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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조선족을 선족이라고 불러도 됩니까?' 댓글:  조회:5118  추천:3  2016-11-02
일전에 중국정법대학 교원(校園)발전사무실 책임자인 김룡하씨한테서 이런 전화가 왔다.   “오선생님, 최근에 국내 조선말신문과 인터넷에서 ‘조선족’을 ‘선족’이라고 부르는 것에 나는 매우 유감럽습니다. 이에 나는 즉시에 관련 신문매체들에 문제를 반영하며 시비를 가릴려고하니 대방에서는 원인을 출처에 밀뿐 큰일로 생각지 않았습니다. 하긴 몽고족을 몽족, 위글족을 위족이라고 간칭을 할려니 조선족이 자기 민족을 ‘조족’이 아닌 ‘선족’이라고 간칭(?)하다니 말이 됩니까? ”   “우리가 자기의 민족을 지키지 않는다면 누가 지켜 줍니까?...나는 협애한 민족주의자는 아닙니다…”   안면이 없는 필자한테 신문사를 찾아서 전화번호를 알고 문제를 반영하려는 김룡하씨의 애족심에 머리가 숙여졌다.   그래서 “선족”이란 어원을 찾아 봤더니 “선족”이란 “아무것도 신지 않은 발”, 일정(日政)때 조선족을 멸시하여 일본사람들이 조선족을 “선족”이라 불렀다고 해석하였다.   연구테마가 “조선족의 다중언어(多言語)교육”인 재일 조선족연구학회 정형규회장(교수)이 조선족을 어떻게 불려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주고있다.   ㅡ 조선족은 자신의 신원과 존재의 의의를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조선족과 한인, 코리안은 전혀 다르다. 조선족이라는 언어는 중국에서 생긴 고유명사로서 중국국적을 가지고 조선민족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자들을 말한다. 조선족과 조선민족은 다르며 중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 사는 조선민족은 조선족이 아니다. 례하면 로씨야에서 사는 조선민족은 조선계 혹은 한국계 로씨야인이라고 불러야 한다. 조선족은 한인, 코리안이 아닌 조선족으로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   필자는 신문지상이나 사회상에서 조선족 언어문자의 람용과 외래어 란무(한국식이나 영어로 표기된 상호, 간판, 성씨, 이름)에 아주 반감한다. 프랑스인들의 “국어사랑법”을 곁들어 본다.   프랑스사람들은 국어 “방위”를 국가의 지상 의무로 여기고 있다.   1994년에 가결된 “프랑스 말 사용법안”에 따르면 프랑스인이 텔레비죤광고에서 “디스크 지키”라는 영어를 쓰면 최고로 6개월의 금고형(禁稿刑)을 받고 국제회의에서 “컴퓨터”라는 말을 쓰면 800만원의 벌금형을 받는다. (프랑스인들은 컴퓨터를 “오르디나툴”이라 하고 “디스크 지키”는 “아니마툴(활기를 불어넣는 사람)”이라고 바꾸었다.   프랑스 문화부장관은 이 법안을 설명하면서 “프랑스어는 늘 국가적 과제였다. 이대로 나간다면 우리는 프랑스어를 틀림없이 잃게 된다.”고 하였다.   프랑스의 총리도 “프랑스어의 수호는 프랑스의 미래를 믿는 행동”임을 강조했다.   “프랑스어의 옳바른 사용법” 책의 저자인 풍피두 수상은 일찍 1967년에 “국어정책은 정부의 단순한 부차적인 사업이 아닌, 공화국의 기본원칙, 곧 국가의 독립과 밀접히 련관되여있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영국의 사회비평가이며 사상가인 존 러스킨(1819.2.8 ㅡ 1900.1.20)의 말이다.   ㅡ 위대한 민족은 자기의 자서전을 세가지 원고로 쓴다. 한 권에는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가를 쓰고 다른 한 권에는 자기네 예술에 대해 쓰며 또 다른 한 권에는 자기네 언어에 대해 쓴다   언어는 살아있는 잔디와 같아 끊임없이 손질하고 잡초를 뽑아줘야 한다. 아니면 어느 사이에 벌레가 먹고 잡초만 무성해진다.   언어는 그 나라, 그 민족의 문화가 얼마나 건강한가를 알려주고 그 나라, 그 민족이 얼마나 문화를 아끼고 있는가를 알려준다.   조선족 언어문자사용의 규범화가 하루속히 기대된다. 길림신문 10월 31일자  
187    “조상들 은혜를 잊지 않으면 자손이 빛난다” 댓글:  조회:3879  추천:0  2016-10-26
일전에 재미로 1분간에 감동을 느끼는 도서ㅡ “1분간의 성격테스트(사람들의 학력, 지능, 능력을 알아보는 책)”을 보니까 원숭이 해인 올해 (丙申年)에 돼지띠는 상복을 입을 운이라고 하였다.   “1분간의 성격테스트”가 맞든 틀리든 관계없이 아무튼 돼지띠인 필자는 올해에 특별히도 상례식에 많이 다녀왔다.   그런데 상례식에 참고하고 나면 이런 의문들이 뒤따랐다.   (마지막으로 친인을 모시는 슬프고 엄숙한 상례인데 무엇때문에 상주들이 많은 돈을 퍼주면서 타민족의 도우미들을 대행시키는지? )   (왜서 상주가 친인의 유골을 하늘에 날리고나서 시름을 놓았다고 할가?)   (왜서 부모의 유품을 처리할 때 부모들의 자애로운 생활사진들까지 함께 태워버릴가?)   (왜서 부모의 시체가 아직 식지도 않았는데 자식형제들이 울퉁불퉁 다툴가?)   비록 전부는 아니지만 아무튼 이런 현상이 거의 과반수였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에게서 들어온 얘기로 우리 민족은 사자(死者)를 생자(生者)처럼 모시고 돌보는 민족으로서 옛날엔 부모가 돌아가면 탈상할 때까지 3년간 상청을 차려놓고 조석으로 밥을 차려올렸다…   집에 불이 나면 불에 갇힌 사람보다 신주를 먼저 보호하는것을 법도로 불에 타죽은 효자, 렬녀까지 있었다…   사계절 성묘(조상의 산소를 돌보는 상례)하는 민족으로 봄에는 청명, 여름에는 중원(7월 15일), 가을에는 추석, 겨울에는 동지에 성묘를 했다…   사자를 생자로 대하는것은 우리 민족의 상례풍속만이 아니다.   한국 《조선일보》 론설위원을 지낸 이규태씨의 얘기다.   일본 사람들은 사자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한다.   죽은 친구 집에 들렸더니 미망인은 불단(佛壇)에 차려놓은 위패상의 문을 열고 아무개가 수박을 사가지고 왔다고 산사람에게 올리는 말을 하였다. 언젠가 려객기 옆자리에 50대의 일본 녀인과 나란히 앉아 미국행을 하였다.   그녀는 하와이 려행을 위해 3년간을 준비한 남편이 우연한 교통사고로 죽어서 혼자서 간다며 돌아간 남편을 생각하며 울다가 려객기가 하와이상공에 이르니 핸드백속에서 남편의 위패를 꺼내 창문에 대고 “
186    지명은 땅에 새겨진 우리의 문화유산 댓글:  조회:4597  추천:0  2016-09-30
월전에 도문시 석현진 향양촌 달라자툰 책임자로부터 마을에서 석비를 세우려니 지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달라자(大磊子)는 필자의 출생지로 필자는 지금까지 고향의 경제문화건설에 등한치 않고있다.   필자는 고향에 석비를 세우는 일을 고향에 대한 력사적 책임으로 정중히 대하고 지명유래의 력사적문헌 근거로 1960년에 작성한 왕청현 석현진 수남대대 달라자호구부(大磊子戶口簿)와 1963년 신문에 발표된 기사 등 사료를 찾아서 구체적인 일을 책임적으로 추진하였다.   1960년에 책으로 묶은 “달라자호구부”에 따르면 달라자의 본명은 지금에 있는 석비의 대립자(大砬子)가 아닌 대뢰자(大磊子)였다.   왕청현 석현진 수남대대 “달라자호구부”의 표지는 한자로 “大磊子戶口簿”로 씌여있고, 1963년 12월《소년아동》신문에 실린“일을 찾아 하는 우리 마을 소녀들” 이란 기사에는 “왕청현 석현진 수남대대 대뢰자”로 밝혀있다.   그리고 달라자호구부(大磊子戶口簿)에 밝혀진 호주들의 적관을 보면 1887년생 리룡칠의 적관은 석현진 영창(石峴鎭 永昌), 1913년생 김종섭의 적관은 석현진 수남(石峴鎭 水南), 1919년생 량학송의 적관은 석현진 달라자(石峴鎭 大磊子)로 밝혀있다.   《신화자전》에 따르면 “磊”는 돌이 많다, 마음이 청백하다, 정정당당하다, 광명정대하다는 뜻으로 풀이했고 “砬”는 큰 돌바위라는 뜻이라고 풀이했다.   그런데 지난 세기 80년대에 해당 부문에서 달라자에 세운 석비는 당년에 아무런 사회조사나 지명개명 관련문건도 없이 “大磊子村”을“大砬子村(대립자촌)”이라고 개명했다.   이에 달라자촌의 원주민들은 “청백, 정당, 광명정대”를 뜻한 고향문화유산을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며 해당 부문의 처사에 불만을 표했고 2005년 8월 13일 “달라자촌 원주민 제2차 고향모임”에서 최정금할머니가 달라자의 현 원주민들이 “자기 마을의 이름을 지키지 못했다”며 시비까지 생겼다.   필자는 이런 력사적인 사료와 배경을 근거로 지난 8월 18일에 세운 석비를 달라자(大磊子)로 할것을 제의했고 비석도 세웠다.   그런데 일전에 달라자의 책임자가 “진민정부문에서 대립자촌(大砬子村)으로 석비를 세우라고 한다”며 필자한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자문해왔다.이에 필자는 책임을 본인이 감당하겠으니 시름을 놓으라고 대답하였다.   한 지역의 지명은 그 지역 선조들의 지혜, 풍속과 생활상이며 지명은 땅에 새겨진 그 지역의 문화유산이다.   한국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 주둥개산에는 “말(言)무덤”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이 지명의 유래는 이곳 마을에 주민들간에 말싸움이 너무도 많은데서“주둥개(주둥이의 사투리)”산을 막는다는 의미에서 “말무덤”을 만들었더니 그 후부터는 마을에서 입씨름이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 《연변일보》에서 련재로 내보내고있는 북경의 김호림선생이 쓴 “연변지명이야기”가 독자들의 인기를 끄는것도 바로 그곳 지명에 새겨있는 흥미진진한 고향문화때문일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리 고장의 지명은 우리 민족, 우리 말과 운명을 같이한 문화유산이다. 때문에 사회가 어떻게 발전하고 변한다고 해도 우리는 고향의 문화유산문헌에 남아있는 지명을 참답게 지키며 옛 지명 찾기와 옛 지명지도 제작에 노력을 기울여야 할것이다.   필자는 1981년 6월 27일에 중국공산당 제 11기 6중전회에서 채택한 “중국공산당 건국이래 약간의 력사적 문제에 관한 결의”에서 “문화혁명은 당과 인민에게 수많은 재난과 혼란을 준 내란”이라는 결론에 따라“내란”때 마구 개명했던 많은 지역의 지명도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고싶다.   “문화혁명”때 도문시 홍광향만 하더라도 고려촌(高麗村)을 흥진촌(興進村)으로,곡수촌(曲水村)을 홍위촌(紅爲村)으로, 신기동(神奇洞)을 홍신(紅新)으로, 남양(南陽)을 향양(向陽)으로, 상탄(上灘)을 일광(日光)으로, 집중(集中)을 농안(農安)으로…마구 개명했던 일도 있었으니 말이다. 길림신문 2016-9-23
185    “0 0좋은 사람”을 “0 0좋은 본보기”로 부르면 좋지 않을가? 댓글:  조회:4176  추천:1  2016-09-12
필자는 지금도 자신을 나라 법을 지키고 국민의무를 리행하며 사회질서를 준수하는 공민으로 자신한다. 그런데 근년에 종종 “나는 중간부류사람인가? 아니면 나쁜부류의 사람인가?”를 자문하게 된다. 원인은 이렇다. 최근 2, 3년간 필자는 도시의 공공장소나 신문지면에서 “좋은사람”(..好人), “좋은 사람협회(호인협회)”라는 프랑카트, 선전판, 신문기사를 보게 되였다. 도문기차역광장의 대형선전간판ㅡ“도문좋은사람 도시문명 새풍조를 이끌어 간다”가 일례다(사진제공). 알아 본데 따르면 한 개 지역에 “좋은 사람”의 수자가 “0 0 10대 호인”선발… 으로 지역주민의 총수에 비해 아주 소수적이였다. 무릇 사람이 사는 곳에는 세개 부류(상, 중, 하)의 사람이 있다. 즉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중간부류사람으로 분류하게 된다. 그러니까 0 0에 “좋은 사람”이 있으면 그에 비춰 기필코 “ 나쁜사람”, “중간사람”이 있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어디까지나 좋은 사람과 중간사람이 많고 나쁜 사람이 극히 적다. 그래서 동네가 사람이 살아가는 향기가 풍기고 사회가 발전하게 된다. 한개 지역에 응당 많은 “좋은 사람”들이 적은 수자로 불리는 것은 “좋은 사람”을 선정하는 관계부문의 인위적인 행위 때문이다. 그래서 한 개 지역의 “비(非)좋은” 사람들이 “그럼 나는 나쁜사람인가, 아니면 중간사람인가?” 는 반문을 하거나 불만을 갖는다. 지난 세기 60년대에 모주석께서 전국 인민들에게 “뢰봉을 따라 배우자”고 호소하니 전국민들은 “뢰봉동지의 좋은 본보기를 따라 배우자”(學習雷鋒好榜方樣)며 “혁명에 충성하고 당에 충성하며 애증이 분명하고 립장이 견정한, 전심전의로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는 뢰봉동지의 “좋은 본보기”를 노래로 부르며 따라 배웠다. 그래서 필자는 이제부터라도 “0 0 좋은 사람(호인)”을 “0 0좋은 본보기”로 개칭하자는 바람이다.  
184    참된 인생살이의 지혜를 담은 감동의 편지 댓글:  조회:4047  추천:0  2016-08-22
최근 필자는 필자의 졸작을 읽어주는 독자와 출판물로 맺어진 문우들로 하여 삶의 보람을 느낀다. 전자는 필자의 삶에 힘을 보탬해 주고 후자는 필자의 삶에 질을 높혀 준다. 일전에 아들벌이 되는 독자 리택룡은 필자의 집에 두번이나 찾아와서 필자의 조언을 부탁했고 필자의 기자문집출판에 도움을 주겠다고 자청해 나섰다. 필자는 출판물로 만난 문우 정양곡씨(한국)가 아들에게 보내는 감동의 편지를 읽고 참다운 인생살이의 지혜를 배웠다. 그래서 필자는 이 편지를 혼자만이 읽고서 지나버릴 것이 아닌 독자들과 함께 향유해야 할 참된 삶의 지혜라고 생각하고 편지의 제목과 함께 내용을 정리하여 올린다. 아들아 남의 도움을 바라지 말고 도와주어라 ㅡ 여러 날 밥을 짓지 못하는 집이 있을 때 너희는 그들에게 쌀되를 드리며 그들의 굶주림을 면하게 해주는지 모르겠구나. 눈이 쌓여 추워 쓰러져 있는 집에는 장작개비라도 나누어 주어 따뜻하게 해주고 병들어 약을 먹어야 할 사람들에게 한푼의 돈이라도 쪼개서 약을 지여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가난하고 외로운 로인이 있는 집에는 때때로 찾아가 무릎을 끓고 앉아 따뜻하고 공손한 마음으로 공경하여야 하고 근심걱정이 쌓여 있는 집에 가서는 깜짝 놀란 눈빛으로 고통을 함께 나누며 함께 처리방법을 의논해야 하는데 너희가 잘하고 있는지 궁금하구나. ㅡ 이런 몇 가지 일도 못하면서 너희들이 위급할 때나 너희 집이 곤경에 처하였을 때 다른 집들에서 허겁지겁 달려 올 것을 바라겠는냐? 남이 어려울 때 자기는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서 남들이 먼저 은혜를 베풀어 주기를 바라는 것은 너희들의 리기심때문이란다. ㅡ 이후에는 평상시에 일이 없더라도 항상 공손하고 화목하게 남을 섬기며 마음을 다하여 다른 일가들의 환심을 얻는 일에 힘쓰며 마음속으로 보답을 바라지 말아야 한다. 또 너희가 근심 걱정할 일이 있을 때 다른 사람이 보답해 주지 않더라도 부디 원한을 품지 말며 바로 미루어 용서하는 마음으로 그분들이 마침 도울수가 없는 사정이 있거나 도와줄 힘이 미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가벼운 롱담일망정 “전번에 내가 이리저리 해주었는데 저들은 이렇구나” 하는 자극적인 말을 절대 입밖에 내뱉지 말아야 한다. 만약 이러한 말이 한 번이라도 입 밖에 나오게 되면 지난날 쌓은 공과 덕이 하루아침에 재가 바람에 날아가듯 사라져 버리고 말것이다. 실로 사람냄새가 물씬 풍기는 삶의 지혜이다. 필자의 독후감이다. 나는 새해부터 설명절인사를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를 “새해에 복을 많이 드리겠습니다!”로 바꿀것이다. 그리고 서로서로가  “복 많이 받으세요!”를 “복 많이 지으세요(지읍시다)!”로 했으면 좋겠다. 이 밖에 복권당첨꿈을 꾸는 친척에게 “복꿈을 실현하려면 복을 지어야 한다”고, 복권(福卷)을 챙기려면 복권(福權)을 행세하고 복을 베풀어야 한다고 알리고 싶다.        
183    2000원도 좋지만 2원도 보귀하다 댓글:  조회:4658  추천:0  2016-08-03
“2000원도 좋지만 2원도 보귀하다.” 박정일주필이 일전에 필자한테 보낸 위챗내용이다. 안도현 명월진 청구촌에 있는 로창걸학생(16살)이 1살에 어머니의 가출, 그후 아버지의 사망, 또 그후 외할머니의 사망으로 고아로 되여 백부집에 얹혀 살다가 백부까지 중병에 걸리다보니 백모의 혼자 능력으로는 더는 버틸수가 없어 할수 없이 고중입학을 포기한다는 딱한 사정을 쓴 기사가 “진달래칼럼”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자 24시간도 안되는 사이에 7082원의 성금이 모아져 로학철네 가정에 전해졌다. 창걸이의 백모(김영희,48세)는 연변일보사의 차순희기자도 300원을 내놓고 갔다며 눈물을 흘렸다. “진달래 칼럼”을 읽고 연길중립네트위크회사 리미옥경리가 이 사연을 위챗동아리 친구들게 보내준데서 로창걸학생의 딱한 사정이 널리 알려져 중국조선족기업가협회 챗동아리, 단상위챗동아리, 길림신문문화산업시대위챗동아리, 과기대동문회위챗동아리 등 많은 위챗친구들이 로창걸학생을 도우려고 10원, 20원, 50원 100원, 200원, 2000원…합친 성금액이 한시간사이에 4700여원이 되였다… 많은 성금자들은 자기의 실명을 밝히지도 않았다. 박정일주필은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의 성금으로 로창걸학생이 안도현제1중에 입학하게 되였다는 소식과 함께 “로창걸학생의 3년 고중공부와 그후의 대학공부는 사회의 수많은 감사한분들이 있음으로 하여 뒤근심이 없을것이다”고 하였다. 실로 사람냄새가 물씬 풍기는 글이다. 필자는 가슴과 무릎을 함께 치며 로창걸학생에게 사랑의 손길을 펼친 모든분들에게 “참 잘했다!”를 웨치며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우리들의 삶은 아주 작은것부터 시작된다. 2000원 성금자가 대단하다면 10원 성금자는 아주 보귀하다. 베품이란 누군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또 누군 없어서 못하는것이 아닌 마음가짐이다. 한국의 “기부대왕”이며 뜨거운 농사군인 김용복(84세)옹은 “적게 가졌다고 봉사하지 못하는것이 아니라 마음이 없어서 봉사를 못한다”,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사람은 자기의 능력과 재산을 오직 자기만을 위해 쓰는 사람이다”고 말했다. 베품은 참여이다. 거부들만이 아닌 온 동네, 온 사회가 참여하는 베품, 한푼, 두푼으로 모아지고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온 사회의 베품이 기초가 튼튼하고 힘도 세다. 필자는 5년전에 “한줄기” 기부문화를 발기하였다. “한줄기”란 “한끼를 줄여서 기여하자”는 말이다. 사람마다의 마음속에”한줄기”가 뿌리를 내리면 그것이 합쳐서“한줄기 소원”, “한줄기 희망”, “한줄기 해빛”으로 되여 “한줄기의 불꽃이 료원의 불길”로 타오를것이다 기부도 교육이고 습관이다. 서울 해천(海川)전복집 채성태씨는 “사랑의 밥차” 봉사활동에 나선 동기를 “솔직히 말해서 처음엔 착한척하려고 시작했는데 하다보니 내가 진짜로 착해지게 되였다”고 속심을 터놓았다. 행복이란 자신의 몸에 몇방울 떨어뜨려 다른 사람을 기분이 좋게 하는 향수와 같다. 희망은 거창한 기적에서만이 아닌 지금의 소소한 나눔에서 시작된다. 나만이 아닌 이웃을 생각하는 작은 실천이 아름답고 희망찬 미래를 만든다. “한평생을 행복하려면 주위의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는 중국속담이 새삼스럽다. 길림신문 2016-8-2
182    미리 배워야 할 “죽음학” 댓글:  조회:4725  추천:3  2016-06-02
“누구나 생을 다하면 무덤으로 간다. 죽음은 생의 파멸이며 안식과 평화를 얻는 순간이기도 하다. 죽음은 령혼의 일부분이며 무덤 저쪽에서 우리에게 말을 건다. 죽음을 미리 준비하라. 유언이나 장례절차, 제사 의식 등의 준비가 아니라 그대 령혼이 안식할수있는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세상에서 죽음만큼 확실한것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살이 준비 하면서도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다.”   이는 로씨아의 대문호 똘스또이의 말이다.   필자가 죽음도 미리 배워야 한다고 인식하기는 다음과 같은 계기와 모델들이 있었다.   첫 계기와 모델은 우리 민족의 “로신”이라 불리우는 고 김학철선생님이다.   김학철선생님은  2001년 9월, 풍진세월을 외다리로 버티던 몸이 불치병으로 85세에 생의 가망이 없게 되자 “작가로 글을 쓰지 못하면 운명이 끝이다”고, “사회의 부담을 덜고 가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더는 련련하지 않고 깨끗이 떠나간다”며 “병원, 주사 절대 거부, 조용히 떠나겠다”며 최후의 21일을 단식, 단약을 했고 사망후 추도식이 없이 소규모의 친척과 친지들이 골회를 두만강에 띄워 고향으로 흘러 보냈다.   둘째 계기와 모델은 “조선족의 리시진”인 연변농학원 로교수 김수철( 93세) 교수님이다.   김교수님은 지난 해 취재때 “죽음을 어떻게 생각합니까?”는 물음에 “죽음은 참외나 도마도가 다 익으면 절로 떨어지는 것과 같은 자연사이다. 자연사 인생을 받아들이면 겁이 없게 된다.” “나는 지금 죽을 준비를 한다. 죽기 전에 할 일을 해 놓고 죽어야 한다. 정판룡교수가 그랬다. 정교수는 암병에 시달리며 죽기전까지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였다. 지금 나는 합작이 아닌 혼자서, 항목이 아닌 개인적으로 ‘중국길림성식물독본’출판을 위해 2600가지 식물을 그리고 있다. 이미 출판된 《길림성식물명록》에 빠진것이 많아 내가 보충해야 한다”며 로친(94세)이 있으면 방해된다고 딸네 집에 보내고 90고령에 홀로살이를 하면서 죽을 준비를 하느라고 혼자라도 적적할 새가 없단다. 세 번째 계기와 모델은 한국의 영동농장 김용복회장(84세)님이다.   김회장님은 3살에 어머니를 잃고 15살에 월사금을 내지 못해 학교에서 쫓겨난후 홀로 고향을 떠나 삶을 개척, 40대에 열사막의 나라 사우디에서 남새농사를 성공하여 부자로 되여 금의환향한 후 버려진 간석지를 사들이고 개척하여 매년1만 2000여석의 량질미를 나라에 바치는 한국제1농장주로 되였다.   김회장은 사람농사, 흙농사, 사랑농사를 하는 뜨거운 농사군이다.   1982년에 사재 10억원을 출자하여 “용복장학회 (재)”를 설립, 2005년 70세에 “흙농사”로” 130억원을 출자해 “한사랑농촌문화재단”을 설립, 80 세 나이에 제3세계어린이와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해 “사랑농사”로 여생을 불태우고 있다.   지난 4월 20일, 김회장은 인생무대의 마지막 연출로 5천만원을 투자해 “제10회 한사랑농촌무화상시상식”을 마무리를 한 뒤를 계속하여 “월정김용복어린이복지재단”에 33억원, “영동농장 신사옥 출범에 55억원, “ (재)용복장학회”에20억원, “아너소사이어티(사랑의 열매)에 1억원, 강진군 로인복지재단 출범에 2천만원을 기부하였다.   김회장은 행사에 참가한 귀빈들에게 준비한 죽음을 소개 하였다.   ㅡ 매년 정초마다 내 몫의 재산(부인과 반반으로 나눔)전부와 장기(腸器)를 사회에 바친다는 유서를 써서 금고에 보관한다.”   ㅡ 장례 때 준비로 유상(遺像)(활짝 웃으며 찍은 채색사진)과 제일 즐겨 부르는 노래 3곡을 선정해 놓았다.   ㅡ 사망이 판단되면 사전에 수액관(輸液管)을 뽑아야 한다. 그리고 운명을 하면 박수로 저승에 보내라고 부탁하였다. 만약 어느 누가 울기만 하면 벌떡 일어나서 귀쌈을 칠것이다(하하하)   ㅡ 장기를 모두 기증하고 나머지 유체는 화장을 한후 고향땅에 뿌린다.   프랑스 제 5임 대통령 드골장군은 “나중에 죽임이 언제나 승리한다” 고, 영국의 유명작가 토마스 풀러는 “훌륭하게 죽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한마디로 살았을 때도 사는 법이 나빴던 사람이다“고 말했다.   이 같이 필자가 만난 “죽음학”의 스승님들은 모두가 후회 없는 값진 삶으로 인생을 마무리를 하면서 아무런 미련도 없이 죽음을 당연히 받아들이는 분들이였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때가 되면 그 생을 마감한다. 이는 절대로 어길수 없는 생명의 질서이다.   죽음이 삶을 받쳐 준다. 때문에 그 삶이 더욱 빛난다. 그래서 누군가는 “잘 죽는 것이 잘 사는 것 보다 더 어렵다”고 여겨진다고 했다.   그렇다. 풍진세상을 살아가는 일도 어렵지만 죽는 일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순조롭게 살다가 명을 다해 고통이 없이 가는 것은 다행한 일이지만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본인은 물론 가족들이 함께 시달리게 되면 잘 죽는 일이 잘 사는 일보다 훨씬 어렵게 느껴질것이다. 그래서 선배들이 죽음을 복으로 고종명(考終命)을 오복(五福)중 일복으로 했는가 본다.   생의 파멸인 죽음을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한 사람이 살다가 명이 끝날 때 병원에 실려가지 않고 평소에 살던 집에서 조용히 죽음을 맞이 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다(물론 아빠트주거로 이웃에 불편이 있지만). 이미 사라져가는 잿불같은 목숨인데 하물며 약물을 주사하거나 산소호흡기를 들이대는 “연명”은 당사자에게 커다란 고통이며 사회와 가정에는 부담으로 된다.   필자는 뇌출혈로 입원한 매부(78세)가 인사불성은 물론 심장박동마저 거의 멈췄는데도 타지에 있는 자식들이 올때까지 연명을 시키자는 가족의 주장을 마다하고 저 세상으로 떠나는 분을 조용하고 편안히 보내라며 보기가 흉측할 정도로 의료시설에 의하여 억지로 “연명”을 하는“죽은 사람”에게 설치한 의료시설을 철거시켰다. 그리고 뇌출혈로 쓰러진 형수님(83세)의 수액관을 뽑도록 하였고 간병으로 15년을 시달리다가 거의 죽어가는 동생(54세)을 출원시키고 동생의 의식이 깨끗할 때 며칠전에 사후 처리를 어떻게 한다는 것을 일일이 교대하고 유언을 물어보고 집에서 조용히 운명시켰다. (단 집에서 운명하다 보니 사후에 장기를 의료연구부문에 기증하라는 동생의 유언을 실현 못했다)   필자는 한 인간이 한평생을 험난한 인생길을 헤쳐오면서 살다가 나중에 지쳐서 푹 쉬고 싶을 때 흔들어 깨우거나 이물질을 주입하면서 쉴수 없게 한다면 결코 효도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최희덕선생님이 신병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보기가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내가 효자였다면 어머님을 안락사를 시켰을 것이다”며 후회한 것에 리해가 간다.   필자는 현대 의술로도 소생이 불가능한 경우라면 조용히 한생의 막을 내리도록 곁들고 가능하면 평소에 낯이 익은 생활공간에서 친지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삶을 마감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병원서는 존엄한 한 인간의 죽음도 한낱 업무로 처리되기 마련이다. 한 인간이 마지막으로 가는 길을 낯설은 병실에서 의사와 간호사가 지켜보는 눈길속에서 맞이한다면 결코 마음 편히 갈수 없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고유한 삶의 방식이 있듯이 죽음도 그 사람다운 죽음을 택할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일찍부터 삶을 배우듯이 죽음도 미리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 밖에 필자는 “죽음은 자연사다”는 철학적 인생관에 비춰 지금 고정적으로 불려오는 “생로병사”를 “생병로사”로 어순을 바꾼다. 아니면 모든 부고가 자연사로 사망한 고령사망자들마저 “…병으로 치료에 효과를 보지 못하고 향년 103세(일례임)로 사망 되였다”니 말이다. 고목이 쓰러지듯이 병이 아닌 고령으로 사망했는데… 길림신문 2016년 6월 1일자   
181    조선족상례를 타민족이 대행하다니? 댓글:  조회:4594  추천:2  2016-05-25
한 인간이 죽는다는것은 그가 일생동안 함께 살아온 가족, 친척친지들과 영원한 작별을 한다는것이다.이런 영원한 작별을 슬픈 심정으로 질서 있게 표하면서 마지막 리별의 례를 행하는것이 곧 상례다.상례는 슬프고도 엄숙한 의식과 행사이다. 그래서 례문(禮文)에 “례를 다하여 장사를 지내라”고 후세들에게 당부하였다.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효도를 인륜의 으뜸으로 살아왔기때문에 선조들로부터 상례에 절대 소홀함이 없었다. 그런데 근년에 필자가 목격한 상례를 보면 말이 아닐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환자가 병원에서 거의 운명하게 되면 곁군들은 물론 상주들도 “지금은 병원과 련계하면 다 해준다”며 운명한 즉시로 병원측에 알린다.그러면 안내를 받은 도우미 한두명이 오는데 생각밖으로 조선족상례의 도우미들이 몽땅 타민족일줄이야.   알고도 모를 일이였다.   한 사람이 운명을 하면 대개가 수시(收屍)(숨이 끊어지면 눈을 감기고 깨끗한 솜으로 입, 코, 귀를 막으며 시체가 굳기전에 손발을 주무르는 등), 고복(皐復)(혼을 부른다), 습염(襲殮)(목욕을 시키고 수의를 입힘), 명정(銘旌)(고인의 신분을 적은 명찰), 천구(遷柩) 등 순으로 행사가 이어진다(제순을 제외하고). 그런데 볼라니 도우미들이 사자에게 수의(壽衣)를 입히고 명정(銘旌)을 쓰고 고복을 하고(?) 시체를 담가에 들어서 령구차에 모셨다. 말하자면 사람이 운명한후 천구(遷柩)까지 상례절차를 몽땅 도우미들이 맡아하였다. 도우미들은 사자(死者)에게 목욕을 시키지 않았고 고복은 도우미가 병방의 뒤창문을 열고 옷을 마구 흔들며 몇마디 소리로 끝냈다. 심지어 상주가 혼을 불렀는지를 몰라서 물어보니 “아까 불렀다”니 그만이였다. 도우미들이 쓴 명정도 “古 ㅇㅇㅇ 之柩” 였다.   필자는 이런 상례절차를 절대로 도우미들을 탓할것이 아니라 상주측을 탓해야 한다고생각한다. 도우미는 어디까지 도우미로서 상주들이 어떻게 하라고 시키면 시키는대로 진행할것인데 말이다. 그러나 필자가 본 몇분의 상주들은 도우미의 감독이 아닌 구경군으로(심지어 곁에서 지켜보지도 않았다) 도우미에게 아무런 요구도 없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였다고 해도 고인을 마지막으로 모시는 슬프고 엄숙한 상례는 효성을 다해 우리들의 생활감정과 거의 일치할 정도로 정성껏 치러야 할 것이다.   전통적인 고복은 사자가 평소에 입던 속옷을 가지고 동쪽 지붕끝으로부터 한가운데로 올라가서 왼손에 옷깃을, 오른손에 옷의 허리를 잡고 북쪽을 향해 옷을 휘두르며 크고 긴 목소리고 “ㅇㅇ시(현)ㅇㅇ 진(향) ㅇㅇ촌 학생 ㅇㅇㅇ공, 씨(公,氏) 복! 복! 복!” 하고 세번 부르는것으로 고복의 의미는 사람이 죽으면 혼이 하늘로 날아가기에 지붕우에 올라가 부르는것이고(지금은 현실에 따라 합당한 곳을 선택) 이름을 부르는것은 이 혼이 다시 송장으로 돌아가 합하도록 하기 위함이고 고복을 한후 그 옷을 사자의 가슴에 올려놓는것은 옳바른 관습이라고 한다.   명정은 고인의 신분을 적은 명찰로서 남녀의 구별, 고인의 본(적관)을 밝힌다. 그러나 도우미들은 병지에 적혀있는 이름을 보고 “古 ㅇㅇㅇ 之柩” 로 쓰니 다였다.   필자는 조선족의 상례를 돈벌이를 위한 타민족들에게 아무런 흥정도 없이 돈을 퍼주며 도맡기는것을 절대 리해할수가 없다.   그래 친인을 마지막으로 모시는 슬프고도 엄숙한 상례가 무엇이 겁이 나고 꺼림직하여 타민족에게 돈벌이로 맡긴단 말인가!? 그래 시대가 바뀌여 조선족들의 전통적인 상례마저 “힘들고 어지럽고 위험한”일로 되여 타민족이 대행해야 한단 말인가?!.   실로 례의민족이요 문명민족이요 하며 자기 민족자랑을 하는것이 부끄럽다.   이밖에도 필자는 부모의 유골을 하늘에 날려보내고는 “시름을 놓았다”는 사람들의 말과 생전의 사진까지 보관하기 시끄럽다며 고인의 유물과 함께 몽땅 태워버리는것은 무정하기로 말이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필자는 현존하는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포기”시대의 발전과 로령화사회의 흐름에 따라 우리 민족의 장례문화의 보전, 발전과 그에 따르는 상조써비스의 필요성이 현실사회에서 사각지로 될수 없는 화제로 올라 전통적, 문화적, 현실적인 상례와 상례절차진행책이 출범했으면 한다.   “선배은혜를 잊지 않으면 자손이 빛난다(不忘先辈恩 子孙齐光辉)”는 비문이 인상깊다. 길림신문 2015-5-24  
180    나무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댓글:  조회:4453  추천:4  2016-04-16
지난 4월 5일 습근평주석이 북경시 의무식수활동에 참가하여 어린이들과 함께 나무를 심으면서 “나무를 기르는데 십년이 필요하고 인재를 기르는데 백년이 필요하다”면서 이야기하는 텔레비죤화면을 보면서 소학생때 부르던 노래를 떠올렸다. 꽃나무 자라서 고운 꽃이 피고요 어린이가 자라서 큰 일군이 된다고 떠나던 날 나한테 찬찬히 일러주던 까일로브아저씨 보고싶은 아저씨 아저씨 생각나면 저 북쪽 모스크바 … 노래는 구쏘련의 교육가 까일로브선생이 나무에 비춰 인재양성을 말한 노래다. 세상에는 나무에 비유하거나 나무에 대한 격언이 무수하다. “수천그루의 나무로 울창해진 숲도 한 톨의 도토리로부터 비롯된것이다.” 이는 미국의 사상가 에머슨의 말이다. 울창한 숲이 하루아침이 아닌, 하나의 작은 씨앗이 애기나무로 시작되는 것처럼 인생도 애기나무가 큰 나무로, 하나하나가 합쳐서 인간사회를 이룩한다는 말이다. “힘과 인내를 알려면 나무를 벗으로 삼으라” 이는 나무의 인내력과 생명력이 대단함을 알리는 격언이다.나무의 힘과 인내는 바위(땅)에 뿌리를 파고드는 내적인 것과 거센 바람에 뻗쳐내는 외적인것에 있다. “진실된 우정이란 느리게 자라는 나무와 같다” 이는 미국의 16대 대통령 죠지 위싱턴의 명언으로 진실한 우정은 오랜 세월을 거쳐야만이 돈독해짐을 말한다. “나무는 대지의 갈망을 상징하듯이 발돋움하고 서서 하늘을 본다” 이는 1931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인도의 시인 타코르의 명언이다. 목표란 항상 높은 곳에 있어야 한다. 비록 목표가 너무 높아 다다르지 못했다고 해도 거기에 이르려는 노력이 있었다면 반드시 그에 상응한 대가가 주어진다는 말이다. “나무도 결혼한다” 이는 사람들이 나무의 “련리지현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련리지”란 이어져서 련(連)서로 통할 리(理)가지 지(枝)라는 뜻으로 나무에 상처가 생길 때 두그루의 나무가 꼭 붙는 현상이다. 두 나무가 붙으면 절대 떨어지지 않는다. 신기한 것은 한 나무가 병충해나 기타 원인으로 하여 수명이 위험하면 다른 나무가 꼭 붙어서 영양을 공급하며 병을 이겨 낸다는 것이다. 두 나무는 한 몸이 되였어도 각각의 특성을 버리지 않고 붉은 꽃을 피웠으면 붉은 꽃을, 흰 꽃을 피웠으면 흰 꽃을 피운단다. 두 나무는 자신의 특성을 유지하면서 서로에게 힘을 북돋우어 준다.한국 강원도 설악산에 있는 신흥사부근에 수령이 몇십년이나 되는 만주고로쇠나무와 신갈나무가 “결혼”한것을 볼수있다. 도장을 만드는 화양나무는 볼품이 없는데다가 몸통의 길이가 한뼘 정도로 자라자면 최소한 500년이 걸려야 한단다. 그 시간이면 다른 어떤 나무는 아름드리로 자랐다가 사라지기를 수십번을 한다. 화양나무는 자라기에 앞서 내실을 다지고 또 다지며 어떤 충격에도 뒤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을 갖는다. 하여 가치가 있게 되고 그 견고함으로 도장이 만들어져 인간으로부터 소중함의 대우를 받는다. “떡갈나무와 노송나무는 다른 나무의 그늘이 드리워진 곳에서는 자라지 않는다.” 이는 “나 자신으로 살아야 한다”를 가르치는 말이다. 진정으로 숨쉬는 삶은 독창성적인 삶이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그늘속에서 산다면 그 삶은 시들게 되고 내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려 끝내는 나를 잃게 된다. 젊은이들에게 자기 달성과 삶의 지혜를 심어준 교육가, 활동가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미국 레오버스카글리아의 명언이다. “우리가 천당에 가서 조물주를 만나면 조물주는 우리에게 ‘왜 구세주가 되지 못했느냐고 묻지 않을 것이며 왜 이런 저런 병의 치료약을 발명하지 못했는가도 묻지 않을 것이다. 단 한 가지 물음으로 그 소중한 순간에 왜서 너 자신으로 살지 못했는가고 물을 것이다.” 나무가 인간에게 주는 교훈도 있다. 물은 자기를 낯추려니 낮은 데로만 흐르며 흐를수록 합쳐져 바다를 이루나 나무는 우로만 오르려니 오를수록 외가지로 뻗어진다. 공자는 자신의 사상을 나무에 비유했다. 나무는 울창한 곳에서 만물과 함께 살며 그 자리에 맑은 물과 공기,그리고 시원한 그늘을 제공한다. ㅡ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은 생명에게 “례”로 답하는 일로 미래에 대한 인간의 신뢰를 확인하는 일이다.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은 과거에 대한 우리의 빚을 인정하는 일로서 이는 자연에 동참하는 일이다.자연의 안에서 모든 생명체가 서로 의존하고 있으므로 나무를 한 그루를 심는 것은 과거의 잘못에 대한 슬픔의 표시이다.(시몬스박사) 한 사람이 나무를 심으면 100년에 수림을 이루고 100명이 나무를 심으면 10년이면 수림을 이룬다. 나무로부터 소금 같은 삶의 지혜를 배우고 나무를 심으며 자연에 동참하자. 길림신문 2016-4-14
179    제일 큰 가난은 사람가난이다 댓글:  조회:4589  추천:1  2016-04-07
 “이인위본(以人爲本)”이란 “만물에 근본이 있고 그 근본에는 사람이 있다”,  “사람을 근본으로 사람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뜻이다. 모택동동지는 “사람이 많으면 힘이 세다(人多力量大)”고 하였고 우리 말에는 “가난에서 제일 큰 가난이 사람가난이다”는 속담이 있다. 그래서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는 “약이 귀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귀하다”고, 경로원의 로인들은 “음식이 구섭(귀함)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구섭다(그립다)”고 하는지…. 필자는 “사람욕심”이 특별하다. 필자의 “사람욕심”은 백부님한테서 배운것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필자가 2살(1949년)에 어머니를 잃은 후 아버지가 재혼하여 1950년에 동부이모인 둘째 아들 오기용을 출생했다.  그때 천보산동광에서 기술원으로 출근하던 계모가 27살 나이에 필자보다 한 살이 위인 아들까지 데리고 농민인 아버지와 재혼하였다. 그러니까 계모는20대 나이에 3녀3남을 가진 어머니로 구차한 농촌에서 가정을 꾸려야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상상하기 조차 힘든 일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계모가 너무나도 측은하였던지 두 딸을 시집 보낸후에 다시 결합하기로 합의하고 동네손님들까지 청하여 술상을 차리고 “합의리혼식”을 마련했다. 하여 아버지와 감정이 깊었던 계모는 눈물을 흘리며 돌생진도 쇠지 않은 아들을 데리고 천보산으로 돌아 갔다. 그후 얼마나 되였을가, 하루는 백부님이 오셔서 하는 말씀이 “기용이는 밀면 남이 되고 당기면 우리식구가 된다”며 큰 누님더러 당금 동생을 찾아 오라고 강박 하였다. 그리하여 큰 누님은 이틑날로 천보산에 가서 동생을 업어왔다. 그 후 몇 년이 안 되여 아버지가 사망되다 보니 계모의 재결혼이 무산되고 몇 년후부에 우리형제도 큰집에 얹혀서 한집에서 살았는데 그때50평도 안되는 초가에서 한집식구가 많을 때 열 다섯, 필자가 결혼후 분가할 때까지9명이살았다     웅일이로 하여 행복을 만끽하는 조광훈네 가정   그때 백부님은 농촌에서 그 많은 식구를 거느리고 여러가지 부업을 벌려 “자력갱생”을 하면서(백부님은 모주석저작4권까지 통독 했음) 동생을 심봉쟁이 계모한테 보내지 않았다. 이런 배경으로 자란 필자는1980년대부터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릇 친근한 사이의 외자식부모에게 성별을 불문하고 자식들에게 형제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형제가 있어야 자식들이 형제사랑, 부모사랑이 있는 감정인간이 된다며 아이를 하나 더 낳으라고 “못살게”굴었다. 그 례로 당년에 연변일보사 왕청주재기자 김철영, 연변인민방송국 도문주재기자 최학철, 도문시공상은행 박순만, 도문시민족비닐공장 공장장 조광훈네가 둘째를 낳은 것이다. 당년에 이들 가정 모두가 이미 “독생자녀”증을 수속했기에 둘째를 못났는다고 할 때 필자는 그때는 하나만 낳으라고 했으나 지금은 조선족들이 둘을 낳을 수 있다고, 김철영은 안해가 처음아이를 제왕절개수술을 하였다며 둘째를 못낳는다고 하니 필자가 서방에서는 산모들이 아름다운 체형을 보존하기 위하여 일부러 제왕절개수술을 한다고, 박순만은 둘째도 딸일가봐 겁나다고 하자 필자는 성별을 관계치 말고 자식에게 형제를 만들어 주라고, 최학철은 안해가40이 넘었다고, 조광훈이 자기네 부부가 형제가 많아서 쾐 둘째가 없어도 찮다고…해도 필자는 여하튼 둘째는 낳아야 한다고 설득을 시켰다. 그래서 이들이 낳은 두자식들의 년령 차이가7년이상 , 심지어 12년까지 되였다. 사람의 일은 생각하는 대로 되는가 본다. 첫째가 모두 딸이였던 김철영, 최학철, 조광훈은 모두 둘째로 아들을 보았고 또 딸일가봐 걱정하던 박순만은 걱정 그대로 딸을 낳았는데 둘째 딸이 체격이 훌륭한 미녀로 유치원부터 연변서 모델로 인기몰이를 하였다. 특히 조광훈은 량부모에 장인까지 교원출신인데도 아들을 출생하여 한 달이 지나도 이름을 안 짓고 필자더러 이름을 지으라고 부탁하기에  필자는 조씨가문의 장손이라는데서 조웅일(趙雄一)이라고 작명을 하였다. 이렇게 춝생한 조광훈의 아들 웅일이는 소학교 3학년부터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꼴프를 배우더니 17살에 첫 조선족으로 국가꼴프팀에 입대할 줄이야! 그래서 조광훈은 지금도“웅일이 없었더면 어쨌을가?!” 하며 기뻐서 입이 째질지경이다. 지금 필자의 형제들은 모두가 자식이 둘이상이다. 그에 따라 1984년 생인 며느리까지 2013년 1월 6일에 딸을 순산한 계속으로 2014년 12월 29일에 아들을 순산하였다. 그래서 필자는 손녀의 돌생일에 며느리에게 특제한 사랑패를, 손자의 돌생일에는 특제한 공로패를 드렸다. 공로패는 이렇게 씌여있다.                      功 勞 牌 며느리 鄭明淑은 2013년 1월 6일에 손녀 吳佳睿를, 2014년 12월 29일에 손자 吳秀敏을 출산하였다. 吳秀敏은  海州吳氏高祖할아버지 吳昌範의 5대 후손이다. 고조할아버지 오창범은 1920년대에 朝鮮 咸境北都穩城郡穩城邑美浦面長德洞 長德里에서 세 아들인 吳光俊, 吳浩俊, 吳亨俊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中國 吉林省   汪淸懸石峴鎭大磊子에 정착하였다. 吳昌範 ㅡ 吳浩俊 ㅡ 吳基活 ㅡ 吳茂松 ㅡ 吳秀民 順으로 후대를 이어가는 吳秀民의 출생은 海州吳氏가문에 혈통을 이엇고 우리 민족에 族口를 더하여 주었다. 도문시 차세대관심위원회 許相健주임은 “鄭明淑녀사는 출산의 고통을 마다하고 우리 민족에 뜨거운 혈액을 보충한 현대녀성의 본보기이다”고 80후 산모를 칭송하였다. 우리 량주는 손자 吳秀民의 첫돌생일에 즈음하여 特制한 當 功勞牌를 장한 며느리에게 드리며 며느리의 고상한 “녀성정신”을 기린다.                                                      吳基活 金今福                                    2015년 12월 29일 필자는 아들며느리에게 공로패에 담겨있는 참뜻을 해석해 줌과 동시에 장차 손군들이 공로패에 씌여진 조선글과 중국글을 익숙히 읽고 쓸 줄을 알게 가르키는 것으로 조부들에게 효도를 표하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끝으로 필자가 가문의 일까지 밝히면서 이 글을 올림은 독자들 모두가 가족과 민족의 붉은 피에 끓는 피를 충혈하면서 우리 민족의 넋을 잊지 말자고, 그리고 나라에서 새로 제창하는 “한쌍의 부부 두자녀출생” 정책의 시달에 도움이 되고저 함임을 부디 밝힌다. “최대의 가난은 사람가난이다” 이 글을 빌어 필자의 싱거운 참견으로 자식농사를 잘한 상기 4가정의 “가화만사흥”(家和萬事興)을 기원한다.  
178    조선족의 '산아제한', 반성이 필요하다 댓글:  조회:4598  추천:2  2016-04-06
“길림신문”정년퇴직기자 김정애선생은 “잊지 못할 내 기사와 취재길의 이야기”란 회고록에서 “산아제한”과 “계획생육”이란 제목으로 이런 회고를 했다. ㅡ 1997년 9월 20일에 발표된 나의 기사 “연변조선족인구 마이나스자연장성률이 주는 계시”가 발표된후 나는 연변주산아제한위원회 주임한테 전화로 연변조선족인구통계가 나왔는가고 문의 했더니 그주임은 금방 나왔다면서 “연변조선족인구가 처음으로 마이나스장성으로 나왔다”고 하였다. 이에 나는 올것이 끝내 오고야 말았다는 생각게 연변조선족인구의 마이나스장성에는 주산아제안위훤회의 책임이 크다고 지적하고 주에서“산아제한위원회”이라는 간판이름부터 고칠것을 제의하면서 간판을 중국말 그대로”계획생육위원회”로 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주임은 “간판을 고치는 일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며 고충을 털어 놓았다. 반년이 지난후에 간판을 고쳤는가고 다시 물었더니 새 사무청사로 이사하면서 “계획생육위원회”로 고쳤다고 하였다. 사업방향이 출생인구 제한으로부터 계획적인 출산으로 바뀐것이다. 산아제한에 관한 연변의 그 획기적이고 력사적인 전환에 이 김정애기자가 조금이라고 기여했다는 긍지감을 나는 지금도 느낀다.. 근년에 항간에서 새로 추진하는 “한쌍부부 두자녀”정책을 곁들면서 하는 말이다. “그전에는 둘을 낳자고 해도 못 낳게 하더니 지금은 둘을 낳으면 장례를 한다고 해도 안 낳는다.” 확실히 지난 70년대 말부터 거의 90년대 초까지 연변서 “산아제한”대회전까지 벌리면서 조선족들까지 독생자녀증을 내라며 둘째아이를 낳는 것을 제한하다가 후날에 조선족이 둘째를 낳는 것을 허락하였다(그때는 둘째를 낳으라고 해도 많은 가정에서 안 낳는 실정이였음). 항미원조전쟁에서 퇀 참모장인 남편을 잃고23세에 청상과부로 된 당원어머니의 슬하에서 외독자로 살아 온 리종권(72)씨가 일전에 출판한 자선전“나는 이렇게 살아 왔다”의 한 단락이다.  ㅡ 중국의 인구과잉은 소수민족이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도 나라에서 제정한“계획생육”정책을 우리 민족의 관원들이 “산아제한”으로 틀려먹게 만들어 놓고 우리 민족의 출산을 거의 마구 제한했었다. 나의 첫애(딸)가 돌이 지난 후 두번째 아이를 임신하니 안해단위의 “산아제한”사무실에서 수차나 안해를 불러 야단을 친데서 우리 부부는 할 수 없이 류산하기로 합의했다. 그런데도 안해단위의 “산아제한”일군들이 어머니를 찾아와서 며느리의 임신을 공소하는 통에 어머니가 당격(黨格)을 마다하고 이렇게 항거했다. “남편을 혁명에 바치고 나에게 외동아들이 하나뿐인데 그래 내가 손자를 보려는 것도 죈 가?”  설음으로 가득 찬 어머니가 원성을 토하자 이네들은 어머니단위의 당지부를 찾아가서 “당신네 당지부의 공산당원이 당의‘산아제한’ 정책을 반대한다”며 고발 하였다. ㅡ우리 연변은 당년에 대회전까지 벌리며 실시한 “산아제한”정책의 미열로 오늘에 조선족인구가 줄어들고 조선족 중소학교가 페교되며 심지어 조선족 마을이 없어지는 판에 (물론 개혁개방후 인구류동의 원인에도 있음) 조선족들의 삶의 터전과 앞날이 우려된다! 이런 실례가 있다. 몇 년 전에 모친구한테서 시급 어른을 접대할 일이 있으니 필자더러 참석해 달라고 하기에 접대원인을 물었더니 대답이 너무 어처구니 없었다. 그에 따르면 7년전에 일본에 갔던 둘째 딸이 유치원에 다닐 3살짜리 아이의 교육문제로 귀국하고 아이의 호구를 올리려니 시관계부문 책임자가“계획외 출생” 이라며 입적수속을 해주지 않기에 할 수 없이 시급 어른을 찾아서 호구를 올렸다며 시어른의 은공을 갚으려고 술상을 차린다는 것이다. 출국했던 조선족들이 자녀교육을 위하여 귀국을 했다면 칭찬을 해도 한참 해야 할 것인데 오히려 “계획외 출산”의 명목으로 호적도 못 올리게 했다니 될 말인가? 지난80년대 필자네가 7년차이로 둘째 애를 낳았더니 둘째를 낳았다며 집에까지 찾아와서 훈계를 하던 가두주임이 몇 년 전에 76세 고령으로 4층인 필자집을 찾아 와서 “그때 일이 생각할수록 미안하다”며 반성을 하였다. 76세 할머니의 반성에 비춰“계획외 출생”이라며 호적을 못 올리게 하던 그 책임자의 처사를 대비하면 그 책임자가 너무나 리해되지 않는다.  지금 나라에서는 고령화시대에 비춰 한쌍의 부부가 두자녀를 낳게하는 정책을 출범하였고 연변에서는 조선족이 둘째를 낳으면 장례까지 한다고 하지만 현실은 “안(못) 낳겠다”“두고 보자”는 것이다. 리극강총리는 지난 전국인민대표대회 제 12기 제4차 회의 정부사업보고에서 한“한쌍의 부부가 자녀 두명을 낳을수 있는 정책과 관련한 부대정책을 완비할것이다.”고 밝혔다. 이에 반응해 지금 상당한 젊은 세대들이“두명을 낳을수 있는 관련부대정책”여하에 따라 둘째를 예산하고 있다. 필자는 조선족인구의 마이나스증장 및 그후유증에 관해 집정부문에서 당년의 무리한 “산하제한”의 교훈을 참답게 섭취하고 그에 따라 로령화시대의 로인복지문제를 선진적인사회복지제도의 출범으로 담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177    “그대들은 생각해 보았는가?” 댓글:  조회:4605  추천:3  2016-03-28
“그대들은 생각해 보았는가?”  리종권의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에서 두번째 답을 찾았다                       오기활   별빛도 정다운 강변에서 / 사랑을 속삭이는 련인들이여 텔레비죤앞에 모여앉아 / 이밤을 즐기는 사람들이여 그대들은 생각해보았는가 / 이 땅을 찾아준 은인들을  아직도 어느 한 심산속에 / 이름없이 누워있는 렬사들을    이 시는 길림신문사 문예부 기자를 지냈던 리선근선생이 1979년에 조선족녀항일투사 최희숙의 사적을 취재하고 이듬해에 작사한 “그대들은 생각해 보았는가?”는 제목의 노래 1절가사이다. 작가는 행복한 생활에 대한 가송과 함께 생명을 바친 렬사들에 대한 추모의 감정을 무거운 주제로 선택하고 대화체형식으로 무대에 올렸다.   이 가사의 핵심키워드는 “렬사”이다. 작자는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심산속에 이름없이 누워있는 렬사들을” 잊지 말자는 것을 세인들에게 노래로 부탁을 하였다.이 부탁은 천번만번 옳고 옳은 부탁으로 영원할것이다.   이에 비춰 필자는 혁명렬사의 후대인 리종권선생이 최근에 출간한 자서전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를 읽고나서 “그대들은 생각해 보았는가?의 또 다른 답을 찾게 되였다.   이에 필자는 렬사후대 리종권과 그의 외사촌 녀동생 김문자 두남매간의 애달푼 원성(怨聲)으로 “그대들은 생각해 보았는가?”의 답을 보충한다.   이하는 “나는 이렇게 살아 왔다”에서 읽은 두남매간의 원성이다..   “아빠야 원망스러워”   조선전쟁은 가열처절하였다.  길이 2700메터 너비 1000메터밖에 안되는 상감령고지에서 10만명의 군사들이 43일간 싸우면서 적 아 쌍방이40600명이 사상자를 낸데서 상감령은 사람의 시체로 뒤덮혔고  피물로 물들었다.  1952년 10월 14일 미군은 7개 보병영과 18개 포병영을 투입하고 200대의 폭격기로 폭탄 600개, 포탄 30만발을 투하발사하였다. 지원군은 두개 련과 한개 패의 병력으로 상감령을 고수하며 40여 만발의 탄알과 10000여 발의 수뢰를 발사하였다.  상감령전투에서 지원군은 7100명이 사망, 8500명이 부상을 당하고 16개국 련합군은 11300명이 사망,  1360명이 부상당하였다. 사망 비률은 1:1.6이다.  이처럼 참혹한 전쟁터에 친인을 보낸 이들은 피눈물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았다.  나는 어머니가 왜 밤마다 울고있는지를 잘 알수가 없었다.   “엄마, 울지마.”    “나 공부 잘할께. 아빠처럼 큰 사람이 될께”. “그래 그래. 응. 나, 안울께. 엄만 그저 울어보고 싶어 그러는 거야. 어서 자자.”   어머니는 나를 꼭 껴안고 소리없이 눈물만 흘리였다. 어머니는 울고 있었지만 나는 내 꿈을 이어 갔다. “산에 들에 꽃잎 피고  종달새 노래하는 나서 자란 우리들의  마을을 보아라 깊은밤 어두움에  신음소리 흐르네 아…나어린 가슴에  분노의 불길 싣고 나섰다네. 싸움의 길로   나는 날마다 조선영화 “소년 빨찌산 노래”의 주제가를 부르고 붉은 넥타이를 휘날리며 힘차게 학교로 달려 갔다. 내 조국, 내 고향을 위하여 싸우는 아버지를 뒤따라 새나라의 빨지산대원이 되려고 꿈이 많았고 가슴도 벅찼다…   우리는 하루 빨리 전쟁이 끝나기만을 고대했다. 나는 어린나이 때 아버지가 언제오나 기다리며 기차소리만 울려도 아빠가 돌아오는 환각에서 매일마다 역전에 나가 아빠를 기다렸다 … 할아버지는 어쩌다 동네 잔치집이나 제사집에 가시면 폭음을 하고 고주망태가 되여서 돌아왔다. 차거운 강바람에 두루마기자락을 날리며 비틀비틀 걸어가는 할아버지의 왜소한 체구는 방금이라도 쓸어질듯 싶었고 벼랑으로 굴러 떨어 지는듯 하였다.    “귀송아(큰아들로 작자의 아버지임ㅡ필자) 너희들 다 어디에 있는냐? 내가 뭐냐? 무슨 혁명가야? 왜 세자식을 나라에 다 바쳐야 하니? 난 너들의 아버지로 살고 싶다. 너들의 받아다 주는 술을 한잔이라도 마셔보고 싶단 말이다 … 이 못난 자식들아!  남들은 다 있는데 너희들은 왜 가 버렸느냐 …”    애처로운 부름소리가 강물에 실려 흐른다. 고개길마루에 올라서자 그는 쓰러저 버렸다. 할아버지지가 쓰러졌다는 소리를 듣고 나는 정신없이 고개 마루로 달려갔다.    “내 아들들아, 나 어쩌라고 … 귀철아! 귀석아! 귀송아!”    전방에 내보낸 세 아들들의 이름을 서로 오가며 부르고는 대성통곡을 하는 할아버지의 목갈린 웨침소리는 피를 말리고 간을 말린다.  쓰러진 할아버지의 두손엔 풀잎이며 흙부스러기가 손이 터지도록 쥐어져 있다. 얼굴에는 생채기와 함께 검붉은 피가 말라 붙었다. “상무(저자의 애명)야, 너 혼자서도 살아야 한다. 너 잘 살아야 한다!”  “상무야, 엄마를 따라 가라. 엄마를 놓치지 말고 …”  “너는 살아야 한다… 이 눔아…!” 산악이 흐느끼며 메아리 친다.  “너 혼자서도 잘 살아야 한다 … 상무야 …!” “어 … 허. 흑 ….. 흑”할아버지는 땅을 치며 통곡한다 …      아들 리광택에게 가문의 계주봉을 참답게 이어가라고 부탁하는 리종권씨 마을에서는 할아버지를 주정뱅이라고 부렀지만 세아들을 모두 전쟁터에 내 보낸 할아버지는 속타는 마음을 독한 술로 다스릴 수 밖에 없었다. 할아버지의 처절한 심정을 그 누구도 알아 주지는 못하였다.   할아버지는 해마다 나를 공부시켜 주겠다면서 송아지를 키웠지만 그 소가 얼마나 컸는지는 나는 보지 못했다.1955년 가을. 아버지가 조선전쟁에서 사망되였다는 부고와 함께 중화인민공화국민정부에서 발급한 렬사증이 구정부로부터 내려왔다.  할아버지는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며 기나긴 탄식을 했고 어머니는 땅을 치며 통곡했다. 나는 애처롭게 울면서 힘없이 머리를 떨구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듯했다.    나는 삼으로 짠 베상복을 입고 허리와 머리는 새끼줄로 동여매고 긴수수장지팽이를 손에 집고 맏상제의 자리에 섰다. 조문객들은 먼저 나에게 절을 하며 위안의 말을 하였다. 나는 그들이  “태산같은 희생”이기에 “영생불멸하리” 라며 말하면서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말뜻을 잘 알아 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듣고 싶지도 않았다.    할아버지가 웃 방에서 “아이고 아이고” 통곡하고 정주문 주방에서 어머니가 “애고애고” 땅을 치고 고모가 애처롭게 우는것을 보며 나는 그자리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만 떨구 었다. 이젠 목이 메여 소리도 나가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의 영전앞에 무릅을 끌고 아버지를 회억해보았다.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세살 때 단 한번 돈화에 가서 허리에 권총을 찬 멋진 아버지를 만난 기억이 어슴프레 남을 뿐이다. 그것도 사진으로 본 기억이다. 나는 아버지한테 정이 있어서 운것이 아니라 원망스러워 울었다.    “왜서 우리만 남겨놓고 갔는냐?” 고.  “왜서 아빠 없는 아이라고 아이들에게 몰리우고 가시를 당해야 하는냐?”고. “왜 집 없는 아이가 되여 눈치살이를 하여야 하느냐?”고.     “왜서 마지막 생리별길에서도 전사들 보기가 민망하다고    빨리 돌아 가라고 우리를 재촉하였느냐?” 고…  나는 어머니를 붙안고 울었다.  “엄마 울지마….”  아버지의 기억을 아무리 찾고 헤매도 찾을길 없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은 어떠하였을까?” 아버지는 수년간의 고학생활과 군인생활속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사람으로 되였다. 그런데 아버지의 “군인적인 사랑”은 나에게도, 어머니 에게도 큰 실망과 상처를 주었지만 어머니는 한눈 팔지 않고 나를 아버지의 씨긁이 라면서 한평생을 지키면서 당당하게 살아 왔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고서 저 세상으로 갔을까?”    지금도 손을 꼽아보면서 아무리 헤여봐도 잡히는 것이 없다. 정도, 사랑도 없다. 그저 달랑 사진한장과 혁명렬사증 뿐이다. 사진은 추억을 남겼지만 렬사증은 원한만 남겼다. 렬사증으로 먹고 살 수 있었을까? 아버지가 전선에서 목숨바쳐 싸우는 사이에 전쟁이 두렵고 목숨이 아까워 참군하지 않는 인간들은 마음껏 공부도 하고 취직도 하고 권세도 잡았다. 넓직한 관사에서 장가도 들고 자식들도 한 구들을 두었다.    하지만 우리는? 생사리별의 고통속에서 어머니는 병들어 누웠다. 나어린 나는 어머니를 구할길이 없어 설음이 복받쳤다.어머니는 사업터의 령도를 찾아가 애걸해도 랭대만 받았다. 천장에선 비가 새여 내리고 비바람에 벽이 떨어지고 아궁이에서 삼단 같은 연기가 새여 난다. 수리해야 할 사람은 여라문 살 밖에 안되는 나 혼자뿐이였다.    설명절이면 남들은 조상을 모시고 폭죽을 터뜨리며 등불을 밝히고 있었지만 한산한 우리 집엔 위문왔다는 이들이 집안도 들어다 보지도 않고 달랑 푸른잎도 없는 붉은 종이꽃 한송이를 외벽에 달아놓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말하라”는 말만 남겨놓고 꼬리를 뺐다.     우리들의 마음의 고통과 상처는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다 … 고달프고 힘들 때마다 아버지 생각이 났다.  이것이 아버지의  “태산보다 높은 죽음”과 “영생불멸하리라”는 업적의 대가일까?    그래도 나는 아버지를 자랑으로 생각했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원히 혁명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지금도 역시 확고부동하지만. 우리에게 큰 산이였던 아버지가 무너졌다.       “혁명이란 이런 것인가? 죽는것이 정말 영광일까? 죽으면 어디로 갈까?” 이런 생각에 지쳐 나는 더 울지도 못하고 수수장지팡이만 잡고 오가는 사람들의 인사을 받았다.    그후 벽수촌에 렬자비가 세워졌다.퇀장급의 아버지와 삼춘의 이름이 첫머리에 나란이 새겨져 있었다. 부고에는 퇀 참모장이였던 아버지는 1950년 9월 포항뒷산에서 전사하였다.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아버지는 25세, 어머니는 23세, 나는 5 살이였다. 그리고 할아버지한테 상무(종권씨의 애명)는 내가 책임진다고 편지를 보내왔던 세째삼춘도 1954년 정전협정체결직전에 묘향산 군사학원에서 미군의 폭격에 전사하였다. 그때 겨우 21살이였다.    “아버지를 내놔라”    나의 오촌외숙인 김영선이도 사평전역과 남창전역에 참가하여 일급 영웅칭호를 받았고 다시 해남도 해방전쟁후 비밀리에 조선에 파병되여 참전하였다.       외숙모는 혼자의 농사일로는 두 모녀가 살아가기 힘들었다.  그래서 60년대 초에 작은 시누이를 찾아 룡정으로 들어와 해빛도 찾지 않는 어둑한 고방 한칸을 세를 맡고 딸 문자를 공부시켰다.    나의 외사촌인 문자누나는 한어를 특별히 잘한데서 조선족들 가운데서 찾기 힘든 인재로 불리였다. 그는 가도판사처의 일손을 돕다가 림시로 저축소에 취직하고18원의 로임으로 두 모녀가 근근득식을 하였다. 그런데 출근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 모녀가 농촌에서 왔다는데서 하방호로 획분되여 농촌으로 내려가야 한단다.   매일마다 가도판사처사업일꾼들이 집에 찾아 와 빨리 농촌으로 돌아가라고 성화를 부렸다. 전선에서 영웅이였던 아버지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아버지의 전우들이 아버지가 조선 전쟁에서 희생되였음을 증명해도 렬사증은 내려오지 않았다.    외숙모가 새우등이 되여 땅을 거의 핧타시피하면서 가도일군들을 찾아가 제발 하방만은 시키지 말아 달라고 손이야 발이야 빌었다.   문자누님은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나의 아버지를 내놔라 … 아버지를 내놔라 …”    나 어린 문자누나는 집을 찾아온 간부들 앞에 업드려 두 손을 싹싹 빌었다.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농촌으로 못 갑니다.  갈데도 없습니다…”   그는 이성을 잃고 아버지를 찾으며 어머니품에 안기여 한없이 울부짖다가 쓰러졌다.    이런 사정을 가슴 아프게 바라 보던 나는 16살 어린 나이에 행여나 해서 조선정부와 최용권위원장에게 편지를 써 보내여 이들의 비참한 사정을 호소하며 렬사증을 보내주기를 간청하였다.  렬사증이 내려오면 농촌에 쫒겨가지 않을거라는 생각에서.  1962년 여름 중화인민공화국민정부에서 외숙부의 렬사증이 발급되여 행방불명이던 그의 처신이 해명되여 혹시 포로가 되지 않았는가며 왼눈으로 흘겨 보던 사람들의 기시도 풀렸다.     당년에 중국인민지원군들에게 드리는 선물인 하얀 사기 컾에는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 빨간글이 새겨져있다. 그 컾으로 우리는 사랑을 느꼈고 두손에 그 컾을 바쳐들며 아버지의 넓은 품에 안긴듯 하였으며 그 컵에서 희망찬 리상을 그려 보았다….   이제껏 나라에서 그들(렬사)에게 진빚은 어떻게 보상할까? 피와 목숨을 바쳐 죽어간 사람은…? 그들의 자식들은…? 인젠 그 컾도 깨지고 우리의 인생도 죽어간다.   꽃나이에 죽어간 그 사람들도 불쌍하지만 그 품에 안겨보지 못한 어린것들 역시 더없이 가련하고 불쌍하다.   “아빠의 덕이란 도대체 무엇일고?”    “청상과부를 남겨 놓고서도 아빠는 저 세상에서 편할가?”   나는 아직도 이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그렇다! 지난세기 50년에 방금 탄생한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抗美援朝 保家爲國”이라는 8자 구호를 내걸고 해방을 맞은 백성들을 조선쟁에 보내였다. 금방 해방을 된 고향의 친인들이 가정을 보호하려는 불타는 일념으로 용약 참군, 참전하였다. 자료에 따르면 당년에 50만 조선족인구에서 6만명이란 조선족들이 중화민족의 해방과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항미원조보가위국전쟁에 용약 참전하면서 막대한 희생을 빚어냈다. 그렇다면 자기가 죽을것을 각오하고 전선에 나가는 참전용사들이 바랐던 보가(保家)는 구경 무엇이 였을가? 렬사들이 눈을 감으며 바랐던 보가(保家)는 필경 부모, 안해, 형제, 자녀라는 가정의 안녕과 모든 후세들의 자유와 평화, 행복한 생활이였을 것이다.    “그대들은 생각해 보았는가?”에서 리선근선생이 바라는 답은 “이름없이 누워있는 렬사들”을 잊지 말자는것이였다면 필자의 기준으로 “이름없이 누워있는 렬사들”의 바람은 가족과 친인들의 행복한 생활이 아닐가?   이에 비춰 본다면 우리의 당과 정부기관, 그리고 정부관원 및 모든 국민들이 혁명렬사들의 혼을 기리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해 왔으며 렬사들의 후대에 대한 관심사업에 얼마만한 정력을 기울렸을가?   이는 “그대들은 생각해 보았는가?”는 질문에 한결같이 자문자답할 숙제라 하겠다.    (리종권씨는 도문시문화국, 도문시라지오텔레비방송국 선임부국장으로 사업을 주체했고 연변석유정제공장선전부부장으로 퇴직했음)      
176    사람이 되는 길 댓글:  조회:5075  추천:0  2016-03-18
사람은 물품이 아니다. 물품은 하루가 먼듯 모델이 바뀌고 질도 부단히 개선되여 쓰기에 편하게 만들어진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될수 없다. 그것은 사람은 무엇이 옳고그르며 무엇이 선이고 악인가를 분간할줄 아는 살아있는 목숨이기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시비를 가리고 선악을 가리는 마음의 길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 모든 인류가 나름대로의 사람의 길을 걷지만 그 걷는 모습이 서로가 다르다. 1636년에 설립된 미국 하버드대학은 전 세계적으로 학문에 깊은 의의가 있는 학생들이 꿈꾸는 진리 탐구의 전당으로 인류력사에 기념비적 위치에 올라 세계적인 공인을 받는 일류명문대학이다.하버드대학은 여덟명의 미국 대통령을 배출하였고 수많은 노벨상수상자와 수백개의 글로벌기업 CEO를 배출했다. 하버드대학의 교육과정은 크게 학부와 대학원으로 나뉘는데 학부교육은 맹목적인 성공이나 1등 대신에 먼저 사람이 되는 교육을 기본으로 하고 다음 대학원은 인재를 양성을 목적으로 한다.  하버드대학총장은 매년 입학식에서 신입생들에게 “교양있는 사람들의 집단에 들어오게 된 것을 매우 환영합니다”고 말한다고 한다. 이런 실화가 있다. 1764년 어느 날 저녁에 하버드태학에 화재가 발생해 유명한 도서관인 하버드 홀이 순식간에 재더미로 되였다. 이 도서관은 대학의 설립자 하버드가 세상을 떠난뒤 기증한 보귀한 책들로 그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이런 도서관의 화재로하여 사생들의   안타까운 심정은 말로서 표현할수 없었다.  그런 중학생들 가운데서 존이라는 학생이 더더욱 안절부절하지 못하는것이 곁군들의 눈길을 보았다. 알아보니 존은 전형적인 책벌레로 평소에 이 도서관에서 지내는 시간을 제일 즐겼다. 사고가 나던 날 도서관의 문이 닫힐 시간이 되자 책속에 깊이 빠져있던 존은 책을 외부로 절대 반출할수 없다는 도서관규칙을 어기고 당장에서 책을 끝까지 읽을 욕심으로 읽던 책을 몰래 가지고 도서관을 나왔다.그런데 바로 그날 밤 화재로 도서관의 책이 몽땅타 버렸던것이다. “이 책을 돌려줘야 할가, 아니면 그냥 가질가?” 며칠간이나 이런 사상투쟁으로 모대기던 존은 마음을 정리하고 어느 날 총장의 사무실을 찾았다. “총장님, 죄송합니다. 화재가 나던날 밤 제가 도서관에 있던 책 한 권을 몰래 가지고 나왔습니다. 지금 그 책을 돌려드립니다” 총장은 매우 기뻐하면서 그 책을 받았다. “이 귀한 유산을 보관하고 있었다니 고맙군요, 일단 나가보세요.” 존은 안도의 숨을 쉬였고 이 소식을 들은 많은 교수들도 책을 한권이라도 구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며 기뻐하며 존을 칭찬을 하거나 상을 줘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틀 후 하버드대학에“존 학생은 교칙을 어겼으므로 퇴학으로 처리함”이라는 놀라운 공고문이 붙었다. 이에 많은 사학생들이 처벌이 너무 가혹하다며 총장더러 존에게 한번만 더 기회를 줄것을 요청하였다.  “존이 정직하게 책을 바친것에는 저도 여러분과 함께 감사하고 칭찬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허나 그는 교칙을 위반했기에 퇴학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하버드대학의 규칙에 책임을 져야 하니까요.” 총장의 말에 좌중은 더는 할말이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존의 일을 통해 총장은 교수와 학생들에게 언제나 학교의 규칙과 규률을 지키고 스스로를 단속해야 함을 가르쳐주었다. 실로“인재가 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라” “먼저 사람이 되고 후에 의사, 기자, 교원…이 되라”는 생생한 교육과당이라 하겠다. “어떻게 길을 걸어야 사람이 되는가?” 는 제자들의 물음에 공자의 대답이다.   “도에 뜻을 두고 덕을 지켜라. 그리고 인(仁)을 의지하고 례(禮)에 놀아라.” 그런데 인간은 흔히 배가 고프면 사나워지고 배가 부르면 방탕해진다.  사나운 인간도 사람의 길을 벗어나고 방탕한 인간도 사람의 길을 벗어난다. 요즘의 현실은 상당한 사람들이 배고품의 고통에서 벗어난 상태기에 턱없이 방탕해지고 겁없이 삶을 살아가려는 부류들이 많다.  배부름이 사람을 타락하게 한다는 말이된다. 그렇다면 배부른 타락의 두려움을 어떻게 대처할가? 공자는 “도에 뜻을 두라, 그러면 덕을 지키게 된다. 덕을 지켜라, 그러면 인을 의지하게 된다. 인에 의지하라, 그러면 례에 노닐게 된다.”고 하였다. 사람으로 가는 길의 안내표라고 할가.  “덕만 있고 재주가 없으면 불량품이고 재주만 있고 덕이 없으면 독약이며 덕과 재주를 결합하면 명품이다.”  
175    남을 위해 뭔가 할수있는 것은 삶의 행복 댓글:  조회:4430  추천:1  2016-03-07
지금 한창 페암치료중인 정경락 (“지부생활”잡지사 전임사장,주필)씨는 이번 음력설 련휴기간에 거의 매일 병원치료를 다니면서도 밤낮이 따로 없이 무려 28만 5천자에 달하는 리종권씨(72세, 도문사람)의 자서전 “나는 이렇게 살아 왔다”의 심독(审读), 판면(封面)설계, 제판(版式)설계, 사진수정 등 출판관련의 모든 일들을 혼자서 했다. 3월 2일에 진행될 저자의 수연식에서 발행할 목적으로 시간이 딸리여 건강한 사람들도 감히 엄두를 못 낼 산더미 같은 일을 음력설련휴기간에 누구한테 부탁할수 없다보니 부득불 10여일만에 혼자서 끝냈다는 뒤늦은 고백에 필자는 그한테 일을 부탁한것이 “사람빚”을  질번했다고 너무나 놀란 나머지 겁까지 났다. 3월 1일에 책을 받고 나서 “책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는 필자의 말에 경락씨가 이런 답장을 보내왔다. ㅡ 이번에 앓으면서 이 한 생명이 나에게만 속한 것이 아님을 깊이 느꼈소. 그에 따라 내가 생명을 아끼는 것이 여러분의 기대에 보답하는 것임도 느꼈소 바로 이런 느낌과 보답이 이 책에 관심을 돌리고 배판(排版)까지 열심히 배우면서 완수할수 있었던 동력이였소. ㅡ 아직도 내가 남을 위해 뭔가를 할수있다는 것이 삶의 가치, 삶의 보람, 삶의 행복임을 느낀것으로만도 내 가슴이 뿌듯하오… “내가 남을 위해 뭔가를 할수 있다는 것이 삶의 행복이다.” 이는 경락씨가 감수한 행복의 향수로 머리가 숙여진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며 지혜로운 사람은 동적이고 어진 사람은 정적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오래 산다” 이는 공자의 말이다. 공자가 말한 어짊과 지혜는 바깥 세계에 대한 사람의 반응이고 즐거움과 장수는 인생의 수확이다. 즐거움과 장수는 내면의 깨달음에서 오고 행복은 마음이 만족하고 편안할 때 생긴다. 누구나 행복하려면 끊임없이 마음의 밭을 갈아야 한다. 만족감과 성취감을 추구하는 과정은 마음을 즐겁게 하는 과정이자 행복을 느끼는 과정이다. 만족감, 성취감, 즐거움은 행복지수와 정비례된다. “행복은 다른 사람의 몸이 아닌 자신의 몸에 뿌려지는 향수다”고 한다. 이른바 “장미를 선물하면 손에 장미향이 남는다”는 도리라 하겠다. 행복을 수확하는 첫 번째 비방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 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을 도우면 즐거움이 더 커진다. 중국의 서성(書聖)으로 불린 최고 서예가 왕희지(王羲之, 307ㅡ365 )의 일화다. 어느 날 왕희지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서 어느 할머니가 대나무부채를 파는 것을 보았다. 할머니가 파는 대나무 부채는 비록 최상의 재료로 만들었지만 아무런 그림이나 장식이 없는 탓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에 왕희지는 측은한 마음에 할머니에게 말했다. “할머니 제 생각에는 이 부채에 그림이나 글귀가 없어서 잘 안 팔리는 것 같아요, 제가 글을 써 드릴가요?” 할머니는 눈앞에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지만 그의 따뜻한 마음을 믿고 부채를 맡겼다. 왕의지는 모든 부채에 생동감이 넘치는 글문을 써넣고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 절대 걱정마세요, 사람들에게 이 글자를 왕우군(왕희지의 별칭)이 썼다고 말하면 분명히 사갈 것입니다. 하나에 꼭 200문씩 받고 1문도 깍아주지 마세요.” 왕희지가 자리를 뜬후 할머니는 왕우군이 쓴 부채를 판다고 소리치자 금세 사람들이 몰려들며 앞다투어 챙겼다. 왕희지는 행복한 사람이였다. 그는 7남 1녀를 모두 훌륭하게 키웠다. 그는 가족과 함께 수시로 덕을 쌓고 선행을 앞세우며 행복한 가정을 이끌어 갔다. 선행은 내면을 충실하게 하고 주변을 기쁨으로 채우는 수행이며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 중요한 방도이다. 기꺼이 남을 돕는 사람은 어질고 지혜롭다. 사람들은 서로간 어울려 산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면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고 다른 사람 때문에 존재한다. 값진 인생은 사람됨이 착하고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것으로 즐거움의 도와 장수의 도를 만들며 얻는다. 경락씨의 “내가 남을 위해 뭔가를 할수있다는 것이 행복하다”는 답장이 따사로운 봄바람이 되여 얼음이 풀리듯 무겁던 필자의 마음을 녹여주는것만 같다. 북경대학 선임총장 마인초의 명언이다. “성공한 뒤에 해야 할 일은 두가지로 충분하다. 첫째, 겸손할것, 둘째 다른 사람을 도울 것!” 길림신문 2016-3-4  
174    “처음으로 한가족이 모인 기분입이다!” 댓글:  조회:5632  추천:6  2016-02-19
필자는 “덜된 사람”, “조선족이라면 조선어를 알아야”란 제목으로 두편의 글을 발표한적이 있다. 글에서 말하는 “덜된 사람”은 조선말을 알면서 조선말을 안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생각밖으로 이글을 읽은 독자들이 수천명을 넘었고 그만큼 댓글도 많았다. 세상에 완전완미한 사람이 없듯이 누구나 덜된 부분이 있기마련이다. 그런데 사람의 “덜된” 표준을 사전에서도 찾기 힘들었는데  동네 어른, 교원,공무원을 지낸 분들이 “조선사람이 조선어를 모르거나 안하는 사람을 덜댔다”며 후론을 하였다. 40여 년의 군생활을 한 리광남공군대좌 도 “조선사람이 조선말을 안하면 이다”며40여 년간 조선말을 잊지 않고 막힘이 없이 조선말로 대화했고 한족들 속에서 생활하는 자식들까지 조선어를 배우게 하였다.  “덜됐다”는 “채 못 됐다”, 아직 원숭이로부터 사람에로 채 진화되지 못했다는 말로 해석된다.  그런데 현실은 “덜된 사람” “덜된 ..장”(국장, 시장, 주임, 주장 . 사장…)들이  많아서 꼴불견이다. 지난 세기 80년대 모시에서 “뢰봉식로동자 고만길”을 따라 배우는 좌담회에서 참가자들이 거의 모두가 조선족인데 사회자로부터 거의 모든 조선족들이 한족말을 하기에 향진에서 온 2명의 대표가 “한어수준이 낮아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나서 조선말로 발언하던 일이 지금까지도 머리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지난 1월 30일에 조직된 “연변조선어방송애청자협회 도문분회성립의식”은 완전히 딴 판이였다.   성립의식을 시작하기 전에 도문분회 김봉련(75세, 도문본보기인물)회장이 친히 조선족노래를 배워줬고 모든 참여자들이 조선말로 발언을 한데서 김희숙회장(신화가두로인회장)은 “지금까지 처음 조선말로 발언해 봅니다”, “모두가 조선말을 하니 처음 한 가족이 모인 기분입니다!” 고, 신화가두 신민사회구역 김명복주임(서기겸임)은 지난해 사회구역의 한족사업일군들을 조직하여 조선어 학습반을 조직해 좋은 반향을 이르켰다며 “오늘의 이 좋은 사업을 의사일정에 올려 놓고 잘해 나가겠다”, 한진길 부회장(당지부서기)은 “365활동”(1년 365일 조선말방송듣기활동)을 발기하면서 “길림신문”이 “백년백인”등 전문란으로 중국 조선족들의 위대한 업적과 고귀한 형상을 적극 발굴하고 부각했다며 “조선족의 자랑”을 신명나기 한데서 수차나 되는 박수갈채를 받았다. “연변조선어방송애청자협회” 김문기비서장은 조선족의 부흥을 위해 함께 힘쓰자며 왕청현새일대관심위원회주임이며 전국 “시대의 본보기” 김춘섭의 사적보고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며 조선민족의 감동적인 사적을 전달하였다. 그래도 회원들이 제일 감동을 먹은것은 도문시인대 80대 퇴직간부 박운수옹이 발언에서 민족의 넋(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서 “이 협회에서 꼭 나를 받아 줄 것을 간절히 바랍니다”며 간청하며 한문회원등기표에 몽땅 조선문으로 등기한 등기표를 친히 바친것이다. 사회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이뤄지고 그 관계를 원할하게 하는것이 소통이다.  “말이 통해야 같이 산다.” 이는 한국전임대통 김대중의 말이다. “말은 말하는 사람의 얼굴이고 인격이며 품위다.” “틀린 말, 잘 하지 못하는 말은 듣는 사람을 불쾌하게 한다.” 이는 중국조선족아나운서 제 1 임 방송교수 서방흥교수의 말이다. “언어문자를 상실하면 민족정체성도 사라진다.”  이는 민족출판사 우빈희사장의 말이다.   이로 보아 그 사람의 언어수준과 수양이 그 사람이 되고 안되고를 가늠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후론하는 “덜된 사람”들이 노래방에서는 조선말로 노래를 부르기에 다행이란다.  자기의 “발전”을 위해 한어나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좋지만 자기 민족의 언어도 모르는 그네들이 우리 민족의 문화를 계승, 발전시킨다고 하니 의문이 앞선다. 그래서 미래가 걱정이다. 이에 비춰 일본의 재일 조선족류학생 방정화, 일본 조선족녀성회 전정선회장등이 일본에서 “최대의 고민이 후세들의 언어교육이다”며 “토요일 어린이교실”, “우현교육학원”을 꾸려 후세들의 언어교육을 틀어쥐는 것이 정말 돋보였다. 필자는 “덜된 사람”, “조선족이라면 조선어를 알아야”의 댓글로  이 글을 마감한다. ㅡ연변조선족자치주라면 응당 한족들이 우리 말을 배우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데 반대로 조선족들이 자기민족의 말을 안하는 것이 문제다. ㅡ 덕목이 없기에 말을 해도 듣지않는다. 오히려 “덜된 사람들”이 자기를 제1로 생각한다. 조선족이 조선족을 괄시하는 꼴, 그것도 우리 민족의 리더라는 자들이 이러니 어찌 통탄하지 않겠는가? ㅡ 론리적으로 그렇습니다. 덜된 원숭이를 어찌 사람이라고 할수 있습니까?  일부 사람들은 조선족유치원부터 다시 다녀야 합니다 ㅡ 자기 민족언어를 천시 하고 사용하기를 꺼려하는 사람은 민족의 지도 자로 될 자격이 없다, 자기자신이 민족어를 아끼지 않고 누구한테 민족 교양을 강요할수 있는가! “덜된 사람”들을 볼 때마다  우리 민족의 미래와 운명이 걱정되여 가슴이 아프다 !! ㅡ 조선족 부모들이 자녀들을 한족학교에 보내는데 왜서 일가요? 조선족교육에 문제가 있음을 설명하지 않나요?  말로는 조선족교육개혁을 한다지만 실제로 얼마나 개혁을 했고 얼마만큼의 성과를 거뒀나요?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심사숙고해야 할 바입니다. 각급 정 부에서 크게 중시를 돌리고 뿌리에 든 병부터 고쳐야지 않겠습니까?!  
173    자신을 읽으라 댓글:  조회:4857  추천:2  2016-01-20
필자는 독서에 대하여 이런 편견이 있다. 즉 “시간이 없어서 책을 못 본다”는 사람, “내용이 새롭지 없다.” “ 누가 그걸 몰라서 안하나?” “지금 어떤 시댄데, 너무 지난 얘기야…” 등 독서를 멀리 하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다. 이에 필자는 “시간이 없어서 책을 못 본다는 사람은 시간이 있어도 책을 안 보는 사람”으로, “신문을 욕하는 사람은 신문을 보는 사람, 신문을 볼것이 없다는 사람은 신문을 안보는 사람”으로, 책에 “내용이 없다” , “지금 어떤 시댄데..”라는 사람은 독서를 안 하는 사람이나 혹은 자기의 문제를 감추고 글의 내용을 문제 삼는 사람이라고 감히 말한다. 기실 이런 태도는 책읽기와 자기 발전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글의 내용을 리해하고 음미하면서 자신을 돌아볼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읽는다. 그런 의미에서 한권의 책은 독자에게 읽힘으로 하여 수천수만 권의 책이 될수 있다.  독자들은 각자의 립장에서 그 책을 읽기에 그 책을 리해하는 수준과 깊이, 심지어 책의 내용까지 달라 진다. 즉 책은 독자에게 와서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필자는 어떤 책을 읽어도 새로운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책에서 성과적인 내용에 집착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들은 항상 가시적인 성과만을 보는 습관 때문에 자신이 아는것을 잘 실천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새로운 내용들을 흡수하기에만 급급해 한다. 이래서는 책을 읽어도 지혜는 커지지 않을것라는 짐작이다. 실천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책을 통해 실천의 계기를 다시 만들수 있어야 한다. 작가의 생각이 구태의연하다고 하는 사람은 과연 자신이 구태의연한 행동을 반복하고 있지 않는가를 돌이켜 보아야 한다. 그럴수   있을 때 책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될 것이고 새로운 생명과 가치를 얻게 될 것이다.  필자는 독자에 의해 재창조되지 못하는 책은 죽은 책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자신에게 책을 통해 스스로의 모습을 읽어 내여 발전의 계기로 만들지 못하는 독자는 책이 사람을 읽는 것으로 시간과 돈의 랑비라는 생각이다. 책이 좋아서 그냥 읽는다고 말하는 사람조차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다. 즉 시간을 보내기 위해, 감동을 얻기 위해, 심지어 아무런 리유가 없이 책을 읽을 때조차 그것이 자신에게 리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읽는것이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책을 읽은 사람은 자기의 말을 읽는다. 그리고 그 말은 우리 자신의 생각과 내면화된 가치관을 통과하면서 새로운 의미로 해석된다. 똑 같은 책과 똑 같은 문장을 읽어도 읽는 사람에 따라서 느낌이 달라지고 교훈이 달라지는 리유도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읽으면서 “지루하다” “새로운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지금 현재의 자기가 지루하고 새롭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것과 같다. 지금까지 우리가 가졌던 경험과 지식, 상식들로 구성된 자아가 책을 읽고 있다. 그 자아가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책을 통해 발견하고 있을 때 우리에게는 보다 생산적인 자신을 만들 기회가 생기게 된다.   그래서 어떤 책을 읽는가를 보면 그 사람을 알수 있다. 당신은 어던 책을 읽고 있는가? 그리고 어떤 느낌을 받고 있는가? 당신은 자신을 읽고 있는가?
172    효도사회건설은 고령화시대의 급선무 댓글:  조회:5225  추천:1  2015-12-23
  동물과 인간의 근본적인 구별이 감사한 마음의 유무에 있다. 효의 전통적인 개념적 의미는 공자의 부자자효(父慈子孝), 맹자의 부자유친(父子有親), 동중서의 부위자강(父爲子綱)이라 하겠다. 이런 전통적인 효문화는 단명, 다자(다가족), 문맹을 기초로 발전되였다. 먼 옛날에 자녀들이 부모에게 효도할 수 있은 것은 낳아서 길러준 부모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한것도 있지만 다른 일면으로 농경시대 다자녀, 단명으로 하여 부모가 일찍 돌아가면 장남이 여러 동생들을 다 키워야 하기에 부모가 건강하게 오래 살도록 정성을 다하며 효도해야 했다. 그래서 필자는 효(孝)자를 로인(老)인을 아들(子)이 칼(匕)을 차고 지킴이 아닌 엎고서 높이   모신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저출산, 독신가구, 초혼년령 연장, 리혼, 사회의 로령화 등으로 부부세대, 편부모세대, 독신세대…등 가족의 다양화가 뚜렸해 지고 그에 따라 나타나는 가족문제(가족학대, 부모부양,자녀양육)는 단순히 개별가족의 사적문제로 볼수 없다. 최근의 자료에 따르면 2013년 우리나라 60세 이상이 총인구의 14.9%에 달해 라 한다. 무엇이나 많으면 소중하지 않다. 전통사회에서는 단명시대라 로인들이 쌓은 경험과 년륜으로 젊은이들의 존경을 받고 사회적 우대를 받았다면 지금은 로인들의 지위가 떨어지고 세대간의 차이와 차별이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분야에서 뚜렸히 나타나 100세 이상 되여야 기자들의 인터뷰대상으로 사회적인 혜택을 받는 시대로 되였다. 한마디로 로인들이 존대를 받던 시대는 이미 력사로 되였다. 효도사회건설은 고령화 사회의 급선무    가족 중심의 공동체가 삶의 단위던 지난 시대에 로인은 당연히 집안에서 보살핌의 존재며 삶의 방식이였다면 고령화 사회는 인간의 장수와 함께 로인들의 건강,무소득,고독,무료,방치 등 문제가 주류가 되여 효(孝)란 단지 친자(親子)관계만이 아닌 사회적 모든 관계에 적용된다. 효의 정신적 가치는 세상이 어려울수록 로인공경을 중심으로 한 효문화가 우리들의 정신 속에 깊이 새겨져야 하고 실천으로 되여야 한다. 하여 우리의 사회는 로인들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다양한 사회적,경제적 대책의 실시가 필요로 효도사회 건설이 고령화사회의 급선무로 되고있다. 효도사회건설을 어떻게 할것인가?  이하는 필자가 구상해온 몇 가지 면에서의 단 세가지 주장이다. 첫째; 온 사회가 동원되여 로인들에게 로인들에게 즐거운 삶의 터전을 마련해야 한다. 본론에서 필자는 주로 조선족농촌현상을 대상한다. 다 알다시피 지금 중국 조선존집거지역의 농촌은 로인들이 지키고 운영하는 현실이다. 그래서 촌에 가면 는 원성이다. 필자는 나라와 지방정부,기업인…온 사회가 로인들들에게 즐거운 삶을 위한 환경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문시 석현진 하북촌촌 장류해도 (劉海濤 , 전국로동 모범) 는 촌장선거 때 경쟁연설에서 며 당장에서 현금 4만원을 내놓으면서 고, 도문시 석현진송림촌에서는 를  으로 채택하였다고 한다. 이번길에 취재한 일본 시즈오까대학(국립)인문사회하구 경제학과 리련화 (조선족) 준교 수는  며 고 밝혔다. 둘째; >고 하였다.  로인들의 비참상이 해소되는 것이 바로 그 사회진화의 공적인 시금석으로 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에 비춰 필자는 로인들의 비참상을 해소하는 중요한 일환으로 고령화시대에 비춰 교육제도가 갱신되고 이 뒤바침해야 한다고 본다.  과거 1000년이 발전은 지난 100년의 발전과 맞먹고 지난 100년의 발전이 지난 10년의발전과 맞먹고 또 지난 10년의 발전이 1년의 발전속도와 맞먹을 만큼 세상은 빛의 속도마냥 빠르게 변한다.  오늘의 로인들이 초, 고중까지 12년을 배운 지식으로 60살까지 살아왔다면 100세 시대를 따라 가려면 다시 한번 학교에 다녀야 한다(지금 소위 말하는 로인대학이 아닌). 30년전에 학교를 졸업한 지식으로 현재를 살아간다면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를 절대 제대로 따라 갈수없기에 자연히 뒤처지고 사회에서 쇠외될수밖에 없다. 미국은 이미 동네마다 로인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여 많은 로인들이 배움의기회를 갖는다. 배우고 싶어도 배울수 없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누구나 교육을 받을수 있는 기회가 있다. 자녀들만 공부를 하라고 몰아 세우지 말고 부모들이 대신 공부를 해서 50살에 대학을 졸업해 졸업장을 써먹을 시간이 50년도 남아 있다. 지금 도시나 농촌에서 페교된 중소학교를 로인학교로 꾸려(시설, 교원대오 등은 정부와 해당부문의 투자 필요) 중소학생과 로인들이 함께 공부하는 학교를 운영하자는 주장이다. 이에 필자는 전국서 문화수준이 앞자리를 차지하는 연변서 남먼저
171    <채근담>은 공무원들의 필독교재 댓글:  조회:6223  추천:1  2015-12-11
세상에 변하지 않은것이 없다. 이는 만물이 시간을 떠나서 존재할수 없음을 말한다. 흔히 시간이 흐른다고 하는데 흐름이란 곧 변화이다. 인간은 시간의 흔적을 살펴가면서 살아가는 지혜를 닦는다. 공자는 시간의 흔적을 "온고(溫故)"라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앞을 내다보는 것을 "지신(知新)"이라고. "온고"는 옛것을 살핀다는것이며 "지신"은 새것을 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새것을 알자면 옛것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엄청나게 변하였다. 생각도 변하고 몸가짐도 많이 변했다. 쉽게 말하면 공자시대나 조선시대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는 무척 달라졌다. 시간은 사람을 이렇게도 심각히 변화시켰다. 공자는 또 변화지만 변할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인의(仁義)"라고 했다. 변화는 변화지 않는 것에서 다스림을 받아야한다는 것을 신이며 법이며 도리라고 한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그 것은 바로 사랑하는것, 옳은 것이다. 사랑(愛)과 옳은(是)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런 철리에서 필자는 인생수양서의 첫째로 꼽히는 변할줄 모르는 을 공무원의 필독교과서로 할 것을 간곡히 바란다. 은 명나라 때의 홍자성(1573 ㅡ 1619)이 남긴 수상집(隨想集)으로 전편(225항)과 후편(134항)이 있다. 전편은 사회생활에서 지녀야 할 인간의 마음가짐을 주제로 다루었고 후편은 탈속(脫俗)한 다음 풍월을 동무하며 인간이 살아가는 즐거움을 읊고 있다. 송나라 때의 유학자 왕신민(汪信民)은 "사람이 언제나 나물뿌리를 씹어 먹고 살 수만 있다면 곧 백가지 일을 가히 이루리라"고 했다. 홍자성이 자기의 수상집 이름을 이라고 한 것은 바로 왕신민의 이 말 구절에서 유래된것으로 짐작된다. 인생 수양서에서 을 백미(白眉).로 꼽는 리유는 의 일어일구마다에 심오한 진라가 스며 있고 그것이 세상을 살아감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에는 "덕성으로 도야(陶冶)된 학문이라야 진정한 학문이다.", "덕은 재능의 주인이요 재능은 덕의 종이다. 재능은 있어도 덕이 없다면 마치 집에 주인은 없고 종들이 마음대로 살림살이를 꾸려가는것과 같으니 어찌 도깨비가 날뛰지 않겠는가"는 명구가 있다. 이는 절개와 의리, 깊은 학문 등을 아무리 겸비했다고 해도 그것이 덕성의 바탕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빛을 발할 수 없다는 경고다.  현대는 교육을 꼬집어 기능인은 만들 수 있지만 인격자는 만든다고 감히 담보할수 없다. 오늘날 고도로 발달된 과학기술과 관리 시스템으로 인하여 인류는 많은 재물를 축적하게 되였다. 그러나 이 재물은 사용법에 따라서 인류에게 무한한 행복을 가져다 줄 수도 있고 아니면 파별의 늪 속에 빠뜨릴수도 있다. 그러니 재물의  열쇠를 갖고 있는 주인들의 덕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은 부를 이룬 사람에게는 근신과 경계를, 빈천한 사람에게는 용기와 안정을, 성공한 사람에게는 충고와 경고를, 그리고 실의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는 격려와 방안을 준다. 하기에 이 인생 수양서 중 첫째로 지혜를 터득하는 황금률이며 참인생을 가르치는 동양의 라 불린다. 필자가 한마디를 부언한다면 황희, 초유록 등 력대의 청백리들을 공무원시험의 "렴정필수과"로, 을 공무원양성 필독교과서로 정하자는 것이다. 오기활
170    간부관리 《3불부(三不腐)》에 대한 생각 댓글:  조회:5844  추천:3  2015-11-27
중공중앙 18기5차 전원회는 《중국공산당렴결자률준칙》,《중국공산당 규률처분조례》를 발표했다. 《13•5》계획에는 당의 지도를 강화개선하고 반부패성과를 공고히 하며 《감히 부패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부패할수 없고 부패할 생각이 없는》 효과적인 기제를 구축할것을 건의했다. 간부의 공정, 정부의 청렴, 정치의 청명을 힘써 실현하여 경제사회발전에 튼튼한 정치담보를 제공하려는데서 《3불부(三不腐)》를 간부부패금지구로 명확히 했다. 당중앙에서 말하는 간부란 봉금을 받으면서 국민을 통솔, 지휘, 감독하는 관리들로 당원간부와 공무원을 말한다. 관리는 대체로 청백리와 탐관오리로 나뉜다. 백성을 사랑하는 선비다운 관리를 청백리라 하고 권력을 탐하는 무리와 물욕에 젖은 관리를 탐관오리라고 한다. 당중앙은 당과 나라의 관리들에게 부문(富門)에 《들어갈 생각을 말고(不想进富) 들어갈수 없으며(不能进富) 감히 들어가지 못한다(不敢进富)》는 경종을 울렸다. 하여 요즘 《3불부》가 화제로 되여 《백성들의 마음에 가장 드는 반부패조치이다》고 한다. 기뻐하면서도 지난 력사에 비춰 《진정 실시될수 있을가?》는 설전도 벌인다. 《3불부》의 관건은 관리들의 마음자세인 《불상부(不想富)》이다. 《불상부》는 관리들의 마음의 보초병이다. 관리들이 먹이를 목적한 참새로 되면 《불능부(不能富)》의 덫에 맞고 《불감부(不敢富)》의 초롱에 갖히게 된다. 관리자의 제1생명은 청렴이다. 초유록, 공번삼 등은 《불상부》란 마음의 보초병으로 《오직 나만을 빼놓고》인민을 생각하고 인민을 위했기에 백성들의 마음속에 청백리란 자리가 굳혀져있다. 송나라 려본중(1084-1145, 시인, 학자)은 1000년전에 《벼슬살이를 하는 방법의 첫째는 청렴, 둘째는 신중, 셋째는 근면으로 이 세가지를 알면 몸가짐을 알게 된다.》는 《벼슬살이 처방》을 내놓았다. 관리는 세상의 소금이 되여야 하는데 권력이 상당하고 또 상당수의 관리들이 돈벌이로 썩히는 짓을 하니까 천하가 도둑의 세상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하여 백성들은 《가난한 관리를 볼수 없다》며 텔레비죤를 보면서 《저 사람이 지금도 잡히지 않았는가?》며 눈도장에 찍힌 관리들의 결말을 기다린다. 《거부(巨富)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불평등이 존재한다. 한사람의 거부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500명의 빈자(貧者)가 필요하다.》 이는 영국의 경제학자이며 철학가인 스미스가 1776년에 발표한 국부론(國富論)의 한 단락이다. 모종 의미로 말하면 인류발전사는 권리와 권력의 쟁탈사, 부패와 반부패의 투쟁사다. 1923년의 어느 날, 시카코의 에드위드 비치호텔에는 당년에 미국 최고의 갑부 7명이 모였다. 그들의 재산을 모두 합치면 미국 국고의 총액을 초과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들의 인생말로는 비참하였다. 어느 신문기자가 그 7인 갑부가 시카코에 모였던 그날부터 꼭 25년이 지난후 그들의 생애를 추적조사하고 아래와 같은 결과를 발표했다. 철강회사 사장인 찰스슈업은 무일푼의 거지로 일생을 마쳤고 밀농사 거부 알써카튼은 파산되여 혼자 림종을 맞이했다. 그리고 뉴욕은행의 총재 리처드 위트니는 비리에 련류되여 감옥에서 여생을 보냈고 재무장관을 지낸 엘버트 홀은 감옥에서 풀려나와 집에서 죽음을 기다렸고 웰스프리트의 회장이였던 J.C.리버모아는 자살로 마감했고 국제은행 총재였던 리온 프레이저 역시 자살로 삶을 마쳤으며 부동산업계의 거부였던 이반 크루컬은 자살미수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있었다. 청렴한 사람은 청렴을 편하게 여기고 지혜로운 사람은 청렴을 리롭게 여긴다. 권력으로 얻은 부귀영화는 꽃병의 꽃처럼 쉽게 시든다. 진정한 선진국은 청렴국가를 건설하는것이다. 2003년 12월 9일 유엔의 90여개 회원국이 메히꼬에서 《유엔반부패협약》을 제정하고 12월 9일을 《세계반부패의 날》로 정하였다. 정치를 하는 요체는 공정한 청렴이고 집안을 이루는 도는 검소와 근면이다. 욕심은 차디찬 련못의 물도 끓게 만든다. 당중앙에서 명시한 《3불부》에 비춰 당정관리들이 한번쯤은 당신이 죽은 후의 모습을 생각해 보는것도 유익하지 않을가? 길림신문 2015-11-26  
169    봉림촌에서 당한 어처구니 없는 일들 댓글:  조회:6895  추천:1  2015-10-22
오기철씨 취재로 필자가 왕청현 배초구진 봉림촌을 다닌지도 10여 년이 된다. 취재중 필자는 봉림촌의 미담과 함께 어처구니 없는 이런 일들을 당했다.   170여세대가 살고 있는 봉림촌은 배초구벌 논농사의 로 불린다. 그런데 큰길과 강을 사이 둔 봉림촌의 촌민들은 새로 건설한 로 하여 정상적인 생활과 생산에 애로가 많다. 봉림촌의 는2008년에 200만원을 투자해서 새로 건설했는데 다리가 제구실을 못하는데서 촌민들은 해마다 마을에서 손잡이뜨락또르에 곡식마대를 싣고 강을 건넌 다음에 다시 큰 차에 옮겨서 타곳으로 운송하다 보니 생산비용이 타고장 보다 한 근에 3,4전씩 더 들었다.  그래서 백성들이《국가돈은 썩은 돈이냐?》며 를 관원들을 욕하는,빛 좋은, 라 부른다.  오죽하면3년전에 원 국가민위주임 리덕수일행이 봉림촌을 시찰할 때 승용차마저 를 지날수 없어서 도보로 다리를 오가(사진)야 했겠는가? 는 겨우 6년간의 수명을 완수하고 지난해 무너지는 참상을 당했다(사진) 당의 군중로선교육이 한창 진행중이던 작년 9월 11일, 국가민위 리덕수전임주임이 봉림촌을 또 시찰하였다.  촌민위원회 오기철주임이 이번의 시찰은 리주임이 3년 전에 시찰할 때 거론된 몇가지 문제가 시달되였는가를 조사하는 것이라고 기자들에게 안민고시 하였다. 촌민들은 이 촌과 이미 구면이 된 리주임이 온다니 명절옷을 차려입고 춤판을 벌리며 마중나왔다. 이 촌의 최년상로인이 리주임의 두 손을 꼭 잡고 하는 말이다. 기자들은 인민의 공복과 백성간의 대화장면을 놓칠세라 사진기에 담았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생길 줄이야?! 마을시찰을 끝낸 리주임일행이 촌부에서 촌지도자와 로인대표의 의견을 청취하는데 밖에서 모 젊은 수행인원이 기자들을 부르더니 3명 기자들의 사진기를 하나하나씩 검사하며 며 무릇 리덕수의 신변에 촌민이 찍힌 사진을 몽땅 삭제하였다. 정말 어처구니 없었다.  필자가 리덕수와 최년상로인의 친절한 모습을 담은 사진만은 남기겠다고 해도 절대 안 된다며 리주임이 회보를 듣는 장면까지 몽땅 삭제해 버렸다. 무리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 군중이 없는 군중로선교육이 어떻게 존재하고 지도자가 새농촌건설정황을 시찰하는데 촌민이 없으면 되는가? 촌을 몰린 지난 9월 6일 필자는 오기철주임에게 며칠전 폭우로 손해를 보지 않았는가를 물으며 봉림촌의 새다리건설항목추진정황을 물었더니1180만원의 자금이 락실되여 277메터나 되는 새다리를 명년 8월에 준공하게 된다며 며칠후 착공식을 한다며 기뻐하였다. 이에 필자는 다리착공식에 꼭 참가할 약속을 미루었다. 그런데 이게  또 웬 일이냐? 지난 국경절에 오기철주임과 국경절인사를 오가면서 위챗에 올린 새다리착공식사진을 봤는데 왜 알리지 않았는가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 라니 웬 말인가? 오기철주임은 습근평동지의 접견까지 받은 빈곤부축모범이며 새농촌건설모범인데 말이다. 오주임의 기분이 상한 것은 물론이고 줄곧 봉림촌의 기사를 추적보도를 해온 필자마저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필자는 봉림촌으로 이어지는 다음의 어처구니 없는 일을 지켜볼뿐이다. 오기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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