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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홉과 바꾸고 싶은 하나의 유혹 댓글:  조회:950  추천:0  2019-11-16
나는 문학반에 다니면서 미자씨를 알게 되였다. 모임이 끝난 뒤면 집에 돌아가는 길이 같아서 우리는 늘 얘기를 나누며 걸어서 가군 하였다.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다보니 서로를 많이 알게 되였고 많은 공동언어도 생겼다. 매양 집에 돌아가 잠자리에 누워 그녀의 말을 되새겨보면 참 좋은 책 한권을 읽은듯한 잔잔한 감동까지 받는다. 그렇게 인연이 닿아서 몇번 미자씨 주변의 친구들 모임에도 합석해보고 미자씨에 대해서도 좀씩 깊이 알아갔다. 그런데 웬 일인지 미자씨한테서 종래로 녀자들이 입에 달고있는 “우리 남편”이란 말은 없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나는 어느날 끝내는 조심스레 물어봤다 “남편은 어디 출근해요?” 미자씨는 시무룩이 웃으며 대답했다. “헤여졌어요.” 나는 남의 아픈 상처를 건드린것 같아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냥 의외라는 표정만 지었다. 미자씨는 그런 내 마음을 알기나 한듯이 담담히 웃으며 얘기했다 “사람들은 그냥 입버릇처럼 좀만 언짢아도 리혼하자고 오기를 부리는데 정말 말이 씨가 된다는걸 절실하게 느꼈어요. 저도 필경 오래동안 자기 사업을 해온 사람이라 배짱이 좀 두둑해요. 남편에게 의지해 사는 연약한 녀자라면 혹시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리혼을 후회하는 목소리일가? 어쩌면 그런것 같기도 하고… 그녀는 차분하게 그동안 살아온 과정을 나에게 들려주었다. 남편은 외국에 가 십년 있었다고 한다. 남편이 외국에 간지 처음 얼마간은 앞으로 어떻게 혼자 살겠나 걱정이 태산같았는데 어쩌다보니 장사도 남편이 있을 때보다 더 잘되였고 외롭다보니 여기저기 모임에 다니며 친구들도 많이 사귀였고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어 이런저런 학습반도 다니며 지식면도 많이 넓어졌다 어떤 일은 미리 예고되여있는듯하다 남편이 10여년만에 귀국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십여년 갈라져있은데다 한 사람은 엄청 성장하고 다른 한 사람은 제자리걸음을 하다보니 두 사람 사이에 제일 기본적인 공동언어가 없어졌다. 대화도 대화지만 생각의 차이, 습관의 차이, 관념의 차이 거의다 극과 극 같았다. 한국에서 십년동안 남의 밑에서 시키는 체력로동만 하다 돌아온 남편은 뭘 마땅히 할수 있는 일이 없다는 핑게로 매일같이 마작판에 빠져 새벽이 다돼서야 집에 돌아오군 했다. 남편이란 사람이 하루이틀도 아니고 매일 놀음을 밥 먹듯한다면, 또 그런 상황이 몇년씩 이어진다면 어느 안해인들 감당할수 있을가? 게다가 십년씩 한국에서 독신생활을 해온 남편은 내놓은 들말이나 다름없었다. 오래동안 외국생활에 가족분위기도 그리웠으련만 전혀 그런 눈치가 없이 늘 어중이떠중이 친구들이 더 좋고 마작에 대한 유혹이 더 컸으며 일찍 집에 돌아와야 된다는 개념 자체가 없이 밤 12시를 넘기기가 일쑤였다. 아무리 타이르고 각서를 씌워보고 해도 그 상이 장상이였다. 그래서 다투기도 많이 다투었다. 물론 다툰 뒤 며칠은 마작 놀러 안 가는척했지만 며칠 안 지나서 마누라 화가 좀 풀렸다싶으면 또 마작판에 “출근”했다. 남편은 자기가 한국에서 벌어온 돈을 다 집에 들여놓았다며 떵떵댔지만 사실 그 돈들은 집 살 때 선불금으로 충당되였다. 게다가 외국에서 돈 벌어왔노라고 자기 소비돈은 얼마나 펑펑 써대는지… 막무가내였다. 미자씨는 매일같이 마작판에 빠져있는 남편, 친구밖에 모르는 남편과 다투는 일도 지긋지긋해났다. 전에 그나마 애틋했던 정도 싹 사라질만큼 십여년간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온 부부사이의 격차는 상상 그 이상이였다. 종이로 불을 쌀수 없다더니 일은 끝내 터지고말았다. “단지 자식만을 위한다는 책임감에서 이렇게 문제투성이인 사람과 결혼이라는 멍에를 지고 계속 함께 살아야 할가요? 남보기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는게 아니잖아요. 내가 전혀 행복하지 않은데 자기 감정을 속이고 사는 자체가 비극이잖아요. 하물며 친구도 맘이 통하지 않으면 발길을 돌리는 판에 평생 같이 갈 부부사이가 이래서야 될가요?” 미자씨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하는 얘기, 그동안 얼마나 마음속으로 갈등이 심했을가? 이런걸 일컬어 감정이 깨졌다고 하나보다. 미자씨는 한때는 그래도 타향에서 고생하는 남편이 불쌍하여 귀국하면 잔소리 말고 잘 대해줘야겠다는 마음도 있었는데 귀국해서 5년 동안 놀고 먹고 마작에 빠져있는 남편이 너무 정 떨어져서 더 이상 련민의 정도 생기지 않더라고 한다. 세상에서 제일 많이 싸우는게 부부사이라 하더니 그 말이 맞는것 같다. 하긴 제일 가깝고 또 제일 많은 시간을 함께 부대끼기때문이겠지. “사람이 그런것 같아요. 부부사이에 다툰다는건 또 다른 의미에서 보면 잘못된 부분을 고치면서 잘살자는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어느날부터인가 미자씨는 더는 일찍 집에 오라, 마작 제발 좀 그만 놀아라, 고향에서 뭐든 시작해서 기반을 잡아나가라 등등 잔소리를 뚝 멈추었다. 대신에 헤여지자고 조용히 그러나 드세게 밀어붙였다. 어떤 사람들은 자식을 보더라도 좀 참고 살라고 권고했지만 미자씨로서는 이제는 자기 인생을 살고싶었다. 정말 단 하루를 살아도 정이 가는 사람과 살고싶었다. 남들이 리기적이라고 손가락질한다 해도 무서울게 없었다. 남들한테 보여주기 위해서 사는건 아니라고 확신했다. 자신의 행복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앵돌아진 마음을 다시 돌려세우기가 쉽지 않더란다. 고민끝에 미자씨는 단호히 리혼을 결심하게 되였던것이다. 자기 인생이니 누구와 상론할수도 없고 상론해봤자 무슨 정답 같은게 있을가? 정말 어느날 후회해도 자기가 한 선택이니 스스로 감당할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기어코 리혼을 고집하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남편은 죽어도 리혼을 못해준다고 나누웠다 돈 잘 버는 기계로만 보이던 안해의 반란이 이 정도로 강력하게 리혼까지 가려니는 생각지도 못했을것이다. 남들이 그렇게 부러워하는 그 많은 재산도 다 포기하고 안해가 정말 단지 이런 리유들로 리혼하자고 나설가? 남편은 리해 못하는 눈치였다 다툰 뒤면 안해가 종종 리혼을 들먹이긴 했지만 그것이 정말 현실로 이어지려니는 예상을 못했던것 같았다. 하지만 미자씨는 남편한테서 이미 떠나버린 마음을 돌려세울수 없었다. 반년만에 끝내 두 사람은 남남이 되였다. 그동안 잘살아보겠다고 애면글면 모아놓은 재산은 혼인의 결속과 함께 가차없이 두쪽으로 나뉘여졌다. 가슴이 아팠다. 실제로 한 가정이 깨지기까지는 이런 과정, 이런 이야기들이 있는거구나 실감했다! 그럼 리혼후의 생활은 어떠했을가. 과연 생각처럼 행복했을가? 현실은 그게 아니였다. 미자씨는 리혼한 뒤 한 1년간은 홀가분하게 살았다. 예전처럼 늦게 귀가하는 남편때문에 잠을 설칠 일도 없고 일찍 들어오라 잔소리할 일은 더더구나 없었다. 그동안 가끔씩 소개 들어오는 사람도 만나보았다. 그러던 어느날 미자씨는 지인의 소개로 한 남자를 만나보았다. 그 사람은 학벌도 있고 직위도 있고 단위도 괜찮은데다 가정부담도 없었다. 인물체격이 좋은데다 녀자를 이뻐해주고 유머감각도 있었다. 이 나이, 이 조건에 어쩌다 이런 호박이 넝쿨채 굴러들었냐 싶을 정도로 너무나 완벽했다. 그야말로 신데렐라가 된 기분이였다. 세상에 어쩜 이 같은 행복이… 미자씨는 이제야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무등 기뻤다. 그런데 그 남자가 서서히 본색을 드러냈다. 술만 마셨다 하면 누구나와 걸고들어 시비를 걸었다. 그 남자의 못된 술버릇에 질린 친척이나 지인들은 모임에 아예 그를 부르지도 않았다. 참으로 어이없었다. 그러나 미자씨는 조건 좋은 그를 쉽사리 포기하고싶지 않았다 자기 같은 조건에 어디 가서 이만한 조건의 사람을 만나랴 싶었다. 그래도 사람이 인정스러운 면이 많았고 한편으로는 불쌍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전남편과는 부부정이라고는 모르고 살았지만 이 남자는 그나마 자기를 이 세상의 전부로 알아주고 그렇듯 소중하게 여겨주었던것이다. 정이 뭔지 모르고 살아온 그 세월, 외롭게 살다가 어쩌다 자기를 아껴주는 사람을 만나니 쉽게 잃고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떡하나 주풍을 바로잡아주고 같이 살고싶었다. 그런데 그게 그리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술을 안 마실 때는 순한 양 같다가도 술만 마시면 야수같이 돌변했다. 이중성격자인지 정신이 든 다음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하늘이 야속했다. 전남편은 도박군, 두번째로 만난 남자는 주정뱅이… 여태 살아오면서 남한테 해코지 한번 하지 않고 착실히 살아왔는데 어쩜 남편복이 이토록 없단 말인가. 때로는 차라리 전남편과 회복하고싶었다. 도박군이 주정뱅이보다는 나을듯싶었다. 이 남자는 만날 술에 취해있다보니 언제 맑은 눈동자를 서로 마주보며 얘기를 나눌수도 없었다. 그제는 정신상태도 좀 이상해진듯했다. 결국엔 마음을 모질게 먹고 헤여지기로 작심했다. 그런데 갈수록 심산이라더니 그렇게 온순하던 남자가 헤여지자고 하니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전남편은 그래도 자식이라도 있으니 막 나가지는 않았는데 이 남자는 달랐다. 어찌나 무섭게 나오는지 당하면 어데 가서 해볼데도 없었다. 그제는 손톱만큼의 미련도 안 남았다. 정말 갖은 수단을 다해 겨우 그 남자와 헤여졌다. 그렇게 두번째 혼인에서까지 실패하고나니 그녀는 인생에 회의가 들었다. 게다가 요즘 들어 시집 갈 나이가 다된 딸애한테 부모가 리혼했다는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닐것을 생각하니 죄책감이 더 커졌다. 그래서 그녀는 말한다. 애가 있는 부부들은 웬만하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말라고. 세포 하나하나로 깨달은 그녀의 인생담, 어둡고 소름 끼치는 기나긴 턴넬 그끝까지 가본 사람의 절절한 부탁이였다. 요즘 사람들은 돈보다, 명예보다 더 그리운게 감정인가보다. 그렇게 풍족하게 살았었지만 감정이 없으니 못살겠더라는 미자씨는 가지고있던 소중한 아홉가지로 바꾸고싶은 한가지가 바로 부부정이라고 했다. 요즘 세월 돈벌이때문에 부부가 서로 떨어져 사는걸 보면 서글퍼진단다. 자기네도 잘살겠다고 떨어져 살다가 결국엔 이렇게 되였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처음엔 내 집 마련을 위해 아글타글, 그뒤에는 더 많은걸 갖추느라 다람쥐 채바퀴 돌듯 살다보니 부부감정따위엔 신경 쓸 사이도 없었는데 어느날 문득 정신을 차리고보니 서로간에 제일 중요한 정을 무시하고 살았던것이다. 미자씨의 비극이 우리 시대의 비극이 아닐가싶다. 요즘은 부부사이에 정이 다 사라져 리혼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고 한다. 부부사이에 좀더 대화를 가지고 부부감정을 차곡차곡 다져간다면 이러한 비극은 피할수 있지 않았을가. 매일같이 코를 맞대고 사는 부부들은 가깝기때문에 더구나 서로의 감정따위를 무시하면서 사는 경우가 흔하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은 돠지 말자. 내것이라고 이름 짛었던 내 남편 내 안해도 당신의 무관심과 외면속에서, 거듭되는 실망으로 남남이 될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고 가족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자. 일단 정말 비극이 일어나면 제일 상처받는건 당신과 당신의 가장 소중한 가족이다.   미자씨 인생담이 좋은 귀감이 되였으면싶다. 연변녀성 2015년 10기
9    제로도 아니고 마이나스로 시작한 인생수업 댓글:  조회:1901  추천:0  2019-11-16
남들은 사는게 다 행복해 보인다 가끔씩 아주 가끔씩 간간히 속탄다는 얘기들을 하고 있지만 내가 들어볼바엔 별 일도 아닌 일때문에 속탄다고들한다. 그럴때면 나는 속으로 “그대들은 진짜 속이 탄일, 진짜 설음이 뭔지나 알기나 해?” 라고 혼자말로 중얼댄다. 요즘 샐러리맨들의 일상화장법을 배워주는 강습반에 다니면서 여러분야의새로운 분들을 알게 되였다. 모두들 참 예쁘기도 하다. 반달같이둥근 눈섭,짙고 긴 눈초리, 예쁜 눈매,오똑한 코, 섹시한 입술,아기 피부같은 살결, 꽁꽁 들어박힌 단정한 오관,한마디로 젊고 이쁘고 같은 녀자인내가 봐도 황홀하기 그지없다 어느새 입가에 튕겨나오는 감탄. 엮시녀자는 이뻐야 돼! 그게 자산이구나! 그 분들을 지켜보노라니 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부모들은 잘 살지도 못해서 내가 그토록가고싶어하는 대학공부도 다 못시켜 평생 한이 맺히게 하였는데 이쁘게나 좀 나주시지. 하지만 인츰 또 허허 허구픈 웃음을 웃게된다. 내가 부모가 되여보니 그게 어디 부모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 그런줄뻔히 알면서도 가슴속 한켠으로는 은근히 섭섭함을 떨쳐버릴수 없다. 예쁘게 나주면 좀 좋아! 하지만 그 서운함도 잠시 잠간 순간뿐이다. 다시 잘 생각해 보니 늘씬한 체격도, 예쁜 얼굴도 매력적인곳이라고는 한곳도 찾아볼수 없는 아주 수수한 사람으로 태여나서 가진것 하나없이 낳아 주었지만 그래서 많고많은 고생들을 거듭했지만 과정이야 여하하튼 지금은그래도 결과적으로 행복하게 잘살고 있지 않은가? 지금은 이렇게 이쁘고 지성미 있고 여유넘치는 이들과같이 또 다른 아름다움과 취미생활을 즐기고있는 내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니 어느새 원망은 봄눈 녹듯 사르르 없어지고 감사가 샘물처럼 솟구친다. 힘든 가정형편때문에 너무 일찍부터 고생의 쓴맛을 알았고 어려서부터 저절로 분투할 생각을 했었고 누구나 다 다닐수 없는 고생이라는 명패 "대학"을 나와서 돈주고는 절대 바꿀수 없는 소중한 자산, 좋은경력들을 쌓았고 뒤 돌아 볼사이도 없이 책임감 하나로 오늘날까지 분투해온 덕분에 지금은 저절로도 조금 아니 아주 만족한 인생을 살고 있지 않는가? 물질적으로 풍족한 부모의 그늘밑에서 자랐다면 아마오늘날의 이런 성취들은 없었을것이다. 반듯하게 키워준것외에는 부모로부터 얻어가진것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고 오히려 숱한 보따리만 지워주었던 내 가족, 밑바닥인 제로도 아니고 마이나스로부터 시작해야만했던 나의 인생수업, 그래도 그 많은 고생들을 하나하나 용케도 이겨내고 지금은 얼마나 행복하게 잘 살고있는가? 하나부터 열까지 나의 휘황한 성취와 나의 전성기에는 나의 노력과 분투의 땀방울이 슴배여있지않은게 없다. 그런 힘들었던 나날들 그런 과정 과정들이 쌓여서 오늘같은 사업의 성공과 함께 내 생에봄날을 맞이한게 아닐가? 이렇게 생각하니 내가 겪었던 고생들과 그 과정 하나하나가모두 감사하기 그지없다 이쁘지 않으면 좀 어때,녀자는 가꾸기에 달렸다는말도 있잖아. 그래 많이 가꾸면서 살자.내적 미도 외적미도 지성미도 가지고 있는 모든거에 늘 감사한 삶을 살련다 생각을 바꾸니 내 삶도 참으로 행복해 보인다. 어느새 내 마음속에서 감사의 샘물이 솟아오르고 이런웨침이 메아리 되여 울려퍼진다 “부모님들이여! 반듯하게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것하나로 저희는 평생을 만족하며 살렵니다.”
8    행운의 로또 보따리 댓글:  조회:713  추천:1  2019-11-16
시골에서 자란 나는 사남매 셋째딸로 아래에 남동생 하나 두고있다. 그런데 이 남동생이 나에게 엄청난 부담을 가져다주는 애물단지 보따리가 되였던적이 있다.  피줄을 나누어 가진 혈육으로 그냥 내쳐버릴수도 없고 그렇다고 끌어안자니 내 힘이 부치여 눈앞이 캄캄하고 숨이 막히던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애물단지 보따리가 지금에 와서 나에게 둘도 없이 소중한 보배단지 보따리가 되였다.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지난 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것이다. 그때 나는 집 한칸 있고 매달 먹고쓰는데 부족하지 않게 벌어다 주는 남편을 만나 그냥 그런대로 잘 살고 있었다. 거기에 자그마한 가게 하나 차려놓아 다달이 푼돈도 생기게 되여 그야말로 더 이상 바라는것없이 무지무지 만족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너나가 다 한국가는 세월에 애아빠도 좀 더 잘 살아보겠다고 한국으로 돈벌이를 떠나고 나는 집에서 애나 키우면서 하던 가게일을 계속 보며 그럭저럭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시골중학교에서 교원으로 일하던 남동생이 찾아왔다. 시골학교여서 학생수가 점점 줄어들다가 학교문마저 닫게되였다며 이젠 하루 아침에 백수가 될일만 남았다고 한숨을 풀풀 내쉬는것이였다. 그러면서 이제와서 다른 길이 없는데 어떻게 좀 누나와 같이 장사나 할수 없겠냐며 마구 들이대는것이였다. 장사를 해본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말이 장사지 그거 어디 아무나 하는 일인가. 그거 누구나 다 하는것이라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장사해서 못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것이니 말이다. 나도 이제야 겨우 밥벌이나 하는 장사인데 동생이 와서 거기에 숱가락을 얻고 같이 밥을 나눠먹자고 한다. 그러나 답답하지만 물에 빠진 사람 짚오라기잡는 심정으로 없는 비위까지 쓰며 매달리는 동생을 보니 차마 거절할수 없었다. 나는 기실 오래전부터 동생에게는 부모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홀어머니손에서 자라면서 나는 시집오기전까지 못해본 고생이 없었다. 시골에서 어렵게 고중을 졸업하고 대학시험을 치렀으나 락방하였다. 그 다음해 보습반에 들어가 재수하자면 그때 돈으로 500원만 더 내면 다닐수 있었다. 그런데 당시 우리집에 그 돈 500원은 천문수자나 다름없어서 나의 학비로 선뜻이 낼수 있는 형편이 아니였다 세살 터울인 남동생이 금방 내 뒤를 따라 고중에 붙다나니 혼자 살림을 도맡아 하시는 어머니께는 아무래도 무리일수밖에 없었던것이다. 어머니는 그래도 차마 넌 다니지 말라는 말씀은 못하시고 어떻게 하나 어디서 돈을 구해보겠으니 포기하지말고 다시 한번 시험을 쳐보라고 격려해주셨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집안형편을 빤히 알고 있는 나는 계속 보습반을 다니겠다고 어머님께 말씀드릴수 없었다. 그리고나서 혼자 궁리한것이 나절로 돈을 벌어 학비를 마련한다는 계획이였다. 상학기엔 사회에 나가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후학기에 보습반을 다시 다녀 대학시험을 한번 더 쳐보려고 마음 먹었던것이다. 그런데 말이 쉽지 정작 사회에 나오고 보니 다시 학교에 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어머니는 금방 고중에 붙은 남동생의 학비도 제때에 대주지 못하는 형편이셨다. 나는 내가 고중다닐때 집에 돈이 없어 학비도 제일 마지막에 내다나니 몸과 마음이 늘 초라해나던 생각이 들어 사내자식인 동생만은 그렇게 기가 죽어 학교를 다니게 하고싶지 않았다. 잘 먹이고 잘 입히지 못하더라도 사내자식의 기만은 살려주고 싶었던것이다. 그러나 보습반 후학기만 다니고 다시 한번 대학시험을 쳐보자했던 애초의 나의 생각이 얼마나 천진한 생각이였는지 그리고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 평생 동안 얼마나 후회하고 한이 맺히게 하는 일이 되고 말았는지를 얼마 안가서 금방 깨닫게 되였다. 만약 시계바늘을 되돌려 나더러 지금 다시 선택하라고 한다면 난 엄마의 다리라도 잡고 어디가서 돈을 꿔서라도 기어코 다시 한번 대학시험을 칠 기회를 달라고 매달리며 애원했을것이다. 그런데 환장할것은 그렇게 내가 모든 설음을 혼자 씹으면서 애면글면 뒤바라지하여 고중공부를 마친 동생이 나중에는 글쎄 대학에 붙고도 붙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한것이다. 동생은 자기에게 날아온 입학통지서를 남몰래 감춰놓았던것이다. 나는 그런줄도 모르고 늘 동생을 탓했다. 이 누나가 내 인생 내 꿈을 다 포기하면서까지 힘들게 너를 공부시켰는데 대학문앞에 가지도 못했다고 나무랐다. 그때마다 동생은 벙어리가 된듯이 눈만 껌벅껌벅거렸다 그렇게 동생이 힘들게 살때마다 늘 원망하였는데 그로부터 거의 십년이 지났을까 어느날 동생이 더는 참지 못하고 실토정했다. "사실 그때 입학통지서는 받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놓을수 없었어."라고 말이다. 순간 나는 몽둥이에 한매 되게 얻어맞은 기분이였다. "왜, 왜서? 통지서를 감췄단말이냐!"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지만 동생이 그때 그런 선택을 했을땐 그로서 리유가 있었을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흥분을 최대한 자제하고 차분하게 물었다 ”내가 대학 가면 그 뒤바라지는 누가 해주겠어. 그때까지는 누나가 뒤바라지해준 돈으로 어렵게 고중공부는 마쳤지만 이제 시집갈 나이가 다 된 누나한테 더는 보따리가 되고싶지 않았어. 그리고 내가 대학을 다녀봤자 우리집에 뒤를 봐줄도 사람 하나 없는데 사회에 나와서 또 뭘 어쩌겠나.” ”남자로 태여나서 왜서 그렇게 옹졸하게 생각했느냐. 멀리 보고 길게 생각해야지. 네가 그때 입학통지서만 내 놨어도 우리는 얼마든지 대책을 강구하였을것이야. 아버지의 생전단위에서도 네가 대학에 입학했다면 꼭 돌봐줄거고. 대학을 졸업하고 멋있게 사는게 누나의 고생에 대한 보답인걸 왜 몰랐나? 형제사이에 신세질땐 신세를 지고 잘 돼서 잘 살아주면 되는게 아니였나.” 나는 동생을 애면글면 뒤바라지 해줬기에 배신감이 더 들었는지도 모른다 "좋은 대학을 졸업했더면 지금쯤은 좋은 직장에 출근하고 떵떵거리며 살수 있지 않겠어. 지금처럼 고중만 졸업하고 시골에서 선생질하다가 백수가 되는 일은 없지 않겠어. 바보 팔푼이라구. 저 절로 제 눈을 찔렀지. 그 년대에 대학생이 얼마나 받들렸는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바보짓을 한 동생이 야속하기만 했다 . 그렇게 가시든 내 살점처럼 아픈 내 남동생, 그런 동생의 간절한 부탁으로 동생몫으로 가게를 하나 더 내서 동업하였다. 그런데 하늘이 무심치 않아서인지 기댈 언덕이라곤 없는 우리 남매에게 대박이 터질 기회를 주었다. 적은 돈으로 시작해서 열심히 한 장사가 몇해 안되는 사이에 눈덩이처럼 불고 불어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어마어마하게 커져버린것이다. 때로는 어린 자식들을 조롱조롱 넷씩이나 둔채 너무도 일찍 하늘나라에 가신 아버지가 저 세상에서 우리 남매를 돕는게 아닐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누가 그저 부조해 주듯이 해석이 불가능한 어떤 힘이 우리를 돕는듯 말이다. 이런걸 행운이라 하지 않을가? 아마 행운에도 이런 행운은 더없을것이다. 완전히 로또에 당첨되면 이럴가. 그야말로 나도 대박, 동생도 대박이라 내가 마음 잘 쓴 대가를 톡톡히 받아낸 행운의 로또당첨자같았다. 장사가 잘 된날은 온 저녁 달콤한 마음에 생각할수록 고맙고 또 고마웠다. 래일 또 이런 마음에서 우러러나오는 고마움으로 가득 차면 좋겠다. 집평수도 늘이고 자동차도 사서 반평생을 홀몸으로 우리 사남매를 키우시면서 고생하신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벌의 저기 끝까지 씽씽 달려보고도 싶었다. 매일 퇴근한 뒤엔 모아산에 올라가 시원한 공기도 마시며 여유도 즐기고 싶고 내 힘 내 능력으로 열심히 벌어서 사고싶은 모든걸 다 사고 싶다. 돈 많이 벌어서 내 인생의 가치도 실현하고 내 부모형제의 언덕이 되여주고도 싶다. 장사에서 대박이 터져서 자금이 풍족한데다 머리가 좋은 동생이 좋은 아이디어를 자꾸 대주고 나에게 경험까지 좀 있어서 그 뒤에도 장사는 계속 즐거움의 련속이였다. 이렇게 우리 남매는 자그마한 가게장사군으로부터 이제는 사업가로 불릴만하게 발돋음을 한 셈이다 그때 만약 동생을 "애물단지 보따리"로만 보고 외면하고 내쳤더라면 그리고 동생한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면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도 그냥 한달에 삼사천원이나 버는 작은 가게장사군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지금와서 되돌아보니 동생은 그야말로 "보배단지” 보따리가 되고 내 인생의 귀인이 된것이였다. 이런 생각이 나에게 세상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여서 나는 시골에 있는 오빠들도 모두 같은 방식으로 도와주면서 살았고 그 길에서 또 우리를 도와주는 많은 귀인들을 만났다. 결국 내가 덩달아 톡톡히 혜택을 본셈이 되는것이다. 그래서 지금 나는 늘 감개무량하게 지인들과 얘기한다. 못 사는 부모형제들일지라도 절대로 그들를 외면하지 말라고. 그들이 꼭 당신이 상상할수도 없는 복을 가져다줄것이라고. 세상은 꼭 그렇더라고. "덕은 쌓은대로 가고 죄는 지은 대로 간다”더라고. 오늘도 나는 내 가족을 위해서 내 능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을것이다. 꼭 축복받는 인생을 선물받으리라는 기대보다도 온 가족이 행복하니 내 마음도 더 없이 행복하니깐말이다. 가족과 함께한 책임감이 오늘날 내 성취의 황금열쇠가 아니였던가? 여기까지 쓰고 나니 머리속에는 이런 시구가 저절로 떠오른다. 팽개치고 싶은  보따리 외면하고 싶은 보따리 어쩔수 없는 내 몫이라네 무거운 보따리 힘겹게 지고  높은 산 오르느라 불만이 얼마였던가? 하지만  보따리덕에 마음씨 좋은 동행자들 돕고 도우며 산마루에 올랐거니 굽어보니 혼자 오르는 이들  까마득히 산중턱에서 헤매고 산밑에서 맴돌더라 정상에 이른 동행자들  감지덕지 하였노라 애초에 내동댕이치지 않은 보따리를 두고
7    풍년든 전야를 바라보는 농부의 심정이 얼마나 흐뭇할가? 댓글:  조회:2155  추천:8  2019-11-16
  한밤에 놀라 깨여났다. 찜통 더위때문인지 어떤 꿈을 꾸었던지 그렇게 잠을 깨고보니 다시 잠이 안온다. 이리뒤척 저리뒤척… 잠이 안오는 깊은 밤에 이런 저런 생각들을 떠올리다가 두서없이 적어본다 . 얼마전 고중입학시험을 치른 딸애가 있는 나는 그 시험을 거치면서 참 많은것을 경험했다. 시험이란것은은 정말 독이 있는것같다. 시험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새벽시장에 나가서 찰떡을 사다가 딸애가 붙고저하는 중점고중 대문에 척 붙혀놓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시험기간 내내 꽃만 피면 그 꽃이 모두 다 열매를 맺는다는 가지를 사서 료리를 해서 먹이고 며칠 내내 시험장에 따라다니면서 학부모로서 할수있는 모든 노력을 아끼지않았다 . 시험을 치고 나서는 성적이 발표되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또 록취점수선이 나오기까지 너무도 바질바질 속태웠다. 다른집애들이 시험쳤다는 소식을 전해들을땐 시간이 빠르기만 하더니 막상 제집애가 시험치니 이렇게 느릴까? 사람은 이런 고비에 너무 속태워서 폴싹폴싹 늙는것 같다. 애도 몹시 속타는 모양이였다. 이런 애탄 과정에 이런 시점에서 나는 애를 타이르는걸 잊지 않았다. 어쩌면 딱 요런 시기에 이런 타이름이 더 효력이 있을지도 모를일이니깐 “대학시험칠때엔 제발 이런 속 태우지 말게 시험을 좀 더 잘 쳐달라.”고 절절하게 부탁했다. 애도 엄마가 속태우는게 안스러워서인지 아니면 깊이 깨달았는지 그래야하겠다고 선선히 대답한다. 그 대답이 시원하여 삼년뒤에 대학시험은 정말 속 태우지 않아도 될것처럼 믿음을 주는 애가 고맙기까지하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애가 평소에 기초가 좋기때문에 자기성적으로 꼭 붙을것이라고 예산은 했지만 그래도 록취선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를 일이여서 장담은 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꼭 붙을수 있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록취선이 나온뒤에야 애는 해방되였다. 나도 같이 해방받았다. 가장의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킨건지, 아니면 애 실력이 그래도 좋은 편이여서인지 록취선을 훨씬 넘긴 성적으로 그렇게 붙기 바쁘다는 중점고중에 붙었다. 진짜로 날듯이 기뻤고 세상을 다 가진듯 행복하고 뿌듯했다. 정성으로 자식 키워본 이들은 다 알것이다. 여기가지 오기가 얼마나 쉽지 않은지를. 돌이켜보면 오늘 기쁨의 미소를 짛을수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가장의 피타는 노력이 숨어있는지 모른다. 그동안 참 많이 애간장 태우고 마음 졸이고, 속상하고, 노하고, 기쁘고, 슬픈 과정을 모두 겪었었다. 애가 원하는 중점고중에 붙었다고 말하면 지인들 모두 "공부 잘 시켰네." 하면서 마음으로 축하해주는데 그때는 정말 뿌듯하다. 그런데 애가 좋은 학교에 붙어서 행복을 느끼는건 그 며칠뿐이다. 개학날, 입학생들의 학부형회의를 마치고나니 또 앞으로 관건적인 고중삼년을 어떻게 공부도 잘 시키고 인간성도 좋고, 다른 필요한 소질을 잘 구비하게 교육해야 할지, 학부모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고민이 더 많다. 앞으로 삼년, 애들의 인생에서 또 한번의 고비라면 고비라는 생각에 마음이 벌써 무거워진다. 그래서 한주일씩 숙사에 가있고 주말마다 오는 애가 그동안 어떤 일을 겪었으며 어떤 애들과 어울리는지, 어떤 생각들을 하는지를 늘 체크한다. 그리고 이번 주말에 만나면 요것은 꼭 각인시켜야겠다는것들, 어떤 것은 확실하게 심어줘야겠다는건 꼭꼭 메모해 놓는다. 어디에서 들은 얘기들도 애한테 필요한 교육같으면 꼭 메모했다가 들려준다. 그러나 엄마가 너무 길게 말하면 아이는 아예 시끄러워 들으려하지도 않는다. 사춘기여서 그렇겠지, 때론 기대 이상으로 눈물나게 감동을 주기도 하고 때론 때려주고싶을 정도로 정 떨어지게 쌀쌀 맞기도한 럭비공같은 사춘기애들, 가급적이면 최대한 간단명료하게, 하지만 머리에 깊은 여운이 남게 새겨듣게 얘기해줘야 할것이다 . 그래서 애를 키우면서 나 자신이 더 어른이 되는 같기도 하고 철학가가 되는같기도 하다. 애가 성장하는 과정이 또한 나의 성숙과정이기도 하다. 겸손해지고 배려할줄 알고 마음이 여유로와지고 용서를 배우는 과정, 그런 과정의 연속이다. 또한 즐거운 추억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딸애는 그래도 나를 흐뭇하게 해줄때가 더 많은것 같다. 딸과 나는 종종 이런식으로 대화를 한다. 엄마: 너 고중에 가게 되면 아이들이 모두 각 학교에서 뽑힌 우수한 애들이라 "산위에 산있고 하늘밖에 하늘 있다.(山外有山 天外有天)"는걸 터득하게 될거다. 딸: 학원에 다니면서 여러 학교에서 온 애들과 어울렸기에 나는 언녕부터 그걸 느꼈슴다. 엄마: 이번에는 시험을 잘 쳐서 장학금을 탔는데 어쩌다 한번 말구 쭈욱~ 잘 치기 바란다. 류성이 되지 말고 항성이 되거라.(不要当流星,当恒星吧.) 딸 :알았어유. “OK” 엄마: 전번에 니가 길에서 만난 갸가 예쁘던데 공부는 잘해? 딸: 그 애는 공주병두 있구 자기밖에 모름다. 공부는 잘함다. 하지만 모를 문제를 물어보면 알아두 모른다구 함다. 엄마: 자사자리하군 ... 딸: 학교에서 운동회 하는데 엄마가 좀 음료랑 풍막이랑 협찬해주쇼. 엄마: 그러지 뭐, 너희 반 애들 가장중에 엄마보다 경제력이 더 좋은 사람이 많을거다. 엄마는 돈이 많아서 협찬해주는게 아니야, 너한테 좋은 본보기 보여주기 싶어서지. 없어도 나눌줄 아는 사람,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 되거라. 앞으로도 니가 능력 있어야 없는 사람들을 보살펴 줄수 있단다. 꼭 많이 배워서 베풀수 있는 여유있는 사람이 되거라. 딸: 엄마, 숙사에서 뻐스타구 오는 길에서 이런 글을 봤는데 참으로 음미해볼만해요. "당신이 인물이 될지 페물이 될지는 당신이 지금 뭘 하는가에 달렸다.(你是人物, 还是废物, 看你现在干什么.) " 엄마:와 ~~ 대박 멋있네 ! 엄마: 이젠 반에서 간부하지말고 공부만 열심히 잘하자. 좋은 대학에 가려면 이제부턴 공부에만 올인해야 돼 . 딸: 아니요 난 어릴때부터 리더십을 배우고 싶어요. 성취감을 느끼며 살고싶어요. 엄마인 내가 흐뭇한 미소를 짛는다. 내가 이 멋에 산다. 애가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는게 나에게는 천금가는 향수이다. 요즘엔 또 "혜영이는 뭘 자꾸 자랑함다. 할아버지는 산이 있다구 자랑, 언니는 일본회사에 출근하는데 노트 3 두 사주구, 카메라두 사주구, 핸드폰은 몇천원 짜리 쓰구, 엄마 아빠는 한국에 있는데 한주 소비돈은 몇백원씩 가지구. 그래서 난 소박한 한족애들과 놀기 좋슴다."라고 덧붙힌다 . 언제부터 아이콘 사달라고 투정질하는걸 이 구실 저구실 대면서 안 사주니 억지는 쓰지않고 엄마를 설복하려고 진지하게 얘기하니 내 마음이 좀 알싸~해났다 . 좋은 학교에 붙은 상으로 사줄만도 하건만 그런식이라면 앞으로 모든게 그런식으로 대가를 요구할가봐 그저 아무런 의미도 붙이지않고 그냥 슬쩍 사주는게 나을것 같아 적절한 시기에 알아서 사주려고 시치미 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함께 합숙하는 애가 모든걸 다 그것도 다 좋은 브랜드가지고 유용하고 령활하게 그리고 저절로 잘 절제하면서 이용하는걸 본뒤 나절로 설득되여 두말없이 사주게 되였다. 안 사줘도 억지는 쓰지 않고 최대한 부모를 설득해보려는 딸애의 마음이 기특하기도하고 대견스럽기도 하고 이런 제품을 잘 다루는것도 공부라면 공부일것 같아서 또한 그냥 시대 떨어진 책벌레로만 되지말기 바래서 공부도 잘하고 다른 모든것 즉 종합사유능력, 세밀한 분석력, 정확한 판단력, 차분한 인내력, 좋은 기질, 좋은 성격, 좋은 생활습관, 자신감… 모두 다 잘 구비한 따분하지않고 해박하면서도 지혜롭고 행복한 아이로 자라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것이 또한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줄수있는 천금보다 더 값가는 재부가 아닐까 ? 아이폰을 사주니 그렇게 좋아하던 딸애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사줄수 없는 형편도 아니건만 저렇게 좋아하는걸 뒤늦게야 사준 미안함에 나는 혼자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내가 애한테 참으로 지독하게 굴었구나, 애가 공부에 올인하길 바래서 독하게 마음 먹구 안사줬는데 이렇게 나를 마음이 아프게 하다니! 한편 내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소박하면서도 반듯하게 멋지게 잘 자라준 딸애가 대견하고 흐뭇하다. 아무튼 부모된 립장에선 나름대로 애가 훌륭하고 우수하게 잘 자랄수 있게 최선을 다할수밖에… 다음은 애들 자신의 몫이겟지. 애를 키우면서 부모는 진짜 애들의 좋은 본보기여야 되겠다는걸 내 세포하나하나로 깨닸게 된다. 아이들의 거울인, 모델인, 본보기인, 우리 부모부터 만물의 근원인 뿌리부터 변하자. 쇼를 해도 좋고 다 좋으니 제발 우리 부모부터 행실 바르고 마음 바르고 이 사회, 이 시대에 아이들에게 뒤떨어지지 않는 소질이 있고 품위가 있고 인간성이 좋은 부모로 거듭나자. 행복을 느끼는데는 각자 추구에 따라 여러가지가 있다. 서로 잘 맞는 부부로 만났다던지, 사업이 번창 하다던지, 벅찬 명예나 권력을 가졌다던지, 부모복, 형제복, 친구복이 있다던지… 물론 다 중요하구 다 갖고 싶다. 하지만 변화무쌍한 이 시대에 잠 자고 나면 또 변하고 사람마음도 갈피 잡을수 없이 복잡다단하지만 그 중에서도 꼭 붙잡아야 할 핵심이 있다면 자식교육만은 절대로 소홀히 할수 없다는것이다. 애들 교육만큼만은 "무식"하지않은 "유식"한 부모가 되자. 나도 어쩔수 없이 “소 팔아 공부시킨다.”는 우리 조선민족의 피줄을 그대로 고스란히 물려받았나 보다. 이 시각 풍년든 전야를 바라보는 농부의 심정이 얼마나 흐뭇할까하고 상상해본다. 우리도 한번 대지의 그 풍요로움을 만끽해보자. 우리 다 같이 "자식농사" 잘하는 "실농군"이 되여 오곡이 무르익는 그 가을엔 감사한 마음으로 수확의 열매를 한껏 즐겨보자. —————— 최선숙 (崔善淑)   필명:은주(殷朱) 中国 길림성 화룡 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연변과학기술대학AMP 제1회 로신문학원 연변창작강습반수료 "내 삶의 보따리" "자식농사" "배신 "등 수필 소설 시 20여편발표. "열혈모녀 축구팬 "   해란강닷콤 우수상.  “정향숲을  찾기까지”  제5기 중국조선족 효사랑글짓기 공모 우수상 문학블로그:  邮箱:18844309877@163.com 핸드폰: 18844309877
6    동네 아이 댓글:  조회:1335  추천:0  2019-11-16
"친엄마가 아니예요?" 딸애는 종종 의문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때마다 나는 "응? 어떻게 알았지? 내가 고아원에가서 건강하고 나 닮은 너를 데려다 입양한줄을." 이렇게 짐짓 정색해서 되묻는다. 그러면 딸애는 "거짓말, 그럼 사람들이 왜서 나를 엄마 꼭 빼 닮았다 해? 난 엄마 친딸이야." 말이 났으니 하는 말인데 나이 삼십이 다 되여 딸애를 본 우리는 애가 그렇게 귀여울수가 없었다. 쥐면 부서질가 놓으면 날아날가? 금지옥엽으로 키우면서 애아빠도 나도 다 애한테만 사랑을 쏟고 애가 없었던 나날들은 어떻게 살았던가 싶을 정도로 아기에게 엄청 집착하였다. 뒤늦은 아이의 탄생은 그 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완전히 다른 즐거움과 쾌락을 안겨주어 우리는 세상의 행복을 다 가진것처럼 만족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고중 다닐때 한 숙사에서 제일 가깝게 보내던 동창생이 상해에서 연길로 출장왔던 길에 아기도 볼겸 그 동안 헤여져 살았던 회포도 풀겸 겸사겸사 우리집에 와서 며칠 묵어가게 되였다. 친구는 그동안 애 키우는데 아직은 천방지축인 나를 도와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일들을 거들어주면서 자기가 먼저 애를 키워보았노라고 이런 저런 주의점들을 말해주면서 친정언니인양 자상하게 잘 알려주었다. 기저귀도 매일 깨끗하게 씻어서 꼭 땡볕에 말리워 소독시켜 주고 태교때처럼 아기한테 늘 은은한 음악을 띄워주어 감성을 키워주고 아기방은 구석구석 늘 깨끗하게 청결해주고 방안을 늘 시원한 바깥공기로 환기시켜줘야 한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하루 아기가 너무 이뻐서 물고 빨며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우리부부를 보더니 나에게 이렇게 따끔한 충고 한마디 했다. "애가 돐이 지나면 옷가게를 다시 시작하겠다하면서 애한테 너무 살뜰하게 굴지마. 그렇게 해야 이제 애하고 떨어져 출장다녀도 너도 애도 다같이 적게 힘들거야." 그때에는 다는 리해하지 못했지만 그 말에 어느 정도 도리는 있는것 같아서 나는 차츰 많이 아쉽지만 많이 자제하고 의식적으로 조금씩조금씩 거리를 두고 키웠다. 그렇게 어느덧 애는 한돐이 지나고 나도 가게에 나가 장사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의류업에 종사하는 나는 한달에 한번씩은 꼭 외지에 물건구입을 다녀야 했다. 돐이 지나서까지 모유수유했던 애를 집에 떼두고 외지에 출장갔는데 이것 참, 글쎄 때때로 "살인"미소로 쓰러지게 만들고 옆에서 살갑게 굴던 딸애가 눈에 삼삼해 미치겠는데 애를 먹이던 젖까지 띵띵 부어서 참기 어려울 정도로 아파나 죽을 지경이였다. 한쪽으로 짜버릴수록 점점 더 불어나는 젖때문에 갔던 일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몸도 마음도 지칠대로 지쳐서 이튿날 곧바로 집에 돌아올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저려나는 잊혀지지 않을 고생을 하며 집에 돌아와보니 애는 다행히 아무일도 없이 태평무사하게 할머니와 짝짜그르르~ 쾌활하게 잘 놀고 있었다. 그 친구의 말이 감동으로 안겨오는 순간이였다. 과연 애와 사이를 두고 키웠더니 엄마가 출장가도 크게 의식하지 못하고 평소처럼 유쾌하게 잘 놀고 있었던것이다. 얼마나 그 친구한테 고맙던지. 그 때에서야 그 친구의 한마디가 얼마나 나와 애한테 도움이 되는가? 절실하게 느끼게 되였다. 그 뒤에도 늘 출장이 잦은 직업이여서 나는 그 친구의 말을 잊지 않고 애한데 시종일관하게 그 원칙을 고집하며 키웠다. 그 덕에 지금은 "엄마가 오늘 한국에 물건구입 갔다 와, 한주일 걸릴지 모르겠어, 그 동안 집에서 애 먹이지 말고 잘 노세용"하면 딸애는 "그래요, 엄마 무사히 잘 다녀오세요" 하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 놀음에 빠져 논다. 순간 조금은 섭섭하지만 그래도 "엄마 가지마, 보고싶어 안돼."하면서 칭칭 매달리며 떨어지지 않으면 우리 모녀는 서로 엄청 더 힘들것 같다. 며칠 출장중에 차분하게 처리해야 할 일들을 잘 처리하고 돌아와도 "엄마 그 동안 그리웠어."하며 감겨드는 다른 집 "공주"나 "왕자"들과는 다르게 무탈하게 아빠랑 할머니랑 동네 이웃들과 잘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어릴때부터 둥글둥글 성격 좋게 동네의 누구나 잘 어울려서 "동네아이" 라는 이름까지 가지고. 그렇게 애가 크는 동안 나는 늘 애를 마음으로만 이뻐하고 겉으로는 무관심인척 키우고 있다. 저녁 늦게 돌아와도 그때까지 기다리며 자지 않으면서도 자는 척, 아침에 학교갈때 "내 새끼 장하다. 오늘도 화잇팅 !"하고 싶으면서도 짐짓 다른 일 보는 척, 무덤덤하게 "잘가..." 좀 컨디션이 좋지 않은것 같으면 출근해서 온 하루 애 걱정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나, 큐큐에 올리는 글을 어느 하나 빠뜨리지 않고 제일 먼저 읽어보고 학교에서 친구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세부까지 속속들이 꿰고 있는 나, 대학진학을 앞두고 어떤 학교 어떤 전업이 평생에 혜택을 입을수 있는 전공일지? 만나는 사람마다 좋은 조언을 요청하는 나는 영낙없는 친엄마이건만. 겉보기에는 다른 집 엄마들처럼 섬세하지도 살뜰하지도 못하고 늘 랭혹하고 엄격한 나를 보며 아주 많이 "엄마, 친엄마가 아니지요? 친엄마 맞어?"라고 의혹에 가득 차 묻는 딸. "그래 맞어, 나는 친엄마가 아니야, 너는 저기 고아원에서 입양했거든." “그런데 왜 난 엄마를 꼭 빼닮았어요?" "엄마가 나를 닮은 애를 뽑아서 데려오다나니 나 닮아보이는거야." 딸애는 허허 웃으면서 "쳇, 엄마 언제부터 거짓말 이렇게 잘해 " 종종 낯설게 굴고 차갑게 구는 내가 친엄마인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다 우리모녀는 하하하~ 웃음보를 터뜨린다. 애는 늘 "친엄마가 어찌 이럴수 있냐?"고 애매하다는 표정이다. "나의 이런 무관심속에서 너는 홀로 서기 달인이 되였잖아." 딸애가 열아홉살 되는 해에 나는 딸애에게 나의 그 동창얘기를 해주었다. 깜짝 놀라는 눈치더니 "네가 알다싶이 엄마가 늘 출장해도 그 친구의 충고대로 마음으로만 이뻐했기에 너는 이렇게 무난하게 잘 커줬단다."고 말했다. 눈 깜짝하지 않고 듣던 딸애가 어른처럼 리해된다는듯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이지 그 말 한마디의 혜택을 나는 평생 입으며 살았다. 그래서 애를 힘들이지 않고 무난하게 참 잘 키울수 있었다. 덕분에 딸애는 앞으로의 대학생활 회사생활도 거뜬하게 보낼수 있을것같다 . 나도 또 많은 샐러리맨후배엄마들에게 "힐링육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라고 이 경험을 얘기 했었다. 지금 생각해도 나의 상황엔 그 말이 참 적시적인 보약이였던것 같다. "고마워 친구야, 나 두고두고 이 은혜 잊지 않을게. 그리고 꼭 이 '원쑤'갚을게."
5    알랑방구 딸애의 성장 노트 댓글:  조회:1387  추천:0  2019-11-16
1탄 어디선가 이런 말을 들은적있다. 부모는자녀를 키우는 과정에서 이미 재미와 즐거움을 만끽하였기에 다 큰 뒤엔 자식한테서 뭘 더 바라지 말라 이말은 도리가 있는것 같다. 그러나 애를 키우면서 그래도 뭔가 희망을 품고 바라며 사는 삶이 행복하지않을가? 하는 미련을 떨쳐저릴수 없다.애들 때문에 더 많이 벌고 싶고, 더아끼고 싶고, 다 해주고 싶은 것이 부모마음이 아닌가? 학교의 운동대회나 학부형회의 때는 학부형들이 가게에 와서 옷들을 잘도 사간다. 자기집 애들이 부모님들이 옷을 잘 입고 오라고 신신당부 해서 그런단다. 그래서 나도 한번 애와 물어본적이 있다. "엄마도 학부형 회의때에 멋지게 차려 입구 갈까?" "괜찮아요, 옷가게 하는 엄마는 언제 봐도 멋지니까." 엄마기분을뛰워 줄줄 아는 딸애의 능청스러운 대답이다  "좋네, 엄마 기분 짱이야." 나 또한은근 슬쩍 받아 주고. 하긴 요즘은 부모들은 거의 외국에 나가 있으니 학부형회의에 가보면 거의 다할머니나 할아버지들께서 오시다 보니 그냥 젊다는 리유 하나만으로도 될 것 같았다  예쁜 옷까지 굳이챙겨입지 않아도 애 눈에는 엄마가 제일 멋질 법도 하지. 헌데 어제는 별 생각 없이 애 만나러 학교에 갔는데 낯선 사람 보듯이 눈이휘둥그래서 엄마를 바라본다. 왜 냐고 물었다. "엄마 오늘 너무 멋져." 그런 멋진모습을처음 보는듯 탄성까지 지르면서... 그러고 보니 오늘 좀 차려 입긴 했었다. 나는그저 피씩 웃고는 이렇게 말을 받았다. "그래, 멋진 엄마가 너 보러 오니 기분이 어때?” "넘 좋네." 딸애가 히쭉웃으며 엄지 손가락을 내민다. 우리는 히히 호호 웃으며 같이 밥먹으러 학교 부근의 음식점에 갔다. 밥 먹으면서도 처음으로 그렇게 많은 속심 얘기, 학교 동학들 얘기, 선생님 얘기들을 한다. 다 먹은 뒤 나와서 학교대문까지 같이 가면서반에 동학들도 몇 명 만나게 되였다. 딸애는 자기 동학들에게 엄마라고 이전과는 다르게 주동적으로 그리고 그처럼 자랑스럽게 인사시켜 주었다. 제 엄마가 무슨 시위서기라도 되는것처럼. 덕분에 나도 애들과 한참 서서 몇마디 즐거운 롱담도 하고... 애와 헤여지고 차에 앉아 집에 돌아오면서 마음이 얼마나 즐거운지 모르겠다. 애들한테 자랑스레 소개해주던딸애의 그 표정때문에 아마 난 며칠동안, 아니 몇달동안 기분이 좋을것 같다. 앞으로 딸애의 그 자랑스러운 표정을 위해서라도 더 예쁜 엄마가 돼야 될겄같네. 부모를 울리고 웃기는 새끼란 뭐길래? 2탄 요즘 슬그머니 후회하고 있는 한가지일이 있다. 개학초부터 고중 2학년에 다니는 딸과 이런 계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이제 대학에 가면 너절로 돈을 계획적으로 써야 되기에 달마다 한달치의 소비돈을 한꺼번에 다 줄테니깐 이제부터 이렇게습관하구 적응해보자." 이렇게 애와 토론하고 설득하고 옴니암니 격렬한 흥정끝에 한달 소비돈 겸 식비를 1000 원으로 결정하고 매달 은행카드에 입금시키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웬걸 줄돈을 다 주니 그동안 돈이라도 달라고 자주 걸려오던 전화기가아예 벙어리로 되여버렸다 적게 자주 줄때는 그나마 대화라도 할수 있었는데 이렇게 되니 이젠 아예 소식두절이 되여 버렸다. 애초 그 계약이 후회되여서 내가 또 먼저 다시 고치자고 제안 했다. 고려할사이도 없이 안된다고 딱잘라 말하는 따님, 돈이라도 달라고 전화할때가 좋았는데, 울며 겨자 먹기로 속수무책이되여 속맘 끙끙 앓고 있는데 어느날 아침일찍 따님한테서 걸려오는 전화벨소리! "엄마 은행카드를 도저히 못찾겠어, 저녁에 퇴근뒤에 돈 좀 갖다주라." “얼씨구~절씨구~”, 딸님 만날수 있어 좋구 좋네. 이제 카드 내가 먼저 찾아서 아예 꽁꽁 숨겨버려야겠다. 내가 자식키워보니 자식 타향에 보내놓고 그리워하는 부모님들의 그 마음을 그나마 알것같다. 3탄 아침에 딸애가 학교가면서 혼자말로 중얼거린다. "이번 운동대회는 장거리달리기를 하자 말아야겠어, 등수에도 들지 못하는데." "너무 등수에 연연하지 마, 등수에 드는건 별문제야 참여가 중요하지." 이 말에나는 제꺽 동을 달며 이렇게 받아 말했다. 그리고 하마터면 급하다 못해 이번 달리기에 참여하면 엄마가소비돈도 더 많이 주고 상까지 주겠다고 말해 또 한번 다른 나쁜 습관을 키워줄뻔했다. 선생님이나 동학들 립장에선 등수에 못들면 많이들 아쉽겠지만 딸애의 앞으로의 인생에는 하나의 경험이 되고 얼마나 좋은 자신감의 바탕이 될지 잘 알기에 엄마인 나의 욕심에서볼 때 도시락 사들고 다니며 응원해주고 싶은 일이다 요즘 다 큰 딸애를 지켜보면서 아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분명 내 잘못이 더 큰것 같아 후회막급이다. 늘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그때그때 바로 잡아 줬어야 할 부분들을 바로 잡아 주지 못한 후회로 지금은 몇 곱절 더 공력을 들여야 그런 습관을 고쳐줄수 있지않을까? 하는 생각들을 하게 된다 ■ 일단은 아침 일찍 잃어나는 습관, 달리기나줄뛰기 운동을 견지하는 습관을 했더면 좋았을걸. ■ 편식하지 말고 여러가지 음식을 다 잘 먹을수 있게 키웠어야 했을걸. ■ 낮에 학교 가서는 이런 저런 애들과 잘 어울릴수 있는 좋은 성격의 소유자로키웠어야 했을걸. ■ 어릴때부터 애에게 그 년령때에 맞는 동요 동시 동화를 읽어줌으로써 일찍부터애의 감성을 키워줬어야 했을걸. ■ 어릴때부터 이곳저곳 유람을 다니면서 애한테 앞으로 커서 자연의 오묘와더불어 넓은 흉금을 가질구 있게 했더면 좋았을걸. ■ 부모의 존엄 즉 애들이 부모가 무서운 줄 알게 키웠어야 했을걸. 곱다구만 어루 만지며 키워 가지고 집집마다 애들이 왕이요 밖에 나가면 안하무인.애들이 어린 집 학부모들은 부디 나같은 유감을 남기지 말길 바라는 마음이다. 4탄 방학동안엔 여행을 다녀오자고 너무나도 닥달해서 그 성화에 못이겨 딸애와 한국행을떠나게 되였다. 평소엔 제법 컸느라고 엄마인 나의 말을 무시할때가 참 많았다. “무릎아래 자식”이라고 어릴때 잘 길들였어야 되는데 이제 훌쩍 크고보니부모의 눈으로 볼바엔 하는 일들이 어이없고 눈에 거슬릴때가 참 많다. 그런데 요즘은 상황이 좀 다르다 처음 같이 여행을 떠나다나니 곰상곰상 엄마말을 들을수밖에 내 지휘를 들을수밖에 없었다. 생각하면 속으로 웃음주머니가 흔들흔들했다. (이 참에애한테서 그 동안 무시당한 봉창을 든든히 해야지. 나 원 깨 고소해서 못살겠네.) 특히 비행기표 끊는 일부터 나는 모든 여행과정진행을 애한테 맡겼다. 정확히 비행기표 끊은날부터 딸애는 설걷이 하라면 설걷이 하고 채소사오라면 채소 사오고 방바닥 닦으라고 해도다 하고 옷장정리와 기타 심부름을 싫단 말을 안하고 곰상곰상 다 해줬다. 길 떠나서 주의해야 할 일상상식들을말해주면 귀가 솔깃해서 듣는다. 예전과는 완전 다른 딸애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진짜 저렇게 원하는걸못해준 자책감도 어느 정도 들었다. 요즘은 애들 교육을 위해서 이런저런곳에 데리고 다니며 여행하는 가족들이 많은데 나는 늘 시간에 쫓기다보니 애 데리고 려행 한번 못갔으니 애한테 여간만 죄스럽기 그지없다. 그래서 떠나게 된 여행로정은 연길에서 기차로 심양까지 가서 다시 심양도선공항에서 인천으로, 올때는인천공항에서 북경공항으로 북경에서 삼박사일 명승고적 즉 력사공부 좀 시키고 연길로 돌아오기로 일정을 잡았다. 여행떠나는 날에도 나는미리 두시간 전에 기차짬에 데리고 가서 기다렸다. 한시간 전인줄 알고 따라왔던 딸애는 너무 일찍하다며툴툴댄 뭐나 미리하기 좋아하는 습관이 있는 나는 애한테도 뭐나 확실하게 하는 습관을 심어주고 싶어서앞으로 혼자 하는 여행도 미리미리 다니게 하고 싶어서 일찍 나왔었다. 여행하는 내내 모든 일은 애한테맡기고 내가 도리여 애마냥 따라다니기만 했다. 누구처럼 "바보엄마 역할, 무식한 엄마 역할, 나약한 엄마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딸애는 여기저기 뛰여 다니면서 앞으로혼자라도 아무데나 다 찾아 다닐수 있게 모든 일들을 척척 잘도 해나갔다. 때론 네가 엄마를 무시할만도하겠다는 생각까지들 정도로. 다 키워놓았구나 하는 뿌듯함까지 들게 한다. 이번 여행은 나와 딸, 모두에게 즐거운 힐링이 되였다. 그리고 돌아오면서 (다시 연길에 가면 애는 열심히 공부할거고 나는즐거운 일터에서 재부를 창조, 돈을 많이 벌어야 되겠다.)라고다짐했다. 힐링하고 왔으니 새로운 목표를 위해 오늘부터 빡세게 일하자. 아자!아자!화잇팅!
4    열혈모녀 축구팬 댓글:  조회:857  추천:0  2019-11-16
열여덟살 딸아이 라디오에서 나는 축구 승전 소식을 들으면서 슬그머니 눈물을 훔친다. 어김없는 이 엄마의 모습이다. 나는 쓰윽~ 웃으면서 "너 우는거야 허허~" 딸애는 "네에~진짜 감동입니다" 한다. 그러면서 "엄마, 이번주 토요일 축구표 석장을 끊어주세요, 친구들 같이 응원을 가겠습니다. 엄마, 스티브 선수의 싸인을 받고 싶은데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엄마 인맥 다 동원해 보세요"라고 한다. 고중2학년인 딸애와 나는 축구때문에 울고 웃는 열혈모녀축구팬이다. 딸애는 요즘 스티브선수의 싸인을 받겠다고 엄마를 못살게 굴며 온갖 애교를 다 부린다. 전번날 북경 북공과의 홈장경기에서 5:0 으로 이겼을때 일이다. 나와 딸애는 축구경기 내내 너무 박수를 쳐서 손바닥이 다 얼얼해나고 너무 좋아 목청껏 웨치다나니 상반전에 이미 목이 다 쉬여버려 후반전부터는 안타깝지만 소리도 못치고 그저 두손을 높이쳐들고 기립박수로 환호하고 응원할수밖에 없었다. 목이 아프고 쉬여서 허스키한 목소리로, 맥이 없을때까지 딸애는 계속 응원했다. 그래도 애들은 애들이다. 그날 돌아와서 며칠동안 목캔디를 쭉~ 먹고서야 목상태가 좀 나아졌다 . "2륜 앞당겨 슈퍼리그에로의 진출!" 라디오에서 일년 내내 안타깝게 조바심을 태우며 기다리고 기다리던 좋은 소식이 전해진다. 박태하감독은 매체에서 “우승과 준우승은 의미가 다르다”고 한다. 어느새 코등이 찡~해나고 눈가에 눈물이 핑~돈다. 이런 알싸한 감정이 어디 나뿐일가? 29륜 경기때 보라. 눈물범벅이 되여 구경하는 관람자들을, 지금 생각하도 속이 뭉클하다. 예로부터 축구는 우리 민족의 자랑이였다. 특히 연변축구는 명실공히 우리 연변 조선민족의 자존심뿐만이 아닌 지구촌 조선민족의 자부심이다. 하기에 조선민족이라면 세계 어느 나라에서 생활하든 너나없이 다 눈물을 머금고 맞이한 가슴 뿌듯한소식이였을것이다. 나는 늘 하던대로 가게에서 바쁜 일손을 멈추고 연변축구가 갑급리그에서 슈퍼리그에로 진출한 소식을 흥분에 겨워서 위쳇모멘트에 옮기느라, 이그룹, 저그룹에 전하느라 여념이 없다. 누가 월급 주는것도 아니고 칭찬하는것도 아닌 일에 이렇게 성수나고 즐거울수가 있을까? 아마 올 일년을 "기자"가 아닌 "기자"로 묵묵히 축구소식을 제일 먼저 모멘트에 올리느라 돌아쳤던것 같다. 올 한해는 연변축구와 희로애락을 함께 한 한해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하는데 다시 슈퍼리그로 등극하기까지는 장장 15년 만이다. 기쁘고 울컥하고 내 마음을 통째로 앗아간 연변 축구, 홈장에서 프로축구가 주는 즐거움은 정말 하나의 예술이고힐링이다. 선수들이 헤딩하는 멋진 동작, 악착스레 상대팀 한테서 공 뺏는 의지와 노력, 개인기술, 전략들, 축구팬들을 축구에 미치도록 빠져들게 하는 매력인 같다. 꼴이터질때마다 느끼게 되는 그 짜릿함, 그냥 세상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 이 순간 만큼은 모든 세상의 번뇌와 스트레스 싹 잊고 축구삼매경에 빠져보자. 바로 그 멋에 얼마나 많은 나와 같은 무명축구팬들이 축구와 같이 울고 웃었던가? 그래서 요즘 나는 상대가 축구에 대해서 알고 모르고 관심있고 없고를 떠나서 축구얘기만하는 축구수다쟁이가 되고 말았다. 축구 하면 빠뜨릴수 없는 축구팬들의 의리 또한 잔디밭에서 열정을 쏟아 붓는 축구선수 못지 않게 짠~하게 안겨오는 감동이다. 축구팬 그룹의 숨은 축구해설자들, 전략가들, 분석가들, 소식통들 덕분에 나는 올 한해 여러 시각으로 축구를 즐길수 있게 되였고 조금은 더 "박식"한 축구팬이 되였다. 축구가 있는 날과 축구 있기 전날은 축구팬 위쳇그룹의 명절 날이다.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모아진 위쳇 축구팬그룹의 구호는 “이겨도 내 형제 져도 내 형제”, “승리하자 우리 연변”이다. 삼복철 해볕이 쨍쨍 쬐는 땡볕에도 그늘도 없는 10구역, 15구역에서 경기 두세시간 전부터 기발 들고, 플래카드 들고, 북 들고, 빨간 유니폼을 통일로 차려입은 이들이 보인다. “아리랑”을 높이 부르면서 경기만 시작하면 아낌없는 응원으로 축구선수들에게 홈장에서의 우세를 마음껏 누리게끔 사기를 불어준다. 그 의리에 코등이 시큰시큰해나고 그 기세에 가슴이 찡~저려나게 감동을 먹게 된다. 그 분위기에 빠져보느라면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도 이런 울림이 들리는듯하다 "박태하 감독님 감사합니다 !" “연변축구여 ! 비상하라!” 올 한해의 축구시즌을 마무리하며 올 일년 연변 장백산 축구때문에 받은 신선한 충격들,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이 지금 이 시각, 어제일처럼 떠오른다. ● 하태균 선수가 이적할가봐 열혈 축구팬들이 모멘트를 도배하던 일… 체육장에서제일 열심히 뛰는 찰든과 스티브의 노력에 아낌없는 응원의 박수를 보내던 일… ● 축구가 완승한 날에는 꼴넣는 장면들이 자꾸 눈앞에 얼른거려서 달콤한 흥분에 잠들수 없던 일… ● 할빈팀과의 경기에서 무패행진 기록이 깨지게 되니 너무 기분 상한 나머지 웬지 내 장사도 같이 슬럼프를 겪던 일, 그 이후로는 쭉 홈장이 아닌 집에서 텔레비로 시청할때에도 빨간유니폼을 입고 옹근 마음으로 응원 하던 일… ● 지금은 기실 스티브팬이 되였지만 애초엔 하태균이 여차여차 멋있는 미남이라고까지 벼라별 유혹을 다 주면서 고2인 딸애를 축구팬으로 만들기 위해 축구장에 데리고 다녔던 일… 그 덕에 지금 딸애는 엄마를 초월하는 진짜축구팬이 되여 친구들과 같이 홈장경기는 빼놓지 않고 다니는 축구장 개근생이 되였다. "엄마 축구는 종료 되기 일 분전에도 꼴이 터질까 조마조마하게 손에 땀을 쥐고 봐야되지, 선제꼴이 선수들에게 사기도 돋구어주고 대개는 그 날 축구의 승패를 결정하는 같습다. 축구는 기세가 참 중요한것 같습다" 늘 내곁에서 축구 얘기다. 그래서 요즘 딸애와 공동언어가 더 많아졌다. 주력선수, 핵심선수,체력, 끈기, 투지, 흐름, 진공, 방어, 수비 온통 축구전문용어들이다 . "최고의 파트너와 최고의 합작만이 슬기롭게 이길수 있는 비결인것 같습다." 애들이 분석력도 참 빠르다. "26골로 득점왕의 영예를 딴 하태균, 금년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이고 올해 슈퍼리그로의 진출에 제일 큰 공신"이라고 한다. 또 뿌리는 알아가지고 늘 연변 FC 주축인 본토선수들 즉 김파, 손군, 리훈, 배육문, 강홍권, 박세호, 최민, 조명, 오영춘 이름도 줄줄, 개성도 줄줄, "축구는 박지성 같은 해결사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어야 되겠지만 전체를 잘 다독여 줄줄 아는 맏형 같은 사람도고종훈처럼 뽈을 조직해주는 역할도 있어야 됨다." 문뜩문뜩 전하는 말들이 완전히 전문가처럼 얘기하니 온집안 가족 어르신들이 희귀해하고 기분좋아서 더 난리다. 축구선수들의 개성을 잘 나타낼수 있는 정어린 별명들도딸한테서 들어보니 정말 재밌다. "하신- 하태균, 찰떡 -찰튼, 양고기 뀀을 좋아하는스티브는- 쵈티브, 거미손 ㅡ지문일!" "하태균, 찰튼과 스티브 등 외적 용병도 중요하지만 축구의 주축을 이루는 본토선수들이 협력이 없다면 연변축구를 누가 애정을 가지고 보기나 하겠습까? "라고 딸애는 말한다. 그러면 나도 "우리 축구팀, 연변 장백산호랑이가 래년 슈퍼리그에서도 천시,지리, 인화(天时, 地理, 人和)로 잘 조합되여 올해보다 더 휘황한 기적을 맞이하길 바란다"고 웃으며 맞장구친다. 축구팬 엄마에 축구팬 딸, 올해 기적같은 축구승전소식만큼 나도 딸아이도 진정한 축구팬이 된게 너무 흐뭇하다. 온 여름 땀벌창이 되여 홈장에 앉아 응원한 노력이 탐스러운 열매를 맺은것 같다. 앞으로도 쭉~우리 모녀는 열혈축구팬이 되여 장백산 호랑이 기상을 떨치는 연변축구와 희로애락을 함께 할것이다. 글/최선숙 —————— 최선숙 (崔善淑)   필명:은주(殷朱) 中国 길림성 화룡 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연변과학기술대학AMP 제1회 로신문학원 연변창작강습반수료 "내 삶의 보따리" "자식농사" "배신 "등 수필 소설 시 20여편발표. "열혈모녀 축구팬 "   해란강닷콤 우수상.  “정향숲을  찾기까지”  제5기 중국조선족 효사랑글짓기 공모 우수상 문학블로그:  邮箱:18844309877@163.com
3    이쁜 옷 한 벌 골라주오 댓글:  조회:1706  추천:0  2019-11-16
우리 옷가게에는 굳이 옷을 사지 않아도 쇼핑만 나오면 잠간씩 들려서 이야기도 나누며 시간을 보내시다가시는 할머니 한분이 계신다. 나이 칠십에 가까워 보이는 할머니는 성정이 온화하고 매무새도 꽤 세련되여 보였다. 오늘은 내가 골라드린 옷이 당신 마음에 딱 든다면서 값을 좀 더 싸게 해달라고 넌짓이 말씀하셔서 나 또한 쾌히 응낙하고 기분좋게 드렸다. 할머니는 포장해드린 옷을 조심스레 챙기고나서 가게에 손님이 뜸한것 같으니 좀 더 앉아서 얘기하고 싶다고하셨다. 그래서 나도 아예 가게의 쏘파에 마주앉아서 할머니와 이런저런 세상돌아가는 얘기를 나누게 되였다.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면서 다시 찬찬히 살펴보니 너무 튀지도 않게 무난하면서도 이쁘장하게 화장을 잘 하셔서 그 년세의 세대분들과는 다르게 품위가 있어보였다. 나는 웃으면서 한마디 건넸다. “무도장에라도 다니십니까? 젊어서는 예쁘다는 말씀을 많이 들었겠습니다.” "령감두 없는데 무도장엘 다녀야지." 할머니는 히죽이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이어가셨다. "내 나이 서른살에 병으로 첫 남편을 저 세상에 보내고 마흔아홉살에 또 차사고로 두번째 남편을 저 세상에 보내지 않았겠소. 그래서 이제 또 찾으면 무고하게 불쌍한 사람만 저 세상에 보낼것같아서 남은 생은 령감을 더 찾지 않기로 했소..." 예기치 않았던 얘기에 나는 깜짝 놀랐다. 예전에 우리 마을에서도 어떤 곱상한 아주머니가 40대에 남편이 먼저 병으로 돌아가니 동네사람들이 수군대던 기억이 난다. “녀자가 살이 세면 남편을 잡아먹는다. " 오~ 그래서 할머니의 눈빛이 어딘가 모르게 애처로와 보였구나! 지금은 별일아닌것처럼 담담하게 말씀하시지만 나는 "할머니가 참 모질게 마음고생 하셨겠구나."하는 생각에 마음이 짠~ 해났다. 기분좋게 수다나 떤다는게 어쩌다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이런 얘기가 나와서 나는 괜히 미안한 마음에 송구해났다. 그러다가 갑자기 옛날에 들은 어느 아는 분의 이야기가 떠올라서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제가 잘 아는 분한테서 들은 얘긴데요. 그 분은 처녀시절에 만난 남자가 병이 많아서 오래 살지 못할줄을 뻔히 알면서도 온 가족의 결사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고 신랑은 또 워낙 환자라 예상대로 몇해 못살고 돌아갔대요. 세상 편견이야 여하하든 단 하루 살아도 사랑하는 사람이랑 살고싶었대요.분명 자기가 원래 있던 병때문에 저 세상에 갔는데 녀자가 살이 세서 남편을 잡아먹은게 아니잖아요. 아픈 사람인줄 뻔히 알면서도 결혼해주고 죽을 때까지 사랑해준 그녀의 순결한 사랑과 용기는 응당 세인들의 찬송을 받아야되지 않을가요. 이같이 상대가 오래 살지 못할줄 뻔히 알면서도 결혼까지 해줄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과연 몇명이나 될가요?" “그렇지. 하루 살아도 좋아하는 사람과 살아야지..." 할머니는 내 말이 마음에 와 닿으셨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신다. 그 순간 나는 그 동안 살면서 겪은 난처함과 억울함의 발로인듯 할머니 눈가에 초롱초롱 맺히는 이슬방울을 또렷이 보았다. 그리고 슬그머니 돌아앉아 눈굽을 찍으시는것도 나는 보았다 이 할머니에게도 분명 범상치 않은 감동스런 사랑의 로맨스가 있는듯 했다. 할머니한테는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혹시 내가 들려준 지인의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는 아닐까? 나는 할머니가 궁금해 났다. "남들이 남이 말을 해보았자 사흘 초과 못한다고 하니깐요.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헛뜯지 못해 하는 그런 행실에 자신을 괴롭히지 마세요. 대신 예쁘게 차려입고 무도장에도 다니시고 멋쟁이할아버지도 친하시며 자기방식대로 즐겁게 행복하게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할머니는 언제 눈물 흘렸나 싶게 빙그레 웃으시면서 말씀을 이으셨다. "그럼 그럼. 그래야지, 나도 이제부턴 그렇게 살겟소..." 이때 어디서 려행온것 같은 손님들이 왁자그르르 떠들며 가게안에 모여들었다. 할머니는 고맙다는 얘기를 연신 하시면서 앞으로 자주 찾아오시겠다며 돌아가셨는데 나는 그분의 눈가에 초롱초롱 맺혔던 이슬이 아무래도 잊혀지지 않는다. 가게 들어올때까지만하여도 밝게 웃으시며 오신 할머니가 어찌하다나니 의도치 않게 그분의 마음속 아픈 상처를 건드려 괜히 미안해 죽겠다. 그 할머니가 다녀가신뒤에도 나는 오래동안 그 할머니가 잊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한 두어달이나 지났을가? 그 곱게 나이드신 할머니가 다시 찾아오셨다. 그런데 이번엔 뒤에 키가 구척이나 되는 멋쟁이할아버지 한분이 따라 오셨다. 나는 사뭇 놀랍고도 반가운 표정으로 또 의문스런 표정으로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웃으시면서 나에게 다가오시더니 이렇게 귀속말로 얘기하셨다. "저녁에 할아버지 자식분들과 인사하는 장소에 나가려하니 이쁜 옷 한벌을 골라주오." 나는 대뜸 상황파악을 하고 할머니에게 우리 가게에서 제일 고급스럽고 세련된 옷으로 또 십년은 족히 젊어보이는 옷으로 한벌 골라드렸다. 그 동안 외롭게 살아온 보상을 더하고 또 더하여 오래오래 사랑받으시라는 마음도 함께 담았다. 내가 골라드린 옷을 보시던 할머니는 요즘 젊은이들처럼 쿨하게 한방에 "오케이"하셨다. 젊어서는 참 멌있었을것 같았고 아직도 풍채가 좋으신 멋쟁이할아버지는 가게에 들어오셨다가 돌아가실때까지 그냥 할머니만 바라보셨다. 할아버지의 정겨운 눈길은 할머니에게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던것이다. 그 아름다운 정경을 훔쳐보며 나도 이렇게 속으로 외워보았다. “아무렴 그렇지. 해바라기에게는 밝은 해가 있어야 제격이지.”
2    내 고향 화룡 고성리 댓글:  조회:1464  추천:0  2019-11-16
내 고향 화룡 고성리 (연변라지오방송국  려행스케치) [아] : 방송국 아나운서 [최] : 최선숙 [아]: 안녕하세요, 먼저 자아소개 부탁드릴게요. [최]: 저는 연길성보백화 2층 4호에서 20년째 한국숙녀복장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최선숙입니다. [아]: 오늘 어디로 갈까? 코너에서 청취자여러분께 소개해드릴 곳이 숭선이라고 들었습니다. [최]: 맞습니다. 요즘은 생활수준이 제고됨과동시에 모두 자가용차가 있어 문화생활도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가족끼리, 친구끼리, 지인끼리, 모두려행을 떠나기를 즐기죠, 하지만 그곳 지리를 잘 몰라서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많아서참 아쉽더라구요, 그래서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제 고향의 모든걸 잘 소개해 드리고 싶었었는데 오늘이바로 그때인것 같습니다. 숭선하면 생소하게 생각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화룡에 거주한 분들이라면 아마 다 아실겁니다. 숭선은정말 말 그대로 산 좋고 물 좋고 경치 좋은 곳입니다. 게다가 시골 사람들 인품까지 좋은 곳이죠. 바라보는 곳마다 다 수려한 한폭의 생생한 수채화를 방불케 합니다. 어려서는느끼지 못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아~ 나는 이렇게 좋은 그림속, 동화속, 풍경화속에서 자랐구나. 딱 한국 노래 "강촌에 살고 싶네"에 가사처럼 좋은 곳에서 자랐음을새삼 느끼게 되더라구요. 또한 고향이여서 그런지 바라 보이는 곳마다 동년의 추억이 묻혀있어 많이 설레이고 연길에 있으면서 한동안 잊고 살다가 오랜만에 가보았더니향항이나 어느 유럽에 간것 보다 더 좋았습니다. 고향이여서 그런지 내 몸안에 모든 세포들이 편안해하는게느껴졌어요. 숭선은 너무나도 깊은 심심산골이여서 그 속에 서있느라면 고요함을 깨뜨리는 새들의 지저귐소리, 매미나 베짱이들의 절주있는 노래소리, 나무와 풀들의 속삭임소리 들리는듯합니다. 새소리, 벌레소리, 개구리울음소리가하나의 아름다운 자연 합주곡이 되여서 들려오는데 그야말로 국가급 대자연 생태 향진임을 금방 피부로 느낄수 있도록 눈이 즐겁고 귀가 즐겁습니다. [아]: 그래요, 대자연과 함께하는 그 기분저도 참 그립습니다. 계속해서 말씀주시죠. [최]: "손에 가시가 들어 다치면 아프다. 고향너는 내 가시든 살점" 유명한 김철 작가가 쓴 의 한구절인데요, 백번 공감이 갑니다. 40대에 접어드니 고향에 대한 집착이 엄청 커지는것 같습니다. 정에목말라 있는 현대인들 쫓고 쫓기는 힘든 일상에서 탈출하여 힐링하기 딱 좋은 곳인데요, 깊은 산, 깊은 골, 싱그러운 흙 냄새, 맑은두만강, 닥시싹, 뽕구대,삽지, 애고사리, 애곰치… 자연의 선물이 이리 좋은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자주 가볼수 없어서 참 많이 아쉽습니다. 일상이 지치고 힘들때면 마음으로라도 늘 여행다녀옵니다.   숭선은 가족들, 친구들, 동창들, 회사직원들, 끼리끼리 어울려서 서로의 우의를 돈독히하는 들놀이, 강놀이 가기가 딱 좋은 힐링장소입니다. 먼곳 려행이나 해외여행도 좋지만 짧은 주말같은 경우는 가까운 곳에 가서 생태가 그대로 보존되여 있는 대자연을 만끽해 보시면서 산의정기를 듬뿍 받아 보심은 어떨가요? 꼭 하시는 사업들이 더 번창하실거라 믿습니다. [아]: 그럼 숭선은 화룡 어느 부근에 위치해 있나요? 그곳까지가려면 어떻게 가야 되나요? [최]: 숭선은 화룡 4개 변강 향진가운데 하나로서화룡남쪽 변경지대에 위치하여 있습니다. 숭선까지 가려면 3가지방법이 있는데요. 그중 한가지 방법은 굽이굽이 12고개라는전설이 있는 유명한 소골령 넘어서 가는 방법이 있고, 두번째는 차창에서 남평쪽으로 새아스팔트길이 만들어져서그쪽으로 선경대 구경도 하면서 무산철광도 구경하고 호곡에 있는 리욱시인의 시비도 둘러보면서 가셔도 되구요. 세번째방법은 새길, 즉 소골령에 오르기전 차창에서 옥석림장 통해 가는 길도 있습니다. 지금 중도에서 내리는 사람이 없으면 뻐스도 그렇게 간다더라구요. 숭선은 우수한 자연조건으로 록색입쌀, 콩, 남새, 과일, 사과배가 그렇게 잘 자란답니다. 2012년 성급 생태향진으로, 2013년 국가급 생태보호구로 성정되였습니다. 12개성급 직속 기관, 네개 행정촌 ㅡ숭선, 대동구, 상천, 죽림이고2013년 중외고객 8521명, 2014년 7851인 유람객이 다녀갔습니다. [아]: 숭선에는 또 어떤 볼거리가 있을가요? [최]: 숭선에 가 보았다면 숭선마을 북쪽에 병풍처럼 우뜩 서있는 군함산과 마을과 좀 떨어진곳에 있는 홍기하폭포를 꼭 보셔야 되고 홍기하표류도 꼭 하셔야 되고 산천어, 세천어 국은 꼭 드시고와야 당지인으로서 숭선에 갔다 왓다는걸 인정할수 있지요. 바삐바삐 당일로 갓다 오시지 말고 느슨하게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그 곳에서 묵으면서 생태 자연과 하나가 되여 오감륙정으로 자연을 만끽해 보시는게 좋다고 생각됩니다. 상세하게 말씀드리면, 1, 숭선의 상징ㅡ군함산입니다. 깍아지른듯한 절벽 그 모양새가 군함처럼 웅위롭고 장관이고순 자연 명물이기에 군함산이라 명칭했습니다. 그 산 앞에서 꼭 인증샷 남기셔야 됩니다. 군함산 남쪽 길로 산 정상에 오르면 숭선마을과 조선 삼장마을이 한눈에 안겨오구요. 정상에 오르거나 내릴때 산 중턱에서 서쪽에 있는 상천 벌판을 바라보는라면 특히 가을에는 황금 벌판이 펼쳐지는데누구나 입이 딱 벌어질 정도입니다. 너무 멌있어서 당신에게 감성이 없더라도 시 한구절쯤은 쉽개 떠오를겁니다.   두만강 중조변경 첫다리는 숭선에 있구요. 다음은 남평다리, 승선에서 또 조선의 강물과 두 갈래 강물 합수목에 삼장이라는 조선 마을이 있습니다. 숭선과 조선 삼장마을은 두만강을 사이두고 있습니다. 2, 홍기하폭포는 천렵하기 제일 좋은 곳이라 할수 있어요. 낚시하기도 좋고 산 좋고 물맑고 경치 좋은것이 신선이 따로 없을 만큼 대자연속의 하나의 힐링장소입니다. 그리고 2시간 정도 소요하는 짜릿한 홍기하표류도 꼭 즐기셔야 하는 코스입니다. 깍아지른듯한절벽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홍기하 물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강 량쪽에 풍경을 감상하느라면 별 세상에 온것 같은 느낌입니다. 홍기하 표류의 전체길이는 8.5공리입니다. 2시간정도 소요되고 산골짜기로 홍기하물따라 표류하는데 그 두 시간 정도 배에 앉아서 깍아지른듯한 기암괴석 여러 가지 이름 모를 꽃과 풀, 나무, 고목 등을 감상하느라면 정말로 꿈속을 노니는듯 신비스럽고또한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이 될수 있습니다. 숭선유람에서의 첫손 꼽히는 하이라이트라고 할수 있지요. 상천마을에 서쪽산 언덕을 넘으면 멀지 않은 곳에 자연이 선물한 거인동굴이라고 불리우는 곳도 있는데요, 동굴안 전체 벽면이 까맣고 반질반질한데 거인의 손으로 주물러 놓은듯한 손자국, 어느 조각예술가가의식적으로 만들어 놓은듯한 인체의 어느 부분을 담은듯한 형태의 벽면들, 그냥 반질반질하면 신기하지 않겟지만어떤 거인이 앉았다 난듯한 자리며, 거인의 손자국같은 자국이며 참 미스터리한 흔적들 천지입니다. 어떻게 이런 동굴이? 분명 인간이 손댄건 아닌 자연산물인데 해석불가능하게 참 신비롭습니다. 현지인들만 아는 동굴이죠. 그리고숭선에 가면 이전에 금을 캐느라 팠던 동굴들이 여러 곳에서 보입니다. 3, 숭선에 가셨다면 얼큰한 세천어 국과 산천어국은 꼭 드시고 와야 그래도 숭선에 가보았다고 자랑할수 있다고 우에서 말했죠. 그리고 근당 150원~180원좌우하는 이면수는 먹어보면 연길에와 다른 물고기 국은 먹을수 없을 만큼 죽여주게 맜있답니다. 국을 끓여주는분들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전문 이런 산천어탕이나 이면수탕 먹으러 숭선에 가기도 해요.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두 모릅니다. 그리고 20ㅡ30원씩 하는 돌쫄개로 어죽을 해먹으면 또 쫑기쫑기한게 별맛입니다 화룡에는 로리커호, 선경대 등등 명승지가 많지요. 숭선에도좋은 곳들이 너무 많은데 그중 잘 알려지지 않은 숭선 동쪽에 위치한 간부료양소는 당지 중소학교 학생들이 산보 가는 지정지입니다. 그리고 군함산 동쪽에는 가마뚜껑을 방불케 하는 가마뚜껑산, 그 뒤에는민간이야기에 나오는 옥녀늪과 금녀늪이 길 하나 사이두고 사이좋게 있구요. 그리고 옥석, 시만, 그 쪽은 더 인적이 드문 원시림이고, 옥석 첨치는 그 곳 기후에서만 자랄수 있는 명물입니다. 다음 인삼장, 광평농장,장군님낚시터는 자연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진짜로 둘러 볼만한곳들입니다. 이 밖에도 당지 노인들이 알고 있는 좋은 곳은 더 많고도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마을 동창들이 모이면 앞으로 숭선에 경로원 지어놓고 거기가서 다같이 어릴때처럼 행복한 로년을 보내자고들해요 . 성급 생태 향진인 숭선에서 자란 오곡은 모두 유기농입니다. 특히 숭선의 입쌀은 록색입쌀로써 5근씩 정교하게 포장하여 보통쌀의 몇 배로 비싼 가격에 팔리고 또 선물용으로도 드러났습니다. 숭선 입쌀은 자잘한데 밥해놓으면 윤기나고 한번 잡숴보신 분들은 다시 찾게 돼 있어요. 너무도 좋으니깐요. 논밭이 거의 산 우에 있는데 두만강물을 끌어올려수전농사 짓습니다. 시골의 맑은 공기와 맑은 두만강물로 농사 지어서 그런지 숭선 입쌀은 참으로 맛있고영양가 높고 녹색이 되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숭선같이 깊은 산골 공기 좋은 곳에서 자란 남새며 입쌀의가치는 비할수도 없는 유기농입니다. 숭선은 하도 깊은 산골이여서 사람들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곳이므로생태가 그대로 잘  보존되여 있습니다. 마을에서좀 걸어 산 하나만 넘어도 더 눈이 휘둥그래지는 놀라운 원시림이나 깊은 산속 정취를 그대로 느낄수 있어요. [아]: 숭선에서 조금 올라가면 원봉 홍기하가 있다고 하던데요. 어떤 곳이죠? [최]:홍기하표류의 시발지가 원봉 홍기하인데 그곳의 물은 또 더 맑아서 유명 한 서호처럼모래알을 다 셀 정도이고 물안의 유유히 헤염치는 고기들이 다 보일 정도입니다. 들에는 나리꽃, 함박꽃과 각종 이름 모를 꽃들이 이쁘게 피여 싱그러운 풀 향기가 코를 찌르는것 같습니다. 일본에 어느 학자 분이 얘기하는 말이 시골에서 풀과 나무며 벌레와 새들 등 자연현상들을 지켜보면서 큰 애들은머리가 엄청 비상하대요. 그래서 늘 애들을 시골에 데려가서 산의 풍경들 자연의 섭리를 체험하게 하고싶어요. 우리는 정말 그런 풍경에서 자랐어요. 새벽안개 짙은여름 아침,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자다가 아침에 눈 뜰때면 처절썩~ 두만강파도소리가 귀맛 좋게 들려오고 새벽안개 헤치면서 물동이 이고 강에 가서 물을 길어 아침밥을 짓고 소학교때는 외워내야 될 부분은 책을 가지고 이른새벽에 강가에 가서 커다란 돌우에 앉아서 외우면서 풍요로운 자연을 만끽하면서 자랐지요. 그래서 여기서경영만 몰두하다가 작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제 글에는 늘 고향의 한 단락 한 단락 시골풍경들이 늘 핵심이고 주제이고 하이라이트입니다. [아]: 어렸을때 이곳의 어떤 기억이 가장 인상에 남던가요? [최]: 제 기억에 70ㅡ80 년대 개구쟁이일때 우리 마을 두만강지역에는 록음이 우거진 여름이면 늘 화가들이 자리를 잡고 온종일 그림 그리는광경을 볼수 있었습니다 . 제가 소학교 다닐 때에는 뱀장어, 산천어, 가자미 등을 마을 남자분들이 반디를 들고 잡으러 다녔습니다. 그리고고기잡이에 더 능수인 분들은 그물을 쳐서 잡는 방법도 있어요. 또 어떤 마을 어르신들은 물가운데 크고작은돌들로 돌담처럼 쌓아서 물골을 만들고 버들나무가지같으것으로 키, 즉 방언으로 소보치처럼 결어서 고기를잡는데 이를 채발이라고 합니다. 아무때나 고기가 밭자리에 걸려드는데 특히 비가 내린 새벽에 가면 고기가엄청 많이 걸려들어요. 부지런한 어르신들이 이렇게 산에 포수들이 파놓은 함정처럼 두만강같은 강에는 밭자리로고기 잡기가 좋아요. 개구쟁이오빠따라 아침 일찍 밭자리에 고기 건지러 다닌적도 있어요. 잡힌 고기를 빨리 가져 오지 않으면 또 다른 역빠른 사람들이 거두어 갈때도 있어요. 고기가 많이 잡힌 날에는 당지 식당에 좋은 가격에 팔기도 하고 어떤 환갑이나 생일이 있는 집들에서는 개인적으로고기를 잡아달라고 부탁해서 직접 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중소학교때 우리는 방학만 되면 오전 10시좌우부터 (안그러면 물이 너무 차가우니깐요)두만강에 가서 개발헤염치며 놀다가 물에서 놀기 싫으면 또 산에 올라가 놀고 산에가서는 또 북조선 삼장 건너 마을이다보니북조선노래 "경치도 좋지만 살기도 좋은"을목 터지게 웨치다가 더우면 또 두만강에가 헤염치면서 놀았습니다. 제일 더운 삼복에는 아마 온 하루 강에서놀았던것 같아요. 겨울에는 마을에 남녀로소가 스케트도 타고 그때그때는 참 좋았죠. [아]: 지금도 이곳으로 놀러가는 분들은 많나요? [최]: 화룡에 각 단위는 물론이고 연길, 주내각 현시 정부 각 단위 지정된 봄 들놀이 가기 좋은 곳이라고 할수 있지요 특히 봄, 여름, 가을, 세 계절에숭선에 천렵오시는 분들 어찌 많은지 덕분에 우리 엄마네독보조분들은 륜번으로 올라가서 산천어국, 소천어국등등 여러 가지 국을 끓여주고 받은 수고비를 받아 북경려행도 다니고 또 여기저기 좋은 곳에 려행을 많이 다녔어요. 홍기하폭포아래 정자에서 엄마들이 고추장에 내기를 푹 넣고 끓인 얼큰한 소천어국, 이면수국, 산천어국, 버들치, 돌쫑개국, 어죽을 맛보고 온다면 숭선에 다녀왔다고 할수 있죠. 지금이야 모두좋은걸 부럼없이 드셔가지고 별로 딱히 먹고싶은 탐을 내지 않지만 숭선강역에서 이렇게 천렵해보시면 한다하는 미식가들도 엄지손가락을 내밀게 맛있구요먼 후날에도 자꾸 다시 가고싶은 충동이 들게 할것입니다. 참 재미있는건 시내분들이 가서 분위기좋게 반디질도하지만 대부분 분들은 고기 잡을줄 잘 몰라요. 그래서 현지 식당에 부탁해서 고기를 사다가 끓여 드실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꼭 미리 부탁해서야 살수 있으니 가기전에 꼭 전화라도 하셔서 부탁하세요. 곳구경도 좋지만 강역에가 얼큰한 고기국도 꼭 드시고 와야 유감이 없습니다. 수요가공급을 초과하니 숭선에 소천어나 돌쫑개, 버들개, 모래밑이, 산천어, 이면수는 화룡이나 연길시내에서보다 휠씬 더 비싼 가격에팔려요. 산천어는 한근에 150원정도 하는데 지금은 대동구에서양식하기도 해요. 거기에서 나오는 샘물로 양식하는데다 공기 좋은 곳에서 키우기에 자연산과 같습니다. [아]: 숭선은 그야말로 대자연인데 어떤 다양한 식물이나 곤충들이 있나요? [최]: 숭선에 산과들 강에 보물들을 자랑하고 싶어서 이곳 지리를 잘 아는 제 남동생과같이 정리해 보았는데 가지수가 너무 많아서 엄청 놀랐습니다. 어릴때 듣던 숭선에만 있는 나물들도참 많더라구요. 산나물류들로는 첨치, 참치, 우정금, 기름고비, 쇠투리, 다섯싹, 민들레, 반짜개, 달리, 개나리, 들잎, 도라지, 고사리, 내기, 참내기, 더덜기, 약재로는 인삼, 삽지, 개삼, 만삼, 구름. 버섯류는 송이버섯, 검정귀버섯, 노랑버섯, 솔나무 버섯, 이깔나무버섯, 나무류는 홍송, 싸리나무, 이깔나무, 봇나무, 소나무, 버드나무, 참나무, 느릅나무, 백양나무, 사시나무 과일이나 열매류는 들쭉, 찔그배, 오미자, 딸기, 깸, 살구,  돌배, 앵두, 포도, 사과배, 달맞이꽃, 까마귀열매. 새종류는 뻐꾹새, 종달새, 딱따구리, 꿩, 까치, 콩새, 두만강 물고기류는 산천어, 뱀장어, 가자미, 버들치, 돌쫑개, 깡쫑개, 세지, 물론 우리가 다는 모르지요. 그냥 조금 정리해보았는데 이 정도이면 전문가들이 정확한 수자야더 말할것도 없겠지요 봄에는 뽕구대, 민들레, 여러가지이름 모를 나물들로 우리 음식상을 풍요롭게 만들어 준다면 7-8월에는 깸 월그배, 찔그배, 등 열매로 풍요로운 대자연의 혜택을 그대로 입으며 자라서인지시골분들은 심성이 착하고 마음이 넉넉해요. 아]: 네, 참 뭐가 많네요. 이제 저도 한번 기회가 된다면 숭선의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직접 느껴보고 싶네요. [최]: 산과 강을 벗 삶아 자란 나의 동년시절, 청년시절, 대책도 없이 구질구질 가난하기도 했었지만 그때 그 시절이 왜 이토록 그리운건지, 두메산골 내 고향이 차분하고 인내할줄 알고 감사할줄 알고 자신감 넘치는 긍정적인 오늘의 나를 만든것 같아요. 그래서 늘 내 삶의 뿌리인 고향에 감지덕지 하답니다. 여러분도 기회가된다면 꼭 대자연의 왕국, 보물나라 숭선에 놀러가셔서 자연의 정기를 듬뿍 받고 오신다면 앞으로 쭈욱~ 좋은 일들만 가득할것입니다  [아]: 좋은 얘기 감사합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최]: 네~ 감사합니다. ------———— 프로필 최선숙 (崔善淑)   필명:은주(殷朱) 中国 길림성 화룡 출생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연변과학기술대학AMP 제1회 로신문학원 연변창작강습반수료 "내 삶의 보따리" "자식농사" "배신 "등 수필 소설 시 20여편발표. "열혈모녀 축구팬 "   해란강닷콤 우수상.  “정향숲을  찾기까지”  제5기 중국조선족 효사랑글짓기 공모 우수상 문학블로그:  邮箱:18844309877@163.com 핸드폰: 18844309877        
1    미워.고양이 이모티콘 댓글:  조회:1215  추천:0  2019-11-16
“아침부터 이런 이모티콘을 보내나.” 출장중인 남편이 안해가 저녁마다 무슨 여기 송년모임 있소, 저기 파티에 참가하오, 하면서 매일같이 바깥돌이 한다고 참고 참다못해 속이 탄다고 눈물을 똑~똑~ 떨구는 고양이 이모티콘을, 그것도 명절아침에 보내왔다. 그래서 기분이 잡칠때로 잡친 연희도 아침에 왈 ~ 같이 폭발하고 말았다. 가뜩이나 요즘 장사가 여의치 않아서 스트레스투성인데 소위 장사집남편이 그것도 명절날 아침부터 이렇게 하루 기분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다니 참을래야 참을수 없는 일이였다. 속이 깊은 연희는 평시에는 남편이 자기 일이 여의치 않을때 속상해서 보내는 스트레스를 푸는 문자나 이모티콘은 그런대로 잘 받아주지만 오늘 아침같은 경우는 진짜로 참을수 없었다 . 년하남편을 만나 사는 연희는 웬간한 일은 굳이 옴니암니 따지지 않고 모든 일에서 자기가 그냥 양보하며 산다. 그만큼 집안에 모든 대소사는 당연히 연희가 더 많이 걱정하고 연희손을 거쳐야만 원만한 해결을 볼수 있다. 게다가 남편을 끔찍이 사랑하는 연희이기에 평소에 다투는 일이 거의 없는 그들인데 오늘은 생뚱같은 이모티콘 때문에 대판 싸움이 붙었던것이다. “당신은 참 너무 자사 자리해. 장사하는 사람 아침 컨디션이 중요하다고 평소에 얼마나 말했는데 그새 그걸 잊었나. 가만히 지켜보면 당신늠 언제나 자기밖에 몰라. 배려심이라구는 손톱만큼도 찾아볼수 없다구…” 늘 져주기만 하다가 연희도 성이 나니 어망결에 그동안 속에 쌓였던 원망이 터뜨리고 말았다. “당신이 적게 나 다니나? 그러기에 내가 그렇게 배우라는 집안일도 못 배우지. 당신은 당신이 좋아하는 취미공부나 하면서 밤마다 밖에서 보내시구려, 녀자가 어떻게 매일같이 밖에서 그것도 밤에 그렇게 헤매도냐. 나가는데도 정도가 있어야지. 내 정사같은걸 생각이나 한번 해 봤어?” 남편도 뒤질세라 참아왔던 원망을 터뜨린다. “요즘엔 장사가 잘 안돼서 가게를 밑지면서 내 놓느라 내 마음이 마음이 아니건만 남편이란 사람이 위로는 할줄몰라도 어떻게 이렇게 안해의 기분을 망쳐놓다니. 나는 그래 낮에는 소처럼 일하고 밤에는 고슴도치처럼 집구석만 지켜야 돼냐구? 신경질이 나도 나다니지 말구 비관만 하구 당신이 보낸 고양이 이모티콘처럼 집구석에서 울기만 하면 될가? 남편이 돼 가지고 매너가 참 좋아요. 됐어요, 말하지 맙시다. 짜증나, 어유 못 참겠어.” 아침부터 한바탕 다툼질이로 하루가 다 지나고 퇴근하고 집에 와서 까지도 가라앉지 않았다. 이모티콘 때문에 붙은 부부싸움에 누구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내 말이 어디 그 뜻인가. 나다니는 일이 도를 넘으면 나쁘다는 말이지. 취미공부를 하면서 나가면 그만큼 다른 장소는 거절할건 거절할줄도 알아야지. 어찌 누가 부른다고 하나도 안 빼놓구 쫑도르르 다 다니나? 차라리 밖에 나가서 살렴. 가정을 해 뭐해? 당신은 지금 정신이 너무 들떠있어, 정상이 아니거든. 자기의 취미생활과 친구를 사귀는건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때와 시간과 가족을 헤아려 균형을 잡으며 하는게 좋을상 싶은데요. 안 그래요? 우리 사장님이 아직도 반성을 모르는구만.” “그래요. 나도 집에 일찍 들어오면 좋은줄 알아요. 하지만 저렇게 취미공부라도 하면서 친한 분들이 가게에 와서 옷 한벌이라도 사주면서 때로는 식사도 같이 하자고 하는데 어떻게 거절해요. 장사하는 사람이 여러 사람들과 둥글둥글 어울리지 않고 그렇게 꼿꼿하면 주변에 사람이 몰리겠어?” 이렇게 그동안 하고 싶던 소리 다 하고나니 속이 다 후련하기 그지없었다. 너무도 시원해서 이제부터는 안 좋은 일들을 가슴에 멍이들게 속에 차곡차곡 쌓아두지 말고 그때그때 다 터뜨려버려야 되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소심해서 늘 참고 살던 연희이지만 이번 일만은 절대 쉽게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용서하더라도 혼뜨검은 좀 든든히 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모질지 못한 사람이 모질게 나서자니 자기는 또 얼마나 힘드냐. 그렇게 한바탕 다투고 이튿날 가게에 나갔는데 컨디션 탓인지 온 하루 옷 한벌도 못 팔았다. 좋은 연희는 그걸 다 거절 못하고 정말 거의 매일같이 밖으로 나다녔다. 출장중이여도 매일 연희한테 전화하는 습관이 있는 남편은 그게 좋을리가 없고 연희 자신도 사실 련속 며칠 연회상에 앉고 맥주를 마셨더니 머리가 흐리멍텅해지고 아무것에도 집중할수 없고 환각의 세계에 빠져 사는것 같았다. 진짜로 마약하는 사람들이나 알콜중독자들의 생활을 체험하는것 같았다. 자기절로도 자기 생활이 막 리해 안 되는데 출장중에 멀리서 그걸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는 남편은 속이 뒤번져질건 뻔한 일이다. 그러고보니 자기가 참 너무했다는 생각에 자책감이 슬그머니 들었다. 반성을 하고보니 연희는 남편에게 진심으로 부끄럽고 창피하고 미안했다. 애를 봐도 또 얼마나 불쌍한가? 퇴근해서 집에와 지지고 볶고 저녁 챙겨먹고 설거지까지 하면 아홉시를 훨씬 넘는데 매일같이 해야 할 집안일들을 련속 며칠이나 미뤄났으니 집안이 또 어떤 아수라장이 되였을까? 친구 만나 밤 늦게까지 수다떨고 이튿날 가게에 나가면 또 어떤가? 련 며칠씩 술 마셨으니 피곤해서 잠만 오지 따져보면 바깥돌이해서 좋은게 별로 없었다. 남편은 남편대로 삐져버리지, 애는 애대로 뿌루퉁해 하지, 자기는 자기대로 힘들지, 게다가 장사는 또 엉망이지… 연희는 가슴 아리게 반성을 했다. 안해, 엄마로서, 소위 가게사장으로서, 정말 너무했구나 싶었다. 이제부터라도 생활방식을 고쳐야겠어. 바깥돌이며 취미생활은 적당하게 하고 자기 가족에게 더 많은 애정을 몰부어야 되겠다고. 자기 잘못을 알게되니 금방 사과부터 하고싶었다. 끝내는 연희쪽에서 먼저 진심을 담아 사과문자를 날렸다. “자기야, 정말정말 미안해, 앞으로 밖에 나다니는 일 많이 자제하게. 다시는 당신을 피곤하게 굴지않으게.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해. 사랑해~” 문자와 함께 하트 날려보낸다. 인차 남편한테서도 메시지가 날아왔다. 아마 안해의 사과메시지를 기다린듯 했다. “여보, 나도 명절날에 너무했어, 내가 그만 욱~ 하는 성질에 참지 못하고 아침부터 장사하는 사람의 기분을 망쳤으니 미안해. 앞으로 자기한테 더 잘 하는것으로 립공속죄할께.” 문자와 함께 “하트 뿅뿅” 이모티콘 보내왔다. 헐~ 닭살이야. 평소에 늘 안해의 랑만을 잘도 받아주는 년하남편이다. 아껴도 다 아끼기 아까운 내 남편인데 다시는 피곤하게 들볶지 말아야지. 연희도 련이어 “뽀뽀 백개”, “하트 백개” 이모티콘을 날려보낸다. 언제 다퉛나 싶게 혼자서 히~히~ 웃으면서… 남편과 화해의 메시지를 주고받고나니 신기하게도 방금까지도 꽉~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듯 후련했다. 신이 인간을 참 묘하게 만든것 같다. 안 좋은 일들을 금방금방 잊을수 있게 또 금방 용서할수 있게 해줘서. 신의 능력에 감탄한다! 오늘도 좋은 날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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