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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봉(Lermont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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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천사와 직업으로서의 작가
2016년 12월 04일 20시 56분  조회:1186  추천:0  작성자: 레르몬또브

 

[평 론]

 

역사의 천사와 직업으로서의 작가

- 정세봉의 <볼세비키의 이미지>에 대하여

 

 

이혜진[한국]

 

 

 

이혜진 약력;

서울출생

한국외국어대학교철학과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국문학박사

민족문제연구소연구원

동경외대, 동경대초빙연구원

현세명대학교교양과정부교수

 

1. 파국의 역사와 좌절한 작가의 초혼(招魂)

 

여기 한 권의 소설책이 있다. <볼세비키의 이미지>(정세봉 작, 신세림, 2003). 한국문학사의 내부 경험에서 비추어 볼 때 매우 낯선 분위기가 감지되는 이 중편소설은 이른바 중국 조선족 문단을 대표하는 중견작가 정세봉의 문제작이다. 과거를 향해서는 잠시도 뒤돌아보지 않으면서 앞으로의 활로 개척에 한창인 21세기에 돌연 볼셰비키라니. 더욱이 검정색 바탕에 붉은색의 글씨체, 그리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커다란 눈동자가 그려진 이 책의 표지만 보더라도 어딘가 시대착오적인 느낌이 물씬 한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볼셰비키의 이미지라고 하면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 입장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을 거치지 않고 무산계급에 의한 폭력적 정권 탈취와 체제 변혁을 위한 혁명적 전략전술을 취했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정통파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세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세계 최강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던 소련의 볼셰비즘은 그만큼 세계적인 보편성을 띠고 있는 때문이다. 더욱이 사회주의 혁명을 경험해본 적이 없는 한국으로서는 1920년대 카프(KAFE)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의 활약상을 자본주의 타도를 위한 계급 해방의 관점에 국한해서 보았던 관습을 갖고 있는 탓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을 중국 근대사의 흐름으로 옮겨놓고 보면 문제가 완전히 달라진다. 중국 근대사의 장면들에서 볼셰비키의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1958년 마오쩌둥(毛澤東)이 주도한 사회주의 건설의 기본노선인 삼면홍기(三面紅旗) 운동, 즉 총노선(總路線), 대약진(大躍進), 인민공사(人民公社) 설립은 중국의 농업과 공업에서 비약적인 생산 발전을 이루어 이상적인 사회주의를 건설하고자 했던 마오쩌둥의 신념이 집약된 것이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공산주의 실험으로 평가되는 중국공산당의 이 일련의 정책들은 최악의 대기근과 수천만의 아사자(餓死者)를 내면서 참담하게 끝이 났다.

대약진운동이 대실패로 돌아가자 중국은 또다시 공산주의적 이상에 가까운 사회주의를 새롭게 건설할 방책을 모색해야만 했다. 그렇게 시작된 1966년의 문화대혁명은 전근대적 문화와 자본주의적 사상을 몰아내자는 슬로건과 함께 마오쩌둥 반대파와 ‘반혁명인사’로 지목된 관리와 지식인, 학자들에게 피바람을 몰고 왔고, 마치 도미노처럼 산업과 과학기술, 교육 등 중국 사회 전반에 악영향을 끼쳐가면서 마오쩌둥이 사망한 1976년이 되어서야 막을 내렸다. 마오쩌둥 사망 후 중국공산당은 문화대혁명에 대해 ‘극좌적 오류’였다는 공식평가를 제출했고 이와 함께 문화대혁명의 광기는 급속히 소멸했다.

전 세계의 역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러한 중국 근대사의 소용돌이를 직접 체험해낸 작가의 운명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옛말에 며느리는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을 보내야 한다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혹독한 시집살이를 견디기 위한 방편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인내의 미덕 혹은 가혹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글을 쓰는 행위로만 자신의 존재 의미를 실험할 수 있는 작가에게 벙어리, 귀머거리, 장님의 삶은 그 자체로 작가적 생명의 종언을 뜻한다. 그러므로 작가의 미덕이란 그 어느 누구보다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말하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작가란 태생부터 역사의 시집살이 따위에 굴복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즉 작가란 언제나 역사적 현실에 발을 딛고 허우적거리는 것을 운명으로 타고난 존재인 것이다.

정세봉의 소설 「볼세비키 이미지」의 낯선 분위기가 ‘지금 여기’에서 새롭게 주목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중국 조선족 문단의 유력 문예잡지 중의 하나인 연변작가협회의 기관지 <연변문학>의 편집자이자 소설가인 정세봉(1943- )은 1976년 「불로송」으로 데뷔한 이래 1980년 단편소설 「하고 싶던 말」로 연변문학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중국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중편소설 「볼쉐위크의 이미지」(1991)와 단편소설 「빨간 크레용 태양」으로 배달문학상과 해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대표적인 리얼리즘 소설가로서의 입지를 굳혀왔다.

사실 「볼세비키의 이미지」는 1991년, 중국 조선족 문예잡지인 <장백산> 2호에 처음 발표되었다. 그 뒤 1995년 여름호 <한국문학>을 통해 한국에 소개되었고, 1998년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동명(同名)의 제목으로 중단편소설집에 재수록이 되었으며, 2003년 한국에서 단행본으로 재출간되는 독특한 과정을 거쳐 왔다. 그도 그럴 것이 마오쩌둥 시절 중국공산당의 독재와 정책적 오류에 대한 비판의식을 은밀하게 내세우고 있는 이 작품은 1991년 첫 발표 직후 필화 직전까지 몰리면서 중국 문단에서 왕왕 회자되는 문제작으로 꼽히곤 한다. 중국 조선족 문단에서 활동하는 평론가 조성일의 말을 빌려 「볼세비키의 이미지」가 필화사건 직전까지 가게 된 저간의 사정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이런 와중에 이른바 당성이 강하고 선명한 연변의 한 <량반>이 이 소설이 공산당 기층간부들의 빛나는 지난 력사를 부정하고 빈하중농을 모욕한 반당소설이라고 속단한 끝에 이 소설을 쓴 작자와 그 소설을 발표한 <장백산> 편집부를 닉명신으로 중국 길림성 성위 선전부에 고발하였다. 이 고발 소식이 알려지자 우리 조선족 문단에서는 정세봉 작가와 <장백산> 편집부에 정치적 문제가 생겼다는 소문이 한입 두입 건너 삽시간에 무성하게 되었다.

상고신을 접수한 길림성 성위 선전부 책임자는 남영전 주필과 성 출판국 관계자를 불러 이 상고문에 대한 처리 문제를 의논하였다. 의논 결과 한국어를 전공한 장춘에 있는 한족(漢族) 학자 두 분을 선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소설의 력사 배경, 인물 형상, 주체사상에 대한 견해를 서면으로 작성하여 제기하도록 하였다. 성위 선전부는 전문가들의 보고서를 검토하고 관계 인사들의 의견을 청취한 후, 상고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복하였다.

<근 몇 년래 조선족 문단에서 있어본 적이 없는, 알심 들여 만든 력작>

성위 선전부는 이 결론을 <장백산> 지 남영전 주필에게 서면을 하달하였다. 이렇게 되어 소설가 정세봉도 살고 <장백산>지도 다시 기를 펴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족 작가가 쓴 것을 조선족 지성인이 고발하여 한족 학자들이 평판을 해준 것이다.

 

소설은 1984년 어느 늦은 봄날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소설의 내용은 1958년 인민공사 설립에 의한 농업집단화에서부터 1984년 인민공사가 해체되고 개체 영농을 이루게 되기까지의 약 25년에 걸친 시간을 배경으로 한다. 평강벌 구룡산 마을의 지주 출신인 허수빈 일가를 사이에 두고 평생 볼셰비키의 인생을 살아온 아버지 윤태철과 그 아버지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아들 윤준호의 갈등선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과거 중국공산당의 정책이 농민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어놓았고 또 그것을 회복해가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인간적 비애를 그린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서로의 갈등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과정에는 중국 역사의 오욕과 상처가 끊임없이 환기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말하자면 이러한 과정에서 「볼세비키의 이미지」가 “공산당 기층간부들의 빛나는 지난 력사를 부정하고 빈하중농을 모욕한 반당소설”이라는 견해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인데, 이 대목은 마오쩌둥 사후 덩사오핑(鄧小平)의 실용주의 노선에 의한 개방정책이 10년 이상 흐른 1991년의 시점에조차 지나간 역사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매우 지난하고 고루하게 이루어져 왔음을 시사한다. 과거 독일의 나치즘이나 일본의 전쟁책임, 그리고 한국의 친일문제와 같은 사례에서 보더라도 역사적 오욕을 직시하는 데 따르는 불편함과 곤란함은 비단 중국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또 문제는 자의건 타의건 간에 역사적 오욕을 직시해야 할 운명을 타고난 인간 군상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발터 벤야민의 「생산자로서의 작가」(1934)에서 벤야민이 기본적으로 작가가 처한 사회적 위치에 대한 자각과 성찰의 측면을 가장 중심에 두고 사유했던 데서도 볼 수 있듯이, 작가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자유로운 상태에서 미적 산물을 창조해내는 존재가 아니라 작가 특유의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생산자’이다. 왜냐하면 현실의 상황은 작가로 하여금 자신의 행위가 누구를 향한 봉사인가의 물음에 대해 결단을 내리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특정 작품이 특정 시대의 작가적 생산관계 속에서 차지하는 ‘기능’이 무엇이냐는 물음이며, 그것은 곧바로 작가적 ‘기법’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이에 대해 정세봉은 오욕의 역사에 은폐되어 있는 진실한 면모를 펼쳐 보이고 싶은 작가의 양심이자 사명감이라고 응답한다.

 

건국 후의 40여 년의 역사는 우리의 당-중국공산당이 헤쳐 온 역사이고 우리의 인민-중국의 민중이 겪어온 역사이다. 그 역사의 행정은 위대하고 격동에 찬 역사이기도 하고 빈궁과 낙후 속에 극좌정치가 민중을 괴롭힌 사회적 질환의 시기이기도 하다.

1958년 가을, 16세의 어린 나이에 나는 수천 명 민공들이 바글거리는 대약진의 현장-석국수리공사장에 가서 목도를 메고 곡괭이질을 하였다. 그때로부터 1970년 전반기, 생산대대장과 대대 당지부서기질 할 때까지 나도 그 모든 역사를 친히 겪어온 사람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세월을 당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많이 벌려왔던 것이다.

당이 지난날의 오류를 시정하고 사회가 바야흐로 치유 일로를 걷고 있는 오늘날 흘러간 역사는 자기의 진실한 진면모를 우리들 앞에 보다 선명히 펼쳐놓는다. 높은 산정에 거연히 올라서서 산천경개를 굽어보듯이 오늘이라는 보다 고층차적인 인식차원에서, 의식의 충격적인 굴절과 각성을 거친 이 시점에서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 역사는 투명하고 적나라하다.

그 역사의 시간과 공간 속에 투영되어 있는 우리(민중)들의 삶의 모습은 서글프다. 그리고 그 역사가 남겨준 -민중의 영혼과 육체(혹은 생명)에 준- 상처는 아픈 것이다.

특히 <인간학>을 다루고 있는 작가로 놓고 말하면 더구나 무심할 수가 없으며 침묵을 지킬 수가 없다. 흘러간 역사 앞에서 작가의 양심은 결코 잠잘 수가 없으며 무엇인가 외쳐야 할 그리고 소리 높여 외치고 싶은 절실한 사명감과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파국의 역사를 직시할 때만이 역사의 비밀이 드러나고 또 거기서 다른 역사의 도래를 꿈꿀 수 있게 된다. 그것은 파국의 역사를 재현하는 행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은폐된 사실을 폭로하는 계시의 성격도 지닌다. 파국의 종말 이후의 역사를 어떤 방식으로든 서사화하는 것, 그것이 바로 파국의 역사를 내파하면서 현재의 역사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건강한 방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국의 역사를 현재의 장으로 초혼(招魂)하는 작업은 과거의 역사가 남겨준 정신적 유산을 관리하면서 그것을 세계에 전파하는 중요한 역할을 도맡는 일이다. 파국의 역사에 대해 좌절을 반복한 작가가 역사를 소환하는 행위를 우리가 끊임없이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 세대론의 딜레마: 볼세비키냐 인간이냐

 

이 소설은 앞으로 전개될 사건의 클라이맥스(climax)에서부터 시작된다. 소설의 첫 장면에서 보이는 부자(父子)의 날선 감정 대립은 마치 연극무대를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는 관객이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생에 대한 의욕을 체념한 채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날카로운 성격의 아버지 윤태철,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거역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과 함께 자신의 오만불손을 속죄해야만 하는 모순 속에서 괴로워하는 아들 윤준호의 대결구도가 놓여 있는 폭풍 같은 정적 속에서 괘종시계의 추가 왕복운동을 하는 소리만이 명쾌히 들리는 공간.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고집스럽게 지켜왔던 자존심의 팽팽한 대결이자 근본적으로는 ‘볼세비키’와 ‘인간’의 대결 공간이다. 그것은 곧 ‘볼셰비키 윤태철’의 뼈아픈 회한과 ‘인간 윤준호’의 절실하고도 깊은 사념이 침묵을 방패삼아 대치하는 시공간이기 때문이다.

쉽게 예측할 수 있듯이 아버지 ‘볼셰비키 윤태철’과 아들 ‘인간 윤준호’의 첨예한 대립에는 마오쩌둥 시대의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 그리고 문화대혁명이 중국 농민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던 거대한 역사의 도정이 놓여 있다. 헐벗고 굶주리며 천대받는 자의 설움을 씹어 삼키면서도 소박하지만 강인한 농민의 삶을 견지해온 자들의 마을 구룡골. 인민공사가 해체된 이후 개체영농을 시작한 구룡골은 격동의 중국 농촌사가 여전히 생생하게 재현되고 있는 장소다. 과거 ‘구룡대대 당지부 서기’였던 ‘볼셰비키 윤태철’은 ‘지상낙원’이 될 구룡골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던졌다.

 

윤태철은 이 고장에서 태어나서 소작농의 자식으로 성장을 했던 사람이었다. 공산당이 천하를 얻는 사변이 눈 앞에 박두했을 때 열혈청춘을 해방전쟁에 투신을 하여가지고 제4야전군 12종대를 따라 장강 이남까지 짓쳐나갔다가 허벅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고향에 귀환이 되었다. 중국공산당에는 1949년 여름 사시(沙市)를 공략하는 전투에서 「화선입당」으로 가입을 했던 윤태철이었다.

농업합작화운동에 열성으로 나서서 고급사주임으로 있다가 인민공사화 때부터 구룡대대 당지부 서기로 사업을 떠메고 왔던 것이니 호도거리농사가 시작된 지난해까지니까 꼬박 26년, 「문화대혁명」 시기에 5년 동안이나 「한켠에 비켜서」 있은 걸 제외하여도 당지부 서기 실제 직무담당 연한만도 21년이나 되었다. 이것이 곧바로 61세의 「볼세비키 윤태철」의 이력이었다.(17)

 

그런데 지주 출신의 허수빈의 딸 허순정과 빈농 출신인 자신의 아들 윤준호가 결혼 승낙을 받으려 하자 윤태철은 격렬히 반대했고, 이를 극복하지 못한 허순정이 임신 5개월의 몸으로 자살을 했다. 허순정을 잃은 상실감과 울분으로 윤준호는 ‘침묵의 괴한’으로 변해버렸고, 이를 계기로 아버지 윤태철에게 깊은 원한을 품기 시작했다. 아버지 윤태철이 허순정을 반대했던 이유 역시 ‘볼셰비키’로서 당의 지시와 임무에 철저하고자 했던 아버지의 고지식함에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윤태철 일가와 허수빈 일가 사이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단행된 토지개혁에 의해 계급이 뒤바뀐 사정도 있었던 터라 계급투쟁을 단행하고 있던 시기 ‘볼셰비키 윤태철’의 입장에서 허순정을 받아들이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원래 그 오막살이는 윤태철이네 집이었다. 그의 부친 윤치수가 지주 허영세네 소작살이를 할 때 쓰고 살던 빈고농민의 보금자리였던 것이다. 그런데 토지개혁 직후에 그의 부친 윤치수가 땟국이 꾀죄죄한 일가권속을 주르르 이끌고 지주 허영세네 팔간 기와집에 입택을 하고 깨끗이 청산을 맞아 버린 허영세네 가권이 그 오막살이에 강제택거를 당하게 되었다. (중략)

그러니까 옛날에 빈농 윤치수가 그 오막살이에서 지주 허영세의 「독재」 아래 우마와 같이 살았다면 제2대에 와서는 거꾸로 되어 있었다. 지주의 아들 허수빈이 빈농의 아들이며 당지부 서기인 윤태철이한테서 「독재」를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30)

 

이 장면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1949) 이후 유지되어왔던 ‘봉건지주토지사유제’를 철폐함으로써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경작의 주체인 농민이 토지사용권을 갖게 한다는 내용의 ‘농민토지사유제’가 실시되었던 것을 배경으로 한 것인데, 사실 이때의 토지개혁이란 일종의 계급투쟁을 의미했다. 즉 농촌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빈농과 고농의 지지를 얻어 구세력을 제거하려는 당의 의도에서 촉발된 것으로서, 실제로 토지개혁의 결과 20%를 차지했던 중농이 80%로 급증하면서 농촌 생산량의 뚜렷한 발전을 가져왔던 것도 사실이다. 이때 허수빈 일가는 중국 근대사의 풍랑을 겪은 지주 성분을 가진 자들의 운명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인간의 취약함을 고려하지 않은 당의 신념이 맹목으로 흐를 때 나약한 인간의 본성이 어떤 고통에 처하고 나락으로 빠져들게 되는 지를 경험적으로 잘 보여준다.

 

지주 성분을 가진 사람들의 운명이 다 그러했듯이 허수빈도 예외일 수가 없었다. (중략)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한 시기에는 매일이다시피 「개패」를 걸고 고깔모자를 쓰고 「투쟁」을 당했는데 그 「개패」라는 걸 무거운 널로 짜가지고 가느다란 철사끈을 달아 목에 걸었다. 고깔모자도 거칠은 널로 삼각형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한번 쓰고 「투쟁」을 당하고 나면 얼굴과 머리가 온통 피투성이가 되곤 했다. 때론 얼굴에 먹칠을 해가지로 개처럼 목을 매어 끌고다니곤 했다. 지주의 아들인 데다가 할빈 「대도관 고등국민학교」를 다닐 적에 일본 센또보시를 쓰고 찍은 사진 때문에 그런 고초를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시달림을 받은 허수빈은 자기의 운명에 곱다라니 순종을 했다. 그는 늘 고개를 숙이고 그림자처럼 소리없이 조심스럽게 걸어다녔고 사람들을 만나면 기계처럼 허리를 곱싹거렸다. 서라면 서고 기라면 기고 짓밟아도 꿈틀거리지 않을 듯했다. 때려도 아픈 줄 모르고 아무리 못살게 굴어도 고통과 번민과 비애 같은 것을 전혀 느낄 줄 모르는 허수아비 같은 존재- 그것이 바로 윤태철의 머리 속에 투영되어 있는 허수빈의 이미지였다. (32)

 

허수빈은 결국 실성해버렸다. 빈농 출신의 아내 엄울순도 농약을 먹고 자살시도를 했다. 무남독녀 허순정도 자살해버린 시점에서 허수빈 일가가 농사를 짓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윤준호는 “순정이 앞에서 맹세했던 스스로 짊어진 의무를 잊지 않”기 위해 “그것을 남몰래 이행하느라”(73) 고군분투했다. 다른 한편 아버지 윤태철은 허수빈 일가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숨긴 채 “당과 지나간 역사를 대신해서 자기 한 몸으로 그들 앞에 속죄를 하리라”(81)는 결심으로 허수빈 일가의 농사를 돕고자 결심했다. “그것은 흘러간 역사에 대한 울분이었고 아들놈한테 향하여진 「볼세비키적 오기」”(77)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이쯤 되면 “무산계급 강산”을 꿈꾸면서 “일체를 무조건적으로 당 규율에 복종하는 것을 철 같은 삶의 신조로 삼아왔”(64)던 윤태철의 ‘볼셰비키적 오기’는 어딘가 한풀 꺾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기란 자신감이 충만할 때 생기는 감정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에서 모순을 발견했거나 자신감이 결여되었을 때 나타나는 일종의 불안감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황혼이 깃들 무렵에서야 날아오른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무지와 몽매를 간파했던 선현들의 깨달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허수빈 일가의 몰락과 아들 윤준호의 비난에도 꿈쩍하지 않던 ‘볼셰비키 윤태철’이 역사의 풍랑이 모두 사그라진 이후에야 비로소 각성의 순간을 경험하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에 대한 물음에는 자기 자신이 직접 응답함으로써 진정한 자각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신이 꿰뚫고 달려온 격랑과도 같은 역사의 현장이 생생히 떠오르고 있었다. 윤태철은 급기야 역사의 자욱한 안개를 헤치고 먼 곳에 서서 전혀 새로운 시점에서 자신의 「볼세비키적 인생」을 돌이켜 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의식의 굴절을 거친 뒤의 자신의 과거에 대한 평가였고 검토인 것이다.

군대에서 귀환된 후의 30년은 실지는 아득히 먼 세월이었지만 윤태철에게는 하루밤의 짧디 짧은 꿈결인 것처럼 자꾸만 느껴지고 있었다. 식을 줄 모르는 정치적 격동과 혈색의 충성심으로 가슴을 끓이면서 눈코뜰새 없이 분전해 왔던 까닭에 그렇게 느껴지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해마다 시기마다 내려오는 중앙의 노선, 방침, 정책과 상급 당의 지령, 지시, 결의 등을 받아가지고 내려와서는 그것을 전달하고 집행을 하고 시달정황을 다시 위에다 회보하고 하는 일이 수십 번 수백 번 반복이 되는 가운데 후반생이 꿈결처럼 흘러가 버렸던 것이다. (중략)

그런데 오늘날 지난날의 모든 시비와 흑백과 음양이 많은 경우 조화 속에서처럼 그 위치가 휘딱 뒤바뀌어진 오늘날에 와서 뒤를 돌아다본즉 그렇듯 격동적이고 헌신적이었던 자신의 후반생이 기본적으로 그릇된 것으로 되어 있었고, 자기 「볼세비키 윤태철」은 「당의 말」(지금 보면 근본적으로 오류적인 그 말)을 그대로 받아 외우기만 한 「앵무새」로, 두뇌라곤 전혀 없는, 준호의 말처럼 「당의 지시하면 개똥도 황금」이라고 내리먹인 어릿광대와도 같은 「순복도구」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피를 물려 준 아들한테서 「훈계」를 듣게 된 것이었고 공산당원으로서의 존엄과 부친으로서의 인격도 아들놈의 발밑에 헌신짝처럼 모욕을 당하는 순간이 빚어지게 되었던 것이다.(60-62)

 

그러나 여태껏 하수빈 일가에 대해 독재를 해왔던 아버지 윤태철이 당의 지시라는 이유로 ‘연계호’를 맡아 평등한 관계에서 허수빈 일가의 농사를 돕는다는 사실이 윤준호에게는 그저 “당의 말을 앵무새처럼 그대로 받아 외우고 당의 지시대로 로보트처럼 움직여온 「두뇌 없는 순복도구」”(85)의 희극적 제스처로만 보였다. “당의 규율과 의지 앞에서 독립적 사유체로서의 「인간 윤태철」”(86)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 소조에서 어느 한 당원에게 ‘연계호’를 맡겨 허수빈 일가의 농사일을 거들어 주는 것만으로는 허수빈 일가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윤준호는 허수빈의 아내 엄울순과 의논한 끝에 농사보다는 돼지치기가 대안이 될 수 있음을 깨닫고, 허수빈 일가가 한시라도 빨리 자립을 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돕는다. 윤준호가 허수빈 일가의 양돈업 전환에 맹목적인 추진력을 발휘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를테면 “농토를 다른 사람한테 양도해 버리면 아버지, 「볼세비키 윤태철」은 「당성 발휘」의 터전을 잃게 된다는 사실”,(117) 즉 그것은 말하자면 아버지를 굴복시키는 일에 다름 아니었다. “끈 떨어진 망석중이 되고 보면 아버지는 더는 「살아 움직이는 만화」로 되어 있지 않을 것이고, 인정을 가진 순수 농민으로 돌아갈 것”(118)이라는 것, 그리고 땅과 씨름하는 일에서 해방되어 편안한 만년을 보낼 수 있으리라는 자식 된 자의 성정에서 나온 계산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당의 지시를 집행하는 ‘두뇌 없는 순복도구’일지라도 자신의 신념과 의지로 아낌없는 헌신을 통해 허수빈 일가를 돕는 것이 아들 윤준호에 대한 승리이자 흘러간 역사에 대한 원한에서 해방되는 일이라고 믿고 있는 ‘아버지 윤태철’. 그리고 허수빈 일가의 토지를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는 방법으로 아버지의 임무를 박탈하여 그 노고를 덜어주려는 ‘아들 윤준호’의 대결구도는 이렇게 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그러나 허수빈 일가의 농지를 다른 사람에게 양도해버린 윤준호의 행위는 뜻밖에도 아버지 윤태철에게 치명상을 입히게 된다. 아들과의 대결에서 패배했다는 절망과 노여움으로 뇌출혈을 일으킨 윤태철은 지난 30여 년간 ‘당의 충직한 사병’으로서의 고군분투가 결국 헛된 것이었음을 깨달은 데서 오는 비애를 뼈아프게 실감한 것이다.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윤태철의 꿈 장면은 중국 근대사가 창조해낸 볼셰비키의 격세지감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대목이자 동시에 ‘볼셰비키 윤태철’이 애써 감춰왔던 자신의 무의식 혹은 현재의 시점에서 지난날의 볼셰비키를 조망하는 작가의 시각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즉 윤태철의 무덤에서 발견된 ‘볼셰비키 화석’은 ‘인간’의 종류와는 전혀 이질적인 것이라는 고고학자들의 결론. 다시 말해 ‘볼셰비키 화석’은 겉으로는 인간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는 인간만이 갖고 있는 독립적 사유와 다정다감한 감정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건 곧바로 <볼세비키 화석>이지요. 틀림이 없습니다. 보십시오. 이 혈색의 딴딴한 갑각이 그걸 충분히 실증해 주고 있지요. 여러분들이 좀 더 상세히만 관찰한다면 복부 부위에 누른빛의 낫과 마치가 새겨져 있는 걸 무난히 발견할 수가 있지요. 이건 시신 우에 덮었던 볼세비키당 기폭이 수만 년 동안 수성암 속에서 그대로 화석으로 굳어진 겁니다. 이 적색의 갑각 속에서 인간은 언녕 죽어 있었지요. 말하자면 독립적 사유체로서의 인간, 다정다감한 감정체로서의 인간은 전혀 무시되어 있었다 그겁니다. 그 대신 볼세비키당의 집단적 신념과 의지 같은 것이 로보트처럼 움직이고 있었지요.」(148)

 

그럼에도 시종일관 자신이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피력하는 ‘볼셰비키 윤태철’의 항변은 가볍게 무시된 채 ‘볼셰비키 화석’으로 간주되어 고고학 박물관으로 이동하려는 찰나, 아버지의 죽음을 예측한 아들 윤준호와의 재회는 아버지와 아들, 볼셰비키와 인간의 치열한 대결구도가 종말에 이르렀음을 예감케 해준다.


 

3. 역사와 인간과 서사의 힘

 

1991년 이 소설이 중국에서 처음 발표되었을 때 윤태철의 꿈 장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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