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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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한 미니멀리즘적 분석 김경훈   1. 들어가면서 이번 호에 독자들 앞에 놓여진 박초란의 소설은 라는 중편이다. 제목을 접하는 순간, 어딘가 충격적인 듯한 짜릿함이 들었으나 읽어내려가면서 쭈욱 느꼈던 것은 미세하다 못해 자잘한 조각들이 선별 없이 가루처럼 쌓여가는 무의미하고 지루한 텁텁함이였다. 하지만 결말에서 마치 제목을 귀띔하는 듯한 한마디에서 다시 그 짜릿함이 돌아오고 내 머리 속에서 메아리치면서 그냥 지루하고 별 의미가 없는 내용은 아니라는 강한 부정에 두 눈을 크게 뜨고 다시 이 소설을 들여다보게 되였다. 그 순간, 내게는 반대방향으로 달리는 두개의 사건과 그 사건들보다 더 중요한 두개의 의미층이 차례로 다가왔다.    2. 버리기를 일삼는 ‘그녀’ 소설의 서두에는 녀자주인공의 엄마가 개발로 집안의 물품을 잃어버린 사건부터 다루어지고 있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엄마가 알뜰히 챙겨넣은 송이버섯된장이며 직접 지은 콩으로 메주를 쑤어 달인 간장이며 아끼던 크고작은 오래된 독과 단지들이며 천정에 두렁두렁 달아두었던 말린 명태와 고사리와 버섯들이며 항아리마다 가득했던 콩과 옥수수와 쌀들, 이외에도 한쪽 창고에 가득 장져놓았던 장작들과 석탄무지며 엄마가 장보러 갈 때면 쓰던 작은 끌차와 온갖 도구들, 남김없이 사라졌다. 엄마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 외에도 미처 기억 못한 것들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엄마의 손때가 묻은 것들이 사라졌다는 것은 말 그대로 엄마의 기억 자체를 지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엄마한테 자신의 그림자나 다름 없는 지난날이 저런 물품과 함께 사라졌으니 얼마나 황당하고 안타까운 일이였을가. 하지만 이 소설에서 작가가 주목하고저 하는 것은 그러한 ‘잃어버린 사건’이 아니다. 작가는 동네를 개발하면서 부주의나 무관심으로 발생한 ‘잃어버린 사건’ 자체보다는 엄마의 딸인 녀자주인공에게서 나타나는 ‘물건 버리기’증세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내기 위해 장치로 ‘잃어버린 사건’을 활용하고 있는 듯하다.    “처음 버리기로 작정한 것은 곰인형이였다. 그런 곰돌이인형이 왜? 왜! 집안에 있는 건지 한참을 생각했다. (중략) 넌 어데서 왔니? 인형 같은 걸 사들인다는 건 결코 내게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였다.”   친구가 막무가내로 맡긴 쏘파 밑에 숨어있던 곰돌이인형을 시작으로 녀자주인공은 주방양념을 버리고 소나무원목상까지 버리려고 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접시, 숟가락, 전기밥가마, 책, 옷가지 등등을 버린다. 그렇다면 주인공의 엄마가 잃어버린, 어쩌면 빼앗긴 물건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화가 날 정도로 아까워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왜 전기밥통까지 닥치는대로(?) 버리려고 하는 걸가?   3.  줏기를 일삼는 ‘그 남자’ 이 소설은 사실 사건중심이라기보다는 사건을 통한 주인공의 느낌이나 생각이 중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보아왔던 ‘버리다’란 사건과 함께 이 소설의 또 다른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라고 한다면 바로 그 ‘버리다’의 반대가 되는 ‘줏다’이다.    “이번에는 그는 곧장 문을 열고 한달음에 쓰레기통 앞으로 달려나간다. 그리고는 머뭇거리지도 않고 그는 곰인형을 집어들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뭔가 비밀스러운 작전이라도 치른 듯 그의 별로 뜨거워진 적 없는 심장이 툭툭툭 소리를 낸다. 그는 화장실 개수대 안에 곰인형을 던져놓고 화장실문마저 꽁꽁 닫아놓고 나서 거실로 나와 하나 밖에 없는 방석에 앉아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로서도 자신의 방금 한 행동을 리해할 수가 없었다. 굳이 남이 버린 곰인형을 주어와야 될 리유 같은 걸 죽었다 깨도 찾아낼 수가 없으리라는 걸 알았다.”   그 ‘죽었다 깨도 찾아낼 수가 없는’ 리유도 모른 채 남자주인공은 계속해서 녀자가 버린 노트며 지어는 내용물이 무언지도 모르는 종이봉투까지 주어들인다. 물론 이웃집 녀자의 저러한 물건들을 분별 없이 주어들이는 행위는 일종의 가벼운 증상의 련물증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지만 소설은 그러한 일차적인 범위에서 이야기를 끝내지는 않는다. 그것은 약간 황당하게 느껴지기는 하나 남자주인공의 이름에서 비롯되는 어쩌면 운명적인 것에 연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이름은 박수남이다.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다. 딱 학교 다니기 전까지만 그렇게 불렸다. 학교 다닐 나이가 되여서야 호구부에 박수납이라고 적혀있다는 걸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등록처의 직원의 실수로 나의 이름은 박수남이 아닌, 박수납이 되여버렸다.”   ‘수남’이 아니고 ‘수납’이라고 했으니 박수남이라는 남자주인공은 자기가 원하지 않아도 직원의 실수로, 더 적절히는 작가의 알면서 모른 척 한 실수 아닌 ‘실수’로 녀자주인공의 물품을 수납해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남주인공의 그러한 련물증은 사실 작가에 의해 교묘하게 배치된 ‘규정된 동작’으로 행위의 저 끝자락에는 녀자주인공과의 사랑의 인연이란 푸르고 빨간 색실에 이어지고 있음을 이 작품을 끝까지 읽어본 독자라면 대개 알아차리고도 남을 일이기도 하다. 바로 저러한 ‘수납’, 적절히는 수집 행위를 거듭하면서 남자는 녀자의 취미에서 성격에 이르기까지 서서히 알아가게 된다.    “그는 처음 그녀의 곰인형을 집어 들여오던 순간을 떠올린다. 그 때부터였을가? 그는 인연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무섭지도 않았던 걸가? 그는 궁금해지기도 한다.”   4. 자기를 버리려고 하는 녀자 소설 속의 녀자주인공은 그러면 왜서 물건을 버려서 집안을 비우려고 하는 걸가?    “버리기를 시작한 지 이제 일주일, 나는 집안을 모조리 비우고 텅 빈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 여러 나라를 돌면서 사들였던 기념품들과 아빠트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거라고 믿고 있었던 그 모든것들을 비워내고 싶어졌다. 그것은 그것을 사들일 때와 비슷한 열정의 무게로 나를 다그치고 있었다. 그즘 나는 조금 랭정해져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어떤 리유를 불문하고 그 어떤 열정이 일렁인다는 건 내가 알 수 없는 어데론가 무분별하게 흘러갈 수가 있다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녀자주인공은 그러한 물건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들이든 간에 그것들에 휘둘릴 것에 가장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물건들에 인위적으로 씌여진 이름이나 값어치들 그리고 그것들 때문에 괜시리 여러겹으로 들씌워진 터무니 없는 찬양과 목소리들이 녀자주인공을 꼼꼼히 감싸고 무겁게 지지눌렀을 것이였다. 사실 요즘 들어 갈수록 심각해지는 사회적인 문제중 하나가 물질이나 금전에 대한 과욕이라고 할 때, 그러한 거대한 욕심의 덩어리에 치여진 순수한 인간성이 어떤 꼴로 버려져 있는지는 지성이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인지하고 있는 이지러진 사회적 현상이기도 하다. 소설 속의 녀자주인공이 물건의 값어치보다는 자기만의 공간을 먼저 고려하면서 버리기 시작하는 행위는 처음에는 매우 개성적이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이상한 행위로 비칠지는 몰라도 사실 그 뒤면에는 저러한 현대인들의 물질을 향한 배금주의적인 사고방식에 대한 거부감에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따라서 물건을 버리는 녀자주인공을 보여주기 시작하던 데로부터 나중에 소설의 제목에서 그 주인공이 스스로까지 버리고저 한다고 알려주는 작가의 속셈에는 현대의 찌들어가는 인간의 물욕과 기타 현대병에 대한 하나의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녀자주인공은 자기를 버림으로써 자기 머리 속에 내재되였던 그러한 현대 바이러스를 깨끗이 비워내고 자기만의 순수와 개성의 진정한 삶의 공간과 시간을 되찾자고 한 것이였다.   5. 자기를 잠재우려는 남자 소설의 남자주인공은 괴이한 수납벽이 있어서 녀자주인공을 당혹하게 만드는 한편 가끔 예고 없이 잠이 들어버리는 기면증을 앓고 있어서 놀라게 만든다.   “이양이 계산을 하는 새 그는 카운터에서 한발 물러선 채 깜빡 존다. 까무룩 잠 속에 빠져드는 순간, 매번 그는 내가 지금 자고 있구나, 확인에 재삼 실패한다. 그 순간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마저도.”   기면증이란 일상생활 중에 발작적으로 졸음에 빠져드는 수면장애로 환각에 빠지기도 한다. 작품의 남자주인공은 저러한 기면증에 가끔 빠져 자전거를 타면서 졸고 졸업시험 때 시험지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첫 데이트에 나가 녀자 앞에서 졸기까지 한다. 병적인 증상으로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비우고 버리려고 하는 녀자주인공과 비교해 보면 사실 비슷한 의식의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녀자주인공이 물건을 버림으로써 자기 의식 속에서 과잉됐거나 조종되고 있는 부분을 버리고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을 되찾으려 했다면 남자주인공은 그 녀자주인공이 버린 물건을 수집함으로써 녀자를 느끼고 알아가면서 잃어버렸던 남성의 정체성을 되찾으려 한 것인데 기면증은 말하자면 이지러진 현실을 잠시 도피하고 자기 자신만의 공간과 시간을 획득하는 수단인 셈이다.  기면증은 어쩌면 가장 원초적인 방식으로 외부세계와 철저히 차단함으로써 내부의 억압된 목소리를 비로소 들을 수 있다는 작가 나름의 소설적 장치가 아닐가. 자기를 잠재움으로써 남자는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의 결말에서 녀자주인공이 남자주인공을 향해 힘겹게 물어보는 말마디는 매우 상징적이면서도 의미가 깊게 느껴진다.   “혹시 모다피닐을 드세요?”   6. 나오면서 라는 중편소설에서 녀자주인공이 보여준 여러가지의 ‘버리기’는 결국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한 행위 다름이 아니다.  ‘미니멀 라이프’란 불필요한 물건을 줄이고 최소한의 것으로 살아가면서 적게 가지는 대신 삶의 중요한 부분에 집중하고 거기에 의미를 두는 생활방식을 말하는데 이러한 삶의 방식은 갈수록 물질과 금전에 더욱 집착해가는 현대인의 고질병이 더욱 우심해가는 현실에서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다.  녀자주인공이 버리려고 했던 것은 소설적 사건만으로 보면 여러가지 물품이지만 녀자주인공과 그녀를 둘러싼 남자주인공의 행위를 함께 생각해볼 때, 녀자주인공은 결국 자기의 의식 속에서 뿐만 아니라 주변의 인간들 속의 저러한 현대인의 고질병을 송두리채 버리려고 몸부림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서두의 부분에서 녀자주인공을 괴롭혔던 쏘파세트와 운명적으로 도적질하다 싶이 남자주인공에게 선물한 이양의(?) 전기밥가마 등등이 이 점을 말해줄 것이다. 사실 이 소설 속의 녀자주인공이 추구했던 ‘미니멀 라이프’의 삶의 방식은 지극히 개성적이면서도 앞으로 우리들이 보편적으로 추구해야 할 미래지향적인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왜냐 하면 그러한 삶의 방식은 지극히 자연친화적인 순수한 인간성의 발현에 기초하고 현재의 우리 뿐만 아니라 이후의 세세대대를 위한 진정한 행복에 잇닿아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소설의 제목과 련관시켜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버림으로써 참되고 순수한 우리로 다시 태여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끝으로 이 소설에 대해 부언한다면 주인공의 단순하면서도 의미가 깊은 ‘미니멀 라이프’의 삶에 대한 추구를 좀더 다양한 시각에서 립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하여 작가가 취한 여러가지 시점(1인칭과 3인칭)은 긍정할 만한 노력이나 작품의 구성적인 측면에서 좀더 긴밀하고도 미끈한 련관과 흐름으로 보여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 점은 작품의 결말에 어느 정도 긴장하면서도 흥미롭게 ‘이양’이라는 인물과 주인공들과의 관계가 해명이 되고 그동안 따분한 듯이 느슨하게 흘렀던 소설의 수평적인 흐름이 순간적인 탄력을 받아 수직적으로 주제를 향해 치솟는 느낌과는 너무나 비교되여 더욱 아쉽게 느껴진다. 출처:2017 제4호
3    뼈”에서 “나비”에 이르는 삶의 가락들 댓글:  조회:1055  추천:0  2014-10-22
제33회 《연변문학》문학상 심사평 뼈”에서 “나비”에 이르는 삶의 가락들 김경훈(연변대학 교수)   가을이 무르익어 여기저기 수확의 풋풋한 내음이 짙은 향기로 가득할 때, 제33회 《연변문학》문학상도 드디여 여러 후보작들중에서 최종적인 수상작을 뽑게 되였다. 이번 심사는 쟝르별로 매 작품의 우렬을 충분히 검증하고 작품을 중심으로 한 여러가지 요인들을 골고루 감안하면서 공정성과 객관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아래에 수상한 작품의 면면을 알아보도록 한다.   1. “뼈”가 갖는 다양한 의미의 폭   이번에 소설부문에서 수상한 작품은 김혁의 중편소설 “뼈”이다. 소설은 이장때문에 부모의 뼈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는 수근이라는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시작된다. 그 뼈를 트렁크에 넣고 다니다가 벙어리에게 도적당하기도 하고 또 그 도적무리에 얻어맞아 갈비뼈를 다치기도 한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마을은 저수지확장공사로 수몰될 직전이다. 그런 피페한 마을을 지켜보고있는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렬사비이다. 작가는 이렇게 묘사한다. “과수밭언덕배기에 세워진 렬사비가 유독 눈을 찔렀다. 비바람에 지워지고 오래동안 먹을 넣지 않아 비명이며 렬사들의 이름조차 말끔히 지워지고 하얀 몸체만 남았다. 항일에 몸을 던져 마을을 지켰던 사람들의 기념비는 이제는 괴괴한 무덤 같은 마을을 위해 세워진 커다란 비석처럼 보인다.” 사실 “비석”이라고 표현함이 십분 타당하지만 왠지 이 소설의 제목과 관련해서는 그 마을을 묵묵히 지켜선 “뼈”처럼 느껴졌다. 수근은 “가짜리혼”이 진짜리혼이 되여버려 이제는 남의 안해가 된 “명월”이를 보면서 아주 오래된 통증을 느끼기도 한다. 부모의 뼈를 고향의 강에 수장시키고난 수근이는 어렵사리 만난 아들에게 스키보드를 사주었다가 아들애가 크게 상하는 변고를 당한다. 작품은 말미에 이들 부자간에 아픈 뼈끼리 끌어안는것으로 일종의 전망을 보여주고저 하였다. 물론 작가가 심혈을 기울였을법한 이 결말부분에서 작가의 의도가 제대로 전개되지 않은것 같다는 견해와 결핍된 사랑의 현실적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것이라는 등 엇갈린 견해가 심사위원들사이를 오가기도 하였다.   2. “구색아리랑”이 엮어내는 전통가락의 빛갈   시부문에서는 김영건의 조시 “구색아리랑”이 수상했다. 김영건은 이 조시에서 토종부락, 장독대, 석마돌, 초가집, 돌방아 등 이제는 잊혀져가는 민족의 전통적인 삶의 이모저모를 되살려내고있다. 특히 그러한 전통적인 삶의 자취에 묻어나오는 농가의 풍경을 “누런 조이삭은 길다란 몸통 늘어뜨리고/ 외태머리 마늘다래 곁눈질에/ 빨간 고추다래 연지곤지/ 가슴 헤친 가을호박/ 한마당 가을을 풀어놓다”고 함으로써 정답다 못해 애잔하기까지 한 소중한 유산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풍경은 현실적인 삶의 조건에 비교해보면 가난함 그 자체일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가난에 오히려 행복이 깃들어있음도 귀띔해준다. “피나무함지 노란 저고리 흰 머리수건 하얀 버선/ 베옷에 검정치마 분홍저고리에 청색치마/ 붉은 댕기 외태머리 꽁꽁 동이고/ 귀밑머리 하얀 어머니와/ 보송보송 이팔소녀/ 삭 사르르 섬섬옥수 똑 또르르/ 새하얀 이가 방긋 무궁화꽃이 핀다”(“가난한 행복”) 바로 가난한 행복은 그속에 따뜻한 정이 함뿍 담겨있기때문이 아닐가? “부뚜막 아궁이 장작불 활활/ 통나무 굴뚝 저녁밥 뭉게구름/ 따뜻한 정으로 한구들 메웠던/ 마음에 사금다래 흑백가족사진”. 이처럼 김영건의 조시는 하나하나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지극히 평범하고 새로움이 별로 없는듯이 보이지만 여러 작품들이 한데 어우러졌을 경우, 오늘날 우리에게서 사라져가고있는 민족적인 전통의 소중함에 대해 은연중 호소하고있고 그 가치에 대해 다시 반성해보게 한다고 하겠다.   3. “산다는것은…”   수필부문에서 수상한 작품은 김영자의 “산다는것은…”이라 제목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너무나 리얼한 사실에 기초하여 자연의 섭리를 존중하면서도 인간으로서의 죽음에 대한 초연한 마음가짐을 가지기까지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겪어야 했는지를 아프면서도 아름답게 전해주고있다. 젊었을 때는 앞만 보고 달리면서 서로를 아끼고 보듬을줄 몰랐던 부부, 하지만 석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남편을 바라보면서 후회와 온갖 한스러움이 몰려든다. 따라서 “죽음은 늘 우리와 동반하고있지만 욕망의 그늘에 가리워 잠시 잊고 살뿐이다. 우리는 욕망이 그 어떤 인생의 답을 줄것 같아 어리석게도 많은 세월 있지도 않은 내것들을 찾아 허우적거렸다.”라는 작가의 회포는 비록 많이 늦었지만 인생에 대해 깊이 관조하고 그 흐름에 대해 무언가 나름대로 정의해보고저 하는 새로운 시도로 다가온다. 그리고 모든 허무한 몸짓들을 거부하고 순수한 생명의 의미를 따져갈 때 “산다는것은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삶의 과정이기도 하다”라는 인식의 한 정점에 이르게 되는것이다. 물론 이러한 인식의 과정은 지극히 괴로운것으로서 그것은 소중한 사람의 생명과 바꾼것이며 지나온 자기의 자취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난 뒤에야 가능한것들이기도 하다. 김영자의 “산다는것은…” 결국 덧없는 욕망에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죽음을 삶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때 죽음을 딛고 새롭게 출발할수 있으며 더욱 희망찬 래일을 걸어갈수 있음을 말해준다. 새로운 자기를 발견하고 새롭게 가꾸어갈 때 그 삶은 기필코 화려한 부활로 이어질것이다.   4. 란무하는 “나비”들의 춤사위의 의미   평론부문에서는 김정웅의 “귀추를 잃고 란무하는 ‘나비’들의 비극”이 수상작으로 뽑혔다. 이 평론은 재일조선인문학 제3세대 문학대표자의 한 사람인 리량지와 중국조선족문학 제3세대 문학의 대표적작가의 한 사람인 허련순의 생애를 비교하고 대표적인 작품인 “나비타령”과 “누가 나비의 집을 보았을가”에 나오는 메타포인 “나비”를 비교하였으며 두 작품에서의 가정파탄과 집단적폭력에 의해 집 잃은 “나비”들을 비교하였고 나아가 두 작품에 대한 문학사적자리매김까지 나름대로 하고있다. 이 평론에서 비교적 돋보이는 부분은 메타포로서의 “나비”에 대한 분석과 집단적폭력에 의해 집 잃은 “나비”들에 대한 비교로 비교문학의 리론을 바탕으로 주제학적으로 접근하는데 있어서 매우 탄탄한 연구실력을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이상에 걸쳐 제33회 《연변문학》문학상을 수상한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이외에 초심에 올라온 작품들중에 좋은 작품들이 있어 열렬한 토론을 벌렸으나 수상을 못한 아쉬움도 있다. 특히 초심에는 올라왔지만 작가나 평론가들 본인의 요구에 의해 최국철의 중편소설 “헷채-왈복이 돌아오다”와 김관웅의 평론 “‘오디푸스 콤플렉스’와 동서양소설”이 수상에서 제외되였음도 매우 아쉬운 부분이라고 말하고싶다. 아무튼 다음번의 《연변문학》문학상에 더욱 좋은 작품들이 수상의 영예를 지니기를 미리 기원하면서 수상한 모든 작가들에게 축하의 말씀을 드리는것으로 심사평을 마무리하고저 한다. 2014.10.22
2    《길림신문》 제1회《두만강》문학상 심사평 댓글:  조회:609  추천:0  2014-05-31
  김경훈(연변대학 교수, 평론가)   /사진 유경봉기자   우선 이번 문학상에서 수상한 모든 수상자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린다. 아래에 심사위원들을 대표하여 대상부터 수상작에 대한 평을 하도록 하겠다. 이번 심사에서 대상을 받은 수필 《조모의 〈달〉이》는 작달막한 《조모》와 일찌기 소경이 되어버린 《띤장》의 은밀하면서도 끈질긴 20년 남짓한 사랑을 《달》로 표현되는 단풍의 가을을 배경으로 아름답고도 처절한 《황혼의 사랑》을 피빛으로 연출해내는듯 싶다. 빨갛게 익어간다는 의미에서는 단풍이 가을이라는 계절을 대표하리만큼 아름다운 자연의 한 모습이지만 겨울나이를 위해 잎사귀를 일부러 떨어뜨리는 자기 보호적인 나무의 행위에서는 몸의 일부를 절단해내는 가장 처절한 피어린 단풍의 속내를 엿볼수 있기도 하겠다. 바로 지은이는 조모와 《띤장》의 늘그막의 사랑이 단풍의 가을에 못지 않게 아름다우면서도 서글픈것이였음을 드러내고있다. 《무정세월이 흘러가는》 《영탄곡》, 부모의 치부라고 침묵했던 가친, 《소경의 눈을 비추게 하는 아름다운 초불》, 그 소경의 부음을 듣고 그토록 슬퍼하던 조모의 시름겨운 한숨, 이 모든 것들은 그러한 아름다우면서도 처연한 조모네의 사랑이야기를 전해주는 가장 기본적인 줄거리이다. 늙은이라고 사랑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그 사랑이 세속적인 관념에 의해 외면되는것이라든가, 언제 가도 인정이 될수 없는 자기네들만의것이라면 시간이 얼마나 흐르든간에 결과는 쓸쓸한것외에 달리 보일리가 없을것이다. 조모네가 20년이 넘도록 사랑했지만 아들은 치부로 생각했고 손자에게도 적잖은 충격을 주었으며 결과적으로 서로 생사도 모르고 세상을 뜨게 된 결과는 고혹적이리만큼 아름다우면서도 결국에는 땅에 떨어져 이리저리 뒹굴다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마는 단풍과도 같은 운명밖에 더할것이 없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조모네의 사랑은 그처럼 세상에서 소외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것이였지만 《위대한 생명》의 자취라고 작품의 끝자락에서는 말하고있다. 그때 당시에 세상에 당당하게 인정을 받지는 못했지만 생명의 초불은 소경의 눈을 밝게 비추고 황혼만큼 피빛의 정열을 불태우고 삼남매를 함께 키운 사람보다 더 끈끈한 사랑의 노래를 엮게 했던 가장 소중한 원천이기때문이다. 생명으로 불태운 사랑보다 더한 진지한 사랑이 또 어디 있으랴! 소설부문의 본상을 받은 《련꽃밥》은 연변 고향의 련못과 한국 경남 오지의 련못을 배경으로 련꽃보다 더 아름다울 안해마저 빼앗기고 홀로 쓸쓸이 이국타향의 련꽃을 우산도 없이 바라보아야 하는 어느 불법체류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련꽃을 닮았고 이름지어 더 아름다운 《련화》라는 안해는 소설의 말미에 련꽃축제의 도우미로 등장하지만 이미 그 꽃은 시들고 이지러진 모양새로 세월의 풍파와 인심의 모질음에 의해 여지없이 비탈려버린 순수하면서도 가련한 조선족 녀성의 또다른 모습이라 할수 있다. 이 작품은 작가 특유의 세밀하고 정교로운 메탈한 언어적인 표현과 깊은 의미를 절제하여 표현하고저 하는 감정적인 처리에 의해 아프면서도 아름답게 그 주제를 독자들에게 전해주고있는것 같다. 작품의 제목이 시사하다싶이 그토록 고통스러우면서도 뭔가 깊은 의미를 지니는 주인공의 사연은 련꽃의 밥이 품고 있는 알알의 내용물에 비견될듯도 싶다. 다음의 시부문의 본상작품에 대해 말해보자. 부모가 되여서야 부모의 마음을 진정으로 알수 있게 되여간다는 내용의 《부모 되여》란 작품은 출산의 고통과 기쁨이 뒤섞인 《알찌근한 마음》, 어린애를 안은 《비릿한 마음》, 성장한 애들을 향한 《파릿한 상념》, 성인으로 훌쩍 변해버린 애들을 일별하는 《성숙의 웃음》, 부모가 되여 부모를 돌아보는 애들을 향한 《만족스러운 눈빛》 등 표현에 힘 입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단계들을 부모는 점점 늙어가지만 자식들은 점점 성장하고 성숙해가는 반비례적인 삶의 과정으로 표현하고저 하였다. 물론 그러한 생물학적인 삶의 모습들은 그러나 갈수록 깊어만 가는 부모의 사랑을 뒤늦게야 느끼고 깨달아가는 부모된 자식의 마음이 뒤받침함으로써 부모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에 관한 주제를 시종 일관시키고있어서 여느 시작품들보다 한결 뚜렷하면서도 진지한 시적인 호소력을 갖는다 하겠다. 한편, 이 작품에서 《풀이면 풀,돌이면 돌/물이면 물,새면 새》 등과 같은 표현은 그렇게 신선하다고까지는 할수 없는 표현이지만 부모와 자식의 세대적인 차이를 극복해주는 또다른 시적인 장치로 두운 법칙을 비롯한 전통적인 수단들이 작품의 내용의 여하에 따라서는 매우 친절하면서도 깊의 의미를 나타내는 기능을 함을 발견할수 있게도 한다. 평론부문에서 본상을 받은 《새 천년 전후 중국조선족 한문창작의 현황과 전망》은 이민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김택영, 신정, 신채호에서 김인순, 장률 등 작가나 감독에 이르기까지 한문창작의 역사와 현실을 개괄적이면서 특징적인 요소들을 짚어가면서 잘 분석하고있고 한문창작의 미래에 대해서까지 내다보고있다. 특히 이 글에서 조선어만 고집하면서 현 상태에 안주하는 현상은 우리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나아가 민족문화를 쇠퇴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을가 하는 념려는 자못 의미심장한것이라 할수 있다. 사실 한문창작을 통한 주류문단에의 진출의 가능성에 대해 꾸준히 모색하고 적절한 방식에 의한 노력을 끊임없이 경주한다면 그러한 위기는 얼마든지 극복할수 있을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혁개방 이후 나타난 최건과 남영전 등의 한문창작은 매우 값진것이라 할수 있겠다. 물론 이러한 한문창작에도 주의사항은 꼭 알고 지내야 할 기준과도 같은것이기도 하다. 필자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 점을 충분히 귀띔해주고있다. 《향후 과경민족(跨境民族)의 중국조선족문학은 문학어 사용면에서 필연적으로 모어와 한어 겸용의 〈쌍궤운행〉, 쉽게 말하면 두다리로 걷게 될것이다. 하지만 설사 우리 조선족작가들이 한어창작을 하더라도 조선족의 경험, 조선족의 사상과 감정을 포기하여 주류민족문학에 동화돼가는 경향은 가급적으로 피면해야 할것이다.》 이밖에 청산우수상을 받은 시 《나무그늘》과 수필 《누군들 우물에 갇히지 않는가?》는 깔끔하면서도 살아숨쉬는 표현력과 세속적인 시각을 부정하고 또 다른 목소리를 내고저 하는 이색적이면서도 창의적인 발상으로 보는이의 눈길을 끌었다. 거듭 수상자들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면서 청산그룹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해마지 않는다. * 본문은 2014년 5월 29일 장춘에서 열린 “길림신문” 제1회“두만강”문학상시상식에서 발표되였다.  
1    [평론]허수아비와 매듭 댓글:  조회:765  추천:0  2013-09-05
요즘 읽은 작품들가운데서 날씨만큼 따끈한 인상을 받은것은 구호준의 수필 《겨울, 그리고 허수아비》(《연변일보》해란강 제1535기)와 박춘월의 시 《일년의 마지막 날》(《연변일보》 해란강 제1533기)이다. 이 두 작품은 주제와 형식에 있어서 매우 깊은 철리와 신선한 표현력을 드러내고있어 나름대로 무언가 말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1. 허수아비를 거부하다 한겨울에 허수아비를 본적이 있는가. 눈바람이 휘몰아치는 허허벌판에서 두팔을 하릴것 없이 펼치고 오지 않는 새떼를 향해 두눈을 크게 뜬채 감을줄 모르는 허수아비말이다. 허수아비라고 하면 풍년이 든 가을날 풍경에 적격이겠지만 겨울의 허수아비는 겨울만큼 그 모양이 초라하고 의미조차 건조해져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임에 분명하다. 물론 쓰고나면 버리는 인간의 얄미운 습성으로 허수아비를 측은지심으로 생각해볼수도 있겠지만 허수아비의 의미는 그렇다고 갑자기 숭엄한것으로 승격되지 않는다. 이달에 읽은 구호준의 수필 《겨울, 그리고 허수아비》에서는 그렇게 헛헛한 겨울의 허수아비를 스스로의 허점이나 잘못을 깨닫지 못한채 남을 비방하고 자기의 허물을 덮어감춰 스스로를 과대포장하려는 일부 조선족들의 한국에서의 행태에 빗대고있다. 무조건 좌충우돌해야 자존심을 지킬수 있는듯이 착각하는 삼십대의 윤걸이와 다른 사람들의 솜씨라면 모든것이 눈에 거슬리는 오십대의 이모는 머리속에 든것 없이 먼저 남을 헐뜯는 얄미운 모습임에 틀림없다. 《하루에 세번씩이나 해물파전을 태워서 다시 만들어야 하는》 이모와 《썩은 야채도 아낀다고 주어넣는것은 물론 손님이 많으면 전분이나 참기름을 빼먹는것도 다반수》인 《윤걸이라는 애》는 도무지 제대로 된 교양을 받아보지 못한 무지막지한 존재들이여서 작자의 표현대로라면 《같은 중국에서 왔다는것이 얼굴이 뜨거워》지게 만든다. 사실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이모》나 《윤걸이》를 닮은 사람들이 꽤 눈에 띈다. 아직 이곳이 다른 곳보다 상식이나 질서에 대한 인식이 그나마 괜찮다고는 하지만 자기만 옳고 남들은 무조건 아니라는 식의 생각들이 심심찮게 뛰쳐나오기때문이다. 다시 되새겨보면 분명히 틀린것을 기어코 맞다고 우기고 남들의 말과 행동은 어디까지나 눈에 거슬린다는 그 《대단한 족속》들의 행태는 결국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가장 가소로운것들이다. 이는 기본적인 가정교양을 잘하지 못하고 사회인간으로서의 초보적인 수양을 갖추지 못한 또는 별것도 아닌것때문에 자만심에 빠져 타인을 무시하고 스스로를 거물급으로 착각하는 소인배들의 짓거리이다. 그런데 이러한 족속들의 존재는 워낙 청정했던 공간에 제멋대로 연기를 뿜어대는 몰상식한 행위처럼 인간사이와 사회적인 인식의 터를 오염시킨다. 자기 집에서는 애가 아까와서, 마누라가 무서워서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밖에 나와서는 바로 곁에서 기침을 콜록콜록하는 녀성이 안중에도 없는 사람들이나 볶은 료리가 까맣게 탔다고 하자 손님을 《개간나새끼》라고 욕하는 《윤걸이》는 별반 다를바 없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입만 살아있는 그들은 겨울날 텅 비여버린 밭에 홀로 서서 바람에 옷소매를 펄럭이는 허수아비》라고 하면서 《무식하다는것은 결국 머리가 비였다는 의미고 머리가 비여버린 인간은 누군가의 잠간의 필요로 만들어졌다가 겨울이 오면 그대로 버려져야 하는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라고 한 작가의 일갈은 《허수아비는 잠간 참새의 눈속임은 가능하지만 단 한마리의 참새도 잡지 못한다》는 판단과 함께 매우 적절한 비유이자 판정이다. 더우기 허수아비란 워낙 《필요하면 필요한대로 존재하고 버림을 받으면 버림받은대로 모든것을 받아들이는》 존재인데 상기의 사람들은 그런 허수아비보다도 못하다고 하는 작가의 《결론》은 분명히 일반적인 수필임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아주 날카롭고 정제된 철리적인 계시가 깃들어있다. 이처럼 구호준의 《겨울, 그리고 허수아비》는 평범한 제목이지만 그속에 같은 조선족으로서의 어쩔수 없는 생활의 고뇌와 아픔과 또 자기반성까지 내재하고있어 재한조선족은 물론 이곳에 살고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조용하면서도 따끔한 일침을 가하고있어 주목되였다. 2. 탄탄한 매듭을 위해 일년은 365일의 시간과 그에 따른 공간이 만나 어우러져서 만들어진다. 박춘월의 표현은 그 《시간이 /바람의 실오리를 잡아쥐고 /둥그런 매듭을 짓는다》는것이다. 이 작품에서 시간은 로골적으로 표현하다싶이 돼서 그런대로 분명하지만 공간이 불분명한게 아쉬운 점이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의 사이에서 자유롭게 오간다고 할수 있는 바람이 매듭을 완성하는 매개체로 나타남은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다. 아무튼 산과 들로 나타나는 공간과 그 공간의 미각적 특성인 구수한 향, 그리고 그 공간에서 빚어내는 만물상은 이 시에서 일년이라는 시간만큼이나 스케일이 큰 공간의 내용물을 제시한다 하겠다. 짧은 시속에서 365일의 시간대와 산과 들이라고 하는 추상적이면서도 거대한 공간을 만나게 하고 이들을 버무려서 《매듭》이라고 하는 일년의 결과적인 의미를 추출하는데는 매우 신선한 시적인 발상이 바탕으로 작용했다. 시에서의 시간과 공간은 반드시 나란히 등장해야 하는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느 하나가 아무 연고 없이 생략되여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공간의 측면이 불분명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시간과 공간의 의미와 기능을 어느 정도 잘 파악하고 그것을 일년이라는 단계적이면서도 총체적인 흐름속에 잘 뒤섞어서 삶의 의미를 진행형으로 보여주고저 한것은 긍정할바이다. 일년이란 시간은 인생이란 전체적인 시각에서 보면 어느 한 짧은 단계에 속하지만 또 사계절을 통해 인생의 전반 과정을 압축해보여주는 때이기도 하다는 점에서는 인생의 총체적인 흐름을 암시하기도 한다. 봄에서 출발하여 겨울에 일년의 모든 과정을 총화해보는것은 자연스러우면서도 바람직한것이다. 지나온 일년이 의미있고 보람있을 때 《매듭에서 다시/거세찬 바람이 뿜겨져나오고/너와 나 바람에 말려들어/오만가지 색실로 뽑혀져나오기/ 직전》을 맞보게 될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일년의 마지막 날》은 통상적인 표현 그대로를 적용한다면 《알찬 결과요, 의미있는 시작》이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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