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 대합입시를 회복하던 나날에
김병활
1977년 - 대합입시를 회복하던 나날에(1)
1977년, 이해에 11년간 중단되었던 대학시험이 회복되였다. 5년전인 1972년도에 한번 대학입시를 실시했다가 ‘백지(白纸)영웅’ 장철생이 나왔고 ‘4인방‘이 미친듯이 반대하는 바람에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말았다. 오늘 ‘4인방’이 타도되고 4개현대화를 실현할 절박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장중앙에서는 대학시험제도를 회복하였다. 이는 사회상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인민들의 절대적인 옹호를 받았다.
소문은 일찍 금년(1977년) 4월부터 나돌기 시작했다. 5월 말에 내가 연길현 광신 공사(公社) 문화소(文化站)직원과 함께 심양으로 와이됴(外调)를 하러 갔을 때에 거기선 벌써 여론이 자자했다. 장춘 외조카도 이 문제에 대해 무척 관심을 보이면서 리공과 참고서를 부쳐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나는 룡정에 돌아와 그의 요구대로 예전에 보던 두툼한 참고서 3권을 우편으로 부쳐보냈다. 이해 9월에 들어서자 이런 여론은 룡정에서도 자자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한번은 내가 공사(公社) 병원에 병보이러 가니 약국에 앉아 있던 한족 녀 회계가 다른 사람한테서 거의 10권에 달하는 참고서를 받아들고 만족해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자기 아이한테 주어 복습하게 하겠노라고 한다. 가을철에 동흥대대에서 일피삼반(一批三反) 동원회의를 소집하고 원 대대회계의 탐오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격리심사를 하였다. 그때 나는 집체호의 지식청년인 뜨락또르 운전수와 함께 파수를 섰는데 그 운전수는 직무를 수행하는 한편 숱한 교과서를 책상 우에 놓고 자습하고 있었다. 나는 그저 마음속으로 과연 세상이 달라지는가 보다고 혼자 생각에 잠겼다.
10월에 들어서자 교육계통에서는 이미 정식으로 대학시험 회복을 공포(公布)한 모양이였다. 뜬 소문에 의하면 11월에 대학시험을 치른다고 한다. 응시생은 지식청년뿐만 아니라 금년에 졸업한 중학생들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학교들마다 각종 복습제강을 인쇄해 배부했다는 것이다. 그중에는 길림대학 복습제강이요, 남경지구 시험문제요, 북경지구 수학경색문제요, 연변대학 정치문제 답안이요…… 가지각색 복습자료들이 이미 널리 전파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고중학교들에서는 지식청년으로 농촌에 내려간 본교 졸업생들에게 일일이 복습자료들을 부쳐보냈다는 말도 떠돌았다. 그러자 지식청년들은 가을 탈곡이요, 대채(大寨)식 농촌건설이요 하는 것을 다 집어 던지고 도시로 돌아와 모교에 가서 매일 오후와 저녁 시간에 꾸려지는 복습반에 참가한다고 한다. 그리고 매일 새벽이 되면 조용한 학교 구석구석마다 긴 군인용 누런 솜외투를 걸친 재학생과 귀가한 지식청년들이 입으로 뭔가 중얼거리며 복습문제를 외우더라는 것이였다. 내가 출퇴근 할 때마다 해란강반과 철교 아래서 응시생들이 책을 감아쥔 손을 등에 지고 머리를 숙이고 왔다갔다 하며 뭔가 외우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생각 안 나면 뚝 멈춰서서 복습제강을 둘춰보곤 하였다. 그 바람에 농촌의 생산활동은 확실히 곤란에 빠졌다. 공농5대에서는 15명 청년이 몽땅 집체호 집안에 들어 앉아 공부하느라고 탈곡, 징구량(征购粮) 운송에 커다란 지장을 주었다. 광신대대에서 맡아하는 신화대대 제전(梯田) 공사장에는 수염이 거칠한 중장년과 대학시험을 서두루지 않는 몇몇 ‘무깍지’들만 남아서 일하고 있었다. 이에 대대서기 현철묵은 시험준비하는 칭년들에게 화를 내지 않고 그저 전화로 광신대대에서 빨리 다른 사람을 조직해 신화 제전 공사장에 파견하라고 재촉하곤 하였다.
중앙 방송국에서 대학시험제도를 실시한다고 방송한 날 아침, 나는 신화대대에서 밥을 먹고 시내로 들어오다가 룡정 2중(연길현2중, 이하 같음) 에 들러 녀동생에게 복습제강을 얻어주려고 했다. 수학교연조에 찾아가니 룡정1중(연길현1중, 이하 같음) 시절에 우리를 가르쳤던 리충규 선생님께서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앉으라고 자리를 권했다. 점잖게 안경을 걸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씀하시는 모습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대학시험을 치려구? 그런데 시험제강은 이미 다 내보내고 없는데…”
이에 나는 말머리를 흐리고 그저 룡정1중(초중) 동기생이고 지금은 룡정2중(고중) 교원인 김*호를 찾는다고 했다. 리선생님은 나에게 본관과 따로 떨어진 작은 건물에 있는 물리교연조를 찾아가보라고 찾는 방법까지 상세히 알려주었다.
내가 물리교연조에 들어서니 김*호와 역시 룡정1중 동기생인 김*숙이 앉아 있는 것이였다. 김*숙은 무슨영문인지 우울한 표정을 하고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다. 그래도 김*호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내가 찾아온 리유를 말하자 딱한듯이 제강은 이미 오래전에 다 배부하고 없다는 것이였다. 좀 실망스러웠으나 내색하지 않고 김*호에게 금년 대학시험에 참가하느냐고 물었다.
“글쎄, 오늘 아침 중앙방송을 들어보니 로삼계(老三届,66년급, 67년급, 68년급 고중 졸업생) 중에서 실천경험이 풍부하고 발명창조가 있는 사람은 시험 자격을 준다고 합데, 그래서 좀 참가해볼까 하는데… 그런데 당신은?”김*호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나서 나에게 되묻는다.
“내사 어디 볼게 있소? 10년 동안 농촌에 있으면서 고중시절 교과서를 전혀 보지 않았지, 게다가 발명창조라는건 더 말할나위없지, 안될게 뻔하오.” 그토록 바라던 대학시험이건만 나는 자존심을 구기고 맥없이 대답하였다.
본래 말수가 적고 서생티가 나던 김*호는 오늘따라 흥분하여 이것저것 찾기도 하고 앉았다 섰다하며 말도 많이 했다.
“당신네 룡정3중 고중 동창생 박*호도 우스개 소리로 정규적인 대학시험을 치르고 다시 한번 대학에 다니고 싶다 합데. 농촌에서 추천받아 대학 간 사람이라고 자기를 별로 높이 안 보더라면서. [주: 나의 룡정3중(연길현3중-한족고중, 이하 같음) 동창생 박*호는 원래 지식청년으로 농촌에서 추천돼 길림공업대학에 입학했음, 초중시절에는 룡정2중에서 공부했는데 룡정1중의 김*호와 함께 수학 천재라고 불리웠음]
나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주위를 살펴보았는데 방 한 구석에 하남대대 민병련장이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두툼한 종이말이가 쥐여져 있었다. 내가 웃으며 아른체 하자 그는 게면쩍어 하면서 “대학시험을 좀 치러볼까해서 모교 선생님들을 쫓아다니며 제강 몇권 얻었습니다.”라고 말한다.
나는 김*호와 작별하면서 그에게 대학시험을 잘 치르고 청화대학에 입학하도록 노력하라고 진심으로 축원하였다. 그날 비록 복습제강은 얻지 못했으나 김*호의 기뻐하는 표정과 흥분된 어조에서 뭔가 예전에 없었던 새로운 느낌을 받았다. 그와 같은 수학천재는 반드시 대학에 입학해 나라의 중요한 인재로 육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속으로 착잡하게 떠오른 부러운 마음과 렬등감을 가라앉히고 나의 일터 – 동흥대대 대채전(大寨田)공사장으로 묵묵히 발길을 옮겼다.
11월에 들어서자 신문에서는 금년에 대학생을 모집할 전국 각 대학과 성내 대학의 전업(학과)을 공포하였다. 그리고 기층 초생공작(基层招生工作,학생모집 사업)도 시작되었다. 연길현에서는 4일간 공사 당위서기와 교육보도원이 참석한 초생공작회의가 소집되었고 11월 14일 전까지 응시생 보명(报名, 등록) 공작을 끝내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나의 마음은 저으기 들뜨기 시작했다. 어느날 동흥대대 대채전 공사장에서 뜨락또르를 수리하고 있는 로삼계 고중생인 장*규를 만나 이말저말 나누기 시작했다. 소학교부터 초중까지 한 학교에서 같이 공부했기에 서로 “야, 자”하는 사이였다. 보아하니 지금 그도 나처럼 무척 마음이 들떠 있었다.
“야, 병활아, 우리 대학시험을 치르자. 밎져야 본전인데. 나는 이미 시험 치르기로 작심했어. 너도 그럴테지, 너야 복습하나마나 책을 한번 훑어보면 될걸 가지구. 복습시간이 딸려서 리공과가 안 될 것 같으면 문과라도 치르려무나.”
그의 강권에 나는 확답을 주지 못하고 맥없이 대꾸했다.
“글쎄, 전번에 현 교육국을 찾아 갔는데 초생공작을 책임진 최주임이 내가 문과를 치르려 한다고 하자 단마디로 ‘에이구, 치르지도 마오, 30살 되는 지식청년에게 시험자격을 주는 건 리공과 인재를 뽑자는게 주요 목적이요. 문과는 나어린 재학생 가운데서 얼마든지 뽑을수 있는게요 ’라고 하더란 말이다. 생각해 보니 그의 말에 일리는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하물며 전국에 문과를 설치한 종합대학이 얼마 안 되지, 종합대학 내에서 문과는 20%도 안된다고 하던데. 나처럼 이미 결혼하고 애까지 있는 문과 지망생을 누가 받아주겠나? ”
장*규는 기름 묻은 손으로 기계를 수리하며 가슴에 쌓였던 불평을 내뿜기 시작했다.
“제길할, 안될놈은 그저 이렇다니까, 서른살 거의 먹도록 서방(결혼)가지 않고 대학 가기를 기다렸는데, 금방 서방가자마자 대학시험이 회복됐단 말이야. 몇해전에 농촌에 내려왔던(插队) 장춘 어느 대학 선생님이 떠나갈 때 책을 놓지 말고 공부를 계속 하라고 하더라. 그러면서 지금 입학시험 없이 농촌에서 추천받아 대학에 가는 것은 다 ‘처지바단’인데 앞으로 반드시 대학시험제도가 회복될거라면서 말이야. 나는 그의 말만 믿고 재작년까지 책을 놓지 않고 자습을 했댔다. 한 일년만 앞당겨 시험제도가 회복돼도 결혼은 안 할 건데, 제길할…”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다시 용기를 내여 나에게 말한다.
“야, 우리 실망하지 말고 시험 치르자. 나는 수리과(数理课)가 문제 없으니 정치, 어문만 공부하면 된다. 너는 정치, 어문은 문제 없을 테구, 수학만 보면 되지 않겠니?” 그는 이미 결혼한 로삼계 지식청년 중에서 자기만 시험에 참가하는 것이 쑥스러운 모양인지 자꾸 나를 들쑤시는 것이였다.
어느날 내가 공사 문화소에 들어서니 공사 부녀주임 김*옥이 책상앞에 꼿꼿이 앉아서 기다란 팔로 신문을 번지며 이따금 수첩에 뭔가 적어넣는 것이였다. 나는 대뜸 그가 대학시험 준비를 한다고 짐작했다. 아니나 다를가 좀 지나자 그는 옆에 앉아 있는 공사 무장부 ㅎ부장과 나에게 이것저것 정치과 복습문제를 물어본다. 대학생 출신인 ㅎ부장은 유식한 자태로 일일이 대답해 주는데 내가 옆에서 듣기로는 별로 만족스러운 답이 아니였다.
문화소 소속인 영화방영대 조선말 해설원 서*학이는 재간둥이였는데 그도 대학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였다. 그런데 공사 지도부에서 자꾸 영화 방영 임무요, 대채전 공사 소식 방송 임무요 하면서 복습시간을 주지 않자 짜증을 내는 것이였다.
“오늘 오후 광신 중학교에서 화학과 보도(辅导)를 합니다. 화학과는 나에게 있어서 제일 약한 고리인데 또 빠지게 됐으니 어쩌면 좋습니까? 이러면 내일은 아예 나오지 않겠습니다.”하며 두덜거리는 것이였다. 그러자 우리 모두 그의 딱한 사정을 리해하고 그렇게 하라고 했다.
유신대대의 한 젊은 녀성이 아이 둘이나 있는데도 대학시험을 치르려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원래 학교시절에 학습성적이 괜찮았는데 복습제강을 한번 훑어보더니 자신만만하여 대학시험에 참가하겠단다. 그러자 그의 남편이 반대하지 않고 순순히 동의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 그녀는 시험장에 나타나지는 않았다.
내가 살고 있는 광신대대는 룡정 시내와 해란강을 사이두고 있고 또 농학원도 지척에 있어 비록 농촌일지라도 문화분위기가 농후했고 교육을 아주 중시하는 곳이였다. 그리하여 마을에는 예전부터 고중 졸업생들이 많았고 나와 같은 많은 로삼계 고중졸업생들은 대학을 가지 못하고 마을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중 3대의 최*권이도 시험에 참가하려고 말없이 두달전부터 복습했다고 한다. 평소에 어리무던한 그가 시험을 준비한다는 말을 듣고 어떤 사람들은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그는 1966년 고중 졸업생인데 마을 로삼계 고중생 중에서 제일 먼저 결혼해 벌써 소학교 다니는 딸애까지 있었다. 그의 안해는 일터에서 늘 자기 남편 자랑을 하는데 남편이 학교시절에 어떻게 공부를 잘했고 지금 복습문제 풀이도 아주 쉽게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한단다. 4대 리*학이는 학교시절에 달리기도 잘 하고 공부도 잘 해서 대학에 붙을 가망이 있다고 옆사람들이 말하는데 그 자신은 여태 시험준비에 대해 내색을 하지 않고 있다. 1대의 김*산은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니 대학시험에 합격될 확률이 아주 높을 것 같은데 역시 소식이 없다. 2대의 황*무도 대학시험에 자신만만하다고 하는데 안해가 극력 반대하면서 “아이를 둘이나 두고 무슨 공부를 한단말이예요? 집식구들이 다 굶어죽을거예요.”라고 질타를 하는 바람에 어쩔수없이 시험을 포기했다고 한다. 물론 그 시절 안해들이 남편이 대학 가는 것을 반대한 리유 중에는 남편이 대학 가면 농촌의 안해가 싫어져 같은 대학생 애인을 찾는다는 것, 일단 졸업하면 신분차이가 나기에 리혼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가정생활이 화목할수 없다는 것, 등등 리유도 있었다.
우리 3대 아낙네들은 내가 잠잠해 있는 것이 궁금해서 일터에서 늘 안해에게 눈치를 떠보면서 묻는다고 한다.
“남들은 다 시험준비를 한다고 야단인데 수동이 아버진 왜 소식이 없소?”
“여태까지 일에 매달리면서 전혀 복습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되겠어요?’
“에이구 별소리를 합네, 그래도 수동이 아버지사 어릴때부터 공부를 잘 했는데 왜 안 되겠소? 복습 안 해도 다 알지비. 나머거리(나이 든 사람) 고중생 중에 대학에 붙을 사람은 그래도 수동이 아버지밖에 없습네. 집에 가서 시험 치르라고 말해 보우.” 아낙네들의 이런 말을 들으면 마치 나의 일에 대해 자신들이 더 안타까와 하는 눈치였다고 한다.
1977년 - 대합입시를 회복하던 나날에 (2)
공사 지도부에서는 이제부터 시험준비를 하는 젊은 간부들에게 기층 생산대에 내려가는 임무를 주지 않고 마음놓고 공부하게 한다는 것이였다. 나는 한동안 시험에 참가할 것인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가 시험날짜가 20일도 안될때에야 비로서 결단 내리고 입학지원서를 제출하였다. 그때 이일을 책임진 교육보도원 김*일은 룡남대대에 자리잡은 주 공작대 숙소에서 사무를 보았다. 내가 그 집에 들어서니 원래 광신대대 집체호 지식청년이였던 공사 부서기 장*희가 한창 입학 지망 전업을 선택하고 있었다. 그는 아주 신중하게 여기저기 고르다가 나중에 중앙민족학원(대학) 간부 훈련부에 지망을 써넣었다. 공사직속간부 중 시험준비를 하는 사람이 모두 3명인데 전부 중앙민족학원(대학) 간부훈련부를 지망하였다. 사람들은 이 세사람 중 한명만 입학해도 괜찮은 것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주 공작대 오태호 대장이 거처하고 있는 방에서는 나어린 두 청년이 둥그런 밥상에 마주 앉아 진땀을 뻘뻘 흘리면서 입학지원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들 둘은 한어 수준이 형편없이 낮았는데 한어로 지원서에 해당사항을 쓸줄 몰랐다. 할 수 없이 교육보도원이 대신해 써주다싶이 하였다. 그들이 낑낑 갑짜르며 지원서를 쓰는 것을 보고 오대장은 너무 보기가 답답해서 련신 “이게 다 ‘4인방’의 류독(流毒,여독-余毒)이라니.”라고 몇번이고 혼자서 되뇌이는 것이였다. 두 청년은 자리를 뜰 때 민망스러운지 저희들끼리 “조선어로 시험 치를수 있다고 하니 어떨까해서 해보려고 했는데, 안 그러면 접어들지도 않았을 걸…”라고 중얼거리고는 멋없이 나가버린다.
각 대대에서 교부한 입학지원서들이 륙속 교육보도원에게 집중되였다. 살펴보니 규정(격식)에 맞지 않는 지원서들이 수두룩하였다. 문과와 리공과 전업을 분간 못해 모두 한 곳에 섞어서 몰아 쓴 것이 있는가하면 수준이 제일 낮은 일반 전문학교를 제1지망에 써넣고 수준이 제일 높은 중점대학교를 제3지망에 쓴 것도 있었다. 어느 소학교에서 민영교원을 한 적이 있는 ZB는 지망한 전업을 전부 조선어로 써넣었다. 이걸 보고 교육보도원은 저으기 화난 말투로 “소학교 교원을 했다는 사람이 이 정도의 상식도 모르고, 어쩌면 여기에다 조선어로 쓴담?”라고 투덜거렸다. 북경대학, 청화대학과 같은 어마어마한 대학을 지망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길흥대대 몇 명 청년들은 3개 지망 중에서 단 한개 지망만 써넣었는데 전부 청화대학이였다. 아마 안될바엔 장난삼아 써넣고 청화대학을 지망했다가 안 됐다는 말이나 들어도 괜찮겠다는 심사였는지 모른다. 떠 도는 소문에 의하면 연변농학원은 지망하는 응시생이 적어서 지망을 써넣기만 하면 성적이 높든 낮든 막론하고 전부 입학시킨다는 것이였다. 후에 알고보니 이는 완전히 요언에 불과했다. 또 일본어전업은 조선족을 모집하지 않는다는 소문도 굉장히 널리 펴졌다. 한 집체호 청년은 지원서에 일본어전업을 지망했다가 이런 소문을 얻어듣고 교육보도원을 찾아와 “참 모를 일입니다. 왜 한족만 일본어를 배울수 있고 우리 조선족은 안 된다는 겁니까?”하고 불평부렸다.
이 무렵 공사 교육보도원이 발부한 공백 입학지원서는 총 800부였는데 실제 교부된 것은 500부도 안 되였다. 그러니까 300여명은 이런저런 리유로 시험을 포기한 셈이다. 길림성의 상황도 대체로 비슷해서 응시생들이 예상했던 수자보다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후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적지 않은 기층 단위에서는 생산임무를 완수하지 못할까봐 황당한 조건들을 자체로 제정해서 이른바 ‘정치심사’를 하고 응시생 신청을 제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대혁명과 ‘4인방’의 여독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이른바 ‘흑색’ 출신성분(黑五类) 과 여의치 않은 친척 사회관계로 적지 않은 지식청년들이 시험자격을 박탈당했다고 한다. 이에 반해 출신성분이 좋은 청년들이 시험에 참가하는 것을 주저한 원인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망신이고 앞으로 자신의 발전에 영향 준다는 것, 둘째, 출신성분이 좋으니 대학을 다니나 마나 좋은 직업이 마련될수 있다는 것, 셋째, 있는 힘 다해 겨우 간부직에 올랐는데 본 단위에서 지지하는 눈치가 안 보이니 그냥 시험에 참가하겠다고 고집하면 정치발전면에 불리하다는 것, 황차 몇해후에 대학을 졸업한다고 해도 자신이 원하는 간부직이 차려지지 않을수도 있다는 것, 등등이다.
이런 상황을 파악한 상급 지도부에서는 기층단위에 사상공작을 해서 지식청년들이 적극적으로 시험에 참가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중앙 방송과 신문에서 이런 사상문제를 해결하려는 소식과 보도가 자주 다루어지자 응시생들에 대한 기층 지도부의 태도는 일변되었다. 쉽게 말하면 응시생들이 많을수록 당중앙에서 새롭게 회복한 대학시험제도가 만민의 옹호와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실증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 이전에 나는 신화대대 제전 공사장에서 공사간부들에게 롱조로 대학시험에 참가해 북경의 명문대학에 가고 싶다고 말한적이 있다. 그러자 직설적인 성격으로 유명한 공사 제일 책임자 량서기가 “흥, 코밑의 대학(연변대학)도 못가는 주제에 북경의 명문대학을 바라보는군.”하고 어이없다는 듯이 랭소를 보내는 것이였다. 그후 동흥대대 대채전 공사장에서 공사지도부의 나젊은 부서기 ㅎ서기가 공사장에 공사간부가 몇 명 안되는 것을 보고 나더러 공사장에 밤낮으로 남아 할일을 하라는 것이였다. 그런데 내가 대학 시험에 참가하련다는 말을 듣고 실망스럽다는 듯이 “정말 시험 칠 작정이요? 시험을 치르려면 제대로 공부해서 반드시 입학해야 하오, 반중건중, 얼렁뚱땅, 이런식으로 공부합네 하려면 아예 시험 을 포기하고 여기 공사장에서 할일을 하세요…”라고 말하고는 당장 공사장 일꾼들의 열의를 북돋아 주는 호소문과 기사들을 써서 방송할 임무를 맡기는 것이였다. 후일 ㅎ서기의 말에 의하면 공사에서는 응시생들이 너무 많아 생산에 영향을 주게 되자 먼저 공사 내부에서 예비 시험을 치르고 절반 이상의 응시생들의 시험자격을 취소한 뒤 그들더러 희망을 버리고 생산 로동에 참가하도록 하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중앙 신문과 방송에서 응시생들을 지지하라고 하는 바람에 이 계획을 실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앙 방송을 별로 듣지 않는 기층간부들은 여전히 응시생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였다. 어느 하루 나의 녀동생이 탈곡장에 나가니 생산대장이 다짜고짜 묻더라는 것이였다.
“야, 너 대학시험에 합격할 자신이 있니?
“그걸 지금 어떻게 알겠어요. 시험을 치러봐야 알지요.”
“넌 그래 어떨꿍해서(요행을 바라고) 시험 치르니?”
“글쎄요, 누가 100%로 대학에 입학한다고 시험치르나요? 대학에 붙으면 좋구, 못 붙으면 할수 없구요…”
“야, 너무 치사하다(수치스럽다), 빨리 싹싹 걷어치우고 나와 일이나 해라.일손이 딸려 죽을 지경이다.”
녀동생이 이말을 들으면서 눈치를 보니 평소에는 아주 상냥하던 생산대장이 농담이 아니라 정색해서 화를 내더라는 것이였다.
11월 중순에 공사 지도부에서는 길흥대대 구락부(大礼堂)에서 공사 당원대회를 소집하였는데 량서기가 각 대대의 응시생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그들이 해야할 일들을 다른 사람들이 대신 감당해 나서라고 동원하였다. 그러면서 기층간부들이 쉽게 달통되게 하려고 통속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였다.
“우리에게는 영웅심이 있어야 합니다. 연길현에서 그래도 한다하는(여러면에서 명성이 높은) 우리 광신 공사에서 많은 응시생들이 대학에 입학하면 그건 우리 모두의 영광입니다. 우리가 그만큼 지지를 잘했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요. 대학 모집은 한낱 중요한 국가대사입니다. 4개 현대화를 실현하는데 있어서 후계자가 없어서 되겠는가? 룡정1중, 룡정2중에서 응시생들이 50% 합격되면 우리 광신공사에서도 50% 합격돼야 하는겁니다... ”
아무튼 이번 댕원동원대회를 통해 기층간부들의 사상은 크게 전변되였다고 볼수 있다. 한번은 내가 공사 판공실(办公室)에 들어서니 판공실 ㅌ주임이 나에게 선참 말을 건넨다. “병활이, 대학시험 치르기로 했소? … 시험 날짜도 긴박한데 수학은 나한테 와서 배우도록 하오.” ㅌ주임은 연변대학 수학계 졸업생인데 내가 광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한 학교에서 중학반을 가르쳤다. 그때 어느 한번 학교 교원중에서 대학생 추천이 있었는데 나는 그에게 대학에 가고 싶다는 마음을 털어놓은적이 있었다. 그리고 5년전 1972년에 추천과 대학시험을 결합해 대학생 모집을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초중 동기생인 김*산과 함께 당시 공사 공청단서기로 있었던 ㅌ서기를 찾아가 대학에 가고 싶은데 힘써 도와주기를 바랐다. 당시 그는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내가 공사 문화소에 온후 그는 예전에 서로 모르는 사이라는듯 나에게 비교적 랭담한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이번 공사 동원대회가 있은 뒤 아주 친절해졌고 얼굴에 웃음을 띄우면서 자진해 수학과목 보도까지 해주겠다는것이였다. 그리고는 김*산이도 대학시험준비를 하느냐고 묻는것이였다. 아마 5년전 우리 둘이 도움을 요청했던 일이 생각난 모양이다.
당시 광신 문화소(文化站)는 민영 단위로서 현내 다른 공사 문화소와는 달리 유선 방송소, 영화 방영대를 포괄하였기에 직원이 비교적 많았다. 문화소 당지부서기 함*춘은 소장 직무를 맡은 나를 만나기만 하면 시험 공부를 잘 하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이였다. 그러면서 중요한 일이 있으면 의례 나와 상론해야 하는데 나의 부담을 덜기 위해 자기 혼자 바삐 돈다고 했다. 또 문화소 미술공(美术工) 영철이에 대해 칭찬을 하는것이였다. 영철이는 입학원서를 제출하고도 시치미를 떼고 매일 출근하면서 밤시간만 리용해 공부를 한다는 것이다. 이걸 모르는 함서기는 영철이가 시험을 포기한 줄로 알고 다른 한 미술공에게만 시험 공부할 시간을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시험 기일이 다가오자 시험에 참가하겠으니 말미를 달라고 하자 그제야 깨닫고 아주 감동되여 칭찬했다고 한다.
시험 등록을 한뒤 시험자격증(准考证)을 발급해야 하는데 이 기간 2층으로 된 룡정 사진관은 응시생들의 증명사진을 찍느라고 매일 집안이 터질 지경이였다. 사진관에서는 밤낮으로 근무시간을 연장해 사진을 찍고 현상하였다. 예전에 천천히 하던 일을 속도를 내서 했는데 보통 오전에 사진 찍으면 오후에 사진이 나오곤 했다. 그러다보니 촬영수준이 낮은 사진사를 림시로 고용해 대신 사진을 찍기도 해서 사진 질이 떨어지기 마련이였다. 내가 찍은 1촌 증명사진도 얼굴이 어찌나 보기 흉했던지 마치 거의 40세가 되어가는 사람으로 보였다. 이처럼 나티가 나고 이그러진 얼굴을 보고 어느 누가 모집해 가겠느냐고 걱정돼 시험자격증의 1촌 사진을 떼내고 비교적 젊어보인다고 여긴 2촌짜리 사진을 비슷한 크기로 베여내 교체했다. 그제야 안심하고 시험자격증을 바라보면서 나는 감개무량하였다. 드디어 서른살 먹은 나에게 꿈에도 바라던 대학시험 자격이 차려지게 됐구나, 대학에 가고 못가는 것은 둘째치고 고중 졸업후 10년동안 농촌에서 전전하다가 드디어 대학시험에 참가할 수 있다는것만으로도 한이 풀릴것 같았다.
1977년 - 대합입시를 회복하던 나날에 (3)
대학시험을 치르는 첫날 아침, 안해는 우리민족의 습관대로 찰떡칠 준비를 부지런히 하고 있었다. 그전엔 잘 몰랐는데 시험 보는 날 찰떡을 먹으면 신수가 좋아져 시험에 합격될수 있고 만약 국수를 먹으면 시험에 미끄러진다(락방)는 것이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문을 나서는데 안해가 기어이 동행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안해도 내심으로 대학에 무척 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시집오기전에 연변의학원에 추천된 적이 있었다. 가정 출신성분이 좋고 친척 사회관계에 문제 없으며 본인의 정치사상표현도 좋은데다가 지식청년으로 귀향한후 줄곧 위생소 간호사로 일하고 있으니 어느모로 보나 연변의학원에 가는 것이 문제 없어 보였다. 그래서 공사 교육보도원은 “ 우리 공사에서 네가 대학 못가면 누가 갈수 있겠니?”라고 장담했다 한다. 그런데 고대하던 입학지원서는 웬영문인지 끝내 오지 않았다고 한다. 본인도 급해났지만 일찍 대학가는 걸 걱정말라고 장담했던 공사 교육보도원도 당황해 상급 교육국 등 관련부처에 달려가서 알아보니 누군가가 최후 심사단계에 안해를 밀어내고 다른 사람을 교체했다는 것이였다. 화가난 안해가 상급에 상소하려고 하자 권세 있는 자들이 한 짓이니 상소해도 별 소용이 없다고 곁에서 말리더라는 것이였다. 이처럼 마음에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는 안해가 오늘 겉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시험장까지 수험생 남편과 동행하는것으로 대학에 가고싶은 자신의 마음을 달래는 한편 남편의 성공을 기원하는것 같았다.
룡문교에 이르자 많은 수험생들이 다리를 메우며 룡정3중 시험장으로 향하는 것이였다. 이런 수험생들의 모습은 십인십색이였다. 나처럼 나이 많은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방금 졸업한 나어린 청년들도 있다. 머리와 목에 예쁜 털수건을 두루고 솜바지에 구두를 받쳐 신은 도시 처녀들이 있는가 하면 머리에 네모난 ‘채깝’수건을 삼각형으로 접어서 머리에 쓰고 보풀이 난 낡고 얇은 솜옷을 입은 농촌처녀들도 있다. 그리고 북방사람과 기질이 다른 상해 지식청년들도 련인인양 보란듯이 쌍쌍이 어깨를 나란히하고 걸어갔다. 오늘 수험생 중에는 본기 졸업생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왼팔에 홍위병 완장을 두른채로 무리를 지어 옛날 일본령사관 자리에 있는 현혁명위원회(현정부) 사무청사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저으기 흥분된 기분에 웃고 떠들며 복습문제 해답을 토론하는 애들도 있었다. 아마 룡정2중 시험장으로 가는 모양이다.
내가 도착한 시험장소는 룡정1중이다. 룡정1중은 옛날 만주땅에서 조선인 명문학교로 잘 열려진 대성중학 옛터로서 아버지가 일찍 광복 직후에 여기서 교편을 잡고 수학과 어문을 가르친 적이 있다. 옛날 대성중학은 아버지의 모교였고 해방후 직장이였는데 오늘의 룡정1중은 나의 초중 모교이기도하고 문화대혁명 이후 대학시험제도를 회복하고 제1기 대학생을 모집하는 시험장소이기도 하다. 내가 시험장에 도착했을 때 아직은 시험시간전이여서 입장할수 없었다. 앞가슴에 무슨 글씨를 쓴 노란 명주천을 드리운 나어린 홍위병(학생)들이 시험장으로 통한 복도 출입구를 지키고 있었고 어떤 홍위병들은 땔나무와 석탄을 얻어 시험장 난로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내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우연히 초중 동기생 최*자를 만났다. 그는 원래 룡정1중에서 나와 함께 룡정3중(한족 고중) 입학시험을 치렀는데 락방되어 이듬해 룡정2중 고중에 입학하였다. 이미 나와 동갑이 된 나이인데 여태 시집가지 않았다 한다. 아마 대학에 가려고 그리하였던 것 같았다. 로삼계 동기생인 우리로서는 완전히 그의 마음을 리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서로 인사를 마치자마자 그는 같이 온 녀청년과 함께 나에게 어려운 수학문제를 물어보는것이였다. 내가 아는 정도로 대충 설명했지만 리해가 잘 안된다는 눈치였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이번 응시생 중에는 초중 1학년 때 문화대혁명을 맞이하고 농촌에 내려간 지식쳥년들도 상당히 많을 것인데 그들의 수준을 고려해서라도 아마 이렇게 어려운 문제는 출제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긴장된 마음을 위안하였다. 나는 또 여기서 오랜만에 초중 동창생 김*태를 만나게 되였다. 색이 난 누런 군용 솜외투를 몸에 걸친 그는 원래 우리반에서 나이가 비교적 어렸고 키도 크지 않았는데 지금은 키가 훨씬 커졌다. 그는 부리부리한 두눈에 웃음을 담고 “야, 너 왜 여기 왔니?”하고 묻는 것이였다. 그의 물음을 들으면서 나는 얘가 나를 수험생으로 간주하지 않는 모양이라고 여기고 저도 모르게 롱조로 “공사에서 나더러 우리 공사 수험생들이 제대로 도착하고 입장하는지 살펴보고 돌봐주라고 해서 왔다.”라고 꾸며댔다. 하지만 그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였다. 김*태는 현 농구공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공령이 5년 이상이 되기에 대학에 가도 월급은 그대로 받을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대학시험에는 자신감이 별로 없어 보였다. “내 원참, 시험 날짜는 바득바득 다가오는데 온 집안에 불상사만 생겨서 부산하기 짝이 없단 말이야. 아버지가 급병으로 입원했지, 아이라는게 자꾸 앓지… 어디 공부할 기분이 나는줄 아니?” 하긴 나도 가정형편이 그보다 별로 나은게 아니였다.
시험장 입장을 알리는 예령(预铃)이 울리자 나는 옛 대성중학 교무청사 뒤에 남향으로 지은 단층 교학청사 45호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이 시험장에는 광신공사 수험생들이 많이 들어온 것 같았는데 내 앞자리엔 키다리 부녀주임도 앉아 있었다. 공교롭게도 시험감독은 초중 시절 우리에게 지리를 가르쳤던 리기춘 선생님(우리학년 1반 담임선생님)이였다. 그는 예전처럼 엄숙한 모습을 하고 교단에 올라섰다. 나는 서른살 먹도록 대학에 가지못하고 이제야 자기 제자와 같은 어린애들과 함께 대학시험을 치른다는 것이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이고 감히 선생님을 쳐다 보지 못하고 책상만 내려다 보았다. 만약 이 시각에 선생님이 나를 알아본다면 칭찬할것인지 비웃을것인지 모를 일이였다. 하지만 10년동안 대학에 가지 못한 것이 어디 나의 잘못이란 말인가? 초중 시절에 나는 전반 학년 여러 개 반급에서 유일하게 한어로 입학시험을 치르고 한족고중에 입학한 우수생이였다. 하지만 이 10년 사이 어쩌면 내가 허송세월한 것 같다. 남들은 문화대혁명 중에도 소요파(逍遥派)로 있으면서 외국어 하나를 정통하기도 하고 대학 과목을 자습하기도 했다는데 나는 도대체 뭘 해놓은 일이 있나? 생각할수록 ‘4인방’이 이가 갈리도록 미워났고 덧없이 세월을 보낸(蹉跎岁月) 내가 후회되기도 했다. 그런데 시험감독 두분은 이외로 66년, 67년 고중졸업생들을 조사한다. 나는 그물에 걸린 새마냥 할 수 없이 손을 들었다. 리기춘 선생님은 나를 주시해 보다가 10여년전의 김병활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는 표정이였다. 늘 엄숙하던 그의 두눈에는 일락말락 광채가 빛나는것이였다. 그는 교단에서 천천히 내려와 내곁에 다가서서 시험자격증을 들여다 보는것이였다. 은사님 앞에서 나는 더는 앉아만 있을수 없어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선생님은 연신 “앉읍소, 앉읍소.”라고 말하면서 모르는 사이라는듯 더 아른체 하지 않고 수첩에 나의 수험번호를 적어가지고 교단에 돌아갔다. 아마 시험감독으로서 사생관계를 다른 수험생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모양이였다.
리선생님은 가슴에 검은색 글씨로 감고(监考)라고 쓴 붉은 비단천을 달고 종전과 마찬가지로 위엄을 잃지 않은 모습으로 교단에 서서 또박또박하게 조리있는 발언을 시작했다. “영명한 령수 화주석께서 ‘4인방’을 일거에 타도하였기에 나는 오늘 영광스럽게 대학시험장 감독을 맡게 되였습니다. 그리고 동무들은 또 영광스럽게 응시자격을 가지고 대학시험장에 앉아 조국의 선발을 받게 되었습니다…”그가 한창 발언을 하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더니 연길현 교육국 박두희 국장 ( 원 룡정 2중 교장, 후일 룡정1중, 연변1중 교장 력임)이 각 공사 교육보도원들을 거느리고 시험장에 들어섰다. 그뒤엔 젊은 경찰이 경복을 입은채로 따라들어와 위엄을 부리며 시험장을 한바퀴 돌아보는 것이였다. 경찰의 등장은 시험장의 분위기를 더욱 엄숙하게 만들었다. 우리 시험장에는 관신공사 수험생이 많은 관계로 공사 교육보도원 김*일은 몹시 수척한 얼굴로 빈자리를 세여 보더니 “이게 웬 영문이요? 오지 않은 사람이 꽤 되는군.”라고 중얼거리며 나가는것이였다.
그들 일행이 시험장에서 나가자 리기춘선생님은 시험기률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시험전 15분내로 시험장에 들어올것
[시험지 봉투를 개봉한 후에는 입장을 사절하고 시험자격을 취소함
[입장할 때 글쓴 종이를 휴대하지 못하며 입장후에는 책도 볼수 없음
[말(사담]을 절대 엄금하며 물을것이 있으면 손을 들고 기다릴 것
[담배를 피우지 못함
[한번 일어섰다가 다시 앉아 쓸수 없음
[시험지 앞면에 자리가 부족하면 뒤면에 쓸수 있되 절반 이상 초과하지 말 것
[감고원은 시험장에 자신이 알고 있는 수험생이 있으면 반드시 상급에 회보(보고)할것
… …
마지막에 리선생님은 현 관련부처에서 응시생들을 관심해 매인당 빵 배급표 3장씩 발급한다고 선포했다. 그러자 분위기가 잔뜩 긴장했던 시험장에는 이내 가벼운 웃음소리가 터졌고 좀처럼 웃지 않던 리선생님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후에 들은바에 의하면 식품공장에서는 원래 빵을 생산할 계획이 없었는데 이번 대학시험을 위해 서둘러 정지했던 빵 생산 기계를 다시 돌리고 밤낮으로 빵을 생산했다는것이다.
오늘 첫 시험과목은 수학이다. 일찍부터 대학시험제도가 반드시 회복되리라는 신념을 안고 미리 공부를 한 사람들에게는 수학이 별로 어렵지 않을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초중시절에 전교 수학경시에서 2등상을 수상한적도 있었다. 하지만 10년동안 교과서를 손에 들지 않고 있다가 시험날짜를 보름만 두고 여러 개 과목을 전부 목습해야만 했던 나로서는 수학시험이 그닥 쉬운것이 아니였다. 큰 시험문제 1번부터 4번까지는 쉽게 풀었는데 5번,6번은 어려웠다. 원래 나는 고중 2학년때 문화대햑명에 휘말려 들어가 3학년 과목은 전혀 배우지 못했다,. 그런데 5번, 6번은 거의다 3학년에 가서야 배우는 해석기하니, 미적분방정식이니 하는 문제들이였다. 그외 제일 아래에 부제(副题)가 있는데 30세되는 (리공과?) 응시생과 금년 졸업생은 될수록 풀어야 한다고 했다. 아무튼 마지막 해답결과가 틀리더라도 그 해답과정만 어느정도 맞게 써넣으면 점수를 조금이라도 줄거라는 생각에 나는 이 어려운 문제들을 열심히 풀어가느라고 애썼다. 하지만 시간이 엄청 모자랐다. 시험 종결을 알리는 벨이 울리자 모두들 긴 한숨을 몰아쉬고 복도로 퇴장한뒤 큰소리로 떠들면서 문제 해답을 토론하는 것이였다. 나는 그래도 급제점수는 맞을수 있겠지 하는 요행을 바라며 퇴장하였다.
학교 사무청사 아래층 한 창문에 ‘빵을 팝니다(卖面包)'라는 글씨를 쓴 종이가 붙어있는데 흰 작업복을 입은 영업원들이 빵이며 신바닥처럼 생겼다 해서 ‘신바닥 과자’라고 불리우는 긴 과자를 배급표를 받고 팔고 있었다. 외지 청년처럼 보이는 몇몇 나어린 청년들이 그곳으로 달려가 빵과 과자를 사먹고 있었다. 대부분 수험생들은 남들이 다 눈여겨보는 이런 곳에서 뭔가 사먹는 것이 째째하다고 여겼는지 곧게 대문으로 빠져 나가는것이였다.
나는 점심 식사를 하러 수험생 지정식당 중의 하나인 량식관리소 식당에 갔다. 만나는 사람마다 화제는 수학시험문제 해답이였다. 나는 안해가 도시락에 넣어준 찰떡을 광신6대 청년 리*철이와 함께 나누어 먹었다. 원래는 점심 시간에 정치문제를 복습할 생각이였는데 그럴 시간이 없었다. 부랴부랴 식사를 마치고 교문에 들어서니 마침 정치시험 시간을 알리는 예령이 울리는것이였다. 농촌에서 온 수험생들은 지정 식당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먼거리에 있는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한 탓에 지각생들이 꽤 있었다. 이때 룡정1중에서 키가 훤칠하고 미남선생님으로 존경 받던 김인호 선생님이 지금은 대학입학시험 실무 책임자인지 다급히 확성기를 창문턱에 올려놓고 대문밖에서 걸어오는 수험생들에게 빨리 달려오라고 웨쳤다. 내가 시험장을 둘러보니 5촌조카가 앉은자리가 비여 있었다. 녀동생도 지각하지 않았나 걱정되여 옆에 앉은 녀동생 친구에게 물으니 자기는 먼저 왔는데 녀동생은 다른 시험장이여서 오는걸 보지 못했다고 한다. 나는 농촌에서 일하다 온 5촌조카와 녀동생이 지각으로 시험자격을 취소당할까봐 저으기 걱정스런 마음을 조였다. 아닌게 아니라 정식 벨이 울린뒤에야 5천조카가 그때 유행되던 텁수룩한 머리를 하고 시험장에 들어서는 것이였다. 물론 시험 감독은 엄숙하게 “안 되오, 나가오.”라고 단마디로 명령하는것이였다. 할 수 없이 물러가던 5촌조카는 뜻밖에 키가 훤칠한 김인호선생과 함께 다시 들어왔다. 김선생은 시험감독선생을 보고 “이 학생더러 시험을 치르게 하오. 그리고 내게 수험생 번호를 따로 적어주오.”라고 말하자 5촌조카는 제자리에 앉아 시험을 보기 시작했다. (주: 그해 5촌조카는 락방되었는데 그날 오후 지각한 것이 원인이였지는 모르겠다, 2년후인 1979년에 5촌조카는 무난히 연변대학에 입학하였다.) 저녁에 녀동생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그들 시험장 감고원(시험감독)은 아주 인자하고 순직한 선생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몇분 정도 늦게 들어온 수험생들을 모두 들여보내 시험을 치르게 했다 한다.그런데 붉은 홍위병 완장을 두른 한 학생이 이일을 경찰에게 일러바치자 경복차림의 경찰이 급히 뛰어와서 따지고 캐물었다고 한다. “你们这个考场有没有迟到的?" 이에 감독선생이 “没有,几乎都按时入场的。”라고 대답하자 일러바친 홍위병이 “야, 내 다 봤는데두나.”라고 하자 감독선생이 여전히 태연하게 “你是不是看错了别的考场?最晚进来的也没有超过5分钟,那时补充试题还没有在黑板上抄完呢。”라고 말했다 한다. 하긴 그날 오후 일부 보충 시험문제(부제)를 흑판에 분필로 판서하였기에 시간이 지체된것도 사실이였다. 이리하여 점심에 식당을 찾지못해 헤맸던 근 10명의 지각생들은 무난히 시험을 치렀다고 한다.
대학시험 이튿날인 11월 29일에는 조선어문과 한어 두과목을 시험치렀다. 사실 이 두 과목은 내가 실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과목이였다. 나는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연변 인민출판사 ‘홍소병’간행물과 아동가요집에 동시, 노래가사, 산문 등을 여러편 발표하였는데 당시 유명한 편집 선생님들과 수차 대면한적이 있었다. 그중 연변노래 “고향산기슭에서” 작사자 김경석 선생님이 나의 원고를 보고 한번 대면하고 싶다고 하면서 마을에서 제일 루추한 우리집까지 찾아와 점심 식사도 함께 했다. 그때 안해가 점심 차리는 동안 우리 방에 누워있던 돌이 채 안되는 딸애가 낯선 김경석 선생님을 동그란 두눈으로 빤히 쳐다 보더니 귀여운 얼굴로 해죽해죽 웃는것이였다. 그러자 김경석 선생님은 너무 감동되여 “얘가 웃는 모습이 정말로 예쁘구만.”하고 감탄하는것이였다. (주: 김경석 선생님은 이일이 그냥 잊혀지지 않았던 모양인지 후일 연변대학 조문학부 신문학과에 와서 강의를 할때 나를 만나자 이일을 다시 확인하는것이였다.) 나는 공사 문화소로 전근한후 연변일보에서 소집한 농촌통신원 학습반에 수차 참석하였고 또 무게있는 기사들을 여러편 발표하면서 일보사 편집부를 자주 찾아다녔던 관계로 여러 편집 선생님들과도 교분이 있었고 그들의 지도를 받으며 글쓰기 능력도 크게 제고(향상)시켰다. 그리고 한족고중을 다녔기에 공사의 내부총화자료, 상급에 보낼 회보(보고)자료, 선진집체와 선진개인의 사적자료 등을 한어로 작성하곤 하였다. 그래서 내가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지망했다는 말을 듣고 어떤 사람들은 중문계를 지망해야 간부직에 쉽게 갈수 있는데 하면서 애석해 하였다. 아무튼 이 무렵 내가 시험 복습을 하지 않아도 대학에 갈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아마 이런걸 보고 미리 장담한것이라고 생각되였다.
조선어문 작문은 두개 제목 중에서 하나를 골라 글짓기를 하는것인데 나는 ‘4인방’이 타도된 후에 나타난 생기발랄한 기상과 희망에 넘치는 앞날에 대해 썼다. 이는 평소에 내가 관심했던 분야로서 서사, 서정, 의론 등 수사법을 충분히 활용해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감정을 아낌없이 쏟아냈다. 작문을 다 짓고 나서 나절로도 나에게 잠재해 있던 글쓰기 능력을 은근히 감탄할 정도였다. 후일 룡정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선생님이 그해 조선어문 작문에서 최고 점수를 맞은 수험생이 누군가를 알아보았더니 룡정의 김병활이더라고 하였다. 물론 작문을 포함한 조선어문 시험 성적도 최고 점수라고 한다. 이일이 룡정 시내와 광신공사에 파다하게 전해지자 처음에 나의 대학입학 가능성을 의심하던 사람들이 모두 승복하게 되였다.
이틀에 걸친 문화대혁명 이후의 첫 대학입학시험은 드디어 마무리 되였다. 그날 오후 시험장을 나설 때 무거웠던 나의 두 어깨는 홀가분해졌고 기분도 저도모르게 상쾌해졌다. 시험 성적이 합격선을 훨씬 넘을것 같은 느낌도 생겨났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이 세월의 일을 어느 누가 예측할수 있겠느냐. 1972년도에도 대학시험을 다 치르고 나서 시험지에 마구 락서한 장철생의 글로 인해 그해 대학시험제도가 전부 취소되지 않았던가. 지금은 물론 ‘4인방’이 타도되어 그런일이 다시 발생하진 않겠지만 출신성분과 친척 사회관계가 남들보다 여의치 못한 나로서는 아무리 성적이 높을거라고 예측되여도 불안감은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어쨌거나 “진인사, 대천명(尽人事待天命)”이라고, 해야할 일을 다 하고 남은 일은 하늘의 뜻에 맡긴다는 것이 나의 생활신조 중의 하나인것 만큼 나는 잡생각을 떨쳐버리고 다시 예전 모습대로 대채전 공사장에 나섰다.
(끝)
(이 글은 40년전에 쓴 일지인데 오늘 그 내용은 수정하지 않고 일부 문자만 약간 윤색하여 발표합니다. 당시 시대상황에 맞게 하려고 지금 사용하지 않는 일부 단어들을 그대로 두었는데 오늘의 독자들이 알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것은 한자를 병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