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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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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해학과 풍자의 시인 - 流沙河 댓글:  조회:3662  추천:0  2016-12-25
1961    루마니아 작가 - 게오르기우(규)와 산문시 "한국찬가" 댓글:  조회:4474  추천:0  2016-12-18
      콘스탄틴 비르질 게오르기우 콘스탄틴 비르질 게오르기우(루마니아어: Constantin Virgil Gheorghiu, 1916년 9월 15일 ~ 1992년 6월 22일)은 루마니아의 작가다. 루마니아 북동부 네암츠 주의 러즈보이에니(Războieni)에서 출생하여 부쿠레슈티 대학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배운 후, 루마니아 외무성 특파 문화 사절의 수행 등을 하는 한편, 창작에 주력하여 시집 〈눈 위의 낙서〉를 발표하여 루마니아 왕국상을 받았다. 1949년 전쟁 소설 〈25시〉를 발표하여(파리에서 간행)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그 밖의 저서로 〈제2의 찬스〉등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로 망명하였으며, 1974년 우리나라를 다녀갔다. =========================== 제1장  한국 찬가 극동의 미지의 나라 나는 한국을 사랑하고 찬미한다. 그것은 나로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나는 나의 인생에 있어서 매우 늦게 한국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다. 나는 항상 모범적인 우등생이었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중학교인 군사중등학교에 다녔다.   학생들은 국왕의 제복을 입었으며 40명을 뽑는데 2천명의 지원자가 몰려을 정도로 경쟁이 심한 학교였다. 교수들도 가장 뛰어난 분들이었으나 8년 후 내가 중학을 졸업했을 때에도 나는 여전히 한국의 민중과 한국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나는 다시 대학공부를 마쳤고 루마니아의 해외 주재 대사관의 문정관이되었다. 나는 외교관이었으나 여전히 한국이라고 부르는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극동아시아의 한쪽 구석에 하나의 반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내가 처음으로 한국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I945년 여름,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이었다.   일본제국이 패망하고 5천년의 역사를 지닌 한국인이 독립을 선언하였을 때 붉은 군대는 나의 고향을 점거하였고 나는 포로의 몸이었다.   나에게는 한국에 대해서 무엇을 알 수 있는 책이나 도서관도 없었다. 나는 감옥에 있었던 것이다. 고립된 채로 나는 한국에 대해서 생각하였다.   산 채 매장된 민족들    어찌하여 나는 한국 민족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던가? 그것은 학교 교과서에 그 이름과그 역사가 실려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도에도 한국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의 반도였을 뿐이다. 한국인을 살아있는 민족의 리스트에서 지워버린 것이다.   1919년 3월 1일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한국인들은 봉기하여 독립을 선언하였다. 한국인들은 파리의 평화회의에도 참석하였고 한국인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들은 살과 뼈를 가진 민족으로 수천 년 동안 존재해 온 것이다.   월슨 대통령과 파리의 평화회의의 의원들은 한국인의 호소에 귀를 기울였으나 그 후 그들은 공식적으로 한국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그들은 침략자의 비위를 거슬리기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지상에 살아있는 인간의 리스트에서 한국인의 이름을 삭제하였던 것이다.   내가 한국의 존재에 대해서 오랫동안 알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다. 세계 어떤 나라의 교과서나 어떠한 역사 지리책도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일을 상기할 때 나는 분노와 반항과 노여움과 고통으로 이를 악물게 된다. 왜냐하면 인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잔학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산 채로 인간을 매장하는 일과 같은 것이다. 한민족 전체를 생매장하는 것이다. 수천 만의 인간을…….  그것은 노예제도보다 더 나쁘다. 노예상인은 인간을 광장에 내놓고 무게를 달고 재고 해서 판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노예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민족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여기 하나의 예가 있다. 유럽의 내부에 세 개의 멋진 소수 민족이 있다. 그 하나하나가 고유한 언어와 조국과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리튜아니아인, 에스토니아인, 그리고레트인들이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이 세 나라는 유럽의 지도에서다 없어져버렸다.   발트의 세 나라는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이 세 나라는 소련에 병합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발트의 백성만이 산 채로 매장된 것은 아니다. 오늘날 똑 같은 비극 속에 사는 다른 민족들이 있다. 그것은 자유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소련을 자극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일어나고 있다. 그들은 소련과 협상을 하기를 원한다. 그들과 무역을 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살아있는 민족을 리스트에서 지워버려야 할 것이다. 그것을 요구하는 것이 바로 소련이다.   아시아의 귀고리 한국은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처림 중국과 일본 사이에 놓인 극동 아시아의 하나의 반도이다. 그러나 평면구형도(평면구형도)를 놓고 볼 때 그것은 반도가 아니다. 한국은 아시아 대륙의 귀고리다.   아시아를 아름답게 만들기 위하여,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 자리에 한국이라는 귀고리를 달아 놓은 것이다.   한국은 보석처럼 정교하게 깎여지고 만들어지고 가꾸어진 것이다. 그 해안은 레이스로 되어 있다. 칠보로 되어 있다. 그것은 정말로 자수이다. 오직 보석만이 그러한 식으로 재단된다.   한국은 반도가 아니고 장식품이다. 하나의 보석, 하나의 귀고리이다. 레이스로 수놓은 천 8백 킬로미터의 해안에 3천 4백 개의 섬이 있다. 세공된 크고 작은 섬, 온갖 형태의 섬들이 해안을 장식하고 있다.   이 해안에서 등을 돌려 한국의 내부로 시선을 돌린다면 한국이 보석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 지리학자는 이 반도는 4분의 3이 산악지대라고 말할 것이다. 구름 위까지 뻗치는 산이 있고 거기에 다른 산들이 연결되어 있다. 토지의 기복을 제하면 그것은 해안과 마찬가지의 레이스이다. 산들은 구름에 걸린 레이스와도 같다. 레이스를 이루는 산꼭대기인지, 하늘과 구름인지 때로는 분간할 수가 없다. 아시아의 귀고리는 부조(부조)로 된 작품이다. 그 산은 칠보의 레이스이다.   지도상의 한국은 매우 작다. 모든 보석이 그런 것처럼 하나의 귀고리는 제 아무리 커도 역시 작은 것이다.   한국은 22만 평방킬로미터 라고 씌어 있다. 나에게 있어서 그 면적은 평방킬로로 잴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한국은 정확하게 나의 조국 루마니아와 같은 면적을 가지고 있다. 조국은 어머니이다. 어떤 것이 자기 어머니와 같은 크기를 가졌을 때 면적이라는 말은 의미를 잃는다. 그것이 설사 저속한 것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만일 사람들이 나에게 한국의 크기는 얼마나 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리라. 한국은 나의 어머니의 크기, 나의 조국의 크기이다 라고…….     비단옷을 만드는 종교   한국인은 이곳 지상에 어떻게 나타났는가? 어떻게 그들은 아시아 대륙의 귀고리를 자기의 조국으로 만들었는가? 사랑하는 자에게 인간은 수많은 종류의 질문을 하는 법이다.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님 자신이 한국인을 여기 이 자리에 자리잡게 한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그 날짜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것은 기원전 2333년 10월 3 일이다.   모든 나라, 모든 민족, 모든 예외적인 존재는 초현실적인 기원을 지니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인 아프로디테는 바다의 거품 속에서 태어났다.   하나님의 친구인 모세는 나일강의 푸른 물 위에 떠 있는 광주리 속에서 발견되었다. 로마제국은 암이리에 의해서 키워진 로뮤루스와 레뮤스란 쌍동이가 건설하였다.   한국은 한국을 창조하기 위해서 하늘에서 백두산 꼭대기로 내려온 단군이라는 신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한국은 또한 세계에서 그 문자의 공포일을 국경일로 삼는 유일한 나라이다. 한글날인 10월 9일은 공휴일이다. 마치 7월 14일이 프랑스의 국경일인 것처럼 ‥‥‥.     단군은 한국인에게 꾸지뽕나무 재배와 직조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의류에 대한 기술은 매우 중요하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이브는 옷을 벗고 살다가 포도잎으로 옷을 대치하고자 한 일이 있다. 단군은 여자에게 비단옷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여자들은 쉽사리 그 일에 익숙해졌다. 한국의 비단은 선녀의 옷과도 같았다.   몽고의 유목민이 한국을 침략하였을 때 한국 여인이 다채로운 비단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은 한국을 무지개의 나라라고 불렀다. 단군은 민족의 왕이며 아버지이며 주인이다. 그가 한국 민족에게 내린 헌법은 한 마디로 요약된다. 그것은 홍익인간이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복을 주는 일이다.   그 이후 한국인은 다른 많은 종교를 받아들였지만 단군의 법은 변함 없이 5천여 년동안 계속 유지되고 있다.   왜냐하면 단군의 법은 어떠한 신앙과도 모순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모든 종교나 철학의 이상적인 형태로「최대한의 인간을 위한 최대한의 행복」 또는 모든 인류를 위한 행복과 평화이다.         우주를 향한 깃발   국기란 조국의 참된 현존이다.   내가 프랑스의 깃발에 인사할 때 내가 새로 얻은 조국인 프랑스는 나의 눈앞에 존재한다. 유엔이나 유네스코 등 모든 국제기구 건물에서는 많은 나라의 국기를 볼 수 있다.   수 많은 민족, 땅, 역사가 그 국기들에 나타나 있다. 국기는 각기 다르며 그 민족들도 너무나 다르다. 만국기를 보면서 나의 마음 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국기가 없는, 산 채로 매장된 국가에 대한 것이다.   다음에 소련에 지배되는 나라들이 떠오른다. 자유를 잃은 민족 - 불가리아. 폴란드, 루마니아, 헝가리 - 그 밖의 많은 다른 나라들.   국기는 지배자의 표지를 달고 있다. 낫과 망치, 소련의 문장, 가축이 그 소유자의 이름의 첫글자를 붉은 쇠로 몸에 낙인 찍듯 소련에 예속된 나라들은 모두 망치와 낫의 표지를 지니고 있다.   이 지상에 살아있는 나라의 국기 가운데 붉은색·노란색· 파란색으로 된 삼색의 루마니아 국기를 볼 수 있다. 지금 이 국기는 차드의 국기이다. 루마니아를 지배한 후 붉은 군대는 루마니아의 국기를 차드인에게 팔아버렸다.   이 중앙 아프리카의 흑인은 근래에 독립한 것이다. 그 민족은 국기가 없었다. 붉은 군대는 그 혹인들에게 우리의 국기를 판 것이다.   나는 요사이 매일 같이 뤼 드 벨르 페이유에 있는 파리의 차드 대사관 앞을 지나가며 나의 국기에 인사한다. 나는 나의 조국 루마니아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다. 나의 조국, 나의 어머니에게…….   한국의 국기는 유일한 것이다. 어느 나라의 국기와도 닮지 않았다. 거기에는 세계의 모든 철학의 요약 같은 것이 새겨져 있다. 태극기는 멋지다. 거기에는 하늘과 땅, 네 개의 방향, 낮과 밤과 사계절을 나타내는 선과 점이 있다. 그것은 우주를 나타낸다. 거기에는 남자와 여자, 선과 악, 불과 물이 있다.   우주의 대질서, 인간의 조건이나 살아있거나 죽어있는 모든 것의 운명이 선·점·원, 붉은색·흰색 그리고 파란색으로그려져 있다.   일본이 한국의 국기를 말살했을 때 한국인은 무궁화를 심었다. 무궁화보다 더 한국 민족을 잘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없다.   한국 사람은 그것을 영원한 꽃이라고 부른다. 일본인이 그들에게 그들의 국기를 금지했을 때 수백 만의 한국인은 도처에 무궁화를 심었다. 그 꽃이 그들의 국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지배자는 감시하였다. 일본제국은 한국인에게 무궁화를 심는 일까지 금지하였다. 지배자의 군대는 한국 전 지역에서 무궁화를 뽑아버렸다.    무궁화는 정복자들에게는 위험하였다. 그래서 그것을 뿌리째 뽑아야만 했다. 금지된 것은 국기와 무궁화 뿐은 아니었다. 일본의 지배 하에서는 연도 역시 금지되었다.   한국에서 연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신년에 어린이들은 모두 그들의 소원을 하늘에 보내기 위해서 연을 올리고 연끼리 싸우게 한 것이다. 가장 강한 연이 적수의 연 끈을 끊고 싸움을 종결짓는다. 승리자의 연이 땅에 내려지면 수많은 군중들은 운동시합의 챔피언을 맞이하듯 박수갈채를 한다.  하지만 일본의 지배자들은 연의 제조와 싸움도 금지케 하였다.    연을 가지고 놀 때 한국인은 의젓하였다. 그들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을 쳐다보는 자는 노예의 조건을 거부한다. 일본인은 포로가 된 자가 자유를 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 이다. 승자는 차라리 용감한 죄인이 되고,   1945년 이래 한국의 국기는 다시 하늘에 휘날리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의 상징인 무궁화는 도처에서 재배되었다. 그러나 한국인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945년 해방된 날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한국의 반은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쿠바, 앙고라처럼 소련의 고행의 공화국이 되었다. 한반도의 북쪽에는 한국의 국기는 휘날리지 않고 무궁화도 피지 않는다.       사랑과 자유를 위한 싸움   무엇보다도 나를 한국과 강하게 유대를 맺게 하는 것, 그리고 한국을 열렬하게 사랑하게 하는 것은 그 군대이다.   그것은 1944년 8월 23일 붉은 군대가 루마니아를 지배하여 나에게는 이미 조국의 군대가 없기 때문이다.   그때 이래 나의 어머니인 조국은 자유를 잃고 나의 민족은 노예상태에 빠졌다. 나의 나라의 군대는 패배하여 해산되어 버렸다.   똑 같은 일이 헝가리나 모든 동구라파의 나라에서 벌어졌다. 우리는 우리를 해방시킬 자국의 군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지금 나의 조국을 지배하는 붉은 군대와 싸우는 유일한 군대는 한국의 군대이다.   한국군은 나의 백성을 해방시켜주는 군대이기도 한 것이다. 길에서 지나가는 한국 군인을 만나면 나는 절을 한다.   한국군은 한국의 자유를 지키고 북반부를 해방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뿐이 아니고 세상의 모든 자유를 잃은 민족을 해방하기 위해 존재하는 상징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소련과 싸움으로써 한국관은 월남, 라오스, 앙고라의 해방을 위해서도 싸우는 셈이고 그 지배자에 의해 예속된 지상의 3분의 1 이상의 민족을 위하여싸우는 것이다.   시인으로서 나는 한국군을 찬양하는 데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는데 그것은 한국군의 장교가 계급장으로 어깨에 무궁화를 달고 있는 데 기인한다.   소령은 무궁화 하나, 중령은 둘, 대령은 셋‥‥ 그래서 내가 한국군인에게 인사를 할 때 나는 그 무궁화에 인사하는 것이다.   하위의 장교들은 어깨에 꽃을 달지않는다. 그들은 잎을 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무궁화의 잎이다. 영원히 피는 꽃의 잎사귀들….       노년의 왕관   현대 사회에 있어서 한국은 많은 분야에서 모범이 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노인에 대한 공경이다. 현재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노인들은 버림을 받고 있다. 나에게는 미국에서 아주 유명한 변호사인 한 사람의 친구가 있다. 어느 날 그는 파리에 왔다. 그는 머리에 염색을 하고 있었다.   「자네 암탉처럼 머리를 염색했군. 웬일이야?」하고 나는 그에게 물었다.   나는 그의 염색한 머리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참다운 루마니아인이었다. 루마니아 사람은 머리를 염색하지 않는다. 그들은 노년을 조용히 받아들인다. 노년은 인생의 일부이다. 죽음이 그렇듯이‥‥‥. 「만일 내가 머리를 염색하지 않으면 나는 미국에서 직업을 유지할 수 없다네.」하고 나의 친구는 변명을 하였다.   나는 미국에 살지 않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지상의 모든 가난한 자들은 미국을 꿈꾼다. 그곳은 풍요의 나라이다. 이전에 나도 미국에 사는 그 친구를 부러워했다. 그는 백만장자의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를 가련하게 여긴다. 루마니아에는 노인이 없는 마을은 노인을 하나 사야 한다는 격언이 있다. 세계 어디에도 노인들이 한국처럼 존경받는 곳은 없다.   모든 문명화된 나라에서 노년은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인간은 늙는 것이 부끄럽다. 자동차 공장의 못쓰게 된 부속품처럼 사람들은 노년을 가려낸다. 한국은 이와는 반대이다. 한국에서는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존경을 받는다.   나의 책의 한국어 번역을 한 여성은 대학의 교수이다. 아주 귀여운 부인이다.  그녀는 다람쥐 같은 익숙한 손을 가지고 있다. 그녀를 볼 때 나는 제비를 연상한다. 나는 그녀 이름을 한국어로 발음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녀를 「제비」라고 부른다.   그런데 말을 할 적마다 그녀는 나를 노인처럼 대접한다. 그녀는 내가 마치 백 살쯤이나 된 것처럼 나를 자상하게 돌본다. 마침내 나는 좀 화가 났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부인, 왜 당신은 항상 나를 늙은이 취급을 합니까? 물론 나는 늙었소. 나도 그것을 잘 알고 있소. 하지만 당신의 남편보다 아주 나이가 많은 것은 아니요. 그에게 당신은 항상 그가 늙었다고 말하지는 않겠죠. 」  「 내가 당신을 노인대접하는 것은 존경하는 뜻에서입니다, 신부님.」 하고 그녀는 대답하였다. 그녀는 얼굴이 붉어지고 매우 당황해 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나에게 한국에서 누군가를 노인처럼 대접하는 것은 그가 아름답고 현명하다고 칭찬하는 것보다 더 큰 존경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였다. 나는 놀랐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동방의 기독교도들이 사제가 비록 나이가 어려도 카로이로스(Kaloyeros)」즉 「아름다운 노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상기하였다.   왜냐하면 노인은 현명한 자이고 그 예지는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다. 늙은이처럼 슬기롭게 사는 사제는 비록 나이가 스무살 정도라도 역시 아름다운 노인인 것이다. 노인의 슬기를 공경할 줄 아는것, 바로 이것이 다른 문명화된 나라가 한국에서 배울 점 이다. 내가 한국에 왔을 때 나의 도착을 알리는 신문들은 내 나이를 두 살이나 더 붙였다. 처음에 나는 항의하였다. 늙는 것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에서는 자기의 나이에, 태어나기 전에 살아온 아흡 달을 덧붙인다. 그 다음에 또 한살 더 붙여서 계산한다. 한 살 더 먹는다는 것은 영광이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인간은 성숙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원앙새의 사랑   지상의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한국인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행복을 갈망한다. 단군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의 행복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해 생을 영위하여야 한다. 나는 한국인에 있어서 행복이 무엇에 기반을 두고 있느냐에 대해 알려고 시도하였다. 그것은 배우기 쉬웠다. 행복의 표어는 병풍에 새겨져 있다. 벽에 붙인 그림에서도 볼 수 있다. 모두가 이 행복의 말을 알고 있다.   나는 행복의 요소가 다섯 가지임을 배우고 있다. 장수, 부, 평화와 건강, 자식과 덕, 편안한 죽음.   두 번째 표어인 부는 장수 후의 부이며, 세째가 건강, 네째가 불행의 결여이고 다섯번째가 덕이다. 세 번째 리스트는 행복의 조건으로 장수·부·고귀함·평화·건강 그리고 다섯 번째가 풍요이다.   행복을 열거한 리스트 가운데서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사랑이라는 말이 없는 점이다. 서양에서는 사랑을 제일 첫머리에 놓는다. 그것은 개인의 행복의 요소 중 하나이다.   한국인은 결코 사랑을 하지 않는 것인가? 인류의 시초 이래 세상의 모든 시인들이 읊고 연극의 장면에서 음악으로 노래부른 사랑이 한국에는 없는 것일까? 나는 감히 갑작스럽게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남녀의 거동을 관찰하였다. 한국인은 세계의 모든 젊은 남녀와 똑 같은 사랑의 몸짓을 하였다.   한국인에 있어서는 서구의 나라 사람들보다 사랑이 좀 수줍고 내부에 간직되어 있었을 따름이다. 그것만이 유일한 차이였다. 세상 어디서나 사랑의 상징은 비둘기이다. 아주 사랑스러운 새이다. 그 새는 육신화된 애정을 나타낸다.   한국에서의 사랑의 상징은 오리이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모든 혼례의 방에는 병풍에 그려진 오리를 볼 수 있었다.   침대 옆 테이블, 사기나 도자기에도 나무로 된 오리가 있다. 집집의 어디에나 오리가 있다. 나는 박물관에서도 오리를 보았다. 그것은 언제나 사랑의 상징이었다.   한국의 건국 이래, 즉 기원전 2333년 10월 3일 이래 모든 화가들은 화폭에 오리를 그렸다. 한국의 시인들은 항상 오리를 노래하였다. 나는 사랑의 상징으로 이 새를 고른 것이 이상하여 오리의 모든 종류에 대해서 자료를 모아보았다   첫 번째로 내가 놀란 것은 우리 서양 사람들도 오리를 사랑의 상징으로 여긴 것을 알았을 때이다. 그것은 백조이다.   그런데 백조는 오리이다.   백조의 노래만큼 아름다운 것은 세상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인은 백조가 오리의 종류에 든다고 해서 오리를 사랑의 상징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새들 가운데 오리만이 일부일처제이다. 그 말은 충실하다는 뜻이다. 사랑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충실성이다.   우리 기독교 신자도 역시 그것을 선언한다. 「죽을 때까지 충실하라. 그러면 왕관을 얻게 될 것이다. 」라는 말이 있다. 결혼을 통해 남자와 여자는 영원히 결합된다.   좋은 경우나 최악의 경우나 결혼이란 헤어질 수 없는 것이다. 실제 결혼에 있어 그것은 실천되지 않은 채 이론적으로만 가능하였다.   한국에 있어서 충실성이 없는 사랑이라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너무나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시골의 여인들은 과부가 지나가는 것을 볼 때 그 여자가 아직도 살아있는 것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놀라는 것이다.   결혼의 결합은 그처럼 강하기 때문에 그의 동반자가 죽은 후에도 살아있을 때는 놀라는 것이다. 과부는 흔히 미망인이라고 불린다. 남편이 죽은 후에도 살아있는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놀란다.               한국에서 죽은 사람은 「도착한 사람」이 라 부르고 살아있는 사람은 「지나가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한국적인 사랑은 또한 다른 특징을 지닌다. 이해관계를 초월한 것이다.   인간이 서로 사랑할 때 사로 기다리지 않는 법이다. 젊은 남자나 여자는 그 사랑의 대상이 그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건 적대시하건 무관심하건 언제나 사랑하는 법이다. 그것은 무조건의 사랑이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규칙을 벗어난다. 서양의 소설이 지니고 있는 자기 애인의 정복이나 자기 곁에 잡아두려는 줄거리는 한국의 여인들에게는 이상한 것이다.   그들은 사랑을 위하여 사랑한다. 그들은 소유의 갈망이나 파괴적인 질투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한 젊은 한국의 여인이 어느 날 우리집에 왔다. 나는 문을 열어주었 다. 그녀는 신발을 벗고 한국의 습관에 따라 신을 문 앞에 놓았다. 그녀는 파리에 들른 것이다. 그녀는 미국에서 오는 길이었다.   그녀는 의자 위에 앉았다. 그녀는 밤새도록 여행을 하였기 때문에 피곤했다. 그녀는 한국식으로 앉았다. 그녀는 의사의 치료를 받기 위해서 미국에 갔다오는 길이라고 말하였다. 그녀는 암에 걸려 있었다. 미국 학자들은 그녀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녀는 곧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녀는 젊고 아름다왔다. 그녀는 아직 인생의 반도 살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행복해 했다.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저는 모든 것을 다 정리했어요. 이제 저는 편안하게 죽을 수 있어요」 나는 그녀가 편안하게 죽기 위해서 무엇을 정리하였는지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오직 성인만이 행복하게 죽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저는 제 남편을 몹시 사랑했읍니다」하고 그녀는 말했다. 「전 그의 취미는 뭐든지 다 알고 있어요. 그의 버릇도 모두 알고 있죠, 그의 변덕까지도요. 저는 제가 죽는 날 저를 대신할 수 있는 한 처녀를 찾아냈어요.   저의 남편은 아무 것도 눈치를 못 채고 있지요. 제가 불치의 병에 걸려 있는 것을 알기가 무섭게 나는 그녀를 우리집으로 오도록 했어요. 그리고 그녀에게 나의 남편을 돌보아주는 일을 맹세케 하였죠. 제가 죽으면 제자리를 대신 맡아 달라고요.   저는 물건이 들어있는 모든 서랍을 그녀에게 보여 주었지요 그리고 저의 남편을 위해서 음식을 준비하는 법도 가르쳐 주었어요.   그리고 어린애를 돌보는 법도 가르쳐 주었어요. 그녀는 저를 대신해주기로 약속하였어요. 그러니 저의 아이들이나 남편이 제가 죽어도 슬퍼할 이유가 없지요. 내가 없는 것에 대해서요. 저는 마음 편하게 죽을 수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행복합니다‥‥‥.   나는 이처럼 가슴 아프게 하는 자기희생의 고백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없다. 사랑에 의한 자기희생, 완전한 희생.   나는 후에 이 여인이 한국에 있어서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한국 여인의 본성에 맞게 행동한 것이다.   그때 이래 나는 행복의 다섯 가지 요소 가운데 왜 사랑이라는 말을 찾아볼 수가 없는지를 알게 되었다. 한국에 있어서의 사랑이란 너무나 크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위대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사막을 꽃피게 하는 강   자유의 진영에 있는 한구그이 반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성장해온 나라 중 하나이다. 그것은 나의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운다. 한국은 내가 좋아하는 나라이며 나는 한국이 산업국가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볼 적마다 행복을 느낀다.   기술면에 잇어서 미국 사람은 세계의 챔피언이다. 그들은 달나라에까지 갔다. 그들은 천체의 공간을 여행하고 있다. 미국의 문명은 세계의 경이이다. 예전에 세계에는 일곱 개의 경이가 있었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단 하나의 놀라움밖에 없다. 그것은 미국의 기술이다. 하눅ㄱ은 미국보다 많이 뒤떨어진 곳이 아니다. 일년도 채 되기 전 한국은 현대의 아주 전설과도 같은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한국인은 사막에다 인공의 세 개의 큰 강을 만들고 사막을 꽃피게 하는 일을 착수한 것이다. 그것은 달나라 여행이나 피라밋을 세우는 일 못지않은 큰 계획이다. 거기에는 국제적인 경쟁이 있었다. 모든 산업화된 나라는 이 경쟁에 한몫 기었다. 이 계획을 실천하는 데 있어 한국이 승리를 거둔 것이다.   한국인은 리비아의 벵가지의 남족 천 킬로미터나 되는 사막의 모래를 파는 일에 착수한 것이다. 한국인은 석유가 아니라 물을 끌어올리기 위한 작업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한국인은 타제르보에 거대한 호수를 만들기 위한 땅 가운데서 물이 솟도록 만들 것이다.  그 호수는 천 킬로미터나 되는 인공적인 강을 적시게 될 저장소가 될 것이다.    강은 사막 가운데에서 지중해로 흐를 것이며, 그것이 사막의 모래를 비옥하게 만들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수에즈 운하나 파나마 운하를 만들고 라인강을 론느강과 연결하는 등 수많은 공적을 이루어왓다. 그러나 사막 한가운데에 천 9백 킬로미터나 되는 인공적인 강을 만드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다.   리비아의 사막에 이 인공적인 강을 만들기 위해서 미국, 캐나다, 이탈리아, 일본, 독일, 영국의 학자와 기술자들은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가장 뛰어난 계획은 한국의 학자와 건설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인공적인 강은 현재 실제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한국인은 83개월 안에 끝마치기로 약속하였다.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천 2백만의 한국인이 이 인공의 강을 만들기 위해 일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업적에 대해서 어찌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은자의 왕국   지나간 5세기 동안은 한국인에 있어서 수난기였다. 1600년경 한국은 사방에서 너무나 심한 위협을 받았기 때문에 위축되어 살아왓다. 한국 민족은 세계에서 격리되었다. 한국인은 은자의 민족이 된 것이다. 그 동안은 그들에 있어서 침묵의 세기였다. 한국인들은 그 동안 과거에 그들이 이루어 놓은 놀랄 만한 업적이나 가치를 남기지 못하엿다.   구텐베르크보다 2백년 전에 한국 사람들은 인쇄술을 발명하였다. 목판 활자도 여전히 존재해 있었다. 한국인은 기술의 기적을 이루어온 것이다. 한국인은 그들의 발명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양사람보다 먼저 군함을 만들었다.   그것은 거북선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철갑선을 사용하여 바다의 격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한국인은 측우기도 발명하였다. 그것은 지금 서울의 박물관에 있다. 그들이 세상을 은퇴할 때 그들은 모든 그런 것을 버린 것이다. 적은 바다의 모래나 둘의 풀처럼 많았다. 한국인은 거기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침묵과 고립의 세기는 고통스러웠으나 한편 한국인의 영혼을 단련한 것이다.   베들레헴에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날 무렵 두 종류의 초대자만이 존재하였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천사와 땅에있는 양치기이다. 이따금 사람들은 왜 그리스도가 양치기를 택하였는가 하고 자문한다. 양치기의 조합은 다른 조합보다 뚜어난 것일까? 양치기는 농민이나 직공 또는 의사보다 뛰어난 것일가? 천사 곁에서 동등하고 다른 인간들보다 뛰어나지 않은 인간을 초대하지 않는다.   양치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점은 바로 그들이 고독하게 살며 순수함 속에, 명상 속에 생활하는 데 있는 것이댜.   여러 세기 동안 한국 사람은 은자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참석한 양치기들처럼 세상에서 격리되어 살아왔다.   부처님은 한국인에게 그들이 세살과 격리되어 살아온 것이 그릇된 선택이 아님을 보여 준 것이다. 때은 어려운 시기였다. 한국 주의에는 위험이 가로놓여 있었다.   부처님이 그의 가장 라름다운 연설 가운데 말씀하시기를 위기에 있어서 자기 내부에서 피난처를 찾아야 하며 외부에서 피난처를 찾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국에 있어서의 일상생활은 준엄하다. 한국말에는 쌀이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기근의 달이 계속되는 봅의 기나긴 달이다. 쌀은 보자라고 저장은 바닥이 난 것이다.  새로운 수확의 시기는 아직 멀다. 이 어려운 시절에 한국인은 음식을 고안해낸 것이다.   식물성의 요리. 모든 여인들 처녀들 어린이들은 지붕이 둥근 그들의 집에서 눈이 녹을 무렵에는 나온다. 그녀들은 마당, 들, 산의 기슭으로 식물이나 나무뿌리 등 많은 종류의 식물을 캐러 간다.   그러나 대진는 굶주린 자를 먹이기에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의 여인들은 바다로 물속에서 그들이 먹을 수 있는 바다식물이나 김을 따러 간다.   한국의 집에는 어디나 양식을 저장할 큰 항아리가 있다. 보릿고개란 헛된 말만은 아니다. 그것은 기근의 달이다. 한국의 민화(民畵)에도 보릿고개가 나타나 있다.         기근 때의 일이다. 한 어린이가 그이ㅡ 어머니가 굶어죽게 되는 것을 보다못해 애태운다. 그는 어머니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양식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울면서 강가로 간다. 그는 어머니에게 물고기를 잡아 갖다 주려고 한다. 그런데 강은 얼어 있다. 그는 얼음을 깨뜨릴 만한 힘이 없다. 그는 체운으로 얼음을 녹이기 위해서 얼음 위에 앉는다. 그는 울며 하루종일 앉아 있다. 마침내 얼음이 녹았다. 그는 물고기를 잡아와 그의 어머니를 구출한다.   한 한국의 자각가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멋진 책 속에서 「우리의 집은 자연의 폭력으로부터 보호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나의 가족은 이 피할 수 없는 빈곤에 대해서 걱정은 하지 않는 것 같다.   왜냐하면 나의 가족은 불교이 신비로운 교리와 공자의 이론을 실천에 옮기고 있는데 거기에는 참사람이란 거친 음식이나 소박한 옷, 검소한 집에 사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아름다움을 미묘하게 느낄 줄 모르는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말하고 잇다.   나의 가족에 영향을 주는 수많은 위인들은 죽을 정도로 굶주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양친은 이 모자람을 견디어내고 미적인 펴오하 이외의 모든 것, 만족을 경멸하는 것을 명예로 삼고 있는 것이다.   집안의 학자인 나의 아저씨는 머리털을 다듬는 일이나 옷이 더러운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그이 필체는 언제나 매우 까다롭다.   이러한 기근의 시기에 한국 사람들은 ?逾? 먹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들은 시들은 구고하꽃을 결코 버리지 않는다. 그것으로 신년에 떡을 만드릭 위해서 종교적인 마음으로 그것을 간직해 둔다. 그들은 구고하, 무궁화도 부엌에서 식용으로 쓴다. 한국 민족은 언제나 대지와 인접해서 살아왔다. 자연과 우주와 함게 사라온 것이다.   우물을 파는 장소, 집을 짓는 장소, 양친의 무덤을 파는 장소는 해박하게 연구하여 선택한다. 그것은 에코로지에 대한 고도의 지식을 나타낸다.   사람들은 지세, 바람의 방향, 샘의 깊이, 토지의 성질을 고려한다. 토지·물·나무·꽃은 살아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특히 산은 하나의 영혼으로 간주되었다. 어느 날 나는 절에 간 적이 있다. 그 절은 산꼭대기에 있었다. 기릉ㄴ 아주 좋았다. 포장이 되어 있었다. 현대식 도로였다.  그러나 길은 꾸불꾸불했다. 나를 따라오던 한국 부인은 내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았다.   「미안합니다, 신부님, 우리는 이 산길을 덜 가파르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아주 뛰어난 기사가 있으니까요. 그들은 미국에서 공부를 했어요. 하지만 우리는 굴을 파지 않기 위해서 이 길을 만든 것입니다. 굴을 파면 산신령을 화나게 하고 방해하게 되니까요……」   한국의 기사는 미국 대학에서 공부를 마친 후에도 자동차의 소음이나 도로의 건설에 있어 산신령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마음먹는다.    한국인은 나무·꽃·식물·뿌리의 형제들이다. 한반도에는 4천 5백 종류 이상의 식물이 있다. 덴마크에는 천5백종, 영국에는 2천 종밖에 없다. 매년 4월 5일은 자연의 축제일인 식목일이다. 한국 사람은 누구나 나무를 심는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을 지배한 소련은 남쪽을 침범하였다. 침략자는 수없이 많았다. 탱크로 된 사단은 급류처럼 한국으로 몰려왔다. 그들은 도시와 마을을 불태웠다. 그들은 수확·숲·정원을 파괴하였다. 전쟁은 3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1953년 7월 27일 침략자가 물러갔을 때, 전 한국은 온갖 재로 덮여버렸다. 그것은 소렴의 초토작전이었다. 한국인은 그들의 도시와 집을 다시 세?m다. 그러나 그 전에는 그들은 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한국은 그그들이 형제인 나무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오늘날 한국은 다시금 나무로 덮여 잇다. 매우 오래된 숲을 볼 때 나 자신 놀라게 된다. 나는 그들에게 어떻게 그처럼 빨리 나무가 자랄 수 있도록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했다고 대답하였다. 미국식 방법이다.   자연상태에서는 30년에 걸려 크는 만큼을 5년 동안에 자라게 만든다. 그것은 과학적인 숲이다.   나는 이 과학적 숲이 미국인의 의해, 남미 브라직의 코피재배로 불모지가 된 아주 방대한 대지에 만들어진 것을 알고 있다. 전나무, 참나무, 너도밤나무는 3년 동안에 20년간 자란 만큼 커진다. 미국인의 과학적 업적에 대한 나의 열정은 다시금 넘치게 된다.   그러나 나의 친구인 브라질 사람들은 나를 실만케 하였다. 그들은 나에게 이 기적적인 숲에서는 새의 노래소리를 들을 수가 없디거 말하였다. 단 한 마리의 새도 여기에 보금자리를 만들고 살려하지 않는다. 새들은 고학적인 숲을 좋아하지 않느낟. 미국인에 의해서 브라질에 과학적으로 심어진 아름다운 숲은 유령이 깃든 집과도 같다.   학자들은 새들이 그 숲에 살기를 원치 안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현재 그들은 발생론적 변종에 의해 과학적인 숲을 좋아하는 새로운 종류의 새를 만들어내는 중이다. 나는 한국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그러나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반도를 덮은 과학적인 숲은 새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언제나 한국은 가을에 북쪽의 얼어붙은 땅을 버리고 남쪽 때평양이 섬으로 겨울을 지내러 가는 수많은 철새가 휴식하며 기력을 회복하는 장소이다.   현재 한구겡 머무는 새의 수는 증가하였다. 그들은 새로운 숲을 좋아한다. 한국 사람은 매혹되었다. 약 천만의 인구를 가진 대도시 서울에는 새가 오지 않는다. 새들은 서울에 머무르지 않는다.   하느르이 새들은 현대의 대도시보다 과학적인 숲을 더 좋아한다. 한국 사람은 철새의 방문이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서울을 뚫고 지나가는 한강변에 일년에 두 번 한국의 지바오가 도시 위로 날아갈 수 있도록 특별한 공원을 옮겨 놓았다.    그것은 정말로 새들의 숙소이다.  거기에는 수십 종이 있다. 강물 줄기를 따라서. 도시 한복판에. 현재는 새들이 서울에도 찾아온다. 새들은 더러운 초현대의 대도시도 마다하지 않는다. 새들은 자기 취미에 맞는 숙소를 발견한다.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가지는 은자들처럼 고독 속에 위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중세기 말에 세계를 발견하기 위해 떠났던 서양인들은 한국을 알지 못하였다. 포르투갈인, 영국인, 프랑스인, 화란인은 인도, 중국, 모든 태평양의 섬, 일본은 발견하였으나 한국이 존재하는 것은 알지 못하였다.   포르투갈과 화란의 항해자들은 자주 일본에 가곤 하였다. 그들은 한국 근처의 바다를 지나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알지 못하였다. 프랑스인은 월남에 자리잡았다. 그들은 한국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였다.   한국은 서양의 항해자에 의해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1653년 루이 14세 때 하멜이라고 부르는 화란인이 36명이 수부와 함게 한국 해안에서 조난을 당한 것이다.   화란으로 돌아간 하멜은 미지의 땅 한국에 대해서, 즉 은자의 나라 사람들의 생활에 대하여 썼다. 새로운 민족의 발견은 감동적인 것이었다.         한국에 있어서의 신(神)   그처럼 오랜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은 오늘날 전 세계의 민족에게 알려지고 경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교황 장 폴 2세는 서울에 내리면서 한국의 땅에 입을 맞추고 찬사를 보냈다.   그것은 1984년 5월 3일이었다. 말할 수 없이 중요한 사건이다. 기독교국이 최고의 사제, 로마의 거룩한 형제, 지상의 모든 기독교도의 정신적인 수령이 이날 한국에 온 것이다.   사제들이란 하늘과 신성이 흘러 땅 위에 기울어지는 강이다. 교황의 도래와 더불어 한국에는 신이 온 것이다. 4천만의 한국 사람에게 신은 하늘에서 내려와 교화으이 현존으로서 그들 곁에 임한 것이다.   한국에는 약 백만의 가톨릭 신자가 있다. 신교도는 4백만이고 불교도, 유교도, 도교도, 샤머니스트는 3천 5백만이나 된다. 교황에 대한 가장 감동적인 환영은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들은 기독교의 교회는 그이 어린이들이ㅡ 어머니일 뿐 아니라 교회에 속하지 않는 어린이들의 어머니라는 것을 한국인은 알고 있다.   3천 5백만의 한국의 비기독교 신자들도 교황이 그들의 거룩한 아버지임을 마음속 깊이 느낀 것이다. 그 영접은 아주 열광적이었다.   한국인들은 언제나 관용의 종교를 실천으로 옮기며 살아왔다. 민족이 창시자가 가르쳐 준 것처럼. 어느 날 산꼭대기에 세워진 절에서 두 여승이 나에게로 접근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아름다왔다. 머리를 깎고 승려복을 입고 있었다. 나에게 인사를 한 후 그들은 눈을 하늘로 들고 십자가를 그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당신네들은 불료이 여승들인데……왜 십자가를 긋습니까?」하고 나는 물었다.   「당신네들은 가톨릭 신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은 단신과 당신의 종교에 대한 존경의 표식입니다」하고 그들은 대답하였다. 그들의 파벌주의가 없는 점과 관용성이 나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모든 기독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이 두 여승이 십자가를 그은 것과 같은 마음으로 교황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교황은 한국의 백 3명의 순교자들을 시복하기 위해서 한국에 온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예외적인 일이다.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2세기 전에 불과하다. 그 이상은 아니다. 현재 약 백만의 가톨릭 신자밖에 없는데도 그 민족 중 백3명의 남자와 여자가 시복을 받은 것이다.   성인들이 수에 있어서 한국은 단숨에 성성의 정점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한국보다 성인이 많은 나라는 오직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뿐이다. 한국인은 4위에 이른 것이다. 그것은 절대적인 기록이다.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분명히 백 3명의 순교자들 덕분이다.   오직 순교자와 성인만이 그러한 성스러운 업적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동반자들이다. 순교자들의 피는 천국에의 열쇠이다. 기독교 신앙을 위하여 죽은 백 3명의 한국인들은 오늘 날 천사와 천사장 세라핀과 더불어 하늘나라ㅏ 그리스도의 오른쪽 곁에 있다. 성인들은 예수 곁에서 인간의 변호사이며 중개인이다.   오늘날 한국은 한국을 찬양하는 지상의 모든 민족에 의해서만 알려져 있는 성이 아니고 성 바질, 성 니콜라, 성 조지와 그밖의 다른 위대한 성인들과 하나님 오른쪽에 자리잡은 백 3명의 한국인에 의해서 하늘에서도 알려져 잇다.   지상에 퍼져 있는 수만흔 가톨릭 신잗르은 그들의 달력 속에 한국의 백 3명 성인의 이름을 적어 넣는다. 그들은 그 성인들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들은 한국의 성인들에게 하나님의 곁으로 불러주기를 간청할 것이다. 순교자들에 의해서 얻어진 성성은 가장 바람직한 것이다. 모든 기독교 교회는 다 순교자의 유해 위에 세워졌다.   이 유해가 없이는 미사를 드리기 위한 제단은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1984년  5월에 교황에 의해 시성된 백 3명의 한국 순교자 중 반은 여자이다. 어린이나 여자들이 순교의 시련을 겪는 것은 남자의 경우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일이다. 성인들 가운데 우리의 어머니가 된 수십 명의 한국 여성들은 최후의 심판 덕분에 우리에게 그러한 기회를 더 많이 주게 될 것이다.   그리 많지도 않고 그러럼 짧은 시간 동안에 사도들에 의해 기독교도가 된 오래 된 나라의 성인의 수를 한국이 능가한 것은 어찌 된 일일까?   그것은 분명히 그들이 극동의 조그만 반도에서 5천년 동안 겪어온 용기, 평화에 대한 사랑,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인 것이다.   스페인의 여왕이 미국을 발견하기 위해서 항해 중인 컬럼버스에게 이렇게 썼다. 「똑 바로 항해하라.   만일 네가 찾고 있는 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너의 용기를 보상하기 위해서 신이 그 대륙을 창조할 것이다」.   이따금 나는 미국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크리스토프 컬럼버스의 신념에 보상하기 위해 일부러 미국을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기울어질 때가 있다.   신은 그들의 동포에게 용기를 주기 위하여 백 3명의 한국인을 당신 ?? 하늘나라로 부른 것이다. 그들은 준엄한 투쟁을 해왔다. 그들이 기다리던 시련은 엄하다.   한국의 적은 지금 수도 서울에서 30킬로미터 되는 곳에 있다. 모든 한국인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지켜보고 있다. 무장을 하고. 왜냐하면 그들은 극동에 있어서의 자요세계이 초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국 사람들이 정당한 일을 수호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모든 인류와 관련된 정의, 그러나 그들은 동맹자를 필요로 한다. 시장에 있서서만이 아니라 하늘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한구」(Hanku)의 축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북한을 점거한 붉은 군대는 나의 나라를 침입하여 예속화시켰다. 그때 이래 나는 땅 없이 살아왓다. 추방되어 조국 없이 …….   이따금 나의 조국에 대한 향수는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에 최소한 지도로라도 조국을 보아야 한다.   나는 지도를 펴고 루마니아를 찾는다. 그 달처럼 둥근 나라는 동유럽 다뉴브강의 북쪽 교황의 조국인 폴란드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내가 태어난 마을은 어떤 지도에서도 그 이름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 마을은 너무나 작다. 그것은 하나의 부락이다. 그러나 어느 지도에서나 볼 수 있는 아름답고 중요한 마을이 그 마을 바로 곁에 있다.  그 이름은 「한구」이다.         내가 지도에서 한구라는 이름을 발견할 적마다 나는 손가락을 그곳에 가져다 댄다. 그러면 나는 집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고양, 한구. 그것은 마술적인 이름이다. 한구, 그거은 내가 잃어버린 조국이다.   나는 지금 한구는 한국 문자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한국말 알파벳의 똑같은 문자가 내 고향인 루마니아의 나라이름과 유사하다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나는 그 원인을 알 수 없다. 그러나 해마다 10월 9일이면 나는 모든 한국인과 더불어 한구라는 마술적인 이름으로 이날의 축제를 지낸다.   * 제1장 〈한국 찬가〉(Eloge de la Coree)는  미발표 신작으로 불어판에 앞서 최초로 공개되는 산문시이다.              • 지은이   C.V. 게오르규  • 옮긴이   민희식  • 출판사   범서출판사  • 년도      1984  • 쪽수      192      
1960    영국계 미국 시인 - 오든 댓글:  조회:5731  추천:1  2016-12-16
  출생일 1907. 2. 21, 잉글랜드 요크셔 사망일 1973. 9. 29, 오스트리아 빈 국적 영국/미국 요약 옥스퍼드대학 재학중에 이미 시인이자 철학도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대학 졸업 후 베를린에 머물며 독일의 시와 연극, 특히 브레히트의 연극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초기 '1930년대 시인'의 중심인물로서 C.D.루이스, S.스펜더, L.맥니스 등의 시풍에 큰 영향을 끼쳤다. 소위 오든 세대의 시인으로 알려진 이들을 '오든 그룹'으로 지칭하기도 하는데 이는 대체로 저널리즘이 만든 것이라는 게 정평이다. 그의 시적 세계는 감성적인 측면에서 다분히 좌경적이었으나 이는 핍박받는 빈민의 비참함과 이를 방관하는 사회에 대한 양심의 가책이 섞인 것이었다. 다른 한편 그는 예술가로서 고대 영시풍의 단음절 낱말을 많이 사용해 조롱이 섞인 경시와 모멸 풍의 독특한 스타일을 창출해냈다. 1939년 미국으로 귀화한 이후에는 종교적 색채가 가미된 작품을 많이 썼다.   1930년대 대공황기에 좌익의 영웅으로서 일찍이 명성을 얻었다. 이 시기에 그가 발표한 대부분의 시극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와 공동집필한 것이다. 1939년 미국에 거주하면서 미국시민으로 귀화했다. 1908년 오든의 가족은 버밍엄으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그의 아버지는 의무관·대학교수를 지냈다. 그의 아버지는 자연과학에 대한 광범위한 관심을 지닌 탁월한 의사였고, 그의 어머니는 간호사였으므로, 가정의 분위기는 문학보다 과학에 치중된 편이었다. 또 부모는 독실한 영국 가톨릭교도였기 때문에 오든이 체험한 종교에 대한 첫번째 기억은 '마법 같은 흥미로운 의식들'이었다. 오던(Audun)이라는 성은 아이슬란드의 사가에도 등장하며, 오든은 아버지로부터 아이슬란드에 대한 깊은 관심을 물려받았다. 그는 영국의 중상류층 자녀들이 받는 표준교육과정을 밟았다. 8세에 서리에 있는 세인트에드먼드 예비학교에 입학했고 13세에 노퍽 주(州) 홀트의 그레셤 퍼블릭 스쿨에 진학했다. 오든은 광산 기사가 되려고 했으나, 먼저 과학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으므로 생물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1922년경 그는 시인으로서의 소명을 발견했으며, 2년 후 〈Public School Verse〉를 통해 첫 시를 발표했다. 1925년 옥스퍼드대학교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에 입학했는데, 거기서 시인·철인으로 대단한 명성을 얻었고 다른 문학가들에게 강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한 시인으로는 데이 루이스(1968년 계관시인이 됨), 루이스 맥니스, 1928년 오든의 시를 모아 손으로 인쇄하여 처음으로 시집을 출판한 스티븐 스펜더 등이 있다. 소위 오든 세대의 시인으로 알려진 그들의 이름은 종종 그의 이름과 함께 언급되지만 혁명적인 정치에 헌신했다는 '오든 그룹'이라는 말은 대체로 저널리즘이 만든 것이다. 1928년 오든이 옥스퍼드대학교를 졸업하자 그의 부모는 1년 동안 해외여행을 권했는데, 그는 이전의 문학세대를 매혹시킨 파리 대신 베를린을 택했다. 그는 독일어를 좋아하게 되었고, 독일 시와 카바레 노래, 연극, 특히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연극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베를린에서 귀국한 후 그는 5년간 스코틀랜드와 영국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단편시집 Collected Shorter Poems〉에서 오든은 자신의 생애를 4기로 나누고 있다. 제1기는 그가 아직 대학생이었던 1927년부터 〈연설가들 The Orators〉을 출판한 1932년까지이다. 〈시집 Poems〉과 더불어 1930년 그의 명성을 확고히 한 '제스처 게임' 형식의 〈쌍방에 지불되다 Paid on Both Sides〉는 불완전하게 혼합되었지만, 여러 소재가 잘 융합되어 있음을 가장 여실히 보여주는 매력적인 작품이다. 여기에 융합된 소재를 살펴보면, 아이슬란드의 사가, 고대 영시, 공립학교 이야기, 카를 마르크스, 지크문트 프로이트와 심리학자들, 그리고 이 모든 작품 속에 들어 있는 학생다운 유머 등이다. 이 시들은 한결같지 않고 종종 애매하여 이해하기 어렵다. 또 상반된 충동들, 즉 환상과 신화적·무의식적인 것에 대한 주관적 충동, 사회악과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의 심리적·도덕적 결함의 진단에 대한 객관적 충동이 서로 상충된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 비록 시들의 사회적·정치적 요소가 독자의 주목을 가장 많이 받았지만 좀더 근본적인 것은 심리적 측면이었다. 시를 일종의 치료법으로 보고 정신분석과 흡사한 기능을 수행하는 시의 개념이 오든에게는 근본적으로 중요했다. 1933~38년의 제2기는 오든이 좌익 영웅이었던 시기이다. 오든은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분석하면서 전체주의의 발흥에 대해 경고하기도 했다. 〈이 섬에서 On This Island〉(1937, 영국에서는 1936년에 〈보라, 길손이여! Look, Stranger!〉로 출판)는 구성 면에서 더 분명해져 더 많은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런던에서 실험적·비상업적 연극을 상연하는 '집단극장'(Group Theatre)을 위해 그는 처음에 일종의 음악 선전극인 〈죽음의 무용 The Dance of Death〉을 썼고, 그후 예비학교 시절부터 친구였던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와 공저로 〈가죽 아래의 개 The Dog Beneath the Skin〉(1935)·〈F6의 등반 The Ascent of F6〉(1936)·〈변경에서 On the Frontier〉(1938) 등을 썼다. 그는 또 기록영화 중에서도 고전에 속하는 〈야간 우편 Night Mail〉(1936)을 포함한 여러 기록영화에 대한 논평을 썼고 다수의 수필과 비평서를 집필했다. 그밖에 가장 유명한 르포르타주로 맥니스와 동행한 아이슬란드 여행기 〈아이슬란드에서 온 서신 Letters from Iceland〉(1937), 이셔우드와 함께 중국 여행을 기초로 한 〈전쟁으로의 여행 Journey to a War〉(1939)이 있다. 1937년 오든은 스페인을 잠시 방문했는데 시집 〈스페인 Spain〉(1937)은 그 방문의 직접적인 산물이다. 그러나 그의 회고에 의하면 이 방문은 좌익에 대한 환멸을 맛보게 했으며, 그리스도교로 복귀하는 계기가 되었다. 1936년 그는 독일의 소설가 토마스 만의 딸 에리카 만과 결혼했는데, 그 목적은 그녀가 영국 여권을 받도록 하는 데 있었다. 이셔우드와 함께 중국을 여행했을 때 그들은 오며가며 미국대륙을 횡단했는데, 돌아오는 여행길에 미국에 영주하기로 결심, 1939년 1월 두 사람은 미국으로 귀화했다. 1939~46년에 걸친 제3기에 오든은 미국 시민이 되었고, 그의 종교적·지적 시각이 결정적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또다른 때 Another Time〉(1940)에는 그의 가장 훌륭한 노래들과 시사성있는 시가 들어 있으며, 〈이중인간 The Double Man〉(1941)은 그가 그리스도교에 귀의하기 직전의 입장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1940년 이후 모든 작품의 기초가 된 그의 신념과 태도는 3편의 장시에 분명히 나타난다. 크리스마스 성담곡(聖譚曲)인 〈한동안 For the Time Being〉(1944)에는 종교성이, 같은 책에 실려 있는 〈바다와 거울 Sea and the Mirror〉(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 The Tempest〉에 대한 擬似劇的인 논평)에는 심미성이, 1948년 퓰리처상을 받은 '기이한 목가시' 〈불안의 시대 The Age of Anxiety〉(1947)에는 사회심리성이 드러난다. 오든은 그후 장시를 더이상 쓰지 않았다. 제4기는 1948년에 시작되었는데, 그해부터 오든은 매년 4~10월 동안 뉴욕을 떠나 유럽에서 지냈다. 1948~57년 그는 여름을 이탈리아의 이스키아 섬에서 보냈으며, 말년에 오스트리아의 키르히슈테텐에 있는 농가를 사서 그곳에서 여름을 보냈다. 〈아킬레스의 방패 The Shield of Achilles〉(1955)·〈클리오 찬가 Homage to Clio〉(1960)·〈집에 대하여 About the House〉(1965)·〈성벽없는 도시 City Without Walls〉(1969)에서 그는 시의 순서를 외부양식, 즉 성직자의 시간, 풍경의 유형, 집안의 방을 따라 배열했다. 20년 이상 함께 살아온 친한 벗이자 미국의 시인인 체스터 칼먼과 오페라 대본의 예술성을 복원했다. 그중에도 가장 유명한 작품은 공동작, 이고리 스트라빈스키를 위한 〈난봉꾼의 행각 The Rake's Progress〉(1951), 한스 베르너 헨체를 위한 〈젊은 연인을 위한 애가 Elegy for Young Lovers〉(1961)·〈바사리드 가(家) The Bassarids〉(1966), 니콜라스 나보코프를 위한 〈사랑의 헛수고 Love's Labour's Lost〉 등이다. 그들은 또 〈엘리자베스 시대의 송가집 An Elizabethan Song Book〉(1956)을 편집했다. 1962년 평론집 〈염색공의 손 The Dyer's Hand〉을 펴냈고, 1970년 비망록 〈어떤 세계 A Certain World〉를 발표했다. 그는 편집과 번역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는데, 〈생 장 페르스의 시집 The Collected Poems of St. John Perse〉(1972)이 유명하다. 1972년 그는 겨울철 거주지를 뉴욕에서 옥스퍼드로 옮겼는데, 원래 옥스퍼드대학교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의 명예 특별연구원이었다. 말년에 오든은 볼링언상(1953)·전미도서상(1956)을 수상했으며, 옥스퍼드대학교의 영시교수(1956~61)를 지냈다. 오든에 대한 평가 오든(Wystan Hugh Auden) 영국 태생의 미국의 시인 1930년대 초기에 오든은 그의 시가 이전에 문단에서 최고의 지위를 차지했던 T. S. 엘리엇,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보다 당대의 사회적·정치적 현실에 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다소 논의의 여지가 있는 이유로 인해, 일찍이 일부 사람들에 의해 최고의 시인으로 갈채를 받아왔다. 1965년 엘리엇이 죽을 무렵, 오든은 실제로 그의 후계자라는 평을 듣게 되었는데 이 말은 상당히 설득력있는 주장이었다. 이것은 1939년 예이츠가 죽을 때 엘리엇이 최고의 시인이라는 평을 물려받은 것과 같았다. 시인으로서 오든은 엘리엇보다 더 많은 작품을 썼고 더 변화가 많았으며, 훨씬 더 굴곡이 많았다. 그는 시대를 해석하고, 사회의 병폐를 진단하고, 대중의 관심사인 지적·도덕적 문제를 다루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환상과 꿈의 정신세계를 표현하려는 욕구도 똑같이 드러났기 때문에, 그의 시는 이따금 독자들을 당황하게 했다. 그의 시를 1편씩 따로 떼어 살펴보면 종종 애매한데, 초기 시가 특히 그러하지만 포괄적으로 음미하면 상징적 조망과 신화적 인물 및 상황을 지닌 뜻깊은 시적 질서를 내포하고 있다. 말년에 오든은 자신의 시세계에 체계를 세워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시를 모아 개정하고, 시기별로 정리하여 2권으로 출판했다. ==========================   W. H. 오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H. 오든 위스턴 휴 오든(Wystan Hugh Auden, 1907년 2월 21일 ~ 1973년 9월 29일)은 영국의 시인이다.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그 후 시민권을 얻는다. T. S. 엘리엇이 대표하는 1920년대의 정신에 반기를 들어 마르크시즘의 문제를 시 가운데 넣어서 세실 데이루이스와 스티븐 스펜더 등과 함께 신풍을 영국시단에 일으킨다. 이른바 '오든 그룹'의 지도적 존재이며 임상의(臨床醫)와 같이 병든 사회를 정신분석과 사회의식을 합친 수법으로 파헤쳤다. 말년에는 앵그리칸(Anglican) 종교에 기울어 인간존재를 '사랑'의 면에서 고찰하는 것과 같은 시를 썼으며, 기타 많은 작품이 있다.   목차   [숨기기]  1작품 목록 1.1서적 1.2영화&오페라대본 2바깥고리   작품 목록[편집] 서적[편집] 영화&오페라대본[편집] 난봉꾼의 행각: 체스터 칼먼과 공동창작. 1951 젊은 연인들을 위한 엘레지'(Elegy for Young Lovers): 체스터 칼먼과 공동작업. 1956 러너(Runner, 다큐 영화)의 해설, 캐나다 국립 영화위원회(NFBC). 1962 사랑의 헛수고(오페라): 셰익스피어의 사랑의 헛수고를 기반으로 체스터 칼먼과 공동집필한 작품. 1973  
1959    페미니즘과 모더니즘의 선구자 - 버지니아 울프 댓글:  조회:5125  추천:0  2016-12-16
페미니즘과 모더니즘의 선구자 버지니아 울프 Virginia Woolf |   출생일 1882년 01월 25일 사망일 1941년 03월 28일 본명 아델린 버지니아 스티븐 국적 영국 대표작 《댈러웨이 부인》, 《등대로》 등 의식의 흐름 기법을 시도한 작가로 철저한 남성 중심 사회였던 빅토리아 시대에 당당히 문학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버지니아 울프 버지니아 울프는 영국의 소설가로, 페미니즘과 모더니즘의 선구자로 꼽힌다. 그녀는 여성의 교육 및 사회 진출이 제한되던 빅토리아 시대에 남성 중심의 문명사회를 비판하고, 사회적, 경제적, 자아의 측면에서 여성의 독립을 주장했다. 또한 '의식의 흐름' 기법을 탄생시키고 완성한 작가 중 하나이기도 하다. 또한 버지니아 울프의 페미니즘적 메시지는 물론, 그녀의 명성 그 자체로 말미암아 여성의 지위에 대한, 특히 문학사적인 측면에서 여성의 지위가 새로이 조명되게 되었다. 어머니 줄리아에게 안겨 있는 버지니아 버지니아 울프의 본명은 아델린 버지니아 스티븐이며, 1882년 1월 25일 영국 런던의 하이드 파크 게이트 22번지에서 레슬리 스티븐과 줄리아 덕워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저명한 문예 비평가로 《영국 인명사전》 및 잡지 〈콘힐〉의 편집장을 지냈다. 레슬리와 줄리아는 둘 다 재혼이었는데, 재혼할 당시 각자의 자녀들을 둔 상태였고, 두 사람 사이에서 자녀들이 태어나면서 10여 명의 대가족을 이루었다. 버지니아는 두 사람 사이의 셋째 아이였다. 어린 시절 버지니아는 부유한 환경에서 가정교사와 함께 공부하고, 아버지의 방대한 서재를 이용하는 학구적인 분위기에서 문학적 소양을 갖추고 자랐다. 그러나 레슬리 스티븐은 가부장적인 아버지여서, 딸들은 최소한의 교육만 받고 현모양처가 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녀의 교육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지는 않았다. 남자 형제들이 케임브리지 대학을 다니는 동안 버지니아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며 독학으로 자신만의 지식 세계를 쌓아 올렸다. 보통 버지니아 울프라고 하면 예민하고 우울한 얼굴의 여류 작가, 헌신적인 남편을 저버리고 평생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로 생애를 마감한 작가를 떠올린다. 예민한 성격과 우울증은 아버지 쪽의 유전인 듯도 한데, 레슬리는 첫 번째 아내와 사별하고 우울증과 신경쇠약으로 두문불출했으며, 두 번째 아내 줄리아가 죽었을 때는 더욱 심각해져 딸들에 대한 집착으로까지 발전했다. 버지니아는 13세 때 헌신적이고 천사 같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이후 애증 관계에 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두 번째 정신착란 증세를 보여 투신자살을 기도하는 등 평생 정신질환으로 괴로워했다. 또한 어머니 사후 자전적인 고백에 따르면 유년 시절 의붓오빠들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도 하는데, 이 사건과 아버지에게 억눌린 경험이 남성 혐오 증세와 후일의 동성애적 성향에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버지니아는 언니, 오빠와 함께 런던의 블룸즈버리로 이사했다. 1899년부터 오빠 토비를 중심으로 케임브리지 출신의 젊은 지식인들이 모여 지적 토론을 하던 '한밤중의 모임'이 이곳에서 열리기 시작했는데, 이 그룹은 후일 '블룸즈버리 그룹'이라고 불린다. 버지니아는 이들을 접대하면서 그룹의 일원이 되어 미학,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토론했으며, 지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가디언〉 지와 〈타임스〉 지 등에 무명으로 서평을 실으면서 작가로서의 행보를 시작했다. 1912년에는 블룸즈버리 그룹의 일원이었던 평론가 레너드 울프와 결혼했다. 오빠 토비가 죽고 정서적으로 밀착 관계를 맺고 있던 언니 바네사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자 한 선택이었다. 그녀는 레너드 울프에게서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언니 바네사에게 보낸 편지에 '스물아홉 살이 되고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고, 정신질환을 앓고 있고, 작가도 아니다'라고 쓴 것을 보면 일종의 위기의식이 그녀를 위협했던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일반적인 부부의 모습과는 매우 달랐다. 버지니아는 남녀 관계를 거부했으며,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는 걸 중요시 여겼다. 또 결혼 생활 내내 수차례 자살을 기도했다. 그럼에도 레너드는 버지니아가 죽을 때까지 30여 년간 아내의 정신질환과 자살 기도 등을 감내하며 그녀를 보살폈고, 불편함 없이 작품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호가스 출판사를 설립하여 버지니아의 작품들을 출간하는 등 헌신했다. 결혼한 이듬해 버지니아는 《출항》의 원고를 완성했다. 그러나 신경쇠약 증세와 건강 문제로 요양소에 들어갔고, 그곳에 있은 지 두 달 만에 자살을 기도했다. 1914년, 레너드는 버지니아의 건강을 위해 리치먼드 교외로 이사하고 버지니아를 데리고 왔다. 이 집이 호가스 하우스이다. 이곳에서 레너드는 1917년 버지니아의 기분 전환을 위해 인쇄기를 사서 작게 출판업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호가스 출판사이다. 이후 버지니아 울프의 대표작들을 비롯해 캐서린 맨스필드, T. S. 엘리엇 등 유수의 작품들을 출간하면서 호가스 출판사는 오늘날 영국의 저명한 출판사 중 하나가 되었다. 1915년, 버지니아 울프의 첫 작품 《출항》이 출간되었다. 《출항》을 쓰기 시작한 지 9년 만이었다. 1919년에는 두 번째 작품 《밤과 낮》이 출간되었다. 이 두 작품은 일반적인 소설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이때까지도 버지니아 울프는 자신의 소설을 쓰는 방식을 계속 모색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점차 실험적인 기법의 소설들을 습작했고, 1919년에는 자신의 소설실험에 대한 주의가 담긴 문학 비평 에세이 《현대소설론》을 펴내면서 모더니즘 소설에 대한 이론 및 울프의 비평 원칙을 확립해 나가기 시작한다. 1922년에는 호가스 출판사에서 《제이콥의 방》을 펴냈다. 버지니아 울프를 유명하게 만든 실험적 소설의 첫 작품으로, 형식과 내용 모두 기존 소설 작품에서 완전히 탈피한 새로운 소설이었다. 이 작품은 주인공이 주위 사람들에게 주는 인상과 주위 사람들에게서 받은 인상을 통해 대도시의 원자화된 인간들의 생활과 존재, 일상의 덧없음을 그리고 있다. 이런 독특한 기법은 1925년에 출간된 《댈러웨이 부인》에서 완숙의 경지에 이른다. 그녀는 1924년에 출간된 비평서 《베넷 씨와 브라운 부인》에서는 새로운 실험적 소설이 갖추어야 할 요소를 논하는 한편, '모더니즘 수법을 구사하여 여성적 가치관을 보이겠다'라는 페미니즘 문학 노선을 확립했는데, 《댈러웨이 부인》은 이에 대한 실행인 셈이라 할 수 있다. 《댈러웨이 부인》이 비평가와 대중을 모두 사로잡으면서 울프는 작가로서 명성을 확립했고, 특히 페미니즘 운동가로서 목소리를 많이 내게 되었다. 1929년 출간된 《자기만의 방》은 케임브리지 대학 뉴넘 칼리지에서 했던 강연을 토대로 한 에세이로, 역사적으로 여성을 배제해 온 남성 중심 사회를 풍자적으로 비판하고 여성이 독립을 위해 갖추어야 할 것들을 역설하고 있다. 이후에도 버지니아 울프는 꾸준히 여성의 직업이나 독립과 관련하여 지속적으로 강연들을 했다. 1927년에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하여 시간과 진실에 대한 새로운 관념을 제시한 《등대로》를 발표하면서 페미나 문학상을 수상했다. 1928년에는 이 기법을 보다 발전시킨 《올랜도》를 발표했는데, 장난삼아 쓴 것이라고 한다. 1931년에 출간된 《파도》는 소설이라기보다 시에 가까운 작품으로, 이기적인 자아 때문에 이타적인 이상의 세계가 붕괴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자아를 탈피함으로써 삶의 덧없음을 초월해 나갈 수 있다는 그녀의 사상이 담겨 있다. 1937년에는 《세월》, 1938년에는 《3기니》를 출간했다. 특히 《3기니》는 《자기만의 방》과 함께 1970년대 이후 페미니즘 비평의 고전으로 재평가되면서,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생전에도 작가, 여성운동가로 엄청난 명성을 얻었으나 그녀 자신의 개인적 삶은 힘겨웠다. 예민한 성격에 평생 불안 증세와 신경쇠약에 시달렸는데, 여기에는 남편의 끝없는 사랑과 헌신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1941년 2월 마지막 작품 《막간》을 탈고한 후 우울증이 심해진 버지니아는 3월 28일 남편에게 편지를 한 통 써 두고 산책을 나갔다. 여보, 나는 내가 다시 미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나는 우리가 또다시 그러한 지독한 시간을 극복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중략) 누군가 나를 구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당신이었을 겁니다. 당신의 호의에 대한 확신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이 나를 떠났습니다. 나는 당신의 인생을 더 이상 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어떤 두 사람도 우리들보다 더 행복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이 편지를 마지막으로 울프는 우즈 강에 투신해 자살했다.     버지니아 울프 직업 소설가, 수필가, 발행자, 비평가 대표작 등대로, 댈러웨이 부인 올랜도: 전기, 나만의 방 영향 받은 분야·인물[보이기] 애덜린 버지니아 스티븐 울프(Adeline Virginia Stephen Woolf, 1882년 1월 25일 ~ 1941년 3월 28일)은 20세기 영국의 모더니즘 작가이다. 울프는 의식의 흐름 장르를 탄생시키고 완성한 작가 중 한 사람이다.   목차   [숨기기]  1생애 2블룸스버리 3작품 4같이 보기 5바깥 고리   생애[편집] 울프의 결혼 전 이름은 애덜린 버지니아 스티븐이며, 1882년 1월 25일 런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레슬리 스테판은 《18세기에 있어서의 문학과 사회》의 작가였으며, 어머니는 줄리아 덕워스이다. 버지니아는 아버지의 방대한 서재를 이용할 수 있었다. 1895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울프는 최초의 정신이상 증세가 나타났다. 1897년,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역사학과 그리스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1904년 아버지가 사망하고 울프는 두 번째 정신이상증세를 보여 투신자살시도를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1912년 레오나드 울프와 결혼하고 1915년 《항해》을 출판한 뒤 1919년에는 《밤과 낮》을 간행했다. 1925년에는 《댈러웨이 부인》이 큰 인기를 받았고 1927년에는 《등대로》, 1928년에는 《올랜도》가 호평을 받았다. 1941년 3월 28일 우즈 강으로 산책을 나갔다가 행방불명되었는데, 강가에 울프의 지팡이와 발자국이 있었다. 이틀뒤에 시체가 발견되었으며, 서재에는 남편과 언니에게 남기는 유서가 있었다. 자살의 원인으로는 허탈감과 환청,어린시절 의붓오빠들로부터 받은 성적 학대, 정신이상 발작에 대한 공포심 등으로 추정된다. 블룸스버리[편집] 1907~30년에 대영박물관에서 가까운 런던 블룸즈버리 구(區)에 있는 클라이브 부부(부인 이름은 버네서)의 집과 버네서의 남자형제 애이드리언, 버지니아 울프로 알려진 자매 버지니아 스티븐의 집에서 자주 모인 그룹을 뜻한다. 이들은 불가지론(不可知論)의 입장에서 미학적·철학적 문제들을 토론했으며, G. E. 무어의 (1903), A. N. 화이트헤드와 버트런드 러셀의 (1910~13) 등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또한 이 책들의 관점에서 진·선·미의 정확한 개념을 찾고자 했으며, 모든 종류의 거짓에 대해 '대상을 가리지 않는 불손한 태도'로 기존 관념에 문제를 제기했다. 거의 모든 구성원들은 레슬리 스티븐의 아들 토비와 함께 케임브리지대학교의 트리니티칼리지와 킹스 칼리지를 나왔으며 토비가 누이 버네서와 버지니아를 여기에 소개했다. 또 이들 대부분은 1820년대말 J. F. D. 모리스와 존 스털링이 진지한 문제들을 토론하기 위해 케임브리지대학 내에 구성한 소수정예의 반지하 서클 구성원이었으며, 이 서클은 '사도회'(Apostle)라고 불렸다. 즉 존 스털링, 테니슨, 아서 핼럼, 에드워드 피츠제럴드, 레슬리 스티븐 등이 모두 '사도'였다. 1900년대초에는 뒤에 블룸즈버리 그룹의 핵심을 이루게 될 사람들이 '소사이어티'의 회원으로 활동했는데 바로 문학비평가 로스 디킨슨, 철학자 헨리 시즈윅, J. M. E. 맥태거트, A. N. 화이트헤드, G. E. 무어, 그리고 그 자신도 블룸즈버리 그룹의 일원이었던 미술평론가 로저 프라이 등이었다. 블룸즈버리 그룹에는 소설가 E. M. 포스터, 전기작가 리턴 스트레이치, 미술평론가 클라이브 벨, 화가 버네서 벨과 던컨 그랜트,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 페이비언 회원인 작가 레오나드 울프, 소설가이며 비평가인 버지니아 울프 등이 참여했다. 그밖의 구성원으로는 데스먼드 매카시, 아서 웨일리, 색슨 시드니 터너, 로버트 트레블리언, 프랜시스 비렐, J. T. 셰퍼드(나중에 킹스 칼리지의 학장이 됨), 옥스퍼드대학 출신인 비평가 레이먼드 모티머와 조각가 스티븐 톰린이 있었다. 경제학자 제럴드 쇼브, 버트런드 러셀, 올더스 헉슬리, T. S. 엘리엇도 이따금 이 그룹과 어울렸다. 이 그룹은 제1차 세계대전 때에도 해체되지 않았으나, 1930년대초에 이르러서는 본래의 형태를 상실하고 런던·옥스퍼드·케임브리지 대학교 등의 전반적인 지적 활동과 결합하게 되었다. 구성원들이 특정한 사상과 가치관을 공유하기는 했지만, 일정한 학파를 형성하지는 않았다. 이 그룹의 의의는 놀랄 만큼 많은 수의 재능 있는 사람들이 여기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작품[편집] 《댈러웨이 부인 》(1925년) 《등대로》 (1927년) 《올란도》 (1928년) 《자기만의 방》 (1929년) 《파도》 (1931년) 《세월》 (1937년) ========================== 버지니아 울프의 편지 & 내 상처를 이해해준 그대에게 ..   버지니아 울프의 편지 &  내 상처를 이해해준 그대에게       흐르는 저 강물을 바라보며 당신의 이름을 목놓아 불러봅니다.  레너드 울프. 제 처녀 때의 이름 버지니아 스티븐이 당신과 결혼하면서 버지니아 울프가 된 것을 저는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제 나이 예순, 인생의 황혼기이긴 하지만 아직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할 생각입니다.  제 자살이 성공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 부부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을 거라고 입방아를 찧을 지도 모르겠어요. 아이도 없는 터에 남편의 이해 부족, 애정 결핍 등 이런저런 얘기가 나올까 솔직히 두렵습니다.  이 유서는 당신이 엉뚱한 구설수에 휩싸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쓰는 것이랍니다. 1912년 결혼한 이래 30년 동안 제가 진정으로 사랑하였고, 저를 진정으로 아껴 주었던 레너드 그 동안 차마 얘기하지 못했던 제 생애의 비밀을 이 유서에서 당신께 말하려 합니다. 저의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은 첫 번째 아내가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죽자 변호사 허버트 덕워스의 미망인 줄리아와 재혼을 합니다. 속된 말로 홀아비와 과부의 결혼이었던 거지요. 제 어머니 줄리아는 이미 네 명의 자식이 있는 상태였고, 아버지는 전처 소생의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재혼한 두 사람 사이에서 오빠 토비와 언니 바네사, 저 그리고 동생 애드리안이 줄줄이 태어났지요. 그리 넓지도 않은 집에서 아홉 명 아이와 두 어른이 아옹다옹하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어머니는 봉사정신이 무척 강한 분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병구완하러 다니느라 정작 집에 있는 아이들은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셨지요.  큰애가 작은애를 알아서 잘 돌보겠지 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하셨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 생애의 불행은 여섯 살 때부터 시작됩니다.  큰 의붓오빠인 제럴드 덕워스가 어머니 없는 틈을 타 저한테 못된 짓을 하는 것이었어요. 자기와는 신체 구조가 다른 저를 세밀히 관찰하고 만지고. 그 시절부터 저는 몸에 대한 혐오감과 수치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성에 관련된 것이라면 무조건 배격하는 마음도 갖게 되었지요. 불행은 설상가상으로 몰아 닥쳤죠. 어머니는 이웃사람을 간병하다 그만 전염이 되어 제가 열 세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를 잘 이해해 주던 이복언니 스텔라도 2년 뒤에 죽었는데 바로 그때 아버지마저 암에 걸려 몸져눕고 말았습니다. 저와 언니 바네사가 신경질이 나날이 심해지시는 아버지의 병간호를 맡아서 하는 것이야 뭐 그래도 힘든 일이라 생각하지 않고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춘기를 막 넘긴 작은 의붓오빠 조지 덕워스가 저한테  갖은 못된 짓을 하는 것이었어요. 그렇지 않아도 의지할 데 없어 심리적으로  불안했던 저는 무방비 상태에서 그런 일을 수시로 당하고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집에 책이 없었더라면 전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버지의 전처처럼 죽지 않았을까요? 아버지는 총 65권에 달하는 대영전기사전의 책임 집필자여서 집에 책이 엄청나게 많았고, 저는 현실의 불행에서 도피하기 위해 책에 파묻혀 지냈습니다. 저는 당신과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너무나 무서워했고, 사춘기 시절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당신이 청혼했을 때 저는 두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은 부부생활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작가의 길을 가려는 나를 위해  공무원 생활을 포기해 달라는 것. 세상에 이런 요구를 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성적 욕망을 버리고 사회적 지위를 팽개치고 오겠다는 사람은  레너드, 당신 이외엔 없을 거예요.  고통스런 과거를 끊임없이 반추하며 제가 작품을 쓰는 동안  당신은 출판사를 차려 묵묵히 제 후원자 노릇을 해 주셨지요.  저는 지난 30년 동안 남성중심의 이 사회와 부단히 싸웠습니다.  오로지 글로써. 유럽이 세계 대전의 회오리바람 속으로 빨려들 때  모든 남성이 전쟁을 옹호하였고, 당신마저도 참전론자가 되었죠.  저는 생명을 잉태해 본 적은 없지만 모성적 부드러움으로 이 전쟁에 반대했습니다.  지금 온 세계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제 작가로서의 역할은 여기서 중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한 채  저는 지금 저 강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편지 (유서)   버지니아 울프가 서섹스 시골집에서 아침산책을 나갔다가 근처의 오즈강에서 주머니 속에 돌을 채워넣고 물에 빠진 시체로 발견됐던 1941년 3월,그는 교정으로만 여러 해를 끌어오던 마지막 소설 을 탈고한 뒤였다. 을 고치고 또 고치면서 극단적인 만족과 절망 사이를 오가던 그는 한 기록에서 “다시 환청이 들려 일에 집중할 수가 없다"고 적었다.그는 남편 앞으로 “더 이상 당신의 삶을 망쳐놓을 수는 없다”는 유서를 남겼다.     내 상처를 이해해준 그대에게       흐르는 저 강물을 바라보며 당신의 이름을 목놓아 불러봅니다.  레너드 울프. 제 처녀 때의 이름 버지니아 스티븐이 당신과 결혼하면서  버지니아 울프가 된 것을 저는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제 나이 예순, 인생의 황혼기이긴 하지만 아직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할 생각입니다.  제 자살이 성공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 부부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을 거라고 입방아를 찧을 지도 모르겠어요. 아이도 없는 터에 남편의 이해 부족, 애정 결핍 등 이런저런 얘기가 나올까 솔직히 두렵습니다.  이 유서는 당신이 엉뚱한 구설수에 휩싸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쓰는 것이랍니다. 1912년 결혼한 이래 30년 동안 제가 진정으로 사랑하였고, 저를 진정으로 아껴 주었던 레너드 그 동안 차마 얘기하지 못했던 제 생애의 비밀을 이 유서에서 당신께 말하려 합니다. 저의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은 첫 번째 아내가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죽자 변호사 허버트 덕워스의 미망인 줄리아와 재혼을 합니다. 속된 말로 홀아비와 과부의 결혼이었던 거지요. 제 어머니 줄리아는 이미 네 명의 자식이 있는 상태였고, 아버지는 전처 소생의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재혼한 두 사람 사이에서 오빠 토비와 언니 바네사, 저 그리고 동생 애드리안이 줄줄이 태어났지요. 그리 넓지도 않은 집에서 아홉 명 아이와 두 어른이 아옹다옹하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어머니는 봉사정신이 무척 강한 분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병구완하러 다니느라 정작 집에 있는 아이들은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셨지요.  큰애가 작은애를 알아서 잘 돌보겠지 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하셨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 생애의 불행은 여섯 살 때부터 시작됩니다.  큰 의붓오빠인 제럴드 덕워스가 어머니 없는 틈을 타 저한테 못된 짓을 하는 것이었어요. 자기와는 신체 구조가 다른 저를 세밀히 관찰하고 만지고.  그 시절부터 저는 몸에 대한 혐오감과 수치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성에 관련된 것이라면 무조건 배격하는 마음도 갖게 되었지요. 불행은 설상가상으로 몰아 닥쳤죠. 어머니는 이웃사람을 간병하다 그만  전염이 되어 제가 열 세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를 잘 이해해 주던 이복언니 스텔라도 2년 뒤에 죽었는데 바로 그때 아버지마저 암에 걸려 몸져눕고 말았습니다. 저와 언니 바네사가 신경질이 나날이 심해지시는 아버지의 병간호를 맡아서 하는 것이야 뭐 그래도 힘든 일이라 생각하지 않고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춘기를 막 넘긴 작은 의붓오빠 조지 덕워스가 저한테  갖은 못된 짓을 하는 것이었어요. 그렇지 않아도 의지할 데 없어 심리적으로  불안했던 저는 무방비 상태에서 그런 일을 수시로 당하고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집에 책이 없었더라면 전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버지의 전처처럼 죽지 않았을까요? 아버지는 총 65권에 달하는 대영전기사전의 책임 집필자여서 집에 책이 엄청나게 많았고, 저는 현실의 불행에서 도피하기 위해 책에 파묻혀 지냈습니다. 저는 당신과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너무나 무서워했고, 사춘기 시절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당신이 청혼했을 때 저는 두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은 부부생활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작가의 길을 가려는 나를 위해  공무원 생활을 포기해 달라는 것. 세상에 이런 요구를 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성적 욕망을 버리고 사회적 지위를 팽개치고 오겠다는 사람은  레너드, 당신 이외엔 없을 거예요.  고통스런 과거를 끊임없이 반추하며 제가 작품을 쓰는 동안  당신은 출판사를 차려 묵묵히 제 후원자 노릇을 해 주셨지요.  저는 지난 30년 동안 남성중심의 이 사회와 부단히 싸웠습니다.  오로지 글로써. 유럽이 세계 대전의 회오리바람 속으로 빨려들 때  모든 남성이 전쟁을 옹호하였고, 당신마저도 참전론자가 되었죠.  저는 생명을 잉태해 본 적은 없지만 모성적 부드러움으로 이 전쟁에 반대했습니다.  지금 온 세계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제 작가로서의 역할은 여기서 중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한 채  저는 지금 저 강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 버지니아 울프 -     =================     영국 런던 타비스톡 공원 내의 버지니아 울프 동상, 누군가가 이른 아침 꽃 한 다발을 올려 놓았다. 누굴까?...     ====================     [시] 목마와 숙녀 : 박인환 시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生涯)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少女)는 정원(庭園)의 초목(草木) 옆에서 자라고 문학(文學)이 죽고 인생(人生)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孤立)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作別)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未來)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木馬) 소리를 기억(記憶)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意識)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靑春)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雜誌)의 표지(表紙)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수학자 리프먼 버스는 말했다. “수학은 시와 비슷하다. 위대한 시는 수많은 생각을 짧은 말 안에 담는 것일진대, 그런 면에서 ‘오일러의 등식’ 같은 수식은 무척 시(詩)적이다.” 물리학은 수학을 언어로 하여 자연을 기술한다. 사회과학에서는 경제학이 그러한 학문일 것이다. 마치 어학과 문학의 관계와도 같다.  시인과 경제학자는 그래서 같은 모임의 일원일 수 있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하는 ‘목마와 숙녀’의 그 버지니아 울프와, 2008년 경제위기 이후에 제자리를 찾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그 사람들이다. 20세기 초 영국 런던에는 블룸스버리 그룹(Bloomsbury Group)이라는 젊은 지성집단이 있었고, 울프와 케인스는 여기서 오랜 시간 교유했다. 두 사람은 거기에서 오갔던 모더니즘과 개인주의에 대한 논의들을 통해 지적 영향을 주고받았다.  케인스는 본래 수학을 공부했고 무척 뛰어났다. 경제학자 알프레드 마셜의 권고로 경제학을 천착하게 된다. 하지만 그 선택에 있어서, 버스가 말했던 수학의 본령을 체득한 그가 시와 같은 문학적 성향이 짙은 블룸즈버리 그룹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케임브리지 시절 문학클럽 의장을 맡은 점, 문화로 다른 나라를 지배하려고 주장한 것, 상류층으로서 공무원의 능력을 믿은 점, 그리고 예술 투자를 통해 수요를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등이 이를 나타낸다.     울프, 케인스   주머니를 돌로 가득 채우고 스스로 강으로 걸어간 울프의 죽음은 박인환의 시에서처럼 “목마를 타고 떠난” 우울함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숙모의 유산 덕에 울프의 경제적 조건은 그리 불우하지 않았다. 울프는 을 쓰는 실험을 했고, “여성이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과 500파운드의 고정수입이 있어야 한다. 경제력은 참정권보다도 중요하다”고 적었다. 당시에 유럽을 풍미했던 개인주의의 관점이 개개 여성을 대상으로 하여 구체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거시적인 흐름의 영향을 받지만 개인들의 행동을 바라보고 수요를 고민하던 케인스 경제학의 핵심도 울프의 생각과 비슷한 뿌리를 가지고 있다. “주어진 사실이 바뀌면 나는 나의 입장을 바꿀테요. 그렇다면 경은 어쩌시겠소?”라는 그의 말을 보라.  이들 사이에 직접적인 사랑의 감정은 없었다. 하지만 그룹 일원들 사이의 삼각 혹은 사각관계에 연루되기도 했었다. 실제로 울프에게 청혼했던 전기 작가 리턴 스트레이치는 케인스와 연애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스트레이치는 동성애자로 알려져 있다!).     둘의 사귐이 케인스를 고약하게 만든 적도 있다. 그의 치부(致富) 솜씨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케인스는 영국 대표로 독일 침공 전의 파리를 찾았다. 프랑스는 자국의 명화들을 동맹국에 나누어 보관할 요량이었다. 그는 자신의 지위를 남발하여 개인적으로 사재기를 했다. 많은 수의 인상파 작품들이 그 목록에 있었단다. 그의 치부(恥部)를 이토록 생생하게 전한 것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바로 울프의 일기였다.   블룸즈버리 그룹은 이미 있는 생각들을 ‘깨뜨리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둘의 명성이 확고해진 것은, 역설적이게도 앞선대로만 경제를 바라보아 맞게 된 대공황과 기존 질서를 답습하는 편견이었다. 여성에게 대학입학조차 허용되지 않던 시절 그 편견을 ‘부수려’ 한 울프. 공급은 스스로 수요를 만든다는 주장을 ‘뒤집어’ 만든 물건이 안 팔리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한 케인스. 대상을 기술하는 언어들이 가진 유사성뿐 아니라, 그 근간인 사상도 나누었을 터다. 시가 갖는 또 다른 본령인 파격은 두 문인과 경제학자 사이에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1958    러시아 상징주의 시인 - 기피우스 댓글:  조회:3533  추천:0  2016-12-16
기피우스 안톤 클라이니, Anton KrainyZinaida Nikolayevna Gippius     출생일 러시아 벨료프, 1869. 11. 20(구력 11. 8) 사망일 1945. 9. 9, 프랑스 파리 국적 러시아 요약 러시아의 상징주의 시인. Hippius라고도 씀.   형이상학적 경향의 작품들을 썼다. 1900년대초 상징주의 문학을 이끈 시인이자 소설가인 드미트리 메레슈코프스키의 아내로, 러시아 문단에서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시뿐만 아니라 희곡, 장편·단편 소설, 비평 및 정치평론도 썼다. 1905년 혁명기에 남편과 더불어 열렬한 혁명가가 되어 많은 정치시를 썼다. 혁명이 실패하자 부부가 함께 파리로 이주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러시아로 돌아왔으나, 이번에는 볼셰비키에 격렬히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1919년말 소련을 떠나 폴란드에서 잠시 반혁명 세력과 손잡고 일한 뒤 파리에 정착했다. 기피우스는 꾸준한 작품활동을 했고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격렬하고 신랄한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작가 자신은 형식보다 내용을 더 중시했으나, 후기 작품들은 너무 주관적이고 일관성이 없는 까닭에 내용보다는 형식이 더 돋보였다.
1957    러시아 녀류시인 -안나 아흐마토바 댓글:  조회:7189  추천:0  2016-12-14
안나 아흐마토바 안나 아흐마토바1889년 6월 23일 ~ 1966년 3월 5일는 소련의 여류 시인이다. 아흐마토바는 필명이며, 본명은 안나 안드레예브나 고렌코이다. 러시아 제국에 속하는 오데사(현재는 우크라이나에 속함)에서 태어났다. 11세부터 시를 썼으며, 키예프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부근의 차르스코예 셀로에서 교육받았고, 차르스코예 셀로에서 니콜라이 구밀료프를 만났다. 1910년 구밀료프와 결혼했고 1912년 아들 레프를 낳았다. 남편 및 다른 시인들과 함께 모더니즘적 시문학 운동인 아크메이즘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남편과 결별하고 아크메이즘 운동은 러시아 혁명으로 소멸되었다. 《저녁(ВЕЧЕР)》(1912), 《Anno Domini MCMXXI》(1922) 등의 초기 작품으로 알려졌으나, 소련 당국으로부터 부르주아적이라는 비판을 받아 활동을 거의 중단해야 했다. 1940년에야 새 시가 몇 편 출간되었고 전쟁 중 사기를 돋우는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거나 시선집을 출간하였다. 그러나 그 후로도 스탈린주의의 영향속에 비판과 찬양이 반복되었다가 스탈린 사후에 본격적으로 활동을 재개하여 여러 시선집과 평론을 발표하여 큰 호평을 받았고, 여러 외국의 시를 번역·소개하는 일도 하였다. 그의 명성은 국제적으로도 높아져, 이탈리아와 영국에서도 국제 문학상을 수여하였다. 1966년 레닌그라드에서 76세로 사망하였다. 사망 후 더욱 높이 평가되었으며, 20세기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시인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 Анна Андреевна Ахматова (1889-1966) 1. 아흐마토바의 생애 안나 아흐마토바는 1889년 6월11일 남러시아 오데사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퇴역한 해군의 조선기사였다. 그녀는 어린 시절을 페테르부르크에서 보냈고, 1907년 키예프 고등학교를 마치고 키예프 여자대학 법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법률사와 라틴어에는 흥미를 느꼈으나 딱딱한 법룰과목에는 곧 흥미를 잃었다고 한다. 아흐마토바는 1910년 아크메이즘 시인인 구밀료프와 결혼했다. 1912년 구밀료프와의 사이에서 아들 례프를 낳았다. 그녀의 삶에서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구밀료프와 이혼후에도 두 차례나 재혼을 하지만 역시 행복하지 못했다. 게다가 첫번째 남편인 구밀료프가 볼세비키 혁명 와중에 반혁명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으로 종신형이 처해졌고, 그 여파로 아흐마토바와 그녀의 아들 례프도 감시를 받게 된다. 아들 례프는 이후 체포되어 시베리아 수용소라 끌려가기도 했다. 그녀의 시도 많은 제재를 받았다. 이 시기에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외국 작품을 번역하는 데 할애하게 되었다. 그녀는 한국의 시도 러시아어로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잇다. '당의식'이 강조되던 시기에 그녀는 '에로티시즘과 신비주의에 빠진 예술지상주의적 이단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작가동맹에서 추방되고 말았다. 그러나 1953년 스탈린이 죽고, 아흐마토바의 명예가 회복되었고, 해빙기의 물결을 타고 그녀의 시집들은 간행되었다. 시인으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아흐마토바는 1964년 이탈리아에서 시인상을, 그리고 1965년에 옥스포드 대학의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3월5일 모스크바 근교 도모제도바에서 사망하였다. 2. 아흐마토바의 시세계 그녀의 첫번째 시집 "저녁"(1912)에는 아크메이즘이 주장한 선명함, 정교함, 간결함, 치밀한 세부묘사가 잘 나타나있으며, 인생, 사랑, 슬픔, 고독감, 상실감의 모티브가 담겨있다.  그녀의 초기 서정시는 주로 사랑과 이로인한 슬픔의 테마를 뛰어난 시적 기교로 그리고 있다. 아크메이즘의 대표적인 시인으로서 그녀는 정확한 감정묘사를 통해 구체적인 대상과 그 내면을 깊이 있게 전달하며, 사랑을 주제로 한 서정시들을 극도로 절제된 감정, 정교한 장치, 다듬어진 이미지로 묘사하며 그 "아름다움"을 전하고 있다. 건대출판부 "러시아 문학감상" p195 발췌정리     마지막 만남의 노래                        안나 안드레예브나 아흐마토바 ​ 가슴은 어쩔 수 없이 차가웠지만 나의 발길은 가벼웠다. 나는 오른손에 왼손 장갑을 끼어 보았다. 여러개 있는 듯 싶은 계단 알고보니 세개 뿐이다. 단풍나무 사이로 가을 소리가 나를 부른다. : "함께 죽어요! 나는 슬프고 변덕장이인 사악한 운명에 속았어요..." 나는 대답했다. : "사랑하는 사람아! 나도 그래요. 같이 죽어요..." 이것이 마지막 만남의 노래다. 나는 어둠에 잠긴 집을 바라보았다. 침실에서만 촛불이 노란 불꽃을 내며 무심히 타고 있었다.     1911.9.29           @ Анна Андреевна Ахматова (1889-1966) 러시아의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는 1889년 6월11일 남러시아 오데사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퇴역한 해군의 조선기사였다. 그녀는 어린 시절을 페테르부르크에서 보냈고, 1907년 키예프 고등학교를 마치고 키예프 여자대학 법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법률사와 라틴어에는 흥미를 느꼈으나 딱딱한 법률과목에는 곧 흥미를 잃었다고 한다. 아흐마토바는 1910년 아크메이즘 시인인 구밀료프와 결혼했다. 1912년 구밀료프와의 사이에서 아들 례프를 낳았다. 그녀의 삶에서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구밀료프와 이혼후에도 두 차례나 재혼을 하지만 역시 행복하지 못했다. 게다가 첫번째 남편인 구밀료프가 볼세비키 혁명 와중에 반혁명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으로 종신형이 처해졌고, 그 여파로 아흐마토바와 그녀의 아들 례프도 감시를 받게 된다. 아들 례프는 이후 체포되어 시베리아 수용소라 끌려가기도 했다. [출처] 마지막 만남의 노래 Песня последней встречи - Анна Андреевна Ахматова|작성자 미시령         마지막 만남의 노래   -안나 아흐마토바(1889-1966)       마음은 한없이 차가웠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네.   나는 오른손에   왼손 장갑을 끼고 있었네.     계단은 많은 듯 보였지만   나는 알았네, 오직 세 개뿐임을.   단풍나무들 사이에서 가을이 속삭였네,   재촉했네: "나랑 같이 죽어요!     나는 슬프고 변덕스러운,   사악한 내 운명에 속았어요."   나는 대답했네: "오, 내 사랑!   그럽시다. 같이 죽읍시다."     이것이 우리 마지막 만남의 노래.   나는 어둠에 싸인 집을 흘끗 쳐다보았네.   침실에선 촛불이 타오르고 있었네.   노란 불꽃으로, 매정하게. =============================== 이것은-불면증의 찌꺼기  이것은- 휘어진 양초의 촛농  이것은-수백 개의 하얀 종루에서  울려 퍼지는 타종 소리……  이것은 체르니코프 달빛 아래  따스한 창턱  이것은- 꿀벌- 이것은 클로버  이것은- 먼지 그리고 암흑 그리고 땡볕.    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이 시를 보면 알겠다. 살벌한 공산국가에서 자유를 노래하고 사랑을 구가한 시인 아흐마토바, 그녀의 시는 짙붉은 핏덩이다. 그녀의 삶은 사흘이나 고아 줄인 진액의 뼈이기도 하다. 이 시인의 시를 읽으면 러시아의 자작나무 숲길에서 처절하게 절규하는 한 여성이 보인다. 자유와 사랑을 불 지르는 시인이 보인다.      ========================== Вечером Звенела музыка в саду  Таким невыразимым горем.  Свежо и остро пахли морем  На блюде устрицы во льду. Он мне сказал: "Я верный друг!"  И моего коснулся платья.  Как не похожи на объятья  Прикосновенья этих рук. Так гладят кошек или птиц,  Так на наездниц смотрят стройных...  Лишь смех в глазах его спокойных  Под легким золотом ресниц. А скорбных скрипок голоса  Поют за стелющимся дымом:  "Благослови же небеса -  Ты первый раз одна с любимым". Март 1913  저녁 뜨락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 말할 수 없는 슬픈 곡조로 울린다. 얼음 접시에 놓인 생굴은 신선하고 짜릿한 바다 내음을 풍긴다. "당신의 진실한 벗은 나야!" 하며, 그는 내 옷자락을 매만진다. 이 손길 포옹과는 너무도 다르다. 고양이나 새들을 바라보듯, 날씬한 여자 조련사를 바라보듯.. 조용한 그는 눈이 부드런 금빛 눈썹 아래 웃고 있을 뿐이다. 바이올린의 구슬픈 선율이 떠도는 연기 사이로 흐른다. "처음으로 연인과 함께 있음을, 하늘에 감사하라..." 1913 (번역 : 열린책들의 "러시아 시강의" p 415) Up Песня последней встречи Так беспомощьно грудь холодела,  Но шаги мои были легки.  Я на правую руку надела  Перчатку с левой руки. Показалось, что много ступеней,  А я знала - их только три!  Между кленов шепот осенний  Попросил: "Со мною умри! Я обманут моей унылой,  Переменчивой, злой судьбой".  Я ответила: "Милый, милый!  И я тоже. Умру с тобой..." Эта песня последней встречи.  Я взглянула на темный дом.  Только в спальне горели свечи  Равнодушно-желтым огнем. 29 сентября 1911    마지막 만남의 노래 가슴은 어쩔 수 없이 차가웠지만 나의 발길은 가벼웠다. 나는 오른손에 왼손 장갑을 끼어 보았다. 여러개 있는 듯 싶은 계단 알고보니 세개 뿐이다. 단풍나무 사이로 가을 소리가 나를 부른다. : "함께 죽어요! 나는 슬프고 변덕장이인 사악한 운명에 속았어요..." 나는 대답했다. : "사랑하는 사람아! 나도 그래요. 같이 죽어요..." 이것이 마지막 만남의 노래다. 나는 어둠에 잠긴 집을 바라보았다. 침실에서만 촛불이 노란 불꽃을 내며 무심히 타고 있었다. 1911.9.29 (번역 : 열린책들의 "러시아 시강의" p 433) Up Хорони,хорони меня, ветер! Хорони,хорони меня,ветер! Родные мои не пришли, Надо мною блуждающий вечер Дыхание тихой земли. Я была,как и ты, свободной, Но я слишком хотела жить. Видишь,ветер,мой труп холодный, И некому руки сложить. Закрой эту черную рану Покровом вечерней тьмы И вели голубому туману Надо мною читать псалмы. Чтобы мне легко одинокой, Отойти к последнему сну, Прошуми высокой осокой Про весну,про мою весну. 1909  바람아  나를 묻어다오! 바람아 나를 묻어다오! 정든 이 아무도 오지 않고 떠도는 저녁과 대지의 고요한 숨결만 찾아든다. 너처럼 자유로웠던 나 너무도 살고 싶었다. 바람아, 보아라. 아무도 돌볼 이 없는 차디찬 내 육신을 저녁이 만든 어둠의 옷으로 이 검은 상처를 덮어다오. 그리고 푸른 안개가 나에게  송가를 읽어주게 해다오,  마지막 잠이 들 외로운 내 영혼을 위하여. 키다리 사초처럼 울어다오, 봄을 위하여, 나의 봄을 위하여. 1909   *** О тебе вспоминаю я редко И твоей не пленяюсь судьбой, Но с души не стирается метка Незначительной встречи с тобой. Красный дом твой нарочно миную, Красный дом твой над мутной рекой, Но я знаю, что горько волную Твой пронизанный сердцем покой. Пусть не ты над моими устами Наклонялся, моля о любви, Пусть не ты золотыми стихами Обессмертил томленья мои - Я над будущим тайно колдую, Если вечер совсем голубой, И предчувствую встречу вторую, Неизбежную встречу с тобой. 1913  *** 나는 당신을 간간히 기억하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의 운명에도 끌리지 않아요. 하지만 영혼에서 당신과의 사소한 만남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을거예요. 당신의 붉은 집을 일부러 지나가죠. 흐린 강가 위의 당신의 붉은 집을. 그러나 나는 당신의 평정이 스며드는 태양으로 상당히 동요하고 있음을 알지요. 당신이 사랑을 기원하며 내 입술 위로 숙이지 않았을지라도 당신이 나의 고뇌를 시로서 영원히 남기지 않았을지라도 나는 비밀스레 미래에 마법을 걸 것이고 만일 완전히 푸르러진 저녁의  두번째 만남을 예감한다면 당신과의 만남을 피하지 않겠어요. 1913     Лотова жена Жена же Лотова оглянула позади его и стала соляным столпом.  (Книга Бытия ) И праведник шел за посланником бога, Огромный и светлый, по черной горе. Но громко жене говорила тревога: Не поздно, ты можешь еще посмотреть На красные башни родного Содома, На площадь, где пела, на двор, где пряла, На окна пустые высокого дома, Где милому мужу детей родила. Взглянула - и, скованы смертною болью, Глаза ее больше смотреть не могли; И сделалось тело прозрачною солью, И быстрые ноги к земле приросли. Кто женщину эту оплакивать будет? Не меньшей ли мнится она из утрат? Лишь сердце мое никогда не забудет Отдавшую жизнь за единственный взгляд. 24 февраля 1924    롯의 아내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도다 (창세기) 외로운 자는 어두운 산길을 따라 거대하게 빛나는 신의 천사를 뒤따라 간다. 그러나 아내에게 불안의 소리가 들린다. "늦지 않았다. 당신은 아직 돌아볼 수 있다. 고향 소돔의 붉은 탑과 당신이 노래부르던 광장과, 뛰어놀던 뜨락과 사랑하는 남편의 아이를 낳은 곳 그 커다란 집의 텅빈 창문을" 그녀가 얼핏 돌아보자, 죽음의 고통으로 두 눈은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몸뚱이는 투명한 소금 기둥이 되고, 민첩라던 두 발이 땅에 박혔다. 누가 이 여인을 위해 슬퍼할까? 조금이나마 그녀의 상실감을 생각해 줄 이는 누구인가 내 마음만은 잊을 수 없다. 순간의 시선에 삶을 바친 그녀를  1924.2.24   Up СМЯТЕНИЕ 1 Было душно от жгучего света, А взгляды его - как лучи. Я только вздрогнула: этот Может меня приручить. Наклонился - он что-то скажет... От лица отхлынула кровь. Пусть камнем надгробным ляжет На жизни моей любовь. 2 Не любишь, не хочешь смотреть? О, как ты красив, проклятый! И я не могу взлететь, А с детства была крылатой. Мне очи застит туман, Сливаются вещи и лица, И только красный тюльпан, Тюльпан у тебя в петлице. 3 Как велит простая учтивость, Подошел ко мне, улыбнулся, Полуласково, полулениво Поцелуем руки коснулся - И загадочных, древних ликов На меня посмотрели очи... Десять лет замираний и криков, Все мои бессонные ночи Я вложила в тихое слово И сказала его - напрасно. Отошел ты, и стало снова На душе и пусто и ясно.  1913  곤혹 1 강렬한 빛으로 숨이 막혔다. 그의 눈길은 마치 광선같다. 나는 겨우 몸을 떨었다. 이것이 나를 길들일지도 모른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뭔가를 말할 것이다. 피가 얼굴로 역류했다. 사랑이 내 삶에 묘석처럼 놓이게 해다오. 2 사랑하지 않는가? 보고싶지 않은가? 오, 저주받을 당신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난 날 수가 없다. 하지만 어렸을때부터 난 날개가 있었다. 안개가 내 눈에서 빛을 가릴 것이고, 사물들과 얼굴들이 하나가 된다. 그리고 다만 붉은 튤립만이 당신의 튤립만이 단추구멍에 있다. 3 소박한 말투가 명령하는 듯이 내게 다가와 웃었다.  조금은 게으르게, 조금은 상냥하게 그는 손에 키스를 했다. 알 수 없는 오래된 얼굴들의 눈이 나를 바라보았다. 감각을 잃고 외쳐온 10년동안 계속되는 나의 잠못 이루는 밤을 나는 조용한 말 속에 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말했다. - 헛되도다. 당신은 떠났다.  그리고 또 다시 내 영혼은 텅비고 명료해졌다.  1913  바람아  나를 묻어다오!  바람아 나를 묻어다오!  정든 이 아무도 오지 않고  떠도는 저녁과  대지의 고요한 숨결만 찾아든다.  너처럼 자유로웠던 나  너무도 살고 싶었다.  바람아, 보아라.  아무도 돌볼 이 없는 차디찬 내 육신을  저녁이 만든 어둠의 옷으로  이 검은 상처를 덮어다오.  그리고 푸른 안개가 나에게  송가를 읽어주게 해다오,  마지막 잠이 들  외로운 내 영혼을 위하여.  키다리 사초처럼 울어다오,  봄을 위하여, 나의 봄을 위하여.                                        /안나 아흐마토바   열기 [시가 있는 아침]  [중앙일보] SNS 공유 및 댓글 SNS 클릭 수   무제 -안나 아흐마토바(1889~1966) 공포가, 어둠 속 뭔가를 더듬으며, 달빛 이끈다 도끼한테로 벽 뒤로 들리는 불길한 소리 - 뭐지, 쥐, 유령 아니면 도둑? (…)  윤기 있는 검은 수염 사내 다락 창 밖을 휙 지난다 - 그리고 조용. 어찌나 사악하고 능란한지, 그가 성냥 숨겼고 촛불 껐다. (…) 더 낫지 차라리 잔디 광장이리면 (…)  붉은 피 쏟다가 죽어버리는 것이 DA 300   (…) 부패의 냄새, 현기증 날 정도로 달콤한 그것 인다 서늘한 시트에서. 1921년 아직 발칙하고 강건한 러시아 여성 자유연애주의자였던 시인의 초기 소비에트 사회 체험. 체질적인 불화가 예리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1935~40년 쓰여진 스탈린 시대 ‘진혼곡’은 유례없는 격조와 깊이의 슬픔에 달하고, 그 에필로그는 이렇게 시작된다. ‘배웠다 나, 어떻게 떨어지는지 얼굴이,/어떻게 눈꺼풀 아래에서 엿보는지, 공포가,/어떻게 딱딱한 쐐기문자 페이지를/고통이 입히는지, 뺨 위에,/(…)/미소가 복종의 입술 위에서 시들고,/마른 웃음으로 몸을 떠는지, 두려움이/(…)’ <김정환·시인> [출처: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안나 아흐마토바 문학기념박물관 - 상트페테르부르크(및 인근 지역) - Tourism Media 이전 사진 버튼, 사진 없음 다음 사진 버튼, 14개 중 2개. 안나 아흐마토바 문학기념박물관 러시아 문학의 거장 중 한 명을 기리는 이 박물관에서 매혹적인 문학적 저항의 이야기를 통해 영감을 얻어 가세요. 안나 아흐마토바 문학기념박물관은 제2차 세계대전과 스탈린의 공포 정치에 대한 그녀의 작품으로 기억되는 유명한 여류 시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습니다. 아흐마토바가 밟은 것과 같은 마루를 밟아보고 그녀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스탈린 대숙청을 비판하는 고발장적 성격을 띈 그녀의 레퀴엠 시로 제일 유명한 저자가 쓴 원고를 읽어보세요. 안나 아흐마토바는 안나 안드레예브나 고렌코의 필명이었습니다. 오데사에서 태어났지만 오랫동안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거주했습니다. 아흐마토바는 1966년에 사망할 때까지 지금의 박물관에서 살았습니다. 그녀와 사실혼 관계인 니콜라이 푸닌의 소유였습니다. 미술사가 푸닌은 당국과 문제가 생겨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사망했습니다. 그의 투옥은 레퀴엠에 대한 영감의 주요 원천이 되었습니다. 한두 시간 정도 보내면서 아흐마토바의 삶과 작품에 대해 배우고 러시아 문학 풍경에 기여한 그녀의 업적을 곰곰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 보세요. 스탈린주의가 온 나라를 사로 잡았던 밤에 그녀가 영국 대사관의 서기관 이사야 벌린과 유명한 대화를 나누던 거실에 들어가 보세요. 그녀의 삶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예술 작품을 살펴보고 그녀가 일상 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던 가구들 사이를 걸어가 보세요. 전시는 전체주의 소련 상태에서 당국에 의한 검열과 제약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어떻게 생존하고 작품 활동을 이어갔는지에 대해 조명하고 있습니다. 박물관에서 아흐마토바의 아들인 역사가 레프 구밀레프와 그녀의 동료 시인이자 제자 조지프 브로드스키에 대해서도 알아보는 기회를 가져 보세요. 아파트에서 구밀레프에 대한 전시를 찾아보고 재현된 브로드스키의 매사추세츠 사무실에 전시되어 있는 시청각 자료를 활용하여 아흐마토바의 제자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세요. 아흐마토바를 만났을 당시에는 젊고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였지만 나중에 브로드스키는 노벨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안나 아흐마토바 문학기념박물관은 마야코브스카야 또는 블라디미르스카야 및 도스토예프스카야 지하철 역에서 도보로 멀지 않은 거리에 있습니다.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운영됩니다. 소정의 입장료가 있습니다.   =================== .안나 아흐마토바 박물관의 역사 1989년, 러시아 국민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그녀의 박물관이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세레메체프스키 궁전 남쪽에 세워 졌다. 세레미체프스키 궁전은 18세기 페테르부르크의 가장 아름다운 건물 중의 하나이며, 폰탄카 운하 34번지에 위치해 있다. 이 곳이 안나 아흐마토바가 살았던 유일한 곳은 아니지만, 이곳에서 그녀는 생애의 가장 중요한 기간을 보냈고, 특별히 이 역사적이고 전설적인 세레미체프스키 궁전이 그녀의 창조적 영감을 자극했음에 분명하다. 안나 아흐마토바의 남편은 당시 유명한 예술 비평가이자, 러시아 미술 협회원이었던 니콜라이 푸닌이였는데, 1920년대 중반 그들은 이곳으로 이사해 왔고, 1952년까지 이곳에 살았다. 안나 아흐마토바의 박물관에는 13,500 편 이상의 작품과 25,000 편이상의 습작들이 소장되어 있다. 또한 박물관에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애서가 M. S. Lesman이 모아놓은 서적 3,000 여권이 소장되어 있다. =============================================  안나 아흐마토바의 시는 고난과 슬픔으로 점철된 자신의 생애와 그녀가 살던 성·페테르부르그를 노래한 것이 많다. 지난 세기 러시아 시유파 ‘아크메이즘(acmeism)’의 대표적 시인이자 당대에 풍미했던 상징주의에 반하여 자신의 생활주변의 일들을 ‘아크메’에서 포착함으로써 ‘아름다운 정확성’을 추구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문학기념관을 찾아 그녀가 살다간 발자취를 찾는 것은 그 시심을 헤아리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문학관이 있는 리테이니거리의 모습은 영락없는 유럽이다 4, 5층 건물이 가지런히 이어져 있고 여기저기 있는 동네 가게들 가운데는 예외 없이 미국식 속성음식체인점이 한두 개 끼어있다.  겉에서 보면 평범한 건물이 입구에 들어서면 큰 정원을 가운데 두고 대저택이 ‘ㅁ’자로 둘러 쌓여 있다. 정원에는 아름다운 수목이 가득차 이곳이 대도시 안이라는 것을 잊게 하고 있다. 이 저택은 2백년동안 제정러시아의 한 귀족가문이 살던 곳인데 볼셰비키혁명 때 박물관과 아파트로 개조되었다. 이 저택의 좌측에 1989년 개관된 ‘안나 아흐마토바 문학관’이 들어서 있다. 이 건물 2층에서 시인은 그의 남편인 미술사가美術史家 니콜라이 푸닌과 함께 살았다. 건물에 들어서면 매표소, 비디오 쌀롱과 기념품 코너 등과 시인의 소개를 한 패널이 잘 정돈되어 있다. 전쟁 전후의 러시아 지성인들의 생활상과 아흐마토바의 생애와 문학을 소개한 패널들도 벽공간을 잘 이용해서 붙여져 있다. 2층에 들어서면 대저택 안에서 갑갑함을 느낀다. 높은 천장에 방들이 졸망졸망한 것이 어색하다. 혁명 이후 평등을 외치며 인민들이 닥쳐들어 큰 방들을 쪼개어 살았던 것이다. 〈닥터 지바고〉 영화가 실감나게 나타낸 그 으시시하고 우스꽝스런 장면이 연상된다. 그런 졸망졸망한 방 몇 개에 시인이 살던 자취가 남아 있는데 특별한 것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부엌, 침실, 거실 등이 있는데 하나같이 비좁다. 부엌에는 벽난로 페치카가 보이는데 옛 귀족들의 화려함보다는 격동기의 어려웠던 살림이 엿보인다. 당시 쓰던 등유통, 러시아의 차주전자 사모바, 식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침실과 거실의 가재도구들, 가족과 친지들의 사진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이다.   ▲ 성·페테르부르그의  안나 아흐마토바 문학관 정문 큰 저택에 여러 가구들이 들어서 살았다는데 목욕탕과 화장실은 보이지 않는다. 공용화장실이 건물 어느 구석인가에 있었다는데 사람사는 것이 참 불편했을 것이다. 시인은 이 집에서 1922년부터 30년간을 살았는데 남편 푸닌과 별거를 한 후에도 한 집에서 살았다. 스탈린 시절 사는 것이 어려워 별거한다는 것이 바로 옆방으로 ‘이사’를 한 것이었다. 이 집에서 시인은 대표작 〈진혼곡〉을 완성하고, 〈주인 없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진혼곡〉은 스탈린의 학정을 비판하는 작품이었고 〈주인 없는 시〉는 이 집을 떠나서도 10년 후에 완성한 대하 서사시이다. 이러한 시들이 스탈린정권 눈에 들 리가 없었다. 그녀는 ‘침대와 교회를 오가는 미친 여인’으로 낙인찍히고 많은 박해를 받았다. 공산주의 치하에서는 체제찬양에 가담하지 않으면 작가들이 아흐마토바처럼 박해를 받았다. 이를 견디지 못하여 많은 작가들이 서방으로 피신을 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미야스코프같은 혁명 초창기때 깃발을 올렸던 시인도 스탈린의 학정을 견디지 못해 37세 젊은 나이에 자살했다.   ▲ 안나가 말년을 지낸 문학관 그 와중에서도 아흐마토바는 이 집을 떠나 중앙아시아로 쫓겨갔다가 성·페테르부르그에 다시 돌아와 77세까지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만큼 러시아를, 성·페테르부르그를 사랑한 것이다. 시인이 떠난 지 40년의 세월이 흘러갔지만 그녀의 간결하고도 깊이 있는 시정신이 이제 이렇게 좋은 문학관에 이어지고 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이 맞는다. 시인과 예술가들을 박해하던 ‘혁명전사’들을 누가 작아 보였던 옛날의 피압박예술가들만큼 따뜻한 마음으로 기억해 줄 수 있을 것인가.  (/ 김호기 한무숙문학관 관장)           안나 아흐마토바   러시아의 위대한 여류시인 안나 아흐마토바도 호된 시련을 겪었습니다.    첫 남편과 재혼한 남편 모두 처형을 당했고, 그녀의 아들은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수용소에서 보냈습니다.    혁명 이전에 이미 유명한 시인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1925 ~ 1952년까지 정치적인 박해를 받아 푸시킨에 관한 학술논문 몇 편과 번역 작품,    2차 세계대전 중 즉흥적으로 쓴 몇 편의 애국시 외엔 아무것도 출판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스탈린 치하의 삶을 주제로 한 그녀의 대작은 1966년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러시아에서 출판되지 못했다고합니다.     러시아의 시인. 죽은 뒤에야 비로소 러시아 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여류시인으로 인정받았다.     롯의 아내                - 안나 아흐마토바 (스탠리 쿠니츠, 맥스 헤이워드 공역)     그리하여 그 죄 없는 남자는 빛을 발하는 천사의 거대한 자취를 쫓아 검은 산을 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한 음성이 끊임없이 이 여인을 괴롭혔다. “아직 너무 늦은 건 아냐. 지금 돌아보면 볼 수 있어.   네가 태어난 고향 소돔의 붉은 성채들이며, 네가 한때 노래 불렀던 광장, 물레질하던 헛간, 이제 내다보는 사람 없을 그 높다란 집의 창문들 자식을 낳아준 네 부부의 침상이 있는 그 집을.”   한 차례 힐끗 돌아본 순간, 무슨 소리도 내기 전에 날카로운 고통이 바늘처럼 여인의 두 눈을 찌른다. . . 여인의 몸뚱이는 하얗게 바스러져 투명한 소금기둥이 되고 서둘러 걷던 여인의 두 다리는 땅에 뿌리박혀 버렸다.   누가 이 여인을 슬퍼해 줄 것인가? 이 여인은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너무 하찮은 존재 같지 않는가? 하지만 내 마음은 이 여인을 결코 나무랄 수 없다. 돌아보기를 택했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한 이 여인을   [천양희의 문학의 숲] 슬픔으로 피워낸 꽃 나는 가끔 말을 거꾸로 읽는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 싶을 때 답답함을 푸는 한 방법이다. 가령 정치를 치정으로, 교육을 육교로, 작가를 가작으로, 사설을 설사로, 시집을 집시로, 가출을 출가로, 입산금지를 지금 산에 들어감으로, 자살을 살자로 읽어보는 것이다. 읽고 나면 무엇이든 본자리에 있을 때가 가장 좋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런데 요즈음은 그 방법이 아름다운 봄꽃들 때문에 다른 생각으로 바뀌었다. 꽃들은 아무리 무리지어 피어나도 저마다 홀로 아름다운데 나는 사람들 속에서 얼마나 홀로 아름다웠나 하는 반성 때문이다. 내가 회복해야 할 것은 거꾸로 읽는 말이 아니라 내가 잃어버린 아름다움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름다움이라고 처음부터 그냥 아름다움이었을까. 아닐 것이다. 아름다움도 그 나름대로 숱한 상처를 지나왔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름다움이란 상처가 피워낸 꽃이라 말하고 싶다. 상처를 알고 슬픔을 삭인 사람만이 아름다움을 꽃피울 수 있을 것이다. 상처 때문에 많이 아프거나, 슬픔 때문에 끝도 없이 무너질 때 러시아의 여성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의 ‘내 목소리는’을 읽으면서 지금 내 목소리는 어떨까 생각해봐도 좋을 것 같다. ‘내 목소리는 가냘프지만/ 의지는 약하지 않네/ 사랑이 없으니 내 마음 오히려 가벼워졌네/ 하늘은 드높고/ 산바람 불어오니/ 티 하나 없는 나의 생각들/ 불면증을 돌보던 간병인도 다른이에게 가버렸고/ 나 이제 회색빛 재를 갈망하지 않으니/ 시계탑 문자판의 휘어진 바늘이/ 죽음의 화살로 보이지도 않네/ 과거는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네/ 자유는 눈 앞에 와 있으니/ 나는 모든 것 허락하네/ 햇살이 촉촉한 봄의 담쟁이 덩굴을 따라/ 뛰어내리는 것을 지켜 보면서.’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슬픔’이란 그녀는 역사의 격랑과 개인의 상처로 파란만장하게 살았지만 누구보다 강하게 살다간 시인이다. ▲ 천양희 시인 [천양희의 문학의 숲] 슬픔으로 피워낸 꽃 그는 여섯 살 때부터 시를 쓴 신동이었고 23세 때 첫 시집 ‘저녁’을 냈으며 다섯 살 때부터 톨스토이의 철자교과서에 따라 글 읽는 법을 배웠고 프랑스 말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20세기 초 20년 동안 러시아의 가장 인기 있었던 시인이기도 한 그에게도 16세 때 부모의 이혼으로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좋은 시를 만나면 ‘나는 감동에 젖어 모든 슬픔을 잊고 그것을 읽었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이 한마디로도 그가 얼마나 시를 사랑했고 운명처럼 생각했는지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 슬픔이라며 슬픔을 시로 꽃피운 그를 생각해 보는 아침. 비로소 나도 슬픔만한 거름이 없다고 말해본다. (천양희·시인)       [출처] ‘시에 대하여’-안나 안드레예브   Anna Akhmatova   본명은 Anna Andreyevna Gorenko. 1889. 6. 23(구력 6. 11) 러시아 우크라이나 오데사 근처 볼쇼이폰탄~1966. 3. 5 모스크바 근처 도모데도보. 러시아의 시인. 죽은 뒤에야 비로소 러시아 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여류시인으로 인정받았다.나 아흐마토바(1889~1966) |작성자 반딧불이    
1956    풍자적, 반어적으로 쓴 허무주의 현실 고발서...페루 시인-벨리 댓글:  조회:3554  추천:0  2016-12-14
  출생일 1927. 9. 15, (페루) 리마 국적 페루 요약 페루의 시인.   작품에서 나타나는 허무주의적인 시각과 정확하게 정돈된 깔끔한 언어 구사로 유명하다. 번역가·언론인으로 일하기도 했다. 남아메리카를 두루 여행했고, 스페인·이탈리아·미국 등지에서 여러 차례 거주했다. 리마에 있는 산마르코스대학과 미국에서 문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시집 Poemas〉(1958)·〈안과 밖 Dentro y fuera〉(1960)은 초현실주의적인 어조를 띠면서도 스페인 황금시대의 정돈된 정확성을 상기시키는 문장구조와 어법을 지니고 있다. 직접적인 현재시제로 표현된 이러한 언어를 통해 그는 근본적으로 비인간적인 세계를 이해하려고 애쓴다. 〈오, 인공두뇌 요정! Oh hada cibernética!〉(1961)은 풍자적·반어적으로 쓴 현실 고발서이다. 이 작품은 이질적·강압적인 힘이 개인을 조각내 결국은 완전히 붕괴시키고 만다는 내용으로, '인공두뇌 요정'의 메마르고 비인간적인 기술적 언어가 인류를 탈출구없는 꽉 막힌 세계에 가두어버린다. 〈목 위의 발 El pie sobre el cuello〉(1967)·〈6행 외 Sextinas y otros poemas〉(1970)에서도 세상에 대한 허무주의적 시각이 계속 나타나고 있다. 어떤 비평가들은 벨리가 삶의 부정적인 면을 고집하는 것은 친교·우애·질서에 대한 자신의 갈망을 숨기려는 것이라 평하기도 한다.
1955    로마 방언 作 "소네트" 2천편 소각하라...이탈리아시인-벨리 댓글:  조회:3769  추천:0  2016-12-14
  출생일 1791. 9. 10, 로마 사망일 1863. 12. 21, 로마 국적 이탈리아 요약 이탈리아의 시인.   풍자적인 소네트를 써서 19세기초 교황령 로마 사람들의 삶을 생생히 표현했다. 불행한 어린시절을 보내고 사무원으로 일하다가 1816년 돈 많은 미망인과 결혼해 별 어려움 없이 시를 쓸 수 있게 되었다. 교황 밑에서 일하는 공무원으로서 지니고 있던 보수적인 정치관은 1848년에 일어난 혁명으로 이듬해 로마 공화국이 수립되자 급격한 동요를 겪어 결국 풍자시 쓰기를 중단했으며 숨을 거두는 순간 자신의 소네트를 불태워버리라고 요청했다. 그는 평생 도덕적·종교적인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했다. 로마 방언으로 쓴 2,000편이 넘는 소네트는 체제 순응적인 삶의 방식과는 대조를 이룬다. 주로 1830~39년에 씌어진 이 작품들은 억압된 감정의 배출구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어로 전통시를 쓰기도 했으나 문학 전통, 격식을 중시하는 사고방식, 교황 지배체제하의 사회 불의 등에 대한 반항의식을 표현한 소네트에서 그의 독창성을 찾아볼 수 있다. 교회 의식주의와, 일상적인 도덕의 기정사실화한 원칙에 대해서도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가장 감각적인 색채로 글을 쓸 때에도 전혀 음탕하지 않았듯이 겉보기에 아무리 불경한 소네트라도 사실상 이 작품들 속에서 그는 전혀 불경스럽지 않았다. 차라리 작품을 통해 그가 반역의 기분을 나타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벨리는 대소설가 같은 넓은 시야를 가지고 로마인들을 관찰하고 묘사하는 데 가장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G. 비골로가 서문을 붙인 소네트집이 1952년에 전3권으로 출판되었다.  
1954    한국 시인 피천득과 그의 딸 댓글:  조회:3428  추천:1  2016-12-14
서정적이고 섬세한 문체로 사랑받은 5월의 琴兒 (서울=연합뉴스) 김정선 기자 =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인연' 중) 지난 2007년 5월 25일 타계한 금아(琴兒) 피천득은 일상의 평범한 소재를 서정적이고 섬세하면서도 간결한 문체로 풀어낸 한국 수필문학계의 대표 작가이며 시인이다. 대표작 '인연'은 자신이 열일곱 되던 해부터 세 차례 접한 일본 여성 아사코와의 만남과 이별을 소재로 한 것으로, 학창시절 교과서에 실린 이 작품을 읽고 자란 세대들에게는 설렘과 안타까움이 교차하는 첫 사랑의 대명사가 됐다. 2002년에는 수필의 실제 주인공인 아사코를 소개하는 내용이 국내에서 방송됐을 정도였다. 수필가, 시인, 영문학자의 삶을 산 그는 1910년 5월29일 서울에서 태어나 중국 상하이(上海) 공보국 중학을 나와 호강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광복 직후에는 경성대 예과 교수를 거쳐 1974년까지 서울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했고 1954년에는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하버드대에서 1년 간 영문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수필가로 유명한 그의 문학 입문은 시가 먼저였다. 1930년 신동아에 시 '서정소곡'(抒情小曲)으로 등단한 뒤 잡지 '동광'에 시 '소곡'(小曲)(1932), 수필 '눈보라 치는 밤의 추억'(1933) 등을 발표했다. 1947년 첫 시집 '서정시집'(1947)을 출간한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국민 수필가'로 불릴 정도로 수필을 통해 문학적 진수를 드러냈다. "수필은 청자(靑瓷) 연적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 맵시 날렵한 여인"이라며 은유법을 구가한 수필 형식으로 쓴 수필론 '수필'은 '인연'과 함께 대표작으로 꼽힌다. 19세기 소설가 너대니얼 호손의 단편 '큰바위 얼굴'을 번역한 글을 포함 4편의 글로 1999년 2학기 국정 교과서 '국어' 과목 수록작 저작권자 가운데 저작권료 수입 랭킹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춘원 이광수가 거문고를 타고 노는, 때 묻지 않은 아이의 마음을 닮았다고 붙여준 호 금아(琴兒)처럼 그는 딸 서영씨가 어릴 때 갖고 놀던 인형을 목욕시키고 머리를 묶어주는 등 인형놀이를 하는가하면 흠모하는 작가인 바이런, 예이츠의 사진과, 자신이 '마지막 애인'이라 불렀던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먼의 사진을 가까이 두는 소년의 모습을 간직했다. 어린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발표작 가운데 어린이가 읽기 적당한 시와 수필 등을 엮어 '어린 벗에게'(2002년)를 냈다. 지난해에는 대표작 '인연' 등 16편의 수필작품이 수록된 '피천득 수필집'이 처음으로 일본에서 출간돼 화제가 됐다. 그의 딸에 대한 사랑은 유별났다. 수필작품을 통해 여러번 딸의 이름을 부르며 부정(父情)을 나타냈다. "서영이는 내 책상 위에 '아빠 몸조심'이라고 먹글씨로 예쁘게 써 붙였다. 하루는 밖에 나갔다 들어오니 '아빠 몸조심'이 '아빠 마음조심'으로 바뀌었다. 어떤 여인이 나를 사랑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랬다는 것이다. (중략) 아무려나 서영이는 나의 방파제이다. 아무리 거센 파도가 밀려온다 하더라도 능히 막아낼 수 있으며, 나의 마음 속에 안정과 평화를 지킬 수 있다."('서영이' 중) 미국에서 촉망받는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재키는 그가 그토록 사랑한 딸 서영씨와 남편 로먼 재키(MIT 물리학 교수)씨 사이에서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이다. 외손자에 대한 그의 사랑도 매우 각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1973년 10월부터 글을 싣기 시작한 월간 교양지 '샘터'와 인연을 이어갔으며 2002년 8월에는 월드컵의 감동을 쓴 시 '붉은 악마'와 'Be the Reds!'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환호하는 사진이 '샘터'에 실리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서초구 반포본동 자택에 있는 본인의 서재를 그대로 샘터 사옥으로 옮겨 달라고 샘터 측에 부탁했다. 서재라고 해서 거창한 것이 아니라 평소 보던 책, 안경, 메모 노트, 좋아하는 작가와 배우 사진 등으로 채워진 단촐한 공간이다. '피천득의 방'은 향후 파주출판단지에 세워질 샘터 새 사옥 설계도에 이미 자리 잡고 있다. 샘터 측은 "작은 아파트에서 책과 음악과 조용하게 살다 간 선생은 다작(多作)을 경계했다"며 "문단에 나온 뒤 그가 쓴 책 가운데 대표작을 꼽으라면 대표 수필을 엮은 수필집 '인연'과 시집 '생명', 번역서 '내가 사랑하는 시'와 '셰익스피어 소네트 시집' 등을 꼽을 수 있을 정도"라고 설명했다. 그의 문학관은 자신의 글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인생의 "아름다움" "인간 본연의 의지와 온정"의 문학이었다. 국내 원로ㆍ중진 문인이 문학에 입문한 과정을 들려준 책 '내 문학의 뿌리'(2005)에서 그는 "문학의 내용이 주로 아름다움으로 채워지기를 바란다"며 "슬픔이나 고통도 얼마든지 문학의 내용이 될 수 있지만 비운에 좌절되지 않는 인간 본연의 의지와 온정이 반드시 그 밑바탕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삶은 작가의 문체처럼 소탈하고 검소했다. 술과 담배는 평생 하지 않았고 산책과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으며 화려한 장식품 하나 없는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다. 소박한 인생관을 가진 그는 지인들에게 자신의 사후에 대해 작은 바람을 말한 적이 있다. "죽어서 천당에 가더라도 별 할 말이 없을 것 같아. 억울한 것도 없고 딱히 남의 가슴 아프게 한 일도 없고……. 신기한 것 아름다운 것을 볼 때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참 고맙고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훗날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이 사람, 사랑을 하고 갔구나' 하고 한숨지어 주기를 바라는 게 욕심이라면 욕심이죠. 그것도 참 염치없는 짓이지만…." 생일을 며칠 앞두고 떠난(2007년) 그의 마지막 길은 가족과 평소 친하게 지낸 문학계 지인들이 함께 했다.
1953    중국 죽림칠현 대표 시인 - 阮籍 댓글:  조회:3238  추천:0  2016-12-13
영회시 - 완적 [ 詠懷詩 ]   저자 완적(阮籍, 210-263) 국가 중국 분야 시 해설자 심우영(상명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 <영회시> 82수는 죽림칠현을 대표하는 완적(阮籍, 210∼263)의 작품이며, 중국의 고전 시가 중에서도 최고의 수작으로 꼽힌다. 선진 시대에 ≪시경≫이 탄생해 중국의 정통 시가 문학을 출발시켰다고 한다면, <영회시> 82수는 이보다 약 8세기가 지난 위진 교체기에 5언 신시체로 나와 최고의 서정시로 자리매김했다. 물론 한대 악부시와 <고시 십구수> 그리고 조식(曹植)을 비롯한 건안 시가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 완적이 <영회시> 82수를 지은 것은 그의 나이 45∼46세 즈음부터 53세로 사망하기 전까지였다. 대략 255년부터 263년 사이에 지은 작품들이다. 그는 후한 말 전쟁과 권력 다툼으로 인해 극심한 혼란을 겪을 무렵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완우(阮瑀)는 조씨(曹氏) 부자와 건안 문학을 선도한 건안칠자(建安七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220년에 위나라가 건국된 후 2년이 채 못 되어 완우가 사망했지만, 완적은 당시 명문대족이었던 완씨 가문의 일원으로 위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249년 사마의(司馬懿)가 일으킨 가평(嘉平) 정변으로 인해 조상(曹爽)을 정점으로 하는 왕실 세력은 힘을 잃고 사마씨로의 권력 이동이 급물살을 탔다. 정권 회복을 위한 조씨 집단의 투쟁이 수년간 지속됐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사마씨에게 권력이 집중되자 당시 명사로 이름을 떨치던 완적은 어쩔 수 없이 여러 관직을 거치지만, 정권 찬탈과 명교를 빙자한 그들의 전횡에 불만이 누적되어 극심한 심리적 공황 상태를 맞았다. 이리하여 도피적 처세관으로 청담 현학을 일삼는 죽림칠현의 일원이 됐고, 반예교적 행위도 서슴없이 자행하면서 신선 세계를 동경했다. 이 시기가 대략 254년 그의 나이 44세 때였다. 완적의 <영회시>는 모두 95수인데, 이 중 5언시가 82수이고, 4언시가 13수다. 여기서는 완적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5언시 82수를 대상으로 했다. <영회시>의 ‘영회’는 ‘마음에 품은 바를 노래한다’는 의미다. <영회시>는 일정한 시기에 의도적으로 지은 것이 아니며 평소 감정이 복받칠 때마다 지은 작품이다. 내용을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고통스러운 삶과 고독한 정회를 묘사했다. 둘째, 권력 찬탈과 변절자에 대해 풍자했다. 셋째, 노년기 인생 역정과 불안한 여생을 서술했다. 넷째, 은둔 생활과 신선 세계를 추구했다. <영회시> 82수의 최대 특징은 비흥(比興), 상징, 용전(用典) 등의 수법이 자주 사용되어 시인의 의도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곧 시의 난해성을 얘기하는 것인데, 그 이유는 대강 다음과 같다. 첫째, 작품 자체의 시작 수법에서 기인했다. 둘째, 복잡 미묘한 시인의 심리적 갈등이 상식을 뛰어넘었다. 셋째, 창작 배경이나 정황이 기타 문헌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넷째, 판본에 따라 다른 글자가 많아 정확한 해석이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종영(鍾嶸)이나 이선(李善) 등 역대 수많은 비평가들이 <영회시> 82수를 지극히 난해한 시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이런 난해성에도 불구하고 청일현원(淸逸玄遠)의 미를 구사했다는 점과 그의 철리(哲理)와 정사(情思) 그리고 의상(意想)이 적절하고 풍부하게 두루 포함됐다는 점은 또 다른 예술적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회시> 82수는 일찍부터 비평가들의 이목을 끌었는데, 종영의 ≪시품≫에는 상품(上品)에 올라 있고, 소명태자의 ≪문선≫에는 17수가 선록되었으며, 명 왕세정(王世貞)과 청 왕부지(王夫之), 방동수(方東樹) 등도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쳐 유사한 작품들이 많이 나왔는데, 좌사(左思)의 <영사(詠史)> 8수, 도연명(陶淵明)의 <음주(飮酒)> 22수, 유신(庾信)의 <의영회(擬詠懷)> 27수, 진자앙(陳子昻)의 <감우(感遇)> 38수, 이백(李白)의 <고풍(古風)> 82수 등의 연작시가 이에 해당한다.    
1952    러시아 최고 현대 음유시인 - 부라트 오쿠자바 댓글:  조회:3887  추천:0  2016-12-13
오쿠자바의 노래시 [ Булат Ш. Окуджава Избранные песни ]   저자 불라트 오쿠자바(Булат Ш. Окуджава, 1924-1997) 국가 러시아 분야 시 해설자 조주관(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교수) 모스크바의 터주 노래꾼 오쿠자바 불라트 오쿠자바는 누구인가? 그는 기타를 연주하면서 자작시를 낭송했던 현대 러시아 최고의 음유시인으로, 노래시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러시아 문학과 음악 분야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자작시로 노래하는 그의 독특한 창법은 절묘하다. 기타 연주와 노래는 직업 가수의 그것과는 달리 새로운 맛과 멋을 자아낸다. 이 음유시인이 읊조리는 어눌한 가락의 노래는 마치 시혼과의 대화를 듣는 것 같다. 영적인 교류 의식과도 같은 그의 노래시에는 청중을 사로잡는 마력이 있다. 청중은 시인이 읊조리는 언어의 흐름에 따라 긴장하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한다. 경이로운 음조와 풍부한 감정이 담긴 그의 노래시는 새롭게 창조된 예술 장르라 할 수 있다. 흔히들 불라트 오쿠자바의 노래시에는 일관되고 통일된 테마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아마도 특정한 이념이나 영웅주의를 싫어했던 시인이었기에 소비에트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자연스럽게 붙은 수사일 뿐이다. 그는 어느 누구의 신념이나 독선에 부화뇌동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다. 일생 동안 그의 관심을 끌었던 테마는 모스크바 거리, 전쟁 그리고 사랑이다. 이 세 가지가 그의 작품 속에 일관되게 나타난다. 첫째, 오쿠자바는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대한 남다른 사랑을 보여 준다. 그의 많은 시들은 모스크바의 거리에 대한 노래다. 러시아인들에게 모스크바는 슬라브 민족의 전통이 살아 있는, 어머니 같은 도시다. 모스크바 거리에 대한 노래시 가운데 성공적인 작품으로는 <어린 시절>, <아르바트 거리의 노래>, <야간 전차>, <모스크바의 개미>, <아르바트 거리의 아이들>, <3월의 눈>, <모스크바의 밤 노래>, <지하철에 대한 노래>, <아르바트 거리의 로맨스> 등이 있다. 이러한 노래시 가운데 대표적인 <아르바트 거리의 노래>는 시인이 성장한 거리를 찬미하는 시다. 너의 낯선 이름과 너의 아스팔트는 강물처럼 흐르고 강물처럼 투명하다. 아, 아르바트 거리, 나의 아르바트 거리여, 너는 나의 부름이요, 너는 나의 기쁨이요, 나의 불행이다. 네 위를 걸어가는 사람은 보통 사람들 그들의 구두 굽이 매일 너를 두드린다. 아, 아르바트 거리, 나의 아르바트 거리여, 너는 나의 종교요, 너의 길은 내 발아래 누워 있다. 4만 개의 다른 포장도로를 사랑할지라도 너의 사랑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구나. 아, 아르바트 거리, 나의 아르바트 거리여, 너는 나의 조국, 끝까지 너를 지키리라. 이 3연의 시 속에는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거리에 대한 시인의 사랑이 잘 드러나고 있다. 아르바트 거리의 정경과 그곳에서 펼쳐지는 삶의 단편들이 선연하다. 아르바트 거리는 서울 인사동 거리와 대학로를 합쳐 놓은 듯한 분위기를 지닌 장소다. 과거에는 젊음과 낭만이 넘치는 예술가의 거리였으며, 오늘날에는 전통문화와 현대문화가 공존하는 곳이다. 아랍어에서 유래된 아르바트라는 이름이 낯설지만, 이 거리에는 모스크바의 역사와 전통이 담겨 있다. 모스크바 토박이들에게는 추억의 거리인 셈이다. 그러므로 근처에 큰 도로가 생겨나 도시의 옛 모습을 잃어버릴수록, 아르바트 거리는 보다 소중한 장소가 된다. 현재 모스크바에서 길을 걸으며 전통 민속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은 아르바트 거리뿐이다. 아르바트라는 특별한 장소에 바친 이 노래시는 은연중에 옛것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기억의 공간에 대한 믿음은 종교적인 수준까지 승화된다. 반면, 모스크바를 소재로 한 대다수의 다른 시들 속에는 도시의 군중 속에 묻혀 사는 익명의 개인, 과거가 주는 위안, 현재의 음울한 소음 등이 담겨 있다. 오쿠자바의 노래시들에는 사라져 가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추억과 조용한 우울이 침윤되어 있다. 둘째, 오쿠자바의 시에는 전쟁을 테마로 한 노래시가 많다. 우리로 하여금 종종 묵상에 잠기게 만드는 그의 전쟁시에는 강한 이념이나 영웅주의가 없다. 예를 들면 자신의 군대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에 참가한 최전방 병사의 하루를 다루는 식이다. 문학과 전쟁이라는 테마에 유별난 관심을 보인 오쿠자바는 청년기에 친구와 함께 집을 나가 스페인 내전에 참전할 것을 심각하게 고려한 적도 있었다. 이후 파시즘에 대항하는 세계대전에 실제로 참가했다. 일단 전쟁에 참전한 시인은 젊은 시절의 낭만주의적 성향을 잃어버린다. 그리하여 그는 전쟁을 증오하게 된다. “전쟁은 우울과 아이러니로 나의 창작 활동을 성숙시켜 주었다. 개인의 의지가 중요하지만, 인간은 종종 행복과 생명까지 앗아 가는 객관적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나는 전쟁에서 용서와 이해라는 위대한 예술을 배웠다. 전쟁은 나에게 군사 퍼레이드를 기뻐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전쟁 희생자들을 볼 수 있는 지금, 내게는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정치가들은 그들의 어려움을 전쟁으로 해결하지만, 전쟁은 삶의 안정을 파괴한다. 전쟁이 과거와 현재를 결합시키는 끈을 끊고 미래의 진보로 이어 주는 끈을 끊으려고 위협하기 때문이다.”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으로는 <종이 병정>, <이 일은 일어나리라>, <전쟁을 믿지 마>, <우리 시인들을 보호하시오>, <징조>, <군사 퍼레이드>, <아메리카 병사의 노래>, <나의 사랑, 나의 인생>, <병사들의 군화 소리>, <수많은 여명과 일몰을 보았다>, <내 영혼의 무선전신> 등이 있다. 전쟁에 대한 독특한 메시지는 <종이 병정>에 잘 나타나 있다.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그는 조용한 삶을 원하지 않고 계속 외쳤어. 발사, 발사! 그가 종이 병정이라는 걸 잊고서. 불 속으로? 좋다. 가자! 가야지? 어느 날 그는 앞으로 행군해 갔지. 거기서 그는 허망하게 죽어 버렸어 종이 병정이었기에. 셋째, 오쿠자바의 시에는 사랑이 등장한다. 그가 부른 사랑 노래의 매력은 그 순수함을 찬미하는 데에 있다. 시인은 사랑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명백히 밝힌다. “나의 노래시 가운데 많은 시들이 사랑의 테마를 다루고 있다. 이 나라에서는 오랫동안 사랑에 대한 노래를 거의 부르지 못했다. 여성이라는 단어 속에는 의심스러운 무엇인가가 있었다. 이러한 잘못과 청교도적인 독실함에 대항해 나는 여러 해 동안 신성한 존재로서의 여성에게 처음으로 러시아어 찬송가를 불러 주고,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기어가기로 결심했다.” 사랑은 보다 행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다. 시인은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낸다. 시는 그에게 정직한 욕망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이다. 희망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을 노래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인간>, <아, 당신은 푸른 공>, <모든 땅>, <푸른 풍선의 노래>, <기적의 왈츠>, <아, 나쟈 나젠카>, <낡은 신사복>, <스몰렌스크로 가는 길>, <어떻게 그려야 하나>, <열린 문의 노래> 등이 있다. 그중 <푸른 풍선의 노래>는 사랑과 상실에 대한 테마를 독특하게 다룬다. 소녀가 울고 있네 풍선이 날아갔기에. 그녀를 달래 보려 하나 풍선은 날아갔네. 처녀가 울고 있네 아직도 구혼자가 없기에. 그녀를 달래 보려 하나 풍선은 날아갔네. 여인이 울고 있네 남편이 딴 여자에게 갔기에. 그녀를 달래 보려 하나 풍선은 날아갔네. 할머니가 울고 있네 인생이 너무 짧기에. 풍선이 푸른빛으로 돌아왔다네. 시인은 울고 있는 여성의 개인적 슬픔을 소녀가 할머니가 되기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주 흥미 있게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상실의 아픔을 노래한다. 시구가 물 흐르듯 유연하게 흐르기 때문에 시인은 어떤 면에서 슬픔을 즐기는 듯하다. 그러다가 시의 마지막 행에 이르러 분위기가 갑자기 반전된다. 사랑을 잃어버린 것에 대한 연민에서 한순간이나마 여성에게 행복한 꿈을 심어 주기 위해 푸른빛의 풍선을 돌려준다. 오쿠자바 노래시의 특성 가운데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의 노래시에 나타나는 민요조의 음악성이다. 경쾌하고 유려한 음악성을 지닌 그의 노래시는 소박한 서정시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민요조의 리듬과 멜로디에 의해 주도된다. 섬광처럼 스치는 그의 노래시는 부드러운 목소리와 쉬운 멜로디로 서민들의 삶을 어루만진다. 상처 받은 마음을 달래기 위해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찾았고, 그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며 들불처럼 번져 갔다. 그리하여 오쿠자바의 노래시는 언제나 유익함과 감미로움을 어우른다. 그의 시는 거의가 평행 구조(병치법)와 반복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기법은 민담 예술에서 흔한 특징이다. 그래서 오쿠자바의 노래시는 마치 마법적인 말이나 주문처럼 들린다. 옛 노래를 잃어 가는 이 시대에 오쿠자바는 지칠 줄 모르고 노래시를 불러 온 모스크바의 터주 노래꾼이다.    
1951    중국 晩唐의 詞人 - 溫庭筠 댓글:  조회:4067  추천:0  2016-12-13
온정균 사선 [ 溫庭筠 詞選 ]   저자 온정균(溫庭筠, ?-870) 국가 중국 분야 사(詞) 해설자 이지운(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부 전임연구원) 사(詞)는 시와 비슷한 운문으로, 당 중엽에 민간에서 발생해 송대에 가장 번성했던 문학 양식이다. 민간 가요의 가사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장단이 일정치 않아 ‘장단구(長短句)’라 고도 하며, 초기에는 가창할 수 있었던 근체시의 변형이라고 여겨 ‘시여(詩餘)’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밖에도 ‘곡자사(曲子詞)’, ‘신성(新聲)’, ‘여음(餘音)’, ‘별조(別調)’ 등의 명칭이 있다. 이러한 다양한 명칭에서도 보이듯 사는 음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사를 창작할 때 일정하게 정해진 악보인 사조(詞調)에 가사를 채워 넣는 방식으로 지어져서, 사를 짓는 것을 두고 가사를 소리에 맞추어 메운다는 뜻의 ‘전사(塡詞)’, 혹은 ‘의성(依聲)’이라 했다. 사조마다 명칭이 달랐고, 이를 사패(詞牌)라 불렀다. 사의 발생 초기에는 사패와 사의 내용이 상관관계가 있었을 테지만, 이후로 전혀 무관하게 되었다. 사는 시와는 달리 음악과 긴밀한 관계였으므로 유희적 성격이 매우 강했다. 따라서 그 내용도 술, 여색, 애정, 희롱에 대한 것이 많았고, 서정적이고 감상적인 특성이 강해 깊고 섬세한 내면을 완곡하고 함축적으로 표현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처음에는 문사들에게 그리 환영받지 못한 장르였지만, 당나라 말엽에 이르러 문인들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송대에는 공전의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사가 대량으로 창작됨에 따라 염정적이고 개인적인 신세타령에서 벗어나 시국에 대한 개탄이나 국가의 흥망성세 등까지도 읊게 되어 점차 시와 비슷한 성격을 띠게 되었다. 온정균은 만당(晩唐)의 시인이자 사인인데, 특히 그의 사는 중국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역대의 평론가는 그를 ‘화간파(花間派)의 비조(鼻祖)’라고 평가했는데, 그것은 사의 풍격이나 성격을 규정짓는 데 큰 역할을 한 ≪화간집(花間集)≫에 온정균의 사가 가장 많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는 본래 민간에서 발생했지만, 온정균의 손에서 단련되어 문사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고, 이후 오대와 송대 사인들이 경쟁적으로 창작하게 되어 중국문학의 주요 장르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온정균 이전에 몇몇 시인들이 민간사 형식을 빌려 사를 짓기도 했지만, 온정균은 음악적 재능을 살려 여러 사조를 만들어냈고, 문학적 재능을 쏟아 누구보다도 많은 사를 창작해 낭만적이고 유미적인 감성을 표현했다. 이처럼 온정균은 중국사사(中國詞史)에서 사의 내용과 형식이 하나의 문학 양식으로 자리 잡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그의 완약(婉約)하고 염려(艶麗)한 사의 성격은 사의 정격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특히 그는 도시의 발달로 인한 상류 계층의 향락적인 풍조를 사에 담아 그 당시 문화를 연구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온정균은 창작에 상당한 열정을 지니고 있어,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따르면, 온정균 생시에 이미 ≪악란집(握蘭集)≫ 3권, ≪금전집(金荃集)≫ 10권, ≪시집(詩集)≫ 5권, ≪한남진고(漢南眞稿)≫ 10권이 있었고, 또한 단성식(段成式), 여지고(余知古) 등과 함께 엮은 시문합집(詩文合集)으로 ≪한상제금집(漢上題襟集)≫ 10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모두 전하지 않는다. 지금 온정균의 시사는 ≪화간집≫, ≪전당시(全唐詩)≫, ≪전당문(全唐文)≫에 보존되어 있다. 고사립(顧嗣立)이 교주(校注)한 ≪온비경집전주(溫飛卿集箋注)≫에 시가 310여 수가 전하고, 사는 왕국유(王國維)가 편집한 ≪금전사(金荃詞)≫에 70수가 수록되어 있으며, 임대춘(林大春)의 ≪당오대사(唐五代詞)≫에 70수가 수록되어 있다. 시사 외에 온정균은 또한 소설 작가이자 학자이기도 했다.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따르면, 온정균은 소설 ≪건손자(乾巽子)≫ 3권, ≪채다록(采茶錄)≫ 1권을 지었고 유서(類書)로 ≪학해(學海)≫ 10권을 편찬했다. 애석하게도 거의 전부가 망일되었고, ≪건손자≫의 부분적인 문구가 ≪태평광기(太平廣記)≫에 인용되어 있을 뿐이다. 만당의 저명한 시인이자 중국 사사(詞史)의 중요한 인물인 온정균의 시문집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시문집뿐 아니라, 온정균과 관련한 중요 사료 역시 전하는 것이 없어 온정균에 관한 상세한 고찰이 어려운 실정이다. 비록 사정이 이러하지만, 온정균이 전하는 적은 수의 작품만으로도 우리는 그의 섬세한 감수성과 아름다운 표현력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온정균전집교주(溫庭筠全集校註)≫[류쉐카이(劉學鍇) 지음, 중화서국, 2007]은 온정균 작품이 실린 여러 책의 판본들을 정리하고 교감한 후, 주석을 달고 해설을 했으며, 중요한 역대 평론가의 평을 수록하고 있어 상당히 믿을 만한 판본으로 인정받는다. 모두 12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중 사는 제10권에 해당한다. 온정균의 사는 약 70수 정도 전해지는데, 이 저본에서는 위작 논의가 있는 것과 시와 중복되어 실린 것을 제외한 59수가 실려 있다. 온정균의 사는 복잡한 심정이나 사회상에 관련된 것보다는 여성의 아름다운 모습이나 미묘한 감정을 다룬 것이 많기 때문에, 작품 이해를 위한 사전 지식이나 주변 상황에 대한 이해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 온정균 사의 주제는 대략 여성의 자태, 사랑, 그리움, 이별과 원망으로 한정된다. 편협하다는 느낌이 있을 수 있지만, 이는 온정균 개인의 성향과 사의 초기 성격에 기인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온정균의 성격에 관한 일화는 여럿 전하는데, 대체로 그의 낭만적인 성격과 방탕한 품행이 주를 이룬다. 온정균이 처음 장안에 왔을 때에는 많은 사람이 그의 출중한 재주를 존중했으나, 그는 자신의 재주를 믿고 주색에 빠져 염려한 문사만을 짓거나 권력자를 비꼬거나 비판하는 일을 일삼아 금방 미움을 받게 되었다. 과거시험장에서도 자신의 재주를 자랑하고자 여러 번 부정행위를 저질렀고, 승상이나 권력자, 심지어 왕에게도 방자하게 구는 등, 본래부터 상대방의 기분을 맞추거나 자신을 낮추는 데 소질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기에 유희적 성격이 짙었던 사가 그의 자유분방한 삶에 잘 어울렸던 것 같다. 사는 노래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유희적이고 경박한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의미심장한 내용의 시와 구별되었다. 그러니 독자들은 마음을 편안하게 갖고, 재주 많고 오만한 한 시인이 그려내는 아름다운 당나라 여인과 그윽한 규방을 눈앞에 그려보시길 권한다.  
1950    중국 詩佛 자연시인 - 王維 댓글:  조회:3535  추천:0  2016-12-13
왕유 시선 [ 王維詩全集 ]   저자 왕유(王維, 699-759) 국가 중국 분야 시 해설자 박삼수(울산대학교 중어중국학과 교수) 당시(唐詩)는 중국 고전문학 최고의 정화로 후세 사람들에게 불후의 고전적 자양을 제공하고 있다. 시불(詩佛) 왕유(王維)는 시선(詩仙) 이백(李白), 시성(詩聖) 두보(杜甫)와 함께 당시의 3대 거장으로 꼽히면서도 이(李)ㆍ두(杜)와는 또 다른 시풍으로 그 특유의 매력을 발한다. 현존 왕유 시는 고금을 통틀어 최선본(最善本)으로 평가되는 진철민(陳鐵民)의 ≪왕유집교주(王維集校注)≫(이하 ≪교주≫로 약칭)에 의거해 총 308편 376수로 산정(算定)할 수 있다. 초년의 왕유는 적극 진취적인 유가 사상의 소유자였으나 정치적인 실의에 빠지기 시작한 중년 이후에는 불가와 도가적인 경향을 아울러 보이다가 점차 오직 불교에만 극도로 심취하였는데, 이 같은 인생 사상이 그의 창작 정신의 원천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백과 두보가 각각 낭만시와 사회시 창작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였다면 왕유가 당나라 시단에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독보적인 면모를 보인 것은 바로 자연시의 창작으로, 그는 동진(東晋)의 도연명(陶淵明) 이후 최고의 자연시인으로 평가된다. 송(宋)나라의 대문호 소동파(蘇東坡)는 ‘시중유화(詩中有畫)’ㆍ‘화중유시(畫中有詩)’, 즉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는 말로 산수수묵화의 대가이기도 했던 왕유 시(詩)ㆍ화(畫)의 예술적 경지를 압축 평가함으로써 후세의 절대적인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왕유의 자연시는 역관역은(亦官亦隱, 몸은 벼슬하고 있으나 마음은 늘 피세 은둔의 정취를 동경하고 추구하는 삶)의 시기에 집중적으로 지어졌으며 대부분이 은거 생활과 불도(佛道) 사상이 결합된 산물로, 시인의 피세 은둔의 초탈 정신이 짙게 투영되어 있다. 세속적인 욕망은 일찌감치 떨쳐버리고 오직 한가롭고 편안하기 그지없는 시인의 성정(性情)이 시작 속에서 여실히 표현되고 있는데, 가장 큰 특징은 전원 경물이나 산수 풍광의 묘사 가운데서 절로 풍겨나는 은둔적 정취이다. 이를테면 ≪망천집(輞川集)≫ 중의 <죽리관(竹籬館)>은 그윽한 대숲 속의 탈속적인 정취를 묘사하고 있으니, 세상과 동떨어져 고적(孤寂)함이 감도는 깊은 대숲 속에서 거문고도 타고 휘파람도 불며 살며시 다가와 비춰주는 밝은 달빛과 ‘지음(知音)’의 벗인 양 하나 되어 탈속적인 정취를 즐기는 시인은 이미 ‘해탈’의 경지에 든 듯하다. <산장의 가을 저녁녘(山居秋暝)>은 저녁녘에 한 차례 비가 온 뒤 그윽하고 고아한 산중의 경물을 묘사하였는데, 시정(詩情)과 화의(畫意)가 넘치는 가운데 시인의 고결한 품성과 초탈적 정서가 새롭다. <날씨 갠 후 넓은 들판을 바라보며(新晴野望)> 역시 비가 막 갠 후 아득한 들판에 펼쳐진 초여름의 전원 경색(景色)과 농경 생활을 묘사하였는데, 전편에 걸쳐 강조되고 있는 소박하고 평화로우면서도 활력 넘치는 전원의 생활과 정취는 세속적인 번뇌에서 벗어난 자적(自適)한 삶을 추구하는 시인의 정서가 그대로 배어 있다. 왕유의 시적 재능은 자연시 창작에 있어서는 오히려 이(李)ㆍ두(杜)를 능가할 정도였을 뿐만 아니라 그 밖에도 다방면에 걸쳐 다수의 가작을 남기고 있다. 초년에는 유가적인 인생관에 입각해 매우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경향을 보여 종군(從軍), 변새(邊塞), 호협(豪俠)을 노래하거나 입공보국(立功報國)의 기개를 떨쳐 보이는가 하면 객관성이 결여된 인재 등용이나 형평성을 잃은 논공행상을 비롯한 정치적 부패상을 풍자 폭로하였다. 또한 생애 전반을 통해 창작된 증별(贈別)이나 일상생활의 다양한 서정의 시편(詩篇)도 대개 은근하면서도 진솔한 정감의 묘사로 후세에 널리 애송되고 있다. 이를테면 <안서로 출사하는 원이를 송별하며(送元二使安西)>는 송별시의 절창(絶唱)으로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인구에 회자된 명작인바, 전편에 걸친 절묘한 정경(情景)의 융합과 강력한 전형성 그리고 애틋한 정감과 풍부한 함축미는 송별시의 전범(典範)으로 손색이 없다. 왕유의 시는 정치적인 실의와 실절(失節), 가정적인 불행을 딛고 한껏 유유자적하는가 하면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시종 따스한 인정을 베푼 시인의 생활 서정으로, 오늘날 현실 생활 속에서 삶의 고뇌와 갈등으로 지친 현대인에게 ‘해탈’의 지혜를 일러주고 마음의 안식을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이다.  
1949    프랑스 시인 - 알프레드 드 비니 댓글:  조회:5241  추천:0  2016-12-13
운명 [ Les Destinees ]   저자 알프레드 드 비니(Alfred de Vigny, 1797-1863) 국가 프랑스 분야 시 해설자 최복현(상명대 불문학 박사과정 수료, 저술가) 알프레드 드 비니는 자신의 깊은 철학 사상을 시로 표현해 유명해졌다. 생전에는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으나 사후 시집인 ≪운명≫이 발표된 후에 명성을 얻었다. 그는 일생 동안 좌절과 고독을 독서와 명상으로 관조한 철학 시인이었다. 비니의 철학 사상은 비관주의로서, 인간은 비극적인 운명 앞에서도 좌절하지 말고, 인간의 품위를 지키면서 묵묵히 극기[견인주의(堅忍主義)]로써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니는 ‘인간은 고독한 운명을 타고난 존재’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누구나 고독한 존재이기 때문에 고독감에서 오는 고뇌를 맛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적으로 탁월한 인물일수록, 선택받은 위대한 사람일수록 고독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는 시의 모티프를 성서에서 가져오곤 했는데, 모세라는 인물은 선택받은 위대한 인물이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중대한 사명을 받은 이스라엘 지도자 모세의 고민과 고독감을 소재로 한다. ≪운명≫에서 그는 삼손과 예수를 위대한 인물로 등장시켜 그 고독을 절감하게 한다. 그는 뒤로 물러선다. 내려간다. 무섭게 소리친다. “너희들은 나와 함께 기도하며 철야할 수 없단 말이냐?” 그러나 견딜 수 없는 잠이 제자들을 눌러 버린다. 베드로도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선생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체한다. 그러자 인자는 천천히 다시 올라간다. 이집트의 목자처럼 하늘의 천사가 어느 별 속에서 빛나고 있는지를 찾는다. 슬픔에 잠긴 구름이 과부의 옷처럼 펼쳐지고, 구름자락이 광야를 뒤덮는다. 예수는 33년 전부터 그가 겪었던 괴로움을 상기하면서 인간이 되었다. 두려움은 견딜 수 없는 중압감으로 그의 마음을 조여 온다. 그는 죽을 만큼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을 느낀다. 추워졌다. 세 번을 부르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으니; “나의 아버지여!”−바람만이 그의 부름에 답할 뿐이다. −<감람산> 하나님으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은 그는 인간적인 고독을 느끼며, 하나님의 위대함 앞에서 느끼는 허무감을 토로한다. 비니는 시를 통해 천재적 시인이 당시 사회에서 일반 대중에게 이해받지 못한 채, 고독감과 공허함을 느끼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비니는 인간은 누구나 고독을 좋아하지 않으며 피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독은 인간이 가진 필연 조건이므로 이를 감수하고 극복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비관주의에서 출발해 극기주의에 이른다. 어쨌든 나는 피곤하고 지쳤다.−나는 무거운 청동 기둥의 무게를 거대한 몸과 강한 머리로 지탱해야 하는 슬픔으로 영혼을 지닐 수가 없다. 진흙 속을 기며 그곳에 숨어 있다고 생각하는 금빛 살무사가 사행하는 것을 보는구나! −<삼손의 분노> 그의 시에 나타난 사상은 크게 비관, 자비, 극기로 나눌 수 있다. 고독한 존재인 인간은 이 고독을 피할 수 없고, 신에게 사명을 부여받은 위대한 존재일수록 그 고독감은 크다는 것이다. 모세가 그러했고, 예수가 그랬다. 이러한 인물들은 남들과 다른 더 깊은 고독감을 맛보게 된다. 예수의 삶과 죽음, 삼손의 분노에서 우리는 인간의 고독을 절감한다. 신이 부여했든, 선택했든 결정적인 순간에 인간은 홀로 고독한 존재로 남는다. 시시포스처럼 부조리한 숙명을 발견하지만 그 숙명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런 우리는 나약하게 자살을 생각해서도 안 되며, 늑대처럼 장렬하게 끝까지 투쟁하다 죽어야 한다. 부조리한 존재에서 벗어나지 않는 인간, 부조리한 숙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존재, 그것이 극기하는 인간이며, 인간다운 고귀한 품격을 지닌 존재다. 스스로 죄를 범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고통을 겪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부자유하고, 충분히 무능해질 수 있다. 강자를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폭풍우 치는 물결 속에 허약한 팔을 던지고 어느 호수의 얼음 도가니 속에 잠기고 깊고 깊은 화산의 잉걸불을 괴롭게 할 용기 있는 약자를 사랑한다. 이 영원한 시시포스는 아름답고, 홀로이며 심한 상처를 입었고, 다급하지만 한마디도 외치지 못한다. 그는 언제나 다시 굴러떨어지고 마는 바위를 잡으려고 심한 고통을 당하며, 짓눌리고 있다고 결코 고백하지 않는다. 만약에 너희들보다 더 높이 오른 영광스러운 정신이 업신여겨진다면 그들의 멸시를 무시하라. 모든 영광을 지배하는 모든 것의 정상 그들이 정상에 있지 않듯이, 그 눈은 정상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높은 곳에 있지 않다. 그들의 발자국 앞에서 강한 자들은 밑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산을 발견해 낸다. −<플루트> 인간은 부조리한 존재다. 시시포스의 후예인 우리는 신으로부터 굴러떨어진 돌을 언덕으로 올려야 하는 벌을 받았다. 이 업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시시포스가 있던 산이 아닌 새로운 산에서 각자 운명의 돌을 굴려 올리고 있는 것이다. 온몸에 땀이 흐르지만 운명을 걸머지고, 운명에 맞서서 살아가는 모습은 차라리 아름답다. 시시포스이기를 자처하는 인간은 아름답다. 시시포스이기를 포기한 사람이 비겁하다. 이러한 고독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면서도 인간의 본분에 충실하려는 사상, 그것이 비니의 극기 사상이다. 근원적 고독을 안고 있는 인간은 그 고독을 달래 보려고 여인을 찾아간다. 아름다운 여인은 고독한 존재를 기꺼이 받아 주어 고독을 행복으로 변하게 한다. 여인은 존재를 황홀하게 하여 잠에 취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 존재를 평안하고 행복하게 하여 지상을 낙원으로 만든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의 품에서 인간은 고독을 벗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것인가? “여자, 병들고 열두 번이나 음란한 아이로다! 어느 성소에 있는 것처럼 모욕당한 가슴속에 언제나 힘을, 분노를 유지하도록 조처하니, 거기로부터 달아나는 불은 모든 것을 게걸스레 삼키러 갈 것이며, 그의 눈이 보거나 울지 못하도록 금하러 갈 것이다. 그건 너무 심한 일이다!−신이 원하면 그는 내 죄를 소제할 수 있다. 나는 내 비밀을 주었고 델릴라는 그것을 팔러 가리라. 나에게 죽음을 통고하러 오게 될 사람의 발은 진정 아름다울 것인가!−존재할 수 있는 한 존재하라!” 그는 이 말을 하고 나서 그녀 옆에 잠들었다. 그의 머리칼의 값을 비싸게 치르고, 전사들은 그가 그녀의 집에 있다는 것에 떨면서 그의 손을 붙잡아 매고 그의 눈을 지질 때까지도 떨고 있다. 그는 말없이 신음하며, 두 바퀴를 돌고 주춧돌로 물러났다. 신전의 승려들이 황홀감에 빠져 창백해지며 그들의 신, 다곤 앞에 섰으니; 그들은 열두 마리의 큰 황소가 겨우 끌 수 있는 사슬을 그에게 채워, 질질 끌고 다니다가 피 흘리는 그를 조용히 그들의 신 앞에 서게 한다. (…) 땅이여, 하늘이여! 무기력한 시선으로 태양을 찾으면서 피로 얼룩진 살벌한 눈으로 쫓고 있는 눈으로 거짓말쟁이 창부를 당신들이 보았을 때, 결국 삼손이 거대한 철탑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을 흔들어 치명적인 파편 아래로 단번에 3000명의 그의 원수들과 신상과 제단을 짓누를 때 당신들은 기쁨으로 마음이 설레었습니까? 땅이여, 하늘이여! 위선적인 사랑으로 꾸민 배반을 재판으로 벌하소서. 거짓된 입맞춤 때문에 찢긴, 가슴에 맺힌 비밀의 밀고를 그렇게 벌하소서! −<삼손의 분노> 그랬다. 여인은 아름다움과 함께 배신을 지녔다. 겉은 아름다움으로 치장하고, 속은 배신을 숨기고 있었다. 인간은 고독을 피하고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사랑을 시도하지만 여성은 냉정하게 배신한다. 변심하고 배신하는 여성에 대한 불신과 저주와 절망의 내용을 <삼손의 분노>에 담아냈다. 이 시는 실연한 남성의 슬픔과 고통을 잘 묘사하고 있다. 고독한 인간이 믿을 존재란 여인이 아니었다. 여인은 순간을 아름답고 황홀하게 하지만 결국은 인간 존재를 송두리째 파멸로 몰아간다. 비니는 이 시도 성서에서 모티프를 가져왔다. 구약성서의 삼손과 델릴라 이야기를 시 속에 옮겨 담았다. 그는 성서적 모티프를 통해 자신이 믿었던 여인,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 마리 도르발의 배신을 비난하고 있다. 믿고 사랑했던 여인 도르발의 배신은 그를 그만큼 아프게 했다. 그는 스스로 삼손이 되어 시 속으로 들어갔고, 마리 도르발을 델릴라로 등장시켰다. 민족의 복수를 해야 하는 중대한 사명을 가졌던 삼손을 유혹했다가 철저하게 배신하여 파멸로 이끌었던 델릴라다. 비니는 배신한 여인 마리 도르발에 대한 복수심으로 델릴라에 비유해 맹렬한 비난을 가했던 것이다. 결국 여인이란 믿을 만한 존재가 못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아름답긴 하지만 그 아름다움 뒤에 감추고 있는 변심과 배신은 인간을 더 고독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한다. 여성은 더 이상 평안과 위로의 대상이 되지 못하니 여성에게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가중되는 고독감을 여성에게 위로받으려 했으나 여성은 오히려 그를 더 힘들고 아프게 만들었다. 여성에게 위로받지 못한 인간은 이제 자연을 찾아간다. 자연은 그를 받아들여 여유를 갖게 하고 평안을 꿈꾸게 한다. 그의 근심과 외로움을 달래 주는 매혹적인 경치로 다가온다. 모든 도시들은 남겨 두고 용감하게 떠나라. 더 이상 길의 먼지로 네 발을 더럽히지 마라. 인간 노예가 짊어진 숙명의 바위들처럼 우리 생각이 고양된 지고의 단계에서 노예근성으로 가득한 이 도시들을 보라. 커다란 숲과 들판은 광활한 안식처들이니 침울한 섬 주위에 있는 바다처럼 자유로운 안식처들이다. 손에 꽃 한 송이 들고 들판을 가로질러 걸어가라. (…) 네가 원한다면 나는 눈 내린 마을을 보리라. 사랑스러운 별이 가득히 내려와 반짝이고 있는 마을, 바람이 소리 내며 부는 마을, 바다가 밀려오는 마을, 저주받아 얼음 밑으로 어두운 극지가 있는 마을. 우리는 우연히 방랑자의 행로를 따라간다. 낮이 나에게 무슨 상관 있을까? 세계가 나와 무슨 상관 있을까? 네 눈이 그렇게 말할 때 나는 그것들은 아름답다고 말하리라. −<목자의 집> 그러나 그런 느낌도 잠시, 자연은 걷잡을 수 없는 폭우나 태풍으로 인간을 괴롭힌다. 마치 덧없는 존재인 인간을 비웃으면서 영원한 존재인 자신의 힘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 거들먹거린다. 신은 산악을 통행하는 철도 위에서 목적지로 급히 가는 증기 열차를 인도하고, 천사는 시끄러운 대장간에 서서 기도하니, 증기 열차가 땅 밑으로 가거나 다리를 떨리게 할 때, 열정적으로 도약하는 사슴보다 더 빨리 가마솥을 삼키는 불의 입으로부터, 도시들을 통과하고, 강물이 범람하기를! 그렇다. 푸른 눈의 천사가 도로 위에서 지켜 준다 해도, 손에 든 검으로 허공을 가르며 칼을 방어한다 해도, 그가 지레질을 하며, 바퀴가 회전하는 소리를 듣는다 해도, 마술의 도가니를 조각으로 만들기 위해 물 위에는 눈이, 잉걸불 위에는 손이 있다 해도, 언제나 아이의 조약돌이면 족하리라. −<목자의 집> 자연은 인간에 대하여 무관심한 존재로 나타난다. 자연은 인간의 고뇌에 아무런 위안도 주지 못하며, 영원히 계속되는 자연에서 인간이 위안을 구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입김을 내며 음매음매 울고 있는 힘센 황소 위에 인간은 너무 일찍 올라탔다. 어느 누구도 아직은 모른다. 가혹한 소경이 그의 마음속에 어떤 뇌우를 가지고 오는지를, 즐거운 여행자는 그에게 보물을 넘겨주나니; 그의 늙은 애비와 그의 아들들, 그는 그들을 볼모로 삼아 카르타고산 황소의 뜨거운 배 속에 던져 버리고 황소는 그들을 재로 만들어 금빛 신의 발치에 던져 버린다. −<목자의 집> 고대 페니키아인에 의해 북부 아프리카에 세워진 식민지 카르타고가 기원전 6세기에 서지중해의 무역을 장악해 번영해 나가다가 포에니 전쟁에서 패하여 로마의 속주가 되었던 것처럼, 고독을 피해 자연으로 들어갔던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잠깐 동안의 위로를 얻었을 뿐 자연에 지배당하며 그를 신으로 받들어야만 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자연에 휩쓸려 버린 인간은 거의 망하다시피 했다. 그러니 어떻게 자연을 믿을 것인가. 인간은 모든 것들과 안녕을 고할 수밖에 없는 존재, 자연의 힘 앞에 맥없이 무너지는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인간을 휩쓸어 간 자연은 물리적인 면뿐만 아니라 인간이 가진 사상마저도 휩쓸어 갔고, 오만한 자세로 인간을 철저히 무시한다. 위선적인 그들은 오만하고 불손하다. 그러나 땅은 로마 호민관의 발아래서 떨고 있다. (…) 자연은 내게 말한다. (…) “나는 너희들의 외침도, 한숨 소리도 듣지 않는다. 하늘에서 말없는 관람객들을 찾고 있는 인간의 연극이 헛되이 나를 지나가고 있음을 느낀다.” “나는 개미 같은 민중을 보지 않으며, 그들의 소리를 듣지도 않고 달려간다.” 나는 그들의 재로 이룬 은신처 따위엔 관심이 없다. −<목자의 집> 그렇다고 우리의 삶, 인간의 역사를 포기할 수만은 없다. 오만한 자연에 맞서 무언가 희망을 찾아야 한다. 자연이 오만하게 인간을 무시하는 것처럼 우리 인간도 자연을 무시하고 새로운 길, 새로운 희망을 찾아 일어서야 한다. 자연에 희생당하는 것은 표면적인 것뿐만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도 자연으로부터 피해를 입는다. 살아라, 냉정한 자연이여, 다시 살아라, 끝없이, 우리의 발밑에서, 우리의 머리 위에서, 그것이 너의 법칙이니까; 너희들, 그리고 너희들이 여신이라면 업신여기시라, 당신을 왕으로 섬겨야 할 비천한 나그네 인간을; 너희들의 처세나 헛된 화려함보다도 나는 인간의 괴로움으로 점철된 위엄을 사랑하나니; 너희들은 나로부터 사랑의 외침을 듣지 못하리라. −<목자의 집> <목자의 집>에서 비니는 대자연 속에 홀로 서 있는 목자의 집에서 자연은 인간에게 냉담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비니는 자연을 냉담하고, 태연자약하며, 고고하게 아름다운 것으로, 하늘을 광막하고 황량한 것으로 느낀다. 자연 속에서 그는 ‘거룩한 고독’을 느끼면서 인간의 사상을 심오하게 발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인에게서도 자연에서도 존재의 고독을 위로받지 못한 인간은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이제 인간이 호소할 곳은 신이란 존재밖에 없다. 하지만 신마저도 인간이 고독하고 힘겨워서 간절히 부르짖을 때 응답하지 않는다. 그렇게 신의 아들은 거룩한 아버지와 이야기했다. 그는 아직 엎드려 있다. 그는 기다린다. 그는 희망하고 있지만 포기하고 이렇게 말한다. “나의 뜻대로 마시고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그리고 영원히!” 끔찍한 공포감, 끝없는 고뇌는 그의 느린 임종의 고통을 더욱 배가한다. 그는 오랫동안 바라본다. 오랫동안 찾고 있다. 침울한 대리석처럼 하늘은 온통 캄캄할 뿐이다; 빛도, 별도, 달도 없는 이 땅, 영혼의 빛이 없어 땅은 아직 신음하고 있다. −그는 숲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유다 무리의 횃불이 배회하고 있는 것을 본다. −<감람산> 신도 인간에게 위로를 주지 못하는 것이다. 신도 역시 인간에게 무관심하고 냉담한 존재다. 인간에게 아무런 위안을 주지 못하는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는 영원하신 아버지가 아니다. 비니는 <감람산>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던 전날 예수님의 간절한 호소에 ‘영원한 침묵’만을 보낸 냉담한 존재로 신을 묘사하고 있다. 성서에 기록된 성스러운 낙원에서 인자가 본 것을 말하고, 알렸음에도 피조물들의 외침에 못 본 척, 못 들은 척, 말이 없는 것이 사실이라면, 유산되어 버린 세상처럼 하늘이 우리를 내버려 둔다면 정의는 그 부재에 대해 멸시로 대응할 것이며, 신의 영원한 침묵에는 오로지 냉정한 침묵으로만 대답할 것이다. −<감람산, 침묵> 비니는 그의 시에서 하나님이란 존재를 비난한다. 하나님은 존재한다 하더라도, ‘피조물의 외침에 벙어리이고 소경이며 귀머거리다’. “영원한 아버지, 위안자인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심판 날이 있다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명을 주면서 죄악에 빠지게 했던 사람들 앞에 변명하러 올 것이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기 전, 그것을 피할 수 있다면 피하기 위해 간절히 신을 부르지만 신은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다. 설령 신이 존재한다 해도 인간에게 위로를 주지 못하는 나약한 신에 불과하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놓고, 그 일을 처리하기 어려워진 신은 비겁하게 숨어 버린 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존재한다면 예수를 곤경에 처하게 해 놓고 그것을 처리할 자신이 없어 숨은 신이거나, 그렇지 않다면 신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신이란 존재도 믿을 것이 못 된다는 말이다. 인간이 호소할 곳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외로움을, 고독을 위로받을 곳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인간의 호소나 바람이나 기도는 무익한 일이다. 그러고는 바다 위 위선적인 별을 향해 항해했다. 항해술이 부족한 그는 공중으로 깃발을 올렸지만 곧 돛대 아래로 침몰해 버렸다. 앞에는 시커멓고 삭막한 물결뿐 아무것도 없었다. 폭풍우로 인한 가혹한 노동의 대양 물결은 수많은 생명들을 싣고 와서 부수어 버린다. 며칠 동안 맥없이 물결치면서 그의 영혼은 굴곡 속에 떠올랐다. −<플루트> 이렇게 의지할 곳 없는 인간은 자유의지대로 삶을 꾸려 나가는 일조차도 불가능한 존재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어디에서든, 어느 순간이든 늘 한계에 부딪친다. 의욕을 가지고 용감하게 도전해 본들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무자비한 운명의 무게에 눌려 있는 것이다. 운명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는 인간 존재는 지상에서 인간의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 인간에게 부여된 지력의 테두리 안에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인간 한계의 최종 선에는 죽음이 예리하게 버티고 서 있다. 인간 조건은 이렇게 고독하고 무력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야 한다. 한 마리 소의 머리가 돌을 넘어서지 않고도 깊은 밭고랑을 파거나, 선이 그어지는 것처럼 각각의 머리는 굽실거리며 일상을 그리고 있었다. 냉엄한 신들은 자신들의 노예인 인간들의 두개골과 눈 위에 무거운 멍에를 메우니 인간은 모두 끝없는 사막에서 별도 없이 헤매며, 족쇄가 채워진 발을 힘겹게 들면서 운명이란 원에서 청동으로 된 끄떡없는 손가락이 하라는 대로 따르고 있다. −<운명> <운명>에서 비니는 인간 조건과 운명이라는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인간을 누르고 있는 운명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은 운명 앞에서 무력한 존재다. 인간은 누구나 무자비한 운명의 중압에서 방황한다. 완다여, 그대가 침묵한 후에도 난 아직 듣고 있다오. 생각하는 영혼이 있는 모든 세계의 끝에 지고의 운명의 공포를 지니고 있는 실팍한 손이 내 가슴을 괴롭히고 있음을 느꼈다오. −<완다> 마치 둥지 안에 있는 새처럼 인간에게 한계를 설정하고 조건을 부여하는 운명을, 죽음과 직면하는 인간의 숙명을 묘사한다. “비니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완전한 굴종과 요구하는 숙명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존재인 것이다.”[귀스타브 랑송(Gustave Lanson, 1857∼1934)] 따라서 인간은 각자 주어진 운명을 극기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가 농노의 신분을 벗고 속죄 받은 손으로 타르타로스의 노예만이 존재하는 마음을 만들며 자유로운 목자를 만들면서 대기와 자유를 그들에게 동시에 돌려주려고 많은 새들을 구입하고 큰 새장을 만드는 데 몰두하는 유복한 여행자처럼 온 민족을 인도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완다> 세상에 태어났지만 아버지 우라노스의 심술로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지하에 갇혀 있어야 했던 티탄 족처럼 우리는 노예와 같은 숙명을 타고났다. 신의 손가락이 지시하는 대로 따를 뿐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인에 불과하다. 그렇게 자유롭지 못한 삶은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비니는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다. 우선 인간은 체념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고양이 앞의 생쥐처럼 거대한 운명의 짐에 무기력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체념밖에 없다. 반항해도 소용없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반항하는 것은 어리석고 무모한 짓이다. 화를 낸다 해도 화를 받아 줄 대상도, 반응할 대상도 없으니 화를 내는 것도 어리석다. 그러니 앓는 소리를 낸다든가 하소연하는 일은 비겁한 일이므로 긍지 있게, 명예롭게 고역을 치러 나가야 한다. 그러다 죽음이 닥쳐오면 묵묵히 인내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렇다고 그저 체념하고 삶을 포기하는 것은 극기주의가 아니다. 비니는 이 인간 존재의 비관에서 벗어나는 일로 자비를 내세운다. “나의 자매여 내 집으로 들어오라.” 너의 조상들은 이제 존재하지 않으니; 그들의 마지막 딸을 나의 견고한 지붕 아래로 맞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내 집에서 네 아이들은 너처럼 순결하게 자라게 될 것이다. 아이들은 일하는 우리에게서 대지는 성스러우며, 건강한 팔로 섬기는 자에게 상속권을 준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농사꾼 카인이 여기서 앙갚음을 하고 숲에서 목표도 없고, 법도 없고, 영혼도 없는 야생의 늑대들이 분노로 눈멀고 굶주리며 불행하게 서로 물어뜯다가 길을 잃은 것처럼 사냥꾼 아벨은 노동과 여자를 업신여겼던 연고로 그의 족속이 방황하다가 죽어 가는 것을 보게 되리라. −<토인의 딸> 공통적인 업보를 지고 함께 허덕이는 비참한 동포들에게 측은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자비의 출발점이다. 그는 이미 이렇게 말했을 것이오. “나는 연민을 가지고 있다. 나는 거드름을 피우고 있으니; 옛날의 범죄는 새로운 순교자들에 의해 씻겼다.”; 그의 목소리는 놀라서 주의를 기울이는 국가들 앞에서 자유로운 민족, 속박당하는 민족 앞에서 마지막 입을 열고 있는 천사들의 목소리처럼 공간에서 세 번 반복했을 것이오. “암양이 어린양의 피로 나를 굴복시켰다.” −<완다> 예수가 고통을 당하고 그 피로 인류를 구원했듯이, 우리 인간이 가져야 할 고귀한 정신은 서로 돕고 사는 일이다. 자연에게 버림받고 여인에게 버림받고 신에게마저 버림받은 인간이 의지할 수 있는 일이란 공동의 운명을 가진 인간끼리 서로 도우며 자비를 베풀며 살아가는 일뿐이다. 예수가 그런 아름다운 동포애를 보여 주었으니, 우리가 고독과 무거운 운명의 짐에서 그나마 행복할 수 있고 위로받을 수 있는 길은 서로를 위한 희생뿐이다. 비니는 인간의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서 동족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제시한다. 이것이 비관주의에서 극기주의로 나아가는 길, 즉 자비다. 이러한 연민과 자기희생의 화신은 <늑대의 죽음>에서 수늑대가 아내와 가족을 구하기 위해 희생하는 장엄한 죽음의 장면에서 나타난다. 그는 자기 살을 꿰뚫은 우리의 총탄에도, 십자로 가로질러진 우리의 날카로운 단도에도 불구하고 강철 같은 턱을 벌리지 않았다. 목이 물린 개가 죽어서 늘어진 후에야 늑대는 개를 내려놓고 우리를 노려본다. (…) 그는 다시 우리를 노려보더니 눕는다. 쏟아지는 피를 핥으면서 자신이 어떻게 죽게 되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는 채 커다란 두 눈을 감고 말없이 죽어 간다. −<늑대의 죽음> 인간에게 무정한 자연과 존재하지 않거나 침묵할 뿐인 신에 대한 사랑을 그치고, 차라리 인간의 장엄을 사랑하고, 영원하지만 공허한 것에 사랑을 쏟을 것을 <목자의 집>에서 주장한다. 너, 무심한 여행자여, 너는 네 이마를 기대고 내 어깨 위에서 꿈꾸고 싶지 않은가? 오라. 회전하는 집의 평화로운 문턱으로부터 오라. 지나간 사람들, 지나갈 사람들을 보라. 순결한 정신이 나에게 주는 인간의 모든 그림들은 오래도록 고요하고 위대한 나라들이 우리 문 앞에서 펼쳐질 때 생명력을 얻으리라. 우리는 그렇게 걸을 것이다. 죽은 자들이 지나간 불모의 이 땅 위에 우리 그림자만을 남겨 둔 채로; 우리는 그들에 관해 말하리라. 모든 것이 어두워진 시간에, 네가 지워진 길을 따라가고 싶어 할 그 시간에, 불확실한 나뭇가지에 기댄 채 마치 샘가에 있는 디아나1)처럼 울다가 침묵하며 위협받는 너의 사랑을 몽상하기 좋아하는 그 시간에. −<목자의 집> 인간의 고독과 신의 침묵, 허무와 부조리의 인식, 절망적 조건에서의 능동적인 자기 극복, 공동 운명의 의식에서 일어날 번민과 동포애 등을 보여 준다. 그의 이런 사상은 실존주의를 예비하고 있기도 하다. 인간이 처해 있는 비극적 숙명 앞에서 조용히 자기의 운명을 감수하고 최선을 다하며 묵묵히 살다가 죽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것이 그의 극기주의의 핵심 사상이다. 지금 신탁은 공중과 거리를 떠돌고 있다. 행인이 행인에게 하늘에 있는 검은 점을 가리킨다. 우리는 구름 속에 있는 고독과 우리를 연결시킨다. 운명의 빛이 비치기 4년 전 일이다.−하지만 권력은 그의 교리 속에 갇히고, 그림자 속에서 그는 시소 놀이에 숨겨진 문제들을 생각하느라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며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신화> 그는 <늑대의 죽음>에서 수늑대가 자기 가족을 구하기 위해 묵묵히 죽어 가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극기주의를 찬양한다. 인간은 누구나 불가피한 운명 앞에서 아무런 불평 없이 자기의 막중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극기주의를 <늑대의 죽음>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 기원전 3세기 그리스 철학자 제논에 의해서 주장되었던 극기주의는 오직 이성을 따르면서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인간의 불행에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인간이 어떠한 불행 앞에서도 묵묵히 침묵을 지키면서 참는 것, 이와 같이 극기하는 데는 자제심, 자기 포기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 인간이 극기하고 위대해지기 위해서는 어떠한 불행과 고통 앞에서도 태연자약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불행을 당하고 고통스러우면 신음하고 울부짖게 된다. 또한 부당한 대우를 당하면 불평하게 마련이고, 불행을 당하면 그 불행에서 벗어나고자 기도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비니는 “신음하거나 울거나 기도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비굴하다”고 말한다. 자기의 불행을 처음부터 단념하고 포기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 불행을 타개하려고 노력하다가 불가능하면 노력을 포기하고 묵묵히 자기의 숙명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침묵을 지키고 감수하면서 인간의 자존심과 긍지를 지키라는 것이다. “침묵만이 위대하고 나머지는 모두 나약한 것이다.” <늑대의 죽음>에서는 인간이 품위와 긍지를 가지고 살아야 하며 신음하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간청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어떠한 일에도 최선의 노력을 하다가 안 되면 극기하고 말없이 운명을 감수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키는 일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비니는 비관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다른 방법으로서 순수 정신의 소산인 사상을 후대에 전달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바다에 던진 병>에서 시인은 인류 복지를 위해 사회의 불행이나 악조건에 굴복하지 말고 사상을 후대에 전달하는 사명감을 갖자는 생각을 펼친다. 그는 희생되었다. 대지는 경건한 불후의 명작인 그를 거둬들여야만 한다. 그것은 군주나 다이아몬드보다도 더 귀한 박식한 일기이며 고독한 계산이다. 그건 폭풍우 속에서 생긴 파도의 지도이며 그의 머리를 부수게 될 암초의 지도이니; 미래의 여행자들에게는 숭고한 약속이다. (…) 진정한 신이여, 강한 신은 사상의 신이로다! 우리 이마 위에는 운명이 던진 씨앗이 있으니 풍요로운 지식의 소나기를 쏟읍시다. 그러고 나서 영혼과 돌 같은 과일을 거두어 그는 외출한다. 모든 것은 성스러운 고독의 향기로 생긴다. 우리의 작품을 바다에 던집시다. 넓은 바다에; −신이 항구로 그녀를 인도하기 위해 그녀를 잡을 것이다. −<바다에 던진 병> 세상의 모든 것은 물리적인 힘에 의해 사라지거나 소멸될 수 있다. 그러나 사상만은 영원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사상은 보이지 않는 재산이지만, 머리 또한 우리 몸에 붙어 있으니 우리 몸이 볼모로 잡히거나 사라지면 사상 또한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기록을 해야 한다. 그리해서 그것을 깨지지 않는 병에 넣어 영원히 존재할 바다에 던져 놓으면 언젠가 우리 후손들에게 전달될 것이다. 극기주의는 연민을 토대로 한 인류애와 순수 정신이 지배하는 인간의 사상과 문명을 믿는 낙관적인 사상으로 바뀐다. 그는 순수 정신의 지배를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순수 정신의 지배는 창작에 의해서 준비된다. 긍지를 가지고 명랑한 기분으로 자기 작품을 후세에 맡기는 것이다. <바다에 던진 병>에서 그는 인간의 순수 정신과 사상의 소산인 한 권의 책이 빈 병에 넣어져 바다에 던져지고 떠돌아다니다가 마침내 프랑스 해안에서 후세의 사람에 의해 건져지면, 인류를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믿는다. 만일 이 책의 사상이 위대하다면 언젠가는 이해되고 찬양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일시적인 당대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후세의 사람을 위해서 숭고한 사상이 담긴 시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순수한 정신>에서 그는 독자들에게 확고한 희망과 위안을 주고 있다. 위대한 사상은 불멸하여 후세에 영원히 남게 된다고 믿는다. 예술 작품의 영원성을 그는 위로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유일하며 최후의 부서져 버린 두 사슬로 된 반지, 나는 머문다. 그리고 나는 아직 고도에서 우리의 재치 있는 학자들과 순결한 선생들 사이에서 버티고 있다. 시인과 준엄한 사상가들의 이상이다. 나는 20년의 침묵 속에서 그 지속을 느껴 오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프랑스가 나의 그림을 응시하며, 내 그림들 위에 꽃을 던지는 것을 보고 있다. (…) 당신을 사랑하는 산 자의 젊은 후예여! 당신의 눈에서 나의 모습은 지워졌으니 나는 거울 속에서 나 자신을 알 수 있으니 늘 과거 우리의 업적을 새롭게 판단하라! 다시 부활하는 많은 친구들이여! 나의 운명은 10년 내로 당신을 나에게 데려올 수 있으니 내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라. 그러면 나로서는 족하다! −<순수한 정신> 시인은 사상가의 대표다. 누구보다도 깨어 있는 존재이며 세상을 밝히는 빛과 같은 존재여야 한다. 모든 것은 스러져도 사상은 남을 것이니 시인은 순수한 정신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어 나가야 한다. 시인의 예술성은 영원하여 후대가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니는 자신의 사상을 상징적인 방법을 통해 표현했다. 그는 낭만파 시인으로서 감정 토로를 직접 표현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표현하면서 장중한 음악적 효과를 이용한 시인이기도 했다. 비관주의로 출발해 만년에 이르러 극기주의 사상을 갖게 되기까지, 비니는 위에서 살펴본 대로 세 가지의 주된 흐름을 유지했다. 고독한 존재라는 운명을 안고 태어난 인간, 그 인간은 후에 카뮈가 부르짖었던 부조리한 인간과 닮았다. 벗어날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숙명으로 안고 있는 인간은 바로 시시포스가 굴려 올리는 돌처럼 끊임없는 벌을 받는 존재인 것이다. 이 벌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은 없다. 단지 벌을 기꺼이 감내해야 한다. 늑대는 자기가 처한 운명을 타개하려고 노력했지만, 불가피한 숙명 앞에서도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고통을 묵묵히 감수하면서 장엄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잔인한 사냥꾼들을 늑대는 경멸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장엄한 죽음을 맞이한다. 늑대는 가장 용감한 개가 먼저 자기에게 덤비는 것을 보고 목을 물고 놓지 않는다. 늑대는 투쟁할 줄 알았다. 만일 그 투쟁이 무익하고 소용이 없을 때는 투쟁을 포기하고 자기 운명을 감수하는 것이다. 투쟁할 때는 투쟁하다가 불가능하면 침묵을 지키면서 자기 운명을 감수하라는 것이다. 늑대가 개의 목을 놓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다. 만일 늑대가 개의 목을 놓아 주었다면 자제심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끝까지 투쟁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늑대가 사냥꾼에게 덤비지 않은 것은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심한 분노에서 행동하는 것이지 냉정한 이성을 지키는 행위는 아니다. 우리 모두는 같은 숙명을 타고난 존재들이자 동포다. 그럴 바엔 같은 처지의 존재끼리 동포애와 연민을 가져야 한다. 이 숭고한 정신이 자비다. 작게는 가족애로,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정신이다. <늑대의 죽음>에서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은 아버지 늑대의 희생이다. 이러한 자비와 희생의 정신이 있을 때, 우리는 서로를 위해 어떠한 고독이나 고통도 참을 수 있는 단계에 이를 수 있다. 고매한 인간으로서의 명예와 품위를 갖는 일이다. 늑대는 다만 경멸하는 눈빛으로 사냥꾼을 바라본다. 그 눈빛은 말없이 죽을 줄 안다는 긍지를 보이는 것처럼 보였다. 신음하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간청하지도 말아야 한다. 신음하는 것, 눈물을 흘리는 것, 기도하는 것, 이러한 행위는 인간의 품위를 상실하는 일이다. 어떤 불행과 고통 앞에서도 최선의 노력을 하다가 안 되면 극기하고 말없이 운명을 감수하는 것이 극기 사상이며,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인간이 다다라야 할 지고의 단계라는 것이다.   각주 1) 로마 신화에 나오는 숲의 여신으로 야생동물의 수호신, 여성의 수호신이다. 그리스 신화의 아르테미스와 동일시된다.  
1948    중국 송대 詞人 - 柳永 댓글:  조회:3903  추천:0  2016-12-13
유영 사선 [ 柳永 詞選 ]   저자 유영(柳永, 987-1053) 국가 중국 분야 사(詞) 해설자 박홍준(성신여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부교수 ) 중국 송대(宋代) 문학을 대표하는 장르로 흔히 송사(宋詞)를 꼽는다. 송사는 당시 유행하던 음악의 곡조에 맞춰 지은 노래 가사로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유행가 가사와 같은 것이다. 찬란했던 당시(唐詩)의 영광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을 것 같지만, 황제로부터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송대를 살았던 모든 계층에게 두루 사랑을 받았던 문학은 오히려 송사였다. 그리고 송사를 창작한 사인(詞人)들 가운데서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던 작가가 바로 이 책에서 살펴볼 유영(柳永)이다. 그렇다면 과연 송사의 어떤 매력이, 그리고 유영 사의 어떤 특징이 사람들을 사로잡았을까? 송대는 중국문학사에 있어서 중요한 분수령이 되는 시기였다. 즉 이전의 귀족 중심의 문언(文言) 문학에서 이후 민간 중심의 백화(白話) 문학으로 전환되는 시점이 바로 송대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의 조짐은 중당 시기 안사의 난에서 출발했겠지만, 여러 사회문화적 배경이 제대로 갖추어진 것은 아무래도 송대에 들어와서였다. 강남 도시 경제의 발달로 인구가 증가했고, 많은 도시민의 오락 생활을 위하여 와사(瓦肆)와 구란(勾欄) 같은 대형 공연장이 곳곳에 들어섰다. 이들이 추구했던 예술은 많은 이들이 함께 즐기면서 공감할 수 있는 대중적이고 통속적인 것이었다. 또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함께 생활하면서 복잡한 사회문제들이 많이 발생했고, 이러한 인간상의 이해와 사건의 설명을 위해 자세한 해설식의 서사적 문예가 환영을 받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이야기꾼들이 들려주던 설화(說話)의 대본인 화본(話本)의 강사(講史)나 소설(小說)이 바로 그러한 예가 될 것이고, 문인들이 창작했던 시나 산문도 서사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민간에서 즐겨 부르던 노래의 가사인 송사도 점차 편폭이 길어지면서 가사 전개에 용이한 새로운 형식의 작품을 추구하게 되었다. 유영의 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출현했고, 당시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 그리움과 환희의 감정을 펼쳐낸 만사(慢詞)라는 형식을 도입하여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하지만 만사라는 새로운 형식의 송사가 가져온 변화는 단순히 작품의 길이가 늘어난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형식에 걸맞은 새로운 내용을 갖추었는데, 그 새로운 내용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일상의 추구’라고 할 수 있다. 즉 유영 사는 모호하고 심각한 관념의 세계에서 벗어나 생생한 현실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묘사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이별을 서술할 때도 이별의 아픔을 알듯 모를 듯한 언어로 형상화하기보다는 이별의 전체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상세히 서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유영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우림령(雨霖鈴)>의 경우 이별의 장소와 시간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하여 이별하는 순간의 안타까움을 회상하고, 다시 이별 후 고독한 세월을 보내며 그리워하는 마음까지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창작 기법을 ‘포서(鋪敍)’라고 하는데, 유영의 만사는 확대된 편폭을 기반으로 생활 속에서 마주치는 각종 사건에 대한 자세한 서술을 마다하지 않는다. 독자 스스로 어떤 의미를 찾기 위하여 노력할 필요 없이 작가가 시시콜콜한 정황들을 친절히 소개하여 궁금하고 가려운 것들을 속 시원히 풀어주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유영 사가 환영을 받았던 이유는 일상적인 삶을 그려내면서도 거기에 다소 자극적이고 충동적인 감각을 함께 담아내었기 때문이다. 앞서 유영 사가 현실에 밀착된 일상의 세계를 추구한다고 했는데, 단순히 일상의 세계만을 그려내었다면 유영 사의 인기가 그렇게 높지는 못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국화신(菊花新)> 같은 작품의 경우 사랑하는 두 남녀의 저녁 시간을 그리고 있는데, 사랑 앞에서 위축되지 않고 대담한 여인의 언행이 인상적이다. 게다가 유영 사에서는 남성 화자가 등장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그리움의 심경을 솔직하게 토로한 작품이 상당수 있다. 이것은 예전 작품들이 주로 여인을 작중 화자로 등장시켜 감정을 표현하던 것과는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유가적인 관념에 익숙한 문인들의 입장에서는 가까이하기엔 부담스러운 낯부끄러움이었지만, 당시 새로운 문예를 추구하던 민간 계층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가까이할 수밖에 없는 신선함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대중적인 인기를 한 몸에 받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작가였지만 정작 유영 자신은 그렇게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 과거 급제를 통한 관료 사회 진출이라는 유일한 길만이 인정되던 당시 사회에서 통속적인 문학 작가로서의 길을 선택한 유영의 인생 역정이 순탄치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것이다. 여러 차례 과거에 도전했지만 그때마다 고배를 마셨고,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창작한 작품의 창작 경향이 지나치게 통속적이라는 이유로 탈락한 적도 있었다. 말년에 다행히 과거에 급제는 했지만 지방의 말단 관직을 전전해야 했고, 둔전원외랑(屯田員外郞)이라는 벼슬로 생을 마쳤기에 세상에서는 그를 유 둔전(柳屯田)이라고도 부른다. 이처럼 변변한 벼슬을 하지 못해 정확한 생몰 기록이 전하지 않지만, 대략적으로 987년 출생하여 1053년 전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사망 시기에 관해서는 대체로 의견 일치를 보고 있지만, 출생한 연도에 관해서는 아직까지도 확실하게 입증이 되지 않은 상태다. 학자에 따라서 971년에서 990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는데, 본서에서는 탕구이장(唐圭璋)의 설을 따라 987년으로 보았다. 유영의 생년에 관해서 이렇게 의견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송사의 전개 과정에 대한 인식 차이 때문이다. 즉 송사의 전개 과정에 있어서 먼저 당오대(唐五代)의 화간파(花間派)를 계승한 소령(小令)의 작가들이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만사가 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유영의 생년을 안수(晏殊, 991∼1055)나 구양수(歐陽修, 1007∼1072) 같은 소령 작가의 뒤에 위치시키는 것이고, 그와는 달리 소령과 만사가 동시에 병행하여 발전했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유영의 생년을 조금 앞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에 의한다면 유영의 생년은 결코 당시 유명한 소령 작가들보다 늦지 않으며, 따라서 소령과 만사는 당시에 병행하여 발전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즉 당시에 소령과 만사로 대표되는 송사의 작품군이 함께 존재했고, 이들은 각각의 작품을 선호하는 작가와 독자층의 사랑을 받으면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유영과 관련해서 또 하나 언급해야 할 사항은 그에 대한 평가의 문제다. 유영이 생존했을 당시는 물론이고 그의 사후에 많은 문인들은 그의 작품이 저속하다고 비판했으며, 아울러 그의 인품을 폄하하는 발언을 쏟아내었다. 거의 인신공격인 그런 비평에 대해서 일일이 대응할 필요는 없지만, 그들이 놓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유영 사는 당시 악공(樂工)이나 가기(歌妓)들의 청탁을 받아 창작된 작품이라는 것이다. 여성 화자로 때로는 남성 화자로 창작된 유영의 작품들이 당시 와사와 구란 같은 공연장에서 노래 부르는 가기들의 청탁으로 인한 것이었다면, 그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도 달리할 필요가 있다. 즉 작품을 통해 작가 유영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필요로 했던 독자(讀者)나 청자(聽者)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으며 그러한 노래를 소비했던 당시 사회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유영 사는 송대 사회의 사회문화적 배경하에서 출현한 하나의 새로운 문화적 상품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문화 상품인 유영 사를 단순히 유영 개인의 작품으로, 그의 사상과 감정이 담긴 작품으로만 파악했을 때, 유영 개인에 대한 비난과 공격으로 나가게 되는 불상사가 벌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유영 사를 통해서 송대 사회를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 그리움을 느낄 수 있으며, 동시에 당시에 새롭게 대두된 시민 계층의 변화된 정서를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유영 사의 의미는 그것이 송대 사회를 반영한 문학이었으며, 또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한 문학이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겠다. 보통 중국문학에서는 원대(元代)의 희곡인 잡극(雜劇)에서부터 민간 계층의 새로운 문학이 출현했다고 보지만, 유영 사의 여러 특징을 고려할 때 그 시기를 더 앞당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유영 사 가운데 일부 작품의 경우 소설적인 이야기가 삽입되거나(<장상사(長相思)>), 대화체를 활용한 극적 구성(<투백화 3(鬪百花 其三)>) 등 전통적인 시가의 창작법과는 다른 특별한 창작법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유영 사는 당시의 민간 연예인 백화소설이나 희곡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향후 더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유영 사의 판본과 번역 유영의 사는 그가 생존했을 당시에 이미 일반에 널리 애창되었기 때문에 송대부터 그의 사집이 간행되었다. 그 작품집의 이름은 ≪악장집(樂章集)≫인데, 이 송대 ≪악장집≫은 명ㆍ청대까지는 전해진 것 같으나, 현재는 사라져 원래의 면모를 알 수는 없다. 현재까지 전하는 ≪악장집≫의 판본은 모두 32종인데, 어떤 것은 단지 목록만 있고 전하지 않아 비교적 완정한 것으로는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차례로 명대(明代) 모진(毛晉, 1598∼1659)의 급고각(汲古閣)에서 간행한 ≪송육십명가사(宋六十名家詞)≫에 수록된 ≪악장집≫ 1권, 청대(淸代) 모부계(毛斧季, 1640∼?)가 간행한 ≪악장집≫ 3권, 주샤오짱(朱孝臧)의 ≪강촌총서(彊邨叢書)≫에 수록된 ≪악장집≫ 3권(1901), 그리고 근인 탕구이장의 ≪전송사(全宋詞)≫에 수록된 ≪악장집≫ 3권(중화서국, 1965)이 비교적 믿을 만한 판본이다. 그리고 현재에는 대부분 주샤오짱의 판본이나 탕구이장의 판본을 의지하여 유영 사에 대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탕구이장의 판본은 본래 주샤오짱의 판본을 근본으로 하면서 부분적으로 모부계를 참고했으므로 주샤오짱의 판본이 비교적 신뢰할 만하다. 이번 번역에서는 쉐루이성(薛瑞生)이 교주한 ≪악장집교주(樂章集校註)≫(중화서국, 1994)를 저본으로 삼았는데, 이 책 역시 주샤오짱의 판본을 근본으로 하여 정리했다고 밝히고 있다. 유영 사의 작품 수는 판본에 따라 206수에서 216수를 오르내리는데, 주샤오짱의 판본에서는 206수를 정리했고, 탕구이장의 판본은 여기에 7수를 보충하여 213수를 수록했다. 쉐루이성 교주본에서는 주샤오짱의 206수에 10수를 보충하여 216수를 실어놓았다. 또한 중국의 주석서로 참고할 만한 책으로는 셰타오팡(謝桃坊)의 ≪유영사상석집(柳永詞賞析集)≫[파촉서사(巴蜀書社), 1987], 량쉐윈(梁雪芸)의 ≪유영 사선(柳永詞選)≫[삼련서점(三聯書店), 1989], 야오쉐셴(姚學賢)과 룽젠궈(龍建國)가 공편한 ≪유영사상주급집평(柳永詞詳注及集評)≫[중주고적출판사(中州古籍出版社), 1991]이 있다. 그 외에도 유영 사에 대한 인기를 반영하듯이 최근 들어 유영 사에 관한 많은 주석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작품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 몇 가지 당부할 것이 있는데, 우선 작품을 작품 자체로 보아달라는 것이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그동안 유영 사를 너무 전통적인 시각에서만 바라보아 어떻게 문인이 이런 작품을 썼을까 비판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작품 속의 사랑 이야기를 단지 유영 개인의 이야기로 생각해서 비판한다면, 유영 사의 진면목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유영 사는 송대라는 특수한 시대적 상황에서 만들어진 사회문화적 산물이다. 그러므로 작품을 통해 어떤 사회문화적 배경 속에서 이런 작품들이 탄생했을지 한번 생각해 본다면 전체적인 작품의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유영 사의 새로운 내용과 형식에 주목하기 바란다. 유영 사의 내용이 지금 우리의 시각에서는 별로 새로울 것이 없는 것이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제재였다. 또한 유영 사의 경우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제재의 발굴에도 적극적이어서 송사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아울러 일부 작품의 경우에는 단순히 서정적인 가사의 전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사적인 이야기나 극적인 대화도 삽입하여 송사의 새로운 전개에도 기여한 바가 크다.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작품을 읽을 때 여기에는 어떤 이야기가 들어있는지, 아니면 이 작품은 어떤 방식으로 노래 불렸을지 상상하면서 읽는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1947    중국 "문학의 자각"시인 - 陸機 댓글:  조회:3338  추천:0  2016-12-13
육기 시선 [ 陸機 詩選 ]   저자 육기(陸機, 261-303) 국가 중국 분야 시 해설자 이규일(영동대학교 중국어중국통상학과 전임강사) 3세기는 시사(詩史)의 발전 흐름이 민가(民歌)에서 문인시(文人詩)로 전환되는 시기다. 민간의 백성 대신 문인들이 시 창작의 주체가 되다 보니 문인의 기호와 풍격이 담긴 작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일상에서 느끼는 삶의 애환이나 남녀 간의 정을 노래하는 민가풍의 작품도 여전히 창작되었지만, 작자의 정치적 포부나 좌절을 형상화하는 작품이 많이 출현한 것이다. 또 이전까지는 글을 쓰고 시를 지으면서도 예술이라는 행위에 대한 의식이 없었지만, 위진(魏晉) 시대에 와서는 문학이 뭔가 특수한 영역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문학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먹고사는 일과는 구분되는, 존재로서의 나를 표현하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무엇’이라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루쉰은 이러한 의미에서 “위진은 문학의 자각 시대”라고 표현했다. 육기(陸機)는 ‘문학의 자각’을 보여준 시인 가운데 하나다. 그가 다른 문인과 구분되는 한 가지 특징은 문학의 정체에 대해 이성적인 태도로 사고했다는 점이다. 그는 뛰어난 작가이자 날카로운 이론가다. 그가 쓴 문학 이론서인 ≪문부(文賦)≫는 중국 문학사에서 “처음으로 문학 창작의 이론을 전면적이고 체계적으로 연구한” 글로 평가받는다. 당시의 현학(玄學)으로 인해 유행하던 철학적 개념들을 문학의 영역에 도입해 이론적으로 접근했으며, 자주 발생하는 오류와 대안, 이상적인 심미관, 상상력과 영감, 문체와 풍격 등 창작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했다. ≪문부≫는 “시는 감정을 따라 우러나오는 것이므로 아름다워야 한다(詩緣情而綺靡)”라고 말함으로써 ‘아름다움’을 문학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속성으로 제시했다. 이는 중국의 문학 관념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육기가 말하는 ‘아름다움’은 사상이나 내용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언어와 문자의 형식적 아름다움이다. 즉 도덕이나 인격과는 무관한, 예술로서의 문학 그 자체의 미감이다. 유가(儒家)에서는 표현의 미감을 경시해 단순하고 투박한 것을 이상적으로 생각했지만, 육기는 유가 문학 사상의 제약을 넘어 심미성을 인정한 것이다. ≪문부≫에서 문학 창작의 가치와 즐거움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글을 쓰는 일은 너무나 즐거우니 실로 성현들이 흠모했던 바다. 텅 빈 곳을 살펴 형상을 찾고 고요한 곳을 두드려 음을 찾아내는 것이다. 아스라한 생각을 한 척 비단 위에 담아내고 넘치는 감정을 마음에서 토해낸다. 언어는 그 생각을 넓혀 더욱 광활하게 만들며 생각은 그 감정을 눌러 더욱 깊게 만든다. 아름다운 꽃들의 향기를 널리 퍼뜨리고 푸른 가지들을 무성하게 키워낸다. 찬란하도다. 바람이 일어 회오리처럼 우뚝 선다. 풍성하도다. 구름이 문장의 숲에서 뭉게뭉게 일어난다. 육기 이전에도 조비(曹丕)가 문학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발언을 했지만 심미성에 대한 언급은 아니었다. 문학의 미학적 가치를 발견한 것은 육기의 공헌이다. 미에 대한 탐구를 쾌락과 고통을 오가는 과정으로까지 인식한 것은 중국 문학 이론의 새로운 개척이라고 할 수 있다. 뛰어난 시인으로서 육기가 가장 많이 고민하고 표현한 주제는 생명에 대한 애상이다. 생명에 대한 감상을 노래하는 것은 위진남북조 문학의 보편적인 현상인데 당시 전염병 창궐과 빈번한 전란 때문에 죽음을 일상적으로 접했기 때문이다. 육기와 자주 비교되던 시인 반악(潘岳)은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도망시(悼亡詩)>로 유명했고, 육기는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과 사고가 담긴 시를 많이 지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도 상당히 다양했다. 예를 들어 <달무리야(月重輪行)>, <햇무리야(日重光行)>, <짧은 노래(短歌行)> 등의 작품은 인생의 짧음과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슬퍼하고 한탄하는데 이런 정서는 육기의 작품에서 너무나 보편적인 기조다. 또 <동탁이 도망치다(董桃行)>, <해가 동쪽에서 서문으로 지다(順東西門行)> 등의 시는 생명의 순간성에 대한 슬픔이 급시행락(及時行樂)의 주제로 발전한다. 즉 어차피 살다가 죽을 테니 후회 없이 신나게 삶을 즐기자는 생각이다. 고시에 “왜 등불을 들고 밤새워 놀지 않는가”라는 구절이 있는데 인생이 짧아 밤 시간도 아까우니 등불을 켜고 밤새워 놀자는 내용이다. 육기의 시에도 이 구절이 자주 차용된다. 생명에 대한 민간 정서가 반영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또 <만가(挽歌詩)>에는 죽음에 대한 육기의 독특한 사고가 담겨 있다. 이 작품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죽은 자의 입장이 되어 죽음을 바라본다. 이런 발상은 중국 시사에서 육기가 처음 시도한 것으로, 죽음에 대해 그의 생각이 얼마나 깊었는지 보여준다. 반악의 작품은 죽은 아내를 애도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슬픔의 감정을 남김 없이 드러내고 있지만, 육기의 <만가>는 죽음을 관찰하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감정이 드러나지 않고 묘사 기법도 매우 사실적이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생명과 입신양명을 동일시하는 육기의 가치관이다. 어떻게 보면 입신양명에 대한 소망은 생명에 대한 애상과 맞물려 있는 문제다. 육기의 입장에서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입신양명이며 인생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시공간적 배경인데, 그러한 인생이 짧기에 그는 더욱 초조하고 절박하게 입신양명을 서두르게 된다. 그래서 육기는 많은 작품에서 인생이 짧으니 서둘러 큰 공을 세우라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급시행락의 주제가 민간의 생명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면 입신양명의 주제는 문인의 생명 정서를 대변한다. ‘덕을 세우는 일[立德]’, ‘공을 세우는 일[立功]’, ‘말을 세우는 일[立言]’을 ‘삼불후(三不朽)’라고 한다. 공을 세우거나 글을 남기는 일은 사후에도 후세에 이름을 전할 수 있기 때문에 육체적 생명을 연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긴 노래(長歌行)>는 생명에 대한 육기의 가치관이 전형적으로 표현된 작품이다. 생명을 노래하는 육기의 많은 작품에는 ‘천도(天道)’, ‘인도(人道)’, ‘길흉화복(吉凶禍福)’ 등 숙명적 정서를 담은 개념이 많이 등장한다. 또 계절이 지나가는 일을 매우 민감하게 생각했는데, 이것은 육기의 학자적 성향과 관계있다. 육기는 보수적인 유학을 계승하던 오(吳)나라의 학문적 배경에서 성장했기에 천상의 징조가 세상의 일을 예시한다는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을 신봉했다. 그래서 인생의 애환을 묘사하기 전에 먼저 별과 태양, 달과 바람 등의 이미지를 묘사하는 격식을 애용했다. 한 해가 저물고 만물이 쇠락하는 것은 인간의 운명도 이렇게 될 것이라는 하늘의 예시와 같기 때문에 육기의 시에서 세모 풍경은 생명의 영멸을 상징하는 장치가 된다. 서정의 표현이지만 매우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나 육기는 오나라 최고 명문가의 적자로 조국과 가문이 멸망한 상황에서 자신의 조국과 가문을 멸망시킨 진(晉)나라 황실을 섬겼다. 육기에게 좌절감, 분노, 복수심 등의 격정이 없었을 것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특수한 처지 때문에 육기는 마음속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청대의 문인 중에는 육기가 굴곡 많은 인생을 살았으면서 왜 시 속에 진한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는지 의문을 표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으므로 육기가 관념적인 서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낙양(洛陽)은 육기가 성장한 남방과 자연환경도 다르고 문화적 환경도 달랐다. 그는 스스로를 항상 나그네라고 생각하면서 살았고 시에서도 인생을 나그네로 묘사했다. 육기는 스스로를 “수향(水鄕)의 선비”라고 묘사했는데, 오나라를 대표하는 자연을 물이라고 한다면 낙양을 대표하는 자연은 숲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이별시를 보면 물가에서 형제들과 이별하고 숲길을 걸어가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물의 고장에서 나고 자랐기에 그의 시에서 숲은 이별과 슬픔과 공포를 상징하는 소재가 된다. 육기는 인생의 나그네가 되어 진지하게 인생과 운명을 고민했고, 그것을 관념적인 방식으로 표현했다. 때로는 나그네의 슬픔을 읊기도 하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기도 한다. 그리고 <장안의 좁고 굽은 길(長安有狹邪行)> 같은 작품은 나그네의 실존적 고뇌를 묘사했다. 이 시는 자신이 낙양의 갈림길 위에 서 있다고 말하며 시작된다. 낙양은 그에게 낯선 타향이며 전쟁 포로로 압송되었던 두려운 공간이다. 그리고 길은 그가 선택해야 할 인생 항로의 상징이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 성공과 실패의 갈림길에 서 있는 상황이다. 그는 “원칙대로 살아가면 멀리까지 닿지 못하는 법 / 반듯한 걸음걸이로 어찌 남을 따라가리”라고 말한다. 항상 원칙을 견지하는 근엄한 유학자로 살아왔지만 실존의 순간 앞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가치관이 흔들리고 혼란스럽다. 누구보다 비극적이고 고독한 인생의 주인공이었기에 맞이해야 했던 고민이다. 또 그의 서정시가 자아의 진솔한 고백을 포기하고 강한 상징성과 관념성을 선택해야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육기는 문학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의 인생은 아름답지 않았다. 누구보다 고통스러웠고 비극적으로 끝났다. 하지만 생명에 대한 깊은 사색, 감성적 체험과 이성적 표현으로 빚은 그의 서정시는 문인시의 한 전형이 되었고 중국 문학의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46    중국 송대 詞人 - 리청조 댓글:  조회:3277  추천:1  2016-12-13
이청조 사선 [ 李淸照詞選 ]   저자 이청조(李淸照, 1081-1141 추정) 국가 중국 분야 사(詞) 해설자 이지운(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부 전임연구원) 사(詞)라는 체재가 다소 생소할지 모르겠지만, 운문의 일종으로서, 대략 성당(盛唐, 713∼765년) 전후에 발생하여 송대(宋代)에 가장 번성하였던 문학양식이다. 수당(隋唐) 시대에 유행했던 자극적이고 신선한 음악이었던 연악(燕樂)에 가사를 붙여 발전된 것으로, 시적인 면과 음악적인 면을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다. 따라서 시여(詩餘), 곡자(曲子), 악부(樂府), 장단구(長短句) 등의 다양한 명칭이 있다. 이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가락에 맞추어 가사를 지어 불렀기 때문에 장단이 가지런하지 않고 매 구마다 쉬는 곳이 같지 않은 특색이 있다. 사를 창작할 때에는 일정하게 정해진 악보인 사조(詞調), 즉 곡조에 따라 지어져야 했고, 사조는 각각 특정한 명칭이 있었는데, 이를 사패(詞牌)라 하였으며 먼저 곡조가 있는 상태에서 가사를 지었기 때문에 사를 짓는 것을 전사(塡詞), 즉 ‘가사로 메운다’라 하였다. 사패는 일종의 가락의 명칭이기 때문에 사의 내용과 전혀 관련이 없어 시의 제목이 내용과 긴밀한 연관이 있는 것과는 다르다. 아쉽게도 현재는 그 가락이 실전되어 그저 사를 읽고 그 내용에 비추어 가락의 분위기 정도만 파악할 수 있을 뿐이어서 사의 전모를 파악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같은 운문이긴 하지만 사는 음악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담고 있는 내용도 시와는 구별되었다. 주로 술, 여색, 유희적인 것을 읊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앉아서는 경전이나 역사서를 읽고 누워서는 소설을 읽으며 뒷간에서는 사를 읽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경시되었다. 그러나 수많은 작가들이 아름다운 사를 지어 독자들의 심금을 울려왔으므로 그 지위는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시라는 것은 자신의 뜻을 펴내는 것으로 여겼던 반면 사는 자신의 정감을 쏟아내는 것이라 여겼다. 제재를 선택할 때에도 시는 장엄하고 정치적, 윤리도덕적인 측면이 강한 반면, 사는 서정적 성분이 강해 남녀 간의 애정을 주요 소재로 삼아 깊고 섬세한 내면을 완곡하고 함축적으로 표현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사가 발전함에 따라 염정적이고 개인적 신세타령에서 벗어나 시국에 대한 한탄이나 국가의 흥망성쇠 등까지도 읊게 되어 점차 시의 언지(言志) 기능까지도 겸하게 되었다. 사는 송대에 이르러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송대는 역대 제왕들과 문인들이 모두 사에 대한 관심과 열의가 높았으며 남녀고하를 막론하고 수많은 사인(詞人)들이 배출되었다. 특히 이청조는 중국문학사상 거의 유일하게 주목받고 있는 여성으로, 뛰어난 재능과 부모와 남편의 지지를 바탕으로 시ㆍ사ㆍ산문ㆍ문학비평ㆍ금석고증 등의 방면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두어 여성으로서는 매우 독특하며 높은 지위를 확보하고 있다. 이청조는 산동(山東) 제남(濟南)출신으로 학식이 높은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하게 자라고 교육받았으며, 조명성(趙明誠)과 혼인 후에도 계속 시사를 창작하는 한편 금석문과 서화의 정리에 힘을 기울였다. 그녀의 <금석록후서(金石錄後序)>에는 남편과 보냈던 시절에 대한 몇 가지 추억이 담겨 있는데, 신혼 초 남편이 태학생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을 때, 집에 돌아올 때면 의복을 전당잡히더라도 절에 가서 비문(碑文)과 과일을 사가지고 와서 부부가 서로 마주 앉아 비문을 감상하였었고, 때로는 고대의 서화나 기물 같은 금석예술품을 수집하는데 심취하였으며, 고전의 구절이 어느 책의 어느 쪽, 심지어 몇째 줄에 기재되어있는 지를 맞히는 게임을 하기도 하였다. 맞힌 사람은 통쾌하게 웃다가 찻잔을 쏟았던 경험까지 있었을 정도로 이 둘은 뜻이 잘 맞았던 부부였다. 그녀는 북송과 남송의 교체기에 활동하였기 때문에, 위와 같은 인생 전반기에 겪었던 평화와 안정뿐 아니라 후반기에 겪었던 혹독함과 비참함이 작품에 모두 표현되어 있어 여성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초기에는 자연경물과 자질구레한 일상생활을 읊어 청신한 작풍을 보여주고 있으며, 남편과 이별하고 나서는 주로 이별과 그리움으로 점철된 규원사(閨怨詞)를 쓰고 있다. 송의 남도 이후 남편과 사별하고는 망국의 한과 흥망에 대한 견해를 피력한 작품을 창작하여 여성 사인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후대 애국 사인들에게 전범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녀는 사의 음률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독특하고 새로운 단어와 구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여 자신의 복잡한 정감을 표현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이안체(易安體)’로 불리는 그녀만의 독특한 스타일이다. 이와 더불어 사의 예술성에 대한 정확한 견해가 담긴 ≪사론(詞論)≫이라는 비평문은 그녀로 하여금 사사(詞史)에 있어서 부동의 지위를 가져다주었다. 이청조를 ‘완약사(婉約詞)의 종주’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는 것은 그녀가 북송의 대표적인 완약파(婉約派) 사인들, 즉 유영(柳永), 진관(秦觀), 하주(賀鑄), 주방언(周邦彦) 등의 성과를 계승, 발전시켜 남송 시기의 새로운 사 발전의 가능성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청대(淸代) 사비평가였던 진정작(陳廷焯)은 “이청조는 독자적으로 길을 개척하였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 원류는 진관, 주방언으로부터 나왔으나 어휘를 구사하는 데는 대단히 창조적인 면을 보였다. 따라서 이청조는 이런 면에서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백우재사화(白雨齋詞話)≫)라 하여 그녀의 독창성을 인정한 바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재는 이청조의 작품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 이는 정본으로 삼을 만한 송본(宋本)의 이청조 작품집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인데, 조공무(晁公武)는 ≪군재독서지(郡齋讀書志)≫에서 ≪이이안집(李易安集)≫ 12권을 남겼다고 하였고, 황승(黃昇)은 ≪수옥집(漱玉集)≫3권이 있다 하였으며, ≪송사(宋史)≫에서는 ≪이안거사문집(易安居士文集)≫ 7권과 ≪이안사(易安詞)≫ 6권이 있다 한 것을 볼 때, 이청조의 작품이 당시에는 양적으로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할 때 수많은 일서(佚書)를 집록하면서도 이청조의 작품에 대해서는 집록한 바가 없었으니 송대부터 이청조의 작품집은 이미 실전되었던 듯하다. 그 후 몇몇 학자들이 이청조의 작품을 수집하여 작품집을 엮었으나 작품 수가 조금씩 차이가 나고 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수옥사(漱玉詞) 간본(刊本)으로 비교적 오래된 것으로, 명대(明代) 모진(毛晉)의 ≪시사잡조본(詩詞雜俎本)ㆍ수옥사(漱玉詞)≫가 있고, 근대의 것으로는 왕붕운(王鵬運)의 ≪사인재소각사본(四印齋所刻詞本)ㆍ수옥사(漱玉詞)≫, 조만리(趙萬里)의 ≪교집송금원인사본(校輯宋金元人詞本)≫, 호운익(胡雲翼)의 ≪수옥사집본(漱玉詞輯本)≫, 이문의(李文漪)의 ≪수옥집집본(漱玉集輯本)≫ 및 ≪전송사(全宋詞)≫본 이청조 사 49수가 있다.    
1945    대만 시인 - 葉維廉 댓글:  조회:3056  추천:0  2016-12-13
예웨이롄 시선 [ 葉維廉詩選 ]   저자 예웨이리엔(葉維廉, 1937- ) 국가 대만 분야 시 해설자 고찬경(부산대학교 박사과정 수료, 동아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강사) 시인의 창작이 그의 삶의 유ㆍ무형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집합체라면 예웨이롄(葉維廉)의 시 세계는 시간을 초월하고 공간을 넘나드는 여러 이질적 요소들의 착종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산과 추방, 국가와 민족, 중국과 서양, 과거와 미래, 현대와 전통…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삶의 조건과 의식적인 시적 추구는 이 같은 주제 안에서 자아와 세계에 대한 독특한 감수를 담은 일련의 시를 배태했다. 시인 예웨이롄은 시적 탐구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해 간다. 중국 대륙, 홍콩, 타이완 그리고 미국을 오가는 생활공간의 변화는 그의 의식의 성장과 더불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과 그에 대한 시적 탐구로 이어졌다. 이 같은 예웨이롄의 자의식은 현실에 대한 관망이나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 이어지기 어려운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끊임없이 ‘나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에 속해 있는가’ 하는, 존재의 귀속 문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자의 또는 타의로 시골에서 도시로, 일본의 식민지에서 영국의 식민지로, 다시 타이완으로부터 미국에 이르기까지 각 지역을 전전하며 그는 신체적, 정신적, 언어적 혼란으로 인해 ‘모든 감각기관과 혈관, 심지어 땀구멍과 손가락 끝까지 파고드는 불안’에 시달려야 했다. 이 같은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 기인한 불안과 혼란, 언어의 착종과 시인의 내면세계를 이루는 이질적 문화의 공존은 그의 시작(詩作)을 통해 고스란히 확인된다. 1950년 당시 중국 대륙을 떠나 타이완으로의 이주를 강요받은 시인들은 익숙한 중국 대륙이라는 문화와 창작 환경으로부터 분리됨에 따라 불안정한 ‘현재’와 막연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그들은 파편화된 문화 공간 속에서 새로이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한편, 그 과정 가운데의 복합적인 내면의 심리 상태를 시를 통해 드러낸다. 추방과 이산에 따른 우울과 방황, 향수와 고독뿐 아니라 단절 후 재건이라는 자각적 심미 의식의 회복이 그들의 시, 특히 예웨이롄의 시적 여정에 고스란히 노정되어 있다. 외재적 타격을 내재화해 가는 이 모든 과정은 개인적인 동시에 역사적인 경험의 반영이 아닐 수 없다. 예웨이롄 시의 특징은 이 같은 개인 정체성의 탐구가 사회적, 국가적, 민족적 차원으로 외연을 가짐에 따라 그의 시 또한 문학사적 의의를 함께 획득하게 되었다는 데 있다. 아울러 그의 시의 현대성의 추구가 대륙의 1930∼1940년대 모더니즘의 계도로부터 1950∼1960년대 타이완 시단의 모더니즘에 경도된 후, 중국 전통 시에 대한 의식적 추구로 화했다는 점 또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대륙과 홍콩, 타이완 등지의 각각의 상이한 특성을 품은 모더니즘의 양상이 그에게서 계승되고 융화되어 재창조되고 있는 것이다. 1950년대 타이완의 현대 시인들은 대륙의 역사적 경험을 내재화해 타이완의 사회ㆍ정치적 현실에 조응해야 하는 시적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생활공간과 창작 환경의 변화 속에 그들은 상술한 바와 같은 복합적 정서를 고도로 응축된 시어와 다의적 이미지 속에 이식해 가기 시작한다. 예웨이롄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이 무렵 그는 1930∼1940년대 대륙의 언어미학으로부터의 경험을 타이완이라는 창작 환경 속에 이입해 간다. 역사의 재건과 민족의 자각이라는 제재는 이산자인 시인에게 일종의 사명과 책임으로 의식화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타의 또는 자의에 따른 추방과 이산의 경험이 오히려 시인의 민족의식을 강화하는 기제로 작용한 것이다. 그는 특정 국가나 특정 지역이 아닌 무형의 민족의 품을 귀속처로 삼은 듯하다. 그것은 ‘조국과의 영원한 결별’이라는 현실에 맞닥뜨린 후, 모호하기만 했던 ‘신분 정체성’을 인식해 가는 과정 가운데 획득한 ‘문화 정체성’으로의 귀결이었다. 즉, 당시 대륙과 홍콩, 타이완은 각각 이질적인 정치ㆍ사회ㆍ문화 환경 속에 놓여 있으면서 심지어 대결 양상을 띠고 반목했지만, 세 영토는 결국 시인에게 동질의 문화를 공유한 하나의 공동체로 인식된 것이다. 이 때문에 시인에게 ‘민족’은 영토를 뛰어넘고 국경을 초월하는 ‘우리’로 호칭해도 전혀 거리낄 것 없는 친숙하고도 자연스러운 개념이 된다. 이처럼 정체성의 탐구와 현대성에 대한 추구가 그 깊이를 더해 갈수록 시인은 중국적인 어떤 익숙한 공간과 민족의 보편 정서로 회귀하게 된다. 이 같은 정향은 시의 예술적 탐색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예웨이롄은 중국 고전시의 성과를 현대성을 갖춘 시적 기교에 의식적으로 융화시켜 감으로써 새로운 현대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예웨이롄의 초기 시는 타이완 모더니즘 시인의 작품들 가운데서도 가장 난해한 작품으로 분류되는데, 그 이유는 일상적이고 일반적인 사유의 방식을 초월해 의식적으로 작품 가운데 설명적인 서술적 요소를 배제하고, 사물의 객관적인 형상과 시인 사유의 결과만을 독자에게 알려 주기 때문이다. 사물에 대한 대략적 묘사마저 배제함으로써 독자는 시인의 사고의 과정을 파악하기도 힘들 뿐더러 작품 속 대강의 뜻도 확정하기 어렵다. 시인은 다만 ‘이러함’만을 드러낼 뿐, 왜 이러한지에 대해서는 독자에게 알려 주지 않는다. 독자는 그저 작품에서 사물의 평면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시에서의 현대성의 추구는 그가 고백한 대로 중국의 1930∼1940년대 시인들의 창작, 특히 볜즈린(卞之琳)과 신디(辛笛)의 창작에 힘입은 바 크다. 이에 대해 예웨이롄은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1930∼1940년대의 시인과 비평가를 발견하고 그들의 사색을 계승하게 되었으며 전략적 토대가 되는 언어의 간결함을 찾아내게 되었다. <나와 1930∼1940년대의 혈연관계(我和三四十年代的血緣關係)>라는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정서의 내재적 호응’, ‘장면의 변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눈앞에 보여 주기’, ‘극적 장면’, ‘사건의 율동과 전개의 긴박감’ 등은 이후의 시 속에서 음악적 경향과 분위기의 융합으로부터 분위기의 풍부함과 효과를 얻어 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 5ㆍ4운동 이래 중국의 현대 시인들은 세계문학과의 조우를 통해 시의 형식과 내용을 부단히 확장해 갔다. 세계문학의 거대한 조류는 중국 현대시라는 드넓은 미개척지에 일시에 들이쳤고, 시인들 역시 이를 계기로 다양한 문학적 시도를 통해 시의 영역을 부단히 넓혀 갔다. 그러나 중국과 서구의 역사적 경험의 상이함과 문화적 바탕의 이질성으로 말미암아 서구 문예의 성과는 중국의 전통 정감이라는 필터를 거쳐 이식될 수밖에 없었다. 중국 시와 서구 시의 이 같은 상호 교류로 인해 중국의 현대시는 부단히 확장되고 성숙해 갔다. 예웨이롄은 상이한 이 두 세계의 내면화를 통해 존재와 세계에 대한 사유의 총체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나는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고심하며, ‘탐구’하고 ‘모색’해 갔다. 이를 위해 전통과 현대의 상이한 문화적 시공을 넘나들며 문화와 역사의 다층적 반향을 두루 살펴보았다. 아울러 고전적 어휘와 이미지, 구법을 이용해 새로움을 빚거나 중국 시가 중시하는 현현[呈現]의 방식을 사용해 시각적 이미지와 사건을 한데 어울렀다. 이 밖에 서양 현대시가 제공하는 함축과 다의가 농축된 언어로써 어지러이 산산조각 난 현대 중국의 경험을 길들여 갔다.” 1950∼1960년대 타이완의 많은 시인들은 고전적 어휘와 이미지를 자신의 시에 되살림으로써 중국문학의 본류를 재현하려 했다. 예웨이롄이 밝힌 ‘산산조각 난 현대 중국의 경험을 길들이기’ 위한 그 모든 ‘탐구’와 ‘모색’은 결국 ‘파편화된 문화 공간’을 ‘파괴’하고 ‘재건’하기 위한 시인의 주체적 자각이자 역사적 사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예웨이롄에 대한 중국학자들의 평가는 대체로 대동소이했다. 그의 초기 시작(詩作)을 서양 현대시의 학습과 적용에 실패한 사례로 꼽는가 하면, 순수시 창작을 시인의 역사적 사명의 방기로 단정 짓는 서술도 보인다. 이 같은 평가는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이 종결된 이후, 문예의 해빙기를 맞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중국 문단의 수준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그때까지도 사회ㆍ정치적 효용성의 여부와 대중과의 소통 가능성을 시인과 개별 문학작품에 대한 부동의 평가 기준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훙쯔청(洪子誠), 류덩한(劉登翰)이 함께 쓴 ≪중국 당대 신시사(中國當代新詩史)≫(1993)에 이르면 더 이상 난해하다는 이유로 예웨이롄의 시를 폄훼하는 기술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최근 수년 사이 시인 예웨이롄을 새롭게 주목하는 한편, 중국 당대 문학의 숨겨진 성과로 그의 시를 재평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여기저기에서 포착된다. 주요 정기간행물에 그에 대한 특집 기사가 게재되는가 하면, 2008년에는 총 열한 권으로 구성된 예웨이롄 문집이 인민문학출판사와 안후이(安徽)교육출판사를 통해 출간되었다. 아울러 같은 해 3월 말에는 북경대학 중국현대시연구소(北京大學中國新詩硏究所)와 수도사범대학 중국시연구센터(首都師範大學中國詩歌硏究中心) 공동 주최로 ‘예웨이롄 시 창작 심포지엄(葉維廉詩歌創作硏討會)’이 개최되기도 했다. 예웨이롄에 대한 이 같은 관심의 증폭은 근래 중국문학의 세계적 확장을 위한 ‘해외 화문 문학’의 정립에 그가 좋은 모델이 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예웨이롄의 시는 탐구와 탐색의 기록이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회의로부터 시작되는 자아 정체성의 끊임없는 탐구는 그가 살아온 현대사의 특수한 상황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민족 정체성의 탐구로 변화했다. 상술했다시피 예웨이롄 시의 특징은 이 같은 개인 정체성의 탐구가 사회적, 국가적, 민족적 차원에서 이루어짐에 따라 그의 시 또한 문학사적 의의를 함께 획득하게 되었다는 데 있다. 그는 끊임없는 시적 탐구와 현대성의 추구를 통해 이 같은 정체성의 문제를 해소해 간다. 즉, 1930∼1940년대 중국 모더니즘의 계승자이자 1950∼1960년대 타이완 모더니즘의 선도자인 예웨이롄은 이 같은 현대성의 계승과 확장의 과정을 거친 뒤 중국 전통 시와 서양 현대시의 융합을 통한 현대성의 재창조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청명한 푸른 하늘에 언뜻 스쳐 가는 검은 새 한 마리’와도 같은 순간의 포착과 그 기록으로 구성된다. 그의 시의 문학사적 의의는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 전통과 현대를 두루 아우르는 이 같은 시적 조화라는 창조적 성과에 있다 할 것이다.    
1944    아일랜드 시인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댓글:  조회:5758  추천:1  2016-12-11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William Butler Yeats 1911년에 조지 찰스 베레스포드가 찍은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사진 출생 1865년 6월 13일  아일랜드 더블린 샌디마운트 사망 1939년 1월 28일 (73세)  프랑스 제3공화국 망통 Hôtel Idéal Séjour 직업 시인 국적  아일랜드 사조 시 수상내역 노벨문학상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 1865년 6월 13일 ~ 1939년 1월 28일)는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극작가로 192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노벨 위원회는 "고도의 예술적인 양식으로 전체 나라의 영혼을 표현한, 영감을 받은 시"라는 평가를 남겼다. 아일랜드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노벨상을 받았다.[1] 예이츠는 노벨상을 수상한 이후에도 자신들의 뛰어난 작품들을 완성해 낸 몇 안되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2] 예술가인 잭 버틀러 예이츠의 형이며 존 버틀러 예이츠의 아들이다.   목차   [숨기기]  1생애 1.1어린 시절 1.2청년 시인 2조지와의 결혼 3문체 4예이츠와 연극 5참고 자료 6각주 7바깥 고리   생애[편집] 더블린에서 태어나서 그 곳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그의 유년시절은 슬라이고 주에서 보냈다. 어린 시절에 시를 공부했고, 어렸을 때부터 아일랜드의 전설과 신비주의 모두에 매료되었다. 두 가지 주제 모두 그의 초기 작품에서 볼 수 있으며, 이후 세기가 바뀔 때인 1900년 무렵 까지도 그의 작품에 계속해서 나타난다. 그 가 처음으로 낸 시집은 1889년에 출간되었고, 그 시집에 담긴 시들은 느리고 서정적이었는데 이러한 표현은 라파엘 전파의 서정시와 마찬가지로 영국 시인 두 사람 곧 에드먼드 스펜서와 퍼시 비시 셸리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예이츠 화가 집안에서 출생한 그는 화가를 지망하여 미술 공부를 시작하였다. 뒤늦게 시를 쓰기 시작하여, 1889년 처녀 시집 을 발표하여 와일드 등 유명한 시인들에게 절찬을 받았다. 그의 초기 작품은 낭만적이었으나 후기에는 점차 상징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아일랜드 자유국이 세워지자 원로원 의원으로 정계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국민 극장 창설에 앞장섰다. 대표작으로 시집 과 희곡집 등이 있다. 어린 시절[편집]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는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의 샌디마운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인 존 버틀러 예이츠(1839-1922) 는, 윌리엄마이트 군의 군사이자 리넨 상인이었다가 1712년 세상을 떠난 저비스 예이츠의 자손이었다. .[3] 저비스 예이츠의 손자 벤저민은 킬데어의 부유한 지주의 딸인 메리 버틀러와 결혼했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부친인 존은 결혼할 당시에 법률을 공부하고 있었지만 곧 런던의 헤더리 예술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법률 공부를 중단했다.[4]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모친인 수전 메리 폴렉스핀은 슬라이고에서 제분업과 운송업으로 성공한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다. 윌리엄이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그의 가족은 외갓집과 함께 지내기 위해 슬라이고로 이사하는데 그 곳은 어린 시인의 가슴 속에 어린 시절 속 공간일 뿐만 아니라 마음속의 집으로 남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슬라이고는, 사실로써 뿐만 아니라 상징적으로도, 예이츠에게 “마음속의 고향” 이 된다.[5] 버틀러 예이츠 가족은 무척 예술적인 집안이어서, 그의 남동생 잭은 유명한 화가가 되었고, 누이 엘리저베스와 수전 메리(가족들과 친구들은 그들을 롤리와 릴리라고 불렀다)는 미술 공예 운동에 가담하였다.[6] 예이츠가 어렸을 때, 아일랜드에서는 개신교 우위(Protestant Ascendancy) 시대가 펼쳐지고 있었는데 급격한 시대 변화로 인해 개신교 신자였던 예이츠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그의 가족은 아일랜드에 벌어지는 변화에는 전반적으로 찬성했지만 19세기 민족주의의 부활로 인해 재산에 피해를 입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은 예이츠의 인생관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97년, 예이츠의 전기집을 쓴 포스터(R. F. Foster) 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20세였을 당시의 세상을 이해해야한다는 나폴레옹의 말이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경우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라고 했다.[7] 개신교 신자가 권력을 잃어가면서 예이츠의 어린 시절에도 그림자가 드리웠다. 1880년대에는 정치가 파넬(Charles Stewart Parnell) 이 권력을 얻으면서 홈룰 운동(아일랜드의 토지를 영국계 지주들의 손에서 되찾아내려는 운동)이 널리 유행했고 1890년대에는 민족주의가 급속도로 퍼져나갔으며, 세기말에는 가톨릭 신자가 기득권층으로 부상했다. 이러한 변화와 발전은 예이츠의 시 문학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고 아일랜드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그의 시도는 그의 국가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8] 1867년, 예이츠의 부친 존이 영국에서 예술 공부를 계속하기를 원하자 그의 가족은 영국으로 이주한다. 예이츠의 부모는 처음에 아이들을 집에서 교육하였다. 예이츠의 모친은 아이들에게 아일랜드 전래동화와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부친은 예이츠를 슬라우 지역으로 데려가 자연사 탐구를 도우면서, 독특한 지리와 화학 교육을 제공하였다.[9] 1877년 1월 26일, 어린 시인은 고돌핀 학교에 입학해 4년 동안 학교를 다닌다.[10] 예이츠는 학업 면에서 눈에 띄는 학생이 아니었으며, 그의 담임교사는 성적표에 “나쁘지 않은 수준. 다른 과목보다는 라틴말에 능한 듯함. 철자법에 매우 취약함.”이라는 평가를 남겼다.[11] 예이츠는 수학과 언어 공부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아마 그가 음치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12]) 생물과 동물학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1880년 말, 예이츠의 가족은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더블린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의 가족은 처음에는 도심에서 살다가 후에 호스 시 교외로 이사했다. 1881년 10월, 예이츠는 더블린에 위치한 에라스무스 스미쓰 고등학교에 입학해 학업을 재개한다.[13]부친의 화실이 학교 주변에 위치했던 덕분에 예이츠는 많은 시간을 화실에서 보냈고 도시의 유명한 화가들과 작가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이즈음, 그는 시작(詩作)을 시작했고, 1885년 예이츠의 초기 시들과 라는 제목의 수필집이 더블린 대학 논평지(Dublin University Review)에 발표되었다. 1884년에서 1886년까지, 예이츠는 토마스 거리에 위치한 메트로폴리탄 예술학교(현 국립 예술 디자인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의 초기작품들은 그가 17살이었을 때 지어졌는데 그중에는 중앙아시아에서 왕위에 오르는 마법사에 관한 시(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가 있었다. 이 시기에 예이츠가 지은 다른 작품에는 어느 양치기에게 이교도로 고소당한 여인, 주교, 그리고 수사에 관한 연극을 비롯해 사랑과 관련된 시, 그리고 중세시대 독일 기사에 관한 설화시 등이 있다. 그의 초기작들은 지극히 평범했고, 비평가 찰스 존슨(Charles Johnson)의 말에 따르자면 “아주 아일랜드답지 못하고 그에게 속삭이는 꿈이라는 어둠에서 나온 것” 같다고 하였다.[14] 하지만 그의 초기 작품들이 셸리, 에드먼드 스펜서(Edmund Spenser), 그리고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시의 구절들과 분위기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에 반해, 예이츠가 이후에 지은 작품들은 아일랜드의 전설과 전래동화, 그리고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영향을 받았다. 예이츠는 후에 블레이크를 “인간들에게 위대한 진실을 전달해 준, 위대한 조물주 중 하나”라고 칭하며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15] 1891년, 예이츠는 과 를 출판했는데 전자는 중편소설이었고, 후자는 짧은 이야기였다. 두 작품은 더블린의 더 릴리풋 프레스(The Lilliput Press)에서 1990년 재출판 되었다. 청년 시인[편집] 예이츠의 가족은 1887년에 런던으로 돌아왔다. 1890년에 예이츠는 플릿 스트릿(Fleet Street) 술집에서 정기적으로 시낭송을 하면서 알게 된 런던 시인들 중 한 명인 어니스트 리스(Ernest Rhys)와 라이머클럽(Rhymers' Club)을 공동설립하였다[16]. 이 때 발표한 작품들은 훗날 [17] 라는 이름으로 1892년 첫 번째, 1894년에 두 번째 작품집이 출판되었다. 그는 에드윈 엘리스(Edwin Ellis)와 함께 처음으로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작품집을 완성시키면서, 잊혀진 시 를 재발견하게 된다. 훗날 셸리(Percy Bysshe Shelley)에 대한 에세이에서 예이츠는 “를 다시 읽어보았다. 신성하다고 여겼던 그 어떤 책들보다도 훨씬 확고한 세계가 있는 것 같았다.”라고 썼다.[18]   존 버틀러 예이츠가 그린 1900년도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초상 예이츠는 평생 신비주의나 심령론, 점성술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일생동안 광범위한 주제의 글들을 읽고 초자연현상 연구단체인 회원이 되었는데, 특히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의 글에 영향을 받았다.[19]1892년 초에 예이츠는 “내가 신비로운 힘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지 않았더라면 블레이크집에 단 한 단어도 쓸 수 없었을 것이며, 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비로운 인생이야말로 나의 모든 행동과, 나의 모든 생각과, 나의 모든 글의 중심이다.”라고 저술했다.[20] 신지학자인 모히니 채터지(Mohini Chatterjee)가 연구했던 힌두교, 그리고 신비주의 등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예이츠의 그러한 관심은 훗날 그의 작품에서 큰 토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몇몇 비평가들은 지적 신뢰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이러한 영향력을 무시하고 있다. 특히 위스턴 휴 오든(W.H. Auden)은 이러한 면에 대해 “다 큰 성인이 뻔한 마술과 쓸데없는 인도(India) 의식에 사로잡혀 우스운 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며 비판했다.[21] 처음 주목을 받았던 작품은 에드먼드 스펜서(Edmund Spenser)를 시적 모델로 한 판타지 작품 이었다. 이 작품은 더블린 대학 논평지(Dublin University Review)에 실렸으나 그 이후 재출판되지는 않았다. 첫 단독 출판집은 (1886)라는 소논문으로, 예이츠의 부친이 돈을 들여 100부를 인쇄하게 된 것이었다. 그 후 1889년에는 그가 1880년대 중반에 지었던 시들을 모아 라는 작품집을 발행하였다. 예이츠 전기작가인 포스터(R. F. Foster)는 이 긴 제목의 시집에 대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게일(Gael)식 이름, 두드러지는 반복기법, 끊어짐 없는 운율이 세 단락에 걸친 이 시들에 미묘한 변화를 준다.”라고 말했다.[22] “ We rode in sorrow, with strong hounds three, Bran, Sgeolan, and Lomair, On a morning misty and mild and fair. The mist-drops hung on the fragrant trees, And in the blossoms hung the bees. We rode in sadness above Lough Lean, For our best were dead on Gavra's green. ” “ 포근하고 맑은 어느 날의 안개 낀 아침, 힘센 사냥개 세 마리 브란, 스지란, 로메이어와 함께, 비탄에 잠겨 말을 타고 달렸네. 향기로운 나뭇잎 끝에 이슬 맺히듯, 활짝 핀 꽃잎 끝에 꿀벌들 맺혔네. 린 호수 그 위를 슬픔에 잠겨 달렸네, 가브라의 초원에서 죽어 여한이 없으니. ” 는 아일랜드 신화 중 피니언 편(Fenian Cycle)의 구절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사무엘 퍼거슨 경과 라파엘 전파 시인들로부터 받은 영향 또한 드러내고 있다.[23] 완성하기까지 2년이 걸린 이 시는 그가 아직 미성숙했던 시절의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의 주제는 훗날 예이츠가 다룬 가장 중요한 주제들 가운데 하나가 되는데, 그것은 바로 행동하는 삶을 넘어 명상하는 삶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이 작품 이후에 예이츠는 더 이상 장편시를 쓰지 않았다. 사랑 또는 신비롭고 난해한 주제에 대한 명상을 담은 초기 시들로는 , , 이 있다. 1885년에 예이츠는 더블린 연금술회(Dublin Hermetic order) 창립에 합류하게 되었다. 6월 16일에 열린 첫 번째 회의에서 예이츠는 의장 역할을 맡았다. 같은 해, 신지학협회 (Theosophical Society) 런던지회에 강의를 하러 온 체터지와 공동으로 더블린 신지학회 지부(Dublin Theosophical lodge)를 열었다. 다음 해에 예이츠는 그의 첫 강신회에 참여하였다. 훗날 신지학협회와 신비학, 특히 황금여명단(Golden Dawn)의 장미 십자회 이념이 접목된 신비학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1912년에 열린 강신회에서는 자신을 ‘레오 아프리카누스(Leo Africanus)’라 칭하며 예이츠의 수호신 또는 반(反)자아라고 주장하는 혼령을 만나게 되는데, 여기에서 영감을 얻어 쓴 산문집이 이다.[24] 예이츠는 1890년에 황금여명단에 정식으로 가입되어 'Daemon est Deus inversus(‘악마는 신의 다른 이름’이라는 뜻)'라는 마법명을 받았다. 이 이시스 우라니아(Isis-Urania) 종단 사원의 열렬한 전도자였던 예이츠는 그의 숙부인 조지 폴렉스펜(George Pollexfen)과 모드 곤(Maud Gonne), 플로렌스 파르(Florence Farr)를 입단시켰다. 그는 비록 개인숭배가 저변에 깔린 추상적이고 독단적인 종교에 대한 혐오감을 갖고는 있었지만 황금여명단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는 매력을 느꼈다.[25] 예이츠는 플로렌스 파르, 맥그리거 매터즈(Macgregor Mathers)와 함께 협회의 권력 투쟁에 가담하였으나, 블리스 로드 사건(Battle of Blythe Road)이 있던 당시 매터즈가 알레이스터 크로울리(Aleister Crowley)를 퇴출시키고 황금여명단의 소유물들을 독점하도록 하는 데 가장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다. 황금여명단이 해체되어 여러 분파로 나뉜 후에 예이츠는 1921년까지 샛별회(Stella Matutina)에서 활동하였다. 조지와의 결혼[편집] 1916년, 51세가 되던 해에 예이츠는 결혼하여 아이를 낳기로 결심했다. 그는 1916년 여름에 모드 곤(Maud Gonne)에게 마지막으로 청혼을 했다.[26] 곤의 정치 혁명 활동 경력과 클로로포름 중독, 1916년 부활절 봉기사건에 연루되어 훗날 영국군에게 처형당한 존 맥브라이드(John MacBride)와의 순탄치 않았던 결혼생활 등 그녀에게 있었던 최근 몇 년간의 개인적인 재앙들 때문에 그녀는 부적절한 아내로 여겨졌다. 전기작가인 포스터(R.F. Foster)는 예이츠의 마지막 청혼은 모드 곤과 결혼하려는 진심어린 마음 보다는 의무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1908년 앨빈 랭던 코번(Alvin Langdon Coburn)이 찍은 예이츠 예이츠는 조건을 붙여서 무관심한 태도로 청혼했으며, 내심 그녀가 거절하기를 바랐다. 포스터(R.F. Foster)에 따르면 그가 의례적으로 모드에게 청혼하고 의례적으로 거절당했을 때, 그의 생각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그녀의 딸에게로 옮겨갔다.” 이조 곤(Iseult Gonne)은 당시 21세로 모드가 루시앙 밀레보이예(Lucien Millevoye)와의 사이에서 낳은 둘째 아이였다. 그녀는 그 때까지 슬픈 삶을 살아왔다. 짧은 생을 살고 간 그녀의 오빠를 환생시키려는 시도에서 태어났고, 태어나자마자 몇 년 동안은 그녀의 엄마의 입양된 조카로 소개되었다. 그녀는 11세에 계부에게 성추행을 당했고,[27] 후에는 아일랜드 공화국군을 위해 총기 밀반입자로 일했다. 15세 되던 해, 그녀는 예이츠에게 청혼을 했었다. 그리고 예이츠는 모드 곤에게 접근한지 몇 개월 후에 이조 곤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그 해 가을, 예이츠는 올리비아 셰익스피어의 소개로 만난 25세의 조지 하이디 리즈(Georgie Hyde-Lees, 1892-1968)에게 청혼했다. “조지, 안돼. 그 사람은 곧 죽을 노인이야.”라는 그녀의 친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이디 리즈는 청혼을 받아들였고, 그 해 10월 20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의 나이차이와 예이츠가 신혼여행 도중 품었던 후회와 회환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혼생활은 성공적이었다. 부부는 안느(Anne)와 마이클(Michael) 2명의 자녀를 낳았다. 비록 나중에 예이츠가 다른 여성들과 불륜관계를 맺었을 때라도 조지는 그녀의 남편에게 이렇게 썼다. “당신이 죽은 후에 사람들은 당신의 불륜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할거에요.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에요. 왜냐하면 난 당신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사람인지 기억하고 있을테니까요.”[28] 그의 결혼생활 초반에 예이츠와 조지는 사이코그래프법에 푹 빠져 있었다. 그 안에서 조지는 그들이 “선생님”라고 부르는 다양한 영혼, 안내자들과 소통했다. 영혼들은 글자와 역사에 관한 복잡하고 난해한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 했고, 부부는 이를 무아지경(최면상태)의 환경과 단계, 원뿔, 나선형에 대한 설명을 통한 실험을 하면서 발전시켰다.[29] 예이츠는 이 내용을 《비전》(1925)으로 출간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1924년에 그는 자신의 출판인인 워너 로리(T. Werner laurie)에게 “나는 아마 이 책이 내 책 중의 책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고 인정하는 글을 썼다.[30] 문체[편집] 예이츠는 20세기 영시 작가의 주요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상징시를 즐겨 지었는데 작품 속에서 사물을 암시적으로 형상화시키거나 상징적 구조를 주로 사용했다. 그는 단어를 선택하고 배열하는 과정에서 표면적 의미 이상의 추상적 의미를 전달하는 동시에 공명을 불러일으켰다.[31] 그가 사용한 상징은 대부분 그 자체로서의 의미와 더불어 무형적이고 영원한 의미를 전달하는 것들이었다.[32] 다른 모더니즘 작가들이 자유시 창작을 시도한 것에 반해 예이츠는 기존 문학 양식의 대가로서 문학 양식을 지켜나갔다.[33] 하지만 그 또한 모더니즘 사조의 영향을 받아 차츰 종래의 시어법에서 벗어나 소박한 언어와 주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서술을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변화는 그의 중기 작품인 《일곱 개의 숲에서》(In the Seven Woods), 《책임》(Responsibilities), 《초록 투구》(The Green Helmet) 등에 두드러진다.[34] 예이츠의 후기 작품에는 보다 개인적인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가 사망하기 20년 전에 지어진 작품들에서는 그의 아들과 딸에 대한 언급이나[35] 늙음에 대한 사유가 드러난다.[36] 《서커스 동물들의 탈주》(The Circus Animals' Desertion) 이라는 시에서 예이츠는 후기 작품 창작의 영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 Now that my ladder's gone I must lie down where all the ladders start In the foul rag and bone shop of the heart. ” “ 이제 나의 사다리가 사라졌으니 모든 사다리가 시작하는 곳에 누워야하겠다 마음 속 낡은 중고가게 안에 ” 예이츠는 1919년 이래로 골웨이 주 고트 인근의 투르 발릴리(Thoor Ballylee) 탑 (위도53°06'11.4", 경도08°46'29.2") 에서 매년 여름을 보내다가 1929년을 기점으로 더 이상 그 여름별장을 사용하지 않는다. 예이츠는 1932년 더블린 근교 래스파에서 리버스데일(Riversdale) 휴양지를 임대해 머물기도 했지만 그의 삶의 발자취는 주로 아일랜드 외부에 남겨져 있다. 그는 말년에 창작활동에 주력하면서 많은 운문, 연극, 산문시 등을 발표했다. 1938년, 예이츠는 그의 희곡 《연옥》(Purgatory) 의 첫 공연을 감상했다. 같은 해에 그는《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자서전》(Autobiographies of William Butler Yeats) 을 완성했다.[37] 예이츠의 초기 작품 중 대부분이 아일랜드 전설과 민담을 소재로 삼은데 반해 그의 후기 작품은 보다 현실과 관련된 사항을 다루고 있는 만큼 예이츠의 초기 문체와 후기 문체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예이츠의 작품은 시기별로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초기 작품은 라파엘 전파의 영향을 받은 어조와 함께 화려한 수식을 특징으로 삼으며, 인정없는 비평가들의 말에 따르자면, 부자연스러우리만큼 격식을 갖추고 있다. 예이츠의 초기 시에는 서사시인 《오이진의 방랑기》(The Wanderings of Oisin)이나 《아일랜드의 위상》(The Isle of Statues) 이 있다. 《오이진의 방랑기》는 예이츠가 남긴 유일한 장편시이다.[38] 그의 다른 초기작품에는 사랑이나 몽환적 주제에 관한 서정시가 있다. 중기 작품을 창작할 때 예이츠는 초기 시의 라파엘 전파적 경향을 떨쳐내고 [39] 새로운 특징의 시를 짓는다.[40] 그가 초기 작품에서 보여주던 여성적이고 우미하던 스타일은 딱딱하고 건조한 남성적인 것으로 변화하고, 환상적이던 심상은 금속적이라 할 만큼 구체성을 지닌 심상으로 전화한다. 예이츠의 중기 작품을 좋아한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이 부드러우면서 강인한 리듬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떤 측면에서는 매우 모더니즘적이라고 평가한 반면, 그의 작품을 비방한 비평가들은 시적 형상화가 부족하다고 평했다. 예이츠의 후기 작품들에는 시인이 강신론의 영향을 받아 얻은 창의적인 영감이 잘 드러난다. 여러 가지 면에서 후기 작품들은 초기 작품들로의 회귀라고 할 수 있는데 예이츠의 초기 작품인《오이진의 방랑기》에서 다뤄졌던 세속적인 기사와 종교적인 성직자 사이의 갈등이라는 주제는 후기 작품《영혼의 대화》(A Dialogue Between Self and Soul)에서 다시 한 번 나타난다.[41] 어떤 비평가들은 미술 분야의 파블로 피카소와 비슷하게 시 분야에서는 버틀러 예이츠가 19세기에서 20세기 모더니즘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었다고 평가하지만, 예이츠가 정말로 T.S. 엘리엇 (T. S. Eliot) 이나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와 더불어 모더니즘 작가로 인정받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42] 모더니즘 작가들은 《재림》(The Second Coming) 이 예이츠가 엘리엇의 모더니즘을 모방해 유럽에서 문명이 쇠퇴함에 따라 바치는 장송곡이라고 평가했지만 훗날의 비평가들은 이 시가 예이츠의 종말론 이론에 관한 시이기 때문에 1890년 대 사회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평가내렸다. 예이츠의 작품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그가《초록 투구》(1910) 와《책임》(1914)를 짓기 시작했을 때이다. 시인이 늙어감에 따라 그의 시 속 심상은 강력해져가서《탑》(The Tower) (1928),《나선 계단》(The Winding Stair) (1929), 그리고《새 시들》(New Poems) (1938) 은 20세기 시 가운데 가장 강력한 심상을 이용한 작품들로 손꼽힌다. 신지학과 주술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예이츠의 환상적 경향[43] 은 예이츠의 후기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일부 비평가들은 그의 시를 보고 지적 신뢰도가 낮아졌다고 평가했다. 예이츠의 후기 작품에 드러나는 형이상학은《환상》(A Vision) (1925) 에 나타난, 소수의 사람들만 공유했던 근본과 연관되어 해석돼야 한다.[44] 예이츠가 1920년 쓴 《재림》은 20세기 창작된 시 가운데 시적 형상화가 무척 두드러지는 시이다. “ Things fall apart; the centre cannot hold; Mere anarchy is loosed upon the world, The blood-dimmed tide is loosed, and everywhere The ceremony of innocence is drowned. The best lack all conviction, while the worst Are full of passionate intensity. ” “ 모든 것이 파괴되고 그 중심은 무너진다 오직 혼돈만이 지상에 만연하다 온 누리에 핏빛으로 얼룩진 조수가 퍼지고 순결한 의식은 물에 잠긴다 선인은 주저하고 악인의 열정은 가득하다 ” 이 시에서 “선인”이라고 일컬어지는 존재는 당시 유럽을 휩쓸던 물질주의의 바람 앞에서 전통 문화를 지키는데 무능력했던 기존의 기득권층이다. 시의 마지막 구절은 역사는 반복되고 당시 사회는 순환하던 역사가 마무리되고 새롭게 기독교가 성장하는 시대였다는 예이츠의 믿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 And what rough beast, its hour come round at last, Slouches towards Bethlehem to be born? ” “ 그런데 마침내 때를 맞이하여 태어나고자 베들레헴으로 뚜벅뚜벅 걷고 있는 저 거친 짐승은 누구인가? ” 예이츠와 연극[편집] 예이츠는 19세기 말의 아일랜드 연극운동의 주요한 추천자이기도 했다. 1904년에 설립된 더블린의 애비 극장이 초기의 곤란을 극복하고 존속한 것은 예이츠의 작가로서의 재능과 지도자로서의 통솔력이 크게 기여했었다. 그러나 근대극에서의 예이츠의 참된 공헌은 사실주의로 덮여 있던 연극에 시극(詩劇)을 회복시켰다는 점이다. 예이츠의 초기의 시극 (1894), (1899), (1897-1906) 등은 관객의 상상력에 호소하는 것이며, 계속되는 (1903), (1903), (1907)에서는 극적 수법에 진보를 보이고 있다. 또한 농민극(農民劇)이나 아일랜드 전설에 의거한 영웅극도 썼다. 만년의 작품에서는 예이츠 시극의 특징인 단순한 표현에 포함되는 사상의 심원(深遠)함이 관객의 지성(知性)과 상상력에 가장 강하게 의존하는 형태로 정점에 이르렀다. (1934), (1938)이 그 대표작이다. ========================= 영성 시인 예이츠 시 모음(1)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아일랜드 1865년 6월 13일 - 1939년 1월 28일           하늘의 천    내게  금빛과 은빛으로 수 놓은 하늘의 천이 있다면   어둠과 빛과 어스름으로 수 놓은 파랗고 희뿌연 검은 천이 있다면   그대 발 밑에 깔아 드리련만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이 꿈 뿐이라   내 꿈을 그대 발 밑에 깔아드리오니 사뿐히 밟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니       위로 받는 것의 어리석음   친절한 나의 친구가 위로합니다.   " 자네가 연모하는 여인의 머리위에도  어느덧 잿빛 실이 수 놓아 지고 영롱한 눈 가엔   삶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구나   시간은 흐르고    자네의 빛나는 마음도 잔잔해지겠지   지금은 힘들지라도   인내의 시간이 자유롭게 해주리니      한데, 가슴이 단 한톨도 위로 받질 않네요   그녀의 빛나는 영혼이   시간이 흐를 수록   더욱 깊은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으니까요     그녀가 지닌 아름다움의 불꽃은   삶의 의미를 더해가며   더욱 세차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아, 초 여름의 뜨거운 정열이   그녀의 눈동자에 가득할 때조차   이 정도로 빛나진 않았을 테지요      아, 타는 가슴아   그녀가 나에게 주는 작은 시선에도   친구의 위로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알지 않느냐           William Butler Yeats 낙엽(The Falling of the Leaves) 가을은 우리를 사랑하는 긴 잎새들 위에도 머리 위 로웬나무 잎사귀도 노랗게 물들고 젖은 들딸기 잎도 노랗게 물들었다. 사랑이 시드는 시간이 닥쳐와 이제 우리들의 슬픈 영혼들도 지칠 대로 지쳤다 자 우리 헤어집시다. 정열의 계절이 우리를 잊기 전에 그대 수그린 이마에 입맞추고 한 방울 눈물을 남기고서... AUTUMN is over the long leaves that love us, And over the mice in the barley sheaves; Yellow the leaves of the rowan above us, And yellow the wet wild-strawberry leaves. The hour of the waning of love has beset us, And weary and worn are our sad souls now; Let us patt, ere the season of passion forget us, With a kiss and a tear on thy drooping brow. 술노래(Drinking Song) 술은 입으로 들고 사랑은 눈으로 든다. 우리가 늙어서 죽기 전에 알아야 할 진실은 그것 뿐. 나는 입에 잔을 들며 그대를 바라보고 한숨 짓는다. WINE comes in at the mouth And love comes in at the eye; That's all we shall know for truth Before we grow old and die. I lift the glass to my mouth, I look at you, and I sigh. 버드나무 정원에서(Down By The Salley Gardens) 버드나무 정원에서 그녀와 나 만났었네. 눈처럼 흰 작은 발로 버드나무 정원을 지나며 그녀는 내게 일러주었지. 나뭇가지에 잎이 자라듯 사랑을 수월히 여기라고. 그러나 난 젊고 어리석어 그녀의 말 들으려 하지 않았네. 강가 들판에서 그녀와 나 서 있었네. 기대인 내 어깨 위에 눈처럼 흰 손을 얹으며 그녀는 내게 일러주었지. 둑에 풀이 자라듯 인생을 수월히 여기라고. 그러나 젊고 어리석었던 나에겐 지금 눈물만 가득하네. DOWN by the salley gardens my love and I did meet; She passed the salley gardens with little snow-white feet. She bid me take love easy, as the leaves grow on the tree; But I, being young and foolish, with her would not agree. In a field by the river my love and I did stand, And on my leaning shoulder she laid her snow-white hand. She bid me take life easy, as the grass grows on the weirs; But I was young and foolish, and now am full of tears. 덧없어라(Ephemera) 「예전엔 지칠줄 모르고 내 눈을 들여다 보던 그대의 눈이 이제는 망설이는 눈꺼풀로 서글프게 내려뜨네요. 우리의 사랑이 이울어 가는겁니다」 그러자 그녀는 「우리의 사랑은 이울었지만 다시 한 번 호젓한 호숫가에 서 봅시다. 처량하게 지친 아이, 정열이 깊숙히 잠이 든 온화한 이 시간에 둘이 함께. 별들은 어찌나 멀어 보이는지, 우리의 첫 키스도 얼마나 아득한지 참으로 늙었군요. 나의 마음은」 그들은 생각에 잠긴 채 낙엽을 따라 걷다가, 남자가 천천히 여자의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 「정열은 곧잘 방황하는 우리 마음을 피곤하게 했지요」 나무가 그들을 에워싸고 노란 나뭇잎이 빛 바랜 별같이 어스름 속에 떨어지는데 늙은 토끼 한 마리가 다리를 절며 오솔길을 달려 온다. 그에게는 가을이 오고, 그들은 다시 한 번 호젓한 호숫가에 섰다. 돌아보니 그녀는 그녀의 눈같이 이슬 맺힌 고엽을 말없이 주워 모아 가슴과 머리에 꽂고 있었다. 「아, 슬퍼하지 말아요」 그는 말했다. 「우리가 지친 것은 또 다른 사랑을 기다리기 때문이요. 미움과 사랑으로 후회없는 시간을 밀고 나가요. 우리 앞에는 영원함이 가로 놓였고, 우리의 영혼은 사랑 그리고 끝없는 이별의 연속이니까」 "YOUR eyes that once were never weary of mine Are bowed in sotrow under pendulous lids, Because our love is waning." And then She: "Although our love is waning, let us stand By the lone border of the lake once more, Together in that hour of gentleness When the poor tired child, passion, falls asleep. How far away the stars seem, and how far Is our first kiss, and ah, how old my heart!" Pensive they paced along the faded leaves, While slowly he whose hand held hers replied: "Passion has often worn our wandering hearts." The woods were round them, and the yellow leaves Fell like faint meteors in the gloom, and once A rabbit old and lame limped down the path; Autumn was over him: and now they stood On the lone border of the lake once more: Turning, he saw that she had thrust dead leaves Gathered in silence, dewy as her eyes, In bosom and hair. "Ah, do not mourn," he said, "That we are tired, for other loves await us; Hate on and love through unrepining hours. Before us lies eternity; our souls Are love, and a continual farewell." 그대 늙었을 때(When You Are Old) 그대 늙어 머리 희고 잠이 많을 때 난로가에 앉아 졸게 되거든 이 책을 꺼내 보세요. 그리고 천천히 읽으며, 한때 그대 눈이 지녔던 그 부드러운 눈길이며 깊은 그늘을 생각해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대의 다정하고 우아했던 시절을 사랑했고 그대의 아름다움을 거짓 혹은 진실함으로 사랑하였던가를. 다만 한 남자가 그대 순례자의 영혼을 사랑하였고 그대 변하는 슬픈 얼굴을 사랑하였던 것을. 그리고 빛나는 창살가에 고개 수그려 조금은 슬프게 중얼거려요. 어떻게 사랑이 달아났고 높은 산을 거닐며 별들의 무리 속에 그의 얼굴을 감추었는가를. WHEN you are old and grey and full of sleep, And nodding by the fire, take down this book, And slowly read, and dream of the soft look Your eyes had once, and of their shadows deep; How many loved your moments of glad grace, And loved your beauty with love false or true, But one man loved the pilgrim Soul in you, And loved the sorrows of your changing face; And bending down beside the glowing bars, Murmur, a little sadly, how Love fled And paced upon the mountains overhead And hid his face amid a crowd of stars. 쿨 호수의 백조(The Wild Swans At Coole) 나무들은 가을의 아름다움으로 단장하고 숲 속의 길들은 메말라 있다. 10월의 황혼녘 물은 고요한 하늘을 비치고 돌 사이로 넘쳐흐르는 물 위에는 쉰 아홉 마리의 백조가 떠 있다. 내가 처음 백조의 수를 헤아린 이래 열 아홉 번째의 가을이 찾아왔다. 그땐 미처 다 헤아리기도 전에 백조들은 갑자기 날아올라 요란스런 날개 소리를 내면서 끊어진 커다란 원을 그리며 흩어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지금껏 저 찬란한 새들을 보아 왔건만 지금 나의 가슴은 쓰리다. 맨처음 이 호숫가 황혼녘에 저 영롱한 날개 소리를 들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었던 그때 이래 모든 것은 변해 버렸다. 지금도 여전히 피곤을 모른 채 짝을 지으며 차가운 물 속을 정답게 헤엄치거나, 하늘로 날아오르는 그들의 가슴은 늙을 줄 모르고 어디를 헤매든 정열과 정복심이 여전히 그들을 따른다. 지금 백조들은 신비롭고 아름다운 고요한 물 위에 떠 있지만 어느날 내가 눈을 뜨고 그들이 날아가 버린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어느 등심초 사이에 집을 짓고 어느 호숫가나 웅덩이에서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줄 것인가? THE trees are in their autumn beauty, The woodland paths are dry, Under the October twilight the water Mirrors a still sky; Upon the brimming water among the stones Are nine-and-fifty Swans. The nineteenth autumn has come upon me Since I first made my count; I saw, before I had well finished, All suddenly mount And scatter wheeling in great broken rings Upon their clamorous wings. I have looked upon those brilliant creatures, And now my heart is sore. All's changed since I, hearing at twilight, The first time on this shore, The bell-beat of their wings above my head, Trod with a lighter tread. Unwearied still, lover by lover, They paddle in the cold Companionable streams or climb the air; Their hearts have not grown old; Passion or conquest, wander where they will, Attend upon them still. But now they drift on the still water, Mysterious, beautiful; Among what rushes will they build, By what lake's edge or pool Delight men's eyes when I awake some day To find they have flown away? 흰 새들(The White Birds) 될 수만 있다면 사랑하는 이여, 우리 물거품 위 두 마리 흰 새가 되련만 흐르는 별들의 불꽃에 우리는 지쳐버렸구나. 미처 그 빛이 사라지기도 전에 하늘가 낮게 걸린 황혼녘 푸른 별 그 불꽃이 우리들 가슴에 끝없는 슬픔을 일깨웠네 피로가 찾아든다 이슬에 젖어 꿈꾸는 저 백합과 장미로부터 아, 꿈꾸지 마라 사랑하는 이여, 흐르는 별의 불꽃은 사라지리니 푸른 별의 불꽃을 꿈꾸지 마라. 이슬은 내리는데 낮게 걸려 서성이니 될 수만 있다면 떠도는 물거품 위 두 마리 흰 새가 되련만. 그대와 나는 수많은 섬들과 수많은 다나안 해안으로 내 마음 이끌린다 시간이 우리를 잊고 슬픔도 다가오지 않는 곳 장미와 백합 그리고 가슴 태우는 불꽃도 이내 멀리 사라지리니 사랑하는 이여 우리가 물거품 위를 떠도는 두 마리의 흰 새가 될 수만 있다면 I would that we were, my beloved, white birds on the foam of the sea! We tire of the flame of the meteor, before it can fade and flee; And the flame of the blue star of twilight, hung low on the rim of the sky, Has awaked in our hearts, my beloved, a sadness that may not die. A weariness comes from those dreamers, dew-dabbled, the lily and rose; Ah, dream not of them, my beloved, the flame of the meteor that goes, Or the flame of the blue star that lingers hung low in the fall of the dew: For I would we were changed to white birds on the wandering foam: I and you! I am haunted by numberless islands, and many a Danaan shore, Where Time would surely forget us, and Sorrow come near us no more; Soon far from the rose and the lily and fret of the flames would we be, Were we only white birds, my beloved, buoyed out on the foam of the sea 방황하는 인거스의 노래(The Song Of Wandering Aengus) 내 머리 속에 불이 붙어 개암나무 숲으로 갔었지. 개암나무 한 가지를 꺾어 껍질을 벗기고 딸기 하나를 낚싯줄에 매달았지. 흰 나방들이 날고 나방 같은 별들이 깜빡일 때 나는 시냇물에 딸기를 담그고 작은 은빛 송어 한 마리를 낚았지. 나는 그것을 마루 위에 놓아 두고 불을 피우러 갔었지. 그런데 마루 위에서 무엇인가가 바스락거리더니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지. 그것은 머리에 사과꽃을 단 어렴풋이 빛나는 소녀가 되어 내 이름을 부르며 달아나 빛나는 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지. 나 비록 골짜기와 언덕을 방황하며 이제 늙어 버렸지만 그녀가 간 곳을 찾아 내어 그녀의 입술에 입맞추고 손을 잡고서 얼룩진 긴 풀밭 속을 걸어 보리라. 그리고 시간이 다할 때까지 따보리라. 저 달의 은빛 사과를 저 해의 금빛 사과를... I WENT out to the hazel wood, Because a fire was in my head, And cut and peeled a hazel wand, And hooked a berry to a thread; And when white moths were on the wing, And moth-like stars were flickering out, I dropped the berry in a stream And caught a little silver trout. When I had laid it on the floor I went to blow the fire aflame, But something rustled on the floor, And some one called me by my name: It had become a glimmering girl With apple blossom in her hair Who called me by my name and ran And faded through the brightening air. Though I am old with wandering Through hollow lads and hilly lands. I will find out where she has gone, And kiss her lips and take her hands; And walk among long dappled grass, And pluck till time and times are done The silver apples of the moon, The golden apples of the sun. 첫사랑(First Love) 하늘에 떠가는 달과도 같이 잔인한 아름다움의 종족으로 자라긴 했지만 그녀는 잠시 걷다 얼굴을 붉히고 내 가는 길을 막고 서 있었다. 마침내 나는 생각했다. 그녀의 몸이 살과 피의 심장을 지니고 있다고 그러나 내 손을 그 위에 올려 놓고 돌의 심장임을 알아낸 이후 나는 많은 것을 시도하였으나 하나도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 달 위를 지나가는 모든 손은 미치고야 만다. 그녀의 미소에 나는 변해서 그만 시골뜨기가 되어 버렸다. 여기저기를 서성거리며 달이 나타날 때 하늘에 떠도는 별들보다 한층 더 공허한 마음이 되었다. THOUGH nurtured like the sailing moon In beauty's murderous brood, She walked awhile and blushed awhile And on my pathway stood Until I thought her body bore A heart of flesh and blood. But since I laid a hand thereon And found a heart of stone I have attempted many things And not a thing is done, For every hand is lunatic That travels on the moon. She smiled and that transfigured me And left me but a lout, Maundering here, and maundering there, Emptier of thought Than the heavenly circuit of its stars When the moon sails out. 오랜 침묵 후에(After Long Silence) 오랜 침묵 후에 하는 말 - 다른 연인들 모두 멀어지거나 죽었고 무심한 등불은 갓 아래 숨고 커튼도 무심한 밤을 가렸으니 우리 예술과 노래의 드높은 주제를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함이 마땅하리. 육체의 노쇠는 지혜, 젊었을 땐 우리 서로 사랑했으나 무지했어라. SPEECH after long silence; it is right, All other lovers being estranged or dead, Unfriendly lamplight hid under its shade, The curtains drawn upon unfriendly night, That we descant and yet again descant Upon the supreme theme of Art and Song: Bodily decrepitude is wisdom; young We loved each other and were ignorant. 이니스프리의 호수 섬(The Lake Isle Of Innisfree) 나 이제 일어나 가리, 이니스프리로 가리. 거기 나뭇가지 엮어 진흙 바른 작은 오두막을 짓고 아홉 이랑 콩밭과 꿀벌통 하나 벌 윙윙대는 숲 속에 나 혼자 살으리. 거기서 얼마쯤 평화를 누리리. 평화는 천천히 내리는 것 아침의 베일로부터 귀뚜라미 우는 곳에 이르기까지 한밤은 온통 은은히 빛나고, 한낮은 자주빛으로 타오르며, 저녁엔 홍방울새의 날개 소리 가득한 그 곳. 나 이제 일어나 가리. 밤이나 낮이나 호숫가에 철썩이는 낮은 물결 소리 들리나니 한길 위에 서 있을 때나 회색 포도 위에 서 있을 때면 내 마음 깊숙이 그 물결 소리 들리네. I WILL arise and go now, and go to Innisfree, And a small cabin build there, of clay and wattles made: Nine bean-rows will I have there, a hive for the honey-bee, And live alone in the bee-loud glade. And I shall have some peace there, for peace comes dropping slow, Dropping from the veils of the mourning to where the cricket sings; There midnight's all a glimmer, and noon a purple glow, And evening full of the linnet's wings. I will arise and go now, for always night and day I hear lake water lapping with low sounds by the shore; While I stand on the roadway, or on the pavements grey, I hear it in the deep heart's core.       
1943    영국 시인 - D.H 로런스 댓글:  조회:4314  추천:0  2016-12-11
  출생일 1885. 9. 11, 영국 노팅엄셔 이스트우드 사망일 1930. 3. 2, 프랑스 앙티브 근처 방스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소설가·단편작가·시인·수필가.   D.H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영국의 소설가 20세기 영국의 주요작가로 당대에 떠들썩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주요작품으로는 〈아들과 연인 Sons and Lovers〉(1913)·〈사랑하는 여인들 Women in Love〉(1920)·〈날개 달린 뱀 The Plumed Serpent〉(1926)과 여러 나라에서 외설시비로 인해 발매금지당한 〈채털리 부인의 사랑 Lady Chatterley's Lover〉(1928) 등이 있다. 광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머니는 교직에 있으면서 시도 쓰는 교양있는 사람이었다. 1898년 장학생으로 노팅엄 고등학교에 입학, 졸업 후 회사의 서기와 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21세에 노팅엄의 유니버시티 칼리지에 진학했다. 1908년 이스트우드를 떠나 크로이든의 데이비드슨로드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일찍 창작을 시작했는데 처음으로 발표한 작품은 〈노팅엄셔 가디언 Nottinghamshire Guardian〉지에 실린 소설이었다. 첫 문학 친구 포드 매덕스 휘퍼(포드 매덕스 포드)의 도움으로 1910년 〈잉글리시 리뷰 English Review〉지에 처녀작 〈흰 공작 The White Peacock〉(1911)을 발표했다. 2번째 소설 〈침입자 The Trespasser〉(1912)는 친구 헬레나와 함께 한 아일오브와이트 섬 여행을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은 휘퍼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으나 당시 덕워스출판사의 출판 고문이었던 에드워드 가넷은 이 소설을 호평했고 그후 한동안 로렌스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의 삶에서 결정적인 시기는 1912년 4월 프리다 위클리를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그녀는 독일 귀족 폰리히트호펜 가문 출신이며 노팅엄에서 로렌스를 가르쳤던 교수의 아내였다. 1912년 5월 그들은 독일로 떠났고 이때부터 지칠 줄 모르는 방랑의 삶과, 그의 많은 후기 작품들의 주제를 이루게 되는, 힘들지만 극도로 친밀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잠시 이탈리아에 머물렀다가 영국에 돌아온 그들은 1914년 7월에 결혼했다. 최초의 소설다운 소설인 〈아들과 연인〉은 많이 팔리지는 않았지만 이 작품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14년 첫 단편집 〈프로이센의 사관 외(外) Prussian Officer and Other Stories〉를 발표했고, 1913년에는 이미 최초의 시집 〈연시 외(外) Love Poems and Others〉가 출판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그의 인생의 암흑기였다. 영국 각지를 유람하면서 세상의 공포를 피할 수 있는 이상적 공동체 '라나님'(Rananim)을 꿈꾸었으며 수시로 친구들에게 그곳이 어디에 있든 함께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무지개 The Rainbow〉를 발표하면서 에드워드 가넷과 불화가 생겼고 사회적으로는 외설 혐의로 판매금지당했다. 계획중이던 플로리다 행이 건강과 프리다의 여권 문제로 연기되자 1916년 콘월 주(州)의 세인트아이브스 부근 젠노의 한 오두막에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해 5월에 징집당해 군당국에 의해 여러 차례 기분 나쁜 일들을 겪었는데 처음으로 경험한 신체검사와 그밖에 전쟁 때 겪은 체험이 〈캥거루 Kangaroo〉(1923)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로렌스 가족은 1917년 콘월에서 작가라는 직업과 긴 수염, 아내의 국적이 독일이라는 사실 때문에 의심과 반감을 받게 되었다. 그해 10월에는 그곳 경찰의 이주명령에 따라 그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런던과 더비셔를 전전해야 했다. 전쟁이 끝나자 로렌스는 다시 미국행을 생각했고 미국의 출판사를 통해 돈을 벌려고 좀 특이하지만 뛰어난 〈미국 고전문학의 연구 Studies in Classic American Literature〉(1923)를 썼다. 한편 1919년 10월 독일과 이탈리아로 각기 떠난 프리다와 로렌스는 재회하여 시칠리아의 타오르미나 근처에 머물렀는데 그당시 사르데냐 여행은 〈바다와 사르데냐 Sea and Sardinia〉(1921)라는 여행담으로 발표되었다. 1920년에는 재정 상태가 좋아졌다. 미국에서 그의 작품이 팔리기 시작했으며 〈무지개〉의 재판과 〈사랑하는 여인들〉의 출판을 기꺼이 맡아준 런던의 출판업자 마틴 새커의 도움도 컸다. 새커에게 판권을 넘긴 작품 중에는 〈길 잃은 소녀 The Lost Girl〉(1920)도 있다. 1920년 여름 독일에서 프리다의 어머니와 함께 지내면서 자신의 심리이론을 다룬 논문 〈무의식의 환상 Fantasia of the Unconscious〉(1922)을 썼고 단시간에 〈아론의 지팡이 Aaron's Rod〉(1922)를 완성했다. 1921년이 되자 유럽을 떠나고 싶은 마음은 더욱 간절해졌다. 프리다와 함께 가거나 혼자 이탈리아·독일·오스트리아를 방랑했으나 정처없는 마음은 더해갔고, 작품 〈사랑하는 여인들〉이 런던의 저속한 신문으로부터 '부패에 대한 역겨운 연구'라고 비난받자 유럽에 대한 혐오는 더욱 커져갔다. 그래서 실론에서 불교를 공부하는 미국인 부부 얼과 아크샤 브루스터의 초청을 받아들여 프리다와 함께 그곳 방갈로에 머물렀으나 곧 불교와 실론에 반감을 느껴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났다. 실론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 〈캥거루〉에서는 성(性)과 권력에 관한 신비적 주장 및 〈아론의 지팡이〉에서 제시한 바 있는 구원의 문제를 잠시 멀리하고, 프리다와 함께 하는 생활방식이 그들에게 준 결과들을 돌이켜보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1922년 여름 마침내 〈바다와 사르데냐〉를 격찬한 미국의 부유한 여성 마벨 도지의 초청을 받아들여 미국의 뉴멕시코 타오스 여행단에 합류했다. 이곳에서 그는 자주 로렌초라고 불렸는데 도지는 자신과 로렌스, 프리다, 그밖의 다른 친구들 사이에서 처신하기 어려운 관계를 묘사한 뛰어난 작품 〈타오스에서의 로렌초 Lorenzo in Taos〉(1932)를 발표했다. 1923년 3월 멕시코로 간 그는 아스텍 문명에 매료되었고 라고데샤파라의 해수욕장에 은둔, 〈날개 달린 뱀〉을 쓰기 시작했다. 그해 7월 유럽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우고 뉴욕으로 갔으나 멕시코에 대한 향수를 이기지 못해 떠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우유부단함에 화가 난 프리다는 결국 혼자서 유럽으로 갔다. 1923년 12월 런던에 돌아와 프리다를 다시 만났고 곧 함께 멕시코에서 새로운 사회운동을 이끌 친구들을 찾았는데 캐서린 카즈월의 〈야만의 순례 The Savage Pilgrimage〉에는 로렌스가 이러한 내용을 호소한 카페 로열의 오찬모임이 잘 묘사되어 있다. 1924년 3월 귀족 친구 도로시 브렛과 런던을 떠나 타오스로 갔으며 그곳에서 마벨 도지와 프리다의 대립은 브렛의 출현으로 더욱 깊어만 갔다. 1924~25년 겨울에 건강이 매우 악화되었으며, 죽는 날까지 나빠진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1925년 9월 로렌스는 유럽으로 돌아왔다. 그해 훌륭한 단편소설 〈세인트 모어 St. Mawr〉를 발표했는데 이 단편이 실린 책에는 〈공주 The Princess〉도 함께 실렸다. 또 멕시코에서 쓴 소설 〈날개 달린 뱀〉은 1926년에는 빛을 보았다. 한편 로렌스 부부가 제노바 근처 스포토르노에 살 때 오랜 친구인 비평가 존 미들턴 머리와의 우정에 금이 가고 말았다. 머리에 의하면 로렌스의 여동생, 프리다의 딸, 그들의 변함없는 벗 브렛 등으로 이루어진 로렌스 서클에 참여하라는 로렌스의 요청을 거절한 것이 발단이었다고 한다. 1926년 4월 로렌스 부부는 피렌체로 옮겼고 고대 에트루리아에 관심을 갖게 되어 사후에 출판된 수필 〈에트루리아의 이곳저곳 Etruscan Places〉(1932)을 썼다. 말년에 이르러서 그림과 창작으로 시간을 보냈으며 마지막 소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완성했다. 이 작품에는 작가의 사회에 대한 신랄한 저주와, 새로운 성관계만이 현대 문명세계를 치유할 수 있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 이 소설은 피렌체(1928)와 파리(1929)에서 한정판으로 나왔으며 영국(1932)에서는 많은 부분이 삭제되어 출판되었다. 외설 시비로 레지나와 펭귄출판사의 떠들썩한 오랜 법정싸움 끝에 뉴욕에서는 1959년, 런던에서는 1960년에야 비로소 완본이 출판되었다. 로렌스는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쓰면서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팬지 Pansies〉(1929)는 역시 사회에 대한 증오를 담은 가벼운 시이며 신랄한 소설 〈죽은 남자 The Man Who Died〉(1931)도 이 무렵에 완성되었다. 미국에서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해적판이 나오고 런던에서는 경찰이 자신의 그림 전시회를 금지하자 격분하여 더욱 신랄한 시 〈쐐기풀 Nettles〉(1930)과, 〈최후의 시집 Last Poems〉(1932)에 실린 〈More Pansies〉를 써서 분노를 달랬다. 피렌체를 떠난 1928년 6월부터 1930년 요양소에서 결핵으로 운명하기까지 죽음과의 처절한 투쟁을 위해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그는 임종 전까지도 작품을 써 〈요한의 묵시록〉의 해석서 〈묵시록 Apocalypse〉(1931)을 완성했다. 로렌스는 매력적인 개성으로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을 사로잡았다. 그가 남긴 서간문·소설·시와 여러 편의 산문, 자서전적 기록에도 이러한 점이 잘 나타나 있다. 그를 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캐서린 카즈월은 〈야만의 순례〉(1932)에서 매력적이고 현명하며 동정심이 있는 인물로 묘사했고, 머리는 〈여자의 아들 Son of Woman〉(1931, 새로운 서문이 실린 재판 1954)에서 부정적이고 병적이며 증오심에 가득찬 인물로 나타냈다. 다만 확실하게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다양한 면모의 복잡한 인물이라는 점이며 그의 사상, 메시지,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만의 심리적·사회적 문제에 대한 연구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상상의 문구들로 자신의 능력을 상당부분 실현시킨 독창적인 천재였다. 로렌스의 모든 소설이 그의 천재성을 충분히 발휘한 것은 아니다. 가장 뛰어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무지개〉와 〈사랑하는 여인들〉이 꼽힌다. 이 작품을 보면 마치 커다란 도화지 위에 세부묘사의 상당한 부분이 얼룩졌거나 급히 그려진 듯하지만 전체로서는 대담한 상상력의 효과를 거두고 있는 그림을 연상하게 된다. 여기에서의 주제는 결혼한 남녀 관계이다. 그의 뛰어난 작품들은 성관계를 깊이있게 보여주며 그것의 실재(實在)를 조명하고 그 의미를 대담하게 해석했다. 로렌스의 시도 소설 못지 않게 독자적인 가치가 있다. 유년기를 보낸 곳의 방언으로 쓴 시를 제외한 초기시는 필치가 불분명하고, 지나치게 문어체에 의존해 종래의 전통적 시형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는 전통적인 시 형식과 과감하게 결별하고 독자적인 시형을 개발했으며 자유와 자발성에 의해 존재와 벗겨진 자아의 떨리는 순간을 표현해냈다. 그의 시는 〈보라! 우리는 이렇게 극복하였다! Look! We Have Come Through!〉(1917)에서처럼 자전적 요소가 강하다. 그러나 영시사(英詩史)에 큰 공헌을 한 작품은 지중해 연안과 미국 남서부지역의 경치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표현한 유례없이 독창적인 자연시 〈새, 짐승, 꽃 Birds, Beasts and Flowers〉(1923)이다. 분량은 많지 않지만 서간문에 대한 평가도 빼놓을 수 없다. 서간문에서는 다양한 논조와 넘치는 생동감으로 폭넓은 영역에 걸쳐 그 자신과 편지를 받는 이의 관계, 방랑생활에서 겪은 유쾌한 일, 우울한 일, 예언자적 명상 등을 완벽하고 훌륭하게 표현했다. 이러한 서간문은 작품 전체에 대한 매우 훌륭한 서문 역할을 했다. 로렌스는 위대한 작가였지만 항상 신중하거나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지나친 감정 때문에 통찰력은 흐려지고 반복되는 어조는 문체를 망쳤다. 모든 작품에서 언어는 생활 속의 즉각적인 감정들을 표출했다. 또 너무 빠르게 스쳐가 포착하기 힘든 감각과 직관을 표현하려다가 더듬거리게 되고 과도하게 주장하거나 반복을 일삼다가 난해함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유기적 구성방식을 개척하고 결코 감정과 감각에 이성을 배제시키지 않음으로써 그보다 더 신중한 작가의 작품은 부자연스럽고 차가워 보이도록 만드는 위대한 상징문학의 탑을 세웠다. 소설·시·수필에서 표현하려고 한 것은 인간의 총체성이었으며 그가 표현한 것은 무엇이든 삶의 깊은 자극에서 비롯된 감정들로 충만해졌다. 그는 혼탁하고 혼돈된 세상이라고 규정지은 현대문명세계에서 작품을 통해 형식과 일관성을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1942    스페인 시인 - 가르시아 로르카 댓글:  조회:4907  추천:0  2016-12-11
  출생일 1898. 6. 5, 스페인 푸엔테바케로스 사망일 1936. 8. 19/20, 그라나다 국적 스페인 요약 스페인의 시인·극작가. 목차 개요 생애 평가 개요 죽음을 주제로 한 시와 3부작 희곡인 〈피의 결혼식 Bodas de sangre〉(1933)·〈예르마 Yerma〉(1934)·〈베르나르다 알바의 집 La casa de Bernarda Alba〉(1936)으로 유명하다. 스페인 내란이 발생한 직후 민족주의자들에게 암살당했다. 생애 농부인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한 어머니는 직접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가족이 그라나다 시로 이사한 뒤 그곳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 다녔다. 아버지의 강요에 못이겨 그라나다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곧 그만두고 문학·회화·음악에 몰두했다. 조숙한 작곡가이자 뛰어난 연주가로서, 친구들 사이에서 '음악가'로 통했다. 1918년 카스티야 여행에서 영감을 얻어 〈인상과 풍경 Impresiones y paisajes〉이라는 산문집을 펴냄으로써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이 책은 '작가'로서의 가르시아 로르카를 예고해주었다. 1919년 스페인 수도의 문화적 중심이던 마드리드대학의 기숙사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화가 살바도르 달리, 영화제작자 루이스 부뉴엘, 시인 라파엘 알베르티를 비롯한 그와 같은 세대의 예술가 및 작가들과 사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인 후안 라몬 히메네스를 비롯한 기성세대 저명인사들과도 만났다. 대학 기숙사에서 보낸 첫 2년 동안 스페인 문단 전체에 가르시아 로르카의 시가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출판한 시는 거의 없었는데, 그것은 "시는 입으로 읊어야 한다. 책 속의 시는 죽은 것이다"라는 그의 생각 때문이었다. 따라서 대학 기숙사와 마드리드의 여러 지역에서 중세 음유시인처럼 자신이 쓴 시와 희곡을 낭송했다. 그리하여 작가생활 내내 그의 작품은 출판되기 훨씬 전부터 입으로 창작되어 전파되었다. 이당시 그는 뒷날 〈시집 Libro de poemas〉(1921)·〈첫번째 노래 Primeras canciones〉(1936)·〈노래 Canciones〉(1927)로 엮어져 나오게 될 실험시들을 쓰는 한편 첫 희곡 〈나비의 장난 El maleficio de la mariposa〉을 쓰고 있었다. 이 희곡은 1920년 마드리드의 에슬라바 극장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올려졌으나 첫날 공연 뒤 막을 내리고 말았다. 가르시아 로르카는 1922년 그라나다에서 열린 민속음악축제(Fiesta de Cante Jondo)에서 저명한 작곡가 마누엘 데 파야와 공동으로 작업한 것이 계기가 되어, 자신이 지닌 천재성을 깨닫게 되었다. 민속음악과 집시음악의 전통 속에서 자신의 음악적·시적·영적 충동의 해답을 발견한 듯했다. 〈칸테 혼도의 시 Poema del cante jondo〉(1922 집필, 1931 출판)와 〈집시 노래집 Romancero gitano〉(1924~27 집필, 1928 출판)은 이러한 해답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집시 노래집〉에 실린 18편의 시에는 전통 시형식인 스페인 발라드(romance)가 지닌 전통적인 매력과 새롭고 놀라운 이미지가 결합되어 있다. 그 예로 〈스페인 민병대의 발라드 The Ballad of the Spanish Civil Guard〉에서 민병대가 집시 마을을 향해 불길하게 진군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검은 말들/검은 편자/검은 망토 위에 번들거리는/잉크와 밀랍 얼룩/두개골이 납으로 되어/그들은 울지 않네/칠피 가죽으로 된 영혼을 달고/그들은 길을 따라 내려가네" 〈집시 노래집〉을 쓰면서 그는 희곡도 썼다. 1927년 살바도르 달리가 무대를 꾸며 시적이고 낭만적인 운문극 〈마리아나 피네다 Mariana Pineda〉를 바르셀로나에서 공연함으로써 극 부문에서 처음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같은 해 역시 같은 도시에서 대중을 상대로 한 그림전시회도 열었다. 1928년에 펴낸 〈집시 노래집〉은 하루아침에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으나 행복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단순한 집시 기질을 과장된 신화로 만든다고 불쾌하게 여겼으며, 그 스스로 "내 평생 가장 고통스러웠던 상태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 정서적 위기에 시달린 끝에 위안과 새로운 영감의 샘을 찾아 1929~30년을 미국과 쿠바에서 보냈다. 이 여행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 1940년 그의 사후에 발간된 〈뉴욕의 시인 Poeta en Nueva York〉이다. 이 작품에서는 기계화된 문명에서 느끼는 생명의 말살을 잔인하고 뒤틀린 이미지들의 부조화스러운 결합을 통해 표현한다. "숟가락으로/그는 악어의 눈을 파냈다/그리고 원숭이의 엉덩이를 때렸다/숟가락으로" 1931년 그는 스페인으로 돌아와 나중에 〈타마리트 시집 Diván del Tamarit〉(1936)으로 펴내게 된 시들을 쓰기 시작했으며, 다시 희곡을 썼다. 어렸을 때부터 지녀온 꼭두각시에 대한 열정을 표출하여 〈빌리클럽 꼭두각시 Los títeres de cachiporra〉와 〈돈 크리스토발의 인형극 Retabillo de Don Cristóbal〉이라는 2편의 인형극을 썼다. 이 인형 소극(笑劇)까지도 우울한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스페인 공화국의 출범으로 가르시아는 연극 부문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수 있게 되었다. 문교부는 교육받지 못한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고전희곡 가운데 명작들을 접할 수 있게 해준 학생극단 '바라카'(La Baraca)에 보조금을 지급했다(1932~35). 가르시아는 바라카의 설립자·지도자·연출자·음악가로서 로페 데 베가, 칼데론 데 라 바르카, 세르반테스의 작품을 무대에 올려 폭넓은 연극경험을 쌓았다. 이러한 결실이 민속극 3부작 가운데 제1편인 〈피의 결혼식〉(1933)이다. 이 작품은 결혼식날 신부가 몰래 사랑해온 남자와 달아나는데 결국 두 경쟁자는 싸우다가 서로 상대방의 손에 죽었다는 뉴스 기사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가르시아의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비운의 인물들로, 원초적인 열정과 문명사회의 단호한 명예규범 사이에서 갈등을 겪다가 결국은 죽고 만다. 1934년 자신의 친구였던 한 투우사가 쇠뿔에 받혀 죽은 사건을 바탕으로 〈이그나시오 산체스 메히아스를 애도하며 Llanto por Ignacio Sánchez Mejías〉(1935 출판)를 썼다. 이 시는 그의 가장 뛰어난 시이며 현대 스페인 문학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에서도 가장 뛰어난 애가로 손꼽힌다. 여기에서 "오후 다섯 시에"(A las cinco de la tarde)라는 공허하고 슬픈 후렴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오후 다섯 시에/정각 오후 다섯 시에/한 소년이 참회자의 흰옷을 샀네/오후 다섯 시에/한 바구니의 석회는 이미 준비되었다네/오후 다섯 시에/나머지는 죽음 그리고 죽음뿐이네/오후 다섯 시에" 1934년말 발표한 〈예르마〉는 3부작 가운데 제2편이며, 〈피의 결혼식〉과 더불어 20세기에 성공을 거둔 몇 안되는 시비극(詩悲劇) 중 하나이다. '비극적 시'인 이 희곡은 아이가 없는 것에 절망해 불임 남편을 죽이는 한 여자의 고통을 다루고 있다. 가르시아는 1936년 6월의 어느날 밤 친구들의 집에서 3부작 가운데 마지막 작품인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을 발표했다. 거의 모두 산문으로 쓴 이 희곡은 독재적인 어머니에 의해 상가(喪家)에 갇혀 지내는 4자매가 분노와 욕망으로 몸부림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1936년 7월 내전이 터지자 불안을 느끼고 마드리드를 떠나 그라나다로 갔다. 그러나 작품에 계속 등장하는 참혹한 죽음의 전조는 운명으로 다가왔다. 그라나다에서 지내던 어느날 밤 그는 재판도 받지 않은 채 민족주의자들에게 총살당했다. 평가 작품의 소재는 지역적이지만 작품에 계속 나타나는 주제는 보편적인 것으로서 사랑, 욕망, 죽음, 모성애,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에 대한 형제애를 비롯해 무엇보다도 원초적인 욕정이 인습 때문에 좌절되었을 때 그 결과로 생겨나는 잔혹함, 폭력, 죽음 등을 다루었다. 그의 시에서는 근원적인 욕망이 대개 구체적이고 관능적이며 격앙되고 전율을 느끼게끔 표현되었는데 때로는 초자연적으로 병렬된 이미지와 상징을 통해 표현되기도 한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에게 바치는 송가                                                                         - (칠레 시인)파블로 네루다 만약 내가 쓸쓸한 집에서 두려움에 울 수 있다면, 만약 내가 내 눈알을 빼서 먹어치울 수 있다면, 슬픔에 젖은 오렌지나무의 그대 목소리를 위해, 소리치며 나타나는 그대의 시를 위해 그렇게 하리라. 그대를 위해 병원들을 푸르게 색칠하고 학교와 바다의 구역들이 늘어나며, 상처 입은 천사들은 깃털이 무성하게 돋아나고, 혼인색을 띤 물고기들은 비늘로 뒤엎이며, 고슴도치들은 하늘로 날아가기 때문이다. 검은 디프테리아를 가진 양복점들은 그대를 위해 숟가락과 피로 넘치고 찢어진 리본들을 삼키고, 입 맞추며 비탄에 젖고, 하얀 옷을 입는다. 그대가 복숭아나무 차림으로 날 때, 그대가 퐁풍우에 쓸른 벼 같은 웃음 웃을 때, 그대가 노래하기 위해 동맥과 이, 목청과 손가락을 떨 때, 나는 그대의 온화함을 위해 죽이리라, 나는 가을이 한창일 때 그대가 쓰러진 준마와 피투성이 신(神)과 함께 살고 있는 붉은 호수를 위해 죽으리라, 밤에, 익사한 종(鐘)들 사이로 잿빛 강물처럼 물과 무덤들을 끌고 지나가는 묘지들을 위해 죽으리라, 병 걸린 병사들의 침실처럼 자욱한 강들, 수많은 대리석과 썩은 꽃부리와 장례의 기름들이 떠다니는 강물 속에서 느닷없이 죽음을 향해 자라나는 병사들, 밤에 그대를 보기 위해, 서서 울며, 물에 빠진 십자가들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기 위해 죽으리라, 죽음의 강 앞에서 그대, 버려진 채, 상처 입은 채, 눈물 흘리리니, 그대 눈물, 눈물, 눈물, 가득 고인 눈으로, 울며 흐느끼리니. 내가 밤에, 외로움에 취해, 재를 물어뜯는, 검은 굴뚝의, 철도와 기선(汽船)위에 망각과 그림자와 증기를 쌓을 수 있다면, 그대가 자라고 있는 나무를 위해 그렇게 하리라, 그대가 모으는 황금빛 물의 둥지들을 위해, 그대에게 밤의 비밀 전해주며 그대의 뼈를 덮는 덩굴식물을 위해. 축축하게 젖은 양파 색깔의 도시들이 그대가 목쉰 소리로 노래하며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침묵의 포경선들이 그대를 뒤따르고, 녹색 제비들은 그대의 머리칼에 둥지를 튼다, 또 달팽이들과 주(週)들이, 둥글게 말린 돛대와 버찌들이 영원히 순환한다, 열다섯 개의 눈이 달린 그대의 창백한 머리와 가라앉은 피투성이 그대의 입이 나타날 때, 만약 내가 시청사를 매연으로 가득 채우고, 흐느끼며, 시계들을 무너뜨릴 수 있다면, 그건 보기 위해서이리라, 언제 그대의 집에 부서진 입술로 여름이 도착하는지 해진 옷을 입은 많은 사람들이 도착하는지, 슬픈 광채의 지역들이 도착하는지, 죽은 쟁기들과 양귀비들이 도착하는지, 매장인들과 기수들이 도착하는지, 행성과 피 묻은 지도들이 도착하는지, 재를 뒤집어쓴 잠수부들이 도착하는지, 가면 쓴 사람들이 커다란 칼에 꿰뚫린 처녀들을 끌고 도착하는지, 뿌리들이, 핏줄들이, 병원들이, 샘들이, 개미들이 도착하는지, 거미들 틈에서 어느 외로운 경비병이 죽어가는 침대와 함께 밤이 도착하는지, 증오와 못바늘의 장미가 도착하는지, 노란빛을 띤 배가 도착하는지, 한 소년과 함께 바람 부는 날이 도착하는지, 올리베리오, 노라, 비센테 알레익산드레, 델리아, 마루카, 말바 마리나, 마리아 루이사와 라르코, 라 루비아, 라파엘 우가르테, 코타포스, 라파엘 알베르티, 카를로스, 베베, 마놀로 알톨라기레, 몰리나리, 로살레스, 콘차 멘데스, 그리고 잊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내가 도착하는지. 그대에게 관을 씌우게 이리 와다오, 활기 넘치는 나비의 젊은이여, 영원히 자유로운 검은 번개 같은 순결한 젊은이여, 그리고 우리끼리 대화를 나누며, 바위틈에 아무도 남지 않은 지금, 그대와 나 그대로의 모습으로 소박하게 이야기하자. 이슬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시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냉혹한 비수가 우리를 심문하는 그날 밤을 노래하지 않는다면, 그날을, 그 황혼을, 두들겨 맞은 인간의 심장이 죽음을 준비하는 부서진 그 외딴 곳을 노래하지 않는다면, 시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밤에, 특히나 밤에 많은 별들이 있다. 모든 별들은 강 속에 있다, 가난한 사람들도 가득한 집들의 창가 리본처럼. 누군가가 그들에게서 죽어갔고, 아마도 그들은 사무실에서, 병원에서, 엘레베이터에서, 탄광에서, 자리를 잃었을 것이다. 치유 불능으로 상처 입은 존재들이 괴로워한다, 그리고 도처에 갈망과 탄식이 있다, 끝없는 강 속에 별들이 흐르는 동안 창문들에 숱한 탄식이 있다, 문턱은 탄식에 닳았고, 침실은 물결치듯 카펫을 물어뜯으러 오는 탄식에 축축하게 젖어 있다. 페데리코, 그대는 본다, 세상을, 거리들을, 식초를, 몇몇 이별, 돌들, 철길들밖에 없는 곳을 향해 증기가 그 당당한 바퀴 일으켜 세울 때 역에서의 작별들을. 도처에 질문을 던지는 숱한 사람들이 있다. 피투성이 장님이, 그리고 성난 장님이, 그리고 축 늘어진 장님이, 그리고 처참한 장님이, 손톱들의 나무가, 탐욕을 등에 짊어진 도적이 있다. 삶이란 그런 것이라네, 페데리코, 여기 있네, 남자다운 우울한 남자의 내 우정을 그대에게 전해줄 수 있는 것들이. 이미 그대는 스스로 많은 것들을 알고 있네. 그리고 천천히 다른 것들을 알아가겠지. --------------------------------------------------------------------------------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는 칠레의 시인이다. 본명은 네프탈리 리카르토 레예스 바소알토다. 파블로 네루다는 필명이다. 그는 1904년, 칠레 충부의 파랄에서 태어났으며, 미얀마 명예영사를 거치고, 부에노스아이레스,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주재 영사를 역임한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스페인의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를 처음 만났다. 그뒤 그 둘은 매우 절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로르카는 스페인의 시인으로, 스페인 내전 때 살해 당한 불운의 시인이다.  이 시는 그의 절친한 벗인 로르카의 죽음으로 인해 쓴 시가 분명하다. 어마어마한 양의 시를 계속 읽다보면, 네루다가 얼마나 로르카를 좋아했고, 아꼈는지 알 수 있다. 굉장히 길지만, 어느 하나 그의 친구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없는 구절이 없다.  인터넷에 떠도는 말중에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내가 죽었을 때 누가 슬퍼하고, 울어줄까?'. 이 시를 보면서 이 말이 떠올랐다. 네루다에게 로르카는 분명 소중한 사람이었다. 내가 네루다가 로르카 같은 위대한 사람을 못 되더라도,  누군가에게 그런 소중한 사람이 된다면, 인생을 헛되이 산건 아닐테다.  이건 확신할 수 있다.  네루다는 참여시인으로, 말년에는 정치에 참여했고 정치와 관련된 시를 많이 썼다. 그는 공산당에 가입하기도 했고, 대선에 입후보 하기도 했다. 1971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        ​ 1934년 12월 6일에 마드리드에서 있었던 한 유명한 강연에서 로르카는 네루다를 “철학보다 죽음에 더 가깝고, 지성보다 고통에 더 가까우며, 잉크보다 피에 더 가까운” 시인이라 했다.   네루다는 1904년 칠레에서 문학교사였던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두 달만에 어머니를 잃었지만 온화한 새 어머니에게서 양육을 받았다. 산티아고 사범대학 불어교육과를 입학한 후 황혼일기 라는 시집을 시작으로 시인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마드리드의 주재 영사가 되어 스페인 내전을 겪으며 친구이자 시인 가르시아 로르카를 파시스트들이 살해하는 것을 보고 평생 파시즘에 반대하며 살아간다.상원의원으로 선출된 네루다는 1948년 칠레 대통령 비델라를 비판하다가 국가원수 모독죄로 체포될 위기에 처했고 아르헨티나로 탈출, 파리, 폴란드, 헝가리, 멕시코에서 망명생활을 20여년 가까이 한다.1969년 아엔데 대통령이 이끄는 사회주의 정부가 칠레에 들어서자, 파리 대사에 임명되었고 1971년에는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칠레의 상황은 악화되어 피노체트의 군사 구테타로 사회주의 정부가 전복되고 아옌데 대통령이 피살되었다.  그 충격과 지병인 전립선암의 악화로 네루다는 1973년 사망했는데 죽기 직전 그는 아내에게 절규하듯 말했다고 한다. "그자들이 사람을 죽이고 있어. 산산조각이 난 시신들을 건네주고 있다고."  네루다가 위독해져 병원으로 옮겨져 죽어갈 때 우익 과격파들이 네루다의 집으로 쳐들어와 약탈하고 가구를 부수고 수도를 틀어놓아 집이 물에 잠기게 했다고 한다. 네루다의 관을 다른 장소로 옮기자고 사람들이 말했을 때 아내는 민중을 위해, 시를 위해 살았던 네루다가 얼마나 비참하게 죽었는지 모든이에게 알려야 한다며 창문이 모두 깨지고 가구가 다 부서진 그 집에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는 네루다가 죽기 직전에 살았던 칠레의 아름다운 해변 이슬라 네그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곳 사람들은 대부분 어부들이고 편지를 읽지도 쓰지도 않는 이들이어서 우편배달부의 업무는 전무하다. 오직 네루다의 우편물만 배달해주면 될 뿐. 세계 곳곳에서 전보와 편지를 네루다에게 전해주면서 젊은 우편배달부 마리오 히네메스는 시의 본질과 아름다움에 눈뜬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줄 몰랐던 마리오가 네루다의 시를 외우고 네루다와 대화하면서 세상을 향해 당당하고 아름답게 자기 생각을 말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해간다. 마리오는 네루다가 준 자신감으로 연애와 결혼에도 성공한다. 마리오에게 네루다는 우상이요 은인이다. 그러나 칠레의 정치상황이 악화될 수록 이 둘의 관계는 역전된다. 절망하는 네루다에게 마리오는 작은 기쁨을 전달하는 충성스런 위로자로 끝까지 남아있는다. 소설의 초반 메타포 (은유)가 무엇이냐는 마리오의 질문에 네루다는 아래의 시를 들려준다. ​ 여기 이슬라 네그라는 온통 바다, 바다라네 순간순간 넘실거리며 예, 아니요, 아니요 라고 말하지 예라고 말하며 푸르게, 물거품으로, 말발굽을 올리고 아니요, 아니요라고 말하네. 잠잠히 있을 수는 없네. 나는 바다고 계속 바위섬을 두드리네. 바위섬을 설득하지 못할지라도. 푸른 표범 일곱마리 푸른 개 일곱마리 일곱 개 혀로 바위 섬을 흝고 입 맞추고, 적시고 가슴을 두드리며 바다라는 이름을 되풀이하네. ​ 네루다가 죽은 후로 칠레는 피노체트 정권 아래에서 실종, 고문을 포함하는 가혹행위를 당한 자가 10만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소설 는 칠레의 비참했던 과거에 촛점을 맞추지는 않는다. 거장 네루다와 한 우편 배달부와의 아름다운 우정이 따스하고 유모러스하게 그려진다. [출처] 5.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작성자 맑은샘물  
1941    프랑스 실존주의파 시인 - 장 주네 댓글:  조회:4385  추천:0  2016-12-11
장 주네       Jean Genet (1983). 장 주네 (Jean Genet, 1910년 12월 19일 ~ 1986년 4월 15일) 는 실존주의파에 속하는 프랑스의 시인·소설가·극작가이다. 파리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창부였던 어머니의 버림을 받고, 10세때는 굶주린 배를 억제하지 못하고, 애정에 굶주려 절도죄로 감화원(感化院)에 들어갔다. 그 후 탈옥하여 거지·도둑·남창 (男娼)·죄수 생활을 하면서 유럽 전역을 방황했다. 점령 중에 투옥되었을 때에는 1942년 프렌 형무소에서 데뷔작 소설 및 자전(自傳)의 를 썼다. 1947년에 주베가 을 상연한 것으로 극작가의 길을 열었는데, 이후 그 전작(前作)인 를 비롯하여 가 상연되어, 찬부(贊否) 양론을 낳았다. 그것들은 어느것이나 남색(男色)과 반역과 증오와 범죄가 지배하는 암흑의 세계를 가장 외설스럽고 난잡한 비어음어(卑語陰語)와 빛나고 투명한 시어로써, 독창적이고도 난해한 문체로 그려내서 관객을 현대의 흑막세계로 안내한다. 그것은 반역과 악의 찬가(讚歌)이며, 순수성에의 역설적인 발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주네에 대한 평전 《성 주네》를 저술하면서 그의 문학을 "말로 표현된 고행승적 (苦行僧的) 실험"이라고 했다. 대표작으로서는 시집 《장미의 기적》과 빈민 구제사업의 도움으로 살아난 자기의 이야기를 쓴 소설 《도둑 이야기》, 그리고 희곡 《하녀>가 있다. ======================== 한때 범죄자·부랑자였으나 소설을 통해 관능적이고 때로는 외설스러운 주제를 시적 우주관으로 변형시켜 보여주었다. 또한 전위극, 특히 부조리극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한 극작가이기도 했다. 가브리엘 주네의 사생아로 어머니에게도 버림받아 어떤 농가에서 자랐다. 10세 때 절도죄로 사춘기의 일부를 악명높은 메트레 소년원에서 보냈는데, 그곳에서 후에 소설 〈장미의 기적 Miracle de la rose〉(1945~46)에서 묘사된 일들을 많이 체험했다. 자전적인 작품 〈도둑 일기 Journal de voleur〉(1949)에서는 바르셀로나·안트웨르펜 및 기타 여러 도시에서 떠돌이, 소매치기, 남창 노릇을 하며 살던 시기(1930경~39)의 일들을 숨김 없이 기록했다. 이 작품에는 탐미주의자이며 실존주의자, 그리고 부조리극의 선구자인 작가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1942년 프렌에서 강도죄로 복역하던 중 글을 쓰기 시작하여, 걸작 〈꽃들의 성모 마리아 Notre-Dame des Fleurs〉(1944)를 발표했다. 여기에서 그는 전쟁 직전의 몽마르트르 풍경, 살인청부업자, 포주, 성도착자들이 판치는 지하세계의 모습을 실감나게 그렸다. 그의 재능은 장 콕토, 장 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의 관심을 끌었다. 1948년 강도죄로 10번째 기소되어 자동으로 종신형이 선고되자 여러 저명한 작가들이 프랑스 대통령에게 청원했고, 마침내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또다른 소설 2편 〈장례식 Pompes funèbres〉(1947)과 〈브레스트의 논쟁 Querelle de Brest〉(1947, 영화화 1982)을 발표한 후,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초기 희곡들이 보여주는 간결성과 신고전주의적인 단막극 구성은 그가 사르트르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엄중한 감시 Haute Surveillance〉(1949)에서는 자신이 있던 감옥세계를 배경으로 한 주제가 계속된다. 그러나 〈하녀들 Les Bonnes〉(1947)에서는 정체성이라는 복잡한 문제를 파헤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문제의식은 새뮤얼 베케트, 외젠 이오네스코 등 다른 전위 극작가들에게로 이어졌다. 이 작품으로 그는 부조리극의 대가로 자리를 굳혔다. 이후의 희곡작품 〈발코니 Le Balcon〉(1956)·〈흑인들 Les Nègres〉(1958)·〈병풍 Les Paravents〉(1961) 등은 표현주의 양식에 따른 대작으로, 관객들 자신의 위선과 공범의식을 폭로함으로써 충격을 주고 그들을 극 안으로 말려들게끔 구성했다. 이 '증오의 연극'(thétre de haine)은 정치적·사회적 상황으로부터 최대한의 극적 효과를 얻어내려고 시도하지만 반드시 우파 아니면 좌파(급진주의)라는 식의 정치적 진부함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반항아이며 극도의 무정부주의자인 그는 모든 형태의 사회적 규율과 정치적 참여를 거부했다. 그가 체험한 난폭하고 종종 타락한 에로티시즘은 신비스러운 겸양의 개념으로 이어졌다. 장 폴 사르트르는 평론 〈성자 주네, 배우 겸 순교자 Saint Genet, comédien et martyr〉(1952)에서 금욕과 겸양에 대한 그의 명백한 추구를 성자의 노력에 비유했다. ========================================
1940    프랑스 "인민의 시인" - 자크 프레베르 댓글:  조회:4949  추천:0  2016-12-11
  출생일 1900년 2월 4일 프랑스의 뇌이-쉬르-센 사망일 1977년 4월 11일 프랑스 노르망디(Normandy)의 오몽빌-라-프티트 데뷔 1924년 (Les grands,프랑스) 요약 자크 프레베르는 프랑스의 시인이자 시나리오 작가이다. 초현실주의자로 알려진 그는 마르셀 카르네, 폴 그리모 등의 감독과 협력하면서 영화사에 기록될만한 작품을 다수 남겼다. 목차 생애와 이력 작품 세계 영화사적 평가 작품 목록 자크 프레베르 Jacques Prevert 생애와 이력 프랑스의 시나리오 작가, 시인. 1900년 2월 4일 프랑스의 뇌이-쉬르-센(Neuilly-sur-Seine)에서 태어났다. 자크 프레베르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현대 시인이며 시나리오 작가로 시적 리얼리즘 시기에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자크 프레베르의 아버지 앙드레 프레베르(Andre Prevert)는 생계를 위해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취미로 영화와 연극 비평을 병행했던 아버지 덕분에 프레베르는 어린 시절부터 공연장과 극장을 자주 드나들었다. 그는 학교생활에 싫증을 느껴 열다섯 살 되던 해에 학교를 그만 두었다.    1925년에는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하면서, 마르셀 뒤하멜(Marcel Duhamel), 레이몽 크노(Raymond Queneau), 이브 탕기(Yves Tanguy), 앙드레 브로통(Andre Breton) 등과 교류하였다. 자크 프레베르는 프랑스 공산당에 참여하였던 영화감독 장 르누아르(Jean Renoir)와는 자연스럽게 인연을 맺게 되었다. 장 르누아르와의 공동작업 (Le Crime de Monsieur Lange, 1936)는 두 예술가의 정치 성향이 잘 투영된 작품이었다. 또 한 사람의 참여파 감독인 장 그레미옹(Gremillon)과는 (Lumiere d’ete, 1943) 등에서 함께 작업하였다. 작품 세계 시나리오 및 대사 작가로서 자크 프레베르의 활동은 주로 1935년부터 1945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프레베르는 마르셀 카르네(Marcel Carne)와 더불어 프랑스 시적리얼리즘 사조를 대표하는 숱한 걸작들을 남겼다. (Drole de Drame, 1937), (Le Quai Des Brumes, 1938), (Le jour se leve, 1939), (Les enfants du paradis, Children of Paradise, 1945) 등이 프레베르와 카르네의 공동작업의 결과물이다.    왕과 새 The King and the Mockingbird 자크 프레베르의 또 다른 영화적 동반자로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감독인 폴 그리모(Paul Grimault)가 있었다. 프레베르와 그리모는 30년 가까이 함께 작업을 하였다. 두 사람의 공동작업으로는 안데르센의 동화를 각색한 작품 (La bergere et le ramoneur, 1952), (Le roi et l’oiseau, 1980), (La table tournante, 1988) 등이 있다. 특히 는 프레베르가 병상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몰두하였던 작품이었다. 사망 전날까지도 폴 그리모에게 전보를 보낼 정도로 두 사람은 깊은 우정을 나눈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크 프레베르는 그는 또한 평생에 걸쳐 사회 참여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또한 흔들림 없는 초현실주의자로서 문학적 동반자들과도 연대를 구축하였다. 유랑극단 10월 그룹(Le groupe Octobre)에 참여하여 파업 중인 공장 등을 순회하며 공연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영화사적 평가 시인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자크 프레베르는 마르셀 카르네, 폴 그리모 등의 작가로 교류하면서 영화계에서 활동하였다. 프레베르는 스스로 ‘인민의 시인’으로 기억되기를 원했다. 사망 몇 해 전 인터뷰에서, 프레베르는 “유행을 따를지라도 나는 대중들에게 가까이 가고 싶다. 나를 즐겁게 만드는 것은 독자들을 얻는 것이다. 그들은 가장 위대한 비평가들이다”라고 말했다. 1977년 4월 11일, 자크 프레베르는 일흔 일흔의 나이에 노르망디(Normandy)의 오몽빌-라-프티트(Omonville-La-Petite)에서 폐암으로 사망하였다. 마르셀 카르네는 프레베르의 사망 직후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에 쓴 글에서 “유머와 시정이 가득했던 프랑스 영화의 유일한 시인”으로 프레베르의 죽음을 추모했다. 작품 목록 (Les grands,프랑스,1924) (Comme une carpe , 프랑스,1932,) (L’affaire est dans le sac, 프랑스,1932) (Tenerife, 프랑스,1932) (Ciboulette, 프랑스,1933) (L’hotel du libre echange ,프랑스,1934) (L’Atalante, 프랑스,1934) (Un oiseau rare , 프랑스,1935) (Jeunesse d’abord , 프랑스,1935) (Si j’etais le patron , 프랑스,1935) (27 rue de la Paix , 프랑스,1936) (Jenny , 프랑스,1936) (Le crime de Monsieur Lange, The Crime of Monsieur Lange,프랑스,1936) (Moutonnet , 프랑스,1936) (L’affaire du courrier de Lyon , 프랑스,1937) (Drole de Drame, 프랑스,1937) (Ernest the Rebel , 프랑스,1938) (Le Quai Des Brumes, Port of Shadows , 프랑스,1938) (Boys’ School , 프랑스,1938) (Le jour se leve, Daybreak , 프랑스,1939) (L’enfer des anges , 프랑스,1941) (Remorques, 프랑스,1941) (Les Visiteurs du Soir , 프랑스,1942) (Adieu Lonard , Original Idea,프랑스,1943) (Lumiere d’ete, 프랑스,1943) (Le soleil a toujours raison , 프랑스,1943) (Une femme dans la nuit, 프랑스,1943) (Sortileges, 프랑스,1945) (Les enfants du paradis, Children of Paradise , 프랑스,1945) (Les portes de la nuit, 프랑스,1946) (Aubervilliers, 프랑스,1946) (L’arche de Noe, 프랑스,1947) (Voyage surprise, 프랑스,1947) (La fleur de l’age, 프랑스,1947) (Les amants de Verone , 프랑스,1949) (Souvenirs perdus, 프랑스,1950) (La Marie du port , 프랑스,1950) (La bergere et le ramoneur, 프랑스,1952) (Bim, 프랑스,1954) (Carnet de Baile ,프랑스,1955) (Notre-Dame de Paris, The Hunchback of Notre Dame, 프랑스,1956) (La Seine a rencontre Paris, 프랑스,1957, 단편) (Amours celebres, 프랑스, 1961) (Le roi et l’oiseau, The King and the Mockingbird , 프랑스,1980) (La table tournante, 프랑스,1988)   =============== 아침식사                               그는 커피를                           잔에 담았다                           그는 밀크를                           커피 잔에 탔다                           그는 설탕을                           밀크 커피에 넣었다                           작은 숟가락으로                           저어서                           그는 밀크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잔을 내려놓았다                           말없이                           그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는 연기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그는 재를                           재떨이에 떨었다                           말없이                           날 보지도 않고                           그는 일어섰다                           그는 모자를                           머리에 썼다                           그는 비옷을                           입었다                           비가 오고 있었으니까                           그리곤 떠났다                           빗속으로                           말 한마디 없이                           날 쳐다보지도 않고                           그래서 난                           얼굴을 손에 묻고                           울어버렸다.       세계의 명시/ 자크 프레베르 쓰기공책 둘에 둘은 넷 넷에 넷은 여덟 여덟에 여덟은 열여섯… 다시! 선생님은 말하고 둘에 둘은 넷 넷에 넷은 여덟 여덟에 여덟은 열여섯. 한데 저기 하늘을 지나가는 거문고새가 있네 아이는 새를 보고 아이는 새소리를 듣고 아이는 새를 부르네: 날 좀 구해 줘 나랑 놀아 줘 새야! 그러자 새가 내려오고 아이와 함께 노네 둘에 둘은 넷… 다시! 선생님은 말하고 아이는 놀고 새는 아이와 함께 놀고… 넷에 넷은 여덟 여덟에 여덟은 열여섯이고 그럼 열여섯에 열여섯은 얼마지? 열여섯에 열여섯은 아무것도 아니고 절대로 서른둘은 아니네 어쨌든 아니고 그런 건 멀리 사라지네. 아이가 새를 책상 속에 감추고 모든 아이들은 새의 노래를 듣고 모든 아이들은 새의 음악을 듣고 여덟에 여덟은 차례 되어 사라지고 넷에 넷도 둘에 둘도 차례차례 꺼져 버리고 하나에 하나는 하나도 둘도 아니고 역시 하나씩 사라지네. 거문고새는 놀고 아이는 노래하고 선생님은 소리치네: 장난질 당장 그만두지 못해! 그러나 모든 아이들은 음악 소리를 듣고 교실의 벽은 조용히 무너지네. 유리창은 모래가 되고 잉크는 물이 되고 책상들은 숲이 되고 분필은 절벽이 되고 펜대는 새가 되네. 시를 말하다 정끝별 l 시인 뭐니 뭐니 해도 자크 프레베르는 내게 이브 몽탕이 부른 샹송 ‘고엽(枯葉, Les Feuilles Mortes)’의 작시자로 먼저 떠오른다. ‘고엽’은, 프레베르가 시나리오를 썼던 영화 에서, 주인공이었던 몽탕이 직접 불러 불후의 명곡이 되었다. 낙엽이 거친 삽 속에 쓸려 담기듯 우리의 추억 또한 무정한 삶 속에 쓸려 담기지만, 세월은 그렇게 그대와 나를 갈라놓고 사랑의 흔적마저 지워버리지만, 여름날의 태양 같았던 우리의 사랑을 그대 또한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노래였던가. 그 깊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음률, 노랫말 덕분에 “투아 튀 메메 에 wm 테메”(Toi, tu m'aimais et je t'aimais, 그대 날 사랑했고 난 그대를 사랑했네)”와 “투아 키 메메 에 무아 키 테메(Toi qui m'aimais, et moi qui t'aimais, 날 사랑했던 그대 그대를 사랑했던 나)라는 불어 문장이 저절로 외워지기도 했던. ▶자크 프레베르. 그의 사진이나 초상화는 거의 담배를 문 모습이다. 프레베르가 이렇듯 멜랑콜리한 사랑시만을 썼던 건 아니다. 시인 레몽 크노는 그를 1940~1950년대 프랑스 젊은이들의 지도자로 칭했다. 부르주아 계급과 신(神)과 학교와 기성세대를 조롱했던 프레베르의 목소리가 당대 젊은이들의 목소리보다 더 젊었기 때문이다. ‘쓰기공책’ 또한 획일적인 주입식 교육을 풍자한 시다. ‘거문고새(l’oiseau-lyre, 금조琴鳥)’는 꽁지깃을 펼친 모습이 리라(하프)와 같아서 붙여진 이름인데, 특히 주변의 모든 소리를 그대로 따라하는 새라 한다. 이 거문고새와 함께 아이들이 글자나 숫자 등을 배울 때 베껴 쓰곤 하는 쓰기공책 또한 단순한 모방 교육을 상징한다. 프레베르 시에는 ‘아이’와 ‘새’가 자주 등장한다. “피처럼 따뜻하고 붉은 새/ 그토록 유연하게 날아오르는 새/ 예쁜 아가 그것은 네 마음”(‘새잡이의 노래’)에서처럼, 그는 생명과 사랑과 자유와 순수를 간직한 그 모든 것들을 ‘새’ 혹은 ‘예쁜 아가(마음)’라 부르곤 했다. “이제 다시는 이 아이들처럼 뛰어 놀 수 없고”, “새들처럼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아다닐 수 없는”(‘절망은 벤치 위에 앉아 있다’) 상황이란 그에게 ‘절망’ 그 자체였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새를 나누어주는(‘유리장수의 노래’) ‘새 장수’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희구했던 프레베르는 거짓과 권위로 상징되는 숨 막히는 질서와 경직된 삶을 일관되게 희화화하고 부정하곤 했던 것이다. 지루한 산수 시간. 아이는 “둘에 둘은 넷, 넷에 넷은 여덟”, 그리고 “다시!”에서처럼 단순 반복의 암기식 수업에 흥미가 없다. 아이는 하늘을 나는 새처럼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꿈꾸고 싶어 한다. 그러고는 “모든 걸 지운다/ 숫자와 말과/ 날짜와 이름과/ 문장과 함정을/ 갖가지 빛깔의 분필로/ 불행의 흑판에다/ 행복의 얼굴을 그린다/ 선생님의 야단에도 아랑곳없이/ 우등생 아이들의 야유도 못들은 척”(‘열등생’)한다. 새의 노래를 따라 하는 아이를 향해 선생님은 “당장 그만두지 못해!”라고 소리를 쳐보지만, 아이의 마음을 흉내 내며 노래하는 거문고새의 자유로운 노랫소리는 선생님의 목소리를 이긴다. 한 아이에게서 시작된 거문고새의 노랫소리를 모든 아이들이 따라하게 될 때, ‘교실의 벽’은 무너지고 온갖 교육의 도구들은 모래·물·숲·깃털 등 자연 그 자체로 환원된다. ‘프레’는 ‘초원’이라는 뜻이고 ‘베르’는 ‘초록’이라는 뜻이다. ‘프레베르’라는 그의 이름처럼 프레베르는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시 정신을 잃지 않았던 시인이다. 이 시를 읽다보면, 학생들이 책상 위로 올라가 ‘사물을 다른 각도에서 보’고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을 살아라)’ 하라던 키팅 선생을 ‘오, 마이 캡틴!’이라 외치던 영화 가 떠오르고, 공책과 책장은 물론 세상 모든 것들 위에 ‘자유’라고 쓰고 또 쓰던 폴 엘뤼아르의 ‘자유’라는 시가 떠오른다.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그걸로 족해 족해 내 사투리로 내가 늘어놓을래”로 시작하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가 떠오르고, “초등학교 4학년이면 인생이 결정된다”라는 슬로건 아래 ‘공부 기계’ ‘학원 기계’로 전락해 가는 우리 아이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프레베르의 다른 시 “오, 어린 시절은 얼마나 비참한가/ 지구는 회전을 멈추고/ 새들은 더 이상 노래하려 들지 않고/ 태양은 빛나기를 거부하고/ 모든 풍경은 움직이지 않는다/ (…) 우리는 안개 속에서/ 나이 든 늙은이들의 안개 속에서 숨이 가쁘다”(‘어린 시절’)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프레베르의 시는 쉽다. ‘그가 표현한 그대로’가 바로 그의 시의 의미다. 보들레르에서 랭보로 이어지는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이 쌓아 놓은 그 난해하고 현란한 상징의 장벽을 무시할 수 있는 자유를 선사한다고나 할까? 입말에 가까운 그의 시는 자연스러운 언어로 자연스러운 일상의 풍경들을 포착하곤 한다. 새의 노래처럼 가볍게! 소리와 의미 차원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반복의 형식은 시 전체에 동적인 분위기와 리듬감을 부여한다, 아이의 노래처럼 즐겁게! 때문에 그의 시는 소리 내어 읽었을 때 담백하면서 시원한 시의 맛이 완성된다. 읽고 나서는 자신도 모르게 따라 노래하게 되는 시, 그게 바로 프레베르의 시다. 자연을 사랑한 자크 프레베르에게 헌정된 생제르멩데보(Saint-Germain-des-Vaux) 숲의 정원 자크 프레베르 (Jacques Prévert, 1900.2.4-1977.4.11) 파리 서쪽 변두리 뇌이쉬르센(Neuilly-sur-Seine)에서 태어났다. 사립중학교를 졸업한 뒤 열다섯 살 때부터 시장과 백화점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어려서부터 예술에 뜻이 있어 스물여섯 살에 당시 유행하던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담했으나 브르통, 아라공 등과 뜻이 맞지 않아 그룹에서 나왔다. 이때부터 동생 피에르 프레베르와 친구 마르셀 뒤아멜 등과 함께 영화를 만들었다. , , , , 등 유명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을 했고 샹송 가사도 썼다. 마흔여섯 살에 시집 을 펴냈다. 발간된 지 수주일 만에 10만여 부가 팔리며 일약 스타 시인이 되었으며 그 후 , , 등 세 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시뿐만 아니라 영화, 사진, 샹송 등 다방면의 일을 했으며 특히 어린이들을 위한 사진과 그림을 곁들인 동화를 상당수 출판해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기도 했다. 1977년 폐암으로 사망했다. 글 정끝별 1988년 에 시가, 1994년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된 후 시 쓰기와 평론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시집으로 , , , , 시론ㆍ평론집 , , , 등이 있다.             메세지                            - 자크 프레베르   누군가 연 문 누군가 닫은 문 누군가 앉은 의자 누군가 쓰다듬는 의자 누군가 깨문 과일 누군가 읽은 편지 누군가 넘어뜨린 의자 누군가 연문 누군가 아직 달리고 있는 길 누군가 건너지르는 숲 누군가 몸을 던지는 강물 누군가 죽은 병원  나는 보통 시를 읽을때 그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리고 이에 얼마나 내가 감정이입 할 수 있으며 그 시가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지를 중요시 한다. 물론 운율이나 기타 다른 요소 또한 작용하겠지만, '나'는 머릿속에 그리며 따라가는 그 과정이 좋다. 그렇기에 우연히 본 자크 프레베르의 '아침의 식사'에서 시작하여 계속해서 다른 시들을 찾고 있는지 모른다.   아침의 식사         찻잔에 커피를 부었다.  찻잔의 커피에 밀크를 부었다.  밀크 커피에 사탕을 넣었다  작은 스푼으로 저었다  밀크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찾잔을 놓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재떨이에 재를 떨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나를 보지 않고 일어섰다  모자를 머리에 썼다  비가 내렸으므로 레인코트를 입었다  그리고 빗속으로 나가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쪽을 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머리를 감쌌다  그리고 나는 울었다.           사실상 비슷한 구성. 물론 그의 시가 모두 이런 구성인건 아니지만 그의 느낌은 시 곳곳에서 살아있어 계속 찾게 만든다.   난 이런사람   나는 이런사람 이렇게 태어났지   웃고싶으면 큰소리로 웃고 날 사랑하는 이를사랑하지   내가 사랑하는사람이 매번 다르다해도 그게어디 내탓인가   나는 이런사람 이렇게 태어났지 하지만 넌 더이상무엇을 바라나 이런 내게서   나는 하고싶은걸 하도록 태어났지 바뀔건 단 하나도없지   내 발꿈치가 아주 높이솟았다 해도 내 몸이 몹시 휘었다 해도 내 가슴이 너무도 거칠다 해도 내 두눈이 이다지 퀭하다 해도 네가 그걸 어쩌겠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나는 이런사람 난 내마음에드는 사람이 좋은 걸 네가 그걸 어쩌겠나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뿐인데 그래 난누군가를 사랑했지 누군가가 날 사랑했었지 어린아이들이 서로 사랑하듯이 오직 사랑밖에는 할 줄 모르듯이 서로 사랑하고 사랑하듯이.... 왜 내게 묻는거지 난 너를 즐겁게 하려고 이렇게 있고 바뀐건 아무 것도 없는데    이 얼마나 솔직한가. 위 두 시에서는 감정의 표현 없이 사건의 나열로 솔직하게 표현하였다면 여기선 그냥 꾸밈 없이 자기 하고싶은 말만 나불댄다. 그는 숨김 없는 표현으로 내면의 순수성을 자극한다. 시 '쓰기공책'에서는 주입식 교육에 대한 반항을 보여주며 자유로운 영혼에 대한 추구를 보여주며 자연으로의 회귀를 외치고 있다.    밤의 파리    성냥개비 세 개를 하나씩 켠다 어둠 속에서 첫 번째는 네 얼굴 또렷이 보기 위하여 두 번째는 네 두 눈을 보기 위하여 마지막 것은 네 입술 보기 위하여 그 다음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내 두 팔 안에 너를 꼭 껴안는다 이 모든 것을 기억하기 위하여      일상적인 풍경과 소재로 시를 쓴다는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단순히 시 뿐만 아니라 내가 당연하다는 듯 행동하던 것, 느꼈던 것들을 제 3자가 보는 것처럼 관찰하는 일은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보다, 모래밭에서 각 모래에도 차이가 있다는 걸 깨닫는게 더 어렵다는걸 알게 한다. 사소함에서 시를 쓰기에 그의 시 하나하나에서 나의 모습 또한 읽히는 것은 아닐까.  ========================     이 사랑은 이토록 사납고 이토록 연약하고 이토록 부드럽고 이토록 절망한 이 사랑은 대낮같이 아름답고 날씨처럼 나쁜 사랑은, 날씨가 나쁠 때 이토록 진실한 이 사랑은 이토록 아름다운 이 사랑은 이토록 행복하고 이토록 즐겁고 또 이토록 덧없어 어둠속 어린애처럼 두려움에 떨지만 한밤에도 어른처럼 태연한 어른처럼 자신있는 이 사랑은 다른 이들을 겁나게 하던 그들의 입을 열게 하던 그들을 질리게 하던 이 사랑은 우리가 그네들을 못지키고 있었기에 염탐당한 이 사랑은 우리가 그들을 추격하고 해하고 짓밟아 죽이고 부정하고 잊었기 때문에 쫒기고 상처받고 짓밟히고 살해되고 부정되고 잊혀진 이 사랑은 아직 이토록 생생하고 이토록 볕에 쪼인 송두리채 이 사랑은 이것은 너의 것 이것은 나의 것 언제나 언제나 새로웠던 그것 한번도 변함없던 사랑 초목같이 진정하고 새처럼 애처롭고 여름처럼 따뜻하고 생명에 차 우리는 둘이 다 가고 올 수 있으며 우리는 잊을 수 있고 우리는 다시 잠들 수 있고 잠 깨고 고통받고 늙을 수 있고 다시 잠들고 죽음을 꿈꾸고 정신들고 미소짓고 웃음 터뜨리고  다시 젊어질 수 있지만 우리들의 사랑은 여기 고스란히 멍텅구리처럼 고집 세고 욕망처럼 피 끓고 기억처럼 잔인하고 회환처럼 어리석고 회상처럼 부드럽고 대리석처럼 차디차고 대낮처럼 아름답고 어린애처럼 연약하여 웃음지으며 우리를 바라본다 아무 말 없이도 우리에게 말한다 나는 몸을 떨며 귀를 기울인다 그래 나는 외친다 너를 위해 외친다 나를 위해 외친다 네게 애원한다 너를 위해 나를 위해 서로 사랑하는 모두를 위해 서로 사랑하였던 모두를 위해 그래 나는 외친다 너를 위해 나를 위해 내가 모르는 다른 모두를 위해 거기 있거라 지금 있는 거기 있어라 옛날에 있던 그 자리에  거기 있거라 움직이지 마라 떠나 버리지 마라 사랑받은 우리는 너를 잊어 버렸지만 너는 우리를 잊지 않았다 우리에겐 땅 위에 오직 너뿐 우리들 차디차게 변하도록 버리지 마라 항상 더욱 더 먼 곳에서도 그리고 그 어디에서든 우리에게 생명의 기별을 다오 훨씬 더 훗날 어느 숲 기슭에서 기억의 숲속에서 문득 솟아나거라 우리에게 손 내밀고 우리를 구원하여라 매일 사랑때문에 산다. 사랑에 슬퍼하며 사랑에 기뻐하며 사랑에 분노하며 사랑에 차고 넘치고 싶어서 산다. 어린아이들처럼 사랑앞에 솔직해지자. 간절해지자. 없어도 살 수 있다고 착각하지도 말고 건방지지도 말고 간절해지자. 그것만이 전부인 것처럼  그것으로만 숨쉴 수 있는 것처럼. 그때야 비로소 사랑은 두팔 벌리고 나를 향해 찾아온다. 뒷짐지고 남의 일처럼 방관하며 코웃음 날리며 게으른 나에게 시랑은 오지 않는다. 바지런하여 발이 땅에 닿지않도록 갈구하고 갈급해야지 사랑은 촉촉한 단비처럼 그렇게 온다. 전부인 것처럼, 그것이 없으면 숨쉴 수 없는 것처럼, 전부를 걸 수 있고 전부를 내어줄 수 있는 대범함이 있을때 다이아몬드보다 반짝이는 눈으로 서로를 탐색하고 미리 지름길로가서 다가오는 당신을 맞이 할 모든 준비가 되어 있을때 사랑은 온다. 큰 소리 뻥뻥 치며 오든지 말든지 그것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자만하고 게으르고 태만해지면 사랑은 가차없이 휘돌아 저만큼 비켜 지나가 버린다. 어린아이가 엄마젖을 찾는 것과 같은 본능적이고 간절함이 사랑을 맞이할 수 있는 자세인 것이다. 겁도 없이 사랑없이 살 수 있다고 큰소리 치지마라. 바로 그 순간이 당신에게 사랑이 가장 필요한 때이며 사랑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역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나도 당신도 이미 알고 있다. 때문에 사는 것이고, 그러므로 사는 것이며, 그리하여 살아지는 것이다. 그 모든 원인과 주체는 결국은 사랑이다. 이란 시 때문에 시인을 알게 된 대학 시절 으로 나의 잠을 송두리째 뺏어가 버렸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준 폭풍에다가 삼각형 파도를 더해준 이 시는 읽을 때마다 사랑의 쪼잔함과 숭고함, 그리고 간절함과 그래서 더욱 특별한, 일상적이고 특수한 모든 경우의 사랑속에 나를 던져놓고 헤엄치게 만든다. 그래서 충분히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사는 나의 하루하루가 얼마나 살만한 지를 느끼게 한다. 결국 사람은 사랑으로 살 것이니 사랑이 빵이 되고 밥이 되어 당신을 살아가게 하리라.   =============================== 아버지   / 자크 프레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거기 그냥 계시옵소서  그러면 우리도 땅위에 남아 있으리라  땅은 때때로 이토록 아름다우니  뉴욕의 신비도 있고  파리의 신비도 있어  삼위일체의 신비에 못지 아니하니  우르크의 작은 운하며  중국의 거대한 만리장성이며  모를레의 강이며  캉브레의 박하사탕도 있고  태평양과 튈르리 공원의 두 분수도,  귀여운 아이들과 못된 신민도  세상의 모든 신기한 것들과 함께  여기 그냥 땅위에 널려 있어,  그토록 제가 신기한 존재란 점이  신기해서 어쩔 줄 모르지만  옷 벗은 처녀가 감히 제 몸 못 보이듯  저의 그 신기함을 알지도 못하고  이 세상에 흔한 끔찍한 불행은  그의 용병들과 그의 고문자들과  이 세상 나으리들로 그득하고  나으리들은 그들의 신부, 그들의 배신자,  그들의 용병들 더불어 그득하고  사철도 있고 해(年)도 있고  어여쁜 처녀들도 늙은 병신들도 있고  대포의 무쇠 강철 속에서 썩어가는  가난의 지푸라기도 있습니다.  ======================================= 꽃다발  자크 프레베르  거기서 무얼 하나요 소녀여  갓 꺾은 꽃을 안고  거기서 무얼 하나요 젊은 처녀여  시든 꽃을 안고  거기서 무얼 하나요 어여쁜 여인이여  말라가는 꽃을 안고  거기서 무얼 하나요 늙은 여인이여  죽어가는 꽃을 안고  승리자를 기다리지요  내 누이는 어떻게 되었지  자크 프레베르  그것은 아름다운  고통  그것은 즐거운  괴로움  그것은 잔인한  多情  그것은 무관심한  절망  그것은 죽음이라는  불행  내 누이여  그게 사랑이라더구나  행복이라던  행운이라던  배신당한 애인들  자크 프레베르  나는 램프를 지니고 있었고  너는 빛을 지니고 있었지  심지는 누가 팔아 버렸을까?  노래  자크 프레베르  오늘이 며칠일까  우린 온 세월을 함께 살고 있지  그대여  우린 온 삶을 함께 살고 있지  내 사랑하는 이여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고  서로 살아가며 사랑하지  우린 모르지  삶이 무엇인지  세월이 무엇인지  또 사랑이 무엇인지도  빰에 빰을 대고  하안리히 하이네  빰에 빰을 대고  울어 보자  가슴을 서로 대고  불타 보자  눈물이 불길에  떨어질 때  서로 꼭 껴안고  죽어 버리자  삶  자크 프레베르  삶이 목걸이라면  하루하루는 진주일 테죠  삶이 새장이라면  하루하루는 눈물일 테죠  삶이 숲이라면  하루하루는 나무일 테죠  삶이 나무라면  하루하루는 나뭇가지  삶이 나뭇가지라면  하루하루는 나뭇잎  삶 그것이 바다라면  하루하루는 파도일 테죠  파도마다 탄식  노래  전율  삶이 도박이라면  하루하루는 카드일 테죠  다이아몬드나 클로버  스페이드  불운  삶이 행운  사랑의 카드라면  그것은 엉덩이와 심장일 테죠  잃어버린 시간  자크 프레베르  공장 문 앞에서  노동자는 문득 발걸음을 멈춘다  화창한 날씨가 그의 옷깃을 잡아당긴다  그는 돌아서서  눈부신 하늘에서 미소짓는  빨갛고 동그란  태양을 바라보며  친근하게 눈짓을 보낸다  자 태양 친구 말해봐  이건 영 바보 같은 짓거리가 아닐까  이런 하루를 고스란히  사장한테 갖다 바쳐야 하는 건  아름다운 여자  자크 프레베르  신에게 부인받고  악마에게 부인받고  유죄일 수도 없는 넌  아름다운 여자  부인할 수 없는 여자  넌 아름다워  바다와 대지처럼  인간이 번식하기 전 바다와 대지처럼  하지만 넌 여자  넌 아름다워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아침처럼 저녁처럼  넌 아름답고 혼자가 아니야  넌 아름다워  아름다운 여자들 속에서도  하지만 아름다운 여자들 속에서 별이 아니라  넌 그들 중 한 여자  나의 것이지  하지만 넌 내 것이 아니야  하지만 넌  단 하나뿐인 무인도  내가 너와 함께 살 수 있는  바라볼 권리  자크 프레베르  당신  난 당신을 바라보지 않아요  내 삶도 당신을 바라보지 않아요  난 내가 사랑하는 것만을 사랑해요  그것만이 날 바라보고  날 이해하지요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만을 사랑해요  난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은 내게 바라볼 권리를 주지요  ... ... 할 때  자크 프레베르  새끼 사자가 점심을 먹을 때  어미 사자는 기운을 차린다  열기가 자기 몫을 요구할 때  대지는 낯을 붉힌다  죽음이 그이에게 사랑을 말할 때  生은 전율하고  生이 그이에게 죽음을 말할 때  사랑은 미소짓는다  격언  자크 프레베르  없다  神  없다  높은 사람  무지무지하게  좋다  (바보의 비문법적인 글)  도마뱀  자크 프레베르  사랑의 도마뱀이  또다시 달아나버렸네  내 손가락 사이에  제 꼬리만을 남겨둔 채  하지만 차라리 잘된 일이야  난 그저 도마뱀을 기르고 싶었을 뿐이니까  날 위해서  휼륭한 가문  자크 프레베르  루이 1세  루이 2세  루이 3세  루이 4세  루이 5세  루이 6세  루이 7세  루이 8세  루이 9세  루이 10세(고집불통이라고들 하지)  루이 11세  루이 12세  루이 13세  루이 14세  루이 15세  루이 16세  루이 17세  루이 18세  그리고는 아무도 아무도 없다……  대체 어찌된 사람들인데  스물까지도  채 셀 줄 모르게 생겨먹었지?  여론  자크 프레베르  - 난 행복해!  - 무슨 권리로?  사람들은 그를 응시한다  좀 더 나은걸 기대하면서  무심한 여자  자크 프레베르  난 무심한 여자  이 세상에서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네  내가 사랑한 그이 말고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네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이  내 사랑, 내 사랑이여  지금은 모든 것이 변했네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는 그이 탓이려나  더 이상 내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는 그이 탓이려나  혹 내 탓이려나  내 사랑이여 난 모르겠네  이 모든 게 어찌된 노릇인가?  지금 난 누워있네  사랑의 짚더미 위에  모든 사람들 속에서도 홀로고  절망 속에서도 홀로인 채로  난 무심한 여자 난 무딘 여자  오 내 사랑이여 내 사랑이여  죽어서도 살아서도  부디 그 옛날 잊지 말기를  날 사랑했고  나 또한 사랑했던  내 사랑이여  대화  자크 프레베르  돈지갑:  내가 쓸모 있다는 건 이론의 여지가 없어  우산 세우개:  동감이야 하지만 나라는 존재가 없다면  날 발명해 내느라 골머리 좀 썩어야 할걸  깃대 꽂이:  난 군소리 안 하겠어  겸손하게 잠자코 있겠다구  하기야 말할 권리도 없지 뭐  마스코트:  난 행운을 가져다주지 그게 내 일이니까  다른 셋: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심보 더러운 녀석!  즐거운 잠  자크 프레베르  아이: 어느날 밤 전 책을 한 권 읽었어요  꿈을 꾸느라 그랬을까요?  빛나고 즐거운 사람들이  태양 속에서  태양 위에서  태양 한복판에서  가득한 햇빛 속에서  살고 있었어요  아빠: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아이: 왜요?  하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은  영원한 불 속에서  끝없이 불타면서 살고 있다고  딱 잘라 말하는  책들은  그토록이나 많으면서요  ... ... 그뿐이다  자크 프레베르  한 선원이 바다를 떠났다  그의 배가 항구를 떠났다  왕이 왕비를 떠났다  한 구두쇠가 그의 재산을 떠났다  ... ... 그뿐이다  한 과부가 몽상(蒙喪)을 떠났다  한 실성한 여자가 보호소를 떠났다  네 미소가 내 입술을 떠났다  ... ... 그뿐이다  넌 나를 떠날 것이다  넌 나를 떠날 것이다  넌 나를 떠날 것이다  넌 내게 돌아올 것이다  너와 난 결혼할 것이다  너와 난 결혼할 것이다  칼과 상처가 결혼하듯  비와 무지개가 결혼하듯  미소와 눈물이 결혼하듯  감언과 협박이 결혼하듯  ... ... 그뿐이다  불과 얼음이 결혼한다  삶과 죽음이 결혼한다  삶과 사랑이 결혼하듯  너와 난 결혼할 것이다  너와 난 결혼할 것이다  너와 난 결혼할 것이다  간단한 식사  자크 프레베르  불법 호텔 웨이터가  정직(停職)중이다  그는 뻔뻔스럽게  한 부인의  훤히 드러난 가슴팍을  훔쳐보았던 것이다  유레카  자크 프레베르  네  모  난  계  란  !  마지막 잎새  자크 프레베르  한 그루 나무의  마지막 작은 잎새가 떨고 있다  나무꾼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차디찬 바람 속에서  고양이와 새  온 마을 사람들이 슬픔에 잠겨  상처 입은 새의 노래를 듣네  마을에 한 마리뿐인 새  마을에 한 마리뿐인 고양이  고양이가 새를 반이나 먹어 치워 버려네  고양이는 가르랑거리지도  콧등을 건드리지도 않는다네  마을 사람들은 새에게  휼륭한 장례식을 치르고  고양이도 초대받았네  지푸라기 작은 관 뒤를 따라가네  죽은 새가 누워 있는 관을 멘  작은 소녀는 눈물을 그칠 줄 모르네  고양이가 소녀에게 말했네  이런 일로 네가 그토록 가슴 아플 줄 알았다면  새를 통째로 다 먹어 치워 버릴 걸  그런 다음 얘기해 줄 걸  새가 훨훨 날아가는 걸 봤다고  세상 끝까지 훨훨 날아가더라고  너무도 먼 그곳으로  이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그러면 네 슬픔도 덜어줄 수 있었을 걸  그저 섭섭하고 아쉽기만 했을 걸  어떤 일이든 반쪽만 하다 그만두면 안된다니까          늦잠   이건 무섭다 아연판 카운터 위에 삶은 달걀을 두들겨 깨뜨리는 이 작은 소리는 이 소리가 배고픈 사람의 기억 속에서 움직일 때 이 소리는 정말 무섭다 배고픈 사람의 얼굴은 그가 아침 여섯 시 백화점 유리창에비친 얼굴, 잿빛 자기 얼굴을 바라다볼 때 그러나 그가 포탱 가게 진열장 속에서 바라다본 것은 그의 얼굴이 아니다 이제 그로서는 사람의 얼굴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다 그런 건 염두에도 두지 않는다 그는 곰곰이 생각한다 그는 다른 머리를 상상한다 예컨대 식초 소시를 친 송아지 머리 같은 것 또는 먹을 수 있는 모든 짐승의 머리를 상상한다 그리고 가볍게 아래턱을 움직인다 가볍게 그리고 가볍게 이를 간다 그 까닭은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놀림감으로 삼는데 자기는 이 사람들에 대항하여 아무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손가락으로 하나 둘 셋 하고 샌다 하나 둘 셋 그가 아무것도 먹지 않은 지 사흘째다 사흘 전부터 똑같은 소리를 되풀이하나 아무 소용 없다 이대로 그냥 지낼 수는 없다 그러나 계속하여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굶고 지낸다 그런데 이 유리창 뒤에 즐비한 이 고기 파이들 이 포도주병들 이 통조림들 죽은 물고기들은 통조림 깡통들이 지키고 깡통들은 유리창이 지키고 유리창은 순경들이 지키고 순경은 공포가 지키고 있다. 여섯 마리의 가엾ㅎ은 정어리를 위해 이 많은 장애물들...... 조금 떨어진 곳에 목로 술집 크림 든 커피와 따끈따끈한 반달 빵들 이 사람은 비틀거린다 그리고 그의 머리 속에는 말과 말의 혼돈이 말과 말의 혼돈이 일어난다 양념된 정어리들 완숙의 달걀 크림 커피 럼술을 친 커피 크림 커피 크림 커피 피 뿌린 범죄 커피...... 그의 구역에서 매우 존경받던 인사가 대낮에 목이 찔려 죽었다 그 살인자 부랑자는 그에게서 2프랑을 훔쳤다 말하자면 술 친 커피 한 잔 값 0프랑 70전과 버터 바른 빵 두 쪽 값 그리고 웨이터에게 준 팁 25전이다 이건 무섭다 아연판 카운터 위에 삶은 달걀을 두들겨 깨뜨리는 이 작은 소리는 이 소리는 배고픈 사람의 기억 속에서 움직일 때 이 소리는 정말 무섭다.     얼마나 아름다워요  이렇게 볼 수 있으니  모래 사이로 유리 사이로  창 사이로  자 한 번 보세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려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새를 나누어 주는  새 장수 그의 머리를 깎아 주는  이발사 그의 가위를 갈아 주는  칼 장수 그의 신발을 닦아 주는  신기료 장수 그가 가죽 구두를 수선하면서  똑똑히 볼 수 있게 해 주려고  저녁마다 가로등에 불을 켜는  가로등 불 켜는 사람 그와  곧 결혼할  꽃피는 어린 아가씨를 위해  커다란 침대를 만들어야 하는  목수 그를 위해  널판지를 만들려고  저기 멀리서  나무를 하는  저 나무꾼을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는 새를 파는 가게에 가서  새를 샀다네  사랑하는 이  너를 위하여  나는 꽃을 파는 가게에 가서  꽃을 샀지  사랑하는 이  너를 위하여  나는 철물 파는 가게에 가서  쇠사를을 샀지  굵은 쇠사슬을  사랑하는 이  너를 위하여  나는 노예시장에 가서  너를 찾았지  너는 거기 없었다  사랑하는 이.  =============   새가 새장에 들어가기를 기다릴 것 그가 새장에 들어가거든 살며시 붓으로 새장을 닫을 것 그리고 차례로 모든 창살을 지우되 새의 깃털을 다치지 않도록 조심할 것   -자크 프레베르 ‘ 어느 새의 초상화를 그리려면’ 일부-   창살을 지우다가 새의 깃털이 물들면 살짝 새의 눈치를 살필 것.   눈치를 못 챈 것 같으면 작업을 계속하되, 쓸데없이 수정해 주지는 말 것. 결국 창살은 다 지워지고 무정한 새는 포르르 날아가버리겠지만, 물들인 깃털로 놈을 일별할 수 있도록.   /"한국일보" 황수현기자    [출처] 자크 프레베르의 |작성자 내 맘대로 책읽기
1939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시인 - 게오르그 트라클 댓글:  조회:4163  추천:0  2016-12-10
  출생일 1887. 2. 3,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사망일 1914. 11. 3,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 갈리시아 크라우프(지금의 폴란드 크라쿠프) 국적 오스트리아 요약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시인.   개인적으로 겪은 고통과 전쟁의 경험을 작품에 표현해, 퇴락과 죽음을 노래한 오스트리아 최고의 애가(哀歌) 작가가 되었다. 그의 시는 제1·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의 시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소극적이고 침울한 성격의 트라클은 철물상의 아들로 태어나 1908~10년에 빈대학교에서 약학을 공부했다. 1913년경 상습적인 약물중독자였던 것으로 보아 약학을 공부한 이유는 마취제를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를 사로잡고 있던 다른 강박관념은 누이동생 그레테에 대한 비정상적인 애정과 방랑벽이었다. 한 잡지사 발행인과, 유산 가운데 일부를 몰래 그에게 준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후원에 힘입어 트라클은 시를 쓰는 데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1913년에 첫번째 시집을 내놓았고, 이듬해 군 의무대의 중위가 되어 갈리시아에서 중상을 입은 90여 명의 병사들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약만 조제해주는 약제사에 불과한 그로서는 이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없었다. 그는 한 환자가 자살하는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보았고, 또 탈영병들이 교수형을 당하는 것도 보았다. 이러한 공포를 경험한 뒤 그 여파로 자살을 기도해 크라쿠프에 있는 군병원으로 이송되어 감시를 받다가, 거기서 코카인 과다복용으로 죽었다. 그는 부주의하게 코카인을 복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렬한 힘을 지닌 그의 서정시는 현재에 대한 한탄 속에서도 목가적인 과거의 훌륭했던 정신에 대한 동경과 거듭나고자 하는 열망이 전편에 넘쳐 흐르고 있다. 그는 또 반복해서 나타나는 이미지를 통해 '외로운 하늘을 맞대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루시아 겟시가 영역한 그의 시선집이 1973년에 출판되었다. ============================== 저녁에 숲의 뻐꾸기는 탄식으로 입을 다문다. 붉은 양귀비, 옥수수도 스스로 고개 숙인다.   언덕 저편에서 어두운 뇌우가 밀어닥칠 듯하다. 귀뚜라미 오래된 노래는 들판 속에서 사라져 간다.   밤나무 나뭇잎 하나도 움직이지 않는다. 너의 옷은 펄럭이며 나선형 계단을 오른다.   어두워지는 방안에 양초 하나 고요히 빛나고; 은처럼 반짝이는 손 하나 지금 촛불을 꺼버린다;   바람 한 점, 별 하나 없는 밤.               - G. Trakl   $ 시 여름은 트라클의 시집 [꿈속의 세바스티안]에 실린 라는 부재에 묶인 11편의 시 중 하나이다.  여름은 시인 특유의 주관적인 내면이 자연풍경의 묘사로 이루어진 네 연과 한줄짜리 독백으로 되어 있다. 트라클에게 있어서 자연이란 괴테 이후 서정적 자아와 거리감을 두고 소외를 일으키는 자연이나, 풍요로운 생명과 같은 경외심을 유발키 위해 존재하는 자연과는 그 성격이 다른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의 자연은 이를테면 자기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펜을 담그는 잉크통과 같다. 개별 자연 양태들이 저 음울한 톤과 표정으로 트라클의 펜촉 위에서 떨어진다. 해서 트라클의 자연은 그 직접적인 모사가 아닌 내면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각각의 암호로 존재한다. 1연은 어느 여름의 저녁이라는 시간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탄식으로 입을 다무는' 뻐꾸기는 어느 시골 환혼에 잠기는 시간의 평야 그 당시 무성했던 옥수수밭과 붉은 양귀비꽃은 길고 힘들었던 오후를 지나자 서서히 '고개 숙이'며 밤을 맞이하려 한다. 당시의 주식이었던 옥수수가 고개를 숙였다라는 것은 수확을 해도 될만큼 충분히 영글었다라는 것이다. 그것은 양귀비의 강한 환각과 함께 밤의 일(?)에 필요한 성적이고 정신적인 충만을 대변한다. 해서 1연은 일종의 전주곡이랄 수 있는데, 그것은 소멸을 위한 '충만'을 암시한다. 2연에서 우리는 '어두운 뇌우'소리와 함께 저녁을 알리는 귀뚜라미 소리 역시 사라지는 것을 듣는다. 하루중 가장 외롭고 고독에 충만해지는 황혼의 순간이 지나고 있다. 우리에게 남은 더이상의 고독은 없다. 3연에서는 하나의 대비가 나타난다. 밤나무 잎과 너의 옷이 그것이다. 밤나무는 잎이 많기로 유명하다(?) 허나 움직이지 않고 대신 너(트라클의 누이, 마르가르테)의 옷(치마)만이 펄럭이며 나선형 계단을 오른다. 모든 준비가 곧 끝날 것이다. 4연에서 너와 나는 양초 아래서 만난다. 은처럼 반짝이는 손의 주인공은 트라클 자신이 되고 '지금 촛불은 꺼'진다. 너는 내 앞에 있지만 나를 보지 못하고, 나는 네 앞에서 너를 보기 위해 양초를 끈다. -.-;; 그리고 이제 '바람 한 점, 별 하나 없는 밤'이 찾아온다. 그것은 절대 암흑이 아닌 여름의 충만한 절정의 한 끝을 이룰터이니... 나의 마르가르테여 나의 여신이여 나를 어둡고 환한 하늘 아래로 퀴퀴한 약물상자 속으로 이끌어다오 내 손을 잡아주오...   *시 원문 참고...     Sommer   Am Abend schweigt die Klage Des Kuckucks im Wald. Tiefer neigt sich das Korn, Der rote Mohn   Schwarzes Gewitter droht Uber dem Hugel. Das alte Lied der Grille Erstirbt im Feld   Nimmer regt sichdas Laub Der Kastanie. Auf der Wendeltreppe Rauscht dein Kleid.   Stille leuchtet die Kerze Im dunklen Zimmer; Eine silverne Hand Loschte sie aus;   Windstille, sternlose Nacht.   오스트리아의 시인 "게오르그 트라클"을 아인슈타인이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를 쓴 시인이라고 격찬을 하였다합니다 공부에 전혀 취미를 느끼지 못해 낙제를 거듭하였지만 그래서 그는 홀로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들레르 등을 탐독하면서 큰 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자살을 둘러싸고 여러말들이 있더군요 자기 여동생을 사랑해서 괴로워하다가 27세의 나이에 자살 결국 여동생도 3년후에 자살했다고.... 혹은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 중 육군병원 정신병동에 입원 후 갑자기 사망하였는데, 격전의 비참을 체험하고 자살한 것이라고도 전하고 또는 그는 약학을 공부했지만 마약에 손을 댔고 술때문에(포도주) 일찍 죽었다고 합니다. 그의 시는 많지 않지만 독특한 매력과 우수를 느끼게 합니다 고독자의 가을에 - 게오르그 트라클 - 풍요의 짙은 가을이 돌아온다. 고운 여름날의 광채는 노랗게 물들었다. 썩은 깍지에서 배여나는 지순의 푸른빛. 새들의 비상이 옛이야기를 전한다. 포도즙은 냈다. 은밀한 물음을 나직한 대답으로 채우는 온화한 적막. 황량한 언덕 여기저기 십자가 보이고 황혼이 깔리는 숲 속으로 양떼가 몰려간다. 거울같은 수면을 흐르는 구름. 일손 멈춘 농부의 표정이 한가롭다. 메마른 초가지붕, 컴컴한 대지를 소리없이 저녁의 푸른 날개가 만지적인다. 이제 곧 지치인 자의 눈썹을 찾아 별들이 깃들이리라. 서늘한 방에마다 조용히 찾아드는 소박한 마음들. 가슴아픈 여인들의 파란 눈을 가만히 천사들이 나온다. 갈대가 흔들린다. 앙상한 버들가지에서 슬프게 이슬이 지면 사무치게 뼈만 남은 전율. 홀로 밤에 휩싸이는 늪 죽음을 거쳐서 새로 태어나 더 깊은 고통과 환희를 찾아 우리는 간다 미지의 신선성이 거기 숨쉬고 있고 우리를 영원히 완성시켜주는 태양이 있다 네가 가는 곳은 가을이 되고 저녁이 되고 울창한 나무 아래 우는 푸른 짐승이여, 홀로 밤에 휩싸이는 늪이여 소리없이 나는 새들의 날개소리 네 눈썹에 우수가 흐른다 네 가느다란 웃음이 떨린다 신은 너의 눈을 감기우고 수난일에 태어난 너, 밤이면 별들은 네 반달 같은 이마를 찾는다. 자신의 누이동생을 사랑했던 트라클은 늘 죄의식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시인 자신을 위협하는 착란과 죽음, 세계의 제지할 길 없는 붕괴를 날카롭게 감지하고, 그 우수(憂愁)를 부드러우며 색채 풍부한 이미지로, 나중에는 준엄한 불길과도 같은 절망을 시구(詩句)에 담아 되풀이하여 노래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세계는 멸망을 불러들이는 죄와 그에 대한 속죄를 정신적인 지주로 하는데, 여동생 마르가레테의 역할이 컸다합니다   게오르크 트라클의 「잠」감상 / 오민석     잠       게오르크 트라클(1887~1914)       하얀 잠이여, 너는 무섭고 지겨운 미지의 독! 노을에 물든 오묘한 뜨락은 뱀과 나방과 거미와 그리고 박쥐로 가득하다. 나그네여! 길 잃은 네 그림자가 낙조를 서성이고 비애의 눈물의 바다에 무서운 해적선 떠 있다. 무너져가는 강철의 도시, 그 밤 하늘가에 하얀 새들이 날개를 친다.   ...........................................................................................................................................................................................      19세기 후반에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뒤 몇 달 안 되어 전쟁터에서 사망한 오스트리아 시인 트라클은 20세기 문명에서 몰락의 징후를 읽었다. “하얀 잠”은 근심과 불안으로 가득 찬 그의 무의식을 보여준다. 인류는 길을 잃었고 “해적선”이 상징하는바 폭력의 시대가 다가왔다. 그의 느낌대로 연이어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화려했던 “강철의 도시”들도 무너졌다. 시는 시대의 징후를 읽는 민감한 안테나다.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                        Georg's grave in Mühlau near Innsbruck, Austria (photo: Elisabeth Kranzinger)        겨울저녁                               게오르그 트라클                             /윤동하 역        창가에 눈이 내리고    은은히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    많은 사람에겐 저녁상이 차려진다.    집안은 풍성하다.      집 떠난 나그네들    어두운 오솔길 따라 문으로 다가온다.    대지의 차가운 수액을 마시며    찬란하게 빛나는 은총의 나무      말없이 길손 들어서면    문턱은 이미 고뇌의 화석이 된 지 오래다.    거기 지순의 환한 불빛이 어른거리고    식탁에는 양식과 포도주가 놓여 있다.                                         - 태학당 한권의 시 제57권 '겨울에'중     ▒ 트라클 (Georg Trakl,1887-1914)  시집 〈꿈속의 세바스티안〉이 있다. 코카인 과다복용으로 27세에 요절.  오스트리아의 작가 게오르그 트라클은 김나지움 시절 한 학년을 두 번 다녔다. 라틴어와 수학 실력이 모자라서 낙제를 했던 것이다. 처음부터 모범생은 커녕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외톨이에다가 수줍음을 잘 타고 우둔한 편이어서 낙제로 인한 충격은 이루 말할수가 없었다. 이 때부터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무조건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트라클은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철물상을 경영하는 집안의 6남매중 네 번째로 1887년 2월 3일에 태어났는데, 학교에서 낙제를 한것은 13살때엿다. 같은 반에서 공부를 했던 한 친구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그 아이는 늘 동상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한손으로 코를 받친 자세로 콧구멍을 벌렁거리면서 곰곰히 생각에 잠기곤 했습니다. 그것이 그 아이의 특징적인 자세였지요."  대부분의 학급 친구도 그랬지만 트라클 한테도 교과서는 너무 재미가 없었다. 때로는 친구나 형제들로부터 이상한 아이라고 따돌림을 당할 정도로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보들레르의 책을 읽으면서 시를쓰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상급반으로 올라가지 못했다. 라틴어와 수학 이외 그리스 과목들도 성적이 모지랬던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열여덜의 나이로 학교를 그만두고 약사 실습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 공부를 하다보니 손쉽게 아편과 모르핀에 손을 대게 되었다. 이미 학교 다닐때부터 경험했던 일이d었다.  처음에는 클로로포름 한 종류로 환각 상태에 빠져 가끔씩 정신을 잃는 정도였으니 복용량이 갈수록 많아졌다. 실습 과정과 4학기의 대학 과정을 좋은 성적으로 마치고 난 다음에도 스스로의 힘으로 복용량을 줄여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약사로 군복무를 하던 도중에 심장마비로 못숨을 잃고 말았다. 지나친 코카인 복용이 원인이었다. 그때의 나이가 겨우 27살리었다. 5년이 지난 뒤 트라클의 얄팍한 작품집이 아직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 아인슈테인은 "오스트리아에서 트라클 만큼 아름다운 시를 쓴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1938    시인,애독자, 딸 그리고 100년... 댓글:  조회:4940  추천:0  2016-12-10
인간적인, 그리고 신적인 아름다움의 첫째 아이는 예술이다. 예술 안에서 신적인 인간 자신은 스스로 젊어지고 반복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느끼기 원하며, 따라서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기에 대립시킨다. 이렇게 인간은 스스로에게 자신의 신들을 부여한다. 왜냐하면 시원에 인간과 그의 신들은 하나였으며, 자기 스스로를 알지 못한 채,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신비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존재한다. 신적인 아름다움의 첫째 아이는 예술이다. 아테네인의 경우가 그랬다. 아름다움의 둘째 딸은 종교이다. 종교는 아름다움의 사랑이다. 현인은 종교 자체, 무한자, 포괄자를 사랑한다. 민족은 자신 안에서 다양한 형태들로 나타나는 종교의 아들들과 신들을 사랑한다. 아테네인의 경우가 또한 그랬다. 그리고 아름다움의 사랑이 없고, 그러한 종교가 없는 모든 국가는 생명과 정신이 없는, 말라빠진 해골이다. 그리고 모든 사유와 행동은 우듬지가 없는 나무이고, 상부 장식이 떨어져버린 기둥이다. / (횔덜린  경구)   프리드리히 횔덜린(1770~1843)은 두 살에 아버지를, 아홉 살에 계부를, 여기에다 두 의붓동생까지 잃었다. 일흔세 살까지 장수했지만 서른여섯 살부터는 정신병을 앓는 폐인으로 독일 튀빙겐시 풍광 좋은 네카어 강변의 ‘횔덜린의 탑’에서 37년간 살다가 죽었다. 가끔 경련과 발작을 일으켰지만 평소엔 온순했는데, 어머니마저 외면한 그를 돌봐준 것은 애독자 에른스트 치머와 그 가족이었다. 시인이 입원해 있던 튀빙겐 의료원의 목수였던 그는 소설 을 읽고 감동하여 자진해서 그 일을 떠맡았다. 횔덜린이 3년을 못 넘길 것 같다는 의사의 진단을 애석하게 여겨 집으로 데려다 돌보다가 부부가 먼저 죽었지만, 치머의 딸은 결혼도 않은 채 죽을 때까지 그를 극진히 보살폈다. 네카어 강변으로 치머의 집을 찾으니 횔덜린이 쓰던 2층 반원형 방엔 의자만 덜렁 두 개 놓여 있다. 헤겔과 신학교 같은 방 친구 튀빙겐신학대 학생인 하숙생 빌헬름 바이블링거가 이 고상하게 미친 사나이를 가끔 산책시켰고, 시인의 명성을 좇는 학생들의 방문도 잦았지만, 정작 생모나 형제들은 40여 년 가까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고신과수(孤辰寡宿)살이 낀 걸까. 묘비에는 시 ‘운명’의 한 구절이 새겨 있다. “폭풍 중 가장 성스런 폭풍 가운데/ 나의 감옥의 벽 허물어지거라./ 하여 보다 찬란하고 자유롭게/ 내 영혼 미지의 나라로 물결쳐 가라!”( 장영태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감옥의 벽”이란 의 명귀 “궁핍한 시대”의 갇힌 삶으로 읽고 싶다. 물질뿐 아니라 봉건영주 권력이 짓누르는 자유의 압살과 경건주의 신앙이 조성한 영혼의 빈곤까지 아우른 궁핍이다. 이런 감옥의 벽을 허물려면 혁명 말고는 없는데, 그걸 시인은 “가장 성스러운 폭풍”으로 노래하지 않았을까.   작가의 묘비에는 자유를 갈망한 그의 시 한 대목이 새겨 있다. 임헌영 폭풍 중 가장 성스런 폭풍 가운데/ 나의 감옥의 벽 허물어지거라./ 하여 보다 찬란하고 자유롭게/ 내 영혼 미지의 나라로 물결쳐 가라." 횔덜린이 생전에 쓴 시 ‘운명’의 일부분인 이 시구는 횔덜린의 묘비에 새겨져 있다. 이 짧은 시구는 비극적 생애를 살다 간 횔덜린의 일생을 요약적으로 보여 준다. 시인이라는 소명을 투철하게 살다 간 시인 횔덜린. 젊은 시절 횔덜린의 둘레를 둘러싼 것은 고독과 좌절이었고, 반생(半生)을 산 이후 횔덜린을 포박한 것은 정신 질환이었다. 1770년 네카어 강변의 라우펜(Lauffen)에서 출생한 그는 1806년부터 정신병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병세가 악화되는 그를 최후까지 돌본 이는 횔덜린의 작품에 크게 감명받은 튀빙겐의 목수 에른스트 치머(Ernst Zimmer)였다. 횔덜린은1843년 타계할 때까지 반구형의 옥탑방에서 치머 일가의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그는 무려 38년 동안이나 정신 질환으로 인해 피할 수 없는 유폐 생활을 하면서도, 의식장애의 정신착란에 시달리면서도, 시간관념을 잃고 지내면서도 방문객들에게 짧은 시를 지어 헌정하는 등 시인의 직업을 끝까지 천직으로 알고 시의 붓을 내려놓지 않았다.   하이데거는 횔덜린이야말로 "시인의 시인"이라고 칭송했다. 횔덜린이 보여 준 시 쓰기에서의 엄밀성(한 평자는 "횔덜린의 시에는 '법칙적 계산'이 깔려 있고, 그에게 시는 공예와 같았으며, 매우 정밀한 구성을 자랑한다."라고 말했다.)을 고려할 때도 그러하지만 시인의 직분과 소명에 대해 횔덜린만큼 절박하게 고민한 시인은 일찍이 없었다는 찬사라 할 것이다. 가령, 횔덜린이 "나는 모르겠노라.궁핍한 시대에 시인들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빵과 포도주’ 제7편)라고 썼을 때 이 질문에는 18세기 말 전제정치하에 놓여 있던 독일의 현실 사회를 매섭게 비판하는 시인의 절규, 그리고 그 사회를 개혁하려는 시인의 사명감이 동시에 녹아 있었다. 횔덜린은 물신주의와 속물 의식을 내몰고, "축복의 요람" 그리스의 정신과 프랑스 혁명의 자유‧평등‧박애주의를 자신이 살고 있는 땅에 구현하고자 "종종 울면서 분노"했다. 그것은 고귀하고 "다정한 정신"이며, "사악한 혼란의 죄를 다시금 씻어 주"는 "사랑스럽고 해맑은 평화"였다. 아울러 인간의 내면에 신성(神性)을 회복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그는 그의 조국을 향해 부르짖듯이 열렬히 노래했다. "어리석은 아이가 목마를 타고 앉아,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결코 아이를 비웃지 말라,/ 오 너희 선한 사람들이여! 또한 우리들 역시/ 행위는 부족하고, 사고는 풍부하구나!"('독일 사람들에게')라고.       횔덜린이 스케치로 그려낸 자화상(1842)   이 시는 1803년 창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를 압도하는 정서는 비감(悲感)이다. 이 시의 창작 배경에는 횔덜린이 고결하게 사랑했던 여인, 주제테 곤타르트(Susette Gontard)의 죽음이 놓여 있다. 횔덜린은 주제테 곤타르트를 '디오티마(Diotima)'라고 불렀다. '디오티마'라는 작품을 통해서는 "그대의 노랫가락이/ 나의 감각을 점점 맑게 씻어 주어/ 내 음울한 꿈들은 달아나고/ 나 자신은 다른 사람이 되었노라."라고 썼다. 이런 대목은 횔덜린이 주제테 곤타르트에게서 그리스적인 아름다움과 이상을 발견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횔덜린에게 "아름다운 태양"이었으며 "찬란한 빛"이었던 이 여인이 이제 지상에 없다. 1연이 사랑의 시간을 보여 주는 것이라면 2연은 실연의 시간, 사지(死地)에 해당한다. 사랑의 화신, 사랑의 여사제의 죽음은 시적 화자에게 측량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가 연시로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이 시에는 생성과 소멸, 행복과 불행, 지상적 삶과 천상적 삶이 대비되어 있으며, 그 양쪽의 차가운 경계를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애상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따라서 이 시는 일생의 후반부를 살아가야 할 시적 화자가 천상적인 존재 혹은 신성,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연의 힘에 의해 지상적 삶의 한계를 극복하고 구원받으려는 간절한 기도의 노래라고도 할 수 있겠다.   횔덜린의 작품들은 신과 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합일을 노래했다. 그에게 자연은 신화화된 자연이었으며, 사랑의 가치를 가르쳐 주는 대상이었다. 그는 젊은 시인들을 향해 "만약 대가가 너희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면, / 위대한 자연에게 조언을 구하라!"('젊은 시인들에게')라고 권장했으며, "친밀한 정경이여! 복판으로/길이 평평하게 꿰뚫어 가고/ 창백한 달이 떠오르는 곳에/ 저녁 바람이 불어오며/자연은 간결하게 서 있고/ 산들이 숭고하게 서 있는 곳에/ 나는 끝내 집으로 돌아가네"('즐거운 삶')라고 노래했다. 자연의 광휘를 찬탄했으며 자연과 인간이"하나의 무한한 전체"로 결합되는 것을 소원한 이가 바로 "시인의 시인" 횔덜린이었다.     프리드리히 횔덜린 (Friedrich Hölderlin, 1770.3.20~1843.6.7) 1770년 슈바벤의 네카어강변 라우펜(Lauffen am Neckar)에서 수도원 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1784년 덴켄도르프(Denkendorf)의 수도원 학교, 마울브론 수도원학교를 졸업하고 튀빙겐 대학신학과에 들어갔으나, 어머니의 희망인 신학 공부보다는 고전 그리스어, 철학, 시작(詩作),헤겔, 셸링등의 학우들과의 교류에 열중하였다. 1789년 시인 슈토이들린, 슈바르트등과 사귀면서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다. 졸업 후 프리드리히 실러의 소개로 가정교사가 되었다. 1796년 프랑크푸르트의 은행가 곤타르트가(家)의 가정교사가 되었는데, 그의 부인 주제테와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디오티마(Diotima)라는 이름으로 서간체 소설 [히페리온] 및 그 밖의 많은 시편에 등장하였다. 3년 후 이별을 하고 함부르크, 고향, 슈투트가르트, 보르도 등지를 방랑하였는데, 이 시기 맹렬한 창작력이 발휘되어 위대한 시들이 쓰였다. 1802년 정신착란 증세가 생기고 1806년부터는 완전히 폐인이 되어 튀빙겐의 목수 치머 일가의 보호를 받으며 36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다가 죽었다.그는 고전 그리스 운문 형식을 독일어에 성공적으로 이식시킨 전무후무한 시인으로서, 가장 위대한 독일 시인의 반열에 올라 있다. [엠페도클레스의 죽음], [디오티마], [하이델베르크], [빵과 포도주], [귀향], [라인강], [유일자], [파트모스] 등의 걸작이 있다.     삶의 절반 / 프리드리히 횔덜린         노란 배와 거친 장미들이 가득 매달린, 호수로 향한 땅, 너희, 고결한 백조들, 입맞춤에 취한 채 성스럽게 담백한 물 속에 머리를 담근다.   슬프도다, 겨울이면, 나는 어디서 꽃을 얻게 될까? 또한 어디서 햇빛과 지상의 그림자를? 장벽은 말없이 냉혹하게 그냥 서 있고, 바람결에 풍향기 소리만 찢긴다.     [빵과 포도주] 박설호 옮김, 민음사, 1997     글 문태준 | 시인전통 서정시의 계보를 잇는 대표적인 서정시인으로서 문단 안팎의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1970년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났고, 고려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94년 계간  신인문학상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미당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시 해설집 [포옹] [어느 가슴엔들 시가 꽃피지 않으랴] [우리 가슴에 꽃핀 세계의 명시], 산문집[느림보 마음]이 있다.   ================== Friedrich Hölderlin(프리드리히 횔덜린 1770-1843)    고대 그리스의 미와 정신을 전범으로 하여 고대 그리스의 운문 형식을 독일어에 이식시켰다.   횔덜린은 가장 위대한 독일 시인 중 한 사람으로,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그를 '가장 독일적인 시인', '시인 중의 시인'이라고 했다.   신과 인간이 조화롭게 상생하던 고대 그리스의 미와 정신을 전범으로 삼아 시를 쓴 대표적인 고전주의자로, 단순히 그리스 고전을 차용한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운문 형식을 독일어에 이식시켰다고 평가받고 있다. 반평생을 정신질환자로 보낸 불우하고 광기에 찬 천재로도 유명하다.   요한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횔덜린은 1770년 3월 20일 독일 슈바벤 지방 네카 강변에 있는 라우펜 암 네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하인리히 프리드리히 횔덜린은 수도원 관리인으로, 그가 2세 때 돌연사했다. 4세 때 어머니가 라우펜의 서기인 요한 크리스토프 고크와 재혼했고, 고크는 그로부터 2년 후 뉘르팅겐의 시장이 되었다. 그러나 고크마저도 3년 후 피로와 폐렴으로 사망했다. 횔덜린의 형제로는 친여동생 하인리케와 이복동생 카를 크리스토프 고크가 있었다.   횔덜린은 6세 때 뉘르팅겐의 라틴어 학교에서 교양과 피아노를 배웠으며, 14세 때 덴켄도르프 수도원 학교에 들어갔다. 목사의 딸이었던 어머니가 아들이 신앙인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16세 때에는 마울브론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이 학교는 헤르만 헤세가 14세 때 입학하여 7개월 만에 자퇴한 곳으로도, 헤세의 자전적 경험이 녹아 있는 《수레바퀴 아래서》에 등장하는 수도원 학교로도 유명하다.   18세 때 튀빙겐 대학 신학부에 들어가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훗날 19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가 되는 헤겔, 셸링 등과 교유했다. 또한 시인 동맹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소설 《히페리온》을 구상했다.   1789년,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횔덜린은 혁명이 부르짖는 공화주의적 이상에 심취하였다. 여기에는 '경건한 자코뱅당원'으로 불리던 헤겔의 영향도 있었다. 두 사람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사건을 논평하는 정치 클럽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지만, 횔덜린은 프랑스 혁명 이후 유혈 공포정치가 이루어지면서 혁명에 회의를 느꼈다. 또한 이 시기 루소, 칸트, 스피노자 등의 사상을 접하면서 점차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이 때문에 그는 대학 졸업시험을 보고 나서 약 10년간 가정교사를 전전하며 불안정한 생활을 했다. 횔덜린 자필 방명록 1794년 6월, 대학 졸업시험을 치른 뒤 횔덜린은 12월부터 1년간 발터스하우젠의 샤를로테 폰 칼프의 집에서 가정교사로 일했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 1796년 프랑크푸르트의 부유한 은행가 J. F. 곤타르트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갔는데, 이곳에서 곤타르트의 아내인 주제테를 운명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주제테는 이후 《히페리온》을 비롯해 횔덜린의 많은 작품에 '디오티마'라는 인물로 등장하는데, 디오티마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상징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1794년에 횔덜린은 실러에게 〈히페리온 단편〉이라는 단편소설을 보낸 적이 있는데, 주제테를 만난 뒤 그는 이 작품을 장편소설로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1797년 《히페리온》 1부가 출간되었다.    '그리스의 은둔자'라는 부제가 붙은 《히페리온》은 고대 그리스 신화와 역사, 철학, 정신을 비롯해 국가와 투쟁 문제, 사랑, 선(善), 미(美), 민중, 신(神)적인 것에 대한 전 방위적인 통찰이 담긴 작품으로, 그리스적인 형식미와 독일적인 사상이 융화되어 있다고 평가받는다.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문체와 풍부한 리듬감, 운율법으로 소설의 형식미를 뛰어넘은, 장편소설의 관례를 따르지 않은 작품이다.   그리스 독립전쟁 전야에 히페리온이 독일에 있는 친구 벨라르민에게 보낸 서간체 형식의 글로, 자아와 세계 속에서 여러 모순을 경험하고 신적인 것과의 일체감 속에서 구원을 찾아가는 청년의 내면적 발전이 주요 제제이다. 이 작품에서 디오티마는 히페리온에게서 시인과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발견하고, 그의 내적 여정을 이끄는 주요 모티프로 등장한다.   1799년에는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와 《히페리온》 2부를 발표했다.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은 5세기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로 에트나 산의 화구에 투신자살한 엠페도클레스의 이야기와 시인이 세계에서 경험한 신적인 어떤 것을 반영하여 쓴 단편비극이다.   횔덜린은 자신의 시대를 궁핍한 시대로 보았다. 이는 군주제 아래에서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분리되고, 민중은 지배층에 대한 예속과 그로부터의 탄압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시대를 말한다. 이에 신성(神聖)보다 권력을, 정신보다는 물질을 추구하는 시대가 되면서, 인간은 자연과 신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따라서 그는 시인이란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고귀한 신성을 일깨우는 자라고 여겼으며, 인간, 자연, 신이 조화를 이루었던 고대 그리스의 세계를 이상으로 삼았다. 이런 사고에 의해 쓰인 대표적인 작품이 《히페리온》과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이다.   1843년 6월 7일에 73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튀빙겐 묘지에 안장되었다. 반세기가 지난 후 릴케, 첼란 등에 의해 재발견되어 선구적인 시인으로 여겨지면서 독일의 위대한 현대 시인으로 자리매김했다.    - 청아출판사(이한이 글)에서     발제자: 박석준 / 담당교수: 이은봉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했던 예언자의 목소리   윌리엄 블레이크   위대한 시인이 쓴 위대한 시 시 는 존재의 신비를 탐색하면서 시작된다. 아름다움과 거룩함, 무한성과 영원성의 세계를 추구하는가 싶더니, 블레이크는 금방 현실 한복판으로 뛰어든다. 낭만주의자에서 한순간에 사실주의자로 둔갑하는 것이다. 감동의 세계에서 충격의 세계로의 극적 전환이다. 19세기 초 영국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날카롭게 비판하던 시인은 “학대받은 양은 전쟁을 낳지만, / 그러나 그는 백정의 칼을 용서한다”고 하며 예언자의 목소리를 낸다. 광야에서 외치던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처럼 우렁차게, 블레이크는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한편 노동의 기치를 찬양한다. 낭만주의의 효시로 일컬어져 온 워즈워스와 콜리지의 합동 시집 ≪서정민요집≫이 나온 것이 1798년임을 감안한다면 1789년 작 는 그야말로 예언자적인 작품이다. 영국에서 낭만주의가 하나의 운동으로 전개되기 시작하는 것은 ≪서정민요집≫의 발간에서부터이다. 시기적으로는 분명히, 낭만주의의 선구자는 블레이크이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사회사와 개인사 1760년경부터 영국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는데, 에 잘 표현되어 있듯이 블레이크가 살았던 시대는 이른바 격동의 시대였다. 한편 자유의 물결이 전 유럽과 북미대륙을 휩쓸게 된다. 자유․평등․박애는 프랑스 인권선언(1789)의 기본 정신인 동시에 프랑스대혁명의 3대 정신이었다. 미국은 1776년에 독립선언을 하였고, 영국․프랑스와 1775년부터 1783년까지 전쟁을 하여 결국 독립을 쟁취하였다. 이러한 시대의 기류를 블레이크는 결코 간과하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는 그를 ‘예언자적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는 20대 중반이 되자 요지프 존슨의 집에 모인 진보적인 사상가들 틈에 끼어 혁명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곤 했다. 산업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순수의 노래≫(1789), ≪천국과 지옥의 결혼≫(1793), ≪앨비언의 딸들이 본 환상≫(1793), ≪순수와 경험의 노래≫(1794) 등을 연이어 내놓는다. 이후 여러 해에 걸쳐 서사시 ≪밀턴≫과 ≪예루살렘≫을 완성한 후 그의 시적 활동은 마감된다.   어린양아, 누가 너를 만들었나? 시 의 앞부분에서 얼마 동안 파리를 노래하다가 “나도 / 춤추고 마시고 노래 부르리”에 가서는 화자가 파리가 된다. 에서 ‘어린양’은 성경상의 비유이므로 죄를 짓지 않은 상태, 즉 순결함과 결백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에서도 어린아이의 천진성에 어른이 동화되고 어른이 어린이로부터 감화를 받는다. 학교라는 조직(혹은 제도)은 어린양을 억압하고 사회라는 집단(혹은 체제)은 어린양을 착취한다. 순수의 노래를 부를 수 없게 하는 학교와 사회에 대해 비판하는 블레이크의 목소리는, 그가 시기적으로는 낭만주의의 시대를 살았지만 생래적인 리얼리스트임을 보여주는 것 같다. 에서 볼 수 있듯이 시인에게 학교는 ‘새장’에 지나지 않았다. 다소 과장되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제도교육의 획일성에 대한 시인의 비판의식은 지금까지 유효하다. 은 어린아이의 노동력에 의존했던 영국사회에서의 굴뚝청소를 맹렬히 비난한 작품이다. 블레이크는 당대 사회의 모순을 고발하고 질정하는 데 앞장선 진정한 참여문학인이었다. 에서, 그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였을 런던을 블레이크는 암담하게 그렸다. 블레이크가 이 시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사법제도, 교회, 궁정, 성의 타락 등이다. 시인은 교회의 타락을 다른 시를 통해서도 여러 차례 비판하였다. 블레이크는 인류의 낙원을 회복하려는 꿈을 가진 시인이었다. 그가 신앙했던 기독교는 그 당시 사람들이 믿던 전통적인 종교와는 달랐다. 블레이크는 종래의 그리스도교 교리를 뒤집어서, 선을 이성이나 억압과 동등한 것으로 보고 악을 인간에 내재하는 정신적인 에너지의 자연스러운 표현으로 보았다. 일종의 성악설을 신봉했던 것이다. 그는 법제화된 종교,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종교인, 지배자의 위치에 있는 교회를 비판했을 따름이었다. 블레이크는 자기 작품의 수많은 모티프를 성경에서 가져왔다.   대표작 와 감상 장은명 같은 연구자의 논문에 따르면 블레이크는 상상력을 인간 존재의 영원한 본질, 인간에 내재한 신성으로 본 사람이다. 연구자는 또 블레이크가 예수를 역사적 인물이라기보다는 항상 인간의 내면에서 인간을 사랑하는 신으로 보았다고 했다. 연구자에 따르면, 블레이크는 당시의 ‘교단’보다는 ‘진리’에, ‘의식(儀式)’보다는 ‘본질’에, ‘교리’보다는 ‘성경’에 더욱 가까이 가려고 했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에서 병든 장미나 어두운 은밀한 사랑이 세속세계에서 다반사로 행해지는 불륜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병든 장미’란 타락한 인간이 죄악으로 죽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밤에 날아다니는 보이지 않는 벌레는 경험 세계에서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개념, 예컨대 유물주의, 이기심, 자기 본위 등을 상징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유물주의, 이기심 및 자기 본위에서 다시 위선, 기만, 질투, 잔인성 등의 개념이 파생되어 나온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벌레는 장미를 병들게 했으므로 우리의 인간성을 마멸시키는 악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물질주의에 대척하는 뜻으로서의 정신주의를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주장했고, 그런 뜻에서도 그는 예언자적 시인이었다. 블레이크 하면 떠오르는 또 한 편의 시는 이다. 시인은 “어린양을 만든 신이 너를 만들었던가?” 하고 묻는다. 이 지상의 질서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은 선린우호라기보다는 약육강식이다. 삼라만상과 뭇 생명체를 창조한 신은 사슴과 양과 함께 호랑이를 만들었다. 포스터 데이먼은 블레이크가 이 시를 통해 거대한 악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보았다. 블레이크는 악을 추상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으며,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사람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은 하나님의 분노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어린양’은 이 시에서는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 천진스러운 사람, 선한 사람 등을 상징한다. 이 시의 우수성은 호랑이의 “파괴적이며 본능적인 충동은 억압의 현실을 타파하는 건강한 에너지를 의미”하는 데 있기도 하지만 불의 이미지로 나타낸 데 있다. 밤의 숲 속에서 활활 불타는 두 눈을 번뜩이며 호랑이는 ‘역사’ 한다. 호랑이의 ”무서운 균형 잡힌 몸“은 바로 이 세상의 균형을 뜻하기도 한다. 호랑이는 신의 질서를 끊임없이 거부해온, 낙원에서 추방된 인간의 실존적 모습이 아닐까. 시집 제목 ‘천국과 지옥의 결혼’은 이러한 이항대립적인 세계를 한 손에 넣고 다루고자 했던 시인의 예언자적 세계관의 산물이다.     궁핍한 시대의 시인이 불러야 할 노래   프리드리히 횔덜린   한 여인을 사랑했기에 미쳐버린 시인 횔덜린은 너무나 참담한 사랑을 했고, 그것이 그의 시 세계 형성에 무척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으며, 특히 36년 동안을 광기에 사로잡혀 살아가게 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 활동한 독일의 서정시인이자 소설가인 횔덜린의 생애는 극적이다. 비극의 제1막은 세 살 때 아버지가, 열 살 때 양아버지가 죽은 데서 시작된다. 제2막은 수도원학교를 거쳐 튀링겐 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한 뒤 석사학위까지 받았음에도 사제 서품을 받지 않은 데서 시작된다. 대학시절에 그리스 신들에게 매료된 그가 어느새 신들을 하늘과 대지, 바다 속에서 인간에게 자신의 존재를 현시하는 실제적인 생명체로 보게 되었으니, 신화와 신학, 인간과 유일신 사이의 양립할 수 없는 긴장감은 횔덜린에게 존재의 조건으로 남게 되었다. 그가 성직을 포기하고, 가정교사로 두 번째로 들어가게 된 곳은 곤타르트의 집이었다. 그의 운명은 이 집에 들어간 첫날 뒤바뀐다. 26세의 횔덜린보다 한 살이 많은 주제테 부인은 그때 결혼 10년째로, 네 아이의 어머니였음에도 젊음과 미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횔덜린은 부인의 아름다움에 큰 충격을 받는다. 그녀는 그의 여러 시편 속에서, 특히 불후의 명작 소설 에 디오티마라는 이름으로 그려진다. 비극의 제3막은 부인이 횔덜린의 사랑을 받아들인 데서 시작된다. 1796년 7월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가 침공해 오자 두 사람과 횔덜린의 친구 하인제가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카셀을 거쳐 베스트팔렌의 휴양지 드라부르크로 가서 10월까지 체류하게 되는데, 이때 두 사람의 사랑은 결정적으로 무르익는다. 그들의 행복은 2년 반을 넘기고는 끝나고 만다. 두 사람에 관한 소문은 온 도시에 퍼졌고, 결국 횔덜린은 프랑크푸르트를 타의에 의해 떠난 이후 신경쇠약이 심해진다. 횔덜린은 부인과 헤어진 지 불과 4년 뒤에 친구한테서 온 편지를 통해 부인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다. 그 뒤로 광기의 나날이 계속된다. 비극의 절정인 제5막은 장장 36년 동안이나 계속된다. 마흔도 되기 전인 1806년에 정신이상자가 된 횔덜린은 36년을 절필한 채 그 상태로 지낸다.   주제테 곤타르트 혹은 디오티마 는 시인이 그리스의 시대정신을 구현한 인물로 디오티마란 인물을 설정하여 시를 쓰고 있지만 사실은 곤타르트 부인에게 바치는 연시를 쓴 것이다. 이 시에서 디오티마는 “고귀한 생명”, “신적인 여인”, “사랑스런 뮤즈”, “그대의 천국의 음성” 등으로 신격화된다. 특히 예술의 신 뮤즈로 부른 이유는 디오티마 혹은 곤타르트 부인이 자신의 예술혼을 자극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한 지붕 아래 살면서 사랑을 고백할 수 없는 애절한 마음이 이 시를 쓰게 한 동인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시인은 “이 미개한 자들”이 아닌, 신들과 영웅들과 인간이 아옹다옹하며 다투던 신화의 시대를 동경하고 있다. 신화의 시대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사랑이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인 것이 안타까워 이 시를 썼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 정신의 부활을 꿈꾸다 횔덜린의 위대함은 그가 일생 동안 고대 그리스 문화의 정수를 제대로 익히고, 그리스 정신과 독일 이상주의를 결합시키려 했다는 데에 있다. 횔덜린의 사상을 통칭하여 ‘공동체적 신성’이라고 표현한다. 횔덜린은 그리스 시대를 신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며 살았던 시대, 자연과 인간이 분리되어 대립을 일삼지 않았던 시대로 보았다. 라는 시에서는, 이 시대가 청춘의 꿈과 다정한 자연이 죽고, 사랑이 실현되지 않고, 고향을 상실한 시대임을 말해주고 있다.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는 고향을 노래한 이런 시에서도 시인은 현실에서의 고뇌와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신과 인간이 분리되기 전인 신화의 시대를 꿈꾸며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김재혁은 횔덜린이 그리스에 어떤 식으로 경도되었는지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와 독일, 그리고 프랑스의 혁명이 그의 문학적 삶과 ‘역사적 긴장의 장’을 이루게 된다. 이로써 횔덜린은 현재의 시기의 현대성과 정당성을 위한 투쟁에 하나의 새로운 역사철학적, 미학적 관점을 부여하는 것이다.   궁핍한 시대의 시인 횔덜린의 시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히고 있는 것은 비가 다. 이 시야말로 서양의 역사가 밝은 그리스 세계로부터 중세 시대인 밤의 세계를 거쳐 두 차례의 혁명 이후 도래할 미래의 아침으로 이어진다고 여긴 자신의 역사관을 문학적으로 형상화시킨 작품이다. 시인은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 신들이 남긴 표시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러한 표시 때문에 찬란한 미래가 개벽할 수 있다고 본다. 즉, 횔덜린은 신약성서에 나오는 그리스도가 기적을 행한 ‘빵’과 ‘포도주’의 의미를 이렇게 달리 해석한다. 오늘날 ‘빵과 포두주의 기적’을 행할 사람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 시인이라고. 그리스도를 지상에 찾아온 마지막 신으로 부각시킨 것은 횔덜린의 독창적인 기독교관(혹은 신관)에서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의 이상을 그리스도의 정신과 동일한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서 ‘궁핍한 시대’란 신성이 약화된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밤은 더욱 어둡다. 하지만 궁핍과 밤은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그런데 횔덜린은 자신을 신들의 포고자로 생각하고 신들의 강림을 예견하고 있다. 그 신이란 시인이다. 따라서 시인은 신 없는 시대의 예언자인 것이다. 그리스도 죽음의 의미가 점차 상실되고 있는 이 시대에 시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시인이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들려준 시로는 이것 외에도 , 등이 있다. 에서 횔덜린은 스스로 궁핍한 시대의 시인임을 인지하고 외롭게 이 운명을 짐 지고 살아갈 것을 다짐하고 있다. 횔덜린은 1798년 9월 곤타르트 가를 떠났는데, 심한 정신적 갈등 속에서 소설 을 쓰기 시작했다. 광기의 세월로 접어들기 직전에 쓴 시들로 , , 같은 것이 있다. 그리스 신화의 제신과 유일신 여호와 하느님 사이에서 방황했던 시인의 일생이 요약되어 있다.    
1937    100여년 잊혀있던 독일 시인 - 프리드리히 횔덜린 댓글:  조회:5298  추천:0  2016-12-10
프리드리히 횔덜린       프리드리히 횔덜린 요한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횔덜린 (Johann Christian Friedrich Hölderlin, 1770년 3월 20일 ~ 1843년 7월 6일) 은 독일의 시인이다. 넥카 강변의 라우펜에서 출생하였으며 튀빙엔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였다. 재학 당시 철학자 헤겔·셸링 등과 사귀었다. 고대 그리스를 동경하여 낭만적·종교적인 이상주의를 노래한 그의 시는 오늘날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작품으로는 소설 《히페리온》, 미완성 비극 《엠페도클레스》, 시 , , , 등이 있다.   출생일 1770. 3. 20, 뷔르템베르크 라우펜암네카어 사망일 1843. 6. 7, 튀빙겐 국적 독일 요약 고대 그리스 시의 고전적 형식을 독일 시에 도입하고 그리스도교와 고전이라는 두 주제를 융합하는 데 성공했다. 횔덜린은 생전에 거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100년 가까이 거의 완전히 잊혀져 있었다. 20세기초 비로소 그는 독일에서 재발견되었으며, 독일어로 시를 쓴 뛰어난 서정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명성이 유럽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오늘날 그는 가장 위대한 독일 시인의 반열에 세워져 있고, 특히 그의 뛰어난 표현양식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슈바벤 지방의 네카어 강변에 있는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1772년에 아버지가 죽고 2년 후 어머니가 뉘르팅겐 시(市)의 시장과 재혼하여 뉘르팅겐에서 학교를 다녔다. 1788~93년에는 튀빙겐대학교 신학부에 다녔으며 여기서 석사학위를 받고 사제서품을 받을 자격을 얻었다. 하지만 사제의 길을 포기하고 시인 실러의 격려에 따라 시인의 길을 걸었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종교적 정신 및 고대 그리스의 믿음들을 조화시키고자 노력했고 영혼의 부활과 '신들로의 회귀'를 예언했으며 철저히, 고도로 민감하게, 그렇기에 유달리 상처받으면서 자신을 예술에 바쳤다.   고대 그리스 시의 고전적 형식을 독일 시에 도입하고 그리스도교와 고전이라는 두 주제를 융합하는 데 성공했다. 슈바벤 지방의 네카어 강변에 있는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1772년에 아버지가 죽고 2년 후 어머니가 뉘르팅겐 시(市)의 시장과 재혼하여 뉘르팅겐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1779년 어머니는 다시 남편을 잃고 혼자서 프리드리히와 그의 누이 하인리케, 그리고 아버지가 다른 남동생 카를을 부양해야 했다. 교구목사의 딸로서 단순하고 다소 편협한 신앙심을 가졌던 어머니는 그가 성직자가 되기를 원했다. 성직자 지망생들은 자유로운 교육을 받았는데, 재능은 있지만 가난한 소년이라면 놓쳐서는 안 될 기회였다. 그리하여 그는 처음에는 덴켄도르프와 마울브론의 '수도원학교'(종교개혁 이전 시기부터 그렇게 부름)에 보내졌고, 이어 1788~93년에는 튀빙겐대학교 신학부에 다녔으며 여기서 석사학위를 받고 사제서품을 받을 자격을 얻었다. 그렇지만 그는 성직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기는 했어도 성직에 몸담을 수는 없었다. 신앙과 이성 사이의 쉽지 않은 타협이었던 당대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결코 그의 영혼을 안전하게 기대도록 해주지 않았으며, 그리스도교 교리를 받아들이는 일은 그리스 신화에의 몰두와 전적으로 양립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 신화에 몰두하면서 그리스 신들을 해와 땅, 바다와 하늘 속에서 인간에게 자신의 존재를 현시하는 실제적인 생명력들로 보게 되었다. 이처럼 전념 대상의 양분에서 오는 긴장이 횔덜린에게는 존재의 영원한 조건으로 남았다. 그는 루터교 목사로서 소명을 받았다고 느끼지는 않았지만 종교적인 직업에 대한 의식은 대단히 강해서, 그에게 시인이란 신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는 성스러운 기능을 수행하는 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793년 프리드리히 실러에게 소개를 받았고 그의 추천을 받아 처음으로 가정교사직을 얻었다. 그후 여러 번 가정교사를 했지만 만족스럽지 못했다. 실러는 다른 방식으로도 횔덜린을 도와주었다. 그가 만드는 〈신(新)탈리아 Neue Thalia〉라는 정기간행물에 횔덜린이 쓰기 시작한 시 일부와 소설 〈히페리온 Hyperion〉의 일부를 실어주었다. 〈히페리온〉은 그리스의 자유를 위하여 싸우던 전사의 환멸을 그린 비가조 이야기로 미완성에 그쳤다. 횔덜린은 실러를 대단히 존경했다. 그는 1794년 예나로 가기 위하여 가정교사직을 그만둘 때 다시 실러를 만났다. 횔덜린의 초기 시에는 실러의 영향이 뚜렷이 드러나 있으며, 그가운데 여러 편은 프랑스 혁명이 초기 단계에 약속해주는 듯이 보였던 새로운 세계에 갈채를 보내고 있다. 여기에는 자유·인간성·조화·우정·자연 등에 대한 찬가들도 포함된다. 1795년 12월 가난 때문에 횔덜린은 프랑크푸르트의 부유한 은행가 J. F. 곤타르트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다정다감한 젊은 가정교사는 주인의 부인 주제테에게 깊이 빠져버렸으며, 대단히 아름답고 감수성 있는 이 여인은 그의 애정에 응답했다. 1797년 2월 친구 C. L. 노이퍼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그들의 관계를 "이 비참한 시대에서 정말 헤매고 있던 존재와 맺어진 영원하고 행복한 성스러운 우정"이라고 묘사했다. 주제테는 그의 시와 1799년에 나온 소설 〈히페리온〉 제2권에서 '디오티마'라는 그리스 이름으로 나타나는데, 그녀는 고대 그리스 정신의 화신을 의미했다. 그들의 행복은 짧았고 주제테의 남편과 고통스러운 사건이 있은 다음, 횔덜린은 1798년 9월 프랑크푸르트를 떠나야 했다. 육체적·정신적 동요 속에서도 그는 〈히페리온〉 제2권을 완성했으며 〈엠페도클레스의 죽음 Der Tod des Empedokles〉이라는 비극을 쓰기 시작했다. 이 첫번째 원고는 거의 완성되었으며, 2번째 단편과 3번째 원고도 아직 남아 있다. 이즈음 그에게 아주 민감한 신경증 징후들이 나타나 가족과 친구들을 놀라게 했다. 그럼에도 1798~1801년은 맹렬한 창조력이 발휘된 시기였다. 많은 고귀한 송시(頌詩) 이외에도 위대한 비가 〈디오티마에 대한 메논의 비탄 Menons Klagen um Diotima〉·〈빵과 포도주 Brot und Wein〉가 씌어졌다. 1801년 1월 하우프트빌에서 가정교사를 하기 위해 스위스로 갔지만 주인의 사정이 바뀌어 결국 횔덜린은 같은 해 4월 집으로 돌아갔다. 실러의 영향력으로 예나대학교에서 그리스 문학 강사 자리를 얻고자 했으나 실패한 다음, 그는 다시 프랑스의 보르도에서 가정교사 자리를 얻었다. 1802년 6월 주제테 곤타르트가 죽고, 같은 해 여름 횔덜린은 갑자기 보르도를 떠나 걸어서 프랑스를 통과하여 고향으로 향했다. 그가 뉘르팅겐에 도착했을 때는 돈 한푼 없고 정신도 혼란스러웠다. 정신분열증이 더욱 심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집에서 친절하고 부드러운 간호를 받은 결과 다소 회복되는 듯이 보였다. 〈평화의 축제 Friedensfeier〉·〈유일자 Der Einzige〉·〈파트모스 Patmos〉 같은 1802~06년의 시들은 미치기 직전의 정신에서 쓴 작품들로 비할 데 없이 장엄한 묵시록적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 Antigone〉·〈오이디푸스 왕 Oedipus Tyrannus〉을 운문으로 완역하여 1804년에 출판했다. 같은 해에 헌신적인 친구 이자크 폰 싱클레어가 그를 위해 헤센홈부르크의 영주 프리드리히 5세의 사서라는 한직(閑職)을 얻어주었다. 싱클레어 자신도 온당한 급료를 주었으며 그의 보살핌과 동료애 속에서 횔덜린의 정신상태는 현저하게 좋아졌다. 횔덜린이 정신이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던 싱클레어는 1805년 반체제활동을 했다고 무고를 당해 5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그가 석방되었을 때 횔덜린의 병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빠져 있었고 튀빙겐의 병원에서 한차례 발작을 일으킨 다음에는 어떤 목수의 집으로 옮겨졌으며, 정신착란의 그늘 아래 이후 36년이라는 세월을 보내다가 거기서 죽었다. 횔덜린은 정신적으로 균형을 잃기 2년 전에 〈고향 Die Heimat〉이라는 송시의 결말부에서 자신의 운명을 요약했다. "하늘의 불을 우리에게 빌려준 저 신들은 성스러운 슬픔도 같이 주었다네/두어라. 지상의 아들인 나, 사랑하고 고통받도록 태어난 듯하구나." 횔덜린은 생전에 거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100년 가까이 거의 완전히 잊혀져 있었다. 20세기초 비로소 그는 독일에서 재발견되었으며, 독일어로 시를 쓴 뛰어난 서정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명성이 유럽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오늘날 그는 가장 위대한 독일 시인의 반열에 세워져 있고, 특히 그의 뛰어난 표현양식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그는 고전 그리스 운문형식을 독일어에 성공적으로 이식시킨 전무후무한 시인이다. 격렬한 열정으로써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종교적 정신 및 고대 그리스의 믿음들을 조화시키고자 노력했고 영혼의 부활과 '신들로의 회귀'를 예언했으며 철저히, 고도로 민감하게, 그렇기에 유달리 상처받으면서 자신을 예술에 바쳤다. ======================================= 횔덜린 (Hölderlin, Friedrich) 횔덜린은 괴테, 실러와 함께 최고로 손꼽히는 독일의 시인입니다. 릴케와 첼란과 같은 시인들은 횔덜린을 자신들의 선구자로 여겼으며, 철학자 하이데거는 그를 “시인의 시인”이라고 불렀습니다.  횔덜린은 고대 그리스를 동경하여 낭만적·종교적인 이상주의를 노래했습니다. 이런 그의 사상은 그가 남긴 유일한 소설인 『휘페리온』에도 잘 반영되어 있는데요. 이 소설은 서정적 문체와 폭넓은 주제로 오늘날 새롭게 주목받고 있습니다. 횔덜린의 작품으로는 소설 『휘페리온』과 시 「하이델베르크」 「빵과 포도주」 「운명의 여신들에게」 등이 있습니다.   운명의 여신들에게 여신들이시여, 제 노래가 완전히 무르익도록 한 철의 여름과 가을을 더 허락하소서. 제 노래의 달콤함을 마음껏 누리고 나서  기꺼이 죽으리다. 살아서 거룩한 권리를 누리지 못한 영혼은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하나이다. 그러나 제 마음속에 성스러움이 충만하면 시는 결실을 맺으리다. 그때가 되면 암흑세계의 정적마저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여 제 노래를 두고 떠나야 하더라도 결코 불평하지 않으리다. 적어도 한번은 신들처럼 살아봤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나이다. [출처] 『나의 투쟁』 2, 3 권 속의 인물 ① 횔덜린|작성자 한길사 ==============================     출생일 1770년 03월 20일 사망일 1843년 06월 07일 국적 독일 대표작 《히페리온》, 〈엠페도클레스의 죽음〉 등 고대 그리스의 미와 정신을 전범으로 하여 고대 그리스의 운문 형식을 독일어에 이식시켰다.   프리드리히 횔덜린 횔덜린은 가장 위대한 독일 시인 중 한 사람으로,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그를 '가장 독일적인 시인', '시인 중의 시인'이라고 했다. 신과 인간이 조화롭게 상생하던 고대 그리스의 미와 정신을 전범으로 삼아 시를 쓴 대표적인 고전주의자로, 단순히 그리스 고전을 차용한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운문 형식을 독일어에 이식시켰다고 평가받고 있다. 반평생을 정신질환자로 보낸 불우하고 광기에 찬 천재로도 유명하다. 요한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횔덜린은 1770년 3월 20일 독일 슈바벤 지방 네카 강변에 있는 라우펜 암 네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하인리히 프리드리히 횔덜린은 수도원 관리인으로, 그가 2세 때 돌연사했다. 4세 때 어머니가 라우펜의 서기인 요한 크리스토프 고크와 재혼했고, 고크는 그로부터 2년 후 뉘르팅겐의 시장이 되었다. 그러나 고크마저도 3년 후 피로와 폐렴으로 사망했다. 횔덜린의 형제로는 친여동생 하인리케와 이복동생 카를 크리스토프 고크가 있었다. 횔덜린은 6세 때 뉘르팅겐의 라틴어 학교에서 교양과 피아노를 배웠으며, 14세 때 덴켄도르프 수도원 학교에 들어갔다. 목사의 딸이었던 어머니가 아들이 신앙인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16세 때에는 마울브론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이 학교는 헤르만 헤세가 14세 때 입학하여 7개월 만에 자퇴한 곳으로도, 헤세의 자전적 경험이 녹아 있는 《수레바퀴 아래서》에 등장하는 수도원 학교로도 유명하다. 18세 때 튀빙겐 대학 신학부에 들어가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으며, 훗날 19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가 되는 헤겔, 셸링 등과 교유했다. 또한 시인 동맹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소설 《히페리온》을 구상했다. 1789년,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횔덜린은 혁명이 부르짖는 공화주의적 이상에 심취하였다. 여기에는 '경건한 자코뱅당원'으로 불리던 헤겔의 영향도 있었다. 두 사람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사건을 논평하는 정치 클럽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지만, 횔덜린은 프랑스 혁명 이후 유혈 공포정치가 이루어지면서 혁명에 회의를 느꼈다. 또한 이 시기 루소, 칸트, 스피노자 등의 사상을 접하면서 점차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이 때문에 그는 대학 졸업시험을 보고 나서 약 10년간 가정교사를 전전하며 불안정한 생활을 했다. 횔덜린 자필 방명록 1794년 6월, 대학 졸업시험을 치른 뒤 횔덜린은 12월부터 1년간 발터스하우젠의 샤를로테 폰 칼프의 집에서 가정교사로 일했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 1796년 프랑크푸르트의 부유한 은행가 J. F. 곤타르트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갔는데, 이곳에서 곤타르트의 아내인 주제테를 운명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주제테는 이후 《히페리온》을 비롯해 횔덜린의 많은 작품에 '디오티마'라는 인물로 등장하는데, 디오티마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상징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1794년에 횔덜린은 실러에게 〈히페리온 단편〉이라는 단편소설을 보낸 적이 있는데, 주제테를 만난 뒤 그는 이 작품을 장편소설로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1797년 《히페리온》 1부가 출간되었다. '그리스의 은둔자'라는 부제가 붙은 《히페리온》은 고대 그리스 신화와 역사, 철학, 정신을 비롯해 국가와 투쟁 문제, 사랑, 선(善), 미(美), 민중, 신(神)적인 것에 대한 전 방위적인 통찰이 담긴 작품으로, 그리스적인 형식미와 독일적인 사상이 융화되어 있다고 평가받는다.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문체와 풍부한 리듬감, 운율법으로 소설의 형식미를 뛰어넘은, 장편소설의 관례를 따르지 않은 작품이다. 그리스 독립전쟁 전야에 히페리온이 독일에 있는 친구 벨라르민에게 보낸 서간체 형식의 글로, 자아와 세계 속에서 여러 모순을 경험하고 신적인 것과의 일체감 속에서 구원을 찾아가는 청년의 내면적 발전이 주요 제제이다. 이 작품에서 디오티마는 히페리온에게서 시인과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발견하고, 그의 내적 여정을 이끄는 주요 모티프로 등장한다. 1799년에는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와 《히페리온》 2부를 발표했다. 〈엠페도클레스의 죽음〉는 5세기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로 에트나 산의 화구에 투신자살한 엠페도클레스의 이야기와 시인이 세계에서 경험한 신적인 어떤 것을 반영하여 쓴 단편비극이다. 횔덜린은 자신의 시대를 궁핍한 시대로 보았다. 이는 군주제 아래에서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분리되고, 민중은 지배층에 대한 예속과 그로부터의 탄압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시대를 말한다. 이에 신성(神聖)보다 권력을, 정신보다는 물질을 추구하는 시대가 되면서, 인간은 자연과 신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따라서 그는 시인이란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고귀한 신성을 일깨우는 자라고 여겼으며, 인간, 자연, 신이 조화를 이루었던 고대 그리스의 세계를 이상으로 삼았다. 이런 사고에 의해 쓰인 대표적인 작품이 《히페리온》과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이다. 횔덜린은 32세 때인 1802년경부터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죽을 때까지 정신병으로 불우한 생을 보냈다. 여기에는 그해 6월 주제테가 사망한 것과 연관이 있다고 보는 설도 있다. 그러나 1806년 튀빙겐의 아우텐리트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당할 때까지는 작품 활동을 하고, 친구 이자크 폰 싱클레어의 주선으로 헤센-홈부르크의 영주 프리드리히 5세의 사서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1806년 정신병원에 수용된 이후 완전히 폐인이 되었다. 횔덜린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머물렀던 횔덜린 탑 1807년 《히페리온》에 크게 감명을 받은 목수 에른스트 짐머가 횔덜린을 네카 강변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고, 횔덜린은 이후 죽을 때까지 그의 집에 칩거하며 정신병자로 남은 생을 보냈다. 이 집은 후일 '횔덜린 탑'이라고 불린다. 생전에 횔덜린은 시집을 단 한 권도 내지 못했지만, 정신착란에 빠지기 전 〈그리스〉, 〈운명〉, 〈디오티마〉, 〈에테르에게〉 등 70여 편의 시와 〈시적 정신의 수행 방법에 관하여〉, 〈엠페도클레스에 대한 이유〉 등의 문학론들을 여러 잡지에 발표했다. 또한 정신병이 발발한 초기에는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비롯해 그리스 시인 핀다로스의 작품들을 번역하기도 했다. 짐머의 집에 칩거해서도 계속해서 시를 썼는데, 이 작품들에는 본명 대신 '스카르다넬리'라는 이름으로 서명했다. 정신병이 발발한 이후의 작품들은 '정신병자의 시'로 여겨지며 무시되었으나, 오늘날에는 횔덜린의 가장 매혹적이고 신비로운 작품들로 평가받고 있다. 1843년 6월 7일에 73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튀빙겐 묘지에 안장되었다. 반세기가 지난 후 릴케, 첼란 등에 의해 재발견되어 선구적인 시인으로 여겨지면서 독일의 위대한 현대 시인으로 자리매김했다.
1936    사상 최초, 최고 대서사시를 지은 그리스 시인 - 호메로스 댓글:  조회:5339  추천:0  2016-12-10
[호메로스 - 사상 최초이자 최고의 서사시를 지은 詩人]                                           호메로스(Homeros)  : BC 800? ~ BC 750                                                             호메로스와 길잡이 소년.                               프랑스의 화가 윌리엄 아돌프 부게로의 1874년 작      ⊙ 일리아스(Ilias) - 유럽인의 정신과 사상의 원류가 되는 그리스 최대 최고의                              민족  대서사시.   1만 5,693행, 24권. 각권마다 그리스 문자의 24 알파벳순(順)으로 이름이 붙어 있다. 옛날에는 각권마다 그 내용에 부합되는 이름이 붙어 있었고, 알파벳순으로 이름을 붙이는 방법은 BC 3세기에 처음으로 쓰인 권별법(卷別法)이었다. 《일리아스》는 도시 트로이의 별명 일리오스(Ilios)에서 유래한 것이며, ‘일리오스 이야기’라는 뜻이다. 10년간에 걸친 그리스군의 트로이 공격 중 마지막 해에 일어난 사건들을 노래한 서사시이다.    ⊙ 오디세이아(Odysseia) - 일리아스(Ilias)에 이어서 만든 대서사시   ‘오디세우스의 노래’라는 뜻으로 1만 2110행으로 되어 있으며, 《일리아스》와 같이 24 그리스 문자를 딴 24권으로 나뉘어 있다. 지리적인 지식, 시 속에서 묘사한 생활상태, 기타 여러 가지 내적인 증거로 미루어 보아 이 작품은 《일리아스》보다 약간 뒤늦게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    호메로스는 누구인가? 고대 그리스의 작가이며, 서사시 와 의 저자이며, 일설에 따르면 시각장애인 음유시인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 모두는 ‘사실’이 아닌 ‘전설’이며, 그의 서사시만큼이나 오랜 세월 구전되어 온 이야기일 뿐이다.   호메로스가 누구인지는 물론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두 편의 서사시를 정말 그가 썼는지 아닌지도 불확실하기는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오늘날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이라고는 호메로스라는 인물에 관해 전혀 ‘모른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그렇다면 호메로스에 관한 갖가지 전설들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 호메로스는 한 사람인가? 여러 사람인가?  호메로스가 시각장애인으로 여겨진 까닭은 의 제8권에 등장해 트로이 전쟁을 노래하는 음유시인  데모도코스와 관련 있어 보인다.  어쩌면 그것이 저자 호메로스의 모습을  반영한 것으로 생각한  사람도 있었으리라. 실제로 그 당시 사람들은 시각장애인이 앞을 보지 못하는 대신 기억력이 더욱 비상해진다고 생각했다.   그의 출신지 또한 정확하지 않아서, 이오니아를 비롯한 그리스 도시국가 일곱 군데가  저마다 “호메로스의 출생지”임을 자처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와 에 나온 여러 지명들의 실제 위치를 두고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논의가 오간다.  “호메로스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이후 고전 문학사에서 ‘호메로스 문제’로  지칭되는 갖가지 질문과 답변을 낳았다. 그 중에서도 핵심적인 논제는 호메로스가  한 사람이냐 여러 사람이냐 여부에 집중된다.       일각에서는  양대 서사시에 등장하는 이런저런 불일치를 지적하며  이것은 호메로스가 여러 사람이라는 증거라고 주장하고, 그러면 또 일각에서는 이런저런 유사점을 지적하며 이것은 호메로스가 한 사람이라는 증거라고 반박한다.  어느 고전학자의 지적처럼 공격하는 쪽이나 방어하는 쪽이나 감탄스러운 정도로 훌륭한 논리와 근거를 동원하므로 서로  갑론을박 하는 와중에서 원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장점도 있었다.  호메로스에  대한 이해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은  20세기 중반,  양대 서사시가 문자로 정착되기 이전부터 구전되었을 가능성에 대한 설명이 나오면서부터였다.   우리나라의 판소리 같은 경우에도 대본으로 정착되기 전에 오로지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시기가 있었고, 그 와중에 약간씩의 첨삭이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양대 서사시의 저자 역시 그 이전의 수많은 서사시인들이 만들어 놓은 단편을 가져다가 하나의 일관적이고 커다란 직조물로 이어 붙였을 것이다.    이로써 호메로스가 여러 사람이라는 주장은 사실상 힘을 잃었고, 양대 서사시의 창작자라기보다는 완성자,    또는 기록자인 한 사람의 호메로스를 바라보는 시각이 대두했다.  하지만 “호메로스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은 여전히 답변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다만 대개는 전설의 주장처럼 “고대 그리스의 시각장애인 음유시인으로, 와 의 저자”가 있었다고 편의상 가정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그에 관해서는 여전히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인류사에 남긴 가장 크고 또 가장 훌륭한 업적의 가치를 폄하할 수는 없다. 그 업적이란 바로 그의 양대 서사시를 말한다.                                                                           트로이의 목마를 재현한 모습                                    일리아스(Ilias) 속 트로이의 목마                                                         영화"트로이"의 한 장면  ♣ 사상 최고의 서사시 와        호메로스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서사시 와 는  서양 문학의 최초이자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기원전 8세기경에 구전으로 성립되고,   기원전 6세기경에 문자로 기록되었다고 추정되므로 지금으로부터 무려 수천 년 전의 작품이지만,  이 작품들이 지닌 감동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줄어들지 않는다.  물론 단순히 오래 되었다는 사실 하나에만 경탄이 집중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토록 오래 된 작품이 그토록 짜임새 있는 구조와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경탄을 자아내는 것이다.    는 트로이와 그리스 간의 전쟁을 다룬 서사시다. 황금 사과에서 비롯된 세 여신의 불화와 ‘파리스의 선택’, 지상 최고의 미녀 헬레네의 납치와 도주로 시작돼 ‘트로이의 목마’로 끝난 이 전쟁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는 이 유명한 신화를 일목요연하게 서술하지는 않는다. 어느 고전학자는 어린 시절 번역본을 선물 받고 나서 그 책을 판매한 서점 주인이 사기를 친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왜냐하면 그 유명한 ‘트로이의 목마’ 이야기가 그 책에는 전혀 안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전쟁의 기원과 경과에 관한 설명이 나오긴 하지만, 시간 순서가 아니라 중간에 회고 방식으로 설명되며, 이것은 그리스 서사시의 특징인 동시에 그 영향을 받은 유럽 역대 서사시의 특징으로 자리잡았다.   대신 는 10년여에 달하는 트로이 전쟁 가운데 단 며칠 동안의 이야기에 집중된다. 이 서사시의 실제 주인공은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다. 서두에서 아킬레우스는 그리스 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과 싸우고 나서 더 이상 전투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이후 그리스 군은 헥토르가 이끄는 트로이 군에게 처참하게 유린당하며, 친구의 죽음으로 인해 앞서의 맹세를 철회하고 전투에 복귀한 아킬레우스는 결국 헥토르를 죽여서 원수를 갚는다. 그 와중에 아가멤논, 오디세우스, 아이아스, 디오메네스, 헥토르, 아에네아스, 프리아모스 등 양편의 주요 영웅들의 용맹과 지략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전투를 감상하며 종종 여기저기 참견하는 신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는 흔히 의 속편으로 간주되지만, 역시 두 편의 내용이 곧바로 이어지진 않는다. 의 마지막 장면 이후, 계속된 전쟁의 와중에서 아킬레우스는 ‘아킬레스 건’에 화살을 맞고 죽으며, 트로이는 ‘트로이의 목마’에 속아 무너진다. 승자들은 저마다 전리품을 잔뜩 챙겨 고향으로 향하는데, 오디세우스는 이런저런 불운이 겹치며 10년 동안이나 더 바다를 떠도는 신세가 된다. 역시 처럼 이야기가 중간에서 시작되어 과거를 회고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바다 요정 칼립소의 섬을 떠나 알키노스 왕의 궁전에 도착한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모험을 회고하는 긴 이야기가 끝나면, 드디어 고향에 돌아간 그가 오랜 세월 동안 자기 집을 유린한 자들에게 복수하고 아내와 재회하는 것으로 서사시는 마무리된다.  그 웅장함이며 긴박감에 있어서는 에 미치지 못하지만, 는 오랜 방랑 생활 동안 주인공이 맞닥트리는 갖가지 기이한 사건과 사물(대표적인 것이 감미로운 노래로 선원들을 유혹하는 세이렌, 오디세우스 일행을 가둬두고 한 명씩 잡아먹는 키클로페스(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 파이아케스에 도착한 오디세우스를 구출해 준 나우시카 공주,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구혼자들을 속이기 위해 매일 베를 짜고 또 풀었던 페넬로페, 텔레마코스에게 부친을 찾아갈 방법을 조언하는 멘토르 등이다)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또 수많은 비유를 낳은 바 있다. 분량으로 따지면 쪽이 더 많지만, 내용의 풍부함으로 보면 가 단연 압권이다.     ♣ 호메로스의 영향력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계속된다  미국의 저술가이며 독서 관련 에세이로 유명한 클리프턴 패디먼은 호메로스의 에 관한 글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적을 한 바 있다. 우선 그는 100만 명의 병력과 6000여 척의 선박이 동원된, 20세기 중반 당시로는 사상 최대의 군사 작전이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예로 들면서, 그 작전의 최고지휘관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회고록을 읽어보아도 한 줌밖에 안 되는 청동기 시대 부족들 간의 전투를 기록한 만큼의 웅장함이 느껴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이냐고 묻는다. “이건 결코 아이젠하워 장군의 잘못이 아니다. 다만 그가 호메로스가 아니었을 뿐이다.” 패디먼의 이 말은 호메로스의 위대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호메로스의 탁월함은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이야기를 할 때에 더욱 두드러진다. 양대 서사시에는 수천 년 세월의 간극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인간의 정서에 호소하는 훌륭한 묘사가 수두룩하다. 가령 에는 분노의 창칼로 적을 도륙하는 영웅들의 무용담뿐만 아니라, 그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들의 불운도 묘사되어 있다. 창에 맞아 선지피를 내뿜으며 땅에 쓰러진 아무개의 아들 저무개가 고향에 두고 온 부모와 처자를 뒤로 하고 하데스(저승)로 떠났다는 참혹하고도 구구절절한 묘사 앞에서 독자는 새삼스레 전쟁의 의미를 되묻게 된다. 그런 면에서 는 사상 최초의 ‘전쟁문학’인 동시에 ‘반전문학’이기도 하다. 이처럼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에는 차마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는 말할 수 없어도, 상당히 ‘많은 것’이 들어 있다.  호메로스의 가장 우수한 후계자인 베르길리우스의 는 로마 시대인 1세기경에 나왔다. 에도 잠깐 등장했던 트로이의 영웅 아에네이스가 고향을 잃고 방랑하다가 오늘날의 이탈리아에 도착하여 훗날 로마의 시조가 된다는 일종의 건국신화를 담고 있는데, 전반부의 여섯 장은 의 모범을 따라 트로이에서 이탈리아까지의 여행을 설명하고, 후반부의 여섯 장은 의 모범을 따라 이탈리아의 토착 부족과 벌인 전쟁을 설명한다. 하지만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의 차이는 호메로스와 아이젠하워의 차이만큼이나 현격하다. 이 역시 베르길리우스가 못난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호메로스가 너무나도 탁월한 것뿐이다.  호메로스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려는 시도는 현대에 와서도 계속되었다. 오디세우스의 라틴어 식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1922)는 의 내용과 구조에 착안해서 20세기 더블린의 하루 사이 사건을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묘사한 작품이며, 종종 20세기 최고의 소설로 추앙된다. 그런가 하면 1990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데릭 월콧은 호메로스의 에스파냐어 식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서사시 (1990)를 펴내 격찬을 받았다. 여기서는 아킬레우스, 헥토르, 헬레네를 연상시키는 등장인물들이 카리브 해의 작은 섬나라이며 월콧의 고국인 세인트루시아 토착민으로 묘사된다.  그 외에도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의 제목과 내용은 물론이고, 심지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1984)의 주인공 소녀의 이름도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가 없었으면 나올 수 없었으리라. 이것만 보아도 호메로스의 영향력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그가 누구인지 우리는 알 수 없으며, 앞으로도 영영 알 수 없겠지만 말이다.     ▣일리아스(Ilias)의 중심인물 - 아킬레우스(Achilleus)는 누구인가?                    라틴어로는 아킬레스.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펠레우스왕의 아들로, 어머니인 바다의 여신이 그를 불사신(不死身)으로 만들려고 황천(黃泉)의 스틱스 강물에 몸을 담갔는데, 이때 어머니가 손으로 잡고 있던 발뒤꿈치만은 물에 젖지 않아 치명적인 급소가 되고 말았다.아킬레스힘줄[腱]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하였는데, 이 전설은 비교적 새로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양친은 그를 트로이전쟁에 나가지 않도록 하려고 그를 여장(女裝)시켜 스키로스의 왕 리코메데스의 딸들 틈에 숨겼는데, 그가 없이는 트로이를 함락시킬 수 없다는 예언을 듣고 찾아온 오디세우스에게 발견되었다. 이때 오디세우스가 여자 아이들이 좋아할 물건들 속에 무기를 섞어 놓았는데, 아킬레우스만은 사내라서 무기를 집음으로써 정체가 드러났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는 훗날 여러 미술작품의 좋은 소재가 되었다.    그리스군은 10년 동안에 걸쳐 트로이를 공략하였으며, 아킬레우스는 리르네소스의 왕 에티온을 죽이고 미녀 브리세이스를 손에 넣었으나 아가멤논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격분한 그가 군사를 이끌고 물러가자 그리스군은 계속 패배하였다. 이를 보다 못한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무구(武具)를 갖추고 출진하였는데, 적장 헥토르의 손에 죽자 이에 격분한 아킬레우스는 다시 출격하였다.     이때 그가 몸에 걸친 무구는 어머니가 공신(工神) 헤파이스토스를 시켜 특별히 만든 것으로 유명한 ‘아이기스’이다. 그는 적장 헥토르를 죽여 원수를 갚고 그의 시체를 전차에 매어 끌고 돌아왔는데, 헥토르의 부왕(父王) 프리아모스가 몸소 진중으로 찾아와 몸을 굽히면서 자식의 유해를 돌려달라고 애원하자 배상금을 받고 인도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도 마침내는 파리스의 화살에 급소를 맞고 죽었다. 그는 격하기 쉬운 성격이었으나 정이 많고 트로이전쟁에서 가장 고결한 영웅으로 알려졌으며, 발이 빨라 준족(駿足)의 대표자로도 알려졌다.                                                   [일리아스(Ilias) 1권~24권]     (고대 그리스어: Ίλιάς, 라틴어: Iliad 일리아드)는 현존하는 고대 그리스문학의 가장 오래된 서사시이다. 이름은 트로이인들의 왕성인 ‘일리온’에서 유래하였다. '일리아스'란 이름은 '일리온의 노래' 란 뜻이다.  오디세이아(Odysseia)와 더불어 고대 그리스와 후대 서양의 문학예술과 문화의 전범으로 여겨지고 있다.     주제는 그리스의 전설적인 전쟁인 트로이아 전쟁을 배경으로 51일간의 사건을 노래한 것으로 그리스의 장군인 아킬레우스가 중심이 되어 원한과 복수에서 파생되는 인간의 비극을 다뤘다. 9년 동안 계속된 전쟁의 상황과 전쟁에 관여하는 올륌포스의 신들, 장수들의 이야기 등을 위주로 한다.     이야기 전개에 따라서 시는 24편으로 나뉘며, 그리스의 대표적 시운중의 하나인 6각운(Hexametre)으로 작곡되었다. 각 권마다 그리스 문자의 24 알파벳 순서로 이름이 붙어있다. 그리스 문학의 대부분이 운명론에 따른 체념이나 절망을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정해진 운명에 굴하지 않고 영광된 죽음을 택하는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제1권   아킬레우스의 분노: 아가멤논이 아폴론 사제의 딸, 크뤼세이스를 모욕한 죄과로 아카이 진영(고대 그리스 동맹군)에 전염병이 번진다. 총지휘관 아가멤논은 공개 회의에서 아킬레우스와 격한 말다툼 끝에 그의 애첩 브리세이스를 강제로 빼앗음로써 또한 아킬레우스를 모욕하게 된다. 분노에 사로잡힌 아킬레우스는 앞으로 트로이군과의 전투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공언한다.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테티스는 아들의 부탁에 따라 제우스를 은밀히 찾아가 아카이아군이 패배하도록 요청하여 그의 허락을 받아낸다.   제2권 아가멤논은 제우스가 보낸 꿈에서 트로이아가 함락되는 것을 본다. 이 꿈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가멤논은 장군들과 토론 끝에, 전체 군사회의를 소집한다. 네스토르와 오디세우스는 열띤 논쟁을 벌이며, 아카이아군은 트로이 정복을 포기하고 귀향하자는 의견에 마음이 솔깃해지지만, 신들의 영향하에 있는 오뒷세우스의 강한 반대와 건의에 따라 트로이군과 빨리 결전을 치르자는 데에 합의를 본다. 시의 후반(484-877 이른바 전함 카탈로그)은 전쟁에 참가한 아카이아군과 트로이아군의 지방, 도시 그리고 지휘관들을 노래하고 있다.   제3권 트로이아군과 아카이아군은 들판으로 나가 전투를 위해 진을 친다. 그러나 트로이아의 장군 파리스는 홀로 양 진영 사이에 나서서 자신과 단판을 할 아카이아 용사는 앞으로 나오라고 소리친다. 아카이아군 진영에서 마땅한 도전자를 찾고 있을 때를 같이하여 트로이아의 왕 프리아모스는 헬레나를 망루에 불러내어 아카이아의 장군들에 관해 이야기를 듣는다. 마침내 파리스는 헬레나의 (전)남편 메넬라오스와 일대일 결투을 벌인 끝에 패배하며, 아프로디테에 의해 목숨을 건진다. 그리고 헬레나는 여신의 강요로 파리스가 쉬고 있는 침소로 가 그를 약간은 핀잔을 주면서 위로한다.  제4권 제우스를 중심으로 올림포스의 신들은 트로이전쟁의 앞날에 관한 문제를 놓고 회의를 한다. 아카이아군의 편을 드는 헤라의 요구로 아테나는 판다로스를 꾀어 메넬라오스에게 활을 쏘아 부상을 입힘으로서 이 전에 맺은 협약을 깨친다. 트로이아군의 간계에 분격한 아가멤논은 곧바로 전투 태세를 갖추도록 아카이아 장군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장군들이 이끄는 부대의 열병식을 끝마친 후 아카이아군은 드디어 트로이아 진영으로 공격해 들어간다.  제5권 디오메데스의 무공과 아테나의 도움으로 아카이아군은 트로이아군을 궁지에 몰아 넣는다. 디오메데스는 선두에 서서 만나는 졸개들을 모조리 물리친 후 메넬라오스를 부상시킨 판다로스와 그를 지원하는 아이네아스와 대결한다. 먼저 창을 던져 판다로스를 단숨에 꺼꾸러뜨린 다음 아이네아스에게는 바윗돌을 집어던져 기절을 시킨다. 죽을 지경에 놓인 아들을 구출하기 위해 아프로디테가 끼어들지만 성난 황소 같은 디오메데스에게 손에 부상을 입고 도망친다. 아이네아스는 결국 아폴론에 의해 구출되며, 아폴론은 아테나가 잠시 전장을 비운 틈을 타 트로이아군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또한 아레스가 트로이군의 편을 듦으로써 아카이아군이 궁지에 몰린다. 이를 지켜본 헤라는 다시 아테나를 시켜 아카이아군을 돕도록 한다. 다시 디오메데스는 아테나의 힘을 등에 업고 아레스와 맞붙어 창으로 상처를 입혀 전장에서 내쫓는다. 제6권 트로이아군과 아카이아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틈에 헥토르는 동생 헬레노스의 간청에 따라 성으로 돌아가 아낙네들로 하여금 아테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하도록 권유한다. 이 사이에 전장에서는 트로이아 장군 글라우코스와 아카이아 장군 디오메데스는 서로 족보를 묻고는 서로의 조상이 예전에 알고 지내던 사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기뻐하며 싸움을 그만두고 가지고 있던 무기를 우정의 표시로 교환한다. 헥토르는 트로이아 성에서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있는 동생 파리스를 만나 핀잔을 준 뒤, 남편을 찾아 어린 아들 아스튀르낙스를 품에 안고 이리저리 헤메는 아내 안드로마케를 성문 근처에서 만나 눈물어린 이별의 대화를 나눈다. 이는 일리아스에서 묘사된 가장 유명한 이별 장면이다.  제7권 아테나와 아폴론은 헥토르에게 아카이아의 가장 용맹한 장수와 일대 일로 싸우게 부추긴다. 텔라몬의 아들, 큰 아이아스와 헥토르는 일대 일로 결투를 벌인다. 밤이 되어 양쪽 군대가 갈라지고 네스토르가 전사자들을 화장할 수 있도록 휴전을 맺고 아카이아 인들의 선단 주위에 방벽을 쌓도록 권유한다.  제8권 제우스는 아킬레우스를 위해 아가멤논에게 복수해 주겠다고 한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른 신들에게 이 전쟁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한다. 이에 다른 신들도 아카이아 군이나 트로이군을 도와주지 못한다. 제우스는 이데산으로 가서 아카이아인들에게 패배를 트로이아 인들에게는 승리의 영광을 내린다.트로이군은 승리하고 밤이 되자 승리에 도취된 헥토르는 아카이아군의 진영앞에서 야영을 한다.  제9권 전세가 많이 불리해지자 아카이아 군은 전쟁을 접고 귀국하려고 한다. 아가멤논은 귀국을 하려고 하지만 디오메데스와 네스토르는 이에 반대한다. 아가멤논은 네스토르의 조언에 따라 아킬레우스에게 사절을 보내 아킬레우스와 화해하려고 하였으나 아킬레우스는 이를 단호히 거절한다.  제10권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다른 장군들을 깨워 파수병들을 돌아보게 한다. 디오메데스와 오디세우스는 트로이군의 정탐군인 돌론을 죽이고 트로이군의 진영에 몰래들어가 트로이군을 정탐한다.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우스는 정탐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트라키아인들의 진영을 급습하고 말들을 빼앗아 돌아온다.  제11권 새로운 날이 밝자, 아가멤논은 무장을 갖추고 전쟁터로 군사들을 이끌고 나온다. 그는 용감히 싸웠지만 부상을 입고 디오메데스도 역시 부상을 입고 선단으로 돌아간다. 혼자서 고군분투하던 오디세우스가 적군에게 포위당하자 아이아스가 그를 구해준다. 역시 오디세우스도 부상을 당하고 아카온과 에우리필로스도 부상을 당해 선단으로 물러난다. 네스토르가 마카온을 싣고 돌아오는 것을 보고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를 보내 네스토르가 싣고 온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게 한다.  제12권 아카이아군은 트로이군에 쫓겨 방벽안으로 밀려들어가고 헥토르는 방벽을 공격한다. 두 명의 아이아스가 이에 맞서서 항전을 독려한다. 리키아의 두 장군 글라우코스와 사르페돈이 방벽을 맹렬히 공격하다가 글라우코스는 부상을 당해 물러가고 사르페돈이 결국 방벽을 허물고 만다. 헥토르가 돌로 쳐서 방벽의 문을 부수자 트로이군은 방벽을 넘어 문을 지나 물밀듯이 아카이아 진영으로 쳐들어 간다.  제13권 아카이아 군의 선단을 둘러싸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다. 포세이돈은 제우스 몰래 아카이아인들을 도와주며 격려한다. 맹렬하게 공격하는 헥토르를 맞아 두 아이아스가 무너진 방벽 근처에서 선전하고 전선의 왼쪽에서는 이도메네우스와 메리오네스가 아이네이아스와 파리스 등을 맞아서 분투한다.헥토르는 풀리다마스의 조언에 따라 군사들을 한쪽으로 집결시켜서 맹렬히 공격을 퍼붓는다.  제14권 네스토르가 마카온을 대접한 다음 다시 싸움터로 돌아가다가 부상당한 아가멤논, 디오메데스, 오디세우스와 마주친다. 아가멤논은 철군을 주장하는데 오디세우스가 반대한다. 한편, 헤라는 잠의 신의 도움으로 제우스를 이데산에서 잠재우는 데 성공한다. 이틈을 타서 포세이돈은 아카이아 인들을 도와주는데 큰 아이아스가 던진 돌에 헥토르가 맞고 부상당하여 물러나게 되고 이를 기회로 아카이아인들이 공세를 시작하여 트로이군이 후퇴한다. 작은 아이아스는 큰 공을 세운다.  제15권 제우스는 잠에서 깨어나자 헤라에게 크게 화를 낸다. 이리스를 포세이돈에게 보내 싸움에 개입하지 말라고 종용하고 아폴론을 헥토르에게 보내어 그를 회복시키게 한다. 헥토르가 회복하고 다시 전장으로 나가 아폴론의 도움을 받아 아카이아 인들을 맹렬히 공격하자 아카이안인들은 결국 맨 앞쪽의 선단으로 부터 후퇴하기 시작한다. 큰 아이아스는 해전(海戰)에 쓰는 긴 창을 들고 홀로 분전하지만 중과부적으로 결국 트로이 군은 맨 앞쪽에 있던 프로테실라오스의 배애 불을 지른다. 제16권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무장을 입고 출전하여 트로이 군을 선단에서 몰아낸다. 아킬레우스는 파르토클로스에게 트로이군을 선단에서 몰아내기만 하고 돌아오라고 일렀으나 파트로클로스는 이를 무시하고 도망하는 트로이군을 쫓아진격한다. 파트로클로스는 추격전에서 사르페돈을 죽이는 등 혁혁한 공을 세우지만 결국 헥토르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제17권 파트로클로스의 시체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아카이아 군과 트로이군과의 일전일퇴의 격전이 벌어진다. 헥토르가 파트로클로스에게서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벗겨 자신이 입고는 더욱 맹렬한 공격을 가한다. 메넬라오스가 안틸로코스를 보내 파트로클로스의 전사소식을 아킬레우스에게 알리게 한다. 두 명의 아이아스가 분전하는 동안 메넬라오스와 메리오네스가 파트로클로스의 시체와 귀환한다.  제18권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분노한다. 테테스는 아킬레우스를 위해 새로운 갑옷과 방패를 만들어주도록 헤파이스토스에게 부탁하겠다고 약속한다. 헥토르가 다시 파트로클로스의 시체를 다시 탈취하려고 공격하는 순간 아킬레우스가 무장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나와 크게 고함을 지르자 트로이 군이 놀라서 도망친다. 밤이 되자 풀리다마스는 헥토르에게 아킬레우스가 출전하기 전에 트로이아 군을 성 안으로 철수 시켜야 한다고 조언하지만 헥토르는 이에 따르지 않는다. 아카이아 군은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애도하고 헤파이스토스는 테티스가 부탁한 아킬레우스의 새 무장을 만들어준다.  제19권 날이 밝자 테티스는 아킬레우스에게 새로운 무장을 가져다 주고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는 모든 아카이아 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해한다. 오디세우스의 권고에 따라 모든 아카이아 인들은 아침을 먹고 아킬레우스를 따라 전쟁터로 향한다. 출정하기 전에 아킬레우스의 준마 크산토스가 헤라의 힘을 입어 인간의 음성으로 아킬레우스가 오늘은 승리하지만 결국 전사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무시하고 전쟁터로 나간다.  제20권 제우스는 아킬레우스가 당장 트로이 성을 함락하지 못하도록 여러 신들이 전쟁에 관여하는 것을 허락한다. 아폴론이 아이네이스를 부추겨 아킬레우스에게 맞서게 한다. 여러 신들은 각자 자신들이 응원하는 측으로 갈라선다. 아이네이스가 위험해지자 포세이돈은 그를 구해준다. 아폴론은 헥토르에게 싸움에 나서지 말 것을 권고하지만 헥토르는 이를 무시하고 동생 폴리도로스의 죽음에 화가 나서 아킬레우스에게 맞선다.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에게 거의 죽음을 당할 뻔하는데 아폴론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난다. 아킬레우스는 도망치는 트로이군을 크게 무찌른다.  제21권 트로이 군의 일부가 스카만드로스 강에 빠져 헤어나오니 못하는데 아킬레우스가 칼을 빼들고 뒤쫓아가서 닥치는 대로 죽이고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대한 제물로 삼기위해 12명의 젊은 군인을 생포해 온다. 강의 신이 화가 나서 아킬레우스를 들판으로 추격하나 헤파이스토스가 불로 강의 신을 물리친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 군을 성안으로 모두 몰아넣는다.  제22권 헥토르는 프리아모스 왕와 헤카베 왕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문앞으로 나가 아킬레우스와 일전을 기다린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는 쫓고 쫓기다가 트로이 성을 세바퀴나 돈다. 제우스는 헥토르의 파멸을 결정하고 아폴론은 헥토르를 도와주지 못한다. 아테나가 데이포보스로 변하여 헥토르로 하여금 아킬레우스에게 대항하도록 유도한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이고 그 시체를 전차에 매달고 돌아간다. 헥토르의 부모와 아내는 성벽 위에서 통곡한다.   제23권 파트로클로스의 혼령이 밤에 아킬레우스에게 나타나 자신의 장례를 치뤄줄 것을 요청한다. 아침이 되자 아카이아 군은 나무를 해와서 파트로클로스를 화장한다. 그 다음날 화장터 위에 봉분을 만들고 아킬레우스 주최아래 장례 경기가 벌어진다.  제24권 아킬레우스가 뜬 눈으로 밤을 세우고 나서 헥토르의 시체를 끌고 파트로클로스의 무덤을 돈다. 제우스는 테티스를 보내어 헥토르의 시체를 욕보이지 말고 돌려주라고 명령하면서 이리스를 프리아모스에게 보내어 몸값을 내고 아들의 시체를 찾아가라고 조언한다. 프리아모스는 제우스가 보내준 메시지를 믿고 길을 떠나 헤르메스의 안내를 받으면서 무사히 아킬레우스의 막사에 도착한다. 아킬레우스는 프리아모스에게 아들의 시체를 인도하고 헥토르의 장례기간동안에는 휴전하겠다고 약속한다. 프리아모스는 헥토르의 시체를 데려와 장례를 성대하게 치른다.                                      호메로스(Homeros)의 일리아스(Ilias) 원본                       ◎ [트로이(Troy)]는 어디에 있는가? ◎    ▲ 트로이(Tory)도시성벽   터키 트로이. 트로이 6기에 만들어진 도시 성벽이다.   트로이 유적은 기원전 3000년 청동기 시대부터 로마시대까지 9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트로이 6기는 기원전 1800년부터 1275년까지로 추정된다.   트로야·트로이아라고도 한다. 《일리아스》 《오디세이아》에서는 ‘일리오스’라고 불렸다. 스카만드로스강과 시모이스강이 흐르는 평야에 있는 나지막한 언덕(근대에 와서는 히살리크라고 불렀다)에 있다. 바다에서 6km 정도 떨어져 있어 바다로부터의 습격을 받을 위험은 적었다.   그러나 바다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에게해(海)와 흑해(黑海)를 잇는 헬레스폰투스(다르다넬스 해협)의 입구에 해당하는 중요한 곳에 있어, 예로부터 번영을 누려왔다.  독일 고고학자 슐리만이 1870년부터 이곳을 발굴하면서 유적이 밝혀졌다. 유적은 9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최하층은 BC 4000년 말기의 것으로, 성벽으로 에워싸여 있었다. 제2층에는 메가론식의 왕궁으로 짐작되는 건물이 있고, 이 층에서 많은 금·은 제품을 발견하였으며, 이 층을 호메로스 시대의 것으로 생각하였다.  슐리만은 이때 발굴한 유물들을 독일로 밀반출, 1881년 베를린박물관에서 처음으로 공개함으로써 찬란했던 트로이문화가 세상에 알려졌다. 1945년 베를린을 점령한 소련은 이를 탈취, 금·은 보물은 모스크바 푸시킨미술관에, 도자기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슈미술관에 소장하다가 1995년 4월 푸시킨미술관에서 다시 전시되었다.  그러나 그후 슐리만을 도운 독일의 고고학자 되르프펠트는 아래에서 제6층에 해당하는 곳이 호메로스 시대의 것이라고 하였다(BC 15∼BC 12). 1930년대에 와서 미국의 블레겐이 다시 조직적으로 발굴하여 한 층 위인 제7층 A를 호메로스 시대의 것이라고 수정하였다.  제7층 B는 철기시대 초기, 제8층은 그리스인이 이민(移民)한 아르카이크시대의 것이며, 맨 위층인 제9층은 헬레니즘시대 및 로마시대의 유적으로 이 무렵 도시는 ‘일리움’이라고 불리었다. 이 시대에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원정 도중에 일부러 이곳을 들렀다.   출처: 집필/네이버/두산백과              
1935    서인도제도 영국령 세인트루시아 시인 - 데릭 월컷(월코트) 댓글:  조회:6271  추천:2  2016-12-10
데릭 월컷월코트)     데릭 월컷 Derek Alton Walcott 데릭 월컷(2008년) 출생 1930년 1월 23일 (86세) 세인트루시아 캐스트리스 국적 세인트루시아 직업 시인, 극작가 자녀 피터 월컷, 엘리자베스 월컷, 애나 월컷 상훈 노벨 문학상(1992년) 서명 데릭 월컷(Derek Walcott, OBE, 1930년 1월 23일 ~ )은 세인트루시아의 시인이자 극작가로 199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다. 그의 작업은 식민지 시절의 노예 제도부터 독립까지 카리브 해의 경험, 색다른 문화와 전통의 혼합이 담긴 카리브 해의 식민적 지위의 자연을 탐구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아프리카인과 유럽인 둘다 포함하는 자신의 풍부한 인종적 유산과 문화적 배경을 반영하는 편이다. 세인트루시아의 캐스트리즈에서 태어났다. 처음으로 그의 상업적으로 발간된 시집은 〈푸른 밤에: 1948-1960〉(1962년)이었다. 다른 편들로는 긴 이야기가 담긴 시 〈다른 인생〉(1973년), 〈별사과 왕국〉(1979년), 〈행운적 여행인〉 (1981년), 〈한 여름 중〉(1984년), 〈아칸소 유언〉(1987년)과 〈하사금〉(1997년)을 포함한다. 〈오메로스〉(1990년)는 개인적, 집단적 추억들 사이에 균형을 찾는데, 시인의 내적인 투쟁을 묘사하는 서사시였다. 다른 서사시 〈티에폴로의 사냥개〉(2000년)는 버진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인상주의 화가 카밀 피사로에 중심을 두고 있다. 연작 시집 〈방탕자〉(2004년)는 그의 여행책과 저서를 겸하였다. 그의 시 전집은 2007년에 발간되었다. 그의 극작으로는 〈원숭이 산에 대한 꿈〉(1967년), 〈기념〉(1977년), 〈무연극〉(1978년)과 〈오디세이: 무대극판〉(1993년)을 포함한다. 그 작품들은 위선, 탐험, 권의에 대해 인간의 투쟁에 집중시키고 있다. 그는 또한 미국의 가수 폴 사이먼과 함께 음악적 작품 〈동굴인〉(1997년)을 쓰기도 하였다. 서훈[편집] ");"> 1972년 대영 제국 훈장 4등급(OBE) 외부 연결[편집]           *우표에 오른 시인 월코트 1992년 - 세인트루시아의 시인 월코트(Derek Walcott)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    영국 연방 세인트 루시아 출신의 시인 데레크 월코트(62)가 1992년 10월 8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월코트는 1930년 영국계 아버지와 아프리카 노예 혈통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1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사회사업가인 엄격한 어머니 밑에서 교육받았으며, 1953년 트리니다드로 이사했다. 1948년 첫 시집 '25편의 시'를 출간했고, 1962년 런던에서 '초록빛 밤 속에서'를 펴내 일약 카리브해 문학의 획기적인 시인으로 부상했다. 이 시집은 과거의 시와는 달리 단순한 영문학의 모방이 아니라, 카리브해의 매혹적인 정서를 현지인의 어법으로 생생하게 표현해보려 했다. 1985년부터 미국 보스턴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오메로스' (1990)로 199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장엄한 서사시는 '복합적 혈통과 카리브 해에게서 얻은 감각과 리듬으로 카리브 해 현실과 풍광 속에 세계 문화의 모든 조류를 용해시킨'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데릭 월코트와 작품세계 (199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스웨덴 한림원은 1992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62세의 서인도 출신 시인인 데릭 월코트를 선정 발표하였다. 스웨덴 한림원은 우선 월코트의 시의 '음악적이며 민감한' 문체와 '역사적 비전과 다양한 문화의 산물'로서의그의 시의 우수성과 특성을 높이 평가한 것 같다.  월코트는 1930년 1월 23일 전 영국 식민지였던 서인도 제도인 세인트루시아라는 인구 8만 정도의 작은 섬에서 교사인 동시에 화가인 영국인 아버지와, 역시 교사이며 노예의 후예인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쌍동이로 탄생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월코트가 한 살 때 돌아가셨으며, 그후 그는 엄격하기는 하였지만 비교적 좋은 문학적 환경에서 자랐다.  월코트는 1953년 자메이카에 있는 서인도 대학을 졸업했으며, 대학에서 그는 불어, 라틴어 그리고 서반아어를 전공하였다. 그 후 그는 잠시 그레나다와 자메이카에서 교편을 잡은 일이 있다. 1958년에는 록펠러 장학금을 받아 연극을 공부했으며, 1981년에는 '뛰어난 재능이 있는 개인'에게 수여하는 25만 불의 존 D. 맥아더 상금을 받았다. 현재 그는 미국 보스턴 대학에서 창작을 가르치고 있으며, 시인일 뿐만 아니라 극작가, 언론인 그리고 미술가로 잘 알려져 있다.  월코트의 시는 우선 식민지하에 있었던 서인도 섬들의 바참했던 과거와 자신이 흑인 노예의 후손일 뿐만 아니라 흑백 혼혈의 후예라는 데 대한 심한 갈등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월코트의 주관심이 그가 태어나서 자란 서인도와 그의 아버지의 언어인 동시에 자신의문학의 매체인 영어, 그리고 자신이 아프리카 출신이라는 사실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그에게 있어 숙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월코트의 시의 특징은 이렇듯 그의 혈통과 성장 과정 그리고 역사적 배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월코트의 시의 또 하나의 특징은 서구 사회, 동양 그리고 아프리카 등의 어려 문화와 다양한 인종 그리고 이들의 만남에서 야기되는 여러가지 갈등과 그 와중에서 연출되는 중재자로서의 시인의 위치이다. 또 이러한 점이 바로 월코트의 시가 서인도라는 작은 지방적 폐쇄성에서 탈피하여 보편성을 띄게 되는 동시에 또 만인의 공감을 얻게 된 이유가 아닌가 생각된다.  월코트가 영향을 받은 시인과 극작가는 고대 그리스 극작가 소포클레스, 셰익스피어, 16세기 영국 극작가이며 시인인 크리스토퍼 마로우, 의 저자 밀턴, 17세기 영국 시인 앤드루 마블이 있으며, 현대 시인과 작가로는 T.S. 엘리엇, 에즈라 파운드, 불란서 시인 보들레르, 영국 소설가 제임스 죠이스 등이 있다.  그런데 월코트의 최대의 난점은 동서와 아프리카의 이질적인 문화와, 영어와 서인도의 토착 언어를 어떻게 접목시켜 조화를 이루느냐가 문제였다. 그러기 위해 월코트는 우선 전통적인 시형식부터 희생시키지 않을 수 없었으며, 또 토착적인 면을 살리기 위해서는 문법적인 것도 무시할 때가 있게 되며, 낱말 선택과 심상, 인유및 속어의 사용도 파격적인 경우가 있다.  월코트의 첫시집 는 시인이 18세 때인 1848년에 자비로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때 월코트는 이미 훌륭한 시인으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아 지(誌)의 오랜 편집자인 프랭크 콜리모어의 찬사를 받은 바 있다. 최근에 출판된 월코트의 시집으로는 1990년에 출간된 가 있다.  이번에 번역하게된 시집인 에 실린 시들은 여행자의 마스크를 통해 작가의 예리한 비판적 안목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온유한 신을 말하면서, 그 온유한 신을 위해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한 잔혹한 청교도 후예들이 이제 피묻은 돛을 달고 월남에서 돌아오는 군인이 되어 있는 모습을 그린 시, 기계문명에 의해 자연파괴와 미국혼이 사멸되고 있음을 노래한 시, 식민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과거의 전통 및 유산 등이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과거의 영광을 잃게 되는 것이 자연의 섭리임을 그리는 시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이들은 진리도, 인습도, 전통도 절대적이거나 영원하지 못하다는 포스트모더니즘적 특질을 보여주는 것들로서 서구 지배자의 논리에 착취 당해온 동양의 서구인들에 의해 '오리엔탈리즘'이란 잘못된 고정관념을 심어주어, 그들이 동양지배를 당연시하거나 정당화시켜 온 과거의 역사를 신랄하게 비판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의 주장과 흡사하다. 따라서 탈식민지시대의 대표적인 문학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의 첫 작품인 는 10편의 짧은 연시이며, 이 시에서 샤배인이라는 별명의 시인인 동시에 선원인 주인공은 자신과 현재 처한처지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그에겐 모든 것이 불만스럽다.한가지 예를 들면 그는 그의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마리아 콘셉숀이라는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열애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 이 시의 또 하나의 주제는 주인공의 혈통에 관한 것으로, 백인과 흑인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백인과 흑인 양쪽으로부터 다같이 배척받고 있다. 그리고 이와 관려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식민지 하에 있어서의 사회의 부패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다. 이러한 식민지의 압제자와 그러한 사회에 대한 반항과 비판은 뒤에 이어지는 시(詩)들에서 보다 강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특히 와 에서는 시험적인 시형식이 눈에 띈다. 그러나 한가지도, 그것이 파괴적이거나 혁명적인 것으로 유도하려 하고 있다라고 보기보다는 인고(忍苦)를 최종적인 대안으로 제시하려는 데 있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나 하는 점이다.  박영희(문학박사,충남대 교수)  //////////////////////////////////////////////////////// 카라나지여 안녕 / 데릭 월코트  한가로운 8월의 바다는 부드럽고 섬의 갈색 나뭇잎들이 이 카리브 해변에 달라붙을 때,  곤히 잠든 마리아 콘셉숀의 얼굴을 비쳐주고 있는 촛불을 살며시 끈다, '훌라이트'라는 범선의 뱃사람이 되기 위해  회색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는 아른 새벽 정원 나뭇가지에 바람이 살랑거릴 때까지 나는 돌처럼 서 있었다.  그때 주변은 죽은 듯이 조용하고  찬 바다만이 충격받은 전율처럼 물결치고 있었으며,  하늘에는 못구멍 같은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뜰을 쓸고 있는 무뚝뚝한 이웃 여인을 지나 고개 아래로 내려갈 때,  나는 하마터면 다음과 같이 말할 뻔했다.  "이 마녀야 조용히 쓸어라,  대지는 깊이 잠드는 일이 없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죽은 사람처럼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택시가 섰다, 주차등을 아직도 켠 채,  운전기사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나의 행낭을 재 보았다.  "이번에는 샤반으로 영원히 떠나는 것이냐!"라고 묻는 듯이  그러나 나는 대답하지 않고 뒷자리에 올라탄 채  떠나온 잠든 여인의 가운과 같은 라빈타일 분홍빛으로 불타고 있는 하늘을 응시했다.  후면 반사경을 들여다보니  나와 똑같은 놈이  떠나는 집들과 길거리 그리고 빌어먹을 섬 전체가 몹시나 아쉬운 듯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모든 잠자는 영혼들에 예수님의 자비가 있기를!  저 아래 우라이튼 거리에서 썩고 있는 개로부터  나와 같은 개에 이르기까지.  이들 섬들을 사랑하는 것이 나에게 주어진 짐이라면,  썩어 문들어져가는 곳으로부터 나는 영혼의 날개를 펼치리라.  그러나 그들은 나의 영혼에 독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큰 저택, 대형 승용차, 큰 보물, 중국인 쿨리, 검둥이, 시리아인,  그리고 프랑스 계 크리올 등으로.  그래서 나는 그들과 그들의 사육제에 그 짐을 맡기고  바다 목욕을 한 다음 저 아랫길로 내려갔다.  바닷빛 파란 눈과 녹빛머리.  빨간 검둥이에 대한 방언이 샤배인이라는 선원인 나는 이섬들을 안다.  모노스로부터 나소에 이르기까지.  나 사배인은 또 바다를 사랑하는 빨간 검둥이.  나는 훌륭한 식민지 교육을 받았으나  나에게는 네덜란드인과 검둥이 그리고 영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  따라서 나는 보잘것없는 인간이던가 아니면 하나의 국가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출렁거리고 있는 바다를 지켜보고 있는 나의 머리는  마리아 콘셉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그때 황홀한 반사빛으로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있는 태양은  어선과 범선 그리고 요트들의 항구 쪽 뱃전을  새로운 색채로 단장하고 있었다.  나는 검은 머리의 저녁이 해질 무렵에  그녀의 명주옷을 걸치는 때와,  그녀가 바다를 덮으면서 밝은 웃음과 더불어  옆걸음질 치는 때를 알고 있었다.  휴식이 없고 고통을 잊을 틈도 없다는 것은  죽은 자가 살아나기를 바라는 장지의 상주들에게  부활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것.  따라서 나는 뱃머리의 밧줄이 풀리고 배가 바다로 미끄러져나갈 때  혼자 웃으며 말했다.  "바다에는 보다 많은 고기가 있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나는 그녀가 천사의 성적 매력이 없는 빛의 옷을 입기를 원치 않는다.  나는 비단털 원숭이와 같은 둥근 갈색 눈을 원하며,  몸을 뒤로 비스듬이 젖히고 즐거운 웃음을 웃을 수 있을 때까지,  마치 젖은 모래 위의 개처럼,  땀흘려 일하는 일요일 오후에  나의 등을 간지럽히는 손가락을 나는 원한다,"  나의 어머니의 젖과 오늘밤 화덕으로부터 사라질 별들에 맹세하건데,  썩은 파도가 바다를 명주처럼 가르는 뱃머리를 지켜보면서 일할 때,  나는 그들과 나의 아이들. 나의 아내, 그리고 나의 가정을 사랑했으며,  시인들이 그들의 죽음을 채촉하는 시를 좋아하고  선원들이 그들을 수장하는 바다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는 그들을 사랑했다.  여러분은 혹시 어떤 한적한 해변을부터  멀리 보이는 범선을 본 일이 있는지요?  글쎄요, 나의 시는 구절마다 바닷물에 목욕한 것들이여,  매행은 삭구의 밧줄처럼 꼭 맺혀 있으며,  또 나의 평이한 언어와 말은 바람과 같으며,  나의 한장 한장의 시는 범선의 돛과 같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이 일이 시작되는지를 말하여 드리리다.  @@@@ 데릭 월코트 Derek Walcott  1930년 서인도제도 세인트 루시아에서 태어남.  1947년 서인도 유니버시티 칼리지 졸업  1949년 발표  1952년 희곡 발표  1954년 결혼 그라나다 세컨러리 스쿨 교사  1962년 시집 발간, 재혼  1966년 아메리칸 아카데미 명예회원  1969년 시집 발간, 재혼  1970년 희곡 발표  1973년 시집 발간  1981년 로스앤젤레스타임스상 수상, 하버드대학,캐임브리지대학교수  1982년 세번째 결혼  1983년 시집 발간,크로몬들상 수상  1985년 보스턴대학 교환 교수  1988년 웨스트인디즈대학 교수  1990년 시집 발간  1992년 노벨문학상 수상     샤배인 공화국을 떠나다 / 데릭 월코트  나에게는 이제 상상력 이외에는 나라가 없었다.  백인들은 다음에 권력이 그들 쪽으로 기울자  이번에는 흑인들이 나를 원치 않았다.  처음엔 나의 손에 쇠사슬을 채우고서 '역사' 때문이라고 말하더니,  그런 다음엔 내가 그들의 자존심에 부합할 만큼  검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무슨 권력이든 이들 이름 모를 바위 위에서 말해 주십시오  분무비행 공군, 소방대, 적십자사, 연대,  "열병식!" 이라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당신 앞을 자나가는 두서너 경찰견?  나는 한때 역사를 만난 일이 있다.  그러나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오래된 바다 병처럼 사마귀 투성인  격자 발코니의 그물에 의해 드리워진 그림자 구멍을 통해  개처럼 기고 있는 크림색 옷을 입고 크림색 모자를 쓴 양피지 크리올을.  나는 그와 대면하여,"나는 샤배인입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는 당신의 손자라고 합니다.  당신의 흑인 요리사인 할머니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라고 외쳤다.  그러나 그는 기침을 하면서 가래를 밷는 것이었다.  그러한 가래는 몇백 마디의 말보다 의미가 있다.  그런데 그자들이 우리에게 남겨놓은 것은 말뿐이다.  나는 더이상 혁명을 믿지 않았다.  나는 알렉산더 부록 에서 영웅 취급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어느 일요일 정오에 해양경찰 지서와  베네수웰라 호텔 사이에 있었다.  국기도 없어 셔츠를 흔들면서  가슴에 총구멍이 나기를 기다리는 젊은이들.  그들은 계속 산 속으로 행진해 갔다.  그리고 거품이 모래 속으로 스며들면서 그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빗방울처럼 눈부신 언덕으로 사라져갔다.  작자 자신의 후광을 드리우고 셔츠를 거리에 버려두고  길끝에 권력의 메아리를 남긴 채.  의사당 천장에는 선풍기가 돌고,  사람들이 말하기를 양홍색 법복을 입은 판사들이 아직도 땀을 흘리고 있으며,  프레드릭 거리에는 쓸모없는 사람들이 모두 꼿꼿이 서서 행진을 하고 있을 때,  예산은 새장을 열고 있다.  12시 30분 영화 때 영사기가 고장나는 일이 가장 없으며,  그것이 싫으면 혁명이나 구경가라.  알렉산더 부록이 들어와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리 벤 크리프가 주연으로 출연하는 스페인 서부활극을 구경하기 위해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세 번째 맨 앞줄에 앉는다.  ====================================== 데릭 월코트의 '오메로스(Omeros)'  개인 삶을 넘어서는 장대함  카리브해에 바치는 시인 송가   1992년 '오메로스'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데릭 월코트는 카리브해의 세인트루시아 출신이다. 인구 16만명의 이 작은 섬나라는 노예의 후손인 아프리카계 흑인과 혼혈이 주민의 90%다. 영국계 아버지와 아프리카 노예 혈통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가 카리브해 연안 민족의 소외감과 문화적 갈등을 시의 주제로 삼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다. 그의 시는 강렬한 이미지와 은유로 카리브해의 현실과 정서를 표현한다. 카리브해는 항상 바다 위를 날아다니며 잠들지 않는 칼새처럼 월코트의 서정 속에 살아있다. '오메로스'는 일리아드 오딧세이의 저자인 호머를 뜻한다. 주요 등장인물의 이름인 아쉴,헥터,헬렌은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지 쟁탈전에 부역으로 동원된 노예들에게 그리스 서사시의 영웅들처럼 용감히 싸웠다고 해서 지배자들이 붙여준 것이었다. 이름의 의미는 카리브해의 비극적인 역사처럼 그렇게 아프다.  오메로스는 일리아드보다는 오딧세이에 가깝다. 그의 영혼은 다양한 공간과 시간을 맴돌며 순환한다. 그는 자신이 식민지의 타락된 과거 속에서 태어났음을 깨닫는다. 시간과 공간을 오가는 방황의 순례를 거치며 북미 대륙 남부의 농장들에게서도 역사란 약육강식의 순환이었음을 발견한다. 거대한 공동묘지처럼 시간의 공포에 짓눌린 지중해의 도시들도 그가 살 곳이 아니었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조각상들이 아니라 조각상의 머리에 앉은 새이기 때문에. 마침내 섬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이 그 섬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를 말한다. '난 모든 감각으로 거기서 살았다. 두 눈으로 냄새 맡고 콧구멍으로 볼 수 있었다.'  그의 마지막 도착점은 바로 출발점에 서있는 자신이다. 모두 7부 64장에 이르는 장대한 스케일의 서사적 장편시는 아침을 여는 이른 새벽 출항을 준비하는 바다를 배경으로 시작하여 고기잡이를 마치고 귀향하는 저녁바다로 마지막 장면을 만든다. 생양파 조각처럼 빛나는 보름달 아래 '그가 해변을 떠났을 때도 바다는 여전히 철썩거리고 있었다' 장대한 시가 하룻동안의 일처럼 느껴진다.  아프리카와 카리브와 유럽과 아메리카의 문화와 혈통이 뒤섞이고 집합체를 이룬 다층적 문화 속에서 자아의 주체성을 추구하는 월코트의 문학을 중남미 탈식민주의 문학의 성취라고 한다면,단일문화의 식민지 출신인 우리의 아시아 문학에게 시사하는 점은 무엇일까. 자신이 태어난 카리브해의 작은 섬에 바치는 월코트의 애정은,우리가 목청 높여 떠드는 민족이니 애국이니 하는 말들보다 숭고해 보인다.  무엇보다도 오메로스는 내게 시에 대한 신뢰와 용기를 주었다. 일상의 자잘한 에피소드로 엮어내는 아픔,상처의 토로 같은 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다. 개인의 삶을 넘어 더 크고 장대한 이야기를 시라는 형식으로 이렇게 아름답고 넉넉하게 풀어낼 수도 있구나. 4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이 시집은 펼쳐서 읽다가 덮어두었다가 또 펼쳐보고 하면서 몇 년 째 내 책상에 놓여져 있다.  /국제신문 ========================== 1992년도 노벨 文學賞 受賞 詩人 데레크 월코트의 시 감상 李豊鎬(Paul Lee) 英연방 西인도 카리브 海 세인트 루시아 태생 詩人 데레크 월코트(Derek Walcott)가 금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지난 10월 8일 스웨덴 翰林院이 발표했다. 현대의 호머(Homer)라고 비평가들의 평을 받은 바 있는 올해 62세의 월코트는 흑인 노예의 후손으로서 아프리카의 서인도 제도와 유럽의 문화 전통을 환기시켜주며 풍부한 조화를 제공해주고 있는 광범한 작품 내용으로 찬사를 받았다. 상금으로 미화 백 20만불($1.2 million)을 수여하는 스웨덴 한림원측은 西인도 문화가 위대한 시인 월코트의 작품 속에 들어있다고 말했다. 한림원은 획일적인 광채와 거대한 힘 을 보여주고 있는 그의 아름다운 음악적이고도 감성적인 문체에 대해 칭송했다. 시인으로서 일찍부터 재능이 싹트기 시작한 월코트는 그의 청년기에 이르자 유럽 식민지 전통을 접하게 됐으며 자기가 태어난 西인도 제도의 뿌리 속에 긍지를 심어왔다. 이러한 多문화적 긴장 상태는 노예 제도와 영국 통치로부터의 독립 그리고 가혹한 가난에 대한 주제들이 그의 초기 작품 속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18세에 발표한 월코트의 첫 시집 시 25편 (25 Poems)은 처음부터 국토와 역사 그리고 문화에 대한 혼란스런 要素들이 그로 하여금 주체성에 대한 수수께끼를 깊이 생각하도록 해주었다. 그가 초기에 쓴 시 아프리카에서 들려오는 먼 함성 (A Far Cry From Africa)에서 그는 그의 家系 대대로 전해 오는 아프리카의 遺産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있다. Where shall I turn, divided to the vein? I who have cursed The drunken officer of British rule, how choose Between this Africa and the English tongue I love? 혈관까지 갈라진 채 나는 어디서 돌아서야 할까 술 취한 영국의 통치자를 저주한 나, 내가 사랑하는 아프리카와 영어 말씨 사이에서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그는 때때로 모든 자료는 그의 예술의 권한 아래 또는 그 바깥쪽에 있다고 주장한다 고 밝히면서 詩 그로스일렛 (Gros-Ilet)에서 그는 西인도 제도의 황폐한 작은 섬마을을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This is not the grape-purple Aegean. There is no wine here, no cheese, the almonds are green, the sea grapes bitter, the language is that of slaves. 이곳은 포도 같은 자주빛 에게 海가 아니다. 포도주도 치이즈도 없는 여기에 아먼드 복숭아는 싱싱하고 바다 포도는 쓰고, 언어라고는 노예들의 말 뿐이다. 월코트의 할머니들은 노예의 후손으로 밝혀졌고 노예의 고뇌에 찬 遺産物이 그의 시편들의 주제를 이루고 있다. 자마이카에 대한 1979년도 작품 별 사과 왕국 (The Star-apple Kingdom)에서 馬夫, 목동, 하녀 . . . 아랫 마을의 선한 흑인들, 소리 없는 悲鳴으로 잠겨진 턱에 그들의 입들 (groom, the cattle boy, the housemaid . . . the good Negroes down in the village, their mouths in the locked jaw of a silent scream.)이라고 그는 쓰고 있다. 또 다른 작품에서는 허약한 西인도 제도의 환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One morning the Caribbean was cut up by seven prime ministers who bought the sea in bolts til everyone owned a little piece of the sea, from which some made saris, some made by bandannas the rest was offered the trays to white cruise ships taller than the post office. 어느 날 아침 카리브 海가 분활되었다 한 묶음씩 바다를 산 일곱 首相들에 의해 누구나 조금 씩 바다를 소유할 때까지, 사리 무명천 조각 만큼 물들인 커다란 손수건 만큼 나머지 사람들은 쟁반 크기에서부터 우체국 보다 더 크고 하얀 巡洋船 크기 만큼 얻게 되었다. 데레크 월코트(Derek Walcott)의 詩 감상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월코트의 시세계는 노예제도의 가혹한 遺産과 西인도 제도의 매력 을 묘사하는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의 대표 작품으로는 64章으로 구성된 카리브人의 敍事詩 오메로스 (Omeros)와 함께 그가 처음 주목을 받기 시작했던 1962년도 발표 작품 푸른 밤에 (In A Green Night) 등을 들 수 있다. 월코트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그의 詩 작품 몇편을 일부 영어 원문과 함께 필자의 한글 번역으로 소개한다. 아울러 월코트의 작품 연대기를 실어 그의 전체적인 작품세계를 조명해 본다. The Arkansas Testament I remember the cities I have never seen exactly. Silver-veined Venice, Leningrad with its toffee-twisted minarets. Paris. Soon the Impressionists will be making sunshine out of shade. Oh! and the uncoiling cobra alleys of Hyderabad. 아칸소 言約 나는 내가 한번도 보지 못했던 도시들을 정확히 기억한다. 은백색 결 있는 베니스, 레닌그라드의 콧대 비틀어진 회교 사원의 첨탑. 巴里. 머지않아 印象派 조각가들은 陰影으로 햇빛을 만들겠지. 오, 그리고 히드라바드의 사리를 푸는 코브라 오솔길도. ---------------------------- Adam``s Song . . . Men still sing the song that Adam sang against the world he lost to vipers, the song to Eve against his own damnation; he sang it in the evening of the world with the lights coming on in the eyes of panthers in the peaceable kingdom and his death coming out of the trees, he sings it, frightened of the jealously of God and at the price of his own death. 아담의 노래 . . . 인류는 아직도 아담이 부른 노래를 부른다 毒蛇에게 잃어버린 세상에 대항하여, 스스로 파멸에 대항하여 이브를 향한 노래 평화스런 왕국의 숫표범의 두 눈에서 빛이 발산하고 十字架에서 그의 죽음이 걸어나오는 세상의 저녁이 되면 그는 노래를 불렀다 하느님의 경계심과 스스로 죽음의 對價에 그는 노래를 부르면서 무서워했다. ----------------------------- The Light of the World And I had abandoned them, I knew that there sitting in the transport, in the sea-quiet dusk, with men hunched in canoes, and the orange lights from the Vigie headland, black boats on the water; I, who could never solidify my shadow to be one of their shadows, had left them their earth, their white rum quarrels, and their coal bays, their hatred of corporals, of all authority. 세상의 빛 그리고 나는 마을 주민들을 내버렸다. 나는 내가 輸送船 안에 앉아 있음을 알았다. 조용한 바다 해지는 속에서 커누 안에 등을 구부리고 앉은 사내들과 함께, 오렌지색 불빛이 비기갑(岬)으로부터 비취고, 물 위에 떠있는 검은 보트들. 마을 주민들의 陰影 중 일부가 되기 위해 내 그림자 하나 결속할 수 없었던 나는 그들을 육지에 남겨놓았다 그들의 결백한 술취한 말다툼도, 炭色의 월계관도 그들의 증오어린 육체도, 모든 권력에 대한 증오까지도. 데렠 월코트의 作品 年代記 시집 1948년 첫시집 시 25편 (25 Poems) 18세 때 어머니가 준 200불로 西인도 제도 최남단의 섬 트리니다드에서 自費 출판. 1949년 젊은이의 墓碑銘 (Epitaph for the Young: a Poem in XII Cantos) 바베이도스에서 출판. 1951년 시 (Poems) 킹스턴에서 출판. 1962년 한 푸른 밤에 (In a Green Night) 런던에서 출판. 1964년 시선집 (Selected Poems) 뉴욕에서 출판. 1965년 버림받은 자 외 기타 시 작품 (The Castaway and Other Poems) 런던에서 출판. 1970년 灣 (The Gulf) 런던에서 출판. 1972년 또 다른 인생 (Another Life) 런던에서 출판. 1976년 바다 포도 (Sea Grapes) 런던에서 출판. 1979년 별사과 왕국 (The Star-apple Kingdom) 런던에서 출판. 1982년 運 좋은 여행객 (The Fortunate Traveller) 한여름 (Midsummer) 런던에서 출판. 1986년 1948-84년 시 모음집 (Collected Poems 1948-1984) 런던에서 출판. 1987년 아칸소 言約 (The Arkansas Testament) 런던에서 출판. 1990년 오메로스 (Omeros) 런던에서 출판. --------------------------------------------------------------------- 희곡 1970년 원숭이山上의 꿈 외 기타 희곡 작품 (Dream on Monkey Mountain and Other Plays) 뉴욕에서 출판. 1979년 세빌의 포커 와 오 바빌론 (``The Foker`` and ``O Babylon``) 런던 에서 출판. 1980년 회상 과 무언극 (``Remembrance`` and ``Pantomime``) 뉴욕에서 출 판. 1986년 희곡 3 편 (Three Plays) 뉴욕에서 출판. ---------------------------------------------------------------------- 주요 수필 1965년 학교를 떠나면서 (Leaving School) 크루소의 모습 (The Figure of Crusoe) 발표. 1970년 의미 (Meanings) 黎明이 말해주는 것 - 序曲 (What the Twilight Says; an Overture) 발표. 1974년 역사의 詩 (The Muse of History) 카리브 海, 문화인가 흉내인가  (The Caribbean: Culture or Mimicry?) 발표. 1975년 스페인의 港灣 선택에 관하여 (On Choosing Port of Spain) 발표. 1986년 帝國에 대한 한 식민지의 견해 (A Colonial``s Eye-View of the Empire) 발표. 1989년 캘리구라의 말 (Caligula``s Horse) 발표. 1990-91년 劇 속의 詩人 (The Poet in the Theatre) 발표.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시인 겸 극작가 데릭 월코트(62)는 혼혈이다. 그의 문화적 혈액에는 유럽과 아프리카, 카리브해의 역사와 문화가 뒤섞여 있다. 월코트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시집은 90년에 나온 장편서사시 《오메로스》이다. 이 시집은 그에게 ‘현대의 호머’라는 칭호를 달아주었다. 영어권 문단의 비평가들은 《오메로스》가 호머의 《일리어드》와 《오딧세이》를 그가 성장한 카리브해 문화와 접목시키고 있다고 분석한다.  스웨덴 한림원은 수상 결정 이유에서 “월코트는 아프리카·유럽·카리브의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토착적인 예술형식으로 창조해냈다“면서 《오메로스》에는 호머·에드가 앨런 포우·러시아의 시인 마야코프스키·소설가 멜빌의 음성이 들어 있다고 밝혔다. 이 선배 작가들을 육화해낸 월코트의 시는 역사적 비전을 은유와 빛나는 이미지로 빚어낸다. 모두 64장으로 완결되는 《오메로스》는 위 세 문화가 서로 갈등하고 삼투하는 웅장한 서사시이다. 구비문학의 전통에 충실한 이 시는 역사로서의 바다와, 바다를 둘러싼 해양문화를 노래하는데, 서로 다른 문화와 문학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탁월하게 소화하고 있다. 고대 설화의 신비함과 서인도제도의 미래가 녹아들어가 있는 것이다.  비평가 제임스 알타스는 월코트 문학의 테마를 그가 태어난 서인도제도의 영연방 세인트 루이스섬에 대한 ‘이중구조의 사랑’이라고 규정한다. 영국 식민지의 시민이며 흑인이고 그래서 영원한 아웃사이더일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고향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시집 《오메로스》의 편집자인 갤러시는 영국 시의 전통을 탁월하게 구사하는 현대 시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월코트이며, 그는 진보적인 작가가 아니라 매우 서정적인 시인이라고 평가한다. 이 시집은 91년 영국에서 ‘W.H.스미스 문학상’을 수상했다.  “왜 내가 결정됐는지 모르겠다. 나보다는 트리니나드 출신 작가인 V.S.나이폴이나 아일랜드 시인 시무스 허니가 받을 줄 알았다”라고 당혹해한 월코트는 “서인도제도의 문학이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돼 기쁘다”면서 상금(1백20만달러)으로 고향 세인트 루이스에 집과 연극 스튜디오를 짓고 싶다고 말했다. “내 생애 자체도 이중적이다”  월코트의 생애는 그의 문학세계와 함수관계를 갖는다. “아주 어려서부터 작가가 되고 싶어했다”는 월코트는 한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사회사업가이자 아마추어 연극인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의 부친은 연극과 오페라에 많은 관심을 가진 영국인이며 어머니는 아프리카 노예혈통이었다. 식민지 지배자와 노예의 피는 그의 시 에서 “아프리카와 영국, 내 사랑은 어디인가”로 표출된다. 《오메로스》에서는 “그가 찾아다니는 것은 그의 이름이오. 그 자신의 이름과 영혼말이오”라고 정체성을 찾을 수 없는 유색인종의 아픔이 드러난다.  월코트는 “나의 경험은 카리브해의 것이며 나의 정신은 아프리카와 아시아로부터 왔다”고 말했다. 18세 때인 48년 첫 시집 《25편의 시》를 펴내며 등단한 월코트는 53년 세인트 루이스에서 현재 거주지인 트리니나드로 이주했다. 시 쓰기와 함께 그는 연극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54년 첫 희곡 를 발표했고 62년 시집 《초록빛 밤에》로 문학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의 초기시의 관심은 영문학의 전통과 크레올어(서인도제도의 토착어)의 결합이었다. 크레올어에 스며들어 있는 카리브 문화와, 나아가 아프리카적 정서와 세계관을 전달하기 위해 그는 정확한 영어를 구사했다. 아버지인 영어와 어머니인 아프리카와 카리브의 만남을 문학 속에서 시도한 것이다.  그무렵 그는 라틴어·프랑스어 교사 생활을 거쳐 지의 예술평론기자로도 활약했다. 59년에는 ‘트리니나드 연극연구회’를 조직하고 60년부터 전업작가로 나섰다. (58년)에 이어 그는 (70) (86) 등의 희곡을 썼는데, 은 트리니나드의 최근세사 20년을 다룬 것으로 스웨덴에서 공연된 바 있다. 스웨덴 한림원은, 그의 희곡의 중요한 특징은 그의 시가 그러한 것처럼 다양한 문화의 목소리들을 아우르는 솜씨에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미국 보스턴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예창작을 가르치는 그는 미국과 트리니나드를 오가는 생활을 한다. 미국에 있으면 카리브에 가고 싶고 카리브에 머무를 때는 미국으로 떠나고 싶다는 것이다. 그의 생애와 문학은 이처럼 이중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는 요즘도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글을 쓰는 한편 틈틈이 그림도 그린다.  그가 태어난 영연방 세인트 루이스는 베네수엘라와 쿠바 사이에 있는데, 면적 6백16㎢에 인구는 15만명에 불과한 작은 섬이다. 관광산업과 바나나로 유명한 이 섬은 월코트가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섬 전체가 잔치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세인트 루이스에서 노벨상은 낯설지 않다. 79년 이곳 출신 경제학자 아더 루이스(현재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가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것이다. 루이스와 월코트는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다. 세인트 루이스는 문맹률이 15%밖에 안될 만큼 교육수준이 높다. 유엔주재 세인트 루이스 외교관은 “세인트 루이스는 오래 전부터 강력한 지적 전통이 있어왔다”고 밝혔다.
1934    페르시아 시인 - 잘랄 앗 딘 루미 댓글:  조회:5807  추천:0  2016-12-10
  출생일 1207경. 9. 30, 구르 발흐 사망일 1273. 12. 17 국적 페르시아 요약 가장 유명한 페르시아의 수피(이슬람 신비주의자)·시인. Mawlānā라고도 함.   서정시와 이슬람 신비사상과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교훈서사시〈영적인 2행 연구 Masnavῑ-ye Ma⁽navῑ〉가 유명하다(수피즘). 잘랄 앗 딘이 죽은 뒤 그의 제자들이 서방에서는 '빙글빙글 돌며 춤추는 데르비시들'로 불리는 마울라위야 교단을 조직했다. 잘랄 앗 딘의 아버지 바하 앗 딘 왈라드는 유명한 신비주의 신학자이자 작가이며 선생이었다. 몽골인들의 위협이 주요원인이 되어 바하 앗 딘과 그의 가족은 1218년경 고향을 떠났다. 전설에 따르면 이란의 니샤푸르에서 그의 가족은 페르시아의 신비주의 서사시인 파리드 앗 딘 아타르를 만났으며 그가 어린 잘랄 앗 딘을 축복해주었다고 한다. 메카 순례와 중동지역을 여행한 다음 바하 앗 딘과 그의 가족은 아나톨리아(룸, 여기에서 루미라는 별칭이 나왔음)에 도착했는데 당시 이 지역은 셀주크 투르크 왕조 통치하에 평화와 번영을 누렸던 곳이었다. 라란나(카라만)에서 잠시 머무르는 동안 잘랄 앗 딘의 어머니가 죽고 첫아들이 태어났으며 1228년 그들은 수도인 코니아로 초청되었다. 바하 앗 딘 왈라드는 이곳에 있는 많은 마드라사(madrasah : 종교학교) 중 한 곳에서 강의했으며, 1231년 그가 사망한 뒤 그의 아들이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1년 후 바하 앗 딘의 제자로 있던 부르한 앗 딘 무하키크가 코니아에 와서 잘랄 앗 딘에게 이란에서 발달한 몇 가지 신비적인 이론들을 더 깊이 알려주었다. 잘랄 앗 딘의 정신세계 형성에 커다란 공헌을 한 부르한 앗 딘은 1240년경 코니아를 떠났다. 그가 시리아 수피 교단들과 접촉한 것이 그의 가족이 아나톨리아에 도착하기 전의 일이라고 입증되지 않는 한 시리아로 1, 2차례 여행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곳에서 지도적인 이슬람 신지론자(神智論者)인 이븐 알 아라비를 만났던 것 같다. 잘랄 앗 딘은 코니아에서 이븐 알 아라비의 통역자이자 의붓아들인 사르드 앗 딘 알 쿠나위와 동료로서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1244년 11월 30일은 잘랄 앗 딘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날이었다. 이날 그는 전에 시리아에서 첫 대면했던 성인인 떠돌이 타브리즈 출신의 데르비시 샴스 앗 딘(아랍어로 '종교의 태양'이라는 뜻)을 코니아의 길거리에서 만났다. 샴스 앗 딘은 어떠한 전통적 신비주의 형제단과 결부시켜 생각될 수 없지만 그의 압도적인 개성이 잘랄 앗 딘에게 신의 권위와 아름다움에 관한 신비함을 가르쳐주었다. 수개월 간 이 두 신비주의자는 가까이 지냈는데, 잘랄 앗 딘이 그의 제자와 가족을 소홀히 대하는 것에 분개한 측근들은 1246년 2월 샴스를 마을에서 강제추방했다. 잘랄 앗 딘이 비탄에 빠지자 그의 큰아들인 술탄 왈라드가 결국 샴스를 시리아에서 다시 데리고 왔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샴스와 잘랄 앗 딘의 친분관계를 너그럽게 보아줄 수 없었으며, 1247년 어느 날 밤, 샴스는 영원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살해된 것이었고 잘랄 앗 딘의 아들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코니아에 아직도 남아 있는 한 우물 근처에 그를 급히 매장했음이 최근에야 입증되었다. 잘랄 앗 딘은 이와 같은 사랑과 동경, 결별의 경험들을 겪으면서 시인으로 성장했다. 그의 신비한 시들, 약 3만 행의 시구와 상당수의 로바이야트(robā⁽ῑyāt : 4행 연구)는 그의 아들이 "그는 샴스가 자신에게서 달처럼 빛나는 것을 보았다"라고 기록한 것같이 그의 사랑의 여러 단계들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대부분의 서정시 끝부분에 자신의 필명 대신 샴스의 이름을 적어넣음으로써 사랑하는 사람들의 완벽한 동일시를 보여주었다. 〈샴스의 명시선집 Dῑvān-e Shams〉은 그의 경험들을 시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그러나 이 시들에서는 언어가 고답적인 정신세계나 모호한 사색에 빠지는 일이 결코 없었다. 강한 리듬으로 나아가는 신선한 언어는 때로 대중적인 시와 유사한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연대기 편찬자들이 이 시의 대부분이 피리나 북소리, 대장간의 망치소리 또는 자연을 즐기려고 제자들과 늘 찾아가기도 했던 메람에 있는 물레방아 소리에 의해 이끌려 들어가는 무아경에서 나온 것으로 믿는 까닭으로 여겨진다. 그는 대자연 안에서 종교의 태양이 발하는 찬란한 아름다움이 반사되고 있는 것을 알았으며, 꽃과 새들도 그의 사랑을 함께 나눈다고 느꼈다. 그는 종종 자신의 시에 맞추어 빙글빙글 도는 춤을 추기도 했다. 샴스 앗 딘이 죽은 지 몇 년 후 잘랄 앗 딘은 문맹자인 대장장이 살라흐 앗 딘 자르쿠브와 친분을 나누면서 비슷한 황홀감을 경험했다. 어느 날 코니아의 장터에 있는 살라흐 앗 딘의 가게 앞에서 망치소리를 듣고 있던 잘랄 앗 딘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가게 주인은 오랫동안 잘랄 앗 딘과 가장 친숙했고 충성스러운 제자들 중의 하나로 그의 딸은 후에 잘랄 앗 딘의 맏며느리가 되었다. 이때의 사랑이 다시 잘랄 앗 딘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했다. 살라흐 앗 딘이 죽은뒤 후삼 앗 딘 첼레비가 그의 정신적 연인이 되었다. 잘랄 앗 딘의 주요작품 〈영적인 2행 연구〉는 그의 영향을 크게 받은 작품이다. 후삼 앗 딘은 일화·우화·이야기·격언·비유 등의 글을 군데군데 넣은 긴 시들을 통해 신비주의의 가르침을 전하려고 했던 아타르와 사나이의 시작 기법을 따를 것을 그에게 권했다. 그들의 작품들은 신비주의자와 잘랄 앗 딘의 제자들 사이에서 널리 읽혀졌다. 잘랄 앗 딘은 후삼 앗 딘의 충고에 따라서 수년 동안 〈영적인 2행 연구〉의 거의 2만 6,000행에 달하는 2행 연구를 지었다. 그는 후삼 앗 딘을 데리고 다니며 거리나 욕탕에서도 자신의 시를 낭송했으며 후삼은 이를 받아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13세기 수피주의의 다양한 모습들을 상세히 소개하는 마스나위는 독자를 자유로운 영상으로 도취시켜 작가의 생애에서 어떤 특정 시기에 가졌던 생각을 이해하게 한다. 이 작품은 신성한 사랑의 경험을 반영한 것으로 잘랄 앗 딘에게는 살라흐 앗 딘과 후삼 앗 딘이 모두 모든 것을 포옹하는 빛인 샴스 앗 딘의 새로운 현현이었다. 그래서 그는 후삼 앗 딘을 디야 알 하크('진리의 빛')라고 불렀다. 아랍어로 '디야(ḍiyā⁾)는 햇빛'이라는 뜻이다. 잘랄 앗 딘은 〈영적인 2행 연구〉를 완성한 뒤 죽었고 그후 코니아 사회에서 늘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리스도교 수사뿐만 아니라 고위 관료들도 그의 동료들을 찾아다녔다. 그의 후계자는 후삼 앗 딘이었고, 후삼 앗 딘의 뒤를 이어 술탄 왈라드가 계승했으며, 그는 잘랄 앗 딘의 제자들의 느슨한 조직을 마울라위야 교단으로 통합·조직했다. 이 교단은 그들의 주요의식을 구성하는 신비적인 춤 때문에 서양에서 '빙글빙글 데르비시들'로 알려졌다. 자신의 아버지의 생애를 그린 술탄 왈라드의 시 작품은 잘랄 앗 딘의 영적인 성장을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시 이외에도 잘랄 앗 딘은 동료들이 기록한 작은 일상 담화집을 남겼다. 모음집 〈그 안에 있는 것이 그 안에 있다 Fῑhi mā fῑhi〉에는 그가 쓴 시의 주된 사상들이 재현되고 있다. 또한 여러 층의 인물들 앞으로 보낸 서간문도 있다. 때때로 서로 모순되고 상징물들을 바꾸어 곧잘 독자를 당황하게 하는 그의 사상을 체계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의 시는 신비적인 경험들을 가장 인간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천계로의 열광적인 비행으로부터 일상생활의 사실적 묘사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선호하는 사상과 감정을 독자에게 제시한다. 투르크 문화 생활에 끼친 잘랄 앗 딘의 영향은 매우 지대하다. 오늘날 코니아의 박물관과 푸르고 둥근 천장으로 된 그의 묘소는 아직도 수많은 순례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   잘랄 앗 딘 알 루미 (페르시아 수피·시인)    가장 유명한 페르시아의 수피(이슬람 신비주의자)·시인.         서정시와 이슬람 신비사상과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교훈서사시〈영적인 2행 연구 Masnavῑ-ye Ma⁽navῑ〉가 유명하다(→ 수피즘). 잘랄 앗 딘이 죽은 뒤 그의 제자들이 서방에서는 '빙글빙글 돌며 춤추는 데르비시들'로 불리는 마울라위야 교단을 조직했다.   잘랄 앗 딘의 아버지 바하 앗 딘 왈라드는 유명한 신비주의 신학자이자 작가이며 선생이었다. 몽골인들의 위협이 주요원인이 되어 바하 앗 딘과 그의 가족은 1218년경 고향을 떠났다. 전설에 따르면 이란의 니샤푸르에서 그의 가족은 페르시아의 신비주의 서사시인 파리드 앗 딘 아타르를 만났으며 그가 어린 잘랄 앗 딘을 축복해주었다고 한다. 메카 순례와 중동지역을 여행한 다음 바하 앗 딘과 그의 가족은 아나톨리아(룸, 여기에서 루미라는 별칭이 나왔음)에 도착했는데 당시 이 지역은 셀주크 투르크 왕조 통치하에 평화와 번영을 누렸던 곳이었다. 라란나(카라만)에서 잠시 머무르는 동안 잘랄 앗 딘의 어머니가 죽고 첫아들이 태어났으며 1228년 그들은 수도인 코니아로 초청되었다. 바하 앗 딘 왈라드는 이곳에 있는 많은 마드라사(madrasah : 종교학교) 중 한 곳에서 강의했으며, 1231년 그가 사망한 뒤 그의 아들이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1년 후 바하 앗 딘의 제자로 있던 부르한 앗 딘 무하키크가 코니아에 와서 잘랄 앗 딘에게 이란에서 발달한 몇 가지 신비적인 이론들을 더 깊이 알려주었다. 잘랄 앗 딘의 정신세계 형성에 커다란 공헌을 한 부르한 앗 딘은 1240년경 코니아를 떠났다. 그가 시리아 수피 교단들과 접촉한 것이 그의 가족이 아나톨리아에 도착하기 전의 일이라고 입증되지 않는 한 시리아로 1, 2차례 여행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곳에서 지도적인 이슬람 신지론자(神智論者)인 이븐 알 아라비를 만났던 것 같다. 잘랄 앗 딘은 코니아에서 이븐 알 아라비의 통역자이자 의붓아들인 사르드 앗 딘 알 쿠나위와 동료로서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1244년 11월 30일은 잘랄 앗 딘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날이었다. 이날 그는 전에 시리아에서 첫 대면했던 성인인 떠돌이 타브리즈 출신의 데르비시 샴스 앗 딘(아랍어로 '종교의 태양'이라는 뜻)을 코니아의 길거리에서 만났다. 샴스 앗 딘은 어떠한 전통적 신비주의 형제단과 결부시켜 생각될 수 없지만 그의 압도적인 개성이 잘랄 앗 딘에게 신의 권위와 아름다움에 관한 신비함을 가르쳐주었다. 수개월 간 이 두 신비주의자는 가까이 지냈는데, 잘랄 앗 딘이 그의 제자와 가족을 소홀히 대하는 것에 분개한 측근들은 1246년 2월 샴스를 마을에서 강제추방했다. 잘랄 앗 딘이 비탄에 빠지자 그의 큰아들인 술탄 왈라드가 결국 샴스를 시리아에서 다시 데리고 왔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샴스와 잘랄 앗 딘의 친분관계를 너그럽게 보아줄 수 없었으며, 1247년 어느 날 밤, 샴스는 영원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살해된 것이었고 잘랄 앗 딘의 아들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코니아에 아직도 남아 있는 한 우물 근처에 그를 급히 매장했음이 최근에야 입증되었다.   잘랄 앗 딘은 이와 같은 사랑과 동경, 결별의 경험들을 겪으면서 시인으로 성장했다. 그의 신비한 시들, 약 3만 행의 시구와 상당수의 로바이야트(robā⁽ῑyāt : 4행 연구)는 그의 아들이 "그는 샴스가 자신에게서 달처럼 빛나는 것을 보았다"라고 기록한 것같이 그의 사랑의 여러 단계들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대부분의 서정시 끝부분에 자신의 필명 대신 샴스의 이름을 적어넣음으로써 사랑하는 사람들의 완벽한 동일시를 보여주었다. 〈샴스의 명시선집 Dῑvān-e Shams〉은 그의 경험들을 시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그러나 이 시들에서는 언어가 고답적인 정신세계나 모호한 사색에 빠지는 일이 결코 없었다. 강한 리듬으로 나아가는 신선한 언어는 때로 대중적인 시와 유사한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연대기 편찬자들이 이 시의 대부분이 피리나 북소리, 대장간의 망치소리 또는 자연을 즐기려고 제자들과 늘 찾아가기도 했던 메람에 있는 물레방아 소리에 의해 이끌려 들어가는 무아경에서 나온 것으로 믿는 까닭으로 여겨진다. 그는 대자연 안에서 종교의 태양이 발하는 찬란한 아름다움이 반사되고 있는 것을 알았으며, 꽃과 새들도 그의 사랑을 함께 나눈다고 느꼈다. 그는 종종 자신의 시에 맞추어 빙글빙글 도는 춤을 추기도 했다.   샴스 앗 딘이 죽은 지 몇 년 후 잘랄 앗 딘은 문맹자인 대장장이 살라흐 앗 딘 자르쿠브와 친분을 나누면서 비슷한 황홀감을 경험했다. 어느 날 코니아의 장터에 있는 살라흐 앗 딘의 가게 앞에서 망치소리를 듣고 있던 잘랄 앗 딘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가게 주인은 오랫동안 잘랄 앗 딘과 가장 친숙했고 충성스러운 제자들 중의 하나로 그의 딸은 후에 잘랄 앗 딘의 맏며느리가 되었다. 이때의 사랑이 다시 잘랄 앗 딘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했다. 살라흐 앗 딘이 죽은뒤 후삼 앗 딘 첼레비가 그의 정신적 연인이 되었다. 잘랄 앗 딘의 주요작품 〈영적인 2행 연구〉는 그의 영향을 크게 받은 작품이다. 후삼 앗 딘은 일화·우화·이야기·격언·비유 등의 글을 군데군데 넣은 긴 시들을 통해 신비주의의 가르침을 전하려고 했던 아타르와 사나이의 시작 기법을 따를 것을 그에게 권했다. 그들의 작품들은 신비주의자와 잘랄 앗 딘의 제자들 사이에서 널리 읽혀졌다. 잘랄 앗 딘은 후삼 앗 딘의 충고에 따라서 수년 동안 〈영적인 2행 연구〉의 거의 2만 6,000행에 달하는 2행 연구를 지었다. 그는 후삼 앗 딘을 데리고 다니며 거리나 욕탕에서도 자신의 시를 낭송했으며 후삼은 이를 받아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13세기 수피주의의 다양한 모습들을 상세히 소개하는 마스나위는 독자를 자유로운 영상으로 도취시켜 작가의 생애에서 어떤 특정 시기에 가졌던 생각을 이해하게 한다. 이 작품은 신성한 사랑의 경험을 반영한 것으로 잘랄 앗 딘에게는 살라흐 앗 딘과 후삼 앗 딘이 모두 모든 것을 포옹하는 빛인 샴스 앗 딘의 새로운 현현이었다. 그래서 그는 후삼 앗 딘을 디야 알 하크('진리의 빛')라고 불렀다. 아랍어로 '디야(ḍiyā⁾)는 햇빛'이라는 뜻이다.   잘랄 앗 딘은 〈영적인 2행 연구〉를 완성한 뒤 죽었고 그후 코니아 사회에서 늘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리스도교 수사뿐만 아니라 고위 관료들도 그의 동료들을 찾아다녔다. 그의 후계자는 후삼 앗 딘이었고, 후삼 앗 딘의 뒤를 이어 술탄 왈라드가 계승했으며, 그는 잘랄 앗 딘의 제자들의 느슨한 조직을 마울라위야 교단으로 통합·조직했다. 이 교단은 그들의 주요의식을 구성하는 신비적인 춤 때문에 서양에서 '빙글빙글 데르비시들'로 알려졌다. 자신의 아버지의 생애를 그린 술탄 왈라드의 시 작품은 잘랄 앗 딘의 영적인 성장을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시 이외에도 잘랄 앗 딘은 동료들이 기록한 작은 일상 담화집을 남겼다. 모음집 〈그 안에 있는 것이 그 안에 있다 Fῑhi mā fῑhi〉에는 그가 쓴 시의 주된 사상들이 재현되고 있다. 또한 여러 층의 인물들 앞으로 보낸 서간문도 있다. 때때로 서로 모순되고 상징물들을 바꾸어 곧잘 독자를 당황하게 하는 그의 사상을 체계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의 시는 신비적인 경험들을 가장 인간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천계로의 열광적인 비행으로부터 일상생활의 사실적 묘사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선호하는 사상과 감정을 독자에게 제시한다. 투르크 문화 생활에 끼친 잘랄 앗 딘의 영향은 매우 지대하다. 오늘날 코니아의 박물관과 푸르고 둥근 천장으로 된 그의 묘소는 아직도 수많은 순례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A. Schimmel 글    잘랄 앗 딘 알 루미에 대하여 루미는 1207년 9월 30일, 아프카니스탄의 발흐에서 법관과 종교학자로 이름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바하 앗 딘 왈라디는 "학자들의 술탄" 이라 칭송받는 저명한 신학자이자 수피였다. 그는 철학과 도그마를 넘어 신을 향해 깊이 들어가 곧은 열정과 용기, 장엄한 가슴으로 아들에게 깊은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루미가 태어난 때는 역사적으로 극도의 혼란기였다. 오스만 제국은 안으로는 종교적 방종과 정치적 쇠락, 밖으로는 기독교 침략자들과 칭키즈칸의 몽골 군대와 맞서고 있었다. 이런 혼란의 공포는 루미의 어린 시절에 찾아왔다.  루미가 열 두살이되던 1219년, 그는 일찍이 종교적 박해와 몽골의 침략을 예견한 아버지를 따라 고향을 떠난다. 그리고 일 년 뒤인 1220년 압바스 왕조와 사만 왕조의 수도이자 학문의 도시라는 명성을 얻었던 발흐는 칭키즈칸의 몽골 군대에 의헤 폐허가 된다.  그 뒤 루미의 가족은 10년 동안 아시아의작은 왕국들과 아라비아를 떠돌며 지낸다. 그 10년의 세월 동안 루미는 잊지 못할 만남을 갖는다. 메카를 향한 순례 도중에 루미는 이란의 니샤푸르에서 페르시아의 위대한 수피시인 아타르를 만난다. 그를 본 아타르는 "이 소년이 장차 위대한 사랑의 문을 열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루미는 아타르와의 만남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루미는 "내가 이 좁은 골목 모퉁이에 사는 동안 그는 아름다운 일곱 도시를 여행했다" 며 아타르를 회상하곤 했다. 또 아버지와 다마스쿠스를 여행하던 중에 루미는 당대 최고의 수피 철학자였던 이븐 알 아라비를 만난다. 이븐 알 아라비는 아버지의 뒤를 좇아가는 루미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신에게 영광이 있기를... 바다가 호수를 뒤따르는구나."  열일곱 살의 루미는 사마르칸드의 귀족 집안 출신인 고어 카톤과 결혼한다. 그리고 두 아들, 술탄 왈라드와 알라 앗 딘 텔레비를 낳는다. 아르메니아에서 머물던 루미의 아버지는 코니아의 술탄, 케이코바드의 초청을 받아 코니아로 간다. 1229년의 일이다. 루미라는 그의 이름도 그가 소아시아에 정착해 살게된 데 에서 유래했다. 코니아의 술탄은 루미의 아버지를 위해 마드라사라는 종교 학교를 지었고 그곳에서 루미의 아버지는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그 기간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2년 뒤, 루미의 아버지 바하 앗 딘 왈라드가 죽자, 24세의 루미가 아버지의 후계자로 대ㅣ를 잇는다.  물론 루미의 영적, 지적 교육은 그 뒤로도 지속되었다. 루미는 아버지의 제자였던 부르한 앗 딘 무하키크가 코니아에 와서 루미에게 이란에서 발달한 몇 가지 신비적인 이론들을 더 깊이 알려주는 등 잘랄 앗 딘의 정신 세계 형성에 커다란 공헌을 했주었다. 이미 수학, 물리학, 법학, 천문학과 아랍어, 페르시아어 등 꾸란에 능통해진 루미는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로 다시 여행을 떠난다. 30세에 코니아로 돌아온 루미는 아버지의 영적 은총을 지닌 명석하고, 신실하고, 섬세한 젊은 학자가 되어 있었다. 루미의 명성은 곧 널리 퍼졌다. 그의 아들 술탄 왈라드의 기록에 의하면 1224년에 이미 루미의 제자는 1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1244년 11월 30일, 37세의 루미에게위대한 분해와 파괴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리고 사랑의 영광이 그를 구해낸다. 타브리즈의 샴스를 만난 것이다. 이 날 그는 전에 시리아에서 첫 대면을 했던 떠돌이 상인인 타부리즈 출신의 수도승 샘스 앗 딘을 코니아의 길거리에서 다시 만난다. 샴스가 어떤 전통의 신비주의 교단 출신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그의 압도적인 개성이 루미에게 신의 권위와 아름다움에 관한 신비함을  가르쳐 주었다. 샘스를 처음 본 순간을 훗날 루미는 이렇게 묘사했다.  수많은 거리의 사람들 중, 오직 그만이 내 눈을 채웠다. 나는 모든 경전을 알고 있었고, 그 경전 속의 신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신이 한 사람을 통해 나에게 현현한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샴스의 스승인 루큰 앗 딘 산야비가 샴스에게 루미를 알려주었고 코니아로 가서 가르침을 베풀도록 했다고도 한다. 샴스와 루미는 그날 이후 40일 동안을 둘이서만 지낸다. 루미는 모든 것을 배웠고, 샴스는 루미와의 만남 이전에 이미 모든 것을 주었다. 그 뒤 수개월 동안 이 신비주의자는 가까이 붙어지냈다. 그러나 이미 거대한 집단의 지도자인 루미에게 이런 특별한 시간들이 측근들에게는 많은 오해와 불만을 키우는 시간이기도 했다.  결국 측근들은 1246년 2월, 샴스를 마을에서 강제 추방 한다. 루미가 그로 인해 그의 제자와 가족을 소홀히 대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루미가 비탄에 빠지자 그의 큰아들인 술탄 왈라드는 결국 샴스를 다마쿠스에서 다시 데리고 온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샴스와 루미의 특별한 관계를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1247년 어느 날 밤, 샴스는 영원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살해되었고, 루미의 아들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서야 코니아에 아직도 남아 있는 한 우물 근처에서 그의 주검이 발굴되었다.  샴스가 죽은지 몇 년 후, 루미는 오래동안 친구이자 제자로 지낸 대장장이 자르쿠브의 가게에서 황홀감을 경험한다. 어느 날 코니아의 장터에 있는 자르쿠브의 가게 앞에서 망치질 소리를 듣고 있던 루미가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때의 환희의 경험이 루미로 하여금 시를 쓰게 했다고 한다. 자르쿠브가 죽은 뒤 그의 딸은 루미의 맏며느리가 되었다. 그리고 후삼 앗 딘 첼레비가 그의 새로운 징신적 연인의 자리를  대신한다.  루미의 대표 작품인 (영적인 마스나위)는 바로 이 후삼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다. 후삼은 일화. 우화. 이야기. 격언. 비유 등의 글을 군데군데 넣은 긴 시들을 통해 신비주의의 가르침을 전하려고 했던 아타르와 사나이의 시작 기법을 따를 것을 루미에게 권했다. 루미는 후삼의 충고에 따라 수년 동안 거의 2만 6천행에 달하는 마스나위(2행 연구로 된 페르시아 문학의 독특한 형식)을 지었다.  그는 후삼을 데리고 다니며 거리나 목욕탕에서도 자신의 시를 낭송했으며, 후삼은 이를 받아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샴스를 통한 진정한 수피가 되고, 사랑과 동경, 결별의 경험들을 겪으면서 시인으로 성장한 루미는 자신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30년 동안 수많은 시와 우화를 통해 이슬람 문학의 정수를 꽃피웠다. 루미의 마스나위는 700여 가지 이야기를 중심으로 수피즘의 교의, 역사, 전통을 노래하여 오늘날 신비주의의 바이블, 페르시아의 코란 등으로 불리고 있다.  그의신비한 시들은 루미의 신성을 향한 사랑의 여러가지 단계들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신비주의적 교의와 페르시아의 전통과 역사, 그리고 일상 생활의 그로테스크한 묘사와 가벼운 익살과 풍자를 동시에 아우름으로써 성, 속을 넘나들며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상황에 따라 거침없이 드러냈다. 따라서 때로는 서로 모순되거나 상징물들이 뒤바뀌어 독자들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 이야기의 바탕에는 늘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신의 사랑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사랑을 얻음으로써 인간은 자아를 잊고 신과 하나가 되는 "파나"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음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대부분의 서정시 끝 부분에 자신의 필명 대신 샴스의 이름을 적어 넣음으로써 그 스스로 샴스의 새로운 현현이자 사랑하는 사람과의 완전한 하나됨을 꿈꾸었다.  이런 루미의 법열의 삶은(영적인 마스나위)를 완성함으로써 끝났다. 그의 후계자는 후삼 앗 딘이 되었고, 후삼의 뒤를 술탄 왈라드가 계승했다. 그리스도교 수사들과 고위 관료들조차 루미의 제자들을 찾아다니자, 왈라드는 제자들의 느슨한 조직을 마울라위 교단으로 통합, 조직했다. 마울라위야란 명칭은 루미를 가르켜 부르던 마울라나(아랍어로 우리의 지도자 라는 뜻)에서 비롯되었으며. 터키어로는 메블레비야 라고 부른다. 이 교단은 아나톨리아 전지역으로 확산되어 15세기에는 코니아와 그 주변 전역을 지배했고, 17세기에는 이스탄불까지 세력을 넓혔다.  이 교단은 의례적 기도인 지크르의 음악 반주에 맞추어 오른발로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어 서양에서는 이들을 빙글빙글 돌며 춤추는 데르비시 라고 부르기도 했다.  1925년 9월, 새로 들어선 터키의 공화정 정부는 법령에 따라 터키의 모든 수피 교단을 해체시켰다. 이에 따라 마울라위야 교단은 시리아 ㅇ알레포에 있는 몇몇 수도원으로 옮기거나 중동의 소도시에 흩어져 겨우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1954년, 터키 정부는 코니아의 마울라위야 교단의 데르비시들이 해마다 2주 동안 관광객을 위해 의례적인 춤을 출 수 있도록 특별 허가를 내렸다.  코니아에 있는 루미의 무덤과 유물은 공식적으로는 코니아 박물관에 속해 있다. 그러나 그를 기리는 순례자들에게 코니아의 박물관은 단순한 유적지가 아닌 지금까지 살아 있는 정신의 요람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지난 30년 동안 루미의 작품들은 이슬람 세계를 넘어 세계 곳곳에서 되살아나 연구되고 번역되는 등 놀라운 속도로 확장되고 있다. 특히 1990년 후반, 콜맨 바크의 번역물이 미국에서 베스트셀라가 되면서 루미에 대한 관심이 더 이상 허상이 아님을 입증했다.  이는 예술 세계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언어와 종교를 초월한 수 많은 음악가들이 루미의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부르고 있으며, 대중들은 그 음악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며 화답하고 있다. 루미가 오늘 날 시름시름 앓으며 죽어가고 있는 인류 문명을 신비의 르레상슬르 펼쳐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그가 새로운 뿌리이자, 친절한 스승, 영혼의 치료자로 다시 살아나, 더 늦기 전에 우리 자신과 우리의 행성을 파괴하는 행탤를 멈추고 새로운 깨달음의 비전으로 옮아가도록 우리를 돕는 것이다.  이슬람에서 이단시하는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교의 잘랄 앗 딘 루미. 출처: 사막을 여행하는 물고기      나는 다른 대륙에서 온 새 / 잘랄 앗딘 알 루미           하루 종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밤이 되어 입을 뗍니다.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의 영혼은 다른 곳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 생의 끝을 맞고 싶습니다.   이 취기는 다른 주막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곳 언저리로 다시 돌아가면 나는 온전히 취할 것입니다. 나는 다른 대륙에서 온 새. 그런데 이 새장에 앉아…… 다시 날아오를 그날이 오고 있습니다. 지금 내 귓속에서 나의 목소리를 듣는 이는 누구인가요? 내 입을 통해 말하는 이는 누구인가요? 내 눈을 통해 밖을 보는 이는 누구인가요? 영혼은 무엇인가요?   질문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만일 그 해답을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다면, 나는 그 취기로 이 감옥을 부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이곳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누가 나를 여기에 데려다 놓았건 그가 나를 다시 집에 데려다 주어야 합니다.   이런 말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문득문득 이어지는 생각들…… 이 질문들 너머로, 깊은 고요와 침묵에 들어섭니다.   * 루미 시에는 제목이 따로 없다. 번역된 그의 시 제목들은 대체로 역자가 임의로 붙인 제목이다.     [그안에 있는 것이 그안에 있다] 최준서 옮김, 하늘아래, 2003     “봄의 과수원으로 오세요/ 꽃과 촛불과 술이 있어요// 당신이 안 오신다면,/ 이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당신이 오신다면,/ 또한 이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후배 시인이 보내는 메일 하단에 늘 따라오는 문장이다. 읽을 때마다 ‘그 당신이 바로 당신이예요!’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아 훈훈해지곤 한다. 이 문장이 13세기 페르시아 시인 잘랄 앗딘 알 루미(Jalāl ad-Dīn ar-Rūmi)의 시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루미’라는 이름은 내게 늘 ‘루미나리에(Luminarie, 빛의 예술, 빛의 조각)’나 ‘루비’(보석)라는 단어와 겹쳐진다.루미가 이슬람 마울라위 수피 교단의 창시자이자 신과 시와 사랑의 광채 속에서 살다간 몇 안 되는 신비주의 철학자이며, 나아가 영적인 메시지를 시의 형태로 전했던 우주적 시인이기 때문이다. 끝이 없는 사랑을 사랑함으로써 신 혹은 우주와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루미 시의 도달점이다.       터키 메블라나 박물관의 고서에 있는 루미 이미지.   루미는 아프카니스탄의 발흐에서 태어나 아시아와 아라비아를 떠돌다 열두 살 이후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가 공존하는 실크로드의 서쪽 끝(터키의 중부) 코니아에 정착한다. 37세때 방랑자이자 춤추는 수피 신비주의자 샴스를 만난다. “내가 전에 신이라고 생각했던 그것, 오늘 나는 한 사람 속에서 만나네”라는 시구절은, 샴스와 눈이 마주치자 기절해 버렸다는 루미의 영적인 파탈의 순간을 담고 있다. 샴스가 죽고 난 후 대장장이 자르쿠브가 샴스의 자리를 대신한다. 대장간 앞에서 자르쿠브의 망치질 소리를 듣던 루미가 갑자기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방랑 춤꾼과 대장장이, 이들과의 만남에서 비롯된 신비와 환희와 사랑의 경험이 루미로 하여금 시를 쓰게 했다. 전통의 혹은 정통의 신학자, 학자, 법률가로서의 삶을 뒤로한 채 “그는 시인이 되었고,음악을 듣기 시작했으며, 노래를 불렀고, 땅을 빙빙 돌았다, 시간에 시간을 거듭하여”   “내가 저기가 아니라 여기에 있다는 것이 무섭고 놀랍다. 나는 저기가 아니라 여기에 있을 이유도 없고, 다른 때가 아닌 지금 있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여기에 갖다 놓았는가?”. 17세기 파스칼의 물음이다. 그보다 일찍, 루미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다른 곳’, ‘다른 대륙’, ‘다른 주막’에서 와서 그곳으로 간다고. 그곳은 지금-여기를 넘어선 세계라고. 루미는 늘 이 ‘넘어선 세계’를 노래했다. 지금-여기의 상대적인 몸과 느낌을 가지고 저기-너머의 초월적 삶을 살라고. 모든 것은 내 안에 있고, 나는 모든 것의 밖에 있다고. 내 조그마한 몸 안에 일곱 개의 태양이 있고 오대양 육대주가 있으며, 한없는 창공이 있고 금은보화가 있다고.   누가 우리를 여기에 가져다 놓은 것일까?라는 파스칼의 물음에 일찍이 루미는 또이렇게 설의적으로 답했다. 바로 ‘당신’이라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내가 당신이 거하는 곳으로부터 왔기 때문이고, 내가 ‘당신’을 사랑할 때 나는 당신의 의지대로 행한다. 나는 내 안에 깃든 당신의 귀로 나의 목소리를 듣고, 당신의 입으로 나의 말을 하고, 당신의 눈으로 나의 밖을 본다. 내가 당신을 사랑할 때 나는 당신의 귀이고 눈이고 혀이고 손이다. 나는 당신 안에 존재하며 당신에 의해살아간다. 그러므로 나는 무한하고 영원한 시공간을 넘어선 그것, 절대 존재의 신 안에 존재한다. 존재의 이 같은 무한 의식, 우주 의식이야말로 존재의 사랑 혹은 존재의 엑스터시가 아닐까.   “이 취기는 다른 주막에서 시작되었”고, “그곳 언저리로 다시 돌아가면 온전히 취할 것”이라는 구절은 이 시의 백미다. 우리가 다른 세계를 꿈꾸는 것은 지금-여기의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며, ‘다른 곳’의 저기-너머의 나를 영원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여기라는 이 새장에서 만났던 것처럼 저기-너머라는 다른 대륙에서도 만날 수 있다면, 이 새장에서의 삶은 한여름 밤의 꿈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가 이곳의 주막에서 취했던 것처럼 다른 주막의 발아래 하늘을 열어 놓을 수 있다면, 이 삶은 한 차례의 술자리에 불과할 것이다. 오직 당신을 ‘못 만난’ 사람만이, 오직 이 주막에서 ‘취하지 않은’ 새만이 이 주막과 이 새장을 실재의 전부라고 생각할 뿐!   실크로드의 서쪽 끝 터키에 가면 어쩐지 ‘나 아닌 나’, ‘내가 아니어도 되는 나’,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오르한 파무크라는 다른 작가가 있고 이슬람이라는 다른 종교가 있고, 루미라는 다른 시인이 있고 수피댄스라는 다른 춤이 있기 때문이다. 오른팔은 하늘을 향하고 왼팔은 땅을 향해 뻗은 채 시계 방향으로 빙글빙글 돌다 보면, 문득 다른 대륙에서 온 다른 나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는 일어선다/ 내 속에 있는 하나의 ‘나’가 수백 명의‘나’가 된다/ 그들이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말한다/ 말도 안 돼…… 내가 나를 빙글빙글 돈다”에서처럼 ‘다른 대륙’과 ‘당신’을 향한 whirling dance를! 죽음과 영원을 향한 내 영혼의 춤을!     잘랄 앗딘 무함마드 루미 (1207.9.30~1273.12.17) 이란의 신비주의 시인으로 페르시아 문학의 신비파를 대표한다. 아프가니스탄 발흐에서 신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학자인 아버지와 함께 바그다드, 메카 등지를 떠돌며 순례하다 지금의 터키인 코니아에 정착하여, 종교인이자 학자로서 이슬람 신비주의 사상을 펼치는 한편 신과의 사랑의 기쁨을 노래한 시를 지어 오늘날 페르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주요 저서로 [타브리즈의 태양 시집], [정신적인 마트나비]가 있다. 특히 [정신적인 마트나비]는 전 6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대서사시로 700여 가지 이야기를 중심으로 수피즘(Súfism:금욕, 신비주의적 경향이 있는 회교 일파의 교의)의 교의, 역사, 전통을 노래한 것으로 ‘페르시아어의 코란’ 혹은 ‘신비주의의 바이블’로 불린다.     정끝별 | 시인 1988년 에 시가, 1994년  신춘 문예에 평론이 당선된 후 시 쓰기와 평론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 [흰 책], [삼천갑자 복사빛], [와락], 시론·평론집 [패러디 시학],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 [오룩의 노래], [파이의 시학] 등이 있다.         13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루미의 시 (손님=여인숙) 이 존재, 인간은 여인숙이라, 아침마다 새로운 손님이 당도한다 한 번은 기쁨, 한 번은 좌절, 한 번은 야비함 거기에 약간의 찰나적 깨달음이 뜻밖의 손님처럼 찾아온다. 그들을 맞아 즐거이 모시라 그것이 그대의 집안을 장롱 하나 남김없이 휩쓸어가버리는 한 무리의 슬픔일지라도. 한 분 한 분을 정성껏 모시라. 그 손님은 뭔가 새로운 기쁨을 주기 위해 그대 내면을 비워주려는 것인지도 모르는 것. 암울한 생각, 부끄러움, 울분, 이 모든 것을 웃음으로 맞아 안으로 모셔들이라. 그 누가 찾아오시든 감사하라. 모두가 그대를 인도하러 저 너머에서 오신 분들이리니.     루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마울라나 잘랄 앗딘 무함마드 루미(페르시아어: مَولانَا جَلال الدِین مُحَمَّد رُومِی, 1207년 ~ 1273년)는 페르시아의 신비주의시인이자 이슬람 법학자이다. 발흐에서 출생하여 소아시아(룸)에서 생애의 태반을 보냈기 때문에 루미라는 호(號)로 불렸다. 유년기에 몽고족의 내습을 우려한 부친에게 이끌려 서남아시아를 편력한 후 룸 셀주크의 도읍 코니아에 정주하였다. 부친이 사망한 후에 신비주의의 수업에 진력하여 한 파(派)를 창설하였다. 37세경부터 시를 짓기 시작하여 불후의 명작 《정신적 마스나비》를 완성하였다. 이 전 6권으로 된 방대한 신비주의 시집은 '페르시아어의 코란'이라고도 평가되며 그의 사상적 성전(聖典)이라 하겠다. 몇 가지의 비유·우화·전설의 형식으로 읊은 시로 외면상은 이야기시와 같으나 그 배후에는 절대적인 신의 사랑과 그것을 구하는 인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 외에 감미로운 서정시 〈샴세 타브리즈 시집〉, 산문작품 〈강화집〉(講話集) 〈서간집〉이 있다. 그는 중세의 문학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1933    러시아 시인 - 브류소프 댓글:  조회:3396  추천:0  2016-12-08
  출생일 1873. 12. 13(구력 12. 1), 모스크바 사망일 1924. 10. 9, 모스크바 국적 러시아 요약 러시아의 시인·소설가·번역문학가·수필가. Bryusov는 Briusov라고도 씀.   선구적으로 러시아 모더니즘 문학을 주창했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자유주의 교육을 받았으며 1890년대초에 프랑스 상징주의 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비평가들의 인정을 받은 때는 러시아 상징주의자들의 시와 폴 베를렌, 아르튀르 랭보, 스테판 말라르메 같은 프랑스 시인의 작품 번역을 실은 시선집 〈러시아 상징주의자들 Russkie simvolisty〉(2부 구성, 1894~95)을 A.A.랑과 함께 펴내면서부터였다. 이 책은 러시아 모더니즘 운동의 중요한 이정표였으며 그는 1904년 상징주의 평론지 〈베시 Vesy〉의 편집장을 맡음으로써 결국 러시아 상징주의의 지도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1895~1921년에 10권의 자작 시집을 출간했는데, 그 가운데 〈제3의 경야(竟夜) Tretia vigilia〉(1900)·〈도시와 세계로 Urbi et orbi〉(1903)·〈스테파노스 Stephanos〉(1906) 등이 가장 특기할 만하다. 그는 시인으로서 역사와 신화를 신비적이고 에로틱하게 다루는 뛰어난 기교와 박식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고도로 장식적이며 지적인 그의 시는 일종의 냉정함·초연함·인위성을 띠고 있으며 후기 작품에서는 이 성격이 더욱 두드러진다. 산문으로는 장편소설 〈불의 천사 Ognenny angel〉(1908)·〈승리의 제단 Altar pobedy〉(1913) 등이 있다. 1910년에 상징주의 운동과 결별하고 혁명 후에는 문학을 강의했으며 죽을 때까지 강의와 출판일을 계속했다. 그는 번역문학가이자 비평가로서, 그리고 수필가로서 러시아 근대 시의 위상을 고양시키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1932    러시아 시인 - 벨리 댓글:  조회:4394  추천:0  2016-12-08
  출생일 1880. 10. 26(구력 10. 14), 모스크바 사망일 1934. 1. 7, 모스크바 국적 러시아 요약 러시아 상징주의를 주도한 이론가·시인. 본명은 Boris Nikolayevich Bugayev(Bugaev).   러시아 상징주의는 서유럽 문학·예술의 모더니즘 운동과 러시아 고유의 동방정교회 영성(靈性)에서 유래한 문학운동으로, 인생과 자연에서 발산되는 알레고리를 통해 신비하고 추상적인 이상을 표현한 문학 유파이다. 수학교수의 아들로 학구적인 환경에서 성장했다. 모스크바의 문학 엘리트들과 가깝게 지냈으며 특히 19세기의 신비주의 철학자인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의 세계의 목적과 최종적 해결에 관한 종말론 사상을 흡수했다. 이상주의를 통해 가혹한 현실에서 사변적 사상으로 눈을 돌린 그는 1901년 최초의 주요작품인 〈북방 교향곡 Severnaya simfoniya〉(1902)을 완성했다. 이 산문시는 시, 음악,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회화까지도 결합하려는 노력을 반영했다. 이같은 새로운 문학 형식을 띤 또다른 3편의 '교향곡'을 잇달아 발표했다. 다른 시에서도 그는 혁신적 문체를 계속 개발했으며 불규칙한 운율('절름발이 韻脚')을 반복 사용해 러시아 시 형식의 혁명을 시작했는데 문학 동료인 알렉산드르 블로크가 이 노력의 결실을 거두었다. 첫 3권의 시집 〈담청색 속의 황금 Zoloto v lazuri〉(1904)·〈재 Pepel〉(1909)·〈납골당 Urna〉(1909)은 블로크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시 형식을 빌린 일기이다. 1909년에 첫번째 장편소설 〈은빛 비둘기 Serebryany golub〉(1910)를 완성했다. 가장 유명한 소설 〈페테르부르크 Peterburg〉(1913~14년에 걸쳐 연속 출판됨)는 초기의 '교향곡'을 바로크식으로 연장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1913년에 오스트리아 사회철학자 루돌프 슈타이너의 신봉자가 되어 스위스 바젤에 있는 슈타이너의 인지학자(人智學者) 집단촌에 들어갔다. 이들은 불교의 명상적 종교 체험에서 비롯된 신비주의적 신앙 체계를 신봉하는 모임을 가졌다. 그는 스위스에 머무르는 동안 제임스 조이스의 문체를 연상시키는 짧은 자전소설 〈코티크 레타예프 Kotik Letayev〉(1922)를 쓰기 시작했다. 1916년 모스크바로 돌아왔으며 다른 상징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을 열렬히 환영했다. 짤막한 시 〈그리스도가 부활했도다 Khristos voskrese〉(1918)는 러시아 사회주의의 메시아적 약속을 찬양한 작품이다. 그러나 블로크가 죽고 소비에트가 문학 동료들을 처형함에 따라 환멸을 느껴 해외로 떠났다가 1923년에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가 발전시킨 새로운 창작 기교는 훗날 러시아 시와 산문 양식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931    러시아 시대의 비극적 테너 시인 - 알렉산드르 블로크 댓글:  조회:4801  추천:0  2016-12-08
알렉산드르 블로크(러시아어: Александр Блок, 1880-1921)는 러시아의 시인이다. 생애[편집] 알렉산드르 블로크는 1880년 11월 16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생했다. 그는 러시아 문화 전통이 살아 숨 쉬는 귀족 인텔리겐치아 집안 출신이다. 부친과 조부는 대학 교수였고, 외조부는 유명한 생물학자이자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총장을 역임한 알렉세이 베케토프(А. Н. Бекетов)다. 블로크 역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을 졸업했다. 시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나기 전 사실상 결별했다. 블로크는 외가에서 자라며, 인문적인 가풍 속에서 일찍이 시에 눈을 떴다. 블로크는 1903년 잡지 을 통해 시인이자 비평가로서 등단했다. 1904년 출간된 첫 시집 ≪아름다운 여인에 관한 시(Стихи о Прекрасной Даме)≫는 러시아 상징주의 시인들에 의해 열렬히 환영받았다. 그러나 이 무렵 블로크는 이미 초기 시의 이상과 서서히 결별하고 있었다. 첫 시집 출간 이후 1905∼1910년에 이르는 시기에 블로크의 창작 활동은 절정에 달했다. 시인은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삶의 열기와 격동의 시적 체험을 연이어 상자된 네 권의 시집에 담았다. 블로크는 또한 1908년 ≪서정적 희곡집(Лирические драмы)≫을 출간했다. 블로크는 이후 두 편의 드라마((1908)와 (1913)를 더 집필했다. 블로크의 창작에 있어 1910년대는 새로운 정신적 토대의 모색과 시의 운명의 본질적인 전환과 더불어 찾아왔다. 블로크는 1911∼1912년 다섯 권의 시집을 세 권의 ≪시 모음집(Собрание стихотворений)≫으로 편찬하고자 심혈을 기울인다. 이때부터 블로크의 시는 독자의 의식 속에서 단일한 ‘서정적 3부작’으로서, ‘길의 신화(миф о пути)’를 창조하는 독특한 ‘시 소설’로서 존재하기 시작한다. ‘3부작’의 이상은 시인의 삶과 창작의 토대로 자리했고, 이후의 두 판본(1916년과 1918∼1921년)에서 변함없이 견지되었다. 생의 마지막 해인 1921년 블로크는 새로운 판본의 준비에 착수했으나 1권을 마무리하는 데 그쳤다. 편집인으로서 블로크가 펴낸 ≪아폴론 그리고리예프 시집(Стихотворения Аполлона Григорьева)≫(1916)은 19세기의 잊혀진 ‘마지막 낭만주의 시인’을 부활시켰다. 1915∼1916년에 이르러 블로크의 창작 활동은 현저하게 쇠퇴한다. 자신의 세대와 러시아 인텔리겐치아 전체의 운명을 그리고자 블로크가 1914년 집필하기 시작한 서사시 은 미완으로 남았다. 1차 대전의 암운과 징집은 시인에게 정신적 공동화를 안겼다. 2월 혁명과 더불어 페테르부르크(당시에는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온 블로크는 부르주아 임시정부의 조사위원회에 관여했다. 1917년 단 한 편의 시도 쓸 수 없었던 블로크는 10월 혁명 이후 ‘혁명이 지닌 정화의 힘’에 대한 믿음으로 고양되어 정신적 소생을 맞이한다. 1918년 1월 마지막으로 찾아온 짧고 격렬한 창조적 열기 속에서 블로크는 그를 불멸의 존재로 만든 서사시 과 시 , 그리고 에세이 을 썼다. 마지막 불꽃은 이내 시들었다. 1921년에 이르러 시를 쓸 수 없는 시간이 다시 찾아왔다. 블로크는 창작을 대신하여 혁명정부 산하의 문화 기구들에서 일하며 문화 보존에 전력을 기울이는 한편, 문화철학 강연에 몰두한다. 애초에 블로크의 문화 계몽 활동은 민중에 대한 인텔리겐치아의 책임 의식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정화의 불길로서의 혁명’의 이상과 전체주의적인 소비에트 관료 정권의 실상 사이의 괴리에 대한 뼈아픈 인식은 블로크를 깊은 환멸과 새로운 정신적 지주의 추구로 이끌었다. 말년의 그의 에세이와 수기를 관류하는 ‘문화의 카타콤’의 모티프가 그렇게 대두된다. 시인이 감당할 수 없었던 말년의 우울은 심장병을 동반한 정신착란으로 심화되었다. 1921년 8월 7일 시인은 영면했다. 평가[편집] 20세기 러시아의 또 다른 민족 시인인 안나 아흐마토바(Анна Ахматова)는 ‘시대의 비극적 테너’라는 말로 시대의 표상으로서 블로크가 지닌 의의를 갈파했다. 아흐마토바의 말을 빌리자면, “블로크는 비단 20세기 첫 사반세기의 위대한 시인일 뿐 아니라, 시대적 인간, 가장 선명한 시대의 대변자다”. 블로크의 시적 체험이 지닌 진정성과 날카로움은 수많은 독자를 확보하며 20세기 러시아 시와 러시아인의 삶에 폭넓은 문학적·정신적 반향을 낳았다. 그의 시는 러시아 예술을 관류해 온 시민적 애국정신과 윤리적 절대주의의 생생한 증거다. 블로크는 자신의 생의 의미를 항상 ‘길’의 형상 속에서 모색했다. 그에게 창작은 시인이자 한 인간으로서 그가 걸어온 길의 반영이다. 바로 그래서 그는 상이한 시기에 쓴 시와 서사시들을 독자적인 정신적·예술적 가치를 지닌 독립적인 작품들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에게 그의 모든 작품은 단일한 예술적 총체였다. 이와 같은 시인의 예술적 이상의 구현이 그가 자신의 시 전체에 부여한 큰 문맥이자 주제인 ‘강림의 3부작(трилогия вочеловечения)’이다. 개별적인 시들은 저마다 장(사이클)의 형성을 위해 필수적이다. 여러 장들이 모여 책을 이룬다. 각 권은 3부작의 부분이다. 3부작 전체를 나는 ‘시 소설(роман в стихах)’이라 부를 수 있다. 이 ‘시 소설’은 시인의 운명의 이정표들이 투영된 독특한 서정적 일기다. ===========================   출생일 1880. 11. 28(구력 11. 16),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망일 1921. 8. 7,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적 러시아 요약 러시아 상징주의의 대표적 시인·극작가.   러시아 상징주의는 모더니즘 문학운동의 한 부분으로 유럽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나 러시아 고유의 동방정교회의 종교적·신비주의적 요소가 짙게 배어 있다. 아버지는 법학교수였으며 어머니는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 총장의 딸로 교양이 높은 여자였다. 지성적이고 아늑한 환경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가 이혼하자 3세 때부터 귀족가문인 외조부모의 영지에서 예술적으로 세련된 분위기에서 자라났다. 1903년 저명한 화학자 멘델레예프의 딸 류보프 멘델레예바와 결혼했다. 5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그로서는 시적 표현이란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며 그의 초기 시들은 결혼이 가져다준 정신적 충족감과 고양된 기분을 전달해주고 있다. 19세기초의 시인 알렉산드르 푸슈킨의 낭만주의적 시와 신비주의자이며 시인인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1853~1900)의 계시철학에 감화를 받고 창조적·혁신적인 리듬을 사용해 그들의 관념을 독창적인 시적 표현으로 발전시켰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소리였으며 따라서 음악성이야말로 그의 시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첫번째 시모음인 연작시 〈아름다운 부인에 관한 시 Stikhi o prekrasnoy dame〉(1904)는 그의 청년기를 사로잡은 플라톤적 관념론을 대변해주는 작품으로, 신적 지혜(그리스어로는 소피아)를 여성적인 세계영혼(영원한 여성성)으로 의인화시킨다. 그러나 1904년 내세의 실현에 대한 낭만적 기대는 그를 둘러싼 인간의 고통에 대한 관심으로 변형되었으며 관능적인 체험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고자 광적으로 자신을 내맡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는 후속 시집인 〈도시 Gorod〉(1904~08)·〈백설의 가면 Snezhnaya Maska〉(1907) 등에서 종교적 주제들을 지저분한 도시 문화의 이미지로 승화시키고 첫번째 작품의 신비한 여인을 '미지의 창녀'로 변모시킴으로써 전에 그를 숭배했던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이른바 부르주아 상징주의자들의 메마른 지성주의를 거부하고 러시아 국민을 구원하기 위한 근본적인 변화로서 볼셰비키 운동을 포용함으로써 자신의 비극적 딜레마의 최종 단계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는 이중의 배신감을 느꼈다. 우선 그의 문학 동료들이 그를 저버렸을 뿐 아니라 볼셰비키가 그의 작품과 미학적 포부를 비웃었던 것이다. 이로 인한 소외는 그를 우울한 자포자기 상태로 몰아넣었으며 이때문에 때 이른 죽음을 맞았다. 그의 후기 시들은 희망과 좌절이 엇갈리는 분위기를 표현한다. 미완성 이야기체 시 〈천벌 Vozmezdiye〉(1910~21)은 새 정권에 대한 환멸을 드러내주는 반면 〈조국 Rodina〉(1907~16)·〈북방인 Skify〉(1918) 등은 새로운 세계질서에서 러시아가 맡은 메시아적 역할을 찬양한다. 수사적 송시인 〈북방인〉은 그의 대표적인 극시로 꼽히며 집시 민요에 바탕을 둔 경쾌한 리듬과 불규칙적인 박자, 정열과 우수의 급전 등이 특징이다. 찬미와 위협의 어조가 교차하는 이 작품은 서유럽에 대한 그의 슬라브주의적 사랑과 증오를 표현하며 유럽이 러시아, 즉 미래의 물결에 간섭할 경우 러시아와 아시아의 거대세력에 의해 응징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쓴 불가해한 발라드 〈열둘 Dvenadtsat〉(1918)이다. 이 작품은 인상주의 시의 백미로서 분위기를 창조하는 소리, 다음향적 리듬, 거칠고 속어 같은 언어로 유명하다. 1917~18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봉기 때 혹독한 눈보라 속을 뚫고 행진하는 12명의 잔인한 적군(赤軍)병사들을 묘사하는 이 시에서 약탈과 살인을 자행하는 그들의 선두에 선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비평가들은 〈열둘〉을 모호한 작품이라 평가했지만 그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꾸준히 읽혔다. 그는 러시아 문학에서 혁명 이후의 시대를 연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 블로크 시선 [ Избранные стихотворения Александра Блока ]   저자 알렉산드르 블로크(Александр Блок, 1880-1921) 국가 러시아 분야 시 해설자 최종술(상명대학교 러시아어문학과 교수) 현대 러시아인의 삶의 운명을 결정했던 변혁의 폭풍우가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몰아쳤다. 이 시대의 혼란스러운 삶의 정신적ㆍ정서적 체험이 지닌 폭넓은 스펙트럼을 극도의 진정성과 깊이로 표현한 시인이 있었다. 동시대인의 격앙된 의식의 대변자로 시대정신을 구현했던 그는 생전에 이미 위대한 민족 시인의 반열에 올랐다. 이 시인은 바로 러시아 상징주의 시의 대변자인 알렉산드르 블로크(Александр А. Блок, 1880∼1921)다. 블로크는 서정시가 지닌 문화적 가치와 예술적 힘에 있어 가장 위대한 20세기 초 러시아의 시인이다. 20세기 러시아의 또 다른 민족 시인인 안나 아흐마토바(Анна Ахматова)는 ‘시대의 비극적 테너’라는 말로 시대의 표상으로서 블로크가 지닌 의의를 갈파했다. 아흐마토바의 말을 빌리자면, “블로크는 비단 20세기 첫 사반세기의 위대한 시인일 뿐 아니라, 시대적 인간, 가장 선명한 시대의 대변자다”. 블로크의 시적 체험이 지닌 진정성과 날카로움은 수많은 독자를 확보하며 20세기 러시아 시와 러시아인의 삶에 폭넓은 문학적ㆍ정신적 반향을 낳았다. 그의 시는 러시아 예술을 관류해 온 시민적 애국정신과 윤리적 절대주의의 생생한 증거다. 블로크는 자신의 생의 의미를 항상 ‘길’의 형상 속에서 모색했다. 그에게 창작은 시인이자 한 인간으로서 그가 걸어온 길의 반영이다. 바로 그래서 그는 상이한 시기에 쓴 시와 서사시들을 독자적인 정신적ㆍ예술적 가치를 지닌 독립적인 작품들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에게 그의 모든 작품은 단일한 예술적 총체였다. 이와 같은 시인의 예술적 이상의 구현이 그가 자신의 시 전체에 부여한 큰 문맥이자 주제인 ‘강림의 3부작(трилогия вочеловечения)’이다. ‘강림의 3부작’의 이상은 시인이 본격적인 창작이 시작된 1898년 이래 약 10년에 걸친 전업 시인으로서의 삶을 결산하며 처음으로 ≪시집(Собрание стихотворений)≫ 출판을 기획하던 1910∼1911년에 태동했다. 이때 블로크는 처음으로 지금까지 자신이 쓴 시들을 3부작(세 권의 책) 구조 속에 배열한다. 그리고 3부작의 구조를 통해 실현하고자 한 예술적 이념을 작가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직접 밝힌다. 개별적인 시들은 저마다 장(사이클)의 형성을 위해 필수적이다. 여러 장들이 모여 책을 이룬다. 각 권은 3부작의 부분이다. 3부작 전체를 나는 ‘시 소설(роман в стихах)’이라 부를 수 있다. 이 ‘시 소설’은 시인의 운명의 이정표들이 투영된 독특한 서정적 일기다. 블로크는 나아가 그와 긴밀한 정신적 교감을 나누고 있던 상징주의 시파의 문우 안드레이 벨리(Андрей Белый)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시 소설’이 반영하고 있는 ‘시인의 운명의 이정표들’, 곧 의식의 삶의 각 단계가 지닌 구체적인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며 ‘강림의 3부작’의 이상을 피력한다. …나의 길은 그러하다. …나는 확신한다. 이 길이 의무임을, 모든 시가 모여 ‘강림의 3부작’을 이룸을. 너무나도 선명한 빛의 순간으로부터 불가피한 늪지대의 삼림을 지나, 절망을 향한, 저주를 향한, ‘보복’을 향한… 그리고 ‘사회적’ 인간의 탄생을 향한, 세상의 얼굴을 담대하게 바라보는, 영혼의 부분적인 상실을 대가로 치르고 형식을 연구하고 ‘선’과 ‘악’의 윤곽을 들여다볼 권리를 획득한 예술가의 탄생을 향한 길. 블로크는 이 구절이 지닌 명확한 의미를 어디에서도 해명한 적이 없다. 하지만 상징주의 시인 블로크가 다의적인 형상들 속에 구현한 정신적 삶의 단계들의 윤곽은 그의 시 사이클들을 읽고 각 권(책)의 개념, 그 형상체계와 상징체계, 그리고 (번역을 통해서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그 음악을 이해함으로써 어느 정도 포착될 수 있다. ‘강림의 3부작’은 세상과 삶에 대한 이해를 향해 가는 길이다. 그것은 이성적인 학문적 이해가 아니라, 고행과 환멸, 의심과 고통을 거쳐 가는 길이다. ‘강림’이라는 말 속에는 성서적인 의미가 자리한다. ‘강림’은 인간의 모습으로 육화하여 인류를 위해 죽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의 지상의 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행과 고통을 통해 시인은 ‘세상의 얼굴을 담대히 바라보는 정직한 예술가’가 되고, 세대의 얼굴이 되어 말할 권리를 획득한다. 블로크의 창작의 길은 ‘나’로부터 ‘우리’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다. ‘강림의 3부작’ 1부(권)의 시들에서 그는 온전히 자기 내면에 침잠해 있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형상들이 시인의 영혼을 물결치게 한다. 그러나 2부(권)의 정열의 어두운 회오리와 3부(권)의 ‘무서운 세상’을 거치며, 시인은 담대하게 말한다. “…그리고 이미 더 이상 내가 아닌 우리의 세상과의 결속이 확립되었음을.” 시인은 구시대의 인텔리겐치아로서의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대가로 세대의 이름으로 말할 권리를 획득한다. “우리는 러시아의 무서운 시절의 자식들….” 블로크의 3부작의 제1권에는 시인이 1898∼1904년 사이에 쓴 시들이 창작 연대에 따른 순서로 배열된 세 사이클 <빛이 있기 전 (Ante Lucem)>, <아름다운 여인에 관한 시(Стихи о Прекрасной Даме)>, <기로(Распутья)>에 선별되어 실려 있다. 1권에 실린 첫 시들은 첫 사이클의 제목이 상징하는 바와 같이 ‘빛이 있기 전’의 정신적 상태를 구현한다. 뭔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시인의 의식을 지배한다. 시인은 다가올 파국과 변화에 대한 예감 속에서 살며 정신적 토대를 갈구한다. 묵시록적인 정신적 경향 속의 미증유의 세계에 대한 예감은 세계의 비밀과의 신비로운 접촉의 느낌과 함께한다. 1901년, 블로크는 러시아 상징주의자들의 직접적인 정신적 선구자인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В. С. Соловьёв)의 시와 철학을 본격적으로 접한다. 솔로비요프의 영향 속에서 지상의 현실 속에 이상의 구현에 대한 그의 생각이, 이상적인 ‘저 세계’와 ‘물리적 세계’의 접촉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강화된다. 시인은 신플라톤주의와 주콥스키(В. А. Жуковский)와 페트(А. А. Фет) 등 러시아 낭만주의 시인들의 서정시에 구현된 낭만주의의 ‘이원론적 세계 지각’으로부터 발원하는 진정한 존재의 세계로서의 ‘저 세계’에 대한 믿음을 견지한다. 이와 같은 세계 지각의 이중성이 블로크 상징주의 시의 토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세계 변혁에 대한 기대는 시인의 의식 속에서 ‘영원한 여성성(Вечная Женственность)’의 지상으로의 하강과 긴밀히 연관된다. 이 비밀스러운 여인의 출현에는 그 징표들-상징들이 선행한다. 그것은 오직 선택된 자들의 영적 시선을 통해서만 포착 가능하다. 시인은 독특한 엑스터시의 상태 속에서 ‘영원한 여성성’의 현현을 예고하는 상징과 환유들을 포착하고자 갈구한다. <아름다운 여인에 관한 시>의 시기에 블로크는 이미 지상에 영원한 여성성이 구현된 형상이 있다는 믿음으로 살았다. 이와 같은 정신 구조 속에서 시인은 자신과 자신의 연인이자 미래의 아내인 류보피 멘델레예바(Л. Д. Менделеева) 사이의 사랑을 고상한 신비주의적 사랑의 코드 속에서 이해한다. 시인은 지고지순한 여인에게 순결한 기사도적 사랑을 바친다. 시인에게 그녀와의 개인적인 사랑은 세계사적이고 우주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다. 그는 내밀한 사랑을 세계 변혁의 우주적 신비극으로 받아들인다. ‘영원한 여성성’의 이상 속에서 전기적 사실과 세계사적ㆍ우주적 규모의 사실 사이의 상응이 확립된다. 이 시기 자신의 의식의 상태를 두고 블로크가 ‘너무도 선명한 빛에 의해 눈멀었음’을 고백한 것은 구체적인 현실을 이해하지 못한 젊은 시절의 추상적인 정신 상태에 대한 반성적 술회다. 블로크는 영원한 조화의 이상을 변함없이 소중히 간직하며 정신적 추구의 방향을 변화시킨다. 그는 곧 영원의 꿈에서 깨어나 서서히 현실에 눈뜨기 시작한다. 사이클 <기로>는 이와 같은 변화의 표현이다. 2권에는 1904∼1908년 사이에 창작된 시들이 여섯 사이클 <대지의 기포(Пузыри земли)>, <여러 시(Разные стихотворения)>, <도시(Город)>, <눈 가면(Снежная маска)>, <파이나(Фаина)>, <자유로운 생각(Вольные мысли)>에 분산되어 수록되어 있다. 블로크는 <서시>로 2권을 열고 있으며, 여섯 사이클 외에 서정적 서사시 <밤 제비꽃(Ночная Фиалка)>을 2권에 수록했다. 2권에 실린 시들은 1권의 문맥 속에서 받아들일 때 복잡하고 기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1권의 서정적 주인공이 ‘순결한 어린아이’, ‘현명한 사제’, 성스러운 존재인 연인에게 헌신하기 위해 세속적 가치와 절연한 ‘기사도적 인간’이라면, 2권의 서정적 주인공은 ‘집 없는 곤궁한 부랑아’, ‘생의 무게에 신음하는 소시민’, ‘한밤 선술집의 취객’이다. 새로운 모티프와 형상들이 출현하며, 세계와 연인의 형상의 변모에 상응해서 사랑의 모습이 근본적으로 변한다. 2권은 파국과 비극에 대한 예감과 파괴적이고 파멸적인 정열로 점철되어 있다. 1905년 1차 혁명기의 사회상은 시인의 세계 지각의 변모와 시세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한 직접적인 계기다. 시인은 젊은 시절의 추상적인 염원을 대신하는 다른 지상의 가치를 추구한다. 모순적인 현실의 체험에 시인의 의식이 열리고, 단일한 조화의 원칙의 구현인 ‘영원한 여성성’ 대신 모순적인 삶의 체험이 시에 침투한다. 시인은 혼란스러운 삶의 체험 속에서 순간적인 조화의 체험에 몰입한다. 순간적인 절대의 체험의 엑스터시는 죄의식과 절망의 느낌과 함께한다. 이 시기 시인의 삶, 대표적으로 여배우 나탈리야 볼로호바(Н. Н. Волохова)와의 사랑은 다시 상징주의적인 상응의 코드 속에서 시적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것은 개인의 삶의 모순과 우주적 삶의 모순의 구현이다. ‘강림의 3부작’의 이상을 구체화하던 1910년을 전후한 무렵은 블로크에게 정신적 혼란으로부터의 출구를 찾기 위한 자기 정돈의 시간이었다. 시인은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얻은 삶의 절망으로부터의 구원으로서의(영원한 조화에 대한 갈망과 창조의 원칙의 구현으로서의) 예술과 조국 러시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삶의 지주를 재발견한다. 그에게 개인사적 삶이 부딪힌 절망과 러시아의 삶의 절망은 동등한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희망의 좌절은 파국이 아니라 그와 조국에 부여된 오랜 가시밭길의 시작이다. 조국의 형상은 시인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의 상징이 된다. 개인의 운명과 조국의 운명의 융화 속에 상징주의자 블로크의 일관된 면모가 자리한다. 햄릿적인 선택의 기로에 직면한 블로크는 러시아와 예술, 그리고 미래에 대한 믿음 속에서 삶에 대한 믿음을 견지한다. 이로부터 3부작의 마지막 책에서 블로크가 견지한 ‘예술가 인간(Человек-артист)’의 이상이 대두된다. 모순과 절망의 체험 없는 진정한 삶은 없다. 모순과 어둠 속에 잠재된 조화와 빛의 계기를 포착하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자인 예술가 인간은 이와 같은 건강한 비극적 세계 지각을 체현한 인간이다. ‘강림의 3부작’ 3권은 현실에 맞서는 강한 거부의 몸짓 속에서 현실과 그 미래에 대한 믿음을 견지하는 웅혼한 영혼의 삶의 기록이다. ‘강림의 3부작’의 3권에 수록된 시들은 1907∼1916년에 걸쳐 창작되었다. 3권에는 <무서운 세상(Страшный мир)>, <보복(Возмездие)>, <얌비(Ямбы)>, <이탈리아 시(Итальянские стихи)>, <여러 시(Разные стихотворения)>, <하프와 바이올린(Арфы и скрипки)>, <카르멘(Кармен)>, <조국(Родина)>, <바람은 무엇을 노래하는가(О чем поет ветер)> 등의 9개의 사이클이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으며, 서정적 서사시 <종달새의 정원(Соловьиный сад)>이 사이클 <카르멘>과 <조국> 사이에 수록되어 있다. 블로크는 ‘사랑의 시인’이다. 채 성숙되지 못한 열정[크세니야 사돕스카야(К. М. Садовская)와의 사랑−사이클 <빛이 있기 전>과 3권의 <하프와 바이올린>에 삽입된 소 사이클 <12년이 흐른 후(Через двенадцать лет)>에 반영]의 소산인 시편들로부터 ‘아름다운 여인’의 멘델레예바와 ‘눈 처녀’와 ‘파이나’의 볼로호바를 거쳐, 1914년 블로크에게 다시 닥친 류보피 델마스(Л. А. Дельмас)와의 정열적인 사랑(사이클 <카르멘>)에 이르기까지, 시인에게 사랑의 이해는 삶의 이해와 동질적이다. <카르멘>의 사랑의 형상은 빛과 어둠의 분리 불가능성에 대한 시인의 이해의 극명한 발현이다. 시인은 악의 창조적 힘, 조화를 낳는 어둠, 역사적 악의 필요불가피성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1917년의 혁명을 받아들였고, 그 찬연한 종착점이 혁명 서사시 <열둘(Двенадцать)>이다. 블로크의 시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블로크 자신이다. 그의 시는 모순적이지만 일관된 삶을 살아가는 인간 블로크의 형상을 창조한다. 시가 창조하는 시인의 형상이 실제 시인을 대체한다. 독자들은 이 창조된 시인의 형상을 실제 시인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숭배했다. 블로크는 시를 통해 ‘자기 신화’를 창조했다. 이것은 러시아 상징주의 시학의 가장 중요하며 고유한 면모의 실현이다. 블로크의 ‘3부작 시집’에 수록되지 않은 시 한편이 더 있다. 그것은 시인이 생애의 마지막 해에 쓴 시 <푸시킨스키 돔에게(Пушкинскому дому)>다. 서정시인 블로크의 창작의 길은 ‘3부작’을 닫는 해인 1916년 사실상 종결되었다. 이후 블로크는 혁명의 열기로 고양되어 창작한 서사시 <열둘>과 시 <스키타이(Скифы)> 외에 서정시는 거의 남기지 못했다. 그중 예외적인 의미를 지닌 시가 바로 <푸시킨스키 돔에게>다. 근대 러시아 고전 문화의 정신을 체현했던 블로크는 그의 시의 몸을 러시아 문화의 분수령이 관통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생을 마감하며 푸시킨(А. С. Пушкин)의 이름이 대변하고 자신이 그 유기적 계승자인 러시아 고전 문화의 시대가 자신의 죽음과 함께 종말을 고하고 있음을 예감했다. 이 시는 블로크의 시적 유언이자 동시에 소비에트 러시아의 문화 독재에 의해 고전 문화의 정신적 지향과 가치를 상실하고 문화적 공황을 맞이하게 될 20세기 러시아인의 암울한 삶에 대한 예언이다. 생애의 마지막 해에 블로크가 심혈을 기울였으나 실현되지 못한 ‘3부작’의 개작 판본에서 아마 이 시는 3부작 전체에 대한 에필로그를 이루었을 것이다. 블로크의 시는 파국에 대한 느낌으로 읽는 사람을 전율하게 한다. ‘파멸’은 그가 사랑했던 말이다. 세계의 파국성을, 사랑의 파국성을, 창작의 파국성을 그는 노래했다. 그의 많은 시가 운명의 모든 바람에 개방된, ‘눈보라 치는 광장’의 느낌에 침윤되어 있다. 전 생애에 걸쳐 시인의 내면에는 생의 저주스러움과 파멸성에 관한 무서운 느낌이 살았다. 근대 문명은 의미를 다했고, 그 파멸은 피할 수 없고 무시무시하다. 블로크는 이 파멸의 재앙을 인류의 죄악과 실수에 대한 보복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블로크는 안락을, 축복을 거부한 시인, 파멸의 시인이 되었다. 시인은 세계를 파괴할 재앙을 예감했다. 그러나 이 예감 속에서 그는 세계를 아름답게 갱신시킬 정화의 뇌우를 보았다. 오직 이 소망으로 시인은 러시아 혁명의 재앙을 받아들였다. 블로크는 고통을 통한 정화와 세계의 변모를 꿈꾸었다. 혁명 속에서 블로크는 러시아의 영적 변모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혁명을 믿었다. 실현된 예감은 그의 가슴에 희열이 들끓게 했다. 그러나 이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생의 마지막까지 블로크는 삶에 있어서도 창작에 있어서도 절대주의자였다. 진정한 낭만주의자였기에 그는 혁명이 “모든 것을 새로 만들어야 함을”, “거짓되고 추악하고 무료한 우리의 생이 정의롭고 순결하고 즐거우며 아름다운 생이 되도록 해야 함을” 믿었다. 그리고 위대한 뇌우가 그치고 삶이 변모된 것이 아니라 더 잔혹하고 쓰라린 것이 되었을 때, 무시무시한 애수가 그를 덮쳤다. “소리들이 죽었다”라고 그는 말했다. 시인은 더 이상 음악을 들을 수 없었고, 시를 쓸 수 없었다. 블로크의 시집은 다수의 판본이 존재한다. 1997년 20권으로 출간된 아카데미 판본(А. А. Блок. Полное с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 и писем в двадцати томах. М., Наука, 1997)이 나오기까지 가장 충실했던 블로크의 ≪저작집≫은 소비에트 시대에 출간된 각각 12권과 8권으로 된 판본이다(C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в двенадцати томах, Л., 1932∼1936; С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 в восьми томах, М.:Л., 1960∼1965). 이와 같이 블로크의 문학 유산 전부를 망라하고 그에 대한 연구 성과들을 집약한 명실상부한 블로크 전집은 20세기 말이 되어서야 출간되었다. 블로크의 ‘3부작’을 이루는 시들에 대한 접근은 어느 판본을 이용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암시와 인유로 포화된 블로크의 상징주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 문화와 러시아 문화에 대한 시인의 해박한 지식과 그것이 그의 시의 의미 구축에 적극적으로 작용하는 면모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이 점에서 아카데미 판본이 제시하는 방대한 주석은 블로크의 시에 대한 심화된 이해에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   내 내부에서 은밀하게                                                              알렉산드르 블로크   내 내부에서 은밀하게 물보라치는 혼란된 삶의 외침에 귀기울이면서 꿈속에서도 나는 그릇되고 순간적인 생각에 빠지지 않으리라. 나는 파도를 기다린다- 찬연한 깊은 곳을 향해 동반하는 파도를.   두 무릎을 굽히면서, 가까스로 뒤따른다 두더지의 시선으로, 조용한 가슴으로 환상과 꿈들의 한가운데서 다른 세계들의 목소리 한가운데서 분잡한 세속적인 일들의 떠돌며 지나가는 그림자들을.     알렉산드르 블로크(1880~1921)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으로 “동시대인의 격앙된 의식의 대변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시는 “그릇되고 순간적인 생각”을 떠나보내고, 은밀한 내면의 심해(深海)를 찾아가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시인은 내면 응시를 “조용한 가슴”을 향해가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곳을 향해가는 일이 비록 높은 파도를 동반하는 시련의 길이 되더라도 기꺼이 감내하겠다고 말합니다. 그것이야말로 “분잡한 세속”이 만들어내는 “지나가는 그림자들”을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시인은 시 ‘오, 나는 미친 듯 살고 싶다’에서 “오, 나는 미친 듯 살고 싶다/ 모든 존재를-영원한 것으로,/ 무성격(無性格)을-인간적인 것으로,/ 실현불가능을-가능한 것으로!”라고 써서 삶의 원동력이 되어야 할 원력들에 대해 말합니다. /문태준  시인 ================================ .   철길에서 알렉산드르 블로크 (러시아)   철길에서 철뚝 아래 풀 베지 않은 도랑에 산 사람처럼 누워 눈 뜨고 있다. 땋은 머리 위로 몸을 던진, 물들은 머리 수건을 쓴 젊고 아름다운 여인.   가까이 숲 너머로 소음과 휘파람 소리를 향해, 점잖은 걸음걸이로 그녀는 걸어가곤 했다. 긴 플랫폼을 휘이 지나서, 흥분에 싸여, 그녀는 차양 밑에서 기다렸다.   갑자기 달려와 모인 빛나는 세 눈 --- 홍조는 한결 부드럽고, 머릿단이 더욱 가파르다: 어쩌면 승객들 중에서 누군가가 창으로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열차는 늘 다니는 선로를 따라 지나가면서 간헐적으로 흔들리고 삐걱거렸다. 황색과 청색 객차는 조용했다. 녹색 객차 속에서 사람들은 울고 노래하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졸고 있던 사람들이 일어나 맥없는 시선으로 둘러보았다. 플랫폼을, 관목들이 어우러져 자라는 정원을, 그리고 그녀를, 그녀 곁에 서 있는 헌병을......   다만 한번, 경비병이 부주의 한 팔로 다홍색 우단에 팔꿈치를 짚으면서, 그녀의 몸을 따라 부드러운 미소를 흘렸다...... 흘렸다 --- 그리고 기차는 먼 곳으로 질주해 갔다.   헛된 청춘은 그렇게 질주했다. 공허한 꿈에 지쳐서...... 한길과 철길의 우수는 휘파람 불었다. 가슴을 갈가리 찢으면서   무슨 말이야 --- 이미 오래 전에 심장이 빠져나간 모양인데! 꽤나 많은 인사치레가 행해지고, 꽤나 많은 탐욕에 젖은 시선들이 열차의 황량한 눈을 통해 건너오고......   의문을 품고 그녀에게 접근하지 마세요. 당신들은 그게 그거겠지만, 그녀는 --- 만족스럽다. 사랑, 진흙덩어리나 수레바퀴에 의해 그녀는 짓뭉개진다 --- 모든 것이 병들었다.     ...러시아 2세대 상징주의 시인이자 극작가 알렉산드르 블로크(1880-1921)의 대표작인 희곡 "광장의 왕". 알렉산드르 블로크는 러시아의 국민 시인 '푸쉬킨'만큼이나 사랑받는 작가다. 블로크는 20세기 이후 러시아 모더니즘 문학에 뿌리라고 할 만하다. 그는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 랭보에게 영향을 받은 1세대 러시아 상징주의 작가들을 공허하다고 비판하면서 민중에 뿌리를 둔 상징주의 작품을 써냈다. 원작 희곡 '광장의 왕' 역시 블로크의 세계관을 잘 반영한 작품으로 추상적인 단어의 의미를 곰씹어야 맛이 살아나는 연극이다. 대사 사이에 여운을 얼마나 잘 처리하느냐와 상징적 대사를 모호하지 않도록 돕는 분장, 의상 등 다른 무대도구들이 꼭 필요한 작품이라는 뜻이다. 이 희곡을 낭독하면 40여분이 채 되지 않을 만큼의 짧은 희곡이고 또한 이미지화 된 대사가 많기에 연출 기법과 대사전달에 큰 신경을 써야 극이 살아나는데...
1930    러시아 최후의 "천부적인 재능의 농민시인" - 세르게이 예세닌 댓글:  조회:5492  추천:0  2016-12-08
해외저자사전 세르게이 예세닌 [ Sergei Yesenin ]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1895년 10월 3일(구력 9월 21일)~1925년 12월 28일은 러시아의 시인이다.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예세닌(Серг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Есенин, 1895∼1925)은 1895년 10월 3일 랴잔 지방의 콘스탄티노보 마을에서 태어났다. 1909년, 세르게이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스파스 클레프키 마을에 있는 교사 세미나에 갔는데 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것도 바로 이곳에서였다. 지도교사의 조언에 따라 시작(詩作)에 몰두하기 위해 그는 1913년 3월 모스크바로 떠난다.1915년 3월 9일, 상징주의 시의 대가 알렉산드르 블로크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너무도 흥분한 나머지 갑자기 진땀을 흘리기까지 했다. 블로크는 예세닌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등 도움을 주었으며 그를 “천부적인 재능의 농민시인”으로 불렀다. 예세닌은 자신이 블로크와 클류예프로부터 서정시풍을 배웠고, 벨리로부터는 형식을 배웠다고 주장했다. 1916년 2월, 첫 시집인 『초혼제』가 출간되자, 예세닌의 명성은 순식간에 높아져 황후와 공주들 앞에서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는 황금 시계와 목걸이를 받았다. 그러나 예세닌은 혁명에 동감해서 1917년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을 열렬히 환영했다. 예세닌은 1919년을 자기 생애의 최고의 해로 간주했다. 그에게 서점과 출판사, 보헤미안 문학 카페인 ‘페가수스의 마구간’에 대한 감독권이 주어졌다. 이 시기 그는 여러 시인들과 함께 ‘이미지 그 자체’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이미지주의 문학 그룹을 조직해서 활동했다. 1918년 혹은 1919년에 예세닌은 공산당에 가입하고자 지원했다. 그러니 그는 너무나 개인적이고 ‘어떤 혹은 모든 규율에 이질적’이라고 간주되었다. 이러한 열정적인 사회생활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에서는 점차 소외와 고독감이 자라나고 있었다. 1921년에 그는 “흔히, 서정시인은 오래 살지 못한다”라고 적는다.1921년 11월, 예세닌은 미국 무용수 이사도라 덩컨을 만났다. 그녀는 그보다 열일곱 살 연상이었다. 그들은 1922년 5월 2일 결혼했고, 5월 10일 유럽과 미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들의 미국 생활은 파란만장한 시간이었다. 그는 뉴욕을 혐오했으며 자살을 생각할 만큼 권태로웠다. 그는 예술에 대한 자신의 영감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정신적, 육체적 건강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예세닌은 덩컨과 함께 파리로 돌아갔다. 음주와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1923년 8월 5일경 그들은 모스크바로 되돌아왔고 10월 말 경 그들의 관계는 끝이 났다. 예세닌은 권태와 우울증에 빠졌으며, 알코올 중독과 환각으로 고통을 받았다. 정신적 안식처를 발견할 수 없었던 그는 두 살배기 어린아이처럼 무력감을 느꼈다. 1925년, 예세닌은 장시 『페르시아 모티프』와 『안나 스네기나』를 썼던 바쿠로 갔다. 환각이 그랬던 것처럼 피해망상증도 그의 내부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11월 그는 마지막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12월 21일 그는 갑자기 병원을 떠나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페테르부르크로 떠나 호텔에 투숙해 12월 28일, 성상(聖像)이 놓인 구석의 수도관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세르게이 예세닌 [Sergei Yesenin] (해외저자사전, 교보문고) ======================================   어머니의 편지                           세르게이 예세닌 이제  뭘 더 생각할 게 있겠는가,  이제 뭘 더 쓸 게 있겠는가?  내 눈 앞  우울한 책상 위에  놓여진  어머니의 편지.  어머니는 이렇게 쓰신다.  “될 수 있으면 말이다, 얘야,  크리스마스 때  우리한테 내려오려무나.  내게는 목도리를 하나 사주고,  아버지께는 바지를 한 벌 사다오.  집에는  부족한 게 너무 많단다.  네가 시인이라는 거,  좋지 않은 평판만  얻고 있는 거,  난 정말이지 못마땅하다.  차라리 네가 어릴 적부터  뜰로 쟁기나 몰고 다녔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나도 이젠 늙었고  몸도 영 좋지 않단다  ........  사랑하는 내 아들아,  대체 네가 왜 이렇게 되었느냐?  그토록 얌전하고,  그토록 순한 아이였는데.  모두들 앞을 다퉈 말하곤 했지.  저 아이 아버지는  얼마나 행복할까!라고.  네게 품었던 우리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구나.  게다가 더 가슴 아프고  쓰라린 것은,  그나마 네가 시로 버는 돈이  꽤 많을 것이라는  허황한 생각을  네 아버지가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만 얼마를 벌든 간에,  네가 돈을 집에 보낸 적은 한 번도 없지.  네 시가 그토록 서러운 걸 보면  나도  알겠다,  시인들한텐 돈을 잘 안 주나 보다는 걸.  네가 시인이라는 거,  좋지 않은 평판만  얻고 있는 거,  난 정말이지 못마땅하다.  차라리 네가 어릴 적부터  뜰로 쟁기나 몰고 다녔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요즘은 온통 슬픈 일 투성이다.  암흑 속에서 사는 것만 같구나.  말(馬)도 없단다.  네가 집에만 있었더라면,  지금쯤 우리에겐 모든 게 있을 텐데,  네 머리로  동네 읍장인들 안 됐겠느냐.  그랬더라면 더 당당하게 살았을 텐데,  아무한테도 끌려 다니지 않고,  너 역시나  필요없는 고생은 안했을 텐데,  네 처한테는  실 잣는 일이나 시키고,  너는 아들답게,  우리의 노년을 돌보지 않았겠느냐.”  ................  편지를 구겨 버린 나는  우울해진다.  정말이지 내 이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날 길은 없는 것인가?  그러나 내 모든 생각은  나중에 털어놓으련다.  답장에서  털어놓으련다...  < 답장> 내 늙은 어머니,  사시던 대로 그냥 사세요.  어머니의 사랑,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다 절실히 느끼고 있다구요,  하지만  내가 무얼 위해 사는지,  이 세상에서 무얼 하며 사는지  어머니는 눈꼽만큼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  어머니!  눈보라 속에서 어떻게 잠이 들 수 있지요?  굴뚝에선 웅웅대는 소리가  그렇게 불평하듯 늘어지는데.  몸을 뉘려 하면,  보이는 건 침대가 아니라  좁은 관이고,  꼭 무덤에 들어가는 것만 같을 테지요.  ....  내가 사랑하는  그 봄을  나는 위대한 혁명이라  부르지요!  오직 그 하나만을 위해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거예요.  그 하나만을  기다리며 불러대는 거예요.  그런데 이 가증스러움이란  레닌의 태양으로도  여태 덥혀지지 않는,  우리의 이 차가운 지구 말이에요!  바로 그래서  시인의 아픈 가슴을 안고  추태를 부리기로 나선 거예요.  술 마시고 싸움질이나 하면서 말이예요.  ....  돈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세요.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시라구요.  죽음이라니요?!  왜 그러세요?  내가 뭐 외양간에서 끌어내야하는  소는 아니잖아요,  말이나  당나귀도 아니구 말이에요.  때가 오면,  지구에  불을 지펴야 할 때가 오면,  내 발로 나가겠어요,  그리고는, 돌아오는 길에  목도리를 사드리지요,  아버지께는  말씀하신 바지도 사드리구요.       ...............................................................................................................................................   출생일시 1895. 10. 3(구력 9. 21), 러시아 랴잔 콘스탄티노보 사망일시 1925. 12. 27,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적 러시아 스스로 '목조 러시아의 마지막 시인'이라 불렀다. 독실하고 소박한 농촌 가수이자 동시에 난폭하고 불경한 노출증 환자로서의 이중적 이미지는 혁명 시대의 급변하는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그의 비극적 운명을 반영해준다. 복고신앙파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7세에 모스크바로 떠났고 얼마 뒤 다시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다. 이들 도시에서 알렉산드르 블로크와 농민 시인 니콜라이 클류예프, 그리고 혁명적 정치가들과 교분을 맺었다. 1916년에 출판한 첫번째 시집 〈초혼제 Radunitsa〉는 특이하게도 종교축일에서 제목을 빌려온 것이다. 이 책은 그의 어린시절의 '목조 러시아', 즉 성상화에 그려진 성인들이 축복하는 세계, 황새가 굴뚝에 둥지를 틀며 자작나무 위의 하늘이 연청색 스카프와도 같은 세계를 교회 서적의 이미지로 예찬한다. 그는 2번째 시집 〈내세의 땅 Inoniya〉(1918)에서 꿈꾸었던 농민들의 천년왕국을 가져다 줄 사회적·정신적 변환으로써 혁명을 환영했다. '내세의 땅'에 대한 그의 장미빛 유토피아적 시각은 강철과 석재로 이루어진 추악한 세계(산업화된 도시)에 맞서 '목조 물건들'을 방어한다는 단순한 에토스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1920~21년에 그는 예카테리나 2세 때 농민 봉기를 주도했던 18세기의 반역자 푸가초프를 찬양하는 장편 운문 희곡 〈푸가초프 Pugachyov〉를 집필했다. 1919년에는 러시아 이마지니즘(영미문학의 이미지즘과는 관련이 없음) 선언문에 서명해 곧 이 문학운동의 지도적 대변자가 되었다. 또한 모스크바의 문학 카페에 자주 드나들면서 시를 낭송하고 엄청나게 술을 마시곤 했다. 지나이다 라이흐(뒤에 배우이자 연출가인 프세볼로트 메예르홀트의 부인이 됨)와의 결혼이 이혼으로 끝난 뒤 1922년 미국인 무용가 이사도라 덩컨과 재혼해 아내의 순회공연에 동행했다. 여행 도중 그는 광폭한 술주정으로 유럽의 최고급 호텔 객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았다. 이들 부부는 미국을 방문했는데 이들의 말다툼과 공공연한 소란은 그때그때 전세계 언론에 보도되었다. 예세닌은 덩컨과 헤어진 후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는 한동안 의식적으로 냉소적이며 오만불손한 선술집 시들을 창작해 〈깡패의 고백 Ispoved khuligana〉(1921)·〈선술집의 모스크바 Moskva kabatskaya〉(1924) 등 2권의 시집으로 펴냈다. 그의 시에는 당시 그를 지배하던 자학심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는 톨스토이의 손녀와 재혼했으나 폭음과 마약을 계속했다. 1924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러나 자신은 마르크스를 5페이지도 채 읽지 못한 반면, 마을의 농부들은 소비에트의 구호를 인용하는 수준임을 깨달았고 민중의 시인으로서 메시아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자책감에 시달리며 세태에 보조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황량하고 창백한 달빛 Neuyutnaya zhidkaya lunnost〉(1925)이란 시에서 러시아가 곧 얻게 될 힘의 비밀로써 돌과 강철을 찬양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또다른 시 〈엄숙한 10월은 나를 기만했다〉에서는 솔직하게 볼셰비키 러시아에서 소외당한 자신의 느낌을 털어놓았다. 마지막 주요작품인 고백체 시 〈검은 인간 Cherny chelovek〉은 실패한 자신에 대한 무자비한 혹평이라 할 수 있다. 1925년 신경쇠약으로 잠시 병원신세를 진 뒤, 자신의 피로 마지막 시 몇 줄을 남기고 레닌그라드의 호텔에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 다작의, 그러나 다소 변덕스러운 작가인 예세닌은 노래에 대한 진정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그의 예리하고 짧은 서정시들은 놀라운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생전에도, 사후에도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예세닌주의'가 젊은 세대의 헌신적인 시민의식에 퇴폐적 효과를 미칠까 두려워한 공산주의 비평가들과 당 지도자들로부터 눈총을 받아 오랫동안 냉대를 받았으나 그의 시집이 1956~60년에 판을 거듭해 계속적인 인기를 증명해주었다. 예세닌 전집이 1966  -  1968년에 출판되었다.             자작나무 내 창문 밑 하얀 자작나무 마치 은銀으로 덮이듯 눈으로 덮여 있다. 부풋한 어린 가지 위에는 눈의 가장자리 꾸밈 꽃이삭이 피었구나 흰 술처럼. 자작나무는 서 있다 조으는 고요함 속에, 금빛 불꽃 속에서 눈이 반짝이고 있다. 노을은 게으르게 둘레를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은銀을 어린 나뭇가지에 뿌렸다.  (/ p.) 지는 해의 붉은 날개 지는 해의 붉은 날개는 사라져 가고 있고, 울타리는 저녁 안개 속에서 조용히 졸고 있다. 서러워하지 마라, 나의 하얀 집이여, 또다시 너와 내가 혼자가 된 것을. 초승달은 초가 지붕에서 시퍼런 날을 씻고 있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지 않았고 호젓한 건초더미 뒤로 배웅하러 나가지도 않았다. 세월은 불안을 가라앉혀 주는 것. 세월처럼 이 아픔은 자나가리라. 입술도, 티없이 깨끗한 영혼도 다른 사내를 위해서 그녀는 지키고 있는 것이다. 기쁨을 찾는 자는 힘이 없으며, 의젓한 자만이 힘으로 산다. 또 어떤 자는 구겨서 내던지리라, 젖어서 썩은 멍에처럼. 시름속에서 내가 운명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첫눈이 심술궂게 휘날리리라. 그리고 그녀도 우리 고을에 오리라 제 어린 것의 몸을 녹이게 할 양으로. 털외투를 벗고 쇼올을 풀고, 나와 함께 불 가에 자리를 잡으리라. 그리고 차분하고 상냥하게 말하리라, 어린애는 나를 닮았노라고. (/ p.) 잘 있거라, 벗이여 잘 있거라, 나의 벗이여, 잘 있거라. 사랑스러운 벗이여, 너는 나의 가슴 속에 있다. 운명적인 이별은 내일의 만남을 약속한다. 잘 있거라, 나의 벗이여, 손도 못 잡고 말없는 이별이지만 한탄하지 말고 슬퍼하지 말라, 눈살을 찌푸리고 이 인생에서 죽는다는 건 새로울 게 없다. 히지만 산다는 것도 물론 새로울 게 없다.  (/ p.) ===@@=== 안녕, 나의 친구, 다시 만날 때까지 세르게이 예세닌      안녕, 나의 친구,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다정한 친구, 그대는 내 가슴 속에 살고 있네. 우리의 예정된 이별은 이 다음의 만남을 약속해 주는 거지. 안녕, 나의 친구, 악수도 하지 말고, 작별의 말도 하지 말자. 슬퍼할 것도, 눈썹을 찌푸릴 것도 없어― 삶에서 죽음은 새로운 일이 아니니까, 그러나 삶 또한 새로울 것은 하나도 없지.            세르게이 예세닌(Sergei Yesenin)은 주로 농촌의 목가적인 풍경을 애수에 띤 감정으로 아름답게 노래한 20세기 초 러시아의 서정시인이다     그는 콘스탄티노보라는 마을의 농사꾼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가 도시로 이주하는 통에 어린 시절 신앙심이 아주 깊은 외할아버지 집에서 자랐다. 9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의 재능을 인정한 선생의 권유로 모스크바에 가서 인쇄소에서 일 하면서 써서 발표한 시로 문학의 신동으로 알려졌다. 불과 15세 나이에 쓴 ‘주홍색 여명(1910)’이란 시에서 이미 뛰어난 시인 적인 재질을 보인다. “주홍색 여명이 호수 위를 비친다/ 소나무 숲에서는 큰 뇌조의 울음소리가 울려 나온다. 꾀꼬리의 울음도 어딘가 있구나 허공 속에 숨어서/ 그러나 나만은 울 수 없지- 이 소리는 내 영혼의 불빛이다. 나는 네가 저녁이 되면 길가에서 나타날 것을 안다/ 우리는 건초 가리 밑에 있는 신선한 짚단 위에 앉을 것이다.  나는 취할 때까지 네게 키스를 퍼부을 것이야. 나는 너를 꽃 마냥 마구 구겨놓겠지/ 이렇게 도취된 행복감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나의 끊임없이 애무하는 손길로 인해 네가 입었던 비단 자락을 벗어 던지겠지/ 그러면 나는 너를 품에 안고 아침이 올 때까지 숲 속으로 가리라. 큰 뇌조의 울음이 울리게 하자/ 주홍색 여명에는 달콤한 멜랑콜리가 조금 있구나”    이 시에서 보듯 그는 성적으로도 무척 조숙해서 18세에 인쇄소에서 같이 일을 하다가 사귄 안나라는 여인과 결혼해서 아들 유리를 얻었다. 유리는 스탈린 숙청시기에 체포되어 1937년 시베리아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죽었다. 그는 농사꾼의 자식이었지만 푸른 눈동자에 금발을 한 귀공자같이 생긴 미남이었다. 게다가 부드러운 음성과 낭만적인 성격으로 해서 짧은 나이에 5번이나 결혼했고 많은 염문도 뿌렸다.    18세에 쓴 시 ‘자작나무(1915)’에도 자연을 배경으로 한 서정성이 짙게 배어있다.    “자작나무/ 내 창 밑에서/ 은과 같은/ 눈에 씌워 있네. 굵은 가지들에는/ 눈이 뿌려져서/ 순백의 눈으로/장식하고 있네. 저기 자작나무가 서 있네/ 잠든 것 같은 적막 속에/ 눈송이가 밝게 번쩍이고 있네/ 황금색 태양 밑에서 그리고 석양이 천천히/ 한바퀴를 돌면/ 나뭇가지는 장식하고 있네/ 새로운 은색 옷을 입고”    그의 초기 시는 러시아 전설에서 자주 영감을 받았다. 시인은 1916년 첫 시집 ‘라두닛차(‘죽은 자를 위한 의식’ 또는 ‘모든 성인의 날’로 번역됨)’를 발표했다. 이 시집에서 그는 전통적인 시골 생활, 민속 문화, 어린 시절의 아직 개발되지 않은 러시아 풍물, 그리고 자연에 대한 범신론적 믿음을 시로 표현했다. 그가 그린 러시아의 시골은 슬픔이 깃든 낭만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또 러시아 농민들이 지녔던 그리스도가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들의 보호자가 되리라는 소박한 믿음도 보인다.    러시아 혁명의 과격파인 트로츠키는 예세닌의 시에서 중세기 냄새가 난다면서 과거 지향적인 취향을 비난했다. 그러나 러시아 작가이며 언론이었던 일리야 에렌부르그는 “막심 고르키 같은 위대한 시인은 예세닌이 그 앞에서 새로 지은 시를 낭독하면 깊게 감동해서 눈물을 흘렸다”고 자서전에 적었다.       예세닌의 자살          이사도라 덩컨과 지낸 짧은 기간의 악몽을 떨쳐버리려는 듯 아직도 젊은 시인 예세닌은 모스크바에 돌아오자 미모의 한 여배우와 결혼했다. 같은 시기에 그는 갈리나란 자기의 여비서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갈리나는 예세닌이 죽은 다음 해 첫 번 기일에 그의 무덤 앞에서 자살했다.      예세닌은 점점 무절제한 상태의 심연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는 여류시인 나데즈다 볼핀을 임신시켰다. 그녀는 아들을 낳아 알렉산드르 볼핀-예세닌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정작 아버지는 생전에 아들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알렉산드르는 나중에 자신도 유명한 시인이 되어 1960년대 안드레이 사카로프를 중심으로 했던 공산 독재 반항 운동의 주도자가 되었다. 그 후 미국으로 이주한 안드레이는 유명한 수학자로 활동했다.     1925년 예세닌은 문호 레오 톨스토이의 손녀 소피아 톨스토야를 만나 다섯번째 결혼을 했다. 그녀는 그를 도우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심신이 완전히 황폐되어 계속 술을 마시고 심지어 코카인까지 손에 대었다.      그 무렵 예세닌을 길에서 우연히 만난 마야코브스키 시인은 “나는 그를 아주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돈 다발을 손에 쥐고 흔들면서 같이 술을 마시자고 강요하는 것을 겨우 물리칠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우울한 그의 모습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저녁이 되면 동료들에게 예세닌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말머리를 꺼냈다. 불행하게도 우리에게는 그를 도울 방법이 전혀 없었다”라고 적었다. 결국 예세닌은 정신병원에 한 달간 입원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병원에서 퇴원하자 부인을 모스크바에 남겨놓고 세인트 피터스버그로 가서 한 호텔에 투숙했다. 그는 자살하기 전에 붉은 글씨로 시를 쓰려 했지만 호텔 방에 비치된 붉은 잉크는 말라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팔목을 잘라 피를 내어 아직 식지 않은 그 피로 시를 썼다.      이 시를 봉한 다음 친구인 시인 에를리크에게 주면서 자기 앞에서 읽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런 다음 12월28일 방 천장에 있는 난방용 파이프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불과 30세였다. 죽고 난 다음 에를리크가 펴 본 종이 위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적혀 있었다.  피로 쓴 유서 시였던 것이다.     “안녕히, 내 친구여, 안녕히/내 사랑, 당신은 내 마음 속에 있네/ 이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헤어짐이야/ 나중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해요. 안녕히, 내 친구여, 악수도 없이 아무 말 없이/ 우리 이마에 슬픈 주름을 남기지 말자/ 이 세상에서 죽음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지/ 물론 인생 자체가 새로운 것이 아니니까”       스탈린과 후르시체프 시절 예세닌 작품은 모두 출판이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의 시를 암송했으며 전장에 나간 많은 병사들의 손에는 그의 낡은 시집이 쥐여 있었다.      1960년대에 복권이 되어 그의 시집은 다시 출판되면서 빛을 보게 됐다. 그의 서정이 넘친 시들은 한국에서는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후에 월북한 시인 오장환에 의해 처음으로 ‘예세닌 시집’으로 소개되었다.             정유석(정신과 전문의)                                            【샌프란시스코 중앙일보】     ======================================================      예세닌과  이사도라 던컨   당신은 소위 말하는 저 세상으로 가 버렸소 공허감 별들과 부딪히며 하늘을 날고 있구려 선불도 없고 술집도 없이 이제 맨정신이겠구려 아니 예세닌 이는 조롱하는 말이 아니오 내 목구멍에서 치미는 것은 비웃음이 아니라 주먹 만한 슬픔의 덩어리요   러시아 혁명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은 세기의 사랑이라고 불린 이사도라 던컨과 17살의 나이차가 난다 창작무용을 하던 이사도라는 미국에서 독일로 다시 러시아로 이주하는데 두번의 파경과 두 아이를 잃은 이사도라는 43세 (1922년) 에세닌과 결혼한다 그러나 2년만에 예세닌의 알콜중독과 폭력 신경증으로 두 사람은 결별하고 예세닌은 호텔에서 혈관을 끊고 붉은 피로 '잘 있어라 벗이여' 시를 남긴채 목을 매 30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로부터 2년후 이사도라는 스포츠카에 머풀러가 끼어 목졸려 숨지고 예세닌의 장례식에서 시를 낭송하던 마야코프스키는  5년 뒤 권총으로 자살을 한다... ==================================================   낙엽을 흩뿌린 단풍나무 낙엽을 흩뿌린 단풍나무여,  얼어붙은 단풍나무여 어째서 하얀 눈보라 속에 몸을 굽히고 서 있나요 아니면 무엇을 보았나요  아니면 무슨 소리를 들었나요 시골저편으로 산보라도 나가는 것 같아요 마치 술에 취한 문지기처럼 길가에 서서  눈 더미에 빠져 다리가 얼어붙은 거 같아요 아, 요즘 웬일인지 나약해진 나는 술잔치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고 갯버들을 만나고 소나무를 바라보고 눈보라 속에서 그들에게 여름 노래를 불러주었어요 나는 마치 한 그루의 단풍나무 같아요 낙엽을 흩뿌린 단풍잎이 아니라 있는 힘을 다해 초록빛으로 남으려는 겸손을 잃어버리고 완전히 바보가 되어 마치 타인의 아내인 듯 자작나무를 껴안고 있어요 /세르게이 예세닌          러시아의 농민시인인 세르게이 예세닌은 1895년에 출생하여 30세의 나이인 1925년 12월 28일 셍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예 세닌은 1916년부터 러시아 농촌의 자연과 민중, 역사에 바탕한 섬세한 서정시와 서사 시를 발표한 러시아 혁명기의 대표적인 시인이기도 하다.  현대 무용의 개척자인 이사도라 던컨이 1922년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17세 연상인  그녀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했으나, 이사도라의 헌신적인 사랑에도 불구하고 예세 닌은 신경쇠약, 알콜중독과 간질병으로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고 결국 1925년에 자신 의 피로 마지막 시인 잘있거라 벗이여를 남기고 3년전 던컨과 신혼을 즐겼던 셍트페 테르부르크의 앙글르테르 호텔에서 자살함으로써 광기어린 시인과 천재적인 무용가 의 결혼은 이렇게 마감한다.  예세닌이 죽은지 2년후 이사도라도 파리에서 스포츠카를 시승하다 스카프가 바퀴에  끼어 순간적으로 목이 졸려 비극적으로 사망하게 된다.   잘있거라 벗이여     잘있거라 나의 벗이여, 잘있거라. 사랑스런 나의 벗이여, 너는 나의 가슴속에 있다. 운명적인 이별은 내일의 만남을 약속한다. 잘 있거라, 나의 벗이여, 손도 못잡고 말없이 이별하지만 한탄하지도 말고, 슬퍼하지도 말라. 눈쌀을 찌프리고- 인생에서 죽는다는 건 새로울 게 없다. 하지만 산다는 것도 물론 새로울 게 없다.     [출처] 세르게이 예세닌 - 블라디미스 마야코프스키|작성자 단혜   나는 첫눈 속을 거닌다                                                                                      예세닌     나는 첫눈 속을 거닌다. 마음은 생기 넘치는 은방울꽃들로 가득차 있다. 저녁이 나의 길 위에서 푸른 촛불처럼 별에 불을 붙였다.   나는 알지 못한다, 그것이 빛인지 어둠인지? 무성한 숲 속에서 노래하는 것이 바람인지 수탉인지? 어쩌면 들판 위에 겨울 대신 백조들이 풀밭에 내려앉는 것이리라.   아름답다 너, 오 !  흰 설원이여! 가벼운 추위가 내 피를 덥힌다! 내 몸으로 꼭 끌어안고 싶다. 자작나무의 벌거벗은 가슴을.   오! 숲의 울창한 아련함이여! 오, 눈 덮인 밭의 활기참이여! 못 견디게 두 손을 모으고 싶다. 버드나무의 허벅지 위에서.       * 세르게이 알랙산드로비치 예세닌 :  제정 러시아의 詩人.  (1895 ~ 1925년 ). 소박한 형식으로   러시아의 농촌의 자연을 서정적으로 읊었으며 대표적 작품에는 시집 『주정쟁이의 모스크바 』가   있다.  ㅡㅡㅡㅡㅡ 예세닌은 스스로를 러시아 ' 최후의 농민시인 '이라고 불렀다. 혁명과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러시아의 풍요로운 자연과 진솔한 농민정서를 그만큼  잘 표현한 시인은 없었다.   자작나무 숲과 황금빛 노을, 푸른 밤과 백색의 설원(雪原), 기도하는 어머니와 버려진 황무지 ....   작가 고리키는 그에 대해 '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애당초 詩를 위해 창조된 유기체 '라고 평하면서   " 끝없는 들판의 비애(悲哀)를 표현하고 , 지구 상에 살아 있는 만물에 대한 사랑과, 무엇보다도   인간에게 베풀어야 할 연민의 정을 표현하는 시인" 이라며 경탄한 바 있다.     1921년 가을, 모스크바의 한 파티장, 지친 모습으로 늦게 도착한 이사도라 덩컨이 안락의자에 앉아   한 청년에게 손짓했다. 한 손으로 청년의 곱슬머리를 만지며 서투른 러시아어로 말했다. " 머리가   황금색이야! " 청년의 입술에 키스를 한후 "천사로군! " 다시 키스를 한 후 " 악마 같으니 !"  아기천사   를 닮은  그러나 후일 악마를 닮게되는, 그 청년이 바로  ' 제2의 푸시킨 ' 이라 불리며 랭보와 비교되    었던 천재시인 예세닌이었다.  자신의 종교가 무용이라고 말하던 마흔 넷의 미국 여자 무용수와 ,   자신의 종교가 詩라고 믿엇던 스믈일곱의 러시아 청년과의 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사랑은 덩컨과 예세닌이라는 ' 두 시대, 두 인생관, 두 세계의 충돌' 이었다. 1923년까지 그들은 사랑   했고 결혼했고 여행했고 싸웠고 불행했고 드디어 헤어졌다.    첫눈 속을 걷노라면 ' 은방울 꽃들' 이 가득 찬 마음일 것이다. 어두워지는 하늘에 ' 푸른 촛불 '처럼   ' 별 '들이 하나 둘씩 돋아난다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첫눈, 저녁, 길,  은방울꽃, 촛불, 별 들이   직조해 내는 아름다운 풍경은 서정시의 교본과도 같다.  어둠과 빛, 바람과 수탉등 모든 것들의   경계가 지워진 눈 쌓인 들판을, 詩人은 " 겨울 대신 백조들이 풀밭에 내려앉는다" 라고 표현한다.   그러고는 이 환상적인 풍경에 뜨거운 생명을 불어넣는다. 첫눈을 몰고 온 아름다운 추위가 시인의   피를 덥히고 , 피가 뜨거워진 시인은 이제 자작나무의 벌거벗은 가슴을 안아주고 싶어 한다.   은빛 첫눈과 ,피가 뜨거운 시인의 가슴과 , 은빛 자작나무가 서로 교감하고 상응하는 이 구절은 단연   백미(白眉)다. ( 정끝별 시인의 작품해설에서 :  민음사간, 《세계의 명시 》에서 발췌함 ).             어머니의 편지   -예세닌-       이제 뭘 더 생각할 게 있겠는가, 이제 뭘 더 쓸 게 있겠는가? 내 눈 앞 우울한 책상 위에 놓여진 어머니의 편지.    어머니는 이렇게 쓰신다. "될 수 있으면 말이다, 얘야 크리스마스 때 우리한테 내려오려무나, 내게는 목도리를 하나 사주고, 아버지께는 바지를 한벌 사다오. 집에는 부족한 게 너무 많단다.    네가 시인이라는 거, 좋지 않은 평판만 얻고 있는 거, 난 정말이지 속상하다. 차라리 네가 어릴 적 부터 뜰로 쟁기나 몰고 다녔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텐데.    나도 이젠 늙었고 몸도 영 좋지 않단다. ...........    사랑하는 내 아들아, 대체 네가 왜 이렇게 되었느냐? 그토록 얌전하고, 그토록 순한 아이였는데. 모두들 앞을 다퉈 말하곤 했지. 저 아이 아버지는 얼마나 행복할까! 라고.      네게 품었던 우리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어 버렸구나. 게다가 더 가슴 아프고 쓰라린 것은, 그나마 네가 시로 버는 돈이 꽤 많을 것이라는 허황된 생각을 네 아버지가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만 얼마를 벌든 간에, 네가 돈을 집에 보낸 적은 한 번도 없지. 네 시가 그토록 서러운 걸 보면 나도 알겠다. 시인들한텐 돈을 잘 안 주나 보다는 걸.    요즘은 온통 슬픈 일 투성이다. 암흑 속에서 사는 것만 같구나. 네가 집에만 있었더라면, 지금쯤 우리에겐 모든 게 있을 텐데, 네 머리로 동네 읍장인들 안 됐겠느냐.    그랬더라면 더 당당하게 살았을 텐데, 아무한테도 끌려 다니지 않고, 너 역시나 필요없는 고생은 안했을 텐데,    편지를 구겨 버린 나는 우울해진다. 정말이지 내 이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날 길은 없는 것인가? 그러나 내 모든 생각은 나중에 털어놓으련다.     예세닌가 어머니께 한 답장시:ㅡ     어머니에게 쓰는 편지     나의 늙은 어머니, 아직 살아계세요?  저도 살아서 이렇게 인사 올립니다.  당신 오두막에 저 저녁의  황혼의 찬란한 빛이 내리고 있겠죠  숨기셔도 쓰신  편지에서 알수있어요  저를 생각하면 금새 슬퍼지시는 것  그리고 매일 슈슌을 입은 채로  길가에 나가 저를 기다리는 것도요.   저녁 땅거미가 지면  주막의 싸움에서 누군가에게  칼에 가슴을 찔리지는 않는지 걱정하시죠  아니에요, 사랑하는 어머니, 심려마세요  그건 단지 미치도록 아플뿐이죠  아무리 깊이 취하더라도,  당신께 죽는 모습을 보이진 않겠어요.   저는 여전히 그렇게 마음이 여려집니다  그리고 이 우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집으로 서둘러 돌아가는 것을 꿈꾸죠  우리집 마당에 봄이와  나뭇가지가 기지개 켤 때 돌아갈 거에요  8년 전처럼 저를 그렇게 새벽에  깨우지만 말아주세요.   걱정에 잠에서 문득 깨지 마세요,  일어나지 않은 것에 놀라지 마세요.  기도하라고 하지마세요 기도는 필요없어요  다 큰 이에게 신의 보답은 더이상 없죠  당신만이 저를 도와주는 사람이고 안식처니까요  당신만이 제게 찬란한 빛입니다.  그렇게 당신 염려를 잊으세요.  바람부는 길가에 낡은 슈슌을 입고  그렇게 서 계시지 마세요.   ------------- 예세닌 시선 [ Стихотворения С. А. Есенин ]   저자 세르게이 예세닌(Сергей А. Есенин, 1895-1925) 국가 러시아 분야 시 해설자 김성일(청주대학교 문화콘텐츠학전공 부교수) 세르게이 예세닌은 짧고도 질풍노도 같은 인생을 살았으며 그의 삶은 곧 전설과 신화가 되었다. 1915년, 페테르부르크에서 혜성과 같이 문학계에 데뷔한 후, 1925년에 한 호텔 방에서 자살하기까지 예세닌은 급속한 성공 속에서 여러 개의 문학적 “가면들”1)을 갖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소비에트 러시아의 서정 시인이고자 하는 사람이었고(1924년 중반에서 1925년 3월까지), 자신의 임박한 죽음의 슬픈 예고자이기도 했다(1925). 예세닌의 시가 상당히 자전적이고 “고백적”이기까지 하지만, 사적인 인간과 그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 사이의 연관은 전체적으로 간단하지 않다. 시 쓰는 일과 명예를 쟁취하는 일을 단 하나의 목적으로 삼고 자신을 바치면서, 예세닌은 자신의 “가면”과 “진짜 얼굴”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고 평범한 인간적 행복을 희생했다. 랴잔 지방 출신의 농민으로서 예세닌은 혁명 전 페테르부르크의 문학 살롱에서 눈에 띄는 성공을 얻었다. 모스크바에 온 1912년부터 첫 번째 시집인 ≪초혼제≫가 출간되는 1916년까지의 4년 동안 예세닌은 농민 시인으로서 자신의 문학 세계를 형성하게 된다. 청년 예세닌은 도덕적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비도덕적이며 맹목적인 군중을 비난하는 시인, 예언자의 임무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기독교적 세계관의 소유자였던 그는 세계를 전체로서 지각했고 “모든 인간이 하나의 영혼”이라고 믿었으며 인간이 그리스도처럼 이웃의 행복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릴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시기의 예세닌 서정시에 나타나는 주된 모티브는 시인의 희생적 사명, 영감이 깃든 자연, 농민이 선택한 신(神) 등이었다. 예세닌의 초기 서정시에는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 서정적 자아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자연의 목조 가옥 속에서 살고 있는 목동이다. 그는 그리스도처럼 온순하다. 따라서 “농민 러시아”라는 테마는 예세닌 시에서 성서적 의미를 획득한다. 농민적 우주는 그에게 행복과 조화뿐만 아니라, 지상의 낙원을 구현한다. 풍경 은유는 성서적 이미지와 결합된다. 예술 의식 속에서 전통적으로 성모를 연상시키는 푸른색과 하늘색은 예세닌의 농촌 이미지 속에서 주요한 바탕색이 된다. 예세닌의 풍경 속에는 초기나 후기 모두 범신론, 즉 자연의 보편적인 생명성에 대한 믿음이 표현되었다. 그의 눈보라는 마치 집시의 바이올린 선율처럼 흐느끼고, 풀들은 “바람맞은 버들에서 동을” 그러모으며, 버드나무는 “옷자락처럼 떤다.” 즉, 예세닌의 창작 세계 속에서 풍경은 아름다움과 완전함에 상응하며, 눈보라와 바람, “초췌한 지방” 혹은 “볼품없는 길”까지도 서정적인 주인공의 정신적 행복의 반향이다. 예세닌의 삶과 문학은 1917년의 2월 혁명과 10월 혁명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이 두 혁명을 마르크스적이 아닌 스키타이적으로 받아들였다. 내용상 농민적이고 기독교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에게 러시아는 새로운 나사렛으로 보였으며, 러시아로부터 세계로 혁신과 정신적인 갱생, 기독교 사회주의 사상이 나올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그는 <스키타이인>이라는 일련의 시들 속에서 추상적인 종교와 동물들의 상징 속에 웅크리며 열광적으로, 그러나 막연하게 이 격변들을 환영했다. 하지만 낙관주의와 불안, 충만 된 기도와 신에 대한 모독을 오가는 이 시들은 지상에서 태어난 볼셰비즘의 소름 끼치는 현실에서 멀리 떠난 고양된 우주적인 톤을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유토피아적 사상에 허무주의적인 극단이 동반되었다. 그리하여 <이노니야>(1918)에서 시인은 낡은 세계만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법적인 그리스 정교와 키테주의 이상들, 전통적인 그리스 정교의 상징들, 고통 받는 예수상, 그리고 정신적 갱생으로서의 고통이라는 종교적 수단 자체도 부정했다. 이노니야라고 불리는 그의 다른 러시아에는 “살아 있는 자들의 신이 산다.” 1919년 무렵 예세닌은 농촌 시와 클류예프, 블로크로부터 받은 영향을 선천적인 재능 속에 드러내는 유망한 농민 시인이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그는 민족적인 명성을 누리면서 모스크바의 무정부주의적인 문학적 방랑자들 사이에서 창조적인 독립을 꾀하기 시작했다. 예세닌의 삶의 마지막 6년은 그의 시적 재능의 만발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내면적 평화의 붕괴를 보여준다. 예세닌은 동시대의 급진적인 변혁을 보길 갈망하면서 색다른 시를 창조하고자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는 “이미지주의”라는 새로운 경향의 고무자가 된다. 이미지니스트들은 이미지가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고 선포했고, 직감을 논리로 바꿔치기함으로써 시에서 직감을 제거했으며, 러시아 시의 정신적ㆍ민족적 토대는 인정받지 못했다. 반면 육체적 세계가 우월한 것으로 선언되어 그로 인해 시인들에게는 생리적이고, 에로틱하며, 추잡한 이미지들로 시 창작을 일구어내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미지니스트들의 시에서는 반유미주의가 덕성이 되었음에 반해 주어진 예술적인 사실로서의 재능은 폐지되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미지주의의 이데올로기는 예세닌에게 낯선 것이었다. 예세닌은 혁명이 러시아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지상 낙원을 가져다주지 않았다는 생각에 도달하자 혁명에 대한 자신의 환상이 깨어지는 것을 맛보았다. 1920년에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실제의 사회주의는 “꿈이 없이”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죽이며, 그 속에는 개인도 포함된다. 그의 창작 활동에서 종교적ㆍ혁명적으로 개혁된 러시아에 대한 유토피아가 사라졌고, 잃어버리고 시들어버린 인생, 동시대로부터 구속받지 않는 모티브가 등장한다. 옛 양식의 비산업화 된 루시(Русь, 러시아)에 대한 자신의 뿌리 깊은 낭만적인 집착을 드러내면서 예세닌은 <나는 최후의 농촌 시인>(1920)에서 “철의 방문객(도시의 산업화)”의 급박한 잠식을 슬퍼한다. 이 시는 러시아 사원과 떠나가는 루시, 농민 문화에 대한 이별 예배이자 추도식이다. 낡은 세계의 죽음과 새로운 “철”의 문화의 승리라는 테마는 비극적으로 해결된다. 1921년, 혁명에 실망한 예세닌은 반항자의 이미지에 눈을 돌려 서사시 <푸가초프>를 썼다. 이 농민 전쟁이라는 테마는 혁명 후 농민 봉기를 연상시켰다. 권력과 농민의 갈등이라는 테마를 논리적으로 이어받은 것이 서사시 <무뢰한의 나라>(1922∼1923)다. 이 서사시에서 예세닌은 자신의 반대 기조뿐만 아니라 실제 사회주의 속에서 자신이 설 자리가 없음에 대한 이해도 표현하고 있다. 1923년, 한 편지에서 그는 ‘내가 어떤 혁명에 속해 있는지 이해하기를 그만두겠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2월 혁명에도, 10월 혁명에도 속해 있지 않다는 것과 어쩌면 우리 속에 그 어떤 11월이 숨어 있었고, 숨어있는 것 같다는 것이오’라고 썼다. 1922년, 이사도라 덩컨과 결혼한 후 불운했던 그는 서유럽과 미국을 15개월간 여행하고, 1923년에 러시아로 되돌아왔다. 그의 생애 마지막 2년간 창작된 시들은 새롭게 발견된 “푸시킨적인” 스타일의 단순함과 갈수록 깊어만 가는 비극적인 고립감을 결합시킨 것이었다. 그중 대표적인 시가 <선술집 모스크바>다. 배경은 선술집이고 주민들은 창녀와 건달들, 매독에 걸린 아코디언 연주자 등으로 자신들의 끔찍함을 술과 꿈으로 달래려는 아주 영락한 자들이다. 보편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비(非)이미지주의적 언어로 쓰여진 이 시들은 즉시 수많은 러시아인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는데 그들은 모두 시 속에서 자신들의 번민을 본 사람들이었다. 이 시 속에는 시인의 드라마틱한 운명, 그의 고독함, 뉘우침, 정처 없음, 혁명의 기만, “동물의 시체”, 잃어버린 “영원” 등의 모티브가 표현되었다. <선술집 모스크바>에서 시인은 1916년부터 1918년까지의 자신의 예언자 이미지도 거부했다. 서정적 자아의 영혼은 반항에 지쳤고, 통나무집의 안락함과 들에 볏 짚단이 쌓여 있는 세계로 이끌린다. 예세닌은 한 번도 공개적으로 “반혁명”이었던 적이 없었고, 환멸적인 서유럽 여행 이후에는 때때로 친소비에트적인 시를 쓰려고 애를 썼으며, 레닌을 찬양하고 러시아의 변화된 얼굴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이를 위한 일련의 작업으로 탄생된 시들 중 하나가 <소비에트 러시아>(1924)다. “그 폭풍은 지나갔다 / 우리 살아남은 자들은 적다 / 벗들을 불러보아도 많은 이들이 없다”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혁명의 태풍이 마을을 고아로 만들어버렸다. 예세닌 세대를 대신하러 “한 마을이 아닌 온 누리가 그들의 어머니”인 그런 비(非)농민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왔다. ‘젊고 낯선 종족’과 서정적 자아의 만남이라는 푸시킨적 모티브, 세대 간의 조화와 자연스러운 상속성이라는 푸시킨적 테마는 예세닌에 의해 비극적으로 결말지어진다. 그는 자기 나라에서 외국인이며 마을 젊은이들이 “다른 노래를 부르는” 고향에서 “침울한 순례자”다. 이 시에서 사회주의를 건설 중인 마을은 시인을 배척한다. 그 역시 “그 누구의 눈에서도 안식처를 찾지 못한다.” 이제 서정적 자아도 볼셰비키적 현실로부터 스스로 담을 쌓는다. 그는 그러한 현실에 “사랑하는 수금”만은 넘겨주지 않으며, 예전처럼 “지구의 6분의 1을 차지한 / ‘러시아’라는 짧은 이름의 나라를” 찬양할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농촌은 시인에게 지상 낙원으로 보이지 않았고 러시아 풍경의 선명한 색채도 희미해졌다. “얇은 금박을 / 석양이 잿빛 들판에 흩뿌려 놓았다.” 자연을 묘사할 때 손상이라는 모티브가 등장한다. “포플러가 벗은 발을 도랑에 처박았다.” 서정적 자아는 가까운 죽음의 예감에 고독감을 느낀다. “나는 미지의 경계를 향해 홀로 가리라, / 소요하는 영혼을 영원히 잠재우고.” 고독이라는 테마가 종결된, 의미상 독립적인 대다수의 행에서 반복되는데 이것은 시에 리듬감과 깊은 비애감을 준다. 망명 시인 Z. 기피우스는 예세닌의 자살 이후 <소비에트 러시아>를 염두에 두고 <예세닌의 운명>이라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썼다. “자기 집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조국, 고향의 유행가조차 전혀 남지 않은 조국, 데미얀 베드니의 작품으로 대체된 조국에 대한 시에서 그는 갑자기 자신이 ‘불필요하다’는 느낌에 대해 말한다. 아마도 그것은 자신이 이미 ‘존재하지 않음’보다 더 두려운 느낌이었을 것이다.” “시들어버린 인간”, “흘러간 인생”이라는 모티브는 예세닌의 철학 서정시에서 잘 표현되었다. 일련의 비극적인 과정들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인 감지를 통해 예세닌은 비극주의의 날카로움을 제거하고, 혁명 후 현실과 겪는 갈등을 극복하고, 자신의 “불필요함”을 감내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 그의 후기 비가(悲歌)의 서정적 자아는 되돌릴 수 없는 젊음과 다가온 죽음을 푸시킨적으로 고요히 맞아들이는 경향이 보여준다. 시인은 지상의 삶에서 자신이 말년에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안식의 나라로 넘어가는 것에 대한 철학적 관계를 정립한다. 인간의 삶이 자연의 법칙에 종속되었다는 테마는 <금빛 숲이 입을 다물었다>(1924)라는 비가에서도 발견되었다. 숲도 “입을 다물었고”, 학들도 “이제 더는 그 누구에 대해서도 안타까워하지 않으며”, “나무가 조용히 나뭇잎을 떨어뜨리고”, 서정적 화자도 “슬픈 말을 떨어낸다.” 그에게는 “지나간 그 어느 것도 아쉽게 느껴지지 않는다.” 평행과 비교가 우주의 법칙을 느끼는 것을 도와준다. “어차피 모두가 세상의 나그네인걸.” 하지만 이때 세상은 죽지 않고 “누레져도 풀은 죽지 않고”, “마가목의 끝가지는 그을지 않는다.” 예세닌이 서사시라 불렀던 연작 시 <꽃>에 포함되는 <꽃들이 내게 말하네−안녕이라고>(1924)라는 시도 바로 이 테마에 바쳐진 것이다. 그는 이 서사시를 철학적인 작품으로 간주했으며, “과연 너는 공간 속에서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 서사시를 썼다. 시 속에서 우리는 익히 알고 있는 죽음에 대한 불평 없는 받아들임이라는 모티브와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이 묘지의 전율을 / 새로운 애무로 받아들인다.” 인생의 죄성과 반항성이 가득 느껴지는 가운데 서정적 화자가 자신의 정신적인 부활에 대한 희망을 밝히는 작품 중의 하나가 <어머니께 드리는 편지>(1924)다. 이 시는 철학적인 서정시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그 속에 예세닌 특유의 현실에 대한 철학적 시각이 역시 표현되었다. <어머니께 드리는 편지>는 예세닌의 모든 서정시가 그러하듯이 참회와 뉘우침의 특징을 갖는다. 서정적 화자는 자신의 모순으로 인해 고통 받는다. 그의 내면에는 상냥함도 있고 “반항적인 비애”도 있다. 그는 일찍이 상실감과 피로감을 맛보았다. 그러나 시 속에서 자신의 정신적인 갱생과 어머니의 사랑으로 정신적인 상처를 치유 받는 것에 대한 서정적 화자의 기대도 울려 퍼진다. “당신만이 제게 도움이자 기쁨이에요.” 시는 어머니와 고향의 집이라는 세계와 연관된 고요한 기쁨과, 그리고 주인공의 죄에 가득한 도시 생활의 대조를 이룬다. 우리는 성서에 나오는 탕자의 이야기에 대한 예세닌 식 변형을 보는 것이다. 시 속에서는 모성이라는 영원한 테마와 아들 됨이라는 테마가 전개된다. 어머니, 시인의 세계, 다시 어머니라는 순서로 시의 모습이 갖춰진다. 그들의 세계는 교차되고, 위안을 주는 자로서 어머니의 형상과 뉘우치는 아들의 형상을 완전한 하나로 결합시키는 것을 가능케 한 것은 서한이라는 장르로서 아들이 어머니에게 주의를 돌리는 것을 통해서였다. 어머니에게 선술집에서의 싸움이 보일 때 이 종합을 또한 가능케 한 것이 환영이라는 형태다. 1925년 말경, 예세닌의 시는 가장 비극적인 단계에 접어들었다. 고립되고 알코올에 찌든, 뿌리 뽑힌 그는 얼어붙은 풍경을 배경으로 한 일련의 짧은 시를 썼다. 깊어만 가는 피해망상증이 이제 겨울의 얼어붙음에 반향되었다. 1925년 11월 12일∼13일 그는 장시 <검은 인간>을 썼다. 이 시에서 그는 알코올에 의한 환각과 고문 받는 의식과의 절망적인 싸움을 표현했다. 장시 결말에서 주인공은 검은 손님−자신의 반영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정반대의 “나”의 조화를 마음속에서 확인하는 데 성공한다. 예세닌의 서정적 화자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객관적 실재로서, 자연적인 완전체로서 받아들인다. 12월 27일 예세닌은 마지막 시인 <안녕, 친구여, 안녕>을 자기 피로 썼고, 다음 날 페테르부르크의 한 호텔 방에서 목매단 채로 발견되었다. 예세닌의 작품집이 사후 발간된 이후 그의 창작 활동을 공식적으로 망각하는 시기가 시작되었다. 1927년, N.부하린의 <악한 기록>이라는 기사에서 예세닌의 시는 모욕을 받는다. 그 기사는 문학 연구 작업과 교과서들의 이데올로기적 근거가 되었다. 시인의 창작 활동은 소부르주아적이고 부농적이며 위대한 시기에 걸맞지 않은 것으로 인정되었다. 동시에 예세닌의 대중성이 성장했다. 서구와 러시아에서 그에 관한 엄청난 양의 회상 기사들이 등장했다. 1951년 파리에서 시인의 시선집이 출판되었다. 시선집의 편찬자이자 서문의 저자인 러시아 시인 G.이바노프는 소련에서 확립된 공식적인 입장에 반대하며, 예세닌의 이름과 연관된 모든 것은 사망이라는 보편적 법칙에서 제외되었다고 단언했다.   각주 1) <전원의 천사>(1915년 ∼ 1916년), <농민 예언자>(1917년 ∼ 1918년), <최후의 농촌 시인>(1920년), <상냥한 건달>(1919년 ∼ 1921년), <선술집의 방탕자>(1922년 ∼ 1923년), <예전의 건달>(1923년)을 가리킨다.  
1929    독일로 한번도 가본적 없는 유대계 독일 시인 - 파울 첼란 댓글:  조회:6106  추천:0  2016-12-07
    --------------------------------------------------------------------------------------------------------------- 파울 첼란   독일의 시인. 시집 《양귀비와 기억》(1952)에 수록된 〈죽음의 푸가〉는 현대시의 고전으로 평가된다. 1960년에 퓨히너상을 수상하였다.   본명 파울 안첼(Paul Antschel). 부코비나의 체르노비츠(당시 오스트리아령, 현재 러시아령)에서 유대계 독일인으로 출생. 제2차 세계대전 후 빈을 거쳐 파리에 정주(定住)하였으며, 센강에 투신 자살하였다. 부모를 잃은 나치스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에서 온 마음의 상처를 핵(核)으로 하여 유대 신비 사상을 숨기고,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아 드물게 보는 순수한 시공간을 창조하였다.   시집 《양귀비와 기억 Mohn und Gedächtnis》(1952)에 수록된 〈죽음의 푸가 Todesfuge〉는 현대시의 고전으로 평가된다. 생전에 6권, 사후에 3권의 시집이 간행되었고, 1960년에 퓨히너상을 수상하였다. 그 밖의 저서로 《Sprachgitter》(1959) 《Die Niemandsrose》(1963) 《Lichtzwang》(1970) 《Schneepart》(1971) 등이 있다.     1. ‘아버지’라는 가부장적 구조 속에서의 시인   실비아 플라스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그녀의 삶 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실비아의 문학에서 아버지는 가정에서 울타리 역할을 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거대하고 부조리한 가부장적인 세계의 상징이었다. 실비아의 아버지는 그녀가 만 8살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부성애의 결핍이 그녀가 페미니즘에 눈뜰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 실비아 플라스의 아버지는 매우 권위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오토 에밀리 플라스 (Otto emily Plath) 는 독일계 부모 밑에서 태어나 유럽의 전통적 문화에서 자라났다. 그는 그 후 미국에서 가정을 꾸리게 되었는데, 전통적 문화가 희박한 미국에 와서도 아버지는 권위있는 가장이어야한다는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이는 병에 걸렸을 때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가장의 모습을 잃지 않은 채 죽어간 그의 태도를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어린 플라스에게 그는 강하고 거대한 세계의 하나로 기억되었다. 실비아 플라스가 시의 소재로 삼고 있는 ‘아버지’의 이미지는 상당부분 이런 가부장적인 특성에 기초한다. 이는 자신을 개미로 비유한 시 「거상」(“The Clossus”)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 는 강제 수용소의 체험을 노래한 것이다.         파울 첼란(Paul Celan)은 누구인가? 첼란의 본명은 파울 안첼(Paul Antschel)이다. 유태인이란 이름을 숨기기 위해 첼란이라고 이름을 거꾸로 바꾼 것이다. 첼란은 1920년 루마니아 부코니아 지방의 가장 큰 도시인 체르노비츠의 유태인 부모에게서 독자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유대적 전통을 중시하며  엄격한 유대 정통 교육을 시키고자 하였다. 그의 강한 시오니즘은 첼란에게 오히려 반감을 갖게 하고, 어린 첼란은 아버지의 높은 요구와 기대로 인해 억눌린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이런 부자간의 거리감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시속에 자주 등장하는 반면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아도 느낄 수 있다. 그의 고향은 한 때 오스트리아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당시 교양 있는 집안에서는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첼란은 어려서부터 집에서는 독일어를, 학교에서는 루마니아어를 말하며 자랐다. 어머니와의 관계는 모국어인 독일어를 통해 더 밀접하게 연결된다. 부코비나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어, 루마니아어, 표준 독일어, 슈바벤 사투리어 그리고 히브리어, 이외에도 여러 언어와 사투리들을 사용하였다. 첼란은 독일어와 함께 자랐는데 이는 아버지가 유대교육을 중시한 반면, 어머니는 독일어를 더 중요시하였으며, 첼란이 정확한 표준 독일어를 쓰도록 하였다. 언어적 자질이 뛰어난 그는 루마니아어, 불어, 러시아어, 영어, 히브리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였지만 시는 모국어로 써야한다고 생각하였고, 그의 아픔과 시대적 고통을 그의 모국어이며 동시에 살인자의 언어인 독일어로 써간다. 그는  여러 언어들을 능숙히 말하고 새로운 언어를 쉽게 배우는 언어적 소질이 있음에도 모국어 외의 어떤 언어로도 결코 시를 쓰지 않을 것이라고 친구 룻 Ruth에게 늘 말하고는 하였다. 체르노비츠에서 김나지움을 마친 첼란은 프랑스의 뚜르에서 의학을 전공하지만 한 학기 후인 1939년 체르노비츠로 귀향하여 그곳 대학에서 로만스 어문학을 공부하였다. 1939년은 유럽에서 영, 불, 독, 소간의 주도권 쟁탈전이 시작되고 나치(Nationalsozialismus)의 반유태주의가 그 윤곽을 드러내던 시기였다. 체르노비츠를 포함한 부코니바의 북부가 1940년 소련령이 되었다. 그러나 그곳은 일년 후 독일과 루마니아군에 점령되어 유태인 거주지역 게토(Ghetto)가 되었다. 1942년 첼란의 가족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의 부모는 그 수용소에서 살해당하고 첼란은 극적으로 도망쳐 나왔다. 요코스트라는 사람이 첼란에 대해 쓴 글에는 다음 같이 소개되어 있다: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는 1952년에 출간된 『양귀비와 기억, Mohn und Ged?chtnis』에 수록되어 있다. 시집 제목에서 양귀비는 죽음을 상징하며, 기억은 과거의 시간과 연결된다. 이 시의 주제는 죽음과 기억이다. 이 시에서는 죽음과 기억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언어사용이 창살처럼 교차" 배열되어 있다. 시의 제목에서 나오는 푸가(fuge)는 라틴어 fuga에서 나온 말로 '도주'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음악 형식은 하나의 주제가 한 가락으로부터 다른 가락으로 달아나듯 음이 조정되는 데서 생겨났다. 푸가의 다양성은 모두 이 하나의 주제를 조바꿈하거나 변조시키면서 생겨나는 대위법상의 변화이다.     파울 첼란, 『죽음의 푸가』, 김영옥 옮김, 청하, 1986, 83~93쪽.           후광     파울 첼란       아몬드 속에-무엇이 있을까 아몬드 속에? 아무것도안이 아무것도안이 아몬드 속에 있다. 거기에 그것이 있다, 있다.   아무것도안 속에-누가 있을까 거기에? 왕이 거기에 왕이, 왕이 있다. 거기에 그가 있다, 있다.   유대 사람의 곱슬머리여, 너는 잿빛이 되지 않으리.   그리고 너의 눈은-어느 쪽으로 있을까 너의 눈은? 너의 눈은 아몬드에 맞서 있다. 너의 눈은 아몬드에 맞서 왕 쪽에 있다. 그렇게 있다, 있다.   사람의 곱슬머리여, 너는 잿빛이 되지 않으리. 왕다운 푸른 빛의 빈 아몬드.   아무도안에게 너 삶에게 다가와. 너, 손 잘려나간 팔과 함께 찾아내진 너에게 뺨을 대고.   너의, 손가락들은 저 멀리서 가는 도중, 교차로에서, 때로, 언젠가라는 이름의 먼지방석 위, 맥빠진 관절 옆에서의 휴식.   장작처럼 딱딱해진 가슴-저장소. 불에 그슬리고 있는 사랑과 빛의 노예.   너희들이 만지고 있는 밤을 지새운 이 숨구멍, 저 숨구멍 안에 아직 남아 있는 반(半) 거짓이 작은 불꽃 하나.   열쇠소리, 저 위 너의 위에 있는 숨- 나무에서. 우리를 바라보았던 마지막 낱말은 지금 제 집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   손 잘려나간 팔과 함께 찾아내진 삶, 너에게 다가와.   무슨 일이 있었던가? 돌이 산을 떠났다. 누가 깨어 있었던가? 너와 나. 언어. 언어. 함께있는-별. 버금가는-땅. 더 보잘 것 없는 것. 열려 있는 것. 고향과 같은 것.   그것은 어디로 갔던가? 소리 멎지 않은 곳을 향하여. 그것은 돌과 함께, 우리 둘과 함께 갔다. 가슴과 가슴. 너무 무겁다는 생각이 든다. 더욱 무거워진다. 더욱 가볍다.   공중에 떠있는 그 흉터의 그늘 아래 서다.   아무도안-과-아무것도안의-편에-서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은 채, 네 편에 오롯이.   그 안에 자리잡고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언어 없이도.   흑회색 황량함을 비추는 실낱 햇살 나무- 높은 사상(思想)은 빛의 소리에 제 가락을 맞추는데, 이것은 아직 인간의 저편에서 불리우는 노래들.   말을 쌓아올리기, 화산이 되도록, 바다의 물살에 휩싸여 있는 말을.   위에는 밀려드는 반(反)인간의 무리 그들이 깃발을 나부껴-영상과 잔상(殘像)이 시간 따라 덧없이 교차한다.   네가 말-달을 밖으로 내던질 때까지, 그리하여 썰물의 기적이 일어나고, 가슴- 모양의 분화구가 새로운 시작들을 위하여, 왕의 탄생을 위하여 드러날 때까지.   네 언어의 빛-바람에 썩어 문드러진 체득(體得)되지 않은 것에 관한 갖가지 지껄임-백(百)의 혀를 가진 거짓- 시, 시 아닌 시.   휘- 몰아치며, 자유로이, 인간의 모습을 한 설[雪], 참회자-눈을 지나, 환대하는 빙하 방과 식탁으로 이끄는 길.   깊이 시간의 금간 틈새 벌집얼음 에서 기다린다, 숨의 결정(結晶)이, 너의 취소할 수 없는 증언이.   아직 노래부를 수 있는 것- 저만치, 눈 덮인 곳에 소리없이 낫문자(文字)를 헤치고 나간 이의 윤곽.   소용돌이치는, 혜성- 눈썹 아래 섬광체(閃光體), 그리로 어두워진 조그마한 가슴-위성이 밖에서 붙잡은 불꽃 보듬고 바람에 불려간다.   금치산 선고 받은 입술이여, 알려라, 너 멀지 않은 곳에서, 여전히, 무엇이 일어나고 잇다는 것을.   너의 흔들리는-매인 세 갈래 손들 뒤에 재(灰)의 후광.   흑해의 옛적, 여기, 비석으로 선 서약 깊이, 물에 빠진 노 끝에 맺힌 물방울 하나 그 옛적을 솟아오르게 한다.   (그때, 수직의 밧줄을 타고 고통의 두 매듭 사이, 보다 더 높이 내 너에게로 너에게로 파고 들어갈 때, 그 밝은 타타르의 달은 우리를 따라 떠올랐지.)   너희, 세 갈래 손들 뒤에 재의 후광.   너의 앞에 동쪽으로부터 이리로 내던져진 어마어마한 것.   아무도 증인을 위하여 증언하지 않는다.         --------------------------------------------------------------------   하늘에 머물고 있는 해가 이제 지겹다. 나는 세상이 문장구조가 해체될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 -이탈로 칼비노, 『엇갈린 운명의 城』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공통체』, 정남영·윤영광 옮김, 사월의책, 2014, 27쪽.     ----------------------------------------------------------------------     ----------------------------------------------------------------------------     강신주, 김서연 만듦,『김수영을 위하여』, 천년의 상상, 2012, 99쪽.   아내 김현경은 남편 김수영을 본의 아니게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사유에 이르도록 강제한 셈이다.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에서 하이데거는 본래성(authenticity)과 비본래성(inauthenticity)에 대해 이야기했다. 간단히 설명해 보자. 나를 부당하게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싫어할 것이다.그렇지만 만약 오늘 밤에 그가 죽는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를 측은하게 보고 오히려 안스럽게 여길 수도 있다.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타인을 죽는 존재라고 엄연한 사실에 입각해서 볼 수도 있고, 아니면 나를 괴롭히려는 현재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 우리의 마음은 본래성을 회복한 것이고, 후자의 경우 우리는 비본래적인 마음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는 본래성과 비본래성이란 개념을 가지고 하이데거가 말하고자 했던 바다. 결국 타인을 본래성으로 본다는 것은 그를 ‘존재’와 ‘무’의 층위에서 보는 것. 구체적으로 말해 존재하는 무엇이든지 언젠가 ‘무’의 차원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숙명을 가졌다고 보는 것이다. 즉, 어떤 타인이든 하나의 생명체라는 시선에서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 어느 것이 측은하지 않겠으며 누구를 아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차피 얼마 지나면 다 죽어 갈 목숨이다.(99)   ----------------------------------------------------------------------------------------   늑대     바오긴 락그와수렌         하얀 첫눈을 밟은 말을 늑대가 뜯어 먹고 있다 생명과 생명이 꼬리를 물고 쓰러지는 세상 살아 있는 잠깐 사이 서로를 잡아먹으며 삶을 영위한다   영혼이 떠도는 광활한 희디흰 초원 주위에 흩어진 발자국 함께 달려들어 뜯어 먹은 야수의 발자국 배가 찬 늑대들이 행복을 찾아 저 멀리 사라지고 얼룩 끈 같은 발자국이 뼈다귀에서 멀어져 간다   잡아먹힌 말의 뼈에 닿아 멈춘 발자국에서 뜯어 먹은 늑대의 뼈다귀가 있는 점까지 이 발자국은 계속될 것이다 죽고 산 모든 것을 발자국은 염주같이 연결한다   이 염주로 자비의 보살이 다라니경을 외신다       바오긴 락그와수렌, 『한 줄도 나는 베끼지 않았다』, 이안나 옮김, 문학의숲, 2013, 14~15쪽.       ------------------------------------------------------------------                                       시와진실 시선집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  파울 첼란    지음 | 제여매  옮김  | 시와진실  | 2010년 11월 10일 출간   죽음의 푸가 파울 첼란 시선  파울 첼란    지음 |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11년 07월 29일 출간 죽음의 푸가(세계문제시인선집 2)  파울 첼란    지음 | 김영옥  옮김  | 청하  | 1995년 02월 15일 출간 (1쇄 1986년 01월 01일)   죽음의 푸가(열음세계시인선 3)  파울 체란    지음 | 고위공  옮김  | 열음사  | 1985년 05월 01일 출간      죽음의 푸가 - 파울 첼란 시선 파울 첼란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110728   제2차 세계대전과 아우슈비츠라는 참혹한 비극을 감당해야 했던 유대인으로서, 그 고통을 아름답고 밀도 높은 시어로 표현해 낸 20세기 독일의 대표 시인 파울 첼란의 시선집 [죽음의 푸가]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시선집은 1986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첼란의 시에 관한 이론서를 펴낸 전영애 교수가 30여 년 전 독일에서 번역해 놓은 시들을 2001년부터 10년 동안 틈틈이 다듬어 내놓는 것이다.전후 독일 문단에서는 아우슈비츠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서정시 자체를 쓸 수 없다는 의식이 만연해 있었다. 유대인 학살을 자행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과 함께 인간에게 친숙했던 세계가 무너져 버렸는데 어떻게 인간이 다시 이 세상에 대해 시적으로 노래할 마음을 가질 수 있냐는 것이었다.           손 님 저녁 오래 전 어둠과 인사를 나눈 자가 너의 집에 유숙한다. 낮 오래 전 그는 잠에서 깨어나 떠나기 전 잠을 불러일으킨다, 발걸음 소리 울려퍼진 잠을, 네게는 그가 먼 곳을 횡단하는 소리 들려 오고 그곳으로 네 영혼을 던진다. - Paul Celan ============================= 테나브리에 우리가 가까이 있나이다, 주여, 가까이 붙잡을 수 있도록 벌써 붙잡혀 있나이다, 주여 서로 움켜잡고 있나이다, 주여, 마치 우리들 각자의 몸이  주 당신의 몸이기라도 하듯 기도하소서, 주여, 우리에게 기도하소서 우리가 가까이 있나이다 우리는 바람에 비틀비틀 걸어갔습니다 함지와 화산이 터져 생긴 연못으로 우리는 가 엎드렸습니다 우리는 물가로 갔습니다, 주여 그런데 그것은 피였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흘린 피였습니다, 주여, 피가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당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여, 눈과 입은 헤벌어져 텅 비어 있습니다, 주여, 우리는 들이마셨습니다, 주여 피와 피에 비친 주 당신의 모습을 기도하소서, 주여 우리가 가까이 있나이다. ---- "테나브리에"라는 단어는, 예수 수난을 기리는 아침기도와 찬미가를 뜻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만, 라틴어이기도 합니다. 아주 어두운 어둠. 한국 말로 하자면, '흑암' 정도의 뉘앙스를 가진 단어라고 하더군요.   시는 붉은 자색 울음의 기록이다. 인간이 필요로 할 때  시는 신처럼 등 돌린다. 시인은 언어의 祭壇 제물로 바쳐진  양이다. 그  제물로 바쳐진 시인이 파울 첼란 이다.   흑암(黑暗)                            파울 첼란   우리는 가까이 있습니다, 주여, 잡힐 듯 가까이.   붙잡혔습니다, 주여, 우리 각자의 몸이 당신의 몸인 듯, 서로 움켜 안았습니다, 주여,   기도하소서, 주여, 우리를 향해 기도하소서, 우리는 가까이 있습니다.   바람에 뒤틀리며 갔습니다, 물이 괴어있는 은박지를 향해, 몸을 굽히려고 갔습니다   물을 찾아갔습니다, 주여.   그것은 피였습니다, 당신이 흘린 피였습니다, 주여.   그것이 반짝였습니다.   우리는 마셨습니다, 주여. 피와 피에 담긴 모습을, 주여.   기도하소서, 주여. 우리는 가까이 있습니다.                         *흑암은 성서적 의미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리는 6시부터 9시 사이의의 칠흑 같은 어두움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유념하자. 이 짧은 시에서 주를 부르는 호칭어 ‘주여’가 시 속에서 11번이나 반복되고 있다는 것도 유념하자. * 이 시는 첫 연부터 고난 받는 절박한 마음의 공포에  차 있다.  위험에 잡힐 듯 그러한 가까운 거리에 인간이 처해 있는 것이다. 다가올 운명에 대한 무기력함, 죽음에 대한 공포 속에서 우리 몸뚱어리들은 서로 껴안고 주의 몸인 듯, 살려 달라 움켜 안으며 주를 애절하게 부른다.   기도하소서, 주여, 우리를 향해 기도하소서, 우리는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가 우리를 위해 기도해야해야 한다는 역설의 표현이다.  이렇게 주와 가까이 있는 우리를 위해, 우리를 향해, 기도하소서, 요청하는 것이다.   바람에 뒤틀리며 갔습니다, 물이 괴어있는 은박지를 향해, 몸을 굽히려고 갔습니다.   물을 찾아갔습니다, 주여.   그것은 피였습니다, 당신이 흘린 피였습니다, 주여.   그것이 반짝였습니다.   죽음을 향해 뒤틀리며 찾아 가는 곳은 도살장에서 도살한 고기를 담아두는데 사용한 은박지 같은  곳이다. 그러나 성경 구절처럼  ‘주님은 푸른 초원과 물가로 나를 인도하는 목자가 아니다.  우리는 은박지 속의 물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 물은 물이 아니라 주님의 피를 발견한다. 그 피는 우리의 눈에 반짝거린다. 마치 새 희망처럼.   우리는 마셨습니다, 주여. 피와 피에 담긴 모습을, 주여.   기도하소서, 주여. 우리는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가 마시는 것은 핏속에 담긴 주님의 형상, 고난의 모습이다. 그 순간 기도가 요청된다. 우리를 ‘버리지 마옵시라’는 기도. 우리는  고난 받았던 주님과 똑같이 이처럼 ‘가까이’ 에서 고난을 받는 존재임을 알아주시고 기도해주시기를 바란다는 뜻이 담겨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시의 ‘가까이’라는 말은 부정적 반어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가까이’ 있는 것은 신 같으나 신은 ‘붙잡기 어려운 존재’로 나타난다. ‘가까이 있으나 붙잡기 어려워라 神은’ 이 구절은 횔덜린의 시 ‘파트모스’에 나오는 구절로서 첼란은 이 구절을 자신의 시 속에 그대로 인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흙의 기억                                   파울 첼란 그들 안에 흙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파냈다.   그들은 파내고 또 파냈다, 그리하여 그들의 낮과 밤이 갔다. 그들은 듣건대, 이 모든 것을 원했고, 듣건대, 이모든 것을 알았던 신을 찬미하지 않았다.   그들은 파냈다 그리고 더는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그들은 지혜롭게 되지 않았으며, 아무런 노래도 짓지 않았고, 아무언어도 생각해내지 않았다. 그들은 파냈다.   나는 파낸다, 당신은 파낸다, 그리고 그것, 그 버러지도 파내고, 그리고 저기 노래부르는 이가 읊조린다, 그들은 파낸다고.   오 누구, 오 아무, 오 아무도 아닌, 오 당신이여. 오 당신이 파내고 또 내가 파내고, 그리고 내가 당신한테로 나를 파내 던지고, 그리하여 우리 손가락에서 그 반지가 잠을 깬다.                              * 첼란의 시 속에서 神은 위대한 창조주가 아니라 그저 ‘당신’으로 호칭된다. 존경심이 없다.  ‘아무도 아닌 자’ ‘누구도 아닌 자‘로도  불리어지기 시작한다. 신이라는 이 거룩한 이름은 그에게는 우리를 위해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 아무 것도 아닌 쓸모없는 자로 불리어 지는 것이다.  시에서도 계속 흙을 파는 행위가 반복되고 있다. 밤과 낮으로 벌어지고 있는 죽음의 역사에 대한 끈질긴 회상이 지속된다. 강제수용소에서의 무덤을 파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은 태초에 창조주의 손에 의해 흙으로 빚어졌다.  그러나 숨과 생명을 불어넣은 그 흙을 파낸다는 행위는 신의 뜻을 거역하고 파괴하는 행위이리라. 우리는 강요에 의해 그 뜻을 거역한 자들인 것이라는 자책과 함께 우리로부터 등을 돌린 신에 대한 원망이 이 시속에 깔려 있다.   無 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無이며, 無로 남을 것입니다. 꽃을 피우며; 無의  그 누구도 아닌 자의 장미. (...) 우리가 노래불렀던 그 자색어의 붉음이어라.                                            -파울 체란 ‘나는 무’에서   이 찬미가는 슬픔과 아픔으로 얼룩져 있다. 신은 ‘누구도 아닌 자로’로 불리우고 있을 뿐이다.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닌 ‘無’이다. 시인은 인간을 영원한 無로서 보고 있다. 또한 시인은 신 조차도 이제 ‘無’로 표현하고 ‘아무도 아닌 자와 같은 ’ 동격으로 취급 한다. 신의 장미, 그 영광은 이제 지상에서 우리 인간들이 노래 불렀던  ‘붉은 울음’(紫色語의 붉음)라는 것이다.   神을 ‘아무도 아닌 자’로 규정하는 파울 첼란의 세계관은 많은 반기독교적인 시인에게 공감을 주었다. 우리는 프랑스의 거장 쟈크 프레베르(1900~1966)의 시 ‘하나님 아버지’에서도 이와 유사한 이미지를 찾을 수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거기 그냥 계시옵소서 그러면 우리도 땅위에 남아 있으리다.                                 -쟈크 프레베르 ‘하느님 아버지’에서   주기도문을 빌어 풍자한 이 시는 시인의 반종교적 성향을 담고 있지만 이제 신은 구원의 메시아가 아니라 땅과 격리된 하늘에 있는 관념적 존재일 뿐이다. 훼밍웨이도 단편 ‘해진 날’에서  주기도문을 패러디하여 지문 속에 남겨놓은 바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허무님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허무가 임하옵시며 허무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어다 오늘날 우리가 일용할 허무를 주옵소서 권세와 영광이 허무님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리안네                            파울 첼란   라일락도 꽂지 않은 네 머리, 유리거울 같은 네 얼굴 눈에서 눈으로 구름이 흐른다. 소돔에서 바벨로 일듯이. 나뭇잎인 양 구름은 탑을 쥐어뜯고 유황불 타는 숲을 미쳐 맴돈다. 그리곤 번개도 번쩍인다. 너의 입가에서- 바이올린의 잔해를 지닌 저 계곡. 눈처럼 흰 이빨로 바이올린의 활을 그으니 오 더욱 아름답게 갈대는 울렸었는데! 사랑하는 이여, 너 또한 갈대이고 우리 모두는 빗발이어라. 작은 단지의 푸르름으로 너 그렇게 우리를 훌쩍 뛰어넘어 가는데 우리는 잠들어 있다 천막 앞에 백 명의 병사가 집합하고 있고 우리는 마시며 마시며 마시며 너를 무덤으로 나르고 있다   * 이 시는 마리안네라는 한 바이올린을 켜던 아름다운 처녀의 유골을 묻고 오던 날을 회상하고 있다. 굳이 설명하자면 이렇다. ‘라일락꽃을 머리칼에 꽂지 않았어도 늘 해맑았던 마리안네. 눈처럼 희고 눈부신 그녀의 바이올린 솜씨는 갈대밭의 바람결처럼 황홀했었다. 너는 마치 갈대밭의 애처로운 갈대같았다. 네가 갈대라면 우리의 사랑은 그 위에 내리는 비(雨)였다. 이제 너는 유골단지의 한 줌 재가 되어 있다. 우리는 병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너를 무덤으로 나른 슬픈 기억이 있다.’   * 파울 첼란의 문학은 죽음보다도 어두운 죄의식을 바탕에 깔고 시대와 신에 대한 질문을 가한다. 그는 평생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겪은 정신질환인 추적망상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가 몸을 던져 자살한 세느강은 시인의 오열을 삼키고 오늘도 흐른다.  첼란이 하이데거에게 남긴 그 유명한 말을 음미해보자.   길 왼쪽에는 야생의 백합이 꽃 피고 다른 쪽에는 도라지가 자라고 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엔 패랭이가 눈부시게 커가고 있다. 당신을 위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를 위해 있는 것도 아닌 언어, 도 도 없는 언어, 뿐이고, 뿐인 언어, 알겠는가, 그것만이 있는 것이다   파울 첼란은 1920년 11월 23일 루마니아 부코비나 지방의 가장 큰 도시 체르노바츠에서 유태인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곳은 한때 오스트리아에 속해 있었으므로 어릴 때부터 독어와 루마니아어를 배웠고, 부유하고 교양있는 지식인 부모 덕택에 첼란은 18세때 프랑스 뚜르대학에 합격해  의학수업을 하러 1년간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고향에 돌아와 문학을 공부하게 된다. 1939년은 나찌가 반유태주의를 선언한 시기이다. 세계2차 대전이 일어나자 그의 고향 체르노비츠를 포함한 루마니아 부코비아 북부는 1940년 소련영토가 되었다가 이듬해에는 다시 독일과 루마니아 점령군에 의해 유태인만 모여살아야 하는 유태인 거주지역 게토로 획정된다. 첼란의 나이 21때 일이었다. 1941년 독일군이 도시를 점령하면서 유태인들의 박해와 탄압이 시작되기 시작했다. 첼란은 재빨리 숨을 수 있었으나 집에 있던 부모는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게 된다. 첼란이 집에 도착했을 때는 부모님은 이미 체포되어 집에 없었다. 첼란도 수용소로 끌려가 강제노역을 하게 되지만 부모의 소식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1942년 늦가을 아버지의 죽음을 전해 듣게 되고 그 해 겨울에는 어머니가 일 할 능력이 없는 이유로 총살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부모가 처참한 죽음을 당한 그에게도 어느날 죽음과 삶의 주사위를 선택해야 하는 운명의 사건이 예고되어 있었다.     흔히 첼란을 기억속에 끔찍한 어둠을 지닌 시인이라고 말한다. 일생동안 과거의 상흔과 죄의식을 품고 살아온 그가 시달린 죄책감은  강제수용소에서 살아 나오기 위해 그가 택해야 했던 이런 생존방식에서 연유한다. 첼란은 다시 루마니아의 강제수용소로 이소되었다가 1944년 고향인 체르노비츠로 돌아오게 된다. 그 해 3월부터 체르노비츠는 소련령이 되었고 노동수용소에서 풀려나온 첼란은 루마니아의 수도 부카레스트로 가서 번역과 출판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시는 1947년에 루마니아 문예지에 처음 발표되었다. 1947년 첼란은 독일어권인 비엔나로 가서 횔덜린과 게오르그 트라클의 시를 접하게 된다. 나찌 시대의 어두운 기억을 지닌 그는 이 두 명의 독일시인의 삶에서 불행했던 시인들이라는 어떤 동질성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비엔나에 머물 때 첼란은 초현실주의 화가 레드가 에네와 친하게 지냈는데 그는 당대 초현실주의 시인의 거장 앙드레 브르똥을 소개시켜 주었다. 그 후 빠리에 정착하면서 첼란은 죽을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고 독일어로 시를  쓴다. 1950년 부터 빠리의 한 대학강사로 있으면서 시작활동을 해왔지만 나찌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끊임없이 시달리는 <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의식>으로 인해 1970년 세느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말았다.  그는 루마니아계 유태인으로서 독일은 한번도 가 본적이 없는 시인으로서 창작기의 대부분을 빠리에서 보냈으며 그곳에서 안타까운 생을 마쳤다. 언어적 자질이 뛰어났던 그는 루마니아어, 불어, 러시아어, 영어, 히브리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지만 부모를 죽인 독일인의 언어로 시를 썼다... [출처] 파울 첼란|작성자 다리오75 [출처] 파울 첼란|작성자 다리오75     ● 죽음의 푸가를 읽기 전에   20세기가 되면 유럽의 문학사조는 표현주의 시대입니다. 자연과학이 발달하고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대두되고, 산업혁명 등으로 부의 축적이 이루어지며 대도시로 몰려든 인간에게는 이제 생명의 존엄성은 고사하고 인간 자체로서의 실존의 위협을 받습니다. 언제나 기계의 노예로 물질의 노예로 전락한 인간은 가치없는 수단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는 불안이 팽배해졌습니다. 게다가 기성세대는 강압적인 전통교육을 젊은세대에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젊은이들은 이제 새로운 세계를 갈구합니다. 이때 마침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이 젊은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낡은 전통을 때려부수는 가치전도를 시도했습니다. 그것은 그대로 문학에도 전달됩니다. 아름다운 낭만주의 시같은 모양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모습은 하잘 것 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작가들은 생철학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각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자의식을 잃은 인간은 기존 전통을 따르는 인간들이라고 작가들은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시에서, 소설에서, 희곡에서는 대도시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노동자, 길가의 창녀들을 주로 작품에 옮깁니다. 이웃사랑이나 동포애를 잊은지 오랜 군상들의 모습은 곧 세기말의 현상이자 불안한 20세기 초의 모습입니다. 이제 인간은 인류종말에 와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와중에 세계 제1차대전이 터집니다. 인간의 생명이 더더욱 위급해졌습니다. 실존이 문제입니다. 이어 세계 제2차대전이 발발하고 지식인들은 해외망명길에 오릅니다. 나치의 히틀러 정권은 유태인 대학살에 나섭니다. 현대작가들은 유태인 학살 이후 이제 인간에 대해 글로 쓸 것이 없다고 합니다. 너무나 허무해서 작가의 글로 무엇을 쓸 것이며 쓴다한들 무슨 대책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끝까지 유태인 학살의 문제를 고발한 작가가 있습니다. 너무나 가슴아픈 과거를 경험한 파울 첼란이란 시인입니다. 그의 시는 ‘유리병 편지’입니다. 다급하여 해안가에서 급히 글을 써서 망망대해에 띄웁니다. 누군가 이 ‘유리병 편지’를 건져 읽고는 첼란이 경험한 일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이렇게 띄웁니다. 그 편지는 우리나라의 기형도 시인이 읽었는지 그는 ‘80년대’의 광주사태를 다룬 시를 썼지요. 낮은 목소리로 다급히 전하는 시인의 시를 독자는 참담한 마음으로 한 시대를 읽게되는 서정의 울림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나라 시인 기형도의 「대학시절」이란 시를 한번 소개하며 첼란으로 넘어갑시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기형도 전집, 문학과 지성사, 서울 1999, 43면)     위의 시를 읽으면 분명 기형도라는 시인이 저 서구의 첼란 작품을 분명 읽었음을 알 수 있다. 첼란의 ‘유리병 편지’가 극동의 대한민국에서 자행되었던 광주사태를 아파하는 작가에게도 전달된 것이다. 독자가 유태인이 아니면서도, 학살을 목격하지도 않았으면서도 첼란이 던지는 물음에 당혹을 느끼는 것은 아마도 절명의 위기에서 살아난 생존자 한 개인의 생애의 고통스러운 기억만이 아니라, 삶의 조건이, 인간의 조건이 그의 시속에 함께 울리기 때문일 것이다. 자 이제 첼란의 그 아픈 시를 읽기 전에 작가를 둘러보자. 파울 첼란(Paul Celan)은 누구인가?   첼란의 본명은 파울 안첼(Paul Antschel)이다. 유태인이란 이름을 숨기기 위해 첼란이라고 이름을 거꾸로 바꾼 것이다. 첼란은 1920년 루마니아 부코니아 지방의 가장 큰 도시인 체르노비츠의 유태인 부모에게서 독자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유대적 전통을 중시하며  엄격한 유대 정통 교육을 시키고자 하였다. 그의 강한 시오니즘은 첼란에게 오히려 반감을 갖게 하고, 어린 첼란은 아버지의 높은 요구와 기대로 인해 억눌린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이런 부자간의 거리감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시속에 자주 등장하는 반면에,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아도 느낄 수 있다.   그의 고향은 한 때 오스트리아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당시 교양 있는 집안에서는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첼란은 어려서부터 집에서는 독일어를, 학교에서는 루마니아어를 말하며 자랐다. 어머니와의 관계는 모국어인 독일어를 통해 더 밀접하게 연결된다. 부코비나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어, 루마니아어, 표준 독일어, 슈바벤 사투리어 그리고 히브리어, 이외에도 여러 언어와 사투리들을 사용하였다. 첼란은 독일어와 함께 자랐는데 이는 아버지가 유대교육을 중시한 반면, 어머니는 독일어를 더 중요시하였으며, 첼란이 정확한 표준 독일어를 쓰도록 하였다. 언어적 자질이 뛰어난 그는 루마니아어, 불어, 러시아어, 영어, 히브리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였지만 시는 모국어로 써야한다고 생각하였고, 그의 아픔과 시대적 고통을 그의 모국어이며 동시에 살인자의 언어인 독일어로 써간다. 그는  여러 언어들을 능숙히 말하고 새로운 언어를 쉽게 배우는 언어적 소질이 있음에도 모국어 외의 어떤 언어로도 결코 시를 쓰지 않을 것이라고 친구 룻 Ruth에게 늘 말하고는 하였다.1)   체르노비츠에서 김나지움을 마친 첼란은 프랑스의 뚜르에서 의학을 전공하지만 한 학기 후인 1939년 체르노비츠로 귀향하여 그곳 대학에서 로만스 어문학을 공부하였다. 1939년은 유럽에서 영, 불, 독, 소간의 주도권 쟁탈전이 시작되고 나치(Nationalsozialismus)의 반유태주의가 그 윤곽을 드러내던 시기였다. 체르노비츠를 포함한 부코니바의 북부가 1940년 소련령이 되었다. 그러나 그곳은 일년 후 독일과 루마니아군에 점령되어 유태인 거주지역 게토(Ghetto)가 되었다.   1942년 첼란의 가족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의 부모는 그 수용소에서 살해당하고 첼란은 극적으로 도망쳐 나왔다. 요코스트라는 사람이 첼란에 대해 쓴 글에는 다음 같이 소개되어 있다:   파울 첼란이 죽느냐 사느냐를 결정해야 할 그 아침이 왔다. 유태인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 점호를 부르는 곳에 서 있었다. 사람이 많은 쪽은 가스실로 갈 유대인이고, 사람이 적은 다른 쪽은 바깥쪽으로 내보내질 것이었다. 당시 유태인은 트럭과 교환될 수 있었다. 첼란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 보초가 서있는 사람들을 세느라고 정신이 없을 때, 첼  란은 순간 가스실로 결정된 무리들 속에서 나와 밖에 팔려나갈 무리들 속으로 도망쳤다. 이제 죽음에 바쳐질 사람들 중의 하나가 모자라게 된 것이다. 이송 책임자가 와서 명단과 서있는 사람들 수를 대조하더니 세는 의식을 다시 시켰다. 다시 숫자가 맞지 않자, 그는 간단히 밖에 나가기로 되어있는 쪽에서 가장 앞줄에 선 한 남자에게 손짓하였다. 이 운 없는 사람이 이제 첼란을 대신하여 가스실로 가야했다. 첼란은 밖으로 나왔다.   첼란은 그후 루마니아의 노동 수용소에서 수감되었다가 1944년에 체르노비츠로 돌아왔다. 그해 3월부터 그곳은 소련령이 되었고 이듬해 첼란은 루마니아의 수도 부카레스트로 갔다. 1947년 5월 루마니아에서 발행된 『아고라』에 처음으로 그의 시가 발표되었다. 1947년 12월 첼란은 스스로 독일의 친 문학의 중심지라 생각한 비엔나로 갔다. 이듬해 봄 첫 시집 『유골단지에서 나온 모래』를 출간하나 잘못 박힌 철자가 너무 많아 판매를 중지했다.   비엔나에서 초현실주의 화가 에드가 예네(Edgar Jene)와 친하게 지냈었는데 그가 첼란을 앙드레 부르똥 (Andre Breton)에게 추천하였으며 파리에서 이 초현실주의 대부는 첼란을 기꺼이 맞아들였다.   그후 파리에 정착하면서 그곳에서 독어독문학과 언어학을 전공하고 1950년부터 파리의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면서 1970년 세느강에 투신하여 죽을 때까지 번역과 창작 활동을 했다. 부모가 처참한 죽음을 당할 때에 자신은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은 첼란의 삶 동안 그를 괴롭힌다. 아버지에 대한 반감과 함께 유대교로부터 거리를 두었던 첼란은 부모의 죽음과 유대민족의 고난을 통해 박해받고 고난에 처한 민족에 가까이 다가가며 그 아픔을 함께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또 이들의 고난을 통해 그는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동질성을 찾게되고, 고난받는 민족에 대한 강한 유대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런 죽음의 운명적인 체험은 첼란의 문학을 해석되기를 거부하는 듯 난해하고 어둡게 하는데, 이런 그를 "어두움의 대가 Meister der Dunkelheit"2)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모든 후유증세를 다 지니고 있었다. 그 중의 한 가지는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의식’이었다. 그는 말년에 아우슈비츠를 탈출한 추적망상에 시달리다가 1970년 세느강에 몸을 던져 자살을 했다.   파울 첼란의 가장 잘 알려진 시 『죽음의 푸가』는 강제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노래한 것이다. 그가 독일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독일을 가 본적도 없었는데도 파리에서 살면서 독일어로 시를 쓰고 독일 출판사에서 시집이 간행한 이유는 어쩌면 아우슈비츠에서 잔행된 독일의 만행을 경고하기 위한 엄중한 경고인 것 같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유태인에 대한 단 일회적인 대학살에 대해 첼란은 자기 대신 죽은 자에 대한 죄책감에 빠져 평생을 속죄하며 죽음의 푸가 같은 류의 시를 썼다. 첼란의 시는 고통을 표현하고 고통을 언어로 감당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된 유태인과 함께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이 친숙했던 세계가 무너져 버렸는데 어떻게 인간이 다시 이 세상에 대하여 시적인 또는 노래할 마음을 가질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첼란은 추상의 언어와 함께 조각난 낱말들이나 중간에 끓어져 다음 행에 계속되는 말, 침묵, 생략, 비약 등의 심한 말더듬과 말막힘 경향을 보인다. 첼란은 언어를 현실과 관련시키기 위하여 온갖 시도를 다하고 있는데, 그것은 현실에 상처를 입은 채 현실을 찾고 얻으려는 시도이다.           죽음의 푸가(Todesfuge)에 대해   이 시를 읽으면 어느덧 우리는 시속의 ‘우리’가 되고 만다. 이 시에는 느낌표나 쉼표도 없다. 작가가 안겨주는 시를 읽으면서 숨가쁘게 처절한 유태인 문제, 아니 세계동포인 인간에 대한 아픔에 빠지게 된다. 그러면 이제 이 시의 구성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는 1952년에 출간된 『양귀비와 기억, Mohn und Gedächtnis』에 수록되어 있다. 시집 제목에서 양귀비는 죽음을 상징하며, 기억은 과거의 시간과 연결된다. 이 시의 주제는 죽음과 기억이다. 이 시에서는 죽음과 기억이라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언어사용이 창살처럼 교차" 배열되어 있다. 시의 제목에서 나오는 푸가(fuge)는 라틴어 fuga에서 나온 말로 '도주'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음악 형식은 하나의 주제가 한 가락으로부터 다른 가락으로 달아나듯 음이 조정되는 데서 생겨났다. 푸가의 다양성은 모두 이 하나의 주제를 조바꿈하거나 변조시키면서 생겨나는 대위법상의 변화이다.   우선 주제가 제시되면, 그에 대한 반주제가 성립되고, 곡에서 주를 이루는 이 두 개의 가락은 각기 그에 상응하는 응답을 가진다. 우선 이 시의 푸가 형식을 살펴보면 1연에서 1-3행이 주제이고, 4행이 그에 대한 답(答句)이며, 5-6행이 대주제, 7-9행이 그에 대한 답구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에 따라 시는 두 개의 주된 가락을 갖게 되는데, 파울 첼란은 이러한 이중구조를 통해 유태인과 그들을 억압하는 독일인의 모습을 대비시킨다. 위의 주제들은 매연마다 유사하게 반복되고 있고 이러한 반복어구는 주술적인 효과를 자아내면서 독자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혼돈과 역설이 지배하는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이 시에서 서술자인 첼란은 유태인의 입장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수용소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시는 부문장 없이 주문장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계속되는 반복 어구는 주술적인 효과를 자아낸다. 시에 등장하는 유태인 여성 줄라미트(Sulamith)와 독일의 가장 흔한 이름들 중의 하나인 마르가레테(Margarete)라는 여성을 서로 대비시키는 모티브, 무덤파기와 죽음의 춤이라는 유희 모티브, 색깔 상징들이 푸가 형식의 대위법 구조로 서로 얽히면서 유태인과 독일인의 운명을 대비시킨다.   첼란은 중얼거리는 듯한 독백 속에서도 하나의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유태인들이 자기 무덤을 파고 독일인의 총에 맞아 무덤에 묻힌다고 하는 구체적인 사건이 그것이다.   다음의 시에는 전혀 서정성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아픔이 물씬 퍼져있다:                     작품 분석                   죽음의 푸가                                                                     파울 첼란     새벽의 검은 우유¹ 우리는 그것을 저녁에 마시고   우리는 그것을 한낮에 마시고 아침에 마시고   우리는 그것을 밤에 마신다   우리는 마시고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사람이 비좁게 눕지 않는다   한 남자가 집에서 산다 그는 뱀들과 더불어 논다 그는 편지를 쓴다   날이 저물면 그는 독일을 향하여 마르가레테²너의 금빛 머리라고 쓴다   그가 그것을 쓰고 집 앞으로 나오면 별이 빛난다 그는 제 사냥개를   휘파람으로 부른다   그는 자기 유대인들을 불러내 땅에 무덤을 파게 한다   그는 우리에게 명령한다 이제 무용곡을 연주하라고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밤에 마신다   우리는 너를 아침에 마시고 한낮에 마신다 우리는 너를   저녁에 마신다   우리는 마시고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에 산다 그는 뱀과 더불어 논다 그는 편지를 쓴다   날이 저물면 그는 독일을 향하여 마르가레테 너의 금빛 머리라고 쓴다   줄라미트³너의 잿빛 머리라고 쓴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사람이 비좁게 눕지 않는다   그는 소리친다  너희들 한 무리는 더 깊이 땅을 파고 너희들   다른 무리는 노래하고 연주하라고   그는 허리띠의 권총을 움켜잡고 그것을 휘두른다 그의   눈은 푸르다   너희들 한 무리는 삽을 더 깊이 파고 너희들 다른 무리는   계속해서 춤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밤에 마신다   우리는 너를 한낮에 마시고 아침에 마신다 우리는 너를   저녁에 마신다   우리는 마시고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에 산다 마르가레테 너의 금빛머리   줄라미트 너의 잿빛머리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소리친다 더 달콤하게 죽음을 연주하라고 죽음은 독일이   낳은 명인(名人)이다   그는 소리친다 바이올린을 더 어둡게 켜라 그리고 너희들은   연기되어 공중으로 올라간다   그러면 너희들 무덤은 구름 속에 있고 거기서는 사람이 갇히지 않는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우리는 너를 한낮에 마신다 죽음은 독일이 낳은 명인이다   우리는 너를 저녁에 마시고 아침에 마신다 우리는 마시고   또 마신다   죽음은 독일이 낳은 명인이다 그의 눈은 푸르다   그는 총알로 너를 맞춘다  그는 너를 정확히 맞춘다   한 남자가 집에 산다 마르가레테 너의 금빛 머리   그는 제 사냥개를 풀어 우리를 몰이한다 그는 우리에게   공중의 무덤을 선사한다   그는 뱀을 가지고 놀고 꿈꾼다 죽음은 독일이 낳은 명인이다   마가레테 너의 금빛 머리   술라미트 너의 잿빛 머리     1) 나찌수용소 가스실의 독가스 2) 괴테의 파우스트 Ⅰ부에 나오는 그레트헨을 생각나게 한다. 3) 성서 아가(雅歌)의 여자를 생각나게 한다.     이 시는 한 호흡에 주욱 읽어 나가는 시입니다. 왜냐하면 시에 ‘,’이나 ‘.’이 전혀 없기 때문이지요. 시는 처음에 ‘검은 우유’라는 모순어법으로 시작됩나다. 흔히 고난, 슬픔, 위협 등을 뜻하는 검은 색과 결합된 이 은유는 시에서 죽음의 양식을 의미합니다. 그런 위협이 새벽뿐 아니라 밤낮 없이 이어져요. 유태인의 운명을 암시하는 첫 3행의 주제에 이어서 답구가 그에 대응합니다. '공중의 무덤'이라는 은유법에는 죽어서라도 하늘 나라에 들고 싶다는 유태인의 희망과 내세사상이 담겨 있어요. 그리고 나서 대주제가 이어집니다. 시에는 집안에 살고 있는 남자가 나옵니다. 그는 지배자이기 때문에 밖이 아니라 안에서 산다. 그는 뱀을 가지고 놀아요. 뱀은 성경 창세기에 언급된 것같이 저주받은 권력의 상징이며 사탄입니다. 또한 이 남자는 어두워지면 편지를 쓸 만큼 여유를 보입니다. 사람이 죽어가는 와중에 그는 느긋하게 그 흔해 빠진 독일의 마르가레테라는 이름을 지닌 처녀(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토록 무수히 많은 인간을 죽인 전쟁, 학살, 거기서 현대 작가들은 무엇을 쓸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시속의 그 남자는 밤이면 글을 씁니다. 그에 대응하는 7-9행의 답구에서 남자는 휘파람을 불고 사냥개를 몰아 유태인에게 땅속에 무덤을 파고 춤을 추라고 강요합니다. '땅 속의 무덤'은 '공중의 무덤'에 비해 현실의 냉혹함을 대변합니다. 이 무덤은 유태인을 파묻기 위한 무덤입니다.   2연에서 “검은 우유”는 직접 “너”로 호칭되면서 화자와 훨씬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됩니다. 그와 함께 “우리” 라고 말하는 화자의 생활 공간은 더욱 큰 위협을 받으며 상황도 고조됩니다.   6행에서는 처음으로 유태 여자 이름인 줄라미트가 등장하며 1연에서 이미 나온 독일 여자 이름인 마르가레테와 대조를 이룹니다. 이제 남자는 허리에 찬 탄띠에 손을 대고 위협을 가하며, '무덤파기와 죽음의 춤' 이라는 유희 모티브도 한층 고조됩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색채 모티브가 첨가되고 있습니다. 남자 눈의 푸른색이 그것입니다. 금발의 마르가레테와 푸른 눈의 남자, 이 두 가지 색깔의 결합은 유태인 학살 때 게르만 민족의 순수성을 선별하는 기준이 되었던 표지로서 북구인들에게는 '파멸을 초래하는 것에 대한 표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3연 6행에서 죽음이 직접화법으로 두 번 연속된다. 죽어서 신적인 것과 합일을 이룬다는 신비주의적 용어 "달콤한 죽음"이 여기서는 남자의 조롱으로 희화화됩니다.   8행에서는 이제까지 '공중의 무덤', '땅 속의 무덤'이던 것이 '구름 속의 무덤'으로 바뀝니다. 일반적으로 구름이란 무상함의 표상으로 사용된다는 점으로 미루어, 유태인이 믿고 있는 종교적인 확신이 여기서는 남자의 조롱거리가 되고 무(無)의 세계로 몰가치화 되고 있습니다.   4연 첫 주제의 반복 속에는 명인-죽음-모티브가 삽입되어 있어요. 이제까지 어느 정도 질서 있게 진행되던 주제와 반주제의 형식이 혼합되고, 줄곧 이어져온 분위기 상승의 종결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죽음이 마침내 분리된 두 개의 세계 사이에 우뚝 섭니다.   4연 4행의 "그의 눈은 푸르다"에서 "그의"는 문맥상 "죽음"을 받아주고, 여기서 죽음과 남자는 동일 인물이 됩니다. 4, 5행은 시 전체를 통해서 유일하게 압운이 되는 곳입니다. 이 압운이 우연이든 아니든 시의 절정을 이루고 있어요. 남자는 정확하게 총을 쏘아 명중시키고, 죽은 이들에게 '공중의 무덤'을 선사합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뱀을 희롱하고, 죽음이 독일이 낳은 명인임을 꿈꿉니다 (8행).   끝에 피날레를 장식하는 두 행에서 여인 모티브의 단순화된 나열은 그것이 서로 섞일 수 없는 두 세계의 영원한 대립인지, 아니면 두 세계를 하나로 묶어 주는 화합의 장인지를 애매하게 만들면서 최종적인 판단을 독자에게 유보하고 있습니다. =======================================     죽음의 푸가                                        - 파울 첼란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그것을 저녁에 마신다 우리는 그것을 저녁에 마시고 아침에 마신다 우리는 그것을 밤에 마신다 우리는 마시고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사람이 비좁지 않다 한 남자가 집안에 산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날이 저물면 그는 독일로 써보낸다 너의 금빛 머리 마르가레테 그는 그것을 쓰고 집 앞으로 걸어나온다 별들이 빛나고 그는 사냥개를 휘파람으로 부른다 그는 유태인을 불러내 땅에 무덤을 파게 한다 그는 우리에게 명령한다 이제 춤곡을 연주해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밤에 마신다 우리는 너를 아침에 마시고 한낮에 마신다 우리는 너를 밤에 마신다 우리는 마시고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안에 산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날이 저물면 그는 독일로 써보낸다 너의 금빛 머리 마르가레테 너의 잿빛 머리 줄라미트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사람이 비좁지 않다 그는 소리친다 땅 속 더 깊이 꽂아라 너희 이쪽 너희 저쪽은 노래하고 연주해라 그는 허리띠의 쇠붙이를 쥐고 흔든다 그의 눈은 푸르다 삽을 더 깊이 꽂아라 너희 이쪽 너희 저쪽은 계속해서 춤곡을 연주해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밤에 마신다 우리는 너를 한낮에 마시고 아침에 마신다 우리는 너를 밤에 마신다 우리는 마시고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안에 산다 너의 금빛 머리 마르가레테 너의 잿빛 머리 줄라미트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소리친다 죽음을 달콤하게 연주해라 죽음은 독일이 낳은 명인이다 그는 소리친다 바이올린을 더 어둡게 켜라 그러면 너희는 연기되어 공중으로 올라간다 그러면 너희는 구름 속에 무덤을 갖게 된다 거기서는 사람이 비좁지 않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밤에 마신다 우리는 너를 한낮에 마신다 죽음은 독일이 낳은 명인이다 우리는 너를 저녁에 마시고 아침에 마신다 우리는 마시고 또 마신다 죽음은 독일이 낳은 명인이다 그의 눈은 푸르다 그는 납 총알로 너를 쏘아 맞춘다 그는 너를 정확히 쏘아 맞춘다 한 남자가 집안에 산다 너의 금빛 머리 마르가레테 그는 우리에게 사냥개를 풀어놓는다 그는 우리에게 공중의 무덤을 선사한다 그는 뱀을 가지고 놀며 꿈을 꾼다 죽음은 독일이 낳은 명인이다   너의 금빛 머리 마르가레테 너의 잿빛 머리 줄라미트     주) 마르가레테 - 괴테 의 여주인공 그레트헨을 일컬음 줄라미트 - 구약성서 에서 솔로몬 왕이 사랑한 미녀       첼란은 유태인이고 루마니아 출생입니다. 프랑스에서 의학을 전공했는데 프랑스에 있던 도중 루마니아에서 전쟁이 발발합니다. (이 부분은 정확하지 않을 수도...) 루마니아로 돌아온 이후 루마니아와 소련이 합병되고, 그 후 독일이 루마니아를 침공하면서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되죠. 그의 양친은 모두 수용소 안에서 생을 마감하였고 그 역시 수용소 생활을 했습니다. 죽음의 푸가는 잊을 수 없는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탄생한 시입니다. 평생 독일인이기를 거부했고 독일인을 증오하며 살았던 사람이었다 하더군요. 그는 50세의 젊은 나이로 세느강에 투신자살함으로써 생을 마감합니다.   참고로 이 시는 47그룹에서 상을 받았을 때 독일과 독일의 작가들을 조롱하는 의미로 단상 위에서 낭독한 시라고 합니다. 후에 독일의 현대시사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는 걸 그는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지네요. ===============================   죽음의 푸가 / 파울 첼란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점심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그걸 쓰고는 집 밖으로 나오고 별들이 번득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사냥개들을 불러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유대인들을 불러낸다 땅에 무덤 하나를 파게 한다 그가 우리들에게 명령한다 이제 무도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아침에 또 점심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공중에선 비좁지 않게 눕는다 그가 외친다 더욱 깊이 땅나라로 파 들어가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노래하고 연주하라 그가 허리춤의 권총을 잡는다 그가 총을 휘두른다 그의 눈은 파랗다 더 깊이 삽을 박아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계속 무도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낮에 또 아침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의 눈은 파랗다 그는 너를 맞힌다 납 총알로 그는 마신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가 외친다 더 달콤하게 죽음을 연주하라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가 외친다 더 어둡게 바이올린을 켜라 그러면 너희는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오른다 그러면 너희는 구름 속에 무덤을 가진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점심에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저녁에 너를 맞힌다 정확하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타락 마르가레테 그는 우리를 향해 자신의 사냥개들을 몰아댄다 그는 우리에게 공중의 무덤 하나를 선사한다 그는 뱀들을 가지고 논다 또 꿈꾼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마르가레테는 전형적인 독일 여인 이름이고, 줄라미트는 전형적인 유대 여인 이름이다. 출전 : , 전영애 옮김, 민음사, 2011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를 읽고 그린 헝가리 화가 라슬로 라크너(László Lakner, 1936-1974)의 . 시를 말하다   문태준 l 시인 파울 첼란의 시를 읽는 일은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그의 시에는 비의(悲意)가 꽉 차 있다. 한 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스스로 밝혔듯이 “제(우리)가 어디 있으며 저(우리)를 끌고 가는 힘이 어디로 가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저(우리) 자신을 위한 현실을 기획하기 위해” 창작된 그의 작품들은 아우슈비츠라는 비극적 사건을 출발의 지점으로 삼고 있다. 그의 유대인 부모는 나치 수용소에 끌려가 강제노역을 하다 죽었고, 그 또한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을 뻔한 위기를 간신히 모면했다. 이런 우울한 개인사로 인해 그의 시는 많은 경우 시간을 뚫고, 무언가를 마주해, “말을 건넬 수 있는 현실 하나를 향해”, 자기 자신의 “현존하는 경사각(傾斜角)” 아래서, 타자에게로 나아갔다. 인간 이성의 폭력성과 야만성에 맞서서. 파울 첼란의 시에서 아우슈비츠라는 역사적 비극의 화인(火印)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남녘 만(灣)의 물은 아직 알고 있을까요,/ 어머니, 당신에게 상처를 남긴 파도를?”(‘무덤')에서 “남녘 만”은 유대인들이 송치되었던 지역인 드네프르 강 연안을 연상하게 하고, “그들은 파고 또 팠다, 그렇게 하여/ 그들의 낮이 가버렸고, 밤 또한 갔다. 그들은 신을 찬양하지 않았다,/ 그들이 듣기로 이 모든 것을 뜻했다는 이/ 그들이 듣기로 이 모든 것을 알았다는 이.”(‘그들 속에 흙이 있었다’)라는 시구나 “천막 앞에 백 명의 병사가 집합하고, 우리는 마시며 너를 무덤으로 나른다./ 이제 세상의 석판 위에서 꿈의 단단한 은화가 쨍그렁 울린다.”(‘마리아네')라고 쓴 대목에서 우리는 강제노역에 동원된 유대인들의 참상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시가 주로 동원하는 시어들을 살펴보아도 그의 내상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즉 창살, 꺾인 무릎, 어둠, 뒤엉킴, 박해, 파괴, 울부짖음, 광란, 유골 항아리, 포획, 교살, 꺼진 눈, 수의, 가묘(假墓), 휘몰아치는 바람 등의 시어들은 그에게 상흔의 언어들이었던 것이다. 파울 첼란 시에서 ‘돌'과 ‘돌들'은 이러한 위협에 노출되고야 마는 개별적 존재 혹은 집단을 뜻하는 것으로 각별하게 읽힌다. 그의 시에서 ‘돌’은 ‘돌들’이라는 무더기를 이루면서 서로를 연대하여 보호하지만, 어느 순간 외부적 요인인 강압적 물리력에 의해 와해되고 사멸할 위기에 빠지고 만다. “오, 이 돌 언덕, 사랑아,/ 우리가 쉼 없이 구르는 곳,/ 돌인 우리가,/ 얕은 물줄기에서 물줄기로,/ 한 번 구를 때마다 더 둥글게,/ 더 비슷하게, 더 낯설게.”(‘돌 언덕’)라고 썼던 시인은 “어느 돌을 네가 들든―/ 너는 드러내 버린다,/ 돌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벌거벗긴/ 그들은 이제 짜임을 새롭게 한다,”라고 동시에 쓰고 있는 것이다. 시 ‘죽음의 푸가’는 원래 제목이 ‘죽음의 탱고’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7년 한 잡지에 발표되었다가 1952년 펴낸 시집 에 수록되었다. 이 시를 통해서도 우리는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벌어졌을 법한 비참상을 그려 볼 수 있다. 이 시에는 지극히 수세에 몰려 있는 ‘우리’와 점점 지시와 요구가 난폭해지는 ‘한 남자’가 대치 관계 아래 등장한다. ‘우리’가 하는 행위는 검은 우유를 마시는 것, 무덤을 파는 것뿐이다. 순종을 버리고 맞서서 반항할 위치에 있지 않다.     ‘검은 우유’는 죽음의 은유로 읽힌다. ‘무덤’은 학살당한, 무력하기만 했던 이들의 시체가 묻힐 매장지로 읽힌다. 이에 반해 ‘한 남자’는 몹시 거칠고 사나운 권력자의 함의로 읽힌다. 적의에 차 명령하는 그는 뱀을 갖고 있고, 사냥개를 불러내고, 마침내 살해하고, 주검을 묻게 한다. ‘마르가르테’는 독일 여인을, ‘줄라미트’는 유대 여인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이 둘의 관계는 ‘한 남자’와 ‘우리’의 관계 그것과 대위적으로 진행되고 이해된다. 이 시를 통해 우리가 듣게 되는 것은 그 어떤 ‘호곡(號哭)’이다. ‘마신다’, ‘판다’ 등 동작어의 규칙적인 반복은 잔인함과 처참함의 절정으로 몰아가면서 독자들을 더 강도 높게 전율케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라슬로 라크너,     이반 골(Iwan Goll)과의 표절 시비에 휩싸여 생의 의욕과 활력을 소모한 파울 첼란은 유대 신학과 신비주의를 접하고 또 이스라엘 방문을 계기로 힘을 얻는 듯했으나 입원 생활은 반복되었고 결국 1970년 센 강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시는 죽음의 대성황을 보여 주었고 한 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역사적 고통의 최대치를 보여 주었지만, 한 평자의 지적처럼 타자의 고통을 향해 열린 ‘대화의 문학’이기도 했다. 다음의 시에서 우리는 그가 갈망한, 그러나 꺾인 한 줄의 희망과 유토피아를 읽을 수 있다. “그대 나를 안심하고/ 눈(雪)으로 대접해도 좋다./ 내가 어깨에 어깨 걸고/ 뽕나무와 여름을 지날 때마다/ 그 갓 돋은/ 잎이 소리 질렀거든.”(‘그대 나를') 파울 첼란(Paul Celan, 1920-1970) 1920년 루마니아 북부 부코비나의 체르노비츠에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스물한 살에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체르노비츠가 유대인 거주 지역(게토)으로 확정됐으며 독일군이 도시를 점령한 후 유대인들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갈 때 첼란의 가족도 포함됐다. 강제노역을 하던 중 부모가 처참하게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첼란 역시 가스실 처형 직전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았지만 이후 끔찍한 기억에 고통스러워하며 삶을 이어 갔다. 종전 후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번역과 출판 일을 하다가 오스트리아 빈으로 건너가 첫 시집 를 발표했다. 1948년 프랑스 파리에 정착하여 센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기까지 꾸준히 시작(詩作) 활동을 해 모두 7권의 독일어 시집을 남겼다. 1958년 브레멘 문학상을, 1960년 게오르크 뷔히너 상을 수상했다.    첼란의 시 몇 편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 , 캔버스에 유채와 짚, 1981. 키퍼는 과거사와 논쟁하며 현대사에서 터부시되는 논쟁적인 주제들을 다뤄 왔다. 나치 통치와 연관된 주제들이 특히 그의 작품세계에 잘 나타난다. 작품 ()는 파울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에서 영감을 받았다. 첼란의 시는 침묵을 통해 극도의 경악을 말하고자 한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어떠한 서정시도 쓰일 수 없다는 (나의) 말은 잘못이었다. — 테오도어 아도르노   꽃     돌, 내가 쫓아간 공중의 돌, 돌처럼 눈먼 너의 눈. 우리는 손이었다. 우리는 어둠을 공허하게 창조하였다, 우리는 여름을 건너 찾아온 말을 발견하였다. 꽃. 꽃― 눈먼 자의 말. 너의 눈과 나의 눈, 이들은 물을 걱정한다. 성장. 마음의 벽마다 낙엽진다. 이처럼 또 한 마디 말, 그리고 망치는 야외에서 흔들거린다.   이슬     이슬, 그리고 나는 너와 더불어 누워 있었다. 쓰레기 더미 속의 너. 축축한 달이 우리에게 응답을 던져주었다. 우리는 서로 부서져 나갔다 우리는 다시금 하나로 부셔졌다. 주님은 빵을 자르고, 빵은 주님을 잘랐다.   찬미가     누구도 다시 흙과 진흙으로 우리를 빚지 않으리라. 누구도 우리의 먼지에 관해 말하지 않으리라. 누구도. 누구도 아닌 자여, 당신은 찬양받을지어다. 당신을 위해 우리는 피어나려 하나이다. 당신을 향해. 우리는 무(無)였고, 무(無)이며, 무(無)로 남을 것입니다. 꽃을 피우며, 무(無)의 장미, 누구의 것도 아닌 장미. 영혼의 해맑은 줄기, 하늘의 황량한 꽃실, 빨간 화관(花冠)을 지닌. 우리가 노래 부른 자색(紫色) 단어 위에서, 오 가시 위에서   나뭇잎 하나     나무 없는 나뭇잎 하나,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위해. 그렇게도 많은 말해진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대화가 거의 범죄처럼 되어버린 곳에서, 이 무슨 시간들인가?         [출처] 죽음의 푸가 / 파울첼란|작성자 판 [출처] 죽음의 푸가를 읽기 전에 |작성자 판  
1928    문학예술가, 녀인, 그리고 "뮤즈의 삶" 댓글:  조회:5386  추천:0  2016-12-05
예술사에서 빛나는 위대한 천재들의 성취 뒤에는 어김없이 그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뮤즈라 불리는 연인이 있었다. 이들은 예술가들의 구원자나 동반자가 되어 서로의 삶을 예술만큼이나 아름답게 꽃피웠다. 또한 깊은 안목으로 그들을 돕는 조력자로 기억되기도 한다. 한편, 남성 예술가의 그늘에 가려 자신의 재능은 돌보지 않고 뮤즈라는 존재로만 남았다가 뒤늦게 빛을 본 이들도 있다. 예술가와 그들이 사랑했던 여인들의 삶을 살펴봤다. 뮤즈(Muse) :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와 므네모시네(기억의 여신) 사이에서 태어난 9명의 딸. 각각 미술, 음악, 문학, 학문 등 지적 활동을 담당하는 여신들이다. 이들은 시인과 예술가들에게 재능을 불어넣고 영감을 주는 존재로 알려졌다. 이런 신화에 착안해 현대에는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일으키는 존재에게는 뮤즈라는 단어를 붙인다. 인류의 지적, 문화적 자산을 한데 모아놓은 공간인 박물관을 뜻하는 영어 단어 '뮤지엄(Museum)'과 음악을 뜻하는 '뮤직(Music)'이 뮤즈에서 온 표현이다. 삶의 구원자 살바도르 달리와 갈라 그녀를 향한 내 사랑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나를 사로잡았다 살바도르 달리 스스로를 '미치광이면서도 피타고라스의 정확성을 가진 인간'이라고 정의 내렸던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 광기를 이용해 자신의 독창성을 표현한 화가로는 단연 달리가 최고로 꼽힌다. 어디로 튈지 몰라 광인이라고 불리던 달리에게도 삶의 구심점 같은 존재가 있었는데, 바로 아내 갈라(Gala, 1894~1982)다. 엽기·광기 통해 성공 거둔 '쇼 비즈'의 대표적 예술가 (왼쪽부터) 달리가 사랑했던 갈라, 달리의 품에 안겨있는 갈라, 노년의 두 사람 /살바도르 달리 공식홈페이지 갈라는 본래 달리의 친구이자 유명한 시인 폴 엘뤼아르(Paul Eluard, 1895~1952)의 아내였다. 러시아 출신으로 본명은 엘레나 디미트리예브나 디아코노바이었으나 이미 파리의 예술가들 사이에서 축제를 뜻하는 이탈리아어인 '갈라'로 불리고 있었다. 달리는 폴 엘뤼아르를 집으로 초대했고, 처음 갈라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고 전해진다. 평생 여성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했던 달리는 처음으로 자신의 모든 걸 이해하고 포용하는 여성을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달리는 '어릴 때부터 꿈속에서 그려왔던, 썰매를 타고 눈 속을 천진하게 달리는 러시아 소녀가 부활한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혔다. 갈라 역시 달리를 만나 허공의 광인을 지상의 천재로 만드는데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 그녀는 달리의 작품의 첫 번째 관객이었고, 조언자였으며, 모델이었다. 그의 작품에서 갈라는 나신으로, 때로는 등을 돌린 채, 신화 속의 요정이나 현대적 아이콘으로 등장했다. 그 정도로 달리에게 갈라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자유분방한 영혼 가진 갈라, 내게 상상력 가져다준 천사" [스페인 미술관] 평생을 다해 사랑한 아내를 위해 만든 '갈라의 방' 존 레논과 오노 요코 A dream you dream alone  is only a dream  A dream you dream together is reality 오노 요코 영국을 넘어 전 세계가 사랑하는 밴드 비틀스의 멤버.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와 함께 비틀스를 대표하는 멤버이면서 성공한 싱어송라이터였던 존 레논(John Lennon, 1940~1980)의 인생이 가장 크게 바뀐 것은 비틀스가 아닌 오노 요코(小野洋子)와의 만남이다. 그는 오노 요코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이 쌓아온 음악적 업적과 누려왔던 인기를 무너뜨리는 위기에 빠졌다. 하지만 존 레논 개인적인 삶을 봤을 때 그녀와의 만남은 또 다른 예술의 시작이자 구원이었다. (왼쪽부터)결혼 직후 신혼여행으로 침대 위에서 반전 퍼포먼스를 펼친 존 레논과 오노 요코, 존 레논(좌)과 오노 요코(우), 현재 오노 요코의 모습 /AP, 조선DB 존 레논과 오노 요코는 1966년 런던에서 열린 전위예술 운동인 '플럭서스(Fluxus)' 전시장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보자마자 한눈에 서로 운명임을 알아봤다. 7살의 나이 차, 인종의 차이, 그리고 불륜이라는 장애물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사랑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질투와 비난의 대상이 됐다. 누드 사진을 찍거나 침대 위에 누운 두 사람의 모습을 공개하는 등 전위적인 애정행각과 독특한 행보는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럴 때마다 오노 요코는 비틀스를 해체 시킨 마녀, 세계인이 싫어하는 인물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존 레논에게 오노 요코는 오히려 존의 불우한 어린 시절과 비틀스 시절에 억눌린 순수와 자아를 되찾아준 영혼의 동반자였다. 존과 요코의 동일한 욕망, 즉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정신이 여론의 비난을 넘어 그들을 합치게 했고 동일한 투쟁선상으로 나아가게 했다. 존은 요코를 만나면서 대중스타의 일상에서 탈피했고 진정성을 위해 자본주의의 부조리와 왜곡에 도전하는 반사회적 가수로 떠올랐다. 요코는 그의 진보적 사상은 물론, 지금도 사랑받는 존의 노래 'Imagine', 'Woman is the Nigger of the World' 등 풍부한 음악적 영감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가 1974년 요코와 별거 뒤에 겪었던 극심한 자아해체도 그녀와 재결합한 뒤에야 진정된다. 존 레논을 '비틀스로부터의 완전해방'을 기하게 한 사람은 바로 요코였던 것이다. 상처받은 존은 역시 상처받은 요코로부터 '사랑과 혁명'을 동시에 얻었다. 존 레논·오노 요코의 만남과 '사랑·혁명' 찰리 채플린과 우나 오닐 우나 오닐을 조금 더 일찍 만났다면 사랑을 찾아 헤매는 일은 없었을거다.  세상의 단 한사람에게만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찰리 채플린 영화사에서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 영화감독이자 희극배우인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 1889~1977)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명성을 얻었음에도 불우했던 어린 시절, 3번의 이혼, 정치적 압력 등 개인사적으로는 많은 불행을 겪었다. 하지만 노년에 찾아온 사랑 우나 오닐(Oona O'Neill, 1925~1991)을 만나고 행복한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을 때는 찰리 채플린이 54세, 우나 오닐이 18세였다. 36살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최고의 파트너가 되었다. 찰리 채플린과 그의 마지막 동반자였던 우나 오닐 /찰리 채플린 공식 홈페이지 우나 오닐은 찰리 채플린이 준비 중이던 '그림자와 실체'라는 영화의 여주인공 역을 보기 위해 찾아온 배우 지망생이자 극작가 유진 오닐(Eugene O'Neill)의 딸이었다. '그림자와 실체'라는 작품에는 어울리는 여주인공은 아니었지만 찰리 채플린은 우나 오닐의 외모와 내면에 끌렸다. 우나는 그동안 그의 부와 유명세 때문에 그를 만났던 허영심 가득한 여자들과 거리가 멀었다. 우나 역시 당시 '호밀밭의 파수꾼'의 작가 샐린저와 사귀고 있었지만 괴팍한 샐린저보다 아버지같은 푸근하고 유쾌한 찰리 채플린에게 호감을 느꼈다. 주변의 반대를 뿌리치고 열여덟이 된 우나는 작고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찰리와 결혼식을 올렸고 그들은 이후 여덟 명의 아이들을 낳았다. 평생 아버지 품을 그리워했던 우나 오닐과 불우한 어린 시절과 화려한 삶에서 오는 공허함에 힘들어했던 찰리 채플린은 서로에게 부성애와 모성애를 보여주면서 나이 차이를 극복한 행복한 여생을 보냈다. 예술활동의 조력자 백남준과 구보타 시게코 시게코, 우리가 젊었을 때  당신은 내게 최고의 연인이었소. 이제 내가 늙으니  당신은 최고의 어머니, 그리고 부처가 되었구려. 백남준 일제 때 재벌이던 태창직물공업주식회사(泰昌織物工業株式會社) 사장 백낙승의 아들이었던 백남준(1932~2006)은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도쿄대에 진학하며 일본으로 건너갔다. 백남준과 시게코는 1964년 도쿄에서 처음 만났다. 시게코는 작곡 발표회를 한다면서 피아노를 때려 부수고 머리에 먹물을 뒤집어쓴 채 머리카락으로 글씨를 쓰는 젊은 미치광이 예술가에게 한눈에 빠졌다. 시게코는 발표회 후 백남준이 참석하는 파티에 자기도 초대되도록 손을 썼다. 이후 시게코는 자신도 뛰어난 예술가였지만 평생을 이름 없고 돈 없는 예술가였던 백남준이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 우뚝 설 수 있도록 도왔다.  [만물상] 구보타 시게코의 사랑 (왼쪽부터) 백남준, 1974년 뉴욕에서 동거하던 시절의 백남준과 구보타 시게코, 백남준을 그리며 인터뷰하는 구보타 시게코 /조선DB 결혼에 무관심한 백남준에게 실망한 시케코는 홧김에 자신에게 끈질기게 구애해 온 유대인 작곡가와 결혼하고 만다. 하지만 71년 시부모님의 반대에 못 이겨 이혼하고, 두 사람은 재회한다. 백남준이 캘리포니아 예술학교(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에서 교편을 잡기 위해 뉴욕을 떠날 때 시게코가 "당신 없는 뉴욕에 못 산다"며 따라나섰다. 둘은 7년간 함께 살다 77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백남준은 생전에 기자들에게 "(아내가) 하도 따라다녀서 불쌍해서 결혼해줬다"고 장난스레 말했다. 77년 독일 뒤셀도르프 미대에 비디오 아트 과목 강사 자리를 얻을 때까지, 백남준에게는 일자리가 없었다. 돈 때문에 다툼이 생길 때마다 백남준은 "나, 내 마누라가 오노 요코처럼 유명한 여자 예술가였으면 좋겠어"라고 말했다. 구보타 시게코 역시 비디오 아트를 한 작가였지만 유명하지는 않았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그에게 "난 유명해질 필요 없는 사람이야. 그저 좋은 예술가가 되길 바라는 사람이야" 라고 답했다고 한다. 96년 쓰러지고 나서 2001년에 백남준은 시게코에게 편지를 보냈다. '시게코, 넌 젊어선 멋진 애인이었고, 늙어선 최고의 엄마이자 부처가 됐어'라고 쓰여 있었다. 시게코는 그걸 읽고 깔깔 웃으면서 "남준, 당신 정말 웃겨요. 불교도도 아니면서" 하고 놀렸다.  "개인전은 남편에게 바치는 것… 그를 영원히 살게 만드는게 내 일" 백남준만 쫓아다니던 그녀, 예술 앞엔 양보 없었다 "남편 백남준, 세상엔 위대한 예술가…내겐 큰 아기" 이중섭과 이남덕 나의 최대 최미(最美)의 기쁨, 그리고 한없이 상냥한 최애의 사람,  오직 하나인 현처 남덕군!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꽉 차 있소. 이중섭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이중섭(1916~1956)의 그림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은 소와 가족이다. 이중섭이 전쟁과 가난 속에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고, 뛰어난 작품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가족, 특히 그의 아내 이남덕(일본명 :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대한해협을 두고 서로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은 두 사람의 편지와 이중섭의 그림에도 절절히 묻어나온다.  (왼쪽부터) 젊은 날의 이중섭, 1945년 야마모토 여사가 목숨 걸고 도쿄에서 원산으로 가서 올린 결혼식 사진 전통 혼례 방식을 따랐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중섭이 간직했던 야마모토 마사코 여사 사진 /조선DB 이중섭과 이남덕은 잘 알려진 것처럼 도쿄에 있는 분카학원(문화학원) 시절 미술반 선후배로 만났다. 1935년 일본 도쿄로 건너간 이중섭은 데이코쿠미술학교(제국미술학교)에 입학했다가 중퇴하고 다음 해 개방적인 분위기의 분카학원(문화학원)으로 옮긴다. 이남덕은 창밖으로 배구하고 있는 이중섭의 모습을 보고 잘생겼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마음에 담았다. 어느 날 미술시간이 끝나고 수돗가에서 붓을 씻다가 처음 이야기를 나누게 됐고 두 사람은 이후 연인이 되었다. 결혼 기간 중 이중섭이 이남덕과 함께 살았던 것은 7년이다. 신혼 초 이중섭은 이남덕에게 '남쪽에서 온 덕이 있는 여인'이라며 '남덕(南德)'이란 이름을 붙여줬다. 그러나 6·25가 터지고, 53년 아버지의 부음을 받은 이남덕이 도쿄로 가면서 부부는 영영 이별을 맞게 된다. 이중섭은 일본에서 체류할 방법을 찾기 위해 연줄을 총동원했고 비용 마련을 하겠다면서 미친 듯 그림을 그렸다. 결핍과 희망이 근육질의 황소 등 걸작을 탄생시킨 셈이다. 그러나 일본행이 번번이 좌절되면서 괴로움을 술로 달래는 동안 그의 병세는 깊어져갔다. 60년을 버티게 한 7년의 사랑에 대해 이남덕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쟁이 없었다면 달라질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이중섭과 함께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중섭의 뮤즈 이남덕을 만나다(上)] 두 사람 대해 왜곡된 사실들 [이중섭의 뮤즈 이남덕을 만나다(下)] 남편의 편지 한 장 내 손에 없어… 60년을 버텨낸 '7년의 사랑'… 95세 아내의 편지 김환기와 김향안 애인이 있는 곳이 고향인 것 같아. 나, 파리에 가면 우리 둘만을 위해 살고 노력하고 싶어.  조국이 더 큰 거라면  사랑하는 사람은 조국이기도 해. 김환기 김향안(1916~2004)은 한국 근대 예술계의 뮤즈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예술인, 문인들과 어울렸는데 젊은 시절엔 천재 시인 이상(1910~1937)의 아내였고, 이후에는 천재 화가 김환기(1913~1974)의 평생 동반자로 살았다. 이상은 "레몬 향기가 맡고 싶소…"라고 읊조리며 그녀의 품에서 생을 마감했고, 한국 추상화의 선구자이자 현대미술의 거목 수화 김환기에게 그녀는 예술의 동반자를 넘어 수호신 같은 존재였다. 이국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 미술사에 남을 작품들과 싸우던 김환기는 일생에 걸쳐 좌절할 때면 그녀로부터 힘을 얻고 위안받았다. [만물상] 뮤즈 김향안 李箱과 변동림의 짧은 결혼생활 1961년 당시의 김환기 화백과 김향안 여사 /조선DB, 1957년 파리 시내를 거니는 김환기 화백과 김향안 여사 /연합뉴스 김향안은 1937년 시인 이상을 폐결핵으로 떠나보내고 1944년 김환기를 만나 재혼을 했다. 김향안은 김환기와의 첫 만남에 대해 "일본 시인의 소개로 만났는데 시골뜨기에 홀쭉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1956년 김향안은 "10년 시집살이를 하다 보니 글 쓰고 책 읽는 저만의 일이 하고 싶어졌다"며 프랑스 파리로 홀로 떠나 미술 평론 공부를 시작했다. 그녀의 유학은 1년 뒤 김환기가 홍익대 미대 교수직을 버리고 파행을 결단토록 했다. 김 여사는 김 화백이 파리 화단에서 주목받을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하는 한편, 자신의 글을 계속 썼다. 1960년대 중반 뉴욕에 정착하며 김환기의 작품 활동을 도왔다. 안정된 미래를 훌훌 털어버리고 그는 50 나이에 자신의 예술적 갈증이 인도하는 미지의 세계에 몸을 던졌다. 그의 뉴욕 생활 11년이 가능했던 것은 아내 김향안이 곁에 있어준 덕이었다. 김환기는 그녀를 '향(鄕)'이라고 부르며 "애인이 있는 곳이 고향인 것 같아. 조국이 더 큰 거라면 사랑하는 사람은 조국이기도 해"라고 했다. 김환기의 죽음 이후 그의 작품 세계를 그대로 담은 환기 미술관을 건립한 것은 그녀의 가장 큰 공이기도 하다. 1974년 7월 25일 수화는 뇌내출혈로 쓰러져 자신이 좋아하던 뉴욕의 산 언덕 묘지에 묻혔고, 김향안은 그로부터 꼭 30년 후 그의 곁에 묻혔다. 천재시인·천재화가에 영감 줬던 동반자 "향안(鄕岸), 향안, 그리운 향안…" 뮤즈라는 이름의 희생자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 나의 평생소원은 단 세 가지, 디에고와 함께 사는 것,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것,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 프리다 칼로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는 자신이 평생 두 번의 대형 사고를 당했다고 회고한다. 첫 번째 사고는 그녀에게 육체적 고통을 안겨줬던 교통사고였고, 두 번째 사고는 멕시코의 국민화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와의 결혼이다. 특히 그녀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서는 디에고 리베라를 빼고는 얘기할 수 없다. 여학교 시절, 우연히 멕시코 국민화가였던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작업 현장을 구경하러 갔던 프리다는 그 자리에서 그에게 사로잡힌 영혼이 되고 만다. (왼쪽부터) 프리다 칼로에게 입맞추는 디에고 리베라,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프리다 칼로 /조선DB,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유투브 영상 캡처 그녀는 스물두 살의 나이에 디에고와 결혼을 한다. 디에고는 스무 살이나 연상인 데다 이미 두 번의 결혼경력이 있었고 세 아이의 아버지였다. 게다가 셀 수 없이 많은 여인과 염문을 뿌리던 와중이었다. 프리다에게 디에고는 한 남자였지만 디에고에게 프리다는 그녀들 중의 하나였다. 디에고는 당대 최고의 문화권력이었다. 자신의 그림 속에는 즐겨 민중을 그려 넣었지만 실제로는 정치 거물들과 교류를 했고 방탕과 사치가 일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급기야는 프리다의 여동생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 치명적 불륜을 바라보면서 프리다는 자신의 머리를 싹둑 자른다. 자화상에는 난데없이 수염을 그려 넣기까지 한다. 이번에는 그녀가 보란 듯이 요란한 연애에 나선다. 상처받은 자기애가 관능으로 표출되면서 팜므파탈의 면모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프리다는 자화상을 그리며 그 이마에 디에고를 새겨 넣었다. 프리다 칼로는 자신의 삶과 작품에 대해 이렇게 술회했다. "내 그림이 내 삶을 완성했다. 나는 세 명의 아이를 잃었고 내 끔찍한 삶을 채워줄 다른 것들도 많이 잃었다. 내 그림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해 주었다." 이혼과 재결합을 거듭했던 디에고와 프리다. 디에고는 뒤늦게 프리다 곁으로 돌아와 그녀를 위한 개인전을 열어주었지만, 이 때 프리다의 건강상태는 날로 악화하고 있었다. 프리다는 자신이 남겼던 '이 마지막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게 되기를….' 메모처럼 47세의 나이로 고통 속의 삶을 마감했다. 프리다 칼로, 열두 개의 자아를 가진 여자 [만물상]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 디에고를 만난 건 실수? 그녀의 운명이자 스승이었다 '혁명적 미술가' 칼로를 담은 리베라의 첫 벽화 오귀스트 로댕과 까미유 끌로델 우리는 이탈리아로 떠나 그곳에서 적어도 여섯 달 동안 머무를 것이며, 흔들림 없는 관계를 시작하여  이후 마드무아젤 카미유는 나의 아내가 될 것이다. 오귀스트 로댕 프랑스의 천재적인 조각가였지만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천재, 카미유 클로델(Camille Claudel, 1864~1943)은 우리에게 로댕(Auguste Rodin, 1840~1917)과의 러브스토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어려서부터 조각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카미유 클로델은 스무 살 때 로댕을 만나서 그의 제자 겸 조수, 모델, 그리고 그의 연인이 된다. 그녀는 예술가로서의 천부적인 자질과 열정으로 가득했으나 미술사에서는 안타깝게도 그녀를 한 때 로댕의 연인이었던 정신병자로 기억할 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왼쪽부터) 오귀스트 로댕, 까미유 끌로델, 직접 조각의 모델이 되어보는 까미유 끌로델 /로댕 공식홈페이지 그녀의 비극은 로댕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카미유 클로델의 탁월한 예술적 영감과 재능은 로댕에게 영향을 끼친다. 로댕의 작품제작 활동에 있어 그녀는 없어서는 안 될 만큼의 중요한 존재였다. 특히 로댕의 '지옥의 문(La Porte de I'enfer, 1840~1917)' 제작에는 그녀가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그들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아닌 예술세계의 동지이자 경쟁자의 관계로 성장한다. 24살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사랑에 빠졌으나 그들의 사랑은 로댕의 심한 여성편력 때문에 파경을 맞게 된다. 당시 프랑스 예술계의 최대 거장이었던 로댕의 그늘에 가려 카미유는 로댕에 못지않은 실력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빛을 보지 못했다. 또한 그녀의 뛰어난 예술성에 대한 로댕의 견제와 방해공작으로 인해 그녀는 자신의 예술세계를 독자적으로 펼치지 못하게 된다. 급기야 애인으로부터 버림받은 충격과 조각의 꿈을 펼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좌절감으로 인한 우울증과 피해망상, 강박관념에 시달리면서 그녀의 예술적 불꽃은 사그라지고 만다. 로댕 그늘에 가려 주목받지 못한 천재 조각가
1927    프랑스 시인 - 폴 엘뤼아르 댓글:  조회:7054  추천:0  2016-12-05
    출생일 1895. 12. 14, 파리 생드니 사망일 1952. 11. 18, 샤랑통르퐁 국적 프랑스 요약 프랑스의 시인. 본명은 Eugne Grindel.   초현실주의 운동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20세기의 대표적 서정시인이다. 제1·2차 세계대전, 스페인 내란, 독일군 점령, 레지스탕스, 공산당 투쟁, 연애, 시사 동향, 만남, 우정, 꿈 등 자신의 인생 경험을 소재로 작품을 썼다. 1919년 앙드레 브르통, 필리프 수포, 루이 아라공 등 초현실주의 시인들과 알게 되어 1938년까지 매우 가깝게 지냈다. 첫번째 주요작품인 〈고통의 수도 Capitale de la douleur〉(1926)에서는 새로운 언어기법을 실험했고, 꿈과 현실의 관계에 대한 이론을 적용했으며, 의식의 흐름을 자유롭게 표현했다. 뒤이어 〈대중의 장미 La Rose Publique〉(1934)·〈풍요로운 눈 Les Yeux fertiles〉(1936) 등을 발표했는데, 일반적으로 이 3권의 책에 실린 시들은 초현실주의 운동이 낳은 가장 탁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또한 이 시기에 앙드레 브르통과 함께 〈무염시태(無染始胎) L'Immaculée Conception〉(1930)에서 정신불안증세의 진행과정을 연구했다. 스페인 내란 뒤에는 초현실주의 실험을 그만두었다. 후기 작품에는 정치적 투쟁 성향이 잘 나타나 있으며, 독재를 반대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기본 입장이 더 확고해졌다. 1942년 공산당에 들어갔으며, 인간의 고통과 동지애를 다룬 작품 〈시와 진실 Poésie et vérité〉(1942)·〈독일군의 집합소에서 Au rendez-vous allemand〉(1944)·〈살 만한 가치 Dignes de vivre〉(1944) 등은 제2차 세계대전중 비밀리에 유포되어 레지스탕스의 사기를 높였다. 특히 〈시와 진실〉에 수록되어 있는 그 유명한 시 〈자유 La Liberté〉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저항시로 알려져 있다. 전쟁이 끝난 뒤 발표한 〈모든 것을 말하라 Tout dire〉(1951)·〈불사조 Le Phénix〉(1951) 등은 시어가 간결하고 표현이 생생하여 프랑스의 대표적 서정시로 꼽히고 있다.     폴 엘뤼아르 (Paul Éluard, 1895년 12월 14일 ~ 1952년 11월 18일) 는 프랑스의 시인이다. 본명은 외젠 에밀 폴 그랭델 (Eugène Émile Paul Grindel)이다. 다다이즘 운동에 참여하고 초현실주의의 대표적 시인으로 활동하였다. '시인은 영감을 받는 자가 아니라 영감을 주는 자'라고 생각했다. '자유'라는 시로 유명한 시집 《시와 진실》, 《독일군의 주둔지에서》 등은 프랑스 저항시의 백미로 알려져 있다.[1] 생애[편집] 파리 북쪽 생드니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폐결핵으로 공부를 중단하고 스위스 다보스에서 요양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다.[2] 1911년 ~ 1913년 요양소에 있을 때 보들레르, 아폴리네르 등 프랑스 시인들과 휘트먼 등 미국 시인들에 자극받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였다가 독가스로 폐를 다쳐 평생의 고질(痼疾)이 되었다. 1917년 러시아인 안내 갈라를 만나 결혼했지만, 그녀는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를 사랑하게 돼 1924년에 그를 떠났다. 1934년 마리아 벤즈와 결혼했지만, 그녀 역시 파블로 피카소와 염문을 뿌렸다.[3] 전후 앙드레 브르통, 루이 아라공 등과 쉬르레알리즘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스페인 내전 때 인민 전선에 참가하여 레지스탕스로서 활약하였다. 1952년 11월 18일 과로와 협심증으로 숨을 거뒀고, 파리 페르라셰즈 묘지에 안장됐다. 대표 시집은 《고뇌의 수도 (首都)》(1926년), 《사랑, 그것은 시(詩)》(1929년), 《정치적 진실》(1948년) 등이다. 그의 시는 불연속으로 뜻밖의 이미지와 논리를 무시한 교묘한 비유로, 쉬르레알리즘의 강한 특징을 보이면서 어휘는 점차 투명해지고 내면적인 속삭임을 상기시키는 가락으로 변했다. 불안과 고뇌, 또 연애와 전쟁을 주제로 했어도 "한 인간의 지평선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한다"라고 그가 읊은 바와 같이 미와 사랑과 인생의 여명에의 신뢰를 언제나 잃지 아니하였던 희유(稀有)의 시인이라 할 수 있다.   각주[편집] 이동↑ 구정은. 1952년 자유의 시인 엘뤼아르 타계. 경향신문. 2009년 11월 17일. ===============================================               Inner Link     사랑의 시인 - 폴 엘뤼아르   파블로 피카소 아르튀르 랭보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샤를르 보들레르 폴 엘뤼아르 - 자유 · 이땅에 살기 위하여· 김지하 - 타는 목마름으로 ·     - 는 랭보의 테마와 는 맑스의 테마 사이에서 평화로운 화해를 이루어 낸 시인. 엘뤼아르 소등 - 폴 엘뤼아르 : 어이할까나, 문에는 적의 보초가 지켜 서 있는데 / 어이할까나, 우리는 갇혀 있는데 / 어이할까나, 거리는 통행 금지인데 / 어이할까나, 도시는 정복되어 있는데 / 어이할까나, 도시는 굶주려 있는데 / 어이할까나, 우리는 무기를 빼앗겼는데 / 어이할까나, 밤은 이미 깊었는데 / 어이할까나, 우리는 서로 사랑했는데   사랑의 시인 혹은 정치적 시인이란 평을 받는 폴 엘뤼아르는 20세기 프랑스의 대표적 시인 중 하나다. 그는 파리 북쪽 교외에 있는 노동자의 거리 생 드니에서 출생하였으나 아버지는 회계사이며 어머니는 양재사인 비교적 유복한 중산층 출신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여 중고등학교 시절 폐결핵으로 공부를 중단해야 했고, 1911년에서 1913년까지 스위스의 다보스라는 곳에 있는 요양원에서 지내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보들레르, 아폴리네르 등의 작품을 읽게 되고 특히 미국 시인 휘트먼의 시를 좋아하며 스스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또한 소년 엘뤼아르는 여기에서 러시아 태생의 한 소녀를 만나 사랑하게 된다.   그 사랑은 결실을 맺어 4년 뒤인 1917년 드디어 결혼하게 되는데 후일 그가 애칭으로 '갈라'라고 부른 여인이다. "그녀는 순결한 눈을 녹게 하고 풀 속에서 꽃을 피어나게 한 유일의 존재이다"라고 그는 찬양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사랑도 초현실주의자들의 사교 모임에서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갈라와 사랑에 빠짐으로써 파국에 빠지고 만다. 엘뤼아르는 둘의 행복을 빌어주며 갈라의 곁을 떠나 준다. 오히려 살바도르 달리의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이 부도덕한 짓을 저질렀다며 격분하여 달리에게 먹다만 성게 껍데기를 보내며 부자간의 인연을 끊은 일은 유명하다. 어쨌든 달리는 갈라를 만남으로 그의 예술 세계의 무한한 영감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젊은 시절의 폴 엘뤼아르.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뒤 이후 평생동안 파시즘과에 반대했다.           "시인은 자기의 사상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그 사상은 진보를 향한 인간의 궤적 속에서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다."           부인 뉘쉬와 함께           피카소가 그린 엘뤼아르              만년의 폴 엘뤼아르           엘뤼아르의 무덤(페르 라세즈)       이보다 앞서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고 엘뤼아르는 요양원에서 나오자마자 간호병으로 전선에 동원되었다. 그는 야전 병원에서 전쟁의 참상을 맛보았고 이는 그의 마음에 큰 충격을 주어 전시 중 병원에서 쓴 '평화를 위한 시' 외 1편의 선언문 같은 시들을 자비 출판했다. 파리에 돌아온 그는 한때 차라와 당시 유행하던 다다이즘 운동을 벌였고 후에는 앙드레 브르통을 만나 데스노스, 아라공과 함께 초현실주의 운동의 중요하고 열렬한 멤버가 되었다.   엘뤼아르와 초현실주의와의 관계는 밀접할 뿐 아니라, 이 새로운 문학 정신이 그의 시에 준 영향은 깊다. 1920년에서 1936년까지 그는 브르통이나 르네 샤르와 공동으로 여러 권의 초현실주의적인 시집과 평론을 펴냈을 뿐만 아니라 '죽지 않으므로 죽는 일' 및 그의 걸작으로 꼽히는 '고통의 수도', '사랑', '시', '목전의 삶', '모든 사람의 장미' 등 그의 중요한 시 작품들은 모두 직접 간접으로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초현실주의와의 결별   시집 로 그의 초현실주의 시대는 끝난다. 이 동안에 엘뤼아르는 첫 부인 갈라와 헤어지고 제2의 부인 마리아 벤즈, 속칭 뉘쉬와 결혼한다. 엘뤼아르는 그녀를 가장 이라고 예찬한다. 뉘쉬와의 사랑과 애정은 그의 첫사랑인 갈라에 못지않게 짙고 깊어 수많은 아름다운 시를 낳게 했으며 그녀의 영향은 그녀가 죽은 뒤에도 계속되었다. 이 새로운 여인의 출현으로 그의 시는 사랑의 기쁨을 노래하고 빛의 세계를 향한 일대 도약을 하게 된다. "나는 오래전부터 사랑이란 내 자유를 고통스럽게 희생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은 달라졌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나를 불안하게 만들지도 않고 질투도 하지 않으며 그 여자는 나를 자유롭게 한다. 이제 나에게는 자유로와질 수 있는 용기가 있다."   1936년을 전후하여 그의 시는 점차 사회적, 정치적 관심을 보이고 인류와 정의를 위한 연대 운동에 가담한다. "지금의 모든 시인은 그가 다른 사람의 생에, 공동의 생에 깊이 관여되어 있음을 주장할 권리와 의미를 가지고 있는 때가 왔다"고 그는 썼다. 이 1935년에 그는 그의 오랜 지기이자 가장 절친한 벗이었던 파블로 피카소 회고전을 위해 1월부터 5월까지 스페인의 많은 지역을 순회했다. 스페인을 둘러 본 엘뤼아르의 시선에는 어두운 시대의 그림자였다. 나치가 베르사이유 조약을 파기하고 재무장 선언을 했으며 그 전해에는 이탈리아에서 뭇솔리니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했다.   누구보다 이런 시대의 파랑을 예견하고 있던 그는 이듬해인 1936년 영국 런던에서의 한 강연에서 "지금 모든 시인들이 타인의 생활 속에, 공통된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할 권리와 의무를 가져야 하는 시대가 왔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앞으로 다가올 시대가 시련의 시대가 될 것이며, 시인들을 비롯한 예술가들이 그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에 참여할 것을 부르짖었다.   그의 강연이 있은 지 불과 한 달 뒤인 1936년 7월 스페인 내란이 일어나고,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재판도 없이 처형되고 말았다. 그는 당연히 공화파에 가담하였고 를 발표했다. 이 동안 인간애와 자유를 노래부른 시집에 , , 등이 있다. 이 시기의 피카소는 사상적으로 엘뤼아르의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 역시 비극적인 상황을 결코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피카소가 공산당에 입당하게 된 것도 스페인에서의 파시스트정권에 저항하기 위해서였으며 그런 일 역시 엘뤼아르의 영향이 컸다. 전쟁과 시인   1940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한때 사랑과 꿈의 시인이었던 엘뤼아르는 자유와 조국을 위한 투사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엘뤼아르의 시는 커다란 변모를 보여준다. 그의 시는 전환을 꾀하고 집단적인 감동을 표현하려고 애쓴다. 그는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모든 죄악과 억압에 대한 분노와 혐오를 표현하며 그때부터 시는 저항을 위한 투쟁의 수단과 무기가 된다.    "시인은 자기의 사상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그 사상은 진보를 향한 인간의 궤적 속에서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로부터 1944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항독 비밀 저항 운동에 가담하여 싸웠고, 작가 국민 위원회의 북부 책임자가 되어 비밀 출판물인 를 간행하여 자유와 조국 해방을 위하여 시를 통해 투쟁했다. 이 동안에 그는 시집으로 (이 시집 맨 첫머리에 유명한 시 '자유'가 실려 있다), , 등이 있다. 1942년에는 영국의 항공 편대가 수천 부의 그의 을 독일군 점령 아래 싸우는 프랑스의 항독 투사 위에 뿌렸다. 시가 무기가 된 것이다.   대전이 끝나자 그는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인간에 대한 신뢰와 연대감을 고취하고 계속 시집을 펴냈으로써 자유와 인간애를 노래불렀다. , , , 등이다. 그가 세계와 인류와의 연계를 주장하는 소위 참여 문학에 가담했다고 하나 그의 시는 계속 개성적이며 서정적이고 그의 시의 주제는 언제나 영원한 사랑과 죽음, 평화, 자유였다. 피카소와 엘뤼아르는 삶의 뜨거운 연대자이자 정신적 동지였다. 엘뤼아르가 피카소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피카소를 "한 폭의 그림 앞에 설 수 있는 시인처럼 그는 한 편의 시 앞에 설 줄 아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어둠 그건 눈뜰 때의 나의 이름 어둠 그건 나를 괴롭히는 원숭이 나는 어둠의 거울 앞에서 얼굴을 찡그리고 미치광이인 척 한다네 어둠 그것은 부조리한 나의 무게 차갑게 썩어버린 나의 반신(半身) 중에서     통행금지       - 폴 엘뤼아르     어쩌란 말이냐 문에는 감시병이 서 있는데  어쩌란 말이냐 우리는 갇혀 차단되었는데  어쩌란 말이냐 거리는 차단되었는데  어쩌란 말이냐 도시는 점령되었는데  어쩌란 말이냐 그녀는 굶주리고 있는데  어쩌란 말이냐 우리는 무기를 빼앗겼는데  어쩌란 말이냐 밤은 닥쳐 왔는데  어쩌란 말이냐 우리는 서로 사랑했는데       엘뤼아르와 피카소   엘뤼아르와 피카소는 여름 휴가철마다 남프랑스 무쟁의 바닷가에서 가족들끼리 오붓한 바캉스를 즐기기도 했다. 엘뤼아르가 피카소에게 그의 그림에 있어 사상적 깊이를 주었다면 피카소는 엘뤼아르에게 시적 영감을 주었다. 전통적인 스페인의 색이자 원시적 제의의 색이랄 수 있는 검은 색에서 엘뤼아르는 초현실주의자 특유의 감각으로 인간의 내면 속에 감춰진 어둠의 실체를 밝음 속에 드러내고 있다. 엘뤼아르는 참다운 시인이란 '어두운 진실'을 작품 속에 드낸다고 생각했으며 평생 세계의 어둠과 맞섰다. 엘뤼아르는 평생 동안 두 차례 공산당에 입당한다. 처음의 입당은 1926년 간행 이후 일련의 초현실주의자 그룹과 함께였다. 그후 1933년 공산당에서 초현실주의자들과 함께 축출된다.    당시의 프랑스 공산당은 이념적 경직으로 인해 초현실주의자들의 자유분방함을 견딜 수 없었고, 초현실주의자들 역시 공산당의 엄격함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1943년 그는 나치 독일하의 프랑스에서 공산당에 재입당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유럽을 통틀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나치 독일에 대해 가장 극렬하게 저항한 세력은 좌파였기 때문이다. 엘뤼아르가 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전인류에 대한 사랑과 평화'를 갈구하는 그의 마음은 폭력과 전쟁, 죽음과 암흑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리얼리즘의 참다운 정신을 그가 쉬르 레알리즘이란 그의 문학적 사조 안에서도 실현시키고 있다. 그의 이런 정신은 멀리 우리나라에 까지 영향을 미쳐 1970년대 유신시대의 김지하, 5월 광주 이후의 김남주 시인 등에게 이르러 꽃을 피웠다.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중에서 초현실주의와 공산주의 운동 - 폴 엘뤼아르   1946년 강연 여행으로 스위스에 있을 때 그는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 뉘슈의 죽음의 통지를 받았다. 엘뤼아르는 이때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니쉬의 죽음으로 그는 한때 절망과 공허에 빠져 약 1년 동안 실어증에 빠져 있었다. 엘뤼아르가 기운을 되찾게 된 이유는 현실 속에서 새로운 여인을 발견했다는 것에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그에게는 어둠 속에서 회한을 일삼는 태도를 거부하며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평생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의 성품도) 인류에 대한 신뢰와 사랑과 희망으로 이 위기를 극복했다.   1949년 멕시코의 세계 평화 회의에 참석했다가 거기서 다시 도미니크라는 여성을 만나 제3의 부인으로 맞이했다. 이 재혼을 기하여 엘뤼아르는 이라는 시집을 써서 생의 기쁨을 되찾은 행복을 노래했지만 엘뤼아르의 시들은 뉘쉬의 죽음 이후 쓰라린 회한과 생에 대한 쓸쓸함이 암시되어 있었다. 1952년 엘뤼아르는 과로와 협심증을 일으켜 급사했다. 그의 유해는 전세계의 지식인과 문인의 애도를 받으며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 묻혔다. 파리의 다다그룹 - 오른쪽 1열부터 Tristan Tzara, Céline Arnauld, Francis Picabia, André Breton 2열: Benjamin Péret, Paul Dermée, Philippe Soupault, Georges Ribemont-Dessaignes; 3rd: Louis Aragon, Théodore Fraenkel, Paul Eluard, Clément Pansaers, Emmanuel Faÿ   외국의 문학사조나 유파의 이름만을 듣고서 한 마디로 정리해 버리는 편리한 이해방식을 보이는 이들이 있다. 문화 사조에 있어서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 Sur-realism)에 대한 오해의 상당수도 그렇게 발생한다. 그러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들의 기법까지 초현실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상에 대한 치밀한 묘사를 통해 인간의 무의식에 대한 탐구를 더한 것이다. 앙드레 브르통이 1924년 을 통해 초현실주의가 지향하고 있는 바를 밝히고 있음을 알 수 있다.(물론 초현실주의 선언문 자체는 암시적인 서술로 전개되어 있어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초현실주의의 핵심적인 요소는 이미 많은 학자들이 말하고 있듯이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상상력이 지닌 가치를 환기시키면서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게 꿈꾸며 살 권리가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초현실주의 선언의 배경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역사적 경험과 더불어 프로이트와 마르크스 철학이 자리하고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인류와 부르주아 문명의 종말을 예감했다. 자크 라깡이 "광기로 하여금 항상 이성을 감시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프랑스 대혁명 이후 유럽 문명을 지배했던 부르주아의 도덕율이 한계에 달했음을 자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사회의 속박과 검열, 억압에 의해 욕망을 축소하게 된 인간의 모습을 비참한 현실로 파악하고, 이 세계를 인간의 욕망 차원에서 재구성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문명(전쟁과 부르주아 물질문명)으로 인해 파괴된 인간 본연의 정신적인 힘과 억압된 무의식적 욕망을 해방시키기 위해 시인은 현실 세계의 논리와 일치하는 언어의 질서를 파괴하려 했다. 그들은 현실과 몽상이 조화롭게 연결되는 통일된 세계를 지향했다. 초현실주의가 추구했던 정신적 모험은 합리주의적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예속되지 않으려는 반항과 현실세계를 깊이 있게 탐구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자들은 현실 세계의 강력한 장벽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것은 전체주의의 출현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이었다. 폴 엘뤼아르를 비롯한 초현실주의자들이 공산당에 입당한 까닭은 초현실주의가 실제 현실세계에서 부딪친 무기력함 때문이었다. 초현실주의의 이상은 좌절되었고, 현실은 개선되지 않았다. 진정한 삶 La varie vie과 현실적 삶 La vie reelle의 대립에서 초현실주의는 무기력함을 드러내고 말았다. "는 랭보의 테마와 는 마르크스의 테마 사이에서 평화로운 화해를 이루어 낸 시인" 이라고 엘뤼아르를 말한 것은 그가 초현실주의의 이상을 실현한 시인으로서, 실천적 삶을 살았던 인간으로서 열렬히 살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의 삶은 치열했다.           참고사이트 & 참고 도서  『이 곳에 살기 위하여』/ 폴 엘뤼아르 지음/ 오생근 옮김/ 1974년   - 엘뤼아르의 시집을 읽으면 저도 모르게 행복해진다. 그것은 그의 시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치유력같은 것이다. 가슴 아픈 젊음은 한 번쯤 읽어보시길.  『사랑에 눈 먼 사람 하나 있었다지』/ P.엘뤼아르/ 반도기획/ 1995년    - 엘뤼아르에 대해서는 이상하게도 영세출판사에 낸 책들이 많은 편이다. 상대적으로 젊을 수밖에 없는 출판사 사장들이 엘뤼아르의 시를 읽고 뭔가 감동을 받은 것일까?  『미술과 문학의 만남』/ 이가림 지음/(주)월간미술 / 2000년   - 의 시인이자 인하대 불문학과 교수인 이가림 선생이 에 연재하던 글을 모아 낸 책이다. 피카소와 엘뤼아르를, 모딜리아니와 장 콕토 등을 연결해서 재미있게 해설해 가고 있다. 일독을 권한다.  『세 예술가의 연인 - 엘뤼아르.에른스트.달리, 그리고 갈라』/ 도미니크 보나 지음/ 김남주 옮김 / 한길아트 / 2000년   - 가끔 예술가들의 격정에 희생당하는 불쌍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다.(음, 이말엔 이런 남근주의가 숨어있는 것이다. 예술가 = 남성이란 식의 암시가 깔려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엘뤼아르의 첫 번째 아내이자 달리의 부인, 에른스트의 연인이었던 갈라에게는 그다지 해당되지 않는 말 같다. 그녀가 달리에게 얼마나 무한한 영감을 주었는지는 차차 다루게 될 일이겠지만 갈라를 좋아하기는 참 힘들 것 같다. 이 책은 그런 갈라의 입장에서 쓰인 책이다.  엘뤼아르   - 불어권 시인인 만큼 불어 사이트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불어를 읽지 못하니 무용지물이다. 다만 이 사이트에 있는 그의 사진은 봐둘만 할 것 같다.(불어)       폴 엘뤼아르 Paul Eluard 연보 1895 12월 14일 쎙 드니에서 태어남.  본명 으젠 에밀 폴 그렝델 (Eugene Emile Poul Grindel). 1908 가족 전체가 파리로 이주, 콜베르 중학, 건강이 좋칠 않아 학업을 중단한다. 1912~1914 스위스에서 요양하며 시를 많이 읽는다. 그리고 러시아 여인 갈라를 만난다. 1914~ 1916 제1차 세계대전이 터져 보병으로 입대, 육군병원에서 많은 부상자들을 보며 전쟁을 혐오하게 됨. 엘뤼아르라는 이름으로 시집 『의무와 불안 간행』 1917 갈라와 파리에서 결혼 한다. 1918 5월 11일 딸 세실이 태어남, 『평화를 위한 시편들』 출간 1919 제대함 1920~1922 아라공, 브르통, 수포, 짜라 등과 교유, 다다운동에 참여.『속담Proverb』 지 간행 1920년『동물과 그 인간들』, 1921년 『삶과 필연성과 꿈의 정복』,『반복』 간행 1924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1차 선언문이 발표됨. 엘뤼아르 『죽지 않은 죽음』간행, 초현실주의 활동에 참여, 3월에서 9월까지 세계일주 여행(서인도제도, 타히티, 오스트레일리아, 아시아 등) 1925 초현실주의자들과 본격적 활동 시작 1926 『고뇌의 수도』 간행, 공산당 가입 1929 뉘쉬와 만『사랑시』 간행, 르네 샤르와 만남 1930 샤르, 브르통과 함께『작업지연』,브르통과 함께 『무염시대』 공동 집필 1932 아라공과 불화 『직접적인 삶』 간행 1933 초현실주의자들과 함께 공산당에서 축출됨. 1934 뉘쉬와 정식 결혼 1935 파시스트 등에 대한 투쟁을 호소 1936 스페인 내란 발생, 게르니카가 공습으로 파괴되자 를 쓰고 민중을 지원함. 런던에서 열린 초현실주의 전시회에서 발표. 1939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군경리부에서 중위로 근무함 1940 파리함락, 독일군 점령하 『열린책』 간행 1941 레지스탕스 운동 가담 1942 『시와 진실』 간행 1943 공산당에 다시 들어감,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는 시를 쓰면서 투쟁, 한때는 정신병원에 피신 하기도 함 1944 레지스탕스 운동에 더욱 깊이 참여.『고통의 무기들』 간행. 8월 파리 해방. 그 무렵 심야출판사에서 저항시들을 모아『독일인의 집결지』간행 1945 전쟁이 끝나자 스위스와 영국 등지로 강연 여행 1946 『중단 없는 시』 1947 고독을 벗어나 정치적인 활동, 그는 여러나라를 여행하며 민중의 평화와 독립을 위한 집회에 참석 강연. 1949 멕시코 평화회의 참석, 도미니크를 알게 됨 1951 도미니크와 세 번째 결혼,『모든 것을 말하다』, 『불사조』 간행 1952 폐렴이 악화되어 사망.         죽음 사랑 인생 폴 엘뤼아르 (1895-1952)   그대를 향해 갔고 끝없이 빛을 향해 갔으며 삶은 몸통을 갖게 되었고 희망은 돛을 올리고 잠은 꿈으로 넘쳐흐르고 밤은 새벽에 신뢰의 눈길을 약속하였으며 그대의 양팔의 빛살은 안개를 헤쳐 퍼져나갔으며 그대 입술은 최초의 장미 잎으로 젖어 있었고 황홀한 휴식은 피로를 몰아내고 나는 내 생애 최초의 날들처럼 사랑을 찬미 했네 (중략) 사람이란 서로의 말을 듣고 서로 이해하고 서로 사랑하도록 만들어졌으며 그 아이들은 자라서 아버지가 되는 법이고 불도 없고 집도 없는 아이들이라면 인간과 자연과 그들의 나라를 다시 건설하리니 모든 사람들의 나라 모든 시대의 나라를 (오생근 역)   번역된 외국 시인들의 시를 읽는 것은 마치 비타민 알약을 먹는 것과 같다. 그 시는 싱싱한 과일이나 채소를 먹을 때의 그 씹는 촉감과 냄새와 빛깔이 사라지지 않은 것, 좋은 거니까 먹어봐, 하고 쑥 내밀어진 과제물 같은 것이다. 가끔씩 엘뤼아르의 시는 내게 많은 영감을 준다. 그의 저항 정신을 감싼 초현실주의를,...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는 엘뤼아르의 ‘자유’라는 시를 대 놓고 베낀 것이다.   오늘 엘뤼아르의 시를 옮긴 것은 조금은 따뜻해지고 싶고 위로받고 싶어졌기 때문일지 모른다. 신뢰의 눈길을 보내고, 사랑을 찬미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모든 사람들의 나라, 모든 시대의 나라’가 문득 그립다. 그러나 그러한 과거를 가진 적이 없으므로 문득 그립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 우리는 그의 시 제목처럼 ‘이곳에 살기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 이 겨울도 모두가 따뜻했으면 좋겠다.   (매일신문. 노태맹 시인) 황현산 "모두 표절인 걸 알았지만 민주화의 대의가 중요해 말하지 않았다" 한 저명한 문학평론가가 시인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가 표절 작품이라고 주장해 파문이 일고 있다.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 논란과 맞물려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평론가 황현산은 지난 7일 자기 트위터에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가 발표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게 (폴) 엘뤼아르의 표절인 걸 알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민주화의 대의가 중요했기 때문. 지금 생각하면 그게 잘한 일이었는지 묻게 된다. '타는 목마름으로'를 온전하게 살린 것은 이성현의 작곡이다"라는 글을 올렸다.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와 문학평론집 '잘 표현된 불행'으로 유명한 황현산은 현재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유명 평론가다. 그가 트윗에서 언급한 엘뤼아르 작품은 '자유'. 황현산의 지적대로 '타는 목마름으로'와 '자유'는 주제는 물론이고 어투 등에서도 빼다 박을 정도로 닮았다. '내 학생 때 공책 위에/ 내 책상이며 나무들 위에/ 모래 위에도 눈 위에도/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읽어본 모든 책상 위에/ 공백인 모든 책상 위에/ 돌, 피, 종이나 재 위에도/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숯칠한 조상들 위에/ 전사들의 무기들 위에/ 왕들의 왕관 위에도/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밀림에도 사막에도/ 새 둥지에도 금송화에도/ 내 어린 날의 메아리에도/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밤과 밤의 기적 위에/ 날마다의 흰 빵 위에/ 약혼의 계절들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내 하늘색 누더기 옷들에/ 곰팡 난 해가 비친 못 위에/ 달빛 생생한 호수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들 위에 지평선 위에/ 새들의 날개 위에/ 그림자들의 방앗간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새벽이 내뿜은 입김 위에/ 바다 위에 또 배들 위에/ 넋을 잃은 멧부리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구름들의 거품 위에/ 소낙비의 땀방울들 위에/ 굵은 또 김빠진 빗방울에도/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반짝이는 형상들 위에/ 온갖 빛깔의 종들 위에/ 물리적인 진리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잠깨어난 오솔길들 위에/ 뻗어나가는 길들 위에/ 사람 넘쳐나는 광장들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켜지는 램프 불 위에/ 꺼지는 램프 불 위에/ 모여 앉은 내 집들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겨울의 또 내 방의/ 둘로 쪼개진 과실 위에/ 속 빈 조가비인 내 침대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주접떠나 귀여운 내 개 위에/ 그 쫑긋 세운 양쪽 귀 위에/ 그 서투른 다리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내 문턱의 발판 위에/ 정든 가구들 위에/ 축복 받은 넘실대는 불길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사이 좋은 모든 육체 위에/ 내 친구들의 이마 위에/ 내미는 손과 손마디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놀란 얼굴들의 유리창 위에/ 침묵보다도 훨씬 더/ 조심성 있는 입술들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파괴된 내 은신처들 위에/ 허물어진 내 등대들 위에/ 내 권태의 벽들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나는// 욕망도 없는 부재 위에/ 벌거숭이인 고독 위에/ 죽음의 걸음과 걸음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다시 돌아온 건강 위에/ 사라져 간 위험 위에/ 회상도 없는 희망 위에/ 나는 네 이름을 쓴다// 그리고 한 마디 말에 힘입어/ 내 삶을 다시 시작하니/ 너를 알기 위해 나는 태어났다/ 네 이름지어 부르기 위해// 오 자유여'(폴 엘뤼아르의 '자유' 전문)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전문) "조국은 하나다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꿈속에서가 아니라 이제는 생시에/남 모르게가 아니라 이제는 공공연하게/조국은 하나다/양키 점령군의 탱크 앞에서/자본과 권력의 총구 앞에서/조국은 하나다 ///이제 나는 쓰리라/사람들이 주고받는 모든 언어 위에/조국은 하나다라고/탄생의 말 응아응아로부터 시작하여 /죽음의 말 아이고아이고에 이르기까지/조국은 하나다라고/갓난아기가 엄마로부터 배우는/최초의 말/엄마 엄마 위에도 쓰고/어린아이가 어른들로부터 배우는/최초의 행동/아장아장 걸음마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라고///나는 또한 쓰리라 /사람들이 오고 가는 모든 길 위에/조국은 하나다 라고/만나고 헤어지고 헤어지고 만나고/기쁨과 슬픔을 나눠가지는 인간의 길/오르막길 위에도 쓰고 /내리막길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라고 /바위로 험한 산길 위에도 쓰고 /파도로 사나운 뱃길 위에도 쓰고 /끊어진 남과 북의 철길 위에도 쓰리라///오 조국이여 /세상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꽃이여 이름이여///나는 또한 쓰리라 /인간의 눈길이 닿는 모든 사물 위에 /조국은 하나다라고 /눈을 뜨면 /아침에 당신이 맨 먼저 보게 되는 /천정 위에도 쓰고 /눈을 감으면 /한밤에 맨 나중까지 떠 있는 /샛별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라고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축복처럼 /만인의 배에서 차오르는 겨레의 양식이여///나는 쓰리라 /쌀밥 위에도 쓰고 보리밥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라고 /바다에 가서 쓰리라 모래 위에 /조국은 하나다라고 /파도가 와서 지워버리면 그 이름 /산에 가서 쓰리라 바위 위에 /조국은 하나다라고 /세월이 와서 지워버리면 그 이름 /가슴에 내 가슴에 수놓으리라 /아무리 사나운 자연의 폭력도 /아무리 사나운 인간의 폭력도 /감히 어쩌지 못하도록 /누이의 붉은 마음의 실로 /조국은 하나다라고///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외치리라 /인간이 세워놓은 모든 벽에 대고 /조국은 하나다라고 /아메리카 카우보이와 자본가의 국경 /삼팔선에 대고 나는 외치리라/조국은 하나다라고 /식민지의 낮과 밤이 쌓아올린/분단의 벽에 대고 나는 외치리 /조국은 하나다라고 /압제와 착취가 날조해낸 허위의 벽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고 나는 외치리/조국은 하나다라고//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내걸리라 /지상에 깃대를 세워 하늘 높이 /나의 슬로건 조국은 하나다를 /키가 장대 같다는 양키의 손가락 끝/가난의 등에 주춧돌을 올려놓고 그 위에 /거재를 쌓아올린 부자들의 빌딩도 /언제고 끝내는/가진 자들의 형제였던 교회의 첨탑도 /감히 범접을 못하도록 /최후의 깃발처럼 내걸리라///자유를 사랑하고 민족의 해방을 꿈꾸는 /식민지 모든 인민이 우러러볼 수 있도록 /남과 북의 슬로건 조국은 하나다를!///"  ---김남주, 「조국은 하나다」 전문.   =《덧글들》= 박남철 (2007-**-08 23:15:10)  내가 남주 형을 처음으로 본 것은 남주 형이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작가회의'의 무슨 모임의 뒤풀이 자리에서인가였다. 더 정확하게 얘기해보자면, 인사동 '학고재화랑' 위쪽의 어느 호프집에선가였을 거다.    더욱 정확하게 얘기해보자면,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는 나는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진을 치고 있는---나는 어느 선배에게든, 후배에게든, 처음 보는 선후배들에게는 일부러 먼저 찾아가서 인사를 하지 않았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는 매우 시건방진 처사였다고 아니 반성할 수가 없는 일이기도 하다!)---남주 형에게 먼저 인사를 하지 않고 그저 먼발치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소변을 보려고 화장실에 들렀다가, 화장실에 먼저 와서 소변을 보고 있던 남주 형의 뒷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남주 형의 왼편의 소변대로 다가가서 내 힘없이 질질질 흘러내리는 소변을 잠시 보다가, 문득, 내 오른편 소변대에서 세찬 오줌발 소리로 소변을 보고 있던---저 오줌발 소리가 캄캄 감옥에서 10년씩이나 썩은 사람의 오줌발 소리일 것이란 말인가!---남주 형 쪽으로 고개를 들어 가만히 한마디 던져보았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지요?"  남주 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면서, 다만 고개만 바로 들어 나를 바라보며, 소년처럼 수줍게 웃기만 하던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처음 보는 사람을 눈이 부신 듯이 바라보는 듯한, 그 거만하지 않던 눈길! 남주 형의 눈길은 이미 나를 잘 인지하고 있는, 바로 그러한 눈길이셨던 것이다!  박남철 (2007-**-09 10:26:23)    위 본문에다 인용해본, 세계적인 세 시인들의 대표시들 중에서, 지하 선생의 「타는 목마름으로」는, 폴 엘뤼아르의 「자유」를 창조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변용하여 성공한 대표적인 경우에 속할 것이다.     'FREEDOM'도 아닐, 'LIBERTY'로서의 '자유', 프랑스 적인, '불란서 영화 같은', "불란서 흰빵 같은 자유"를, 바로 저 우리의 6, 70년대의 처절한 현실이었던 "타는 목마름의 민주주의의 자유"로 변용시켜놓은 경우(?)일 것이다.  박남철 (2007-**-09 14:03:47)    그리하여, 지하 선생의 바로 저러한 '징검다리'로서의 「타는 목마름으로」가 선행되었기에, 남주 형의 저 타는 듯한 아지프로로써의 「조국은 하나다」라는 통일 시의 데마고기도 성립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남주 형도 명백히 그 자신의 시의 서두에서부터 "꿈속에서가 아니라 이제는 생시에 / 남 모르게가 아니라 이제는 공공연하게(!)"라고, 바로 '공산당선언'적인 어투로, 지하 선생의 「타는 목마름으로」를 공공연하게 비판하면서도, 수용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남주 형도 이미 이러한 사실들을 잘 의식하면서, 미친 듯이, 작품을 써내려갔을 것이지만, 만약 지하 선생의 '징검다리'로서의 「타는 목마름으로」가 선행하지 않았다면, 남주 형 역시 「조국은 하나다」를 쓰지 않았을 것이지만, 지하 선생의 '징검다리'로서의 「타는 목마름으로」가 선행하지 않았다면, 남주 형의 저 "위대한 반동적 통일 시" 「조국은 하나다」는 한낱, 불란서어의 콧소리 가득 섞인, '슬로건' 아닌, 음색들을 너무나도 불란서적으로 잘 표현해놓고 있을, 폴 엘뤼아르의 세계적인 대표작 「자유」에 대한, 지루하고도 지루한, 열거법과 반복법만이 뒤섞인, 한낱 표절작에 지나지 않게 되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박남철 (2007-**-09 14:29:17)     그리하여, 이제와, 우리의 문학 작품, 특히 시문학 작품에 있어서의 "그 창조적 변용", 또는 "그 창조적 비판 및 그 변용의 확산" 및 "'포절'이냐, 표절이냐" 하는 문제들은 언제나 그 문학사적인 문제들과 더불어, 매우 중차대한 문제들이 되어주고 있다고 아니 말할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 20세기 프랑스의 대표 시인인 엘뤼아르는 초현실주의 작품을 쓰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을 계기로 정치색을 강하게 품은 작품을 쓴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활동에 적극 참여했을 정도다. 평화와 자유, 정의를 관통하는 엘뤼아르 작품 중에서도 대표적인 게 '자유'다. 1942년 영국 공군은 엘뤼아르의 시집 '시와 진실'을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에 뿌리기도 했다. 이 시집의 맨 앞에 실린 작품이 '자유'다. '타는 목마름으로'는 대표적인 저항시인이었던 김지하가 엄혹한 유신시대의 억압 속에서 민주주의를 열망한 작품. 숨이 막힐 듯한 시대적 상황에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절규하는 문체로 풀어낸 한국문단?대표적인 사회참여시다. 사실 '타는 목마름으로'가 '자유'의 표절작이라는 주장은 진작 제기됐다. 시인 노태맹은 올 초 한 지방지에서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는 엘뤼아르의 '자유'라는 시를 대 놓고 베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두 시가 워낙 유명한 만큼 시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타는 목마름으로'가 '자유'의 표절작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일반인은 왜 이 같은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일까. 전태흥 미래티앤씨 대표가 2013년 1월 한 지방지에 기고한 글에서 그 이유를 유추할 수 있다. "며칠 전 페이스 북에서 친구가 쓴 글을 읽었다. 그 글은 2차 대전 당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시인인 폴 엘뤼아르의 시 '자유'와 한국에서 오랫동안 저항시인(무엇에 저항했는지는 모르지만)으로 불린 김지하의 대표 시 '타는 목마름으로'를 비교한 것이었다. 그 글의 내용은 한마디로 김지하의 시가 폴 엘뤼아르의 시를 베낀 것인데 이미 오래전에 '자유'라는 시가 한국에 소개되었고 그 시를 읽은 사람들이 김지하가 그 시를 표절한 것을 알면서 침묵한 것은 표절의 명백한 공범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어 친구는 우리가 그동안 김지하라는 이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주저해 왔던 것은 젊은 날 자신이 지켜왔던 것들을 잃지 않으려는 일종의 보상심리와 같다고 썼다. 전적으로 동의한다.""민주화의 대의가 중요했기 때문"에 모두들 표절인 걸 알고서도 침묵했다는 황현산의 글과 일맥상통하는 주장이다. 한 문인은 "표절에 대한 '침묵의 카르텔'이 있다는 이응준의 지적은 김지하의 사례에도 유효하다"고 말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응준은 최근 허핑턴포스트코리아에 '우상의 어둠, 문학의 타락 - 신경숙의 미시마 유키오 표절'이란 글을 기고해 신경숙의 소설 '전설' 중 한 문단이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우국(憂國)'의 한 문단을 거의 베끼다시피 했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찬미 기자 =================================== [전태흥의 이야기가 있는 음악풍경] 김민기 곡, 양희은 노래 '상록수' 며칠 전 페이스 북에서 친구가 쓴 글을 읽었다. 그 글은 2차 대전 당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시인인 폴 엘뤼아르의 시 '자유'와 한 국에서 오랫동안 저항시인(무엇에 저항했는지는 모르지만)으로 불린 김지하의 대표 시 '타는 목마름으로'를 비교한 것이었다. 그 글의 내용은 한마디로 김지하의 시가 폴 엘뤼아르의 시를 베낀 것인데 이미 오래전에 '자유'라는 시가 한국에 소개되었고 그 시를 읽은 사람들이 김지하가 그 시를 표절한 것을 알면서 침묵한 것은 표절의 명백한 공범이라는 내용이었다.   문학작품에 관해 이런 것이 표절이 성립하는 지는 내가 잘 모르겠다. 단언할 수 있는 건 패러디라는 것도 그렇고 일부 따올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은 드는데 그렇게 하면 저자가 그런 사실을 다른 방법을 통해 알리는 것이 망신을 피하는 길이 될 것 같기는 하다. 그대로 따온 구절도 있지만 새로 덧붙여 놓은 것도 있으니 청출어람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단, 이것이 김지하의 대표작이라면 그것 역시 사기의 일종이라는 것까지는 나도 인정할 수 있다.   또, 폴 엘뤼아르의 "자유"도 시인의 대표작으로 2차대전 중 지어져 영국항공기로 뿌려졌다는 이야기도 있는 만큼 외국에서 이렇게 널리 알려진 게 한국사람들만 모른다는 이유로 표절이라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무리다. 모르는 한국사람들에게는 사기일 수 있겠다. 한 작가의 대표작이 일종의 패러디(?)라는 것은 뭔가 우스워 보이고, 그가 한국문학의 대표작가라면 솔직히 "국격"에도 손상이 가는 일이다. 문학에 대한 감식안이 없는 일개 독자인 나로 김지하를 기억하는 것은 최인호 작가가 몹시 칭찬하던 시인이라는 것 뿐이다. 또한, 일본 같이, 얄밉고 한편으로 증오스런 노릇이지만,1분명 문화적으로는 한국이 넘볼 수 없는 동양의 대표주자2인 나라에서 그를 꾸준히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해왔다는 점도 내가 쉽게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겠다.3 적어도 한 때 한국문화예술인들이 그렇게도 베껴왔던 일본 것은 그가 베끼지 않았다는 증거겠다. 하긴, 주작업이 민족적이고 전통적인 시였으니 그런 일이 있을 지 모르겠으나, 거의 드물게도 현대적 풍으로 쓴 대표적 하나가 그런 쪽이라니 실망이 되는 건 사실. 앞으로는 이 시에 대해 작가나 소개하는 사람들이나 폴 엘뤼아르의 "자유"도 함께 언급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폴 엘뤼아르도 엘뤼아르지만, 김지하의 는 알퐁스 도데의 과도 비슷하다. 마지막에 도데의 소설에서 하멜 선생은 마지막으로 목이 메인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대신 칠판에 "프랑스 만세"라고 크게 쓰는 장면이 있다.   문학도 좋고 뭣도 좋지만 우리는 먼저 우리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 아직은,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해 마다 노벨문학상 후보 누구누구 하는 이야기가 나오며 한국문학도 덩달아 대단해 진 줄 생각하지만 정말 아직까지는 우리 문학 수준이 이 정도 밖에는 안된다. 아니 수준이라기 보다는 이것은 혼탁함의 척도에 더 가까운데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지 않는다는 것도 다 이유가 있으니까. ============================   (프랑스)엘뤼아르 시모음   엘뤼아르  1895~1952   초현실주의 시인으로서, 또한 열렬한 저항시인으로 비교적 다양한 문학적 생애를 보낸 엘뤼아르는   1936년 스페인 내란 이후 뒤늦게 정치적 움직임에 참여하기 시작하였고, 전쟁 중 항독운동에 가담 하였다.   하지만 다른 참여시인들 보다는 훨씬 너그럽고 온건하여, 순수한 시인으로서의 기질과 천분을 가졌고   스페인 내란 이후 매우 전투적인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나, 어딘가 체념의 여지가 깃들여 있고, 초현실주의의 흔적이 남아있다.     주요작품: 고뇌의 수도(Capitale de Douleur)1926,          직접적인 인생(La Vie Immediate)1932,          시와 진실(La Poesie et la verite)1942 등           경쾌한 노래     나는 앞을 바라보았네 군중 속에서 그대를 보았고   밀밭 사이에서 그대를 보았고 나무 밑에서 그대를 보았네.     내 모든 여정의 끝에서 내 모든 고통의 밑바닥에서   물과 불에서 나와 내 모든 웃음소리가 굽이치는 곳에서     여름과 겨울에 그대를 보았고 내 집에서 그대를 보았고   내 두 팔 사이에서 그대를 보았고 내 꿈속에서 그대를 보았네.     나 이제 그대를 떠나지 않으리.         한 순간의 거울     그것은 빛을 분산시키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외모와는 다른 섬세한 모습을 보여주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방심할 여유를 앗아가버린다. 그것은 돌처럼 단단하다,   형태가 없는 돌, 움직임이 있고 시각이 있는 돌처럼,   그리고 그것의 섬광은 그 어떤 갑옷이나 그 어떤 가면도 일그러질 만큼 찬란하다.   손에 잡혀 있었던 그것은 손과 동화되기를 거부하고, 이해되었던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새는 바람과 뒤섞이고, 하늘은 진리와   사람은 현실과 뒤섞인다.       자유                국민학교 시절 노트 위에 나의 책상과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가 읽은 모든 페이지 위에 모든 백지 위에   돌과 피와 종이와 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황금빛 조상 위에 병사들의 총칼 위에   제왕들의 왕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밀림과 사막 위에 새 둥우리 위에 금작화 나무 위에   내 어린 시절 메아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밤의 경이로움 위에 일상의 흰 빵 위에   결합된 계절 위에 나는 어늬 이름을 쓴다     누더기가 된 하늘의 옷자락 위에 태양이 곰팡 슬은 연못 위에   달빛이 싱싱한 호수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들판 위에 지평선 위에 새들의 날개 위에   그리고 그늘진 방앗간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새벽의 입김 위에 바다 위에 배 위에   미친 듯한 산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구름의 거품 위에 폭풍의 땀방울 위에   굵고 무미한 빗방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반짝이는 모든 것 위에 여러 빛깔의 종들 위에   구체적인 진실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깨어난 오솔길 위에 뻗어나간 큰 길 위에   넘치는 광장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불켜진 램프 위에 불꺼진 램프 위에   모여 있는 내 가족들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둘로 쪼갠 과일 위에 거울과 내 방 위에   빈 조개껍질 내 침대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게걸스럽고 귀여운 우리 집 강아지 위에 그 곤두선 양쪽 귀 위에   그 뒤뚱거리는 발걸음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 문의 발판 위에 낯익은 물건 위에   축복받은 불의 흐름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화합한 모든 육체 위에 내 친구들의 이마 위에   건네는 모든 손길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놀라운 소식이 담긴 창가에 긴장된 입술 위에   침묵을 넘어선 곳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파괴된 내 안식처 위에 무너진 내 등댓불 위에   내 권태의 벽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욕망없는 부재 위에 벌거벗은 고독 위에   죽음의 계단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되찾은 건강 위에 사라진 위험 위에   회상없는 희망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삶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자유여.       그리고 미소를     밤은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주장하기 때문에   슬픔의 끝에는 언제나 열려 있는 창이 있고   불켜진 창이 있다.   언제나 꿈은 깨어나듯이 충족시켜야 할 욕망과 채워야 할 배고픔이 있고   관대한 마음과 내미는 손 열려 있는 손이 있고   주의 깊은 눈이 있고   함께 나누어야 할 삶 삶이 있다.       나이는 없이              숲속을 향하여 우리는 가까이 간다   아침의 거리를 지나서폴 엘뤼아르, 안개의 계단을 올라보라     우리가 가까이 가면   대지의 가슴은 파르르 떨고 여전히 다시 태어나는 하루     하늘은 넓어지리라 잠은 폐허 속에서   휴식과 피로와 체념의 두터운 어둠 속에서 산다는 일은   얼마나 견딜 수 없는 일이었을까 대지는 싱싱한 육체의 모습을 회복하고   바람은 가라앉아 우리의 눈 속에 태양과 어둠은   변함없이 흐르리라       그리고 미소를 - 폴 엘뤼아르   밤은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주장하기 때문에 슬픔의 끝에는 언제나 열려 있는 창이 있고 불 켜진 창이 있다. 언제나 꿈은 깨어나며 욕망은 충족되고 배고픔은 채워진다. 관대한 마음과 내미는 손 열려 있는 손이 있고 주의 깊은 눈이 있고 함께 나누어야 할 삶 삶이 있다.   폴 엘뤼아르 (Paul Eluard, 1895~1952)   스페인 내전이 한창이던 1937년 4월 26일. 독재자 프랑코를 지원하는 독일 공군이 스페인 북부의 작은 마을 바스크를 폭격한다. 이 폭격으로 마을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000여명 죽거나 다치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을 접한 유럽대륙의 예술가들은 분노한다. 뜻을 함께 하기로 한 예술가들은 같은 해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 스페인관에 강력한 항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피카소의 대작 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전쟁의 잔학함과 인간의 비참함을 빛과 어둠으로 그려낸 불세출의 명작은 이렇게 탄생했다. 당시 파리박람회 스페인관에는 피카소의 그림 만 걸려있었던 건 아니다. 그림 옆에는 한 편의 시도 같이 전시됐다. 바로 폴 엘뤼아르의 「게르니카의 승리」라는 시였다. 한 대목만 옮겨보자.   “여인들과 어린아이의 눈빛 속에는 보석을 가지고 있고 남자들은 있는 힘을 다해 이를 보호하고 살고 죽기 위한 공포와 용기 그렇게 어렵고 그렇게 쉽기도 한 죽음   보석을 노래하게 한 사람들 보석을 망쳐버린 사람들”   엘뤼아르는 상반된 듯한 이미지를 지닌 시인이다. 그는 육감에 가까울 정도로 사랑에 몰두한 사랑의 시인이자, 압제와 불의에 맞선 저항시인이기도 하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만나야 하는 시가 서두에 인용한 「그리고 미소를」이다. 이 시는 아주 감미롭고 따뜻하게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거친 구호도 다급한 분노도 담겨 있지 않지만 시는 충분히 강력하다. 우리가 왜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아껴야 하는 지, 함께 살아가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지. 굳이 목소리 높여 외치지 않아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피카소,   1895년 파리 북부에서 태어난 엘뤼아르는 고등학교 시절 폐결핵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스위스 다보스로 요양을 떠난다. 이곳에서 그는 ‘갈라’라고 불리는 러시아 출신 여성과 결혼을 한다. 훗날 갈라가 살바도르 달리와 사랑에 빠지면서 둘 사이는 파국을맞지만, 이때의 경험과 초현실주의자들과의 교류는 엘뤼아르의 시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는 루이 아라공 등과 함께다다이즘 운동의 주요 멤버가 된다. 요양원에서 나온 엘뤼아르는 1차 대전에 간호병으로 참전해 전쟁의 참상을 몸소 겪으며 인간내면의 폭력성에 대해 커다란 회의를 느끼게 된다. 초현실주의자였던 그를 현실참여파 시인으로 변모시킨 것은 피의 역사였다. 스페인 내전과, 1,2차 세계대전, 나치즘의 횡포 등을 목도하면서 ‘사랑의 시인’ 엘뤼아르는 자유를 위한 투사로 거듭나게 된다. 이 무렵 쓴 유명한 시가 「자유」라는 유명한 시다. 주요부분은 이렇다.   “반짝이는 모든 것 위에 여러 빛깔의 종들 위에 구체적인 진실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살포시 깨어난 오솔길 위해 곧게 뻗어나간 큰 길 위에 넘치는 광장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중략) 자유여.”   우리가 엘뤼아르를 기억하는 이유는 그가 인간의 삶과 사랑을 단 한 번도 저버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자기가 살아야 했던 시대에 눈을 감은 채 감미로운 사랑만 노래했다면, 또 만약 그가 오로지 목적에만 부합하는 구호같은 투쟁시만 썼다면우리는 그를 위대한 시인으로 기억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는 두 가지를 모두 노래했다. 그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시대정신이었고, 우리가 살아냈던 삶이었으므로.   엘뤼아르는 온 몸으로 온 정신으로 그가 살았던 시대를 증거했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한 치의 비겁함도 없이 자기가 살았던 시대를 증언했다. 그리고 그 증언은 너무나 아름다운 ‘연시(戀詩)’로 우리에게 남아있다. 그리고 엘뤼아르의 모든 문학은 공동체를 향해 있었다.   “우리는 혼자서가 아니라 둘이서 목적지를 향해 가리라/ 우리 둘이 서로를 알게 되면 모든 사람을 알게 되리라/ 우리는모두 서로를 사랑할 것이며 우리의 아이들은/ 고독한 자가 눈물 흘리는 서글픈 전설을 비웃으리라.” (「우리의 삶Ⅱ」)   | 허연 (시인, 매일경제 문화전문기자)  
1926    미국 시인 - 로버트 로웰 댓글:  조회:4624  추천:0  2016-12-04
1917. 3. 1 미국 보스턴~ 1977. 9. 12 뉴욕 시. 미국의 시인.   복잡한 자전적 시로 유명하다. 보스턴에서 자랐으며 제임스 러셀 로웰이 증종조부이고, 에이미 로웰, 퍼시벌 로웰, A. 로렌스 로웰은 먼 친척들이다. 하버드대학에 다녔으나 퓨지티브 (Fugitive:1920년대 미국의 시인·비평가 그룹)의 주창자인 존 크로 랜섬이 가르치는 오하이오 주 갬비어의 캐니언 칼리지로 옮겼다. 1940년에 졸업하고 그해에 소설가 진 스태퍼드와 결혼하여 잠시 가톨릭교로 개종했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 양심적 병역기피자로서 1년 1일의 형을 선고받고 5달 동안 코네티컷 주 댄버리에 있는 연방 교도소에서 복역했다.   〈위어리 경(卿)의 성 Lord Weary's Castle〉(1946)에 실린 시 〈감옥에서 In the Cage〉와 〈인생 연구 Life Studies〉(1959)에 실린 매우 세심한 시 〈웨스트 가(街)와 렙커의 회상 Memories of West Street and Lepke〉은 이때의 경험을 말한다.   첫시집 〈Land of Unlikeness〉(1944)에서는 위기에 처한 세계와 정신적인 안정에 대한 갈구를 표현했다.   〈위어리 경(卿)의 성〉에는 그의 가장 뛰어난 시로 인정되는 2편의 시가 실렸는데 〈낸터킷의 퀘이커 묘지 The Quaker Graveyard in Nantucket〉는 로웰의 친척인 워렌 윈슬로가 제2차 세계대전중 바다에서 실종된 것을 애도하는 시이고, 〈검은 바위에서의 대화 Colloquy in Black Rock〉는 성체성혈대축일을 기리는 시이다.   1948년에 첫번째 부인과 이혼한 뒤 이듬해에 작가이자 비평가인 엘리자베스 하드윅과 결혼했으나 1972년에 또 이혼했다.   1951년에는 극적 독백기법을 쓴 〈캐버노의 방앗간 Mills of the Kavanaughs〉을 출판했다.   1954년에는 보스턴에 정착했다.   〈인생 연구〉에는 자전적 수필 〈리비어 가 91번지 91 Revere Street〉와 고백시 15편이 실려 있다. 이 시들 중에서는 정신병원에 갇힌 경험을 묘사한 〈Waking in Blue〉와 정신적인 혼돈상태를 전달한 〈스컹크의 시간 Skunk Hour〉이 유명하다.   시민권 옹호와 1960년대의 반전운동(反戰運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이는 〈죽은 연합군을 위해 For the Union Dead〉(1964)· 〈대양 근처에서 Near the Ocean〉(1967)· 〈노트 Notebook 1967~68〉(1969) 등에 잘 나타나 있다.   1965년에 내놓은 3부작 희곡 〈옛 영광 The Old Glory〉(1968 개정)에서는 역사적 시각에서 미국의 문화를 조망하고 있다. 〈페드라 Phaedra〉(1963)와 〈묶인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Bound〉(1969)를 개작했으며, 유럽의 여러 시인들의 작품을 의역한 〈모방 Imitations〉(1961)을 썼다.   이밖에도 시집 〈여행, 기타 보들레르 시의 개작 The Voyage and Other Versions of Poems by Baudelaire〉(1968)을 발표했다.   팔려고 내놓은 집                                                                  로버트 로웰  함부로 남발한 적개심으로 꾸며진  남루하며 수줍은 놀이터,  딱 일 년만 살았다―  베벌리 농장에 있는 아버지의 오두막을  당신이 죽은 달에 시장에 내놓았다.  텅 빈, 문이 열린, 친숙한,  도시가옥 풍의 가구는  장의사가 금방 다녀간 뒤에  발끝을 들고  운송업자를 애타게 기다린다.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지만,  여든 살까지 홀로 살 일이 두려운,  어머니는 멍하니 창문을 응시했다.  마치 목적지를 한 정거장 지나친  기차에 타고 있는 듯.  =============================== Skunk Hour 스컹크 時                                  ( For Elizabeth Bishop)                                              (엘리자베스 주교를 위해)                                                              Robert Lowell ​                                                                          로버트 로웰   Nautilus Island's hermit heiress still lives through winter in her Spartan cottage; her sheep still graze above the sea. Her son's a bishop. Her farmer is first selectman in our village; she's in her dotage. ​앵무조개 섬에는 상속녀 하나가 장식하나 없는 오두막에 칩거하여 겨울을 난다. 그녀가 키우는 양들은 아직도 바다를 면한 절벽 위에서 풀을 뜯고, 그녀의 아들은 주교. 남편인 농부는 우리 마을에서 자치위원인데, 그녀는 이제 노망이 들었다. ​------------------------   Thirsting for the hierarchic privacy of Queen Victoria's century, she buys up all the eyesores facing her shore, and lets them fall.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귀족적인 은밀성이 그리웠던 그녀는 해변에 연한 눈에 거슬리는 것들을 모두 사들여서 철거해버렸다. ​-----------------   The season's ill --- we've lost our summer millionaire, who seemed to leap from an L.L.Bean catalogue. His nine-knot yawl was auctioned off to lobstermen. A red fox stain covers Blue Hill. 계절이 병들었다 --- 여름이면 찾아오던 어느 백만장자는 ​빈회사 상품통신판매목록에서나 나올 법 했는데, 이제는 고인이 되었다. 그가 몰던 쾌속선은 가재잡이어부들에게 경매되었다. 靑山이 붉은여우 융단을 덮어썼다. ---------------------- ​   And now our fairy decorator brightens his shop for fall; his fishnet's filled with orange cork, orange, his cobbler's bench and awl; there is no money in his work, he'd rather marry. 그리고 이제 실내 장식가는 가을맞이용으로 가게를 화사하게 꾸민다. 그의 어망은 오랜지색의 콜크들이 달리고 그의 신기료 장수 의자와 송곳도 오렌지색이다. ​ 그런데 , 장사에서 별로 재미를 못 보니, 장가나 가는 게 나을 법 하다.   ​-------------------------   One dark night, my Tudor Ford climbed the hill's skull; I watched for love-cars. Lights turned down, they lay together, hull to hull, where the graveyard shelves on the town ... My mind's not right. 어느 어두운 밤, 내가 모는 포드사 튜더형 차가 산정에 올라갔다. 내 눈엔 사랑을 나누는 차들이 보였지. 전조등을 끈 채, 그들은 몸을 맞대고, 함께 누워있었다. 내 정신이 온전치 못한 걸까.   ------------------   A car radio bleats, "Love, O careless Love ..." I hear my ill-spirit sob in each blood cell, as if my hand were at its throat ... I myself am hell; nobody's here --- 차 내 방송이 직직 거리는데, "사랑, 오, 조심성 없는 사랑이여..."란 노랫말이 들리다. 나는 내 병든 영혼이 피톨마다 신음하는 소리를 듣는다. 마치 내 손이 영혼의 목을 조르듯. 내 자신이 지옥이야. 여긴 아무도 없는 데 말이지. ------------------------------   only skunks, that search in the moonlight for a bite to eat. They march on their soles up Main Street: white stripes, moonstruck eyes' red fire under the chalk-dry and spar spire of the Trinitarian Church. 있는 것이라곤 스컹크들인데, 이 놈들은 한 입 거리를 찾느라고 달밤을 누빈다. 녀석들은 중심대로 위를 발바닥으로 기어가는데 ​하얀 등줄이 드러나고, 정신 나간 눈동자는 벌건 빛을 발산한다 삼위일체 파 교회의 백악처럼 하얗게 마르고 돛대 같은 첨탑 아래에서. ​ --------------------- I stand on top of our back steps and breathe the rich air --- a mother skunk with her column of kittens swills the garbage pail. She jabs her wedge-head in a cup of sour cream, drops her ostrich tail, and will not scare. 뒷 계단 꼭대기에 서서 활기찬 공기를 마시면서. 어미 스컹크는 새끼들을 줄 세우고 쓰레기통을 게걸스럽게 뒤지고 뾰족한 주둥이를 신맛이 나는 아이스크림에 파묻고, 타조 같은 꼬리를 바닥으로 깔고. 겁도 없이. Robert Lowell(1917~1977) 영국 시인 SKUNK(스컹크)는 족제빗과의 동물로 북아메리카 남부와 멕시코 등지에 서식하는 새. 1959 Bishop의 헌시 “The Armadillo”의 응답 시로 이 시는 정신적, 경제적, 윤리적으로 타락한 뉴잉글랜드의 풍속도를 풍자한 시이다.  연별로 분석하면; (1~4연) 부정적인 현실의 이미지 (정신적, 경제적, 성적 타락) (5~6연) 현실, 내면을 직시하는 시인  (7~8연) 현실을 타파할만한 강력한 생명력과 용기를 가진 스컹크를 본다는 것.      
1925    영국 계관시인 - 로버트 브리지스 댓글:  조회:5239  추천:0  2016-12-04
로버트 브리지스 /                                   * 이해와 감상 내가 좋아하는 시에 영국의 계관시인이 었던 로버트 브리지스(Robert Bridges, 1844-1930)의 [유월이 오면-When June Is Come]이 란 시가 있다. “유월이 오면 나는 하루 종일 / 내 사랑과 향긋한 건초 속에 앉아 / 산들바람 하늘에 흰 구름이 짓는 / 저 높은 곳 해 바른 궁궐 바라본다네 / 그녀는 노래하고 난 노래 지으며 / 온종일 아름다운 시 읊조린다네 / 건초 집에 둘이서 남몰래 누워 있으면 / 오! 인생은 즐거워라, 유월이 오면.” 한 폭의 밝고 투명한 수채화같이 6월의 전원 풍경을 깔끔하게 묘사한 시이다. 청명한 하늘에 떠있는 구름 궁전, 햇빛 쏟아지는 언덕, 그리고 풋풋한 건초더미 속에 호젓하게 앉아있는 연인들의 모습을 선명하게 그리고 있다.   나는 유월은 풀과의 전쟁하는 달이라 말하고 싶다. 천여 평의 밭에 포도, 복숭아, 감나무, 살구나무, 자두나무, 대추나무, 밤나무, 사과나 무 등등의 과목이 있다. 난 농사꾼이 아니기에 잘 가꾸지도 못한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것은 풀이 얼마나 잘자라는지 예초기로 풀을 깎고 나서 뒤돌아 보면 금방 또 자라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속담에 ‘유월 장마에 돌도 큰다’ 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유월 장마가 올 때엔 모든 것이 매우 잘 자라므로 풀도 아닌 돌도 큰다고 하였으니 옛 조상들의 멋진 생각에 감탄할 뿐이다. 참으로 놀라울 정도로 모든 것이 왕성하게 잘 자란다. 유월은 자람의 계절이다.   이럴 때 생각해 본다. 나의 믿음도 이렇게 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러기에 유월의 여름은 땀 흘릴 수밖에 없다. ‘녀름짓다’는‘농사짓다’의 옛말이다. 여름(夏)=열매, ‘열-’의 동명사형에서 ‘열음=여름’이 되었다고 본다.   땀 흘려 농사짓는 유월, 풀들이 잘 자란다. 그렇지만 나는 행복하다. 푸른 유월의 계절에는 채소가 밭에 많다. 매일 푸른 채소를 먹는 유월은 나도 소가 되어 풀을 뜯고 있으니 말이다. 채식의 즐거움 여기에도 있으니 말이다. (표성수 문학박사) 로버트 브리지스   로버트 브리지스 (1844-1930) 영국 시인 겸 수필가. 명문 집안 출신으로, 옥스퍼드대학에서 약학을 공부하여 처음에는 소아과 병원에 근무하였다. 그러나 1882년부터 시 집필에 전념하였으며,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1913년에 영국의 왕실이 임명한 계관시인이 되었다.  저서로는, 등이 있다. ===@ 영국의 시인 겸 수필가. 1844년 영국 켄트주 월마의 명문 집안에서 태어나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했다. 처음에는 약학을 공부하고 소아과 병원에서 근무하다 개인 병원을 열었으나 환자가 적어 병원 경영에 어려움이 많았다. 1882년부터는 시 창작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1885년부터 1894년까지 8편의 희곡을 써서 고전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으로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순직한 감정과 운율이 아름다운 시를 많이 썼다. 그밖에도 장시집 을 발표했다.           오늘은 울지 말아라 ​   오늘은 울지 말아라 이 슬픔은 웬일인가? 지금의 불안 속에서 배울지니 네 마음 속 깊은 데까지 적시는 이 눈물을 누를 수 있도록 해라   네 과거의 용기와 미래의 긍지를 생각하여라 일어서라 슬픈 마음이여 부숴지지 말라 보기 싫은 넋두리에 대해서나 더욱 좋은 인생의 기원에 대해서나   네 생명은 날마다 줄어든다 어두운 무덤의 평화도 분명하게 다가와   바로 그날 하룻밤의 편안한 잠과 함께 헤어져 끝없는 잠 속에 빠져들게 된다   싸우라 투쟁 속에 있어라   네 죽음은 머나먼 꿈의 일이 아니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슬픔과 같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때는 어쩌면 오늘일지도 모른다   - 로버트 브리지스 ​ ​   나는 지는 꽃을 사랑했네   나는 지는 꽃을 사랑했네, 그 꽃 안의 마술의 천막 안에서 풍성한 빛깔이 기억에도 없는 달콤한 향기와 결혼을 하네: 신혼여행의 즐거움― 한 시간 만에 여무는 첫눈에 반한 사랑의 기쁨― 나의 노래여, 꽃만 같아라!   나는 사라지는 멜로디를 사랑했네, 멜로디의 매력이 그를 환영코자 몸을 떠는 매끄러운 하늘 위에 씌어지기 전의 노래를. 멜로디는 불 같은 맥박으로 영혼의 욕망을 선포하고는 사라진다네, 그 어디에도 없네― 나의 노래여, 멜로디만 같아라!   노래야, 멸(滅)하거라, 숨소리마냥 멸하거라, 그리하여 활짝 핀 채로 시들거라; 꽃의 죽음을 두려워 마라, 멜로디의 무덤을 무서워 마라! 기쁨 속에 날아가라, 이 곳으로부터 날아가라! 고이 기억할 것은 그대 사랑이 붙든 부드러운 감각이었다; 이제 그대가 떠난 자리에서 미(美)는 눈물을 흘리리.                                                     ―로버트 브리지스(1844~1930)     진(晋)나라의 도연명은 오직 국화만을 사랑했고, 송나라의 주돈이는 연꽃을 사랑하여 을 남기기도 했다. 당나라 고조 때에는 황후가 모란을 사랑하자 세인이 너나없이 모란을 사랑했다.  퇴계는 매화를 사랑하여 돌아가기 몇 달 전에 매화를 읊은 그의 시만을 엮어 을 만들기도 했다.   꽃이 향연이 시작되는 이 봄, 의사 출신의 유일한 영국 계관시인 로버트 브리지스의 시 한 편을 골랐다. 1913년 알프리드 오스틴의 뒤를 이어 계관시인의 자리에 오른 브리지스는 섬세하고 치밀한 작법의 고전시를 발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옥스퍼드의 코퍼스 크리스티 대학을 졸업한 후 38세까지 런던에서 의사로 활동한 그는 동시대의 유명 시인 G. M. 홉킨스의 후원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여기 소개된 시는 그가 의사로 있던 1876년에 발표한 것으로 시집 (The Growth of Love)에 수록되어 있다.   브리지스는 시의 언어가 가지는 생명력은 단어에 상투적인 색채가 입혀지기 이전의 순간에 있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시는 공중에 던져지는 노래처럼 찰나의 생명만 누리고 사라질 것을 이 시에서 염원하고 있다.     [출처] 나는 지는 꽃을 사랑했네 / 로버트 브리지스|작성자 지티   [출처] 오늘은 울지 말아라 - 로버트 브리지스|작성자 빙그레                  인생은 아름다워라! 6월이 오면     When June is come, then all the day 유월이 오면 나는 하루 종일     I'll sit with my love in the scented hay: 내 사랑과 향긋한 건초 속에 앉아     And watch the sunshot palaces high, 산들바람 하늘에 흰 구름이 짓는     That the white clouds build in the breezy sky.  저 높은 곳 해바른 궁궐 바라본다네     She singeth, and I do make her song,  그녀는 노래하고 난 노래 지으며     And read sweet poems the whole day long: 온종일 아름다운 시 읊조린다네     Unseen as we lie in our haybuilt home,  건초 집에 둘이서 남몰래 누워 있으면     O, life is delight when June is come.  오 인생은 즐거워라, 유월이 오면.     로버트 s,브리지스 (1844-1930) 영국의 시인이자 수필가 옥스포드대학에서 약학을 공부하고     소아과 병원에서 근무했으나 1882년부터 시에 전념했다     1913년에 계관시인이 되었다 순수한 감정과 운율울 살린 아름다운 시를 썼다     자연은 계절마다 아름답지만 , 6월에 더욱 더 눈부십니다     푸른 물이 뿜어 나오는듯한 진초록 잎들. 흐드러지게 핀 꽃들     자연이 가장 싱싱한 생명의 힘을 구가하는 때지요     사람의 삶에도 계절이 있다면 단연 청춘이 제일 아름답지않을까요     나긋나긋한 몸매와 통통튀는 용수철같은 발걸음     온몸으로 발산하는 생동감, 삶에 대한 도전과 자신감-     모두 멋지지만     청춘이 아름다은 이유는 아마도 아직은 낭만을 잃지않고     달콤한 사랑에 빠지는 나이이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그래서 시인들은 청춘의 달 6월을 사랑의 달이라고 불렀고      작사가 레오 로빈은 이라는 노래에서 이렇게 노래부른적도 있습니다     "사랑에 빠졌으니 1월속의 6월이네!"     '청춘'이라는 말을 떠올릴때마다 나는 괴테가 생각납니다           청춘을 갈망하는 파우스트의 외침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폭풍의 심장을 가졌던 그날들을 내게 돌려달라     환희가 너무 깊어 고통스럽던     시절,증오의 힘, 그리고 사랑의 동요-     아,내게 내 젊음을 다시 돌려 달라!"     그 '폭풍의 심장'을 가진 청춘을 다시 살라면     난 아마 파우스트처럼 선뜻 '예스'라는 답이 나오지않을것 같습니다     그래도 향기로운 초여름 6월이 오면     아름다운 하늘,꽃 ,숲,미풍을 느끼며     '아,인생은 아름다워라'     ...라고 노래하는 그 마음만은 간직하고 싶습니다             출처 :演好마을     
1924    미국 최초의 계관시인 - 로버트 워런 댓글:  조회:4418  추천:0  2016-12-04
출생일 1905. 4. 24, 미국 켄터키 거스리 사망일 1989. 9. 15, 버몬트 스트래턴 국적 미국 요약 미국의 소설가·시인·비평가·교육자.   전통적인 농촌사회의 가치를 침식당한 남부가 처한 도덕적 딜레마를 다룬 것으로 유명하다. 1986년 미국 최초의 계관시인이 되었다. 1921년 테네시 주 내슈빌에 있는 밴더빌트대학교에 입학해, 그곳에서 자칭 퓨지티브라는 시인 집단에 가입했다. 그는 이 집단의 몇몇은 다른 남부인들과 함께 남부에서 농민적인 생활방식을 지켜줄 것을 호소한 〈나의 위치를 고수하리라 I'll Take My Stand〉(1930)라는 수필집을 출판했는데, 워런도 여기에 참여했다. 1925년 밴더빌트대학교를 졸업한 후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1927 문학석사)와 예일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뒤에는 로즈 장학생으로 옥스퍼드대학교에 갔다. 1930~50년 밴더빌트·미네소타 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 및 대학교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클리언스 브룩스, 찰스 W. 핍킨과 함께 당시 미국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문학잡지 〈서던 리뷰 The Southern Review〉를 창간·편집했다. 그뒤 1951~73년 예일대학교에서 가르쳤다. 클리언스 브룩스와 함께 쓴 〈시의 이해 Understanding Poetry〉(1938)·〈소설의 이해 Understanding Fiction〉(1943)는 신비평 이론을 확산시키는 데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신비평). 첫 소설 〈복면기사단 Night Rider〉(1939)은 켄터키 주의 담배 자영농들과 큰 담배회사 사이에 벌어진 담배 전쟁(1905~08) 이야기이다. 비극적 반어투로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폭력을 강조하며 도덕적 궁지에 빠져 있는 개인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점에서 뒤에 나오는 많은 소설을 예고했다. 가장 잘 알려진 소설 〈모두가 왕의 부하들 All the King's Men〉(1946)은 루이지애나의 민중 지도자 휴이 롱의 생애를 토대로 한 작품으로, 1947년 퓰리처상을 받았고 영화로 만들어져 1949년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그밖의 소설로는 〈천국의 문에서 At Heaven's Gate〉(1943)·〈세상도 시간도 World Enough and Time〉(1950)·〈천사들의 무리 Band of Angels〉(1956)·〈동굴 The Cave〉(1959)이 있다. 토머스 제퍼슨의 두 조카가 저지른 살인사건을 다룬 이야기체 장시 〈용의 형제 Brother to Dragons〉(1953)는 원래 소설로 쓴 것을 운문으로 바꾼 것이다. 시는 대부분 소설에서 다룬 주제를 함께 다루고 있다. 시집으로 〈약속 : 시 1954~56 Promises : Poems, 1954~1956〉·〈당신, 제왕들, 다른 사람들 You, Emperors, and Others〉(1960)·〈오더번 : 환상 Audubon : A Vision〉(1969)·〈지금과 그때 : 시 1976~1978 Now and Then : Poems, 1976~78〉·〈입증된 소문 Rumor Verified〉(1981)·〈우두머리 조지프 Chief Joseph〉(1983)·〈신작시선집 1923~85 New and Selected Poems, 1923~1985〉(1985)이 있다. 〈Blackberry Winter〉가 들어 있는 〈다락방의 곡예 The Circus in the Attic〉(1948)는 몇몇 비평가들이 워런의 최고 걸작으로 꼽는 단편소설집이며, 〈에세이 집 Selected Essays〉(1958)은 평론을 모은 책이다. 소설뿐만 아니라 시 부문에서도 퓰리처상을 2차례(1958, 1979) 받았는데, 1986년 계관시인이 되었고 계관시인 중 두 부문에서 모두 퓰리처상을 받은 사람은 워런뿐이었다. 말년에는 시작(詩作)에만 몰두했다. ================================================== 신비평(新批評 New Criticism) 존 크로 랜섬(1888~1974), 존 올리 앨런 테이트(1899~1979), 클린스 브룩스(1906~), 로버트 펜 워런(1905~1989), 리처드 파머 블랙머(1904~1965) 등이 주도한 1930~50년대 영·미의 비평계를 휩쓸었던 문학사상. 넓게 보면 에즈라 루이스 파운드(1885~1972),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1888~1965) 등의 업적도 신비평의 선구라 할 수 있다. 신비평의 골자는 작품을 읽음에 있어 작가의 개인적 의도, 사회적 배경, 독자의 주관적 연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를 비평한다는 것이다. 신비평은 작품의 형식에 필요한 관심을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일정한’ 미덕을 가졌으며 한때 영·미 및 한국 강단비평의 주류를 형성했다. 미국의 신비평가로서 로버트 워런(Robert Warren)과 함께 《시의 이해 Understanding Poetry》(1938)를 펴낸 클리언스 브룩스(Cleanth Brooks)는 하나의 시 작품을 놓고 작품의 각 부분을 생장하는 식물의 부분에 연관시켜 비유적으로 예시하였는데, 이는 작품의 유기적 발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서 신비평의 독특한 특징의 하나인 ‘텍스트 자세히 읽기’라는 기법을 정당화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텍스트가 살아 있는 식물처럼 그 구성요소들의 상호작용의 결과로서 기능한다면, 텍스트의 세목(細目) 하나하나가 모두 중요성을 띠기 때문이다. 
1923    미국 시인 -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댓글:  조회:5305  추천:0  2016-12-04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Henry Wadsworth Longfellow 출생 1807년 2월 27일 (75세) 포틀랜드 (메인 주) 사망 1882년 3월 24일 (75세) 케임브리지 (매사추세츠 주) 직업 시인, 교수 국적  미국 학력 보든 대학교 장르 로맨티시즘 사조 시, 소설 대표작 Hyperion, a Romance (1839) Evangeline: A Tale of Acadie(1847) 배우자 메리 스토라 포터 프랜시스 파나 애플턴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Henry Wadsworth Longfellow, 1807년 2월 27일 ~ 1882년 3월 24일) 는 미국의 시인이다. 〈인생찬가〉나 〈에반젤린〉 등의 시로 잘 알려져 있으며, 단테의 신곡을 미국에서 처음 번역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목차   [숨기기]  1생애 1.1첫 번째 유럽 여행 1.2두 번째 유럽 여행 1.3재혼 2작품 2.1소설 2.2시집 2.3번역 2.4명시선집 3각주 4바깥 고리   생애[편집]   롱펠로우의 생가 1807년 2월 27일 미국 메인 주 포틀랜드에서 질파 워즈워스 롱펠로와 스테판 롱펠로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변호사이고, 외할아버지 벨렉 워즈워스 장군은 미국 독립 전쟁 중에 장군이었다. 롱펠로의 가정은 1676년에 영국의 요크셔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온 가족이다. 또한 외가에서, 메이플라워 호의 승선자인 프리실라 알덴, 존 알덴, 윌리엄 브루, 헨리 샘슨, 존 하울랜드, 리처드 워런의 피를 받았으며, 또한 역대 대통령을 많이 배출한 존 라스 드롭 목사의 피도 이어받았다. 롱펠로의 형제는 스테판 (1805년생), 엘리자베스(1808년생), 앤(1810년생), 알렉산더(1814년생), 메리(1816년생), 엘런(1818년생), 사무엘(1819년생)로 7명이었다. 롱펠로는 읽기가 매우 우수하였고, 세 살때 사숙에 입학하여 6살 때 포틀랜드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1822년 14세의 나이에 브런스윅 보든 대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서는 평생 친구가 될 너대니얼 호손과 만났다. 첫 번째 유럽 여행[편집]   첫 번째 아내 메어리 스토어러 포터 1825년 보든 대학교를 졸업한 후, 언어학의 연구를 위해 여러 번 유럽에 파견 근무를 한다는 조건으로 대학의 교수직 제안을 받았다. 1826년부터 1829년 사이, 유럽(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페인)를 여행하고 귀국해서 버든에서는 처음으로 현대 언어학 교수가 되었고, 또한 비상근 사서가 되기도 했다. 이 교수 시절에 롱펠로는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교본을 만들거나 여행기 《바다를 건너 : 바다를 건넌 순례자》(Outre - Mer : A Pilgrimage Beyond the Sea)를 저술하였고, 그해 1831년 포틀랜드의 메리 스토어러 포터와 결혼했다. 두 번째 유럽 여행[편집] 롱펠로는 또한 1년 정도의 해외 유학이라는 조건부로 하버드 대학의 프랑스어와 스페인어의 스미스 교수(Smith Professor of French and Spanish) 자리를 얻었다. 롱펠로가 여행 도중에 로테르담에 있었던 1835년, 아내 메리는 유산 후 22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3년 후,롱펠로는 메리와 사랑에 영향을 받은 《천사의 발자국》(Footsteps of Angels)을 썼다. 1836년 롱펠로는 미국으로 돌아와 하버드 교수직에 올랐다. 케임 브리지에 살며, 평생 거기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여름 동안만은 나한트에서 보냈다. 그즈음 시집 출간을 시작했다. 1839년의 처음으로 시집 《밤의 소리》(Voices of the Night), 1841년의 《발라드와 다른 시》(Ballads and Other Poems)를 발표했다. 《발라드와 다른시》에는 유명한 시 〈마을의 대장장이〉(The Village Blacksmith)가 들어 있다. 재혼[편집]   7년간 구애 끝에 결혼한 프랜시스 애플턴, 1843 롱펠로는 보스턴의 부유한 사업가 네이선 애플턴의 딸, 프랜시스 파나 애플턴과의 교제를 시작했다. 이 교제 기간, 롱펠로는 종종 하버드에서 보스톤 브리지를 넘어 보스턴에 있는 애플턴 집까지 걸어 다녔다. 이 교량은 오래되어 1906년에 재가설되었고 롱펠로 브리지라고 불렸다. 7년 후에 파니와 결혼에 동의하고, 1843년 두 사람은 결혼했다. 네이트 애플턴은 두 사람에게 결혼 선물로 찰스 강이 내려다 보이는 "크레기 하우스"(Craigie House)를 구매했다. 이 집은 독립 전쟁 중에 조지 워싱턴 장군과 그 참모가 점령한 것이었다. 파니에 대한 롱펠로의 사랑은 1845년 10월에 쓴 그의 유일한 사랑의 시 소네트 〈밤의 별〉(The Evening Star)에 나오는 다음 구절에서 엿볼 수 있다. “ 오, 내 사랑하는 사랑스런 금성이여! O my beloved, my sweet Hesperus! 나의 사랑하는 아침, 저녁 별아! My morning and my evening star of love!) ” 롱펠로와 그녀의 사이에서는 6명의 아이를 가졌다. 론구훼로과 웃기는 사이에 6 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찰리 애플턴 (1844-1893), 어니스트 워즈워스 (1845-1921), 퍼니(1847-1848), 앨리스 메리 (1850-1928), 에디스 (1853-1915), 앤 알레그라 (1855-1934) 1847년 4월 7일에 파니의 출산 때 나단 쿨리 유지 박사는 파니에게 마취를 사용하였고, 이것은 미국에서 처음으로 산부인과 마취가 사용된 사례였다. 1854년 하버드에서 은퇴하고 저술에 전념하기로 했다.1859년에는 하버드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시는 건전한 인생관을 바탕으로 알기 쉬운 표현을 하여 널리 애독되었는데, 한편 너무 통속적이고 낭만적인 교훈조여서 20세기에 들면서 그리 환영받지 못하였다. 작품[편집]   "The Village Blacksmith" (손글씨 1페이지) 소설[편집] 《바다를 건너 : 바다를 건넌 순례자》 (Outre - Mer : A Pilgrimage Beyond the Sea, 1835) 《하이 페리온, 로맨스》(Hyperion, a Romance. 1839) 《스페인 학생》(The Spanish Student 3 막 극, 1843) 《카바나 : 이야기》(Kavanagh : A Tale. 1849) 《바닷가와 난롯가》(The Seaside and the Fireside. 1850) 《황금 전설》(The Golden Legend. 詩劇, 1851) 《뉴잉글랜드의 비극》 (The New England Tragedies. 1868) 《하느님의 비극》 (The Divine Tragedy. 1871) 《쿠리스투스》 (Christus. 신비, 1872) 《3권의 노래 책》 (Three Books of Song. 1872) 《아득한 목표》 (Ultima Thule. 1880) 《밤의 소리 : Voices of the Night : 발라드와 다른 시》(Ballads; and other Poems. 1839) 《발라드와 다른 시》(Ballads and Other Poems. 1842) 《노예시》(Poems on Slavery. 1842) 《브뤼헤의 종탑과 다른 시 (The Belfry of Bruges and Other Poems. 1845) 《에반젤린 : 아카디 이야기》(Evangeline : A Tale of Acadie. 서사시, 1847) 《하이아와사의 노래》(The Song of Hiawatha. 서사시, 1855) 《마일스 스탄디슈의 교제와 다른 시》(The Courtship of Miles Standish and Other Poems .1858) 《가정시》 (Household Poems 1865) 《길가의 여인숙 이야기》(Tales of a Wayside Inn.시, 1863) 《루스의 꽃》 (Flower-de-Luce.시, 1867) 《그 후》(Aftermath.시, 1873) 《판도라의 가면과 다른 시》 (The Masque of Pandora and Other Poems. 1875) 《녹색 모스와 다른 시》 (Kéramos and Other Poems. 1878) 《항구에서》(In the Harbor.시, 1882) 번역[편집] 《단테의 신곡》 (Dante's Divine Comedy, 1867) 《단 호르게 만리케의 코프라》 (Coplas de Don Jorge Manrique, 1833) 명시선집[편집] 《유럽 시인과 시》(Poets and Poetry of Europe, 1844) 《웨이프》(The Waif, 1845) 《시와 공간》(Poems of Places, 1874)   바깥 고리[편집]     자료 "); padding-right: 13px;">롱펠로우의 시와 전기 at PoetryFoundation.org "); padding-right: 13px;">Henry Wadsworth Longfellow의 작품 -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 단순 텍스트와 HTML "); padding-right: 13px;">롱펠로우의 작품 at Internet Archive - 스캔된 책과 많은 삽화 그리고 원본판 서적 "); padding-right: 13px;">낭송 - the Village Blacksmith 듣기 "); padding-right: 13px;">메인 역사 학회 검색 가능한 시 텍스트 데이터베이스, 전기, 교안 기타 "); padding-right: 13px;">롱펠로우 유적지 in Cambridge, 매사추세츠 주 "); padding-right: 13px;">워즈워스 롱펠로우의 집 포틀랜드, 메인 주 "); padding-right: 13px;">Public Poet, Private Man: Henry Wadsworth Longfellow at 200 Online exhibition featuring material from the collection of Longfellow's papers at the Houghton Library "); padding-right: 13px;">Longfellow's Translation of Dante rendered side by side with that of Cary and Norton "); padding-right: 13px;">롱펠로우의 명언   ===================================== 롱펠로 시선 [ Selected Poems of Henry Wadsworth Longfellow ]   저자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Longfellow, Henry Wadsworth, 1807-1882) 국가 미국 분야 시 해설자 윤명옥(충남대 영문학 박사,          홍익대학교 영어교육과 강사, 시인) 롱펠로의 시는 읽기가 쉽고, 이해하기가 쉽다. 이는 그의 시가 가진 대중성에 결부된다. 이 대중성은 월트 휘트먼이 지향했던 것과 유사하게, 미국에 국민문학을 구현하고자 했던 롱펠로의 열망을 반영한다. 그는 대중적이고 국민적인 시를 써서 이를 통해 자신이 인지하고 깨달은 모든 것을 표현하고자 했다. 아울러 그는 당대에 떠오르던 민주주의의 개념과 함께 더 겸손하고 더 평범한 미국인들의 삶과 이상을 시에서 표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사실은 또한 그의 시의 주요 특성 중 하나인 교훈성과 맞물린다. 대학교수를 지낸 교육자로서, 그리고 시인을 보통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인지하고 더 많은 것을 더 깊이 볼 수 있는 시력과 예견력을 가진 예지자로 여겼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시인으로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통해 일반 독자들에게 교훈을 주어 많은 사람들을 깨우치고 계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당대에 그는 미국에서 대단한 인기를 얻고 많은 영광을 누렸으며, 해외에 알려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20세기에 오면서, 시대적 상황의 변화와 함께 시에서 역시 주제나 기교가 좀 더 복잡하고 독창적인 면을 통해 호소를 하는 것들이 더 많은 작품성과 예술성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 시대로 변화되면서 롱펠로의 명성은 시들해졌다. 그의 대중성, 혹은 통속성과 교훈성에 대한 비판에, 그의 시가 유럽 스타일을 따라 했다는 점에서 작위적이고 모방적이라는 비판이 가해졌다. 그러나 롱펠로의 시대에는 그가 가장 진지한 시인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 상황은 시대적인 변천과 더불어 시대적 평가 기준의 변모와 독자의 취향의 변화, 엄밀히 말하면 비평가의 취향의 변화로부터 생긴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오늘날에도 쉬운 시, 어려운 시, 대중에게 호소하는 시, 소수의 독자에게 호소하는 시 등 다양한 종류의 시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독자들은 각기 자신의 취향에 따라, 혹은 필요에 따라, 목적에 따라 맞는 시들을 골라 읽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한편에서는 롱펠로의 시가 독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각기 취향이 다르고, 삶의 여정 또한 다르다. 그러나 인간과 인간 삶이라는 커다란 범주 안에서 공통적으로 느끼고 겪고 이해하는 부분들이 있다. 롱펠로는 바로 이런 삶의 공통분모를 찾아 시를 통해 잘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부분들은 얼핏 보기에 통속적이고 대중적인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인간인 우리, 즉 희로애락을 경험하며 나아가야 하는 인간의 삶 속에서 언젠가는 죽어야만 하는 운명에 처한 인간의 실존을 감내해야만 하는 단순하고 소박한 존재인 우리에게 중요한 기본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롱펠로는 직업적인 면이나 문학적인 면에서 대단한 행운을 누리기도 했지만 사적이고 가정적인 측면에서 불운을 많이 겪었던 사람이었기에, 그는 자신의 인생행로의 경험을 통해 불운하고 감상적이고 애수적인 면도 주저 없이 표현하는 시를 많이 썼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현실에서 겪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 즉 슬픔, 근심이나 걱정, 비탄, 혹은 좌절과 절망 등을 시로 표출해 낸다. 그러나 그는 결코 부정적이거나 염세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는 낙천주의적이며 이상적인 경향을 보여 준다. 인간의 건강한 의지와 힘찬 의욕, 죽음에 대한 슬픔과 그 슬픔을 뛰어넘는 영원을 향한 열망들이 그의 시를 한껏 고양시키고 있는데, 그는 자신을, 그리고 독자를 긍정적인 세계 속으로 끌고 가는 힘을 시 속에 담아 건전한 인생관으로 이끈다. 그는 우리 인간의 삶을 잘 표현하면서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과 위안을 주는 진리를 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좌절과 절망으로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지침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작품은 일반 대중을 격려하는 데서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은 그가 시대를 초월해 대중에게 여전히 사랑을 받는 이유가 된다. 그의 시는 또한 아름다운 언어로 우아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특히 음악성으로 유명한 그의 서정시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에서 깨닫는 삶의 엄숙함을 잘 드러낸다. 게다가 그의 박학한 독서 편력과 유럽 여행의 경험 등을 통해 다양한 정경 묘사뿐 아니라, 신화와 전설, 역사적인 이야기가 곁들여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의 시야나 시적인 스케일은 대체적으로 크고 남성답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직유 혹은 은유적인 비유에서는 매우 섬세하고 여성적이다. 많은 현대의 비평가들이 지적하듯, 롱펠로가 사물을 끈질기게 탐구하려는 창작 태도에서는 다소 부족한 면이 없지 않지만, 아름다운 언어로 우리에게 위안과 용기를 주고 삶의 슬픔으로 인해 웅크리고 있는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풀어 준다는 점에서 롱펠로는 계속해서 우리 곁에 있게 될 것이다.   ====================                                                                                                                                         밤이 다가왔다. 너무 이르지 않게             And sinking silently,                                              조용히 아주 조용히             All silently, the little moon                                        작은 달이 가라앉으며             Drops down behind the sky.                                    하늘 뒤로 사라졌다.             There is no light in earth or heaven                           땅에도 하늘에도 빛이 없다             But the cold light of stars;                                       차가운 별빛밖에는.             And the first watch of night is given                           밤의 첫 파수꾼은             To the red planet Mars.                                          붉은 별 화성의 차지.             Is it the tender star of love?                                   그건 부드러운 사랑의 별인가?             The star of love and dreams?                                   사랑과 꿈의 별인가?             Oh no! from that blue tent above                              아 아니! 저 푸른 천막 위에             A hero's armor gleams.                                      번쩍이는 한 영웅의 갑옷이겠지.             And earnest thoughts within me rise,                          저녁 하늘에 매달린             When I behold afar,                                               저 붉은 별의 방패를              Suspended in the evening skies,                               멀리 바라보고 있노라면             The shield of that red star.                                   마음속 깊은 생각들이 떠오르나니.             O star of strength! I see thee stand                            오 힘의 별이여! 그대는 서서             And smile upon my pain;                                          내 아픔을 비웃고 있구나.             Thou beckonest with thy mailed hand,                 그대 갑옷에 덮인 손으로 나를 손짓하면             And I am strong again.                                            나는 또다시 힘을 얻노라.             Within my breast there is no light                               내 가슴속엔 빛이 없다.             But the cold light of stars;                                        차가운 별빛밖에는.             I give the first watch of the night                                밤의 첫 파수꾼은             To the red planet Mars.                                           붉은 별 화성의 차지.             The star of the unconquered will,                               정복되지 않는 의지의 별,             He rises in my breast,                                              고요하고 결연한             Serene, and resolute, and still,                                  말없고 침착한 그 별이             And calm, and self-possessed.                                  내 마음속에 떠오른다.             And thou, too, whosoe'er thou art,                            이 짧은 시를 읽는 그대             That readest this brief psalm,                                     또한 누구라 해도             As one by one thy hopes depart,                            그대 희망 하나하나 사라져 갈 때             Be resolute and calm.                                          굳센 의지로 냉정을 찾으라.             Oh, fear not in a world like this,                               이 세상 무엇이든 두려워 말라.             And thou shalt know erelong,                                 그러면 그대 멀지 않아 알지니             Know how sublime a thing it is                                괴로워하며 굳세어지는 것이             To suffer and be strong.                                            얼마나 숭고한가를.              인생 찬미가 슬픈 곡조로 나에게 말하지 말라. “인생은 헛된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잠자는 영혼은 죽은 것, 사물의 진상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는 아니다. 인생은 참된 것! 인생은 진지한 것! 무덤이 그의 목적지는 아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이는 영혼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우리의 가는 길이나 끝은 즐거움이나 슬픔이 아니라,  제각기 모두 내일이 오늘보다도 낫도록 행동하는 것이다. 예술은 길고 세월은 빠른 것. 우리의 심장은 강하고 튼튼하지만, 마치 싸맨 북처럼, 무덤을 향해서 장례식의 행진곡을 치며 나아간다. 이 세상의 넓은 전쟁터에서, 인생의 거치른 야영장에서, 말못하고 쫓기는 짐승처럼 되지 말고 싸움에 이기는 영웅이 되라! 그 아무리 즐거워도 미래를 믿지 말라. 죽은 것은 죽은 과거로 묻게 하라. 활동하라, -- 살아 있는 현재 속에서 활동하라, 안에는 용기를 갖고, 위로는 하나님을 모시고. 위인들의 생애는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우리도 장엄한 삶을 만들 수 있고 떠날 땐 때라는 모래터 위에 발자욱을 남겨놓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그 발자욱, 그것은 아마도 다른 사람이, 엄숙한 생의 바다 위로 배저어가다가 홀로 외롭게 파선당한 사람이 보면 다시금 용기를 얻게 되리라. 그러나 우리 일어나 일하자, 어떠한 운명에도 두려워하지 말고. 끊임없이 완성하고 끊임없이 추구하면서 우리 일하며 기다리는 것을 배우자. 화살과 노래  화살 하나 공중에 쏘았네. 땅에 떨어졌으련만, 어딘지 알 수 없어라. 너무도 빨리 날아, 날아가는 화살을 눈으로 좇아갈 수 없었네. 노래 하나 공중에 띄워보냈네. 땅에 떨어졌으련만, 어딘지 알 수 없어라. 어느 눈이 그처럼 날카롭고 강하여 날아가는 노래를 좇아갈 수 있으랴. 오랜 뒷날 한 참나무에 아직도 성하게 박혀 있는 화살을 보았네. 노래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벗의 마음 한 가운데 그대로 남아 있었네.   [출처]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ellow)|작성자 dgdgpp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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