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옛날과 지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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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중산의 일생
2009년 08월 26일 10시 10분  조회:2625  추천:0  작성자: 人和

손중산의 본명은 손문이다.손문( 1866년~1925년)은 중국 근대민주혁명의 선구자이다. 이름은 문(文), 자는 덕명(德明), 호는 일신(日新) 또는 일선(逸仙)이다. 일본에서 혁명활동을 할 때 이름을 중산(中山)으로 바꾸었다.


광서  5년(1879)에 손문은 어머니를 따라 호놀룰루(檀香山:Honolulu 미국의 섬)로 갔다. 당시에 그곳의 화교자본가였던 큰형 손미의 도움으로 손문은 호놀룰루, 광주, 향항 등지를 오가며 서양식근대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았다. 1883~1885년의 중국-프랑스전쟁은 손문에게 민족의 위기를 구해야 한다는 애국적정열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청나라정부의 부패와 무능함을 목격하면서 반청사상과 자산계급정치방안으로 중국을 개혁하겠다는 사상을 싹틔우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자주 반청관련언론을 발표하면서 초기의 개량주의자 하계(何啓), 정관응  등과 자주 만나 교류를 했다.


1892년에 손문은 향항 서의서원을 졸업한후 오문, 광주 등지에서 의사사업을 하다가 뜻있는 사람들과 함께 혁명단체 창설을 준비했다.


1894년에 손문은 리홍장에게 편지를 보내 “사람은 그 재능을 다할수 있어야 하고 토지는 그 리익을 다할수 있어야 하며 물건은 그 쓰임을 다할수 있어야 하고 재화는 그 흐름이 통할수 있어야 한다”는 개혁적인 주장을 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94년 11월, 손문은 상해에서 호놀룰루로 가서 흥중회를 조직하고 “만족축출, 중국회복, 련합정부건설”을 강령으로 삼았다.


1895년 2월, 향항흥중회를 창설하였다. 같은 해 10월, 흥중회는 광주에서 봉기를 모의하였으나 사전에 루설되여 실패로 돌아갔으며 손문은 해외로 망명하였다.


1896년 10월, 영국 런던에서 청나라공사관에 체포되였으나 영국인 친구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후 손문은 유럽과 미국 등 각국의 정치, 경제 상황과 많은 류파의 정치학설을 연구하고 많은 나라의 진보적인사들과 접촉을 가지면서 그의 독창적인 민생주의리론을 완성하였다. 여기에서 삼민주의사상의 기초가 형성되였다.


1897년, 손문은 영국에서 카나다를 거쳐 일본으로 가서 정부와 재야 인사들과 교분을 맺었다.
무술변법이후 일본의 우호적인 인사들의 활동으로 손문은 강유위, 량계초(梁啓超)를 대표로 하는 개량파와 합작문제를 론의하였지만 개량파가 황제체제를 견지하고 혁명을 반대하였기에 합작은 실현되지 못했다.


1904년에 손문은 일본, 호놀룰루, 윁남, 타이, 미국 등지에서 화교와 류학생들을 대상으로 혁명을 선전하였다. 1905년에는 필리핀, 독일, 프랑스 등지의 류학생들속에서 혁명단체를 조직하고 이 시기에 국내의 혁명단체, 혁명지사들과 관계를 맺었다.


1905년 8월, 손문은 황흥 등과 함께 흥중회, 화흥회 등의 혁명단체를 기반으로 일본 도꾜에서 동맹회를 창건하였다. 여기에서 손문은 총리에 추대되였으며 그가 제기한 “만족축출, 중화회복, 민국창립, 토지소유의 균등”이 동맹회의 강령으로 채택되였다. 동맹회의 기관지 《민보》 발간사에서 손문은 제일 먼저 “민족(民族), 민권, 민생(民生)”의 3대주의를 발표하였다. 동맹회의 성립은 전국혁명운동의 발전을 강력하게 촉진시켰다. 그는 국내외 각지로 사람들을 파견하여 조직을 발전시키고 혁명을 선전하였다. 손문은 중국혁명민주파의 선봉으로 되였다. 그가 주도한 개량파 비판은 신해혁명(辛亥革命)의 강력한 사상적기초가 되였다.


1906~1911년, 동맹회는 화남 각지에서 여러차례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손문은 그러한 봉기에 전략방침을 제공해주었을뿐만아니라 해외에서 분주하게 다니면서 봉기를 위한 모금활동을 벌렸다. 비록 이들 봉기는 대중적기반이 부족하고 조직도 치밀하지 못하여 모두 실패로 끝나고말았지만 혁명의 열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청나라정부에 많은 타격을 입혔다.


1911년 10월 10일, 무창봉기를 기점으로 전국각지에서 이에 호응하는 봉기가 잇달아 일어났다. 손문은 미국에서 이 소식을 접한후 12월하순에 중국으로 돌아와 17개 성의 대표자들에 의해 림시대통령에 추대되였다. 1912년 1월 1일, 남경(南京)에서 림시대통령취임을 선포하고 중화민국 림시정부를 구성하였다. 이로써 중국은 2000여년에 걸친 군주전제제도를 종식시키고 공화국을 건설하였다. 3월 11일, 손문은 《중화민국림시약법》을 반포하였다.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의 강대한 압력과 혁명당내부의 갈등으로 인하여 손문은 1912년 2월 13일에 림시대통령자리를 원세개에게 양위하였다. 그후 1여년간 손문은 민생주의를 적극적으로 선전하였지만 정권이 원세개의 수중으로 떨어진 뒤인지라 이러한 손문의 노력은 아무런 성과를 거둘수 없었다.


1912년 8월, 동맹회는 국민당을 개편하여 손문을 리사장으로 추대하였다. 1913년 3월, 원세개가 국민당대리리사장 송교인을 암살하자 손문은 무력으로 원세개를 타도할것을 주장하였다. 7월에 2차혁명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다시 일본으로 도피하였다. 1914년 6월, 손문은 도꾜에서 중화혁명당을 조직하였고 10월 25일에 도꾜에서 송경령과 결혼하였다.


1917년 7월, 단기서(段祺瑞)의 북양군벌이 국회를 해산시키고 《림시약법》을 페기하자 손문은 서남군벌과 련합하여 광주에서 군사정부를 세웠다. 9월에 대원수에 추대되여 《림시약법》을 수호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손문은 군사정부내에서도 군벌과 정치인들의 배척을 받아 1918년 5월에 어쩔수 없이 대원수직을 사임하고 일본을 거쳐 상해로 갔다.


1917년, 로씨야10월혁명이 성공하자 손문은 1918년 여름에 레닌과 쏘베트정부에 축전을 보냈다. 1919년의 5.4운동은 그를 크게 고무시켰다. 1919년 10월, 중화혁명당을 중국국민당으로 개편하였다. 1920년 8월, 손문은 복건성과 광동성 주둔군에 회군을 명령하여 광동에서 계계군벌을 축출하였다. 1921년 5월, 광주에서 비상국회의 추대로 비상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계속하여 륙영정의 세력을 소멸시킨 다음 광동과 광서를 근거지로 삼고 북벌을 준비하였다. 광동군의 지휘권을 장악한 진형명이 1922년 6월에 반란을 일으켰다. 손문은 위험에서 벗어난후 해군을 이끌고 반란군에 대한 반격을 개시하였지만 다른 부대의 지원을 받지 못하여 하는수 없이 광주를 떠나 상해로 갔다. 진형명의 반란은 손문을 매우 어려운 상황에 빠뜨렸다. 이에 손문은 코민테른과 중국공산당의 도움을 받기로 결심하고 리대소  등 공산당인사들을 개인자격으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하도록 하였다.
1923년 2월, 손문은 상해에서 광주로 돌아가 다시 륙해군 최고사령부를 창건하고 대원수의 이름으로 전군을 통솔하고 정무를 총괄하였다. 이와 동시에 서서히 중국국민당 개편준비작업에 박차를 가하였다. 8월에 장개석을 중심으로 하는 대표단을 쏘련으로 파견하여 정치와 군사를 시찰하게 하였다. 10월에 쏘련에서 파견된 보로딘을 고문으로 초빙하였다. 1924년 1월, 손문의 주관으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광주에서 소집되였다. 여기에서 새로운 당의 강령과 헌장을 제정하여 사실상 “로씨야와의 련합, 공산당과의 련합, 로동자 농민에 대한 원조”라는 3대정책을 확립하고 중국공산당원이 참여하는 중앙통치기구를 구성하였다. 이 대회에서 통과된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선언”에서 손문은 삼민주의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을 내리고 반제 반봉건적인 내용을 보충하였다. 1924년 5월, 손문은 광주 황포 장주도에서 륙군군관학교를 창설하고 혁명군대의 설립을 위한 기초를 다졌다.


이러한 일련의 혁명투쟁을 거치면서 손문은 제국주의의 타도만이 중국의 독립과 부강을 보장해줄수 있다고 인식하였다. 1924년 10월, 손문은 광주상인단체가 일으킨 무장반란을 진압하였다. 1924년 10월, 봉계군벌의 사령관 장작림과 직계군벌의 장군 풍옥상이 련합하여 조곤이 사령관으로 있는 직계군벌정부를 전복시켰다. 풍옥상, 단기서, 장작림은 손문에게 전보를 보내 국정을 함께 론의할것을 요청하였다. 손문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11월에 광주를 떠나 북으로 갔다. 12월말에 병을 무릅쓰고 북경에 도착하였으나 1925년 3월 12일에 간암으로 북경에서 세상을 떠났다.


손문은 중국의 위대한 민주혁명의 선구자이며 중국을 개혁하기 위하여 일생동안 모든 정력을 다 쏟았다.

 


손문의 유언


손문은 1925년 3월 12일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에 세개의 유서에 서명하였는데 그것은 “국사에 대한 유언”과 “가정에 대한 유언”, “쏘련에 보내는 유서” 였다.


그중 국사에 대한 유언에서 그는 40년에 걸친 혁명경험을 총화하여 “반드시 민중들을 일깨워서 세계에서 우리를 평등하게 대하는 민족과 련합하여 함께 분투합시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혁명은 아직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니 동지들은 계속 더 노력해야 하오”라고 호소함으로써 그의 혁명주장과 혁명주의가 실현될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의 가정유언에서는 서적과 옷, 일상용품, 주택 등을 송경령에게 기념으로 물려준다 하고 자녀들에게는 그의 혁명유지를 계승할것을 요구했다.


쏘련에 보내는 유서에서는 3대 혁명정책을 실행하면서 견지하였던 반제 애국사업에 대한 그의 확고한 신념을 천명하고 세계 피압박민족의 자유쟁취전쟁에서 중쏘량국이 함께 협력하여 승리를 거두자는 소망을 표시하였다. 그리고 또 손문은 안해 송경령에게 자기 대신 쏘련을 방문하여 그가 생전에 이루지 못했던 념원을 실현시켜줄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손문의 유언에는 그의 반제 애국과 3대정책 견지라는 혁명정신이 나타나있었다.


 

제공:  연변라지오TV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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