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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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연변의 자랑 댓글:  조회:1929  추천:31  2009-02-03
  연변의 자랑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30돐을 맞이하면서 우리 연길시에는 다섯 개의 큰 건물들이 준공되였다. 이전부터 그 건물들에 대한 말들을 듣기도 하고 또 지나다니면서 보기도 하고 한 나였으나 여직껏 들어가 감상해 보지는 못했었다. 그러던 차 마침 문예공연 관람권이 차례지게 되어 나의 마음은 무등 기뻤다.   아닌게아니라 새로 일떠선 예술극장은 예술의 대전당이였다. 이 극장에는 고대 희랍(그리스)의 건물처럼 육중한 돌기둥도 없으며 빠리 노트르담 사원과 같은 고딕식 교회당의 뾰족한 탑도 없으며 고대 동방건물의 두꺼운 담과 묵직한 기와지붕도 없다. 그러나 실용적이면서도 예술적으로 설계된 예술극장은 그 사용에도 편리하고 또 현대사람들의 심미관에도 맞는 현대식 건물이였다. 여러개의 립방체 구조로 된 극장 외형은 장중하고도 우아하다. 산뜻한 느낌을 주는 흰벽과 기둥들, 그리고 극장 정면을 거의 차지하는 유리창문, 극장처마에 둘러진 금황색 유리타일, 이 외형의 조화된 색조들은 해빛에 반사되여 찬란한 금빛과 은빛으로 눈부시고 있었다. 극장 앞마당 량켠에는 민족예술의 정화로 알리여진 장구춤과 북춤을 추는 높이 3메터나 되는 조선족 녀성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던 10년동란의 나날에 그처럼 무참히 짓밟혔던 우리 민족의 예술이 인제는 온 세상에 보란듯이 자기의 아릿다운 자태를 자랑하게 되었다.   극장 대청에 들어서면 마치 신화세계에 온듯한 감이 난다. 대청 밑바닥과 기둥은 천연색 대리석으로 되었고 대청 천정 복판에는 64개 전등이 꽃모양으로 무어져 걸려있었다. 대청 량켠에 놓여진 층계는 마치 공중에 걸려있는 사닥다리 같기도 했다. 층계를 따라 휴게실로 올라가면 그것은 꼭 마치 무지개를 타고 하늘나라로 올라간듯이 황홀해진다. 한것은 연변의 미술가들이 창작한 백여폭의 미술작품과 공예미술작품들이 전시된것이다. 관람석에는 1천4백개의 푹신푹신한 해면(스펀지)걸상이 주런이 놓여져 있는데 아무리 오래 앉아 있어도 몸이 피곤할것 같지 않았다.   나와 함께 공연을 보러온 전진가무단의 한 벗은 무대 설비에 대해 무척 관심을 가진 사람이였다. 그래서 나는 그를 따라 무대에 올라가 49개 조명시설이 갖추어진 조명실, 2백여명의 배우들이 동시에 화장할 수 있다는 화장실(분장실), 백여명의 악대를 용납할수 있는 반주실(오케스트라 박스) 등 설비를 돌아보았다. 워낙 견식이 좁은 내가 놀라움을 금치 못한것은 물론이고 전국 각지로 순회공연을 많이 다녔다는 나의 벗도 연신 찬탄을 자아냈다. 해방직전에 보잘것없는 영화관 하나밖에 없었다던 연길에 오늘은 이처럼 사람들의 찬탄을 자아내는 예술의 대전당이 세워졌으니 이 어찌 사람들의 인심을 흥분시키지 않겠는가!   5대 건물에 대한 나의 흥취는 점점 도도해졌다. 그때 나는 련 며칠 <<9.3>> 경축활동에 참가하면서 매일 생일을 쇠는듯한 유쾌한 기분을 안고 새로 선 건물들을 하나하나 참관하였다. 때로는 홍수처럼 밀려가는 사람물결 속에 휘말려 연길공원 서쪽에 자리잡은 인민체육장에 들어가 보기도 하였고 때로는 외지참관단 벗들을 만나러 예술극장 맞은쪽에 우중충 높이 솟은 연길민족호텔에 들어가 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 외지대학에서 교편 잡은 한 동창생과 함께 부르하통하의 맑은 물에 두 발을 시원히 잠그고 다정한 자매처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우뚝 일어선 연변도서관과 연변박물관을 바라보며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자네 연길 5대 건물이 무엇을 설명하는지 생각해 보았나?>> 동창생의 말이였다.   <<하긴 건축이란 일정한 정도로 그 시대의 사회정치와 경제문화를 반영하니깐. 어쨌든 연변의 자랑이야. 그것은 우리 연변도 사회주의현대화건설에서 다른 형제민족 지구처럼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단 말일세.>>   <<그렇구말구. 어제 우린 저 박물관을 참관하지 않았나. 나는 박물관 문을 나서면서 5대 건물의 락성은 그저 하늘에서 떨어진것이 아니라는걸 심심히 느꼈네. 그것은 조선족 인민들과 형제민족이 어깨겯고 싸운 피의 대가일세!>> 동창생은 이렇게 말하며 표정이 근엄해지였다.   동창생의 말은 옳았다. 우리 민족이 이 땅에서 살아온지도 벌써 수백년이 된다. 이 수백년의 력사는 우리 조상들이 피땀으로 이 강산을 개발한 력사이며 피바다에서 몸부림치며 수난을 겪어온 력사이며 두손에 무장을 들고 목숨 바쳐 싸워온 력사이다. 장백산 줄기마다 그 어디인들 우리 선조들의 땀방울이 스며있지 않은 곳이 있으며 황토고원으로부터 해남도 연해에 이르기까지 그 어디인들 우리 형제자매들의 붉은 피가 뿌려지지 않은 곳이 있으랴! 혁명선렬들이 최후로 두눈을 조용히 감으며 그려보던 그 아름다운 세계가 오늘 우리 앞에 현실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자치주 창립 30돐을 맞으며 세워진 5대 건물은 사람들에게 당의 민족시책의 따사로움과 고향에 대한 긍지감을 안겨주었고 앞날의 새 희망을 펼쳐주었다. <<연변문예>> 1982.10
17    석화 수필-인생탐구의 풍만한 열매 댓글:  조회:1926  추천:23  2009-01-24
  인생탐구의 풍만한 열매 -근년에 창작된 석화수필을 평함 김병활   젊은 시인 석화는 90년대 중기로부터 수필창작을 시작하였다. 일찍 열혈청년이 갖고 있는 흥분과 격동을 자기의 시와 가사에 담아 목청껏 노래 부르던 석화는 불혹의 40대에 가까워짐에 따라 사품치는 정서를 눅잦히고 냉정한 태도로 인생에 대해 철리적인 사고를 하게 되었다. 이 성숙되는 년대에 맺힌 열매가 바로 1994년부터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살며 생각하며》를 중심으로 한 값있는 수필들이다.  《살며 생각하며》는 석화가 1994년부터 1996년 초까지 발표한 인생을 탐구하는 수필들의 총 제목으로서 그 가운데는 길고 짧은 수필이 근 30여편이 포함되어 있고 그 외 다른 제목으로 발표된 수필이 7, 8편이 된다. 이런 수필들에서 우리는 강렬한 민족의식, 생명의식, 주체의식을 감수할 수 있다. 1.   우수한 문학예술작품들은 거의 모두 민족적인 것이며 또한 세계적인 것이다. 민족의식이 결핍하고 민족성을 상실한 작자는 본 민족에게서 환영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에게도 접수되기 어렵다. 일본작가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작품이 노벨 문학상을 수여 받을 수 있은 것은 그의 작품이 동방민족문화의 정취를 차분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석화의 수필은 그의 시, 가사와 마찬가지로 민족의식을 선명히 표현하고 있다. 이런 민족의식은 그 표현형식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용, 정서, 기질 등에서 나타나고 있다. 할머니에게서 들은 《천인떡》이야기, 개성신선로유래, 전통적 민족무용인 《탈춤》, 어린이들의 유희《가위, 바위, 보》, 고전문학명작들과 신화전설들인 《양반전》,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이조시기 문학가인 정약용, 현대시인 김소월, 박팔양 그 외에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언어, 미풍양속, 살아가는 지혜 등등은 모두 석화의 수필들에 민족적 특성을 선명하게 부여하였다.   석화수필은 우리 민족의 우수한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발양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이 한 수의 동요와》에서 작자는 우리 민족의 자부심과 자신감을 긍지 높게 토로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밝은 것을 따랐으며 깨끗하기로 이름이 나서 흰색을 좋아하는 <백의민족>으로 통하기까지 합니다.\" \"우리 민족은 또한 낙천적이며 노래와 춤을 즐기며 삶의 멋을 아는 명랑하고 소탈한 기질을 가졌습니다.\" \"우리 민족은 항상 내일을 믿고 앞날을 믿고 희망을 믿는 미래지향적인 민족이며 늘 내일을 더 잘 살도록 가꿀 줄 아는 부지런한 민족입니다.\" 이처럼 민족적 긍지가 한 가슴 가득 찬 석화이기에 그의 작품은 언제나 밝고 명랑한 색채로 사람들에게 희망과 미래를 안겨주고 있다.  《세계가 하나로》 되어 가는 《지구촌》에서 우리 민족이 설자리를 얻으려면 발달한 타민족과의 비교에서 비굴해질 것이 아니라 충만된 자신심으로 자기의 것을 아껴야 한다. 때로는 남들에게 민족의 열근성처럼 보이는 것도 석화의 수필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민족의 긍지와 지혜로 되는 것이 적지 않다. 《아이 러브 유》에서 작자는 우리 민족이 사랑의 표현방식에서 너무 인색하지 않은가 하는 문제를 사색하고 있다. 서방에서는 쩍하면 서로 열렬히 포옹하고 키스를 나누면서 \"아이 러브 유(나 너를 사랑해)\"를 되풀이하는 까닭은 그들이 수렵문화의 환경에서 아침에 나섰다가 저녁에 돌아올는지도 모르는 불안하고 모험적인 생활방식에서 산생된 것이다. 그러나 동방의 농경문화환경 속에서 우리 민족은 자기 땅에서 대대손손 보다 안정된 생활을 하기에 \"구태여 번마다 사랑을 확인하고 다짐받을 필요\"가 없었다. 여기에서 작자는 우리 민족의 사랑표달방식의 당위성을 인정하고 따라서 민족문화에 대한 자신감을 표현하고 있다. 《동양화의 운치는…》에서 작자는 화폭이 \"꽉 차서 넘쳐나는\" 서양화보다 \"항상 조금씩 비워두는\" 동양화의 운치를 찬미하면서 거기에서 \"언제나 여유가 있고 맑은 기량이 흐르는 듯한 자유로움\"을  한껏 향수 할 수 있다고 썼다. 작자는 동서방문화의 우렬 보다도 치중하여 각자의 존재가치에 대해 충분히 긍정하고 있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가장 돌출한 특징은 바로 언어이며 문학작품에서 민족적 특성을 잘 표현할 수 있는 형식도 바로 언어이다. 이에 대해 석화의 두뇌는 매우 명석하다. 《말하는 기쁨》(《연변일보》1995년 6월 21일)에서 작자는 \"언어는 한 민족의 제일 두드러진 표징으로 그 민족형성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며 따라서 최후의 보루이다.\"라고 갈파하고 있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에》(《도라지》1995년 제 6호)에서 작자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에, 그 신비로운 표현력에 그저 감탄하고 감격할 뿐\" 이라고 썼다. 《말하는 기쁨》에서 작자는 또 국외에서 우리말로 의사소통이 될 수 있는 민족동질성에 대해 긍정한 동시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런 \"말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을 기원하였었다.   응당 지적해야 할 것은 석화수필에서 표현된 민족의식은 절대로 협애한 민족성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타민족의 우수한 문화에 대한 존중과 전 인류의 선진문화의 교류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이다. 《해돋이에 띄우는 연하장》(《조선족중학생보》1995년 1월 1월)에서 작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신화 속의 프로메테우스가 아닌 역사와 현실 속의 뉴톤, 다윈, 에디슨, 아인슈타인에 의해 과학의 찬란한 빛을 보았고 김소월, 뿌슈낀, 유고, 똘스또이, 타고르에 의하여 마음의 눈을 떴으며 4대성인 이라 불리는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 석가모니 나아가 가장 과학적인 사회발전이론을 창조한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모택동에 의하여 철학적 지성을 깨우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민족의식은 세계 타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긍정적인 태도로 받아들이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바 민족자신심이 확고한 민족일수록 세계문화에 대한 포섭력도 많아지며 따라서 그 민족의 생명력도 더 강해진다. 이로부터 석화수필에서 표현된 민족의식은 개방된 민족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2.   불혹의 40 대에 가까워 오면서 시인 석화는 흥분된 정서를 가라앉히고 냉정한 철리적 사고를 시작하였다. 그중 가장 중요한 내용의 하나가 바로 인생의 의의를 탐구하는 생명의식이다.   개혁개방이후 시장경제의 활성화에 따라 문화도 상업적 색채를 다분히 띠게 되였는바 통속적인 대중문화는 발전하고 고상한고 우아한 문학이 얼마간 쇠락되었다. 이런 풍조의 충격을 받아 작가들은 우월감을 상실하였고 자기의 출로를 사고하게 되었다. 복잡하고 현란한 현대생활에 직면하여 일부분 작가들은 상업화물결을 따라 하해(下海)도 하고 평민대중들의 취미에 맞추어 글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 반면에 일부분 작가들은 금전과 물욕의 유혹 속에서도 문학에 종사한 자기의 취지를 굽히지 않고 자기의 정신을 기탁할 수 있는 순결한 낙원을 탐색하고 있다. 이리하여 인생의 의의와 목표를 탐구하고 인류의 영혼과 정신이 도달해야할 높은 차원의 경지를 추구하는 고상한 문학이 산생되고 있다. 근년에 창작된 석화의 수필은 후자에 속하는바 여기에서 우리는 변화하는 시장경제와 혼탁한 도덕기풍의 충격을 수시로 받으면서 심사숙고하는 시인의 올바른 인생태도를 읽어볼 수 있다.   석화수필들은 인생의 일회성을 강조하고 이런 인생을 적극적이며 낙천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설파하고 있다. 《삶이란 결국…》(《청년생활》1994년 제 11호)에서 작자는 \"삶이란 결국 시간과의 대결입니다. …차례진 인생이 1차성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할 때 어찌 시간 앞에서 순간이라도 함부로 태만할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썼고 《계절이 바뀌는 의미는》(《연변라지오텔레비죤신문》1994년 9월 21일)에서는 \"참다운 하나의 인생을 완성하려면 계절이 주는 계시를 깨우치고 희망은 크게, 일은 열심히 하여 수확의 철이 되면 풍요로운 성과를 이룩하여야할 것이다.\" 라고 썼다. 그러면서 작자는 자기에게 소중한 생명을 준 부모에게 감사드리었고 또 그런  삶을 후손들에게 남겨줄 결의를 다진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에》에서 작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거룩한 조상한테서 내려와 아버지, 어머니에게서 받은 귀중한 삶을 올바르게 참으로 살아가면서 또다시 예쁘기 그지없고 귀엽기 그지없는 아들과 딸에게 그 삶의 줄기를 이어 줄줄 아는 이, 이렇게 어제와 오늘과 그리고 내일을 참답게 살아가는 사람이 야만이 사람으로서의 사람인 것이다.\" 이런 바른 삶의 자세는 복잡다단한 세파 속에서 갈팡지팡하며 삶의 뜻을 모르고 눈물과 한숨만으로 염세적인 나날을 보내는 사람들과는 대조적이다.   석화는 자기의 수필에서 이상적인 인생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인정했기에 자기에게 사랑을 베풀어준 모든 것에 감사를 드린다. \"우리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라 없이 <고맙습니다.> 혹은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진심으로 한번이라도 더 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랑을 안겨준 이도 미움을 배워준 이도 이렇게 오늘의 나를 만들어준 이 모두가 고맙고 감사할 뿐입니다.\"(《진심으로 한번이라도 더 하여야…》, 《청년생활》1994년 제11호) 작자자신이 여태까지 사랑을 받아온 이상 그 은혜에 역시 사랑으로 보답하려는 것이 작자의 인생태도이다.   다음, 시인 석화가 바라보는 이상적인 인생은 조화로운 인생이다. 이런 조화는 인간관계의 조화, 인간과 자연의 조화, 대자연의 모든 사물들의 조화 등으로 표현된다. 《살며 생각하며(4)》에서 작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만나는 모든 것에 따스한 눈길을 얹자. 아침 커튼사이로 비쳐드는 해살 그리고 산책길에 밟는 풀잎의 이슬, 문득 골목길에서 마주치는 강아지와 머리 우를 스칠 듯 날아가는 이름 모를 새 한 마리 모두가 인연이 닿아서 이렇게  만나지는 것이니 어찌 반갑지 않으랴. 출근길에서 어깨를 스쳐 가는 누구, 낯설지만 퇴근버스에서 자리를 함께 한 옆얼굴, 성씨도 모르고 이름자도 모르는 그들이지만 모두가 전생에 천 번 옷깃을 스치는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신선로와 조합의 묘미》(《연변일보》, 1995년 4월 19일)에서 작자는 개성신선로의 유래를 흥미진진하게 말하고 나서 합리한 조합의 묘미, 직장의 합리한 인사조절과 음악, 미술의 아름다운 조화를 예로 들면서 조화로운 이 세상을 목청껏 노래하고 있다. \"아, 조화로운 내 모습, 내 가정, 내 나라 그리고 조화로운 이 세상이여!\"   이와 동시에 작자는 조화롭지 못한 인생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임종시에도 후손들에게 원한의 씨를 심어주는 사람, 남을 속이면서 치부하는 벼락부자들, 자기의 진면모를 감추고 탈 쓰고 나서는 사람, 허영심에 들떠 명함 장에 자기 이름자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로 일여덟 줄 직함을 써넣는 사람… 이런 부조리적인 인생과의 대조 속에서 작자가 찬미하는 조화로운 인생은 더 한층 돋보이게 된다.   그 다음, 시인 석화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인생은 분투하는 인생이다. 그가 사랑을 찬미하고 조화를 주장한다 해서 결코 생존경쟁에서 소극적인 태도로 수수방관하고 자기의 운명을 남에게 맡기는 뜻이 아니었다. 그는 길섶의 작디작은 잔디 한 포기로부터 열심히 살아가는 생명을 노래했고 아픈 상처가 오히려 영롱한 진주를 빚을 수 있다는 도리로 실패 속에서 떨쳐 일어나 분투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것이 석화에게는 귀감이 되여 분투에 분투를 거듭하여 오늘의 보람찬 성취를 이룩하게 된 것이다. 시인 석화가 오늘 우리 겨레들에게 사랑을 받게 된데 는 한번밖에 없는 인생을 분투로 빛내보려는 생명의식과 관계된다. 3.   석화의 수필들은 인생에 대한 투철한 인식을 토대로 하여 강렬한 주체의식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주체의식은 구체적으로 자기에게 부여된 인간의 권리와 의무를 실행하려는 의식, 도덕적으로 자아의 인격이미지를 완미화 하려는 의식, 두려움 없이 자신을 해부하려는 의식 등으로 표현된다.  《살며 생각하며(3)》에서 작자는 자아독립의식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누가 나더러 <지구의 중심은 어디요>라고 물으면 <바로 내가 밟고 선 이 발밑이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렇게 중심을 바로 잡을 때 그대는 떠오르는 해도 나 때문에 떠오르고 흘러가는 강물도 나 때문에 흘러가며 꽃이 피고 새들이 우짖는 것도 다름 아닌 나 때문일 것이라 느낄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면 이와 같은 주체의식이 결여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주체의식을 소유한 인간만이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자신심을 가지고 자기의 위치를 확보할 수 있다.   그런데 석화의 이런 주체의식은 이기주의적인 자아중심의식이 아니라 남들도 포섭해 줄 수 있는 평등의식과 결합되어있다. 《부끄러움 배우기》에서 작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들은 누구나 다 한 생이라는 목숨을 나누어 받고 이 세상에 왔습니다. 그런 것만큼 누구나 삶의 의무와 함께 권리가 있는 것이며 서로 존경할 의무와 존경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이처럼 주체의식과 평등의식이 잘 융합될 때만이 작자가 바라는 이상적인 인생―조화로운 인생이 이룩될 수 있는 것이다.   석화의 주체의식은 또 인간의 권리를 충분히 향수 할 수 있는 기쁨에서 표현된다. 《우리가 본다는 것은》(《연변일보》 1995년 7월 21일)에서는 동물과 다른,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감각기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자기의 눈으로 객관세계를 인식하며 사물의 겉모양에만 국한되지 말고 \"마음의 눈을 더 크게 더 밝게\" 떠서 \"더 넓고 더 크고 더 풍부하고 더 다채로운\" 세계를 바라보라고 호소하고 있다.   석화수필에서의 주체의식은 도덕적으로 자아인격의 이미지를 완미화 하려는 염원에서 표현된다. 《선비의 초상》(《연변라지오텔레비죤신문》 1994년 9월 21일)에서 작자는 인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것은 결백한 마음, 꿋꿋한 기품과 청고한 넋을 꾸준히 쫓아온 선비에게 부와 사치란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맑은 물 한 사발이라도 깊은 정을 나눌 수 있고 더미이룬 금은보화에도 마음에 한 가닥 그늘이 지지 않는 것이 선비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선비》란 바로 《논어(論語)》에서 늘 일컫는 《군자(君子)》 즉 도덕적으로 완미화된 지성인의 이미지이다. 이런 《선비》의 이미지가 확고히 형성된다면 명예, 금전, 물욕에 드놀지 않고 주체적으로 자기 인생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 도덕적으로 자아인격의 이미지를 완미화 하려는 욕망이 있기에 작자는 《삼인행(三人行)》에서도 선생을 찾듯 언제나 겸손하고 배우는 자세로 꾸준히 노력할 수 있었다.   석화 수필에서의 주체의식은 또 두려움 없이 자아해부를 하고 자기 몸에 배어있는 열근성을 파헤치는 데서도 표현된다. 《일기를 쓴지가…》(《청년생활》 1994년 제 5호)에서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주체의식이 약화 되여 가는 자신을 사정없이 채찍질하고 있다. \"언제부터 이렇게 너절해지고 담이 작아졌을 가? 아침이면 넥타이를 찾아 누구에겐가 끌려가듯이 목을 꼭 졸라매고 나서도 거울에 비춰보고서야 시름이 놓이고 햇살이 낯에 비치면 웃음부터 먼저 얼굴에 바르고 마주선 사람과 무슨 말인지 자꾸만 시부렁거려야 시름이 놓이는 덜돼먹은 자식, 예전엔 큰 웃음으로 주변에 기쁨도 주었는데 이젠 영 남의 눈치만 먼저 보며 남이 웃고 난 한참 뒤에야 시름 놓고 헤― 웃어보는 바보가 되어버렸으니 살아가자니 멋쩍을 수밖에…\" 작자가 자신을 이처럼 혹독하게 매도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타락되지 않고 언제나 고상한 지조를 지킬 수 있는 토대로 된다. 《부끄러움 배우기》에서도 작자는 거울에 마주서서 본 자기를 \"채 여물지 못한 그래서 설익은 돌배 같다고나 할 어설픈 모양새입니다.\"라고 쓰면서 주저 없이 자조(自嘲)하고 나서 자아완성의 길로 나아갈 결의를 다진다. 이런 수필들에서 우리는 석화다운 솔직한 성격을 읽어볼 수 있다. 때로는 남들 앞에서 웃통을 벗어 메치고 제 몸의 결함까지 숨김없이 드러내놓는 것이 바로 석화다운 석화라고 할 수 있다. 나이들 어서도 수시로 동심세계로 돌아와 거짓 없는 인생을 보내는 것이 바로 석화가 자아인격의 이미지를 완미화 하는 길일수도 있다.   석화의 수필은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다. 일부 수필들은 교훈 식으로 남들에게 설교하려는 듯한 감을 준다. 이런 것들은 아마 편집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어 고약 짜듯이 쓴 것과 관계된다고 본다.   총적으로 석화는 자기의 수필창작으로 자신의 문학세계를 일층 더 넓이였고 다른 차원에서 우리 겨레문단에 공헌을 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였다.                               1996년 8월 20일                        《문학과 예술》1996년 제 6호      
 한(조선)민족문화에 대한 한국어(조선어)학과 학생들의 10년 인식변화                                                연변대학 김병활   《第9次朝鲜-韩国语言文学教育学术会议》(2005.7)  金秉活(延边大学).  韩国语(朝鲜语)学科学生对韩(朝鲜)民族文化的十年认识变化(题目).  韩国语教育 Ⅶ; 목차 [摘要 [머리말[설명1.민족문화 지식에 대한 인식변화2.한국인, 조선인의 성격에서 긍정할 점(장점)은 무엇인가? 3.한국(조선)문화와 민족성격 중에서 타민족이 적응하기 어려운 점(단점, 결함)은 무엇인가?[맺는 말 韩国语学科教学中必须重视民族文化教育。从92级学生与02级学生的问卷调查结果来看,两个班级学生都对韩国文化具有相当广泛的基本知识,也都了解韩国人民族性格中的很多优点。而对韩国人缺点的认识,02级学生相比之下更多一些。其原因大致分析如下:第一,不论哪个民族,其民族文化和民族性格中都或多或少存在缺点和短处,而韩国人也不例外。而这种缺点,对中韩两国刚建交时入学的92级学生来说并未引起多大注意,而建交十年后入学的02级学生就对此认识更多一些。第二,中国越来越来发展强大起来,中国大学生对本国自信心也越来越强,因此对韩国的缺点也就看得越多起来。第三,个别学生把个人的缺点当作整个民族的缺点加以指责,并把日常专业学科学习中的欲求不满、挫折感发泄到整个韩国文化上。   总之,韩国语教师不能只满足于传授语言文学知识,而必鬚正确把握学生对韩国文化的不同思想认识问题,及时帮助解决和纠正各种误解和错误认识,以促进两国文化交流顺利发展。  关键词: 韩国文化, 民族性格, 认识变化, 问卷调查 주제어:  한국문화,  민족성격,  인식변화,  설문조사 머리말    교육자는 자기의 교육대상을 잘 알아야 한다. 특히 조선 언어문학 교육자는 우리 민족의 언어문화를 배우고 있는 타민족이 증가되고 있는 시점에서 그들이 우리 민족문화와 민족성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1992년에 입학한 연변대학 조선어(한국어)학과 汉族(중국인) 학부생(92년급(학번) (학생- 총 22명)들에게 <外事基础(국제교류 기초지식)> 과목을 강의하고 1995년 기말시험에 조선(한)민족문화에 대한 이해를 시험문제 겸 설문조사로 낸 적이 있다. 비록 시험문제라고는 하지만 솔직하게 쓸수록 높은 점수를 준다고 유도하였고 실지 응답내용을 보아도 허위적 응답이 거의 없음을 느낄 수 있다. 2005년에 필자는 또 비교문학 연구생 과목 <중조(한)일 문화비교>에 참고될만한 자료를 얻고자 2002년에 입학한 연변대학 조선어(한국어)학과 02년급(학번) 汉族(중국인) 학부생(총 50명)들에게 92년급(학번)과 거의 같은 내용으로 무기명 설문조사를 하였다.   본문은 이 자료에 근거하여 10년 사이 조선(한) 민족문화에 대한 조선어(한국어)학과 학생들의 인식변화에 대해 고찰해 보려 한다. 같은 자료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시각이 다를 수 있기에(见仁见智) 본문은 자료제공을 위주로 하면서 필자의 견해와 분석은 부분적으로 간략하게 첨부하였다.  설명: 1) 매 조목 글 뒤의 수자는 응답 인원수, 그중 일부 상당한 수량을 가진 조목은 ‘ / ’ 뒤에 백분율 (%)을 표기했음;(예: ‘온돌-13/59.1%’중에서 ‘13’은 응답자 수이고, ‘59.1%’는 반급 총 인원수 중의 백분율임) 2) 02년급(학번) 학생들 중 일부는 장점(긍정 면)을 쓰는 欄에 단점(결점)을 써넣었는데 이를 { }栏에 정리하였음. 3) 92년급(학번)은 설문 제시가 없이 자유로 응답하였고 02년급(학번)은 92년급(학번)의 응답조목에 다소 맞추어 약간 설문제시를 하였음. 4)응답 중에 한국인, 조선인, 조선족을 따로 명시하지 않은 것은 대체로 하나의 민족으로 보고 종합응답을 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음. 민족문화 지식에 대한 인식변화 1.주거방식 92년급(학번)(총 22명-이하 같음) 온돌-13/59.1%; 도시 양옥, 아파트 위주7/31.8%; 농촌에는 전통적 가옥-7/31.8%; 기타= 기와집5;지붕 곡선미2;신 벗고 구들에 올라가기1;땅 파고 부엌 만들기1;집안에서 신분에 따라 방 구조가 다름1;함석지붕1;미닫이 문1;초가집1;흙벽1;짚 이영1 02년급(학번)(총 50명-이하 같음) 여러 세대 동거(대가족제)-18/36%; 온돌-10/20%; 기타= 깨끗함5;장식 간소함4;농촌 전통초가집과 기와집4;현대도시 아파트3;친척들이 모여 살지 않음(분산 거주)3;통풍 양호3;전통과 현대 결합1;실내장판1;남향집1;구조 합리1;넓직함1;마루1;가족주의1;장남이 부모 모심1 (조선-경제적 원인으로 구조 간단함1, 정결함1, 20세기 70-80년대의 중국과 비슷함1; 한국-전통과 현대 결합1; 조선족-중국문화와 본 민족특색 결합1, 中国化1) 분석: 02년급(학번)은 92년급(학번)보다 온돌에 대한 관심이 적어졌다. 현대도시화와 아파트생활에 따른 인식변화라고 볼  수 있다.92년급(학번)은 집(가옥) 구조에 따른 전통 문화적 의미를 탐구하였는바 그 예로 ‘신분에 따라 방(가옥) 구조 다르다; 지붕 곡선미’ 등을 들 수 있다. 02년급(학번)은 ‘전통과 현대의 결합, 구조합리, 친척들이 모여 살지 않음’ 등 현대적 변화에 주의를 돌리고 있다. 2.복장 92년급(학번) 명절, 혼례식에 민족복장-14/63.6%; 민족복장과 신식 유행복 병존-8/ 36.4%; 기타= 흰색 선호, 백의동포3; 코신5 ; 갓 쓰다4; 두루마기 입다3; 치마저고리3; 도시에서는 양복위주3; 폭 넓은 바지가랑이2 02년급(학번) 넓고 편한 (민족)복장-29/58%;  한복(치마저고리)-21/42% 한복 아름답다(곡선미,美观大方, 色彩鲜艳)-14/28%; 기타= 흰색위주(백의민족)3; 개량한복2; 특색 있음2; 바짓가랑이 넓다2; 두루마기1;현재 양복 보급1;中山服1 {재료 낭비1; 아름답지 않다1;촌스럽다(土气)1} (한국인-유행과 전통 결합, 젊은 세대 일본 모방1; 조선인-경제 낙후로 복장 전통적1, 소박함, 단아함1; 아주 추함1, 20세기 70-80년대 중국과 비슷함1; 조선족-한국 유행 따름2,색상 화려함1, 中国化1)  분석: 두 학급의 비슷한 점은 ‘민족복장과 현대복장 결합; 흰색 선호, 백의동포’ 등. 차이점(변화)은  02년급(학번)이 한복의 장점을 인식-넓고 편함, 아름답다.   3.음식 92년급(학번) 清淡素食-기름기 많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5/22.7%; 고추(매운 음식)5/22.7%; 기타= 쌀밥4;고기4;김치4;된장국3;냉면 국수2;찰떡2;찬 음식 선호2;불고기2;건강식품2;소고기를 즐김1;생식1;계절 따른 野菜1;가족 야유회1 02년급(학번) 고추(매운 음식)-27/54%; 청담소식(볶음 요리가 적다)-17/34%;김치 선호-16/32%;장국6/12%; 기타= 간단함3;찬 음식3;음주3;맛있다2;나물2;불고기2;전통음식문화1;쌀밥1;김밥1;순대1;비빔밥1;요리과정(公序) 복잡함1;색상 보기 좋다1;생식1;단 음식1;찰떡1;냉면1;건강음식1 {맛없다2;이상한 것1} (조선-순 민족적, 간단함; 한국-본 민족 위주, 비교적 서양화; 조선족-중국 특점과 본 민족 특징 결합) 분석: 두 반급이 큰 변화가 없다. ‘청담하고 기름기 적고 매운 음식; 쌀밥, 김치, 장국 선호’. 다만 02년급(학번)에는 ‘맛있다/맛없다’ 라는 주관적 평가가 있다. 4.가족관념 92년급(학번) 혈연관계 중시-13/59.1%; 족보 중시-8/36.4%; 김씨, 이씨, 박씨가 제일 많다1 02년급(학번) 일부일처-8/16%; 3대(4대)동거-7/14%; 가족관념 강함-6/12%; 가부장제-6/12%; 기타= 남녀 분공5;현재 핵가족4;자녀 많음4;복잡함2;여자 가무 위주1;가정 안정1;민족특색1;금자탑 형식1(?) {대남자주의4; 번쇄함4;중국과 비슷함 (중국 모방)3} (조선-민족성2;  한국-전통적 가정2;혼인자유1;전통장례1; 조선족-중국과 한국 융합, 中国化) 분석: 비슷한 점은 ‘가족중시, 혈연관계 중시, 대가족(3대, 4대 동거)’ 등; 차이점(변화)은 02년급(학번)이 중국 가족문화를 모방했다는 응답이 나옴. 5. 혼인 92년급(학번) (유가관념으로) 혼인 후 이혼 어려움-14/63.6%; 재혼도 어려움-10/45.5%; 동성동본 혼인금지-10/45.5%; 기타= 가족 내 남녀 분공 명확함, 부녀지위 낮다3;혼례식 민족특징1;혼인 시 부모 의향 중요시1 02년급(학번) 혼인과정(예의) 복잡(번쇄)함-14/28%; 기타= 중국과 비슷함3;혼례식 규모방대1;민족특색1;중매혼인1;전통혼인과 자유연애(혼인) 병존1, (조선-민족성; 한국-민족성위주, 晚婚, 韩西융합) 분석: 비슷한 점은 두 반급이 혼례식의 민족특색을 지적하면서 모두 부정적 시각으로 봄. 차이점(변화)은 92년급(학번)이 이혼 어려움, 재혼 어려움, 동성동본 혼인 금기를 지적하고 02년급(학번)은 ‘혼인 과정 번쇄함, 중국과 비슷함, 전통혼인과 자유혼인 병존’을 지적. 02년급(학번)은 중국 영향을 강조. 6. 장례 92년급(학번) 土葬 위주-8/36.4%;개별적으로 화장-7/31.8%; 3일장5;제사 중시4 02년급(학번) 제사중시-4/8% 기타= 민족특색1;검은 상복1;화장1 {번쇄함8;중국과 비슷함3} (조선-민족성; 한국-민족성 위주, 韩西융합; 조선족-中朝 융합) 분석: 비슷한 점은 ‘제사 중시’. 차이점(변화)은 92년급(학번)이 ‘土葬 위주’; 02년급(학번)은 ‘장례 번쇄함, 중국과 비슷함’을 지적. 7.명절 92년급(학번) 노인환갑잔치-18/81.8%;애기백일잔치-17/77.3%;돌잔치-17/77.3%;회혼례-10/45.5%기타= 서방명절-성탄절3;민족명절3-구정(음력설2=,상원절, 단오절, 중추절2/가족명절-생일2;중국명절-중추, 단오,重阳2,한식일; 국가명절阳曆-개원절, 석가무니 탄생일, 독립기념일 등, 02년급(학번) 민속제 중시-17/34%;축수 많음-7/14% 기타= 생일3;친족 모임3;손님 대접2; 축수 시 음주위주1;무용과 노래1;음주필수1;전통적 명절 음식1 {규모방대(겉 치례)8; (행사) 많음5;번쇄함5; 낭비2;중국과 비슷함1} (한국-민속제 위주; 조선-혁명적 명절 위주) 분석: 비슷한 점은 ‘민속 명절, 생일, 축수 많음’; 차이점(변화)은 02년급(학번)이 ‘규모방대(겉 치례), 번쇄함 , 중국과 비슷함’을 지적. 8.예절 92년급(학번) 예의지국-20/90.9%;경어, 문명 언어-18/81.8%;어른, 부모, 스승 존중-15/68.2%; 상하급 구분 명확-13/59.1%; 기타= 효도 위주4;아버지 앞에서 흡연금기1 02년급(학번) 예절 중시-21/42%;예의범절 많음-16/32%;노인과 어른 존중-9/18%; 기타= 언어 상하(서열) 구별4;90도 경례(鞠躬)빈도 많음3;인사친절2;큰절1 {예절 번거로움(형식주의)9;웃어른이 아래 사람을 괄시2;중국과 비슷함2;남존여비1;경어 시끄러움1; 상상한 바와는 적다1} (조선과 한국-예절중시2; 조선족-예절  의식 약화2, 中国化1) 분석: 비슷한 점은 예절 중시, 노인, 어른 존중, 상하 서열 구분. 차이점(변화)은 02년급(학번)이 경어를 시끄럽게 인식, ‘예절 중시’도 92년급(학번)보다 현저히 줄었음( 92년급(학번)은20/90.9%, 02년급(학번)은 21/42%). 이밖에 02년급(학번)은 ‘웃어른이 아래 사람을 괄시, 중국과 비슷함’을 지적. 기타 92년급(학번) 학생들의 응답에는 아래와 같은 조목이 더 첨가되어 있다. 1.교육중시 교육열-5/22.7%; 2.외국문화영향  중국문화 영향-5/22.7%;서방 영향4-양옥1 성탄절1 양복1 외래어1; 조선 자국문화원천이 결핍1 3. 종교 유교영향 제일 강함-13/59.1%;유교관념 중국보다 더 강함4;불교4;도교1;기독교2 4.예술 国花-무궁화1;민족무용1; 민족 악기1 한국인, 조선인의 성격에서 긍정할 점(장점)은 무엇인가? 1.가족관념 92년급(학번) 전통적 가족관념 강함(가족중시, 책임감)-8/36.4%;부모효도-7/31.8%;   가족 안정(이혼율 낮다)2;가족 내 남녀 분공2;유가관념1 02년급(학번) 가족관념 강함(유가관념, 가족 중시, 안정됨)-26/52%; 가족 내 분공(男主外, 女主内)-19/38%;  기타= 한국 신세대 남존여비 사상 약화1;부모 존중1;여성 근로, 선량1 {대남자주의(남성 우월주의, 남존여비)9; 훌륭한 후대양성을 위한 산아제한이 없다(不优生优育)1} 분석: 비슷한 점은 ‘유가관념 강함, 가족중시, 가족 내 남녀 분공, 가족 안정’; 차이점(변화)은 92년급(학번)은 이혼율 낮다고 보고 02년급(학번)은 신세대의 남존여비 사상이 약화됨을 지적; 2.예절 92년급(학번) 礼义之邦(国)(예의 중시)-16/72.7%; 어른존중-13/59.1%; 인간관계 조화(화목)-8/36.4%; 스승존중-7/31.8%; 기타= 시간준수5;사전 약속4; 상하 서열 분명4; 공중도덕 좋다3; 인사 예절 밝다3; 90도 경례3; 경어사용3; 한국인 문명해 보임(수양)2; 선물 포장 중시1; 대화 시 상대방 배려1 02년급(학번) 스승 존중-30/60%; 공중 도덕성(예절 중시, 상호 존중) 강함-27/54%;웃어른(노인)을 존중-23/46%; 기타= 상하 서열 분명1;손님 대접 중시(好客)1; 조선인 수령 존중1 {공중도덕 차함1/너무 번쇄함1 } 분석: 비슷한 점은 ‘예절 중시, 공중도덕이 좋다, 어른 존중, 스승 존중’. 차이점(변화)은 92년급(학번)이 예의지국(16/72.7%)을 강조하였으나 02년급(학번)에는 이런 표현이 없음. 3.집단주의 92년급(학번) 단결호조-14/63.6%;  기타= 오랜 원수 없고 쉽게 모순 완화3;농악놀이1;대외로 일치단결1 02년급(학번) 단결호조(응집력)-41/82%;  기타= 붉은 악마정신 1;외래침략에 일치하게 대항1 {동아리(짝패)를 뭇다1;단결심 없다1 } 분석: 두 반급이 모두 ‘단결, 호조’를 인식. 실례를 드는데서 약간한 차이를 보이는데 92년급(학번)은 ‘농악놀이’, 02년급(학번)은 ‘붉은 악마’를 들고 있음. 4.사업태도 92년급(학번) 근로-14/63.6%;인내성(耐劳)-6/27.3%;진취성-5/22.7%;  기타= 직업(敬业)정신(책임감)2; 개척정신1; 빠른 속도 , 효율 중시1 02년급(학번) 근로함-23/46% ; 진취성-22/44% ; 책임감(치밀함,认真)-21/42%; 기타= 사업 효율 높음2;인내력1;승벽1; 불요불굴1 {연변대학 조선족 사업 효율 낮다2; 진취성 없다2; 게으르다1;중국인보다 못함1} 분석: 두 반급이 모두 ‘근로함, 진취성, 책임감’ 등을 인식하고 있으나 02년급(학번)은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음. 5.생활습관 92년급(학번) 춤 노래 즐김(단결, 융합을 체현)-13/59.1%;열정(활발)-11/50%; (조선족) 손님대접 융숭-11/50%; 위생중시(주거, 복장 알뜰하고 깨끗함)-15/68.2%; 기타=체육과 오락 활동으로 스트레스 해소3;신생 사물 빨리 접수2;쉽게 교제2;흰색 선호(백의동포)2;주거, 복장 편한 것 추구(舒适)1; 환경 적응성 강함1; 체육 즐김1; 들놀이(생활정취 풍부)1; (음식)절약1; 노인 젊게 화장1; 복장 우아함(교양 있어 보임)1;건강식품1  02년급(학번) 위생을 중시(알뜰하고 깨끗함, 규칙적)-39/78%; 기타= 음식 청담함(기름기 없이 상큼함)5;고추(매운 음식)4;건강음식3;민족특색음식2; 깨끗한 음식2; 쌀밥위주1; 김치1;소채 많음1; 음주 즐김1; 종류 풍부1; 춤추고 노래 즐김(能歌善舞)1; 검소 절약1 {건강에 불리1; 위생이 차함1}  분석: 두 반급이 모두 ‘위생 중시, 깨끗함, 춤추고 노래하기 즐김’ 등 민족 특색을 지적. 92년급(학번)은 아마 농촌 현지 실습체험으로 절반 학생이 손님 대접을 융숭히 하는 점을 지적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02년급(학번)도 다른 조목들에서 손님 대접을 즐긴다고 인정. 6.성격 92년급(학번) 낙관적(근심걱정 없어 보임)-7/31.8%;활달(성실, 직설적, 아량)-10/45.5%; 기타= 人情 중시(인정미)2; 소박함2; 선량; 용감성(희생)2; 승벽1; 완강함(불요불굴)1; 한국인 인색함1; 한국인 잘 살아도 절약1; 겸손1; 유연한 춤동작은 겸손과 합작, 조화 등 민족성격의 체현1; 서방 영향으로 경제관계가 명확함(‘인정채무(人情债)’ 거부)1;  약자 동정1  분석: 다른 조목과 결부해보면 두 반급이 모두 한국인의 인색함을 지적하고 있지만 92년급(학번)은 이를 한국인의 ‘절약정신, 경제관계의 명확성’으로 보면서 긍정적으로 인식함. (02년급(학번)-따로 설문제시 안함) 7.남성 92년급(학번) 호방하고 시원시원함-3/13.6%; 우정, 의리 중시-2/9.1%; 02년급(학번) 호방하고 시원시원함-22/44% ; 승벽-16/32% ;  기타= 책임감4;우정, 의리 중시(성심성의)4;손님대접 즐김3; 아량 있다(대범하다)3;진취성2;용감성2;자존심1; 엄숙함1; 멋있다1  {대남자주의3; 싸움 즐김(성격 거칠다)2; 한국인 인색함2; 자고자대1; 일부 게으르다1; 장점 없다1 } 분석: 두 반급이 모두 남성의 ‘호방하고 시원시원함과 의리 중시’를 인정하였고 02년급(학번)은 ‘아량 있다(대범하다)’, ‘멋있다’ 등 표현이 나오고 있음. 8.여성 92년급(학번) 부덕 있다(温柔贤惠)-9/40.9%;근로-8/36.4%;인내성-7/31.8%; 기타= 활달2; 외유내강2; 정결함2 02년급(학번) 부덕이 있다(어질다, 温柔贤惠)-36/72% ;근로-26/52%; 기타= 부모(시부모) 공대2;인내성2;깨끗함2;춤 잘 추고 노래 잘 한다2; 가족중시1; 婚前 개방, 결혼 후 가정주부 부덕이 있다1;활달1; {요즘 한국 젊은 여성과 조선족 젊은 여성 내숭 떤다1;게으르고 악한 여자도 적지 않다1} 분석: 두 반급이 모두 ‘부덕이 있다(温柔贤惠), 근로함, 인내성, 활달함’ 등을 인정. 92년급(학번)은 외유내강을 지적하고 있으나 02년급(학번)은 결혼 전에는 개방적이라고 지적. 9.정치, 인생 이념 92년급(학번) 애국-8/36.4%;교육중시(어린이, 자녀 사랑)-11/50%;정치, 민족 역사 관심-5/22.7%; 기타= 국산품 애용(일본 제품 불매, 배격)2; 개성발전 추구2; 문화자질 높다1; 조선인 수령 숭배1 {한국인 금전만능주의1 } 02년급(학번) 교육중시(어린이, 자녀 사랑)-36/72% ;애국-27/54% ; 기타= 국가, 민족 등 문제에 민감1; {한국 일부 청년 인생목표 없다1; 한국인 보잘것없는 것도 제 자랑한다(뻐긴다)1; 조선족은 한국을 선호1} 분석: 두 반급이 모두 ‘애국심, 민족 운명 관심, 교육 중시’ 등을 인식. 10.민족의식 92년급(학번) 민족의식(민족 자부심) 강함-12/54.5%; 기타= 외래문화를 수용하고 민족적 창의력 발휘하여 발전을 도모3;배타적(긍정)1; 대외로 일치단결1 02년급(학번) 민족 자부심(우월감)-33/66% ; 민족의식(응집력) 강함-23/46%; 기타= 정신생활 중시1 {열등감 강함1; 나쁘다1} 분석: 두 반급이 모두 ‘민족의식, 민족 자부심’을 지적. 92년급(학번)은 ‘배타성’을 민족문화 보호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인식. 11.종교의식 92년급(학번) 한국인 기독교1; 유교, 불교, 도교1 02년급(학번) 종교의식 강함-15/30% ;기독교 신자 많음-11/22%; 기타= 불교6;종교의식 약함3;천주교1; 진선미 선호1 {종교 신앙에 너무 의뢰(집착)2;한국인 종교 선전(传教)은 귀찮다1;(자체)종교 없다1;한국인 서방 종교 영향1} 분석: 02년급(학번)이 종교문제를 보다 심각히 인식. 12.중국에 대한 인식 92년급(학번) {한국인-중국의 정치, 경제를 무시1} 02년급(학번) 우호적(그중 亲华9;중국 문화와 역사 존중5; 중국이 점차 강해지자 피동적으로 우호2)-16/32%;영토 크고 자원 풍부-7/14% ; 기타= 조선족은 중국을 열애 2; (한국인) 중국이 강대해짐을 부러워하면서도 두려워함1; {중국보다 앞선 것으로 자부함1; 중국인식이 편면적(부족함)7;일부 한국인 중국을 낙후하고 가난하다고 봄3;(조선족)농촌과 일부 지방에서 중국국가관념이 차함1; 일부 조선족은 한국과 더 친근함3} 분석: 02년급(학번) 학생 중 중한 수교 10년 후에도 우호적이라고 인식한 학생이 32%밖에 안 됨.    12.기타 92년급(학번) 조선족은 우수한 민족1 02년급(학번) 총체적으로 한국이 괜찮다1; (그들) 문화의 뿌리가 우리 中华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경고(告诫)한다1 분석: 다른 조목과 결부해 보면 02년급(학번) 학생들 중 극히 일부분이겠지만 중한 양국을 대립관계로 상정한 발상과 기타 착오적 인식이 일부 있음. 한국(조선)문화와 민족성격 중에서 타민족이 적응하기 어려운 점(단점, 결함)은 무엇인가? 1.가족관념 92년급(학번) 유가관념(그중 전통적 가족관념2; 여성 재혼 곤란2; 보수적(봉건)1; 어른 절대 복종1)-10/45.5%; 남존여비-7/31.8%; 동성동본 혼인 금기는 과학적이 못된다(혈연관계 너무 중시)3; 02년급(학번) 보수(그중 유가관념5)-30/60%;남존여비-10/20%; 기타= 남녀 분공2; 봉건적2;부모가 자식 혼인 결정1;한국 현재 이혼율 중가1; 타민족과의 결혼 적음1;조선족 대부분 타민족과의 통혼을 거부1 분석: 두 반급이 모두 유가적 가족 관념을 부정적으로 인식. 그중 ‘남존여비, 보수적인 가부장제’를 특별히 지적함. 2.성격 92년급(학번) (한국인 작은 은혜 베풀기도 하지만) 대체로 인색함-6/27.2%;작은 이익 탐냄(小聪明)-6/27.2%; 기타= 한국인 허위적(허영심)2; 眼光 협소1; 맹목적 의리(복종)1;천박함(옷차림만 중시)1 02년급(학번) 충동적-27/54%;인색함(이기적)-14/28%; 싸움 즐김(好鬪)-9/18%; 기타= 극단적(偏激)-5; 조포함2; 손님 대접 즐김2;사치하고 향락1;허위적1 분석: 두 반급이 모두 ‘인색함, 안광 협소, 허영심’ 등을 지적하고 있음. ‘인색함’에 대하여서는 상기한바와 같이 결함이 아닐 수도 있음. 02년급(학번) 학생중 상당수가 ‘싸움을 즐긴다’는 점을 특별히 지적하고 있음. 3.예절 92년급(학번) 체면 중시-3/13.6%; 한국인 맨발바람으로 나다니고 남들 앞에서 발가락 만진다-3/13.6%; 기타= 상하 등급차별 과도1;반말 사용, 인격 모욕감1; 시간관념 박약1; 한국 유학생 예절 없다1; 외국에서 한국인 이미지 안 좋다1 02년급(학번) 체면 중시-31/62%;예절 번쇄함-11/22% 기타= 허위적(표리부동)5;수구적2;거북스럽다1;무례함1 분석: 두 반급이 모두 체면 중시를 부정적으로 지적하고 있으나 02년급(학번) 62%가 92년급(학번) 13.6%보다 훨씬 다수를 차지함.  4.남성 92년급(학번) 대남자주의(남성 우월주의, 家务 안 돌본다)-16/72.7%;음주 과도(술주정)-14/63.6%;오만무례-6/27.2%; 작은 일로 싸움-5/22.7% 기타= 여성에 비해 게으르다3;조포함2; 충동적 2; 중국에 온 한국인 생활 작풍(남녀치정관계) 난잡 2; 한국 유학생 기숙사 어지럽다2; 아무데나 소변2; 자기 양말도 씻지 않는다1 02년급(학번) 대남자주의(남성 우월주의)-45/90%;음주 즐김(과음)-39/78% 기타= 허세 부림2;가부장주의1; 충동적1 분석: 두 반급이 모두 압도적인 다수로 대남자주의(남성 우월주의)와 과도한 음주를 지적, 중국인들이 제일 접수하기 어려운 결함으로 인식됨. 다른 조목과 결부해 보면 두 반급이 모두 ‘작은 일로 싸운다’고 지적. 5.여성 92년급(학번) 인내성(절대 복종,지위 낮은 현실에 안주)-12/54.5%;여성 지위 비천함-8/36.4%;  기타= 贤妻良母1;녀 대학생도 결혼 후 가정주부로 되는 것은 인재 낭비1 02년급(학번) 열등감(연약성)-30/60%;과분한 인내성-26/52%; 기타= 혼인 전후 차이 크다1;신세대 자부심1; 허영심1; 야만적1 분석: 두 반급 학생 중 절반 이상이 여성들이 과분한 인내성으로 비천한 지위에 안주한다고 지적. 6.생활습관 92년급(학번) 과소비(향락주의)-9/40.9%; 기타= 土葬 위주(토지 낭비)2; 생식1; 저축관념 없다1; 중국인은 한국 음식습관에 적응하기 어렵다1; 억지로 劝酒함1; 온돌 불편, 건강 불리1; 보수1; 현실에 안주(한평생 초가집 살다)1;(한국)남성 생활 작풍(남녀치정관계) 난잡(随便)1; 조선인 사생활 무시1; 조선 여성 추울 때도 치마 입다(건강 불리)1 02년급(학번) 돈을 마구 씀(过消费, 낭비)-36/72%; 기타= 형식주의2;까다로움1;조선족은 한국을 맹목 숭배1 분석: 두 반급이 모두 낭비, 과소비 성향을 지적. 7.복장 92년급(학번) 괴상한 옷차림(서방 유행 따름, 과분한 옷 치례)-3/13.6%; 02년급(학번) 유행 따름-29/58%; 기타= 과분한 화장5;촌스럽다3;조선족 한국 유행 , 브랜드 바싹 따름3;간편한 복장(休闲)2;사치함1;서방 모방1; 전통복장1;[유행 따르는 것은 결함이 아님3]  분석: 두 반급이 모두 과분한 옷 치례를 지적. 02년급(학번)의 일부 응답자들은 유행 따르는 것을 결함으로 제시할 수 없다고 반발함. 8. 정치, 인생 이념 92년급(학번) 정치: 남북 모두 입으로만 통일, 상호 적대시2;  한국 신문매체 책임감 없다1; 조선 교육 봉페적, 개성발전 무시1 인생: 신세대 향락, 안일 추구(나태함, 非규칙적인 생활)-4/18.2%;한국 유학생 도덕수양 부족1; (한국)금전만능주의1 02년급(학번) 정치: 너무 민감1;(한국인) 애국심 중국보다 못함1; (한국)미국의 走狗, 최근에 조금 개선1 ; 조선인은 정치 영수를 迷信(맹목 숭배)하고, 한국에는 막강한 정치인물이 없어 비참하고 애처로움(悲哀)1; 조선족은 한국과 너무 친근함(한국인 체 한다)-10/20%; 인생: 인생 목표 없음(안일추구; 정치 무관심)-10/20%; 기타= 여성 역할 없음3;개인주의1;이기적(自私自利)1;신임할 수 없다1;세 치 보기(안광 협소)1 분석: 두 반급에는 모두 한국 정치를 부정적으로 보는 응답자가 있음. 02년급(학번) 학생 중 20%는 조선족에 대한 인식이 생활습관, 민족성격으로부터 정치면에 쏠리고 있으며 한국과의 친근성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음. 9. 민족의식 92년급(학번) 맹목적 민족 자부심(우월감)-9/40.9% ;배타적-4/18.2%; 기타= 谦虚하지 못함(예: 영어발음이 틀려도 인정 안한다)3;춰주는 말만 좋아한다2; 한국인 傲气2; 한국인 미국 숭배2; 조선인 중국 개혁개방의 부정적인 면만 인식1; 외래어사용 과도1; 한국인 자국제품만 선호1; 조선인 맹목적 자고자대1; 활동범위 협소1; 02년급(학번) 맹목적인 자고자대-32/64%; 배타적-31/62%; 기타= 사대주의2; 경제가 낙후한 나라의 사람을 무시2;세계 제일 우수한 민족으로 자처1;민족 자부심 과도팽창1; 자아중심1; 미국 추종1 분석: 두 반급이 모두 ‘맹목적인 민족 자부심(우월감), 배타성’을 지적하고 있으며 미국숭배와 미국 추종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음. 10. 종교의식 92년급(학번) 传教者들 시끄럽다(종교선전)2;  종교 신앙 과도1; 02년급(학번) 종교 신앙심 과도(맹목 추종)-11/22%; 传教하는 사람 짜증난다3 기타= 종교의식이 강한 반면 자립성 차함2;기독교 신앙이 대부분2; 서구화 엄중2 분석: 두 반급이 모두 종교 신앙에 대해 부정적으로 봄. 11. 중국인식 92년급(학번) 한국인-중국의 정치, 경제를 무시1; 02년급(학번) 중국인식 편면적(부족함)-12/24%; 중국을 낙후하다고 인식-8/16%; 기타= (한국인) 중국의 위대함을 홀시1;중국을 모르면서 자기 나름대로 상상1; 중국제품이 한국보다 못하다고 여김1;중국에 대한 질투심리1; 고대중국은 숭배하나 현대중국 인식 부족1; 조선족은 한국을 선호2; 조선족은 자기들을 키워준 중국 은혜를 망각1 분석: 두 반급에서 모두 상당수가 한국인의 중국 인식이 편면적이라고 인정. 02년급(학번)은 조선족이 같은 민족문화와 혈연관계를 가지고 있는 한국에 대해 너무 친근하다고 불만. 다른 조목과 결부해 보면 상당수가 조선족과 한국의 친근 관계를 아주 엄중한 정치문제로 보고 있음. 12.기타 92년급(학번) 국제무역 등 상업활동에서 信任度 낮다1; 결함이 있어도 우수한 민족이다1 02년급(학번) 중국은 동서 모든 나라 문화의 뿌리1; 한국도 별거 아니다(不过如此)1; 한국인 과분한 자부심을 조금 절제했으면 한다1; 민족 자부심과 열등감 병존1; 소집단주의(맹목적 단결)2; 야만적1, 전횡1; 아주 가증스럽다1 분석: 92년급(학번)에는 결함이 있어도 우수한 민족이라고 인정하는 응답자가 나왔지만 02년급(학번)에는 한국을 과소 평가하고 ‘중국이 동서 모든 나라 문화의 뿌리’라고 강조하는 응답자가 나왔음. 맺는 말   조선어(한국어)학과에서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언어문자만 가르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이 학생들이 앞으로 중한 관련, 중조 관련 일군으로 자라나 쌍방의 친선을 도모하는 主力이 될 수 있는 만큼 민족문화를 정확히 인식시키는 교육에도 힘써야 할 것이다. 이번 조사에서 보면 두 반급 학생들이 모두 상당히 넓은 범위에서 기본적인 민족문화지식을 장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중 92년급(학번)은 민속문화의 내적의미를 깊이 파악하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으며 02년급(학번)은 현대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민족문화의 변화에 대해 보다 즉흥적이면서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주목할만한 것은 02년급(학번)의 인식 변화이다. 이들은 대체로 지난 세기 80년대에 태여난 이른바 ‘신세대’(‘80후’)들로서 조선(한국) 민족문화에 대한 인식은 향후 그들이 종사하게 될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면의 교류사업 성공여부와 관련된다. 이번 조사자료에 의하면 총체적으로 02년급(학번)은 92년급(학번)보다 조선(한국)민족문화중의 긍정적인 면에 대한 인식이 현저히 감소되였고 부정적인 면에 대한 지적이 현저히 증가되였다. 그 원인에 대해 반드시 신중한 연구를 기해야 하겠지만 필자의 미숙한 소견으로는 대체로 아래와 같은 몇 가지로 귀납할 수 있다. 1.어느 민족이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자체 결함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조선(한국) 민족문화와 민족성격 중에도 예외 없이 이러저러한 자체결함이 실지로 존재하고 있다. 이런 결함이 중한 국교가 수립된 해에 대학에 진학한 92년급(학번)에게는 별로 심각하게 인식되지 않았으나 중한 교류가 빈번해진 10년 후에 02년급(학번)에게는 보다 많이 인식되였다고 볼 수 있다. 2. 중국이 날로 강대해지고 있는 시점에서 중국 대학생들에게 자국에 대한 자신감이 강화되였다. 따라서 예전에는 대체로 한국의 발전 모습이 많이 보이던 데로부터 지금은 한국의 단점이 상대적으로 많이 보이게 되였고 ‘한국도 별거 아니다’라는 과소평가가 나온 것이다. 3. 중국 조선족이 중국 공민이면서도 이민민족으로서 조선(한)반도와 밀접한 혈연적 관계와 문화적 연계를 가지고 있는데 대한 이해와 아량이 부족하다. 바꾸어 말하면 해외 중국인(华人), 화교가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로 별로 이상할 것이 없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조선족이 중국의 혁명과 경제건설에 기여한데 대해 한족 학생들이 잘 알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이로 인해 일부 편견이 생길 수 있다. 4.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면 일부 학생들이 설문조사 기회를 통해 일상생활과 전공학과 학습에서의 욕구불만, 좌절감을 해소할 분출구를 찾아 불만을 토로하고  代理만족을 얻으려는 시도가 전반 조선(한국)문화를 부정하는데서 표현되였다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개별적 사람들에 대한 불만을 전반 민족에 대한 부정, 비판으로 대체한 것일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어느 학과를 전공하면 그 학과와 관련문화에 대해 애착심을 가진다고 한다. 이 이치대로라면 조선어(한국어)를 전공하는 학생이면 조선어(한국어)와 유기적으로 관련된 민족문화에 대해서도 애착심을 가지는 게 常理일 것이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여러 면에서 부정적인 정서 반응을 보이고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이외에도 다른 원인이 더 있을 수 있겠지만 독자들의 자체 분석에 맡긴다.   중한관계와 중조 관계는 미래 동북아정세의 변화, 발전에서 그 중대한 변수로 작용할 수도 있다. 중한교류는 보다 늦게 발족하였으나 총체적으로 좋은 방향에로 발전하고 있다고 본다. 중국 조선족은 중화민족의 일원으로서 중국의 혁명과 경제건설에 기여하였고 앞으로도 자체 우세를 발휘하여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특히 중한관계, 중조 관계를 좋은 방향에로 발전시킴에 있어서 교량 역할을 훌륭히 감당할 수 있고 보다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두 나라, 두 민족의 문화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상호 오해를 피면하면서 안정된 국내외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한국)언어문학 교육자들은 단순히 언어, 문학 지식전수에만 몰두하지 말고 학생들의 사상인식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들이 봉착한 실제적인 인식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하며 일부 그릇된 인식과 오해를 제때에 풀어가도록 해야 한다.                                                             2005.6 [이 논문은 2005年 7月에 연변대학교에서 있은 《第9次朝鲜-韩国语言文学教育学术会议》에서 발표되었고 후에 한국 태학사에서 출판한 <중국에서의 한국어 교육(7)>(2007.12)에 수록되었음]
15    문화학과 문학예술의 관계 댓글:  조회:1475  추천:22  2009-01-18
문화학과 문학예술의 관계                       - 문화학 학습 심득(2)  김병활   문화학은 정치학, 종교학, 철학, 민속학, 언어학, 문학예술, 과학기술 등 여러 분야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그중에서 예술과 문화의 관계에 대해 간단히 언급해보기로 한다.   예술은 일종 독특한 문화현상으로서 물질문화, 제도문화, 행위문화, 정신문화 등 문화 자(子)계통가운데서 정신문화 범주에 속한다. 예술발생학의 견지에서 고찰해보면 인류가 창조한 최초의 도구와 최초의 예술은 일치한것이였고 원시도구는 바로 인간의 본질을 대상화한 최초의 예술류형이였다.    예술의 발전행정에서 물질문화는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물질문화는 인류예술의 발전에 필수적이며 현실적인 물질적 토대를 마련해주었으며 일정한 예술형식은 일정한 물질문화 발전상황에 적응되였다. 례를 들면 소설이라는 이 언어예술형식의 발전은 도시경제의 번영 및 제지술, 인쇄술의 발전과 매우 큰 관련이 있었으며 영화라는 종합예술은 광학, 전기기술과 촬영기술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일정한 력사단계에서 물질문화의 발전정도는 해당시대의 예술의 전반 풍모에 큰 영향을 일으킨다. 례컨대 중국 한조시기와 당조시기의 예술은 물질문화가 충분히 발전한 봉건제국의 번영기의 풍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중국고대예술사에서 일컫는 <<성당(盛唐)기상>>이란 바로 물질문화가 발전한 당조흥성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물질생산과 예술생산은 때로는 불균형관계를 가진다. 례를 들면 독일은 18세기경에 경제가 매우 락후했으나 오히려 위대한 문학예술을 창조하였다.   물질문화뿐만아니라 정신문화도 예술에 대해 막대한 영향을 일으킨다. 종교와 예술의 관계를 고찰해보면 예술이 종교에서 기원되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이런 주장이 전적으로 정확하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원시종교가 산생된후 인류의 예술이 신속히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현실세계를 떠나 가상의 세계를 다루고 있는 종교는 인류의 상상력을 지대하게 자극하여 예술에 상상의 날개를 달아주었다. 리백 시가의 랑만주의적 상상력은 도교사상과 내재적인 련계가 있으며 레브 . 똘쓰또이의 <<부활>> 등 거작에는 작자의 열렬하고도 경건한 기독교(동정교)적 정서가 흘러넘치고 있다.   철학도 예술에 큰 작용을 하고 있다. 철학은 인류가 세계와 자신을 인식하는 사상 성과인바 인류의 예술창조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일정한 철학의식은 특정시대의 예술창작의 사상적기초로 되며 한 시대의 예술적 풍모를 결정한다. 17세기 리성주의 철학은 고전주의문학의 사상적기초로 되였고 서방 현대 비리성주의 철학사조는 서방현대주의(모더니즘)예술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문화는 예술의 내용과 형식에 대해 모두 작용하는바 제재의 선택, 주제의 표현, 구성의 형식, 쟝르의 지위, 예술창조방식, 예술의 미학적 풍모 등은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술은 일종 중요한 문화현상이기에 문화학은 예술을 연구하지 않을수 없다. 예술문화연구는 일찍 기원전부터 서방에서는 플라톤이 중시하였고 동방에서는 공자가 의론하기 시작하였다. 현대적의미를 갖춘 예술문화학 연구는 19세기 중반에 문화인류학에서 예술의 기원을 과학적으로 밝힘에 따라 계통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19세기 60년대에 프랑스의 저명한 미학가, 문예리론가인 테느의 저작 <<예술철학>>에서 집중적으로 반영되고 있다. 테느는 <<예술철학>>에서 예술발전의 세가지 요소는 “인종, 환경, 시대”라고 제출하면서 하나의 예술품, 한 예술가, 한 부류의 예술가들을 리해하려면 반드시 그들이 속한 시대의 정신적 풍모와 풍속습관을 정확히 파악해야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희랍예술을 연구할 때 희랍의 풍속, 종교, 륜리 등 제반 문화요소로부터 착수하여 그 예술전반을 설명하려 하였다. 테느가 계통적으로 제출한 원칙과 방법은 후세의 예술문화학 연구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물론 테느의 예술문화학 연구는 문화환경이 예술에 끼치는 영향을 너무 강조하고 예술자체의 독특성을 어느 정도 홀시한 결함을 갖고 있다.   이에 반발하여 몇십년 이후에 로씨야 형식주의, 신비평, 구조주의 등 예술내부연구방법이 나타났다. 하지만 예술작품을 사회, 력사와 리탈한, 독립적이고 봉페된 계통으로 간주하면서 내용에 관한 과제를 포기하고 단순히 내부조직구조로 예술작품을 해석하려는 구조주의 비평방법도 뚜렷한 결함을 갖고 있다.   예술문화학연구가 재차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된 것은 20세기 50-60년대였다. 이 시기에 문화인류학연구가 한층 발전하였고 정신분석학 특히는 칼.융의 집단무의식학설과 카나다 문예리론가 프라이의 원형비평방법이 제출되였으며 프레이저의 저작 <<황금의 가지>>도 세계적으로 광범한 영향을 일으켰다. 이리하여 예술문화학연구의 열조가 다시 일어났다. 연구자들은 예술이 일종 문화현상인 이상 그 자체의 독특한 운행법칙을 연구하는 외에 반드시 예술을 사회문화 대계통속에 놓고 고찰해야 한다고 인정하였다.   이밖에 예술문화학연구의 흥기는 20세기부터 발전하기 시작한 비교문학연구와도 관련이 있다. 비교문학연구에서는 부동한 민족문학의 공통성과 독특성을 구명하기 위하여 부득불 각 민족의 독특한 문화발전과정속에서 그 문화적 근원을 탐색해야만 하였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여 일부 연구자들은 반드시 독립적인 예술문화학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중국은 근년에 문학예술 연구방법면에서 서방에서 백여년 동안 걸어온 행정을 따라잡고 있다. 그중 예술문화학적연구는 목전 국내에서 광범히 중시를 받고있는 일종 예술연구방법이다. 이 방법이 각광을 받게된 데는 또 심각한 문화적 원인이 있다. 현대중국인들은 개혁개방의 조류속에서 유구한 문화전통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힘겹게 새로운 문화창조를 진행하고 있다. 고유의 문화전통을 어떻게 리해하며 외래문화를 어떻게 대할것인가하는 문제는 모든 중국인들이 직면한 시대적과제로 되었다. 중국 당대(當代)의 예술연구도 사실상 이 문제에 대해 자기 나름의 해답을 하여야한다.    20세기 80년대 중반에 중국문단에는 민족문화전통의 뿌리를 찾고 문화심리를 탐색하는 <<뿌리찾기>>문학이 대두하였다. 이 문학사조의 흥기는 우연한 것이 아니였다. 개혁개방이후 중국은 현대화를 실현하는 과정에 전통과 현대, 동방문화와 서방문화의 충돌이 첨예하게 나타났다. 작가들은 <<반성소설>>을 창작하면서 전통문화, 특히 장기간 침적된 문화심리구조가 현대화과정에서 거대한 작용을 한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따라서 정치와 력사를 반성하던데로부터 문화를 반성하는데로 전환하였고 또 경제변혁을 중시하던데로부터 문화변혁을 중시하는데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서방 현대파(모더니즘)문학을 모방한 작품들이 중국대중들의 공명을 일으키지 못하게 되자 작가들은 눈을 서방으로부터 동방에로 돌리고 민족문화의 토양에 뿌리를 박은 민족문학을 육성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이밖에 라틴아메리카의 마환(魔幻)사실주의문학의 성공은 중국작가들을 자극하였고 문학의 민족성과 세계성의 관계를 정확히 대할수 있게하였다.   <<뿌리찾기>>소설창작은 우선 민족문화와 지역문화에 대한 발굴 작업을 하였다. 그들은 현대문명과 멀리 떨어진 편벽한 지역의 문화를 발굴하면서 천백년 동안 형성된 행위관념과 생존방식을 제시하였다. 례를 들면 한소공의 상서초(湘西楚)문화소설, 아성의 도교불교(庄禪)문화소설, 리항육의 오월(吳越)문화소설, 장승지의 중아(中亞)초원문화소설, 가평요의 상락산구의 진한(秦漢)문화소설, 정만륭과 우럴투의 동북 흥안령문화소설, 짜시다와의 서장문화소설 등은 풍부하고 다채로운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뿌리찾기>>소설은 문화전통과 현대인의 정신심리구조의 관계를 탐색하였다. 이런 소설들은 인물형상부각에서 현대인에 대한 문화전통의 속박을 제시하는가하면 문명의 억압 밑에서도 원시적 생명 형태를 보존하고 발양하려는 욕구를 반영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령혼과 육체, 감성과 리성의 분렬로 인한 현대인의 고통을 조명하였다.   목전 예술문화학을 포함한 우리의 문화학은 아직 형성단계에 처해있으며 리론상, 실천상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실천가운데서 부단히 탐색하고 과학적인 연구를 거듭한다면 우리민족의 특색을 가진 문화학이 새롭게 형성될 날이 멀지않을 것이다.   (이 글은 ‘문학과 예술’ 2001년 제1기에 발표된‘문화학-변혁시대의 신흥인문사회과학’중에서 발췌한것입니다.)
14    [창작시]숙명(외 1수) 댓글:  조회:1480  추천:25  2009-01-18
[창작시]숙명(외 1수)김병활 젊은 시절의 꿈 하나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서재 한칸 그것만 있으면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될것 같았다 수십년뒤 할아버지 다 되여  그 꿈 이뤄졌는가  늙어빠졌다는 소리가 들릴 즈음에   바라던 서재가 차려졌다 그런데 어느날 손자가 생기면서  거실을 내주고 이 서재로 옮겨와  나는 홀로 살게 되였다 서재 방바닥에 혼자 누워 침대도 없이 책장으로 꽉 들어찬 네 벽과  백지 같은 천정을 멍하니 바라본다  문득 고대 제왕의 릉묘(陵墓)속에  누워있는것만 같았다 살아서 책과 씨름하고도 모자라  이제 어디까지 끌고 가야 하나  서재에 혼자 누워  순장품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이 역시 숙명인가 생각해본다 나그네와 기타                                먹장구름 아래로 찬바람 불어치는데 줄 끊긴 기타를 간신히 짚고  물가에 하염없이 서있는  저 나그네 휘청거리는 그 모습 물우에 비낀 흐트러진 그림자마냥  몽롱해진다 하늘과 땅 사이에 지음은 어디로 갔느냐  지친 나그네의 지팽이런듯 기타는 입만 다물고 서있는데   반백이 되여 휘날리는  장발을 스치며  바람소리 들려온다 외로운 저 나그네 오늘도 마냥 물가에 서서 산너머 저 멀리 바라본다 지팽이인양 기타를 짚고 (연변문학 2006년 2월호)
13    여추우 등의 학자수필 댓글:  조회:2427  추천:35  2009-01-07
중국 개혁개방 이후시기 수필 문학(3) 여추우 등의 학자수필                            1980-90년대의 산문(수필)창작에서 나타난 중요한 현상은 <<학자산문>> 혹은 <<문화산문>>이라고 불리운 수필이 산생된것이다. 이런 산문(수필)의 작자들은 대부분이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였는데 그들은 과외시간에 학자적인 리성적사고와 개인의 감수를 표현하는 것을 융합시킨 글들을 썼다. 학자산문의 출현은 현실문제와 문화교류에 참여하려는 학자들의 새로운 취향을 보여주었다.   중국은 고대에 <<문인문장 (文人之文)>>과 <<학자문장>>의 구별이 분명치 않았다. 후에 현대지식의 전문화와 학과건설의 발전에 따라 <<학자>>와 <<작가>>의 계선은 점점 더 명확해졌다. 문학은 정감과 감성체험을 표현하는 형상적사유로 인정되여 학술연구의 추상적사유와는 본질적인 구분이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런 명확한 분계선은 사실상 문학창작과 인문과학의 발전에 모두 불리하였다. 때문에 학자들이 이 분계선을 넘어 문학창작에 종사하는 것은 매우 주목할만한 현상이였다. 80년대에 보다 일찍 산문창작에 참여한 학자들로는 김극목, 장중행 등 권위성을 가진 학자들이였다. 90년대 초반에 예술문화사와 희곡미학연구에 종사하던 여추우가 <<수확>>지에 특별란 형식으로 산문을 발표하였는데 후에 <<문화고행(文化苦旅)>>, <<문명의 단편(文明的碎片)>>으로 묶어 출판하여 매우 큰 반향을 얻었다. 일부 영향력 있는 간행물과 출판사에서도 의도적으로 이런 문체의 창작을 추천하여 학자산문의 흥기를 추진하였다.    학자산문의 작자들은 모두 비교적 풍부한 학술수양을 갖고 있으며 학술지식과 리성적사고를 산문에 융화시켜 표현하였다. 그들은 산문의 문체적규범을 별로 중시하지 않았고 산문을 학문연구 이외의 자아표현과 현실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일종 형식으로 간주하였다. 례를 들어 여추우는 자기를 아마추어 배우(票友)라고 불렀고 진평원은 칼럼을 쓰는 것을 인간의 정감과 회포를 유지해가는 특수한 경로라고 하였다. 많은 학자산문이 인기를 얻을 수 있은 것은 그 서술형식이 아니라 문장에서 담론한 내용이였다. 그러나 이런 담론은 문화에 대한 작자의 관심과 개인적감수를 결합시켰기에 문자표현면에서 매우 생동하였고 개성이 뛰여났다. 이런 학자들의 창작은 비교적 자유로웠기에 전반 산문창작에 새로운 요소를 주입하였다. 학자산문의 풍격은 거개 감정을 절제하는것이였는데 보통 지혜가 넘치는 유모어로 정감의 평형을 유지하였다. 학문지식의 침투는 산문으로 하여금 특수한 사상적심도와 정감의 무게를 갖게하였다. 이런 산문, 수필이 잡문과 다른 점은 <<식(识)>>에 치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정(情)>>과 <<리(理)>>를 강조한 것이다. 때문에 일부 리론가들은 이를 <<문화산문>>, <<철리산문>>이라고 불렀고 혹은 <<산문창작에서의 리론적간여>>라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장중행(张中行,1909--  )는 하북성 향하현 사람으로서 30년대에 북경대학을 졸업하고 중학교와 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건국이후에는 인민교육출판사에서 근무하였다. 그는 80년대 초반에 륙속 지난날을 추억하는 수필을 썼다. 그 주요내용은 30년대 초반의 북경대학을 중심으로 옛일과 옛친우들에 대한 이야기를 쓴것인데 후에 <<부훤쇄화(负喧琐话)>>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어 출판하였다. 그후 륙속 같은 류형의 산문을 써내여 <<부훤속화(负暄续话)>>, <<부훤3화(负暄三话)>>와 <<흘러간 세월의 쪼각난 그림자(流年碎影)>> 등 산문집으로 묶어 출판하였다. 장중행은 고대한어의 <<부훤(负喧, 해볕을 쪼이면서 한담하는것)>>이라는 단어를 빌어 산문집의 제목을 달았는데 여기에서 그가 추구한 창작풍격을 대략 짐작할수 있다. 즉 시와 력사의 필치로 한적하고 따사로운 정취를 전달하려는것이였다. 장중행은 주로 언어문자연구에 종사하였으나 흥취가 다양하고 고금중외의 지식을 널리 설렵하였기에 <<잡가>>라고 불리웠다. 그의 수필은 력사인물과 력사사건 및 그 전고에 대해 상세히 소개하였고 거기에 대한 의론도 단아한 리성과 정취를 풍기는 문화적품위를 보여주었다. 그의 이런 수필은 한 시기 매우 큰 인기를 얻었는바 일부 비평가들은 심지어 <<현대의 <세설신어(世说新语)> >>라고 비유하기도 하였다.    김극목(金克木,1912--  )은 안휘성 수현 사람이다. 1935년에 북경대학 도서관에서 근무하였고 1941년에 인도에서 류학하였다. 1948년에 북경대학 동방언어학부에서 교편을 잡았다. 김극목은 범문연구 전문가, 번역가로서 인도의 종교, 철학, 문학과 언어에 대해 매우 깊은 조예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30년대에 현대파(모더니즘) 시인이였는데 80년대에는 주로 산문을 썼다. 그의 산문은 타계한 사람과 기왕사를 쓰기도 하였지만 주로 사상수필을 많이 썼는바 독서필기, 문화단평, 문헌고증 등 많은 내용을 언급하였다. 그의 산문은 보통 하나의 의제로부터 출발하여 풍부한 지식을 활용하여 활약적인 사유, 풍부한 지혜와 유모아적인 문풍을 표현하였다. 그는 문제를 담론할 때 대부분 일정한 학술적취향이 있었다. 즉 자기의 인생경력과 동서양의 력사, 철학, 종교, 문학 등 여러면의 지식을 결부시켜 자유롭게 서술을 진행하였으나 인용된 재료와 도출해낸 결론은 모두 엄밀한 과학성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일부 비평가들은 그의 산문의 특징을 <<산문소품의 학술화>>라고 지적하였다. 그의 산문언어는 소박하고 구두어에 가까우며 또 자연스럽게 고대한어의 어휘와 구절형식을 가첨하였다. 그리고 정감을 쉽게 표출하지 않았고 산만해 보이는 필치에서는 세상사를 통찰한 학자의 예지를 보아낼수 있다.                           여추우(余秋雨,1946--  )는 절강성 여도현 사람이다. 1966년에 상해희곡학원 문학학부에 입학하였고 졸업한후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일찍 상해연극학원 원장, 상해습작학회회장을 담임한 적이 있다. 90년대 초부터 학술에 몸을 담고 《희곡리론사고(戲剧理論史稿)》,《희곡심미심리학(戲剧审美心理学)》,《중국희곡문화사(中国戲剧文化史)》,《예술창조공정(艺術创造工程)》등 학술저작을 출판하였다. 그후 산문(수필)창작을 시작하여 《문화고행(文化苦旅)》,《산거필기(山居笔记)》 등 산문집과 《문명의 단편(文明的碎片)》,《추우산문(秋雨散文)》등 선집들을 펴냈다.   여추우는 학자로부터 수필가로 된 개성적인 산문가이다.《문화고행(文化苦旅)》은 그가 《수확(收获)》에 발표한 계렬 산문인데 그의 말대로 하면 산수고적을 빌어 역경에 처했던 중국문인들의 고행과정을 탐구한다는 무거운 문화화제에 관심을 두었다. 《문화고행(文化苦旅)》은 1991년에 출판되자 인차 문단을 크게 진동하여 엄숙한 산문(중수필)의 발행기록을 창조하였다.   여추우의 산문집 <<문화고행(文化苦旅)>>, <<문명의 단편>>에 실린 산문들은 거의 기행문 형식으로 문화에 대한 사고를 표현하였다. 그는 산문에서 명승고적을 유람한 후의 감수를 쓴 동시에 그것과 관련된 문화, 력사 지식을 소개하고 민족문화에 대한 사고를 전달하면서 인간, 력사, 자연을 하나로 융합시켰다.   여추우의 산문은 강렬한 문화반성의식을 갖고 있는바 흘러간 력사에 대한 추억으로 문화와 산수의 변천을 개탄하였고 고대문화의 흔적에서 지식인의 사명과 운명을 사고하고 탐구하였다. 여추우는 비록 대량의 문화사지식을 운용하였지만 산문을 간단하게 <<문화 + 산수>>모식으로 쓰지 않았고 <<인간의 기(人气)>>를 더 강조하였다. 즉 작자의 문화적사고와 개인적 체험을 눈앞의 경관에 융합시켜 <<인간과 산수의 교감>>을 이루었다.  《문화고행(文化苦旅)》와 《산거필기(山居笔记)》에 실린 일련의 산문가운데서 독자들에게 심각한 인상을 준것은 그의 문화우환의식이다.   여추우는 당대 중국예술사를 연구하던 학자였는데 장시기에 걸친 문학과 사학에 대한 연구는 그로 하여금 풍부한 문화학문수양을 쌓게 하였으며 그의 독특한 예술재능을 쌓고 발휘하게 하였다. 중국의 문화는 력사가 유구하고 너무 방대하고 웅위하기에 혼란되기 쉬웠지만 여추우의 학문과 수양은 이 점을 통찰할수 있게 했다. 중국문화에 대한 여추우의 감정은 매우 복잡하였다. 한면으로 그는 문화에 대해 찬미하였고 다른 한면으로는 중국문화에 대해 우려와 탐구의 눈길을 보냈다. 《문화고행(文化苦旅)》의 개편(开篇)인 《도사탑(道士塔)》과 《막고굴루(莫高窟樓)》에서는 한 방면으로 찬란한 중국문화에 의해 자부와 긍지를 느끼며 동시에 침울한 어조로 막고굴루(莫高窟樓)가 략탈 당함을 서술하였는바 이런 모순된 심경으로 작자는 중국문화에 선진과 락후가 병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유감스럽게 표현하였다.《향관은 어디에(乡关何处)》에서 그는 7000년전 하모도 고향의 문명과 한 고향사람인 왕양명(王阳明),황종희(黄宗羲)등 학자들에 대해 자호감을 느낀 동시에 <<고향이 명성을 날린 유구한 력사에는 누구도 가릴수 없는 몽매함과 야만성이 내포되여 있었다.>>라고 지적하였다. 《필묵제(笔墨祭)》에서 그는 한대의 붓에서 <<존경스럽지만 애석하기도 한 중국문화>>를 계승하기 좋아하는 보수적인 요소를 보아내였다.     여추우의 문화우환의식이 형성된 다른 원인은 고금문명의 대비에 있다. 《청운보수상(青云谱随想)》에서 서위(徐渭),원제(原济) 등 격정이 흘러넘치는 화가들로 하여 자부심을 느끼는 동시에 정직하고 철저한 생명을 체현한 <<현대예술가는 어디 있는가?>>를 질문하였다. 《천년정원(千年庭院)》에서 작자는 <<인류의 정체성 소실 특히 문화인격면에서 우리가 주희(朱熹),장목식(张木式)이 생활했던 시대와 도대체 얼마 진보하였는가?>>라고 질문을 던지고 있다. 《서호의 꿈(西湖梦)》에서 작자는 엄숙하게 질문은 하지 않았지만 백낭자(白娘子)가 <<사람이 되기>> 위해 운명과 박투함은 현대인들에게 <<인간>>의 가치에 대한 적극적인 사고를 계발해준다고 지적했다. 이런 글들은 현대의 한 지식인과 전통문화사이에 진행한 한차례 대화라고 할수 있다.   여추우 산문의 두번째 특징은 농후한 력사감이다.   학자산문의 일반적 특징은 <<사(史)>>에 대한 중시인데 여추우가 다룬 <<력사>>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것이 아니다. 그의 산문은 인문산수로부터 출발하여 문화에 대한 사고로 귀결되는데 력사는 단지 문화의 부착물(附丽物)이였다. 《도사탑(道士塔)》,《막고굴(莫高窟)》은 돈황의 력사를 썼고 《한 왕조의 뒤모습(一个王朝的背影)》은 청조 시초로부터 자희태후에 이르기까지의 력사를 썼고 《10만 진사(十万进士)》(상,하)는 천년동안 시행되였던 과거제도를 썼다. 이외에도《양관설(阳关雪)》,《류후사(柳侯祠)》,《청운보수상(青云谱随想)》,《페허(废墟)》,《류배자의 땅(流放者的土地)》,《취약한 도시(脆弱的都城)》,《산서의 부끄러움(抱愧山西)》,《소동파의 포위돌파(苏东坡突围)》등 많은 수필작품들에서도 력사를 다루고 있다. 그가 다룬 력사는 그의 심미적 안광으로 려과된 력사인바 그의 말대로 하면 력사를 마음속으로 <<느끼여 터득한다>>는 것이다. 그는 《문화고행. 서언(文化苦旅、自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옛사람들이 섰던 그 자리에서 선인들과 비슷한 안광으로 변화가 거의 없는 자연경치를 바라보고 있으며 천여년 전과 똑같은 바람소리, 새소리를 듣고 있다 …… 대지는 아무 말도 없지만 리해력이 있는 문인 한두 사람이 그 앞에 서기만 하면 오래동안 보존해온 문화적 내포를 한꺼번에 쏟아낸다 … >> 여기에서 력사에 대한 회억과 추적은 일종 마음속 감수를 전달하는 넓고 큰 장소라는것을 알수 있다.   여추우산문의 다른 하나의 돌출한 특징은 산문가운데서 표현된 그의 리성적정신이다. 여추우는 학자이기도 하고 시인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중국전통문화에 많은 격정을 쏟아 부었으며 동시에 학자로서의 리성은 그로하여금 감정의 범람을 조절할수 있도록 하였다.《산서의 부끄러움(抱愧山西)》에서 그는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력사자료를 인용하면서 지금 빈곤한 산서성은 원래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였고 18세기와 본 세기 초에는 줄곧 전국 금융중심이였는데 후에 락후해진 원인은 <<18세기중엽이후부터 련속된 급진주의적 폭력충돌 때문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폭력충돌이란 주로 태평천국운동, 신해혁명 그리고 그후의 군벌혼전을 가리킨다. 《소동파의 포위돌파(苏东坡的突围)》에서 <<세계 급의 위대한 시인>> 소동파는 소인들의 무함으로 먼곳에 류배하는 과정에 간곳마다 조리돌림을 당하였다. 그는 극도로 렬악한 상황에서 자신의 설자리를 애써 찾는다. 이는 이미 지나간 일 같지만 민족의 치욕이라는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런 대목에서 독자들로 하여금  <<4인방>>이 광분할 때 지식인들이 겪은 <<문화대혁명>> 동란의 세월을 련상케 하였다.   《산거필기(山居笔记)》에 수록된 《한 왕조의 뒤모습(一个王朝的背景)》은 그의 창작수준을 가늠할수 있다. 이 산문의 가장 선명한 특징은 기세가 드높고 기백이 강건하다는것이다. 작자는 다른 작가들이 보통 다루지 않고 있던 승덕별장(承德山庄)을 썼는데 주로 청왕조의 강희황제로부터 자희태후에 이르기까지의 흥망성쇠의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방대한 청왕조가 어떻게 공부도 하지 않아 지식도 없고 아무런 공훈도 없는 한 여자의 손에서 패망하는가를 쓰면서 그런 환경에서 한족지식인들이 청조에 대해 반항하던 데로부터 화해하고 도피하며 인정해 버리는 내심세계를 기술하였다. 작자는 글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강희황제의 정치적위업과 군사적위업이 파멸된후에도 그에 대한 문화적 인정만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리하여 왕국유(王国维)선생은 죽음으로 그것을 추모하였다 … 그런데 왕국유 선생이 추모한 것은 전반 중국 전통문화이며 청조는 다만 그 중의 한 지침돌이였다.>>   여추우의 산문이 독자들의 환영을 받은것은 주로 작자가 부단히 변화, 발전하는 민첩한 사유를 표현하고 화려한 수필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념노교. 적벽회고(念奴娇  赤壁怀古)》와《적벽부(赤壁赋)》,《소동파의 포위돌파(苏东坡突围)》,《향관은 어디에(乡关何处)》등 수필에서 이런 특징이 잘 드러나고 있다.   여추우 산문의 또 하나의 특색은 소설식 서사형식을 취한데 있다. 《문화고행(文化苦旅)》의 제1편 《도사탑(道士塔)》는 경물묘사로부터 시작하여 간간이 세절묘사를 끼워 넣어 처음 돈황의 도사탑을 볼 때의 심리변화과정을 기술하고 있다.《류후사(柳侯祠)》《려산(庐山)》《백발이 된 소주(白发苏州)》《청운보수상(青云谱随想)》《삼협(三峡)》에는 풍아한 문사와 각양각색 명인들의 숨은 일화와 기문을 소설식으로 쓰고 있다. 후기 작품 《소동파의 포위돌파(苏东坡突围)》등에도 선명한 형상성을 보이고 있다. 이는 그의 산문으로 하여금 리성적 사고를 표현한 동시에 독자들을 흡인하는 매력이 고갈되지 않게 하였다.   여추우의 산문에도 일부 결함이 존재한다. 례컨대 그의 일부 산문에는 력사와 사실이 어긋나고 지나치게 문장의 기세와 절주를 따졌기에 때로는 정감표현이 너무 과장된 감을 주었으며 또 일부 문장들의 구성은 격식화된 현상을 보이고 있다.    왕소파(王小波,1952--1997)는 북경사람으로서 1968년에 지식청년으로 운남성 농촌에 내려갔다. 1978년에 중국인민대학 무역경제학부에 입학하였고 1984년에 미국에 류학하여 석사학위를 획득하였다. 귀국한후 북경대학과 중국인민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1992년부터 자유 기고인으로 되었다. 1997년에 병으로 북경에서 세상떴다. 왕소파의 수필은 리성과 자유를 견지한 문화적립장과 생동하고 활발한 문풍으로 하여 90년대에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짧은 문장들은 잡문에 보다 가까웠는바 문제의식이 매우 강하고 구체적인 문화사상문제에 비추어 창작하였으며 풍자, 조롱, 욕설을 통해 자기의 태도를 표현하였다. 그의 사유방식은 매우 독특한바 흔히 한 가지 이야기거나 재미있는 개인의 경력을 통해 문제토론에 들어가고 수시로 기민하게 관련문제에 대한 평론을 삽입하였다. 왕소파는 산문창작에서 <<재미>>를 특별히 강조하였는데 유모아적 어구와 북경구두어를 활용하여 독특한 서술방식을 창조하였다.            이밖에 문단에서 각광을 받은 학자산문들로는 진평원(陈平原)의 <<학자의 인간적회포(学者的人间情)>>, <<선비의 기질(书生意气)>>, 류소풍(刘小枫)의 <<우리세대의 <두려움>과 <사랑>(这1代的怕与爱)>>, 조원(赵园)의 <<창문아래에서(窓下)>>, 경점춘(耿占春)의 <<관찰자의 환각(观察者的幻影)>>, 륙건덕(陆建德)의 <<참새의 울음소리( 麻雀啁啾)>>, 주국평(周国平)의 <<인간과 영구성(人与永恒)>> 등이 있다. 2001.3
12    로씨야 연해주 관광기행(1) 댓글:  조회:2135  추천:27  2008-11-13
  로씨야 연해주 관광기행(1) 목차 1. 불라지보스토크 지명유래와 력사 2. 기나긴 로정 3. 중국인 관광객 급증 4. 장령자 세관을 지나면서 느낀 문화차이 5. 려객선에서 본 불라지보스토크 야경 6. 불라지보스토크(해삼외) 사람들 7. 군사 요새와 박물관 8. 레닌광장과 동정교 교회당 9. 관광객들로 번성하는 유흥업 10. 중국, 한국, 일본의 부동한 자세   2002년 ‘5.1’국제 로동절 련후 기간에 필자는 대학교 동료 교수들과 함께 3박4일로 로씨야 연해주 수부 불라지보스토크를 관광하였다. 비록 주마간산 식으로 대충 돌아보았으나 연변 지척에서 경이로운 이색적 ‘서양문화’를 체험한다는 것이 아주 인상적이였다. 지금 다시 연해주로 관광을 간다면 이전과 다른 새로운 인상을 갖게 될것이지만 몇해전에 적어 두었던 문학적 표현을 배제한 제강 식 글을 거의 그대로 발표한다.    1. 불라지보스토크 지명유래와 력사   불라지보스토크는 로씨야 련방 연해주의 수부(首府)로서 태평양연안의 유명한 항구이다. 이곳은 원래 중국 령토였는데 중국 지명으로는 해삼외(海蔘崴), 즉 해삼이 많이 나는 곳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일찍 발해국 시대에 일본과의 무역과 문화교류가 활발했던 곳이다. 로씨야 연해주박물관 해설원의 말에 따르면 11세기 이전까지는 녀진족이 살다가 원조시기에 몽골인들이 들어오자 녀진족은 원시림에 도망갔다고 한다. 13세기경에 원조의 멸망과 함께 몽골인들이 물러가자 녀진족이 다시 이곳에 정착하였는데 그후 청조의 판도에 들어갔던 해삼외는 1860년 <중로북경조약>에 의해 로씨야 판도로 들어갔다는것이다.   로씨야는 이곳을 점령한 후 지명을 불라지보스토크로 고쳤는데 그 뜻인즉 <동방을 통치>한다는 것이다. 역전 맞은 켠 레닌광장에 세워진 레닌동상이 바로 이런 의미를 다분히 담고 있는데 레닌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이 곧바로 중국과 조선이였다. 사실상 짜리로씨야거나 쏘련이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동방에 대한 자기들의 영향력을 줄곧 과시하려하였다. 어쩌면 뾰트르1세 등 짜리황제의 령토 확장 욕망이 이미 로씨야인들의 집단무의식으로 되어 공산주의자들에게도 굳어진 사유 관성(慣性)으로 되었는지도 모른다.   바다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구라파 해양민족은 일찍부터 손써 해양 원항탐사를 하였고 강력한 함대를 건설하여 식민지 확충에 주력하였다. 이리하여 영국과 같은 작은 나라는 나중에 <일불락국(日不落國)>으로 부상되었다. 로씨야는 원래 내륙 국가였으나 통일된 봉건집권제국가로 된후 출해구(出海口)를 돌파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리하여 북쪽으로는 빨찍해 출해구를 탈취하기 위하여 스웨덴 등 북구라파나라들과 전쟁을 벌렸고 서남쪽으로는 흑해에서 지중해로 나가는 출해구를 얻기 위하여 터키(土耳其)와 전쟁을 하였다. 그들은 또 우랄산맥을 넘어 시베리야를 점령한 후 베링해협을 건너 지금의 알라카스카까지 점령하였는데 후에 그 땅을 720만 달러를 받고 미국에 팔아버렸다. 흑룡강과 우쑤리강 연안을 강점할때도 중국에 출해구를 하나도 주지 않아 중국 동북지구는 바다를 지척에 두고도 나가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2. 기나긴 로정   불라지보스토크는 로씨야 련방의 수도 모스크바와 9288 km나 떨어져 있고 본지에서 사용하는 시간은 모스크바시간보다 7시간 빠르다. 모스크바사람들은 이 연해주를 자기들의 생활에 별로 영향력이 없는 아득한 세상으로 여길 테지만 우리들에게는 지척에 있는 가까운 고장이다. 연길에서 2시간정도로 뻐스를 타고 가면 훈춘에 이르고 거기에서 15분도 안 되여 장령자 해관(세관)에 이른다. 효률성이 낮은 로씨야 세관검사를 거치고 로씨야 경내에 들어선 후 2시간정도 뻐스로 크라스지노, 자루비노항 등지를 경유하여 인구 3만인 작은 항구 스라브양카에 이른다. 거기에서 간단한 <점심식사>를 하고 100명좌우 사람이 탈수 있는 작은 려객선을 타고 2시간 반 정도 가면 (현대화된 汽船이면 한 시간 정도 걸리는데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리용하고 있다) 목적지인 불라지보스토크에 도착한다. 우리 관광객들은 이 거리(距離)를 정확히 알수 없지만 6시간의 거리는 대략 예전에 연길에서 백두산으로 가는 로정일 것이다. 로씨야는 이처럼 지척에 있는 나라이다. 물론 수속이 번잡하여 실지로는 거의 12시간이 걸렸는데 연길에서 아침 7시에 출발하여 저녁 7시경에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그중 선 자리에 머물러 있은 시간은 훈춘시내에서  한 시간, 장령자 세관에서 3시간 반, 스라브양카에서 한 시간이다. 3. 중국인 관광객 급증   개혁개방이후 연변은 금삼각이라고 불리우고 있지만 많은 연변사람들은 지척에 있는 로씨야에 가보지 못하였다. 개혁개방이후 시장경제의 도입으로 인한 국제 경제교류의 강화와 인민대중들의 생활수준의 향상에 따라 의식주를 해결한 뒤 관광에 대한 흥취가 날로 높아가고 있다. 금년(2002년) <5. 1> 련후 기간에 연변과 수분하를 통해 로씨야 연해주 소재지 불라지보스토크에 관광을 떠난 사람들이 급증하였다. 4월 30일 하루사이에만 하여도 훈춘을 경유하여 로씨야로 간 관광객은 무려 900여명을 초과하여 1000명에 박근하였다고 한다. 실지로 불라지보스토크에 가보면 간곳마다 중국인 관광객이 붐비였는데 이에 대비해 상점, 유흥장소, 관광명소에서 일보는 로씨야 사람들은 중국어를 몇 마디씩 할줄 알았고 밖에서 기념품을 파는 사람들도 모두 중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그리고 중국인들이 경영하는 중국 료리집도 여러 곳 있었고 자유시장에 가면 중국인 장사군들이 아주 많다고 한다. 이곳은 1950년대 후반부터 근 40년간 거의 페쇄된 상태에 있다가 개혁개방이후 경제문화교류를 강화하면서 이 지구에서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지역으로 되었다.   중국과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은 이 땅을 밟으면서 거개 착잡한 심리를 갖게 된다. 중국인들은 이 고장의 이국적인 풍경을 감상하면서 이처럼 살기 좋은 곳을 공손히 내준 청조정부를 타매하였고 조상들의 무능함을 개탄하였다. 특히 페쇄적인 봉건국가가 바다의 중요성을 전혀 모른채 두만강 출해구마저 포기하고 오늘에 와서는 남의 항구를 빌어 항해운수와 관광사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를 애타하였다. 이런 콤플렉스가 있었기에 중국정부는 본래 이 고장에 설치했던 령사관을 하바롭스크에 옮겨갔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에 이미 9개 나라에서 령사관을 설치한 상황을 감안하면 중국인들의 착잡한 심리를 짐작할수 있다. 그리고 중국지도에 불라지보스토크를 여전히 <해삼외>라고 괄호 안에 표기하고 하바롭스크를 여전히 <백력>이라고 괄호 안에 표기하는 것은 이 땅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는 심리를 가늠할수 있을 것 같다.   이 고장은 조선인들과도 력사적으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저들의 식민지로 만들자 많은 조선인들은 이 고장에 이주하였는데 1930년대에 이르러 30여만의 <고려인>(조선인)들이 살고 있었고 따라서 이 지방은 조선독립운동의 근거지로 되었다. 안중근 의사도 일찍 이 지방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고 유명한 독립투사인 홍범도장군도 이 고장에서 독립활동을 전개하였다. 처음에 쏘련 정부는 이곳의 조선인들에게 비교적 관용적인 포용정책을 실시하였는바 조선인들은 자유롭게 자신들의 문화를 보존, 향수할수 있었고 비교적 완비한 교육체계도 갖추고 있어 조선인사범대학도 설립되여 있었다. 유명한 조선시인 조기천도 바로 이 대학에서 교수로 있었다. 그런데 1930년대에 일본군이 이 지역에 간첩을 많이 파견하였고 무장도발의 위험 수위가 높아지자 쏘련 정부는 일본인과 조선인은 생김새가 비슷하여 간첩과 무장 공작대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리유로 중앙아세아에 강제이주를 시켰다. 그 로정이 먼데다가 추운 겨울에 철도로 유개화물차를 타고 한달 이상 고난 속에서 헤매다보니 얼어 죽고 병들어 죽은 사람이 몇만명이나 되었고 철로연선에는 기차에서 그대로 버려진 조선인 시체가 널려있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거의 연변과 다름없이 조선인이 많았던 곳에 인젠 황페한 페허만 남게되였다. 최근 중아아세아에서 살길을 잃은 일부 조선인 후예들이 다시 옛 고장을 찾아와 간고한 창업을 다시 시작하고 있다. 이밖에 김일성주석도 1940년대 초반에 중국동북의 어려운 환경을 피해 이 고장에 근거지를 옮겼고 일본이 투항하자 신속히 국내로 진출하였다. 만약 당시에 조선인들이 중앙아세아로 강제이주를 하지 않았다면 연변과 연해주사이의 경제, 문화교류는 지금과는 훨씬 달랐을 것이다. 연해주를 유람하면서 나는 <내가 만약 려행사 경영자라면 조선인독립투사와 문화명인들의 활동지역을 고찰하는 관광코스를 개발하여 흡인력이 있는 력사문화 탐방을 진행하도록 할것이다.>라는 엉뚱한 생각도 해보았다.  4. 장령자 세관을 지나면서 느낀 문화차이   로씨야 측의 세관검사는 효률이 낮았다. 휴대한 짐에 대한 검사는 흐름선(流水) 작업이 아니라 한사람, 한사람씩 꼼꼼히 헤쳐부면서 검사하였고 금액도 10원까지 정확히 신고해야하는데 오차가 있을 경우에는 300원이하의 벌금을 한다고 한다.    관광객이 많은 때여서 중국세관을 지나 로씨야 세관을 거쳐 나오기까지는 거의 3시간이 걸린다. 때문에 세관검사가 끝난후 제일 급히 해결해야할 문제는 화장실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남녀화장실표기가 중국과 달랐기에 웃음거리가 생겼다. 로씨야 화장실 표기는 동그라미 밑에 삼각형을 거꾸로 붙인 것이 남자용 표기이고 동그라미 밑에 바른 삼각형을 붙인 것이 여자용 표기였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거의 다 이것을 오해하고 정반대로 들어가 웃음거리를 만들어냈다.   세관 구역 안에서 버스 운행을 지휘하는 한 젊고 예쁜 녀성 군인이 보초막(부스) 안에서 보란듯이 담배를 꼬나물고 피우고 있었는데 이것도 중국에서는 있을수 없는 일이였다.   로씨야 경내에 들어서면 산과 들의 초목을 전부 불태우는 정경을 볼수 있다, 중국 쪽은 산살구, 진달래가 산마다 활짝 피였으나 로씨야는 간곳마다 불탄 자리였고 연기가 하늘땅을 뒤덮인 것이 마치 전쟁터와 같았다. 안내원의 말에 따르면 이는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땅을 걸구는 원시적인 방법이라고 한다. 때문에 이 고장 산에는 재목으로 쓸만한 나무가 없고 잡목만 엉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들이 놓은 불로하여 중국경내의 재목으로 자라나는 삼림이 화재 위험에 직면하였고 관계부문에서는 시시각각 국경을 날아 넘어오는 불티를 경계하여야 했다.   농업을 홀시하는 로씨야인들은 그처럼 넓고 평탄한 땅도 개간하지 않은 채 내버려두고 있다. 이는 연변과 완전히 다른 상황이였다. 중국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이는 그들의 사유방식과 관련된 것인데 농사에 종사하는 사람은 한 등급 낮은 사람으로 인정되기에 빌어먹더라도 농사지을 생각은 안한다는 것이다. 지금 중국인, 한국인들이 장기계약을 맺고 이곳에서 농장을 개발하고 있으며 중앙아세아에 갖던 일부 고려인후예들이 돌아와 페기된 옛 농장을 다시 복구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농장을 개발하는 목적은 이 고장에서 생산한 쌀을 이북에 지원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5. 려객선에서 본 불라지보스토크 야경   해삼외는 산을 끼고 있는 항구로서 중국의 대련과 중경, 한국의 부산과 비슷한 지형을 갖고 있다. 이는 도시교통에 불편을 갖다준 일면도 있지만 도시 야경에는 매우 신비하고 아름다운 정취를 불러 일으킬수 있는 지형으로 된다. 로씨야가 경제가 어렵다고는 하지만 공업용 에네르기는 매우 충족하였다. 원자력발전소와 시베리야에 매장된 석유, 천연가스는 무진장하여 자원결핍으로 골치를 앓는 일본, 한국 등 나라들에서 매우 부러워한다. 산과 바다가 잇댄 항구도시에 충분한 전력 에네르기를 공급받는 고장이기에 해삼위의 야경은 온 도시에 오색찬란한 명주(구슬)를 뿌린 듯이 이름다웠다. 게다가 산기슭으로부터 산꼭대기에까지 줄줄이 지은 층집들과 길가의 가로등에서 뿌리는 빛은 매우 잘 조화되였다. 이는 전력부족으로 고심하는 린국과는 선명한 대조가 되어 있다. 인조위성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면 일본 동경이 아주 밝게 보인다고는 하나 그 경치는 평면적인 것일 뿐, 땅 우에서 바라본다면 산언덕에 자리잡은 항구도시의 야경보다는 못할것이라고 나는 생각되였다.    6. 불라지보스토크(해삼외) 사람들   중국 사람들은 로씨야에는 키가 크고 몸집이 실팍한 사람들만 모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로시야인을 지칭하는 <마우재> 즉 ‘마오즈’는 ‘毛子’에서 온 말, 중국인들은 ‘라오’자를 더붙여 <老毛子> 라고 하는데 이 말에는 거쿨지고 온몸에 털이 뒤덮이고 우둔한 원시인과 같은 이미지를 부여하고 있다. 그리고 여름에 미니스커트에 로출이 심한 웃옷을 입은 처녀들의 팔에도 바스스한 털이 나 한눈에 안겨온다고 한다. 그러나 실지로는 그런 소문이나 상상과는 달랐다. 그들은 남녀로소를 불문하고  옷차림, 행동거지 등 모든 면에서 신사숙녀처럼 문화수준이 높아보였다. <5.1.절> 전후인데도 날씨가 추운 탓인지 양복차림을 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남자들은 가죽점퍼, 가죽외투를 많이 입었고 젊은 녀자들은 가죽 웃옷 밑에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키가 별로 크지 않은 나로서는 그들의 키에 대해 다소 관심을 가졌는데 생각 외로 나와 비슷한 키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생김새는 완전히 구라파인종인데 키는 별로 크지 않아 같이 서있어도 위압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롱담 삼아 <키가 작은 우리 동양인들도 로씨야 처녀들과 련애할수 있겠구만!>라고 말한다. 기차역 앞에서 견학을 떠나는 수십 명 중학생들을 보았는데 그중에서 놀랍게도 10여명의 동양인 얼굴을 볼수 있었다. 녀진족(만족), 몽골인, 조선인들의 후예임이 틀림없었다. 그들도 자기들과 같은 얼굴을 한 중국인들을 보고 신기한 듯이 한참이나 빤히 우리를 주목하였다. 이밖에 어른들 중에서도 키가 작고 까만 머리, 까만 눈을 가진 사람들을 적지 않게 보았는데 동양인 후예거나 혼혈아들일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도 이 지방에서 산다면 너무 위압감을 받지 않을것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모스크바 쪽으로 가면 이런 얼굴들이 많지 않다고 한다.   7. 군사 요새와 박물관    로씨야 짜리군대는 시베리야를 넘어 흑룡강, 우쑤리강 연안지구를 침범할 때 한 고장을 점령하면 인차 그 곳에 요새를 구축했다. 그중 제일 중요한 전략적 위치를 가진 해삼위에 제일 견고한 요새를 구축하였고 당시로서는 제일 선진적인 대포를 배치하였다. 때문에 일본군과의 치렬한 전투에서 승리할수 있었다. 일본군은 대련에서는 ‘황군’무사들의 시체를 쌓아가면서 로씨야 요새를 정복할수 있었으나 이곳에서는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고 한다. 이 요새는 지금도 지하에 실용적인 장비를 갖추고 있으며 매일 북경시간 오전 9시에 한번 씩 발포한다. 이때 이 요새에는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이 일제히 모여들어 제일 혼잡한 곳으로 된다.   요새안과 지하실에 전시된 박물관은 규모가 작지만 자기들의 침략 력사를 미화한 점에서는 일본의 야스구니신사와 같은 인상을 준다. 거기에는 중심위치에 짜리군대의 대표적인 장군들의 동상과 초상화를 전시하고 그들의 <개척>공로를 찬미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였던 무기, 일상용품, 문서, 편지 등이 전시되였다. 물론 녀진족이 살던 고장이라는 점도 보여주면서 그들이 사용하였던 활, 칼, 도자기그릇, 털가죽 옷 등도 전시되여 있다. 그중 활은 아주 큰것이였는데 화살은 1미터 반쯤은 되어보였고 그 활에 시위를 먹이기 위해서는 활에 달린 두 바퀴를 돌려야했다. 박물관 안에서 문화차원이 낮은 일부 중국인들이 짜리군대 장군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것을 보고 다른 중국인들이 낮은 소리로 국치도 모른다고 비웃는것이였다.   이 전시관에서 한 로씨야 녀성 가이드가 중국어로 해설하고 있었는데 상대는 중국인지 아니면 대만, 홍콩에서 왔는지 모를 사람들이였다. 나도 옆에서 귀동냥으로 몇 마디 들었는데 ‘중국인’,‘만주인’,‘녀진인’ 등 어휘들에서 ‘인(人)’자를 ‘썬’이라고 발음하는 것이 이상하였다. 고중 시절에 배운 로어를 회상해보고 또 옛날 중로사전에서 중국어 발음을 표기한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들은 중국어‘R’발음을 로어 자모로 표기한 것이‘SH’와 비슷하게 된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니 ‘렌’이 ‘썬’으로 된 것이였다. 이는 마치 일부 외국인들이 영어 발음과 중국어 병음자모를 혼동하여 중국 산동성을 ‘중국어발음’으로 할 때 ‘싼둥’을 ‘ 싼똥’이라고 발음하는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8. 레닌광장과 동정교 교회당   레닌 광장에 세워진 레닌 동상은 <동방 통제(控制)>,<동방 령도>의 이미지가 강하다. 레닌에 대해 로씨야인들은 별로 부정적 시각으로 보지 않는것 같지만 쓰딸린에 한해서는 독재자로 보는 것 같았다. 거리 바닥에서 레닌초상마크 등 기념품을 파는 청년들에게 쓰딸린 초상마크가 있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이상한 표정으로 쓴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런데 박물관과 잠수정 안 전람실에 전시된 쏘련군 상장(賞狀)과 훈장에서만 간혹 쓰딸린의 모습을 찾아볼수 있다.    로씨야 종교는 동정교인데 천주교, 기독교와 달리 십자가에 가로댄 나무가 두 개 더 달렸고 아래쪽 나무는 좀 비뚤게 달려있다. 교회당 앞 공원중심에는 원래 레닌동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사회주의체제가 붕괴된후 레닌동상을 허물어 버리고 동정교회 십자가를 세웠다. 흥미로운 것은 로씨야 가이드가 이 과정을 말하면서 중국어로 <레닌이 이미 퇴직하였다!>라고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다. 아마 그는 이런 롱조로 관광객들을 웃기려고 한 모양인데 중국 관광객들의 반응은 미미했다. 보아하니 젊은이들은 레닌에 대해서 너무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별로 친근감을 느끼는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교회당 부근의 기념품상점에서 정교한 성모 마리야 초상화를 샀는데 그녀의 배속에는 그리스도를 품은 그림을 그려 넣었다. 성스러운 종교화(畵)였지만 프로이트 씨가 살아서 본다면 아마 나름대로 장편 론평을 했을 것이다.    9. 관광객들로 번성하는 유흥업     나이트클럽 옆에 있는 건축물 지하실에서는 스트립쇼로 매일 저녁 초만원을 이루고 있다. 관객은 일색으로 중국인, 한 번에 50명 정도, 일인당 200원, 한 번 공연에 수입이 1만원인데 하루저녁에 4,5차 공연하니 총수입이 4,5만원이나 된다. 댄서와 관리인원이 모두 7,8명밖에 안 되는데 여기에다 중국 관광객들이 얼마나 많은 돈은 뿌리고 가는지 모른다. 태국(타이)에 가서 인요(人妖)를 보지 못하면 헛걸음 한거나 다름없다고 하는 것처럼 연해주에 와서 스트립쇼를 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게 된다고 한다. 하긴 보통 인간으로서는 권력 기관이 제한하는것일수록 더 애써 체험하려는 심리를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중국 경내에서는 볼수 없는 스트립쇼가 여기서 흥행하면서 중국인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대신 지갑을 털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남성 중심의 관객 중에는 녀성들도 상당수 끼여 있다고 하니 재미있는 현상이 아닐수  없다.   호텔 안에도 매춘부들을 알선하는 업무를 거리낌 없이 하고 있다. 중국어로 된 안내광고를 보니 거기에는 금발미인들의 <마사지(안마)>가 그대들을 기다린다고 버젓이 적혀있었다. 듣는바에 의하면 외국인상대로 진행되는 유흥 업무는 별다른 단속이 없는데 현지인들은 이런 놀음에 참여 못한다고 한다. 이는 성에 대해 별로 문제시하지 않는 로씨야 문화와 시장경제로 전환한 이후 로씨야인들의 실용적인 사유방식과 일정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여기서는 카지노도 합법적이다. 그런데 거기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역시 거개가 중국인이라고 한다. 중국 경내에서는 카지노가 비법이기에 중국 남방 연해지역에서 온 졸부들과 각지에서 사업 고찰 명의로 출국하여 카지노에 손을 대는 정부 관원들과 공무원들이 많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도박쟁이’들이 로씨야 폭력범죄자들의 표적이 되고 만다. 바로 며칠전에 한 중국인이 카지노 호텔에서 현찰이 가득 들어 있는 가방을 들고 나오는데 로씨야 청년 몇이 불시에 달려들어 사람을 죽이고 돈 가방을 빼앗았다 한다.             10. 중국, 한국, 일본의 부동한 자세   한국 회사들은 연해주 시장을 선점하는 기세를 보이고 있는데 삼성 회사가 레닌광장에 전자 광고판을 설치했고, 한국 엘지(LG) 회사도 홍군 전사광장에 전자 광고판을 설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도시 곳곳에서 엘지 광고판을 볼수 있는데 전자상품은 엘지가 절대적 우세인것 같았다. 한국은 로태우 정부 시절에 국교정상화를 위해 막대한 자금을 허비하였으나 얻은 것이 별로 없다고 한다. 한국인들의 말을 빌면 <30억 달러를 팔고 조선 전쟁시에 북에서 먼저 전쟁을 시작하였다는 증거 하나밖에 얻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엔에치케이(NHK) 지사를 먼저 설치하고 면밀한 정보수집에 력점을 두면서 서둘러 투자를 하지 않는다. 중국은 주로 건축업에 주력하여 1970년대부터 신축 건축물이 없다시피 된 해삼외 시내에 호화로운 호텔, 식당 등을 세워주었고 심지어 크라스지노에 세관까지 세워주었다.     관광객은 중국인이 95% 이상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모두 한국에서 쓰다 버린 낡은 대형 관광버스를 타고 다닌다. 이에 반해 한국인, 일본인들은 작은 호화 승합차를 타고 다닌다. 그리고 2,3명밖에 안 되는 작은 단체라 해도 모두 자국어 해설원을 초빙(고용)하고 있다. 군사요새 력사 박물관에서 일본인 관광객을 보았는데 젊은 로씨야 처녀가 일본어로 해설하였다. 그중 한 일본인은 열심히 듣다가 유리상자로 된 의연금상자에 달러를 몇장 넣어주는것이였다. 이런 일을 중국인들에게서는 찾아볼수 없었다. 일반 단체 관광객들은 지갑이 비여있는것도 그 원인이겠지만 박물관에 전시된 것이 <중국침략을 정당화한 력사>여서 식상하기 때문인것 같았다. 일본인들의 이런 ‘자선’행위에 대해 중국인들은 감동된다기보다 형언하기 어려운 묘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들은 일찍 이 땅에서 로씨야와 군사충돌을 일으켰고 또 그런 원인으로 인해 연해주의 30여만 고려인들이 중앙아세아로 강제이주를 당하였다. 지금 일본인들은 정말 이를 반성하고 있는것일까? 아니면 로씨야인들의 호감을 사서 뭔가 실리를 얻어내려고 하는것일까? (待續)                                       2002.5  
11    혐한 정서는 10여년전부터 잠재 댓글:  조회:1746  추천:54  2008-09-27
 ‘혐한’ 정서는 10여년전부터 잠재 - 10년 간격으로 한국어과 학생을 상대로 한 설문 조사(발췌)    최근 북경 올림픽을 계기로 혐한, 반한에 관한 의론이 열점 화제로 오른 것 같다. 중국 속담에 얼음이 석자 두께로 얼게 된 것은 하루아침의 추위 때문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冰冻三尺, 非一日之寒). 필자는 일찍 10여년 전에 연변대학교 조선어(한국어)과의 교재 <外事基礎(국제교류 기초지식)>를 편찬하고 또 1992학번(92년급) 학부생들에게 직접 강의한 적이 있다. 그리고 1996년 6월 기말 시험 중에 한국문화에 대한 인식, 한국인의 장점과 단점 등을 시험문제로 제출하였다. 그후 2005년 연변대학 조선한국학학원과 연변 과기대에서 련합으로 주최한 ‘제9차 조선-한국 언어문학교육학술대회’(국제학술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2002학번(02년급) 학생들을 상대로 2005년 6월에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그 자료를 바탕으로 ‘조선(한국) 민족문화에 대한 조선어(한국어) 학과 학생들의 10년 인식변화’라는 제목으로 론문을 집필하고 상기의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하였다. 그후 이 론문은 ‘한(조선)민족문화에 대한 한국어(조선어)학과 학생들의 10년 인식변화’라는 제목으로 한국 태학사에서 2007년12월에 펴낸 <중국에서의 한국어교육(7)>에 게재되었다고 한다.   론문 구성은 대체로 한국문화에 대한 인식 정도, 한국인의 장점, 한국인의 단점, 인식 변화가 생긴 원인, 문제 해결의 대책 등이 포함된다. 그런데 이 론문의 원고전문은 자택에 보관되어 있을 것인데 현재 손에는 설문조사자료(원시자료)밖에 없다. 그리하여 ‘혐한’정서가 10여년전부터 잠재되어 있었다는 주제로 그 자료 중에서 한국인의 단점 부분만 발췌하여 여기에 발표한다. 그 취지는 문제의 해결에 있을뿐 절대로 혐한 정서를 조장하려는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총 제목:‘한국(조선)문화와 민적성격중에서 적응하기 어려운 점(한국인의 단점)은 무었인가?’ 1.가족관념 92학번(92级) 유가관념; 보수적(봉건관념); 남존녀비; 동성동본 혼인 금기는 과학적이 못된다(혈연관계 너무 중시); 전통적 가족관념; 녀성 재혼 곤란; 어른들에게 절대 복종 02학번(02级) 남존녀비; 봉건적; 보수; 유가관념 중함; 부모가 자식 혼인 결정; 타민족과의 통혼이 적음; ; 가족에서 남녀 역할 분공 너무 심함; 한국 현재 리혼률 증가 2.성격 92학번(92级) (한국인 작은 은혜를 베풀기도 하지만) 대체로 린색(례: 가정교사에게도 팁을 주지 않는다); 작은 리익 탐냄; 소총명(약은 수를 부림); 한국인 허위적(허영심); 시야 협소; 맹목적 의리(복종);천박함(옷차림만 중시) 02학번(02级) 린색(리기적); 싸움 즐김(호전적); 조포함; 충동적; 사치하고 향락; 허위적; 3.례절 92학번(92级) 반말 사용, 인격 모욕감; 시간관념 박약; 체면 중시; 상하 등급차별 과도; 한국인 맨발바람으로 나다니고 남들 앞에서 발가락 만진다(중국인 습관을 존중 안함); 한국 류학생 례절 없다; 외국에서 한국인 이미지 안 좋다; 02학번(02级) 체면 중시(겉 치례);례절 번쇄(번거롭다); 허위적(표리부동); 거북스럽다; 수구적; 무례함 4.남성문제 92학번(92级)  남성 우월주의(가사 안 돌본다);오만무례; 작은 일로 싸움; 녀성에 비해 게으르다; 조포함;  충동적; 중국에 온 한국인 생활작풍(남녀관계) 란잡; 한국 류학생 기숙사 어지럽다; 아무데나 소변; 자기 양말도 씻지 않는다;  과음 02학번(02级)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주의; 충동적; 허세 부림 5.녀성문제 92학번(92级) 녀성지위 비천; 인내성 과도함(절대 복종); 지위 낮은 현실에 안주; 현처량모에 만족; 녀대생도 결혼 후 가정주부로 되는 것은 인재랑비 02학번(02级) 열등감(자비감); 과분하게 인내; 연약; 혼인 전후 성격차이 크다; 신세대 자부심이 과도; 허영심; 야만적 6.생활습관 92학번(92级) 과소비(향락주의);술주정; 장례법 토장(土葬) 위주(토지 랑비);생식(生食); 저축관념 없다; 중국인은 한국음식습관에 적응하기 어렵다; 음주 과도; 억지로 권주; 남성 생활작풍(남녀관계) 란잡(随便); 온돌 불편, 건강 불리; 보수적 02학번(02级) 돈을 마구 씀(랑비); 과소비; 음주 즐김(과음); 성질이 까다로움; 형식주의 7.복장 92학번(92级) 괴상한 옷차림(서방 류행 따름); 과분한 옷치례 02학번(02级) 과분한 분장, 촌스럽다; 류행 지나치게 따름; 서방 모방; 유명 브랜드 바싹 따름; 사치함 8. 정치, 인생 리념 92학번(92级) 남북 입으로만 통일, 상호 적대시; 한국 언론매체 책임감 없다: 신세대 향락, 안일 추구, 나태함, 무규칙적인 생활; 한국 류학생 도덕수양부족; 금전만능주의; 02학번(02级) 애국심 중국보다 못함; 극단적(偏激); 국외 정세에 너무 민감; 정치 무관심; 조선에서는 령수를 미신하는가 하면 한국에는 막강한 정치인물이 없어 비참하고 애처로움; 한국은 미국의 주구인데 최근에는 조금 개선됨: 인생 목표 없음; 안일추구; 개인주의; 녀성 역할 없음; 리기적(自私自利); 신뢰성 없다; 시야 협소, 세치보기;  9. 민족의식 92학번(92级) 맹목적인 민족적 자부심 ; 배타적; 맹목적 우월감; 춰주는 말만 좋아한다; 한국인은 오기(傲気)뿐; 한국인 미국숭배; 외래어사용 과도; 한국인 자국 제품만 선호; 겸허하지 못함(不謙虚, 례: 영어발음이 틀려도 인정 안함); 자기들끼리만 모임, 활동범위 협소 02학번(02级) 민족적 자부심 과도팽창; 맹목적인 자고자대; 배타적; 세계에서 제일 우수한 민족으로 자처; 자아중심; 미국 추종; 사대주의; 경제가 락후한 나라의 사람을 무시 10. 종교의식 92학번(92级) 전교자(伝教者)들 시끄럽다(종교선전);  종교 신앙심 과분; 02학번(02级) 종교 신앙심 과분; 종교의식이 강한 반면에 자립성이 차함; 남을 맹목 추종; 기독교 신앙이 대부분; 서방화 엄중; 伝教하는 사람 짜증난다 11. 중국에 대한 인식 92학번(92级) 중국의 정치, 경제를 무시 02학번(02级) 고대중국은 숭배하나 현대중국에 대한 인식 부족; 중국인식 편견(부족함); 중국의 위대함을 홀시; 중국이 락후하다고 인식; 중국을 모르면서도 자기 마음대로 상상; 중국제품이 한국보다 못하다고 여김; 중국에 대한 질투심리 12.기타 92학번(92级) 국제무역 등 상업무역활동에서 신임도(信任度) 낮다; 한국인은 결함이 있어도 우수한 민족이다 02학번(02级) 중국은 동서 모든 나라 문화의 뿌리; 한국도 별거 아니다(不過如此); 한국인 과분한 자부심을 조금 절제했으면 한다; 소집단주의, 야만적, 전횡; 맹목적 단합; 민족 자부심과 열등감(자비감) 병존; 아주 가증스럽다(十分可悪)   이상 몇 년전의 설문조사자료(원시자료) 중 일부를 발췌하여 발표하는바 여기에서 강조하기 싶은 것은 \'혐한\'정서가 주류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밖에 한국문화를 찬양하고 한국인의 장점을 긍정하는 조사 자료가 따로 있다는 것을 이 글의 서두에서 이미 밝히고 있다. 그리고 요즘 젊은 세대는 감성적이고, 즉흥적이며 깊이 있는 사고를 잘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점을 감안하고 랭정한 태도로 이러한 이슈를 대하고 그  원인과 해결책을 모색함이 바람직 할 것이다.                                2008.9.27 중경에서
10    수필창작의 다원화 양상 댓글:  조회:1827  추천:36  2008-09-24
 수필창작의 다원화 양상 김병활 《연변문학》지 2005년 제7기부터 2006년 제6기까지 실린 수필들을 한번 평론해보라는 부탁을 받고 정독이 아닌 수박겉 핥기로 두루 읽어보았다. 우선 어떤 문체로 쓸것인가가 고민중의 하나다. 가장 자유로운 문체라고 하는 수필을 《들어가면서》, 《나오면서》와 같은 팔고문(八股文)식 문체로 평론한다는것이 어쩐지 탐탁치 않다. 다음은 이른바 담론의 권위성을 강화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 벨린스키, 프로이트, 류협 등 동서고금의 명인들의 말들을 양념처럼 거들어야 하는가가 고민거리다. 똑같은 말도 나 같은 속인이 하면 마이동풍으로 여길것이나 《명인》들이 별 생각없이 내뱉은 말도 성지(聖旨)로 되여 우러러 받드는 풍토이니 말이다. 물론 ‘내가 싫으니 당신도 그만두시오’ 라는 뜻이 아니다. 또 관용이 결핍한 문단에서 솔직한 말만 하다가는 아무때고 한대 얻어맞기 쉬우니 조심스럽기만 하다. 비록 옛날 죽기전에 《임금의 귀는 당나귀 귀다》라고 웨친 궁정 리발사를 본받는 마음으로 내 목소리를 한번 내보려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현실에서는 어쩐지 잘 통하지 않는다. 아무튼 무명 속인이 하는 무게없는 말이니 누구도 가타부타 개의치 않으리라는 《안도감》을 안고 이 글을 쓴다.    일년간의 수필들은 론자에 따라서는 여러가지 시각이 있을수 있으나 필자는 《수필창작의 다원화》라는 각도에서 정리해보려 한다. 우선 량적으로 우세를 차지한 수필들로는 민족문화와 그 운명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 수필, 잊기 어려운 인물을 묘사한 수필, 자신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고있던 심리를 대담하게 표현한 수필, 현실사회의 륜리도덕을 우환의식으로 평가한 수필, 옳바른 인생도리를 깨우치려는 교훈적수필, 신변잡기와 같은 인생체험을 기술한 수필, 생태환경에 관심을 보인 수필 등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우의 수필분류와 중첩되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페미니즘경향을 띤 수필, 서정수필, 기행수필 등등으로 세분할수 있다. 이런 분류는 문학적인 연구에만 필요한것이 아니라 사회학적 연구에도 참고가치가 있는 텍스트를 제공할수 있다고 본다. 요컨대 급변하는 이 시대에 몸을 담고있는 조선족 사회 각 계층의 수필인들이 어떤 사회문제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그런 문제들에 대한 어떻게 도덕적 평가와 심미적 평가를 하고있는가를 알아볼수 있을것이다.       1. 민족문화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 수필 이 부류의 수필들로는 김관웅의 《디아스포라, 사과배 그리고 민족문화의 뿌리》(2005. 7), 서정순의 《참새와 귀향》(2005. 7), 류원무의 《자루가 짧은 호미 그리고 비탈린 소나무》(2005. 9), 《중국장기와 조선장기》(2005. 12), 조룡기의 《혼의 려행》(2005. 9), 김두필의 《<개구리>의 꿈》(2006. 1), 채선애의 《아빠가시고기 같은 우리네 오라버니들》(2006. 3), 김응진의 《기억에 몽롱하면서도 잊혀지지 않는 녀인》(2006. 4), 최홍자의 《바가지》(2006. 5), 안병렬의 《그날과 오늘》(2006. 5) 등이다. 개혁개방이후 시장경제의 도입은 전통적인 민족문화에 커다란 충격을 주고있다는것은 주지하는바이다. 민족문화의 파수군으로 자부해온 문화인들은 여기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있으며 이런 내용의 수필은 그 수량이 압도적으로 많다.    류원무의 《자루가 짧은 호미 그리고 비탈린 소나무》(2005. 9), 《중국장기와 조선장기》(2005. 12)는 작은 일상에서 중국과 조선 두 나라 민족문화의 정수를 집어내고 문화적비교를 시도한 무게있는 수필이다. 수필의 중심사상은 조선족이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릴수 있은것은 웅녀정신― 《인고》정신이 있기 때문이라는것이다. 처음에는 조선족문화의 단점을 집어내고 그것을 부정하는 줄로 짐작했는데 나중에는 그 《불완전》속에서 민족의 인내성, 강인성을 발견하고 찬양하고있다. 자루가 짧은 호미는 자루가 긴 중국호미에 비해 무척 힘들고 허리가 아프지만 오히려 불이 번쩍나게 일을 해제낄수 있고 씨솎음도 실수없이 할수 있다. 이런 인고정신으로 혹한이 다섯달이나 지속되는 만주땅에서 처음으로 논농사를 시작하면서 본지방 사람들이 엄두도 못내는 찬물에 들어서서 모내기를 하여 이밥― 뼈밥을 지어낸다.  비탈린 소나무에 대해서도 작자는 정서적인 찬사를 보내고있다.    소나무를 보는 우리의 미적감수가 그 하나의 보기이다. 우리네는 시원스레 자란 락락장송보다 바위벼랑을 타고 비탈리며 자란 타래진 소나무가 유독 아름답다.  …뼈저리고 비장한 생명의 이악스러움! 그런 소나무를 보고있노라면 삶의 비장함에 가슴이 저리고 인생의 서글픔과 쓸쓸함에 가슴이 젖는다. 우리네는 그것이 좋다. 그것이 하나의 미적감수다. 그래서인가, 우리네 민요의 선률에는 남다르게 애상이 많이도 흐른다. 한데 이상하게도 그 애상이 쓸쓸하면서도 경쾌하게 불려지며 신바람을 내기도 한다. 인고의 정신, 상향의 뼈아픔, 즐거움이다.  이 대목은 성망높은 소설가답게 문필도 미끈하고 정서적이다.     《중국장기와 조선장기》도 아주 재미있는 수필이다. 두 나라의 장기기법을 자세히 비교한후 작자는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다른 점이 많은 가운데서도 핵심은 중국장기는 공격형인 반면 조선장기는 방어형이라는데 있지 않을가싶다. …조선장기에는 우리 한민족의 사유방식, 생존철학, 전략사상이 여실히 체현되여있다고 인정된다. …리조 5백년 력사에 한강에 다리가 놓이지 않았던것은 적들이 그 다리로 쳐들어올가봐서였다. 다리를 놓아 진공공간을 넓힐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고 방어에만 급급하였다. 그야말로 조선장기와도 같은 방어형진세라고 하겠다. …우리 조선족은 한세기 남짓 망망한 중국대륙에 모래알 같이 섞여살면서도 중국장기에 끌리지 않고 조선장기를 고집하면서 장군이야, 멍군이야, 삶의 지혜를 누리며 살아가고있다.  이와 같은 론술에는 비교문화 학자들에게 더없이 귀중한 자료로 인용될수 있는 비교적 심각한 견해가 내포되여있다. 물론 작자는 민족의 력사와 현실을 결합하면서 자신의 체득을 서술하고는 있지만 오늘의 현실에 백프로로 적용되는것만은 아닌것 같다. 례컨대 한국기업의 중국진출과 동북 조선족의 대거 관내이동은 꼭 《방어진세》만은 아닌것 같다.   김관웅의 《디아스포라, 사과배 그리고 민족문화의 뿌리》(2005. 7)는 민족문화의 변화에 줄곧 깊은 관심을 가지고있는 학자의 견해를 보여주고있다. 디아스포라로서의 우리 중국조선족문화도 접본(接本), 즉 자기 민족문화의 뿌리를 잃지 말아야 한다. …지금은 작은 민족이 큰 민족에게 동화되여야 하는 시기거나 세계가 하나의 민족으로 되여야 하는 대동세계가 아니라 민족문화가 개화 발전해야 하는 시기이다. 즉 세계 각 민족문화의 다원공존의 시기이다. 하기에 중국조선족은 앞으로도 자기의 땅속 깊이 내린 민족문화의 뿌리를 통해 부단히 자양분을 섭취해야 할것이다. 작자는 조선족문화를 사과배에 비유하면서 약세에 처한 민족문화가 계속 존재해야 되는 당위성을 강조하고있다. 연박한 지식과 생동한 비유는 이 수필이 돋보이는 점이다.  2. 인물을 묘사한 수필   이 부류의 수필들로는 리상각의 《<아리랑>과 진용선》(2005. 7), 김응준의 《시인 정몽호를 운다》(2005. 8), 정형섭의 《문림에 또 하나의 그루터기》(2005. 11), 장정일의 《기서》(2006. 1), 현영애의 《겨울해살의 의미》(2006. 2), 한원국의 《꽃은 웃고 나는 울고》(2006. 5), 허춘희의 《아버지는 천당을 만드셨다》(2006. 6) 등이다.   이런 수필들에서는 문화인들의 공적을 서술하고 그들 사이의 우정을 노래한것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행적을 통해 인간미를 찬미한 수필들도 아주 감동적이다.    허춘희의 《아버지는 천당을 만드셨다》(2006. 6)는 지난 세기 70년대 후반에 두만강변의 시골에서 자란 작자가 중앙민족대학에 진학하여 처음으로 바나나를 맛본후 아껴쓰면서 모은 돈으로 바나나를 사서 고향의 부모에게 보내준 이야기를 쓰고있다. 아버지는 당시 만민이 우러러보는 북경에서 보내온 과일이라고 동네 로인들을 정중히 모시고 《바나나연》을 벌렸는데 그 바나나를 떡호박처럼 솥에 쪘기에 결국은 그 귀중한 과일을 먹지 못하고 버렸다는것이다. 작자는 이야기도 재미있게 기술하였을뿐만아니라 베풀고 나눌줄 아는 사랑이 있는 곳에 천당이 있다는 생동한 비유와 이에 걸맞는 의론이 아주 자연스러워 끈끈한 인정미와 그 정서에 끌려가는 느낌을 준다. 아버지는 바나나라는걸 구경도 못하시고 드실줄도 모르시던 세월에도 동네 로인들을 청하는것만은 잊지 않으신 넉넉한 마음의 부자셨기에 슬하에 칠남매를 두고 장기환자인 어머니를 극진히 돌보셨다. …우스운 이야기로만 여길수 없는 아버지의 찐 바나나연 이야기, 그리고 천당이야기, 올해는 청명날 아버지 산소를 찾아가면서 특별히 바나나를 사서 쪄서 들고 갔다. …아버지께서는 하늘나라 천당에서 사실것이다. …아버지가 만드신 천당을 우리도 만들수 있는지? 확답보다 앞서는 의심에 부끄러운 마음 감출길 없다. 이처럼 이 수필에서는 보통백성들의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민간에 깊이 깔린 인정미를 높이 구가하고있다.  3. 자신의 심리를 대담하게 표현한 수필      이런 부류의 수필들로는 최기자의 《<마흔여덟> 콤플렉스》(2005. 7), 강효근의 《문우들아, 모두모두 건강하시라》(2005. 8), 한원국의 《거울에 쓰는 일기》(2005. 8), 김점순의 《엄마의 녀자》(2005. 9), 유천의 《꽃울음변주곡》(2005. 10), 허영순의 《내가 선글라스를 낄 때》(2005. 11), 김현순의 《가을날의 정취》(2005. 11), 주향숙의 《너무나 사랑하기때문인것을》(2005. 11), 김순희의 《웃어라 해살처럼》(2005. 11),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2005. 12), 리선희의 《소주, 맥주, 그리고 모태주》(2006. 1), 리진화의 《풍경과 만나다》(2006. 3), 김경희의 《새해의 첫눈》(2006. 5), 신영애의 《내 애처로운 <비둘기>야》(2006. 5) 등이다.    김순희의  《웃어라 해살처럼》(2005. 11)은 밝은 정서로 녀성심리를 표현한 수필이라고 할수 있다. 수필은 네살나는 어린 아이 해의 웃음에서 느낀 감수를 섬세한 필치로 쓰고있다.      해는 맑고 거짓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깨끗하고 단순합니다. …아무델 건드려도 웃음과 기쁨과 행복이 와그르르 쏟아져나옵니다. …저렇게 아무 생각없이 그때의 감정에 충실하게 깔깔 웃을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혼자만이 아닌, 우리 모두가 같이 웃을수 있은 그런 찬란한 웃음을 웃고싶습니다.  도시의 지저분한 뒤골목에서 천덕꾸러기처럼 살던 팀은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고싶은 욕심에 자기의 보석처럼 아름다운 웃음을 팔아 백만장자가 됩니다. …웃음을 팔고 산다는것이 하황한 이야기 같지만 웃음이 인간에게 너무 소중한것이기때문에 그런 이야기들이 나온게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작자는 거짓이 없이 깨끗한 동심과 그런 순결성에서 자연스럽게 터져나오는 천진한 웃음과 어지러운 사회 일각에서 어른들이 웃음을 팔고 사는 루추한 행실을 대비하면서 비판하기도 한다.   허영순의 《내가 선글라스를 낄 때》(2005. 11)도 《문화대혁명》시기에 생긴 선글라스콤플렉스가 수십년 작용하여 현실사회를 어둡게만 보던 자신이 그런 콤플렉스에서 해탈되는 심리변화과정을 깊이있게 묘사하고있다.  이제는 《선글라스》를 건 자신으로부터 해탈되여야 할것 같다. 차분히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두려움없이 《선글라스》를 벗어버리고 밝은 세상을 맞이해야 할것 같다. …선글라스를 건 사람은 나쁜 사람, 불량한 사람이라는 편견을 털어버리고 《여름철에 강렬한 해빛으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하여 쓰는 색안경》인 선글라스를 두려움없이 거는 여유도 가져야겠다. 내가 선글라스를 낄 때 세상은 생각했던것처럼 그렇게 어둡지 않을것이며 마음은 더 여유롭게 될것이다. 나도 선글라스를 낀 녀자가 되겠다.    혼탁했던 시절에 자신이 선택할 여지도 없이 지지누르고있었던 심리적부담을 훌쩍 털어버리고 새로운 인생도전에 림하려는 적극적인 자세가 더없이 소중하다. 이런 류형의 수필중에서 최기자의 《<마흔여덟> 콤플렉스》(2005. 7), 김점순의 《엄마의 녀자》(2005. 9), 김현순의 《가을날의 정취》(2005. 11) 등 수필은 페미니즘경향을 띤 수필이라고도 할수 있다. 그리고 강효근의 《문우들아, 모두모두 건강하시라》(2005. 8), 유천의 《꽃울음변주곡》(2005. 10), 주향숙의 《너무나 사랑하기때문인것을》(2005. 11), 김경희의 《새해의 첫눈》(2006. 5), 신영애의 《내 애처로운 <비둘기>야》(2006. 5) 등 수필은 서정수필이라고도 할수 있다.  4. 현실사회의 륜리도덕을 우환의식으로 평가한 수필   이런 류형의 수필들로는 장련춘의 《아이의 친엄마》(2005. 8), 정문준의 《나를 바꿔야 산다》(2005. 9), 채철호의 《<문전박대>를 받고》(2005. 9), 한영남의 《애빌레, 에밀레》(2005. 10), 김태현의 《아름다운 꽃도 향기 없을 때가 있습니다》(2005. 11), 류성의 《하나의 우산을 둘이서》(2006. 2), 장련춘의 《사랑의 삼색도》(2006. 2), 김미란의 《시부모님의 손가락은 열한개가 아니였다》(2006. 4), 류광철의 《수캐와 나》(2006. 4) 등이다.    정문준의 《나를 바꿔야 산다》(2005. 9)는 한동안 돈의 유혹으로 인정과 우정마저 버렸던 자신을 예리한 메스로 사정없이 해부한 수필이다. 동년시절의 누룽지친구 쇠돌이가 커서 병으로 입원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도 《나》는 돈을 많이 벌어 유족한 생활을 하면서도 그 돈이 아까워서 문병을 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 쇠돌이가 내가 병치료로 입원해있는 병실에 찾아와 문병하였고 또 암으로 앓는 처지에서 돈 2백원까지 내놓고 가는 사실에서 《나》는 령혼의 촉동을 받는다.  무쇠가 아닌 이상 60살이 된 나의 몸에도 이상이 생겨서 어느날 외과의사의 예리한 메스에 배가죽을 길게 째이게 되였다. …의사선생님들은 내 몸속에서 푸닥거리는 모기와 파리떼, 설설 기는 구데기와 뱀 그리고 귀신딱지 같은 벼라별 돈잎들이 너펄거리는것을 보고 경악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세상밖의 사람으로 돼가고있었다. …나는 온 세상을 잃었구나. …나의 베풀음 한번 받은적 없는 친구들도 내 손을 잡아주면서 병문안한다. 나는 낯이 없었다. …내가 나를 바꾸지 않으면 스스로 죽어지는게다. 나는 나를 바꿔야 산다.     금전욕과 륜리도덕의 갈등은 가치관이 뒤흔들리는 격변시기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문화현상이다. 그러나 이 수필에서는 늦게나마 잘못을 깨우치고 가차없이 도덕적 비판을 가하는 자세는 돋보인다. 겉으로는 민족을 위해 분투하는 《군자》인체하면서 금전에 미혹되여 뒤로 수박씨를 까는 렴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메스가 필요하다. 우에서 인용된 대목은 사실적인 묘사이면서도 아주 자연스럽게 상징성을 띠고있어 매우 인상적이다.    5. 옳바른 인생도리를 깨우치려는 교훈적수필    이 류형의 수필들로는 최균선의 《우리가 만드는 굴레》(2005. 10), 현영애의 《당신은 잃어버린 신발 한짝을 찾으셨나요?》(2005. 12), 류광철의 《<감자싹눈>으로 읽는 인생살이》(2005. 12), 서정순의 《청우계신세》(2006. 1), 김양금의 《아름다운 거짓말― 화이트라이》(2006. 2), 김관웅의 《재목, 배 그리고 나그네》(2006. 4), 남춘애의 《당신은 사랑을 위해 무엇을 걸겠습니까?》(2006. 6) 등이다.    교훈적수필이라고 하면 꼭 딱딱한 설교라고만 생각될수도 있는데 우리 수필인들은 이 점을 감안해 될수록 자신이 직접 체험한 실감나는 소재들을 다루면서 인생의 철리를 생동하게 터득시키고있다.    현영애의 《당신은 잃어버린 신발 한짝을 찾으셨나요?》(2005. 12)는 이 류형의 수필에서 좋은 본보기를 선보였다고 할수 있다. 수필은 추석날 부모 산소로 가기 위해 역전 대합실에 앉아있다가 무심코 수없이 지나가는 신발을 내려보다가 어릴적에 엄마가 큰 마음먹고 사준 고무신 한짝을 논도랑에서 잃어버린 일을 련상하게 된다. 그러면서 작자는 동서고금의 풍부한 지식과 생동한 묘사 그리고 자연스러운 의론을 잘 결합하여 부모들에게서 물려받은 훌륭한 문화전통을 이어가면서 자신의 인생목표와 책임감을 중도에서 포기하지 말고 끈질긴 인내성으로 추구해야 한다는 도리를 설파하고있다.     그때 잃어버린 고무신 한짝은 끝내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기어코 그 잃어버린 그 신발 한짝을 찾아냈다면 지금의 내 운명이 바꿔지지 않았을가. …그랬다면 내 인생도 덤덤한 흑백 TV가 아닌 요즘 최첨단기술이 만들어낸 디지털 TV 속에 펼쳐지는 화려한 드라마의 주인공 아가씨처럼 울긋불긋하고 찬란하지 않았을가요. …우리는 우리 부모님들로부터 두짝이 가지런한 한컬레의 신발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다 나처럼 어쩌다가 신발 한짝을 잃어버려 외짝 신발을 갖고있은 형국이 되였지요. 고무신이든 헝겊신이든 부모님께서 한컬레 신발에 담아 우리에게 남겨주신것은 모두가 소중한것이였습니다. 이는 권력과 명예와 재부와 상관되는것이라기보다는 인생의 사랑, 행복 그리고 아름다운 령혼에 이어지는것으로 무한히 큰것이였습니다. …잃어버린 그 고무신 한짝을 찾는것은 분명히 내가 해야 할 일인데 그 일을 완수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러저러한 리유로 삶에 너무 게을렀고 타성에 너무 빠져있었던것은 아니였을가요. …한쪽 발이 시려납니다. 아니, 어쩌면 오래동안 그냥 한쪽 발이 시렸는데 모르고있은것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아간다는것은 어쩌면 모노샌들로스 이아손처럼, 외짝만 신은 달마대사처럼 그리고 신데렐라나 콩쥐아씨처럼 잃어버린 나머지 한짝 신발을 찾아가는 머나먼 길이 아닐가요. 당신은 잃어버린 그  신발 한짝을 찾으셨나요? 그리고 나는 오늘 엄마의 무덤에 가서 잃어버린 그 한짝 신발을 찾을수 있을가요.   교훈적수필은 절대로 철학론문이 아니다. 《무식》한 《민초》들 앞에서 자신의 학식만 자랑하려는 식의 수필, 전지전능의 거룩한 자세로 남을 훈계하려는 식의 수필은 첫머리만 읽어보아도 역겹기만 하다. 수필인 이상 심오한 철학적명제도 알기싶게 쓰는것이 바람직하다. 중국말로 하면 《심입천출(深入淺出)》이라고 하겠다.  6. 신변잡기와 인생체험을 기술한 수필     ‘신변잡사’를 쓴 수필을 폄하하는 의론이 있다고 한다. 시대에 따라서는 그럴수도 있겠다고 생각되나 일괄적으로 부정할수는 없다. 례를 들어 지난 세기 30년대를 전후하여 림어당, 주작인 등 문인들이 초미의 사회문제를 회피하고 《자기의 원지(自己的園地)》에서 《미문(美文)》창작에 열을 올릴 때 로신은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이 치렬한 마당에서 어떻게 신변잡기만 쓰고 풍월만 읊을수 있느냐고 비판한적이 있다. 그런데 요즘에는 림어당, 주작인의 그런 수필이 되려 큰 각광을 받아 베스트셀러가 되였다고 한다. 우리 문단 일각에서 ‘신변잡사’를 쓴 수필을 배격하려는 시도는 아마 민족문화가 생사존망의 시련을 겪고있는 때에 그 수량이 과분할 정도로 많다고 사려하는것이라고 짐작된다.     이런 류형의 수필들로는 김자연의 《노래파트너 이야기》(2005. 8), 김길련의 《산의 련가》(2006. 2), 김동진의 《개발헤염 60년》(2006. 3), 전성호의 《<조화석습>의 즐거움》(2006. 3), 최기자의 《곤계란을 먹다》(2006. 3), 최국철의 《강태공은 무엇을 배웠을가》(2006. 4), 오설추의 《첫돌》(2006. 6), 김영금의 《소주에서 백거이를 만나다》(2006. 6)  등이다.     그중 김길련의 《산의 련가》(2006. 2), 김영금의 《소주에서 백거이를 만나다》(2006. 6) 등 수필은 기행수필로 분류할수도 있다.   7. 생태환경에 관심을 보인 수필     생태문학은 최근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분야이다. 우리 문단의 수필창작에서는 아직 커다란 조류를 이루지 못한 분야이기는 하지만 생태환경에 대한 수필인들의 관심은 날로 강화되고있는 추세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을 다른 의미로 해석하면 배 부른후에는 자연히 아름다운 산수풍경에 눈길이 가기 마련이라고 할수 있다. 이런 류형의 수필로는 김일량의 《무지개는 우리를 떠나고있다》(2005. 7), 권중철의 《인류와 자연》(2005. 10), 허무궁의 《칼라의 가을엔 무궁화도 자리 양보하더라》(2005. 12), 김동진의 《강풍폭설에 짓밟힌 4월을 바라보며》(2006. 6) 등이다.    생태수필들에서는 아름다운 고향의 경치를 노래하는 일면 이런 미적향수를 안겨주는 자연을 극히 보잘것 없는 경제리익때문에 제멋대로 파괴하는 야만적행위를 질책하고있다. 다만 아직 배가 부르지 못한 사람들에게 무작정 생태환경을 보존하라고 요구하는것도 어느 정도 무리인것 같다. 례컨대 서북지구의 사막이 내지로 만연되는것을 막기 위해 정부에서 《퇴경환림(退耕還林)》정책을 실시하고 당지 백성들의 생활을 담보할수 있는 경제적지원을 하고있다. 환경보호주의자들에게도 이런 문제를 조화롭게 풀어갈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필자도 생태환경에 퍼그나 관심을 가지고있는 사람으로서 이런 수필들이 보다 높은 차원에 오를것을 기대하고있다. 한화휴제(閑話休題).   총적으로 일년간 《연변문학》에 발표된 수필이 질적으로나 량적으로나 커다란 진보를 가져왔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문제점을 안고있는 실정이다. 일부 수필들은 주제가 명확하지 않다. 수필이 붓 가는대로 쓰는것이라 하여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모를 수필을 쓴다는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주제고 뭐고 다 무시해버리는 이른바 《모더니즘수필》이 있는지는 학식이 짧은 필자로서는 판단하기 어려우나 적어도 동양에서는 다수 독자들의 구미에 맞지 않을것 같다. 중국의 산문창작기법에는 《형산신불산(形散神不散)》이라는것이 있는데 이야기 소재는 이것저것 흐트러진것 같지만 주제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음 교양있는 문화인들이 쓴 수필인데도 때때로 속된 감을 주는 경우가 있다. 례컨대 《수캐와 나》라는 제목은 남자의 《정조》를 지킨다는 주제와 어울리지 않는 유별난 비유이다. 아마 독자들의 시선을 끌려는 시도였는지도 모른다. 《곤계란을 먹다》에서는 털이 생긴 죽은 병아리가 들어있는 썩닭알을 씹어먹는 장면을 쓰고있는데 수필을 읽으면서 미적 향수를 받기보다 되려 독자들의 기분을 잡치기만 한다. 하긴 근자에 《심추(審醜)》라는 미학적범주가 생기기는 하였지만… 일찍 로신이 자신의 잡문집에 《무덤(墳)》이라는 제목을 달고 무시무시한 이미지를 부각한것은 바로 권세, 재부, 명예를 몽땅 차지한 지배층들에게 끔찍하고 불쾌한 장면을 안겨주기 위한것이라는 명확한 시도가 있었기때문이다. 만약 우리 수필인들의 의도가 《태평천하》라고 송가만 부르고있는 세월에 일부러 끔직하게 추한것을 드러내 육식자들의 식욕에 손상주려는것이라면 다른 문제이겠지만 우리 수필들은 그런 차원인것 같지는 않다.    그다음으로 페미니즘수필이라고 할수 있는 일부 녀성수필들이 약간 도를 넘는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가지게 된다. 시대에 따르거나 앞서가는 선봉적인 평론가들이 보기에는 전혀 문제시되지 않겠지만 어려서부터 유가적교육에 길들여진 필자로서는 시시로 거부감을 가지게 된다. 녀성의 적(敵)은 남자이고 녀성 자신이고 사회규범이므로 녀성해방은 이런 《적》들을 타승해야 한다는 리론에 따라 일부 수필들은 녀성들의 가장 은밀한 부분을 꺼리낌없이 남성을 포함한 독자들에게 홀딱 다 드러내고있다. 물론 이성에 대해 호기심이 많은 남자들의 눈길을 끌기에는 충분하지만 아무래도 함축미가 부족한것 같다.                 이밖에 문화인으로서는 상식적으로 알아두어야 할 지식이 착오적으로 표출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례를 들어 로신의 작품에는 《아홉근 할머니》라는 제목으로 창작된 소설이 없다. ‘아홉근 할머니’는 로신의 소설 《풍파(風波)》에 나오는 보수적인물이다. 기억력에 대한 자신감만 믿고 책임감을 소흘히 한다면 이런 착오가 나올수 있다고 본다. 한번쯤은 로신작품집이거나 중국현대문학 교과서를 살펴보면 이런 오류는 피면할수 있을것이다. 물론 필자도 이런 과오를 범하지 않는다고 장담할수는 없으나 아무튼 자타가 주의할바이다.        본문의 서두에서 필자는 이 글이 정독한후에 쓴 《평론》이 아니라는것을 밝혀두었다. 맺음말로 더 부언하고 싶은것은 이 글이 법관의 판결문이 아니라는것이다. 독자가 천이면 햄리트도 천이라는 말이 이미 상투어로 된것 같지만 아직도 관용적으로 랭정하게 평론을 대함이 부족한것 같다. 하긴 우리 문단에서는 누군가가 어느 한 작품이 여차여차하다고 평론하면 그것으로 끝내버리는 경우가 많다. 마치 법관의 《일심(一審) 판결》에 항소하지도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것과 같다. 하지만 필자는 《일심 판결》에 불복하는 《항소문》과 그에 따른 《2심(二審) 판결》이 속출하길 바란다. 이밖에 지면의 제한으로 일년이라는 긴 시일에 발표된 많은 훌륭한 수필들을 상세히 평해드리지 못함을 량해해주길 바란다.                                   2006년 7월                      [‘연변문학’ 2006년 10월호]
9    추석 단상 댓글:  조회:1604  추천:41  2008-09-19
                       추석 단상    오늘은 추석이다. 나는 고향과 수천만리 떨어진 중경에서 고인이 되신 부모님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2년전 까지만 해도 나는 해마다 청명과 추석이면 조상들의 묘소에 가서 성묘를 하군 했다.   우리 조상들의 묘소는 룡정 광신촌 북쪽에 있는 “만무 과수원” 산마루에 모셔져 있다. 여기서는 묘소를 모두 ‘산소’라고 부르는데 때로는‘산’으로 략칭하기도 했다. 그것은 명당자리로는 언제나 양지바른 산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것 같다. 우리 조상들의 산소도 례외가 아니다. 묘소 뒤 고개를 넘으면 옛날 고향집터인 삼성촌이 있고 오른쪽 골짜기를 넘으면 삼봉동 마안산이 우뚝 솟아 있다. 마안산 산줄기를 따라 남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지금은 채석장으로 변해 빈 허울만 남은 뾰족산이 있고 좀더 나가면 연변대학 농학원 서쪽에 서있는 말발굽산이 자리하고 있다. 물론 지금은 한때 채석장으로 변해 말발굽을 신통히 닮았던 그 형체가 사라졌지만 이름은 그대로 불린다. 그냥 그 산줄기로 더 멀리 내다보면 유명한 룡정 비암산과 일송정이 바라보인다. 묘소에서 정면으로 남쪽을 바라보면 “제정”때 일본 령사관을 대포로 겨냥했다는 대포산이 바라보이고 시선을 동쪽으로 옮기면 윤동주 묘소가 있는 룡정 동산, 다시 묘소에서 왼쪽을 바라보면 멀리 모아산이 바라보인다. 아무튼 옛날에는 풍수를 보고 명당자리를 정한다고 했는데 아마 여기가 명당자리라고 공인 받은 모양인지 근처 마을은 물론, 멀리는 룡정 시내에서도 여기에다 조상들의 묘소를 정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장기간 유가사회에서 살다보니 대체로 장례는 “토장(土葬)”을 했었다. 만약 불교 성향이 있는 가족이면 “화장”을 하는 경우도 있다. 조상 숭배를 특별히 강조한 유가는 다른 민족처럼 “천당”이나 “래세”를 별로 믿지 않았다. 그래서 각별히 토장을 중시한것 같다.   그런데 “문화대혁명” 중에도 무사했던 이 산소가 지난 세기 80년대에 큰 봉변을 달할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이른바 “장례혁명”이라는 구호(슬로건)를 내걸고 죽은 사람이 산 사람과 땅을 다투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였다. 만약 경작지가 적은데다 인구가 넘쳐나는 남방 농촌이거나 신도시 개발 지역이라면 그래도 좀 리해가 가겠지만 인구가 적고 간곳마다 개발하지 않은 땅이 많은 여기 변강의 벽촌 어디서나를 막론하고 무조건 산소를 파헤치고 평지를 만들라는 엄명은 누구도 달가와하지 않았다. 조상들의 묘소를 제손으로 파헤치는 죄를 범할 후손이 어디에 있으랴? 그 무렵 화룡현 어느 마을에서는 백성들이 극력 반대하면서 전혀 움직이지 않자 불도저를 끌어다가 산소를 마구 밀어내려고 했다. 그러자 마을의 할아버지 몇분이 불도저 앞에 드러누워 산소를 밀어내겠으면 내 몸부터 깔아뭉개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실로 상상만 해도 눈물날 정도로 비장한 장면이다.   우리 마을 농민들은 간부들이 상급의 지시를 집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신의 처지를 봐달라고 애걸한 탓인지 할수없이 삽을 들고 산으로 올라갔다 한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대책이 있었던 것이다. 묘소를 몽땅 파헤친것이 아니라 윗부분을 삽으로 반쯤만 깎아내고는 그대로 남겨 두었다. 묘소는 평지로 변한 것이 아니라 기본상 그 위치와 형체를 보존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일년도 안 되어 모두 본래의 모양대로 복원되였다. 이는 그 누구의 지시에 따라 한 일이 아니고 순전히 우리 민족의 머리속에 잠재해 있는 조상숭배의식이 작용했을 뿐이였다.   아무튼 나는 이런 조상들의 묘소가 있어 늘 마음이 든든했다. 어느 한번 연변의 한 녀작가와 한담을 하다가 조상들의 묘소가 화제가 되었다. 그때 그녀는 나에게 “산소가 있는것과 없는것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라고 묻는것이였다. 나는 별 생각없이 “뿌리의식이 작용하지요. 조상의 묘소가 있고 해마다 성묘하고 있는 나로서는 부평초와 같이 허망 떠돌아다니는 방랑자가 아니라 대지에 튼튼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초목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나는 줄곧 하나님이요, 부처님이요 하는 우상숭배를 하지않는 무신론자인데 그 대신 조상들의 얼이 가장 어려울때 나를 지켜주지 않았나 하고 혼자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지난해 심양에 계시는 형님께서 내가 여름방학에 중경에서 돌아온 기회를 타 산소에 가서 성묘하시겠다고 했다. 이미 년세가 칠순을 훨씬 넘었고 또 중풍에 걸려 반신이 그냥 저리고 마비된 상태이지만 기어코 손수 산소에 가서 벌초를 하시겠다고 한다. 장남이지만 먼 심양에서 살다보니 5,6년에 하번 정도 친척들의 결혼식이 있으면 찾아왔다가 꼭 산소에 가보시는 형님이였다. 이번만은 여느때처럼 택시를 잡고 가는것이 아니라 꼭 도보로 산아래로부터 산마루까지 걸어 올라가겠다고 하여 그 의사에 따랐다. 그날따라 도보로 산마루로 올라가면서 형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먼 타향에서 죽음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면서 고위직까지 오른 파란만장의 인생이였는데 여기에 뿌리가 있다는 것으로 하여 언제나 마음이 든든하였다고 산소에 누워계시는 조상들에게 감사했을것이다.   사실 옛법대로 하면 조상들의 산소를 지키는 일은 모두 장남의 차지였다. 그런데 나는 차남이지만 장남 못지않게 산소 지키기에 정성을 다 했다. 그래서인지 내가 바라던 자그마한 욕망들은 어렵게나마 곡절 끝에 두루 이루어지군 하였다. 아무런 백도 없고 관계처리를 전혀 모르는 내가 자신의 힘으로 애써서 성사하였다고 말하기가 무엇하면 늘 입버릇처럼 “해마다 청명과 추석에 산소에 가서 조상들을 잘 모신 덕분이지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말은 듣고 있던 사람들은 “맞아요. 남들도 모두 그렇다고 하던데요.”라고 맞장구 치군 하였다.   대략 20여년전 어느해인가 장춘에서 평생 사업에만 몰두해온 큰 매형이 연길에 와서 부모의 산소를 찾아보겠다고 하였다. 중한수교 전에 누님과 큰 매형은 한국에서 고위직에 있었던 장조카의 초청으로 서울 구경을 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그 장조카가 조상들의 산소가 그대로 있느냐, 언젠가 조상들의 산소를 ‘배알’하고 큰 비석을 세우겠다고 하자 말문이 막혔다고 하였다. 그래서 연길 동북쪽 공동묘지에 모셔져 있을 산소를 급급히 찾아보려 한것이였다. 그런데 그때 그 공동묘지는 과기대 캠퍼스 자리로 징용돼 이미 불도저로 몽땅 파헤친 상태였다. 임자있는 묘는 사전에 이장했는데 임자없는 묘소는 마구 파헤쳐져 사처에 깨여진 비석들이 어지럽게 널려져 있었다. 매형은 이 정경을 보고 너무 억울하여 말도 하지 못한채 몇 번이고 주위를 돌면서 좀처럼 그 자리를 떠날줄 몰랐다. 날이 저물었는데 하는수 없이 내가 나서서 그냥 그 주위를 맴돌고 있는 매형을 설득하고 맥없이 돌아왔다. 이 일로 하여 매형은 아마 장조카에게 크게 꾸중을 들었을 것이고 그날부터 고인이 될 때까지 불효라는 큰 짐을 지고 살았을것이다. 그리고 장수하지도 못하고 회갑을 넘자 세상 뜨고 말았다.   3년전 우리 가문의 장손이 암으로 사망하였다. 그런데 관내에서 일하던 아들딸들이 앞으로 어머니까지 관내로 모시고 가야할 형편이고 아버지 묘소를 돌볼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화장을 하고 골회를 그냥 굴뚝으로 날려 보냈다. 그날 나의 마음은 아주 착잡하였다. 과연 인젠 연변 떠난 후손들이 모두 이런 식으로 장례를 하면 성묘라는 풍속은 완전히 소실되는걸까? 마음이 언짢았지만 그런대로 불교 가족에서도 이런 식으로 장례를 하겠지 하고 서글픈 마음을 달랬다.     나는 2년전부터 청명, 추석에 성묘하던 관습을 고쳐서 방학이면 날을 잡아 성묘를 가군 한다. 이것이 재래의 풍속에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름대로의 성의는 다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조상들의 산소는 나의 마음을 정화하는 성지이다. 지금 되돌아보니 나는 불효자는 아니지만 효자로 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부모님께서 생전이라면 더 잘해 드릴텐데...’라고 시시로 생각하지만 후회막급이다. 하지만 그래도 산소가 있어 부모님의 은덕에 감사할수 있는 장소가 있는 내가 행복하다.                             2008년 추석, 중경에서                                                          
8    방취제 중경 시험장 인상 댓글:  조회:1469  추천:41  2008-09-19
                           \'방취제\' 시험장 인상                                김병활   4월 20일에 있게 되는 한국 방문 취업제로 인한 한국어 능력시험 - ‘실무한국어’ 시험을 보려고 전국 각지의 조선족들이 며칠사이에 전례 없는 관내 대이동이 있었다. 거리가 제일 멀고 교통이 불편한 곳은 아마 서남지역의 중경과 성도일 것이다. 중경 응시생 중에는 연길에서 전용 버스로 4주야를 꼬박 달려온 이들이 있다고 한다. 시초에 인터넷 신청에서 문제가 발생해 이에 대한 비판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내막이야 어떠했던지를 막론하고 옛날에 하늘 오르기보다 더 어렵다는 ‘촉도난’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천수만리의 여정을 강행해 온 그들의 정신에 우선 감동되었다.   시험관을 맡은 사천외대의 한족 교직원들이 60세에 가까운 할아버지, 할머니들마저 불원천리하고 중경 시험장에 온 것을 보고 감탄을 하면서도 “그 연세에 뭘 하러 한국에 일하러 가요?”라고 의아한 듯 말한다. 사실 인천 공항에서 줄지어 한국에 들어오는 동남아 연수생(노무자)들을 보면 말짱 20-30대 청년들이었는데 중국의 조선족은 나이를 완전히 망각하고 한국행을 택하고 있다. 같은 민족으로서는 물론 이해가 간다. 가족 관념이 강한 부모로서는 아직 해야 할 책임이 쌓여 있다. 자식들을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를 보내고 살림집까지 마련해 주자면 집에서 농사만 짓고는 안 될 것이고 복잡한 시장경제에 적응하지 못해 아무리 돈벌이를 애써봤자 밑지기만 한다. 그러니 “힘만 내면 돈을 벌 수 있는” 한국을 바라보는 것이다. 한편 평생 시골에서만 살다보니 늙도록 눈부시게 발전하는 현대문명을 체험할 수 없다. 마침 다른 나라에 비해 언어 소통이 편리한 한국이 그들에게는 현대문명을 “만끽”할 수 있는 훌륭한 장소이기도 하다. 다행히 한국 정부에서 ‘무연고 방취자’들을 배려하여 시험을 통해 출국 자격을 취득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니 나이를 망각하고 앞 다투어 외국노무자가 되려는 것이다. 나는 연세 많은 분들이 여북하면 이런 길을 선택했겠느냐고 동정심이 가기도 했지만 그들의 책임감, 의지력, 굴강한 정신에는 탄복되기도 했다.    응시생들의 수준은 차별이 컸고 시험장에서 나올 때의 표정은 십인십색이었다. 20-30대의 젊은 층들은 1교시의 필답시험에서 반시간 정도 지나자 답을 다 쓰고 가벼운 웃음을 지으면서 여유작작하게 퇴장하군 하였다. 그런데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마지막까지 깔고 앉아 썼다가 지우고, 또 지웠다가 쓰고 하는 것이었다. 대체로 50대에 들어선 응시생들은 <문화대혁명> 시기에 학교를 다니다 보니 별로 배운 것이 없었을 것이고 또 농촌에서 장기간 농사만 짓다보니 얼마 배우지도 못한 지식도 다 까먹었을이라고 짐작이 간다. 하지만 많은 여비를 쓰면서 그토록 먼 서남지역까지 올 바엔 어느 정도 미리 시험 준비를 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이번 시험에서는 성적순으로 출국 인원을 결정한다고 하니 40-50대가 탈락될 확률은 아주 크다. 다음번 시험에 참고로 될 것 같아 천박한 인상이나마 응시생들의 문제를 몇 조목 적어본다. 1. 시험 방식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 이름과 수험번호를 쓰는 방법과 답안지(컴퓨터 채점용 카드)에 답안 번호를 지우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한족 시험관이 두번 정도로 표준한어(普通話)로 설명하고 조선족 시험관이 또 조선어로 두 번 정도로 설명했는데도 알아듣지 못하는 응시생들이 적지 않았다. 때문에 필답 시험시간과 듣기 시험 시간이 모두 연장되곤 하였다. 2. 영어 이름을 쓸 줄 모른다. 영어이름이라야 한어 병음과 같은 것이다. 이런 영어 이름은 이미 ‘수험증’에 활자로 똑똑히 쓰여 있기에 그대로 베끼기만 하면 되는데 그걸 베낄 줄 몰라 우리 보고 대신 써달라고 한다. 자기절로 쓴 것도 틀린 것이 간혹 있다. 예를 들면 \'G\'를 써야 할 자리에 ‘C\'를 쓴 것과 같은 것이다. 3. 듣기 시험에서 일부 문제는 한 단락의 말이 끝난 후 답을 두 개 쓰는 것이 있다. 그 답은 부르는 번호에 따라 각각 선택하게 된다. 예컨대 23번 과 24번을 같은 한 단락의 말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데 먼저 ‘23번’하고 제시한 후 답을 선택하는 시간을 주기 위해 잠간 쉬었다가 또 ‘24번’하고 제시한다. 그런데 ‘23번’하고 쉬는 사이에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자 “이 문제가 틀렸다. 왜 말이 나오질 않느냐?”라고 야단법석이었다. 적지 않은 응시생들은 두 개 답 중에서 단 하나만 썼다고 한다. 여러 지방에서 개설한 강습반에 참가하면 이런 문제가 해결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시험문제 유형과 해답방식에 대한 상식이 결여된 채 시험을 보다나니 필연적으로 생소한 시험유형과 해답방식에 당황해 질수밖에 없다.    4. 내가 보기엔 한국에 가서 노무에 종사하기엔 부적절한 응시생들이 일부 있는 것 같다. 50대의 한 ‘할아버지’는 손이 떨려 영어 이름을 쓸 수 없다고 하면서 나보고 대신 써달라고 하였다. 다가가 보니 확실히 오른 손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 나는 대신 써주면서 저도 모르게 낮은 소리로 “이렇게 손을 떨면서 어떻게 한국 가서 일 할 수 있어요?”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 할아버지는 “점심에 술을 마셔서 손이 떨립니다.”라고 대꾸하는 것이었다. 왜 숱한 돈을 팔면서 그처럼 중요한 시험을 보러 올 때까지도 손이 떨릴 정도로 술을 마셔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나는 그가 아마 오래전부터 술을 즐겨 마시는 경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짐작했다. 이런 분들이 한국에 나가서 그 술버릇을 뗄 수 있겠는지 걱정된다. 너무 맹목적이 아닌가 싶다.   5. 한국에서 중국식 조선어를 하면 무시당한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는데 응시생들이 거의 다 사투리에다 중국어를 되는대로 섞어 쓰고 있었다. 중경 시험장에는 동복 3성 각지에서 응시생들이 모여 왔는데 거개 다 함경도, 경상도, 평안도 방언으로 말하고 있었다. 어쩐 응시생들은 조사(토)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 한어 단어를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무시를 당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한국어를 얼마간 배워야 할 것 같다.  6. 한족 학교를 다닌 조선족 응시생들의 처지가 보기 딱하였다. 내가 맡은 시험 장소에는 한 산재지구에 온 중년 여성이 있었는데 우리말이 안 되어 모든 대화는 한어로 해야 했다. 심지어 한국어로 자기 이름을 쓰고는 나보고 맞는지를 봐 달라고 하는데 그 수준으로 어떻게 이번 시험에서 출국 자격을 얻을 수 있겠는지 근심되었다. 요행을 바라는 심리가 작용한 것 같다.   나는 15년 전에 일본 텔레비전에서 어느 한국인 노무자가 일본에서 밤마다 야학으로 하는 일본어 강습반(학원)에 참가하는 프로를 보았다. 그 노무자는 왜 이토록 열심히 일본어를 배우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아주 당당하게 일본어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고도바가 오까네데스요(말이 곧 돈이에요).” 그의 이 말은 지금도 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도 외국에서 일하면서 어느 정도 대접을 받으려면 될수록 해당 국가의 말을 잘 구사해야 한다고 본다.     한마디 부언할 것은 사천외대 한족 교직원들로 구성된 마음씨 고운 시험관들이 “인간본위(以人爲本)” 사상에 입각하여 수준 차한 응시생들의 문제를 잘 보완해 주었다는 것이다. 시험이 끝난 후 답안지를 살펴보니 몇몇 응시생들이 수차 가르쳐준 방식대로 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답안지(카드)에 수험 번호를 쓰지 않고 아래의 수자만 지운 것, 컴퓨터 채점을 위해 나누어 준 필로 쓰지 않고 다른 필로 지운 것 등 문제를 발견하고 일일이 대신 수정해 주었다.   아무튼 애초에 말썽 많았던 시험이 관련 부처에서 늦게나마 여러모로 조처하였기에 그런대로 시험은 별 말썽 없이 무난하게 끝난 것 같았다. 다음 시험에서는 이번 시험의 경험을 잘 살려서 보다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                                                 2008.04.21    중경에서                              
7    결혼식 주례사 댓글:  조회:1526  추천:37  2008-09-19
   김관웅교수의 큰 따님 결혼식 주례사  연변대학 조문학부의 김병활입니다. 오늘 결혼식에서 주례의 신분으로 축사를 드릴수 있게된것을 더없는 영광으로 간주합니다.  존경하는 하객여러분  오늘은 연변대학의 저명한 학자이며 박사생도사이신 김관웅교수의 큰 따님 김정란 양과 길림대학의 유명한 학자 김증손교수의 아드님 김호씨가 백년가약을 맺는 기쁜 날입니다.  저는 백마왕자(白马王子) 신랑 김호 씨와 요조숙녀(窈窕淑女) 신부 김정란 양의 행복한 결합을 충심으로 축하하며 또한 두분의 변함없을 백년해로를 축원합니다.  오늘 이 결혼은 <<천시, 지리, 인화(天时, 地利, 人和)>> -- 이 모든것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구비되였습니다.  우선 <<천시(天时)>>를 보면 중추절도 방금 지난 황금시절—오곡이 무르익는 가을날에 신랑은 한가위날 큰 보름달처럼 환하고 꽃처럼 예쁜 신부를 맞이하였고 신부는 가을의 붉은 단풍처럼 정열에 불타오르는 백마왕자의 드넓은 품에 안기게 되였습니다.  다음 <<지리(地利)>>를 보면 민족의 얼을 간직한 장백산기슭에 자리잡은 연길에서 결혼하는 이 젊은 신랑, 신부는 백두산의 정기를 온몸에 듬뿍 받아들일수 있어 백년해로는 물론, 그 후손들도 완강한 생명력으로 이 세상 한끝까지 리상의 날개를 펼치고 자유자재로 날아옐수 있을것입니다.  그 다음 <<인화(人和)>>를 보면 신랑, 신부는 모두 같은 민족문화를 만끽하면서 화기애애하게 가정을 꾸릴수 있는 튼튼한 문화적기초가 마련되여 있습니다. 신랑과 신부는 모두 중국의 굴지의 명문대학 길림대학에서 하늘이 맺어준 사랑의 연분이 생겼고 그 싹을 키우고 열매를 맺게하여 오늘의 원만한 결혼에 이르게 되였습니다. 거기에 또 두 사돈집의 어르신님들은 모두 명문대학의 저명한 학자, 교수들로서 실로 문벌이 맞는 골든 파트너십(황금조합-黄金组合)이며 또 금상첨화라고 할수 있습니다.  오늘 이 기쁜 날에 저는 행복한 새 가정을 이룬 신랑, 신부에게 다음과 같은 부탁을 하고저 합니다.  첫째,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신랑, 신부가 오늘이 있게된 것은 두분을 낳아 키워준 부모님들의 덕분이며 고향의 아름다운 대자연과 찬란한 민족문화의 요람이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날로 부강해지는 이 나라의 은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은혜에 대해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깊이 간직하길 바랍니다.  둘째, 결혼은 애정의 종식이 아니고 더욱 새롭고 달콤한 사랑의 시작이라는것을 명기하길 바랍니다. 로씨야의 위대한 문학가 레브. 똘쓰또이는 <<결혼을 신성하게 할수 있는것은 오직 사랑이며, 진정한 결혼이란 사랑으로 신성해진 결혼뿐이다.>> 라고 잘 말하였습니다. 저는 신랑, 신부가 <<이 세상을 다 준다해도 바꿀수 없는>> 그런 참된 사랑을 영위해 나갈것을 바라마지않습니다.  셋째, 중국의 굴지의 명문대학에서 사랑의 꽃을 피운 신랑과 신부는 지적면에서나 용모와 체형면에서나를 막론하고 모두 우수한 <<유전인자>>를 갖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런 우수한 <<유전인자>>들을 잘 조합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선조들을 초월라는 훌륭한 아들딸들을 나라에서 허용하는대로 많이 낳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나라에 대한 충성이요 부모에 대한 효성이며 또한 민족에 대한 공헌이라고 확신하는바입니다.  이상으로 저의 축사를 마치면서 다시한번 신랑, 신부의 행복과 하객 여러분들의 건강을 충심으로 축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김병활, 2003년 9월13일) 
6    \"졸업의 노래\"에 깃든 사연 댓글:  조회:2623  추천:57  2008-08-26
  [수필]        \"졸업의 노래\"에 깃든 사연       - 연변대학 조문학부 77학번 이야기(1)                                  김병활   금년은 ‘문화대혁명’이 종식된 후 대학 입시제도를 회복하여 처음으로 대학에 입학한 77학번 대학생들이 실지로 대학 교정에 들어와 학업을 시작한 지 만 30년 되는 해이다. 4년 동안의 학창 생활을 마치고 사회에 진출하던 해는 1982년 1월 초였다.     그해 졸업식에서 잊을 수 없는 일은 바로 행사마감에 힘차게 불려진 ‘졸업의 노래’였다. 전 장내는 기립 상태에서 조문학부 77학번 졸업생 김성우 작사, 김병활 작곡으로 된 ‘졸업의 노래’를 연변 가무단 인기 가수 김응 씨의 노래를 록음하여 전 장내에 울려 퍼지게 했다. 그 때 우리의 심정은 더없이 격동되었다.   작사자 김성우와 나는 모두 조문학부 출신으로 대학 공부시절 전공이 음악이 아닌 문학이였는데 자신들이 과외로 창작한 노래가 대학교 졸업식에서까지 열창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이 일은 우연한 것 같지만 기실 여러 면에서 미리 준비되어 있은 것 같았다.(사진4 참고)   김성우는 목단강 출신으로서 당시 다재다능한 젊은 학도였다. 그는 문학 창작뿐만 아니라 언어학에도 상당한 취미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축구, 수영, 음악 등 다방면에 걸쳐 재능을 과시하기도 했다. 서양문화라면 덮어놓고 ‘자산계급 문화’로 인식하고 기피했던 그 시절 우리 반급 침실에서 ‘문화대혁명’ 사이에 거의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던 서양 악기 기타를 연주할 수 있은 사람은 바로 김성우였다.   대학 시절 동아리 활동에서 김성우의 가장 큰 공로는 아마 80년도 경에 조문학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문학 서클 ‘종소리’문학사를 창립한 것이라고 본다. ‘종소리’문학사에는 소설, 시, 문학평론 등 여러 분과를 두었는데 김성우가 발기인 및 총 책임자로 되었고 78학번 후배 김호웅 씨가 소설분과를 책임지고 내가 문학평론분과를 책임졌던 기억이 남아있다. 종소리 문학사 멤버들은 조문학부를 중심으로 했지만 다른 학과의 학생들도 참여하였다. 례컨대 정치학부의 장경률 씨(연변일보  론설부장)도 우리 문학평론분과에서 활약하였다.   종소리 문학사는 창립된 후 연변의 저명한 작가, 시인들을 초청하여 특강을 마련했고 또 그들과 함께 대형 시 랑송회를 열기도 했다. 그리고 종소리 문학사 구성원들이 가사를 쓰고 예술학교(지금의 예술학원) 대학음악반 77학번의 학생들에게 작곡을 의뢰하고 같이 감상 모임을 갖기도 했다. 그 때 대학음악반 동아리 책임자는 남희철 씨라고 기억된다. 당시 창작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정확히 평가하기는 어려웠지만 아무튼 이런 행사를 통해 우리는 가요 창작에 대해 초보적인 인식과 훈련을 갖게 되었다.   나는 ‘종소리’문학사 분과책임자의 한 사람으로서 김성우와 취미 면에서 통하는 데가 있었다. 나는 ‘문화대혁명’시기 농촌에 내려가 귀향 지식청년으로 있으면서 생산대대(지금의 행정 촌) 문예선전대 대장을 맡은 적이 있었고 소학교 교원으로 된 다음엔 음악교원도 겸해 하였다. 어느 해인가 연길현 혁명위원회에서 춘절(음력설)을 전후하여 연길현 주변의 해방군 주둔부대를 위한 위문 공연을 해야 했는데 ‘주양과 주덕해의 검은 문예로선’을 따른 연길현문공단이 이미 해체되여 곤난에 직면했다. 그리하여 림시로 원 문공단의 일부 골간들과 농촌 문예선전대에서 활약하던 지식청년들을 선발하여 위문공연단을 구성하였다. 그때 나의 손풍금 연주수준이 다소 인정받은 모양인지 이 위문단 악대에 손풍금수로 선발되여 한달 남짓이 순회공연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그 무렵에 나는 과외로 문학창작과 노래창작을 열심히 공부했고 당시로서는 꽤 인기 있는 소형 가극과 노래들을 창작해 내기도 했다. 그리고 공사(公社) 음악교원 훈련반(강습반), 문예골간 훈련반을 꾸리게 되면 늘 나를 지도교사로 의뢰하는 것이였다. 만약 대학 입시제도가 회복되지 않아 내가 그냥 농촌에 남아 있었더라면 그냥 아마추어 작사자, 작곡자로 되어 과외 노래창작에서 손을 떼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나는 대학 학창시절에도 학교 문예 활동에 적극 참가하였고 때로는 모방작과 같은 노래들을 작사, 작곡하여 혼자 흥얼거리기도 하였다.(사진 1,2,3 참고) 지금 일부 퇴직 교직원들은 나의 이름을 몰라도 손풍금 연주하던 선생이라면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바탕이 있었기에 졸업을 앞 둔 무렵에 김성우가 가사를 가지고 와서 곡을 붙여달라고 의뢰하자 선뜻이 수락하였던 것이다.   김성우가 쓴 ‘졸업의 노래’ 가사는 다음과 같다.  1. 배움의 요람에서 푸른 꿈 키운 우리     보람찬 일터에로 나래쳐 간다네.     언제나 어디서나 잊지를 못할     모교의 종소리에 가슴 울리며    (후렴)아, 안녕히, 존경하는 스승이여,    아, 잘 있거라, 어머니 대학이여.    2. 언제나 인민에게 붉은 맘 바쳐가며    스승의 가르치심 높이 받들리라.    눈보라 사나워도 비바람 쳐도    모교의 밝은 창문 앞길 밝히리.    (후렴) 3. 조국의 곳곳에서 별처럼 빛날 우리    찬란한 래일 위해 위훈을 떨쳐가리.    설레는 감격 안고 다시 만날 때    모교와 더불어 축배 들리라.    (후렴)       이 가사는 그 시절 졸업을 맞는 동창생들의 심정을 진실하게 반영했기에 특별한 설명이 없어도 쉽게 공감을 가질 수 있었다. 따라서 나의 작곡도 그처럼 어렵지 않게 선률이 쉽게 마음속으로부터 흘러나왔다. 초고가 나온 뒤 우리는 시창을 해보고 수개를 거듭하다가 이만하면 투고할 수 있다고 여겨 ‘연변대학 신문’(학보)에 원고를 가져갔다.   그 때 대학신문 주필은 김영식 선생이였는데 우리의 대담한 발상과 창작 활동을 대범하게 여기고 신문에 실어줄 용의가 있다고 표시했다. 사실 우리의 소박한 념원은 졸업하면서 문자 형식으로 창작품을 내놓아 기념으로 남기자는 것 뿐이였다. 다시 말하면 신문에 발표되기만 하면 만사대필이었다. 그 일은 뜻대로 되어 ‘졸업의 노래’는 ‘연변대학’ 신문 1981년 12월 25일 자 ‘진달래’12기에 실리였다. (사진5 참고)   그런데 그 후 우리가 예상치도 못한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졌다. 어느날 대학교 선전부 간사로 있던 김세걸 선생과 공회 구락부 음악 지도로 있던 김경섭 선생이 나를 부르더니 우리가 창작한 노래를 연변 가무단의 인기 가수 김응 씨가 불러 록음한 뒤 졸업식 날에 대회장에서 열창한다는 것이였다. 이 소식을 들은 나는 깜짝 놀랄 지경이였다. 단지 활자로 된 창작품을 대학교 신문에 실은 것만으로도  만족인데 이런 예상 밖의 엄청난 경사가 벌어지는 것이였다. 나는 흥분된 마음을 눅잦히고 김세걸, 김경섭 두 선생의 지시대로 몇번 감상하였다. 김응 씨의 노래는 말 그대로 사랑하는 모교를 떠나는 감회와 사회에 진출하여 큰 업적을 이루려는 젊은 학도들의 격정을 잘 표현하였다. 선율에서 수정된 부분은 후렴 중의 제7악구와 제8악구였는데 본래 좀 낮은 선률을 한 옥타브 조약하는 격정 넘치는 선률로 수정하였다. 수정한 다음 후렴 부분은 충만된 격정이 흘러 넘쳐났다. 그래서 나는 그저 ‘가무단의 전문가들이 수정한 것인데 더 이를 데 있겠습니까? 아주 마음에 듭니다.’라고 동의하였다. 게다가 반주도 악대구성이 완벽한 대형 관현악단이 연주하여 실로 금상첨화였다.   졸업식 후에 이 노래는 한국화와 김응이 부른 다른 노래와 함께 판매용 록음테프로 제작되여 시중에서 팔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 때는 저작권이란 개념이 전무하였던 시절이라 이 록음 테프에 ‘졸업의 노래’를 취입하는 것도 몰랐고 제작자들에게서 원고비 한푼도 받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혹간 연길 서시장에 가면 테프 판매상들이 확성기로 내보내는 이 노래를 자주 들을 수 있었는데 그 때마다 마음은 아주 흐뭇하였다. 나는 그저 그것만으로 성취감, 만족감을 만끽했을 뿐이였다.    지난해(2007년) 여름방학에 대학 입시 회복 30주년을 기념하는 조문학부 77학번 동창회가 있었는데 술상에서 누군가 이 ‘졸업의 노래’를 상기하면서 무심코 ‘졸업의 노래’를 발표할 때 김성우의 이름이 빠지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것이였다. 나는 설마 그럴리 있겠느냐 하는 태도였으나 이미 30년이나 지난 일이여서 그 자리에서 확답을 줄수 없었다. 그러다가 요사이 짬을 타서 먼지가 두텁게 앉은 옛날 자료들을 들춰보았는데 마침 어느 틈에서 원고 발표 시 신문을 오려 둔 것을 발견하였다. 역시 상기 ‘연변대학’ 신문에는 ‘졸업의 노래’가 발표될 때 분명히 활자로 ‘김성우 작사, 김병활 작곡’으로 되어 있었다.(사진3 참고) 다만 연변일보 1982년 2월 24일(수요일) 자 제3면에서 상기 한국화, 김응 독창곡 록음테프 광고를 보았는데 김응이 부른 노래 제9번 ‘졸업의 노래’는 제목만 있을 뿐 작사자, 작곡자의 이름을 모두 밝히지 않고 있었다. 아마 누군가 이 신문 광고만을 보고 오해하지 않았냐고 추측된다.    아무튼 남들은 거의다 잊어버렸을 이 ‘졸업의 노래’는 우리 동창생들이 대학 입학 30주년 동창회에서 그냥 마음속에 간직하였고 젊음의 활기와 창조적 용기를 되새기는 추억으로 되었다.   다만 아직도 궁금한 것은 이 노래 후렴부분을 수정한 분이 누구였고 관현악단 지휘는 누구였을가 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 노래가 지금 어디에 보존되여 있는지, 옛날 록음 테프의 노래를 재생하는 것이 가능한지도 궁금하다.                                                       2008.7.20
5    뮤지컬 《사랑의 샘》의 창작특징에 대하여 댓글:  조회:1835  추천:51  2008-08-14
       뮤지컬 《사랑의 샘》의 창작특징에 대하여                -- 문학대본분석을 중심으로                            김병활    머리말   2003년 10월 28일자 《길림신문》에는 《대형뮤지컬 <사랑의 샘> 종합우수상 수상》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10월22일, 연변연극단에서는 길림성 제19차 창작극 콩클에 참가, 연변예술극장에서 대형뮤지컬 《사랑의 샘》을 재공연하여 종합우수상을 받았다.   성문화청 동위 부청장을 평의위원회 주임으로 하는 평의위원회는 《사랑의 샘》의 성공적인 공연과 예술적 성과를 높이 평가하면서 《사랑의 샘》의 창작공연은 우리 성 연극사에서의 일대 창거이며 저조기에 처한 연극을 부활시키는 좋은 본보기라고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   동위 성문화청 부청장은 《사랑의 샘》은 우리 시대의 실제에 알맞고 관중의 심미에 알맞으며 현실생활에 알맞는 우수한 작품으로서 우리 성, 전국 그리고 외국의 그 어느 무대에서도 공연할수 있는 정품의 토대를 가지고있다고 충분히 긍정하면서 금후 배우들이 자체로 노래를 부르고 무용수들의 수준을 한층 더 높이며 무대배경을 좀 더 화려하게 하여 10년, 20년을 내내 공연해도 색 바래지 않는 좋은 작품으로 만들어 줄 것을 희망했다.   필자는 이 기사의 내용에 기본적으로 동감하면서 이런 평가는 연변 희곡계와 정부계통의 견해를 대변한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이런저런 상을 수상하고 관계부문 지도자의 찬사를 받았다하여 자만할만한 일은 아니다. 우수한 예술작품은 한번 내린 결론에 만족하고 그런 평가를 두고두고 답습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생명력 있는 예술작품은 부동한 시각에서 전개되는 각이한 토론을 거듭하면서 그 시련을 이겨낼수 있는것이여야 한다. 본문에서는 뮤지컬 《사랑의 샘》에 대해 연변 희곡평론계의 평론자료를 수집하지 못한 상황에서 일가견을 발표하려 한다. 1. 뮤지컬에 대한 초보적인식    상기 신문기사에서는 뮤지컬 《사랑의 샘》이 연변과 길림성 《연극사에서의 일대 창거》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 평가를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면 연변의 대다수 일반 관객들은 처음으로 이런 예술형식에 접하였고 관람시 뮤지컬에 관한 기본상식에 대해 생소했다고 할수 있다. 때문에 이에 대해 간단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뮤지컬은 19세기 후반에 미국에서 발생하기 시작하였으나 현대 뮤지컬은 20세기 20년대에 비교적 성숙된 예술쟝르로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뮤지컬은 대사와 노래, 춤을 섞어 이야기하는 극으로서 대체로 분위기가 가볍고 익살과 해학이 많이 들어 있다. 오늘날 유명한 대중음악가운데 많은 곡들은 뮤지컬에서 나왔다   오페라와 오페렛타(operetta, 경쾌한 가극--필자 주)는 뮤지컬과 비슷하지만 뮤지컬보다 대사가 훨씬 적다. 오페라는 대부분 고전음악으로 되어 있지만 뮤지컬은 거의 모두 대중음악으로 되어 있다. 연극도 노래와 음악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음악이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   뮤지컬의 구성요소는 대본, 음악, 가사, 춤 등이다. 대본은 뮤지컬의 륜곽과 구조를 결정한다. 음악은 대부분 관객이 쉽게 기억할수 있는 선율로 이루어지는데 오늘날에는 등장인물의 성격묘사를 두고 줄거리를 전개하기도 한다. 가사는 줄거리를 이야기하기도 하고 등장인물의 기분을 묘사하기도 한다. 춤은 관객을 즐겁게 하기 위한것도 있지만 대개는 줄거리를 전달하고 분위기를 만들어가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 뮤지컬은 한번 공연하는데도 엄청난 비용이 들기에 관객이 좋아하는 작품만을 무대에 올린다. 1)           이런 기본상식에 비추어 보면 《사랑의 샘》은 기본상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뮤지컬 쟝르기준에 부합된다고 볼수 있다. 다만 구미의 뮤지컬에 비해 분위기가 가볍고 익살과 해학이 많이 들어있는 특징이 결여되였고 뮤지컬중의 음악이 유명한 대중음악으로 전파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일정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동양의 뮤지컬이 반드시 구미의 것을 답습해야 된다는 법은 없다.   일본에서 뮤지컬을 전문 공연하고 있는 다카라즈카 가극단은 외국의 뮤지컬을 공연하는 외에 《니혼모노(日本物)》라고 하는 일본이 배경으로 된 연극 종류가 있는데 일본의 전통적분위기와 함께 다카라즈카 특유의 화려함을 느낄수 있는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니혼모노》는 일본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 실존인물, 민화, 만화 등에서 힌트를 얻어 사랑에 관련된 주제를 만들어 창작극을 공연하고 있다.   근년에 한국에서 국제무대에 올린 대형 뮤지컬 《명성황후》도 민족성을 살리는데 주력한것이지 일부러 구미의 심미습관에만 매달린 것은 아니라고 사려된다. 이런 작품들은 모두 민족성을 중시하고 동서 각국 관객의 심미습관에 두루 맞추었기에 국제적 성망을 가지고 있다.   2. 뮤지컬 《사랑의 샘》의 민족성과 시대성 1) 민족성    부동한 민족에게는 부동한 문화전통이 있다. 민족문화전통 속에서 살아온 작가들은 민족문화전통의 영향을 받지않을수가 없다. 작가의 스찔(风格)은 민족문화전통의 요소를 포함하게 되며 민족성을 나타내게 된다. 민족풍격은 작가들의 언어에서 표현될 뿐만아니라  제재, 주제, 기질과 작품에 체현된 민족정신 등 모든 면에서 나타난다.2) 뮤지컬 《사랑의 샘》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수 있은 것은 바로 창작자들이 민족정신과 민족심리를 잘 파악하고 작품에 반영하였기 때문이다. 아래에 이 작품에 체현된 민족정신과 민족심리를 분석해 본다.        (1)민족의 집단무의식을 반영한  《독서열》   뮤지컬 《사랑의 샘》의 기본 줄거리는 시골 농민이 땅을 버리고 생소한 도시에 들어와 자식들을 대학과 중점고중에 진학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이야기이다. 농경사회에 바탕을 둔 유가사상이 세세대대로 우리 민족의 사상을 지배하면서 《소 팔아 자식 공부시킨다》는 말은 우리 전반 민족에게 있어서 이미 하나의 집단무의식으로 된듯하다. 사농공상(士农工商)의 서렬로 인간의 가치를 부여하는 유교사회에서 공부하여 출세하는것만이 가장 의의있는 인생으로 되었는데 이른바 《무한경쟁시대》라고 하는 오늘날에도 그 가치를 잃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작품증의 주인공 학수는 아무런 사회배경(back)이 없이 제힘으로 농사지어 살아가는 순박한 시골 농민이다. 학수 부부는 머리가 총명한 자식들이 시골에 파묻히는 신세를 면하고 출세를 하려면 오직 공부를 잘하여 대학에 진학하는 길밖에 없다고 인정하고 무작정 소를 팔고 도시에 진출한다. 하지만 그들이 《열두번을 죽었다 살아나더라도》열심히 공부를 하려는 동기는 단순하지는 않다.    제1장에서 학수의 안해 영애가 부른 노래 《촌닭과 봉황》에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다.   개천에서 룡이 납니다/ 봉황은 날때부터 봉황이랍니까/ 봉황도 고향은 시골이라 합디다/ 봉황도 원래는 촌닭이던게 꿈을 꿈을 잘 꾸어서 봉황이 되였답니다.../ 우리 아들 우리 딸이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우리 아들 룡이고 우리 딸이 봉황입니다.                                                              -- 영애의 노래 《촌닭과 봉황》     이는 오늘날 자식들을 공부시켜 훌륭한 인재로 키우겠다는 상투어 《자식이 룡이 될 것을 바란다(望子成龙)》를 가사(歌辞)화 한것이라고 할수 있다.    제2장에서 자전거를 사준 부모에게 학수의 딸 문옥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버지, 어머니, 잘 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금후 공부를 더 잘하는 것으로 아버지 어머니의 태산같은 사랑에 보답하겠습니다.》   제5장에서 학수의 생일날에 부른 아들 문철이의 노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아버지를 위하여 어머니를 위하여/ 학습을 잘하여 대학에 가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 찾으면 / 아버지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렵니다/ 이 세상 그 어느 아버지 어머니들보다/ 더욱 더 행복하게 해드리렵니다   효성으로 차넘치는 이 노래는 그들의 학습 동기가 그 무슨 아득한 리상에서가 아니라 고생하는 부모에게 효도하려는 자식들의 순박한 마음으로 해석될수 있다. 여기에서 공부를 잘하려는 그들의 원초적인 동기를 엿볼수 있다. 아마 학수 부부도 내심으로는 이를 바라고 있다고 할수 있다. 이런 기특한 자식들을 위해 영애는 죽을 각오를 하고 자식공부를 시켰고 실지로 목숨을 바쳐가면서 이를 실천해 간다.   학수의 일부 대사에서는 나라를 위해 자식들을 인재로 양성하겠다는 고상한 정신과 동네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세우기 위해 반드시 자식을 중점대학에 진학시키겠다는 심리가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 제7장에서 문철이와 문옥이가 고생하는 아버지를 차마 볼수 없어 공부를 안하고 돈을 벌겠다고 하자 학수는 대노하여 자식을 훈계한다.   《네 암마는 왜 죽으면서까지 돈을 벌어? 목표가 명확하지 않니? 다 너희들을 공부시키고 너희들이 공부를 잘 해서 나라에 유용한 사람이 되라고 돈을 번게다. ... 똑똑한 애들은 너네처럼 공부를 그만두고 돈을 벌겠다고 하는게 아니라 어떻게 하나 공부를 잘 하고 좋은 대학에 가서 아버지를 기쁘게 해주는 것으로 아버지 고생한 빛깔이 나게 한다는게다. ... 그저 어떻게 하나 너네 공부를 잘 해서 큰 사람이 되는 그 하나만을 바라보며 사는데 그 한가닥 희망마저 없어지면 이 애비 무슨 멋에 사니?》   제 8장에서 고향에 돌아온 학수가 근심속에서 문철이의 입학통지서를 애타게 기다릴 때 학수의 친구 영삼이 북경대학, 청화대학이 문제없다고 위안의 말을 하자 학수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그렇게만 되였으면 그렇게만 된다면은/ 내 평생 소원 풀고 동네면목 서겠는데...》   이처럼 학수부부와 그들 아들딸의 독서 동기는 다양한바 나라 위한 인재 배양, 부모에게 바치는 효도, 동네마을에서 체면 유지하기 위한 것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아무튼 우리 민족의 이런 열광적인 《독서열》과 거기에 깔려있는 보편적인 사회적심리를 잘 파악하고 예술화한 것은 작품이 성공할수 있는 하나의 기본적요소--민족성의 체현이라고 할수 있다.  (2) 고향 농촌에 대한 애착   유가는 가족문화와 인간관계를 각별히 중시한다. 농경사회는 주로 가족을 단위로 생산에 종사하게 되는데 이런 가족은 한 마을, 한 지방에 집중되는 것이 보통이다. 고향은 바로 이런 가족이 모여 살던 고장이기에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고향은 역경속에서도 심리적 안정을 찾을수 있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지난 세기 80년대 이후부터 시장경제의 도입으로 하여 농민들의 도시 진출은 불가피하게 되였고 도시화에 따른 농민들의 고향탈출은 이 시대의 하나의 돌출한 특징으로 된다. 중국에 이주한 우리 민족의 제1세들은 거의 모두 농민이였고 지금 이미 도시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농촌에 고향을 두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 민족은 현대사회에서도 여러모로 농민들의 생활에 가장 밀착되여 있다. 따라서 농민생활을 제재로 한 예술작품이 관객에게 충분히 공명을 일으킬수 있는 심리적바탕도 충분히 마련되여 있다. 《사랑의 샘》이 바로 농민을 주인공으로 하였고 시대적전환기에 도시와 농촌사이에서 몸살을 앓고 있는 눈물겨운 생활을 다루었기에 많은 관객들을 감동시킬수 있었다.   제1장 고향사람들과 작별하는 연회에서 학수는 다음과 같이 노래 부른다.   땅 없이 못사는 농민이란다/ 소 없이 못짓는 농사란다/ 소 팔고 땅 내놓고 고향을 떠나/ 시내로 올라가는 발 무겁다// 아... 이 세상 한 끝에 간대도 내 이름 변함없이 농민이란다// 봄이면 밭 갈아 씨를 뿌리고 가을엔 풍년가 높이 불렀지/ 정이 든 고향사람 언제 또 볼가/ 시내로 올라가는 발 무겁다/ 내 이름 변함없는 농민이란다                                     -- 학수의 노래 《나는 농민이다》   학수가 도시에 들어와 삼륜차를 끌다가 건달청년들에게 뭇매를 맞은후에 부른 노래는 다음과 같다.   수모도 모욕도 참아왔건만/ 매까지 맛고는 참을수 없구나/ 아... 그리워라 시골의 그 생활/ 시골 찾아 돌아가리라                                     -- 학수의 노래 《시골 찾아가리라》   이 가사에서는 도시생활에 대한 부정과 함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고향에 돌아가려는 심리를 일각에서는 《자궁회귀설(子宫回归说)》로 해석하면서 이는 누구에게나 다 있는 심리라고 인정하고 있다. 때문에 이런 보편적인 인간심리를 상황에 따라 잘 표현하면 관객들에게 충분히 감동을 줄수 있다.  학수 부부의 이런 분투과정은 우리민족의 정서특징인 《한(恨)》으로도 해석할수 있다. (3) 필사적 분투와 성공한 후의 만족감   우리 민족은 근면성, 인내성을 선도하면서 필사적인 분투로 이룩한 성취를 극구 찬양하는 성향이 있다. 문학예술작품에서는 흔히 이른바 《고진감래》식 결말로 표현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 민족의 문학예술작품들에는 비극적결말이 아주 적으며 작중인물들이 아무리 극한적인 상황에 처했어도 그 결과는 언제나 《대단원(大团圆)》으로 이루어진다. 《사랑의 샘》도 이런 민족적인 심미취향을 따랐기에 관객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주인공들의 비장한 분투과정을 지켜보다가 나중에는 그들의 성공에 심미적만족을 얻게 된다.     학수와 영애는 자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말 그대로 죽음을 대가로 한 필사적인 악전고투를 거듭한다. 제5장에서 영애는 남편의 생일날에 심장병이 발작하여 죽음을 예감하게 된다. 이때 그녀의 독백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이제 며칠 갈것같지 못합니다. 오늘 이 생일상이 내가 당신에게 차려주는 마지막 생일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보시오. 나를 위해서 애들을 위해서 당신만은 제발 건강해야 합니다. 당신까지 쓰러지면 모든게 다 끝납니다. 끝까지 함께 가지못하는 이 못난 안해를 용서해주십시오.》   이처럼 영애는 자식들의 공부를 위해 죽음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죽으면서 근심하는 것도 여전히 자식들의 공부이다.   제5장에서 학수가 생일날에 건달들에게 매를 맞았다는 말을 듣고 온 가족이 분개하는 와중에 문철이는 칼을 들고 건달들과 결판을 내려한다. 이때 부른 영애의 노래가사는 다음과 같다.   아버지는 농사일이 힘들어서 시내로 왔니/ 어머니는 농촌에서 살기 싫어 시내로 왔니/ 오직 하나 너희들의 장래를 위해/ 정든 고향 정든 사람 다 버리고 왔단다// 아버지가 건달한테 맞으며는 뭐가 어떻고/ 어머니가 류망들께 욕을 보면 뭐가 대수니/ 오직 하나 너희들이 공부를 잘 하면/ 무슨 고생 무슨 욕을 못 참아내겠니/ 너희들이 활개치며 대학에 가는걸 본다면/ 어머니는 죽는대도 한이 없단다                                     -- 영애의 노래 《죽는대도 한이 없다》    학수의 심경도 안해에 못지않게 비장하다. 영애가 죽은후 학수가 부른 노래 《사나이의 눈물》는 아주 감동적인바 모든 관객들의 가슴을 찡하게 한다.   가슴속엔 눈물이 억수되여 쏟아져도/ 눈시울엔 황홀한 무지개를 피웁니다/ 눈물을 흘려야만 우는겁니까/ 아... 아... 사나이 눈물/ 사나이의 눈물은 피랍니다  피랍니다// 세상없는 슬품도 가슴속에 묵새기며/ 얼굴에는 그 언제나 밝은 웃음을 피웁니다/ 눈물을 흘려야만 우는겁니까/ 아... 아... 사나이 눈물/ 사나이의 눈물은 피랍니다  피랍니다                                                   -- 학수의 노래 《사나이 눈물》   제8장에서 아들 문철이 북경대학에 붙었다는 입학통지서를 받아보고 오열하면서 부르짓는 학수의 대사는 더욱 감동적이다.  《장하다. 문철아! 문철아 장하다... 여보 문철이 엄마! 우리 문철이 북경대학에 붙었소. 여보, 당신 듣소? 우리 문철이 대학생이 됐소. ... 여러분, 동네 여러분 ... (무릎을 꿇고 앉으며) 우리 문철이 북경대학에 붙었습니다... (학수 손으로 땅을 치며 황소울음을 터뜨린다.)》   이런 장면에서 관객들도 주인공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오열할것이다. 하지만 그 눈물은 단순한 슬품의 눈물이 아니고 죽음을 대가로 얻어온 성공에 대한 축복도 깃들어 있을 것이다. 이는 비극의 카타르시스 효과가 충분히 발휘되는 부분이다.        (4) 《흥부와 놀부》형 두 가족 대조 모식   조선고전명작의 하나인 《흥부와 놀부》는 두 형제가족의 흥망성쇠를 대조적으로 묘사하면서 권선징악의 륜리도덕을 선양하고 있다. 이는 고전문학의 하나의 심미적모식으로 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적지않은 작품들에서 이런 기법을 활용하여 우리민족의 무의식에 깔린 권선징악의 심리적취향을 표현하고 있다. 《사랑의 샘》의 창작자들이 의도적으로 《흥부와 놀부》형 두 가족 대조 모식을 채용했는지는 알수 없으나 아무튼 이 작품에서 이런 대조적 표현기법은 민족성을 살리는 면에서 성공한 사례라고 할수 있다.   학수의 안해 영애와 그녀의 오빠 영화는 모두 시골 농촌에 파묻혀 살던 농민들이였다. 그들은 모두 농촌을 떠나 도시로 진출하지만 그후의 생활진로와 결과는 판판 달라진다.   영애의 오빠 영화는 놀부형 인물로서 현대 물질문명을 향수하려는 욕망은 강렬하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량지와 능력이 전혀없기에 놀부처럼 부정당한 기편수단으로 하루아침에 거부가 되려 한다. 제3장에서 영화와 그의 안해 설매는 출국수속을 해준다는 사기수단을 펴면서 량심적 가책을 받을 대신 벼락부자가 되는 꿈에 흥이 나서 엉덩이를 우습게 놀리며 현대무를 춰댄다. 이 장면에서 부른 그들의 노래는 다음과 같다.   사기를 치는것도 재간이란다/ 얼리고 닥치면서 고래를 낚자/ 꼬부랑 새우는 작아서 싫고/ 납작한 자라는 미워서 싫다/ 그물을 늘여라/ 낚시를 걸어라/ 사기도 재간이라 고래를 낚자/ 어제는 시골의 가난한 농민/ 래일은 도시의 벼락부자다/ 왕고래 왕고래 고래를 낚자/ 왕고래 낚아서 부자가 되자                                          -- 영화와 설매의 노래 《고래를 낚자》    이는 《흥부전》에서 놀부가 《보물박》을 타면서 노래하는 장면을 련상케 한다. 놀부식 인간들인 영화 부부는 끝내 사기행각이 들통나고 피해자들에게 맞아 죽을 위험이 닥쳐오자  어린 자식마저 다 버리고 도망친다.   이와 반대로 녀동생 영애네는 흥부네 집과 비슷하다. 그들은 도시에 들어온후 조손 삼대가 한 구들우에서 비좁게 살면서도 순박한 농민의 천성을 잃지않고 부지런히 일하였고 모든 치욕을 참아가면서 선심을 베풀며 일한다. 이런 착한 마음은 일부 도시 사람들을 감동시키며 학수 부부의 로동대가를 후하게 치루어주기도 한다. 착한 사람은 언제나 흥부처럼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것과 같이 학수 부부의 꿈은 이루어지고 아들 문철이는 대학에 진학한다.   이 두 가족의 대비를 통해 관객들은 놀부형 인물들인 영화와 설매 두 부부의 행실에 분개를 가지는 동시에 그들이 자초한 악과에 대해서는 쾌재를 부르게 된다. 따라서 목숨을 내걸면서 자식들을 공부시키고 나중에 성공한 흥부형 인물들인 학수와 영애의 피땀으로 얼룩진 이야기에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박수갈채를 보내게 된다.     2) 시대성   부동한 시대에는 부동한 문화가 있고 그 시대속에서 생활하는 작가는 해당 시대의 분위기에 감염되지 않을수 없다. 작가의 문학스찔(风格)은 필연적으로 해당 시대의 문화적요소를 내포하게 되며 시대성을 표현하게 된다. 문학스찔은 언제나 시대적문화의 특징을 반영하게 되며 문학의 시대적풍격을 형성하게 된다. 이른바 시대적풍격이란 바로 작가, 작품이 총체적특색 면에서 특정시대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해당시대의 정신적특질, 심미적요구, 심미리상을 표현하고 있음을 말한다. 시대적풍격은 단지 그 시대에만 속하고 다른 시대에는 있을수 없는 문학의 총체적특징을 가리킨다. 3) 역경속에서 자식을 공부시켜 출세하게 한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문학예술에서 흔히 불수 있는 제재이다. 같은 제재라 하여도 시대성이 약하면 외면당하게 되고 반대로 시대성이 강한 예술작품은 대중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줄수 있다. 뮤지컬 《사랑의 샘》은 비교적 강한 시대성을 갖고 있기에 관객들에게 공명을 일으키고 감동을 줄수 있었다. 작품에 반영된 시대성은 대체로 아래와 같은 몇 개 면에서 체현되였다.       (1) 시대전환기에 나타난 도시와 농촌의 차별   도시와 농촌의 차별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차별은 부동한 시기에 부동한 내용과 표현형식을 가지고 있다. 개혁개방 이전에 보통 농민들이 도시로 대거 진출하는것은 거의 상상할수 없었기에 차별은 존재하였지만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남길 정도로 심각화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개혁개방이후 농민들이 자유로 도시에 진출하면서부터 이런 차별은 코를 맞대고 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매일 매시각마다 봉착하게 되는 가시적 현상으로 되였다. 이런 차별로 하여 농촌에서 일찍 자존심이 강한 촌장으로 활약하였던 학수도 도시에 온후 무서운 렬등감에 눌리우게 된다. 시대전환기에 도시와 농촌의 차별로 인기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학수는 단순히 자신의 무능에 귀결시키고 자책과 한탄을 금치못한다. 제1장에서 조용히 공부할수 있는 작은 방 하나가 필요하다는 문철의 소원을 듣고 학수는 느티나무를 주먹으로 쳐대며 오열을 터뜨린다.   《문철아, 내 너한테 미안하다. 너의 친 애비로서 너의 그런 고충도 모르고 여직껏 살아왔으니 내가 무슨 애비냐? 흐흐흑... 작은 방 하나... 내 애비로 생겨서 그런 소원 하나도 못 풀어줬으니 문철아... 내가 무슨 애비냐? ...》   학수는 자신이 건달들에게 매를 맞거나 안해 영애가 억울하게 도적으로 몰리는 것은 참을수 있지만 자식들에게 도시 아이들처럼 좋은 학습환경을 마련해줄수 없는데 대해서는 부모로서 용서할수 없는 죄악처럼 가책을 느끼게 된다. 나중에는 끝내 현대 도시문명에 적응하지 못한채 안해를 잃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 고향에 되돌아가게 된다. 작품에서 이 과정에 대한 묘사는 선명한 시대성을 띠고 있기에 관객들에게  낡은 곡조를 되풀이하는 감을 주지 않았고 현존하는 사회문제를 사고하게 하는 무거운 감명을 안겨준다.   이밖에 제5장에서 영애가 병이 있어도 치료하지 못하고 죽고마는 스토리도 강한 시대성을 띠고 있다. 비록 학수가 돈을 아끼지 말고 병을 먼저 치료해야 한다는 《간단한 도리도 모르고 죽는》 《부실한》 안해를 원망하지만 영애와 같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도리》는 그처럼 《간단한것》이 아니다. 학수는 제6장 앵애의 무덤앞에서 또 한번 자신의 렬등감을 다음과 같이 발설하고 있다.   《내 같은 이런 머저리 남편을 만나서 말이다. ... 내보다 똑똑한 돈 잘 버는 나그네를 만났더라면 이렇게 안갔을게다...》   순박한 농민은 이 정도로 자책할수밖에 없지만 기실 이는 당면 전반 사회가 심각히 고민해야 할 사회문제이다.               (2) 시대전환기의 세대차이   두 세대 간의 차이를 묘사하는 것은 동서고금의 명작에서 흔히 다루고 있는 모티브이다. 이런 세대차이는 시대 전환기에 특별히 선명하게 나타나게 되는데 이를 민감하게 포착하고 예술적으로 잘 표현한다면 그것은 선명한 개성과 함께 독특한 시대성을 띠게 된다. 《사랑의 샘》은 개혁개방이후 농민들의 도시진출이 가시화될 때 고향 농촌을 떠나기를 주저하는 부모세대와 현대도시문명을 갈구하는 새 세대의 차이를 뚜렷하게 반영하고 있다. 제1장에서 막이 열리자마자 문철이와 문옥이 동네아이들은 흥겨운 댄스음악에 맞추어 현대무를 추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부른다.   랄라라라라... 랄라라라라.../ 농촌을 리별하고 시내로 간다// 수레바퀴 덜컹덜컹 굴러가는 시골을 떠나/ 매미차가 쌔앵쌔앵 달려가는 시내로 간다/ 이십리 길 산길을 걸어 걸어 학교 가던 일/ 인제는 영원히 력사로 남겨두고/ 새로운 배움의 전당을 찾아/ 랄라랄라 우리는 시내로 간다/ 랄라라라... 랄라라라.../ 농촌을 리별하고 시내로 간다                                                          -- 《시내로 간다》   이 장면에서 젊은 세대들이 얼마나 현대문명의 출산지인 도시를 동경하는가를 알수 있다.     하지만 부모 세대는 자식들의 공부를 위해 어쩔수 없이 정든 고향을 버리고 생소한 도시로 들어간다. 제1장에서 학수는 도시진출을 결심한 후에도 천당일지 지옥일지 막연한 도시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다. 그의 독백 한 단락 보기로 하자.   《학수: (호미를 들고 나오며) 나서 자란 고향, 조상의 뼈가 묻힌 고향을 래일이면 영영 떠나야 한다. 피땀으로 걸군 기름진 밭을 버리고 인정 많은 고향사람들을 작별하고 길 설고 사람 설고 생활마저 생소한 시내로 가야 한다. 시내! 시내란 나에게 있어 천당일가 지옥일가? 천당이든 지옥이든 가야만 하는 길.. 그 길에서 정녕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가? 희망? 희생? 행복? 불행? 다 같은 한 글자 차이다만 제발 믿거니 전자만 있고 후자는 없어다오. 희망, 희생, 행복, 불행...》   농민답지 않은 인테리식 독백이지만 자식들을 위해 무작정 도시로 진출하는 순박한 농민들의 불행을 예감케 하는 비장한 정서를 느낄수 있다. 이런 정서는 《시골샘물 외에는 무어나 다 좋은》 현대도시문명을 동경하는 신세대와 완연히 구별된다.        (3) 시대전환기에 나타난 인물의 모순심리와 복잡한 성격    문학예술 작품의 인물형상화에서 복잡한 성격을 어떻게 부각하는가는 작품의 상패를 결정하는 하나의 요인으로 된다. 대가들의 명작에는 인물의 복잡한 성격을 부각하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 례컨대 로신의 《아Q정전》에 나오는 아Q, 파금의 《집》에 나오는 고각신, 로씨아 뚜르게네브의 《아버지와 아들》 등 작품에 나오는 《쓸모없는 사람》 등이다. 긍정인물일지라도 《문화대혁명》시기의 《고대전(高大全)》식 인물이라면 독자와 관객들은 모두 외면해버릴 것이다.   《사랑의 샘》에서 학수와 영애의 성격은 복잡성을 띠고 있다. 농촌을 버리고 도시에 진출함에 있어서 그들 부부의 심리려정은 상반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학수의 심리려정은 《동요--확고한 신념--동요》이지만 영애의 심리려정은 《확고한 신념--동요--확고한 신념》이다.   학수는 처음에 도시가 천당일는지 지옥일는지 몰라 무척 망서린다. 또 농촌 아이들이 학교에서 도시 아이들의 학습성적을 따르려면 《열두번을 죽었다 살아나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자신감을 얻지 못한다. 하지만 영애는 《봉황도 원래는 촌닭이던게 꿈을 꿈을 잘 꾸어서 봉황이 되였답니다. ... 우리 아들 룡이고 우리 딸이 봉황입니다.》라고 노래하면서 남편을 설득한다.   그러나 영애의 이런 신념은 시종 확고한 것은 아니였다. 제5장 학수의 생일날 영애는 생일상을 차려놓고 혼자 되뇌인다.   《당신 인젠 쉰살이 되는데 날마다 산더미같은 짐을 힘겹게 밀고 다닐때면 ... 무턱대고 시내로 오자고 고집을 세운게 후회되기도 합니다. 당신 밤이면 맥없이 신음소리를 내며 쉬는걸 볼때는 정말 시골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자꾸 올리밉니다.》   영애의 이런 동요는 비록 잠시뿐이였으나 어쨌든 그녀의 복잡한 심리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 나중에 학수 부부는 동요없이 기정 목표를 위해 필사적으로 분투한다.    결말에서 학수는 《지옥같은》 도시에서 탈출하여 고향에 되돌아 온다. 비록 아들 문철이의 대학 입학으로 하여 학수의 《사명》은 완수된듯하지만 기실 따지고 보면 완전히 그런것도 아니다. 아직도 딸을 대학에 보내야 할 《책임》이 있고 가령 둘이 다 대학공부를 하게 되면 학수의 부담은 더욱 가중해지는 것이다. 때문에 학수가 미리 고향에 돌아온 것은 그들의 처음 사유방식대로 따진다면 일종 도피행위인 것이다.       3. 계속 탐구되여야 할 몇가지 문제 1) 유가사상의 영향--유일독서출세론과 중농경상(重农轻商)사상   우리 민족의 하층 농민들에게는 《애비 없이는 살아도 소 없이는 못 산다》는 속담이 있는데 그처럼 귀중한 존재인 《소를 팔아 자식 공부시킨다》는 말도 상식처럼 된듯하다. 그런데 《사랑의 샘》에서는 이런 옛 속담도 무색할 정도로  《목숨을 팔아 자식 공부시킨다》는 차원에로 끌어올린 감을 준다. 영애의 죽음은 관객들에게 돌연한 감을 주는것이 아니다. 작품에서 영애의 죽음은 작자가 시종 복선을 늘이면서 강조하는 예감으로 떠오르다가 나중에 확실한 결과로 락착짓게 된다. 부모는 언제나 《죽더라도》 자식들을 공부시키려 하고 자식들도 《열두번 죽다가 살아나더라도》 도시 아이들을 따라잡기 위해 공부한다. 목숨을 바치면서도 자식 공부시킨다는 이야기는 더없이 비장하고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창도되여야 할 보편적인 륜리도덕으로 될 수 있겠는지 의문이 간다.   필자는 일본의 한 현대작가가 문학이라는 이 《성스러운 사명》을 위해 세 자식이 굶어죽고 앓아 죽는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작품 창작에 몰두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문학을 위해 세 자식의 생명마저 바치는 《순도자》의 정신에 감동되긴 했으나 나약한 필자의 소견으로는 더없이 소중한 인간의 생명을 대가로 그 어떤 명예와 체면을 얻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다. 이런 필자이기에 《사랑의 샘》을 감상하면서 영애의 죽음에서 커다란 공명을 일으켰고 눈물이 나도록 감동되긴 하였지만 자신더러 그녀처럼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자식을 공부시키라고 한다면 어쩐지 주저심이 생길 것 같다.    이밖에 《사랑의 샘》에서는 유가의 《중농경상(重农轻商)》사상이 때때로 표현되고 있다. 유가사상은 농경사회의 산물이기에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경제의 부착물인 금전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현대도시생활에 물젖고 생산업종이 아닌 상업성 돈벌이에 나서면 무조건 타락하게 된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학수 부부와는 대조적으로 영화네 부부를 금전 때문에 타락한 부정인물로 형상화한 것이 그 일례로 된다. 만약 텔레비전 드라마 《사랑의 샘》처럼 려행사 경리 전호같은 인물이 따로 긍정적으로 형상화된다면 상황은 좀 달라질 것이다. 이외에 영애의 무덤앞에서 학수는 《그 개도 안 먹는 돈 때문에 그 아픈 동통도 참고 그 무거운 순대그릇을 이고 순대 팔러 다녔단 말이다.》라고 한탄한다. 금전숭배를 부정하는 학수의 이런 태도는 담론상황(语境)에 따라 긍정될바이지만 유가사상을 대변하는 《개도 안 먹는 돈》이라는 관념을 현대사회에서 긍정적으로만 받아들이는것은 어느 정도 토론되여야 할 여지를 가지고 있다. 2) 현대도시문명에 대한 부정    현대사회에서 도시는 현대적인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을 산출하는 주요 장소이다. 따라서 도시화에 따른 농민들의 도시진출은 오늘 사회에서 이미 하나의 력사적 추세로 되였다. 물론 시대전환기에 도시문명은 완벽한것일수 없으며 농민들도 도시생활에 적응하려면 진통을 겪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나 만약 도시의 일부 결함과 농민들의 진통만을 클로즈업하면 손쉽게 도시문명을 부정하는데로 나아가게 된다. 《사랑의 샘》에서는 농촌인심과 도시 인심에 대한 대조를 통해 도시를 부정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두 가족의 운명을 통해 농민이 도시에 들어오면 영화네처럼 타락되지 않으면 학수네처럼 혈육이 죽고 가정이 파탄된다는 인상을 강하게 주고 있다. 때문에 학수에게 있어서 도시는 절대로 천당이 아니라 지옥이였다. 제1장과 제2장의 막간에서 한 도시 청년이 삼륜차 료금을 내지 않고 달아났을때의 장면을 보기로 하자. 학수: 달아났다구? 시내에는 그런 법도 다 있다니? 설매: 그런 법이? 범이 다 씹어먹고 지금 법이라는게 어디 있음둥? 아주버님이 촌사람인걸 알고 놀리는게꼬마! 학수: 세상에... 세상에 이런 법도 다 있단 말인가? 까짓 돈 몇푼이나 된다구 ... 야, 세상도 한심하다. 설매: 팔팔 뛰는 산 범의 코등에서 밥알을 뜯어먹는게 지금 세상이꼬마! 알만함둥? 가겝소.   도시에 대한 농민들의 이런 관념은 딸 문옥에게도 감염된다. 제5장에서 학수가 생일날에 건달들에게 뭇매를 맞은후 문옥이는 격분하여 웨쳐댄다. 문옥: 그럼 어머니는 내가 지금 정신병자처럼 돼보입니까? 난 지금 백프로 제정신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난 이 잘난 시내에 있는게 지금 지옥에 있는 것 같습니다. 시내 좋으면 어머니나 그냥 시내에서 사시오. 영애: 너 정말 ... (문옥의 귀썀을 후려친다.) 너 정말 진짜 돌았구나. 내가 지금 시내에 살고파서 여기 와 사니? 나를 위해 지금 시내에 와 사는가?   이런 대화에서 표현된 심각한 극적 갈등은 도시의 한 모퉁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문제를 사실주의적으로 잘 반영하고는 있다. 그러나 그들 관념중의 자체모순도  발로되고 있다. 만약 도시문명이 아니였더면 그들이 오매에도 바랐던 중점고중에서의 공부와 대학진학이 가능했을런지가 문제이다.  3) 예술표현형식면에서 탐구되여야 할 문제   《사랑의 샘》이 연변 무대에서 처음 올리는 뮤지컬인것만큼 예술표현면에서도 이런저런 문제가 나타난 점은 별로 이상할것이 없다. 하지만 그냥 간과해도 되는 문제인것만은 아니다. 례컨대 뮤지컬의 주요 배역을 맡은 배우가 뮤지컬의 가장 중요한 요소중의 하나인 노래를 자신의 육성으로 부를수 없다는 점은 우리들에게 그럴사한 뮤지컬을 공연할수 있는 인적 여건이 마련되였는가를 의심케 한다. 그리고 뮤지컬의 특성을 고려하여 비극적인 정서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작품일지라도 관중들의 긴장한 심미정서를 완화시킬수 있는 해학적인 장면이 좀더 삽입되면 일희일비의 효과를 한층 강화할수 있을 것 같다. 영화 부부의 일부 언행에서 풍자와 해학적인 요소가 표현되고는 있지만 아직도 부족한 감이 든다. 이밖에 대중들에게 널리 애창될수 있는 몇수의 노래를 알심들여 창작하는것도 뮤지컬이 예술생명력을 가질수  있는 중요한 고리라고 사료된다.   방언사용 문제도 심중히 토의되여야 한다. 방언을 적당히 사용하면 지방색, 향토색을 짙게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과도하게 사용하면 문제시된다. 소설 열독에서 독자는 리해할수 없는 부분을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되돌아와 재음미할수 있지만 극 공연시 관중은 리해하지 못한 대사를 배우더러 그 자리에서 다시 말하라고 할수 없다. 관객 범위를 연변에만 한정시킨다면 별문제이지만 연변방언을 사용하지 않는 타지방에서 공연한다면 심미적 장애가 올수 있다. 뮤지컬 《사랑의 샘》을 보다 높은 차원에 끌어올리자면 대부분 관객이 거의다 알아들을수 있는 보다 품위 있고 세련된 대사와 연변 방언을 적당히 결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맺는말   뮤지컬 《사랑의 샘》은 연변 연극사에서 의의(意义)있는 실험성 창작으로 된다. 작품은 내용면에서 사회현실을 민감하게 반영한 시대적특징을 갖고 있으며 우리 민족이 모두 심리적으로 공감할수 있는 민족성도 구비하고 있다. 예술형식면에서 기여한 창의적인 노력도 충분히 긍정을 받아야 한다.   뮤지컬 《사랑의 샘》이 현 상태로는 일류 작품으로 평가받기는 어렵다고 필자는 외람된 견해를 가지게 되지만 아무튼 창작자들이 제일 처음 게와 거미를 맛본 용사로 평가받아야 한다. 필자는 일부 시행착오를 범하더라도 어려운 환경에서 연극의 부진을 타개하기 위해 피타는 노력을 경주한 창작자, 배우들에게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다.   옥에서 티를 가리는 식으로 일부 문제를 제기하였는데 총적으로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 뮤지컬 《사랑의 샘》은 중국조선족희곡사에 남을만한 비교적 훌륭한 작품인것만은 틀림없다. 앞으로 명실공히 《우리 성, 전국 그리고 외국의 그 어느 무대에서도 공연할수 있는》 훌륭한 작품으로 될 수 있기를 충심으로 기대한다.                                                                                          2006. 2                      [<예술세계> 2007.3]
4    연변 출신 중국현대작가 락빈기 댓글:  조회:2263  추천:51  2008-08-02
       연변 출신 중국현대작가 락빈기         (락빈기의 문학세계와 동북 다민족문화)                       김병활    중국현대문학사에서 한 페지를 차지하는 저명한 작가 락빈기(骆宾基)가 우리 연변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연변사람은 별로 없다. 필자도 전공분야가 중국현대문학이기에 락빈기와 그의 문학세계를 다소 알수 있게 된것 같다. 필자가 락빈기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단순히 그가 연변 훈춘 출신이라는 점에 기인된 것이 아니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자신의 출생지인 훈춘을 배경으로 개성이 풍부한 많은 여러 민족 인물들을 형상화하였고 또 여러 민족이 함께 생활하고 있는 변강의 민속과 인정세태에 대해 많은 편폭을 들여 묘사하고 있다. 그중 조선인들에 대한 묘사도 아주 주목되는 부분으로서 당시 연변지역의 정치, 경제, 문화를 리해하고 조선인들의 생활실상을 파악함에 있어서 생생한 화폭을 제공해 주고 있다.       락빈기(骆宾基,1917-  )의 본명은 장박군(张璞君)이며 연변 훈춘현 소재지의 한 상인, 지주가정에서 태여났다. 아버지 장성검(张成俭)은 청조 광서(光绪)년간에 산동성 평도현에서 울라지보스토크에 로무일군으로 갔다가 후에 도박장, 일용잡화상점을 경영하여 2등 신사라는 사회지위와 체면을 세웠다. 나이가 40이 되자 그는 산동 고향에 돌아와 김씨 성을 가진 소녀를 첩으로 삼았다. 김씨는 종친들 앞에서 첩이라는 대우를 받기 실어 로씨야, 조선 변경에 있는 훈춘에 정착하였고 아들 락빈기를 낳았다. 로씨야 10월혁명으로 인해 짜리시대의 화페 루블이 가치가 폭락할 때 락빈기의 아버지는 이런 상황을 제때에 파악하지 못하고 사기술책에 걸려 루블을 대량 인수하여 파산되고 말았다. 그러자 할수없이 일찍 사들였던 토지(占荒地) 3천무를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락빈기는 17세 나는 해에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의 령구를 모시고 산동 교동에 갔었다. 그후 북경에 가서 중국대학, 북경대학에서 방청생으로 있었고 북경도서관에서 로신의 작품과 외국명작을 탐독하였다. 1935년에 동북에 돌아와 쏘련류학을 위해 할빈 정화학원에서 로어를 배웠다. 이때 동북의 좌익시인 김검소(金剑啸)에게서 동북청년작가들인 소군(萧军), 소홍(萧红)이 상해에서 로신의 도움을 받아 문단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상해로 갔고 비좁고 숨 막히는 정자간(亭子间)에서 처녀작 장편소설 <<변경선에서(边陲线上)>>를 창작하여 그의 문학생애를 시작하였다. 그후 그는 많은 수작들을 창작하였는데 본문은 단지 연변지역과 관련된 소설 <<변경선에서>>, <<죄증>>, <<혼돈--강보외 가족사>> 등 몇편만 소개한다.   <<변경선에서(边陲线上)>>1)은 소군의 <<8월의 향촌>>과 비슷한 창작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 장편소설은 관동 변경일대의 원시산림의 울창하고 비장한 모습과 민풍의 강인함과 우울함을 묘사하였고 초연이 자욱한 전쟁터를 생동하게 그리였다. 소설은 위 만주국이 세워진 이듬해인 1933년 훈춘 변경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5월의 심야에 구국군 류(刘)사령은 대오를 거느리고 훈춘시내로 공격해 들어갔다. 철퇴할 때 백정 출신인 병사 관이호(关二虎)가 일본군에게 체포되여 사형되였다. 도시 안에도 망국노를 원치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관이호의 송아지동무였던 류강(刘强)이 밤을 타서 사형장의 시체를 빼내여 안장하였다. 도시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류강의 아버지 류림(刘林)은 아들을 데리고 농촌에 가서 피신할 겸 조선인 소작농들에게서 소작료를 받으러 떠났다. 그런데 뜻밖에도 고려(조선) 홍당(红党, 공산당)에게 나포되였다. 그들 부자는 기회를 보아 도망쳤는데 류강은 위자구 벌목공들로 구성된 의용군에 가담하였다. 아버지 류림은 훈춘 시내로 돌아왔는데 평생 피땀으로 바꾸어 온 땅이 일본군에게 비행장으로 몰수된 것을 알게되였다. 이에 류림은 얼마 안되여 화병으로 세상을 떴다. 아편장사군 왕(王)곰보는 고향친구 류림의 장례를 치르고 일본군의 강박으로 철로를 수축하는 쿠리들을 감독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일본당국이 로동자들에게 삯전을 주려는 생각이 꼬물만치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쿠리들을 이끌고 유격대를 찾아 산으로 도망하였다. 일본군이 구국군을 소탕하러 오자 왕곰보와 류강이 소속된 유격대는 위기에 처했다. 생존을 위해 그들은 험산준령을 넘어 류사령이 거느리는 구국군과 합류하였다. 하지만 이 대오는 내부분쟁과 비적기풍이 판을 치고 있었다. 비적출신인 류사령은 사사로이 금광을 차지하고 많은 황금을 저장하고 있었으나 병사들에게는 생활비(军饷)를 한푼도 분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위자구에서 온 인마를 극력 배척하였는데 쿠리출신의 병사 장씨가 상점에서 돈을 몇푼 빼앗았다는 리유로 총살하고 이로써 위자구에서 온 병사들을 혼내려 하였다. 이에 병사들이 반발하자 류사령은 자기 지반이 흔들리는 것을 감촉하고 일본군의 투항권유를 접수하려 하였고 또 투항을 반대하는 퇀장(团长)을 가두었다. 이때 류강이 선뜻 나서서 조선 홍당(红党)과 련계를 맺고 병사들을 령솔하여 사령부를 공격하였다. 갈길이 없게된 류사령은 자살하고 말았다. 류강은 일본군의 진공을 격퇴하고 대오를 이끌고 조선 홍당의 기발이 휘날리는 산봉우리로 전이하였다.   <<변경선에서>>는 1936년 초겨울에 탈고되였으나 전란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3년후인 1939년 초겨울에 비로소 출판되였다. 때문에 이 작품은 소군의 <<8월의 향촌>>, 소홍의 <<생사장>> 등 동북작가군의 초기작품들처럼 센세이션(轰动效应)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작자는 후일에 만약 이 소설이 항일전쟁 발발전에 출판되였다면 일정한 효과를 거둘수 있었겠지만 3년후에 출판되였기에 영향력이 약화되였다고 지적하면서도 여하튼 당시에 문단의 주목을 받은 작품이라고 자부하였다.   이 소설에 대해 오복휘(吴福辉) 교수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항전발발 전후에 창작되고 출판된 <변경선에서>는 사건서술이 비록 번잡하지만 스토리가 사시성(史诗性)으로 충만되여 있으며 지주와 농민의 모순, 항일대오가 갖고 있는 내외모순은 작자가 큰 스케일로 잘 구성해 놓았다. 이 작품은 작자가 장래 40년대에 보다 큰 력작이 나올 것을 예시하고 있다.>>2)       <<죄증(罪證)>>은 1940년에 발표된 중편소설로서 락빈기의 창작발전에서 탐색성을 띤 작품이라고 할수 있다. 이 소설의 특색은 변태심리를 묘사하는 것을 통해 위 만주국에서 정신적 압박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한 청년 인테리의 령혼을 드러내 보이였다. 주인공 오점규(吴占圭)는 북경대학 법학원에서 학업에만 몰두하고 세상사를 불문하는 연변 훈춘 출신의 대학생이다. 그는 부모를 만나려 고향 훈춘에 돌아가기 위해 천진에 가서 <<만주국>>의 <<입경증>>을 신청하면서부터 동북에서 일어난 사변의 엄중성을 피부로 느끼기 시작하였다. 대련에 도착하여 려객선에서 내릴 때 소홀한 탓으로 <<입경증>>에 <<일본, 독일, 이딸리아 일체화>>에 대한 감상을 써넣지 않았다. 이에 일본 특무기관에서는 그를 정치혐의범으로 간주하고 감옥에 밀어넣었다. 5년이라는 지겨운 감옥생활에서 오점규의 취약한 신경은 지칠대로 지치였다. 그가 석방되자 녀동생 옥방(玉芳)이 감옥에 와서 이미 멍청해진 그를 배동하여 고향 훈춘에 돌아왔다. 일제 치하의 훈춘에는 특무들이 파리떼처럼 욱실거리였다. 오점규가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원래 건달군이였던 여사덕(余士德)이 일본헌병대의 특무노릇을 하면서 감시하기 시작하였다. 오점규가 피곤하여 길가의 돌계단에 앉아 있는데 안경을 건 특무 여사덕이 그의 주변에서 언뜰거리자 숫한 구경군들이 여름날의 파리떼처럼 몰려들어 야단법석이 되였다. 이에 정신이 아찔해진 오점규는 길에서 허둥거리다가 하마트면 마차에 치워 죽을번하였다. 그는 유령처럼 겨우 제집으로 돌아왔는데 어머니는 그의 병을 치료하느라고 미신놀음을 벌리였다. 그는 무시로 악몽에 빠져들어갔는데 험한 절벽에 올라갔다가 깊은 물속에 빠지군하였다. 폭풍이 몰아치는 밤에 그는 굴뚝 우에 올라섰다가 자신을 끌어내리려는 아버지를 물어놓아 상처를 입히기도 하였다. 녀동생 옥방이는 국방부녀회와 일본 장관 사무실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모던 아가씨였다. 그녀가 일본과 로씨아가 곧 전쟁을 하게된다는 소식을 집에 전하자 아버지는 아들을 저장실에 가두어 놓고 중로변경에 가 혼란한 틈을 타서 콩 장사를 하여 횡재를 하려 하였다. 그런데 그는 어수선한 전쟁시국에 길을 잃고 조선경내로 잘못 들어갔고 나중에 두만강변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이때 오점규는 여전히 저장실에 갇혀 바줄을 풀고 나오려 발악하면서 사람만 보면 잡아먹을것처럼 흉악한 표정을 짓군 하였다.   이 소설은 고골리의 <<광인일기>>의 주인공과 같은 병태심리를 련상시키고 있다. 그리고 소설은 토스토예브스키의 <<죄와 벌>>처럼 랭혹할 정도로 심각하게 인물의 심리를 해부하고 있다. 소설은 또 민족의 비극과 가족의 비극을 결부하여 묘사하고 있는바 나라가 일제에 의해 산산조각이 된 험한 세월 속에서 변강의 작은 도시 훈춘의 괴상한 병태적 모습을 그리면서 참담한 운명감을 표현하고 있다.   <<혼돈-- 강보외 가족사(混沌--姜步畏家史>>는 장편자전체소설로서 락빈기의 창작이 성숙기에 이르렀음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은 일찍 <<강보외 가족사 제1부: 유년>>(일면 <<유년(幼年)>>)이라는 제목으로 1944년에 계림삼호서점에서 초판 발행되였고 그후 1947년에 상해신군출판사에서 <<혼돈>>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이 소설은 작가가 계림에서 중경에로 전전하면서 5, 6년 동안 제일 알심들여 창작한 작품으로서 락빈기의 예술 창작에서 돌파를 가져온 결정체라고 할수 있다. 제2부 <<소년>>은 1945-1946년 사이에 중경 시교에서 초고를 써서 <<문학>>지에 련재되다가 3기까지 련재된후 잡지가 페간되였다. 그후 40년대 후반에 상해의 <<청명>>지와 <<교성보(侨声报)>> 문예부간에 일부가 련재되였다. 1980년대에 작자는 이 원고를 다시 수개하기 시작하였고 그 일부를 할빈 <<동북작가>>지, 장춘 <<신원(新苑)>>지에 발표하였다. 1994년에 북경 10월문예출판사에서 제1부 <<유년>>과 제2부 <<소년>>을 한데 묶어 <<혼돈초개(混沌初开>>라는 총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소설의 어린 주인공 강보외의 아버지 강청산(姜青山)은 산동 교주반도에서 관동에 모험하러 온 사람이였다. 그는 로씨아 해삼위(울라지보스토크)에서 10 여년 애써 분투하여 2등 상인으로 되었다. 그런데 의형제를 맺은 형덕형(荆德亨)이 10월 혁명으로 파지로 되여버린 짜리시대의 루불을 강청산에게 팔아넘겨 강씨 일가는 패가에 직면하였다. 강보외는 본래 형덕형의 어린 딸 소금(小琴)과 아주 친한 사이였으나 이 일로 하여 서로 기피하는 비애감을 맛보게 되었다. 재산이 거덜이 나자 본래 무서울 정도로 강직했던 강청산은 성질이 누그려져 집에서 아들애에게 <<삼자경>>을 가르쳤고 심심풀이로 <<삼국연의>>를 읽군하였다. 강보외는 점차 집에서 나와 홍기하(红旗河)에서 얼음지치기를 놀고 있는 아이들과 휩쓸리였고 또 소학교에 입학하여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생각밖에도 교원의 선입견으로 하여 나쁜 학생으로 취급되였고 늘 체벌을 주는 자대에 얻어맞군 하였다. 강씨네 가산은 로씨아 상인에게 팔아넘겼는데 그 로씨아 상인은 세말이 되었는데도 부산하게 찾아와 가산과 잡동사니를 정리하느라 야단법석이였다. 온 가족이 이처럼 비참하게 된 것을 고려하여 아버지 강청산은 남은 토지를 청산하고 고향 산동에로 돌아가려 하였다. 그런데 어머니가 견결히 반대하였다. 본래 어머니는 시집온 뒤에야 자신이 남편에게 속혀 첩의 신분으로 들어온 것을 알게 되었다. 이리하여 남편과 함께 관동에 온후 시집 강씨에 대해 적대심리를 품게 되었고 죽어도 다시는 산동의 강씨네 가족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때문에 남편이 사업에서 실패하고 밭을 팔고 고향에 돌아가려 하자 그녀는 선뜻 나서서 뒤에 물러앉은 남편 대신에 토지를 경영하면서 한사코 산동에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소설은 주인공 강보외가 혼돈속에서 방금 세상을 알게된 어린 나이에 가운이 기울어진뒤의 랭혹한 인정세태를 맛보는 것을 치중하여 묘사하였다. 하지만 이런 가족분위기에서 그는 독단적이고 전횡적인 아버지의 속박에서 쉽게 풀려나올수 있었고 구속없는 야인처럼 대자연의 품속에서 자유자재로 생활할수 있었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별로 친근감을 느껴보지 못했고 반면에 생명의 존엄을 재생한 어머니에게서 정감의 귀속을 찾을수 있었다. 이런 묘사로 하여 작품은 농후한 인정미를 갖게 되었다.   이 소설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20세기 초반의 동북변강 소도시 훈춘의 인정세태를 생동하게 묘사한 점이다. 소설은 <<9. 18>>사변 전 훈춘에서 만족, 한족, 회족, 조선인 등 네 개 민족과 10월혁명 전후 훈춘 등지에 피란하여 이주한 로씨아 귀족후예들이 잡거하고 있을 때의 도시풍속과 인정을 잘 반영하고 있다. 물론 이런 세속은 반봉건, 반식민지 시대의 락인이 찍혀있는것이였다.   이 작은 변강 도시에는 산동 향친(乡亲)들이 세운 상점들이 들어서 있었고 도시에서 벗어나면 산동 향친들이 황무지를 개간할 때 사용하는 워펑(窝棚)들이 쉽게 눈에 띄운다. 이밖에 거리에는 고려(高丽)술집과 일본 상업회사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고 경극원(京剧院) 문앞으로는 로씨아식 네바퀴마차가 지나가고 있다. 본토에서 축출당한 백로시아 군관들은 이 거리에서 당과상점을 경영하고 있다. 청조시기에 년봉으로 황은(皇银) 288냥씩이나 받았던 정홍기(正红旗) 황족들은 이 변강 소도시에서 남은 재산을 다 파먹고 빈털터리로 되어버렸다. 일본 령사관에 의부하는 한국 통사(通事)는 세력을 확충하려고 애쓰고 있다.   소설에서 나어린 주인공이 부모와 함께 마차를 타고 훈춘거리를 지나 경극원으로 갈 때 본 거리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풍막을 씌운 네바퀴 마차인데 완전히 로씨아식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를 마주하고 앉았다. 어머니는 목에 완정한 여우가죽으로 만든 목도리를 두르었고 ... 아버지는 가죽외투에 달린 수달가죽 옷깃을 세워 입고 있었다. ... 붐비는 사람들속에 마차는 잠간 멈추어섰다. ... 이때 제일 눈에 띄운 사람은 붉은 얼굴에 붉은 이마, 붉은 머리, 붉은 눈을 가진 로씨아 유태인인데 어깨에 로씨아식 큰 도끼를 메고 길옆에 서있었다. ... 고반(만족, 마차몰이군--필자 주)은 나를 안아 마차에서 내려놓고 유리창문을 단 서양식 상점에 들어갔다. 나는 닫힌 문에 <류브린스끼>라는 금박을 올린 중국글자를 보았다. ...   고반은 사탕과자 두 봉지를 들고 마차우에 뛰여 올랐는데 나는 그가 <<이완, 이 사과를 받아!>>라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는 달리는 마차에서 멀리 떨어진 유태인을 향해 <<자네가 술을 얼마나 마셨는가 보게, 바지에 오줌을 갈겼군그래!>>라고 소리쳤다.   ... ...   북문에서 경극원까지 아직도 반리길이 남았다. 여기서부터 성호(护城河)를 따라 가게 되었는데 한쪽은 ... 어지러워진 눈과 쓰레기가 뒤섞여 록색을 띤 강물이였고 다른 한쪽은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거리였다. ... 이 거리에서 장사는 아주 잘되는 것 같았다. 중국인이 경영하는 차수레 부속품 상점, 고려인이 경영하는 술집(高丽花酒店), 메밀 틀국수(랭면?-필자) 식당, 그리고 야장간에는 어디에나 고객들이 차있었다. 그 가운데는 짧은 소수레 채찍을 들고 서있는 고려 농민들과 도끼를 든 로씨아 쿠리(苦力)들이 있는가하면 마차와 소수레의 부속품을 사는 농민들도 있다. 어떤 로씨아 쿠리는 중국식 상점의 매대밖에 서서 소주를 마시고 있는데 절군 오이를 안주로 삼아 씹고있었다. 그는 술을 다 마시고나서 손등으로 입을 쓱 닦고 나오는것이였다. 고려 술집의 구들우에는 부유한 고려 농민들이 올방자를 틀고 앉아있었다. 밝은 광선이 비낀 창문안으로 들여다보니 붉은 저고리에 흰 치마를 입은 고려 기생들이 작은 북을 쥐고 노래하고 있었다. 모두가 이처럼 즐겁고 열기에 떠있었으며 생기가 넘쳐나는 것 같았다. 이 술집에는 이 겨울철에 제일 행복한 사람들이 모인것 같지만 기실 제일 우울한 사람들이 모여 밤을 지내는 구역이였다. 외국에서 떠돌고 있는 고려 농민들과 국적을 잃은 슬라브족 유민들은 애써 벌어온 몇푼 안되는 돈에서 10전 내지 50전을 떼내여 저들의 락원을 만들어 향수를 발산할수 있는 장소를 구축하였다. 재산이 많은 중국인일지라도 여기를 지날때면 이런 이국정서에 감염되여 그 자리에 멈취서서 술취해 미친듯이 춤추고 있는 장면을 바라보게 되며 그들의 즐거운 모습을 보고 우울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 나어린 나로서는 아버지가 왜 그들의 노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우울한 기색을 띠게 되었는지를 리해할수 없었다. 아버지는 거리에서 떠도는 고려 기생(酒妓)들의 노래에 반했을가? 아니면 그들의 노래로 인해 멀리 발해 남쪽 언덕에 자리잡은 고향을 생각해서일가?   ...     이 번화한 밤거리를 지나면서 고반은 나에게 고려술집의 이름을 물었다. 이런 술집들에는 처마밑에 흰천으로 된 간판이 걸려있는데 이 집은 <<평양 려관(宿屋)>>, 저 집은 <<조양 려관>> 등으로 각각 씌여져 있었다. ...    경극원에 거의다 왔다. 원래 경극원은 동서를 가로 지른 큰 거리(横街)의 중심에 있었다. 이 큰 건물의 상공에는 일본 가스등으로 밝게 비추어진 편액이 걸려있었다.   소설은 중국, 조선, 로씨아가 서로 접경하고 있는 이 변경도시의 지역색채를 잘 묘사하고 있다. 여름이면 홍기하에 떼목이 흐르고 겨울이면 아이들이 얼어든 강우에서 얼음지치기를 놀고 있다. 봄이면 원시림에 들어가 산나물을 채취하고 세말이면 물고기 시장에서 언 잉어를 사들인다. 훈춘 홍기하의 아름다운 경치에 대해 작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도시밖에는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홍기하가 있다. 그 옛날 원주민들이 살고 있던 시절에 북쪽 언덕은 아마 정홍기(正红旗) 만족 원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였을것이다. 지금은 목재판에서 실어온 나무를 쌓아두고 있었고 목재가공소도 여러곳에 있다. 강 한켠에는 껍질을 벗긴 목재들로 무어진 떼목들이 떠있는데 강의 절반 수면을 거의 다 덮고 있다. 이런 떼목들은 여기서부터 강물을 따라 아래로 떠내려가 두만강에 이르게 된다. 일부 목재들은 거간군들에게 넘어가고 목재가공소에 실려간다. ... 여름철이면 매일 오후마다 도시안의 녀인들이 몰려와 떼목우에서 빨래를 한다. 좀 멀리 후미진 곳에서는 남자들이 떼목우에 올라서서 목욕을 한다. 아이들은 떼목우에 옹크리고 앉아 낚시질을 하고 있다. 강언덕에 자리잡은 목재가공소에서는 온종일 톱으로 목재를 켜는 소리와 도끼와 마치로 나무사이에 쐐기를 치는 소리가 울리였다. 그 소리와 아낙네들이 빨래하는 방치소리가 조화롭게 들리여오는가 하면 울라지보스토크와 청진항에서 온 수부들이 바람에 돛을 둥둥 부풀게 하고 환호하는 소리도 함께 들려온다. 이 모든 번잡한 경치와 소리는 홍기하의 아이들의 단순한 눈에는 아주 큰 유혹성을 띤 오색찬연한 락원으로 되었다.    이런 풍속화와 같은 묘사에는 작가의 동년의 꿈이 면면히 서려져 있어 항전시기 관내 타향에서 방랑하고 있는 작자의 절절한 사향의 정을 느낄수 있다. 이에 오복휘 교수는 제1부 <<유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유년>은 작자가 간직하고 있는 유년, 소년 두 시기의 천진함과 순결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으며 어린 강보외의 시각으로 만족, 한족, 회족, 조선인 등 네 개 민족이 잡거하고 있는 변강 소도시 훈춘에서 벌어진 사회와 가족의 변천사를 쓰고 있다. 그중 가정의 몰락으로 인한 비애감, 굴욕적인 생명이 간직하고 있는 존엄, 하층로동자의 소탈함과 너그러움, 청년 일대의 강직한 령혼과 정감의 귀속 등은 바로 작자가 당시 서남 대후방에 머물면서 천만리 떨어진 고향을 사무치게 그리는 향수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런 향수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인생과 자아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할수 있다.>>3)    락빈기의 소설에서 우리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조신이민들의 생활실상이다. <<변경선에서>>는 스케치 수법으로 조선인 소작농 박씨(朴盖), 조선 홍당(공산당) 유격대 지도자 김씨(金盖), 철로를 수축하는 중국인 쿠리들을 감독하는 조선인 홍씨(洪盖) 등 인물들을 형상화하였다. <<혼돈초개>>에서는 보다 다각적인 기법으로 생동하게 인물을 형상화하였는바 소작농 김병호(金秉湖)와 그의 예쁜 딸 보리(宝莉), 조선 독립당의 후손이며 보리의 미혼부인 우가(尤加,유쨔), 일본 외무특파원, 통사관(通事官) 박두인(朴斗寅) 등 인물들은 당시 조선이민들의 여러 계층을 잘 대표하고 있다. 이밖에 조선이민들이 민족적기시를 받으며 어렵게 살아가는 실태와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생존을 위해 악전고투하며 민족문화를 고수하면서 완강히 살아가려는 모습도 보아낼수 있다. 이런 내용에 대해 본문은 지면의 제한으로 간단히 언급하고 다른 론문에서 자세히 론하려 한다.   작자는 어린 시절 대지주, 상인의 도련님이였기에 그의 동심에 비쳐진 조선인 생활모습은 진실한 일면이 있는 동시에 일부 편견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바로 소설에 나타난 이런 편견 자체를 통해서도 당시 조선이민들의 실생활을 파악하는데 일정한 도움을 줄수 있다.   특별히 지적하고 싶은 것은 락빈기의 <<변경선에서>>는 중국현대문학사에서 처음으로 연변지역생활을 묘사하였고 또 많은 필묵을 들여 조선인 홍당(공산당)이 령도한 항일무장대오를 긍정적으로 묘사한 소설이라는 점이다. 이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바가 아주 큰바 향후 많은 연구를 기하고 있다.        [<문학과 예술> 2005.4-原题目:<락빈기의 문학세계와 동북 다민족문화>]
3    광주에는 \'문화\'가 없다 댓글:  조회:1837  추천:74  2008-07-17
 [수필]                광주에는 <<문화>>가 없다                                              김병활    오래전부터 바랐던 광주행이다.    <<학문을 하려면 북쪽(북경)으로 가고 돈벌이를 하려면 남쪽(광주)으로 가라.>>,<<북경에 가야 자기의 관직이 작은줄 알고 광주에 가야 자기의 돈이 적은줄 알고 동북에 가야 자신의 담량이 작은 것을 알수 있다.>>는 항간의 류행어처럼 광주는 중국에서 제일 먼저 개혁개방에 나섰고 국내에서 제일 부유한 지방으로 알려진 곳이다. 하지만 나는 잘사는 광주를 가보고 싶은 마음보다도 사실은 로신이 일찍 광주 중산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의 생활을 현지에서 탐방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하였다.    북경에서 광주행 려객기에 올라 고공에서 북경시교를 조감해보니 팔달령 주변의 만리장성이 한눈에 안겨온다. 때는 11월 초인데 여느 해보다 일찍 폭설이 내려 아아한 팔달령은 백설천지로 변했다. 심미거리설(审美距离说)이 작용한것인지 10년전에 일본에서 귀국하던차에 온가족과 함께 팔달령 장성에 도보로 올랐을 때와는 감수가 완전히 다르다. 동화세계와 같은 고산준령의 셜경을 내려다보며 흥이 도도해지자 저도 모르게 모택동의 시사 <<심원춘 . 눈>>의 시구가 떠오른다.     북국의 풍광 / 천리에 얼음 덮이고 / 만리에 눈 날리네 / 바라보니 장성 안팍은 / 망망한 은세계여라 / 도도히 흐르던 황하도 / 별안간 그 기세 잃었구나 / 산은 춤추는 은배암이런가 / 고원은 줄달음치는 흰 코끼리런가 / 저마다 하늘과 높이를 겨루네 / 날이 개이면 / 붉은 단장 소복차림 / 유난히 아릿다우리. ( 北国风光,/ 千里冰封,/ 万里雪飘。/ 望长城内外,/ 惟余茫茫;/ 大河上下,/ 顿失滔滔。/ 山舞银蛇,/ 原驰蠟象,/ 欲与天公试比高。/ 须晴日,/ 看红装素裹,/ 分外妖娆。)    동서고금에 어느 시인이 이처럼 활달한 흉금으로 북국의 눈을 묘사한적이 있었던가? 모택동은 실로 걸출한 정치가, 군사가였을뿐만아니라 문화소양이 높은 문학가였다. 그러기에 그는 만년에 일반 사람들이 독파하기 어려운 로신잡문집을 손에 놓지않고 읽으면서 크게 공감하였다한다. 나는 지금 이런 위인들과 만나 북경에서 모택동과 <<대화(对话)>>를 하고 또 광주로 로신과 <<대화>>하러 가고 있다.   광주공항에 내리자 너무 더워 숨이 탁 막힌다. 세시간전까지 북경공항에서 추워 부들부들 떨면서 탑승수속을 했었는데 인젠 두터운 웃옷과 털내의를 다 벗어내치고 티셔츠바람으로 나서야 했다. 같은 시간에 북경은 설산, 광주는 청산이라, 과연 대국은 대국이로구나!    학술회의 접대원들의 안내를 받으면서 전용차를 기다리는 사이에 나는 공항대합실의 서점을 찾아갔다. 무릇 새 고장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서점부터 돌아보는 것이 나의 오랜 습관이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온 서점의 구석구석을 다 돌아보아도 인문과학에 관한 책은 거의 없었다. 책 진렬대를 채운 것은 청일색(清一色)경제관련 도서이다. 미국, 일본, 대만, 홍콩 등 지역의 기업가, 상인들이 어떻게 기업관리과 장사를 잘해서 신화처럼 거부로 되었는가를 소개하는 책들이 나의 시야를 꽉 메울 정도로 진렬되여 있다. 그런데 이는 내가 몇시간 전에 북경공항의 서점에서 보았던과는 판판 다른 정경이다. 거기에는 인문과학 도서들이 절반정도는 진렬되여 있었는데 나는 짐이 될까봐 사고싶은 마음을 억제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광주사람들의 관심사는 돈벌이로구나, 인문과학이야 있으나마나. 그러기에 남들보다 잘 살수 있는거지.>> 이렇게 속으로 되뇌이며 나는 제딴엔 광주라고 하는 이 <<딴 세상>>에서 새로운 관념을 하나 체득했다고 생각했다.    접대용 소형버스에 앉아 광주군구 초대소로 가는 길에 우리는 안내원으로 나선 대학생과 한담을 나누었다. 외국어처럼 까다로운 광동어세계이지만 신분이 대학생인지라 우리의 언어소통은 보통화(普通话,표준어)로 별 문제 없었다. <<광주는 삼다시(三多市)로 불리우는데요, 이를테면 자동차가 많고, 슈퍼마켓이 많고 또 ...>> 안내원은 여기까지 말하고는 이상야릇한 표정으로 우리를 흘끔 바라보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도적이 많지요. 하지만 그 도적놈들은 본래 광주사람들이 아니고 외지사람들이죠.>> 제주도가 삼다도라더니 여기 광주가 삼다시이구만. 하긴 잘 사는 곳이기에 자동차와 상점이 많을것이고 또 돈지갑이 불룩하니깐 도적들도 많이 몰려들테지. 나의 판단은 늘 이렇게 엇갈렸으나 대체로 광주의 좋은 점을 많이 생각하려고 애썼다.    광주의 거리는 북경의 거리처럼 곧게 벋은 것이 별로 없다. 광주사람들이 먹기 좋아하는 뱀과 같은 야생동물을 닮아서인지 거리도 모두 구불구불하였다. 이전 같으면 왔던김에 그들이 즐기는 야생동물 료리를 맛보려했겠지만 여기가 얼마전에 온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사스의 발원지라고 생각하니 온몸이 오싹해난다. 목적지로 가는 사이에 줄줄이 지나가는 거리 량켠의 건물들을 내다보았다. 크고 작은 상점과 식당 등 가게들에는 색이 난 춘련(春联)들이 그냥 붇어있는데 <<부자가 되는 것을 축원합니다(恭喜发财)>>와 같은 말들이 법규정(法定) 문자인 간체자(简体字)가 아니고 대만, 홍콩의 본을 따서 번체자(繁体字)로 씌여져 있었다. 하긴 문화라는것은 언제나 경제가 발전한 곳을 따라가기 마련이지, 지금  영어가 세계에서 판을 치고 있지만 미국, 영국이 약소국이 되는 날이면 영어도 멸망할런지도 모르지.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는 사이에 차는 도시중심에서 한창 건축하고 있는 경마장 공사장에 이르렀다. 그러자 안내원과 운전기사는 큰 자랑거리 화제를 얻은 듯이  려행사의 가이드처럼  선뜻이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이 경마장은 건국이후 대륙에서 제일 처음으로 수건하는 것이다. 도박성이 있다하여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끝내 시교도 아닌 도시중심에 버젓하게 공사장을 벌린 것이다. ... 하긴 북방사람들은 엄두도 내지못하는 일이다. 돈지갑이 불룩해졌으니 도박성을 띤 소비문화도 부추겨야 할테지.    학술회의를 마치고 남들이 값싼 전자제품을 사려가는 시간에 나는 로신이 거처했던 백운루를 가보려고 작심했다. 이것은 광주로 온 목적가운데서 빼놓을수 없는 중요한 일이였다. 마침 연길부터 동행했던 리광일씨와 수도사범대학에서 박사후를 하고 있는 왕가씨가 뜻을 같이하여 일행은 광주시 관광안내 지도 한 장을 사가지고 출발하였다.    백운루 근처에 이르러 <<백운루 로신고거(白云樓魯迅故居)>>가 어디냐고 물으니 아는 사람이 없다. 젊은이들은 광주에 그런 건물이 있었느냐 하는 표정이고 좀 나이든 사람들도 들은적은 있는데 어디였던가 하는 태도였다. 백운루를 지척에 두고 찾지못하는 나의 마음은 조급해나기도 했지만 로신에 대해 이 정도로 무관심한 광주시민들이 민망스러웠다. 다행히 학자같아보이는 한 로인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행여나 물었는데 과연 그이가 자세히 가리켜주어 요행 목적지 도착하였다.    백운루는 로신이 중산대학 문학계 주임 겸 교무주임으로 있을 때 거처했던 건물이다. 로신은 북경에서 북경녀자사범대학의 학생운동을 성원했던 관계로 군벌정부의 검은 명단에 올랐었다. 이런 위험한 처지에서 벗어나고 또 20년 동안 성생활도 하지 않은 명의상의 안해 주안과 갈라져 허광평과의 결합을 추진하기 위해 로신은 북경을 떠났다. 처음에는 림어당의 도움을 받아 하문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교수들 사이에 물고뜯고 싸우는 것이 싫어 허광평이 있는 광주로 가서 중산대학에 취직한것이다. 광주에서 로신은 백운루 2층에서 허광평, 허수상 등과 함께 거처하면서 국민당의 반혁명정변을 목격하였고 자신이 사랑했던 학생 필뢰(공산당원) 등이 피살당하는 것을 보았다. 이로인해 청년시기부터 믿고있었던 진화론을 포기하였다. 백운루는 로신의 세계관이 일대 전변을 가져오게된 중요한 기념성 건물이다. 중국현대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으로 광주에 와서 백운루를 보지못하고 간다면 남들의 웃음을 사게 되는 것은 물론 일생동안 후회를 하게 될 수도 있다. 아무튼 목적지에 이르렀으니 한 시름을 놓게 되었다.     노란벽으로 된 백운루는 서양식 3층 건물이였다. 그런데 겅건한 마음으로 찾아온 오늘의 이 백운루는 우리의 기대를 여지없이 짓밟아놓았다. 1층 바깥벽에 겨우 찾을 정도로 작은 패쪽이 걸려있는데 거기에 곁에가야 알아볼수 있는 <<백운루  로신고거>>라는 글이 씌여져 있었다. 그런데 대조적으로 그 옆에 <<水泥(시멘트)>>, <<沙砖(모래벽돌)>>이라고 씌여진 붉은 색 광고와 상점 간판은 눈부실 지경으로 행인들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웬걸, 로신의 고거가 세집으로 둔갑한것이였다. 정문을 찾아가 두손을 바지호주머니에 집어넣고 서있는 깡패모양을 한 젊은이에게 들어가 참관할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무뚝뚝한 표정으로 안된다고 한마디 툭 내쏘는것이였다. 천리만리 멀다하지 않고 찾아온 우리를 백운루는 이렇게 <<대접>>하고 있다. 전국에서 제일 부유하다고 하는 광주에 요만한 운영경비마저 없어 세인들이 늘 찾아오는 백운루를 이처럼 차원이 낮은 세집으로 내준단 말인가? 그것도 서점과 같은 우아한 문화상품을 경영하는 상점이면 몰라도 시멘트와 모래벽돌을 파는 구멍가게로 되었으니 로신이 살아 옛집을 찾아와 본다면 어떤 감수였을가? 나는 일찍 북경과 상해에서 로신의 옛집을 찾아본적이 있는데 거기의 분위기는 완전히 <<성지(圣地)>>와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역시 문화도시가 다르고 문화시민들이 달랐다. 하지만 광주는 ? ...   섭섭한 마음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나는 길가의 낮은 시멘트기둥에 맥없이 걸쳐앉았다. 광일씨와 왕가씨가 맥이 풀린 나를 보고 왜 그러느냐고 묻자 나는 <<인젠 광주를 알만큼 다 알았네. 다른 곳은 가보나마나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왕가씨가 웃으면서 <<내가 북경에 돌아가면 수필 한편을 쓰겠는데 꼭 오늘 아침 기대에 차있던 김교수의 그 모습과 지금의 심리, 태도의 변화를 묘사하렵니다.>>라고 말하는것이였다.    왕가씨가 돌아가 수필을 썼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착잡해진다. 북경과 상해의 로신 옛집에서 나와 로신과의 <<대화>>는 훌륭하게 이루어졌지만 광주의 백운루에서 나와 로신과의  <<대화>>는 원만하게 이루어지지못했다.       후, 광주에는 <<문화>>가 없다!                                                         2004.5                           (<연변문학>2004.7)  
2    로신의 학력은? - 위인은 학력을 무시했다 댓글:  조회:1655  추천:63  2008-06-30
                  로신의 학력은?              - 위인은 학력을 무시했다                           김병활   로신은 현대적인 중소학교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그는 동년시절과 소년시절을 서당(私塾)에서 보냈다. 처음엔 숙부벌 되는 옥전 선생에게서 ‘감략’을 배웠고 후에 삼미서옥의 수경오 선생에게서 사서오경과 ‘이아’,‘주례’와 ‘의례’ 등을 배웠다. 그후 가세가 기울어지자 1898년에 할 수 없이 등록금을 면제하는 남경수사학당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유신파가 세운 사관학교인데 그 목적은 해군 군관을 양성하는 것이였다. 학제는 9년인데 세 개 단계로 나누었다. 제1단계는 3반이라고 하는데 매 3년마다 1개 반급씩 진급한다. 학과목은 한문과 영문 두가지였다. 한문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상식적인 것들이였고 영문은 ABCD부터 시작하였다. 로신은 ‘납함’ 서문에서 “이 학당에 와서야 나는 이 세상에 또 물리(格致), 수학, 지리, 력사, 도화와 체조 등 학문이 있는 줄 알았다.” 라고 썼다. 졸업 전에는 천문, 항해, 기계 등 전업과목을 증설하였다. 만약 억지로 지금의 학교와 비교해 본다면 이 초창기의 신식 학당은 대체로 지금의 중등전문학교와 비슷했을 것이다. 이 학당의 3반은 초중과 비슷했고 2반은 고중과 비슷한 것인데 1반을 졸업해야 지금의 중등직업기술학교와 같은 학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로신은 이 수사학당에서 7개월만 공부하고 퇴학하였다. 그 이유는 이 학당의 분위기가 너무 문란했기 때문이였다.   그해 년말에 로신은 강남 륙사학당(륙군 사관학교)에서 부설한 광로학당에 학적을 두었다. 이 학당도 역시 사관학교였는데 광로학당은 석탄 채굴을 위해 림시로 설립한 학교였다. 창시자의 말대로 “후일 전문 학당에 필요한 인재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였다. 때문에 전쟁에 대해 공부하지 않았고 채탄업 관련 학과목을 주로 공부하고 철로 부설을 보충과목으로 배웠다. 이 시절 여러 학과목을 제외하고 로신에게 제일 큰 영향을 준 것은 과외로 읽은 ‘천연론’(생물진화론)이였다. 3년 후인 1901년 말에 로신은 이 학당을 졸업하였다. 이는 로신 평생에 가장 완정한 최고 학력인데 그 졸업증서(文凭)도 수사학당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중등직업기술학교 졸업증서와 맞먹는다. 로신은 ‘아침 꽃을 저녁에 줏다’ 중의 한 문장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아마 광로학당인 것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는다. 졸업증서도 지금 내 손으로 보관하지 않아 조사하고 고증할 수 없다.” 이 말에서 우리는 로신이 확실히 그런 졸업증서를 받은 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중국의 최고 학부이며 중국의 첫 국립 종합성 대학인 북경대학은 창립된지 겨우 4년이 되며 청화대학은 그후 1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설립되였다.        그 이듬해 로신은 강남 독련공소의 파견으로 일본류학을 하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아마 그더러 광산업, 채탄업을 배우라고 한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 관료기구는 여느 때나 다름없이 일 처리가 전후 연결이 잘 되지 않아 일본에 보낸 류학생들이 뭘 하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로신은 처음에 동경의 홍문학원에 적을 두었다. 이 학교는 사립으로서 기한 2년인데 전문적으로 중국 류학생들에게 일본어와 기타 중학교 수준의 기초과목을 가르치는 예비 학교였다. 이 학교의 학생들은 대부분 대청국의 문동과 수재들이여서 평소에 중국 성인들의 경서만 읽다보니 상식적인 과학지식마저 몰라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이는 이미 륙사학당의 졸업증서를 받은 로신에게는 시간 랑비였다.   그러면 이 홍문학원은 어느 급별(級別)에 속할까? 아마 보통 중학교거나 단기 강습반과 비슷했을 것이다. 주작인의 회억에 의하면 홍문학원 졸업증서를 가진 학생은 전문고등학교에 진학할수밖에 없다고 한다. 만약 국립대학에 진학하려면 따로 3년제 고등학교에 가야하는데 이것이 바로 대학 예과이다. 의학 공부를 하려면 요구 조건이 더 엄격한바 대학의 의학부는 국립고등학교를 졸업해야 들어갈 수 있었다. 보통 중학교를 졸업하면 전문학교밖에 들어갈수 없고 수료 년한은 4년이였다. 졸업한 후에는 의사로 될수 있지만 의학사 학위는 가질수 없었다. 로신이 홍문학원을 졸업하고 센따이 의학전문학교에 진학했는데 당시 그 학교는 고등전문학교(大專)에 불과하였고 졸업해도 학력은 인정하지만 학위는 수여받을 수 없는 것이였다. 그런데 로신은 이 학교에서 2년만 공부하고 퇴학하였기에 이 학교의 성격과 급별이 로신의 학력에는 별로 큰 영향이 없었다.    동경에 돌아온후 로신은 더는 정식 학교에 편입되지 않았다. 한 시기 그는 독일어학협회에서 부설한 독일어학교에 다닌적이 있었는데 매일 열심히 수업에 참가하지 않았고 거의 모든 시간을 하숙집에서 독일어를 자습하거나 독일어 서적과 잡지를 읽곤 하였다. 이 시기 그는 허수상 등 친구들과 같이 장태염에게서 문자에 관한 학문을 배웠다. 그리고 주작인과 함께 ‘역외소설집’을 편찬했는데 그 발행부수는 아주 적었다.   이처럼 중등전문학교 졸업증서를 받고 고등전문학교에서 중퇴한 로신이 귀국한후 북경대학, 북경고등사범학교, 북경녀자고등사범학교 등 여러 대학의 강사로 되었는데 이에 대해 지금 일부 학자, 교수들은 리해할수 없다고 말한다. 심지어 어떤 교수들은 “로신의 학문수준은 별거 아니야. 그의 동생이 교수로 될 때까지 그는 그냥 강사였어.”라고 말한다. 기실 당시 북경대학의 규정에 따르면 학교 밖에서 겸직으로 초빙된 사람은 최고로 강사인데 이런 초빙강사가 아무리 학문수준이 높아도 교수라고 부르지 않았다. 당시 로신의 정식 직업은 교육부 첨사였다. 후일에 북경을 떠나 하문대학, 중산대학에 가서 취직할 때에는 자연스럽게 교수로 된 것이다. 물론 로신은 그때에도 직함에만 집착하는 후일의 ‘고루한  선생’들과는 달리 강사, 교수 등 허울뿐인 직함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일부 사람들은 로신은 실력, 즉 작품으로 교수가 된것이지 학력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 말은 학력만으로가 아니라 작품으로도 교수가 될수 있다는 말이 되겠다. 그렇다면 로신의 작품을 가지고 오늘날 직함평의에 참가할 수 있느냐가 문제이다. 조기 론문인 ‘파악성(破惡聲)론’,‘인간의 력사’,‘과학사 교편’,‘문화편지(偏至)론’,‘마라시 력설’ 등은 ‘순 학술적’이라고 할수 있겠다. 그러나 문장 앞에 내용요지와 일련의 키워드(关键词)가 없고 문장 뒤에는 기다란 주석(注释)이 없는데 론문으로 취급할수 있느냐가 문제이고 ‘학술적 규범’에 맞느냐가 문제이다. 그래도 만약 학술논문으로 인정해 준다면 그런 문장들이 발표된 재일 하남적 류학생들이 창간한 <河南>지가 어떤 성질의 간행물인가가 문제로 된다. 그 기간간행물이 ‘핵심 간행물’이냐 아니면 ‘권위성 간행물’,‘중요 간행물’이냐? 국가급(国家级)이냐 아니면 성급(省级), 지구급(地级), 구현급(区县级)이냐? 그리고 지금 간행물 책임기관(主办单位)의 행정 급별로 해당 간행물의 급별을 결정하는 관행으로 본다면 재일 하남 류학생회(留日学生会)는 어떤 급별의 ‘행정기관’인가가 문제이다. 성부급(省部级)이냐 아니면 사국급(司局级), 현처급(县处级)이냐?   또 잡문을 가지고 직함평의에 참가할수 있느냐도 문제이다. 만약 할수 있다고 하면 ‘수염을 론함’, ‘제길할것을 론함’, ‘과부주의’ 등 잡문 명작은 점수를 몇점 딸수 있는지? 만약 이런 잡문을 가지고는 직함평의에 참가할수 없다고 하면 왜 후일에 이런 문장들이 되려 ‘로신 연구가’들이 대거 승진하는 자본으로는 될수 있는지?    아무튼 오늘의 현실에서 로신 작품 중 번역 작품과 <중국소설사> 외의 소설, 산문 등 작품들은 문학사 교수로 놓고 말하면 애초부터 직함평의에 제출할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데 로신이 북경대학 강사로 되기 전에 로신의 번역 작품과 <중국소설사>는 아직 출판되지 않은 상황이였다. <중국소설사>는 로신이 북경대학에서 수업을 하기 위한 강의고였다. 그리고 <역외소설집>은 지금의 말대로 하면 개체 도서상인들의 해외 불법 출판물과 같은 것이였다. 지금 법대로 하면 직함평의에 참가할수 없을 뿐만아니라 몰수, 벌금 등 출판법 위반으로 인한 처분을 당할지도 모른다.           일부 사람들은 한 작품과 저작의 가치는 어떤 매체에 발표되였는가에 의해 결정되는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가치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가치’를 결정하는 권한이 누구에게 있으며 어떻게 그 가치를 가늠하느냐가 문제이다. 자신의 ‘계승자’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체제하에서 그런 ‘가치’의 공정성과 진리성을 담보할수 있겠는가? 다행히 수십년 이 지나가면 ‘영원(永恒)’이라는 시간 철칙에 따라 부지기수의 문자 쓰레기들이 씻겨나가고 없어질 것이다. 그 대신 로신의 문학만은 찬사를 얻든, 욕을 먹든 누구도 에둘러 갈수 없는 존재로 자리를 굳히고 있다. 전란이 련속된 시대거나 혁명이 최우선시 되던 시대거나를 막론하고 로신은 슬로건과 리론만으로가 아니라 실적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실적을 이룰수 있은것은 물론 인사제도의 유연성과 출판, 언론의 상대적 자유와 일정한 관련이 있다. 그리고 로신이 자각적으로 이른바 ‘주류’와 멀리하고 ‘정통’과 거리를 두면서 달갑게 ‘소졸(小卒)’이 되려 한 인생선택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인생 선택은 그의 일생에 관통되였다. 일찍 로신은 소흥을 떠나 남경수사학당에 가서 학문을 닦으려 할 때 “마치 남다른 길을 선택하고 다른 지역에 가서 다른 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추구하려 했다.” 그러나 “그 시기 글공부를 하여 과거시험을 보는 것이 정도(正路)이고 이른바 양무(洋務)를 배우는 것은 사회적으로 길이 막힌 사람들이 령혼을 서양놈들에게 팔아버리는것과 같아서 가배로 무시당하고 배척받았다.” 일본에서 로신은 중국 류학생들이 진취심이 없이 주색에 빠져버린것을 보고 염오감을 가졌다. 본래 동경 부근에 있는 찌바와 가나자와에도 의학전문학교가 있었으나 로신은 동경 일대에서 무리를 지어 다니는 대청국의 ‘머리태 군대(辮子軍)’과 ‘후지산(富士山)’(주: 중국 류학생들이 머리태가 부끄러웠지만 베여버릴수는 없어 머리 우에 틀어 얹은 다음 학생모를 눌러써서 마치 일본 후지산처럼 되었다는 비유)들을 피해 보다 먼 지역에 있는 센따이를 선택하였다. 귀국 후 그는 오래동안 소흥에 칩거하였고 북경에 간 후에도 출근 외에는 홀로 소흥회관의 큰 홰나무 밑에 앉아 고대 비문들을 베끼는 일에 몰두하였다. 1927년에 광주를 떠날 때 그에게는 두갈래 길이 놓여있었다. 하나는 북경에 돌아가 계속 교수로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해에 가서 직업 작가가 되는 것이였다. 나중에 로신은 후자를 선택하였다.     로신은 일관적인 혁명자가 아니였다. 그는 이전의 교과서에서 말한것처럼 시종여일 전사로 되어 세계를 놀랠만한 전투를 지휘한 것도 아니였다. 로신도 신선이 아니라 사람이니 먹고살아야 하고 가족을 부양할 의무도 행해야 했다. 생활 여건이 마련되면 로신은 늘 자각적으로 아카데미식 대학과 관방 문단에 거리를 두려 했는데 이는 별로 이상할것 없고 더구나 질책할수도 없다. 이는 오늘날 우리 학자, 교수들더러 짐을 싸고 집에 돌아가 장보러 다니고 자유 기고인이 되라고 강박할수 없는것과 마찬가지 도리이다. 하지만 오늘날 ‘지식인’이라고 당당히 자처할수 있는 사람들은 자각적으로 주변(邊緣)의 립장에 서서 독립적인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여야 한다. 최소한 주동적으로 권력에 아부하고 금전리익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된다. 오늘날 좌우를 두루 살펴보면 빈 허울에만 집착하고 대단한 학자, 교수로 자처하면서 형이상학적 ‘고담준론’을 펴는 사람들이 있는것 같은데 그들에게 이 정도의 요구를 제출하는 것은 그처럼 과분한 것은 아닐것이다.            [본문은 중국 야후 ‘지식당’에서 취재하여 적당히 번역, 편집하였음. 문장 중의 일부 견해는 역자, 편집자의 견해와 다를수 있음.]
1    [평론] 중국 당대《80후(後)》문학현상에 대하여 댓글:  조회:2220  추천:60  2008-01-14
중국 당대 《80후(後)》 문학현상에 대하여 김병활 연변대학교 교수 (이 글은 대학교 학부생들을 상대로 한 특강 초고입니다. 특강 시 시간 관계상 많은 내용을 다 강의하지 못 했는데 참고로 여기에 초고 전문을 올립니다.)              목차 1. 《80후》문학의 궐기 2. 《80후》문학의 대표작 내용소개와 분석 1) 대표작 내용소개 (1) 곽경명(郭敬明)의《꿈속에 지는 꽃(夢里花落知多少)》 (2) 곽경명(郭敬明)의 《환성(幻城)》 (3) 한한(韓寒)의《삼중문(三重門)》 2) 작품의 여파 3. 《80후》문학이 흥기하게 된 원인 1) 《신개념》작문경색이 《80후》작자들을 산생 2) 도서시장의 추동작용 3) 《80후》 문학작품의 출현은 광범한 학생들의 독서수요에 적응된 것 4. 《80후》 작자들의 부동한 품격(品格) 5.《80후》 문학현상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 1) 현행 교육체제에 대한 반발 2) 작품에서 묘사된 청소년들의 감상적인 정서(憂傷) 3) 《80》창작자들의 시장경제의식 6. 《80후》창작자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과 전망   1. 《80후》문학의 궐기   이른바 《80후》란 대체로 1980-1989년 사이에 태여난 작자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가지고 도서시장에 진입하고 문단에 데뷔한 문학현상을 가리킨다. 때로는 이를 《청춘습작》,《청춘문학》, 《신 청춘문학》, 《신 개념 습작》 등 개념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80》후가 하나의 개념으로 널리 알려지기는 2003년부터였다. 이해에 북경개권(開卷)도서연구소에서 《청춘창작(寫作)》연구토론회를 소집하고 평론가들에게 《80후》에 속하는 작자들의 소설을 소개하였다. 그중에는 곽경명(郭敬明)의 소설 《꿈속에 지는 꽃(夢裏花落知多少)》, 《환성(幻城)》, 한한의《삼중문(三重門)》 , 장열연(張悅然)의 《1890년에 사라진 해바라기(葵花走失在1890)》 등이 포함되였다.   사실 이 문학현상은 그 이전에 있은 《신 개념》작문경색과 깊은 관련이 있다.  1999년 초에 상해 《맹아》지에서 북경대학, 복단대학, 남경대학 등 7개 중점대학과 련합하여 30세 이하 청소년 전국 작문경색을 벌렸는데 이를 《신 개념》 작문경색이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1등상을 수상한 학생은 대학입시를 면제받고 자기가 가고 싶은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몇해 후 이런 혜택은 취소되였지만 《신 개념》작문경색의 영향은 아주 컸는바 《80후》 문학의 산생을 촉발시켰다.    그후 이 대오는 부단히 확충되였는바 평론가 白燁의 추산에 의하면 《80후》인솔자들은 대략 110 면 정도이고 경상적으로 창작에 종사하는 사람은 1천 명 정도이며 자기들의 중문 홈페이지에 계약을 맺고 작품을 발표하는 사람은 약 2만 명을 넘는다고 한다. 이는 실로 하나의 방대한 창작군체라고 할 수 있다. 2. 《80후》문학의 대표작 내용소개와 분석 1) 대표작 내용소개   먼저《80후》 문학에서 대표적인 인물인 곽경명과 한한의 대표적인 작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학부생들이 이러저러한 원인으로 작품을 읽지 못한 상황을 감안하여 보다 상세히 이야기 줄거리를 소개하도록 한다.   (1) 곽경명(郭敬明)의 《꿈속에 지는 꽃(夢里花落知多少)》   모 대학 광고학과 3학년 녀학생 림란은 중학 시절부터 동창생 고소북과 련애하였다. 본래 고소북은 제일 우수한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지만 림란이 입시 림박에 신경이 긴장하여 성적이 내려가자 림란과 같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일부러 지망을 낮게 썼다. 그런데 입시에 둘 다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에 진학하였고 둘 다 1등 장학금을 수여받았다.   한반 동창생인 백송(상업 거두의 아들)도 림란이를 좋아한다. 한번은 백송이 연회에서 술 마신 후 림란을 찾아와 련애는 할 수 없지만 한번만이라도 안아볼 수 없겠는가고 청구하였다. 그는 림란이의 허가를 기다리지도 않고 림란을 끌어안았다. 이 장면을 고소북은 옆에서 다 보고 있었다. 그후 림란이 핸드폰으로 고소북과 련락하려 했으나 통화가 되지 않았다. 화가 난 림란이는 고소북이네 집을 찾아가 갈라지자고 을러멨다. 본래는 그를 어름장만 놓으려는 목적이였는데 림란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고소북은 그러마 하고 갈라지는데 동의하였다. 썩 후에야 안 일이지만 사실 그 동안 고소북은 핸드폰을 잃어버렸기에 련락이 안 되였을 따름이였다.   그후 고소북은 요산산이라는  녀학생과 련애하였다. 요산산에게는 토치카라는 별명이 붙었고 이 대학교의 꽃이라고 불리웠다.  요산산은 아주 오만한 녀학생으로서 도처에서 안하무인으로 대통령 부인인체 하였다. 그리하여 술상에서 늘 림란과 그 옆의 친구들과 다투고 싸우고 하였다.   미미(微微)는 림란이와 어려서부터 같이 자랐는데 대학교 광고학과를 중퇴하고 혼자 사업을 하고 있다. 림란이가 대학 4학년이 되어 사회실천을 하게 되였는데 미미의 알선으로 한 광고회사에 취직하여 실습생들의 2천원 로임의 3배나 되는 6천원 로임을 받게 된다. 이 회사에서 림란은 평소에도 몇 만 원 짜리 양복을 입고 다니는 멋쟁이 남자 륙서(陸敍)의 수하에서 일하게 된다.   훠차이(火柴, 성냥개비-성냥가치)라는 별명을 가진 녀자애는 림란이와 일찍 초중 동창이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훠차이를 출산하다가 죽었는데 이로 인해 아버지는 그냥 훠차이를 미워하고 때리군 하였다. 친구들이 집에서 쫓겨난 그를 불쌍히 여겨 안드레센 동화중의 《성냥파는 여자애》의 략칭으로 《훠차이》라고 불렀다. 그후 훠차이는 아버지의 구박에 반항하여 가출하고 말았다. 그는 그후에 매춘부로 되었고 나중에는 마마상(기생어미)이 되어 매춘업계 경리로 되었다. 동창생들 앞에서 그녀는 자신은 인제 《성냥 파는 여자애》가 아니라 《여자애를 파는 성냥》이라고 하였다.    림란은 실련의 고배를 마시고 북경에서 실습하기 싫어 아버지의 관계를 리용하여 상해로 갔다. 상해에서 아버지의 친구 진(陳)씨가 영접하였고 비여 있는 그의 2층 양옥에 홀로 들게 되었다. 그리고 역시 진씨의 소개로 훌륭한 광고회사에 취직하였다. 그런데 림란을 열렬히 사모하고 있는 륙서가 북경에서 상해로 좇아와 로임이 2천원이나 낮은 대우도 아랑곳하지 않고 역시 림란의 회사에 취직하였다. 륙서가 숙소를 마련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을 보고 림란은 진씨 몰래 자기가 투숙하고 있는 양옥에 륙서를 데려와 1,2 층에서 별거한다. 남들은 그들 둘이 이미 동거하고 있다고 추측한다.   그런데 생각밖에도 요산산도 상해에 와서 역시 림란의 회사에 와서 막대한 배경(백)을 믿고 림란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 륙서는 이를 제지하려고 했으나 력부족으로 상사의 배체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림란은 륙서가 자기를 보호하지 않는다고 오해했으나 나중에 회사의 책임자의 해석으로 륙서를 량해한다.   화가 동한 림란은 사직하고 북경에 다시 돌아온다. 그러자 륙서도 림란의 뒤를 따라 북경에 돌아왔다.    미미(微微)가 사업의 수요로 큰 부자와 계약서를 체결해야하는데 대방에서는 계약서를 체결하기 전에 지식수준이 있는 젊은 녀성과 술자리를 같이 해야 된다는 뜻을 암시하였다. 이에 미미는 림란과 문청에게 청구한다. 친구의 일을 돕기 위해 그들 둘은 그 술자리에 찾아간다. 과연 그 작자들은 이 두 여자를 희롱하려고 서둘렀다. 이때 륙서가 기미를 알아차리고 이 장소를 찾아와 그 작자들과 격투를 하다가 두 여자를 빼낸 후 자신은 부상당한다. 이 소식을 들은 훠차이가 용감하게 나서서 제2작전 방안에 따라 그 작자들을 찾아간다. 큰 사건이 일어날 줄 알았는데 훠차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계약서에 싸인을 받아오고 개선하여 돌아왔다. 원래 그 회사의 사장(老板)이 바로 훠차이의 아버지 당빈(唐斌)이였다. 당시 훠차이는 아버지를 알아보고 만약 계약서에 싸인하지 않으면 래일 신문에 모 회사 사장의 딸이 매춘업에 종사한다고 소문을 내면 아버지의 위신은 당장에 납작해진다고 협박을 한 것이였다.     어느날 훠차이가 놀라운 소식을 전하였다. 원래 백송의 여자친구 리말리는 매춘부이고 병원에서 중절(人工流産)수술을 받고 나오는 것을 자기 친눈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백송이가 그런 타격을 감내 못할가봐 그들은 이 소식을 알리지 않기로 하였다.   림란이가 북경에서 다시 취직한 날 이를 축하하여 술자리를 마련하고 친구들과 백송이, 리말리도 청하였다. 그런데 술이 얼근해지자 훠차이는 참지못하고 리말리가 매춘부이면서도 숙녀인체 가장(假裝)하고 백송을 기만한다고 욕설을 퍼부었다.   이에 보복하려고 리말리는 미미가 훠차이가 일하는 호텔에서 마약판매를 한다고 경찰에 고발하였다. 그 바람에 미미가 체포되였다가 증거부족으로 풀려나왔다. 미미는 전후 상황을 잘 모르고 훠차이가 자기를 물어먹었다고 의심한다. 미미가 풀려나오자 친구들이 술상을 마련하고 위로하는데 리말리도 그 자리에 왔다. 화가 동한 훠차이는 리말리를 화장실에 데려고 가서 얼굴이 붓도록 때졌邨年?   봄이 오자 림란이는 문청이와 함께 시교의 농촌 휴가촌에 가서 닭곰을 먹고 돌아오려 하였다. 이때 어둠속에서 오토바이를 탄 건달무리가 문청이가 몰고 있는 승용차를 막아섰다. 상황을 보니 돈을 강탈하는 놈들 같지 않았다. 문청이는 용단을 내서 림란이를 차밖에 밀어내고 자기 혼자 차를 몰고 그 자들을 대처하였다. 나중에 문청은 건달무리에게 성폭행을 당하면서 친구인 림란을 보호하였다.   훠차이가 이 소식을 알고 여러모로 탐문한 결과 역시 리말리가 보복심으로 건달무리에게 의뢰해 성폭행을 하게 한 것이였다. 훠차이는 더는 참을 수 없어 백송이네 집에 찾아가 리람리를 때려주었다.   얼마후 훠차이가 경찰의 수배를 피해 잠적하였다. 사연인즉 미미가 훠차이를 물어먹었다는 것이다. 아마 경찰에게 마약혐의를 받은 미미가 자신의 청백함을 표시하기 위해 훠차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모양이였다.   어느날 림란이와 륙서는 술에 취한 뒤 차를 몰고 돌아가려 하였다. 륙서가 취한것을 보고 림란이가 대신 차를 몰았으나 림란이도 역시 취한 상태여서 엄청난 교통사고를 빚어냈다. 둘 다 병원에서 이틀 동안 깨여나지 못하다가 림란이가 먼저 깨여났다. 림란이는 간호부들의 권고를 무시하고 방금 정신 차린 륙서와 열변을 토하다가 평시 습관대로 륙서의 머리를 흔들었다. 그 통에 륙서는 그 자리에서 쇼크하였고 나중에는 죽고 말았다.       륙서의 장례를 치른 후  더는 북경에 있을 수 없게 된 림란은 비행기 편으로 심천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비밀리에 공항으로 전송 나온 훠차이가 당장에서 경찰들에게 체포되였다.       고소북은 나중에야 요산산이 거짓임신으로 자기를 기만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둘은 갈라지고 말았다. 림란이가 륙서의 죽음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심천에 갓다는 소식을 듣고 고소북도 옛정이 되살아나 심천에 따라가 찾아보려 했으나 그녀가 이미 다른 남자와 사귀는 것을 보고 되돌아왔다.   백송이는 매춘부 리말리에게 거금을 사기 당한 후 절망하고 마약에 손을 댔다. 집에서 그의 악습을 고쳐주려고 바줄로 결박하고 있었는데 방문객들 앞에서 코물,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참아보기 어렵다는 것이였다.   20여세밖에 안 되는 림란은 파란만장의 인생체험을 하고나서 성숙되여 갔다. 그는 지난날을 추억하면서 홀로 《꿈속에 지는 꽃(夢裏花落知多少)》라는 노래를 부른다.    [이 소설에 대해 일부 평론가들은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지난세기 80년대에 출생한 청소년들은 시대의 류행과 조류를 애써 추구하고 있다. 소설중의 주요 인물들은 호화로운 유흥장소를 드나들면서 먹고 마시고 놀아대는 것을 일상사로 삼았다. 그들과 동세대에 속하는 청소년들은 거의다 이런 생활을 동경하고 있다. 그들은 생활의 평담함에 불만을 품고 자극을 갈망하고 있다. 그러나 생활의 압력에는 견뎌 낼수 없어 늘 모순과 갈등 속에서 심리적 고통을 감수하고 있다.]   (2) 곽경명(郭敬明)의 《환성(幻城)》      이 소설은 완전히  허구된 이야기이다. 환설제국(幻雪帝國)의 빙족(冰族)과 화염성(火焰城)의 화족(火族)이 세세대대로 싸우는데 환설제국의 두 왕자 카소(잡색, 卡索)와 앵공석(櫻空釋)이 왕위를 계승할 것인가 아니면 자유를 위해 왕위를 포기할 것인가 하는 일로 분기가 생기였다. 두 형제는 이복형제이지만 어려서부터 아주 사이가 좋았고 서로 잘 보살펴주고 있었다. 동생은 형이 자유를 갈망하는 것을 알고 왕위를 포기하라고 권고한다. 왕위계승과 자유를 얻는 것은 량자택일의 어려움이 있는데 형 카소는 본위가 아니게 남들의 권고로 왕위에 오르려 한다.   동생 영공석의 생모(선왕의 비첩) 련희(蓮姬)가 환술을 써서 동생(친아들)더러 형이 사랑하는 룡궁의 공주 람상(嵐裳)을 성폭행 한 후 죽여 버리고 또 왕위를 다투게 한다.   하지만 동생의 주관적 동기는 줄곧 형을 도와 그가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는 자유를 마련해 주려는 것이였다. 이를 오해한 형은 동생을 처형하였다. 동생은 죽으면서 형이 자유를 얻을 것을 갈망하면서도 자신의 호의를 오해한다고 애석해 한다.       형 카소는 사랑하는 공주 람상(嵐裳)이 죽고 종래로 사이좋게 지내면서 갈라진 적이 없었던 귀여운 동생까지 죽자 아주 고독하였다.    화염성의 화족들이 공격해오자 카소는 환술사, 점성사, 월신(月神) 등 가장 재능있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출정하였다. 파란만장의 고난을 헤쳐가면서 목적지로 가고 있는데 그 과정에 부하들 사이에 끔직한 참살(慘殺)이 빚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일행중의 그 누구도 모두 혐의자(범죄용의자)로 될수 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왕 카소는 자신이 가장 신임하던 측근마저 의심스러워져 아주 당황해졌고 적아를 구분하기 어려운 난제를 해결하지 못해 매우 우울해졌다.   동생 앵공석의 생모 련희가 나타나 이 모든 참살은 자기가 설계한 유희라고 카소에게 말한다. 카소는 자기 곁에서 죽은 이들은 모두 선량하고 훌륭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그들을 부활시켜 달라고 청구한다.   그러자 련희는 랭소하면서 그들이 부활되면 모두 기억을 상실하게 되고  카소에게는 자기의 아들 앵공석과 다른 부하들의 기억만 남게 된다고 말한다. 즉 몸체는 카소이지만 령혼은 앵공석의 것이라고 한다.     카소가 련희에게 청구하여 죽은 이들을 부활시켰는데 그후 화족의 두목 리천신(罹天燼)이 진공해 들어오고 카소의 군대는 거의 다 멸망된다. 죽음에 림박한 카소는 몽경 속에서 동생의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았고 그 역시 《석아, 나를 용서해 다오, 내가 너를 기다리지 못했구나.》라고 절규한다. [일부 평론가들은 이 소설이 자유와 권력의 갈등, 인간의 고독과 감상적인 정서(우울한 정감)을 잘 표현하였다고 평하고 있다. 북경대학 교수 조문헌(曹文軒)은 나젊은 곽경명이 학생시절에 이와 같은 큰 스케일의 소설을 구사하고 언어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데 대해 경탄한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면서  목전 많은 10대, 20대의 나어린 《80후》 작자들이 세상의 모든 것을 업신여기고 버릇없이 아무 말이나 마구 해버리는(玩世不恭) 불량배(痞子) 창작태도를 지적하면서 이 소설에서는 이런 《완세불공(玩世不恭)》의 창작경향을 일소하였다고 평가하였다. 그는 젊은 세대의 불량배 창작경향에 대해 우려를 표시하면서 《한 사람이 불량배로 되는 것은 별 문제없지만 만약 한 민족이 모두 불량배로 되고 불량배适렝?된다면 그것은 큰 우려를 자아내게 하는 일이다》라고 지적하였다.] (3) 한한(韓寒)의 《삼중문(三重門)》   중학생 림우상(林雨翔)은 작은 진의 초중에서 공부하고 있다. 이 학교는 리과만 중시하고 문과를 홀시하기에 어문교원들이 다른 곳으로 떠나버렸다. 이때 진 문화소에서 일하던 마덕보(馬德保)가 자비로 작품집 2백 권을 출판하고 그것을 사처에 배포한 덕분으로 이 학교의 어문교원으로 들어왔고 또 과외활동단체인 문학사의 책임자로 되였다. 림우상은 문학에 흥취 있는 학생이다. 아버지가 편집으로 일하기에 집에는 장서가 많아 림우상의 과외독서에 편리한 환경을 마련해 주었다. 어머니는 진장(鎭長)의 마작친구가 되어 마작에만 빠져있었고 집안일을 전혀 관계하지 않는다.   학교 문학사에서는 사회실천을 하기 위해 상해 근처의 주장이라는 마을을 견학한다. 이 마을을 관통하는 배길 우에서 문학사의 추녀(醜女) 심계아(沈溪兒)와 함께 배를 타고 있는 중학생 수산(susan)을 보고 림우상은 동행했던 라천성(羅天誠)과 동시에 수산의 매력에 끌리워 호감을 가진다. 그후 그들 둘은 수산에게 각기 련애 편지를 쓴다. 라천성의 편지에는 오자 (錯別字)가 수두룩하여 수산은 그것을 고쳐서 되돌려 보낸다. 림우상은 본래 문학천부가 있는지라 그의 련애 편지를 받아본 수산은 그에게 호감을 가진다.   전국 중학생 응모작품경색을 한다는 소식이 문학사에 전해지자 림우상이 작품을 써서 응모한다. 그것이 입선되여 1등상을 수상한다. 이에 림우상의 명성은 이 진에 널리 알려졌고 림우상도 미칠 듯이 기뻤다.   하지만 림우상은  문학사 책임자 마덕보 선생이 전국 우수 문학사단 1등상을 《획득한 것이 아니라 돈으로 사온 것임을 알고》자기의 1등상도 별것이 아니라고 인정하며 그후부터 별로 자랑거리로 여기지 않는다.    고중 입학 시험성적이 발표되였는데 림우상은 리과와 영어 실력이 차하기에 시 중점고중은 아예 안 되고 현 중점고중도 자비생으로밖에 들어갈 수 없었다. 어머니가 마작친구들의 힌트를 받고 체육특수생의 신분으로 시 중점고중에 입학시키려 하였다. 림우상은 시 중점고중에 가면 한창 열렬히 사모하고 있는 수산이와 같이 한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겠다고 인정하고 부모의 의견에 오피構?3만원을 내고 입학하였다. 그런데 생각밖에도 줄곧 최우수생으로 인정받던 수산이가 3점이 모자라 시 중점고중에 입학하지 못하고 현 중점고중에 입학한다는 것이였다. 이런 내막을 부모에게 말할수 없어 림우상은 싫은대로 체육 특수생이라는 엉뚱한 신분으로 시 중점고중에 입학하였다. 기실 후일 수상이가 림우상에게 실토한데 의하면 수산이는 얼마든지 자기 실력으로 시 중점고중에 입학할 수 있었는데 림우상과 함께 현 중점고중에서 공부하기 위해 일부러 아는 수학문제도 답안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였다. 결국 둘은 엉뚱한(우연한) 원인으로 (弄假成眞,陰錯陽差) 갈라져 공부하게 되었다.   학교에서 학생 과외 서클을 조직하자 림우상은 이른바 체육 특수생이면서도 문학사에 지망하였다. 그런데 심사교원들 앞에서 면접할 때 그들의 비위를 잘 맟추지 못해 락방되였다. 실망한 그는 호 교도원에게 자신이 전국 작문경색 1등상을 수상했는데도 중학생 과외 문학사에도 들어 못 간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호 교도원의 노력으로 그는 문학사에 겨우 입선되였다.   문학사 지도교원들의 실력이 형편없어 문학사 집단위신이 내려가고 그 대신 텔레비죤 방송부가 위신이 올라갔다. 어느 한번 지도교원이 외출했을 때 전임 학생사장이 사직하고 림우상이 민주선거로 사장으로 되었다. 그의 노력으로 문학사는 우수한 작품들을 창작하여 위신이 크게 올라갔다. 그 과정에 텔레비전 책임자 전영(錢榮)과 알륵이 생기였다. 그런데 지도교원이 돌아와 자기의 인가 없이 사장을 교체했다고 책망하고 실권을 주지 않자 림우상을 유명무실해졌다.   어느날 림우상에게 익명신이 왔는데 수산이가 마음이 변하여 리과반 우수생과 련애를 한다는 것이였다. 처음에 림우상은 크게 실망하였으나 그 편지의 영어 필명을 자세히 뜯어보고 자기의 라이벌인 라천성이 쓴 것을 알아차린다. 급기야 수산에게 련정을 표달하는 편지를 써서 우편함에 넣었다. 그리고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심계아에게 실정을 탐문하는 편지를 띄웠다. 그런데 수산에게서는 회답이 없었고 심계아의 회신에도 라천성의 편지처럼 다른 남자와 사귄다는 내용이 씌여져 있었다.   후에 알게된 일이지만 소식이 없어 궁굼하던 수산이는 림우상의 진심을 떠보기 위해 라천성과 심계아에게 거짓내용으로 편지를 쓰게 했고 림우상이 수산에게 보낸 편지에는 우표를 붙이지 않아 썩 후에야 전영의 손을 통해 되돌아 왔던 것이다. 애타게 기다리는 림우상의 편지가 오지 앉자 화가 동한 수산이는 림우상에게 전화로 욕설을 퍼부었고 림우상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주말이 되어 실련의 위기로 고민에 쌓인 림우상은 학교 기률을 무시하고 담장을 넘어 밖에 나가 돌아다니다가 저녁 9시 반경에 학교로 돌아왔다. 이때 누군가 록음기를 사라고 유혹하는 바람에 두달 생활비에 해당되는 1백 50원을 주고 샀는데 알고보니 가짜 제품이였다.   그날 저녁 비를 맞고 감기에 걸린 림우상은 의무실에 갔다가 우연히 자기에게 가짜 록음기를 판 상급생을 만나게 되었다. 다른 학생도 같은 피해를 받았다는 말을 듣고 림우상은 교장에게 학교 내에서 록음기를 밀수하는 학생이 있다고 신소하였다. 공안국에서 조사를 하고 나서 밀수는 아니지만 가짜 제품인 것만은 인정된다고 하면서 림우상더러 증인으로 나서라는 것이였다. 그 바람에 림우상이 학교 기률을 위반하고 몰래 밖에 나간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고 림우상은 처분을 받게 된다.   림우상은 수산이와의 애정도 잃고 처분까지 받게 되는 이중적 고통에서 모대기게 되였다. 그는 자신이 벼랑 중턱에 매달려 피가 흥건한 손으로 바위를 부여잡고 올라가지도 못하고 깊은 골짜기로 뛰여 내릴 수도 없는 처지에 빠졌는데 맥이 풀리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황혼 속에서 혼자 생각을 하였다.       [일부 평론가들은 이 소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지난 세기 80년대에 출생한 청소년들은 렬화와 같은 정열과 충동성을 가지고 있는데 늘 자기들의 소망을 웨치려하고 반항하려 한다. 이런 웨침과 반항이 아무리 불철저하고 심지어 우습강스럽다 하더라도 그들은 반역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확인하려 한다. 한한이 바로 이런 반역자로서 이 세대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다.]       2) 작품의 여파    요즈음 중학생, 대학생들은 곽경명의 소설에 푹 빠져버렸다고 한다. 누가 그 소설의 내용을 모르면 《그것도 몰라, 살아서 뭘해, 죽어라 죽어.》라고 야유한다고 한다. 그들은 또 그 소설들을 읽고 아름다운 언어에 감복되고 있다. 그의 언어는 왕삭(王朔)의 풍격과 비슷한데 어마어마한 정치적 언어(話語)로 자그마한 일상사들을 묘사하고 있다. 례컨대 한 예쁜 녀학생이 수많은 남학생들의 사모를 받고 있지만 그 녀학생은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하지만 남학생들은 실망하지 않고 추구하는데 곽경명은 이를 묘사할 때 《한 전사가 꺼꾸러지만 수천만의 전사들이 뒤를 이어 돌격해 들어간다.(一个戰士倒下來,千万个戰士站起來(冲上去)》라고 쓰고 있다. 혁명전쟁시기의 언어로 평화시기의 어린 학생들의 조기 련애를 묘사한 것이 격에 맞지 않는 것 같지만 아주 재미가 있어 저절로 웃음이 나오게 된다.   몇 해 전까지만 하여도 주류문단에서는 《80후》의 문학창작에 대해 별로 중시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도서시장에서 그들의 영향력은 점점 커가고 있었다. 2003-2004년 사이에 도서시장을 조사한데 의하면 문학류 도서 중에서 중국현당대문학 작품이 10%를 점하고 있는데 《80후》 문학작품도 마찬가지로 문학류 도서시장의 10%를 점한다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이제 방금 20세 전후에 들어선 몇몇 나젊은 창작자들의 작품 발행량이 지난 한 세기 (백년 동안) 수많은 문학대가들이 창작한 작품 발행량의 총수와 맞먹는다는 말이 된다. 이는 실로 놀랄만한 수자로서 평론가들이 더는 젖내 나는 아이들의 창작이라고 무시할 수 없는 문학현상으로 되었다.   일부 매체와 평론가들이 《80후》는 《 시장에 들어섰지만 문단에는 들어서지 못했다.》고 폄하하고 있다. 사실상 그들 중 적지 않은 작자들은 모두 직접 출판사를 통해 자기들의 작품을 출판하였고 문학 습작과정에 본격적안 정규훈련을 받지 못했다. 따라서 주류문단에서는 그들의 존재를 무시하군 하였다. 이에 대해 《80후》 작자들은 아주 큰 불만을 가지고 있다.   이 무렵 2004년 11월에 중국당대문학연구회와 북경언어문화대학에서 련합으로 《 《80후》연구토론회(走進80后硏討會)》를 소집하고 중국사회과학원의 白燁, 북경대학 교수 曹文軒, 저명한 작가 梁曉聲 등 학자, 평론가, 작가들이 발언하였다. 그들의 일치한 견해는 《80후》문학은 일부 사람들이 상상하고 있는 것처럼 《小兒科》가 아니라 내용면에서 비교적 엄숙한 추구가 있으며 예술 면에서도 선명한 특징이 있다고 인정하였다. 3. 《80후》문학이 흥기하게 된 원인 1) 《신개념》작문경색이 《80후》작자들을 산생  《신개념》작문경색은 중소학교 어문교육에서 아주 큰 추진 역할을 하였다. 이전에 대학, 중학에서 수리화(數理化) 천하였고 문과는 광명한 전도가 없는듯하였다. 그런데 《신개념》작문경색이 문학을 애호하는 학생들에게 한갈래 출로를 열어주었다. 이 경색에서 수상한 학생들은 성취감을 가지였을 뿐만 아니라 1등상과 2등상 수상자들은 입시면제의 혜택을 받아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이는 문학을 애호하는 학생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상 《80후》 중견작가들인 한한, 곽경명, 장열연 등은 모두 《신개념》작문경색의 1등상 수상자들이였다. 때문에 《신개념》작문경색이 《80후》작가들을 출산(낳았다)하였다고 할수 있다. 다른 말로 비유하면 이 경색은 위성발사 로케트처럼 《80후》작자들을 도서시장에 진출시켰다고 할 수 있다. 2) 도서시장의 추동작용   근년에 도서시장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례컨대 장편작품은 이미 비교적 체계가 선 시장화에로 나가고 있다. 이전에 장편소설은 거의 모두 명작가들의 몫이였기에 이름 없는 작가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근년에 이런 상황은 이미 변화되였다. 1990년대 초반에 장편이 약 300부 출판되였는데 1990년대 후반에는 일약 700부나 출판되여 1993년의 3배에 해당되였다. 1999년 이후부터 해마다 장편이 1천여부 정도 출판되고 있다.   목전 문단은 3국 정립시대(三分天下)를 련상케 한다. 그중 하나는 기간간행물과 문학지를 진지로 하는 순문학창작이다. 또 하나는 다소 상업성을 띤 장편소설창작이고 다른 하나는 인터넷을 매개물로 하는 인터넷창작이다. 여기에서 장편소설이 3분의 1을 점한다고 하는 것은 이전에 상상하지 못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장편은 적지않은 작품들은 출판상들이 시장 법칙에 의해 기획해낸 것이다. 《80후》작자들이 창작에 뛰여들던 시기가 바로 이런 환경이 조성된 시기여서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시장궤도에 올라서게 되였다. 그들은 장편 창작능수들인바 도서시장의 수요에 따라 일 년에 장편을 몇 개씩 쉽게 쓰군 하는데 그중 어떤 작품들은 베스트셀러가 된다. 기성 세대중의 실력파 작가들의 작품도 몇 만부씩 팔릴 정도인데 《80후》작자들의 장편소설들은 몇 십만 부, 1백만 부 이상 팔리고 있다. 이는 중국 도서시장에서 실로 경탄하지 않을 수 없는  현상이다. 3) 《80후》 문학작품의 출현은 광범한 학생들의 독서수요에 적응된 것    《80후》작자들은 주로 학생들이다. 학생 작자가 학생생활을 쓰고 학생들의 정서를 표현한 것은 학생들의 수요에 적응되였다. 이는 《80후》문학이 궐기할 수 있는 가장 주요한 원인으로 된다. 지금 학생독자들은 하나의 광범한 독자 군체를 형성하고 있는데 향학열이 강한 그들은 경상적으로 과외독서를 대량적으로 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또 독신자녀들이여서 상당한 구매욕과 구매력을 갖고 있다. 이런 군체 중에서 초중생과 고중생들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또 《80후》문학작품의 가장 충실한 독자 군체로 되고 있다. 례를 들면 곽경명의 소설에 대해 이런 학생들은 가족의 보물(傳家宝)을 알고 있듯이 그 내용을 익숙히 알고 있다.(頭頭是道,如數家珍)   수도사범대학 문학원에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중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현대, 당대작가들로는 첫째가 김용, 버금으로 곽경명, 다음으로 로신이였다. 필자가 근년에 대학 본과생 졸업 론문을 지도할 때 《대만홍콩문학》에서 김용의 무협소설을 선택한 학생이 거의 해마다 10여 명씩 되어 제한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이다. 이는 문학열독과 어문교육중의 하나의 경향과 문제를 반영하고 있다. 지금 학생들은 자신들의 생활에 접근된 작품을 선호하고 있으며 그 표현방식도 자신들에게 접근한 작품을 즐기고 있다. 기성세대는 어린 시절에도 《청춘의 노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였는가》 등 책을 읽으면서 소년아동의 시각으로 리해하군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학생독자들은 기성세대의 지시에 끌려가지 않고 있으며 자신들의 진정한 흥취를 버리려 하지 않는다. 기성세대 작가들이 곽경명과 같은 작품을 써주지 않기에 그들의 구미에 맞는 작품이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몇 해 전에 경요(瓊瑤)붐, 삼모(三毛)붐이 일어나 그들의 수요를 충족시켰다. 지금은 곽경명, 한한, 장열연 등이 경요, 삼모를 대체하고 있다.     우에서 언급되였지만 곽경명의 언어는 감각 표달 방식과 감정발산방식에서 지금의 청소년들의 방식 그대로이다. 례컨대 청소년중의 애꾼들이 밤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표현할 때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一到晩上精神好得跟賊似的,一双眼睛亮得連狼見了都害怕。》이처럼 학생들의 표달방식에 맞는 생활화면과 활력있는 언어가 있기에 학생들의 환영을 받게 되었다. 지난 시기에 아동문학은 소년아동들의 수요를 얼마간 만족시켰으나 중학생들의 수요를 적응된 작품은 거의 없었다. 지금 기성세대가 제공하지 못한 이 창작령역을 학생 자신들의 창작으로 독서수요를 충족시키고 있다. 《80후》문학이 소리없이 궐기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 의해 인기된 것이다. 4. 《80후》 작자들의 부동한 품격(品格)   2004년에 《양성만보(羊城晩報)》(광주)에서 《80후》작자 인기순서를 만들어 냈다. 그들로는 곽경명, 한한, 춘수(春樹, 하루키), 리사사(李傻傻), 장열연 등 순위로 된 작자들이다. 이런 순위는 부동한 기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아무튼 부동한 류형을 대표하고 있다.    우선 곽경명은 《80후》의 상업화경향을 대표하고 있다. 이런 상업화경향은 일부분 사람들이 부정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나쁘다고 할 수 없다. 기성세대의 관념으로 그들을 질책할 수 없다.   다음으로 한한은 주류사회에 대한 일종 반발경향을 대표하고 있다. 평론가 백엽은 한한에게 있어서 이런 경향은 점점 극단으로 나가기도 하였다고 지적하였다. 례컨대 그는 한한의 작품 《 2004 통고(通稿)》를 읽고 깜작 놀랐다고 하였다. 이 작품에서는 중학교에서 설치한 학과목을 아무런 쓸모없는 것이라고 질책하였고 현행 교육제도와 학교 교사들에게 마구 먹칠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반발은 극단적이고 반발을 위한 반발로서 문학과 거리를 멀리하고 있다. 그의 《삼중문》은 그래도 문학적인 표현이 있었는데 《2004 통고(通稿)》는 이런 문학적 표현이 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최근에 인터넷에서 평론가 백엽과 한한 사이에 쟁론이 벌어졌는데 나어린 《80후》세대와 쟁론하기 귀찮아서인지 백엽은 자기의 홈페이지(博客)를 닫아버렸고 한한도 정전포고를 내고서 《나도 인제 자동차경기에 참가하러 간다》고 선포하였다.   강열연(녀)은 《80후》 작자 중에서 보다 지혜를 갖추었다고 할수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문학연구를 하는 학자이고 그녀를 키워준 외할머니는 기독교 신도로서 그의 문학창작에 큰 영향을 끼치였다. 례컨대 그의 작품에는 대자연과 인간에 대한 련민 의식이 보여지고 있다.(悲天憫人) 즉 인간과 작은 동물 사이, 인간과 작은 식물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감정을 잘 표현하였다. 이는 《80후》 작자 중에서 아주 특이한 것이다.  그의 《십애(十愛)》 등 작품집들에 수록된 작품들에서는 이런 련민의 감정을 확대하여 사회생활과 인간관계를 관찰하고 사고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례컨대 한 소녀가 치정(癡情)과 열렬한 련애에 빠져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는 이야기, 부모가 리혼한 후 자식들을 돌보지 않아 서로 감정을 상한 이야기 등 제재는 아주 무거운 내용을 담고 있는데 장열연은 이를 잘 처리하고 있다. 최근에 그가 창작한 장편소설 《물신선은 벌써 잉어를 타고 떠났다(水仙已乘鯉魚去)》는 그가 청춘기 습작단계를 벗어나 어른들의 세계에 들어섰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 북경 영화학원 학생 팽양(彭揚)이 창작한 《 날이 저물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나(天黑了,我們去哪)》 등 작품도 주목된다. 이 소설은 1980년대에 출생한 불량소년(問題少年)들의 생존상황을 다루고 있다. 이런 불량소년들은 대체로 가정이 해체된 후 범죄의 길로 나갔거나 교육방법이 타당치 못해 욕설과 체벌로 인해 인격이 삐뚜러졌거나 극단적인 허영심으로 어린 나이에 큰돈을 벌려다가 나쁜 사람들의 기편과 사촉 하에 마약에 손을 대거나 매춘부로 전락되기도 한다. 다른 《80후》 작자들은 보통 자신의 생활을 많이 다루고 타인에 대한 관심이 적은데 비해 팽양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관심하였고 특히 사회의 변두리에서 헤매는 청소년들의 생활을 관심하였다. 이는 《80후》 작자 중에서 특이한 점이다. 백엽은 이 작품을 평하면서 이런 《문제(불량)소년》들은 《문제사회》의 산물로서 그 뒤에는 《문제학교》, 《문제교사》, 《문제가장》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80후》문학에서 적지 않은 창작자들은 본격적인 문학창작보다는 문학애호가(票友)들의 과외창작이라고 할수 있다. 그들 중에는 우에서 언급한 인기창작자 외에 문학소질을 갖추고 문학적 추구가 있는 사람들도 있다. 례컨대 사천대학의 학생 안가(顔歌, 녀, 网名)의 산문 《봉왕(蜂王)》은 그녀의 문학적 재능을 과시하고 있다. 이 수필은 농촌에서 양봉업에 종사하는 중년남자를 쓰고 있는데 그는 괴상하게도 벌 한 마리만 키우고 있다. 하지만 그는 양봉업을 통해 인생에 대한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한 주인공은 15세 나는 소녀인데 총명하고 장난을 즐기였다. 이 소녀는 늘 양봉장에 가서 구경하면서 양봉하는 그 중년남자와 대화를 나눈다. 이 대화는 진실한 마음의 교류이며 암시성이 풍부한바 灵气와 巫气(무속적인 기운)가 충만되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중앙희곡학원의 학생 윤산산(尹姍姍, 녀)의 산문 《미다기(美多琦)》도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녀주인공은 대학 2학년 때 《서방문학사》를 가르치는 문기(文琦)선생을 사모한다. 문기선생은 내성적이여서 학생들과 별로 말도 하지 않고 옷차림도 대충하고 다니며. 수업시간에는 강의내용에 너무 깊이 빠져 들어가 학생들의 반응을 살피지도 않는다. 녀주인공도 내성적인 학생인데 문기선생을 미칠 정도로 사모한다. 수업시간에 그는 강의내용은 듣지 않고 문기선생의 옷차림, 말투, 손짓만 주의 깊게 살펴보는데 그것만으로도 풍부한 미적감수를 받는것 같았다. 후에 그 선생이 다른 곳에 가서 강의를 하자 그는 그냥 따라가서 강의를 듣는데 그 선생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마스크를 끼고 안경을 걸고 간다. 그러면서도 한편 문기선생의 주의를 불러일으키려고도 한다. 그러나 그 선생은 그냥 본체도 하지 않았다. 이 산문에서는 한 나어린 소녀가 나이 차이도 많은 남자를 사모하여 생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정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특히 대조적 기법이 잘 되였다. 한켠에서는 마음속에서 불길이 치솟을 정도로 사모하는데(翻江倒海,如火如荼)다른 한쪽에서는 조용한 호수처럼 전혀 반응이 없다.(心如止水,毫无知情) 이런 뜨거운 것과 찬 것, 동적인 것과 정적인 것의 대비로 하여 이 작품은 아주 큰 감화력을 갖고 있다.   서북대학 졸업생 리사사(李傻傻, 남, 본명은 蒲荔子)의 산문 《내가 가장 잊을수 없는 한 녀인의 손(我最難忘的一双女人的手)》도 좋은 작품이다. 이 애매한 제목과는 달리 사실은 11세나는 여자애의 손을 쓰고 있다.      총적으로 《80후》 문학이라는 이 문화현상에는 풍부한 내용이 있으며 그 리면에는 부동한 경향과 부동한 추구가 있다.   5.《80후》 문학현상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 1) 현행 교육체제에 대한 반발  《반역》은 《80후》문학의 가장 선명한 자세이다. 그들의 반역은 우선 전통적인 교육리념과 현행 교육체제에 대한 반발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한한이다. 그는《穿着棉襖洗澡》라는 격문(檄文)에서《지금의 교육개혁은 아주 괴상하다. 아마 중국에는 전면발전 인재가 결핍한 모양이다. 이렇게 양성된 인재는 반드시 오늘은 로케트 발명하고 래일은 장편소설을 써서 모순문학상을 수상하고 모레는 자기절로 그 작품을 8국 언어문자로 번역하여 전 세계에 발행해야 하는 것 같다. ...  전면 발전의 결과는 전면적인 평범함과 용속함을 초래한다. 학습과 수업, 교육과 교과서는 완전히 다른 두 개 개념이다.》라고 불만스레 말하였다. 《80후》 창작자들 중에서 명성이 가장 높은 사람들은 모두 엄중하게 편과(偏科)를 하는 《문제소년》(불량소년)들이다. 그들은 교원의 발자국을 밟고 걸으려 하지 않았고 전통적인 교육을 거부하고 교실에서 뛰쳐나갔다. (失學) 그들에게 있어서 문학창작은 바로 현행교육체제에 대한 반항행동으로 되었다.   이에 일부 교육가들도 《80후》 문학현상을 주목하고 있다. 왜 교정의 세멘트 바닥에서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작은 풀들이 사회에 진출하면 하늘을 찌르는 거목으로 자라날 수 있는가? 이는 심사숙고해야 할 문제이다. 전면 발전이라는 교육목표는 너무 리상화한 것으로서 대부분 학생들은 이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 력사 상의 위인들은 거의 모두 전면 발전의 인재가 아니라 오히려 청소년 시기에 편면적으로 발전?사람들이였다. 영국 수상 쳐칠, 중국 학자 심종문, 학자 오함 등은 수학 점수가 언제나 꼴찌였고 심종문과 오함은 수학이 0 점이였다. 다윈도 동년시기에 공부하기 싫어했고 단지 식물관찰만 즐겼다고 한다. 발명 대가 에디손은 어린 시절에 교원에게 멍청이라는 모자를 쓰고 학교에서 쫒겨 나기도 하였다. 한한은 7개 과목이 락제 점수를 맞았는데 이에 불복한 한한은 고대 그리스 과학자 아르키메데스의 《나에게 하나의 받침대(支點)를 주면 나는 지구를 들 수 있다 .》(지레대 원리) 라는 명언을 빌어 《나에게 한 시간만 주면 나는 멋진 문장을 써낼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현행 교육에 대한 반감으로 하여 그들은 그 누구도 자신의 문학창작이 학교 어문교원의 인격에 감화되고 또 그들의 지도하에 성공하였기에 아주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부 평론가들은 《80후》 창작자들이 현행 교육체제의 문제점과 그에 대한 불만을 정서적으로 토로(發泄 발설)하였으나 이를 시정할 수 있는 대안은 제출 못하였으며 반대로 나어린 학생들에게 가치혼란을 조성하여 반면(부정적,負面) 효과를 낳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최근에 9세의 길림 소녀 범강국(範姜國, 현재는 월반하여 초중 1학년생)이 소학 시절을 소재로 창작해왔던 12만자 되는 소설 《놀면서 보낸 소학시절(玩過少學)》을 원고료 30만원을 조건으로 출판하려고 서둘고 있다.  (일설 2006년 5월 중순에 발행되였다고 함) 소설은 자유롭고 유쾌한 동년 시절을 갈망하는 소년들의 심리를 대변해주고 있다. 범강국은 놀기 좋아하는 어린이인데 바둑, 축구, 유희를 즐기며 아버지와 함께 강에 가서 물고기를 잡고, 산에 가서 꽃을 꺾으며, 사처로 유람하기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3년 반에 소학교 과정(학과목)을 다 배우고 초중에 월반하여 진학하였다. 그는 이미 2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였고 10여 개 성, 시의 20여개 향진을 유람하였다. 그는 유쾌한 공부(快樂學習)를 주장하면서 장난(玩)하는 것도 학습이라고 말한다. 이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될것 은 당연하다. 이로 인해 현행 교육체제에 대한 의론이 더 활발해질 것은 의심할 바 없다. 2) 작품에서 묘사된 청소년들의 감상적인 정서(憂傷)   북경대학 교수 조문헌은 《80후》창작자들의 창작에 나타난 우울한 정서를 지적하면서 《그들의 문장은 가을 기분(추의)이 너무 농후하다(秋意太重).》라고 하였고 저명한 당대작가 량효성(북경언어대학)은 그들의 고통의 진실성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면서 《가을 기분(추의)은 진실한 것인지, 거짓인지? 아니면 시장 수요에 따라 만들어낸 것인지?》라고 질문을 하였다. 아무튼 청소년들이 어린 년령에 걸맞지 않게 우울해지고 있다는 것이 불가사의하다는 것이다.   목전 청소년들의 감상적인 정서에 대해 서연(徐姸) 등 평론가들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80후》 청소년들은 세상에 태여나서부터 동화가 없는 동년시기에 살아왔다. 그러다가 1990년대 개혁개방시기에 초속(超速)으로 달리는 직행 렬차에 앉아 소년시기에 들어섰다. 이 소년시기에 그들은 생명은 가렬 처절한 입시경쟁, 인터넷 유희, 시장경제의 파도에 몰리웠다. 황차 독신자녀들인 그들은 이 모든 것을 계통적인 조기양성과 지력개발 훈련을 통해 수용하였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소년시기와 청춘기의 계선이 없어졌고 과도한 심리적 부담으로 하여 창백하고 로쇠한(蒼老) 심령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런 심리상태로 하여 그들은 이 세상에 순진한 것이 있다는 말을 거짓으로 받아들였고 이런 말로 훈계하는 사람들을 천박한 사람으로 보았다. 따라서 성인세계와 교류하기 어려운 간격을 가지게 되었고 늘 감상적인 정서를 가지기도 하였다.   이런 감상적 정서는 곽경명의 《환성》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주인공 카소는 태여나서부터 우울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는 환설왕국에서 살아야 했다. 그는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왕위를 계승하는 모순된 심리를 갖고 행동한다. 때문에 주인공의 일생은 우울한 정서를 시종 동반하고 있다. 《꿈속에 지는 꽃(夢裏花落知多少)》에서 환설왕국의 우울 정서는 지상의 대도시 북경과 상해에서 재현된다. 곽경명은 바로 이런 소설을 빌어 《80후》세대가 안고 있는 감상적인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80후》의 대표적 인물인 장열연도 자신은 《우울한 세대(憂傷一族)》에 속한다고 말하면서 《환성. 서문》에서 공개적으로 《감상적인 서술은 《80후》세대가 순진성을 영원히 매장한 일종 기념 형식이다.》라고 천명하였다.  3) 《80》창작자들의 시장경제의식  《80후》문학은 시장, 문단, 학교를 련결시킨 하나의 문화현상이다. 《80후》세대는 다원적인 문화가치를 지향하고 있으며 텅빈 설교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들의 생존상태에 대해 아주 솔직하고 진지한 태도를 갖고 있다. 2004년에 북경 서단 도서빌딩에서 한 《80후》 작자가 자기의 소설을 싸인하면서 판매하고 있을 때(籤名售書) 한 기자가 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 《 일반적으로 문학과 시장은 극복하기 어려운 모순을 안고 있는데 이 소설의 작자는 이 모순을 어떻게 극복하고 있습니까?》 이 물음에 그 작자를 포함한 거의 모두의 《80후》 작자들은 이구동성으로 《 모순이 있습니까? 우리는 전혀 이런 모순을 느껴 본적이 없는데요.》라고 대답하였다한다. 기실 《80후》 작자들은 시장의 유혹에서 거의 벗어날 수 없다. 곽경명의 경우를 보더라도 모든 출판사와 출판상들이 그의 꼬리를 따라다니면서 원고를 얻으려 애쓰고 있으며 그들의 원고를 얻기 위해 막대한 원고료를 지불하는 것을 서슴치 않고 있다. 곽경명의 소설 《꿈속에 지는 꽃(夢裏花落知多少)》와 《환성(幻城)》이 2003년에 100만부 이상 팔려 이해 도서시장 베스트셀러 제1위와 제2위를 점했다고 한다. 그러니 작자에게 들어오는 수입은 적어도 몇 백만 원에 달했을수도 있다. 재학중의 대학생이 이런 거금의 유혹을 거부할 리유는 아마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늘 시장의 올가미에 매여 있게 되면 그들의 문학 재눙이 진정으로 발휘될수 없는 것이다.    최근 일본 NHK 텔레비전에서 수여한 《아세아 우수남성》칭호를 받은 곽경명은 지난해 상해 위성 텔레비전 대담종목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로일대는 젊은 시절에 거의다 《자아를 상실》한 시대에 살아왔기에 개성이 없는 인생을 보내고 있으며 정채로운 인생이란 말하기조차 어렵다. 《80후》는 기성세대와 다른 어른이 되고 싶다.》 《독신세대》라고도 할 수 있는 《80후》창작자들의 문학활동은 바로 이런 정신구조를 체현하고 있으며 그들의 문학활동은 사회경제문화에 파급될 수 있는 영향력을 갖고 있다. 그중 문학과 시장의 관계를 어떻게 대할 것이냐 하는 것은 아주 주목할 만한 과제이다.   동서방의 전통문화에서는 종래로 문학이 금전과 밀착되는 것을 비판하고 있는 것 같다. 《성경》에서는 재부를 점유한 자들을 풍자하고 있는바 그들이 천당에 올라갈 수 있는 비률은 락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기 어려운 것만큼 작다고 설교하고 있다. 중국 유가문화에서도 《군자는 본래부터 가난하느니라(君子固窮)》《문장은 가난할 때 써야 훌륭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다.(文章窮而后工)》라는 관념을 선양하고 있다. 수천 년 동안 문학이 가난과 밀착되여 있었기에 문학은 시종 상품경제와 불공대천의 관계에 놓여 있는 듯하였다.   하지만 이 문제에서 리론과 실천은 언제나 탈절되여 있었다. 문학은 대체로 경제의 변혁에 따라 변하였고 경제의 발전에 따라 발전하여왔다. 총체적으로 보아 상품경제가 발달한 나라의 문학은 그 수준도 높아갔다. 국제적으로 공인하고 있는 최고 문예상들인 노벨 문학상, 오스카상은 모두 상품경제가 발달한 서방국가에서 설치한 것이다. 순수문학을 표방하는 나라일수록 경제적 포상(褒賞)이 놀랄 정도로 크다. 미국 프리체(普利策)문학희곡상, 프랑스 공글 문학상 등은 당장에서 수여하는 상금이 막대할 뿐만아니라 그에 따른 원고 주문이 끊임없기에 이런 작가들은 한평생 돈낟가리에 앉아 있을 수 있다. 오늘날 권위성을 띤 국제문예상이 금전을 거부한것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은 당조시기에 경제가 발전하였기에 시가의 황금시기를 마련해 주었고 명청 시기의 상품경제의 발전은 소설의 번영을 추진하였다. 지금 한류(韓流)가 중국, 동남아를 휩쓸고 있는데 이는 한국의 경제발전과 무관한 것이 절대 아니다.   만악의 금전만능주의를 비판한 프랑스 사실주의 작가 발자크도 매우 강렬한 금전욕망을 안고 창작에 몰두하였고 아버지 뒤마는 동료들과 함께 문학작품을 팔고사고 하였다. 톨스토이는 처녀작을 발표할 때 출판상에게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원고료가 1 루불이라도 적으면 절대로 투고하지 않는다고 천명하였다.   중국의 군자는 종래로 돈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마음속으로는 금전에 대한 욕망은 다다소소 가지고 있다. 청조의 명화가 정판교는 《판교윤격(板橋潤格)》이라는 글에서 《무릇 례물과 음식물을 가져오는 것은 은전을 가져오는 것보다 못하다. 나는 은전을 가져오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즐거워져 서예거나 그림이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가작으로 되군 한다.》라고 썼다. 아마 《홍루몽》의 작자 조설근이 지금 살아있다면 자신감이 넘치게 막대한 원고료를 청구했을 것이다.   사회가 고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오늘에 있어서 문학의 상품화는 문학의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 자체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최저한도로 문학가의 경제래원과 생존래원은 시장이여야 한다.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는 작가가 문학활동을 견지한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작가가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으면 독립적인 인격을 가지기 어려우며 심지어 자신의 령혼을 쉽게 팔아먹을 수 있다. 이른바 어용문인, 자본가(상인, 기업가)의 下人이 되는 것도 대체로 이런 원인이 작용할 것이다.   문학과 상품경제의 관계에서 《80후》세대는 기성세대와 판이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보편적으로 문학과 시장경제가 모순되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들은 도서출판 기제에 대해 정통하고 있기에 창작자인 동시에 《절반 출판상(半個 書商)》라고 불리운다. 출판사에서는 쩍하면 몇 십만 원, 몇 백만 원이라는 원고료를 내걸고 그들의 작품을 사가려 한다. 그것은 이에 걸맞는 상업리윤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곽경명의 《환성》이 1백만부 이상 팔렸다는 것은 신화와 같은 이야기이다. 이에 반해 주류문학의 엘리트 작가들이 책 몇 만 부를 발행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로 되었다.   《80후》창작자들이 성공적으로 문학과 시장의 접목을 실현하였는데 그 의의는 절대 폄하할수 없다. 목전 전 중국의 청소년들이 부모에게 손을 내밀고 엄청난 소비돈을 요구하고 있을 때 《80후》창작자들은 제힘으로 경제적 자립을 실현했고 세세대대로 가난하게 살아왔던 조상들의 운명을 개변시켰다. 그들의 한부의 작품이 거의 죽어가는 출판사를 살릴 수 있게 되었고 나어린 몇몇 작가들이 수많은 출판상, 도서판매상들을 먹여살릴 수 있게 되었다. 2005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의 상업성 간행물(《福布斯》)에서 부자 명단에 올린 중국 명인이 4명인데 그중 《80후》창작자들인 한한과 곽경명이 들어 있었다. 한한의 여가생활은 이미 상상을 초월한다고 할수 있다. 그는 자동차운전애호가인데 고급승용차를 사가지고 전국각지에서 벌리는 승용차 경주(賽車)에 참여하고 있다.   《80후》창작자들의 시장경제의식에 대해 평론가 초수홍(焦守紅)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정신 로동과 육체 로동의 대우가 바뀌여져 지식인, 문화인들의 생활처지가 여의치 못한 불합리한 사회구조 속에서 《80후》창작자들은 왕삭(王朔), 지리(池莉) 등 작가들이 창작한 통속문학의 뒤를 이어 문학가치의 외연을 확장시켰고 정신 로동자들을 위해 정의를 쟁취하였다. 문학의 경제혁명이라는 의미에서 말하면 《80후》 창작자들은 바로 시장경제환경에서의 신문화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중국의 《80후》문학현상은 고립적인 것이 아니다. 린국 한국에도 이와 류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중국 《80후》 창작자들과 나이가 비슷한 녀중학생 \'가애도(可愛淘-귀여니, 본명 이윤세)가 쓴 소설 《그 놈은 멋 있었다(那小子眞帥)》가 2001년에 한국과 중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단 시일에 40만부가 발행되였다. 흥미 있는 것은 3년 후 《80후》세대에 속하는 녀학생 동효뢰(董曉磊)가 《나는 총명한 녀학생이 아니야(我不是聰明女生)》이라는 소설이 한국에 번역, 출판되였는데 대번에 인기작으로 되어 30만부 발행되였다. 이는 중국의 《80후》 문학이 이미 세계적인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6. 《80후》창작자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과 전망   목전 《80후》의 창작에 나타난 결함에 대해 평론가들의 의견을 대충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1) 앞에서 언급된 것처럼 그들의 창작을 참된 의미에서의 문학창작아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문학애호가일 뿐 그들의 창작은 과외창작이나 다름없다. 사실상 그들 중 적지 않은 작자들은 모두 직접 출판사를 통해 자기들의 작품을 출판하였고 문학 습작과정에 본격적안 정규훈련을 받지 못했다. 따라서 주류문단에서는 한동안 그들의 존재를 무시하군 하였다. 2) 생활체험이 협소하고 개인의 자그마한 환희와 애수를 표현하는 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사기법과 예술구성 면에서 정채로운 일면이 있는 반면 많은 부족점을 보이고 있다. 이는 그들이 인생경력이 짧은 것과도 관련이 있다. 3) 상업화, 매체화와 과분하게 밀착된 감을 준다. 일부 매체와 평론가들이 《80후》는 《(도서)시장에 들어섰지만 문단에는 들어서지 못했다.》고 폄하하고 있다. 4) 현행 교육제도와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을 표현함에 있어서 과분함감을 주며 사회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이른바 《한한현상》이 바로 돌출한 실례이다.   1999년에 《나는 해빛을 사랑한다(我愛陽光)》의 작자 허가(許佳, 녀)가 평론가들과의 담화에서 현실에 대한 그들의 감수를 이야기 하였다. 그는 로 일대가 지난 시기에 표현하였던 보통 수준을 초월하는(超常) 정치열정에 대해 아주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모두 虛妄한 일이라고 꼬집었다. 이에 대해 로 일대 평론가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 시기에는 누구나 자신의 전도를 대할 때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단지 그 길 하나 뿐이였다. 너희들이 가소롭다고 보고 있는 그런 정치열정에는 기실 우리 로 일대의 진지하고 성실한 감정이 내포되여 있다.》 이런 대답에 대해 《80후》세대는 별로 동감을 표시하지 않고 있다. 이는 두 세대 사이에는 이미 가치관면에서 심각한 세대차이(代溝)를 보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80후》문학창작자들의 미래에 대해 평론가 백엽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80후》창작자들이 앞으로 모두 뛰여 난 문학가가 될 수 있다고 단언하기 어려우며 또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들 중 신형의 문학가가 되려는 사람들이 문학대오에 보충될 것만은 의심할 바 없다. 그들이 문단에 들어와 창작주력군이 될 때 그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개성화창작과 개성화품격은 기필코 당대문학에 총체적이고 혁명성을 띤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참고문헌 백엽 《 <80후>의 현 상황과 미래》 백엽 《 새로운 군체, 새로운 분위기》》 서연 《 <80후>의 창작현상 분석》 초수홍 《 <80후> 신 청춘문학의 궐기》 리흔 양혜 설건 《<80후>창작의 시장성과 류행성 연구》 (이상의 론문들은 모두 중국당대문학회 기관간행물  《당대문학연구》에 실렸음)                                                            200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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