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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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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아들 댓글:  조회:847  추천:0  2020-05-02
아        들                       농민이 셨던 아버지는 나를 대학생으로 공무원으로 변호사로 키웠다.     나는 아들을 어떻게 키워야 아버지한테 교대가 가능 할것인가. . . 물론 아들이 모든 면에서 나를 초월했으면 좋겠지만 무턱 대고 높이 바랄수만도 없는 일이다. 일단 아들이   키가 180이 되여 보통키가 되나마나한 나를  훨씬 초과 하였다. 소학교부터 한족학교에 다녀 중국어가 나보다 낳고 책 읽기를 좋아해서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었기에 "삼국연희"나 "수호전"같은 중국 고전에 나 보다 익숙하다.  중국어나 중국력사에 궁금한것이 있으면 아들한테 물어 보는데 아들은 자료를 찿아서라도 답을 정리해 온다.       때로는 주변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초월했다고 하면 괜히 가슴이 흐뭇해 나면서 입귀가 어느새 위로 걸리고 랭면 한 그릇 이라도 대접하고 싶어 진다.         아버지는 32세에 둘째 아들로 나를 낳으 셨고 나는 서른넷에 아들을 낳았다. 요즘엔 거의 하나씩만 낳지만 가끔 둘씩 낳아키우는 집도 있고 욕심 많은 집은 셋씩이나 키우는데 재롱부리는 뉘집 막둥이를 보면 끌어 안고 뽀뽀 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만  내아들 한테도 못해준 뽀뽀를 쉽게 해주는것도 싱거운 일이라 참는다.       아버지를 계속 "아버지"로만 생각했고 때로는"아바이"라고도 불렀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아버지 아들인 지금 나보다 젊은 시절이 많으셨다. 아들이 나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老爸 "라 부르기에 나의 어머니가 왜 아버지가 젊었는데 "老爸"라고 부르냐고 물은적도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눈엔 중년에 들어선 아들도 그냥 철부지 아들로 보였을 것이고 아버지가 내눈에 계속 높이 보였듯이 아들눈에는 내가 "老爸"로 보일까. . .        후에 안 일이지만 아버지는 손자 이름을 "호남"이라고 지으려고 하셨단다. 헌데 내가 아들이 태여나기 반년전에 벌써 "길호"라고  지어놓았으니 호적에는 "길호"로 올랐었다. 유감스럽게도 아들이 네살때 이름을 바꾸어 지금은 "호남"도 "길호"도 아닌 "은우"라 부른다. 이름이란 결국 다른사람과 구분하기위한 호칭이니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 아닐지라도 듣기에 "고슴도치"나 "불여우"처럼 너무 까칠하거나 요상스럽지 않고 부르는 사람이 쉽게 입에 담아 부를수있고 불리는 사람이 귀로 거부감 없이 받아 들을수 있다면 그만인것이다.           부모님들 집은 화룡투도에 있었는데 대학교를 졸업하고 연길에서 일을 시작하다보니 당해에  녀자친구와 세집을 잡고 함께 보냈다. 물론 서로 좋아 함께 살았겠지만20-30원하는 집세를 절약하자는 속셈도 없지않아 있었다. 두사람 월급을 합해봐야 200원도 안되는 판국에 20-30원이란  적은 돈이 아니였다.  함께 세방살이를 시작하여 자기집을 장만하기까지 한해에 한번씩 네번이나 이사하였다. 용케도 결혼등기도 하지 않고 세방살이를 시작했던 그 초중동창과 결혼하고 지금까지 30년 함께 살면서 낳아 키우는 아들이 이글의 주인공이다.        2020년 경자년에 들어서면서 코로나19 덕에 두석달 질리도록  쉬고 일을 시작해 볼가하니 5.1로동절이라 또 6일 쉰단다. 로동절이면 일을 해야 명실상부할텐데 로동절이랍시고 6일씩이나 놀아야 한다. 자본주의의 원조인 영국에서도 5. 1국제로동절에 겨우 하루휴식인데절 유래대로 데모하면서  자본주의 미국의 "맥도날드"와 "컨더키"를 부순다. 영국이나 미국같은 자본주의나라에서 데모하며 무산계급이 자산계급을 부수는  5. 1일 중국에서는 며칠씩되는 련휴를 시작한다. 양머리를 걸어 놓고 개고기도 끓여 팔고 쥐고기도 구워 팔수 있는 편안한 동네임이 틀림없다. 지난밤 새날이 들어서야 눈을 붙였는데 동녘이 희붐히 밝아오자 자동으로 눈이 떠진다. 세월이 하사한 선물이라 하겠다. 아침을 먹고 나니 아들이 열시에 친구만나러 행차하신단다. 시원섭섭한 일이다. 휴가기간 될수록이면 아들과 놀아 주려 했던 참인데 첫날부터 혼자 시간생기는지라 고마운 일이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를 낳아  키워주신 "아버지"와"어머니"도 쓰고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과 "친구"도 썼는데  아직 한이불을 덥고자는  아내와 내가 낳아 키운  아들을 쓰지 못했다. 요즘은 글쓰기도 편하다. 옛날처럼 초고를 쓰고 원고지에 다시 옮길 필요 없이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손에 들려 있는 전화기에 손에 달려 있는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면 글이된다.       어릴때 아버지가  우리 현(铉)자 돌림이 진위(振威. 한국 충청남도 평택 부근 )김씨 13대라고 알려 주셨다. 고향은 함경북도 성진군(김책시)학남면 신천리라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사진에서만 보고 할머니는 내가 고중때 돌아 가셨는데 화룡 룡수에 계시는 사촌형님이  김씨가문 장손이라고 하셨다. 문화대혁명때 족보를 빼았기고 몇년전 족보를 다시 찿아  "중국진위김씨종친회"도 새로 내왔는데 워낙  우리가 시조로 알고있어던  김시문(金始门 리조조선에서 문과. 무과에 전부 급제)위로 6대가 더 있었다. 하여 우리대는 진위김씨 19대인것이다.       두사람 함께 세집살이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여 태기가 있었다. 두사람 먹고 살기도 어려운 형편이라 아이한테는 세집살이를 시키지 않기로 작심하고 "계획생육"하였다. 지금도 가끔 아들보고 "그때 너의 그 형님이 태여 났더면 너는  없어"하면 아들은 이상해하는  눈길로 바라보며 무슨뜻인가 물어 본다. 그때 "만원호" 였으면 부자집이였고 20대에 자기집이 있으면 "지주집"였다. 93년도에 집은 장만하였지만 "계획생육"은 관성이 붙어 99년도에야 아들을 보게 되였다. 99년도 봄 임신한지 4개월 되는 집사람을 집에 두고 지구촌반대편으로 떠나면서 아들일거라 확정하고 이름을 "길호"라 지어 놓았다 . 네살전까지 아들 호구등록이름은 길호였었다.       아들 첫돐 생일상은 룡정리화호텔에서 받고 나는 영국런던에서 친구들과 마주앉았다. 지금같으면 스마트폰으로 영상통화가 가능할테지만 그때는 몇만리 떨어져있는 타국에서 전화로 현지 소식을 들을수 있는것만으로도 기적같은  사연이였다. 그날 첫돐생일 사회를 아는 사이인 룡정 양춘국가수가 진행하게되였는데 아들이 사회자보고 마이크를 달라고 한다하여 모두 웃었다. 형님동생하면서 가깝게 지내는 지인들이  아들 사진 보면서 "장군이다". "장개석이다"하면서 칭찬하여주었다. 기분은  어떻했든 술맛은  달든 쓰든 친구들은 내술잔에 술을 따르고 또 따랐다. 이국타향에서 마이는 아들 첫돐생일술이 였다.        한번은 도문에서 함께 갔던 최씨형님 내외와 늦게까지 술 마이다가 화장실 갔다 왔더니 형님이 얼굴에 눈물을 주렁주렁 달고 쿨적쿨적 하길래  형수님보고 싸웠는가고 물었더니 아들이 보고 싶어 운다는것이 였다. 아들이 보고 싶으면 형수님이 울든지 아예 두사람 함께 울든지 할것이지 왜 혼자 우냐고 했더니 엄마가 돌아 갔을 때도 함께 울어 본적 없이니 감정이 풍부한 자기가  대표로 울면 된다고 한다. "형님도 참말로 .  아들이 아빠부르며 뛰여다니도록 아들 얼굴보지도 못한 사람도 버티는데 뭔 주책입니까"했더니 형님이 벌겋케 달아오른 눈을 껌벅껌벅하더니 "그렇구나. 미안하다. 한잔해라"하면서 잔을 채워 준다. 웃음이 웃음을 불러오지만 눈물 또한 웃음 못지 않게 전파가 빠르다. 잔을 받고 나니 눈앞이 흐려짐을 어찌할 수 없었다. 제아무리 날고 뛰는  방수공정사도 제눈 작은 구멍에서 솟아나는 눈물을 막는 재간이 없다. 아들 보고 싶다고 울던 그형님의 아들은 그때 중학교에 다녔었는데 지금은 길림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하여 아들을 낳고 상해에서 잘 살고 있다.          아빠는 영국에 있는데 중국에서 아들이 태여 났다고 좋아한 사람은 나와 친구들 뿐이 아니었다. 하루는 집에서 편지가 왔는데 아들이 영국에서 보냈다는 옷을 입고 찍은 사진을 보내 왔다. 어떻게 된 사연인가 알아 봤더니 잘 아는 일본지인이 어떻게 나의 중국집 주소를  수소문하여 나몰래 집에 아들옷 한벌을 보냈던것이였다. 덕분에 아들은 아주 어려서 영국옷을 입어 보게 되였다.         부모자식간에 얼굴을 서로 보지 못하였어도 피줄은 속이지 못하는 모양이다. 집 사람이 아들이 세살때  내사진을 가르키면서 아버지라 알려 주었더니  나의 사진들을 따로 뽑아 가지고 있었다 한다. 그중에 천진에서 녀동창과 함께 찍은 사진 한장 있었는데 녀동창 얼굴부분을 찢어버리고 내 얼굴부분만 짤래내여 누가 달라해도 안주고 하루종일 배속에 넣고 다녔던 적도 있었다 한다. 재미있는 이야기 한두가지 더있다. 록음기속에서 노래소리가 흘러 나오길래 어찌된 영문인가 아들이  묻기에 누가 록음기속에 사람이 있다고 알려줬더니  나중에 록음기속 테이프를 빼고 자기가 먹던 과자를 록음기속에 가득 넣어 어렵게 털어냈적도 있다 한다. 또 한번은 록음기 전기코드를 뽑아 두코구멍에 꽂아 놓고 있더란다. 비슷하게 생긴 두구멍인데 전기코드를 사람코구멍에 꽂아 전기가 나오면 노벨물리상을 받을만도 한 발명이다. . .      아들이 다섯살때 영국에서 귀국했다. 물론 5년간 보지 못했던 부모님도 아내도 보고 싶었지만 사진만으로 보아 오고  실물은 한번도 보지 못한 아들이 더 궁금했다.  귀국전 아들이 말을 시작하면서 매주 통화할때면 아빠 빨리오라고 조르곤 했었다.  몸보다 마음을 앞 세우고 짜른 목을 길게 빼들고 유리문 사이로 마중 나온 사람들을 살펴보니 맨앞에 큼직한 꽃다발을 들고 분리선을 뛰쳐 들어 오려고 설치는 꼬마가 보였다. 출구를 나서기전 꼬마는 결국 분리선안으로 뛰여 들어와 아버지라 부르며 안긴다. 보안일군도 대개  상황파악이 가는지 말리지 않았다. 나를 닮아 고수머리였고 여적 깍지 않았다는 뒤머리가 뱅글뱅긍 탈려 등에 닿아 있었다. 오래전 일이건만 지금 생각해봐도  영화 한장면 같은 모십이 기억에 생생하다. 아들과의 첫만남 그 장면은 필경 내 인생  드라마중 명장면이였다.          아들 눈에는 새로온 못보던 아버지도 신기했지만 여적 독차지하고 있는 엄마가 더컷다. 엄마 옆자리를 내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때 저녁이면 중앙TV에서 뉴스련합보도후 련속극 를 두집 련속방송했었는데 아들은 련속극 삽입곡을 나와 함께 높은소리로  부르며 끝까지 보고 엄마 아빠사이에 누워 잠들었다.   누울땐 분명히 엄마 아빠사이에 누웠든데 자고 깨나면 엄마가 가운데 눕고 자기가 한쪽켠에 간것이 좀 수상했을 것이다.         아침에 아들을 유치원에 데려다 주곤하였다. 하루는 아들과 가지런히 걷다가 아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뒤에 좀 떨어지기 되였다. 옆에 내가 없는것을 발견한 아들이 급기야 아버지를 부르며 울며 허겁지겁 되돌아 뛰여 오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가슴이 섬찍하고 코나루가 찡해 났다. 이것이 어린 아들 가슴에 아버지존재 였을까. 그후부터 아들은 유치원가는 길에 앞서지도 뒷서지도 않고 바로 옆에 붙어 다녔다.            나는 자라면서 아버지 어머니한테 매를 맞아본 기억이 없다. 누나가 시집 갈 때 결혼식 상차림으로 준비했던 색과자를 훔쳐 친구들과 나눠 먹고 들통나서  누나한테 쫒겨 다닌 적은 있었다. 나의 아버지 어머니는 어려운 상황에서 자식 셋을 키우면서도 손찌검 한번 안하고 나를 키웠지만 나는 하나 자식 키우면서도 아들한테 두세번 손을 댔다. 한번은 때린 나의 손이 아플 정도로 호되게 패줬다.       아들이 소학교에 다닐때 일이다. 아침에 가방을 싸던 아들이 필통에서 종이 쪽지 한장 꺼내서 슬며시 쓰레기통에 가져다 버리는 모습이 보였다. 쪽지를 펼쳐보니 먼저날 숙제였다. 왜 버리는가 물었더니 하지 않아도 되는 숙제라고 변명한다. 하지 않아도 되는 숙제도 숙제인가. . . 실말을 하라고 하니 아들은 계속 우긴다. 뒤통수를 한대 패주니 울음을 터뜨린다. 공부하기 싫으면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더니 흑흑 흐느끼면서도 학교에는 가겠다고 하기에 반주임선생님한테 데리고 갔다. 헌데 이럴수가. . . 선생님이  자기 한테 불리한 말씀을 하니 쬐고만 놈이 두눈을 바로 뜨고 정면으로 선생님을 빤히 쳐다 보는 것이였다. 우리가 소학교다닐땐 선생님 으름장 한마디면 머리도 못쳐 들고 선생님 발끝이나 겨우 쳐다 봤었는데. . . 내 집이 였으면 또 한대 패 줬으련만 선생님앞이라 올리미는 화를 겨우 참고 집으로 돌아 왔다.       또 한번은  초중겨울방학때 일이다. 며칠 지나면 개학하는데 하지 않은 숙제가 많았다. 하루는 늦게까지 숙제하길래 과일 깍아다 주며 영어숙제책 몇페지 번져 봤더니 ABCD에서 선택하시오 하는 선택제에 EF를 적어 놓은 답안이 수두룩 했다. 숙제책으로 뒤통수를 툭 쳤더니 눈을 바로 뜨고 마주 본다. 신경이 곤두 섰다. 숙제책을 팽개쳐 버리고 소학교때 선생님 분풀이 까지해서  주먹으로 패줬더니 그제야 잘 못했다고 아프니 때리지 말라고 사정한다. 아프라고 때렸는데 아프다고 때리지 말라고 사정하는 도리도 있는가. . . 도리는 있건 없건 이날 아들은 매맛을 톡톡히 봤고 나는 벌겋게 달아오른 손바닥을 보면서 좀 심하지 않았나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아들은 어려서 부터 애들 답지 않게 자상한 놈이였다. 소학교때 엄마가 출국하여 옆에 없을 때가 많았는데 책갈피속에 엄마머리카락을 주어서 끼워 넣고 엄마가 생각나면 책을 펼치고 엄마머라카락을 만져 본다고 하였다. 애 엄마가 들었으면 가슴 아플 이야기다. 해마다 엄마 아빠 생일을 기억하고 축하메세지를 보낸다.      초중때부터 해마다 부친절 이면 나한테 선물을 준비한다. 테니스운동 할때는 손목보호대와 테니스공 가방을 받았고 변호사를 시작한 후로는 멋진 버버리표 목수건도 받았고 법률관련 책도 받았고 그럴듯한 향수도 받았다. 고중때 한번은 학원에 내는 학비가 차이나는것 같아 다른데 쓰지 않았는가 했더니 아들은 울먹이면서 요즘 부친절선물 준비하느라 점심마다 고기만두 하나씩만 먹으면서 돈을 모은다고 하였다. 그날 아들은 위챗모멘트에 "最熟悉的陌生人"이라고 일곱글자 올렸다. 나만이 알아 볼수 있는 일곱글자였다.     나는 어려서 부터 돈을 좋아 했고 돈을 모으기도 좋아 했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 . 헌데 아들은 조금 다른 눈치이다. 돈이 필요하면 얼마 필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돈에 집념은 하지 않는다. 필요하다는 만큼은 넉넉히 넣어 주곤 했었다. 돈에 개념이 없는건 아니다. 소학교때 하루 소비돈으로 5원씩 가지고 갔었는데 아들한테 때로는 돈이 몇십원씩 있었다. 어데서 온 돈인가 물었더니 가끔 동창들한테 돈을 빌려 주는데 10원을 빌려 주고 이틑날 11원을 받는다는것이다. 하루 리식 10%. . . 고리대 위 고리대이다. 리자수입으로 얼마나 올렸는지  모르겠지만 수익률이 높은 만큼 모험도 컸다. 한 녀동창에게는 소학교에서 빌려준 돈을 초중에 올라가서도 본금도 못 받았다 한다. 딱히 모르긴해도 아마 불량자산으로 처리 됐을 것이다. 대학교에 가서도 녀친도 사귀고 숙사관리위원회를 책임지고 회식도 하고 한숙사 친구들과 가끔 맥주도 마인다는데 돈은 별로 쓰지 않는다. 생활비가 떨어지기 전날 지출내역과 함께 현찰얼마 위챗에 얼마 남았다고 잔액까지 준확하게 보고한다.  나는 여적 은행계좌에 얼마 남아 있고 위챗계좌에 얼마 남아 있고 지갑에 현찰이 얼마 들어 있는지 딱히 모르고 두루뭉실하게 살아 간다. 그러고 보면 재무핵산 역시 나보다 한수 위다.             아들이 고중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이 끝난 뒤였다. 반주임선생님한테 인사도 드릴겸 한번 만났더니 선생님이 첯마디로 아들이 정의감이 있는 좋은 학생이라고 칭찬하는 것이였다. 물론 기분은 좋았지만 그 말뜻을 리해하긴 어려웠다. 아들이 후에 학교학생회에서 기획부 부장을 하였는데 선생님께서 많이 밀어주는 눈치였다. 반장이 따로 있었는데 학부모회의에서도 아들이 학생들을 대표하여 환영사를 읽게 하고 학부모대표회의에도 나한테 참가하라고 하셨다. 한번은 학교문화절에서 아들이 도연을 맡아 친구들과 함께  표현한 "서유기"가 예선에서 탈락했었다는데 선생님이 심사위원회와 교섭하여 본선에 들어가서 "표현1등상"을 받은적이 있다. 문화절 경연에 학부모대표로 참석하였었는데 1등상을 받을만한 절목이였다. 그때 아들은 나한테 얘기하면 공연이 공부에 지장 있을가 념려할것 같아 몰래 이모한테서 돈 200원을 빌려 복장과 소품을 인터넸에서 구매하여 여러날 시간을 들여 공연준비를 했다 한다.       고중에 들어가면서 아들은 대학시험 준비에 들어 갔고 나는 사법고시준비에 들어 갔었다. 3년쯤 준비할 예정으로 아들이 대학교 가는해 나도 사법고시를 통과할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다. 사법고시를 치고 돌아오니 롱담을 잘 하는 집사람이 "알만한 것이 좀 있던가"고 물었다. 운이 좋았다. 생각밖에 당해에 그렇게 어렵다는 사법고시를 통과하였고 아들은 2년후에 대학교에 갔다. 아들한테  법률학과를 지망하라고 하니 내가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모습을 익히 보아온 아들인지라 자기는 게을러서 사법고시 공부를 할것 같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사법고시를 통과하면  변호사사무소를 열어 준다고 얼리고 닥치고 해서 겨우 제일전업으로 법률학과를 적어 넣었는데 결국 점수가 조금 모자란다. 부자가 함께 변호사를 하기는 어려운 일인가 보다. 아들 사법고시까지 내가 봐줄수 없는 일이니 어쩔수 없다.       나는 하려고 마음 먹으면 이를 악물고 달려드는데 아들은 때가 안돼서 그런가 아직 그런 모습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고중때 반주임선생님처럼 정의감이 있다고 평가하지는 못하겠지만 성품이 선량하고 자상함은 틀림없다. 남을 배려하고저 하는 마음이 보인다. 사내가 험악한 세상에 살아가려면 우락부락한 면도 좀 있고 독한면도 좀 있어야 하는데 마음이 여려서 상처들을 입을가  염려된다.        겨울방학하여 집에 돌아와 코로나19덕에 여러달째 얼굴을 맞대고 있지만 전례없이 단결과 화합이 잘 돼가고 있다. 키작은 사람은 나이가 들어 가고 키 큰 사람은 키뿐만 아니라 사람이 커가는 연고일것이다. 롱담 잘하는 집사람은 쩍하면 "당신 또 컸네요"하지만 인젠 더 클데는 별로 없고  여러모로 야금야금 줄어 드는 것이 피할수 없는 현실이다. 요즘같이 바같환경이 어수선한 세월엔 부자가 얼굴 붉히고 어느 한사람 "가출"하여 어디 피신할 합당한 곳도 없다.       어른들이 등한하여 마스크를 장만할 기회를 놓친 와중에 아들이 춘절전에 마스크 30장을 구매하여 두어 요즘 잘 쓰고있다. 대견스러운 모습이다. 역시 컸고 크고 있다.       오늘로  5월에 접어 들었는데 아직도 고중. 초중 졸업학년을 제외하고  학교들에서 언제 개학한다는 소식이 없다. 대학교가 개학하면 전국적인 나아가서 세계적인 인구 대류동이 시작되기에 이번학기에 개학하기는 물 건너간것 같다.       중국뿐만이 아니라 지구촌 전체가 속한기일내에 마스크를 벗어 버리고 학교들에서 하루 빨리 개학하여 누구아들 누구딸 할것없이 모두 건강한 몸으로 학교에 갈수 있었으면 좋겠다.   
32    봄은 기필코 올것이다 댓글:  조회:417  추천:0  2020-03-05
봄은 기필코 올것이다            (김재현)   립춘이라 봄이 오는 계절 겨울은 떠날준비 마치고 세상만물 봄우뢰 기다리건만 경자년 새봄은 발걸음 멈췄구나 코로나19 보이지 않는 악마   신주대지 한복판  무한에서 봄이 오는길 막아섰구나   우수경칩 봄 기운 완연한데  겨울 가고 안 오는 봄 있더냐 장성내외 한마음 되고 대강남북 한주먹 되엿으니 코로나19 보이지 않는 악마 황학루의 굳은 절개 꺽을소냐 장강물의 세찬 흐름 막을소냐 봄은 기필코 올것이다 새봄 소식 귀에 들리네 새봄 모습 눈에 보이네             2020.03.05
31    봄의 선구자 댓글:  조회:365  추천:0  2020-03-05
봄의 선구자                   (김재현)   안녕하세요 백의천사들  하루세끼 식사는 챙겨 드시는가요 지난밤도 뜬눈으로 긴긴밤 지새우진 않았겠죠  병마에 시달리는 환자를 구하려고   소가정의 안위는 뒤로하고  역행길에 오른 백의천사들 집 떠난지 언제 입니까   힘 내세요 외로와 하지마세요 그대들은 혼자가 아닙니다 신주대지 억만의 뜨거운 심장 그대들과 박동을 같이합니다 그대들 뒤에는 우리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 기다립니다 함께했던 손길들 기다립니다 천만쌍의 눈길들 지켜봅니다  아름다운 꽃다발 기다립니다    그대들이 쏟은 땀방울 곧 결실을 맺을겁니다 떠나던날  씩씩한 기상대로   개선가 부르며 돌아 오세요  그대들은 이겨울 혹한 몰아낸   사랑스러운 전사들입니다 그대들은 얼어붙은 이땅을  가슴조여 숨못시던 이땅을  녹여준 봄의 선구자입니다                    2020.03.05
30    백의천사 白衣天使 댓글:  조회:389  추천:0  2020-03-05
백의천사  白衣天使         (김재현)   2020년 새해 벽두에 펼쳐진 보이지 않는 악마와의 싸움터 무한신형폐렴과의 대결 한마음 한뜻으로 똘똘뭉쳐 흰옷입고 떨쳐나선 용사들 신성한 그 이름 백의천사 백의천사 도고한 그 기백 만리장강 타고 신주대지 적시네   조국땅 방방곡곡에 펼쳐진  사신과 대결하는 처절한 싸움터 환자생명 구하기 위하여  온역만연 막기 위하여 흰옷 입고 떨쳐나선 용사들 사랑스러운 그 이름 백의천사 백의천사 거룩한 그 업적 만리장성과 더불어 청사에 빛나리                                                               2020.02.01  
29    가을 댓글:  조회:509  추천:0  2019-09-16
      가  을     내리쬐던 땡볕 맥을 버리니 익어가는 잎새 한잎 가을을 알리네 처마밑 지지배배는 어데론가 종적 감추고 끼룩끼룩 소리나는 곳엔 철새가 줄지어 남으로 나네   머리위 만리창공은  푸른비단 높게 걸어    숨쉬는 가슴속 구름 싸서 하늘로 하늘로 뻗어가고   발아래  천리옥토는 금빛주단  넓게 펼쳐  숙여지는 머리속 이삭 담아 지평선 멀리로 이어가네 
28    갈림 길-이어지는 길 댓글:  조회:587  추천:0  2019-07-01
갈림 길-이어지는 길 길이란 얼기설기 천만갈래 별거 아닌 인생 고작 백년도 못 살면서 천년을 살것처럼 누구를 위한답시고 총칼을 마주겨눠 살점을 떨어뜨리고 령혼을 앗아간들 정녕 누가 얻는 것은 얼마며 누가 잃는 것은 얼마요   토끼 반도 하나 한 걸음이면 넘을   삼팔 +- 누구의 땅인데 누구의 터전인데 부모처자 마주보며 피눈물로 앞을 가리며 애탄하며 땅을 쳐도 못 건너는 안보이는 선   갈림 길 색 바래가는 하얀집 넓은 광장뒤 붉은집 붉은 광장옆 탑집 이집.저집에서 천만리 떨어졌으면서 제집 문앞 길 인양 살펴보는 길 삼십팔+ 삼십팔- 지구촌 갈수록 작아지는 동네 희다고 얼마나 힐것이요 검다고 얼마나 검을거요 검음이 잇어 지가 흰것을 코가 크면 뭘하리요 코 그늘에 두더지 키울꺼요 덩치가 크면 뭘하리오 참새도 오장육부 알뜰히 챙겨 자기 말로 이야기 나누며 자기 살기 싶은 동네 집 짓고 한가족 함께 모여 오붓이 살아 가는것을 누구 밥그릇 쓰게해서 지 밥그릇 얼마나 달것이요 단들 뭘 하리오 언젠가는 단맛위에 누구 밥그릇에 뿌렸던 쓴 재가 얹일것을 간들 간들 보이는 갈림 길 언젠가는 이어질 길 혈육이 서로 만나 내땅 내집에서 가슴을 치며 아픔을 나누고 다리펴고 한온돌에서 온 가족 다모여 된장에 고추장 김치에 오그랑죽 우리음식 챙겨놓고 껄껄껄 호호호 마주보며 함께 살아보세 2019.6.30
27    낚시 이야기 댓글:  조회:861  추천:0  2019-06-18
낚시 이야기 세수대야 한국에서 가까이 지내는 두사람 하는 얘기 들었어요. 쉬는 날 한사람 낚시 간다고 얘기했습니다. 친구가 몇시에 떠나려고 ...물었습니다. 말 꺼낸 사람 어이 없다는듯 " 세수대야" 두개 마주 봐서 떡이 나오냐? 고기들 징그러워 단식하겠다 하면서 주먹을 내 보였습니다. 아주 귀찮다는 눈치였습니다. 이틑날 친구와 함께 낚시터에 가봤더니 분명히 안 간다는 눈치였던 친구가 어느새 낚시장비를 펼쳐 놓고 주위를 두리번 두리번 살피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제 주먹을 보였었는데 다섯시라는 암호였습니다. 초봄 다섯시라 날이 희붐희붐 밝아오기 시작했는데 함께간 친구가 멀리서 "에헴"헛기침 하자 기다리던 친구가 아무일도 없었던듯 자리에 앉아 주섬주섬 낚시 시작했습니다. 안갔더면 얼마나 서글펐을가요... 맨날보는 세수대야 보면 별거 아니지만 이삼일 안보면 은근히 보고 싶어지는 세수대야들... 엊그제도 며칠 못본 세수대야 몇달 못본 세수대야 두루두루 마주 앉으니 펀들펀들 거의 그대로 건만 언제 어쨋냐는 뜻 수집은양 제입으로 술잔만 운반하다 몇순배 돌아가니 그제야 슬슬 터지는 익살들... 50년 묵은지들 삶의 향 가득 묻은 못내 진실하면서도 가는 세월에 씼겨 어덴가 서글픈듯한 들었던 얘기 못 들었던 얘기 했던 얘기 안했던 얘기 하여간 할얘긴 또 따로... 상어 매운탕 영국과 프랑스사이에 도버해협이 있습니다. 지금은 해저 터널이 통해 유로스타도 통하고 자가용도 통하고 옛날 언덕넘어 사촌집 다니듯 할수있습니다. 런던에서 자가용으로 두시간 남짓하면 도착합니다. 영국쪽에서 프랑스쪽으로 쭉 인공 방파제가 뻗어 있습니다. 여러가지 피부색 인종들이 모여 여러가지 해어를 낚습니다. 주로 고등어 낚시를 하는데 하이갈에 낙씨 일곱개를 매달고 힘자라는 만틈 냅다 던집니다(낚시대 하나에 낚시 일곱개 이하로 제한합니다). 미끼로 은박지를 가늘게 오려 매다는데 고등어들 눈엔 해볕 아래 옅은 물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은박지(한국분들은 은박지를 아예 반짝이라고 하더군요)가 멸치로 보여 무작정 덥칩니다. 연돌을 묵직히 달아서 사오십미테 힘껐 던지고  잽싸게 자아 올리면 낚시 일곱개에 고등어 여덟마리 올라 올 때도 있습니다. 첯날 아침 일찍 해 뜨기 전에 도착하여 고등어 낚시 하기전 강태공낚시도 놓았습니다. 참말로 가는 날이 장날 얼마 안지나 꼬마 상어가 올라왔습니다. 공복에 갔던지라 가지고간 고추장을 걸찍히 풀어 즉석 상어매운탕을 끓였습니다. 대서양상어에 우리 고추장 세상에 그런 매운탕 또 있으련만 홀 그만 맛은 해란강 세치네탕보다 별로였습니다. 가지고간 쏘주 한잔씩 나누면서 해뜨길 기다리는데 동쪽하늘을 불태우며 올라오는 큰 불덩이를 바라 보노라니 한 아늘아래 같은 태양을 보며 살면서도 행여나 꿈에서나 만날가 그려보는 두고온 보고 싶은  얼굴들 눈앞에 매삼매삼... 하늘엔 뜨거운 불덩이 하나 가슴엔 후둑후둑 뛰는 주먹하나 시큼해지는 코옆엔 흐려지는 검은공 둘... 저수지 바닷고기 경기도 광명사거리에서 안양쪽으로 나가다 안산 갈림목에 가면 방둑머리라고하는 风水宝地(우리말은 알아서 번역하세요)가 있습니다. 앞에는 저수지 뒤에는 행복산... 주말 친구들과 저수지에 낚시 갔는데 밤 늦게까지 거나하게들 마이고  go-stop 진행하다 화투장을 붙들고 판으로 깔았던 홀이불을 서로 땡겨 덥고 쓰러져 잤습니다... 그중 한친구만 억쑤로 폼잡고 요란히 텐트치고 밤새 낚시 했어요. 이틑날 아침 매운탕 올라 왔는데 모두들 밤새 낚시하느라 수고했다 입마르게 치하하며 맛있게 먹고나니 매운탕 끓인 전라도 아지매 하시는 말씀: "거시기"맛있쬬 근데 매운탕고기 낚시 고기 아니고 "거시기"아침에 내가 물고기 가게 배달시킨겁니다. "거시기"저 양반 엊저녁 텐트안에서 코굴며 자서 물고기들 놀라서 다 도망가더라구요... 이상하게 아침상에 매운탕에 칼치찜이며 고등어 구이 올라왔다 했더니... 낚시고기면 어떻고 배달고기면 어떻고 바닷고기면 어떻고 하여간 잘 놀고 잘 먹고 왔습니다만 전라도 아지매 밤 낚시군한테 "거시기"괘씸죄에 걸렸나 방둑머리 저수지낚시는 이후로 끝...
26    그런사람 댓글:  조회:732  추천:0  2019-02-18
   그런사람         뭉게뭉게...몽글몽글 당신머리에 뭐가 들었는지 내머리에 물어보면 알것같애 후둑후둑...콩닥콩닥 당신가슴이 얼마나 뛰는지 내가슴에 손 얹어보면 알것같애 깜빡깜빡... 소곤소곤 당신눈이 뭘 말하려는지 내눈이 알아들을것같애 오불꼬불...쭉쭉빵빵 당신발길 어데로 가려는지 내발길이 찿아 갈것같애 그런사람 당신과 나와 저 나그네... 우린 친구니까
25    그대로 갑시다 댓글:  조회:330  추천:0  2019-01-21
그대로 갑시다 꽃이 피면 봄이 오는 구나 꽃 향기 즐기세요 그자리에 그꽃은 백일홍이 고작이고 만자천홍 자색 뽐내도 당신이 봐야 반깁니다 비가 오면 얼마나 멀리에서 왔을까 내몸을 깨서 땅을 적시는 그 모습 보세요 마중 가지 않아도 당신 얼굴 흐르는 눈물 가려줍니다 바람이 불면 어찌 그 큰 구름 몰고 다닐까 생각해 보세요 흔들리는 당신 마음 흔들리라 달래 줍니다 락엽이 지면 떨어지는 그 속내 생각해 보셨습니까 추풍락옆 싫어도 떨어집니다 래년 봄에 다시 오리라 벼르고 떨어 졌을까요 눈이 오면 너는 왜 그렇게 희냐 생각해 보셨습니까 겉희고 속 검은건 백로뿐 아니고 나와 당신인것을 살다 보면 귀찮은일 어찌 없으리오 거울 한번 보세요 반듯한 얼굴에 눈.코.입 정히 배겼으니 그대가 바로 이 세상 유일의 당신입니다
24    명절 댓글:  조회:617  추천:0  2018-12-26
명절 누가 봐도 명절입니다. 가슴이 흐뭇해지는 두 글자입이다... 소시쩍 제일 큰 명절은 소대(촌민소조) 총결날이 였습니다.      그날이면 소대에서 대장네집(촌민소조 소조장)에서 총결을 지었는데 저희와 같은 조무래기들 바램은 총결후 누구에게나 차려지는 "총결음식"이엿습니다.그때 촌민들 겨울 주채소는 배추김치 감자 무우였습니다. "계획생육"이 덜 됐던 시절이라 집집마다 식구(食口)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보통 대여섯명 ...그이상이 였습니다. 마을에 "열세호"집도 있었습니다.그뜻인즉 식구가 열셋이 였습이다. 저희집은 식구가 다섯명이 였는데 겨울움김치 배추 300포기를 담궜습니다.       윗집 아들넷집과 아래집 딸넷집에선 500포기씩 담궜습니다(진실입니다.저희집은 남매 셋이 였는데 윗집은 아들넷,아래집은 딸 넷)총결날엔 대장이 일년총결을 지었는데 "중심사상"이 당해 일을 제일 많이 한 사람에 대한 "표창"이 였습니다.일년 365일. 하루에 한공인인데 "800"공도 있었습니다. 뜻인즉 요즘 말로"쟈발쟈댄加班加点"겨울에도 쉬지 않고 소수레로 농가비료를 논과 밭에 내는 실농군들만 벌수있는 공수였습니다. 선진소대 윗동네(신민4대) 년말총결 분배 한공에 80전,일년최고 "분배"가 0.8원×800공=640원 이였습니다.      그집에서는 그 "분배를 어디에 다 썻을까" "이 많은 분배를 어디에 다쓸가...배나무집 영감.배나무집 노친 밤새껏 토론했네..."그때 노래 가사입니다.       대장이 공수를 발표한후 바로 우리 조무래기들 명절이 였습니다. 소대 전 촌민들에게 돼지고기 듬뿍 ...김치듬뿍 넣고 쇠가마에 넣고 지글지글 보글보글 끓인 "돼지고기 장물"이 였습니다. 지금말로 "김치찌개"      한나이 더들어서 취직후 명절은 원단 춘절이 였습이다.그때는 단위에서 소박한 "복리"로원단에 콩기름한통(열두근?).쌀한매대"활실히 200근!" 또 사과배 한 "쾅재" 도 있었습니다.        현 현교수라고 청도모대학 교수하시는 가까운 친구가 있었습니다. 자전거에 사과배"쾅재" 실고 가는 친구 잡아  보니까 실정이 "두사람 한쾅재"라 놓아 줬습니다. 좀후 친구 마누라 임신해서 사과한꾸러미사서 친구 손에 들려줘서 친구집에 가서 위촌 좀 받았는데 술 좀되니까 교수친구가 "니 먹은 사과 내가 산거 아니고  저기 자 산거다"불어 버렸습니다. 그때 교수들은 머리가 별로였습니다. 머리별로인 교수친구 한마디 "명절위촌" 이엿습니다.       원단.춘절엔우리집과 처가집에 갔습니다.그때 연길에서 투도에 가려면뻬스역에가서 줄을 섰습니다.        지금도 우리집 하면 집사람한테 미안한 얘기지만 그때는 확실했습니다. 우리집에 먼저가고 처가집에 이틑날 갔습니다... 한번은 단위  총결짓고 집에 가서 아버지(맨발의사)한테 "어제 술 마이고 피를 토했는데 술  마이람두..."햇더니 의사선생님 말씀"괜찮아.술마이고 위로 나오는 피는 위출혈이 아니고 기관 살짝 파열이니까" 아버지를 모시고 부자간 "토혈주" 명절이 였습니다.      단위에서 사직하고 물속헤염"下海"해서 대서양 저쪽 섬나라에 갔습니다.집 떠나 멀리가니 부모처자에 쏠리는 그리움이 "명절"였습니다. "춘절"이란 동양권 중국 한국(구정) 베트남에서 주로 세는 명절입니다. 섬나라에  간 첯해에는 참으로 동쪽(서쪽)으로 나는 철새(铁鸟)가 그리웠습니다. 춘절날 서둘러 일을 마치고  뻐스로 숙소로 향하는데"꽹""꽝""뿡"요란한 소리에 피곤한 눈을 뜨고 봤더니 꽹과리 북소리 요란한 와중에 노랑머리 사는 나라에  검은머리 조무래기들 벗은 윗도리에 빨간 댕기치마 두르고 줄지에 쪼로록 흘러갑니다. 차이나타운에서 해마다 "차이니즈 뉴예"세는 겁니다.     순간 얼굴엔 두줄기 빗물...살았던 그 나라에선 감춰야할 빗물이지만 이나라에선 까닭을 알아볼수 없는 빗물이였습니다...감추지 않았습니다.당시 임신3개월 집사람과 년로하신 부모님 집에 두고 "잘 살아보세" 속으로 다지며 지구촌 반대편에 가서 맞았던 명절이 였습니다.면목도 못본 아들놈 대신 즐겁게 뛰노는 꼬마들을 눈에 담았습니다. 그해 명절은 혼자 배아팠던 집사람과 못알아듣게  불렀을 피줄의 그리움이 였습니다. 얼마를 먹었는지 누구도 헤아릴수 없는 세상한가자만 확실합니다. 춘추바라던 "명절"인젠 별로 입니다. 춘추"명절" 인젠 눈 감아도 보이는 피줄이 이어진 사람 피줄을 이어준 사람 그리고 친구 ................. 그려지는 날   만나는 날 명절입니다.
23    선생님 댓글:  조회:262  추천:0  2018-09-16
               나의 선생님 봄비는 몸을 부셔 만물을 소생시키고 조용히 땅속에 스며들고 초불은 몸을 태워 주위를 밝혀주고 눈물만 남기고 떠납니다.      인간의 아둔한 머리속 흰피에 령혼을 심어주는 성생님들 정성을 봄비라, 초불이라 하겠습니다.       화룡현 룡수평 시골에서 태여난 저희는 유치원에  다닌 기억이 없습니다.딱한번 누나와 함께 한마을 다른소대(촌민소조)유치원에 놀러갔었는데 선생님이 누나와 저희한테 옥씨튀개(옥수수 튀김)한줌씩 주었습니다. 간식이란 거의 없던 시절이라 선생님이 주신 한줌의 옥수수튀김은 그렇게 맛있을수가 없었습니다.그맛은 지금의 그어떤 산해진미로도 바꿀수 없는 별미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것입니다.그때 다른소대 어린이였던  저의 작은 손에 옥수수튀김 한줌을 쥐여주었던 유치원선생님의 그손은 틀림없는 천사의 손이였습니다.      소학교에 입학하는해 대대(촌민위원회)에서 벽돌로 교사를 새로 지었습니다.그때 촌에 벽돌집이란 학교,집체호(지식청년들  숙소)가 전부였습니다.소학교와 초중을 함께 지었섰는데 그때는 소학교 5년제,초중2년제 였습니다.소학교 1학년 반주임 선생님은 향소재지에서 우리촌으로 걸어서 출퇴근 하신 남순복선생님이셨는데  저의 어머니와 년세가 비슷한 분이셨습니다.한번은 조선어문시험에서 100점을 맞았습니다.헌데 시험지를 받아보니 "오리"를 "우리"로 잘못썼기에 선생님을 찿아가 성적을 잘못매겼다고 보고하였습니다.선생님은 성적을 95점으로 고쳐주시고 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성실한 학생이라고 칭찬해주셨음니다.스스로 찿아갔지만 100점이 95점으로 떨어지니 코마루가 시큰해났습니다. 착하다고 칭찬해주시기에  이를 악물고 기여나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았습니다.얼마 안지나 선생님은 반장직을 저한테 맡기셨습니다.      소학교 4학년때 한책상에 함께 앉았던 동창 아버지가 선생님이셨습니다.한번은 상학종이 울려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셨는데 "기립"을 불러야할 저희가 옆에 앉은 동창과 옴니암니 다투고있었습니다.노하신 선생님은 우리둘을 교탁앞에 불러 세웠습니다. "이놈들, 반급간부란 자식들 상학시간이 됐는데도 싸워...". "찰싹" 선생님의 큰손바닥이 저하고 싸운 동창의 작은 얼굴에 떨어졌습니다.  눈을 딱 감고 내얼굴에 떨어질 선생님의 주먹을 기다렸습니다.헌데 선생님은 당신 아들만 때리시고 나는 때리지 않았습니다.나도 때릴것이지...왜 당신 아들만 때리고 아들과 싸운 나는 때리지 않으셨을까???얼굴은 변을 면했지만 가슴속에는 큰 의문부호와 작은 멍이 새겨졌습니다.      그때 마을앞에 룡정에서 화룡으로 가는 철길이 있었습니다.봄이면 철길옆에 자라는 풀을 뽑는 "호로중대"가 있었습니다.한번은  호로중대 활동일 풀 뽑으로 갔어야 했는데 호미를 들고 과수대 살구밭에 갔습니다.호미자루로 살구나무 가지를 후려쳐 익지도 않은 살구를 싹쓸이하다 함께간 개구장이들 태반히 잡혔습니다.과수대 대장은 우리가 가져간 호미를  전부 빼았고 담임선생님을  부르셨습니다.선생님은 과수대 대장 앞에서 우리를 호되게 꾸짖으시며  호미를 찿아주고  학교에까지 우릴 줄지워 데리고 갔었습니다.뒤지게 혼날줄 알았는데 선생님은 의외로  "살구가 아직 안익어서 못먹어.그리고 호미로 살구나무를 치면 살구가 다 떨어져...임마들아"하시면서 우리를 쉽게 풀어 주었습니다.그후로   "호로중대" 는 취소되고 우리는 그 과수대밭엔 과일훔치러 가지 않았습니다.      3년제 초중을 세개학교에 거쳐 5년을 다녔습니다.룡수1중에서 초중에 입학하여 투도2중을 거쳐 투도1중에서 초중을 졸업했습니다.       투도2중에 다닐때 학교운동대회날이 였습니다.저희가 철봉에서 떨어져 팔목이 부러졌습니다.오기선선생님이 담임선생님이 셨는데 다짜고짜 저희를 둘쳐업고 한창경기중인 축구장을 가로지나  병원으로 달려가셨습니다.해란강제방공지에 나가신 의사선생님이 돌아오시길 기다려 썩후에야 진료를 시작했는데 아주 재래식이였습니다.팔목 상처부위가 이미 퉁퉁부었는데 뒤에서 선생님과 의사선생님이 저의 몸과 팔을 잡고 앞에서 다른한 의사선생님 저의 손을 잡고 힘으로 당겨 엇갈린 뼈를 제위치에 잡아넣었습니다.아팠습니다.뼈를 상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 아픔이  말로 형연하기 어려움을 알지못합니다. 아픔도 아픔이려니와 뼈가 제대로 잇기지 않아 불구가 될것같은 두려움에 혼신이 후들후들 떨림을 어쩔수 없어습니다.눈물이 절로 흐리기 시작했습니다.선생님은 저의 몸을 꼭 끌어안아 주시며 울고싶으면 울라고 하셧습니다.선생님앞이라 이를 악물고 울음을 참았습니다.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아프면 아프다고 소리내여 울었더면 혹시 덜 아팠을지도 몰랐을텐데...병원에서는 베니야판으로 손목 상처부위를 고정하고 붕대로 싸서 목에 매여주었습니다.선생님은 저희를 집까지 자전거에 태워다 주었습니다.아버지는 선생님이 수고하셧다고 하시면서 어머니한테  술상을 챙기라고 지시하셧습니다.그날후로 선생님과 아버지는 절친이 되시고  투도에서 가끔 만나시면 약주도 함께하시곤 하셨습니다.       초중을 투도1중에서 졸업했습니다.그때 학교마다 초중에서 고중에 가지않고 중등전문학교에 직접가는 수험생지표가 있었습니다 .중등전문학교에 가려고 일년 재학했습니다.헌데 결국 이듬해에도 겨우 연변사범학교 녀학생지표가 달랑 한장  왔습니다.화룡2중(화룡고중)에서는 입학통지서가 왔는데 고중에 가야할지 중등전문학교 지표를 일년 더 기다려 봐야할지...술두병 사들고 손윤식담임선생님을 찿아갔습니다.그때 흑백텔레비가 금방 나왔었는데 텔레비프로가 끝날때까지 선생님과 사들고간 술두병 다마이고 선생님집 술도 꽤나 마였습니다.선생님은 일년 더기다려도 남학생지표가 올지 알길이 없으니 화룡고중으로 가라고 하셨읍니다.하고싶은 얘기가 정말로 많았습니다.선생님과 하루밤새 나눈 얘기가 아버지와 일년간  나눈 얘기보다도 많았을것입니다. 그때 지표를 기다리는 녀동창들도 몇명 있었는데 학교일어선생님 녀동생이 결국 지표를 받아 연변사범에 갔습니다.재학생이라 성적도  줄곧 일위이고  학교단위 조직위원을 하였기에  선생님과 동창들 주목을 많이 받았습니다. 나의 눈에도 들어오는 녀동창이 있었습니다.그녀동창생도 공부를 잘했었는데 저와 부부가된 후날 선생님은 사모님과 함께 조선에서 가져온 오지독을 이시고 집에  찿아오셨습니다.그날도 저희 좁은 세집방에서 텔레비프로 끝날때까지 마였었는데 거나하게되신 선생님은  자네들이 부부가 될줄 진작 아셧다고 하시면서 꼭 잘살라고 덕담을 남기셨습니다.      화룡2중 담임선생님은 키가 훤칠한 곱슬머리 미남 최수남선생님이였습니다.물론 선생님이시기에 어려운면도 있었지만 매형과 년세가 비슷하였기에 은근히 큰형님같은 친근감도 있었습니다.화룡고중 운동대회때마다  담임선생님과 반급간부중 세명을 추려 남성두명 녀성두명해서 네사람 이어 달리기 전통항목이 있었는데 매학기 운동회마다 우리반급에서 일등을 했습니다.선생님이 마지막 주자였었는데 두팔을 휘저으며  뒤걸음으로 골인하시며 즐거워하셨습니다. 반급 단지부서기를 하면서 활동도 조직하였습니다.한번은 야외 나들이에 나갔었는데 저희가 반급 동창들 앞에서 어망결에 발길로 선생님소퇴를 걷어찿습니다.많이 아프셧을 겁니다.속으로 어찌 마무리 할까 많이 우려했었는데 선생님은 웃고 넘기셨습니다.고중3학년때 대학시험이 다가오는 시점에 학교를 그만두고 토끼를 키워 일찍 돈좀 벌어보려고 자원퇴학을 결심했었습니다.그냥 도망갈수는 없는 일이라  선생님집에 찿아가 사연을 말씀드렷더니 선생님은  어이없다는뜻 입을 딱 벌리시며 "왜 너까지 이러냐?"한마디 하셨습니다.그때 학교에 정교처라고 있었는데 학생들이 싸우거나 련애하거나 담배피우다 정교처선생님들한테 걸리면 중처벌 지어 퇴학까지 당하는 사례가 있었습니다.우리반에서도  몇몇 동창들 이런저런 사항으로 처벌을 면하려고 퇴학맞지 않으려고 선생님을 찿아다니기 빠븐데  탄서기를 한다는 놈은 자원퇴학 한답시고 선생님을 찿아갔으니 기가막힐수도 있었을 것입니다.설득하다 힘빠지신 선생님은 "갈테면 가되 늦었으니 저녁이나 먹고가라"하시며 저녁을 준비해줬습니다.거기에 맥주한잔 까지...      집에 내려온후 본격적으로 토끼양식업 준비를 시작했습니다.우선 룡정에 있는 연변농학원에가 토끼사양기술을 배우는 한편 종자토끼를 구입하기 시작했습니다.하루는 연변농학원 축산학과 선생님집에서 종자토끼를 사서 자전거에 정히 모시고 30리길을 달려 집에 왔는데 집안 분위기가 어수선했습니다.선생님이 몸소 집에 찿아오시여 학생을 당장 학교에 돌려보내라고 최후통첩을 내리고 가셨던것이였습니다. "다른일엔 아버지말을 안들어도 괜찮으니 이번만은 내말을 따르거라.내일 학교로 돌려보낸다고 선생님한테 답복했으니 학교로 돌아가거라"하시고 돌아 앉으시는 아버지 등뒤에서 저희는 할말을 찿지못했습니다.가냘퍼 보이는 아버지 등모습을 바라보며 그 어깨에 힘이 돼보고저 했던 계획은 뒤로미루는걸로하고  이틑날 학교로 돌아갔습니다.그때 선생님이 찿아오시지 않았다면 저희 인생궤적은 지금과 확실히 달랐을것입니다.      천진에가 대학교를 다니게 되였습니다.졸업을 앞두고 하북성 부녕현 (抚宁县)당교에가 실습하였습니다.실습 인솔자였던 계(학부)당총지서기선생님께서 저희를 단독으로 불러 "북대하옆 남대하부근에  서하남 조선족촌이 있는데  북대하 참관교학후 경제법학과 두개반  60 여명 학생주숙을 련계하러 갈수없겠느냐?" 문의하셨습니다.물론 기꺼이  답복했습니다.역시 피줄이 가르키는대로 술 두병 사가지고 촌장을 찿아가 주숙을 련계했습니다.일정 변화로 북대하참관이 취소되여 학교로 복귀되였습니다만    학교에서 왜 학생이였던  저희를 몇십명 실습생 주숙련결하라고 파견했었는지?학생이였던 내가 왜 그 임무를 달게 받고 자비로 뻐스표 끊어 길을  떠났던지 ...지금 생각해봐도 황당하기까지 합니다.선생님께서 저희를 믿었었기에  저에대한 고험으로 숙제를 주셨을 것이라 좋게 생각해봅니다.덕분에 이틀간에 북대하 그리고 진황도부근 4대명승지 老龙头,天下第一关,燕塞湖,孟姜女庙를 돌아 보았습니다.      대학교 졸업하고  주정부법률관련기관에 분배되여 근무하다 집한채 분배받고 사직하고 공직에서 물러났습니다.지구촌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20년만에 본업에 복귀하였습니다.헌데 여기에도 선생님이 계시네요.전국 유일의 성인민대표대회대표로 활약하는 조선족 녀성변호사 리은희주임변호사입니다.선생님은 평소에는 저희를 김변호사나 "老金"으로 불러주며 가끔은 우스개도 하지만 별로 개별소통이 없었습니다.한번은 룡정에 있는 선생님이 법률고문을 맡아보는 모정부기관에 함께 다녀오게 되였습니다.간질거리는 입을 용케도 붙들어 매고 있다 회의가 거의 끝날무렵 제대로 단속못하고 몇마디 발설했습니다.긑까지 입을 다물었어야 만점 시험지 였었는데 ...회의가  끝나고 단둘이 차에 오르자 생님님은 본색을 들어냈습니다.  저는 물론 한마디 대꾸못하고 착실히 교육을 받았습니다.사제간에 언젠가는 꼭 치르고 지나가야할 장이였습니다.오히려 가슴이 후련하였습니다.      한번은 법률문서를 작성하였는데 선생님은 요기조기 때끔때끔 지적하여 주었습니다.헌데 얼마 안지나 전사무소회식 자리에서 그 법률문서가 잘 작성되였다고 칭찬하여 주셨습니다.나이든 제자에 대한 "안면공사"였을것입니다.얼굴이 뜨거웠습니다.저희가 한국영화 "두사부 일체"를 엮어가며 한번선생님은 영원한 선생님이라고하면 반대로 저희한테서 배울것이 많다며 웃겨넘기십니다.늦게만난 비슷한 나이의 선생님이지만 명실상부한   존경스러운 훌륭한 선생님입니다.      나는 아마 좋은 선생님들을 모실 운을 지니고 태여났나 봅니다.     인간이란 사회생활을 하는 군체입니다.세사람이 함께 길을 걸으면 그중에 꼭 나의 선생님이 계신다고 하였습니다.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킨 선생님만 선생님이 아닙니다.학교에서든 직장에서든  하늘을 나는 비행기에서는 마을귀퉁이 대포술집 에서든...어디에서든 누구든 내가 모르는것을 가르켜주고  내가 깨닫치못하는 리치를 읽깨준다면 남녀로소 따질것없이 그분은 바로 나의 선생님입니다. 많고 많은 선생님속에 끼워 살아가기에  스스로의 부족함을 알고 언제든 배우면서 살아갑니다.       배움길이란 끝이 없는 길일것입니다.        그길에서 만났고 또 만날 모든 선생님들께 감사인사 드립니다. 교사절 축하합니다           2018년 9월9일     장춘---연길행 렬차에서
22    [수필] 나의 선생님들 (김재현) 댓글:  조회:1120  추천:0  2018-09-16
나의 선생님들 김재현   봄비는 몸을 부셔 만물을 소생시키고 조용히 땅속에 스며들고 초불은 몸을 태워 주위를 밝혀주고 눈물만 남기고 떠납니다.      인간의 아둔한 머리속 흰피에 령혼을 심어주는 선생님들 정성을 봄비라, 초불이라 하겠습니다.       화룡현 룡수평 시골에서 태여난 저는 유치원에  다닌 기억이 없습니다.딱 한번 누나와 함께 한마을 다른 소대(촌민소조)유치원에 놀러갔었는데 선생님이 누나와 저한테 옥씨튀개(옥수수 튀김)한줌 씩 주었습니다. 간식이란 거의 없던 시절이라 선생님이 주신 한줌의 옥수수튀김은 그렇게 맛있을 수 가 없었습니다.그맛은 지금의 그 어떤 산해진미로도 바꿀수 없는 별미였다고 기억됩니다.과언이 아닐것입니다.그때 다른 소대 어린이였던  저의 작은 손에 옥수수튀김 한줌을 쥐여주었던 유치원선생님의 그 손은 틀림없는 천사의 손이였습니다.      소학교에 입학하던 해 대대(촌민위원회)에서 벽돌로 교사를 새로 지었습니다. 그때 촌에 벽돌집이란 학교,집체호(지식청년들 숙소)가 전부였습니다.소학교와 초중을 함께 지었는데 그때는 소학교 5년제,초중2년제였습니다.소학교 1학년 반주임 선생님은 향소재지에서 우리촌으로 걸어서 출퇴근 하신 남순복선생님이셨는데  저의 어머니와 년세가 비슷한 분이셨습니다. 한번은 조선어문시험에서 100점을 맞았습니다.헌데 시험지를 받아보니 "오리"를 "우리"로 잘못썼기에 선생님을 찿아가 성적을 잘못 매겼다고 보고하였습니다.선생님은 성적을 95점으로 고쳐주시고 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며 성실한 학생이라고 칭찬해주셨습니다.스스로 찿아갔지만 100점이 95점으로 떨어지니 코마루가 시큰해났습니다. 착하다고 칭찬해주시기에  이를 악물고 기어이 나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았습니다.얼마 안지나 선생님은 반장직을 저한테 맡기셨습니다.      소학교 4학년 때 한책상에 함께 앉았던 동창생의 아버지가 선생님이셨습니다.한번은 상학종이 울려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셨는데 "기립"을 불러야 할 제가 옆에 앉은 동창과 옴니암니 다투고있었습니다.노하신 선생님은 우리 둘을 교탁앞에 불러 세웠습니다. "이놈들, 반급간부란 자식들 상학시간이 됐는데도 싸워...". "찰싹" 선생님의 큰 손바닥이 저하고 싸운 동창의 작은 얼굴에 떨어졌습니다.  눈을 딱 감고 내 얼굴에 떨어질 선생님의 손바닥을 기다렸습니다.헌데 선생님은 당신 아들만 때리시고 나는 때리지 않았습니다.나도 때릴것이지...왜 당신 아들만 때리고 아들과 싸운 나는 때리지 않으셨을까???얼굴은 변을 면했지만 가슴속에는 큰 의문부호와 작은 멍이 새겨졌습니다.      그때 마을앞에 룡정에서 화룡으로 가는 철길이 있었습니다.봄이면 철길옆에 자라는 풀을 뽑는 "호로중대"가 있었습니다.한번은  호로중대 활동일에 풀 뽑으로 갔어야 했는데 호미를 들고 과수대 살구밭에 갔습니다.호미자루로 살구나무 가지를 후려쳐 익지도 않은 살구를 싹쓸이하다 함께간 개구장이들 태반히 잡혔습니다. 과수대 대장은 우리가 가져간 호미를  전부 빼았고 담임선생님을  부르셨습니다.선생님은 과수대  대장 앞에서 우리를 호되게 꾸짖으시며  호미를 찿아주고  학교에 까지 우릴 줄지워 데리고 갔습니다.뒤지게 혼날 줄 알았는데 선생님은 의외로  "살구가 아직 안 익어서 못먹어.그리고 호미로 살구나무를 치면 살구가 다 떨어져...임마들아"하시면서 우리를 쉽게 풀어 주었습니다. 그후로   "호로중대" 는 취소되고 우리는 그 과수대밭엔 과일 훔치러 가지 않았습니다.      3년제 초중을 세개학교에 거쳐 5년을 다녔습니다.룡수1중에서 초중에 입학하여 투도2중을 거쳐 투도1중에서 초중을 졸업했습니다.       투도2중에 다닐 때 학교운동대회날이였습니다.저는 철봉에서 떨어져 팔목이 부러졌습니다.오기선선생님이 담임선생님이셨는데 다짜고짜 저를 둘쳐업고 한창 경기중인 축구장을 가로지나  병원으로 달려가셨습니다.해란강제방공지에 나가신 의사선생님이 돌아오시길 기다려 썩 후에야 진료를 시작했는데 아주 재래식이였습니다.팔목 상처부위가 이미 퉁퉁부었는데 뒤에서 선생님과 의사선생님이 저의 몸과 팔을 잡고 앞에서 다른 한 의사선생님 저의 손을 잡고 힘으로 당겨 엇갈린 뼈를 제위치에 잡아넣었습니다.아팠습니다.뼈를 상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 아픔이  말로 형언하기 어려움을 알지 못합니다. 아픔도 아픔이려니와 뼈가 제대로 잇기지 않아 불구가 될 것같은 두려움에 혼신이 후들후들 떨림을 어쩔수 없었습니다.    눈물이 절로 흐리기 시작했습니다.선생님은 저의 몸을 꼭 끌어안아 주시며 울고싶으면 울라고 하셨습니다.선생님앞이라 이를 악물고 울음을 참았습니다.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아프면 아프다고 소리내여 울었더면 혹시 덜 아팠을지도 몰랐을텐데...    병원에서는 베니야판으로 손목 상처부위를 고정하고 붕대로 싸서 목에 매여주었습니다.선생님은 저를 집까지 자전거에 태워다 주었습니다.아버지는 선생님이 수고하셨다고 하시면서 어머니한테  술상을 챙기라고 지시하셨습니다.그날후로 선생님과 아버지는 절친이 되시고  투도에서 가끔 만나시면 약주도 함께 하시곤 하셨습니다.       초중을 투도1중에서 졸업했습니다.그때 학교마다 초중에서 고중에 가지않고 중등전문학교에 직접 가는 수험생 지표가 있었습니다 .중등전문학교에 가려고 1년 더 재학했습니다.헌데 결국 이듬해에도 겨우 연변사범학교 녀학생지표가 달랑 한장  왔습니다. 화룡2중(화룡고중)에서는 입학통지서가 왔는데 고중에 가야할지 중등전문학교 지표를 1년 더 기다려 봐야할지...술두병 사들고 손윤식담임선생님을 찿아갔습니다.    그때 흑백텔레비가 금방 나왔었는데 텔레비프로가 끝날 때까지 선생님과 사들고간 술두병 다 마시고 선생님집 술도 꽤나 마시였습니다.선생님은 1년 더 기다려도 남학생지표가 올지 알길이 없으니 화룡고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하고싶은 얘기가 정말로 많았습니다.선생님과 하루밤새 나눈 얘기가 아버지와 1년간  나눈 얘기보다도 많았을것입니다.    그때 지표를 기다리는 녀동창들도 몇명 있었는데 학교 일어선생님 녀동생이 결국 지표를 받아 연변사범에 갔습니다.재학생이라 성적도 줄곧 1위이고  학교단위 조직위원을 하였기에  선생님과 동창들의 주목을 많이 받았습니다.    당시 나의 눈에도 들어오는 녀동창이 있었습니다.그 녀동창생도 공부를 잘했었는데 저와 부부가 된 후날 선생님은 사모님과 함께 조선에서 가져온 오지독을 이시고 우리집에  찿아오셨습니다.그날도 저희 좁은 세집방에서 텔레비프가 끝날 때까지 마시었는데 거나하게 되신 선생님은  자네들이 부부가 될 줄 진작 아셨다고 하시면서 꼭 잘 살라고 덕담을 남기셨습니다.      화룡2중 담임선생님은 키가 훤칠한 곱슬머리 미남 최수남선생님이였습니다.물론 선생님이시기에 어려운 면도 있었지만 매형과 년세가 비슷하였기에 은근히 큰형님같은 친근감도 있었습니다.화룡고중 운동대회때마다  담임선생님과 반급간부중 3명을 추려 남성 2명 녀성2명해서 네사람 이어 달리기 전통항목이 있었는데 매학기 운동회마다 우리반급에서 1등을 했습니다.선생님이 마지막 주자였었는데 두팔을 휘저으며  뒤걸음으로 골인하시며 즐거워하셨습니다.     반급 단지부서기를 하면서 활동도 조직하였습니다.한번은 야외 나들이에 나갔는데 제가 반급 동창들 앞에서 어망결에 발길로 선생님 소퇴를 걷어찼습니다.많이 아프셨을겁니다.속으로 어찌 마무리 할까 많이 우려했었는데 선생님은 웃고 넘기셨습니다.    고중3학년 때 대학시험이 다가오는 시점에 학교를 그만두고 토끼를 키워 일찍 돈 좀 벌어보려고 자원퇴학을 결심했습니다.그냥 도망갈수는 없는 일이라  선생님집에 찿아가 사연을 말씀드렸더니 선생님은  어이없다는 듯 입을 딱 벌리시며 "왜 너까지 이러냐?" 한마디 하셨습니다.그때 학교에 정교처라고 있었는데 학생들이 싸우거나 련애하거나 담배피우다 정교처 선생님들한테 걸리면 중처벌 지어 퇴학까지 당하는 사례가 있었습니다.우리반에서도  몇몇 동창들 이런저런 사안으로 처벌을 면하려고 퇴학맞지 않으려고 선생님을 찿아다니기 빠쁜데  탄서기를 한다는 놈은 자원퇴학 한답시고 선생님을 찿아갔으니 기가 막힐수도 있었을 것입니다.설득하다 힘이 빠지신 선생님은 "갈테면 가되 늦었으니 저녁이나 먹고가라"하시며 저녁을 준비해줬습니다.거기에 맥주한잔 까지...      집에 내려온후 본격적으로 토끼양식업 준비를 시작했습니다.우선 룡정에 있는 연변농학원에가 토끼사양기술을 배우는 한편 종자토끼를 구입하기 시작했습니다.하루는 연변농학원 축산학과 선생님집에서 종자토끼를 사서 자전거에 정히 모시고 30리길을 달려 집에 왔는데 집안 분위기가 어수선했습니다.선생님이 몸소 집에 찿아오시여 학생을 당장 학교에 돌려보내라고 최후통첩을 내리고 가셨던것이였습니다.    "다른일엔 아버지말을 안들어도 괜찮으니 이번만은 내 말을 따르거라.래일 학교로 돌려보낸다고 선생님한테 답복했으니 학교로 돌아가거라"하시고 돌아 앉으시는 아버지 등뒤에서 저는 할 말을 찿지못했습니다.가냘퍼 보이는 아버지 등모습을 바라보며 그 어깨에 힘이 돼보고저 했던 계획은 뒤로 미루는걸로하고  이틑날 학교로 돌아갔습니다.그때 선생님이 찿아오시지 않았다면 저희 인생궤적은 지금과 확연히 달라졌을것입니다.      천진에가 대학교를 다니게 되였습니다.졸업을 앞두고 하북성 부녕현 (抚宁县)당교에 가 실습하였습니다.실습 인솔자였던 계(학부)당총지 서기선생님께서 저를 단독으로 불러 "북대하옆 남대하부근에  서하남 조선족촌이 있는데  북대하 참관교학후 경제법학과 두개반  60 여명 학생주숙을 련계하러 갈 수 없겠느냐?"고 문의하셨습니다.물론 기꺼이  답복했습니다.    역시 피줄이 가르키는대로 술 두병 사가지고 촌장을 찿아가 주숙을 련계했습니다.일정 변화로 북대하참관이 취소되여 학교로 복귀되였습니다만 학교에서 왜 학생이였던  저를 몇십명 실습생 주숙을 련결하라고 파견했었는지? 학생이였던 내가 왜 그 임무를 달게 받고 자비로 뻐스표 끊어 길을  떠났던지 ...지금 생각해봐도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선생님께서 저희를 믿었었기에  저에 대한 고험으로 숙제를 주셨을 것이라 좋게 생각해봅니다.덕분에 이틀간에 북대하 그리고 진황도부근 4대명승지 老龙头,天下第一关,燕塞湖,孟姜女庙를 돌아보았습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연변주정부 법률관련기관에 분배되여 근무하다 집 한채 분배받고 사직하고 공직에서 물러났습니다.지구촌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20년만에 본업에 복귀하였습니다.헌데 여기에도 선생님이 계시네요.전국 유일의 성인민대표대회 대표로 활약하는 조선족 녀성변호사 리은희 주임변호사입니다.선생님은 평소에는 저희를 김변호사나 "老金"으로 불러주며 가끔은 우스개도 하지만 별로 개별소통이 없었습니다.     한번은 룡정에 있는 선생님이 법률고문을 맡아보는 모정부기관에 함께 다녀오게 되였습니다.간질거리는 입을 용케도 붙들어 매고 있다 회의가 거의 끝날무렵 제대로 단속못하고 몇마디 발설했습니다.긑까지 입을 다물었어야 만점 시험지였었는데 ...회의가  끝나고 단둘이 차에 오르자 선생님은 본색을 들어냈습니다.  저는 물론 한마디 대꾸 못하고 착실히 교육을 받았습니다.사제간에 언젠가는 꼭 치르고 지나가야 할 장이였습니다.오히려 가슴이 후련하였습니다.      한번은 법률문서를 작성하였는데 선생님은 요기조기 때끔때끔 지적하여 주었습니다.헌데 얼마 안지나 전사무소 회식 자리에서 그 법률문서가 잘 작성되였다고 칭찬하여 주셨습니다.나이든 제자에 대한 "안면공사"였을 것입니다.얼굴이 뜨거웠습니다.저희가 한국영화 "두사부 일체"를 엮어가며 "한번선생님은 영원한 선생님"이라고하면 반대로 저희한테서 배울 것이 많다며 웃겨넘기십니다.늦게 만난 비슷한 나이의 선생님이지만 명실상부한  존경스러운 훌륭한 선생님입니다.      나는 아마 좋은 선생님들을 모실 운을 지니고 태여났나 봅니다.     인간이란 사회생활을 하는 군체입니다."세 사람이 함께 길을 걸으면 그중에 꼭 나의 선생님이 계신다"고 하였습니다.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만 선생님이 아닙니다.학교에서든 직장에서든  하늘을 나는 비행기에서든 마을귀퉁이 대포술집에서든...어디에서든 누구든 내가 모르는것을 가르쳐주고  내가 깨닫지 못하는 리치를 일깨워 준다면 남녀로소 따질것 없이 그분은 바로 나의 선생님입니다. 많고 많은 선생님속에 끼워 살아가기에  스스로의 부족함을 알고 언제든 배우면서 살아갑니다.       배움의 길이란 끝이 없는 길일것입니다.       그 길에서 만났고 또 만날 모든 선생님들께 감사인사 드립니다.       교사절 축하합니다       2018년 9월 9일      장춘---연길행 렬차에서
21    [신작시] 삼소 삼배 삼락 댓글:  조회:407  추천:0  2018-07-26
삼소 삼배 삼락   김재현 흐르는 세월 낙화류수 가는세월 아쉽다 한탄한들  무엇하리오   가는 인생 너나없이 어제.오늘. 내일 삼일인것을   앞섰다고 하늘에 갈것이요 늦었다고 땅끝에 갈것이요 하늘에 가면 얼마나 좋으며  땅끝에 가면 얼마나 좋으리요    왔다가 가는 세상길  너.나.당신 알길 없건만  바보같이 아는 듯 웃기며 웃어가네   간우 친구 직음 필        2018.7.19
20    뼈 그리고 살과 피 댓글:  조회:964  추천:0  2018-04-27
뼈가 육체를 세워주기에 인간은 두발로 걸어다니며 살고 살이 뼈를 감싸주기에 인간은 목위에 머리를 얹고 살고 피가 뼈와 살사이 흘러주기에 인간은 대화를 나누며 삽니다 인간은 뼈 그리고 살과 피입니다   뼈와 살이 서로 닿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골육이라 햇을것이요 피와 살을 서로 나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혈육이라 햇을것입니다 한집에 같이 살라 가족이라 했을것이요 한밥상에 같이 식사하라 식구라 했을것인데 무슨 연고로 스스로   제땅에 금을 그어놓고 가족이 남북으로 갈라살고 식구가 딴 가마밥 먹어야 하는고   민족통일은 력사의 조류인것을 따르는 자는 번영창설 할것이요 막는 자는 기필코 망할것이요 갈라산지 어언 70여년 골육의 정 다 가시기전 혈육의 눈물 다 마르기전 우리말로 쌓인 설음 서로 풀고 우리힘으로 우리살집 새로짓고 우리손으로 우리밥상 새로챙겨 한집에서 한밥상에 마주앉아 팔도강산 진주성찬 나누며 껄껄껄 우리 목소리로 웃으며 다같이 행복하게 살아갑세      무술년 4.27 남북정상회담날                중국 연길에서
19    봄비 댓글:  조회:576  추천:0  2018-04-19
소리없이 잔잔히 내리는 봄비 얼었던 겨울땅 녹여주려 내리는 걸까 동여맸던 너나가슴 풀어주려 내리는 걸까   봄우뢰 울기도전 수집은양 머리풀고 세상만물 기다리는 님인줄 아는양 살며시 적셔주고 가뭇없이 사라지네   살랑살랑 옷깃을  누벼주는 봄비 무뎌진 가슴속에 살며시 스며들어 아리숭이 남아있는 아련한 추억속으로 즐거웠던 그옛날로 나그네를 이끄네   봄비 전해온 봄소식 산에도 들에도 너와 나의 가슴에도 아지랑이 아물아물 완연한 봄기운 가슴헤쳐 만발하네
18    버들피리 삘릴리 댓글:  조회:761  추천:0  2018-04-03
삘릴리 삘릴리 버들피리 삘릴리 우에집 영범이도 아래집 영금이도 손잡고 함께 불었던 버들피리 삘릴리 동년의 목소리 개울가 버드나무 파랗게 물들어가면 십전짜리 연필칼로 정히 오려 다듬고 앞니로 정성스레 깨물어 씹어 입술로 잡아물고 신나게 불었던 버들피리 삘릴리 동년의 랑만 하학종이 울리면 마을뒤 버들숲에 몰려들러 물먹은 버들가지 한웅쿰 꺽어 잎사귀 훝어 개울물에 띄워놓고 버들개지 다져 껌으로 씹고 줄기 추려 버들모자 역어쓰고 동네방네 줄지어 누볏던 버들피리 삘릴리 동년의 추억 해가 가고 달이 지여 영범이도 영금이도 개구장이 옛모습만 아물아물 살아가는 인생의 봄은 해달따라 변하건만 찿아오는 자연의 봄은 버들피리 삘릴리 동년의 그리움  
17    춘절 댓글:  조회:494  추천:0  2018-02-15
    추운 겨울 지나가고 따뜻한 봄 찿아옵니다 정유년 지나가고 무술년 다가옵니다   아무리 헐레벌쩍 뛰여봦자 오늘로 정유년 마감하고 아무리 옴니암니 챙겨봦자 내일로 무술년 맞이합니다   인생길 어찌 비단같이 보드럽길 바라리오 울퉁불퉁 오불꼬불 만경창파 파란곡절 가시밭길 별미일세   가는해와 오는해 길목에서 앞뒤를 살펴볼제 오백년을 더 살거요 삼백년을 더 살거요 룡을 타고 나를거요 봉황 안고 즐길거요    앞사람도 내친구 뒤사람도 내동무  위에사람 우러르고 아래사람 아우르며  웃으면서 살아 갑시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음력 정유년  서달 그믐날 양력       2018,02,15
16    립춘 댓글:  조회:930  추천:1  2018-02-06
연분홍 매화우에 하아얀 설화 내려 앉으이 매화가 아쉽다 하리오 설화가 무정타 하리오   매화가 피여 겨울을 알리고 설화가 내려 겨울을 익히니  밑에 피엿으면 뭐라하리오 위에 앉았으면 뭐라하리오    지지않는 꽃 어데 있으며 녹지않는 눈 어데 있으리오 지는 매화 가엽다  겨울을 잡으리오 녹는 설화 아쉽다 새봄을 막으리오   얼핏왓다 가는것이 계절이거늘 겨울은 왓으니 갈것이요 새봄소식 아장아장 다가오네   봄이란 파종의 계절인것을 희망의 씨앗 땀에 씼어 묻으며 황금가을 꿈속에 그려보세  
15    [시작시] 가을밤 강변로 (김재현) 댓글:  조회:1250  추천:0  2017-10-21
가을밤 강변로 김재현   해뜨기 바쁘게 시끌벅적 소란스럽던 가을밤 강변로 해지기 바쁘게 사람 그림자  하나둘 줄어들더니  드디여 한적해졌네 한사람 한그림자만 남기고   자연의 해바라긴 한여름 해를 쫓는 동그란 누른판 인간세상 해바라긴 늦가을 강변로의 움직이는 막대기위 또다른 동그란 누른판    한낮의 산책길엔  뭘하는 사람들일까 뭘하고 살고들있을까 궁리할새도 없이 언뜻언뜻 스쳐보냈던 생소하고 익숙한 수많은 얼굴들   늦은밤 산책길엔  앞뒤를 살펴봐도 온데간데 찾을길 없고 옆에는 꼭 닮은 그림자만 조용히 따라줄제  찬빛만 울먹이던 검푸른 강물위에 아롱다롱 네온불빛 아물아물 재롱부리네   늦은밤 홀로 걷는  싸늘한 강변로  늦가을 찬기운 꼭 여민 옷깃속에 살금살금 기여드는데 의젓한 정자만  오늘도 변함없이 그자리에 반겨주네 늦은밤 찾는이 있을가만은 행여나 찾아올 사람위해 혹여나 내릴지 모를 찬비를 막아주려고 ...   ...   ...  ...   ... 2017.10.20 좋은 주말입니다. 엊저녁 답답해서 연길 부르하통하 기슭 강변로에 산책나갔다가 떠오르는대로 긁적여보았습니다.물을 좋아하는데 흐르는 내물도 넓게 보면 바다로 보일때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14    [신작시] 첫눈 (김재현) 댓글:  조회:1225  추천:1  2017-10-11
2017년 10월 10일 연변 화룡에 내린 첫눈 첫눈 김재현     소시적엔 첫눈 오면 아.눈온다.첫눈이다 들떠서 궁리없이  소리쳤습니다   나이 들고나니 아.눈온다.첫눈이다 또 일년 지나가네 무거운 생각이 앞섭니다    첫눈은 지나갈 일년  찍은 발자취를 덮어주려고 내렸을 것입니다 한해동안 찍었던 어지러운 발자취를 덮고 산뜻한 기분으로 새길에 오르라고   첫눈은 다가올 일년                찍을  발자취를 남겨두려고 내렸을 것입니다 외롭고 어려운 길이든 즐겁고 쾌적한 길이든 한발자욱 한발자욱 걷는것이 인생길이라고    첫눈은 하얀 붕대가 되여 누군가의 아픈추억을 덮어주려고 내렸을것입니다 첫눈은 하얀 주단이 되여  누군가의 희망의 발자욱을 새겨주려고 내렸을 것입니다       첫눈에 찍는 발자욱 생김생김 서로 다르고 가는방향 서로 다르지만   뜻있는 곳에 발자욱 따르고 발자욱 가는곳에 뜻이 이루어 질터이니 래년 첫눈에 찍는 발자욱은 보다 깊고 풍요로울것입니다   2017년 10월 10일 연변 화룡에 내린 첫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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