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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 《한락연을 추억하여》(9)무한을 보위하던 시기의 한락연을 회억하며
조글로미디어(ZOGLO) 2020년10월22일 08시27분    조회: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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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극부(姜克夫)

한락연동지는 동북의 조기 중국공산당원으로 우리의 로선배이기도 하다. 1924년 그는 중앙의 파견을 받고 동북에 돌아와 건당 준비사업을 하면서 소자원, 염보항 등 로선배들과 래왕이 밀접했다.

내가 한락연동지를 알게 된 것은 1938년 8월, 당시 ‘동총’(동북항일구국총회의 략칭)의 무창명월교순직회관에 세운 총부에서였다.

‘동총’은 중국공산당 령도하의 항일민족 통일전선 조직으로 주은래동지가 직접 관심, 령도하는 동북 망명동포EMF로 구성된 항일구국단체이다.

1931년 ‘9.18’ 후 많은 동북사람들 특히 대량의 청년들은 관내 평진 각지로 망명했는데 그들중 많은 사람들은 1935년의 ‘12.9’운동에 참가했다. 1936년 12월 서안사변후 동북려평각계구국련합회를 정식 구성하였고 이 광범한 군중기초우에서 동북항일구국총회를 설립했다.

1937년 1월, 상해에서 준비회의가 있었고 1937년 6월초 북평에서 설립대회를 열었다. ‘동총’의 주요 책임자로는 류란파, 염보항, 고숭민 등이였다. 1937년 7월 로구교사변 후 ‘동총’ 본부는 남경으로 이사했고 상해가 함락되자 남경에서 지키지 못해 국민정부를 따라 무창까지 물러나게 되였다.

나는 ‘9.18’사변 후 관내에 망명한 동북청년으로 항전전에는 북평 동북대학에서 공부를 하였다. 1937년 8월초 평진이 함락되자 나는 또 제남으로 망명했다. 당시 우리 당은 국민당과 함께 항일한다는 합법 명의로 적진의 후방에서 항일유격전을 발동했다. 중공중앙 화북국 련락국은 ‘화북구국회’의 명의로 국민당 산동성 주석 겸 제3집단군 총사령인 한복구와 합작해 제3병단 군정인원훈련반을 개설했다.

당조직에서는 망명해온 진보적 청년들을 동원해 이 훈련반에 참가하게 했다. 나는 이 훈련반에 참가했는데 졸업 후 산동 제6전구에 파견돼 정치사업일군으로 있으면서 적진의 후방에서 유격전을 벌렸다.

1938년 8월초, 나는 무한에 도착했고 ‘12.9’ 후 나는 우의부의 소개로 ‘동북인민항일회’에 참가했기에 무한에 온 후 제3집단군 한구판사처로부터 ‘동총’ 본부로 이사해 살게 되였다. 그 당시 나는 ‘동총’의 청년항일구국단과 전지복무단에 항일전선의 전쟁 상황을 소개한 적 있다.

당시 한락연동지도 ‘동총’ 본부에 살고 있었는데 그는 그림을 무기로 대량의 항일선전화를 그렸다. 그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은 그가 ‘동총’에 그린 대형 화폭 〈노예로 되기 싫은 사람들 일어나 일본제국주의를 소멸하자〉는 그림이였다. 이 그림은 한구해관 청사에 높이 걸려있었는데 특별히 눈에 띄였으며 민중들의 사기를 크게 돋우어주었다.

당시 중공 동북특위 판사처 기관 간행물인 《역습》(반월간)에는 거의 매 표지화(封面画)마다 한락연의 그림이 실렸다. 례로 〈일어나 적들과 싸우자〉, 〈우리 가원을 보위하자〉, 〈포효하는 로구교〉 등등이였다. 특히 잊을 수 없는 것은 ‘8.13’ 전면 항전 1주년 시위 그림이였다.

이 시위에는 류란파, 우의부, 한락연 그리고 수많은 중조 애국청년들이 참가했다. 10여만명 분노의 인파 속에서 ‘중공호북성당위’, ‘중화민족선봉대 총대부’와 ‘동북항일구국총회’ 기발이 보였고 또한 ‘조선민족전선련맹’ 기발도 보였다.

시위대오 행렬에는 주은래, 동필무, 엽검영 등 중공 지도자들도 있었다.

또한 시위대오에는 ‘국민당 호북성 당부’, ‘무한보위구 사령부’의 기발도 있었고 국민당의 고급 장령들인 진성, 장발규도 시위에 참가했다.

광범한 군중들은 국공 량당이 항일구국을 위해 함께 나섰음을 보게 되였고 이에 열렬한 환영을 표했다.

일본 비행기가 무한 삼진에 대한 폭격이 심해짐에 따라 ‘동총’ 본부도 명월교 순직회관에 있을 수 없게 되여 대량의 사업일군들은 서안과 중경으로 철거, ‘동총’의 주요 지도자들인 류란파, 우의부, 우병란 등 남겨진 동지들은 한구의 프랑스 조계지인 명덕리로 이사했다.

그 당시 락연과 나도 프랑스 조계지인 명덕리로 이사했는데 사람이 적은지라 나와 한락연은 접촉시간이 많아졌다. 한락연은 검은 테두리 안경을 끼고 있었고 말수가 적었으며 점잖고 례절이 밝아 오랜 시간 서방교육을 받은 학자로 보였다.

일본 비행기 폭격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낮에 늘 교외에 나가있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그가 아주 친절한 사람임을 느끼게 되였다. 그는 서유럽의 견문을 나한테 들려주었고 에스빠냐 인민들의 마드리드보위전투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는 그림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을뿐더러 견식이 넓고 분석이 치밀하여 우리 젊은이들로 하여금 큰 교육을 받게 하였다.

1939년 9월 중순, 상급 당조직에서는 ‘동총’ 본부를 중경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류란파동지도 서안을 거쳐 연안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우의부동지는 나한테 류란파와 함께 서안을 거쳐 연안으로 떠날 준비를 하라고 통지했다. 당시 나는 산동성 제6전구 유격사령 범주선부대의 현직 군관으로 국민당부대 군관복을 입고 계급을 달고 있었다.

또한 범주선이 발급한 통행증도 갖고 있었기에 무한에서 철거하기란 아주 쉬운 일이였다. 떠나기전, 락연동지는 나를 찾아와 네명의 조선 청년을 연안으로 데려가줄 것을 부탁했다. 그들은 리명, 왕수성, 장영(녀) 그리고 한명은 서양화를 그리는 청년이였다.

나는 그들을 무한에서 모집한 병사라 말하고 국민당 경찰과 헌병들의 조사를 안전하게 통과하여 서안에 도착했고 18집단군 서안판사처의 소개로 연안으로 향했다. 연안에 도착한 후 나는 네명의 조선 동지들을 해당 조직에 데려다준 후 항일군정대학에서 공부했다. 1945년 일본이 투항한 후 나는 동북으로 돌아가 정권사업을 했다. 몇년 후 치치할에서 열린 회의에서 우의부와 관몽각동지를 만난 나는 그들과 옛이야기를 나누면서 한락연이 서북에서 희생되였음을 알게 되였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한 시대의 조선족 준걸이 너무 일찍 이 세상을 떠났으니 말이다.

/1987년 8월 15일

자죽원 숙소에서

강극부(1913―1993년): 1935년 중공 동북특지의 외곽 조직인‘동북인민항일회’에 참가, 1938년 1월 중국공산당에 가입, ‘동북항일구국총회’에서 사업했다.

1938년 11월, 그는 무한에서 연안에 도착한 후 선후로 중공중앙군위 총정치부 선전부에서 《군정잡지》편집을 담임, 당중앙 기관보인 《해방일보》 편집과 특파기자 겸 삼변분구 통신처 주임 등 직을 맡았다. 1958년부터 그는 선후로 중국근대사연구소에서 연구원과 소장, 민국사연구실 부주임 등 직을 담임했다. 작품으로는 《민국군사사략고(民国军事史略稿)》와 《동북대학사고(东北大学史稿)》가 있다.

번역: 길림신문 최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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