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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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손톱
2019년 07월 15일 09시 06분  조회:453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손톱

한영남

 

1.

손톱이 문제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치솔질하고 아들 깨워 이불 개고 밥 먹고 그럴 때까지도 아무 문제 없었다.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고 U 턴해서 출근길에 오르면서부터 그는 오른손 새끼손톱이 별스레 고분고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느꼈다.

운전중이라 딱히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매끈하지 않고 약지의 옆구리 쪽을 자꾸 찌르는 느낌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왜 그런지 보려고 속력을 죽이는 순간 뒤에서 클랙슨 소리가 아우성친다.

“에라, 회사 가서 보자.”

그는 체념하고 운전에만 온 신경을 쏟았다.

그리고 출근해서는 또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잊고 있었는데 커피 마신다고 그것도 종아리도 어깨도 얼굴도 어디를 봐도 이쁘기만 한 성양이 타준 커피를 마시며 유난스레 포즈를 한껏 취하느라 했더니 갑자기 잊고 있었던 새끼손톱이 쿡 약지 옆구리를 찔러댔다. 하마트면 커피를 쏟을 번했으나 아닌 보살 하고 슬며시 커피잔을 왼손에 바꿔쥔 다음 문제의 새끼손톱을 슬쩍 내려다 보았다.

이 녀석이 언제 이렇게 자라났을가.

남자의 손톱답지 않게 갸름걀죽하게 생긴 녀석은 언제 어디에 부딪쳤는지 끝부분 절반 쯤이 부서져나갔고 남은 부분은 억척스레 자라면서 약간의 변형이 생기고 있었다. 그 부분이 이상하게 약지 쪽으로 발전해볼 양으로 잔뜩 기울기를 시작했고 약지 쪽 끝머리는 얼마 쯤 날카로워있었다.

“응, 그래서였군.” 라고 입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왜 그렇게 되였는지는 도무지 생각이 떠올라주지 않았다.

 

“강선생님, 타이곤이라고 들어보셨어요?”

“타이곤? 그게 뭔데?”

“수컷 호랑이와 암컷 사자 사이에 태여난 동물 타이곤.”

“아아, 그거. 근데 그게 왜?”

“헷갈려서요. 이거 전에도 몇번 찾아봤는데 자꾸 헷갈려요. 벌써 오늘 두시간째 이것만 검색하고 있어요. 호휴~”

“우리 말에 노새와 버새라는 말이 있지. 암말과 수당나귀 사이에 태여난 동물이 노새이고 수말과 암당나귀 사이에 태여나면 버새라고 하는. 그래서 버새도 노새도 새끼낳이는 못한다고 남자구실 못하는 사람을 놀림조로 일컬으기도 하지.”

“네. 그건 노새와 버새에 대한 거구요. 타이곤은…”

“잠간, 내 찾아봄세.”

“어, 여기 있군. 자자, 한번 정리를 합시다. 타이곤은 수컷 호랑이와 암컷 사자 사이에 태여난 동물이고 라이거는 수컷 사자와 암컷 호랑이 사이에 태여난 동물이며 리티곤은 수컷 타이곤과 암컷 사자를 교배시켜 만들어낸 잡종이다. 또 리라이거는 수컷 사자와 교접할 수 있는 암컷 라이거이고 티라이거는 수컷 호랑이와 교접할 수 있는 암컷 라이거이다. 근데 뭐가 이렇게 복잡하지?”

“제 말이 그 말이예요. 그래서 하는 얘기인데 왜 사람들은 자꾸 잡종을 만들어내는 거죠?”

“심심하겠지.”

“심심해서, 심심해서 복제양 돌리를 만들어내고 복제강아지 복제원숭이를 만들어내나요?”

“음음… 어어… 아마… 그렇… 겠지…”

“자꾸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바람에 괜히 동물사전이나 쓸데없이 두꺼워지잖아요.”

그는 갑자기 이상해진 새끼손톱을 어떻게 조리할가 유심히 살피며 뜨적뜨적 말했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그건… 발전이지… 퇴보는 아니거든…”

“뭐든 다 복제 가능해도 사상은 복제하지 못할걸요.”

“사상을 왜 복제하지 못하지?”

“의미가 없으니깐요.”

“그렇지. 그렇겠지.”

 

그는 늘 그랬다. 누구의 말이든 듣게 되면 다 일리가 있어보이고 세상사람들의 말은 거의 절대진리처럼 느껴지군 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였는지 모르지만 왠지 자기는 정말 굉장히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서 아주 굉장히 새롭고 굉장히 단단한 어떤 리론(그것을 리론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이랍시고 척 꺼내놓는데 다른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 그만 그 견고한 리론들이 다 어이없이 허물어지고 그는 번마다 패배자로 되여야 했다. 다른 사람들은 남의 말에도 척척 멋진 말들을 리론처럼 막 쏟아내지 않는가. 그들의 말들은 그대로 진리 같아 보였고 자기는 형편없이 초라한 존재로만 느껴졌다. 사상을 복제하지 못한다는 성양의 말은 얼마나 믿음직하고 론리적이고 진리 같아 보이는가.

그래서 지금 그는 성양의 말에 조금 수긍이 되면서도 사뭇 난감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계집애가 서른다섯이면 시집이나 갈 것이지 쓸데없는 말들에 관심을 가져가지고는.

그런데 따지고 보면 사전을 만들면서 단어를 어떻게 비켜갈 수가 있단 말인가. 그걸 몇시간이 아니라 며칠이 걸리더라도 해결하고 넘어가야 하는 게 사전 만드는 작업이 아닌가. 선인들이 이미 만들어놓은 부분들은 참고가 되여 쉽지만 전혀 공백으로 있는 부분을 새로 추가해야 하니 진짜 해골 아파지는 작업이 사전편찬 사업이다. 다들 뇌즙을 짜는 일이라고도 했다. 해봤던 사람들은 다시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고 안해본 사람은 그게 뭐 그리 어려우냐, 세상사람들 자기 하는 일은 누구나 다 바쁘다고 하는 법이거든 하며 픽픽 웃기도 한다. 웃어도 좋다. 모르는 사람이므로 용서가 되는 것이다. 저그만치 3천페지짜리 사전 만든다고 생각해보라. 아니 상상만 해보라. 그게 어디 애들 장난인가. 그래도 여기 꾸욱 박혀서 이 지긋지긋한 작업을 꾸준히 하는 까닭은 어쩌면 딱히 다른 일도 할 줄 모른다는 리유도 한몫 톡톡히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스피커와 스티커가 전혀 다르듯이 노새와 버새가 다르듯이 타이거와 타이곤 또 라이거와 라이곤 역시 다른 것이다. 객관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는 데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하리라. 그런데 정말 그런 새로운 품종 내지 잡종이 왜 필요한 걸가.

 

“강선생, 담배 한대 피우고 계속 하시지요.”

“그럴가요?”

“하루이틀에 끝내는 일도 아니고 뭐…”

휴계실에는 담배연기가 자오록하다.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니 담배군들은 휴계실에서만 피운다. 복도에서도 금연이다. 담배군들은 이것도 인권침해라고 주장했지만 아무도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한테 해를 끼치는 행위야말로 인권침해라는 것이다. 사전 만드는 골치 아픈 일을 하면서 담배도 시름 놓고 피우지 못한다는 게 그는 정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할 수 없는 일이였다. 녀자들은 여차직하면 미투로 걸고 들었고 담배 피우지 않는 남자들은 걸핏하면 인권을 들고 나온다. 뭐든 남들이 말하는 것은 다 도리가 선명하고 진리처럼 번뜩인다. 그래, 당신들 다 정확하고 정확하고 정확하고 정확하다구. 나 같은 바보들만 오류덩이다. 이제 됐나?

그저 강철웅 자기만이, 쇠때곰이란 별명이 붙어있는 자기만이 무엇이든 납득이 잘되지 않는 모양이다. 다들 그렇고 그렇게 쉽게 넘어가주는 일도 그한테는 자못 어려운 일이였다.

휴계실 TV에서는 동물세계가 한창이였다. 그의 머리를 아프게 했던 사자들이 줄말 한마리를 집중공격해서 포획한다. 아주 작전이다. 포복전진도 하고 앞에서 막기도 하고 뒤에서 쫓기도 하면서. 줄말은 단말마적인 발악을 했으나 끝내는 사자들의 먹이가 되여 힘있는 다리만 힘없이 허공을 삿대질한다. 그리고 사자들이 한창 맛있는 식사를 하고 있는데 하늘에서는 독수리들이 빙빙 돌며 기회를 엿보고 멀리 쯤에서는 하이에나들이 틈을 노린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짐승 중 하나가 하이에나이다. 늘 다른 짐승들이 힘겹게 잡아놓은 사냥물을 끼여들어 가로채기도 하고 먹다 남은 부패한 것을 먹기도 하는 아프리카 짐승이다. 아주 드물게 사자도 공격한다는 하이에나는 그야말로 소름 돋는 동물이 아닐 수 없다. 생긴 것마저 개처럼 멋지지도 않고 승냥이처럼 사납지도 않으며 털색갈조차 아주 음산하게 생겨먹었다.

남의 식사상에 끼여들기는 독수리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독수리들은 스스로 뱀도 사냥하고 들토끼도 사냥한다지만 지금 저 아프리카의 독수리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며 유독 다른 짐승의 사냥물만 넘본다. 그래서 사자 같은 큰 짐승들이 배를 불리거나 혹은 지나친 방해 때문에 시끄러워서 가버리면 대뜸 사냥물을 차지하고는 포식을 한다.

“하이에나들과 독수리들이 서로 싸움이나 벌리지.”

“하필 잘 살아가는 녀석들을 왜 싸움 시켜요?”

“나는 저놈들을 싫어하니깐.”

“강선생 싫다고 해도 저놈들끼리 싸워 서로 씨가 마르는 일은 없을 텐데요.”

듣고 보니 또 일리가 있다. 그는 괜히 끼여들었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괜히 끼여들어서 옆구리를 쿡 찔리고 말았다. 남들이 다 흥미진진해서 잘 보는데 철없이 끼여든 자신이 어처구니마저 없었다.

그래, 동물세계거든. 인간세상의 주변사들도 엄청 머리 아픈데 동물세계까지 내가 상관해야 하나. 내 오지랖이 너무 넓었어.

그는 내심 자책하며 약간 쑥스러워진 이 장면을 어떻게 모면할 것인가 궁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그의 생각과는 달리 전혀 걱정거리가 되지 못했다. 남들은 허허 웃고는 곧 새로운 먹이감을 발견한 하이에나들처럼 다른 주제를 열심히 뜯어대고 있었다. 미국경제가 어떻고 무역전쟁이 어떻고 이상기후가 어떻고 하면서.

멋쩍어진 그는 훌쩍 일어섰다. 담배쉼도 시간이 그만하면 비슷하게 흘러갔던 것이다.

 

오후 다섯시 반 퇴근인 그는 오후 네시부터가 가장 어려운 고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시 반부터 출근해서 자리에 못박힌 채 모니터에 온통 신경을 쏟아야 한다. 전에는 세시 쯤에 반시간 정도 휴식이 있었으나 야근을 취소하면서 반시간 휴식이 같이 취소당했다.

하여튼 뭐든 취소가 매우 쉬운 회사였다. 성급 사업단위인 데도 년휴가는 취소란다. 왜 그게 취소냐 하면 일이 바쁜데 언제 그런 휴가까지 다 챙겨서 쉬냐고 한다. 토요일에도 출근이다. 직원들 휴식은 아무렇게나 잘라먹어도 상관없는 모양이다. 대신 년말에 2천원 보상해주지 않나 반문한다.

그래, 그럼 당신이 그 2천원 가지고 주말마다 토요일 꼬박꼬박 출근하시오.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소리가 잘도 먹혀들어가는 게 이 회사의 생리이다.

사전편찬도 마찬가지이다. 본래 이런 일은 출판사에서나 할 일이지 연구원에서 할 일이 절대 아니다. 그런 걸 존경하는 원장님께서 퇴직 전에 국가2급이라도 되여볼 양으로 직원들 전체가 반대하고 상급부문에서도 반대하는 것을 부득부득 우겨서 국가프로젝트를 따내왔다. 지원금도 어마어마하게 내려왔다. 결국 직원들이 개고생해서 사전을 만들어낸다고 치자. 그러면 그야말로 토씨 하나 건드리지 않은 원장은 총기획자에 주필에 편집위원회 주임에 등등 생색낼 수 있는 곳에 전부 자기 이름자를 척척 박아넣을 것이고 누워서 떡 먹기로 국가2급 혹은 잘되면 국가1급까지 될 것이다. 직원들이야 고작 몇푼 안되는 돈 주며 콩알사탕으로 어린애 달래듯하면 될 터이고 상급자들은 그 덕에 자기네 성적도 올라갈 것이므로 칭찬마저 해줄 것인즉 이래저래 좋은 일만 쭈욱 기다리는 판이다. 원장은 원장이길래 그리고 프로젝트를 따내와서 국가지원금을 가져온 공신이길래 닥달질만 하면 되였다. 속도를 내라 그렇게 해서 어느 천년에 일 마무리하냐. 다른 곳에서는 일 바로 하지 않아서 국가지원금 다시 되가져갔단다. 갖은 위협과 공갈이 섞인 채찍질을 해댄다.

그러고 보니 그는 회사에 출근해서도 은근히 원장으로부터 부원장으로부터 서기로부터 주임으로부터 부주임으로부터 자주 옆구리 찔리워왔었다. 그게 불편하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왜 그래야 하는지, 그걸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저그만치 2천만원짜리 프로젝트이니까 거물급이 맞긴 맞다. 다만 정작 살손을 대서 일할 사람은 몇 안되고 대부분 어중이 떠중이들은 그 변두리를 슬슬 돌면서 언제 콩고물이라도 떨어질지, 고기부스러기라도 흘려질지, 그런 것에만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는 형국이다. 일이야 어떻게 진척이 되든 말든, 사전이야 틀리게 나가든 말든 그들에게는 전혀 상관 없는 일이였다.

저토록 쾌적하게 즐겁게 살아가는 족속들이 저렇게도 많이 번식되여있다니…

그는 어느 날 그런 것에 생각이 미치는 순간 마치 본의 아니게 왕의 당나귀 귀의 비밀을 알아버린 리발사마냥 안절부절 못했다. 그래도 그렇달 뿐이다. 그야말로 회사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말단의 말단인 그가 뭐라고 한대서 바뀌는 건 아무 것도 없을 터이니 말이다.

 

마침내 그 대망의 퇴근시간이 돌아왔다. 하루의 고생 끝에 하루의 락이 찾아온 것이다. 그는 익숙한 솜씨로 펼쳐져있던 갖가지 사전의 페지들에 연필이며 원주필이며 확대경까지를 부지런히 신나게 끼워놓고는 일을 마무리했다는 투의 휘파람을 가볍게 불어댔다.

휘파람소리를 내는 사람은 그 혼자만이 아니였다. 퇴근은 아무래도 즐거운 일이다. 원장이라고 해도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하기야 지금 세월에 누가 그렇게 혁명을 위하고 사회를 위하고 나라를 위하고 인민을 위한다던가. 정직하고 원칙성 강하기로 정평이 나있는 서기님도 당장 래일부터 로임을 주지 않는다고 해보라. 출근이고 뭐고 바로 할 것인가. 이것이 사회생리이고 먹고 살기 위한 인간의 본능인 것이다. 금전만능주의는 아니더라도 얼마 쯤의 경제적인 자극이 있어야 힘도 나고 열의도 나는 법이니깐.

휘파람으로 전 유고슬로비아 영화 《다리》의 주제가를 절반도 부르지 못했는데 벌써 주차장에 도착했다. 이럴 때는 신행태보 대종이 따로 없다. 다들 끼리끼리 술 마실 사람들은 식당으로 움직이고 데이트 있는 사람은 데이트 장소로 움직이고 그와 같이 아무도 불러주지 않고 아무 데도 갈 곳이 없는 무약속인들은 서둘러 집으로 향한다. 따스한 보금자리에 가서 가능하다면 약주 한잔 하고 밥 포식한 뒤 TV를 시청하거나 아이를 어르거나 무얼 해도 다 괜찮다. 마누라의 귀찮은 잔소리만 뺀다면.

차에 오르며 너무 힘주는 바람에 차문 쪽에 몸이 슬쩍 치였는데도 그는 감각하지 못하고 그대로 시동을 걸었다. 오케이! 브라보!

오늘따라 시동도 가뿐하게 잘 걸린다. 전날 수리부에 다녀온 덕이리라. 룰랄라다. 저녁에는 모처럼 맥주라도 한잔 때려야겠다. 낮 동안 두어 서너 네댓 여섯일여덟번 쯤 어떤 어떤 일에 쓸데없이 끼여들었다가 수많은 진리와 원칙들에 시퍼런 퉁을 맞았던 일이 까아만 점들로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난 뒤였다.

붉은 신호등이 들어온다. 젠장!

붉은 신호등은 참 이상했다. 한번 걸리기 시작하면 다음 신호등도 그 다음 신호등도 계속 걸린다. 푸른 신호등일 경우에는 일사천리로 그야말로 거침이 없어 지어  붉은 신호등이다가도 그의 차가 다가가면 바로 바뀌여지면서 기분을 즐겁게 해주지만 아닐 때는 아니다. 묘하게 일이 조금씩 꼬여가는 느낌이다. 이럴 때는 노래가 최고다.

 

그 사람을 부탁해요 나보다 더 사랑해줘요 

보기에는 소심해보이지만 알고 보며는 괜찮은 남자예요 

눈치 없이 데이트할 때 친구들과 나올 거예요 

사랑보다 남자들 우정이 소중하다고 믿는 바보니까요 

술을 많이 마셔 속이 좋지 않아요 

하도 예민해서 밤잠을 설치죠 

밤에 전화할 때 먼저 말없이 끊더라도 

화내지 말고 그냥 넘어가줘요 

 

왁스의 <부탁해요>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좀 오래된 노래인데 언제부터 이 노래를 좋아했는지 모른다. 그냥 처음에는 슬픈듯한 노래가 나쁘지 않아보였고 듣다가 듣다가 노래 가사를 검색해보았고 그러다 보니 깊이 꽂히게 된 노래이다. 어쩌면 자기 강철웅 자신을 쓴 노래 가사가 아닐가 싶을 정도로 그의 모든 것이 들어맞는 노래이다.

같이 따라 흥얼거리며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데 노래 가사가 별스레 더 파고든다. 어쩌면 끼여든 녀자를 원망 한마디 하지 않고 오히려 남자의 구석구석을 챙겨주는 바보스런 전 녀친이란 애초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럴 리가 없지. 어떤 바보가 떠난 남자를 저토록 챙겨준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노래 가사는 작사자 내지 세상사람들의 희망사항을 담는 경우가 많다. 사랑에 끼여든 사람을 제3자라 했던가. 이제는 그런 제기법도 아주 고삭은 어투가 돼버린지 오래다. 그런데 세상 남자들이란 다 세상 녀자들이 그래주었으면 하고 게걸스런 침을 한발씩 흘린다. 그런 남자들이 자기의 전 녀친을 저렇게 챙겨줄 수 있는가. 말도 안되는 소리지. 암 그렇구 말구.

혼자서 노래에 심취해있는데 갑자기 앞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거나 말거나다. 내 이 소중한 저녁을 그렇게 허투로 흘려버려서야 쓰나. 더구나 금요일 저녁이 아닌가. 물론 래일 토요일 출근해야 하지만 걱정할 건 없다. 대개 토요일 출근이란 약간 형식적인 것으로 좀 늦게 나가도 되고 사정이 있어 청가를 맡아도 대개 허락이 떨어진다.

그런데 너무 소란스럽다. 대체 뭔 일이길래 저런다냐?

신호등이 바뀌고 뒤에서 클랙슨이 아우성쳐도 막힌 길이 뚫릴 가망이 있어보이지 않는다. 젠장!

할 수 없이 내려서 스적스적 다가가본다. 울퉁불퉁하게 생긴 아낙 하나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잔뜩 게거품을 물고 있다. 비쩍 말라보이는 차주인은 화를 내야 하는데 말할 틈새를 찾지 못한다. 아낙 혼자서 떠드는 형국이다. 알고 보니 차가 서있는데 아낙이 다가와 광고전단지를 끼우려다 말다툼이 벌어진 모양이다. 벌써 몇년 전부터 법으로 금지되여있는 그런 행각을 이 바쁜 금요일 저녁 퇴근길에 용감하게 행하다니. 구경군들은 집으로 갈 일이 바쁘지 않은지 팔짱을 지른 채 구경만 한다. 그런데 아낙의 욕지거리가 아주 가관이다. 말로 할 수 있는 욕이란 욕은 아마 평생 알고 있는 걸 기어이 다 쏟아놓을 작정을 한 모양이다. 가히 살아있는 욕설사전이다. 저 아낙 불러다 욕설사전이나 편찬할 노릇이 아닌가. 출판사 분들은 다 뭣들 하셔?

입에 거품을 물다 물다 갑자기 바람이 휙 스쳐지나갔고 아낙은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절호의 기회이다. 비쩍 마른 사내는 갑자기 말꼬리를 잡고 툭 내뱉는다.

“수양이 없이!”

구경군들은 웃음을 참지 못한다. 욕을 아주 청결차로 들입다 흡입하고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수양 어쩌구 저쩌구. 에잇 사내라는 게 불 차고 참 못났어. 그 서슬에 불이 더 확 붙었는지 아낙이 팔소매까지 거두며 달려든다. 여차직하면 큰길에 드러눕기라도 할 기세다. 보다 못해 한걸음 나선다.

“됐구요. 다들 그만해요. 이 바쁜 퇴근길에 어서 갈 길들이나 갑시다. 별 하찮은 일을 가지고…”

그의 말에 힘을 얻었는지 비쩍 마른 사내가 갑자기 돌따서더니 아낙을 손가락으로 삿대질하며 기어이 한마디 팽 던진다.

“막돼먹은 년!”

“뭐야? 아니 지금 누굴 욕해?”

그러나 비쩍 마른 사내는 그만 차안으로 쏙 들어가서 차창을 올려버린다. 아낙이 아무리 두드려도 꿈쩍도 안한다. 갑자기 목표물을 잃은 아낙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를 발견하고 감때사납게 그한테 달려든다.

“네가 웬 참견이야? 네가 다 뭔데? 어디서 굴러온 말뼉다구냐 넌!”

갑자기 들이닥친 일이라 그도 구경군들도 잠시 얼빠진 모양새다. 누구도 나서서 말릴 념을 못했고 그는 더구나 뭐라고 했으면 좋을지 몰라 입을 헤 벌리고 말았다.

아낙의 손가락이 당장 너무 놀라 헤 벌어진 그의 입안으로 들어올 기세이다.

이런 젠장! 내가 왜 끼여들어가지고는. 친구의 옆구리도 아니고 참…

그러나 이미 놓아버린 활시위이다.

그는 급히 자기 차로 걸어갔다. 아낙이 덮칠듯 다가와 그의 옷소매를 거머쥔다. 투둑! 와이셔츠 단추가 떨어지는 소리 비슷한 것이 들리는듯했으나 경황이 없어진 그는 아랑곳할 사이도 없이 반달음에 차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그 역시 비쩍 마른 사내를 본받아 차안에 쏙 들어가 차창을 올려버렸다. 차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아낙은 몇걸음 따라오는가 싶더니 포기하는 눈치이다.

이 더러운 습관을. 이 미친 습관을. 왜 나서기를 나서냐 자꾸. 그렇다고 해결을 시원하게 보기나 하는가. 사람이 그만큼 끼여들었다가 망신당하고 옆구리 찔리고 했으면 좀 정신을 차려야지. 반팔십 나이나 어린가.

갑자기 아늑한 보금자리 어쩌구, 맥주 어쩌구 하는 생각들이 바람결에 내뿜은 담배연기 모양으로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차를 거칠게 운전하는데 갑자기 그동안 잊혀졌던 새끼손톱이 또 약지 옆구리를 쿡 찔러댄다. 이번에는 느낌이 아주 강렬했다.

오늘 저녁에는 이 녀석을 손 좀 봐야지. 암 봐야 하구 말구.

아니 근데 어디서 저런 아낙이야? 그리고 그 비쩍 마른 사내는 또. 내가 더러워서 못산다. 내가.

그는 다짜고짜 같은 회사 동료 김선생한테 전화를 걸었다.

“어디요? 나 지금 거기 갈 테니까 기다리오. 아니아니, 됐고. 반드시 갈 거요. 지금 당장.”

 

2.

“아니,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모범남편님께서 여기까지 오시게 되였습니까?”

“쓸데없는 말은 쓰레기통에 던지고 쓸데있는 말도 잠시 뒤 술안주로 남기고 일단 맥주부터 한잔 따르라구.”

“어어, 강선생님 이건 반칙입니다.”

“레드카드 받아도 지금은 맥주야.”

저으기 단호한 그의 표정에 모두들 일순 놀라는 표정이였다. 그러나 대개 남자들은 술상에서 만큼은 술 마신 뒤 뒤따를 마누라의 엄청난 잔소리 따위를 개의치 않는다. 특히 타인에게 나타날 그런 잔소리들은 오히려 술상 남자들의 기고만장을 부채질해주는 꼴이 되여서 서로 대신 상대방 마누라의 잔소리를 들어라도 줄 양으로 까치배보다 더 흰소리를 펑펑 쳐대는 게 술상 남자라는 족속들이다.

다른 사람 술상에 끼여든 꼴이 된 그는 그러나 그런 걸 따질 계제가 되지 못했다. 지금은 당장 그 욕쟁이 아낙과 비쩍 마른 사내에 대한 불미스런 기억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을 뿐이다.

쿨럭쿨럭쿨럭쿨럭.

잘도 들어간다. 화김에 마시는 맥주는 맥주 그 이상으로 도도하게 흘러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먼저 앉은 친구들의 화제에 미처 섞이지 못한 그는 그들의 이야기 흐름을 애써 파악하려고 했다.

“하던 얘기 계속하라구. 날 관계 말고.”

집장고도를 잘하는 화두는 지금 막 일본지진까지 흘러왔단다.

이런 게 또한 녀자들이 리해불가라고 왼고개를 트는 리유 중 하나이다. 남자들은 무슨 할 말들이 그렇게 많아서 술상에 앉았다 싶으면 세시간이고 다섯시간이고 일어설 줄 모르는가. 그러면서도 녀자들이 이야기를 나누어서 반시간만 초과하면 녀자들의 수다라고 무작정 혀를 끌끌 찬다. 끌끌 차실 혀가 따로 있지 반시간과 다섯시간을 어떻게 비교한단 말인가. 그러나 화장과 옷과 몸매에 대한 이야기를 빼면 할 말이 없는 녀자들이 어찌 알 수 있으랴. 작게는 나노기술부터 크게는 저 광대무변한 우주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국의 국기로부터 해양세계, 동물세계, 과일세계, 건축세계, 관계세계, 정치세계, 력사세계, 지리세계, 금융세계, 스포츠세계 등등등등 무릇 새로운 정보겠다 싶으면, 무릇 남들이 모르는 지식이다 싶으면 곧잘 화두로 등장시키는 남자들의 세계를. 그리고 그 방대한 내용이 죄다 남자들의 화제라는 것을.

“그런데 말이야.”

그가 이야기꼭지를 슬쩍 당겨온다. 오늘따라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고 속에서 부글거리는 뭔가를 어떤 방식으로든 분출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말이야. 우리는 왜 잘못된 걸 분명히 알면서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건가?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해?”

“제법 심각한데요? 오늘 무슨 일 있었죠?”

“아참 그러고 보니 강선생님 차를 운전하고 오신 것 같은데 술 괜찮으세요?”

“술맛 떨어지게 차 운전이 여기서 왜 나와? 대리운전 부르면 간단히 해결될 걸 가지고.”

“인간은 진화에 진화를 거듭했는데 왜 아직도 체모와 손톱은 그대로 남아있어야 하는가?”

술상에 자주 앉지 못하다 보니 술군들이 제일 꺼려하는 화제가 무엇인지 알 턱이 없는 그는 혼자말처럼 자꾸 떠들어댔다. 그만큼 술기운도 오르고 금방 겪었던 싫은 기억도 차츰 희미해지고 있었다.

“강선생, 술이나 마십시다. 무슨 갑자기 다윈2세라도 된 겁니까? 대체 왜 그래요?”

“군말도 많다. 대답이나 해봐.”

“어엇… 술맛 다운시키면서…”

“뭐래?”

그래서 말다툼이 일어난 것 같고 삿대질하며 상대방을 충분히 모욕을 준 것 같고 재수없이 중간에 끼여들어가지고 라는 말에 누군들 끼여들기가 아닌 사람 있나고 고함을 질렀던 것 같다.

화김에 마시는 술은 그래서 나쁘다. 금방 취하고 금방 필림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분히 충동적이여서 누구와도 잘 걸고들고 걸핏하면 말다툼으로 번진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까지 점치고도 술상에 끼여들었던 것은 지극히 퇴근길에서 조우했던 그 욕쟁이 아낙과 비쩍 마른 사내 탓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였다.”

그는 몇잔을 더 마셨고 취기가 훨씬 더 올랐고 대리운전 불러주는 동료들을 뿌리치면서 아무리 흙이 돼도 자전거에 올라앉으면 바로 집까지 가던 이야기를 빨래줄처럼 줄레줄레 널어놓으며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왁스의 <부탁해요>가 차안을 넘어 밖에서도 들릴 지경이였다.

 

드라마를 좋아하고 스포츠도 좋아해요 

야한 녀자 너무 싫어하고 담배 피는 녀자 싫어하지요 

절대 그 사람을 구속하지 말아요 

그럴수록 그는 멀어질 거예요 

사랑한단 말도 너무 자주 표현하지 말아요 

금방 싫증낼 수 있으니 

혹시 이런 내가 웃기지 않나요 

그렇게 잘 알면서 왜 헤여졌는지 

그 사람을 사랑할 때 리해할 수 없었던 일들이 

헤여져보니 이제 알 것 같아요 

그 사람 외롭게 하지 말아요 

 

3.

이튿날 아침 쓰린 속을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화장실 벽을 짚고 헛구역질을 하다가 문득 눈물 그렁한 눈으로 새끼손톱에 눈길을 꽂아버렸다.

약지 옆구리를 사정없이 찔러대던 그의 새끼손톱은 가쯘하게 잘라져있었고 매끈하게 다듬어져까지 있었다.

출처:<장백산>2018 제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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