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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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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수필 ) 한복나라에서 치포우를 입다 (박연희) 댓글:  조회:144  추천:0  2022-06-26
​베이징동계올림픽 개막식 한복논란으로 한국은 시끌벅적했다. 나도 잠시 한복을 입었던 그때를 떠올려 보았다.     출근복장   한복은 연변조선족여성들의 일상복이자 혼례복이었고 행사복이었다. 연변의 한복은 처음에는 조선화 경향이 뚜렷했고 중한수교이후로는 점차 한국화로 변했다. 밭일을 하면서도 흰 한복만을 고집했던 나의 할머니, 평소 늘 한복을 입던 나의 어머니,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나도 한복을 즐겨 입었다.    1980년대의 한복은 꽃무늬 망사원단으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다보니 치마가 늘어져 바람이 불면 자전거바퀴에 감겨들기도 했다. 한손으로 한복을 휘감아 쥐고 다른 한손으로 핸들을 움직이면서도 비가 오나 눈이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늘 한복을 입고 직장으로 출근하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여성의 명절    특히 3.8여성의 날에는 여성들이 각자의 색다른 한복으로 예쁨을 자랑하기가 바빴다. 연변여성들에게 여성명절은 하루가 아닌 한 달 내내 명절이었다. 동료와 친구 그리고 동창들이 하루가 멀다하게 먹고 마시고 노래방으로 전전하다보니 미처 한복을 씻었지만 말리지 못할 때도 있었다.  일반 복장으로 모임에 나가는 날은 누군가에게 밀리는 느낌이 들면서 하루 종일 기분이 찜찜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기념일   매년 9월 3일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일로서 연변의 최대의 명절이다. 그날이면 해마다 연길인민경기장에서 기념행사를 진행했다. 경기장으로 행하는 길은 한복을 입은 사람들로 붐비었는데 남성들과 애들도 한복을 입고  행사장으로 간다. 학교나 가두(주민센터)에서 준비한 자기들의 프로그램들을 선보이는데 개막식 검열의식, 농악을 울리며 춤판을 벌리는 농악대, 도라지 노래에 맞춘 대형 집단무용, 각종 민속경기와 다채로운 민속놀이(축구, 태권도, 씨름, 널뛰기 등)가 있었다. 널뛰기를 하는 여성들도 하나같이 한복을 질끈 묶고 힘차게 널을 움직인다. 씨름에서 1등을 한 선수는 한복으로 갈아입고 상으로 탄 황소를 끌고 경기장을 한 바퀴 돌아다닌다.    소개팅을 위해 주고받는 여성들의 사진도 대부분 한복을 단정하게 입고 찍은 사진이다. 이렇게 한복은 우리의 일상이었다.    길림성 소재지 장춘에서    1993년도 장춘으로 며칠간 출장을 간적이 있었다. 첫날 호텔에서 자고 일어나니 한방에 투숙했던 한족여성이 옷장에 걸려있는 나의 한복을 가리키며 중국어로 물었다. ‘언니 이 원피스를 어디에서 샀어요? 너무 예뻐서 나도 사고 싶은데.’ 내가 원피스가 아니라 한복이라고 했더니 장춘에 파는 곳이 있으면 자기도 한 벌 사고 싶다고 했다. 장춘에서 3일간 회의를 하고 2일간 유람을 하는 동안 나는 매일같이 한복을 갈아입었다.  여러 도시에서 온 회의 참석자 20여명의 눈길은 나한테서 떨어질 줄 몰랐고 여성들은 앞다투어 나와 사진을 찍었다. 한복이 나를 스타 아닌 스타로 만들어주었다.    잊혀 지지 않는 사진      1997년도 직장상사의 딸이 한국에서 한복을 사 입고 왔는데 연변에서는 보지도 못했던 세련된 한복이었다. 색상도 화사하고 멋있는 자수가 새겨져 있고 치마가 살짝 부풀러져 있어 내 마음을 단번에 끌어당겼다. 인민폐로 1800원이라 살 수는 없고 그 한복을 입고 사진 한 장을 남기는 것이 소원이었다. 나는 술을 즐기는 상사를 불러내 같이 술을 마시고 한복을 빌려서 사진 한 장을 기어이 남기고 말았다. 지금도 그 사진을 보면  첫사랑을 보는 것처럼 마음이 흐뭇해진다.    후회   나의 시어머니는 조교(조선)출신이다. 그래서 그 당시 전통적인 벨벳이나 레이스로 만든 구닥다리 한복만 있다보니 한국식 한복이 없어 늘 부러워했다. 그 말을 흘려듣기만 했는데 갑자기 시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날줄이야. 화장터로 가는데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나라로 가는 길에나마 시어머니한테 한복 한 벌을 해드렸을걸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어쩔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단체복장   차츰 연변에도 한복을 입는 사람들이 줄기 시작했다. 2008년에 내가 다니던 연길시 텔레비죤방송국에서는 직장에서 돈을 내고 생활한복을 단체복장으로 제공했다. 한복을 좋아하는 나에게 명분이 생겼으니 신나게 한복을 입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되지 않아서 한복 치마가 왠지 모르게 불편함을 느꼈다. 다른 사람들은 느끼지 못했지만 평소에 한복을 늘 입었던 나는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연변에는 한복집도 많았고 장사도 잘되었다. 나는 평소에 알고 지내던 한 한복상인을 찾아갔는데 한복치마를 수선할 수는 없지만 새 한복치마를 선물로 주었다. 그 덕에 한국으로 나오기 전까지 사람들을 만나 취재를 하고 시골까지 찾아가서 TV영상을 찍고 다시 직장으로 돌아와서 편집하는 동안 한복이 늘 함께 했었다.    캐리어에 넣고 온 유일한 옷   2010년 말 한국을 오면서 유일하게 캐리어에 넣고 온 것은 한복이었다. 마침 문인들의 모임에 초대되었는데 나는 ‘제가 한복을 입고 가도 될까요?’ 라고 물었더니 깜짝 놀라면서 거부했다. 행사장에 도착해보니 분명 한국인들인데 한복 입은 사람은 눈 씻고 봐도 없었다. 결혼식장에도 결혼 당사자와 그의 부모, 친척 외에는 하객들은 별로 한복을 입지 않았다. 한국의 드라마에는 늘 한복을 입은 모습이었는데 웬일일까? 내가 상상했던 한국은 한복천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동안 중국에서 살던 조선족들이 더 많은 시간동안 한복을 입었고 민족의 문화유산을 이어가고 있었다. 중국에서 나는 조선말 방송을 십 여 년을 해왔고 몇 십년동안 조선글로 작품을 써왔다.    소수민족 복장   한국에서 한복을 입을 기회가 없어서 소침해있는데 다른 한 충격이 찾아왔다. 세계인의 날 행사에 글로벌센터의 직원들인 각 나라의 상담사들이 자기나라의 복장을 입고 참석하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한복을 입는 줄 알았는데 팀장은 웃으면서 치포우를 입으라고 했다. 중국에서 한 번도 입어본적 없고 치포우도 없다고 했더니 팀장이 머리를 흔들었다. 중국에서는 55개의 소수민족들이 저마다 자기의 복장을 입다보니 조선족이 한복을 입는 것은 자신의 소수민족복장이기 때문이다. 한복나라에 왔는데 한복이 아닌 치포우를 입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치포우를 입다   직장에서 중국담당으로 일하는 한편 이주민강사, 상호이해교육 강사, 사회통합프로그램 이주민 멘토로 강의를 나가면 내가 하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중국문화나 중국동포에 대한 이야기다 보니 자연스레 중국의 치포우를 입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향에 갔을 때 나는 세벌의 치포우를 사가지고 왔다. 중국에서 한복차림의 사진이 많았지만 한국에서는 치포우 차림의 사진이 더 많아졌다.    차가운 시선들     재한이주민들의 한 포럼에서 북경에서 온 한복차림의 한 조선족여성을 만났다. ‘쌤은 왜 한복이 아니고 치포우인가요?’ 대놓고 싫은 감정을 드러내는 그녀한테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한복을 입었던 날들이 거의 30년이고 치포우를 입은 건 고작 10번도 안되는데 이런 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시선은 차갑기만 했다. ‘조선족들이 아무리 한민족이고 같은 핏줄이라고 우기면 뭐해요? 저길 봐요. 맨날 치포우를 입는데.’ ‘한국에 와서 치포우를 입고 길거리를 활보하면서 도대체 뭐 하자는 건가요?’    굳이 치포우를 입어야 하는 이유    강의가 있을 때마다 나는 될수록 치포우를 입고 나간다. 강의가 시작되면 중국에서 내가 늘 치포우를 입었을 것 같냐고 물으면 대부분이 그렇다고 한다. 그러면 나는 내가 중국에서 입어본적이 한 번도 없고 한국에 와서 입기 시작했다고 답한다. 뒤이어 중국에서 한복 입은 사진을 펼쳐 보이면서 중국동포들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내가 치포우를 입는 것은 중국인이라고 티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중국국적이면서도 한민족이라는 중국동포의 정체성을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강의를 마무리 한다.     마무리   중국동포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좋지 않은 한국에서 나의 치포우 차림은 종종 과녁이 되기도 한다. 화살이 과녁에 쏟아질 때마다 속상하고 힘들지만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중국동포를 포함한 이주민의 삶을 피력하면서 한국인과 재한이주민들과의 소통과 화합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2    [사는 이야기] 부자집 종노릇도 할 만하다 (박연희) 댓글:  조회:269  추천:0  2017-02-26
서울의 한 부자 집 가정부로 취직을 한지도 반년이 지났다. 100평의 주택에 화장실 3개 거실 4개에 객실과 주방은 거실의 두 배나 된다. 50대의 부부와 자녀 셋에 시부모와 증조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주인집은 하루 빨래만 세탁기에 3,4차 돌려야 하고 빨래를 정리하고 다림질 하는 시간도 거의 한 시간 반이나 걸린다. 결벽증이 있는 주인마누라는 베개커버는 일주일에 한번, 이불커버는 두주에 한번, 이불은 날씨만 좋으면 옥상에 널어놓고 문지 털기를 반복해라 했고 지어 침대커버는 매일같이 테이프로 먼지를 묻혀내기를 원했다. 퇴근시간 5분을 앞두고 옷 한 벌을 내밀면서 다림질 해달라, 슬리퍼를 씻어라, 고구마를 쪄달라, 옷 정리를 해달라, 여하튼 제시간에 퇴근 시키려 하지 않고 퇴근시간이 돼도 퇴근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자기 수요에 따라 퇴근시간이 30분이나 연장이 돼도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당연한 듯 일을 시켰다.          과일주스 내리는 기계, 빵 굽는 기계, 커피 내리는 기계 등이 내가 처음 접해보는 일이라 서툴고 벅찼다. 애들의 과외선생들은 줄을 쳐서 들어오는데 그들한테 각자의 요구에 따라 커피, 음료수, 생수를 가져다 주었고 선생 한 분이 나가면 청소를 하고 그 다음선생을 맞을 준비를 해야 했다. 수업시간이 오랜 과외선생한테는 간식까지 챙겨주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식당 일보다 몸을 아낄 수 있고 힘이 덜 든다고 가정부를 선택했는데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어려운 건 나의 식사였다. 약속대로 하루에 한번 식사를 해결해 주긴 하는데 아주 거지 취급이었다. 애들이나 어른들이 먹다 남긴 빵 조각, 전날에 먹다 남은 반찬 혹은 짜거나 맛없게 만들어졌거나 자기네들이 먹기 싫어하는 음식들을 나한테 준다. 한심한 것은 그런 음식들을 주면 당연 거절해야 하는데 배고픈 놈 언 똥 가리지 않듯이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 버리는 나였다. 원래부터 식탐인 나에게 이는 큰 곤혹이었다.   내가 도시락을 사가지고 다니겠다고 하면 돈이라도 보태줄 가 싶었는데 주인마누라는 아주 담담한 태도로 편한 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자 주인집마누라는 밝은 얼굴로 나를 대했다. 한달 전기비용만 해도 50만, 가스요금은 거의 100만인데 가정부 한끼 음식을 남겼다고 저렇게 까지 좋아할 가 하는 생각이 들어 열불이 나기도 했다.    우유가 떨어져도, 계란이 없어져도, 빵이 적어져도 주인집마누라는 내가 먹었다고 의심하면서 나한테 대놓고 묻지를 못하고 대신 애들한테 누가 먹었는지를 추궁하기도 했다. 우유는 장이 나빠서 생으로 먹으면 설사한다고. 계란은 너무 먹어서 질려서 먹지 않는다고, 빵은 식빵이 아니고 바리바게트 빵만 먹는다고 구구절절 설명해주고 때로는 어쩌다 비싼 빵이 생기면 먹지 않고 두었다가 이튿날 주인집에 가서 보라는 듯이 먹으면서 쇼를 해서야 겨우 도둑년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래도 가정부 일이 나한테 이득이 되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가 모임이 있을 때 사전에 주인한테 이야기 하면 휴무를 그날로 정할 수 있었고 다른 하나는 부자 집 떡고물을 주어 먹는 재미였다. 명절 때는 물론 평소에도 선물이 얼마나 많이 들어오는지 미처 처리할 시간이 모자랐다. 주인집에 늘 오시는 택배아저씨까지 내 얼굴을 익힐 정도였으니 말이다. 명품 지갑도 한 박스 거의 50개가 배달됐고 스카프도 20,30개, 음식과 과일은 하루 건너 배달이 왔다. 미처 먹지를 못해서 여러 개의 냉장고에 나누어 넣을 때면 원래 있던 음식들을 처리한다. 그러면 내 웃음주머니가 흔들거린다. 그것은 냉장고에 있던 것을 버리라고 하면 내가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먹어보지도, 보지도 못했던 생선과 과일을 한아름씩 집에 가지고 와서 쥐 소금 녹이든 하나씩 꺼내 먹을 때 마다 주인집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조금씩 줄여 가기도 한다. 그 외에도 브랜드 옷이나 신 기타 생활용품들을 버리는 것을 가져다 써도 나는 충분히 입을 수 있고 쓸 수 있는 것 이여서 나한테는 이득이 아닐 수 없다.   선물로 들어온 과일상자를 뜯으면 주인집마누라는 이미 맛이 가기 시작했거나 못생긴 과일을 골라서 나한테 선심 쓰듯 준다. 그 속의 알맹이만 골라 먹어도 내 돈을 남길 수 있기에 속으로는 욕하면서도 감사하다는 말을 연발하는 자신을 보면 안쓰러운 생각도 든다.   특히 생선을 좋아하는 나의 룸메이트는 내가 먹을걸 들고 집에 들고 갈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네가 나를 위해서라도 그 부자 집에서 쭉 일해야겠다. 이거 꿩 먹고 알 먹기 아니니? 조금만 참으면 되는데 " 두 달이 지나니 주인집 남자가 식사를 했는지를 묻기도 하고 시아버지는 고향이 어디냐고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때로는 제정신으로 돌아온 증조할머니가 남몰래 호주머니에 만원자리를 넣어줄 때면 얼었던 마음이 녹기 시작한다. 똥을 묻힌 팬티를 내놓기도 하고 너무 많이 먹어서 화장실을 초토화 시킬 때도 있고 쉴새 없이 지팡이를 두드리며 집을 헤집고 다녀 정신을 빼앗아 가기도 하고 5분에 한번씩 물컵을 내놓아 밉상이기도 했지만 고향에 두고 온 비슷한 처지의 친정엄마 생각에 증조할머니한테 정성스레 음식상을 차려주기도 한다.    하루는 7살나는 여자애가 나한테 물었다. '청소하는 할머니는 왜 우리와 같이 밥을 안 먹어요?' 예상치 않았던 물음에 당황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해줄 수 밖에 없었다. "너는 공부가 위주이고 나는 청소가 위주니깐 설거지 끝나고 먹어야지."  우연하게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다가 같은 빌딩에 있는 가정부와 마주쳤다. 서로 주인집 흉을 봤는데 그 집에서도 그녀한테 반찬은 꼭 전날에 먹다 남은걸 준다고 했고 그 집은 온종일 식구 넷이 집에 틀고 있어 하루 종일 허리를 펼 시간도 없다는 것이었다. 자기보다 낫다고 나를 부러워하는 그 언니를 보면서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매일 같이 맥주를 찾느라 냉장고를 이 잡듯 하는 증조할머니가 어느 날 우리 둘만 남았을 때 이런 애기를 했다. 원래 이 집에서 몇 년간 일했던 가정부가 있었는데 물건을 집으로 자주 가져가는 바람에 쫓겨났다는 것 이였다. 그 말을 듣고 내가 그 동안 의심 받은 것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가정부 일을 하면서부터 점점 변하는 나를 발견했다. 빨래를 묵혀 두지 않고 제때에 세탁하고 설거지를 할 것이 한 개만 있어도 안절부절 못하고 커피 한잔을 마셔도 컵 받침대를 찾고 과일을 먹어도 포크가 있어야 하고 반찬도 그릇에 예쁘게 담아 먹으려 하고 주방에 두 번씩 나갔다 오더라도 밥을 작은 공기에 담아 먹으려 한다. 거기에다가 집에서 까지 쓰레기 분리수거를 철저하게 하는 나를 보고 룸메이트가 이런 표현을 했다.  "부자도 아닌 것이 우아한 척 하기는. 내사 눈이 시려서 못 봐주겠다. " 인생은 새옹지마라 했다. 소 뒷걸음 치듯이 싫은 발길을 돌려 주인집으로 갈 때 마다 나 자신을 위안한다. 이 집이 아니면 네가 어디에 가서 하루에 7만원이란 돈을 벌 수 있겠니? 식당에서 12시간 힘들게 일하기 보다 이 집에서 하루 8시간 일하면서 쉬고 싶을 때 쉴 수도 있고 때로는 부자 집 떡고물도 주어 먹을 수 있는데 이 일을 포기하면 내가 바보지. 부자 집 종 노릇도 이만하면 할만 한 것 아닌가. 동북아신문 2017.02.25
1    나를 찾아 떠나는 려행 댓글:  조회:942  추천:0  2013-05-16
 나를 찾아 떠나는 려행 박연희 나는 살아오면서 줄곧 이런 의문이 있었다. 나는 부모에 대해 의무적으로 혹은 남의 눈을 의식해 효도했을 뿐 왜 가슴으로부터 우러러 나오는 효도를 하지 못하는걸까? 그 답안을 나는 요지음에야 비로서 찾게 됐다. 우연한기회에 대한에니어그램영성학회에서 조직한 제44기 에니어그램 영성수련에 참가하여 한양대학교 김영운박사님의 에니어그램에 대한 강의를 듣고서 표면에 드러난 내가 아닌 내면의 내자신을 발견하였고 그속에서 답안도 함께 찾게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집에는 자녀가 오형제인데다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둘 모두 11명이란 대가족이 엉켜살았다. 부모가 둘다 출근족이다보니 우리형제는 늘 저녁을 먹지 못하고 부모가 퇴근하기전에 여기저기 너부러져 잠들었었다. 그중에서 내 여동생은 간질병으로 하루에도 수십번씩 발작을 일으키군 했는데 부모의 관심사는 이런 녀동생한테만 가있었다. 그런데다 셋째로 태여난 나는 늘 언니들이 물려주는 옷과 가방을 사용해야만 했다. 고중을 졸업하는 해에 언니의 친구로부터 옷감 하나를 선물로 받았는데 그때 나는 감동되여 펑펑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할아버지는 11년동안이나 뇌졸증으로 집안에서 대소변을 봤는데 그래서 늘 머리맡에 변기를 놓고 살았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부모는 생활을 영위해가는게 우선이였다. 그렇다고 앓는 여동생외에 다른 형제들을 특별히 사랑해준것도 아닌데 왜 나만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것일까? 그것은 내가 가슴으로 느끼는 성격이 아니라 머리로 느끼는 성격형 즉 다시 말하면 리지적인 성격이기 때문이라는것을 이번 에니어그램 영성수련을 통해서 비로서 알게 되였다. 나는 내 자신이 오래동안 풀지 못했던 수수께끼를 풀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자주 들었지만 정작 어떻게 해야 자신을 알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가르침을 받지 못했다. 인생을 사는 주체는 나요, 내가 이 세상에서 사는것이 분명하지만 내가 나 자신을 잘 모르고 있을 뿐만아니라 내 주변의 세상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는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건강하고 행복하고 자유로운 삶을 꿈꾸어 왔다. 자기 자신을 모르면 행복을 원하면서도 실제로는 불행을 자초하거나 누리고있었던 행복마저 쫓아 버리는 일이 생기게 된다. 그리하여 더 많은 인간들이 불행한 삶을 살게 되고 지구촌에서는 축제의 노랫소리보다 고통의 신음소리가 더 높아지고있다. 이런 우리들에게 에니어그램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성격을 아홉가지로 나누는 과정을 통해 나와 세상에 대한 리해에 밝은 빛을 던져주는 정교한 심리학 체계이다. 많은 사람들이 에니어그램을 통해서 자기발견과 자기이해의 눈을 떴고 살아가는 도리와 인생을 경영하는 방법과 수완을 익히고있다. 중국에 있을 때 나는 두번 에니어그램을 접하게 되었고 이번에 한국에 와서 세번째로 영성수련에 참가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모르는 나를 찾는길이 생각처럼 즐겁지만은 않았다. 내자신이 가지고 있는 단점들이 숨김없이 백일하에 드러날 때 나는 길거리에 벌거벗고 서있는것 같아 쥐구멍이라도 찾아들어가고 싶었고 때로는 내자신의 격정에 경악하기도 했다. 이번 에니어그램을 통해 나는 내면의 진정항 내가 누구인지를 찾게 되였다. 내가 아는 나는 일처리에서 아주 쿨했다. 근데 결국 나는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가지 않는 류형의 성격이였다. 나는 내가 누구나 포용할수 있는 너그러운 인간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린색한것이 단점이라니 듣기 싫어도 승인하고 싫어도 받아들여야 할점이였다. 나는 내가 사교적인줄 알았는데 내주변의 사람들을 거부함으로써 나 스스로 고립시켜 왔다는걸 이제서야 깨닫게 됐다. 하루 열두시간 혼자 일하면서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상황임에도 휴무날 사람들과 만나는것보다 홀로 컴퓨터에 마주앉아 있거나 책을 보거나 글을 쓰는것이 더 즐거운 내가 결국은 현실을 도피하고 있기 때문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표면의 내자신의 모습을 가면인줄 모르고 자기의 진 모습인양 착각하고 부정적인 감정이나 생각의 에너지에 떠밀려 살아왔다는걸 깨닫게 됐다. 자기 자신을 찾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깨여나 있지만 잠자는것과 같다. 자기가 자기를 모르는 어두운 인생은 늪지를 건는것처럼 진척이 더디고 힘에 겨울수밖에 없다. 밝은 인생을 구가하려면 어서 잠에서 깨어나야 하며 내가 먼저 깨어나 내 인생을 밝히고 내 존재의 빛으로 내 주변을 밝힐수 있다. 내 자신을 찾는 려행--- 나는 멈추지 않을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타인에 대한 리해의 폭과 깊이를 신장시켜 더 멋지고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맺게 해주고 주변이들 도 그들 자신을 성찰하도록 계기를 마련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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