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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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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 한복나라에서 치포우를 입다 (박연희)
2022년 06월 26일 20시 20분  조회:145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베이징동계올림픽 개막식 한복논란으로 한국은 시끌벅적했다. 나도 잠시 한복을 입었던 그때를 떠올려 보았다.  
 
출근복장
 
한복은 연변조선족여성들의 일상복이자 혼례복이었고 행사복이었다. 연변의 한복은 처음에는 조선화 경향이 뚜렷했고 중한수교이후로는 점차 한국화로 변했다. 밭일을 하면서도 흰 한복만을 고집했던 나의 할머니, 평소 늘 한복을 입던 나의 어머니,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나도 한복을 즐겨 입었다. 
 
1980년대의 한복은 꽃무늬 망사원단으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다보니 치마가 늘어져 바람이 불면 자전거바퀴에 감겨들기도 했다. 한손으로 한복을 휘감아 쥐고 다른 한손으로 핸들을 움직이면서도 비가 오나 눈이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늘 한복을 입고 직장으로 출근하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여성의 명절 
 
특히 3.8여성의 날에는 여성들이 각자의 색다른 한복으로 예쁨을 자랑하기가 바빴다. 연변여성들에게 여성명절은 하루가 아닌 한 달 내내 명절이었다. 동료와 친구 그리고 동창들이 하루가 멀다하게 먹고 마시고 노래방으로 전전하다보니 미처 한복을 씻었지만 말리지 못할 때도 있었다.  일반 복장으로 모임에 나가는 날은 누군가에게 밀리는 느낌이 들면서 하루 종일 기분이 찜찜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기념일
 
매년 9월 3일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일로서 연변의 최대의 명절이다. 그날이면 해마다 연길인민경기장에서 기념행사를 진행했다. 경기장으로 행하는 길은 한복을 입은 사람들로 붐비었는데 남성들과 애들도 한복을 입고  행사장으로 간다. 학교나 가두(주민센터)에서 준비한 자기들의 프로그램들을 선보이는데 개막식 검열의식, 농악을 울리며 춤판을 벌리는 농악대, 도라지 노래에 맞춘 대형 집단무용, 각종 민속경기와 다채로운 민속놀이(축구, 태권도, 씨름, 널뛰기 등)가 있었다. 널뛰기를 하는 여성들도 하나같이 한복을 질끈 묶고 힘차게 널을 움직인다. 씨름에서 1등을 한 선수는 한복으로 갈아입고 상으로 탄 황소를 끌고 경기장을 한 바퀴 돌아다닌다. 
 
소개팅을 위해 주고받는 여성들의 사진도 대부분 한복을 단정하게 입고 찍은 사진이다. 이렇게 한복은 우리의 일상이었다. 
 
길림성 소재지 장춘에서 
 
1993년도 장춘으로 며칠간 출장을 간적이 있었다. 첫날 호텔에서 자고 일어나니 한방에 투숙했던 한족여성이 옷장에 걸려있는 나의 한복을 가리키며 중국어로 물었다. ‘언니 이 원피스를 어디에서 샀어요? 너무 예뻐서 나도 사고 싶은데.’ 내가 원피스가 아니라 한복이라고 했더니 장춘에 파는 곳이 있으면 자기도 한 벌 사고 싶다고 했다. 장춘에서 3일간 회의를 하고 2일간 유람을 하는 동안 나는 매일같이 한복을 갈아입었다.  여러 도시에서 온 회의 참석자 20여명의 눈길은 나한테서 떨어질 줄 몰랐고 여성들은 앞다투어 나와 사진을 찍었다. 한복이 나를 스타 아닌 스타로 만들어주었다. 
 
잊혀 지지 않는 사진   
 
1997년도 직장상사의 딸이 한국에서 한복을 사 입고 왔는데 연변에서는 보지도 못했던 세련된 한복이었다. 색상도 화사하고 멋있는 자수가 새겨져 있고 치마가 살짝 부풀러져 있어 내 마음을 단번에 끌어당겼다. 인민폐로 1800원이라 살 수는 없고 그 한복을 입고 사진 한 장을 남기는 것이 소원이었다. 나는 술을 즐기는 상사를 불러내 같이 술을 마시고 한복을 빌려서 사진 한 장을 기어이 남기고 말았다. 지금도 그 사진을 보면  첫사랑을 보는 것처럼 마음이 흐뭇해진다. 
 
후회
 
나의 시어머니는 조교(조선)출신이다. 그래서 그 당시 전통적인 벨벳이나 레이스로 만든 구닥다리 한복만 있다보니 한국식 한복이 없어 늘 부러워했다. 그 말을 흘려듣기만 했는데 갑자기 시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날줄이야. 화장터로 가는데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늘나라로 가는 길에나마 시어머니한테 한복 한 벌을 해드렸을걸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어쩔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단체복장
 
차츰 연변에도 한복을 입는 사람들이 줄기 시작했다. 2008년에 내가 다니던 연길시 텔레비죤방송국에서는 직장에서 돈을 내고 생활한복을 단체복장으로 제공했다. 한복을 좋아하는 나에게 명분이 생겼으니 신나게 한복을 입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되지 않아서 한복 치마가 왠지 모르게 불편함을 느꼈다. 다른 사람들은 느끼지 못했지만 평소에 한복을 늘 입었던 나는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연변에는 한복집도 많았고 장사도 잘되었다. 나는 평소에 알고 지내던 한 한복상인을 찾아갔는데 한복치마를 수선할 수는 없지만 새 한복치마를 선물로 주었다. 그 덕에 한국으로 나오기 전까지 사람들을 만나 취재를 하고 시골까지 찾아가서 TV영상을 찍고 다시 직장으로 돌아와서 편집하는 동안 한복이 늘 함께 했었다. 
 
캐리어에 넣고 온 유일한 옷
 
2010년 말 한국을 오면서 유일하게 캐리어에 넣고 온 것은 한복이었다. 마침 문인들의 모임에 초대되었는데 나는 ‘제가 한복을 입고 가도 될까요?’ 라고 물었더니 깜짝 놀라면서 거부했다. 행사장에 도착해보니 분명 한국인들인데 한복 입은 사람은 눈 씻고 봐도 없었다. 결혼식장에도 결혼 당사자와 그의 부모, 친척 외에는 하객들은 별로 한복을 입지 않았다. 한국의 드라마에는 늘 한복을 입은 모습이었는데 웬일일까? 내가 상상했던 한국은 한복천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동안 중국에서 살던 조선족들이 더 많은 시간동안 한복을 입었고 민족의 문화유산을 이어가고 있었다. 중국에서 나는 조선말 방송을 십 여 년을 해왔고 몇 십년동안 조선글로 작품을 써왔다. 
 
소수민족 복장
 
한국에서 한복을 입을 기회가 없어서 소침해있는데 다른 한 충격이 찾아왔다. 세계인의 날 행사에 글로벌센터의 직원들인 각 나라의 상담사들이 자기나라의 복장을 입고 참석하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한복을 입는 줄 알았는데 팀장은 웃으면서 치포우를 입으라고 했다. 중국에서 한 번도 입어본적 없고 치포우도 없다고 했더니 팀장이 머리를 흔들었다. 중국에서는 55개의 소수민족들이 저마다 자기의 복장을 입다보니 조선족이 한복을 입는 것은 자신의 소수민족복장이기 때문이다. 한복나라에 왔는데 한복이 아닌 치포우를 입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치포우를 입다
 
직장에서 중국담당으로 일하는 한편 이주민강사, 상호이해교육 강사, 사회통합프로그램 이주민 멘토로 강의를 나가면 내가 하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중국문화나 중국동포에 대한 이야기다 보니 자연스레 중국의 치포우를 입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향에 갔을 때 나는 세벌의 치포우를 사가지고 왔다. 중국에서 한복차림의 사진이 많았지만 한국에서는 치포우 차림의 사진이 더 많아졌다. 
 
차가운 시선들  
 
재한이주민들의 한 포럼에서 북경에서 온 한복차림의 한 조선족여성을 만났다. ‘쌤은 왜 한복이 아니고 치포우인가요?’ 대놓고 싫은 감정을 드러내는 그녀한테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한복을 입었던 날들이 거의 30년이고 치포우를 입은 건 고작 10번도 안되는데 이런 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시선은 차갑기만 했다. ‘조선족들이 아무리 한민족이고 같은 핏줄이라고 우기면 뭐해요? 저길 봐요. 맨날 치포우를 입는데.’ ‘한국에 와서 치포우를 입고 길거리를 활보하면서 도대체 뭐 하자는 건가요?’ 
 
굳이 치포우를 입어야 하는 이유 
 
강의가 있을 때마다 나는 될수록 치포우를 입고 나간다. 강의가 시작되면 중국에서 내가 늘 치포우를 입었을 것 같냐고 물으면 대부분이 그렇다고 한다. 그러면 나는 내가 중국에서 입어본적이 한 번도 없고 한국에 와서 입기 시작했다고 답한다. 뒤이어 중국에서 한복 입은 사진을 펼쳐 보이면서 중국동포들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내가 치포우를 입는 것은 중국인이라고 티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중국국적이면서도 한민족이라는 중국동포의 정체성을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강의를 마무리 한다.  
 
마무리
 
중국동포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좋지 않은 한국에서 나의 치포우 차림은 종종 과녁이 되기도 한다. 화살이 과녁에 쏟아질 때마다 속상하고 힘들지만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중국동포를 포함한 이주민의 삶을 피력하면서 한국인과 재한이주민들과의 소통과 화합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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