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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호, 󰡔��한국연극사󰡕��(현대편), 연극과 인간, 2005.
2009년 05월 16일 22시 10분  조회:5172  추천:0  작성자: 방룡남

서연호, 󰡔��한국연극사󰡕��(현대편), 연극과 인간, 2005.

 

제1장 서설

 

1. 한국연극사의 기술방법

 

1) 연극에 관한 역사. 연극의 역사

 

대체로 연극사는 두 가지 측면을 내포한다. ‘연극에 관한 역사’와 ‘연극의 역사’가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연극사는 전자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전자를 연극사회사 혹은 연극문화사라고 달리 지칭할 수 있다. 연극을 당대의 사회와 문화라는 범주 속에 놓고 연구하는 관점이다. 연극에 대하여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공연했느냐 하는 점을 사실대로 밝히는 과정이 우선이고, 거기에 덧붙여서 그 공연의 성과와 의의를 역사적으로 평가하는 과정이 뒤따르는 서술방법이다. 작품의 환경, 작품의 제작과정, 작품의 내용과 특징, 작품을 만든 사람들, 작품의 사회적 가치, 작품의 유통구조 등을 실증적 방법으로 재구성하고 체계적으로 밝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연극사들은 이러한 측면에 치중해 왔다.(25)

이러한 전자의 방법에 대하여, ‘연극의 역사’는 연극 자체의 미학적, 양식적(형식적)발전을 중점적으로 추구하는 방법, 즉 연극예술사 혹은 연극미학사라고 달리 지칭할 수 있다. 연극에 대하여 작품에 나타난 인식과 사상, 형식과 양식, 언어와 표현방법, 공간과 시간의 개념, 연속성과 적층성 등의 내적 변화와 전개양상을 분석적으로 재구성하고 논리적으로 밝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한국연극사 서술에서 이러한 측면이 소홀하게 취급되었다.(26)

양식의 변화는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양식의 변화는 사회학적 동기들의 소산이며, 동시에 심리학적이면서 동시에 양식사적인 동인들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양식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사회적 환경, 심리적 배경, 그리고 지난 시대의 양식적 변화와 모색을 살피는 일이 동반되어야 한다.(27)

재론의 여지도 없이, 훌륭한 연극사란 연극의 사회적인 측면과 예술적인 측면이 총체적으로 조화된 연극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개념은 사회적인 행위가 예술적인 재료가 되고, 동시에 예술적인 창조가 사회적인 의미로 수용된다는 명제와 상통한다.......연극사가 독자성을 갖기 위해서는 ‘시대정신의 표현양식’에 관한 총체적 인식과 실천적인 창조성이 작품분석을 통해 규명되어야 한다.(28)

 

2) 연극사 기술의 범위와 양식적 분류

 

첫째로, 연극사에 연희사(演戱史)를 포함시켜 기술하기로 한다. 19세기 말엽까지 한국에는 서구식 드라마가 공연된 적이 없다. 이웃나라인 중국, 일본의 연극도 일찍이 공연된 적이 없다. 청일전쟁(1894. 6~1895. 4)이후 ‘중국인 및 일본인 거류지역’이 번화(繁華)해지면서 비로소 두 나라의 연극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플롯형식의 드라마는 없었고, 연희와 연극 개념에 구분이 없었으며, 모든 공연은 연희(performance)로 통칭되었다. 연희들은 개인 대 개인, 개인 대 집단, 개인 대 사회제도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을 직접적으로 들추어내기보다는 그것을 비유적으로 양식적(樣式的)으로 드러내었으며, 신화적 원형성, 집단 속의 화해와 즐거움, 도덕적 이상주의 같(28)은 주제를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표현하였다. 한 마디로 축제적인 연희 전통이 계승되었다. 이런 이유로 한국에서 연극사와 연희사는 분리될 수 없다.(29)

둘째로, 대표적인 양식별로 기술하기로 한다. 어느 한 시대의 주도적인 작품형식 혹은 어느 지역(종족)의 주도적인 작품형식, 공연방식, 이념적 지향, 무대구조, 관극습관 등을 통칭 양식이라 한다. 기존의 연극사에서 시대별로 모든 연극의 변화를 통합해 기술한 것과 다른 방법이다. 이처럼 양식별로 연극사를 기술하고자 하는 것은 기존 연극사에서 애매하게 취급되었거나 아니면 전혀 인식조차 없었던 연극 고유의 표현방법과 창조성을 새롭게 규명하고 해명해 보기 위함이다. 양식이 내포한 심리적, 사회적, 형식적, 시대적 상관성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바로 연극사 서술의 목적이기 때문이(29)다.(30)

셋째로, 한국연극사의 시대구분은 양식의 변화를 기준으로 볼 때, 고대·중세·근대·현대로 대별할 수 있다.(30)

고대극은 선사시대부터 10세기 초엽 향악이 발달된 삼국(三國)시대 후기까지의 연극을 통칭한다. 고대의 축제, 불교연희의 수용, 기악(伎樂)의 성립, 탈놀이의 발달 등이 이루어진 시대이다. 중세극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전기까지의 연극을 통칭한다. 나례희, 연등희, 꼭두각시놀이, 산대희 등이 발달된 시대이다. 근세극은 17세기 중엽 국가공의(公儀)로서 산대희를 폐지한 이후부터 19세기 말엽까지의 연극을 통칭한다. 산대탈놀이, 꼭두각시놀이, 판소리, 광대우희(廣大優戱), 유랑광대놀이 등이 발달된 시대이다. 근대극은 20세기(30) 초엽 극장이 설립된 이후부터 1950년대까지의 연극을 통칭한다. 신파조극, 사실극, 프로극, 대중극 등이 발달된 시대이다. 현대극은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연극을 통칭한다. 서사극, 풍자극, 제의극, 뮤지컬, 마당극 등이 발달된 시대이다.(31)

넷째로, 가능한 대로 공연 작품을 대상으로 하여 기술하고자 한다.......연극사가 곧 공연사(公演史)이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기존 연극사들은 뜻밖에도 이런 논리에 소홀했음이 사실이다. 물론 연극의 현장성, 일회성, 다매체성(多媒體性)은 본질적으로 기록과 평가를 어렵게 한다.(31)

한 작품의 공연기간을 통산하면 대체로 전반기의 공연보다 후반기의 공연이 우수한 것이 통례다. 이 같은 공연의 일회성은 빈번하게 작품을 오판하게 하는 요건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다매체시대에 살고 있다. 매체의 발견, 발전, 교류와 더불어 극 양식은 다양하게 분화되었으며, 동시에 극의 분화는 다매체의 개발에 크게 기여했다. 연극에서만도 다매체를 활용한 새로운 제작방식은 관객을 확대시키고, 작품의 질을 향상시키는 한편, 창의력 있는 인재들을 양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연극의 다매체성은 역사적인 평가를 어렵게 하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31)

다섯째로, 현 단계로서는 연극사 자료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31) 사실을 밝혀둔다.(32)

 

3) 현대극의 개념과 분류

 

현대극은 동시대의 연극(contemporary drama)을 지칭한다. 근대극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 현대극이다.(32)

근대극의 미학은 리얼리즘으로 요약된다. 근대극 시대는 20세기 초부터 1950년대 말까지로 구분된다. 일반 역사 서술에서 일제시대 까지를 근대로 설정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1950년대의 연극 또한 리얼리즘이 주도했기 때문이다.(32)......1950년대 후반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은 실험극들이 간헐적으로 나타났으나 그것은 여전히 리얼리즘에 기초한 것이었고, 시대정신이나 시대양식을 전환시킬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33)

한국의 현대극은 크게 세 가지 경향으로 분류될 수 있다. 첫째, 근대극 양식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킨 경우, 둘째, 서구의 현대극 양식을 수용하여 새롭게 창조한 경우, 셋째, 전통극 양식을 계승하여 현대화한 경우가 그것이다.(33)

먼저, 근대극 양식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킨 양식으로는 사실극, 희극, 역사극, 창극을 들 수 있다. 1911년 신파조극으로부터 한국의 사실극 운동은 시작되었다. 1921년 극예술협회 및 청년연극단체의 활동은 서구의 리얼리즘에 근접할 정도로 사실극을 한층 고조시켰다. 1931년 극예술연구회의 창작극으로부터 사실극은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현대 사실극은 탈(脫)리얼리즘의 환경 가운데서 1950년대의 사실극을 새롭게 계승하면서 발전했다.(33)

희극은 1930년대의 희극(파스)과 막간극(스케치, 난센스, 만담)을 통해 발전했다. 현대극은 대부분 희비극적 요소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자칫 양식의 경계는 애매하기 쉽다.(34)

1928년 7월에 창설된 시대극연구회는 역사극의 인식을 넓혔다. 1930년대 유치진, 임선규, 함세덕은 본격적인 역사극시대를 열었다. 현대역사극은 민족생존권의 수호, 지속적인 경제발전, 반봉권(건?)·반독재적인 시민혁명의 완수, 그리고 민족통일의 성취가 절규되던 1970년대 초부터 대두되었다. 즉, 역사극에서 사실(史實)을 충분히 응용함으로써 동시대의 상황을 구조적으로 이해하고, 우리 삶에 대한 비판적 통찰력을 얻고자 했다. 역사극의 갈등구조를 통해서 사실(史實)이 내포한 진실과 허위의식(虛僞意識)을 폭넓게 상기시켰다. 아울러 역사극은 연극 검열을 피해가는 하나의 방법으로도 이용되었다.(34)

창극은 전통음악인 판소리를 무대음악극으로 재창조해낸 것이다. 보편적인 의미에서는 ‘노래로 하는 연극’을 지칭한다. 20세기 초엽에 서울에 와서 공연했던 중국의 경극이나 일본의 가부키에서 적지 않은 자극을 받은 판소리 성악가들은 창극을 개발했다. 유명한 판소리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등 5가를 창극으로 제작하여 새로운 음악극의 붐을 일으켰다. 이 창극은 1930년대에 수용된 오페라와 더불어 현재까지 발전·전승되고 있다. 현재는 판소리뿐만 아니라 모든 전통음악을 재료로 한 음악극이 제작된다. 이런 작품들은 창극과 구분하여 ‘가무악극’이라 칭한다. 창극의 반주는 전통악기로 하고, 가무악극의 반주는 전통악기와 서양악기를(34) 두루 사용한다.(35)

모든 문화는 모방과 창조, 수용과 굴절, 변동과 모색을 지속하며, 특수성과 보편성을 변증법적으로 발전시킨다. 현대극 역시 예외일 수 없다. 비극, 희극, 희비극, 멜로드라마 같은 서구의 고전적 형식을 비롯하여 리얼리즘, 모더니즘, 표현주의, 실존주의 등의 양식이 한국 근대극에 수용되고 굴절, 정착되었다. 1950년대 후반, 전후의 폐허 가운데 서구의 새로운 물결이 흘러들었고, 이 물결은 1960년대부터 근대극의 낡은 양식과는 다른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처럼 서구양식을 수용하여 창조한 현대극으로는 서사극, 부조리극, 신화극, 잔혹극, 개방극, 뮤지컬 등을 들 수 있다.(35)

신화극과 제의극은 한 실체의 양면이다. 제의는 신화적 세계의 표상이고, 신화는 제의에 의하여 전승되기 때문이다. 신화는 좁게는 신의 이야기, 넓게는 설화(전설, 민담)를 포용하며, 삶의 보편성과 원형성을 지니고 있다. 바로 이런 본질로 인하여 신화는 시간을 초월하여, 소재를 초월하여 재해석되고 동시대의 살아 있는 신화가 된다.(37)

1960년대 실험극에는 잔혹극, 개방극(開放劇), 참여극, 정치극, 가난한 연극, 살아 있는 연극이라는 개념이 통용되었다.......한국의 현실과 공연 여건에 따라 복합적이고 절충적인 문화굴절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37)

이런 유의 실험극은 종래의 창조자 중심에서 수용자 중심으로, 폐쇄적인 공연방식에서 개방적인 공연방식으로, 극장주의에서 탈극장 초극장주의로, 언어 위주의 표현에서 육체 위주의 표현으로, 몰정치적인 주제에서 정치적인 주제로, 개인적 사고에서 공동체적 사고로, 사실적인 전달에서 이미지적인 전달로, 풍족한 무대에서 가난한 무대로, 과거회귀적인 방향에서 현재와 미래지향적인 방향으로, 작품의 완결성보다는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과 순간적인 몸짓을 더욱 중시하는 쪽으로 전개되었다.(38)

1920년대 후반기에 대중음악인 트로트와 즉석의 밴드반주를 기반으로 한 이른바 악극(樂劇)이 연극 장르로 대두되었다. 아울러 악극과 변별하여 서양식 창작 가창곡에 즉석의 피아노반주를 기반으로 한 음악극을 가극(歌劇)으로 별칭하기 시작했다. 아직 뮤지컬이라는 개념이 수용되기 이전이었다. 악극은 1950년대 후반, 영화가 붐을 일으키기 전까지 대중극을 주도한 장르였다. 이에 대하여 가극은 주로 학교행사나 교회행사를 통해 공연되는 것이 고작이었다.(38)

...창극은 근대극의 계승이자 전통양식의 계승이다. 1960년대부터 전통제의인 무당굿을 계승한 굿극, 가면극을 계승한 탈춤극, 인형극을 계승한 꼭두극, 배우희(俳優戱)를 계승한 재담극(才談劇), 그리고 전통을 폭넓게 계승한 마당극과 가무악극이 현대극의 새로운 양식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전통양식의 계승과 발전’으로 통칭되는 일련의 창조작업이었다.(39)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인형극은 꼭두각시놀음이다. 전문적인 연행집단과 더불어 전승되고 있다. 민속극희 ‘남사당(男寺黨)’이 그것이다. 인형극의 정신과 방법을 계승하여 현대적으로 창조한 연극이 ‘꼭두극’이다. 꼭두극은 인형극의 범칭이다. 인형이 내포한 원형성과 현실성, 기교성과 표현성을 최대로 활용하여 만들어진 것이 현대 꼭두극이다.(40)

한 배우 혹은 두 배우가 재치 있게 말을 하며 현실을 풍자하거나 관객들을 즐겁게 하는 연극을 ‘재담극’이라 했다. 코믹한 언어가 주 수단이고 거기에 익살스런 연기를 곁들이는 이 연극에서 배우의 기량은 기지에 찬 말의 기술로 평가되었다. 즉 화술에 의존하는 골계극(滑稽劇)이었다. 재담은 오랜 역사를 지녔다. 왕과 상류계층은 유식한 재담을 즐겼는가 하면, 문맹인 서민들은 그들 나름대로 이해하기 쉽고 일상생활에서 우러나오는 솔직한 재담과 몸짓을 즐겼다. 현대 재담극을 희극과 구분하여 서술하는 것은 희극이 서구적인 양식의 계승·창작인데 반하여, 재담극은 전통양식의 계승·창작으로, 다른 구조와 어법을 지녔기 때문이다. 장면 만들기, 개방된 공간 활용, 생략된 연기, 더블 캐스트, 낭독법, 격조(格調)있는 말투, 말과 노래의 혼합, 서사와 서정의 조화 등은 전통양식의 재창조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시된다.(41)

전통적인 개념으로 볼 때 마당극은 야외극이다. 마당극을 야외극에 한정시키지 않고, 이른바 ‘마당정신을 표현한 연극’으로 통칭할 때, 실내의 공연도 마당극에 포함된다. 1970년대에 마당극이 성립된 이후, 실제로 마당극은 야외와 극장(기타 실내)을 오가며 공연되었다. 마당극은 집단적인 창작과 집단적인 공연을 위주로 했다. 당국의 검열을 받지 않은, 이를테면 불법공연이므로 학술발표회나 토론회, 학예회나 워크숍 같은 명칭을 빙자하여 공연되었다. 이렇게 마당극의 개념적 애매성은 성립시기부터 배태된 셈이다.(41)

공연양식이라는 관점을 기준으로 하면, 탈극장주의 야외극만이 ‘마당극’으로 분류된다. 탈극장주의는 마당정신의 한 표현이기도 하다. 마당정신은 언제나 현실주의에 기반을 둔 체제저항과 투쟁, 시(41)민들과의 의사소통 및 시민의식의 표현, 정보가 차단된 사회 속에서의 역사적인 현실비판과 진실전달, 그리고 전통적인 드라마 방법의 계승과 재창조라는 의미를 포괄한다. 지극히 정치적인 연극이 마당극이며, 서구적인 리얼리즘보다는 전통적인 민중극의 현대화에 더욱 가깝다. 1970년대 검열제도에 저항했던 탈극장주의 사실극은 마당극(마당굿)으로 지칭되었고, 발전적인 개념으로 노동극 혹은 민족극이라는 개념을 부각시켰다.(42)

모든 전통음악을 재료로 하여 제작된 음악극은 창극과 구분하여 ‘가무악극’이라 한다. 1960년대부터 새로 시도된 것이 뮤지컬과 가무악극이다. 가무악극은 양악의 방법을 수용하여 전통을 현대적으로 변화시킨 음악까지를 포함하므로 뮤지컬에 포함하여 논의할 수도 있다.(42)

 

2. 현대극 성립의 문화기반

 

1) 신세대 극단 및 관객의 진출

 

신세대 극단은 1960년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진출했다.(43)

이런 극단들은 광복 후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했거나 대학극 활동을 함께 한 신세대가 주축이었다. 물론 일부 지도자들 가운데는 기성 연극인도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신세대와 손을 잡은 기성인들은 신세대와 연극이념이나 비전을 함께 하면서 그들의 취향에 알맞은 연극을 하려고 노력했다.(44)

1960년대에 창단된 극단들 가운데서 극단 실험, 민중, 가교, 광장, 자유, 여인, 성좌 등은 2004년 말 현재에도 공연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신세대 극단들이 현대극을 주도해 왔다는 것은 이런 사실만으로도 입증된다. 지속성의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전위성(前衛性)과 실험성을 내포한 참신성의 측면에서도 신세대극단 활동은 주목할 만하다. 이들의 참신성은 기존의 연극에 대응하여 새 바람을 일으켰고, 끝내는 연극계의 풍토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했다.(44)

 

2) 국립극장의 정립과 소극장의 증설

 

현대극의 중심지는 국립극장이었다. 창작적 측면이나 공간적 측면에서 모두 그러했다.(47)

 

3) 신세대 극작가의 출현

 

1960년 1월 이근삼 작, 김재형 연출의 <원고지>, 이철향 작·연출의<제5계절>이 원각사에서 각각 공연되었다. 4월에 학생혁명이 폭발했다. 이런 시대정신과 함께 대학에서 연극 활동을 한 젊은 연극인들이 대거 새로운 극단을 결성하고 나섰으며, 그들은 종래의 사실주의 미학만으로는 급속하게 변화되고 복잡하게 얽히어 가는 동시대인의 삶과 의식을 무대에서 제대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자각과 실험적인 저항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50년대 후반기부터 신진 작가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일기 시작한 일련의 새로운 모색들을 60년대의 그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표면화시키고 활성화시키는 데 정열을 기울였다. 젊은 연극인들의 미학은 해체와 개방·수정과 절충·전통의 재발견과 창조적인 모색 등으로 표출되었다. 당시 국립극단은 이러한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51)

 

4) 번역극과 전통연희의 영향

근대적인 연극이 발달하지 못했던 우리 연극계는 번역극에서 짙은 영향을 받았다. 20세기에 들어서서, 근대화의 갈망과 식민화가 동시에 진행된 까닭으로 서구극의 번역은 대부분 일본을 통해서 수용되었다. 1920년대부터 외국어를 전문으로 하는 지식 연극인들이 대두되면서 직역 번역극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번역은 할 수 있었지만, 연출과 연기, 무대예술, 무대 메커니즘은 체계적인 교육이나 훈련을 받은 적이 없었기에 역시 일본극장에서 견문한 것을 바탕으로 공연할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에 이르자, 새로운 공연 수요가 급증했고, 외국어를 전문으로 하는 신세대 연극인도 차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연극서적을 구독하기 쉬워졌는가 하면, 외국에서 연극을 위해 유학한 사람들도 국내 무대에 나타났다. 번역극은 창극의 부족한 영역을 보충(53)해주는 정도가 아니라, 창작극과 같은 비중으로 무대를 메웠고, 신세대의 폭발하는 갈증은 번역극이 오히려 주도적으로 채워주었다. 번역극의 편향성(偏向性)은 줄곧 문제가 되었지만 창작극의 기반이 취약하다 보니 쉽사리 극복되기 어려웠다.(54)

여기서는 사물엘 베케트(1906~1989) 작, 임영웅 연출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하나의 대표적인 번역극으로 기록해 두는 정도에 그치기로 한다. 베케트의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임영웅은 1969년 12월 한국일보 소극장에서 이 작품을 처음 무대에 올렸고, 세기를 넘어 2004년 현재까지 국내외에서 수차례 재공연 되면서 훌륭한 작품으로 거듭 났다. 임영웅과 산울림소극장의 대표작은, 재론의 여지없이, <고도를 기다리며>이다. 그는 이 작품의 정심하고도 심원한 연출을 통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각광받는 연출가로 발돋움했다.(54)

창작극과 더불어 번안극(飜案劇)도 끊이지 않았다. 번역극을 그대로 하기보다는 번역극에 자신의 뜻을 담아 새로 만든 작품이 번안극인데, 연극계 전반의 흐름으로 보아서는 날로 증가하는 추세다.(55) 무엇보다도 공연예술의 현장성과 일회성이 ‘번역극도 하나의 창작극이다’라는 개념을 낳게 하고, ‘기왕에 번역극을 할 바에는 차라리 새로운 요소를 첨가하여 번안극을 하는 것이 연극에 대한 자신의 뜻을 펼 수 있는 길’이라는 인식이 신세대 연극인들 사이에는 확대되어 온 것이다.(56)

아울러 세계화의 추세에 따라 확대되고 있는 동서연극의 교류도 번안극을 부추기는 요인의 하나이다. 번안극 무대에서는 원작의 정신이나 독창적인 방법을 심하게 훼손(毁損)하는 행위가 빈번한데, 이러한 현상은 큰 문제이다. 일종의 저작권 침해이자 고전의 파괴행위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번역극은 과거보다 현저히 줄어들고 있고 있다. 하지만, 원작에 대한 정밀한 고찰이나 현대적인 해석에 관한 새로운 비전 없이 ‘마구잡이식’으로 번안극이 성행하고 있는 오늘날의 현상은 심히 우려된다.(56)

1960년대부터 전개된 전통연희의 부활운동은 현대극의 발전에 적지 않은 영감과 자극을 주었고, 숱한 자료와 전통방법 및 기술을 구체적으로 제공했다.(57)

정부가 주도하는 전국민속예술축전(경연대회의 개칭)은 1958년에 시작되었다.(58)

 

5) 연극검열제도

 

...한국 현대극은 검열제도 아래 표현의 자유를 제한받는 조건 속에서 성립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멀리는 식민지시(60)대 초부터 1980년대까지 무대공연은 이른바 ‘공연필(畢)’의 도장이 찍힌 작품들이었다.(61)

 

 

제2장 근대양식의 지속과 전개

 

1. 사실극의 계승과 분단현실

 

1) 사실극·마당극

 

현대 사실극은 근대 사실극을 지속 발전시킨 연극이다. 사실극은 대부분 과거처럼 무대적 실제성(實際性)에 치중하거나, 당면한 현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한 채 시시콜콜한 주변 이야기를 늘어놓는 데 시간을 낭비했다. 물론, 드물지만 동시대가 요구하는 리얼리즘을 창출시킨 경우도 없지 않았다. 1960년 4월, 자유당의 장기독재에 항거하는 학생혁명이 일어났다. 이 혁명은 민주화운동의 불씨가 되었고, 동시에 연극을 변화시키는 데도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65)

현대 사실극은 이른바 극장주의(劇場主義)와 탈극장주의의 두 계통으로 분류된다. 근대극 전통을 계승한 극장주의 사실극은 사실주의를 고수하면서 한편으로 수정주의, 절충주의 경향을 드러냈다. 상징주의·표현주의·부조리극 등과의 절충, 사실극 자체의 심리화·투시화·내면화를 통한 수정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다. 현대 사실극은 사실주의로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다변화되고 다층화되고 복잡해졌다.(66)

한편, 검열제도에 저항했던 탈극장주의 사실극은 새로운 제작방법과 공간을 찾아나섰다. 그들은 공연장으로서의 ‘극장’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깃들인 구태의연한 기성제도와 온존(溫存)주의적 인식과 굴종(屈從)의 행동방식에 저항했다. 그들에게는 공연예술과 새로운 이념, 정치적 투쟁이 별개일 수 없었다. 그들은 리얼리즘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타성화된 사실극을 혹독하게 비판했고, 새로운 방법으로 기존의 관행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들은 한때(66) 자신들의 연극을 ‘마당극’으로 지칭했다.(67)

 

2) 1960년대의 사실극

 

1960년대에 접어들어 사실극은 한층 안정되고 심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근대 사실극에 비해 소재나 배경의 측면에서 훨씬 폭넓고 다양해졌다. 농촌 중심에서 도시, 어촌, 광산 등으로 공간적 배경이 확대되었으며, 금기시되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소재가 대담하게 채택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극작가들의 현실인식이 이전에 비해 한층 과감하고 치열해졌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그 도화선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4·19혁명이었다.(67)

 

3)차범석의 사실극

 

차범석은 한국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극작가이다. 1950년대부터 작품활동을 시작한 그는 근대와 현대를 잇는 교량 역할을 하며 일관되게 사실주의를 고수해왔다. 국립극단이 공연한 이진순 연출의 <산불>(1962. 12)은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이 연극은 6.25 전쟁기에 공비토벌의 현장이던 지리산 자락의 마을을 무대로 하여,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회적인 갈등과 인간의 본능적인 갈등을 집약적으로 다룬 비극이다.(71)

 

4) 사실극의 다층화

 

1970년대에 접어들어 사실극은 남북분단의 비극적 현실에 주목하면서 사회적인 화제를 다각적으로 형상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민감한 정치사회적인 현실보다는 가치관의 변화로 인한 윤리적 갈등을 우회적이고 심리적으로 조명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는 곧 사실극이 현실의 외피에 대한 묘사에서 벗어나 그 내면적 현실에 주목하는 방향으로 진화되었음을 시사한다. 동시에 이러한 경향은 유신독재 체제하의 살벌한 검열로 인해 정치적인 현실문제를 직접적으로 거론하기 어려웠던 시대환경 탓도 없지 않았다.(76)

 

5) 1980년대의 사실주의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연극계에는 이른바 ‘수정사실주의’의 흐름이 폭넓게 정착되었다. 사실주의 미학을 기조로 하되, 현대극의 다양한 양식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여 표현의 영역을 확대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실극은 심리적인 현실의 환기, 상징적이고 시적인 분위기의 가미, 플래시백 수법을 통한 자유로운 시공간의 넘나듦 등으로 요약되는 유연하고 개방적인 특성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현대 사실극은 한층 성숙한 면모를 갖추었다.(84)

 

6) 윤조병의 연작

 

1980년대 사실극을 주도한 극작가는 윤조병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이른바 농촌 3부작으로 일컬어지는 <농민>, <농토>, <농녀> 등의 작품과, 광산 3부작인 <모닥불 아침이슬>, <풍금소리>, <초승에서 그믐까지> 등이 사실극을 연이어 발표했다. 물론 그의 작품이 보이는 스펙트럼은 사실극에서 서사극, 부조리극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위의 연작들을 통해 윤조병은 차범석의 계보를 잇는 현대 사실극의 주요작가로 자리잡았다.(89)

윤조병의 사실극은 농민과 광부 등 소외된 이들의 삶에 주목한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뒷전으로 밀려난, 사회의 그늘진 이면에 조명을 가한다. 그리하여 산업사회의 구조적 모순, 그로 인해 야기되는 하층민의 운명적 비극성을 절절하게 환기시킨다. 나아가 3대를 아우르는 가족사적 인물구성은 운명의 대물림을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비극성을 한층 고조시킨다. 운문과 산문, 현실과 꿈이 각각 뚜렷한 경계를 이루면서 변증법적으로 조화되는 구조적 견실함 또한 돋보인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윤조병의 연극은 현대 사실극의 한 전형으로 굳건히 자리잡았다.(95)

 

7) 정복근의 사실극

 

극단 현대극장이 공연한 정복근 작, 김아라 연출의 <독배>(1988. 6)는 한 인물의 개인사를 통해 한국 현대사를 집약시켜 조명한 작품이다.(95)

 

8) 후기 산업사회와 사실극

 

1990년대에 들어서며 사실극은 한층 뚜렷한 변화의 징후를 보여준다. 농어촌, 광산 등 전통적 삶에 집중되었던 소재가 도시인의 일상적 삶으로 이동하였고, 추리극이나 음악극 등의 다양한 기법이 수용됨으로써 표현의 폭이 확대되었다.(98)

극단 맥토가 공연한 박구홍 작, 엄기백 연출의 <시민 조갑출>(1990. 9)은 이른바 ‘내 귀의 도청장치’ 사건을 소재로 하여 1980년대의 정치현실을 풍자적으로 재현한 작품이다. 9시 뉴스에 느닷없이 출현하여 ‘내 귀에 도청장치가 들어 있다’고 외쳐 시청자들을 경악케 한 사건이 한동안 화제였는데, 이 사건을 극화한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98)

 

9) 재외작가 한진, 유미리

 

알마아타에서 활동하는 조선극장이 내한하여 공연한 한진 작, 파스코브 알렉산드르 연출의 <나무를 흔들지 마라>(1991. 9)는 이주 4세대가 지났어도 완벽한 한국어 능력을 선보인 배우들의 연기로 관객들을 감동시켰다. 193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춘향전>으로 창단공연을 올린 이 극단은 1937년에 알마아타로 강제 이주당하여 오늘에 이르렀다.(111)

극단 민중극장이 공연한 유미리(柳美里) 작, 윤광진 연출의 <물고기 축제>(1994. 7)는 재일 한국인 극작가 유미리의 자서전적 작품이다.(111)

 

10) 사실극의 의의와 과제

 

사실극은 동시대의 현실에 내재한 인간의 삶 혹은 사회문제를 관찰한 결과에서 우러나온 연극이다. 사실극에서 ‘사실’이 언제나 ‘현실’ 그 자체일 수 없고, 또한 반드시 그럴 필요도 없지만, 시실성 곧 현실성의 구현은 사실극의 본질이자 목표이다. 사실극은 이런 본질과 목표의 구현을 목적으로 한다.(112)

‘탈(脫)리얼리즘시대라고 하는 현대에 왜 리얼리즘은 필요한가.’ ‘현대 리얼리즘의 새로운 방법은 무엇인가.’ 대부분 기존의 사실주의자들은 이런 질문에 실질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극은 현실에 대한 구조화와 압축기술, 문제에 대한 확대화가 부족했다. 작가 자신이 사실극을 발표하면서 자기가 선택한 방법에 새로운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것이 전반적인 실패의 요인이자 한국 사실극의 무대를 지리멸렬하게 만든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부터 리얼리즘을 다시 시작하자’는 주장을 펴자는 것이 아니다. 작품의 원리와 방법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철학이자 의도에서 창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연극계의 상황으로 보아서 사실극은 별로 전도가 밝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극을 무대에 올리고 싶다면, 작품의 신선함과 충실성이 관객의 마음에 현실성 짙은 감동으로 치환되는 것이어야 한다.(115)

 

 

2. 희극의 계승과 현대 풍자극

 

1) 희극·희비극

 

희극으로 통칭하는 연극양식에는 다양한 형식이 전승되었다. 근대 최초의 희곡인 <병자삼인>(1912. 11)은 동시대 일본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보이는 난센스 코미디였다. 근대의 희극정신은 하나의 전통을 형성했고, 특히 동양극장시대의 희극(笑劇, 파스가 주종을 이룬다)은 연극의 대중화를 촉진시켰다. 1930년대의 희극은 ‘악극(樂劇)’ 혹은 ‘고전의 현대화’와 결합하여 대중적인 오락극으로서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르네상스시대부터 희비극 형식이 확대되어 온 것은 삶이 본질적으로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데다 두 형식의 결합을 통해 인생의 진실을 더욱 잘 드러낼 수 있고, 나아가서는 극작가의 이념을 구체화시키는 데 효율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헤겔은 ‘희극적인 주관(116)성은 비극에서 심각한 양식으로 다루어지며, 비극적인 것은 희극적인 화해 속에서 완화된다’고 했다. 프라이(Frye)는 ‘희극이란 비극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비극은 단지 아직 끝나지 않은 희극일뿐’이라고 했다. 뒤렌마트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더 이상 하나의 비극으로 구현될 수 없는 비극적 요소들을 희극에서 본다’고 했고, 이오네스코는 희극적인 것과 비극적인 것은 상호 교환될 수 있고, 공통적인 본질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빠트리스 파비스, 심현숙 역, 󰡔��연극학 사전󰡕��, 현대미학사, 1999, pp.515~516-인용자 주)(117)

한국 근대극에서는 비극을 찾아보기 어렵다. 민주화, 대중화, 정보화 시대인 현대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역사적으로 ‘비극적인 삶’과 ‘비극적인 요인’이 지속되고 있는 것과 연극무대는 별개의 현실을 보여준다. 현대극은 양식에 상관없이 희극 혹은 희비극 양식이 줄기차게 강세를 보인다. 앞서 서술한 사실극은 물론이고, 역사극, 서사극, 부조리극, 잔혹극, 뮤지컬, 전토의 재창조 등 모든 연극이 정도의 차이뿐 희극정신을 모두 내포한다.(117)

폴야르(Pollard)는 풍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의했다. 풍자는 항의하려는 본능에서 생기며, 예술화된 항의이다. 풍자는 실제의 인간 현실 속에서 악덕과 어리석음, 모순과 비리 등 모든 부정적인 가치들을 폭로하고 비판한다. 풍자는 우행폭로(愚行暴露)와 사악징벌(邪惡懲罰)이라는 두 점 사이에 타원형을 그리며 왕복으로 운동한다. 풍자에서 폭로과 비판의 형식은 간접적이고 우회적이다. 직접적인 비난과 공격을 피하기 위해 기지(機智), 조롱, 아이러니, 비꼼, 냉소, 조소, 욕설 등 풍자의 스펙트럼대(帶)에 있는 모든 어조를 사용함으로써, 그 표면을 다양한 색상으로 변화시킨다.(아더 폴야르, 송낙헌 역, 󰡔��풍자󰡕��,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6, p.10 참조.-인용자 주)(117)

현대극에서 주종을 이루는 것은 풍자극이다. 근대희극이 파스(farce) 위주였던 것과는 대조적 현상이다. 풍속적인 불일치(不一致)에 가까운 행위들을 다루는 파스는 정치비판이나 저항이 불가능한 시대, 혹은 체제와의 대결을 피하면서 공연하기 위한 소극적인 극형식으로 유행했다. 이에 대하여, 윤리적 불일치에 가까운 행위들을 다루는 풍자극은 시대적으로 역행하는 정치와 반윤리적인 사회에 대한 과장과 비판, 경멸과 야유, 조소와 공격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려는 형식으로 대두되었다. 여기서 희극은 주로 풍자극이 대상이다.(118)

 

2) 현대 희극의 개척자, 오영진

 

한국의 대표적인 희극 작가로는 단연 오영진을 꼽을 수 있다. 희극의 교과서로서 오영진의 작품은 이후의 희극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영진의 희극은 근대기 대중극단에 의해 상연된 소극(笑劇, farce)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주로 배우의 즉흥적인 액션에 의지해 웃음을 촉발하는 슬랩스틱 코미디와 달리, 그의 연극은 치밀하게 계산된 구성을 통해 웃음을 유발한다. 아울러 그 웃음 속에는 사회현실에 대한 강한 풍자성이 내장되어 있다.(118)

오영진의 「맹진사댁 경사」는 일제 말기에 일본어 시나리오(국민문학, 1943. 4)로 처음 발표되었다. 해방 후 <향연>(1946. 2)으로 개제되어 역시 동일한 스텝진에 의해 조선예술좌에서 공연되었다. 작가에 의해 <도라지 공주>(1952. 8)로 각색되어 이해랑 연출로 극단 신협이 공연한 것은 전쟁 중의 일이었다. 1956년에 <시집가는 날>로 영화화되어 명성을 얻기도 했다. 1967년 극단 신협의 도일 공연을 위해 뮤지컬 <시집가는 날>로 개작되었으나 실연을 보지 못하다가, 1974년(118) 국립가문단에 의해 초연되었다.(119)

 

3) 로맨틱 코미디의 성황

 

오영진이 사회비판적인 풍자희극에 주력하였다면, 한편에서는 낭만적이고 유쾌한 웃음을 통해 사회적 갈등을 해소시키려는 경향이 대두되었다. 1960, 70년대는 한국사회가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였다. 삶의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모랄 역시 전통적 가족주의에서 개인주의로 급속하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희극은 해체와 변화가 가져오는 갈등의(122) 양상에 주목하면서, 이러한 갈등을 훈훈한 웃음으로 해소시키고자 하였다.(123)

극단 자유극장이 공연한 이강백 작, 최치림 연출의 <결혼>(1974. 11)은 관객과 함께 연극을 만들어가는 즐거움으로 충만한 소극이다.(125)

 

4) 풍자희극의 정착

 

1980년에 접어들면서 희극은 보다 사회비판적이고 풍자적인 성격을 강화한다. 폭력적인 독재정권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시민들의 민주화의식이 성숙되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그대로 연극 속에 반영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시대의 로맨틱한 응접실 희극은 자취를 감추고, 대신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공격하고 야유하는 풍자극이 주류를 형성한다.(128)

 

5) 1990년대 이후의 희극

 

6) 쓰카코헤이의 충격

 

교포작가인 쓰카코헤이(っかこうへい, 1948. 4 후쿠오카 출생, 후일 본명을 金峰雄으로 밝힘)는 <아타미(熱海) 살인사건>으로 1973년 제18회 기시다 쿠니오(岸田國士, 1890~1954) 희곡상을 수상했다. 또한 같은 해 <초급혁명강좌 비룡전(飛龍傳)> 등을 발표하면서 일본(144)의 젊은 세대에 최대 충격을 준 극작가이자 연출가로 급부상했다. 숱한 젊은 극단에서 그의 작품을 상연하여 붐을 일으켰다.

1980년에 초연된 대표작 <가마타 행진곡(蒲田行進曲)>은 그의 손으로 소설화되어 1982년 제86회 나오키(直木)상을 수상하기도 했다.(145)

 

7) 희극·풍자극의 의의와 과제

 

현대 희극은 대부분 풍자극이고 풍자정신으로부터 양분을 얻어 개화(開花)하였다. 일상에 만연한 모순, 비리를 비꼬고 야유함으로써 웃음을 유발하고, 이를 통해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개혁의 의지를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그런 점에서 희극은 진취성을 가진다. 다른 한편, 현대 희극은 대중문화의 영향 아래 관객들의 오락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로맨틱하고 명랑하고 가벼운 웃음을 통해 일상에 지친 관객들을 위무하고 격려한다. 현대극은 이러한 풍자성과 낭만성의 양면적 성격을 보여준다. 희극은 소재와 행동양식에 따라 다음의 몇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로, 전통사회를 배경으로 한 풍자극류이다. <맹진사댁 경사>, <해녀 뭍에 오르다>, <허생전>, <태평천하>, <어머니>, <고추 말리기> 등이 이런 유에 속한다. 어느 사회나 그렇지만 보수성이 강한 사회에서 그 덕목에 순응하며 살아온 사람들은 진보성이 뒤지게 마련이다. 오늘날 같이 급변하는 사회에서 그런 사람들은 선의의 피해를 입거나 스스로 피해를 자초하여 파멸하게 된다. 때로는 양자가 날카롭게 대립하다가 서로 피해를 입기도 한다. 이런 유형에 드는(147) 작품들은 사실극에 가까울 정도의 유장한 속도를 유지하면서 전통사회가 지닌 본질적인 모순을 넌지시 들어낸다.

둘째로, 결혼, 부부의 갈등, 이혼 및 재혼의 문제를 다룬 풍자극류이다. <아빠빠를 입었어요>, <토끼와 포수>, <동의서>, <결혼>, <이혼파티>, <바람분다, 문 열어라>, <용띠 위에 개띠>,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 등이 이런 유에 속한다. 이런 유의 작품은 숱하고 형식도 다양하다. 로맨틱 코미디가 있는가 하면 넌센스 코미디도 있고, 파스가 있는가 하면 자못 철학적인 내용을 추구한 하이 코미디도 있다. 현대 여성들의 지나친 성욕추구를 다룬 <생과부...> 같은 작품은 아이러니의 극단을 보여주기도 한다.

셋째는, 정치부패를 비판한 풍자극류이다. <관광지대>, <칠수와 만수>, <늙은 도둑 이야기>, <마르고 닳도록> 등이 이런 유에 속한다. 정치극은 가장 기대할 만한 현대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풍자의 금기 속에서 살아온 우리 사회에서 정치극은 희귀할 수밖에 없다. 다른 분야에 비해 가장 낙후된 정치 속에 살면서도 작가들 역시 정치적 상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유로 ‘정치풍자를 기피’하는 현상이 짙다. 또한 기존의 정치극도 범주가 좁고 풍자의 농도가 취약하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넷째로, 사회, 종교, 양심을 비판한 풍자극류이다. <유다여 닭이 울기 전에>, <팽>, <하나님 비상이에요>, <피고지고 피고지고>, <자살에 관하여>, <택시 드리벌>, <아타미 살인사건> 등이 이런 유에 속한다. 본격적인 사회풍자극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유의 작품은 뒤에서 다룰 서사극, 부조리극, 잔혹극, 재담극, 마당극 등과 유기적인 연관성이 있다.(148)

건전한 비판정신과 건강한 윤리의식은 풍자극의 기반이다. 비극이 사라지고 희극만이 성행하는 현대 사회에서 유독 우리 연극계는(148) 희극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다. 연극인 자신들의 정신과 의식이 박약하거나 흐리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진지한 현실인식을 통해 웃음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라야 희극은 관객들에게 정곡을 찌르는 쾌감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149)

 

3. 역사극과 역사인식

 

1) 역사극의 인식

근대 역사극은 식민지시대의 역사극운동을 거쳐 성립되었다. 이승만 자유당독재에 항거하여 일어난 1960년 4월의 학생의거와 8월의 장면(張勉)내각 출범은 민주화의 가능성을 보였다. 그러나 일시에 폭발한 각계각층의 사회적 욕구는 국가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1961년 5월 군사혁명 정부는 이러한 위기를 수습하고, 세계 최빈국(最貧國)이었던 국가경제를 최단시일에 부흥시켰으며, 일제시대부터 단절되었던 문화전통을 재생시킨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장기집권의 폐해는 민주화를 지연시켰고, 끊임없는 인권문제를 야기하였으며, 전두환·노태우 시대 같은 군벌독재 정치로, 김영삼·김대중 시대 같은 부패정치로 연계되는 불행한 역사를 낳았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민주화, 민족론, 통일론, 세계화에 대한 역사인식의(150) 왜곡과 날조는 극심해졌다.

민족생존권의 수호, 지속적인 경제발전, 반봉건·반독재적인 시민혁명의 완수, 그리고 민족통일의 성취가 절규되던 1970년대 초에 역사극의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즉, 역사극에서 사실(史實)을 충분히 응용함으로써, 오늘의 상황을 구조적으로 이해하고, 우리 삶에 대한 비판적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역사극의 갈등구조를 통해서 사실(史實)이 내포한 진실과 허위의식(虛僞意識)을 폭넓게 밝혀낼 수 있다. 역사극을 통한 성실한 창조작업으로써 비양심적인, 비역사적인, 비예술적인 낡은 요인들을 부단히 대체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역사극은 이렇게 정의되었다. ‘역사극이란 역사적 사실을 연극의 소재로 삼아 그 사실을 작가의 동시대적 현실과 역사인식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여 만든 작품이다. 연극을 통해서 역사에 참여하는 행위의 일종으로서, 작가가 지닌 자생적이고 주체적인 역사의지를 보편화시키려는 의식적이고 객관적인 표현이다. 작가의 자생적 역사의지는 그것 자체가 고립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 및 사회적 산물인 동시에 그가 위치한 전통적 기반 위에서 생성, 발전되는 것이기에 항시 타당성, 필연성, 보편성을 동시에 요구한다. 역사극이 관중에게 공감력을 획득할 때, 그들이 스스로 자각된 의식으로 역사적 사명을 실천적으로 이끌어 가게 하는 효용성을 갖게 된다.’(서연호, 󰡔��한국연극론󰡕��, 삼일각, 1975, pp.64~86 참조.)

사실(史實)을 소재로 한 작품은 현대극에서도 다반사로 확인된다. 그러나 소재의 차용(借用)을 역사극으로 볼 수는 없다.(151)

 

2) 김의경의 역사극

국립극단이 공연한 김의경 작, 이진순 연출의 <남한산성>(1974.6)은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斥和派)인 김상헌(金尙憲)과 주화파(主和派)인 최명길(崔鳴吉)의 갈등을 주축으로 현실주의와 다변(多變) 외교를 부각시켜 관객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152)

극단 민중극장이 공연한 정진수 연출의 <식민지에서 온 아나키스트>(1984. 9)는 일본 동경에서 활약한 열사 박열(朴烈)의 일대기를 사실대로 극화한 작품이다.(153)

극단 현대극장이 공연한 김상렬 연출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985. 10)는 일본의 관동대지진 학살사건을 새로이 발굴, 극화시킨 작품이다.(154)

 

3) 김상렬의 역사극

극단 작업이 공연한 김상렬 작, 길명일 연출의 <길>(1978. 10)은 세조의 왕위찬탈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성삼문 일가와 신숙주 일가를 양쪽 무대에 설정해 놓고 이를 교차 조명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156)

극단 신시에서 김상렬 작·연출로 공연한 <애니깽>(1988. 10)은 구한말의 어지러운 정국을 배경으로 멕시코 이민자들의 수난사를 조명한 작품이다.(157)

 

4) 1970년대의 역사극

극단 산하가 공연한 윤대성 작, 표재순 연출의 <노비문서>(1973. 4)는 1970년대의 인권문제와 탈춤양식을 절충한 역사극으로 주목할 만하다. 고려시대 몽고군의 침입 때 충주성에서 노비군(奴婢軍)이 활약한 사실을 소재로 하여 귀족(전운 역)들이 그들에게 한 면천(免(158)賤)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오히려 더욱 탄압하는 내용을 다룬 것이다.(159)

극단 실험극장이 공연한 오영진 작, 나영세 연출의 <동천홍>(1973. 11)은 1884년의 갑신정변(甲申政變)을 김옥균(金玉均)의입장에서 재구성한 것이었다.(159)

극단 민중극장에서 공연한 이재현 작·연출의 <대한(大恨)>(1976. 12)은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일대기다.(160)

 

5) 1980, 90년대 역사극

극단 성좌가 공연한 정복근 작, 권오일 연출의 <검은 새>(1985. 8)는 고구려 고분벽화인 삼족오(三足烏)의 설화를 바탕에 깔고 함길도 절제사였던 이징옥(이승철 역)의 반란사건을 형상화한 것이다.(162)

극단 반도가 공연한 이만희 작, 채승훈 연출의 <문디>(1989. 1)는 일제말기 나환자들을 수용했던 소록도를 무대로 한 작품이다. 특정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상황을 통해서 시대를 인식하려는 성찰을 보인다.(163)

 

6) 2000년대의 역사극

극단 연희단거리패가 공연한 이윤택 작·연출의 <시골선비 조남명>(2001. 8)은 조선시대 중기 남명 조식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이다. 벼슬에 뜻이 없이 글만 읽고 살던 한 시골선비(조영진 역)가 문정왕후(남미정 역)의 섭정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시골의 현감직에서 파직당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학에 정진하는 선비의 행동을 드라마로 만드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는 것이 통념이었다. 이 작품은 이러한 통념을 과감하게 깨뜨리고, 야성에 가까운 바판적 실천성을 보인 선비의 모습을 부각시킨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낙방한 것은 기성세력에게 불리한 새로운 지식을 제시했으며, 자신의 발언이 세상의 잣대에 어긋나기 때문이라고 서슴없이 토로한다.(164)

한국극단 미추와 일본극단 스바루가 합작공연한 <히바카리>(2001. 8)는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잡혀간 도공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조국에 대한 자존심, 도자기에 대한 자부심 등을 주제로 한 것이다. 시나가와 요시마사(品川能正) 작, 손진책·무라타 간시(村田元史) 연출, 박범훈 작곡, 김태근 편곡, 국수호 안무였다. 양국의 배우가 22명이나 참여하는 대작이었다.(165)

극단 맥토가 공연한 홍창수 작, 박종선 연출의 <수릉>(2002. 5)은(166) 고려시대 말기 공민왕의 정신적 방황을 그린 역사극이다.(167)

 

7) 역사극의 의의와 과제

현대 역사극은 소재의 영역이나 그 형상화의 측면에서 근대에 비해 훨씬 폭넓고 다양해졌다. 고대나 중세의 역사로부터 역사적인 평(167)가가 채 마무리되지 않은 근현대의 민감한 사실(事實)에 이르기까지 제재의 영역을 확장시킨 점은 괄목할 만하다. 아울러 서사극, 가무극, 심리극 등이 다양한 장르를 차용해 표현을 다변화시킨 것 또한 현대 역사극의 두드러진 특성 중 하나이다.(168)

역사적 사실의 단순한 복원이나 그 기이성, 호사성, 오락성에 집착하는 소재주의적 연극은 옳은 의미의 역사극이라고 볼 수 없다. 이는 매너리즘이나 상업주의의 소산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극의 소재는 비록 과거이지만, 이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은 언제나 현재적이자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 역사적 사실은 오늘의 삶에 대한 구조적인 인식과 비판적 통찰력을 얻는데 기여할 수 있을 때만 의미를 가진다. 역사의식이란 단순한 과거인식이 아니라, 진취적인 입장에서 과거·현재·미래의 삶을 연속적으로 인식하고 판단하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창의적 해석에 의해 과거가 진정 오늘을 비추는 거울로 기능할 대 역사극은 관객에게 충격과 감동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168)

 

4. 창극의 계승과 독자성의 위기

 

1) 창극·국립창극단

근대창극은 판소리를 무대 음악극으로 현대화하려는 광대들의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의 경극(京劇)이나 일본의 가부키(歌舞伎)에서 적지 않은 자극을 받았다. 날로 늘어나는 무대공연의 기회는 창극운동을 부추겼다. 창극은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등 5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08년에 공연된 <은세계>는 동시대의 현실문제를 창조적으로 부각시킨 점에서 5가와는 별도로 획기적인 의의가 있다. ‘신연극’이라는 의미에 부합되는 작품이었다. 강용환의 연출력이 비로소 창극의 가능성을 입증한 사건이었다.

1930년대 조선성악연구회의 창극은 극작가 김용승과 연출가 정정렬의 독보적인 노력과 함께 창극을 연극장르로 분명하게 인식시키(169)는 계기를 마련했다. 유명한 판소리 더늠과 신파조(新派調), 신극(新劇)의 연기를 조화시킨 조선성악연구회의 창극은 매 작품마다 기승전결의 완결된 구조를 갖추었고, 5가 이외에 판소리계소설, 고전소설, 창작 공연 등을 통해 창극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동양극장의 전속극단 청춘좌(靑春座)가 한때 시도한 ‘신창극’은 사실극에 더늠을 삽입하는 진보적인 시도를 보이기도 했다.

광복 이후 창극을 계승한 ‘국극’이 유행했다. 국수주의적 편향성이 짙은 무대였고, 계면조(界面調)의 이른바 여성국극(女性國劇)이 특히 인기를 독점했다. 격동과 혼돈기에 그리고 전쟁과 전후의 불안하고 참담했던 시기에 창극은 관객들에게 일시적으로 마음의 위안과 즐거움을 주었지만, 독자적인 양식을 수립하지 못한 채 신파조극이나 신극(사실극)에의 의존도가 높아 한계를 드러냈다. 5가 혹은 역사 및 설화 소재에 함몰되어 동시대적인 현실성이 없었고, 판소리 더늠을 토막내어 부르는 ‘토막소리’에 길들여져 새로운 창작 판소리무대를 창출해내지 못한 채 현대극에 편입되고 말았다.

1962년 2월 국립창극단(초기 명칭은 國立國劇團)이 창설되면서 창극은 전환기를 맞았다.(170)

 

2) 5가·창극연출

통산 106회 공연에 이르는 현대창극은 근대극시대와 변함없이, 5가의 재공연 및 개작공연이 여전히 주류를 이루었다. <춘향가>가 18회, <심청가>가 15회, <흥보가>가 13회, <수궁가>가 11회, <적벽가>가 3회 공연되었다. 「삼국지」의 적벽대전(赤壁大戰)을 소재로 한 <적벽가>는 지난 시대의 인기와는 달리 현대에 와서 현격한 퇴조를 보였다.

1962년 국립창극단이 결성되면서 ‘창극 정립’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비로소 연출의 독립이 이루어졌다. 명창(名唱) 세대를 이어온 김연수가 첫 번째 지휘봉을 잡았다. 그러나 그의 연출방향은 창극의 독자성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전승(傳承) 판소리의 진흥, 보급 및 감상에 역점을 두었다.

박진 연출에 이르러 종래 신파조 창극은 사실극 양식으로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무대적 사실성과 객관성을 중시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속속 도입되었으며, 판소리와 리얼리즘의 접목이 시도되었다. 종래 낭만주의 연극의 지류인 서구적 멜로드라마와 일본식의 신파조극이 접목된 타성화(惰性化) 된 창극으로부터, 창극은 다시 현대적인 과학정신을 존중하게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고 보니 창극은 자연 오페라나 뮤지컬과 유사한 형태로 변모하였다. <배비장전>(1963. 6),(171)<백운랑>(1963. 10), <서라벌의 별>(1964. 3), <춘향가>(1970. 9) 등이 그의 연출작이다.

이원경은 이 같은 박진의 작업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창극이 서양의 오페라나 뮤지컬과 흡사한 양식이 되는 것을 배격하는 동시에 우리 민속극의 양실을 모방, 수용하는 것도 경계하였다. 그러나 기본적인 방법 면에서는 리얼리즘 양식이 바탕에 깔려 있는 상태여서 판소리의 더늠과 아니리를 위주로 하는 공연을 펼쳐 나갔다. <춘향전>(1976. 4), <대춘향전>(1980. 4), <서동가>(1984. 6), <흥보전>(1988. 2) 등은 대체로 더블 캐스트를 활용한 이상과 같은 방식의 공연이었다.

1970년대 이진순에 이르러 창극은 왕성한 모색과 실험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리얼리즘 연극을 바탕으로 한 그의 다양한 시도는 창극의 새로운 가능성과 창극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열어놓았다. 연극적인 시각화와 소리의 입체화 및 동적인 요소의 확대방향은 민속극을 포함한 여러 가지 연기의 도입, 사실적인 의상제작, 생략된 무대장치와 배경화, 안무, 합창곡, 새로운 작곡, 30인에 가까운 생음악반주, 신속한 장면 변화, 마임 등을 포함하는 각종 요소의 복합차용으로 나타났다. 연출의 독립성은 그에 의해 두드러지게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 후반기에 다채로운 드라마 체험을 안고 창극계에 뛰어든 허규는 이진순보다 새로운 세대답게 창극의 실험에 몰두하였다. 그는 박진, 이원경, 이진순의 리얼리즘에 기조한 연출방향에서 완전히 방향을 바꾸어, 판소리 발생의 기반이라고 생각하는 판굿놀이에(172) ‘원형적으로 회귀’하려는 열정을 드러내었다.

전통적인 판굿놀이는, 한 마디로 광대의 예술이라 할 정도로, 광대의 재능과 현장성과 관중들의 심성이 어우러진 분위기를 창출하였는데, 허규는 바로 그러한 분위기를 재창출해내기 위하여 새로이 판을 짜는 방식으로 연출에 임하였던 것이다. 이를 위하여 민속극의 관습이 수용되었고, 현대식 확대 과장법이나 합창, 군중무가 이용되었고, 그 자신에 의한 대본 정리·창작이 진행되었다. 판굿놀이가 다채로웠던 것처럼, 그이 창극도 여러 가지 요소에 의해 새로이 짜여진 다채로운 연희가 되었으며, 판소리만의 창극은 이미 아니었다.

광대와 관중과 연희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판의 창출이 허규 연출의 꿈이라 할 수 있다. 판소리 명창의 맛과 멋을 즐길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그 밖의 미속예능이 지닌 잠재적 예술성을 유감없이 그 자리에 쏟아부어 현장성에 맞게 판을 짜는 연출방법이었다. 이를 통해 그는 연희자와 참여자가 함께 공감하는 마당을 만들어내고자 했다.(173)

1990년부터 허규 주도의 창극에 변화와 반성의 물결이 일었다. 창극 연출이 연극 연출가에서 음악극 연출가로 바뀐 것이 변화의 계기였고, 이 변화는 동시대적인 우리 음악문화의 영향을 수반한 것이었다. 2003년 4월까지의 창극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연출가 김홍승과 정갑균의 대두이다. 두 연출가는 모두 전통음악과 양악 특히 오페라 분야의 전문성을 구비한 음악인이었다.(174)

김홍승은 창극의 발전을 위한 방안으로 악보화 및 작곡화, 관현악기법 및 악기배치의 연구, 발성 개발, 판소리극의 극복, 음악극적인 음악편성, 지휘자 및 연출자의 역할 확립, 새로운 대본, 가사의 현대화 등을 제시했다. 이런 방안들을 전제로 김홍승의 연출은 이루어졌고, 정갑균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방법론은 여전히 높고 두꺼운 인습적인 창극의 장벽에 부딪혀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창극은 구태의연하게 오늘에 이른다.(174)

3) 신창극의 모색

5가만으로 공연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는 창극단은 신작 개발을 병행했다. 개발 작품에는 비교적 제작이 용이하게 여겨지는 실전(失傳) 판소리가 포함되었다. 공연 빈도로 보면, <배비장전>(실전)이 9회, <박씨전>(고전소설)과 <용마골장사>(고려시대 배경)가 3회, <광대가>(신재효 전기), <부마사랑>(고전소설, 윤지경전), <황진이>(전기)(174) 등이 각각 2회 공연되었다.

<백운랑>(신라시대 배경), <서라벌의 별>(원술랑의 전기), <대업>(안중근의 전기), <강릉매화전>(실전), <가로지기>(실전), <최병도전>(신소설, 은세계), <서동가>(백제무왕의 전기), <광대의 꿈>(송흥록의 전기), <윤봉길 의사>(전기), <두레>(조선시대 배경), <달아 달아 밝은 달아>(일제시대 배경), <이생규장전>(고전소설), <구운몽>(고전소설), <명창 임방울>(전기), <경복궁의 북소리>(고종황제의 전기), <백범 김구>(전기), <논개>(전기), <춘풍전>(고전소설, 이춘풍전) 등이 각각 1회 공연되었다.(175)

 

4) 창극의 의의와 과제

판소리를 무대 음악으로 전환시킨 창극은 근대와 현대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장르로서 일정한 의의를 지닌다. 전통 음악극으로서의 독자적인 가치를 지니고 오늘날에도 상당한 관객층을 보유한다. 무엇보다도 창극의 가치는 현상으로서의 연극에서 더 나아가 그것이 미래의 한국 음악극 개발에 가장 중요한 기반이고 자료이고 자산이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1백여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독자적인 음악극으로서 양식을 수립하지 못한 점은 분명 한계로 지적된다. 판소리 자체가 지닌 연희미학(演戱美學)을 폭넓게 발견하고, 현대 음악극으로 진전시키지 못한 것이 문제다.

근대에는 신파조극이나 신극(사실주의)에, 현대에는 전통극이나 서구식 메커니즘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시청각적인 무대공연을 제공했다. 그러나 서양음악 어법으로 하는 오페라와 뮤지컬, 국악 어법의 창작곡으로 새로 발흥하고 있는 가무악극과의 사이에서 창극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과연 생존전략은 무엇인지 쉽게 찾을 수 없다. 과연 판소리 5가를 떠나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를 되묻게 된다.

현대 창극은 물론, 미래지향적인 창극이 되기 위해서는 창작극이 만들어지고, 그것은 동시에 관중의 관심과 호응을 불러일으켜야 한(177)다. 판소리의 어법을 창의적으로 이해하는 극작가와 작곡가가 우선 요청된다. 근대 창극 <은세계>가 놀라운 반응을 일으킨 것처럼, 우리의 현실문제를 부각시킨 대본과 음악극의 조건에 충족된 악보(5선보)가 마련되어야 한다, 악보 없이 음악극을 하는 것은 낡은 사고이다. 전문 연출가와 배우의 필요성도 강조될 필요가 있다.

광대의 소리를 따라가는 수성(隨聲)가락의 즉흥성, 5관청(五管淸)으로 고정된 남녀창 음역의 불합리성, 창작성을 결여한 채 ‘노가바(노래가사 바꾸어 부르기’에 의존한 창작형태 등 음악예술 형태로서의 여러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판소리의 더늠을 토막내어 부르는 ‘토막소리’가 아닌, 등장인물의 개성에 따른 창작곡·편곡·관현악적 편성, 판소리의 전개가 보여주는 과감한 생략과 집약적 방법에 의한 새로운 무대전개법의 개발, 그리고 사실적인 연기만이 아닌 상징적이고 이미지적인 연기법의 시도가 필요하다. 새로 창작된 판소리 악보를 보면서 노래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창극은 가능해진다.

 

 

제3장 서구양식의 수용과 창조

 

1. 서사극의 수용과 변용

1) 브레히트·서사극

1959년 5월 고려대학교 극예술연구회는 손톤 와일더 작, 김갑순 역, 이기하 연출의 <우리 읍내>를 대강당에서 공연했다. 김갑순의 지도로 이화여대에서 영어극으로 두 번 상연된 작품이지만 번역극으로는 처음이었다. 공연 팸츨릿 해설에는 ‘이 극에는 막이 오르거나 내리거나 하는 일이 없다. 그리고 무대장치도 최소한도의 암시적인 것 이외에 없다. 무대감독은 극의 배경을 설명하고 진행을 좌우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때그때 필요한 이 사람, 저 사람이 된다. 물론 그는 사실 이상의 것을 말하지 않는다. 작자의 대변인도 아니다. 이 극은 안타까움을 느낄 정도로 외면적인 움직임이 억제되어 있다.’고 피력했다. 그리고 ‘이 극의 클라이맥스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오직 5평방피트의 널판자의 인생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183)고자 하는 정열뿐’이라는 원작자의 말을 인용했다.(고려대학교 극예술연구회, 󰡔��정기공연 팸플릿(제12회󰡕��, 1959. 5, pp.6~7 참조-원주)

비록 대학극이지만 이 공연은 ‘기성극단의 쇠퇴가 거의 말기적 징후를 나타내고 있는 현상에서 전위적인 색다른 특징을 지녔고’, 연극계에 새로운 형식을 통한 실험정신을 일깨우는 선구적인 일대 충격을 안겨주었다.(여석기, 󰡔��학생연극을 살리자󰡕��, 앞의 팸플릿, pp.6~7 참조-원주) <우리 읍내>로부터 실험극이니 전위극이니 하는 용어와 공연이 차차 빈번해졌다. 서사극은 1960년 1월 이근삼의 <원고지>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60년대에 서사극이라는 용어는 찾아보기 어렵고 ‘브레히트의 연극’이 아니면 ‘실험극’이라는 말로 통칭되었다.(184)

여석기는 앞서의 논설에서 ‘서사극은 객관을 표방하는 리얼리즘의 극이 자신도 모르게 빠져버린 자연주의적 모사(模寫)의 함정을 피한 점에서 객관적 리얼리티에 더욱 충실하다고 볼 수 있으나,(184) 방법으로는 그것이 채용한 바 가지가지 비리얼리즘의 연극적 요소로 말미암아 오히려 연극 본연의 전통에 부응하는 것’이라고 전제했다. 서사적 연극의 제반 연극적 요소로서 ‘장면의 삽화적 구성, 설화적 방법의 사용, 음악극을 방불케 하는 노래의 삽입, 코러스의 등장, 등장인물의 자기 석명적(釋明的) 대사, 환등·영사막·도표의 사용, 동시적인 무대’ 등을 지적했다.(「현대극의 조류」, 󰡔��사상계󰡕��, 1960. 12, p.318 참조)(185)

이런 뒤늦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의 공연목록에서는 브레히트를 찾을 수 없다. 여전히 반공(反共)이 국시(國是)였고, 그는 좌익작가로 분류되어 공연이나 출판검열을 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대학에서 연구하는 것은 제한적으로 허용되었으므로 소개 정도의 논설이 발표되었다. 이근삼이 그 선두주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유학의 체험 덕분이었다. 한편, 이상의 소개에서도 감지할 수 있듯이, 브레히트의 이론 자체가 실현하기에 난점이 있는데다가 간략한 이론만을 알아서 서사극을 무대에 올리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한 짓이었다.(185)

본격적인 서사극의 번역 공연도 할 수 없고, 서사극에 정통한 극작가와 연출가도 없는 상태에서 서사극의 수용과 창작은 심한 굴절과 변이를 거쳐 ‘한국적인 서사극’으로 변용되기에 이르렀다.

화소(話素)와 사실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서사극, 사실극, 역사극은 기록극과 유사성이 있다. 그러나 과거사의 추적 자체가 사실의 기술에 치중되고(documentation), 사실의 추이를 객관적으로, 실증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특히 새로운 증언이나 기록을 토대로 근현대의 은폐된 사건을 규명해낸다는 점에서 기록극(dokumentarishes Theater)은 독자적인 양식으로 불 수도 있다.(186)

 

2) 서사극의 전도사, 이근삼

이근삼은 한국 서사극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신무대실험극회가 공연한 이근삼 작, 김재형 연출의 <원고지>(1960. 1)는 한국 서사극의 효시로 평가된다.(186)

중앙대 연극과 학생들이 김기훈 연출로 공연한 이근삼의 <대왕은 죽기를 거부했다>(1960. 9)는 당시 자유당의 장기집권과 권위주의 독재를 거부한 민중의지를 반영한 작품이었다. 자신의 무능을 알지 못하는 대왕은 나라의 혼란과 위기에 대한 책임을 백성들에게 돌린다. 갑작스레 죽음의 사자가 나타나 대왕의 죽음의 시한을 알리고, 동시에 그가 살 수 있는 조건도 제시한다. 그를 대신해 죽는 사람이 있으면,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족과 신하, 백성 누구도 그를 위해 죽기를 거부한다. 대왕은 이런 현실을 알고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다.(188)

실험극장이 공연한 이금삼 작, 허규 연출의 <위대한 실종>(1963. 1)은 여주인공 공미순을 통해 왜곡된 출세주의의 일면을 풍자한 작품이다.(188)

극단 가교의 창립공연인 김승일 연출의 <데모스테스의 재판>(1965. 5)은 사후의 세계를 배경으로 작가의 정치와 사회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 우화적 재판극이다. 궁성의 경비원인 데모스테스는 경호부장의 명령으로 데모를 진압하다가 군중의 한 사람인 멘쉬키를 죽인다. 그는 살인죄로 사형당한 후 저승의 재판정에 서게 된다. 군사독재에 항거하여 데모로 얼룩졌던 1960년대의 상황을 우의적으로 극화한 것이다. 관객이 사건과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도록 전개시킨 것은 브레히트의 영향으로 이해된다.

재판과정에서, 여왕과 경호부장의 내연관계, 본인은 계속 부정해 왔지만 경호부장의 발포명령이 있었던 사실 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또한 데모스테스의 증언을 통해 왕실 주변의 권력을 둘러싼 온갖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세상사가 하나하나 밝혀진다. 심지어는 재판을 주도하는 재판장, 검사, 변호사, 서기의 부정도 폭로된다. 그의 살인은 법적으로 무죄임이 입증된다. 그러나 재판의 마지막에 5천 년 간이나 끌어온 판결은 다음 법정으로 연기된다. ‘저승의 재판정’이라는 시공간 개념을 설정하고, 역적과 애국자의 상관성을 지속적으로 반전시키며, 재판의 허구성을 아이러닉하게 풍자한 이 작품은 ‘재판 공해’에 시달려 온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다.(189)

실험극장이 공연한 나영세 연출의 <일요일의 불청객>(1974. 12)은 서사극의 방법을 최대로 활용한 대표작의 하나이다. 해설자를 맡은 배우(서인석 역)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모든 인물들은 환상세계에서 나온 사람들’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작가가 서사(敍事)를 자유롭게 구사핫겠다는 취지를 공포한다. 과연 그 자신도 해설자 노릇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의 윤이사 역, 동회서기, 총을 든 범인 역 등을 맡아가며 변신한다. 그의 이런 변신은 서사를 경제적으로 제시하는데 기여할 뿐만 아니라 관객에서 비판적 거리를 넓힘으로써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증대시킨다.(190)

극단 민중극장이 공연한 정진수 연출의 <수렵사회>(1975. 10)는(190) <국물이 있사옵니다>를 개제한 것이다. 당시 유행어를 제목으로 살린 작품이다. ‘국물’은 ‘약간의 대가’ 혹은 ‘약간의 수고료나 분배 몫’을 의미한다. 사회정의나 법, 양심에 상관없이 자기 이익(국물, 출세)을 위해 타인의 일을 돕는 사람들이 많은 환경에서 유행된 말이었다. 이 작품은 김상범(박봉서 역)이라는 청년의 무모하고 불합리한 출세과정을 ‘국물을 찾는 인간’으로 부각시킨다. 애초에 그는 매우 소심하고 어리숙한 청년이어서 회사의 임시직을 면치 못하고, 마음에 둔 여자에게는 내심을 털어놓지 못한다. 이웃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매양 손해만 입는 처지로 살아간다. 그런 그는 작품이 전개됨에 따라 획기적인 변신을 보여주게 된다. 청년은 소위 출세법(기회주의와 배경주의)에 눈뜨게 되자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자기 이익과 이해’에만 전념하며 신속하게 교활한 인간으로 변질된다. 신세대들의 출세주의와 이윤추구의 행동양식을 냉혹하게 제시함으로써 비판적인 웃음을 이끌어낸다.(191)

극단 가교가 공연한 이승규 연출의 <아벨만의 재판>(1977. 10)은 이근삼이 즐겨 다룬 재판극의 수작이다. 당시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일부 비평도 있었지만, 1970년대의 냉혹한 정치현실을 우화적으로 풍자하여 폭넓은 공감을 얻었다. 전화(戰禍)를 입은 어떤 중립국의 소읍에서 일어난 사건을 취급한 이 작품에서 주인공 아벨만(강문선 역)은 가축을 기르는 선량한 청년임에도 불구하고 주위 사람들의 복수와 출세를 위한 제물로 희생된다. 재판의 장면은 매우 치밀하게 구성된다. 재판이라는 요식행위를 통해 아벨만의 죄가 조작되는 과정, 사람들이 책임을 회피하는 방법, 그리고 집단적인 횡포,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잔인성 등을 섬세하게 이끌어내어 보여준다. 당대 사람들의 현실에 가로놓인 정치적 모순구조뿐만 아니라, 집단적 욕망체계를 아이러닉하게 인식시킴으로써 지적인 웃음을 창출해내었다.(192)

국립극단이 공연한 김도훈 연출의 <이성계의 부동산>(1994. 3)은 극중극의 기법을 활용해 기도원의 비리와 인권유린을 풍자한 작품이다. 극은 천지복지원이라는 기도원에 새로운 원장이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신임원장 오봉(정상철 역)은 폭력이 난무하는 복지원의 현실을 개선하고자 하며, 그 과정에서 이성계(김동원 역)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거액의 기부금을 낸 대신 복지원에 머물고 있는 이 인물은 자신이 태조 이성계라고 믿는 과대망상증 환자이다. 그를 치유하기 위해 오봉은 일종의 사이코드라마(사이코드라마[psychodrama]: 비슷한 환자들을 모아 놓고 즉흥적으로 연기하도록 하는 연극. 미국의 정신과 의사 모레노가 고안한 정신 요법의 하나로, 환자들이 이를 통하여 마음속에 있는 문제를 표현하도록 함으로써 환자를 분석하고 치료할 수 있다-인용자 주)를 시도하기로 한다. 원생들이 각자 이성계의 신하 역할을 맡아 극중극을 벌이는 과정에서 이성계를 둘러싼 진실이 드러난다. 자신의 부동산을 놓고 벌이는 가족들의 집안싸움에 환멸을 느낀 그는 환상으로의 도피를 택한 것이다. 결국 이성계는 환상 속에서 행복하게 눈을 감고, 복지원은 운영난으로 문을 닫는다. 모두가 떠난 복지원에 정도전 역할의 38번(주진모 역)만이 남는다. 새로운 배우들이 38번을 찾아옴으로써 이성계의 환상은 계속되고, 극은 막을 내린다.(193)

이근삼의 연극공간은 우화적(寓話的)인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우화는 흔히 이야기를 통한 구체적인 심상과 그 심상 뒤에 가로놓인 추상적인 의미의 이중 구조를 지니게 마련이다. 알레고리의 어원은 ‘말과는 다른 의미를 뜻한다’는 것이다. 그 다른 의미란 곧 이중 구조를 지칭하는 것이며 평행선적인 구조를 말한다. 이근삼은 무대 공간을 이와 같은 이중적 구조로 드러내기 위한 의도에서 자유자재로 활용하고 개방해 놓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자신이 의도하는 창조적인 우화를 위해 일상적인 시간이나 역사적인 시간 개념을 새롭게 바꾸어 놓았다.

그는 서구 현대극이 지닌 새로운 방법을 수용하여 종횡무진으로 활용했다. 연극 공간 개념의 확장, 시간 개념의 확대, 극적인 제시방법의 변화, 극적인 언어영역의 확대 등이 선을 보였다. 특히 제시방법에서는 서사적 수법, 우화적 수법, 표현주의적 수법, 극적인 아이(194)러니의 수법, 소극적 수법, 음악적 요소의 삽입, 시적(詩的) 분위기의 도입 등이 다양하게 시도되었다. 그를 통해서 기존 연극에 대한 인식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대체로 이근삼이 즐겨 다룬 알레고리는 정치와 권력의 부패, 지식인의 타락, 건정한 사회윤리의 붕괴, 꿈의 상실, 애정관의 세속화, 사회제도의 박제화, 인간적인 멋과 여유의 상실, 인간성의 상실과 진보 지향성의 혼미 등이었다.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 주관적인 과장이나 왜곡, 변화를 보이는 표현주의 방법도 즐겨 사용했다. 전통적인 연극 형식의 개념에서 본다면 이근삼은 소극(farce)의 작가였다. 익살스럽고 우스꽝스런 사건, 즉흥적인 대사, 자발적인 비판과 농담, 과장된 동작과 익살, 떠들썩한 분위기 등이 소극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소극의 이러한 특징을 활용하여 현대의 관중에게 날카로운 비판과 차가운 비웃음을 일으키는 서사극을 만들었다.(195)

 

3) 이재현의 기록극

1960년대에 이근삼, 신명순 등에 의해 싹튼 서사극은 70년대 이재현이 출현하면서 한층 심화된 단계로 나아간다. 이재현은 전대의 서사극 작가들과 달리, 보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현실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국립극단이 공연한 이재현 작, 이기하 연출의 <포로들>(1972. 5)은 6.25 당시 남쪽 거제도에서 일어난 포로수용소 사건을 극화한 것이다.(195)

이 작품은 전쟁과 휴머니즘의 갈등, 이데올로기와 개인적 자유의 갈등, 일방적인 정의와 상대적인 이익 사이의 갈등을 첨예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수용소 안에서 극한적인 이념 갈등과 그 틈바구니에서 무참하게 희생당하는 인간들의 모습은 그대로 민족적 비극으로 구현된다.

한상철은 ‘한국 연극은 서사극 형식에 아직 미숙했다. 이 말은 역사적 현실을 차갑고 냉정하게 보는 눈이 작가나 연출자에게 부족했었다는 것을 말한다. 즉 연출자나 작가나 높은 휴머니즘으로 승화시켜야 될 한 포로의 비극을 낭만적 감상 내지 멜로드라마틱한 센티멘탈리즘으로 전략시켰던 것이다. 특히 연출에서 재래적인 수법을 그대로 극에 적용시키려 한 점은 이 작품 공연을 손상시켰다’고 비(196)판했다.(한상철, 「<포로들>」, 󰡔��70년대 연극평론 자료집(1)󰡕��, pp.61~62 참조-원주)(197)

극단 현대극장이 공연한 김상렬 연출의 <멀고 긴 터널>(1978. 9) 또한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197)

극단 민중극단이 공연한 정진수 연출의 <선각자여>(1985. 8)는 식민지시대 말기 이광수의 친일문제를 다룬 서사극이다. 작품은 이광수(박봉서 역)의 업적에 대한 시비를 염두에 두고, 이광수를 비판하는 최유청(윤주상 역)이라는 인물과 이광수를 호의적으로 보는 박정호(정운봉 역)를 설정한 뒤, 그들의 내레이션으로 접근을 시도한다. 총 9장으로 되어 있는 이 작품은 이광수가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친일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순차적으로 보여준다. 각 장의 말미에는 최유청과 박정호가 등장하여 서로의 의견을 피력한다. 춘원의 같은 행각을 두고 벌이는 그들의 논쟁은 관객의 역사인식을 확장시킨다.(198)

극단 부활이 공연한 이재현 작·연출의 <코리아 게이트>(1988. 11)는 1970년대 한미외교상 가장 큰 위기를 몰고 왔던 이른바 ‘코리아 게이트’ 중 김한조 사건의 전말을 추적한 서사극이다.(199)

극단 성좌가 공연한 길명일 연출의 <사파리의 흉상>(1991. 9)은 한 영웅적 인물의 성공신화에 숨은 추악한 내막을 폭로한 작품이다.(200)

이재현의 서사극은 표현의 측면에서는 기록적인 성격이 강하며, 소재의 측면에서는 실화를 활용하는 특성을 보여준다. 분단현실과 이념대립, 유신독재로 이어지는 살벌한 1970, 80년대에 이재현은 금기시되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이슈를 과감히 채택하여 극화하였다. 현실비판의 측면에서 희극적이고 우회적인 성격이 강한 이근삼의 서사극과 달리, 이재현의 서사극은 비극적이고 직접적이다. 그런 점에서 이근삼에 이은 이재현의 등장으로 한국 서사극은 비로소 균형과 조화를 확보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201)

 

4) 1980년대의 서사극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서사극은 젊은 연극인들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되기 시작했다. 극단 창고극장이 공연한 김상수 작·연출의 <포로교환>(1985. 7)은 한국전쟁 중 포로송환 과정을 객관화하여 다룬 작품이다. 작품의 무게중심은 1953년 9월 중립국송환위원국에 이첩되어 교환 설득을 받게 된 북한의 포로들에게 맞춰져 있다. 막이 열리면, 낡은 삼각다리 사진기기가 무대 전면 중앙에 놓여 있고, 포로들은 그 사진기 앞에 나와 서서 한 사람씩 상반신을 찍는다. 포로들의 약력이 차례로 소개되면서 연극이 진행된다. 이 작품에는 일관된 줄거리나 사건 같은 것은 없다. 설득의 날을 기다리고 있는 포로들의 초조한 모습과 간간이 그들의 과거가 회상되거나 발광하는 몸짓이 있을 뿐이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설득장면이다. 남북한의 설득위원들은 온갖 화술을 다 동원하여 포로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에 혈안이 된다. 장광설이 계속될수록 포로들은 설득되기는커녕, 오히려 양측의 논리가 허위에 가득 차 있음을 깨닫고 어느 쪽도 택하려 들지 않는다. 남은 길은 하나뿐, 즉 중립국으로 가는 것이지만 그것마저 그들은 거부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포로들은 “우리는 그대로 여기에 있겠다”고 부르짖는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결단이지만, 이러한 결단이 갖는 비극성은 관객들에게 충격을 안겨준다. 우리의 역사현실이 그처럼 모순과 거짓에 둘러싸여 있고 불순한 힘과 논리에 억압되어 있음을 첨예하게 느끼게 해 주는 까닭이다.(202)

극단 제작극회가 공연한 신명순 작, 정진 연출의 <증인>(1988. 10)은 본래 1966년 5월 실험극장이 공연할 계획이었으나 ‘군사문제’(202)를 다루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공연을 중지당한 채, 20년 만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지난 시대에는 군사문제를 비판하거나 군인의 권위를 무시하는 작품의 공연은 곧 금기시되었다. 이 작품은 6·25전쟁 당시 상부의 명령으로 한강 인도교를 폭파했던 최창식 대령이 오히려 단독 폭파범으로 몰려 억울하게 총살당한 사건을 소재로 했다.

사건의 내막과 비인도적 재판과정, 최대령의 명예회복과 온당한 역사적 평가를 위하여 최대령(박상규 역)의 아내(우명옥 역)와 윤변호사(서학 역)가 중심이 되어 과거의 사실을 재고하고 파헤친다. 특히 윤변호사에게 극중 해설자 역할을 부여하고 재판극의 형식을 차용함으로써 작가는 과거 사건에 대한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거리를 조성한다. 이를 통해 부패한 자유당 권력자들과 야심에 찬 정치 군벌들의 만행을 투시적으로 보여준다. 그리하여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증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결국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은 전쟁을 통한 정치적 게임의 이용물, 희생물에 불과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관객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203)

극단 연우무대가 공연한 이상우 작·연출의 <4월 9일>(1988. 12)은 1964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혁당(人革黨)사건의 전말을 폭로한 작품이다. 당시 교수, 언론인, 대학생 등 21명이 공산주의자 내지 그 앞잡이 혹은 간첩 용의자로 체포되어 인혁당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공표되었다. 그 중 8명(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흥선, 송상진, 여정남)이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선고 후 15시간이 지난 1975년 4월 9일 처형되기에 이르렀다. 이 작품은 이러한 일련의 사건 전개과정을 기록극으로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 지난 날의 정권이 군사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반체제 지식인들을 고문과 처형으로 제압해 간 내용을 재현해(203) 보여준다. 닫혔던 지난 시대의 현장을 적나라하게 들추어 보인 이 작품에서 관중들은 가슴 서늘한 충격을 받았다.(204)

극단 실험극장이 공연한 윤대성 작, 김동훈 연출의 <신화 1900>(1982. 8)은 한 �년(강태기 역)의 정신치료과정을 내용으로 한 작품이다. 이 청년은 한 소년을 살해한 공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사형언도까지 받았으나 대법원에서 무죄 석방되었고, 그간의 고초로 인해 강박관념 피해망상이라는 증세로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담당 의사(오승명 역)는 그를 위해 사이코드라마를 만들어 보기로 작정한다. 극중극의 초점은 소년 살해에 대한 진부를 가리기 위한 행위들로 점철된다. 작가는 엄청난 사건 조작을 분명하게 밝히는 한편, 그러한 조작극이 지니고 있는 오늘날의 사회적인 의미를 조명한다. 작가의 드라마투르기는 풍부한 현실 감각, 극적인 긴장과 흥미, 재치 있는 화술을 드러내 보이면서도, 보다 차원 높은 보편적인 진실을 표현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작품에서 주된 관심은 광인을 만들어 내는 사회이며, 결과적으로는 그 사회 전체의 광인화가 내포하는 비극성이다. 청년의 결백에도 불구하고, 검찰 측의 치밀하고도 끈질긴 추리에 따라 그의 범행동기, 범죄행위는 모두가 사실로 체계화되고 위장된다. 극중극이 끝나고, 그가 무죄로판결되는 순간, 지금까지 재판과정을 지켜보던 환자들은 동요를 일으킨다. 흥분한 환자들은 청년을 끌고 나간다. 작품의 끝에서 그는 결국 교수당한 시체와 같이 철창에 매달려 있다. 이 광경을 뒤늦게 목격하게 된 담당의사는 경악과 충격을 억제치 못하여 미친 듯이 웃는다. 이리하여 주인공의 죽음은 불가피한 현실(204)이 되고 만다. 환자들의 피해의식과 사회에 대한 저항감을 보상하는 수단의 하나로 주인공은 그들의 손에 살해당한 셈이다. 그의 정신질환이 타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듯이 그의 운명 역시 타인들에 의해 결정되기에 이른다.(205)

극단 산울림이 공연한 이강백 작, 임영웅 연출의 <쥬라기의 사람들>(1982. 10)은 당시 일어난 사북탄광사태와 같은 현실을 모델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문명한 현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마치 석탄이 만들어지던 쥬라기와 같이 어둡고 암담한 삶을 살고 있는 광부들의 모습을 아이들의 밝은 태도와 대조적으로 그렸다.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모습과 발언을 객관적으로 증언함으로써, 관객들은 사태의 진실을 파악할 수 있다. 때마침 몰락해가던 탄광산업이어서 기업 측은 더 이상의 투자를 꺼리는 상태에서 현상유지와 이윤추구를 계속하고, 노동자 측은 새 직장을 찾기 어려운 불황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채탄작업을 한다. 이런 조건에서 어느 날 탄갱 내에서 일어난 폭발사고는 생존자 만석의 증언에 따라 양측의 이해가 크게 상반되는 갈등의 초점이 된다. 설비불량에 의한 가스누출이 원인이냐, 갱부의 단순 사고가 원인이냐를 놓고 팽팽한 대결이 이어진다. 원인규명은 사망자들에 대한 엄청난 보상비와 상관되기 때문이다.

만석은 기업주 측으로부터 한 광부의 개인적인 자살로 빚어진 사건이라고 증언해 줄 것을 사주받는다. 장차 지상근무를 보장해 준다는 조건이다. 광부들은 그가 노동자 측에 유리하게 증언해 줄 것을 요구한다. 사망한 광부들도 그의 꿈에 나타난다. 한편 탄광촌초등학교에서는 경연대회 참가를 목적으로 광부 아이들의 합창연습이 진행된다. 합창대원의 선발여부는 아이들을 양분시킨다. 참가를 못하게 된 아이들은 선생에게 저항하며 사고로 무너진 굴 속에 숨는다.(205) 만석은 자기 아들을 합창단에서 제외시켜 굴속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동시에 어느 측에도 불리한 증언을 할 수 없는 그는 자신의 실수로 사고를 냈다고 허위증언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굴속으로 들어간 그의 아들이 혼자 나온다. 아이들이 모두 가스에 질식하여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사고는 가스누출이 원인이었던 것이다. 문명에서 소외된 탄광촌의 구조적 비극은 한국인들의 실존성을 자각시킴으로 충격을 주었다.(206)

극단 연희단거리패가 공연한 이윤택 작·연출의 <시민 K>(1989. 4)는 군사정권이 언론난립을 정리한다는 명분으로 민주언론사들을 무자비하게 폐지했던 80년대의 폭거정치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폐간지의 마지막 기사를 작성하면서 K기자(김영식 역)는 ‘우리는 어둡고 긴 터널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기록한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민주언론쟁취를 위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성명서 작성에 참여한다. 그는 체제저항의 주동자로 몰려 당국에 연행된다. 이 작품은 심문, 고문, 감옥, 법정, 석방 장면 등으로 전개되며, 과거의 동료들과 애인(윤선희 역)의 거짓증언에 의해 그가 헤어날 수 없는 상황에 뒤얽히는 과정을 다각도로 보여준다. 마지막에 풀려난 그는 ‘현실, 그 자체가 체포되었다’고 절규한다. 사회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감옥인 현실에서 자신은 ‘기사다운 기사’를 쓸 수 없는 기자임을 통탄한다. K는 손도끼로 자신의 손목을 자른다.

연극의 핵심은 K의 민주시민적인 행위를 반체제적 범죄로 쉽게(206) 조작해가는 사회구조를 조명하는데 있다. 그가 동지로 믿었던 주변 지식인들의 시세 순응적인 태도와 가치관의 요동으로 말미암아 거짓말은 그대로 사실로 둔갑한다. 시민적인 발언은 개인의 불만으로 단순화되고, 비전이 있는 비판은 일시적인 푸념으로 폄하된다. 당국자의 의중에 따라 하루아침에 범법자가 되기도 하고 선량한 시민으로 인정되기도 한다. 이처럼 작품에서 묘사되는 동시대 한국사회는 정치 조작술의 극단을 보여준다. 스스로 손목을 자르는 K의 결단은 자기를 포함한 동시대의 지신들에 대한 환멸과 자조의 결과이자 일종의 저항이기도 하다. 다양한 국면을 빠른 전개로 실현한 이 공연은 시대불안과 암담한 미래를 가슴 서늘하게 느끼게 했다.

이 공연에 대하여 신현숙은 ‘공간의 수평선을 극장 밖 복도에까지 확장하고 분장실로 이어지는 통로를 무대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원근법의 효과에 의해 현실감과 입체감을 나타낸 점, 공간의 수직선을 확장해 재판석을 객석의 측면, 관객의 머리 위 높이에 올려 설계함으로써 무대에 깊이를 주게됨은 물론이고 무대 바닥에 위치한 피고(시민K)와 높은 공간에 정좌한 재판관의 위상적 대립을 통해 사회조직의 한 단면을 공간적으로 형상화시킨 점, 화면을 이용해 이용 공간을 삽입시키고 객석에 시민K가 자연스럽게 앉음으르써 객석마저 무대 공간에 통합시켜 관객의 무의식 속에 자신도 연극 속에 동참되어 있음을 느끼게 만든 점 등 무대 공간에 대한 연출가의 뛰어난 에스프리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고 평가했다.(신현숙, 「스치고 지나간 지식인론-유연한 무대」, 󰡔��한국연극󰡕��, 1989. 5 참조-원주)

 

5) 오태석의 서사극

오태석에 이르러 서사극의 문법은 한층 한국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정치사회적인 소재보다는 일상적인 소재를 취하여 고유한 한국적 정서를 서사극의 양식 속에 녹여냈다. 오태석은 70년대 이후 한국의 전통적 연극미학과 고유한 심성을 현대적인 무대 위에 구현하고자 하는 일관된 태도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서사극 창작을 시도한 것이다.

국립극단이 공연한 오태석 작·연출의 <사추기>(1979. 12)는 딸이 결혼하고 폐백하는 시간에 부부의 대화와 회상으로 전개되는 작품이다. 초로에 접어든 50대 부부(이것이 思春期에 대응하는 思秋期의 의미)의 정신적 갈등과 생의 한가운데 놓인 실존적 모습을 투시한 서사극이다. 의식의 흐름과 과거의 에피소드를 재현하는 기재(器材)로서 무대 한편에 타임머신이 설치되고, 부부(장민호, 정애란 역)는 담담한 자세로 이 기재를 돌려가면서 자신의 분신(分身)과 자식, 관련 인물들, 사건의 실제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되새긴다. 마치 낡은 필름이 돌아가듯, 부부가 겪은 삶은 서로의 애정과 괴리, 갈등과 이질감, 상실감을 그대로 재현한다. 서구적인 메커니즘을 최대로 활용한 작품이다.

이것은 한국적인 부부의 일상생활이 진솔하게 묻어나는 한 권의 ‘흑백사진첩’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억의 장면화와 인물의 분신화(인형을 활용)를 통해 내면적 진실들은 투명하게 확대된다. 고전소설 <한중록>의 이미지, 전통의 계승, 한국여성의 폐미니즘과도 상관된다. 자의식이 강한 딸(손숙 역)과 어머니의 연속성이 돋보인다.(208)

극단 드라마센터가 공연한 김우옥 연출의 <자전거>(1983. 9)는 시골 면서기가 체험한 6·25의 체험담을, 마치 묵은 필름을 순차(順次) 역차(逆次)로 돌리듯이 전개한 작품이다. 여기서 자전거는 물리적인 이동수단이자 ‘의식의 흐름’을 유도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부친의 제삿날 밤에 윤서기(박영규 역)가 동료인 구서기(김명환 역)와 더불(209)어 자전거를 끌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에피소드는 시작된다. 구서기는 연극 참여자이자 관객과 동격의 관찰자이기도 하다. 시간과 공간은 기억의 환기에 따라 투시적으로 재생된다. 체험담은 세 갈래로 집약된다. 첫째는 부친의 피살사건, 둘째는 문둥이네 가족의 이산(離散), 셋째는 마을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6·25와 깊이 상관됨으로써 비극성을 증폭시킨다.(210)

전체는 밤의 괴기담(怪奇談) 구조이나, 가족사 이야기를 통해 민족적인 비극을 형상화시킨 점에서 주제를 살린다. 시골에서 느끼는 서정적 분위기의 창출도 이 연극의 장점이다. 사투리가 담담하게 펼쳐지며 어둠 속에서 환청, 환시, 환각이 간단없이 이어진다. 1980년대의 암울한 상황을 연상시키는 빛과 소리의 강한 이미지는 긴 여운을 남긴다. 한국인에 내재한 비극적 공포와 불안, 한스러움을 서사극으로 극화한 수작이다.(210)

 

6) 김석만의 연출

미국에서 연극학부와 대학원을 수학하고 귀국한 김석만은 서사극 발전에 기여했다. 극단 연우무대가 공연한 황석영 원작, 오인두·김석만 각색, 김석만 연출의 <한씨연대기>(1985. 4)는 분단시대의 상황을 구조적으로 투시하여 세대를 달리하는 숱한 관객들에게 감동을 안긴 서사극이다. ‘빠른 장면의 전개는 셰익스피어로부터, 무대와 무대 밖의 유기적 연결은 체홉에게서, 장면 흐름의 구성은 판소리나 산조적(散調的) 구조에서, 공연의 전반적 양식은 브레히트로부터, 신체표현과 들리는 소리결은 길거리에서 펼져지고 있는 대중오락 수단들을 사용하던 장돌뱅이나 광대에게서 배웠다.’ 이것은 연출자의 말이다.(211)

월남한 휴머니스트 의사 한영덕의 일대기를 통해서 우리 시대의 사상적, 체제적,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를 집약적으로 구조화시킨(211) 점에 이 공연의 탁월성이 있다. 짧은 시간에 일대기 전체를 객관적으로 집약하기 위해 연출자는 아주 빠른 진행과 일인다역(一人多役) 시스템을 시도하며, 섬세하게 에피소드들을 배치한다. 상황설명과 노래, 몸짓, 음향 등은 이러한 에피소드들의 실제성을 보완해 주고, 철제빔으로 엮은 무대는 비정한 현실을 느끼게 한다. 박진감 있게 전개되는 장면 장면은 관극의 기대를 끝내 놓치지 않게 한다.(212)

국립극단이 공연한 신채호 원작, 차범석 각색, 김석만 연출의 <꿈하늘>(1987. 3)은 신채호의 소설 <몽천>(夢天)을 자료로 그의 일대기를 기록극 형식으로 재조명한 것이다.(213)

기록과 자료의 충실이라는 측면 외에도 그의 사상과 실천적 입장 내지 인간적인 내면의 세계를 온당하게 구현시킨 점에서 김석만의 연출력은 크게 돋보인다. 한마디로 과감한 도전이요, 실험이라 할 수 있겠다. 연출자는 역사와 연극의 공간과 시간을 항시 염두에 두고 사건이나 행위 자체와 일정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무대를 연기와 그림과 소리와 이미지로 가득 차게 한다. 음악과 조명의(213) 조화, 얼굴과 가면의 대비, 3인 단재의 어울림, 주인공과 군중장면의 처리, 보고서 형식의 언어와 시적인 언어의 반복적 활용, 무리 없는 신속한 진행 등 여러 면에서 연극적인 감각과 방법을 잘 살려낸 작품이다.(214)

극단 연우무대가 공연한 현기영 원작, 오인두 각색, 김석만 연출의 <변방에 우짖는 개>(1987. 5)는 원래 제주도에서 3년 간격으로 일어났던 방성칠의 반란(1898)과 이재수의 반란(1901)응ㄹ 소재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공연에서는 ‘이재수 난’ 부분만을 각색, 재구성하여 무대에 올렸다. 한국사회에서 제주도문화는 흔히 주변문화(marginal culture)로 인식되어 왔는데, 이 작품을 통하여 오히려 중심문화의 개념으로 위상을 되찾게 되었다.(214)

극단 연우무대가 공연한 김석만 작·연출의 <최선생>(1990. 9)은 당시 사회적 이슈로 부상했던 전교조 문제를 교사의 입장에서 극화함으로써 교육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 작품이다.(216)

김미혜는 ‘이 작품의 형상화에는 노래극, 아동극적 요소가 더해져 있다. 이 요소들은 우선 극의 재미를 더해주는 소박한 접근법이고 또한 관객에게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생각할 시간을 주는 극적 기교가 되기도 한다. <최선생>은 지나친 선전을 하지 않고 흑백 논리를 제시하지 않아 성공하고 있다. 최 선생과 아동들의 수업 내용을 많이 보여줌으로써 교육 현장에 직면한 관객이 스스로 교육 내용의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게 했던 점이 무엇보다 좋았다’고 평가했다.(김미혜, 「연우무대의 <최선생>」, 󰡔��90년대 연극평론 자료집(1)󰡕��, pp.85~86 참조-원주)

 

7) 1990년대 이후 서사극

북촌 창우극장에서 공연된 이만희 작, 허규 연출의 <돼지와 오토바이>(1993. 3)는 자기 �ㅅ 아이인 두부기형아(頭部畸形兒)를 ‘사랑했기’에 살해한 아버지의 처지를 그린 것이다. 물론 그는 7년형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한국의 현실에서 부모가 생존 불가능한 자식에 대해 영아살해를 저지르는 것이 과연 사회적으로 양해(諒解)될 수 있는 문제인지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이 작품이 매우 서정적인 정조를 띤 서사극으로 만들어진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217) 1990년대 초에 이러한 문제가 무대에서 제기된 것은 장애자들의 사회복지문제가 한창 고조되던 시기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2인극으로 진행된 이 작품은 남자(이호재, 김명곤 교체역)와 여자(김성녀, 방은진 교체역)의 1인 다역으로 구현되었다.(218)

이 작품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몰윤리적 자세를 고발하는 일면, 대사회에 대한 경고의 의미가 더욱 크게 부각된다. 돼지도 오토바이를 타다보면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그처럼 익숙해진 사회, 타성화된 사회를 작가는 뒤집어볼 수 있게 해주었다.(218)

 

8) 서사극의 의의와 과제

한국의 서사극이 브레히트를 금기시(禁忌視)하는 반공주의 사회속에서 수용되어 뿌리를 내렸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주목할 사실이다. 새로운 방법에 대한 연극인들의 갈증과 욕구가 그만큼 강렬했음을 시사한다. 일제하에서 신파극과 신극을 목격하고, 해방공간의 좌우익 대결과 6·25 당시 미군통역장교를 경험한 이근삼이 미국유학 과정에서 브레히트를 선택한 것은 탈리얼리즘에 대한 하나의 절실한 대안이기도 했다. 1959년에 귀국한 그는 이미 미국에서 몇 편의 영어극을 발표한 적이 있는 서사극 작가였고, 60년 초에 <원고지>를 국내무대에 올림으로써 새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근삼의 서사극은 김의경과 신명순을 거쳐 이재현에게서 기록성을 확장하여 가일층 발전했고, 오태석과 김석만을 통해서 토착화의 발길을 내딛었다.(219)

서사극은 사실극에 대한 ‘변증법적 연극’이다 실증성과 객관성을 확대시키는 것이 공연의 목표이다. 1960, 70년대의 군사독재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통제는 본격적인 서사극의 무대를 제공하는 데 매우 인색했다. 작품의 내용에 대한 선택은 검열을 의식하여 협소해졌고, 불가피하게 당국의 눈치를 살피며 논의를 펴야 했다. 한국 현대극이 서사극의 정치적 이념성을 온전히 수용하게 된 것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이후 서사극은, 독자적인 연극양식으로 존립하기보다는 다른 양식과 복합적으로 결합되는 길을 택했다. 정치적인 소재의 금기를 돌파하고 다양한 형식실험을 가능케 한 점에서 사서극이 현대극에 미친 영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220)

 

2. 부조리극의 수용과 모색

1) 부조리극·반연극

1951년 12월 극단 신협은 사르트르 작, 이진순 연출의 <붉은 장갑>(원제, 더러운 손>을 피난지인 부산극장에서 공연했다. 어수선하고 불안정한 전쟁상황이었음에도 경찰이 동원될 정도로 대만원을 이루었다. 당초 대구문화회관에서 공연예정이었으나 공보처의 검열로 지연되었고, 부산으로 내려가 부분적인 수정을 가하여 공연했다. 실존주의 연극이 수용된 최초의 공연이었다.(이진순, 󰡔��한국연극사(1945~1970)󰡕��, 예술원, 1977, pp.53~54 참조-원주) 광복과 미소의 개입, 그리고 좌우익의 분열은 분단을 가져왔고, 남북한은 미소의 지원 아래 동족상잔의 살육전을 일삼는 와중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허무와 상실의 소외감 속에서 성숙된 실존주의는 때마침 한국의 지적(221)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철학이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한국인의 실존적 상황을 다룬 일련의 작품들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부조리(不條理)는 전통적인 개념과 카뮈의 철학적 개념으로 서로 다르게 사용된다. 동일한 어휘를 사용하지만 부조리극에 이르면 의미는 더욱 차이가 생긴다. ‘조리가 서지 않는 것’,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 부조리의 일반적인 개념이다. 부조리극이라는 용어는 영국의 비평가 예슬린(M. Esslin)이 지적한 대로, ‘통합된 원칙을 잃고 분열된 세계 속에서 느끼는 인간존재의 우주적 상실감을 표현하고자 하는 연극’으로 정의된다.(Martin Esslin, The Theatre of Absurds(3e), Penguin books, New York, 1983, p.399-원주) 이오네스코가 말한 ‘반연극’이라는 용어도 부조리극과 더불어 자주 사용된다.

한국에서 부조리극을 수용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들어서이다. 실험극 혹은 전위극이라는 개념으로 소개되었다.(222)

실험극장은 창단공연으로 이오네스코의 <수업>(1960. 11)을 허규 연출로 상연하였다. 이 공연은 국내 최초의 부조리극 공연으로, 이후 전개된 부조리극 수용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어서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극단 팔월, 1961. 11, 중앙무대, 1967. 8, 시극동인회, 1969. 12)가 공연되었다.(중략) 특히 1969년 베케트의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부조리극의 붐은 절정에 달하였다.

1960년대부터 부조리극이 본격적으로 수용된 이유는 소극장운동의 전개와 시기적으로 맞아떨어진 결과로 볼 수 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소극장은 규모의 개념이 아니라 정신의 개념으로서 실험극과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1969년 카페 떼아뜨르의 개관을 비롯하여 뒤를 이은 카페 극장들, 그리고 속속 개관된 소극장들은 새로운 작품에 새로운 관객을 수용하려 했고, 실험정신과 경제성에 출실하(223)고자 했다. 이러한 변화에 잘 부합되는 전위적인 연극이 부조리극이었다.(김미혜, 「부조리극 수용과 한국 연극」, 서연호 편, 󰡔��한국연극의 쟁점과 새로운 탐구󰡕��, 연극과인간, 2001, p.24 참조-원주)

 

2) 오태석의 시도

오태석은 한국 부조리극의 전개에 있어서 주목되는 작가이다. 부조리극의 작풍은 그의 초기 세계에 한정되어 나타나지만, 그는 몇 편의 중요한 부조리극을 선보였다. 무엇보다 젊은 시절의 오태석은 삶의 본질을 애매성과 유희성으로 인식했다. 이런 삶의 본질을 연극으로 표현하기 위해 1960년대에 그는 부조리극 작품과 관련 자료를 섭렵하고 자기 나름대로 부조리극을 모색했다. 하지만, 그의 애매성은 난해성에 빠지기 일쑤였다. 당시 그의 작품은 의식의 혼란이나 혼돈에 빠진 적이 많았는데, 이런 난해성에서 벗어나 삶의 본질적인 애매성을 비교적 잘 객관화시킨 부조리극이 <웨딩드레스>와 <환절기>였다.

극단 드라마센터가 공연한 이원경 연출의 <웨딩드레스>)1967. 4)는 전쟁 중에 어머니를 잃은 청년이 웨딩드레스를 입은 한 장의 어머니 사진을 분실하고 방황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는 어머니의 이미지를 되찾기 위해 웨딩드레스를 들고 박물관으로 찾아가 관람객으로 들어온 한 여성에게 입히고 잃어버린 모습(사진)을 재현하고자 애쓴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그에게 실망을 주고, 그녀의 평상 차림은 오히려 어머니의 모습과 흡사하여 그에게 기쁨을 안겨준다. 이처럼 잃어버린 사람을 찾는 모티프가 이 작품의 발상이다. 등장인물 네 사람, 즉 사내(가게주인, 정운용 역), 손님(신(224)원균 역), 청년(박은수 역), 여자(박물관 관람객, 이선경 역)가 모두 자신이 잃어버린 사람을 찾는 방식의 미스터리 드라마를 전개시켜 박진감을 창출해낸다.

동일한 사건의 현장에 참가했으면서도, 등장인물들은 마치 미지의 세계에서 온 사람들처럼, 서로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 의사소통이 어려운 인간관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작품은 부조리한 구조를 통해 동시대인의 의식을 새롭게 투시한 점에 의의가 있다. 새로운 방법은 새로운 의미와 감동을 제공할 수 있다. 작가는 잃어버린 인간성을 직설적으로 해설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과 더불어 체험하도록 한다. 이른바 ‘말장난’을 넘어서서, 인간관계에 대한 진지한 체험을 관객에게 제공한 연극이었다.

국립극단이 공연한 임영웅 연출의 <환절기>(1968. 5)는부부 조대빈과 한나영이 과거의 상처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225)

끊임없이 짝을 바꾸며 전개되는 어지러운 사랑의 놀음과 그것이 초래하는 병적인 이미지를 통해 작가는 젊은 세대의 방향상실을 표현한다. 이처럼 오태석의 부조리극에서 삶에 근본적으로 내포된 모호성, 애매성, 불가해성은 한국 전후세대의 정신적 혼돈, 방황, 불황과 맞물려 개연성 있게 제시된다. 그 결과로 오태석의 부조리극은 관객들에게 충격과 공감의 감정을 동시에 전해준다.(226)

실험극장이 나영세 연출로 공연한 <교행>(1969. 11) 또한 오태석이 시도한 부조리극 중 하나이다.(226)

 

3)부조리극의 다양한 실험

극단 탈이 공연한 박조열 작, 이효영 연출의 <목이 긴 두 사람의 대화>(1967. 5)는 베케트 작 <고도를 기다리며>의 영향으로 씌어졌고 한국인들의 남북한 통일에 대한 기다림을 다룬다. 막이 오르면(227) 황량한 벌판을 배경으로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A(박근형 역)와 B(김인태 역)가 마주 서 있다. 그들이 각자 자신들의 대장을 기다리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연극의 내용이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두 인물은 그들의 대장을 흉내내 회담을 벌이지만, 회담은 결렬되고 그들은 다시 대장을 기다린다.

베케트의 작품에서 끝없는 기다림의 행위가 인간존재의 비극적 운명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라면, 박조열의 기다림은 다분히 정치사회적인 함의를 가진다. 철조망의 설정과 대장의 등장, 정상회담식 놀이의 삽입, 그들의 혈연관계(여자, 여운계 역) 등은 한반도의 기약 없는 분단과 불가해(不可解)한 통일의 상황을 암시한다.(228)

극단 드라마센터가 공연한 윤대성 작, 유치진 연출의 <출발>(1967. 4)은 순환열차의 이미지를 통해 사랑을 상실한 젊은이들의 좌절감을 표현했다. 역원이 홀로 남아 지키는 한 간이역에서 한 사내가 찾아(228)들면서 극은 시작된다. 기차가 서지 않는 폐쇄된 간이역에서 사내와 역원은 모두 기차를 기다린다. 두 인물의 대화를 통해 역원에게 마리아라는 아내가 있었고, 그 아내는 떠나간 옛 애인을 기다리다 열차에 투신자살한 것으로 밝혀진다. 그리고 마리아가 기다리던 옛 애인은 다름아닌 사내인 것으로 밝혀진다. 죽은 아내를 영원히 소유하고자 역원은 달려오는 열차에 몸을 던진다.

시발점과 종착점이 맞물리는 순환선, 기차가 서지 않는 폐쇄된 간이역의 이미지는 정주할 목적지를 상실한 채 떠도는 동시대 젊은이들의 뿌리뽑힌 정신상황을 표상한다. 죽음을 통해 완전한 사랑을 성취하고자 하는 역원의 비극적인 행위는 역설적으로 사랑의 성취를 불허하는 황폐한 현실을 드러낸다. 폐쇄된 순환열차의 이미지가 삶에 내포된 근원적인 부조리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해준다.(229)

극단 중앙무대가 공연한 이재현 작, 김세중 연출의 <제10층>(1969. 11)은 9층에 자리 잡은 건축사무소에 한 사내가 찾아들면서 시작된다. B로 명명도니 그 사내는 건축기사인 A에게 10층으로 가는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하지만, A는 건물에 10층이 없다고 말한다. B는 10층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우기면서, 건물 아래를 지날 때마다 10에서 비치는 거울의 반사광 때문에 봉변을 당해왔음을 호소한다. B와 언쟁을 나누며 A의 확신은 차츰 흔들린다. 시간이 지날수록 B는 자신의 망상에 더 깊이 빠져들고, 결국 그는 다시 거울 빛의 환상에 사로잡혀 9층에서 추락사하고 만다. A는 B가 그랬듯이 10층에 대해 헛소리를 하면서 막이 내린다. 존재하지 않는 10층의 불가사의한 이미지는 현실의 이면에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합리적인 사회에 은폐된 비합리적인 권력성이 도시사회의 계량화된 이미지를 통해 역설적으로 표현되었다.(229)

극단 에저또가 공연한 윤조병 작, 방태수 연출의 <건널목 삽화>(1972. 4)는 철도원 사나이의 실존적 상황을 그린 것이다. 철도원이 지키는 한 건널목에 낯선 사나이가 찾아들면서 시작된다. 무엇인가를 분주히 찾는 철도원에게 사나이는 각각 다리와 팔을 잃은 두 상이용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팔이 없는 쪽이 다리 잃은 쪽을 업고 다님으로써 합성인이 된 이 두 사람은 한 소녀와 사랑을 놓고 갈등하다가 층계 아래로 굴러 떨어져 죽음을 맞는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끝날 즈음 예정된 열차가 지나가고, 철도원은 드디어 자신의 귀가시간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의 기다림은 아내의 매춘행위가 끝날 시각에 맞춰 귀가하기 위한 것으로 밝혀진다.

이 극은 두 사람의 쉼 없는 지껄임으로 점철된다. 맥락이 닿지 않는 두서없는 대화는 언어의 파편화와 정신적 혼돈을 표현한다. ‘머리가 두 개’인 합성인의 이야기 또한 정신적 불구성을 부각시키는데 기여한다. 결국 두 인물이 전상자(戰傷者)임이 드러나는 대목에서, 이러한 불구성의 원인은 전쟁임이 밝혀진다.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정신상황을 두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우의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대화의 공연한 난해성이 오히려 극의 상징성을 방해한 것이 이 작품의 흠이다.(230)

 

4) 이현화와 부조리극의 창작

한국의 부조리극은 1970년대 후반 극작가 이현화에 이르러 한층 안정된 모습으로 정착되었다. 부조리극의 언어전략, 무대문법, 주제의식은 이현화에 의해 잘 정돈된 형태로 표출되었다. 이현화는 부조리극의 전략을 토대로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이후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서사극 등 다양한 양식 실험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다양한 실험(230)의 뿌리가 된 것은 부조리극이었다.

자유극장이 공연한 김정옥 연출의 <쉬-쉬- 쉬잇>(1976. 9)은 한 신혼부부의 숙소에 정체불명의 남녀가 방문함으로써 시작된다. 이 낯선 손님은 과거사를 들먹이며 부부에게 차례로 위협을 가한다. 무례한 손님의 출현에 부부는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에게 차츰 세뇌되어 간다. 손님들은 호텔 객실의 유사성을 이용해 부부를 다른 방으로 이리저리 옮겨 놓으며 각각 부부의 남편이자 아내로 행세한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장소이동은 부부의 의식을 혼란에 빠트리고 급기야 정신착란의 상태로 몰고 간다. 마침내 부부는 낯선 손님을 남편이자 아내로 인정하기에 이른다. 악몽 같은 밤이 지나자 부부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같은 객실의 침대에서 일어난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부부에게 다시 손님의 출현을 알리는 노크소리가 들리면서 극은 막을 내린다.

이 극은 일종의 숨바꼭질놀이다. 문제는 이 숨바꼭질 놀이가 손님들에 의해 조작된다는 점에 있다. 감시하는 자와 감시당하는 자의 대립은 이 작품에서 숨기는 자와 찾는 자의 끝없는 술래잡기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나아가 양자의 위치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무쌍하게 교체된다. 계속되는 위상의 역전현상은 개인의 의식 속에까지 파고들어 견고하게 내면화되고, 권력의 감시구조는 일상의 구석구석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부부조차도 서로의 정체를 끊임없이 의심하며 말 한 마디에도 ‘쉬-쉬-쉬잇’을 연발한다. 그런 의미에서 낯선 손님은 산업사회의 일상에 잠복한 억압적 권력체계의 촉수(觸手)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작가는 손님과 주인이 뒤바뀌는 해프닝을 통해 대중을 정치적으로 길들이려는 산업사회의 은폐된 감시체계를 드러내고자 한다.(임준서, 「이현화 희곡의 패러독스 미학 연구」,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PP.15~25 참조-원주)(231)

2000년 채윤일 연출의 공연에 대하여 김문환은 ‘이 작품은 하나의 블랙 코미디라 할 만하다. 폭력은 느닷없을수록 고 효과가 커진다. 여기에서도 신혼 남녀를 정신 이상 상태로까지 몰고 가는 폭력의 근거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이를 대표하는 낯선 남자는 당신이 아직 결혼식을 올릴 순서가 아니었다는 이유라는 이유를 댈 뿐이다. 이는 신혼 여자를 찾아온 여인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들은 “혐의란 일단 씌우는 쪽이 유리하다”고 태연하게 말한다.’고 평가했다.(김문환, 󰡔��삶과 꿈의 공연들󰡕��, 도서출판 삶과 꿈, 2004, PP.138~139 참조-원주)

민중극장이 공연한 유재철 연출의 <누구세요?>(1978. 6)는 <쉬-쉬-쉬잇>보다 먼저 창작되었지만 공연은 늦게 이루어졌다. 이 작품은 집을 잘못 찾아든 남녀(한인수, 오미연 역)간의 해프닝을 그리고 있다. 서로를 침입자로 몰아세우며 자기 정체를 증명하고자 그들은 이웃에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이웃(박찬현, 이경순 역)의 출현은 오히려 의혹만 가중시킨다. 결국 어떠한 존재증명의 단서도 확보하지 못한 남녀는 극도의 흥분상태에서 서로 몸을 섞는다. 아침이 밝은 뒤 남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익숙한 부부처럼 대한다. 그러나 그들의 집을 방문한 이웃집 여자를 남자가 ‘여보’라고 부름으로써 다시 남녀의 정체는 모호해진 채 막이 내린다.

서로의 존재를 몰라본다는 발상이 개연성을 얻는 것은 이 극의 공간적 배경이 아파트라는 점 때문이다. 아파트의 공간적 속성은 복제성에 있다. 이러한 기술복제시대의 공간이 갖는 시뮬라시옹의 속(232)성은 그 속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관계에까지 침투하여 인간적인 유대감을 부식시킨다. 아파트에 살고 있는 주민들 역시 하나의 복제된 오브제로 전락하여 격리되고 소외된다. 정체성을 상실한 군상(群像)이다. 가장 친숙한 관계인 부부 간에도 서로를 분별하지 못하는 이러한 착란은 복제사회의 저주받은 운명이 된다. 작가는 아파트의 미로구조를 빌어 산업사회의 규격화된 일상 속에서 정체를 상실한 동시대인의 정신상황을 부조리하게 극화하고 있다.(임준서, 「이현화 희곡의 패러독스 미학 연구」,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PP.66~68. -원주)(233)

이처럼 이현화의 연극은 순환적 플롯을 통한 열린 미스터리 구조, 개성을 잃고 자동인형화한 등장인물, 분열된 의식을 반영하는 분신의 설정, 상투적인 대사의 반복 등의 형식적 특성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이현화의 작품은 부조리극의 한국적 토착화를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임준서, 「이현화 희곡의 패러독스 미학 연구」,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P.76.-원주)

 

5) 임영웅의 <고도를 기다리며>

임영웅은 사무엘 베케트 작 <고도를 기다리며>를 국내에 소개하고 지속적으로 연출하였다. 극단 산울림이 한국일보 소극장에서 공연한 임영웅 연출의 <고도를 기다리며>(1969. 12)는 번역극이지만 한국인들이 창출한 부조리극의 대표작이다.(234)

<고도를…>의 연출에 대한 소감을 묻는 인터뷰에서 임영웅은 “난 적을 만났다”, “난공사에 부딪쳤다”라는 비명 섞인 탄성을 토해냈다. 그만큼 그는 이 작품이 평생 자신과 싸워야 할 작품임을 직감했고, 줄기차게 그 작품에 자신의 온 생애를 걸었다.(234)

1988년 9월 88올림픽 기념축전 공연은 임영웅에게도 영예로운 한해였다. 부조리극의 권위자인 마틴 에슬린의 호평을 받았기 때문이다. 마친 에슬린은 그의 연출을 다음과 같이 격찬했다.

‘산울림의 무대는 부드러움과 무용적인 움직임, 그리고 고도로 양식화된 동작으로 베케트가 갖가지 상징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이용했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이러한 여출방식은 혹시 한국의 전통공(235)연예술이 지닌 추상적인 표현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매우 아름다운 이미지로 승화시킨 마지막 장면은 이 작품에 새로운 차원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중략) 한국무대는 두 주인공이 부드럽고 무용적인 광대로 그려졌고, 럭키의 대사도 단조롭고 기계적으로 처리, 효과를 살렸다. 연출과 연기에서 산울림 공연은 베케트극을 한층 진전시킨 훌륭한 무대였다.’(마틴 에슬린, 「<고도를 기다리며>에 대하여」, 󰡔��조선일보󰡕��, 1988.9.9.-원주)(236)

베케트의 고향인 더블린에서의 공연은(1990년 아일랜드 더블린 연극제 초청공연-인용자 주) 심리적인 부담이 컸지만, 대대적인 찬사를 받게 되었다. 아일랜드의 대표적인 신문인 「아일리쉬 인디펜던트」는 ‘한국의 고도는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호평했고, 「아일리쉬 타임즈」 역시 ‘임영웅의 연출은 희극성과 비극성을 공유하고 있다. 기다림은 초조하고 고통스런 과정으로 표현되었다. 희망의 설레임과 사라짐은 어두워진 달빛 조명으로 끝나는 종결부에서의 치미랗ㄴ 처리에 의해 깊은 비애감을 전달해 주었다’며 감탄했다.(236)

1999년 11월 도쿄 초청공연도 호평이었다.(236)

2001년 9월 제8회 베세토연극제 초청의 일본 시즈오카 예술극장 공연에서도 관객의 반응은 훌륭했다.(237)

‘현대를 사는 우리 모두가 이해하고 동의하는 현대 고전’을 만들기 위한 극단 산울림의 노력은 한국 부조리극의 역사를 빛내고 있는 것이다.

 

6) 부조리극의 의의와 미래

부조리극은 국내 연극인들에게 서구의 대표적인 실험극으로 인식되었고, 1960년대부터 동인제 극단들에 의해 활발히 소개되고 창작(237)되었다. 전통적 플롯의 부재, 몰개성적인 등장인물, 논리적 언어의 해체 등을 통해 부조리극은 현대인의 소외된 정신상황을아이러니컬하게 표현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까지 산발적으로 창작되어 공연되던 부조리극은 1980년대 이후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게 된다. 베케트, 이오네스코 등의 번역극 공연이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져오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238)

다른 나라의 경우도 그렇지만, 한국 부조리극의 창작은 애초부터 어려운 일이었다. 제공자나 수용자나 모두 ‘애매하고 난해한 연극’이라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뿌리를 내리지 못한 직접적인 요인을 찾는다면, 부조리극의 놀이성에 지나치게 집착한 결과로 보인다. 부조리극은 ‘제멋대로의 말장난’ 정도로 관객(238)들에게 인식되어 생명력을잃고 말았다. 오늘의 무대에서 부조리극을 찾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부조리극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 없다. 부조리극은 다른 연극과 절충하여 혹은 복합하여 여전히 표현의 방법으로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239)

 

3. 신화극의 대두와 원형성의 탐색

1) 살아 있는 원형

제의극과 신화극은 한 실체의 양면성이다. 제의는 신화적 세계의 표상이고, 신화는 제의에 의해 전승되기 때문이다. 신화는 좁게는 신의 이야기, 넓게는 설화(전설, 민담)를 포용하지만, 삶의 보편성과 원형성을 지니고 있다. 바로 이런 본질로 하여 신화는 시간을 초월하고, 소재를 초월하여 재해석되고, 끝없이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고대의 제의로부터 연극이 발생하고 발전했다는 논의는 연극학, 인류학, 예술학의 오랜 명제다. 연극적인 제의가 이후의 신화극 혹은 제의극의 모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태적 요소에는 고대 제의의 형식과 소재가 포하됨은 물론이고, 제의에 관련된 표현 기술과 열정, 신화, 내면적 정신이나 집단무의식, 복합적인 예술적 방법 등이 깊은 영향을 끼쳐 왔다.(240)

이 책에서 신화극은 제의극과 구분하여 서술하기로 한다. 제의극(굿극)은 주로 샤먼의 제의나 전승되는 제의양식과 관련된 현대극을 지칭한다. 신화극은 ‘신화의 현대화’라는 명제에 치중하므로, 제의적 측면보다는 신화적 측면을 확대시켜 조명될 필요가 있다. 신화를 새롭게 표현하는 양식에서는 자유분방한 개방성과 아울러 동시대적 해석과 의미의 창조가 주목된다.(241)

20세기의 신화극, 특히 1960년대 이후의 신화극은 당대 연극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출발하였다. 여타의 공연들이 동시대의 문제에 대한 시사적 고발, 과거사의 재현, 이데올로기의 선전, 즉흥적인 언어와 몸짓의 유희, 감각적인 오락, 무대기교나 메커니즘의 실험 위주 등에 치우치고 함몰되어 있는 데 대하여 근본적인 반성의 차원에서 출발한 것이다. 연극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던 신성한 의식성과 진실한 영혼의 탐구 및 삶의 본질성과 반복성을 오늘의 예술로서 새롭게 되살리고 창출시켜 보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순하게 고대적 의식에로의 회귀나 전통의 계승을 목적으로 한 연극이 아니라, 연극을 통해서 현실적 삶과 문화양식들이 지닌 근원성을 새롭게 해석해 보고자 하는 연극이다. 아울러 인간과 사회와 역사가 지닌 문화적 정체성과 신화적 원형성을 발견해내고자 하는 전위적이고 창조적인 연극을 통칭한다. 역사적인 소재에 근거한 작품의 경우에도, 역사적으로 분류하지 않고, 신화극에 포함시킨 것은 이런 까닭이다.(241)

 

2) 최인훈과 신화극의 대두

한국 연극에서 신화극을 일관되게 추구해온 자각로 최인훈이 주목된다. 신화극은 1970년대 최인훈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도되고 실(241)험되었다. 최인훈은 오늘의 한국 사회나 제도와 삶이 내포하고 있는 신화적 원형성을 보편성 있게 해석하고 이를 무대적으로 창조해내고자 노력해왔다. 그의 작품에는 숱한 신화와 설화가 소재로 활용되고 있지만 그 소재는 현실을 투시하고 어떤 근원성에 대한 발견과 창조를 위한 자료로서 이용된다.

그의 연극양식은 다양한 해석을 허용하는 복합성과 개방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의 연극은 우선 비극의 개념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주인공의 비극적 결말 자체에다 연극적 의미를 한정하지 않으므로 단순하게 비극으로 취급하는 것은 무리이다. 역사극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사를 현실의 시점에서 사실적으로 재구하고 그 사실을 객관적으로 해석하는 데 치중하지 않으므로 이러한 분석에도 무리가 따른다. 정치극의 관점에서도 논의가 가능하다. 그의 모든 작품에는 현실 정세와 정치적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와 아이러니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표현주의극, 서사극, 상징극, 초현실주의극, 잔혹극의 측면에서도 해식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그 어떤 시각도 최인훈 연극의 전모를 효과적으로 밝히는 한계를 보인다. 결국 이 모든 요소와 양식을 총체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화적 보편성의 추구를 궁극적 목적으로 삼고 있는 점에서, 그의 연극은 신화극 양식으로 논의될 수 있다.(242)

극단 자유극장이 공연한 최인훈 작, 김정옥 연출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1970. 11)는 온달(장건일 역)과 평강공주(손봉숙 역)의 비극적인 설화와, 생명을 구해준 선비에 대한 보은(報恩)의 까치설화를 하나로 묶어 재구성한 것이다. 작가는 ‘온달과 평강공주의 만남을 인간의 근본적 경험의 한 원형으로 보자는 것이 이 작품에서 전하고 싶은 느낌’이라고 했다.(최인훈, 「만난다는 신비스러움」, 극단 자유극장, 󰡔��제17회 공연 팸플릿󰡕��, 1970. 11 참조-원주) 이 작품에서 신화적 원형성은(242) 불교적 개념인 인연과 업(業)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들은 빈번하게 나타나는 꿈 혹은 꿈의 이미지를 통하여 현실과 구체적으로 관련된다. 현실적으로 부부의 죽음은 욕망이 자초해낸 결과이고, 근원적으로는 인간적 삶이 내포한 숙명적 굴레이다. 삶 자체가 생명의 본질에 있어서는 미망((迷妄)이요, 꺼지지 않는 욕망추구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작품 가운데서 자연세계(산중)와 문명세계(평양성), 신성(온달)과 인성(공주), 삶과 죽음, 찰라와 영원, 꿈과 현실은 일상적으로는 대립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러면서도 순환논리에서는 입장의 변화로 표현되거나 초월논리에서는 하나의 양면성으로 상징화된다. 이 논리구조가 전체적으로 작품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243)

극단 산하가 공연한 표재순 연출의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어이>(1976. 11)는 아기장수설화를 희비극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최인훈은 이 설화의 상징구조는 예수의 생애와 같으며, 구약성서 출애굽기의 과월절(過越節)의 유래와도 동형이라고 보았다. 신화적인 것을 옳게 살리는 현대적 방법은 기본적으로 사실주의 연극이 가지는 충분한 설명과 압축의 공존이라고 했다.(최인훈, 「깊어질 충격을 기다리면서」, 국립극단, 󰡔��138회 공연 팸플릿󰡕��, 1989. 10 참조-원주) 이 작품의 신화적 원형성은 민중의 소망에 의해 구세자가 탄생하고, 또한 구세자의 죽음은 민중의 소망에 의해 부활한다는 명제로 제시된다. 일가족이 모두 죽음으로 끝난 마지막 마당에서, 그 일가족이 용마를 타고 등천하는 것이야말로 부활 소망의 전형적 모습이라고 할 만하다. 바로 이런 행위에서 비극을 초월하여 신화극으로 승화되는 요인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244)

극단 시민극장이 공연한 심현우 연출의 <달아 달아 밝은 달아>(1979. 9)는 고전 <심청가>의 현대화이다. 심청(손숙 역)이 창녀로 팔려가는 줄 알면서도 스스로 중국행에 오른 것은 아버지(임동진 역)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발로이자 고행의 선택이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녀에게 용궁은 그리던 어머니를 상봉하는 꿈의 장소가 아니라, 빚을 갚기 위해 남성들의 수난을 감내해야 하는 비정하고도 냉엄한 현실적 삶의 전쟁터(창녀촌)이다. 그녀가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는 것은 남성들과의 육체적인 관계에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정감을 지닌 김서방(신동훈 역)과의 만남을 통해서이다. 그리하여 그녀의 환생(귀환)은 용왕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힘이 이루어낸 결과가 된다.

마지막에 그녀의 실성한 웃음이 차라리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그녀가 창녀생활의 질곡으로부터 성녀적인 삶을 지향하는 인간적인 노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의 신화적 원형성은 인생의 가치야마롤 고난 가운데서 스스로 삶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러한 자각내용을 실천해가는 데 있는 것이다. ‘민중은 육신의 수난을 통해서 높고 깊은 마음에 이르러야 한다’는 작가의 말은 바로 이러한 원형을 시사한다. 속성(俗性)으로부터 신성(神性)을 찾아가는 연극놀이인 셈이다.(최인훈, 「마음」, 극단 시민극장, 󰡔��2회 공연 팸플릿󰡕��, 1979.9; 머시아 엘리아데, 이동하 역, 󰡔��성과 속󰡕��, 학민사, 1994; 로저 카이와, 이상률 역, 󰡔��놀이와 인간󰡕��, 문예출판사, 1994 참조-원주)(246)

극단 동랑레퍼터리가 공연한 유덕형 연출의 <봄이 오면 산에 들에>(1980. 3)는 문둥이 달걀귀신 설화를 현대화시킨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 속에서 모든 등장인물들이 자기들의 인간적 역량을 극한까지 북돋워야 할 만한 상황을 그려보았다. 그렇게 해서 인생은 어디쯤까지 무서울 수 있고 어디쯤까지 고상할 수 있는가를 알아보고(247) 싶었다’고 했다.(최인훈, 「얼굴」, 동랑레퍼토리극단, 󰡔��공연 팸플릿󰡕��, 1980.3-원주)(248)

이 작품의 신화적 원형성은 진실한 구원의 사랑이야말로 개개인의 헌신적인 노력과 자기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보편성을 통해서 드러난다.(248)

국립극단이 공연한 허규 연출의 <둥둥 낙랑둥>(1980. 9)은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의 설화, 살생기우제 설화를 현대화한 것이다. 작가는 ‘인간은 어느 시대의 어떤 환경에서든 자기 삶의 끝까지 가려고 들면, 대뜸 자신이 신화의 주인공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럴 때 보통 자기라고 여겨오던 존재는 실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고, 진실한 자기는 이런 신화적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우리들의 생활에서 이런 각성의 국면을 만나기는 그리 쉽지 않다’고 언급했다. 이를테면 이러한 각성을 호동과 낙랑공주 쌍둥이를 통해서 무대에서 표현해 보고자 이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최인훈, 「연극이라는 의식」, 국립극단, 󰡔��97회 공연 팸플릿󰡕��, 1980. 9 참조-원주)

이 작품의 신화적 원형성은 <봄이 오면…>과 같다. 즉 구원의 사랑은 개개인의 헌신적인 노력과 자기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보편성이 그것이다.(249)

최인훈의 연극 중 대표적인 신화극으로는 <옛날 옛적에…>와 <봄이 오면…>이 꼽힐 만하다. 이 두 작품이야말로 오늘의 현실 위에서 살아 있는 신화로 재생되었고, 신화적 원형성이 현대적인 축제로서(250) 부활했으며, 역동적인 구조로서의 드라마, 객관성과 필연성을 갖춘 드라마로서의 조화를 창출하였다.(251)

 

3) 이강백의 신화극

최인훈과 함께 신화극을 주도한 작가로 이강백이 주목된다. 최인훈이 주로 고전의 재해석을 통해 한국인의 심성에 내재한 보편적 원형성을 발견하는 데 치중했다면, 이강백은 주로 신화적 소재를 알레고리화하여 동시대의 현실을 비판하는 데 활용하였다.(251)

극단 가교가 공연한 이강백 작, 이승규 연출의 <내마>(1974. 8)는 국가적인 일을 기록하는 관리 내마의 일대기를 극화한 것이다. 고대의 역사적 사실에서 취재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허구담에 지나지 않는다. 내마가 겪는 사건들은 동시대적 삶과의 알레고리가 짙다는 점에서 현실성을 갖는다. 즉 욕망, 특히 권력욕은 애국, 위기극복, 혹은 국가발전이라는 ‘허구의 모자’를 쓰고 존재하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팔은 악마와도 손잡고, 다리는 더러운 늪길이라도 마다 않는 인간의 속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군사독재시대의 살아있는 신화라고 할 수 있다. 사실성과 공정성에 충실한 기록관으로서뿐 아니라, 독재자를 살해한 데 대한 보답으로 새 지도자는 내마에게 ‘정의의 손’이라는 의수(義手)를 제공한다. 그는 독재자를 살해하다가 한 팔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마는 바로 그 새 지도자에 의해서 살해된다.(251)

현대극회가 공연한 김선옥 연출의 <파수꾼>(1975. 3)은 이솝우화를 빌어 유신시대의 억압적 정치현실을 비판한 작품이다. 막이 오르면 파수꾼 가, 나, 다가 망루를 지키고 있다. 노인인 파수꾼 나와 소(252)년인 파수꾼 다는 망루 위에서 외치는 파수꾼 가의 신호에 따라 양철북을 두드려 이리의 내습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파수꾼 가는 끊임없이 이리떼의 습격을 외치고, 나와 다는 쉼 없이 북을 쳐댄다. 소년은 이리떼의 습격을 알리는 파수꾼의 직업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어느 날 무심코 망루 위에 올라가본 파수꾼 다는 파수꾼 가의 외침이 거짓이었음을 확인한다. 충격에 사로잡힌 소년은 사실을 마을 주민에게 알릴 것을 결심하지만, 촌장은 마을의 안녕을 이유로 소년을 회유한다. 결국 진실은 은폐되고 망루는 그대로 유지된다.

이강백은 잘 알려진 이솝우화를 활용해 분단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폭로한다. 애초부터 현실에 대한 우화적 형상화를 의도한 만큼 이 작품에 등장하는 파수꾼은 유신시대의 지식인 계층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소년은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깨닫고 진실을 폭로하고자 하지만, 촌장의 협박과 회유에 굴복해 파수꾼 가와 나의 전철을 되밟는다. 이는 곧 당대의 왜곡된 정치현실의 근본적인 원인이 지식인들의 권력유착과 타협에 있음을 암시한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 결국 작가는 유신체제 하의 왜곡된 현실을 비판하면서, 그러한 현실을 야기한 원인이 바로 자신과 같은 지신인에게 있음을 작품을 통해 반성적으로 성찰하고 있다.(253)

극단 시민극장이 공연한 <올훼의 죽음>(1986. 2)은 희랍신화를 차(253)용한 모노드라마이다.(중략) 막이 열리면 무대 위에는 작은 탁자 하나, 그 위에 찻잔 하나, 무대 전면에는 스펀지로 깎아 만든 여러 개의 손이 마치 나뭇가지에 잎이 달리듯이 붙어 있다. 기둥의 축을 돌리면 그 손들은 빙글빙글 돌게 되어 있다. 이 작품은 그렇게 손을 돌려가면서, 커피를 마시는 시늉을 해가면서 전개된다.

주인공 ‘나’(중략)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손을 잡느냐가 문제이며, 속도만이 문제가 된다. 상대방의 얼굴이나 마음씨, 인격 등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소개장, 추천서, 훈장, 표창장 등으로, 그것을 도구로 삼아 그는 이른바 큰손잡기와 승급에 열을 올린다. 현대인의 현실추구적인 자세와 그 맹목적인 어리석음응ㄹ 올훼와 비교하여 부각시키고자 한 점에서 작가의 의도를 찾을 수 있다.(254)

극단 성좌가 공연한 권오일 연출의 <봄날>(1984. 9)은 동녀(童女)설화를 바탕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가족생활을 투시한 작품이다. 아버지가 여러 여성과 관계하여 각기 배다른 형제를 낳았고, 여성이라고는 없는 이 집에 장자가 어머니의 역할을 한다. 어느 날 이(254)웃 절의 스님이 밥이나 먹여 달라며 동녀를 맡긴다. 매사에 의욕이 없던 막내는 동네에게 순정을 느낀다. 그러나 아버지는 동녀의 처녀성마저 빼앗는다. 마지막에 그녀는 그의 며느리가 되어 아이를 잉태한다. 막내만이 아니라 사춘기에 접한 다른 아들들도 여성에 대한 욕구가 봄날처럼 충만한다. 이처럼 이 작품은 성적인 이미지로 가득 차 있으며, 생명에 대한 상징으로서 성의 본질을 추구한다. 아버지가 남성적인 정력을 증강하고 지키고자 하는 것과 재물을 독점하고자 하는 욕구는 동일시된다.

이 작품의 근간을 이루는 아버지의 폭력과 독점은 동시대 군사독재 권력과의 알레고리로 자주 비유되었다. 사건이 전개되는 도중에 그림, 시, 논설, 신문기사 등이 반복적으로 삽입된다. 현실성과 객관성으로 강조하려는 일종의 서사적 기법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은 전체 구조에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사건이 지닌 신화성 자체의 구조가 견고하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배고프고 일거리가 없는 나른한 봄날, 아버지는 돈을 감추어 둔 채 호식(好食)하며 바람이나 피우고, 아들들은 들끓는 욕망을 주체할 길 없어 갈등하고 저항한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기동할 수 없게 된 늙은 아버지와 가출하여 성숙한 아들들은 서로서로 그리워한다. 성숙을 위한 지난날의 싸움이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순환되는 원리를 극명하게 보여준다.(255)

극단 민중극장이 공연한 정진수 연출의 <칠산리>(1989. 8)는 한국인들에게 강하게 남아있는 사상편향성에 대한 위험성을 비판하고, 모두가 어머니의 자식이라는 생명의 근원성을 제시한 작품이다.(256)

국립극단이 공연한 이승규 연출의 <비옹사옹>(1986. 1)은 고전 <옹고집전>을 현대화시킨 것이다. 자기 기준으로만 모든 가치를 판단하는 편향된 인간을 ‘옹고집’이라고 하는데, 옹고집을 미워한 신이 그를 반성시키고자 가짜 옹고집을 내세워 진짜를 골탕먹이고 회개시킨다는 내용이다. 익상백은 고전을 현대화하는 과정에서, 무대를 원형의 개방된 공간으로 설정하고, 사계절의 변화를 순리대로 보여주며, 인간의 삶을 보편성과 욕망체계라는 대조적 입장에서 해석하여 극화하였다.(257)

이강백은 사실극, 희극, 서사극 등 여러 장르에서 우수작을 내놓았으나 특히 신화극에서 걸작을 생산했다.(258)

 

4) 신화의 다양한 활용

1970년대 후반부터 다양한 신화극이 선보이기 시작한다. 극단 민예극장이 공연한 이언호 작, 손진책 연출의 <소금장수>(1977. 3)는 옛 사람들의 소금에 대한 인식, 즉 신비성과 영험성에 뿌리를 둔 작품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소금장수는 어려움에 처한 서민을 구제하고 억울한 입장에 처한 사람에게 희망을 준다.(258)

극단 산하가 공연한 노경식 작, 강영걸·김창화 연출의 <하늘 보고 활쏘기>(1980. 1)은 한 활꾼(이호재 역)의 이야기를 소재로 신화적인 세계관을 펼쳐보인 작품이다.(259)

이 작품에서 활꾼의 이야기는 격리→수난(투쟁)→부활로 이어지는 영웅신화의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다. 밤과 낮의 대립, 괴물과의 투쟁, 보상으로서의 결혼 또한 고대 신화에서 찾을 수 있는 전형적인 화소(話素)이다.(260)

극단 미추가 공연한 박조열 작, 손진책 연출의 <오장군의 발톱>(1988. 6)은 1975년 9월에 극단 자유극장이 국립극장의 공연을 목표로 연습 중에 예술윤리위원회의 대본검열을 통과하지 못한 작품이다. 당시 군부정권은 ‘군인의 위상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상연을 허가하지 않았다. 오장군(전일범 역)은 말 그대로 장군이 아니라 시골청년의 이름일 뿐이며, 군인으로서는 졸병에 지나지 않는(260)다. 동쪽나라의 군에 입대한 청년은 서쪽나라와 대치하고 있는 전선에 배치되어 양편의 작전과 선전에 이용되고, 끝내 총살형을 받아 희생된다. 이러한 사건이 조작되어 진행되는 과정에서 양편의 야전사령관(김종엽, 정태화 역)은 각기 자기 측에 유리한 명분을 내서우기 위해 온갖 야만적인 행동을 드러낸다. 마치 매가 무서운 발톱을 감추고 있다가 순간적으로 드러내듯이 말이다. 사령관의 발톱에 희생된 청년의 현실을 ‘장군의 발톱’이라는 이미지로 부각시킨 것이다. 작가는 6·25 때 수개월간 최일선 초총병으로 싸웠던 체험을 토대로 이 작품을 썼다.(박조열, 「몇 가지 기억과 분격의 메모」, 극단 미추, 󰡔��오장군의 발톱󰡕��(공연 팸플릿), 1988. 6-원주)(261)

진실은 언제난 강자의 논리에 의해 조작되고, 순진하고 무지한 사람들은 언제나 조작의 희생양이 된다는 원형성을 보여준 점에서 이 작품은 신화극으로 간주된다.(261)

극단 배우극장이 공연한 윤정선 작, 주요철 연출의 <나는 어이 돌이 되지 못하고>(1986. 11)는 호동의 설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우리 현대희곡사에서 왕자 호동의 이야기는 훌륭한 소재로(262)서 수차에 걸쳐 극화된 바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호동의 의붓 어미인 원비가 호동이 왕위를 계승할까 두려워 왕에게 모함하였는데, 이에 그는 불효를 저지르지 않고자 자결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을 놓고 작가는 나름의 관점에서 호동설화를 재해석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호동의 죽음을 가져오게 한 요인은 원비의 호동에 관한 사랑과 증오로 설정되어 있다. 그리스의 운명비극 <히폴리토스>(BC 428) 같은 분위기가 감도는 이 작품에서 관중들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재현을 목격하게 된다.(263)

극단 목화가 공연한 오태석 작·연출의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나>(1900. 10)는 고전 <심청전>의 신화적 모티프를 차용해 오늘의 세태를 풍자한 작품이다.(263)

극단 민예가 공연한 이만희 작, 강영걸 연출의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1990. 4)는 불상을 조각하는 승려의 내면의식을 다룬 것이다. 불교수행을 본격적으로 다룬 연극사 최초의 공연이었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받았다.(중략) 조각가가 승려가 된 것은 수년 전에 일어났던 아내의 사건(265) 때문이다. 아내는 그가 보는 앞에서 폭력집단에게 윤간(輪姦)을 당한다. 그 사건으로 그는 아내를 싫어하게 되고, 승려가 되어 불상을 조각하게 된다. 첫 장면에서 그는 자살한 혼령으로 등장한다.

승려들의 매우 현실적인 사찰생활과 구도정신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가운데, 작가는 조각가를 통해 ‘과연 불교가 인간에게 구원이 될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질문한다. 이러한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이 작품에는 조각가의 분신(망령)이 등장하여 갈등한다. 그가 애써 만든 불상은 흉측하고 일그러진 불상(자화상)에 불과하며, 그는 끝내 자기 생명마저 포기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인간의 무지(無知)가 목탄구멍 속의 어두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비유된다. 결국 불교의 실체는 존재에 대한 자각에서 시작하여 자각으로 순환(輪廻)되는 무한한 과정임을 암시해 준다.(266)

극단 목화가 공연한 홍원기 작·연출의 <천마도>(1998. 1)는 경주 천마총의 천마도(天馬圖)에서 연상된 삼국통일의 영웅 김유신의 일대기에 대한 재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267)

극단 인혁이 공연한 이해제 작, 이기도 연출의 <흉가에 볕 들어라>(1999. 10)는 전통적인 가신(家神)이야기를 초공간과 초시간의 개념으로 극화한 것이다. 한국의 집에는 집의 공간을 지키는 여러 신들이 존재한다는 샤머니즘적 인식이 있었다. 이 인식을 근거로 30년 전에 가족들이 모두 죽어 ‘죽음의 집(흉가)’이 된 낡은 고가 주변에 ‘당시 죽어 귀신이 된 가족들이 그대로 머물며 여전히 갈등한다’는 드라마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전통적인 가신인 구렁이여신(뱀신, 황정라 역)이 애잔한 노래를 부르며 전개되는 이 무대에 유일하게 생존한 옛 하인(현재의 행상인, 한명구 역)이 찾아오고, 문신(門神)이 된 가부장 어른(박용수 역)이 생사의 내기를 걸면서 극이 시작된다. 하인은 끔찍한 비극과 엄청난 죄악의 진실을 밝혀내는 책임을 떠맡게 된다.

지난날 죄악의 발단은 가족 상호간에 무모하게 진행된 살인행위(268)이고, 살인의 동기는 농지(農地)를 차지하기 위한 욕망이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첩을 얻어서라도 아들을 낳으려는 것은 농지를 상속하려는 욕망과 동일시된다. 곱추 아들이 성불구자인 것을 안 가부장은 아들의 첩과 관계하여 아이를 잉태시킨다. 곱추 아들의 모친은 초조한 나머지 아들의 첩과 하인과의 성관계를 강요한다. 그러나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의 부정한 잉태가 하인에 의해 밝혀지면서 연쇄살인극이 벌어진다. 가신설화를 빌어 욕망의 본질을 부각시킨 이 공연은 고전적 스토리의 흥미로움이 관객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복잡한 사건전개에 비하여 인물들의 성격구축이 미진한 것이 아쉬웠다.(269)

연희단거리패가 공연한 최창근 작, 김경익 연출의 <봄날은 간다>(2001. 6)는 혈육관계만을 가족으로 인식해온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족개념을 부각시켜 주목받았다. 모든 인간은 지역·혈연·성별에 상관없이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될 수 있고, 사랑하는 삶이야말로 최고의 가치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시적인 대사로 부각시켜 감동을 준다.

 

5) 이윤택과 신화극의 심화

최근의 신화극 가운데서는 이윤택의 실험적 연극이 주목된다. 이윤택은 신화적 구조를 차용하면서도 여기에 다양한 연극양식을 접목시킴으로써 한층 진전된 신화극을 선보였다. 연희단거리패가 공연한 이윤택 작·연출의 <바보 각시>(1993. 8)는 이야기구조를 지닌 드라마가 아니라 바보 각시(이윤주 역)라는 별명을 지닌 여자를 중(271)심으로 한 슈프레히콜(sprechchor) 형식의 신화극이다.(중략) 전설에 의하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각시가 마을에 나타나서 여성을 그리워하는 뭇 남성들에게 차례로 몸을 제공(이것을 ‘살보시’라 했다)하다가 추방되었는데, 후일 그 여인은 부처님으로 판명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윤택은 이 설화를 현대 서울의 신도립역 주변을 무대로 재창조해냈다. 역 주변의 세태는 남에게는 차갑기 이를 데 없고, 살아가기는 더더욱 고달프며, 정치고 종교고 학문이고 구원이라고는 찾아볼 길 없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런 세태 속에서 외로움과 배고픔으로 방황하는 남성들에게 유일하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사람은 각시뿐이다. 불교적인 진리보시와 재물보시뿐만 아니라, 현대인에는 사랑보시가 더욱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이 작품은 부각시킨다.(272)

국립극단이 공연한 이윤택 작·연출의 <연산>(2003. 9)은 1995년 6월의 초연 대본을 대폭 수정한 것이다. 초연에서는 어머니의 불행한 죽음으로 인하여 광기에 사로잡힌 연산군이 권력무상에 사로잡히는 모습을 잘 표현한다. 동시에 그의 허무가 후궁 녹수와 더불어 왕도를 벗어난 쾌락주의를 탐닉하게 하는 동기로 작용하는 과정을 잘 구현했다. 그러나 작품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의미의 부각이 미진했다. 2003년 재공연에서는 이러한 결함을 고려하여 ‘권력추구의 역사야말로 광기의 역사이며, 권부(權府)야말로 죽음의 집에 다름 아니’라는 신화성을 분명하게 부각시켰다. 이 공연에서 연산의 모친을 살해한 당파의 행위도, 다시 그들을 살해한 연산의 행위도 제각기 권력을 지키려는 인간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부각되었다. 연산의 광기를 사회정의상 묵인할 수 없다는 새로운 권력집단의 광기(쿠테타)는 이 작품의 신화적 원형성을 극명하게 드러낸다.(273)

 

6) 재일동포 정의신·김수진의 충격

재일 한국인 극단 신쥬쿠 료산바쿠(新宿梁山泊)가 공연한 정의신(鄭義信) 작, 김수진(金守珍) 연출의 <천년의 고독>(1989. 10)은 소외된 삶 속에서 꿈을 꾸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의 ‘이상적 지향성’을 밀도 있게 추구한 작품이다. 일본 실험극의 대표주자 반열에 서 있는 두 사람의 작업은 국내 연극계에 신선한 충격과 자극을 안겼다.(274)

 

7) 신화극의 의의와 과제

한국의 신화극은 신화적 소재나 이야기 구조를 통해 삶의 보편성과 원형성의 재현을 목표로 시작되었다. 한국 고유의 전래 신화나 설화가 적극적으로 발굴되어 연극에 활용되었고, 다시 이것이 현대적인 맥락 속에 재배치되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과정에서 신화나 설화는 정치사회적 담론으로 재해석되거나 패러디되거나 알레고리화되었다. 신화는 현실을 재현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거나, 혹은 그 자체가 연극의 목적이 되기도 했다.(276)

이제부터 신화극은 신화나 설화를 연극의 직접적인 소재로 삼거나 이를 도구화하는 단계를 넘어서야 한다. 오히려 오늘의 현실 속에서 신화적 성격을 발견해내고, 이를 다시 신화적 논리로 해석해낼 수 있어야 한다. 연극을 통해 살아있는 신화를 창조해야 한다는(276) 말이다. 작가의 신화학을 분명하게 정립하여 그것이 오늘날 유용하다는 사실을 예술적으로 입증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신화극의 과제이다.(277)

 

4. 잔혹극·개방극의 수용과 절충

1) 개방과 참여

한국에 표현주의가 수용된 것은 1920년대 초부터였다. 이론과 더불어 희곡이 창작되었지만 식민지치하인 데다가 전위적인 연극이 발을 붙일 수 있는 환경이 아니어서 실연에는 이르지 못했다. 앞서 서술한 대로, 1950년대에 실존주의 연극이 나타났고,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실험극이라는 개념으로 서사극과 부조리극이 수용되고 창작, 공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실험극과는 달리하는 일련의 실험극이 수용되었다. 잔혹극, 개방극, 참여극, 정치극, 가난한 연극, 살아 있는 연극 등 복합적인 명칭으로 통용되었다.

엄격하게 보면, 아르토(A. Artaud), 그로도프시키(Grotowski), 줄리앙 벡(J. Beck), 피터 부룩(P. Brook), 조셉 차이킨(J. Chaikin), 피터 슈만(P. Schuman), 리차드 쉐크너(R. Schechner), 알란 캐프로(A. Kaprow),(278) 장 루이 바로(Jean-Louis Barrault) 등 그 누구의 연극도 제대로 수용되지 않았다. 당시 현실과 고연여건에 따라 복합적이고 절충적인 문화굴절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한상철에 의해 「아르토의 잔혹연극론」(󰡔��연극평론󰡕��, 1970년 봄호) 정도가 소개되었을 뿐이다.

이런 류의 실험극은 종래의 창조자 중심에서 수용자 중심으로, 폐쇄적인 공연방식에서 개방적인 공연방식으로, 극장주의에서 탈극장·초극장주의로, 언어 위주의 표현에서 육체 위주의 표현으로, 몰정치적인 주제에서 정치적인 주제로, 개인적 사고에서 집단적 사고로, 사실적인 전달에서 이미지적인 전달로, 풍족한 무대에서 가난한 무대로, 과거회귀적인 방향에서 현재와 미래지향적인 방향으로, 작품의 완결성 추구보다는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더 중시하는 쪽으로 전개되었다. 이처럼 개방적이고 해체적인 특성을 보이면서도, 특정한 양식으로 수용되기 어려운 연극의 흐름을 여기서는 ‘잔혹극·개방극’이라는 이름 아래 통합하여 기술하기로 한다.(279)

 

2) 오태석의 잔혹극

다양한 양식의 절충을 통해 실험적인 연극을 시도한 오태석은 1970년대에 들어 일련의 잔혹극을 선보였다. 극단 드라마센터가 공연한 유덕형 연출의 <초분>(1973. 4)은 초분장(草墳葬)으로 상징되는 ‘섬의 질서’와 육지를 동경하는 ‘육지의 질서’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들의 욕망을 강렬하게 표현한 작품이다.(280)

<초분>에서 시작된 생명적 원형성의 추구는 안민수 연출의 <태>(1974. 4)를 통해서 분명해졌다. 드라마센터가 공연한 <태>는 조선시대 어린 나이에 형의 왕위를 계승한 조카 단종(함현진 역)을 내쫓고 왕위를 빼앗은 세조(이호재 역)의 쿠테타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역사적 시비보다는 그 사건을 통해서 생명의 원초성과 존엄성을 진지하게 추구하는 방향으로 주제가 설정된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초연될 당시는 때마침 군사적인 통치가 진행되고, 사회 각처에서 고문이니, 탄압이니, 독재니 하는 반휴머니즘적인 차원에서의 비난과 고발과 저항이 전개되던 상황이었다. 때문에 이 작품의 현실적 의의에 대한 관객들의 애착과 관심은 한층 고조되었다.(281)

극단 목화가 공연한 오태석 작·연출의 <부자유친>(1987. 9)은 세자빈인 홍씨가 서술한 고전소설 <한중록>을 원전으로 한 재창작이다. 부왕 영조(정진각 역)가 후계자인 세조(한명구 역)를 뒤주에 넣어 굶겨 죽인 사건을 수술실의 쓰레기통에 넣어 죽이는 장면으로 현대화시켰다. 일반인들에게는 황당하고 낯선 충격을 안겨주었다. 일관된 줄거리가 없고, 세자의 광기에 이유도 없으며, 동시에 왕의 자식에 대한 증오와 학대에도 분명한 동기부여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283)

한국의 전통개념인 부자유친, 이것은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복잡한 갈등과 미묘한 반감을 갖게 한다. 이 작품은 패러디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환골탈퇴이자 원작을 뒤집은 아이러닉 패러디라는 점에서 동시대성을 가진다. 모두가 죽음에 직면하여 살길을 찾아야 하는 사(283)람들의 허우적거림이 부자간 권력의지의 그물망 속에서 처절한 익살로 전개된 점이 주효했다.(284)

극단 목화가 공연한 오태석 작·연출의 <비닐하우스>(1989. 3)는 발표되자마자 문제작으로 주목 받았다.(중략)이 작품은 국가적인 비상사태를 맞아 피를 집단채혈하는 비닐하우스 내부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다룬다. 채혈소이자 집단수용소인 비닐하우스는 연극의 무대가 되는 동시에 이 작품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왜곡된 권력의 상징인 국가를 의미하기도 한다. 비닐하우스에는 소위 국민적 합의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법에 의해 수명의 국민(재소자)들이 들어(284)와 있다. 그들은 매일 채혈을 강요당하거나 제도에 대한 반발을 근절시키기 위한 집단훈련을 받는다. 무대 후면 높은 곳에는 사령탑이 설치되어 있고 모든 지시와 보고는 이 사령탑을 통해서 이루어진다.(285)

극단 목화가 공연한 오태석 작·연출의 <천년의 수인>(1998. 5)은 한국 현대사가 테러와 폭력으로 얼룩진 과정이었고, 오늘날에도 이런 요소가 잔존해 있음을 꼬집은 작품이다. 이 작품의 중심인물은 백범 김구를 저격한 늙은 테러범 안두희(安斗熙, 이호재 역), 지리산에서 빨치산 투쟁을 하다 잡힌 비전향 장기 복역수(전무송 역), 그리고 1980년 광주 민주화투쟁에 진압군으로 참전했던 졸병 청년(이명호 역) 등 세 사람이다. 이들은 모두 병원에 입원한 사태로 시종 행동한다. 안두희는 애국자를 저격했다는 죄로 역(逆)테러를 맞았고, 복역수는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의 뇌출혈 환자이며, 청년은 데모 현장에서 시민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시달리다 노이로제에 걸린 상태이다. ‘누가 이들에게 살인을 하도록 명령했는가’ 하는 것이 극 행동을 이끌어가는 키워드이다.(286)

무대는 입원실이자 세 사람이 과거를 재현하는 극중극 장소로 다양하게 활용된다. 이른바 놀이극이다.(286)

 

3) 이현화의 잔혼극

오태석에 뒤이어 이현화 또한 1970년대부터 잔혹극을 지속적으로 추구하였다. 극단 민중극장이 공연한 이현화 작, 정진수 연출의 <카덴자>(1978. 9)는 1970년대의 정치적 상황을 피지배층의 입장에서 표상한 작품이다. 피비린내 나는 살육과 공포 분위기를 거쳐 마침내 쿠테타에 성공한 15세기 세조의 만행을 작가는 ‘어느 때나 어디서(287)나’ 일어나는 보편적이고 반복적인 일로 해석함으로써, 역사를 일상적인 유사구조로 병치시키는 데 성공한다.

객석에서 무작위로 이끌어 올린 여자관객(강선숙 역, 이 배우는 연극이 끝날 때까지 관객의 입장을 고수한다)에게 왕(세조)이 다짜고짜 “네가 네 죄를 알렷다”라고 공갈하는 대목에서부터 극은 시작된다. 객석으로 되돌아가고자 몸부림치는 여자에게 결박이 지워지고 모진 고문이 가해진다. 이어서 테이프로 입이 봉해진 상태에서 마치 어린 단종과 같이 여자관객의 머리에 왕관이 씌어진다. 왕은 이 어린 상황을 마치 장난감처럼 앞에 놓고 일방적인 정치유희를 벌인다. 왕의 대사는 미리 짜여진 각본에 따라 곁에 서 있는 선비(신하)에 의해 대변된다. 선비의 변신과 죽음 역시 역사적인 알레고리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는 비로소 “내 죄를 알겠소”라고 절규하면서,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한다. 질식할 것만 같은 상황 속에서 쿠테타는 역사적인 정당행위로 묵인되고, 일단 집권에 성공한 권력집단은 또 다른 공작정치를 펴기에 분주하다. 작품에 등장하는 여자는 역사로부터 소외된 한 개인, 역사와 자신은 별로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한 서민, 더욱이 역사를 변혁시키는 데 자신은 전혀 무력한 존재라고 절망하고 있거나 아니면 죽음이 두려워 나서기를 주저하는 서민, 마치 연극의 구경꾼같이 역사는 구경만 하면 된다고 느끼는 대부분의 민중적 개체에 대한 상징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여자를 이끌어내어 공작적인 연극놀이를 하는 것은 역사적 상활에 참여시킴으로써 관객 개개인의 현실적 문제의식을 증폭시키기 위한 연극적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의 모든 연극적 언어와 기호들은 현실이 곧 역사라는 진실을 관객들에게 체현시키는 데 기여했다.(288)

극단 쎄실이 공연한 채윤일 연출의 <불가불가>(1987. 10)는 연극이 하나의 ‘의도된 놀이’라는 것을 관객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무대연습 장면으로 전개된다.(중략)이렇게 해서 양식화된 연극으로부터의 탈연극화, 역사극으로부터의 역사놀이화가 이루어진다.(289)

국립극단이 공연한 강영걸 연출의 <넋씨>(1991. 4)는 흔한 ‘씨받이 이야기’의 상투성을 초월한 여성극이다. 수난시대를 살아오면서도 자녀를 낳아 꿋꿋이 길러온 모성의 세계를 연대성(連帶性) 있게, 상징성 있게 잘 형상화했기 때문이다.(290)

이 작품에서는 인물 개개인의 행동과 그것들이 순간순간 창출시켜 나가는 갈등 자체에 초점이 주어진다. 시대배경이라든지 주위 환경 등을 이용해서 극을 이끌어 가거나 극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방식은 배제된다. 극적인 갈등 자체만을 발현시키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침묵의 언어 곧 육체적 표현 위주의 공연이어서 강렬한 느낌을 주었다.

이현화는 그간 리얼리즘을 비롯한 여타의 기존 방법에 대한 무의미한 추종을 줄곧 거부하여 왔다. 신작을 발표할 때마다 기존 방법에 대한 과감한 절충과 더불어 신선하고 기발한 착상을 드러내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보수적이고 기성적인 낡은 연극인식에 일대 자극과 공격을 퍼부었다. 그런 점에서 이현화의 개성은 충분히 인정된다. 연극을 ‘관객과 함께 하는 놀이’로 인식하고, 언제나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앞서가는 ‘첨단적인 놀이연극’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그의 일관된 실험자세야말로 가히 전위적인 작가라는 칭호에 걸맞는다 하겠다.(291)

 

4) 1980년대의 개방극

극단 동랑레퍼터리가 공연한 마이클 커비 작, 김우옥 연출의 <내·물·빛>(1980. 9)은 구조주의 연극을 표방한 한국 초연작으로 관심을 끌었다. 이 연극은 종래의 연극이 필수적으로 갖고 있던 플롯이 전혀 없다. 플롯 대신 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다른 요소들이 대거 사용된다.(292)

인물(최성관, 양서화, 최종원 등역) 역시 개성보다는 구조로서 행동한다.(292)

두 사람의 신분이나 관계나 배경 등은 이 작품에서 전연 관심 밖의 일이며 따라서 그들에 대한 어떤 감정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상황이 만들어 놓는 우리 생활의 구조적 배열이다. 이 작품 속에는 인간의 일상생활의 의미들을 구조적으로 투시하는 논리성과 원리가 충분히 깔려 있고, 그러한 구조가 빚어내는 현대인의 불안정, 사회적 갈등, 존재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현실적 삶과 대응하는 새로운 연극적 창조의 한 전형을 보여준 공연이었다.(293)

서독에서 활동하다 귀국한 무세중의 공연 <反, 그리고 통·막·살(통일을 위한 막걸리 살풀이)>(1982. 2)은 국내 전위극 활동에 큰 자극을 주었다. 이 공연은 잔혹극과 초현실주의, 그리고 한국의 전통연희 양식이 총체적으로 결합된 퍼포먼스였다.(293)

‘통·막·살’에서는 한국의 전통적 제의의 형식을 이용해 남북분단의 현실과 통일에의 염원을 상징적으로 표출함으로써 관객들의 큰 공감을 자아냈다. 흰 광목이 무대 중앙을 가로지르게 한 뒤 양쪽에 있던 무세중과 배우들이 광목을 찢고 만나는 식으로 연출되었다. 그 과정에서 배우들은 옷을 벗고 막걸리통에 들어가거나 진흙을 몸에 바른 채 자학행위를 하는 등 잔혹하고 충격적인 동작을 선보이며 분단의 고통을 육체적인 언어로 표현하였다.(293)

전체적으로 대사극의 거부, 잔혹극 혹은 제의극의 한국화, 신체적 표현의 극대화 등으로 요약되는 무세중의 공연은 이후 국내에서 전위극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294)

극단 현대극장이 공연한 김상렬 작·연출의 <언챙이 곡마단>(1982. 9)은 백제국과 의자왕의 멸망과정을 마치 곡마단의 놀이처럼 재현한 연극이다.(중략) 이 작품을 통해서 관중들은 불가피하게 역사와 부딪히게 되고, 일상적인 삶의 내부에 깊이 스며 있는 과거의 잔영과 충격적으로 만나게 된다. 작가는 그것을 ‘원형의 버릇’이라 지적하였다.(294)

여기서 원형의 버릇이란 대체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일상적으로 지니고 있는 명예니 신념이니 희생이니 구제니 하는 것들에 대한 집착과 자기기만이다. 이러한 버릇들은 시대가 바뀔 때마다 새 옷을 갈아입고, 새로운 단장을 꾸미고 사회의 표면에 나타나 언제나 심각한 표정으로 많은 사람들을 우롱하고 있다는 것이다.(295)

극단 민중극장이 공연한 장정일 작, 윤광진 연출의 <도망중>(1987. 11)은 연작형식의 <실내극>(1987년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과 <어머니>(세계의 문학, 1987년 가을호)를 한데 묶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감옥이라는 모티브를 중심으로 현실세계에서 감옥으로 도피하려는 모자의 화소(실내극)와 감옥으로부터 현실의 환상 속으로 도피(295)하려는 화소(어머니)를 내포한다.(296)

극단 자유가 공연한 김정옥 연출의 <수탉이 안 울면 암탉이라도>(1988. 5)는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실험적인 작품이다. 김정옥은 극단 자유와의 작업을 통해 그동안 <바람 부는 날에도 꽃은 피네>(1984), <이름없는 꽃은 바람에 지고>(1986) 등 일련의 실험극을 시도하여 매번 화제를 일은켰다. <수탉이…>는 그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세 번째 작품이다. 현재를 기점으로 약 1세기에 걸친 역사를 종횡무진으로 더듬어가는 이 작품은 여러 역사적 장면을 극중극의 형태로 편집한 구조를 보인다.(296)

변신술과 무대활용, 시청각적 요소의 확대를 통한 연기력의 확장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이전에 비해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준다. 이 작품의 공연에서 연기자는 하나의 인격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인격을 순간순간 표상해 낸다. 이름하여 변신의 연극이다. 소수의 연기자들이 짧은 시간에 다수의 극중 역할을 별다른 무리없이 감당해 냄으로써 연기력의 확장은 물론, 연극의 본질인 놀이성을 충만시켜 준다. 일상적인 자아와 다른, 여러 인격에로의 변신을 통하여 연기자와 관객들이 함께 역사적 현실을 체험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297)

극단 연우무대가 공연한 주인석 구성, 김석만 연출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8. 2)는 시를 성공적으로 극화한 사례로 주목받았다. 실험성 강한 황지우의 시에서 제재를 빌려온 이 작품은 원작에 걸맞게 과격한 형식실험을 선보였다.(298)

연극은 열다섯 장면이 병렬적으로 맞물리면서 전개된다. 그 장면들은 하나하나가 별개의 상황과 언어·몸짓으로 이루어진 독립된 구조로서, 다른 용어로는 삽화·짧은 이야기(에피소드)·극적 편린 등으로 부를 수 있는 단위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장면들은 다시 하나 내(298)지 여러 화소(話素)를 내포하고 있어서 마치 영화의 스틸 사진을 연상시켜 준다. 작은 모티브들이 결집되어서 하나의 독립된 국면을 이루고, 그러한 국면들이 다시 전체적인 논리와 맥락을 지니면서 하나의 극이 완성되는 형식을 숨 가쁘게 보여준다. 20여 편이 넘는 시가 거의 직접적인 모티브로 활용되고, 작품의 성향이나 주제 면에서 황지우의 시세계 전체와 대응을 이루는 연극이다.(299)

 

5) 1990년대 이후

6) 잔혹극·개방극의 의의와 과제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도되기 시작한 실험적인 연극작업은 한국 현대극의 방향을 탈사실주의 쪽으로 돌리는 데 기여하였다. 아르토나 그로토프스키 등 서구 실험극의 전략을 수용하여 다양한 무대실험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실험은 주로 언어 위주의 연극문법에서 탈피해 동작 중심의 원형적 연극성을 되살리는 데 초점이 모아졌다. 이에 따라 대본 구성보다는 그것의 무대화가 더욱 중시되었다. 기존 연극문법에 대한 과격한 해체나 전복은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어 관객의 참여를 촉진시켰다.(308)

서사극, 부조리극, 신화극은 이미 실험극이 아니라 현대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잔혹극, 개방극, 참여극, 정치극, 가난한 연극, 살아있는 연극, 비(非)언어극, 마임극 같은 것들이 여전히 실험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전위극(前衛劇)이라는 이름 아래 전개된 이상과 같은 무대작업들은 아직 그 자체의 분명한 연극미학을 수립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 표현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한편으로, 뚜렷한 현실시각과 예술적 지향점을 제시하는 것이 과제로 남는다.(309)

 

5. 뮤지컬 시대의 개막

1) 가극·악극·뮤지컬

가극(歌劇)과 악극(樂劇)이라는 용어는 근대극시대에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가극은 애초에 한자어 그대로 ‘노래하는 연극’, 즉 창극, 오페라, 악극, 창작가극 등을 통칭했다. 1920년대 후반기 대중음악인 트로트와 즉석의 밴드반주를 기반으로 한 이른바 악극이 연극 장르로 대두되면서, 악극과 변별하여 서양식 창작 가창곡에 즉석의 피아노반주를 기반으로 하는 음악극을 가극으로 별칭하기 시작했다. 당시 가극은 뮤지컬의 한 부류이기는 했지만, 아직 뮤지컬이라는 개념이 수용되기 이전이었다. 악극은 1950년대 후반 영화가 붐을 일으키기 전까지 대중극을 주도한 장르였다. 이에 대하여 가극은 주로 학교행사나 교회행사를 통해 공연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1940년대 전반기 세계대전의 분위기 속에서 서양 뮤지컬은 대중(310)극의 총아로서 확고히 자리를 굳히기 시작했다. 춤과 노래라는 감각적인 언어로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특성 때문에 뮤지컬은 대중성을 담보한다. 한국에는 60년대부터 뮤지컬 양식이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했다. 전후 급ㅎ속도로 파급된 재즈의 물결을 비롯해 미국문화의 유입과 보편화는 뮤지컬이 움틀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 즉 196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다양한 뮤지컬의 시도가 이루어진 데는 대중들,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 팽배해 있던 미국문화에 대한 동경이 큰 몫을 했다.(문호근, 「한국의 음악극-1971년부터 현재까지」, 󰡔��한국의 공연예술󰡕��, 현대미학사, 1999, p.235 참조-원주)(311)

당시 뉴욕에서 장기흥행하고 있는 브로드 웨이 뮤지컬을 직접 관람하고 돌아온 유치진은 뮤지컬의 대중적 가치를 체감했다. 그가 제작한 <포기와 베스>(1962. 8)는 이해랑 연출로 드라마센터 무대에서 공연되었다. 그는 ‘이번 공연은 우리가 시험해 보려는 명일 음악극의 시금석’이라고 했다.(유치진 「<포기와 베스>의 연출」, 󰡔��동랑 유치진 전집󰡕�� 8, 서울예술대학 출판부, 1993, pp.353~354 참조-원주)

<포기와 베스>는 1937년과 1948년에 유치진에 의해 상연된 적이 있고, 이때 처음으로 음악극을 의식하여 거슈윈의 음악을 구사했다. 2개월 동안 배우들에게 노래와 춤을 훈련시켜 완성도를 기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뮤지컬 플레이’, ‘뮤지컬 드라마’라고 소개했으나(311) 엄밀한 의미에서 곡수가 너무 적고 음악을 제대로 살리지 못해 제대로 된 뮤지컬로 보기 어렵다. 대본도 원작이 아닌 일본의 축지 소극장에서 상연했던 중역본을 사용했다.(차범석·우에무라 료오스께·김상렬 대담, 「한·일 뮤지컬의 가능성」, 󰡔��한국연극󰡕��, 1990, 10, p107 참조-원주) 그러나 최신 무대시설을 갖춘 드라마센터의 아레나 스테이지에서 펼쳐진 <포기와 베스>는 일반인에게 서구적인 뮤지컬 양식을 인식시키는 데 기여했다.(312)

 

2) 뮤지컬의 창작

한국 뮤지컬의 본격적인 시발은 소위 2차 예그린악단의 <살짜기(312) 옵서예>에서 찾을 수 있다. 총인원 3백여 명이 참가한 <살짜기 옵서예>(1966. 10)는 초대형 서울시민회관에서 모두 7회 공연되었다. 작곡과 지휘를 전담한 최창권은 이 작품을 뮤지컬의 효시로 보았다. 그 이유로 대중관객의 반응, 흥행 성적, 규모와 내실 면, 그리고 양식적인 측면에서 현대적인 뮤지컬 양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최창권, 「뮤지컬」, 한국음악협회 편, 󰡔��한국음악총람󰡕��, 1991, p.513-원주) 당시 각 분야의 전문인이 참여하고 각계의 재주꾼과 스타가 집결한 <살짜기 옵서예>는 한국 뮤지컬의 화려한 개화를 알리는 선언적인 작품임에 틀림없다.(313)

예그린악단은 북한의 종합무대 형식의 공연예술에 필적할 만한 예술단체의 필요성을 인식해, 국비 지원으로 창단된 단체였다. 군사정권의 2인자였던 김종필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후원회를 조직했으므로 당시 내로라하는 재계인사들이 후원회에 참여했다. 활동비 지급이 원활했으므로 당대의 손꼽히는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이 참여했고, 정규 대학 출신의 남녀 합창단과 관현악단, 무용단 등 300여 명의 단원을 구성할 수 있었다. ‘예그린’이란 영문학자 오화섭이 ‘옛을 그리며 내일(來日)을 위하여’의 뜻을 담아 작명한 것이다.(314)

<살짜기 옵서예>는 고전소설 <배비장전>을 각색한 것이다.(315)

이 작품이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근본 이유는 우리 정서에 부합하는 고전을 소재로 하여 여기에 한국음악과 춤의 전통 위에 서구 뮤지컬 양식을 접목하려고 노력한 점에 있었다. 서구식 극 구조와 음악어법을 차용하되 소재, 대사, 선율, 율동, 연희, 소품 및 의상 등에서 한국적 색채와 분위기를 덧붙인 노력을 통해 현대적 음악극으로서의 면모를 갖출 수 있었다.(316)

국내 뮤지컬의 역사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극단이 현대극장이다. 극작가 김의경이 연극의 전문화, 과학화, 직업화를 목표로 창단한 단체이다.(317)

현대의 뮤지컬 <해상왕 장보고>는 1995년 미국 LA에서부터 2002년 프랑스 파리공연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24개국 26개 도시를 순회 공연하였다. 한국 뮤지컬을 처음으로 세계무대에 알리는 대장정이었다. 파리공연은 당시 환상적인 의상과 신선한 무대효과가 돋보였다는 호평을 받았다. 이와 같은 공연실적에 힘입어 다음 작품인 <팔만대장경>은 여러 나라에서 초청제의를 받을 수 있었다. 2001년부터 일본 후쿠오카 공연을 시작으로 2004년 7월 현재까지 해외 공연이 진행되고 있다.

또한 현대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뮤지컬을 시도한 점도 주목된다. ‘해태 명작극장’ 시리즈로 시작된 어린이 뮤지컬 제작은 오늘날 매해 5월마다 각 방송사에서 기획하는 아동 대상 뮤지컬의 효시를 이루었다.(중략) 그리고 현대가 운영하는 청소년극장 프로그램은 국내외의 명작들을 청소년들에게 선보임으로써 연극인구의 저변확대에도 기여해 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318)

 

3) 뮤지컬의 영역 확대

1980년대 들어서 뮤지컬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대표적인 현상으로는 극단 민중·광장·대중이 공동제작한 <아감씨와 건달들>(1983. 12)의 흥행성공이었다.(중략)이 작품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뮤지컬이 국내 공연시장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계기를 마련했고, 초연된 이후 3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였다.(319)

극단 대중이 제작한 강영걸 연출, 정대경 음악, 박상규 안무의 <넌센스>(1991. 6)는 뮤지컬 사상 최다 공연을 기록한 작품이기도 하다.(319)

1986년에 88서울올림픽을 겨냥한 새로운 관립 뮤지컬단인 88서울예술단(후에 서울예술단으로 개칭)이 창단되었다. 88서울예술단의 창단 배경은 1985년 9월 정부에서 발표한 민족 대교류 선언에서 비롯되었다. 세계의 화해무드와 더불어 정부의 대 북방정책의 변화에 따라 남북한 간의 문화예술 교류를 활성화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루어진 예술단의 교환공연은 본격적인 남북 문화교류의 시발점으로, 이산가족의 상봉 못지않은 큰 기대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86년 8월 1일에 한국방송공사 산하단체로 출범한 88서울예술단은 문화예술의 세계적 조류에 편승하여 노래와 연구와 무용 등 각 장르의 성격과 특이성이 상호 조화를 이루는 총체예술단으로 창단된 것이다.(서울예술단 편, 󰡔��서울예술단 10년사󰡕��, 1996, pp13~34 참조-원주)(320)

그 후 총체극이라는 생소한 장르보다는 뮤지컬이라는 대중적인 연극이 적합하다는 판단에서 서울예술단은 제작방향을 바꾸었다.(320)

1990년 88서울예술단은 서울예술단으로 개명되어 문화부 산하의 재단법인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이전의 88서울예술단에서는 창작뮤지컬 제작에 치중하는 편이었으나 재단법인으로 전환하면서 뮤지컬은 물론 전통무용을 기저로 한 창작 무용극, 그리고 악기연주와 춤, 노래가 총합된 가무악(歌舞樂) 작품을 개발하는 등 공연양식의 다양화를 꾀하였다.(321)

 

4) 뮤지컬의 시대

1990년대에 들어 대형 뮤지컬을 성공적으로 공연하여 가장 주목받은 단체는 에이콤이다. 사립극단으로서 뮤지컬 전문단체임을 표방하고 나선 것은 에이콤이 처음이었다. 창단작품으로 <아가씨와 건달들>을 공연한 데 이어, <스타가 될 거야>(1995), <명성황후>(1996), <겨울 나그네>(1997) 등 창작뮤지컬을 중심으로 공연해 오고 있다. 특히 이문열 원작, 김광림 각색, 김희갑 작곡, 윤호진 연출의 <명성황후>는 국내 창작뮤지컬 중 가장 많은 공연 횟수와 관객을 동원하여 창작뮤지컬의 롱런 가능성을 열어놓은 공연으로 평가받았다. 또한 1997년 뉴욕 링컨센터와 1998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마지막 황후>라는 제목으로 역사적인 해외 공연을 가진 바 있다.(322)

재정은 취약하지만 공연환경의 변화에 순응하기 위해 사립극단들은 위험을 안고 창작뮤지컬에 도전했다. 1971년 창단하여 1991년 뮤지컬 극단으로 변신한 극단 맥토의 경우도 그렇다. 맥토는(중략)(322) 주로 창작뮤지컬 제작에 힘썼다. 특히 뮤지컬 <번데기>(1994-인용자)는 서울연극제사상 처음으로 뮤지컬이 대상을 차지하는 이변을 연출했다.(중략) 이 작품은 1995년도 스포츠조선의 한국뮤지컬시상에서 극본상과 연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근단 신시도 1988년 창단하여 정극 위주로 공연하다 1995년 신시뮤지컬컴퍼니로 개명하면서 본격적인 뮤지컬 제작에 합류하였다.(323)

뮤지컬 전문 프로덕션 티엔에스(T&S)와 서울뮤지컬컴퍼니는 1995년 창단된 단체로서 창작뮤지컬 위주로 공연하고 있다.(중략) 이후 독자적으로 분리된 서울뮤지컬컴퍼니는 살롱뮤지컬의 연장선으로 <지상에서 부르는 마지막 노래>(1997), <오 해피데이>(2000)를 올렸으며, <하드록 카페>(1998)와 <록 햄릿>(1999) 등의 작품으로 오늘날 젊은이의 감성에 맞는 무대를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323)

극단 학전의 김민기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번역 상연에 대항해(323)서 뮤지컬의 번안 공연을 통해 우리 뮤지컬의 발전을 시도하고 있다.(중략) 이는 장기 공연이 가능한 전용극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324)

특히 <지하철 1호선>은 독일 그립스극단 대표 폴커 루드비히의 원작을 한국적으로 새롭게 번안한 뮤지컬이다. 김민기는 이 작품을 1994년 초연하여 2000년 1월 1000회 공연을 돌파하였다. <지하철 1호>는 소극장에서 라이브 음악을 사용하는 등 한국뮤지컬의 질적 수준을 한 단계 높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324)

최근에 나타난 새로운 공연양식으로, 논버벌(non-verbal) 퍼포먼스를 빼놓을 수 없다. 미국의 논버벌 퍼포먼스 양식에 한국의 풍물·사물놀이를 결합한 <난타>의 성공은 전용극장 개관, 브로드웨이 진출 등의 성과를 낳았다. 이에 영향을 받아 <도깨비 스톰> 등의 작품들이 나타났다.(325)

오늘날 뮤지컬은 연극양식의 중심에 자리를 잡았다. 대중이 가장 선호하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간 뮤지컬 전문극단과 공연은 숱하게 증가했고, 창작에 대한 시도도 끊이지 않았다. 피상적으로 관찰하면, 뮤지컬은 전망이 매우 밝은 분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외국 뮤지컬, 특히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빈번하게 직수입되어 국내시장의 점유율이 높아지는 현상은 심히 우려할 사태이다. 상대적으로 국내 창작뮤지컬의 성장을 위축시키기 때문이다. 제작비는 물론, 모든 여건이 불리한 국내 사정에 비추어 뮤지컬의 발전을 단시일에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326)

역시 한국 뮤지컬의 장래를 기대하게 하는 요인은 배우들의 우수한 가창력이다. 이 가창력을 바탕으로 소극장의 작은 뮤지컬운동으로부터 대극장용 창작극들이 발전해 나가야 할 것이다.(327)

 

제4장 전통양식의 계승과 발전

1. 굿극의 시도와 제의성의 추구

1) 샤먼의 원시극

종교체험은 제의(祭儀)를 통해서 표현된다. 한국인의 원시종교는 샤머니즘(巫敎)이고, 그것은 현재도 잔존한다.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한국의 샤머니즘은 강력한 영향력을 지녔고, 현재에도 민간신앙으로 혹은 민속으로 분명하게 살아있다. 오늘날엔 샤먼이 참여하지 않은 채 군중만이 모인 행사를 ‘굿’이라 통칭하기도 한다. 지난날 샤머니즘의 영향을 상징하는 말이다.

‘무당’이란 여자 샤먼을 지칭한다. 남자 샤먼은 ‘판수’, ‘박수’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는 여자 샤먼이 대부분이어서 ‘무당’이라는 말이 샤먼의 대명사가 되었다.(331)

샤먼의 제의를 목적에 따라 분류하면, 크게 샤먼 자신들을 위한 굿(巫神굿), 일반인들의 가족을 위한 굿(집굿), 마을 사람들을 위한 굿(마을굿)으로 나눌 수 있다. 샤먼을 위한 굿은 샤먼이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기성 샤먼이 신의 내림을 받아주는 내림굿(入巫굿)과 샤먼들이 자기가 모시는 신을 위하여 봄, 가을에 하는 제의가 있다. 샤먼은 어느 계통을 막론하고 자신에게 내림굿을 해주고 자기를 무당으로 수련시켜 준 무당을 일생의 스승이나 어버이로 받드는 관습이 있다. 양자의 관계는, 샤먼을 신에 비유하여, 신의 아들 혹은 신의 딸이라 부른다.

가족을 위한 굿에는 죽은 사람을 위해서 하는 넋굿(死靈遷度祭)과 아픈 사람을 위해서 하는 병굿, 그리고 일상생활의 행운과 행복, 성공을 기원하는 재수굿(행운굿) 등이 있다. 재수굿은 대체로 가족이나 개인적인 행운을 기원하며, 때로는 매우 이기적인 욕망을 달성하려는 의도에서 행한다. 극히 드문 예이지만 아직 살아 있는 노인의 장수를 빌기 위해 자녀들이 무당을 초빙하여 행하는 경우도 있다.

마을을 위한 굿은 말 그대로 마을 전체의 재앙을 물리치고 안녕을 빌며, 풍년과 풍어와 다산을 기원하는 제의다. 고대로부터 한국에서는 어느 지역, 어느 마을에서나 마을을 수호하는 대표적인 남녀신(男女神)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신들을 모시는 제당 혹은 제단이 주변에 마련되었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다양한 제의가 계승되었다. 산간마을, 평지마을, 바닷가마을, 광산마을, 섬마을 등에 따라 각기 생활방식이나 생산물, 생산방법 등이 달랐으므로 여러 가지 신앙제도가 발달했다. 마을굿에는 매년 하는 정기굿(定期굿)과 몇 년 간격을 두고 혹은 특별히 하는 별신굿(別神굿)이 있다. 마을굿은 축제로 전승되었다.(332)

무당굿은 몇 가지 단계로 이루어지고, 각 단계는 행위의 동기(motive)와 화소(motif)에 따라서 독립적인 제의를 연출한다. 보통 12가지 단계를 거쳐 굿이 완성되는데, 이 단계들을 ‘굿거리’라고 한다. 굿거리 가운데 특히 연극성이 높은 거리를 ‘굿놀이’라고 부른다. 관중뿐 아니라 무당들 또한 굿놀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놀이이자, 연희이자, 연극으로서 굿의 역사적 본질을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샤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모셔 놓고, 혹은 신을 향하여, 마치 그 신이 그 자리에 실재하듯이 모든 절차와 행동과 말을 연출하고 시행한다. 홉사 일인극(monodrama) 배우처럼 혼자서 여러 가지 역할을 능숙하게 해낸다. 무당은 실제 시공간과 현실적 삶을 굿의 시간, 공간, 행위로 즉 굿의 세계(굿판)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하여 굿판은 성스러운 제이 장소가 되고, 놀이판이 되고, 연극무대와 같이 된다. 무당굿이야말로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공연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종교적으로 가장(仮裝)된 놀이라는 측면에서는 모든 굿은 일종의 종교극, 제의극 혹은 진지한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E. T. Kirby, Ur-Drama: The origins of Theatre, New York University Press, 1975 참조-원주)

고대 한국인들은 다산과 풍농과 안전을 위해 여러 신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신을 잘 받들기 위해 신성한 장소(‘소도’라 했다)를 보존하거나 신전(‘서낭당’이라 했다)을 만들기도 했다. 제의와 정치가 하나였으므로(祭政一致) 샤먼은 통치자이거나 혹은 막강한 권력자였다. B.C. 1세기까지 왕들을 샤먼들이 겸직한 증거도 남아 있다. A.D. 4세기에 불교가 수용되기 이전에는 샤머니즘이 절대적인 종교였고, 사제자·통치자·교사·의사로서 샤먼의 사회적 역할과 위상은 신성불가침의 것이었다.

샤먼은 신의 위대한 힘을 믿으며, 그 힘을 빌어서 인간적 소망과(333) 사회적 소망을 해결하고자 한다. 가령 산에는 산신이 있고, 강에는 수신이 있으며, 땅에는 지신이 있다고 믿었다. 인간신·동물신·초목신(木神)·물건신(物件神)이 있으며, 바람신·불신(火神)·선신(善神)·악신(惡神) 등이 있다고 믿었다. 이런 범신관(汎神觀)은 일종의 문화적 전통이다. 신들은 이 세상 어디에나 강림하고 또한 내재한다. 그러나 샤먼이 아닌 일반인들은 그 모습을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샤먼만이 신과 소통할 수 있다고 믿었다.

1969년까지 조사된 샤먼 신의 종류는 273가지에 달한다. 1950년대의 전쟁과 1960년대의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샤먼과 굿은 급격히 감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많은 샤먼 신이 잔존한 것은 한국 사회에서 무속신앙의 전통이 얼마나 뿌리깊은 것인지를 시사한다. 불교와 유교와 기독교도 샤머니즘과 깊이 결합되어 있다. 신들은 자연신 계통과 인간(영웅)신 계통으로 대별되는데, 63 대 33, 기타 4로, 자연신 계통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김태곤, 󰡔��한국무속 연구󰡕��, 집문당, 1981, pp.280~285 참조-원주)(334)

 

2) 굿과 굿극

샤먼은 오랜 동안 연마해온 주술적 언어능력, 춤과 노래와 연기력을 포함하는 연희적 표현력, 그리고 제의 관리능력을 통하여 굿을 주재해왔다. 샤먼의 유형은 여러 가지로 분류된다, 영력(靈力)이 탁월하고 예능이 우수한 샤먼이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고 인기를 독차지하게 된다. 영력과 예능은 일면 선천적인 혹은 의식적(意識的)인 능력이기도 하지마는 대체로 후천적 능력 혹은 학습과 수련(修鍊)을 통해 얻어진 능력이다. 샤먼은 목적에 따라 여러 가지 굿을 하는(334) 데, 큰굿을 하기 위해서는 각 굿거리의 복잡한 절차와 장편의 서사무가, 공수(신의 말씀), 재담(익살스런 말)연행, 춤, 악기연주, 점치기, 꽃 만들기, 제물 만들기, 의상관리 등을 제대로 파악하고 능숙하게 실연할 수 있어야 한다.(335)

샤먼들은 거주지역에 따라, 영력에 따라, 굿의 목적과 과정에 따라, 굿의 방법에 따라 각기 다른 굿놀이를 해 왔다. 오랜 역사와 전승과정에서 여러 가지 계통과 다양한 양식을 발전시켰다. 신화와 무가의 종류와 내용도 복잡하다. 한국의 굿은 샤먼과 민중 사이에서 하나의 사회적 관습을 이루었고, 신앙으로서, 윤리로서, 교육으로서 전통을 이루었다. 특히 굿은 전통공연예술로서, 민중의 오락과 위안물로서 확고한 문화적 역할을 했다.(335)

샤먼의 ‘굿놀이’는 제의극의 일종이자 민속극의 일종이다. 따라서 그것을 그대로 재현하기도 힘들지만, 설사 재현한다고 해도 그것이 저절로 현대적인 연극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전통연희의 일종에 불과한 것이다. 무당굿은 현대극의 하나의 대안양식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정말 대안양식이 되느냐 못 되느냐는 전적으로 연극인 자신의 창의성에 달려 있다. 따라서 굿의 정신과 방법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응용하느냐 하는 창조성과 참신성이 성패의 관건이 된다.(335)

무당굿 양식을 현대화시켜 재창조한 연극을 ‘굿연극’의 약칭으로서 ‘굿극’으로 부르기로 한다. ‘굿극’이라는 말은 아직 한국에서 널리 사용되지는 않지만, 분명 창조적이고 도전적인 개념이다. 1970년대부터 현대까지 굿극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은 현대 신화극을 창조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지속되어 왔다. 신화극이 서구적인 양식의 영향을 많이 받은 연극이라면, 굿극은 한국 무당굿 양식의 영향이 강한 연극이라 할 수 있다.(336)

 

3) 굿극의 모색과 전개

제의의 양식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굿극은 1970년대부터 실험되기 시작했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전통문화에 대한 자각과 반성이 일어났고, 이를 토대로 민속연희를 부활하고자 하는 붐이 조성되었다. 그 가운데 굿은 민족의 원형적 연희양식으로 부각되었다. 굿에 대한 관심은 굿의 재현으로 이어졌고, 다시 굿의 현대적 계승으로 나아갔다.

자유극장이 공연한 박우춘 작, 김정옥 연출의 <무엇이 될고 하니>(1978. 10)는 ‘장승’에 얽힌 설화를 극화한 작품이다. 돌이나 나무로 만들어 마을의 입구에 세운 신상을 ‘장승’이라고 한다. 장승은 마을의 수호신이고, 마을 사람들이 장승 앞에 모여 1년에 한 번씩 축제를 벌이는 것을 ‘장승굿’이라 했다. 장승들은 지역마다 고유한 신화나 설화를 지닌다. 이 작품에서는 억울하게 살해된 청년과 그를 사랑하다가 죽은 애인이 ‘장승’으로 변했다는 설화를 차용하고 있다. 과거에 살았던 두 연인의 아름다운 사랑과 부당한 희생을 다루면서, 그들의 희생을 저항적인 이미지로 부각시켰다.(336)

무대에는 특별한 장치 없이 빨랫줄이 있을 뿐이다. 거기에 배우들(336)이 옷을 벗어 걸고, 다시 갈아입는 방식으로 역할 변신을 시도하였다. 마치 무당이 수차례 변신을 거듭하면서 굿을 하듯이, 숱한 장례기구들, 염을 한 송장, 소도구들은 모두 배우들이 움직일 때 손에 들려져 함께 움직인다. 이로써 살아 있는 그림과 분위기, 나아가서 극적인 체험을 강조하는 도구로 활용된다. 아울러 무대 공간뿐만 아니라 객석의 모든 통로도 배우들의 등퇴장로가 된다. 코러스는 무대 공간 위에서 연극이 끝날 때까지 사라지지 않고, 각기 맡은 역할에 따라 객석 앞으로 나와서 대사를 하거나 몸짓을 하거나 북을 치거나 노래를 부른다.(337)

이렇게 이 연극은 살아 있는 미술, 행동하는 이미지의 개념에 주목해 한편의 굿을 창조한다.(중략) 프랑스 공연에서 「르몽드」지는 ‘한국인과 프랑스인의 영혼이 교류된 무대, 생동감 넘치는 공연이었으며, 동양적 뮤지컬의 가능성을 보였다’고 평하였고, 뉴욕대학의 마이클 커비는 ‘연기자들은 관객들과 격식 없이 직접적, 해학적으로 대화를 나누어 즉적반응을 일으키는 전혀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해냈다’고 평가하였다.(337)

국립극단이 공연한 김진희 작, 손진책 연출의 <바리더기>(1983. 3)는 대표적인 무당신화인 진오귀굿 바리공주를 극화한 것이다. 작가는 ‘사령제(死靈祭)’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위한 생령제(生靈祭)를 위해 만들게 되었음을 밝혔다.(338)

1987년에 공연된 엄인희 구성의 <왔구나 왔어>는 우리 광대극의 일종인 배뱅이굿을 현대화한 작품이다. 판놀음의 일종으로 전승되어 온 민속 연극 배뱅이굿은 광대가 혼자서 하는 일인극으로, 주로(338) 평안도·황해도 지역에서 널리 알려졌다. 배뱅이굿의 역사는 19세기 후반까지 소급될 수 있다. 16세기 중반에 나온 <<어우야담>>의 동윤설화에 배뱅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전하나, 동시대에 배뱅이굿이 있었으며, 그것이 계속 전승되어 왔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339)

극단 목화가 공연한 오태석 작·연출의 <백마강 달밤에>(1993. 2)는 마을굿인 은산별신제와 무속설화인 바리공주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중략) 은산별신제는 백제시대의 희생자를 추모하(339)는 제의에서 유래하였다. 현재는 ‘불운하게 사망한 영혼을 위로하는 무당굿’으로 전국적으로 희귀하게 잔존한다.(340)

 

4) 굿극과 문화상호주의

한편, 한국적 제의극의 모색은 단순히 굿의 양식을 계승하는 데 머물지 않고, 굿의 양식을 응용해 외국 작품을 무대화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자유극장의 레퍼토리로 정착된 가르시아 로르카(1898~1936)의 <피의 결혼>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341)

 

5) 이윤택과 굿극

굿극이 한국 현대극의 뚜렷한 양식으로 자리잡는데는 1990년대 이윤택의 기여가 적지 않다. 연희단거리패가 공연한 이윤택 작·연출의 <오구>(1990. 6)는 굿극으로서 흥행에 성공한 드문 사례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오구는 불행하게 살다 죽은 사자의 넋을 위로하고, 세상을 떠도는 영혼을 저승에 안착시키는 샤먼의 제의이다. 드문 일이지만, 살아 있는 부모의 장수를 위한 오구굿을 하기도 한다. <오구>는 노모(남미정 역)을 위한 산오구굿에서 출발해서 2차 세계대전 때 작고한 아버지를 위한 오구(진오구굿)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자식들 사이에 벌어지는 욕망의 갈등을 그린 작품이다.(343)

이 연극에서 죽음은 생의 의미와 살아있음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동시에 일상의 삶은 죽음이라는 절대적 진실 앞에 놓인 무상하고도 창조적인 실체로 형상화되었다. 적어도 이 연극은 죽음이 무엇인지를 묻고 답하는 설명극이 아니다. 죽음을 통해서 삶을 체험하게 하는 굿극이다. 사람들을 구경꾼으로 잡아두는 연극이 아니라, 관객들로 하여금 스스로 체득하게 하는 공연이다. 이 공연에서 비로소 기존 굿의 해체와 새로운 총체화가 시도되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위한 해체인가. 물리적인 것이든, 상징적인 것이든 굿의 기호들을 밝혀내기 위한 해체이다. 기호의 탐구와 발견이야말로 새로운 굿극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굿을 존재론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방법론적으로, 즉 기호로 접근한 데서 이 연극의 길이 열린 것이다.(344)

연희단거리패가 공연한 장일홍 작, 이유택 연출의 <초혼>(2003. 12)은 <오구>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굿극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었다.(중략) ‘이번 <초혼> 연출을 맡으면서 나는 흥미로운 단서를 발견했다. 연극은 굿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시작되고 굿이 끝나면서 연극은 자연스럽게 끝난다. 막을 열고 닫을 이유가 없고 조명을 끄고 켜고 할 이유도 없다. 거추장스럽게 무대장치를 바꿀 이유 또한 없다. 한 편의 연극은 그대로 한 판의 굿이 되는 것이고, 모든 극적 구조는 굿의 구조 속에 녹아 들어가 버린다.’ 이것은 연출가 이윤택의 말이다.

관객에게 한 편의 새로운 요왕맞이굿을 체험시키는 것이 <초혼>의 전략이다. 그것은 고난과 극복과 화해의 총체성을 일컫는다.(345)

 

6) 굿극의 의의와 과제

한국의 전통적인 제의인 굿은 인간의 삶에 내포된 원초적인 비극성을 드러내주고, 동시에 이를 치유하는 신성한 기능을 발휘했다. 이러한 기능은 현대인의 삶에 있어서 보다 절실하다. 현대의 삶이 삭막해진 것은 산업화, 물질화, 도시화로 인해 본래의 성스러운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탈신성화의 결과는 끝없는 소외와 폭력의 악순환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의 삶은 제의의 형식을 통해 쇄신되고 정화될 필요가 있다. 굿극의 연극사적 의미는 바로 이러한 절실한 시대적 요청에서 비롯된다.

한국적인 연극, 신선한 현대극, 그리고 진보적인 연극을 만드는 데 굿양식은 하나의 중요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이런 연극의 기본조건은 창조이다. 전통굿 가운데서 현대성을 발견하고, 현대적인 삶(346)을 새로운 굿으로 표현하는 변증법적인 창조성이 요청된다. 연극인들이 굿자료를 폭넓게 인식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민속학자의 입장이 아니라 창작자의 자세로 굿의 기호들을 활용해야 한다.(서연호, 「현대극의 대안양식 굿」, 󰡔��생동하는 무대를 찾아서󰡕��, 2004, pp.170~176 참조-원주)(중략) 지금 연극 나름의 방법에 대한 치열한 싸움이 절실히 요청된다. 연극양식은 언제나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지 동서양의 기성양식이 현대극의 성공을 보장해 주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347)

 

2. 탈춤극과 탈놀이의 계승

1) 가면극의 전승

가면극의 제작은 땅 위에서 인간의 활동이 시작된 때로부터 이루어졌다. 가면은 인간 심성의 반영이고 욕망의 표현이자 특정한 대상의 모방을 통해 만들어진다. 가면은 다용도로 사용되는 물질적 도구이자 신성한 영력을 지닌 정신적 상징물이다. 사냥과 채집만으로 생존했던 시대, 전쟁과 약탈을 일삼던 시대의 사람들에게 가면은 자신을 위장하는 중요한 도구였다. 또한 가면은 신비하고도 위대한 힘을 지닌 신상 혹은 기적을 이룩한 조상의 모습으로 추앙되기도 했다. 고대의 사람들은 이러한 신상(神像) 및 선조상(先祖像) 앞에서 다수확과 다산, 풍농을 기원했다. 한편으로는 그들 자신이 그러한 신격으로 위장하여 인간의 건강하고 풍요로운 삶을 위한 여러 가지 모의행동을 연출해냈다. 가면을 매개로 하는 신앙적·주술적인 의식과 현(348)실적·전투적인 행위, 그리고 상상적·예능적인 표현은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줄기차게 지속되어 왔다.(Andreas Lommel, Masks, McGraw-Hill Book Company, 1972 참조-원주)(349)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파된 ‘가면악(仮面樂)’, 가야의 ‘사자춤(獅子伎)’, 신라의 ‘黃昌舞)’, 톨일신라의 ‘처용무(處容舞)’와 ‘향악잡영(鄕樂雜詠)’, 고려의 ‘산대잡극(山臺雜劇)’과 ‘나례(儺禮)’, 조선의 ‘山臺劇)’과 ‘나례’ 등은 모두 가면극이었다. 가면극은 1930년대까지 각 지방에서 성행했다. 한국의 모든 가면극은 농어촌 및 도시의 민속신앙·불교의식·세시풍속·시장흥행과 더불어 발전했다. 독자적인 생존기반을 갖지 못했던 배우(‘광대’)의 연희는 이러한 신앙의식이나 생활풍속, 환경에 의존해서 전승되었다. 가면극에 벽사(辟邪)와 기복(祈福)의 요소가 짙은 것은 이러한 이유였다.

가면극이 독자적인 연희양식으로 발전하면서 가면과 가면극은 지역마다 다른 명칭과 특징을 갖게 되었다. 가면은 한국어로 ‘탈’, 가(349)면극은 ‘탈춤’이라 했다. 경기도지역에서는 ‘산대탈놀이’ 혹은 ‘별산대탈놀이’라는 명칭이 전승되는데, 이는 고려시대의 개성과 조선시대의 한성을 중심으로 ‘산대놀이(山臺戱)’가 성행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산대’란 산과 같이 높은 가설무대를 설치하고 놀았던 데서 유래했다. ‘산대놀이’라고 해서 모두 실제로 ‘산대’를 만들어 놓고 그 위에서 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과거의 전통을 잇고 있다는 의미에서 유행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산대’는 궁정이나 반가(班家)에 설치했던 ‘채붕(綵棚, 彩棚)’과 구별된다. 역시 가설무대의 하나였던 ‘채붕’은 연희가 벌어지는 건물의 마루 끝에, 마루와 평면이 되도록 넒혀서 만든 무대를 일컬었다. 왕가나 반가를 위한 연희는 주로 이 채붕에서 연행했다. 주위를 비단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데서 비롯된 명칭이다.

황해도지역에서는 ‘탈춤’과 ‘놀탈’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춤이 그만큼 중요시되었고, 잘 놀아야 가면극이 된다는 의미에서 배우를 ‘놀탈’이라 했던 것이다. 경상도지역에서는 ‘들놀음’, ‘오광대놀음’, ‘별신굿놀음’ 등이 가면극의 대명사가 되었다. 가면 자체보다는 야외에서 노는 놀음, 다섯 ‘광대’의 놀음, 다섯 장면으로 공연하는 놀음, ‘별신굿’에서 노는 놀음 등의 의미가 강조된 것이다. 함경도에서는 애초부터 사자를 중심으로 놀았으므로 ‘사자탈놀음’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남사당에서는 가면극을 ‘덧뵈기’라고 한다. 이처럼 탈과 탈놀이의 명칭은 다의적으로 사용되었다. 이상과 같은 전통탈춤의 정신과 방법을 계승하여 현대적으로 재창조한 연극을 ‘탈춤극’이라고 부르기로 한다.(350)

 

2) 탈춤극의 대두와 실험

극단 실험극장이 공연한 윤대성 작, 김현영 연출의 <망나니>(1969. 9)는 나무꾼에서 양반의 종으로 환생한 청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청년이 겪는 극중극이 드라마의 핵심적인 갈등이다. 노승과 귀신의 내기에 걸려든 나무꾼은 가면을 쓰자마자 종으로 환생하고, 일생 가면을 벗지 못하게 된다. 여기서 가면은 다른 인격으로의 변신을 가능하게 하며, 동시에 다른 운명을 체험하는 도구로 작용한다.(351)

<망나니>는 1960년대에 들어와서 시작된 전통 탈놀이의 재건운동과 그 현대적 계승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이룩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연극사적인 의의를 갖는다.(351)

극단 가교가 공연한 김상렬 작·연출의 <탈의 소리>(1972. 6)는 극중극을 통해 현대인과 가면극의 인물들이 어울리는 놀이극이다. 현대인은 작가와 그 아내이고, 아내는 극중극의 애사당(김영자) 역을 겸하며, 그녀의 꿈이 변신역할극으로 전개된다.(353)

극단 민예극장이 공연한 장소현 작의 ‘말뚝이 시리즈’는 연출가 손진책의 의지와 투합하여 10여 년 간이나 지속되었다. 손진책은 극장주의 마당극을 지향한 대표적인 연출가였다.(353)

전통 가면극에 등장하는 말뚝이는 양반의 하인으로서 겉으로는 주인에게 복종하면서도 실제로는 주인을 비판하고 반항하는 인물이다. 코메디아 델아르테의 하인역인 잔니처럼 언제나 놀라운 기지와 즉흥적이고 익살스런 동작으로 관중의 인기를 독차지해 왔다.(353)

 

3) 이승규의 탈춤극

창의성의 측면에서 현대 가면극에 기여한 연출가 이승규의 공로는 독보적이다. 이강백 작, 이승규 연출의 <개뿔>(중략) 한국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개뿔(속칭으로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을 동시대의 천대받는 인권에 비유하고, 독재 권력의 남용으로 비인간화되는 현실을 개판(속칭으로 몹시 난잡하고 엉망인 상태)으로 상징화시켰다.(355)

극단 가교는 1979년 10월에 이 팬터마임을 공연하여 불안한 군부정권의 상황에 일대 충격을 주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무리들은 같은 표정의 가면을 쓰고 같은 직물(삼베)로 지은 옷을 입었다.(355)

이 작품에서 가면은 인간의 본모습을 가리는 허위와 위장의 도구로 활용된다. 본래 가면에 투영되었던 신성한 영력은 획일화되고 익명화된 의식으로 대체된다. 그리하여 가면을 벗고 쓰는 행위를 통해 정치적 억압과 자유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가면극의 전통적 미학을 전복시켜 새로운 문법을 보여주었으며, 이를 통해 동시대의 정치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공연이었다.(356)

국립극단이 공연한 이승규 구성·연출의 <약속>(1986. 5)은 고전 <춘향전>을 가면극으로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중략) <춘향전>은 근대 이후 연극, 무용, 영화, 오페라,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로 현대화된 만큼, 새로운 해석 자체가 하나의 실험이자 도전이었다. 이승규의 해석은 장르적인 실험뿐만 아니라, 기존의 관념을 새로운 메시지인 ‘약속’으로 분명하게 해석한 점에서 높이 평가될 만하다. 작품의 특색은 한마디로 총체적인 접근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총체적이라는 뜻은 효과적인 극적 표현을 위해 언어와 몸짓은 물론 음악적인 요소, 무용적인 요소, 조형적인 요소 등 모든 방법론과 기술을 활용하여 창조를 위한 조화를 꾀했다는 의미이다.(357)

인천시립극단이 공연한 서연호 극본, 이승규 연출의 <시집가는 날>(1998. 5) 또한 탈놀이의 수용을 보여주었다. 이 공연에서 오영진의 원작은 대폭 개작되었다. 원래 이 작품은 <맹진사댁경사>라는 제목의 시나리오로 1943년에 발표되었다가, 이듬 해 김태진에 의해 희곡으로 각색되어 초연된 바 있다. 1952년 작가 자신에 의해 <도라지공주>라는 제목의 희곡으로 재창작되어 공연되었으며, 이후 대중적 인기를 누리며 자주 공연되었다.(358)

인천시립극단의 개작본은 남녀노소·가족이 함께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시민극으로 형상화되었다. 보편성과 현대성에 기초한 현대적 무대를 선보였다.(중략) 원작에서 가장 문제가되는 것은 헛소문을 퍼뜨리는 신랑 김미언의 애매한 이중적 성격이었다. 이런 이중성을 극복하고, 김미언과 입분이의 순수하고 올바른 마음가짐도 분명히 드러나도록 보완되었다. 그래서 헛소문의 진원지는 신랑 측이 아니라, 맹진사의 만행을 저지하려는 마을 사람들 자신인 것으로 설정된 것이다. 삼돌이의 성격도 강조되었다. 원작의 취지를 살리면서도 가면의 착용, 춤, 노래, 마임, 마당놀이 등을 대담하게 활용함으로써 새로운 양식적 탐구를 보여주었다.(359)

 

4) 채희완의 탈춤극

극단 한두레가 공연한 채희완 작·연출의 <칼노래 칼춤>(1994. 10)은 마당극과 무대극의 장점을 살린 가면무용극으로서 주목받았다. 객석과 무대의 구분이 없이 공간 전체를 연행공간으로 활용한 생명력 넘치는 분위기였다. 이 공연은 현실적인 입장에서 동학농민전쟁을 되새기고 향후의 민족적 의지를 상징적으로 부각시킨 것이 감동적이었다.(359)

 

5) 탈춤극의 의의와 과제

한국의 고유한 가면극인 탈놀이는 다양한 사회적 갈등을 표출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언어, 춤, 노래가 어우러지는 놀이적 형식 속에 해소시킨 민중적 축제극이었다. 지역마다 다른 재료와 다른 형태와(360) 색채, 다른 방법으로 만들어진 가면은 연극도구로서 뿐만 아니라 전통미술사의 한 맥을 이었다. 아울러 지역마다 다양한 춤사위는 연극의 표현으로서 우수한 창의성과 개성을 발휘했다. 양주별산대와 송파산대의 전아(典雅)한 춤사위, 봉산탈춤·강령탈춤·은율탈춤의 활달하고 공격적인 춤사위, 낙동강 유역의 제멋대로의 춤사위는 가장 한국적인 몸짓의 미학을 보여준다.

탈춤극의 결론으로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전통탈춤사위의 현대적 계승과 활용성이다.(중략) 탈춤사위는 그 자체가 일종의 몸짓언어이자 훌륭한 연기인 것이다. 이러한 자원을 곁에 두고도 서양으로 서양으로만 치닫는 연극인들의 자세도 답답하거니와 보물을 망각한 채 시대착오적인 연기개발에 나서는 연극인들의 근시안적 방법 역사 한계가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 전통탈놀이의 계승이 현대적인 창조가 아니라 유희성에 빠지거나 사회문제에 대한 소재의 차원에 머문 것은 한계로 지적된다. 이러한 한계를 얼마나 예술적으로 극복하고 탈춤의 고유한 축제성을 부각시킬 것인가가 현대적 탈춤극의 과제라 할 것이다. 탈춤의 현대적 문법을 개발하는 작업과 함께 이에 걸맞는 진지한 현실인식을 갖추어야 한다.(361)

 

3. 꼭두극의 가치와 현대 인형극

1) 현대 ‘꼭두극’

흙이나 나무, 종이나 돌, 천이나 플라스틱 혹은 가능한 재료를 응용해서 사람의 형상으로 만든 것을 인형이라고 한다. 외형적으로 사람과 닮은꼴이라는 데서 비롯된 명칭이다. 사람의 형상 이외에도 동물상, 신상(神像), 괴물상, 기타 어린이들의 장난감(玩具)류에 인형이라는 명칭이 두루 씌이고 있다. 이것은 사람과의 유사성뿐만 아니라, 사람의 인격이나 심리, 행동방식 및 언어와 폭넓은 비유가 성립되는 데서 비롯된 개념이다. 사람들은 인형 혹은 인형놀이를 통해서 자기의 모습과 행동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데 흥미를 느끼고 있다. 나아가서 매우 기발하고 상상적인 인형놀이를 통해서 실제 체험을 능가하는 새로운 세계와 인생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깨닫게 된다.(김청자 편역, 󰡔��인형예술의 재발견󰡕��, 대원사, 1989 참조-원주)(362)

현대는 만화인형(漫畵人形)과 영상인형(映像人形)이 발달해 있다.(362) 말 그대로 실체는 없고, 만화나 영상 가운데서 하나의 성격 및 이미지로 살아 있는 인형인 것이다. 이를 캐릭터(character)인형이라고 통칭한다. 이 캐릭터인형들은 주로 만화책과 만화영화에서 혹은 일반영화에서 애니메이션(animation, 움직이는 그림)으로 표현된다. 캐릭터 인형이 발달하고 문화산업의 주력으로 성장하면서 실물인형들은 인기가 하락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옛 사람들은 인형을 ‘괴뢰(傀儡)’라고 하여, 가면을 가리키는 한자어와 혼용하였다. 그것은 실제 인간과 다른 가장된 인격체이고 귀신과 상통한다는 의미에서 일반화된 용어일 것이다.(이두현, 󰡔��한국가면극󰡕��, 문화재관리국, 1969, p40 참조-원주) 또한 인형을 가리키는 말로 ‘꼭두’ 혹은 ‘꼭두각시’가 널리 사용되었다. 중국에서는 6세기 중엽에 인형을 ‘곽독(郭禿)’이라고 했다.(角田一郞, 「人形劇の成立に關する硏究󰡕��, 旭屋書店, 1963, pp190~191 참조-원주) 한국의 꼭두라는 명칭은 중국의 곽독에서 유래되고 다시 일본의 ‘구구츠(クグツ)’가 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363)

한국의 대표적인 전승인형극은 ‘꼭두각시놀음’이다.(363)

 

2) 심우성의 꼭두극

3) 꼭두극의 다양한 시도

꼭두각시놀음은 일명 ‘박첨지놀음’, 혹은 ‘홍동지놀음’이라고도 불린다. 그만큼 전통 인형극에서 박첨지와 홍동지의 역할 비중이 크다. 박첨지는 연분홍색 얼굴에 흰 머리와 흰 수염을 하고 소매가 긴 저고리를 입은 허름한 노인이다. ‘첨지’는 원래 관직명이던 것이 일반적인 호칭으로 정착된 것이다. 박첨지는 가산을 탕진하고 정처없이 강산을 유람하는 초라한 늙은이로, 공연 전체의 해설자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꼭두각시놀음은 박첨지를 사이에 두고 본부인인 꼭두각시와 젊은 첩인 덜머리집이 갈등하는 구조로 전개된다.

한편, 홍동지는 몸 전체가 붉은 나체로 머리에 상투를 한 채 사타구니에 커다란 남근을 달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동지’는 관직명에서 유래한 일반적인 호칭으로, 홍동지는 건장한 서민청년의 모습을 구현한다. 그는 힘이 센 역사(力士), 남을 돕는 조력자, 생명의 구원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시미(이무기)를 잡아 껍질을 벗겨 팔아 돈을 벌 정도로 초월적인 위력을 과시하며, 위급한 상황에 출현하여 박첨지를 구한다. 아울러 거대한 생식기로 평양감사의 상여를 밀고가며 권력층의 위선을 노골적으로 야유하는 반항아의 모습을 보인다.(서연호, 앞의 책, pp.186~191 참조-원주) 현대극은 주로 이 박첨지와 홍동지의 캐릭터에 주목하(367)여 꼭두각시놀음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368)

 

4) 꼭두극의 의의와 과제

 

4. 재담극의 부흥과 화술극의 전통

1) 기지에 찬 화술극

한 배우가 혹은 두 배우가 재치 있게 말을 하며 현실을 풍자하거나 관객들을 즐겁게 하는연극을 ‘재담극’이라 했다. 가면이나 인형이 동원되지 않는 이 연극에서는 코믹한 언어가 주 수단이고 거기에 익살스런 연기가 곁들여졌다. 배우의 기량은 기지에 찬 말의 기술로 평가되었다. 즉 화술에 의존하는 골계극이었다. 재담극을 ‘판극’, ‘판굿’이라고도 했다. ‘판’은 무대나 공연장, 노는 장소 등을 지칭했고, 일정한 내용을 구성해서 연행하는 장면 장면을 지칭하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시청중이 모인 어느 장소에서 배우들이 연극적으로 집약된 소재를 한 장면, 한 장면씩 만들어가는 과정을 의미했다.

한국의 재담극은 오랜 역사를 지녔다. 왕과 상류계층은 유식한 재(371)담을 즐겼는가 하면, 문맹인 서민들은 그들 나름대로 이해하기 쉽고 일상생활에서 우러나오는 솔직한 재담과 몸짓을 즐겼다.(372)

재담극의 방식은 계승되었다. 현대 재담극을 희극과 구분하여 서술하는 것은 희극이 서구적인 양식의 계승·창작인데 반해, 재담극은 전통양식의 계승·창작으로서, 다른 구조와 어법을 지녔기 때문이다. 유사한 것 같지만 양자는 표현방법과 수용방법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 재담극의 장면 만들기, 개방된 공간 활용, 생략된 연기, 더블 캐스트, 낭독법, 격조 있는 말투, 말과 노래의 혼합, 서사와 서정의 조화 등은 전통양식의 재창조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시된다.(373)

 

2) 1970년대의 재담극

극단 실험극장이 공연한 최인훈 작, 김영렬 연출의 <놀부전>(1972. 5)은 판소리 <흥보가>를 개작한 것이다. 선량하고 정직한 흥보가 제비의 부러진 다리를 고쳐주고나서 하늘의 도움으로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최인훈은 고전에서 탐욕스럽게 묘사된 형 놀부를 성실하고 지혜로운 현실주의자로, 반면 동생 흥부를 게으르고 무기력한 인물로 재해석하였다. 자본주의 사회의 논리를 적용해 고전을 패러디한 것이다. 놀부는 양식을 얻으러 온 흥부에게 게으름과 무기력, 무절제와 융통성 없는 태도 등을 질타하면서 자신의 근면성실함을 과시한다. 이처럼 이 작품은 흥부를 주인공으로 한 고전의 구조를 뒤집어 놀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이와 함께 봉건적 윤리를 자본주의적 논리로 대치함으로써 고전을 현대화시켰다.(373)

실험극장이 공연한 윤대성 작, 김영렬 연출의 <너도 먹고 물러나라>(1973. 3)는 ‘장대장네굿’을 현대화시킨 것이었다. 황해도지역에 전승되던 이 굿은 전통극의 배우(‘광대’라 했다)들이 무당굿을 모방해서 공연하던 레퍼토리였다. 코믹한 형식을 그대로 살리고 낡은 내용은 현실적인 이야기로 대체하였다. 제목인 ‘너도 먹고 물러나라’는 무당들이 악귀를 물리칠 때 하는 주술적인 명령어이다. 이 작품에서는 한국의 현실을 타락시키고 부정하게 만드는 요인들을 악귀에 비유하고, 이러한 악귀를 대상으로 제물(祭物)을 받아먹고 물러가기를 요청하고 있다.(375)

극단 자유극장이 공연한 장윤환 작, 김정옥 연출의 <색시공>(1975. 1)은 동시대 유사종교의 난립을 풍자한 언어유희극이었다. 도사를 자처하는 두 청년은 교주인 선생을 수제 로켓에 태워 공중으로 날려 보내고는 비로소 영생불사의 진리를 터득했다고 자부한다.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힌 두 청년은 교세확장을 위해 경전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이견과 갈등이 점차 심화된다. 한 청년은 교세확장을 위해서 신(376)자들에게 거짓 교리를 강요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다른 청년은 신자들에게 진실한 교리로 접근해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교리논쟁은 다시 새 교주를 누가 차지하느냐의 싸움으로 발전한다.

연극은 두 청년이 무한도설(無限道說, 오영수 역)과 무량도설(無量道說, 조명남 역)이라는 각기 다른 종파를 창시하여 정부기관에 등록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이처럼 이 작품은 ‘색즉시공’이라는 불교적인 명제가 현실 속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를 사교집단의 해프닝을 통해 제시함으로써 한국사회의 정신적 무질서를 상징적으로 고발하였다. 극심한 유사종교와 유사종파의 난립, 그리고 종교가 생계수단으로, 치부와 권세의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오염된 현실을 감각적이고 비유적인 언어로 익살스럽게 표현한 점이 주효했다. 전통광대의 화술과 당시 소외된 지역인 전라도의 방언을 십분 응용한 작가의 재치 또한 돋보였다.(377)

극단 민예가 공연한 허규 작·연출의 <다시라기>(1979. 10)는 진도지역에서 전승되는 장례놀이의 일종인 ‘다시라기’를 현대화한 것이다. 다시래기에는 어원상 ‘다시 낳는다, 다시 생산한다’는 의미와 ‘여러 사람을 즐겁게 한다, 함께 즐긴다’는 의미가 들어 잇다. 이 놀이는 마을 사람들이 시신을 안치한 제전 앞에서 벌어진다.(378)

 

3) 오태석의 재담극

재담의 양식적 원리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 극작가는 오태석이다. 오태석 작·연출의 <약장사>(1974. 2)는 모노드라마였다. 동시대의 삼류 약장사들이 거리를 배회하며 혼자서 쇼를 했듯이, 배우 이호재도 약장사를 모방한 언어유희를 통해 관객을 웃겼다.(378)

오태석 작·연출의 <춘풍의 처>(1976. 12)는 고전 <이춘풍전>을 현대 재담극으로 재창작한 것이다.(380)

국립극단이 공연한 오태석 작·연출의 <기생비생 춘향전>(2002. 4)은 고전 <춘향전>을 새롭게 재구성한 작품이다. <춘향전>은 우리문화의 원형이자 창작의 열린 가능성으로, 이를 새롭게 해석하는 일은 우리 연극의 당면과제이다.(381)

 

4) 1980년대 이후의 재담극

극단 고향이 공연한 안종관 작, 박용기 연출의 <토선생전>(1980. 5)은 고전 <수궁가>를 현대화시킨 연극이다.(383)

김시라 작·연출의 <품바> 공연은 전남 무안군 일로읍 공화당에서 1981년 배우 정규수(1대 품바)로부터 시작되었다. 1960년대 이후, 무안이 일시적으로 잔존 각설이패의 집단거주지가 된 적이 있는데, 이러한 현실이 김시라 시도의 계기가 되었다. 작품은 각설이패의 유일한 안식처인 ‘천사의 집’을 배경으로 천장근이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일제시대부터 현대까지 품바타령과 재담, 춤으로 엮어낸 것이다. 공연을 시작하자 좋은 반응을 얻었고, 1985년에는 극단 가가의회와 품바전용극장 ‘왕과 시’를 개관하기도 했다. 국내공연, 해외공연, <각시 품바>(1994) 등이 이어졌다. 1991년 2천회, 1998년 4천회 공연을 돌파했고, 한국기네스북에 최장기공연으로 기록되기도 했다.(중략) 2001년 2월 김시라의 갑작스런 타계로 이 작품의 새로운 개발은 끝나고 말았다.(384)

극단 실험극장이 공연한 홍창수 작, 윤우영 연출의 <오봉산 불지르다>(1999. 4)는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어 전개되는 재담극이다.(384)

극단 연우무대가 공연한 김태웅 작·연출의 <이(爾)>(2000. 11)는 조선시대의 배우희를 재현하여 주목받았다. 전체적으로는 연산군과(385) 장녹수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면서, 한편으로 당대의 궁중광대였던 실존 인물 공길(孔吉)을 등장시켜 극중극으로 배우희를 펼쳐보인다. 연극은 연산군과 장녹수, 그리고 공길의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연산군은 공길의 뛰어난 재주에 매료되어 연정을 느끼고, 공길은 몸을 바쳐 왕의 욕망을 달래준다. 동성애의 결과로 공길은 천민 출신에서 높은 관직에 오르며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임금과 공길의 관계를 눈치챈 녹수는 음모를 꾸며 공길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죽마고우 장생의 희생으로 목숨을 건진 공길은 광대의 본분을 깨닫고 왕의 폭정을 비판하는 재담극을 연출한다. 극중극이 끝남과 동시에 공길은 자결을 택하고, 뒤이어 반정(反正)의 군사들이 들이닥치며 연극은 막을 내린다.(386)

작품의 제목인 ‘이(爾)’는 임금이 신하를 높여 부르던 호칭으로, 공길에 대한 연산의 각별한 애정을 함축한다. 광대이면서도 고위 관직에 오른 공길의 비극적 삶을 통해 신하와 배우의 진정한 사명을 중의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특히 작가가 밝힌 바 있듯이, 이 작품은(386) 애초부터 조선조의 배우희를 재구하려는 뚜렷한 의도하에 기회되었다.(김태웅, 「작가노트」, 󰡔��이󰡕��, 평민사, 2003, p.49 참조-원주) ‘소학지희(笑謔之戱)’로 불리기도 했던 조선의 배우희는 나례(儺禮)의식에서 분화되어 조선조의 대표적인 궁중연희로 자리 잡았으며, 정치적 기능과 오락적 기능을 겸하였다.(387)

 

5) 재담극의 의의와 과제

한국의 전통연희에서는 대사를 흔히 재담이라고 했다. 재치 있는 말, 재미있는 말이다. 그러나 재담은 ‘대사’이상의 판극, 판굿, 판놀음을 동시에 의미하기도 했다. 재담은 문학적인 언어로서 값진 독자성을 지니고 있으며 연극적인 언어로서 역시 그러하다. 재담은 흔히 말뒤집기나 언어유희, 욕설이나 비속어의 상용, 반복적인 운율성의 특성을 보인다. 재담은 이러한 문법을 통해 현실에 대한 비판과 야유를 수행하며, 한편으로는 쾌락적이고 오락적인 기능을 수행한다.(387)

 

5. 마당극의 출현과 노동극

1) 마당극·노동극·민족극

어의상으로 마당은 실외공간이고 전통적으로 마당극은 야외그이다. 마당극을 야외극에 한정시키지 않고, 이른바 ‘마당정신을 표현한 연극’으로 통칭할 때, 실내의 공연도 마당극에 포함된다. 1970년대에 마당극이 성립된 이후, 실제로 마당극은 야외와 극장(기타 실내)을 오가며 공연되었다. 마당극은 집단적인 창작과 집단적인 공연을 위주로 했다. 당국의 검열을 받지 않은, 이를테면 불법공연이므로 학술발표회나 토론회, 학예회나 워크숍 같은 명칭을 빙자하여 공연되었다. 이렇게 마당극의 개념적 애매성은 성립시기부터 배태된 셈이다.

공연양식이라는 관점을 기준으로 하면, 탈극장주의 야외극만이 ‘마당극’으로 분류된다. 탈극장주의는 마당정신의 한 표현이기도 하(389)다. 마당정신은 언제나 현실주의에 기반을 둔 체제저항과 투쟁, 시민들과의 의사소통 및 시민의식의 표현, 정보가 차단된 사회 속에서의 현실비판과 진실전달, 그리고 전통적인 드라마 방법의 계승과 재창조라는 의미를 포괄한다.

전통적인 마당극의 방법을 계승하면서도 동시대의 시민들이 처한 현실문제를 연극으로 표현하려는, 지극히 정치적인 연극이 마당극이다. 이런 점에서 사실극과 공통된다. 그러나 양식적으로 서구적인 리얼리즘보다는 전통적인 민중극의 현대화에 더욱 가깝다. ‘마당극은 암울한 시대상황 속에서 민중이 끝내 살아있음을 웅변한다. 유언비어의 시대적 수렁에서 알릴 것을 알리고, 알려진 것을 제대로 바로 잡음으로써 언론의 한 통로구실을 떠맡음이 분명하다. 새로운 연극운동이기 이전에 생존을 위한 싸움이고, 은폐된 현실을 해결하는 사회운동이며, 민족적 신명으로 제3세계의 생명을 예축(豫祝)하는 생명공통체운동이다. 마당극의 개념은 완결된 것이 아니라 성취되어 가는 것이자 열린 개념이다.’(채희완, 「마당굿의 과제와 전망」, 󰡔��한국의 민중극󰡕��(작품집), 창작과비평사, 1985, pp4~5 참조-원주) 이것은 동시대에 마당극운동을 주도한 한 연극인의 메시지다.

1970년대 검열제도에 저항했던 탈극장주의 사실극은 새로운 제작방법과 공간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공연장으로서 ‘극장’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구태의연한 기성제도와 인식과 행동방식에 저항했다. 그들은 서구적인 리얼리즘에 구속되지 않고 전승되는 민중극, 즉 가면극이나 인형극, 판소리 같은 연극에서 표현방법을 찾았다. 그들에게 공연예술과 새로운 이념, 정치적 투쟁은 별개일 수 없었다. 그들은 한때 자신들의 연극을 ‘마당극(마당굿)’으로 지칭했고, 마당극의 발전적인 개념으로 기성어를 가다듬은 ‘노동극’ 혹은 ‘민족극’이라(390)는 개념을 부각시켰다.(서연호, 「민족극의 이념」, 󰡔��한국연극론󰡕��, 삼일각, 1975, pp11~36 참조-원주) 탈극장주의 마당극 이외에도 당시엔 극장주의의 마당극이 있었고, 실험극운동으로서의 마당극이 있었다.(391)

한편, 이상과 같은 마당극, 마당극정신을 계승하면서 노동자들에 의해서, 혹은 노동자들의 입장에 서서 만들어진 연극이 이른바 ‘노동극’이다. 엄격한 규제 속에서 정부 주도로 진행된 산업화는 1980년대부터 노동법의 개선을 전제로 한 공영화 및 민영화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노동법과 분배문제를 둘러싼 노사분규는 산업의 구조와 성격, 생산 방법, 발전 속도와 맞물려 점차 거칠어지고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현실성과 현장성, 비판과 주장은 노동극의 조건이었다. 노동극은 노사분규와 노사발전의 한 문화적 표현이었다. 초기의 단순 재현적인 겨향이 80년대 후반부터는 점차 구조적인 양식으로 발전되었다.(민족극연구회, 「󰡔��민족극 대본선 3󰡕��을 펴내며」, 󰡔��민족극 대본선󰡕�� 3, 풀빛, 1991, pp2~3 참조-원주)

‘민족극’은 마당극 혹은 노동극의 연장선에서 상용되기 시작했다. 한국민족극운동협회는 ‘연행(演行) 활동의 당면 과제를 민족현실의 극복에 두고, 민주화와 분단극복의 통일전망을 민족사적 비원(悲願)으로 파악하여, 민주화를 이룩하고 통일의 실현을 위해 온폐, 왜곡된 민중사실을 밝혀 드러내며, 이를 민중적 전망과 세계관 속에서 형상화하는 연행행위 모두를 민족극으로 규정한다’고 창립선언문에서 밝혔다.(391)

 

2) 마당극과 시대정신

1970년대에 최초로 공연된 마당극은 농민의 협업과 분업의 중요성을 계몽한 김지하 작, 임진택 연출의 <진오귀굿>(1973. 12)이었다.(중략)농민을 못 살게 구는 대상으로 수해귀(水害鬼), 외곡귀(外穀鬼), 소농귀(小農鬼) 등 세 마리 도깨비를 설정하고, 농민이 단결하여 그들을 몰아내는 놀이극이다. 사실극의 대사와 판소리, 탈춤, 풍물, 춤 등을 응용하여 공연했다.(392)

다당극들은 애초부터 당국의 검열을 피하여 ‘공연 소식을 전해들은 일부 관객들만이 볼 수 있는 장소(교회, 공장, 대학, 야외)’에서 공연되었다. 내용은 주로 신문에 보도되지 않았거나 보도되었다고 해도 자세히 다루어지지 않은 사건을 조사하여 극화했다. 한마디로 ‘살아있는 신문’의 역할을 하여 신선감을 던져 주었다.(394)

 

3) 마당극의 전성기

1970년대에 개화한 마당극은 1980년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한다.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시작된 80년대는 군사정권의 철권통치가 그 어느 때보다 심했던 시대였고, 이에 비례해시민들의 미주화에 대한 갈망 또한 그 어느 때보다 드높았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전통적인 연극방법과 체제저항적인 주제의식으로 무장한 마당극은 큰 호응을 얻었다.(395)

극단 연우무대는 <장산곶매>(1980. 3),(중략) 조선시대 말기 황해도 장산곶의 민중저항을 다룬 <장산곶매>는 서사극 방법을 마당극에 응용한 것이다. 황석영의 희곡을 개작하여 드라마센터에서 공연했다. 무당의 공수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주민들의 생활상과 억울함을 보여주고, 마지막에 참을 수 없는 민란의 격렬함을 표현한다. 풍어굿이 재연되고 간간이 민요가 불린다.(395)

1983년부터 5년 간 전두환의 군부통치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마당극은 한층 조직화되고 다양하게 발전되었다.(398)

극단 토박이가 공연한 <금희의 오월>(1988. 4)은 극장주의에 치중한 마당극이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1980년 5월 광주사태를 최초 사실대로 취급한 점에서 전환기적인 의의를 갖는다.(399)

극단 아리랑이 김명곤 작 연출로 공연한 <갑오세 가보세>(1988. 4)는 동학농민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당시 민중의 수탈상을 마임으로 보여주는 앞풀이와 우금치의 마지막 전투를 극화한 뒷풀이를 포함하여, 전체 7마당으로 구성되었다. 특정 인물의 무용담이 아닌 전봉준(안석환 역), 먹쇠(박용수 역), 춘복(고동업 역) 등 평범한 농민들의 이야기와 함께 거사를 중심으로 한 사람들의 갈등, 조정의 태도, 청국의 움직임, 일본의 속셈 등이 서사로 전개된다. 이러한 서사는 대사극이 아니라, 풍물, 민요, 꼭두각시놀음, 판소리 같은 전통연희와 일본의 가부키와 검도 같은 예능을 활용하여 표현되었다. 전래 가사인 검가(劍歌), 가보세, 옹야헤야, 녹두야 등을 이성재가 작곡하여 부른 것도 특기할 일이다.(400)

이 작품에 대하여 이영미는 ‘작품을 작품답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다채로운 연출, 무대형상화 방법, 그리고 전편에 흐르는 살아있는 민중들의 힘과 사람다운 모습이었다. 연출에 있어서 이 작품은 표현주의적, 서사극적, 사실주의적, 마당극적 기법을 모두 동원하여 관객의 긴장감을 최대한도로 유지시키는 한편, 많은 이야기를 압축, 효과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이영미, 「닫히고 열리는 무대」, 극단 아리랑, 󰡔��갑오세 가보세󰡕��(공연 팸플릿), 1988,6-원주)(400)

 

4) 노동극의 대두

노동극은 노동자가 만든 연극과 노동을 소재로 한 연극을 총칭한다. 19세기 말부터 독일노동자들의 문화운동에서 시작된 노동극은 1920, 30년대 식민지치하 조선노동자들의 프로극(계급주의 연극)으로 전이되었고, 현대극에서는 산업체조합의 노동극으로 발전되었다. 노동자들의 권익투쟁 혹은 노동자들을 위한 민주화운동은 마당극의 정신과 방법에 포함되므로 여기서는 마당극의 한 영역으로 기술하기로 한다.

원풍모방노동조합 탈춤반은 <원풍모방 놀이마당>(1979. 4)과 <조선방직 노동쟁의 사례극>(1981. 11)을 공연했다.(401)

컨트롤데이터 해고노동자들이 준비한 <금강산을 빌려주고 머슴살이 웬 말이냐>(1984. 9)는 흥사단 강당에서 공연하려다 경찰의 연행으로 좌절되었다. 그들은 조합의 탈춤반원이었고, 투쟁하다가 해고된 사람들이었다.(402)

산업선교회 제1기 노동자문화교실이 졸업작품으로 공연한 <해태제과 노동재의 사례극>(1984. 4)은 노동쟁의 사건의 전말을 재구성하여 만든 것이다. 일부 해태제과의 노동자들도 참가했다.(402)

극단 천지연은 <선보에 서서>(1986. 7)와 <쇳물처럼>(1987년 봄)을 공연했다.(402)

놀이패 한두레는 <어떤 생일날>(1987년 여름), <우리 공장 이야기>(1988. 6), <일터의 함성>(1989년 가을) 등을 공연했다.(403)

여성노동자회는 <우리 승리하리라>(1987. 7), <막장을 간다>(1987. 9), <들불로 다시 살아>(1988. 8), <껍데기를 벗고서>(1988. 10) 등을 공연했다.(403)

극단 현장은 <횃불>(1988. 3), <노동의 새벽>(1988. 9), <멋있는 동지>(1989. 9) 등을 공연했다.(403)

 

5) 마당극의 의의와 과제

마당극은 70년대 중엽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연극사에 있어서 괄목할 만한 현상 중의 하나이다. 전통극의 정신을 기반으로 하되, 치열하고 분명한 정치적 지향성을 내보인 연극이 마당극이다. 서구편향적인 역사인식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시대정신을 토대로 하여 다수 관중의 참여에 의해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민중극을 실천적으로 구현하고자 했다. 상황적 진실성, 집단적 신명성, 현장적 운동성, 민중적 전형성으로 요약되는 마당극의 미학은 민중의 생활체험을 예술적 체험에 의해 공유화시키는 전형적인 통로를 마련한 점(404)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연극은 정치행위이기 이전에 하나의 예술행위이다. 그런 맥락에서 마당극은 예술적인 전문성을 확보하거나 독자적인 예술양식을 정립하는 데 한계를 보였다. 주체적인 정치의식에 상응하는 창조적인 예술원리를 개발하는 노력이 절실히 요청되었다. 이 마당에서 우리에게 ‘마당극은 지속할 만한 의미와 힘을 지니고 있는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마당극 연극인들은 이 질문에 작품으로 응답해야 한다. 해묵은 이데올로기 논재이나 실증성이 없는 관념적 연극이론, 혹은 편협한 국수주의 자세로 마당극은 절대 발전할 수 없다. 어떤 연극양식도 그렇지만, 마당극 역시 자생적이고 자립적인 공연예술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무대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다.(405)

 

6. 가무악극의 시도와 전통 음악극의 필요성

1) 전통음악과 음악극

한국 전통음악에서 판소리는 서사극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연극적인 가창으로 표현된다. 20세기 초엽에 서울에 와서 공연했던 중국의 경극(京劇)이나 일본의 가부키(歌舞伎)에서 적지 않은 자극을 받아 판소리 명창들은 그것을 무대음악극으로 재창조해냈다. 이것을 노래로 하는 연극이라는 의미에서 창극이라 했다. 전통적으로 유명한 판소리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등 5가를 창극으로 제작하여 새로운 음악극 붐을 일으켰다. 1930년대부터 오페라도 수용되었다. 이 창극은 오페라와 더불어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406)

한편, 20세기 초엽부터 기독교회나 학교로 수용된 서양음악은 어린이 노래극이나 중학생들의 학교 노래극을 발전시키는 기반이 되(406)었다. 이런 음악극은 오페라와 함께 가극(歌劇)이라고 불렀다. 1920년대 후반의 대중극에서 막간(幕間) 장르가 시작되었다. 이 장르 가운데서 대중가수의 노래는 특히 인기를 독차지했다. 연극보다 노래에 흥미를 느끼는 관중들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대중적인 노래가 1930년부터 본격적인 대중음악극을 탄생시켰다. 노래하는 연극이라고 해서 악극(樂劇)이라고 지칭했다. 악극은 멜로드라마틱한 줄거리에 감상적인 주제곡들을 섞어서 부르며 과장된 연기와 익살스런 쇼를 포함하는 공연이었다. 일본식민지 시대에 악극은 한국인들의 고통스러운 삶에 커다란 위안물이 되었다. 악극은 1950년대까지 공연되다가 그 종사자들이 영화 붐을 타고 전향함으로써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1960년대 초에 미국의 뮤지컬 음악이 수용되면서 서양식 뮤지컬의 창작이 시작되었다.(중략) 같은 시기에 전통음악의 재발견과 재창조의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이러한 운동이 동기가 되어, 창극은 그 나름대로 현대화에 힘을 경주했다. 한편에서는 창극과는 다른 새로운 음악극이 모색되었다. 전통적인 음악구조와 방법에 의한 관현악곡이 전체의 기조가 되고, 배우의 가창과 무용과 연기를 통해 구성되는 한국적인 뮤지컬을 개발하려는 시도였다. 일반적으로는 표현요소를 기준으로 ‘가무악극(歌舞樂劇)’이라고 부른다. 전통성을 기조로 한 뮤직 드라마라는 의미이다. 창극, 뮤지컬과 다른 음악극을 여기서는 가무악극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1973년 6월 서라벌예술대학은 김동리 작사, 이원경 극본, 김대현 작곡, 이원국 편곡의 교성무극(交聲舞劇) <백의종군>을 공연했다. 가야금을 포함한 오케스트라의 지도에 임만규, 판소리를 포함한 합창 지도에 한성석, 서곡무용 및 강강수월래를 포함한 무용지도에 송(407)범이 참여했다.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말 그대로, 등장인물 개인의 노래와 집단적인 합창, 그리고 군무가 총체적인 조화를 목표로 하는 가무악극이었다. 최초의 가무악극 시도로 여겨져 주목된다.(408)

 

2) 손진책의 연출작

극단 민예극장이 공연한 오영진 원작, 장소현 각색, 손진책 연출, 김영동 작곡의 <한네의 승천>(1975. 12)은 원작 시나리오를 각색한 가무악극으로 주목받았다. 전통을 기조로 한 창작곡들은 당시 서구양식의 범람 속에서 신선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한네(이주실 역)라는 여인의 고난에 찬 삶을 선녀설화로 재구하고 만명(정현 역)이라는 현실적인 인물을 등장시켜 동시대적인 주제를 부각시키고자 한 작품이다. 전통적인 ‘선녀와 나무꾼’ 설화와는 달리, 만명에 대한 한네의 지극한 헌신과 사랑을 담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현실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모습을 그렸다. 종막에서 그녀의 승천은 그녀가 베푼 아름다움에 대한 하늘님의 구원으로 묘사되었다.(408)

극단 미추가 창단공연으로 올린 정복근 작, 손진책 연출, 박범훈9408) 작곡의 <지킴이>(1987. 4)는 문중(門中)의 정신을 지키는 제사의식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409)

1990년, 88서울예술단은 체제를 개편하여 서울예술단이라는 이름으로 새출발하였다. 서울예술단이 공연한 김용옥 작, 손진책 여출, 박범훈 작곡, 국수호 안무의 <백두산 신곡>91990. 10)은 총체예술적 성격을 지닌 가무악곡으로 시도되었다. 음악, 무용, 연극, 신화를 결(409)합시켜 만든 대서사극으로 전체 2막 18장의 구성이었다. 이 작품은 단군신화 이전의 신화로 거슬러 올라가 우리 민족이 생성된 과정을 그린 것이다. 암흑의 상징인 흑두거인이라는 외세를 물리친 백두거인(김평호 역)이 우리 민족에게 정기를 심어준 신으로서, 그 신이 조선에 고난과 시련이 닥쳐오자 변화하여 백두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단군신화를 확대 해석하여 개국신화를 정립하고, 현대적으로 재창조한 것이다.(중략) 국수주의적 요소가 깃든 것이 한계였지만, 한국적 공연양식을 정립해 보겠다는 제작진의 의도가 주목 받았고, 실제로는 작품을 펼쳐놓는 데 치중하여 음악적인 요소와 무용, 연극이 제대로 짜임새 있게 집약되지 못했다(410)

극단 미추가 공연한 윤대성 작, 손진책 연출, 박범훈 작곡의 <남사당의 하늘>(1993. 6)은 본래 여사당이었던 바우데기(본명 金岩德)가 남사당패를 조직해서 꼭두쇠로 활약한 안성 청룡사 불당골의 전설적인 이야기를 소재로 만든 작품이다. 남사당은 하늘에서 죄를 짓고 인간세계로 하방(下放)된 무리들이며, 고통을 인내하며 광대로서의 역할을 다할 때 다시 하늘로 갈 수 있다는 속설을 믿고 열심히 남을 위해 연행(演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410)

 

3) 이승규의 연출작

극단 가교가 공연한 이근삼 작, 이승규 연출, 신동민 음악의 <유랑극단>(1972. 4)은 가무악극으로서 선구성을 보였다. 말 그대로 식민지시대의 유랑극단의 수난과 꿈을 그린 이 작품은 개방된 무대에서 수레 하나를 끌며 연기와 노래와 춤으로 엮어내는 공연이었고, 당시로서는 매우 간편하면서도 신선하게 감성을 자극하여 관객의 주목을 끌었다.(411)

뉴욕에 이주한 연출가 이승규는 1993년 10월 8일 브로드웨이 95번가 심포니스페이스 극장에서 <유랑극단>으로 극단 누리의 창단공연을 올렸다. 교포 연극인들에게 뿔리를 둔 단체였다. 정교하게 제작된 손수레를 빈 무대에 올려놓고 그 수레를 다양한 용도(침상, 상여, 가옥 등)로 활용해 가면서 지난 시대 유랑극단 배우들의 변화무쌍한 인생을 속도감 있게 표현했다. 그것은 고국을 떠난 교민들의 실존적인 모습, 20세기 후반에도 세계사에서 여전히 방황하는 한국(411)인의 처지를 느끼게 했다.(412)

인천시립극단이 공연한 김동리 원작, 구히서 극본, 이승규 연출, 김철호 작곡, 구경숙 안무의 <등신불>(1999. 4)은 원작이 미처 다루지 못한 인물의 성격까지 생동감 있게 추구하였다. 초연인데다 종래의 사실주의 방법이 아니라 전통적인 가무희적 요소와 현대적인 영상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응용한 공연으로 주목받았다. 연출자는 대사를 최소로 줄이는 대신 가무희적 요소와 곤두놀이, 인형놀이, 택견, 불교의식 등을 최대로 활용하여 한국적인 정서와 느낌을 만들어 내었다.(412)

 

4) 70, 80년대 가무악극

민예극장이 공연한 허규 작·연출의 <물도리동>(1977. 10)은 가면극으로 유명한 하회의 고유한 지명응ㄹ 그대로 차용하고, 고려시대 가면을 제작한 청년 허도령전설을 무대 드라마로 재구성한 것이다. 작가는 ‘보전되어 오는 9개의 하회가면 외에 전해지지 않는 3개 가면(별채, 떡다리, 도령)을 가면의 역할, 성격, 조각수법, 구전자료 등을 참작하여 복원하고, 무의(巫儀)의 연극적 기능 실험, 단원들이 창단 이래 익혀온 판소리, 가곡, 가사, 무가, 탈춤 등 우리의 연극 유산을 바탕으로 하여 재창조하였다’고 밝혔다.(413)

자유극장이 공연한 김정옥 구성·연출의 <바람 부는 날에도 꽃은 피네>(1984. 2)는 권세가의 딸을 유괴한 상두꾼이 붙들어온 딸과 가까워지고 결국 풀어주는 대신 자신은 같은 패거리들에게 추방돼 광대가 된다는 내용이다. 발에 가면을 붙이고 공연하는 가면극, 거지들이 부르는 노래, 엿장사의 노래, 이야기 시합, 팬터마임 등 즉흥적인 놀이와 판소리가 곁들여진 작품이다. 크러스를 통해 가면의 이미지를 과감하게 부각시켰고 무언(無言)의 서사화를 만들어낸 점은 새로운 시도라 할 수 있다.(414)

88서울예술단이 공연한 오태석 작, 이기하 연출, 김영재·강준일 작곡의 <새불>(1987. 3)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각 분야 전문가들의 공동작업을 통해 총체예술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시도된 가무악극이다. 이 작품은 새 날을 밝힐 불을 받을 8도 신부(정은혜 등)들이 불받이 제사를 올리는 데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를 시기한 용왕의 방해로 제주도 신부(민경숙 역)는 풍랑을 만나 참석하지 못하고 용궁에 남게 된다. 수중 깊은 용궁에 갇힌 제주도 신부를 구하러 온 나머지 신부들의 정성에 감복한 용왕이 불을 얻어오는 조건을 제시한다. 8도 신부들의 합심과 미물인 조랑말(임관규 역)의 헌신적인 희생과 사랑으로 민족의 새 날을 밝힐 새 불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의 공연을 본 많은 사람들은 총체예술이 과연 바람직한 형식이냐는 의문과 함께 내용 역시 의욕만 앞선 의식과잉이라고 지적했다. 무용이라는 육체언어를 주요 표현수단으로 삼고 있으나, 여기에 대사나 동작 등 연극적 요소들이 제대로 맞물리지 않아 무용마저 표현영역이 좁아졌다는 지적도 있었다. 특히 추상적인 내용이 공감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었다.(415)

88서울예술단이 공연한 김진희 작, 김우옥 연출, 김희조 작곡의 <아리랑 아리랑>(1988. 9)은 전통 아리랑의 다양한 변주곡들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소련 땅 타슈켄트의 방송국에 근무하고 있는 교포 3세 이한(유인촌 역)은 할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혈육을 찾을 겸 88서울올림픽을 취재하러 어머니 땅을 찾아온다.(중략) 만남과 이별의 정조를 잘 살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416)

 

5) 1990년대 이후

서울예술단은 유치진의 <자명고>를 원작으로 한 김상렬 각색, 김효경 연출, 김정택 작곡의 <그날이 오면>(1991. 4), 가야금을 만든 우륵의 일대기를 그린 이강백 작, 김효경 연출, 김희조 작곡의 <님 찾는 하늘소리>(1993. 3), 사당패의 후계자 문제를 다룬 <뜬쇠 되어 돌아오다>(1993. 12), 천지개벽을 내용으로 한 최성철 극본, 서한우 안무·연출, 김종진 작곡의 <신의 소리-춤>(1995. 5), 방랑시인 김병연의 일대기를 그린 홍원기 극본, 오상민 각색, 박종선 연출, 최종혁 작곡의 <김삿갓>(1997. 11) 등을 공연했다.

국립국악원이 제작한 세종의 일대기를 그린 정복근 작, 한태숙 연출, 이상규 작곡의 <세종 32년>(1996. 11)은 세조의 꿈에 비친 부친의 모습을 재현한 음악극이다. 국악기를 총동원하여 전통 음률을 폭 넓게 살리려는 시도를 보였다.

서울예술단은 신선희가 총감독을 맡은 이후 가무악극에 더욱 치중했다. 신선희 극본·연출, 김대성 작곡, 손인영 안무의 <청산별곡>(2000. 6)은 고려가요 <청산별곡>과 <쌍화점>을 바탕으로 만든 본격적인 가무악극이다. 특히 무용이 중심을 이룬다.(417)

비나리라는 전통양식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비나리 시리즈’는 서울예술단의 고정 레퍼토리가 되었다.(418)

올림픽공원의 야외에 임시로 설치한 극장무대에서 월드컵 문화축전의 일환으로 공연한 신선희 극본, 신선희·이병훈 연출, 이준호 작곡, 채상묵 안무의 <고려의 아침>(2002. 5)은 팔만대장경을 소재로 한 가무악극이다. 평화를 희구하는 고려인들의 염원을 춤과 노래로 형상화한 이 작품은 여러 면에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418)

이 극의 기본적 구성은 놀이패들이 등장하여 성황제를 지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장면마다 다양한 형태의 연등이 등장하여 고려인들의 깊은 불심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 연등은 결말부에 가서 관객들의 손에 나뉘어져 인공의 호(湖)에 띄우는 평화의 촛불이 된다. 이처럼 이 공연은 동제(洞祭)와 연등회의 형식을 빌려 상생과 화합의 대동제적 의미를 십분 살린 무대였다. 그러나 이 공연의 가장 큰 수확은 무엇보다 야외무대의 공간 활용에 대한 문법을 제시했다는 데 있다. 방원형의 의 돌출무대를 중심으로 등퇴장로가 빗살형태로 객석을 가로지르도록 구성되었다. 객석 깊이 파고든 이러한 무대구성은 배우들의 동선을 사방으로 확장시키며, 이를 통해 관객들의 일방향적인 시선을 다각화시키는 촉매로 작용했다. 아울러 2층의 누각과 무대 둘레의 호는 주위의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시간의 힘에 풍화된 유적(遺蹟)의 깊은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객석으로 확장된 수평적 차원의 무대는 몽고의 침입과 고난을 형상화하는 현세적이고 의식적인 세계를 표현한 반면, 수직적으로 확장된 2층의 누각 무대는 대장경의 꿈을 통해 현실을 초극하려는 초월적이고 무의식적인 세계를 표현하는 데 효과적으로 기여했다. 그리햐여 무대의 수직적 원심력은 해명공주(정유희, 강권순 역)의 부활장면을 통해 누각의 꼭대기까지 확장됨으로써 극에 달하였다. 허공에 관세음보살로 떠오른 해명공주의 모습은 고려인들이 염원하던 보름달 같은 황금빛 화엄(華嚴)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구현해냈다.(419)

 

6) 가무악극의 의의와 과제

작곡이나 가창의 방법을 서양음악어법에 일방적으로 따르지 않고 전통적 방법을 되도록 살리면서 음악극을 만들고자 한 데 가무악극의 의의가 있다. 음악사가 곧 작곡사(作曲史)라는 관점에서 보면, 가무악극의 시도는 가능한 실험이자 미래지향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전통적 방법은 연주, 가창, 선율, 음역(音域) 등에서 현대적인 감성을 변화 있게, 충실하게, 폭 넓게 표현하는데 여러 가지 장애가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가사(歌詞)도 뜻있게 하고, 악보도 제대로 작성하고, 악기도 개량하고, 작품 소재에 대한 해석도 새로워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통이면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라(421) 현대의 관객심리에 감동을 주는 전통적인 음악이어야 좋은 것이다.

그동안 공연된 가무악극은 드라마 가운데 몇 곡의 노래가 삽입되는 정도의 이른바 ‘노래극’으로부터 드라마 전체가 관현악곡과 가창곡의 조화로 전개되는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상을 보였다.(422)

한국의 가무악극은 오늘날과 같이 성격이 애매한 ‘가무악극’으로 존속하지 말고, 당당하게 ‘한국음악극’으로서 보편성과 창의성을 이룩해내야 한다. 무리하게 창극, 뮤지컬, 가무악극을 통폐합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동서양, 한국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음악어법이 창작의 방법으로 활용되고, 한국인의 신화와 역사, 사고와 행동양식이 연극의 내용으로 새롭게 해석되고 창작된 현대음악극이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잡동사니와 무리한 접목이 아닌, 세련되고 승화된 ‘한국음악극’이고, 오늘날의 관객들이 즐겨 찾는 ‘한국음악극’이어야(422) 한다. 그것은 연극을 위한 노래의 삽입이 아니라, 음악적 질서로 조화된 노래와 반주의 드라마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유능한 작곡자들의 기여가 우선되어야 한다. 작품 전체의 악보가 보존되고, 필요하다면 어느 극단이나 어느 연주단에게나 재공연이 가능한 음악극이 되어야 할 것이다.(423)

 

제5장 결어

1. 한국 현대극의 의의와 과제

2. 일문 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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