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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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쌀뜨물과 환경오염 댓글:  조회:522  추천:0  2021-04-14
쌀뜨물과 환경오염 엄정자 주말에 남편하고 장보러 마트에 갔다. 다이어트와 건강 때문에 쌀밥을 많이 먹는 것은 아닌데 그래도 야금야금 축나서 왔던 김에 쌀도 사가려고 쌀코너에 갔다. 코시히카리, 아키타고마치, 히도메보레…예쁜 이름이 박힌 쌀봉투들이 줄느런히 진렬되여 있다.   일본사람들은 쌀이름에도 좋은 의미를 부여하기 좋아해서 빛(光)처럼 반짝반짝 빛난다는 의미에서 ‘코시히카리’, 아키타(秋田)라는 지명에 일본 3대미인의 하나인 코마치(小町)의 이름을 부쳐서 ‘아키타고마치’, 첫눈에 반할 정도로 예쁘다고 ‘히도메보레’, 이름만 보아도 빛나는 매력이 넘치는 미인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내 눈을 끈 것은 화려한 이름을 가진 쌀보다도 무세미(無洗米)라는 부제가 달린 쌀이였다. 내가 “이거 안 씻어도 된다는데 이거 살까?”하고 남편을 쳐다보니 무세미를 제조하는 것은 안 씻어도 되는 편리함을 위해서라 하기보다 쌀 씻은 물이 환경을 오염하기 때문에 연구해낸 것이라고 설명을 해주었다. 쌀뜨물에 포함된 린(燐)이나 질소(窒素) 같은 여러 성분이 미생물의 성장을 다그치기 때문에 수질을 나빠지게 하는데 무세미로 가공하면 그런 폐단이 적어진다는 것이였다.   ‘쌀뜨물’은 우리 생활에서 좋은 이미지로 많이 쓰인다. 위키백과에서도 좋게 해석했다.  “쌀뜨물은 쌀을 씻고 생긴 물이다. 국이나 찌개에 사용한다든지 발효액 등으로 사용할 수 있다. 또한, 쌀뜨물은 여러 가지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비타민 B1, B2, 각질 등이 녹아 있어 피부 미백에 좋으며, 냄새를 흡착하는 능력이 매우 뛰여나 악취가 제거된다.”   그래서 나도 쌀 씻은 다음에는 쌀뜨물을 버리지 않고 화분에 준다. 그래서인지 우리집 베란다에서 자라는 무궁화나 목백일홍은 해마다 예쁜 꽃을 피우고 있고 집안에서 키우는 행운목(幸福の木)은 천정에 닿을 정도로 자랐다. 그런데 쌀뜨물이 환경오염을 조성하다니,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쇼크였다. 모르고 한 일이지만 쌀뜨물을 꽃나무에게 준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자연재해 다발의 주요원인이 지구온난화 때문이라고 과학자들도 매스컴도 말하고 있다. 지구온난화문제는 지구의 운명을 좌우지하는 큰 문제로 제기되었다.   남태평양의 산호초의 섬 '투발루'는 바다 홍수와 해안 침식으로 섬이 수몰되고 있어 정부가 주민을 집단이주 시키는 결정을 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로 인해 '환경 난민'이라는 새로운 개념마저 나왔다.   그러면 왜 이런 재해가 일어나고 지구온난화가 일어나는가? 결국 자연재해는 인재로 인해 일어나는 것이다.   동남아시아의 열대림 목재의 40 %를 사재기하고 있는 일본은 ODA 개발 원조의 형태로 산림 파괴를 조성하고 있다. 아마존의 제철 브랜드와 농지 개간 계획은 150 만 헥타르의 황무지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 열대우림소멸(熱帯雨林消滅)은 지구온난화의 원인의 하나로 되고 있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으로 인한 원전사고는 대량의 방사선을 방출했는데 그 량이 기준을 넘어서 8개 현의 111시와 촌이 위험지구에 들어갔고 피난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후쿠시마 현에서만 해도 16 만 명 이상이 대피했었다.  원전에서는 지금도 1호기와 3호기의 원자로 아래쪽에 녹아서 내린 핵연료가 남아 열을 내고 있기 때문에 항상 물을 주입하여 랭각을 해야 한다. 이 물이 핵연료에 닿으면 방사성 물질을 포함한 “오염된 물”이 되는데 지금 120만톤이 넘는 오염수가 천개가 넘는 탱크에 저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나오고 있다. 별수 없이 정부로부터 오염수를 바다에 방출하거나 대기에 방출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아무리 궁여지책이라 해도, 이미 그렇게 한 다른 나라의 선례가 있다고 해도, 아무리 기준 수치 이하로 희석한다고 해도 트리튬이 내포된 오염수가 바닷물을 오염시킬 것은 뻔한 일이다.   한 사람 한 사람, 작은 일에서부터 움직이는 것이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스타벅스와 맥도날드는 플라스틱 스트로(빨대)부터 종이 스트로로 바꾸었고 편의점이나 마트의 플라스틱봉투가 유료화 하면서 사람들은 휴대용가방을 가지고 다니게 되었다. 요즘은 플라스틱 스푼과 포크도 유료화 한다고 한다. 모든 것을 휴대하고 다닐 수는 없지만 이제는 휴대용쇼핑백이 습관화된 것을 보면 사람들의 의식의 변화는 작은 움직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독립해서 혼자 사는 딸애 집에 가보니 주방용 세제가 처음 보는 메이커였다. 딸애 말에 의하면 그 세제는 천연식물 진액으로 만든 것이라서 환경오염이 안 생긴다고 한다. 세제 하나, 쇼핑백 하나, 음료수병 하나로부터 환경보호가 시작된다.   깨끗한 지구를 후대들에게 넘겨주려면 쌀뜨물부터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동북아신문/흑룡강신문  동북아신문/흑룡강신문 
2    [작가평]뿌리는 껍질 안에서 길을 찾는다 댓글:  조회:297  추천:0  2019-07-18
뿌리는 껍질 안에서 길을 찾는다 — 허련순작가와의 어느 만남 엄정자   “아, 오랜만이예요! 반가워요.” 석양빛이 비낀 연변국제호텔 정문으로 매미 날개 같은 망토자락을 휘날리며 반갑게 다가오는 이가 있으니 바로 허련순작가님이였다. “여전히 우아하고 보기 좋네!” 늘 그랬듯 칭찬부터 하시며 나를 따뜻하게 안아준다. 기분이 좋았다. “선생님도요!” 그러면서 다시 바라보니 우아한 옷차림에 어울리지 않게 비닐봉지 하나를 달랑 들고 있었다.  내 눈길을 의식했던지 손에 든 비닐봉지를 들어보이며 “내가 엄선생한테 줄 책만 생각하다 보니 현관 앞에 놓은 지갑이 든 가방하고 핸드폰은 그만 두고 나왔네. 열쇠도 가방 안에 있어서 다시 들어갈 수도 없고… 식사 대접한다고 해놓고 지갑을 두고 나왔다면 누가 믿겠나? 참 내가 이렇다니깐…” 하며 멋적게 웃었다. 생각보다 허술했다. 하지만 돌담에 틈이 있어 단단하듯이 인간은 실수가 있어 더 완벽한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실수에서 그의 인간적인 면이 느껴져 편안해졌다. “괜찮아요! 오늘은 제가 식사대접 하기로 했잖아요.”   “무슨 소리! 엄선생은 먼곳에서 왔는데 내가 대접해야지. 좀 있다가 남편에게 전화하면 돼요.” 가는 날이 장날이라 하더니 우리가 식사하려고 했던 국제호텔 레스토랑이 휴업하는 날이여서 우리는 ‘큰가마밥집’이라는 한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허련순작가님은 자리에 앉기 바쁘게 다른 사람의 전화를 빌어 남편한테 돈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였다. 익숙한 솜씨로 날렵하게 번호를 누르는 그녀를 보면서 “선생님은 남편 분의 번호를 기억하고 계시네요.”라고 하자 “남편하고 딸애 뿐만 아니라 가까운 친구들의 번호는 모두 머리로 기억해요.” 하며 웃으신다. 수자에 약한 내가 감탄하자 “남편이 집안의 주요한 일을 맡아주니 내가 사소한 일을 기억하는 여유가 있는 거죠.”고 롱담을 했다. 허선생님은 아침에 눈을 뜨면 곧장 컴퓨터 앞에 가서 앉는다고 한다. 메일을 체크하고 필요한 답신을 하고 글쓰기에 돌입하는데 그 사이에 남편은 아침준비를 하고 다 되면 안해를 부른다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자료수집은 물론이고 잡지사와의 미팅이나 계약도 다 남편이 해준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글을 안 쓸 때는 아무 것도 안해줘요.” 하며 허선생님은 허탈하게 웃었다. “아주 격이 있는 매니저이시군요!” “그런 셈이지. 남편은 자신이 격은 모든 일이 소설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자신이 그 날 보고 들은 이야기를 밥 먹을 때도 잘 때도 계속 말하는데 정말 귀찮을 때가 있어요. 그 분의 말에서 소재를 얻을 때가 많으면서도 말입니다.” , 같은 소설들은 다 남편의 이야기에서 령감을 얻어 쓴 소설이라고 하였다. 그는 소설이 끝나면 제일 먼저 딸한테 보이는데 딸이 감동이 없다고 하면 주저없이 버린다고 했다. 그는 버리는 것에 린색하지 않았다. 버리지 않으면 새것을 담을 자리가 없다나. 아무튼 젊은 감각은 딸을 통하여 아쉬움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사이에 허련순작가의 남편인 홍성빈씨가 돈을 가지고 음식점으로 찾아왔다. 미남으로 불리웠던 옛날 모습이 중후함 속에서도 아직도 남아있었고 친화적이고 서글서글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투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는 안해에게 페 끼칠가 미련없이 떠나는 뒤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허선생님의 장편소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를 전해받을 때도 허선생님 대신 남편인 홍성빈씨에게서 전해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허선생님은 참 복도 많다. 모든 것을 대신해주는 매니저 같은 남편에 엄한 비평가 딸이 있어서 허련순은 소설가로서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현실적 제약 속에서 작가는 어떤 문학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현실적 제한성을 극복해야 하는지에 화제를 모았다.  허련순은 어려운 시대일수록 문학은 위축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경을 터닝 포인트로 삼고 더 높은 레벨로 비약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려울 때가 오히려 문학하기 좋은 적기라고 말이다. 장편소설 를 쓰게 된 동기를 묻자 허선생은 한국에서 있은 어느 문인대회에서 만났던 뉴질랜드의 엡스타인교수와의 일화를 꺼냈다. 그는 4개 국적을 가지고 있는 비교적 자유로운 번역가였는데 디아스포라 개념에 대하여 별로 의식하지 않았으며 국경에 대한 개념도 별로 없었다. 디아스포라의 주제에 집착하고 있었던 허련순에게 있어서 그와의 만남은 조금은 충격이였다고 한다. 그 이후로 국가 안에 갇히지 않은 인간과 인간의 대등한 관계 안에서의 정체성의 확립이야말로 진정한 자기 가치를 찾는 길이라는 인식을 가져오게 된다. 그는 ‘디아스포라문학의 선구자’ 재일동포작가 서경식교수의 영향으로 디아스포라문학의 동기를 확립했다가 엡스타인교수의 의식과 라이프 스타일에서 힌트를 받고 다시 그 속에서 나오는 즉 디아스포라문학을 넘어서야 하는 필요성을 깨달은 셈이다. 절대 한곳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고저 하는 명철한 작가의식, 문제의식, 이는 허련순이 조선족문단의 대표적 작가로 될 수 밖에 없는 필수적 조건이였음을 다시 한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나는 여전히 허련순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그는 까고 까도 끊임없이 새것이 나오는 양파를 닮은 작가였다. 아직 내가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부분이 많아 안타까웠다. 나는 국제학술회의 때문에 연길에 왔었기에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허선생님에게만 마음이 쏠려 다른 사람의 발표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회의 도중에 나와서 전화를 걸어 그와 다시 약속을 잡았다. 급히 마무리지어야 할 글이 있어 시간 내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오전시간을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연변대학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백산호텔 커피숍에 도착하니 허련순작가님은 벌써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전날 밥을 사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선생님은 기어이 비싼 홍차 값까지 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연길에 올 때마다 허선생님은 나에게 밥을 사줬던 것 같다. 이 같이 친구나 지인에게 린색하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손 내밀어줄 줄 아는 넉넉한 마음씀씀이는 그의 글에서도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  허련순 소설의 주인공들은 거의 모두가 사회에서 소외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인물들이다. 사람을 중히 여기는 따뜻한 인간애가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에 그는 사회적으로 소외받고 차별당하는 아픈 손가락 같은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고 그들의 아픔을 아파하며 살뜰하게 쓰다듬어줄 수 있었다. 《바람꽃》의 주인공 홍지하는 비록 작가이기는 하지만 교도소에 갔다 왔고 안해에게 리혼당했고 ‘사기군’으로 ‘호모’로 몰리여 억울한 류치장 신세까지 지지 않으면 안되였다.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의 주인공 세희는 어릴 때 아버지를 잃었고 이모부에게 유린당했고 결혼생활도 여의치 않아 두번이나 리혼했으며 남의 집 강아지가 먹는 쏘세지도 아이들에게 마음껏 사줄 수 없는 빈궁한 생활을 해야 한다. 의 단이는 한족인 아버지와 조선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여난 ‘짜구배(혼혈아)’인데다가 ‘부모를 잡아먹는 사주’를 가지였고 그래서 어머니가 남편의 릉욕을 참지 못하고 목을 매여 자살하였을 때 어머니가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죄의식을 느낀다. 거기에다가 어머니 대신으로 의지하던 외할머니, 첫사랑 룡이까지 죽으면서 그는 있을 곳이 없게 되여 15살이나 이상이고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가 없는 한국남자와 결혼한다. 디아스포라문학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바람꽃》,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 3부작을 통해서 허련순은 조선족의 뿌리 찾기, 정체성 찾기, 인간의 소통을 통한 치유의 과정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사회학적 접근으로부터 인문학적 접근을 하는 창작양상의 변화를 보여준 는 새로운 문학에로 승화하는 전환점이 되였으며 조선족 디아스포라의 변화양상을 연구하는 교과서적 역할을 하게 되였다. 이로써 디아스포라 문학을 완성하는듯 보이다가 최근에 를 보여주어 깜짝 놀랐다.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가? 억압된 인간의 심적 목소리를 복원하고 인간 존재의 시원을 찾아가고 싶었다고 그는 말했다. 매번 놀라운 느낌이지만 허선생님은 자신의 작품의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하는 데에 너무 정확하고 투철했다. 늘 깨여있고 사유가 명석한 작가란 생각이 들었다. 허련순은 자기 문학의 근원은 아버지라고 했다. 다섯째 딸로 태여났다는 태생의 조건으로 아버지의 소외를 받아야 했고 이름마저 없어서 친척 오빠가 지어준 이름으로 살아야 했던 허련순은 “어린 시절에 벌써 인간의 소외와 차별과 슬픔을 경험했고 그것이 인간이 인간에게 행해지는 가장 큰 부정과 비애임을 체험했다.”(허련순 문학자서전 《문학은 죽음을 통하여 거듭 문학으로 태여난다》) 하지만 허련순은 어릴 때부터 스스로 살아가는 법을 알고 있었다. 저녁 밥상머리에 그녀가 보이지 않아도 누구 하나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존재감이 없는 그녀였지만 스스로 개구리, 물고기를 잡아 팔아서 자기 학용품을 해결했는데 고기 잡는 채발마저 자기 손으로 만들었다. 마당에 뒹구는 나무토막을 대패질도 하지 않은 채 틀을 만들고 버려진 양철 바게쯔를 펴서 못으로 구멍을 내서 바닥을 댔다. 그것은 어린 소녀가 들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그래도 씩씩하게 고기 잡으러 다니였고 지금도 그는 어린 시절 손바닥에서 파닥파닥거리던 물고기의 느낌을 생생히 기억한다고 한다. 놀음에 탐해 혹시 늦어진 날에는 아버지에게 책망받을가 두려워서 밖에서 부모님 잠들기를 기다려야 했다. 키높이 자란 옥수수밭에 쪼그리고 앉아, 뒤마당의 짚가리 속에 들어앉아서 개구리의 개굴개굴 우는 소리, 풀벌레의 찌르륵 찌르륵 우는 소리를 들었다. 매미는 맴맴, 귀뚜라미는 귀뚤귀뚤, 철 따라 다른 벌레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별들이 무수히 반짝이는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구름 속을 헤염치는 달님을 따라가면서 그는 미래의 꿈을 키워왔는지 모른다. 부모님이 채워주지 못하는 마음의 빈자리를 자연의 아름다움, 풍요함으로 채워갔던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소외한 아버지이지만 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고 대학교를 다닐 때는 주말마다 집에 돌아가서 아버지의 병수발을 들었다. 돌아가시기 전 그런 딸을 바라보며 아버지는 “불효녀가 효자였다”는 말을 남기셨다. 딸로 태여난 것이 ‘불효’였다면 아들보다 더 부모에게 효도했으니 ‘효자’인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자연의 아이 같이 자유롭게 자라온 그런 풍만한 정서가 있었기에 허련순은 ‘슬픈 이야기를 아름답게 쓰는 작가’로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뿌리가 껍질 안에서 길을 찾듯이 허련순은 부단히 겹겹이 두꺼운 껍질 속에서 부단히 자신의 길을 모색해가고 있다. 다음은 또 어떤 작품으로 자신을 선보일지 벌써 궁금해진다. 어느 문학노트에서 그는 “작가는 문제되는 것에 자신을 바쳐야 자유롭다. 나는 소설로 이 자유를 누리고 있다. 현실에서 나는 늘 벽걸이 뒤면처럼 현실의 내 삶에서는 물러나있었다. 그리고 생계 그 이상의 소명의 자리에서 문학으로 수십번 죽고 다시 태여나면서 오늘까지 버텨왔다. 무엇이든 될 수 있었지만 아직 아무 것도 아니였던 시절에 다른 것을 다 내려놓고 오직 소설을 쓰면서 견뎌냈다. 나의 경험에서 문학창작이란 결국 자신의 가장 불안한 상태를 견디여내는 일이였다고 믿는다.”고 쓴 적이 있다. 대학 선배이면서 문학선배인 허련순소설가, 우리 문단에 이렇듯 멋진 작가가 있다는 것이, 그렇듯 훌륭한 그의 작품을 내가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이 참 행운인 것 같다.  출처:2017 제5호
1    [수필]같은 하늘 아래 다른 땅 댓글:  조회:261  추천:0  2019-07-16
같은 하늘 아래 다른 땅 엄정자   아침에 일어나니 휴대폰에 축하메시지가 가득 들어와있었다. “선생님, 즐겁고 풍성한 한가위 보내시길 바랍니다!” “보름달 같이 풍성한 한가위 되시길 기원합니다!” “친구, 추석떡 보내. 그림의 떡이지만. ㅋㅋ” 그제야 오늘 추석이라는 것을 떠올리게 되였다. 양력만 쇠는 일본에는 추석련휴라는 것이 없지만 제자들에게서, 지인들에게서, 친구들에게서 온 축하인사를 보니 제법 추석기분이 드는 것 같았다. 아무리 추석이라도 출근은 출근인지라 여느 때 같이 바삐 바삐 준비해서 문을 나서는데 마음만은 풍요롭고 행복했다.   그렇게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이제 퇴근하는 남편도 마침 뒤따라 들어왔다. 아침부터 마음은 들떠 계속 명절인데 현실에서는 평일인지라 나는 랭장고에 들어있는 야채들로 볶음밥을 만들었다.   “여러가지 채소가 듬뿍 들어가니 풍성한 거지.” 이렇게 자아위로를 하면서 그래도 오색을 갖춘 볶음밥을 식탁 우에 내놓았다. 설겆이까지 끝내고 나니 9시가 다되였다. 낮에 바빠서 답신을 보내지 못했던지라 이제라도 보내려고 베란다에 나가 달사진을 찍었다. 약간 구름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휘영청 밝은 보름달인데 휴대폰으로 찍으니 그냥 평범한 달로 보여 조금 서운하기는 했지만 오늘은 달이 메인이니 그대로 위챗과 페스북에 올렸다.  그랬더니 중국에 있는 친구에게서 답신이 왔다.  “거기 달도 우리 집에서 보는 것과 똑같네.” 이번에는 한국에서 페친님이 댓글을 올리셨다. “방금 달을 보니까 사진 속의 그 달이랑 꼭 닮았네요.ㅎㅎ” 순간 몇천리 몇만리 떨어져있어도 우리가 쳐다보는 하늘은 같은 하늘이라는 사실이 가슴에 확 와닿았다. 같은 하늘 아래 다른 땅, 어쩐지 기쁜 것 같기도 하고 서글픈 것 같기도 하다. 같은 하늘 아래에 사는 같은 민족이라서 다같이 추석 쇠는 기분을 느끼고는 있지만 서로 다른 땅에서 사니까 같이 쇠지는 못하는 운명, 우리는 그래서 ‘한恨’이 깊은 민족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형제는 다 각기 다른 나라에 살고 있다. 큰언니는 조선에, 오빠는 로씨야에, 둘째언니는 중국에, 나는 일본에. 어떻게 하다나니 이주민족의 백년력사가 그대로 우리 집에서 그려지고 있다.  내가 아기였을 때를 제외하고 우리 형제는 다같이 모여본 적이 없다. 30년 전에 조선의 큰언니가 부모님 환갑에 왔을 때는 오빠가 오지 못했고 그 후 3년이 지나서 오빠가 왔을 때는 큰언니가 오지 못했다.  내 어릴 때 기억에 박힌 어머니의 모습은 늘 우시는 모습이다. 어제는 혈혈단신 18세에 혼자 조선에 류학 간 큰딸 때문에, 오늘은 공부하겠다고 외롭게 혼자 로씨야에 남은 아들 때문에. 자식이 보고 싶어 가슴이 타들어가는데 “왜 보냈냐! 왜 두고 왔느냐!” 가슴 치며 후회해도 국경이 막히여 만날 길이 없으니 타는 건 가슴이요, 흐르는 건 눈물이라! 어머니가 흘린 눈물을 다 담으면 동해에 넘칠 것이다. 그렇게 30년의 세월이 흘러 드디여 오빠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고 어머니는 뇌출혈로 치매가 와서 그렇게 보고 싶어하던 아들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시니 불효자식이 된 오빠 마음은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우리 어머니가 생전에 늘 아버지에게 하던 원망의 말이 있다. “내가 당신을 따라오지 않았다면 내 딸과 내 아들과 헤여지지 않았겠는데.” 그러면 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못하시고 애꿎은 책만 들어다보셨다. 나라 잃은 설음에 총을 들고 싸우다가 일본 토벌군에 쫓기워가다 보니 로씨야 땅이였고 병 때문에 그 곳에 남다 보니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게 되였고 장남이라 할아버지를 모셔야 해서 중국에 돌아가다 나니 중국어를 못하는 자식들은 공부하러 뿔뿔이 흩어질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다 나라 지간의 국정에 의해 국교가 끊기니 생리별이 되고 말았으니 아버지 속이라고 왜 타지 않았겠는가. 천성이 과묵한 분이라 말은 못하고 속만 태웠을 것이니 아버지 속을 들여다 보면 꺼멓게 타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원망해야 할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그 땅의 주인들을 타향에 쫓아낸 일본놈들일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어쩌다 나니 내가 지금은 일본 땅에 살고 있고 그래서 우리 형제들이 다시 모일 날은 의연히 묘연하다는 것이다. 그래도 중국에 있는 언니는 같이 자랐고 일본에 온 뒤에도 3, 4년에 한번은 내가 학술회의에 갈 때나 시집행사로 갈 때 만났으니 그중 제일 많이 만난 셈이고 제일 가깝게 지낸 사이이다. 이제 나에게는 부모 같은 언니, 그 언니가 우리 집에 와보고 싶다고 해서 요즘 친척방문 신청을 하였다. 무사히 비자가 내려오면 나는 단풍이 빨갛게 타오르는 11월에 언니를 우리 집에 모셔올 것이다. 단풍이 그림 같이 아름다운 교또에도 데려갈 것이고 세계에서 제일 높은 스카이트리 도꾜타워에도 데려갈 것이고 예쁜 단풍 속에 묻힌 전통 온천에도 데려갈 것이다. 부모님에게 하지 못한 효도, 큰언니, 오빠에게 주지 못하는 사랑을 담아서 언니에게 행복한 려행을 선물하고 싶다. 추석은 가족이 둥그렇게 모여앉아 같이 밥 먹으며 그동안 그립던 이야기도 하면서 그렇게 정을 나누는 날인데 나는 부모님들이 다 돌아가시고 형제들이 다 멀리 이국땅에 있어서 추석다운 추석을 쇨 수는 없다. 그래도 남편과 딸이라도 옆에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거기에다 멀리 떨어져있어도 잊지 않고 추석인사 전해오는 제자들, 지인들, 친구들이 있어서 명절기분이라도 만끽할 수 있으니 복 받은 인생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보름달에 기원하면 소원이 풀린다고 한다. 그래서 하늘을 향해 두손으로 소원을 빌었다. -달님, 다음해에는 우리 형제 다 모여서 추석을 쇨 수 있게 해주십사.   그림자 같은 구름 사이로 달이 소리없이 헤염쳐간다.  그 달이 지는 곳에 우리 오빠, 언니들이 살고 있다.  출처:2018 제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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