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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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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들 댓글:  조회:847  추천:0  2020-05-02
아        들                       농민이 셨던 아버지는 나를 대학생으로 공무원으로 변호사로 키웠다.     나는 아들을 어떻게 키워야 아버지한테 교대가 가능 할것인가. . . 물론 아들이 모든 면에서 나를 초월했으면 좋겠지만 무턱 대고 높이 바랄수만도 없는 일이다. 일단 아들이   키가 180이 되여 보통키가 되나마나한 나를  훨씬 초과 하였다. 소학교부터 한족학교에 다녀 중국어가 나보다 낳고 책 읽기를 좋아해서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었기에 "삼국연희"나 "수호전"같은 중국 고전에 나 보다 익숙하다.  중국어나 중국력사에 궁금한것이 있으면 아들한테 물어 보는데 아들은 자료를 찿아서라도 답을 정리해 온다.       때로는 주변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초월했다고 하면 괜히 가슴이 흐뭇해 나면서 입귀가 어느새 위로 걸리고 랭면 한 그릇 이라도 대접하고 싶어 진다.         아버지는 32세에 둘째 아들로 나를 낳으 셨고 나는 서른넷에 아들을 낳았다. 요즘엔 거의 하나씩만 낳지만 가끔 둘씩 낳아키우는 집도 있고 욕심 많은 집은 셋씩이나 키우는데 재롱부리는 뉘집 막둥이를 보면 끌어 안고 뽀뽀 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만  내아들 한테도 못해준 뽀뽀를 쉽게 해주는것도 싱거운 일이라 참는다.       아버지를 계속 "아버지"로만 생각했고 때로는"아바이"라고도 불렀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아버지 아들인 지금 나보다 젊은 시절이 많으셨다. 아들이 나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老爸 "라 부르기에 나의 어머니가 왜 아버지가 젊었는데 "老爸"라고 부르냐고 물은적도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눈엔 중년에 들어선 아들도 그냥 철부지 아들로 보였을 것이고 아버지가 내눈에 계속 높이 보였듯이 아들눈에는 내가 "老爸"로 보일까. . .        후에 안 일이지만 아버지는 손자 이름을 "호남"이라고 지으려고 하셨단다. 헌데 내가 아들이 태여나기 반년전에 벌써 "길호"라고  지어놓았으니 호적에는 "길호"로 올랐었다. 유감스럽게도 아들이 네살때 이름을 바꾸어 지금은 "호남"도 "길호"도 아닌 "은우"라 부른다. 이름이란 결국 다른사람과 구분하기위한 호칭이니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 아닐지라도 듣기에 "고슴도치"나 "불여우"처럼 너무 까칠하거나 요상스럽지 않고 부르는 사람이 쉽게 입에 담아 부를수있고 불리는 사람이 귀로 거부감 없이 받아 들을수 있다면 그만인것이다.           부모님들 집은 화룡투도에 있었는데 대학교를 졸업하고 연길에서 일을 시작하다보니 당해에  녀자친구와 세집을 잡고 함께 보냈다. 물론 서로 좋아 함께 살았겠지만20-30원하는 집세를 절약하자는 속셈도 없지않아 있었다. 두사람 월급을 합해봐야 200원도 안되는 판국에 20-30원이란  적은 돈이 아니였다.  함께 세방살이를 시작하여 자기집을 장만하기까지 한해에 한번씩 네번이나 이사하였다. 용케도 결혼등기도 하지 않고 세방살이를 시작했던 그 초중동창과 결혼하고 지금까지 30년 함께 살면서 낳아 키우는 아들이 이글의 주인공이다.        2020년 경자년에 들어서면서 코로나19 덕에 두석달 질리도록  쉬고 일을 시작해 볼가하니 5.1로동절이라 또 6일 쉰단다. 로동절이면 일을 해야 명실상부할텐데 로동절이랍시고 6일씩이나 놀아야 한다. 자본주의의 원조인 영국에서도 5. 1국제로동절에 겨우 하루휴식인데절 유래대로 데모하면서  자본주의 미국의 "맥도날드"와 "컨더키"를 부순다. 영국이나 미국같은 자본주의나라에서 데모하며 무산계급이 자산계급을 부수는  5. 1일 중국에서는 며칠씩되는 련휴를 시작한다. 양머리를 걸어 놓고 개고기도 끓여 팔고 쥐고기도 구워 팔수 있는 편안한 동네임이 틀림없다. 지난밤 새날이 들어서야 눈을 붙였는데 동녘이 희붐히 밝아오자 자동으로 눈이 떠진다. 세월이 하사한 선물이라 하겠다. 아침을 먹고 나니 아들이 열시에 친구만나러 행차하신단다. 시원섭섭한 일이다. 휴가기간 될수록이면 아들과 놀아 주려 했던 참인데 첫날부터 혼자 시간생기는지라 고마운 일이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를 낳아  키워주신 "아버지"와"어머니"도 쓰고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과 "친구"도 썼는데  아직 한이불을 덥고자는  아내와 내가 낳아 키운  아들을 쓰지 못했다. 요즘은 글쓰기도 편하다. 옛날처럼 초고를 쓰고 원고지에 다시 옮길 필요 없이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손에 들려 있는 전화기에 손에 달려 있는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면 글이된다.       어릴때 아버지가  우리 현(铉)자 돌림이 진위(振威. 한국 충청남도 평택 부근 )김씨 13대라고 알려 주셨다. 고향은 함경북도 성진군(김책시)학남면 신천리라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사진에서만 보고 할머니는 내가 고중때 돌아 가셨는데 화룡 룡수에 계시는 사촌형님이  김씨가문 장손이라고 하셨다. 문화대혁명때 족보를 빼았기고 몇년전 족보를 다시 찿아  "중국진위김씨종친회"도 새로 내왔는데 워낙  우리가 시조로 알고있어던  김시문(金始门 리조조선에서 문과. 무과에 전부 급제)위로 6대가 더 있었다. 하여 우리대는 진위김씨 19대인것이다.       두사람 함께 세집살이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여 태기가 있었다. 두사람 먹고 살기도 어려운 형편이라 아이한테는 세집살이를 시키지 않기로 작심하고 "계획생육"하였다. 지금도 가끔 아들보고 "그때 너의 그 형님이 태여 났더면 너는  없어"하면 아들은 이상해하는  눈길로 바라보며 무슨뜻인가 물어 본다. 그때 "만원호" 였으면 부자집이였고 20대에 자기집이 있으면 "지주집"였다. 93년도에 집은 장만하였지만 "계획생육"은 관성이 붙어 99년도에야 아들을 보게 되였다. 99년도 봄 임신한지 4개월 되는 집사람을 집에 두고 지구촌반대편으로 떠나면서 아들일거라 확정하고 이름을 "길호"라 지어 놓았다 . 네살전까지 아들 호구등록이름은 길호였었다.       아들 첫돐 생일상은 룡정리화호텔에서 받고 나는 영국런던에서 친구들과 마주앉았다. 지금같으면 스마트폰으로 영상통화가 가능할테지만 그때는 몇만리 떨어져있는 타국에서 전화로 현지 소식을 들을수 있는것만으로도 기적같은  사연이였다. 그날 첫돐생일 사회를 아는 사이인 룡정 양춘국가수가 진행하게되였는데 아들이 사회자보고 마이크를 달라고 한다하여 모두 웃었다. 형님동생하면서 가깝게 지내는 지인들이  아들 사진 보면서 "장군이다". "장개석이다"하면서 칭찬하여주었다. 기분은  어떻했든 술맛은  달든 쓰든 친구들은 내술잔에 술을 따르고 또 따랐다. 이국타향에서 마이는 아들 첫돐생일술이 였다.        한번은 도문에서 함께 갔던 최씨형님 내외와 늦게까지 술 마이다가 화장실 갔다 왔더니 형님이 얼굴에 눈물을 주렁주렁 달고 쿨적쿨적 하길래  형수님보고 싸웠는가고 물었더니 아들이 보고 싶어 운다는것이 였다. 아들이 보고 싶으면 형수님이 울든지 아예 두사람 함께 울든지 할것이지 왜 혼자 우냐고 했더니 엄마가 돌아 갔을 때도 함께 울어 본적 없이니 감정이 풍부한 자기가  대표로 울면 된다고 한다. "형님도 참말로 .  아들이 아빠부르며 뛰여다니도록 아들 얼굴보지도 못한 사람도 버티는데 뭔 주책입니까"했더니 형님이 벌겋케 달아오른 눈을 껌벅껌벅하더니 "그렇구나. 미안하다. 한잔해라"하면서 잔을 채워 준다. 웃음이 웃음을 불러오지만 눈물 또한 웃음 못지 않게 전파가 빠르다. 잔을 받고 나니 눈앞이 흐려짐을 어찌할 수 없었다. 제아무리 날고 뛰는  방수공정사도 제눈 작은 구멍에서 솟아나는 눈물을 막는 재간이 없다. 아들 보고 싶다고 울던 그형님의 아들은 그때 중학교에 다녔었는데 지금은 길림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하여 아들을 낳고 상해에서 잘 살고 있다.          아빠는 영국에 있는데 중국에서 아들이 태여 났다고 좋아한 사람은 나와 친구들 뿐이 아니었다. 하루는 집에서 편지가 왔는데 아들이 영국에서 보냈다는 옷을 입고 찍은 사진을 보내 왔다. 어떻게 된 사연인가 알아 봤더니 잘 아는 일본지인이 어떻게 나의 중국집 주소를  수소문하여 나몰래 집에 아들옷 한벌을 보냈던것이였다. 덕분에 아들은 아주 어려서 영국옷을 입어 보게 되였다.         부모자식간에 얼굴을 서로 보지 못하였어도 피줄은 속이지 못하는 모양이다. 집 사람이 아들이 세살때  내사진을 가르키면서 아버지라 알려 주었더니  나의 사진들을 따로 뽑아 가지고 있었다 한다. 그중에 천진에서 녀동창과 함께 찍은 사진 한장 있었는데 녀동창 얼굴부분을 찢어버리고 내 얼굴부분만 짤래내여 누가 달라해도 안주고 하루종일 배속에 넣고 다녔던 적도 있었다 한다. 재미있는 이야기 한두가지 더있다. 록음기속에서 노래소리가 흘러 나오길래 어찌된 영문인가 아들이  묻기에 누가 록음기속에 사람이 있다고 알려줬더니  나중에 록음기속 테이프를 빼고 자기가 먹던 과자를 록음기속에 가득 넣어 어렵게 털어냈적도 있다 한다. 또 한번은 록음기 전기코드를 뽑아 두코구멍에 꽂아 놓고 있더란다. 비슷하게 생긴 두구멍인데 전기코드를 사람코구멍에 꽂아 전기가 나오면 노벨물리상을 받을만도 한 발명이다. . .      아들이 다섯살때 영국에서 귀국했다. 물론 5년간 보지 못했던 부모님도 아내도 보고 싶었지만 사진만으로 보아 오고  실물은 한번도 보지 못한 아들이 더 궁금했다.  귀국전 아들이 말을 시작하면서 매주 통화할때면 아빠 빨리오라고 조르곤 했었다.  몸보다 마음을 앞 세우고 짜른 목을 길게 빼들고 유리문 사이로 마중 나온 사람들을 살펴보니 맨앞에 큼직한 꽃다발을 들고 분리선을 뛰쳐 들어 오려고 설치는 꼬마가 보였다. 출구를 나서기전 꼬마는 결국 분리선안으로 뛰여 들어와 아버지라 부르며 안긴다. 보안일군도 대개  상황파악이 가는지 말리지 않았다. 나를 닮아 고수머리였고 여적 깍지 않았다는 뒤머리가 뱅글뱅긍 탈려 등에 닿아 있었다. 오래전 일이건만 지금 생각해봐도  영화 한장면 같은 모십이 기억에 생생하다. 아들과의 첫만남 그 장면은 필경 내 인생  드라마중 명장면이였다.          아들 눈에는 새로온 못보던 아버지도 신기했지만 여적 독차지하고 있는 엄마가 더컷다. 엄마 옆자리를 내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때 저녁이면 중앙TV에서 뉴스련합보도후 련속극 를 두집 련속방송했었는데 아들은 련속극 삽입곡을 나와 함께 높은소리로  부르며 끝까지 보고 엄마 아빠사이에 누워 잠들었다.   누울땐 분명히 엄마 아빠사이에 누웠든데 자고 깨나면 엄마가 가운데 눕고 자기가 한쪽켠에 간것이 좀 수상했을 것이다.         아침에 아들을 유치원에 데려다 주곤하였다. 하루는 아들과 가지런히 걷다가 아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뒤에 좀 떨어지기 되였다. 옆에 내가 없는것을 발견한 아들이 급기야 아버지를 부르며 울며 허겁지겁 되돌아 뛰여 오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가슴이 섬찍하고 코나루가 찡해 났다. 이것이 어린 아들 가슴에 아버지존재 였을까. 그후부터 아들은 유치원가는 길에 앞서지도 뒷서지도 않고 바로 옆에 붙어 다녔다.            나는 자라면서 아버지 어머니한테 매를 맞아본 기억이 없다. 누나가 시집 갈 때 결혼식 상차림으로 준비했던 색과자를 훔쳐 친구들과 나눠 먹고 들통나서  누나한테 쫒겨 다닌 적은 있었다.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 어려운 상황에서 자식 셋을 키우면서도 손찌검 한번 안하고 나를 키웠지만 나는 하나 자식 키우면서도 아들한테 두세번 손을 댔다. 한번은 때린 나의 손이 아플 정도로 호되게 패줬다.       아들이 소학교에 다닐때 일이다. 아침에 가방을 싸던 아들이 필통에서 종이 쪽지 한장 꺼내서 슬며시 쓰레기통에 가져다 버리는 모습이 보였다. 쪽지를 펼쳐보니 먼저날 숙제였다. 왜 버리는가 물었더니 하지 않아도 되는 숙제라고 변명한다. 하지 않아도 되는 숙제도 숙제인가. . . 실말을 하라고 하니 아들은 계속 우긴다. 뒤통수를 한대 패주니 울음을 터뜨린다. 공부하기 싫으면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더니 흑흑 흐느끼면서도 학교에는 가겠다고 하기에 반주임선생님한테 데리고 갔다. 헌데 이럴수가. . . 선생님이  자기 한테 불리한 말씀을 하니 쬐고만 놈이 두눈을 바로 뜨고 정면으로 선생님을 빤히 쳐다 보는 것이였다. 우리가 소학교다닐땐 선생님 으름장 한마디면 머리도 못쳐 들고 선생님 발끝이나 겨우 쳐다 봤었는데. . . 내 집이 였으면 또 한대 패 줬으련만 선생님앞이라 올리미는 화를 겨우 참고 집으로 돌아 왔다.       또 한번은  초중겨울방학때 일이다. 며칠 지나면 개학하는데 하지 않은 숙제가 많았다. 하루는 늦게까지 숙제하길래 과일 깍아다 주며 영어숙제책 몇페지 번져 봤더니 ABCD에서 선택하시오 하는 선택제에 EF를 적어 놓은 답안이 수두룩 했다. 숙제책으로 뒤통수를 툭 쳤더니 눈을 바로 뜨고 마주 본다. 신경이 곤두 섰다. 숙제책을 팽개쳐 버리고 소학교때 선생님 분풀이 까지해서  주먹으로 패줬더니 그제야 잘 못했다고 아프니 때리지 말라고 사정한다. 아프라고 때렸는데 아프다고 때리지 말라고 사정하는 도리도 있는가. . . 도리는 있건 없건 이날 아들은 매맛을 톡톡히 봤고 나는 벌겋게 달아오른 손바닥을 보면서 좀 심하지 않았나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아들은 어려서 부터 애들 답지 않게 자상한 놈이였다. 소학교때 엄마가 출국하여 옆에 없을 때가 많았는데 책갈피속에 엄마머리카락을 주어서 끼워 넣고 엄마가 생각나면 책을 펼치고 엄마머라카락을 만져 본다고 하였다. 애 엄마가 들었으면 가슴 아플 이야기다. 해마다 엄마 아빠 생일을 기억하고 축하메세지를 보낸다.      초중때부터 해마다 부친절 이면 나한테 선물을 준비한다. 테니스운동 할때는 손목보호대와 테니스공 가방을 받았고 변호사를 시작한 후로는 멋진 버버리표 목수건도 받았고 법률관련 책도 받았고 그럴듯한 향수도 받았다. 고중때 한번은 학원에 내는 학비가 차이나는것 같아 다른데 쓰지 않았는가 했더니 아들은 울먹이면서 요즘 부친절선물 준비하느라 점심마다 고기만두 하나씩만 먹으면서 돈을 모은다고 하였다. 그날 아들은 위챗모멘트에 "最熟悉的陌生人"이라고 일곱글자 올렸다. 나만이 알아 볼수 있는 일곱글자였다.     나는 어려서 부터 돈을 좋아 했고 돈을 모으기도 좋아 했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 . 헌데 아들은 조금 다른 눈치이다. 돈이 필요하면 얼마 필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돈에 집념은 하지 않는다. 필요하다는 만큼은 넉넉히 넣어 주곤 했었다. 돈에 개념이 없는건 아니다. 소학교때 하루 소비돈으로 5원씩 가지고 갔었는데 아들한테 때로는 돈이 몇십원씩 있었다. 어데서 온 돈인가 물었더니 가끔 동창들한테 돈을 빌려 주는데 10원을 빌려 주고 이틑날 11원을 받는다는것이다. 하루 리식 10%. . . 고리대 위 고리대이다. 리자수입으로 얼마나 올렸는지  모르겠지만 수익률이 높은 만큼 모험도 컸다. 한 녀동창에게는 소학교에서 빌려준 돈을 초중에 올라가서도 본금도 못 받았다 한다. 딱히 모르긴해도 아마 불량자산으로 처리 됐을 것이다. 대학교에 가서도 녀친도 사귀고 숙사관리위원회를 책임지고 회식도 하고 한숙사 친구들과 가끔 맥주도 마인다는데 돈은 별로 쓰지 않는다. 생활비가 떨어지기 전날 지출내역과 함께 현찰얼마 위챗에 얼마 남았다고 잔액까지 준확하게 보고한다.  나는 여적 은행계좌에 얼마 남아 있고 위챗계좌에 얼마 남아 있고 지갑에 현찰이 얼마 들어 있는지 딱히 모르고 두루뭉실하게 살아 간다. 그러고 보면 재무핵산 역시 나보다 한수 위다.             아들이 고중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이 끝난 뒤였다. 반주임선생님한테 인사도 드릴겸 한번 만났더니 선생님이 첯마디로 아들이 정의감이 있는 좋은 학생이라고 칭찬하는 것이였다. 물론 기분은 좋았지만 그 말뜻을 리해하긴 어려웠다. 아들이 후에 학교학생회에서 기획부 부장을 하였는데 선생님께서 많이 밀어주는 눈치였다. 반장이 따로 있었는데 학부모회의에서도 아들이 학생들을 대표하여 환영사를 읽게 하고 학부모대표회의에도 나한테 참가하라고 하셨다. 한번은 학교문화절에서 아들이 도연을 맡아 친구들과 함께  표현한 "서유기"가 예선에서 탈락했었다는데 선생님이 심사위원회와 교섭하여 본선에 들어가서 "표현1등상"을 받은적이 있다. 문화절 경연에 학부모대표로 참석하였었는데 1등상을 받을만한 절목이였다. 그때 아들은 나한테 얘기하면 공연이 공부에 지장 있을가 념려할것 같아 몰래 이모한테서 돈 200원을 빌려 복장과 소품을 인터넸에서 구매하여 여러날 시간을 들여 공연준비를 했다 한다.       고중에 들어가면서 아들은 대학시험 준비에 들어 갔고 나는 사법고시준비에 들어 갔었다. 3년쯤 준비할 예정으로 아들이 대학교 가는해 나도 사법고시를 통과할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다. 사법고시를 치고 돌아오니 롱담을 잘 하는 집사람이 "알만한 것이 좀 있던가"고 물었다. 운이 좋았다. 생각밖에 당해에 그렇게 어렵다는 사법고시를 통과하였고 아들은 2년후에 대학교에 갔다. 아들한테  법률학과를 지망하라고 하니 내가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모습을 익히 보아온 아들인지라 자기는 게을러서 사법고시 공부를 할것 같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법고시를 통과하면  변호사사무소를 열어 준다고 얼리고 닥치고 해서 겨우 제일전업으로 법률학과를 적어 넣었는데 결국 점수가 조금 모자란다. 부자가 함께 변호사를 하기는 어려운 일인가 보다. 아들 사법고시까지 내가 봐줄수 없는 일이니 어쩔수 없다.       나는 하려고 마음 먹으면 이를 악물고 달려드는데 아들은 때가 안돼서 그런가 아직 그런 모습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고중때 반주임선생님처럼 정의감이 있다고 평가하지는 못하겠지만 성품이 선량하고 자상함은 틀림없다. 남을 배려하고저 하는 마음이 보인다. 사내가 험악한 세상에 살아가려면 우락부락한 면도 좀 있고 독한면도 좀 있어야 하는데 마음이 여려서 상처들을 입을가  염려된다.        겨울방학하여 집에 돌아와 코로나19덕에 여러달째 얼굴을 맞대고 있지만 전례없이 단결과 화합이 잘 돼가고 있다. 키작은 사람은 나이가 들어 가고 키 큰 사람은 키뿐만 아니라 사람이 커가는 연고일것이다. 롱담 잘하는 집사람은 쩍하면 "당신 또 컸네요"하지만 인젠 더 클데는 별로 없고  여러모로 야금야금 줄어 드는 것이 피할수 없는 현실이다. 요즘같이 바같환경이 어수선한 세월엔 부자가 얼굴 붉히고 어느 한사람 "가출"하여 어디 피신할 합당한 곳도 없다.       어른들이 등한하여 마스크를 장만할 기회를 놓친 와중에 아들이 춘절전에 마스크 30장을 구매하여 두어 요즘 잘 쓰고있다. 대견스러운 모습이다. 역시 컸고 크고 있다.       오늘로  5월에 접어 들었는데 아직도 고중. 초중 졸업학년을 제외하고  학교들에서 언제 개학한다는 소식이 없다. 대학교가 개학하면 전국적인 나아가서 세계적인 인구 대류동이 시작되기에 이번학기에 개학하기는 물 건너간것 같다.       중국뿐만이 아니라 지구촌 전체가 속한기일내에 마스크를 벗어 버리고 학교들에서 하루 빨리 개학하여 누구아들 누구딸 할것없이 모두 건강한 몸으로 학교에 갈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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