오기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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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채근담>은 공무원들의 필독교재 댓글:  조회:6221  추천:1  2015-12-11
세상에 변하지 않은것이 없다. 이는 만물이 시간을 떠나서 존재할수 없음을 말한다. 흔히 시간이 흐른다고 하는데 흐름이란 곧 변화이다. 인간은 시간의 흔적을 살펴가면서 살아가는 지혜를 닦는다. 공자는 시간의 흔적을 "온고(溫故)"라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앞을 내다보는 것을 "지신(知新)"이라고. "온고"는 옛것을 살핀다는것이며 "지신"은 새것을 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새것을 알자면 옛것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엄청나게 변하였다. 생각도 변하고 몸가짐도 많이 변했다. 쉽게 말하면 공자시대나 조선시대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는 무척 달라졌다. 시간은 사람을 이렇게도 심각히 변화시켰다. 공자는 또 변화지만 변할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인의(仁義)"라고 했다. 변화는 변화지 않는 것에서 다스림을 받아야한다는 것을 신이며 법이며 도리라고 한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그 것은 바로 사랑하는것, 옳은 것이다. 사랑(愛)과 옳은(是)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런 철리에서 필자는 인생수양서의 첫째로 꼽히는 변할줄 모르는 을 공무원의 필독교과서로 할 것을 간곡히 바란다. 은 명나라 때의 홍자성(1573 ㅡ 1619)이 남긴 수상집(隨想集)으로 전편(225항)과 후편(134항)이 있다. 전편은 사회생활에서 지녀야 할 인간의 마음가짐을 주제로 다루었고 후편은 탈속(脫俗)한 다음 풍월을 동무하며 인간이 살아가는 즐거움을 읊고 있다. 송나라 때의 유학자 왕신민(汪信民)은 "사람이 언제나 나물뿌리를 씹어 먹고 살 수만 있다면 곧 백가지 일을 가히 이루리라"고 했다. 홍자성이 자기의 수상집 이름을 이라고 한 것은 바로 왕신민의 이 말 구절에서 유래된것으로 짐작된다. 인생 수양서에서 을 백미(白眉).로 꼽는 리유는 의 일어일구마다에 심오한 진라가 스며 있고 그것이 세상을 살아감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에는 "덕성으로 도야(陶冶)된 학문이라야 진정한 학문이다.", "덕은 재능의 주인이요 재능은 덕의 종이다. 재능은 있어도 덕이 없다면 마치 집에 주인은 없고 종들이 마음대로 살림살이를 꾸려가는것과 같으니 어찌 도깨비가 날뛰지 않겠는가"는 명구가 있다. 이는 절개와 의리, 깊은 학문 등을 아무리 겸비했다고 해도 그것이 덕성의 바탕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빛을 발할 수 없다는 경고다.  현대는 교육을 꼬집어 기능인은 만들 수 있지만 인격자는 만든다고 감히 담보할수 없다. 오늘날 고도로 발달된 과학기술과 관리 시스템으로 인하여 인류는 많은 재물를 축적하게 되였다. 그러나 이 재물은 사용법에 따라서 인류에게 무한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도 있고 아니면 파별의 늪 속에 빠뜨릴수도 있다. 그러니 재물의  열쇠를 갖고 있는 주인들의 덕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은 부를 이룬 사람에게는 근신과 경계를, 빈천한 사람에게는 용기와 안정을, 성공한 사람에게는 충고와 경고를, 그리고 실의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는 격려와 방안을 준다. 하기에 이 인생 수양서 중 첫째로 지혜를 터득하는 황금률이며 참인생을 가르치는 동양의 라 불린다. 필자가 한마디를 부언한다면 황희, 초유록 등 력대의 청백리들을 공무원시험의 "렴정필수과"로, 을 공무원양성 필독교과서로 정하자는 것이다. 오기활
176    간부관리 《3불부(三不腐)》에 대한 생각 댓글:  조회:5844  추천:3  2015-11-27
중공중앙 18기5차 전원회는 《중국공산당렴결자률준칙》,《중국공산당 규률처분조례》를 발표했다. 《13•5》계획에는 당의 지도를 강화개선하고 반부패성과를 공고히 하며 《감히 부패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부패할수 없고 부패할 생각이 없는》 효과적인 기제를 구축할것을 건의했다. 간부의 공정, 정부의 청렴, 정치의 청명을 힘써 실현하여 경제사회발전에 튼튼한 정치담보를 제공하려는데서 《3불부(三不腐)》를 간부부패금지구로 명확히 했다. 당중앙에서 말하는 간부란 봉금을 받으면서 국민을 통솔, 지휘, 감독하는 관리들로 당원간부와 공무원을 말한다. 관리는 대체로 청백리와 탐관오리로 나뉜다. 백성을 사랑하는 선비다운 관리를 청백리라 하고 권력을 탐하는 무리와 물욕에 젖은 관리를 탐관오리라고 한다. 당중앙은 당과 나라의 관리들에게 부문(富門)에 《들어갈 생각을 말고(不想进富) 들어갈수 없으며(不能进富) 감히 들어가지 못한다(不敢进富)》는 경종을 울렸다. 하여 요즘 《3불부》가 화제로 되여 《백성들의 마음에 가장 드는 반부패조치이다》고 한다. 기뻐하면서도 지난 력사에 비춰 《진정 실시될수 있을가?》는 설전도 벌인다. 《3불부》의 관건은 관리들의 마음자세인 《불상부(不想富)》이다. 《불상부》는 관리들의 마음의 보초병이다. 관리들이 먹이를 목적한 참새로 되면 《불능부(不能富)》의 덫에 맞고 《불감부(不敢富)》의 초롱에 갖히게 된다. 관리자의 제1생명은 청렴이다. 초유록, 공번삼 등은 《불상부》란 마음의 보초병으로 《오직 나만을 빼놓고》인민을 생각하고 인민을 위했기에 백성들의 마음속에 청백리란 자리가 굳혀져있다. 송나라 려본중(1084-1145, 시인, 학자)은 1000년전에 《벼슬살이를 하는 방법의 첫째는 청렴, 둘째는 신중, 셋째는 근면으로 이 세가지를 알면 몸가짐을 알게 된다.》는 《벼슬살이 처방》을 내놓았다. 관리는 세상의 소금이 되여야 하는데 권력이 상당하고 또 상당수의 관리들이 돈벌이로 썩히는 짓을 하니까 천하가 도둑의 세상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하여 백성들은 《가난한 관리를 볼수 없다》며 텔레비죤를 보면서 《저 사람이 지금도 잡히지 않았는가?》며 눈도장에 찍힌 관리들의 결말을 기다린다. 《거부(巨富)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불평등이 존재한다. 한사람의 거부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500명의 빈자(貧者)가 필요하다.》 이는 영국의 경제학자이며 철학가인 스미스가 1776년에 발표한 국부론(國富論)의 한 단락이다. 모종 의미로 말하면 인류발전사는 권리와 권력의 쟁탈사, 부패와 반부패의 투쟁사다. 1923년의 어느 날, 시카코의 에드위드 비치호텔에는 당년에 미국 최고의 갑부 7명이 모였다. 그들의 재산을 모두 합치면 미국 국고의 총액을 초과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들의 인생말로는 비참하였다. 어느 신문기자가 그 7인 갑부가 시카코에 모였던 그날부터 꼭 25년이 지난후 그들의 생애를 추적조사하고 아래와 같은 결과를 발표했다. 철강회사 사장인 찰스슈업은 무일푼의 거지로 일생을 마쳤고 밀농사 거부 알써카튼은 파산되여 혼자 림종을 맞이했다. 그리고 뉴욕은행의 총재 리처드 위트니는 비리에 련류되여 감옥에서 여생을 보냈고 재무장관을 지낸 엘버트 홀은 감옥에서 풀려나와 집에서 죽음을 기다렸고 웰스프리트의 회장이였던 J.C.리버모아는 자살로 마감했고 국제은행 총재였던 리온 프레이저 역시 자살로 삶을 마쳤으며 부동산업계의 거부였던 이반 크루컬은 자살미수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있었다. 청렴한 사람은 청렴을 편하게 여기고 지혜로운 사람은 청렴을 리롭게 여긴다. 권력으로 얻은 부귀영화는 꽃병의 꽃처럼 쉽게 시든다. 진정한 선진국은 청렴국가를 건설하는것이다. 2003년 12월 9일 유엔의 90여개 회원국이 메히꼬에서 《유엔반부패협약》을 제정하고 12월 9일을 《세계반부패의 날》로 정하였다. 정치를 하는 요체는 공정한 청렴이고 집안을 이루는 도는 검소와 근면이다. 욕심은 차디찬 련못의 물도 끓게 만든다. 당중앙에서 명시한 《3불부》에 비춰 당정관리들이 한번쯤은 당신이 죽은 후의 모습을 생각해 보는것도 유익하지 않을가? 길림신문 2015-11-26  
175    봉림촌에서 당한 어처구니 없는 일들 댓글:  조회:6892  추천:1  2015-10-22
오기철씨 취재로 필자가 왕청현 배초구진 봉림촌을 다닌지도 10여 년이 된다. 취재중 필자는 봉림촌의 미담과 함께 어처구니 없는 이런 일들을 당했다.   170여세대가 살고 있는 봉림촌은 배초구벌 논농사의 로 불린다. 그런데 큰길과 강을 사이 둔 봉림촌의 촌민들은 새로 건설한 로 하여 정상적인 생활과 생산에 애로가 많다. 봉림촌의 는2008년에 200만원을 투자해서 새로 건설했는데 다리가 제구실을 못하는데서 촌민들은 해마다 마을에서 손잡이뜨락또르에 곡식마대를 싣고 강을 건넌 다음에 다시 큰 차에 옮겨서 타곳으로 운송하다 보니 생산비용이 타고장 보다 한 근에 3,4전씩 더 들었다.  그래서 백성들이《국가돈은 썩은 돈이냐?》며 를 관원들을 욕하는,빛 좋은, 라 부른다.  오죽하면3년전에 원 국가민위주임 리덕수일행이 봉림촌을 시찰할 때 승용차마저 를 지날수 없어서 도보로 다리를 오가(사진)야 했겠는가? 는 겨우 6년간의 수명을 완수하고 지난해 무너지는 참상을 당했다(사진) 당의 군중로선교육이 한창 진행중이던 작년 9월 11일, 국가민위 리덕수전임주임이 봉림촌을 또 시찰하였다.  촌민위원회 오기철주임이 이번의 시찰은 리주임이 3년 전에 시찰할 때 거론된 몇가지 문제가 시달되였는가를 조사하는 것이라고 기자들에게 안민고시 하였다. 촌민들은 이 촌과 이미 구면이 된 리주임이 온다니 명절옷을 차려입고 춤판을 벌리며 마중나왔다. 이 촌의 최년상로인이 리주임의 두 손을 꼭 잡고 하는 말이다. 기자들은 인민의 공복과 백성간의 대화장면을 놓칠세라 사진기에 담았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생길 줄이야?! 마을시찰을 끝낸 리주임일행이 촌부에서 촌지도자와 로인대표의 의견을 청취하는데 밖에서 모 젊은 수행인원이 기자들을 부르더니 3명 기자들의 사진기를 하나하나씩 검사하며 며 무릇 리덕수의 신변에 촌민이 찍힌 사진을 몽땅 삭제하였다. 정말 어처구니 없었다.  필자가 리덕수와 최년상로인의 친절한 모습을 담은 사진만은 남기겠다고 해도 절대 안 된다며 리주임이 회보를 듣는 장면까지 몽땅 삭제해 버렸다. 무리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 군중이 없는 군중로선교육이 어떻게 존재하고 지도자가 새농촌건설정황을 시찰하는데 촌민이 없으면 되는가? 촌을 몰린 지난 9월 6일 필자는 오기철주임에게 며칠전 폭우로 손해를 보지 않았는가를 물으며 봉림촌의 새다리건설항목추진정황을 물었더니1180만원의 자금이 락실되여 277메터나 되는 새다리를 명년 8월에 준공하게 된다며 며칠후 착공식을 한다며 기뻐하였다. 이에 필자는 다리착공식에 꼭 참가할 약속을 미루었다. 그런데 이게  또 웬 일이냐? 지난 국경절에 오기철주임과 국경절인사를 오가면서 위챗에 올린 새다리착공식사진을 봤는데 왜 알리지 않았는가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 라니 웬 말인가? 오기철주임은 습근평동지의 접견까지 받은 빈곤부축모범이며 새농촌건설모범인데 말이다. 오주임의 기분이 상한 것은 물론이고 줄곧 봉림촌의 기사를 추적보도를 해온 필자마저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필자는 봉림촌으로 이어지는 다음의 어처구니 없는 일을 지켜볼뿐이다. 오기활  
174    이름까지 바꾸며 겸손 챙기다니... 댓글:  조회:5657  추천:1  2015-10-19
일전에20여 년 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도문철도2중 영어교원 김영화선생을 만났다. “핸드폰을 바꿨습니까? 왜 나의 위챗에 김선생님이 없습니까?” “아니요, 위챗의 金英謙이 냅니다” “아, 왜 개명 하였습니까?” “일부 사람들이 나를 교오한다고 하기에 英華를 永謙으로 바꿨습니다. 기실 나는 겸손하느라고 노력하는 사람인데 말입니다…” (57살 나이에 개명을 하면서까지 겸손을 챙기려 하다니?) 기실 필자는 그녀를 령혼이 없이 “다 좋아요!”로 받아주는 봉사형녀성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다. 일면으로는 보면 그에게는 혹자들로부터 “교오”한다고 볼수 있는 밑천이 있다. 계급투쟁을 고리로 가정출신을 첫째로 꼽던 당년에 그의 가정출신으로 보면 아버지5남매(3남2녀)중 남자3명과 고모부2명이 항미원조에 참가하여 공을 세운 유공자며 더욱히 그의 아버지 김문국은 심양철도국 군대표로 참전하여 3등공을 세웠다. 이 밖에 최근에밝혀진 사실이지만 희생된지 60년 만에 발견된 항일투자 김철운렬사가 바로 그의 친할아버지이다. 이런 가정 바탕에 6남매중 5째인 영화씨도 1981년에 연변대학영어전업을 졸업하고 줄곧 여러 중학교에서 받들리는 “한족영어교원”인데다가 사진기와 바일올린까지 능숙하게 다루며 사회봉사활동에 참가하니까 남들이 그녀를 “머리를 추켜들고 다닌다”고 말할수 있고 또 그런 말을 들을만한 자격이 있었다. 김선생의 말로는 자기가 평소에 남의 결함을 곧잘 지적해 주는데 이것은 상대방을 낮춰서가 아니라 상대방을 책임지는 마음이란다.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호감을 사고 칭찬과 인정을 받고저 한다. 자신을 높이고 싶은 심리는 인간의 속성이니깐. 겸손하다는 것은 상대보다 자기를 낮추는 행위다.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반대로 상대방을 높인다는 얘기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누구에게나 호감을 받는다. 우리 사회는 실력도 능력도 있는 사람들이 가끔 성공하지 못하는 원인의 하나가 겸손이란 미덕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자기를 낮추며 겸손하면 타인들의 불필요한 견제나 방해를 받을 필요가 없다. “탈무드”에는 “겸손하면 모든 존재가 그대의 스승이 된다”는 말이 있다. 알고싶고 배우고싶고 얻고싶다면 무조건 머리를 숙이고 겸손해야 한다. 그 누가 아는 척하고 교만해 보이면 그를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타인에게는 추켜 세우는 일을 잊지 말고 자신에게는 겸손해지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지나친 겸손도 오만이며 금물이다.겸손은 최소의 노력을 들여서 최대의 효과를 볼수있는 경제 원리요 처세술이다. 겸손의 가르침과 수행방법은 자기를 낮추기 위한것 외에 아무것도 없다. 철저히 자기를 낮추고 남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사람만이 인격의 완성을 성취할수 있다. 누구나 사회의 일원으로서 내가 부족한 점이 없는가, 지금 내가 누리는 자리가 내가 누릴만한 자격이 있는가를 항상 스스로 가늠해야 한다. 누리기만 하려는 교만은 자신과 이웃의 삶을 파탄으로 이끈다.그래서 자신의 교만이 무게가 몇 근이 되는지를 늘 달아볼 일이다. “개명을 한 후에 스스로 겸손을 위한 변화가 있습니까?” “지금은 팔짱을 끼고 남들과 대화를 안하고 걸상에 앉을 때 다리를 로 하던 습관이 바뀌였습니다.” 필자의 물음에 자신의 행동몸가짐이 바뀌웠단다.   스스로 각성하기 위하여, 주동적으로 타인들의 감독을 받기위하여 겸손을 챙기는 김영겸의 몸자세에 머리가 숙여진다. 오기활  
173    한국 사람들이 말하는 <부조> 얘기 1, 2 .3 댓글:  조회:5986  추천:2  2015-10-16
 일전에 모시 중층간부가 하는 말이다.  “당의 군중로선교육이 끝나니 제도래가 되였다. 공가차가 되돌아 오고 접대바람이 다시 불어친다”, “지난 달에만 (昇學宴)에 10차나 참가했다” 잠잠했던 손님접대와 그에 따른 못 마땅한 부조바람에 대한 원성이다.다. 영원한 교육으로 되여야 할 당의 군중로선교육이 “끝났다”가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의 군중로선교육 때 부당으로 저격당한 공가차 사용, 여러가지 접대연회가 부활된데 대한 후론이라 하겠다. 우리 고장에서 불어치는 “어쩔수 없다”는 부조얘기에 비춰 필자가 한국에서 목격했던 부조”설전”이 새삼스레 떠 올랐다. “돈을 꿔서라도…” 손춘식; 강원도 춘천시 동내면 40대 중반인 손씨는 말수가 적고 마음이 어질며 사람들에게 점잖다는 인상을 줬다. ㅡ 우리 고장에는 3 개면(우리고장의 촌급)있는데 회원만 해도 2700여명이 됩니다… 어떤 회원들은 전화번호책을 번져가며 청첩을 띄우는데 청첩을 받고도 누구던지가 떠오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ㅡ 일반적으로 초상집은 5만원, 결혼집은 3만원을 부조를 하는데 돈을 꿔서라도 갔다 와야 마음이 편하지요. 나는 이번에 올 때 청첩을 3장이나 받았습니다. 일요일에는 돈지갑에 20만원은 넣고 다녀야 면목이 섭니다. 내가 알건대 한국 농가집에 평균적으로 빚이 4000만원은 될것인데 말입니다. “차라리 기탁해 보내는 편이…” 홍승환;경기도 안성   50대 중반인 홍씨는 음성이 높고 성질이 콸콸한 편이다. ㅡ지난해 부조금을 기록해 봤는데 475만원이나 되였습니다. 농사를 지어서 쌀 30가마니를 남한테 부조한 셈이지요. ㅡ 부조돈을 4,5만원 준비해 가지고 갔다가 어떤 때는 결혼 쌍방의 주인을 다 아는 사이라 생각밖에 10만원을 내게 될 때도 많았습니다.. 오히려 남한테 부조를 기탁하는 편이 났습니다. 어떤 군일 집은 너무 복잡하여 간단히 먹자고 부조만 하고는 나와서 다른 음식점에 가는 때가 있는데 간단히 먹는다는 것이 술잔이 오가다 보면 부조돈만큽 드는 때가 많았습니다. “나부터 안 다니겠다” 김종학; 안성시 중리동 30대 푼한 김씨는 검은색 낯에 키가 작고 퍼그나 강한 성격이였다. ㅡ부조돈은 옳게 써야 한다. 결혼집은 친척들만 모여서 치르면 되고 생일은 능력이 있으면 손님을 청하고 능력이 없으면 집안에서 쇠면 된다. 초상집엔 빈손으로 가서 일만 해주면 된다. ㅡ 우리나라에는 못된것만 남았다. 웬간한 군일 집은 나부터 안 다니겠다. 언젠가 어느 집 환갑에 가보니 기생들까지 청했더라. 차라리 그 부조돈이면 가난한 집을 돕겠다.  
172    “로인 교육법”(조례)을 내 오자 댓글:  조회:6313  추천:2  2015-08-17
최근 자료에 따르면 2013년 우리나라 60세 이상이 총인구의 14.9%에 달해 “21 세기는 장수시대(고령화시대)”라는 신조어가 있다. 무엇이나 많으면 소중하지 않다.  전통사회는 단명시대라 로인들이 쌓은 경험과 년륜으로 젊은이들의 존경을 받고 사회적 우대를 받았다면 지금은 로인들의 지위가 떨어지고 세대간의 차이와 차별이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분야에서 뚜렸히 나타나 100세 이상 로인들이 기자의 인터뷰대상으로 사회적인 혜택을 받는 시대가 되였다. 지금은 빛의 속도마냥 빠르게 변하는 시대다. 과거 1000년의 발전이 지난 100년의 발전과 맞먹고100년의 발전이 지난 10년의 발전과 맞먹으며 지난 10년의 발전이 지금 1년의 발전속도와 맞먹는다고 한다. 이러한 과학문화의 발전에 따라 문제로 나서는 것이 로인들의 비참상이다.  제네바의 한 사회학교수는 “인생은 련속이다. 60까지 일해온 사람이 갑작스레 할 일이 없는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모든 책임에서 제외되는 것이 심리학적으로 보면 잘못된 일이며 경제학에서 보면 랑비다”고 하였다. 이러한 현실에서 필자는 로인들의 비참상을 해소하는 중요한 일환으로 고령화시대의 교육제도를 갱신하고 “로인교육법”을 제정하여 로인들의 과학문화의 제고로  “로인비참상”을 해소하는 뒤바침으로 하자는 소견이다. 오늘의 로인들이 12년(고중까지)을 배운 지식으로 60살까지 살아왔다면 100세 시대를 살아가기 위하여 다시 한번 학교에 다녀야 한다(지금 사회구역에서 말하는 ‘’로인대학’’이 아닌 교육대강이 있는 정규교육).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3, 40년 전에 학교를 졸업한 지식으로 현재를 살 아 간다면 따를 수가 없어 자연히 뒤지고 사회에서 쇠외될 수밖에 없다. 미국은 이미 동네마다 로인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여 많은 로인들이 배움의 기회를 갖는다고 한다. 지금은 배우고 싶어도 배울수 없던 과거와는 달리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 그러니 자녀들만 공부를 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부모들도 함께 공부를 해서 100세 시대에 50살에 획득한 졸업장을 써먹을 시간이 아직 50년이 남아있다. 필자는 지금 도시 농촌에 페교 된 중소학교를 로인학교로 꾸려(시설, 교원대오 등은 정부와 기업 및 사회의 투자로) 중소학생과 로인들이 함께 공부하는 학교를 만들었으면 한다. 전국서 문화수준이 제일 앞자리를 차지하는 연변서 남 먼저 “로인교육법(조 례) 를 제정하고 지역적으로 제일 먼저 “로인절”을 출두시킨 연변서 연변의 “로인절”을  나라의 “로인절”(9.9절)에 접규(接軌)시키고 연변의 “로인절”을 “효도절”, 아니면 “로인교육절”로 하지 못할가? 고령화시대에 “로인교육법(조례)”의 출두가 기대된다.  
171    ‘이 전화를 어떻게 알았습니까?’ 댓글:  조회:6502  추천:5  2015-05-22
               일전에 모시 시장을 만나려고 시정부를 찾았다。 복도의 수직원이 비서실로 안내, 비서한테 신분과 여건을 밝히니 시장에게 알리겠다고 나갔다가 오더니 정부반공실 주임을 찾으라고, 접대주임이 하는 말이 일이 있으면 선전부를 찾으라고, 선전부를 찾을 일이 아니라니 지금 시장이 없다고, 그럼 시장핸드폰번호를 알려 달라니 령도들의 핸드폰번호를 알려줄수 없단다.  중경시는 시위서기핸드폰번호를 매체에 공개했다고 해도 계속 안 된다며 일이 있으면 정부반공실의 고정전화에 걸라며 번호를 알려주었다. 필자는 시당정책임자들의 안전을 위한 그 어떤 내부문건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시당정책임자들의 사무실간판을 수자로 표시하고 전화번호를 비밀로 하는것을 전혀 리해할수 없었다.(비록 번중한 사업을 고려하는 일면도 있겠지만.) 언젠가 모회사경리가 하던 말이다. 한번은 경영항목을 늘이려고 공상관리부문에 가니 반드시 시장비준이 있어야 한다고 하기에 주관부시장을 통해 전화번호를 알고M시장에게 전화로 만남을 청시하니 첫 마디로 고 질문 하더란다. 또 한번은 북경에 출장갔다가 만날 사람이 있어서 모 호텔에 가니 그 자리 사람들 가운데 건축을 책임진 부시장도 있었다. 그런데 그 부시장과는 면목이 없어 인사를 못 했더니 시민에게 례절교육을 하는지 부시장어른이 고 질문 하더란다. 글쎄 시장전화번호를 알아도 질문, 시장들의 낯을 몰라도 질문이니 시민으로 어찌 할 바를 모르겠단다. 조선왕조 때 신문고제도(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기 위해 대궐 밖 문루에 북을 달아 놓고 억울한 사정이 있는 백성들이 그 북을 치면 임금이 직접 나와 하소연을 듣고 처리하는 제도)를 부활시킨 영조(21대 왕)은 백성들의 상소를 듣는것이 소설을 읽는것보다 더 좋다며 한양에서 수원을 시찰하는 길에서 가마에서 내려 걸으며 백성들의 상소를 친히 들었다는 미담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240여년 전의 조선와 백성들의 상소를 찾아서 듣던 영조에 비춰  시지도자사무실의 수자문패와 전화비밀이 어쩐지 꺼름한 생각이 든다. 연변범서방필름유한회사조광훈총경리의 말이다.  타인의 조언과 고충을 제때에 들으려는 조광훈의 사업작풍이 돋보인다. 오기활  
170    잘난 도둑 날도둑 그 리고 대도(大盜) 상도둑 댓글:  조회:6164  추천:4  2015-05-22
잘난 도둑 날도둑 그 리고 대도(大盜) 상도둑 최근 당중앙의 에 걸려 줄을 선 , , 무리를 보노라면 분개와 함께 (만약 습근평정부가 없었다면 나라가 어떻게 되였을가?)는 우려와 물음까지 뒤따른다.  오늘 필자는 에 비춰 을 곁든다. 도둑이 잡히면 감옥으로 간다.도둑범들이 모이면 서로간 정보를 주고 받으며 어떻게 된 일인 가를 묻는다.그리고 감옥에서 도둑범가 마련된다. 는 큰 도둑이 상좌에 않고 좀도둑들이 아랫자리에 않는다. 큰 도둑이 좌중을 향해 큰소리도 외친다. 큰 도둑이 일갈에 다른 도둑들이 라며 큰 박수를 쳤다.  이처럼 도둑의 눈에는 온 세상이 도둑으로 보였다. 덤을 노리는것도 도둑이요 턱없이 욕심을 부리는것도 도둑이다. 남보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하면 탐욕을 부리게 되고 탐욕은 갖은 수단으로 욕심을 채운다. 압력으로 돈을 챙겨도 도둑이고 뢰물을 주고받아도 도둑이다. 남의 집에 들어가 강도질을 하고 남의 든 지갑을 터는 소매치기만이 도둑인 것은 아니다. 권력의 특혜를 받는 특권층과 금융의 특혜를 받는 모리배들은 법의 비호를 받는 도둑들이다. 공자는 권력형 축재보다 더 큰 도둑은 없다며 권문세도의 로략질을 상도둑이라고 하였다. 윤재근선생(한국)의 대도(大盜)이야기다. 화제의 주인공을 어떤 사람들은 대도라고, 어떤 사람들은 신판 림꺽정이라며 입에 침을 발라가며 동정하고 옹호했다. 대도는 특권층의 집이나 평판이 좋지 않는 부유층의 집만을 골라가며 도둑질을 하는데 보석이나 현금만 털고 기타에는 손을 대지 않고 흉기로 사람을 해치거나 위협하지 않았다. 그런데 도둑을 당한 사람들은 그 많은 불의지재(不義之財)의문에 꼬리가 잡힐가봐 신고를 꺼리며 랭가슴만 앓았다. 이에 백성들은 남의 도둑품을 다시 훔치는것은 도둑질이 아니라 림꺽정이 토호를 털어 배고픈 백성에게 나누어 주는것을 곁들며 대도를 의적이라고 불렀다. 꼬리가 길면 잡히듯이 대도가 잡혔다. 감옥에서 대도는 자기는 훔친 것을 다시 훔친것밖에 없다며 먼저 훔친자는 떵떵거리는데 훔친것을 다시 훔친 자만 감방에서 콩밥을 먹어야 하는가며 자기의 이런 주장을 세상에 알리려고 탈출을 하였다. 대도는 쫓기다 막다른 골목에서 밀려오는 수색조와 맞서다가 한 사람을 인질로 붙들고 버티였다. 현장에서 많은 사림들이 만일 대도가 그 인질을 방패로 해친다면 대도로 불리기는 글렀다며 안타까워하였다. 과연 대도는 대도였다. 그는 인질잡이를 뉘우치고 인질을 안전하게 풀어주고 스스로 잡혔다. 사람들은 도둑이 잡혔으면 속이 시원해할 것인데 그렇지 않았다. 특권을 누리는 도둑들이 세상을 망치는데 분개해 오히려 대도를 동정하였다.  도둑을 례찬하는 세상은 엄청나게 썩었음을 말한다. 썩어버린 세상에서는 숨은 도둑으로 하여 누가 도둑이고 누가 아닌지를 분간하기 어렵다. 일전에 어느 경리가 연변텔레비를 보면서 하면서 모 령도의 종말을 기다렸다.. 장자는 대도의 조건을 聖(목표설정),勇(용기),義(책임감),智(판단 능력),仁(공평분배)이 라고, 거기에서 도둑이란 두 글자를 빼면 그 다섯가지조건이 공직자들이 지켜야 할 조건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리한 자를 욕할 때 이라고. 꼭 5년 전(2010, 4, 27)에 필자가 발표한 글(길림신문)이다. 어느 술상에서 오간 얘기다.
169    독서 열독 그리고 괄목상대 댓글:  조회:6445  추천:4  2015-05-04
독서 열독 그리고 괄목상대 우리 민족의 속담에 고 했다. 는 젊었을 때 독서를 많이 하라는 것이다. 독(讀)자를 파자 하면 말(言)을 팔(賣)다가 아닌가. 생이지지(生而知之) 학이지지(學而知之) 곤이지지(困而學知) 곤이불학(困而不學)  태여 나서 아는 자가 최상이고 배워서 아는 자가 그 다음이며 살다가 어려움을 겪고서야 배우려는 자가 그 다음이고 살다가 어려움을 겪고서도 배우려 하지 않는 자가 가장 아래이다. 이는 에서 배움을 언급한 말이다. 어느 자수성가한 문인이 고 했다. 공부란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이요 빨리 늙지 않으려면 책을 읽으란다. 리극강총리는 지난 인대보고에서 를 언급, 기자회견 때 독서를 열독(閱讀)으로 고 했다. 세계적으로 책의 민족이라 불리는 유태민족의 나라 이슬라엘은 500만 명도 안 되는 국민에 29종의 신문과 900종의 잡지가 발행, 매년 인당 독서량이 64권,2001년까지 100년간 노벨상수상자 680명중 세계 인구의 0.23%인 유태인이152명(22.4%)으로 으뜸을 차지였다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괄목상대란 눈을 비비고 본다는 뜻으로 학문이나 재주가 전에 비해 몰라볼 정도로 향상되였을 때 쓰는 말이다. 이런 얘기가 있다. 중국 삼국시대 때 오나라의 왕 손권의 부하에 글읽기를 싫어하는 려몽(呂蒙)이란 장수가 있었다. 어느 날 손권이 려몽을 불러 라고 하니 려몽이 고 대답하자 고 반문하였다. 왕의 귀뜸에 크게 깨달은 려몽은 그 후부터 전쟁터에서도 책을 놓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몇 년후 박식해진 려몽을 재상 로숙(魯肅)이 찾아와 그의 학문에 깊이를 칭찬하자 려몽이 이렇게 말했다. 고 하였다. 모택동도 며 독서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지금은 자본(資本)주의시대가 아닌 뇌본(腦本)주의시대다. 뇌본주의시대는 독서, 열독, 괄목상대를 버팀목으로 해야 하지 않을가. 오기활
168    의사가 퇴직하면 전문가라니? 댓글:  조회:5929  추천:1  2015-04-27
의사가 퇴직하면 전문가라니? 지난번 동북3성 언론사 응모작품총화모임 때 연변작가협회X주석이 필자와 하는 말이다.   전문가란 어떤 분야를 연구하거나 그 일에 종사하며 그 분야에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그렇다면 광고에 오른 의사들이 모두 전문가인가? 몇 년 전에 길림신문 에서 상금을 내 걸고 을 모집했을 때 편집부의 배치로 필자가 수백통의 을 편집하였는데 그때 독자들이 신문에 대한 원성(怨聲)이 제일 높은 것이 의사광고면이였다. , ,  … 는 불만이 이만 저만이 아니였다. 을 편집하면서 왕청에 있는 조카(40대초 중의)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정말 한심하였다. 그 때 연변의 크고 작은 신문의 한개 면을 차지한 란 광고는 글자수만 7592자, X가 자신 있게 뗀다는 병만해도 소화계통, 순환계통, 호흡계통, 신경계통, 비뇨계통의 39가지 병이였다. 실로 한 손으로 머리, 눈썹, 수염을 몽땅 거머쥐는 였다. 이는 오랜 위병환자로 자학하여 로 불리는 도문시 박모(79)가 필자더러 신문을 잘 꾸리라며 하던 분에 찬 말이다. 일전에 을 취재하면서 를 별도의 화제로 하였다. 김춘영원장의 말이다. 확실히 (연변기림병원전신)에서 남방  들을 끌어다가 과대광고, 허위광고를 하면서 환자들의 돈지갑을 털었다. 그 때 오죽하면 원성(怨聲)이 에 자리매김을 했겠는가?>>  리철호부원장의 말이다。 , 두부장사가 외쳐야만 사람들이 찾아 오듯이 의사도 외칠 때는 외쳐야 한다. 문제는 의사들의 과대광고, 허위광고다. 언젠가 연길시공상행정관리국해당부문의 검사에 따르면 등록회피광고가 200여건, 비법인쇄물광고가 상당수를 차지했다. 비법광고, 과대공고, 허위광고는 부덕한 광고주들의 문제만이 아닌 광고업자들의 사회적책임감과 법률적 책임감문제이기도 하다. 사회적책임감과 도덕성을 외면하는 는 견결히 숙청해야 한다. 사람들에게 신선한 정보를 제공하는 광고의 생명력은 진실성, 도덕성, 신빙성, 예술성에 있다. 오기활        
167    상대를 움직이는 감각적인 언어의 힘 댓글:  조회:5998  추천:1  2015-03-30
프랑스 파리의 미라보다리우에서 한 장님이 구걸을 하고있었다. 그 장님걸인의 목에는 《저는 태여날 때부터 장님입니다.》라는 글구가 적힌 패쪽이 걸려있었다 어느날 한 사람이 그 곁을 지나다가 걸음을 멈추고 걸인에게 물었다. 《이렇게 하루종일 있으면 얼마나 구걸합니까?》 《겨우 10프랑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장님이 침통한 어조로 대답하자 행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목에 걸린 패쪽을 뒤집더니 거기에 다른 글을 적어놓았다. 한달후 미라보다리우에 행인이 다시 나타났다. 행인은 지난번처럼 하루 구걸하는 액수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목소리를 알아들은 장님이 행인의 손을 잡고 감격해하며 말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선생님이 다녀간후부터 하루 수입이 50프랑까지 올랐습니다. 대체 무슨 리유인지 모르겠습니다. 패쪽에다 뭐라고 썼길래 이런 놀라운 일이 생기는 겁니까?》 그러자 행인이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별 말이 아닙니다 원래 당신의 패말에는 로 씌여있더군요. 저는 그 글구를 로 고쳐 썼을뿐입니다.》 이 일화는 우리가 쓰는 말(글) 한마디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결과가 생길수 있다는 사실을 얘기해준다. 감각적인 언어(글)는 리성에 호소하는것이 아니라 상대를 감동시키고 감성의 심리를 자극한다. 중국의 첫 노벨수상자 막언의 말이다. - 지난해 10월 15일 습근평총서기가 소집한 문예일군좌담회는 이전에 참가했던 다른 회의와 달리 분위기가 매우 자연스럽고 부드러웠다. 마치 집에 모여앉아 한담하는것처럼 친절하였다.습주석이 즉흥적으로 말하던 내용은 그대로 문장으로 되여 청취후 인상이 매우 깊었다. 필자는 습근평주석의 2015년 신년사를 친절한 인정미와 감각적인 언어로 세인을 감동시킨 본보기라고 말한다. 《세월은 참 류수와 같습니다》 《…세계 각국과 각지의 벗들에게 새해 축복을 전하는바입니다.》 로 시작한 신년사는 지난해를 회고하며 《…인민생활을 새롭게 개선하였습니다.》 《…반부패의 확고한 결심을 보여주었습니다.》 《…세계가 중국을 더 잘 인식하게 되였습니다.》 《…우리의 위대한 인민들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인민들의 희생과 기여를 영원히 명기할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그리며 그들의 가족들이 모두 평안하기를 기원합니다.》 《…새로운 락원에서 행복하게 생활하기를 바랍니다.》로. 그리고 새해를 맞아 《…우리는 인민들의 기대를 우리의 행동으로 바꾸고 인민들의 희망을 현실로 바꾸기 위해 계속 노력할것입니다.》 《…초요사회를 전면적으로 실현하는 목표가 제때에 실현되도록 추진할것입니다.》《…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이 생활상 만족을 느끼게 하고 마음상 따뜻함을 느끼게 할것입니다》 《…부패가 있으면 반드시 엄벌하고 탐오가 있으면 엄하게 숙청할것입니다.》 《…국가발전과 인민생활이 나날이 향상되게 할것입니다.》 《…중국인민들이 각국 인민들과 함께 동고동락하고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모든 어린이들이 해빛아래에서 무럭무럭 성장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며 《감사합니다.》로 끝냈다. 미사구려나 무미건조한 말은 사람들에게 믿음이나 감동을 줄수 없다. 3000자도 안되는 습주석의 신년사에는 《…추켜들고》 《…견지해야 한다》는 등 정치적 구호가 없는 대신 우리 나라 《남수북조》(南水北調)대공사의 이주민들의 생활, 말디브 수도의 물공급부족 등 지구촌의 안방구석까지 살피면서 다정다감한 감각적인 언어로 중국인민과 세계인민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초요사회를 건설하려는 중국공산당의 결심을 보여주는데서 세인을 감동시키고 당의 형상을 돋보이게 했다. 막언의 말이다. - 진리만이 사람을 납득시킬수 있고 진정만이 사람을 움직일수 있다. 리론가는 리치로 사람을 설복시키고 문예가는 정으로 사람을 움직인다. - 나에게는 두가지 기본적인 판단이 있다. 하나는 중국공산당은 세계 그 어느 나라의 정당보다 더욱 중국이 부강해질것을 바라며 둘째는 중국의 국가주석 습근평은 세계 어느 나라 원수보다 더욱 중국인민이 잘살기를 바란다는것이다. 습주석의 신년사야말로 감감적인 언어로 사람을 납득시키고 사람을 움직이는 감명 깊은 신년사라 하겠다. 길림신문 2015-3-25  
166    허룡길의 “육아 3불” 댓글:  조회:6100  추천:3  2015-03-27
음력설문예만회에서 본 소품 “소송”을 반추하며 얼마 전에 허룡길(39)이 말하던 “육아3불”이  머리에 떠오른다. 허룡길은 필자의 글 “추억의 추도문”과 “ 불효한 교육은 무효다”의 주인공으로 지난번에 두 아들을 데리고 고향을 방문하던 걸음에 만났다. 지난 90년대에 부모를 잃고 어린 나이에 녀동생을 데리고 호주노릇을 하다가 청도에 진출한 그는 지금 두 아들의 아버지로 가시부모까지 여섯이 한집에서 행복하게 지낸다. “두 애를 볼라니 너희 가시부모들이 고생이 많았겠구나!” “많았지요 … 그런데 우리는 로인들이 아이를 절대 못 안게 하였습니다.” 그에 따르면 로인들이 아이를 안고 엎고 다루는것이 심한 고역이라고, 로인들이 아이들 보기를 힘들다는것은 지친 몸으로 생각대로 되지 않아 혹시라도 아이들이 상할가봐 두려워하는 심리부담 때문이란다. 그래서 이들 부부는 두 아이를 키우면서 로인들의 건강을 위한 <
165    그들의 드팀 없는 신념 댓글:  조회:6760  추천:1  2015-02-10
그들의 드팀 없는 신념 일전에 필자는 도문시 석현진향양촌달라자로인협회 박선녀(65)회장을 취재하면서 생각밖에 그의 남편(김철송)이 당에 대한 드팀없는 신념에 탄복되였다. 김철송(69)은 20대부터 단지부서기, 생산대대장(20년간)을 지낸 향양촌의 토배기로 1983년 제1기 촌민위원회 선거부터 지금까지 기마다95% 이상의 득표률을 확보한 《원로촌민위원》이다. 촌의 튼튼한 버팀목으로 그의 득표수가 촌장보다도 높은 데서 그더러 촌장을 맡으라니 김철송은 자기는 청각장애자이고 가방끈이 짧아서 못한다고 거절하고는 계속하여 촌을 위해 발벗고 달아 다니는 그를 촌민들은《무관촌장(無冠村長)》이라 불러왔다.  김철송은 확고한 신념으로 입당을 갈망하였다.  46년 전 그의 입당을 심사하는 당지부회의에서 쏘련에 간 그의 조부가 행방불명으로 하여  로 그의 입당이 통과되지 못했다. 그 후로부터 김철송은 자기 앞에 당문(黨門)은 막혔다고 하지만 당원답게 살겠다며당원의 조건으로 자신을 책임지기에 노력하였다.       김철송은 입당을 못한것에 불만이 있을 대신 사람은 신앙이 있어야 한다며 부인(64)의 입당을 적극 지지해 나섰다.  김철송은 마음속으로 자기의 당령을46년이라고, 한번은 촌당지부서기를 찾아서 이런 유언을 남겼다.    물론 그도 비당원의 유골에 당기를 덮을수 없다는것을 알지만 그래도 당조직에 이런 유언을 남기니 마음이 거뿐하더 란다.  필자는 최근에 연변농학원 연동훈(84)교수의 회억록을 읽고 드팀 없는 그의 입당 신념에 다시 한번  큰 감동을 받았다. 연동훈은 소학교교원,조선류학(길일성종합대학 원산농업대학), 참군,참전(6급 잔페군), 연변대학강사, 우파분자, 감옥살이(15년), 호구없는 흑인(黑人)으로 희로애락 인생을 살다가 1979년에 루명을 벗고 연변대학에 복직하여1992년에 리식휴양하였다. 1979년에 연동훈은복직하자 먼저 당조직을 찾아서20여 년간의 과거사를 회보하며 드팀없는 입당의 신념을  밝혔다. (50년대부터 입당신청을 하였음)   15년간이나 억울하게 징역살이 하고도 입당하려는 그를 말리는 사람도, 코웃음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입당만은 그의 필생의  신념이였다. (감옥에서 푸르푸랄(糖醛) 등 연구성과로 나라에  수억원의 경제수익을 창출,소공 2차, 대공 2차, 특등공 4차를 세웠다) 이는 연동훈의 사상회보에 밝힌 그의 입당동기였다. 그의 드팀없는 신념 으로1982년에 그의 입당이 비준되였다. 신념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사상이나 명제, 연설 등을 적절한것으로서 또는 진실한 것으로서 승인하고 수용하는 심적(心的)태도이다.  미국의 첫 흑인대통령 오바마는 고  했다. 해해년년 확실하게 자기의 심적당령(心的黨令)을계산하며 당원답게 살기 위해 드팀없이 노력해 온 김철송,역경에 부대끼다가 풀려 나와 사회에 분풀이를 할 대신 수선 먼저 당조직을 찾아가 입당을 신청하고 당원을 따기 위해 노력한 연동훈, 필자는 이들의 드팀없는 입당신념에 자신을 반성하며 신념이란 잠재의식의 위대성을 감수한다. 오기활           
164    앞줄에 앉은 사람들로 이어지는 그때 그 이야기 댓글:  조회:8373  추천:5  2015-02-03
60년대 농촌청년 참군기념사진을 보며 확실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아무튼 내가 본 집체사진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앞줄에 앉은 사람들의 대개가 친척이나 사회에서 존중을 받는 대표적 인물들이다. 어느 날 필자는 사진을 정리하다가 1969년 12월에 (徹底埋葬帝修)는 글을 새긴 집체사진에 눈길을 멈췄다.  이 집체사진은 당년에 도문시 홍광공사 수남대대 7대(달라자마을)청년 김영화의 참군을 기념하며 찍은 것이다. 그때만도 누가 참군하면 온 마을의 경사로 동네가 들썽했으니깐 말이다. 총 32명에 그중 마을의 로농대표 4명(가족포함), 마을청년 16명, 지식청년(집체호)12인데, 앞줄에9명(주인공, 가족포함)의 대표적인물이 앉았다. 오늘 필자는 앞줄에 앉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년대를 반추한다.(앞줄에 앉은 9명중 이미 6 명이 하늘나라 사람으로 되였음) 이야기는 왼쪽 첫 사람을 1번으로 9번까지 이어진다. 1,   – 고 장련귀(蔣連貴,) 지난세기 60년대 나라에서는 도시의 초중이상 졸업생을 조직하여 농촌에 보냈다. 에는 이들을 이라 부르며 광활한 농촌에 가서 단련한다고 했고   때는 이라는 부르며 농촌에 내려 가서 재교육을 받는다고 하였다. 1969년 4월 우리 마을에는 도문가도에서 조, 한족으로 조직한 가 입적하였다. 장련귀(한족)는 그때 온 청년으로 말이 지식청년이지 기실은 소학생 3학년정도였다. 납자쌍둥이의 형으로  태여난 련귀는 키가 작고 체질이 약질(弱質)이며 자기의 코물마저 건사할줄을 모르는 였다. 그는 집에서 놀다가 때로는 도문농장에서 양을 몰았다고 한다. 그런데 장련귀는 생산대 대비판회의 때마다 늘 선참으로 발언을 했는데 그는 발언할 때마다 을 반복하면서 상당한 지식청년의 신분으로 대접을 받으며 기치가 선명한이란 별호를 가졌다. 문맹을 자랑으로, 대신 지식분자를 로 비판하고 로동개조를 시킨 이  사진속에 그대로 담겨있다. 이 사진의 최금순(중간줄 오른쪽 네번째)은 대학을 졸업하고 농촌서 재교육을 받았고 반문맹인 장련귀는 으로 우쭐거렸다. 언비(言秘)에 걸린 최금순이 으로 사람들에게 무시(無視) 당하던 그 모습이 정말 측은했다. 2, -한성훈(韓成勳) 한성훈(韓成勳)은 고중을 졸업하고 철도중학교에서 한어교직에 있다가 이 라는 의심을 받고 실업을 당하고 집에서 놀았다고 한다. 그의 별호는 , 였다. 때는 을 멀리 하고 책에만 매달려 있는 사람을 라고 의심했다.수남마을에도 중문, 조문공부에 미쳐있는 열혈청년을 로 취급한 실레가 있다.한성훈은 실로 공부에 미친 (정신병환자)였다. 그는 글씨를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고 수영도 잘했는데 그의 위병은 그가 농촌에 와서 의학을 배우고 자체로 자기 몸에 침을 놓으면서 완치하였다. 그는 라지오를 가지고 다니며 밤 늦게까지, 새벽 일찍부터 영어, 서반아어, 세계어, 로어… 등 외국어 공부를 견지하였다. 그는 기억력이 좋고 언변이 좋아 ,을 하도 생동하게 이야기 하기에 웃동네 사람들까지 들으려 왔다. 특히 그의 속기법과 한어발음은 사람들을 놀래울 정도였다. 그가 중국공산당 9차대표대회보고를 방송을 한어로 듣고 기록하고 기록한 문장을 한자성조(聲調)까지 달면서 기록하여 대회에서 전달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때 저마다 혀를 차며 엄지를 내 흔들었다. 로동자 모집때 그는 도문벽돌공장공인으로, 다시 도문제재공장 중학교교원으로, 개혁개방이 초기에 길림성대외무역국에서 한성훈을 제 1호로 초빙해갔다. 2007년 필자가 한성훈이 에서 꾸리는 의 편집으로 초빙되였다는 소문을 듣고 일부러 장춘에 가서 한성훈을 찾아 뵈였다. 필자는 지금도 한성훈의 의학필기장과 독서필기장을 수장품으로 보관하고 있다. 지식분자를 로 몰던 을 생각하면 진정 소름이 끼친다. 3, (猪官叔叔) – 오기활(吳基活) 오늘 따라 필자는 처음으로 용기르 내서 를 말하고 싶다. 1963년에 필자는 도문중학(그때는 연길현4중) 제 16기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이 되겠다는 발언을 했고 뢰봉학습모범으로 학교에서 입단을 하고 회향(回鄕)하였다.  필자는 청년사업을 힘있게 틀어쥐여 달아자의 첫 단지부를 건립하고 단지부서기와 정치대장을 맡았다. 운동가운데서 전 도문시에서 제일 먼저 집체우사를 돌로 지어 전시에서 보급했고 모택동저작학습반을 잘 꾸린데서 1964년 으로 표창을 받았다. 그후 때 백부가 억울한 모자를 쓰고 망나니들에게 타살되자 정치상에서 권리를 박탈하고5년간 생산대집체양돈장의 사양원을 맡았다. 그때 달라자양돈장을 성, 주, 시 전형이였고 필자는 주, 시 모태동저작학습선진분자로 대회에서 강용(大會講用)을 했다. 그때 필자의 별명은 오대장, 오서기, 오호장(집체호정치호장)이 라고 부르지 않고 로 불렀다.  글의 9번 (쇄지-김영철)에서 당년의 배경이 보충된다. 4, 농촌의- 고 최성욱(崔成旭) 최성욱의 별명은 농촌의 먼저 (코가 큰 사람을 가르킴)였다. 사람들은 한사람의 체구나 이목구비에 비춰 그의 별명을 곧 잘 짓는데 그때 달라자에는 , , 가 있었기에 그저 라면 서로간 엇갈렸다.. 최성욱은 코큰 아버지(최석준)를 계승하여 어렸을 때부터 라 불렸다. 소학교문화수준인 최성욱은 글씨를 잘 쓰고 그림을 잘 그렸고 독서를 즐기기로 조선문으로 번역된 세계명작을 거의 다 읽었다고 한다. 그때 동네서는 최성욱이 그린 화토를 빌려 가지고 다니며 화토놀이를 하였다 최성욱은 퉁소, 해금 등 악기를 잘 다뤘고 목수, 미장일도 능했다.  그래서 동네서 그의 별명을 >보다도  농촌의 라 하였다. 최성욱은 달라자의 첫 공청단원이며 민병패장, 생산대장을 지냈다. 사회주의교육운동때인 1964년에 그의 그림작품 가 수남대대 계급투쟁교양도편교재로 추천되여 타동네서 빌려다가 전시 하기도 했다. 필자보다 9년 년상인 최석준은 19살에 결혼하였으나 자식이 없어 양자를 길렀는데 그의 아들이름을 필자가. 글 문(文), 밝을 철(哲)로 이라고 지었다. 최성욱은 60이 넘은 나이에 돈벌이로 한국에 가서 페암으로 진단받고 집에 돌아와 타계하였다. 5, - 고 김철국(金哲國) 나의 아버지친구인 김철국의 별명은 에 까지 둘이다. 는 그가 혈변(血便)을 본다는 질병에서, 은 지난 세기 50년대 문맹 퇴지 야학반에 다닐 때 김철국이 자기의 성 이라고 쓴다는것이 으로 쓴후부터 불려진 이름이다. 로빈농성분에 체격까지 우럭진 김철국은50년대부터 생산대 대장과 빈하중농대표로 활약하였다. 그는 기억력이 좋아 상급회의에 참가하고 돌아와서 기록도 없이 회의 정신을 빠짐없이 전달한데서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1958년 대약진 때 상급에서는 마을을 단위로 경쟁을 벌렸는데 붉은색기는 공산주의사회를, 노란색기는 사회주의사회를, 흰색기는 자본주의를, 검은색기는 암흑한 봉건사회를 상징하였다. 그때는 며 5년이면 영국을 릉가하고 10년이면 미국을 따라 잡는 천만군의 기세로 을 부를 때다. 그때 우리 마을의 큰길 옆에 자동차바퀴쇠가마를 높이 달아맨 종(鐘)대에 검은색기발이 펄럭거렸는데 김철국대장은 면서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었다. 그는 실사구시한 사람이였다. 지난세기 60년대에 빈하중농대표인 김철국은 정치대장을 하는 필자에게 몇번이나  이런 말을 하였다. 사실은 이러했다. 1952년 조선전쟁이 폭발한후 조선의 모 밀수군이(성이 남씨로 기억됨) 밀수건으로 달라자에 있는 사돈(오세준)을 찾아 왔다. 그 때 조선전쟁때라 고도로 긴장된 대대의 간부들은 그를 (남로당)라 의심하고 다시 오면 붙잡기로 하였다.(그때 필자의 사촌형(오기품)이 그 밀수군의 심부럼으로 밀수폼을 운반해 줬다고 했다) 하루는 김철국이 배앓이병 도져서 길옆 널판자변소에 앉아 있는데 그 밀수군이 또 나타나자급히 바지춤을 올리고 나서 그자를 체포했다. 그런데 그후 신문에는 수남대대 민병련장인 송림마을의 안창렬이 달라자의 오세준세 집에있는 꿰짝속에 이틀간이 나 숨어서 그자를 기다렸다가 뛰쳐나와 직접 붙잡은 것으로 보도되였다는 것이다. 김철국의 얘기를 오랫동안 간직했던 필자는 이 글을 쓰려고 지난해 11월에 연변일보사 자료실에 가서 당년의 신문을 찾아 봤더니1952년 6월 19일자 에 지승원의 그림으로 는 련환화가 련속 3기로 발표되였다. 사진속에 한족솜옷을 입고 신끈도 없는 기운 왕바신(솜신)을 신고  등장한 김철국의 신분은 참군하는 아들의 아버지신분이다. 6 - 김영화(金英和) 김영화는 이 사진에 참군하는 주인공이다. 김철국의 큰 아들인 영화는 도문중학교(초중)를 졸업하고 회향하여 농사일을 하다가 참군, 퇴대후 농촌에서 추천받고 중등전업학교에 입학, 졸업후 도문시건설국계통에서  사업하다가 정년퇴직하였다. 퇴직후 영화는 한국에가서 용역으로 일했고 한국모 부문에서 조직한 응모작품에 입선되여 상금을 타기도 했다. 영화는 말수가 적고 글씨를 잘 쓰고 장기에 흥취가 있었다. 영화가 (대어른)이란 별명을 얻게 되기까지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그가 한번은 동네친척집에서 차린 잔치에 갔다가 심부름꾼으로 술을 사려 도문에 갔다가 영화구경을 하고 친구 집에서 밤을 자고 이틑날에 왔다. 술을 고대히 기다리던 동네 사람들이 너무나도 기가찬 나머지 며 자기를 달랬다.  7,   - 고 주성문(朱成文) 주성문은 60년대 중반에 외지에서 이사 온 사람이다.  그의 별명은 >, 둘이다. 얼굴모양이 쏘련사람 같다고 하여 라 불렀다. 주성문의 얘기는 세가지로 이어진다. 주성문은 언제나 남 먼저 남성들(그때는 자란들이라고 불렀다)의 개추렴을 발동하고는 자기는 번번히 빠지였다. 지금 생각하면 돈 때문이겠는데 술상에서 그를 라며 술안주에 올렸다. 김철국에게 당했다. 그 년대는 술이 귀하기로 는 년대였다. 어느 하루 길닦이를 하는데 주성문이 손님이 와서 아침에 술을 마였다며 술냄새를 피웠다. 그에서 술냄새에 함께 일하던 남자들이 며 서로간  올라오는 술충을 달랬다.  이에 주성문은 자기가 술을 마였다면서 고 하였다. 그런데 곁군들이 술생각을 잊어버리자 하면 그가  또 를 몇번이나 반복하였다. 이에 처음에는 미안해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로, 로 풀이를 하더니 나중에는 김철국(이 글의 5번)이 삽을 팽개치고 며 대판 싸움을 벌렸다. 장세날에 춤판을. 주성문은80로모가 사망되여 후사를 치른 날에 동네분들 앞에서 며 술상이 끝난후 먼저 나서 노래를 부르며 오락판을 벌렸다. 그때까지 모든 사망을 슬픔으로만 여겨온 필자는 주성문한테 호상(好喪)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고 호상이면 오락판을 벌려도 별문제인 풍속을 처음 알게 되였다. 필자는 주성문을 떠 올리면 술이 긴장하던 년대가 떠오른다. 8, - 고 최장국(崔長國) 최장국은 체격이 웅장한것으로 (키큰사람)란 별명을 가졌다.  항미원조 때 중국인민지원군에 참군, 퇴대후 영예군인으로 조직된 왕청현 석현진 에 배치 되였다. 그후 남양(지금의 향양)에 이사를 왔다가 또 아래 마을인  달라자에 이사를 왔다. 최장국은 성질이 콸콸하였다. 한번은 그가 돼지새끼를 팔려고 도문시장에 갔다가 팔리지 않아서 그대로 수레에 싣고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서  술독이 퍼졌던지 안산다리우에서 산 돼지새끼를 몽땅 북강물에 처넣었다. 또한 최장국은 필자에게 특별한 인상을 남긴 사람이기도 하다. 필자가 수남소학교에 다닐 때인 1953년 음력 정월 초, 어느 날 오후에 내가 휴식시간에 합작사(공소사)에 가보니 바로 필자의 아버지(오호준)와 최장국이 마른 명태를 사놓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때 아버지는 필자에게 한대에 3전짜리 싸리연필 몇대를 사주었다. 그런데 아버지와의 이번 만남이 최후의 만남으로 될 줄이야! 그날 아버지는 쌀을 찧으려고 수남정미소를 갔는데 최장국이를 만나 술을 마이고 갈라졌는데 후에 아버지는 수남우물의 내리막 길에서 쌀마대를 싫은 소수레에서 떨어져 수레바퀴에 깔려 과다출혈로 이틑 날에 사망되였다. 그 후로부터 필자는 최장국이를 보면 어린 나이에도 그가 술을 함께 마이고 술동무를 끝까지 책임지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약간의 불만이 있었다. 그런데 웬 일인가?! 지난 70년대 김철국(5호인물)의 생일에 다른 술상에서 일부러 필자를 찾아 와 술을 마이던 최장국이 하며 옛이랴기를 하던 중 불시에 찰떡이 목에 메여 사망될 줄이야! 아버지와의 인연으로 맺어진 최장국의 사망은 나에게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지난 해 11월 23일에 필자는61년 만에 처음으로 최장국의 아들 최정록을 찾아가서 아버지의 죽음을 이야기로 나누었다.(당시에 최정록이 외지에 있었다) 9.   -  고 김영철(金英哲)- 필자보다 한살 우인 김영철의 애명은
163    감각적인 언어로 상대를 움직이는 힘 댓글:  조회:6653  추천:4  2015-01-20
프랑스 파리의 미라보 다리 우에서 한 장님이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 장님걸인의 목에는 는 글구가 적힌 푯말이 걸려 있었다 어느날 한 사람이 그 곁을 지나다가 걸음을 멈추고 걸인에게 물었다. 장님이 침통한 어조로 대답하자 행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목에 걸린 푯말을 뒤집더니 거기에 다른 글을 적어 놓았다. 한달후 미라보 다리 우에 행인이 다시 나타났다. 행인은 지난번처럼 하루 구걸하는 액수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목소리를 알아들은 장님이 행인의 손을 잡고 감격해하며 말했다. 그러자 행인이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이 일화는 우리가 쓰는 말(글) 한마디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결과가 생길수 있다는 사실을 얘기해 준다. 감각적인 언어(글)는 리성에 호소하는것이 아니라 상대를 감동시키고 감성의 심리를 자극한다. 중국의 첫 노벨수상자 막언의 말이다. 지난해 10월 15일 슴근평총서기가 소집한 문예일군좌담회는 이전에 참가했던 다른  회의와 달리 분위기가 매우 자연스럽고 부드러웠다. 마치 집에 모여앉아 한담하는것처럼 친절하였다.습주석이 즉흥적으로 말하던 내용은 그대로 문장으로 되여 청취후 인상이 매우 깊었다.  필자는 습근평주석의 2015년 신년사를 친절한 인정미와 감각적인 언어로 세인을 감동시킨 본보기라고 말한다.  로 시작한 신년사는 지난해를 회고하며 로,그리고 새해를 맞아 며 로 끝냈다. 미사구려나 무미건조한 말은 사람들에게 믿음이나 감동을 줄수 없다. 2천 몇 백자에 달하는 습주석의 신년사에는 는 등 정치적구호가 없이 우리 나라 (南水北調)대공사의 이주민들의 생활, 말디브 수도의 물공급부족 등 지구촌의 안방구석까지 살피면서  다정다감한 감각적인 언어로 중국인민과 세계인민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초요사회를 건설하려는 중국공산당의 결심을 보여주는데서 세인을 감동시키고 당의 형상을 돋보이게 했다. 막언의 말이다.    진리만이 사람을 납득시킬수 있고 진정만이 사람을 움직일수 있다. 리론가는 리치로 사람을 설복시키고 문예가는 정으로 사람을 움직인다. 나에게는 두가지 기본적인 판단이 있다. 하나는 중국공산당은 세계 그 어느 나라의 정당보다 더욱 중국이 부강해질것을 바라며 둘째는 중국의 국가주석 습근평은 세계 어느 나라 원수보다 더욱 중국인민이 잘살기를 바란다는것이다. 습주석의 신년사야말로 사람을 납득시키고 사람을 움직이는 감명 깊은 신년사라 하겠다.
162    새해에 올리는 인사 - 행복만들기 댓글:  조회:6672  추천:5  2015-01-14
161    물욕치료 으뜸 비방 – 부동심 댓글:  조회:6749  추천:3  2015-01-06
요사이 주영강, 소영, 서재후 등 , 들의 기사, 그들이 염낭에 채운 검은 돈으로1000여척의 미국항공모함을 살수 있다는 기사를 읽은 필자는 분노에 앞서 '그들이 그 돈을 제 돈이라고 생각했을가?'는 천진한 의문들이 따른다. 아니면 많은 자영업자들 마저 고 하는데 말이다. 명심보감에 이란 경구가 있다.물건을 보면 마음(물욕)이 생기므로 마음을 바로 잡고 응하라는 것으로  풀이 된다. 일전에 한국에서 온 외조카(엄학철,49)의 말이다. 농촌서 구차하게 살다가 한국바람에 결혼하고 아들까지 본 그는 소박하고 성실하며 부지런한 막힘이 없는 일군이다. 생활을 곁들던 조카의 말이다. 며칠전에 안해의 충고로 처음 큰 마음을 먹고 롯데마트에서 27만원(한화)짜리 등산복을 삿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복무원이 2 7만원을  2만 7천원으로 잘못 계산했었다. 그래서 다른 일을 제쳐 놓고 급히 찾아 가서 보충 결산을 했다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조카가 그렇게 량심적으로 놀기에 인복과 일복이 따른다며 칭찬했다. 물건을 보면 집착하는것은 욕심이고 마음이 흔들리는것은 마음에 동요심이 꼬리치기 때문이다. 이는 옛날 로인들게서 듣던 명언이다. 부동심이면 물질에 미혹되여도 흔들리지 않고 련꽃처럼 진흙속에서 살아도 오염되지 않는다. 부동심은 현실을 피해 외부 세계와 단절하는 것이 아닌, 수련을 통해 욕망과 집착을 자제하고 정심(正心)을 찾는 것이다. 고대에 은사(隱士)를 소, 중, 대로 나눴는데 소은사는 초야에 은거하고 중은사는 도시에 은거하고 대은사는 조정에 은거한다고 하였다. 사람들과 어울려 살며 세상의 시험을 통과한 은사가 비로서 대은사다. 남북조시대의 학자 안지추(顔之推)는 를 (顔氏家訓)으로 하였다. 만약 주영강, 소영, 서재후 등 조정의 와 도시와 초야의 들, 그리고 소방차경적이 울려도 자기를 잡으려 오는 경찰차로 착각하며 안방에서 떨고있 는 때를 기다리는 와 >들이 이 을 봤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가 ? 오늘 보면 집 389채, 황금,백은 42850근, 현금 15.8억원…이 있다는 주영강을 자기의 몫이 아닌 돈(물건)을 제때에 돌린 엄학철에 비하면 가련하고 불쌍하기 그지 없다.  주영강의 이 주영강의 령혼을 사막에로 끌고 갔으니 말이다. 부동심은 물리적용기(血氣)가 아닌, 비도덕을 배격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도덕적 용기이며 물욕을 치료하는 으뜸 비방이다. .어느 명인의 말이다  
160    '교환수'가 아닌 '지령원'... 으로 댓글:  조회:6540  추천:2  2014-12-24
모시 변호사사무소 주임의 말이다. 그 주임의 말인즉 부탁이나 질문을 받은 사람들 일본새를 보면  자기가 직접 나서는 것이 아니라 상급은 하급에, 하급은 상급에, 이 부문은 저 부문에…저부문은 이 부문에 전달만하는 라는 말이다. 그 결과 하는 일이 추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확실히 그랬다. 실례로 몇해 전에 도문서 를 준비했던 도문백탑(쏘련홍군렬사기념탑)이 매체의 지적과 시민들의 반대로 옮길 대신 최근에는 수건과 환경조경으로 새모습을 보였다. 하여 백탑이 도문의 관광상품으로 특히는 로씨야관광객들의 발길로 되고있다. 그런데 도문백탑에 새로 세운 석비의 비문이 미완성비문일줄이야! 새 석비의 비문에는 조선문으로 로 되여야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필자는 몇몇 해당 책임자들을 찾아서 석비에 여백이 있으니를 빨리 보충할것을 건의했다.아니면 도문의 망신이라며 말이다. 그런데 몇 달간을 지켜봐도 그냥 그상이였다. 이에 필자는 어느 기회에 도문시관광국 조동범국장을 만나 또 한번 상술한 건의를 되풀이 하였다. 그때 조동범국장은 이 한마디여서 필자는 마음상 미심하였었다. 그런데 얼마후 조국장이 필자의 건의를 제때에 시달할 줄이야! 아마도 조동범국장은 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그러기에 내가 그를  만난 자리에서 70대 로인이 그를 찾아와 제기하는 문제를 당장에서 해결해 드렸고 또 두만강광장탁구협회 책임자가 반영하는 는 요구도 는 답을 주어 그 책임자가 며 기뻐하며를 반복하였다. 지난 11월 28일 기자는 조국장을 전화취재 하면서 며 몇가지 일을 곁들자 는 또 한마디 였다. 주변에 이 너무도 많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까짓 일, 작은 일, 응당할 일이라고 하면서도 그 일을 안하거나 하지 못한다. 또 는 이 두고 보면 탁상공담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필자는 모 변호사 사무실 주임의 말을 빌어 인민의 공무원은 가 아닌, 내가 할 일을 내가 책임지는 조동범식 지령원, 시공원으로 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159    텔레비죤 대신에 책장을 댓글:  조회:13702  추천:13  2014-12-08
가끔 보면 대부분 가정에서 아이들이 텔레비나 전자 게임기에 매달려 방과후를 보낸다. 심지어 온 밤을 중앙텔레비아동프로와 동무한다. 이에 필자는 아이들이 텔레비에 매달려 있으면 익보다 해가 많다면 대방은 오히려 언어능력이 제고되고 지력이 발달한다며 설전을 벌렸다. 아무튼 세상에 절대적것이 없듯이 텔레비를 보고 안보고에 서로간 장단점이 있다. 구경 텔레비와 전자게임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이에 필자는 학자, 전문가들의 일가견, 그리고 폄범한 아이도 세계 최강의 인재로 키워내는 유태민족들의 자녀교육을 독자들에게 답으로 제공한다.  이는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성장발달연구프로젝트로 최근에(2012년 1월 초판인쇄) 편찬한 3-7세 아이를 위한 의 한 단락이다.    는 유태인 가정의 거실에는 거의 텔레비가 없고 그 대신 책이 가득한 책장과 독서후 토론을 위해 마련된 채걸상이 있다고 한다. 혹 텔레비가 있다해도 어린이 프로그램이 끝나면 텔레비코드를 빼버린다. 부모는 처음부터 아이와 어린이 프로만 보기로 약속하고 훈련을 시킨다. 자녀는 부모를 보고 그대로 따라하기에 부모가 먼저 실천한다.  유태인들이 거실에 텔레비를 놓지 않는 원인은 아이들게 시각을 통해 전달되는 강렬한 세속문화를 차단하기 위해서고 영상매체의 강한 중독성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서란다.   으로 불리는 유태인들은 아이들이 작은 활자가 빽빽한 책을 멀리하면 학년이 올라갈수록 까다롭고 복잡한 내용의 책을 읽어야 하는데 반대로 독서를 싫어하기에 학습에서 락오될수밖에 없다고 한다. 노벨상 수상자인 호주 멜버튼대학 피터 도허티교수는 고 했다. 아이들한테 텔레비를 제약하면 어떤 변화가 있는가? 미국 이스트워싱턴 대학 바버라 브락 박사의 400가구 조사에 따르면 텔레비를 없앤 집 자녀의 51%가 전 과목점수가 A를, 83% 부모들이 텔레비를 없앤 효과라고 밝혀졌다. 그리고 텔레비를 안 보는 대신 활동으로 독서(1위, 놀이, 취미생활, 운동이 뒤를 이엇다. 한국의 의 저자 김명옥씨는 텔레비에 빠져있는 큰아들이 네살 때 텔레비를 완전히 끊게까지는 2년이 걸렸다며 2년간 텔레비시청 시간을 줄인만큼 독서를 시작,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5천 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김명옥씨는 아들이 손만 뻗으면 책을 잡을수 있도록 아들이 눈높이에 맞춰 사방 벽에 엄선한 수백 권의 책을 배치하였다며 고 했다.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보고서에 따르면 영상물에 지속적으로 로출된 아이들은 좌뇌 활동이 크게 위축된다. 우뇌는 창의력과 직관력, 좌뇌는 언어능력과 수리력을 담당한다. 좌뇌활동이 위축되면 논리력과 분석력이 악화되여 읽기, 쓰기, 셈하기 능력이 퇴보된다고 했다. 영상물은 사고능력을 떨어 뜨린다. 텔레비는 시청자의 눈길을 잡기 위하여 화면을 1-2초 간격으로 계속 바꾸면서 말초적이고 감각적인 자극을 준다. 텔레비 시청은 주어진 자극을 그대로 받아 들이는 수동적인 행위로 어려서부터 텔레비에 빠져 있으면 스스로 오랫동안 넓고 깊게 생각할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자기 스스로 열정을 갖고 능동적으로 일을 해나갈 때 집중력이 생기고 창의력도 높아진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영상물에 익숙해지면 자연히 영상물에 비해 재미없고 덜 자극적이고 오래 생각해야 하는 독서와 멀어지게 된다. 필자가 의식적으로 관찰한 총명하고 활발했던 어린애가 텔레비에 빠지더니 지금은 친구를 사귀지 않고 자연과 교류하는 사회성이 떨어져 지금은 은둔형 로 변했다.  왈가 왈불가할것잆이 필자는 한마디로 아이들게 텔레비를 하게 제약하자는 주장이다.  
158    한국진출이 남긴 여운 ABC 댓글:  조회:12452  추천:14  2014-12-02
중국조선족들의 한국진출이 20년을 넘겼다 지금 한국체류중인 조선족이 60여만명이라는 통계가 있다. 이는 한국로무가 우리 민족의 주요《산업》중의 하나임을 뜻하기도 한다. 한국진출로 중국조선족들이 가난에서 해탈하는 길이 열려 경제생활에서 여유가 있게 됨은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얻는것이 있으면 잃는것도 있기마련이다. 한국진출로 인해 남긴 여운을 세가지로 정리했다. 《가장 큰 착오가 아이를 낳은것이다.》 한국에서 몇몇 젊은 부부들을 만났는데 이는 집에 두고 온 자식을 걱정하며 하는 말이다. 《건강하려면 한국에 가지 말라.》 이는 어느 한 생일상에서 한국에 다녀온 친구의 말이다. 그는 한국에 있으면 앓을 사이가 없다. 얼마전에 모 병원에 가보니 적지 않게 한국에 다녀온 사람들이고 암환자도 적지 않다 했다. 《안해는 이다(전화만 통한다는 뜻)》60대 되는 한 친구의 안해가 한국에 간지 15년이 되며 안해는 이미 남이 됐다고 말한다. 이 세가지는 한국진출이 자식농사, 건강상황, 부부관계에서의 《3재(灾)》를 가져왔다는 말이다. 《3재》가운데 건강과 부부관계는 어른들의 몫이나 단 《아이를 낳은것이 착오이다》에 비춰 《돈농사와 자식농사를 함께 못한다》를 곁들고저 한다. 아이들의 제1임 선생님은 어머니이다. 아이 심성의 90%가 어머니를 닮는다 한다. 육아는 어머니의 책임이 절대적이라 할수 있다. 아이들은 《물드는 존재》(모방하는 존재)이다.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있다. 맹자네가 저잣거리에서 살 때는 애가 장사흉내를 내고 대장간옆에서 살때는 애애가 대장간 흉내를 냈으며 서당옆에 이사가니 애가 글공부를 하더라는것이다. 아이들은 기른 이를 엄마라고 부른다. 아이를 낳자마자 유모한테 맡기면 심성이 유모를 닮는다고 하고 할머니에게 맡기면 할머니가 엄마로 된다 한다. 연구자료에 따르면 아기는 최저로 3살까지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 3살전까지는 아이들의 성장발육의 관건시기이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 아이들은 사물을 인식하고 자아를 알고 하나 또 하나의 진보를 가져올때이다. 그래서《세살때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는가 본다. 《가장 큰 착오가 아이를 낳은것이다》고 말하는 40대 부부는 아이가 한살때 너무 귀엽게 놀아서 동네의 사랑을 듬뿍 담았다 한다. 그런데 부모들이 로부모에게 맡기고 한국에 가다보니 지금 소학교 5학년에 다니는 애가 말하기 싫어하고 친구들과 사귀기 싫어하며 혼자 독방을 차지하고 텔레비와 동무하는 애어린《로인》이 되였다 한다.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과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 부모라면 자식에게 사랑을 줄 뿐만 아니라 자식의 잘못에 꾸지람도 주어야 바르게 자란다. 그런데 로인들은 왕왕 지나친 사랑을 준다. 《제 에미가 키웠으니 말이지 우리가 키웠더라면 어림도 없지.》소학교 5학년에 다니는 손녀가 북경수학올림픽경연에서 우승을 했다는 70대 량주가 하는 자랑의 말이다. 돈농사와 자식농사는 함께 못한다. 자식농사를 잘하려면 《자기 자식은 자기가 키워야 한다.》유태인은 《엄마는 집안의 령혼이다》며 《어머니가 유태인이여야 유태인이다》고 한다. 《세계를 움직이는것은 남자지만 그 남자를 움직이는것은 녀자이다》. 정신분석학 창시자 프로이트(유태인)는 《내가 위대한 인물이 되려고 노력한것은 어머니가 나를 믿어주었기때문이다》고 말한다. 아인슈타인(유태인)을 과학천재로 만든것도 엄마의 인내심과 슬기로움이였다. 우리 민족도 유태인 못지 않게 자녀들에게 헌신적이다. 자식이 잘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고 희생한다. 그런데 안타까운것은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자녀교육을 돈과 결부시키며 경제적 여유를 만드는것이 교육의 기본으로 오해하고있는것이다. 조선 축구팀 명장 정대세는 어머니의 격려와 사랑의 힘을 입어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한것이지 결코 돈이 아니였다. 정대세 어머니는 아들이 운동밖에 모르는 사람이 될가 우려되여 어릴때부터 피아노와 그림을 가르쳐주었다. 그녀가 가장 아끼는 보물이 아들이 고중때 받은 12년 개근상이다. 《자식농사》는 단 공부만이 아닌 심성이 밝은 사람됨됨의 《인간농사》이다. 돈을 잘 버는것, 일을 잘하는것, 공부를 잘하는것은 서로간 학문이 다르다. 사람은 돈을 잘 벌든 일을 잘하든 공부를 잘하든 인간됨됨이가 좋아야 한다. 《가장 큰 착오가 아이를 낳은것이다》고 말하는 젊은 부부의 후회에 부모 무책임의 《쭉정이 농사》는 차라리 안하기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돈은 벌었지만 가정농사가 잘 안됐다면 결과는 실패라 하겠다. 집은 있지만 가정이 없는 《빈곤족》이 측은해 보인다. 길림신문 1014-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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