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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넋 알라의 발자취3
2020년 12월 21일 08시 15분  조회:353  추천:0  작성자: 기록
 7. “영길현, 서란현, 유수현”의 수전 개간으로 인한 풍파
 
알라의 발전사에서 이제는 숨을 좀 쉬는가 했더니 갑자기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지듯이 시에서 갑자기 통지가 왔다. 영길현, 서란현, 유수현 세개 현이 송화강의 젖강을 막아 수위를 높여 1000여쌍의 토지를 수전으로 개간한다는 결정이다. 만약 그렇다면 알라의 200쌍은 물에 잠기게 되니 미리 조치를 강구하란다. 
 
알라대대에서는 급하게 김서기가 사람들을 데리고 금주땅을 돌아봤으나 알라사람들이 옮겨갈 형편이 안 되었다. 또 배주환씨를 데리고 흑룡강성까지 돌아보아도 300여호의 농가와 300쌍의 수전을 풀 수 있는 곳은 전혀 없었다.
 
할 수 없이 알라에 다시 와 지부회의를 열고 부득불 일부 인원을 이사시켜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총지에서 누구든지 마음대로 조직하여 좋은 곳으로 이사가는 사람을 지지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리종원(전임 대대장)씨가 30여호(전임 대대장)를 조직하여 길림시 교구 구참공사 남산도(南山道)로 가기로 결정되었다.
 
가을에 일부는 남산도에 가서 집을 짓고 논 풀 준비를 하고 이사했다. 내가 따라가 봤는데 산골이고 물을 퍼 올려 논을 풀어야 하는데 물을 푸는 일은 국가에서 도와준다 하였다. 산골에 논을 푸니 얼마나 좋을까?  
 
그것 또한 기발한 창조였다. 후에 다시 진툰(陈屯)으로 옮겨갔다. 나는 그냥 말하지 않고 알라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알라에서의 발전은 가망이 적기에 후에 떠날 생각을 하고 길림시정부의 고시장을 찾아가 알라에서 호수를 줄여야 하기에 부득불 떠나야 하는데 수전을 풀만한 곳을 련계해달라고 제기했더니 고시장은 알라사람들은 벼농사를 잘해 길림시교구에 와서 수전을 발전을 이끌어주면 좋겠다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교구정부에 전화를 걸고 우리를 보고 바로 구참공사에 가라 하여 구참공사에 찾아갔더니 박구장(조선족)과 하와자(下洼子)대대 서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논풀 곳을 돌아보았다. 신작로 옆이고 송화강가에 고점자 남쪽인데 강냉이를 심던 한전을 우리를 주겠다고 하였다. 그날 저녁 우리는 하와자대대의 접대를 받고 돌아왔다(당시 나와 강필근이 함께 갔다).
 
알라에 돌아와 이사 갈 사람을 조직해 보려니 자리가 좋아 서로 가려고 할 것 같아서 젊은 사람들로 조직하였는데 서기감인 신기원, 대장감 최형두, 강필근은 당지와 관계를 잘 맺어 양수장과 주택 건설을 맡고 나는 길림시와 가까우니 방법을 연구하여 기업을 꾸리면 하와자에 가게 될 30여호의 미래 생활은 좋아질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우리가 김서기에게 30여호가 이사 간다고 하니 김서기가 명단을 보자고 했다. 강필근이가 김서기에게 쓴 명단을 보여주었더니 김서기는 명단을 훑어보다가 그 종이를 쫙 찢어버리며 “아무도 못 간다!”고 화를 내면서 나가더니 합작사에 가서 술 한컵에 소금 한알을 안주로 마신 뒤 집으로 갔다.
 
강필근과 나는 기가 막혀 집으로 갔는데 사람을 시켜 저녁도 먹지 않은 나를 김서기가 불러서 갔더니 “6대 리형출 서기가 세상을 떠났다는데 가봐야 되지 않겠나?"고 했다.
“예!?”
리서기네 집에 가서 인사를 한 다음 술상을 차렸는데 김서기가 “리서기는 알라의 훌륭한 당원이다.”라고 하면서 여러 면에서의 그의 착한 인생살이와 사업에 힘써온 얘기를 하면서 나에게 “명수도 알라를 위하여 알라사람들을 위하여 너는 알라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을 정중하게 말씀하셨다.
 
김서기의 간곡한 부탁에 나는 다시 생각해 보게 되였다. 알라에는 나를 낳아 젖 먹여 키워준 세상에 둘도 없는 어머니의 뼈가 묻혀 있었고 또 같은 피가 흐르는 겨레들이 서로 도우면서 참된 사랑과 인정으로 살아온 인정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나는 '내 고향 알라를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알라사람들과 같이 영원히 알라의 청산록수에 묻혀 살며 알라를 지켜보며 세상 끝까지 가야 했다.
 
김서기에게 떠나지 않겠다고 하자 김서기는 나의 어깨를 툭툭 치며 고맙다고 인사한 뒤 매우 기뻐하였다. 내가 떠나지 않겠다고 하니 목수 윤광수, 철만지, 윤상건 등은 기계 사용에 재간 있는 김리선 등 몇 사람들도 못 가도록 다시 붙들어놓았다. 그리하여 리종원(李钟元)씨를 비롯한 30여호와 강필근이 조직한 30여호 250-260명의 인구가 줄었는데 그것은 한개 대대가 없어진 셈이였다. 알라사람들은 그래도 그 물 때문에 걱정이 되여 마음이 들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정부에서 좋은 통지가 내려왔는데 "알라에다 국가에서 제방을 새로 쌓아주고 수문을 단속하고 배수는 큰 펌프를 놓아 논에 물이 차는 것을 막을 수 있으니 안심하라" 하였다.
 
그렇게 해결한 덕분에 가물 때는 송화강에서 물을 끌어올리고 장마 때는 퇴수물을 밖으로 퍼 내니 자연에 맞서는 알라사람들에겐 하늘도 울고 갈 가물이나 장마도 없었고 그 후로는 해마다 풍작을 거두었다.

 
8. 문화대혁명
 
알라에서는 1963년도 제1차 사회주의교육 운동이 시작되여 길림시농업국 국장 리규삼(李圭三)의 령솔하에 공작대 십여명이 장기 주둔하면서 군중을 발동하여 경제청산을 하고 간부들의 문제를 적발하는 운동을 벌렸다. 그 때는 생산소대가 핵심이여서 일부 소대간부들은 돈을 좀 더 가져가고 소대돈으로 술상을 차리는 등 부정한 일이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고 다만 대대의 회계가 1000여원을 횡령하여 철직처분을 받았다. 그래서 잠시 내가 회계를 맡아했으며 년말에 공작대가 철거했다.
 
1964年에 다시 제2차 사회주의교육 운동이 시작되였는데 박원종(朴元钟)씨가 공작대 조장으로 되였다. 경제상에서 큰 문제는 없었고 다만 대대장이 생활작품문제로 떨어지고 26세인 내가 정치대장으로 되였다.
 
사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농촌사업에서 아무런 능력도 없었다. 농사에는 문외한이였고 정치사업에도 깜깜이었다. 중학교에 다닐 때 우리 집은 일곱 식구에 다섯명이나 학생이니 부모님들의 부담이 너무나 많아 나는 부모님들의 부담을 경감시키려고 퇴학하여 포두시(包头市)에 가서 측량대로 있다가 돌아왔으니 농촌사업에서 많은 것을 모르기에 마음속으로는 달갑지 않은 간부가 되였다. 내가 대대장으로 된 것은 그 시기에는 가정출신을 많이 따지는 세월이라 나는 빈농출신에다 렬사의 동생, 아버지는 렬군속모범이었으니…
 
대대장이 되였지만 정치운동에 아무런 흥취가 없어 내 앞의 일이나 보고 대대 김서기가 시키는 일만 중시하고 언제나 열심히 해나갔다. 하루는 사무실에 있는데 호구를 겸하여 관리했던 회계 한춘근씨가 나에게 “김국범(金国范) 선생의 호구에는 성분을 밝히지 않았는데 어떻게 써야하는가?”라고 묻는 것이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초기에 학교에서 나의 자형 김국범 선생은 목에 패쪽을 걸고 비판투쟁을 받았다. 당시 우리 가정은 혁명가정인데 자형이 지주분자로 인정된 것이 접수되지 않아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아버지는 “지주라도 세살 때 아빠가 죽었는데 네 자형이 무엇을 알겠나? 그래도 길림성 우수교사로 입당까지 했는데…”
 
 나는 또 김서기께 직접 물어보았다. “우리 자형은 도대체 무슨 문제인가요?” 김서기는 소지주의 아들이라 했다. 그리하여 나는 회계에게 김국범이 소지주의 아들이라고 알려 주었다.
 
이 일이 문화혁명시기 나에게 큰 문제로 되였다. 한번은 나를 새 교실에 오라고 하여 갔더니 <배명수 비판대회>라고 써서 붙여놓고 앞에 서라하여 섰더니 “계급투쟁을 견지하자!”, “무산계급전정을 공고히 하자!”라는 구호를 부른 뒤 나더러 검사하라 했다. 속으로 나는 집체공금을 횡령하지 않았고 다른 오점도 없으며 벽돌 한장도 공짜로 쓴 적이 없고 바람을 피워 녀자를 본 적도 없는데 무엇을 검사할 것인가? 그래서 나는 “학습이 부족하여 정치를 돌출이 하지 못했고 능력이 모자라 대대 일을 잘 보지 못하였다.”라고 검사하니 뒤에서 누군지 큰소리로 말하기를 “나라를 배반하고 조선에 갔다 온 것은 죄가 아닌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깜짝 놀랐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조선에 갔다 온 것은 사실이고 입당할 때 김서기에게 다 교대했고 조선 남양에 갔다가 나흘 만에 돌아왔었고 조선의 실 한오리도 가져오지 않았는데 무슨 죄를 론할 것인가? 다시 생각해 보니 국경을 넘어 불법 월경한 것이 죄인 것 같아 잘못했다고 했다.
 
10년간의 문화대혁명은 나에게 인생살이에 대한 많은 것을 느끼게 했고 배우게 했다. 
나는 영국의 유명한 작가 쉐익스피어의 “세상의 그 어떤 권위와 위망이 있는 사람도 여론계의 중상을 피면하기 어렵고 가장 순결한 도덕품행도 배후의 공격을 피면할 수 없다”라는 명언에 담긴 철리를 다시 한번 느꼈었다.
 
9. 개혁개방의 풍랑 속에서 알라의 개혁은 성공하였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중국에 개혁개방정책이 시달되면서 농촌에는 호도거리가 실시되기 시작했다. 1978년에 안휘성 소강촌의 18명 농민이 혈서로 대보간을 하자고 하여 당시 성위 서기 만리의 지지를 받고 1979-1980년에는 전국적으로 실시했다. 그 때 알라의 김서기는 1979년에 병환으로 있다가 1980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서기는 일편단심 당을 위해 일생을 바쳤고 26년이란 기나긴 세월, 1953년부터 1980년까지 알라를 위하여 분투하였다. 하여 현위 곽(郭)서기는 추도식에서 “김룡구 서기의 업적은 알라에서 대대로 빛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당은 훌륭한 일꾼을 잃었고 알라사람들은 훌륭한 령도를 잃었기에 알라사람들은 매우 비통해 했다. 
 
김서기의 추도식이 끝난 후 공사 허명(许明)서기가 알라에 와 하루간 있더니 이튿날 다시 와서 당원대회를 소집하고 하시는 말씀이 “당원, 간부들의 다수 의견에 따라 공사당위는 배명수동지를 알라당총지 서기로 임명한다.”라고 선포했다. 오래전부터 김서기는 후계자를 고려해 모든 일을 나하고 먼저 토론해 결정하였는데 4, 5명이나 선발해 사업해봤지만 한 사람도 후계자로 되지 못했다 .
 
나는 지부사업은 조금도 해보지 못했고 할 줄도 몰랐으며 지부서기사업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이미 결정되였으니 정영기(원 화전시당위 서기)의 의견을 많이 참고하고 도움을 받아가며 하루하루를 겨우  견지한 것 같다.
 
호도거리정책을 실시할 때 처음엔 알라사람들에게 접수되지 못했다. 20여년간의 집체경제제도로 얻어온 성적과 발전도 많았는데 호도거리를 실시하면 이미 이루어놓은 모든 것이 묵살되는 것 같아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현위 김서기를 찾아 의견을 청취하려 하였더니 김서기 말씀이 “알라는 보통 농촌과 달라서 자기 립장에서 꼭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은 못하겠으나 알라사람들이 결정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던 차 1981년 길림성 성장 장근생(张根生)과 중앙농촌정책연구소 두윤생(杜润生) 소장이 알라에 왔을 때 나는 알라사람들이 집체화길에서 얻어온 많은 성과를 보고했는데 두윤생 소장의 말씀은 “지난날 알라는 참 잘 했습니다. 성적도 컸습니다. 그런데 알라의 이 좋은 기초에 전국에서 얻어온 좋은 경험을 보태면 알라는 더 빨리 좋아지지 않을까?”라고 했다. 마지막 그들이 떠나갈 때 장성장과 두주임의 말은 중앙의 지시와 같다 하면서 나의 어깨를 도닥이였다. 그리하여 나는 호도거리 시달을 결심하고 1982년도 호도거리정책을 시달하였다.
 
호도거리가 실시된 후 농민들은 제 땅의 주인이 되였고 땅에 대한 애착도 커졌으며 공출미를 바친 뒤에 남은 곡식은 배불리 먹고도 팔 것이 많았다. 몇십년 분투 끝에 성적도 많았지만 호도거리는 우리에게 일체는 자기 형편에 따라, 능력에 따라 돈을 벌 수 있어 생활이 제고되였으며 사람마다 좋아했다.
 
알라는 개혁개방의 영향 아래 원래 집체공금으로 집을 짓던 제도를 개혁하여 이미 벽돌집에 살고 있는 사원들은 값을 싸게 쳐서 받고 소유권은 개인에게 돌리고 새로 집을 짓는 농호들은 자기 마음대로 설계하고 보기 좋고 쓸모 있게 잘 짓게 하였다. 주택건설에 힘 입어 1983년에 알라는 초가집 한채도 없는, 그림 같은 마을로 변모되였다. 
 
                     알라송
 
         인생길 굽이굽이 산수 80 지난 오늘
         태평산령 우에서 세상을 굽어보니
         하늘은 높아졌고 땅도 넓어졌는데 
         그 속에서 알라는 번영창성해 가네
 
         천년 묵은 갈대밭 초가집도 없는데 
         백의동포 피땀 흘려 걸군 곳
         무연한 들판엔 황금파도 물결치고
         아스팔트 줄치는 자동차
 
         줄지어 선 주택이 아름다운 그림 같고
         만발한 화초 속 꽃나비 춤 추네
         흥겨운 공장의 기계소리 
         성(城)향을 구분키 어렵구나
 
         태평산 뿜어올리는 붉은 태양
         찬바람 막아주는 봉황산
         송화강이 고향 적셔주니
         만풍년 알라에 호적 올렸네
 
오늘의 알라가 이렇게 좋아졌으니 물 마실 때 우물 판 사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중국공산당의 영명한 령도와 오늘을 위하여 수십년 세월 속에서 힘겹게 살아온 알라사람들을 잊을 수 없다.
 
10. 잊을 수 없는 알라사람들 
 
지난 수십년 세월의 흐름 속에 잘 먹고 잘 입지 못하면서도 달을 지고 나갔다가 별을 이고 돌아오시던 어머님, 아버님들... 저녁 굶고 자는 어린 자식들에게 헌 옷자락을 덮어주고나선 일에 지친 나머지 자장가 한번 불러주지 못하고 혼곤히 잠드신 어머님들의 가슴 아픈 사연 또한 그 얼마였던가... 

알라사람들의 장백산려행                   


운동대회에서
 
무더운 여름이면 해빛을 등으로 받아주고 흐르는 땀은 논물에 보탬이 될 지경이였으며 엄동설한 추운 겨울 털모자 눌러 쓰고 주먹장갑을 껴도 손이 얼어드는데 곡괭이로 언 땅을 파헤치며 방전화 평정을 하느라고 그믐날까지 일했던 적이 어찌 한두해뿐인가! 알라사람들 잘 살아보자고 일하다가 20여세에 어린 아기 하나 두고 탈곡기에 치마 감겨 생명을 잃은 조한악씨! 당의 호소 받들어 농토개혁의 길에서 지게짐을 지고 가다 허리가 끊어져 어린 아이 둘을 두고 세상을 하직한 안승도 부서기.
 
2011년부터 해마다 진행되는 고추문화축제           


신 나는 장고춤
      
 
풍작을 위해 궂은 날 폭우 속에서 일하다 번개불에 목숨 바친 김정임씨(30세에 인생을 마쳤음), 어린 아기를 남겨 두고 떠나간 그 마음 오죽했을까? 
 
벽돌공장에서 일하다 차사고로 숨진 안용건의 어머니! 알라의 건설을 위하여 밤을 지새우며 벽돌을 나르다가 차에 깔려 사망된 조병태의 안해, 차바퀴가 가슴 우로 지나갔는데 그래도 금방 일어나 앉았다가 탁 쓰러지면서 눈 뜨고 저 세상에 갔으니…
 
나는 또 이미 저 세상을 떠나간 윤기태 부서기를 잊을 수 없다. 전세기 60년대초부터 당총지 부서기로 있으면서 사업능력도 있고 원칙성이 강한 주요령도였다. 간부들이나 군중들 중 잘못이 있으면 추호의 량해라곤 없고 엄격히 처리하기에 일부 사람들은 반감을 샀다. 후에 자식들중 생활작풍문제가 있는 것으로 하여 서기사업 그만두었지만 알라벽돌공장과 새 농촌 건설 사업에서 대대내의 구체적 건설은 윤주임이 관여하면서 사업했으며 사업에 대한 책임감이 아주 높았다. 
 
벽돌을 생산하는 관건은 벽돌가마의 건축이었고 벽돌가마건축의 관건은 천장을 마무리는 것인데 벽돌을 눕혀 틈사이로 흙모래로 꽉 밀어넣고 위에 흙을 바르고 또 벽돌을 깔아 평평하게 만드는 것이다. 힘들게 가마를 다지고 나서 개를 잡아 점심에 술을 마시려고 상을 차려 놓고 술을 마시려 할 때 윤주임이 들어와 서쪽에 비구름이 밀려오니 금방 다져놓은 가마를 덮어야 하기에 빨리 나가 덮자고 동원하니 원래 못 먹고 곤난한 시기여서 개고기냄새만 맡아도 춤이 넘어가는 형편인데 잠깐 먹고 나가면 될 것을 저 사람이 “덜살 대네.”하면서 다수가 먹고 나갈 생각으로 움직이지 않을 때 윤주임은 큰 소리로 "몽땅 나가자"고 소리 질러 모두 나가 비닐로 덮었고 10분도 안되여 소나기가 퍼부었지만 벽돌가마는 무사했다.
 
만약 제때에 덮지 않았으면 비에 흙과 모래가 씻겨 내려가면 벽돌가마가 무너진다고 하여 크나큰 경제손실을 피면하였다. 이 얼마나 참된 공산당 간부인가? 후에 년세가 많아 또 알라의 로인협회 회장으로 사업하다가 세상을 떠났으나 나는 그가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또 저승에 간 알라사람을 말하려 한다. 정영기 부서기는 원래 화전에서 이름 있는 대대 서기였는데 원 화전현위서기 김수희(金守希)가 영길현 서기로 조동되여서 알라의 정황을 료해한 후 알라를 더 잘 꾸리기 위하여 정영기를 알라로 오게 했다. 정영기는 사람이 침착하고 속에 든 것도 많지만 더욱 큰 특점은 진실함이였다. 모든 처사를 공정하게 하고 어느 편에 서는 법이 없는 사람이였다. 옳고 그름을 똑바로 가르고 자기의 주위에 사람을 끌어모으는 법도 없었고 언제나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여주었는데 중한 병에 걸려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의 별세는 알라의 큰 손실이였다.
 
     
알라디룡성충압공장의 모습         


배명수의 아들 배철훈 
길림시룡성실업유한공사 리사장 
길림시조선족기업가협회 상무부회장
                                                                          
신종화, 리충환(李忠焕) 두 사람은 알라의 기업발전에 자기들의 정열을 다 바쳤다. 항상 사업에 열중하고 그 많은 정치운동에 얼굴을 내밀려는 야심이 없었고 패거리에 휩쓸리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몹쓸 병은 그들의 인생을 너무 일찍이 앗아가 알라의 발전에 손실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당원도 아니고 간부도 아닌 순수한 농민인 김근식씨를 나는 말하고 싶다. 그는 장춘에서 알라로 와서 알라를 위하여 자기의 모든 정열을 바쳐온 훌륭한 사람이다. 다른 건 그만두고 알라에서 경제난이 생겨 부득불 자동차를 조립하여 돈을 벌지 않으면 안되였을 때 자동차 4대를 조립해 낸 뛰여난 공로가 있다. 한시기 장춘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자동차공장의 작업복을 입고 자동차공장에 드나들면서(제1자동차공장의 출입구는 자동차공장의 작업복만 입으면 그냥 들어갈 수 있었다) 그곳의 사람들과의 밀접한 련계를 가졌다. 그는 갖은 방법으로 당시 사기 어려운 자동차부속품 구매에 큰 공헌이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명이 짧아 일찍이 세상을 떠났으니 나의 마음은 지금도 쓰리다. 나의 사업에 손과 발처럼 중요한 작용을 한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술 한잔 따로 대접 못한 것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그 시절, 나에게는 돈이 없었고 대대돈은 일전도 아껴야 했으니 말이다. 좋은 말이라도 해주지 못한 것이 참으로 후회스럽고 다른 사람들에게 배려를 많이 돌리지 못한 것이 가슴이 아프다! 
 
이 분들은 모두가 한 민족의 피가 흐르는 알라사람들이였다. 
 
알라사람들! 나는 언제나 알라사람들을 자랑하고 싶다.
 
박호산:탄지니아 수력발전소 건설공정의 총지휘로 지원 나갔다가 건설을 끝마치고 돌아와 백산수력발전소의 책임자로 사업하셨다.
 
오만복: 알라에서 일하다 자습하여 대학까지 졸업하고 공사당위 서기, 시위조직부의 처장, 길림시상업국 국장으로 사업한 분이다.
 
한철근: 알라에서 일하다가 문예면에 재간이 있어 시조선족문화관에서 사업했는데 많은 조선족노래를 작곡했으며 우리 로인들이 즐겨 부르는 로인협회가를 작곡한 이름난 작곡가이시다.
 
김홍란: 지금 우리 민족의 이름 있는 《도라지》 잡지사의 편집부에서 사업하시며 작가이시다.
 
안수근(안승도의 아들): 길림시보험공사의 처장이고 그의 동생은 중국인민해방군 모 부대 사장으로 사업하고 있다.
 
도규섭: 장춘교통학교를 졸업하고 연길현도로공사에서 공정사, 양로참 참장으로 사업하다 정년퇴직하여 길림시조선족문학사랑회를 발기한 사람이다.
 
박상래: 길림시 룡담구정부에서 요원으로 사업하고 있다.
 
김석대(김룡구 서기의 아들): 한시기 알라대대 당총지서기로 선거되여 알라사람들을 위해 사업하였다. 개혁개방 시기 북경에서 기업을 꾸리였다.
 
김미도: 장춘철도부문에서 일했는데 중국철도에서 최고상인 기관차 (火车头)훈장을 수여받았다.
 
배철훈, 배광훈: 지금 알라에서 250여명의 직공들을 거느리고 중국 자동차공업의 발전을 위하여 다소간 공헌을 기여하고 있다.
 
남효일, 김영배: 모두 조기대학생으로 북경대학을 졸업한 후 국방부 모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사업했다.
 
김노미: 병환에 계시는 남편에 아이들까지 일곱 식구를 먹여살리겠다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뼈 빠지게 일해 온 그녀는 아마 알라에서 그 누구보다 더 많이 일한 사람일 것이다.
 
그외에도 많은 알라 사람들의 사적이 있지만 이젠 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기서 나는 알라사람이 아닌 나의 훌륭한 친구 박광현씨를 얘기하려 한다. 중학시절 나의 동창이고 포두시계획국에 출근하다가 (그 때 나는 측량대에서) 영길현에 조동되여 현민족사무위원회, 현조직부에서 사업하였다. 후에 길림시 강남에 있는 교통은행 주임으로 사업하다가 정년퇴직을 하였는데 이 분이 현에서 사업하면서 알라에 공작대로 와서(1956年) 알라의 사업을 관심하고 지지하였으며 간부내의 모순과 결함을 해결해 준 좋은 분이다. 후에는 길림시로년협회 부회장으로 10여년 사업했으며 알라사람들에 대한 감정이 깊어 지금도 알라로인협회에 있으면서 만년을 보내고 계신다. 고맙습니다! 박광현 씨!
 
그리고 알라에 또 하나의 신문인물은 배석환이라고 하는 사람이다. 배재선씨의 삼촌인데 1945년도 해방후 팔로군에 입대하여 깡요, 막석, 서란 일대는 물론 알라에도 자주 왔는데 키가 훤칠하고 아주 약빠르고 담량도 큰 사람이였다. 한쪽 눈이 없는 애꾸눈이어서 늘 검은 안경 한알을 걸치고 다녔고 한족말은 한족들도 물러설 정도로 잘했고 그가 거느리는 부대는 깡요 일대에서 이름을 날렸다.
 
그런데 이 사람이 1947년도에 사라졌다. 후에 알고 보니 일부분의 부대를 거느리고 국민당에 귀순하여 장춘에서 퇀장질하고 있었다. 배상호 아버지나 배씨네 집안에서는 누구도 이 말을 못하고 숨기고 있었다.
 
문화대혁명 후기 밤중에 배상환이가 알라 배상호네 집에 왔다 갔다고 한다. 배석환씨는 원래 팔로군 련장이였는데 그 때 국민당과 내통하였다. "돈을 받고 국민당에 귀순하면 군급도 높여 준다"하여 귀순했는데 해방전쟁 후기 남방에서 대만으로 갈 것을 결정했다. 정작 대만에 가려고 하니 동북땅에 부모형제 다 두고 수만리 멀고먼 대만까지 가게 되면 바다가 가로놓여 영원한 리별이 될 것은 뻔한 일이였다. 그래서 마음을 돌려 배석환은 해방군에게 의식적으로 체포되였다.
 
후에 퇀장급은 전쟁범에 속하기에 려순군사감옥에 들어갔는데 열흘도 안 되어 감옥책임자가 찾아왔다. 이전에 배석환씨가 장춘에서 국민당군대의 퇀장으로 있을 때 팔로군 12명(조선족)이 체포되였다. 석환씨가 심문한 후 그 팔로군포로들에게 빈총을 메워 팔로군 주둔한 지역 가까이에 보내주었다.
 
당시 석환씨는 같은 민족이 변을 당한 것에 민족의 동정으로 팔로군포로를 구해주었는데 마침 그 감옥장이 그 때 구해준 12명 팔로군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감옥장의 힘으로 석환씨는 감옥에 한달도 있지 않고 나왔는데 알라에 돌아가려니 문화대혁명시기여서 친인들에게 정치적으로 영향을 끼칠까봐 갈 형편이 못 되여 부득불 자기 신분을 감추려고 혼자서 흑룡강의 어느 깊은 산속의 벌목장을 찾아가 부모형제도 없이 밥벌이를 했다.
 
신분을 속이고 사람들 앞에서 부지런히 일했더니 몇년후 벌목대의 채벌대장까지 되였다. 그러다가 근처 산골마을의 처녀와 결혼을 하고 농사일을 했었다. 한해 지나 또 입당도 하였고 2년도 안 되어 대대 서기로 되었다.
 
석환씨는 그곳에서 열심히 공작한 결과 군중위망도 높게 얻었고 상급의 신망도 컸었다. 한번은 흑룡강에서 조직한 과거의 고통을 회억하고 오늘의 행복을 생각(忆苦思甜)하는 대회에서 전형인물로서 발언을 했는데 그의 말재주에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영원한 비밀은 없는 것이다.  대회에 참가한 사람중 그가 예전의 국민당 퇀장임을 알아본 사람이 있었으며 그를 적발하는 바람에 공산당에서 퇴당되고 보통 농민으로 뭇사람들이 멸시의 시선을 받으며 남은 인생을 보냈다고 한다.

 
인생이란 한조각 구름 같아서 구름이 사라지면 눈앞의 현실이 없듯이 인생 역시 구름과 같다. 백년도 못 사는 인생으로 말하면 지나간 내 인생 80여년 세월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11. 알라의 희망과 나의 간절한 소망
 
   수십년 세월을 알라에서 살면서 심혈을 바쳐왔고 지금도 호흡을 같이 하고 있는 년세 높은 친구들! 전세기 1960년대 초기부터 농업 제일선에서 사업해 온 김성오, 최수열, 강춘근, 백상례, 리동복, …, 후에 대대 간부로 사업한 리종태, 차인석, 알라 건설에 힘바쳐 온 김철우, 김무영, 윤광수 씨, 1962년 알라에 첫 전기를 들여 온 그 때부터 알라의 첫 전공, 전기관리와 전기안전사용을 위해 말 없이 꾸준히 일해 온 신종광씨! 교육사업에서 알라의 후대들을 위해 힘들게 사업해 온 강병운 교장, 김룡선 선생, 리연란, 김곡자 등 선생님들! 근 20년 알라의 촌사업을 해온 박기순씨! 중학교원으로부터 대대기업 서기로 후에 로인회 회장으로 사업해온 강동산씨! 알라 중학교 교원사업을 오래동안 하다가 알라로인협회 회장으로(10여 년 간 사업했음) 지금까지 로인들을 위해 자기 만년의 정열을 바치고 있는 심철우 회장! 그리고 리동만, 김기수 친구들! 금년에 전국 로년협회 모범대회에서 표창을 받고 돌아오셨고 지금도 열심히 로인협회 이끌어 가시는 박찬동 회장! 세상은 한이 없고 인생은 한이 있는데 인간이 아무리 총명한 사람일지라도 자기의 래일을 모르고 산다고 한다. 때문에 우리는 오늘의 삶을 행복으로 삼고 래일은 더 행복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살면서 서로 손잡고 지난 세월에 못 다한 알라사람들과의 사랑과 인정을 주고받으며 함께 살아가자는 것이 나의 부탁이고 간절한 소망이다.
 
지금 알라는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고 있으며 리수영, 손청송, 재춘선 등 현임간부들이 새로운 현실에 도전하고 있다.
 
알라의 조선족들은 시의 령도와 시조선족군중예술관의 지지하에 고추축제로 새로운 력사를 쓰고 있으며 우리 민족의 넋인 알라를 더욱 잘 지키려는 목적으로 민속촌을 꾸려 대대로 알라를 빛내어갈 것을 다지고 있다.
 
그렇다! 중화의 꿈, 민족의 꿈이 바로 우리의 꿈이 아니겠는가?  
민족의 자랑, 우리들의 희망, 알라여! 영원히 빛나라!
 
배명수 프로필:
1937년 3월 27일, 영길현 알라에서 출생.
1951년, 길림조중에 입학후 부모님의 부담을 덜려고 알라에 돌아와 농사일에 종사.                                          
1956-1958년, 내몽골 포두시측량대에서 근무.
1958년, 알라민영중학 설립 제1임 교원.
1959-1962년, 알라디대대 공청단총지 서기.
1963년, 알라대대 대대장 등 직무 력임.
196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1980년, 알라디대대당총지 서기.
1982년, 제3-4기 길림시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 및 중공길림성 제4차 대표대회 대표.
1986년, 영길현충압공장 공장장.
1995년, 길림시광명충압유한회사 리사장.
 
편자의 말:
본 《기록》문집은 이미 타계하신 배명수 알라디대대 당총지 서기의 아들 배철훈씨로부터 <민족의 넋 알라의 발자취> 자료를 받아 다시 재편집하였다. 
 
배철훈 프로필:
    1962년, 길림시 룡담구 알라디마을 출생.
    길림시룡성실업유한회사 법인대표 리사장.
    길림시조선족기업가협회 상임부회장.
    월드옥타길림지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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