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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군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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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촌을 찾아서
2013년 01월 09일 14시 14분  조회:1252  추천:1  작성자: 김군욱
선구촌을 찾아서

글/ 김군욱

  삼복철더위에 집에서 방학휴식일을 보내고 있던차 선구촌에서 살고있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 선구촌마을을 다녀오게 되었다. 중조변경에 자리잡고 있는 개산툰진 선구촌은 동으로 두만강을 사이두고 조선의 종성읍과 마주하고 있는 곳으로 내가 태여나서 즐거운 동년시절을 보냈던 마을이다. 력사도 유구하고 전설도  많은 산좋고 물맑은 고장이다.

  29일 오전, 콩크리트포장도로를 달려 한시간만에 마을에 도착하고보니 이른 점심시간이다. 차에서 내려 친구에게 마을을 좀 돌아보고 곧장 들어갈테니 그리알라는 기별을 하고 마을밖의 길을 따라 거닐면서 동년의 꿈이 묻혀있는 고향의 산천을 돌아보았다. 고향마을의 본명은 광개향 선구촌 제6소조인데 그 이름부터 유래가 깊다. 광개라는 명칭은 고려시기 광개토왕이 북벌하여 령토를 점차 확장하면서 개간한 땅이라 하여 지어진것이며 선구라는 지명은 고향마을 동쪽에 두만강을 사이두고 부두가 있어서 선구(船口)라고 지어진것이다.

  마을을 또 산성촌이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마을의 서북쪽산정상에 선구산성이 있어서 지어진것이다. 산성비문에 따르면 이 산성은 금나라때 (기원1115년~ 기원1234년)에 축조된것으로 동남성과 서북성으로 이루어졌고 평면은 릉형에 가까우며 방향은 140도이다. 동남성의 둘레는 1960메터, 서쪽모서리근처에는 대형건축물자리 한곳이 있고 동남과 동북모서리에는 사람이 거주했던 터가 있으며 서남과 서북에는 문자리 하나씩 있다. 서북성의 둘레는 1814메터, 이 성은 동남성이 축조된후에 쌓은 부속성이다. 성안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괴면기와막새 처마기와, 손가락누름무늬기와, 륜제니질회색토기그릇밑굽 등이 있다.

  언젠가 정동중학에서 사업할 때 한국에 류학간 고향친구가 한국인 선배로부터 연변의 유적을 답사하는 걸음에 선구산성도 답사하려는데 길안내를 서달라는 제의를 받고 흔쾌히 따라나선적이 있다. 그때 산성촌마을의 정황을 잘 알고있고 정부로부터 산성관리를 책임졌다는 윤씨할아버지를 청하여 선구산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산성에 대하여 더 많은것을 알게 되였는데 산성의 남쪽산(뱀이 따발을 틀고 앉은것 같다하여 일명 따발산이라 부름)정상에는 봉화대와 야장간도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길 없다. 그리고 산성을 축조할 때 서남대문자리 기초로 사용되였던 아주 큰 돌은 본고장의 돌이 아닌것으로 그 출처가 분명하지 않아 성새의 존재에 신비로움을 더해주고 있다. 성새에 올라서 굽어보면 천년전 고려군사와 성새의 금나라군사들이 두만강을 사이두고 치렬한 쟁탈전을 벌렸을 전투장면이 눈앞에 떠오른다.

  산성촌마을로부터 편서남쪽으로 약 600여메터 떨어진곳에 새마을이라고 부르는 초기의 부락이 있었다. 그때는 70여호가 넘는 큰 마을이였는데 후에 지금의 산성촌마을과 새마을 서쪽켠의 마을로 한두호씩 이사하면서 차츰 새마을이 없어졌다고 한다. 산성촌마을의 북쪽켠에는 실개천을 사이두고 자그마한 마을이 있었는데 일명 꼬리섬(미도尾岛—사이섬의 끝부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부두는 지금의 산성촌마을 동쪽 밭끝자락 이왕의 사이섬의 동북쪽켠에 있었다. 조선조말기 일제의 침략과 략탈에 배달민족이 살길을 찾아 일제놈들의 감시를 피해 가만히 두만강을 건너 사이섬과 그 부근의 땅을 개척하면서부터 점차 새마을과 부두가 생기기 시작하였었다. 부두가 생겨서 부두로부터 새마을로 통하는 구간에는 당시에도 규모가 퍼그나 큰 집시무역시장이 형성되였다고 한다.

  부두가 생긴후 일제는 부두에다 세관을 설치하고 부두를 오가는 행상들에게서 관세를 징수하였을 뿐만아니라 경찰서까지 설치하고 오가는 행인과 마을의 이민들을 감시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몇차례의 큰물이 졌는데 무역시장과 세관은 홍수에 밀려 사라지고 사이섬도 홍수에 의해 그 형태가 점차 사라졌다고 한다. 사이섬은 두만강물줄기가 두갈래로 흐르면서 강바닥의 침점과 홍수의 범람으로 점차 생겨난 섬인데 물학성(지금의 개성촌)으로부터 산성촌 북쪽마을의 꼬리섬까지 사이에 있었었다. 그러다가 두만강물의 류량이 많이 줄면서 서쪽의 물줄기가 점차적어지고 또 홍수에 의해 뭍히면서 사이섬은 점차 천평벌과 이어지게 되였다. 해방이후(지난세기 60년대-뚝을 쌓기전까지도 나루터앞에는 두만강의 큰 줄기와 작은 줄기의 물이 흘렀었는데 그때의 민공들이 나루터 앞의 작은 물줄기를 건너가서 뚝을 쌓았다고 함) 물학성으로부터 산성촌마을북쪽끝까지 홍수방지로 뚝을 쌓으면서 부두와 사이섬은 두만강과 완전히 떨어지게 되여 그 형태를 감추게 되였다.

  그무렵 촌민들이 농지개간으로 물도랑을 파면서 시장이 있던 자리에서 많은 도기그릇과 술병들이 출토되였는데 번성했던 당시의 나루터의 존재와 집시무역시장의 존재를 가히 알수있다.

  여기에는 또 이런 재미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대홍수가 지기전에 농부들이 일군 밭이 아주 비옥하였는데 그때 많은 비옥한 땅을 소유하고있던 대지주가 홍수와 곬물에 많은 땅이 묻힌것이 너무 아까워 그 땅을 다시 개간하려고 몇날몇밤을 패가면서 주산알을 튕겼으나 인건비가 너무 아름차 포기, 눈물만 글썽이다가 두만강을 건너 조선으로 돌아간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는것.

  동북이 광복되기전까지도 마을의 젊은 남성들과 아주머니들은 생계를 위하여 지게를 지고 물함지를 메고 두만강을 건너 종성읍에 나들며 보따리장사로 생활보탬을 하였다고 한다. 어린 동년시절 동년배들과 즐겁게 물장구도 치고 수영도 하였던 강변의 모래밭, 산딸기랑 살구랑 산열매를 따먹으면서 숨박꼭질도 하였던 따발산, 물고기를 잡아 여름더위를 피하여 물고기탕을 끓여먹고 옥수수도 구워먹었던 돌다리, 그리고 마을 북쪽산에도 몇채의 인가가 들어섰던 명당마을, 그곳에서 돌배도 따먹던 즐거운 추억들, 이 모든것이 내가 알고있는 고향의 력사와 전설과 함께 어우러져 즐거운 환영에 빠지다나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깜빡 잃었다.

  문뜩 울리는 전화벨소리에 받고보니 친구로부터 금방 집으로 올것이지 어디에 정신이 팔려 점심시간이 다 지나가는것도 모르느냐는 푸념소리다. 반죽좋게 웃어넘기고 금방 간다고 대답했다.

  친구의 집에 들어서니 친구외에도 너무나 낯익은 고향의 어른들도 계셔 서로 정답게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한상에 앉았다. 비록 차린것은 진수성찬이 아니였지만 허물없이 지내던 동년의 고향친구와 고향의 어른들을 만난 기쁨과 고향에 왔다는 즐거움에 음식도 별미였고 기분도 한결 상쾌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한담을 나누는 가운데 당의 새농촌건설과 흥변부민 등 일련의 정책속에 산성촌 마을이 모두 벽돌기와집으로 변신하였고 농민들의 수입도 많이 늘어나 생활형편이 많이 개선되였다는 좋은 소식들에 귀가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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