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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씨천하를 꿈꾼 려태후
2009년 08월 20일 10시 21분  조회:2947  추천:0  작성자: 人和


려태후( BC241~BC180)는 이름이 려치, 자는 아후이며 한고조  류방의 황후이다.  그녀는 류방이 죽은후에 정권을 장악하여 16년간 한나라제국을 통치했다.


려치는 진(秦)나라때 단부현(지금의 산동성 단현)에서 태여났다.  그녀의 아버지 려공은 원쑤를 피하여 패현으로 이주했으며 류방과 친분을 맺은 뒤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초한전쟁이 시작된지 얼마 안되여 려치는 류방의 부모와 함께 항우의 진영에 인질로 잡혀갔다.


기원전 203년에 려치와 류방의 부모가 석방되였다.  그 이듬해에 류방은 황제에 오르고 려치는 황후가 되였다.


려치는 일찍 뛰여난 지략으로 류방의 천하통일을 보좌하였을뿐만아니라 한나라초기에는 류방이 류씨이외의 왕(제후)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조10년(BC197)에 류방이 양하후 진희의 반란을 평정하러 출정하였을 때 서울 장안을 지키고있던 려치는 회음후 한신의 반란정보를 입수한후 마침내 승상 소화와 모의하여 한신을 궁궐로 불러다가 죽이고 3족을 멸하였다. 얼마후 류방은 진희의 반란을 평정하고 락양으로 돌아온후에 량왕(梁王)  팽월(彭越)이 반란을 도모하려 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류방은 즉시 팽월을 체포하였지만 모반의 증거가 없자 그를 평민으로 강등시켜 파촉(巴蜀)에 류배보내기로 하였다. 도중에 팽월은 려치를 만나 그녀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집으로 돌아가 여생을 편히 살수 있도록 류방에게 잘 말해줄것을 청하였다. 락양으로 돌아온 려치는 류방에게 “팽월은 용맹한 장수이니 그를 촉(蜀)에 보낸다면 범을 산에 풀어주는것과 같아서 크나큰 후환이 될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류방은 즉시 팽월을 죽여버렸다.


려치의 슬하에는 아들 류영(후의 혜제)과 딸 로원공주가 있었다.   그러나 류방은 류영의 성격이 나약하다는것을 리유로 자신이 총애하던 비빈  척부인(戚夫人)의 아들 조왕  류여의를 태자로 삼으려고 하였다. 척부인의 눈물어린 호소와 류방의 결심으로 류여의는 거의 태자에 오를번했지만 장량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대신들의 간언과 려치의 노력으로 류여의는 태자에 오르지 못하고 류영이 태자의 자리를 계속 유지할수 있었다.


고조 12년(BC195) 4월에 류방이 죽고 려치의 아들 류영이 제위를 계승하여 한나라의 제2대 황제 혜제(惠帝)로 되였다. 이에 황태후가 된 려치는 어린 혜제를 대신하여 정사를 보면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려태후는 류방의 사랑을 받았던 척부인과 태자의 자리를 넘보았던 조왕 류여의를 그대로 놓아두지 않았다.  먼저 척부인을 영항(永巷: 원래는 궁녀들이 살던 곳이였으나 후에는 죄를 지은 비빈을 감금하는 곳으로 사용되였음)에 감금한 다음 조왕 류여의를 제거할 기회를 노리였다.


혜제 원년(BC195) 12월, 혜제가 새벽에 활쏘러 나간 틈을 리용하여 려태후는 혼자 남아있던 류여의에게 독주를 먹였다.   아침 해뜰 무렵에 혜제가 돌아왔을 때 류여의는 이미 싸늘한 시체로 변해있었다.


그후 려태후는 다시 척부인의 손과 발을 자르고 눈알을 뽑고 귀를 태우고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인 다음 “돼지우리”에 가두고 그녀를 “사람돼지”라고 불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혜제는 려태후의 야만적인 행위에 충격을 받고 병을 얻게 되였다.  그는 려태후에게 사람을 보내여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이것은 사람이 할짓이 아닙니다. 저는 태후의 아들로서 더이상 천하를 다스릴수 없게 되였습니다.”


그리고는 매일 주색에 빠져서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후 려태후는 다시 류씨성을 가진 제후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혜제 7년(BC188) 가을에 혜제가 세상을 떠났다. 혜제가 죽은후 려태후는 2명의 소제(少帝: 1명은 원래 평민의 소생이였는데 려태후가 혜제의 황후 장씨에게 명하여 그를 데려오게 하여 혜제의 아들로 삼은 다음 그의 생모는 죽여버렸다.  다른 1명은 상산왕(常山王) 류의이다)를 차례로 옹립하고 황제의 지위를 대신하였다.  황제의 이름으로 반포되는 모든 명령과 조서는 모두 려태후의 손에서 나왔으며 이때로부터 그녀는 실질적인 황제나 다름없었다.


려태후는 자신의 정치적지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자신의 정책을 반대하던 태위(太尉) 주발(周勃)과 우승상 왕릉(王陵)을 파면하고 “류씨외에는 누구도 왕이라 칭해서는 안된다”는 류방과의 약속을 파기하고 려태, 려산, 려록 등 많은 려씨일족들을 왕으로 책봉했다.


려태후는 황제의 지위를 대신한 8년동안 많은 정적들을 무참히 죽이고 려씨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그 어떤 야만적인 행동도 서슴치 않았지만 국정운영면에서는 그 어느 왕조의 황제에 못지 않은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먼저 류방이 시행해오던 민생안정정책을 계승하여 농업을 장려하는 한편 삼족을 멸하는 연좌제와 요언령(妖言令) 등의 가혹한 형벌을 페지하였다. 이로써 이 기간에는 백성들의 생활이 비교적 안정되였을뿐만아니라 그동안 혼란했던 사회도 점차 질서를 잡아가고 피페했던 경제도 점점 회복되였다.


그러나 려태후는 “류씨외에는 누구도 왕이라 칭해서는 안된다”는 류방과 여러 대신들의 약속을 파기하고 많은 려씨일족들을 왕으로 삼았기에 대신들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  즉 그속에는 그녀가 죽은후에 일어날수밖에 없는 또 다른 정치적불안요소가 잠재되여 있었던것이다.


기원전 180년 3월, 천하를 호령하던 려치도 결국은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병을 얻어 자리에 눕게 되였다. 7월에 병세가 위독해지자 그녀는 급히 뒤일을 수습하기 위하여 조카 려산을 상국에 임명하여 북군을 통솔하게 하고 려록을 상장군에 임명하여 남군을 통솔하게 한후 두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했다.


“고조가 천하를 평정했을 때 대신들과 ‘류씨외에 왕이 되는 자는 모두 합심하여 토벌하라’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려씨가 왕에 책봉되여 권력을 장악하고있으니 대신들은 모두 이에 불복하고있습니다.   내가 죽은후에 황제는 나이가 어리므로 대신들이 란을 일으킬것이니 그대들은 반드시 군사를 장악하여 황궁을 수호하도록 하시오. 나의 장례를 치를 때도 그대들은 황궁을 떠나지 말고 반란에 대비해야 할것이요.”


그리고는 다시 려록의 딸을 황후로 삼은 다음 자기가 죽은 후에도 려씨천하를 유지하려는 야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7월 신사일(辛巳日), 려태후는 장안 미앙궁에서 62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려태후가 죽은후에 태위 주발과 승상 진평, 주허후 류장 등은 신속하게 려씨일족을 죽이고 문제(文帝) 류항을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로써 려태후와 그녀의 일족에 의해 다스려지던 한나라는 다시 류씨천하를 회복하게 되였다. 려태후의 묘지는 류방의 장릉 서쪽(지금의 섬서성 함양시 동쪽 17.5킬로메터되는 곳)에 있다.


사마천은 《사기》 《려태후본기》에서 그녀의 치적을 다음과 같이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혜제와 려태후 시절에 백성들은 전국시기의 고통에서 벗어날수 있었으며 군신(君臣)들은 모두 ‘무위’의 경지에서 안식(安息)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혜제는 팔장만 끼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려태후가 녀성으로서 황제의 직권을 대행하여 모든 정치가 방안에서 이루어졌지만 천하가 태평하고 안락했다.   형벌을 가하는 일도 드물었으며 죄인도 드물었다.  백성들이 농사에 힘을 쓰니 의식(衣食)은 나날이 풍족해졌다.”

 

 

제공:  연변라지오TV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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