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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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홍화백의 향수
2012년 10월 08일 08시 38분  조회:4341  추천:3  작성자: 김희관
《여러분! 오늘 고향에서 저의 미술작품전을 가지게 되여 매우 기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말로 답사를 드리겠습니다.》

 

김태홍화백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인사말이다. 9월 29일,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화가, 무대미술설계사, 김태홍선생 무대미술설계도, 유화, 속사 작품전》이 중공연변주위 선전부, 연변주문화국 주관, 연변가무단, 연변박물관의 주최하에 성대히 열렸다.

김태홍화백은 영예의 금상과 눈부신 광환이 너무나 많은 예술가이다. 미술학박사, 국가 1급무대미술설계사,중앙발레무단 무대미술설계사,유화가,국가문화부 《문화상》평심위원 등이다. 그는 무릇 국내 동서남북에서 중대한 발레극, 무극, 가무극이 기획되고있다면 그중 태반의 무대설계는 모두 김태홍화백의 몫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그는 항상 《남정북전》하느라 바쁘다.

그러면서도 이번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돐을 맞이하여 그는 만사를 제쳐놓고 부인과 함께 작년 6월부터 고향에 와 지금까지 눌러앉아 고향을 그리고 또 그렸다. 김태홍화백은 연변조선족자치주창립 60돐 기념대회에서 2만 5000명 청년학생들이 공연한 광장무 《연변찬가》의 배경미술 총설계사를 담당했다.

김태홍화백은 일찍 국외에 명성을 날렸다. 80년대 초, 영국의 발레무용단이 중국무대에 발레무극 《실비아》를 올리게 되였는데 그 어마어마한 무대배경을 운송하기 어려워 중국에서 제작할수 있는가고 문의를 했다. 그래서 젊은 김태홍화백이 나섰다. 그의 무대미술작품은 영국사람들을 놀래웠고 공연도 성공을 거두었다. 영국사람들은 김태홍화백의 무대미술설계도를 가장 귀중한 선물로 받아갔다.

그후 김태홍은 인민대회당 무대의 만리장성을 설계제작했고 인민대회당에 거폭의 《황토고원》을 헌정하는 등 무수한 명작들을 내놓았다.

김태홍화백은 무대미술의 거장이다. 전국 방방곡곡의 풍경과 문화를 소재로 창작된 무대미술설계도를 보면 화폭은 크지 않지만 그 내함이 심오하다는것은 금방 느낄수 있다. 바로 그 자그마한 설계도 한장한장이 진짜 무대배경으로 그려질 때는 수십필의 화포(画布)가 이어지면서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실경같은 배경으로 다시 태여난다. 하기에 이번에 전시된 200여폭의 무대미술설계도를 실제 제작하는데는 수천필의 화폭을 그려내야 했다. 그 거대한 무대의 실경을 상상해보라.

김태홍화백은 중국조선족무대예술의 한복판에 서있다. 1990년 일본류학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연변가무단의 무극 《춘향전》의 무대미술설계를 성공적으로 완성한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무용서사시 《장백의 정》, 무용서사시 《들끓는 장백산》, 대형가무《노래하노라, 장백산》 등 가무예술 경전작들의 무대미술설계를 모두 성취함으로써 그의 천재적인 예술성과들은 모두 나라에서 수여하는 금상, 대상을 받아안았다.

또한 1990년 연변TV방송국의 음력설야회를 위해 제작했던 거폭의 배경화 《장백림해》도 불후의 명작이다. 그중에서 필자가 무릎을 치며 감탄한 작품은 《장백의 정》의 배경화 《뿌리》이다. 땅속에 백년천년 묻혀있는 뿌리는 언제나 흑속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묵묵히 고목을 떠받들고있것만 김화백은 그 뿌리에 강렬한 빛을 조명해줌으로써 민족문화의 뿌리를 위해 찬가를 불렀다.

김태홍화백은 항상 향수(乡愁)에 푹 젖어있다. 김태홍화백은 흑룡강성 녕안현 태생이며 중소학교시절은 연길에서 지냈다. 당시 그와 필자는 연변주위 관사에 같이 살면서 공부도 같이 하고 딱지 치기도 같이 하던 송아지친구이다. 1958년 그는 맏형님의 부름을 받아 북경으로 공부하러 가서 중앙미술학원부속중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미술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밑거름이 되여 중앙희극학원 무대미술설계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후날에 그는 일본 도꾜로 건너가 일본대학 예술부 희극연구소에서 미술학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는 7남매를 모두 훌륭한 인재로 키워주신 부모님을 항상 그린다. 그의 아버지는 해방후 처음으로 연변행정지도를 그린 엘리트였고 그의 어머님은 매우 자애로운분이시였다. 김화백은 향수를 달래기 위해 10년전 룡정시 석정 종성골에 초가집을 마련하고 마을의 농민들과 형제처럼 지낸다. 처음에 농민형제들이 외따른 골짜기에서 TV방송을 시청하지 못하는 고초를 헤아려 1만원을 들여 TV케이블을 끌어다주기도 했다.

이번 미술전 개막식에도 그는 종성골의 촌주임과 농민형제들을 귀빈으로 초청해 같이 향수를 달랬다. 이번에 전시한 유화작품들중에서 연변농촌을 반영한 미술작품들은 바로 종성마을을 배경으로 그려낸 화폭들이다. 또한 그가 여러차례 신강에 가서 무대미술창작을 하는 과정에 체험한 위글족형제들의 농촌생활상을 그토록 생동하게 그려낸 미술작품들도 매우 인상적이다. 그는 지금도 북경에 사는것이 민족문화예술적으로 몹시 고독하다고 한다. 향수는 그의 미술생애의 원천이다.

김태홍화백의 왕성한 미술창작활동은 스케치(소묘)라는 아주 기초적인 작업을 기본태로 하고있다. 그는 어디를 가나 스케치북을 가지고 다니면서 인물속사와 배경스케취를 꾸준히 함으로써 그의 마음은 그냥 흥분해있고 손은 그냥 움직이고있다. 그의 말인즉 《매일 그리면 손이 익는다》는것이다.

김태홍화백은 고희를 맞으면서 미술생애에 대한 체험담을 이렇게 쓰고있다. 《흥취로 시작한 미술이 60년 갑자를 맞이하면서 머리에 남는것이라면 미술은 시대적 정신의 표상이고 인간의 개인적, 집단적 의식과 행위가 미술작품에 반영되여 완성되지 않나 고민해봅니다.》

그는 이미 애니메이션 미술가로 두각을 나타내고있는 사랑하는 딸 미연이를 대견하게 바라보면서 말한다. 《미술가는 입으로 말할것이 아니라 미술작품으로 말해야 한다.》 필자는 김태홍화백의 빛나는 성취에 어떻게 찬사를 보낼가 고민했다. 《김태홍화백, 당신은 겨레의 미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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