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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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부처님처럼 인자한 허룡구 교수님 댓글:  조회:1087  추천:0  2019-11-30
부처님처럼 인자한 허룡구 교수님                                김병활     나는 일찍부터 작고하신 허룡구 교수님을 기리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필력이 날로 쇠퇴해가는데 서뿔리 필을 들었다가 은사님의 고매한 형상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하고 오히려 루(累)를 끼칠까봐 차일피일 미루고 말았다. 그러던 차에 연변대학 설립 70주년을 맞이하면서 관련 부처에서 허룡구 교수에 대한 글 한편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면서 망설여졌다. 하지만 이참에 은사님에 대한 추모글을 써내 숙원을 이뤄야겠다고 마음먹고 흔쾌히 수락하였다. 나는 로신(鲁迅)선생이 일찍 일본 류학시 은사였던 후지노(藤野) 선생을 추억하여 쓴 수필을 본받아 비록 멋진 글귀로 화려하게 쓰진 못하더라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박한 필치로 쓴 글 한편을 추모비로 간주하고 은사님의 령전에 올리고저 한다.   정판룡 교수님은 허룡구 교수의 인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그의 마음은 부처님처럼 한없이 어지기에 그를 법이 없어도 살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한번 결심을 내리면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고 보니 온순하면서도 고집이 있는 그런 사람인것 같다.”(정판룡,《작가일화》제168페지, 료녕민족출판사) “그러나 그는 일상생활에서 현대인답게 술집, 노래방에도 자주 드나들며 녀성들과도 사이가 가까운 그런 사람이다.” (동상서) 그리고 어느 한국 교수는 “허교수가 고문, 특히는 한시(汉诗)를 잘할뿐만 아니라 사람된 자체가 고풍스러웠다.”고 자신의 인상을 쓰고 있다. (동상서) 말하자면 은사님은 현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옛 선비의 기질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으며 또한 독선적이고 청빈한 수재가 아니라  “속세”에서 인생의 쾌락도 즐길줄 아는 분이라는 것이다.  허룡구은사님은 중국고전문학을 전공하면서도 평소에 양복차림을 즐겨하셨는데 티없이 맑은 두눈에는 학자답게 안경을 점잖게 걸고 얼굴에 언제나 인상좋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의 그런 모습은 우리 제자들로 하여금 일구월심(日久月深) 경모의 마음을 갖게 하였다.   은사님은 1937년 7월에 길림성 영길현에서 출생하여 흑룡강성 연수현에서 살다가 상지조선족중학에서 공부하였다. 정판룡 교수도 그 학교 출신이여서 두 분은 “교우” 라고 스스럼없이 지냈다. 은사님은1960년에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중국고대문학 교원으로 대학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조문학부에서 장기간 당총지서기, 학부장 등 직을 력임하였던 현룡순 교수는 1994년에 출간한 《겨레의 넋을 지켜--연변대학 조문학부가 걸어온 45성상》이라는 책에서《이중으로 받은 의 영예》라는 글로 허룡구 교수의 업적을 비교적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한문을 잘 알지못하는 조선족학생들에게 중국고전문학을 가르치기란 다른학과보다 더 힘들다. 은사님은 중국고전작품의 열독에 도움을 주려고 많은 힘을 들여 교과서에 나타나는 작품들을 거의 조선말로 번역하였다. 고전작품의 번역에서 그대로 글자풀이하여 옮겨놓은것이 아니라 작가와 작품의 스찔과 예술적표현수법을 원 면모대로 살리기에 큰 공력을 들여 학생들의 학습흥취를 불러일으켰다. 개혁개방이후 문학애호가들은 은사님의 시적 재능과 당시(唐诗), 송사(宋词) 번역기교에 경탄을 금치 못하면서 “허룡구 교수의 시 재능은 현 시대 명시인들에 비견할 만하다. 연변에 이런 분이 있는줄 우리가 왜 여태 몰랐을가?”라고 하면서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  은사님은 교수사업의 여가를 타서 시 창작도 하였다. 지난세기 90년대 초반에 창작된 은사님의 정론시《반도의 호소》(일명 《반도의 운명》) 는 한국 청년들에게 널리 애송되였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많은 독자들의 애대를 받았고 몇해 동안  《연변시조시사》의 초대회장을 력임하기도 하였다. 아래에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은사님이 번역한 당시 중 짧은시 몇수만 소개하고저 한다.   아침에 백제성 떠나(早发白帝城)   채운에 비낀 백제 이른아침 떠나서 강릉 천리길을 하루에 돌아오네 강기슭 원숭이는 그침없이 울어예고 가벼운 쪽배 하나 만첩청산 누볐구나. (朝辞白帝彩云间,千里江陵一日还,两岸猿声啼不住,轻舟已过万重山.-리백의 시)     려산폭포를 바라보고(望庐山瀑布)   향로봉에 해 비치니 자색연기 이는듯 저 멀리 뵈는 폭포수는 앞강물에 세웠는듯 삼천척을 날아 흘러떨어지는 물 하늘에서 쏟아지는 은하순가싶구나 (日照香炉生紫烟,要看瀑布挂前川。 飞流直下三千尺,疑是银河落九天。-리백의 시)     락유원에 올라(登乐游原)   저녁이라 이내 마음 달랠 길 없어 수레 몰아 고원에 올라갔도다. 석양빛 한없이 아름답건만 애석토다,황혼이 가까왔어라 (向晚意不适,驱车登古原,夕阳无限好,只是近黄昏.- 리상은의 시)     제목없이(无题)   만나기 어렵다만 리별도 어렵거늘 동풍이 잠자니 백화가 시드누나. 봄누에 죽을때면 실을 다 토한 때 초불은 몽땅타야 눈물이 마른다네 샐녁에 거울 보면 수척해진 얼굴이요 야밤에 시 읊으면 달빛조차 느낄지라. 봉래산 찾아가면 다시 올 길 막연하니 파랑새야 은근히 그대 소식 알려다오. (相见时难别亦难,东风无力百花残。春蚕到死丝方尽,蜡炬成灰泪始干。晓镜但愁云鬓改,夜吟应觉月光寒。蓬山此去无多路,青鸟殷勤为探看。-리상은의 시)    은사님은 고대의 작가,작품을 가르치면서 늘 현대를 잊지않고 옛것을 오늘에 유익하게 리용하는데 류의하였다. 막상 이렇게 실천하려고 하니 교수내용,교수방법에서 한차례 심각한 개혁을 일으켜야했다. 은사님은 교수사업과 결합하여 교과서, 참고자료를 편찬하였고 과학연구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는바 《중국문학사》(제2책)을 편찬하였고 《중국고전문학작품선》(제2책)을 번역,편찬한 외에 많은 공저들을 남겨놓았다. 그리고《고대민가 백수》,《리자성(제2권2책)을 번역하였고《수호전》,《홍루몽》의 집체번역에도 참가하였다.  이밖에 《소식의 창작관에 대하여》,《굴원과 리소》,《농민봉기의 생동한 화폭》등3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은사님의 성망이 높아지면서 1980년대 후반에 학교의 주선으로 한국 리화녀자대학교 중문학과 객원교수로 초빙되여 대학원생들에게 고체시 률격과 중국고전문학을 강의하게 되였다.  이처럼 교수와 학술연구에서 이룬 업적으로 은사님은  수차 연변대학,자치주의 우수공산당원,연변대학과 길림성의 우수교원으로 당선되여 장려를 받았다. 그는 1988년에 전국보통대학 우수교원 및 전국우수교원이라는 이중의 영예를 한몸에 지니면서 상장,메달,상금을 수여받았다.  연변대학에서 제일 처음 연구생(대학원생) 을 양성하기 시작한 학과로는 조문학부였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판룡 교수의 공로였다. 그런데 그것은 조선언어문학학과였기에 중국문학교연실 교원들은 한동안 지도교사로 될수 없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후반에 비교문학 연구생을 양성하게 되면서부터 중국문학교연실 재직교원들이 지도교사를 담임하게 되였다. 하지만 학술수준이 높은 로교수들은 이미 퇴직하였기에 그런 영광을 누릴수 없었다. 1997년에 한 나젊은 학국인이 정판룡 교수의 명망을 듣고 찾아와 서산대사의 선시(禅诗)를 연구해 박사론문을 쓰겠다고 하였다. 세계문학 전공이였던 정판룡 교수는 처음에 주저하였지만 그해에 퇴직한 허룡구 교수가 당시(唐诗)에 조예가 깊으므로 지도교수로 초빙하면 될것이라고 확신하고 그 한국인을 박사생으로 받았다. 그런데 2년후에 허 교수가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급하게 세상을 뜨자 정판룡 교수는 유력한 조수를 잃고 비통한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허룡구은사님은 학생들의 사상교양사업을 중시하였으며 학생들의 사상발전과 건전한 성장에 대하여 관심하였다. 그는 늘 학생들속에 들어가 그들의 요구와 의견을 들었으며 학생들의 사상을 제때에 알아보고 실정에 맞게 사상교양을 하였다. 그리고 학생기숙사로 자주 찾아가서 학생들과 속심을 나누면서 올바른 인생관을 수립하도록 교양하였다. 학생들은 졸업한후에도 후더운 선생님을 있지못하여 그냥 서신으로 련계를 맺고 있었다.  우리 조문학부 77학번(77级)은 “문화대혁명”이 종식되고 대학입시를 회복한후 제1기생으로 입학한 대학생들로 구성되였다. 처음엔 김해룡 교수가 담임(담임교수)으로 있다가 나중엔 허룡구 교수가 담임을 맡았다. 52명 학생들은 나이 차이가 많고 출신성분도 다양하며, 언어, 문학 재능도 남달리 뛰여나 저마다 개성도 강하였다. 이런 반급의 담임을 맡는다는것은 영광이기도 하지만 무척 힘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은사님은 조금도 난색을 보이지 않고 학생들과 형제처럼 어울려 지내면서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나갔다. 우리 반급에서 막내 중의 한 사람인 황동일은 다른 학과에서 우리 반급으로 전학하여 왔다. 처음엔 언어문학 기초지식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에 은사님은 친조카처럼 이끌어주었고 황동일의 부모와 시시로 련계를 가지면서 학습에서 부닥친 애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주셨다. 그런 노력이 알찬 열매를 맺기 시작하여 황동일의 학습성적은 날로 향상되였고 졸업시 북경의 중앙 번역국에 취직하게 되였다. 렴광호는 화룡 숭선 출신으로서 가정 경제상황이 여의치 않았지만 큰 포부를 품고 우리 반급에서 첫사람으로 연구생과정에 도전하여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무난히 획득하였다. 그 과정에서 은사님은 여러모로 고무격려를 해주었고 박사학위 수여식에도 참석하여 마치 친동생이 학위를 획득한것처럼 기뻐하면서 따뜻이 축하해 주셨다.  졸업한후에 우리 동창생들은 은사님의 로고를 잊지못해 동창회를 자주 가지면서 은사님과 함께 옛정을 나누고 회포를 풀었다. 은사님께서는 만사를 제쳐놓고 동창모임이 있을때마다 어김없이 참석해 주셨다. 1990년대 초반에 나는 방문학자 신분으로 출국했다가 2년후 귀국하였다. 그리고 80평방메터 정도 되는 아파트를 마련하면서 10여년 동안 네댓번 이사하던 쪽방살이신세를 면하였다. 나는 그 기쁨을 동창들과 함께 나누고저 조촐하게나마 집들이를 하였다. 그때 은사님께서도 참석하셔서 동창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냈었다. 그날 찍은 사진들을 다시 보노라면 신사복을 입고 모임에 참석한  은사님께서는 학창시절에 우리를 따뜻이 이끌어 주시던 옛 모습이 여전하였고 자애로운 웃음을 띤 얼굴에는 마냥 청춘의 기백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러던 은사님이 몇해후에 갑자기 타계하시자 우리 동창생들은 청천벽력처럼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몇해 후에 있은 동창회 때 동북삼성과 북경에서 모여온 전체 동창생들은 은사님의 명복을 빌면서 머리를 깊이 숙이고 조용히 묵도를 드렸다. 그리고 글쓰기 재능이 있는 친구들은 지금까지도 다양한 형식으로 추모글을 써서 은사님을 기리고 있다. 우리 반급 동창생 리성권은 연변인민출판사 사장으로 수년간 열심히 일하다가 정년퇴직하였는데  수필 《저세상에 부쳐보내는 편지》에서 은사님을 추모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4년전에 이 제자란 놈이 죄송스럽게도 4분동안이나마 면저 저승길을 답사하여 일대 소동을 일으킨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어떡하다보니(황공하옵게도) 소문이 퍼질대로 퍼져 련일 병원이 시끄러워질 정도로 사람들이 밀려들었습니다. 하지만45일째 되는날까지도 당신은 나타나시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솔직한 심정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당신이 제일 기다려졌습니다. 그만큼 당신에게(당신한데만) 하고싶은 말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또 제일 두려운것이 당신을 뵈올 일이였습니다. 퇴원을 한지 3일째 되는 날(그날은 국경절),당신은 아무런 기별도 없이 문득 저의 집에 들어서시였습니다. 들어서시기 바쁘게 저를 붙들고 이윽토록 저의 눈을 살펴보시는것이였습니다. … “…죽지는 않겠구나. 못난 녀석 같으니라구!”  당신은 안도의 숨을 내쉬시면서 저의 어깨를 툭툭 쳤습니다. 그때 저는 그야말로 송구스럽고 죄스러운 나머지 몸둘바를 모를 지경이였습니다… 당신은 바로 이런분이였습니다.  각별히 뜨겁거나 다사스럽고 로골적인 그런것이 아닌 언제나 따뜻하고 은근한것이였습니다.” (《해빙기 행운아들》제110페지, 연변인민출판사)  이 글에 흘러넘치는 사제간의 돈독한 정은 우리반급 동창생들 모두가 마음속  깊이 절절히 느끼고 있는 진실한 정감이다.   학창시절에 우리가 본 은사님의 가정형편은 그닥 좋지 않은것 같았다. 사모님이 무직업인 관계로 60원밖에 안되는 은사님의 박봉으로 조손 삼대 다섯식구가 20평방메터 되나마나한 작은 단층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집에 들어가 보면  정주방과 부엌이 하나로 련결되였고 안방은 미닫이로 나뉘어졌다. 북쪽 벽에는 “오시이레”라고 불리는 작은 일본식 벽장이 달려있었다. 그 시절 모든 교수들이 그러했듯이 대학교엔 교수 연구실이 없어 자택 안방을 침실 겸 서재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은사님이 사용하는 책상이 엄청 큰것이였다. 나는 여태 우리대학  교수들이 자택에서 그토록 큰 책상을 사용하는것을 보지 못하였다. 다른 가구는 사지 못해도 책상 하나만은 서적과 자료를 가득 펼쳐놓고 글 쓰는데 편리하도록 큰 마음을 먹고 산 것이리라. 우리가  보기에는 가족관계가 대체로 평화롭고 큰 말썽이 없는것 같았다. 은사님은 인자한 할머니의 성격을 닮은것 같았다. 해방전 할머니의 여러 가족분들은 독립운동에 기여한 분들이라고 하는데 그 시절엔 누구 하나 이에 대해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못했고 남들처럼 우대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나중엔 정부로부터 유공자로 인정받고 응당 받아야할 대접을 받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동북해방전쟁시기에 10대 소년이였던 은사님은 당시 혁명적 분위기에 감화되고 농회조직의 영향을 받은것 같았다. 조문학부에서 오락판이 벌어지면 은사님은 어김없이 토지개혁시기에 동북 조선족마을 농회조직에서 쏘련 홍군한테서 배우고 즐기던 로씨야 민간무용을 신명나게 추셨다. 조문학부 교수님들이 너나없이 합창으로 즐겨 부르는 쏘련 노래의 강렬한 률동에 맞추어 무릎을 굽히고 자세를 낮추었다가 용수철처럼 훌쩍 뛰쳐일어나는 동작을 반복하면서 춤을 추는가 하면 때로는 한 손으로 땅을 짚고 몸을 경사로 낮추면서 360도로 빙빙도는 춤동작은 그야말로 전업 무용수 못지않았다. 그러면 옆에서 노래하며 박수를 치던 교수님들이 일제히 큰소리로 웨치며 환호하기도 한다. 게다가 림휘 교수가 한수 더 떠서 멋진 스타일로 로어를 몇마디 하면 리해산 교수가 통역을 서는데 원래 의미를 떠나서 오락판 상황에 맞춰 재치있게 우스개말을 엮어대는 바람에 모두들 박장대소를 하면서 즐거워 하였다. 연변대학에서 이토록 즐겁게 오락판을 펼치는 학과는 우리 조문학부밖에 없다고 한다. 이런 락관적인 집단 분위기가 있었기에 당시 경제 형편이 어려웠지만 은사님의 얼굴 표정에선 그늘을 전혀 찾아볼수 없었다.   외유내강의 성격소유자인 은사님은 평소엔 인자한 분이지만 학교 운동회에서는 사기를 북돋우는 “맹장”이였고 축구시합이 있으면 늘 앞장서 참여하였다. 특히 유표한 것은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큰소리로 웨치면서 여기저기로 뛰여다니는 모습이다. 비록 주력 선수는 아니지만 그 정신에 감동돼 모두들 사기를 북돋우어 경기에 림하군 하였다. 1990년대 중반부터 연변팀은  중국 갑A 축구경기장에서 일대 돌풍을 일구면서 연변인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있었다. 홈장인 연길체육장은 언제나 관람석이 초만원을 이루어 표를 사지못해 입장 못한 열성팬들은 경기장 밖 산언덕의 높은 나무에 바라올라가 관람하기도 하였는데 CCTV 체육채널 생방송에서 방송되여 전국 축구팬들의 시선을 한껏 모았고 몇십년 지난 지금도 화제로 되고 있다. 그 시절 역시 열성팬이였던 은사님께서는 매번 경기를 빼놓지 않고 관람하고는 연변 스포츠신문에 경기관람 소감을 글로 발표하군하셨다. 그중 제일 유명한 글은 바로 “축구와 손자병법”이라는 장편 평론문이다. 중국고전문학의 전공자이신 은사님은 손자병법에 대해서도 전문가였다. 때문에 이 글은 아주 큰 인기를 얻어 은사님은 또 한번 명성을 날리였다.   나는 1990년대 초반에 작은 2층 주택(小二楼)에 이사하여 은사님과  한동네에서 살게 되였다. 그러자 은사님 부부는 일이 있으면 나를 불렀다. 자녀들이 급한 병으로 앓으면 내가 업고 택시를 불러 병원에 갔는데 사모님은 몇번이고 급하면 먼저 나를 부를 생각부터 하게된다고 되뇌이군하였다. 그 무렵 학부장 강은국 교수도 한 동네에서 살았는데   허교수네 집에 급한 일이 생기면 먼저 나를 불러 함께 가보군 하였다. 나는 이를 부담이 아니라 은사에게 보답하는 일로 간주하고 달갑게 받아들였다. 은사님은 한국 리화녀자대학교에서 강의를 마치고 돌아온후 우리집 앞에 신축한 아파트 4층에 이사하였다. 그후부터는 예전보다 다소 유족한 생활을 영위하였고 즐길 일이 있으면 술상을 마련하고 여러 교수들을 청하군 하였는데 지척에 집을 둔 나도 늘 함께 참여하였다.  은사님은 학교서나 가정에서나 후대를 가르치는 방법이 특이하였다. 한번은 나를 불러 두툼한 원고를 내놓으면서 한족 작가가 쓴 무협소설 원고인데 나더러 읽어본후 심사평을 쓰라는것이였다. 내가 다소 난색을 짓자 “괜찮아, 한번 해봐. 수영을 배우려면 물속에 들어가야 해.”라고 하면서 밀어부치시는것이였다. 거절할수 없어서 잘 쓰지 못하면 은사님께서 수정할거라고 생각하고 나는 며칠동안 원고를 열심히 읽고 나름대로 심사평을 써서 은사님께 교부하였다.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로서는 그 과정이 바로 자신의 힘으로 소설평론 훈련을 해본 좋은 경험이 되였다고 생각한다. 실로 은사님께서는 “물고기 한마리를 주기보다는 고기 잡는법을 가르쳐라(授人以鱼不如授之以渔《淮南子.说林训》) 고 한  고전 명언의 가르침을 이 제자에게 실천하신 것 같았다.  은사님은 자녀들에게도 주입식 교육을 실시하지 않았다. 한번은 외지에 출장 갔다가 나어린 아들 정무에게 선물을 사왔는데 바로 은빛을 번쩍번쩍 내뿜는 무술용 장검이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은사님은 자식들이 학문지식에만 매달리지 말고 이름자에 어울리는 식씩한 무사의 재능과 기품도 갖출것을 바란것 같았다. 그런 아들이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사회에 진출한후 열심히 분투하여 지금은 남방에서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얼마전 연변에 출장왔다가 조문학부를 찾은 은사님의 아들 정무가 재직 교원들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던 중 조문학부에 “탁사모(탁구를 사랑하는 모임)”가 있다는 말을 듣고 5천원을 활동경비로 내놓았다. 허교수의 사위 또한 장인어른의 학문정신을 이어받아 번역가 꿈을 키우고 있는데, 조선문으로 된 김해룡 교수의 문학저서를 중문으로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전문성을 띤 저서여서 그 번역이 어려운 작업이지만 훌륭히 완수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광음이 류수와 같아 은사이신 허룡구 교수님이 타계하신지도 어언 20년이란 긴 세월이 지나갔다. 하지만 늘 얼굴에 웃음을 띠우시고 우리를 대하던 인자하신 은사님은 언제나 우리곁에 계시는것만 같다.    은사님이시여, 우리 제자들은 한결같이 두손 모아 은사님의 명복을 비나이다!                                                  2019년 5월 23일 (연변인민출판사, 2019년 11월)
15    연변의 진달래 그리고 혁명렬사기념비 댓글:  조회:1621  추천:0  2019-06-12
    연변의 진달래 그리고 혁명렬사기념비 继承延边红色基因,实现伟大“中国梦”   (이 글은 연변대학 조문학부 학생이 전국 대학생 응모작품으로 제출하기 위한 것입니다. 조선족 학생이 한어로 쓴 탓인지 락선되였는데 그대로 묻어두기 아쉬워 여기에 올리는 바입니다.)   石夏花 延边大学   2015级 指导老师:  金秉活 연변의 진달래 그리고 혁명렬사기념비  继承延边红色基因,实现伟大“中国梦”     延边,是延边朝鲜族自治州的简称。它位于吉林省东部, 是我国最大的朝鲜族聚居区和东北唯一的少数民族自治州。延边先后三次被国务院命名为全国30个自治州中唯一的民族团结进步模范自治州。也许,大部分人早已知道延边素有“教育之乡”、“足球之乡”、“歌舞之乡”的美誉。但是,您是否知道,延边还是革命战争年代的“烈士之乡”? 延边是具有光荣传统的革命根据地之一。曾经是十四年抗日战争的东满根据地,又是东北地区解放战争的可靠后方、抗美援朝的前沿阵地。在历次革命战争中,有成千上万的各族优秀儿女抛头颅、洒热血,为革命献出了宝贵的生命,为人民的解放事业创建了不朽的功勋。著名诗人贺敬之同志来延边视察时写下的“山山金达莱、村村烈士碑”这一著名诗句就是延边革命历史的真实写照. 建国初期,延边朝鲜族人口只有50多万。战争年代的延边革命烈士共有15453名。其中朝鲜族革命烈士14512名(94%)。   按战争时期分类统计:抗日战争时期有3125名烈士。其中,朝鲜族烈士3026名(97%);解放战争时期有4313名烈士。其中,朝鲜族烈士3713名(86%)。通过以上数据,我们可以看出,在战争年代延边人民,特别是延边朝鲜族付出了巨大的牺牲。 在解放战争时期,仅第四野战军就有6万多名朝鲜族官兵。中国朝鲜族平均每17人中就有1人参军,父母送儿女、妻子送丈夫上前线的事迹比比皆是,也有三兄弟并肩上前线的感动实例。 延边的热血儿女不仅是为了保卫延边这个家乡,而且从东北边陲长白山下一直打到天涯海角的海南岛,为祖国的解放战争献出了宝贵的生命。作为一名当代的朝鲜族大学生,为哺育我22年的延边土地具有光荣的革命历史和红色基因而感到自豪。   2017年的3月,我偶然看到了一篇有关“传承红色记忆,祭奠革命先烈”活动的报道,其主要内容抒写了87岁高龄的“老革命”金东元讲述的一家人革命事迹:   “大哥是我的榜样,让我骄傲!” 金东元老人双手摩挲着大哥的烈士证明感慨地告诉记者。大哥金东厚是家里第一个参加革命的,大哥亲身投入抗日战争,并见证了抗日战争的胜利,随后参加了解放战争,1946年3月14日,当时是龙井警备队战士的大哥,在参加解放长春的战争中牺牲,当时他只有21岁。闻听噩耗,一家人悲痛欲绝。大哥牺牲后不久,大嫂毅然地上了战场当了卫生兵,追随大哥的脚步继续战斗,不久后在部队病故。   1947年,大哥牺牲的第二年,当时只有14岁的二哥金东昌背着家人,和大哥的朋友一起参加了解放战争,经历多年的南征北战,迎来新中国的成立。新中国成立后,金东昌又来到朝鲜战场,1950年8月25日,在庆尚北道的战斗中牺牲,当时只有17岁。   家人的接连故去,让当时刚上中学三年级的金东元深受刺激,一心要上战场为兄嫂们报仇。经过两次报名,金东元终于如愿参军,被编入志愿军离开故土上战场。一路上风餐露宿,长途跋涉,让他感受到了哥嫂们参军的艰辛与执着。他在中国人民志愿军16军司令部高射机枪连中,继承着一家人的报国志愿,在战场上英勇作战保家卫国。   金东元所讲的一家人革命事迹传递到了我的心中,一股暖流涌上心头,不禁激起了我的爱国之情。我激动的心情久久不能平静,或许还有更多为党和人民撒下热血的烈士,我们不曾记住。作为当代的朝鲜族大学生,我们更是要追寻我们延边的记忆,重温这些红色经典。于是我下决心用实际行动追寻延边地区的好多红色足迹。这些红色遗址将成为永不磨灭的红色基因,它将引领延边人民在用生命和鲜血保卫伟大祖国、建设现代化强国并且实现“中国梦”的大道上勇往直前。  
14    한락연—내고향 룡정의 자랑 댓글:  조회:920  추천:0  2019-06-12
한락연—내고향 룡정의 자랑 韩乐然的红色基因永驻心间 (이 글은 연변대학 조문학부 학생이 전국 대학생 응모작품으로 제출하기 위한 것입니다. 조선족 학생이 한어로 쓴 탓인지 락선되였는데 그대로 묻어두기 아쉬워 여기에 올리는 바입니다.)   作者姓名:高瑛海 性  别:     女 学  校:    延边大学 年  级:     017级 指导教师:金秉活 한락연—내고향 룡정의 자랑 韩乐然的红色基因永驻心间   前不久,我有幸聆听了延边大学校党委与关工委举办的传承红色基因讲座,讲座中提及的韩乐然等英雄人物着实令人钦佩,革命先烈们的英雄事迹更是感人至深。我作为一名朝鲜族大学生,深感传承红色基因,是我们新一代青年应时刻铭记的责任,于是在回到家乡龙井时我特地到了龙井档案馆参观韩乐然事迹展览,并且到位于海兰江畔的乐然公园进行了参观学习。这其中我收获了很多很多。   我怀着庄严的心情走入了韩乐然事迹展览厅,展现在我面前的不仅是简单的文字说明和图片,而是真真切切地感受到了革命战争年代战场上的炮火硝烟,以及艰苦卓绝的地下工作气氛。我感受到了我们的革命先辈为中华民族崛起所做的不懈努力,他们用鲜血创造了我们今天的幸福生活。通过了解韩乐然等革命先烈的事迹,我深受启发——弘扬革命精神,传承红色基因,对于当代大学生来说  意义不可谓不重大,对我们的国家来说更是影响深切而远大!   中国优秀的共产主义战士、人民画家-韩乐然,1898年出生于我的家乡-吉林龙井的一个朝鲜族农民家庭。他21岁时参加了著名的龙井“3.13”反日运动,1923年在上海美专学习时结识了同校工作的中共早期领导人之一蔡和森,并加入了中国共产党,成为第一名朝鲜族中共党员,也是中国美术界第一位共产党员。从此他为民族的解放事业奔走呼号,为我党的革命事业鞠躬尽瘁。他是参与创建东北奉天(沈阳)党组织的“第一人”,之后在奉天、哈尔滨、齐齐哈尔等地从事党建工作,他以绘画写生为掩护,宣传共产主义理论,发展党团组织,领导群众运动开展得有声有色。大革命失败之后韩乐然到法国学习美术,并参加了法国共产党从事反法西斯斗争。在抗战后期,党组织派韩乐然到国民党内部以少将指导员身份秘密开展对西北国民党军政要员的统战工作,这其中他做出了卓越的贡献。1940年,韩乐然在陕西宝鸡不幸被国民党特务机关秘密逮捕。在狱中,韩乐然保持共产党人的气节,机智地与敌人作斗争。出狱后,韩乐然在新疆积极开展统战工作,先后对国民党的上层要员陶峙岳、张治中、赵寿山等进行宣传,为后来和平解放新疆做出了贡献……   纵观韩乐然的一生,是为共产主义事业与中华民族解放奋斗的一生,他不顾个人安危,一切听从党的安排,为完成党组织交给的任务,竭尽了毕生精力。同时他作为杰出的艺术家,一生创作了很多艺术珍品,被称为“中国的毕加索”,如今他的大部分作品收藏在中国国家美术馆。他走遍中华大地,跨越欧亚大陆,发掘丝绸之路上的文化遗产,留下了丰厚的艺术遗产和考古成果,也为后人留下了不可磨灭的红色基因和宝贵的精神财富!   韩乐然是延边龙井人民的骄傲,我们将永远怀念他,继承他身上的红色基因。龙井是东北共产主义思想传播的发祥地之一,也是长达十四年抗日战争的发祥地之一,而韩乐然就是在龙井最早接受共产主义思想。龙井培育了许多像韩乐然这样的优秀的革命先烈,作为革命老区,龙井具有光荣的革命传统和红色基因。“山山金达莱,村村烈士碑”——贺敬之的诗句描绘出当年延边人民在党的领导下不怕牺牲、英勇斗争的光荣历史,在他们的熏陶之下延边各族群众在抗日战争、解放战争及朝鲜战争时期,为中华民族独立解放事业和新中国的诞生做出了巨大贡献和牺牲。延边在“九一八”事变后的十四年抗日战争中涌现出3400余名抗日烈士,解放战争中涌现出4400余名革命烈士,在朝鲜战争中涌现出7700余名革命烈士,其中朝鲜族占绝大部分。在这个多民族聚集的地区,各族人民同仇敌忾,前赴后继,描绘了一场波澜壮阔的全民族抗战的伟大史诗,用鲜血和生命谱写了可歌可泣的历史篇章!这就是我的家乡延边及龙井代代相传的红色基因!   我和韩乐然烈士的家乡都在延边龙井市,故乡能出现这样一位心系国家、人民的共产党员令我十分自豪。我的爷爷与父亲也都是共产党员,爷爷的兄长更是革命烈士,我家祖孙三代都受到家乡龙井的革命传统的影响,我也自小接受在这块土地上永葆生命力的红色基因熏陶。我作为一名朝鲜族共青团员,同时也是一位渴望入党的积极分子,继承像韩乐然这样的革命先烈的红色基因,努力成为共产主义事业的接班人!  
13    100세 현대작가들의 장수비결 댓글:  조회:1297  추천:0  2019-01-01
 100세 현대작가들의 장수비결   김병활    중국에서 “5.4신문학운동” 이후부터 문학창작에 종사한 현대작가들 중 100세를 넘긴 작가는 아주 적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중국에서는 끊임 없는 전란과 정치투쟁으로 적지않은  문학가들이 불행하게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목숨을 부지하고 장수를 누린 작가들도 있으니 파금, 양강, 라홍은 100세를 넘도록 장수를 누렸고 빙심은 중국 나이(虚岁)로 100세까지 장수하였다. 개혁개방이후 물질적 생활이 풍부해져 유족한 생활을 할수 있기에 으례 장수해야 할것 같지만 새파란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나는 작가, 시인들을 심심찮게 볼수 있어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시도때도 없이 욕심이 꼬리치며 유혹하는 오늘의 경쟁 환경에서 건강한 생할습관과 심리건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준다. 아래에 중국의 100세 현대작가 네 사람의 장수 비결을 알아보고 우리 작가들의 문필 생활에 무엇이 문제인지 심사숙고하면서 모두 함께 건강장수를 누리길 바라는 마음이다.   차례 파금: 산책은 건강보조식품을 초월하는 장수 비결 양강: 양생 달인으로 소문난 녀작가 빙심: 주련에 내포된 양생 비결 라홍: 머리와 붓으로 글을 쓰고 손과 발로  건강 챙긴다   파금: 산책은 건강보조식품을 초월하는 장수 비결    파금(巴金, 1904 - 2005)은 중국 현대 작가중에서 유일하게 100세 이상을 산 남성 작가이다. 그는 1931년에 창작한 장편소설《집》을 이어 1938년과 1940년에 《봄(春)》, 《가을(秋)》을 내놓았다. 이 세 장편소설을《격류3부작》이라고 했다.  항전시기에는 《제4병실(第四病室)》《추운 밤(寒夜)》 등 력작들을 발표했다. “문화대혁명”이 종식된후 파금은 1978년 74세되는 해부터 이 전대미문의 “혁명”을 고발하는 수필을 쓰기 시작하여 1986년 81세되는 해까지 150여편을 썼는데 이를 《수상록》이라고 총칭하였다. 그의 열정은 고령기에 들어선 것으로하여 식지 않았으며 엄숙한 사회비판과 자아반성에서 로예술가의 고매한 인격이 표현되였다. 그는 자신이 만년에 직접 체험한 력사적동란에 대해 서슴없이 간여하고 개입하는 태도를 가지였고 인간의 리성이 반드시 모든 것을 통제할수 있으며 인류의 리상과 전도는 밝다는 신념을 안고 있었다.  파금은 만년에 파킨슨병, 척추압축성골절, 기관지염, 폐부감염 등 병으로 고생하다가   2005년10월17에 101세 고령으로 타계하였다. 사실 파금은 팔순을 넘긴 후에도 두눈에 광채가 빛났고 얼굴에 혈기가 피여 안색이 아주 좋았다. 그는 로화는 다리부터 시작된다고 하면서 매일 걷기 운동을 견지하였다. 매일 아침 기상한 후 그는 집밖에 나와 정원에서 천천히 달리기를 하고 우유를 한 컵 마신 뒤 또 나와 산책을 하곤 하였다. 파금은 젊은 시절부터 샌책을 즐겼는데 프랑스 유학시절은 물론  “문화대혁명”기간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견지하였다. 1967년 63세 되는 해에 홍위병들에게 붙잡혀 상해 강만에 감금되였는데 낮에 투쟁대회에 시달리고도 저녁에 구류소 문앞에서 산책을 하였다. 만년에 여러가지 중병에 걸렸으나 오전에는 약을 복용하고 휴식한 후 오후엔 로인전용 보행도움기(助步器)를 리용하여 산책을 하곤 하였다. 산책 외에 파금의 최대 애호, 취미는 독서와 글쓰기였다. 1982년 78세 이후에 파금은 수차 입원치료를 하면서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파금문집》, 《파금번역문집》 등 방대한 저서를 수정하고 편집하는 작업은 모두 이 시기에 완성하였다.   2. 양강: 양생 달인으로 소문난 녀작가    양강(杨绛,1911-- 2016)은 저명한 학자이며 작가인 전종서의 안해로서 젊은 시절부터 극작품, 수필을 발표해 명성을 날렸고 또 외국 명작품 번역에서도 큰 성취를 이루었다. 극작품으로는 1940념대에 창작한《흡족한 마음(称心如意)》,《롱가성진(弄假成真)》,《인생유희(游戏人间)》, 《버들개지(风絮)》등이 무대에서 상연되고 책으로 출판되였다. 양강의 《간부학교 수필 6편》은 작자가 1969년 말부터 1972년 봄까지 하남성 《5.7간부학교》에서 생활한 경력을 썼다. 양강의 다른 수필집 《차 마시기 将饮茶》는 부분적으로 “문화대혁명”시기의 불행을 썼다. 양강은 60세 이후에도 왕성한 기력으로 문학창작에 주력했는데 아래에 이 시기에 출판한 산문집과 산문 목록을 참조해 볼수 있다. 1:1981年,时年70岁, 《干校六记》; 2:1987年,时年75岁, 《将饮茶》、《记钱钟书与〈围城〉》、《回忆我的父亲》、《回忆我的姑母》; 3:1994年,时年83岁, 《杂忆与杂写》、《听话的艺术》; 4:2004年,时年93岁, 《我们仨》、散文《我在启明上学》; 5:2007年,时年97岁,《走到人生边上——自问自答》; 6:2009年,时年98岁,《丙午丁未年纪事》; 7:2013年,时年102岁,散文《忆孩时》。    2016년 105세에 세상을 하직한 양강은 양생 달인이였는바 그에게 양생 관련 문제를 물으면 언제나 손금보듯 줄줄이 대답하곤 하였다. 양강은 만년에 팔단금(八段锦, 중국식 맨손체조의 일종)에 심취되였는데 매일 아침 남편 전종서와 함께 이 운동을 하곤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도 팔단금의 요령과 작용을 중의학적으로 설명하곤 하였다. 양강은 어느 한편의 수필에서 일년간 양로원에 가서 70-80세 되는 로인들에게 팔단금을 배워주었더니 많은 로인들이 혈압이 안정되였고 식욕도 좋아졌다고 썼다.  양강은 식생활애서도 건강식품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하였다. 그는 평소에 기름진 음식을 아주 적게 먹었는데 담백한 음식, 기름, 소금, 당분이 적게 들어간 음식을 선호했고 절대 배불리 먹지 않았다. 대신 제철 과일과 채소를 즐겨 먹었고 우유를 마시고 생선을 조금씩 쪄서 먹었다. 때로는 큰 뼈를 쪼개서 국을 끓여 먹기도 했고 검은 목이버섯을 끓여서 끼니마다 조금씩 먹었다. 콩물은 언제나 즐겨 먹었는데 어느 수필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내 손으로 콩물을 만들어 집식구들과 함께 마시는데 좋은 재료를 선택하고 아주 정성들여 가공하곤 한다. 나는 또 살구씨 장졸임을 만들기도 하고 콩물을 만들때 땅콩, 호두를 함께 넣는 방법도 발명하였다.”   양강은 로년에 건강하려면 심리상태가 아주 중요하다고 말하였다. 그는 한평생 “누구와도 다투지 않았고 남과 시비를 거는 일이 없었다. 남들이 그를 저명한 작가라고 치하하면 그는 “나에겐 그런 야심이 꼬물만치도 없어요.”라고 말한다. 누군가가 그의 작품집이 아주 잘 팔린다고 하면 그는  “해빛이 개꼬리를 비추듯이  그저 잠간일뿐이예요.”라고 대답한다.  그는 흉금이 넓어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고 보다 많은 정력을 자신이 즐기는 일에 집중하였다. 이리하여 그의 만년 생활은 아주 풍부하고 재미로 넘쳐나게 되였다. 그의 가사도우미(保姆)의 말에 따르면 양강은 만년에 서예와 글쓰기를 견지하였고 매일 책을 읽고 남편의 필기를 정리하거나 외국작품을 번역하곤 하였다. 양강이 87세 되는1997년에 유일한 딸 전원이 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대학교수였던 딸이 자신의 최고 걸작이라고 늘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60세밖에 안되는 나이에 늙은 부모를 남겨두고 먼저 세상을 하직한 것을 매우 슬퍼했다. 하지만 그는 비통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우리 셋(我们仨)》이라는 산문집을 집필하였는데 그중 주인공은 사랑하는 딸이였다. 2004年 93岁되는 해에 이 책이 출판되였는데 수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 베스트셀러(畅销书)로 부상하였다.     빙심: 주련에 내포된 양생 비결    빙심(冰心)(1900--1999)은 일찍 1920년대에 “문제소설”과 짧은 시로 이름을 날렸지만 그보다 산문의 성취가 더욱 크다. 빙심의 소설로는 《누구의 죄인가(誰之罪)》, 《이 사람만 홀로 초췌하여라(斯人獨憔悴)》《초인》등이 있고 수필로는 어문 교과서에 채용된《작은 초롱(小橘灯)》、《어린 독자들에게(寄小读者)》(발췌)가 있고 시집으로는 《뭇별(繁星)》、《봄물(春水)》등이 있다. 개혁개방 이후 빙심은 80세 고령으로 다시 필을 들고 왕성한 정력으로 300여편의 수필을 창작하였다. 만년의 그의 창작은 높은 예술 수준으로 강렬한 반향을 일으켰다. 자전체 수필 《나의 동년》 ,《나의 대학 생애》, 《나의 남편—오문조》등 작품들은 자신의 100세 경력을 주선으로 익숙히 알고 있는 20세기 지식인들의 생활을 우아하고 생동한 필치로 묘사하여 전기문학의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빙심이 95세 되는 해에 한 언론매체에서 그의 양생비결에 대해 묻자 친필로“事因知足心常乐,人到无求品自高。” 라는 주련을 써 주었다. 그 뜻인즉 만족감을 안고 살면 언제나 즐겁고 욕심을 버리면 인격이 고상해 진다는것이다. 빙심은 일찍 29세 되는 해에 맹장염에 걸려 병원에서 수술하게 되였는데 “모든 근심걱정을 포기하고 자연이라는 대해속에서 치료를 받으면 된다.”는 내용의 글을 썼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빙심 일가 8명은 8개 지방에 산산이 흩어져 살게 되였는데 그도 농촌에 내려가 “소외양간”이라 불리는 숙소에서 어렵게 생활했지만 태연히 모든것을 받아들였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에겐 특별한 양생지도(养生之道)가 없다. 그저 마음을 활달하게 가지고 남과 시시콜콜 따지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괴롭히지도 않으며 지난 일로 언제나 자신을 죄스럽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에게 제일 무서운 병은 마음의 병이다!”    빙심은 마음을 다스리는 외에 만년의 양생에서 몇가지 중요한 규칙을 세웠다. 그중 하나는 바로 음식 량을 절제하고 편식을 하지 않는 것이다. 아침에는 우유거나 커피에 달걀을 하나 먹고 점심, 저녁에는 육식과 채식을 겸하되 채식을 위주로 하며 평소에 즐겨 먹던 홍소육(红烧肉),두부, 배추, 동과(冬瓜) 등을 골고루 먹는다는 것이다. 이밖에 빙심은 “의사의 분부대로 한다”는 준칙을 세웠는데 병이 있거나 어디가 불편하면 엄격히 정규병원의 의사 말대로 해야지 절대로 여기저기서 뜬소문을 듣고  “용한 의사”를 찾아가 병을 보지 않는다는것이다.   빙심은 자신의 양생법에서 빠질수 없는것이 바로 글쓰기라고 하였다.  “나의 양생법은 건강보조식품도 아니고 보약도 아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미소를 지으면서 글을 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장수 비타민’이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빙심은 평생 아동문학창작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그는 귀여운 어린이와 같은 밝은 사물을 묘사하는것을 선호했고 명랑하고 청신한 문구를 사용하는것을 즐겼다. 아마  일생동안 어린이들과 벗을 사귄것이 바로 만년에도 생기발랄한 동심을 보존하는 방도였을 것이다. 바로 이런 동심이 그로하여금 모든 어린 생명을 사랑하게 하였고 건강장수를 누리게 했을것이다. 빙심은 집에서 흰털 페르시아고양이를 키우고 있는데 빙심은 그 고양이가 애교를 부리는 모습을 볼때마다  너무 즐거워서 큰소리를 내며 웃곤하였다.       라홍: 머리와 붓으로 글을 쓰고 손과 발로  건강 챙긴다    라홍(罗洪1910 – 2017)은 장기간 문학사가들에게 소외당하여 별로 중시를 받지 못한 녀작가(最受文坛冷落的女作家)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그러나 전종서는 라홍이야말로 사회소설을 창작하는 “진정한 기재(真奇才)”이며 “진정한 소설가(真正的小说家)”라고 극찬하였다. 라홍은 1930년부터 박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는데 첫 작품은 수필《심심할때면(在无聊的时候)》이다. 그후부터는 소설을 창작하였는데 《부등변(不等边)》, 《교장녀사(校长女士)》등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해방후 문예지 편집에 종사하다가 정년 퇴직하였다. 그후부터 라홍은 왕성한 정력으로 소설, 산문을 창작하였는데 선후로 《부서집(腐鼠集)》,《아동절(儿童节)》,《이 시대(这时代)》,《밟는 재미(践踏的喜悦)》등12부 단편소설집과 《춘왕정월(春王正月)》, 《고도시대(孤岛时代)》,《고도세월(孤岛岁月)》등 장편소설 3부를 창작하였고 또 수필집도 출판하였다. 2006년에는 《라홍문집(罗洪文集)》총3권을 출판하였다. 그의 소설은 주로 사회민중들의 군상을 묘사하였는데 필치가 섬세하고 인물성격이 선명하다. 2017년에 별세한 라홍은 중국 현대작가 중에서 최장수 녀작가로 되였다. 라홍은《나의 양생경(我的养生经) 》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의 양생법은 바로 평범한 삶을 추구하는것이다. 일상 생활을 평범하게 보내고 차분한 마음으로 생할을 대하며 너그러운 태도로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는것이다.”그의 이런 양생법은 양강과 비슷한 데가 있다.   이밖에 라홍의 장수 비결은 “움직이는것(动)”이다.  첫째는 머리를 쓰는것(动脑)이다. 만년에 라홍은 매일 아침 5시에 기상하여 세수를 마친후 정한 시간에 아침 뉴스를 시청한다.   오전에는 신문을 읽고 책을 보며 점심 식사후에는 수십분 정도 오침을 취하는데 일반적으로 1시간을 초과하지 않는다. 기상한 뒤에는 작품 창작구상을 한다. 이렇게 그는 80년 문필생활에서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고  100세 되는 해에도 머리가 명석하여 단편소설 《련마(磨砺)》발표하였다.  다음은 식생활에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 준칙을 지키는것이다. 식사 시 절대로 배불리 먹지 않고 70%정도만 먹는다. 아침은 죽밥이 위주인데 반공기면 족하다. 거기에 절인 채소와 기름에 볶은 땅콩을 곁들여 먹는다. 점심은 고기가 들어간 요리 2가지에 채소와 국 각각 한가지이며 밥은 역시 반공기면 된다. 저녁도 점심처럼 먹는다.  구기자차를  늘 마시면서 눈을 잘 보양한다. 눈 위생에 주의하면서 절대로 눈이 과로하지 않도록 한다... 라홍은 이런 준칙을 잘 지킨 덕에 줄곧 건강을 유지했고100세 넘도록 안경을 쓰지 않고 책을 보고 글을 썼다.  두번째는 손발을 움직이는것이다(动手脚). 라홍은 한평생 동적인것(动)과 정적인것(静)을 잘 결합하였다. 책을보고 글을 쓰다가도 반드시 밖에 나가 운동을 하는데 매번 반 시간 정도 걷기를 한다. 그는 산책을 하는외에 또 태극권을 즐긴다. 라홍의 집에서 20여년간 가사도우미(保姆)를 한 림씨의 말에 따르면 라홍은 95세 되는 해까지 매일 태극권을 견지했다고 한다. 라홍의 수필 《태극권 배우기(我学太极拳)》에서는 자신이 어떻게 태극권 문외한으로부터 태극권의 진미를 터득하게 되였는지를 쓰고 있다.   2019년 1월 1일   부록: 양강 100세 소감   (杨绛一百岁感言:人生最曼妙的风景是内心的淡定与从容)     我今年一百岁,已经走到了人生的边缘,我无法确知自己还能走多远,寿命是不由自主的,但我很清楚我快“回家”了。   我得洗净这一百年沾染的污秽回家。我没有“登泰山而小天下”之感,只在自己的小天地里过平静的生活。细想至此,我心静如水,我该平和地迎接每一天,准备回家。   在这物欲横流的人世间,人生一世实在是够苦。你存心做一个与世无争的老实人吧,人家就利用你、欺侮你。你稍有才德品貌,人家就嫉妒你、排挤你。   你大度退让,人家就侵犯你、损害你。你要不与人争,就得与世无求,同时还要维持实力,准备斗争。你要和别人和平共处,就先得和他们周旋,还得准备随时吃亏。   少年贪玩,青年迷恋爱情,壮年汲汲于成名成家,暮年自安于自欺欺人。人寿几何,顽铁能炼成的精金,能有多少?但不同程度的锻炼,必有不同程度的成绩;不同程度的纵欲放肆,必积下不同程度的顽劣。   上苍不会让所有幸福集中到某个人身上,得到爱情未必拥有金钱;拥有金钱未必得到快乐;得到快乐未必拥有健康;拥有健康未必一切都会如愿以偿。   保持知足常乐的心态才是淬炼心智、净化心灵的最佳途径。一切快乐的享受都属于精神,这种快乐把忍受变为享受,是精神对于物质的胜利,这便是人生哲学。   一个人经过不同程度的锻炼,就获得不同程度的修养、不同程度的效益。好比香料,捣得愈碎,磨得愈细,香得愈浓烈。   我们曾如此渴望命运的波澜,到最后才发现:人生最曼妙的风景,竟是内心的淡定与从容…… 我们曾如此期盼外界的认可,到最后才知道:世界是自己的,与他人毫无关系。   (作者:杨绛(1911年7月17日—2016年5月25日),本名杨季康,江苏无锡人,中国女作家、文学翻译家和外国文学研究家,钱锺书夫人。杨绛通晓英语、法语、西班牙语,由她翻译的《唐·吉诃德》被公认为最优秀的翻译佳作,到2014年已累计发行70多万册等等。2016年5月25日,杨绛逝世,享年105岁。)  
12    연변대학 학생팀제작 마이크로영화축제 댓글:  조회:1074  추천:0  2018-11-29
 연변대학 학생팀제작 마이크로영화축제 김병활      11월 26일에 연변대학에서 “2018화위컵 ‘청춘아리랑’ 대학생제작 마이크로영화(微电影) 경시대회”가 개최되였다. 이번 행사는 연변대학 교무처에서 주최하고 조한문학원에서 주관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신문학과의 최향단 학과장을 비롯한 교수진에서 모든 구체적 사무를 맡아 진행하였다. 예선에 참가한 팀은 총 20부인데 본교 8개학원의 여러팀과 훈춘 캠퍼스 5개 학과에서 104명의 학생들이 참여하였다. 그중 10부만 선발해 총선에서 우렬을 가리게 되였다. 미술학원 단청루(丹青楼)대회장에는 관객들로 빈자리 하나 없이 초만원을 이루었고 연변대학 조한문학원의  관계자, 교수들과 연변 텔레비전 계통의 전문가, 평가위원들도 대거 참석하였다. 평가 방식은 전문가 평가점수가 70% 차지하고, 현장에서 위챗 큐알코드(二维码)를 리용한 관객들의 평가점수가 30%를 차지하기로 되였다.      나도 초청을 받고 참석하여 우수작품을 시상하는(颁奖) 영예를 가지게 되였다. 사실 나는 마이크로영화를 몇부 감상해 보긴 하였으나 보다 깊은 지식은 아직 결여된 상황이다. 이번 기회에 시대의 발전에 부응한 이 새로운 쟝르에 대해 공부하고 또 대학생들의 영화제작 수준을 직접 체험할수 있어 흔쾌히 초청을 수락하고 참석하였다.  마이크로영화는 뉴미디어시대에 접어든후 인터넷 등 수단을 통해 광범하게 전파되는 일종 새로운 영상쟝르로서 7~15일 내에 30분 정도의 편폭으로 제작할수 있는 단편 영화이다. 이런 영화는 시간, 장소, 인물, 이야기줄거리를 모두 갖춘 영상작품으로서 이동 상황이거나 짧은 여가시간에도 감상할수 있다. 다른 전통영화에 비해 단편이기에 자금이 적게 들고 팀 구성도 쉬우며 전파하는 문턱이 비교적 낮기에 나젊은 대학생들이 이 분야에 입문하기 쉽다.  연변대학 신문학과에서는 시대의 발전에 부응하고저 이 새로운 사물을 적극 수용, 발전시키기 위한 프로젝트를 학교 교무처에 신청하고 지난해부터 정식으로  마이크로영화축제를 개최하였다. 물론 준비 과정에 연변텔레비전 방송국의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일정한 기초지식을 습득하고 작품의 질을 업그레이드시키는데 주력하였다. 전문가들의 평가에 의하면 올해 작품수준이 지난해보다 훨씬 향상되였다고 한다.      이번에 제작된 영화작품의 주제와 스토리면에서 보면, 어려서부터 부모의 리혼으로 술만 마시는 아버지의 손에서 자라 내성적 성격을 가진 남자 대학생이 학우들과 어울리지못해 외롭게 지내다가 도적놈과 용감히 싸운 일로 학우들과의 우정을 되찾고 자신감을 가지는 이야기, 설계사의 꿈을 가진 녀 대학생이 실패를 거듭하면서 우울해지다가 친구들의 도움으로 재기해 끝내 성공하는 이야기, 건강문제로 대학에 입학하지 못한 녀 청년이 완강한 의지로 난관에 도전해 캘리그라피(艺术书法)를 배워 성공한 이야기, 애어린 소년이 병든 아버지를 치료할 돈이 없어 약국에서 약을 훔치다가 발각돼 큰 곤욕을 치를뻔할때 부근의 상점 주인이 불쌍한 소년을 구해주었는데 30년 후에 그 상점주인이 병에 걸리자 서슴없이 그 은혜에 보답하는 이야기 등이 인상 깊었다. 이런 이야기를 다룰때 제작팀들은  허위와 과장을 배제한 신변의 진실한 야야기들을 소박하게 얶어 나갔기에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곤하였다. 이에 관중석에서는 시시로 마음속으로 우러나오는 감탄과 웃음이 터졌고 주인공이 처한 어려운 처경에는 동정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평소에 친숙히 지내던 대학생들로 구성된 아마추어 배우진들의 예상밖의 놀라운 연기에 대해서도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기도 하여 회장은 시종 열렬한 분위기로 차넘쳤다.      조금 아쉬운 점이라면, 주제와 소재 선택에서 미숙한 점을 보이고 있는것인데, 례컨대 대학생들 사이의 애정 갈등에서 칼을 들고 상대자에게 복수하는 장면은 너무 끔찍해 보였고 피해망상증에 걸린 여학생을 다룰때 너무 부정적인 에너지가 발산하는듯한 느낌 등이다. 예술 기교면에서 본다면, 경험과 자금이 부족하고 장비가 차한 우리 대학생팀에 당연히 나타나는 문제들도 있다. 말하자면 스토리와 장면 련결이 자연스럽지 못한것, 활동 무대가 너무 단조로운것, 야간 촬영이 너무 많은 관계로  화면이 필요 이상으로 어두운것, 조선어 대사가 일상 대화체(구어체)가 아닌 서사어(문어체)로 된것 등이 부족점이라고 볼수 있다. 이제 방금 이 분야에 발을 들여놓은 학생들에게 너무 높은 요구를 제기하는건 무리이지만 가능한 조건에서 표현수법을 보다 활성화하고 수준을 일층 향상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무튼 연변 텔레비전 방송국 리홍림 총감독이 마무리 연설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오늘 마이크로영화 작품들을 통해 급변하는 시대에 발빠르게 따라가는 젊은 대학생들에게서 우리 연변의 밝은 미래가 보이는것 같았다.      2018.11.29  (사진은 연변대학 조한문학원 관련부처 제공)
11    사진으로 본 나의 40년 인생변천사 댓글:  조회:1442  추천:0  2018-11-09
 사진으로 본 나의 40년 인생변천사   김병활    올해는 1978년 말에 개혁개방을 선고하고 실시한지 40년이 되는 해이다. 나는 “로삼계(老三届)” 고중 졸업생으로 농촌에서 10년 동안 전전하다가 1977년에 대학입시를 회복하자 제1기생으로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후 나는 개혁개방의 물결을 타고 분투하면서 비록 남들처럼 휘황찬란한 대업을 이루지는 못했어도 자신이 바라는 일들을 늦게나마 하나하나 이루어 나아갔다. 늙으막에 남는건 사진뿐이라고 요즘들어 옛날 사진첩을 펼쳐들고 보노라면 우여곡절을 동반한 분투로정을 회억하면서 그야말로 감개무량하다. 오늘은 그중 일부 사진만 몇장 골라 개혁개방의 혜택으로 이룩한 나의 40년 인생변천사를 도약식으로 간단히 말해보고자 한다.     (1)우리 조문학부 77학번(77级)은 1977년에 대학입시를 치르고 이듬해 3월초에 입학등록을 하였다. 그런데 본교에는 비비고 누워잘만한 기숙사가 없어 우리 조문학부는 본관 사무실에 매트과 거적을 깔고 생활하다가 인가도 없는 연집공사 황초구(慌草沟) 산골에 가서 농사일도 하면서 허술한 교실에서 수업을 하였다. 그러다가 2개월 정도 지나 연길 시내 본교에 돌아 오게 되였는데 그때 나는 웅대한 모택동 석상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우리반 “사진 촬영사”들로는 김성우,전정환 등 재간둥이들인데 그들 덕분에 나는 의미 있는 사진들을 남길수 있었다. 오늘 다시 이런 사진들을 들여다 보니 결혼후 딸애까지 둔 내가 대학입학 시 한몸에 촌티를 잔뜩 안고 흙냄새를 물씬 풍기면서 대학교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느껴진다. 지금 애들이 사진에 나타난 나의 이런 모습을 보면 아주 우습게 여길터이지만 그때는 여유없는 생활에 쪼들리면서 일터로 굴러다니던 시기인지라 복장이나 헤어스타일(发型) 같은것에 대해선 아예 신경을 쓰지 못했다. 다만 사진에 비친  나의 얼굴표정엔 그래도 청춘의 기백이 흘러넘쳐 무슨 꿈이라도 이루려는 야심이 차있은듯 하다.      (2)지난세기 80년대에 접들면서 우리 반급 김성우가 주도해 “종소리”문학사를 창립하고 또 많은 문학관련 행사를 벌렸다. 나도 열성분자 중의 한사람으로서 다양한 행사에 빠짐없이 참여하였다. 당시 한국에서 “5.18” 광주사건이 터지면서 김지하 시인이 군부의 만행을 고발하는 시들을 썼다. 그런데 생각밖에도 연변의 언론 매체에서 처음으로 이른바 “남조선” 시인의 이런 시들을 전재하였다. 나는 “5.18”사건에 대해 무척 관심을 가지고 있던 차에 김지하 시인의 시들을 접하고 심취되였는데 그중 한수를 택해 “종소리”문학사 시랑송 모임에서 격정에 넘쳐 읊었다. 그땐 나도 한창 혈기 왕성한 청년이였던 관계로 나의 시랑송도 청중들을 깊이 감동시킨것 같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김성우가 그때 모습을 찰칵 사진에 담았다.   (3)우리 77학번 52명 동창생들은 나이 차이가 많았다. 제일 "좌상"과 제일 "막내"들의 나이 차이는 무려 12세나 되였다. 30세 이상의 늦깎이 남자 대학생들은 7명이나 되는데 우리반급에서는 듣기 좋게 이들을 로장(老将)이라 불렀고 다른 반급에서는 “아즈바이”라고 부르는 데도 있다고 한다. 명절때 술마시고 오락회를 펼치면 이런 ”아즈바이”들이 집생각이 나서 일제히 베개를 끌어 안고 조선영화 “금희와 은희의 운명”의 주제가 “잘 자거라 아가야(아버지의 축복)”를 얼굴에 울상을 하고 곧잘 부르곤 했다. 어느해 우리는 마반산 철길아래 강변에서 봄놀이를 하였는데 술에 얼근해진 “아즈바이”들이 사진을 찍겠다며 물살이 센 강물도 아랑곳 하지 않고 강 중심에 있는 바위우에 올라서서 멋진 기념을 남겼다. 지금 그때 나이라면 더 멋있게 살수 있으련만……   2. (1) 나는 4년간의 대학생활에서 “문화대혁명”으로 잃어버린 10년(蹉跎岁月)을 되찾겠노라고 줄곧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비좁은 학생기숙사에는 방마다 토끼장 같은 2층 침대 4개에 8명씩 입주하였다. 나는 나이가 많다고 침대 아래층에 배정되였다. 거기에 널조각들을 주어 만든 간이“책장”까지 자리를 점해 키큰 학생들은 취침 시 다리를 쪼그리고 자야 했다. 나는 가정형편히 아주 어려웠지만 한푼두푼 아끼고 모아 졸업전에 벽돌장 크기와 비슷한 싸구려 록음기 하나를 큰마음 먹고 샀다. 그 록음기 덕분에 나의 외국어 수준은 나날이 향상되였다. (2) 졸업 시즌이 다가오자 동창들은 잊지못할 학창생활을 기억에 남기려고 부지런히 기념촬영을 하였다. 나도 동참해 사진 몇장 남겼다. 그중 괜찮다고 생각되는 사진은 학교 정문에서 자전거를 손에 잡고 찍은 사진이다. 그 시절의 대학 정문은 민족 풍격이 다분한 오늘의 으리으리한 대문과는 전혀 비교가 안 된다. 그래도 소박한 옛 교문을 사진으로 보면서 따뜻한 정을 느끼게 된다.사진에서 내가 잡고 있는 자전거는 녀동생이 사용하던 것인데 멀리 타성으로 시집가면서 집에 그냥 남겨 두었다. 그런데 졸업전 마지막 학기에 아버님이 뇌졸증에 걸려 반신불수로 되였고 나젊은 안해가 혼자 집에서 시아버지 병 시중을 해야만 했다. 이에 나는 주말 저녁무렵이면 룡정행 버스 운행 시간을 맞출수 없어 자전거를 타고 모아산 고개를 힘들게 넘어 집으로 갔다가 월요일 새벽이면 또 자전거를 타고 모아산 고개길을 숨가쁘게 넘어 학교로 돌아와 수업에 참가하곤 했다. 그때 연길 ~ 룡정 구간에서 버스가 운행하는 도로는 경사도가 심한 산세를 따라 굽이굽이 에돌아가는 산길인데 내리막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내려올때면 잔뜩 긴장된 신경이 일초도 해이해선 안되였다. 그래도 다행히 사고가 나지 않아 오늘까지 사지가 멀쩡한대로 나다닌다. (3) 속설에 대학생들은 4년 공부를 마치면 거개 “때벗이”를 하는데 1학년때 촌티가 나던 청년들이 4학년 졸업 시에는 신사숙녀로 환골탈태한다는것이다. 나도 례외는 아니였던지 졸업때 찍은 사진들을 입학 시에 찍은 사진들과 비교해보면 어느 정도 “때벗이”를 한것 같다. 말하자면 글 읽은 사람들의 “서생의 기(书生气)”가 한몸에  차넘친다는 것이다.    3. (1) 개혁개방 이후 출국 대문이 열리기 시작하여 국가에서는 외국어 시험을 통해 인재들을 선발하고 국비생, 공비생 등 자격으로 출국시켰다. 당시 연변대학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국가급 외국어출국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따낸 교원들을 공비생으로 출국시키는 방침을 실시했다. 이에 나는 90년대에 접어들어 대련에서 진행된 국가 통일 출국시험에 참가해 우수한 성적을 취득하였다. 그때 연변대학에서 일본어학과 교원들을 제외하고 출국시험에서 성적이 제일 높은 사람은 나와 정치학과의 김선생인데 신통하게도 두 사람의 성적이 0.5까지 동일했다. 그후 우여곡절을 거쳐 일본 쯔꾸바대학에 가서 방문학자(외국인 연구자) 자격으로 공부를 하게 되였다. 국가 교육부에서 파견한 국비생이면 달마다 19만엔씩 수령하지만 우리 연변대학 공비생들은 일년간 월 12만엔씩 수령하기로 되였다. 나보다 앞서 출국한 한철씨가 내가 겉보기에도 신체가 허약한것 같다고 하면서 “당신 그 신체로 반년도 못 결딜게요. 력사학과 전선생이 일년도 채우지 못하고 미리 귀국한 걸 보라니.”라고 “엄포”를 놓는것이였다. 그러자 나는 남들이 밤낮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을 부러워 하면서도 일년 기한전에 건강을 해쳐 조기 귀환을 할까봐 조심스레 드문드문 아르바이트를 하곤했다.  (2) 그러나 일생에 한번밖에 올수 없는 기회인데 용돈이 적다고 여행도 못가면 후일에 후회될것 같아 나는 큰 마음 먹고 올림파스표 카메라를 사들고 여기저기 여행 다니였다. 대학 소재 도시 쯔꾸바시는 도꾜와 고속버스로 한시간 거리여서 나는 거의 달마다 한번씩 도꾜에 다녀왔다. 그중 고마운 것은 도꾜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김광림 씨가 바쁜 와중에도 하루 일정을 할애해 나와 함께 도꾜 시내 관광명소를 돌아본 일이다. 그밖에 인상 깊은 곳은 오사까(大阪), 나라(奈良), 교도(京都) 등 일본 고대 문물이 제일 많이 보존된 지역과 일본에서도 유명한 관광지인 군마(群马)현 구사쯔(草津) 스키장 겸 온천욕장이다. 나라의 황실공원은 아주 개방적인데 사슴들이 관광객들과 한 동아리가 되여 함께 즐기는것이 인상 깊었다. 공원의 사슴들이 밖에 뛰쳐나가 거리 복판에 서 있으면 오고가는 차들이 멈춰서서 사슴이 지나갈때까지 대기한다고 한다. 공원에서 관광객들은 동물들에게 제마음대로 먹이를 주는것이 아니고 건강에 유익한 먹이를 전문 판매점에서 사서 함께 즐기곤 하였다. 나도 사슴이 즐겨먹는 먹이를 한봉지 사들고 예쁜 사슴들과 친숙하게 사귀였는데 “천인합일(天人合一)”이란 어떤것인지 한번 체험해 보았다. (3) 구사쯔 스키장에서 나는 3박4일 머물었는데 밤과 낮을 이어 스키 연습을 하다보니 마지막 날엔 아주 숙련된 기술로 위험도가 높은 가파른 지형을 날파람을 일구며 쌩쌩 오르내릴수 있었다. 실로 나 절로도 나에게 잠재한 이런 도전정신과 운동능력에 감탄할 정도였다. 이처럼 사비를 털어 관광하는 나를 두고 역시 한철씨가 “당신이 보통이 아니구만, 일본에 온지 얼마 안 돼 벌써 카메라를 사들고 여행 다니다니.”라고 하면서 끌끌 혀를 차는것이였다. 아무튼 그 덕분에 일본에서 찍은 사진들이 너무 많아 두꺼운 사진첩 한권으로는 부족할 정도였다.  그 대신 남들은 알바를 하고 돈을 모아 귀국한 후 모두 큰 집들을 샀지만 나는 그저 자그마한 집 한채를 사서 네 식구가 10년 동안 살았다. 그때 모(某)학과의 임교수가 우리 아파트 북쪽에 있는 큰 주택에서 살고 있었는데  늘 “병활이 이 사람이 일본에 갔다왔다는게 왜 요렇게 작은 집에서 살고 있소?”라고 말하곤 했다. 그럴때마다 나는 그저 “저는 일본에 공부하러 간것이지 돈 벌려고 간게 아니거든요.”라고 멋적게 대답하곤 하였다.  그리고 원 연변대학 지도자 한분이 출퇴근 할때마다 우리 아파트 현관 앞을 지나다녔는데 나를 만나면 “김선생, 이 집을 빨리 바꿔야겠구만,”라고 되네이곤 하던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4.  (1) 나는 퇴직을 일년 앞두고 만년의 인생살이에서 중요한 결단을 내리고 중경에 가서 한국어교육에 종사하기로 하였다. 어느 하루 조문학부 관계자가 나를 찾아와 사천외국어학원(지금의 사천외국어대학)에서 한국어학과를 새로 설립하는데 퇴직 교수가 필요하다는 것이였다. 아마 원래는 다른 퇴직 교수들에게 요청을 했는데 모두들 삼대 화로(三大火炉)라고 하는 중경에 가기 싫다고 한것 같았다. 그런데 이미 공식적으로 퇴직교수를 보내기로 약속한 상황이여서 퇴직을 일년 앞둔 나를 찾은 모양이다. 나도 처음엔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고 김병민 교장과 김관웅 교연실 주임도 극구 말리는 것이였다. 그러다가 다시 생각을 고쳐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 리유는 “삼국연의(삼국지)”의 주전장이며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어렵다는 “촉도난(蜀道难,难于上青天)”으로 유명한  사천에 가서 신비한 환경에 한번 도전해 보는 것도 의미있을 것 같았다. 다른 리유로는 퇴직후엔 주택 공적금이 적용될수 없다고 해서 퇴직전에 새집을 마련하느라고 서둘러 공적금을 신청하고 그동안 아껴서 모아둔 비용과 대부금을 합해 면적이 꽤 크고 환경이 괜찮은 주택을 마련한 것이다. 그런데 은행에서 빌린 대부금은 8년 동안 다 갚아야 하는데 나의 월급만을 가지고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고생해야만 했다. 관례대로라면 내가 수년간 당총지서기를 했으니 재직시절에 나에게도 얼마간 돈을 벌수있는 출국 기회가 차려져야 하는데 무슨 영문인지 수차 제기했어도 남들이 줄지어 나가는 그런 기회가 나에겐 좀처럼 차려지지 않는다. 이 일로 김교장도 여러모로 신경쓴 것으로 알고 있는데 뭔가 잘 안되는 모양이다. 그러니 이제 나에게 차례진 것은 남들이 가기 싫다고 하는 중경행뿐이였다. 사실 중경행 동기에 대해 거창한 담론은 차치하고 속되게 말한다면, 비록 중국에서도 락후한 지역으로 소문난 중경의 국공립 대학이라 대우가 동부 연해지역에 비해 아주 차할것은 당연하지만 그래도 퇴직후 집에서 그저 놀기보다는 어느정도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것 같았다. (2) 막상 중경에 가보니 생활환경이 진짜 말이 아니였다. 한 학기 강의를 끝내고 방학에 집에 오니 만나는 사람마다 수척해진 나의 얼굴을 보고 놀라는 것이였다. 그러면 나는 웃으면서 “손오공처럼 화로 안에서 도를 닦는것이 어디 쉬운일입니까? 라고 말하곤 하였다. 사천외대측에서는 학생들의 반응이 좋다면서 한해 두해 계속 초빙하다보니 어느덧 11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 나도 고희년에 이르게 되였다. 그동안 나는 한번도 사사로이 결근하고 휴강한 적이 없었는데 특수 사유로 휴강하게 되면 후일에 반드시 보충강의를 하곤 하였다. 그리고 여느 교원들처럼 강의를 하기싫으면 남몰래 전혀 수준이 안 되는 철부지 석사연구생(대학원생)들을 시켜 대리강의를 한적은 한번도 없었다. (3) 지난해 학교측에서 규정에 따라 더는 나를 초빙하기 어렵다고 하자 나도 이젠 쉴때가 되였다고 느긋하게 생각하고 연길에 돌아 오기로 하였다. 송별 좌담회에서 사천외대 부교장을 위수로 한 인사처장, 동방어학원 관계자들이 나의 로고에 대해 극찬해 주어  나도 성취감으로 기분이 좋았다. 연길에 아주 돌아오니 나보고 “이젠 부자가 되였구만요.”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나는 그저 미소를 띠고 “물론 부자가 되였지요.”라고 대꾸하곤 하였다. 사실 그동안 주택 구매로 은행에서 빌린 대부금을 규정된 시일에 다 갚았고 또 지갑에 돈이 찰때마다 관내 지역의 수많은 관광명소들을 두루 돌아보기도 했다. 후일에 할일이 없으면 치매예방 차원에서 관광명소 기행문을 써볼 생각이다. 하지만 그 분량이 너무 커서 죽기전에 다 쓸것 같지 못하다. 그리고 그동안 애들 둘이 박사학위 공부를 하게 되였는데 우리 부부는 힘 자라는대로 도움을 주었다. 그 보답으로 딸애는 연변대학과 한국 충북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두개나 획득했고 아들애는 일본 규슈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획득한후 학교측의 요청으로 수년간 박사후(博士后)를 하면서 보다 깊은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 무렵에 나는 내가 잘되는 것보다 자식들이 잘 되는것이 더 기분 좋은 일이라는 것을 보다 깊이 느꼈다.  나는 비록 자가용도 없고 엘리베이터가 달린 고층 아파트(电梯楼)로 이사가진 못해도 자식들 덕분에 당당하게 "부자"가 된셈이다.  나는 지난 40년을 되돌아보면서 개혁개방이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대학 교수로 될수 있고 또 애들 둘다 어떻게 박사학위를 획득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수 있겠는지 전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라고 깊이 느끼면서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5.  (1) 지난해 여름에 내가 연길에 돌아오자 연변대학 관공위(关心下一代工作委员会) 주임 김영춘 교수(원 연변대학 기률검사위원회 서기)가 소문을 듣고 나에게 전화로 조한학원 관공위 주임을 맡아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였다. 사실 나는 이제부터 모든 짐을 내려놓고 건강관리나 잘 하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김주임의 요청을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그와 나는 77학번 동기생으로서 일찍 내가 공청단 책임을 맡았을때 나의 상급이였다. 황차 연변대학이 나를 양성하였는데 나로서는 퇴직한 몸일지라도 필요할때 응당 보답을 해야할 립장이다. 그래서 두말없이 수락하고 생소한 관공위 사업에 뛰여들었다. 1년 남짓한 기간에 나는 PPT사용방법을 배우면서 남들이 하기어렵다고 손대지 않는 당과(党课)강의와 19차 당대회 관련 특강을 모두 4차 진행하였다. (2) 그동안 나는 원고료를 일전한푼도 지급하지 않는 인터넷 사이트에 관공위에서 개최한 행사들을 글과 사진으로 소개하곤 하였다. 그 리유로는 인터넷 사이트가 상대적으로 독자도 많고 영향력도 비교적 크기 때문이다. 돈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들은 여기에 구수한 토장국 냄새가 풍기는 글들을 자유롭게 올리고있어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로서는 친근감도 생긴다. 비록 나젊은 독자들이 재미없다고 외면하기도 하겠지만 "한명의 로인은 하나의 박물관과 같다"는 말처럼  백년후에 민족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판에 로인들이 남겨놓은 인생회억록들을 수집해 책으로 출판한다면 살아숨쉬는 훌륭한 력사자료로 될것이라고 의심치 않는다. (3) 내가 관공위 직무를 열심히 책임적으로 하는 것을 보고 일부 사람들은 세속의 사유방식대로 내가 액외의 경제 대우를 많이 받기때문이라고 미리짐작을 하고 여러모로 시탐하는것 같았다. 이에 나는 어이없어서 그저 “자원봉사라고 생각하고 일하는것입니다.”라고 대답하곤 한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학교측으로부터 수당금 일전한푼 받은적이 없다. 후일에 지급할지는 모르겠으나 애초부터 그걸 바라고 한일이 아니기에 아무런 불평불만도 없다.  옛날 공자님 시대에는 70세가 되면 고희년(古稀之年)이라고 일컬었다. 그런데 요즘엔 100세 시대라는 말이 입버릇처럼 류행되고 있다.  또 일부 선진국들에서는 75세가 돼야 로인 대접을 받을수 있다고 하는데, 이에 비하면 나는 이제 방금 70세를 넘어선 초등생이나 다름없다(초등생이라고 하면 좀 과장된 말이긴 하지만). 그런 분위기에 미혹돼 나도 남들처럼 100세까지 살고 싶은 욕망이 굴뚝처럼 솟아 오르기도  하지만 젊은 시절에 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여기저기 아픈데가 생기고하니 두루 실망스러울때가 있다. 하지만 집에 앉아 놀기만 한다고 장수하는 것도 아니다. 힘자라는대로 사회활동을 하고 자원봉사도 하면 심리 건강도 누릴수 있어 장수 비결중의 하나로 꼽힌다고 한다. 나는 지난 40년 동안 개혁개방의 혜택을 받으며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부터 아무런 경제적리득이 없는 사소한 일일지라도 즐겁게 성심성의로 하려고 한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안 좋은 관습에는 따라가지 않고 여생에 나라와 가족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보내는것이 나의 확고한 신념이고 사명이다.                                                                                    2018. 11. 9
10    고목나무의 생존 의미 댓글:  조회:748  추천:0  2018-10-17
 고목나무의 생존 의미  -- 중양절 유감                          김병활    올 가을 어느날 나는 아파트 정원에서 산책하다가 무심코 근 20년 전에 심은 버드나무 두 그루를 바라보게 되었다.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심은 버드나무 두 그루는 수년 동안 쌍둥이처럼 똑 같은 모습으로 사이좋게 잘 자라다가 지금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서쪽켠에 심은 나무는 가지와 나뭇잎이 울창하게 자라나 삼복철에 시원한 그늘을 선사하는   옛  마을의 보기좋은 느티나무를 연상케 한다. 그런데 동쪽켠에 심은 다른 한그루는 요 몇해 사이에 무슨 병에 걸렸는지 앙상한 줄기만 드러내고 외롭게 서있다. 하나는 20~30대 젊은이와 같은데   다른 하나는 운명하기 직전의 늙은이를 방불케 한다.      “그런데 아파트정원 관리자(정원사)는 왜 이처럼 보기 흉한 나무를 베어버리지 않고 그냥 놔두지?”라는 의문을 가지고 곁에 다가가 살펴보니 큰 줄기에서 올봄에 새로 자라난 나무가지 몇대가 싱싱한 물기를 머금고 있는 파란잎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싹 말라버린 큰 줄기에는 담쟁이덩굴이 나무를 에워싸고 위를 향해 줄기차게 자라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정원 관리자가 이 나무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이유를 나름대로 짐작할수 있었다.       같은 날에 심은 버드나무 두그루가 쌍둥이처럼 사이좋게 지내다가 그중 한 그루가 불행히 중병에 걸려 거의 죽어가고 있지만 그래도 그 병든 나무는 자신의 생존 의미를 알아차리고 수명을 다 할때까지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비록 이 나무가 앙상한 골격만 남았지만 만약 이 나무를 베어 버린다면 보기좋게 잘 자란 무성한 잎을 자랑하며 히말라야 등산객들처럼 나무 줄기를 에돌아 위로 위로 톺아오르는 담쟁이 덩굴은 자신의 등반 재능을 아낌없이 발휘하며 살아갈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다 죽어가는 고목나무의 두꺼운 껍질을 무서운 힘으로 뜷고나와  싱싱하게 자라난 어린 나가지들도 대자연이 그들에게 부여한 소중한 생명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명망높은 예술광장에 세워진 멋진 조각품처럼 꿋꿋이 서있는 이 고목나무의 당당한 모습을 보면서 생명을 다 할때까지 자신의 생존 의미를 완수하려고 애쓰는 그런  사명감과 의지력에 감동되었고 또한 대자연의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그 이름 모를 정원 관리자에게도 마음속으로 찬사를 보냈다.    요즘  “100세 시대”라는 말이 널리 유행되고 있다. 그래서 만약 100세까지 살지 못하면 제 노릇을 다 하지 못한듯이 서운한 느낌을 가지고 될것이고 따라서 나이 들어 여기저기 아픈데가 많아지면 남들처럼 100세를 살기 어려울 자신에 대해 주눅이 들어 열등감을 가지게 될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수명은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아무리 단명(短命)이라 하더라도 정원의 고목나무처럼 죽는 날까지 자신이 해야할 소명을 다하고 죽는다면 나름대로 의미 있는 삶이 될 것이다.  
9    룡정은 오랜 혁명 근거지(革命老区) 댓글:  조회:854  추천:0  2018-07-14
      룡정은 오랜 혁명 근거지(革命老区)          김병활    당 창건 97주년에 즈음하여 연변대학 관공위(关心下一代工作委员会 략칭)에서는 유구한 혁명 력사를 자랑하는 혁명근거지 - 룡정시 현지에서 홍색유전자를 계승하는 행사를 마련하였다. 행사의 주제는 “공산당원의 사명감을 잃지 말고 홍색유전자를 계승하는 모범이 되자(牢记使命,争做传承红色基因楷模-纪念建党97周年主题党日活动)”이다.  룡정은 내가 나서 자란 고향이다 연길에서 퇴직한 후 외지에서 10여년 일하는 사이 룡정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고 하는데 그중 중국 동북지역 공산주의운동의 발상지 중의 하나로, 오랜 전쟁 년대의 혁명 근거지로 공인받게 된것이 가장 마음에 와 닿는다. 이런 룡정에서 혁명 교육을 받는 행사에 참가하게 된다니 나의 마음은 저으기 설레였다. 그날따라 수일간 흐리고 비오던 날씨가 활짝 개여 우리 일행은 모두 밝은 표정이였다.       7월3일 아침 연길에서 출발하여 처음 도착한 곳은 룡정시 교사연수학교이다. 예전에 내가 보았던 이 학교는 단층집이였는데 지금은 4층으로 된 큰 건물로 변하였다. 여기가 바로 1928년2월에 연변지역에서 처음으로 설립된 중국공산당 지부이고 동북지역에서 가장 일찍 설립된 당지부 중의 하나인 중공룡정촌당지부  구지이다. 물론 당시엔 회색 벽돌벽에 회색 기와로 된 중국식 건물이였는데 당조직의 련락지점인 “민성보” 편집부 구지라고 한다. 학교 운동장 서쪽에 룡정촌당지부 설립 기념비와 이 지역에서 활동한 항일련군 고급장령 반신상, 그리고 입당선서문 비석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다. 기념비마다 꽃다발이 많이 놓여 있는것을 보아 우리가 오기전에 여러 단체들에서 이미 혁명렬사들을 추모하고 입당선서를 하는 행사를 진행한것 같았다. 우리 일행은 먼저 기념비에 꽃다발을 정중히 드리고 나서 인문학원 관공위 주임 강선자 교수가 소개한 연변지역 당조직 창건 력사와 혁명렬사들의 추쟁 사적을 청취하였다. 그리고 입당선서문 비석앞에서 주먹을 들고 함께 장엄한 입당선서를 진행하였다.      다음 목적지는 룡정중학이다. 대략 95년전에 대성중학이라는 교명으로 설립된 이 학교는 당시 조선족 문화 중심지였던 룡정의 명문 중학교였다. 따라서 항일구국의 신념을 안고 룡정시에 모여온 유지인사들과 사생들이 각종 방식으로 반일 투쟁을 진행했다. 또한 10월혁명의 영향하에 공산주의자들도 룡정의 여러 학교들에서 혁명 사상을 활발히 선전하고 반제반봉건투쟁을 진행하였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서 시인 윤동주가 성장하였고 나중에 친일파문학이 성행하던 시기에도 친일파와는 달리 우리민족의 정서를 훌륭히 반영한 수작들을 창작하였다.  나의 아버님은 1930년 경에 대성중학에서 공부했는데 학창시절에 아버님이 학교에서 수상한 각종 상장과 항전 승리 후에 대성중학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남긴 기념사진들을  나는 지금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우리 형제자매들도 다수가 대성중학(우리가 공부할 때엔 교명을 룡정1중, 연길현 1중이라고 했음)에서 공부했었다. 나는 모교의 사무청사가 예전처럼 잘 보전되여 있고 또 서쪽과 복쪽에 있었던 단층집 교실 두채가 있던 자리에 새로운 교수 청사가 버젓하게 세워진 것을 보고 감회가 깊어졌다.  우리 일행은 앞선 행사처럼 윤동주 석상에 꽃다발을 드린 후 과기학원 관공위 부주임 최후택 교수의 혁명력사 강의를 청취하고 기념 사진을 다투어 찍었다. 이때 누군가 윤동주의 국적에 대해 국외에서 론란이 있다고 하자 최교수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윤동주의 부친이 명동촌에 와서 땅을 사서 학교를 세우고 밭농사를 하면서 활동경비를 마련하려고 하니 당시에는 중국 국적에 가입해야 땅을 살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대의를 위해 중국 국적에 가입하여 무난히 필요한 면적의 토지를 충분히 매입하였으며 따라서 명동학교 등 건물들을 축조하면서 떳떳이 당국과 각종 교섭을  할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부친이 중국 국적이니 아들 윤동주도 자연스럽게 중국 국적으로 된게 아니냐는 것이다. 나는 윤동주 연구전문가가 아니기에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국적이 여하하든 그 시기의 민족정서를 잘 반영한 윤동주의 시들은 모든 사람들의 문화유산이 될거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윤동주는 은진중학 출신인데 왜 대성중학에 석상과 기념비를 세웠느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룡정출신인 내가 나서서 설명하였다. 윤동주가 은진중학 출신인것은 사실인데 항전승리 후에 은진중학을 포함한 룡정 6대중학교가 룡정중학으로 합병되였고 후일에 이른바 신 도시 건설이라는 명의하에 유서깊은 옛 건물들을 마구 철거하는 바람에 “영국덕이(영국 조계지)”에 위치한 은진중학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지금 룡정 6대 중학 중 옛 교수청사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학교는 대성중학 구지 뿐이여서 여기에 윤동주 반신상을 세운 것이라고 한다.       다음 행선지는 해란강과 륙도하 합수목에 자리잡은 “락연공원(乐然公园)”이다. 락연공원은 부지면적이 크진 않지만 한락연 동상과 3층 정자가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잘 어우려져 유달리 품위가 있어 보였다.  1998년에 룡정 륙도하 남쪽에 자리잡은 토성포(지금의 공농촌)에서 나서 자랐고 또한 1919년 룡정에서 일어난 “3.13”빈일운동에서 혁명가의 첫 발자국을 내디딘 한락연은 여러가지 “제1인자”라는 명망을 가지고 있다. 중공 통전부 전 부장이며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전 주임 리덕수의 평가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한락연 동지는 중국 20세기 걸출한 정치활동가이며 인민예술가이다. 그는 중국 조선족의 첫 공산당원으로서 동북지역 첫 당조직을 창건하는 사업에 참여하였다. 그는 중국 조선족 중에서 처음으로 국제 반파쇼 전사로 되여 프랑스 공산당의 반파쇼 투쟁에 참가하였으며 국제 우호 인사와 함께 중국의 항일투쟁사업을 세계각지에 선전하였다. 그는 국민당 소장 신분으로 공산당의 통일전선공작을 진행한 선행자로서 산서성 동남지역의 항일전선에서 항일통일전선 련락사업을 전개하였다. 국공합작이 파렬된후 그는 국민당 감옥에서 3년이란 긴 시간을 보내면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투쟁을 견지하였다. 그는 미술계에서 처음으로 동서 미술 기법을 결합시킨  선행자로서 중국전통문화와 서양문화를 융합시켜 후세에 많은 예술 걸작들을 남겨 놓았다. 그는 처음으로 키질 벽화를 연구한 중국 화가로서 과학과 예술, 회화와 고고학을 하나로 융합시켰고 신강 남부지역과 돈황 고대문물을 보존하기 위해 많은  개척성 사업을 진행하였다.  그는 처음으로 서북지역 각족인민들의 생활을 소재로 창작을 진행한 예술가로서 회화예술로 서북 각족인민들의 로동 생활을 반영하여 서북 지역 인민들과 두터운 우의를 맺고 민족단결을 추진한 모범으로 되였다. 한락연 동지의 혁명정신과 예술 품격은 소중한 유산과 재부로 되고 있는 바 우리들은 이를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것이다.”  이처럼 위대한 학명가, 예술가이며 조선족의 자랑인 한락연이 어째서 남들보다 뒤늦게 알려지게 되였을가? 이것은 아마 한락연의 혁명적 일생이 대부분 지하비밀공작을 한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가 생명 위험을 감수하며 진행한 투쟁은 지하비밀공작의 성격으로 인해 직계상사가 아니면 누구도 알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건국 후 끊임없이 진행된 정치투쟁과 “문화대혁명”으로 하여 많은 지인들이 비밀리에 진행된 한락연의 빛나는 투쟁업적을 알리지 못하고 가슴에 묻어둔채 세상을 하직하였을 것이다. 다행히 요행 살아남은 전우, 지인들과 한락연의 자녀들이 사명감을 지니고 끈질기게 노력한 결과 오늘과 같이 한락연의 혁명가, 예술가의 빛나는 일생이 해빛을 보게 된 것이다.    우리는 한락연 동상에 꽃다발을 드리고 미술학원 관공위 최국남 주임이 한 한락연 혁명생애 소개를 청취한후 기념 사진을 찍었다.     오늘 유람객들이 줄지어 찾아오는 “락연공원” 자리는 원래 채소농사를 하던 채마전이였고 해란강과 륙도하 합수목엔 부드러운 모래가 깔린 넓다란 백사장이 있었다. 어렸을 때 나는 아버님의 뒤를 따라 여기에 와서 목욕을 하고 일광욕도 즐기곤 하였다. 그 시절에 우리는 철교 동쪽에 위치한 토성포(공농촌)에서 한락연이라는 위대한 인물이 나서 자랐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이 합수목에서 낚시질을 즐기면서 로후생활을 보내고 있는 낚시꾼들은 아마 오늘의 이 행복이 어떻게 온것인지를 잘 알고 있으리라.        오늘 행사의 마지막 목적지는 지신 승지촌에 위치한 주덕해 고택이다. 예전에 그 마을을 자주 지나 다니면서도 여기에 주덕해 옛집이 있다는 것은 몰랐다. 주덕해 기념비와 고택은 승지촌 촌민위원회 사무실 곁에 있는데 부지 면적은 크지 않지만 시설물들이 정갈하게 잘 정리되여 있다. 주덕해 동지의 일생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우리 일행은 별다른 소개와 설명은 하지 않고 꽃다발을 드린후 기념 사진을 찍었고 기념비 주변에 전시된 주덕해 공적을 담은 사진들을 관람하였다.  사실 나는 지금 연변대학 뒷산(와룡산)에서 거의 매일 주덕해 기념비와 묘소를 만나고 있다. 나이들어 몸이 무거워지면서 움직이기 싫을 때면 어김없이 뒷산에 올라 호요방 전 총서기가 금빛 제사를 한 주덕해 기념비 주변을 돌곤 하는데 그러고나면 한몸에 정기를 듬뿍 받아안은 듯 두 발에 힘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그런 느낌이 좋아서 폭우, 폭설이 있는 날과 특별한 행사가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주덕해 기념비와 묘소를 모신 뒷산에 오르곤 한다.  오늘 행사를 마무리하면서 연변대학 관공위 주임 김영춘 교수가 총화발언을 하였다. 그는 입당선서를 할 때의 초심을 잃지 말고 사명감을 지니고 습근평신시대중국특색사회주의사상을 견지하고 혁명선렬들의 발자취를 따라 홍색유전자를 계승하면서 공산당원의 선봉,모범 역할을 남김없이 발양해야 한다고 하였다.     [주: 저의 재간으로는 본문에 사진 5장밖에 삽입할 수 없기에 사진 여러 장을 합쳐서(퍼즐, 拼图) 올렸습니다.]  
8    퇴역 사령원의 록수청산 꿈 댓글:  조회:1471  추천:0  2018-05-11
    퇴역 사령원의 록수청산 꿈     김병활      연변대학 새일대관심사업위원회[关心下一代工作委员会, 략칭 (관공위- 关工委)]에서는 주말인 5월 5일에 50여명의 사생들을 이끌고 안도현 석문진 대성구에 가서 식수를 하기로 하였다. 그곳은 원 연변군분구 부사령원 김문원 씨가 퇴역한후 황산을 록수청산으로 탈바꿈하려는 꿈을 안고 14년 동안이나 고군분투해온 곳이며 또한 연변대학 관공위에서 마련한 애국주의 교육기지이기도 하다.  아침 일찍 대학 정문에서 출발해 8시반 경에 대성구에 도착하니 김 사령원이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70세가 다된 고령이라고 하지만 군인다운 강직한 모습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김 사령원은 먼저 애국주의 교육기지 기념비 앞에서 나젊은 대학생들에게 “록수청산은 바로 금산, 은산”이라는 습근평 주석의 어록은 인용하면서 자신이 퇴역한후 14년동안 황산을 록수청산으로 개조하기 위해 분투한 체험을 이야기하였다.    당시 그는 퇴역 연금만으로도 얼마든지 편안히 남은 일생을 보낼수 있었다. 그러나 생명이 끝나지 않는한 전투를 멈출수 없다는 혁명군인의 신념은 그로 하여금 집에 앉아 여생을 보낼수 없게 하였다. 그리하여 땅을 버리고 도시로 떠난 농민들의 빈집을 빌어 살면서 황산에 나무를 심기 시작하였다. 낮에는 힘들게 식수를 하고 저녁엔 전기설비도 없는 초가집에서 등불을 켜고 책을 읽는 생활은 여간 힘들고 외롭지 않았다고 한다. 그 바람에 수차 난치병에 걸려 입원 치료도 하였는데 같은 병을 앓던 수십명의 환자들 가운데 그만이 병이 호전되여 계속 식수조림을 할수 있었다고 한다. 나는 강연을 한창 하고 있는 김 사령원의 모습을 카메라로 사진 찍다가 우연히 그가 다 해진 솜신을 신고 있는것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나중에 그 리유를 조용히 물으니 사실은 신병으로 발이 차면 안 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한낮 기온이 20도를 웃도는 5월 날씨에도 솜신을 신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또 엄지발가락 부위가 해져서 구멍이 뚤렸다고 하자 이는 솜신에 공기가 통해야 된다는 의사의 말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아주 락관적인 표정으로 이제도 10여년 더 분투해 80세까지 식수조림을 견지하겠다고 마음다짐을 하는 것이였다.    김 사령원은 평범한 농민들처럼 아주 간소한 생활을 하면서도 청산을 이루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사재를 털고 대부금을 맡아 어마어마한 투자를 하였다. 옛날엔 눈이 녹고 비가 오면 길이 질척해져 산에 오를 엄두를 못냈지만 지금은 산비탈을 따라 아스팔트 길을 보기좋게 닦아놓아 묘목을 가득 실은 경운기가 쉽게 산에 오를수 있었다. 그는 또 린근 마을의 빈곤한 농민들의 생활을 여러모로 관심해 주고 그들을 이끌고 빈곤에서 하루빨리 해탈하도록 도와주고 있다.    김 사령원의 분투 정신에 감동된 우리 일행은 삽, 괭이, 묘목을 들고 가파른 산비탈을 누비면서 나무를 심기 시작하였다. 연변대학 관공위 김영춘 주임(연변대학 원 기률검사위원회 서기)과 나는 모두 70세를 넘었지만 젊은 대학생들보다 못지 않게 땀을 흘리며 소나무를 정히 심어나갔다. 마침 며칠전에 눈개비가 많이 내려 땅이 축축해졌는데 모두들 시커먼 흙을 파낸후 다시 묘목 우에 부드럽게 덮고 두 발로 잘 밟아주곤 하였다. 그러면서 오늘 심은 나무들이 100%로 전부 살아날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곤 하였다. 김 사령원도 오늘 온 대학생들이 기왕에 왔던 그릅들보다 훨씬 일을 잘한다고 흡족해하며 연신 치하하는 것이였다. 애초에 오늘 식수 계획이 500그루를 심는 것이라고 했는데 다 심고 보니 1000그루 넘게 심었다고 한다.    10년 지난뒤에 다시 와서 울창한 숲을 이룬 소나무와 거기에 열린 잣송이를 본다면 우리도 록수청산을 가꾸어 가는 사업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탰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해질 것이다. 대성구를 떠나면서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해준 김 사령원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래년에 이 산에서 다시 만날것을 기약하였다. 
7    아들 결혼에 바라는 것 댓글:  조회:1129  추천:1  2018-01-07
                                                               아들 결혼에 바라는 것 (전략)  오늘 **와 **가 연애생활을 마무리하고 2018년 새해 벽두에 길일을 택하여 이 자리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결혼 당사자들의 축복일뿐만 아니라 양가 부모들의 축복이며 또한 이 자리에 모처럼 참석해주신 일가친척들과 하객 여러분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좋은 인연으로 이루어진 **와 **의 행복한 결혼을 흔쾌히 승낙해 주신 사돈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토록 좋은 인연을 맺을수 있도록 여러모로 도와주신 신랑신부의 친구 여러분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아래에 저는 오늘 결혼식에 즈음하여 신랑신부에게 몇가지 바람을 말하고자 합니다.  첫째, 결혼은 사랑을 한 차원 업그레이드하는 스타트라고 생각합니다.  신랑신부는 이미 낭만적인 연애생활을 통해 상대방을 서로 깊이 이해하고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오늘 이 결혼식은 바로 이를 토대로 사랑을 한 차원 더 높은 경지에로  승화시키는 자리입니다. 앞으로의 결혼 생활은 무지개 걸린 꽃동산처럼 아름다울뿐만 아니라 때로는 가시덤불도 만날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바로 두 사람이 마음과 지혜를 합쳐 새롭고 아름다운 생활을 개척하고 영위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더욱더 돈독해 질것이라고 믿는 바입니다.  둘째, 결혼은 사랑과 행복을 동반한 책임감도 있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책임감, 양가 보모들에 대한 책임감, 후대에 대한 책임감 등을 시시로 잊지말아야 할것입니다.   최근에는 건강도 일종 책임이라고 합니다(健康也是一种责任).  건강은 단순히 나 한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을 책임질수 있는 필수적 조건이라는것을 잊지말아야 할것입니다. 지금 중국에서 많은 부모들이 자식들이 용이 되길 바라고 있지만(望子成龙) 14억 인구 중에서 용이 될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자식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하면서 중산계층 정도의 소득으로 책임감있게 사회와 가족을 대한다면 그 이상 더바랄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우리민족의 우수한 전통문화인 효도를 착실히 실천해 나아가길 바랍니다.  물론 효도의 내용과 형식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퇴직금, 의료보험과 같은 사회보장 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3대가족, 4대가족이 한 집에서 사는 방식으로 자신의 노후를 보장받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부모들은 거의 다 퇴직금, 의료보험금이 있기 때문에 궂이 자식들과 함께 생활하지 않고도 살아갈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부모들은 자신이 움직일수 있는한 자식들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병으로 인해 자식들에게 부담이 될까봐 열심히 건강관리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부모들일지라도 때로는 외로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常回家看看”이라는 노래가 유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경쟁사회에서 밤낮없이 바삐 돌아치는 자식들을 부모들은 늘 걱정하고 있는데, 자식들은 이런 부모님들에게 문안의 전화 한 통으로나마 보답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중국매체에서 조선족의 미풍양속을 소개할때면 어김없이 우리민족의 효도를 찬양하고 있는데 우리는 반드시 이런 우수한 전통문화를 대대손손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후략) 감사합니다.                          2018년 1월 6일  연길에서 
6    연변 항일 <녀장군> - 허성숙의 발자취를 찾아서 댓글:  조회:1269  추천:0  2017-11-30
   연변 항일 - 허성숙의 발자취를 찾아서    김병활     연변대학 새일대관심사업위원회(략칭 ‘관공위’关心下一代工作委员会) 에서는 올 가을 어느 주말에 대학 공청단위원회와 함께 안도현 혁명교육기지 참관 행사를 마련하였다. 대형버스를 탑승하고 고속도로 한시간 정도 주행해 안도현 정부 소재지 명월진에 이르렀다. 지난 여름에 홍수 피해로 이곳 주민들이 많이 고생하였다고 들었는데 복구사업을 잘 해서2,3개월 지난 뒤에 그 피해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안도현 인민대표대회 부주임이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고 동행하면서 오늘 행사의 순조로운 진행을 위해 많은 수고를 하였다.   현 소재지를 벗어나 버스로 대략 30분 정도 달리니 신합향십칠가(新合乡十七街)에 이르렀다. 아스팔트 포장도로 옆에 있는 모 기관 청사 정원에 항련2군 지도부 장령들의 름름한 모습이 커다란 조각상으로 제작되여 높이 세워져 있다.  동북항일련군 제2군(략칭 항련2군)은 중국 공산당의 령도하에 조직된 항일무장대오로서 주로 한족, 조선족 등 민족으로 구성되였다.  항련 2군은 1936년 3월에 안도 신합향 미혼진(新合乡迷魂阵)에서 원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을 항련2군으로 개편해 조직되였다. 항련 2군 군장으로는 왕덕태(王德泰), 정치위원은 위증민(魏拯民), 참모장은 류한흥(刘汉兴)이였다. 산하에 3개 사가 있었고 병력은 대략 2천여명이였다. 항련2군은 주로 길림성과 흑룡강성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혁혁한 전공을 이룩하였다.     항련2군에서 특히 주목할만한 항일투사로는 조선족 이라고 불리운 허성숙(许成淑)이다. 조각상을 측면으로 보니 뒤켠에 군복 차림을 한 녀성이 씩씩한 자태로 서 있는데 이 분이 아마 허성숙일 것이다.    기념촬영을 마친뒤 다음 목적지 - 영경향 대사하툰(大沙河屯)에 위치한 항련2군 밀영유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버스는 먼저 민속촌으로 유명한 만보향  홍기촌에 이르러 잠간 휴식하였다. 그리고  지난 세기 로동모범 류창은씨가 고산지대에 적응된 벼 품종을 개발했다는 사적을 떠올리면서  이 지역에서 보기드믈 정도로 넓은 만보향 수전 벌판을 차창 너머로 바라보며 갈길을 재촉했다.    대사하툰 항련2군 밀영유적지에 이르니 규모가 큰 민속박물관이 나타난다. 지금 지방 정부에서는 여기에 홍색 관광과 만족민속관광을 결합해 규모가 꽤 큰  관광지를 조성하였다. 입장료는 120원이라고 밝혔는데 안도현 인대회 부주임의 도움을 받아 우리 일행은 특수할인대우를 받은것 같았다.    밀영유적지에 복구된 당시 항련 전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던 허름한 집들을 보면서 그들이 겪었던 어려움과 그런 환경에서 용감히 항일 무장투쟁에 떨쳐나선 영웅 기개와 완강한 의지력에 가슴이 찡해난다.    여기서 남달리 눈에 띄였던 것은 바로 대사하전역 전람관 앞마당에 세워진 항일 허성숙의 조각상이다.    허성숙 조각상 뒤에 있는 전람관 안에는 아주 큰 편폭으로 허성숙의 영웅적 사적을 소개하고 있다.  허성숙, 녀, 조선족, 1915년 안도현 중평촌 출생, 허성숙은 어려서부터 중평촌 농민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항일구국사상을 받아들였고 마을에서 전개되고 있는 반일활동에 적극 참가하였는바  1931년에는 소년선봉대에 가입하였고 1933년에는 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면서 반일투쟁에 적극 투신하였다. 당시 원래 농민이였던 아버지가 자위단 단장에 위임되자 허성숙은 수차 사퇴할것을 권고했지만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하자 결연히 가정을 리탈하였다. 그리고는 1933년 8월에 웡성라즈 항일유격근거지를 찾아가 연길유격대에 가입하였다. 1934년에 이 유격대는 중평촌 부근에서 허성숙의 아버지 허기형이 인솔한 자위단과 맞다들었다. 유격대에서는 허성숙더러 아버지 허기형에게 투항을 권고하라고 였다. 허성숙은 상대편 진지를 향해 수차 높은 목소리로 총을 놓고 인민 편으로 돌아오라고 연속 웨쳤지만 허기형은 오히려 유격대를 향해 진공을 발동하였다. 이에 허성숙은 혁명의 승리를 위해 부녀지간의 인정을 끊어 버리고 련장에게 승리를 전취할수 있는 기회를 놓지지 말고 싸울것을 청구하면서 전우들과 함께 조금도 서슴없이 전진을 향해 명렬히 사격을 퍼부었다.   1934년 겨울 허성숙은 신병으로 유격대를 떠나 연길현 사방대 청년단 구위에서 부녀사업을 책임지고 일하였다. 1935년에 허성숙은 부대로 돌아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단 1련 기관총수로 되였고 1련 련장 박광규와 결혼하였다. 이해 허성숙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37년 4월에 남편 박광규가 전사하자 허성숙은 복수의 일념으로 지도부에 계속 제일선 전투에 나서겠다고 요구했고 지도부에서는 이를 수락하고 허성숙을 기관총반 반장으로 임명하였다. 허성숙은 전투에서 욤감하였을뿐만 아니라 사격술도 아주 우수하여 ‘여자 명사수(神枪手)’로 불리웠다. 이리하여 그가 인솔한 기관총반은 살상력이 아주 강해 1927년 6월 10일에 있은 림강묘령전투, 6월 30일에 있은 장백현 간산봉전투 등 수차의 치렬한 전투에서 명성을  날리였고 허성숙 자신은 ,으로 불리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1939년 1월에 있은 화전 목기하전투와 돈화 따푸차이허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허성숙은 정찰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하여 전투의 승리를 담보하였다. 이해 4월에 있은 안도 시베이차전투에서 허성숙은 적들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용감하게 적진에 뛰여 들어 기관총 한 자루를 로획하였다,  1937년 8월 대사하 전역에서 허성숙은 부대를 엄호하기 위해 홀몸으로 적들과 용감히 싸우다가 중상을 입었고 정신을 잃고 포로된 후에도 혁명적 절개를 고수하다가 희생되였다. 그해 허성숙은 겨우 24세 젊은 나이였다.    우리일행은 허성숙의 영웅적 사적에 더없이 감동되였고 그의 조각상앞에서 단체 기념촬영을 한 뒤에도 앞다투어 개인 기념촬영을 하였다.   안도에서 있은 그날 행사를 마무리하고 돌아오면서 나는 우리 신변에 일찍 허성숙과 같은 우리 민족의 항일 영웅들이 있었는데 왜 여태까지 모르고 있었던 것일가 하고 자신을 반성하였다. 귀가 후 여기저기서 자료를 찾아보니 1982년에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에서 김태갑씨가 ‘항일련군의 ’이라는 제목으로 수집정리한 허성숙의 사적이 상세히 소개되여 있었다. 이번 행사를 통해 나는 앞으로 남은 인생이 얼마 안 되겠지만 우리 민족의 영웅 인물을 소개한 책들을 짬짬이 열독하고 그들의 초심을 기리고저 한다. 그리고 지난 세월 세속에서 다소 오염된 자신의 령혼을 깨끗이 청소하면서 부끄러움없이 살아가야겠다고 마음 다짐을 하였다. 
5    건축공사장의 철학 댓글:  조회:827  추천:0  2017-09-04
   건축공사장의 철학    김병활    (1)    건축 공정이 한창인 공사장에 탑식 기중기가 우중충 높이 솟아있다. 기중기는 레루우에서 미끄러지듯 오가며 건축자재들을 부지런히 운송한다. 그 힘장사 팔뚝은 육중한 자재들을 아이 장난감 다루듯이 슬쩍 들었다 놓았다 한다.  기중기가 힘세다고는 하지만 만약 레루와 모다(모터)의 힘을 빌지 않는다면  어찌 그토록 령활하게 움직이면서 무진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으랴.  레루가 밑바닥에서 묵묵히 무거운 체중을 받쳐주지 않고, 또 모다가 끊임없이 원동력을 공급하지 않는다면 기중기는 한낱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탄탄한 기초와 무진장한 원동력 – 이는 학문 닦기에서도 불가결의 요소로 된다. 학문의 금자탑을 쌓음에 있어서 기초를 잘 닦지 않고 하루 이틀에 성공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마치 레루가 없는 기중기처럼 제자리에서 휘청거리거나 한발짝도 내딛지 못하게  될것이다. 또한 원대한 포부가 없는 사람은 원동력(모터)이 없는 기중기처럼 자그마한 난관에 부딪쳐도 머리를 숙이고 중도이페하고 말것이다.     (2)    건축 공사장에서 세멘트, 모래, 자갈 등은 없어서는 안될 재료들이다. 만약 이것들이 공사장에 헤실바실 흩어진대로 쌓여있으면 아무런 힘도 쓸수 없다. 그러나 일단 이것들을 적당한 비례로 물과 함께 미끼샤(믹서)에 넣고 잘 혼합한다면 화강암처럼 단단한 콩크리트로 변하게 된다. 분산 상태에서 응고 상태에로의 변화 – 그것은 량적 변화가 아니라 질적 변화이다. 이 질적 변화의 필수적 조건은 바로 분산과 배척이 아닌 상호 융합이다.  학문 연구에서도 각종 지식의 호상 융합은 새로운 발명과 성취를 거둘수 있는 조건으로 된다. 우리의 대뇌는 마치 미끼샤(믹서)처럼 부동한 종류의 지식을 잘 혼합하여 자연법칙 인식이 일대 비약(도약)을 일으키도록 한다. 마치 산소와 수소가 화학반응을 일으켜 물이 되듯이.  학문연구에서 전문화는 단일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비좁은 전문지식 령역 안에 머리를 틀어밖고 단일화만 추구한다면 그것은 마치 분산 상태에 있는 세멘트, 모래, 자갈처럼 무기력하여 아무런 성취도 거둘수 없게 된다. 세계에 명성을 떨친 학자, 발명가들은 거의 다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다재다능한 다면수들이였다.     (3)    건축공사장에서 기중기, 미끼샤와 대조되는 것은 건축 로동자들이 손으로 사용하는 자그마한 흙칼이다. 현대화를 목표로 하는 오늘날 그것은 락후한 도구가 아닐수 없다. 하지만 로동자들은 그 흙칼이 락후하다고 탓하지 않고 오히려 보배로 여기고 매일 부지런히 일터에서 재치있게 흙칼을 사용하면서 기적을 쌓아 올리고 있다.  4개 현대화를 위해 분투하고 있는 오늘 우리 앞에 놓여진 과학, 교육 등 분야의 설비들은 아직 세계 수준과 거리가 먼 것들이다. 우리는 이런 분야에서도 당분간 재래식 ‘흙칼’을 사용해야 한다. 현대화 리상과 락후한 현실은 하나의 모순이다. 하지만 모순 쌍방은 상호 전환될 수 있다. 락후한 일방은 피타는 노력과 끊임없는 실천을 거쳐 선진적인 사물로 전환될수 있다. 학습 조건과 연구 설비들이 남보다 못하다고 상을 잔뜩 찌푸리고 우는 소리만 하거나, 남들이 땀흘려 쌓아 올린 금자탑 밑에서 어리둥절해 입만 헤- 벌리고 쳐다보는 격이 되여서는 안 된다. 이런 사람들은 금자탑은 고사하고 벽돌 한장도 옮겨 놓지 못할 것이다.            1979년 9월    (이 글은 38년전에 일기장에 쓴 글입니다.) 
4    따예(大爷)’라는 호칭에 습관되지 못한 나 댓글:  조회:960  추천:0  2017-09-02
     ‘따예(大爷)’라는 호칭에 습관되지 못한 나         김병활    나는 올 상반기 중경 정기검진에서 고지혈증이 있으니 약을 복용하는게 좋겠다는 조언을 받았다. 그래서 연길에 돌아온 후 한달간 약을 복용하고 다시 병원에 피검사 하러 갔다. 피검사하는 한족 간호사가 마스크를 착용한채 나를 보고 갑자기 중국어로 “大(?)叫什么名字?”라고 묻는다.  그때 나는 공복이고 전날 저녁부터 물 한모금 마시지 않은 탓으로 정신집중이 잘 안돼 간호사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방금 ‘따?’뭐라고 했지? 여기가 병원이니까 아마 어느 의사한테서 진료 받았느냐고  “大夫叫什么名字?”라고 묻는줄 알고 모모 의사한테서 진료 받았다고 했다. 그녀는 이상하다고  다시 좀더 높고 똑똑한 목소리로“大爷(할아버지)叫什么名字?”라고 묻는다. 그제야 나는 내가 이젠 ‘따예’가 다 된줄 깨달았고,  방금 간호사가  나를 ‘따예’라고 호칭하고  나의 이름을 묻는다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둘은 웬영문인지를 알아차리고 서로 마주보며 웃고 말았다. 나오면서 곰곰이 방금 있었던 일을 생각해보니 내가 연길에 돌아온후 병원의 진료 절차와 습관을 잘 몰랐고 더욱이 ‘大爷’라는 나에 대한 호칭에 아직 익숙하지 못해 이런 실수를 했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래 맞아, ‘다예(大爷)‘가 바로 나고, 내가 바로 ‘다예’인 것이다. 나는 마치  오늘에야 인생의 새로운 전환기를 새삼스레 인식한 느낌이였다.   사실 나는 퇴직후 10여년 동안 줄곧 중경에 있으면서 어느 누구도 나를 ‘다예’라고 불렀던 기억이 없다. 그때 나는 연변대학에 있을때처럼 늘 양복차림을 하고 수업했고 흰 머리가 드러나면 늘 염색하곤 하였다. 그 덕분인지 아주 젊어보여 ‘90后(주링허우)’ 학생들과의 거리가 좁혀졌고 세대차이라는 개념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지내왔다. 퇴근 후에 캐주얼(평복)차림으로 마트에 가도 직원들은 중경 습관대로 모든 고객들을 ‘老师(라오스)’라고 부르기에 나는 직업관계상 늘 습관적으로 나를 부르는줄로 알았다. 내가 버스나 지하철을  탈때면 누구하나 나에게 자리 를 권하는 법이 없다. 이에 나는 여기 젊은이들의 풍습이 왜 이꼴이냐고 불쾌하게 생각하기보다 내가 아직은  젊어 보이니까  그렇겠거니 하고 기분좋게 목적지까지 한시간 정도 선채로 가곤했다.     그런데 연길에 온후 상황이 달라졌다. 나는 언제나 캐주얼을 입고 외출했고 머리도 염색하지 않아 희끗희끗한 머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인들이 이런 모습을 여겨보고 왜 갑자기 늙어 보이느냐고 이상해하면 나는 농조로 이게 바로 “庐山真面目(루산 진면모)라는 거지요”라고 모택동주석의 시구를 인용해 대꾸했다.  그리고 ‘할아버지’라는 우리말로 된 호칭은 외손녀에게서 자주 들어 그런대로 익숙한데 마트와 같은 공공장소에서는 그냥 중경 습관대로 나를  ‘老师(라오스)’라고 부르겠거니 하고 여겼다. 그런데 오늘 병원 간호사가 마스크를 착용한채  ‘다예’라고 하자 나는 어망결에 빗들은 것이다.  신분계층을 따지기 좋아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남들이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인식하고 또 어떤 호칭을 사용하는가에 대해 굉장히 신경쓰는 것 같다. 나도 물론 다를바 없다. 중경에서 모두 나를 젊게 보고 ‘교수님, 라오스(老师)’라고 부르니까 나도 이런 호칭에 만족하고 기분좋게 살아왔다. 그래서 70살이 다 된 올 봄에도 전교 교직원 배구경기에 참가해 젊은 교직원들과 함께 어울려 주요 멤버로 활약하면서 응원대와 관객들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그곳의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오자 나는 그저. 백발이 다된 ‘다예’‘할아버지, 아바이’가 된 것이다.  사실 내가 아무리 싫어한다해도 나는 어김없이 70살이 되었고, 할아버지, 아바이, ‘따예’ 라는 호칭을 달갑게 받아들일 나이가 된 것이다. 이 즈음에 저도 모르게  공자님께서 하신 “70살이 되니 마음에서 하려고 하는 바를 그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七十而从心所欲,不逾矩)。”는 가르침이 떠오른다. 여기서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不逾矩)”는 말 중의  '법도(矩)'에 대해 여러가지 해석이 있지만 나는 대체로 자신의 심경에 따라 ‘자연법칙’, ‘자연의 순리’ 등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 오늘날 과학이 아무리 발전했다해도 해와 달이 뜨고지고 춘하추동이 순번대로 돌아가는 것은 그누구도 막을수 없다. 그리고 아무리 100세 시대라 해도 인간의 수명은 제한되어 있고 생명은 종식되기 마련이다. 천하를  호령하던 진시황이 장생불로를 꿈꾸면서 신하 서복(徐福)더러 3천 동남동녀를 이끌고 불사약 – 불로초를 구해오라고 엄명을 내렸어도 그 꿈은 물거품처럼 맥없이 깨지고 49세밖에 안되는 일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한오백년 살자는데 웬 성화요.”라는 노래는 단지 하나의 기원과 희망사항을 드러냈을 뿐이고 “가는 세월 그 누구가 막을 수 있나요, 흘러가는 시냇물을 막을 수가 있나요.”라는 노래는 그래도 현실을 직시하는 차분한 심경을 표현했다고 할수 있다. 공자님 같은 성인들이야 자기 마음 내키는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겠지만 나와 같은 평민,백성들이 그런 경지에 도달하려면 실로 어려운 일이 아닐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쉽사리 세속의 유행에 휘말려들어가 분명히 늙어가고 있음에도 그것을 애써 감추려고 과학상식도 무시하고 이런저런 불로장생 방책을 애써 추구하게 된다. 이는  어쩌면 허황한 꿈과 허영심만 가지고 ‘법도(矩)’ - 자연의 순리를 무시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생명은 나의 것이고 건강도 나의 것이다. 그 어떤 단체거나 술친구들의 유혹과 속박에 넘어가 시시로 벌어지는 술판에서 ‘위하여’를 웨치면서 과음한다든지, 고희년(古稀年)에 젊은 시절의 위대한 꿈을 실현한답시고 불철주야 부질없는 분투를 하는 행위는 자살행위와 다를바 없다. 오늘 나는 70살 고개를 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자신이 이미 “따예(할아버지)로 되었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자연의 법칙을 존중하면서 전혀 불가능한 ‘불로장생’과 같은 꿈따위는 주저없이 버려야할 것이다. 이제는 자신의 백발과 주름살, 그리고 거무칙칙한 피부를 감추느라 신경쓸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자신의 늙은이다운 모습 - “루산 진면모 (庐山真面目)를 서슴없이 드러내고 남들이 “다예(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에 익숙해지고 또 그것을 달갑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2017. 9.1
3    1977년 - 대합입시를 회복하던 나날에 댓글:  조회:1141  추천:0  2017-08-13
1977년 - 대합입시를 회복하던 나날에 김병활 1977년 - 대합입시를 회복하던 나날에(1)    1977년, 이해에 11년간 중단되었던 대학시험이 회복되였다. 5년전인 1972년도에 한번 대학입시를 실시했다가 ‘백지(白纸)영웅’ 장철생이 나왔고 ‘4인방‘이 미친듯이 반대하는 바람에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말았다. 오늘 ‘4인방’이 타도되고 4개현대화를 실현할 절박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장중앙에서는 대학시험제도를 회복하였다. 이는 사회상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인민들의 절대적인 옹호를 받았다.  소문은 일찍 금년(1977년) 4월부터 나돌기 시작했다. 5월 말에 내가 연길현 광신 공사(公社)  문화소(文化站)직원과  함께 심양으로 와이됴(外调)를 하러 갔을 때에 거기선 벌써 여론이 자자했다. 장춘 외조카도 이 문제에 대해   무척 관심을 보이면서 리공과 참고서를 부쳐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나는 룡정에 돌아와 그의 요구대로 예전에 보던 두툼한 참고서 3권을 우편으로 부쳐보냈다.  이해 9월에 들어서자 이런 여론은 룡정에서도 자자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한번은 내가 공사(公社) 병원에 병보이러 가니 약국에 앉아 있던 한족 녀 회계가 다른 사람한테서 거의 10권에 달하는 참고서를 받아들고 만족해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자기 아이한테 주어 복습하게 하겠노라고 한다. 가을철에 동흥대대에서 일피삼반(一批三反) 동원회의를 소집하고 원 대대회계의 탐오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격리심사를 하였다. 그때 나는 집체호의 지식청년인 뜨락또르 운전수와 함께 파수를 섰는데 그 운전수는 직무를 수행하는 한편 숱한 교과서를 책상 우에 놓고 자습하고 있었다. 나는 그저 마음속으로 과연 세상이 달라지는가 보다고 혼자 생각에 잠겼다.  10월에 들어서자 교육계통에서는 이미 정식으로 대학시험 회복을 공포(公布)한 모양이였다. 뜬 소문에 의하면 11월에 대학시험을 치른다고 한다. 응시생은 지식청년뿐만 아니라 금년에 졸업한  중학생들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학교들마다 각종 복습제강을 인쇄해 배부했다는 것이다. 그중에는 길림대학 복습제강이요, 남경지구 시험문제요, 북경지구 수학경색문제요, 연변대학 정치문제 답안이요…… 가지각색 복습자료들이 이미 널리 전파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고중학교들에서는 지식청년으로 농촌에 내려간 본교 졸업생들에게 일일이 복습자료들을 부쳐보냈다는 말도 떠돌았다. 그러자 지식청년들은 가을 탈곡이요, 대채(大寨)식 농촌건설이요 하는 것을 다 집어 던지고 도시로 돌아와 모교에 가서 매일 오후와 저녁 시간에 꾸려지는 복습반에 참가한다고 한다. 그리고 매일 새벽이 되면 조용한 학교 구석구석마다 긴 군인용 누런 솜외투를 걸친 재학생과 귀가한 지식청년들이 입으로 뭔가 중얼거리며 복습문제를 외우더라는 것이였다. 내가 출퇴근 할 때마다 해란강반과 철교 아래서 응시생들이 책을 감아쥔 손을 등에 지고 머리를 숙이고 왔다갔다 하며 뭔가 외우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생각 안 나면 뚝 멈춰서서 복습제강을 둘춰보곤 하였다. 그 바람에 농촌의 생산활동은 확실히 곤란에 빠졌다. 공농5대에서는 15명 청년이 몽땅 집체호 집안에 들어 앉아 공부하느라고 탈곡, 징구량(征购粮) 운송에 커다란 지장을 주었다. 광신대대에서 맡아하는  신화대대 제전(梯田) 공사장에는 수염이 거칠한 중장년과 대학시험을 서두루지 않는 몇몇 ‘무깍지’들만 남아서 일하고 있었다. 이에 대대서기 현철묵은 시험준비하는 칭년들에게 화를 내지 않고 그저 전화로 광신대대에서 빨리 다른 사람을 조직해 신화 제전 공사장에 파견하라고 재촉하곤 하였다.                 중앙 방송국에서 대학시험제도를 실시한다고 방송한 날 아침, 나는 신화대대에서 밥을 먹고 시내로 들어오다가 룡정 2중(연길현2중, 이하 같음) 에 들러 녀동생에게 복습제강을 얻어주려고 했다. 수학교연조에 찾아가니 룡정1중(연길현1중, 이하 같음) 시절에 우리를 가르쳤던 리충규 선생님께서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앉으라고 자리를 권했다. 점잖게 안경을 걸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씀하시는 모습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대학시험을 치려구? 그런데 시험제강은 이미 다 내보내고 없는데…”  이에 나는 말머리를 흐리고 그저 룡정1중(초중) 동기생이고 지금은 룡정2중(고중) 교원인  김*호를 찾는다고 했다. 리선생님은 나에게 본관과 따로 떨어진 작은 건물에 있는 물리교연조를 찾아가보라고 찾는 방법까지 상세히 알려주었다.  내가 물리교연조에 들어서니 김*호와 역시 룡정1중 동기생인 김*숙이 앉아 있는 것이였다. 김*숙은 무슨영문인지 우울한 표정을 하고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다. 그래도 김*호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내가 찾아온 리유를 말하자 딱한듯이 제강은 이미 오래전에 다 배부하고 없다는 것이였다. 좀 실망스러웠으나 내색하지 않고 김*호에게 금년 대학시험에 참가하느냐고 물었다. “글쎄, 오늘 아침 중앙방송을 들어보니 로삼계(老三届,66년급, 67년급, 68년급 고중 졸업생) 중에서 실천경험이 풍부하고 발명창조가 있는 사람은 시험 자격을 준다고 합데, 그래서 좀 참가해볼까 하는데… 그런데 당신은?”김*호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나서 나에게 되묻는다. “내사 어디 볼게 있소? 10년 동안 농촌에 있으면서 고중시절 교과서를 전혀 보지 않았지, 게다가 발명창조라는건 더 말할나위없지, 안될게 뻔하오.” 그토록 바라던 대학시험이건만 나는 자존심을 구기고 맥없이 대답하였다. 본래 말수가 적고 서생티가 나던 김*호는 오늘따라 흥분하여 이것저것 찾기도 하고 앉았다 섰다하며 말도 많이 했다. “당신네 룡정3중 고중 동창생 박*호도 우스개 소리로 정규적인 대학시험을 치르고 다시 한번 대학에 다니고 싶다 합데. 농촌에서 추천받아 대학 간 사람이라고 자기를 별로 높이 안 보더라면서. [주: 나의 룡정3중(연길현3중-한족고중, 이하 같음) 동창생 박*호는 원래 지식청년으로 농촌에서 추천돼 길림공업대학에 입학했음, 초중시절에는 룡정2중에서 공부했는데 룡정1중의 김*호와 함께 수학 천재라고 불리웠음]  나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주위를 살펴보았는데 방 한 구석에 하남대대 민병련장이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두툼한 종이말이가 쥐여져 있었다. 내가 웃으며 아른체 하자 그는 게면쩍어 하면서 “대학시험을 좀 치러볼까해서 모교 선생님들을 쫓아다니며 제강 몇권 얻었습니다.”라고 말한다.  나는 김*호와 작별하면서 그에게 대학시험을 잘 치르고 청화대학에 입학하도록 노력하라고 진심으로 축원하였다. 그날 비록 복습제강은 얻지 못했으나 김*호의 기뻐하는 표정과  흥분된 어조에서 뭔가 예전에 없었던 새로운 느낌을 받았다. 그와 같은 수학천재는 반드시 대학에 입학해 나라의 중요한 인재로 육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속으로 착잡하게 떠오른 부러운 마음과 렬등감을 가라앉히고 나의 일터 – 동흥대대 대채전(大寨田)공사장으로 묵묵히 발길을 옮겼다.   11월에 들어서자 신문에서는 금년에 대학생을 모집할 전국 각 대학과 성내 대학의 전업(학과)을 공포하였다. 그리고 기층 초생공작(基层招生工作,학생모집 사업)도 시작되었다. 연길현에서는 4일간 공사 당위서기와 교육보도원이 참석한 초생공작회의가 소집되었고 11월 14일 전까지 응시생 보명(报名, 등록) 공작을 끝내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나의 마음은 저으기 들뜨기 시작했다. 어느날 동흥대대 대채전 공사장에서 뜨락또르를 수리하고 있는 로삼계 고중생인  장*규를 만나 이말저말 나누기 시작했다. 소학교부터 초중까지 한 학교에서 같이 공부했기에 서로 “야, 자”하는 사이였다. 보아하니 지금 그도 나처럼 무척 마음이 들떠 있었다. “야, 병활아, 우리 대학시험을 치르자. 밎져야 본전인데. 나는 이미 시험 치르기로 작심했어. 너도 그럴테지, 너야 복습하나마나 책을 한번 훑어보면 될걸 가지구. 복습시간이 딸려서 리공과가 안 될 것 같으면 문과라도 치르려무나.”  그의 강권에 나는 확답을 주지 못하고 맥없이 대꾸했다. “글쎄, 전번에 현 교육국을 찾아 갔는데 초생공작을 책임진 최주임이 내가 문과를 치르려 한다고 하자 단마디로 ‘에이구, 치르지도 마오, 30살 되는 지식청년에게 시험자격을 주는 건 리공과 인재를 뽑자는게 주요 목적이요. 문과는 나어린 재학생 가운데서 얼마든지 뽑을수 있는게요 ’라고 하더란 말이다. 생각해 보니 그의 말에 일리는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하물며 전국에 문과를 설치한 종합대학이 얼마 안 되지, 종합대학 내에서 문과는 20%도 안된다고 하던데. 나처럼 이미 결혼하고 애까지 있는 문과 지망생을 누가 받아주겠나? ” 장*규는 기름 묻은 손으로 기계를 수리하며 가슴에 쌓였던 불평을 내뿜기 시작했다. “제길할, 안될놈은 그저 이렇다니까, 서른살 거의 먹도록 서방(결혼)가지 않고 대학 가기를 기다렸는데, 금방 서방가자마자 대학시험이 회복됐단 말이야. 몇해전에 농촌에 내려왔던(插队) 장춘 어느 대학 선생님이 떠나갈 때 책을 놓지 말고 공부를 계속 하라고 하더라. 그러면서 지금 입학시험 없이 농촌에서 추천받아 대학에 가는 것은 다 ‘처지바단’인데 앞으로 반드시 대학시험제도가 회복될거라면서 말이야. 나는 그의 말만 믿고 재작년까지 책을 놓지 않고 자습을 했댔다.  한 일년만 앞당겨 시험제도가 회복돼도 결혼은 안 할 건데, 제길할…”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다시 용기를 내여 나에게 말한다. “야, 우리 실망하지 말고 시험 치르자. 나는 수리과(数理课)가 문제 없으니 정치, 어문만 공부하면 된다. 너는 정치, 어문은 문제 없을 테구, 수학만 보면 되지 않겠니?” 그는 이미 결혼한 로삼계 지식청년 중에서 자기만 시험에 참가하는 것이 쑥스러운 모양인지 자꾸 나를 들쑤시는 것이였다.   어느날 내가 공사 문화소에 들어서니 공사 부녀주임 김*옥이 책상앞에 꼿꼿이 앉아서 기다란 팔로 신문을 번지며 이따금 수첩에 뭔가 적어넣는 것이였다. 나는 대뜸 그가 대학시험 준비를 한다고 짐작했다. 아니나 다를가 좀 지나자 그는 옆에 앉아 있는 공사 무장부 ㅎ부장과 나에게 이것저것 정치과 복습문제를 물어본다. 대학생 출신인 ㅎ부장은 유식한 자태로 일일이 대답해 주는데 내가 옆에서 듣기로는 별로 만족스러운 답이 아니였다.  문화소 소속인 영화방영대 조선말 해설원 서*학이는 재간둥이였는데 그도 대학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였다. 그런데 공사 지도부에서 자꾸 영화 방영 임무요, 대채전 공사 소식 방송 임무요 하면서 복습시간을 주지 않자 짜증을 내는 것이였다. “오늘 오후 광신 중학교에서 화학과 보도(辅导)를 합니다. 화학과는 나에게 있어서 제일 약한 고리인데 또 빠지게 됐으니 어쩌면 좋습니까? 이러면 내일은 아예 나오지 않겠습니다.”하며 두덜거리는 것이였다. 그러자 우리 모두 그의 딱한 사정을 리해하고 그렇게 하라고 했다.     유신대대의 한 젊은 녀성이 아이 둘이나 있는데도 대학시험을 치르려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원래 학교시절에 학습성적이 괜찮았는데 복습제강을 한번 훑어보더니 자신만만하여 대학시험에 참가하겠단다. 그러자 그의 남편이 반대하지 않고 순순히 동의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 그녀는 시험장에 나타나지는 않았다.   내가 살고 있는 광신대대는 룡정 시내와 해란강을 사이두고 있고 또 농학원도 지척에 있어 비록 농촌일지라도 문화분위기가 농후했고 교육을 아주 중시하는 곳이였다. 그리하여 마을에는 예전부터 고중 졸업생들이 많았고 나와 같은 많은 로삼계 고중졸업생들은 대학을 가지 못하고 마을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중 3대의 최*권이도 시험에 참가하려고 말없이 두달전부터 복습했다고 한다. 평소에 어리무던한 그가 시험을 준비한다는 말을 듣고 어떤 사람들은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그는 1966년 고중 졸업생인데 마을 로삼계 고중생 중에서 제일 먼저 결혼해 벌써 소학교 다니는 딸애까지 있었다. 그의 안해는 일터에서 늘 자기 남편 자랑을 하는데 남편이 학교시절에 어떻게 공부를 잘했고 지금 복습문제 풀이도 아주 쉽게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한단다. 4대 리*학이는 학교시절에 달리기도 잘 하고 공부도 잘 해서 대학에 붙을 가망이 있다고 옆사람들이 말하는데 그 자신은 여태 시험준비에 대해 내색을 하지 않고 있다. 1대의 김*산은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니 대학시험에 합격될 확률이 아주 높을 것 같은데 역시 소식이 없다.  2대의 황*무도 대학시험에 자신만만하다고 하는데 안해가 극력 반대하면서 “아이를 둘이나 두고 무슨 공부를 한단말이예요? 집식구들이 다 굶어죽을거예요.”라고 질타를 하는 바람에 어쩔수없이 시험을 포기했다고 한다. 물론 그 시절 안해들이 남편이 대학 가는 것을 반대한 리유 중에는 남편이 대학 가면 농촌의 안해가 싫어져 같은 대학생 애인을 찾는다는 것, 일단 졸업하면 신분차이가 나기에 리혼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가정생활이 화목할수 없다는 것, 등등 리유도 있었다.   우리 3대 아낙네들은 내가 잠잠해 있는 것이 궁금해서 일터에서 늘 안해에게 눈치를 떠보면서 묻는다고 한다. “남들은 다 시험준비를 한다고 야단인데 수동이 아버진 왜 소식이 없소?” “여태까지 일에 매달리면서 전혀 복습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되겠어요?’ “에이구 별소리를 합네, 그래도 수동이 아버지사 어릴때부터 공부를 잘 했는데 왜 안 되겠소? 복습 안 해도 다 알지비. 나머거리(나이 든 사람) 고중생 중에 대학에 붙을 사람은 그래도 수동이 아버지밖에 없습네. 집에 가서 시험 치르라고 말해 보우.” 아낙네들의 이런 말을 들으면 마치 나의 일에 대해 자신들이 더 안타까와 하는 눈치였다고 한다.           1977년 - 대합입시를 회복하던 나날에 (2)    공사 지도부에서는 이제부터 시험준비를 하는 젊은 간부들에게 기층 생산대에 내려가는 임무를 주지 않고 마음놓고 공부하게 한다는 것이였다. 나는 한동안 시험에 참가할 것인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가 시험날짜가 20일도 안될때에야 비로서 결단 내리고 입학지원서를 제출하였다. 그때 이일을 책임진 교육보도원 김*일은 룡남대대에 자리잡은 주 공작대 숙소에서 사무를 보았다. 내가 그 집에 들어서니 원래 광신대대 집체호 지식청년이였던 공사 부서기 장*희가 한창 입학 지망 전업을 선택하고 있었다. 그는 아주 신중하게 여기저기 고르다가 나중에 중앙민족학원(대학) 간부 훈련부에 지망을 써넣었다. 공사직속간부 중 시험준비를 하는 사람이 모두 3명인데 전부 중앙민족학원(대학) 간부훈련부를 지망하였다. 사람들은 이 세사람 중 한명만 입학해도 괜찮은 것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주 공작대 오태호 대장이 거처하고 있는 방에서는 나어린 두 청년이 둥그런 밥상에 마주 앉아 진땀을 뻘뻘 흘리면서 입학지원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들 둘은 한어 수준이 형편없이 낮았는데 한어로 지원서에 해당사항을 쓸줄 몰랐다. 할 수 없이 교육보도원이 대신해 써주다싶이 하였다. 그들이 낑낑 갑짜르며 지원서를 쓰는 것을 보고 오대장은 너무 보기가 답답해서 련신 “이게 다 ‘4인방’의 류독(流毒,여독-余毒)이라니.”라고 몇번이고 혼자서 되뇌이는 것이였다. 두 청년은 자리를 뜰 때 민망스러운지 저희들끼리 “조선어로 시험 치를수 있다고 하니 어떨까해서 해보려고 했는데, 안 그러면 접어들지도 않았을 걸…”라고 중얼거리고는 멋없이 나가버린다.    각 대대에서 교부한 입학지원서들이 륙속 교육보도원에게 집중되였다. 살펴보니 규정(격식)에 맞지 않는 지원서들이 수두룩하였다. 문과와 리공과 전업을 분간 못해 모두 한 곳에 섞어서 몰아 쓴 것이 있는가하면 수준이 제일 낮은 일반 전문학교를 제1지망에 써넣고 수준이 제일 높은 중점대학교를 제3지망에 쓴 것도 있었다. 어느 소학교에서 민영교원을 한 적이 있는 ZB는 지망한 전업을 전부 조선어로 써넣었다. 이걸 보고 교육보도원은 저으기 화난 말투로 “소학교 교원을 했다는 사람이 이 정도의 상식도 모르고, 어쩌면 여기에다 조선어로 쓴담?”라고 투덜거렸다. 북경대학, 청화대학과 같은 어마어마한 대학을 지망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길흥대대 몇 명 청년들은 3개 지망 중에서 단 한개 지망만 써넣었는데 전부 청화대학이였다. 아마 안될바엔 장난삼아 써넣고 청화대학을 지망했다가 안 됐다는 말이나 들어도 괜찮겠다는 심사였는지 모른다.  떠 도는 소문에 의하면 연변농학원은 지망하는 응시생이 적어서 지망을 써넣기만 하면 성적이 높든 낮든 막론하고 전부 입학시킨다는 것이였다. 후에 알고보니 이는 완전히 요언에 불과했다. 또 일본어전업은 조선족을 모집하지 않는다는 소문도 굉장히 널리 펴졌다. 한 집체호 청년은 지원서에 일본어전업을 지망했다가 이런 소문을 얻어듣고 교육보도원을 찾아와 “참 모를 일입니다. 왜 한족만 일본어를 배울수 있고 우리 조선족은 안 된다는 겁니까?”하고 불평부렸다.  이 무렵 공사 교육보도원이 발부한 공백 입학지원서는 총 800부였는데 실제 교부된 것은 500부도 안 되였다. 그러니까 300여명은 이런저런 리유로 시험을 포기한 셈이다. 길림성의 상황도 대체로 비슷해서 응시생들이 예상했던 수자보다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후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적지 않은 기층 단위에서는 생산임무를 완수하지 못할까봐 황당한 조건들을 자체로 제정해서 이른바 ‘정치심사’를 하고 응시생 신청을 제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대혁명과 ‘4인방’의 여독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이른바 ‘흑색’ 출신성분(黑五类) 과  여의치 않은 친척 사회관계로 적지 않은 지식청년들이 시험자격을 박탈당했다고 한다. 이에 반해 출신성분이 좋은 청년들이 시험에 참가하는 것을 주저한 원인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망신이고 앞으로 자신의 발전에 영향 준다는 것, 둘째, 출신성분이 좋으니 대학을 다니나 마나 좋은 직업이 마련될수 있다는 것, 셋째, 있는 힘 다해 겨우 간부직에 올랐는데 본 단위에서 지지하는 눈치가 안 보이니 그냥 시험에 참가하겠다고 고집하면 정치발전면에 불리하다는 것, 황차 몇해후에 대학을 졸업한다고 해도 자신이 원하는 간부직이 차려지지 않을수도 있다는 것, 등등이다. 이런 상황을 파악한 상급 지도부에서는 기층단위에 사상공작을 해서 지식청년들이 적극적으로 시험에 참가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중앙 방송과 신문에서 이런 사상문제를 해결하려는 소식과 보도가 자주 다루어지자 응시생들에 대한 기층 지도부의 태도는 일변되었다. 쉽게 말하면 응시생들이 많을수록 당중앙에서 새롭게 회복한 대학시험제도가 만민의 옹호와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실증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 이전에 나는 신화대대 제전 공사장에서 공사간부들에게 롱조로 대학시험에 참가해 북경의 명문대학에 가고 싶다고 말한적이 있다. 그러자 직설적인 성격으로 유명한 공사 제일 책임자 량서기가 “흥, 코밑의 대학(연변대학)도 못가는 주제에 북경의 명문대학을 바라보는군.”하고 어이없다는 듯이 랭소를 보내는 것이였다. 그후 동흥대대 대채전 공사장에서 공사지도부의 나젊은 부서기 ㅎ서기가 공사장에 공사간부가 몇 명 안되는 것을 보고 나더러 공사장에 밤낮으로 남아 할일을 하라는 것이였다.  그런데 내가 대학 시험에 참가하련다는 말을 듣고 실망스럽다는 듯이 “정말 시험 칠 작정이요? 시험을 치르려면 제대로 공부해서 반드시 입학해야 하오, 반중건중, 얼렁뚱땅, 이런식으로 공부합네 하려면 아예 시험 을 포기하고 여기 공사장에서 할일을 하세요…”라고 말하고는 당장 공사장 일꾼들의 열의를 북돋아 주는 호소문과 기사들을 써서 방송할 임무를 맡기는 것이였다. 후일 ㅎ서기의 말에 의하면 공사에서는 응시생들이 너무 많아 생산에 영향을 주게 되자 먼저 공사 내부에서 예비 시험을 치르고 절반 이상의 응시생들의 시험자격을 취소한 뒤 그들더러 희망을 버리고 생산 로동에 참가하도록 하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중앙 신문과 방송에서 응시생들을 지지하라고 하는 바람에 이 계획을 실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앙 방송을 별로 듣지 않는 기층간부들은 여전히 응시생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였다. 어느 하루 나의 녀동생이 탈곡장에 나가니 생산대장이 다짜고짜 묻더라는 것이였다. “야, 너 대학시험에 합격할 자신이 있니?  “그걸 지금 어떻게 알겠어요. 시험을 치러봐야 알지요.” “넌 그래 어떨꿍해서(요행을 바라고) 시험 치르니?” “글쎄요, 누가 100%로 대학에  입학한다고 시험치르나요? 대학에 붙으면 좋구, 못 붙으면 할수 없구요…” “야, 너무 치사하다(수치스럽다), 빨리 싹싹 걷어치우고 나와 일이나 해라.일손이 딸려 죽을 지경이다.” 녀동생이 이말을 들으면서 눈치를 보니 평소에는 아주 상냥하던  생산대장이 농담이 아니라 정색해서 화를 내더라는 것이였다. 11월 중순에 공사 지도부에서는 길흥대대 구락부(大礼堂)에서 공사 당원대회를 소집하였는데 량서기가 각 대대의 응시생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그들이 해야할 일들을 다른 사람들이 대신 감당해 나서라고 동원하였다. 그러면서 기층간부들이 쉽게 달통되게 하려고 통속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였다. “우리에게는 영웅심이 있어야 합니다. 연길현에서 그래도 한다하는(여러면에서 명성이 높은)  우리 광신 공사에서 많은 응시생들이 대학에 입학하면 그건 우리 모두의 영광입니다. 우리가 그만큼 지지를 잘했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요. 대학 모집은 한낱 중요한 국가대사입니다. 4개 현대화를 실현하는데 있어서 후계자가 없어서 되겠는가? 룡정1중, 룡정2중에서 응시생들이 50% 합격되면 우리 광신공사에서도 50% 합격돼야 하는겁니다... ”  아무튼 이번 댕원동원대회를 통해 기층간부들의 사상은 크게 전변되였다고 볼수 있다. 한번은 내가 공사 판공실(办公室)에 들어서니 판공실 ㅌ주임이 나에게 선참 말을 건넨다.  “병활이, 대학시험 치르기로 했소?   … 시험 날짜도 긴박한데 수학은 나한테 와서 배우도록 하오.” ㅌ주임은 연변대학 수학계 졸업생인데 내가 광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한 학교에서 중학반을 가르쳤다. 그때 어느 한번 학교 교원중에서 대학생 추천이 있었는데 나는 그에게 대학에 가고 싶다는 마음을 털어놓은적이 있었다. 그리고 5년전 1972년에 추천과 대학시험을 결합해 대학생 모집을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초중 동기생인 김*산과 함께 당시 공사 공청단서기로 있었던 ㅌ서기를 찾아가 대학에 가고 싶은데 힘써 도와주기를 바랐다. 당시 그는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내가 공사 문화소에 온후 그는 예전에 서로 모르는 사이라는듯 나에게 비교적 랭담한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이번 공사 동원대회가 있은 뒤 아주 친절해졌고 얼굴에 웃음을 띄우면서 자진해 수학과목 보도까지 해주겠다는것이였다. 그리고는 김*산이도 대학시험준비를 하느냐고 묻는것이였다. 아마 5년전 우리 둘이 도움을 요청했던 일이 생각난 모양이다.  당시 광신 문화소(文化站)는 민영 단위로서 현내 다른 공사 문화소와는 달리 유선 방송소, 영화 방영대를 포괄하였기에 직원이 비교적 많았다. 문화소 당지부서기 함*춘은 소장 직무를 맡은 나를 만나기만 하면 시험 공부를 잘 하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이였다. 그러면서 중요한 일이 있으면 의례 나와 상론해야 하는데 나의 부담을 덜기 위해 자기 혼자 바삐 돈다고 했다. 또 문화소 미술공(美术工) 영철이에 대해 칭찬을 하는것이였다. 영철이는 입학원서를 제출하고도 시치미를 떼고 매일 출근하면서 밤시간만 리용해 공부를 한다는 것이다. 이걸 모르는 함서기는 영철이가 시험을 포기한 줄로 알고 다른 한 미술공에게만 시험 공부할 시간을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시험 기일이 다가오자 시험에 참가하겠으니 말미를 달라고 하자 그제야 깨닫고 아주 감동되여 칭찬했다고 한다.  시험 등록을 한뒤 시험자격증(准考证)을 발급해야 하는데 이 기간 2층으로 된 룡정 사진관은 응시생들의 증명사진을 찍느라고 매일 집안이 터질 지경이였다. 사진관에서는 밤낮으로 근무시간을 연장해 사진을 찍고 현상하였다. 예전에 천천히 하던 일을 속도를 내서 했는데 보통 오전에 사진 찍으면 오후에 사진이 나오곤 했다. 그러다보니 촬영수준이 낮은 사진사를 림시로 고용해 대신 사진을 찍기도 해서 사진 질이 떨어지기 마련이였다. 내가 찍은 1촌 증명사진도 얼굴이 어찌나 보기 흉했던지 마치 거의 40세가 되어가는 사람으로 보였다. 이처럼 나티가 나고 이그러진 얼굴을 보고 어느 누가 모집해 가겠느냐고 걱정돼 시험자격증의 1촌 사진을 떼내고  비교적 젊어보인다고 여긴 2촌짜리 사진을 비슷한 크기로 베여내 교체했다. 그제야 안심하고 시험자격증을 바라보면서 나는 감개무량하였다. 드디어 서른살 먹은 나에게 꿈에도 바라던 대학시험 자격이 차려지게 됐구나, 대학에 가고 못가는 것은 둘째치고 고중 졸업후 10년동안 농촌에서 전전하다가 드디어 대학시험에 참가할 수 있다는것만으로도 한이 풀릴것 같았다. 1977년 - 대합입시를 회복하던 나날에 (3)      대학시험을 치르는 첫날 아침, 안해는 우리민족의 습관대로 찰떡칠 준비를 부지런히 하고 있었다. 그전엔 잘 몰랐는데 시험 보는 날 찰떡을 먹으면 신수가 좋아져 시험에 합격될수 있고 만약 국수를 먹으면 시험에 미끄러진다(락방)는 것이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문을 나서는데 안해가 기어이 동행하겠다는 것이다. 사실 안해도 내심으로 대학에 무척 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시집오기전에 연변의학원에 추천된 적이 있었다. 가정 출신성분이 좋고 친척 사회관계에 문제 없으며 본인의 정치사상표현도 좋은데다가 지식청년으로 귀향한후 줄곧 위생소 간호사로 일하고 있으니 어느모로 보나 연변의학원에 가는 것이 문제 없어 보였다. 그래서 공사 교육보도원은 “ 우리 공사에서 네가 대학 못가면 누가 갈수 있겠니?”라고 장담했다 한다. 그런데 고대하던 입학지원서는 웬영문인지 끝내 오지 않았다고 한다. 본인도 급해났지만 일찍 대학가는 걸 걱정말라고 장담했던 공사 교육보도원도 당황해 상급 교육국 등 관련부처에 달려가서 알아보니 누군가가 최후 심사단계에 안해를 밀어내고 다른 사람을 교체했다는 것이였다. 화가난 안해가 상급에 상소하려고 하자 권세 있는 자들이 한 짓이니 상소해도 별 소용이 없다고 곁에서 말리더라는 것이였다. 이처럼  마음에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는 안해가 오늘 겉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시험장까지 수험생 남편과 동행하는것으로 대학에 가고싶은 자신의 마음을 달래는 한편 남편의 성공을 기원하는것 같았다.  룡문교에 이르자 많은 수험생들이 다리를 메우며 룡정3중 시험장으로 향하는 것이였다. 이런 수험생들의 모습은 십인십색이였다. 나처럼 나이 많은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방금 졸업한 나어린 청년들도 있다. 머리와 목에 예쁜 털수건을 두루고 솜바지에 구두를 받쳐 신은 도시 처녀들이 있는가 하면 머리에 네모난 ‘채깝’수건을 삼각형으로 접어서 머리에 쓰고 보풀이 난 낡고 얇은 솜옷을 입은 농촌처녀들도 있다. 그리고 북방사람과 기질이 다른 상해 지식청년들도 련인인양 보란듯이 쌍쌍이 어깨를 나란히하고 걸어갔다. 오늘 수험생 중에는 본기 졸업생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왼팔에 홍위병 완장을 두른채로 무리를 지어 옛날 일본령사관 자리에 있는 현혁명위원회(현정부) 사무청사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저으기 흥분된 기분에 웃고 떠들며 복습문제 해답을 토론하는 애들도 있었다. 아마 룡정2중 시험장으로 가는 모양이다.  내가 도착한 시험장소는 룡정1중이다. 룡정1중은 옛날 만주땅에서 조선인 명문학교로 잘 열려진 대성중학 옛터로서 아버지가 일찍 광복 직후에 여기서 교편을 잡고 수학과 어문을 가르친 적이 있다. 옛날 대성중학은 아버지의 모교였고 해방후 직장이였는데 오늘의 룡정1중은 나의 초중 모교이기도하고 문화대혁명 이후 대학시험제도를 회복하고 제1기 대학생을 모집하는 시험장소이기도 하다. 내가 시험장에 도착했을 때 아직은 시험시간전이여서 입장할수 없었다. 앞가슴에 무슨 글씨를 쓴 노란 명주천을 드리운 나어린 홍위병(학생)들이 시험장으로 통한 복도 출입구를 지키고 있었고 어떤 홍위병들은 땔나무와 석탄을 얻어 시험장 난로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내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우연히 초중 동기생 최*자를 만났다. 그는 원래 룡정1중에서 나와 함께 룡정3중(한족 고중) 입학시험을 치렀는데 락방되어 이듬해 룡정2중 고중에 입학하였다. 이미 나와 동갑이 된 나이인데 여태 시집가지 않았다 한다. 아마 대학에 가려고 그리하였던 것 같았다. 로삼계 동기생인 우리로서는 완전히  그의 마음을 리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서로 인사를 마치자마자 그는 같이 온 녀청년과 함께 나에게 어려운 수학문제를 물어보는것이였다. 내가 아는 정도로 대충 설명했지만 리해가 잘 안된다는 눈치였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이번 응시생 중에는 초중 1학년 때 문화대혁명을 맞이하고 농촌에 내려간 지식쳥년들도 상당히 많을 것인데 그들의 수준을 고려해서라도 아마 이렇게 어려운 문제는 출제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긴장된 마음을 위안하였다. 나는 또 여기서 오랜만에 초중 동창생 김*태를 만나게 되였다. 색이 난 누런 군용 솜외투를 몸에 걸친 그는 원래 우리반에서 나이가 비교적 어렸고 키도 크지 않았는데 지금은 키가 훨씬 커졌다. 그는 부리부리한 두눈에 웃음을 담고 “야, 너 왜 여기 왔니?”하고 묻는 것이였다. 그의 물음을 들으면서 나는 얘가 나를 수험생으로 간주하지 않는 모양이라고 여기고 저도 모르게 롱조로 “공사에서 나더러 우리 공사 수험생들이 제대로 도착하고 입장하는지 살펴보고 돌봐주라고 해서 왔다.”라고 꾸며댔다. 하지만 그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였다. 김*태는 현 농구공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공령이 5년 이상이 되기에 대학에 가도 월급은 그대로 받을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대학시험에는 자신감이 별로 없어 보였다. “내 원참, 시험 날짜는 바득바득 다가오는데 온 집안에 불상사만 생겨서 부산하기 짝이 없단 말이야. 아버지가 급병으로 입원했지, 아이라는게 자꾸 앓지… 어디 공부할 기분이 나는줄 아니?” 하긴 나도 가정형편이 그보다 별로 나은게 아니였다.  시험장 입장을 알리는 예령(预铃)이 울리자 나는 옛 대성중학 교무청사 뒤에 남향으로 지은 단층 교학청사 45호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이 시험장에는 광신공사 수험생들이 많이 들어온 것 같았는데 내 앞자리엔 키다리 부녀주임도 앉아 있었다. 공교롭게도 시험감독은 초중 시절 우리에게 지리를 가르쳤던 리기춘 선생님(우리학년 1반 담임선생님)이였다. 그는 예전처럼 엄숙한 모습을 하고 교단에 올라섰다. 나는 서른살 먹도록 대학에 가지못하고 이제야 자기 제자와 같은 어린애들과 함께 대학시험을 치른다는 것이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이고 감히 선생님을 쳐다 보지 못하고 책상만 내려다 보았다. 만약 이 시각에 선생님이 나를 알아본다면 칭찬할것인지 비웃을것인지 모를 일이였다. 하지만 10년동안 대학에 가지 못한 것이 어디 나의 잘못이란 말인가? 초중 시절에 나는 전반 학년 여러 개 반급에서 유일하게 한어로 입학시험을 치르고 한족고중에 입학한 우수생이였다. 하지만 이 10년 사이 어쩌면 내가 허송세월한 것 같다. 남들은 문화대혁명 중에도 소요파(逍遥派)로 있으면서 외국어 하나를 정통하기도 하고 대학 과목을 자습하기도 했다는데 나는 도대체 뭘 해놓은 일이 있나?  생각할수록 ‘4인방’이 이가 갈리도록 미워났고 덧없이 세월을 보낸(蹉跎岁月) 내가 후회되기도 했다. 그런데 시험감독 두분은 이외로 66년, 67년 고중졸업생들을 조사한다. 나는 그물에 걸린 새마냥 할 수 없이 손을 들었다. 리기춘 선생님은 나를 주시해 보다가 10여년전의 김병활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는 표정이였다. 늘 엄숙하던 그의 두눈에는 일락말락 광채가 빛나는것이였다. 그는 교단에서 천천히 내려와 내곁에 다가서서 시험자격증을 들여다 보는것이였다. 은사님 앞에서 나는 더는 앉아만 있을수 없어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선생님은 연신 “앉읍소, 앉읍소.”라고 말하면서 모르는 사이라는듯 더 아른체 하지 않고 수첩에 나의 수험번호를 적어가지고 교단에 돌아갔다. 아마 시험감독으로서 사생관계를 다른 수험생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모양이였다.  리선생님은 가슴에 검은색 글씨로 감고(监考)라고 쓴 붉은 비단천을 달고 종전과 마찬가지로 위엄을 잃지 않은 모습으로 교단에 서서 또박또박하게 조리있는 발언을  시작했다. “영명한 령수 화주석께서 ‘4인방’을 일거에 타도하였기에 나는 오늘 영광스럽게 대학시험장 감독을 맡게 되였습니다. 그리고 동무들은 또 영광스럽게 응시자격을 가지고 대학시험장에 앉아 조국의 선발을 받게 되었습니다…”그가 한창 발언을 하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더니 연길현 교육국 박두희 국장 ( 원 룡정 2중 교장, 후일 룡정1중, 연변1중 교장 력임)이 각 공사 교육보도원들을 거느리고 시험장에 들어섰다. 그뒤엔 젊은 경찰이 경복을 입은채로 따라들어와 위엄을 부리며 시험장을 한바퀴 돌아보는 것이였다. 경찰의 등장은 시험장의 분위기를 더욱 엄숙하게 만들었다. 우리 시험장에는 관신공사 수험생이 많은 관계로 공사 교육보도원 김*일은 몹시 수척한 얼굴로 빈자리를 세여 보더니 “이게 웬 영문이요? 오지 않은 사람이 꽤 되는군.”라고 중얼거리며 나가는것이였다.  그들 일행이 시험장에서 나가자 리기춘선생님은 시험기률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시험전 15분내로 시험장에 들어올것 [시험지 봉투를 개봉한 후에는 입장을 사절하고 시험자격을 취소함 [입장할 때 글쓴 종이를 휴대하지 못하며 입장후에는 책도 볼수 없음 [말(사담]을 절대 엄금하며 물을것이 있으면 손을 들고 기다릴 것 [담배를 피우지 못함 [한번 일어섰다가 다시 앉아 쓸수 없음 [시험지 앞면에 자리가 부족하면 뒤면에 쓸수 있되 절반 이상 초과하지 말 것 [감고원은 시험장에 자신이 알고 있는 수험생이 있으면 반드시 상급에 회보(보고)할것 … …  마지막에 리선생님은 현 관련부처에서 응시생들을 관심해 매인당 빵 배급표 3장씩 발급한다고 선포했다. 그러자 분위기가 잔뜩 긴장했던 시험장에는 이내 가벼운 웃음소리가 터졌고 좀처럼 웃지 않던  리선생님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후에 들은바에 의하면 식품공장에서는 원래 빵을 생산할 계획이 없었는데 이번 대학시험을 위해 서둘러 정지했던 빵 생산 기계를 다시 돌리고 밤낮으로 빵을 생산했다는것이다.      오늘 첫 시험과목은 수학이다. 일찍부터 대학시험제도가 반드시 회복되리라는 신념을 안고 미리 공부를 한 사람들에게는 수학이 별로 어렵지 않을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초중시절에 전교 수학경시에서 2등상을 수상한적도 있었다. 하지만 10년동안 교과서를 손에 들지 않고 있다가 시험날짜를 보름만 두고 여러 개 과목을 전부 목습해야만 했던 나로서는 수학시험이 그닥 쉬운것이 아니였다. 큰 시험문제 1번부터 4번까지는 쉽게 풀었는데 5번,6번은 어려웠다. 원래 나는 고중 2학년때 문화대햑명에 휘말려 들어가 3학년 과목은 전혀 배우지 못했다,. 그런데 5번, 6번은 거의다 3학년에 가서야 배우는 해석기하니, 미적분방정식이니 하는 문제들이였다.  그외 제일 아래에 부제(副题)가 있는데 30세되는 (리공과?) 응시생과 금년 졸업생은 될수록 풀어야 한다고 했다. 아무튼 마지막 해답결과가 틀리더라도 그 해답과정만 어느정도 맞게 써넣으면 점수를 조금이라도 줄거라는 생각에 나는 이 어려운 문제들을 열심히 풀어가느라고 애썼다. 하지만 시간이 엄청 모자랐다. 시험 종결을 알리는 벨이 울리자 모두들 긴 한숨을 몰아쉬고 복도로 퇴장한뒤 큰소리로 떠들면서 문제 해답을 토론하는 것이였다. 나는 그래도 급제점수는 맞을수 있겠지 하는 요행을 바라며 퇴장하였다. 학교 사무청사 아래층 한 창문에 ‘빵을 팝니다(卖面包)'라는 글씨를 쓴 종이가 붙어있는데 흰 작업복을 입은 영업원들이 빵이며 신바닥처럼 생겼다 해서 ‘신바닥 과자’라고 불리우는 긴 과자를 배급표를 받고 팔고 있었다. 외지 청년처럼 보이는 몇몇 나어린 청년들이 그곳으로 달려가 빵과 과자를 사먹고 있었다. 대부분 수험생들은 남들이 다 눈여겨보는 이런 곳에서 뭔가 사먹는 것이 째째하다고 여겼는지 곧게 대문으로 빠져 나가는것이였다.  나는 점심 식사를 하러 수험생 지정식당 중의 하나인 량식관리소 식당에 갔다. 만나는 사람마다 화제는 수학시험문제 해답이였다. 나는 안해가 도시락에 넣어준 찰떡을 광신6대 청년 리*철이와 함께 나누어 먹었다. 원래는 점심 시간에 정치문제를 복습할 생각이였는데 그럴 시간이 없었다. 부랴부랴 식사를 마치고 교문에 들어서니 마침 정치시험 시간을 알리는 예령이 울리는것이였다. 농촌에서 온 수험생들은 지정 식당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먼거리에 있는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한 탓에 지각생들이 꽤 있었다. 이때 룡정1중에서 키가 훤칠하고 미남선생님으로 존경 받던 김인호 선생님이 지금은 대학입학시험 실무 책임자인지 다급히 확성기를 창문턱에 올려놓고 대문밖에서 걸어오는 수험생들에게 빨리 달려오라고 웨쳤다. 내가 시험장을 둘러보니 5촌조카가 앉은자리가 비여 있었다. 녀동생도 지각하지 않았나 걱정되여 옆에 앉은 녀동생 친구에게 물으니 자기는 먼저 왔는데 녀동생은 다른 시험장이여서 오는걸 보지 못했다고 한다. 나는 농촌에서 일하다 온 5촌조카와 녀동생이 지각으로 시험자격을 취소당할까봐 저으기 걱정스런 마음을 조였다. 아닌게 아니라 정식 벨이 울린뒤에야 5천조카가 그때 유행되던 텁수룩한 머리를 하고 시험장에 들어서는 것이였다. 물론 시험 감독은 엄숙하게 “안 되오, 나가오.”라고 단마디로 명령하는것이였다. 할 수 없이 물러가던 5촌조카는 뜻밖에 키가 훤칠한 김인호선생과 함께 다시 들어왔다. 김선생은 시험감독선생을 보고 “이 학생더러 시험을 치르게 하오. 그리고 내게 수험생 번호를 따로 적어주오.”라고 말하자 5촌조카는 제자리에 앉아 시험을 보기 시작했다. (주: 그해 5촌조카는 락방되었는데 그날 오후 지각한 것이 원인이였지는 모르겠다, 2년후인 1979년에 5촌조카는 무난히 연변대학에 입학하였다.) 저녁에 녀동생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그들 시험장 감고원(시험감독)은 아주 인자하고 순직한 선생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몇분 정도 늦게 들어온 수험생들을 모두 들여보내 시험을 치르게 했다 한다.그런데 붉은 홍위병 완장을 두른 한 학생이 이일을 경찰에게 일러바치자 경복차림의 경찰이 급히 뛰어와서 따지고 캐물었다고 한다. “你们这个考场有没有迟到的?" 이에 감독선생이 “没有,几乎都按时入场的。”라고 대답하자 일러바친 홍위병이 “야, 내 다 봤는데두나.”라고 하자 감독선생이 여전히 태연하게 “你是不是看错了别的考场?最晚进来的也没有超过5分钟,那时补充试题还没有在黑板上抄完呢。”라고 말했다 한다. 하긴 그날 오후 일부 보충 시험문제(부제)를 흑판에 분필로 판서하였기에 시간이 지체된것도 사실이였다. 이리하여 점심에 식당을 찾지못해 헤맸던 근 10명의 지각생들은 무난히 시험을 치렀다고 한다.  대학시험 이튿날인 11월 29일에는 조선어문과 한어 두과목을 시험치렀다. 사실 이 두 과목은 내가 실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과목이였다. 나는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연변 인민출판사 ‘홍소병’간행물과 아동가요집에 동시, 노래가사, 산문 등을 여러편 발표하였는데 당시 유명한 편집 선생님들과 수차 대면한적이 있었다. 그중 연변노래 “고향산기슭에서” 작사자 김경석 선생님이 나의 원고를 보고 한번 대면하고 싶다고 하면서 마을에서 제일 루추한 우리집까지 찾아와 점심 식사도 함께 했다. 그때 안해가 점심 차리는 동안 우리 방에 누워있던 돌이 채 안되는 딸애가 낯선 김경석 선생님을 동그란 두눈으로 빤히 쳐다 보더니 귀여운 얼굴로 해죽해죽 웃는것이였다. 그러자 김경석 선생님은 너무 감동되여 “얘가 웃는 모습이 정말로 예쁘구만.”하고 감탄하는것이였다. (주: 김경석 선생님은 이일이 그냥 잊혀지지 않았던 모양인지 후일 연변대학 조문학부 신문학과에 와서 강의를 할때 나를 만나자 이일을 다시 확인하는것이였다.) 나는 공사 문화소로 전근한후 연변일보에서 소집한 농촌통신원 학습반에 수차 참석하였고 또 무게있는 기사들을 여러편 발표하면서 일보사 편집부를 자주 찾아다녔던 관계로 여러 편집 선생님들과도 교분이 있었고 그들의 지도를 받으며 글쓰기 능력도 크게 제고(향상)시켰다. 그리고 한족고중을 다녔기에 공사의 내부총화자료, 상급에 보낼 회보(보고)자료, 선진집체와 선진개인의 사적자료 등을 한어로 작성하곤 하였다. 그래서 내가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지망했다는 말을 듣고 어떤 사람들은 중문계를 지망해야 간부직에 쉽게 갈수 있는데 하면서 애석해 하였다. 아무튼 이 무렵 내가 시험 복습을 하지 않아도 대학에 갈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아마 이런걸 보고 미리 장담한것이라고 생각되였다.  조선어문 작문은 두개 제목 중에서 하나를 골라 글짓기를 하는것인데 나는 ‘4인방’이 타도된 후에 나타난 생기발랄한 기상과 희망에 넘치는 앞날에 대해 썼다. 이는 평소에 내가 관심했던 분야로서 서사, 서정, 의론 등 수사법을 충분히 활용해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감정을 아낌없이 쏟아냈다. 작문을 다 짓고 나서 나절로도 나에게 잠재해 있던 글쓰기 능력을 은근히 감탄할 정도였다.  후일 룡정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선생님이 그해 조선어문 작문에서 최고 점수를 맞은 수험생이 누군가를 알아보았더니 룡정의 김병활이더라고 하였다. 물론 작문을 포함한 조선어문 시험 성적도 최고 점수라고 한다. 이일이  룡정 시내와 광신공사에 파다하게 전해지자 처음에 나의 대학입학 가능성을 의심하던 사람들이 모두 승복하게 되였다.    이틀에 걸친 문화대혁명 이후의 첫 대학입학시험은 드디어 마무리 되였다. 그날 오후 시험장을 나설 때 무거웠던 나의 두 어깨는 홀가분해졌고 기분도 저도모르게 상쾌해졌다. 시험 성적이 합격선을 훨씬 넘을것 같은 느낌도 생겨났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이 세월의 일을 어느 누가 예측할수 있겠느냐. 1972년도에도 대학시험을 다 치르고 나서 시험지에 마구 락서한 장철생의 글로 인해 그해 대학시험제도가 전부 취소되지 않았던가. 지금은 물론 ‘4인방’이 타도되어 그런일이 다시 발생하진 않겠지만 출신성분과 친척 사회관계가 남들보다 여의치 못한 나로서는 아무리 성적이 높을거라고 예측되여도 불안감은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어쨌거나 “진인사, 대천명(尽人事待天命)”이라고, 해야할 일을 다 하고 남은 일은 하늘의 뜻에 맡긴다는 것이 나의 생활신조 중의 하나인것 만큼 나는 잡생각을 떨쳐버리고 다시 예전 모습대로 대채전 공사장에 나섰다.   (끝)      (이 글은 40년전에 쓴 일지인데 오늘 그 내용은 수정하지 않고 일부 문자만 약간 윤색하여 발표합니다. 당시 시대상황에 맞게 하려고 지금 사용하지 않는 일부 단어들을 그대로 두었는데 오늘의 독자들이 알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것은 한자를 병기하였습니다.)        
2    老伴喜欢养花 댓글:  조회:1661  추천:0  2014-11-08
  老伴喜欢养花, 她没有什么很高雅的艺术情趣, 但是对养花却情有独钟,家里的阳台和客厅合适的地方都摆满了花盆。 其中她最得意的花是君子兰。   君子兰曾经被称为皇家和望门贵族欣赏的名贵之花, 于是上世纪80年代有些人炒作, 一盆君子兰价值好几万元, 而当时人们所追求的梦是‘万元户’, 就有一个作家写了报告文学“疯狂的君子兰”, 一举出名。   老伴很少在别人面前夸耀自己的东西, 但是对君子兰却例外, 连连主动提起盛开的君子兰花, 好像夸耀自己的孩子长得多么漂亮一样…
1    화이부동(和而不同) 댓글:  조회:1940  추천:3  2012-11-17
  화이부동(和而不同)   ‘자로(子路)’편에서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 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라는 공자의 말을 적고 있는데 그뜻인즉 군자는 다름을 인정하고 다른 것과의 조화를 도모하는데, 소인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무엇이나 같게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군자는 남들과 사이좋게 지내되 자신의 정체성은 지킨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 고전인 에서도 “화실생물(和實生物), 동칙불계(同則不繼)”라 하여 다른 것끼리 만나서 조화를 이루고 협조하면 만사만물이 번창하지만, 이를 말살하고 동일하게 해버리면 지속되지 못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화이부동”과 비슷한 말로는 “화위귀(和為貴)” “화기생재(和氣生財)”등 성구도 있다. 동양전통음악에는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와 같은 서로 다른 5음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나의 명곡이 된다고 인정하고 있다. , 음악에 조예가 깊은 공자가 소악(邵樂)을 감상하면서 3개월이나 고기맛을 잊어버렸다고 하는데 그 소악도 틀림없이 5음의 조화가 굉장히 빼어났을 것이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충칭 대족석각(大足石刻)이 세인들의 눈길을 끄는 이유를 생각해보니 역시 유교·불교·도교가 공존하면서 ‘3교합일(三教合一)’을 이룬 조화의 미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요컨대 중국철학의 핵심정신인 화이부동(和而不同)을 구현한 명실상부한 세계적 문화유산이라 하겠다.  미국학자 헝팅턴이 ‘문명의 충돌’에 대해 경종을 울린지 여러해 지났건만 다사다난한 오늘의 지구촌을 두루 살펴보니 갈길이 멀었다는 느낌으로 마음이 무거워진다. 중국서남지역에서 성공한 많은 외래 기업가들은 대체로 이런 화이부동의 문화섭리를 나름대로 터득한 것 같다. 외지 사업가들이 생소한 중국서남지역에 와서 꿈을 이루려면 화이부동이라는 자세가 무엇보다 우선인 것 같다. “이 지역문화가 왜 이 꼴 이 모양으로 우리와 다르지?”라는 불만에 짜증을 내기보다도 화이부동의 관용적 자세로 이 지역 문화의 다른 점을 인정하는 동시에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같은 점도 찾아내 예기목적을 이룰 수 있는 맞춤형 대안을 세우는 것이 군자의 지혜라고 할 수 있겠다.  올 4월에 사천외대 한국어과에서 개최한  한국문화주 개막일에 한국외대 교환생들과 사천외대 한국어과 재학생들이 국적과 민족을 불문하고 하나로 어울려 예술축제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이런 조화로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우냐고  감탄과 축복이 한가슴 가득 차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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