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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와 수석(1) 수석 찬가 (신철호)
2008년 01월 19일 18시 34분  조회:4281  추천:105  작성자: 두만강수석회

시조와 수석(1)                  

 

                             수석 찬가 


 

    김광욱(金光旭. 1580~1656)은 조선 인조때에 병조판서(지금의 총참모장에 해당)로 있었던 사람이다. 자는 회이(悔而)로서 뭔가 깊은 의미가 있어보이는 반면에, 호는 죽소(竹所)로서  시적 감각을 불러 일으켜주기에 너무 족하다. 그의 문집으로는 《죽소집》이, 대표작으로는 련시조《률리유곡(栗里遺曲)》이 전해진다고 하나 나는 본 일이 없고 다만 《옛시조감상》이라는 책에 평시조 한수가 올라있는 것이 볼적마다 재미있어서 기억해두고 있는데 여기에 적어본다. 호가 죽소라 하였으니 올곧은 성격과 어울리게 참대를 무척 좋아했음을 알 수 있는 작품이다.

 

                                  대막대 너를 보니

 

                              대막대 너를  보니 有信하고 반갑고야

                              내 아이적에 너를 타고 다니더니

                              이제란 창 뒤에 섰다가 날 뒤세우고 다녀라

 

    아이적에 너를 타고 다니더니》를 보면 자꾸 고향생각이 난다.

    화룡시에서 남쪽으로 70여리 가다보면 유명한 선경대(仙景臺)풍경구가 있고 이 선경대를 끼고있는 마을이 흥진(興進)이다. 흥진에서 그냥 남쪽으로 5리정도 가면 류동(柳洞)이라는 마을이 있고  이 마을 뒤켠 골짜기를 따라  3리가량 들어가면 지금은 싹  페촌이 된  동평(東坪)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사면이 모두 우중충한 검푸른 산으로 둘러싸인 이  심심산골의 막치기 마을이 내 고향이다

    지금은 싹 말라서 흐르지도 않지만 어렸을 때는 마을을 감돌아 흐르던 내물(柳東河)이 제법  강 구실을 하면서 일년에 한축씩 범람하기도 하였다. 이 강을 따라  버드나무가 많아서 고장이름나 강이름이 다들 류동으로 되었다흔하디흔한것이 버들인지라 어렸을 때 타고다니며 놀음을 논것도 죄다 버드나무가지였다. 그러니 어린 시절 내 고향친구들을 죽마고우(竹馬故友)가 아니라 류마고우(柳馬故友)라고 함이 오히려 더욱 적절하다.

    나는 이 고향에서 1975 3월까지 만 13살까지 살았다. 《문화대혁명》이 한창 광기를 부리던 그 시절에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홍위병들의 집수색으로 심리적 타격을 엄청 받은 나는 오래동안 사람기피증을 앓았다. 굴쥐라는 별명을 달고 늘 집 뒤울안에서 혼자 놀았다. 먼곳에서 반가운 친척이 놀러와도 밥먹을 때 피뜩 보고는 그냥 낮에는 뒤울안에서,  밤에는 고방구석에서 혼자 놀았다. 집식구 이외에는 누구와도 만나는것이 딱 싫었다.

    그렇다고 그냥 집에만 박혀있지도 않았다. 집에 누구도 없는 한낮이면 강변에 나가서도 혼자 잘 놀았다. 강변에는 괴상하게 생긴 나무뿌리들이 고사(枯死)하여 도처에 뒹굴고 있어 괜찮게 생긴것들을 골라 뒤울안에 가져와서는 이리 저리 놓으면서 감상하는것이 하나의 큰 재미였다. 지금도 그 후유증이 크게 남아 서점에 가면 뿌리조각(根藝)에 관계되는 책들을 열심히 본다.

    강변은 나에게 나무뿌리만 주지 않았다. 갈수기철에는 강변에 온통 돌밭이여서 멋있게 생긴 돌들을 줏는것도 상당한 재미거리였다. 그러니  수석인으로서의 나의 생애는 예닐곱살 어린 시절부터 계산해서 지금까지 무려 40년이라고 서류에 기입해야 할것이다입은 비뚤어도 말은 바른대로 하라고 력사는 언제나 실사구시하게 적어야 하지 않는가아무렴.

    하여튼 고향마을은 작아도 주변에 돌밭은 많았다. 모두가 나의 놀이터였다. 지금에 보면 오석도 많았는데 수석이라는 이름조차 몰랐던 세월이라 그저 어설픈 어린 눈에 가지고 놀만한것이라 생각되는것이면 골라서 뒤울안에 가져다 줄느런히 늘여놓고는 혼자서 두고두고 감상하면서 가지고 놀았다. 산수석이라는것이 뭔지, 문양석이라는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그저 소경이 단청 구경을 하듯 되는대로 갖고 놀았다. 나의 이런 취미는 물론술소양이 다분한 아버지의 지도도 가끔 받았지만 생각밖에 어머니의 도움도 적지 않게 받았다.

    농촌살림이라  겨우내 축내야 할 반찬이라는것이 김치뿐이라  어느 집에서나 할것 없이 김치굴이 큰만큼 김치도 많이 담갔다. 그러니  가을이면 김치독에 넣어둘 김치돌을 주어오는것이 집집의 어머니들의 하나의 필수적인 일과로 되였다김치돌은 대개 큰 허물이 없이 둥글둥글하게 생기기만 하면 되는것인데 말이야 그렇지만 김치돌을 줏는데도  알게 모르게 정성이 들어간다그 돌들이 김치맛을 내는데 한몫을 하는지는 몰라도 같은 값에 다홍치마라고 동네 어머니들은 될수록이면 잘 생긴 돌들을 주어서는 강물에 깨끗이 씻은 다음 똬리에 올려 머리에 이고 집으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버리지 않고 남겼다가 이듬해 가을이면 다시 쓰는 집이 많았다.

    어머니의 일과라고 다르겠는가? 동네에서 김장을 담그는데 솜씨가 일품이였던 어머니는 김치돌을 줏는데 정성을 각별히 넣었다그래서 두개씩 이고 들고 오는 날이 푸술했는데 그중 하나는 무조건 모양이 김치돌로 쓰기에 아까운 특이하게 생긴 돌이였다.

    《이 돌을 주을 때 보니 천연하게  쇠가 누워있는것 같아서 가져왔다.

    또 빨래하러 강변에 갔다가도 소랭이에 돌을 한두개 담아갖고 온적이 여러번 있었다.

    《이것 봐라. 달걀처럼 동그랗게 생겼지 않고 뭐야.

    그때 수석에 대한 상식이 조금만이라도 있었더라면  목수재간이 출중한데다가 그림을 잘 그리고 붓글씨를 잘 쓰시는 부친께서 오히려 앞장서서 탐석을 하고  탐석한 후에는 침식을 잊어가면서 밤새워 좌대를 만드셨을것이다. 그러나 가석하게 내가 정식으로 수석인의 행세를 시작한것은 이제 겨우 칠팔년이고 부친은 세상을 뜨신지 벌써 20년이 넘으니 생각할수록 가슴만 내려앉을뿐이다.

    2000년 국경절련휴때인가 한번 연변TV방송국 동료들과 함께 고향에 갔더니 그 많던 돌밭들을 촌에서 여러해전에 불도젤로 싹 밀어서 방축을 만들어 놓은 통에 오석들은 아예 씨가 말랐고 그대신 아무런 수석적인 가치도 없는 막돌과 몽돌들만 별 볼모양이 없는 헐벗은 형체를 스산하게 드러내놓은채 잔뜩 강바닥을  덮고있었다.

    《까욱~까욱~

    방맞게도 저승사자같은 까마귀 두마리가 우리의 머리우로 날아가면서 을씨년스럽게 울어대는 통에  허전했던 내 심사는 무거운 그 무엇에 지지 눌리운듯 울적해지기만 하였다.

    그후부터 여가가 생기기만 하면 무작정 탐석에로 돌렸고 2002년에 연변대학 교원으로 자리를 옮긴후로는 김봉세, 김학송, 리광인과 같은 스승들을 만나면서 탐석에 더더욱 열을 올렸다하도 수석에 심취해버리니 안해마저 뭔가 크게 끌리는것이 있는지  2005년도 봄에는 서점에 가서 2백원을 주고 《中華奇石鑒賞大觀》이라는 책을 사서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근묵자흑(近墨者黑)라고 옛말이 그른데 없음을 한번 실감한 값진 선물이였다.  

    이제는 두만강수석회 회원으로 된지도 두해가 넘어 되니 이렇게 훌륭한 조직을 떠나 어디에 가서  무슨 멋으로 어떻게 살랴.

    우리의 조직 성원들을 일일이 소개하여 볼까?

    현임 회장: 김봉세. 문체계통, 의료계통 당정일군으로 오래동안 근무하다가 퇴직했음. 키는 크지 않으나 축구선수답게 다부지고 날파람이 있게 생겼음. 두만강수석회 코너를 보면 그의 탐석사적이 계렬로 올라있음.

    고문: 김대현. 유명한 고물수집가로서 언론계통 책임일군으로 오래동안 근무하다가 퇴직하였음키는 중키이나 뼈가 크고 체구가 우람하며  로지심처럼 근력이 좋음. , 수필 등을 잘 씀. 김봉세회장의 고중때 정치과임이였다고 함.

    고문: 리흥국. 초대 회장. 현 연변주당위에서 상무위원, 선전부장으로 근무함. 스타일이 뛰여났고 붓글씨를 기가 막히게 씀. 촬영애호도 뛰어나고. 연변에서 수석을 가장 많이 소장한 사람중의 한 사람임.

    회원: 리광인. 2임 회장. 현 절강 월수외국어대학 교수로 근무함. 어문학부 출신이나 오래동안 不務正業하면서 력사학연구에서 큰 성과를 거둬 중국조선족력사전문가로  되었음지금 절강일대의 수석《토벌》에 열성을 다 하고 있다고 함.

    회원: 김철학. 김대현고문과 대학 동기라 함. 유명한 시인으로서 현 연변시조시사 사장임. 《우리는 중국조선족》이라는 노래의 작사자로 이름을 날렸음

    회원: 김학송. 초대 부회장. 유명한 시인임. 지금껏 17권의 시집을 출간했음. 연변의 수석원로라 할 수 있으며 중국 조선족으로 맨 첨 수석관련 교양서를  출간했음.

    회원: 한태익. 한 대중신문의 사장을 오래동안 해온 언론인임. , 수필을 잘 씀. 한때 신통하게 메주처럼 생긴 수석을 얻어 소문을 놓았음.

    회원: 석문주. 전업계통 직원. 시인.

    회원: 송철남. 방송언론인으로서 수석회의 애송이임.   

    회원: 신철호. 이글의 필자임.

    회원:   . 의사.

    

특별회원: 박식. 한국인. 화가이고 칼럼니스트임. 연길 내고향음식점 사장.

    

    이런 분들이다. 수석을 사랑하는 분들이여서 그런지 다들 진짜 《수석》같은 사람들이다. 그러니 어찌《수석》들과 어울려 수석을 즐기지 않으랴.

   김광옥의 《대막대 너를 보니》를 개작하여 수석찬가나 한수 만들어보자.

 

                 수석아 너를 보니 유신하고 반갑고야

                 내 아이 적에 너를 품고 놀았더니

                 이제란 강가에 섰다가 널 앞세우고 다니리

 

   회원 여러분옛 문인들은 꽃과 술과 달과 벗을 가리켜 사미구(四美具)라 했다는데  우리는 산, , 계곡, 술에  수석까지 하여서 오구미를 갖추며 즐겨 삽시다.

                                                                       - 2008. 0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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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3 ]

3   작성자 : 신철호
날자:2008-01-21 10:21:57
이회장님, 여름방학에 집에 애가 초중을 졸업하게 되니 무조건 귀가해야 할것 같습니다. 연대 학생들도 졸업하고요. 방학에 만나 탐석이나 해봅시다. 돌고돌아도 돌때문에 돌아와야지요.
2   작성자 : 두만강
날자:2008-01-20 11:14:56
님의 글은 너무나 좋아 인기가 높습니다. 기대, 기대 또 기대합니다. 이번 방학은 연변에 오시는지~~~
1   작성자 : 신철호
날자:2008-01-20 10:34:23
고향에서 13살까지 살았으며 아버지는 술소양이 다분한 분이 아니라 예술소양이 다분한 분이셨습니다. 가끔씩 틀리는 부분이 있어 구멍이 생기는데 돌에 구멍이 생기면 관통석이라 하며 특히 오석에 구멍이 생기면 값이 갑니다. 그런데 글이 수석같이 되지 않습니다. 미안합니다. 신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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