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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280 ]

280    남을 미워하면… 댓글:  조회:76  추천:0  2019-04-12
인간은 혼자서는 살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어느 누구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주지 않아도 고운사람이 있는 반면 달라는 것이 없이 미운사람이나 또는 저주하게 되는 사람이 있게된다. 물론 남을 미워함에 그 나름대로 미워할 만한 리유가 있기 마련이다. 나에게 경제적 손실을 입혔거나 가족에게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당하게한 등의 원인으로 말이다. 하기에 상대방을 미워하는 것이 상대적 원리로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세네카(로마제정시대 정치가)는 “너에게 해를 끼치는 자는 너보다 강하거나 약했다. 만약에 그가 너보다 약했다면 그를 용서하고 그가 너보다 강했으면 너 자신을 용서하라”고 했다. 말이 쉽지만 진작 미운사람을 용서하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남을 미워하거나 증오하지 말아야 함에 관한 R,테카르트의 말이다. “남을 증오하는 감정이 얼굴의 주름살이 되고 남을 원망하는 마음이 고운 얼굴을 추하게 만든다. 사랑의 감정은 맥박이 고르며 보통 때보다 기운차게 움직이게 하며 위장을 도와 음식 소화를 잘 시킨다. 이와는 반대로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감정은 혈액순환을 방해하는 동시에 맥박을 급하게 하며 위장의 운동을 정지시키며 음식을 받지 않게 할 뿐 아니라 먹은 음식이 부패되기 쉽다고 한다. 아무리 속으로만 미워한다고 해도 그사람을 싫어하는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언제든 겉에 드러나 자신에게 메아리처럼 돌아오기 마련이다. 어느 스님의 말인데 사람이 남을 미워하면 상대방도 리유없이 나를 미워하는데 미워하는 감정이나 표정을 전혀 대방이 눈치재지 않게 했는데도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 하여 어느날 갑자기 리유없이  누가 미워지면 그 사람이 먼저 나를 미워하지 않았나를 생각해 봄직 하다. 미움의 감정은 건강에 해롭고 다른 사람을 미워한다는 것은 적을 만드는 것이다.  “친구 열 명을 만들기보다는 원쑤 한 명을 만들지 말라”는 말이 있다. 친구 열명의 도움이 아무리 커도 원쑤 한 명의 해침을 당해내지 못한다 그래서 “백사람의 친구는 적다 그러나 한 사람의 적은 많다”고 한다. 사람마다에게 장단점이 있게 마련이다. 대방의 나쁜점만 보면 나쁜 점만 눈에 들어 오고 좋은 점만 찾고저 노력하면 나쁜 사람도 반드시 좋게 마련이다. 세상에 본래부터 완전한 사람은 없다. 나의 기준에 맞추어 상대를 변화시키고 바꾸기는 아주 어렵다.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게 한다는 어느 심리박사의 “처방”이다. 1, 미워하는 사람의 장점을 적어 놓고 매일 몇 번씩 읽고 생각하면 나중에 그를 존경하는 애정이 솟아난다. 2, 미운 사람을 위해 기도면년 그사람이 사랑스러워진다. 3, 미운 사람일수록 많이 도울 때 결국 그 람이 나를 사랑하게 된다. 4, 미운 자가 듣거나 듣지 않는 장소에서 그를 칭찬하면 내가 그를 좋아하는 줄 알고 그도 나를 사랑하게 된다. 5, 미운 자일수록 미소로서 친절하게 대해 준다. 한국의 “무관전권대사”(無冠全權大使)로 불리는 임덕규회장(83, 영문”외교”월간잡지사 회장, 한국 “百笑會”회장)의 인간처세술은 “정(情) 따라 구만리”다. 그는 “정을 따라160여개 나라를 오가며 400여명의 나라 정상들을 만났는데 지금까지 어느 나라나 어느 누구를 미워하고 욕한적이 한번도 없다”고 한다.  미움을 미움으로 이길수는 없다. 당신의 주위에 당신 마음에 들지 않거나 미운 사람이 있다면 사랑으로 다가 서라. 당신이 진정한 사랑으로 그를 감싸 준다면 그의 마음이 눈처럼 녹을 것이다. 사랑은 남을 변화시키는 가장 아름답고 지혜로운 “질책”이다
279    지금에 최선을 ... 댓글:  조회:184  추천:1  2019-04-01
신(神)이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것 중에 가강 공평한 것을 시간이라 하겠다. 일국의 왕부터 거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이 하루 24시간 1440분을 주었으니 말이다.  흔히 “시간은 금이다”.”시간은 돈이다”고 하는데 똑 같은 시간을 어덯게 쓰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공과 실패, 그리고 인생의 행, 불행이 좌우된다. 미국의 시간관리 전문가(마이클 포티노)의 조사에 따르면 한 사람이 70세를 산다고 할때 일생동안 줄을 서는데, 신호등을 대기하는데, 가사일에, 먹는데, 잠을 자는데… 등 살아가는데 불가피한 여건으로 43년을 보내고 그 밖에 휴식을 포함한 시간을 제외하면 일생동안 실제로 일에 파는 시간이 얼마 안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에 비춰 보면 시간을 랑비하는 것은 곡 생명을 랑비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흔히 돈 만원을 잃어버리면 찾느라고 야단치지만 시간을 잃어(랑비)버린 것을 아까워 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한 십년만 젊었도…” “ 그 때 좀 더 잘 할걸. 좀 더 열심히 공부했더라면…”하면서 후회를 한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흘러간 물로 물방아를 돌릴 수 없듯이. 흘러간 세월을 아무리 후회해야 소용이 없다. 농사도, 공부도,사랑도,우정도, 효도도… 때가 있다. 시간의 중요성을 깨워주는 일화다. 러씨아의 대 문호 도스도예프스키가 28세에 내란류도혐의로 사형을 판결 받고 형장에 끌려가 기둥에 묶여졌다. 그는. 사형집행 예정 시간을 보니 자신이 이 땅위에서 살 수 있는 시간이 이제 5분밖에 안 남았다. 28년을 살아 왔지만 이렇게 5분이 소중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5분을 어떻게 쓸가를 생각해 보았다. 형장으로 끌려 온 동료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마디씩 하는데 2분, 오늘까지 살아온 생활을 정리하는데 2분을 쓰기로 하였다. 남은 1분은 오늘까지 발을 붙이고 살아온 땅과 눈으로 볼수 있는 자연을 마지막으로 둘러보는데 쓰기로 하였다.  마지막 인사를 하는데 벌써 2분이 지났다. 이제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자 하는데 앞으로 3분 후면 어디로 갈것인가를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고 아찔하였다. 28년의 세월을 순간 순간 아껴 쓰지 못한 것이 너무 후회 되였다. 이제 다시 살 수 있다면 순간 순간을 값 있게 쓰련만! 그는 깊은 뉘우침에 사로 잡혔다. 탄알을 장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죽음의 공포에 떨었다. 바로 그때 형장이 떠들썩하더니 한병사가 흰 수건을 흔들며 형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황제의 특사령을 가지고 온 것이다. 그는 풀려나 시베리아류형생할을 하면서 인생문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되였다. 그는 항상 그때의 마지막 5분간을 기억하면서 시간을 금쪽같이 아끼면서 살았다. 그는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갖고 “죄와 벌”, “카라마죠프가의 형제”와 같은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어제는 력사고 래일은 알수없고 오늘은 선물이다” 시간이란 이렇게 소중하다. 연변대학 농학원 식물학박사 김수철(95세)교수는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고 래일 죽을 것처럼 일한다’ 그는 이미 출판한 “길림성식물명록”에 빠진 것이 많아서 내가 보충해야 한다며 자기가 수집한2600종의 식물표본으로 “길림성식물독본”을 출판하고저 90고령에 로친을 딸 집에 보내고 오늘의 일을 열심히 한다.  ‘오늘은 인생의 최초의 날로 생각한다면 많은 희망과 기대를 가질수 있고 ‘오늘은 인생의 최후의 날로 생각한다면 지금 이시각에 삶의 계획을 이루기에 최선을 다 할 것이다..  오기활  
278    잊혀지지 않는 까울령고개 댓글:  조회:139  추천:0  2019-03-27
날씨가 유난히 맑고 상쾌했던 지난해 국경절련휴때 나는 지난60년대에 동북사대를 졸업하고 중학교원으로부터 선후로 향당위서기, 시당학교부교장, 시농업방송대학교 교장을 지낸  남편이 정년퇴직후 신병으로 수년간이나 바깥나들이를 못하는 남편을 하루가 따게 변화발전하는 고향지역의 새로운 면모를 감상케 하고저 조카까지 셋이서 택시로 “말타고 꽃구경식”려행을 하였다. 우리는 새로 개통된  도문-곡수ㅡ향양 간의 고품도로부터 시작하여 도ㅡ훈고속도로에 올라 향양촌 ㅡ수남촌 ㅡ량수진을 지나면서 정든 고향의 변신한 산천을 만끽하면서 설레이는 마음을 달래였다. 왕청쪽에서 흘러 내리는 가야하와 연길쪽에서 흘러 내리는 해란강이 도문곡수(曲水)에서 합수(合水)하고 “도문북강”이란 새이름으로 밤낮을 흐르는 강줄기를 가로지른 높고넓은 고속도로다리로 씽씽달리는 우리는 똑 마치 훨훨날아가는 날새마냥 신기롭고 별스러웠다  우리는 어느덧 내가 다닌 소학교, 내가 처음 교편을 잡았던 수남소학교  뒤산까지 왔다 그때의 우리 학교뒤산은 수풀이 무성하고 산짐승들이 뛰노는 자연 그대로 였건만 오늘은 내가 그 학교의 뒤산허리를 가로 지른 고속도로에서 감동과 희열을 느까면서 내달리고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학생도 선생도 다 떠난  텅빈 학교만 덩그러니 서 있는 외로운 모습에 마음이 서글펐다. 계속하여 차가 앞으로 달리다가 지난년대에 도문사람들이 “훈춘까울령고개”라고 불러온 고개길 밑에서 한동안을 멈춰섰다 한참이나 까울령고개와 마중하고 회포에 잠겼던 남편이 화문을 열었다. ㅡ내가 3녀 1남중 유복자망내로 태여나서 다섯살에 엄마를 잃고 저 까울령고개 밑 공둥산에 자리한 큰누나집에 얹혀 살면서 방학이면 까울령 고개를 넘어 다니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둘째누님집에(왕청현 석현진 수남촌 달라자)다니던 생각이 떠 오르오... 한번은 열살이 갓 넘어서 여름 방학에  2십여리도 퍽 넘는 신작로길을 맨발로 걸어서 누나집에  갔는데 누나는 밭에 나가 없었고 어린 두 조카가 집에 있더군. 그때 내가 지친데다가 배고픔으로 누나집에 들어서니 코를 찌르는 소고기장조림냄새에 정신이 팔려 누구를 돌볼사이도 없이 맨 손으로 장조림을 집어 눈깜빡사이에 계눈 감추듯이 몽땅 먹어치웠소. 얼마후 일밭에서 돌아온 누나가 텅빈 소고기장조림냄비를 보더니 “허약한 매부를 춰세우려고 어쩌다 힘들게 해 놓은 소고기졸임인데 누가 다 먹어치웠냐?” 며 볼멘 소리를 치더군. 그러자 언제나 엄마같이 자애로운 누나가 불시에 무섭고  당황해 지더군,, 그래서 무작정 밖으로 뛰쳐 나갔지만  날이 저물고 어두우니 갈 곳이 없어 혼자서 까울령고개를 쳐다보며 쿨적이는데 동생을 찾아 헤매던 누나가 동네집 모퉁에서 울고있는 나를 발견하고 달아와  와락 끌어안더니 둘이서 한참이나 같이 울었지요….  남편은 저 멀리서 희미하게 보이는 산봉을  가르키며 저산밑에 큰누나의 산소가 있다면서 자애로운 누님들 생각에 잠겨있었다. 나역시 까울령고개를 보며 우리 할아버지의 생각을 떠 올렸다. 그때  할아버지(최주해)는 훈춘서 연변4고중을 다니는(1954~1957)큰  손자(최정욱)가 보고 싶어서 일년에 두번씩 손자를 볼려 훈춘에 다녔는데 갈 때는 아버지(최철산)가 앉쳐드리는 뻐스로 가고 돌아 올때면 아버지가 드린  차비돈을 아껴 손자를 주고나서 도보로 힘겹게 까울령고개를 오르내리였다 할아버지는 누구도 몰래 걸어오시고는 지쳐서 며칠씩 누워 계사군 했다 그때  연변4고중에 다나던 많은 학생들이 개학이되면  집체로 화물자동차에  앉아서 학교에 갔는데 부모들은 자식을 떠나보낸후 자식들 한테서 까울령고개를 무사히 넘어갔다는 편지가 올때까지 몇날을 밤잠까지 설치며 랭가슴을 태웠다. 이밖에도 “훈춘까울령고개”는 연변인민들에게 잊을수 없는 끔찍한 사연을 남기기도 했다. 1987년 8월 30일, 오전 11시 33분, 훈춘행 연길운수공사뻐스와 연길행 훈춘제2운수공사뻐스가 “훈춘까울령고개”에서 서로 길을 비키다가 훈춘행뻐스가 그만 내리막에 쏠리더니 평형을 잃고 번져져. 마구 딩굴다기 길에서56메터 가량 떨어진 산중턱나무에 걸려서 멈춰섰다…  그때 뻐스전복사고로 6명이 사망하고 21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 …  .. 그러나 오늘은 그 험난했던 까울령고개길은 우리에게 희미한 흔적만 남겨놓고 시원스럽게 뻥  뚤린 동굴과 멋지고 넓직한 고속도로로 변신하여 오가는 차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쏜살같이 내달리니 말이다 날에 날마다 변화발전하는  세상의 모습에  우리 량주는 서로를 마중보며 감동했고 가슴벅찬 행복감으로 즐겁기만 했다. 한편으로 자식을 출세시키려 평생 뼈빠지게 일만 하셨던 부모님 생각에 마음이 숙연해졌고 대학공부까지 마치고 사회의 떳떳한 인재로 된 언니 오빠들이 너무나도 대견스러웠다. 재직때 성격이 호랑이 같아서 남들로부터 좀 너무하다는 말을 듣던 남편이 오늘은 온순한 양처럼 잠자리에 누워서 하는 말이다.  “오늘 당신이 마련한 택시려행이 정말 즐거웠소. 중병으로 집밖에 모르던 나에게 바깥세상구경을 시켜준 당신이 정말 감사하오. 오늘 그렇게도 그립던 고향산천을 돌아보았으니 인젠 죽어도 원이 없겠소…” …   …   … 당년에 대단한 술꾼이라 불리며 집일을 제쳐놓고 사업만 사업이라며 달아다니던 남편이 오늘에 술잔을 멀리하고 진종일 책과 동무하는 신세가 되였으니 너무나 측은해 보였다.   최정금(도문, 75)
277    비록 죽은아이의 자지를 만지는 격이라지만… 댓글:  조회:346  추천:1  2019-03-18
요즘 필자는 김수연씨의 비문 “오늘 나는 당신을 잃었습니다”를 듣고 읽고 하며 손에 일이 잡히지 않는다. 신주의 땅에 64년이란 족적을 남긴 “연변팀”이 2억 4천만원이란 세금을 내지 못해 해체를 당했다니 너무나도 안타낍다. 이제는 “죽은 아이의 자지를 만지는 격”으로 해체를 누구의 탓이라고 해도 소용이 없지만 필자의 소견으로 “해제”의 “주범” 이 그래도 관리측과 운영자에 있다고 본다. 필자는 족구(足球)가 “외항”이다. 그리고 축구팬도 아니다. 단 연변주민으로 연변축구에 정감(情感)이 있고 연변팀을 위한 사랑과 책임은 지켜왔을 뿐다. 례하면1998년 6월 2일, 연길경기장에서 연변팀의”검은 호르래기”피해에 억울하고 분개하여 “연변일보”기자신분으로 주용기총리한테 “푸른잔디에 민족기시가 존재 한다”는 고발신을 등록우편으로 써올렸다.(당년에 국가축구협회에서 연변축구협회 에 공개사과를 했음). 그리고 2003년 연변팀의 봄철 한국전지 훈련 때 필자의 련줄로 한국 경상남도 고성교육청 이정찬학사가 연변팀의 숙박, 교통, 훈련장 배치를 전담하기도 했다. 필자는 연변의 자존심이며 브랜드인 연변팀 이 2억 4쳔만원이란 세금채납문제로 파산된 것에 대하여 주급지도부와 해당부문의 속셈과 다른  궁리가 있을것이라고 믿는 한편 또 다른 생각으로는 주정부를 비롯한 관계부문에서 세금부문과 시간적인 남세담보를 하고 “남의 손을 비는 지혜”를 써 봤더면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맴았다. “남의 손을 빌다”는 다름 아닌 각급 정부측의 지원, 기업의 협찬, 조선민족과 조선족들의 성원과 성금으로 2억 4천만원을 쟁취하여 체불된 세금을 납부하고 “연변팀”을 살렸으면 하는 생각이다. 연변의 축구팬 “수박학머니”가 연변팀에 천원을 헌금한 실례가 단적으로 가능성을 말해준다. 전체 조선족들의 “축구애”와 “축구열”이 연변팀의 뒤심과 버팀목이 될수 있다는 믿음간다.. 물론 이와는 별도지만 필자는 지난 80년대에 도문시홍광향중심소학교(오공소학교)에서 자금난으로 학교악대를 조직하지 못하는 실정을 료해하고 “학부모들의 자식교양열로 악대를 설립하자”는 건의 편지 한 통으로 이틀만에 훌륭한 장비를 가춘 악대를 설립하고 당해에 시급문예경연대회에서 오공소학교가 우승을 쟁취한 력사가 있다. 필자는 대비도 안될 이런 경험으로 주해당부문에서 “전사회에 올리는 글”을 발표하여 모든 조선족들의 무형재산인 “축구열(애)”로2억 4천만원이란 “유형재산”을 만들어 연변조선족의 자존과 긍지를 지키고 연변의 브랜드를 수호 했더라면 얼마나 다행일가를 생각해 본다. 언제나 위기와 기회는 동존하니깐.. 하버드대의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열심히 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다른 힘을 빌릴 줄 아는 것 역시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인생의 성공자는 외부의 힘을 연구한 사람, 외부에 있는 힘을 배운 사람들이다.”고 한다. 오기활
276    동년의 설날이 그립고 그립다 댓글:  조회:404  추천:0  2019-03-06
래일이면 설날이다. 래년은 몇백년만에 한번씩 든다는 황금돼지해이다. 멀리에 있는 세 딸과 귀여운 손군들을 그리면서 량주가 마중앉아 손을 꼽아 보니 어느덧 내나이가 75살이다. 이만하면 아버지년세는 남아 살았고 동네에서 최년상으로 모시던 할아버지(최주해)만큼 살려면 아직도 10년은 더 살아야 한다.  그나마 최 근년에 핸드폰을 손에 익힌 덕분으로 매일을 핸드폰과 동무함이 별세상만하다. 그믐날 부터 핸드폰은 쉴새 없이 신호가  울린다 지인들께서 올린 설명절 문안과 동영상들이  명절의 분위기를 띄우고 있지만  핸드폰만 끄면 썰렁하여  옛날 설명절 분위기와는 너무다르다  내가 어릴때  우리 집은 마을에서  제일 큰 기와집이 였는데 아버지 어머니는 할아버지를 모시고  우리 다섯 남매를 기르면서 화목하게 살았다  옆 집은 삼촌네 집이였는데  삼촌네도 다섯 남매를  기르면서 오손도손 살았고 뒤집은 5촌 숙부네 집이였고  년세가 많은 5촌 숙부네는  오누이를 기르면서 재미있게 살았다이  이렇게  우리4촌 6촌 12명 형제자매들은 어릴 때 부터  이집 저집에서  뛰놀며 뒤엉켜 자랐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재밌고 잊혀지지 않던 일은 설날이 오면 우리집에 모여 할아버지에게  세배 드리고 함께 모여 즐겁게 설명절 쇠던 일이다. 설날이면 세 집식구들은 아침부터 우리집 한 구들에서 야단 법석했는데 지금 생각만해도 웃음이 절로 나고 가슴이   뿌듯해진다. 설날아침 할아버지에게 세배를 올리는 행사가 제일 재밌었는데  그것이 우리 가문의 례의 범절인 것 같다 열명도 넘는  우리 자매들은 모두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저마다 설비슴으로 마련해준 꼬때옷을 떨쳐입고  우리집에 모여와 나이 순서대로 세배줄을 섰다 그때  철부지 였건만 그래도 신통이도 제자리를 찾아 서서는 히히닥 거리며 제가 더 멋지게 하겠노라 마구엎드려  세배련습까지 해 가며 순서를 기다렸다 할아버지에게 세배 올리는 제일 첫 순위는  뒤집 5촌 숙부가 할아버지에게  절을하면서 "아즈바님  오레도  무사합소" 하시면 할아버지도  맞절을 하며서"조카도 무사하오"하시고는 또 입속말로 뭐라고 하셨는데  그때 나는 너무어려서 잘 알아 듣지 못했다. 두 번째 순위는  우리 아버지와 삼촌께서 할아버지 앞에 공손히 엎드려 절 하시며 "오레도 무사하고  오래오래 앉읍소"하신다 할아버지는 으으음 하시며 즐거워 하셨다. 다음 세번째 순위는 10여명 손군들 순서다 제일 처음엔 큰 손자부터인데 성욱, 정욱, 영욱, 태욱, 송욱이고 손녀들 순서는 일금, 정금, 순금, 오금 ,선금, 신숙이였는데  모두 깍뜻이 엎드려 세배를 했다 이때부터 온 집안은  웃음소리가 넘쳐난다  엉뎅이를  하늘로 췌들고 머리만  땅에 붙힌 놈, 머리와 배때기를  모두 땅에 납작 엎드리고 손만 아마에 대고 있는 놈'  두 무릅을 꿀고 이마에  손만 엊고  엎드려  일어날 렴을 하지 않는 놈, 별라 별 우수운 꼴 다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제일 볼거리는  막둥이들이 절을 하느라 머리는 땅에 대고  궁뎅이를 꺼꾸로 췌들면 짜개바지 밑으로 삣죽 내미는 엉뎅이가 온 집안을  웃음바다로 만들어 저마다  웃느라 눈물이 찔끔 나기도 했다 세배를 받는 할아버지는 즐겁고 손군들이 너무 귀여워서 저마다의 머리를 쓰다듬고 잔등을 정겹게 뚝뚝 두두려 주며 "네가 제일 잘 한다"네가 제일 곱게하다" “네가 제일 멋있게 한다"고 하시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럴 때면 철부지 들은 저마다 제가   제일인줄 알고 우쭐대며 너덜거린다 그사이 우리 어머니와 숙모는 정주간에서 아침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지만  조무래기들이 새배하는 모습이 너무 궁금하고 재미있어 틈틈이 달아와 보고는 웃음보를 터 뜨리며 다시 정두간으로 간다 설 세배가 끝나면 다 같이 모여  아침삭사를 한다  남자들은  술상에 앉아 권커니 작커니 하면서 술을 마셨고 여자들과 애들은 끼리까리 모여앉아 맛나게 설 음식을 먹었다 할아버지는 술잔을 들고 마시기도 전에 가매목에서 바삐도는  며느리들에게 “인젠 그만하고 식기전에 빨리 식사해라”며  사랑에 넘친 어조로 재촉한다 아렇게 온 집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 찼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동네 어르신들과 젊은이 들이 할아버지에게 설 인사 드리려 연거퍼  들어 오신다  어머니는 아침  설거지도 채  끝내지 못하고  동네 손님  접대로  술상을 갖추고  거두고를  바복하며 온종일 쉴새 없이   뱅글뱅글 돌아쳤다 그 뿐만 아니라  초이튼날 부터는 먼곳에 있는 친척들께서 할아버지에게  설인사를 왔기에  술상 차리고  정심까지 대접해야 했고  어떤 분들은 오래만에 왔다고  몇칠씩 묵어 가기도 했기에  우리집은  조용한 날이 별로 없이  시글벅적 하였다  그래도 우리 어머니는  짜증 한번 내지 않고 되려 꼭 오실 분인데  안 오면 이제나 저제나 하시면서  손 꼽아 기다렸다  하기에 우리 어머니는  친척들과 동네에서 효자며느리로 소문이 자자했다  지금 할아버짔께서 돌아 가신지 40여년  지나 세월은 가고 시대는  변하여 비록 해마다 설날은  어김없이 찾아 오건만 지금의 설날은  우리민족의 고상한 전통과  미풍량속이란 맥박은  해해년년이 달리 약해지고 숨결이 낮아지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나는 그때 그시절 설날이 너무  너무 그립다 례의가 바르고  착실하게 화목한  가정을 꾸렸던   우리 부모님들의 넋이 살아 숨쉬는 설날은 영원히 나의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하고 싶다 아니, 영원히  간직할것이다  왕청현 석현진 달라자툰 큰기와집 큰딸   최정금(도문)  
275    시련(試鍊)의 뜻 댓글:  조회:196  추천:0  2019-03-01
신이 우리에게 시련을 주는 것에 반드시 깊은 뜻과 의미가 있다고 한다. 단지 우리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할 뿐이다. 인류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사람들로 평탄한 가정에서 아무런 고생이나 시련이 없이 성공한 사람을 하나도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석중의 보석으로 불리는 가장 아름답고 단단한 다이아몬드는 숯이 수천년만 동안 뜨거운 열과 압력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리 회사에서는 숯에다 150만 피운드의 압력과 5000도의 열을 가해 다이아몯드를 만든다고 한다. 감당할수 없는 압력 때문에 큰 시련을 겪기에 그 약한 숯덩이가 다이아몬드로 변한다.  우리 인간도 시련을 겪을 때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뚜렷한 존재가 될 것이다.  “선각자는 고독하다”는 말과 같이 큰 뜻을 품은 사나이나 장부일수록 괴로운 슬픔이 많은 법이다. 나무도 큰 나무일수록 비바람을 많이 타며 아름다운 무지개가 서기 위해 비구름이 있어야한다.  나에게 부딪치는 일이 많고 시련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그릇이 크기 때문이며 고난이 따른다는 것은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호주 부근에 벨리라는 거대한 호수가 있는데 호수의 길이가 3천 킬로메터나 되며 호수의 안쪽은 아주 고요하고 물결이 잔잔하다. 그런데 그곳에 자라고 있는 산호초의 풀잎은 한결같이 생기가 없고 제대로 자라지 않는데 이와 반대로 호수 바깥의 물결이 거세고 사나운 곳에서 자라는 풀들은 오히려 싱싱하고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자태를 과시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고통이나 시련이 없는 안정되고 쾌적한 환경속에서 살아가고 싶고 또 살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며 또 그렇게 살아가는 식물적 삶에서 보람을 얼마나 느낄수 있으며 삶의 가치가 얼마나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아무런 자연환경의 변화와 시련이 없이 주는 먹이를 받아 먹으면서 생명의 위협과 배고품을 모르고 살아가는 동물원의 동물들이 생의 의욕과 활기를 찾아볼수 없는것처럼 인간도 무사안일한 삶보다는 어려운 여건이나 환경에 직면하면서 스스로의 힘으로 그러한 여건과 환경에 도전하면서 성취한 즐거움이야말로 인생의 참의미와 가치이다. 일본의 자수성가한 어느 대기업가가 성공의 비결이 무엇인가는 물음에 “병마, 실업, 실연, 배신 등등 다른 사람이 피하고 싫어하는 것을 많이 경험하시오, 이것이 제가 성공한 비결이자 디딤돌인 것 같습니다” 고 답했다.  우리에게 이러한 문제들이 남보다 많이 찾아온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나 자신을 단련시키고 강하게 하기 위한 신의 특별한 배려인지도 모른다. 어느 분야든 정상에 있는 사람들의 오늘이 있기까지엔 허다한 곤난과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 중에는 운이 좋아서, 환경이나 여건이 좋아서 성공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을수 있다. 허나 대부분의 성공자들은 남모르는 피땀, 눈물은 물론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형극의 가시밭길을 헤쳐온 것임을 관과해서는 안 된다. 열악한 사막나라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배추농사로 세계 “록생혁명의 기수”로 불린 한국의 최대 농부 김용복회장의 자서전 (제 1책)의 제목이 “그 때의 처철한 실패가 있었기에 오늘의 성공이 있다”이다. 그만큼 인생에서 성공과 행복은 그냥 주어지는 법이 없다. 오기활
274    안생목표가 확실하면 댓글:  조회:245  추천:1  2019-02-18
인생을 영위하는 기슬은 하나의 목표를 확실하게 정해서 거기에 힘을 집중하는 것이다.  목적없이 사는 삶은 인생을 랑비하는 것으로 삶이 허무하고 공허하기 마련이다. 라침판도 없고 키와 노도 없이 망망한 대해에서 표류하는 배와 같은 인생이니깐 흔희 보면. 거의 많은 사람들이 삶에서 자신들의 목적지가 어딪지를 ,잘 알치 못하며 한 번밖에 없는 1회적인 인생을 허송 세월로 방황한다는 생각이 때로 든다.  내가 가고자는 목적지를 분명하게 정하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에서 자못 중요하다. 이런 현상이 말해준다. 우리가 평지에서 눈을 감고 걸어 갈 경우 20메터 직선 거리라고 해도 4메터 정도의 오차가 생긴다고 한다. 100메터를 넘게 가면 아무리 똑바로 걷는다고 해도 원을 그리면서 걷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장님 걸음을 하며 인간이 빙빙도는 현상을 륜형방황(輪形彷徨)이라고 한다. 당신이 륜형방황을 하지 않으려면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지정한 목표지점을 향해 쉬지 않고 걸어야만이 목적지에 도달한다. 치렬한 경쟁사회에서 승리자가 되기 위하여 목표를 분명히 하고 구체적으로 뚜렷하게 세워야 한다.뚜렷하지 못한 목표는 의지력이 약할 때 흔들리게 되니깐. 과녁이 흔들리면 천하의 궁사라도 활을 명중할 수 없다. 목표는 구체적인 실현 가능성을 생각해서 세워야 한다.맹목적으로 성공 하겠다, 돈을 벌겠다….는 추상적인 목표는 꿈에 불과하다. 돈을 벌겠다면 얼마를, 무슨 일을 해서 언제까지 어떻게 벌겠다는 세부적인 계획을 세우고 그것이 자기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세워야 하며 분명한 계획을 세웠다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 속담에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하는데 과연 열 번을 찍어 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는 통계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두세본 찍어 보고 포기한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짐작이다. 인생에 확실한 목표가 있는 사람이 수명을 연장시킨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느 녀성이 암으로 3개월 밖에 못 산다는 선고를 받았다. 그녀는 한동안 고민하던 끝에 마음을 진정하고 교회를 찾아가서 간절히 기도를 했다. “하느님, 저에게 찬송가 1만권을 팔수 있는 시간을 주십시오.”  그는 살아 있는 동안에 보람 있는일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그날부터 찬송가를 팔기 시작했는데 어느던 3개월이 지나니 그의 몸 상태는 훨씬 좋아 졋으며 의사들마저 고개를 개웃거렸다. 그녀는 1만권의 찬송가를 다 파는데 2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그때까지도 정상인처럼 행동했다. 그러다가 3개월이 지닌뒤에 그는 죽었다. 그가 만일 1만 부가  아닌, 더 이상의 목표를 세웠더라면 그의 삶도 그만큼 연장되였을 것이 분명했다. 미국의 어는 유명한 의사가 뉴욕에서 사는 15,321명의 남자 횐자를 살펴본 결과 주된 병세의 원인은 인생에 대한 가치관과 목표가 뚜렷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미국 어느 료양원,양로원의 사말률을 조사한데 의하면 결혼기념일, 생일, 공휴일 같은 날의 사망률이 매우 적었다고 한다. “한 번 더 크리스마스를 지내고 죽자, 한 번 더 생일을 쇠고 죽자, 한 번 더… …지내고 죽자”는 목표가 그들을 그 때까지 살게 만든것이다. 필자의 주변에도 늘 “손자가 대학을 가는 것을 보고 죽어야 하겠는데”라며 죽음을 기다리던 할머니가 손자가 대학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몇칠후에 사망했다. 이와 같이 확실한 목표는 건강과 수명에 영향을 미친다. 인생의 목표가 뚜렷한 사람은 발걸음도 힘차고 활기차고 의욕적으로 살 수 있다. 반면에 목표가 없이 왜 사는 지도 모르는 삶은 무계획적이고 무가치한 무기력 인생이다. 어떤 목표든 확실한 목표가 있의면 당신의 삶이 보다 더 행복해 질 수 있다. 오기활
273    “종이장 국장” 댓글:  조회:289  추천:2  2019-02-01
어느 술상에서 조직의 인사(人事)례가 술안주로 올랐다.  “지금 보니까 선전부, 조직부, 정부반공실, 당위반공실에서 일하던 출납원, 타자원, 심지어 기사들까지 그자리를 떠날 때면 거의 모두가 국장(부)이나 주임(부)급을 달고 나오더라”  “나는 그런 ‘국장’들을 “종이장 국장(주임)”이라고 한다” 말인즉 인사(人事)관계 처리를 “문자순서에 따라 사업(事) 먼저 사람(人)을 책임진다”는 말이다. 이런 실화가 있다. 미국서 월슨이 28대 대통령으로 집정할 때 로동부장이 사표를 냈다. 이 소식을 전해듣고 백악관에서 대통령내외의 잔심부름흘 하는 한 녀직원이 대통령에게 부탁하기를 “저의 남편이 그 장관 자리에 적격입니다. 로동이 뭣인지를 알고 근로자의 심리도 잘 리해하고 있답니다. 그러니 그를 로동부장관으로 쓰신다면 후회하시지 않을 겁니다.”  이 말에 월슨대통령이 답하기를 “당신의 추천을 고맙게 생각한다. 그러나 알아 두어야 할 것은 로동부장관이란 대단히 중요한 자리이다. 그런 자리에는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앉아야 한다”고.  이에 녀직원은 “하지만 대통령께서 제 남편을 장관으로 임명하시기만 한다면 그 순간부터 그는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 될 게 아닙니까?”고 말하였다. 녀직원이 말하는 “장관으로 임명하면 그 순간부터 그는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 될 게 아닙니까?”는“ 사람이 자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자리가 힘이다”는 뜻으로 이 말을 현실을 봐도 일정한 근거가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영국에서 장관을 뜻하는 【MlNlSTER】는 “봉사한다”, “힘을 빌려줃다”는 뜻이고 미국의【SECRETARY】는 쉽게 말하는 서기나 비서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는 일단 누구에게  장(長)자가 붙으면 평민들이 그를 높이 모시며 당자들도 어깨를 으쓱해 하는 모습이다.  누구에게 그 직무나 급에 따른 사람됨됨이나 사업적인 능력이 있다면 그에게 어떤 직무를, 어떻게 맡겼(줬)던간에 그래도 좋은데 문제는 그 자리에 그 사람이 불격(不格)인데도 그 부문의 사업에 대한 책임보다도 일개인에 대한 책임이 앞서다보니 후론이 따르고 분분하기가 마련이다. 그래서 그 부문의 직원들이 새로운 급을 달고 온 아무개를 “종이장 국장”이라며 그에게 큰 희망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습근평총서기는 “충성스럽고 깨끗하며 담당하는 높은 자질의 간부대오 힘써 건설해야 한다”는 중요한 연설에서 “우리 당이 인민을 단합, 인솔하여 위대한 부흥의 중국꿈을 실현하려면 반드시 새시대 당의 조직로선을 전면적으로 관철하고 덕재 기준을 엄하게 틀어쥐며 공정한 인재등용을 견지하고 인재등용 시야를 확대하며 간부의 적극성을 격려하여 충성스럽고 깨끗하며 담당하는 높은 자질의 간부대오를 힘써 건설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지난 1월 16일에 출판된 《구시》잡지 제2호에 실린 “간부대오를 힘써 건설해야 한다”에 관한 문장의 내용이다. “간부는 정치품성, 직업도덕, 사회공덕, 가정미덕 등 면에서 모두 우수해야 한다. 공정한 인재등용은 나라를 위해 당을 건설하고 인민을 위해 집권하는 우리 당의 조직로선에서의 체현으로서 공정한 인재등용에서의 공(公)은 공평심에서 오고  사업에서 오며  바른 기풍에서 온다.”. “공정한 인재등용”이 곧 “인사(人事)기풍의 정풍(正風)이다” 오기활 
272    연변에서 “이웃절”을 법(조례)정명절로 정하자 댓글:  조회:345  추천:2  2019-01-24
연변에서 “이웃절”을 법(조례)정명절로 정하자 필자는 작년 10월에 연변주당위선전부에 “연변에서 ‘이웃절’과 ‘로인교육법’을 법(조례)으로 정하자”는 건의를 제기한 계속으로   12월 말에 주인대와 주정협에 똑 같은 내용의 건의를 제기하였다. “로인법을 제정하자”는 전국적으로 문화수준이 높다고 인정받는 연변서 전국에서 제일 먼저 “로인절”을 법정일로 제정했다면 고령화시대에 또 제일먼저 “로인교육법”을 제정하고 연변의 “8.15” 로인절을 나라에서 정한 “로인절”(중양절(음력 구월구일)에 접목시키고 “8.15”를 “로인교육절”로 정하자는 것이다. 필자는 13년 전에 주당위 기관지인 “지부생활 2005년 제 11호”에 “이웃절을 내오자”를 발기하였다. 이웃간의 화목은 중화민족의 우량한 전통이고 미풍량속으로서 한민족의 미풍량속은 시대의 발전에 따라 계속 이어지고 발전되여야 한다. 특히 강조해서 말한다면 이웃사이의 화목은 조화사회건설의 기본 적인 것으로서 마땅히 온 사회의 중시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그런데 도시의 거주문화의 변천과 사람들의 생활 절주가 빨라짐에 따라 같은 아빠트에서, 같은 지붕을 쓰고사는 이웃사 이가 서로 래왕이 없고 지어 상사가 있어도 관계하지 않고 무감 각할 정도로 이웃관계가 랭담해지는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농촌 호도거리농사의 실시로 한개 농호가 하나의 생산단위로 된후 지난날의 “이웃사촌”관계와, 마을관계가 전에 비해 랭담하고 또는 약화된 형편이다. 이는 인간사회의 단결, 우애, 협조 및 공동책임의 의식과 정신을 약화시키고 있다. 이에 필자는 법적으로 “이웃절”을 제정하고 전 사회적으로 조화 로운사회건설에 유익한 활동을 벌려 단결되고 우애적인 이웃관 계를 새롭게 확립할 목적으로 “이웃절”을 내오자고 발기하였다. “이웃절”을 정하면; 1,  사회공덕을 지킴에 리롭다. 법적인 “이웃절”이 있게 되면 법규의 약속성이 있기에 “이웃 절” 을 발판으로 저마다 일종의 사회적책임감을 지키야 하기에 이웃간 에 서로 거래하고 호조호애하면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이룩하기에 노력해야 하므로 조화로운 사회건설에 기초적인  바탕이 마련 될 것이다. 2,  후대교양에 리롭다. 법정“이웃절”이 있게 되면 학교부터 가정에 이르기까지 존로애 유, 호경호애, 호방호조의 미풍교양을 앞세우기에 필연적으로 “웃물 이 맑으니 아래 물도 맑게 된다.” 3,  민족단결에 리롭다. 우리 나라는 다민족국가이다. 법정”이웃절”이 있게 되면 민족이웃 간에 여러 가지 단결에 유익한 활동과 거래가 있게 될것이니 필연적으로 다민족웃간의 단결과 진보가 촉진되기에 마련이다., 4,  부모 자식이 외롭지 않다. 지금의 “핵가족” 세대에 “이웃사촌”이 맺어지면 외자식이 외롭지 않고 독거로인들이 고독하지 않으며 이웃서로간 뒤근심을 덜수 있다. 5,  간부와 백성간의 관계가 밀접해질수 있다. 이웃사이가 밀접하면 이웃주변의 간부들이 이웃평민들의 질고를 심입하여 료해하고 백성들도 주변의 간부를 찾아서 구속이 없이 민원을 반영할수 있어 당과 대중과의 혈연적관계를 강화할수 있다 6,  빈부차이를 줄임에 리롭다 이웃간에는 빈부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이웃간에 화목하면 서로 간에 어려운 일을 함께 풀고 선각선부(先覺先富)한 자들을 선두로 하여 서로간 비기고 배우고 따라잡고 릉가하며 더불어 살아 가기 에 리롭게 된다. “이웃절”을 발기한후 “지부생활”편집부의 계획적인 홍보와 솔선적인 노력으로 2006년 4월 11일, 연길시 북산가로부터 시작한 “이웃절”은 지금 연길, 왕청, 룡정, 도문, 돈화 등 시와 현에 파급되여 “이웃절”이 자원적이고 대중적인 “필수명절”로 부상되여 몇년전의 지역“이웃절”이 이웃“친척잔치”로부터 오늘의 “동네잔치”로 파급되였다. 하여 동네방네의 많은 독자들이 “이웃절은 축하할 일입니다”는 글을 매체에 올렷고 연변예술학원의 남희철교수는 조한문으로 된 “이웃절노래”(함께하는 우리세상)를 창작하여 생방송으로 매체에 올린데서 “이웃절”노래가 연변 주민(州民)들의 마음속깊이에 자리하고 있다. 필자는 지금이 연변에서 법(조례)적으로 “이웃절”을 제정함에 튼튼한 기초, 우세, 그리고 전 사회적인 대환경이 마련된 적기(適期)라고 인정한다. 1, 연변은 “지부생활”편집부의 계획적인 조직과 꾸준한 노력으로 연길시 북산가두의 선도로 “이웃절”활동을 이미 13년간의 풍부한 경험을 쌓았고 연길시의 “이웃절잔치”가 “마을잔치”, “지역잔치”로 보급되여 장춘시에서까지 7월의 첫 일요일을 “이웃절”로 제정하기로 예정하였다.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조사연구원(정처급)진향란녀사가 연변“이 웃절”에 대한 기대이다. ㅡ 산재지구 조선족들은 이웃관계가 아주 경색되였다. 연변서 “이웃절”을 쇤다니 얼마나 흥분되던지… 연변의 “이웃절”이 연변만이 아닌 전 사회적으로 보급되기를 기대한다.  이번에 연변에 와 보니 이웃간에 서로 돕고 의지하는것을 보고 정말 사람 사는 멋과 냄새를 느낄수 있었다. 이웃 서로간의 전화가 그렇게도 빈번하고 심지어 옥수수죽을 했다며 이웃을 청했는데 정말 부러웠다. 언제부터 부모들을 장춘에 모셔오려 해도 부모들이 거절하는 원인을 이번에 와서야 알게 되였다. 마치도 이웃정이 부모자식정을 멀리 하게 하는것 같다. 2, 여론적으로 사회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이웃절”활동은 2006년 주당위 선전부의 주요사업과 주직속기관 최우수실사로 선정되였고 2010년말 인민일보 취재팀이 연길시 소영진 인평촌, 북산가두 단영사회구역의 “이웃절”활동을 취재한 후 인민일보 정치문화부 원건달부주임은 “수십년간 민족보도를 하면서도 오늘처럼 깊은 감명을 받기는 이번이 연변서 처음이다”며 인민일보에 연변의”이웃절”을 대서특필하였다. 지난해 국경절을 계기로 중앙텔레비방송국에서 특집프로 ㅡ “개혁개방40주년을 경축”해 마련한 길림성의 모델로 된 “연변”편에서 연변의 “이웃절”을 중요한 내용으로 선정하고 상당한 편폭의 생방송으로 연변의 “이웃절”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 총적으로 연변의 “이웃절”은 연변주민은 물론  길림성내외에서 거의 굳어진 즐거운 명절로 튼튼한 자리매김을 하였고 연변의 “이웃절”을 전국적으로 긍정하고 보급해야하는 주요명절로 사회와 중앙여론의 눈도장에 찍히였다. 필자는 연변에서 “로인절”의 법정(조례)명절로 제정함이 20세기 전국의 전범으로 되였다면 연변의 “이웃절”을 법정명절로 제정함도 습근평총서기가 령도하는 21세기 새세대에 연변이 또 한번 전국적으로  앞선 행보(行步)를 걷는 실제행동이라고 믿어진다. 필자는 연변의 법정명절인 “이웃절”을 하루 속히 기대한다. 오기활
271    선과 악은 어떻게 다른가? 댓글:  조회:361  추천:0  2019-01-22
옛날에 한 스님이 제자들이 얼마나 정직한가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제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이런 질문을 했다. “만약 길을 가다가 돈이 가득 들어있는 주머니를 줏는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한 제자가 대답했다. “저는 돈 주인을 찾아 당장 돌려 주겠습니다.” 그는 너무 쉽게 대답했다. 그러니 스님이“정말로 그가 돈을 돌려줄 것인지 자못 의심스럽다고 생각했다. 두번째 제자가 대답했다. “그 주머니를 주을 때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면 그냥 그 돈을 갖겠습니다.” 스님은 저애는 솔직한 혀를 갖고 있지만 못된 가슴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세번째 제자가 말했다. “솔직히 말씁드리자면 그 돈을 그냥 갖고 싶은 유혹을 느낄 것입니다.그래서 부처님께 그런 유혹을 물리칠수 있는 힘을 내려 주십사고 기도 하겠습니다.” 이 말에 스님은 “저 애야 말로 내가 정말로 믿을수 있는 제자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돈을 좋아한다. 특히 돈 중에서도 제일 탐스러운 돈이 공돈이다. 그러나 공돈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공돈에 뒤탈이 따르는 공돈이 있다. 언젠가 “선과 악은 어뎋게 다르냐?”는 물음내기에서 소설가 헤망웨이(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소설가)가 “뒷 맛이 좋은 것이 선이고 뒷맛이 쓴 것이 악이다.”로 백점만점을 맞았다고 한다. “뒤맛이 쓴것이 악이다”에 비춰 이어지는 얘기다. 이 몇년간 당중앙에서 전개하는 부패척결마당에서 눈치를 살피던 상당급 어른의 자제분이 친구들의 반부패를 론하는 모임에서믿음으로 “그래도 아버지가 일찍 해 먹고 나 앉은것이 다행이다”며 한시름을 놓았다고 했다. 확실히 허물없는 실토정이였다. 지금 날로 틀어쥐는 반부패형세에 서 (소방차의 사이렌(경보)소리만 들려도 나를 체포하려는 경찰차가 아닌가)고 놀라하는 “어른”들이 한, 둘이 아니라고 한다. 6,7년 전만 돌이켜 보면 한시기에 상당수의 당정간부들이 “자리에 있을 때 못해 먹으면 머저리다”는 듯이 돈으로 권력을 사고 권력으로 자기의 염낭을 챙기는 “경쟁”을 백성들의 눈에 거의 드러날 정도로 벌리였다.그러기에 모시의 한 중층간부는 공개장소에서 나는 현금20만원이 없어서 국장이 못 되였다고 원망하였고 모 시의 진장은70만원이 없어서 부시장이 못 되였다며 아쉬워 했다. 모시의 L씨 국장은 재임 몇년간에 외부로부터 당치도 않는 얼뚱이까지 21명이나 되는 “새사람”을 받아드리면서 21만원의 거금을 챙기고는 퇴직 하자마자 내지로 뺑소니를 쳐 감감무소식이라고 후론한다. 이렇게  해먹고 나눕은 당권자들이 습근평새시대에 자신들의 “뒷맛이 쓸 가봐” 다행(多幸)이나 요행(要幸)을 갈망함이 어느 정도 리해가 된다. 그런데 악과 선의 분별에서 잡히면 뒤맛이 쓴 악이 되고 안 잡히면 선이 되는것이 아니라 당신들의 량심적인 자문자답으로 마음속의 악과 선을 갈랐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음속 량심전에는 다행이나 요행이 없게으니깐. 오기활  
270    정부의 “건망증”이 걱정된다 댓글:  조회:414  추천:3  2019-01-15
일전에 “길림신문” 한정일부주필이 쓴 [추모글] ㅡ “고 정경락선생, 신문사업에 바친 일편단심”을 읽고 필을 들었다. 글은 고 정경락선생이 “길림신문”사의 고문으로 초빙된 8년간은 물론 고문직무를 떠난 후 64세 나이로 인생을 마감하는 그시각까지 “길림신문” 발전에 관심을 두고 조언을 남긴 감명깊은 사적을 기록하였다. 실로 초빙측에서 “임이부관“(任而不管”)이 아닌 “임이상용”(顧而常用), 고문측의 “고이불문”(顧而不問)이 아닌 “고이상문”(顧而常問)의 전범이라 하겠다. 통속적으로 말하면 고문(顧問)을 초빙(위임)하는 것은 정부나 기업에서 어떤 분야 에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권위적인 인물, 또는 “최고경 영자”를 고문으로 초빙(위임)하여 당 고문의 능력과 활력을 발휘시켜 자기들의 사업을 추진하려는 목적이며 수단으로 참 좋은 작법이라 하겠다. 그런데 문제는 정부나 기업에서 주동으로 되여 모모를 경제고문 또는 홍보대사로 모셔놓고는 그런 일이 없은듯이 까맣게 잊고 초빙(임명)후에는 한번도 당고문을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와 연길시인민정부의 실례이다.   2017년 8월,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에서는 건주 65주년 경축행사의 하나로 “천남지북 연변인들 고향의 궐기를 함께 꿰하기(天南地北延边人,共谋家乡崛起路)”란 명제로  간담회를 조직하였다. 하이얼그룹의 전임 부총재이며 청도길재청화(吉财菁华)투자자문유한회사 리사장인 최소화(崔少华, 돈화출신)씨가 8월 30일 간담회에서 한 쓴소리 발언이다. “기업가간담회(포럼)라고 이름을 달았으면 기업가들에게 발언기회를 많이 주어야한다. 그런데 8월29일 한시간반 넘게 진행된 간담회에서 6명기업가들의 발언에 주어진시간은 고작 20분이였다. 반면에 이미 퇴직한 지도자들을 소개하는데만 몇분이나 소요했다. 이렇게 형식적인 행사를 많이 조직하고 실제적인 내용물이 없으면 차라리 조직하지 않기보다 못하다.” “성공한 기업가, 유명한 전문가와 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우세를 고향의 발전에 기여할수 있을가를 늘 고민한다. 나는 고향에 보답한다는 마음으로 연변에 8500만원을 투자했는데 이번 경축행사에서 ‘연변의 어떤 대상에 투자했는가? 창업에서 애로사항은 없었는가?’고 묻는 정부관원이 한명도 없었다. 이번 간담회는 타향에서 온 기업가들을 위주로 조직하는 간담회라고 하기에 자본적립과 함께 많은 경험을 쌓은발언자들이 밤을 패가며 연변의 발전에 살이 되고 피가 될만한 의견과 건의들을 준비했는데 어찌하여 대회에서 록음은 커녕 기록하는 사람마저 한명도 없는가” “나는 주정부로부터 여러 기의 경제고문으로 위촉받았지만 지금까지 20년째 주정부에서 고문인 나를 찾은적이 한번도 없었으니 정말 내심적으로 매우 서운하다.”. 다음은 연길시정부“경제특사 및 홍보대사”인 라강철(李鋼哲)씨의 말이다. 강철씨는 지난해에 필자한테 이런 말을 했다. 2008 년 8 월 말에 나는(일본 호쿠리쿠대학 교수, 재일 조선족연구학회 회장)연길시정부에서 조직한 “연길시투자무역박람회”에 일본의 중국조선족기업가대표단(OKTA 치바지회)을 인솔하여 가지고 참가하였는데 생각외로 연길시정부로부터 연길시정부“경제특사 및 홍보대사”라는 임명장을 받았다. 이에 나는 너무나도 돌연적이여서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사실 나는 이런 중짐을 메고싶지 않았다. 왜냐면 내가 연변의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다가 연변을 떠난지도 28 년이나 되고 연변에 대한 애착심도 별로 없는데 단 연변에 부모형제가 있으니 고향방문을 하는 정도로 연변을 다녔다. 그런데 아무런 심리적준비도 없은 나에게 불시에 이렇게 중대한 짐을 맡기니 어쩔바를 몰랐다. 다행히도 지금까지 연길시정부에서 나를 찾은 일이 한번도 없은 “덕분”에 직무책임추구는 면하게 되였다. 하지만 나는 중임을 맞고 량심적으로 보답하려는 마음으로 연변의 발전을 위하여 일본의 조선족인재와 IT 기업을 연길에 유치하기에 신경을 쓰기는 했다. 이 밖에도 필자가 목격한 일이다. 2013년 8월 7일에 도문시에서 조직한 “제4기 두만강문화포럼”에서 한 길림성문련부주석 조보명(曺保明)씨의 대회발언이다. “나는 어제 “도문철도박물관”을 참관하고 크게 놀랐다. 하여 나는 오늘 원래 준비했던 발언내용을 포기하고 새로운 내용으로 발언하겠다” “도문시에서 ‘도문철도박물관’을 ‘도문철도문화박물관’으로 개칭하고 이 철도문화박물관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하라.” “유럽에서는 2차세계대전의 유물로 포로집중영이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였다” 조보명씨는 많은 실례와 세가지 가능성으로 도문철도박물관이 세계유산으로 비준될수 있음을 생동하게 진술하여 모든 청중들의 눈귀를 밝혀주어 회의장을 흥분시켰다. 필자는 이날 포럼의 소식기사를 다른 내용을 제체놓고 “도문철도박물관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하라”로 밣표하였다. 제4차 “두만강문화관광축제”가 끝난 몇달 후 필자는 그날 포럼을 주최한 도문시책임자를 만나 “도문철도박물관 세계문화유산신청” 추진정황을 추문하니 글쎄 생각밖으로  책임자가 금시초문이라고 대답하여 너무나도 실망하였다. 사람이 늙으면 기억력이 약해진다. 그것은 뇌세포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할만큼 병이 든 탓이다. 그런데 병이 들지 않았고 또 늙지도 않았는데도 기억력이 약해 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런 증세를 의학에서 “건망증”이라고 부른다. 하긴 어떤 의미에서는 건망증도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데 적절한 료법이 된다고 한다. 쓸데없는 사소한 것들을 일일이 기억하느라면 거기에 묶여 정신이 피로해 지고 그 피로가 도를 지나면 스트레스가 쌓이게 되여 건강을 해친단다.  1962년 노벨의학상수상자 왓슨크리크 박사는 “사람은 잊어버리기 위해 꿈을 꾸고 꿈을 꾸기 위해 잠을 잔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연한 망상이나 환상에 시달리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 긴장감이 아주 없는 것도 스트레스 못지 않게 건강에 해롭다. 그러나 상기 정부는 “고문”을 모신 “큰일”을 너무나도 쉽게 잊어버렸다. 정부에서 고문을 모신 일은 지우개로 지워질수 없는 잊어서는 안될 큰일이다. 그렇게 잊어서는 안될 일들을 정부가 잊어버리면 사회가 곧 건강을 잃게 된다. 그래서 최소화, 리강철씨가 정부의 건망증이 사회의 건강을 잃게 할가봐 걱정되여 비록 서운은 하다해도 관심하는 마음으로  정부에 쓴소리를 한 것이라고 필자는 짐작한다. 오기활
269    '렴치없이 산다면 아직도 몇 십년은 문제없소' 댓글:  조회:874  추천:0  2018-12-21
 “렴치없이 산다면 아직도 몇 십년은 문제없소” 두 “100세 로인”의 인생스토리   필자는 올해 달력의 막장을 펼친 며칠 후 당금 찾아오는 100세 시대에 현존하는 100로인들의 인생스토리를 듣고저 일전에 룡정의 김수철(94)옹과 연길의 리남조(99세)할머니를 인터뷰를 하였다.     “원래는 두 분을 한자리에 모시려고 했는데 여러가지 불편으로 이틀 건너 이렇게 만났습니다”   “둘이 만나면 할말이 많아서 더 좋았겠는데…”   필자의 수인사에 두 분이 약속이나 한 듯이 이렇게 답하며 무척 아쉬워 했다.     필자는 같은 물음에 같은 형식으로 “대답을 간단히 하세요"로 인터뷰를 이었다.   무례로 되지만 로인들의 장설을 “짧게”하며 말 막이를 해야했다.   김수철은 연변농학원교수로1987년에 정년퇴직을 한 후에 여러 권의 책도 출간하고 한국과 일본의 학술무대에서 무게 있는 론문을 수편 발표했다.   그리고 “이미 출판된”길림성식물명록”에 빠진 것이 많아 내가 보충해야한다” 며 최근 몇 년간에 고군작전을 하면서 한평생을 채집, 정리한 수천수만점의 식물표본에서 2300종을 선정하여 그림까지 배합하여 “길림성식물도감”편집을 마무리 하였다.   리남조할머니는 할아버지, 아버지, 언니(부양사촌언니)가 반일렬사가정에서 자란7남 1녀 8형제로10살부터 어머니를 도와 가사와 농사일을 하였다. 결혼후2남 6녀의 어머니로 남편을 일찍 잃고 혼자서 자식들의 글공부를 섬기면서 슬하에 박사, 석사, 의사, 대학교수 5명을 키워낸 존경스러운 어머니이며 자랑스러운 할머니다.    할머니는 딸집에 놀려 다녀도 그사이에 볼 책과 신문을 챙기는 기억력이 좋고 한어말이 순통한 “현대할머니”이다.   문; 언제 중국에 오셨습니까? 김: 할아버지가 조선 함경북도명천군에서 50세에 사망한 아버지의 유골을 등에 업고1909년 음력 7월에 가족 10명을 이끌고 600리를 걸어서 조양천백석구에 정착하였다. 나는 백석구출생이다. 리: 우리의 원적은 한국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무의리이다. 백년 전에 증조할아버지가 가족을 데리고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단동 ㅡ 심양 ㅡ 해림에서 두루 살다가 나중에 흑룡강성 동경성에 정책했다. 나는 심양태생이다.   문: 문화정도는요? 김: 7살에 서당을 다니기 시작하여 10살에 소학교를,,, 최후의 학적이 대학 1학년이다. 리: 할아버지한테서 한글(韓文)과 한자(漢字)를 배우다가 할아버지가 “사람이 까막눈이 되여서는 안 된다”며 사비로 6년제 소학교를 세운후 4년간 소학공부를 하였다.    문: 결혼은 언제 하였습니까? 김; 백부님의 강권으로 연길국민고등학교 2학년을 다닐 때인1941년 1월 31일에 결혼하였다  리: 결혼을 말하자니 힘들다. 이때까지 비밀로 지켰다.  내가 18살 때 8남 1녀 형제네 막내아들의 눈에 들어 부모들이 그 남자가 병자인 것을 모르고 둘이 만나본 한 달 후인 10월 24일에 결혼시켰다. 그런데 결혼하자부터 앓는 남편을 보고 의사가 부부생활을 하면 안 된다기에7년간을 혼자서 지냈다.    25세에 5년 년상인 김병훈이란 남자와 결혼하고 한동안 임신을 못하다가 익모초를 부지런히 달여 먹었더니 1947년부터 시작하여 2년 터울로 6녀 2녀를 출산하였다. 나의 결혼은 “꽃봉오리를 맺고도 꽃을 피우지 못한” 실패결혼이다.   문: 지금의 건강상황은 ? 김: 유전관계인지 허리가 구불고 귀가 슬 들릴 뿐. 지금도 안경을 모르고 몸에 로인반점이 한개도 없다. 허리가 구불었지만 아무런 불편이 없다. 자식들만 안 말리면 산도 마음대로 다니고 달리기경기에도 나갈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다. 리: 지금도 안경이 없이 신문도 보고 바늘귀도 꿴다. 썩 오래 전에 딸집을 가다가 물도랑에 넘어져서 무릅뼈가 탈골했던 후유증으로 무릎이 가끔씩 아픈 외 아무런 이상이 없다. 단 이발이 부실하여 십년 전에 8500원을 팔아 치료를 했는데 요즘에 불편해 한다며 자식들이3000원을 투자해 틀이를 했다. 몸에 로인반점도 없다. 건강은 우리 집에서 누구도 나를 못 따른다.   문: 건강비결은 무엇입니까? 김 : 몸에 해가 되는 일을 안 한다. 담배는 배우지 않았고 젊어서는 술상에 앉으면 빼갈을 한 근을 남아 마셨는데 지금은 절제한다. 식약동원(食葯同源)이라 식단은 그저 먹기 위해서나 맛을 위해서가 아니라 건강영양을 따져서 배치한다.  나는 쑥, 되꼬리 등 길옆의 풀과 뜸으로 건강을 지키며 병원을 모르고 건강하게 살고 있디. 뜸은 살을 태워야 한다. 살을 태우지 않는 뜸은 효과가 거의 없다 “동의보감”을 쓴 리조말기 어의 허준도 뜸은 살을 태워야 효과가 있다고 말하였다.  리: 나는 늘 편안한 마음으로 남을 잘 받아 준다. 90세에 뇌출혈로 하루간 병원서 혼수상태에 처했다가 6일만에 출원하였다. 나는40세부터 의학서적을 보면서 스스로 여러가지 건강운동을 만들어 가지고   50년을 견지해 왔다. 얼마 전에 아들이 발운동을 이렇게 하면 좋다고 알려주니 나는 그 발운동을50년간 하루도 빼 놓지 않고 견지했다고 하니 놀라 하였다.    문: 이제 몇 년을 더 살수 있다고 자신합니까? 김: 교통사고만 없다면 렴치없이 살 것 같다.  교통사고를 피하기 위하여 길을 걸을 때 다른 생갹을 안 한다.  리:. 먹을 것을 제대로 먹으니 운동원처럼 건강하지는 안지만 지금 생각에 아직도 몇 십년은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문: 지금까지 잘했다고 하는 일이 있다면? 김: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 결혼 한 것이고 조강지처를 만나 사상을 개조한 것이며 우리 민족의 전통을 지겼고 계자로 들어가 백부를 잘 모신 것이다. 한눈도 팔지 않고 끝까지 식물학을 지켰고 한 우물을 판데서 오늘의 일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특히 잘한 것은 뜸으로 건강을 지키며 사업을 보증코 완성한 것이다.   일생을 아껴 쓰고 아껴 먹으며 간고분투하며 나의 사업에 모든 경제를 소비한 것이다. 경제가 딸리는 상황에서 일생 동안 배울 공구서적을 준비했기에 지금 내 집에서 자료를 찾을수 있다 내가 수장한 종이책들이 연변대학도서관보더 더 구전한 것 같더라. 리: 잘했다고 생각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 재혼 때 둘이 털털 이로 만난 것이 잘한 것 같고 자녀들을 잘키운 것이 자랑스럽다.    문; 아쉬웠던 일이 있다면? 김: 비록 일심정력으로 일을 했다지만 그래도 옛날의 노력이 부족한 것이다. 학술면에서 재간을 나타내자는 욕심이 없었다. 이면에서 기술(대인관계 기교)이 부족했다. 출세를 하자는 생각이 없이 그저 자기의 능력을 믿고 하면 된다고, 잘하면 인정해 주겠지 생각하고 령도들과의 접근을 멀리한것이다. 리: 생활이 그렇게 가난하면서도 없다는 말을 안하고 너무 간고히 살아 온 것이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어머니를 소설로 쓰지 못한 것이 아쉽다.   문; 억울한 일이 있다면? 김: 크게는 없다. 내 잘못이 많다. 리: 한때는 내가 가도에서 련조장, 선전워원으로 공작하다가 감독원을 하라니 나는 남을 감독할 자격이 없다며 사양을 했다. 그런데 오빠가 일본놈들에게 총살 당한 아버지의 원쑤를 갚겠다며 집을 나갔는데 후에 보니 토비로 되였다. 하여 한때는 가도에서 오빠의 문제로 “可疑分子”로 몰려 모든 사업을 박탈당하였다. 할아버지, 아버지, 언니가 항일렬사인데 오빠문제로 렬사가족을 묵과하고 “가이분자”로 몰리니 억울 하였다.   문: 반성되는 일은 없는지요? 김: 가정성원에 대한 관심이 부족 했고 만년에 부인의 병조리를  딸에게만 맡긴 것이 미안하고 후회된다. 리: 이때까지 “예, 예”하면서 살아왔기에 반성할 일이 별로 없다. 마음으로 가책되는 일이 한 점도 없다.   .문: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김: 가족에 대해 말한다면 자녀들이 결혼하자 자립을 했다고 경제적으로 돕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사회에 대해 말한다면 사회에 대한 관심이 적고 정치를 불문하고 “마이퉈우 쿠깐”(埋斗苦干)만 한 것이다.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리: 지금까지 우리가문이 좋은 가문인지 아니면 나쁜 가문인지를 알려줬으면 좋겠다.(뜻인즉 할아버지, 아버지, 언니의 항일력사기록이 없다고 ㅡ편자)   문: 효도란? 김: 효는 “백행지원”(百行之源)이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하는 사람이 나라에 충성할수 없다. 효는 나의 마음속 기둥으로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았고 이상분을 존경하고 내가 할수 있는 데까지 노력하며 책임을 지켰다. 리: 효는 부모님이상 조부, 증조부…에 대상해 쓰는 말이다. 녀자가 절개를 지키면 렬녀라 하고 훌륭한 안해를 조강지처라고 훌륭한 어머니를 현처량모라고 한다.   문: 자식들에게 할말이 있다면? 김: 자녀들게 크게 요구하지 않고 아이들과 모순도 없고 기대도 안한다. 나는 나절로 살고 너희들은 너희로 편리대로 살면 된다. 리: 아무런 요구가 없다. 너희들끼리 잘 살면 된다.   문: 그 년세에 이성에 대한 생각이 나는가요? 김: 남자니까 미녀가 나타나면 지금도 마음이 움직인다. 아니라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나는 사상을 개조하면서 조강지처를 지켰음을 자랑으로 느낀다. 한때는 리혼도 하자고 했다. 부부간에 싸움이 없었다면 거짓이다. 리: 나는 이성을 말하면 듣기도 싫다. 100세에 이성을 론하는 것은 나발이다. 총명한 증손들에게 빠진 재미로 산다. 나는 혼자 7년을 지날 때 대정원에 다니며 공부를 하고 중학교도 대수 다녔다.   인터뷰채록을 정리하면 김수철교수는 효를 백행지원으로 하고 풀과 책을 동무하며 평생식물학을 연찬하는 불로송이고 리남조할머니는 긍정적인 사고로 생을 지키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의 견증인이였다.    오기활 사진배합( 4장) 김수철 1, 최근 2년에 내몽골에 다니며 이 사진기로 수천장의 사진을 찍었다. 2, 이 토배기현미경을 리용하여 2600여가지 식물표본을 그렸다.  리남조 1, 지금도 안경이 없이 바늘뀌도 께고 신문도 본다. 2, 젊은들에게 당신이 고안해낸 건강체조를 전수한다.    
268    <<우리 말로 말해라…>> 댓글:  조회:409  추천:0  2018-12-09
 11월 27일 “재일 조선족녀성들 우리말 지켜 10년”이란 “길림신문”의 기사가 참으로 마음에 안긴다. 3년전 필자가 재일 조선족녀성회 전정선회장인터뷰때 그의 “최대의 고민이2,3세대들에 대한 언어교육이다”고 2008년에“재일조선족어린이교실”을 출산하였단다. 황유복(중앙민족대학)교수는 “다른 민족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민족특성을 상실하는 순서는 제일 먼저 민족의 언어를 상실하고 다음은 음식습관을 상실하며 마지막으로 가치관을 상실한다고 한다.”고 하였다. 일본서 대학교로 지내는 아들이8년 전에 결혼식을 올리고 돌아갈 때 “앞으로 자식들에게 우리말을 잘 배워주는 것을 효도로 하겠습니다”고 약속하였다. 아들부부는 자녀들게 우리말을 배워주는 것을 “가훈”으로 일상생활에서 꾸준히 지켜왔다. 심지어 며느리가 공무로 한국에 다닐 때마다 시끄러워 하지않고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돈을 투자하며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다니게 하였다.  아들은 애들이 보육원(유치원)에서 돌아오면 항상 “우리말로 말해라”로 단속 하였다. 부모들의 끌진 노력은 헛되지 앟았다. 지금5살짜리 손녀의 언어표현은 한국드라마의 동역배우와 다름이 없고 심지어 할아버지가 “텔레비를 죽여라”면 “죽여라고 아니고 꺼라고 해요”하면서 어른들의 우리말 사투와 틀린말을 그자리에서 바로잡는다. 필자는 애들이 우리말을 하는 것과 효도하는 것이  정비례라고 체험했다. 손녀손자는 매일 잠자기전에 “할아버지 할머니 편이 주무세요”라며 배꼽인사를 하고도 매일 아침이면 “할아버지 할머니 편히주무셨어요?”며 첫인사를 올린다.    어린손군들은 자기들이 먹었던 입자리를 낸 과자나 빵을 이상분들게 절대 못드리는 것으로 엄격히 지켰다. 한번은 3살짜리 손자가 제일좋아하는 딸기를 사다주니 자기가 입을 대기 전에 할아버지부터 시작하여 누나몫까지 챙기고 나니 자기가 먹을것이 없으니 울음보를 터뜨릴뿐 이미 나눠드린 딸기를 찾자고 하지 않았다. 모종 의미에서 민족이란 언어의 공동체이다. 이에 황유복교수는 “한 민족을 형성하는 5대 요소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언어다”고 한다. 청나라를 세운 만족은 본 민족의 언어를 쓰지 않은데서 만어가 소실되여 지금 중국전역에서 만어를 아는 만족이 겨우 10여명밖에 없다니 만족이란 공동체를 운운할수 있는가? 지금 산재지역의 조선족아들이 후세들에게 우리 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적극 활약하고 있는데. 대련서 제4회 우리말학교협회 교사연수회가 열렸다는 소식이 듣던 희소식이였다. 동북아 간판통역가로 주목받는 일본 ㈜JCK후렌즈 장경자 사장의 체험이 “우리 말을 잘하면 외국어도 잘한다”이다. 오기활  
267    <<우리 말로 말해라…>> 댓글:  조회:367  추천:0  2018-12-09
 11월 27일 “재일 조선족녀성들 우리말 지켜 10년”이란 “길림신문”의 기사가 참으로 마음에 안긴다. 3년전 필자가 재일 조선족녀성회 전정선회장인터뷰때 그의 “최대의 고민이2,3세대들에 대한 언어교육이다”고 2008년에“재일조선족어린이교실”을 출산하였단다. 황유복(중앙민족대학)교수는 “다른 민족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민족특성을 상실하는 순서는 제일 먼저 민족의 언어를 상실하고 다음은 음식습관을 상실하며 마지막으로 가치관을 상실한다고 한다.”고 하였다. 일본서 대학교로 지내는 아들이8년 전에 결혼식을 올리고 돌아갈 때 “앞으로 자식들에게 우리말을 잘 배워주는 것을 효도로 하겠습니다”고 약속하였다. 아들부부는 자녀들게 우리말을 배워주는 것을 “가훈”으로 일상생활에서 꾸준히 지켜왔다. 심지어 며느리가 공무로 한국에 다닐 때마다 시끄러워 하지않고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돈을 투자하며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다니게 하였다.  아들은 애들이 보육원(유치원)에서 돌아오면 항상 “우리말로 말해라”로 단속 하였다. 부모들의 끌진 노력은 헛되지 앟았다. 지금5살짜리 손녀의 언어표현은 한국드라마의 동역배우와 다름이 없고 심지어 할아버지가 “텔레비를 죽여라”면 “죽여라고 아니고 꺼라고 해요”하면서 어른들의 우리말 사투와 틀린말을 그자리에서 바로잡는다. 필자는 애들이 우리말을 하는 것과 효도하는 것이  정비례라고 체험했다. 손녀손자는 매일 잠자기전에 “할아버지 할머니 편이 주무세요”라며 배꼽인사를 하고도 매일 아침이면 “할아버지 할머니 편히주무셨어요?”며 첫인사를 올린다.    어린손군들은 자기들이 먹었던 입자리를 낸 과자나 빵을 이상분들게 절대 못드리는 것으로 엄격히 지켰다. 한번은 3살짜리 손자가 제일좋아하는 딸기를 사다주니 자기가 입을 대기 전에 할아버지부터 시작하여 누나몫까지 챙기고 나니 자기가 먹을것이 없으니 울음보를 터뜨릴뿐 이미 나눠드린 딸기를 찾자고 하지 않았다. 모종 의미에서 민족이란 언어의 공동체이다. 이에 황유복교수는 “한 민족을 형성하는 5대 요소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언어다”고 한다. 청나라를 세운 만족은 본 민족의 언어를 쓰지 않은데서 만어가 소실되여 지금 중국전역에서 만어를 아는 만족이 겨우 10여명밖에 없다니 만족이란 공동체를 운운할수 있는가? 지금 산재지역의 조선족아들이 후세들에게 우리 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적극 활약하고 있는데. 대련서 제4회 우리말학교협회 교사연수회가 열렸다는 소식이 듣던 희소식이였다. 동북아 간판통역가로 주목받는 일본 ㈜JCK후렌즈 장경자 사장의 체험이 “우리 말을 잘하면 외국어도 잘한다”이다. 오기활  
266    개 같은 훌륭한 인생 댓글:  조회:439  추천:0  2018-12-01
 일본에 있는 5살짜리 손녀가 언제부터 “할머니가 지금도 누리를 못 잊는데 나도 누리사진을 봅시다”기에 지난 90년대에 부인이 집에서 사양하는 애완견인 누리를 안고 찍은 사진을 월전에 보내 줬다. 20년 전 우리가 사양한 애완견은 인도영화 “누리”를 본따 작명한 것인데 이 영화는 한 아가씨가 사양하는 누리라는 애완견이 녀주인을 강간하려는 망나니와 결사적으로 싸우는 감동적인 사연을 각색한 영화이다. 일전에 필자는 “개 같은 훌륭한 인생”이란 글을 읽었다. 글은 어느 마을의 3년생 어미개가 한 집에서 새끼를 낳다가 죽은 어미돼지를 대신해 애기돼지들에게 자기 젖을 물려 기른다는 이야기였다. 개가 인간과 제일 가까운 동물이라는 것은 자타가 다 아는 사실이다. 개는 1만 5전년 전에 지구에 출현한후 기원전 600년 전에 가축화하였으니 인간과의 인연이 아주 오래다. 그 때문에 영특하고 충실한 개에 대한 이야기도 수없이 있다. 술에 취해 쓰러져 잠을 자는 주인에게 접근하는 산불에서 주인을 구하기 위해 불을 끄다가 목숨을 잃은 사례, 지진을 예감하고 갖은 수단으로 주인에게 암시하여 긴급한 위험에서 주인을 벗어나게 한 사례, 주인이 죽은 뒤 단식을 하면서 주인이 즐겨 찾던 자리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사례, 주인의 묘소에서 주인을 동무하고 지켜주는 감동적인 사례…. 충견들의 사적이 너무나 기특하고 감격스러워 충견을 추모하는 개탑기념비도 한, 두 자리가 아니다.  개는 의리만 있는 것만이 아니였다. 개도 인간이 못지않게 희로애락을 느끼고 일정한 생활규범을 가지고 있었다. “개의 감춰진 삶”이란 책은 개들이 감정적으로나 지적으로, 또 생활전통에 따라 그 나름의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들을 기록하였다. 개들끼리 만났다고 모두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며 사랑과 결혼의 일정한 절차도 갖추고 있다. 개는 또 아무 곳이나 마구 돌아 다니는 게 아니라 130평방마일안을 탐색 한다. 이런데도 우리가 흔히 못된 사람을 일러 “개 같은 ㅇ ㅇ”라고 하는데 이쯤 되면 그런 말을 삼가했으면 한다. 반대로 인정이나 인심이 박약한 사람을 “개보다 못한 ㅇㅇ”란 평을 하는 것이 다행이기도 하다. 일본서 보니 애견이 뒤를 보면 견주가 항문을 깨끗하게 닦아 주었다. 미국의 한 견상(犬商)은 거친 옷차림에 끌신을 신고 개를 사려온 손님에게 “당신은 개를 살 자격이 없습니다”며 그한테 개를 팔지 않은 기사도 있다. 오기활   
265    내가 나를 아는 것 댓글:  조회:397  추천:0  2018-11-17
 인간은 아는 것이 많으면 자만하기 쉽다. 지식을 좀 쌓았다 싶으면 고집스러운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려 한다. 하여 편견이 생기고 독단도 생기며 시시비비가 일어난다. 나중에 아는 것만 믿고 설치던 자가 무슨 덫에 걸리기 마련이다. 하다면 이러한 병을 고치는 데 무슨 약이 없을가? 있다. 지혜라는 약이 있다. 지식은 사물을 알게 하지만 스스로를 과신 하여 나중에는 “아는 것이 병이다”는 뒤 말을 남긴다. 하지만 지혜는 수선 내가 나를 알게 하고 설 자리를 알도록 한다.  공자는 분수(守分)를 지키라고 했다.  공자의 분수 분별은 시비를 가리기 위한 분별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서로의 립장을 바꾸어 느껴보고 생각하며 리해하고 판단하는 분별이다. 이러한 분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내가 나를 알게 하고 돌이켜보게 하고 반성해 보게 한다. 되돌아 볼 줄을 안다는 것은 옛 것을 돌이켜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옛 것이 선한 것이면 택하고 악한 것이면 버릴 줄 알 때 사람은 스스로를 들여다보게 된다 “력사는 배울 것이 없으면 버릴 것을 배우라”고 한다. 우쭐해 하는 것보다 자신이 자신을 분명하게 알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교원은 교원답게, 학생은 학생답게 ……답게 말이다. 저마다 … …“답게” 했는가,  또 답게 하고 있는가를 반성하고 분명히 해야 한다. 그래야만 스스로 겸허하고 스스로 정직해 진다. 문제는 우리가 善함에서 자신이 얼마만큼 거리가 멀어졌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흔히 다른 사람의 모습은 잘 보지만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보기는 쉽지 않다. 자기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안다. 자신의 목소리는 기관(气管)의 진동을 통해 들리기에 원성을 알 수 없다. 자기 목소리는 록음을 통해 들어야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 목소리와 너무 다르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자신보다 남을 더 잘 알게끔 만들어진 것이 바로 우리다. 현대일 수록 “나를 잘 아는 일”이 인생철학공부의 기본으로 된다. 우리는 자신을 알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하여 “나는 누구인가?”는 물음에 떳떳하게 나설수 있는 존재가 되여야 한다. 우리가 스스로를 돌아봐야 현대문명의 세파 속에서 내가 얼마만큼 약(악)한가를  확인면서 선함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오기활         
264    항일가족 99세 할머니의 간절한 원망을 들어본다 댓글:  조회:715  추천:1  2018-10-29
 “어찌하여 우리를 좋다, 나쁘다로 안 갈라주오?” 월전(9월 5일)에 필자는 한국 친구로부터 “나의 후배가 중풍에 걸렸는데 오선생이 쓴 책(시대의 맥박과 더불어 숨을 쉬는 사람들)의 587페지에 실린 김의사의 중풍치료약을 보내 주세요”라는 부탁을 받고 연길시 동아(東亞)진료소 김설희소장을 찾았다. 지난 세기 60년대에 김소장은 도문서 필자의 누님네와 길을 사이 두고 사이좋게 지낸 이웃이다. 볼일을 끝낸후 김소장의 “올해 99세인 친정어머니가 지금도 건강에 아무런 문제없이 정정히 보냅니다.”는 자랑에 호기심이 강한 필자는 김소장 따라 그의 저택으로 갔다. 10살 때 상한 손가락을 보이면서 가족항일사를 얘기하는 리남조할머니 “어머니, 손님이 왔습니다. 누군지 맞춰 보세요” 네쩨 딸이 어머님의 방문을 열며 하는 말에 백발이 풍성한 머리에 함박꽃 얼굴로 잔 웃음을 피우던 할머니가 한참후 “오기자구만!” 하면서 급히 침대에서 내려 필자의 두 손을 반갑게 잡아 주었다. “나를 이렇게 쉽게 알아 봄두?”  “정말 대단하꾸마!” “나는 오기자가 쓴 책들을 다 읽어 봤소, 정말 자랑스럽소!” 필자는 100세 할머니의 둘째 딸(김성희)과 도문중학교 동반동창이다. 그때 성희는 얼굴이 예쁜데다가 노래까지 잘하여 반에서 인기였고 그의 어머니(李南祚)는 도량이 넓고 선량하며 특히는 세상사에 박식한 것으로 동네의 인기였다. 필자를 만난 할머니는 소식이 없던 아들을 찾은 듯 그렇게도 기뻐하며 걸상까지 챙겨가지고 “오늘은 기자와 무릎말을  하껬소”며 웃음꽃을 피웠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버지부터 아버지, 언니까지(사촌언니 李勤淑, 공산당원,  아버지가 언니네 생활난으로 언니를 부양했음)  항일활동으로 밖에서 돌다 보니 리남조는 열살 때부터 (형제 7남1녀) 어머니를 도와 가무며 농사일을 도와 나섰고 남편이 46년 전에 사망하다보니   혼자서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하면서 5명의 자손들을 교수, 의사, 박사로 양성한 박사가정 어머니(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당신의 이름을 오얏 李, 앞 南, 복조 祚 라고, 原籍이 한국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무의리(慶尙北道 醴泉郡 龍宮面無依里)라고 더듬없이 말하고 나서 증조할아버지의 이름도 오얏 李 , 셀 數, 으뜸 元으로 리수원이라고 알려 줬다. 할머니는 근 백년전에 부모 따라 조선의 신의주를 거쳐 단동 ㅡ 심양 ㅡ해림 에서 살다가 나중에 동경성에 정착했다며 당년에 월강민들이 불렀다는 설음과 한에 넘친 “단동교”노래의 가사까지 술술 외웠다. 그리고 80년 전에 할아버지(리동락)를 따라 리향 30년 만에 고향에 가서 선조들의 산소를 찾아보았고 동네 친척에게 선조들의 산소를 잘 지켜달라며 두 마지기(2무)의 땅을 무상으로 주고 왔다는 이야기까지 곁들었다 할머니의 한어수평은 한족과 다름이 없다는 느낌을 주였다. 할머니에 따르면 항일독립군인 할아버지(리수원)는 “사람은 까막눈이 되여서는 안 된다”며 사비를 팔아 동네에6년제 사립학교를 세웠고 아버지(리대성)는 항일을 하다가 일본놈들에게 학살되였고 언니(리근숙)는28세 나이에 일본놈들에게 학살되였다고 한다.   “오기자, 나는 주덕해전을 통독하면서 한 가문, 한 사람의 좋고 나쁨을 잘 알게 되였소, 그런데 우리 가문은 지금까지 좋은 사람들인지 나쁜 사람들인지를 모르고 있소.” “지금까지 중국에서 알려주지 않으니 한국에 물어 볼가,  조선에 물어 볼가,  아니면 일본에 물어 볼가?”(뜻인즉 가문의 항일력사 기록이 없다는 것 ㅡ 편자) 이렇게 물어보는 할머니는 당년에 아버지 등 5명이 일본놈들에게 학살된 사실은 후에 주보중장군한테서 알게 되였고 언니의 사적은 주보증장군의 부인 왕일지가 썩 후에 당지 해당부문에 리문숙의 항일사적을 곁들어서야 언니의 약간한 사적이 세상에 밝혀지고 목단강에 리근숙렬사비가 세워졌다고 한다. 할머니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도와 가사를 맡았다면서 10살 때 일제놈들이 툐벌하려 온다는 소식을 듣고 피난을 가면서 큰 돌로 돼지굴 굴문을 받쳐놓다가 그만 오른쪽 셋 째 손가락을 돌에 상해 석달간이나 고생했다고, 지금도 상한 손가락의 상처를 만지면서 “너도 나와 함께 백살을 먹는구나!”며 그때 일을 떠 올린다며 손가락 “자랑”을 하였다. “나는 지금 자식들더러 납들지 말고 조용히  살라고 당부하오, 아니면 아버지가 항일렬사라고 해도 아무런 흔적이 없고 자식들만 고생을 시켰는데 납둬서는 무얼하오?”  “우리 집에 돈은 없고 자랑거리라면  나에게 박사자손이 5명이라는 것 뿐이요 ” … … “우리가 돈은 관계하자 말고 어머님의 치아를 몽땅 새롭게 바꿔드리자” 이날 자리를 같이한 자식들의 말참견에 필자는 고종명을 앞둔100세 로인에게 제철효도를 하는 자식들에게 머리가 숙여졌다. 영국의 유명한 력사가 에드워드핼릿카(E.H.카)는 “력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과거는 현재의 빛에 비춰졌을 때만이 비로소 리해될수 있으며 또한 현재도 과거의 조명속에서만이 충분히 리해될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비춰 필자는 한세기를 살아온 리남조의 눈물겨운 구술사가 대를 이을 영원한 력사로 기록되여 오늘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물론 미래에 살아갈 후세들에게 빛과 호소력으로 될만한 민족의 교양서로 하루속히 세상에 태여 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날 필자를 만나 그만큼이라도 처음 마음속 원망을 토로 했다며  기쁘하는 할머니는 기어코 층집에서 내려와  대문밖 멀리까지 필자를 전송하였다. 오기활 사진설명’ 2, 대문밖까지 필자를 전송하는 100세 할머니와 함께 기념사진을 남겼다. 3, 이날 자리를 함께한 두 아들과 김설희부부  
263    날강도와 돌팔이 댓글:  조회:561  추천:0  2018-10-16
  피땀을 흘린 만큼 돈을 벌어 재산을 일구는 일은 너무나도 당당하고 자랑스럽다. 피땀으로 번 돈은 랑비하거나 탕진되는 법이 거의 없다. 그러나 남의 등을 쳐서 돈을 챙긴 인간들은 돈이 아까운 줄을 모르기에 검은 돈을 람용한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그 사람이 돈을 쓰는 것을 보면 그 돈이 어떻게 왔는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정치와 장사꾼이 야합을 하면 백성들이 낸 세금을 갖은 수단으로 나누어 먹으려고 애를 쓰고 권세가 돈맛을 들이면 될 일을 못되게 해서 돈을 후려내고 안될 일을 되게 해서 더러운 돈을 챙긴다. 그래서 “지금은 물어보면 될 일도 안 된다고 하고 안 되는 일도 돈을 내면 되니깐 물어보지 말라”는 말이 있다. 뢰물을 챙기며 나라의 세금을 잘라내고 백성의 돈을 뜯어먹는 놈을 날강도라 하고 사람의 약점을 악용해 돈을 뜯어내는 놈을 돌팔이라 한다.  검은 돈, 더러운 돈, 그리고 사람을 잡는 돈이란 본래 살인강도의 것만이 아니다. 손에 칼을 들고 강도질을 하는 도둑놈은 내놓고 도둑질을 하기에 잡을 수 있지만 뒤로 뢰물을 챙기고 나라의 세금과 백성의 돈을 잘라먹는 날강도와 남의 등을 쳐먹는 돌팔이는 버젓하게 행세를 하면서 도둑질을 하기에 쉽게 눈에 뜨이지 않는다. 사회나 주변을 살펴 보면 날강도(부패관리)도 많고 돌팔이(의사, 집법자, 정상배..)도 많다. 해당 자료에 따르면 한심하기로 전국에서 상반년에 빈곤부축사업령역에서만 6만 1500명의 “날강도”와 “돌팔이”를 처리했다니 말이다. 호화롭게 살면서 출세했다고 으스대는 날강도와 돌팔이들의 꼴은  들통이 나고 천벌을 받게 마련이다. 오기활                
262    “조선족이 앵무샌가?” 댓글:  조회:588  추천:0  2018-10-15
 일전 훈춘서 아이 첫 돐생일에 참가하였다. 그런데 “자랑스런 우리 아이 첫 돌잔치”란 현수막이 방영되자 미리 준비가 있은 듯이 자리를 같이한 80대 할머니가 “조선족이 앵무샌가?”며 한바탕 불만을 토로하였다. 20대부터 교직에서 정년퇴직을 했다는 이 할머니는 ”우리는 ‘첫 돍’이라고 배워줬는데 왜’ 첫 돌’ 이라고 하냐?” “우리는 ‘려관”이라고 배워줬는데 왜 ‘여관’이라고 하냐? ...며 조선족이 앵무샌가며 한바탕 공소했다. 앵무새는 사람의 말 흉내를 잘 내기에 흔히 남의 말흉내를 잘 내는 자들을 앵무새에 비긴다. 필자는 “첫돌”이 맞냐, “첫 돐”이 맞냐를 판단하기 어렵지만 필자가 알기로는 건국후 “중국의 조선어문자는 평양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주은래총리의 지시에 따라 중국의 조선어문자규범을 평양을 기준으로 하였다.  이에 따르면 '돌'은 생일을 표하고 '돐'은 주기를 표하는 것으로 사용이 구분되였다. 한국도 예전에는 “돌”과 “돌”을 구분하여 사용하다가 후에  “표준어 6항에 근거하여 그 같은 구분이 불필요한 것으로 '돌'로 통일했다”고,  “려관”은 "북한어"라고 사전에 밝혀있다. 그런데 나라의 개혁개방과 함께 한중교류의 심화와 한류의 영향으로 상당한 부류의 조선족들이 한국을 따르고 한국을 흉내 내는 것이 류행으로 된 데서 연변의 조선족들이 앵무새마냥 한국말을 하느라고 말끝마다 어색할 정도로 “요”를 달았고 조선어문자규범도 한국을 본 땄다. 례하면 일제 때는 일제의 강압적인 “창씨개명”으로 조선인들이 부득불 일본성과 이름을 가졌다면 지금은 조선족인(朝鮮族人) 들이 누구의 강요가 없는데 스스로 자기의 리(李)씨 성을 이씨라 부르고 쓰며 수풀 림(林)씨를 맡을 임(任)씨로 부르고 쓰며 "창씨"를 했다. 훈춘할머니는 바로 이런 사람과 현상을  “앵무새”라며 비난했다. 필자의 눈에는 물론 “앵무새”도 거슬리지만 아예 우리의 말과 문자를  외면하는  “덜된 사람”도 눈에 거슬린다. 연변텔레비를 보면 한복차림을 한 인민(당)대표들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말을 버리고 한어를 하며 조선족을 대표한 부분적 지도자들마저 우리 말을 외면하는 것은 물론 아무런 꺼리낌도 없이 기자들 앞에서 “我根本不㸔朝鮮文”(나는 근본상 조선문을 안본다)라고 자랑을 했다. 이 밖에도 조선족들이 출연하는 ”가짜 연출”도 어색이 아닌, 창피할 정도로 필자의 눈에 거슬린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례복, 상(喪)복, 작업복이 분명한데 텔레비를 보면 조선족녀성들이 명절한복차림으로 벼가을 하고 사과배를 따는데 그래 이렇게 때를 모르고 옷을 입은 화면을 보고 욕설이 뒤따르지 않겠는가?  필자가 취재한 어느 화백은 조선족들이 평상시에 민족복장을 입지 않기에 아무 때나 소수민족의 복장을 그리기 위해 서장을 간다는데 말이다.  필자는 무척 대고 한국을 흉내 내는 “앵무새”, 자기 민족의 말과 문자를 외면하는 “덜된 대표”, “덜된 간부”, 그리고 “가짜 연출”을 만들어 내는 “무지한" 도연…등등의  주범들은 모두가 타민족이 아닌 우리 민족 자신이다고 감히 말한다.  이에 비춰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4기 인대상무워원회는 9차 회의에서 9월 2일을 《조선어문자의 날》로 결정하면서 “조선어문자의 날”을 제정함은 사회적으로 자치민족언어습관을 존중하고 조선어발전의 량호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민족단결사업을 추진하고 민족전통을 계승하며 민족의 우수한 문화와 특색경제를 발전시키고 조선어 문자사업을 번영 발전시키기 위함이다”고  밝혔다. 이로보아 “조선어문자의 날”의 제정은 우리 민족이 자기민족의 문자와 언어를 홀시하고 잃어 버림을 반대하고 방지하기 위한 하나의 법적 조치라 하겠다. 조선언어문자의 규범화, 표준화 및 그 건전한 발전을 도모하는 것은 미룰 수 없는 문화적 책임이고 사회적 의무이다. 모종 의미에서 말하면 민족이란 언어문자의 공동체다. 언어문자를 상실하면 민족정체성이 사라진다. 청나라를 세우고 중국을 통치하던 만족은 본 민족의 언어문자를 쓰지 않은데서 만어가 소실되여 지금은 중국전역에서 만어를 아는 만족이 겨우 10여명밖에 없다니 만족이란 공동체를 운운할수 있는가? 지금은 글로벌(세계화)시대다. 글로벌 시대에 우리는 더욱 정신을 가다듬고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 우수성과 자주성을 고수해야 한다. 글로벌시대에 우리가 자기 민족의 말과 글조차 모른다면 어찌 민족의 군체며 민족의 자질을 운운할수 있겠는가! 오기활                                                               
261    <<통일의 론리는 간단하다, 친하면 된다>> 댓글:  조회:1045  추천:2  2018-10-10
 이 글은 필자가 2014년 4월 26일에 한국 영문월간 (디플로머시)잡지사 임덕규(任德奎)회장 인터뷰이다. 최근에 조한, 조미를 선두로 한 국제적인 평화대기후의 변화로 조선반도의 영구적인평화정착에 큰 가망이 현실로 다가 오니 필자는 당년에 발표를 안 했던 이 글을 떠올리며 오늘 그때 원고를 그대로 올린다. 그때 나이 79세인 임회장의 건강이 4년(2010년) 전과 다름없고 자애로움에 예지가 담긴  그의 실눈웃음은 그가 눈을 떴는지 감안는지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효(孝)를 백행지원으로 는 임회장은 스스로 자기는 전세계 평화를 창조하려 다니는 사람이다며 필자가 어리둥절할 정도로 큼직큼직한 세상일을 들려 줬는데 화제마다에 로 부언을 했다.  임회장은 전략으로 지금까지 에 세계 여러 나라의 정상들을 400여 명을 올렸는데 360여명은 그가 직접 인터뷰를 하였다. 그가 한 개 나라 정상을 수번 만난 차수로 합하면 그가 세계의 정상들을 만난 차수가 1000 번이 넘고 5대양 6대주를 넘나들며 찾은 나라가 100개를 넘는다고 하였다.  그의 사무실 한쪽벽은 완전히 그가 만난 여러 나라 정상들의 사진들로 도배되였다. 초심을 잊지 않고 임회장은 한국 논산시 부적면 탑정리의 열두마지기농가집에서 으로 태여났다. 그때는 조선이 일본식민지라 그가 초등학교 3학년 1학기를 다닐 때 까지 조선말을 못하고 한글도 못 배웠다 1945년에 > 해방을 맞고서야 2학기부터 자기나라의 말을 하며 자기나라의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 새로 태여 난 나라에 국회의원이 생긴다는 말을 듣고 일찍 초등학교 4학년 때 는 꿈을 간직했단다. 그는 국회의원이 되려면 고 생각하고 자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뛰였다. 1년간 신문배달을, 8년간 가정교사를 하면서 동국대학교법과 석, 박사과정을 마치고 전략으로  임덕규박사는 1966년부터 동국대학에서 국제법을 가르쳤고 1968년부터 신화일보, 동화통신 론설위원을, 1981년에 11대국회의원(충남공주,국민당)으로 당선되여 초등학교 4학년때 품었던 꿈을 끝내 실현하였다.                           와의 인연 그가 를 꾸리게 된데는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2대 외무장관과 유엔대사를 지낸 임병직박사를 만난것이 계기로 되였단다.  1960년에 동국대학을 졸업하고 법과박사과정이던 그는 1963년에 임씨네 집안에서 삼촌벌인 임병직박사가 귀국하자 자진해서 임박사의 시중을 들기 시작, 10년간에 임박사의 연줄로 당대의 거물급 인사들을 많이 알게 되였고 그들로부터 나라사랑을 배웠다.  임병직박사가 인도 주한대사로 지내며 를 창설, 임덕규가 간사로 일하며 국제외교를 경험하였다.  1972년 뮌헨 올림픽을 계기로 임박사가 세상에 한국을 홍보하기 위해 예술단을 이끌고 유럽순방을 떠나던 날 임덕규한테 이런 당부를 하였다. .  하늘 같은 어른님의 말씀에 임덕규는 그 자리에서 하겠다는 대답은 했지만 잡지를 꾸려 본 경험은 물론 영어수준, 자금 등으로 앞길이 막막했다. 그 때 한국에 영문으로 문장을 쓰는 인재도 몇이 없었다.  그러나 모든 걸 다 바쳐 독립운동을 하신 어르신들을 생각하니 말한 대로 안 하면 죄인이 될 것 같은 자책감이 앞섰다. 다행히도 4년간(1968-1971)신아일보 론설위원과 동화통신 출판부국장, 론설위원을 지낸 밑천으로 배짱이 생겨 전화를 잡혀 300만원의 자금을 마련하여 서울 무교동에 손바닥만한 사무실을 마련하였다. 그 때 합작동지라고는 지금 세계적인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동화통신 사진부 차장 백남식이다.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3년 남짓이 아이디어를 짜낸 끝에 1975년 8월에 창간호를 발간, 창간호의 표지스토리는 한미 관계에 력점을 두고 미국포드대통령 가족사진을 싣고 성조기변천사, 력대 미국대통령의 친필서명, 력대 주한미국대사사진 등 내용으로 특집을 꾸렸다.  창간호가 나오니 미친 짓이라며 극구 말리던 사람들마저 니 죽자 살자 뛰여다녀도 힘이 드는 줄을 몰랐다. 광고를 얻기 위해 아침밥을 거르며 아침출근을 하는 기업체 사장들의 발목을 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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