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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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    연변에서 “이웃절”을 법(조례)정명절로 정하자 댓글:  조회:3296  추천:2  2019-01-24
연변에서 “이웃절”을 법(조례)정명절로 정하자 필자는 작년 10월에 연변주당위선전부에 “연변에서 ‘이웃절’과 ‘로인교육법’을 법(조례)으로 정하자”는 건의를 제기한 계속으로   12월 말에 주인대와 주정협에 똑 같은 내용의 건의를 제기하였다. “로인법을 제정하자”는 전국적으로 문화수준이 높다고 인정받는 연변서 전국에서 제일 먼저 “로인절”을 법정일로 제정했다면 고령화시대에 또 제일먼저 “로인교육법”을 제정하고 연변의 “8.15” 로인절을 나라에서 정한 “로인절”(중양절(음력 구월구일)에 접목시키고 “8.15”를 “로인교육절”로 정하자는 것이다. 필자는 13년 전에 주당위 기관지인 “지부생활 2005년 제 11호”에 “이웃절을 내오자”를 발기하였다. 이웃간의 화목은 중화민족의 우량한 전통이고 미풍량속으로서 한민족의 미풍량속은 시대의 발전에 따라 계속 이어지고 발전되여야 한다. 특히 강조해서 말한다면 이웃사이의 화목은 조화사회건설의 기본 적인 것으로서 마땅히 온 사회의 중시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그런데 도시의 거주문화의 변천과 사람들의 생활 절주가 빨라짐에 따라 같은 아빠트에서, 같은 지붕을 쓰고사는 이웃사 이가 서로 래왕이 없고 지어 상사가 있어도 관계하지 않고 무감 각할 정도로 이웃관계가 랭담해지는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농촌 호도거리농사의 실시로 한개 농호가 하나의 생산단위로 된후 지난날의 “이웃사촌”관계와, 마을관계가 전에 비해 랭담하고 또는 약화된 형편이다. 이는 인간사회의 단결, 우애, 협조 및 공동책임의 의식과 정신을 약화시키고 있다. 이에 필자는 법적으로 “이웃절”을 제정하고 전 사회적으로 조화 로운사회건설에 유익한 활동을 벌려 단결되고 우애적인 이웃관 계를 새롭게 확립할 목적으로 “이웃절”을 내오자고 발기하였다. “이웃절”을 정하면; 1,  사회공덕을 지킴에 리롭다. 법적인 “이웃절”이 있게 되면 법규의 약속성이 있기에 “이웃 절” 을 발판으로 저마다 일종의 사회적책임감을 지키야 하기에 이웃간 에 서로 거래하고 호조호애하면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이룩하기에 노력해야 하므로 조화로운 사회건설에 기초적인  바탕이 마련 될 것이다. 2,  후대교양에 리롭다. 법정“이웃절”이 있게 되면 학교부터 가정에 이르기까지 존로애 유, 호경호애, 호방호조의 미풍교양을 앞세우기에 필연적으로 “웃물 이 맑으니 아래 물도 맑게 된다.” 3,  민족단결에 리롭다. 우리 나라는 다민족국가이다. 법정”이웃절”이 있게 되면 민족이웃 간에 여러 가지 단결에 유익한 활동과 거래가 있게 될것이니 필연적으로 다민족웃간의 단결과 진보가 촉진되기에 마련이다., 4,  부모 자식이 외롭지 않다. 지금의 “핵가족” 세대에 “이웃사촌”이 맺어지면 외자식이 외롭지 않고 독거로인들이 고독하지 않으며 이웃서로간 뒤근심을 덜수 있다. 5,  간부와 백성간의 관계가 밀접해질수 있다. 이웃사이가 밀접하면 이웃주변의 간부들이 이웃평민들의 질고를 심입하여 료해하고 백성들도 주변의 간부를 찾아서 구속이 없이 민원을 반영할수 있어 당과 대중과의 혈연적관계를 강화할수 있다 6,  빈부차이를 줄임에 리롭다 이웃간에는 빈부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이웃간에 화목하면 서로 간에 어려운 일을 함께 풀고 선각선부(先覺先富)한 자들을 선두로 하여 서로간 비기고 배우고 따라잡고 릉가하며 더불어 살아 가기 에 리롭게 된다. “이웃절”을 발기한후 “지부생활”편집부의 계획적인 홍보와 솔선적인 노력으로 2006년 4월 11일, 연길시 북산가로부터 시작한 “이웃절”은 지금 연길, 왕청, 룡정, 도문, 돈화 등 시와 현에 파급되여 “이웃절”이 자원적이고 대중적인 “필수명절”로 부상되여 몇년전의 지역“이웃절”이 이웃“친척잔치”로부터 오늘의 “동네잔치”로 파급되였다. 하여 동네방네의 많은 독자들이 “이웃절은 축하할 일입니다”는 글을 매체에 올렷고 연변예술학원의 남희철교수는 조한문으로 된 “이웃절노래”(함께하는 우리세상)를 창작하여 생방송으로 매체에 올린데서 “이웃절”노래가 연변 주민(州民)들의 마음속깊이에 자리하고 있다. 필자는 지금이 연변에서 법(조례)적으로 “이웃절”을 제정함에 튼튼한 기초, 우세, 그리고 전 사회적인 대환경이 마련된 적기(適期)라고 인정한다. 1, 연변은 “지부생활”편집부의 계획적인 조직과 꾸준한 노력으로 연길시 북산가두의 선도로 “이웃절”활동을 이미 13년간의 풍부한 경험을 쌓았고 연길시의 “이웃절잔치”가 “마을잔치”, “지역잔치”로 보급되여 장춘시에서까지 7월의 첫 일요일을 “이웃절”로 제정하기로 예정하였다.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조사연구원(정처급)진향란녀사가 연변“이 웃절”에 대한 기대이다. ㅡ 산재지구 조선족들은 이웃관계가 아주 경색되였다. 연변서 “이웃절”을 쇤다니 얼마나 흥분되던지… 연변의 “이웃절”이 연변만이 아닌 전 사회적으로 보급되기를 기대한다.  이번에 연변에 와 보니 이웃간에 서로 돕고 의지하는것을 보고 정말 사람 사는 멋과 냄새를 느낄수 있었다. 이웃 서로간의 전화가 그렇게도 빈번하고 심지어 옥수수죽을 했다며 이웃을 청했는데 정말 부러웠다. 언제부터 부모들을 장춘에 모셔오려 해도 부모들이 거절하는 원인을 이번에 와서야 알게 되였다. 마치도 이웃정이 부모자식정을 멀리 하게 하는것 같다. 2, 여론적으로 사회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이웃절”활동은 2006년 주당위 선전부의 주요사업과 주직속기관 최우수실사로 선정되였고 2010년말 인민일보 취재팀이 연길시 소영진 인평촌, 북산가두 단영사회구역의 “이웃절”활동을 취재한 후 인민일보 정치문화부 원건달부주임은 “수십년간 민족보도를 하면서도 오늘처럼 깊은 감명을 받기는 이번이 연변서 처음이다”며 인민일보에 연변의”이웃절”을 대서특필하였다. 지난해 국경절을 계기로 중앙텔레비방송국에서 특집프로 ㅡ “개혁개방40주년을 경축”해 마련한 길림성의 모델로 된 “연변”편에서 연변의 “이웃절”을 중요한 내용으로 선정하고 상당한 편폭의 생방송으로 연변의 “이웃절”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 총적으로 연변의 “이웃절”은 연변주민은 물론  길림성내외에서 거의 굳어진 즐거운 명절로 튼튼한 자리매김을 하였고 연변의 “이웃절”을 전국적으로 긍정하고 보급해야하는 주요명절로 사회와 중앙여론의 눈도장에 찍히였다. 필자는 연변에서 “로인절”의 법정(조례)명절로 제정함이 20세기 전국의 전범으로 되였다면 연변의 “이웃절”을 법정명절로 제정함도 습근평총서기가 령도하는 21세기 새세대에 연변이 또 한번 전국적으로  앞선 행보(行步)를 걷는 실제행동이라고 믿어진다. 필자는 연변의 법정명절인 “이웃절”을 하루 속히 기대한다. 오기활
276    선과 악은 어떻게 다른가? 댓글:  조회:3676  추천:0  2019-01-22
옛날에 한 스님이 제자들이 얼마나 정직한가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제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이런 질문을 했다. “만약 길을 가다가 돈이 가득 들어있는 주머니를 줏는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한 제자가 대답했다. “저는 돈 주인을 찾아 당장 돌려 주겠습니다.” 그는 너무 쉽게 대답했다. 그러니 스님이“정말로 그가 돈을 돌려줄 것인지 자못 의심스럽다고 생각했다. 두번째 제자가 대답했다. “그 주머니를 주을 때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면 그냥 그 돈을 갖겠습니다.” 스님은 저애는 솔직한 혀를 갖고 있지만 못된 가슴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세번째 제자가 말했다. “솔직히 말씁드리자면 그 돈을 그냥 갖고 싶은 유혹을 느낄 것입니다.그래서 부처님께 그런 유혹을 물리칠수 있는 힘을 내려 주십사고 기도 하겠습니다.” 이 말에 스님은 “저 애야 말로 내가 정말로 믿을수 있는 제자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돈을 좋아한다. 특히 돈 중에서도 제일 탐스러운 돈이 공돈이다. 그러나 공돈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공돈에 뒤탈이 따르는 공돈이 있다. 언젠가 “선과 악은 어뎋게 다르냐?”는 물음내기에서 소설가 헤망웨이(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소설가)가 “뒷 맛이 좋은 것이 선이고 뒷맛이 쓴 것이 악이다.”로 백점만점을 맞았다고 한다. “뒤맛이 쓴것이 악이다”에 비춰 이어지는 얘기다. 이 몇년간 당중앙에서 전개하는 부패척결마당에서 눈치를 살피던 상당급 어른의 자제분이 친구들의 반부패를 론하는 모임에서믿음으로 “그래도 아버지가 일찍 해 먹고 나 앉은것이 다행이다”며 한시름을 놓았다고 했다. 확실히 허물없는 실토정이였다. 지금 날로 틀어쥐는 반부패형세에 서 (소방차의 사이렌(경보)소리만 들려도 나를 체포하려는 경찰차가 아닌가)고 놀라하는 “어른”들이 한, 둘이 아니라고 한다. 6,7년 전만 돌이켜 보면 한시기에 상당수의 당정간부들이 “자리에 있을 때 못해 먹으면 머저리다”는 듯이 돈으로 권력을 사고 권력으로 자기의 염낭을 챙기는 “경쟁”을 백성들의 눈에 거의 드러날 정도로 벌리였다.그러기에 모시의 한 중층간부는 공개장소에서 나는 현금20만원이 없어서 국장이 못 되였다고 원망하였고 모 시의 진장은70만원이 없어서 부시장이 못 되였다며 아쉬워 했다. 모시의 L씨 국장은 재임 몇년간에 외부로부터 당치도 않는 얼뚱이까지 21명이나 되는 “새사람”을 받아드리면서 21만원의 거금을 챙기고는 퇴직 하자마자 내지로 뺑소니를 쳐 감감무소식이라고 후론한다. 이렇게  해먹고 나눕은 당권자들이 습근평새시대에 자신들의 “뒷맛이 쓸 가봐” 다행(多幸)이나 요행(要幸)을 갈망함이 어느 정도 리해가 된다. 그런데 악과 선의 분별에서 잡히면 뒤맛이 쓴 악이 되고 안 잡히면 선이 되는것이 아니라 당신들의 량심적인 자문자답으로 마음속의 악과 선을 갈랐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음속 량심전에는 다행이나 요행이 없게으니깐. 오기활  
275    정부의 “건망증”이 걱정된다 댓글:  조회:3435  추천:3  2019-01-15
일전에 “길림신문” 한정일부주필이 쓴 [추모글] ㅡ “고 정경락선생, 신문사업에 바친 일편단심”을 읽고 필을 들었다. 글은 고 정경락선생이 “길림신문”사의 고문으로 초빙된 8년간은 물론 고문직무를 떠난 후 64세 나이로 인생을 마감하는 그시각까지 “길림신문” 발전에 관심을 두고 조언을 남긴 감명깊은 사적을 기록하였다. 실로 초빙측에서 “임이부관“(任而不管”)이 아닌 “임이상용”(顧而常用), 고문측의 “고이불문”(顧而不問)이 아닌 “고이상문”(顧而常問)의 전범이라 하겠다. 통속적으로 말하면 고문(顧問)을 초빙(위임)하는 것은 정부나 기업에서 어떤 분야 에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권위적인 인물, 또는 “최고경 영자”를 고문으로 초빙(위임)하여 당 고문의 능력과 활력을 발휘시켜 자기들의 사업을 추진하려는 목적이며 수단으로 참 좋은 작법이라 하겠다. 그런데 문제는 정부나 기업에서 주동으로 되여 모모를 경제고문 또는 홍보대사로 모셔놓고는 그런 일이 없은듯이 까맣게 잊고 초빙(임명)후에는 한번도 당고문을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와 연길시인민정부의 실례이다.   2017년 8월,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에서는 건주 65주년 경축행사의 하나로 “천남지북 연변인들 고향의 궐기를 함께 꿰하기(天南地北延边人,共谋家乡崛起路)”란 명제로  간담회를 조직하였다. 하이얼그룹의 전임 부총재이며 청도길재청화(吉财菁华)투자자문유한회사 리사장인 최소화(崔少华, 돈화출신)씨가 8월 30일 간담회에서 한 쓴소리 발언이다. “기업가간담회(포럼)라고 이름을 달았으면 기업가들에게 발언기회를 많이 주어야한다. 그런데 8월29일 한시간반 넘게 진행된 간담회에서 6명기업가들의 발언에 주어진시간은 고작 20분이였다. 반면에 이미 퇴직한 지도자들을 소개하는데만 몇분이나 소요했다. 이렇게 형식적인 행사를 많이 조직하고 실제적인 내용물이 없으면 차라리 조직하지 않기보다 못하다.” “성공한 기업가, 유명한 전문가와 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우세를 고향의 발전에 기여할수 있을가를 늘 고민한다. 나는 고향에 보답한다는 마음으로 연변에 8500만원을 투자했는데 이번 경축행사에서 ‘연변의 어떤 대상에 투자했는가? 창업에서 애로사항은 없었는가?’고 묻는 정부관원이 한명도 없었다. 이번 간담회는 타향에서 온 기업가들을 위주로 조직하는 간담회라고 하기에 자본적립과 함께 많은 경험을 쌓은발언자들이 밤을 패가며 연변의 발전에 살이 되고 피가 될만한 의견과 건의들을 준비했는데 어찌하여 대회에서 록음은 커녕 기록하는 사람마저 한명도 없는가” “나는 주정부로부터 여러 기의 경제고문으로 위촉받았지만 지금까지 20년째 주정부에서 고문인 나를 찾은적이 한번도 없었으니 정말 내심적으로 매우 서운하다.”. 다음은 연길시정부“경제특사 및 홍보대사”인 라강철(李鋼哲)씨의 말이다. 강철씨는 지난해에 필자한테 이런 말을 했다. 2008 년 8 월 말에 나는(일본 호쿠리쿠대학 교수, 재일 조선족연구학회 회장)연길시정부에서 조직한 “연길시투자무역박람회”에 일본의 중국조선족기업가대표단(OKTA 치바지회)을 인솔하여 가지고 참가하였는데 생각외로 연길시정부로부터 연길시정부“경제특사 및 홍보대사”라는 임명장을 받았다. 이에 나는 너무나도 돌연적이여서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사실 나는 이런 중짐을 메고싶지 않았다. 왜냐면 내가 연변의 시골에서 농사일을 하다가 연변을 떠난지도 28 년이나 되고 연변에 대한 애착심도 별로 없는데 단 연변에 부모형제가 있으니 고향방문을 하는 정도로 연변을 다녔다. 그런데 아무런 심리적준비도 없은 나에게 불시에 이렇게 중대한 짐을 맡기니 어쩔바를 몰랐다. 다행히도 지금까지 연길시정부에서 나를 찾은 일이 한번도 없은 “덕분”에 직무책임추구는 면하게 되였다. 하지만 나는 중임을 맞고 량심적으로 보답하려는 마음으로 연변의 발전을 위하여 일본의 조선족인재와 IT 기업을 연길에 유치하기에 신경을 쓰기는 했다. 이 밖에도 필자가 목격한 일이다. 2013년 8월 7일에 도문시에서 조직한 “제4기 두만강문화포럼”에서 한 길림성문련부주석 조보명(曺保明)씨의 대회발언이다. “나는 어제 “도문철도박물관”을 참관하고 크게 놀랐다. 하여 나는 오늘 원래 준비했던 발언내용을 포기하고 새로운 내용으로 발언하겠다” “도문시에서 ‘도문철도박물관’을 ‘도문철도문화박물관’으로 개칭하고 이 철도문화박물관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하라.” “유럽에서는 2차세계대전의 유물로 포로집중영이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였다” 조보명씨는 많은 실례와 세가지 가능성으로 도문철도박물관이 세계유산으로 비준될수 있음을 생동하게 진술하여 모든 청중들의 눈귀를 밝혀주어 회의장을 흥분시켰다. 필자는 이날 포럼의 소식기사를 다른 내용을 제체놓고 “도문철도박물관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하라”로 밣표하였다. 제4차 “두만강문화관광축제”가 끝난 몇달 후 필자는 그날 포럼을 주최한 도문시책임자를 만나 “도문철도박물관 세계문화유산신청” 추진정황을 추문하니 글쎄 생각밖으로  책임자가 금시초문이라고 대답하여 너무나도 실망하였다. 사람이 늙으면 기억력이 약해진다. 그것은 뇌세포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할만큼 병이 든 탓이다. 그런데 병이 들지 않았고 또 늙지도 않았는데도 기억력이 약해 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런 증세를 의학에서 “건망증”이라고 부른다. 하긴 어떤 의미에서는 건망증도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데 적절한 료법이 된다고 한다. 쓸데없는 사소한 것들을 일일이 기억하느라면 거기에 묶여 정신이 피로해 지고 그 피로가 도를 지나면 스트레스가 쌓이게 되여 건강을 해친단다.  1962년 노벨의학상수상자 왓슨크리크 박사는 “사람은 잊어버리기 위해 꿈을 꾸고 꿈을 꾸기 위해 잠을 잔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연한 망상이나 환상에 시달리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 긴장감이 아주 없는 것도 스트레스 못지 않게 건강에 해롭다. 그러나 상기 정부는 “고문”을 모신 “큰일”을 너무나도 쉽게 잊어버렸다. 정부에서 고문을 모신 일은 지우개로 지워질수 없는 잊어서는 안될 큰일이다. 그렇게 잊어서는 안될 일들을 정부가 잊어버리면 사회가 곧 건강을 잃게 된다. 그래서 최소화, 리강철씨가 정부의 건망증이 사회의 건강을 잃게 할가봐 걱정되여 비록 서운은 하다해도 관심하는 마음으로  정부에 쓴소리를 한 것이라고 필자는 짐작한다. 오기활
274    '렴치없이 산다면 아직도 몇 십년은 문제없소' 댓글:  조회:4531  추천:0  2018-12-21
 “렴치없이 산다면 아직도 몇 십년은 문제없소” 두 “100세 로인”의 인생스토리   필자는 올해 달력의 막장을 펼친 며칠 후 당금 찾아오는 100세 시대에 현존하는 100로인들의 인생스토리를 듣고저 일전에 룡정의 김수철(94)옹과 연길의 리남조(99세)할머니를 인터뷰를 하였다.     “원래는 두 분을 한자리에 모시려고 했는데 여러가지 불편으로 이틀 건너 이렇게 만났습니다”   “둘이 만나면 할말이 많아서 더 좋았겠는데…”   필자의 수인사에 두 분이 약속이나 한 듯이 이렇게 답하며 무척 아쉬워 했다.     필자는 같은 물음에 같은 형식으로 “대답을 간단히 하세요"로 인터뷰를 이었다.   무례로 되지만 로인들의 장설을 “짧게”하며 말 막이를 해야했다.   김수철은 연변농학원교수로1987년에 정년퇴직을 한 후에 여러 권의 책도 출간하고 한국과 일본의 학술무대에서 무게 있는 론문을 수편 발표했다.   그리고 “이미 출판된”길림성식물명록”에 빠진 것이 많아 내가 보충해야한다” 며 최근 몇 년간에 고군작전을 하면서 한평생을 채집, 정리한 수천수만점의 식물표본에서 2300종을 선정하여 그림까지 배합하여 “길림성식물도감”편집을 마무리 하였다.   리남조할머니는 할아버지, 아버지, 언니(부양사촌언니)가 반일렬사가정에서 자란7남 1녀 8형제로10살부터 어머니를 도와 가사와 농사일을 하였다. 결혼후2남 6녀의 어머니로 남편을 일찍 잃고 혼자서 자식들의 글공부를 섬기면서 슬하에 박사, 석사, 의사, 대학교수 5명을 키워낸 존경스러운 어머니이며 자랑스러운 할머니다.    할머니는 딸집에 놀려 다녀도 그사이에 볼 책과 신문을 챙기는 기억력이 좋고 한어말이 순통한 “현대할머니”이다.   문; 언제 중국에 오셨습니까? 김: 할아버지가 조선 함경북도명천군에서 50세에 사망한 아버지의 유골을 등에 업고1909년 음력 7월에 가족 10명을 이끌고 600리를 걸어서 조양천백석구에 정착하였다. 나는 백석구출생이다. 리: 우리의 원적은 한국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무의리이다. 백년 전에 증조할아버지가 가족을 데리고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단동 ㅡ 심양 ㅡ 해림에서 두루 살다가 나중에 흑룡강성 동경성에 정책했다. 나는 심양태생이다.   문: 문화정도는요? 김: 7살에 서당을 다니기 시작하여 10살에 소학교를,,, 최후의 학적이 대학 1학년이다. 리: 할아버지한테서 한글(韓文)과 한자(漢字)를 배우다가 할아버지가 “사람이 까막눈이 되여서는 안 된다”며 사비로 6년제 소학교를 세운후 4년간 소학공부를 하였다.    문: 결혼은 언제 하였습니까? 김; 백부님의 강권으로 연길국민고등학교 2학년을 다닐 때인1941년 1월 31일에 결혼하였다  리: 결혼을 말하자니 힘들다. 이때까지 비밀로 지켰다.  내가 18살 때 8남 1녀 형제네 막내아들의 눈에 들어 부모들이 그 남자가 병자인 것을 모르고 둘이 만나본 한 달 후인 10월 24일에 결혼시켰다. 그런데 결혼하자부터 앓는 남편을 보고 의사가 부부생활을 하면 안 된다기에7년간을 혼자서 지냈다.    25세에 5년 년상인 김병훈이란 남자와 결혼하고 한동안 임신을 못하다가 익모초를 부지런히 달여 먹었더니 1947년부터 시작하여 2년 터울로 6녀 2녀를 출산하였다. 나의 결혼은 “꽃봉오리를 맺고도 꽃을 피우지 못한” 실패결혼이다.   문: 지금의 건강상황은 ? 김: 유전관계인지 허리가 구불고 귀가 슬 들릴 뿐. 지금도 안경을 모르고 몸에 로인반점이 한개도 없다. 허리가 구불었지만 아무런 불편이 없다. 자식들만 안 말리면 산도 마음대로 다니고 달리기경기에도 나갈수 있을 정도로 건강하다. 리: 지금도 안경이 없이 신문도 보고 바늘귀도 꿴다. 썩 오래 전에 딸집을 가다가 물도랑에 넘어져서 무릅뼈가 탈골했던 후유증으로 무릎이 가끔씩 아픈 외 아무런 이상이 없다. 단 이발이 부실하여 십년 전에 8500원을 팔아 치료를 했는데 요즘에 불편해 한다며 자식들이3000원을 투자해 틀이를 했다. 몸에 로인반점도 없다. 건강은 우리 집에서 누구도 나를 못 따른다.   문: 건강비결은 무엇입니까? 김 : 몸에 해가 되는 일을 안 한다. 담배는 배우지 않았고 젊어서는 술상에 앉으면 빼갈을 한 근을 남아 마셨는데 지금은 절제한다. 식약동원(食葯同源)이라 식단은 그저 먹기 위해서나 맛을 위해서가 아니라 건강영양을 따져서 배치한다.  나는 쑥, 되꼬리 등 길옆의 풀과 뜸으로 건강을 지키며 병원을 모르고 건강하게 살고 있디. 뜸은 살을 태워야 한다. 살을 태우지 않는 뜸은 효과가 거의 없다 “동의보감”을 쓴 리조말기 어의 허준도 뜸은 살을 태워야 효과가 있다고 말하였다.  리: 나는 늘 편안한 마음으로 남을 잘 받아 준다. 90세에 뇌출혈로 하루간 병원서 혼수상태에 처했다가 6일만에 출원하였다. 나는40세부터 의학서적을 보면서 스스로 여러가지 건강운동을 만들어 가지고   50년을 견지해 왔다. 얼마 전에 아들이 발운동을 이렇게 하면 좋다고 알려주니 나는 그 발운동을50년간 하루도 빼 놓지 않고 견지했다고 하니 놀라 하였다.    문: 이제 몇 년을 더 살수 있다고 자신합니까? 김: 교통사고만 없다면 렴치없이 살 것 같다.  교통사고를 피하기 위하여 길을 걸을 때 다른 생갹을 안 한다.  리:. 먹을 것을 제대로 먹으니 운동원처럼 건강하지는 안지만 지금 생각에 아직도 몇 십년은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문: 지금까지 잘했다고 하는 일이 있다면? 김: 아버지의 결정에 따라 결혼 한 것이고 조강지처를 만나 사상을 개조한 것이며 우리 민족의 전통을 지겼고 계자로 들어가 백부를 잘 모신 것이다. 한눈도 팔지 않고 끝까지 식물학을 지켰고 한 우물을 판데서 오늘의 일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특히 잘한 것은 뜸으로 건강을 지키며 사업을 보증코 완성한 것이다.   일생을 아껴 쓰고 아껴 먹으며 간고분투하며 나의 사업에 모든 경제를 소비한 것이다. 경제가 딸리는 상황에서 일생 동안 배울 공구서적을 준비했기에 지금 내 집에서 자료를 찾을수 있다 내가 수장한 종이책들이 연변대학도서관보더 더 구전한 것 같더라. 리: 잘했다고 생각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 재혼 때 둘이 털털 이로 만난 것이 잘한 것 같고 자녀들을 잘키운 것이 자랑스럽다.    문; 아쉬웠던 일이 있다면? 김: 비록 일심정력으로 일을 했다지만 그래도 옛날의 노력이 부족한 것이다. 학술면에서 재간을 나타내자는 욕심이 없었다. 이면에서 기술(대인관계 기교)이 부족했다. 출세를 하자는 생각이 없이 그저 자기의 능력을 믿고 하면 된다고, 잘하면 인정해 주겠지 생각하고 령도들과의 접근을 멀리한것이다. 리: 생활이 그렇게 가난하면서도 없다는 말을 안하고 너무 간고히 살아 온 것이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어머니를 소설로 쓰지 못한 것이 아쉽다.   문; 억울한 일이 있다면? 김: 크게는 없다. 내 잘못이 많다. 리: 한때는 내가 가도에서 련조장, 선전워원으로 공작하다가 감독원을 하라니 나는 남을 감독할 자격이 없다며 사양을 했다. 그런데 오빠가 일본놈들에게 총살 당한 아버지의 원쑤를 갚겠다며 집을 나갔는데 후에 보니 토비로 되였다. 하여 한때는 가도에서 오빠의 문제로 “可疑分子”로 몰려 모든 사업을 박탈당하였다. 할아버지, 아버지, 언니가 항일렬사인데 오빠문제로 렬사가족을 묵과하고 “가이분자”로 몰리니 억울 하였다.   문: 반성되는 일은 없는지요? 김: 가정성원에 대한 관심이 부족 했고 만년에 부인의 병조리를  딸에게만 맡긴 것이 미안하고 후회된다. 리: 이때까지 “예, 예”하면서 살아왔기에 반성할 일이 별로 없다. 마음으로 가책되는 일이 한 점도 없다.   .문: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김: 가족에 대해 말한다면 자녀들이 결혼하자 자립을 했다고 경제적으로 돕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 사회에 대해 말한다면 사회에 대한 관심이 적고 정치를 불문하고 “마이퉈우 쿠깐”(埋斗苦干)만 한 것이다.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리: 지금까지 우리가문이 좋은 가문인지 아니면 나쁜 가문인지를 알려줬으면 좋겠다.(뜻인즉 할아버지, 아버지, 언니의 항일력사기록이 없다고 ㅡ편자)   문: 효도란? 김: 효는 “백행지원”(百行之源)이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하는 사람이 나라에 충성할수 없다. 효는 나의 마음속 기둥으로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았고 이상분을 존경하고 내가 할수 있는 데까지 노력하며 책임을 지켰다. 리: 효는 부모님이상 조부, 증조부…에 대상해 쓰는 말이다. 녀자가 절개를 지키면 렬녀라 하고 훌륭한 안해를 조강지처라고 훌륭한 어머니를 현처량모라고 한다.   문: 자식들에게 할말이 있다면? 김: 자녀들게 크게 요구하지 않고 아이들과 모순도 없고 기대도 안한다. 나는 나절로 살고 너희들은 너희로 편리대로 살면 된다. 리: 아무런 요구가 없다. 너희들끼리 잘 살면 된다.   문: 그 년세에 이성에 대한 생각이 나는가요? 김: 남자니까 미녀가 나타나면 지금도 마음이 움직인다. 아니라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나는 사상을 개조하면서 조강지처를 지켰음을 자랑으로 느낀다. 한때는 리혼도 하자고 했다. 부부간에 싸움이 없었다면 거짓이다. 리: 나는 이성을 말하면 듣기도 싫다. 100세에 이성을 론하는 것은 나발이다. 총명한 증손들에게 빠진 재미로 산다. 나는 혼자 7년을 지날 때 대정원에 다니며 공부를 하고 중학교도 대수 다녔다.   인터뷰채록을 정리하면 김수철교수는 효를 백행지원으로 하고 풀과 책을 동무하며 평생식물학을 연찬하는 불로송이고 리남조할머니는 긍정적인 사고로 생을 지키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의 견증인이였다.    오기활 사진배합( 4장) 김수철 1, 최근 2년에 내몽골에 다니며 이 사진기로 수천장의 사진을 찍었다. 2, 이 토배기현미경을 리용하여 2600여가지 식물표본을 그렸다.  리남조 1, 지금도 안경이 없이 바늘뀌도 께고 신문도 본다. 2, 젊은들에게 당신이 고안해낸 건강체조를 전수한다.    
273    <<우리 말로 말해라…>> 댓글:  조회:3763  추천:0  2018-12-09
 11월 27일 “재일 조선족녀성들 우리말 지켜 10년”이란 “길림신문”의 기사가 참으로 마음에 안긴다. 3년전 필자가 재일 조선족녀성회 전정선회장인터뷰때 그의 “최대의 고민이2, 3세대들에 대한 언어교육이다”고 2008년에“재일조선족어린이교실”을 출산하였단다. 황유복(중앙민족대학)교수는 “다른 민족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민족특성을 상실하는 순서는 제일 먼저 민족의 언어를 상실하고 다음은 음식습관을 상실하며 마지막으로 가치관을 상실한다고 한다.”고 하였다. 일본서 대학교수로 지내는 아들이 8년 전에 결혼식을 올리고 돌아갈 때 “앞으로 자식들에게 우리말을 잘 배워주는 것을 효도로 하겠습니다”고 약속하였다. 아들부부는 자녀들에게 우리말을 배워주는 것을 “가훈”으로 일상생활에서 꾸준히 지켜왔다. 심지어 며느리가 공무로 한국에 다닐 때마다 시끄러워 하지 않고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돈을 투자하며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다니게 하였다.  아들은 애들이 보육원(유치원)에서 돌아오면 항상 “우리말로 말해라”로 단속하였다. 부모들의 끌진 노력은 헛되지 앟았다. 지금5살짜리 손녀의 언어표현은 한국드라마의 동역배우와 다름이 없고 심지어 할아버지가 “텔레비를 죽여라”면 “죽여라고 아니고 꺼라고 해요”하면서 어른들의 우리말 사투와 틀린 말을 그자리에서 바로잡는다. 필자는 애들이 우리말을 하는 것과 효도하는 것이  정비례라고 체험했다. 손녀, 손자는 매일 잠자기전에 “할아버지, 할머니 편이 주무세요”라며 배꼽인사를 하고도 매일 아침이면 “할아버지, 할머니 편히주무셨어요?”며 첫인사를 올린다.    어린 손군들은 자기들이 먹었던 입자리를 낸 과자나 빵을 이상분들게 절대 못드리는 것으로 엄격히 지켰다. 한번은 3살짜리 손자가 제일 좋아하는 딸기를 사다주니 자기가 입을 대기 전에 할아버지부터 시작하여 누나몫까지 챙기고 나니 자기가 먹을것이 없으니 울음보를 터뜨릴 뿐 이미 나눠드린 딸기를 찾자고 하지 않았다. 모종 의미에서 민족이란 언어의 공동체이다. 이에 황유복교수는 “한 민족을 형성하는 5대 요소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언어다”고 한다. 청나라를 세운 만족은 본 민족의 언어를 쓰지 않은데서 만어가 소실되여 지금 중국전역에서 만어를 아는 만족이 겨우 10여명 밖에 없다니 만족이란 공동체를 운운할 수 있는가? 지금 산재지역의 조선족아들이 후세들에게 우리 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적극 활약하고 있는데. 대련서 제4회 우리말학교협회 교사연수회가 열렸다는 소식이 듣던 희소식이였다. 동북아 간판통역가로 주목받는 일본 ㈜JCK후렌즈 장경자 사장의 체험이 “우리 말을 잘하면 외국어도 잘한다”이다. 오기활  
272    개 같은 훌륭한 인생 댓글:  조회:3490  추천:0  2018-12-01
 일본에 있는 5살짜리 손녀가 언제부터 “할머니가 지금도 누리를 못 잊는데 나도 누리사진을 봅시다”기에 지난 90년대에 부인이 집에서 사양하는 애완견인 누리를 안고 찍은 사진을 월전에 보내 줬다. 20년 전 우리가 사양한 애완견은 인도영화 “누리”를 본따 작명한 것인데 이 영화는 한 아가씨가 사양하는 누리라는 애완견이 녀주인을 강간하려는 망나니와 결사적으로 싸우는 감동적인 사연을 각색한 영화이다. 일전에 필자는 “개 같은 훌륭한 인생”이란 글을 읽었다. 글은 어느 마을의 3년생 어미개가 한 집에서 새끼를 낳다가 죽은 어미돼지를 대신해 애기돼지들에게 자기 젖을 물려 기른다는 이야기였다. 개가 인간과 제일 가까운 동물이라는 것은 자타가 다 아는 사실이다. 개는 1만 5전년 전에 지구에 출현한후 기원전 600년 전에 가축화하였으니 인간과의 인연이 아주 오래다. 그 때문에 영특하고 충실한 개에 대한 이야기도 수없이 있다. 술에 취해 쓰러져 잠을 자는 주인에게 접근하는 산불에서 주인을 구하기 위해 불을 끄다가 목숨을 잃은 사례, 지진을 예감하고 갖은 수단으로 주인에게 암시하여 긴급한 위험에서 주인을 벗어나게 한 사례, 주인이 죽은 뒤 단식을 하면서 주인이 즐겨 찾던 자리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사례, 주인의 묘소에서 주인을 동무하고 지켜주는 감동적인 사례…. 충견들의 사적이 너무나 기특하고 감격스러워 충견을 추모하는 개탑기념비도 한, 두 자리가 아니다.  개는 의리만 있는 것만이 아니였다. 개도 인간이 못지않게 희로애락을 느끼고 일정한 생활규범을 가지고 있었다. “개의 감춰진 삶”이란 책은 개들이 감정적으로나 지적으로, 또 생활전통에 따라 그 나름의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들을 기록하였다. 개들끼리 만났다고 모두 친구가 되는 것이 아니며 사랑과 결혼의 일정한 절차도 갖추고 있다. 개는 또 아무 곳이나 마구 돌아 다니는 게 아니라 130평방마일안을 탐색 한다. 이런데도 우리가 흔히 못된 사람을 일러 “개 같은 ㅇ ㅇ”라고 하는데 이쯤 되면 그런 말을 삼가했으면 한다. 반대로 인정이나 인심이 박약한 사람을 “개보다 못한 ㅇㅇ”란 평을 하는 것이 다행이기도 하다. 일본서 보니 애견이 뒤를 보면 견주가 항문을 깨끗하게 닦아 주었다. 미국의 한 견상(犬商)은 거친 옷차림에 끌신을 신고 개를 사려온 손님에게 “당신은 개를 살 자격이 없습니다”며 그한테 개를 팔지 않은 기사도 있다. 오기활   
271    내가 나를 아는 것 댓글:  조회:3479  추천:0  2018-11-17
 인간은 아는 것이 많으면 자만하기 쉽다. 지식을 좀 쌓았다 싶으면 고집스러운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려 한다. 하여 편견이 생기고 독단도 생기며 시시비비가 일어난다. 나중에 아는 것만 믿고 설치던 자가 무슨 덫에 걸리기 마련이다. 하다면 이러한 병을 고치는 데 무슨 약이 없을가? 있다. 지혜라는 약이 있다. 지식은 사물을 알게 하지만 스스로를 과신 하여 나중에는 “아는 것이 병이다”는 뒤 말을 남긴다. 하지만 지혜는 수선 내가 나를 알게 하고 설 자리를 알도록 한다.  공자는 분수(守分)를 지키라고 했다.  공자의 분수 분별은 시비를 가리기 위한 분별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서로의 립장을 바꾸어 느껴보고 생각하며 리해하고 판단하는 분별이다. 이러한 분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내가 나를 알게 하고 돌이켜보게 하고 반성해 보게 한다. 되돌아 볼 줄을 안다는 것은 옛 것을 돌이켜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옛 것이 선한 것이면 택하고 악한 것이면 버릴 줄 알 때 사람은 스스로를 들여다보게 된다 “력사는 배울 것이 없으면 버릴 것을 배우라”고 한다. 우쭐해 하는 것보다 자신이 자신을 분명하게 알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교원은 교원답게, 학생은 학생답게 ……답게 말이다. 저마다 … …“답게” 했는가,  또 답게 하고 있는가를 반성하고 분명히 해야 한다. 그래야만 스스로 겸허하고 스스로 정직해 진다. 문제는 우리가 善함에서 자신이 얼마만큼 거리가 멀어졌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흔히 다른 사람의 모습은 잘 보지만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보기는 쉽지 않다. 자기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안다. 자신의 목소리는 기관(气管)의 진동을 통해 들리기에 원성을 알 수 없다. 자기 목소리는 록음을 통해 들어야 자신이 생각하는 자기 목소리와 너무 다르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자신보다 남을 더 잘 알게끔 만들어진 것이 바로 우리다. 현대일 수록 “나를 잘 아는 일”이 인생철학공부의 기본으로 된다. 우리는 자신을 알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하여 “나는 누구인가?”는 물음에 떳떳하게 나설수 있는 존재가 되여야 한다. 우리가 스스로를 돌아봐야 현대문명의 세파 속에서 내가 얼마만큼 약(악)한가를  확인면서 선함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오기활         
270    항일가족 99세 할머니의 간절한 원망을 들어본다 댓글:  조회:3491  추천:1  2018-10-29
 “어찌하여 우리를 좋다, 나쁘다로 안 갈라주오?” 월전(9월 5일)에 필자는 한국 친구로부터 “나의 후배가 중풍에 걸렸는데 오선생이 쓴 책(시대의 맥박과 더불어 숨을 쉬는 사람들)의 587페지에 실린 김의사의 중풍치료약을 보내 주세요”라는 부탁을 받고 연길시 동아(東亞)진료소 김설희소장을 찾았다. 지난 세기 60년대에 김소장은 도문서 필자의 누님네와 길을 사이 두고 사이좋게 지낸 이웃이다. 볼일을 끝낸후 김소장의 “올해 99세인 친정어머니가 지금도 건강에 아무런 문제없이 정정히 보냅니다.”는 자랑에 호기심이 강한 필자는 김소장 따라 그의 저택으로 갔다. 10살 때 상한 손가락을 보이면서 가족항일사를 얘기하는 리남조할머니 “어머니, 손님이 왔습니다. 누군지 맞춰 보세요” 네쩨 딸이 어머님의 방문을 열며 하는 말에 백발이 풍성한 머리에 함박꽃 얼굴로 잔 웃음을 피우던 할머니가 한참후 “오기자구만!” 하면서 급히 침대에서 내려 필자의 두 손을 반갑게 잡아 주었다. “나를 이렇게 쉽게 알아 봄두?”  “정말 대단하꾸마!” “나는 오기자가 쓴 책들을 다 읽어 봤소, 정말 자랑스럽소!” 필자는 100세 할머니의 둘째 딸(김성희)과 도문중학교 동반동창이다. 그때 성희는 얼굴이 예쁜데다가 노래까지 잘하여 반에서 인기였고 그의 어머니(李南祚)는 도량이 넓고 선량하며 특히는 세상사에 박식한 것으로 동네의 인기였다. 필자를 만난 할머니는 소식이 없던 아들을 찾은 듯 그렇게도 기뻐하며 걸상까지 챙겨가지고 “오늘은 기자와 무릎말을  하껬소”며 웃음꽃을 피웠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버지부터 아버지, 언니까지(사촌언니 李勤淑, 공산당원,  아버지가 언니네 생활난으로 언니를 부양했음)  항일활동으로 밖에서 돌다 보니 리남조는 열살 때부터 (형제 7남1녀) 어머니를 도와 가무며 농사일을 도와 나섰고 남편이 46년 전에 사망하다보니   혼자서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하면서 5명의 자손들을 교수, 의사, 박사로 양성한 박사가정 어머니(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당신의 이름을 오얏 李, 앞 南, 복조 祚 라고, 原籍이 한국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무의리(慶尙北道 醴泉郡 龍宮面無依里)라고 더듬없이 말하고 나서 증조할아버지의 이름도 오얏 李 , 셀 數, 으뜸 元으로 리수원이라고 알려 줬다. 할머니는 근 백년전에 부모 따라 조선의 신의주를 거쳐 단동 ㅡ 심양 ㅡ해림 에서 살다가 나중에 동경성에 정착했다며 당년에 월강민들이 불렀다는 설음과 한에 넘친 “단동교”노래의 가사까지 술술 외웠다. 그리고 80년 전에 할아버지(리동락)를 따라 리향 30년 만에 고향에 가서 선조들의 산소를 찾아보았고 동네 친척에게 선조들의 산소를 잘 지켜달라며 두 마지기(2무)의 땅을 무상으로 주고 왔다는 이야기까지 곁들었다 할머니의 한어수평은 한족과 다름이 없다는 느낌을 주였다. 할머니에 따르면 항일독립군인 할아버지(리수원)는 “사람은 까막눈이 되여서는 안 된다”며 사비를 팔아 동네에6년제 사립학교를 세웠고 아버지(리대성)는 항일을 하다가 일본놈들에게 학살되였고 언니(리근숙)는28세 나이에 일본놈들에게 학살되였다고 한다.   “오기자, 나는 주덕해전을 통독하면서 한 가문, 한 사람의 좋고 나쁨을 잘 알게 되였소, 그런데 우리 가문은 지금까지 좋은 사람들인지 나쁜 사람들인지를 모르고 있소.” “지금까지 중국에서 알려주지 않으니 한국에 물어 볼가,  조선에 물어 볼가,  아니면 일본에 물어 볼가?”(뜻인즉 가문의 항일력사 기록이 없다는 것 ㅡ 편자) 이렇게 물어보는 할머니는 당년에 아버지 등 5명이 일본놈들에게 학살된 사실은 후에 주보중장군한테서 알게 되였고 언니의 사적은 주보증장군의 부인 왕일지가 썩 후에 당지 해당부문에 리문숙의 항일사적을 곁들어서야 언니의 약간한 사적이 세상에 밝혀지고 목단강에 리근숙렬사비가 세워졌다고 한다. 할머니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도와 가사를 맡았다면서 10살 때 일제놈들이 툐벌하려 온다는 소식을 듣고 피난을 가면서 큰 돌로 돼지굴 굴문을 받쳐놓다가 그만 오른쪽 셋 째 손가락을 돌에 상해 석달간이나 고생했다고, 지금도 상한 손가락의 상처를 만지면서 “너도 나와 함께 백살을 먹는구나!”며 그때 일을 떠 올린다며 손가락 “자랑”을 하였다. “나는 지금 자식들더러 납들지 말고 조용히  살라고 당부하오, 아니면 아버지가 항일렬사라고 해도 아무런 흔적이 없고 자식들만 고생을 시켰는데 납둬서는 무얼하오?”  “우리 집에 돈은 없고 자랑거리라면  나에게 박사자손이 5명이라는 것 뿐이요 ” … … “우리가 돈은 관계하자 말고 어머님의 치아를 몽땅 새롭게 바꿔드리자” 이날 자리를 같이한 자식들의 말참견에 필자는 고종명을 앞둔100세 로인에게 제철효도를 하는 자식들에게 머리가 숙여졌다. 영국의 유명한 력사가 에드워드핼릿카(E.H.카)는 “력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과거는 현재의 빛에 비춰졌을 때만이 비로소 리해될수 있으며 또한 현재도 과거의 조명속에서만이 충분히 리해될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비춰 필자는 한세기를 살아온 리남조의 눈물겨운 구술사가 대를 이을 영원한 력사로 기록되여 오늘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물론 미래에 살아갈 후세들에게 빛과 호소력으로 될만한 민족의 교양서로 하루속히 세상에 태여 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날 필자를 만나 그만큼이라도 처음 마음속 원망을 토로 했다며  기쁘하는 할머니는 기어코 층집에서 내려와  대문밖 멀리까지 필자를 전송하였다. 오기활 사진설명’ 2, 대문밖까지 필자를 전송하는 100세 할머니와 함께 기념사진을 남겼다. 3, 이날 자리를 함께한 두 아들과 김설희부부  
269    날강도와 돌팔이 댓글:  조회:3445  추천:0  2018-10-16
  피땀을 흘린 만큼 돈을 벌어 재산을 일구는 일은 너무나도 당당하고 자랑스럽다. 피땀으로 번 돈은 랑비하거나 탕진되는 법이 거의 없다. 그러나 남의 등을 쳐서 돈을 챙긴 인간들은 돈이 아까운 줄을 모르기에 검은 돈을 람용한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그 사람이 돈을 쓰는 것을 보면 그 돈이 어떻게 왔는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정치와 장사꾼이 야합을 하면 백성들이 낸 세금을 갖은 수단으로 나누어 먹으려고 애를 쓰고 권세가 돈맛을 들이면 될 일을 못되게 해서 돈을 후려내고 안될 일을 되게 해서 더러운 돈을 챙긴다. 그래서 “지금은 물어보면 될 일도 안 된다고 하고 안 되는 일도 돈을 내면 되니깐 물어보지 말라”는 말이 있다. 뢰물을 챙기며 나라의 세금을 잘라내고 백성의 돈을 뜯어먹는 놈을 날강도라 하고 사람의 약점을 악용해 돈을 뜯어내는 놈을 돌팔이라 한다.  검은 돈, 더러운 돈, 그리고 사람을 잡는 돈이란 본래 살인강도의 것만이 아니다. 손에 칼을 들고 강도질을 하는 도둑놈은 내놓고 도둑질을 하기에 잡을 수 있지만 뒤로 뢰물을 챙기고 나라의 세금과 백성의 돈을 잘라먹는 날강도와 남의 등을 쳐먹는 돌팔이는 버젓하게 행세를 하면서 도둑질을 하기에 쉽게 눈에 뜨이지 않는다. 사회나 주변을 살펴 보면 날강도(부패관리)도 많고 돌팔이(의사, 집법자, 정상배..)도 많다. 해당 자료에 따르면 한심하기로 전국에서 상반년에 빈곤부축사업령역에서만 6만 1500명의 “날강도”와 “돌팔이”를 처리했다니 말이다. 호화롭게 살면서 출세했다고 으스대는 날강도와 돌팔이들의 꼴은  들통이 나고 천벌을 받게 마련이다. 오기활                
268    “조선족이 앵무샌가?” 댓글:  조회:2889  추천:0  2018-10-15
 일전 훈춘서 아이 첫 돐생일에 참가하였다. 그런데 “자랑스런 우리 아이 첫 돌잔치”란 현수막이 방영되자 미리 준비가 있은 듯이 자리를 같이한 80대 할머니가 “조선족이 앵무샌가?”며 한바탕 불만을 토로하였다. 20대부터 교직에서 정년퇴직을 했다는 이 할머니는 ”우리는 ‘첫 돍’이라고 배워줬는데 왜’ 첫 돌’ 이라고 하냐?” “우리는 ‘려관”이라고 배워줬는데 왜 ‘여관’이라고 하냐? ...며 조선족이 앵무샌가며 한바탕 공소했다. 앵무새는 사람의 말 흉내를 잘 내기에 흔히 남의 말흉내를 잘 내는 자들을 앵무새에 비긴다. 필자는 “첫돌”이 맞냐, “첫 돐”이 맞냐를 판단하기 어렵지만 필자가 알기로는 건국후 “중국의 조선어문자는 평양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주은래총리의 지시에 따라 중국의 조선어문자규범을 평양을 기준으로 하였다.  이에 따르면 '돌'은 생일을 표하고 '돐'은 주기를 표하는 것으로 사용이 구분되였다. 한국도 예전에는 “돌”과 “돌”을 구분하여 사용하다가 후에  “표준어 6항에 근거하여 그 같은 구분이 불필요한 것으로 '돌'로 통일했다”고,  “려관”은 "북한어"라고 사전에 밝혀있다. 그런데 나라의 개혁개방과 함께 한중교류의 심화와 한류의 영향으로 상당한 부류의 조선족들이 한국을 따르고 한국을 흉내 내는 것이 류행으로 된 데서 연변의 조선족들이 앵무새마냥 한국말을 하느라고 말끝마다 어색할 정도로 “요”를 달았고 조선어문자규범도 한국을 본 땄다. 례하면 일제 때는 일제의 강압적인 “창씨개명”으로 조선인들이 부득불 일본성과 이름을 가졌다면 지금은 조선족인(朝鮮族人) 들이 누구의 강요가 없는데 스스로 자기의 리(李)씨 성을 이씨라 부르고 쓰며 수풀 림(林)씨를 맡을 임(任)씨로 부르고 쓰며 "창씨"를 했다. 훈춘할머니는 바로 이런 사람과 현상을  “앵무새”라며 비난했다. 필자의 눈에는 물론 “앵무새”도 거슬리지만 아예 우리의 말과 문자를  외면하는  “덜된 사람”도 눈에 거슬린다. 연변텔레비를 보면 한복차림을 한 인민(당)대표들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말을 버리고 한어를 하며 조선족을 대표한 부분적 지도자들마저 우리 말을 외면하는 것은 물론 아무런 꺼리낌도 없이 기자들 앞에서 “我根本不㸔朝鮮文”(나는 근본상 조선문을 안본다)라고 자랑을 했다. 이 밖에도 조선족들이 출연하는 ”가짜 연출”도 어색이 아닌, 창피할 정도로 필자의 눈에 거슬린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례복, 상(喪)복, 작업복이 분명한데 텔레비를 보면 조선족녀성들이 명절한복차림으로 벼가을 하고 사과배를 따는데 그래 이렇게 때를 모르고 옷을 입은 화면을 보고 욕설이 뒤따르지 않겠는가?  필자가 취재한 어느 화백은 조선족들이 평상시에 민족복장을 입지 않기에 아무 때나 소수민족의 복장을 그리기 위해 서장을 간다는데 말이다.  필자는 무척 대고 한국을 흉내 내는 “앵무새”, 자기 민족의 말과 문자를 외면하는 “덜된 대표”, “덜된 간부”, 그리고 “가짜 연출”을 만들어 내는 “무지한" 도연…등등의  주범들은 모두가 타민족이 아닌 우리 민족 자신이다고 감히 말한다.  이에 비춰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4기 인대상무워원회는 9차 회의에서 9월 2일을 《조선어문자의 날》로 결정하면서 “조선어문자의 날”을 제정함은 사회적으로 자치민족언어습관을 존중하고 조선어발전의 량호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민족단결사업을 추진하고 민족전통을 계승하며 민족의 우수한 문화와 특색경제를 발전시키고 조선어 문자사업을 번영 발전시키기 위함이다”고  밝혔다. 이로보아 “조선어문자의 날”의 제정은 우리 민족이 자기민족의 문자와 언어를 홀시하고 잃어 버림을 반대하고 방지하기 위한 하나의 법적 조치라 하겠다. 조선언어문자의 규범화, 표준화 및 그 건전한 발전을 도모하는 것은 미룰 수 없는 문화적 책임이고 사회적 의무이다. 모종 의미에서 말하면 민족이란 언어문자의 공동체다. 언어문자를 상실하면 민족정체성이 사라진다. 청나라를 세우고 중국을 통치하던 만족은 본 민족의 언어문자를 쓰지 않은데서 만어가 소실되여 지금은 중국전역에서 만어를 아는 만족이 겨우 10여명밖에 없다니 만족이란 공동체를 운운할수 있는가? 지금은 글로벌(세계화)시대다. 글로벌 시대에 우리는 더욱 정신을 가다듬고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 우수성과 자주성을 고수해야 한다. 글로벌시대에 우리가 자기 민족의 말과 글조차 모른다면 어찌 민족의 군체며 민족의 자질을 운운할수 있겠는가! 오기활                                                               
267    <<통일의 론리는 간단하다, 친하면 된다>> 댓글:  조회:4304  추천:2  2018-10-10
 이 글은 필자가 2014년 4월 26일에 한국 영문월간 (디플로머시)잡지사 임덕규(任德奎)회장 인터뷰이다. 최근에 조한, 조미를 선두로 한 국제적인 평화대기후의 변화로 조선반도의 영구적인평화정착에 큰 가망이 현실로 다가 오니 필자는 당년에 발표를 안 했던 이 글을 떠올리며 오늘 그때 원고를 그대로 올린다. 그때 나이 79세인 임회장의 건강이 4년(2010년) 전과 다름없고 자애로움에 예지가 담긴  그의 실눈웃음은 그가 눈을 떴는지 감안는지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효(孝)를 백행지원으로 는 임회장은 스스로 자기는 전세계 평화를 창조하려 다니는 사람이다며 필자가 어리둥절할 정도로 큼직큼직한 세상일을 들려 줬는데 화제마다에 로 부언을 했다.  임회장은 전략으로 지금까지 에 세계 여러 나라의 정상들을 400여 명을 올렸는데 360여명은 그가 직접 인터뷰를 하였다. 그가 한 개 나라 정상을 수번 만난 차수로 합하면 그가 세계의 정상들을 만난 차수가 1000 번이 넘고 5대양 6대주를 넘나들며 찾은 나라가 100개를 넘는다고 하였다.  그의 사무실 한쪽벽은 완전히 그가 만난 여러 나라 정상들의 사진들로 도배되였다. 초심을 잊지 않고 임회장은 한국 논산시 부적면 탑정리의 열두마지기농가집에서 으로 태여났다. 그때는 조선이 일본식민지라 그가 초등학교 3학년 1학기를 다닐 때 까지 조선말을 못하고 한글도 못 배웠다 1945년에 > 해방을 맞고서야 2학기부터 자기나라의 말을 하며 자기나라의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 새로 태여 난 나라에 국회의원이 생긴다는 말을 듣고 일찍 초등학교 4학년 때 는 꿈을 간직했단다. 그는 국회의원이 되려면 고 생각하고 자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뛰였다. 1년간 신문배달을, 8년간 가정교사를 하면서 동국대학교법과 석, 박사과정을 마치고 전략으로  임덕규박사는 1966년부터 동국대학에서 국제법을 가르쳤고 1968년부터 신화일보, 동화통신 론설위원을, 1981년에 11대국회의원(충남공주,국민당)으로 당선되여 초등학교 4학년때 품었던 꿈을 끝내 실현하였다.                           와의 인연 그가 를 꾸리게 된데는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2대 외무장관과 유엔대사를 지낸 임병직박사를 만난것이 계기로 되였단다.  1960년에 동국대학을 졸업하고 법과박사과정이던 그는 1963년에 임씨네 집안에서 삼촌벌인 임병직박사가 귀국하자 자진해서 임박사의 시중을 들기 시작, 10년간에 임박사의 연줄로 당대의 거물급 인사들을 많이 알게 되였고 그들로부터 나라사랑을 배웠다.  임병직박사가 인도 주한대사로 지내며 를 창설, 임덕규가 간사로 일하며 국제외교를 경험하였다.  1972년 뮌헨 올림픽을 계기로 임박사가 세상에 한국을 홍보하기 위해 예술단을 이끌고 유럽순방을 떠나던 날 임덕규한테 이런 당부를 하였다. .  하늘 같은 어른님의 말씀에 임덕규는 그 자리에서 하겠다는 대답은 했지만 잡지를 꾸려 본 경험은 물론 영어수준, 자금 등으로 앞길이 막막했다. 그 때 한국에 영문으로 문장을 쓰는 인재도 몇이 없었다.  그러나 모든 걸 다 바쳐 독립운동을 하신 어르신들을 생각하니 말한 대로 안 하면 죄인이 될 것 같은 자책감이 앞섰다. 다행히도 4년간(1968-1971)신아일보 론설위원과 동화통신 출판부국장, 론설위원을 지낸 밑천으로 배짱이 생겨 전화를 잡혀 300만원의 자금을 마련하여 서울 무교동에 손바닥만한 사무실을 마련하였다. 그 때 합작동지라고는 지금 세계적인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동화통신 사진부 차장 백남식이다.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3년 남짓이 아이디어를 짜낸 끝에 1975년 8월에 창간호를 발간, 창간호의 표지스토리는 한미 관계에 력점을 두고 미국포드대통령 가족사진을 싣고 성조기변천사, 력대 미국대통령의 친필서명, 력대 주한미국대사사진 등 내용으로 특집을 꾸렸다.  창간호가 나오니 미친 짓이라며 극구 말리던 사람들마저 니 죽자 살자 뛰여다녀도 힘이 드는 줄을 몰랐다. 광고를 얻기 위해 아침밥을 거르며 아침출근을 하는 기업체 사장들의 발목을 잡고
 필자는10여년간 일본을 나들며 “재일 조선족류학생 1세”를 취재하고 나서 “나는 조선족인이다”, “나는 동북아시아인이다”, “우리가 조선족이였기 때문에…”란  인터뷰채록을 다시 펼칠 때마다 감명이 깊어 진다. 일본의 조선족사회의 형성은 지난 80년대 “일본의 류학생 10만명 수용”정책에 띠라 중국 조선족류학생 도일(到日)을 시작으로30여 년의 력사를 갖고 있다.(일본은 외국 국적별통계만 있고 민족별통계가 없기에 재일 조선족수를 최대로 10만명으로 추정할뿐 정확한 수자는 파악하기 힘들다.)  “나는 조선족인(人)이다”의 대표적인 인물로 일본 BLUEDT주식회사 리동철회장이다. 동철씨는 중국인민대학 국민경제계획전업을 졸업하자바람으로 국가 로동부에 배치되여 2개월을 출근하다가  “먼저 희망을 품은 인간이 되는 길에 나서겠다”묘 1991년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일터를 떠나 일본 류학길에 올랐다. 동철씨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조선족이라고 말하는 것은 틀렸다. 스스로를 조선족인(人)으로 칭해야 한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人이 모여서 族을 이루기에 族이 人을 대체하지 못한다. 어느 전형인물이 그가 속한 민족을 대표하지만 어느 민족이 전형인물을 대표하지 못한다. 人을 알려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는 뿌리를 찾고 절대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조선족인”의 뿌리를 잘 알고 개발하면 엄청난 힘을 갖게 된다. 모든 경쟁은 어느 사람이 하는 것이지 어느 민족이 하는 것이 아니다. 오바마는 “나는 흑인이라는 존재를 인식하고 그 속에서 희망을 찾고 자기를 개발한데서 대통령이 되였다.”고 한다. 인이 성공해야 그가 속한 민족이 부흥한다. 지금까지 구전(口傳)되는 “모주석이 없으면 새중국이 없다.’ “주덕해가 있었기에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있다.“가 이를 설명한다.   “나는 동아시아인이다”의 대표적인물로 재일 “조선족연구학회” 회장을 지낸 일본 후꾸리뀨(北陸)대학 리강철교수이다. 강철씨는 중앙민족학원 철학전업을 졸업하고 북경시위 당교 제1기 연구생, 중화전국총공회(中國工運学院)교수로 지내다가 “자유로운 학자의 길을 선택”하고저1991년에 일본류학을 선택하고 일본서 중국, 조선 한국, 로씨야, 몽골, 미국, 유럽을 드나들며 여러가지 국제무대에서 활약하였다. 그가 환일본해종합연구원 사무국장직을 맡고 “동북아시아개발은행 설립 및 일본대외정책”이란 연구테마로 세계 여러나라의 개발은행을 고찰하고 일본정부에 “동북아개발은행”설립관련보고서를 제출하여일본 내각부 산하 정책연구소에서 그를 사상 첫 외국인주임연구원으로 중용, 일본 전임수상 (후꾸다야스오(福田康夫)의 접견까지 받았다. “지금은 글로벌시대인만큼 초민족적, 초국가적 가치관이 수요된다. 나는 10전부터 나는 ‘동북아시아인다’며 일본을 발판으로 동북아 발전과 평화를 실현하는 것을 나의 인생가치와 목표로 했다.”, “나는 련합국위크숍(硏討會)에서 정식발언 먼저 “저는 동북아시안인입니다.”며 자아소개를 하여 한결 같은 인정을 받았다, 그는 동북아 6개국의 학술무대에서 “나는 동북아인”이라며 하는 일에 자신이 만만하다고 했다. 이밖에 필자가 만난 재일조선족 1세들은 거의 모두가 성공의 주원인을 “나는 조선족이였기 때문에…”라고 입을 모았다.  일본 건축업계의 거두인 일본 ㈜ JPM허영수사장은 “조선족들이 중국, 조선, 한국문화를 알고 일본문화를 배웠기에 일본이 아무리 선진국이라고 해도 세 가지 언어의 우세로 일본인들의 선배로 될수 있고, 창업, 취직률이 다른 민족보다 높다” 고 한다. 일본 “제1사진가”에 도전한 ㈜카와 변소화사장은 “나는 조선족이였기에 ‘중국가격+한국기술 +일본써비스 = 성공’이란 우리만의 경영공식을 모색하였다”고 하였고 일본 시즈오까대학 리련화 부교수는 “나는 조선족이였기에 중, 한, 일 3국을 대상한 동아시아사회보장연구에 선뜻이 나서서 거의 한눈으로도 아시아를 거시적으로 볼수있는 시야를 넓혔다”고 장담을 했다. 일본 조선족연구전문가인 와세다대학 권향숙박사(한국계일본인)는 “조선족들이 단시기내에 기업을 운영한다는 자체가 상당히 놀라운 능력이다. 조선족들이 일본의 주류사회와 상류사회에 진출하여 활동하는 인물들이 많은데 이런 현상은 동아시아에서 흔지 않다.”며 “형은 상해에서 비즈니스를, 부모님은 한국에서 막로동을, 나는 일본에서 류학생활을”이라는 조선족류학생들을 통해 이는 조선족들의 가족리산이면서도 가족련결이 잘 진행되는 것으로 이런 다국적인 가족이 어느 민족에게 또 있을가는 생각이 든다”고 감명이 깊게 말하였다.. 필자는 전 지구촌에 뿌리를 튼튼히 내리려는 모든 조선족들은 나는 “조선족인이다”, “동아시아인이다” “우리는 조선족이기 때문에…”를 반추하며 민족의 사명감과 자신감으로 지구촌의 평화 및 건설을 위한 튼튼한 생력군으로 되였으면 한다.  오기활
265    읽고 또 읽으면… 댓글:  조회:4446  추천:0  2018-09-12
 성인 월리엄 존스는 200년전의 사람이다. 그는 어린 나이에 궁금증에 사로잡혀 자신과 어머님의 바람대로 끝없이 책을 읽기를 한데서 결국 세계 최고 학자들의 대렬에 올랐다.  영국의 왕은 그에게 백작의 칭호를 수여했고 성인 월리엄 존스라고 칭했다. 월리엄 존스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은 것은 상상을 뛰여넘는 그의 박식함 때문이다. 그는 더 많은 책을 읽고 싶은 욕심과 한 나라만의 책으로는 만족할수 없다는 욕구로 외국어공부에 열성을 다 바쳐 50여 개 나라의 말을 하고 글을 쓸수 있었다. 이하는 월리엄 모자간의 이야기다. “어머니. 도대체 구름은 어떻게 만들어져요? 왜 비가 내려요? 떨어진 빗방울은 모여서 어디로 가요?” .“정말 알고 싶어요! 세상 모든 것들을 알고 싶어요!” 어린 월리엄은 이렇게 늘 궁금증에 사로 잡혔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월리엄의 끝없는 질문에 대답해주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월리엄이 글을 읽게 되자 어머니는 책을 통해 월리엄의 궁금증을 풀도록 하였다. “어머니 왜 바람이 불어요?” “책을 읽으려무나 그럼 저절로 알게 되지.” “세상 저편엔 누가 살고 있을가요?” “책을 읽으려무나, 그럼 절로 알게 될 거다.” “왜 하늘은 푸르지요?” “책을 읽으려무나, 그럼 알게 된단다.” “어머니, 저는 정말 세상 모든 걸 알고 싶어요.” “그러나 너는 절대로 세상 모든 걸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책들로 말미암아 사람이 알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세상의 대부분을 알 수 있게 되겠지.” “알았어요, 어머니! 저는 모든것을 알 때까지 끝없이 책을 읽을 거예요.” 이렇게 말한 월리엄은 아주 어린 소년이였다. 세 살이 채 되기도 전이지만 책을 읽을 수 었는 천재에 가까운 소년이였다. 월리엄은 여덟 살이 되기도 전에 유명한 학교인 해로우의 저명한 학자가 되였다. 그는 언제나 읽기를 좋아했고 소망했고 무엇이든 쉬지 않고 읽었던 것이다. 월리엄이 말했다. “나는 세상을 알고 싶다! 세상 모두를 알고 싶다! 내 소망은 단지 하나다.” 그런 아들에게 어머니는 쉬지 않고 말했다. “읽으려무나, 끝없이 읽으려무나. 네가 알고 싶은 걸 알 때까지 말이다.”  월리엄이 유명한 학자가 되였을 때 그의 나이는 아직 십대에 불과했고 그때까지 어머니의 설교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도 역시 아들을 위해 좋은 책을 읽어 주듯 말했다. “진실한 책을 읽어라, 아름답고 훌륭한 책을 읽어라, 현명해지는 책을 읽으려무나.” 어머니의 설교는 계속되였다. “어리석음을 주는 책을 선택해 읽느라 절대로 시간은 허비해서는 안 된다. 절대로 나쁜 책은 읽지 말아야 한다. 좋은 책은 그 어떤 책이든지 네게 모두 도움이 될 것이다.” 월리엄의 “독서광”과 어머니의 바람, 그리고 설교는 월리엄을  세계 최고 학자정상에 오르게 하였다. 로마시대의 철학자, 정치인 키케르의 말이다. “책은 청년에게는 음식이 되고 로인에게는 오락이 된다. 책은 부자일 때는 지식이 되고 고통스러울 때는 위안이 된다.” 오기활
264    당신은 이에 자신이 있습니까? 댓글:  조회:3633  추천:0  2018-09-06
 프랑스의 곤충학자 파브르는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교사로 지내면서 곤충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다가 한 권의 책을 읽고 1871년에 교직을 그만두고 일생을 곤충 연구에만 바쳤다. 그의 저서 “곤충기”는 그가 30여년의 세월을 거쳐 완성한 세계적인 명작이다. 그로부터 파브르는 “한 선배의 책이 나로 하여금 정신적으로 기원(紀元)을 이룩해 내게 했다”며 “사람마다 남들에게 권해줄만한 책 한권쯤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덕담을 남겼다. 파브르의 이 말은 그만큼 책이 사람의 운명을 좌우할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책은 하나의 아름답고 풍부한 세상이다. 동기부여 연설가며 작가인 찰스 존스는 “두 가지에서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 인생은 5년이나 지나도 지금과 똑같을 것이다 그 두 가지란 우리가 만나는 사람과 읽는 책이다”고 하였다. 독서는 마음의 량식으로 결코 취미만이 아닌 생활의 일부분이며 인생의 필수다.   언젠가 필자는 돈을 잘 번다는 모 사장에게 책을 선물했더니 뜻밖에도 “이 두터운 책을 어떻게 읽습니까? 나는 책 읽기를 제일 싫어 하는데…”고 답하기에 상대의 무지(無智)함을 모르고 책을 선물한 필자가 오히려 무지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책은 미지인 세계로 가는 길을 찾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바르게 걷게하는 리정표이다. 한국 경기도 남양주시의 백복임씨의 얘기다.  7년전에 그녀는 암에 걸려 희망을 잃고 하루하루를 버티다가 남편의 헌신이 고마워서라도 건강해 지키겠다며  “책읽기”를 선택하였다. 그런데 혼자 읽기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서로 공유하며 힘을 얻고 싶었다. 그래서 독서 모임을 조직하고 여섯 명이 매주 책 한권을 골라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만들었다. 그녀는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우크라이나 작가의 책을  시작으로 2년동안 70여권의 책을 읽으며 책과 함께 웃고 울며 분노하고 맞장구를 치면서 “아하! 이런 거였구나”며 자기를 깨달으며 “그동안 내가 사람과 세상을 너무 몰랐다”며 “이제는 책이 더 이상 활자로 보이지 않는다.” “책은 내게 무한한 힘을 불어넣는 없어서는 안 될 친구로 되였다”며 즐거운 인생을 산단다. 미국의 정치행동주의자 도리스 해덕은 “평화 순례자”라는 선배 행동주의자의 책을 읽고 1998년 88세 나이에 진짜행동주의 자로 데뷔하고 2004년엔 94세에 미상원의원에 출마하였다.   이는 책의 위대함, 독서의 위대함, 인간 집념의 현실성과 위대함을 말해준다.   우리는 항상 책을 가까이 하며 책향기로 마음을 살찌워야 한다. “전민열독”이 련속 5년 동안 “정부사업보고”에 들어간 것을 보아도 인터넷시대에서 우리는 특히 더욱 독서를 해야 한다. 책속의 지혜의 해빛은 우리의 시대, 우리의 인생을 찬란하게 비춰주고 더욱 나은 자신을 만날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정신적으로 기원을 이룩할만한 책을 갖고 있습니까? 당신은 남에게 한 권의 책을 권할 자신이 있습니까? 오기활                                                                         
263    백부님을 그리며 혼란의 력사를 반추해 본다 댓글:  조회:4398  추천:0  2018-08-12
오늘은(음력6월 25일) 나의 백부 오광준이 56세 나이에 도문시 홍광공사 수남7대(달라자)에서 “문화대혁명”폭도들에게 원을 품고 타살된 50주년이 되는 잊을래야 잊혀지지 않는 비참한 날이다. 그때 필자는 조실부모로 하여 큰집에 얹혀살던 22살 나이였다. 1968년6월 25일(음력) 아침, 달라자 한복판에 자리한 흑판보에 “오늘 저녁에 오광준투쟁대회를 한다”는 “자발군중전정소조”의 종이에 쓴 해보(海報)가 나붙었다. 소위 “자발군중전정소조”란 “문화혁명”후기에 대련합을 하라는 모주석의 최신지시에 따라 대대로부터 시급에 이르기까지 대련합의 시달로 군중조직간의 파벌싸움을  끝내고 대련합을 한 형세하에서 달라자에서 아래웃집으로 재내는 서춘권이 딴 심보를 품고 비공개적으로 친근을 사촉하여  “4인 자발군중전정소조”를 조직한 비법적인 조직이다. 이틑날 오광준의 사망소식을 접한 홍광공사의 책임자들이 즉시 현장에 내려와 반복적인 조사를 거쳐 “오광준의 사망은  타살이다”, “자발군중전정소조는 비법적인 조직이다”고 결론을 내리고 “자발군중전정소조”를 해제시켰다. “오광준투쟁대회”는 서춘권이 남양, 송림 등 외지마을 사람들을 조직하여 진행, 서춘권과 최동우(송림사람, 서춘권의 측근)의 발언을 이어 처음부터 “사람을 때리는 것을 락’(打人为樂)으로 삼는 망나들과 딴 심보를 품은 야심가들이 때리고 차고 쓰러 눕히고 찬물을 끼며 행패를 부린 사람잡이였다. 그때 필자는 투쟁대회에 참가할수 없자 투쟁대회마당의 뒤 집인 오송준(필자의 9촌숙부)네 집에 숨어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당일 저녁, 투쟁대회장으로 불려나가기 전에 백부님은 필자를 불러 “오늘 저녁에 서춘권이 정녕 나를 때려 죽이겠는데 나는1대1로 죽겠다”며 몸속에 칼을 품고 나갔다가 기회를 찾아 서춘권을 찔러 죽이겠다”고 말하는 것을 필자가 안된다고 말렸다. 그러니까  필자가 서춘권을 살린것이다. 오광준이 56세 나이에 “조선특무”란 억울한 모자를 쓰고 망나니들에게 타살 된 데는 이런 억울한 사연이 얽혀 있었다. 1952년에 조선전쟁이 한창일 때 조선서 최남주라는 사람이 달라자에 있는 매부 (오세준)네 집에 밀수건으로 종종 다닌다는 말이 돌았다. (최남주는 해방전에 왕청현 석현구에서 살다가 해방후 조선으로 갔다) 당년에 새중국이 건국된지 3년밖에 안되고 게다가 조선전쟁이 한창 긴장하게 진행되는 형세에서 정치형세에 민감해야만 했던 촌과 지방간부들은 최남주의 소식을 듣고 “최남주가 조선특무”라며 다시 오면 체포하기로 하였다. 그때 오세준과 6촌형제인 오광준은 한마을인 오세준네집에 다니며 사돈간인 최남주를 만나 보았고 (오광준의 동생 오호준(필자의 아버지)도 함께 놀았다고 한다)오광준의 아들인 오기풍은 최남주를 도와 물수품을 제공해 주었다.    1952년 어느 날, 달라자의 생산대 대장과 빈하중농대표로 지내는 김철국이 한낮에 배앓이 병이 도져서 마을의 길옆에 있는 허룸한 널판자변소에 앉아서 일을 보고 있다가 최남주가 나타난 것을 보고 급히 바지춤을 올리고 나서 키가 크고 힘이 센 우세로 당장에서 그자를 체포했다.(김철국의 자술) 최남주는 체포되여 심문을 받으며 달라자로 나들던 과정을 실토하였다. 하여  간부들이 최남주의 제공에 따라 오세준, 오광준, 오호준을 불러 최남주를 만난 과정을 조사할 때 오세준이 먼저 최남주를 만난적이 없다고 말하니 오광준도 형제간인 당사자가 승인하지 않는데 내가 어찌 승인하겠는가는 단순한 생각으로 최남주를 만난사실을 승인하지 않았다.(동생인 오호준은 만났다고 승인) 그로부터 계속하여 촌간부들은 어느 날 저녁에 촌부가 있는 수남에서 “오광준투쟁대회”를 조직하고 오광준에게 “2년 지방관제” 라는 처분을 주었다(후에 정책에 따라 해제)  이 사건으로하여 오광준의 마음속에는 (최남주가 오세준네 집에 다녔는데 왜 오세준은 문제없고 나를 투쟁하고 관제까지 했는가)는 억울함으로 촌간부들에게 늘 불만이 있었다. 그러다가 1967년 초의 어느 날 “문화대혁명을 동원하는 생산대 대회”에서 오광준이 “이번 문화혁명에서 나의 억울함을 해명해 달라”는 발언을 하였다. 김철국은 실사구시하고 기억력이 상당히 좋았다. 하여 그는 비록 문맹이지만 대장을 지내면서 상급회의에 참가하여 회의기록은 못했지만 “회의정신을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몽땅 전달한다”는 평판을 받았다.  지난 세기 60년대 초, 연변에서 “면(面)의 사회주의교육운동”이 한창일 때  김철국이 생산대 정치대장인 필자를 찾아 몇 번이나 이런 말을 하였다. “오대장, 신문이라고 다 믿을 것이 못 됩데, 신문이 도삽(거짓)입데…” “…그때 내가 최남주를 체포했는데 신문에는 수남촌민병련장인 안창렬(송림사람)이  오세준네 궤짝에 숨어 있으며 정찰하고 최남주를 체포했다”고 신문에 안창렬의 사적이 났습데…” 필자는 김철국의 이 말씀을 가슴깊이 간직하고  십수년 후에 “연변일보”기자로 된후 연변일보자료실에서 당년의 신문을 찾아봤더니 과연1952년 8월 16일자 “동북조선인민보”(東北朝鮮人民報)에 “길림성 1등 민병모범 안창렬”이란 제목으로 지승원련환화로 기사를 엮은 안창렬의 사적이 3기로 나누어 실리였다. 이하는 련환화에 배합된 신문기사내용다. “안창렬이 오가네 집에 가서 그가 없는 틈을 타 큰 꿰짝안에 밤낮 이틀을 숨어있으며 동정을 살폈다. 사흘되는 날 밤에 오가와 그의 안해의 말가운데 ‘모래 실으려 간다고 수레를 끌고가서 최특무를 데리고 오기로 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때 그는 궤짝에서 뛰여나와 오가네 부부를 다른 민병을 시켜 지키게 하고 다음날 민병네명과 함께 오가와 최특무가 약속한 지점에가서 숨어있다가 최특무를 잡았다. 그는 이와 같이 하여 악패지주와 반혁명분자 六명을 잡았다.(사진배합)  실로 어처구니 없이 황당한 날조였다. 이하는 필자가 백부님에게서 들었고 또 백부님을 지켜본 백부님에 대한 평가이다. 백부(1911,12,10ㅡ 1968, 6,25)는 지난세기 20년대 초에 원적(原籍)인 朝鮮 咸鏡北道 穩城郡 穩城邑 美浦面 長德洞 長德里에서 부모님과 함께 남자 3 형제가 두만강을 건너 중국 도문시 곡수2대에 잠시 삶터를 잡았다가 1927년 경에 물 건너 달라자에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백부는 문화가 있고 사상이 진보적이였다. 백부는 자식들에게 늘 석현지구의 오중하 등 항일투사들의 이야기와 고려툰(지금의 흥진)의 항일력사를 들려 주었다. (한번은 항일하는 사람들의 심부름도 했단다.) 백부는 독서를 즐겼다.  도문에 가면 꼭 서점에 들렀고 신라, 백제, 고구려 등 우리 민족의 력사책을 사서 읽었고 타살되기 전까지 모택동저작을 1권부터 4권까지 통독을하였다. 한번은 정치대장인 필자와 백부간에 생산대문제로 의견분기가 있었는데 필자가 모택동저작에서 “자유주의를 반대하자”는 문장을  읽어 드리며 해석하니 “그렇다면 나에게는 할말이 없다” 심복(心服)하였다. 백부는 경제의식이 높고 계산이 빨랐다.   50년대 해방초에 농촌서 생산합작사를 꾸리며 가가호의 소, 수례 등 많은 농구를 헐값으로 생산합작사에 입고시킬 때 백부는 소구유의 값을 3원으로 치니 그 좋은 자료로  칼판을 만들어 팔아도 한 개에 3원씩 받겠다며 끝내 작두와 소구유를 입고하지 않았다. 60년대에 정치적으로 비판하던 “소생산”을 “조카들까지 공부를 시키려면 15명이나 되는 대가정이 자력갱생을 해야 한다”며 수백마리나 되는 양계장을 경영했고 담배농사를 많이 해 도문시장에가 팔았다. 백부는 친척을 중히하고 부모없는 조카들을 그렇게도 아끼고 사랑했다. 그때 석현구(진)수남촌은 왕청현에 속하였기에 수남촌학구의 학생들이 중학교를 다니려면 먼저는 대흥구 중학교, 후에는 석현중학교에 다녀야 했다. 그때 연길현인 도문중학교에 전학을 하려면 문이 없이는 쉽지 않았는데 백부님의 노력으로 우리 오누이를 집가까이 도문중학교에 전학시켜 공부에 편리를 주었다.  60년대 가난한 시기에 필자가 도문중학교를 다닐 때 하루는 백부님이 필자를 데리고 장마당에 가서 꿩을 한자웅(암수두마리)을 사가지고 반주임인 권경혁(權慶赫)선생님네 집을 찾아가 “부모없는 조카를 선생님께 맡기니 잘 돌봐 주십시요”라고 부탁하였다.   가정경제형편이 곤난한 시기에도 필자에게 바일론을 사주겠다고 하였고 현금 22원을 팔아 명표스케트를 두 틀이나 사주었다. 그때 중국의 명표 인“장백산”표스케트가 14원이였다. 백부는 10여 리 밖인 송림툰에 홀로계시는 5촌숙부(오창근)를 종종 집에 모셔다 맛좋은 음식을 대접시켰다. 백부는 “끊어 질 지언정 후러들줄 모른다” 는 정도로 성격이 강하였다. 그래서 동네사람들로부터 “꼬재”(꼬쟁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백부는 늘 민족복장차림을 하는 민족주의자였지만 혼인에서는 “녀자는 데려다가 제집사람을 만들면 된다”며 “로박사의 부인도 일본녀자다”며 곤명에 있는 6촌동생(오철준)이 재혼으로 한족부인을 택하자 백부가 나서서 “제수에게 한복을 입히고 결혼잔치를 치려주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당신이 어디서 예쁜 한족처녀를 바뒀다며 필자더러 그녀와 결혼하여 빨리 아들을 낳아서 무남3녀인 형님에게(오기풍) 계자(鷄子)로 보내라고 하였다. 백부님은 사람욕심이 대단하였다. 그러기에 늘 “최대의 가난은 사람가난이다”며 3녀1남 자녀들에게서 4남 10녀의 손군을 보았다. 큰며느리가 부인병으로 3녀를 낳고 생육하지 못하자 백부가 며느리를 데리고 다시며 병치료를 시켰고 4녀를 낳은 큰 딸을 설복시켜 끝내 아들을 보게 하였다. 백부는 장기간 고혈압병으로 머리가 아파서 늘 헝겁댕기로 골을 동여매고 매일 안나가(安那咖)라는 약을 복용하며 생산대집체로동에는 별로 참가하지 못하며였다. 이렇게 백부가 집체로동에는 참가하지 못하면서도 자력갱생을 한다며 “소생산”을 하였으니 당년의 형세에서 정치를 앞세우는 촌간부와 “집체를 열애하는“ 사람들의 말밥에 오르기가 한창이였다. 그래서 당년에 억울한 모자를 쓰고 투쟁을 받았고 문화혁명의 대혼란속에서 딴 심보를 품은 음모가들에게 타살을 당했다고 필자는 인식한다. 단 백부님의 타살은 “문화대혁명”의 혼란 시대에 필자의 정적(政敵)들이 정치적으로 필자를 “죽이려는” 딴 심보를 품고 고의로 조작한 비법적이고 비인간적인 형사사건으로 필자는 정의한다. 영국의 유명한 력사가 에드워드핼릿카(E.H.카)는 “력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과거는 현재의 빛에 비춰졌을때만이 비로소 리해될수있으며 또한 현재도 과거의 조명속에서만이 충분히 리해될수있다”고 하였다. 이에 비춰 반우파운동, 대약진운동, 사회주의교양운동, “문화혁명”을 두루 겪은 필자는  “력사를 잃는 것은 오늘에 대한 배반이며 력사를 기록하는 것은 지나온 그릇된 력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라는 생각으로 필을 들었다. 이 글로 우리 가족과 후세들에게 지난 세대의 혼란했던 력사를 거울로 알려주고 다시는 그런 억울하고 혼란한 력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돌이켜 보면 혼란년대에 피해자나 가해자나 모두가 시대의 피해자다.  이 글로 억울한 루명을 쓰고 원을 품고 타살된 백부님을 더없이 그리고 기리며 백부님께  행복하고 바른세상이 오늘에 왔음을 알리며 고인의  명복을 빌고 또 빈다. 2018년 6월 25일(음력) 도문에서
262    <<이웃절>>을 내오자 댓글:  조회:3312  추천:0  2018-07-31
가정은 사회의 기본세포단위이다. 가정과 가정, 이웃과 이웃사이의 화목은 사회주의 조화로운사회를 건설함에 있어서 홀시할수 없는 기본적인 사회조성부분건설의  하나로 마땅히 온 사회의 중시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또한 이웃사이에 서로 돕고 관심하며 화목하게 지내는 것은 중화민족의 전통이며 미풍량속이다. 미풍량속은 시대가 발전한 오늘에도 계속 발양하고 발전해야 한다. 허나 도시의 거주문화가 변천을 가져오고 사람들의 생활절주가 빨라짐에 따라 한아빠트, 한지붕을 쓰고사는 이웃사이가 서로 래왕이 없고 지어 상사가 있어도 관계하지 않고 무감각할 정도로 이웃관계가 랭대해지는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농촌에서도 호도거리농사의 실시로 한개농호가 하나의 생산단위로 된후 이웃관계, 마을관계가 이던 전에 비해 많이 랭담하고 약화된것이 사실이다. 이는 인간들의 단결, 우애, 협조의 공동책임의식과 정신을 약화시키고 있다. 이런 실정에서 이웃관계를 개선하는 것은 조화사회건설에서 마땅히 온사회의 중시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이에 필자는 법적으로 을 제정하고 전 사회적으로 조화로운사회 건설에 유익한 활동을 벌려 단결, 우애적인 이웃관계를 새롭게 확립할것을 창의하는 바이다. 법적으로 이웃절을 정하면 특히 다음과 같은 몇가지가 리롭다고 본다. 1, 사회공덕을 지킴에 리롭다. 이웃절이 있게 되면 법규의 약속성이 있게 되며 이를 발판으로 일종의 사회적책임감을 지키려는데서 이웃간에 서로 거래하고 호조호애하면서 새로운 인간관게를 이룩하게되여  이 , 으로 발전하여 사회가 부단히 정화되고 문명해지기에 사회주의 조화로운 사회건설의 바탕이 마련되게 된다. 2, 후대교양에 리롭다.  이웃절이 있게 되면 학교부터 가정에 이르기까지 존로애유, 호경호애, 호방호조의 교양을 앞세우게 되여 중화민족의 미풍량속이 천추만대로 이어지게 될것이다. 3, 민족단결에 리롭다. 우리 나라는 다민족국가이다. 이웃절이 있게 되면 이웃간의 여러가지 유익환 활동으로 하여 다민족이웃간의 우정이 돈독해지여 민족단결진보를 더욱 강화하게 된다., 4, 부모나 자식이 외롭지 않다. 지금은 세대마다 자식을 거의 하나만을 낳는 현실에서 이 맺어지면 외자식이 외롭지 않고 부모도 부모로 외롭지 않게 된다. 특히 지금 은 핵가족으로 되여가는 실정에서 이웃자식들간에 서로가 다정해지고 로인들이 고독하지 않으며 자식들의 뒤근심을 덜수 있다. 5, 간부와 백성간의 관계가 밀접해질수 있다. 이웃사이가 밀접하면 주변의 간부들이 백성들의 질고를 료해하는데 리롭고 백성들이 주변의 간부를 찾아서 여러가지 문제를 구속이 없이 실사사구적으로 반영할수 있어 당과 대중과의 거리차이를 줄이는데서 혈연적 련계를 강화할수 있다 6, 빈부차이를 줄임에 리롭다.                                                  이웃간에는 빈부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이웃간에 화목하면 서로간에 어려운 일을 함께 풀려는데서 이웃간에 선각자가 후각자를 이끌며 비기고 배우고 따라잡고 릉가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조화사회형성에 리롭게 된다.   필자는 이웃절을 1년 24개 절기의 첫 절이인 립춘날로 정했으면 한다. “1년지계는 재어춘”이라 봄은 1년의 시작이니 새봄을 맞는 기분으로 이웃절을 맞이하면 우정을 돈독히 하기위한 시작으로 서로서로가 확실하고  준비있게 마중할것이다.                   발족인 오기활 2005년 10월 10일 (지부생활 2005년 제 11호)
261    진찰의사들이 개소리를 하다니… 댓글:  조회:3443  추천:0  2018-07-27
최근 몇 년간 단위(연변일보사)에서 해마다 잊지않고 집체적으로 신체검사를 조직해주어 너무나 감사하다. 근 3년간을 지켜보니 연변병원의 신체검사담당 의사와 간호원들의 인간미가 풍기는 봉사에 마음이 기뻤다. 특히 안내를 담당한 의무일군들의 정다운 봉사는 동지섣달에 꽃을 본듯 즐거웠다. 그런데 옥에티라고 할가? 어제(7월 25일)오전 신체검사때다. 안내자가 “彩照”를 하라며 3호실 문어구에서 대기하라고 하기에 문어구에 마련한 걸상에 앉아서 순서를 기다리는데 “샤이거런 찐라이”(下一個人 進來)라는 녀성의 또랑진부름에 따라 조용히 진찰실에 들어 서니 컴퓨터와 마중한 녀성의사 옆에 자리한 젊은 녀의사가 한어로 “무슨 소리를 그렇게… 나는 개가 짖는가 했어요…”하면서 허물없이 웃음보를 터뜨리며 둘이서 서로간 개얘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둘이서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언제는 누구네 개가 어떻고…하면서 진찰을 끝날 때까지 계속하여 개소리를 하는것이였다. 이에 필자는 의사들의 진찰에 믿음이 안가 검사가 끝났다니 일부러 검사결과를 물었더니 “지방간이 두텁고…”하며 검사결과를 대충 알려주었다. 물론 의사던 교사던 모두가 인간이기에 누구나 우습던 일을 떠 올리면서 롱담을 하고 큰 웃음도 지을수 있다. 문제는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하고 직업도덕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오늘 만난두 분의 의사는 손님이 진찰실에 들어가기 전부터 개소리로 시작한 롱담이 진찰이 끝날 때까지 당사자 앞에서 “개소리”를 해대니 마음이 언잖았다. 진찰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날 “彩照”진찰이 어수선했다는 느낌이다. 오기활
260    “헝그리정신” 만세! 댓글:  조회:3928  추천:0  2018-07-26
사브라는 선인장의 열매로 겉은 가시가 많지만 속은 붉은색이며 아주 달다. 유태인들은 자녀를 “사브라”라고 부르며 자녀들에게 어릴 때부터 “아빠처럼 사브라가 되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한다고 한다. 뜻인즉 자녀더러 한 방울의 비도 없이 땡볓이 내리 쬐는 열악한 사막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사브라마냥 역경을 이기고 강인하게 살아 남으라는 것이다. 현대의 랍비로 불리는 마빈토테이어는 (미국 유태교신학자) “아무리 절망적이고 위태한 순간에도 우리 눈앞에는 언제나 희망의 끈이 내려져 있다. 절대 굴복하거나 포기하지 않겠다는 신념과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만 있다면 새로운 령역에서 선 구자로 우뚝 설수 있다. 무슨 일이든 쉽게 체념해서는 안 된다. 인생은 변화무쌍하며 얼마든지 변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였다. 재일 조선동포로 남아공월드컵에 출전한 “눈물의 스타” 정대세의 어머니 (이정임)는아들의 성공비결을 한마디로“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과 장벽을 이겨내고 월드컵까지 나간 비범한 마이너리티(소수자)의  ‘헝그리 정신이다’ ”며 “재일동포들이 일본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한 소수자일 수밖에 없는데 이를 극복하고 당당하게 살려면 뭘하든 열심히 하는수밖에 없었다”고 하였다. “헝그리정신”이란 빈곤하고 굶주린 상태에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빈마음으로 무엇이든지 열심하는 정신을 말한다. 한 사람의 사로(思路)가 그 사람의 출로(出路)이다. 이런 얘기가 있다. 사형을 선고받고 죽음에 립박한 한 사나이가 국왕에게 이런 탄원서를 올렸다. “1년의 여유를 주신다면 왕께서 가장 아끼는 말에게 하늘을 날게하는 방법을 가르치겠습니다. 만약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때는 사형을 달게 받겠습니다.” 이에 왕이 말했다. “좋다, 하지만 약속을 어길 경우에는 즉시 사형을 집행하겠다.” 하여 사나이는 요행 사형을 모면하고 감옥으로 돌아왔다. 많은 죄수들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말이 어찌 하늘을 날수 있단 말이오?” 곁군들의 물음에 사나이가 태연하게 말했다. “물론 말이 하늘을 날 거라고 장담하기는 어렵지요. 하지만 1년 안이 왕이 죽을 수도있고 내가 죽을 수도 있고… 미래의 일을 누가 알겠는가. 1년 안에 말이 죽을 수도 있고 또 하늘을 날지도 모르지 않는가.” 주변을 보면 같은 돈 1원을 놓고 부정적인 사람은 (1원밖에 없다…)며 겁을 내고 좀자르지만 긍정적인 사람은 (아직도 1원이 있다구?…)하면서 그 1원을 가지고 또 무엇을 할 궁리를 한다. 성공자들은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역경이야말로 최고의 기회다”고 말한다. 오기활
259    사람 됨됨이의 순서 댓글:  조회:3996  추천:1  2018-05-29
 어느 사회에서도 좋은 사람이 있고 나쁜사람이 있기가 마련이다. 그래서 아무개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 무슨 일을 하자면 사람이 제일 문제라면서 일을 맡길 사람을 찾을 때 먼저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려고 한다. 그런데 오늘에는 인품에 앞서 그 사람의 능력을 먼저 따지려는 풍조가 앞서는듯 하다. 이런 풍조에 너무 매달리다 보면 뒤끝이 별로 신통찮게 끝나는 경우가 빈번하다. 능력은 재주에서 비롯되고 인품은 덕에서 비롯되는 까닭으로 사람의 인품과 능력은 서로 다르다. 덕은 베푸는 마음을 앞세우고 능력은 요구하는 마음을 앞세운다. 옛날에는 스포츠를 놀이로 했지만 지금은 커다란 기업이 되고 있다. 그래서 엄청난 거금을 팔면서 선수들을 사들인다. 년봉을 얼마나 받느냐를 놓고 그 사람의 몸값을 따지게 된다. 스포츠만이 아닌 전문경영인의 경우도 그러하다. 사업수완의 능력에 따라 고임금을 받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이 또한 월신을 얼마나 받느냐를 두고 그 사람의 몸값을 따지는 경우다. 이런 때의 사람값은 능력을 기준으로 삼지 그 사람을 인품으로 따지지 않는다. 흔히 재주가 앞서면 덕이 모자란다고 한다. 재주만 믿고 저만 잘났다는 착각에 사로잡힌 사람은 남을 얕보고 존중할 줄을 잘 모른다. 모든 것을 지식의 량으로 따지려고 하고 사람들과의 사이에 있어야 할 도리를 저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는 모든것을 리용의 대상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덕한 사람은 주변을 살펴서 무엇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가에 신경을 쓴다. 덕은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며 덮어 주고 약한 사람을 감싸 주면서 힘을 붇돋아 서로 함께 살맛을 나누게 한다. 덕이란 사람을 리용하지 않고 돕는다. 선을 위하여 리롭게 하는것이 덕이므로 덕은 사람을 외롭게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왕왕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재주만 앞세워 세상을 얕잡아 보려고 한다. 이런 성품 탓으로 사람들은 서로 팽팽히 삶의 줄을 당기면서 제 몫만 챙기려고 한다. 공자는 덕행을 삶의 근본으로 삼아햐 한다며 나라를 잘되게 하려고 했지만 군왕아 공자의 뜻을 들어주지 않으니 56세에 자기의 로나 라를 떠나 진나라, 제나라 등 나라를 돌아다니며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왕도를 설파했다. 그러나 힘으로 세상을 얻은 군왕들이 공자의 말에 아무도 귀를 기울여 주지 않기에 수많은 고생만 하고 69세에 다시 로나라에 돌아왔다. 공자는 그간 고생만 시키고 아무런 권세도 얻지못한 제자들에게 미안을 표하며 제자들의 됨됨이를 이런 순서로 밝혔다. 덕행으로는 안연(顔淵)이 뛰여 났고 언변은 자공(子貢)이 뛰여났다. 큰일을 처리하는 데는 염유(苒有)였고 박학하기로는 자유(子游)가 였다. 공자는 이렇게 서로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인간들에게 덕을 근본으로 삼았다. 바로 습근평주석이 당 19차당대표대회에서 제출한 당이 간부를 관리하는 6개 원칙에서 덕재를 겸비하되 덕행을 우선하는 원칙을 첫째라고 하듯이. 오기활
258    야합, 담합, 그리고 총명이란? 댓글:  조회:3621  추천:0  2018-05-18
 옳은 것이면 감출것이 없고 선한 것이면 숨길것이 없다. 옳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범하고 악한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면 죄는 이미 씨앗되여 뿌리내려 터를 잡는다.  법을 어기는 것만이 죄가 아니다. 도둑질, 강간, 살인이 큰 죄지만 부정부패를 일삼는 탐관오리도 죄를 범하는 원흉이다. 특히 높은 위치나 큰 자리에 있는 특권자들이 죄를 범하면 다른 죄보다도 온 나라가 큰 화를 당한다 . 특권자는 특자만큼 눈귀가 밝아야 한다 . 높은 위치에 있는 자가 곁눈질을 하면 간사한 무리들이 그의 눈길을 맞추게 되고 큰 자리에 있는 자가 귀가 얇으면 그 귀에다 소곤거리며 리득을 챙기려는 무리들이 모이게 된다. "력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이는 력사적으로 부덕한 다스리는 자들이 숨길것이 많아서 밤이 돼야 서로 귀를 맞대고 눈길을 훔치면서 서로간 수를 부려서 리권(利權)을 챙기려고 끼리들이 은밀히 야합(夜合)하여 입을 마추는 담합(談合)을 비꼬는 말이라 하겠다.   어느 친구의 말이다. " X X 텔레비를 보면 국회위원들이 손찌검을 하면서 의(義)는 양보 할지언정 이(利)는 절대로 양보를 안(못)하는 것 같다." 당순(黨順), 당리(黨利)를 살펴봐도 먼저 내당을, 다음에 네당을, 그 다음에야 “우리 당을 챙기는것 같았다. 공동한 리익을 위하여 큰면에서 공동한것을 찾고 작은 일은 보류(救大同存小異)하고 나라와 국민을 위하여 영예와 치욕을 함께 해야 하는데 ...   실상의 여하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저 듣고 지날 얘기는 아닌것 같다.  공자는 "총명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는 제자(자장)의 물음에 " 물처럼 스며드는 말을 멀리하고 피부에 느껴질 만큼 솔깃한 말을 멀리하면 총명해진다"고 했다. 공자의 이 말은 총명한 인간이 되려면 야합하거나 담합을 하지 말고 측근의 말을 조심하라는 경고며 충고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그 나름의 측근이 있게 마련이다. 은근한 측근의 말을 믿고 놀면 멀리 보는 눈이 멀어지고 듣는 귀가 막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대통령을 포함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어리석음을 범하고 그 뒤탈은 다른 사람들이 앓게 된다.   한국의 모 대학교 윤교수의 말이다 . "력대의 대통령들을 보면 번번히 뒤끝이 좋지 못했다. 왜 그렇게 되는가? 총명하지 못한 탓으로 그렇게 되였다. 야합이나 담합을 무서워했더라면 높은 자리에서 내려온 다음에 원성을 사지 않았을 터이다." 그렇다면 총명이란 무엇인가? 총명은 죄라는 병을 앓기 전에 미루 예방을 할줄 아는 밝은 귀와 맑은 눈이라 하겠다.. 오기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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