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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기록》제1집 -> 배명수 편

민족의 넋 알라의 발자취2
2020년 12월 21일 08시 13분  조회:300  추천:0  작성자: 기록
 
4. 전기 가설해 풍수를 안아오고 한족들을 도와 수전을 풀었다
 
알라는 호조조로부터 초급사, 고급사, 인민공사화에서 사회주의건설과 혁명에서 시종 전 현에서 앞장서서 걸어왔고 민족단결의 모범대대였다. 1961년에 큰 가물이 들어 7월이 됐는데도 논판에 물이 없어 모판에 모가 그대로 서있는 것이 매우 많았다. 모를 심지 못한 면적이 많아 사람들이 애를 태우고 있을 때 자연조건과 하늘만 믿을 수 없다는 생각에 김서기와 리종원, 윤기태 그리고 나까지 송화강물을 끌어오려는 기발한 생각을 갖고 마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송화강가에 가 보았는데 물을 끌어올 수 있는 조건은 매우 좋으나 전기가 문제였다.
 
그때부터 김룡구 서기는 공사와 현으로 동분서주하면서 전기를 당겨오기로 결정하고 시, 현에 찾아다니며 련계하여 울라가 원전화(园田化)전기를 그해 가을부터 길림성 전기가설대가 전기가설을 시작하여 동네에 집집마다 전기가 들어오게 되었다. 양수장까지 설치하여 1962년봄부터 물을 퍼올릴 수 있었다. 
 
    
해마다 대풍작   
             


양식업을 크게 발전
 
그 때부터 사원들은 전등을 하나 쓰면 100원, 두개 쓰면 150원을 내기로 하고 집집마다 전기를 쓸 수 있었고 농업에서는 아무런 가물도 겁나지 않았으며 알라의 기타 발전에도 아주 좋은 기초를 닦아놓았다.
 
1962년도에 양수장을 설치한 후 알라는 해마다 농업풍수를 거두게 되자 김서기는 회의에서 "우리의 밥사발에 밥이 높은 것은 좋은 일이지만 반드시 이웃집 밥사발에 밥도 같이 높아야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1963년에 마을과 밭이 높은 언덕 우에 있는 전알라대대(한족대대)는 수원관계로 한전뿐인데 사원들의 생활도 매우 빈곤하였다. 그래서 김서기는 우리가 퍼올린 강물에 전알라양수장을 설치하여 수십쌍 되는 논을 풀게 하였고 기술자(나의 아버지)를 파견하여 울라가공사 26개 한족대대에서 제일 처음으로 벼농사를 짓게 하였다.
이 역시 좋은 뉴스였고 그 때부터 련속 대정(大郑),장로(张老),고모(高毛)대대 등 모두 알라의 지원으로 수전을 풀기 시작하여 전 공사적으로 적지 않은 대대가 벼농사를 하였다. 
 
5. 벽돌공장 꾸리고 새 농촌 건설을 시작했다
 
1967년 5월 7일, 당중앙 모주석께서 "각 인민공사는 농업생산을 틀어쥐는 한편 조건을 창조하여 기업을 꾸려 농민들의 수입을 올려야 한다"고 지시했다. 지시가 하달되자 당지부에서는 기업을 꾸리기로 결정했다.
 
당시 알라의 정황은 공장을 꾸릴만한 아무런 여건도 구비되지 않았고 기초도 없었다. 농사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는 대장간에서 소발에 편자를 박는(挂掌) 심방룡, 구금서 두 사람, 부대에서 기계(军械)를 수리하다 복원한 리종환씨와 발동기를 좀 볼 줄 아는 리동화, 송기헌 씨외에 목수 몇사람뿐이였다. 토론 끝에 알라를 둘러싸고 있는 산언덕이 모두 황토이기에 “혹시 벽돌공장을 꾸리면 되지 않을까.”라고 했지만 그곳은 우리 알라대대에 소속한 땅이 아니고 또 그 황토로 벽돌을 구울 수 있을지도 확신이 없었다.
 
그리하여 모험을 무릅쓰고 달려드는 의미에서 렴치도 불문하고 한족대대와 상의하기로 하였다. 김서기와 나는 전알라(前阿拉) 왕풍림(王风林) 서기를 찾아가 언덕의 땅문제를 제기했더니 왕서기는 묵어있는 땅인데 수요되는 대로 쓰라고 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땅을 얻어놓았으니 이번에는 그 흙으로 벽돌을 만들 수 있는 지가 문제였다.  
 
우리는 벽돌 굽는 데는 깜깜 무지라 벽돌공장을 찾아야 했다. 알라에서 거리가 가장 가까운 벽돌 공장이란 대툰북산(大屯北山)에 있는 길림시제3벽돌공장이였는데 아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련 며칠 연구 끝에 강필근과 같이 김룡선 선생님을 불러서 길이 1.8m, 너비 0.90m 되는 합반(胶合板)에 붉은색을 칠한 후 금빛색으로 모주석의 5.7지시(1966년 5월 7일 발표했음)를 밤새워가며 써 붙였다.
 
이틀후 나와 강필근 서기 둘이서 그것을 가지고 장호역에서 렬차에 오르려니 물건이 크다고 막더니 모주석의 지시를 쓴 것이여서 마침 차를 탈 수 있어 금주역(金珠火车站)에 내렸는데 봄바람이 얼마나 불어제끼는지 갖은 애를 먹어가며 겨우 길림시제3벽돌공장에 도착하여 공장입구에서 수발실(收发室) 직원에게 우리는 모주석의 지시를 전달하러 왔으니 공장의 령도들을 찾아달라고 했더니 두말없이 달려가 공장장과 서기를 데리고 왔다.
 
그들은 우리를 열정적으로 접대하였다. 우리가 온 목적은 모주석의 지시를 락실하기 위해 벽돌공장을 꾸리려고 찾아왔다고 하자 공장장은 두말없이 기술자를 파견하겠으니 래일 알라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튿날 왕사부(王师傅)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벽돌공장을 차릴 자리와 토질을 파보고 2시간 남짓이 돌면서 알아본 후 벽돌을 굽는 데는 질이 아주 좋은 흙이라고 했다.
 
왕사부는 열정적으로 기계설비는 어디에다 설치하고 벽돌을 굽는 가마(窑)를 쌓을 자리까지 상세히 알려주어서 우리는 너무 고마운 나머지 입쌀  5근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당시에는 큰 선물인 셈이었으니) 왕사부에게 억지로 넘겨주었다. 그러자 자기는 벽돌기계(砖机)는 모른다면서 공장에 호(胡) 씨성을 가진 기술자가 있는데 그 사람을 찾아 연구하라고 귀띔해 주었다. 우리가 이내 신종화(辛钟华)를 보내 도움을 청하자 호사부(胡师傅)가 금방 찾아왔다.
 
벽돌공장을 꾸리려는 결심과 노력으로 땅도 해결되고 토질도 좋기에 벽돌공장을 꾸릴 수 있는 가능성이 크지만 호사부의 말에 의하면 쇠 덩어리 하나 없는 농촌에서 기계를 처음부터 만들어야 한다면서 “벽돌기계(砖机)를 새로 만들어야 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돈도 많이 드는데 나 자신도 똑똑히는 모르겠고 몇천원 가지고는 공장 꾸릴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당시 나의 생각에는 벽돌공장을 꾸리자면 반드시 기계가 있어야 하고 기계를 만들자면 많은 돈이 든다는데 어떻게 할까? 생각 끝에  나는 솔직히 호사부에게 우리는 돈이 없는데 아마 벽돌공장을 꾸리려는 계획이 허사일 것 같다고 말하면서 애달픈 마음을 그대로 토로하며 도와줄 수 없냐고 말했다.
 
그러자 호사부는 말 없이 앉아 있다가 형편이 정 그렇다면 벽돌공장에 위만 시기부터 쓰던 낡은 벽돌기계(砖机)가 있는데 그것을 자기네 공장에서 쓰다가 새로운 기계를 사서 낡은 기계는 창고에 처박혀 있는데 보기에 어설프고 우둔(笨重)하지만 큰 부속품은 거의 제대로 있으며 큰 전동기를 써야 하니 전기세가 좀 많이 들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호사부는 그 기계만 사오면 자기가 책임지고 벽돌을 생산할 수 있게 할 수 있으니 공장과 련계해보라고 했다.
 
아주 반가운 소식이었다. 알라에서 벽돌공장을 꾸리는 것은 관건적인 문제이고 또 제3벽돌장과의 관계를 잘 처리하여 그들의 지지와 관심을 받아야만 벽돌공장을 세우려는 우리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관계를 가깝게 할 수 있을까? 나는 김서기에게 상황을 반영하면서 내 생각을 말했다. 당시 우리의 조건으로는 선물을 주거나 돈을 주는 방법은 생각도 못했고 약 10여일후  5.1국제로동절인데 알라의 문공단을 보내 위문공연을 하면 어떻겠는가고 제기했다. 
 
별 방법이 없었던 김서기는 나의 의견에 따르는 수밖에 없어 김정곤(문공단 단장)과 리응두, 재정태를 불러서 위문공연을 준비시켜 련습하기 시작했다.
 
알라사람들은 일찍부터 문화생활에 흥취가 있었고 예술을 즐기는 김재곤 등 분들이 편찬한 극 “심청전”은 50년대초부터 길림지구 조선족마을에(강밀봉, 쌍하진 등) 순회공연을 하여 소문이 자자한데다 1964년, 1965년까지 길림성민족가무단을 알라에 건립하여(연변에서 많이 왔음) 그들이 알라농민들과 함께 일하면서 문예련습을 지도하여 알라사람들은 문예방면에 수준이 매우 높았었다. 이번 기회에 마침 5.1절이 다가오자 신종화를 제3벽돌공장에 보내 공인들께 위문공연을 해주겠다고 전했다. 
 
우리는 제3벽돌공장과의 관계를 더 돈독하게 하기 위해 한 열흘 앞두고 련습하여 4월 30일, 세틀의 수레에 악기와 배우들을 싣고 벽돌공장에 갔다.
 
공장의 마당에다 꾸려 놓은 무대는 어설펐다. 그래도 전등불을 환하게 켜놓아 처녀들이 알락달락한 치마저고리에 분단장 곱게 하고 남성들은 한복에 조끼를 입고 머리에 수건을 질러매고 꽹과리, 장구, 북을 치며 펼치는 조선민족의 노래는 로동자들의 열렬한 박수와 환호성 속에서 공연은 아주 원만하게 막을 내렸다.
 
이어서 공장의 령도들과 로동자들이 함께 어울려 춤과 노래로 즐겁게 놀다가 밤중에 돌아왔는데 이번 공연은 완전히 성공적이었다.
 
며칠이 지나 나와 신종화가 벽돌공장에 가 낡은 벽돌기계(旧砖机)를 사겠다고 했더니 대번에 낡은 기계를 페철가격으로 가져가라고 했다. 우리는 당장 창고에 가서 헌 기계를 본 후 이튿날 마차 세대에 싣고 왔는데 저울이 없어 주먹구구 잡아 200원을 주기로 하였다.
 
신종화가 다음날 보관원에게 돈을 가져다주러 갔는데 보관원(김씨라는 조선족)이 마누라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지만 돈이 없어서 치료하지 못하여 돈 200원만 꿔달라고 하였다.
 
신종화가 알라에 돌아와서 벽돌공장 보관원의 돈 문제를 말하기에 먼저 안해의 병 치료나 잘 하라하며 돈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하며 이튿날 신종화를 통해 돈 200원을 보관원에게 보내 주었다. 김씨는 감동되어 눈물이 글썽하여 “이후 벽돌생산에 수요되는 물건이 있으면 최대의 노력을  다하여 돕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가져온 기계는 수송기(输送机), 교반기(搅拌机), 절전기(切砖机)인데 별로 정밀한 기계는 아니지만 조금 손질하고(전동기도 호씨가 가져왔음) 3개월 내에 기계를 설하고 실험해보니 벽돌이 잘되여나왔다.
 
벽돌 굽는 가마(窑)는 윤기태씨가 책임지고 건설하여 10월에 마른 토피를 구워놓고 이듬해(1968년 4월초) 꺼냈(出窑)는데 정말로 좋은 벽돌이였다. 바로 전 성에서 처음으로 농촌기계벽돌공장이 알라에서 일어섰다.
 
기술인재는 한명도 없고 돈도 없는 형편에 반년이란 기간에 공장을 꾸려 벽돌까지 훌륭한 것으로 나왔다는 자체가 실로 놀랄만하며 자랑거리였으니 온 길림지구를 들썽하게 했고 많은 사람들이 참관하고 탄복했다.
 
       
알라디민속촌대문           


알라디조선족중심소학교청사
 
벽돌이 나오자 나는 벽돌을 팔기 위해 수소문 했는데 마침 길림자동차부품공장(吉林汽配厂)에서 직장(车间)을 짓기에 벽돌을 해결해 달라고했다. 책임과장이 가격은 요구대로 다 주겠다고 하여 초보적으로 한장에 6전씩 결정하였다. 
 
돌아와 김서기에게 회보하니 김서기는 벽돌공장의 윤주임과 몇 사람이 벽돌 원가가 한장에 3전가량 된다고 하는데 김서기는 벽돌공장을 차려 돈을 너무 많이 벌면 자본주의길로 가게 되니 리윤을 적게 부치자고 해서 벽돌가격을 한장에 4전씩 받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처음으로 벽돌이 대외로 팔리기 시작했는데 그 때 우리 알라사람들의 성공의 기쁨은 얼마나 컸던지 무슨 말로도 형용할 수 없었다.   
 
며칠후 길림시강북제2백화상점에서 오철해(吴铁海)라는 후근주임과 사무실 곽주임이 벽돌을 요구하여 해결해 주었더니 질 좋고 값 싸니 고맙다 하며 앞으로 알라일을 많이 돕겠다하여 좋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후 알라 새농촌건설에서 우리는 운수방면에서 그들의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알라대대가 농촌에서 기계벽돌공장을 꾸렸다는 소식은 신문에도 실렸고 공사, 현, 시의 령도도 참관왔고 앞으로 알라의 농민들에게 벽돌집을 지어 살게 하라고 고무격려하는 바람에 대대당총지에서는 새 농촌 건설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그후 시정부 고시장이 알라에 왔을 때 김서기가 새 농촌 건설을 해야 하는데 계획을 세우려니 많은 방면에 경험이 부족하니 좀 관심을 해 달라고 했더니 “그럼 좋아요. 래일 즉시로 시달할터니 소식을 기다려보시요!”라고 하기에 우리는 이튿날 고시장을 찾아갔다. 고시장은 부동산공사에 얘기해 놓았으니 찾아가라고 했다.
 
시부동산공사 서기 김명곤씨는 알라사람인데 항미원조에 갔다가 부동산관리국의 당위서기로 배치받은 분이었다. 그분은 매우 반가워하면서 시장의 지시대로 며칠내로 측량대에 제일 좋은 기술자를 배동해 보내겠다고 했다. 다음날 측량대원 7명과 설계원인 리충교(李忠桥)란 공정사를 보내 왔다. 
새 농촌건설의 설계는 넓이 10m , 길이 900m 짜리 중심거리가 동서로 두개, 남북으로는 집 4채마다 길을 두었고 3채는 3간방으로 다른 한채는 5간방으로 하고 집마다 차지하는 땅은 집 앞 10m, 집 6m, 채마지기 14m로 하여 동네는 장기판처럼 설계되었으며 큰길 남쪽 문화지에는 학교, 유치원, 병원, 로인활동실을 짓기로 했다.
 
일주일후 측량대는 돌아갔지만 리충교는 일년 동안 알라에 남아 설계와 건설을 지도했다. 처음 남북으로 7채씩 4채의 집을 시작했고 작은 삼칸집 기초는 1.7m 좌우 깊이로 파고 자갈과 모래를 채워 넣었다(다행히 모래와 자갈은 동네에서 해결했는데 지금의 양어장이 당시 모래와 자갈을 파낸 자리이다). 지량(地梁)을 하는데 전단(前团)에서 돌을 사와야 하는데 집 한채에 자갈(沙石)이 25립방메터 수요되고 전단석(前团石)이 6립방메터가 들어야 하는데 운수가 큰 문제였다. 
  
6. 새 농촌 건설에서 닥친 난관을 지혜와 의력으로
 
당시 촌에는 생산소대마다 소 몇마리와 동방수레가 여섯개가 있을 뿐이다. 소에게 못 먹여 여위고 말라서 형편 없고 때로는 소가 쓰러져 일어나지 못할 때도 있었다. 하여 나와 김 서기는 소에게 운수를 시키면 농사도 짓지 못할 것이 뻔하기에 생각다 못해 헌 자동차라도 사야겠다는 것을 결정하고 그 임무를 내가 맡았다.
 
차를 어디에 가야 살 수 있겠는지? 생각 끝에 장춘에 자동차공장이 있으니 그곳에 가야 하는데 태여나서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장춘에, 그것도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어떻게 할까? 걱정하던중 장춘에서 중학교를 다닌 적 있는 신종기를 찾아가 장춘에 있는 그의 동창 김근식, 송국환, 권오식, 정모모를 찾아갔다. 김근식과 송국환은 직업도 없기에 우리를 도와 매일 자동차소식을 탐문하다가 어떤 사람이 심양에 자동차 파는 곳을 안다기에 나는 급한 김에 알라에 돌아와 현금 6000원을 가지고 그 사람을 따라 김근식, 송국찬 넷이 심양에 도착했다.
 
도착한 지 이틀이 지나도 자동차 파는 곳을 안다는 사람이 자동차 파는 사람을 못 만났다며 차일피일 미루기에 기다리다가 그 사람이 밖으로 나간 다음 우리는 의심스러워 그 사람의 보따리를 들춰보았다. 조선녀성의 루추한 옷 한벌과 소학생 공책에 형님, 동생이란 글자외에 아라비아 수자만 몇 개 쓰여 있었다.
 
우리는 사기당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려관을 나와 심양시 뜨락또르제조공장(拖拉机制造厂)에 다니는 동창생 도영국(都英国)을 찾아 심양까지 오게 된 사연을 말하고는 헌 차라도 사게 련계해 달라고 했다. 그는 웃으면서 지금 단위에서 차를 마음대로 살 수 없고 팔 수도 없으며 자동차는 국가의 계획에 따라 분배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다시 알라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알라에 와보니 알라의 새 농촌 건설사업중 세가지 난관에 부딪쳤는데 하나는 목재문제였고 두번째는 수도 박을 파이프 문제며 세번째는 지붕에 얹을 세멘트기와인데 기와 한장의 무게는 약 여섯근으로 길림에 가서 사오려면 돈도 많이 들지만 운수가 제일 큰 문제였다.
 
닥친 곤난은 하나씩 해결해야 했는데 먼저 목재를 해결하기 위하여 공사에 찾아가 소개신에 도장을 받고 길림서관(西关)목재가공공장에서 목재를 사려니 “시내만 공급하고 대외는 상대하지 않는다.”고 딱 잡아떼기에 말도 못하고 밖에 나와 애꿎은 담배를 피웠다. 목재가 이렇게 많은데 어째서 팔지 않는가하고 두덜거리고 있는데 팔에 붉은 완장을 낀 사람이 꽥 소리를 질러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차! 금연! 나는 농촌에서 왔기에 몰랐다고 사과하면서 웃는 얼굴로 익숙한 사람을 묻듯이 목재가공공장의 조과장네 집이 어딘지 생각나지 않는다며 거처를 물었다.
 
조과장네 집은 공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알려주어 찾기가 쉬웠다. 나는 이튿날 입쌀 10근(당시 쌀이 매우 귀했다)을 과장집에 가져다 그의 마누라에게 주었더니 얼른 받아서 침대 밑에 넣는 것이였다.  
 
다음날 또 조과장을 찾아갔더니 소개신을 보고나서 다른 사람들의 일을 다 해결한 뒤 나에게 정황을 묻기에 사실대로 얘기했더니 알라에 벽돌공장이 있으니 기건과장(基建科长)을 찾아가서 벽돌을 팔겠다고 말해보라 했다. 
 
기건과장을 찾아가니 나이는 40세 좌우이고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벽돌문제를 말했더니 자기네 공장에서 창고를 짓는데 10만장의 벽돌이 수요되여 지금 각 곳에 련계중인데 벽돌이 질만 좋으면 된다고 했다. 우리는 알라벽돌은 질이 일등급이고 한장에 4전이라고 했다. 왕과장이 난제가 해결되여 좋아할 때 우리는 목재가 수요되니 공소과에 가서 우리에게 목재를 해결해 줄 것을 요구했다.
 
왕과장이 쾌히 승낙하여 우리 두사람은 조과장을 찾아갔다. 조과장은 목재를 주겠다고 승낙했다. 기실은 조과장이 알라에 목재를 주기 위해 만들어놓은 합법적 절차였다. 
 
다음은 수도파이프가 긴급하였다. 집집마다 수도는 박아야 하는데 그 숱한 파이프를 파는 곳도 없고 현이나 시물자국도 계획 없는 강철재료를 해결할 수 없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또 장춘에 있는 송국환과 김근식을 찾아가 얘기하니 국찬의 매부가 리놀륨공장 공소과(油粘纸厂供销科) 과장으로 사업하는데 국환의 매부는 출장 가고 없고 지금 공장에는 1.2촌짜리 파이프는 있는데 팔지 않고 규격이 큰 파이프와 바꿔 쓰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리놀륨공장장(油粘纸厂长)을 찾아가 우리가 농촌에서 왔다고 하면 접대조차 하지 않을 것 같아 국찬이는 나를 전기용접봉공장(电焊条厂)공소과(供销科)에서 왔다고 하면서 1.2촌짜리 파이프을 먼저 주면 일주일내로 굵은 파이프로 바꾸어주겠다고 했다. 공장장은 아주 좋아하면서 동의했다. 발등에 붙은 불부터 꺼야 했으니 굵은 파이프는 어디서 어떻게 구해주어야 한다는 것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후과를 고려할 여지가 없었다.
 
소뿔은 단김에 뺀다고 우리는 급히 수요되니 래일 와서 차로 가져가게 해달라고 했다. 공장장은 래일은 휴식날이지만 급하게 수요된다면 차를 보내주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밤새 마음이 뒤숭승하여 잠 한숨 바로 자지 못했다.
 
리놀륨공장(油粘纸厂)에 들어가 보니 공일날이라 직공들은 출근하지 않았고 보관원은 우리를 기다렸다. 나는 장춘시 전기용접봉공장공소과 배명수(长春市电焊条厂供销科裴明守)가 파이프를 받았다는 사인을 하고 파이프를 차에 실었다.
 
알라에 돌아오려면 차로하(岔路河),수등참(授登站)에 물자검사참(物资检查站)이 있어 목재나 강철재료 같은 것은 허가 없이 지나가지 못하기에 밤중에 떠나려고 점심때 운전수에게 술대접을 하고 우리 몇은 장춘남호(南湖)에서 놀다가 저녁 무렵 려관에 오니 장춘시 엄단판공실(严打办公室,엄격히 법규를 위반한 자를 다루는 판공실)에서 운전수를 데려갔는데(알고 보니 운전수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셨는지라 다른 사람의 침대에서 잠이 들었는데 침대 주인이 자기 침대를 비우라고 운전수를 깨우는 바람에 싸움이 벌어졌다고 했다) 나를 오라 하여 책임자인듯한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인사를 했더니 그 사람은 문화대혁명시기에 장춘에 와서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지만 농촌에서 왔으니 주의하라고 당부하고 풀어주었다. 그날 밤 10시경 우리는 알라로 출발했다.
 
앞에 두곳의 검사참(检查站)을 어떻게 무사히 건너가겠는가 조마조마 했는데 찰로하검사참(岔路河检查站)은 마침 긴 란간도 내려놓지 않았고 지키는 사람이 잠을 자는지 잠시 나타나지 않아 무사히 건너왔지만 수등참검사참(授登站检查站)에 오니 란간이 좀 짧아서 절반 쯤 막혀 있었다. 자동차를 길 옆쪽으로 몰며 속도를 내어 건너다가 자동차 앞부분이 좀 망가졌지만 별 문제 없이 알라에 도착하여 이튿날 아침부터 수도를 박기 시작했다.
 
약 10여일후 장춘시 공안국에서 영길현 투기장사정돈조직(打击投机倒把办公室)과 련합하여 구성된 3-4명의 공작인원이 나를 찾아왔다.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던 나는 촌에다 회보한 상태여서 회계 제룡태는 “배명수가 출장 갔기에 저녁에야 돌아올 것이다.”고 거짓말을 해놓고 공사에 가서 김서기에게 알렸더니 공사의 양서기, 김서기와 나는 함께 저녁 무렵에 공안국 사람들을 만나 나는 새농촌건설에 급히 수요되는 수도파이프는 훔친 것도 아니며 먼저 쓰고 후에 갚으려 했다는 사실을 재삼 설명하였다.
 
하지만 우리 능력으로 굵은 파이프는 해결할 수 없어 하루하루 미루다가 시간이 오래되니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결국 공짜로 수도문제는 해결한 셈이었다.
 
다음으로 닥친 문제는 벽돌집에 덮어야 할 기와인데 경비와 운수가 큰 일이었다. 한장에 5, 6근 되는 그 많은 기와를 어떻게 가져온단 말인가? 부득불 우리는 기와공장을 차려야겠다고 결정했다. 윤주임이 길림시기와공장에 갔었는데 알고 보니 기와 생산은 아주 간단했다. 기와형틀(瓦母子) 200개와 압반(压板) 4개만 사서 틀 우에 올려놓고 반죽한 세멘트와 모래를 형틀(模具)에 올려놓은 다음 압반(压板)기로 잘 눌러서 2, 3일이면 굳어지는데 그 때 형틀에서 떼어내 약 열흘 양성하면 기와가 되었다. 그 때부터 알라의 기와공장은 계속하여 해나왔다.
 
알라건설중 제일 힘들게 지어진 중, 소학교는 너비 10메터, 길이 76메터 이층집 근 1600평방메터의 큰집을 지어야 하는데 우리 실력으로 말하면 실제는 막막한 일이었다.
 
이 집을 설계한 사람은 리송교(李松桥)인데 이층에 덮을 콩크리트판은 길이 5메터, 넓이 0.95메터인데 수요량이 160개였다. 사오자니 돈도 없고 설상 돈이 있어 사온다 해도 운수와 싣고 부리우는 것도 난제였다.
 
그래서 부득불 자체로 만들기로 하였다. 말이 쉽지만 콩크리트판은 품질요구에 도달하지 못하면 특히는 학교라서 우리들의 자식들, 즉 많은 아동들의 생명에 관계되는 큰 일이기에 재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 기술을 지도하는 리공정사는 기술만 지도할 뿐이지 후과는 책임을 질 수 없다고 정중하게 말했다.
 
당시 나의 생각은 공정사가 시키는 대로 어김 없이 하면 질은 보증할 수 있을 것이고 콩크리트판(水泥板)을 올려 놓은 뒤 학생들이 인차 들어가지 않고 또 그 우에다 세멘트를 바르게 되니 시간적 여유가 많으니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리공정사에게 신신부탁하여 만들 때 꼭 옆에 붙어있으면서 엄격히 요구하고 감시하게 했다. 그리하여 160개 콩크리트판을 충분히 양성시켜 나무받침대를 세우고 널판을 깔아펴고 밀차에 실어서 우에서 바줄로 당기고 네 사람이 뒤에서 밀면서 올렸다. 처음 올릴 때는 조마조마하였지만 두번째부터는 잘 올려놓아 이층집을 순리롭게 지었다. 지금 이층집을 짓는 것은 식은 죽 먹기지만 70년대 기술, 설비 없는 농민들에게는 기적이었고 참관을 온 사람들은 모두 입을 벌렸다.
 
알라의 새 농촌 건설중 운수문제가 제일 큰 난제였다. 우리가 곤난에 처해있을 때(1969년 가을) 마침 현에서 고무바퀴 뜨락또르를 보내주었다. 벽돌공장에 석탄재가루를 실어와야 하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날라도 딸리는 형편이여서 자동차 한대를 조립하기로 하였다.  
 
1970년에 첫 자동차를 조립하였는데 우리가 성공적으로 자동차를 조립할 수 있었던 것은 길림군구 부대농장에서 5.7지시를 받들어 음마하에 땅을 맡아 수전을 풀었는데 길림성에서 수전농사는 알라가 으뜸이라는 소문을 듣고 양신영(당시부대농장장)이 알라에 찾아와 도움을 요구했을 때 김서기가 선뜻 동의하고 차경철(2대서기) 등 몇 사람을 보내 논을 풀어주고 모 키우는 기술지도를 하여 농사를 참 잘 되였기 때문이였다.
 
벼가 잘 자라고 있을 때 양농장장은 나를 요청하여 음마하농장을 구경시켰고 이튿날 자동차공장에 데리고 가 공구분공장(工具分厂) 두(杜)공장장의 접대를 받은 다음 샤시공장(底盘厂)에 가서 장영(张英)서기와 진모영(秦冒榮)공장장과 엽량부(叶良富)공장장을 만나 접대를 받았다. 당시 양신영 공장장은 알라를 매우 높이 평가하면서 새 농촌을 정말 잘 건설한다고 했다. 이 때 샤시공장의 엽공장장이 그 공장에서 림시로 겨울에 쓸 수 있는 자동차 창고가 수요되는데 알라에서 지을 수 있는가하고 제기하자 나는 그 자리에서 흔쾌히 답복하였다.
 
 
   
우수한 길잡이로 떨친 원 알리디 당총지 서기 김룡구


70, 80년대 알라디 새 마을 풍경
 
그리하여 너비 10메터 길이 15메터 되는 차고를 두주일에 다 지어주고 품값을 주려하자 얼마 되지 않은 품값을 받지 않겠다고 했더니 관계가 대단히 좋아져 자동차 조립에 큰 도움을 주어 자동차를 조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길림성계획경제위원회 주임 미풍균은 원래 제일자동차 샤시공장에서 엽공장장의 부하로 같이 사업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그 때 처음으로 “일본 50령” 자동차가 길림성에 들어왔다는 소문을 듣고 나는 장춘에 가 엽공장장과 함께 성정부에 가서 미주임을 찾아 일본차를 요구하니 미주임은 웃으면서 특별히 비준을 해주어 50령자동차를 가져왔다. 이렇게 알라에는 조립한 자동차 한 대, 고무바퀴 뜨락또르 한대 또 50령차까지 있어 운수문제는 해결되였다.
 
그후에 알라사적이 신문에도 자주 나고 상급령도들도 많이 왔었는데 길림성 성장 장근생(张勤生), 심양군구사령 심사장(深师长), 중앙민족사무위원회 문정일(文正一) 부주임,중앙수력발전부 전재영(钱在英) 부장, 중앙군사위원회 후근부 조남기(赵南起, 그는 두차례 알라에 왔음) 부장, 특히 국무원 온가보(温家宝) 총리도 알라를 돌아보고 문기춘(文基春) 집에 들어가 보았다. 그외 길림성, 흑룡강성, 료녕성의 조선족참관단은 헤아릴 수 없이 왔었으며 일부 동남아국가, 태국, 라오스, 파키스탄 손님들도 다녀갔다.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돼지우리에 있는 돼지를 보고는 꿇어앉아 두 손 모아 절을 하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조선량강도도위 서기 등 손님들도 왔었다. 오는 손님이 너무 많아 위생소에 출근하던 손명호(孙明浩) 씨를 대대 부주임이라는 직위를 주고 초대소를 관리하면서 손님을 접대하게 하였는데 후에는 고문주(高文珠)가 책임지였다. 
 
당시 알라는 성내에 제일 먼저 기계벽돌공장을 꾸려 새 농촌 건설을 하였고 그후 목재가공(설비가 좋았다) 선반기, 용접, 꽃무늬거울공장, 화학비료공장, 세멘트공장, 유기비료공장, 양계부화장, 전문건축대, 양어장 등 공장과 생산기지가 있어 참관 온 사람마다 놀랐으며 대단한 농촌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내막은 1982년부터 10여년간 새 농촌 건설로 인하여 투자가 너무 많았다. 사원주택은 짓는 족족 사원들에게 분배했는데 일전도 받지 않았고 학교 초대소, 병원, 대대사공실 등은 공가건설로 돈 일전 나오지 못하였고 대대내에 그 많은 기업은 벽돌공장을 제외하고 돈 버는 기업이 없어 본기업의 월급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 형편이였다. 대대의 자금래원은 다만 농업에서 루적을 많이 떼기에(17%, 20%) 사원들의 분배가 적게 돌아서 다수의 농민들은 량식값을 떼고 나면 찾아 갈 돈이 얼마 없었다. 로동력이 좋은 사람들은 찾아갈 돈이 좀 있어도 주지 않거나 흉내만 냈다. 그리하여 음력설이 돌아오면 생산대마다 돼지를 잡아 고기 1, 2근씩 주고 때로는 콩기름도 줄 때가 있었다. 그외에 복리는 생각지도 못했다. 극소수의 사원들이 돈 때문에 간부들의 멱살을 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내막을 상급이나 대외에 말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돈 없는 경제난이 큰 문제로 되여 우리의 앞길을 막고 있었다. 정말 딱한 사정이었지만 별 방법이 없었고 그렇다고 상급에 제기할 형편도 아닌데 때마침 할빈가용전기공장(家用电器厂) 리익수(녀)와 공소과 과장 서종발(徐宗发) 두 사람이 샤시공장(底盘厂) 장영(张瑛)서기의 소개로 나를 찾아왔는데 자동차를 조립해달라고 하였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샤시공장 장영은 제1자동차공장 서기로 승급했으며 강택민(江泽民) 주석과 쏘련류학도 같이 했고 강택민 주석이 장춘제1자동차공장의 열전공장(一汽热电厂) 서기로 있을 때 장영은 샤시공장 서기였다. 
 
그리고 샤시공장의 진(秦)부공장장은 제1자동차공장의 부공장장으로, 엽량부(叶良富)부공장장은 제1자동차공장 배치처(调度处) 처장이니 내가 자동차공장에서 알라대대의 일을 보는데 기본상 통달한 셈이다. 그래서 우리의 곤난을 해결하기에 아주 편리했다.
 
이런 기초가 있었기에 할빈가용전기공장에서 자동차를 조립해줄 것을 요구할 때 돈이 없어 헤매던 알라가 돈을 벌기 위해 나는 렴치를 불구하고 자동차의 가격문제를 먼저 말하면서 자체로 자동차를 조립해 보니 경비도 많이 들고 조립하기도 힘이 드는데 아무리 절약한다 해도 원가가 많이 들어 약 3만원 이상 든다하면서 먼저 4만원 돈을 지불해야 한다고 했더니 할빈에서는 값이 싸던 비싸던 관계 없이(당시 자동차가 귀했다) 그저 조립만 해주면 고맙다고 했다.
 
그리하여 할빈에서 돈 4만원을 부쳐와 알라는 목마를 때 물을 마신 것 같았다. 내가 처음 자동차를 만들 때에는 아무 것도 몰랐지만 후에 책을 사서 재료를 보고 부속품의 명칭도 알고 자동차의 5대총성 및 부속품의 전부 명칭도 기본상 장악한 기초에 자동차 공장과의 좋은 관계가 있어 2개월 만에 자동차를 조립했고 돈을 부쳐온 지 두달도 안되어 자동차 한대를 할빈에 보내 우리는 경제난을 초보적으로 해결했다.
 
솔직히 말해서 자동차 한대를 조립하는데 돈 만원도 안 들었고 할빈에서 남은 돈을 돌려달라고 하지 않기에 더 많은 수익을 본 셈이다.
 
또 얼마 안 되어 연변림업국에서 자동차 한대를 해결해 달라하여 돈을 버는 재미도 있고 앞으로 목재 해결에 좋은 조건을 창조하기 위하여 선뜻 자동차 한대를 조립해 주었더니 돈도 벌었고 알라의 건설사업에 목재는 아무런 걱정이 없게 되었다. 화룡림업국과 안도림업국과의 관계가 아주 좋아져 목재 래원이 더 풍요롭게 되었고 모든 일이 더욱 순리롭게 해결되였다.
 
그후 산서성대동시모피공장(大同皮毛厂)에서 자동차 한대를 요구하여 보내주었더니 돈 4만원을 부쳐왔다. 사실은 당시 4만원씩 받았지만 우리는 만원도 들지 않았는데 많은 부속품은 관계망을 리용해 공짜로 가져오는 것이 많았고 큰 부속품은 헐한 값으로 가져왔다. 이렇게 되여 대대 경제난은 점차적으로 해결되었고 대대의 형편은 풀려나갔다.
 
대동시모피공장과의 관계는 우리가 자동차를 조립할 때 내가 장춘에 자주 갔었는데 한번은 큰길 근처의 영춘려관에 들게 되어 내몽골사자왕기모피공장공소과(四子王旗毛皮厂供销科)에 있는 성명이 요복(姚福)이란 사람이 키도 훤칠하고 희고 갸름한 얼굴에 숱이 많고 검은 눈썹을 가진 사람이였는데 처음에는 서먹했으나 며칠 지나서는 밥 먹은 후에도 서로 앞을 다투어 밥값을 내려는 사이로 되였다.
 
서로간에 익숙해진 다음 나는 무슨 볼일로 장춘에 왔는가하고 물었더니 장춘 어느 공장에 양털을 가공하는 기계를 주문했는데 기계가 완성되지 않았다며 대방에서 날짜만 미루고 부쳐주지 않아서 몽골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면서 그들은 또 좋은 양털옷감을 달라하기에 며칠내로 옷감이 도착하면 기계를 부쳐줄 것 같다고 했다.
 
내가 들어봐도 기계는 돈 받고 만들어주면서도 자기들의(개인) 털옷감을 얻으려고 수단을 부리고 있다는 게 뻔하고 격분할 일이었다.
 
나는 요복에게 나와 같이 공장에 가보자고 하면서 “공장에서 구체관리를 맡아하는 사람을 만날 때 내가 그 자리를 피할 테니 나를 길림시강북기계공장(吉林市江北机戒厂)에 있다고 말하며 이 공장에 양털가공기계가 있다는데 만약 당신들이 기계를 인츰 해결하지 못하면 돈을 돌려달라!”고 말해라 했다. 내가 길림에 가서 바로 사가지고 가겠다고 말하라고 했더니 그들은 그제야 이틀내로 부쳐주겠으니 기다리라하여 려관에 오니 양털옷 두감과 검은 털장갑이 도착해 있었다.
 
이튿날 요복이 양털옷 한감과 장갑을 가지고 그 사람에게 가져다주니 매우 좋아하면서 마침 기계도 다 되엿으니 래일 당장 부쳐준다고 하여 이 일은 해결됐다. 떠나가기 전에 둘이서 술잔을 나누며 그는 세상에 너 같은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하면서 남은 양털옷 한감을 나에게 주었다. 나는 돈도 없고 그저 가지는 게 미안하여 거절했지만 너무 간곡히 주는 바람에 결국 받고 말았다.
 
서로 갈라질 때 주소와 전화번호를 주고받으며 바쁠 때 서로 돕기로 하였다. 며칠이 지나 요복의 편지가 왔는데 지난 일들이 고맙다고 인사한 후 몽골에는 목재가 곤난한데 동북엔 산림이 많고 목재가 많이 나는 곳이니 조건이 되면 도와달라고 했다.
그 때 나는 길림시강만로(吉林市江湾路)에 있는 21목재가공공장(制材厂)에 목재를 사느라 자주 다녔는데 공소과 과장 조상현(供销科科长赵相贤)을 알게 되여 래왕중 조과장이 자기 녀동생이 나이가 들었는데 대상을 물색해 달라하여 나는 고삼범이라는 총각을 소개했는데 혼사가 되어 결혼까지 했다.
 그 때부터 조씨와 나는 서로 친하게 되어 몽고의 목재문제를 말하니 제21목재가공공장의 도장만 찍으면 전국 각지 어디에나 목재를 보낼 수 있는데 이 도장을 자기가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목재는 국가계획에 따라 보내기에 함부로 도장을 찍으면 착오를 범한다고 했다. 
 
당시 나는 나라내에서 곤난한 곳에 목재를 줘서 돈을 제대로 받으면 큰 문제가 없을 것 같고 그 사람들도 감사하여 양털이라도 기부할 수 있으니 목재를 부쳐주라고 권고하자 조과장은 내가 “곤난한 지방에 목재를 부쳐줘 큰 죄가 될 것 없지.”라면서 부쳐 보냈다.
 
그후 사자왕기(四子王旗)에 송목 한차피를 보냈고 돈 결산도 다 되였다. 사자왕기모피공장(四子王旗皮毛厂)에서는 양털옷과 구두 몇컬레를 감사의 뜻으로 나에게 부쳐왔기에 그 털옷과 구두를 조과장에게 보내주었다.
 
사자왕기(四子王旗)에서는 력사이래 처음으로 그렇게 좋은 목재가 들어와 전기(全旗)에 소문이 나고 요복의 이름도 날렸다. 이 소식을 들은 산서성대동모피공장(山西大同皮毛厂)에서 요씨가 큰 인재이니 요씨를 대동모피공장(大同皮毛厂)으로 조동시키고 가족도 모두 대동으로 이사시켰다.
 
요씨는 대동모피공장공소과(大同皮毛厂供销科)에서 사업하면서 그 공장에서 자동차를 사지 못하여 나에게 또 도움을 부탁하기에 우리는 돈을 받고 자동차를 조립해 보내주 었다. 그 공장은 민영기업인데 전국에서 이름이 있고 공장장 리자영은 전국 정협위원이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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