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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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서정수필] 삼월에 댓글:  조회:207  추천:0  2023-09-01
서정수필 삼월에   삼월의 하늘로 삼월의 구름이 정처없습니다 삼월의 바람이 훈훈한가운데 서있는 나는 그러나 삼월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내곁을 떠난것이 삼월입니다 그 사람은 그때 내게서 삼월까지 가져갔고 그 뒤로 나의 달력에서는 삼월이 사라졌습니다 눈이 왔으면 비가 왔으면 하고 바라도 삼월에는 눈도 비도 모질이 모질이 적습니다 삼월의 정수배기에 서서 이월도 돌아보고 사월도 건너다보며 아무래도 나는 삼월을 누리지 못합니다 꽃샘을 하는 바람이 부는 좋은 삼월이라고 누가 그랬습니까? 삼월부터 봄이고 봄이면 사람들이 한결 밝아질거라고 누가 그랬습니까? 해빛은 극상 따사롭습니다 그 따슨 해빛이 삼월을 잃은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한결 가벼워진 옷차림들이 거리로 흐릅니다 그 화사함에 웃음을 보태지 못하는 나는 그야말로 바보스럽습니다 내게 있어 삼월은 낮도 밤도 없습니다 내게 있어 삼월은 맛도 멋도 없습니다 내게 있어 삼월은 삼각형도 타원형도 아닙니다 그리고 삼월에는 삼월의 이야기를 해야겠는데 삼월은 내게 시도 주지 않고 붉은 피와 푸른 잉크를 말리웁니다 누가 만일 내게서 삼월을 사가신다면 나는 내 젊음의 한토막까지 서슴없이 덤으로 얹어드리겠습니다 삼월이 저렇게 아지랑이로 쨍 빛나도 나는 참말 삼월의 사람은 아닙니다 저만치 유월이 구월이 매콤하고있지 않습니까?  
13    설이 오면 두근거리던 이 가슴을 댓글:  조회:213  추천:0  2022-03-11
설이 오면 두근거리던 이 가슴을 □ 한영남 양력설이 다가올 즈음은 한해 동안 사용해오던 탁상력 따위들을 새 력서로 갈아주고 새해 첫 스타트부터 계획들도 알차게 세우면서 새로운 한해를 즐겁게 멋지게 행복하게 보낼 꿈과 희망으로 부풀어오르는 갈림목이기도 하다. 낡은 해와 새해를 가름하는 양력설은 그래서 언제 봐도 새롭다. 그러나 우리한테 양력설은 새해 첫날 정도로만 각인될 뿐 설이 아니다. 본격적인 설은 음력 정월 초하루인 음력설을 설로 알고 있다. 하긴 설빔 같은 우리 말이 무색하리 만치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새옷도 척척 사입을 수 있고 색다른 음식도 가격에 크게 제한받지 않으면서 마음대로 사먹을 수 있는 요즘이다. 그러니 음력설이라 해도 오랜만에 온 집 식구가 모여서 얼굴을 확인하는 날 정도라고나 할가. 거기에 친척이라도 오는 경우면 그야말로 설분위기가 무르익는다. 예전에는 음력설을 맞으면 벌써 일주일에서 열흘 아니, 부지런한 살림군들은 아예 한달 정도 시간을 가지고 조금씩 조금씩 설음식들부터 준비해왔다. 눈발을 헤치며 장을 봐오는데 간혹 산토끼나 꿩 같은 것을 만나게 되면 값을 크게 흥정하지도 않고 사버린다. 또 집에서 직접 해야 하는 음식들도 미리미리 식재료를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어릴 때 집에서 순대도 만들고 엿도 달였었다. 방학이라지만 소조공부를 해야 하므로 낮에 친구네 집에 가서 소조공부를 하다가 집에 돌아오면 어느새 가마에서 엿이 푹푹 소리를 내며 끓고 있었다. 내가 돌아온 것을 본 할머니는 주걱으로 엿을 스윽 긁어서는 내 앞에 쑥 내민다. 나는 냉큼 입을 가져다대다가 너무 따가워서 그만 뒤로 벌렁 자빠진다. 할머니는 그것이 또 우습다고 허리를 부여잡으신다. 엿이 다 달여지면 그것을 둥근 모양으로 식혀준다. 엿이 굳어진 것을 우리는 판대기엿이라 불렀고 그것을 창고의 독에 넣어두었다. 그러다가 설에 오락을 한바탕 벌리고 난 다음 군입질거리가 생각날 때면 그 판대기엿을 가져다가 칼등으로 툭툭 쳐 까부시여서는 먹군 했다. 그런데 누가 그 추운 겨울밤에 어두운 창고에 가서 엿을 가져오느냐가 항상 문제였다. 원칙만 내세우는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화투놀이나 윷놀이에서 진 팀이 엿을 가져와야 한다고 우기셨다. 팀을 잘 만나야지 지는 날이면 개고생이다. 어린 나이에 어둡고 음습하며 랭기만 감도는 창고는 썩 우호적인 장소가 아니였다. 게다가 눈보라가 왱왱 몰아치는 겨울밤에 엿 가지러 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벌칙이였다. 나는 누나 때문에 졌다고 투덜거리며 커다란 아버지의 외투를 머리꼭대기부터 눌러쓰고는 손전지를 켜들고 앞장을 선다. 나보다 세살 이상인 누나는 여유롭게 뒤따르지만 정작 창고앞에 이르면 나는 걸음이 자꾸 느려지고 그렇게 되면 누나가 내 손에서 열쇠를 나꿔채고는 앞장서서 창고로 들어간다. 시커먼 구석에서 당장 무슨 괴물이라도 나올 것 같은 그런 느낌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억지로 참는데 그때따라 누나를 한번 놀래울 생각이 갑자기 떠오른다. 나는 갑자기 손전등을 꺼버리며 우왁- 소리를 질러버린다. 그 바람에 가뜩이나 긴장해서 손더듬을 하던 누나는 그만 와- 울음보를 터뜨린다. 나는 누나가 울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터라 그만 더럭 겁이 나서 같이 울어버린다. 우리의 울음소리에 깜짝 놀란 식구들이 다투어 창고로 돌진해온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어머니는 애두 참 하고 혀를 끌끌 차고 아버지는 너 이노옴 어디 보자 하는 투가 력력하시다. 막상 장난을 하고 나니 후폭풍이 예감되면서 더럭 후회가 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렇게 가져간 엿을 입 가득 물고 먹을 때면 온갖 시름과 걱정도 다 사라지고 만다. 방학숙제를 잔뜩 미루고 하지 않은 그 엄청난 걱정까지도… 엿은 그렇다치고 순대는 우리 집의 전통명절음식이다. 제정 때 순대장사, 국밥장사, 랭면장사를 하셨던 할머니의 호령에 따라 순대 만들기는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순대를 만들려면 밸을 깨끗이 씻는 것이 우선이다. 돼지밸을 씻는 임무는 나와 아버지의 몫이고 속을 만드는 것은 할머니, 어머니, 누나와 녀동생의 몫이다. 물론 할머니의 레시피대로 어머니가 만드셨지만 누나와 녀동생은 기어이 자기네도 순대 속을 만들었다고 우긴다. 밸은 먼저 물에 몇번 헹구어 대충 험한 것들을 제거한 다음 냄새를 잡는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주로 된장과 밀가루로 빨래하듯이 주물러서 냄새를 제거했다. 요즘 식당들에서는 세탁기에 돌려낸다고도 하는데 그렇게 하면 맛이 순수하지 않다. 밸 손질은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다. 때론 오전 내내 그 일만 하기도 한다. 순대속은 대체로 선지와 찹쌀과 멥쌀을 적당히 섞어주고 거기에 시래기를 넣어준다. 일단 그 정도만 해도 순대속 모양새가 나지만 거기에 조미료들을 곁들여야 한다. 소금 적당량, 후추 적당량, 아지나모도 적당량 등을 한데 넣고 잘 섞어주면 된다. 이제 밸도 손질이 끝나고 속도 다 되였으니 넣어야 한다. 아버지는 빈 병을 가져다가 실에 휘발유를 적셔 병아가리에서 우리 손으로 한뼘 정도 되는 데를 한고패 둘러서 매준다. 그리고 거기에 불을 붙이고 밀대로 톡톡 치면 신기하게도 병아가리가 뎅겅 잘라진다. 밸의 한끝을 실로 잘 매고 다른 한 끝에 금방 잘라낸 병아가리를 거꾸로 집어넣으면 그게 깔대기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작은 사발로 순대속을 떠서 넣는데 할머니는 눈짐작으로도 고루 섞어서 넣어줘야지 너무 되게 들어가고 너무 묽게 들어가면 이제 삶을 때 터진다고 훈계가 이만저만이 아니시다. 그럭저럭 순대속을 다 넣으면 마당에 땅가마를 걸고 불을 지핀다. 가마에서 김이 실실 피여오르고 물이 벌렁벌렁 끓기 시작하면 순대를 넣어주는데 조심하지 않으면 끓는 물이 튕겨 손을 데기 쉽다. 그렇게 한참을 끓이다가 아버지가 느닷없이 싸리꼬챙이를 가져오라고 하신다. 순대를 삶는데 장작을 때면 되지 갑자기 불 피울 때나 쓰는 싸리는 왜? 그래도 군말 못하고 다소곳이 가져다드리면 아버지는 그 선뜩거리는 손칼로 싸리꼬챙이를 연필처럼 잘 깎아준다. 뭔가 일이 생길 것 같은 조짐이지만 재미있고 신기하다. 가마덮개를 열면 물이 사품치고 그 사품치는 물속에서 순대들이 빙글빙글 돌아눕는다. 그때면 아버지는 금방 깎은 싸리연필로 순대의 몸통을 쑤욱 찔러준다. 그러면 때론 김이 새여나오고 때론 물총을 냅다 쏘기도 한다. 순대속을 넣을 때 공기가 같이 들어가기에 이렇게 삶을 때 찔러주지 않으면 순대가 다 터져 먹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넣은 순대를 잘 알아보려고 일부러 파란 색실로 끝을 묶어두었었다. 그런데 그게 참 어리석은 짓이였다. 내가 넣은 순대는 속을 고루 잘 저어서 넣지 않았기에 순대 굵기가 고르지 않고 가늘고 굵고 울룩불룩 아주 가관이였다. 근데 파란 실로 묶어놓아서 금방 들통이 나버렸다. 이런 참 괜한 짓을 했잖아? 순대는 아무리 열심히 만들고 삶아도 혹시 터지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순대가 터지면 국가마 밑굽에 순대밥이 가라앉게 되는데 그것을 순대국이라고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빨이 부실해서 순대껍질을 씹는 게 참 고역이라 그 순대국을 잘 먹었다. 엿도 되였고 순대도 되였으면 이제 폭죽이나 사가지고 설이 오기만 기다리면 되였다. 드디여 그 대망의 그믐날이 된다. 그때는 텔레비죤이 없던 시절이라 라지오를 틀어놓고 온 집 식구가 모여앉아 만두를 빚었다. 어머니는 솜씨가 잽싸서 아버지, 누나, 녀동생, 나 넷이 싸는 만두피를 혼자서 거뜬히 담당하셨다. 만두속은 두부를 보자기로 싸서 꾸욱 짜 물기를 제거한 다음 부셔뜨린다. 그리고 배추김치를 역시 물기를 꾹 짜서 제거한 다음 그대로 잘게 다져서 한데 섞어준다. 거기에 고기를 발라낸 꿩의 뼈를 다져서 같이 섞어준다. 꿩의 뼈는 잘 다져야지 아니면 먹기 어려웠다. 이 만두속에는 후추가루가 상상 이상으로 많이 들어가서 아주 진한 후추냄새가 풍겨야 만두가 제맛을 낸다. 물론 만두를 삶을 때는 꿩고기로 끓인 꿩탕이 제격이다. 그믐밤이 깊어지면 폭죽소리가 점점 요란해지고 그러면 어서 나가서 터치지 못해 속이 바질바질 탔다. 그러나 아버지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고서는 누구도 감히 나가서 폭죽을 터칠 궁리를 하지 말아야 했다. 드디여 열한시가 넘어 자정을 향해 시계가 바쁜 걸음을 재촉하면 아버지가 이제 폭죽 터칠가 하신다. 야호! 만세 삼창이 나오기도 전에 신을 꿰고 밖으로 내달린다. 뒤에서는 옷을 더 입으라는둥 모자를 쓰라는둥 어머니의 잔소리가 잔등을 매섭게 갈겨댄다. 그렇게 폭죽을 터치고 집에 들어오면 만두가 다되여서 우리는 그것을 먹으며 새날을 맞았다. 그믐밤에 자면 눈섭이 하얗게 된다고 해서 잠이 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버텨보려고 하다가 결국 쓰러져 자버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제는 환경오염이다 방화다 해서 폭죽도 터치지 못하게 하고 새옷을 입어도 기뻐서 입이 귀에 걸리는 일이 생기지도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다 같은 설인데 이제는 설풍속도 많이 달라져서 설 쇠는 재미는 많이 적어졌다. 그리고 설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는 말을 하면 요즘 애들은 픽픽 웃을지도 모른다. 연변일보
12    [두만강칼럼]넘버원이 아닌 온리원을 꿈 꾸라 댓글:  조회:421  추천:0  2021-01-28
온리원이라는 말이 대세이다. 중한 수교 이후 넘버원이라는 말이 오래동안 류행되더니 요즘은 온리원 쪽으로 돌아졌다. 둘 다 영어의 한국식 표기인데 대충 그 뜻을 헤아려보면 넘버원은 ‘으뜸’이라는 말이고 온리원은 ‘하나’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왜 으뜸이 아니고 하나를 더 선호하게 되였을가? 넘버원은 언제라도 넘버투 혹은 넘버쓰리,넘버포 등에 의해 정복될 위험을 안고 있다. 어디 넘버들 뿐인가. 이름도 없는 무명소졸이 급속히 치고 올라와 무너뜨릴 가능성마저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온리원은 오롯이 자기만을 고집하고 세상에 둘도 없는 혼자라는 리념을 내세우기에 대체불가인 것이다. 희유금속이 왜 비싸게 팔리는지 아는가? 철이나 구리 등 일반금속과 달리 매장량이 적은 데다가 한곳에 집중되여있으며 추출이 어려운 금속이 바로 희유금속이다. 리튬, 니켈, 인듐, 몰리브덴, 세슘 등이 바로 이 희유금속에 속하는데 우리의 일상에서 사용량은 결코 많지 않지만 최첨단 IT산업, 자동차, 철강 등 주요 산업의 핵심소재로 쓰이고 있으며 그래서 ‘산업의 비타민’으로까지 불리운다. 황금보다 더 비싸게 거래되는 오로지 리유라면 바로 그 희소성 때문이다. 온리원이 제대로 먹혀들어간 사례로 볼 수 있겠다.   중국 영화계에 까까머리가 트랜드마크인 갈우라는 남자배우가 있다. 그는 금계상, 대중영화백화상 등 중국 영화계의 모든 영화상을 싹쓸이했고 제47회 칸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까지 받은 영화대가이다. 그런데 이 갈우는 당시 사람들의 심미관념으로 볼 때 결코 남자주인공의 형상이 아니였다. 당시 중국 영화계에서 남우주연으로 정평이 나있던 배우들로는 왕심강(《정찰병》, 《렬화 속에서 영생하리》, 《지음》,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전파》 등 영화들에서 남우주연을 맡은 배우), 당국강(《남해풍운》, 《오늘 밤도 별은 찬란하네》, 《적수하를 네번 건느다》, 《높은 산 아래에 놓인 화환》, 《장정》, 《삼국연의》, 《건국 수령 모택동》등 영화와 드라마의 남우주연을 맡은 배우), 진도명(《말대황제》, 《강희왕조》, 《초한전기》, 《당산대지진》 등 영화와 드라마에서 남우주연을 맡은 배우) 등 쟁쟁한 배우들이였다. 그들은 말 그대로 당대 꽃미남들이였고 그래서 전국의 수많은 소녀팬, 아줌마팬, 할머니팬들의 우상이였다. 그러나 갈우는 워낙 형상이 우습게 생긴 데다가 젊은 나이에 번대머리까지 되였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고 자신만의 형상창조를 위해 고심했다. 행운은 준비된 자에게만 찾아온다고 했던가. 마침내 갈우는 중국에서 판도를 바꾼 이름 난 드라마 《편집부의 이야기》에서 자신만의 특색연기로 대중들의 시선을 한몸에 집중시키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형상창조를 위해 번대머리를 아예 까까머리로 밀어버리고 지금까지도 그 까까머리를 고집하고 있다. 중국 영화배우들의 까까머리는 모름지기 저명한 소품배우 진패사와 갈우로부터 시작되였을 것이다. 갈우는 넘버원을 다투지 않았다. 결코 남우주연을 욕심내지도 않고 오로지 자신만의 개성 있는 형상창조를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경주해왔다. 그랬기에 그는 더욱 연기파로 소문날 수 있었고 그의 연기는 오로지 갈우 한사람만의 독보적인 것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갈우의 경우는 살을 깎고 뼈를 깎아서 천편일률적인 미를 추구하는 요즘과 사뭇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혼자만의 독보적인 존재가 결국 세상사람들한테 먹힌다는 것을 그는 몸소 실천으로 보여준 사람중의 한사람이다. 서비홍을 모방하는 사람은 아무리 말을 잘 그린다 하더라도 서비홍을 영원히 초과할 수 없다. 그러나 당나귀를 열심히 그리고 당나귀그림에서 만큼은 가히 독보적인 존재라고 불리울 수 있다면 적어도 서비홍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은 자기홍보시대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비슷한 학력, 비슷한 실력, 비슷한 경력 등으로는 경쟁에서 이겨낼 수가 없는 것이다. 반드시 자기만의 특색을 발굴하고 그것을 극대화시켜야 비로소 세상의 인정을 받게 된다. 즉 세상에 단 한명 밖에 없는 자신을 홍보해야 하는 것이다. 타인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상처투성이 넘버원이 아니라 자신만의 가치로 행복을 창출하는 창의적인 온리원이 되여야 진정한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얘기이다.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이 인정되는 순간 당신은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다. 누구나 대체가능한 사람은 인재일지는 몰라도 그런 인재의 보편성 때문에 결국 인정받기 어렵게 된다는 말이다. 글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은 이미 글이 아니다. 같은 이야기도 다르게 표현될 때 그 가치가 인정되며 독자들을 자석처럼 끌 수 있는 것이다. 보도 블록은 아무리 아름답게 만들어져도 결국 보도 블록일 뿐이다. 그 보도 블록을 고이 모셔다가 집에 수석으로 소장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강변에 널려있는 돌들이라 해도 모양이 기괴하고 다른 돌들과 특이하게 생기면 수석으로 모셔져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름지기 이 ‘하나’를 추구해야 한다. 오로지 나만의 것을 창출해서 개성 창조에 주력할 때 비로소 훌륭한 작가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아마츄어는 넘버원을 추구하지만 프로는 온리원을 꿈 꾼다. 길림신문
11    득롱망촉 댓글:  조회:468  추천:0  2020-12-08
[두만강칼럼]득롱망촉 한영남 득롱망촉(得:얻을 득. 隴:흐릿할 롱. 望:바랄 망. 蜀:나라이름 촉.)―롱(지금의 감숙성)의 땅을 얻으니 촉(지금의 사천)나라까지 갖고 싶다는 말로 끝없는 욕심을 빗대여 이르는 말이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은 거야 글쎄 인간의 본능이라 하겠으나 과유불급이라 했은즉 넘쳐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뜻이다. 사람의 생명은 마치 한척의 배와도 같다. 만일 인생항로에서 감당능력을 초과한 물욕이나 허영심을 적재한다면 그 배는 곧 좌초하거나 침몰하기 십상이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비비(일명 개코원숭이)를 어떻게 잡는지 아는가. 고정된 작은 나무상자 속에 비비가 가장 좋아하는 견과류를 넣어두고 상자에 비비의 앞발이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구멍 하나를 뚫어놓는다. 비비는 일단 상자 속의 견과류를 움켜쥐면 커진 주먹 때문에 앞발을 빼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비비는 손에 쥔 물건은 절대 놓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이런 방법으로 비비를 잡군 한다. 사람들은 늘 “왜 먹이를 놓아버리고 도망가지 않는가?” 라고 하며 비비의 우둔함을 비웃군 한다. 그러나 사실 비비만 그런 착오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도 물욕이 일정한 정도에 이르면 오직 눈앞의 리익에만 집착하게 되며 그에 따르는 위험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모모한 어른들이라고 머리가 아둔해서 들통이 나고 감옥행을 하겠는가. 어떤 고위급 관원이 잡혀나오는 걸 보면 억소리를 넘어서 수백억의 돈을 삼켰다고 한다. 100억원의 돈을 다 쓰려면 인생 100년을 산다고 치고 하루 평균 약 30만원에 달하는 돈을 써야 한다. 불쏘시개를 하지 않는 한, 그리고 필요 이상의 집을 구매하거나 고급 승용차를 매일 갈아대지 않는 한, 양말 갈아신듯이 녀자를 갈아대지 않는 한, 정말 써버리기도 곤난한 돈이다. 그런데도 1억이 생기면 10억을 노려보고 10억이 생기면 100억을 노려본다. 그게 인간의 욕심이다.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이 세상을 통째로 준대도 만족을 모를 것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그러나 각도를 바꾸어서 개인적인 발전을 위한 욕심이라면 어디까지나 격려할 일이다. 책을 억수로 많이 본다든가 무릎 벗겨지도록 열심히 일을 한다든가 성실함과 근면함을 반죽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든가 그런 욕심이라면 내볼 만한 것이고 세인들의 박수를 받아도 무방할 것이다. 하긴 세상사람 모두가 세한삼우(岁寒三友. 겨울에도 지조를 지키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나무.)를 닮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인간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마지노선은 지켜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전문가들이나 지성인들은 인간의 타락을 문화에 대한 외면에서 그 리유를 찾고 있다. 문화를 멀리하고 오로지 동물근성만 키우다가는 쉽게 탈이 나는 것이 우리들 삶의 생리인 것이다. 밝고 건전하고 미래지향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은 거의 모든 인간들의 리상이다. 문화수양 쌓기가 급선무로 나서고 있는 요즘, 독서를 권장한다. 왜냐 하면 독서는 사람들을 더욱 바른 삶을 살도록 채찍질해주기 때문이다. 길림신문 
10    집중력에 대하여 댓글:  조회:467  추천:0  2020-09-03
[두만강칼럼] 집중력에 대하여 한영남 무슨 일을 하든 집중력이 중요하다. 일이 진척되지 않고 공부성적이 오르지 않는 것 따위에 고민하기전에 우선은 집중력을 닦아야 한다. 옛 성인들이 말하길 “그 인물이 일을 완수할지 여부는 그의 불 켜는 방법, 마루를 쓰는 방법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눈앞의 작은 일이라도 마음을 담아 행할 수 있다면 중요한 일도 반드시 완수할 수 있다는 말이 되겠다. 춘추시대 진(晋)나라에는 왕자기(王子期)라는 유명한 마부(馬夫)가 있었다. 조(趙)나라의 대부 양주(襄主)는 왕자기에게서 말 부리는 기술을 배우고 있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그에게 마차달리기시합을 청했다. 그러나 양주는 세번이나 말을 바꾸었는 데도 모두 지고 말았다. 양주는 몹시 불쾌하여 왕자기에게 말했다. “그대는 나에게 말을 다루는 기술을 전부 다 가르쳐주지 않은 것 같소.” 이에 왕자기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저는 비책(秘策)까지도 다 가르쳐드렸습니다. 다만 대부께서 그것을 잘못 받아들이신 것 같습니다. 말을 제어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의 몸과 수레가 일치되여야 하고 또 부리는 사람과 말의 마음이 일치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비로소 빨리 달릴 수 있으며 또 먼곳까지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께서는 저를 앞지르고저 초조해하고 또 앞서 달릴 때에는 제가 뒤쫓아오지나 않을가 걱정하셨습니다. 말을 달려 먼곳까지 경주할 때에는 앞설 수도 있고 뒤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든지 뒤서든지간에 언제든지 저에게 마음을 쓰고 계시니 그래 가지고서야 어떻게 말과 일치되여 보조를 같이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대부께서 저에게 뒤쳐진 까닭입니다.” 일을 할 때 잡생각을 없애고 눈앞에 있는 것에만 집중하면 기대 이상의 좋은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집중력 말이 나오니 어릴 때 그렇게 성행하던 ‘기공이야기’가 떠오른다. 지난 세기 80년대초 중국영화계에는 시대를 가름하는 영화 한부가 혜성처럼 나타나 원자폭탄처럼 신주대지의 상공에서 작렬했다. 바로 향항무술영화 《소림사》가 그 주인공이다. 이 영화가 상영되면서 중국에서는 갑자기 무술붐이 일어나 너도 나도 무술을 배운다고 야단을 떨었다. 어떤 극성팬들은 직접 하남성 숭산에 있는 소림사를 찾아가 중이 되는 것도 불사하며 무술을 배워주십사 청을 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 무술붐에 이어서 나타난 것이 바로 ‘기공술’이다. 기실 기공은 중국의 전통적인 보건, 양생, 거병 방법의 일종으로 호흡의 조절과 신체활동의 조절 및 의식의 조절 따위를 수단으로 삼아 신체를 단련하고 병을 예방 치료하며 장수를 도모하고 잠재능력을 개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심신단련방법이다. 쉽게 말하면 인체내에 존재하는 기를 자유자재로 움직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기공에서 가장 골자중의 골자가 바로 ‘집중력’이다. 집중력이 떨어지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기를 ‘움직인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인 까닭이다. 인간의 잠재력 역시 고도의 집중력에 따라 다다소소 개발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나무저가락을 쥐고 집중력을 발휘해 힘차게 던지면 널판자에 쇠꼬챙이처럼 척 꽂히는 것을 우리는 영화같은 데서 많이 보아왔다. 무술영화에서 보면 눈을 부릅뜨고 집중력을 발휘해 “얍―” 소리와 함께 맨손가락으로 돌에 구멍을 뚫는 것도 우리는 많이 보아왔었다. 현실적으로 가능할지는 전문가가 아니라서 왈가왈부할 수 없으나 집중력에 대한 칭송 정도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공부 잘하는 애들을 보면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그런 애들은 공부할라치면 설령 곁에서 아무리 떠들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해야 할 공부를 충분히 잘해낸다는 것이다. 집중력이 그 진가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칼럼같은 것도 정신을 고도로 집중해서 쓰면 한시간도 되지 않아 마무리할 수 있겠으나 이 생각 저 생각 넘나드는가 하면 사이트를 뒤적거리고 누구와 위챗으로 얘기도 나누고 그럴라치면 하루종일 컴 앞에 앉아있어도 마침부호를 찍어내지 못할 것이다. “하면 된다”는 말도 집중력을 념두에 두고 한 말로 풀이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집중력은 얼마나 우리에게 필요한지 모른다. 길림신문
9    끝날 줄 모르는 백색전쟁 댓글:  조회:680  추천:0  2019-11-19
[두만강칼럼] 지난 세기말에 급부상한 백색공포는 비닐봉지에 포위된 인간들의 아우성이였다. 사용하기 편리하고 단가도 비싸지 않은 비닐봉지는 세상에 나오자 마자 대뜸 사람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그전에 사용하던 비닐가방, 그물가방, 풍천가방 등은 하루아침에 거리바닥에 나앉는 신세가 되여 그야말로 력사무대에서 조용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대신 엷고 하얀 비닐봉지(처음에는 요즘처럼 다양한 색상의 비닐봉지가 아니라 오로지 하얀색 한가지 색상 뿐이였음.)가 일상의 생필품으로 자리 잡았다. 남새를 사도 육류, 어류 등 시장에서는 모든 것을 비닐봉지에 담아주었고 지어 상점에서 공책을 사도 연필 한대를 사도 비닐봉지에 담아주군 했다. 그러자 삽시에 세상은 하얀 비닐봉지투성이로 변해버려서 사처에 비닐봉지가 날리기 시작했다. 전선줄에 휘감기고 가로수에 휘감기고 길가는 행인의 뺨을 후려치는가 하면 승용차 앞창문에 턱 달라붙어 뜻밖의 사고를 빚어내기도 했다. 이제 비닐봉지가 없는 세상은 상상도 할 수 없으리 만치 되여버렸다. 그런데 그 비닐이 자연분해되여서 무기물로 돌아가기까지 저그만치 500년이 걸린다고 한다. 물론 요즘은 이 백색공포의 위해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일회용 사용을 절제하고 비닐봉지 대신 종이봉투를 사용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도 전세계적으로 아직도 년간 5천억개에서 1조개의 비닐봉지가 소비되고 있다고 한다. 그야말로 우리는 어마어마한 비닐봉지의 포위 속에서 호흡하고 생활하고 있는 셈이다. 백색공포, 우리들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는 시점이 되였다. 새 세기에 접어들면서 백색전쟁으로 일컬어지는 소금과의 전쟁은 고혈압의 최대 적으로 각인된 소금 특히 나트륨과의 맞대결이였다. 소금 즉 염화나트륨에서 나트륨이온은 고혈압을 유발하는 가장 적확하고 실효적인 공로자인 셈이다. 소금섭취량을 줄이자는 목소리 역시 아주 오래전부터 불거져왔다. 세계보건기구에서 권장하는 1일 나트륨 섭취량은 2그람이다. 서구유럽인들의 1일 평균 섭취량을 보면 대략 1.5그람인데 비해 우리 조선민족의 경우 4.6그람 정도라고 한다. 이는 찌개류, 김치류, 젓갈류를 즐겨 먹는 우리들의 식생활패턴과 직접 관계되는 사안이다. 한국의 경우 라면소비량이 세계 으뜸을 차지한다. 그런데 그 라면 1봉지의 나트륨함량은 약 1.7그람이란다. 환언하면 라면 1봉지만 먹어도 그 하루 나트륨섭취량을 충분히 완성하는 정도라는 계산이다. 그외 인스턴트(즉석) 식품 속에 함유된 나트륨은 계산에 넣지 않고도 말이다. 요즘은 저나트륨염이라는 것이 시중에서 팔리고 있는 실정이다. 말 그대로 고혈압에 좋지 않다는 염화나트륨의 량을 줄이는 대신 인체에 거의 무해하지만 짠맛을 가지고 있는 염화칼륨이 다량 포함된 소금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예전에는 고혈압, 심장병, 당뇨병을 일컬어 ‘3대 부자병’이라고 했다. 운동을 잘하지 않고 출근해서는 신문이나 뒤적이고 차물이나 마시는 일부 간부들에게나 있을 법한 병이라는 말이다. 그 ‘3대 부자병’의 근원이 운동부족, 부적절한 식사패턴 등이라고 하니 그냥 비아냥조로 말했던 것이 적중한 셈이다. 짠맛이 없는 음식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모든 음식의 맛을 제대로 낼 수 있는 조미료에서 소금은 으뜸이다. 짠맛이 들어가지 않으면 별의별 조미료를 다 집어넣어도 음식맛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바로 그 짠맛이 고혈압에는 직격탄이라고 하니 세상 오래 살려면 조심하는 게 상수가 아니겠는가. 이제 식탁에서 또 다른 백색전쟁이 펼쳐지고 있으니 바로 설탕과의 전쟁이다. 우리가 아주 어릴 때는 설탕이 비싸고 배급제여서 사카린을 많이 사용했었다. 소학교 때 하학해서는 식장문을 아무리 열어보아도 먹을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귀동냥으로 얻은 방법 대로 ‘과학실험’을 시작한다. 먼저 물 한고뿌 떠서는 거기에 사카린을 두알 내지 세알 집어넣고 잘 휘젓는다. 그리고 거기에 식용소다를 반숟가락 정도 넣고 또 휘젓는다. 그 다음 식초를 몇방울 떨어뜨린다. 그러면 삽시에 하얀 거품이 부글거리다가 물고뿌벽에 거품들이 송알송알 맺힌 채로 조용해진다. 일명 우리 끼리 통하던 ‘사이다’였다. 나중에 사카린이 몸에 나쁘다고 식장에서 자취를 감추고 그걸 대신한 것이 바로 설탕이다. 눈덩이처럼 하얗고 깨끗하고 정갈한 설탕은 이래저래 쓸모가 많았다. 사탕도 귀하던 시절 첩약이나 쓰거운 환약 따위를 먹고 구역질이 날 것 같으면 할머니는 설탕을 한숟가락 떠주군 했다. 그 때 먹던 그 단맛! 그것은 천상의 맛이였다. 그 맛을 잊지 못해 하학하면 식장에 매달려 설탕단지에서 설탕을 부지런히 축내군 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그렇게도 아끼던 설탕 담는 유리단지를 깨먹고 말았다. 그 때 내 어린 생각에도 그 유리단지는 ‘국보급’은 아니더라도 우리 집 ‘가보급’에 해당되는 굉장히 어마어마하게 비싼 그릇이였다. 그것을 깨먹은 나는 그 좋은 설탕맛이고 뭐고 새까맣게 잊은 채 바로 그 위기를 모면할 궁리에만 골몰해야 했다. 다 지나간 얘기지만 설탕은 귀한 것이였고 결혼잔치라도 치르는 경우 동네 이웃들 설탕표를 얻어서 구매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던 시절이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설탕이 당뇨병의 적이라고 밝혀졌다. 완치가 불가능한 불치병의 하나이고 걸리면 죽어야 끝난다는 그 무서운 당뇨병을 설탕이 유발하다니. 설탕찬미주의자들은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물론 최근에야 영국, 미국의 학자들이 다년간 반복적인 실험을 거쳐 당뇨병과 설탕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밝혀냈지만 아직도 설탕 하면 바로 당뇨병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다수이다. 당뇨병은 그릇된 생활방식이 제일 큰 적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우리 민족은 자고로 ‘백의겨레’라고 불리워왔고 우리 또한 그것을 큰 자랑으로 삼아왔다. 푸른 하늘에서 여유롭게 두둥실 떠있는 하얀 구름, 백사장으로 하염없이 밀려오는 하얀 파도, 가을 석양빛 아래 바람에 흔들리는 하얀 억새… 하얀 저고리, 하얀 수건, 하얀 코신… 우리 민족만이 서로 통하고 공감하는 이 하얀 색은 그 순결함과 그 정갈함과 그 순수함으로 때묻지 않은 삶을 지향하는 우리 민족의 대표색으로 일컬어왔다. 그러나 하얀 색은 우리 인간들의 건강만으로 볼 때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은 존재이다. 하얀 비닐봉지가 그렇고 하얀 소금이 그렇고 하얀 설탕이 그렇다. 절제해야 하고 경계해야 하고 견제해야 할 대상들이다. 2020년 경자년이 바야흐로 저 얼음 우로 미끌어져오고 있다. 모든 인사말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건강문안을 미리 올리면서 새해에는 정말 건강하게 건전하게 보다 행복한 삶을 꽃피워가기를 기원해본다. 길림신문
8    [작가노트] 문학주름 만들기 댓글:  조회:494  추천:0  2019-07-15
문학주름 만들기 한영남   소학교 시절 담임선생님께서 머리를 많이 쓰는 사람일수록 대뇌에 주름이 많이 생긴다고 한마디 하셔서 내 머리 속 주름은 얼마나 될가 궁금했던 적이 있다. 세상에서 제일 총명한 사람들을 헤아릴 때면 의례 스티븐 호킹(IQ 160 정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IQ 170으로 추정), 레오나르도 다빈치(IQ 180으로 추정) 등 명인들이 등장하군 한다. 그들은 일반인(평균 IQ 100)들보다 IQ가 엄청 높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한국 방송에 라는 예능프로가 있다. 거기에 출연하는 사람들은 전현무, 리장원, 하석진, 김지석, 박경, 타일러 등 고정 출연자이든 그들과 대결을 펼치기 위해 도전하는 게스트이든 일제히 빼여난 문제풀이 재능을 보여주면서 뇌섹남녀들의 쏠쏠한 재미를 부채질해주고 있다. 우리 문학도들 역시 문학주름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 장편소설 하나 쯤 탈고하면 굵직한 문학주름 하나 생기는 것이고 시 한수 써내면 실주름 하나 쯤 생기는 것이다. 같은 장편소설이라도 어떤 사람은 굵고 깊게 생기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가볍게 스치는 정도의 흔적만 남기기도 한다. 평생 단 한수의 시만 세상에 남긴 시인도 있다. 그는 바로 그 시 한수로 이 세상에 더없이 거대한 문학주름 하나를 남긴 것이다. 지금도 가끔 이제껏 발표해온 수백만자의 글들을 되새겨보면서 나는 도대체 어떤 주름을 얼마나 만들어왔을가 생각해본다. 굵직한 문학상을 받은 작품보다 많은 독자들이 선호하는 글들은 나름 대로 괜찮은 문학주름이 아닐가 스스로 위안해보기도 한다. 맵시 있는 주름을 만드는 사람도, 투박한 주름을 만드는 사람도 다 나름 대로의 리유가 있을 것이다. 서로 다를 뿐이다. 욕심 같아서야 쓰는 글마다 세상사람들이 아우성치며 환호하는 명작들을 펑펑 쏟아내고 싶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문학주름도 몇개 안되면서 서뿌른 욕심부터 부리는 사람들도 꽤 많아진 요즘이 아닌가. 문학주름은 글을 쓰지 않고 좋은 책만 읽어도 생겨난다. 한 사람의 문학생애를 좌우지할 만한 사변적인 작품을 읽었을 때 그의 문학주름은 평소와는 결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빅토르 유고의 《93년》을 내 인생의 거대한 문학주름이라고 불러주고 싶다. 그만큼 《93년》을 읽었을 때의 경이로움에서 나는 아직 헤여나오지 못한 까닭이다. 나이가 많다고 꼭 문학주름이 굵고 깊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나어린 문학지망생이라 해도 천부적인 문학재능이 잘 발굴되고 오성도 강한 데다가 독서 등으로 문학 관련 지식들을 두루 많이 습득한 사람은 그 문학주름이 굵고 깊을 수 밖에 없다. 같은 독서라고 해도 많이 읽은 사람과 알차게 읽은 사람은 차이가 있다. 많이 읽은 사람은 독서면의 확장으로 인한 굵은 주름일 수 있고 알차게 읽은 사람은 파고드는 정신으로 깊은 주름이 생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괜히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얘기를 늘여놓으려는 의도는 없다. 옳바른 문학주름을 만들기 위해 서로 열심히 읽고 쓰는 판에 보다 참된 문학주름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요청되지 않을가 로파심에 한마디 한 것이다. 세상이 참 좋아졌다. 인터넷으로도 많은 정보량 획득이 가능해졌고 웬간한 책들도 인터넷 구독이 가능해졌다. 문제는 어떤 책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이다. 일전에 L평론가가 한국 갈 일이 생겼다면서 나한테 필요한 책 있으면 사다 주마 하는 것이였다. 기쁜 김에 최근에 검색해두고 언제든 구해서 봐야지 했던 책 세권을 부탁했다. 《하마트면 열심히 살 번했다》, 《시를 잊은 그대에게-공대생의 가슴을 울린 시 강의》, 《환상동물사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해마다 두어번씩 한국행이 가능한 L평론가는 갈 때마다 필요한 책 없나 해서는 그걸 사다 주는 고마운 형이다. 결국 《환상동물사전》은 이미 품절이 된 상태여서 다른 두권만 사왔다고 했다. 그런데 그 책이 아마 형의 구미에도 맞았나 보다. 원문은 자기가 소장하고 나한테 복사본으로 보내온 것이다. 아무튼 고맙기 그지없는 노릇이였다. 아들 녀석이 기타 교습을 위해 음악학원에 가서 한시간, 태권도관에 가서 한시간 보내는 동안 녀석을 기다리면서 책을 읽군 한다. 역시 멋진 책이였다. 이 두권의 책은 나에게 어떤 문학주름을 만들어줄가 생각할 때면 저도 모르게 흥분하게 된다. 독서도 중요하지만 멘토를 만나는 일 역시 비상히 중요한 일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십년 공부보다 나을 때가 있다. 그 좋은 사람은 스승일 수도 있고 동료일 수도 있으며 후배일 가능성도 있으며 오다가다 만난 스치는 길손일 수조차 있다.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그 누구인가가 바로 이 멘토인데 커다란 깨우침을 준 사람을 가리킨다. 때론 한마디가 굉장히 중요할 때가 있다. 나 역시 그런 스승과 선배와 동년배와 후배들을 만났었다. 일일이 거론하지 않아서 그렇지 오늘의 내가 있게 된 데는 그들의 그 ‘한마디’가 굉장히 중요한 작용을 했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게 독서를 하고 멘토를 만나면서 내 문학주름은 만들어졌다. 물론 굉장히 가늘고 옅은, 또 어설프기 짝이 없는 주름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굉장히 소중하게 여긴다. 그것을 내가 세상을 향해 으시대는 자본으로 삼자는 게 아니라 그 흔적이 남겨지기까지 내가 읽은 책과 나에게 좋은 조언을 해준 멘토들한테 끈히 고마운 마음을 저버리지 않고저 함이다. 문학주름이 문학의 전부는 아니다. 문학상이 문학의 전부가 아니듯이. 그러나 그래도 성실한 문학공부의 길에서 생겨나는 문학주름을 거절하거나 부인할 필요까지는 없지 않겠는가. 오늘도 나는 문학주름을 만드는 길에서 “할 수 없이 열심히 살고 있다”. 그만큼 나는 충전을 하지 않는 순간 내가 도태되리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까닭이다. 출처:2018 제5호
7    '그 날처럼' 댓글:  조회:564  추천:0  2019-07-09
‘그 날처럼’ 한영남   - 자 오랜만에 이렇게 상 둥글게 모였는데 우리 ‘그 날처럼’ 한잔 멋지게 해볼가요? - 그 날이라니, 언제? 누구와 무슨 일 있었는데? - 그런 건 몰라도 되니까… 그냥 그 날처럼… - 그래요. 그럼 ‘그 날처럼’ 마십시다. 필회에 가서 젊은 패들이 모여앉은 상에서 내가 술 한잔 권하며 쓸데없는(?) 제스처를 섞으면 가장 센스 있게 맞장구를 쳐주는 친구가 바로 주향숙이다. 굳이 ‘그 날’이 언제냐고 ‘그 날’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는 친구들은 대개 소설쟁이들이다. 이야기와 등장인물들에 더 관심이 많은 족속들이니깐. 그렇다고 시인들마다 다 알아먹는 것도 아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는 시인들은 약간 뚱한 기색이다가 주향숙의 맞장구 또는 엉너리에 대뜸 그 내막(내막이랄 것도 없지만)을 간파해버리고는 곧 화제에 섞여주기도 한다. 끝까지 몰라버리는 시인들도 없지는 않지만. 그래서 우리 젊은이들 술상은 재미있다. 그리고 그 재미의 중심에는 주향숙이가 있었다.   내가 주향숙을 알게 된 것은 벌써 20년도 넘는 지난 세기 90년대 중반의 일이다. 어느 한번 술상에서 지인의 소개로 인사를 받게 되였는데 아주 어린애를 글쎄 시인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아닌가. 시인? 이렇게 어린 시인도 있었나? 그것도 녀류시인이? 그런데 이름을 들어보니 그 어린애(?)가 바로 주향숙이라는 것이였다. 주향숙이라면 내 또래 알 만한 시인들은 다 안다. ‘오월시사’였다가 나중에 ‘연길시청년시회’로 개명된 시모임의 초기 멤버였던 주향숙. 어린 나이에 비해 속 깊은 아픈 시를 곧잘 쏟아내서 선배들을 놀래웠던 주향숙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어지간히 놀랐고 약간은 존경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우리는 알게 되였고 그 무렵 자주 열리군 하던 어떤어떤 문필회에서도 단발머리의 주향숙이를 볼 수가 있었으며 게다가 한동네에 살고 있었던 연고로 우리는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아직 결혼 전이였고 다방에서 술을 오래 마셔도 괜찮을 때였다. 그 때 주향숙에 대한 인상이라면 녀자가 좀 너무 똑똑하다는 느낌이였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누구의 말이나 그 속뜻까지 헤아릴 줄 알았고 내색은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의 아픔을 진심으로 같이 아파해줄 줄 아는 시인이였다.   그런 주향숙을 문인으로서 정식 대우해주기 시작한 것은 ‘두만강여울소리 시탐구회’에 참가해서부터이다. 물을 보면 코등살을 찡그리며 소녀처럼 깔깔거리고 떨어지는 나무잎 하나를 주어들고도 쇠통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뭔가를 생각하는 그 모습에서 진정한 시인적인 모습을 엿본 까닭이리라. 술상에서만 만났던 향숙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였고 그래서 그런 시들도 나올 수 있었구나 싶은 모습들이 내 뇌리에 깊숙이 각인되는 순간이였다. 그 때로부터 나는 주향숙을 문인대우 해주었다. 하긴 나보다 선배 격인데 내가 대우를 해주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다가 본의 아니게 등 떠밀려서 나 역시 차츰 평론이라는 장르를 터치하기 시작했고 잡지사에서 주향숙의 작품에 대한 평론글을 의뢰해오기 시작했다. 때론 시를, 때론 수필을. 그런 그녀의 시와 수필들을 비벼보면서 나는 거기에서 풍겨오는 상큼하면서도 풋풋한 인간향을 공유할 수 있었고 이제 주향숙이라는 이름은 내게 문우라는 이름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같이 시상대에도 서보고 서로의 수상을 향해 박수도 보내주면서 우리는 문학이라는 파도를 타고 넘실거리기도 했다. 일년 가야 한두번이 될가 말가 하지만 만나면 언제나 아껴두었던 소중한 보물을 다시 꺼내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런 향숙이의 글에서는 늘 부모에 대한 효심이 강한 느낌으로 나를 울컥이게 만들기도 하고 순수 문학을 위한, 순수 예술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조차 엿보여서 그런 그녀의 작품을 보는 나는 은연중 그녀의 진솔하면서도 알찬 문학행보에 감탄을 보내기도 했다. 잠간 그녀의 시 한수를 읊고 지나가자.   당신은 아름다운 한수의 시입니다                                            -주향숙   다정한 입김으로 씨앗 하나하나를 피워주고   정성스러운 손길로 초록의 고운 숨결을 만져온   당신이 사랑하고 있음을 온 들판이 알아버리고 이 가을 금빛의 행복으로 설레입니다   이 땅의 아름다운 것들 그들 모두를 감동시킨 당신은 아름다운 한수의 시입니다   부모에 대한 절절함이 묻어나는 시이다. 그리고 부모님한테서 받아안은 사랑에 늘 감사해할 줄 아는 향숙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이다. 내가 애송하는 그녀의 시 가운데 한수이기도 하다.   나는 주향숙이 우는 모습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녀의 시를 읽게 되면 그 가슴 속에 얼마나 많은 눈물과 아픔과 고독이 고여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참말이지 그냥 짐작일 뿐이지 다는 알 수도 없고 알아버려서도 안되는 어떤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주향숙이라는 그릇은 겉으로는 도저히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아도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과도 통한다. 언젠가 향숙이는 나한테 롱반진반으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 제가 이래 뵈도 참 못된 녀자랍니다. 그 말의 의미가 이제야 비로소 조금 알리는듯하다. 못되다는 것을 내 식으로 풀이하면 못돼먹은 나쁜 녀자가 아니라 당차고 꼼꼼하며 추호도 곁을 주지 않는다는 말이 되겠다. 적어도 내가 아는 향숙이는 그런 녀류시인이다. 상큼하게 찡그려 웃을 줄 아는 조용히 휘여든 코마루를 가지고 있고 타인의 아픈 사정을 들어줄 줄 아는 하얀 귀를 가지고 있으며 눈물 그렁이는 사연에 부드럽게 공감하는 사슴의 그것 같이 섬세한 눈망울을 가지고 있고 다른 이의 한마디 말에 오래오래 상처를 받거나 두고두고 환희를 느낄 줄 아는 그런 빛나는 가슴의 소유자인 주향숙, 늘 아줌마라고 자조하지만 아직도 유리구슬처럼 부서지기 십상인 여린 심성을 가진 주향숙, 그녀의 좋은 시를 얼른 만났으면 좋겠다. 향숙아, 부탁한다. 좋은 시와 수필을…  
6    댓글문화에 태클을 걸며 댓글:  조회:660  추천:1  2019-04-23
[두만강칼럼] 위챗이 아니면 대화가 불가능할 지경이 되였다. 편지는 사라진 지 오래고 전화마저 이젠 귀찮다고 위챗으로 대화(?)한다. 상대방의 얼굴을 마주보거나 목소리를 확인하며 이야기를 나눌 경우의 어색함 등에 적당히 베일을 가려주는 위챗은 그래서 세상에 생겨나자부터 대뜸 현대인들의 필수대화도구로 되여버렸다. 그런데 위챗이 등장하면서 모멘트나 위챗방에 댓글을 다는 ‘댓글문화’가 더욱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댓글문화는 악플러들에 의해 많이 더럽혀져왔고 악플에 덧글까지를 달면서 네티즌들 끼리 싸우는 악순환이 오늘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아니, 어쩌면 더욱 기승을 부리는 형국이다. 그래서 선플을 달아 건전한 댓글문화를 꽃피우자는 목소리는 늘 우렁차왔다. 문학작품에 다는 댓글은 인신공격이 아닌 이상, 악의적이고 고의적인 악플이 아닌 이상 허락되여야 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한마디만 다른 톤의 목소리를 내기만 하면 얼굴들이 검으락 푸르락 해서 기어이 뜨거워진 속내를 내비치고야 만다. 그러면 상대방이라고 가만있을 리 없다. 그래서 서로 옥신과 각신을 섞게 되면 수위가 점점 높아지고 마침내는 네 탈 내 탈 하다가 개니 돼지니 하는 막말에 상말까지도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면 과연 선플만 좋다고 해야 할 것인가. 선플은 그야말로 모를 다 죽이고 동글동글하게, 게다가 속에 가시도 다 발라내고 단단한 부분들도 말짱 제거해서 그야말로 솜뭉치나 구름뭉치나 안개뭉치 정도이다. 그리고 일부 댓글들을 보면 원문을 자세히 읽어보지도 않고 무작정 올리추기만 한다. 그것이 자기한테 어떤 계발을 주고 어떤 공감을 주었는지는 아예 괄호 밖이다. 그런 선플들에 익숙한 사람들은 누군가 비평 한마디 하면 노발대발한다. 자기는 세계 최고급 명작을 써냈는데 너희가 대작을 알아보는 혜안이 없어가지고 이러쿵저러쿵 시비를 건다고 여긴다. 밝고 건전하고 미래지향적인 댓글대화가 요청되는 시점이다. 근거와 리유를 충분히 헤아려보고 댓글을 달아야 진정성이 보이게 되고 그 한마디 댓글이 가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무작정 까기식의 댓글도 삼가해야 하지만 무작정 추기식의 댓글도 경계해야 할 바이다. 그리고 우리의 글쟁이들도 댓글을 좀 제대로 리해했으면 좋겠다. “너무 좋아요”, “너무 멋진 글이네요”, “너무 감동 먹었습니다”, “너무 가슴이 먹먹해서 한참 머물다 내립니다” 등등 ‘너무’가 너무 란무하는 댓글들은 정말 경계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인사치레로 그렇게 달아준 것을 마치 유명 평론가의 장편평론인 것처럼 여기고 안하무인 격이 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정말이지 그냥 인사치레인 것이다. 인사는 인사로 받아주면 그만이다. 동방식 인사로 말이다. “밥 먹었냐”는 인사를 받고 밥 사주기를 기다리지 않는 것이 우리 동방식 사고방식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하필 그런 인사를 평론 쯤으로 여기고는 오른손에 기고만장을, 왼손에 적반하장을 쳐들고 다닌다. 웃기지 않는가. 웃길 때 웃어주는 것은 매너이다. 웃기지도 않는 것을 억지웃음으로 대할 때 그것은 례의이다. 례의라는 것을 알면서도 약간 뒤맛이 씁쓰레하다. 그런 것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작은 턱을 하늘 높이 치켜드는 것을 가리켜 꼴불견이라고 할 것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거늘 하물며 사람이라고 칭찬 앞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을 것인가. 칭찬이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칭찬을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가 너무 일차적이고 평면적이고 고정적이라는 데 있다. 글은, 아무리 칭찬해주어도 그 글의 품위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칭찬을 많이 받는다고 해서 그 글이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인터넷 세상에서 누구나 글을 쓰고 누구나 시인이라고 불리우는 마당에 지나가는 과객이 “어? 글 좋소!” 라고 한마디 했다고 해서 노벨상이라도 받은 것처럼 으시대서야 어디 될 말인가. 하이퍼시가 대세이다. 정말 좋은 하이퍼시는 우리에게 충격까지 주면서 그 막강한 파워를 자랑한다. 그런데 어설픈 아마츄어시인이 하이퍼시를 써서 모멘트에 올렸는데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면서도 무턱대고 좋다고만 하는 댓글이 엄청 달린다. 정말 그 시를 알아보았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그냥 안면이 간지러워서 달았다고 한다. 디카시 역시 대세이다. 그런데 아무나 다 생각할 수 있고 아무나 다 쓸 수 있는 디카시가 범람하고 있다. 자기의 생각을 그대로 표출하는 데까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을 작품으로 생각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어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니 리해는 된다. 하지만 리해가 곧 긍정이나 찬양으로 받아들여져서는 아니될 것이다. 악플이든 선플이든 서로 소통하고 화목과 우의를 다지면서 더 밝고 즐겁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한 일들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도를 넘어서는 경우가 너무(!) 많다. 아무도 브레이크를 걸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맞는 것이라고 단정해버리면 곤난하다. 삼척동자만이 춰주면 좋아서 헤벌쭉해진다. 머리가 명석한 지성인이라면 뜨거워지는 머리를 한달에 한번 쯤 식혀둘 필요가 있다. 예방주사를 맞듯이 퇴고도 맞으면서 말이다. 그리고 진솔한 얘기지만 이 글에 대한 댓글은 정말 보고 싶지 않다. 길림신문
5    [두만강칼럼] 도(度) 댓글:  조회:793  추천:1  2018-12-20
세상사 어느 것인들 도를 떠날 수 있으며 인생사 어느 것인들 도를 잊을 수 있으랴   우리는 일상에서 어떠한 정도나 한도가 넘어설 경우 도가 지나치다고 한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역시 이 도를 설명하는 데 빠질 수 없는 사자성어이다.   “물유본말(物有本末), 사유종시(事有终始),지소선후(知所先后),칙근도의(则近道矣)”(《礼记·大学》)를 우리말로 옮기면 “사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으니 근본과 말단, 시작과 끝의 순서를 깨달으면 도에 가까울 것이로다”는 뜻이다.   인간은 욕심이 있는 고급동물이기에 도를 넘어서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한번만 더’가 사람 잡는 경우도 많다.   화학실험을 할 때 보면 무색의 수산화나트륨 같은 염기성 용액에 역시 무색인 페놀프탈레인 용액을 방울방울 떨어뜨리다가 어느 한 방울이 떨어지는 순간 무색의 용액이 적색으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한계 즉 도이다.   물리실험을 할 때 용수철을 늘구다가 어느 한정치를 넘게 되면 용수철이 회복불가가 되여버린다. 그것이 용수철의 탄성한계 즉 도인 것이다.   수학에서 플루스와 미누스 사이에 있는 수치를 0이라고 한다. 즉 0의 오른쪽으로 갈수록 플루스수치가 점점 높아지고 왼쪽으로 갈수록 미누스수치가 점점 거대해진다. 절대치가 같은 플루스와 미누스를 0이 량손에 꽉 쥐고 밸런스를 이루는 형국인 것이다. 그 0이 평면좌표에서는 바로 도인 것이다.   세상 만사만물이 도를 떠나서는 안된다.   시를 굉장히 잘 쓰는 형 한분이 계신다. 그 형과 식사를 하게 되면 재미 있는 현상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밥 한 공기를 드시는데 맨 마지막에 꼭 한 숟가락의 밥을 남기시곤 했다. 왜 남기시냐 물어보니 딱 못 드시겠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상했다. 많은 것도 아니고 단 한 숟가락이 아닌가. 그런데 그걸 드시지 못하다니. 나중에 따져보니 그것이 바로 도였다. 바로 그 한 숟가락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과식으로 약을 한줌씩 먹어야 하고 더러 병원놀이까지 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다.   우리말 속담에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라는 말이 있다. 여름처럼 덥지도 않고 겨울처럼 춥지도 않은 안성맞춤한 날씨인 데다가 그 해의 햇쌀이 나오고 각종 과일들도 무르익어 그야말로 주머니사정까지 불룩해진 좋은 계절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날이 바로 한가위인 것이다. 계절이라는 도의 한복판에 있는 날이라 해서 이름한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 사이라 해도 얼마 쯤의 거리감이 있어야 한다고들 말한다. 이른바 관계의 도인 것이다.   음악도 들어보면 남성 베이스만 좋은 것도 아니고 녀성 소프라노만 음악인 것도 아니다. 파솔라시 높은 음과 도레미파 낮은 음이 적당히 조화를 이루어야 멋진 음악이 탄생하는 것이다.   강한 것이 좋지만 너무 강한 것은 부러지기 쉽다고 한다.   중용을 고취하는 것은 아니지만 삶에는 얼마 쯤의 완충지대가 필요한 것이다.   마지노선이라는 말도 있다. 그게 최후의 도인 것이다. 그것을 넘어서면 사태가 완전히 뒤바뀌는 사변이 일어나게 된다.   결벽증이 있는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면 답답증을 호소하게 된다. 그 지나친 철저함이 사람을 질식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한테 “너 혹시 물도 씻어서 마시냐?” 라고 꼬집은 적이 있다. 깨끗한 것은 선호하되 그것이 도를 넘어서면 안된다는 것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개구리 주저앉는 뜻은 멀리 뛰기 위한 데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개구리도 너무 오래 주저앉아있으면, 즉 도를 넘게 오래 쭈크리고 있으면 멀리 뛰지 못한다. 오금이 저리기 때문이다.   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인기절정일 때 다들 알아서 자제하고 자중하고 겸손하게 다소곳해야지 거기서 더 우쭐거리면 사람들의 미움을 사게 된다.   도가 지켜지면 이 세상이 바로잡혀진다.   도를 지키려면 웬간한 용기를 가지고는 태부족일 수도 있다.   도, 인간의 한계를 시험해보는 짓거리는 이제부터라도 사라졌으면 좋겠다.   도, 거기에서 더욱 아름다운 인간미가 꽃펴났으면 좋겠다.   길림신문/한영남(시인)
4    스포츠수치의 대명사 소치 댓글:  조회:1329  추천:1  2014-02-24
스포츠칼럼 스포츠수치의 대명사 소치     스포츠가 사라졌다. 스포츠정신이 실종되였다. 소치는 무치하게도 눈치놀이에 빠져 70억 세계인들을 우롱했다. 김연아는,  진정한 챔피언이였다.  그리고 영원한 피겨녀왕이다.  소치는 전설을 용납할 가슴이 부족했다. 소치가 아무리 눈감고 아웅해도 진정한 피겨는 존재한다. 진정한 피겨를 즐기는 사람들은 오늘의 력사를 잊지 않을것이다. 수치스러워하라, 소치여! 자랑스러워하라, 연아여!/ 한솔
3    리상화의 운동화를 벗겨보니 댓글:  조회:1168  추천:2  2014-02-24
   소치올림픽이 한창이고 한국빙상녀제 리상화의 발이 화제다. 25살 처녀의 발이라고 믿기 어려우리만치 그의 발은 망가져있었다. 온통 굳은살투성이에 상처투성이인 발. 그리고 우리는 저런 발 몇개를 더 보아온 기억이 있다. 아직은 스무살도 되지 않았을 무렵의 피겨녀왕 김연아의 발, 아시아뿐아니라 유럽에서조차 그 저력을 승인해준 한국축구국가대표팀의 보증수표 박지성의 발, 전 세계가 인정하는 발레리나 강강수진의 발… 굳은살에 상처투성이에 변형까지 된 그런 발들을 보며 우리는 세계정상이 되기까지의 험난한 로정을 상상해볼수 있었다. 연약한 녀자의 몸으로 170킬로그램의 무게를 달고 지옥훈련을 하며 자신과의 싸움에서 드디여 승리의 팡파르를 터친 리상화는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노메달에 그쳤지만 열심히 훈련하고 열심히 경기에 림한 모든 선수들에게 진심으로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참다운 스포츠정신은 결코 이기고 지는데 있는것이 아니다. 0.01초의 차이로 메달과의 인연을 접어야 했던 선수지만 시상대에 선 자신의 경쟁자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박수를 보내면서 다음을 약속하는 선수, 스키를 타다가 넘어져서 이제 메달의 꿈은 물론 순위조차 까마득히 밀려날것을 분명 알면서도 결연히 일어서서 다시 라스트를 향해 달리는 선수, 부상당한 경쟁적수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며 그의 쾌유를 비는 선수… 바로 이런 선수들이 있음으로 하여 올림픽은 빛나는것이며 올림픽홰불은 꺼질줄 모르고 활활 타오르는것이리라. 훈련과정에서 부상당해 소치에 가는것조차 포기하고 동료들의 경기를 TV로만 봐야 하는 선수에게도 격려의 박수를 보내는것을 잊지 말자. 동메달을 탄 선수에게 왜 메달색이 금색이 아니냐고 그 아픈 마음에 생소금을 뿌리지 말자. 서로가 등을 투덕이며 격려해주고 서로의 장점을 배우면서 같이 진보하는것이야말로 참다운 스포츠정신이기때문이다./ 한솔
2    삶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댓글:  조회:1694  추천:0  2012-07-20
삶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한영남 어느 조그마한 제재소에서 성실하게 일하던 한 40대의 남자가 하루는 해고통지서를 받게 되었다. 사장은 차갑게 말했다. "이 일이 당신의 적성에는 맞는 것 같지 않소. 이제 우린 더 이상 당신이 필요 없소." 때마침 최악의 불황이라 남자는 절망했다. 앞으로 살 길도 막막했지만 황당한 이유로 그를 해고한 사장에 대한 분노가 끓어올랐기 때문이다. 여러 달 동안 취업도 못하고 가진 돈도 거의 다 떨어지자 그는 아내한테 말했다. "여보,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 수백 통의 이력서를 제출했지만 연락 오는 곳은 없어. 정말 미안해." 그런데 아내는 너무도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회사에서 당신을 채용하지 않는 거죠? 그럼 차라리 회사를 만드세요." 딱히 해결책도 없었으므로 고민하던 그는 아내의 말대로 조그마한 건축업을 시작했다. 사업이 번창하여 5년 만에 조그마한 기업으로 되었고 몇 년 후에는 세계적인 체인으로 되었다. "홀리데이 인"호텔의 창업이야기가 바로 이것이다. 이 세상은 사고하기에 따라 그 양상이 굉장히 달라진다. 낭떠러지에서 앞을 보면 심연이지만 돌아서서 보면 광활한 대지라고 한다. 만일 상기의 이야기에서 그 남자가 제출한 이력서를 보고 어느 기업에서 채용했다고 하자. 그럼 이 세상에 이름난 저 "홀리데이 인"호텔은 태어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이며, 낙천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항상 기회가 차례지지만 부정적이고, 과거지향적이며, 비관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오던 기회도 되 달아난다는 얘기다. 반 컵 물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아는 얘기이다. 부정적인 사람은 "물이 절반밖에 안 남았네."라고 말할 것이요 긍정적인 사람은 "물이 아직도 절반이나 남았네."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암 치료에 굉장히 효과적이라고 알려진 한 가지 치료법에 암시요법이라는 것이 있다. 뱃속 암이 생긴 부위를 뱃가죽에 볼펜으로 표시해주고 환자더러 매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나는 암을 반드시 이길 수 있다고 매일 수십 번씩 외치게 한다. 그리고 한 달 정도 지난 후 의사가 정밀의기로 검사해보고 다시 볼펜으로 요만큼 줄어들었다고 표시해준다. 그렇게 몇 달을 견지하면 처음에는 차도가 전혀 알리지 않다가 반년 쯤 지난 뒤부터는 확실히 줄어드는 것이 알린다는 게 의학전문가들의 결론이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어릴 때 보았던 아동명작 한편이 생각난다. 아이가 방학을 맞이해서 매일 놀다보니 심심하기 이를 데 없는 지라 손에 닿는 대로 책 한권을 펼쳐든다. 거기에는 무기력하고, 식은땀이 나며, 아무 의욕도 없고, 제대로 먹지 못하며 잠만 자는 증상이 있으면 두 달을 못 넘겨 죽는다고 적혀있었다. 이를 본 그 아이는 자신이 죽을병에 걸렸다고 생각하고 진짜 드러누워 앓기 시작한다. 부모들이 깜짝 놀라 병원에 가서 검진을 해보지만 아무 병도 없다. 결국 아이한테 물어서 원인을 알게 된 부모들은 소년이 보여준 책을 보고 그만 앙천대소를 한다. 그 책은, 수의학에 관한 것으로 소의 증세에 대해 쓴 한 대목이었던 것이다. 좋은 것만 생각해도 아름 버는 요즘인데 쓸데없는 생각으로 자신을 괴롭히고 마이너스효과까지 불러올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천고마비의 계절이 서서히 밀려가면서 백설의 겨울이 저만치서 뚜벅거리고 있다. 환절기에 건강을 챙기면서 산다는 의미를 한번쯤 다시 되새겨볼 일이다.
1    에밀레종은 얼마를 더 울어야 하나 댓글:  조회:2169  추천:0  2012-01-17
      1 수년전 미국 캘리포니아 몬터레이에서 사다새(鹈鹕)사건이 터졌었다. 굳이 사건이라고까지 하는것은 본래 동물을 지극히 사랑하는 몬터레이주민들로 말하면 그것은 말그대로 일대 사건이기때문이다.  몬터레이는 사다새들의 천국이였다. 그런데 어느날부턴가 사다새들이 갑자기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한것이다. 생물학자들은 새들속에서 온역이 돌지 않나 의심하였고 환경학자들은 바다물의 오염에서 문제를 찾아보려고 애썼다.  과학가들은 후에 그 원인이 그곳에 새로 선 고기미끼공장이라는것을 밝혀냈다.  본래 몬터레이에 사는 어민들은 바다가에서 잡은 물고기들을 손질하면서 내장을 사다새들에게 던져주군 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다새들은 통통하게 살이 올랐고 따라서 사다새들은 더는 생존을 위해 움직일 필요가 없게 되였다.  그러나 고기미끼공장이 서면서 물고기내장은 그 공장에서 원자재로 회수해가기 시작했고 물고기내장이 돈으로의 환산이 가능해지자 어민들은 더는 사다새들을 위해 내장을 던져주지 않았다. 사다새들은 여전히 어민들 곁을 떠나지 않으며 이제나저제나 내장을 던져주기를 바랐으나 그들에게 무상급식은 더는 생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대대로 어민들이 던져주는 내장에 의해 번식해오며 이미 포획능력을 상실한 이 사다새들은 그만 굶주리다 못해 무리죽음을 당하게 되였던것이다.                             2 요즘은 세계가 지구촌으로 불리우면서 세상나들이가 가능해졌고 돈만 있으면 어디라도 관광을 할수가 있게 되였다. 각 나라는 나라대로 특색건축물, 조형물, 예술조각 등으로 관광객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기에 안깐힘을 쓰고있으며 이색적인 맛거리까지 동원하여 관광객들의 발목을 잡아보려 애쓴다.  그러나 세계 어느 나라나 하나의 공통점이 있으니 그 도시의 아무 광장에서나 유유히 날아예는 비둘기들이 바로 그것이다. 나라는 그만두고 우리 나라 그 어느 도시에 가보아도 이 평화의 비둘기들의 모습은 심심찮게 볼수 있다. 그러나 그 비둘기들 역시 인간이 던져주는 빵부스레기가 아니면 생존이 어렵다고 한다.  지어 얼마전 뉴스에서는 영국 런던에서 환경문제로 더는 빵부스레기를 던져주지 못하게 하자 비둘기들이 굶어죽는 현상까지 나타났다고 한다.  굶겨죽일수는 없지만 그러나 이 비둘기들이 영국정부측으로 말하면 일대 고민거리가 아닐수 없다고 한다.  인간들의 손에 의해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어진 비둘기들이 필요이상으로 번식하여 정부에서는 막대한 자금을 들여 비둘기들을 먹여살려야 하기때문이란다.  지어 어떤 사람은 비둘기들의 먹이에 피임약을 섞어먹이자는 제의까지 했으나 그것은 동물에게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리유로 채택되지 못했다.  인류는 스스로의 작은 허영심 만족을 위해, 이쁜 짐승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단순히 눈으로 즐기기 위해 동물들의 생존능력을 박탈하고있는것이다.                          3 어미산양은 새끼들을 훈련시킬 때 일부러 벼랑으로 내몬다고 한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훈련을 거친 산양들은 벼랑을 잘 타고 그래서 승냥이를 비롯한 다른 큰 짐승들로부터의 추격을 거뜬히 피할수 있다고 한다.  독수리의 토사물이란 말이 있다. 독수리는 하늘높이 날면서 땅에서 기여다니는 독사나 전갈 등 극독물들을 먹이로 하는데 독수리는 그런 독성이 강한 뱀이나 전갈을 먹고도 살아남는다.  알고보니 거기에는 그럴만한 리유가 있었다. 독수리들은 독사나 전갈들을 잡은후 잘 찢어 삼켰다가 그것을 토해 새끼들을 먹인다. 그것을 먹은 새끼들은 더러 쇼크도 하고 더러 죽기도 하지만 그중 살아남은 새끼들은 어릴 때부터 그런 독물을 먹어온지라 성장한후 웬만한 독은 먹어도 중독되지 않는다.  사실 독수리의 토사물은 응구(鹰呕)라고 하는데 독수리 역시 오래동안 독이 있는 짐승들을 잡아먹다나면 위낭속에 독이 뭉치게 된다. 그것을 일정 기간이 되면 토해내야 독수리가 살아남게 되고 그것을 토하지 못하면 독수리는 죽게 되는것이다. 그 독수리가 토해낸 토사물이 바로 응구로 독단(毒丹)이라고 한다.  건실한 새끼들을 키우기 위한 그야말로 사활적인 어미독수리의 노력이라 할수 있다.                                             4 인간은 날이 갈수록 신체적으로 퇴화되여간다고 한다. 교통수단의 발달로 다리가 점점 힘을 잃고 가늘어지는가 하면 컴퓨터 등에 맛들여진 나머지 손가락의 기능이 엄청 발달하고 갈수록 새록새록 거듭나는 맛나는 음식물들에 중독되여 배는 점점 커지며 두뇌가 발달하면서 머리가 굉장히 커진다고 한다.  반면 본래 거의 본능적이던 일부 기능들 례하면 면역력(기실 감기따위는 굳이 치료하지 않아도 인간 신체내부의 조절로 치료 가능하다고 한다)이 퇴화되고 살아남기 위해 필요했던 일부 감지능력들도 퇴화되는 등 꽤 쓸만한 기능들이 점차 사라져간다고 한다.  언젠가 한국의 한 시인은 주둥이와 생식기만 고도로 발달한 생물이라고 인간을 걸죽하게 욕한적이 있는데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요즘 사람들을 사막복판에, 망망대해에, 원시림속에 내려놓으면 혼자의 힘으로는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고 한다. 그만큼 인간은 신체적으로 퇴화되였을뿐만아니라 심리적으로도 구조대따위에 의존하려는 생각이 본능을 덮어버리고있다는 말이다.  몇해전 중국과 일본의 어린이들이 함께 삼림속에서 어른들 도움이 없이 일주일동안 자체로 숙영숙식을 챙기는 캠프를 벌린적이 있었다. 그나마 일본의 어린이들은 삼림속에서 생존을 위해 노력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중국의 어린이들은 부모를 찾거나 아예 포기하는 모습이여서 주변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중국의 교육시스템의 허점을 극명하게 드러낸 실례라 할수 있겠다. 중국의 한족들은 그래도 방송국 취재팀이 마이크를 들이대면 자기의 생각을 대충 표달하고있는 실정이지만 조선족아이들은 부끄러움이 많아서일가 취재가 거의 불가능하다는게 방송국 지인들의 이구동성이다.  어른들이라고 자유로울수가 없다. 조선족성인들한테 마이크를 들이대보라.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 의견따위를 뜻대로 표달할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가… 조선족을 지나치게 비하하는것이 아니다. 중국교육중에서도 조선족교육은 많이 뒤처져있다는게 전문가들의 결론이다. 조선족이 소수민족가운데서 교육수준이 높고 교육질이 높다고 했던것은 이제 대단히 낡은 옛말이다.  물론 자기의 문자마저 없는 몇만명밖에 안되는 소수민족이거나 비교적 락후한 민족들과 비하면 아직도 가슴을 내밀고 큰소리 쳐도 괜찮다. 그러나 한족들한테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민족? 축구 잘하는 민족? 어느것도 이제 중국이라는 무대에서 내노라 할만한 큰소리거리가 못된다.  시험치는 기계로만 만들고있는 교육실태, 한국을 닮아서 명문대학만을 노리는 학부모사정, 자유활동시간을 모조리 긁어모아서 학원에 보내야 시름놓는 오늘의 현황이 이런 악순환의 장본인이라는것을 알면서도 누구 하나 이런 현상을 개변해보려고 선뜻 나서지 않고있다. 아니, 아예 나서지 못하고있는지도 모른다.                            5 한족들한테는 맹모삼천의 이야기가 있고 조선족들한테는 한석봉의 이야기와 더불어 에밀레종의 이야기가 있다. 부모의 실없는 한마디로 억울하게 죽어간 아이의 혼이 에밀레종을 울리고있다는 얘기는 아는 사람은 안다.  그 에밀레종은 이제 그냥 종으로, 기념물로만 남아버리고말았다. 아무도 에밀레종이 울고있는 내지 울지 않는 리유를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사실 요즘의 우리에게야말로 에밀레종은 가장 큰 경종으로 울려 정신들을 번쩍 차리게 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 저 에밀레종은 울리기를 그만두었다.  에밀레종이 울지 않는다고 평화롭다고 착각하면 대단히 오산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에게서 비둘기의 생존능력을 박탈하듯이 동심과 더불어 그들의 생존능력을 무지막지하게 빼앗고있는것은 아닐가. 떠엉—떠엉— 에밀레종이 운다. 마지막 목갈린 울음이 정처없이 흩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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