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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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48 ]

48    준것만큼 기대하라 댓글:  조회:2014  추천:0  2014-04-09
    준것만큼 기대하는것이 삶의 참된 리치이건만 우리들은 늘 그것을 소홀히 여기고 지나가는 경우가 많아서 후회라는 포물선이 마음의 둔덕을 가리울 때가 한두번이 아님을 절감하군한다. 그럴즈음이면 스스로의 안위를 먼저 치켜들기에 분망한것도 우리가 아님을 부정할수 없어서 그냥 그런 처절한 모습을 지우기에 다망하군한다. 대자연의 품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그 품을 몰라도 전혀 모르고 있으니 어찌 머리를 쳐들고 가슴을 내밀수 있으랴만 그래도 그런 우리를 따스한 품으로 포옹해주는 자체가 너무도 자랑스럽다. 자연이 항상 주기에 분망한 모습이여서 되려 안으로 뭔가 채워지는것이 아닐가 하는 부러운 마음도 부채살처럼 활짝 펴지건만 그냥 고집을 물고 늘어지는 우리가 구경 얼마나 걸어갈수 있을지 늘 궁금증은 봄날의 옷깃을 당긴다. 가끔은 별도 캄캄한 어느 구석에서 반성이라는 자그마한 마음의 지퍼를 열어보지만 끝내는 열지 못하고 되려 잠그려고 성급해진다. 잠그고난후의 기분은 되려 슴슴하기 그지없다. 세상은 보이지 않는 어떤 구석들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늘 외면하려고 모지름을 쓰면서 별스레 다정다감이라는 어색한 장면을 붙들고 서성거리군한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이름자를 달고 오늘도 옅은 물우를 걷고 있는지 모른다. 물의 깊이도 전혀 모르건만 장하게 걸을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준 고마운 사람들의 존재가 나의 존재를 연장시켜주는지도 모르게 고마웁다.     여직 구경 주기에 얼마나 너그러운지 마음의 천평을 드리우느라면 되려 부끄러움에 눈금들은 하나 둘 지워지군한다. 뭐든지 다 줄수 있다고 큰소리 뻥뻥 치면서 장모님앞에서 곱게 키운 딸을 빼앗아 왔건만 오늘까지도 승낙은 미지수로 다가서고 있으니 어찌 내 마음의 지퍼를 마음대로 열어갈수 있으랴? 그래도 마누라는 아무런 투정도 모르고 되려 나에게 뭔가를 더 주려고 아픈 마음을 차곡차곡 접는 모습을 지켜보느라니 얼굴이 얼굴이 아님을 이불깃을 살며시 들면서 알게 되였다. 고생같은건 아예 나의 사전에 없듯이 큰소리는 쏟아났건만 여직 만들어준 고생 또한 얼마였던지 셈에 약해지군 한다. 그래도 마누라는 무던한 마음의 뚜껑을 시원스레 열어놓고 어떤 기대가 생생하게 머리를 내밀고 있다. 그런 모습을 목격할적마다 나는 속으로 백번이고 다짐을 하면서 쉽지 않게 이룬 우리네 터전에 될수록이면 잡초들이 사라지고 향기로운 꽃들만이 뿌리를 내릴수 있도록 정성을 다 하려고 주먹을 움켜쥐기도 한다. 언젠가는 내 마음의 지퍼도 당당하게 열어갈수 있는 그런 순간을 만들기에 오늘 아침도 나는 집안 청소를 열심히 해간다. 잠간이나마 편하게 존재를 만들수 있게금 마누라의 옷깃에 채색무지개를 걸어준다.     부모님께도 정말 해드린것이 너무 헐망하다. 마음은 태산같으나  생각처럼 되여주지 않아서 안타까움은 뿌리를 깊이 내린다. 그래도 부모님들께서 건강하나 좋으셔서 내 마음은 안위를 만들기도 한다. 드린다는것은 실천임을 번연히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으니 아픈 마음은 뭐라 형언이 두렵고. 오늘도 만년을 편히 쉬지 못하고 외국땅에서 고생을 밥처럼 드시는 부모님보기에 자식으로서 불효를 절감해본다. 살아 계실적에 효도하라는 말을 모르는건 아니지만 여직 실천에 가난해서 아픈 가슴 쥐여 짜본다. 그래도 부모님은 언제 한번 부러움을 투정한적이 없이 점잖게 한생을 너무도 아름답게 장식해가신다. 부모님께 진 빚낟가리는 점점 높아가고 갚음은 늘 머언 안개속에서 서성거린다.  친구들에게도 무엇을 얼마나 주었는지 마음으로는 퍽 편하지가 못하다. 여하튼 친구가 도움을 청하면 최선을 다하여 능력을 발휘해보았지만 그래도 어딘가는 기대치가 더 높다는생각이다. 그래도 친구들은 아무런 불평도 없이 그냥 그렇게 옛날처럼 따스하게 자리를 만들어주고 길을 열어주고 마음에 드레박을 드리우니 얼마나 편한지 모르겠다. 그래서 항상 친구자랑에 움직임도 바쁠 때가 많다. 한점의 긍정으로도 만족해하는 친구앞에서 자신이 각별히 왜소해짐을 어찌할길이 없다. 그냥 그렇게 편한 친구가 되여주기에 마음의 부자가 되려는 생각을 꼬옥 잠근다. 마누라에게도 얼마나 미안한지 모른다. 하늘도 따줄것처럼 용감하던 자신이 언제부턴가 조용해 지기 시작하였고 고마움의 우물은 점점 깊어만감을 절실히 느끼기 시작하였다. 남들 마누라처럼 심술이라도 부리거나 욕심이라도 왈라당 하고 쏟아놓는다면 정말 너무너무 아픈 일이 아닐수 없다. 그런것을 모르는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이 못난 남편의 허줄한 자존이라도 굳게 세워주는 자세에 얼마나 큰 고마움이 물씬거리는지 모른다. 이제 하나 하나 차곡차곡 장부책에 접어두면서 언젠가는 꼭 가진것만큼 더 주려는 다짐을 만들어본다. 겉으로의 미소가 아니라 안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안온한 그런 미소를 기대하면서 삶의 또 다른 언덕을 향해 새로운 낚시를 드리운다…
47    나의 뿌리는 지금 어떤 조각품으로 자라고 있는걸가? 댓글:  조회:1671  추천:0  2014-03-12
     보이는것이 다 좋은것처럼 억지로 움직이는 요즘 세월을 두루 살펴보느라면 저으기 말못할 걱정들이 합수목에서 타래치는 순간을 만들기가 일쑤이다.     뿌리는 쉬이 보여지질 않는다. 매 사람마다 나름대로의 뿌리를 조각해가고 있으나 그 뿌리의 실정은 오직 자신만이 잘 알고 있는것이다. 곁사람들은 그 뿌리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평가할 권리가 없다. 그저 뿌리의 어떤 결실에 대하여 지켜볼뿐이다. 뿌리가 깊든 옅든 상관없이 스스로의 삶의 뿌리를 든든히 내리면서 자신의 울타리를 잘 가꾸면 최고인것이다. 내 용기안의 뿌리는 어디까지 뻗을수 있다는것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릇이 커야 뿌리도 깊게 그리고 넓게 뻗어갈수 있지만 어떤 용기들은 차림새가 보기 싫커나 공간이 너무 좁아서 뿌리의 삶에 큰 장애를 만들어가는 페단들도 없는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들에게 그만큼 공정한 지구의 공간을 만들어주고 있어서 오늘의 뿌리가 귀찮으면 수시로 새로운 뿌리를 내리기에 바쁜 일면들도 보여지고 있는데 이는 찬성할바가 못된다. 절대로 뿌리에 귀찮음을 만들것이 아니라 그 그릇이 중요하다는말이다. 다시말하면 뿌리가 믿음직하게 내릴수있는 그런 그릇을 만들어야 하건만 쉽게 자신이 내린 뿌리를 탓하는 현상들이 존재하여서 뿌리는 본뜻을 잃어가고 어떤 어두운 구석에서 설음을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걱정은 그제나마 그 뿌리의 진통을 감안하고 돌아서는 풍경이라면 다소 보기라도 좋으련만 그냥 고집스레 어떤 새로운 뿌리에 도전하려고 혹은 어떤 새로운 뿌리에 매달려보려고 자신의 뿌리와 그릇을 팽개치는 현상이 언제부턴가 일종의 멋으로 다가서기도 하였다. 글쎄 자신의 뿌리가 약하면 가히 어떤 믿음직한 뿌리에 매달려 삶의 충전을 열어가는건 나쁘다고 말할수가 없지만 문제는 그런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그 뒤끝이 너무도 어지럽게 다가선다는 말이다. 오늘은 이 뿌리에 매달려 원래를 뿌리를 조소하거나 비난하는 현상들이 아프게 다가선다. 우리가 어찌 자신이 정성들여 고생과 함께 행복을 꿰매던 그 뿌리를 비웃을수 있으랴!     뿌리는 일종의 조각품이다. 아무도 실물을 들여다볼수 없지만 그 실물의 맨끝에서 열리는 과일들의 모양과 냄새에서도 가히 뿌리의 속성을 어느정도 들여다볼수있는것이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의 뿌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나의 뿌리에는 행복의 주머니가 얼마나 달려있는가? 나는 이 뿌리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 나의 이 뿌리가 혹시 지금 썩어가고 있는것은 아닌가? 나의 이 뿌리를 누가 지금 정성스레 가꾸고 있는가? 혹시 나의 이 뿌리는 어떤 버려진 뿌리는 아닌가? 남들이 한창 파내고 있는 그런 헐망한 뿌리는 아니가?  뿌리의 진실을 감안하고 뿌리의 맨 끝에 서보라. 어떤 들림이 우리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줄것이다. 이름난 조각가의 신분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될것이다.
46    구경 무엇이 우리 애들을 이모양으로 만들어놓았을가?! 댓글:  조회:2436  추천:3  2014-03-08
    우리 말을 잃어가는 애들의 비참한 모습을 격감한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하지만 교원으로서 진정 그 모습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오늘같은 두려움을 몰아오게 된것이다. 애들에게는 절대로 잘못이 없다. 그럼 그 잘못은 구경 어데서 막을 열었을가?!     우리 애들이 우리 말을 멀리하고 한어를 밥먹듯하는일이 언녕 고질로 되여버렸다. 아마도 이런 현상을 제일 먼저 발견하게 된것도 우리 교원들일것이다. 하지만 산사태처럼 쏟아지는 현실을 오직 교원의 힘으로는 돌려세우기가 엄청 힘에 부치는 일이였다. 여러모로 고민하면서 대책을 강구하였지만 별로 좋은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을뿐만아니라 되려 어떤 역풍이 되였는지도 모를일이다. 보기마저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구경 이제와서 그 해결책은 어디에 있는지 모두가 방황하는 모습이다. 모든 병은 시간이 엄중하게 만들어가듯이 우리 애들의 “병”도 어언 오래시간이 만들어낸 악현상이 아닐수 없다. 감각에 둔한 인간의 반응이라할가?     요즘 조선족학교 학생들은 태반이 우리 말을 하는것이 고질로 되여버렸다. 억지로라도 시켜보면 정말 엉망이다. 말을 한다해도 순서가 없고 토가 틀리고 상대방이 알아듣기마저 어려운 표현이다. 교원들은 알심들여 교수를 연구하고 실행하고 있었지만 오늘에 와보면 모두가 헛수고였다. 가끔 중학교 교원들의 하소연을 들으면서 설마 그럴수까지 있을가 하는 의문이 였지만 현실은 이미 증명에 든든하게 다가서고 있다. 입만 벌리만 한족말이다. 그 누가 시키지 않아도 술술 한족말은 그처럼 표달이 잘 된다. 하지만 우리 말에 대한 리해와 장악은 한심하기 그지없다. 한번은 조선어문 교수에서 “호텔”이라는 단어를 제기하고 누가 아는가고 물었더니 백분의 70정도는 두눈만 슴벅이였다. 그래도 올똘한 한 학생이 알고 그것을 인차 한어로 말하니 어쩌면 그처럼 이구동성으로 “아, 그거 !.”하면서 인차 리해하는것이였다. 그 순간은 자랑이 아니라 비감이 앞섰다. 그럼 우리 애들이 오늘의 이 모양은 구경 무엇이 끌고 온것일가?     필자의 옅은 견해라면 우선은 주위의 환경이 초래한 엄중한 후과라고 말하고 싶다.   이런 환경이 우리 애들로 하여금 무의식간에 오늘의 현실을 만들어오게 되였다. 교정만 나서면 모두가 한어로 교제가 가능하니 혼자서 아무리 언어를 고집한다해도 어려운 일이니 아예 한어가 습관화로 다가선것이다. 요즘은 이상하게도 우리 가장들이 별로 잘 안되는 한어로 가정에서 어색하게 대화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 애들은 비위에 맞추느라고 한어를 선택하게 되는것이다. 그리고 텔레비도 그렇고 접촉하는 모든 물건들이 거개가 한어를 위주로 하고있으니 별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필자는 애들더러 가정형편이 괜찮으면 될수록 한국위성을 설치하고 보라고 권장하기도 하였지만 별로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다음은 시험제도의 불완전함이 초래한 후과라고 생각한다. 어느 분야든 상관없이 빈구석이 많으면 그 자리에는 반드시 악현상이 존재하는 법이다. 우리의 시험제도에도 빈구석이 너무도 많다. 이런 현상은 시험을 만드는 전문가들의 실수라고 해도 관언이 아니다. 서면시험이 우세인 중국을 놓고 봐도 능력을 홀시하고있는면이 빈구석이 아닐수 없다. 그리고 한어와 조선어의 시제를 한 초점에 맞춰놓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한어는 글자공부이고 조선어는 단어공부이다. 한어는 글자를 많이 읽고 쓰면 잘 되여간다. 한어를 잘한다는것이 바로 글자를 많이 장악한것으로 가히 판정을 내릴수있다. 하지만 조선어문은 글자공부가 아니고 단어공부이기에 많이 읽고 외워야 한다. 조선어문의 글자는 아마도 소학교 3학년정도를 다니면 문제없이 다 읽을수 있다. 그러니 글자공부보다는 단어공부에 핵심을 두어야 하는데 현실은 글자공부에 심혈을 엄청 많이 몰붓고 있다. 이런 현상은 불완전한 시험이 초래한 엄중한 후과가 아닐수 없다. 한 교원의 공작에 대한 평가가 학생들의 능력이 아니고 서면시험성적이다보니 자연 이렇게 될수밖에 없는것이다. 이것이 바로 조선족교육의 빈구석이다. 그런 빈구석이 많을수록 그 자리에는 이름못할 슬픔들이 자리를 잡게 되는것이다. 요즘 우리 조선족애들은 정말 많이 쓰고 읽는다. 하지만 그것은 별로 조선어문을 제고하는 가장 바람직한 길이 아님을 잘 모르는 자체가 참으로 안타깝다. 조선어문공부의 핵심을 우리는 단어공부에 두어야 하는데 시험이 그렇지가 아니하니 교원들도 울며겨자먹기로 거기에 응해야하는것이다. 그래도 명석한 교원들은 애들의 능력배양을 초점에 두고 있는데 가져오는 결실은 별로 시원치가 못하니 아예 애들을 일종의 기계로 몰아가는편이 더 나을것같다는 오판이 오늘의 비참한 현실을 만들게 되였다. 할말은 많으나 이만하고 다음 화제로 넘어가련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면서.    그다음은 연극이 꾸면낸 가면의 교수연구활동이다.  우리 조선어문교수연구활동을 참관하면 그 감수가 자못 심각하다. 어쩌면 애들이 그처럼 말을 조리있게 잘하는가가 되려 의심스럽다. 학생마다 손을 들고 말하는걸보면 그 수준이 상당하다. 한국애들과 세워놓아도 별반 차이가 없을정도이다. 하지만 이것이 진정 현실을 보여주는가가 문제이다. 정말 우리애들이 사유가 그렇게 발달했고 언어조직능력이 그렇게 강하며 단어활용능력도 그렇게 우세를 가지고 있는것일가? 아니다. 이는 어느 한 일면을 돌보기 위한 가면술이나 다름이 없다. 그래도 일부 령도들은 웃음주머니를 흔들거리며 만족해하는 모습은 실로 비감이 아닐수 없다. 학생들의 진실은 가면에 들씌워 보이질 않고 보이는건 거개가 연극이니 말이다.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     이외에도 학생과 교원에게도 어느 정도 문제가 있겠지만 우리는 그 누구를 탓할 문제가 아니다. 모두가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으로 움직이려는 모습을 만들어가야지 니밀쭉 내밀쭉한다면 우리 애들의 앞날이 저으기 걱정스럽다. 언어는 민족의 옷이건만 이젠 그 옷마저 색바랜 모습으로 다가서니 낯설음은 날로 커만간다. 병에 걸렸으면 전문가를 찾아서 잘 진단하고 그 치료방안에 심혈을 몰부을 때가 온것같다. 우리 모두 하나같이 똘똘 뭉쳐 우리라는 우리를 찾기에 피를 태우는 노력과 뼈를 깎는 움직임이 무엇보다 바람직한 움직임이다.     멀지 않은 래일에 기대여보면 그래도 희망의 탑은 희미하게 보인다.  
45    뒤를 돌아보면 앞길이 열린다 댓글:  조회:2669  추천:2  2014-03-02
    인간의 가장 큰 흠이 바로 고집이다. 옳든 그르든 상관없이 자신의 생각대로 나아가다보면 후회의 포물선에 사로잡히게 되군한다. 분명 이제 더 나아갈 공간이 없건만 그래도 악착스레 구멍을 찾느라고 고집을 놓지 않는다. 가끔 이런 현상을 두고 일부 사람들은 개성이 있다고 말한다. 실상 이런 노릇은 개성이 아니라 자멸이나 다름이 없는것이다.     우리는 가끔 살다보면 앞으로 나아가다가 너무 힘이 들면 잠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때로는 뒤를 돌아보는데 이것은 너무도 현명한 노릇이다. 뒤를 돌아본다는것은 부끄러운 일이 절대 아니며 앞으로 나아가는것에 무조건 도움으로 다가설것이다. 무지한 사람은 앞만 보고 달리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무시로 뒤를 돌아볼줄아는 그런 명석함을 지니고 있는것이다. 뒤를 돌아본다는것은 앞길을 더욱 멀리 더욱 넓게 열어가는 노릇이다. 다시말하면 뒤를 돌아보면 앞길이 스스로 열리는 법이다.    사람이 살다보면 어찌 실수라는 전선줄을 건드리지 않으련만 그런 실수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가 자못 중요한 노릇이다. 실수앞에서 앞만 쳐다보면 그것은 실수에 평방을 가하는 우둔한 노릇이지만 실수 앞에서 조용히 마음을 눅잦히고 뒤를 돌아보는것은 실수의 껍질을 바르는 좋은 움직임이 아닐수 없다. 가끔 우리는 자신이 살아온 길에서 말못할 후회의 돛을 올릴 때가 있는데 그 순간만큼 아프고 힘들수가 없다. 이맘 때면 우리들은 가슴을 열어놓고 다시금 걸어온 뒤안길을 열심히 헤쳐보게 된다. 그 순간만큼 세상이 바르게 보이는 순간은 더 없는줄로 알고 있다. 뒤를 돌아봄은 허심한 표현이지만 앞만 바라봄은 어리석음의 표현이다. 오늘의 자신이 어제의 어떤 순간앞에서 이미 무너졌음을 우리들은 자각하지 못했기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말이 나왔나보다.   “ 오늘의 나의 모습이 어제의 나의 행동이 였고 오늘의 나의 행동이 래일의 나의 모습을 만든다.” 참으로 일리가 있는 말이다. 왕왕 우리들은 순간에 빠져 순간을 모를 때가 많은것이다. 순간은 흥분을 만들기에 아주 두려운 존재임을 다시금 마음으로 새김이 너무도 바라직한 노릇이 아닐수 없다. 우리는 래일을 위해 사는것이 아니라 오늘을 위해 사는 가장 순진하고 깨끗한 자신을 세워야 한다. 오늘을 정시함은 래일의 희망에 돛으로 다가서지만 오늘을 무시하고 함부로 움직임은 래일의 희망에 함정을 파는 노릇이다. 이제 우리는 뒤를 돌아보는 지혜를 갖추는 혁명이 무엇보다 소중한 노릇이다. 오늘에 오늘을 깔끔히 정시하면서 오늘의 우리들의 움직임이 래일에 어떤 두려움이나 아픔 혹은 후회의 장단지를 만드는지 곰곰히 사색하는 자세가 너무도 필요하다. 오늘이 편한 삶은 래일의 정답이 아니다. 혹시 오늘의 어려운 삶이 래일에 어떤 놀라운 삶을 잉태하고 있는지를 그 누구도 모르고있다.     오늘의 삶의 논밭을 열심히 돌아보자. 겉만 돌아보는 그런 노릇이 아니라 곡식들의 포기사이에 보이지 않는 어떤 잡초들이 무서운 꿈을 만들고나 있지 않는지 사색이 필요한 계절 3월앞에서 우리 모두 지혜의 주막집을 정성들여 가꿔보자. 뒤를 돌아봄은  래일을 위한 아름다운 준비이다. 절대로 어떤 부끄러움이나 슴슴한 노릇이 아니다. 우리들의 뒤안길이 얼마나 깨끗했는지는 그 누구도 모르고 있다. 이제 우리는 오늘이라는 이 두려운 존재를 다독이면서 그것들이 래일의 삶에 모두 유리한 존재로 다가서도록 손과 발을 부지런히 놀려보자. 동시에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오늘을 배수가 높은 확대경으로 들여다보고 래일은 현미경으로 깊이 들여다보자.     뒤를 돌아보기 안성맞춤한 좋은 계절 3월앞에서 우리 모두 어제를 뒤돌아보면서 오늘의 아픔들을 하나하나 정시하고 한번밖에 차례지지 않는 인생이라는 이 큰 그릇안에 될수록이면 좋은 꿈들을 차곡차곡 접어두면서 수년이 지나도 변질함이 없도록 래일을 위한 정성의 바줄을 단단히 잡아보자.
44    아름다운 마무리 댓글:  조회:1961  추천:2  2014-02-25
     서로의 가까움은 두말없이 좋은 결실이다. 더우기 믿음이 날로 박약해가는 요즘 세월에 가까움은 또 다른 별미로 인간세상을 후련하게 만들어간다. 서로 남남이지만 살아가면서 가깝게 지내는 모습들을 지켜보느라면 마음먼저 후더워난다. 사람이 그리운 요즘 세월에 가까운 이웃들이 존재함은 스스로의 행운이 아닐수 없다. 산보도 어깨 나란히 같이 다니고 희사도 좋고 액사도 좋고 모두가 한맘이 되여 서로 손잡고 세월을 주릅잡는 순간들은 고향의 풍경처럼 다가선다. 선조님들의 지혜를 남김없이 빛내여가는 그런 하얀 옹달샘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우기 어려운 일들이 생기면 제집 일처럼 발벗고 나서는 모습도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별로 넉넉한 살림이 아닐지라도 서로의 주고받음에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그저 그렇게 행복하고 즐겁기만 한 그런 모습들이 너무도 보기가 좋다. 남들이 산해진물을 집을 때 뜨끈뜨끈한 구들에서 구수한 된장국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인정을 쌓아가는 모습도 참말로 구수하게만 다가선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 어떤 바램이나 요구도 없이 가슴 시원히 열어놓고 그처럼 편하게 그처럼 다정하게 그처럼 즐겁게 움직이는 순간들도 너무너무 보기 좋다.    서로가 아프면 자신이 아픈것보다 더 걱정하고 슬퍼하는 그런 만남, 서로가 힘들어하면 서슴없이 몸을 내번지는 그런 만남, 서로가 어려워하면 아낌없이 얄팍한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내는 그런 만남, 서로가 서로를 서로라고 여기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서로답게 여기는 그런 존재앞에서 우리는 다시금 마음의 지퍼를 열어야 한다.     진정 마음으로 다가서는 그런 만남, 진정 사랑으로 다가서는 그런 만남, 진정 정성으로 다가서는 그런 만남, 진정 행복하게 다가서는 그런 만남, 진정 편하게 몰아가는 그런 만남, 만남이 만남같은 만남으로 자리를 만들면서 만남답게 만남을 장식하는 그런 만남앞에서 우리는 다시금 마음의 흉벽을 허물어야 한다,     리익을 위하여 만들어가는 어떤 헐망한 울타리가 아니다, 리익을 위하여 펴놓은 어떤 잔디밭이 아니다, 리익을 위하여 파놓은 어떤 두려운 함정이 아니다, 리익을 위하여 가면에 발리운 어떤 얄팍한 웃음이 아니다, 리익을 위하여 찧는 어떤 멀쩡한 방아질이 아니다, 리익을 위하여 흐르는 어떤 오염된 시내물이 아니다, 리익을 위하여 슴슴하게 심어놓은 어떤 농작물이 아니다, 리익을 위하여 세워 놓은 어떤 비석이 아니다…      너무도 평범한 한점의 만남엔 티끌만큼의 오염도 용서못한다. 오염의 빛마저 들어설 자리가 없는 그런 밝은 구석들이다. 만남이 귀하고 만남이 귀함을 만들고 귀함이 서로를 서로답게 만들 때 우리는 또 다른 삶의 지평을 열게 된다.  
43    인류문명의 발원지는 가정이다 댓글:  조회:1727  추천:1  2014-02-11
     인류문명이 날로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이 때 우리는 새삼스레 느끼는 바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가정교육의 소중합입니다. 가정교육이 인류문명의 핵심임을 우리는 시간이 퍼그난 흘러간 오늘에야 다시금 절감하게 됩니다. 가정은 사회로 놓고 말하면 작은 세포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이 일으키는 역할은 얼마나 큰지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에야 다시금 절감하게 됩니다.    무슨 사물이든 언젠가는 나름대로의 소중함을 드러내는 법이지만 우리들은 항상 뒤늦게야 깨달음을 가져오게 되다보니 아쉬움을 많이 묻어두기도 합니다. 가정이 많이 흔들리는 요즘 세월에 맞추어 사람마다 깨침을 얻게 되여서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릅니다. 모르고 살아온 세월의 자락들을 들춰보느라면 가정이 묵묵히 우리들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쳤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전반 사회가 어느 정도의 문명을 부를 때라야 비로소 느끼게 되는법입니다. 문명이라는 매개물이 우리들의 신변을 다독일 때 우리는 다시금 문명의 발원지를 향해 머리를 숙이게 되는법입니다. 숙여진 머리의 안쪽으로 곱게 드리운 오색의 늪들은 저마다 행복의 미소를 머금습니다. 그러면서 뼈저리게 가정에 고마움을 몰아오게 됩니다. 환한 가정이든 어두운 가정이든 상관없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큰 교육의 드레박을 드리웠는지 가늠이 어렵습니다. 이제야 절실히 느껴봅니다. 우리의 가정이 이처럼 우리들의 삶에 소중한 존재였음을 문명이라는 매개물앞에서 반성의 돛을 올려봅니다. 우리들의 가정이 살아있었기에 우리는 문명이라는 낱말앞에서 허리를 펼수 있었습니다. 그처럼 시원스레 허리를 펴고 세상을 바라볼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되였습니다. 가정의 지평을 바르게 열어가는 부모와 자식만큼 지혜로운 사람은 따로 없습니다. 조상님들로부터 왜서 그처럼 어려운 여건에서도 가정을 굳건히 지켜왔음을 세월의 주름속에서 뼈속으로 느껴봅니다. 가정이야말로 인류문명의 대문을 열어젖힐수있는 가장 유력한 존재임을 가슴에 손을 얹고 절감합니다.     이제 가정을 지켜가는 부모야말로 하늘아래 가장 아름답고 가장 신성하고 가장 지혜로운 부모님이라는 자격증을 받게 될것입니다. 이 순간 우리 모두 하늘이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가정만을 굳게 지켜가는 그런 모습을 만드는것이 너무도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청룡의 기상과 함께 높이 높이 울려갑니다.    가정, 인류문명의 발원지입니다. 우리가 인간다운 인간으로 당당하게 살아갈수 있는 그런 문턱을 다듬어주는 너무도 소중한 존재랍니다.
42    댓글과 인간 그리고 문명성 댓글:  조회:2784  추천:12  2014-02-08
    요즘 일부 사이트에 두루 들려보느라면 마음이 서글프게 다가설 때가 한두번이 아님을 절실히 느끼게 되 였다. 많은 한족사이트는 제외하고 우리 조선말 사이트를 놓고 보더라도 참으로 문명성을 잃은 일부 댓글들 이 머리를 쳐들고 있어서 참으로 안타깝다.   그럼 구경 댓글은 무엇을 의미하는 존재일가?   한마디로 말하면 자신의 소박한 견해를 진정어리 마음에 담아서 문명이라는 큰 그릇이 안받침이 되여야 하는데 일부 댓글들은 그 문명성을 잃었고 심지어 어떤 루추한 모습까지 드러내고 있어서 말이 아니다. 대 부분의 댓글들은 아주 문명하고 유식한 모습으로 필자에 대하여 좋은 인도나 가르침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일부 댓글들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속에 다른 무슨 기미같은것이 보이고 있다는 말이다.    댓글은 그 사람의 마음을 남김없이 깔끔히 드러내는것이 특징적이다. 유식하고 문명한 사람의 댓글은 보 기만 하여도 마음이 후더워나고 신심이 생기고 희망이 열린다. 하지만 일부 소인들의 댓글은 고약한 마음이 기반으로 깔렸고 필자에 대한 어떤 인신공격같은 수단으로 다가서는듯한 느낌까지 주어서 참으로 안타까울 때가 많다. 실상은 아주 신성하고 문명하고 소중한 모습으로 다가서야 할 댓글이건만 일부 댓글들은 둔갑을 당하다보니 참으로 눈뜨고 보기마저 안타깝다.     글과 인간의 동일성이 어느 정도 갖추어진 사람이라면 댓글은 아마도 필자들의 심금을 바르게 울려줄것 이다. 그렇지가 않고 글은 그런대로 쓴다치고 인간의 소질이 저질이라면 댓글은 아마 볼품없는 몰골을 만들 게 될것이다.     우리 필자들은 태반이 글을 쓴 후에 자신의 댓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 댓글을 통하여 독자 들의 바른 인도와 동감을 얻고 그속에서 보다 높은 차원의 자신을 수립시키려는 소박한 마음을 지니고 있 건만 그것마저 뭉개버리는 어떤 인간의 저질적인 소행은 실로 사이트에 먹칠을 하는거나 다름이 없다. 참으 로 이상하리만큼 리해가 안될 때가 많다는것이다.     가끔 글을 써놓고 들어가보면 기분이 붕붕 뜰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좋은 댓글이 곱게 걸려있기 때문이 다. 필자보다 훨씬 유식한 분이건만 그토록 겸손하게 댓글을 달아주었고 또한 보다 크게 성장할 길까지 시 원스레 인도해주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이처럼 문명한 댓글들을 보면 대부분이 우선은 소질이 상당 한 분들이고 다음은 유지인사들이다. 이런 댓글은 아마 우리 필자들로 하여금 보다 좋은 글을 쓰는데 퍼그 나 큰 힘으로 다가설것이다.    하지만 일부 저질적인 인간들의 댓글을 보고나면 참으로 슬플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우선은 그 인간의 무지를 보여주고 다음은 사람 됨됨이의 차질을 보여준다. 써놓은걸 보면 어데서 봤는지는 몰라도 아주 점잖 은체하면서 아양을 떨기가 일쑤이고 다음은 필자들의 어떤 마음의 구석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그런 느낌을 만들고 있어서 한심하다. 어찌보면 타인의 인신공격을 그처럼 시원한 노릇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예 감이 들기도 한다. 이런 댓글은 필자들의 마음을 어지럽힐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깨끗한 심령도 흐리게 될것 이다.    이제 댓글도 관리가 엄하게 다가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 댓글이나 함부로 올리지 못하도록 단속을 해 야 한다. 인류의 문명이 어느 정도에 도달해야만이 관리가 필요없듯이 우리의 댓글도 언제면 필자들의 아픈 마음을 건드리지 않을가? 그리고 언제면 고차원의 소질을 갖춘 그런 댓글이 진정 필자에게 도움이 되는 그 런 댓글로 다가설가 마음이 아프다.  
41    소학교 조선어문 교수에서 존재하는 문제점 댓글:  조회:2030  추천:3  2014-01-21
    요즘 조선어문 교원들은 남몰래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렇다해서 들고 다니면서 하소연 할 일도 아니고 하니 실로 어려움이 아닐수 없다. 목전 우리 조선족애들을 보면 한족말을 밥먹듯이 하고 있는 현실이다. 필자가 어느 한번 점심시간에 가만히 조사를 해보았는데 놀라지 않을수가 없었다. 학교의 대문앞에 서서 밖으로 놀러나오는 애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한 10분정도에 20여명의 어린이가 밖으로 나왔는데 그중에 한명도 우리 말을 하는 애가 없었고 모두가 그처럼 자연스럽게 한족말을 하는것이였다. 궁금증에 못이겨 한발 더 다가서서 이런 질문을 던져보았다. 혹시 너희들속에 한족애가 있으면 손을 들라고 했는데 글쎄 한명도 없는것이였다. 모두가 순수한 조선족애들이였다. 슬그머니 너희들은 왜서 조선족인데 한족말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한족말을 하기가 더 편하고 알아듣기 쉽단다. 순진한 애들의 이런 대답앞에서 한 조선어문 교원으로서 무심히 그저 스쳐지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사정없이 가슴을 쳤다. 그렇다! 애들에게 무슨 죄가 있으련만. 스스로의 자책감에 온 몸은 정착을 잃은듯한 느낌이였다. 혹 자신이 무슨 큰 죄라도 지은것처럼 슬그머니 그것도 머리도 들지 못한채 교무실로 발을 옮겼다. 그처럼 무겁게 말이다. 그럼 우리 애들이 목전 이런  현장을 만들게 된 문제점은 어데 있을가? 애들에게? 아니면 가장들에게? 아니면 사회에? 아니다. 그 관건적인 문제는 우리 조선어문 교원들에게 있다고 솔직하게 받아들임이 더 편할것같다. 그럼 아래 필자가 다년간 걸어온 길을 더듬으면서 나름대로의 생각을 적어본다. 첫째: 교원의 교수용어가 불완정하다. 목전 소학교 조선어문 교원들은 한어도 어느 정도 습득해야 할 형편이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로 필연적이 아님을 긍정하고 싶다. 글쎄 반급에 소수의 한족애들이 있다손치더라도 그들을 우대하여 한어로 일부 교수용어를 만든다는것은 가치를 상실한거나 다름이 없다. 한족애들이 조선학교를 선택한것은 한어를 잘 배우기 위한것이 아니라 조선어를 더 배우기 위해서가 분명하다. 그러므로 반드시 울며 겨자 먹기라도 조선어를 사용함이 바람직한 움직임이다. 실상은 교원의 어떤 좋은 목적을 위한데 있는것을 리해못하는것은 아니지만 이런 작은 움직임이 어느 날엔가  해결못할 어려움을 산생하게 되는것이다. 여기서 반드시 무조건이라는 전제를 펴놓고 애들의 비뚫어진 심리를 바르게 세워주어 그들로 하여금 조선말의 뜻을 바르게 리해하기 위하여 노력을 해야겠다는 자세를 갖춰주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쩍하면 한어로 물어보면 교원이 얼뜰하게 그대로 대답을 해주니깐 애들에겐 근본 조선어를 열심히 배워야겠다는 포부같은것들이 사라지게 되는것이다. 이로보아 이제라도 우리 조선어문 교원들은 과당교수에서 무릇 어떤 형편이든 상관없이 무조건 우리 말로 해석을 하거나 분석을 하는것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움직임이 아닐수 없다. 습관이란 상당히 무서운것이다. 일단 애들이 선생님의 의사를 바르게 터득하고 함께 움직이려는 마음가짐을 습관적으로 옮겨놓는다면 실상 하늘의 별따듯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님을 자각하게 될것이다. 이제 애들을 위하여, 가장들의 기대를 위하여,  자신을 위하여 어려운 시작일지라도 침착하게 보다 너른 마음가짐으로 성급함은 멀리 던져버리고 하나하나 실속있는 걸음이 무엇보다 소중한 일이 아닐수 없다. 둘째: 수박의 겉 핥기 형식이 많이 존재한다.   읽기가 조선어문에서 중요함은 그 누구의 해석이 없이도 다 잘 알고 있는 현실이다. 하지만 읽어도 어떻게 읽어야 하고 무엇을 위해 읽어야 함을 바르게 알고 읽어야 진정한 읽음으로 다가서는것이다. 요즘 저급학년 아이들의 과문랑독 순준은 상당하다. 정말 발음이나 철자나 빈틈없이 물흐르듯이 잘 읽고 있으나 가장 중요한 문제인 리해가 령으로 취급을 받았다는것이다. 한번은 1학년 녀자애가 과문을 너무도 잘 읽기에 여러번 읽게 하면서 감상한적도 있다. 찬탄할만큼 크게 자랑을 하고나서 어느 한 구절을 짚으면서 이 구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고 물었더니 두 눈이 휘둥그래서 아무말도 못하는것이였다. 순간 훈훈하던 가슴이 갑자기 숨막혀옴을 절실히 느끼게 되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기도 하였다. 옥에 티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현실이였다. 그래서 몇몇 어린이들을 시켜 더 물어보았으나 모두가 하나같이 입을 꼭 다무는것이였다. 무엇을 말하는가? 애들이 그저 죽은 글을 읽었을뿐 그 글의 내용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것이다. 글쎄 잘 읽는것도 자랑할만한 일이지만 내용을 모르고 잘 읽는것은 자랑이 아니라 되려 근심일수밖에 없다고 본다. 이제 우리 조선어문 교원들은 읽기에 중시를 돌리는것도 중요하지만 글의 내용을 리해하면서 읽기의 훈련과 노력이 필요한것이다. 잘 읽는 목적은 다름이 아니라 빠른 시간내에 글의 내용을 바르게 리해하자는것이다. 그런데 시작은 좋은데 결실이 없으니 벙어리 랭가슴 앓는 격이 아닐수 없다. 이제는 뭐 술술 빨리 읽는것보다는 곰곰히 읽으면서 글의 내용을 하나하나 바르게 리해함이 죽은 글을 줄줄 읽는것보다 더 실속있는 일이 아닐가? 수박의 겉 핥는 격을 벗어나서 애들에게 보다 바른 공부방법과 자세를 습관적으로 심어주는것이 소학교단계에서 교원이 해야 할 가장 바람직한 노릇이라고 생각해본다. 셋째: 어휘교수에 대한 홀시가 아주 엄중하게 존재한다.  간단히 말하면 조선어문 교수는 읽으면서 글의 내용을 바르게 리해하면 그만이다. 그 이상 더 필요한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주 간단한 일같지만 실속있게 해나가려면 엄청 힘에 부치는 노릇인것이다. 어휘교수가 조선어문 교수에서 핵심이다. 애들이 읽으면서 내용을 리해하지 못하는것이 바로 글속에 나타난 어휘에 대한 리해를 정확하게 못하였기때문이다. 어휘교수를 함에 있어서 교원은 절대로 너무 성급해할 필요가 없다. 교원의 성급함은 되려 애들의 리해에 어둠을 몰아오게 되는것이다. 그러기에 어휘교수에서 교원은 반드시 침착하면서도 지혜롭게 넘어가야 한다. 그저 어휘의 뜻을 사전식으로 풀어주지 말고 먼저 과문에서 해결할 어휘들을 찾게 하고 다음 글속에서 그 어휘의 뜻을 알아보도록 하는 동시에 교원의 간단한 해석을 취급해야 한다. 너무 심오한 해석은 될수록이면 피하고 애들이 쉽게 접할수 있도록 될수록이면 생활과 결부하여 해석함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는 과정에 일부 어휘의 동의어나 반의어도 장악하도록 한다. 관건은 어휘의 여러가지 활용에 대한 훈련이 매우 중요하다. 이를테면 하나의 단어로 여러가지 경우에 말마디를 만들면서 그속에서 단어의 뜻이 달라짐을 스스로 리해하도록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 이렇게 점차 습관이 되다보면 애들이 스스로 공부하는 방법을 깨치게 되고 신심도 갖게 될것이며 나아가서 조선어문 공부에 흥취를 가지고 다가서게 되는것이다. 어휘교수에서 교원은 반드시 층차성에 중시를 돌려 하나의 어휘가 점차 심도있게 파생적으로 탈바꿈하는 그런 과정을 애들이 직접 맛보는것이 가장 바람직한 가르침이 아닐수 없다. 넷째: 문장에 대한 훈련이 가물에 콩나듯하다.  조선어문의 최종목표는 문장을 바르게 리해하고 문장을 지을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것이다. 요즘 애들을 보면 교원이 정리해준 동의어나 반의어, 말마디, 짧은글, 틀린 문장 고치기 등등은 아주 손쉽게 척척 잘해낸다. 하지만 일단 만나보지 못한 어떤 생소한 단어나 문장이 나오면 아예 투항하려는 마음부터 앞세운다. 그러니깐 틀에 잡힌 그런 공부에 중시를 돌릴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고하고 해결하는 그런 능력을 키우도록 요구해야 한다. 특히 소학교 단계에서는 애들에게 짧고 리해하기 쉬운 문장들을 선택하여 분석하는 훈련을 가강해야 한다. 수시로 애들에게 문장을 주고 처음에는 선생님과 함께 주어진 물음을 해결하도록 하면서 능력을 키워준다. 차츰 학년이 높아감에 따라 문장을 주고 스스로 물음을 정리하고 해결하는 그런 능력성학습을 하도록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 일단 문장을 바르게 분석하면 글을 짓는것도 별로 큰 어려움이 아닐것이다. 요즘 애들은 그저 문장을 대충 읽어보고 별로 생각없이 마음대로 적으려고 하는데 공부에 대한 책임감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관건은 교원의 노력이다. 교원이 평소에 어느 만큼 애들에게 정성을 몰부으면 그 만큼의 성적이 나오게 되는법이다. 일부 교원들은 자신의 노력은 아끼고 애들더러 성적을 내라고 하는데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일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제 애들에게 문장을 바르게 읽고 그 내용을 정확히 깨치면서 공부하는 그런 능력을 배양함이 무엇보다 급선무로 다가선다.  이상으로 필자의 옅은 견해를 나름대로 적으면서 솔직한 생각을 털어놓는바이다. 어찌보면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아는것과 실천함의 절대치를 바르게 전달하려는 소박한 념원일뿐 그 어떤 현상에 대한 질책이 아님을 짚고 넘어간다.
40    새해의 평범한 소망 한쪼각 댓글:  조회:1950  추천:3  2014-01-19
     갑오년이 우리를 향해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선다. 유난히도 밝은 그런 미소앞에서 스스로 희망이 부푼다. 사랑이 꿈틀거린다. 미래가 열리는듯하다. 갑오년 즉 말때해이니 소망도 이상하리만큼 소박한 모습을 만들면서 조용히 다가선다. 어깨우를 다독이는 그런 소망앞에서 다시금 행복의 노를 힘껏 저어본다. 이런 소망하나를 평범한 편지봉투에 곱게 접어넣는다. 새해에는 학생들의 가장 평범하면서도 지혜로운 친구로 다가서련다. 커가는 애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즐거움도 행복하지만 그보다도 애들에게 한점의 희망이라도 더 열어주고 한갈래의 오솔길이라도 더 환하게 비춰주고싶은 생각이 새해에 넉두리처럼 다가선다. 너무도 어렵게 매일을 열어가는 애들을 지켜보면서 가슴을 아파한적도 한두번이 아니지만 늘 생각처럼 되여주질 않아서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른다. 이제 새해에는 모든 심혈을 애들의 성장을 위한 어떤 새로운 기반으로 다가서련다. 애들이 그처럼 편하게 그처럼 즐겁게 그처럼 행복하게 그처럼 자랑스럽게 그처럼 순진하게 하나하나 열심히 보듬어주련다. 무조건이라는 낱말을 이젠 나의 교원생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면서 그속에 보다 좋은 생각들을 한포기 한포기 열심히 심어가련다. 해빛도 밝은곳에 공기도 청신한곳에 수분도 충분한곳에 영양분도 넉넉한곳을 선택하여 열심히 가꿔가련다. 마음이 힘든 애들에게는 믿음직한 그런 친구같은 존재로, 공부에 힘든 애들에게는 오빠같은 그런 선배님으로, 몸이 아픈 애들에게는 천사같은 그런 존재로 다가서련다. 티끌만한 편애도 없이 애들을 진정 품으로 마음으로 보듬어주면서 한점의 설음도 만들지 말도록, 순간의 아픔도 다가서지 말도록 수시로 애들의 곁을 지켜주는 그런 수호신으로 다가서련다. 실상 애들은 그 누구의 어찌는척한 그런 엄한 모습이 전혀 필요없다. 다시말하면 교원이나 가장이나 애들에게 부끄러움이 없도록 최선을 몰부었으면 그 이상 최고가 더 없는줄로 알고 있다. 그러기에 새해에는 절대로 애들을 엄격함이라는 그런 헐망한 모자로 교육을 진행하지 않으련다. 많이는 애들이 스스로 깨치고 스스로 움직이고 스스로 걸어가도록 길을 잘 선택해야 겠다. 순간마다 애들의 손을 정답게 잡아주면서 진정 가치있고 손색이 없는 바른 길을 걷도록 가로등이 되련다. 애들에게 함부로 요구를 제기함도 멀리하고 애들더러 마음이 내키여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시원스레 마음을 풀어주련다. 동여진 마음의 끈을 풀고 마음껏 자신의 울타리를 세우도록 든든한 징검다리로 다가서련다.  애들과 함께 소중한 말띠해의 순간 순간을 소중히 쪼개면서 그속에 보다 가치있고 보람있는 행복의 물결을 만들기에 최선을 다 하련다. 새해에는 진정 손색이 없는 애들의 가장 믿음직하고 자랑스럽고 행복한 그런 평범한 선생님으로 성장하기에 애들과 함께 손을 잡고 성장의 채찍을 높이 그리고 힘있게 휘두르려한다.  얘들아, 우리 함께 희망찬 새해엔 동년의 잔디밭에 보다 좋은 추억을 심어가꾸면서 알찬 래일을 위해 최선의 움직임을 만들어보자꾸나. 선생님은 언제나 너희들을 굳게 믿고 있으니깐. 자, 이제 우리 모두 나름대로의 재주를 활기차게 열어가면서 희망찬 말띠해에 보람찬 꿈나무를 깊이 깊이 뿌리내리자꾸나!
39    교원이라는 그 이름으로 댓글:  조회:1938  추천:10  2014-01-12
1.        어려서부터 오매에도 그려오던 그 꿈-교원이라는 이름자를 걸어온지도 어언 10여년의 문턱을 넘어선다. 그동안 훌훌 털고 해외 진출에 나서는 사람들의 모진 마음을 짚어보면서 자신을 보다 성숙의 단계로 이끌어 가고자 애써온 10여년이기도 하다.누구는 돈을 얼마나 벌어왔다오 하는식의 말들을 귀가에 자주 들어왔지만 아직 내 지금의 교원생활에 한점의 후회나 부끄러움을 가져본적이 없다. 그러니 아마 물질적 욕구에서는 령취급을 받아야만 할것같다. 하지만 그런 위치나 인생태도로 하여 이 내 마음이 더 편하고 몸도 더 거뿐한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의 얄팍한 자존심은 여직 마음의 골짜기에서 목탄처럼 타오른다. 바로 여직껏 그 사람들의 손에서 돈을 빌려본적이 없다는것이다. 실상 돈이 넉넉해서거나 생활이 풍족해서가 아니다. 그저 평범한 삶이지만 그래도 교원 그 이름자 하나만으로도 정신상 만족감을 느끼며 내 삶을 보다 이채롭게 가꾸어가고자 해서이다. 원래 이 세상에 태여날적부터 그런 모진 마음을 가지지 못해서인지 때로는 월급 또한 매우 낮은 교단생활이건만 일단 교단을 떠나기만 하면 당장 죽음의 골짜기로 자신을 밀어넣는 듯한 그런 심정이였다. 그래서 아마 안해도 교원인 나에게 시집왔는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아마도 하늘이 맺어준 그런 신성한 연분이여서 보다 아끼고 사랑해야함을 절실히 느끼기도 한다. 비록 사회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그런 자그마한 일터이지만 그속에서 스스로 땀 흘려 정진하는 나의 이삭주이는 너무도 생각밖의 희열를 안겨주군 하였다. 락후생이 점차 학습의 재미를 느끼면서 전변하는 그런 모습들을 지켜보느라면 금방 자신이 어린애로 되여버리 군 한다. 함께 기뻐해주고 함께 뛰여보는 그런 흥분은 아마도 인생에서 몇번 느끼지 못하는 것이리라. 먼지하나 묻지 않은 그런 깨끗한 동심속에서 생활을 수놓아가는 그런 신성한 일이여서 항상 자신을 보다 인간답게 가꾸고자 노력한다. 너무도 공평한 애들의 마음앞에서 가면의 열쇠를 쥐고 흔드는 자신이 얼마나 가소로운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 수시로 자신을 피동에 처넣을때도 한두번이 아니다. 그 순간만큼 부끄럽기는 말로의 형언으로서는 너무도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슬쩍 웃고 넘어가기도 하지만 늘 마음에 꺼려서 소화에도 영향을 줄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언제든 꼭 대범하게 애들앞에서 반성을 해야만 마음이 열리는것도 참으로 이상할 정도이다. 그래야만 애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여나기에 오히려 그 그 반성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 요즘 애들은 담도 여간만 작지가 않다. 수시로 교원이라는 신성한 이름자에 도전을 걸어온다. 척척 들이대는 너무도 생각밖의 질문에 자신도 말문이 막힌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애들이라지만 선생이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일단 진리에 어긋나는 일이면 티끌만한 면목도 주지않고 뒤집어 버린다. 그래서 아마 애들앞에서 얄팍한 망신을 한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망신으로 마음이 상하거나 기분이 잡치지 않았다. 오히려 애들에게 고마운 생각이 더 컸다. 애들의 깨끗한 마음은 자신의 메마른 마음에 생명수같이 보귀한 존재였다. 거짓을 모르는 그들의 말이나 행동은 늘 자신으로 하여금 직책을 다 하도록 수시로 깨우쳐주군 하였다. 가끔은 울고 웃는 그 속에서 삶의 참도리들을 열심히 터득하면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그런 무형의 이미지도 마음으로 느껴보기도 하였다. 항상 애들과 허물없이 친구처럼 지내면서 마음의 주머니들을 깡그리 털다보면 내란 놈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한번은 애들보고 선생님이 무섭냐고 질문을 들이 댔더니 무섭다는 이 한 도 없었다. 이런 현실앞에서는 자신에 대해 만족을 느끼면서 애들에게도 고마움을 간직하군 한다. 믿음은 두려움을 몰아내기 때문에 무섭지가 않은것이다. 일단 애들이 무섭다고 한다면 이는 아마 나의 교원생활 실패신호이기도 할것이다. 애들은 시킴이 없이 척척 일들을 열심히 잘해간다. 공부도 마찬가지로 열심히 해나간다. 조용히 그 모습들을 지켜보느라면 자연 모든 물직적 욕구가 안개처럼 살아져 버린다. 순간 몸의 여기저기서 생겨나는 힘을 억제할길이 없다. 동시에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만족감으로 전신이 충만한다.여기에 무슨 후회가 있을소냐! 항상 하는일에 만족을 느끼면서 자신에게 맡겨진,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느라면 마음도 편하고 몸도 거뿐한것이다. 내가 지금 하고있는 일이 크든 작든 위대하든 평범하든 상관없이 오직 마음을 풀어놓고 해나간다면 그 이상 더 큰 보람이 또 있겠는가.항상 교원이라는 그 이름으로 행복을 느끼고 만족을 느끼면서 민족의 미래를 위해 다소 얼마만한 자신의 힘을 기울였다고 생각해보면 여직 부끄러움같은것을 느껴본적은 티끌만치도 없다. 그 신성한 이름자에 자신의 땀방울들이 송골송골 맺힌 모습들을 조용히 마음으로 비춰보느라면 아픔도 피곤도 살그머니 자리를 감춘다. 하고있는 모든 일들이 땀방울을 먹고 자라야만 진정한 가치를 삶의 가치를 느끼게 된다. 가면이나 허영으로 남겨진 흔적들은 오히려 마음에 상처를 주기가 너무도 쉬운것이다. 항상 애들앞에서 거짓을 모르는 그런 깨끗한 인간으로 량심의 기반을 든든히 다진 그런 교원으로 되기 위해 나는 오늘도 열심히 교단에서 뛰고 있다.일단 애들만 믿어준다면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열심히 뛰고 또 뛸것이다. 머리우를 날으는 애들의 기꺼운 모습을 보면서. 2.                                                                                        힘차게 자라나는 애들의 기꺼운 모습은 교원으로 하여금 무한한 행복과 긍지로 자부감을 느끼게 한다. 자신이 가르친 학생이 어엿한 대학생으로 성장했다는 자체에 얼마나 행운스럽고 고마운지 모른다. 자신을 위해 하고있는 공부라고들 하지만 거기에는 어디까지나 행운의 수치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를테면 자신을 가르치는 교원이 얄미워서 중퇴하는 학생도 가끔은 있는것이다. 교원의 너무도 지나친 욕심이 때로는 애들의 깨끗한 마음에 어두운 음영을 던져주게도 되여 어린것들이 푸르싱싱 자라나지 못하고 도중에 점차 스러지는 모습들도 가슴아프게 목격하게 된다. 글쎄 주제는 애들을 위한다고 하지만 가끔은 자칫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는것이 교원이다. 애들은 자신의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억압적으로 내리 먹여도 그 무슨 일이라도 아예 손대지 않으려한다. 이때에 얼핏 잘못하면 마음을 다치기가 쉬우니 항상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이 늘 마음을 떠날줄을 모른다. 언제나 애들과 함께 하는시간을 늘이면서 서로간의 수많은 무형의 장벽을 무너뜨리면서 사생의 거리를 좁혀가면서 그 무슨 일이라도 시름놓고 털어놓을수있는 장소를 마련하는것이 너무나 필요하고 중요한 교육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그 속에서 가끔 애들과 롱담도 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하나 또 하나 무너뜨리면서 잊지못할 추억들을 마음의 일기장에 하나 하나 적는 그 재미 또한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나는 애들이 공부하다가 하기 싫다하면 즉시로 휴식을 선포한다. 그러면 자신도 편하고 애들도 편한 마음이 여서 얼마나 즐거운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교수계획같은것은 절대 미루거나 취소하지 않고 어느 틈에라도 물우의 배 밀듯이 자연스럽게 진척시키군 한다. 실상 교원들은 자신의 인격을 위해서 사업을 해나가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이러저러한 여론이 두려워서 방법이없이? 해나가는 경우도 있는것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욕심이 사업에서의 반영이다. 일단 순수히 자신만을 위한다는 그런 위치라면 이는 역시 생명을 잃은 령혼의 허망한 움직임이나 다름이 없다. 이럴 경우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신호가 짜증이다. 이렇게 되면 애들은 교원의 눈치를 봐가면서 너무도 힘들게 공부를 하게 된다. 그리고 애들이 제일 두려워하는것이 교원의 짜증인것이다. 어른들도 타인의 짜증만큼 싫은것이 없는데 하물며 한창 자라고있는 애들이사 더 말할것이 있겠는가. 나는짜증이 자신만 다치게 할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그리고 애들은 교원의 가면을 신물이 날 정도로 싫어한다는 것고 알고 있다. 일부 교원들은 정서파동이 너무 심하다보니 애들은 맞추기가 상당히 어려워한다. 오죽했으면 하는식의 말들이 나타났을가? 특히 공개교학에서 평심위원들의 보다 좋은 인상을 얻으려고 하는 억지스러운 행동거지는 참으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편하기 그지없게 만든다. 우리는 한시간의 훌륭한 수업보다도 평시의 교수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우리의 임무는 한시간의 공개교학에 있는것이 아니라 많고 많은 평시교학인것이다. 여기에는 우선 책임감이 무엇보다 앞서야 한다는 생각이다. 교원노릇은 장난이 아니다. 한 인간을 육성하는 그런 신성한 일이건만 일부 교원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 누구는 머리가 어떻게 둔하다는 둥 하면서 한일보다 탓하는 경우가 더 많아보인다. 애들의 진보와 성장은 절대 다수가 교원의 책임감과 갈라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교원이 하는일이 모르는 애들을 알게 하는것이지 아는 애들을 알게 하는 것은 아니다. 오죽했으면 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으랴! 그러니 하루를 해도 항상 책임감을 버리지 말고 열심히 해간다면 큰 보람이 스스로 느껴져 힘이 솟아나는 것이다. 이는 하루를 위한것이 아니라 평생을 위한 위대한 작업임을 가슴으로 느껴야한다. 사실상 일부 학생들이 한족학교로 전학해 간데는 우리의 실책으로 인한 원인도 들어 있음을 우리는 부정할수없는 일이다. 항상 애들과의 교수에서 우선 마음이 통해야 한다. 심령의 통함이 있어야만 아무런 장애도 없이 배움의 길이 열리는것이다. 구속스러움은 수업에서 큰 장애가 된다.우리는 애들의 모든 구속을 풀어주면서 마음껏 뛰고 날수있는 공간을 마련해줌으로서 모든 과정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나갈 수 있다.말하자면 교원은 애들과 같은 위치에서 함께 배우고 가르치는 립장에 서야만 효과가 더 좋을것같다는 생각이다.그래서 나는 항상 애들의 생각이나 의견을 존중하면서 열심히 대하는 태도로 자신의 사업을 해나가자고 자주 다짐한다. 그러면서 민족의 령혼인 말과 글을 가르치는 우리가 한순간의 소홀함으로 보다 큰 아픔을 낳지 말고 항상 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정력과 심혈을 기울이면서 열심히 해나가는것이 결국은 민족을 구하는 너무도 성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오늘도 열심히 뛰고 있다. 3,                                                                                    교원생활을 하다보면 교원의 일거일동이 생각외로 애들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애들은 각별히 담임선생님의 일거일동을 자신의 거울로 간주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를테면 걷는 모습, 이야기 할 때의 흉내, 학생을 교육할 때의 틀거지 등등을 애들은 한번쯤 연극해본다. 그러면서 자아감각이 넘넘 좋아서 고무풍선같이 동동 떠있는 모습들을 지켜보느라면 자연 질책보다는 흐믓함이 앞선다. 그러면서 어딘가 두려움같은 느낌도 갈마들기도 한다. 가끔 애들을 앞에 두고 저도 모르게 음성이 높아가고 행동이 거칠어지는 경우도 있다. 큰 도리 작은 도리 몽땅 들춰내여 복잡스레 교육을 한답시고 하지만 효과가 그닥 좋지 않았다. 나중에는 그저 자신의 에네르기만 소모했을뿐 아무런 소득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이 차한면을 자신의 실책으로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가짐부터 갖춘다면 실상은 후진생교육이 그렇게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관건은 문제의 본질을 어떻게 분석하고 해결하는가에 있는것이다. 실상 애들도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면 얼마나 후회하는지 모른다. 솔직하게 말해서 교원보다 자신이 더 가슴아프게 후회를 하는것이다. 애들에게 자신을 반성할수있는 공간과 시간을 충분히 주어야 하는데 교원이 너무 급히 서두르다보니 일이 항상 생각과 달리 망가지는 것이다. 몇년전에 내가 가르치던 한 남학생이 있었는데 참으로 대단한 장난꾸러기 였었다. 그러나 그애에게서 가장 우수한 점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였다.그 어떤 나쁜일을 저질렀다 할지라도 솔직하게 승인하는 그 자태가 대견스러웠다. 얼마후에 그 남학생이 담배를 피운다는 가 날아들었다. 아마 그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챘는지 좀 잠잠해졌었다. 그러던 어느날 조용히 불러서 사실의 진상을 알아보았는데 너무도 생각밖으로 언제 어디서 몇대 피웠다는 것마저 솔직하게 탄백하였다. 나는 질책보다 먼저 담배의 해로운 점과 공부의 중요성 그리고 사람의 됨됨이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실상 학생교육도 어느 쪽으로 착수해야만 성공할수 있는가가 상당히 중요하다. 가장 좋기는 애들의 마음을 열수있는 쪽을 선택함이 비교적 타당한것이다. 교원이 아무리 어떻게 교육을 한다지만 일단 학생의 마음의 대문을 열지 못하면 그건 헛수고에 불과한것이다. 가끔 교원의 열 마디보다 한번의 실속있는 행동이 보다 좋은 효과를 가져 올수도 있다. 즉 애들에게 환경위생을 지킬데 대하여 여러모로 강조하고 있지만 그것이 생각처럼 되여주 질 않는다. 애들더러 길을 걷다가 쓰레기가 눈에 띄우면 주어서 쓰레기통에 넣어라고들 하지만 교원들은 왜서! 줏지 않고 애들만 주어라고 하는지 하는 의문이 생기기가 쉽다. 이럴쯤에는 교원도 복도나 층계에 널린 쓰레기를 주어서 쓰레기통에 넣는다면 그 효과가 더 좋지 않을가? 실상 교원이 널려있는 쓰레기를 줏는다하여 애들이 웃는것이 아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더없이 그런 교원을 존경할것이다. 이런 교원이야말로 학생들을 교육할 자격과 능력이 있는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교원의 행동거지가 학생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하고있다해서 너무 그렇게 기계적으로 행동할 필요까지는 없는것이다. 가끔은 유머적인 행동으로 애들의 긴장한 분위기를 풀어주는것도 교원의 매력이기 때문이다. 색바랜 매력들은 훌훌 버리면서 절때로 아까와 하지말면서.  4.                                                                               애들은 종종 유머적이고 허물없이 롱담이랑 잘하는 선생님을 따르게된다. 문제는 이런 선생님은 그 무슨 어색함이 없이 마치도 친구같은 그런 느낌을 주기때문이다. 바로 사생이라는 그런 무형의 장벽을 뛰여넘어 아무런 불편함도 없이 마음이 하냥 편하기 때문인것이다. 사생지간의 장벽을 허물고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볼수있는 그런 우호적인 관계라야만 수업이든 교육이든 최적화에 도달하는것이다. 어찌보면 교수든 교육이든 모두가 심령의 통함이 너무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것이다. 일단 심령의 통함이 이루어지고보면 그 누구의 시킴도 필여없는것이다. 관건은 사생의 믿음이다. 실상 교원과 학생은 일종의 장사에서의 흥정이나 다름이 없는것이다. 교원은 지식이라는 매개물을 팔러 이곳에 온것이고 학생은 지식이라는 매개물을 사려고 이곳에 온것이다. 이런 만큼 서로가 서로를 믿지 않고서는 그 무슨 흥정이든 론할바가 못되는것이다. 믿음의 기초가 성립되고 마음의 통함이 이루어지고 보면 그 누구의 말도 필요가 없는것이다. 스스로 이루어지는것이다. 애들은 각별히 무뚝뚝한 선생님을 싫어한다. 좀 매력이 부족하더라도 너그럽고 애들과 한데 어울리기 좋아하는 그런 선생님을 애들은 무척 좋아한다. 이를테면 애들의 결점은 확대경으로 들여다보고 우점은 축소경으로 들여다보는 그런 식의 교원은 애들의 마음을 살수가 없는것이다. 늘 이런 교원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려하고 마음속의 진짜말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혹간 교원이 기분의 전환이나 량심의 가책을 받아서 갑자기 애들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면 애들은 오히려 더욱 무서워한다. 이러고 보면 자연 힘들어지는것은 교원뿐이다. 교육방법은 연을 띄우는것과 상사한 도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연줄을 늘 꼭 쥐고 달린다해서 연이 높이 뜨는것도 아니고 늘 놓아준다해서 연이 낮게 뜨는것도 아닌것처럼 애들도 꼼짝 달싹 못하게 엄하게 대한다해서 그들이 훌륭하게 성장하는것이 아니다. 가끔은 연줄을 놓았다가 다시금 살짝 당겨주는 그런 섭리를 교육현장에 구현하면 매우 좋은 효과를 볼 수 있다. 일부 담임교원들은 애들을 너무도 엄하게 단속한다. 그래서 담임선생님만 들어서면 교실안은 쥐죽은듯이 조요해진다. 이에 교원은 만족을 할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 점검 해볼 필요가 있는것이다. 실상 교원앞에서 이처럼 얌전하지만 일단 교원이 자리를 비우면 어떨가하는 생각을 가져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학생을 믿음에도 무작정 믿음이 아니라 역시 예술이 필요한것이다. 학생의 일상 변화에 따라 믿음도 자리이동을 해야 한다. 번개불식으로 변하는 믿음이 때로는 애들에게 너무도 큰 충격을 주기도 한다. 하는 등등의 의문을 가지고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이럴쯤에는 일정한 시간을 주어 학생으로 하여금 충분히 자신을 비춰볼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도 안되면 조용히 타일러줌이 바람직한것이다. 실상 애들은 자그마한 고마움이라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다. 대부분 애들은 교원이 일단 자신을 믿어만 주면 있는 노력을 다하여 부지런히 힘쓴다. 그속에서 저도몰래 하는 너무도 큰 신심이 다시 불길처럼 일어서면서 학생의 전변에 큰 도움으로 뿌리를 내린다. 이런 현상은 실상 교원에 대한 크나큰 고무로도 안겨오기에 정말로 바람직한 것이다. 요즘 보면 가끔 애들이 죽음을 선택하는 경향이 존재한다. 여기에 글쎄 대부분은 가정의 압력으로 일이 생긴다 하지만 역시 교원의 사업과도 련관이 없는것이 아니다. 애들은 정신적압력을 이겨내는 힘이 너무도 약하다. 그리고 충동도 심하다보니 너무도 작은 한 마디의 말이나 행동이건만 그것이 너무도 무서운 악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러니 학생교육에서 아무리 애가타고 괘씸하다 할지라도 절대로 애들의 가슴에 옹이 맺힐 그런 언어나 행위는 피하는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한다. 항상 애들에게 믿음을 주면서 마음속의 아픔을 수시로 녹여주는것도 너무도 성스러운 일이 아닐수없다. 애들을 믿어주자, 애들을 껴안아주자, 항상 제 자식처럼 사랑해주자! 배우려고 찾아온 애들의 마음속에 즐거움을 심어주지 못할망정 아픔같은것은 아예 주지를 말자! 믿음속에서 또 하나의 아름다운 행복을 마음으로 느끼면서 항상 홀가분한 심정으로 교원이라는 이름자에 깨끗한 면사포를 선물하면서 자신의 삶에 만족을 느껴보자.   5.                                                                              사생은 서로의 교류속에서 호상 진보하게 된다.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되여 아낌없이 주고 받으면서 무형의 분위기를 만들어간다. 교원으로서는 훌륭한 본보기가 되여 텅빈 애들의 마음속에 아름다운 잔디밭을 만들고 학생으로서는 깨끗한 동심으로 교원의 메마른 가슴속에 생명수를 부여한다. 그 어떤 보수도 바램이 없이 그저 아낌을 모르면서 삶에 이채를 돋군다. 가끔은 실수 앞에서 조용히 웃을뿐 질책이나 성난 눈길은 아예 보이질 않는다.  이렇게 보다 넓은 마음으로 잘못이나 실수를 받아들이기에 성장에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교원으로서 애들의 건강이나 안전에 대하여서는 1초도 늦춤이 없어야한다.  순간의 실수로 애들의 건강에 무서운 후과를 싫어온다면 그 이상 더 큰 실책이 없는줄로 알고있다. 애들은 불편함앞에서 절대로 가면을 모른다. 교원의 등안함으로  무서운 후과에 목을 동이는 일이 없이 수시로 애들의 건강상황에 중시를 돌려면서 최선을 다 함이 너무도 바람직하다. 수십년을 무사히 넘기다가 한 순간에 걸리고 보면 녹아나는것은 자신뿐이다. 때문에 학습도 학습이거니와 애들의 건강이나 안전에 신경을 늦추지 말아야함이 교원으로서의 사명감이 아닐수없다. 더우기 한 가정에서 자녀를 하나씩 키우는 현실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그 책임이 얼마나 큰가를 다시금 인식하게 된다. 글쎄 그누구의 책임을 벗어나서 교원은 량심이라는 저울대를 가늠하면서 항상 고도의 책임감으로 사업을 해나감이 얼마나 바람직한지 모른다. 애들의 건강을 자신의 건강처럼 아끼면서 맡은 사업을 착실하게 해나감이 우리민족의 생존과 전망에 밝은 빛으로 안겨오지 않을가?!  6.                                                                                신성한 이름자를 지니기도 어렵지만 그 보다도 그 이름에 빛을 가해간다는 그 자체가 상당히 힘든일이 아닐수없다. 그것은 순간의 형상으로 이루어지는것이 아니라 세월의 흐름속에서 불변의 정성으로 쌓고 또 쌓는 무형의 탑이기도 하기때문이다. 더우기 인류문명의 발전에 절대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교원으로서는 그 의미가 더욱 감개무량하다. 더우기 흔들림의 진통을  겪고있는 우리 민족교육으로서는 그 가치의 함금량이 상당한걸로 근심은 마음속을 떠날줄 모른다.  사랑을 모르는 교원은 그 성스러움을 운운하기가 상당히 어렵다고 생각한다. 애생(爱生)은 교원으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미덕이다. 사랑을 떠난 교육은 교육이 아니라 억압이나 착취에 불과하다. 더욱 명기할것은 교육이 여직 수많은 력사의 발자취를 남겨왔지만 그 순간순간에는 사랑이 너무도 놀랍게 숨쉬고 있는것이다. 교육이 발전할수록 학생의 주체적 직위가 상승하게 되는것이다. 락후한 교육에는 항상 교원이 주체가 되여 애들을 쥐락펴락하는라고 힘은 곱으로 들지만 효과는 항상 급제에도 오르기가 힘들다는 생각이다. 그러니 교육과 사랑은 반드시 동존해야 함을 다시금 인식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히 가슴에 맞혀온다. 이러고 보면 사랑은 교육의 어머니나 다름이 없는것이다. 모성애를 떠난 자식의 삶이란 얼마나 고달픈지 가히 짐작을 해볼수가 있다. 실상 우리들도 늘 겪고 있지만 가르침에 힘이 들다보면 자연 저도몰래 음성이 높아가고 행동이 거칠어짐을 피할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가르치고 난 지식치고는 애들이 알뜰하게 장악한 정도가 거의 령취급을 받게 된다. 상술한 현상들은 실상 교원도 애들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는 고상한 마음과 애들이 지식을 장악하지 못할가봐 걱정스러운 그런 안타까움에서 생겨나는 욕심의 산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것은 교원의 욕심이 너무 지나치면 애들의 마음의 문이 스스로 잠겨지면서 현실을 리탈하려는 또 다른 생각이 산생하는것이다. 실상 애들도 교원의 안타까운 마음을 모르는것이 아니라 자신이  너무도 힘들기에 잠시라도 피곤을 풀려는 그런 간단한 생각이다. 그러니 우리교원들은 교육이나 교수에서 너무 성급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과일도 때가 되여야 진정한 제 맛을 드러내는거나 다름이 없는줄로 안다. 급한 마음 잠시 눌러놓고 사랑이라는 두 글자를 떠올리느라면 자신도 편하고 애들도 얼마나 편한지 모른다. 그렇다 해서 사랑을 늘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허줄한 장사를 하라는 말은 아니다. 마음속 깊이에 간직하면서  재치있게 필요할때만 살짝 줘보라는것이다. 그러느라면 주는멋도 참 멋지지만 그 보다도 받아 가지는 그 순간에 애들은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른다. 순간 신심같은것도 마음속을 비집고 애들의 생각을 깨끗이 려과시키기도 한다. 실상 애들의 전변은 오랜시간이 필요한것이 아니라 순간적인 영향이 절대적인 작용을 하게된다. 날마다 꾸지람을 받는 애의 마음을 각도를 바꾸어 생각해보라. 만약 교원이 매일 령도들한테 핀잔을 당한다면 그 순간의 마음은 어떠할가?! 애들이나 교원이나 다를바가 없는것이다. 사랑앞에, 칭찬앞에는 년령의 제한이 필요없는것이다. 그러니 교원은 교수도 열심히 연구해야지만 그 보다도 사랑의 연습이 더욱 필요한것이다. 실상 애들에게 사랑을 주는데는 그 무슨 물직적인 투자도 필요가없다. 그저 교원의 표정에 대한 투자와 고마운 몇마디 언어투자면 ok가 아닐가?! 필자가 사업하고 있는 학교의 유치원과 학전반 교원은 년세가 비교적 많은 로교원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제 곧 할머니자격을 가질 그런 분들이다. 이것은 얼마나 명석한 선택인지 모른다. 필경은 로교원은 젊은 교원보다 사랑의 질적인 함금량이 상당히 높은것이다. 이 두교원은 애들이 큰 실수를 하여 속옷까지 더렵혔다할지라도 항상 깨끗하게 뒤처리를 해주군 한다. 그것이 꼭 마치 자신의 사업상의 실책처럼 여기고 참답게 맡은 상업을 열심히 해나간다. 이것이야말로 사랑의 산물이 아닐가?! 문제는 그 누구든 한두번은 자신을 희생할수 있지만 경상적으로 자신을 희생한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애들하고 너무 다사스러운 그런 사랑은 필요없다. 오히려 애들을 힘들게 만들뿐 아무런 소득도 없는것이다. 그러니 애들에게 허줄한 사랑보다도 진정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그런 값진 사랑이 너무도 필요한것이다. 실상 우리 교원들속에는 진정 학생들을 자신의 눈동자같이 아끼고 사랑하는 분들이 많고도 많다. 반면에 그럭저럭 중이 종을 치듯이 하루하루 보내는 교원들도 적지않다. 우선은 반성이다. 자신을 교원이라는 그 신성한 이름자의 천평우에 올려놓고 저울질해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지나친 자신에 대한 질책보다는 새롭게 자신을 세워봄이 너무도 바람직하다. 교원은 우선은 사랑의 샘으로 자리매김을하고 다음 교육의 선구자로 나서야 한다. 모든것을 떠나서 애들에게 질책보다는 다 자그마한 한점의 사랑이라도 전해주자!  사랑으로 이어진 교육의 구름다리야말로 진정 조국과 인민에게 한점의 부끄러움도 묻지 않은 그런 교원의 이름자앞에 설수있지 않을가?!   사랑을 만들자! 사랑을 연습하자! 사랑을 전해주자! 갇혔던 사랑의 주머니를 이제라도 확 풀어놓고 단 하루라도 그 이름자에 미안함이 없는 교원으로. 7.                                                                                      사회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비록은 하잘것없는 울타리속에서 거의 반복적인 삶의 연속을 빚고 있지만 그것이 너무도 매혹적이여서 아예 미련을 남긴채 발목을 묶이운 교원들도 적지않다. 정 하나에 자신을 서슴없이 헌신하고있는 우리 교원들의 그림자마다에는 성스러움이 그대로 숨쉬고있다. 아마도 얄팍한 봉금에 매혹되여 삶을 지향한 교원은 거의 없을것으로 짐작이 간다. 별스럽게도 그 신성한 이름자 앞에서는 어쩐지 마음이 모질게 변색할줄을 모른다. 그래서인지 해도해도 싫지가 않은지도 모른다. 시장경제의 세찬 부대낌속에서 흔들림도 겪어보았지만 다행히도 움직임은 없었으니 다소 미안함은 누를만도하다. 하지만 부끄러움은 늘 마음의 덕대에서 떠날줄을 모른다. 편식은 한 사람의 성장에 자못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래서 아이적부터 편식의 엄중성에대하여 부모님들로부터 많이도 들어왔다. 아마도 엄중한 편식은 심지어 사형에까지 몰아넣을 가능성도 있을것이다.  그럼 교육에서는 편애가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지 모른다. 실상 애들은 지식적으로도 배가 불러야하지만 사랑적으로 마음이 불러야 한다. 하지만 일부 교원들은 편애를 일종의 교육수단으로 간주하고있는데 이는 너무도 큰 실수가 아닐수없다. 지금 학생들이 자퇴하거나 심지어 자살까지 하는 현상들이 여기저기에서 머리를 쳐들고 교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거개가 교원의 엄격한 질책도 질책이거니와 절대다수가 교원의 편애가 빚은 무서운 비극이 아닐수없다. 특히 애들은 심리가 건전하게 발육을 하지 않은 상태여서 자그마한 상처라도 회복이 상당히 힘든것이다. 글쎄 한두번의 편애는 떠나서 경상적인 편애와 멸시는 교원으로서의 죄악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생들이 빚은 무서운 비극앞에서 시야비야가 소용돌이 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업에 대한 무책임이지 찬성할바가 못된다고 생각한다. 실상 현실속에 이런 교원이 존재하고 있는것은 부정할수가 없다. 이 세상에는 지식을 떠난 소중한것들이 너무도 많고도 많음을 자각해야한다. 일단 교원이 오직 지식전수라는 울타리에만 갖힌다면 그것은 교원으로서의 참으로 슬픈 실패나 다름이없다. 교원의 서리발같은 편애앞에서 일부 애들은 도리머리질이다. 한가지 명기할것은 교원이 어느 애가 미워지기 시작한다면 그 순간이 바로 교원으로서는 실패의 신호나 다름이없다. 아무리 학생이 애들 먹인다해도 언제든 그것이 마음속의 가시로 꽂혀 짜증을 늘 호주머니속에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시도때도 없이 풀어 놓는다면 자신만 잃을뿐 기타는 령으로 취급을 받게된다. 애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는 너무도 명석한 자신이 자신을 가르침에 있어서는 너무도 까아만 현실앞에서 근심만 높아간다. 그러므로 교원으로서는 우선 편애라는 개념을 완전히 포개버리고 자연의 섭리속에서 부단히 자신을 승화시키면서 미운것도 각도를 바꾸어 곱게 본다면 그러법도 생기는것이 아닐가! 아예 미움이라는 낱말같은것은 훌 집어던지고 항상 자신의 신성한 이름자에 황관같은것은 선물하지못할망정 한점의 따스함이나 빛이라도 부여함이 얼마나 바람직할가!  
38    존재의 이유 댓글:  조회:1710  추천:3  2014-01-09
 해빛도 밝고 바람마저 싱그러운 어떤 성스러운 존재때문에 오늘도 나는 당당하게 인생의 동그라미를 열심히 그려가고 있다. 한점의 비뚫어짐도 용서없이 점점의 정성으로 내 삶의 이유를 파아란 하늘향해 두 팔 힘껏 벌려 목청를 높여본다. 울림의 여운에는 한점의 부끄러움도 묻지 않은채 그대로 내 령혼의 터전을 말끔히 닦는다. 지나가던 구름마저 잠시 머물고 향기에 취해있는듯한 그런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나는 나대로 흥분에 흠뻑 젖어버린다. 그렇게 오래오래 젖고 싶은 간절한 바램이다. “ㅏ, ㅑ, ㅓ, ㅕ…” 서로가 두 팔을 벌리고 그토록 반갑게 맞아주는듯한 그런 성스러운 모습이여서 마음은 한없이 설레인다. 세종대왕님의 드높은 학식과 사랑이 한줄기의 시원한 샘물처럼 다가서면서 심한 갈증에 시달리는 겨레의 목을 적셔주는 사랑의 모습 행복의 순간이기도 하다. 어두운 밤 조용히 “아-”하고 읽는 순간 어둠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광명이 면사포마냥 우리의 마음을 조용히 보듬어준다. 반드시 자랑과 긍지로 시작을 기하라는 대왕님의 간절한 소원도 함께 마음의 중심에 곱게 꿰맨다. 아픔이 아니라 그처럼 행복하고 자랑스럽고 행운스러운 순간이여서 곱게 펴지는 얼굴의 구석마다에는 자랑의 기발들이 폭넓게 설레인다. 돌아오면 서로 마중을 하면서 반가와 하듯이 헤여지면 보다 멋진 만남을 기대하면서 다가서는 그런 모습도 황홀하게 다가서고 가시는 님의 뒤모습을 오래오래 지켜보면서 그토록 행복해하시고 또 다른 만남을 적셔가는 그런 모습도 령혼의 오솔길에 채색기를 꽂아갑니다. 내 령혼도 그속에 하나의 존재를 보여준다는것이 너무너무 자랑스럽고 행복합니다. 자나 깨나 그리운 모습이여서 살아가는 길마다에는 꽃잎의 향기가 그윽합니다. 늘 자신을 낮추는 그런 겸손함도 깊이 간직하고 있는 모습이여서 우리의 얼은 더욱 밝게 빛나는것입니다. 사방에서 울려오는 그 목소리에 먹었던 귀도 금시 열리고 닫겼던 마음의 쪽문도 활짝 열려옵니다. 우리 만의 그 자랑 부러움의 농도는 점점 커가지만 언제나 조용하고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네 일상은 보람을 심어 갑니다. “ㄱ, ㄴ, ㄷ, ㄹ…” 서로가 마음을 열고 그토록 화목하게 살아가는 모습처럼 반갑게 다가섭니다. 똘똘 뭉치기를 꿈에마저 바라시는 대왕님의 기대도 흠뻑 가슴을 적셔옵니다. 꽃이 피지못하고 그대로 시들어가는 나무의 존재앞에서 가슴을 아퍼하시던 대왕님의 성스러운 모습이 아프게 다가섭니다. 섬기는 자세에는 놀라운 힘이 필요하지만 섬김의 뒤끝에는 기적같은 영광이 숨쉬고 있음을 명기하신 대왕님의 지혜야말로 천하무적으로당당하게 그 형상 우뚝 솟습니다. 늘 가슴아퍼하시고 걱정하시던 대왕님의 뜻을 이어 겨레의 숨소리 백두산을 울립니다. 하아얀 넋을 높이 치켜들면 구름마저 찾아드는 그런 신성한 존재, 우리는 반드시 우리로 당당하게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가야 합니다. 한점의 잘못에도 용서없이 아픈 가슴 억누르며 밝은 길을 열어주기에 살을 깎는 그런 순간도 자랑으로 가꿔오신 민족의 그 얼이야 말로 하늘의 참뜻을 전달하는 너무도 고마운 손길입니다. 두리뭉실한 삶은 아예 접어두고 순간을 살아도 뜻을 굽힘이 없이 당당하게 살도록 력사의 강을 시원하게 펼쳐주신 그 고마움에 숙여지는 머리가 자랑으로 넘칩니다. 강한 의지 굽힘을 모르고 오직 일편단심 쌓아가는 민족의 얼마다에는 꽃향기 그윽하고 구수한 옛말이 뿌리를 향기 끊임없이 흐르고 또 흐릅니다. 내가 살아가는 리유는 너무도 당당합니다. 그러니 되려 살아가지 못하는 리유의 구석은 자리마저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왕님의 소원을 이뤄가는 한줄기 강물을 파헤치는 그런 존재인 내가 더욱 자랑스럽습니다. 우리 말을 가르치는 일선에서 자신을 불태우는 리유가 너무도 당당하게 다가섭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함은 되려 죽음보다 더 어려운 순간으로 다가섭니다. 새싹들이 해볕물로 뾰족뾰족 자라듯이 우리 애들이 우리 말을 먹고 열심히 커가는 모습에 오늘도 나는 살아가는 리유에 미소를 짓습니다. 아니 미소가 아닌 큰 웃음으로 우리 말의 뿌리를 깊이 뿌려갑니다. 내가 살아가는 리유는 내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 존재는 헐망한 움직임이 아니라 대왕님의 큰 뜻을 기리면서 보다 넓은 공간속에 우리 말만의 공간과 무대를 만들어가는것입니다.  아, 자랑도 많고 슬픔도 많았던 우리 말이여! 바람인들 두려우랴! 비인들 두려울소냐!    해빛도 밝고 바람마저 싱그러운 어떤 성스러운 존재때문에 오늘도 나는 당당하게 인생의 동그라미를 열심히 그려가고 있다. 한점의 비뚫어짐도 용서없이 점점의 정성으로 내 삶의 이유를 파아란 하늘향해 두 팔 힘껏 벌려 목청를 높여본다. 울림의 여운에는 한점의 부끄러움도 묻지 않은채 그대로 내 령혼의 터전을 말끔히 닦는다. 지나가던 구름마저 잠시 머물고 향기에 취해있는듯한 그런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나는 나대로 흥분에 흠뻑 젖어버린다. 그렇게 오래오래 젖고 싶은 간절한 바램이다. “ㅏ, ㅑ, ㅓ, ㅕ…” 서로가 두 팔을 벌리고 그토록 반갑게 맞아주는듯한 그런 성스러운 모습이여서 마음은 한없이 설레인다. 세종대왕님의 드높은 학식과 사랑이 한줄기의 시원한 샘물처럼 다가서면서 심한 갈증에 시달리는 겨레의 목을 적셔주는 사랑의 모습 행복의 순간이기도 하다. 어두운 밤 조용히 “아-”하고 읽는 순간 어둠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광명이 면사포마냥 우리의 마음을 조용히 보듬어준다. 반드시 자랑과 긍지로 시작을 기하라는 대왕님의 간절한 소원도 함께 마음의 중심에 곱게 꿰맨다. 아픔이 아니라 그처럼 행복하고 자랑스럽고 행운스러운 순간이여서 곱게 펴지는 얼굴의 구석마다에는 자랑의 기발들이 폭넓게 설레인다. 돌아오면 서로 마중을 하면서 반가와 하듯이 헤여지면 보다 멋진 만남을 기대하면서 다가서는 그런 모습도 황홀하게 다가서고 가시는 님의 뒤모습을 오래오래 지켜보면서 그토록 행복해하시고 또 다른 만남을 적셔가는 그런 모습도 령혼의 오솔길에 채색기를 꽂아갑니다. 내 령혼도 그속에 하나의 존재를 보여준다는것이 너무너무 자랑스럽고 행복합니다. 자나 깨나 그리운 모습이여서 살아가는 길마다에는 꽃잎의 향기가 그윽합니다. 늘 자신을 낮추는 그런 겸손함도 깊이 간직하고 있는 모습이여서 우리의 얼은 더욱 밝게 빛나는것입니다. 사방에서 울려오는 그 목소리에 먹었던 귀도 금시 열리고 닫겼던 마음의 쪽문도 활짝 열려옵니다. 우리 만의 그 자랑 부러움의 농도는 점점 커가지만 언제나 조용하고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네 일상은 보람을 심어 갑니다. “ㄱ, ㄴ, ㄷ, ㄹ…” 서로가 마음을 열고 그토록 화목하게 살아가는 모습처럼 반갑게 다가섭니다. 똘똘 뭉치기를 꿈에마저 바라시는 대왕님의 기대도 흠뻑 가슴을 적셔옵니다. 꽃이 피지못하고 그대로 시들어가는 나무의 존재앞에서 가슴을 아퍼하시던 대왕님의 성스러운 모습이 아프게 다가섭니다. 섬기는 자세에는 놀라운 힘이 필요하지만 섬김의 뒤끝에는 기적같은 영광이 숨쉬고 있음을 명기하신 대왕님의 지혜야말로 천하무적으로당당하게 그 형상 우뚝 솟습니다. 늘 가슴아퍼하시고 걱정하시던 대왕님의 뜻을 이어 겨레의 숨소리 백두산을 울립니다. 하아얀 넋을 높이 치켜들면 구름마저 찾아드는 그런 신성한 존재, 우리는 반드시 우리로 당당하게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가야 합니다. 한점의 잘못에도 용서없이 아픈 가슴 억누르며 밝은 길을 열어주기에 살을 깎는 그런 순간도 자랑으로 가꿔오신 민족의 그 얼이야 말로 하늘의 참뜻을 전달하는 너무도 고마운 손길입니다. 두리뭉실한 삶은 아예 접어두고 순간을 살아도 뜻을 굽힘이 없이 당당하게 살도록 력사의 강을 시원하게 펼쳐주신 그 고마움에 숙여지는 머리가 자랑으로 넘칩니다. 강한 의지 굽힘을 모르고 오직 일편단심 쌓아가는 민족의 얼마다에는 꽃향기 그윽하고 구수한 옛말이 뿌리를 향기 끊임없이 흐르고 또 흐릅니다. 내가 살아가는 리유는 너무도 당당합니다. 그러니 되려 살아가지 못하는 리유의 구석은 자리마저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왕님의 소원을 이뤄가는 한줄기 강물을 파헤치는 그런 존재인 내가 더욱 자랑스럽습니다. 우리 말을 가르치는 일선에서 자신을 불태우는 리유가 너무도 당당하게 다가섭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함은 되려 죽음보다 더 어려운 순간으로 다가섭니다. 새싹들이 해볕물로 뾰족뾰족 자라듯이 우리 애들이 우리 말을 먹고 열심히 커가는 모습에 오늘도 나는 살아가는 리유에 미소를 짓습니다. 아니 미소가 아닌 큰 웃음으로 우리 말의 뿌리를 깊이 뿌려갑니다. 내가 살아가는 리유는 내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 존재는 헐망한 움직임이 아니라 대왕님의 큰 뜻을 기리면서 보다 넓은 공간속에 우리 말만의 공간과 무대를 만들어가는것입니다.  아, 자랑도 많고 슬픔도 많았던 우리 말이여! 바람인들 두려우랴! 비인들 두려울소냐!  
37    교육은 가장 신성한 예술이여야 댓글:  조회:1800  추천:1  2013-12-29
    교육은 일종의 엄격한 노릇인것같지만 실상은 보다 높은 차원의 예술을 바탕으로 요구하고 있다. 그러니깐 교육의 가장 믿음직한 바탕색이 바로 예술이여야 한다는 말이겠다. 우리가 매일 해나가는 교육의 배경은 항상 조용한 예술이 이미 바탕으로 다가서고 있었기에 날따라 효과를 가져오게 되는것이 아니다. 그속에는 교원의 어떤 정성과 책임감 그리고 애틋한 사랑이 잔잔한 파문을 만들면서 교육이라는 신성한 풍랑을 만들어가는것이다. 예술을 떠난 교육이란 바로 지난날의 감옥이나 다름이 없다. 그저 무작정 어떤 경지에 이르도록 몰아치는 그런 헐망한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을 육성하는 신성한 노릇에 부득불 예술을 만들어야 한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예술은 요란한 그 어떤 움직임이 아니며 더우기는 다사스러운 어떤 모습이 아님을 특별히 강조하련다. 여기서 말하는 예술은 바로 교원의 어떤 지혜를 말하자는것이다. 필자가 다년간 사업을 하면서 이모저모로 훌륭한 교원들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면서 찬탄을 금치못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이런 훌륭한 교원들의 공동한 특점이 바로 늘 조용하게 하는 사업에 다가선다. 언제 한번 팔을 저으면서 요란스레 움직이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가끔은 그렇게 요란스럽다할지라도 전적으로 학생의 어떤 안타까운 모습을 바르게 세우려는것에 최종의 목적을 둔것이다. 그래서 이런 교원들을 마주하면 늘 즐겁고 자랑스럽고 행복하기만 하다. 그러면서 자신도 어릴적에 이처럼 훌륭한 교원을 만나지 못한것이 조금은 한스럽기도 하였다. 여하튼 우리의 신변에 이처럼 물같이 조용하면서도 바다같은 넓은 수양으로 가르침에 충성을 다하는 훌륭한 교원들이 있어서 우리의 교육은 희망이 당당한것이다. 교육은 일종의 특수한 예술분야이다. 생명을 키워가는 그런 무게있고 자랑스러운 예술이니깐 말이다. 이제라도 우리는 하는 사업에 어떤 예술을 만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남들이 이미 다 파먹은 그런 낡은 예술보다는 자신의 개성을 능실히 보여줄수있는 그런 독특한 예술을 그려가야 한다. 그러자면 반드시 교육의 진미를 바르게 턱득하여야 한다. 교육의 진미를 바르게 터득하려면 우선 마음부터 비우는 재주를 갖추어야 한다. 마음속의 티끌만한 오물일지라도 반드시 비워야 한다. 아무런 미련도 없이 무조건 비워가야만이 교육의 신성한 의미를 깨치게 될것이고 그속에서 그냥 연장선을 그어간다면 스스로도 얼마든지 교육의 예술에 대하여 누구보다 바르게 그리고 명석하게 깨쳐갈것이며 그속에서 진정 교원의 가치를 추구하게 될것이다. 이제 우리 교육의 급선무가 바로 예술이다. 애들이 공부하기 싫어하는것에 대하여 어떤 예술을 동원하여 모두가 그처럼 즐겁게 배우고 행복하게 움직이게 할것인가에 대하여 보다 깊은 연구를 만들게 되는것이다. 무슨 일이든 조금이라도 마음을 부여한다면 꼭 그만큼한 보답이 차례지게 되는것이다. 그러니깐 관건은 마음가짐이다. 일단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일을 어떤 자세로 다가서냐가 관건에 관건인것이다. 실상 예술이란 별로 놀라운것도 아니다. 교육에서의 예술이란 바로 호상 서로의 조화가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할 때 우리는 그것을 교육에서의 가장 바람직한 예술이라고 말할수 있는것이다. 여기서 자연스럽답는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생의 편안한 존재를 가리키며 자연스럽다는것은 사생의 가장 순결의 마음의 움직임을 일컷는것이다. 그러니 예술이라하여 별로 놀랄것도 없고 실상 우리들은 이미 많은 예술을 만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관건은 그 예술의 맨끝은 어떤 효과를 만들어가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다가서는것이다. 진정 좋은 결실을 만들어가는 예술은 언제나 조용하고 무겁게 다가선다는 자체를 반드시 명기함이 바람직하고 그런 존재를 만들기에 노력하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것이다. 교원마다의 생각과 개성이 다름에 따라 그 예술의 형식이나 모습이 모두 다를 땡 우리는 그것을 진정 교육의 예술이라고 이름지을수가 있는것이다. 여기서 꼭 같은 예술은 절대로 불어이며 더우기 흉내는 금물인것이다. 그렇다, 교육의 예술은 별다른것이 아니다. 실상 우리가 이미 만들어가고 있는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금은 잘 다듬고 보듬으면서 만들어간다면 그 가치가 더 보람찰것이다.  비여있는 하아얀 백지장들을 어떻게 하면 어떤 예술의 향기가 그윽한 그런 종이가 아닌 종이로 만들어갈것인가를 조금나마 사색함이 우리들이 목전 해야 할 일이 아닐가 하는 소박한 생각을 마친다.
36    교육의 뚜껑을 열어본다 댓글:  조회:2012  추천:5  2013-12-29
    가끔 이상하게 풍겨오는 어떤 냄새에 마음이 어지럽혀짐을 감출수 없었다. 더욱 한심한것은 그런 이질적인 냄새가 어떤 구석의 환영을 받고 있다는것이다. 그래서 지켜보는 아픔이 되려 마음을 모질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그 속성을 바르게 깨치기전에 너무 소홀하게 다가서고보면 남는것은 후회일뿐이다. 필자가 말하려는것은 우리의 교육이다. 요즘 우리의 교육의 속성을 들여다보느라면 안타까운 면들이 적지 않다. 다시말하면 겉치레가 너무 크게 다가서고 있다는 말이다. 소리도 크고 움직임도 다사하고 보여지는것도 어느 정도 괜찮은것같지만 결실의 맨 끝엔 이름못할 아픔들이 매달려있다.    그럼 진정 교육의 의미는 무엇일가? 한마디로 말하면 부동한 사람을 부동하게 만들어가는것이 곧 교육이다. 부동한 사람을 꼭 같게 만들어간다면 그건 교육이 아니라 일종의 말살이다. 다시말하면 꼭같은 애들을 부동한 애들로 만들어내는것이 곧 진정한 교육의 의미가 아닐수 없다. 요즘 학교들에서보면 애들에 대한 이런저런 규정들이 엄격하게 다가서고 있다. 그런 규정을 만드는리유는 바로 애들이 자신을 바르게 키워갈것을 묶어주는 마음의 운전이다. 이상하게도 일부 애들은 그런 규정에 참 말을 잘 듣는다. 그저 교원이 시키는대로 아주 순하게 잘 따라준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학생을 진정 훌륭한 학생이라고 긍정할수 있을가?!  천차만별의 학생들인것만큼 그들 나름대로의 개성과 인생길이 다른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마저 자신의 얄팍한 견해대로 고집스레 운전을 도맡아하려고 애를 쓰고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노릇인지 생각마저 아타깝기만하다. 우리는 응당 부동한 애들을 열심히 만들어가야하는데 교원의 부질없는 욕심이 하나의 모형을 만들어가지고 그걸 들고다니면서 어떤 수단이든 상관없이 애들을 하나같이 그속에 넣어 이리 누르고 저리 문지르면서 자신의 요구에 부합되는 그런 존재를 만들려고 애를 써가는 순간부터 교육은 이미 본질을 잃게 되였고 방향이 틀리게 된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모습도 천차만별인것만큼 어찌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을 꼭 같은 모형으로 만들어낼수있단말인가?! 정말 안타깝다. 하나의 온정한 물건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하여 마음대로 부셔서 다시 자신의 마음에 드는 어떤 모습으로 만들겠다는 그 자체부터 의미를 잃게 되는것이다.  우리는 애들을 그냥 자신의 개성에 따라 크도록 바르게 인도해줄 권리를 교육법이 주었을뿐이지 그걸 우리가 나름대로 우왕좌왕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말이다. 물건도 아닌 인간을 자신의 욕심대로 꼭 같은 존재를 만들어가려는 그런 교원의 움직임부터 문제가 있는것이다. 서로 개성이 다르고 욕망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사람을 어찌 한 모형에 넣고 꼭 같이 만들수 있으랴?!  우리는 이제 교육의 뚜껑을 열어봐야 한다. 아니 교육이라는 이 크나큰 우물의 뚜껑을 열어봐야 한다. 뚜껑만 열어볼것이아니라 그 우물속에 뛰여들어 직접 체험해보고 그속에서 교육의 진정한 의미를 맛보는것이야말로 진정 한 교육자의 의무가 아닐가 싶다. 교육은 어디까지나 꼭 같은 사람을 만들어내는것에 대하여 받아들이지 않는다. 부동한 사람을 부동하게 키워내것이야말로 진정 교육이 아닐가 싶다. 이제 우리는 부질없는 순간의 욕심의 주머니를 풀어헤치고 그속에서 풍겨오는 어떤 이질적인 냄새를 깨끗이 소독함이 무엇보다 바람직한 자제가 아닐가?  진정 지혜로운 교원은 언제나 늘 애들의 순간을 보는것이 아니라 애들의 앞날을 그려볼줄아는 그런 뛰여난 재주와 비범한 지혜를 갖추기에 늘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그렇다, 교육은 절대로 수많은 인간을 꼭 같은 하나의 모형에 맞추어 재가공하는 그런 헐망한 노릇이 아님을 명기해야 할것이다. 풀이면 풀처럼 나무면 나무처럼 꽃이면 꽃처럼 흙이면 흙처럼 자기다운 자신을 만들어갈 때라야 교육의 향기가 세상을 밝혀가게 될것이다. 
35    곡선교육(曲线教育) 댓글:  조회:2113  추천:5  2013-12-01
자연의 성스러운 계시에 매달려 하루하루 탈변을 기하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좋다. 하지만 고집스레 어떤 존재를 물고 늘어지는 모습은 보기마저 안스럽다. 교육이란 하는일이 아님을 어느날 자연의 가르침속에서 놀랍게 발견하게 되였다. 스스로 하게 함이 바로 가장 성스러운 교육이 아닐가하는 기발한 사유를 틀어본다. 하지아니함이 하지않는것이 아니며 스스로 하도록 가르침이 너무도 성스러운 교육이 아닐가 하는 나름대로의 견해를 털어본다. 여직 우리의 교육은 오직 통하는 가장 가깝고 빠른 거리에 눌리워 많이는 어려움을 겪어오기도 한 현실이다. 보기에는 그처럼 깔끔하고 흠이 없는것 같았지만 실상은 속은 언녕 별질이 시작되였음을 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긴 사색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 교육의 가장 큰 흠이 바로 너무도 직통적으로 달리는것이다. 모든 기로는 교육의 절대적인 흠으로 간주하면서 하나같이 높이 웨치는것이 바로 우리들의 가는 교육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가슴치며 자부하는 자체가 바로 문제인것이다. 이제 우리는 교육의 가장 성스러운 령물인 곡선교육을 진행함이 가장 바람직하고 후대들에게 얼마간의 미안함이라도 덜어버릴수있는 값진 반성의 시작이라고 스스로 느껴보는편이 진정 교육의 진미를 터득하고 실천하는 좋은 계기로 다가설것이다.  자연의 만물을 한번쯤 유심히 살펴보라. 그 어느 존재도 막론하고 모습들이 직선으로 생긴곳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수 없는 놀라운 현실이다. 필자의 말을 믿고 싶지 않으면 한번쯤 자연을 돌이켜보면서 반성의 주출돌을 추슬려보라는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의 형상은 절대로 직선을 용서하지 않았다. 다시말하면 직선으로 자랄수있었다는 그 자체가 바로 그 교육의 영향이 아닐수없다. 하지만 자연은 수억년전에 벌써 그런 리치를 바르게 깨닫고 실천한것이다. 자연의 가르침처럼 하지 아니하면서 스스로 깨치게 하는 그런 교육에 우리가 이젠 사색이 필요하다. 교육이란 꼭 어떻게 가르쳐야 함이 아니며 더우기는 손을 잡고 곧게 직선으로 달리는 그런 어설픈 노릇이 아님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교원쯤이면 깊은 침묵이 필요한것이다. 그리고 자연은 곡선교육을 그냥 열심히 펼쳐가고 있지만 인간은 직선교육에 매우 민감하다. 그래서 인간의 두손으로 가꾸어진 모든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면 백에 구십구는 모두가 직선으로 되여있는것이다. 그것이 직선으로 이루어질수있었다는 자체가 바로 그 자신들이 받은 교육이 문제가 되는것이다. 아마도 직선만큼 어설프고 가치가 허줄한 존재는 더 없을것이다. 그래서 세상에 태여날때는 직선으로 오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자신의 모습을 곡선으로 바꿔가게 되는것이다. 그리고 직선으로 그냥 고집을 이끈다면 아마 그 존재는 조만간에 취급을 버리게 되는것이다. 이런 현실에 비추어 우리의 교육은 이제 그 무엇보다 곡선교육에 보다 많은 침투가 필요하다고 본다. 애들에대한 가르침도 이젠 직선교육에서 벗어나 곡선교육으로 운전방향을 바꿔야 한다. 직선교육은 시간상으로는 좋은 결실을 보는것같지만 그 교육의 뒤끝은 보람이 희미한것이다. 다시말하면 직선은 곡선의 노예로밖에 자격을 갖추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직선은 곡선을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겠다. 교원이 그냥 고집스레 직선교육을 끌고 나간다면 교원이나 학생이나 모두 힘만 들뿐이지 별로 좋은 결실은 보이지 않는것이다. 요즘에 교육에서 뭐 소질교육이요 하면서 높이 웨치고 있지만 소리만 높았지 변한것은 눈에 보이 않는것이다. 이를테면 직선교육은 교원의 주체지위가 변할수가 없다는말이다. 한끝을 그냥 끌고 나가려는 옹졸한 마음이 그걸 용서하지 않기때문이다. 그러니깐 교원이 앞에서 끌고 학생이 뒤에서 비뚤지 않게 조심스레 나가려고 애만 쓸뿐이다. 하지만 곡선교육은 교원의 그런 고집이 필요없다. 학생이 주체가 되여 이곳저곳 부딪쳐도 보면서 스스로 깨치는 그런 성스러운 교육인것이다. 그러니깐 곡선교육은 교원이 아니하면서도 학생들이 스스로 깨치게 되는 그런 최상의 교육인것이다. 이제 우리는 마음에 주욱 그어진 직선을 지워버리고 대담스레 곡선을 그릴줄 아는 그런 재주와 지혜가 너무도 바람직하다. 이곳저곳에 넘어져도 보면서 그속에서 애들이 스스로 깨치고 또 다른 지혜를 심게 되는것이다. 그러니 직선교육은 흉내교육이지 진보교육이 절대 아님을 긍정하게 된다. 하지만 곡선교육은 바로 지혜와 실천의 교육인것이다. 학생자체가 스스로 교육의 주인이 되여 교육을 바르게 인식하고 그속에서 뛰여난 지혜로 삶을 마주하기 때문이다. 곡선은 어찌보아도 그처럼 편하게만 다가선다. 하지만 직선은 그렇지가 않다. 얼핏 조심하지 않으면 당금 무슨 큰 변이라도 당할듯한 심리적 압력이 머리를 쳐들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은 어디까지나 스스로 깨침이 진정한 교육이지 절대로 교원들의 호랑이같은 눈길로 주시하는 그런 어색한 장면이 아니다. 그런속에서 교육이 이루어진단들 얼마나 잘 이루어질수 있으랴!  곡선은 언제까지나 비뚫어짐을 그처럼 너그럽게 용서한다. 비뚫어짐이 있어야 그런 비뚫어짐을 피하기 위한 지혜가 이루어지게 되는법이다. 그 지혜가 바로 진정한 교육의 가장 아름다운 결실이자 향기인것이다. 하지만 직선은 티끌만도 비뚫어짐을 용서못한다. 그런 용서의 재주와 지혜를 갖추지 못했기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모두가 힘들고 어려움은 크지만 그 결실은 이미 병든 어떤 모습을 만들게 되는법이다. 이제 우리 교육의 급선무가 바로 곡선교육을 보급하면서 그런 교육을 위한 지혜의 충전인것이다. 다소 습관이 어려울지라도 한발한발 실속있게 걷는다면 실상은 그렇게 어려운 움직임이 아닐것이다. 자연의 성스러운 가르침속에서 우리는 교육을 더욱 완미하게 이끌어가야 한다. 실상 교육의 본질은 스스로 깨치는것인만큼 교원은 많이는 아니하려는 그런 지혜의 탑을 쌓아야 한다. 아니함이 아니하는것이 아님을 반드시 바르게 깨쳐야 한다. 아니함은 바로 함을 말하는것이며 스스로 깨침이 바로 서로의 깨침임을 명석하게 깨쳐야 한다. 실상 교원자체가 깨치지 못한 형편이건만 자꾸 애들더러 깨치라고 구호를 부를 필요는 없다. 그건 소경의 막대질이다. 가끔은 곡선의 진의를 바르게 리해하면서 그속에 숨겨진 진정한 교육의 함의를 우리는 긴 시간으로 풀어나감이 무엇보다 중요한것이다.  곡선교육은 영원한 교육의 주제이다. 교육의 가장 성스러운 령물로 다가설 때라야 우리의 교육은 자연에 접근할수 있는 그런 자격증을 받게 되는것이다. 곡선교육의 맨끝에 곱게 드리운 우리 교육의 미래를 그려보면서 우리 모두 곡선교육의 성스러운 울타리에 마음을 먼저 쏟아보자.  
34    지켜보는 즐거움에는 행복이 꿈꾼다 댓글:  조회:1575  추천:4  2013-11-01
     어려움을 행복으로 슬쩍 바꿔놓는 순간 우리는 다함없는 즐거움에 마음이 열린다. 한점의 바람에도 고마웁고 노오란 단풍잎에도 감격스럽고 지나가는 비에도 기쁨이 묻어있게 되는것이다. 그런 숙제가 조금도 싫지 않을 때 나는 나답게 나를 세우군한다.  담임교원의 행복이란 무엇이냐고 그 누가 정중하게 물어온다면 나는 서슴없이 이렇게 말하고 싶다.  “ 날마다 커가는 애들을 지켜보는 즐거움입니다. 그런 즐거움이 있기에 우리는 우리답게 우리를 바르게 세워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애들에게 고마움을 덜어버릴수가 없는것입니다.”  남들이 들으면 어떻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나로서는 이만하면 만족스러운 정답이라고 수염이라도 쓸고 싶은 그런 심정이다. 담임교원의 가장 보람찬 일이란 애들의 공부에 압력을 주어 높은 점수를 따내는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담임교원은 절대로 좋은 선생님의 대렬에 끼여들기가 한낱 어려운 일이다. 그럼 담임교원의 가장 큰 행복은 어데 있을가?! 평범한 나의 견해라면 애들이 아무 탈없이 잘 커가는 그속에 이름못할 행복이 꿈틀거린다고 서슴없이 말할것이다. 공부성적이 제고 되는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도 애들이 매일이 다르게 어른스럽게 커가는 그 정경이 천하절경이 아닐수 없다. 아무리 자연의 경치가 아름답다 할지라도 그보다도 순박한 애들이 깨끗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커가는 그 모습이야말로 인간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경치가 아닐수 없다. 나는 애들을 무턱대로 질책한적이 거의 없다. 왜냐하면 이전에 이방면에서 곤혹을 치렀기 때문이다. 그후로부터는 절대로 애들에 대한 질책에 한낱 심중하게 처리하군 하였다. 아무리 유치한 질문일지라도 그 애의 각도에서 들여다보고 답복을 주군 하였다. 그래서 지금 가르치는 애들은 커가는 환경이 퍼그나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애들이 나에 대한 두려움이 꼬물만치도 없기 때문이다. 가끔 아침에 출근하여 교실로 들어서면 일부 애들이 마치도 반가운 친구를 만나듯이 그처럼 반가워한다. 우리는 늘 자신의 각도에서 생각을 부리울것이 아니라 많이는 애들의 립장에서 생각을 부리움이 너무도 바람직한 일이다. 정말 애들의 세계에는 공부보다 더 중요한것들이 너무도 많이 들어있다. 우리는 그것을 바라볼줄 알아야 하는데 지혜가 부족한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1학년부터 5학년까지 데리고 온 애들이 정말 많이 커왔다는 생각에 나는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철없던 그들이 이젠 제법 철이 들어 일처리는 하는걸 보면 너무도 자랑스럽다. 비록 공부에서는 놀라운 성적을 가져오지 못했지만 사람다운 학생으로 열심히 커가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나는 너무도 행복하기만하다. 그래서 애들도 저도 모두 편하게 매일을 즐겁게 열어가고 있는것이다. 공부는 뒤떨어지면 노력하면 되지만 사람적으로 뒤떨어지면 그건 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님을 수시로 애들에게 노래처럼 들려주군 하였다. 그러는과정에 애들은 자신의 소행에 각별히 조심하면서 열심히 크려고 애쓰는 그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아닐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늘 애들의 지켜보는 그런 멋에서 행복을 찾고 즐거움을 줏고 자랑을 심어간다.  애들아, 몸도 마음도 씩씩하게 모든 두려움도 훌훌 털어버리고 마음껏 크거라. 한줄금의 빛속에서 우리는 미래를 그려가고 한줌의 흑속에서 오돌찬 래일의 모습을 열심히 심어가꾸라. 나는 너희들을 지켜보는것마저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 너희들이 있어서 나는 늘 행복의 덩굴에서 그네뛰기를 하면서 행복의 씨앗을 열심히 뿌려간다.  고맙다, 사랑하는 나의 학생들이여!  
33    우리 애들 왜 요지경일까?! 댓글:  조회:2102  추천:3  2013-08-24
     다년간 교육사업을 해오면서 많은 변화를 지켜보고 있지만 만족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만물이 자연의 변화속에서 날로 진보를 하면서 새로운 탈바꿈을 기약하고 있지만 우리 애들은 이상하게 점점 퇴보하고 있다는 가슴아픈 현실을 감출수 없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어떤 핑게를 만들면서 다소 안위의 주추돌을 만들어보느라 모지름같은것을 엮어보지만 점점 조이는 현실의 어떤 구석앞에서 부득불 안타까움의 항아리를 깨뜨릴수밖에 없음을 절감하게 된다. 몇년전만하여도 그처럼 활달하고 배움에 게으름을 모르고 열심히 매일을 열어가는 애들의 장한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면서 흥분에 젖기도 하였지만 요즘의 현실은 참으로 캄캄하기만하다. 스러져가는 한그루의 나무앞에서 현실의 탈을 벗길일이 아득하다. 여직 담임교원 사업을 해오면서 늘 반성의 울타리를 열심히 가꾸느라 하지만 어수선하게 자라나는 잡초의 존재를 다시금 절감하면서 잡초가 잡초가 아님을 절실히 느껴본다. 잡초가 없는 자연을 우리는 쉬이 자연이라고 부르기에는 자격이 없는줄로 알면서도 모든 잡초를 모조리 뽑으려는 그런 아둔한 행위가 오늘에 또 다른 어떤 존재를 만들어왔는지 모른다. 잡초의 존재가 무성해야만 자연의 풍요로움도 느끼듯이 이젠 잡초에 그만 미련을 두고 하나하나 쪼아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요즘 우리 애들 왜서 요지경인지 가슴을 흔든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사색의 물결을 따라 노를 젓느라니 맞서는 물길이 두렵기만 하다.      우선 요즘 우리 애들은 죽은듯이 살아가고 있다. 구경 무엇이 우리 애들을 요지경으로 만들어 놓았을가? 그런 존재앞에서 흡족해하는 어떤 얼굴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지? 시간에 발언을 하라면 몇을 제외한 기타 애들은 죽어가는 소리로 말마저 제대로 못하고 서성거리는 모습을 너무 쉽게 볼수있는것도 참으로 그저 스쳐지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무섭게 풍랑을 만든다. 수업시간에는 그처럼 죽은듯이 가만히 있다가도 휴식시간이 되면 정신없이 움직이는 모습에도 뭐가 문제로 다가서고 있는것이 아닐가? 왜서 애들은 자신을 그처럼 무섭게 단속해야 했을가? 오직 말도 없이 얌전하게 앉아서 선생님의 말을 듣기만 하면 최고로 생각하는 애들의 그런 심리는 또 무엇이 만들어 놓은것일가? 가끔 질문을 하면 감히 손도 못들고 두려움에 망설이는 그런 존재는 또한 어떻게 생긴걸가? 발언을 한다해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런 심리는 또 어디서 밀려온것일가? 파아란 마음이 이렇게 늙어가는 리유는 또한 어떻게 된 판결일가? 정말 안타깝다! 그리고 걱정스럽고 또 두렵구 나중에는 무섭고… 이 모든 현상은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구경 무엇이 이렇게 무섭게 애들을 좌우지 하고 있는것일가? 아무리 사색의 돌다리를 부셔봐도 대답은 그냥 하나로 어설프게 다가선다. 그들의 심리에 어떤 문제가 생긴것이다. 배움에 두렵고 생활에 두렵고 교류에 두렵고 움직임에 두렵고 믿음에 두렵고 웃음에 랭정한것이다. 그럼 애들이 이렇게 자신을 만들고 싶어서 초래된 후과일가? 절대로 아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이처럼 무서운 후과를 만들어내고 있는것일가? 모든 교육자가 스스로 사색의 힘이 필요한 급선무이다. 이제 가슴에 손을 얹고 보다 량심적인 사색이 가장 바람직한 답안을 물고 일어설것이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들고 들여다본다면 어느 정도 우리는 답안을 뽑아낼수 있을것이다. 가슴을 치면서 이런 질문을 한번쯤 해보는것이 너무도 바람직한 일이 아닐가? “나는 진정 애들이 마음을 열수 있는 그런 교원으로 다가섰는가? 애들이 얼마나 나를 믿고 있는지? 애들에게 한점의 부끄러움도 없는 그런 형상을 만들었는가? 나는 구경 어디로 가고 있는것인가에 대하여 질문을 해본적이 있는가? 애들을 질책하기전에 먼저 스스로의 질문을 해보았는가? 구경 애들이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가? 애들이 도대체 나를 좋아하는가 아니면 나를 두려워하는가?...” 이런 질문앞에서 우리는 머리를 들수 있었는가? 애들의 가슴을 찌르는 어떤 못된 말들을 한적은 없는가? 나는 구경 애들에게 어떤 존재로 다가서고 있는가?  스스로 떨리는 가슴을 눌러야 한다. 교육은 어떤 영예에 매달리는 순간부터 가치를 잃게 된다. 더우기 교육은 어떤 가리움을 동원하여 허영에 눌리워서는 절대 안되며 그런 허줄한 동원으로 얻는 그런 영예에는 비린내가 풍김을 스스로 절감하여야 한다. 진정한 교육은 자랑이 아니며 더우기 드러냄이 아니다. 평범한 움직임속에 큰 뜻을 키워가는 그런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교육이 아닐가 싶다. 무서운 교원의 얼굴은 교육의 함정이다. 왕왕 애들이 무서워하는 교원을 높이 평가하는 헐망한 울타리도 없는것은 아니다. 애들이 무서워하는 교원은 절대로 좋은 교원이 아님을 명기해야 한다. 진정 좋은 교원은 자신의 어떤 형상을 수립시키지 않는다.      다음 우리 애들은 기를 잃고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다. 제앞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저 교원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들으면 된다는 어설픈 지팽이를 잡아쥐고 아주 힘들게 매일을 열어가고 있다. 애들과 서로 교류를 할라치면 정말 힘이 든다. 우리 애들은 자신을 너무 감추려고 애를 쓴다. 가히 자신의 능력으로 당당하게 잘 할수 있으련만 그 어떤 두려움의 영향으로 기를 못펴고 그냥 굽은 등을 만들려고 애를 쓴다. 그럼 이런 현상은 또 어떻게 생겨난것일가? 자신의 주장을 모조리 파묻어 버리고 그저 조심스레 행동하는 어떤 움직임을 만들기에 엄청 바빠한다. 시간에도 허리를 펴지 못하고 할말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그저 선생님의 눈치만 살피면서 자신을 두려웁게 만들고 있다. 감히 자신의 주관도 드러내지 못하고 선생님의 말이면 무조건 따르는 그런 모습도 참으로 안타깝다. 그리고 자신을 드러내려는 용기를 완전히 잃어 버렸고 될수록이면 자신의 존재를 최소한 약화시키려고 애를 쓰는 모습들을 너무도 쉽게 볼수 있어서 안타까움은 짙어만 간다. 그저 몇몇 애들을 제외한 기타 애들은 자신에 대하여 너무 신심이 없으며 지어 어떤 애들은 선생님이 질문을 시작하면 두려워서 벌벌 떨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장점임에 확실하건만 늘 부정하려고 애를 쓰고 그런 부정에 만족하려는 모지름을 만들고 있는것이 요즘 우리 애들이다. 당당하고 활발한 기운은 어디론가 다 도망가고 이상한 자신들을 만들기에 요란스레 움직이고 있다. 자신의 견해나 장점같은것을 스스로 자랑할만도 하건만 그 어떤 두려움에 눌리워 기를 못펴고 늘 자신을 밟고 있는것이 요즘 우리 애들이다. 그럼 애들이 이렇게 해야하는 리유는 구경 무엇이며 왜서 이렇게 애들이 변하고 있는것일가?  보기마저 안타깝고 걱정스럽기만하다. 몸은 날로 커가지만 마음은 늘 야위여가는 현실이다. 선생님의 간단한 어떤 질책에도 무슨 큰 설음이라도 당한듯이 눈물을 펑펑 쏟는 모습을 지켜보느라면 마음만 모질게 아플 뿐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선생님의 그 한마디가 서러운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어떤 장애로 쌓이고 쌓여서 이처럼 큰 설음을 만든것이다. 마음의 구석에 드리운 어떤 설음을 토해낼 그런 그릇이 보이지 않고 간혹 그런 그릇이 보일지라도 마음에 어떤 장애가 생기면서 길이 막히게 된것이다. 그 길은 구경 누가 열어줘야 할것인가? 우리들의 사색이 너무도 필요하다. 교원은 생각하는 사람이여야 한다. 언제든 늘 생각하는 그런 존재로 다가서야만 진정 애들에게 어떤 길을 새롭게 열어주게 될것이다.  이제 우리 교원들이 해야 할 일과 가야 할 길은 정말 아득하기만 하다. 어느 길로 어디로 어떻게 가야하는가에 대하여 깊은 사색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교육은 영원한 주제이다. 고정된 뿌리가 없이 움직일줄 알고 생각할줄아는  어떤 나무로 다가서야 하지 않을가?
32    존재의 리유 댓글:  조회:2191  추천:3  2013-08-16
     해빛도 밝고 바람마저 싱그러운 어떤 성스러운 존재때문에 오늘도 나는 당당하게 인생의 동그라미를 열심히 그려가고 있다. 한점의 비뚫어짐도 용서없이 점점의 정성으로 내 삶의 리유를 파아란 하늘향해 두 팔 힘껏 벌려 목청을 높여본다. 울림의 여운에는 한점의 부끄러움도 묻지 않은채 그대로 내 령혼의 터전을 말끔히 닦는다. 지나가던 구름마저 잠시 머물고 향기에 취해있는듯한 그런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나는 나대로 흥분에 흠뻑 젖어버린다. 그렇게 오래오래 젖고 싶은 간절한 바램이다.    “ㅏ, ㅑ, ㅓ, ㅕ…” 서로가 두 팔을 벌리고 그토록 반갑게 맞아주는듯한 그런 성스러운 모습이여서 마음은 한없이 설레인다. 세종대왕님의 드높은 학식과 사랑이 한줄기의 시원한 샘물처럼 다가서면서 심한 갈증에 시달리는 겨레의 목을 적셔주는 사랑의 모습, 행복의 순간이기도 하다. 어두운 밤 조용히 “아-”하고 읽는 순간 어둠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광명이 면사포마냥 우리의 마음을 조용히 보듬어준다. 반드시 자랑과 긍지로 시작을 기하라는 대왕님의 간절한 소원도 함께 마음의 중심에 곱게 꿰맨다. 아픔이 아니라 그처럼 행복하고 자랑스럽고 행운스러운 순간이여서 곱게 펴지는 얼굴의 구석마다에는 자랑의 기발들이 폭넓게 설레인다. 돌아오면 서로 마중을 하면서 반가와 하듯이 헤여지면 보다 멋진 만남을 기대하면서 다가서는 그런 모습도 황홀하게 다가서고 가시는 님의 뒤모습을 오래오래 지켜보면서 그토록 행복해하시고 또 다른 만남을 적셔가는 그런 모습도 령혼의 오솔길에 채색기를 꽂아갑니다. 내 령혼도 그속에 하나의 존재를 보여준다는것이 너무너무 자랑스럽고 행복합니다. 자나 깨나 그리운 모습이여서 살아가는 길마다에는 꽃잎의 향기가 그윽합니다. 늘 자신을 낮추는 그런 겸손함도 깊이 간직하고 있는 모습이여서 우리의 얼은 더욱 밝게 빛나는것입니다. 사방에서 울려오는 그 목소리에 먹었던 귀도 금시 열리고 닫겼던 마음의 쪽문도 활짝 열려옵니다. 우리 만의 그 자랑 부러움의 농도는 점점 커가지만 언제나 조용하고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네 일상은 보람을 심어 갑니다.     “ㄱ, ㄴ, ㄷ, ㄹ…” 서로가 마음을 열고 그토록 화목하게 살아가는 모습처럼 반갑게 다가섭니다. 똘똘 뭉치기를 꿈에마저 바라시는 대왕님의 기대도 흠뻑 가슴을 적셔옵니다. 꽃이 피지못하고 그대로 시들어가는 나무의 존재앞에서 가슴을 아퍼하시던 대왕님의 성스러운 모습이 아프게 다가섭니다. 섬기는 자세에는 놀라운 힘이 필요하지만 섬김의 뒤끝에는 기적같은 영광이 숨쉬고 있음을 명기하신 대왕님의 지혜야말로 천하무적으로당당하게 그 형상 우뚝 솟습니다. 늘 가슴아퍼하시고 걱정하시던 대왕님의 뜻을 이어 겨레의 숨소리 백두산을 울립니다. 하아얀 넋을 높이 치켜들면 구름마저 찾아드는 그런 신성한 존재, 우리는 반드시 우리로 당당하게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가야 합니다. 한점의 잘못에도 용서없이 아픈 가슴 억누르며 밝은 길을 열어주기에 살을 깎는 그런 순간도 자랑으로 가꿔오신 민족의 그 얼이야 말로 하늘의 참뜻을 전달하는 너무도 고마운 손길입니다. 두리뭉실한 삶은 아예 접어두고 순간을 살아도 뜻을 굽힘이 없이 당당하게 살도록 력사의 강을 시원하게 펼쳐주신 그 고마움에 숙여지는 머리가 자랑으로 넘칩니다. 강한 의지 굽힘을 모르고 오직 일편단심 쌓아가는 민족의 얼마다에는 꽃향기 그윽하고 구수한 옛말이 뿌리를 향기 끊임없이 흐르고 또 흐릅니다. 내가 살아가는 리유는 너무도 당당합니다. 그러니 되려 살아가지 못하는 리유의 구석은 자리마저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왕님의 소원을 이뤄가는 한줄기 강물을 파헤치는 그런 존재인 내가 더욱 자랑스럽습니다. 우리 말을 가르치는 일선에서 자신을 불태우는 리유가 너무도 당당하게 다가섭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함은 되려 죽음보다 더 어려운 순간으로 다가섭니다. 새싹들이 해볕물로 뾰족뾰족 자라듯이 우리 애들이 우리 말을 먹고 열심히 커가는 모습에 오늘도 나는 살아가는 리유에 미소를 짓습니다. 아니 미소가 아닌 큰 웃음으로 우리 말의 뿌리를 깊이 뿌려갑니다. 내가 살아가는 리유는 내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 존재는 헐망한 움직임이 아니라 대왕님의 큰 뜻을 기리면서 보다 넓은 공간속에 우리 말만의 공간과 무대를 만들어가는것입니다.  아, 자랑도 많고 슬픔도 많았던 우리 말이여! 바람인들 두려우랴! 비인들 두려울소냐!                     
31    슬픔의 한길에는 아픔만이 가득하다 댓글:  조회:1908  추천:1  2013-07-20
    ----  한춘 선생님의 령전에 올리는 말씀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하고 아픈 마음을 달랠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무정하다는 원망도 만들어보았습니다.  부랴부랴  버스를 잡아타고 근 다섯시간의 로정을 거쳐 할빈에 도착하였습니다.  채복숙 누님이 신문사앞에서 마중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충 짐을 부려놓고 선생님네 댁으로 달려갔습니다. 많은 문인들이  한창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선생님께 인사를 올리고 같이 집식구들과 같이 저녁식사를 하였습니다. 크고 작은 설음들이 방안을 가득 메웠습니다.  설음은 내 마음을 모질게 흔들었습니다. 밤12시가 거의 될 무렵 밤제사를 지내는 행사가 시작되였습니다. 김성우 시인님의 주최로 우리들은 저마끔 선생님의 령전앞에 무릎을 꿇고  아픔을 풀어놓았습니다.  너무도 인자하신 선생님의 모습을 보느라니 가슴은 터지는듯하였습니다.  문학애숭이던 저를 그처럼 아끼고 사랑하면서  가르침에 너그러운 선생님의 그 은공 언제면 다 갚아드릴지  아픔만이 가슴을 쳐옵니다.  제가  첫 수필집을 출판하려는 의향을 말씀드렸더니 그처럼 시원스레 책머리말을 써주신지도 어언 몇년이 지났습니다.  이제와서 돌이켜보느라니 선생님께 얼마나 미안한지 모릅니다. 이런저런 경제여건으로 오늘까지 책을 펴내지 못한것이 또한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선생님께서 이처럼 총망히 가실줄을  알았더라면 언녕 방법을 대서라도 책을 출판하여 선생님께 손수 드리지 못한 그 아픔도 저으기 커만 갑니다.  선생님께서 매번다다 저의 원고를 보시고는 꼭꼭 의견을 메일로 보내주시군 하였습니다. 그러는 과정에 저는 얼마나 컸는지 모릅니다.  문학에서 이런저런 어려움에 부딪치면 서슴없이 선생님께 가르침을 청하시면 선생님은 언제나 그처럼 자상하게 도와주군 하셨습니다.  이제 저는 곱절 노력하는 모습으로, 문학의 신성한 길을 열심히 걸어가는 자세로 선생님의 은공에 보답하렵니다.    선생님,  제발 빕니다.  선생님께서 가시는 그 길 그처럼 평온하고 따스하고 행복하시고 건강하시고 즐거우시길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30    시험의 이미지를 클릭해본다 댓글:  조회:2053  추천:5  2013-07-10
    국어사전에는 시험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했다.    "재능, 실력, 신앙 등을 실지로 경험하여 봄"    하지만 요즘의 시험은 그 의미를 너무 벗어나 나름대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필자는 소학교의 교원이니 소학교의 시험에 대하여 피력하련다. 응당은 시험이라면 준비된 사람들이 자신의 기능을 능력껏 발휘하는 좋은 겨룸의 장으로 다가서야 하는데 요즘의 시험은 정말 말이 아니다는 생각이 가슴을 칠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어찌보면 요즘의 시험은 너무 헐망하다는 느낌이다. 애들의 기능을 알아보는 좋은 만남이 아니라 애들을 골탕먹이는 일종의 장난이 아닌가 싶다. 특히 소학생들은 이제 금방 어느 정도 인식의 대문을 열가하고 망설이는데 만남이 너무 두려워서 애들은 겁을 먹고 있다. 그러니깐 시험문제를 설계하는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겠다.  솔직하게 말하면 복습을 잘하고 시험은 애들이 복습한 상황을 료해하고 거기에 비춰 출제를 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고 어딘가 애들의 마음을 우롱하려는 일종의 목적도 슴배여있다는 생각이다. 그럼 구경 시험이란 어떤 존재로 다가서야 하는가?  애들은 한학기동안 정말 공부를 하느라고 고생을 엄청 한다. 하지만 종당에는 한장의 시험지로 모든것을 가늠하는 존재로 다가서는데 시험이 너무 애들을 힘들게 한다면 거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바라는걸가?      고생끝에는 응당 락이 물씬거려야 하건만 현실은 그게 아니고 두려움과 걱정이니 정말 안타깝기만 하다. 시험이란 진정 애들의 기능을 알아보는 일종의 수단으로 다가서야 하는데 요즘의 시험은 기능을 알아보는것이아니라 애들의 어떤 구석을 찾아보려고 애쓰는 경향이 너무 크게 다가서고 있다. 그리고 시험은 응당 교재를 기본으로 하면서 어느 정도 좀 연구를 거쳐 애들의 실정을 헤아리면서 만들어져야 하는데 생각보다 훨씬 다른것이 좀 이상하다. 필자의 생각에는 시제라면 응당은 백점을 공제하고 락제를 돌보는 현실을 감안해야만 최고의 효력을 보아낸다고 생각한다. 확실한 견해인지는 몰라도 그래도 비교적 과학적이라고 고집하련다.  특히 소학생들의 시제는 애들의 심리를 바르게 료해하고 그 심리특점에 맞게 시제를 만들어야 한다. 어디서 엉뚱하게 만들어놓고 제딴에서 만족하는 그런 모습은 정말 꼴볼견이다.  이제 우리애들의 시제가 탈바꿈을 하여야 한다. 두려움의 탈을 버리고 애들이 신심을 가지고 필을 들수있는 그런 시제로 탈바꿈을 하여야 한다. 어느 옛날의 교재를 보면서 시제를 내는 그런 헐망한 모습도 이젠 사라져야하고 출제하는 각도에서 반드시 그 누구보다 교재에 대하여 손금보듯하는 그런 존재라야 그 가능성이 크고 가치가 큰것이 아닐가?! 더우기 우리 조선족은 결손자녀가 어느 민족보다 우세를 차지하는 현실인데 힘든 로인님들의 고생에도 어느 정도 빛이 다가서면 보기좋은것이 아닐가? 그렇다해서 시험을 너무 쉽게 만들라는 말은 아니다. 반드시 좀 연구를 하고 과학적으로 시제를 만들어라는 권고뿐이다.   애들의 여린 심령을 건드리는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님을 명기하라!
29    친구여, 꽃잎을 즈려밟고 가시라! 댓글:  조회:1951  추천:3  2013-06-15
   친구가 병으로 갑자기 돌아갔다는 비보의 소식을 접하고 나는 그만 그자리에 무너지고 말았다. 여직 살아오면서 이처럼 청천벽력의 소식을 접하기는 처음이다. 아픔이 그토록 사품치며 흘러보기도 처음이다. 나는 떨리는 가슴을 붙안고 부랴부랴 차를 잡아탔다. 차가 달리는 동안 쉴새없이 흐르는 눈물을 감출길 없었다. 전날 아침까지 전화통화를 한 친구가 이렇게 갑자기 돌아갔다는 자체가 좀처럼 믿어지질 않았다. 늘 인자하고 명랑하던 친구가 이렇게 총망히 가실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이다. 갈기갈기 찢기는듯한 마음을 달래면서 친구가 모질게 그리워났다. 한번 가면 돌아오질 못할 그 길을 택한 친구가 너무도 무정하다는 생각도 마음을 붙잡고 놓지를 않았다. 전혀 믿겨지지 않는 현실앞에서 나는 몇번이고 친구의 이름을 되뇌였다. 기어이 친구의 령구를 보고서야 정말 돌아가셨음을 확인하려는 고집이 그냥 마음을 붙잡고 아픔을 놓아주지 않았다.    진정 마음과 마음으로 인생을 풀어온 그런 가까운 친구이다. 언제 한번 얼굴을 붉힌적도 없이 그냥 그렇게 편하게 지내온 너무도 소중한 친구이다. 늘 서로를 관심하고 아끼면서 살아온 너무도 소중한 친구이다. 문학에 남다른 흥취를 가지고 있는 친구는 진정 손색이 없는 문인으로 당당하게 살아왔다. 문학에 남다른 천부적인 재주를 갖고있는 너무도 아까운 친구이다. 주옥같은 시들을 륙속 세상에 내놓으면서 조선족문단의 드높은 인정과 자랑 나아가서 민족의 긍지로 다가서기까지 하였다. 빈틈없이 깔끔하게 씌여진 수필들을 읽으면서 수많은 인생의 도리를 깨치게 되였고 친구의 깨끗한 마음의 세계를 편안하게 들여다볼수가 있어서 너무도 자랑스럽던 친구이다. 한편의 글을 완성하면 꼭꼭 나한테 보내와서 함께 즐기던 친구를 잃었다는 그 아픔만으로도 시간은 얼마나 흘려야 할지 생각은 캄캄하기만하다. 언제보나 조용하고 인자한 그런 너그러운 모습으로 자신의 일상을 충실하게 가꿔가던 자랑찬 친구이다. 흑룡강성 어학회에서 조직한 우리 말과 글에 대한 론문이 대상을 수여받았고 수상하는 그 자리에서 상금 3000원에서 1000원을 어학회에 내놓으면서 성의를 내비치던 그런 남자같은 친구이다. 이제 이런 친구를 더 찾을수가 있을지 가슴은 모질게 아파만 온다. 비여가는 친구의 그 자리엔 아픔만이 꼬올독이 들어선다. 남들과 언제 한번 싫은 소리 한마디 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그처럼 알뜰하게 가꿔가던 친구이다. 그래서 아픔은 더 크게 다가서는지도 모른다. 정말 친구에겐 아까운것이 너무도 많다. 40대라는 너무도 안타까운 나이, 문학에 남다른 천부적인 재주, 인간관계에 대한 해맑은 처사,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심, 친구들에 대한 다함없는 아낌과 사랑 그리고 믿음, 자식에 대한 뼈절인 사랑…  친구를 보내고나니 더 많은 아픔과 후회가 끊기질 않는다. 이렇게 당돌하게 가실줄을 알았더라면 생전에 좀이라도 더 관심하고 편하게 대해주질 못한것이 가슴에 걸려온다. 가끔은 수업시간에 전화가 걸려오면 아무런 주저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린 그 행위에 오늘은 아픔들이 후회의 깃을 물고 놓아주질 않는다…  정말 그립다, 친구야! 그리고 너무너무 미안하다! 못다한 그 정성 래세에 다시 만나 갚아드리련다. 힘들었던 모든 부담들을 깡그리 털어버리고 그쪽에서 보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그리고 하고 싶던 일들을 더욱 빛나게 해나가길 진심으로 기대한다.  하늘 아래 둘도 없는 자랑스러운 친구야, 가시는 길에 꽃잎을 즈려밟고 가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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