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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조선족력사(92)제88장 농민들 호조합작의 길로
조글로미디어(ZOGLO) 2020년7월23일 15시22분    조회: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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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옥금 국빈회에서 〈도라지〉부르고

김시룡 세전벌서 ‘호조조’ 성공시켜

리옥금과 ‘품앗이조’

토지개혁 이후 가난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조선민족 농민들은 공산당과 인민정부의 호소를 적극 받들고 호조합작의 길로 나아갔다. 특히 렬사가족, 군인가족들이 농업전선에서 앞장에 나섰다. 혁명렬사가족 리옥금이 조직한 ‘품앗이조’와 호조조가 그 일례라고 할 수 있다.

공량을 바치러 가는 공량수레.

리옥금(1922년)은 조선 함경북도 성진군 태생이다. 8살 때부터 지주집에서 일을 하면서 갖은 고생을 다한 리옥금은 15살 때 조선 함경북도 덕산지역에서 오빠를 도와 유격대에 정보를 나르고 밥도 지어 날랐다. 그러던 어느 날 큰할아버지의 밀고로 탄로가 나 더는 유격대를 도와 일할 수 없게 되자 조선을 떠나 연길현 조양천 태평구에 있는 오빠네 집으로 왔다. 그 후 얼마 안되여 리옥금은 림지룡에게 시집을 갔다. 1942년 리옥금은 연길시 흥안향 소대려촌에 이사해 왔다. 1945년 9월, 리옥금은 농회 부주임으로 되였다. 남편을 입대시킨 리옥금은 어린 시동생, 시누이 넷을 보살피면서 가사와 농사일, 사회공작에 바삐 보냈다. 리옥금의 모범적 행동에 영향을 받아온 마을의 청장년중 80%가 참군하였다.

끌끌한 남자들이 다 참군하다 보니 늙은이와 어린이들 밖에 남지 않아 이듬해 밭갈이를 할 사람이 적었다.그때 리옥금은 호리를 세번이나 마스면서도 끝내 밭갈이 재간을 익혔고 자기 집 논 3무 2푼을 갈아번진외에 십여호 군인가족 녀성들을 조직하여 ‘품앗이조’를 무어 밭을 갈아 번지였다.

연변에서는 ‘호조합작’ 문제를 비교적 일찍 제기하였다. 1946년 2월 중순, 연변전원공서 부전원이였던 동곤일은 각 현의 현장, 건설과장 회의를 열고 〈연변농업생산의 총화〉라는 보고를 통하여 ‘호조조’ 문제를 언급하였다. 그는 보고에서 생산호조조를 통하여 소농경제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으므로 그 조직구성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자원적 결합’과 ‘등가교환’의 원칙을 잘 관철한다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라고 제기했다. 조선민족들은 과거 공동으로 농사를 지으려고 ‘두레’를 무은 적이 있었다. 이런 옛 생산형식은 ‘호조조’를 꾸리기 위한 좋은 바탕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리옥금은 ‘품앗이조’를 무어 일하던데로부터 앞장 서 호조조를 조직해 그해 농사를 녀성의 힘으로 지었고 잘 여문 낟알을 나라에 바쳐 전선을 지원하였다. 그리하여 1946년 리옥금은 연길시로력모범대회에 참가하여 표창을 받았다. 1947년 리옥금은 생산, 전선지원렬사유가족 모범으로 선거되여 길림성로력모범회의에 참가하였고 1948년에는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리옥금이 조직한 호조조의 영향을 받고 전 현의 호조조도 매우 빠른 발전을 가져왔다. 1948년 10월, 지구로력모범대회에서 리옥금은 암소 한마리를 상으로 받았다. 그 해 겨울 리옥금은 전국 제1차 부녀대표대회에 참가하여 모택동을 비롯한 중공중앙 지도자들의 접견을 받았다. 1950년 1월에는 아시아부녀대표대회에 참가하였다. 그 때를 리옥금은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조선민족을 대표하여 전국 제1차 부녀대표대회에 참가하러 북경으로 갔습니다. 당시 당중앙은 서백파에서 북경으로 오고 있는중이였지요. 저는 영광스럽게 모주석의 마중을 나가게 되였습니다. 비행기가 멎자 중앙 지도자 8명이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모주석께서도 내리시였지요. 어찌나 격동되였는지 감히 주석의 얼굴도 쳐다보지 못하였습니다. 주석께서 저의 앞을 지나간 후에야 뒤모습을 보았는데 팔각모자를 쓰셨더군요. 그렇게 웅장하셨습니다. 제가 회의에 올 때 동네 분들이 환송하며 모주석의 얼굴을 똑똑히 보라고 하던 부탁이 떠오르자 정말 속상했습니다. 그 날 저녁 북경에 돌아온 후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이젠 모주석을 다 뵈였구나’라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이틀이 지난 후 전체회의가 시작되였는데 저는 주석단 성원으로 되였지요. 회의를 시작한 지 얼마 안되여 모주석께서 오신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모주석께서는 회의장에 오시여 저의 앞줄 오른켠에 앉아계셨지요. 당시 그이의 뒤모습만 봤을 뿐입니다. 후에 만찬회가 있었는데 모주석께서 또 오셨지요. 저는 모주석과 한좌석에 배치되였습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모주석의 얼굴을 보았으며 격동된 나머지 그이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답니다. 만찬이 끝나고 오락회가 시작되였지요. 모주석께서는 저더러 노래를 부르라는 것이였지요. 제가 금방 배운 〈공산당이 없으면 새 중국도 없다〉는 노래를 부르자 주석께서는 저를 보고 〈도라지〉를 부르라는 것이였습니다. 뒤이어 저는 노래도 부르고 조선춤도 추었습니다.”(서봉학, 리광수의 대형 다큐멘터리 〈연변아리랑〉에서)

1949년부터 각급 당조직에서는 호조합작운동을 공산당의 중심사업으로 삼고 ‘생산대에 참가하여 생산을 지도할 것’을 전체 당원들에게 호소하였으며 자원적이며 쌍방이 다 리로와야 한다는 원칙을 재차 강조하였다. 이 해 봄에 연변지구에는 2만 3,799개 호조조가 조직되였는데 80%의 로력과 축력이 호조조에 들어갔다. 그러나 김매기철에 먼저 매고 후에 매는 모순 때문에 53%를 차지하는 만 2,593개 호조조가 무너졌다. 년말까지 남아있는 년간호조조가 만 490개로서 32%를 차지했다.

실패한 영성촌의 ‘대형 호조조’

‘호조조’를 조직하라는 소식은 세전이벌에 자리 잡고 있는 연길현 동성용향 영성촌에도 전해져 왔다. 이 마을에서는 처음에는 두서너집씩 모여 ‘소겨리조’, ‘품앗이조’ 등 계절호조조를 조직하여 농사를 지었다.

영성촌에서 ‘호조조’를 정식으로 꾸린 것은 1947년 여름이였다. 그 때 이곳에서는 토지를 분여하면서 전 마을을 한데 합하여 한개 ‘호조조’를 무었다. 호조합작의 경험이 없는 형편에서 대번에 큰 조를 뭇고보니 모순이 련속부절하게 나타났다. 로력랑비가 많았고 아무때나 일밭으로 나가기만 하면 한개 공씩 적어넣었다. 뿐만 아니라 로력공수 평가가 합리하지 않고 과학적이 못되여 생산 적극성에 영향을 주었으며 생산력 발전에 커다란 장애로 되였다. 게다가 토지개혁의 대중적 운동의 거센 조류 속에서 조직하다 보니 적지 않은 농민들이 ‘호조조’에 들지 않으면 법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여기기까지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군중비판이거나 투쟁을 받을가 겁나 억지로 참가하였다.

그 해 가을 중농 이상 농호 일곱집이 먼저 ‘호조조’에서 물러나가자 억지로 참가하였던 농민들과 로력, 부림짐승이 넉넉한 집들은 슬금슬금 ‘호조조’에서 나갔다. 영성에서 처음 조직한 ‘호조조’는 이렇게 유야무야해지고 말았다.

‘호조조’가 건립될 때 선참 참가하였던 김시룡은 공산당의 호소 대로 끝까지 합작화의 길로 나아가려 했으나 ‘호조조’가 무너지고 보니 맹랑한 생각이 들었다. “가난한 농민에게 땅을 준 이가 공산당이다.”고 생각하고 있는 김시룡은 공산당의 은혜를 잊을 수 없었다. 그는 생활의 체험에서 공산당의 말을 들으면 틀림없다는 신념을 지녔다. 그는 호조합작을 실시하라는 공산당의 호소에 호응하여 불바다에라도 뛰여들어가려는 심정이였으나 랭혹한 현실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파도에 밀린 모래처럼 산산이 흩어진 ‘호조조’를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이 아파난 김시룡은 그 일로 고민에 빠지기까지 했다.

1948년 봄, ‘대형 호조조’를 강제적으로 조직하여 실패한 경험교훈을 찾고 이번에는 자원호혜의 원칙을 관철하여 ‘소형 호조조’를 조직하였다. 영성에서는 서로 뜻이 맞고 감정이 맞는 농민들이 네댓 혹은 대여섯씩 한개 조를 무어 전 촌을 여섯개 ‘호조조’로 조직하였다. 그런데 촌농회의 간부들은 회의가 많아 밭일에 참가하지 못하는 때가 많았으므로 농민들은 간부들과 함께 조직하기를 싫어했다. 이러한 실정을 고려하여 자원호혜의 원칙에 좇아 ‘간부조’라는 특별한 ‘호조조’를 따로 내왔다.

여섯개 ‘호조조’ 가운데서 갑자기 김장룡호조조가 조원 한사람이 병사하는 바람에 로력이 결핍하여 흩어질 위험성이 있었다. 이에 김시룡은 자원적으로 ‘김장룡호조조’로 넘어갔다. 김시룡은 조장을 도와 ‘호조조’를 잘 꾸려나갔다. 김시룡의 꾸준한 노력에 의하여 로력이 늘 딸린다던 이 ‘호조조’는 개체농호보다 1주일 앞당겨 타작을 끝마쳤다.

성공한 ‘김시룡호조조’

1949년 봄, 영성의 여섯개 소형 호조조는 또다시 대형 호조조로 되였다. 마을사람들은 한결같이 감농군이고 살림군이며 진국인 김시룡을 조장으로 선거하였다. 큰 살림을 한몸에 떠멘 김시룡은 조원들의 앞장에 서서 밭일에 참가하였으며 제일 일찍 밭에 나갔다가 제일 늦게 집으로 들어왔다.

 

광복을 맞아 새학교로 가는 연길시의 소학생들.

김시룡은 경영관리 사업에 힘을 기울여 존재한 모순을 찾았다. 군중들은 시끄러운 밭머리평공, 비오기 전후의 김매기, 후치질에서의 로동차이, 로동강도, 불합리한 등가교환 등 18가지 모순을 폭로하였다. 이에 김시룡은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할 방책을 창조적으로 제기하였다.

우선 표준공을 정하였다. 토질이 좋은가 나쁜가, 어떤 곡식을 심는가, 마을에서 밭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먼가 하는 등을 고려하여 조원들의 민주적인 평의를 거쳐 봄부터 가을까지 소요되는 총공수를 정하였는데 이것을 표준공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여러 가지 모순과 불합리한 현상이 시정될 수 있었다.

다음, 합작자금을 설치하였다. 담배농사, 양 기르기 등 비교적 많은 로력과 자금이 소요되는 농업과 부업은 개인으로 경영하기 힘들었다. ‘호조조’에는 로력은 남아있으나 자금이 없었다. 이런 실정에서 규모가 비교적 큰 부업을 경영하기 위하여 조원들에게서 받아들인 자금을 합작자금이라고 하였다. 분배 때에는 합작자금 역시 로력과 같은 역할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로력 기준량을 정하였다. 조원들의 숙련정도, 신체상황, 같지 않은 로동에 따라 로력 기준량을 정하였다.

세전이벌은 원래부터 땅이 기름졌다. 그런데 항일전쟁이 승리하기전에는 지주의 착취로 말미암아 땅을 잘 가꾸지 않아 밭 평균수확고는 겨우 헥타르당 1,000키로그람 좌우였고 논은 2,150키로그람 사이에서 오르내렸다.

‘김시룡호조조’는 가난한 조선민족 농민 23세대로 조직되였는데 총인구 117명 가운데서 남성로력 20명, 녀성로력 26명이였다. 가축으로는 소 16마리에 소수레 12대였으며 그 외에 말 한마리와 노새 한마리는 호조조의 연자방아간에 두어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토지는 밭 26헥타르 6무 5푼, 논 13헥타르 9무 6푼인데 합치면 40헥타르 6무 1푼이였다. 그러니 인당 3무 3푼씩 돌아가는 셈이였다. 김시룡은 춘경 때 남아 돌아가는 로동력을 조직하여 황무지를 개간하여 밭 1헥타르와 논 8무를 확대하였다. 하지만 농토는 적고 로력과 축력이 남아 돌아가는 모순은 의연히 해결되지 못했다.

김시룡은 세심히 따져보았다. 아무리 심경세작하더라도 한개 로력이 밭 2.5헥타르거나 혹은 논 1.5헥타르를 다룰 수 있으니 논과 밭을 평균으로 잡으면 한개 로력이 2헥타르를 다룰 수 있다. 그렇다면 40헥타르의 땅을 다루는 데 남자로력 20명이면 족하다. 소 한마리로 평균 3.5헥타르의 땅을 개간할 수 있으니 12마리면 넉넉하다. 그러니 소 4마리나 남는 셈이다. 남아 돌아가는 로력과 축력을 합리하게 리용해야 했다.

한해 농사를 지으면 인당 알곡 465키로그람 밖에 안돌아간다. 이것으로 공량을 20%로 바치고 식량, 종자, 사료를 남겨 놓는다면 의복을 지어입을 돈이 생길 구멍이 없다. 그러니 알곡생산만으로는 살림이 펴일 수 없었다.

이에 김시룡은 우선 땅을 잘 가꾸었다. 농토의 시비면적을 80%로 증가하고 40%의 밭을 네벌 김 매고 네번 후치였으며 그외 밭은 세벌 김 매고 세번 후치였다. 하여 헥타르당 수확고를 2,612.5키로그람으로 올려 전해보다 64% 증산하였으며 개체호보다 헥타르당 105키로그람씩 증산하였다. 1헥타르 8무의 개간지에서도 적지 않은 수확고를 높이였으며 1헥타르 1무의 밭을 논으로 개답하여 수확고를 높이기도 했다. 그 밖에 담배농사를 하여 수입을 올렸다. 김시룡은 또 조원들에게서 자금을 모아 여유로력을 조직하여 닭, 오리, 돼지, 양 등을 사양하였으며 녀자들을 조직하여 약재를 캐게 하였는데 부업으로 얻은 수입은 5만여키로그람의 식량가치에 해당되였다. 농업과 부업으로 얻은 수입으로 의식이 문제없이 해결되였으며 생활을 일정한 정도로 개선할 수 있었다.

김시룡은 공부하지 못하여 일자무식이였으나 늘 목책을 갖고 다녔는데 목책에 여러가지 부호들이 가득 적혀 있었다. 누구나 그 기호를 알아볼 수 없었으나 김시룡만은 그 목책을 펼쳐보기만 하면 ‘호조조’의 실정을 손금 보듯 환히 꿰뚫고 있었다.

개체로 경작할 때보다 수입이 증가되니 ‘호조조’내부에서 동요하던 조원들은 장기타산을 갖게 되였으며 ‘호조합작’이라면 외면하던 개체호들은 호조조를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김시룡호조조’의 경험은 연길현의 계선을 넘어 전 연변에 소개되였다. 경영관리 사업이 따라가지 못하여 해산될 위험이 있던 적지 않은 ‘호조조’들은 ‘김시룡호조조’의 경험을 학습하고 새로운 기상을 나타내게 되였다.

1949년, ‘김시룡호조조’는 연길현로력모범대회에서 1등 ‘모범호조조’로 당선되였다. 1950년, 김시룡은 길림성특등로력모범, 전국로력모범의 영예를 지니고 북경에 가 국경 첫돌 기념모임에 참가하게 되였으며 모스크바를 방문, 쓰딸린의 접견을 받았다. 그는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제1기로부터 제3기에 이르는 기간 줄곧 대표로 당선되였고 또한 전국정치협상회의 위원으로 당선되였다.

김시룡은 1951년에 연변농학원과 손 잡고 ‘새벽농업대학’을 창설하여 농업로동에 참가하고 있는 농민들로 하여금 농업과학기술을 습득케 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첫 초급농업사

1951년 3월, 중공연변지위에서는 중공중앙 동북국의 지시에 근거하여 토지출자를 특점으로 한 초급농업사를 시험적으로 건립할 것을 지시함과 동시에 전국로력모범 ‘김시룡호조조’에 공작조를 파견하여 경험적으로 해보게 하였다.

여러 차례의 토론 끝에 22호 조원중 6호는 계속 ‘생산량을 도맡은 호조조’에 남아있고 부유농민 송병관은 아예 혼자 하겠다면서 나가고 15호가 초급농업사에 가입하였다. 이것은 연변지구에서 건립된 첫 초급농업사였다.

김시룡초급농업사는 건립한 첫 해에 증산하였다. 김시룡초급농업사의 논 헥타르당 수확고가 3,865키로그람인데 비하여 생산량을 도맡은 호조조의 수확고는 3,800키로그람이였고 혼자 한 송병관의 수확고는 3,234.5키로그람이였다. 혼자 하는 것이 호조조보다 못하고 호조조는 농업사보다 못하다는 것을 증명해준 셈이였다.

1952년 1월초, 동북인민정부 판공청 주임 왕광위는 공작조를 데리고 와서 김시룡농업생산합작사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조사한 후 보고를 썼다. 당시 동북인민정부 주석이던 고강은 이 보고를 비준, 이첩하면서 각급 지도간부들에게 김시룡농업사의 경험을 연구하라고 호소함과 동시에 동북3성의 성보는 이 보고를 실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이로부터 농업생산합작사란 이 새 사물이 농촌경제생활의 중심으로 되였다.

중공연변지위에서는 전 지구적으로 94개의 초급농업사를 세울 것을 계획했다. 그런데 이 해 봄에 각지에서는 자발적으로 농업사를 세우는 고조가 일어나 190개나 되는 초급사가 새로 건립되였다. 왕청현에서는 민족련합사도 건립되였다.

농업사가 급격히 증가된 새로운 정세에 비추어 중공연변지위에서는 〈농업생산호조합작에 대한 중공중앙의 결의〉(초안)를 진지하게 관철하였다. 특히 이 〈결의〉에 명시된 ‘적극적으로 지도하고 온당하게 전진’하는 방침을 진지하게 관철, 집행할 것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중견력량, 호조경험, 대중토대 등 조건에 근거하여 농업사를 정돈, 공고히 할 것을 제시하였다. 연변지구에는 비준을 거치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난 농업사가 60개나 되였다. 현에서 그들더러 호조조로 고치라고 해도 그들은 듣지 않고 그냥 농업사를 꾸려나갔다. 당시 이런 농업사를 ‘검은 사’ 라고 하였다. 이런 ‘검은 사’도 후에는 다 자기궤도에 올라 공고히 되였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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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9-04
  • 북경 김호림 특별기고  두만강의 남쪽에서 보는 천불지산, 칠도구는 천불자산의 북쪽 자락에 위치한다.     (흑룡강신문=하얼빈) 시초에 불린 마을의 이름은 원동(元東)이 아니었다. 원동은 본래 학교이름이었다. 1920년경 학교를 세울 때 원동학교라고 이름을 지었다. 학교의 이 이름을 따서 마을도 종국적으로...
  • 2018-07-24
  • 옛 마을 새 마을,우리네 전설은 이어진다 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명(明)나라의 장령 이성량(李成梁)은 남다른 명을 타고 난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삼태성'을 밟고 있었다는 사실은 우연하게 드러난다. 발을 씻겨주던 시종이 발바닥에 붉은 점이 박혀있다는 것을 발견했...
  • 2018-01-04
  • ‘오상 조선민족지'로 보는 180년 민족의 변천사   (흑룡강신문=하얼빈)김철진 기자=최초로 오상시 조선족의 력사를 계통적으로 기술한 ‘오상 조선민족지(五常朝鲜民族志, 이하 민족지라고 략칭함)' 중문판(흑룡강인민출판사 출판)이 최근 조선족사회에서 널리 전해지면서 항간의 화제로 떠오르고 있...
  • 2017-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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