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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연호, 󰡔��한국연극사󰡕��(현대편), 연극과 인간, 2005.   제1장 서설   1. 한국연극사의 기술방법   1) 연극에 관한 역사. 연극의 역사   대체로 연극사는 두 가지 측면을 내포한다. ‘연극에 관한 역사’와 ‘연극의 역사’가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연극사는 전자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전자를 연극사회사 혹은 연극문화사라고 달리 지칭할 수 있다. 연극을 당대의 사회와 문화라는 범주 속에 놓고 연구하는 관점이다. 연극에 대하여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공연했느냐 하는 점을 사실대로 밝히는 과정이 우선이고, 거기에 덧붙여서 그 공연의 성과와 의의를 역사적으로 평가하는 과정이 뒤따르는 서술방법이다. 작품의 환경, 작품의 제작과정, 작품의 내용과 특징, 작품을 만든 사람들, 작품의 사회적 가치, 작품의 유통구조 등을 실증적 방법으로 재구성하고 체계적으로 밝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연극사들은 이러한 측면에 치중해 왔다.(25) 이러한 전자의 방법에 대하여, ‘연극의 역사’는 연극 자체의 미학적, 양식적(형식적)발전을 중점적으로 추구하는 방법, 즉 연극예술사 혹은 연극미학사라고 달리 지칭할 수 있다. 연극에 대하여 작품에 나타난 인식과 사상, 형식과 양식, 언어와 표현방법, 공간과 시간의 개념, 연속성과 적층성 등의 내적 변화와 전개양상을 분석적으로 재구성하고 논리적으로 밝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한국연극사 서술에서 이러한 측면이 소홀하게 취급되었다.(26) 양식의 변화는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양식의 변화는 사회학적 동기들의 소산이며, 동시에 심리학적이면서 동시에 양식사적인 동인들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양식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사회적 환경, 심리적 배경, 그리고 지난 시대의 양식적 변화와 모색을 살피는 일이 동반되어야 한다.(27) 재론의 여지도 없이, 훌륭한 연극사란 연극의 사회적인 측면과 예술적인 측면이 총체적으로 조화된 연극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개념은 사회적인 행위가 예술적인 재료가 되고, 동시에 예술적인 창조가 사회적인 의미로 수용된다는 명제와 상통한다.......연극사가 독자성을 갖기 위해서는 ‘시대정신의 표현양식’에 관한 총체적 인식과 실천적인 창조성이 작품분석을 통해 규명되어야 한다.(28)   2) 연극사 기술의 범위와 양식적 분류   첫째로, 연극사에 연희사(演戱史)를 포함시켜 기술하기로 한다. 19세기 말엽까지 한국에는 서구식 드라마가 공연된 적이 없다. 이웃나라인 중국, 일본의 연극도 일찍이 공연된 적이 없다. 청일전쟁(1894. 6~1895. 4)이후 ‘중국인 및 일본인 거류지역’이 번화(繁華)해지면서 비로소 두 나라의 연극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플롯형식의 드라마는 없었고, 연희와 연극 개념에 구분이 없었으며, 모든 공연은 연희(performance)로 통칭되었다. 연희들은 개인 대 개인, 개인 대 집단, 개인 대 사회제도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을 직접적으로 들추어내기보다는 그것을 비유적으로 양식적(樣式的)으로 드러내었으며, 신화적 원형성, 집단 속의 화해와 즐거움, 도덕적 이상주의 같(28)은 주제를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표현하였다. 한 마디로 축제적인 연희 전통이 계승되었다. 이런 이유로 한국에서 연극사와 연희사는 분리될 수 없다.(29) 둘째로, 대표적인 양식별로 기술하기로 한다. 어느 한 시대의 주도적인 작품형식 혹은 어느 지역(종족)의 주도적인 작품형식, 공연방식, 이념적 지향, 무대구조, 관극습관 등을 통칭 양식이라 한다. 기존의 연극사에서 시대별로 모든 연극의 변화를 통합해 기술한 것과 다른 방법이다. 이처럼 양식별로 연극사를 기술하고자 하는 것은 기존 연극사에서 애매하게 취급되었거나 아니면 전혀 인식조차 없었던 연극 고유의 표현방법과 창조성을 새롭게 규명하고 해명해 보기 위함이다. 양식이 내포한 심리적, 사회적, 형식적, 시대적 상관성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바로 연극사 서술의 목적이기 때문이(29)다.(30) 셋째로, 한국연극사의 시대구분은 양식의 변화를 기준으로 볼 때, 고대·중세·근대·현대로 대별할 수 있다.(30) 고대극은 선사시대부터 10세기 초엽 향악이 발달된 삼국(三國)시대 후기까지의 연극을 통칭한다. 고대의 축제, 불교연희의 수용, 기악(伎樂)의 성립, 탈놀이의 발달 등이 이루어진 시대이다. 중세극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전기까지의 연극을 통칭한다. 나례희, 연등희, 꼭두각시놀이, 산대희 등이 발달된 시대이다. 근세극은 17세기 중엽 국가공의(公儀)로서 산대희를 폐지한 이후부터 19세기 말엽까지의 연극을 통칭한다. 산대탈놀이, 꼭두각시놀이, 판소리, 광대우희(廣大優戱), 유랑광대놀이 등이 발달된 시대이다. 근대극은 20세기(30) 초엽 극장이 설립된 이후부터 1950년대까지의 연극을 통칭한다. 신파조극, 사실극, 프로극, 대중극 등이 발달된 시대이다. 현대극은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연극을 통칭한다. 서사극, 풍자극, 제의극, 뮤지컬, 마당극 등이 발달된 시대이다.(31) 넷째로, 가능한 대로 공연 작품을 대상으로 하여 기술하고자 한다.......연극사가 곧 공연사(公演史)이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기존 연극사들은 뜻밖에도 이런 논리에 소홀했음이 사실이다. 물론 연극의 현장성, 일회성, 다매체성(多媒體性)은 본질적으로 기록과 평가를 어렵게 한다.(31) 한 작품의 공연기간을 통산하면 대체로 전반기의 공연보다 후반기의 공연이 우수한 것이 통례다. 이 같은 공연의 일회성은 빈번하게 작품을 오판하게 하는 요건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다매체시대에 살고 있다. 매체의 발견, 발전, 교류와 더불어 극 양식은 다양하게 분화되었으며, 동시에 극의 분화는 다매체의 개발에 크게 기여했다. 연극에서만도 다매체를 활용한 새로운 제작방식은 관객을 확대시키고, 작품의 질을 향상시키는 한편, 창의력 있는 인재들을 양성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연극의 다매체성은 역사적인 평가를 어렵게 하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31) 다섯째로, 현 단계로서는 연극사 자료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31) 사실을 밝혀둔다.(32)   3) 현대극의 개념과 분류   현대극은 동시대의 연극(contemporary drama)을 지칭한다. 근대극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 현대극이다.(32) 근대극의 미학은 리얼리즘으로 요약된다. 근대극 시대는 20세기 초부터 1950년대 말까지로 구분된다. 일반 역사 서술에서 일제시대 까지를 근대로 설정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1950년대의 연극 또한 리얼리즘이 주도했기 때문이다.(32)......1950년대 후반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은 실험극들이 간헐적으로 나타났으나 그것은 여전히 리얼리즘에 기초한 것이었고, 시대정신이나 시대양식을 전환시킬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33) 한국의 현대극은 크게 세 가지 경향으로 분류될 수 있다. 첫째, 근대극 양식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킨 경우, 둘째, 서구의 현대극 양식을 수용하여 새롭게 창조한 경우, 셋째, 전통극 양식을 계승하여 현대화한 경우가 그것이다.(33) 먼저, 근대극 양식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킨 양식으로는 사실극, 희극, 역사극, 창극을 들 수 있다. 1911년 신파조극으로부터 한국의 사실극 운동은 시작되었다. 1921년 극예술협회 및 청년연극단체의 활동은 서구의 리얼리즘에 근접할 정도로 사실극을 한층 고조시켰다. 1931년 극예술연구회의 창작극으로부터 사실극은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현대 사실극은 탈(脫)리얼리즘의 환경 가운데서 1950년대의 사실극을 새롭게 계승하면서 발전했다.(33) 희극은 1930년대의 희극(파스)과 막간극(스케치, 난센스, 만담)을 통해 발전했다. 현대극은 대부분 희비극적 요소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자칫 양식의 경계는 애매하기 쉽다.(34) 1928년 7월에 창설된 시대극연구회는 역사극의 인식을 넓혔다. 1930년대 유치진, 임선규, 함세덕은 본격적인 역사극시대를 열었다. 현대역사극은 민족생존권의 수호, 지속적인 경제발전, 반봉권(건?)·반독재적인 시민혁명의 완수, 그리고 민족통일의 성취가 절규되던 1970년대 초부터 대두되었다. 즉, 역사극에서 사실(史實)을 충분히 응용함으로써 동시대의 상황을 구조적으로 이해하고, 우리 삶에 대한 비판적 통찰력을 얻고자 했다. 역사극의 갈등구조를 통해서 사실(史實)이 내포한 진실과 허위의식(虛僞意識)을 폭넓게 상기시켰다. 아울러 역사극은 연극 검열을 피해가는 하나의 방법으로도 이용되었다.(34) 창극은 전통음악인 판소리를 무대음악극으로 재창조해낸 것이다. 보편적인 의미에서는 ‘노래로 하는 연극’을 지칭한다. 20세기 초엽에 서울에 와서 공연했던 중국의 경극이나 일본의 가부키에서 적지 않은 자극을 받은 판소리 성악가들은 창극을 개발했다. 유명한 판소리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등 5가를 창극으로 제작하여 새로운 음악극의 붐을 일으켰다. 이 창극은 1930년대에 수용된 오페라와 더불어 현재까지 발전·전승되고 있다. 현재는 판소리뿐만 아니라 모든 전통음악을 재료로 한 음악극이 제작된다. 이런 작품들은 창극과 구분하여 ‘가무악극’이라 칭한다. 창극의 반주는 전통악기로 하고, 가무악극의 반주는 전통악기와 서양악기를(34) 두루 사용한다.(35) 모든 문화는 모방과 창조, 수용과 굴절, 변동과 모색을 지속하며, 특수성과 보편성을 변증법적으로 발전시킨다. 현대극 역시 예외일 수 없다. 비극, 희극, 희비극, 멜로드라마 같은 서구의 고전적 형식을 비롯하여 리얼리즘, 모더니즘, 표현주의, 실존주의 등의 양식이 한국 근대극에 수용되고 굴절, 정착되었다. 1950년대 후반, 전후의 폐허 가운데 서구의 새로운 물결이 흘러들었고, 이 물결은 1960년대부터 근대극의 낡은 양식과는 다른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처럼 서구양식을 수용하여 창조한 현대극으로는 서사극, 부조리극, 신화극, 잔혹극, 개방극, 뮤지컬 등을 들 수 있다.(35) 신화극과 제의극은 한 실체의 양면이다. 제의는 신화적 세계의 표상이고, 신화는 제의에 의하여 전승되기 때문이다. 신화는 좁게는 신의 이야기, 넓게는 설화(전설, 민담)를 포용하며, 삶의 보편성과 원형성을 지니고 있다. 바로 이런 본질로 인하여 신화는 시간을 초월하여, 소재를 초월하여 재해석되고 동시대의 살아 있는 신화가 된다.(37) 1960년대 실험극에는 잔혹극, 개방극(開放劇), 참여극, 정치극, 가난한 연극, 살아 있는 연극이라는 개념이 통용되었다.......한국의 현실과 공연 여건에 따라 복합적이고 절충적인 문화굴절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37) 이런 유의 실험극은 종래의 창조자 중심에서 수용자 중심으로, 폐쇄적인 공연방식에서 개방적인 공연방식으로, 극장주의에서 탈극장 초극장주의로, 언어 위주의 표현에서 육체 위주의 표현으로, 몰정치적인 주제에서 정치적인 주제로, 개인적 사고에서 공동체적 사고로, 사실적인 전달에서 이미지적인 전달로, 풍족한 무대에서 가난한 무대로, 과거회귀적인 방향에서 현재와 미래지향적인 방향으로, 작품의 완결성보다는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과 순간적인 몸짓을 더욱 중시하는 쪽으로 전개되었다.(38) 1920년대 후반기에 대중음악인 트로트와 즉석의 밴드반주를 기반으로 한 이른바 악극(樂劇)이 연극 장르로 대두되었다. 아울러 악극과 변별하여 서양식 창작 가창곡에 즉석의 피아노반주를 기반으로 한 음악극을 가극(歌劇)으로 별칭하기 시작했다. 아직 뮤지컬이라는 개념이 수용되기 이전이었다. 악극은 1950년대 후반, 영화가 붐을 일으키기 전까지 대중극을 주도한 장르였다. 이에 대하여 가극은 주로 학교행사나 교회행사를 통해 공연되는 것이 고작이었다.(38) ...창극은 근대극의 계승이자 전통양식의 계승이다. 1960년대부터 전통제의인 무당굿을 계승한 굿극, 가면극을 계승한 탈춤극, 인형극을 계승한 꼭두극, 배우희(俳優戱)를 계승한 재담극(才談劇), 그리고 전통을 폭넓게 계승한 마당극과 가무악극이 현대극의 새로운 양식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전통양식의 계승과 발전’으로 통칭되는 일련의 창조작업이었다.(39)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인형극은 꼭두각시놀음이다. 전문적인 연행집단과 더불어 전승되고 있다. 민속극희 ‘남사당(男寺黨)’이 그것이다. 인형극의 정신과 방법을 계승하여 현대적으로 창조한 연극이 ‘꼭두극’이다. 꼭두극은 인형극의 범칭이다. 인형이 내포한 원형성과 현실성, 기교성과 표현성을 최대로 활용하여 만들어진 것이 현대 꼭두극이다.(40) 한 배우 혹은 두 배우가 재치 있게 말을 하며 현실을 풍자하거나 관객들을 즐겁게 하는 연극을 ‘재담극’이라 했다. 코믹한 언어가 주 수단이고 거기에 익살스런 연기를 곁들이는 이 연극에서 배우의 기량은 기지에 찬 말의 기술로 평가되었다. 즉 화술에 의존하는 골계극(滑稽劇)이었다. 재담은 오랜 역사를 지녔다. 왕과 상류계층은 유식한 재담을 즐겼는가 하면, 문맹인 서민들은 그들 나름대로 이해하기 쉽고 일상생활에서 우러나오는 솔직한 재담과 몸짓을 즐겼다. 현대 재담극을 희극과 구분하여 서술하는 것은 희극이 서구적인 양식의 계승·창작인데 반하여, 재담극은 전통양식의 계승·창작으로, 다른 구조와 어법을 지녔기 때문이다. 장면 만들기, 개방된 공간 활용, 생략된 연기, 더블 캐스트, 낭독법, 격조(格調)있는 말투, 말과 노래의 혼합, 서사와 서정의 조화 등은 전통양식의 재창조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시된다.(41) 전통적인 개념으로 볼 때 마당극은 야외극이다. 마당극을 야외극에 한정시키지 않고, 이른바 ‘마당정신을 표현한 연극’으로 통칭할 때, 실내의 공연도 마당극에 포함된다. 1970년대에 마당극이 성립된 이후, 실제로 마당극은 야외와 극장(기타 실내)을 오가며 공연되었다. 마당극은 집단적인 창작과 집단적인 공연을 위주로 했다. 당국의 검열을 받지 않은, 이를테면 불법공연이므로 학술발표회나 토론회, 학예회나 워크숍 같은 명칭을 빙자하여 공연되었다. 이렇게 마당극의 개념적 애매성은 성립시기부터 배태된 셈이다.(41) 공연양식이라는 관점을 기준으로 하면, 탈극장주의 야외극만이 ‘마당극’으로 분류된다. 탈극장주의는 마당정신의 한 표현이기도 하다. 마당정신은 언제나 현실주의에 기반을 둔 체제저항과 투쟁, 시(41)민들과의 의사소통 및 시민의식의 표현, 정보가 차단된 사회 속에서의 역사적인 현실비판과 진실전달, 그리고 전통적인 드라마 방법의 계승과 재창조라는 의미를 포괄한다. 지극히 정치적인 연극이 마당극이며, 서구적인 리얼리즘보다는 전통적인 민중극의 현대화에 더욱 가깝다. 1970년대 검열제도에 저항했던 탈극장주의 사실극은 마당극(마당굿)으로 지칭되었고, 발전적인 개념으로 노동극 혹은 민족극이라는 개념을 부각시켰다.(42) 모든 전통음악을 재료로 하여 제작된 음악극은 창극과 구분하여 ‘가무악극’이라 한다. 1960년대부터 새로 시도된 것이 뮤지컬과 가무악극이다. 가무악극은 양악의 방법을 수용하여 전통을 현대적으로 변화시킨 음악까지를 포함하므로 뮤지컬에 포함하여 논의할 수도 있다.(42)   2. 현대극 성립의 문화기반   1) 신세대 극단 및 관객의 진출   신세대 극단은 1960년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진출했다.(43) 이런 극단들은 광복 후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했거나 대학극 활동을 함께 한 신세대가 주축이었다. 물론 일부 지도자들 가운데는 기성 연극인도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신세대와 손을 잡은 기성인들은 신세대와 연극이념이나 비전을 함께 하면서 그들의 취향에 알맞은 연극을 하려고 노력했다.(44) 1960년대에 창단된 극단들 가운데서 극단 실험, 민중, 가교, 광장, 자유, 여인, 성좌 등은 2004년 말 현재에도 공연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신세대 극단들이 현대극을 주도해 왔다는 것은 이런 사실만으로도 입증된다. 지속성의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전위성(前衛性)과 실험성을 내포한 참신성의 측면에서도 신세대극단 활동은 주목할 만하다. 이들의 참신성은 기존의 연극에 대응하여 새 바람을 일으켰고, 끝내는 연극계의 풍토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했다.(44)   2) 국립극장의 정립과 소극장의 증설   현대극의 중심지는 국립극장이었다. 창작적 측면이나 공간적 측면에서 모두 그러했다.(47)   3) 신세대 극작가의 출현   1960년 1월 이근삼 작, 김재형 연출의 <원고지>, 이철향 작·연출의<제5계절>이 원각사에서 각각 공연되었다. 4월에 학생혁명이 폭발했다. 이런 시대정신과 함께 대학에서 연극 활동을 한 젊은 연극인들이 대거 새로운 극단을 결성하고 나섰으며, 그들은 종래의 사실주의 미학만으로는 급속하게 변화되고 복잡하게 얽히어 가는 동시대인의 삶과 의식을 무대에서 제대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자각과 실험적인 저항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50년대 후반기부터 신진 작가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일기 시작한 일련의 새로운 모색들을 60년대의 그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표면화시키고 활성화시키는 데 정열을 기울였다. 젊은 연극인들의 미학은 해체와 개방·수정과 절충·전통의 재발견과 창조적인 모색 등으로 표출되었다. 당시 국립극단은 이러한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51)   4) 번역극과 전통연희의 영향 근대적인 연극이 발달하지 못했던 우리 연극계는 번역극에서 짙은 영향을 받았다. 20세기에 들어서서, 근대화의 갈망과 식민화가 동시에 진행된 까닭으로 서구극의 번역은 대부분 일본을 통해서 수용되었다. 1920년대부터 외국어를 전문으로 하는 지식 연극인들이 대두되면서 직역 번역극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번역은 할 수 있었지만, 연출과 연기, 무대예술, 무대 메커니즘은 체계적인 교육이나 훈련을 받은 적이 없었기에 역시 일본극장에서 견문한 것을 바탕으로 공연할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에 이르자, 새로운 공연 수요가 급증했고, 외국어를 전문으로 하는 신세대 연극인도 차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연극서적을 구독하기 쉬워졌는가 하면, 외국에서 연극을 위해 유학한 사람들도 국내 무대에 나타났다. 번역극은 창극의 부족한 영역을 보충(53)해주는 정도가 아니라, 창작극과 같은 비중으로 무대를 메웠고, 신세대의 폭발하는 갈증은 번역극이 오히려 주도적으로 채워주었다. 번역극의 편향성(偏向性)은 줄곧 문제가 되었지만 창작극의 기반이 취약하다 보니 쉽사리 극복되기 어려웠다.(54) 여기서는 사물엘 베케트(1906~1989) 작, 임영웅 연출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하나의 대표적인 번역극으로 기록해 두는 정도에 그치기로 한다. 베케트의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임영웅은 1969년 12월 한국일보 소극장에서 이 작품을 처음 무대에 올렸고, 세기를 넘어 2004년 현재까지 국내외에서 수차례 재공연 되면서 훌륭한 작품으로 거듭 났다. 임영웅과 산울림소극장의 대표작은, 재론의 여지없이, <고도를 기다리며>이다. 그는 이 작품의 정심하고도 심원한 연출을 통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각광받는 연출가로 발돋움했다.(54) 창작극과 더불어 번안극(飜案劇)도 끊이지 않았다. 번역극을 그대로 하기보다는 번역극에 자신의 뜻을 담아 새로 만든 작품이 번안극인데, 연극계 전반의 흐름으로 보아서는 날로 증가하는 추세다.(55) 무엇보다도 공연예술의 현장성과 일회성이 ‘번역극도 하나의 창작극이다’라는 개념을 낳게 하고, ‘기왕에 번역극을 할 바에는 차라리 새로운 요소를 첨가하여 번안극을 하는 것이 연극에 대한 자신의 뜻을 펼 수 있는 길’이라는 인식이 신세대 연극인들 사이에는 확대되어 온 것이다.(56) 아울러 세계화의 추세에 따라 확대되고 있는 동서연극의 교류도 번안극을 부추기는 요인의 하나이다. 번안극 무대에서는 원작의 정신이나 독창적인 방법을 심하게 훼손(毁損)하는 행위가 빈번한데, 이러한 현상은 큰 문제이다. 일종의 저작권 침해이자 고전의 파괴행위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번역극은 과거보다 현저히 줄어들고 있고 있다. 하지만, 원작에 대한 정밀한 고찰이나 현대적인 해석에 관한 새로운 비전 없이 ‘마구잡이식’으로 번안극이 성행하고 있는 오늘날의 현상은 심히 우려된다.(56) 1960년대부터 전개된 전통연희의 부활운동은 현대극의 발전에 적지 않은 영감과 자극을 주었고, 숱한 자료와 전통방법 및 기술을 구체적으로 제공했다.(57) 정부가 주도하는 전국민속예술축전(경연대회의 개칭)은 1958년에 시작되었다.(58)   5) 연극검열제도   ...한국 현대극은 검열제도 아래 표현의 자유를 제한받는 조건 속에서 성립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멀리는 식민지시(60)대 초부터 1980년대까지 무대공연은 이른바 ‘공연필(畢)’의 도장이 찍힌 작품들이었다.(61)     제2장 근대양식의 지속과 전개   1. 사실극의 계승과 분단현실   1) 사실극·마당극   현대 사실극은 근대 사실극을 지속 발전시킨 연극이다. 사실극은 대부분 과거처럼 무대적 실제성(實際性)에 치중하거나, 당면한 현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한 채 시시콜콜한 주변 이야기를 늘어놓는 데 시간을 낭비했다. 물론, 드물지만 동시대가 요구하는 리얼리즘을 창출시킨 경우도 없지 않았다. 1960년 4월, 자유당의 장기독재에 항거하는 학생혁명이 일어났다. 이 혁명은 민주화운동의 불씨가 되었고, 동시에 연극을 변화시키는 데도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65) 현대 사실극은 이른바 극장주의(劇場主義)와 탈극장주의의 두 계통으로 분류된다. 근대극 전통을 계승한 극장주의 사실극은 사실주의를 고수하면서 한편으로 수정주의, 절충주의 경향을 드러냈다. 상징주의·표현주의·부조리극 등과의 절충, 사실극 자체의 심리화·투시화·내면화를 통한 수정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다. 현대 사실극은 사실주의로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다변화되고 다층화되고 복잡해졌다.(66) 한편, 검열제도에 저항했던 탈극장주의 사실극은 새로운 제작방법과 공간을 찾아나섰다. 그들은 공연장으로서의 ‘극장’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깃들인 구태의연한 기성제도와 온존(溫存)주의적 인식과 굴종(屈從)의 행동방식에 저항했다. 그들에게는 공연예술과 새로운 이념, 정치적 투쟁이 별개일 수 없었다. 그들은 리얼리즘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타성화된 사실극을 혹독하게 비판했고, 새로운 방법으로 기존의 관행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들은 한때(66) 자신들의 연극을 ‘마당극’으로 지칭했다.(67)   2) 1960년대의 사실극   1960년대에 접어들어 사실극은 한층 안정되고 심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근대 사실극에 비해 소재나 배경의 측면에서 훨씬 폭넓고 다양해졌다. 농촌 중심에서 도시, 어촌, 광산 등으로 공간적 배경이 확대되었으며, 금기시되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소재가 대담하게 채택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극작가들의 현실인식이 이전에 비해 한층 과감하고 치열해졌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그 도화선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4·19혁명이었다.(67)   3)차범석의 사실극   차범석은 한국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극작가이다. 1950년대부터 작품활동을 시작한 그는 근대와 현대를 잇는 교량 역할을 하며 일관되게 사실주의를 고수해왔다. 국립극단이 공연한 이진순 연출의 <산불>(1962. 12)은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이 연극은 6.25 전쟁기에 공비토벌의 현장이던 지리산 자락의 마을을 무대로 하여,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회적인 갈등과 인간의 본능적인 갈등을 집약적으로 다룬 비극이다.(71)   4) 사실극의 다층화   1970년대에 접어들어 사실극은 남북분단의 비극적 현실에 주목하면서 사회적인 화제를 다각적으로 형상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민감한 정치사회적인 현실보다는 가치관의 변화로 인한 윤리적 갈등을 우회적이고 심리적으로 조명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는 곧 사실극이 현실의 외피에 대한 묘사에서 벗어나 그 내면적 현실에 주목하는 방향으로 진화되었음을 시사한다. 동시에 이러한 경향은 유신독재 체제하의 살벌한 검열로 인해 정치적인 현실문제를 직접적으로 거론하기 어려웠던 시대환경 탓도 없지 않았다.(76)   5) 1980년대의 사실주의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연극계에는 이른바 ‘수정사실주의’의 흐름이 폭넓게 정착되었다. 사실주의 미학을 기조로 하되, 현대극의 다양한 양식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여 표현의 영역을 확대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실극은 심리적인 현실의 환기, 상징적이고 시적인 분위기의 가미, 플래시백 수법을 통한 자유로운 시공간의 넘나듦 등으로 요약되는 유연하고 개방적인 특성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현대 사실극은 한층 성숙한 면모를 갖추었다.(84)   6) 윤조병의 연작   1980년대 사실극을 주도한 극작가는 윤조병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이른바 농촌 3부작으로 일컬어지는 <농민>, <농토>, <농녀> 등의 작품과, 광산 3부작인 <모닥불 아침이슬>, <풍금소리>, <초승에서 그믐까지> 등이 사실극을 연이어 발표했다. 물론 그의 작품이 보이는 스펙트럼은 사실극에서 서사극, 부조리극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위의 연작들을 통해 윤조병은 차범석의 계보를 잇는 현대 사실극의 주요작가로 자리잡았다.(89) 윤조병의 사실극은 농민과 광부 등 소외된 이들의 삶에 주목한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뒷전으로 밀려난, 사회의 그늘진 이면에 조명을 가한다. 그리하여 산업사회의 구조적 모순, 그로 인해 야기되는 하층민의 운명적 비극성을 절절하게 환기시킨다. 나아가 3대를 아우르는 가족사적 인물구성은 운명의 대물림을 강조함으로써 이러한 비극성을 한층 고조시킨다. 운문과 산문, 현실과 꿈이 각각 뚜렷한 경계를 이루면서 변증법적으로 조화되는 구조적 견실함 또한 돋보인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윤조병의 연극은 현대 사실극의 한 전형으로 굳건히 자리잡았다.(95)   7) 정복근의 사실극   극단 현대극장이 공연한 정복근 작, 김아라 연출의 <독배>(1988. 6)는 한 인물의 개인사를 통해 한국 현대사를 집약시켜 조명한 작품이다.(95)   8) 후기 산업사회와 사실극   1990년대에 들어서며 사실극은 한층 뚜렷한 변화의 징후를 보여준다. 농어촌, 광산 등 전통적 삶에 집중되었던 소재가 도시인의 일상적 삶으로 이동하였고, 추리극이나 음악극 등의 다양한 기법이 수용됨으로써 표현의 폭이 확대되었다.(98) 극단 맥토가 공연한 박구홍 작, 엄기백 연출의 <시민 조갑출>(1990. 9)은 이른바 ‘내 귀의 도청장치’ 사건을 소재로 하여 1980년대의 정치현실을 풍자적으로 재현한 작품이다. 9시 뉴스에 느닷없이 출현하여 ‘내 귀에 도청장치가 들어 있다’고 외쳐 시청자들을 경악케 한 사건이 한동안 화제였는데, 이 사건을 극화한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98)   9) 재외작가 한진, 유미리   알마아타에서 활동하는 조선극장이 내한하여 공연한 한진 작, 파스코브 알렉산드르 연출의 <나무를 흔들지 마라>(1991. 9)는 이주 4세대가 지났어도 완벽한 한국어 능력을 선보인 배우들의 연기로 관객들을 감동시켰다. 193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춘향전>으로 창단공연을 올린 이 극단은 1937년에 알마아타로 강제 이주당하여 오늘에 이르렀다.(111) 극단 민중극장이 공연한 유미리(柳美里) 작, 윤광진 연출의 <물고기 축제>(1994. 7)는 재일 한국인 극작가 유미리의 자서전적 작품이다.(111)   10) 사실극의 의의와 과제   사실극은 동시대의 현실에 내재한 인간의 삶 혹은 사회문제를 관찰한 결과에서 우러나온 연극이다. 사실극에서 ‘사실’이 언제나 ‘현실’ 그 자체일 수 없고, 또한 반드시 그럴 필요도 없지만, 시실성 곧 현실성의 구현은 사실극의 본질이자 목표이다. 사실극은 이런 본질과 목표의 구현을 목적으로 한다.(112) ‘탈(脫)리얼리즘시대라고 하는 현대에 왜 리얼리즘은 필요한가.’ ‘현대 리얼리즘의 새로운 방법은 무엇인가.’ 대부분 기존의 사실주의자들은 이런 질문에 실질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극은 현실에 대한 구조화와 압축기술, 문제에 대한 확대화가 부족했다. 작가 자신이 사실극을 발표하면서 자기가 선택한 방법에 새로운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것이 전반적인 실패의 요인이자 한국 사실극의 무대를 지리멸렬하게 만든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부터 리얼리즘을 다시 시작하자’는 주장을 펴자는 것이 아니다. 작품의 원리와 방법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철학이자 의도에서 창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연극계의 상황으로 보아서 사실극은 별로 전도가 밝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극을 무대에 올리고 싶다면, 작품의 신선함과 충실성이 관객의 마음에 현실성 짙은 감동으로 치환되는 것이어야 한다.(115)     2. 희극의 계승과 현대 풍자극   1) 희극·희비극   희극으로 통칭하는 연극양식에는 다양한 형식이 전승되었다. 근대 최초의 희곡인 <병자삼인>(1912. 11)은 동시대 일본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보이는 난센스 코미디였다. 근대의 희극정신은 하나의 전통을 형성했고, 특히 동양극장시대의 희극(笑劇, 파스가 주종을 이룬다)은 연극의 대중화를 촉진시켰다. 1930년대의 희극은 ‘악극(樂劇)’ 혹은 ‘고전의 현대화’와 결합하여 대중적인 오락극으로서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르네상스시대부터 희비극 형식이 확대되어 온 것은 삶이 본질적으로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데다 두 형식의 결합을 통해 인생의 진실을 더욱 잘 드러낼 수 있고, 나아가서는 극작가의 이념을 구체화시키는 데 효율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헤겔은 ‘희극적인 주관(116)성은 비극에서 심각한 양식으로 다루어지며, 비극적인 것은 희극적인 화해 속에서 완화된다’고 했다. 프라이(Frye)는 ‘희극이란 비극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비극은 단지 아직 끝나지 않은 희극일뿐’이라고 했다. 뒤렌마트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더 이상 하나의 비극으로 구현될 수 없는 비극적 요소들을 희극에서 본다’고 했고, 이오네스코는 희극적인 것과 비극적인 것은 상호 교환될 수 있고, 공통적인 본질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빠트리스 파비스, 심현숙 역, 󰡔��연극학 사전󰡕��, 현대미학사, 1999, pp.515~516-인용자 주)(117) 한국 근대극에서는 비극을 찾아보기 어렵다. 민주화, 대중화, 정보화 시대인 현대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역사적으로 ‘비극적인 삶’과 ‘비극적인 요인’이 지속되고 있는 것과 연극무대는 별개의 현실을 보여준다. 현대극은 양식에 상관없이 희극 혹은 희비극 양식이 줄기차게 강세를 보인다. 앞서 서술한 사실극은 물론이고, 역사극, 서사극, 부조리극, 잔혹극, 뮤지컬, 전토의 재창조 등 모든 연극이 정도의 차이뿐 희극정신을 모두 내포한다.(117) 폴야르(Pollard)는 풍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논의했다. 풍자는 항의하려는 본능에서 생기며, 예술화된 항의이다. 풍자는 실제의 인간 현실 속에서 악덕과 어리석음, 모순과 비리 등 모든 부정적인 가치들을 폭로하고 비판한다. 풍자는 우행폭로(愚行暴露)와 사악징벌(邪惡懲罰)이라는 두 점 사이에 타원형을 그리며 왕복으로 운동한다. 풍자에서 폭로과 비판의 형식은 간접적이고 우회적이다. 직접적인 비난과 공격을 피하기 위해 기지(機智), 조롱, 아이러니, 비꼼, 냉소, 조소, 욕설 등 풍자의 스펙트럼대(帶)에 있는 모든 어조를 사용함으로써, 그 표면을 다양한 색상으로 변화시킨다.(아더 폴야르, 송낙헌 역, 󰡔��풍자󰡕��,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6, p.10 참조.-인용자 주)(117) 현대극에서 주종을 이루는 것은 풍자극이다. 근대희극이 파스(farce) 위주였던 것과는 대조적 현상이다. 풍속적인 불일치(不一致)에 가까운 행위들을 다루는 파스는 정치비판이나 저항이 불가능한 시대, 혹은 체제와의 대결을 피하면서 공연하기 위한 소극적인 극형식으로 유행했다. 이에 대하여, 윤리적 불일치에 가까운 행위들을 다루는 풍자극은 시대적으로 역행하는 정치와 반윤리적인 사회에 대한 과장과 비판, 경멸과 야유, 조소와 공격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려는 형식으로 대두되었다. 여기서 희극은 주로 풍자극이 대상이다.(118)   2) 현대 희극의 개척자, 오영진   한국의 대표적인 희극 작가로는 단연 오영진을 꼽을 수 있다. 희극의 교과서로서 오영진의 작품은 이후의 희극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오영진의 희극은 근대기 대중극단에 의해 상연된 소극(笑劇, farce)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주로 배우의 즉흥적인 액션에 의지해 웃음을 촉발하는 슬랩스틱 코미디와 달리, 그의 연극은 치밀하게 계산된 구성을 통해 웃음을 유발한다. 아울러 그 웃음 속에는 사회현실에 대한 강한 풍자성이 내장되어 있다.(118) 오영진의 「맹진사댁 경사」는 일제 말기에 일본어 시나리오(국민문학, 1943. 4)로 처음 발표되었다. 해방 후 <향연>(1946. 2)으로 개제되어 역시 동일한 스텝진에 의해 조선예술좌에서 공연되었다. 작가에 의해 <도라지 공주>(1952. 8)로 각색되어 이해랑 연출로 극단 신협이 공연한 것은 전쟁 중의 일이었다. 1956년에 <시집가는 날>로 영화화되어 명성을 얻기도 했다. 1967년 극단 신협의 도일 공연을 위해 뮤지컬 <시집가는 날>로 개작되었으나 실연을 보지 못하다가, 1974년(118) 국립가문단에 의해 초연되었다.(119)   3) 로맨틱 코미디의 성황   오영진이 사회비판적인 풍자희극에 주력하였다면, 한편에서는 낭만적이고 유쾌한 웃음을 통해 사회적 갈등을 해소시키려는 경향이 대두되었다. 1960, 70년대는 한국사회가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였다. 삶의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모랄 역시 전통적 가족주의에서 개인주의로 급속하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희극은 해체와 변화가 가져오는 갈등의(122) 양상에 주목하면서, 이러한 갈등을 훈훈한 웃음으로 해소시키고자 하였다.(123) 극단 자유극장이 공연한 이강백 작, 최치림 연출의 <결혼>(1974. 11)은 관객과 함께 연극을 만들어가는 즐거움으로 충만한 소극이다.(125)   4) 풍자희극의 정착   1980년에 접어들면서 희극은 보다 사회비판적이고 풍자적인 성격을 강화한다. 폭력적인 독재정권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시민들의 민주화의식이 성숙되었으며, 이러한 경향은 그대로 연극 속에 반영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시대의 로맨틱한 응접실 희극은 자취를 감추고, 대신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공격하고 야유하는 풍자극이 주류를 형성한다.(128)   5) 1990년대 이후의 희극   6) 쓰카코헤이의 충격   교포작가인 쓰카코헤이(っかこうへい, 1948. 4 후쿠오카 출생, 후일 본명을 金峰雄으로 밝힘)는 <아타미(熱海) 살인사건>으로 1973년 제18회 기시다 쿠니오(岸田國士, 1890~1954) 희곡상을 수상했다. 또한 같은 해 <초급혁명강좌 비룡전(飛龍傳)> 등을 발표하면서 일본(144)의 젊은 세대에 최대 충격을 준 극작가이자 연출가로 급부상했다. 숱한 젊은 극단에서 그의 작품을 상연하여 붐을 일으켰다. 1980년에 초연된 대표작 <가마타 행진곡(蒲田行進曲)>은 그의 손으로 소설화되어 1982년 제86회 나오키(直木)상을 수상하기도 했다.(145)   7) 희극·풍자극의 의의와 과제   현대 희극은 대부분 풍자극이고 풍자정신으로부터 양분을 얻어 개화(開花)하였다. 일상에 만연한 모순, 비리를 비꼬고 야유함으로써 웃음을 유발하고, 이를 통해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개혁의 의지를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그런 점에서 희극은 진취성을 가진다. 다른 한편, 현대 희극은 대중문화의 영향 아래 관객들의 오락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로맨틱하고 명랑하고 가벼운 웃음을 통해 일상에 지친 관객들을 위무하고 격려한다. 현대극은 이러한 풍자성과 낭만성의 양면적 성격을 보여준다. 희극은 소재와 행동양식에 따라 다음의 몇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로, 전통사회를 배경으로 한 풍자극류이다. <맹진사댁 경사>, <해녀 뭍에 오르다>, <허생전>, <태평천하>, <어머니>, <고추 말리기> 등이 이런 유에 속한다. 어느 사회나 그렇지만 보수성이 강한 사회에서 그 덕목에 순응하며 살아온 사람들은 진보성이 뒤지게 마련이다. 오늘날 같이 급변하는 사회에서 그런 사람들은 선의의 피해를 입거나 스스로 피해를 자초하여 파멸하게 된다. 때로는 양자가 날카롭게 대립하다가 서로 피해를 입기도 한다. 이런 유형에 드는(147) 작품들은 사실극에 가까울 정도의 유장한 속도를 유지하면서 전통사회가 지닌 본질적인 모순을 넌지시 들어낸다. 둘째로, 결혼, 부부의 갈등, 이혼 및 재혼의 문제를 다룬 풍자극류이다. <아빠빠를 입었어요>, <토끼와 포수>, <동의서>, <결혼>, <이혼파티>, <바람분다, 문 열어라>, <용띠 위에 개띠>,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 등이 이런 유에 속한다. 이런 유의 작품은 숱하고 형식도 다양하다. 로맨틱 코미디가 있는가 하면 넌센스 코미디도 있고, 파스가 있는가 하면 자못 철학적인 내용을 추구한 하이 코미디도 있다. 현대 여성들의 지나친 성욕추구를 다룬 <생과부...> 같은 작품은 아이러니의 극단을 보여주기도 한다. 셋째는, 정치부패를 비판한 풍자극류이다. <관광지대>, <칠수와 만수>, <늙은 도둑 이야기>, <마르고 닳도록> 등이 이런 유에 속한다. 정치극은 가장 기대할 만한 현대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풍자의 금기 속에서 살아온 우리 사회에서 정치극은 희귀할 수밖에 없다. 다른 분야에 비해 가장 낙후된 정치 속에 살면서도 작가들 역시 정치적 상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유로 ‘정치풍자를 기피’하는 현상이 짙다. 또한 기존의 정치극도 범주가 좁고 풍자의 농도가 취약하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넷째로, 사회, 종교, 양심을 비판한 풍자극류이다. <유다여 닭이 울기 전에>, <팽>, <하나님 비상이에요>, <피고지고 피고지고>, <자살에 관하여>, <택시 드리벌>, <아타미 살인사건> 등이 이런 유에 속한다. 본격적인 사회풍자극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유의 작품은 뒤에서 다룰 서사극, 부조리극, 잔혹극, 재담극, 마당극 등과 유기적인 연관성이 있다.(148) 건전한 비판정신과 건강한 윤리의식은 풍자극의 기반이다. 비극이 사라지고 희극만이 성행하는 현대 사회에서 유독 우리 연극계는(148) 희극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다. 연극인 자신들의 정신과 의식이 박약하거나 흐리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진지한 현실인식을 통해 웃음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라야 희극은 관객들에게 정곡을 찌르는 쾌감을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149)   3. 역사극과 역사인식   1) 역사극의 인식 근대 역사극은 식민지시대의 역사극운동을 거쳐 성립되었다. 이승만 자유당독재에 항거하여 일어난 1960년 4월의 학생의거와 8월의 장면(張勉)내각 출범은 민주화의 가능성을 보였다. 그러나 일시에 폭발한 각계각층의 사회적 욕구는 국가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1961년 5월 군사혁명 정부는 이러한 위기를 수습하고, 세계 최빈국(最貧國)이었던 국가경제를 최단시일에 부흥시켰으며, 일제시대부터 단절되었던 문화전통을 재생시킨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장기집권의 폐해는 민주화를 지연시켰고, 끊임없는 인권문제를 야기하였으며, 전두환·노태우 시대 같은 군벌독재 정치로, 김영삼·김대중 시대 같은 부패정치로 연계되는 불행한 역사를 낳았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민주화, 민족론, 통일론, 세계화에 대한 역사인식의(150) 왜곡과 날조는 극심해졌다. 민족생존권의 수호, 지속적인 경제발전, 반봉건·반독재적인 시민혁명의 완수, 그리고 민족통일의 성취가 절규되던 1970년대 초에 역사극의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즉, 역사극에서 사실(史實)을 충분히 응용함으로써, 오늘의 상황을 구조적으로 이해하고, 우리 삶에 대한 비판적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역사극의 갈등구조를 통해서 사실(史實)이 내포한 진실과 허위의식(虛僞意識)을 폭넓게 밝혀낼 수 있다. 역사극을 통한 성실한 창조작업으로써 비양심적인, 비역사적인, 비예술적인 낡은 요인들을 부단히 대체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역사극은 이렇게 정의되었다. ‘역사극이란 역사적 사실을 연극의 소재로 삼아 그 사실을 작가의 동시대적 현실과 역사인식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여 만든 작품이다. 연극을 통해서 역사에 참여하는 행위의 일종으로서, 작가가 지닌 자생적이고 주체적인 역사의지를 보편화시키려는 의식적이고 객관적인 표현이다. 작가의 자생적 역사의지는 그것 자체가 고립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 및 사회적 산물인 동시에 그가 위치한 전통적 기반 위에서 생성, 발전되는 것이기에 항시 타당성, 필연성, 보편성을 동시에 요구한다. 역사극이 관중에게 공감력을 획득할 때, 그들이 스스로 자각된 의식으로 역사적 사명을 실천적으로 이끌어 가게 하는 효용성을 갖게 된다.’(서연호, 󰡔��한국연극론󰡕��, 삼일각, 1975, pp.64~86 참조.) 사실(史實)을 소재로 한 작품은 현대극에서도 다반사로 확인된다. 그러나 소재의 차용(借用)을 역사극으로 볼 수는 없다.(151)   2) 김의경의 역사극 국립극단이 공연한 김의경 작, 이진순 연출의 <남한산성>(1974.6)은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斥和派)인 김상헌(金尙憲)과 주화파(主和派)인 최명길(崔鳴吉)의 갈등을 주축으로 현실주의와 다변(多變) 외교를 부각시켜 관객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152) 극단 민중극장이 공연한 정진수 연출의 <식민지에서 온 아나키스트>(1984. 9)는 일본 동경에서 활약한 열사 박열(朴烈)의 일대기를 사실대로 극화한 작품이다.(153) 극단 현대극장이 공연한 김상렬 연출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985. 10)는 일본의 관동대지진 학살사건을 새로이 발굴, 극화시킨 작품이다.(154)   3) 김상렬의 역사극 극단 작업이 공연한 김상렬 작, 길명일 연출의 <길>(1978. 10)은 세조의 왕위찬탈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성삼문 일가와 신숙주 일가를 양쪽 무대에 설정해 놓고 이를 교차 조명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156) 극단 신시에서 김상렬 작·연출로 공연한 <애니깽>(1988. 10)은 구한말의 어지러운 정국을 배경으로 멕시코 이민자들의 수난사를 조명한 작품이다.(157)   4) 1970년대의 역사극 극단 산하가 공연한 윤대성 작, 표재순 연출의 <노비문서>(1973. 4)는 1970년대의 인권문제와 탈춤양식을 절충한 역사극으로 주목할 만하다. 고려시대 몽고군의 침입 때 충주성에서 노비군(奴婢軍)이 활약한 사실을 소재로 하여 귀족(전운 역)들이 그들에게 한 면천(免(158)賤)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오히려 더욱 탄압하는 내용을 다룬 것이다.(159) 극단 실험극장이 공연한 오영진 작, 나영세 연출의 <동천홍>(1973. 11)은 1884년의 갑신정변(甲申政變)을 김옥균(金玉均)의입장에서 재구성한 것이었다.(159) 극단 민중극장에서 공연한 이재현 작·연출의 <대한(大恨)>(1976. 12)은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일대기다.(160)   5) 1980, 90년대 역사극 극단 성좌가 공연한 정복근 작, 권오일 연출의 <검은 새>(1985. 8)는 고구려 고분벽화인 삼족오(三足烏)의 설화를 바탕에 깔고 함길도 절제사였던 이징옥(이승철 역)의 반란사건을 형상화한 것이다.(162) 극단 반도가 공연한 이만희 작, 채승훈 연출의 <문디>(1989. 1)는 일제말기 나환자들을 수용했던 소록도를 무대로 한 작품이다. 특정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상황을 통해서 시대를 인식하려는 성찰을 보인다.(163)   6) 2000년대의 역사극 극단 연희단거리패가 공연한 이윤택 작·연출의 <시골선비 조남명>(2001. 8)은 조선시대 중기 남명 조식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이다. 벼슬에 뜻이 없이 글만 읽고 살던 한 시골선비(조영진 역)가 문정왕후(남미정 역)의 섭정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시골의 현감직에서 파직당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학에 정진하는 선비의 행동을 드라마로 만드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는 것이 통념이었다. 이 작품은 이러한 통념을 과감하게 깨뜨리고, 야성에 가까운 바판적 실천성을 보인 선비의 모습을 부각시킨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낙방한 것은 기성세력에게 불리한 새로운 지식을 제시했으며, 자신의 발언이 세상의 잣대에 어긋나기 때문이라고 서슴없이 토로한다.(164) 한국극단 미추와 일본극단 스바루가 합작공연한 <히바카리>(2001. 8)는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잡혀간 도공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조국에 대한 자존심, 도자기에 대한 자부심 등을 주제로 한 것이다. 시나가와 요시마사(品川能正) 작, 손진책·무라타 간시(村田元史) 연출, 박범훈 작곡, 김태근 편곡, 국수호 안무였다. 양국의 배우가 22명이나 참여하는 대작이었다.(165) 극단 맥토가 공연한 홍창수 작, 박종선 연출의 <수릉>(2002. 5)은(166) 고려시대 말기 공민왕의 정신적 방황을 그린 역사극이다.(167)   7) 역사극의 의의와 과제 현대 역사극은 소재의 영역이나 그 형상화의 측면에서 근대에 비해 훨씬 폭넓고 다양해졌다. 고대나 중세의 역사로부터 역사적인 평(167)가가 채 마무리되지 않은 근현대의 민감한 사실(事實)에 이르기까지 제재의 영역을 확장시킨 점은 괄목할 만하다. 아울러 서사극, 가무극, 심리극 등이 다양한 장르를 차용해 표현을 다변화시킨 것 또한 현대 역사극의 두드러진 특성 중 하나이다.(168) 역사적 사실의 단순한 복원이나 그 기이성, 호사성, 오락성에 집착하는 소재주의적 연극은 옳은 의미의 역사극이라고 볼 수 없다. 이는 매너리즘이나 상업주의의 소산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극의 소재는 비록 과거이지만, 이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은 언제나 현재적이자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 역사적 사실은 오늘의 삶에 대한 구조적인 인식과 비판적 통찰력을 얻는데 기여할 수 있을 때만 의미를 가진다. 역사의식이란 단순한 과거인식이 아니라, 진취적인 입장에서 과거·현재·미래의 삶을 연속적으로 인식하고 판단하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창의적 해석에 의해 과거가 진정 오늘을 비추는 거울로 기능할 대 역사극은 관객에게 충격과 감동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168)   4. 창극의 계승과 독자성의 위기   1) 창극·국립창극단 근대창극은 판소리를 무대 음악극으로 현대화하려는 광대들의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의 경극(京劇)이나 일본의 가부키(歌舞伎)에서 적지 않은 자극을 받았다. 날로 늘어나는 무대공연의 기회는 창극운동을 부추겼다. 창극은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등 5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08년에 공연된 <은세계>는 동시대의 현실문제를 창조적으로 부각시킨 점에서 5가와는 별도로 획기적인 의의가 있다. ‘신연극’이라는 의미에 부합되는 작품이었다. 강용환의 연출력이 비로소 창극의 가능성을 입증한 사건이었다. 1930년대 조선성악연구회의 창극은 극작가 김용승과 연출가 정정렬의 독보적인 노력과 함께 창극을 연극장르로 분명하게 인식시키(169)는 계기를 마련했다. 유명한 판소리 더늠과 신파조(新派調), 신극(新劇)의 연기를 조화시킨 조선성악연구회의 창극은 매 작품마다 기승전결의 완결된 구조를 갖추었고, 5가 이외에 판소리계소설, 고전소설, 창작 공연 등을 통해 창극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동양극장의 전속극단 청춘좌(靑春座)가 한때 시도한 ‘신창극’은 사실극에 더늠을 삽입하는 진보적인 시도를 보이기도 했다. 광복 이후 창극을 계승한 ‘국극’이 유행했다. 국수주의적 편향성이 짙은 무대였고, 계면조(界面調)의 이른바 여성국극(女性國劇)이 특히 인기를 독점했다. 격동과 혼돈기에 그리고 전쟁과 전후의 불안하고 참담했던 시기에 창극은 관객들에게 일시적으로 마음의 위안과 즐거움을 주었지만, 독자적인 양식을 수립하지 못한 채 신파조극이나 신극(사실극)에의 의존도가 높아 한계를 드러냈다. 5가 혹은 역사 및 설화 소재에 함몰되어 동시대적인 현실성이 없었고, 판소리 더늠을 토막내어 부르는 ‘토막소리’에 길들여져 새로운 창작 판소리무대를 창출해내지 못한 채 현대극에 편입되고 말았다. 1962년 2월 국립창극단(초기 명칭은 國立國劇團)이 창설되면서 창극은 전환기를 맞았다.(170)   2) 5가·창극연출 통산 106회 공연에 이르는 현대창극은 근대극시대와 변함없이, 5가의 재공연 및 개작공연이 여전히 주류를 이루었다. <춘향가>가 18회, <심청가>가 15회, <흥보가>가 13회, <수궁가>가 11회, <적벽가>가 3회 공연되었다. 「삼국지」의 적벽대전(赤壁大戰)을 소재로 한 <적벽가>는 지난 시대의 인기와는 달리 현대에 와서 현격한 퇴조를 보였다. 1962년 국립창극단이 결성되면서 ‘창극 정립’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비로소 연출의 독립이 이루어졌다. 명창(名唱) 세대를 이어온 김연수가 첫 번째 지휘봉을 잡았다. 그러나 그의 연출방향은 창극의 독자성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전승(傳承) 판소리의 진흥, 보급 및 감상에 역점을 두었다. 박진 연출에 이르러 종래 신파조 창극은 사실극 양식으로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무대적 사실성과 객관성을 중시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속속 도입되었으며, 판소리와 리얼리즘의 접목이 시도되었다. 종래 낭만주의 연극의 지류인 서구적 멜로드라마와 일본식의 신파조극이 접목된 타성화(惰性化) 된 창극으로부터, 창극은 다시 현대적인 과학정신을 존중하게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고 보니 창극은 자연 오페라나 뮤지컬과 유사한 형태로 변모하였다. <배비장전>(1963. 6),(171)<백운랑>(1963. 10), <서라벌의 별>(1964. 3), <춘향가>(1970. 9) 등이 그의 연출작이다. 이원경은 이 같은 박진의 작업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창극이 서양의 오페라나 뮤지컬과 흡사한 양식이 되는 것을 배격하는 동시에 우리 민속극의 양실을 모방, 수용하는 것도 경계하였다. 그러나 기본적인 방법 면에서는 리얼리즘 양식이 바탕에 깔려 있는 상태여서 판소리의 더늠과 아니리를 위주로 하는 공연을 펼쳐 나갔다. <춘향전>(1976. 4), <대춘향전>(1980. 4), <서동가>(1984. 6), <흥보전>(1988. 2) 등은 대체로 더블 캐스트를 활용한 이상과 같은 방식의 공연이었다. 1970년대 이진순에 이르러 창극은 왕성한 모색과 실험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리얼리즘 연극을 바탕으로 한 그의 다양한 시도는 창극의 새로운 가능성과 창극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열어놓았다. 연극적인 시각화와 소리의 입체화 및 동적인 요소의 확대방향은 민속극을 포함한 여러 가지 연기의 도입, 사실적인 의상제작, 생략된 무대장치와 배경화, 안무, 합창곡, 새로운 작곡, 30인에 가까운 생음악반주, 신속한 장면 변화, 마임 등을 포함하는 각종 요소의 복합차용으로 나타났다. 연출의 독립성은 그에 의해 두드러지게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 후반기에 다채로운 드라마 체험을 안고 창극계에 뛰어든 허규는 이진순보다 새로운 세대답게 창극의 실험에 몰두하였다. 그는 박진, 이원경, 이진순의 리얼리즘에 기조한 연출방향에서 완전히 방향을 바꾸어, 판소리 발생의 기반이라고 생각하는 판굿놀이에(172) ‘원형적으로 회귀’하려는 열정을 드러내었다. 전통적인 판굿놀이는, 한 마디로 광대의 예술이라 할 정도로, 광대의 재능과 현장성과 관중들의 심성이 어우러진 분위기를 창출하였는데, 허규는 바로 그러한 분위기를 재창출해내기 위하여 새로이 판을 짜는 방식으로 연출에 임하였던 것이다. 이를 위하여 민속극의 관습이 수용되었고, 현대식 확대 과장법이나 합창, 군중무가 이용되었고, 그 자신에 의한 대본 정리·창작이 진행되었다. 판굿놀이가 다채로웠던 것처럼, 그이 창극도 여러 가지 요소에 의해 새로이 짜여진 다채로운 연희가 되었으며, 판소리만의 창극은 이미 아니었다. 광대와 관중과 연희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판의 창출이 허규 연출의 꿈이라 할 수 있다. 판소리 명창의 맛과 멋을 즐길 수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그 밖의 미속예능이 지닌 잠재적 예술성을 유감없이 그 자리에 쏟아부어 현장성에 맞게 판을 짜는 연출방법이었다. 이를 통해 그는 연희자와 참여자가 함께 공감하는 마당을 만들어내고자 했다.(173) 1990년부터 허규 주도의 창극에 변화와 반성의 물결이 일었다. 창극 연출이 연극 연출가에서 음악극 연출가로 바뀐 것이 변화의 계기였고, 이 변화는 동시대적인 우리 음악문화의 영향을 수반한 것이었다. 2003년 4월까지의 창극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연출가 김홍승과 정갑균의 대두이다. 두 연출가는 모두 전통음악과 양악 특히 오페라 분야의 전문성을 구비한 음악인이었다.(174) 김홍승은 창극의 발전을 위한 방안으로 악보화 및 작곡화, 관현악기법 및 악기배치의 연구, 발성 개발, 판소리극의 극복, 음악극적인 음악편성, 지휘자 및 연출자의 역할 확립, 새로운 대본, 가사의 현대화 등을 제시했다. 이런 방안들을 전제로 김홍승의 연출은 이루어졌고, 정갑균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방법론은 여전히 높고 두꺼운 인습적인 창극의 장벽에 부딪혀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창극은 구태의연하게 오늘에 이른다.(174) 3) 신창극의 모색 5가만으로 공연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는 창극단은 신작 개발을 병행했다. 개발 작품에는 비교적 제작이 용이하게 여겨지는 실전(失傳) 판소리가 포함되었다. 공연 빈도로 보면, <배비장전>(실전)이 9회, <박씨전>(고전소설)과 <용마골장사>(고려시대 배경)가 3회, <광대가>(신재효 전기), <부마사랑>(고전소설, 윤지경전), <황진이>(전기)(174) 등이 각각 2회 공연되었다. <백운랑>(신라시대 배경), <서라벌의 별>(원술랑의 전기), <대업>(안중근의 전기), <강릉매화전>(실전), <가로지기>(실전), <최병도전>(신소설, 은세계), <서동가>(백제무왕의 전기), <광대의 꿈>(송흥록의 전기), <윤봉길 의사>(전기), <두레>(조선시대 배경), <달아 달아 밝은 달아>(일제시대 배경), <이생규장전>(고전소설), <구운몽>(고전소설), <명창 임방울>(전기), <경복궁의 북소리>(고종황제의 전기), <백범 김구>(전기), <논개>(전기), <춘풍전>(고전소설, 이춘풍전) 등이 각각 1회 공연되었다.(175)   4) 창극의 의의와 과제 판소리를 무대 음악으로 전환시킨 창극은 근대와 현대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장르로서 일정한 의의를 지닌다. 전통 음악극으로서의 독자적인 가치를 지니고 오늘날에도 상당한 관객층을 보유한다. 무엇보다도 창극의 가치는 현상으로서의 연극에서 더 나아가 그것이 미래의 한국 음악극 개발에 가장 중요한 기반이고 자료이고 자산이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1백여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독자적인 음악극으로서 양식을 수립하지 못한 점은 분명 한계로 지적된다. 판소리 자체가 지닌 연희미학(演戱美學)을 폭넓게 발견하고, 현대 음악극으로 진전시키지 못한 것이 문제다. 근대에는 신파조극이나 신극(사실주의)에, 현대에는 전통극이나 서구식 메커니즘에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시청각적인 무대공연을 제공했다. 그러나 서양음악 어법으로 하는 오페라와 뮤지컬, 국악 어법의 창작곡으로 새로 발흥하고 있는 가무악극과의 사이에서 창극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과연 생존전략은 무엇인지 쉽게 찾을 수 없다. 과연 판소리 5가를 떠나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를 되묻게 된다. 현대 창극은 물론, 미래지향적인 창극이 되기 위해서는 창작극이 만들어지고, 그것은 동시에 관중의 관심과 호응을 불러일으켜야 한(177)다. 판소리의 어법을 창의적으로 이해하는 극작가와 작곡가가 우선 요청된다. 근대 창극 <은세계>가 놀라운 반응을 일으킨 것처럼, 우리의 현실문제를 부각시킨 대본과 음악극의 조건에 충족된 악보(5선보)가 마련되어야 한다, 악보 없이 음악극을 하는 것은 낡은 사고이다. 전문 연출가와 배우의 필요성도 강조될 필요가 있다. 광대의 소리를 따라가는 수성(隨聲)가락의 즉흥성, 5관청(五管淸)으로 고정된 남녀창 음역의 불합리성, 창작성을 결여한 채 ‘노가바(노래가사 바꾸어 부르기’에 의존한 창작형태 등 음악예술 형태로서의 여러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판소리의 더늠을 토막내어 부르는 ‘토막소리’가 아닌, 등장인물의 개성에 따른 창작곡·편곡·관현악적 편성, 판소리의 전개가 보여주는 과감한 생략과 집약적 방법에 의한 새로운 무대전개법의 개발, 그리고 사실적인 연기만이 아닌 상징적이고 이미지적인 연기법의 시도가 필요하다. 새로 창작된 판소리 악보를 보면서 노래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창극은 가능해진다.     제3장 서구양식의 수용과 창조   1. 서사극의 수용과 변용 1) 브레히트·서사극 1959년 5월 고려대학교 극예술연구회는 손톤 와일더 작, 김갑순 역, 이기하 연출의 <우리 읍내>를 대강당에서 공연했다. 김갑순의 지도로 이화여대에서 영어극으로 두 번 상연된 작품이지만 번역극으로는 처음이었다. 공연 팸츨릿 해설에는 ‘이 극에는 막이 오르거나 내리거나 하는 일이 없다. 그리고 무대장치도 최소한도의 암시적인 것 이외에 없다. 무대감독은 극의 배경을 설명하고 진행을 좌우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때그때 필요한 이 사람, 저 사람이 된다. 물론 그는 사실 이상의 것을 말하지 않는다. 작자의 대변인도 아니다. 이 극은 안타까움을 느낄 정도로 외면적인 움직임이 억제되어 있다.’고 피력했다. 그리고 ‘이 극의 클라이맥스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오직 5평방피트의 널판자의 인생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183)고자 하는 정열뿐’이라는 원작자의 말을 인용했다.(고려대학교 극예술연구회, 󰡔��정기공연 팸플릿(제12회󰡕��, 1959. 5, pp.6~7 참조-원주) 비록 대학극이지만 이 공연은 ‘기성극단의 쇠퇴가 거의 말기적 징후를 나타내고 있는 현상에서 전위적인 색다른 특징을 지녔고’, 연극계에 새로운 형식을 통한 실험정신을 일깨우는 선구적인 일대 충격을 안겨주었다.(여석기, 󰡔��학생연극을 살리자󰡕��, 앞의 팸플릿, pp.6~7 참조-원주) <우리 읍내>로부터 실험극이니 전위극이니 하는 용어와 공연이 차차 빈번해졌다. 서사극은 1960년 1월 이근삼의 <원고지>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60년대에 서사극이라는 용어는 찾아보기 어렵고 ‘브레히트의 연극’이 아니면 ‘실험극’이라는 말로 통칭되었다.(184) 여석기는 앞서의 논설에서 ‘서사극은 객관을 표방하는 리얼리즘의 극이 자신도 모르게 빠져버린 자연주의적 모사(模寫)의 함정을 피한 점에서 객관적 리얼리티에 더욱 충실하다고 볼 수 있으나,(184) 방법으로는 그것이 채용한 바 가지가지 비리얼리즘의 연극적 요소로 말미암아 오히려 연극 본연의 전통에 부응하는 것’이라고 전제했다. 서사적 연극의 제반 연극적 요소로서 ‘장면의 삽화적 구성, 설화적 방법의 사용, 음악극을 방불케 하는 노래의 삽입, 코러스의 등장, 등장인물의 자기 석명적(釋明的) 대사, 환등·영사막·도표의 사용, 동시적인 무대’ 등을 지적했다.(「현대극의 조류」, 󰡔��사상계󰡕��, 1960. 12, p.318 참조)(185) 이런 뒤늦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의 공연목록에서는 브레히트를 찾을 수 없다. 여전히 반공(反共)이 국시(國是)였고, 그는 좌익작가로 분류되어 공연이나 출판검열을 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대학에서 연구하는 것은 제한적으로 허용되었으므로 소개 정도의 논설이 발표되었다. 이근삼이 그 선두주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유학의 체험 덕분이었다. 한편, 이상의 소개에서도 감지할 수 있듯이, 브레히트의 이론 자체가 실현하기에 난점이 있는데다가 간략한 이론만을 알아서 서사극을 무대에 올리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한 짓이었다.(185) 본격적인 서사극의 번역 공연도 할 수 없고, 서사극에 정통한 극작가와 연출가도 없는 상태에서 서사극의 수용과 창작은 심한 굴절과 변이를 거쳐 ‘한국적인 서사극’으로 변용되기에 이르렀다. 화소(話素)와 사실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서사극, 사실극, 역사극은 기록극과 유사성이 있다. 그러나 과거사의 추적 자체가 사실의 기술에 치중되고(documentation), 사실의 추이를 객관적으로, 실증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특히 새로운 증언이나 기록을 토대로 근현대의 은폐된 사건을 규명해낸다는 점에서 기록극(dokumentarishes Theater)은 독자적인 양식으로 불 수도 있다.(186)   2) 서사극의 전도사, 이근삼 이근삼은 한국 서사극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신무대실험극회가 공연한 이근삼 작, 김재형 연출의 <원고지>(1960. 1)는 한국 서사극의 효시로 평가된다.(186) 중앙대 연극과 학생들이 김기훈 연출로 공연한 이근삼의 <대왕은 죽기를 거부했다>(1960. 9)는 당시 자유당의 장기집권과 권위주의 독재를 거부한 민중의지를 반영한 작품이었다. 자신의 무능을 알지 못하는 대왕은 나라의 혼란과 위기에 대한 책임을 백성들에게 돌린다. 갑작스레 죽음의 사자가 나타나 대왕의 죽음의 시한을 알리고, 동시에 그가 살 수 있는 조건도 제시한다. 그를 대신해 죽는 사람이 있으면,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족과 신하, 백성 누구도 그를 위해 죽기를 거부한다. 대왕은 이런 현실을 알고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다.(188) 실험극장이 공연한 이금삼 작, 허규 연출의 <위대한 실종>(1963. 1)은 여주인공 공미순을 통해 왜곡된 출세주의의 일면을 풍자한 작품이다.(188) 극단 가교의 창립공연인 김승일 연출의 <데모스테스의 재판>(1965. 5)은 사후의 세계를 배경으로 작가의 정치와 사회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 우화적 재판극이다. 궁성의 경비원인 데모스테스는 경호부장의 명령으로 데모를 진압하다가 군중의 한 사람인 멘쉬키를 죽인다. 그는 살인죄로 사형당한 후 저승의 재판정에 서게 된다. 군사독재에 항거하여 데모로 얼룩졌던 1960년대의 상황을 우의적으로 극화한 것이다. 관객이 사건과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도록 전개시킨 것은 브레히트의 영향으로 이해된다. 재판과정에서, 여왕과 경호부장의 내연관계, 본인은 계속 부정해 왔지만 경호부장의 발포명령이 있었던 사실 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또한 데모스테스의 증언을 통해 왕실 주변의 권력을 둘러싼 온갖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세상사가 하나하나 밝혀진다. 심지어는 재판을 주도하는 재판장, 검사, 변호사, 서기의 부정도 폭로된다. 그의 살인은 법적으로 무죄임이 입증된다. 그러나 재판의 마지막에 5천 년 간이나 끌어온 판결은 다음 법정으로 연기된다. ‘저승의 재판정’이라는 시공간 개념을 설정하고, 역적과 애국자의 상관성을 지속적으로 반전시키며, 재판의 허구성을 아이러닉하게 풍자한 이 작품은 ‘재판 공해’에 시달려 온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다.(189) 실험극장이 공연한 나영세 연출의 <일요일의 불청객>(1974. 12)은 서사극의 방법을 최대로 활용한 대표작의 하나이다. 해설자를 맡은 배우(서인석 역)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모든 인물들은 환상세계에서 나온 사람들’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작가가 서사(敍事)를 자유롭게 구사핫겠다는 취지를 공포한다. 과연 그 자신도 해설자 노릇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의 윤이사 역, 동회서기, 총을 든 범인 역 등을 맡아가며 변신한다. 그의 이런 변신은 서사를 경제적으로 제시하는데 기여할 뿐만 아니라 관객에서 비판적 거리를 넓힘으로써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증대시킨다.(190) 극단 민중극장이 공연한 정진수 연출의 <수렵사회>(1975. 10)는(190) <국물이 있사옵니다>를 개제한 것이다. 당시 유행어를 제목으로 살린 작품이다. ‘국물’은 ‘약간의 대가’ 혹은 ‘약간의 수고료나 분배 몫’을 의미한다. 사회정의나 법, 양심에 상관없이 자기 이익(국물, 출세)을 위해 타인의 일을 돕는 사람들이 많은 환경에서 유행된 말이었다. 이 작품은 김상범(박봉서 역)이라는 청년의 무모하고 불합리한 출세과정을 ‘국물을 찾는 인간’으로 부각시킨다. 애초에 그는 매우 소심하고 어리숙한 청년이어서 회사의 임시직을 면치 못하고, 마음에 둔 여자에게는 내심을 털어놓지 못한다. 이웃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매양 손해만 입는 처지로 살아간다. 그런 그는 작품이 전개됨에 따라 획기적인 변신을 보여주게 된다. 청년은 소위 출세법(기회주의와 배경주의)에 눈뜨게 되자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자기 이익과 이해’에만 전념하며 신속하게 교활한 인간으로 변질된다. 신세대들의 출세주의와 이윤추구의 행동양식을 냉혹하게 제시함으로써 비판적인 웃음을 이끌어낸다.(191) 극단 가교가 공연한 이승규 연출의 <아벨만의 재판>(1977. 10)은 이근삼이 즐겨 다룬 재판극의 수작이다. 당시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일부 비평도 있었지만, 1970년대의 냉혹한 정치현실을 우화적으로 풍자하여 폭넓은 공감을 얻었다. 전화(戰禍)를 입은 어떤 중립국의 소읍에서 일어난 사건을 취급한 이 작품에서 주인공 아벨만(강문선 역)은 가축을 기르는 선량한 청년임에도 불구하고 주위 사람들의 복수와 출세를 위한 제물로 희생된다. 재판의 장면은 매우 치밀하게 구성된다. 재판이라는 요식행위를 통해 아벨만의 죄가 조작되는 과정, 사람들이 책임을 회피하는 방법, 그리고 집단적인 횡포,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잔인성 등을 섬세하게 이끌어내어 보여준다. 당대 사람들의 현실에 가로놓인 정치적 모순구조뿐만 아니라, 집단적 욕망체계를 아이러닉하게 인식시킴으로써 지적인 웃음을 창출해내었다.(192) 국립극단이 공연한 김도훈 연출의 <이성계의 부동산>(1994. 3)은 극중극의 기법을 활용해 기도원의 비리와 인권유린을 풍자한 작품이다. 극은 천지복지원이라는 기도원에 새로운 원장이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신임원장 오봉(정상철 역)은 폭력이 난무하는 복지원의 현실을 개선하고자 하며, 그 과정에서 이성계(김동원 역)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다. 거액의 기부금을 낸 대신 복지원에 머물고 있는 이 인물은 자신이 태조 이성계라고 믿는 과대망상증 환자이다. 그를 치유하기 위해 오봉은 일종의 사이코드라마(사이코드라마[psychodrama]: 비슷한 환자들을 모아 놓고 즉흥적으로 연기하도록 하는 연극. 미국의 정신과 의사 모레노가 고안한 정신 요법의 하나로, 환자들이 이를 통하여 마음속에 있는 문제를 표현하도록 함으로써 환자를 분석하고 치료할 수 있다-인용자 주)를 시도하기로 한다. 원생들이 각자 이성계의 신하 역할을 맡아 극중극을 벌이는 과정에서 이성계를 둘러싼 진실이 드러난다. 자신의 부동산을 놓고 벌이는 가족들의 집안싸움에 환멸을 느낀 그는 환상으로의 도피를 택한 것이다. 결국 이성계는 환상 속에서 행복하게 눈을 감고, 복지원은 운영난으로 문을 닫는다. 모두가 떠난 복지원에 정도전 역할의 38번(주진모 역)만이 남는다. 새로운 배우들이 38번을 찾아옴으로써 이성계의 환상은 계속되고, 극은 막을 내린다.(193) 이근삼의 연극공간은 우화적(寓話的)인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우화는 흔히 이야기를 통한 구체적인 심상과 그 심상 뒤에 가로놓인 추상적인 의미의 이중 구조를 지니게 마련이다. 알레고리의 어원은 ‘말과는 다른 의미를 뜻한다’는 것이다. 그 다른 의미란 곧 이중 구조를 지칭하는 것이며 평행선적인 구조를 말한다. 이근삼은 무대 공간을 이와 같은 이중적 구조로 드러내기 위한 의도에서 자유자재로 활용하고 개방해 놓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자신이 의도하는 창조적인 우화를 위해 일상적인 시간이나 역사적인 시간 개념을 새롭게 바꾸어 놓았다. 그는 서구 현대극이 지닌 새로운 방법을 수용하여 종횡무진으로 활용했다. 연극 공간 개념의 확장, 시간 개념의 확대, 극적인 제시방법의 변화, 극적인 언어영역의 확대 등이 선을 보였다. 특히 제시방법에서는 서사적 수법, 우화적 수법, 표현주의적 수법, 극적인 아이(194)러니의 수법, 소극적 수법, 음악적 요소의 삽입, 시적(詩的) 분위기의 도입 등이 다양하게 시도되었다. 그를 통해서 기존 연극에 대한 인식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대체로 이근삼이 즐겨 다룬 알레고리는 정치와 권력의 부패, 지식인의 타락, 건정한 사회윤리의 붕괴, 꿈의 상실, 애정관의 세속화, 사회제도의 박제화, 인간적인 멋과 여유의 상실, 인간성의 상실과 진보 지향성의 혼미 등이었다.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 주관적인 과장이나 왜곡, 변화를 보이는 표현주의 방법도 즐겨 사용했다. 전통적인 연극 형식의 개념에서 본다면 이근삼은 소극(farce)의 작가였다. 익살스럽고 우스꽝스런 사건, 즉흥적인 대사, 자발적인 비판과 농담, 과장된 동작과 익살, 떠들썩한 분위기 등이 소극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소극의 이러한 특징을 활용하여 현대의 관중에게 날카로운 비판과 차가운 비웃음을 일으키는 서사극을 만들었다.(195)   3) 이재현의 기록극 1960년대에 이근삼, 신명순 등에 의해 싹튼 서사극은 70년대 이재현이 출현하면서 한층 심화된 단계로 나아간다. 이재현은 전대의 서사극 작가들과 달리, 보다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현실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국립극단이 공연한 이재현 작, 이기하 연출의 <포로들>(1972. 5)은 6.25 당시 남쪽 거제도에서 일어난 포로수용소 사건을 극화한 것이다.(195) 이 작품은 전쟁과 휴머니즘의 갈등, 이데올로기와 개인적 자유의 갈등, 일방적인 정의와 상대적인 이익 사이의 갈등을 첨예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수용소 안에서 극한적인 이념 갈등과 그 틈바구니에서 무참하게 희생당하는 인간들의 모습은 그대로 민족적 비극으로 구현된다. 한상철은 ‘한국 연극은 서사극 형식에 아직 미숙했다. 이 말은 역사적 현실을 차갑고 냉정하게 보는 눈이 작가나 연출자에게 부족했었다는 것을 말한다. 즉 연출자나 작가나 높은 휴머니즘으로 승화시켜야 될 한 포로의 비극을 낭만적 감상 내지 멜로드라마틱한 센티멘탈리즘으로 전략시켰던 것이다. 특히 연출에서 재래적인 수법을 그대로 극에 적용시키려 한 점은 이 작품 공연을 손상시켰다’고 비(196)판했다.(한상철, 「<포로들>」, 󰡔��70년대 연극평론 자료집(1)󰡕��, pp.61~62 참조-원주)(197) 극단 현대극장이 공연한 김상렬 연출의 <멀고 긴 터널>(1978. 9) 또한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197) 극단 민중극단이 공연한 정진수 연출의 <선각자여>(1985. 8)는 식민지시대 말기 이광수의 친일문제를 다룬 서사극이다. 작품은 이광수(박봉서 역)의 업적에 대한 시비를 염두에 두고, 이광수를 비판하는 최유청(윤주상 역)이라는 인물과 이광수를 호의적으로 보는 박정호(정운봉 역)를 설정한 뒤, 그들의 내레이션으로 접근을 시도한다. 총 9장으로 되어 있는 이 작품은 이광수가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친일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순차적으로 보여준다. 각 장의 말미에는 최유청과 박정호가 등장하여 서로의 의견을 피력한다. 춘원의 같은 행각을 두고 벌이는 그들의 논쟁은 관객의 역사인식을 확장시킨다.(198) 극단 부활이 공연한 이재현 작·연출의 <코리아 게이트>(1988. 11)는 1970년대 한미외교상 가장 큰 위기를 몰고 왔던 이른바 ‘코리아 게이트’ 중 김한조 사건의 전말을 추적한 서사극이다.(199) 극단 성좌가 공연한 길명일 연출의 <사파리의 흉상>(1991. 9)은 한 영웅적 인물의 성공신화에 숨은 추악한 내막을 폭로한 작품이다.(200) 이재현의 서사극은 표현의 측면에서는 기록적인 성격이 강하며, 소재의 측면에서는 실화를 활용하는 특성을 보여준다. 분단현실과 이념대립, 유신독재로 이어지는 살벌한 1970, 80년대에 이재현은 금기시되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이슈를 과감히 채택하여 극화하였다. 현실비판의 측면에서 희극적이고 우회적인 성격이 강한 이근삼의 서사극과 달리, 이재현의 서사극은 비극적이고 직접적이다. 그런 점에서 이근삼에 이은 이재현의 등장으로 한국 서사극은 비로소 균형과 조화를 확보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201)   4) 1980년대의 서사극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서사극은 젊은 연극인들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되기 시작했다. 극단 창고극장이 공연한 김상수 작·연출의 <포로교환>(1985. 7)은 한국전쟁 중 포로송환 과정을 객관화하여 다룬 작품이다. 작품의 무게중심은 1953년 9월 중립국송환위원국에 이첩되어 교환 설득을 받게 된 북한의 포로들에게 맞춰져 있다. 막이 열리면, 낡은 삼각다리 사진기기가 무대 전면 중앙에 놓여 있고, 포로들은 그 사진기 앞에 나와 서서 한 사람씩 상반신을 찍는다. 포로들의 약력이 차례로 소개되면서 연극이 진행된다. 이 작품에는 일관된 줄거리나 사건 같은 것은 없다. 설득의 날을 기다리고 있는 포로들의 초조한 모습과 간간이 그들의 과거가 회상되거나 발광하는 몸짓이 있을 뿐이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설득장면이다. 남북한의 설득위원들은 온갖 화술을 다 동원하여 포로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에 혈안이 된다. 장광설이 계속될수록 포로들은 설득되기는커녕, 오히려 양측의 논리가 허위에 가득 차 있음을 깨닫고 어느 쪽도 택하려 들지 않는다. 남은 길은 하나뿐, 즉 중립국으로 가는 것이지만 그것마저 그들은 거부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포로들은 “우리는 그대로 여기에 있겠다”고 부르짖는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결단이지만, 이러한 결단이 갖는 비극성은 관객들에게 충격을 안겨준다. 우리의 역사현실이 그처럼 모순과 거짓에 둘러싸여 있고 불순한 힘과 논리에 억압되어 있음을 첨예하게 느끼게 해 주는 까닭이다.(202) 극단 제작극회가 공연한 신명순 작, 정진 연출의 <증인>(1988. 10)은 본래 1966년 5월 실험극장이 공연할 계획이었으나 ‘군사문제’(202)를 다루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공연을 중지당한 채, 20년 만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지난 시대에는 군사문제를 비판하거나 군인의 권위를 무시하는 작품의 공연은 곧 금기시되었다. 이 작품은 6·25전쟁 당시 상부의 명령으로 한강 인도교를 폭파했던 최창식 대령이 오히려 단독 폭파범으로 몰려 억울하게 총살당한 사건을 소재로 했다. 사건의 내막과 비인도적 재판과정, 최대령의 명예회복과 온당한 역사적 평가를 위하여 최대령(박상규 역)의 아내(우명옥 역)와 윤변호사(서학 역)가 중심이 되어 과거의 사실을 재고하고 파헤친다. 특히 윤변호사에게 극중 해설자 역할을 부여하고 재판극의 형식을 차용함으로써 작가는 과거 사건에 대한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거리를 조성한다. 이를 통해 부패한 자유당 권력자들과 야심에 찬 정치 군벌들의 만행을 투시적으로 보여준다. 그리하여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증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결국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은 전쟁을 통한 정치적 게임의 이용물, 희생물에 불과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관객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203) 극단 연우무대가 공연한 이상우 작·연출의 <4월 9일>(1988. 12)은 1964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혁당(人革黨)사건의 전말을 폭로한 작품이다. 당시 교수, 언론인, 대학생 등 21명이 공산주의자 내지 그 앞잡이 혹은 간첩 용의자로 체포되어 인혁당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공표되었다. 그 중 8명(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흥선, 송상진, 여정남)이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선고 후 15시간이 지난 1975년 4월 9일 처형되기에 이르렀다. 이 작품은 이러한 일련의 사건 전개과정을 기록극으로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 지난 날의 정권이 군사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반체제 지식인들을 고문과 처형으로 제압해 간 내용을 재현해(203) 보여준다. 닫혔던 지난 시대의 현장을 적나라하게 들추어 보인 이 작품에서 관중들은 가슴 서늘한 충격을 받았다.(204) 극단 실험극장이 공연한 윤대성 작, 김동훈 연출의 <신화 1900>(1982. 8)은 한 �년(강태기 역)의 정신치료과정을 내용으로 한 작품이다. 이 청년은 한 소년을 살해한 공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사형언도까지 받았으나 대법원에서 무죄 석방되었고, 그간의 고초로 인해 강박관념 피해망상이라는 증세로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담당 의사(오승명 역)는 그를 위해 사이코드라마를 만들어 보기로 작정한다. 극중극의 초점은 소년 살해에 대한 진부를 가리기 위한 행위들로 점철된다. 작가는 엄청난 사건 조작을 분명하게 밝히는 한편, 그러한 조작극이 지니고 있는 오늘날의 사회적인 의미를 조명한다. 작가의 드라마투르기는 풍부한 현실 감각, 극적인 긴장과 흥미, 재치 있는 화술을 드러내 보이면서도, 보다 차원 높은 보편적인 진실을 표현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작품에서 주된 관심은 광인을 만들어 내는 사회이며, 결과적으로는 그 사회 전체의 광인화가 내포하는 비극성이다. 청년의 결백에도 불구하고, 검찰 측의 치밀하고도 끈질긴 추리에 따라 그의 범행동기, 범죄행위는 모두가 사실로 체계화되고 위장된다. 극중극이 끝나고, 그가 무죄로판결되는 순간, 지금까지 재판과정을 지켜보던 환자들은 동요를 일으킨다. 흥분한 환자들은 청년을 끌고 나간다. 작품의 끝에서 그는 결국 교수당한 시체와 같이 철창에 매달려 있다. 이 광경을 뒤늦게 목격하게 된 담당의사는 경악과 충격을 억제치 못하여 미친 듯이 웃는다. 이리하여 주인공의 죽음은 불가피한 현실(204)이 되고 만다. 환자들의 피해의식과 사회에 대한 저항감을 보상하는 수단의 하나로 주인공은 그들의 손에 살해당한 셈이다. 그의 정신질환이 타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듯이 그의 운명 역시 타인들에 의해 결정되기에 이른다.(205) 극단 산울림이 공연한 이강백 작, 임영웅 연출의 <쥬라기의 사람들>(1982. 10)은 당시 일어난 사북탄광사태와 같은 현실을 모델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문명한 현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마치 석탄이 만들어지던 쥬라기와 같이 어둡고 암담한 삶을 살고 있는 광부들의 모습을 아이들의 밝은 태도와 대조적으로 그렸다.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모습과 발언을 객관적으로 증언함으로써, 관객들은 사태의 진실을 파악할 수 있다. 때마침 몰락해가던 탄광산업이어서 기업 측은 더 이상의 투자를 꺼리는 상태에서 현상유지와 이윤추구를 계속하고, 노동자 측은 새 직장을 찾기 어려운 불황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채탄작업을 한다. 이런 조건에서 어느 날 탄갱 내에서 일어난 폭발사고는 생존자 만석의 증언에 따라 양측의 이해가 크게 상반되는 갈등의 초점이 된다. 설비불량에 의한 가스누출이 원인이냐, 갱부의 단순 사고가 원인이냐를 놓고 팽팽한 대결이 이어진다. 원인규명은 사망자들에 대한 엄청난 보상비와 상관되기 때문이다. 만석은 기업주 측으로부터 한 광부의 개인적인 자살로 빚어진 사건이라고 증언해 줄 것을 사주받는다. 장차 지상근무를 보장해 준다는 조건이다. 광부들은 그가 노동자 측에 유리하게 증언해 줄 것을 요구한다. 사망한 광부들도 그의 꿈에 나타난다. 한편 탄광촌초등학교에서는 경연대회 참가를 목적으로 광부 아이들의 합창연습이 진행된다. 합창대원의 선발여부는 아이들을 양분시킨다. 참가를 못하게 된 아이들은 선생에게 저항하며 사고로 무너진 굴 속에 숨는다.(205) 만석은 자기 아들을 합창단에서 제외시켜 굴속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동시에 어느 측에도 불리한 증언을 할 수 없는 그는 자신의 실수로 사고를 냈다고 허위증언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굴속으로 들어간 그의 아들이 혼자 나온다. 아이들이 모두 가스에 질식하여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사고는 가스누출이 원인이었던 것이다. 문명에서 소외된 탄광촌의 구조적 비극은 한국인들의 실존성을 자각시킴으로 충격을 주었다.(206) 극단 연희단거리패가 공연한 이윤택 작·연출의 <시민 K>(1989. 4)는 군사정권이 언론난립을 정리한다는 명분으로 민주언론사들을 무자비하게 폐지했던 80년대의 폭거정치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폐간지의 마지막 기사를 작성하면서 K기자(김영식 역)는 ‘우리는 어둡고 긴 터널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기록한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민주언론쟁취를 위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성명서 작성에 참여한다. 그는 체제저항의 주동자로 몰려 당국에 연행된다. 이 작품은 심문, 고문, 감옥, 법정, 석방 장면 등으로 전개되며, 과거의 동료들과 애인(윤선희 역)의 거짓증언에 의해 그가 헤어날 수 없는 상황에 뒤얽히는 과정을 다각도로 보여준다. 마지막에 풀려난 그는 ‘현실, 그 자체가 체포되었다’고 절규한다. 사회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감옥인 현실에서 자신은 ‘기사다운 기사’를 쓸 수 없는 기자임을 통탄한다. K는 손도끼로 자신의 손목을 자른다. 연극의 핵심은 K의 민주시민적인 행위를 반체제적 범죄로 쉽게(206) 조작해가는 사회구조를 조명하는데 있다. 그가 동지로 믿었던 주변 지식인들의 시세 순응적인 태도와 가치관의 요동으로 말미암아 거짓말은 그대로 사실로 둔갑한다. 시민적인 발언은 개인의 불만으로 단순화되고, 비전이 있는 비판은 일시적인 푸념으로 폄하된다. 당국자의 의중에 따라 하루아침에 범법자가 되기도 하고 선량한 시민으로 인정되기도 한다. 이처럼 작품에서 묘사되는 동시대 한국사회는 정치 조작술의 극단을 보여준다. 스스로 손목을 자르는 K의 결단은 자기를 포함한 동시대의 지신들에 대한 환멸과 자조의 결과이자 일종의 저항이기도 하다. 다양한 국면을 빠른 전개로 실현한 이 공연은 시대불안과 암담한 미래를 가슴 서늘하게 느끼게 했다. 이 공연에 대하여 신현숙은 ‘공간의 수평선을 극장 밖 복도에까지 확장하고 분장실로 이어지는 통로를 무대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원근법의 효과에 의해 현실감과 입체감을 나타낸 점, 공간의 수직선을 확장해 재판석을 객석의 측면, 관객의 머리 위 높이에 올려 설계함으로써 무대에 깊이를 주게됨은 물론이고 무대 바닥에 위치한 피고(시민K)와 높은 공간에 정좌한 재판관의 위상적 대립을 통해 사회조직의 한 단면을 공간적으로 형상화시킨 점, 화면을 이용해 이용 공간을 삽입시키고 객석에 시민K가 자연스럽게 앉음으르써 객석마저 무대 공간에 통합시켜 관객의 무의식 속에 자신도 연극 속에 동참되어 있음을 느끼게 만든 점 등 무대 공간에 대한 연출가의 뛰어난 에스프리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고 평가했다.(신현숙, 「스치고 지나간 지식인론-유연한 무대」, 󰡔��한국연극󰡕��, 1989. 5 참조-원주)   5) 오태석의 서사극 오태석에 이르러 서사극의 문법은 한층 한국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정치사회적인 소재보다는 일상적인 소재를 취하여 고유한 한국적 정서를 서사극의 양식 속에 녹여냈다. 오태석은 70년대 이후 한국의 전통적 연극미학과 고유한 심성을 현대적인 무대 위에 구현하고자 하는 일관된 태도를 보여주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서사극 창작을 시도한 것이다. 국립극단이 공연한 오태석 작·연출의 <사추기>(1979. 12)는 딸이 결혼하고 폐백하는 시간에 부부의 대화와 회상으로 전개되는 작품이다. 초로에 접어든 50대 부부(이것이 思春期에 대응하는 思秋期의 의미)의 정신적 갈등과 생의 한가운데 놓인 실존적 모습을 투시한 서사극이다. 의식의 흐름과 과거의 에피소드를 재현하는 기재(器材)로서 무대 한편에 타임머신이 설치되고, 부부(장민호, 정애란 역)는 담담한 자세로 이 기재를 돌려가면서 자신의 분신(分身)과 자식, 관련 인물들, 사건의 실제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되새긴다. 마치 낡은 필름이 돌아가듯, 부부가 겪은 삶은 서로의 애정과 괴리, 갈등과 이질감, 상실감을 그대로 재현한다. 서구적인 메커니즘을 최대로 활용한 작품이다. 이것은 한국적인 부부의 일상생활이 진솔하게 묻어나는 한 권의 ‘흑백사진첩’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억의 장면화와 인물의 분신화(인형을 활용)를 통해 내면적 진실들은 투명하게 확대된다. 고전소설 <한중록>의 이미지, 전통의 계승, 한국여성의 폐미니즘과도 상관된다. 자의식이 강한 딸(손숙 역)과 어머니의 연속성이 돋보인다.(208) 극단 드라마센터가 공연한 김우옥 연출의 <자전거>(1983. 9)는 시골 면서기가 체험한 6·25의 체험담을, 마치 묵은 필름을 순차(順次) 역차(逆次)로 돌리듯이 전개한 작품이다. 여기서 자전거는 물리적인 이동수단이자 ‘의식의 흐름’을 유도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부친의 제삿날 밤에 윤서기(박영규 역)가 동료인 구서기(김명환 역)와 더불(209)어 자전거를 끌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에피소드는 시작된다. 구서기는 연극 참여자이자 관객과 동격의 관찰자이기도 하다. 시간과 공간은 기억의 환기에 따라 투시적으로 재생된다. 체험담은 세 갈래로 집약된다. 첫째는 부친의 피살사건, 둘째는 문둥이네 가족의 이산(離散), 셋째는 마을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6·25와 깊이 상관됨으로써 비극성을 증폭시킨다.(210) 전체는 밤의 괴기담(怪奇談) 구조이나, 가족사 이야기를 통해 민족적인 비극을 형상화시킨 점에서 주제를 살린다. 시골에서 느끼는 서정적 분위기의 창출도 이 연극의 장점이다. 사투리가 담담하게 펼쳐지며 어둠 속에서 환청, 환시, 환각이 간단없이 이어진다. 1980년대의 암울한 상황을 연상시키는 빛과 소리의 강한 이미지는 긴 여운을 남긴다. 한국인에 내재한 비극적 공포와 불안, 한스러움을 서사극으로 극화한 수작이다.(210)   6) 김석만의 연출 미국에서 연극학부와 대학원을 수학하고 귀국한 김석만은 서사극 발전에 기여했다. 극단 연우무대가 공연한 황석영 원작, 오인두·김석만 각색, 김석만 연출의 <한씨연대기>(1985. 4)는 분단시대의 상황을 구조적으로 투시하여 세대를 달리하는 숱한 관객들에게 감동을 안긴 서사극이다. ‘빠른 장면의 전개는 셰익스피어로부터, 무대와 무대 밖의 유기적 연결은 체홉에게서, 장면 흐름의 구성은 판소리나 산조적(散調的) 구조에서, 공연의 전반적 양식은 브레히트로부터, 신체표현과 들리는 소리결은 길거리에서 펼져지고 있는 대중오락 수단들을 사용하던 장돌뱅이나 광대에게서 배웠다.’ 이것은 연출자의 말이다.(211) 월남한 휴머니스트 의사 한영덕의 일대기를 통해서 우리 시대의 사상적, 체제적,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를 집약적으로 구조화시킨(211) 점에 이 공연의 탁월성이 있다. 짧은 시간에 일대기 전체를 객관적으로 집약하기 위해 연출자는 아주 빠른 진행과 일인다역(一人多役) 시스템을 시도하며, 섬세하게 에피소드들을 배치한다. 상황설명과 노래, 몸짓, 음향 등은 이러한 에피소드들의 실제성을 보완해 주고, 철제빔으로 엮은 무대는 비정한 현실을 느끼게 한다. 박진감 있게 전개되는 장면 장면은 관극의 기대를 끝내 놓치지 않게 한다.(212) 국립극단이 공연한 신채호 원작, 차범석 각색, 김석만 연출의 <꿈하늘>(1987. 3)은 신채호의 소설 <몽천>(夢天)을 자료로 그의 일대기를 기록극 형식으로 재조명한 것이다.(213) 기록과 자료의 충실이라는 측면 외에도 그의 사상과 실천적 입장 내지 인간적인 내면의 세계를 온당하게 구현시킨 점에서 김석만의 연출력은 크게 돋보인다. 한마디로 과감한 도전이요, 실험이라 할 수 있겠다. 연출자는 역사와 연극의 공간과 시간을 항시 염두에 두고 사건이나 행위 자체와 일정한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무대를 연기와 그림과 소리와 이미지로 가득 차게 한다. 음악과 조명의(213) 조화, 얼굴과 가면의 대비, 3인 단재의 어울림, 주인공과 군중장면의 처리, 보고서 형식의 언어와 시적인 언어의 반복적 활용, 무리 없는 신속한 진행 등 여러 면에서 연극적인 감각과 방법을 잘 살려낸 작품이다.(214) 극단 연우무대가 공연한 현기영 원작, 오인두 각색, 김석만 연출의 <변방에 우짖는 개>(1987. 5)는 원래 제주도에서 3년 간격으로 일어났던 방성칠의 반란(1898)과 이재수의 반란(1901)응ㄹ 소재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공연에서는 ‘이재수 난’ 부분만을 각색, 재구성하여 무대에 올렸다. 한국사회에서 제주도문화는 흔히 주변문화(marginal culture)로 인식되어 왔는데, 이 작품을 통하여 오히려 중심문화의 개념으로 위상을 되찾게 되었다.(214) 극단 연우무대가 공연한 김석만 작·연출의 <최선생>(1990. 9)은 당시 사회적 이슈로 부상했던 전교조 문제를 교사의 입장에서 극화함으로써 교육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 작품이다.(216) 김미혜는 ‘이 작품의 형상화에는 노래극, 아동극적 요소가 더해져 있다. 이 요소들은 우선 극의 재미를 더해주는 소박한 접근법이고 또한 관객에게 에피소드가 끝날 때마다 생각할 시간을 주는 극적 기교가 되기도 한다. <최선생>은 지나친 선전을 하지 않고 흑백 논리를 제시하지 않아 성공하고 있다. 최 선생과 아동들의 수업 내용을 많이 보여줌으로써 교육 현장에 직면한 관객이 스스로 교육 내용의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게 했던 점이 무엇보다 좋았다’고 평가했다.(김미혜, 「연우무대의 <최선생>」, 󰡔��90년대 연극평론 자료집(1)󰡕��, pp.85~86 참조-원주)   7) 1990년대 이후 서사극 북촌 창우극장에서 공연된 이만희 작, 허규 연출의 <돼지와 오토바이>(1993. 3)는 자기 �ㅅ 아이인 두부기형아(頭部畸形兒)를 ‘사랑했기’에 살해한 아버지의 처지를 그린 것이다. 물론 그는 7년형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한국의 현실에서 부모가 생존 불가능한 자식에 대해 영아살해를 저지르는 것이 과연 사회적으로 양해(諒解)될 수 있는 문제인지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이 작품이 매우 서정적인 정조를 띤 서사극으로 만들어진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217) 1990년대 초에 이러한 문제가 무대에서 제기된 것은 장애자들의 사회복지문제가 한창 고조되던 시기였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2인극으로 진행된 이 작품은 남자(이호재, 김명곤 교체역)와 여자(김성녀, 방은진 교체역)의 1인 다역으로 구현되었다.(218) 이 작품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몰윤리적 자세를 고발하는 일면, 대사회에 대한 경고의 의미가 더욱 크게 부각된다. 돼지도 오토바이를 타다보면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그처럼 익숙해진 사회, 타성화된 사회를 작가는 뒤집어볼 수 있게 해주었다.(218)   8) 서사극의 의의와 과제 한국의 서사극이 브레히트를 금기시(禁忌視)하는 반공주의 사회속에서 수용되어 뿌리를 내렸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주목할 사실이다. 새로운 방법에 대한 연극인들의 갈증과 욕구가 그만큼 강렬했음을 시사한다. 일제하에서 신파극과 신극을 목격하고, 해방공간의 좌우익 대결과 6·25 당시 미군통역장교를 경험한 이근삼이 미국유학 과정에서 브레히트를 선택한 것은 탈리얼리즘에 대한 하나의 절실한 대안이기도 했다. 1959년에 귀국한 그는 이미 미국에서 몇 편의 영어극을 발표한 적이 있는 서사극 작가였고, 60년 초에 <원고지>를 국내무대에 올림으로써 새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근삼의 서사극은 김의경과 신명순을 거쳐 이재현에게서 기록성을 확장하여 가일층 발전했고, 오태석과 김석만을 통해서 토착화의 발길을 내딛었다.(219) 서사극은 사실극에 대한 ‘변증법적 연극’이다 실증성과 객관성을 확대시키는 것이 공연의 목표이다. 1960, 70년대의 군사독재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통제는 본격적인 서사극의 무대를 제공하는 데 매우 인색했다. 작품의 내용에 대한 선택은 검열을 의식하여 협소해졌고, 불가피하게 당국의 눈치를 살피며 논의를 펴야 했다. 한국 현대극이 서사극의 정치적 이념성을 온전히 수용하게 된 것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이후 서사극은, 독자적인 연극양식으로 존립하기보다는 다른 양식과 복합적으로 결합되는 길을 택했다. 정치적인 소재의 금기를 돌파하고 다양한 형식실험을 가능케 한 점에서 사서극이 현대극에 미친 영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220)   2. 부조리극의 수용과 모색 1) 부조리극·반연극 1951년 12월 극단 신협은 사르트르 작, 이진순 연출의 <붉은 장갑>(원제, 더러운 손>을 피난지인 부산극장에서 공연했다. 어수선하고 불안정한 전쟁상황이었음에도 경찰이 동원될 정도로 대만원을 이루었다. 당초 대구문화회관에서 공연예정이었으나 공보처의 검열로 지연되었고, 부산으로 내려가 부분적인 수정을 가하여 공연했다. 실존주의 연극이 수용된 최초의 공연이었다.(이진순, 󰡔��한국연극사(1945~1970)󰡕��, 예술원, 1977, pp.53~54 참조-원주) 광복과 미소의 개입, 그리고 좌우익의 분열은 분단을 가져왔고, 남북한은 미소의 지원 아래 동족상잔의 살육전을 일삼는 와중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허무와 상실의 소외감 속에서 성숙된 실존주의는 때마침 한국의 지적(221)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철학이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한국인의 실존적 상황을 다룬 일련의 작품들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부조리(不條理)는 전통적인 개념과 카뮈의 철학적 개념으로 서로 다르게 사용된다. 동일한 어휘를 사용하지만 부조리극에 이르면 의미는 더욱 차이가 생긴다. ‘조리가 서지 않는 것’,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 부조리의 일반적인 개념이다. 부조리극이라는 용어는 영국의 비평가 예슬린(M. Esslin)이 지적한 대로, ‘통합된 원칙을 잃고 분열된 세계 속에서 느끼는 인간존재의 우주적 상실감을 표현하고자 하는 연극’으로 정의된다.(Martin Esslin, The Theatre of Absurds(3e), Penguin books, New York, 1983, p.399-원주) 이오네스코가 말한 ‘반연극’이라는 용어도 부조리극과 더불어 자주 사용된다. 한국에서 부조리극을 수용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들어서이다. 실험극 혹은 전위극이라는 개념으로 소개되었다.(222) 실험극장은 창단공연으로 이오네스코의 <수업>(1960. 11)을 허규 연출로 상연하였다. 이 공연은 국내 최초의 부조리극 공연으로, 이후 전개된 부조리극 수용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어서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극단 팔월, 1961. 11, 중앙무대, 1967. 8, 시극동인회, 1969. 12)가 공연되었다.(중략) 특히 1969년 베케트의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부조리극의 붐은 절정에 달하였다. 1960년대부터 부조리극이 본격적으로 수용된 이유는 소극장운동의 전개와 시기적으로 맞아떨어진 결과로 볼 수 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소극장은 규모의 개념이 아니라 정신의 개념으로서 실험극과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1969년 카페 떼아뜨르의 개관을 비롯하여 뒤를 이은 카페 극장들, 그리고 속속 개관된 소극장들은 새로운 작품에 새로운 관객을 수용하려 했고, 실험정신과 경제성에 출실하(223)고자 했다. 이러한 변화에 잘 부합되는 전위적인 연극이 부조리극이었다.(김미혜, 「부조리극 수용과 한국 연극」, 서연호 편, 󰡔��한국연극의 쟁점과 새로운 탐구󰡕��, 연극과인간, 2001, p.24 참조-원주)   2) 오태석의 시도 오태석은 한국 부조리극의 전개에 있어서 주목되는 작가이다. 부조리극의 작풍은 그의 초기 세계에 한정되어 나타나지만, 그는 몇 편의 중요한 부조리극을 선보였다. 무엇보다 젊은 시절의 오태석은 삶의 본질을 애매성과 유희성으로 인식했다. 이런 삶의 본질을 연극으로 표현하기 위해 1960년대에 그는 부조리극 작품과 관련 자료를 섭렵하고 자기 나름대로 부조리극을 모색했다. 하지만, 그의 애매성은 난해성에 빠지기 일쑤였다. 당시 그의 작품은 의식의 혼란이나 혼돈에 빠진 적이 많았는데, 이런 난해성에서 벗어나 삶의 본질적인 애매성을 비교적 잘 객관화시킨 부조리극이 <웨딩드레스>와 <환절기>였다. 극단 드라마센터가 공연한 이원경 연출의 <웨딩드레스>)1967. 4)는 전쟁 중에 어머니를 잃은 청년이 웨딩드레스를 입은 한 장의 어머니 사진을 분실하고 방황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는 어머니의 이미지를 되찾기 위해 웨딩드레스를 들고 박물관으로 찾아가 관람객으로 들어온 한 여성에게 입히고 잃어버린 모습(사진)을 재현하고자 애쓴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그에게 실망을 주고, 그녀의 평상 차림은 오히려 어머니의 모습과 흡사하여 그에게 기쁨을 안겨준다. 이처럼 잃어버린 사람을 찾는 모티프가 이 작품의 발상이다. 등장인물 네 사람, 즉 사내(가게주인, 정운용 역), 손님(신(224)원균 역), 청년(박은수 역), 여자(박물관 관람객, 이선경 역)가 모두 자신이 잃어버린 사람을 찾는 방식의 미스터리 드라마를 전개시켜 박진감을 창출해낸다. 동일한 사건의 현장에 참가했으면서도, 등장인물들은 마치 미지의 세계에서 온 사람들처럼, 서로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 의사소통이 어려운 인간관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작품은 부조리한 구조를 통해 동시대인의 의식을 새롭게 투시한 점에 의의가 있다. 새로운 방법은 새로운 의미와 감동을 제공할 수 있다. 작가는 잃어버린 인간성을 직설적으로 해설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과 더불어 체험하도록 한다. 이른바 ‘말장난’을 넘어서서, 인간관계에 대한 진지한 체험을 관객에게 제공한 연극이었다. 국립극단이 공연한 임영웅 연출의 <환절기>(1968. 5)는부부 조대빈과 한나영이 과거의 상처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225) 끊임없이 짝을 바꾸며 전개되는 어지러운 사랑의 놀음과 그것이 초래하는 병적인 이미지를 통해 작가는 젊은 세대의 방향상실을 표현한다. 이처럼 오태석의 부조리극에서 삶에 근본적으로 내포된 모호성, 애매성, 불가해성은 한국 전후세대의 정신적 혼돈, 방황, 불황과 맞물려 개연성 있게 제시된다. 그 결과로 오태석의 부조리극은 관객들에게 충격과 공감의 감정을 동시에 전해준다.(226) 실험극장이 나영세 연출로 공연한 <교행>(1969. 11) 또한 오태석이 시도한 부조리극 중 하나이다.(226)   3)부조리극의 다양한 실험 극단 탈이 공연한 박조열 작, 이효영 연출의 <목이 긴 두 사람의 대화>(1967. 5)는 베케트 작 <고도를 기다리며>의 영향으로 씌어졌고 한국인들의 남북한 통일에 대한 기다림을 다룬다. 막이 오르면(227) 황량한 벌판을 배경으로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A(박근형 역)와 B(김인태 역)가 마주 서 있다. 그들이 각자 자신들의 대장을 기다리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연극의 내용이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두 인물은 그들의 대장을 흉내내 회담을 벌이지만, 회담은 결렬되고 그들은 다시 대장을 기다린다. 베케트의 작품에서 끝없는 기다림의 행위가 인간존재의 비극적 운명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라면, 박조열의 기다림은 다분히 정치사회적인 함의를 가진다. 철조망의 설정과 대장의 등장, 정상회담식 놀이의 삽입, 그들의 혈연관계(여자, 여운계 역) 등은 한반도의 기약 없는 분단과 불가해(不可解)한 통일의 상황을 암시한다.(228) 극단 드라마센터가 공연한 윤대성 작, 유치진 연출의 <출발>(1967. 4)은 순환열차의 이미지를 통해 사랑을 상실한 젊은이들의 좌절감을 표현했다. 역원이 홀로 남아 지키는 한 간이역에서 한 사내가 찾아(228)들면서 극은 시작된다. 기차가 서지 않는 폐쇄된 간이역에서 사내와 역원은 모두 기차를 기다린다. 두 인물의 대화를 통해 역원에게 마리아라는 아내가 있었고, 그 아내는 떠나간 옛 애인을 기다리다 열차에 투신자살한 것으로 밝혀진다. 그리고 마리아가 기다리던 옛 애인은 다름아닌 사내인 것으로 밝혀진다. 죽은 아내를 영원히 소유하고자 역원은 달려오는 열차에 몸을 던진다. 시발점과 종착점이 맞물리는 순환선, 기차가 서지 않는 폐쇄된 간이역의 이미지는 정주할 목적지를 상실한 채 떠도는 동시대 젊은이들의 뿌리뽑힌 정신상황을 표상한다. 죽음을 통해 완전한 사랑을 성취하고자 하는 역원의 비극적인 행위는 역설적으로 사랑의 성취를 불허하는 황폐한 현실을 드러낸다. 폐쇄된 순환열차의 이미지가 삶에 내포된 근원적인 부조리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해준다.(229) 극단 중앙무대가 공연한 이재현 작, 김세중 연출의 <제10층>(1969. 11)은 9층에 자리 잡은 건축사무소에 한 사내가 찾아들면서 시작된다. B로 명명도니 그 사내는 건축기사인 A에게 10층으로 가는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하지만, A는 건물에 10층이 없다고 말한다. B는 10층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우기면서, 건물 아래를 지날 때마다 10에서 비치는 거울의 반사광 때문에 봉변을 당해왔음을 호소한다. B와 언쟁을 나누며 A의 확신은 차츰 흔들린다. 시간이 지날수록 B는 자신의 망상에 더 깊이 빠져들고, 결국 그는 다시 거울 빛의 환상에 사로잡혀 9층에서 추락사하고 만다. A는 B가 그랬듯이 10층에 대해 헛소리를 하면서 막이 내린다. 존재하지 않는 10층의 불가사의한 이미지는 현실의 이면에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합리적인 사회에 은폐된 비합리적인 권력성이 도시사회의 계량화된 이미지를 통해 역설적으로 표현되었다.(229) 극단 에저또가 공연한 윤조병 작, 방태수 연출의 <건널목 삽화>(1972. 4)는 철도원 사나이의 실존적 상황을 그린 것이다. 철도원이 지키는 한 건널목에 낯선 사나이가 찾아들면서 시작된다. 무엇인가를 분주히 찾는 철도원에게 사나이는 각각 다리와 팔을 잃은 두 상이용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팔이 없는 쪽이 다리 잃은 쪽을 업고 다님으로써 합성인이 된 이 두 사람은 한 소녀와 사랑을 놓고 갈등하다가 층계 아래로 굴러 떨어져 죽음을 맞는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끝날 즈음 예정된 열차가 지나가고, 철도원은 드디어 자신의 귀가시간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의 기다림은 아내의 매춘행위가 끝날 시각에 맞춰 귀가하기 위한 것으로 밝혀진다. 이 극은 두 사람의 쉼 없는 지껄임으로 점철된다. 맥락이 닿지 않는 두서없는 대화는 언어의 파편화와 정신적 혼돈을 표현한다. ‘머리가 두 개’인 합성인의 이야기 또한 정신적 불구성을 부각시키는데 기여한다. 결국 두 인물이 전상자(戰傷者)임이 드러나는 대목에서, 이러한 불구성의 원인은 전쟁임이 밝혀진다.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된 정신상황을 두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우의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대화의 공연한 난해성이 오히려 극의 상징성을 방해한 것이 이 작품의 흠이다.(230)   4) 이현화와 부조리극의 창작 한국의 부조리극은 1970년대 후반 극작가 이현화에 이르러 한층 안정된 모습으로 정착되었다. 부조리극의 언어전략, 무대문법, 주제의식은 이현화에 의해 잘 정돈된 형태로 표출되었다. 이현화는 부조리극의 전략을 토대로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이후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서사극 등 다양한 양식 실험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다양한 실험(230)의 뿌리가 된 것은 부조리극이었다. 자유극장이 공연한 김정옥 연출의 <쉬-쉬- 쉬잇>(1976. 9)은 한 신혼부부의 숙소에 정체불명의 남녀가 방문함으로써 시작된다. 이 낯선 손님은 과거사를 들먹이며 부부에게 차례로 위협을 가한다. 무례한 손님의 출현에 부부는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에게 차츰 세뇌되어 간다. 손님들은 호텔 객실의 유사성을 이용해 부부를 다른 방으로 이리저리 옮겨 놓으며 각각 부부의 남편이자 아내로 행세한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장소이동은 부부의 의식을 혼란에 빠트리고 급기야 정신착란의 상태로 몰고 간다. 마침내 부부는 낯선 손님을 남편이자 아내로 인정하기에 이른다. 악몽 같은 밤이 지나자 부부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같은 객실의 침대에서 일어난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부부에게 다시 손님의 출현을 알리는 노크소리가 들리면서 극은 막을 내린다. 이 극은 일종의 숨바꼭질놀이다. 문제는 이 숨바꼭질 놀이가 손님들에 의해 조작된다는 점에 있다. 감시하는 자와 감시당하는 자의 대립은 이 작품에서 숨기는 자와 찾는 자의 끝없는 술래잡기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나아가 양자의 위치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무쌍하게 교체된다. 계속되는 위상의 역전현상은 개인의 의식 속에까지 파고들어 견고하게 내면화되고, 권력의 감시구조는 일상의 구석구석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부부조차도 서로의 정체를 끊임없이 의심하며 말 한 마디에도 ‘쉬-쉬-쉬잇’을 연발한다. 그런 의미에서 낯선 손님은 산업사회의 일상에 잠복한 억압적 권력체계의 촉수(觸手)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작가는 손님과 주인이 뒤바뀌는 해프닝을 통해 대중을 정치적으로 길들이려는 산업사회의 은폐된 감시체계를 드러내고자 한다.(임준서, 「이현화 희곡의 패러독스 미학 연구」,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PP.15~25 참조-원주)(231) 2000년 채윤일 연출의 공연에 대하여 김문환은 ‘이 작품은 하나의 블랙 코미디라 할 만하다. 폭력은 느닷없을수록 고 효과가 커진다. 여기에서도 신혼 남녀를 정신 이상 상태로까지 몰고 가는 폭력의 근거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이를 대표하는 낯선 남자는 당신이 아직 결혼식을 올릴 순서가 아니었다는 이유라는 이유를 댈 뿐이다. 이는 신혼 여자를 찾아온 여인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들은 “혐의란 일단 씌우는 쪽이 유리하다”고 태연하게 말한다.’고 평가했다.(김문환, 󰡔��삶과 꿈의 공연들󰡕��, 도서출판 삶과 꿈, 2004, PP.138~139 참조-원주) 민중극장이 공연한 유재철 연출의 <누구세요?>(1978. 6)는 <쉬-쉬-쉬잇>보다 먼저 창작되었지만 공연은 늦게 이루어졌다. 이 작품은 집을 잘못 찾아든 남녀(한인수, 오미연 역)간의 해프닝을 그리고 있다. 서로를 침입자로 몰아세우며 자기 정체를 증명하고자 그들은 이웃에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이웃(박찬현, 이경순 역)의 출현은 오히려 의혹만 가중시킨다. 결국 어떠한 존재증명의 단서도 확보하지 못한 남녀는 극도의 흥분상태에서 서로 몸을 섞는다. 아침이 밝은 뒤 남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익숙한 부부처럼 대한다. 그러나 그들의 집을 방문한 이웃집 여자를 남자가 ‘여보’라고 부름으로써 다시 남녀의 정체는 모호해진 채 막이 내린다. 서로의 존재를 몰라본다는 발상이 개연성을 얻는 것은 이 극의 공간적 배경이 아파트라는 점 때문이다. 아파트의 공간적 속성은 복제성에 있다. 이러한 기술복제시대의 공간이 갖는 시뮬라시옹의 속(232)성은 그 속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관계에까지 침투하여 인간적인 유대감을 부식시킨다. 아파트에 살고 있는 주민들 역시 하나의 복제된 오브제로 전락하여 격리되고 소외된다. 정체성을 상실한 군상(群像)이다. 가장 친숙한 관계인 부부 간에도 서로를 분별하지 못하는 이러한 착란은 복제사회의 저주받은 운명이 된다. 작가는 아파트의 미로구조를 빌어 산업사회의 규격화된 일상 속에서 정체를 상실한 동시대인의 정신상황을 부조리하게 극화하고 있다.(임준서, 「이현화 희곡의 패러독스 미학 연구」,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PP.66~68. -원주)(233) 이처럼 이현화의 연극은 순환적 플롯을 통한 열린 미스터리 구조, 개성을 잃고 자동인형화한 등장인물, 분열된 의식을 반영하는 분신의 설정, 상투적인 대사의 반복 등의 형식적 특성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이현화의 작품은 부조리극의 한국적 토착화를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임준서, 「이현화 희곡의 패러독스 미학 연구」,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2, P.76.-원주)   5) 임영웅의 <고도를 기다리며> 임영웅은 사무엘 베케트 작 <고도를 기다리며>를 국내에 소개하고 지속적으로 연출하였다. 극단 산울림이 한국일보 소극장에서 공연한 임영웅 연출의 <고도를 기다리며>(1969. 12)는 번역극이지만 한국인들이 창출한 부조리극의 대표작이다.(234) <고도를…>의 연출에 대한 소감을 묻는 인터뷰에서 임영웅은 “난 적을 만났다”, “난공사에 부딪쳤다”라는 비명 섞인 탄성을 토해냈다. 그만큼 그는 이 작품이 평생 자신과 싸워야 할 작품임을 직감했고, 줄기차게 그 작품에 자신의 온 생애를 걸었다.(234) 1988년 9월 88올림픽 기념축전 공연은 임영웅에게도 영예로운 한해였다. 부조리극의 권위자인 마틴 에슬린의 호평을 받았기 때문이다. 마친 에슬린은 그의 연출을 다음과 같이 격찬했다. ‘산울림의 무대는 부드러움과 무용적인 움직임, 그리고 고도로 양식화된 동작으로 베케트가 갖가지 상징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이용했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이러한 여출방식은 혹시 한국의 전통공(235)연예술이 지닌 추상적인 표현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매우 아름다운 이미지로 승화시킨 마지막 장면은 이 작품에 새로운 차원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중략) 한국무대는 두 주인공이 부드럽고 무용적인 광대로 그려졌고, 럭키의 대사도 단조롭고 기계적으로 처리, 효과를 살렸다. 연출과 연기에서 산울림 공연은 베케트극을 한층 진전시킨 훌륭한 무대였다.’(마틴 에슬린, 「<고도를 기다리며>에 대하여」, 󰡔��조선일보󰡕��, 1988.9.9.-원주)(236) 베케트의 고향인 더블린에서의 공연은(1990년 아일랜드 더블린 연극제 초청공연-인용자 주) 심리적인 부담이 컸지만, 대대적인 찬사를 받게 되었다. 아일랜드의 대표적인 신문인 「아일리쉬 인디펜던트」는 ‘한국의 고도는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호평했고, 「아일리쉬 타임즈」 역시 ‘임영웅의 연출은 희극성과 비극성을 공유하고 있다. 기다림은 초조하고 고통스런 과정으로 표현되었다. 희망의 설레임과 사라짐은 어두워진 달빛 조명으로 끝나는 종결부에서의 치미랗ㄴ 처리에 의해 깊은 비애감을 전달해 주었다’며 감탄했다.(236) 1999년 11월 도쿄 초청공연도 호평이었다.(236) 2001년 9월 제8회 베세토연극제 초청의 일본 시즈오카 예술극장 공연에서도 관객의 반응은 훌륭했다.(237) ‘현대를 사는 우리 모두가 이해하고 동의하는 현대 고전’을 만들기 위한 극단 산울림의 노력은 한국 부조리극의 역사를 빛내고 있는 것이다.   6) 부조리극의 의의와 미래 부조리극은 국내 연극인들에게 서구의 대표적인 실험극으로 인식되었고, 1960년대부터 동인제 극단들에 의해 활발히 소개되고 창작(237)되었다. 전통적 플롯의 부재, 몰개성적인 등장인물, 논리적 언어의 해체 등을 통해 부조리극은 현대인의 소외된 정신상황을아이러니컬하게 표현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까지 산발적으로 창작되어 공연되던 부조리극은 1980년대 이후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게 된다. 베케트, 이오네스코 등의 번역극 공연이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져오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238) 다른 나라의 경우도 그렇지만, 한국 부조리극의 창작은 애초부터 어려운 일이었다. 제공자나 수용자나 모두 ‘애매하고 난해한 연극’이라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뿌리를 내리지 못한 직접적인 요인을 찾는다면, 부조리극의 놀이성에 지나치게 집착한 결과로 보인다. 부조리극은 ‘제멋대로의 말장난’ 정도로 관객(238)들에게 인식되어 생명력을잃고 말았다. 오늘의 무대에서 부조리극을 찾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부조리극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 없다. 부조리극은 다른 연극과 절충하여 혹은 복합하여 여전히 표현의 방법으로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239)   3. 신화극의 대두와 원형성의 탐색 1) 살아 있는 원형 제의극과 신화극은 한 실체의 양면성이다. 제의는 신화적 세계의 표상이고, 신화는 제의에 의해 전승되기 때문이다. 신화는 좁게는 신의 이야기, 넓게는 설화(전설, 민담)를 포용하지만, 삶의 보편성과 원형성을 지니고 있다. 바로 이런 본질로 하여 신화는 시간을 초월하고, 소재를 초월하여 재해석되고, 끝없이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고대의 제의로부터 연극이 발생하고 발전했다는 논의는 연극학, 인류학, 예술학의 오랜 명제다. 연극적인 제의가 이후의 신화극 혹은 제의극의 모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태적 요소에는 고대 제의의 형식과 소재가 포하됨은 물론이고, 제의에 관련된 표현 기술과 열정, 신화, 내면적 정신이나 집단무의식, 복합적인 예술적 방법 등이 깊은 영향을 끼쳐 왔다.(240) 이 책에서 신화극은 제의극과 구분하여 서술하기로 한다. 제의극(굿극)은 주로 샤먼의 제의나 전승되는 제의양식과 관련된 현대극을 지칭한다. 신화극은 ‘신화의 현대화’라는 명제에 치중하므로, 제의적 측면보다는 신화적 측면을 확대시켜 조명될 필요가 있다. 신화를 새롭게 표현하는 양식에서는 자유분방한 개방성과 아울러 동시대적 해석과 의미의 창조가 주목된다.(241) 20세기의 신화극, 특히 1960년대 이후의 신화극은 당대 연극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출발하였다. 여타의 공연들이 동시대의 문제에 대한 시사적 고발, 과거사의 재현, 이데올로기의 선전, 즉흥적인 언어와 몸짓의 유희, 감각적인 오락, 무대기교나 메커니즘의 실험 위주 등에 치우치고 함몰되어 있는 데 대하여 근본적인 반성의 차원에서 출발한 것이다. 연극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던 신성한 의식성과 진실한 영혼의 탐구 및 삶의 본질성과 반복성을 오늘의 예술로서 새롭게 되살리고 창출시켜 보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순하게 고대적 의식에로의 회귀나 전통의 계승을 목적으로 한 연극이 아니라, 연극을 통해서 현실적 삶과 문화양식들이 지닌 근원성을 새롭게 해석해 보고자 하는 연극이다. 아울러 인간과 사회와 역사가 지닌 문화적 정체성과 신화적 원형성을 발견해내고자 하는 전위적이고 창조적인 연극을 통칭한다. 역사적인 소재에 근거한 작품의 경우에도, 역사적으로 분류하지 않고, 신화극에 포함시킨 것은 이런 까닭이다.(241)   2) 최인훈과 신화극의 대두 한국 연극에서 신화극을 일관되게 추구해온 자각로 최인훈이 주목된다. 신화극은 1970년대 최인훈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도되고 실(241)험되었다. 최인훈은 오늘의 한국 사회나 제도와 삶이 내포하고 있는 신화적 원형성을 보편성 있게 해석하고 이를 무대적으로 창조해내고자 노력해왔다. 그의 작품에는 숱한 신화와 설화가 소재로 활용되고 있지만 그 소재는 현실을 투시하고 어떤 근원성에 대한 발견과 창조를 위한 자료로서 이용된다. 그의 연극양식은 다양한 해석을 허용하는 복합성과 개방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의 연극은 우선 비극의 개념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주인공의 비극적 결말 자체에다 연극적 의미를 한정하지 않으므로 단순하게 비극으로 취급하는 것은 무리이다. 역사극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과거사를 현실의 시점에서 사실적으로 재구하고 그 사실을 객관적으로 해석하는 데 치중하지 않으므로 이러한 분석에도 무리가 따른다. 정치극의 관점에서도 논의가 가능하다. 그의 모든 작품에는 현실 정세와 정치적 상황에 대한 알레고리와 아이러니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표현주의극, 서사극, 상징극, 초현실주의극, 잔혹극의 측면에서도 해식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그 어떤 시각도 최인훈 연극의 전모를 효과적으로 밝히는 한계를 보인다. 결국 이 모든 요소와 양식을 총체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화적 보편성의 추구를 궁극적 목적으로 삼고 있는 점에서, 그의 연극은 신화극 양식으로 논의될 수 있다.(242) 극단 자유극장이 공연한 최인훈 작, 김정옥 연출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1970. 11)는 온달(장건일 역)과 평강공주(손봉숙 역)의 비극적인 설화와, 생명을 구해준 선비에 대한 보은(報恩)의 까치설화를 하나로 묶어 재구성한 것이다. 작가는 ‘온달과 평강공주의 만남을 인간의 근본적 경험의 한 원형으로 보자는 것이 이 작품에서 전하고 싶은 느낌’이라고 했다.(최인훈, 「만난다는 신비스러움」, 극단 자유극장, 󰡔��제17회 공연 팸플릿󰡕��, 1970. 11 참조-원주) 이 작품에서 신화적 원형성은(242) 불교적 개념인 인연과 업(業)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들은 빈번하게 나타나는 꿈 혹은 꿈의 이미지를 통하여 현실과 구체적으로 관련된다. 현실적으로 부부의 죽음은 욕망이 자초해낸 결과이고, 근원적으로는 인간적 삶이 내포한 숙명적 굴레이다. 삶 자체가 생명의 본질에 있어서는 미망((迷妄)이요, 꺼지지 않는 욕망추구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작품 가운데서 자연세계(산중)와 문명세계(평양성), 신성(온달)과 인성(공주), 삶과 죽음, 찰라와 영원, 꿈과 현실은 일상적으로는 대립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러면서도 순환논리에서는 입장의 변화로 표현되거나 초월논리에서는 하나의 양면성으로 상징화된다. 이 논리구조가 전체적으로 작품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243) 극단 산하가 공연한 표재순 연출의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어이>(1976. 11)는 아기장수설화를 희비극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최인훈은 이 설화의 상징구조는 예수의 생애와 같으며, 구약성서 출애굽기의 과월절(過越節)의 유래와도 동형이라고 보았다. 신화적인 것을 옳게 살리는 현대적 방법은 기본적으로 사실주의 연극이 가지는 충분한 설명과 압축의 공존이라고 했다.(최인훈, 「깊어질 충격을 기다리면서」, 국립극단, 󰡔��138회 공연 팸플릿󰡕��, 1989. 10 참조-원주) 이 작품의 신화적 원형성은 민중의 소망에 의해 구세자가 탄생하고, 또한 구세자의 죽음은 민중의 소망에 의해 부활한다는 명제로 제시된다. 일가족이 모두 죽음으로 끝난 마지막 마당에서, 그 일가족이 용마를 타고 등천하는 것이야말로 부활 소망의 전형적 모습이라고 할 만하다. 바로 이런 행위에서 비극을 초월하여 신화극으로 승화되는 요인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244) 극단 시민극장이 공연한 심현우 연출의 <달아 달아 밝은 달아>(1979. 9)는 고전 <심청가>의 현대화이다. 심청(손숙 역)이 창녀로 팔려가는 줄 알면서도 스스로 중국행에 오른 것은 아버지(임동진 역)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발로이자 고행의 선택이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녀에게 용궁은 그리던 어머니를 상봉하는 꿈의 장소가 아니라, 빚을 갚기 위해 남성들의 수난을 감내해야 하는 비정하고도 냉엄한 현실적 삶의 전쟁터(창녀촌)이다. 그녀가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는 것은 남성들과의 육체적인 관계에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정감을 지닌 김서방(신동훈 역)과의 만남을 통해서이다. 그리하여 그녀의 환생(귀환)은 용왕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힘이 이루어낸 결과가 된다. 마지막에 그녀의 실성한 웃음이 차라리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그녀가 창녀생활의 질곡으로부터 성녀적인 삶을 지향하는 인간적인 노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의 신화적 원형성은 인생의 가치야마롤 고난 가운데서 스스로 삶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러한 자각내용을 실천해가는 데 있는 것이다. ‘민중은 육신의 수난을 통해서 높고 깊은 마음에 이르러야 한다’는 작가의 말은 바로 이러한 원형을 시사한다. 속성(俗性)으로부터 신성(神性)을 찾아가는 연극놀이인 셈이다.(최인훈, 「마음」, 극단 시민극장, 󰡔��2회 공연 팸플릿󰡕��, 1979.9; 머시아 엘리아데, 이동하 역, 󰡔��성과 속󰡕��, 학민사, 1994; 로저 카이와, 이상률 역, 󰡔��놀이와 인간󰡕��, 문예출판사, 1994 참조-원주)(246) 극단 동랑레퍼터리가 공연한 유덕형 연출의 <봄이 오면 산에 들에>(1980. 3)는 문둥이 달걀귀신 설화를 현대화시킨 것이다. 작가는 ‘이 작품 속에서 모든 등장인물들이 자기들의 인간적 역량을 극한까지 북돋워야 할 만한 상황을 그려보았다. 그렇게 해서 인생은 어디쯤까지 무서울 수 있고 어디쯤까지 고상할 수 있는가를 알아보고(247) 싶었다’고 했다.(최인훈, 「얼굴」, 동랑레퍼토리극단, 󰡔��공연 팸플릿󰡕��, 1980.3-원주)(248) 이 작품의 신화적 원형성은 진실한 구원의 사랑이야말로 개개인의 헌신적인 노력과 자기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보편성을 통해서 드러난다.(248) 국립극단이 공연한 허규 연출의 <둥둥 낙랑둥>(1980. 9)은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의 설화, 살생기우제 설화를 현대화한 것이다. 작가는 ‘인간은 어느 시대의 어떤 환경에서든 자기 삶의 끝까지 가려고 들면, 대뜸 자신이 신화의 주인공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럴 때 보통 자기라고 여겨오던 존재는 실은 그림자에 지나지 않고, 진실한 자기는 이런 신화적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우리들의 생활에서 이런 각성의 국면을 만나기는 그리 쉽지 않다’고 언급했다. 이를테면 이러한 각성을 호동과 낙랑공주 쌍둥이를 통해서 무대에서 표현해 보고자 이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최인훈, 「연극이라는 의식」, 국립극단, 󰡔��97회 공연 팸플릿󰡕��, 1980. 9 참조-원주) 이 작품의 신화적 원형성은 <봄이 오면…>과 같다. 즉 구원의 사랑은 개개인의 헌신적인 노력과 자기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보편성이 그것이다.(249) 최인훈의 연극 중 대표적인 신화극으로는 <옛날 옛적에…>와 <봄이 오면…>이 꼽힐 만하다. 이 두 작품이야말로 오늘의 현실 위에서 살아 있는 신화로 재생되었고, 신화적 원형성이 현대적인 축제로서(250) 부활했으며, 역동적인 구조로서의 드라마, 객관성과 필연성을 갖춘 드라마로서의 조화를 창출하였다.(251)   3) 이강백의 신화극 최인훈과 함께 신화극을 주도한 작가로 이강백이 주목된다. 최인훈이 주로 고전의 재해석을 통해 한국인의 심성에 내재한 보편적 원형성을 발견하는 데 치중했다면, 이강백은 주로 신화적 소재를 알레고리화하여 동시대의 현실을 비판하는 데 활용하였다.(251) 극단 가교가 공연한 이강백 작, 이승규 연출의 <내마>(1974. 8)는 국가적인 일을 기록하는 관리 내마의 일대기를 극화한 것이다. 고대의 역사적 사실에서 취재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허구담에 지나지 않는다. 내마가 겪는 사건들은 동시대적 삶과의 알레고리가 짙다는 점에서 현실성을 갖는다. 즉 욕망, 특히 권력욕은 애국, 위기극복, 혹은 국가발전이라는 ‘허구의 모자’를 쓰고 존재하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팔은 악마와도 손잡고, 다리는 더러운 늪길이라도 마다 않는 인간의 속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군사독재시대의 살아있는 신화라고 할 수 있다. 사실성과 공정성에 충실한 기록관으로서뿐 아니라, 독재자를 살해한 데 대한 보답으로 새 지도자는 내마에게 ‘정의의 손’이라는 의수(義手)를 제공한다. 그는 독재자를 살해하다가 한 팔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마는 바로 그 새 지도자에 의해서 살해된다.(251) 현대극회가 공연한 김선옥 연출의 <파수꾼>(1975. 3)은 이솝우화를 빌어 유신시대의 억압적 정치현실을 비판한 작품이다. 막이 오르면 파수꾼 가, 나, 다가 망루를 지키고 있다. 노인인 파수꾼 나와 소(252)년인 파수꾼 다는 망루 위에서 외치는 파수꾼 가의 신호에 따라 양철북을 두드려 이리의 내습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파수꾼 가는 끊임없이 이리떼의 습격을 외치고, 나와 다는 쉼 없이 북을 쳐댄다. 소년은 이리떼의 습격을 알리는 파수꾼의 직업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어느 날 무심코 망루 위에 올라가본 파수꾼 다는 파수꾼 가의 외침이 거짓이었음을 확인한다. 충격에 사로잡힌 소년은 사실을 마을 주민에게 알릴 것을 결심하지만, 촌장은 마을의 안녕을 이유로 소년을 회유한다. 결국 진실은 은폐되고 망루는 그대로 유지된다. 이강백은 잘 알려진 이솝우화를 활용해 분단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폭로한다. 애초부터 현실에 대한 우화적 형상화를 의도한 만큼 이 작품에 등장하는 파수꾼은 유신시대의 지식인 계층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소년은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깨닫고 진실을 폭로하고자 하지만, 촌장의 협박과 회유에 굴복해 파수꾼 가와 나의 전철을 되밟는다. 이는 곧 당대의 왜곡된 정치현실의 근본적인 원인이 지식인들의 권력유착과 타협에 있음을 암시한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 결국 작가는 유신체제 하의 왜곡된 현실을 비판하면서, 그러한 현실을 야기한 원인이 바로 자신과 같은 지신인에게 있음을 작품을 통해 반성적으로 성찰하고 있다.(253) 극단 시민극장이 공연한 <올훼의 죽음>(1986. 2)은 희랍신화를 차(253)용한 모노드라마이다.(중략) 막이 열리면 무대 위에는 작은 탁자 하나, 그 위에 찻잔 하나, 무대 전면에는 스펀지로 깎아 만든 여러 개의 손이 마치 나뭇가지에 잎이 달리듯이 붙어 있다. 기둥의 축을 돌리면 그 손들은 빙글빙글 돌게 되어 있다. 이 작품은 그렇게 손을 돌려가면서, 커피를 마시는 시늉을 해가면서 전개된다. 주인공 ‘나’(중략)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손을 잡느냐가 문제이며, 속도만이 문제가 된다. 상대방의 얼굴이나 마음씨, 인격 등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소개장, 추천서, 훈장, 표창장 등으로, 그것을 도구로 삼아 그는 이른바 큰손잡기와 승급에 열을 올린다. 현대인의 현실추구적인 자세와 그 맹목적인 어리석음응ㄹ 올훼와 비교하여 부각시키고자 한 점에서 작가의 의도를 찾을 수 있다.(254) 극단 성좌가 공연한 권오일 연출의 <봄날>(1984. 9)은 동녀(童女)설화를 바탕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가족생활을 투시한 작품이다. 아버지가 여러 여성과 관계하여 각기 배다른 형제를 낳았고, 여성이라고는 없는 이 집에 장자가 어머니의 역할을 한다. 어느 날 이(254)웃 절의 스님이 밥이나 먹여 달라며 동녀를 맡긴다. 매사에 의욕이 없던 막내는 동네에게 순정을 느낀다. 그러나 아버지는 동녀의 처녀성마저 빼앗는다. 마지막에 그녀는 그의 며느리가 되어 아이를 잉태한다. 막내만이 아니라 사춘기에 접한 다른 아들들도 여성에 대한 욕구가 봄날처럼 충만한다. 이처럼 이 작품은 성적인 이미지로 가득 차 있으며, 생명에 대한 상징으로서 성의 본질을 추구한다. 아버지가 남성적인 정력을 증강하고 지키고자 하는 것과 재물을 독점하고자 하는 욕구는 동일시된다. 이 작품의 근간을 이루는 아버지의 폭력과 독점은 동시대 군사독재 권력과의 알레고리로 자주 비유되었다. 사건이 전개되는 도중에 그림, 시, 논설, 신문기사 등이 반복적으로 삽입된다. 현실성과 객관성으로 강조하려는 일종의 서사적 기법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은 전체 구조에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사건이 지닌 신화성 자체의 구조가 견고하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배고프고 일거리가 없는 나른한 봄날, 아버지는 돈을 감추어 둔 채 호식(好食)하며 바람이나 피우고, 아들들은 들끓는 욕망을 주체할 길 없어 갈등하고 저항한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기동할 수 없게 된 늙은 아버지와 가출하여 성숙한 아들들은 서로서로 그리워한다. 성숙을 위한 지난날의 싸움이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순환되는 원리를 극명하게 보여준다.(255) 극단 민중극장이 공연한 정진수 연출의 <칠산리>(1989. 8)는 한국인들에게 강하게 남아있는 사상편향성에 대한 위험성을 비판하고, 모두가 어머니의 자식이라는 생명의 근원성을 제시한 작품이다.(256) 국립극단이 공연한 이승규 연출의 <비옹사옹>(1986. 1)은 고전 <옹고집전>을 현대화시킨 것이다. 자기 기준으로만 모든 가치를 판단하는 편향된 인간을 ‘옹고집’이라고 하는데, 옹고집을 미워한 신이 그를 반성시키고자 가짜 옹고집을 내세워 진짜를 골탕먹이고 회개시킨다는 내용이다. 익상백은 고전을 현대화하는 과정에서, 무대를 원형의 개방된 공간으로 설정하고, 사계절의 변화를 순리대로 보여주며, 인간의 삶을 보편성과 욕망체계라는 대조적 입장에서 해석하여 극화하였다.(257) 이강백은 사실극, 희극, 서사극 등 여러 장르에서 우수작을 내놓았으나 특히 신화극에서 걸작을 생산했다.(258)   4) 신화의 다양한 활용 1970년대 후반부터 다양한 신화극이 선보이기 시작한다. 극단 민예극장이 공연한 이언호 작, 손진책 연출의 <소금장수>(1977. 3)는 옛 사람들의 소금에 대한 인식, 즉 신비성과 영험성에 뿌리를 둔 작품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소금장수는 어려움에 처한 서민을 구제하고 억울한 입장에 처한 사람에게 희망을 준다.(258) 극단 산하가 공연한 노경식 작, 강영걸·김창화 연출의 <하늘 보고 활쏘기>(1980. 1)은 한 활꾼(이호재 역)의 이야기를 소재로 신화적인 세계관을 펼쳐보인 작품이다.(259) 이 작품에서 활꾼의 이야기는 격리→수난(투쟁)→부활로 이어지는 영웅신화의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다. 밤과 낮의 대립, 괴물과의 투쟁, 보상으로서의 결혼 또한 고대 신화에서 찾을 수 있는 전형적인 화소(話素)이다.(260) 극단 미추가 공연한 박조열 작, 손진책 연출의 <오장군의 발톱>(1988. 6)은 1975년 9월에 극단 자유극장이 국립극장의 공연을 목표로 연습 중에 예술윤리위원회의 대본검열을 통과하지 못한 작품이다. 당시 군부정권은 ‘군인의 위상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상연을 허가하지 않았다. 오장군(전일범 역)은 말 그대로 장군이 아니라 시골청년의 이름일 뿐이며, 군인으로서는 졸병에 지나지 않는(260)다. 동쪽나라의 군에 입대한 청년은 서쪽나라와 대치하고 있는 전선에 배치되어 양편의 작전과 선전에 이용되고, 끝내 총살형을 받아 희생된다. 이러한 사건이 조작되어 진행되는 과정에서 양편의 야전사령관(김종엽, 정태화 역)은 각기 자기 측에 유리한 명분을 내서우기 위해 온갖 야만적인 행동을 드러낸다. 마치 매가 무서운 발톱을 감추고 있다가 순간적으로 드러내듯이 말이다. 사령관의 발톱에 희생된 청년의 현실을 ‘장군의 발톱’이라는 이미지로 부각시킨 것이다. 작가는 6·25 때 수개월간 최일선 초총병으로 싸웠던 체험을 토대로 이 작품을 썼다.(박조열, 「몇 가지 기억과 분격의 메모」, 극단 미추, 󰡔��오장군의 발톱󰡕��(공연 팸플릿), 1988. 6-원주)(261) 진실은 언제난 강자의 논리에 의해 조작되고, 순진하고 무지한 사람들은 언제나 조작의 희생양이 된다는 원형성을 보여준 점에서 이 작품은 신화극으로 간주된다.(261) 극단 배우극장이 공연한 윤정선 작, 주요철 연출의 <나는 어이 돌이 되지 못하고>(1986. 11)는 호동의 설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우리 현대희곡사에서 왕자 호동의 이야기는 훌륭한 소재로(262)서 수차에 걸쳐 극화된 바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호동의 의붓 어미인 원비가 호동이 왕위를 계승할까 두려워 왕에게 모함하였는데, 이에 그는 불효를 저지르지 않고자 자결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을 놓고 작가는 나름의 관점에서 호동설화를 재해석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호동의 죽음을 가져오게 한 요인은 원비의 호동에 관한 사랑과 증오로 설정되어 있다. 그리스의 운명비극 <히폴리토스>(BC 428) 같은 분위기가 감도는 이 작품에서 관중들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재현을 목격하게 된다.(263) 극단 목화가 공연한 오태석 작·연출의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나>(1900. 10)는 고전 <심청전>의 신화적 모티프를 차용해 오늘의 세태를 풍자한 작품이다.(263) 극단 민예가 공연한 이만희 작, 강영걸 연출의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1990. 4)는 불상을 조각하는 승려의 내면의식을 다룬 것이다. 불교수행을 본격적으로 다룬 연극사 최초의 공연이었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받았다.(중략) 조각가가 승려가 된 것은 수년 전에 일어났던 아내의 사건(265) 때문이다. 아내는 그가 보는 앞에서 폭력집단에게 윤간(輪姦)을 당한다. 그 사건으로 그는 아내를 싫어하게 되고, 승려가 되어 불상을 조각하게 된다. 첫 장면에서 그는 자살한 혼령으로 등장한다. 승려들의 매우 현실적인 사찰생활과 구도정신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가운데, 작가는 조각가를 통해 ‘과연 불교가 인간에게 구원이 될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질문한다. 이러한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이 작품에는 조각가의 분신(망령)이 등장하여 갈등한다. 그가 애써 만든 불상은 흉측하고 일그러진 불상(자화상)에 불과하며, 그는 끝내 자기 생명마저 포기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인간의 무지(無知)가 목탄구멍 속의 어두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비유된다. 결국 불교의 실체는 존재에 대한 자각에서 시작하여 자각으로 순환(輪廻)되는 무한한 과정임을 암시해 준다.(266) 극단 목화가 공연한 홍원기 작·연출의 <천마도>(1998. 1)는 경주 천마총의 천마도(天馬圖)에서 연상된 삼국통일의 영웅 김유신의 일대기에 대한 재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267) 극단 인혁이 공연한 이해제 작, 이기도 연출의 <흉가에 볕 들어라>(1999. 10)는 전통적인 가신(家神)이야기를 초공간과 초시간의 개념으로 극화한 것이다. 한국의 집에는 집의 공간을 지키는 여러 신들이 존재한다는 샤머니즘적 인식이 있었다. 이 인식을 근거로 30년 전에 가족들이 모두 죽어 ‘죽음의 집(흉가)’이 된 낡은 고가 주변에 ‘당시 죽어 귀신이 된 가족들이 그대로 머물며 여전히 갈등한다’는 드라마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전통적인 가신인 구렁이여신(뱀신, 황정라 역)이 애잔한 노래를 부르며 전개되는 이 무대에 유일하게 생존한 옛 하인(현재의 행상인, 한명구 역)이 찾아오고, 문신(門神)이 된 가부장 어른(박용수 역)이 생사의 내기를 걸면서 극이 시작된다. 하인은 끔찍한 비극과 엄청난 죄악의 진실을 밝혀내는 책임을 떠맡게 된다. 지난날 죄악의 발단은 가족 상호간에 무모하게 진행된 살인행위(268)이고, 살인의 동기는 농지(農地)를 차지하기 위한 욕망이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첩을 얻어서라도 아들을 낳으려는 것은 농지를 상속하려는 욕망과 동일시된다. 곱추 아들이 성불구자인 것을 안 가부장은 아들의 첩과 관계하여 아이를 잉태시킨다. 곱추 아들의 모친은 초조한 나머지 아들의 첩과 하인과의 성관계를 강요한다. 그러나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의 부정한 잉태가 하인에 의해 밝혀지면서 연쇄살인극이 벌어진다. 가신설화를 빌어 욕망의 본질을 부각시킨 이 공연은 고전적 스토리의 흥미로움이 관객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복잡한 사건전개에 비하여 인물들의 성격구축이 미진한 것이 아쉬웠다.(269) 연희단거리패가 공연한 최창근 작, 김경익 연출의 <봄날은 간다>(2001. 6)는 혈육관계만을 가족으로 인식해온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족개념을 부각시켜 주목받았다. 모든 인간은 지역·혈연·성별에 상관없이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될 수 있고, 사랑하는 삶이야말로 최고의 가치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시적인 대사로 부각시켜 감동을 준다.   5) 이윤택과 신화극의 심화 최근의 신화극 가운데서는 이윤택의 실험적 연극이 주목된다. 이윤택은 신화적 구조를 차용하면서도 여기에 다양한 연극양식을 접목시킴으로써 한층 진전된 신화극을 선보였다. 연희단거리패가 공연한 이윤택 작·연출의 <바보 각시>(1993. 8)는 이야기구조를 지닌 드라마가 아니라 바보 각시(이윤주 역)라는 별명을 지닌 여자를 중(271)심으로 한 슈프레히콜(sprechchor) 형식의 신화극이다.(중략) 전설에 의하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각시가 마을에 나타나서 여성을 그리워하는 뭇 남성들에게 차례로 몸을 제공(이것을 ‘살보시’라 했다)하다가 추방되었는데, 후일 그 여인은 부처님으로 판명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윤택은 이 설화를 현대 서울의 신도립역 주변을 무대로 재창조해냈다. 역 주변의 세태는 남에게는 차갑기 이를 데 없고, 살아가기는 더더욱 고달프며, 정치고 종교고 학문이고 구원이라고는 찾아볼 길 없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런 세태 속에서 외로움과 배고픔으로 방황하는 남성들에게 유일하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사람은 각시뿐이다. 불교적인 진리보시와 재물보시뿐만 아니라, 현대인에는 사랑보시가 더욱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이 작품은 부각시킨다.(272) 국립극단이 공연한 이윤택 작·연출의 <연산>(2003. 9)은 1995년 6월의 초연 대본을 대폭 수정한 것이다. 초연에서는 어머니의 불행한 죽음으로 인하여 광기에 사로잡힌 연산군이 권력무상에 사로잡히는 모습을 잘 표현한다. 동시에 그의 허무가 후궁 녹수와 더불어 왕도를 벗어난 쾌락주의를 탐닉하게 하는 동기로 작용하는 과정을 잘 구현했다. 그러나 작품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의미의 부각이 미진했다. 2003년 재공연에서는 이러한 결함을 고려하여 ‘권력추구의 역사야말로 광기의 역사이며, 권부(權府)야말로 죽음의 집에 다름 아니’라는 신화성을 분명하게 부각시켰다. 이 공연에서 연산의 모친을 살해한 당파의 행위도, 다시 그들을 살해한 연산의 행위도 제각기 권력을 지키려는 인간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부각되었다. 연산의 광기를 사회정의상 묵인할 수 없다는 새로운 권력집단의 광기(쿠테타)는 이 작품의 신화적 원형성을 극명하게 드러낸다.(273)   6) 재일동포 정의신·김수진의 충격 재일 한국인 극단 신쥬쿠 료산바쿠(新宿梁山泊)가 공연한 정의신(鄭義信) 작, 김수진(金守珍) 연출의 <천년의 고독>(1989. 10)은 소외된 삶 속에서 꿈을 꾸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의 ‘이상적 지향성’을 밀도 있게 추구한 작품이다. 일본 실험극의 대표주자 반열에 서 있는 두 사람의 작업은 국내 연극계에 신선한 충격과 자극을 안겼다.(274)   7) 신화극의 의의와 과제 한국의 신화극은 신화적 소재나 이야기 구조를 통해 삶의 보편성과 원형성의 재현을 목표로 시작되었다. 한국 고유의 전래 신화나 설화가 적극적으로 발굴되어 연극에 활용되었고, 다시 이것이 현대적인 맥락 속에 재배치되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과정에서 신화나 설화는 정치사회적 담론으로 재해석되거나 패러디되거나 알레고리화되었다. 신화는 현실을 재현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거나, 혹은 그 자체가 연극의 목적이 되기도 했다.(276) 이제부터 신화극은 신화나 설화를 연극의 직접적인 소재로 삼거나 이를 도구화하는 단계를 넘어서야 한다. 오히려 오늘의 현실 속에서 신화적 성격을 발견해내고, 이를 다시 신화적 논리로 해석해낼 수 있어야 한다. 연극을 통해 살아있는 신화를 창조해야 한다는(276) 말이다. 작가의 신화학을 분명하게 정립하여 그것이 오늘날 유용하다는 사실을 예술적으로 입증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신화극의 과제이다.(277)   4. 잔혹극·개방극의 수용과 절충 1) 개방과 참여 한국에 표현주의가 수용된 것은 1920년대 초부터였다. 이론과 더불어 희곡이 창작되었지만 식민지치하인 데다가 전위적인 연극이 발을 붙일 수 있는 환경이 아니어서 실연에는 이르지 못했다. 앞서 서술한 대로, 1950년대에 실존주의 연극이 나타났고,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실험극이라는 개념으로 서사극과 부조리극이 수용되고 창작, 공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실험극과는 달리하는 일련의 실험극이 수용되었다. 잔혹극, 개방극, 참여극, 정치극, 가난한 연극, 살아 있는 연극 등 복합적인 명칭으로 통용되었다. 엄격하게 보면, 아르토(A. Artaud), 그로도프시키(Grotowski), 줄리앙 벡(J. Beck), 피터 부룩(P. Brook), 조셉 차이킨(J. Chaikin), 피터 슈만(P. Schuman), 리차드 쉐크너(R. Schechner), 알란 캐프로(A. Kaprow),(278) 장 루이 바로(Jean-Louis Barrault) 등 그 누구의 연극도 제대로 수용되지 않았다. 당시 현실과 고연여건에 따라 복합적이고 절충적인 문화굴절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한상철에 의해 「아르토의 잔혹연극론」(󰡔��연극평론󰡕��, 1970년 봄호) 정도가 소개되었을 뿐이다. 이런 류의 실험극은 종래의 창조자 중심에서 수용자 중심으로, 폐쇄적인 공연방식에서 개방적인 공연방식으로, 극장주의에서 탈극장·초극장주의로, 언어 위주의 표현에서 육체 위주의 표현으로, 몰정치적인 주제에서 정치적인 주제로, 개인적 사고에서 집단적 사고로, 사실적인 전달에서 이미지적인 전달로, 풍족한 무대에서 가난한 무대로, 과거회귀적인 방향에서 현재와 미래지향적인 방향으로, 작품의 완결성 추구보다는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더 중시하는 쪽으로 전개되었다. 이처럼 개방적이고 해체적인 특성을 보이면서도, 특정한 양식으로 수용되기 어려운 연극의 흐름을 여기서는 ‘잔혹극·개방극’이라는 이름 아래 통합하여 기술하기로 한다.(279)   2) 오태석의 잔혹극 다양한 양식의 절충을 통해 실험적인 연극을 시도한 오태석은 1970년대에 들어 일련의 잔혹극을 선보였다. 극단 드라마센터가 공연한 유덕형 연출의 <초분>(1973. 4)은 초분장(草墳葬)으로 상징되는 ‘섬의 질서’와 육지를 동경하는 ‘육지의 질서’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들의 욕망을 강렬하게 표현한 작품이다.(280) <초분>에서 시작된 생명적 원형성의 추구는 안민수 연출의 <태>(1974. 4)를 통해서 분명해졌다. 드라마센터가 공연한 <태>는 조선시대 어린 나이에 형의 왕위를 계승한 조카 단종(함현진 역)을 내쫓고 왕위를 빼앗은 세조(이호재 역)의 쿠테타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역사적 시비보다는 그 사건을 통해서 생명의 원초성과 존엄성을 진지하게 추구하는 방향으로 주제가 설정된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초연될 당시는 때마침 군사적인 통치가 진행되고, 사회 각처에서 고문이니, 탄압이니, 독재니 하는 반휴머니즘적인 차원에서의 비난과 고발과 저항이 전개되던 상황이었다. 때문에 이 작품의 현실적 의의에 대한 관객들의 애착과 관심은 한층 고조되었다.(281) 극단 목화가 공연한 오태석 작·연출의 <부자유친>(1987. 9)은 세자빈인 홍씨가 서술한 고전소설 <한중록>을 원전으로 한 재창작이다. 부왕 영조(정진각 역)가 후계자인 세조(한명구 역)를 뒤주에 넣어 굶겨 죽인 사건을 수술실의 쓰레기통에 넣어 죽이는 장면으로 현대화시켰다. 일반인들에게는 황당하고 낯선 충격을 안겨주었다. 일관된 줄거리가 없고, 세자의 광기에 이유도 없으며, 동시에 왕의 자식에 대한 증오와 학대에도 분명한 동기부여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283) 한국의 전통개념인 부자유친, 이것은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복잡한 갈등과 미묘한 반감을 갖게 한다. 이 작품은 패러디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환골탈퇴이자 원작을 뒤집은 아이러닉 패러디라는 점에서 동시대성을 가진다. 모두가 죽음에 직면하여 살길을 찾아야 하는 사(283)람들의 허우적거림이 부자간 권력의지의 그물망 속에서 처절한 익살로 전개된 점이 주효했다.(284) 극단 목화가 공연한 오태석 작·연출의 <비닐하우스>(1989. 3)는 발표되자마자 문제작으로 주목 받았다.(중략)이 작품은 국가적인 비상사태를 맞아 피를 집단채혈하는 비닐하우스 내부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다룬다. 채혈소이자 집단수용소인 비닐하우스는 연극의 무대가 되는 동시에 이 작품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왜곡된 권력의 상징인 국가를 의미하기도 한다. 비닐하우스에는 소위 국민적 합의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법에 의해 수명의 국민(재소자)들이 들어(284)와 있다. 그들은 매일 채혈을 강요당하거나 제도에 대한 반발을 근절시키기 위한 집단훈련을 받는다. 무대 후면 높은 곳에는 사령탑이 설치되어 있고 모든 지시와 보고는 이 사령탑을 통해서 이루어진다.(285) 극단 목화가 공연한 오태석 작·연출의 <천년의 수인>(1998. 5)은 한국 현대사가 테러와 폭력으로 얼룩진 과정이었고, 오늘날에도 이런 요소가 잔존해 있음을 꼬집은 작품이다. 이 작품의 중심인물은 백범 김구를 저격한 늙은 테러범 안두희(安斗熙, 이호재 역), 지리산에서 빨치산 투쟁을 하다 잡힌 비전향 장기 복역수(전무송 역), 그리고 1980년 광주 민주화투쟁에 진압군으로 참전했던 졸병 청년(이명호 역) 등 세 사람이다. 이들은 모두 병원에 입원한 사태로 시종 행동한다. 안두희는 애국자를 저격했다는 죄로 역(逆)테러를 맞았고, 복역수는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의 뇌출혈 환자이며, 청년은 데모 현장에서 시민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시달리다 노이로제에 걸린 상태이다. ‘누가 이들에게 살인을 하도록 명령했는가’ 하는 것이 극 행동을 이끌어가는 키워드이다.(286) 무대는 입원실이자 세 사람이 과거를 재현하는 극중극 장소로 다양하게 활용된다. 이른바 놀이극이다.(286)   3) 이현화의 잔혼극 오태석에 뒤이어 이현화 또한 1970년대부터 잔혹극을 지속적으로 추구하였다. 극단 민중극장이 공연한 이현화 작, 정진수 연출의 <카덴자>(1978. 9)는 1970년대의 정치적 상황을 피지배층의 입장에서 표상한 작품이다. 피비린내 나는 살육과 공포 분위기를 거쳐 마침내 쿠테타에 성공한 15세기 세조의 만행을 작가는 ‘어느 때나 어디서(287)나’ 일어나는 보편적이고 반복적인 일로 해석함으로써, 역사를 일상적인 유사구조로 병치시키는 데 성공한다. 객석에서 무작위로 이끌어 올린 여자관객(강선숙 역, 이 배우는 연극이 끝날 때까지 관객의 입장을 고수한다)에게 왕(세조)이 다짜고짜 “네가 네 죄를 알렷다”라고 공갈하는 대목에서부터 극은 시작된다. 객석으로 되돌아가고자 몸부림치는 여자에게 결박이 지워지고 모진 고문이 가해진다. 이어서 테이프로 입이 봉해진 상태에서 마치 어린 단종과 같이 여자관객의 머리에 왕관이 씌어진다. 왕은 이 어린 상황을 마치 장난감처럼 앞에 놓고 일방적인 정치유희를 벌인다. 왕의 대사는 미리 짜여진 각본에 따라 곁에 서 있는 선비(신하)에 의해 대변된다. 선비의 변신과 죽음 역시 역사적인 알레고리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는 비로소 “내 죄를 알겠소”라고 절규하면서,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한다. 질식할 것만 같은 상황 속에서 쿠테타는 역사적인 정당행위로 묵인되고, 일단 집권에 성공한 권력집단은 또 다른 공작정치를 펴기에 분주하다. 작품에 등장하는 여자는 역사로부터 소외된 한 개인, 역사와 자신은 별로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는 한 서민, 더욱이 역사를 변혁시키는 데 자신은 전혀 무력한 존재라고 절망하고 있거나 아니면 죽음이 두려워 나서기를 주저하는 서민, 마치 연극의 구경꾼같이 역사는 구경만 하면 된다고 느끼는 대부분의 민중적 개체에 대한 상징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여자를 이끌어내어 공작적인 연극놀이를 하는 것은 역사적 상활에 참여시킴으로써 관객 개개인의 현실적 문제의식을 증폭시키기 위한 연극적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의 모든 연극적 언어와 기호들은 현실이 곧 역사라는 진실을 관객들에게 체현시키는 데 기여했다.(288) 극단 쎄실이 공연한 채윤일 연출의 <불가불가>(1987. 10)는 연극이 하나의 ‘의도된 놀이’라는 것을 관객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무대연습 장면으로 전개된다.(중략)이렇게 해서 양식화된 연극으로부터의 탈연극화, 역사극으로부터의 역사놀이화가 이루어진다.(289) 국립극단이 공연한 강영걸 연출의 <넋씨>(1991. 4)는 흔한 ‘씨받이 이야기’의 상투성을 초월한 여성극이다. 수난시대를 살아오면서도 자녀를 낳아 꿋꿋이 길러온 모성의 세계를 연대성(連帶性) 있게, 상징성 있게 잘 형상화했기 때문이다.(290) 이 작품에서는 인물 개개인의 행동과 그것들이 순간순간 창출시켜 나가는 갈등 자체에 초점이 주어진다. 시대배경이라든지 주위 환경 등을 이용해서 극을 이끌어 가거나 극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방식은 배제된다. 극적인 갈등 자체만을 발현시키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침묵의 언어 곧 육체적 표현 위주의 공연이어서 강렬한 느낌을 주었다. 이현화는 그간 리얼리즘을 비롯한 여타의 기존 방법에 대한 무의미한 추종을 줄곧 거부하여 왔다. 신작을 발표할 때마다 기존 방법에 대한 과감한 절충과 더불어 신선하고 기발한 착상을 드러내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보수적이고 기성적인 낡은 연극인식에 일대 자극과 공격을 퍼부었다. 그런 점에서 이현화의 개성은 충분히 인정된다. 연극을 ‘관객과 함께 하는 놀이’로 인식하고, 언제나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앞서가는 ‘첨단적인 놀이연극’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그의 일관된 실험자세야말로 가히 전위적인 작가라는 칭호에 걸맞는다 하겠다.(291)   4) 1980년대의 개방극 극단 동랑레퍼터리가 공연한 마이클 커비 작, 김우옥 연출의 <내·물·빛>(1980. 9)은 구조주의 연극을 표방한 한국 초연작으로 관심을 끌었다. 이 연극은 종래의 연극이 필수적으로 갖고 있던 플롯이 전혀 없다. 플롯 대신 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다른 요소들이 대거 사용된다.(292) 인물(최성관, 양서화, 최종원 등역) 역시 개성보다는 구조로서 행동한다.(292) 두 사람의 신분이나 관계나 배경 등은 이 작품에서 전연 관심 밖의 일이며 따라서 그들에 대한 어떤 감정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상황이 만들어 놓는 우리 생활의 구조적 배열이다. 이 작품 속에는 인간의 일상생활의 의미들을 구조적으로 투시하는 논리성과 원리가 충분히 깔려 있고, 그러한 구조가 빚어내는 현대인의 불안정, 사회적 갈등, 존재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현실적 삶과 대응하는 새로운 연극적 창조의 한 전형을 보여준 공연이었다.(293) 서독에서 활동하다 귀국한 무세중의 공연 <反, 그리고 통·막·살(통일을 위한 막걸리 살풀이)>(1982. 2)은 국내 전위극 활동에 큰 자극을 주었다. 이 공연은 잔혹극과 초현실주의, 그리고 한국의 전통연희 양식이 총체적으로 결합된 퍼포먼스였다.(293) ‘통·막·살’에서는 한국의 전통적 제의의 형식을 이용해 남북분단의 현실과 통일에의 염원을 상징적으로 표출함으로써 관객들의 큰 공감을 자아냈다. 흰 광목이 무대 중앙을 가로지르게 한 뒤 양쪽에 있던 무세중과 배우들이 광목을 찢고 만나는 식으로 연출되었다. 그 과정에서 배우들은 옷을 벗고 막걸리통에 들어가거나 진흙을 몸에 바른 채 자학행위를 하는 등 잔혹하고 충격적인 동작을 선보이며 분단의 고통을 육체적인 언어로 표현하였다.(293) 전체적으로 대사극의 거부, 잔혹극 혹은 제의극의 한국화, 신체적 표현의 극대화 등으로 요약되는 무세중의 공연은 이후 국내에서 전위극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294) 극단 현대극장이 공연한 김상렬 작·연출의 <언챙이 곡마단>(1982. 9)은 백제국과 의자왕의 멸망과정을 마치 곡마단의 놀이처럼 재현한 연극이다.(중략) 이 작품을 통해서 관중들은 불가피하게 역사와 부딪히게 되고, 일상적인 삶의 내부에 깊이 스며 있는 과거의 잔영과 충격적으로 만나게 된다. 작가는 그것을 ‘원형의 버릇’이라 지적하였다.(294) 여기서 원형의 버릇이란 대체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일상적으로 지니고 있는 명예니 신념이니 희생이니 구제니 하는 것들에 대한 집착과 자기기만이다. 이러한 버릇들은 시대가 바뀔 때마다 새 옷을 갈아입고, 새로운 단장을 꾸미고 사회의 표면에 나타나 언제나 심각한 표정으로 많은 사람들을 우롱하고 있다는 것이다.(295) 극단 민중극장이 공연한 장정일 작, 윤광진 연출의 <도망중>(1987. 11)은 연작형식의 <실내극>(1987년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과 <어머니>(세계의 문학, 1987년 가을호)를 한데 묶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감옥이라는 모티브를 중심으로 현실세계에서 감옥으로 도피하려는 모자의 화소(실내극)와 감옥으로부터 현실의 환상 속으로 도피(295)하려는 화소(어머니)를 내포한다.(296) 극단 자유가 공연한 김정옥 연출의 <수탉이 안 울면 암탉이라도>(1988. 5)는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실험적인 작품이다. 김정옥은 극단 자유와의 작업을 통해 그동안 <바람 부는 날에도 꽃은 피네>(1984), <이름없는 꽃은 바람에 지고>(1986) 등 일련의 실험극을 시도하여 매번 화제를 일은켰다. <수탉이…>는 그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세 번째 작품이다. 현재를 기점으로 약 1세기에 걸친 역사를 종횡무진으로 더듬어가는 이 작품은 여러 역사적 장면을 극중극의 형태로 편집한 구조를 보인다.(296) 변신술과 무대활용, 시청각적 요소의 확대를 통한 연기력의 확장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이전에 비해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준다. 이 작품의 공연에서 연기자는 하나의 인격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인격을 순간순간 표상해 낸다. 이름하여 변신의 연극이다. 소수의 연기자들이 짧은 시간에 다수의 극중 역할을 별다른 무리없이 감당해 냄으로써 연기력의 확장은 물론, 연극의 본질인 놀이성을 충만시켜 준다. 일상적인 자아와 다른, 여러 인격에로의 변신을 통하여 연기자와 관객들이 함께 역사적 현실을 체험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297) 극단 연우무대가 공연한 주인석 구성, 김석만 연출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8. 2)는 시를 성공적으로 극화한 사례로 주목받았다. 실험성 강한 황지우의 시에서 제재를 빌려온 이 작품은 원작에 걸맞게 과격한 형식실험을 선보였다.(298) 연극은 열다섯 장면이 병렬적으로 맞물리면서 전개된다. 그 장면들은 하나하나가 별개의 상황과 언어·몸짓으로 이루어진 독립된 구조로서, 다른 용어로는 삽화·짧은 이야기(에피소드)·극적 편린 등으로 부를 수 있는 단위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장면들은 다시 하나 내(298)지 여러 화소(話素)를 내포하고 있어서 마치 영화의 스틸 사진을 연상시켜 준다. 작은 모티브들이 결집되어서 하나의 독립된 국면을 이루고, 그러한 국면들이 다시 전체적인 논리와 맥락을 지니면서 하나의 극이 완성되는 형식을 숨 가쁘게 보여준다. 20여 편이 넘는 시가 거의 직접적인 모티브로 활용되고, 작품의 성향이나 주제 면에서 황지우의 시세계 전체와 대응을 이루는 연극이다.(299)   5) 1990년대 이후 6) 잔혹극·개방극의 의의와 과제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도되기 시작한 실험적인 연극작업은 한국 현대극의 방향을 탈사실주의 쪽으로 돌리는 데 기여하였다. 아르토나 그로토프스키 등 서구 실험극의 전략을 수용하여 다양한 무대실험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실험은 주로 언어 위주의 연극문법에서 탈피해 동작 중심의 원형적 연극성을 되살리는 데 초점이 모아졌다. 이에 따라 대본 구성보다는 그것의 무대화가 더욱 중시되었다. 기존 연극문법에 대한 과격한 해체나 전복은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어 관객의 참여를 촉진시켰다.(308) 서사극, 부조리극, 신화극은 이미 실험극이 아니라 현대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잔혹극, 개방극, 참여극, 정치극, 가난한 연극, 살아있는 연극, 비(非)언어극, 마임극 같은 것들이 여전히 실험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전위극(前衛劇)이라는 이름 아래 전개된 이상과 같은 무대작업들은 아직 그 자체의 분명한 연극미학을 수립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 표현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한편으로, 뚜렷한 현실시각과 예술적 지향점을 제시하는 것이 과제로 남는다.(309)   5. 뮤지컬 시대의 개막 1) 가극·악극·뮤지컬 가극(歌劇)과 악극(樂劇)이라는 용어는 근대극시대에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가극은 애초에 한자어 그대로 ‘노래하는 연극’, 즉 창극, 오페라, 악극, 창작가극 등을 통칭했다. 1920년대 후반기 대중음악인 트로트와 즉석의 밴드반주를 기반으로 한 이른바 악극이 연극 장르로 대두되면서, 악극과 변별하여 서양식 창작 가창곡에 즉석의 피아노반주를 기반으로 하는 음악극을 가극으로 별칭하기 시작했다. 당시 가극은 뮤지컬의 한 부류이기는 했지만, 아직 뮤지컬이라는 개념이 수용되기 이전이었다. 악극은 1950년대 후반 영화가 붐을 일으키기 전까지 대중극을 주도한 장르였다. 이에 대하여 가극은 주로 학교행사나 교회행사를 통해 공연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1940년대 전반기 세계대전의 분위기 속에서 서양 뮤지컬은 대중(310)극의 총아로서 확고히 자리를 굳히기 시작했다. 춤과 노래라는 감각적인 언어로 이야기를 전달한다는 특성 때문에 뮤지컬은 대중성을 담보한다. 한국에는 60년대부터 뮤지컬 양식이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했다. 전후 급ㅎ속도로 파급된 재즈의 물결을 비롯해 미국문화의 유입과 보편화는 뮤지컬이 움틀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 즉 196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다양한 뮤지컬의 시도가 이루어진 데는 대중들,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 팽배해 있던 미국문화에 대한 동경이 큰 몫을 했다.(문호근, 「한국의 음악극-1971년부터 현재까지」, 󰡔��한국의 공연예술󰡕��, 현대미학사, 1999, p.235 참조-원주)(311) 당시 뉴욕에서 장기흥행하고 있는 브로드 웨이 뮤지컬을 직접 관람하고 돌아온 유치진은 뮤지컬의 대중적 가치를 체감했다. 그가 제작한 <포기와 베스>(1962. 8)는 이해랑 연출로 드라마센터 무대에서 공연되었다. 그는 ‘이번 공연은 우리가 시험해 보려는 명일 음악극의 시금석’이라고 했다.(유치진 「<포기와 베스>의 연출」, 󰡔��동랑 유치진 전집󰡕�� 8, 서울예술대학 출판부, 1993, pp.353~354 참조-원주) <포기와 베스>는 1937년과 1948년에 유치진에 의해 상연된 적이 있고, 이때 처음으로 음악극을 의식하여 거슈윈의 음악을 구사했다. 2개월 동안 배우들에게 노래와 춤을 훈련시켜 완성도를 기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뮤지컬 플레이’, ‘뮤지컬 드라마’라고 소개했으나(311) 엄밀한 의미에서 곡수가 너무 적고 음악을 제대로 살리지 못해 제대로 된 뮤지컬로 보기 어렵다. 대본도 원작이 아닌 일본의 축지 소극장에서 상연했던 중역본을 사용했다.(차범석·우에무라 료오스께·김상렬 대담, 「한·일 뮤지컬의 가능성」, 󰡔��한국연극󰡕��, 1990, 10, p107 참조-원주) 그러나 최신 무대시설을 갖춘 드라마센터의 아레나 스테이지에서 펼쳐진 <포기와 베스>는 일반인에게 서구적인 뮤지컬 양식을 인식시키는 데 기여했다.(312)   2) 뮤지컬의 창작 한국 뮤지컬의 본격적인 시발은 소위 2차 예그린악단의 <살짜기(312) 옵서예>에서 찾을 수 있다. 총인원 3백여 명이 참가한 <살짜기 옵서예>(1966. 10)는 초대형 서울시민회관에서 모두 7회 공연되었다. 작곡과 지휘를 전담한 최창권은 이 작품을 뮤지컬의 효시로 보았다. 그 이유로 대중관객의 반응, 흥행 성적, 규모와 내실 면, 그리고 양식적인 측면에서 현대적인 뮤지컬 양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최창권, 「뮤지컬」, 한국음악협회 편, 󰡔��한국음악총람󰡕��, 1991, p.513-원주) 당시 각 분야의 전문인이 참여하고 각계의 재주꾼과 스타가 집결한 <살짜기 옵서예>는 한국 뮤지컬의 화려한 개화를 알리는 선언적인 작품임에 틀림없다.(313) 예그린악단은 북한의 종합무대 형식의 공연예술에 필적할 만한 예술단체의 필요성을 인식해, 국비 지원으로 창단된 단체였다. 군사정권의 2인자였던 김종필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후원회를 조직했으므로 당시 내로라하는 재계인사들이 후원회에 참여했다. 활동비 지급이 원활했으므로 당대의 손꼽히는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이 참여했고, 정규 대학 출신의 남녀 합창단과 관현악단, 무용단 등 300여 명의 단원을 구성할 수 있었다. ‘예그린’이란 영문학자 오화섭이 ‘옛을 그리며 내일(來日)을 위하여’의 뜻을 담아 작명한 것이다.(314) <살짜기 옵서예>는 고전소설 <배비장전>을 각색한 것이다.(315) 이 작품이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근본 이유는 우리 정서에 부합하는 고전을 소재로 하여 여기에 한국음악과 춤의 전통 위에 서구 뮤지컬 양식을 접목하려고 노력한 점에 있었다. 서구식 극 구조와 음악어법을 차용하되 소재, 대사, 선율, 율동, 연희, 소품 및 의상 등에서 한국적 색채와 분위기를 덧붙인 노력을 통해 현대적 음악극으로서의 면모를 갖출 수 있었다.(316) 국내 뮤지컬의 역사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극단이 현대극장이다. 극작가 김의경이 연극의 전문화, 과학화, 직업화를 목표로 창단한 단체이다.(317) 현대의 뮤지컬 <해상왕 장보고>는 1995년 미국 LA에서부터 2002년 프랑스 파리공연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24개국 26개 도시를 순회 공연하였다. 한국 뮤지컬을 처음으로 세계무대에 알리는 대장정이었다. 파리공연은 당시 환상적인 의상과 신선한 무대효과가 돋보였다는 호평을 받았다. 이와 같은 공연실적에 힘입어 다음 작품인 <팔만대장경>은 여러 나라에서 초청제의를 받을 수 있었다. 2001년부터 일본 후쿠오카 공연을 시작으로 2004년 7월 현재까지 해외 공연이 진행되고 있다. 또한 현대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뮤지컬을 시도한 점도 주목된다. ‘해태 명작극장’ 시리즈로 시작된 어린이 뮤지컬 제작은 오늘날 매해 5월마다 각 방송사에서 기획하는 아동 대상 뮤지컬의 효시를 이루었다.(중략) 그리고 현대가 운영하는 청소년극장 프로그램은 국내외의 명작들을 청소년들에게 선보임으로써 연극인구의 저변확대에도 기여해 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318)   3) 뮤지컬의 영역 확대 1980년대 들어서 뮤지컬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대표적인 현상으로는 극단 민중·광장·대중이 공동제작한 <아감씨와 건달들>(1983. 12)의 흥행성공이었다.(중략)이 작품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뮤지컬이 국내 공연시장의 중심으로 떠오르는 계기를 마련했고, 초연된 이후 3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였다.(319) 극단 대중이 제작한 강영걸 연출, 정대경 음악, 박상규 안무의 <넌센스>(1991. 6)는 뮤지컬 사상 최다 공연을 기록한 작품이기도 하다.(319) 1986년에 88서울올림픽을 겨냥한 새로운 관립 뮤지컬단인 88서울예술단(후에 서울예술단으로 개칭)이 창단되었다. 88서울예술단의 창단 배경은 1985년 9월 정부에서 발표한 민족 대교류 선언에서 비롯되었다. 세계의 화해무드와 더불어 정부의 대 북방정책의 변화에 따라 남북한 간의 문화예술 교류를 활성화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루어진 예술단의 교환공연은 본격적인 남북 문화교류의 시발점으로, 이산가족의 상봉 못지않은 큰 기대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86년 8월 1일에 한국방송공사 산하단체로 출범한 88서울예술단은 문화예술의 세계적 조류에 편승하여 노래와 연구와 무용 등 각 장르의 성격과 특이성이 상호 조화를 이루는 총체예술단으로 창단된 것이다.(서울예술단 편, 󰡔��서울예술단 10년사󰡕��, 1996, pp13~34 참조-원주)(320) 그 후 총체극이라는 생소한 장르보다는 뮤지컬이라는 대중적인 연극이 적합하다는 판단에서 서울예술단은 제작방향을 바꾸었다.(320) 1990년 88서울예술단은 서울예술단으로 개명되어 문화부 산하의 재단법인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이전의 88서울예술단에서는 창작뮤지컬 제작에 치중하는 편이었으나 재단법인으로 전환하면서 뮤지컬은 물론 전통무용을 기저로 한 창작 무용극, 그리고 악기연주와 춤, 노래가 총합된 가무악(歌舞樂) 작품을 개발하는 등 공연양식의 다양화를 꾀하였다.(321)   4) 뮤지컬의 시대 1990년대에 들어 대형 뮤지컬을 성공적으로 공연하여 가장 주목받은 단체는 에이콤이다. 사립극단으로서 뮤지컬 전문단체임을 표방하고 나선 것은 에이콤이 처음이었다. 창단작품으로 <아가씨와 건달들>을 공연한 데 이어, <스타가 될 거야>(1995), <명성황후>(1996), <겨울 나그네>(1997) 등 창작뮤지컬을 중심으로 공연해 오고 있다. 특히 이문열 원작, 김광림 각색, 김희갑 작곡, 윤호진 연출의 <명성황후>는 국내 창작뮤지컬 중 가장 많은 공연 횟수와 관객을 동원하여 창작뮤지컬의 롱런 가능성을 열어놓은 공연으로 평가받았다. 또한 1997년 뉴욕 링컨센터와 1998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마지막 황후>라는 제목으로 역사적인 해외 공연을 가진 바 있다.(322) 재정은 취약하지만 공연환경의 변화에 순응하기 위해 사립극단들은 위험을 안고 창작뮤지컬에 도전했다. 1971년 창단하여 1991년 뮤지컬 극단으로 변신한 극단 맥토의 경우도 그렇다. 맥토는(중략)(322) 주로 창작뮤지컬 제작에 힘썼다. 특히 뮤지컬 <번데기>(1994-인용자)는 서울연극제사상 처음으로 뮤지컬이 대상을 차지하는 이변을 연출했다.(중략) 이 작품은 1995년도 스포츠조선의 한국뮤지컬시상에서 극본상과 연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근단 신시도 1988년 창단하여 정극 위주로 공연하다 1995년 신시뮤지컬컴퍼니로 개명하면서 본격적인 뮤지컬 제작에 합류하였다.(323) 뮤지컬 전문 프로덕션 티엔에스(T&S)와 서울뮤지컬컴퍼니는 1995년 창단된 단체로서 창작뮤지컬 위주로 공연하고 있다.(중략) 이후 독자적으로 분리된 서울뮤지컬컴퍼니는 살롱뮤지컬의 연장선으로 <지상에서 부르는 마지막 노래>(1997), <오 해피데이>(2000)를 올렸으며, <하드록 카페>(1998)와 <록 햄릿>(1999) 등의 작품으로 오늘날 젊은이의 감성에 맞는 무대를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323) 극단 학전의 김민기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번역 상연에 대항해(323)서 뮤지컬의 번안 공연을 통해 우리 뮤지컬의 발전을 시도하고 있다.(중략) 이는 장기 공연이 가능한 전용극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324) 특히 <지하철 1호선>은 독일 그립스극단 대표 폴커 루드비히의 원작을 한국적으로 새롭게 번안한 뮤지컬이다. 김민기는 이 작품을 1994년 초연하여 2000년 1월 1000회 공연을 돌파하였다. <지하철 1호>는 소극장에서 라이브 음악을 사용하는 등 한국뮤지컬의 질적 수준을 한 단계 높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324) 최근에 나타난 새로운 공연양식으로, 논버벌(non-verbal) 퍼포먼스를 빼놓을 수 없다. 미국의 논버벌 퍼포먼스 양식에 한국의 풍물·사물놀이를 결합한 <난타>의 성공은 전용극장 개관, 브로드웨이 진출 등의 성과를 낳았다. 이에 영향을 받아 <도깨비 스톰> 등의 작품들이 나타났다.(325) 오늘날 뮤지컬은 연극양식의 중심에 자리를 잡았다. 대중이 가장 선호하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간 뮤지컬 전문극단과 공연은 숱하게 증가했고, 창작에 대한 시도도 끊이지 않았다. 피상적으로 관찰하면, 뮤지컬은 전망이 매우 밝은 분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외국 뮤지컬, 특히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빈번하게 직수입되어 국내시장의 점유율이 높아지는 현상은 심히 우려할 사태이다. 상대적으로 국내 창작뮤지컬의 성장을 위축시키기 때문이다. 제작비는 물론, 모든 여건이 불리한 국내 사정에 비추어 뮤지컬의 발전을 단시일에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326) 역시 한국 뮤지컬의 장래를 기대하게 하는 요인은 배우들의 우수한 가창력이다. 이 가창력을 바탕으로 소극장의 작은 뮤지컬운동으로부터 대극장용 창작극들이 발전해 나가야 할 것이다.(327)   제4장 전통양식의 계승과 발전 1. 굿극의 시도와 제의성의 추구 1) 샤먼의 원시극 종교체험은 제의(祭儀)를 통해서 표현된다. 한국인의 원시종교는 샤머니즘(巫敎)이고, 그것은 현재도 잔존한다.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한국의 샤머니즘은 강력한 영향력을 지녔고, 현재에도 민간신앙으로 혹은 민속으로 분명하게 살아있다. 오늘날엔 샤먼이 참여하지 않은 채 군중만이 모인 행사를 ‘굿’이라 통칭하기도 한다. 지난날 샤머니즘의 영향을 상징하는 말이다. ‘무당’이란 여자 샤먼을 지칭한다. 남자 샤먼은 ‘판수’, ‘박수’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는 여자 샤먼이 대부분이어서 ‘무당’이라는 말이 샤먼의 대명사가 되었다.(331) 샤먼의 제의를 목적에 따라 분류하면, 크게 샤먼 자신들을 위한 굿(巫神굿), 일반인들의 가족을 위한 굿(집굿), 마을 사람들을 위한 굿(마을굿)으로 나눌 수 있다. 샤먼을 위한 굿은 샤먼이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기성 샤먼이 신의 내림을 받아주는 내림굿(入巫굿)과 샤먼들이 자기가 모시는 신을 위하여 봄, 가을에 하는 제의가 있다. 샤먼은 어느 계통을 막론하고 자신에게 내림굿을 해주고 자기를 무당으로 수련시켜 준 무당을 일생의 스승이나 어버이로 받드는 관습이 있다. 양자의 관계는, 샤먼을 신에 비유하여, 신의 아들 혹은 신의 딸이라 부른다. 가족을 위한 굿에는 죽은 사람을 위해서 하는 넋굿(死靈遷度祭)과 아픈 사람을 위해서 하는 병굿, 그리고 일상생활의 행운과 행복, 성공을 기원하는 재수굿(행운굿) 등이 있다. 재수굿은 대체로 가족이나 개인적인 행운을 기원하며, 때로는 매우 이기적인 욕망을 달성하려는 의도에서 행한다. 극히 드문 예이지만 아직 살아 있는 노인의 장수를 빌기 위해 자녀들이 무당을 초빙하여 행하는 경우도 있다. 마을을 위한 굿은 말 그대로 마을 전체의 재앙을 물리치고 안녕을 빌며, 풍년과 풍어와 다산을 기원하는 제의다. 고대로부터 한국에서는 어느 지역, 어느 마을에서나 마을을 수호하는 대표적인 남녀신(男女神)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신들을 모시는 제당 혹은 제단이 주변에 마련되었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다양한 제의가 계승되었다. 산간마을, 평지마을, 바닷가마을, 광산마을, 섬마을 등에 따라 각기 생활방식이나 생산물, 생산방법 등이 달랐으므로 여러 가지 신앙제도가 발달했다. 마을굿에는 매년 하는 정기굿(定期굿)과 몇 년 간격을 두고 혹은 특별히 하는 별신굿(別神굿)이 있다. 마을굿은 축제로 전승되었다.(332) 무당굿은 몇 가지 단계로 이루어지고, 각 단계는 행위의 동기(motive)와 화소(motif)에 따라서 독립적인 제의를 연출한다. 보통 12가지 단계를 거쳐 굿이 완성되는데, 이 단계들을 ‘굿거리’라고 한다. 굿거리 가운데 특히 연극성이 높은 거리를 ‘굿놀이’라고 부른다. 관중뿐 아니라 무당들 또한 굿놀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놀이이자, 연희이자, 연극으로서 굿의 역사적 본질을 시사해주는 대목이다. 샤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모셔 놓고, 혹은 신을 향하여, 마치 그 신이 그 자리에 실재하듯이 모든 절차와 행동과 말을 연출하고 시행한다. 홉사 일인극(monodrama) 배우처럼 혼자서 여러 가지 역할을 능숙하게 해낸다. 무당은 실제 시공간과 현실적 삶을 굿의 시간, 공간, 행위로 즉 굿의 세계(굿판)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하여 굿판은 성스러운 제이 장소가 되고, 놀이판이 되고, 연극무대와 같이 된다. 무당굿이야말로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공연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종교적으로 가장(仮裝)된 놀이라는 측면에서는 모든 굿은 일종의 종교극, 제의극 혹은 진지한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E. T. Kirby, Ur-Drama: The origins of Theatre, New York University Press, 1975 참조-원주) 고대 한국인들은 다산과 풍농과 안전을 위해 여러 신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신을 잘 받들기 위해 신성한 장소(‘소도’라 했다)를 보존하거나 신전(‘서낭당’이라 했다)을 만들기도 했다. 제의와 정치가 하나였으므로(祭政一致) 샤먼은 통치자이거나 혹은 막강한 권력자였다. B.C. 1세기까지 왕들을 샤먼들이 겸직한 증거도 남아 있다. A.D. 4세기에 불교가 수용되기 이전에는 샤머니즘이 절대적인 종교였고, 사제자·통치자·교사·의사로서 샤먼의 사회적 역할과 위상은 신성불가침의 것이었다. 샤먼은 신의 위대한 힘을 믿으며, 그 힘을 빌어서 인간적 소망과(333) 사회적 소망을 해결하고자 한다. 가령 산에는 산신이 있고, 강에는 수신이 있으며, 땅에는 지신이 있다고 믿었다. 인간신·동물신·초목신(木神)·물건신(物件神)이 있으며, 바람신·불신(火神)·선신(善神)·악신(惡神) 등이 있다고 믿었다. 이런 범신관(汎神觀)은 일종의 문화적 전통이다. 신들은 이 세상 어디에나 강림하고 또한 내재한다. 그러나 샤먼이 아닌 일반인들은 그 모습을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샤먼만이 신과 소통할 수 있다고 믿었다. 1969년까지 조사된 샤먼 신의 종류는 273가지에 달한다. 1950년대의 전쟁과 1960년대의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샤먼과 굿은 급격히 감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많은 샤먼 신이 잔존한 것은 한국 사회에서 무속신앙의 전통이 얼마나 뿌리깊은 것인지를 시사한다. 불교와 유교와 기독교도 샤머니즘과 깊이 결합되어 있다. 신들은 자연신 계통과 인간(영웅)신 계통으로 대별되는데, 63 대 33, 기타 4로, 자연신 계통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김태곤, 󰡔��한국무속 연구󰡕��, 집문당, 1981, pp.280~285 참조-원주)(334)   2) 굿과 굿극 샤먼은 오랜 동안 연마해온 주술적 언어능력, 춤과 노래와 연기력을 포함하는 연희적 표현력, 그리고 제의 관리능력을 통하여 굿을 주재해왔다. 샤먼의 유형은 여러 가지로 분류된다, 영력(靈力)이 탁월하고 예능이 우수한 샤먼이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고 인기를 독차지하게 된다. 영력과 예능은 일면 선천적인 혹은 의식적(意識的)인 능력이기도 하지마는 대체로 후천적 능력 혹은 학습과 수련(修鍊)을 통해 얻어진 능력이다. 샤먼은 목적에 따라 여러 가지 굿을 하는(334) 데, 큰굿을 하기 위해서는 각 굿거리의 복잡한 절차와 장편의 서사무가, 공수(신의 말씀), 재담(익살스런 말)연행, 춤, 악기연주, 점치기, 꽃 만들기, 제물 만들기, 의상관리 등을 제대로 파악하고 능숙하게 실연할 수 있어야 한다.(335) 샤먼들은 거주지역에 따라, 영력에 따라, 굿의 목적과 과정에 따라, 굿의 방법에 따라 각기 다른 굿놀이를 해 왔다. 오랜 역사와 전승과정에서 여러 가지 계통과 다양한 양식을 발전시켰다. 신화와 무가의 종류와 내용도 복잡하다. 한국의 굿은 샤먼과 민중 사이에서 하나의 사회적 관습을 이루었고, 신앙으로서, 윤리로서, 교육으로서 전통을 이루었다. 특히 굿은 전통공연예술로서, 민중의 오락과 위안물로서 확고한 문화적 역할을 했다.(335) 샤먼의 ‘굿놀이’는 제의극의 일종이자 민속극의 일종이다. 따라서 그것을 그대로 재현하기도 힘들지만, 설사 재현한다고 해도 그것이 저절로 현대적인 연극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전통연희의 일종에 불과한 것이다. 무당굿은 현대극의 하나의 대안양식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정말 대안양식이 되느냐 못 되느냐는 전적으로 연극인 자신의 창의성에 달려 있다. 따라서 굿의 정신과 방법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응용하느냐 하는 창조성과 참신성이 성패의 관건이 된다.(335) 무당굿 양식을 현대화시켜 재창조한 연극을 ‘굿연극’의 약칭으로서 ‘굿극’으로 부르기로 한다. ‘굿극’이라는 말은 아직 한국에서 널리 사용되지는 않지만, 분명 창조적이고 도전적인 개념이다. 1970년대부터 현대까지 굿극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은 현대 신화극을 창조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지속되어 왔다. 신화극이 서구적인 양식의 영향을 많이 받은 연극이라면, 굿극은 한국 무당굿 양식의 영향이 강한 연극이라 할 수 있다.(336)   3) 굿극의 모색과 전개 제의의 양식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굿극은 1970년대부터 실험되기 시작했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전통문화에 대한 자각과 반성이 일어났고, 이를 토대로 민속연희를 부활하고자 하는 붐이 조성되었다. 그 가운데 굿은 민족의 원형적 연희양식으로 부각되었다. 굿에 대한 관심은 굿의 재현으로 이어졌고, 다시 굿의 현대적 계승으로 나아갔다. 자유극장이 공연한 박우춘 작, 김정옥 연출의 <무엇이 될고 하니>(1978. 10)는 ‘장승’에 얽힌 설화를 극화한 작품이다. 돌이나 나무로 만들어 마을의 입구에 세운 신상을 ‘장승’이라고 한다. 장승은 마을의 수호신이고, 마을 사람들이 장승 앞에 모여 1년에 한 번씩 축제를 벌이는 것을 ‘장승굿’이라 했다. 장승들은 지역마다 고유한 신화나 설화를 지닌다. 이 작품에서는 억울하게 살해된 청년과 그를 사랑하다가 죽은 애인이 ‘장승’으로 변했다는 설화를 차용하고 있다. 과거에 살았던 두 연인의 아름다운 사랑과 부당한 희생을 다루면서, 그들의 희생을 저항적인 이미지로 부각시켰다.(336) 무대에는 특별한 장치 없이 빨랫줄이 있을 뿐이다. 거기에 배우들(336)이 옷을 벗어 걸고, 다시 갈아입는 방식으로 역할 변신을 시도하였다. 마치 무당이 수차례 변신을 거듭하면서 굿을 하듯이, 숱한 장례기구들, 염을 한 송장, 소도구들은 모두 배우들이 움직일 때 손에 들려져 함께 움직인다. 이로써 살아 있는 그림과 분위기, 나아가서 극적인 체험을 강조하는 도구로 활용된다. 아울러 무대 공간뿐만 아니라 객석의 모든 통로도 배우들의 등퇴장로가 된다. 코러스는 무대 공간 위에서 연극이 끝날 때까지 사라지지 않고, 각기 맡은 역할에 따라 객석 앞으로 나와서 대사를 하거나 몸짓을 하거나 북을 치거나 노래를 부른다.(337) 이렇게 이 연극은 살아 있는 미술, 행동하는 이미지의 개념에 주목해 한편의 굿을 창조한다.(중략) 프랑스 공연에서 「르몽드」지는 ‘한국인과 프랑스인의 영혼이 교류된 무대, 생동감 넘치는 공연이었으며, 동양적 뮤지컬의 가능성을 보였다’고 평하였고, 뉴욕대학의 마이클 커비는 ‘연기자들은 관객들과 격식 없이 직접적, 해학적으로 대화를 나누어 즉적반응을 일으키는 전혀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해냈다’고 평가하였다.(337) 국립극단이 공연한 김진희 작, 손진책 연출의 <바리더기>(1983. 3)는 대표적인 무당신화인 진오귀굿 바리공주를 극화한 것이다. 작가는 ‘사령제(死靈祭)’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위한 생령제(生靈祭)를 위해 만들게 되었음을 밝혔다.(338) 1987년에 공연된 엄인희 구성의 <왔구나 왔어>는 우리 광대극의 일종인 배뱅이굿을 현대화한 작품이다. 판놀음의 일종으로 전승되어 온 민속 연극 배뱅이굿은 광대가 혼자서 하는 일인극으로, 주로(338) 평안도·황해도 지역에서 널리 알려졌다. 배뱅이굿의 역사는 19세기 후반까지 소급될 수 있다. 16세기 중반에 나온 <<어우야담>>의 동윤설화에 배뱅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전하나, 동시대에 배뱅이굿이 있었으며, 그것이 계속 전승되어 왔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339) 극단 목화가 공연한 오태석 작·연출의 <백마강 달밤에>(1993. 2)는 마을굿인 은산별신제와 무속설화인 바리공주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중략) 은산별신제는 백제시대의 희생자를 추모하(339)는 제의에서 유래하였다. 현재는 ‘불운하게 사망한 영혼을 위로하는 무당굿’으로 전국적으로 희귀하게 잔존한다.(340)   4) 굿극과 문화상호주의 한편, 한국적 제의극의 모색은 단순히 굿의 양식을 계승하는 데 머물지 않고, 굿의 양식을 응용해 외국 작품을 무대화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자유극장의 레퍼토리로 정착된 가르시아 로르카(1898~1936)의 <피의 결혼>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341)   5) 이윤택과 굿극 굿극이 한국 현대극의 뚜렷한 양식으로 자리잡는데는 1990년대 이윤택의 기여가 적지 않다. 연희단거리패가 공연한 이윤택 작·연출의 <오구>(1990. 6)는 굿극으로서 흥행에 성공한 드문 사례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오구는 불행하게 살다 죽은 사자의 넋을 위로하고, 세상을 떠도는 영혼을 저승에 안착시키는 샤먼의 제의이다. 드문 일이지만, 살아 있는 부모의 장수를 위한 오구굿을 하기도 한다. <오구>는 노모(남미정 역)을 위한 산오구굿에서 출발해서 2차 세계대전 때 작고한 아버지를 위한 오구(진오구굿)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자식들 사이에 벌어지는 욕망의 갈등을 그린 작품이다.(343) 이 연극에서 죽음은 생의 의미와 살아있음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동시에 일상의 삶은 죽음이라는 절대적 진실 앞에 놓인 무상하고도 창조적인 실체로 형상화되었다. 적어도 이 연극은 죽음이 무엇인지를 묻고 답하는 설명극이 아니다. 죽음을 통해서 삶을 체험하게 하는 굿극이다. 사람들을 구경꾼으로 잡아두는 연극이 아니라, 관객들로 하여금 스스로 체득하게 하는 공연이다. 이 공연에서 비로소 기존 굿의 해체와 새로운 총체화가 시도되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위한 해체인가. 물리적인 것이든, 상징적인 것이든 굿의 기호들을 밝혀내기 위한 해체이다. 기호의 탐구와 발견이야말로 새로운 굿극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굿을 존재론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방법론적으로, 즉 기호로 접근한 데서 이 연극의 길이 열린 것이다.(344) 연희단거리패가 공연한 장일홍 작, 이유택 연출의 <초혼>(2003. 12)은 <오구>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굿극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었다.(중략) ‘이번 <초혼> 연출을 맡으면서 나는 흥미로운 단서를 발견했다. 연극은 굿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시작되고 굿이 끝나면서 연극은 자연스럽게 끝난다. 막을 열고 닫을 이유가 없고 조명을 끄고 켜고 할 이유도 없다. 거추장스럽게 무대장치를 바꿀 이유 또한 없다. 한 편의 연극은 그대로 한 판의 굿이 되는 것이고, 모든 극적 구조는 굿의 구조 속에 녹아 들어가 버린다.’ 이것은 연출가 이윤택의 말이다. 관객에게 한 편의 새로운 요왕맞이굿을 체험시키는 것이 <초혼>의 전략이다. 그것은 고난과 극복과 화해의 총체성을 일컫는다.(345)   6) 굿극의 의의와 과제 한국의 전통적인 제의인 굿은 인간의 삶에 내포된 원초적인 비극성을 드러내주고, 동시에 이를 치유하는 신성한 기능을 발휘했다. 이러한 기능은 현대인의 삶에 있어서 보다 절실하다. 현대의 삶이 삭막해진 것은 산업화, 물질화, 도시화로 인해 본래의 성스러운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탈신성화의 결과는 끝없는 소외와 폭력의 악순환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의 삶은 제의의 형식을 통해 쇄신되고 정화될 필요가 있다. 굿극의 연극사적 의미는 바로 이러한 절실한 시대적 요청에서 비롯된다. 한국적인 연극, 신선한 현대극, 그리고 진보적인 연극을 만드는 데 굿양식은 하나의 중요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이런 연극의 기본조건은 창조이다. 전통굿 가운데서 현대성을 발견하고, 현대적인 삶(346)을 새로운 굿으로 표현하는 변증법적인 창조성이 요청된다. 연극인들이 굿자료를 폭넓게 인식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민속학자의 입장이 아니라 창작자의 자세로 굿의 기호들을 활용해야 한다.(서연호, 「현대극의 대안양식 굿」, 󰡔��생동하는 무대를 찾아서󰡕��, 2004, pp.170~176 참조-원주)(중략) 지금 연극 나름의 방법에 대한 치열한 싸움이 절실히 요청된다. 연극양식은 언제나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지 동서양의 기성양식이 현대극의 성공을 보장해 주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347)   2. 탈춤극과 탈놀이의 계승 1) 가면극의 전승 가면극의 제작은 땅 위에서 인간의 활동이 시작된 때로부터 이루어졌다. 가면은 인간 심성의 반영이고 욕망의 표현이자 특정한 대상의 모방을 통해 만들어진다. 가면은 다용도로 사용되는 물질적 도구이자 신성한 영력을 지닌 정신적 상징물이다. 사냥과 채집만으로 생존했던 시대, 전쟁과 약탈을 일삼던 시대의 사람들에게 가면은 자신을 위장하는 중요한 도구였다. 또한 가면은 신비하고도 위대한 힘을 지닌 신상 혹은 기적을 이룩한 조상의 모습으로 추앙되기도 했다. 고대의 사람들은 이러한 신상(神像) 및 선조상(先祖像) 앞에서 다수확과 다산, 풍농을 기원했다. 한편으로는 그들 자신이 그러한 신격으로 위장하여 인간의 건강하고 풍요로운 삶을 위한 여러 가지 모의행동을 연출해냈다. 가면을 매개로 하는 신앙적·주술적인 의식과 현(348)실적·전투적인 행위, 그리고 상상적·예능적인 표현은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줄기차게 지속되어 왔다.(Andreas Lommel, Masks, McGraw-Hill Book Company, 1972 참조-원주)(349)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파된 ‘가면악(仮面樂)’, 가야의 ‘사자춤(獅子伎)’, 신라의 ‘黃昌舞)’, 톨일신라의 ‘처용무(處容舞)’와 ‘향악잡영(鄕樂雜詠)’, 고려의 ‘산대잡극(山臺雜劇)’과 ‘나례(儺禮)’, 조선의 ‘山臺劇)’과 ‘나례’ 등은 모두 가면극이었다. 가면극은 1930년대까지 각 지방에서 성행했다. 한국의 모든 가면극은 농어촌 및 도시의 민속신앙·불교의식·세시풍속·시장흥행과 더불어 발전했다. 독자적인 생존기반을 갖지 못했던 배우(‘광대’)의 연희는 이러한 신앙의식이나 생활풍속, 환경에 의존해서 전승되었다. 가면극에 벽사(辟邪)와 기복(祈福)의 요소가 짙은 것은 이러한 이유였다. 가면극이 독자적인 연희양식으로 발전하면서 가면과 가면극은 지역마다 다른 명칭과 특징을 갖게 되었다. 가면은 한국어로 ‘탈’, 가(349)면극은 ‘탈춤’이라 했다. 경기도지역에서는 ‘산대탈놀이’ 혹은 ‘별산대탈놀이’라는 명칭이 전승되는데, 이는 고려시대의 개성과 조선시대의 한성을 중심으로 ‘산대놀이(山臺戱)’가 성행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산대’란 산과 같이 높은 가설무대를 설치하고 놀았던 데서 유래했다. ‘산대놀이’라고 해서 모두 실제로 ‘산대’를 만들어 놓고 그 위에서 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과거의 전통을 잇고 있다는 의미에서 유행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산대’는 궁정이나 반가(班家)에 설치했던 ‘채붕(綵棚, 彩棚)’과 구별된다. 역시 가설무대의 하나였던 ‘채붕’은 연희가 벌어지는 건물의 마루 끝에, 마루와 평면이 되도록 넒혀서 만든 무대를 일컬었다. 왕가나 반가를 위한 연희는 주로 이 채붕에서 연행했다. 주위를 비단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데서 비롯된 명칭이다. 황해도지역에서는 ‘탈춤’과 ‘놀탈’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춤이 그만큼 중요시되었고, 잘 놀아야 가면극이 된다는 의미에서 배우를 ‘놀탈’이라 했던 것이다. 경상도지역에서는 ‘들놀음’, ‘오광대놀음’, ‘별신굿놀음’ 등이 가면극의 대명사가 되었다. 가면 자체보다는 야외에서 노는 놀음, 다섯 ‘광대’의 놀음, 다섯 장면으로 공연하는 놀음, ‘별신굿’에서 노는 놀음 등의 의미가 강조된 것이다. 함경도에서는 애초부터 사자를 중심으로 놀았으므로 ‘사자탈놀음’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남사당에서는 가면극을 ‘덧뵈기’라고 한다. 이처럼 탈과 탈놀이의 명칭은 다의적으로 사용되었다. 이상과 같은 전통탈춤의 정신과 방법을 계승하여 현대적으로 재창조한 연극을 ‘탈춤극’이라고 부르기로 한다.(350)   2) 탈춤극의 대두와 실험 극단 실험극장이 공연한 윤대성 작, 김현영 연출의 <망나니>(1969. 9)는 나무꾼에서 양반의 종으로 환생한 청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청년이 겪는 극중극이 드라마의 핵심적인 갈등이다. 노승과 귀신의 내기에 걸려든 나무꾼은 가면을 쓰자마자 종으로 환생하고, 일생 가면을 벗지 못하게 된다. 여기서 가면은 다른 인격으로의 변신을 가능하게 하며, 동시에 다른 운명을 체험하는 도구로 작용한다.(351) <망나니>는 1960년대에 들어와서 시작된 전통 탈놀이의 재건운동과 그 현대적 계승작업의 연장선상에서 이룩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연극사적인 의의를 갖는다.(351) 극단 가교가 공연한 김상렬 작·연출의 <탈의 소리>(1972. 6)는 극중극을 통해 현대인과 가면극의 인물들이 어울리는 놀이극이다. 현대인은 작가와 그 아내이고, 아내는 극중극의 애사당(김영자) 역을 겸하며, 그녀의 꿈이 변신역할극으로 전개된다.(353) 극단 민예극장이 공연한 장소현 작의 ‘말뚝이 시리즈’는 연출가 손진책의 의지와 투합하여 10여 년 간이나 지속되었다. 손진책은 극장주의 마당극을 지향한 대표적인 연출가였다.(353) 전통 가면극에 등장하는 말뚝이는 양반의 하인으로서 겉으로는 주인에게 복종하면서도 실제로는 주인을 비판하고 반항하는 인물이다. 코메디아 델아르테의 하인역인 잔니처럼 언제나 놀라운 기지와 즉흥적이고 익살스런 동작으로 관중의 인기를 독차지해 왔다.(353)   3) 이승규의 탈춤극 창의성의 측면에서 현대 가면극에 기여한 연출가 이승규의 공로는 독보적이다. 이강백 작, 이승규 연출의 <개뿔>(중략) 한국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개뿔(속칭으로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을 동시대의 천대받는 인권에 비유하고, 독재 권력의 남용으로 비인간화되는 현실을 개판(속칭으로 몹시 난잡하고 엉망인 상태)으로 상징화시켰다.(355) 극단 가교는 1979년 10월에 이 팬터마임을 공연하여 불안한 군부정권의 상황에 일대 충격을 주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무리들은 같은 표정의 가면을 쓰고 같은 직물(삼베)로 지은 옷을 입었다.(355) 이 작품에서 가면은 인간의 본모습을 가리는 허위와 위장의 도구로 활용된다. 본래 가면에 투영되었던 신성한 영력은 획일화되고 익명화된 의식으로 대체된다. 그리하여 가면을 벗고 쓰는 행위를 통해 정치적 억압과 자유의 의미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가면극의 전통적 미학을 전복시켜 새로운 문법을 보여주었으며, 이를 통해 동시대의 정치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공연이었다.(356) 국립극단이 공연한 이승규 구성·연출의 <약속>(1986. 5)은 고전 <춘향전>을 가면극으로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중략) <춘향전>은 근대 이후 연극, 무용, 영화, 오페라,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로 현대화된 만큼, 새로운 해석 자체가 하나의 실험이자 도전이었다. 이승규의 해석은 장르적인 실험뿐만 아니라, 기존의 관념을 새로운 메시지인 ‘약속’으로 분명하게 해석한 점에서 높이 평가될 만하다. 작품의 특색은 한마디로 총체적인 접근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총체적이라는 뜻은 효과적인 극적 표현을 위해 언어와 몸짓은 물론 음악적인 요소, 무용적인 요소, 조형적인 요소 등 모든 방법론과 기술을 활용하여 창조를 위한 조화를 꾀했다는 의미이다.(357) 인천시립극단이 공연한 서연호 극본, 이승규 연출의 <시집가는 날>(1998. 5) 또한 탈놀이의 수용을 보여주었다. 이 공연에서 오영진의 원작은 대폭 개작되었다. 원래 이 작품은 <맹진사댁경사>라는 제목의 시나리오로 1943년에 발표되었다가, 이듬 해 김태진에 의해 희곡으로 각색되어 초연된 바 있다. 1952년 작가 자신에 의해 <도라지공주>라는 제목의 희곡으로 재창작되어 공연되었으며, 이후 대중적 인기를 누리며 자주 공연되었다.(358) 인천시립극단의 개작본은 남녀노소·가족이 함께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시민극으로 형상화되었다. 보편성과 현대성에 기초한 현대적 무대를 선보였다.(중략) 원작에서 가장 문제가되는 것은 헛소문을 퍼뜨리는 신랑 김미언의 애매한 이중적 성격이었다. 이런 이중성을 극복하고, 김미언과 입분이의 순수하고 올바른 마음가짐도 분명히 드러나도록 보완되었다. 그래서 헛소문의 진원지는 신랑 측이 아니라, 맹진사의 만행을 저지하려는 마을 사람들 자신인 것으로 설정된 것이다. 삼돌이의 성격도 강조되었다. 원작의 취지를 살리면서도 가면의 착용, 춤, 노래, 마임, 마당놀이 등을 대담하게 활용함으로써 새로운 양식적 탐구를 보여주었다.(359)   4) 채희완의 탈춤극 극단 한두레가 공연한 채희완 작·연출의 <칼노래 칼춤>(1994. 10)은 마당극과 무대극의 장점을 살린 가면무용극으로서 주목받았다. 객석과 무대의 구분이 없이 공간 전체를 연행공간으로 활용한 생명력 넘치는 분위기였다. 이 공연은 현실적인 입장에서 동학농민전쟁을 되새기고 향후의 민족적 의지를 상징적으로 부각시킨 것이 감동적이었다.(359)   5) 탈춤극의 의의와 과제 한국의 고유한 가면극인 탈놀이는 다양한 사회적 갈등을 표출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언어, 춤, 노래가 어우러지는 놀이적 형식 속에 해소시킨 민중적 축제극이었다. 지역마다 다른 재료와 다른 형태와(360) 색채, 다른 방법으로 만들어진 가면은 연극도구로서 뿐만 아니라 전통미술사의 한 맥을 이었다. 아울러 지역마다 다양한 춤사위는 연극의 표현으로서 우수한 창의성과 개성을 발휘했다. 양주별산대와 송파산대의 전아(典雅)한 춤사위, 봉산탈춤·강령탈춤·은율탈춤의 활달하고 공격적인 춤사위, 낙동강 유역의 제멋대로의 춤사위는 가장 한국적인 몸짓의 미학을 보여준다. 탈춤극의 결론으로서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전통탈춤사위의 현대적 계승과 활용성이다.(중략) 탈춤사위는 그 자체가 일종의 몸짓언어이자 훌륭한 연기인 것이다. 이러한 자원을 곁에 두고도 서양으로 서양으로만 치닫는 연극인들의 자세도 답답하거니와 보물을 망각한 채 시대착오적인 연기개발에 나서는 연극인들의 근시안적 방법 역사 한계가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 전통탈놀이의 계승이 현대적인 창조가 아니라 유희성에 빠지거나 사회문제에 대한 소재의 차원에 머문 것은 한계로 지적된다. 이러한 한계를 얼마나 예술적으로 극복하고 탈춤의 고유한 축제성을 부각시킬 것인가가 현대적 탈춤극의 과제라 할 것이다. 탈춤의 현대적 문법을 개발하는 작업과 함께 이에 걸맞는 진지한 현실인식을 갖추어야 한다.(361)   3. 꼭두극의 가치와 현대 인형극 1) 현대 ‘꼭두극’ 흙이나 나무, 종이나 돌, 천이나 플라스틱 혹은 가능한 재료를 응용해서 사람의 형상으로 만든 것을 인형이라고 한다. 외형적으로 사람과 닮은꼴이라는 데서 비롯된 명칭이다. 사람의 형상 이외에도 동물상, 신상(神像), 괴물상, 기타 어린이들의 장난감(玩具)류에 인형이라는 명칭이 두루 씌이고 있다. 이것은 사람과의 유사성뿐만 아니라, 사람의 인격이나 심리, 행동방식 및 언어와 폭넓은 비유가 성립되는 데서 비롯된 개념이다. 사람들은 인형 혹은 인형놀이를 통해서 자기의 모습과 행동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데 흥미를 느끼고 있다. 나아가서 매우 기발하고 상상적인 인형놀이를 통해서 실제 체험을 능가하는 새로운 세계와 인생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깨닫게 된다.(김청자 편역, 󰡔��인형예술의 재발견󰡕��, 대원사, 1989 참조-원주)(362) 현대는 만화인형(漫畵人形)과 영상인형(映像人形)이 발달해 있다.(362) 말 그대로 실체는 없고, 만화나 영상 가운데서 하나의 성격 및 이미지로 살아 있는 인형인 것이다. 이를 캐릭터(character)인형이라고 통칭한다. 이 캐릭터인형들은 주로 만화책과 만화영화에서 혹은 일반영화에서 애니메이션(animation, 움직이는 그림)으로 표현된다. 캐릭터 인형이 발달하고 문화산업의 주력으로 성장하면서 실물인형들은 인기가 하락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옛 사람들은 인형을 ‘괴뢰(傀儡)’라고 하여, 가면을 가리키는 한자어와 혼용하였다. 그것은 실제 인간과 다른 가장된 인격체이고 귀신과 상통한다는 의미에서 일반화된 용어일 것이다.(이두현, 󰡔��한국가면극󰡕��, 문화재관리국, 1969, p40 참조-원주) 또한 인형을 가리키는 말로 ‘꼭두’ 혹은 ‘꼭두각시’가 널리 사용되었다. 중국에서는 6세기 중엽에 인형을 ‘곽독(郭禿)’이라고 했다.(角田一郞, 「人形劇の成立に關する硏究󰡕��, 旭屋書店, 1963, pp190~191 참조-원주) 한국의 꼭두라는 명칭은 중국의 곽독에서 유래되고 다시 일본의 ‘구구츠(クグツ)’가 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363) 한국의 대표적인 전승인형극은 ‘꼭두각시놀음’이다.(363)   2) 심우성의 꼭두극 3) 꼭두극의 다양한 시도 꼭두각시놀음은 일명 ‘박첨지놀음’, 혹은 ‘홍동지놀음’이라고도 불린다. 그만큼 전통 인형극에서 박첨지와 홍동지의 역할 비중이 크다. 박첨지는 연분홍색 얼굴에 흰 머리와 흰 수염을 하고 소매가 긴 저고리를 입은 허름한 노인이다. ‘첨지’는 원래 관직명이던 것이 일반적인 호칭으로 정착된 것이다. 박첨지는 가산을 탕진하고 정처없이 강산을 유람하는 초라한 늙은이로, 공연 전체의 해설자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꼭두각시놀음은 박첨지를 사이에 두고 본부인인 꼭두각시와 젊은 첩인 덜머리집이 갈등하는 구조로 전개된다. 한편, 홍동지는 몸 전체가 붉은 나체로 머리에 상투를 한 채 사타구니에 커다란 남근을 달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동지’는 관직명에서 유래한 일반적인 호칭으로, 홍동지는 건장한 서민청년의 모습을 구현한다. 그는 힘이 센 역사(力士), 남을 돕는 조력자, 생명의 구원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시미(이무기)를 잡아 껍질을 벗겨 팔아 돈을 벌 정도로 초월적인 위력을 과시하며, 위급한 상황에 출현하여 박첨지를 구한다. 아울러 거대한 생식기로 평양감사의 상여를 밀고가며 권력층의 위선을 노골적으로 야유하는 반항아의 모습을 보인다.(서연호, 앞의 책, pp.186~191 참조-원주) 현대극은 주로 이 박첨지와 홍동지의 캐릭터에 주목하(367)여 꼭두각시놀음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368)   4) 꼭두극의 의의와 과제   4. 재담극의 부흥과 화술극의 전통 1) 기지에 찬 화술극 한 배우가 혹은 두 배우가 재치 있게 말을 하며 현실을 풍자하거나 관객들을 즐겁게 하는연극을 ‘재담극’이라 했다. 가면이나 인형이 동원되지 않는 이 연극에서는 코믹한 언어가 주 수단이고 거기에 익살스런 연기가 곁들여졌다. 배우의 기량은 기지에 찬 말의 기술로 평가되었다. 즉 화술에 의존하는 골계극이었다. 재담극을 ‘판극’, ‘판굿’이라고도 했다. ‘판’은 무대나 공연장, 노는 장소 등을 지칭했고, 일정한 내용을 구성해서 연행하는 장면 장면을 지칭하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시청중이 모인 어느 장소에서 배우들이 연극적으로 집약된 소재를 한 장면, 한 장면씩 만들어가는 과정을 의미했다. 한국의 재담극은 오랜 역사를 지녔다. 왕과 상류계층은 유식한 재(371)담을 즐겼는가 하면, 문맹인 서민들은 그들 나름대로 이해하기 쉽고 일상생활에서 우러나오는 솔직한 재담과 몸짓을 즐겼다.(372) 재담극의 방식은 계승되었다. 현대 재담극을 희극과 구분하여 서술하는 것은 희극이 서구적인 양식의 계승·창작인데 반해, 재담극은 전통양식의 계승·창작으로서, 다른 구조와 어법을 지녔기 때문이다. 유사한 것 같지만 양자는 표현방법과 수용방법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 재담극의 장면 만들기, 개방된 공간 활용, 생략된 연기, 더블 캐스트, 낭독법, 격조 있는 말투, 말과 노래의 혼합, 서사와 서정의 조화 등은 전통양식의 재창조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시된다.(373)   2) 1970년대의 재담극 극단 실험극장이 공연한 최인훈 작, 김영렬 연출의 <놀부전>(1972. 5)은 판소리 <흥보가>를 개작한 것이다. 선량하고 정직한 흥보가 제비의 부러진 다리를 고쳐주고나서 하늘의 도움으로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최인훈은 고전에서 탐욕스럽게 묘사된 형 놀부를 성실하고 지혜로운 현실주의자로, 반면 동생 흥부를 게으르고 무기력한 인물로 재해석하였다. 자본주의 사회의 논리를 적용해 고전을 패러디한 것이다. 놀부는 양식을 얻으러 온 흥부에게 게으름과 무기력, 무절제와 융통성 없는 태도 등을 질타하면서 자신의 근면성실함을 과시한다. 이처럼 이 작품은 흥부를 주인공으로 한 고전의 구조를 뒤집어 놀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이와 함께 봉건적 윤리를 자본주의적 논리로 대치함으로써 고전을 현대화시켰다.(373) 실험극장이 공연한 윤대성 작, 김영렬 연출의 <너도 먹고 물러나라>(1973. 3)는 ‘장대장네굿’을 현대화시킨 것이었다. 황해도지역에 전승되던 이 굿은 전통극의 배우(‘광대’라 했다)들이 무당굿을 모방해서 공연하던 레퍼토리였다. 코믹한 형식을 그대로 살리고 낡은 내용은 현실적인 이야기로 대체하였다. 제목인 ‘너도 먹고 물러나라’는 무당들이 악귀를 물리칠 때 하는 주술적인 명령어이다. 이 작품에서는 한국의 현실을 타락시키고 부정하게 만드는 요인들을 악귀에 비유하고, 이러한 악귀를 대상으로 제물(祭物)을 받아먹고 물러가기를 요청하고 있다.(375) 극단 자유극장이 공연한 장윤환 작, 김정옥 연출의 <색시공>(1975. 1)은 동시대 유사종교의 난립을 풍자한 언어유희극이었다. 도사를 자처하는 두 청년은 교주인 선생을 수제 로켓에 태워 공중으로 날려 보내고는 비로소 영생불사의 진리를 터득했다고 자부한다.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힌 두 청년은 교세확장을 위해 경전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이견과 갈등이 점차 심화된다. 한 청년은 교세확장을 위해서 신(376)자들에게 거짓 교리를 강요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다른 청년은 신자들에게 진실한 교리로 접근해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교리논쟁은 다시 새 교주를 누가 차지하느냐의 싸움으로 발전한다. 연극은 두 청년이 무한도설(無限道說, 오영수 역)과 무량도설(無量道說, 조명남 역)이라는 각기 다른 종파를 창시하여 정부기관에 등록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이처럼 이 작품은 ‘색즉시공’이라는 불교적인 명제가 현실 속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를 사교집단의 해프닝을 통해 제시함으로써 한국사회의 정신적 무질서를 상징적으로 고발하였다. 극심한 유사종교와 유사종파의 난립, 그리고 종교가 생계수단으로, 치부와 권세의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오염된 현실을 감각적이고 비유적인 언어로 익살스럽게 표현한 점이 주효했다. 전통광대의 화술과 당시 소외된 지역인 전라도의 방언을 십분 응용한 작가의 재치 또한 돋보였다.(377) 극단 민예가 공연한 허규 작·연출의 <다시라기>(1979. 10)는 진도지역에서 전승되는 장례놀이의 일종인 ‘다시라기’를 현대화한 것이다. 다시래기에는 어원상 ‘다시 낳는다, 다시 생산한다’는 의미와 ‘여러 사람을 즐겁게 한다, 함께 즐긴다’는 의미가 들어 잇다. 이 놀이는 마을 사람들이 시신을 안치한 제전 앞에서 벌어진다.(378)   3) 오태석의 재담극 재담의 양식적 원리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 극작가는 오태석이다. 오태석 작·연출의 <약장사>(1974. 2)는 모노드라마였다. 동시대의 삼류 약장사들이 거리를 배회하며 혼자서 쇼를 했듯이, 배우 이호재도 약장사를 모방한 언어유희를 통해 관객을 웃겼다.(378) 오태석 작·연출의 <춘풍의 처>(1976. 12)는 고전 <이춘풍전>을 현대 재담극으로 재창작한 것이다.(380) 국립극단이 공연한 오태석 작·연출의 <기생비생 춘향전>(2002. 4)은 고전 <춘향전>을 새롭게 재구성한 작품이다. <춘향전>은 우리문화의 원형이자 창작의 열린 가능성으로, 이를 새롭게 해석하는 일은 우리 연극의 당면과제이다.(381)   4) 1980년대 이후의 재담극 극단 고향이 공연한 안종관 작, 박용기 연출의 <토선생전>(1980. 5)은 고전 <수궁가>를 현대화시킨 연극이다.(383) 김시라 작·연출의 <품바> 공연은 전남 무안군 일로읍 공화당에서 1981년 배우 정규수(1대 품바)로부터 시작되었다. 1960년대 이후, 무안이 일시적으로 잔존 각설이패의 집단거주지가 된 적이 있는데, 이러한 현실이 김시라 시도의 계기가 되었다. 작품은 각설이패의 유일한 안식처인 ‘천사의 집’을 배경으로 천장근이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일제시대부터 현대까지 품바타령과 재담, 춤으로 엮어낸 것이다. 공연을 시작하자 좋은 반응을 얻었고, 1985년에는 극단 가가의회와 품바전용극장 ‘왕과 시’를 개관하기도 했다. 국내공연, 해외공연, <각시 품바>(1994) 등이 이어졌다. 1991년 2천회, 1998년 4천회 공연을 돌파했고, 한국기네스북에 최장기공연으로 기록되기도 했다.(중략) 2001년 2월 김시라의 갑작스런 타계로 이 작품의 새로운 개발은 끝나고 말았다.(384) 극단 실험극장이 공연한 홍창수 작, 윤우영 연출의 <오봉산 불지르다>(1999. 4)는 고수의 북장단에 맞추어 전개되는 재담극이다.(384) 극단 연우무대가 공연한 김태웅 작·연출의 <이(爾)>(2000. 11)는 조선시대의 배우희를 재현하여 주목받았다. 전체적으로는 연산군과(385) 장녹수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면서, 한편으로 당대의 궁중광대였던 실존 인물 공길(孔吉)을 등장시켜 극중극으로 배우희를 펼쳐보인다. 연극은 연산군과 장녹수, 그리고 공길의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연산군은 공길의 뛰어난 재주에 매료되어 연정을 느끼고, 공길은 몸을 바쳐 왕의 욕망을 달래준다. 동성애의 결과로 공길은 천민 출신에서 높은 관직에 오르며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임금과 공길의 관계를 눈치챈 녹수는 음모를 꾸며 공길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죽마고우 장생의 희생으로 목숨을 건진 공길은 광대의 본분을 깨닫고 왕의 폭정을 비판하는 재담극을 연출한다. 극중극이 끝남과 동시에 공길은 자결을 택하고, 뒤이어 반정(反正)의 군사들이 들이닥치며 연극은 막을 내린다.(386) 작품의 제목인 ‘이(爾)’는 임금이 신하를 높여 부르던 호칭으로, 공길에 대한 연산의 각별한 애정을 함축한다. 광대이면서도 고위 관직에 오른 공길의 비극적 삶을 통해 신하와 배우의 진정한 사명을 중의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특히 작가가 밝힌 바 있듯이, 이 작품은(386) 애초부터 조선조의 배우희를 재구하려는 뚜렷한 의도하에 기회되었다.(김태웅, 「작가노트」, 󰡔��이󰡕��, 평민사, 2003, p.49 참조-원주) ‘소학지희(笑謔之戱)’로 불리기도 했던 조선의 배우희는 나례(儺禮)의식에서 분화되어 조선조의 대표적인 궁중연희로 자리 잡았으며, 정치적 기능과 오락적 기능을 겸하였다.(387)   5) 재담극의 의의와 과제 한국의 전통연희에서는 대사를 흔히 재담이라고 했다. 재치 있는 말, 재미있는 말이다. 그러나 재담은 ‘대사’이상의 판극, 판굿, 판놀음을 동시에 의미하기도 했다. 재담은 문학적인 언어로서 값진 독자성을 지니고 있으며 연극적인 언어로서 역시 그러하다. 재담은 흔히 말뒤집기나 언어유희, 욕설이나 비속어의 상용, 반복적인 운율성의 특성을 보인다. 재담은 이러한 문법을 통해 현실에 대한 비판과 야유를 수행하며, 한편으로는 쾌락적이고 오락적인 기능을 수행한다.(387)   5. 마당극의 출현과 노동극 1) 마당극·노동극·민족극 어의상으로 마당은 실외공간이고 전통적으로 마당극은 야외그이다. 마당극을 야외극에 한정시키지 않고, 이른바 ‘마당정신을 표현한 연극’으로 통칭할 때, 실내의 공연도 마당극에 포함된다. 1970년대에 마당극이 성립된 이후, 실제로 마당극은 야외와 극장(기타 실내)을 오가며 공연되었다. 마당극은 집단적인 창작과 집단적인 공연을 위주로 했다. 당국의 검열을 받지 않은, 이를테면 불법공연이므로 학술발표회나 토론회, 학예회나 워크숍 같은 명칭을 빙자하여 공연되었다. 이렇게 마당극의 개념적 애매성은 성립시기부터 배태된 셈이다. 공연양식이라는 관점을 기준으로 하면, 탈극장주의 야외극만이 ‘마당극’으로 분류된다. 탈극장주의는 마당정신의 한 표현이기도 하(389)다. 마당정신은 언제나 현실주의에 기반을 둔 체제저항과 투쟁, 시민들과의 의사소통 및 시민의식의 표현, 정보가 차단된 사회 속에서의 현실비판과 진실전달, 그리고 전통적인 드라마 방법의 계승과 재창조라는 의미를 포괄한다. 전통적인 마당극의 방법을 계승하면서도 동시대의 시민들이 처한 현실문제를 연극으로 표현하려는, 지극히 정치적인 연극이 마당극이다. 이런 점에서 사실극과 공통된다. 그러나 양식적으로 서구적인 리얼리즘보다는 전통적인 민중극의 현대화에 더욱 가깝다. ‘마당극은 암울한 시대상황 속에서 민중이 끝내 살아있음을 웅변한다. 유언비어의 시대적 수렁에서 알릴 것을 알리고, 알려진 것을 제대로 바로 잡음으로써 언론의 한 통로구실을 떠맡음이 분명하다. 새로운 연극운동이기 이전에 생존을 위한 싸움이고, 은폐된 현실을 해결하는 사회운동이며, 민족적 신명으로 제3세계의 생명을 예축(豫祝)하는 생명공통체운동이다. 마당극의 개념은 완결된 것이 아니라 성취되어 가는 것이자 열린 개념이다.’(채희완, 「마당굿의 과제와 전망」, 󰡔��한국의 민중극󰡕��(작품집), 창작과비평사, 1985, pp4~5 참조-원주) 이것은 동시대에 마당극운동을 주도한 한 연극인의 메시지다. 1970년대 검열제도에 저항했던 탈극장주의 사실극은 새로운 제작방법과 공간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공연장으로서 ‘극장’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구태의연한 기성제도와 인식과 행동방식에 저항했다. 그들은 서구적인 리얼리즘에 구속되지 않고 전승되는 민중극, 즉 가면극이나 인형극, 판소리 같은 연극에서 표현방법을 찾았다. 그들에게 공연예술과 새로운 이념, 정치적 투쟁은 별개일 수 없었다. 그들은 한때 자신들의 연극을 ‘마당극(마당굿)’으로 지칭했고, 마당극의 발전적인 개념으로 기성어를 가다듬은 ‘노동극’ 혹은 ‘민족극’이라(390)는 개념을 부각시켰다.(서연호, 「민족극의 이념」, 󰡔��한국연극론󰡕��, 삼일각, 1975, pp11~36 참조-원주) 탈극장주의 마당극 이외에도 당시엔 극장주의의 마당극이 있었고, 실험극운동으로서의 마당극이 있었다.(391) 한편, 이상과 같은 마당극, 마당극정신을 계승하면서 노동자들에 의해서, 혹은 노동자들의 입장에 서서 만들어진 연극이 이른바 ‘노동극’이다. 엄격한 규제 속에서 정부 주도로 진행된 산업화는 1980년대부터 노동법의 개선을 전제로 한 공영화 및 민영화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노동법과 분배문제를 둘러싼 노사분규는 산업의 구조와 성격, 생산 방법, 발전 속도와 맞물려 점차 거칠어지고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현실성과 현장성, 비판과 주장은 노동극의 조건이었다. 노동극은 노사분규와 노사발전의 한 문화적 표현이었다. 초기의 단순 재현적인 겨향이 80년대 후반부터는 점차 구조적인 양식으로 발전되었다.(민족극연구회, 「󰡔��민족극 대본선 3󰡕��을 펴내며」, 󰡔��민족극 대본선󰡕�� 3, 풀빛, 1991, pp2~3 참조-원주) ‘민족극’은 마당극 혹은 노동극의 연장선에서 상용되기 시작했다. 한국민족극운동협회는 ‘연행(演行) 활동의 당면 과제를 민족현실의 극복에 두고, 민주화와 분단극복의 통일전망을 민족사적 비원(悲願)으로 파악하여, 민주화를 이룩하고 통일의 실현을 위해 온폐, 왜곡된 민중사실을 밝혀 드러내며, 이를 민중적 전망과 세계관 속에서 형상화하는 연행행위 모두를 민족극으로 규정한다’고 창립선언문에서 밝혔다.(391)   2) 마당극과 시대정신 1970년대에 최초로 공연된 마당극은 농민의 협업과 분업의 중요성을 계몽한 김지하 작, 임진택 연출의 <진오귀굿>(1973. 12)이었다.(중략)농민을 못 살게 구는 대상으로 수해귀(水害鬼), 외곡귀(外穀鬼), 소농귀(小農鬼) 등 세 마리 도깨비를 설정하고, 농민이 단결하여 그들을 몰아내는 놀이극이다. 사실극의 대사와 판소리, 탈춤, 풍물, 춤 등을 응용하여 공연했다.(392) 다당극들은 애초부터 당국의 검열을 피하여 ‘공연 소식을 전해들은 일부 관객들만이 볼 수 있는 장소(교회, 공장, 대학, 야외)’에서 공연되었다. 내용은 주로 신문에 보도되지 않았거나 보도되었다고 해도 자세히 다루어지지 않은 사건을 조사하여 극화했다. 한마디로 ‘살아있는 신문’의 역할을 하여 신선감을 던져 주었다.(394)   3) 마당극의 전성기 1970년대에 개화한 마당극은 1980년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한다.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시작된 80년대는 군사정권의 철권통치가 그 어느 때보다 심했던 시대였고, 이에 비례해시민들의 미주화에 대한 갈망 또한 그 어느 때보다 드높았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전통적인 연극방법과 체제저항적인 주제의식으로 무장한 마당극은 큰 호응을 얻었다.(395) 극단 연우무대는 <장산곶매>(1980. 3),(중략) 조선시대 말기 황해도 장산곶의 민중저항을 다룬 <장산곶매>는 서사극 방법을 마당극에 응용한 것이다. 황석영의 희곡을 개작하여 드라마센터에서 공연했다. 무당의 공수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주민들의 생활상과 억울함을 보여주고, 마지막에 참을 수 없는 민란의 격렬함을 표현한다. 풍어굿이 재연되고 간간이 민요가 불린다.(395) 1983년부터 5년 간 전두환의 군부통치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마당극은 한층 조직화되고 다양하게 발전되었다.(398) 극단 토박이가 공연한 <금희의 오월>(1988. 4)은 극장주의에 치중한 마당극이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1980년 5월 광주사태를 최초 사실대로 취급한 점에서 전환기적인 의의를 갖는다.(399) 극단 아리랑이 김명곤 작 연출로 공연한 <갑오세 가보세>(1988. 4)는 동학농민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당시 민중의 수탈상을 마임으로 보여주는 앞풀이와 우금치의 마지막 전투를 극화한 뒷풀이를 포함하여, 전체 7마당으로 구성되었다. 특정 인물의 무용담이 아닌 전봉준(안석환 역), 먹쇠(박용수 역), 춘복(고동업 역) 등 평범한 농민들의 이야기와 함께 거사를 중심으로 한 사람들의 갈등, 조정의 태도, 청국의 움직임, 일본의 속셈 등이 서사로 전개된다. 이러한 서사는 대사극이 아니라, 풍물, 민요, 꼭두각시놀음, 판소리 같은 전통연희와 일본의 가부키와 검도 같은 예능을 활용하여 표현되었다. 전래 가사인 검가(劍歌), 가보세, 옹야헤야, 녹두야 등을 이성재가 작곡하여 부른 것도 특기할 일이다.(400) 이 작품에 대하여 이영미는 ‘작품을 작품답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다채로운 연출, 무대형상화 방법, 그리고 전편에 흐르는 살아있는 민중들의 힘과 사람다운 모습이었다. 연출에 있어서 이 작품은 표현주의적, 서사극적, 사실주의적, 마당극적 기법을 모두 동원하여 관객의 긴장감을 최대한도로 유지시키는 한편, 많은 이야기를 압축, 효과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이영미, 「닫히고 열리는 무대」, 극단 아리랑, 󰡔��갑오세 가보세󰡕��(공연 팸플릿), 1988,6-원주)(400)   4) 노동극의 대두 노동극은 노동자가 만든 연극과 노동을 소재로 한 연극을 총칭한다. 19세기 말부터 독일노동자들의 문화운동에서 시작된 노동극은 1920, 30년대 식민지치하 조선노동자들의 프로극(계급주의 연극)으로 전이되었고, 현대극에서는 산업체조합의 노동극으로 발전되었다. 노동자들의 권익투쟁 혹은 노동자들을 위한 민주화운동은 마당극의 정신과 방법에 포함되므로 여기서는 마당극의 한 영역으로 기술하기로 한다. 원풍모방노동조합 탈춤반은 <원풍모방 놀이마당>(1979. 4)과 <조선방직 노동쟁의 사례극>(1981. 11)을 공연했다.(401) 컨트롤데이터 해고노동자들이 준비한 <금강산을 빌려주고 머슴살이 웬 말이냐>(1984. 9)는 흥사단 강당에서 공연하려다 경찰의 연행으로 좌절되었다. 그들은 조합의 탈춤반원이었고, 투쟁하다가 해고된 사람들이었다.(402) 산업선교회 제1기 노동자문화교실이 졸업작품으로 공연한 <해태제과 노동재의 사례극>(1984. 4)은 노동쟁의 사건의 전말을 재구성하여 만든 것이다. 일부 해태제과의 노동자들도 참가했다.(402) 극단 천지연은 <선보에 서서>(1986. 7)와 <쇳물처럼>(1987년 봄)을 공연했다.(402) 놀이패 한두레는 <어떤 생일날>(1987년 여름), <우리 공장 이야기>(1988. 6), <일터의 함성>(1989년 가을) 등을 공연했다.(403) 여성노동자회는 <우리 승리하리라>(1987. 7), <막장을 간다>(1987. 9), <들불로 다시 살아>(1988. 8), <껍데기를 벗고서>(1988. 10) 등을 공연했다.(403) 극단 현장은 <횃불>(1988. 3), <노동의 새벽>(1988. 9), <멋있는 동지>(1989. 9) 등을 공연했다.(403)   5) 마당극의 의의와 과제 마당극은 70년대 중엽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연극사에 있어서 괄목할 만한 현상 중의 하나이다. 전통극의 정신을 기반으로 하되, 치열하고 분명한 정치적 지향성을 내보인 연극이 마당극이다. 서구편향적인 역사인식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시대정신을 토대로 하여 다수 관중의 참여에 의해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민중극을 실천적으로 구현하고자 했다. 상황적 진실성, 집단적 신명성, 현장적 운동성, 민중적 전형성으로 요약되는 마당극의 미학은 민중의 생활체험을 예술적 체험에 의해 공유화시키는 전형적인 통로를 마련한 점(404)에서 역사적으로 큰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연극은 정치행위이기 이전에 하나의 예술행위이다. 그런 맥락에서 마당극은 예술적인 전문성을 확보하거나 독자적인 예술양식을 정립하는 데 한계를 보였다. 주체적인 정치의식에 상응하는 창조적인 예술원리를 개발하는 노력이 절실히 요청되었다. 이 마당에서 우리에게 ‘마당극은 지속할 만한 의미와 힘을 지니고 있는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마당극 연극인들은 이 질문에 작품으로 응답해야 한다. 해묵은 이데올로기 논재이나 실증성이 없는 관념적 연극이론, 혹은 편협한 국수주의 자세로 마당극은 절대 발전할 수 없다. 어떤 연극양식도 그렇지만, 마당극 역시 자생적이고 자립적인 공연예술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무대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다.(405)   6. 가무악극의 시도와 전통 음악극의 필요성 1) 전통음악과 음악극 한국 전통음악에서 판소리는 서사극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연극적인 가창으로 표현된다. 20세기 초엽에 서울에 와서 공연했던 중국의 경극(京劇)이나 일본의 가부키(歌舞伎)에서 적지 않은 자극을 받아 판소리 명창들은 그것을 무대음악극으로 재창조해냈다. 이것을 노래로 하는 연극이라는 의미에서 창극이라 했다. 전통적으로 유명한 판소리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등 5가를 창극으로 제작하여 새로운 음악극 붐을 일으켰다. 1930년대부터 오페라도 수용되었다. 이 창극은 오페라와 더불어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406) 한편, 20세기 초엽부터 기독교회나 학교로 수용된 서양음악은 어린이 노래극이나 중학생들의 학교 노래극을 발전시키는 기반이 되(406)었다. 이런 음악극은 오페라와 함께 가극(歌劇)이라고 불렀다. 1920년대 후반의 대중극에서 막간(幕間) 장르가 시작되었다. 이 장르 가운데서 대중가수의 노래는 특히 인기를 독차지했다. 연극보다 노래에 흥미를 느끼는 관중들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대중적인 노래가 1930년부터 본격적인 대중음악극을 탄생시켰다. 노래하는 연극이라고 해서 악극(樂劇)이라고 지칭했다. 악극은 멜로드라마틱한 줄거리에 감상적인 주제곡들을 섞어서 부르며 과장된 연기와 익살스런 쇼를 포함하는 공연이었다. 일본식민지 시대에 악극은 한국인들의 고통스러운 삶에 커다란 위안물이 되었다. 악극은 1950년대까지 공연되다가 그 종사자들이 영화 붐을 타고 전향함으로써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1960년대 초에 미국의 뮤지컬 음악이 수용되면서 서양식 뮤지컬의 창작이 시작되었다.(중략) 같은 시기에 전통음악의 재발견과 재창조의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이러한 운동이 동기가 되어, 창극은 그 나름대로 현대화에 힘을 경주했다. 한편에서는 창극과는 다른 새로운 음악극이 모색되었다. 전통적인 음악구조와 방법에 의한 관현악곡이 전체의 기조가 되고, 배우의 가창과 무용과 연기를 통해 구성되는 한국적인 뮤지컬을 개발하려는 시도였다. 일반적으로는 표현요소를 기준으로 ‘가무악극(歌舞樂劇)’이라고 부른다. 전통성을 기조로 한 뮤직 드라마라는 의미이다. 창극, 뮤지컬과 다른 음악극을 여기서는 가무악극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1973년 6월 서라벌예술대학은 김동리 작사, 이원경 극본, 김대현 작곡, 이원국 편곡의 교성무극(交聲舞劇) <백의종군>을 공연했다. 가야금을 포함한 오케스트라의 지도에 임만규, 판소리를 포함한 합창 지도에 한성석, 서곡무용 및 강강수월래를 포함한 무용지도에 송(407)범이 참여했다.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말 그대로, 등장인물 개인의 노래와 집단적인 합창, 그리고 군무가 총체적인 조화를 목표로 하는 가무악극이었다. 최초의 가무악극 시도로 여겨져 주목된다.(408)   2) 손진책의 연출작 극단 민예극장이 공연한 오영진 원작, 장소현 각색, 손진책 연출, 김영동 작곡의 <한네의 승천>(1975. 12)은 원작 시나리오를 각색한 가무악극으로 주목받았다. 전통을 기조로 한 창작곡들은 당시 서구양식의 범람 속에서 신선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한네(이주실 역)라는 여인의 고난에 찬 삶을 선녀설화로 재구하고 만명(정현 역)이라는 현실적인 인물을 등장시켜 동시대적인 주제를 부각시키고자 한 작품이다. 전통적인 ‘선녀와 나무꾼’ 설화와는 달리, 만명에 대한 한네의 지극한 헌신과 사랑을 담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현실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모습을 그렸다. 종막에서 그녀의 승천은 그녀가 베푼 아름다움에 대한 하늘님의 구원으로 묘사되었다.(408) 극단 미추가 창단공연으로 올린 정복근 작, 손진책 연출, 박범훈9408) 작곡의 <지킴이>(1987. 4)는 문중(門中)의 정신을 지키는 제사의식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409) 1990년, 88서울예술단은 체제를 개편하여 서울예술단이라는 이름으로 새출발하였다. 서울예술단이 공연한 김용옥 작, 손진책 여출, 박범훈 작곡, 국수호 안무의 <백두산 신곡>91990. 10)은 총체예술적 성격을 지닌 가무악곡으로 시도되었다. 음악, 무용, 연극, 신화를 결(409)합시켜 만든 대서사극으로 전체 2막 18장의 구성이었다. 이 작품은 단군신화 이전의 신화로 거슬러 올라가 우리 민족이 생성된 과정을 그린 것이다. 암흑의 상징인 흑두거인이라는 외세를 물리친 백두거인(김평호 역)이 우리 민족에게 정기를 심어준 신으로서, 그 신이 조선에 고난과 시련이 닥쳐오자 변화하여 백두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단군신화를 확대 해석하여 개국신화를 정립하고, 현대적으로 재창조한 것이다.(중략) 국수주의적 요소가 깃든 것이 한계였지만, 한국적 공연양식을 정립해 보겠다는 제작진의 의도가 주목 받았고, 실제로는 작품을 펼쳐놓는 데 치중하여 음악적인 요소와 무용, 연극이 제대로 짜임새 있게 집약되지 못했다(410) 극단 미추가 공연한 윤대성 작, 손진책 연출, 박범훈 작곡의 <남사당의 하늘>(1993. 6)은 본래 여사당이었던 바우데기(본명 金岩德)가 남사당패를 조직해서 꼭두쇠로 활약한 안성 청룡사 불당골의 전설적인 이야기를 소재로 만든 작품이다. 남사당은 하늘에서 죄를 짓고 인간세계로 하방(下放)된 무리들이며, 고통을 인내하며 광대로서의 역할을 다할 때 다시 하늘로 갈 수 있다는 속설을 믿고 열심히 남을 위해 연행(演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410)   3) 이승규의 연출작 극단 가교가 공연한 이근삼 작, 이승규 연출, 신동민 음악의 <유랑극단>(1972. 4)은 가무악극으로서 선구성을 보였다. 말 그대로 식민지시대의 유랑극단의 수난과 꿈을 그린 이 작품은 개방된 무대에서 수레 하나를 끌며 연기와 노래와 춤으로 엮어내는 공연이었고, 당시로서는 매우 간편하면서도 신선하게 감성을 자극하여 관객의 주목을 끌었다.(411) 뉴욕에 이주한 연출가 이승규는 1993년 10월 8일 브로드웨이 95번가 심포니스페이스 극장에서 <유랑극단>으로 극단 누리의 창단공연을 올렸다. 교포 연극인들에게 뿔리를 둔 단체였다. 정교하게 제작된 손수레를 빈 무대에 올려놓고 그 수레를 다양한 용도(침상, 상여, 가옥 등)로 활용해 가면서 지난 시대 유랑극단 배우들의 변화무쌍한 인생을 속도감 있게 표현했다. 그것은 고국을 떠난 교민들의 실존적인 모습, 20세기 후반에도 세계사에서 여전히 방황하는 한국(411)인의 처지를 느끼게 했다.(412) 인천시립극단이 공연한 김동리 원작, 구히서 극본, 이승규 연출, 김철호 작곡, 구경숙 안무의 <등신불>(1999. 4)은 원작이 미처 다루지 못한 인물의 성격까지 생동감 있게 추구하였다. 초연인데다 종래의 사실주의 방법이 아니라 전통적인 가무희적 요소와 현대적인 영상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응용한 공연으로 주목받았다. 연출자는 대사를 최소로 줄이는 대신 가무희적 요소와 곤두놀이, 인형놀이, 택견, 불교의식 등을 최대로 활용하여 한국적인 정서와 느낌을 만들어 내었다.(412)   4) 70, 80년대 가무악극 민예극장이 공연한 허규 작·연출의 <물도리동>(1977. 10)은 가면극으로 유명한 하회의 고유한 지명응ㄹ 그대로 차용하고, 고려시대 가면을 제작한 청년 허도령전설을 무대 드라마로 재구성한 것이다. 작가는 ‘보전되어 오는 9개의 하회가면 외에 전해지지 않는 3개 가면(별채, 떡다리, 도령)을 가면의 역할, 성격, 조각수법, 구전자료 등을 참작하여 복원하고, 무의(巫儀)의 연극적 기능 실험, 단원들이 창단 이래 익혀온 판소리, 가곡, 가사, 무가, 탈춤 등 우리의 연극 유산을 바탕으로 하여 재창조하였다’고 밝혔다.(413) 자유극장이 공연한 김정옥 구성·연출의 <바람 부는 날에도 꽃은 피네>(1984. 2)는 권세가의 딸을 유괴한 상두꾼이 붙들어온 딸과 가까워지고 결국 풀어주는 대신 자신은 같은 패거리들에게 추방돼 광대가 된다는 내용이다. 발에 가면을 붙이고 공연하는 가면극, 거지들이 부르는 노래, 엿장사의 노래, 이야기 시합, 팬터마임 등 즉흥적인 놀이와 판소리가 곁들여진 작품이다. 크러스를 통해 가면의 이미지를 과감하게 부각시켰고 무언(無言)의 서사화를 만들어낸 점은 새로운 시도라 할 수 있다.(414) 88서울예술단이 공연한 오태석 작, 이기하 연출, 김영재·강준일 작곡의 <새불>(1987. 3)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각 분야 전문가들의 공동작업을 통해 총체예술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시도된 가무악극이다. 이 작품은 새 날을 밝힐 불을 받을 8도 신부(정은혜 등)들이 불받이 제사를 올리는 데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를 시기한 용왕의 방해로 제주도 신부(민경숙 역)는 풍랑을 만나 참석하지 못하고 용궁에 남게 된다. 수중 깊은 용궁에 갇힌 제주도 신부를 구하러 온 나머지 신부들의 정성에 감복한 용왕이 불을 얻어오는 조건을 제시한다. 8도 신부들의 합심과 미물인 조랑말(임관규 역)의 헌신적인 희생과 사랑으로 민족의 새 날을 밝힐 새 불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의 공연을 본 많은 사람들은 총체예술이 과연 바람직한 형식이냐는 의문과 함께 내용 역시 의욕만 앞선 의식과잉이라고 지적했다. 무용이라는 육체언어를 주요 표현수단으로 삼고 있으나, 여기에 대사나 동작 등 연극적 요소들이 제대로 맞물리지 않아 무용마저 표현영역이 좁아졌다는 지적도 있었다. 특히 추상적인 내용이 공감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었다.(415) 88서울예술단이 공연한 김진희 작, 김우옥 연출, 김희조 작곡의 <아리랑 아리랑>(1988. 9)은 전통 아리랑의 다양한 변주곡들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소련 땅 타슈켄트의 방송국에 근무하고 있는 교포 3세 이한(유인촌 역)은 할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혈육을 찾을 겸 88서울올림픽을 취재하러 어머니 땅을 찾아온다.(중략) 만남과 이별의 정조를 잘 살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416)   5) 1990년대 이후 서울예술단은 유치진의 <자명고>를 원작으로 한 김상렬 각색, 김효경 연출, 김정택 작곡의 <그날이 오면>(1991. 4), 가야금을 만든 우륵의 일대기를 그린 이강백 작, 김효경 연출, 김희조 작곡의 <님 찾는 하늘소리>(1993. 3), 사당패의 후계자 문제를 다룬 <뜬쇠 되어 돌아오다>(1993. 12), 천지개벽을 내용으로 한 최성철 극본, 서한우 안무·연출, 김종진 작곡의 <신의 소리-춤>(1995. 5), 방랑시인 김병연의 일대기를 그린 홍원기 극본, 오상민 각색, 박종선 연출, 최종혁 작곡의 <김삿갓>(1997. 11) 등을 공연했다. 국립국악원이 제작한 세종의 일대기를 그린 정복근 작, 한태숙 연출, 이상규 작곡의 <세종 32년>(1996. 11)은 세조의 꿈에 비친 부친의 모습을 재현한 음악극이다. 국악기를 총동원하여 전통 음률을 폭 넓게 살리려는 시도를 보였다. 서울예술단은 신선희가 총감독을 맡은 이후 가무악극에 더욱 치중했다. 신선희 극본·연출, 김대성 작곡, 손인영 안무의 <청산별곡>(2000. 6)은 고려가요 <청산별곡>과 <쌍화점>을 바탕으로 만든 본격적인 가무악극이다. 특히 무용이 중심을 이룬다.(417) 비나리라는 전통양식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비나리 시리즈’는 서울예술단의 고정 레퍼토리가 되었다.(418) 올림픽공원의 야외에 임시로 설치한 극장무대에서 월드컵 문화축전의 일환으로 공연한 신선희 극본, 신선희·이병훈 연출, 이준호 작곡, 채상묵 안무의 <고려의 아침>(2002. 5)은 팔만대장경을 소재로 한 가무악극이다. 평화를 희구하는 고려인들의 염원을 춤과 노래로 형상화한 이 작품은 여러 면에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418) 이 극의 기본적 구성은 놀이패들이 등장하여 성황제를 지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장면마다 다양한 형태의 연등이 등장하여 고려인들의 깊은 불심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 연등은 결말부에 가서 관객들의 손에 나뉘어져 인공의 호(湖)에 띄우는 평화의 촛불이 된다. 이처럼 이 공연은 동제(洞祭)와 연등회의 형식을 빌려 상생과 화합의 대동제적 의미를 십분 살린 무대였다. 그러나 이 공연의 가장 큰 수확은 무엇보다 야외무대의 공간 활용에 대한 문법을 제시했다는 데 있다. 방원형의 의 돌출무대를 중심으로 등퇴장로가 빗살형태로 객석을 가로지르도록 구성되었다. 객석 깊이 파고든 이러한 무대구성은 배우들의 동선을 사방으로 확장시키며, 이를 통해 관객들의 일방향적인 시선을 다각화시키는 촉매로 작용했다. 아울러 2층의 누각과 무대 둘레의 호는 주위의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시간의 힘에 풍화된 유적(遺蹟)의 깊은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객석으로 확장된 수평적 차원의 무대는 몽고의 침입과 고난을 형상화하는 현세적이고 의식적인 세계를 표현한 반면, 수직적으로 확장된 2층의 누각 무대는 대장경의 꿈을 통해 현실을 초극하려는 초월적이고 무의식적인 세계를 표현하는 데 효과적으로 기여했다. 그리햐여 무대의 수직적 원심력은 해명공주(정유희, 강권순 역)의 부활장면을 통해 누각의 꼭대기까지 확장됨으로써 극에 달하였다. 허공에 관세음보살로 떠오른 해명공주의 모습은 고려인들이 염원하던 보름달 같은 황금빛 화엄(華嚴)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구현해냈다.(419)   6) 가무악극의 의의와 과제 작곡이나 가창의 방법을 서양음악어법에 일방적으로 따르지 않고 전통적 방법을 되도록 살리면서 음악극을 만들고자 한 데 가무악극의 의의가 있다. 음악사가 곧 작곡사(作曲史)라는 관점에서 보면, 가무악극의 시도는 가능한 실험이자 미래지향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전통적 방법은 연주, 가창, 선율, 음역(音域) 등에서 현대적인 감성을 변화 있게, 충실하게, 폭 넓게 표현하는데 여러 가지 장애가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가사(歌詞)도 뜻있게 하고, 악보도 제대로 작성하고, 악기도 개량하고, 작품 소재에 대한 해석도 새로워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통이면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라(421) 현대의 관객심리에 감동을 주는 전통적인 음악이어야 좋은 것이다. 그동안 공연된 가무악극은 드라마 가운데 몇 곡의 노래가 삽입되는 정도의 이른바 ‘노래극’으로부터 드라마 전체가 관현악곡과 가창곡의 조화로 전개되는 작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상을 보였다.(422) 한국의 가무악극은 오늘날과 같이 성격이 애매한 ‘가무악극’으로 존속하지 말고, 당당하게 ‘한국음악극’으로서 보편성과 창의성을 이룩해내야 한다. 무리하게 창극, 뮤지컬, 가무악극을 통폐합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동서양, 한국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음악어법이 창작의 방법으로 활용되고, 한국인의 신화와 역사, 사고와 행동양식이 연극의 내용으로 새롭게 해석되고 창작된 현대음악극이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잡동사니와 무리한 접목이 아닌, 세련되고 승화된 ‘한국음악극’이고, 오늘날의 관객들이 즐겨 찾는 ‘한국음악극’이어야(422) 한다. 그것은 연극을 위한 노래의 삽입이 아니라, 음악적 질서로 조화된 노래와 반주의 드라마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유능한 작곡자들의 기여가 우선되어야 한다. 작품 전체의 악보가 보존되고, 필요하다면 어느 극단이나 어느 연주단에게나 재공연이 가능한 음악극이 되어야 할 것이다.(423)   제5장 결어 1. 한국 현대극의 의의와 과제 2. 일문 초록
39    고모리 요이치-󰡔�포스트콜로니얼󰡕� 댓글:  조회:3904  추천:1  2009-05-16
고모리 요이치, 󰡔�포스트콜로니얼󰡕�, 송태욱 옮김, 삼인, 2002   머리말   이 책의 제목이 왜 󰡔�포스트콜로니얼리즘󰡕�도 아니고 󰡔�포스트콜로니얼 연구󰡕�도 아닌 것일까? 물론 당초 편집부측과 논의하면서 그런 제목을 달자는 안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것이나 2001년이라는 현시점에서는 극히 한정된 영역을 가리키는 개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없었다.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이나 ‘포스트콜로니얼 연구’라는 용어는 주로 영어권에서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걸쳐 급속하게 하나의 연구 영역을 형성하게 된 일련의 담론, 즉 어떤 역사적 시점으로부터 유럽이라는 극히 한정된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권력 아래서 다른 지역에 대한 영토적 침략과 정복을 행한 이후의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연구 동향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유통되었다. 이러한 연구 동향의 특징은 유럽 식민주의의 제도들, 특히 제국주의 시대의 지배가 피지배 지역 사회에 어떠한 충격을 주었는가를 분석하는 데 있었다. 그 중에서도 제국주의에 의한 담론 조작에 초점을 맞춰 식민주의적 담론(colonial discourse)-세계를 문명과 야만, 정복자와 현지인, 식민자와 비식민자, 주인과 노예, 선진과 후진, 진보와 정체, 중심과 주변, 진짜와 가(10)짜 등으로 양분하고, 그러한 일련의 이항 대립주의(binarism)적 쌍 개념을 참과 거짓, 성과 속, 선과 악이라는 초월적 이항(二項)을 정점으로 하는 위계질서(Hierarchie) 안에 봉인하는 언어 시스템-안에서 구성되는 주체(subject)와 그것에 반항하고 저항하며 대항하는 주체 쌍방을 분석하는 데에 전략적 역점이 두어졌다. 특히 두 개념에 공유되고 있는 ‘포스트’라는 접두어는, 예전에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지역이 종주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전과 후를 분할하는 역사적 경계를 명시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이 ‘포스트’라는 접두어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어 왔다. 어떤 지역이 옛 종주국에 의한 식민지 지배로부터 독립했다고 해서 식민지 시대의 온갖 부정적인 유산이나 유제(遺制)가 불식되는 일이 결코 없을뿐더러 식민주의가 끝난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포스트’라는 접두어는 구식민지가 독립한 후에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세력에 의한 신식민주의(neocolonialism)적 현실을 은폐하고 있다는 비판도 제출되었다. 그러한 논쟁에 입각하면서 문학을 비롯한 표상 예술의 연구 영역에서 예전에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지역과 공동체 사회 속에서 산출된 다양한 표현에 착목, 식민지 시대의 상흔이나 유제가 거기에 어떻게 각인되었고 또 그것들에 대해 어떠한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는가가 적극적으로 문제화되었다. 이러한 동향은 포스트콜로니얼 비판이라고도 할 만한 영역을 형성했다. 거기에서는 첫째로, 어떤 특정한 지역이나 공동체 안에서 산출된 포스트콜로니얼한 텍스트를 분석하고 해독하는 과정 속에서 그 지역 고유의 식민지 지배와 그 후의 역사적·정치적·사회적·경제적·문화적 컨텍스트와의 관련성을 밝히고, 동시에 그 지역의 특수성으로 환원하지 않고 포스트콜로니얼한 상황 전체로 열어가려는 시도가 실천되었다. 둘째로, 비평가나 연구자 자신이 현재 진행형으로 살고 있는 포스트콜로(10)니얼한 역사 과정과 사회 속에서 정전화(canonize)된 기존의 텍스트를, 당시까지의 표현 양식이나 레토릭을 철저하게 재편성함으로써, 권위가 부여된 정전적 텍스트를 포스트콜로니얼한 정치 상황과 관련된 형태로 다시 읽어 나아가는 방향이있다. 이러한 다시 읽기야말로, 그 자체로서 보편적 가치를 내재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해 온 ‘문학’이나 ‘예술’, ‘미’라는 개념이 식민주의적 담론의 변동 속에서 인공적으로 날조된 것이라는 것을 폭로하는 포스트콜로니얼한 신천인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을 󰡔�포스트콜로니얼󰡕�이라고 명명한 것은, 현재의 우리들이 스스로의 실천에서 식민주의와 그 유제를 비판하는 행위를 실제로 수행해 나아가는 데서는 ‘포스트콜로니얼’이라는 형용사를 피수식어로부터 분리하는 편이 전략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전략을 취한 이상, ‘포스트콜로니얼’이라는 수식어 뒤에 피수식어로서 어떤 명사가 붙는다고 해도 그것에 대해 논의하고 비평한다는 책임=응답성을 받아들일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상이 포스트콜로니얼한 공간이나 포스트콜로니얼한 시간이라는 대명제라고 해도, 포스트콜로니얼한 밥그릇이나 포스트콜로니얼한 튀김이라는 소명제라고 해도, 그 각오는 질적으로 변함이 없다. 농담이 아니다. 도기나 자기의 이동, 생산 기술의 전파, 그 소유와 권력의 관계는 천 년 단위의 ‘세계’편성 과정을 밝혀 줄 것이고, 오늘 먹는 튀김의 밀가루가 어디서 어떻게 생산되었고 내용물인 새우가 ‘세계’의 어떤 지역에서 포획되었는지는 음식물을 둘러싼 신식민주의적(neocolonialistic) 착취와 수탈의 양상을 드러낼 줄 것이다. 이러한 포스트콜로니얼 이론이 구축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계기가 된 책은 사이드(Edward W. Said)의 󰡔�오리엔탈리즘󰡕�(1978)일 것이다. 유(11)럽에서 형성된 역사학, 언어학, 문헌학이라는 19세기적 지(知)의 담론은 항상 서양(Occident)과 동양(Orient)을 대비시키면서 학문적인 담론 체계를 형성해 왔다. 동양이라는 타자를 둘러싼 치밀한 분석과 기술을 가능하게 하는 담론 체계를 창출함으로써, 타자로서의 동양의 문화적 이질성을 거울로 삼아 서양이라는 유럽 사람들의 자기상(自己像)이 구성되어 왔다. 그리고 동양에 대한 상세한 논의를 쌓아 나아감으로써 유럽 사람들은 그것과 이질적인 서양을 권위화하고 동양을 지배하고 교도(敎導)하며 서양적(Occidental)인 가치관이나 세계관에 의해 ‘세계’를 조작하는 주체를 편성해 온 것이다. 담론을 둘러싼 푸코(Michell Foucault)의 이론에 입각한 사이드의 논의는, 이항 대립주의적 구도 속에서 서양과 동양을 대비시키는 학문적 담론이 그것을 배우고 익힌 사람들에 의해 수없이 반복되고 결국에는 그들 자신에 의해 재생산되어 굉장혹 강고한 이원론적 틀을 형성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자신의 담론이 지적 담론으로 인증되기 위해서는 반복 재생산되어 온 오리엔탈리즘 담론의 틀 안으로 들어가, 그 속에서 주체화=예속화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동양이란 실체적 무엇가가 아니라 몇 세대에 걸친 지식인, 학자, 정치가, 평론가, 작가라는 오리엔탈리즘에 꿰뚫린 사람들이 반복 재생산한 표상=대리 표출(representation)에 의해 구성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19세기 후반에는 동양으로 에워싸인 사람들 자신이 서양으로부터 동일한 담론을 추출함과 동시에 서양과 동양이라는 지정학적 구도가 실체화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가운데서 ‘우리’와 ‘그들’이라는 이분법이 인종주의나 ‘민족’주의 혹은 사상적임과 동시에 기분·감정적인 내셔널리즘의 온상이 되어가는 것이다.(12) ‘우리’를 비추기 위한 거울로서 ‘그들’의 표상적 구축. 당연히 이 논의는 라캉(Jacques Lacan)의 ‘거울 단계’와 타자를 둘러싼 논리를 불러들이게 된다. 유아가 거울 속에서 찾아내는 시각적 상을 자기상이라고 인지하기 직전 단계까지의 거울상은 유아의 신체나 표정의 움직임을 반복하기 때문에, ‘소문자 타자’는 유아로서는 예측 가능한 행동밖에 하지 않고 그것이 ‘소문자 타자’를 지배할 수 있다는 환상을 낳는다. 이 구도를 비유적으로 식민주의 지배와 피지배 관계로 이동시키면, ‘소문자 타자’를 식민지화된 지역의 주변화된 타자와 겹칠 수 있다. 그것에 비해 라캉이 말하는 ‘대문자 타자’, 즉 담론을 중심으로 한 기호적 세계로서의 ‘상징계’를 통괄하는 ‘상징적 타자’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식민지를 지배하는 제국주의 담론을 담당하는 중심이며 관념으로서의 제국 자체가 된다. 이 제국주의적 중심(실체로서는 어디에도 없다)은 식민지화된 지역의 사람들로서는, 한편으로 결코 동일화될 수 없음에도 계속해서 동일화를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되는 타자로서 기능하고, 또 한편으로는 세계를 인식하기 위한 기준점이 되어 모든 이데올로기적 담론 변동의 요점이 된다. 따라서 피식민지적 주체는 이 제국주의적 타자의 감시와 응시의 시선에 구석구석까지 노출되고 또 꿰뚫리게 된다. 호미 바바(Homi Bhabha)는 이러한 식민자와 피식민자, 식민지 지배자와 식민지의 피지배자 사이에 현상하는 거울 관계를 전략적으로 양가적(ambivalent) 관계로서 다시 파악했다.(「흉내와 인간-식민지적 담론의 양가성」, 1984) 즉 식민지의 피지배자는 제국의 중심에 존재한다고 상상된 진정한 지배자의 상을 계속해서 흉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결코 그 상과 동일화할 수는 없다. 호미 바바는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이 제기한 이 틀(󰡔�검은 피부와 하얀 가면󰡕�, 1952)을 다시 짜 하나의 행위인 ‘흉내와 모방’을,(13) 그리고 고지식하게 진정성(authenticity)을 꾀하는 ‘적절한 모방’(mimicry)과 행위의 주체가 의식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별도로 하고 결과적으로 비웃음이나 얼버무림이라는 역설적인 혼란을 낳는 ‘부적절한 모방’(mockery, 비웃음이나 조소를 내재시킨 흉내)이라는 상호 모순된 측면이 동시에 작동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이러한 양가성,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상반되고 모순된 힘이 동시에 하나의 사상(事象)이나 행위에 작용하는 상태를 굳이 계속해서 찾아냄으로써 확고한 이항 대립주의의 틀을 구축한 제국주의적 담론을 전복하고 교란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오미 바바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양가성에 드러나 있는 것은 식민지의 피지배자만이 아니라 식민지 지배자 자신도 그러한 분열된 모순 가운데 휩쓸려 있다는 논점이다. 앞에서 말한 라캉의 이론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소문자 타자’가 주변화된 식민지의 피지배자이고, ‘대문자 타자’가 중심화된 식민지의 지배자라는 이분법이 반전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양자의 관계는 근원적으로 또 어디까지나 비대칭적이지만, 전위(轉位)와 역전위의 동력학(dynamics)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양자 모두 식민지적 상황에 휩쓸려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호미 바바의 논의는 식민지적 담론을 교란케 하면서 다시 짜는 낙관적 전망을 개척하는 방향을 지시했지만, 스피박(Gayatri Spivak)은 그러한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이나 포스트콜로니얼 연구라는, 이미 일정한 방법론을 구축한 담론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했다. 즉 「섭얼턴은 말할 수 있는가?」(Can the Subaltern Speak?, 1985)라고 했다. 미국에서 데리다(Jacques Derrida)의 번역자였기 때문에 나온 비판이지만, 스피박은 애당초 어떤 지역에서 가장 차별받은 위체에 놓인 사람은 자(14)신의 현상황에 대해 이야기할 말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그것은 타자 자신이 읽을 만한 담론을 스스로 엮어내는 지적 훈련을 받고 있는가(받을 수 있는가), 대부분의 타자에게 통하는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읽을 만하다고 인정되는 담론이란 단적으로 말해 반복적으로 재생산되어 온 지적 엘리트에 의한 담론의 집적인 이상, 그 틀을 통해 가장 차별받는 사람의 ‘현실’은 결코 표상될 수가 없다. 결국 나오는 것은 가장 차별받는 사람 이외의 사람들이 대리적으로 표상한 담론일 수밖에 없다. 애초에 가장 차별받는 사람(섭얼턴)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한다면, 그녀의 목소리는 들려지지도 않은 것이다. 이러한 스피박의 날카로운 비판은, 식민주의적 강간의 산물일 수밖에 없는 포스트콜로니얼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해석하며 어떻게 말하는가 하는 담론과의 관련 방식 총체에 대해 엄격한 윤리적 질문을 들이댄 것이다.(15) 일찍이 식민지 지배자였던 ‘대일본제국’의 연장선상에 있는 ‘일본국’에 귀속한 사람으로서, 󰡔�포스트콜로니얼󰡕�이라는 제목 아래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내가 택한 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이다. 첫째, 일본의 역사를 말할 때 정치적인 입장으로서는 우익에서 좌익까지가 기본적으로 ‘문명’으로서의 ‘근대’를 향했다고 긍정적으로 말해져 온 막부 시대 말부터 청일전쟁까지의 사건을 식민지적 무의식과 식민주의적 의식의 모순 속에서 다시 파악하는 것이다. 둘째, 마찬가지로 ‘초국가주의’(ultranationalism)에 의해 조종되어 ‘근대’화의 과정을 그르치고 만 ‘전시중’(戰時中)의 ‘야만’으로부터 다시 ‘문명’으로서의 ‘민주주의’로 향했다고 하는 패전 후의 사건을 동일한 모순 가운데서 다시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15) 셋째, 메이지(明治, 1868~1912) 일본의 식민지적 담론 안에서 있으며 그것을 교란시키는 문학적 담론으로서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의 텍스트를 지금까지처럼 정전(canon)으로서가 아닌 방식으로 다시 읽는 실천을, 앞의 두 가지 역사적 서술 사이에 개입시키는 일이다.(16)   개국 전후의 식민지적 무의식   대륙·반도· 열도의 지정학   대륙의 개국 ‘조공외교’란 중화(中華)사상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다시 말해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므로 중국 이외의 나라는 문명과 무관한 ‘오랑캐’의 나라들이며, 그 나라들은 중국에 조공을 함으로써 그때마다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확인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조공을 하기만 한다면 그 나라는 자신의 지역에서 중국 본국으로부터 자립된 형태의,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정치적 통치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그에 비해 서구 열강 사이의 조약 외교는 근대 국민 국가를 전제로 한 상(18)태에서 서구 열강의 국가 시스템을 기준으로 ‘만국공법(萬國公法)’적인 합의를 만들고 서구 열강과 동일한 국가 개념에 합당한 국가 시스템을 갖추지 않으면 대등한 조약을 맺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19) 불평등 조약의 초점은 최혜국(最惠國) 조항과 협정 세율, 그리고 영사 재판권에 있었다. 물론 협정 세율은 이미 산업 자본주의화한 서구 열강이 자국 공업 제품의 수출을 용이하게 하는 시장 확대를 위한 것이었고, 영사 재판권은 사실상 서구 열강측이 상대국 안에서 치외법권적인 위치에 서는 것이었다.(19)   열도의 개국 일본의 개국 양상이 중국의 경우와 미묘하게 달라지게 된 요인은, 영국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하는 형태로 근대 국민 국가가 된 미합중국을 최초의 개국 교섭의 상대로 삼은 데에 있었다.(21) 해리스는 미합중국의 평화주의를 강조하고, 먼저 미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제3국으로부터의 침략을 방지하는 것임을 강조했다.(22) 텐진조약과 비교했을 때 안세이 5개국 조약에서는, 관세율에서 청나라가 5퍼센트였던 것에 비해 대다수의 품목이 20퍼센트로 오른 것, 기독교에 대한 특별 조치가 들어있지 않은 것, 또 외국인의 ‘내지’(內地) 자유 여행을 인정하지 않은 것 등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서구 열강에 의한 아편 전쟁에서 애로우호 전쟁에 이르는 경위를 숙지하고 그 교훈을 살리려고 한 막부의 국방 관계 관료들은 전쟁에 의한 반식민지화를 피하고 교역의 관세 이익에 의해 부국강병을 수행해 나아가는 노선을 취하고자 했던 것이다.(22)   ‘존왕양이’와 자기 식민지화 중화사상의 산물인 ‘양(22)이’사상이란, 바로 자신들을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는 선진 문화권이라고 가상(假想)하고 주변 지역의 사람들을 문화를 갖지 못한 오랑캐(夷狄)로 간주하는 차별적 배외주의이다. 이를테면 현실을 보지 않는 관념의 영역 속에서 열도를 옛 대륙의 위치로 미끄러져 들어가게 하면서, 서구 열강을 오랑캐라고 간주하는 사상이 양이 사상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양이 사상은 현실 정치와 외교의 과정에서 보자면, 아편 전쟁에서 애로우호 전쟁에 이르는 청나라의 경험을 완전히 소거함으로써만 성립할 수 있었다. 서민의 차원에까지 퍼진 ‘흑선’ 패닉(panic)에 편승한 형태로 형성되었던 ‘존왕양이’라는 광신적 배외주의의 기분·감정은 현실 역사 과정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대한 인식을 소거하면서, 그 소거된 공백을 ‘존왕’, 즉 불(23)평등 조약의 허가를 내주지 않았던 ‘천황’을 떠받든다고 하는 낡고 새로운 권위주의에 의해 충전(充塡)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근대 천황제라는 장치의 기원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메이지 유신 정부가 최초로 지니고 있었던 중요한 외교 과제는, 어쨌든 막부가 맺은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는 일이었다. 일본의 위정자와 파워 엘리트들의 정신 구조는, 한편으로는 서구 열강에 대해 종속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표면상으로는 조약 개정을 진행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만국공법’을 중심으로 한 서구 열강의 외교 이론을 재빨리 내면화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나는 자국의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국내의 제도·문화·생활 관습, 그리고 무엇보다 국민의 머릿속을 서구 열강이라는 타자에 의해 반(半)강제된 논리하에서, 자발성을 가장하면서 식민지화하는 상황을 ‘자기 식민지화’라고 부르고자 한다.(24) 열도의 파워 엘리트들은 서구 열강의 해군을 중심으로 한 군사력 및 청나라에 대한 식민주의적 외교 정책 그리고 열강 본국의 정치력·외교력과 실지(實地)에서 직접 대면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므로 그 힘의 균형을 이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이며, 지방 군벌제가 아닌 강력한 국가와 군대를 만드는 방향으로 ‘존왕양이’ 노선을 ‘존왕토막’(尊王討幕)으로 전환했던 것이다.(26)   반도의 개국 반도가 이러한 ‘조공 외교’권에 귀속해 있었기 때문에 1860년대 반도에서는 서구 열강에 의한 직접적인 개국이 진행되지 않을 수 있었다. 역으로 청나라와 ‘조공’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 열도에서는 불가능했던 ‘양이’가 반도에서는 실질적으로 철저하게 실천되기도 했던 것이다. 무론 이 시점에서는 서구 열강의 태평양 전략에서 반도가 차지하는 중요성이 대륙이나 열도의 항만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점도 하나의 요인이기는 했다.(27) 반식민지화된 대륙, 개국하지 않은 반도, 개국에 의해 자기 식민지화를 수행한 열도 사이에서, 이러한 ‘만국공법’적 국가의 논리와 ‘조공 외교’적 국가의 논리가 미묘한 시간적 어긋남(time lag)을 내재시키면서, 서구 열강이 지닌 힘의 균형과의 흥정에 다투고 있었다. 그로 인한 혼란이 1870년대, 이 지역의 헤게모니 관계를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재편성해 버렸다. 그 최대의 요인은 열도의 파워 엘리트들이 ‘만국공법’을 내면화하는 방법, 즉 열도의 자기 식민지화 과정에 있었다.(28)   ‘문명 개화’와 식민지적 무의식   ‘만국공법’의 내면화 1860년대 열도의 파워 엘리트들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는, ‘만국공법’의 논리나 서구 열강이 만들어낸 ‘국제’ 관계의 규범을 내면화하고 또 자신들이 귀속한 국가 자체를 그 규범의 틀에 적합한 것으로 새롭게 만드는 일이었다.(28) ‘만국공법’이란 용어는 헨리 휘튼(Henry Wheaton, 1785~1848)이 지은 Elements of International Law(국제법의 요소들, 1836)를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 마틴(William A.P. Martin, 1827~1916, 중국 이름은 딩웨이량(丁韙良))이 󰡔�만국공법󰡕�이라는 제목으로 한역한 데서 유래한다. 이 한역본은 1864년에 간행되었고, 다음 해인 1865년에 일본인용으로 번각(飜刻)되어 청나라에서 일본으로 들어왔으며 막부 말기 유신기에 유포되었다. 일본의 파워 엘리트들에게 이 󰡔�만국공법󰡕�은 수입처인 청나라에 비해 훨씬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29)   식민주의의 실천 ‘만국공법’은 어디까지나 서구 열강형 국가 사이의 ‘국제’법(International Law)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서구 열강에 의한 다양한 형태의 식민지 지배를 추인하듯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 ‘만국공법’의 논리에서 ‘세계’는 서구 열강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국가를 ‘문명국’으로 특권화하고 있고 그 밖의 지역을 ‘미개국’으로 나누고 있다. 그리고 ‘문명국’이 ‘미개국’의 영토를 ‘주인 없는 땅’으로 영유하고 지배하는 것이 정당화되었다. ‘홋카이도’ 영유에 즈음해 메이지 정부는 이 논리를 사용했다. 아이누는 ‘미개’, 즉 ‘야만’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설령 그 지역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토지는 영유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국공법’에서 식민지 영유가 정당화되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문명국’에 대해서이다. 서구 열강으로부터 불평등 조약을 강요받고 있던(32) 일본은 과연 ‘문명국’이었을까? 막부 말의 사절단이 서구를 방문했을 때, 대부분의 경우 일본은 방문한 국가의 보도에서 담론상 ‘미개’국으로 취급되었다. 이러한 모순과 비정당성을 어떻게 은폐할 수 있을까?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이 ‘문명 개화’를 국시(國是)로 내걸고 학교 교육을 철저히 함으로써 스스로 ‘문명’화, 즉 가지 식민지화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것은 메이지 신정부의 파워 엘리트들도 엄연한 사실로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33)   ‘문명’, ‘반개’, ‘야만’의 삼극 구조 ‘문명국’측이 자신들의 식민주의를 정당화하는 가운데 만들어낸 ‘만국공법’의 논리를, 아직은 ‘문명국’이 아니었을 일본의 형편에 맞게 독해한 사람이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1874년(明治 7년)부터 구상했고 다음 해에 탈고한 󰡔�문명론의 개략󰡕� 제1권에서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 개화’의 개념을 상대화해 보여주었다. 후쿠자와는 우선 “오늘날 세계의 문명을 논함에 있어 유럽의 여러 나라와 미합중국을 최상의 문명국으로 보고 터키, 가나, 일본 등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반개(半開)의 나라라고 칭하며, 아프리카 및 호주 등을 야만국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명칭이 세계의 일반적 견해가 되어 있어, 단지 서양 여러 나라의 인민들만이 자신들의 문명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반개와 야만국의 인민들 역시 그 명칭을 정당하다고 인정하며 스스로 반개와 야만이라는 이름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감히 자기 나라의 상태를 자랑하며 서양의 여러 나라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자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한번 읽어보면 다섯 대륙을 ‘문명’, ‘반개’, ‘야만’ 으로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주권 국가의 차원에서 문제 설정을 하고 있다. 이어서 생(33)산 양식과 문화의 차이에 따라 ‘야만’, ‘반개’, ‘문명’을 ‘인류가 반드시 거쳐가야 할 단계(段級)’ 혹은 ‘문명의 연령’이라는 사회 진화론적 발전 단계설의 논리에 기초해 세 단계로 위치 짓고 있다. 이러한 ‘문명’, ‘반개’, ‘야만’이라는 3단계 규정을 한 다음 후쿠자와는 “이상과 같이 세 단계로 나누어 그 양상을 적어보면 문명, 반개, 야만의 경계는 분명하다. 하지만 원래 이 명칭은 상대적인 것이므로, 아직까지 문명을 본적이 없는 동안에는 반개의 상태를 최상으로 여기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다. 이 문명이라는 것도 반개에 비해야만 문명인 것이고, 반개라 하더라도 이를 야만에 비한다면 이 역시 문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여, ‘반개’를 축으로 하면서 이들 세 항을 상대적인 관계 속에 재비치해 보여주었다. 서구적인 ‘문명’과 아직 만난 적이 없는 지역에서는 ‘반개’의 상태가 가장 진보한 단계가 된다. 게다가 ‘문명’이 ‘문명’으로 성립하는 것은 직접 ‘야만’과 대비해서가 아니라 ‘반개’와 비교한 상태에서 그것보다 진화했으므로 ‘문명’일 수 있다. 따라서 ‘반개’는 ‘야만’과의 대비에서는 충분히 ‘문명’이라 할 만한 것이다. 다시 말해 후쿠자와의 논의는 ‘문명’을 ‘문명’으로, ‘야만’을 ‘야만’으로 성립하게 하는 거울, 내지는 대립적이지 않은 일종의 촉매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중간항적인 타자로서의 ‘반개’를 만들어낸 것이다.(34) 일찍이 세계적인 ‘문명’을 구축했던 중국도 현시점에서 ‘서양’과 비교하면 ‘반개’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남아프리카나 여러 나라들과 비교하면 충분히 ‘문명’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일본 수도권의 인민”도 ‘에조인’과 비교하면 분명히 ‘문명’측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이 ‘에조인’이 사는 지역이었던 토지를 ‘홋카이도’라고 하면서 영유하고 개척의 장소로 삼을 수 있는 권리가 ‘문명’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던 것이다. ‘반개’는 ‘문명’이라는 타자로서의 거울에 자기를 비추고, 그 기준에 따라 자기 상을 형성함으로써만 ‘반개’일 수 있다. 동시에 ‘반개’가 ‘미개’ 내지는 ‘야만’으로 떨어져 ‘문명’인 서구 열강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한쪽의 타자로서의 거울인 ‘미개’ 내지는 ‘야만’을 새롭게 발견하거나 날조하여 거기에 자기를 비추면서, 그들에 비하면 자신들은 충분히 ‘문명’에 속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확인 행해지는 순간, 자신들이 ‘문명’측으로부터 ‘미개’나 ‘야만’으로 간주될지도 모른다는(실제로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은 막부 말기의 사절단에 대해 그러한 시선을 보냈지만) 공포와 불안을, 거울인, 즉 새롭게 발견한 ‘미개’와 ‘야만’을 식민지화함으로써 마치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기억에서 소거하고 망각의 심연에 떨어뜨려 다시는 떠오르지 못하도록 뚜껑을 닫아버리고 의식하지 않으려 한다. 이러한 조작을 통해 개국 후 일본의 식민지적 무의식과 식민주의적 의식의 원형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이 ‘노예’가 될지도 모른다는 식민지적 공포와 불안을 망각하기 위해서는 항상 타자로서의 거울인 ‘미개’와 ‘야만’이 계속해서 발견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모처럼 발견된 ‘미개’와 ‘야만’은 그 지역이 내국화(內國化)되지 않으면 타자로서의 거울이라는 기능을 하겠지만, 일단 식민주의적 지배가 수행되고 자국의 영토가 되어버리면 타자로서의 ‘미개’(35)와 ‘야만’이었던 사람들도 동일한 자국민이 되어 자기의 일부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실제로 ‘홋카이도 개척사’가 설치된 이후 ‘토인’이라고 불렸던 아이누는 신민(臣民)의 일부로 편입되었고, 그랬기 때문에 독자적인 문화로 유지되어 온 고유의 풍속이나 생활 관습이 금지당했던 것이다. 동시에 ‘구토인’(舊土人)이라는차별적 명명을 부여받음으로써 ‘일본인’의 일부이면서도 차별을 지속받는 분열 속에 놓였던 것이다.(36)   ‘정한론’의 양의성 ...아이누가 ‘교화’라는 이름의 폭력적인 동화의 대상이 되어버린 이상, 홋카이도를 영토화한 이후 타자로서의 거울인 ‘미개’와 ‘야만’은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관계가 계속되는 동안에는 어떻게든 새롭게 발견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다음 표적은 반도로 향해졌다. 대원군의 지배 체제하에 있던 반도는 메이지 유신 후의 ‘왕정 복고’를 인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신 정부가 신국가 체제를 통보하는 편지에 ‘황’(皇)이나 ‘칙’(勅)이라는 글자를 천황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당시까지의 ‘조공 외교’에서 조선에 대해 이러한 글자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종주국인 청나라의 황제뿐이었기 때문이다.(36)   ‘제국’ 흉내 내기로서의 ‘타이완 출병’ ...1874년 5월에 이와쿠라 토모미와 오쿠보 도시미치를 중심으로 한 정부 수뇌는, 3년 전에 타이완 동남쪽 해안에 표착한 류큐선(琉球船)의 승무원 54명에 대한 살해 사건과 1년 전의 빗추(備中) 오다현(小田縣) 세이코군(誠江郡)의 4명의 타이완 동남쪽 해안 표착자에 대한 약탈 사건을 구실로 ‘타이완 출병’을 결행한다. 이러한 무력행사를 가능하게 함에 있어 청나라측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타이완의 ‘야만인’(生蕃, 사건에 관여했다고 하는 ‘고사족’(高砂族))을 “나라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의 백성”(化外의 民)이라고 위치 지은 것이 커다란 요인이 되었다. 만약 타이완 동남쪽 해안에 거주하는 사람이 ‘나라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의 백성’이라면, 그 장소는 ‘주인 없는 땅’으로서 군사력에 의한 식민지 지배가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일본측은 바로 ‘만국공법’의 논리를 행사했다. 조선 대신에 새롭게 발견된 ‘미개’와 ‘야만’이 ‘타이완 출병’이라는 최초의 대외적인 침략적 군사행동을 가능하게 한 억지 버팀목이 되었던 것이다. 동시에 이 ‘타이완 출병’은, 청나라와 일본 사에에서 사실상 ‘양속’(兩屬) 관계에 있었던 류큐 왕국의 주민을 ‘일본국 속민’이라고 주장하는 말이 열기를 띠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야금야금 먹어 들어가는 식으로 류큐 왕국에 대한 일본의 단독 지배의 근거를 획득해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타이완에서 새롭게 발견한 ‘미개’와 ‘야만’에 의해, 후일 ‘류큐 처분’으로 이어지(40)는 류큐 제도(諸島)의 식민지적 영토화의 길을 여는데 성공했던 것이다.(41) 자신들이 서구 열강에 대해 불평등 조약의 개정을 한창 요구하고 있을 때, 그와 동일한 조약을 조선에 밀어붙이려는 욕망을 품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기에서는 이 시기에 형성된 일본형 식민주의 의식 구조의 특질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언뜻 보면 특수하게 일본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만국공법’적인 서구 열강에 의해 산출된 제국주의적 식민주의 자체가 원리주의적으로 형성하고 만 모방과 흉내(mimicry) 연쇄의 일환인 것이다. 동시에 이 시기의 대륙, 반도, 열도에서는 기본적으로 ‘만국공법’적(41) 관계와 ‘조공 외교’적 관계가 국소적인 편차의 비대칭성 속에 혼재하고 있었고, 그 혼재 속에서 ‘만국공법’적인 논리가 절대적으로 우세했던 것이다.(42) 본래의 한민족(漢民族)적인 ‘중화’에서는 있을 수 없는 침략 왕조로서의 청조(淸朝)와 직접적인 ‘조공’ 관계를 맺지 않았던 일본이 청나라와 거의 유사한 불평등 조약을 거의 같은 시기에 체결하게 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공교롭게도 서구 열강과 동시에 등등해졌다. 청나라와 일본 사이의 청일수호조규의 대등함이나 평등성은 어디까지나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성에서 보전된 관계인 것이다. 그러나 그 대등함 속에서는 옛 대륙과 ‘조공’ 관계를 맺고 있던 종속 관계의 기득권을 없앨 수 있게 된다. 속국을 독립시킨다는 논리에 의해 일본이 청나라의 권익을 빼앗을 수 있게 된 것이다.(42)   ‘탈아론’적 식민주의의 형성   흉내(mimicry)와 양자 관계(affiliality) ‘만국공법’의 논리 속에서 ‘친자 관계’(filiality)를 가장한 형태로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를 과도하게 흉내·모방하고, ‘양자 관계’(affiliality)로 들어가려는 방침이 더욱 강하게 되었던 것이 ‘강화도 사건’과 그것을 계기로 맺(43)어진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에 이르는 과정이었다. 사이드는 문화적 중심에 주변부가 그저 받아들여질 뿐만 아니라 마치 양자(養子)처럼 완전한 양자 결연을 맺어 그 일부가 되는 욕망을 가지고 과도한 모방을 하는 현상을 의식적인 ‘양자 관계’ 만들기(affiliation)의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오키나와’(沖繩)의 속지화(屬地化)를 내재시킨 ‘타이완 출병’ 후의 ‘강화도 사건’은 그 과정을 여실하게 보여준다.(44) 2월 26일에 조인된 조일수호조규는 표면적으로는 “조선국은 자주국이며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고 하면서, 일본 선박에 의한 연안 측량의 자유, 개항장에서 일본 영사가 재판권을 갖는다는 치외법권, 수출입 비과세 등 명백히 조선에 대해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또한 조약 체결 후 협의 과정에서 미곡 수출입 허가 조항이 덧붙여짐으로써 조선에서 대량의 쌀이 일본으로 수출되게 되었고, 그후 이 조항은 반도에서의 농업 파괴와 식량부족 현상의 커다란 요인이 되었다. 불평등 조약을 강요함으로써 일본은 조선에 대해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치를 확보했고, 장기간에 걸쳐 쇄국 정책을 취해 오던 조선을 결과적으로 서구 열강에 앞서 개국시켰다. 그러한 의미에서 페리로 대표되는 미합중국의 일본에 대한 외교 전략을, 일본은 조선에 대해 극히 고식적인 형태로 모방했던 것이며, 동시에 서구 열강의 대리인 역할(agency)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이긴 하지만 서구 열강과의 관계에서 이미 청나라와 대등(45)한 관계에 있었던 일본은 조선과 불평등 조약을 맺음으로써 청나라와 조선의 종속 관계를 단절시키고, 사실상 ‘조공 외교’ 시스템을 붕괴시켰다. 그것은 ‘류큐’를 둘러싼 ‘양속’ 관계를 일본의 단독 지배 아래 두는 과정에서도 극히 중요한 기정 사실 만들기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일본이 ‘조공 외교’권에 ‘만국공법’의 논리를 가지고 들어감으로써 옛 종주국으로서의 청나라의 위치를 모방하면서, 그 청나라가 종주국으로서 휘둘러왔던 ‘조공 외교’권을 내부로부터 붕괴시켜 가는 서구 열강의 대리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46)   ‘부적절한 모방’에 의한 식민주의의 격화 논리적으로 생각한다면, 막부 말기에 맺었던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고 서구 열강과 대등하고 평등한 관계가 되는 것이 국가의 지상 명제일 때, 오랫동안 우호 관계를 유지해온 조선에 대해 군사적 위협을 가하여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는 것은 완전히 불합리한 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후쿠자와 유키치적인 ‘문명’·‘반개’·‘야만’(‘미개’)이라는 삼극구조의 논리 안에서는, ‘반개’는 ‘야만’ 없이는 ‘문명’에 대해 ‘반개’일 수 없기 때문에 ‘야만’을 계속해서 날조하지 않는 한 자기의 위치를 유지할 수(46)가 없다. ‘반개’로부터 벗어나 ‘문명’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서구 열강과 맺은 조약을 개정할 수 없다. 그것이 현재의 권력 안에서 늦추어지고 있는 동안은 주변 지역에서 ‘야만’(‘미개’)을 계속해서 날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47) 호미 바바는 식민지화된 지역의 사람들이 종주국의 문화나 담론에 대해 ‘적절한 모방’을 강요받고, 결과적으로 종주국의 논리에 ‘점유’(appro-priate)되고 마는 과정에 대해 ‘부적절한 모방’, 즉 비켜놓기나 조소라는 패(47)러디를 통해 자신들을 표현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부적절한 모방’은 하나의 탈식민주의적 담론의 논리적 가능성으로 제시된 것인데, 일본 식민주의의 발생을 생각하는데 있어서는 덮어놓고 이 논리를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것으로 위치 짓기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일본에서의 식민주의적 의식의 발생은 ‘만국공법’권의 논리에 대해서나 ‘조공 외교’권의 논리에 대해서나 동시에 ‘부적절한 모방’을 행함으로써 성립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 ‘부적절한 모방’은 ‘만국공법’의 표면상의 원칙인 주권 국가간의 조약에 의한 대등한 외교관계라는 가면을 벗겨버리고, 약육강식의 군사적 위협에 의해 식민지화를 진행시켜 나아가는 권력 통치의 논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버렸다. 결과적으로 일본이 ‘만국공법’권에 양자적 대리인으로 참가함으로써 대리인에서 제국주의적 주체로 이행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이 아시아 지역에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지배 경쟁을 가속화시키고 격화시켰던 것이다.(48)   ‘류큐 처분’이라는 이름의 식민지화 ‘타이완 출병’의 처리에 즈음해 류큐 사람들을 ‘일본국 속민’으로 하는 조항을 청나라와 교환한 일본은, 그후의 교섭 과정에서 류큐가 고래로부터 일본의 영토라는 것을 반복해서 주장했다. 즉 류큐 사람들을 ‘일본인’이라고 한 것이 영유(領有)의 유일한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48) 그리고 1879년 3월 27일, 구마모토(熊本) 진대병(鎭臺兵)을 류큐에 파견해 일방적으로 폐번치현을 통고하고, 수리성(首里城)을 군사력으로 접수했다. 그리고 4월 4일에는 청나라를 무시하는 형태로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沖繩縣)을 설치한다는 조치가 전국에 포고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류큐 처분’이다. 류큐 왕부의 ‘주권’을 짓밟은 것일뿐만 아니라 청나라와의 외교 교섭에서도 전혀 타결을 보지 못한 상황에서의 폭거라는 형태로 ‘류큐 처분’이 행해진 것이다.(49)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반개’·‘야만’(‘미개’)이라는 삼극 구조를 둘렇싼 줄타기하는 듯한 논리는, 이렇게 주변 지역에서 ‘야만’으로서의 타자를 발견하고, 그에 비해 ‘반개’일 수밖에 없는 일본을 ‘문명’이라고 가장하지 않을 수 없는 연속적 상황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 ‘야만’으로서의 타자가 아이누 사람들이고 타이완 ‘원주민’이며 류큐 사람들이었다.(50) 결국 청나라와의 외교 교섭에서 ‘류큐 처분’ 문제는 타결을 보지 못하고 청일전쟁까지 넘어가게 된다. 다시 말해 ‘타이완 출병’, ‘강화도 사건’, ‘류큐 처분’이라는, 즉 군사력에 의한 위협을 통해 식민주의적 야망을 실현해 나아가려는 일본으로서는, 불평등 조약에서 대등하게 된 청나라와의(50) 모순이 ‘만국공법’적 논리 속에서 점점 심화되어 가게 된다.(51)   ‘반도’에서의 위기와 군비 확대 노선   청불전쟁과 ‘조공 외교’권의 붕괴 이 시기 자유민권파를 포함한 일본의 여론이 갑신정변에 대해 과도하다 싶게 침략주의적 반응을 보인 최대의 이유는, 1884년(明治 17년) 8월부터 이듬해에 걸쳐 선전 포고도 없이 벌어진 ‘청불전쟁’이 일본 국내의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불전쟁은 신문 독자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일본의 여론에 아시아 지역에 대한 서구 열강의 지배 정책이 결정적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일본 신문의 보도에서 이 전쟁의 발단은 ‘안난스 사건’(安南事件)이라고 불린 사건에 있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프랑스는 1874년의 단계에서 청나라에 대한 ‘조공’국인 베트남을 보호국화하고 있었다. 1882년 프랑스의 광산(鑛山)조사대가 송코이강 유역에서 조사를 벌이는 것에 대해 태평천국의 난에 참가한 류용푸(劉永福)의 흑기군(黑旗軍)이라는 사병(私兵)들이 방해했다는 구실로, 프랑스군은 하노이를 군사적으로 제압했다. 당초에는 흑기군과 프랑스군 사이의 군사적 충돌이었지만, 하노이 점령 후 ‘조공 외교’의 종주국이었던 청나라의 정규군이 윈난성(雲南省)과 광시성(廣西省)에서 베트남으로 진공했다. 이른바 ‘양무 운동’ 과정에서 근대적 장비를 갖(53)추었던 청나라 군대의 첫 대외 전쟁이 벌어지려고 했던 것이다. 리홍장(李鴻章)은 북베트남을 중립 지대로 하는 방향으로 평화 교섭을 진행했지만, 프랑스는 베트남 침략을 본격화하여 1883년(明治 16년)에는 후에(順化) 조약에 의해 베트남을 완전히 보호국으로 만들어버렸다. 이 사태는 청나라를 종주국으로 하는 ‘조공 외교’적 종속 관계가 완전히 무효라는 사실을 확정해 주는 사건이었다. ‘만국공법’권에 속해 있던 대국 프랑스가 ‘만국공법’의 틀 안에서 ‘조공’적인 속국을 청나라로부터 ‘독립’시키는 형태로 떼어놓은 뒤 국가 주권을 박탈하는 식으로 보호국으로 만들었다가, 최종적으로는 식민지로 속지화하는, 새로운 형태의 아시아 지배가 확립되었던 것이다. 프랑스가 베트남에 대해 취한 식민지 지배의 과정은 분명히 ‘류큐 처분’ 때 일본이 청나라에 대해 취한 과정을 모방한 것이며, 그 후 일본은 러일전쟁의 과정에서 조선에서도 동일한 과정을 실천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볼 때, 아시아 대륙의 남부 그리고 동남부의 반도와 열도 지역에 대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지배를 가속화하고 격화시켰던 것은, 이러한 불평등 조약 체제로부터 한창 탈출하려는 동북부 열도의 정권이 제국주의적 침략 경쟁에 모방적으로 참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조약상으로는 서구 열강과 같은 수준의 ‘만국공법’권적인 제국주의적 주체가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아시아 주변 지역에 대해서는 군사적 위협을 중심으로 하는 퍼포먼스적 몸짓에 의해 서구 열강적 ‘주체’를 모방·흉내 냄으로써, 결과적으로 ‘조공 외교’적 종속 관계를 최종적으로 해체하는 서구 열강의 대리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던 것이다. 리홍장은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권을 인정하고, 청나라 정규군을 국경까지 철퇴시키는 방향으로 교섭을 진행했지만, 병사 철수를 둘러싼 오해가 원인이 되어 현지에서는 전투 상태가 되었다. 1884년 8월 23일에는(54) 프랑스 해군의 철갑 함대가, 목제 함대로 편제되어 있던 청나라의 푸젠(福建)함대를 십 몇 분 만에 전멸시켰다. 나아가 프랑스 군이 타이완을 봉쇄함으로써 전투 상태는 헤어나기 힘들 정도가 되었고, 드디어 1885년 6월 9일에 리홍장이 준비했던 방향으로 텐진조약의 조인이 이루어졌다. ‘양무 운동’에 의해 ‘근대적 전쟁 준비’를 갖추었을 청나라 정규군은 프랑스의 최신예 해군에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조공 외교’권에서의 종주국 청나라는 속국의 군사적인 위기를 방어할 수가 없다는 군사적 약체성을 뚜렷하게 폭로하고 말았다. 갑신정변은 바로 이러한 청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조공 외교’권이 서구 열강의 군사력 앞에서 요란하게 무너지려는 기회를 틈타 일어난 쿠테타였다. 반도의 정권에서 왕비 민씨 일족을 중심으로 한 사대당이 청나라에 의존하고, 개혁파인 김옥균 등의 독립당이 일본을 후원자로 삼았다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반도의 정치가 청나라와 일본의 간섭적 권력 정치의 대리투쟁이 되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55)   ‘탈아론’적 왜곡 갑신정변의 사후 처리에 반발하는 학생을 중심으로 한 정치 행동과 함께 밝은 1885년(明治 18년) 3월 16일, 후쿠자와 유키치는 「탈아론」(脫亞論)을 󰡔�시사신보󰡕�(時事新報)의 사설로 발표한다. 그 앞머리에서 후쿠자와는 ‘동점(東漸)의 세(勢)’가 격렬한 ‘서양 문명’을 ‘홍역의 유행 같다’고 파악한다.......다시 말해 후쿠자와 유키치는 ‘서양문명’의 타자성을 병에 대한 비유를 통해 표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를 사용한 직후에 “이 유행병의 해악을 싫어해 이를 막으려 해도” “그 수단”은 없다고 단언한다.(56) ‘서양 문명’이라는 ‘유행병’적 타자성을 그렇게 불가피하고 불가역적인 것으로 담론화하는 데에 후쿠자와 유키치의 특징이 있다. 즉 병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병과 그 이전의 건강했을 신체를 망각하고 감염 후의 삶을(57) 살아가는, 곧 병의 은폐인 것이다.(58) 그리고 일단 병에 걸린 ‘서양 문명’이라는 ‘유행병’이 “유해하기만 한 유행병이라 해도, 여전히 그 기세에 격해져서는 안 된다. 하물며 이해(利害)가 동반되며 항상 많은 이익이 있는 문명에 있어서야 말할 것도 없다”는 식으로 ‘문명’을 해악만이 아니라 이익이 많은 ‘병’으로 재정의함으로써, 그 다음은 ‘문명’ 대 ‘구투’(舊套, ‘야만’)라는 이항 대립주의로 훌륭하게 변동되어 간다.(58)   ‘국민정신’의 지정학 ‘문명’, ‘활발’, ‘진보’, ‘독립’에 적대하는 ‘고풍노대한 정부’일 수밖에 없는 ‘구 정부’로서의 막부는 ‘폐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논리로 메이지 유신이 재정의 된다. 게다가 “일체 만사 서양의 최근 문명을 취해 오직 일본”만이 “구투(舊套)를 벗었다”고 십수년간에 걸친 ‘문명 개화’ 제1단계의 과정을 평가하고, 제2단계인 “아시아 전 대륙 안에서 새롭게 한 기축(機軸)을 이루어 주의(主義)로 삼는바”의 ‘탈아’가 주장되기에 이른다.(58) 후쿠자와 유키치는 “하나는 지나라고 하고, 하나는 조선이라고 한다”, ‘근린’에 있는 ‘두 나라의 인민’은 “고래로 아시아의 정교풍속(政敎風俗)” 안에서 ‘일본 국민’과 마찬가지로 살았지만 “그 인종의 유래를 각별히 한 것인지” 아니면 “유전(遺傳) 교육의 취지와 다른” 이유에서인지, ‘일본’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아간다고 말한다. 즉 “개진(改進)의 길을 알지 못하고” “고풍의 구습에 연연하는 정(情)”에 있어서, 그리고 ‘유교주의’에 기초하는 ‘외견의 허식’에만 집착하는 점에서, 이 ‘두 나라’, 즉 “지나와 조(59)선의 유사한 모양”은 극히 대단하고 “지나와 조선이 일본보다는 가까운” 상황에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견해로는, 이대로 가면 이 두 나라는 “문명이 동점”하는 가운데 “독립을 유지하는 길이 있을 수 없으며”, “수년이 지나지 않아 망국이 되어 그 국토는 세계 문명 제국의 분할로 돌아갈 것에 한 점 의심도 없다”고 후쿠자와는 판단했던 것이다.(60)   자기 오리엔탈리즘의 시선 또 한가 중요한 것은 ‘지나와 조선’이 ‘일본’과 결정적으로 다름에도 불구하고(후쿠자와 유키치가 그렇게 강변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후쿠자와 유키치가 “서양 문명인의 눈”에서 보면 이 “삼국의 지리(地利)가 상접(相接)하므로 때로는 이를 동일시하고, 지나와 조선을 평하는 값어치로서 우리 일본을 평가하는 의미가 없지 않다”는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두려워하는 것은, ‘일본’이 서구 열강의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에 의해 ‘지나, 조선’과 동등하게 취급되는 일이었다. ‘지나와 조선’의 정치가 ‘전제’적이고 ‘법률’에 따른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일본’ 역시 마찬가지로 ‘서양 사람들’로부터 ‘법률이 없는 나라’라고 생각되고 마는 것이 두려웠으며 싫었던 것이다. ‘일본인’은 ‘서양의 학자’(60)로부터 ‘지나와 조선’ 사람들이 비‘과학’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보이는 것, ‘지나인’의 ‘비굴’함이나 ‘조선인’의 ‘참혹’함 그리고 ‘근린’의 ‘잔인무도’함과 ‘동일시’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의 개략󰡕�(文明論之槪略)에 나오는 ‘문명’·‘반개’·‘야만’이라는 삼극 구조에서의 ‘반개’가 ‘문명’과 ‘야만’으로 나누어졌던 것이다. 결국 20년 전까지 ‘일본’이 속해 있던 ‘아시아식의 정교풍속’을 철저하게 ‘구투’, ‘고루’, 비‘개진’, 비‘진리’, 비‘도덕’, ‘잔혹과 몰염치’라며 모멸하고, 현재의 ‘일본’으로부터 결정적으로 단절함으로써 더욱 ‘문명’에 가까운 ‘반개’의 위치를 확보하려고 했던 것이다. 갑신정변 후의 ‘일본’ 신문을 중심으로 한 여론이 과도하게 아시아를 멸시하게 되는 최대의 원인이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후쿠자와의 이러한 주장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서양 문명인의 눈’에 대해 ‘외견의 허식’에 가득 차 있는 것이라는 사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결론은 이렇다. “오늘날 일을 꾀함에 있어 우리 나라는 이웃 나라의 개명(開明)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일으키는 여유가 있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대오를 벗어나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같이하고, 지나와 조선과 접촉하는 방법도 이웃 나라인 까닭에 특별히 배려할 필요는 없다. 바로 서양인이 이를 대하는 식에 따라 처리해야만 한다. 악우(惡友)를 사귀는 자는 함께 악명을 면할 수 없다. 나는 진정코 아시아 동방의 악우를 사절할 것이다.”(61)   전쟁을 할 수 있는 ‘국가’에 대한 욕망 ‘문명’과 ‘구투’로서의 ‘고루’함, 즉 계속해서 ‘야만’과 ‘미개’에 머무는 자와의 이원론을 중심으로 구축되어 가는 식민주의적 이항 대립주의 담론이 최종적으로는 선과 악의 이항 대립으로 수렴되어 가는 너무나 전형적인(61) 사례가 ‘탈아론’이다. 그리고 ‘유행병’이라는 비유로 언급되었던 ‘문명’이 선인가 악인가 하는, 합리적인 사고에서 당연히 물어져야 할 그 문제가 그 순간 사고 정지의 심연에 떨어지고 만다. 역시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이 말하는 정치적 무의식이 구조화되는 전형적인 예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서양 문명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의 적용 범위는, 이후의 ‘대일본제국헌법’의 발포(1889년)와 1881년(明治 14년) 메이지 천황에 의해 약속된 국회 개설(1890년)에 의해 청나라나 조선과는 다른 입헌 국가로서의 ‘외견’을 갖출 정치 일정을 분명히 포함하고 있었다. 또한 ‘군인칙유’(軍人勅諭)로 헌법 밖에서 통수권을 획득한 메이지 천황이 ‘대일본제국헌법’과 ‘국회개설’에 의해 그 절대적인 권력을 위협받았던 것에 대항하여, ‘대일본제국 신민’의 ‘국민정신’을 ‘교육칙어’에 의해 통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태의 필연성도 분명히 해두었다. ‘대일본제국헌법’ 자체가 서구 열강 제국주의와 맺은 조약을 개정하기 위해 불가결한 ‘태서식(泰西式)법전’의 요점이었으며, 서구 열강의 논리에 의한 자기 식민화의 증좌였던 것이다.(62) 서구 열강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욕망은 ‘만국공법’에서의 종주국이 되기 위해 속국이 될 만한 지역에서 전쟁을 할 수 있게 되는 ‘보편의 나라’가 되는 데에 있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욕망은 2001년까지도 형태를 바꾸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 있다. 최초의 제국주의 전쟁인 청일전쟁에서 ‘대일본제국’ 천황의 이름 아래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은 바로 ‘대영제국’과의 사이에서 불평등 조약의 개정이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아시아’에서 서구 열강 제국주의의 대리인으로서 ‘대일본제국’은 ‘외견’상 제국주의적 주체(subject)가 되고, 그 후 얼마 동안은 아시아에서의 러시아제국과 대영제국의 대립에서 영국측 대리인으로서의 역할을 계속해서 수행해 가게 된다.(63)     식민지적 무의식에 대한 대항 담론   ‘회전’과 ‘소회전’   ‘일본인의 눈’ 청일전쟁의 승리와 그 후의 이론바 ‘삼국 간섭’을 거치면서 몇 겹으로 굴절된 일본의 식민지적 무의식과 식민주의적 의식의 상호 보완 관계를 표상한 표현자의 한 사람으로 소세키(漱石), 곧 나츠메 긴노스케(夏目金之助)가 있다.(64) 다이이치(第一)고등학교에서 제국대학으로 진학했지만 졸업 후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교사가 되었던 나츠메 긴노스케는 1900년, 제1회 문부성 관비 유학생이 되어 영국에 유학함으로써 엘리트 코스에 복귀한다. 20세기 첫해를 ‘대영제국’의 수도 런던에서 맞이한 나츠메 긴노스케는 1월 22일 빅토리아 여왕의 죽음과 조우한다. 여왕의 장례와 마주친 다음날인 1901년 1월 27일, 나츠메 긴노스케는 일기에 “밤, 하숙집 3층에서 곰곰이 일본의 앞날을 생각한다. 일본은 진지해져야 하고 일본인의 눈은 더욱 켜져야 한다”라고 적고 있다. 소설가 나츠메 긴노스케가 탄생하는 데에 런던 유학이 작용한 결정적인 의(64)미는 이 “일본인의 눈은 더욱 켜져야 한다”는 인식의 획득에 있다. ‘일본의 앞날’, 즉 ‘문명 개화’, ‘부국강병’, ‘식산흥업’(殖産興業) 그리고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중심적인 모방 모델의 하나가 된 것이 ‘대영제국’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죽음은 그 ‘일본의 앞날’을 체현하고 있는 ‘대영제국’의 쇠퇴 징조를 확실히 드러낸 사건이기도 했다. 19세기의 끝과 20세기의 시작을 런던에서 경험한 나츠메 긴노스케는 그때까지 그 안쪽에 귀속해 있던 ‘대일본제국’의 ‘전도’(前途)를 바깥쪽으로부터 보는 ‘눈’, 동시에 ‘일본의 전도’, 즉 미래의 목표가 되었던 ‘대영제국’이라는 외부의 현재를 그 내부로부터 보는 ‘눈’을 획득한 것이다.(65) 런던의 나츠메 긴노스케는 ‘밤낮없이 회전’하는 ‘다사한 세계’의 ‘파란’과 자신이 생활하고 있는 장소인 ‘작은 세상’에서의 ‘작은 회전’과 ‘작은 파란’을 밀접하고 불가분한 관계 속에 두고 볼 수 있는 ‘일본인의 눈’을 획득했던 것이다.(66)   ‘진보’에 대한 의심 이 ‘눈’의 중요한 특질로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실제로 발생하는 사건이나 일로서의 ‘파란’,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파란’과 개별적인 ‘나’라는 개인과 관계되는 ‘작은 파란’이 모두 ‘회전’ 내지는 ‘작은 회전’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인식의 모습이다. ‘회전’ 운동이란 안쪽으로 끌어당기는 구심력과 바깥쪽으로 튀어나가려(66)는 원심력이 정확하게 평형을 이루었을 때 발생하는 운동이다. 방향을 완전히 역으로 하는 두 힘이 서로 끌어당기는, 갈라지기 직전의 길항 속에서 생기는 ‘회전’과 ‘작은 회전’. 런던의 나츠메 긴노스케는 ‘모순’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두 논리의 힘이 서로 평형을 이루는 한 가운데에 몸을 두게 된다.(67) 청일전쟁 직전, ‘대영제국’과의 조약 개정에 이르러 청나라에 대해 서구 열강 못지 않은 전쟁이 가능한 ‘보통의 나라’가 된 ‘일본’. 그 청나라에 대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진보’에 ‘서양인’은 ‘놀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놀란’ 것은 당시까지의 ‘일본’이 서구 열강 못지않게 될 거라고는 결코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진보’에 아주 뒤떨어진 나라라고 ‘경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일본’ 따위에는 관심을 갖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했다.(67) 그러나 영일동맹이 맺어진 1902년 1월 30일 전후의 수기에서는 “영국인(67)은 천하 제일의 강국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영국은 망할 날이 없을까”하는 진화론적인 ‘진보’에 의심을 표명하면서, 그때까지 번영의 절정에 있었고 그 상태를 그 후로도 계속해서 갱신하고 있다고 믿어졌던 ‘영국’의 ‘망할’ 가능성을 지적한 다음, ‘일본’에 대해서도 “미래는 어떠해야 할까, 스스로 득의양양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대영제국’은 청나라에서 자신의 권익을 지키고 조선 반도를 포함한 러시아제국의 남하 정책에 대항하는 데 있어 일본을 아시아의 헌병으로 삼을 작정으로 영일동맹을 맺었다. 동시에 이 동맹은 그 전까지는 ‘미개’의 섬나라로밖에 간주하지 않았던 일본과 군사동맹을 맺지 않으면, 아시아에 대해 전개해 온 식민주의적 정책을 지킬 수 없게 될 만큼 제국주의 열강의 경쟁이 심해지고 ‘대영제국’의 힘이 상대적인 것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예전에는 ‘미개’의 나라였던 ‘대일본제국’이 아시아에서의 제국주의적 패권 다툼에 서구 열강 못지않게 참여함으로써 청나라에 대한 조차(租借)라는 이름의 식민지적 분할을 일거에 가속화했던 것이다. 역으로 ‘삼국 간섭’은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대일본제국’을 대등하다고는 인정할 수 없다는 국가적 표시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도 일본 국내에서 영일동맹은 한 번 더 일본이 서구 열강 못지않다는 증좌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에 대해 런던의 나츠메 긴노스케는 혼자 하숙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의심을 표명했던 것이다.(68)   ‘모순’으로서의 내셔널리즘 아무리 ‘문명 개화’라고 소리쳐 보아도 ‘일본인’은 영국인이 될 수 없다.(69)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강박적으로 영국인보다 더 영국인답게 되려고 쓸데없는 모방을 한다. 한없이 자기를 타자로서의 거울인 영국인에 다가서게 하려고 한다. 그들의 기준에서 자기를 측정하려고 한다. 다시 말해 ‘문명 개화’란 바로 서구 열강의 논리와 가치관에 입각해 자기를 철저하게 개변하려고 하는 자기 식민지화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 식민지화는 ‘부국강병’을 하고 생산력·경제력·군사력을 서구 열강 못지않게 하여 외교적으로 대등하게 되면서, 바로 아시아의 주변 지역을 침략하여 제국주의적 식민주의를 전개한다는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 결과 침략적 내셔널리즘에 의해 자기 식민지화를 부추겨대는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모순’이 아니라고 꾸며대기 위해서는 자기 식민지화를 온폐하고 제국주의적 식민주의를 추진해 나아가는 내셔널리즘 쪽으로 일원화하는 수밖에 없다. 여기에 ‘대일본제국’이 과도하게 침략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구도가 있다. 그러나 단독으로 그 침략성을 발동할 수 없는 이상, 가장 헤게모니적인 국가에 기생할 수밖에 없다. 그 귀결이 영일동맹이며, 일본형 기생(parasite) 내셔널리즘의 완성인 것이다. 런던의 나츠메 긴노스케는 그 의식의 한 부분을 자기 식민지화와 내셔널리즘이 갈라지는 한복판에 두면서도, 그러나 다른 부분에서는 자기 식민지화, 즉 ‘대영제국’에 대한 흉내와 모방이 결국 ‘미래에는 중대한 대사’로 이어지고 국가가 ‘망할’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고 있었다. 이 입장은 ‘모순’을 은폐하고 침략성을 과도하게 드러내는 방향도, 혹은 ‘모순’을 해소한 것처럼 그럴싸하게 보여주는 연속적인 ‘진보’의 가능성 속에서 근대를 발견하는 후쿠자와적 발전론도 아니다. 그것은 훗날의 소설가 나츠메 소세키를 관통하는, 계속해서 ‘모순’을 ‘모순’으로 파악하며 그 갈라짐의 중심에서 사고해 가는 표현자로서의 모습을 결정했던 것이다.(70)   러일전쟁과 식민주의   ‘고양이’와 러일전쟁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의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거기에서 발생하는 인종주의적 차별과 전쟁이라는 폭력의 문제는 소설가 나츠메 소세키의 탄생 이후 일관된 주제로 나타난다. 예컨대 스스로 ‘소세키’라는 서명(署名)을 최초로 사용한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71) 키우는 고양이까지 전시(戰時) 내셔널리즘에 열광하고 있다는 설정인데, ‘혼성 여단’이란 러일전쟁에 대한 신문 보도의 핵심어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은 보명 1여단에, 필요한 다른 병종(兵種)을 더해 편제한 독립 부대를 말한다. ‘혼성 여단’이 새롭게 전장에 투입되었다는 신문 보도는 국내에서는 전의(戰意)와 국위를 고양시키는 기능을 하지만, 전장이라는 현장에서는 무능한 지휘관의 무모한 작전에 의해 다수의 사상자가 나왔기 때문에 새로운 사상자 예비군이 투입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나츠메 긴노스케처럼 ‘송적’(送籍)을 해서 징병을 피할 수 없었던 남자들은 거기에 자신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장에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71) 당시 ‘인간’으로서의 ‘일본’인 독자측에서 보면, 부엌 한가운데서 ‘쥐’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확인하려고 고민하고 있는 ‘나’와 도고 헤이하치로가 같은 ‘걱정’을 하고 같은 ‘환경’에 놓여 있다는 따위의 말은 결코 있을 수(72) 없다. 결과적으로 ‘나’의 담론은 동해의 해전을 부엌에서의 고양이와 쥐의 싸움으로 폄하하고 있는 것이다. 방법으로서의 ‘모순’이 가지는 전략적 의미가 여기에 있다. ‘나’는 ‘모순’되어 있다. 단지 한 마리의 고양이로서는 설령 ‘인간’쪽으로부터 다른 고양이와 비교되어 무가치하다고 아무리 비판받는다 해도 ‘쥐’를 잡아본 적은 없다. 쥐를 죽이는 살인을 범한 적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 속해 있는 이상,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이라는 국가 안의 ‘인간’을 주인으로 가진 ‘고용된 고양이’인 이상, ‘쥐’를 잡지 않으면 안 된다. 우선 쥐를 죽이는 살인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결국 ‘쥐’를 잡지 못하고 끝나고 만다. 그리고 결코 ‘쥐를 잡지 않은’ ‘무명의 고양이’로서 그 생애를 마친다. 동시대의 일본 ‘군인’들처럼 ‘쥐’에 해당하는 러시아 병사를 죽이고, 단번에 신문지상에 영웅으로 유명하게 되는 방향을 거절하고서 말이다.(73)   󰡔�도련님󰡕�의 콜로니얼 이항 대립주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직후, ‘나’는 마츠야마(松山)로 보이는 지방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벌거벗은 몸에 빨간 훈도시를 차고 있는” ‘뱃사람’을 보고 “야만스런 곳이다”라는 감상을 갖는다. 세계를 ‘문명’과 ‘야만’으로 나누고, ‘야만’인이 사는 토지를 ‘주인 없는 땅’이라고 하여 식민지적으로 영유하는 것을 사후적으로 긍정하는 ‘만국공법’의 논리인 것이다. 우라가(浦賀)에 도착한 페리의 감상을 흉내 낸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수도 도쿄의 교외인 ‘오모리’(大森)와 비교해 마을이 작다고 화를 낸다. 올라탄 기차가 “성냥갑 같다”고 또 화를 낸다. 해변가에 서 있던 ‘코흘리개’에게 ‘중학교’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으나 모른다고 하니까 곧바로 ‘멍청한 시골뜨기’라고 화를 낸다. 중학교에 부임 인사를 갔다 온 후, 마을을 산보하고 있는 동안에도 ‘나’의 차별의식은 계속해서 발동한다.(74) 비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도쿄에서는 이미 실현되어 있다고 ‘나’가 믿고 있는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의 달성도이다. ‘문명’과 ‘야만’이라는 식민주의적인 이항 대립주의를 기본 틀로 하면서 착의(着衣)와 나체, 커다란 가치와 작은 가치, 교육을 받은 자와 교육을 받지 못한 자, 금세기와 전세기, 대연대(大聯隊)의 ‘근사’한 ‘병영’과 그렇지 않은 ‘병영’, 대도시와 소도시, 그리고 도회와 ‘시골’이라는 이항 대립이 ‘나’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일본의 ‘문명개화’=자기 식민지화의 최첨단을 달리고 있는 도회인 도쿄에서 온 이주자=식민자이므로 자신의 부임지를(74) ‘시골’이라며 멸시할 특권을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75) ‘5엔의 팁’으로 숙소의 사람을 놀라게 해주겠다는 벼락부자의 심정은, 절제된 생활에서 해방되어 “월급 40엔”이라는 이주지의 새로운 생활에 들어갈 수 있다는 비일상적인 여행 기분 가운데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래 뵈도 근본은 하타모토(旗本)다”라고 ‘촌놈’을 경멸한다. ‘에도 토박이’를 자랑으로 여기는 ‘나’의 벼락부자 심정이 이 정도인 것이다. ‘야만’스러운 ‘촌구석’이라고 멸시하는 이주지의 생활 속에서, ‘나’는 예전의 생활 방식에서는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풍요로운 생활 방식을 향유할 수 있다는 식민지 거주자 특유의 모습이다. ‘시골’은 도쿄라는 도시의 지적 엘(75)리트에게 식민지적 취직의 장소인 것이다.물론 종주국으로 돌아가면 그러한 생활이 가능할 리 없다. ‘도쿄’로 돌아간 ‘나’는 ‘월급’이 ‘25엔’인 ‘시내 전차 기수(技手)’라는 직업밖에 얻지 못한다.(76)   조선의 식민지화와 󰡔�문󰡕�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이유 󰡔�문󰡕�은 ‘한국 합병’이라는 극히 기만적인 호칭을 부여받은, 반도에 대한 식민지 지배가 수행된 동시대 상황을 명확하게 새겨넣은 소설이다.(76)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스케의 처 오요네가 남편과 그의 동생이라는 두 명의 남성에게 하나의 질문을 반복적으로 한다는 설정이다.(77) 처음부터 󰡔�문󰡕�의 주인공인 소스케에게는, 청일전쟁 이후 한국을 독립국으로 한다는 국제 조약을 맺었으면서도 러일전쟁을 계기로 하여 한국의 각료를 위협해 한국을 식민지적 속국으로 삼는 외교 조약을 억지로 맺게 했던 이토 히로부미의 상세한 이력을 오요네에게 설명할 만한 사회적 관심은 부여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한일 합병’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쓰인 󰡔�문󰡕�이라는 소설에서, 오요네 본인의 의식과는 별도로 소설의 전체 구조속에서 그녀의 물음은 소스케가 자신의 의식에서 배제하고 있던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의 문제를 동시대 독자들의 기억 속에 상기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다.(80)   계급과 식민지 󰡔�문󰡕�에 등장하는 남자들의 지정학적 배치에는 계급과 식민주의의 관계가 명확하게 각인되어 있다.(81) 결과적으로 소스케는 장남으로서 자신이 상속받았어야 할 부친의 유산을 아버지의 동생인 숙부에게 빼앗기고 만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소스케의 유산 상속이 실패하는 전 과정이, 러일전쟁의 시작부터 ‘대일본제국’에 의한 한국의 식민지 지배가 급속하게 강화되어 가는 기간, 즉 안중근이 예심의 진술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한 이유로 들었던 거의 모든 항목이 실천된 시기와 겹쳤다는 사실이다.(83)   ‘한국 합병’으로의 과정 1903년 11월과 1904년 1월, 두 차례에 걸쳐 러일전쟁 발발의 가능성을 미리 상정하면서 한국 정부는 전시에서의 국외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러일전쟁 개전 직후인 1904년 2월 23일, 한국에 대해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조인을 강요했다. 사실상 이것은 한국 정부가 ‘대일본제국’ 정부가 하라는 대로 정치를 해야 한다는 보호국화를 강요하는 조약이다. 나아가 3월에는 일본군이 ‘한국 주둔군’으로서 한국의 영토를 군사적으(83)로 지배하고, 7월에는 군율에 의해 사형까지도 시킬 수 있다는 형태로 반일행위를 단속하기 시작했으며, 결국에는 그 파급력이 한국 전지역으로 퍼져 나아갔다. 이러한 무력 지배하에서 1904년 8월에는 제1차 한일협약에 의해 고문정치 체제가 포고되었고, 1905년 11월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직접 한국에 들어와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화’하는 ‘을사보호조약’을 밀어붙였다. 이 조약의 국제법상의 유효성은 지금도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84) 소스케와 스기하라라는 ‘실패자’와 ‘성공자’의 이항 대립은 그대로 유산상속에 ‘실패’한 소스케와 ‘성공’한 사카이의 계급적 낙차와 겹쳐질 수 있다. 그것과 동시에 한국의 식민지 지배를 위해 새롭게 창설된 통감부의 초대 총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70명에 가까운 통감부 직원들은 과연 ‘성공자’인가 ‘실패자’인가 하는 문제도 부상한다. 왜냐하면 이토 히로부미의 통감 취임에 즈음하여 일본 내에서는 그것이 무단파(武斷派)인 가츠라 타로(桂太郞) 내각에 의한 좌천으로 보도되었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소스케와 마찬가지로 사카이가 경영하는 “셋집을 빌려 쓰고 있는 혼다(本多)”라는 ‘은거 부부’가 “조선의 통감부에서 훌륭한 관리로 있는 외아들이 보내주는 돈으로 편하게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도인 도쿄에서 근무한다고는 해도 월급이 보잘 것 없어 신발에 구멍이 나도 새 신발을 살 수 없는 소스케, 그 은거 부부와 같은 생활 상태를, 부모에게 생활비를 보낼 수 있는 식민지 ‘조선의 통감부’ 관리와 비교할 경우, 도대체 어느 쪽이 ‘실패자’이고 어느 쪽이 ‘성공자’인지 갑자기 결정할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실패자’도 ‘성공자’도 ‘만주’나 ‘조선’이라는 식민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상황이다. 󰡔�문󰡕�이라는 소설의 시간 구조는 러일전쟁과 그 이후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의 과정, 그리고 그에 대한 이토 히로부미라는 한 정치가의 깊숙한 관여를 상기시키는 장치로 되어 있다.(87) 더욱이 󰡔�문󰡕�이라는 소설의, 소설로서의 스토리의 요체에, 소스케와 오요네라는 남편과 아내의 기억의 정치학이 있다. 오요네는 히로시마, 후쿠오카, 그리고 도쿄에서 유산, 출산 직후의 사망, 그리고 사산이라는 형태로 잃은 세 아이의 죽음을 매일같이 기억으로부터 되살리고 있는 데 비해, 소스케는 과거의 기억을 계속해서 망각해 왔다는 대비 속에 놓여 있다. 소스케에게 과거에 대한 망각이야말로 오요네가 물었던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 이유에 대해 대답할 수 없는 의식의 양상을 규정한다는 것이 이 시간 구조 속에서 명확해지는 것이다.(88)   식민주의와 ‘낭만주의’   취직 장소로서의 식민지 일본의 능력주의(meritocracy)가 이제 일본 국내에 국한해서는 유지할 수 없으며 완전히 식민지 지배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 시대라고 파악하고 있는 작품이 󰡔�히간 지날 때까지󰡕�(彼岸過迄)이다. 주인공인 다가와 케이타로(田川敬太郞)는 󰡔�도련님󰡕�의 ‘나’와 비교했을 때 한층 더 식민주의적 일상 감각에 젖어 있는 인물이다. 소스케의 동생인 고로쿠가 대학에 진학할 학비를 조달할 전망이 보이지 않아 “만약 안 된다면 학교를 집어치우고 당장이라도 만주나 조선에라도 가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해도 국내에서는 좀처럼 일자리를 찾을 수 없는 케이타로에게 ‘만주’나 ‘조선’에서 직장을 구하는 것은 거의 당연한 일로 의식되고 있다.(88) 이제 막 획득한 식민지에서조차 생활의 장이 없다면 다시 새로운 식민지를 만들 수밖에 없다. ‘낭만 취미(romantic)의 청년’으로 규정되어 있는 다가와 케이타로는 분명 남방에 대한 식민주의의 꿈을 품고 있었다.(90) 케이타로의 세대는 제국주의 열강 상호간의 격렬한 경쟁 속에서 늘 일촉즉발의 위기를 내포하는, 곧 성공의 배후에 커다란 위험을 안지 않을 수 없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막다른 곳에 몰려 있는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히간 지날 때까지󰡕�의 화자가 독자에게 ‘낭만’주의가 식민지적 침략주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낭만’주의가 있는 그대로의 자기로부터 있어야 할 자기로 상승(90)해 가려는 욕망의 표현 형태라고 한다면, 케이타로의 ‘낭만 취미’적 꿈은 남양에서 식민지적 플랜테이션의 경영자가 되는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그 지역에서 이미 성공을 거두었던 서구 열강 출신의 플랜테이션 경영자들을 당치도 않게 모방·흉내 내는 꿈이었다.(91)   ‘탐정’과 식민지 지배   ‘고등 유민’과 전쟁 비용 조달 ‘소회전’은 밀접하고도 불가분하게 큰 ‘회전’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94)     패전 후의 식민지적 무의식   상징 천황제와 식민지적 무의식   밖으로부터의 탈제국주의화   식민지화와 세 가지의 전후   상징 천황제와 오키나와의 요새화   비대칭적인 거울상 관계   반도 분단에 대한 일본의 책임   차별화된 거울의 상실   ‘피해의 신화’의 기원     전후의 ‘문명’과 ‘야만’   단절된 과거   우월한 지위로부터 열등한 지위로   ‘야만’적 과거로서의 ‘독재주의’   ‘문명’, ‘진보’로서의 민주주의   ‘야만’적 ‘독재주의’로서의 ‘공산주의’   적색 추방과 ‘단독 강화’     식민주의와 전쟁 책임   ‘단독 강화’와 배상 문제   ‘두 개의 중국’과 전쟁 책임의 모호화   ‘반공주의’와 전쟁 책임의 무화   고도 경제 성장과 신식민주의   역사 교육과 아시아 멸시   이에나가 교과서 재판과 ‘한일조약’   경제 원조라는 이름의 신식민주의   라이셔워의 근대화론과 아시아 배제   자신의 문제로서의 ‘탈식민지화’ 자신의 주변에서 발생하는 ‘소회전’으로서의 사건을 어떻게 세계적 상황으로서의 ‘대회전’과 겹쳐서 생각할 수 있을까 하는 소세키의 물음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이미 행해져 온 ‘소회전’과 ‘대회전’을 겹치는 담론의 시스템을 일단 파기하고 그 담론들을 꿰뚫고 있던 틀을 다시 짜고 교란시켜 지금 여기에서 제시할 수 있는 형태로 재편성하며 자기 나름의 ‘소회전’과 ‘대회전’을 겹치는 수밖에 없다. 아마 담론과 관계된 각자가 그러한 실천을 계속해 나아가는 것이 포스트콜로니얼한 상황을 살아가는 데 있어 소박한 윤리기준이 될 것이다.(143)
38    한기문-애국계몽기소설과단재소설의성격 댓글:  조회:2751  추천:0  2009-05-16
불행한 출발, 그 역경의 시작 -애국계몽기 소설과 단재 소설의 성격 한기문(문학평론가) -1950년을 전후한 시기에 신문, 잡지 그리고 당시 활발히 전개된 상업적 출판에 힘입어 다양한 형태의 서사문학이 출현하였다. 첫째, 국가의 근대화 혹은 국난 극복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국내외 영웅들을 주인공으로 한 역사전기문학, 둘째로 작가의 의식과 이상을 대변하는 화자에게 현실을 분석, 비판하도록 함으로써 독자의 각성과 정치적 계몽의 효과를 의도한 시사토론체 소설, 셋째로 근대소설적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면서 당대의 시대상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반영한 신소설이 그들이다. 앞의 두 양식이 정치적 계몽을 더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문학적 의장을 빌린 혐의가 농후하다면, 신소설은 그에 비해 순문학에 더 가까운 양식이라 할 수 있다. (한국소설문학대계1<<신소설>> 동아출판사 1995 539페이지) -본래 근대사회의 주류적 서사양식은 소설이다. 근대소설은 시민의식의 문학적 표현으로서 사회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묘사와 엄정한 분석, 비판을 통해 시대현실을 묘파하는 데 그 문학적 사명이 있다. 그러나 이 시기 서사문학은 그 문제의식의 치열함에도 불구하고 근대소설의 확립이라는 문학사적 요구를 철저하게 실현하지 못했다. 즉 현실의 여러 모순과 당대 민중의 다양한 요구를 완미한 근대소설의 양식 속에 수렴하는 대신, 서로 다른 양식으로 분열되어, 근대를 추구하는 정신이 근대적 양식과 결합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사회 각 영역에 엄존했던 봉건세력의 완강한 반대와 이를 교묘히 이용하면서 식민지 침략의 발판을 넓혀 나갔던 일본 제국주의로 말미암아 근대적 개혁이 완수되지 못한 탓이다. 이러한 정황이 작가가 근대소설이란 새로운 양식으로 자신의 문학적 이상을 실현하는 길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그 결과 애국계몽기 서사문학은 구소설의 자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신소설이나, 전기.서사성보다 정론성이 두드러지는 시사토론체와 같은 <<불완전한>> 양식을 산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애국계몽기 서사양식들이 완미한 근대소설의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한 것과 그들의 수행한 문학적 성과는 분리해서 따져 보아야 할 문제이다.(540) -‘신소설’이란 명칭은 이인직의 <혈의 누>(1906)에서 처음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이때의 신소설이란, 구소설과 구별되는 새로운 소설이라는 다분히 편의적인 명칭으로 명확한 양식적 특질을 내포한 개념이 아니었다. 이는, 번안소설인 <애국부인전>(장지연, 1908)에도 ‘신소설’이란 표제가 붙어 있으며 신소설이란 명칭과 아울러 ‘가정소설’, ‘최근소설’, ‘정치소설’과 같은 표제가 두루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던 것이 이후 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면서 명칭에 걸맞은 장르적 개념을 얻게 된 것이다.(540) -그렇다면 신소설이 수행한 문학사에서의 역할과 의미는 어떠한 것인가. 먼저 근대문학적 요소로, 언문일치에 가까워진 문체의 변화와 작품 속에 반영된 내용의 리얼리티가 비약적으로 발전된 점을 들 수 있다. 신소설은 비록 불완전하게나마 고전 국문소설의 운문체 문장이나 한문 직역투에서 벗어남으로써 문체에서 근대소설 형성의 길을 닦아 놓았다. 또한 작품 배경과 소재를 주로 갑오경장과 청일전쟁 이후의 사회현실에 둠으로써 소설이 지나친 허구와 비현실의 세계로 떨어질 가능성을 좁히고, 결과적으로 인물과 사건이 한층 실감을 갖게 되었다. 다시 말해 리얼리즘의 일보 진전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541) -이러한 리얼리즘의 진전은 문명개화의 요구를 체현한 인물 군상을 빚어 내어 봉건적 사회체제와 가족제도의 완고한 구습을 비판하게 하였으며, 귀족사회의 몰락과 평민층의 성장과 같은 사회변동을 그려내고 미신타파, 신교육의 필요성, 남녀간의 자유로운 연애 등 새로운 시대정신을 제시하는 동력이 되었다.(541) -하지만 신소설에는 근대소설과 부합되지 않는 구소설의 잔재가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이를테면 처첩, 계모와 전실 자식 간에 빚어지는 봉건 가정 내부의 갈등에 대한 과도한 집중이라든지, 선인형과 악인형으로 인물을 유형화하여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성격변화의 가능성을 봉쇄한 점, 우연성의 남발, 권선징악의 도식적 구조 등이 그것이다.(541) -그렇다면 신소설이 이렇듯 반구반신의 문학에 머무르게 된 근본적인 요인은 무엇인가. 우선 구소설의 영향을 완전히 불식시킬 수 있을 만큼 근대사회로의 이행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작가의 안목이 제한된 점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구소설에 길들어 있는 독자층의 낙후한 의식의 흥미 본위와 통속성을 조장한 점, 그리고 일제의 간섭에 의한 사회 전반의 위축과 발전의 차단으로 인해 신소설 가운데 새롭고 긍정적인 요소들이 강화될 수 없었던 점 등을 지적할 수 있다.(541) -<혈의 누>(1906)는... 청일전쟁의 참상을 실감 있게 그리면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일점의 비(非)를 찾기 어려울 만치 규격이 정비된 구성”이라는 임화의 평가와 같이 묘사나 구성에 있어 구소설과 현격한 차이가 있다.(542) -...<은세계> 전반부가 보여준 문학적 성취와는 달리 후반부는 옥순과 옥남의 미국 유학이란 맹랑한 구성을 통해 전반부에 나타난 최병도 죽음의 의미를 희석시키고 ‘반봉건 근대화’라는 시대적 요구가 단순한 서구문명의 수입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사태를 왜곡한다. 이러한 서구문명에 대한 무조건적 예찬은 <혈의 누>에서도 명료히 드러났던 것으로, 당시 대한제국이 안고 있던 숱한 모순의 유일한 해결책으로 서구 문화와 문명의 수입을 상정하는 이인직의 관점은 ‘서구의 아류’로서 ‘일본 제국주의’의 현실적 존재를 인정하고 나아가 그 힘에 복속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로 귀결된다. 당대인이 추정할 수 있는 근대화의 유일한 모델이 일본이었기 때문이다. 실로 가공할 만한 논리의 함정이 아닐 수 없다.(544) -<귀의 성>(906-1907)은 표면적으로 <사씨남정기>나 <정을선전>과 같은 중세 가정갈들형 소설의 맥을 잇고 있는 것처러 보인다. 그러나 이인직은 평민인 강동지의 딸 길순과 김승지 부인의 갈등을 축으로 ‘처=순선(純善)’, ‘첩=순악’이란 도식을 역전시킴으로써 처첩갈등 속에 내재되어 있는 신분적 모순과 사회적 약자인 첩들이 당할 수 밖에 없는 불합리한 질곡을 예각적으로 분석하고 있다.(545) -<귀의 성>에는 <사씨남정기>와 같은 예정된 권선징악의 구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선량한 인물의 대표격인 길순은 아들과 함께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고 자기 품성에 대한 보답을 받지 못한다. 김승지 부인의 비참한 운명 또한 선천적을 예정된 것이 아니라 자기 행위의 필연적 결과였을 뿐이다. 이것이 <귀의 성>과 전대 가정소설이 구별되는 지점이다. 예컨대 <사씨남정기>의 주제가 사대부적 관습과 질서가 강요하고 있는 사회적, 인간적 갈등을 무마하고 얼버무려 그 모순을 온폐, 보수하려는 데 있었던 것과는 달리 <귀의 성>은 단호히 양반이 지배하는 사회의 모순을 폭로한다. <귀의 성>의 리얼리티는 바로 이러한 가정모순의 사회적 본질을 묘파한데 있다. 근대주의자 이인직의 현실안이 빛을 발하는 대목인 것이다.(545) -<구마검>(이해조 1908)은 바로 이러한 분열, 즐 ‘계몽성’과 ‘현실성’의 이원화라는 현상을 자신의 미학적 특질로 하고 있다. 이는 기실 <구마검>만이 아닌 애국계몽기 소설사에서 흔히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으로, 문학의 계몽적 본질과 소설문학의 특수성을 종합해서 사고하지 못한 시대적 한계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계몽성’이 극단적으로 추구될 때, 작품의 서사성이 위축되어 <금수회의록>이나 <자유종>, <거부오해>, <소경과 안즘방이 문답>과 같은 토론체 소설이 등장하게 된다.(547) -애국계몽기에 시사토론체 소설이 성행한 것은 무엇보다 그 형식이 간편함과 단순함이 작자의 사상을 전달하거나 문제의 시비를 가리는데 손쉬웠기 때문이다.(547-548) -그러나 문학 본래의 입장에서 본다면 대단히 불충분한 것이었다. 작품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마는 인물과 환경이 작자의 의도에 따라 편의적으로 결정되었으니 결국 계몽적 의도에 따라 소설의 외피를 빌린 것이었다.(548)
37    조구호-한국근대소설연구 댓글:  조회:2842  추천:0  2009-05-16
조구호, 󰡔�한국 근대소설연구󰡕�, 국학자료원, 2000 이향소설과 같은 역사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문학작품들은 그것이 생산된 역사적 배경에 대한 고찰이 작품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중요하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일제강점기의 이향은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대응이자 삶의 단면이다. 그리고 이향소설은 그런 문제들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므로 개별 작품에는 어떻게든 역사적 상황에 대한 작가의 태도가 내포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향의 시대적 배경과 이향소설을 상호 의존적이고 소통적인 관계로 검토할 것이다.(18쪽) 이향의 양상을 살펴보면 일제에게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한 애국지사들의 망명과 일제와 그들의 앞잡이들에 의한 경제적 수탈을 견디지 못하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나간 농민들의 이농으로 크게 두 유형으로 드러난다.(21쪽) 일제는 조선의 농촌을 그들의 항구적인 식량공급지로 만들기 위하여 1908년 동양척식회사를 설립하여 일본의 자금으로 조선의 농지를 매입하는 한편, 일본 농민을 조선의 농촌으로 이주시킨다.(조기준, 일인 농업이민과 동양척식주식회사, 한국근대사론 1(지식산업사, 1985), 64쪽-인용자 재인용) 그리고 토지조사사업을 빌미로 전국의 토지를 수탈하기 시작한다. 이 사업은 단순한 토지조사가 아니라 일제가 우리 나라를 식량공급지로 만들기(28쪽) 위한 토지 약탈사업이었다. 토지는 생산의 토대이고 생존의 근거이므로 수탈의 제 일 대상이었다. ‘일제는 한반도를 그들의 영구적인 식민지로 지배하기 위하여 조선인 중소지주․자작농․자소작농 등 농촌사회의 중간층을 몰락시키고, 농촌사회를 일본인 및 조선인 대지주와 그 소작인으로 양분하여 농촌에서의 민족자본가 계층의 성장을 저지하는 식민지 농업정책을 꾀하여’(강만길, 일제하 농촌빈민증가의 원인, 동양학 14집(단국대 동양학연구소, 1984), 160쪽-인용자 재인용) 농민들로부터 토지를 수탈했다.(29쪽) 정책이주란 만주사변(1931) 이후 일제가 넓은 농토와 풍부한 자원을 지닌 만주를 지배하기 위하여 정책적으로 조선 농민들을 만주로 이주시킨 것을 말한다.(고승제, “만주농업이민의 사회사적 분석”참조 윤병석 외 편, 한국근대사론 1(지식산업사, 1977)-인용자 재인용)(36쪽) 일제강점기 이향소설에서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농민들의 이농과 관련된 문제를 다룬 소설들이다. 당시의 이농은 식민지 통치아래 민족이 겪었던 고난의 참상을 잘 말해준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 등 일련의 식민지 수탈정책으로 가난한 농민들은 살길을 찾아 정든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궁핍한 상황과 이농민들의 삶은 당시의 소설에서도 드러난다. 이농을 다룬 소설은 주로 이농의 원인을 부각시켜 궁핍한 현실을 고발한 것이 한 부류를 이루고, 또 하나는 만주나 일본 등지에서 이농민들이 겪는 고난을 그려 민족의 수난을 묘사한 것이다.(94쪽) 앞의 유형에 속한 작품들은 고향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 쫓기어 가는 암담한 모습과 일본 등지에 가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말만 듣고 속아서 가는 모습으로 구분할 수 있고, 뒤의 유형에 속하는 작품들은 이농민들의 삶의 모습에 따라 ‘좌절과 절망’하는 것과 ‘각성과 저항’하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95쪽) 앞에서 농민들잉 고향을 떠나게 되는 이향의 역사적 배경을 일제의 착취와 수탈이라고 했다. 일제의 수탈과 억압에 대대로 지어먹던 토지를 빼앗기고 정든 고향에서 내몰리게 된 사람들이 마지막 희망을 걸고 찾아가는 곳은 간도로 대표되는 만주였다. 당시 굶주린 조선의 농민들에게 간도는 ‘기름진 땅이 널려 있고 산림도 울창하여 나무 걱정도 없어 열심히만 하면 배불리 먹고 살 수 있는’ 이상향으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105쪽) 간도는 고향에서 내몰리게 된 사람들에게 마지막 희망의 땅이었다.(105쪽) 간도 이주민들의 고난상을 그린 작품들은 이주 초기의 극도의 궁핍으로 절망적 세계에서, 생존을 위하여 목숨을 건 소금 밀수를 감행하는 세계로 전개되고, 또 수전 개간으로 정착을 하게 되는 모습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것은 광복투쟁기 소설의 흐름의 한 갈래를 보여주는 것이며, 간도 이주민들의 정착의 역사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140쪽) 어느 한 시대에 발표된 문학 작품의 세계가 그 시대를 직접 반영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 시대가 지닌 삶의 총체적 분위기가 작가에게 미치는 영향은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148쪽) 이향소설과 같이 일제의 가혹했던 검열에도 불구하고 민족이 처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형상화한 데에는 작가의 현실인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149쪽) 경향문학은 당대의 사회적 모순의 근본 원인이 계급 몬순에 있다고 파악하고, 문학을 매개로 한 조직적인 실천을 내세운 문학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1925년 조선 프로레타리아예술가 동맹(KAPF)을 결성하고, 박영희․김기진․최서해․조명희․이기영․한설야․임화․김남천 등의 작가들이 모습을 드러낸다.(류보선, 민족과 계급-리얼리즘 소설의 두 좌표, 「민족문학사 강좌 하」(창작과비평사, 1995), 94-97쪽-인용자 재인용)(153쪽) 일제는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7년에 중일전쟁을 도발하면서 전체 아시아를 장악하려는 음모를 서두르는 과정에서 식민지 조선을 더욱 철저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군사력과 경찰력을 증강하여 조선민족의 일거수일투족까지도 감시하며 수많은 애국지사와 저항적인 민중들을 검거․투옥․학살했다. 출판물에 대해서는 1931년 카프회원들에 대한 제일차 검거를 필두로 하여 검열을 강화하고, 작품의 발표를 방해하며 삭제 개작을 공공연히 강요하였다. 1935년 카프의 강제해산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일제의 문화적 탄압은 프로문학은 물론이고 그 외의 문학을 포함한 모든 민족문학의 위기를 초래했다. 과거 어느 시기와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155쪽) 재만 조선인 문학은 1930년 이후 1940년대에 걸친 일제강점기 후기에 만주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국내에서는 민족문학의 최후 보루였던 <<동아일보>>․<<조선일보>>에 이어 <<문장>>과 <<인문평론>>마저 폐간되고 친일의 황도문학이 위세를 떨치고 있던 사정을 감안하면 그 문학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156쪽) 1941년 태평양전쟁을 전후한 시기부터 일제의 탄압은 극에 달아 각종 잡지들을 폐간하고 우리말과 글의 사용을 금지하였다. 그리고 작가들은 노골적인 친일행위와 친일문학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이에 어떤 작가는 그 강요에 굴복 당하고 어떤 작가는 글쓰는 행위를 중지하고 어떤 작가는 투옥 당하고 어떤 작가는 국외로 탈출하는 상황이 되었다. 실로 우리 문학사의 암흑기에 놓여진 것이었다.(157쪽) 어느 일정한 시기의 문학작품에서 어떤 양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것은 그 시기의 보편적인 삶의 모습을 문학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하겠다.(200쪽) 광복투쟁기에 간도 이주의 동기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일본제국주의와 그 앞잡이들에 의한 수탈과 착취를 견디지 못하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유랑이민이다. 둘째, 일제에게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망명이민이다. 셋째, 일제가 중국대륙을 침략하기 위하여 꾀했던 이민정책에 속아 대륙침략의 제물이 된 정책이민이다. 당시 간도이민은 대부분은 첫 번째와 세 번째 경우에 속한 유랑이민과 정책이민이었고, 두 번째 경우에 속하는 망명이민은 극히 소수였다.(201쪽) 유랑이민과 정책이민은 이주 동기로는 구분할 수 있겠으나, 그들이 이주하게 된 배경은 크게 다를 발 없이 일제의 수탈에 의한 경제적 궁핍에서이다.(201쪽) 일제는 한반도 식민통치의 전 단계로 1908년 동양척식회사를 설립하고, 이어 토지조사사업을 빌미로 전국의 토지를 수탈하기 시작한다. 토지는 생산의 토대이고 생존의 근거이므로 수탈의 제일 대상이었다.(201쪽) 그리하여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되는 1918년 이후에는 대다수의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 일제는 토지수탈에 이은 2단계 식민지 정책으로 산미증식운동을 강행하여 민족의 주식인 쌀을 수탈하여 농민들을 헐벗고 굶주리게 한다.(202쪽) 일제는 1932년 허수아비 정부인 만주국을 세워 겉으로는 민족협화와 樂土 만주를 부르짖으며 이민을 장려하는 한편, 안으로는 대륙침략을 획책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인들이 만주로 이주하여 고난을 겪은 것은 만주국 건국 이전이 되어야(216쪽) 했던 것이다. 이러한 요인이 작용한 때문인지 「농군」과 「벼」에서 만주로 이주하는 이주민의 모습은 고향에서 내몰린 초라한 행색이 아니고, 이주민의 생활도 가난에 찌들어 끼니를 때우지 못하는 처지도 아니다. 이들 작품에서는 수전 개간의 고난이 중점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다.(217쪽) 「농군」, 「벼」 등에서 드러나는 조선이주민들의 고난상은 1920년대의 최서해의 「홍염」, 「기아와 살육」 등에서 그려진 바와 같이 극단적인 행동으로 인한 최악의 상황으로 전개되지 않는 것은, 일제의 검열이라는 족쇄도 한 원인이 되었겠지만, 1930년대 이후는 이주 초창기라고 할 수 있는 1920년대의 이주민들이 어느 정도 정착할 수 있었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간도 이민소설은 이주 초기에 정착을 하지 못하고 극단적인 몸부림을 치던 단계를 지나, 목숨을 건 소금 밀수를 감행하기도 하다가, 수전 개간으로 정착하게 되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것은 광복투쟁기 소설의 흐름의 한 갈래를 보여주는 것이며, 간도이주민들의 정착의 역사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218쪽) 문학작품이 역사적 진실을 얼마나 정확하게 형상화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겠으나, 광복투쟁기에 이루어졌던 우리 민족의 간도이주는 민족이 겪은 수난의 역사이며,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민족의 현실이라는 점에서 간도 이민소설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219쪽) 작가가 현실을 얼마나 정확하게 인식하고 성실하게 살았는가 하는 문제는, 바로 그것이 문학적 가치는 아닐지라도 작품을 평가하는데 참고자료는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안수길 초기소설이 이루어진 역사적 상황과 그의 만주생활을 살펴보는 것은 작품 연구를 위한 예비적인 작업이라 하겠다.(222쪽) 이와 같이 다소 여유 있는 생활을 누렸다고 해서 작가 자신이 40여년의 일관된 작품이라고 밝힌 <어떻게 사느냐>에 대한 주제의식이 부정되거나 왜곡되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 식민지하에서 민족이 겪어야 했던 현실을 함께 아파하고 타개하려고 노력한 투철한 역사의식을 지닌 작가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것 같다. 그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역사적 현실과의 괴리도 이러한 그의 생활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229쪽) 여기서 지적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만주 이주민들이 겪어야 했던 참상을 전달하거나 고발하는 것만으로는 “어떻게 사느냐”를 견지해온 작가적 소임을 다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시대의 현실에 대한 투철한 인식을 바탕으로 왜 그러한 수난을 받아야 했는지를 밝혀야 하고, 나아가 어떻게 그와 같은 환경을 극복해야 하는가를 구조적으로 천착해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이주민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은 근본적으로 일제의 야만적인 식민지 통치에서 비롯되고 있는데도 「새벽」에서는 이에 대하여는 언급되지 않고 단지 이주민들의 고난상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234쪽) 오직 벼, 벼 앞에는 아무런 희생도 참고 견딜 수 있었다. -「벼」 201쪽 어른들은 이내 틀에 익숙해 졌으나 저항력이 없는 어린애들은 설사를 하다가 죽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벼에 좋은 물이므로 어린애 하나 둘 죽는 것은 결코 큰 일이 아니었다. -「벼」 241쪽 이것은 재만 조선인들의 삶의 진실일 수도 있겠으나, 이 작품에서 지적되어야 할 문제점 중의 하나다. 「벼」를 위하여는 어린 자식의 희생까지 감수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 존엄성에 대한 외면이다. 이러한 태도는 곧 민족이라는 개념도 벼 앞에서는 자리할 수 없게 되어 만주국의 건립 이념인 이른바 <오개족 협화>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이러한 희생도 무릅쓰고 감행하는 수전 개간이 결국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에 대한 시선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235쪽) 작품 「벼」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새벽」에서와 같이 가족단위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매봉둔 주민전체의 문제로 민족적 차원으로 확대된다는 점이다.(236쪽) 「새벽」의 박치만과 동일한 계보를 이루는 인물 한익상의 횡포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다. 이주사회에 기식하는 전형적인 착취형 인물로 인하여 이주민들이 겪어야 하는 또 다른 수난상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수난은 한익상이 제거됨으로써 해소되고 있다는 것이 「새벽」이나 「벼」에서와 같이 개인이나 집단의 힘으로 극복될 수 없는 고난이 아니라는 점에서 앞의 작품들에서 제기된 것과는 다르다고 하겠다.(239쪽) 「토성」은 작품의 배경이 만주국 건국 이후라는 데서 앞의 세 작품들보다 신중한 논의가 요구된다.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만주국은 일제가 대륙침략을 위하여 세운 허수아비 정부임으로 당시의 상황을 어떻게 반영, 수용하고 있는가에 따라 작품의 성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안수길 초기 소설에 대한 연구에서 가장 큰 쟁점이 있다면(239쪽) 바로 이점이다. 작품의 내용이 일제의 허수아비 정부인 만주국의 이념에 연계되어 있다면, 그것은 곧 친일적인 성격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장덕순의 견해를 따른 것이다.-인용자) 그리고 부분적으로 드러나는 시대 영합적인 요소를 일제의 가혹한 검열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한다면(민현기의 경우-인용자), “당대의 한국 문학 작품 중에서 가장 강렬한 민족의 지향의지를 형상화한 작품 중의 한 편”(이재선의 주장에 따라-인용자)이라는 평가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240쪽) 작품에서 드러나는 갈등은 이복형제인 학수와 명수 사이에 금전으로 인하여 일어난다. 「새벽」, 「벼」, 「원각촌」 등에서와 같이 외부적인 요인에 의하여 갈등이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앞의 작품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명수네 일가의 만주 생활은 「새벽」, 「벼」 등의 작품에서 보았던 고난상이 아니다. 소작생활을 열심히 하여 수전 4상(垧)을 마련할 수 있었고 학수가 장사 밑천으로 수전 문서를 처분하기 전에는 명수는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또한 만주국 건국 이후에는 황폐한 농촌을 갱생시키기 위하여 갖가지 특전과 혜택이 베풀어지고 아편의 재배까지 허용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을 아버지와 명수가 적극 수용하여 열심히 농사를 짓고 비적의 침입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하여 토성을 쌓고 자위대를 편성하여 명수는 부단장이 된다. 여기서 이주민의 생활상은 변모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주국의 이념을 적극 수용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으로 부각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작품에서 보이는 일제의 허수아비 정부인 만주국의 설립과 정치가 미화되고 있는 것과도 연계된다.(240쪽) ① 만주에는 새나라가 탄생하였고 간도에는 새 정치가 배프러 졌다. -「토성」 72쪽 ② 이제는 어두운 정치가 아니었다. 정부에서는 다시금 농촌의 갱생을 위하여 한 가지 특전이 배프러 졌다. -「토성」 73쪽 ③ 반만 항일의 완매한 꿈을 채 못 깨치고 처처에 준동튼 패잔비도 황군 장병과 ...(중략) ... 협화회 특별 공작대의 선무공작으로 일편 섬멸되고 일편 귀순하여... -「토성」 86쪽 ④ 자위단의 애로 청년단도 조직되어 주민은 당국과 함께 이 새나라 건설의 파괴자를 방어하고 응징하는데 한 덩어리가 되었다. -「토성」 86쪽 위와 같은 요소들은 강압적으로 강요된 사항이나, 검열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시대 영합적인 모습으로 보여진다.(241쪽) 현실 긍정의 자세가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새마을」-인용자) 「토성」에서부터 드러나는 이주민의 생활은 수난의 모습보다는 현실을 긍정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강조하며 부각시키고 있다. 이와 같은 양상은 「목축기」에서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242쪽) 앞에서 살펴본 작품들에서 드러나는 이주민의 생활상과 「목축기」에 드러나는 이주민의 생활상을 비교 검토해 보면 「목축기」의 중심인물 찬호는 앞의 작품들에서 보았던 인물들과는 여러 면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첫째, 찬호의 신분은 수의사 면허를 가진 전문학교 출신의 전직 교사이며 많은 인부를 거느린 목장의 경영주이고, 둘째, 막내동생이 찬호가 근무하던 학교에 교원으로 오게 된 것으로 보아 여유있는 가정 형편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현 당국에서는 찬호의 와우산 목장을 목축부락으로 인가하였고, 목축 자작농으로서의 자급자족 경제를 세워나감에 갖가지 편의를 제공하여 앞의 작품들에서와 같이 이주민으로서 겪어야 할 갈등의 요인이 전혀 없다. 그런데다가 찬호는 근면 성실하여 목장 일도 어려움 없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염상섭이 말한 「새로운 경지」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찬호의 생활은 더 이상 이주민의 생활이 아닌 만주에서 터전을 잡고 만주국의 정책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만주국의 한사람의 모습인 것이다.(244쪽) 작품의 발표연대가 늦을수록 이주민의 생활상은 만주국의 이념에 순응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목축기」에서는 더 이상 이주민이 아닌 만주국의 정책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만주국의 한 사람의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안수길의 초기 소설들이 재만 조선인의 생활을 발굴하여 민족이 겪는 고난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은 「토성」 이전의 「새벽」에서만 해당된다. 「벼」에서 보여진 친일적인 경향은 「토성」에서부터 만주국 건국 이념에 순응하는 시대 영합적인 경향들로 나타난다.(244쪽) 작품연구에 앞서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작가의 전기를 살펴보니, 안수길은 투철한 역사의식을 지니고 창작에 임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겠다. 그것은 안수길 자신이 밝힌 바 있는 ‘내게 허용되는 가능한 범위 안에서’, ‘만주 이주민들이 겪는 고난의 모습을 보여 주려했다’는 창작의도에서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새마을」, 「목축기」, 「토성」 등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만주국 건국 이념과 부합되는 내용들에서도 알 수 있다고 하겠다.(245쪽) 그리고 작품세계의 특징으로는 만주에서 조선이주민들이 겪는 고난상을 그리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그런데 작품들에서 그리고 있는 이주민들의 고난상이 창작 년도가 늦은 작품들에서 보다 약하게 그려지고 있다. 특히 「새마을」, 「목축기」 등의 작품들에서 그려진 이주민들의 삶은 조선이주민들이 겪는 고난상이라기 보다는 만주국의 국책에 순응하면서 만주국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점에서 안수길의 초기 소설들은 일제의 식민지 입식정책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거나 친일적인 요소를 부분적으로 그리고 있어 민족문학으로 떳떳이 자리 매김 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서 우리말로 작품활동이 불가능했던 때에 우리말로 재만 조선이주민들의 참상을 다소나마 증언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긍정적인 평가의 대상이 될 부분도 있다고 하겠다.(245쪽) 여기서는 ‘등장 인물의 성격과 행동이 가족적인 질서안에서 특징 지워지고, 2대 이상 몇 대에 걸친 연대기적 서술이 가계 중심의 서사형태를 지닌 것’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이렇게 ‘가족사소설’을 규정해 보면, 「북간도」는 구성상 가족사 소설의 양상을 보인다. 등장인물의 특성이 가족적인 질서에서 대를 이어 전해지고 서사구조도 이한복일가를 중심으로 연대기적으로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309쪽) 소설의 인물중심 연구는 작품자체가 제공하는 정보(작품자체가 제공하는 정보로는 육체적 외모, 동작, 버릇, 습관, 타인에 대한 행동, 말씨, 자신에 대한 태도, 그 인물에 대한 타인의 태도, 물질적인 환경, 과거, 이름 또한 비유 등의 외변기법 등을 들 수 있다.(로비 매콜리/죠오지 래닝, “인물 구성”, 김병욱 편․최상규 역, 󰡔�현대소설의 이론󰡕�, 대방출판사, 1984, 251-291쪽)-인용자 재인용)를 토하여 인물의 성격을 추출하고 이를 바탕으로 마주치는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아를 어떻게 실현해 가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작품의 의미를 밝혀나가는 작업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인물중심 연구는 작품 속에만 갇혀 있지 않고 당대의 사회․역사적 지평으로 투사될 때 작품의 의미가 보다 확대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인물의 성격을 통하여 작가가 드러내고자 하는 바를 규명하고, 이것을 당대의 역사적 상황과 연관 지워 봄으로써 작품의 의미와 작품의 바탕이 되고 있는 작가의 역사의식이 규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313쪽) 힘 없는 정부의 백성인 조선이주민들이 중국인들 사이에서 민족의식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주체성을 지키는 길 밖에 없다.(318쪽) 1부에서는 서술자의 시선이 이씨가에 고정되어 있어, 이씨가 인물의 이동에 따라 장면이 이동되는 단선적 서술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로 인하여 장편소설의 일반적인 특징인 다양한 인물들이 엮어가는 다양한 살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게 되고, 작품의 배경인 북간도는 조선이주민들의 공동의 공간으로 자리잡지 못하게 된다.(319쪽)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세 명의 소년이 그들의 조부가 보여준 성격을 닮고 있다는 것이다. 장치덕의 중도주의를 닮은 현도는 감자서리를 하자는 의견만 제시하고 행동으로는 옮기지 않으며, 최칠성의 순응적인 태도를닮은 동규는 청인지주 동가네 밭이라며 두려워하고, 창윤은 한복의 대담성을 닮아 앞장서 행동하다가 붙잡히게 된다. 이렇게 인물의 성격이 대를 이어 가족적인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는 데서 「북간도」가 가족사적 구성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321쪽) 한복의 죽음은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한 주체성의 결과로 창윤에게 민족의식을 싹트게 하는 계기가 된다.(321쪽) 정수가 가족과 떨어져 독립지사들과 기거하면서, 그들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게 됨으로써 가족적인 질서에서 벗어나게 되어, 창윤과 정수 사이는 이가 빠진 것처럼 연결이 잘 되지 않고,(윤재근, “안수길론”(하), 현대문학, 1977. 10호, 261쪽-인용자 재인용) 1․2․3부와 4․5부가 별개의 작품처럼 되어 버렸다는 지적을 받게 된다.(김윤식, 󰡔�안수길연구󰡕�, 정음사.1986, 177쪽-인용자 재인용) 그러나 정수의 항일독립 투쟁은 한복에서 창윤으로 이어지는 이씨가의 유전적 특징인 주체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수의 성격형성에 가족의 영향이 거의 없다고 해서 가족적인 특성이 유지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정수를 가족적인 질서에서 벗어나게 한 것은, 창윤과 정수라는 두 인물을 통해 용정과 대교동이라는 두 공간적 배경에서 항일투쟁과 이주민의 삶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씨가의 3대 인물이자 2․3부의 중심인물인 창윤은, 작품의 4․5부에서 중심인물로는 등장하지 않지만 앞의 1대․2대의 인물들과 같이, 소설의 장면(326쪽)에서 사라지지 않고 용정의 외곽지역인 대교동-훈춘 등지에서 이주민드이 겪는 고난의 모습을 부분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경술국치 이후 일본의 만주침략야욕이 노골화됨으로써 청인들에게 일본의 앞잡이로 오인받게 되는 조선이주민들과 청인 사이의 갈동, 마적과 청국 군경의 횡포에 시달리는 고난의 모습 등이 창윤을 통하여 제시된다. 그렇지만 창윤을 통하여 드러나는 이주민들의 삶은 항일투쟁과 무관하지 않다. 항일투쟁이 확대될수록 수난의 정도도 심해진다. 독립군을 색출한다는 빌미로 자행되는 갖가지 탄압이 형상화되고 있다. 이것은 앞에서 보았던 서술자의 시선이 중심인물에 집중됨으로써 일어나게 되는 단조로운 사건의 전개를 피하고, 역사적인 현장을 다각적인 방법으로 형상화하려는 작가의 의도로 보인다. 작품의 1․2․3부가 발표된 이후 4․5부가 5년 후에 완성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작품에 대한 작가의 충분한 검토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327쪽) 정수가 소년병으로 항일무력투쟁에 참가하지만 이야기는 항일투쟁을 어떻게 펼쳐나가야 하느냐에 맞추어지지 않고, 봉오골전투와 청산리전투 등의 역사적인 사건을 서술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어 정수의 역할은 한복과 창윤에 비하여 크게 위축된다. 소설의 무대가 비봉촌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용정이라는 실제의 공간으로 이동되고, 등장인물의 관심도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나기 위한 북간도 이주나, 청국의 착취에 수난을 겪게 되는 이주민 문제에서, 항일독립투쟁이라는 국가적 차원으로 확대되어 용정의 기미만세의거, 봉오골전투, 청산리전투 등의 항일투쟁의 역사적 사건들이 서사구조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327쪽) 「북간도」의 특징중의 하나가 이와 같은 역사적인 사건들을 소설 속의 사건으로 등장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제1부의 함경도 육진지방의 대흉작이나 역사적 인물인 어윤중, 백두산 정계비 등에서부터 4․5부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역사적 사건들을 소설 속의 사건으로 등장시(327쪽)켜 놓고 있다. 이것은 1․2․3부에서는 비봉촌이라는 허구의 공간에서 이주민들의 삶의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에 반하여, 4․5부에서는 용정이라는 실제의 공간에서 항일투쟁을 부각시키려는 작가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용정이라는 실제의 공간은 보다 구체적인 현실로 부각되고, 항일투쟁이라는 주제는 만주일원에서 전개되었던 실제의 사건들과 결부되지 않고는 크게 의미를 지닐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심인물 정수가 열네살의 소년으로 등장하고 있어 정수의 행위는 항일투쟁의 역사적 사건들을 주동적으로 이끌지 못하고, 역사적 사건에 따라 결정된다. 이렇게 됨으로써 인물의 이상적인 삶은 항일투쟁이라는 주제에 흡수되는 모습을 보인다.(328쪽) 정수의 자수행위는 소년병으로 항일독립투쟁에 참가했던 정수의 성격이 철저하지 못함을 말해주는 것으로(김윤식,󰡔�안수길연구󰡕�, 정음사, 1986, 223쪽-인용자 재인용) 작가의 주제의식을 흐려놓게 된다. 이에 대하여 의지와 좌절이 거듭되는 인간적인 삶의 모습을 잘 그리고 있다(신동한, “민족의 수난을 딛고 서는 용기”, 󰡔�한국소설의 문제작󰡕�, 일념, 1985, 285쪽-인용자 재인용)며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다는 지적도 있지만, 중심인물인 정수의 행위가 작가의 주제의식의 형상화와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면 정수의 자수는 작품의 주제를 흐려 놓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4․5부의 주제인 항일투쟁의 올바른 전망을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서뿐만 아니라, 대를 이어온 이주민들의 삶에 대한 진지하고 철저한 물음이 던져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329쪽) 북간도를 중심으로 만주일원을 떠돌던 이주민들의 삶이 어떻게 자리자아야 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제시하기만 하고 구체적인 전망을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어떻게 사느냐’에 대한 작가의식은 역사적 현실을 보다 철저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이것은 1910년 이후 북간도 농업이민은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의하여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1931년 만주사변 이후의 만주는 일제의 만주국 건설이라는 식민지 정책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정수의 자수는 만주국 건설이라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부합되는 행위에 다름아니라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329쪽) 일제의 만행에 짓밟힌 민족의 쓰라린 역사를 안수길은 담담한 필치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 점이 「북간도」가 지니는 최대의 장점일 것이(330쪽)다. 중심인물의 삶과 연결되지 않은 사건들이지만 민족이 겪은 수난을 곳곳에서 담담하게 형상화하고 있어 만주 이주민들의 수난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331쪽) 결국 「북간도」에서 중심인물 이씨가 4대를 통하여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민족의 수난기인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중반까지 북간도를 중심으로 만주일원을 떠돌던 조선이주민들의 고난상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중심인물인 이씨가의 삶의 모습은 아들→손자→증손자로 대를 이어가면서 가족적인 차원에서 이주민 집단촌으로, 국가적인 차원으로 확대되어, 「북간도」는 가족성장소설의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민족이 겪은 수난의 역사를 발전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331쪽0 「북간도」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대를 이어 가족사적으로 등장하고 있어 이들의 관계가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가를 먼저 살펴보니, 이한복가를 중심으로 전반부는 최칠성가와의 갈등과 화해의 과정을 통하여 북간도 이주민의 수난상이 제시되고 있고, 후반부는 장치덕가와 상이한 삶의 태도가 비교되면서 이주민들의 삶이 제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331쪽) 이한복 일가 4대는 아들(장손)→손자(창윤)→증손자(정수)로 대를 이어(331쪽)가면서 가족의 생존을 위한 노력의 북간도 이주, 이주사회에서 우리 것을 지키며 살아가기 위한 노력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난상,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독립투쟁들이 차례로 전개되어 「북간도」는 가족성장소설의 모습을 보인다.(332쪽) 3대의 인물 창윤은 청국인들 사이에서 조선이주민들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점을 고민한다. 제고장은 제힘으로 지켜야 한다는 자주적인 노력이 강구되지만 청국 정부의 압력과 청인들의 착취에 그의 노력은 무위로 끝나게 된다. 창윤은 청국의 착취와 압력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할아버지가 일구어놓은 터전인 비봉촌을 떠나게 된다. 이것은 곧,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이주민들의 수난의 형상화이자 민족이 겪는 수난의 상징이기도 하다.(332쪽) 정수의 항일독립투쟁은 한복에서 창윤으로 이어지는 이씨가의 유전적 특징인 정의감과 주체성 지키기가 국가적 차원으로 확대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비롯한 북간도 이주민들이 겪은 고난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민족의 국권을 되찾는 것이며, 이를 위하여 전쟁터에 나가는 것은 정의감과 주체성에 다름 아닌 것이다. 또한 민족이 잃은 국권을 되찾을 때 이국에서 푸대접 받는 이주민의 삶을 청산하고 국가라는 가장 아래서 가족적인 삶을 살아 갈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347쪽)
36    민현기-한국근대소설과민족현실 댓글:  조회:2561  추천:0  2009-05-16
민현기, 󰡔�한국 근대소설과 민족 현실󰡕�, 문학과지성사, 1989 문학을 연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작품의 가치를 올바르게 해석․평가하여 그것이 지닌 문학사적 의의를 면밀히 규명해내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문학작품을 해석․평가하는 방법이 너무나 다양한 까닭에 이러한 목적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야기될 논란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다. 대상을 보는 연구자의 태도에 따라서 동일한 작가, 동일한 작품에 대한 평가 결과가 상반되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예로, 문학작품을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구조물 즉 미적 양식으로서 파악하려는 태도와 작품이 씌어진 역사적 조건을 중시하여 문학적 의미를 사회적 맥락 속에서 파악하려는 태도 사이의 심한 갈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연구자들이 내세우는 미학적 이론이나 비평적 접근 방법이 다양하다는 것은 한편으론 무학의 가치 기준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론 문학에 대한 관점과 여구의 태도가 개인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문학작품이 독자적인 원리를 지니고 있는 동시에 또한 그것이 역사․사회적 산물이라는 사실을 함께 인정함으로써, 이른바 ‘형식주의’와 ‘역사주의’라는 두 극단론으로부터 벗어나 양자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파악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대도는 좀 포괄적으로 말해서, 문학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탐구(11쪽)하는 과정에서 문학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문학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문학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밝히는 태도와 동일하다. 이렇게 본다면 문학을 미적 양식으로서 파악하는 일과 사회․역사적 형식으로서 파악하는 일이 배타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근본적으로 필요한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12) 작가의 의도는 대부분 작중인물들을 통해서 명시되거나 암시되는데, 특히 그것은 인물이 처한 구체적 현실 상황 속에서의 문제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일정한 시간적․공간적 상황 속에서 개체로서의 인간이 경험하는 삶의 세계를 묘사할 경우에 작가는 어느 의미에서든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 또는 체험한 상황에 의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같은 시대 같은 사회에 사는 작가라 할지라도 그가 처한 사회적 위치나 현실에 대한 시각, 삶을 해석하는 태도에 따라서 작중인물과 작중 현실의 모습이 달라지게 된다.(13쪽) 안수길의 초기 소설이란 창작집 󰡔�북원(北原)󰡕�에 수록된 작품들과 만선일보(滿鮮日報)에 연재되었던 장편 󰡔�북향보(北鄕譜)󰡕�를 일컫는다. 주로 한국 유이민(流移民)들이 만주에서 겪는 시대적 고난과 현실 대응 자세를 상세히 묘사한 이 소설들은 당시 부일 문학(附日文學)의 독성(毒性)에 깊게 침윤된 대부분의 국내 문인들의 작품과는 상대적으로 비교적 건실한 민족주의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307쪽) 안수길 소설의 진정한 문학적 가치는 작품에 강렬히 반영된 민족정신과 역사의식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그의 만주 체험이 바탕이 된 많은 소설을 통해 드러나는 민족의 수난과 역사적 삶의 의미는, 국가를 상실하고 생존을 위해 유랑하는 민족적 불행의 근원과 시대와 현실의 비극적 문제를 포괄적으로 규명하려는 작가 자신의 확고한 태도에 의해 더욱 뚜렷이 부각되고 있다. 말하자면 안수길의 작가정신은 민족이 처했던 역사적 조건과 그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현실적인 삶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려는 데 그 근본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307쪽) 특히 간도를 배경으로 한 초기 작품에서 드러나는, 참담한 민족 현실에 대한 리얼한 묘사와 끈질긴 생명학의 추구는 암흑기의 수난과 그 대응 양상을 깊이 있게 조명하려 한 강렬한 작가 정신의 소산이다.(309쪽) 아수길의 역사의식과 현실인식으로 구체화된 작중인물의 모든 행위는 민족적 수난의 증언인 등시에 그 수난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다. 작품 외적인 시대 및 사회 현상과 거의 일치하는 작중 상황의 리얼한 제시 역시 식민지의 황폐한 현실을 고발하기 위한 적극적인 태도의 반영이다. 특히 실향민들의 참상과 생존을 위한 고투의 현장이 허구적 트릭이나 감상적 어조의 개입이 없이 하나의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서 추구되고 있는 것은 재만 한국인들의 공동체적 삶의 양상이 민족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탐색하려는 작가의 강한 의욕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작가 자신의 개인적 체험의 객관화가 성공하였음을 뜻하고 있다.(311쪽) 「새마을」은 「새벽」의 어둡고 절망적이고 긴장된 분위기와는 달리 다소 여유 있고, 밝고, 진취적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이 작품이 주로 ‘나’를 비롯한 ‘병덕이’ ‘영호’ ‘삼손이’ 등과 같은 젊은이의 배움에 대한 열정과 앞날의 포부를 제시하면서 성장 과정의 면모를 탐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벽」은 바람․추위․얼음이 배경이 된 반면에 「새마을」(314쪽)은 햇빛․따뜻함․푸른색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또한 이 작품에는 ‘고씨’라는 인물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그는 ‘박치만’과는 대조적으로 ‘무턱대고 좋은 사람’으로 특히 동족들 사이의 상호 부조정신을 주장하고 또 그를 실행하는 사람이다. 그의 동포애와 소박하고 낙천적인 생활 태도는 이역 땅에서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정신적 도움이 되고 있다. 작가는 「새벽」을 통해 한국인의 모진 수난을 ‘어떻게 살아왔느냐’의 방향에서 역사적으로 제시했으며, 또한 「새마을」을 통해서는 절망을 딛고 일어서서 미래 지향적 자세를 보이는 사람들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의 방향에서 이상으로 제시해놓고 있다.(315쪽) 「원각촌(圓覺村)」은 동족을 괴롭히는 ‘한익상’의 타락한 모습을 고발하고, 학교 설립문제를 대두시켜 민족교육의 당위성을 제시한 작품이다.(316쪽) ‘한익상’은 「새벽」의 ‘박치만’과 동일한 인물로서, 일제가 빚어놓은 민족정신의 타락을 부채질하는 부정적 인물 유형에 속한다.(317쪽) 「목축기」는 “백오십만 동포의 8할을 점령한 농촌은 배운 자를 목마르게 기다린다.”고 학생들에게 강조하던 주인공 ‘찬호’가 자신의 신념이 무시당하자 하교를 그만두고 스스로 목장을 세워 거기에 몰두하는 모습을 그린 소설이다. ‘찬호’를 학생들이 존경하지 않는 것은 그가 만주국(滿洲國)의 교육 방침에 순응하기 위해 학교 당국에서 택한 농업 교사이기 때문이다. 즉 학생들은 찬호를 식민지 정책을 장려하려는 사람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찬호는 이와 관계없이 항상 농업의 중요성, 특히 지식인의 귀농을 강조했고, 그것만이 현실적 삶을 안전하게 보장해준다는 믿음을 표명하고 있다. 이 작품은 당시의 시대상을 교육면과 영농면에서 반영하고 있다. 일제의 재만 한인 교육 정책에 따라 많은 하교가 개편되었고, 교사들은 강압적 교육 방침에 순응하지 않고 사직하였는데, 이것을 작품에서는 “자리를 후진에게 맡기고 용퇴(勇退)한”이라고 함축적인 말로 표현하여놓고 있다. 물론 검열을 의식한 탓이다. 또한 일제는 만주 점령 후에 농민 입식 정책과 소위 안전 농촌이라는 기만적 술책을 썼는데, 작품에서는 “농민의 입식은 그 사이 성과였다”와 “현당국은 와우산 목장을 목축 부락으로 인가하였고 목축 자작농으로서의 자급자족 경제를 세워나감에 가지가지로 편의를 주었다”라고 표현하여, 정책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다.(318쪽) 매우 어려운 시대적 여건 속에서도 꾸준히 외로이 문학적 진실을 추구해온 안수길이, 부조(父祖)들의 피와 땀으로 개척된 수난 받는 민족의 제2의 고향인 만주를 “그 자손이 천대만대 진실로 새로운 고향으로 생각하고 이곳에 백년대계를 꾸며야 할 것이라는” 이른바 재만 한국인들의 미래지향적 삶의 지표를 제시하고자 연재한 소설이 바로 이 󰡔�북향보󰡕�이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주로 강조되는 것은 여러 가지 극심한 곤경에도 굴하지 않고 가치 있는 공동체적 삶의 터전을 민족적 차원에서(319쪽) 마련하기 위해 분투하는 긍정적 인물들의 자세이다. 비뚤어진 현실관과 근시안적인 세속적 욕망으로 자기 성찰의 기능을 상실한 부정적 인물형들과 대조를 이루는 이들 이념 실천형 인물들의 일거일동을 상세히 보여줌으로써, 작가는 그가 중시하는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이냐’하는 당위적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을 마련해놓고 있다. 그리고 이 해답이 곧 󰡔�북향보󰡕�의 이야기 값 storyvalue 에 해당된다.(320쪽) 작가는 사건의 복잡성이나 인물 상호간의 긴장된 대립․갈등보다는 어려운 시대적․사회적 환경 속에서의 올바른 삶의 방향 설정에 대한 문제를 현실의 일상적 생활에 내포된 여러 요소와 연결시켜 점진적으로 다루고 있다. 목장의 건설과 농민 도장 설치, 학교 교육의 중요성, 이민들을 위한 삶의 기반 마련에 따른 여러 가지 난관과 고통, 대의적(大義的) 삶을 지향하는 인물들의 집념과 노력 등을 부각시키며 작가는 자신이 살았던 수난기의 인물들의 역사적 의미를 아울러 증언하고 있다.(321쪽) 󰡔�북향보󰡕�의 문학적 의미는 ‘정학도’가 주창하고 ‘오찬구’가 계승한 ‘북향정신’을 통해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북향 정신은 곧 안수길의 작가 정신이기도 한데, 이것은 “구체적으로 만주에 아름다운 풍치를 가진 촌락으로 만들자는 것이요, 그런 좋은 풍경 속에서 생활의 뿌리를 깊이 박고 멀리를 생각하면서 아늑하게 선량하게 살자는” 정신이며, “지행합치(知行合致)의 실천적 교육을 실시하여 농촌의 계발건설(啓發建設)에 솔선하여 실천궁행(實踐躬行)하는 모범 인재를 양성하는 농민 도장의 농민도(農民道)와도 밀접한 정신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주민들이 정착한 북만주 땅에 새로운 농촌(고향)을 세워 탄탄한 민족적 삶의 터전을 마련하자는 것이 북향정신의 요체이다.(321쪽) 그런데 이것을 궁극적으로 실현하기 위해서 우선 세 가지 근본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하는데, 작품에서 그것은 경제적 자립 문제, 교육문제, 주거 환경 문제로 나타난다. 그래서 ‘정학도’는 목장 건설을 통한 경제적 문제를, 학교 설립을 통해 교육문제를, 황페한 산천 속이지만 주위를 인위적으로 미화시키는 작업을 통해 주거 환경의 문제를 각각 해결하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물론 소설에서는 주로 이 어려운 과업을 달성하려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제(321쪽)시되고 있다. 현실적 여건으로 위협받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작품의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그려지고 있는데,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가치(북향정신) 실현의 어려움이 가치 자체의 강조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의미로서 반영되고 있다.(322쪽) 북향 정신은 국가를 잃고 생존의 기반마저 박탈당한 채 황량한 이역을 유랑하는 우리 민족이 삶의 새 좌표를 마련하고 민족적 일체감 형성을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정신적 응집력으로서 작용한다. 그것은 실향민들의 참담한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어 목적 지향의 공동체적 연대의식을 강화하는 중요 요인이 되고 있는데, 소설의 제목인 󰡔�북향보󰡕� 자체에도 이미 이러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리고 작품의 인물들 중 ‘박병익’의 반민족적이고 비윤리적 행위와 인간성 상실의 황폐한 정신이 어떠한 독성을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작가는 상세히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당대의 어두운 혼경에 가세된 또 다른 어둠을 독자에게 인식시키기 위한 하나의 문학적 방법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반동 인물 antagonist인 ‘박병익’은 북향 정신 실현을 전면(前面)에서 방해하고 오로지 개인적 탐욕만을 채우는 타락한 삶의 증거물 역할을 하면서 독자의 비판적 대상으로 부각되고 있다.(322쪽) 이 작품에서 특히 시대 순응의 안일한 삶을 거부하는 ‘찬구’의 태도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목장의 일로 무척 고민을 할 때 ‘찬구’는 일인(日人) ‘사도미’로부터 관청에서 함께 일하자는 청을 받는다. ‘사도미’는 술까지 대접하며 정부의 방침(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장황하게 설명한 후 ‘찬구’의 참여를 독촉한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 목장 일을 팽개치고 관청에 취직을 하는 것이 보다 편안하고 앞날이 보장되는 길임을 ‘찬구’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현실의 조건들에 순응하면서 고민하지 않고 물질의 혜택을 받으며 살수 있는 기회는 주어진 것이다. ‘찬구’는 며칠 후에 자신의 의사를 결정하여 알려주겠다고 말하고 ‘사도미’와 헤어져 거리로 나온다. 때마침 봄을 재촉하는 가랑비가 내리고 있고, 길가 상점에선 일본 가요가 흘러나오고 있다. 빗소리와 가요 소리가 술취한 ‘찬구’를 한껏 감상적으로 만들어놓아, 그의 머릿속을 혼란하게 한다. 그는 목장․박병익․사도미․관리 등의 생각으로 “관념의 뒤범벅” 상태가 되어 비틀거리다가 지나가던 마차에 치일 뻔한 위기를 모면한 후 정신을 차리게 된다. 작가는 이 내용에 ‘유혹’이라는 소제목을 붙여놓고 있다. 곧 어려움에 직면한 찬구를 유혹하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은밀히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유행가의 부드러운 선율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일제 세력에 편승하는 생활의 편안함을 상징한다. 그러나 찬구는 “등골에 땀을 솟치면서” 위기를 모면하고 본래의 자기 위치로 돌아오게 된다. 이렇게 ‘유혹’의 극복을 통한 민족정신의 고취를 작품에서 강조하고 있는 작가는 한편으로 조국의 고유한 민족행사를 의도적으로 시켜놓고 있다. 단오놀이․씨름대회․사자놀이․박첨지놀이 등에 관한 즐거운 분위기 속의 대화는 민족의 동질성을 확인시키기 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323쪽) 안수길의 󰡔�북원󰡕�에 수록된 작품들과 󰡔�북향보󰡕�는 민족 수난의 실상과 그 극복 의지를 리얼하게 반영시키고 있다. 그것은 ‘어떻게 살아왔느냐’와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삶이냐’를 민족적 단위에서 파악하려는 작가 정신에 의해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문학이란 그 시대, 그 현실 속에서의 인간의 생활이 담겨져야 한다는 생각을 일생 동안 견지한 안수길은 형극의 시대를 살았던 한국 이농민들의 만주에서의 고투와 상황 대응 자세를 상세히 묘사함으로써 자신의 폭넓은 역사인식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그의 소설은 소위 암흑기 한국 문학사의 공백을 채워줄 가치가 있을 뿐만이 아니라, 한국 민족의 정신적 성장 과정을 삶과 문학의 불가분성(不可分性)을 통해서 통찰하는 데도 훌륭한 자료가 되고 있다.(325쪽) 다만 여기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작품에 반영된 일제 식민지 정책에 관한 문제이다. 「벼」 「토성」 「목축기」 󰡔�북향보󰡕� 등에 부분적으로 수용된 식민지 정책은 분명히 작품의 결함으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작가의 시대 영합의 징후라기보다는 위협적으로 강요된 사항이거나 혹독한 검열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해하여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내게 허용되는 가능한 범위내에서”라는 안수길 자신의 말을 상기해볼 경우에 더욱 그러하다.(325쪽)
35    채훈-재만한국문학연구 댓글:  조회:2942  추천:1  2009-05-16
蔡壎, 󰡔�在滿韓國文學硏究󰡕�, 깊은샘, 1990 우리나라 사람들의 만주로의 이주는 일본에 의한 강제 개항 이후 3․1운동 무렵까지는 만주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우려는 사람들이 많이 섞여 있었으나, 産米增殖計劃의 실시 이후부터는 땅에서 뿌리 뽑힌 농민들이 만주에서나마 삶을 도모하려 했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만주로 가는 이주민수의 증가는 우리나라 안에서의 日帝侵奪이 그만큼 가혹해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9쪽) 만주국 건국 이후인 1933년말부터 1939년말에 이르는 기간 동안 집단부락은 ‘1만 3천 개’나 설치되었는데 이 제도야말로 만주를 강점한 일제의 ‘최대의 범죄’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서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과 만주국은 전쟁 수행을 위해 각종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有畜農業으로의 전환 및 식량 증산을 끊임없이 부르짖음으로써 가뜩이나 고달픈 우리나라 이주농민들을 괴롭혀 마지않았다.(22쪽) 중일전쟁에 이어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과 만주국의 탄압과 폭정은 그 도를 더해갔다. 과중한 전재수행을 위한 단말마적 作態 앞에 만주에 거주하는 우리나라 이주민들은 농촌에 있거나 도시에 있거나를 막론하고 더욱 더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25쪽) 이는 안수길의 실질적인 출세작(「새벽」-인용자 주)인 동시에 장차 전개될 안수길에 의한 만주개척민문학의 본격적인 작품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55쪽) 특히 중국인 지주의 토지를 관리하는 사이비 동족인 ‘얼되놈’의 행패가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이처럼 잘 보여주는 작품은 일찍 없었다. 얼되놈의 빚 때문에 이주민들은 영원히 소작인의 신세를 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빚의 담보로 잡힌 딸은 혼인 강요에 견디다 못해 자살하거나, 어머니는 실성하는 등 어느 것 하나 이주민들의 괴로운 삶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주민들의 만주 정착과정에서 겪게 되는 충격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10살 전후의 어린 ‘나’의 눈(기억 혹은 추억)에 의존함으로써 왜 만주로 이주하게 되었는지 모른다는 등 문제의 심각성을 희석시킨 느낌이 없지 않다. 이주농민의 생활을 그리고 있으면서도 농삿일에 종사하는 장면은 없고 얼되놈 박치만의 빚과 소금밀수에 연관된 이야기로 가득차 있을 뿐, 다른 생활의 자취는 소홀하게 다루어져 있다. 또한 사건전개에 긴요하지 않은 긴 에피소드(예를 들면, 누이의 애인인 삼손과 그의 가족에 관(57쪽)한 장황한 설명, 胡氏를 만난 뒤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가 어릴 때 늪에 빠질 뻔한 일을 회상하는 장면 등)를 늘어놓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몇 가지 사례는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마땅하다고 생각된다.(58쪽) 이처럼 다소 초점 흐린 현실 인식의 자세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이주농민에게 있어서의 만주의 현실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본격적으로 형상화시켜 보여줌으로써 재만한국농민문학의 가능성을 크게 제고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58쪽) 이 작품(「벼」-인용자 주)은 <새벽>으로 시작되는 안수길 나름의 재만한국농민문학을 본격적으로 전개시켜 나가는데 있어 後續打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었다.(58쪽) 여기까지 이르는 대목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박첨지가 만주로 이주하게 되는 동기라 할 수 있다. 딸을 잃은 허탈감을 달래려 화류계 여인인 ‘향옥’에게 탐닉한 나머지 재산을 탕진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안수길의 현실인식의 시각이 어디에 있었나 하는 것을 엿보게 해준다. 일제침탈로 인한 구조적 몰락의 심화로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는 당시의 우리나라 현실을 염두에 두고 생각(59쪽)해 볼 때 박첨지의 만주이주 동기는 너무나도 어이없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60쪽) 매봉둔 정착과정에서는 당연히 수전 개간에 이어 벼농사를 짓는 장면이 이 작품의 핵심적인 부분을 이룰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수로와 퇴수로 파기에 이어 벼농사를 짓고 첫해의 수확으로 2백석의 벼를 거두는 장면까지를 불과 4면만으로 처리해 놓고 있음을 본다. 1944년판 󰡔�北原󰡕�에 실린 <벼>는 203면에서 291면에 이르는 분량을 가진 작품이라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벼농사 짓는 장면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은 이 작품을 재만한국농민문학을 대표하는 것 가운데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지 적이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60쪽) 계속되는 이야기 가운데서 박첨지의 만주이주의 계기를 마련해준 ‘향옥’이 7년 뒤에 매봉둔에 나타나 박첨지와의 묵은 인연을 되살림으로써 가정불화를 일으키게 하고 있는데, 이 대목은 가뜩이나 석연치 않은 이주 동기를 가지고 있는 박첨지의 이미지를 더욱 흐리게 하는 작용만을 하는 듯 보인다.(60쪽) ‘前章’과 ‘後章’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우리들의 눈을 끄는 것은(61쪽) 학교를 설립하자는 논의에 따라 교사인 찬수가 등장함으로써 이 작품은 차츰 농민문학다운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학교설립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할 사람으로 당시의 최고급 지식인을 불러들였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이주농민에게 있어 찬수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갓 정착한 이주농민의 아들딸을 가르치기 위해 꼭 찬수 같은 인물이 필요했을까, 어찌하여 찬수에게 ‘지도자’ 또는 ‘구세주’ 같은 역할까지 기대하게 되었을까 라는 회의를 지울 길이 없다. 찬수 같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의 설정이 재만한국농민문학으로서의 이 작품의 성격을 애매하게 하는데 커다란 요인이 되었음은 물론이다.(62쪽) 그러나 찬수가 정작 ‘지도자’나 ‘구세주’ 같은 역할을 수행할 기회는 이 작품의 結尾 부분에 이르러 도래한다. 새로 부임한 젊은 縣長이 배일적인 정책을 펴는 가운데서, 첫째 매봉둔에 짓고 있는 학교공사의 중지(준공불허에 이어 방화), 둘째 우리나라 이주민들의 매봉둔 퇴거라는 청천벽력 같은 명령을 내렸을 때 찬수는 ‘어느 날’ 이후 특별한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中本에게 연락하여 일본 영사관을 통한 정치적 해결방안을 모색함으로써 ‘지도자’나 ‘구세주’ 같은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전망된다. 찬수 뒤에는 중본이 있고 중본 뒤에는 일본 (영사관)이 있다는 엄연한 현실 앞에서 원주민 마을로 달려가려는 매봉둔 사람들 앞을 가로막은 중국군은 총을 쏘지도 못하고 다른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한 채 서 있기만 하는 것이다.(62쪽) 이러한 찬수의 역할로 말미암아 매봉둔의 이주민들은 아마 그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그것은 일본의 힘을 배경으로 한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볼 때 찬수의 ‘지도자’나 ‘구세주’ 같은 역할이란 과연 어떠한 것이었을까, 또 찬수 같은 인물을 ‘지도자’나 ‘구세주’로 설정하고 있는 안수길 나름의 재만(62쪽)한국농민문학의 행방은 과연 어느 곳이었을까 하는 것을 곰곰이 되새겨보게 된다.(63쪽) 앞에서 살펴본 바를 간추려 보면 이 작품은 재만한국농민문학의 본격적인 전개과정에서 <새벽>의 뒤를 이을 後續打와 같은 작품으로서 기대를 모으기에 충분했으나, 앞부분의 경우 박첨지의 만주이주 동기에서 볼 수 있는 작가의 안이한 현실인식의 자세와 함께 너무나도 쉬운 정착과정을 보여 주었고, 뒷부분의 경우 박첨지의 아들이자 최고급의 지식인인 찬수를 등장시켜 학교를 세우는 과정에서 농민문학다운 성격의 변질을 초래하였으며 배일적인 새 현장에 맞서기 위해 일본 사람 또는 일본(영사관)의 힘에 의지하려는 자세를 보인 대목 등 상당한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63쪽)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서 우리들은 몇 가지 점에 대해 주목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첫째, 와우산목장의 설립시기를 만주국 건국후 8년되는 해로 설정했다는 점, 둘째, 주인공이 학생들에게 ‘귀농’을 권유하면서 만주의 상황을 ‘암흑시대’가 아니라 ‘아침’이라고 표현한 점, 셋째, 와우산목장 있는 곳이 ‘목축지정현’으로, 목장이 ‘목축부락’으로 지정되어 당국으로부터 갖가지 편의를 제공받는 일에(64쪽) 대해 주인공은 크게 만족하고 있다는 점 등.(65쪽) 만주국 건국후 8년 되는 해라면 1940년인데 이때는 이미 일본의 허수아비로서의 만주국 체제가 나름대로 굳어진 시기라 할 수 있고, ‘귀농’은 농촌으로 돌아가 ‘증산’에 힘쓰라는 말로, ‘아침’은 만주국의 현실을 희망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당국의 갖가지 편의를 오로지 고맙게 생각해야 할 일로 여기고 있다는 것 등으로 요약된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前二作-<새벽>, <벼>-과는 달리 목전에 전개되고 있는 현실적 일에서 취재하고 있으면서도 나날이 가중되고 있는 대다수 이주민들의 고통스런 삶을 외면하고 만주의 현실이나 시책을 긍정적으로, 또는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만을 늘어놓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세계로의 이행가능성은 이미 <벼>의 결미부분을 통해서도 어렴풋이 예견되었지만 작가의 현실인식의 자세는 이 작품을 쓰면서 한층 더 구체적인 방향으로 기울고 있는 듯이 보인다.(65쪽) 한편 와우산목장으로 돼지 새끼를 수송해 오는 동안 주인공 찬호는 돼지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짐승인가 하는 것을 재인식함으로써 교육계에서의 실패를 양돈 등의 목축사업에서 보상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무한히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막상 와우산목장에 도착한 뒤부터 찬호는 뒷전에 물러서게 되고 돼지의 사육은 돼지 사육의 전문가인 중국인 老宋에게 일임되고 마는데 그 老宋은 야생 짐승의 내습과정에서 범에게 귀를 잃게 되자 범에 대한 ‘復讐鬼’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이 작품은 이야기 줄거리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에도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다.(65쪽) 그리고 이 작품에서 꼭 指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작품의 전반부에서는 지식인인 찬호가, 후반부에서는 중국인인 老宋이 클로즈업되어 있는 것과 함께 ‘목축부락’으로 인가된 이 와우산목장을 구(65쪽)성하는 ‘농부’나 ‘인부’에 관한 이야기가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66쪽) 더욱이 이 작품은 우리나라 이주민들의 정착 유형을 단순한 수전 개간으로부터 유축농업으로 유도하려는 의도 아래 쓰여진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1940년을 전후하여 장려되기 시작한 만주국의 有畜農業, 酪農, 畜産開發 정책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66쪽) 지도적 인물인 정학도의 념원은 이주민들이 정착해서 살고 있는 이곳 ‘만주에다가 아름다운 고향을 건설하자’는 것이기도 하고, 그가 세우려는 ‘농민도장은 유축농업을 기초로 하는 영농방법을 전수해야 할 것’에 목표를 두고 있다는 것을 보면 <새벽>이나 <벼>의 처참하고 암울한 세계와는 전연 다른 이야기임이 분명하다.(68쪽) 이 작품의 주주들이 적자를 거듭하고 있는 북향목장에 증자하기를 꺼리는 것이라든가, 박병익이란 주주가 목장을 은행에 저당 잡히려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정착이후세대들이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만주국 건국 이전 시대처럼 어떻게라도 살아남으면서 정착하는 것이 문제가(68쪽) 아니라, 보다 아름답고 쾌적한 환경 만들기와 보다 안락하고 윤택한 생활을 도모하는 일이 당면과제로 부각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과거와 미래를 올바르게 바라볼 안목을 상실한 채 일본의 허수아비인 만주국이 마련해 준 현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69쪽) 이처럼 얼만 안되는 사례만으로도 이 작품(「북향보」-인용자 주)의 기조를 이루는 작가의 현실인식의 자세가 어떻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건국정신에 즉’하여 행동하며, 기회만 있으면 ‘증산’을 부르짖고, 생일을 축하하는 사(70쪽)람들끼리의 모임에서조차 建國神廟와 만주국의 황제가 사는 궁성 및 諸宮에 대한 요배를 하고, 전몰 용사에 대한 묵념을 올린 다음, 時局省民의 誓詞를 齊唱할뿐더러, 우리나라 이주민들의 온갖 결점을 성토하는 일본인을 친구로서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들이 얼마나 갸륵하고 충성스러운 만주국 국민인가 하는 것은 물을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목축기>의 경우보다 진일보한 경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71쪽) 한편 이 작품에도 <목축기>의 찬호를 닮은 인물로 찬구가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다같이 농업학교 출신으로서 수의 면허를 가지고 있으며 또 목장의 전무직을 맡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염상섭이 ‘<목축기>는 그것이 完結된 작품은 아닌모양’(단편집 󰡔�북원󰡕�의 서문-인용자 주)이라고 한 말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이 작품은 <목축기>의 세계를 심화 확대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박선생’을 대신한 ‘정학도’가 북향도장을 설립하려한 것은 그 나름대로의 뜻을 가진 일이라 하더라도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찬구는 한번도 가축과 직접 접촉하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찬구가 專務이기 때문에 그렇다면 다른 인부라거나 이 작품에도 또 등장하고 있는 老宋조차 가축과 어울리지 않고 있으며 농민들도 모심기 하는 장면에서 잠시 모습을 보일 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 작품에는 주인공인 오찬구를 비롯하여 많은 지식인이 등장하고 있다. xx신문 지국을 경영하는 마준영, 소설가로서 교사일을 맡고 있는 현암, 여교사인 석순임, 유행가가수인 정애라, 일본인 관리 등이 그들이다. 이처럼 많은 지식인들이 지면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바람에 정작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목장 혹은 목장에 딸린 땅에서 일하는 농민이나 목장 인부들의 활동하는 모습은 거의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러한 기(71쪽)법은 <목축기>에 이어 이 작품에도 그대로 답습되고 있는데 농촌이나 목장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든가, 농촌이나 목장에서 일하는 지식인을 그린 소설이라고 부를 만한 이러한 작품을 어찌하여 농민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72쪽) 그리고 작품 말미에서 정학도의 딸 애라가 비록 ‘익명의 독지가’로서 목장재건을 위한 성금을 냈다고는 하더라도 아버지의 유지를 어기고 농촌과 오찬구의 곁을 떠났다든지, 더구나 유행가가수로서의 생활을ㅇ 끝까지 고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정학도의 숭고한 뜻과 그 뜻을 이어받으려는 오찬구와 그 친구들의 피나는 노력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행동으로서 작가의 진의가 무엇인가를 가늠하기 어렵다고 하겠다.(72쪽) 안수길의 작품 가운데서 만주의 도시와 도시거주이주민에서 취재한 작품은 많지 않다. 사실 재만한국작가로서의 안수길의 문학세계를 상징할 만한 작품은 거의 첫째 항에 해당되는 농촌과 이주농민에서 취재한 작품이기 때문에, 둘째 항에 딸린 작품은 상대적으로 빈약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둘째 항의 작품도 안수길의 현실인식의 자세를 알아보는데 있어 적잖은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72쪽) 거지(「장」-인용자)로 전락한 이 이주민의 지나온 자취와 ‘오늘’의 상황은 수없이 많은 기막힌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작가의 냉철한 눈은 여러 등장인물들을 골고루 비추기만 할 뿐, ‘거지’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 보이지는 않고 있다.(73쪽) 이러한 경개를 통하여 볼 때 이 작품(「車중에서」-인용자 주)에 등장하는 ‘거지’ 또한 <장>에서의 ‘거지’ 못지않게 비참한 상황 아래 놓여 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로 보이는 나는 그의 ‘역한 체취’에 혐오감을 느끼며 그에게서 ‘백치’ 또는 ‘거지’일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10錢 두 닢의 적선을 하는데 그칠뿐더러 구상중인 작품 속에 그를 되도록이면 비참하게 묘사함으로써 인간의 이기심이 얼마나 잔인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소재로 이용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나의 태도는 일종의 엘리트 의식 또는 선민의식으로 자리잡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에게 있어서의 ‘거지’는 단지 嫌惡, 積善, 작품 속의 소재의 대상으로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을 올바르게 인식하려는 작가라면 거지로 변한 그 이주민이 어찌하여 어머니를 남겨둔 채 고향인 汝海津을 떠나 병을 무릅쓰고 간도로 왔으며, 그동안의 생활은 어떠하였고 간질 발작에 이은 허리부상으로 귀향할 수밖에 없는 형편에 대해 진지하게 천착하는 자세를 가졌어야 마땅하리라 생각된다. <장>과 이 작품에 등장하는 거지에 관련된 묘사는 이 무렵의 안수길의 현실인식의 자세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예라 하겠다.(74쪽) 위와 같은 이야기에서 우리들은 10대 소년인 ‘나’가 어려운 형편아래서도 立志傳中의 인물처럼 소원하는 바를 착착 성취해 나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야기의 현장이 농촌에서 도시로 옮겨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염상섭에 의해 ‘조선인개척민을 위한 농민문학’을 기대케 하던 안수길이 더구나 <새벽>의 속편으로 이러한 작품을 썼다는 것은 뜻밖의 일이라 할만하다. 만주(75쪽)의 농촌에 뿌리를 박은 것으로 보이던 사람들(‘나’의 일가, 삼손네, 영호네)이 왜 자꾸 도시로만 몰려오고 있을까.(76쪽) 이주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인 ‘용정으로 몰려오게 된 이면’에는 바로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기막힌 사연이 깔려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현실에는 눈을 돌린 채 이미 龍井으로 이사온 사람들의 모습을 그것도 열 살 남직한 얼니아이의 눈을 통해 그려놓고 있을 뿐이다. 마땅히 직시해야 하고 고발해야 할 현실을 외면하고 10대 소년의 장밋빛 세계만을 구가한 작가의 현실인식의 자세(76쪽)는 <장>, <車중에서>의 경우와 함께 면밀히 검토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77쪽) 이들 작품 중 <벼>는 재만한국농민문학의 발전을 구체화시켜 줄 작품으로서 크게 기대할 만한 자리에 놓여 있었으나 이주민의 만주이민 동기를 화류계 여인에 의해 재산을 탕진했기 때문인 것으로 설정하였으며, 만주정착 과정에서 수전 개간에 이은 벼농사 장면 또한 너무나도 간단하고 수월한 것으로 다루고 있음을 본다.(77쪽) 그리고 <목축기>와 <북향보>는 만주국이 건국된 훨씬 뒤의 상황을 작품화하여 <새벽>과 <벼>와는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이들 작품에서는 이미 이주민들의 정착을 둘러싼 삶의 문제보다는 만주국이 베푸는 갖가지 편의를 고맙게 생각하면서 목축사업에 열중한다거나 만주를 아름다운 고장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으로 건국정신이나 증산을 되뇌이는 인물들을 등장시킴으로써 작가의 현실을 인식하는 자세가 현저하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한편 <벼>, <목축기>, <북향보>가 비록 농촌이나 목장(77쪽)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은 농민이나 목장의 인부가 아니라 지식인들이라는 점에서 이들 작품을 전적으로 농민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지 懷疑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78쪽) <장>과 <車중에서>에 등장하는 ‘거지’는 다같이 기막힌 사연을 간직한 이주민들임에 틀림없는데도 ‘구경꾼’이나 작중화자는 냉철한 입장이나 태도를 취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작가적 자세는 <새마을>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만주의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사 올 수밖에 없는 이주민들의 현실에 대한 외면이 그것이다. 기막히고 처절한 현실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자세가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와 무관하지 않음은 물론이다.(78쪽) 이곳에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앞에 예시한 7작품을 분석 검토하면서 밝혀낸 ① 이주민의 이주동기 ② 정착과정, 그리고 ③ 작가의 현실인식의 자세 및 ④ 농민문학문제에 관한 논의, 그 가운데서도 특히 ③, ④항에 관해서는 앞으로도 계속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이다.(78쪽) 재만학국문학은 그 형성 과정에서부터 주목할 만한 몇 가지 특이성(문제점)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① 재만한국문학이 만주사변과 만주국의 건국 이후 다수 이주한 우리나 문화인․지식인들에 의해 본격적인 전개과정을 갖게 되었다는 점-만주사변의 결과에 따라 건국된 만주국으로 이주한 문화인․지식인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만주의 현실을 수용가능한 것으로 인식하는 입장을 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이 무렵의 이주민들 사이에는 한국 안에서의 이념 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만주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자한 경우도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② 만주로 이주한 문화인․지식인들이 거의 도시에 거주하면서 교사나 신문기자로 근무하는 한편 앞서 이주한 개척민들의 삶을 작품화했다는 점-만주로 이주한 문화인․지식인들은 전문학교나 대(102쪽)학 출신자가 대부분이며 거의 도시에 생활 기반을 가지고 있으면서 만주의 농촌에서 수전 개간이나 벼농사 또는 목축업에 종사하는 이주농민들의 삶을 작품화하였는데 이들의 작품에서 농민들이 일하는 모습이나 생동감․박진감 넘치는 농촌 풍경을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안수길의 소설로 대표되는 몇 작품을 농민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재만한국문학-그 가운데서도 안수길소설의 주된 경향을 농민문학으로 파악한 염상섭의 언급은 재검토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③ 만선일보가 재만한국작가들의 유일한 발표기관이었다는 점-재만한국문학의 흐름이 재만문예동인지인 「북향」에서부터 구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재만한국문학의 본격적인 전개는 만선일보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만선일보는 ‘일본 관동군의 기관지’나 다름없는 것으로서 만주국의 건국이념이라든가 시책을 우리나라 이주민들에게 홍보하기 위한 신문어었기 때문에 재만한국작가의 유일한 발표기관으로 정말 바람직한 역할을 수행했는지 미심쩍다. 특히 김창걸의 <붓을 꺾으며>에 서술되어 있는 것처럼 작품 내용에 대해 부단히 간섭 규제한 것이 사실이라면 만선일보는 재만한국문학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 부정적인 위치에 서있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103쪽) 재만한국작가 가운데서 작품의 수나 질적인 면에 걸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강경애, 안수길, 김창걸 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작가는 인적사항이 다른 만큼 여러 면에서 상이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이들의 현실인식의 자세 및 그 작품화 과정에서 나타내 보이는 특이성은 유다른 바 있다.(103쪽) ① 강경애의 경우-강경애는 崇義女學校와 同德女學校를 중퇴한 학력밖에 가지고 있지 않지만 숭의여학교에 재학하고 있을 때라든가 그 뒤의 여러 과정을 통해 이념을 획득한 바 있고, 남편 張河一의 계속적인 영향으로, 특히 1931~1934년 사이의 작품을 통해 이념적 세계관을 피력해 보이기에 이른다. 즉 만주로 이주한 뒤에 발표한 <蹴球戰>에서는 이념에 바탕을 둔 조직력에 의해 일제가 강점하고 있는 만주국의 현실에 맞서야 한다는 입장을 보여주고 있으며, <母子>에서는 남편을 통해 반만항일 활동의 문학적 수용을 꾀하고 있다. 그리고 <소금>에서는 남편은 공산당으로 인해 죽게 되고 아들은 공산당에 참여했다가 처형되지만 여주인공은 목숨을 이어나가기 위해 소금밀수를 하는 과정에서 공산당의 주장에 동조하게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부분저긍로나마 이념에 바탕을 둔 이러한 강경애의 현실인식의 자세는 객관적 정세의 악화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1935~1938년 사이의 작품에서는 남편과 연관된 일이라든가, 빈궁과 인간의 배신문제를 다루는 방향으로 차츰 옮겨져 갔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만주를 강점하고 있는 일제의 서슬이 퍼런 상황 아래서 몇 작품에서나마 이념으로 현실에 맞서려는 작가의식을 펴보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라 할 수 있다. ② 안수길의 경우-안수길은 일본 유학을 중단하고 아버지가 머무르고 있는 만주 龍井으로 돌아온 뒤 李周福과 함께 북향회를 조직하고 동인지 「북향」을 간행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1935년 「조선문단」을 통해 작가로 데뷔, 1937년부터 만선일보의 기자로 일하면서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안수길을 재만한국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로 인식시켜 주는데 기여한 <벼> 그리고 <목축기>와 <북향보>에 이르러 안수길의 현실을 바라보는 자세는 뚜렷해진다. 즉 이미 개간한 땅을 지키기 위해서는 일본의 힘에 의존하려는, 목장에 주어지는 만주국의 각종 혜택을 고맙게 생각하는,(104쪽) 농민도장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만주국 건국이념이나 시책에 충실한 인물들을 등장시킴으로써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입장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한편 <장>, <車중에서>에서는 거지로 전락한 이주민을 단순한 구경거리로 또는 혐오감을 가지고 대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자세 또한 안수길의 작가의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하겠다. ③ 김창걸의 경우-어려서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주한 김창걸은 소학교를 거쳐 중학교에 재학하고 있을 때 그의 시에 대하여 ‘혁명적 시인의 색채가 농후’하다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그 뒤 오랜 방랑생활을 하면서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운 고난을 겪은 뒤 1936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1939년에 만선일보의 新春文藝로 데뷔하게 된다. 데뷔하기 전인 1936~1938년 사이에 쓴 작품-특히 <소표>, <두번째 고향>을 통해 김창걸은 마주로 온 우리나라 이주민들이 중국인 지주나 관리로부터 당하는 억울한 일에 대해서는 무력에 의존해서라도 끝내 맞서야 한다는 현실인식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작가의식은 막상 만선일보를 통해 정식으로 데뷔한 뒤의 작품에서는 차츰 자취를 감추게 되고 현실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으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곳으로 후퇴하게 된 연유에 대해서는 작가의 <붓을 꺾으며>에 자세히 술회되어 있다. 그러나 1942년에 쓴 <강교장>에서는 다시 초기작품세계로 회귀하려는 몸짓을 보이기도 하지만 다음 해에 끝내 절필하고 만다.(105쪽) 재만한국작가로서의 안수길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과 그리고 절충적인 것의 세 가지 유형으로 이루어져 왔다.(108쪽) ① 1935~1945년 동안에 발표한 20편에 가까운 작품 중 10여 편이 만주를 소설공간으로 하고 있다. 그 가운데의 몇 작품에서 만주농촌의 이주민을 그렸다고 해서 염상섭이 안수길을 ‘조선개척민을 위한 농민문학’의 대표적인 작가라고 평가한 이래 그러한 견해는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답습되고 있다. ② 안수길의 작가적인 명성을 확고하게 해준 작품은 <새벽>이다. 그 뒤 <벼>, <목축기>, <북향보> 등이 계속해서 발표되자 그야말로 전형적인 재만한국농민작가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들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찬수, 찬호, 찬구는 하나같이 지식인이다. 농촌에서 일하는 농부나 목장에서 일하는 인부의 구체적인 작업 광경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농촌이나 목장의 풍경만이 차용되어 있고 농부나 인부의 움직임이 배제된 채 지식인의 활약상이 두드러진 이들 작품을 농민문학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108쪽) ③ <벼>, <목축기>, <북향보>의 주인공들은 일제가 강점하고 있는 만주국의 현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만주국의 이념이 창작의 주제’(김윤식 「우리문학의 마주체험」(下) (소설문학, 1986. 7), p. 206.-인용자 재인용)로 등장하게 되는 현실인식의 자세 때문에 ‘소설 <벼>, <목축기> 등은 왕도낙토를 설교하고 농촌진흥운동을 고취하였으며 일본 제국주의를 위하여 일하도록’(조선족략사편찬조지음, 「조선족약사」, p. 248.-인용자 재인용) 우리나라 이주민들을 기만했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는지 모른다. ④ 안수길의 이색적인 이주민관을 보여주는 작품에 <장>과 <車중에서>가 있다. 이들 작품에 등장하는 ‘거지’는 우리나라 이주민 가운데서도 가장 비참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무관심 또는 냉담한 태도는 온당한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⑤ 해방전에 쓰여진 안수길의 작품은 낙천적이요 낭만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있는 것이 많은데 이는 애써 밝은 면에 초점을 맞추고 명랑한 분위기를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인 듯하다. 그러나 만주국에서 살고 있는 대다수 우리나라 이주민들은 농촌의 경우 토벌 작전과 집단농장의 강행으로 마음 놓고 농삿일에 종사할 수 없는 형편 아래 놓여 있었고, 도시의 겨우 주거난, 취직난, 물자난 때문에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의 고난 속에서 살고 있었는데도 극히 일부에 해당되는 또는 예외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는, 밝고 즐겁고 희망찬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은 만주국의 현실을 총체적으로 인식하는데 있어 소홀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재만한국문학의 형성과 발전 과정에 끼친 안수길의 공로는 지극히 크다. 그가 해방때까지 남긴 20편 가까운 작품도 적다고는 할 수 없으며, 작품의 기교 또한 제일급에 속하는 것이었다.(109쪽) 이러한 안수길에 대한 평가로는(109쪽) 첫째, 우리나라 문학의 암흑기요 공백기를 메워주는 작가라든가 우리나라 농민문학의 흐름을 잇는 작가로 찬양되어 마땅하다는 설이 있기도 하고, 둘째, 만주국의 건국이념을 주제로 한 작품을 쓴 작가라든가 일본 제국주의에 매수된 ‘반동적 문인들’(조선족략사편찬조지음, 「조선족약사」, p. 248.-인용자 재인용) 가운데의 한 사람으로 비판되어 마땅하다는 설이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안수길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그처럼 양극을 달리는 것보다는 안수길의 재만한국문학에 끼친 공로나 업적은 그것대로 인정되어야 하며 몇몇 작품에 노출된 만주국의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자세는 또 그것대로 논의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그래야만 안수길의 우리나라 현대문학사에 있어서의 자리매김도 제대로 이루어지리라 믿는다.(110쪽) 서언의 끝부분에서 제기한 물음에 답하는 형식을 빌려 결론을 내려보면 다음과 같다. ① 우리나라 사람들의 만주로의 이주는 1869년과 1870년에 걸친 흉년 때문에 많이 건너가기 시작한 이래 강제 합방, 3․1운동을 거쳐 산미증식계획으로 말미암아 우리나라가 농촌의 구조적인 몰락과정이 거듭됨에 따라 해마다 증가하여 해방직전에는 이백만을 웃도는 수에 이르렀다. 만주로 이주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은 고국에서의 그것 못지않게 어려움에 가득 찬 것이었다. 농촌의 경우 만주국 건국 이후부터(112쪽) 치안유지를 핑계로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농가의 집단부락화와 증산 및 유축농업으로의 전환 등을 강요하는 바람에 이주농민들의 고통은 筆舌로 형언키 어려울 만한 것이었다. 한편 도시의 경우 나날이 가중되는 주택난, 취업난, 생활필수품의 배급제 등으로 도시거주이주민의 어려움 또한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② 비록 수는 많았지만 만주로 이주한 우리나라 사라들은 먹고 살기 위해 수전을 개간하거나 노동에 종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이들에 의한 자생적인 文學活動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재만한국문학의 형성은 만주사변 이후 만주국이 건국된 뒤부터 만주로 다수 이주한 문화인․지식인 또는 문학도․작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진작부터 문학에 뜻을 두고 있던 이들은 교사나 신문기자로 근무하는 한편 문학운동을 펼쳐 나갔다. 그 가운데서도 안수길과 이주복 등에 의한 북향회의 조직․활동 및 재만문예동인지인 「북향」의 발간, 만선일보를 통한 작품발표 그리고 작품집-재만조선인작품집 󰡔�싹트는 大地󰡕� 및 안수길의 첫 단편집 󰡔�북원󰡕�-의 간행 등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해 재만한국문학은 나름의 흐름을 이루어 나갔다. ③ 지금까지는 재만한국문학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안수길에게만 시선이 집중된 듯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재만한국문학을 빛낸 작가로는 안수길 이외에 강경애, 김창걸 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들 세 작가는 해방전에 각각 20편 내외의 작품을 남겼다. 이 가운데서 필자는 만주를 소설공간으로 한 작품만을 골라내어 유형별로 구분한 다음, 그 속에 담겨진 현실인식의 자세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하여 살펴 보았다.(113쪽) 안수길은 재만한국문학의 형성 과정에서 남다른 기여를 하였을뿐더러 <새벽>에 이어 <벼>, <목축기>, <북향보> 등을 발표하여 크게 주목되었으나 농촌이나 목장에서 활약하는 지식인들을 통해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자세를 보여 주었다.(114쪽) ④ 1940년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강제 폐간된데 비해 1945년까지 한글 신문인 만선일보가 폐간되었으며, 따라서 한글로 된 작품을 그때까지 발표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오늘날 우리들은(114쪽)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햇볕을 볼 수 없는 한글 작품이 만선일보에 발표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우리나라 문학사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자료가 아니냐는 논리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곳에서 잠시 만선일보가 어떠한 취지로 창간되었고 재만한국이주민들에게 어떻게 작용하였으며, 또 재만한국문학을 위해 어떠한 역할을 했느냐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선일보야말로 만주에 가서 살고 있는 우리나라 이주민들에게 만주국의 건국이념이라든가 시책을 홍보하고 지도할 뿐만 아니라 재만한국작가들에게는 김창걸의 <붓을 꺾으며>에 서술되어 있는 바와 같은 일을 서슴지 않는 언론 기관이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이곳에 실린 작품이라고 해서 무조건 우리나라 문학사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 믿는다. 그렇다면 어떠한 작품이 우리나라 문학사의 공백을 메울 수 있을까 하는 것은 명백해진다고 할 수 있다.(115쪽) 돌이켜본다면 재만한국문학은 고르지도 못하고 불행한 여건아래 생성 성장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주사변에 이은 만주국 건국 이후 다수 이주해 간 우리나라 문화인․지식인들에 의해 본격화의 길로 접어든 뒤 동인지 「북향」을 거쳐 만주국의 국책을 홍보하는 신문인 만선일보를 유일한 발표기관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부터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선일보를 전연 이용하지 않은 강경애라든가, 발표되지 않을 것을 각오하고 작품을 쓴 김창걸 같은 작가가 일제와 만주국의 서슬이 퍼런 상황에서도 뜻 깊은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는 것은 감동적인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재만한국문학은 지나친 기대 아래 이론적 근거도 뚜렷하지 않은 채 과대평가 되어온 경향 또한 없지 않았다. 이제 우리들(115쪽)은 구득 가능한 자료를 차근차근하게 모아 면밀하게 분석․검토함으로써 보다 보편타당성 있는 평가에 도달하도록 계속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116쪽) 在滿朝鮮人作品集 讀後感 半世紀前부터 赤手空拳으로 바가지짝밖에 가지고 온 것이 없는 우리에게 오늘에 이만한 作品이 나왔다는 것은 實로 火中生蓮인 것이다. 半世紀라는 짧지 않은 移住史를 가지고 있으면서 이제 겨우 作品集 하나 나온 것을 그렇게 신통히 여길 것이 무엇이냐고 비웃음이 없지 않을 것이나 우리에게 있어 이만한 收穫이란 文字 그대로 苦心慘憺이오 難産의 難産이 아니랄 수 없는 것이다. 이 땅 우리게게 문학적 유산이 있은 것도 아니오, 現實的 條件이 또한 그러한 것도 아니다. 다만 괭이로 파헤치고 호미로 긁어 담아서 알알이 주운 결정이요, 피로 물들이고 땀으로 섞어 빚은 매듭진 記錄인 것이다. 이 短篇集에 수록된 七篇의 作品들은 現地 作家의 作品들 중에서 그 精髓들만을 拔萃(발췌-인용자 주)한 것임으로 어느 것이나 精金이요, 美玉인 걸작 아님이 없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구수한 흙냄새가 풍기는 것 같고 大地의 脈搏이 그대로 뛰는 것 같다. 일찍 朝鮮文壇의 作家들 중에서도 滿洲를 取材한 作品들이 없는바 아니었으나 그러나 그들의 作品들이란 一律的으로 抽象的 槪念的 作品들뿐이라 거기에 흐르는 리즘이 滿洲의 생소한 雰圍氣를 살리지 못했고 오히려 隔靴搔癢의 안타까움만 더할 뿐이었었다. 그러나 이번 이 作品集에 나타나는 內容만은 이 땅 滿洲의 雰圍氣를 그대로 呼吸했고 흙으로 더불어 싸우고 이 고장 現實과 더불어 부닥긴 눈물의 쓰라린 體驗에서 나온 알뜰한 純粹品들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文學이란 決코 觀念이나 文字遊戱가 아니요, 純粹(204쪽)한 體驗에서 얻은 崇高한 藝術(價値)이어야 할 것임을 새삼스럽게 느끼는 바이다. 나는 이 作品集 속의 일곱 편 作品이 모두 傑作들이라고 지나친 어리꾼 노릇을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滿洲의 분위기를 알고 참다운 滿洲의 眞面目을 알고 鮮系의 生活을 알고 半世紀間 移民史를 알고 귀중한 體驗에서 얻은 아롱진 生活의 眞諦(진체-인용자 주)를 알고 흙냄새 그윽히 풍기는 참다운 흙의 文學을 찾으려면 이 한권의 作品集을 내놓고는 다시 다른 곳에 찾을 길이 없을 것이다. 나는 文學에 대해서는 門外漢이라 이 한권의 作品集으로서의 完成與否는 모른다. 다만 우리들이 滿洲를 알고 滿洲에서만이 얻을 수 있는 移民文學으로서의 귀중한 要諦인 것만은 아무나 누구나 어떤 世界的 文豪일지라도 體驗이 아니고는 건드리지도 못할 未開의 境地인 것이다. 나는 이 한권의 作品集이 나오기까지에 얼마나 눈물겨운 難産을 겪었다는 것을 이 作品集의 跋文에서 읽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울었다. 빈바가지짝만 달랑달랑 매달아 가지고 江을 건너온 우리에게 무엇이 있으랴. 여기에 와서 一望無際한 거칠은 들을 손톱이 무지러지도록 파헤치고 그리고 논을 풀고 밭을 갈아서 겨우 安着의 꿈을 얻으려는 우리에게 무엇이 있으랴. 여기에서 現實과 싸우고 온갖 苦難을 克服하고 異鄕의 심산한 꿈을 어루만지고 鄕愁를 달래고 그러며서 우리가 가진 바 情緖를 눈물 섞어 읊조린 것이 이 한권인 것이다. 이것을 出版하기까지 얼마나 難關이 있고 얼마나 남다른 苦心이 있었던 것은 想像以上의 눈물겨운 일이었을 것이다. 崔基正 (이 글은 1941. 12. 18 만선일보에 실린 글이다. 재만조선인작품집 「싹트는 대지」는 1941. 11. 15에 만선일보사 출판부에서 간행되었다.-인용자 주)(205쪽) 북원발간예고 滿洲에 있어 鮮系藝文 運動이 싹트기 十年 그 가운데서 康德九年度에 在滿朝鮮人 作品集 󰡔�싹트는 大地󰡕�가 發刊된 것이 嚆矢로서 昨十年에는 다만 間島와 吉林에서 두 詩集이 나왔을 뿐 寂然히 作品集의 出版이 없던 中 今番에 南石 安壽吉 創作集 󰡔�北原󰡕�이 드디어 發刊케 되어 印刷도 거의 끝났음으로 不日間 世上에 나오리라 한다. <새벽>, <벼>, <牧畜記>, <圓覺村> 等 旣發表分 外에 新作 <土城>, <새마을>을 收錄한 作品 都合 十二篇 四百餘頁의 巨篇으로 大部分作品은 滿洲에 있어서의 朝鮮人 生活의 時代的인 변천과 歷史的 使命等을 남김없이 取材한 것이다. 創作集으로서의 價値도 價値려니와 在滿朝鮮人 開拓의 文獻的 價値로도 적지 않은 바가 있어 크게 期待된다. 그리고 滿洲鮮系 藝文壇에서 個人作品集으로는 이것이 역시 嚆矢이다. (안수길의 첫 창작집 󰡔�북원󰡕�은 1944. 4. 15에 간도 예문당에서 간행되었고 발간예고는 1944. 4. 12에 만선일보에 실린 것으로 되어 있다.)(207쪽) <북향보>의 연재예고 본지 연재소설 <개동(開東)>은 만천하 애독자가 다같이 큰 기대 속에서 앞으로의 진전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공교로이 필자 염상섭(廉尙燮)씨의 건강관계로 섭섭하지만 일단 완결을 짓기로 하였습니다. 거의 四개월간의 아무런 소식이 없이 지내온 것은 독자 제위께 심히 미안한 일이나, 지면의 관계, 본지의 성격 또는 시국의 긴박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계속 연재할 소설에 대하여도 또한 신중치 않을 수 없어 이제야 바야흐로 만주조선문단 유일의 보배인 안수길(安壽吉)의 <북향보(北鄕譜)>를 실리게 되었습니다. 작자와 작품에 대하여는 긴 설명을 피하거니와 작자는 마주선계문학인으로서 불우한 환경 어려운 처지에서 단 한사람 외로이 꾸준히 또 진실히 문학을 해오는 만큼 무엇보다도 이 작품에는 역시 진실을 탐색(探索)하고 진실을 파악(把握)하려는 열의와 노력이 있어 반드시 독자의 가슴을 감격케 하고 심금(心琴)을 울리게 하는 바가 있을 것을 확신합니다. 이 특색 있는 작가의 특색 있는 작품에 더욱 특색을 가하고자 오본봉협(吳本鳳協)씨의 삽화를 넣게 된 것은 뚜렷한 특색의 또(215쪽) 하나일 것입니다.(216쪽)(만선일보에 실린 글이지만 게재 연월일은 미상) <북향보>연재와 관련한 작자의 말 나는 과거의 짧은 문학적 경력(文學的經歷)에 있어 주로 우리 부조개척민(父祖開拓民)들의 지나간 역사를 단편적(斷片的)으로 살펴왔습니다. 이렇게 살펴온 중에 결론으로 파악된 것은 다음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즉 그것은 우리 부조들이 피와 땀으로 이룩한 이 고장을 그 자손이 천대만대 진실로 새로운 고향으로 생각하고 이곳에 백년대계를 꾸며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 작품에서 이 고장에 아름다운 고향을 만들지 안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초삼아 이야기를 전개시켜 보려는 것입니다. 만주를 고향을 삼고 여기에 뿌리를 깊이 박자-이것은 현시국의 요청이기도 합니다. 서투른 붓이 독자에게 얼마만큼 흥미와 이익을 드릴지 미리 기약할 수는 없으나 증산에 매진하는 농민의 저녁 후의 동무가 될 수 있고 선계의 만주정착문제(滿洲定着問題)에 유의하는 분의 관심거리가 된다면 나로서는 분외의 영광이겠습니다.(216쪽)(만선일보에 실린 글이지만 게재 연월일은 미상)
34    안수길연구자료들 댓글:  조회:2846  추천:0  2009-05-16
안수길 연구자료   1. 元亨甲, 「안수길의 작품세계」, 안수길, 󰡔��第三人間型󰡕��, 삼중당, 1981   선생에 있어서 북간도는 제이의 고향일 뿐 아니라 문학의 대륙적 원천(大陸的源泉)이다. 선생의 작품세계가 한국의 다른 작가와 다른 점을 우리는 이 두개의 고향에서 찾아야 된다. <<北間島>>나 <<通路>> 등의 대하소설은 말할 것도 없고, <<白夜>> <<산을 바라보는 사람들>> <<泥土地域>> <<浮橋>> 등 10여 편의 장편소설에서 우리가 감동하는 것은 저 황량하고 광활하며 중후한 인간의 거의 원시적 광야의 무대이다. 또렷한 이성(理性)의 질서가 작용하고 지배하는 문명이나 교양의 알뜰한 그늘이 아니라 그것들이 미치지 못하는 막막한 회색의 들판인 것이다. 분명히 이러한 대륙적 차원은 한국문학에 있어 특이한 일면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불교와 유교 그리고 기독교의 교양으로서 인간성의 선악의 분별이 갈라지고 모든 면면들이 닳고 닳은 사회적 의식 차원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안선생의 또 하나의 면이 이러한 회색적인 광야의 문학을 내재적(內在的)으로 보충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가(276쪽) 황량한 광야에 이끌리면서도 늘 그의 탄생 조건이자 어버이의 고향인 함흥의 정서속에 젖어 살 수밖에 없다는 것에는 전자에 못지않게 지대한 그의 문학적 의미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섬세하고 꼼꼼하며 다분히 사말적(些末的)이라고 할 만한 자랑스러운 감정이나 교양의 언어적 노력은 이 후자의, 즉 생래적(生來的)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작품세계는 이 두개의 상반된 의식영역 또는 지향성의 갈등현실이라고 해도 과언 아니다. 이러한 작품에 있어서의 갈등현실은 곧 그의 문학적 현실인 동시에 또한 문학적 실현의 불가결한 이유라고 할만도 하다. 안선생의 평소의 모습과 그가 일생을 살아온 역정의 대조적인 성격이 이러한 그의 독특한 문학적 현실을 무엇보다도 연연하게 증명하여준다. 그의 곱기 이를 데 없고 늘 잔잔하며 모든 것에 있어 가냘프리만큼 깊이 생각하는 겁먹은 눈빛과 나직한 키에 허약한 체구, 그리고 동양인 특유의 교양의 전아한 소극성이 그 표정과 거동에서 국향(菊香)이듯 풍기는 인격적 모습을 생각하면서 이미 소년시절부터 파란이 약속될 수밖에 없고 그의 생애를 더듬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모순인 것 같고 어떤지 이화감(異和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선생이 함흥고보(咸興高普) 二년이라는 10대의 나이에 항일 동맹휴학사건을 주모하여 퇴학당하고 다시 서울의 경신학교(儆新學校)에서도 광주학생사건에 호응 봉기하여 또한 끝내 졸업을 못하고 일제의 경찰서와 국외를 전전한, 그 생기발랄한 민족정신과 조국애의 산 경력을 그의 조용한 모습에서 상기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수록된 十三편의 단편소설들은 그러한 그의 기복어린 민족의식과 만주의 회색적(灰色的) 대지, 그리고 그의 고향인 어버이의 땅의 아기자기한 감각적 정서가 그의 품향(277쪽)(稟香)어린 인격적 교양에 무르녹아 깊은 자기 조화속에 빚어진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안선생의 단편소설의 특색은 그가 많은 중편과 장편, 대하소설에서 시도하였던 거대하고 광활한 주제라는 것을 전혀 의식조차 하려고 하지 않은 점이다. 선생은 단편소설이 지닐 수 있는 매력의 가능성을 끝까지 성실하게 추구한 것 같다. 큰 것은 큰 그릇에 담아야 한다는 소박한 원리가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장편소설에서 얻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 十六편(실린 것은 13편임-인용자 주)의 단편이 반증적(反證的 )으로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단편소설만의 문학적 가능성(可能性)을 열어준 셈이다. 우리가 장편소설의 도도한 이야기의 흐름에 휩쓸려 스치고 지나버릴 지루한 감정적인 사말성(些末性)들이 하나하나 이 단편들의 작가적 시력(視力)으로 포착되고 있다. 그러나 그 사소한 감성의 편린 같은 것들이 단순한 사말성이 아니라 대륙적 광야의 체험에서 또는 민족적 시련의 체험에서 한 방울 한 방울 눈물이듯 받아낸 결정체(結晶體)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커다란 사회적 체험의 배경과 심각한 인간적 체험의 거울이 없이는 어떠한 한 줄의 문장도 그 진실한 의의를 못가진다. 안수길선생의 고드름 같은 이 생활 감성(感性)의 결정체들은 단순한 흥미로 엮은 작가적 여적(餘滴)이 아니라 보다 깊은 내연성(內緣性)을 가지고 그의 <<北間島>>적 세계에 문맥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커다란 세계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골돌한 인간의 오뇌(懊惱)가 뒤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이 짤막한 단편들은 그 어느 하나도 깜찍한 재치에 끝나지 않고, 재미있게 읽히면서 재미로 그치지 아니하며, 하물며 투명하게 생활현실을 비춰보는 것 같으면서도 그 문학적 문맥이 생활속에(278쪽) 무산하는 일 없이 음미할 맛있는 여운을 남겨주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 단편소설들은 친근감에 넘치는 서민생활의 알뜰한 순례기(巡禮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적 현실을 그 원근(遠近)에 있어 겪은 자의 애정있는 순례기이다. 애정과 증오의 경지를 훨씬 높은 차원에서 극복한 조화(調化)의 한 실현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단편들의 언어전개(言語展開)사이에 기웃거리는 여러 가지 색다른 눈길들은 한결같이 인간의 비극적 현실의 현주소를 날카롭게 암시하고 있다. 서민의 현실생활이 움직여지고 있는 그 내면의 보이지 않는 줄이 무엇인가를 찾아 나선 작가적 사명을 이 단편들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것들은 그 보이지 않는 내면성에 있어 집단적 불행과 숙명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작품 하나하나를 다 읽고난 다음에, 지극히 막연한, 먼 원경으로밖에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작품 하나하나 속에 분명히 내용으로서 박혀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한편 한편의 전체성(全體性)으로 하여금 독자에게 새로운 인생의 위치에 서게 하고 또한 그 독자로 하여금 작품이 암시하는 작품의 대안(對岸)을 향하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안수길선생은 작품속에서 어떠한 주제(主題)를 내세워 주장하거나 강요하는 일을 극히 꺼려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문학에 있어 그런 욕심은 허다한 작가들의 작품에서 부딪쳐야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어데까지나 그것은 문학적 생명의 자기 손상이거나 자기 학대에 다름 아닌 것이며, 그것이 아무리 절실하고 위대한 주제나 주장이라 하더라도 결국 문학세계에서 벗어나는 문학의 월권(越權) 내지 배신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문학은 암시할 권리는 있어도 지적할 권리는 없다. 안선생은 그의 이 단편들에서 곧 볼 수 있듯이, 그가 철저할이만큼 가난하고 수모받고 어려운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의 문학을 착상하면서도(279쪽) 끝내 그가 그러한 유혹에 빠지지 않고 주제라고 할 만한 것을 눈에 보이게 드러내는 일에 대해서 겸손한 것은 그러한 문학의 원리적(原理的) 성격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단편집에 수록된 十六편의 소설은 그 모두가 한결같이 어려운 사람들을 다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하나도 같은 소재, 같은 내용, 같은 방향의 것이 없다. 모두가 특이한 독자성(獨自性)에 있어 매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단편들의 특징은 그 전개(展開)의 자연스러움에 있다. 우리가 맺히는 데 없이 읽어나갈 수 있고 어느 대목에서도 진전상(進展上)의 벽에 부딪히는 일 없이 순탄하게 넘어가며 그의 소설의 함정에 빠져들어 갈 수 있는 것은 그때문일 터이다. 이제까지의 모든 소설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고 믿어온 것은 우리가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점차로 그 소설의 세계를 신뢰하고 결국은 의식의 전영역성(全領域性)으로서 정서적으로 젖을 수 있느냐의 문제일 것 같다. 그것을 빙이(憑移)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소설 독자의 빙이야 말로 소설의 성공의 키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단편들의 승점(勝點)은 독자의 감명도(感鳴度)를 어느 수준에서 머물게 하고 독자로 하여금 조용하고 나지막하게 사유(思惟)할 수 있도록 끌어나간다는 점이다. 작가가 그의 주장이나 주제를 일방적으로 강조하거나 과장해서 강렬한 독자의 감명도를 이 작가는 시도하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는 것이다. 흔히 이러한 작품을 전전적(戰前的)이라든가 잃어버린 세대의 특색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소재(素材)의 성숙한 자기동화(自己同化)에서 비롯되는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작가의 관조적(觀照的)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소설의 한 생명(280쪽)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연령의 고하를 막론하고, 또는 체험의 심천(深淺)을 떠나서, 이러한 관조적 작가태도로, 여간한 작가의식의 성숙도가 아니고서는 바라기 어렵다.(281쪽) <<第三人間型>> 이 소설이 이 작가의 제삼창작집의 이름이기도 하듯이 단편으로서도 작가 안수길의 한 대명사이기도 하다. 확실히 <<第三人間型>>으로 하여금 이 작가의 작가적 심도(深度)가 움질일 수 없게 부각되었다고 해도 과언 아니다. 말할 것도 없이 제三인간형이란 현실의 어려움에 패배하여 스스로의 사명감을 버리거나 또는 현실에 질질 끌려가는 애매모호한 소극적형이 아니라 그 현실속에서 주체성을 잃지 않고 그가 할 수 있는 사명의식(使命意識)을 되찾기 위하여 현실을 극복해가는 인물이다....(281쪽) 그러나 제삼인간형이란 이름은, 흔히 모든 작(281쪽)가가 그러하듯이 편의상 붙인 제목에 불과하다. 주제로서 형성될 만한 사상적(思想的) 내용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것이다. 다만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스스로의 능력으로 스스로의 인간적 사명을 찾아 나선다는 의미(意味)에 불과하다. 이렇게 생각할 때 이 작품이 추구(追求)하고 의미는 보다 깊은 데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 같다. 이 소설의 배후(背後)인 六․二五와 더불어 우리는 민족의 역사적 숙명을 느끼게 되고 그 역사적 숙명에 도전하는 인물로서 등장한 것이 다름아닌 <미이>란 존재라고 상도되는 것이다. 일제(日帝)의 극혹(極酷)이라든가 六․二五의 참극이라든가의 민족적 수난은 그 모두가 국민의 자주성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비겁한 의타성(依他性)에 직결하는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제삼인간형이라는 막연한 주제성(主題性)은 단순히 현실을 파헤치고 살아나가는 주체적 인격에 그치지 않고 민족의 국민적 의식구조에 대결하는 오의(奧義)를 품고 있는 것이다. 광주학생사건을 뼈아픈 현실로서 체험하고, 중국인의 허망스런 국종의식(國宗意識)을 현실로서 목격한 작가의 역사의식을 생각할 때 이 소설의 이야기속에 나타난 여주인공의 존재는 민족적 당위성이 감지(感知)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이 소설의 기막힌 라이트 모티브이기도 한 <검정 넥타이>는 그러한 깊은 민족적 반성을 음미할 만한 상징이다. 그것이 <검은 넥타이>란 점에서 그것도 악세서리의 멋에 그치고 말 수가 없다. 죽은 역사의 모티브를 죽은 역사에 돌려줘야 하는 <미이>의 각성은 바로 민족의 의식구조에 도전하는 한 역사적 각성(覺醒)이 느껴지고 남는 것이다. 그 <검정 넥타이>로 하여금 <조운>과 <석>이라는 작중 주인공이 심각한 쇼크를 받았듯이.(282쪽) <<翠菊>> 사랑과 성(性)의 일원성(一元性)을 기대한 문학작품은 세계문학사상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그같은 사랑이란 얼마나 절실하고 불가능한 인간문제의 필연성(必然性)인가를 다룬 문학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그 풀길 없는 인간의 필연성을 이 소설에서처럼 아름답고 담담한 내연성(內燃性)으로 전개한 작품은 없을 것 같다. 이렇게 짧고 이렇게 조용하고 이렇게 기복없는 내용으로서 이렇게 성공한 성문학(性文學)은 <<翠菊>>외에 보지 못했다....<분이>의 괴로움을 너무도 알고 그러기 때문에 마음으로 아끼고 감싸주는 시어머니야 말로 <분이>의 대항할 수 없는 적이었다. 마침내 <분이>는 그 적 앞에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시어머니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이웃집 머슴과 도피행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말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네의 죽음이 성의 괴로움으로부터 스스로 해방하자는 것은 아니다. 욕구불만이 죽음으로 결과했다는 것은 값싼 정신분석학(精神分析學)의 피상적 견해다. 오히려 그네는 그네의 죽음으로써 그네의 성을, 그네의 사랑을 그네의 존재 이유를 그네의 생명의 필연성을 자기방어한 셈이다. <분이>의 자살은 성의 욕구가 얼마나 절실하게 인간적인가를 진리로 남겨 주었다.(283쪽) <<旅愁>> ...통속적인 작가 같으면 이 <철>과 <황숙>의 기묘한 해후를 남녀의 애정문제로서 관계지었을 것이다. 충분히 그러고 남을 만한 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가는 이같은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第三人間型>>에서처럼 분별(分別)의 지성(知性)이라고 할까, 극복의 의지라고 할까 하는 이 작가만의 정신적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황숙>이라는 여주인공으로 하여금 그러한 속된 인간의 범정적 개연성(凡情的蓋然性)을 탈피한다. <황숙>은 불행을 딛고 일어난 안수길 특유의 의중(意中)의 인물이다. 그는 어떠한 비극도 비극으로서 그리지 않는 우리 문단(文壇)의 특이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황숙>은 그러한 안수길문학의 전형적인물상(人物像)인 것이다.(284쪽) 안수길 문학의 이러한 놀라운 자기혁명이 그 충분한 동기 부여를 가지고 그러나 커다란 내적 고민의 도정없이 이루어지는 데에 있다. 그러면서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당연한 인과(因果)를 느끼게 한다. 피난생활 속에서 무섭게 변모한 三八이북 동포의 생(284쪽)존의식이 이렇게 간파되는 직시력(直視力)의 세계는 이 작가만의 것이다.(285쪽) <<牧畜記>> 생(生)의 의지가 투쟁적인 끈기로 전개된다. 인간의 정서적인 무기력화라든가 삶의 꿈 같은 희박화라든가가 일체 허용될 수 없는 현실세계이다. 종돈(種豚) 70마리를 모국의 논산(論山)에서 만주의 와우산까지 생활을 같이하며 수송하는 <찬호>란 인물은 실향민(失鄕民)의 전형인 동시에 그 실향을 극복하기 위한 생의 의지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 작가는 이러한 민족의 의지를 만주의 황량한 허허벌판에서 발견하고 조국광복의 내일의 힘일 것을 다짐하는 것 같다. 수난의 민족사를 그 최악의 현실에서 체험한 작가에 있어 문학일반의 고독이라든가 향수 같은 것이 문제될 수 없다. 그건 오히려 감미롭고 값싼 문학의 기만일지 모른다. 목축장에 생활을 의탁하고 있는 천애의 고아 老로우슨이 호랑이에게 귀를 잃고 그 복수심에 불타 끝내 호랑이와의 대결을 위하여 단신 산으로 올라가는 투지가 주인공 <찬호>를 뒷받침했다.(285쪽) <<새>> 날지 못하는 새는 생명의 의미(意味)가 없다. 사회적으로 활동력을 잃은 가장(家長)은 이미 남자의 명맥이 없다. 새가 날듯이 남자는 사회에 나가서 경제적인 활동을 해야 하는 것(286쪽)이다. 그렇지 못하면 기운이 없고 위축되어 폐인이나 다름없다. 언제부턴가 이런 남자의 철학(哲學)이 남자사회를 위협하기 비롯하고 있다. 무직(無職)은 무능의 대명사처럼 등장하고 무능은 자학을 낳으며 무능과 자학은정신분석상 이어동의(異語同義)가 되어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 <<새>>는 소설로서도 색다르거니와 안수길문학에 있어서도 특이한 일면이다. 작중 인물인 <나>는 이러한 무직과 무능과 자학이라는 금일사회(今日社會)의 콤플렉스에서 나온 그 스스로의 무능을 동일시하는 환상에 빠진다. 그가 멀쩡한 정신으로 선물로 받은 새장 속의 새를 해방시키는 것은 그의 유능(有能)여부를 알기 위해서였다. 물론 가난이 몰고 온 병이다. 그러나 이 병은 남자들의 금일사회를, 그 농도야 어떻든, 물들이고 있다. 어떤 면에서 생각하면 작가의 기발한 착상인 것 같으나 남자사회의 전염병을 고발한 의미가 곁들여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의 뒤에는 작가 특유의 자신의 철학이 대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작가의 작품세계는 단순한 구경꾼의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287쪽) <<梟首>>와 <<꿰매입은 洋服바지>> 효수와 광복투쟁, 아무리 생각해도 인과성(因果性)이 없는 논리(論理) 같으면서 나라없는 무리의 비극이 더욱 참담하게 심각하여진다. 안수길의 모든 작품이 체험의 진실성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이 참혹한 이름의 소설은 그 담담한 회상적(回想的) 전개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역사의식을 사무치게 한다.(289쪽)   2. 李光勳, 「三段階의 變貌」, 안수길, 󰡔��牧畜記󰡕��, 범우사, 1976   우리가 이미 문단의 원로가 된 작가 安壽吉에게서 받는 인상은 한평생을 외길로 살아온 고고(孤高)한 선비의 이미지 그대로이다. 사실상 그는 해방직후의 신문사 근무와 피난시절의 교사생활이후 식생활을 위하여 직장을 가진 일이 없었다. 오로지 소설만을 써오면서 오늘의 연륜을 쌓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 나이의 문인들이 흔히 갖기 쉬운 문학단체의 감투싸움에 뛰어들지도 않았고, 많은 돈이 걸려 있는 문학상에 연연하지도 않았으며, 자기 세력의 확장을 위하여 동분서주하지도 않았다. 그는 작품을 쓰는 일 이외에는 아무 데도 한눈을 팔지 않은 채 오늘을 쌓아왔다. 산마루에 꿋꿋이 서 있는 하나의 거목이나 노송에 앉아 있는 학처럼 세월을 엮어온 것이다.(11쪽) 일제의 탄압이 심했던 1940년대에 첫창작집을 낼 수 있었던 것도 만주라는 입지적인 조건이 크게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가 간도시절에 써낸 작품으로는 중편 「벼」를 비롯하여「한여름밤」 「새벽」 「牧畜記」 「圓覺村」 「바람」 등이 있으며 「滿鮮日報」에 연재한 장편 「北鄕譜」도 이때에 쓰여졌다. 작가 안수길에 있어서 이때가 작가생활 제1기에 해당되는 시기이다. 이때의 작품인 「牧畜記」에 나타나듯 자연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전원생활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차 있다.(12쪽) 「牧畜記」의 주인공 찬호는 도시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자연으로 돌아온 전직교사이다. 그는 동물적 본능을 억압하고 영적(靈的) 세련을 갖추었다는 인간의 심성보다는 「저희를 생각해 주는 줄 알고 저희를 위하여 애쓰는 사람에 대하여 감사의 뜻을 표할 줄 아는」 돼지의 심성에 더욱더 마음이 끌리는 순박한 인물이다.(12쪽) 그의 교사직 실패는 그 자신이 너무나 순박했기 때문이다. 다른 교사들은 거의가 다 삼일운동을 전후하여 만주로 망명하여 온 지사(志士)들이었기 때문에 남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조리있고 감격적인 말솜씨를 가진 웅변가들이었다. 그러나 찬호에게는 말솜씨가 없었다. 그리고 일제와 싸운 혁혁한 공로도 없고 평범한 농업실습교사인 것이다. 그는 항상 그 자신이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은 망발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마침내 그는 교사직을 미련없이 던지고 와우산(臥牛山) 기슭으로 들어와 목장을 경영하게 된다. 인간에 대한 깊은 불신(不信)이 동물에 대한 애정과 믿음으로 새로운 가치관을 세운 것이다.(13쪽) 동물에 대한 끝없는 애정과 자연에 대한 뜨거운 동경이 전편에 넘쳐 흐르는 작품이 바로 「牧畜記」이다. 해방이 되던 해 6월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만선일보사를 사직하고 귀향, 흥남시에 있는 과수원에서 3년간의 요양생활을 하며 작품활동 제2기의 청사진을 잉태한다. 해방 뒤의 혼란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뒤인 1948년 그는 가족을 이끌고 월남한다. 그리고 경향신문사에 문화부 차장으로 입사하고 조사부장에 이르나 다시 6․25동란을 피해 대구로 내려간다. 그리고 이듬해엔 부산으로 내려가 해군문관 등을 거쳐 피난지의 용산고동학교 교사로 취임한다. 이 당시의 작품들이 그의 문학 제2기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旅愁」 「密會」 「翠菊」 「假面」 등과 제2회 아세아문학상 수상작품인 「第三人間型」들이 이 당시의 작품들이다. 제1기의 작품들과 비교해 보면 우선 무대가 농촌에서 도시로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 도시 소시민의 일상을 담담한 필치로 그리고 있다. 작중인물의 대부분은 이 사회를 개조하고 변모시키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인물들이기보다는 항상 피해만 당하는 서민의 애환에 초점을 맞추어주고 있다. 그들은 항상 주저하고 눈치를 살(14쪽)피며 세상을 조심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이다. 그들에겐 사태를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킬 힘도 없으며 그 자신의 문제 조차도 명쾌하게 해결하지 못하는 결단성 없는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사회에 대한 분노, 시대에 대한 분노는 대부분 그 자신을 향해 터뜨리는 것이 고작이다. 이 상시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第三人間型」을 살펴보면 이러한 작가의 성향은 퍽 선명하게 노출되고 있다.(15쪽) 생업인 교직에도 충실치 못하고 그 자신의 이상이요 사명인 문학에도 충실치 못하는 「석」이 바로 작가가 그리는 제2의 인간형인 것이다.(16쪽) 「第三人間型」은 안수길의 제2기문학을 대표하고 있는 작품이며 그 당시의 작품 경향을 대변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도시에 살면서도 그 자신의 문제에조차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으며 또 사회의 구조적 병리나 상황에 대해서는 분노나 저항보다는 체념과 순응으로 일관되고 있다. 그러나 60년대 이후 그의 작품은 큰 변모를 겪는다. 사회에 대한 적응이나 저항이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변하게 되며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이 한층더 높아지게 된다. 우리 사회의 비리(非理)에 대해서는 종래의 체념이나 순응과는 달리 분노를 터뜨리기도 하고 저항을 시도하기도 한다. 4․19가 가져다 준 또 하나의 의식혁명이었다. 이미 4․19직후 「白夜」라는 신문소설을 통해 자유당 말기의 사회상을 고발한 발 있는 작가는 「서장」 「이락에서 온 불온문서」 등을 비롯하여 「꿰매입은 양복바지」 「동태찌개의 맛」 등을 통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 예리한 메스를 들고 정면으로 부딪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안수길문학 제3기가 시작된 것이다.(17쪽) 결국 김수동씨(「서장」의 주인공-인용자 주)는 주인이 되고 싶은 것이다. 항상 남에게 매어 살던 생활을 청산하고 자기 스스로 자신의 생활을 설계하고 추진해 가는 주인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게 항상 벽에 막혀 있는 것이다. 사실상 그가 아내를 향해 던진 숭늉사발은 처음부터 그 목표가 아내가 아니고 아내 뒤에 있는 「벽」이었다. 그 벽을 부셔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벽은 그의 손으로 무너뜨리기엔 너무나 견고했던 것이다.(18쪽) 「牧畜記」를 비롯한 해방 전의 초기작품에선 현실에 적응하기보다는 현실에서 도피하여 전원으로 돌아가는 인간상을 보았고 「第三人間型」으로 대표되는 제2기의 작품(해방이후 4․19에 이르기까지)에서는 어쩔 수 없이 현실에 몸을 담고 있으나 현실에 적응하지도 못하고 자기자신에게도 충실치 못하는 좌절과 방황의 인간상을 본다. 그러나 4․19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작품(말하자면 제3기라 할 수 있는)들에서는 현실에 대한 강렬한 문제의식과 여기에 대한 열띤 분노와 저항을 보았다. 현실에 대한 태도가 점차 적극적인 모습으로 선명한 색깔을 띠우고 펼쳐지는 것이다. 게다가 「北間島」 「城川江」 등에서 펼쳐지는 한말(韓末)부터의 우리 민족사는 이 작가의 작품세계가 보다 새로운 차우너으로 발전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청신호(靑信號)이다.(19쪽)   3. 李炯基, 「登山路의 意味」, 󰡔��風車/登校通告󰡕��, 삼중당, 1979   안수길(安壽吉)은 언젠가 두 사람의 동료 작가와 자기를 대비해서 각자의 문학의 차이를 재미있게 설명한 일이 있다. 지금 수중에 자료가 없어 정확하게 인용할 수는 없지만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황순원(黃順元)과 김동리(金東里)와 안수길(安壽吉) 세 사람이 금강산에 올라갔다고 하자. 황(黃)은 이 나무, 이 꽃, 저 바위, 이 맑은 물......하면서 그 자연의 오묘함을 샅샅이 살피며 즐길 것이고, 김(金)은 세부적인 관찰보다도 그 전체적인 신비를 중시해서 철학적 명상에 잠길 것이다. 그때 나 안수길은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도 나는 산 정상(頂上)의 경관(景觀)보다 정상에 오르기까지의 등산로(登山路)가 어떻든가를 생각할 것이다. 비가 오면 길이 망가지지 않을까, 또는 산에 멧돼지가 내려와 아랫동네 밭을 노략질하지 않을까 하는 따위의 일을... 나는 이 글을 六四년인가에 나은 황순원 전집의 그 책 속에 끼어 있는 해설 팜플렛에서 읽었다. 그리고는 안수길의 평가의 적확(的確)함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불과 몇 줄 안 되는 글 속에서 당대의 정상급, 작가 세 사람의 특징을 이렇게 알기 쉬운 말로 또 이렇게 뚜렷하게(287쪽) 밝혀낼 수 있는 안수길이란 작가를,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그때부터 다시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안수길의 이름은 내게 있어 언제나 그 글과 함께 떠오른다. 그 글 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인 대목은 안수길의 자기평가다. 금강산에 가서도 경관이 아니라 등산로를 생각한다는 그 말을 듣고 보니 미상불 안수길은 그말대로의 작가였던 것이다. 등산로를 생각한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그의 문학적 관심이 인간의 구체적 현실과 생활에 그 초점을 두고 있음을 뜻한다. 리얼리즘이 그의 문학의 기반을 이루게 되리라는 사실은 여기서 쉽게 도출될 수 �는 추론이며 또한 그 추론은 정당한 결론이다. 작가가 현실과 생활에 관심을 둔다고 할 때의 그 현실 그 생활은 물론 등 더웁고 배부른 사람의 그것일 수가 없다. 밥먹고 할일 없는 사람들의 그 팔자가 엿가락처럼 늘어진 현실과 생활도 환상이나 신기루는 아니지만 그러한 현실, 그러한 생활은 작가의 관심을 필요로 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것을 성가시게 여긴다. 안수길의 예의 등산로 이야기의 그 말투를 빈다면 산 밑에서 밭갈이를 하지 않고 고대광실에서 떵떵거리는 사람, 그리고 산에 오를 때 가마를 탈 수 있는 사람에게는 비가 와서 등산로가 망가지거나 말거나, 멧돼지가 밭을 노략질 하거나 말거나 자기와는 무관한 강 건너의 불인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망가진 등산로와 멧돼지의 피해를 알리고 그 일에 대해 관심을 가지라 한다면 괜한 소리로 남의 기분을 잡친다고 짜증을 낼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안수길이 관심을 갖는 현실과 생활은 그 현실, 그 생활이 언제나 무거운 짐이 되고 있는 서민들의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288쪽) 서민! 그렇다, 안수길 문학의 특징의 하나는 그 서민성에 있다. 소설의 주인공을 영어로(288쪽)는 히어로우 즉 영웅이라 하지만 안수길의 소설에는 영웅은커녕 영웅의 친척 뻘되는 인물도 찾아볼 수 없다. 영웅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악당 역시 거기에는 없다. 주인공은 물론 주인공을 에워싼 여타의 인물도 모두가 서민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들 서민의 생활은 고달프고 그 나날은 또한 개미 체바퀴 돌기처럼 따분하고 볼품 없다. 그 고달른 생활, 그 따분한 나날은 사회적 여건이 그들에게 그것을 강요한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물리치지 못하는 적어도 그것을 물리쳐 보려고 안간힘조차 써보지 못하는 그들의 무력함의 반증이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수길은 그들을 사랑한다. 그 사랑은 높은 데서 아래로 베푸는 사랑이 아니라 이웃의 이웃에 대한 사랑, 아니 그보다도 훨씬 친근하고 또 농도가 짙은 혈연적(血緣的) 사랑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러한 사랑은 서민들의 가슴속에 간직되어 있는 긍정적 요소를 발견하는 데 있어 민감하다.(289쪽) 사회의식이 강한 작가 안수길은 그 당연한 귀결로서 사회의 부조리를 적극적으로 고발하게 된다. 이 경우의 부조리는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의 문학에는 또 그 구조적 부조리를 최종적으로 책임져야 할 권력 체제의 역학에 대한 저항성이 절로 반영되는 것이다.<<登校通告>>는 그의 그러한 저항성의 일단을 엿보게 하는 작품이다.(292쪽) 그러고 보니 안수길은 <<素朴한 印象>>이나 <<萌芽期>>에만 그치지 않고 모든 작품에서 한결 같이 차분한 객관성과 간결한 문체를 견지하고 있다. 거기서 오는 작품의 전체적 인상은 그 옛날의 이름 있는 도자기를 방불케 하는 그것이다. 그것은 물론 그의 작품의 예술성을 높이는데 있어 큰 기여를 한다. 사회의식과 저항성이 작품의 내용적 바탕이 되고 있는 작가의 경우는 예술성이 대체로 소홀해지기 쉽다는 일반적 통례를 생각하면 이 또한 안수길 문학의 좋은 수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293쪽)   4. 申東漢, 「安壽吉의 文學世界」, 한국문학전집(18), 󰡔��안수길󰡕��, 삼성당, 1986   滿洲 新京(현재 長春)에서 발행되던 滿鮮日報에는 그 무렵 崔南善․廉想涉․朴八陽․李台雨․金朝奎․李石薰․金萬善․孫素熙․尹金淑 등 여러 文人이 모여 있어 國內文壇과는 달리 마치 一種의 亡命文壇 비슷한 樣相을 띠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作家 安壽吉은 가장 활발하게 作品發表를 하여 젊은 熱情을 文學에 불태웠다. 이 때에 발표된 短篇 <圓覺村> <牧畜記> <새벽>, 長篇 <北鄕譜> 등을 보면 滿洲 大陸에 와서 荒蕪地를 開墾하는우리 農民의 敢鬪相을 素材로 한 것들이 많다. 이러한 素材를 가지고 그는 넓은 大陸 벌판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雄渾한 筆致로 엮어 나가고 있다.(559쪽) ...그는 滿洲의 曠野에서 흙과 싸우는 우리 農民의 모습을 그리는 데 큰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 때에 발표되었던 여러 作品을 묶어 그는 一九四三年에 첫 創作集 <<北原>>을 刊行하였다. 당시 國內에서는 소위 國民文學이라는 이름 아래 親日과 附日의 作品만이 활개를 치고 있었던 狀況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短篇集의 刊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을 만도 하다.(560쪽)   5. 申東漢, 「안수길의 문학」, 신한국문학전집(39), 󰡔��안수길선집󰡕��, 語文閣, 1981   안수길의 문학편력을 살펴나가는데서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젊은 시절을 간도를 중심으로 한 만주에서 보냈다는 사실이다.(543쪽) 「通路」의 시대적 배경은 노일전쟁과 동학란을 전후한 이조 말의 1900년대에서 한일합병 직전까지의 개화기로서 여기에 함경도의 한 서민의 가족사를 펼쳐놓고 있다. 이제까지도 우리 문단은 몇 편의 개화기를 작품으로 다룬 장편을 가지고 있다. 해방 전에 발표된 「大河」, 「塔」, 「봄」 등이 거기에 해당되는 장편들인데 이것들은 일제하에서 발표의 자유를 못 가진 채 써졌던 말하자면 절름발이의 작품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행방을 맞이한 오늘날까지 이 이조말엽 개화기의 격동의 세태를 소설화한 것이 이제껏 별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기에 안수길씨가 敢然히 붓을 들게 된 것은 그 의도부터가 우리 문학의 肥沃을 위해 기획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547쪽) ...작자는 윤 노인의 회고록을 소개해 나가는 형식으로 그 가족의 생활을 통해 풍속을 그리고 시대상을 낱낱이 묘사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547쪽) 만세교에 얽힌 사연은 그것이 바로 이 겨레의 수난의 자취요, 榮枯盛衰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증인인 것이다.(548쪽) 사방으로 밀려다니는 전란 가운데의 피난생활-그 가운데에서 민중들의 기대일 데 없는 어려운 살림살이의 모습이 펼쳐지고 쳐들어오지도 않는 노병(露兵)을 피하여 함흥시민이 철수하는 어처구니없는 소동도 벌어진다.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이 변전하여 노일전쟁이 끝나고 일본의 마수는 더욱이 강토에 야욕을 뻗치게 된다.(548쪽) 가족사를 더듬어 나가는 가운데 이조말엽 개화기의 혼돈의 세태를 작품화해 가고 있는 이 「통로」는 그 기법이나 내용에 있어서 문학사에 큰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거편이 될 것이며 이것이 하루 빨리 완결되기를 고대하는 마음 간절하다.(549쪽)   6. 申東漢, 「서민정서와 역사의식」, 한국문학대전집(14), 󰡔��안수길󰡕��, 太極出版社, 1981   장편 「城川江」은 제1부를 「通路」라는 제목 아래 68년 11월부터 <<현대문학>>지에 1년 동안 연재하였다. 말하자면 이것은 대하소설 「성천강」의 프롤로그라 할 수 있다.(601쪽) 장편 「성천강」의 시대적 배경은 노일전쟁과 동학혁명을 전후한 이조말(李朝末)의 개화기에서 한일합병을 거쳐 3․1운동에 이르는 격동기로 여기에 함경도의 한 서민의 가족사를 펼쳐놓고 있다.(602쪽) 윤 원구도 이 겨레의 궐기에 앞장서고 드디어 국내에서는 발을 붙일 수가 없어 간도를 향해 떠나는 데서 작품 「성천강」은 끝을 맺고 있다. 이렇게 한말(韓末)의 개화기에서 일제식민지 치하의 초기인 3․1운동까지의 4반세기를 살아가는 젊은 주인공 윤 원구의 생태를 그려 나가는 가운데에서 우리나라의 근대 여명기의 시대풍속을 극명하게 그려 나가고 있다. 대하소설 「성천강」에서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나 있는 것은 주인공 윤 원구의 인물묘사이다. 그는 적극적인 반일투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대에 영합하는 아부파도 아니다.(605쪽) 그러면서도 스스로 올바른 길을 위해서 살아가려는 양심적인 인물이다. 이것은 어느 시대의 어느 사회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인간형이면서도 또 가장 전형적인 타이프라고 할 수 있다.(606쪽) 악과 선의 대극에 위치하는 중간적인 인물은 작가가 작품에서 형상화하는 과정에서는 가장 까다로운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작가 안수길은 그것을 이 장편 「성천강」에서 본때 있게 해놓았다. 언제나 동요하면서도 올바른 길을 걸어가려는 양심적인 지식인의 자세를 「성천강」의 주인공 윤 원구에게서 우리는 실감있게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작가의 굽히지 않는 문학관의 반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문학의 대전제라는 작가 안수길의 말 그대로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이 근본문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것을 가장 깊이 있고 폭넓게 나타내 준 것이 바로 장편 「성천강」이다.(606쪽) 우리나라 근대사에 있어서 가장 큰 파란을 몰고 온 개화기의 시대상을 그린 장편을 그 동안에 별로 문학작품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아쉬움이 있었다. 이것을 크게 채워 주고도 남는 것이 바로 대하소설 「성천강」의 진면목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장 정통적이면서도 세련된 리얼리즘의 수법을 가지고 민족의 격동기의 모습을 힘있게 그려 나간 작품 「성천강」은 우리 근대 이후의 소설사에 큰 자리를 차지할 거편이 아닐 수 없다.(606쪽)   7. 김윤식, 󰡔��안수길 연구󰡕��, 정음사, 1986   함흥과 간도 사이, 제1의 고향과 제2의 고향 틈에서 오르내린 작가 안수길의 성장과정은 그대로 식민지와 탈식민지의 사이를 방황한 그의 시대와 대응될 뿐만 아니라, 「성천강」과 「북간도」로 대표되는 그의 문학세계와 대응되는 것이기도 하다.(16쪽) 만주국이란 일본 역사책에만 나오는 독특한 나라의 명칭이다.(36쪽) 안수길이 마주에 있는 동안 창작한 작품을 연대별로 보면 「새벽」(1935), 「함지쟁이 영감」(1936), 「부억녀」(1937), 「차중에서」(1940), 「4호실」(1940), 「한여름밤」(1941), 「벼」(1941), 「원각촌」(1941), 「토성」(1942), 「새마을」(1942), 「목축기」(1943), 「바람」(1943) 등 모두 12편의 단편과 장편 「북향보」(北鄕譜, 1944)가 알려진 바의 전부이다. 이들 작품을 연대별로 검토해 보면 그의 작가적 원점으로서의 변하지 않는 부분과 객관적 정세 변화에 따라 변해 간 부분을 알아낼 수 있다. 다시 말해 첫 작품인 「새벽」과 마지막 작품인 「목축기」에 이르는 9년간의 창작활동 속에는 안수길 문학의 본질이 잠겨 있을 것이며 그것은 또 저절로 만주국의 조선계 작가의 본질이기도 할 것이다.(66쪽) 김오성은 이를 두고, “이 작품이야말로 개척민의 생활사의 한 토막이라 할 수 있다”라고 전제하고, “「싹트는 대지」를 읽고 참담한 색조를 만주문학의 성격으로서 인상 받은 것은 기실 이 작품에서 받은 자극에서인 것이다. 안씨는 사실을 문학적으로 서술할 만한 능력을 가진 작가다. 만주개척사의 문학적 탐구를 안씨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다”(<<인문평론>>, 1942, 3, p. 23)라고 보았다. 이러한 평가의 기(71쪽)준은 만주이민 개척사의 전사에 해당되는 세계야말로 재만 조선인 작가의 작품상의 본질이라고 본 점에 놓여 있었음이 분명하다.(72쪽) 조선농민들이 처음 두만강을 넘어가 정착할 때, 중국(청나라)인 땅인 만큼 중국인 지주로부터 땅을 분양받아 소작인으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조건 아래에 있었다. 이 기본조건 아래 삶의 있음의 방식이 만들어졌다. 「새벽」이 이 삶의 방식을 어느 작품보다 먼저(72쪽) 깊이 그리고 정확히 반영한 것이다.(73쪽) 중국인 지주(지팡)와 조선 이민 사이엔 지주와 소작이 관계가 이루어진다. 오직 바가지와 호미만을 갖고, 고향서 야간도주하다시피 하여 온 조선 이민들이 소작조건에 맞추어 살기란 당초 무리한 일이었다. 더구나 조선 이민은 밭농사가 아니고 물을 이끌어와 벼농사를 짓고자 하였다. 그 비용 때문에 지주로부터 빚을 얻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주가 빚을 줄 때는 담보를 반드시 요구하였다. 그것이 인질이다. 인질은 주로 딸이 선택된다. 빚을 갚지 못하게 되지 딸을 빼앗기게 된다. 아비는 빼앗긴 딸을 찾기 위해 지주 집에 찾아가 불을 지르든가 살인을 하는 것이 최서해적인 창작방법론이다. 이를 보통 우리 문학사에서는 자연발생적인 프롤레타리아문학이라 한다. 소재를 궁핍한 곳에서 찾고 지주(공장주)와 소작인의 대립구성 그리고 살인, 방화로 끝을 맺는 자연발생적인 창작방법은 최서해의 「홍염」, 김영팔의 「검은 손」, 이기영의 「세 거지」, 주요섭의 「개밥」 등에도 어느 정도 해당된다(백철, 「조선신문학사조사」, 현대편, 백양당, 1949, p. 38). 이러한 초보적인 단계에서 목적의식에로 방향 전환한 것은 「낙동강」(1927)이후이다. 프롤레타리아문학이 뚜렷한 계급의식을 내세워 창작을 할 단계에로 성숙했느냐 아니냐는, 구체적으로는, 어떤 방법론을 가졌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것은 권환의 「목화와 콩」(1931), 이기영의 「홍수」(1930), 「서화」(1930) 등에서 비로소 논의가 가능해진다. 20년대와 30년대 소설의 차이를 가능케 한 그 소설형식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우리는 그것을 매개적 인물 설정에서 찾아낼 수 있다. 계급 사이의 대립을 직접적으로 다룬 것이 자연발생적인 것이고 또 그것이 20년대 프로소설의 형식이라면 30년대 프로소설은 매개인물(지식인 또는 의식분자)을 설정함으로써 계급대립에로 나아가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김윤식, 「한국근대문학사상비판」, 일지사, 1978, p. 244. 이하 참조).(73쪽) 「새벽」은 최서해의 「홍염」 쪽에 가까운 성격을 지니고 있다. 거(73쪽)기에는 30년대 소설의 특징인 매개적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데, 이 사실은 그만큼 「새벽」이 자연발생적인 단계에 놓여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개척이민의 초기단계를 그리기 위해서는 자연발생적 단계가 당연한 순서일 터이다. 만주 개척이민의 전사를 다루는 일이 매개인물 설정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74쪽) 이러한 개척이민의 비극을 소년 <나>의 목격담으로 엮어 나간 것이 「새벽」이 작품상으로 성공한 으뜸 조건이다. 또한 「새벽」은 개척이민의 전사에 해당된다는 점이 이 작품의 소재상의 최대의 강점이라 할 수 있다.(75쪽) 안수길이 개척이민사를 보다 깊은 곳에서 탐구한 것은 1941년에 씌어진 「벼」와 「원각촌」 두 편이다. 「벼」는 조선민족 단위의 생존권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주제의 강점을 띤 것이며, 「원각촌」은 한 개인의 강렬한 개성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어느 누구도 이르지 못한 독특하고도 높은 수준을 보인 것이다. 특히 민족 단위의 생존방식을 다룬 「벼」는 훗날 안수길의 대작으로 꼽히는 「북간도」의 기본구도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작품이다.(77쪽) 만주국 건국 이전과 그 이후를 구별하는 일은 만주개척이민사를 이해함에 제일 중요한 요소이다. 이 사실을 떠나면 만주문학은 물론이지만 안수길 문학의 특질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가 없게 된다. 앞에서 「새벽」과 「새마을」을 살피는 자리에서 이 문제를 조금 엿본 바 있었거니와, 「새벽」은 만주국 건국 이전의 일이고 「새마을」은 이후의 것이다. 「새벽」이 「새마을」보다 훨씬 심각하고 깊었다는 것, 「새마을」이란 「새벽」의 후일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앞에서 조금 엿볼 수가 있었다. 조선인에 있어 만주개척이민사는 만주국 건국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고 따라서 그 고난의 역사도 그때에 비로소 겪었던 탓이다. 만주개척이민의 전사(前史)에 해당되는 것이 안수길 작품(77쪽)의 참주제인 것이다. 만주국 건국 이후란 따지고 보면 민족단위의 고통이란 거의 없거나 적어도 내면화된 것일 따름이다. 만주국이란 일본 군부의 괴뢰정권인 만큼 그 정책 속엔 조선계 이민을 일본계 이민 다음으로 우대한 사실만 보아도 이 점을 알아차릴 수가 있을 것이다. 「새벽」에 비해 「새마을」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낙천주의에 빠져 있는가도 이 문제와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다. 이런 전제에서 볼 때 「벼」의 배경이 1930년으로 되어 있음은 이민의 전사의 막바지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78쪽) 벼농사란 무엇인가. 조선계 이민사는 벼농사를 떠날 수 없음을 그 특징으로 한다. 거치른 만주벌판도 예외는 아니다. 벼농사는 물을 떠날 수 없는 만큼 관개사업이 첫 과제이다. 관개사업이 집단적 노동을 요청한다는 것, 그것이 곧 조선인 공동체를 필연적으로 만들어 낸다는 사실이야말로 벼농사가 갖고 있는 생산적 성격이다. 이 점에서 단순히 <민족>이라는 핏줄과 구분된다. 피가 물보다 진하다고는 하나, 만주 이민의 경우는 결코 그렇지 않다. 그 반대이거나 적어도 동등한 것이다. 물은 피보다 진하든가 적어도 같은 수준의 무게를 갖고 있다. 벼농사를 모든 농사 중 으뜸으로 치고, 벼농사로써 생존의 터밭을 삼고자 하는 지향성은 조선 민족만이 가진 특수성이다. 이 점은 적어도 만주에 살던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한 가지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조선인이라는 것 자체가 바로 공동체의 기본단위의 제일 밑바닥에 놓인 것이라 하기는 어렵다. 공동체의 기본 단위란 핏줄에 못지않게 삶의 방식으로서의 생산양식도 놓여 있기 때문이다. 벼농사는 민족적인 단위와 생활적인 단위가 동시에 결부된 것인(78쪽) 만큼 만주개척이민사의 특징을 제일 잘 보여 줄 수 있는 구체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만주벌판에 벼농사를 하기 위해 관개사업을 벌이는 일은 이처럼 조선민족으로서의 공동체와 노동공동체의 완벽한 결합체를 만들 수 있지만 거기에는 이를 방해하는 세력 또는 이와 대립되는 조건들도 결코 만만치 않으며 이에 대한 싸움은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어 있었다. 그 반대 조건들은 땅주인, 중국관헌, 원주민 등이다.(79쪽) 만주에서의 땅주인이란 무엇인가. 만주는 청나라 땅이고 민국 건국 이후엔 중화민국의 국토인 만큼 당연히 중국 정부가 지주이거나 중국인의 개인 소유로 되어 있었다. 중국 정부는 각 성에 관리를 파견하여 그들로 하여금 행정 및 치안을 맡겼다.(79쪽) 이 사건의 발생이란 두 가지인데, 이 두 가지 사건이 작품 「벼」가 차지하는 성숙된 단계의 조선인 개척이민사의 참모습에 깊이 관련을 맺게 된다. 첫째 사건은 벼농사 및 이주민 증가에서 오는 원주민의 저항이었다. 어느 시기에는 중국 정부도 대체로는 방치원의 생각과 같아서 만주개척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이주증(移住證)을 발급하여 조선인 이민을 환영하였으나, <바가지와 보퉁이를 이고 거지 떼같이 몰려오는> 조선인에 원주민들의 불만은 증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선인은 벼농사를 시작했던 것이다. 원주민과 이민 사이의 싸움은 지주 및 중국 정부가 중재함에도 불구하고 살인사건에까지 이르게 된다.(80쪽) 둘째번 사건은 중국관헌에 의해 일어난다. 여태까지 중국 최고 관리인 현장(縣長)은 조선인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민국 17년(1928)이래 장개석의 북벌이 성공하여 청천백일기가 북만주에도 휘날리게 되자 중국은 종래의 매관매직의 썩은 정치를 없애고 삼민주의에 입각한 힘센 정치를 펴고자 하였다. 거기에 발탁되어 온 인물이 소현장(邵縣長)이었다. 북경대학을 나오고, 일본 유학까지 한 소현장은 패기에 있어서나 정치의식에 있어서나 진보적이었다.(81쪽) 「벼」의 이러한 결말에서 드러나듯, 결국 조선 개척민은 일본 세력을 업고, 일본영사관의 힘을 빌어 중국 정부와 대결하는 형식을 취하게 된다. 일본인 나까모도와 그가 이끌고 올 일본영사관이야말로 매봉촌의 구세주인 셈이다. 일본영사관이 무서워 소현장도 편의대도 감히 총을 쏘지 못했음은 너무도 명백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단계만 나아가면 만주국 문학에 이르게 된다. 일본(83쪽) 군부의 허수아비가 만주국이라면, 만주국 이념에 맞는 문학 건설은 곧 친일문학에로 나아가는 길목에 해당된다. 일본영사관의 비호를 받아 중국 원주민을 위협하는 가해자 집단으로 매봉촌이 우뚝 서는 일이 눈앞에 닥쳐오고 있다. 조선 개척민이 일본인 다음으로 원주민 침략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일이 「벼」가 나아갈 다음 단계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벼」는 만주국 건설 직전의 조선 개척이민의 현실을 제일 잘 반영한 작품이라 평가될 수 있겠다.(84쪽) 「벼」에 대한 이와 같은 해석은 만주국 건국과 그것의 이념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달린 것이라, 만주개척이민사의 전사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개척이민의 전사 중에 최후 단계가 「벼」인 셈이다.(84쪽) 「벼」가 차지하는 위치는, 작가 안수길에 있어서도 중요하지만 만주개척이민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전환점에 놓이는 것이다. 만주국 건국 이전과 이후로 나눌 때, 「벼」가 만주국 건국 직전의 상황에 해당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조선개척이민사의 제2단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안수길은 「싹트는 대지」에서 작품 「새벽」을 내놓고 그것을 통해 조선개척이민의 제1단계의 생존권 문제를 보여 주었으며, 「벼」를 통해 제2단계의 그것을 보여 준 것이다.(85쪽) 「새마을」은 앞에서 조금 살펴본 바와 같이 만주국 건국이념이 바탕에 깔려 있으며 「토성」은 그 이념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는 이종의 국책 작품에 속하는 것이다. 「벼」에서 「토성」, 「새마을」에로 나아가는 길은 탄탄대로여서, 거기엔 대외적인 측면에서 가해 오는 고통이나 갈등은 없다. 만주국 정부(85쪽)가 그런 조건들을 말끔히 해결해 주었던 것이다. 그 대신 거기엔 가족 내부의 갈등 또는 사랑의 문제 등이 서서히 고개를 내밀게 된다. 말하자면 외부의 적과 싸우는 단계에서 민족, 가족, 마을, 내부의 인간적 문제들과 싸우는 단계에로 이르게 된다. 이러한 큰 변화의 길목에 「원각촌」(1941)이 놓여 있음은 음미될 만한 일이라 할 수 있다.(86쪽) 작가 자신은 「건국 전, 만주에 있어서의 반도인 선구 개척민의 생활을 발굴하는 일련의 작품 중의 일편임을 말하여 둔다」고 머리에 밝혀 놓고 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새벽」과 한 가지로 만주국 건국 이전의 시기의 조선 개척민 이민사를 다룬 것이다. 그렇지만, <반도인 선구 개척민의 생활의 발굴>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듯 개척민의 초기단계에 속하는 것인 만큼 건국 직전의 희망찬 세계를 다룬 「벼」와는 구분되는 것이기도 하다.(88쪽) 그는 한 마리의 늑대이다. 간도에 들어온 한 마리 늑대를 그린 작품 「원각촌」은 다음 두 가지 점에서 「새벽」이라든가 「벼」 계통의 개척이민사와는 질적으로 구분된다. 첫째 조선 민족단위나 가족단위의 생존 방식이 아니라 순전히 한 개인의 생존권을 다루었다는 점. 사나이 억쇠는 가족도 족보도 고향도 없다. 이원보라 불리는 그는 혼자이고 정착을 싫어하였다. 산판을 돌아다니며 나무 자르는 일을 좋아하였다. 그러니깐 집단의 영웅이 아니라 한 마리 늑대로서의 고독한 영웅상이다. 이것은 작품 「원각촌」이 시정(市井)의 리얼리즘에 맴도는 창백한 지식인의 심리 해명에 전전긍긍하는 국내 문단을 충격한 제일 큰 이유였다. 유진오가 <큰 물에 큰 고기가 산다>는 것은 이런 뜻으로 해석된다. 거칠고 외로운 그러나 강인한 개성을 지닌 인물을 이 작품에서 만들어 낸 안수길의 작가적 역량이라 할 수 있다. 둘째는 아내의 부정이 도덕적인 문제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점. 아내의 부정은 도덕문제가 아니라 가장 단순하고 원시적인 <늑대의 관습>이자 <늑대의 본능>이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모랄감각이 전혀 스며들지 못한다. 개인의 생존권의 최소 단위를 문제삼을 수 있을 따름이고, 가정이라든가 종족단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89쪽) 사람을 짐승의 자리에서 바라보는 일은, 원시적인 세계에서는 으뜸 자리에 오는 일이다. 먹는 일과 종족번식을 위한 생식작용만이 짐승으로서의 사람의 가장 기본 조건이다. 만주 개척이민의 원시적인 유형은 물을 것도 없이 이런 인물의 창조를 통해 찾아낼 수가 있을 것이다.(90쪽) 「원각촌」의 삵은 누구인가. 해룡선사의 돈으로 자기 명의의 땅을 산 중국에 입적된 조선인 한익상이다....「붉은 산」에서는 삵이 민족 내부에서의 악종이고 민족 외부에서는 선종이었다. 이 때문에 한 인물 속에 선악이 함께 있었다. 「원각촌」에서의 한익상은 민족의 안에서도 밖에서도 악종이었다. 한편 억쇠는 안으로든 밖으로든 관계없이 선종도 악종도 아닌 한 마리 늑대였을 뿐이다.(91쪽) 「원각촌」이 비록 <<국민문학>>지에 발표되긴 했으나 작가는 퍽 애착을 가진 듯하며 또 이 작품이 국내에 반향을 일으켜 원고 청탁이 들어왔다는 점은 한 번 더 눈여겨 둘 필요가 있다. 개척이민의 집단적 의의를 다룬 작품이 아니라, 그 집단에 관련되기는 하나 오히려 집단에서 이탈하고자 하는 고독한 인물을 창조함으로써 만주개척이민의 영웅상을 보여 준 것이다. 이것이 국내 작가들에 일층 관심거리가 될 수 있었다.(91쪽) 「목축기」(<<춘추>>, 1943. 4)는 안수길 문학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을 만큼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작가 자신도 이 작품만은 소중히 하였다. 태극출판사 「안수길」편 속에 「성천강」과 함께 단편으로서는 오직 이것 한 편을 여러 곳 개작하여 싣고 있음이 그 증거이다.(93쪽) 염상섭의 견해에 따른다면 「목축기」가 <새로운 경지>를 보여 주는 작품이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경지>란 과연 무엇인가. 이 물음에서는 상당한 설명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같은 글(창작집 「북원󰡕��의 서문-인용자 주)에서 염상섭은 매우 솔직하게도 안수길의 종래의 작품들이 “차라리 그 모(93쪽)든 점을 제쳐 놓고라도 이 작가가 주로 취재하는 전기(前期) 개척민의 생활상이 주는 엽기적 흥미만으로도 일독의 가치가 있다고 믿는바”라고 말해 놓고 있는 터이다. 중국인에게 딸이나 아내를 인질로 하여 돈을 빌고, 살인 방화로 종말을 고하는 일이라든가 원주민과의 피투성이 싸움이라든가 마적단의 습격으로 온 마을이 잔악하게 학살되는 일들을 그린 전기 개척이민사가 <엽기적 흥미>의 일종임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 그 1단계가 「새벽」이고 제2단계가 「벼」였으며, 그 제3단계가 「목축기」인 셈이다. 그렇지만 제3단계인 「목축기」는 「새벽」, 「벼」와는 다음 한 가지 점에서 결정적으로 구분된다. 만주국 건국 이전과 이후가 그것이다. 「벼」는 만주국 건국 2년 전이었다. 「목축기」는 건국 이후 상당한 기간이 지난 뒤의 일을 그린, 이른바 개척 전기가 아니라 <후기>에 속하는 작품이다. 그러므로 후기엔 <엽기적 요소>란 줄어들거나 다른 양상을 띠지 않을 수 없는 형편에 있다.(94쪽) 「목축기」보다 한 해 먼저 쓴 것이나 미발표된 작품에 「토성」(土城, 1942)이 있다. 「토성」은 「벼」에도 연결되지만 김동인 이래의 삵과 같은 인물의 계보와도 연결되는 만큼 「원각촌」과 관련이 맺어진다. 「토성」은 만주사변이 터진 1931년에서 만주국 건국에 이른 과정 속에 놓인 조선 개척민 가정을 다룬 것이다.(94쪽) 학수는 명수 집안의 삵이었다. 학수의 욕심은 돈이었다.(95쪽) 「토성」은 매우 엽기적이다. 그러나 그 엽기적 성격은 「새벽」이라든가 「원각촌」의 경우와는 썩 다르다. 학수라는 인물이 얼마나 영악한가를 문제삼음에 있어 <돈>이 핏줄보다 우위에 섬을 선명히 보여 준 점에서 작품 「토성」은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하면 「목축기」는 염상섭의 지적과 같이 새로운 단계를 보이는 작품이다....찬호가 학생을 훈육하는 직업을 버리고 돼지를 키우는 일에 훨씬 큰 보람을 느끼는 이유야말로 이 작품이 개척이민 <후기>작품에 해당되는 즉, 참주제가 놓인 곳이다. 교사에서 돼지 키우기에로의 이행이 곧 개척이민의 전기와 후기에 엄밀히 대응되고 있다. 그것은 또한 「벼」의 주인공인 교사인 찬수에서 「목축기」의 목장주 찬호에 대응되는 것이기도 하다.(95쪽) 「목축기」는 국내에서 돼지를 사서 기차로 수송해 오는 찬수와, 그 돼지를 와우산 농장에서 기르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교사직을 버리고 농민이 되어 만주국 건국이념에 이바지하겠다는 주인공 찬호의 굳건한 의지가 심어져 있다. 그리고 염상섭이 지적한 바와 같이 「목축기」는 <완결된 작품이 아닌 모양>이다. 작가는 「목축기」 후속편을 「북향보」(<<만선일보>>, 1944. 12. 1-1945. 7. 4)라고 하여 장편으로 만들어 내었다. 「북향보」의 주인공은 「벼」의 찬수, 「목축기」의 찬호와 같은 계보에 속하는 인물 찬구이다.(97쪽) 「목축기」의 신념이 곧 「북향보」에 이어져 있는 만큼 「목축기」는 안수길 문학의 제3단계에 속하는 중요성이 인정된다. 그렇다면 「목축기」의 참된 모랄은 어디 있는가. 이런 물음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다. (A)하나는 작품 자체에서 참주제를 이끌어 내(97쪽)는 방식. 이 경우 「목축기」의 참주제는 만주국 이념의 하나인 만주 농업건설 이념에 해당될 것이다. 만주에서 뿌리를 내려 만주국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은 숭고한 것이자 현실적인 것인 만큼 거기엔 아무런 잘못이 없다. (B)다른 하나는 민족주의적인 모랄감각이다. 그것은 작품의 참주제와 구별되는 작가의 모랄감각에 관련된다. 이 (B)에 관해서는 「부억녀」를 통해 좀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98쪽) 이 글(「싹트는 대지」의 염상섭의 <서>-인용자 주)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싹트는 대지」가 국내의 <조선문학>과는 다른 대륙문학(개척문학)의 특징을 가졌고, 그로써 <조선문학>에 포함된다는 점이 그 하나이고, 그것(99쪽)에 멈추지 않고 나아가, 장차는 만주국 문학 즉 5개 민족 협화를 이상으로 하는 국민문학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다른 하나이다. 조선문학으로서의 만주국 조선계 문학이냐 만주국 문학으로서의 조선계 문학이냐를 문제삼는 일은 「싹트는 대지」로 말미암아 비로소 구체적으로 가능해졌다. 조선어로 씌어진 것이면서도 국내의 것과는 다른(조선문학의 어느 구석에서도 엿볼 수 없는 신선미)것이 「싹트는 대지」라면, 그러면서도 아직 만주국 문학(국민문학)축에 들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면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싹트는 대지」는 이 갈림길에 놓여 있었던 셈이다. 만일 「싹트는 대지」에서 나아간다면 <꽃피는 대지>, <여름 여는 대지>가 전개될 것이다. 그럴 때 그것은 조선문학이기보다는 만주국 문학에 일층 가까울 것이다.(100쪽) 「싹트는 대지」는 2백만 조선계를 배경으로 갖고 있는 문학이라 할 수 있고, 여기에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를 묻고 있는 문학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그것은 구체적이자 상징적인 창작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100쪽) 일본 군부의 주도 아래 놓인 만주국인 만큼 실질적인 주인은 일본계였다. 형식상으로 일본계 속에 조선계를 포함하고 있지만 이 때문에 다른 종족들의 조선인의 특권 부여의 비난이 있었지만, 요컨대 이 특권적인 조건 때문에 조선계 인구가 급증된 것으로 분석된다.(101쪽) 만주국이 민족 협화를 외치며, 이에 상응하는 문화건설에 나아갈 때 그 최고 통치기관은 무엇이었을까. 물을 것도 없이 관동군 보도부였다.(101쪽) ...조선계가 전혀 언급되지 않음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된다. 일본인들이 만든 「만주 연감」인 만큼 그들은 일본계 속에 <鮮系>라 하여 조선계를 포함했다는 관점에서 정리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일본어계란 일본어로 쓴 문학만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만선일보>>란 거기에 포함되지 않으며 따라서 「싹트는 대지」도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102쪽) 어째서 안수길은 만주국 문학의 조선계 작품으로 「원각촌」라든가 「벼」, 「새벽」 등을 내세우지 않고, 만주와는 아무 관련 없는 부억녀를 제출한 것일까. 이런 의문이 솟긴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점뿐이다. 즉, 염상섭이 주장하는 생각과 <<신천지>>의 주간 오랑부부의 생각 사이에 큰 차이가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 「싹트는 대지」가 출간되었어도 만주국 문단에서는 전혀 관심을 보여 주지 않았다. 염상섭은 이 점이 불만일 뿐 아니라 이해하기 곤란하기까지 한 일이었다. 2백만을 헤아리는 조선인을 배경으로 갖고 있는 조선계 문학을 외면하고서 어떻게 만주국 문단을 이룰 수가 있으며 이른바 <협화정신>을 살릴 수가 있겠느냐고 염상섭은 본 것이다. 그러기에 염상섭은 안수길이 동의하든 않든 상관없이 그의 창작집 「북원」을 「어데보다도 먼저 만주국 예문단에 보내고자 하는 바」라고 외쳤다. 그렇지만 오랑 중심의 <<신천지>>의 편집 태도는 이와 달랐을 것이다. 그들의 처지에서 볼 때 조선인의 만주국 개척사란 만주 원주민과의 투쟁사가 아니었던가. 비록 상해로 망명은 가지 않고 일본 관동군 지배 하에서 허깨비인 만주국에서 문학 활동을 하고 있긴 하나 그들에겐 그들 나름의 주체성이 없을 수 없었다. 더구나 조선인은 법적 지위로 보아, 일본인과 같은 취급을 받고 있는 처지가 아닌가.(107쪽) 이러한 사정은 안수길에게도 그대로 해당된다. 재만 각계 민족의 대표작 특집을 하는 마당에 「새벽」이나 「원각촌」을 내보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들 작품들이 강인한 조선인의 삶을 위한 투쟁력과 생존권에 대한 싸움으로 일관되어 있는 만큼, 그것은 곧 다른 민족과의 충돌을 뜻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인 내부의 갈등에서 빚어지는 문제점들이 곧 조선인의 성격적 결함으로 파악될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107쪽) 그러니까 일본 본토에서 바라볼 때 만주국 문학의 중심은 만주를 배경으로 글을 쓰고 있는 일본작가에 있고 그 양념으로 만주(원주민)계와, 소련혁명 후 쫓겨 온 백계 러시아계에 있음이 드러난다.(109쪽) 우리는 지금껏 만주국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물었다. (가)일본중심의 문학, (나)중국인 중심의 문학, 그리고 (다)염상섭과 안수길이 생각했던 <왕도낙토>의 제3세계로서의 문학 등이 그 구체적 대답이었다. 조선인으로서 남의 땅 만주에 살 권리가 있는 것일까. 이 물음을 (다)는 당연히 내포하고 있다. (나)중국인의 처지에서 보면 (가)는 침략자이자 용납될 수 없는 세력이다. 또한 (다) 역시 못 마땅한 침입자임에 틀림없다. 안수길이 오랑을 향해 <당신네나 우리나 다 같은 처지니 협조해서 문학활동을 하자>는, 엄밀히 말해 잠정적인 의미밖에 없다. 근원적인 문제에서는 모든 것이 명백하다. 문학이란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는 세계인 만큼 염상섭으로 대표하는 (다)의 세계는 따라서 썩 비문학적인 것이다. 안수길이 「부억녀」를 내놓은 것은 따라서 (다)에 속하긴 하지만 <조금> 근원적인 것에 가까이 간 것이라 할 수 있다. 안수길은 만주이민문제를 제시하는 대신 조선문학만을 조심스럽게 제시한 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안수길이 (다)의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세계관에 설수 있는 것은 「북간도」에서이다. 그것은 민족문학이라는 이름의 세계관을 얻은 다음에야 겨우 가능하였다.(112쪽) 「만선일보」가 무엇이었느냐에 관한 논의는 우리 근대문학을 주체적인 측면에서 바라볼 때 비로소 바른 이해에 이를 수가 있다. 그것은 1945년 8월 15일의 해방에서 실마리를 풀어야 되는 과제이다. 안수길에 있어 이 과제는 어떻게 인식되는 것이었을까. 이 물음은 「북향보」(1944)에서 「북간도」(1967)에 이르는 과정 전체에서 해답을 이끌어낼 수밖에 없는 일이다.(114쪽) 작가 안수길에 있어 창작 수준 및 창작 동기, 그리고 작가로서의 자존심이 창작집 「북원」(1944)에 응축되어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국내 문단에서 바라볼 때도 간도의 문학 하면 제일 먼저 안수길을 꼽았으며, 만주국 만주계(중국계)쪽에서 바라볼 때도 조선계의 대표적 작가로는 안수길을 꼽았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114쪽) 만주 개척민 후손들이 만주를 <천대만대> 살아갈 <고향>으로 본 자리에서 작품을 쓴다는 것을 안수길은 작가적인 최종 단안으로 제시해 놓고 있다. 만주땅을 자기의 천대만대 고향으로 생각하는 일이 작가 안수길이 「북향보」를 집필하던 1944년 12월에 있어서의 최종적인 단안이었다고 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두고 어떻게 그 단안을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즉, 안수길은 「북향보」의 연재가 채 끝나기도 전인 1945년 6월말에 고향 함흥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던 사실이다. 그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엄연히 있었던 것이다. 그 고향에는 할머니와 아버지까지 있는 곳이었다. 안수길은 간도를 떠난 것을 건강 때문과 일제의 패망이 눈앞에 다가 온 점을 들고 있다.(115쪽) 이러한 상태였다면 그가 작가로서 최종 결론으로 삼았던 조선인 개척사에 관한 결심이라든가 포부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를 우리는 손쉽게 알아차릴 수가 있다. 그렇다면 자손만대에 만주 땅을 고향이라고 생각한다는 1944년 12월에 표명한 그의 의지란, 한갓 수사학적인 것이었을까. 이러한 의문을 마땅히 던질 만하다. 왜냐면 만약 만주 땅을 자손만대의 고향이라고 생각할 각오였다면 일제가 패망하든 않든 그것은 상관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몸의 건(115쪽)강 문제도 역시 그러하다. 뼈를 만주 땅에 묻는 일이라면 용정이라 해서 안될 이유는 없다. 이렇게 보아 온다면 안수길 문학의 중심에 놓인 만주개척이민사란 것도 어느 정도 방편상의 문제에 지나지 않았음을 우리는 곧 알아차리게 된다. 그의 나이 35세 때였다. <<만선일보>>에서 물러났고, 거기에 연재한 장편 「북향보」도 끝나갈 때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미련 없이 간도를 떠날 수가 있었다. 그에게는 부모와 조상이 있는 고향이 다름 아닌 함흥에 오롯이 있었다. 자손만대에 만주 땅을 고향으로 하겠다는 것은 한갓 헛소리로 돌아간 셈이다. 적어도 해방되던 그해와, 그로부터 3년간의 투병생활 중에는 그러하였다. 그에게는 출애굽기적인 민족운동 혹은 가족이동의 체험이란 아주 없는 형편이다. 8․15가 그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광복(빛의 회복)의 의미란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116쪽) 만주에 있어 조선인은 1939년엔 1,065,523명이던 것이 해방되던 1945년엔 2,163,115명으로 늘어나 일본인을 몇 배 앞지르고 있었다. 이들은 준일본인의 대접을 받아 초기 개척민의 고통 없이 땅을 경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백만을 웃도는 조선인의 상당수가 그야말로 조부들이 피땀흘려 개척한 만주땅을 <천대 만대의 고향>이라 생각하고 그대로 머물렀다고 볼 수가 있다. 오늘날 길림성 연변 조선인자치구를 이루고 있는 이백여만 명의 조선인이 이(117쪽) 사실을 증거한다. 만주에 있어 조선인은 일본인과는 달라서 가해자가 아니라 생활인이었으며, 그들은 실상 돌아갈 고향도 없었던 계층들인 만큼 만주 땅이 그대로 고향일 수밖에 없었다고 볼 것이다. 안수길처럼 돌아갈 고향이 있는 사람들은 물론 해방의 환희 속에서 고향을 찾아갔을 것이다. 이 제2의 부류들은 대개는 만주국 건국 이후 이주해 온 계층들일 것이다. 그들은 뿌리가 없거나 약한 자라 쉽게 만주 땅에 왔고 또 쉽게 떠날 수가 있었을 것이다. 안수길의 집안도 근본적으로는 이런 부류에 든다. 만주서 낳은 개척민의 제2세대에 속하는 윤동주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118쪽) 그는 해방되기 두 달 전에 귀국하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그보다 먼저 고향에 와서 과수원을 경영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안수길 문학을 설명함에 있어 매우 중요하고도 특수한 뜻을 갖는다. 무엇보다도 그는 역사의 현장에서 물러서 있었던 것이다. 만주국이 무너지는 소리를 그는 직접 듣지 못했고 그 혼란을 그는 보지 못하였다. 만주국 조선계 작가의 대표적인 존재로 꼽히던 그가 정작 만주국 붕괴의 현장에서 일찌감치 물러나 있었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일종의 직무유기와 다름없는 죄의식을 유발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가 성실한 작가의식에 불타오르면 오를수록 이 <작가적 죄의식>은 깊은 상처를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만들어 놓고 만 것이다. 병마에 시달렸기 때문이라든가 일제의 패망을 미리 알았다든가는 작가의 마음자리에서 나오는 말일 수가 없다. 그는 갈 고향이 따로 있었다. 만주․간도․용정 따위는 잠깐 몸을 두고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그가 갖고 있었음이 여지없이 증명된 마당에서 새삼 그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작가로서의 부끄러운 일종일 터이다. 이 죄의식 또는 부끄러움의 드러남과 그것의 극복과정이 장편 「북간도」임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 이 점에서 「북간도」는 안수길의 작가로서의 자존심 회복이고, 다만 그 점에서 이 작품은 기념비적이다. 그리고 이 작품이 안수길을 떠나 우리 근대문학사에서도 기념비적이라는 점에 관해서는 또 다른 논리가 필요할 것이다.(120쪽) 안수길이 해방 후에 쓴 첫 작품은 「여수」(1948)이다. 이 작품은 여러 가지 점에서 특수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의 작가로서의 부끄러움과 죄의식의 실마리가 이 작품 속에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120쪽) 첫 작품 「여수」는 서울에 적응하지 못하는 월남작가이자 만주에(122쪽)서 미리 도피해 온 작가 안수길의 내면풍경에 해당된다. 만주국 조선계의 대표작가로 남과 더불어 스스로 자부하던 안수길이 누구보다 먼저 그 개척민의 피땀서린 만주를 헌신짝모양 팽개치고 귀향한 사실은 병 때문이든 무엇이든 엄연한 사실에 속한다. 오히려 다른 친구들은 만주에 그대로 있는 형편이다. 작가로서 죄의식, 부끄러움의 의식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안수길은 계속 작가로 활동하고자 했다. 낯선 서울에서 3년 만에 다시 작가로 출발함이란 어떤 마음가짐이어야 하며 어떤 소재 및 내용을 붙들어야 하는 것일까. 숙을 통해 주인공 철이 깨치는 삶의 태도에서 우리는 만주국 조선계의 대표적 작가에서 한갓 초라하고도 겸허한 신진작가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다.(123쪽) 「여수」의 주인공 철이 만주서 월남한 M신문사 특파원이란 점, 그리고 현재 서울의 어떤 신문사 기자라는 점이야말로 이 작품이 이루어진 근본 동기인 까닭이다. M신문사 시절과 지금 경향신문사 시절을 비교할 수 있는 자리에서 첫 작품 「여수」가 태어날 수 있었다. 치수 맞은 간도 용정과 치수 맞지 않는 서울과의 비교에서 절망하는 일, 그리하여 만주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은 심리적 퇴행을 창작동기로 삼은 것이 「여수」의 참주제이다. 주인공 철이 숙이의 참상을 보고, “서울이 좁은 것, 칫수 안 맞는 것, 어깨를 펼 수 없는 것, 그것은 내가 생활을 잃어버린 탓은 아닐까?”라고 하여, 작품의 결말을 삼은 것은, 물론 작가의 앞으로의 결의를 보인 것이라 할 수가 있다. 앞으로 적극적으로 서울에서 살아가리라는 것, 곧 적극(124쪽)적으로 창작활동을 해야 하리라는 결심의 표명이다. 안수길에 있어 삶(어떻게 사느냐)과 창작은 별개가 아니고 완전히 동일한 물건인 탓이다. 이 점에서 그는 철저한 인생파 계보에 든다.(125쪽) 이처럼 어떻게 사느냐와 작품이 나란히 가는 것이라 할지라도 작품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어떤 계기가 필요하다. 그 계기 없이는 결코 작품이 낳아지지 않는다. 그것이 「여수」에서는 신문기자이다. 정확히 말하면 「여수」를 낳게끔 한 계기(참주제)는 만주로 향하고자 하는 작가의 심리적 퇴행의식이다.(125쪽) 작품 「밀회」는 그러니까 소시민의 일상적 삶 속의 심리를 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 역시 작품이 이루어지게 된 매개 개념(참주제)은 만주체험이다. 미애와 의사와의 관계를 서술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125쪽) 작품 「밀회」도 만주체험을 매개로 하여서 비로소 씌어질 수 있었다. 작품 어느 구석이든 만주체험을 이끌어 들이지 않고는 도무지 작품을 쓸 수가 없었던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126쪽) 세 번째 작품 「범속」(1949)은 만주체험의 연속성이 매우 교묘하게 이중적으로 용해되어 있다....주의 깊은 안수길의 독자라면 <찬수-찬구>라는 이름이 마주개척이민사를 다룬 「벼」, 「북향보」의 주인공 이름임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한편 한철은 어떠한가. 끝자만 딴다면 <철>이 되는데, 이 이름은 첫 작품 「향수」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다. 그런데 「향수」에 나오는 철은 M신문사에 근무하다 월남하여 서울 모신문사 문화부 기자 노릇하는 사람이다. 철은 서울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초조해 하는 지식인이며 이 점은 3년만에 사회에 복귀하여 작가로 되돌아온 작가 안수길의 투영이라 보아 큰 잘못이 없다. 그러니깐 「범속」에 나오는 한철은 안수길을 지칭한다고 볼 수가 있다.(126쪽) 흡사 「밀회」에서모양, 거꾸로 된 세상이라든(127쪽)가, 심리라든가, 가정을 보여주는 것이 안수길의 만주 이후의 작품구성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범속」의 주제는 유별난 인간이나 그런 인간의 행위의 허위를 뒤집어 보임으로써 삶의 담담함과 건실성을 드러내고자 한 곳에서 찾아 마땅하다. 아마도 이것은 40대를 바라보는 작가의 성숙 또는 상식성을 말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128쪽) 작품 「범속」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런 주제 쪽이 아니다. 주제보다도 항시 먼저 있고, 그것이 없으면 전혀 작품이 이루어지지 않는 매개 개념 또는 계기(참주제)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우리의 관심이 놓여 있다고 할 때 「범속」에서 그것은 무엇인가. 여수에서는 그것이 안수길 자신의 모습인 M신문사 R지국 특파원으로 된 만주체험이었고, 「밀회」에서는 아내 미애를 짝사랑한 의사의 만주체험이었다.(128쪽) 경숙이를 경멸하기 위해 애라를 창조했든 그 반대든 그러한 상황 설정의 동기는 작가 안수길의 내면 속에 있었다. 그 내면은 1935년에서 1945년까지 만주체험에서 형성된 것이다. 「범속」이란 작품이 이루어진 기본 핵은 겉으로 드러난 주제에 있지 않고 이 내적 동기에 있는 것이다.(129쪽) 첫째는 그가 만주국 조선계의 대표적 작가였다는 사실. 이것은 그의 작가적 야심 또는 자존심에 관련된 것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그것에 손색없는 작품을 해방 후에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낳았다. 둘째는 인생파에 속하는 안수길인 만큼 작품은 그의 삶과 나란히 가야 하는 것이었다는 점. 그러니까 작가로서의 공백기 3년은 삶의 공백기 3년에 해당된다. 이 두 가지 점이야말로 그가 해방 후 작가로 재출발할 때 마주체험의 연속성 없이는 전혀 작(129쪽)품을 이루어 내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나 이러한 만주체험을 매개 개념으로 하지 않고는 그가 도무지 작품을 쓸 수가 없었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여수」에서 보듯 한갓 심리적 퇴행의식에 사로잡혀 있음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일밖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만주체험을 매개체로 하는 한 작가 안수길은 참된 작가로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주를 누구보다 먼저 팽개치고 떠나온 사람으로서의 <죄의식과 부끄러움>을 탈각하지 않고는 그는 진정한 작가로 변모할 수 없다.(130쪽) 그에게 있어 <어떻게 사느냐>는 따라서 이중적이었다. 체질상 <어떻게 사느냐>쪽에 서는 작가로서의 안수길은 그러한 유형의 작품을 「새벽」이래 계속 써 내었다. 그러나 작품에(144쪽)한 태도(체질)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현실 속에서 실제로 자기가 살아가는 일에서 이 문제가 해결되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경향신문>>의 기자 노릇(조사부장)을 버리고 용산 중학교 선생 노릇을 하는 일과 관련된 것이다. 기자 노릇이나 교사 노릇 어느 것도 그에겐 한갓 방편이었다. 본업이 <작가>인 만큼 그 삶의 목적인 <작가 노릇을 하느냐> 한갓 <입에 풀칠하는 교사>(기자) 노릇을 하느냐를 그는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해결 없이 <어떻게 사느냐> 쪽에 선 창작을 할 수 없다. 그러니까 엄밀히 따지면 그것은 체질 문제와는 관련이 없다. 참된 작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라면 <기자(교사) 노릇이냐> <작가 노릇이냐>에서 한 쪽을 택해야 한다. <작가 노릇이냐> 쪽을 택한 것이 1956년 앞뒤이다. 비로소 작가 안수길은 실생활에 있어 <어떻게 사느냐>를 해결하였다. 그 결과가 「북간도」이다. 「북간도」가 우리 문학사에서 기념비적이자 이 작가에 있어서도 기념비적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145쪽) 왕도낙토를 표어로 내세운 만주국에 조선인 이민 수가 급증한 것은 여러 자료에서 드러나 있다. 일본은 전쟁수행의 산업기지를 만주에 건설하기 위해 이민정책에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150쪽) 안수길의 「토성」, 「목축기」가 막바로 국책에 순응한 것이라 하기는 물론 어렵다. <어떻게 사느냐>를 줄기차게 문제삼아온 안수길에 있어서는 만주국 국책도 한갓 <어떻게 사느냐>에 흡수되는 것이어서 그 자체가 「유맹」처럼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154쪽) <<만선일보>>가 안고 있는 특수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조선총독부 기관지가 <<매일신보>>라면 만주국 기관지중의 하나가 <<만선일보>>라는 관계와 흡사하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와 만주국 기관지 사이의 차이란, 곧 조선총독부 정책과 만주국 정책의 차이와 흡사하다. 만주국 민족정책이란 겉으로는 5개 민족 협화였지만 그 내실은 일본국을 제1위로 하고 조선족을 두 번째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계는, 중일전쟁(1937)이래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절박한 이유 때문에 인구증가가 더 이상(155쪽) 되지 않았다. 이에 비해 만주에는 조선계 이주민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이것은 만주국 개척을 위해 불가피하였다....일본은 전쟁 수행의 물자공급을 위해서도 만주국 인구증대를 강행해야 했으며, 거기에는 조선계 개척을 크게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는 상당한 이론 대립이 생길 수 있었다. 즉 <민족협화냐>, <민족질서론이냐>가 그것이다. 만주국을 움직이는 관동군측 및 일본관리들은 민족협화라는 대의명분으로써 이른바 <왕도낙토>를 건설하는 일이 앞서느냐, 일본을 중심으로 한 민족 질서를 내세워 다른 민족을 식민화하느냐의 갈림길에 섰다. 1937년 이후, 관동군 사령관을 역임한 조선총독 미나미(南)는 관동군에게 의견을 제출하였다. 「만주국 내에 있어서의 조선인에 대한 태도가 민족협화여서는 못쓰니까 고쳐주길 바란다」(「만주제국」지, 앞의 책, p. 206) 미나미 총독의 항의는 만주국이 조선계를 우대함에 대한 항의이다. 5개 민족 평등을 내세우는 일이 일본인 우위 조선인 하위의 질서관에 위배된다는 것, 그러니까 조선통치자로서 총독은 조선통치에 악영향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정을 미루어 보면, 국내의 <<매일신보>>와 만주의 <<만선일보>>의 검열상의 차이를 짐작할 수가 있다.(156쪽) 그의 문학적 활동 범위는 <<만선일보>>문예란이며 그의 문단적 야심은 국내문단에 나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만선일보>>에서의 활동은 국내문단으로 나아가는 방편의 일종인 셈이다. 이러한 사정은 그가 두 개의 고향을 가졌던 사실과 완전한 대응관계를 이룬다. 그가 태어난 함흥은 단순한 태생지가 아니고 할머니가 있는 진짜 고향이었다. 한편 부모가 교사 노릇하며 살고 있던 간도 용정은 어른이 되어서 산 곳에 지나지 않는다. 유년기와 중학과정을 함흥에서 다닐 정도로 그는 이쪽저쪽을 왕래하였다. 그러나 어느 편이냐 하면 함흥이 참된 고향이었다. 병들어 요양한 곳이 함흥이었음을 보아도 이 사정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만주국 조선계의 대표적 작가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는 그의 작가적 능력이 다른 사람들보다 특출했음을 새삼 말해 주는 것이다. 그의 문학적 야심과 목표가 국내 문단에 진출함이지만 그 방법은 오직 한가지뿐이었다. 만주국 체험을 통해서일 뿐이었다. 「새벽」, 「벼」를 비롯 「원각촌」, 「목축기」란 무엇인가. 국내에서 그를 알아준 것은 이들 작품세계인 것이다. <큰물에 큰 고기가 논다>(유진오)는(157쪽) 평을 얻어낸 것은 오직 마주체험을 작품화했다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만주체험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조선개척민의 고난사(과거)와 당면한 과제를 소재로 하여 작품을 쓰는 일을 가리킴이라면 그것은 한갓 소재주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소재주의야말로 창작에서는 매우 소중한 것이다. 작가는 아무도 그가 잘 알고 있는 소재에서 벗어날 수 없고 따라서 소재는 절대적인 것이다. 체험이 곧 소재인 만큼 그것을 떠나면 창작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만주 체험이야말로 작가 안수길의 최대의 강점이자 작가적인 원점이기도 한 것이다. 만주국 조선계의 대표적 존재인 안수길의 자존심은 이처럼 만주 체험을 원점으로 했음이 확연히 드러났다.(158쪽) 3년간의 공백기는 참으로 이상한 체험이다. 거대한 허구였던 만주국의 붕괴 과정과 조선의 총독정부의 붕괴, 그리고 새로운 한국민족사가 시작되는 유례없는 역사적 전환기를 그는 보지도 듣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역사적 체험을 하지 못한 안수길이 과연 어떻게 하면 계속 작가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158쪽) 만주국 조선계 문인의 대표적 존재였다는 사실에서 작가 안수길은 완강히 벗어나지 않았다. 그를 이러한 심리적 퇴행에로 이끈 근본 동기는 두 가지이다. 첫째, 만주체험에 대한 자의식을 들 수 있다. 작가적 출발점이자 명성을 얻은 것이 곧 만주체험이고 보면 이것은 안수길의 원점이다. 그 원점은 양면성을 지닌 가치개념이다. 만주국을 전제로 한 가치개념이라면 그것은 만주국이 허수아비이듯 한갓 허구적인 것에 지나지 못한다. 그러니까 그것을 딛고 일어선 그의 「북원」의 세계는 일종의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큰 물에 큰 고기가 논다>는 말을 가능케 한 만주체험을 안수길 만큼 깊이 가진 작가란 없다. 이것은 매우 소중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작가로서의 자존심의 근거인 만주체험은 작가로서의 부끄러움의 일종이기도 하였다. 이 틈에 끼어 그는 오랫동안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둘째로 그의 창작방법의 일관성 즉 <어떻게 사느냐>를 계속 고(159쪽)수한 점이다. 창작방법의 불변성은 안수길 문학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 <어떻게 사느냐>라는 창작방법의 고수라는 것도 기실 따지고 보면 만주체험에서 말미암았다. 개척이민의 수난사를 다룬다는 것이 곧 <어떻게 사느냐>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만주에서 조선인이 어떻게 사느냐를 다루듯, 월남한 이북사람 또는 만주에서 돌아온 귀국동포가 어떻게 사느냐를 다루었으며, 6․25 이후에는 전쟁으로 말미암아 뿌리 뽑힌 사람들이 또 어떻게 사느냐를 다룰 뿐이었다.(160쪽) <큰 물에 큰 고기가 논다>는 명제와 만주국의 이념에 관련된 세계는 결국 안수길에게 자랑과 부끄러움, 자존심과 속죄의식의 공존을 가능케 하였다. 여기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이 그의 만년의 대작 「북간도」이다. 그의 만주체험의 속죄의식과 자존심은 이로써 마침내 극복될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민족문학 쪽에 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주국의 허구를 깨고 민족문학의 처지에 서서 만주체험을 재정비하기에 10여 년이 걸렸던 셈이다. 이렇게 긴 시간이 걸린 것은 만주체험이 그에게 얼마나 강렬한 자존심과 죄의식을 몰로 왔는가를 새삼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을 더욱 부채질한 것은 그가 그 찬란한 만주국의 붕괴과정, 총독부 붕괴과정, 그리고 새로운 한국민족사의 격동기 3년간을 보도 듣도 못하고 과수원에 드러누웠던 사실에서 말미암았다. 결정적인 만 3년간의 해방공간의 체험이 없는 작가 안수길은 「북간도」를 쓰기에 그토록 머뭇거리고 긴 준비기간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이것은 「북간도」의 결말의 취약점으로 들러나기도 하는 문제이다. 그렇지만 만주체험은 작가 안수길에게 움직일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을 계속 던져 놓고 있었다. <큰 물에 큰 고기가 논다>는 명제가 그것이다.(160쪽) 대하소설 「북간도」를 분석함에 있어 맨 먼저 우리가 취할 방법은 제1부에서 제3부까지를 한 단위로 보고, 제4, 5부와 구분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방법론은 「북간도」를 이루고 있는 공간적 구조에서 말미암는다. 만일 우리가 「북간도」를 이루고 있는 (A)역사적 구조층 (B)공간적 구조층 (C)인물 구조층을 각각 문제 삼는다면 이중 (B)가 (A)(C)보다 훨씬 본질적인 몫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162쪽) 이 작품 제1부 초두의 상당한 부분이 이 정계비 해설에 바쳐져 있음은 부인될 수 없다. 과연 간도가 우리 땅이냐 청나라 땅이냐를 결정하는 일은 두 나라 사이의 역사적 인식의 수준에서 논의될 성질의 것이지 단순한 정계비 해석으로 해결되거나 결정될 성질은 아니다. 다만 정계비란 그러한 해결에 이르는 실마리의 하나가 될 수 있을 따름이다. 이 기본적 사실을 작가는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작품의 한 가지 골격을 삼고자 하였다.(163쪽) 「북간도」에 있어 역사적 구조층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정계비 문제가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간도이민의 제1세대에 속하는 이한복이 간도 이민 훨씬 이전에 할아버지를 따라 정계비를 보러간 적이 있다. 그는 공부를 못한 무식한 농민으로 성장했지만 할아버지 유지를 받들어 간도가 조선 땅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사잇섬 농사>를 대담하게 지은 것도 이런 자존심과 관련이 있다. 이로 말미암아 이한복은 종성부사를 안내하여 정계비를 다시 보러가게 된다. 간도 농사는 그 후로 자유롭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한복은 간도이민의 합법화를 위해 노력한 숨은 일등 공신이다. 그러기에 이민 제1세대인 이한복의 자존심은 대단하였다. 그가 머리 깎기를 절대 반대한 것도 이러한 조선인의 자존심에서 말미암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 자존심이 그의 목숨을 앗아가는 계기가 되었다.(167쪽) 손자 창윤이 이러한 할아버지의 환상을 안고 어른이 되여 청인 비각에 불지르고 비봉촌을 탈출했다가 되돌아오는 장면까지가 「북간도」 제1부이다. 그러니까 정계비라는 「북간도」 속의 역사적 구조층은 제1부에서는 압도적 의미를 띠고 있다. 그렇지만 <정계비> 자체가 갖고 있는 실증적 사실이 제1부의 원동력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일면적인 사실임을 면하기 어렵다. 국경문제의 현실적 측면을 무시했거나 적어도 소홀히 한 점 때문에 이 작품의 주인공 창윤의 의식을 지배한 할아버지 이한복의 고집은 논리성이 빈약하며 따라서 그것에 주로 기대어 자란 창윤의 행동도 비논리적 측면을 띠게 된 것이다.(168쪽) 이러한 역사적 사건이 「북간도」에서 어떻게 수용되었는가를 묻는 일은 중요하다. 역사적 사건을 소설이 얼마나 수용하여 자기의 구조층으로 삼는가는 소설가의 안목보다도 소설형식이 결정할 문제인 까닭이다. 작품의 전체적 구조를 결정하는 서사적 형식이 역사적 구조층을 선택 조절할 권리를 갖고 있는 만큼 작가는 이 법칙에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청산리 독립전쟁은 앞에서 우리가 문제삼은 (가)항인 정계비 사건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정계비는 많이 불확실한 것이지만 청산리 독립전쟁은 분명한 사건인 것이다. 「북간도」에서 작가 안수길은 청산리 독립전쟁을 제5부의 주축으로 삼고 있다.(170쪽) 제1부에서 제4부까지의 서두는 이처럼 각각 소리시늉말을 내 걺으로써 작품의 분위기를 암시하고자 하였다.(173쪽) 제5부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가 작품중심에 크게 자리를 잡는 바람에 제1부에서 제4부까지에 걸치는 일상적 삶이 갖는 비중이 현저하게 줄어들게 되게 되었다. 이 사실은 장편 「북간도」의 소설적 결함 중 제일 큰 대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은 적어도 장편은 서사적 형식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현상과 본질, 일상적인 삶과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의미, 일시적인 것과 영원적인 것의 어긋남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 어긋남이 없는 형식을 이름하여 서사시(서사시적 상태)라 부를 수 있다.(174쪽) 작품 「북간도」의 제1부에서 제3부까지는, 일상적 삶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 속에는 물론 삶의 의미도 충분히 용해되어 있는 것이다. 비봉촌을 만들기 위해 겪는 여러 가지 싸움이란 일상적 삶 속에 녹아들어가 있는 삶의 의미이자 본질이다. 그 본질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사느냐>이다. 정계비 사건이 계속 그 삶의 공간 속에서 메아리치고 있는데 그 메아리가 단순한 역사적 구조층의 단계를 넘어서는 것은 비봉촌 사람들의 <어떻게 사느냐>라는 것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사느냐>(의미, 본질)와 일상적 삶(묘사)이 균형감각을 얼마나 적절하게 유지하고 있는가를 재는 일이 「북간도」의 작품상의 성공여부를 판단하는 일일 것이다. 이런 기준에 따르면 제1부에서 제3부까지는 상당한 수준에서 그러한 균형감각에 이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할 때 제4부는 그 균형감각이 의미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주인공 창윤이 가족을 이끌고 비봉촌을 떠나 대교동으로 옮긴 뒤의 삶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비봉촌에 뿌리내리기란 곧 농민생활을 뜻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사느냐>의 의미란 땅과 더불어 있는 것이다. 그 비봉촌을 떠나 아들 정수의 교육을 빙자하여 창윤일가가 대교동으로 옮겼을 때의 <어떻게 사느냐>는 무엇이었던가. 농사짓기가 아니라, 기와굽기와 국수장수였다.(175쪽) 농사짓기에서 기와장이 또는 국수말이에로 바꾼 것은 <어떻게 사느냐>의 의미 변화를 새삼 말해 주는 것이다. 그 징조는 제3부에서 이미 드러났다. 그러니까 제1부에서 제3부까지가 줄곧 농사짓기를 통한 <어떻게 사느냐>로 일관된 것이며, 이 범위 내에(175쪽)서 역사적 구조층인 정계비 사건의 메아리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제4부에서 제5부는 별개의 구조, 별도의 작품이라 볼 수도 있다. 같은 주인공, 같은 만주 땅의 얘기이긴 하나, 비봉촌과 농사짓기를 떠난 국수장수의 세계인만큼 그 역시 <어떻게 사느냐>의 일종임엔 변함이 없다 해도, 「북간도」를 두 토막 내기에 족한 형국 즉 구성적 파탄을 가져온 것으로 볼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제4부에 오면 일상적 삶이 매우 변화가 심하고, 시사적 정치적으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일상적 삶이 정치적 시사적 풍문에 휩쓸려, 정상적인 삶에서 떠나 있는 형국이다....정치적 사건 속에 일상적 삶이 모조리 흡수되기 시작하는 것이 제4부의 특징이다. 심지어 어린 중학생인 정수가 독립투사인 듯 묘사되기조차 하는 정도이다. 제4부에서는 <어떻게 사느냐>가 바로 독립운동에로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일상적 삶은 의미(본질)속으로 서서히 스며들어 마침내 현상과 본질의 균형감각은 깨어지기 시작한다. 제4부가 제1부에서 제3부까지와 질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하는 점은 이런 곳에 있다. 그것은 서사적 형식의 파탄이다.(176쪽) 제5부에 오면 제4부에서 진행된 의미 부분이 더욱 강화되어 나타나기 시작한다. 봉오동전투와 곧 이어, 청산리 전투가 제5부 전체의 중심부를 이루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제5부는 흡사 플라톤의 철학과 같이, 일상적 삶은 아주 무가치한 것으로 떨어져 나가고 오직 독립투쟁이라는 의미(본질)만이 이데아 속으로 높이 스며들어간 형국을 빚고 있다. 그것은 서사적 형식의 쪽에서 보면 치명적 결함이다. 서사적 형식으로서의 소설이 아니라, 다만 어떤 민족주의자의 신념의 전개에 지나지 못한다. 마치 이때부터 모든 사람들이 독립전쟁을 하기 위해서만 살아가는 듯한 착각(176쪽)마저 준다. 「북간도」의 결함을 제1부에서 3부까지와 제4부에서 5부까지 사이의 단절감에서 찾아내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주인공)이 한결같이 독립군이라든가 독립운동에 종사하는 소설도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주제로 훌륭한 소설이 씌어질 수 있음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북간도」의 제1,2,3부는 「비봉촌」에서 뿌리를 내려 <어떻게 사느냐>를 문제삼는(그런 주제를 다룬) 소설이다. 그 주제는 그것으로 스스로 완벽한 것이다. 그 주제를 살리기 위해 일상적 삶과 본질(의미)을 얼마나 어긋난 상태에서 밀도 있게 파악하여 그려내었는가, 다시 말해 이념으로서의 규정적인 것(prescription)과 실질적인 묘사(description) 사이의 긴장 또는 간격좁힘 속에 리얼리즘이 가능하다(루카치, 「우리시대의 리얼리즘」, 하퍼․로우출판사, 1964, p. 116). 제1부에서 3부까지 즉 비봉촌에서의 삶의 묘사와 그 삶의 의미는 상당한 수준에서 그 점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제4,5부에서는 독립전쟁이 유사주제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한갓 유사주제(類似主題)이지 참주제는 아니다. 만일 독립운동이라는 것을 참주제로 택했다면 작가는 제1,2,3부와 다른 새로운 「북간도」를 써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 또 다른 「북간도」가 씌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그렇게 하지 않고, 제1,2,3부에 이어 제4,5부를 썼다. 두 부분의 연결점에 상당한 무리가 빚어졌다. 제5부에서 그 점이 크게 노출되어 있다.(177쪽) 그렇다고 제5부가 의미(독립군의 민족주의(177쪽)적 이념) 일변도로 되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제5부는 그 나름대로의 소설적인 처리를 적절히 해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것은 독립군의 패배한 모습을 그린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제5부의 전반부가 통쾌하고도 극적인 전투장면 묘사이고, 그 속에서의 어린 병사 정수의 행동을 그린 것과 대조적으로 그 후반부는 패배한 독립군의 뒷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 모습이 매우 가라앉은 필치로 그려져 있다. 이 정수는 올 데 갈 데 없는 존재가 되어 마침내 일본영사관으로 스스로 나아가 자수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소설적 처리는 제5부만이 갖는 논리이자 소설에서만 대할 수 있는 이른바 소설적 진실이다. 낭만적 거짓이기보다는 소설적 진실이라 불릴 수 있다.(178쪽) 「북간도」는 만주 개척이민 제1세대인 이한복에서 그 제4세대인 이정수에까지 걸치는 백 오십여 년에 걸친 시기 속에 출렁이고 있다고 할 때, 그 역사적 구조층은 (가)정계비 문제 (나)청산리 독립전쟁 그리고 (다)만주국 문제이다.(182쪽) 만주국 건국 목표는 왕도낙토(王道樂土)였다. 그것은 5개 민족 협화를 기본원칙으로 했으며 구체적으로는 일본 민족을 제1위로 하고, 그 다음이 조선인이고, 그 다음이 중국인의 순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정수를 포함한 용정의 조선인들은 어떠했는가. 이 물음을 「북간도」는 겨우 제5부의 마지막 두 장에서 보여주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니까 제5부 속에 만주국 전체의 운명을 결판 짓는 두 가지 역사적 구조층이 함께 들어 있는 셈이며, 따라서 제5부는 소설적 처리로서는 무리일 정도로 역사 쪽으로 압도적인 비중을 갖고 있다.(182쪽) 이러한 결말은 장편 「북간도」의 것으로는 매우 허술하고 미약하다. 특히 제1,2,3부를 연상할 적에 그러하다. 그렇다면 제4,5부의 결말로서는 어떠한가. 다시 말해 제4,5부가 제1,2,3부와는 주제가 다른 별개의 작품이라고 보는 관점에 선다 할지라도 이 결말은 역시 미약하다고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어디서 말미암은 것일까. 이 물음에는 소설적인 형식(구속력)이 겨우 대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즉, 제5부는 만주국 전체의 운명을 건 두 개의 역사적 구조층이 일방적으로 강화, 강조됨으로써, 그 속의 일상적 삶은 숨도 쉴 수 없는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역사적 구조층의 강도가 높으면 그럴수록 일상적 삶은 위축된다. 일상적 삶이 위축되어 미약해지고 의미(본질, 이념 따위)가 이념의 차원으로 군림하게 되는 청산리 독립전쟁으로 말미암아 제5부의 전반부는 소설적 미달현상을 빚었다. 한편 그 후반부는 만주국 이념이 일상성을 외면함으로써 역시 소설적 미달 현상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어느 쪽이나 <서사적 형식>에 대한 고려가 빈약한 탓에 제5부는 실패한 부분이라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184쪽) 공간적 구조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시간적 구조층에 대응되는 개념이자 동시에 역사적 구조층에도 대응되는 개념이다. 앞장에서 살폈듯 「북간도」를 이루고 있는 역사적 구조층은 (가)백두산 정계비 (나)청산리 독립전쟁 (다)만주국 등으로 구성된 것이었다. 이를 다시 세대별로 보면 이민 제1세대에서 제4세대에 걸치는 기간으로서, 역사적 구조는 또한 인물적 구조층과도 자연히 관련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때문에 역사적 구조는 시간적 구조를 흡수하여 일층 문제적인 시간으로 단위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구조층에 알맞게 대응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통틀어 공간적 구조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럴 때 공간적 구조층에는 다음 두 가지가 포함된다. 하나는 사람들이 발을 딛고 사는 지명 즉 마을(도시)의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소설의 구성상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후자는 이른바 공간적인 소설구성법을 특별히 가리킨다.(185쪽) 「북간도」 5부작을 통틀어 볼 때 인물들이 뿌리를 내려 깃드는 곳은 비봉촌과 용정이다. <어떻게 사느냐>라는 생존방식(의미, 철학)만이 「북간도」 전체를 꿰뚫고 있을 뿐, 공간적 구조는 비봉촌과 용정(대교동)으로 크게 갈라져 버린다. 이것은 제5부에서 그 역사적 구조가 청산리 전투와 만주국 건국으로 갈라지는 것과 흡사하다. 제1,2,3부까지는 비봉촌이 삶의 터전이며 따라서 개척이민의 <어떻게 사느냐>가 땅(농사짓기)과 결부되었음에 비해 제4,5부에서는 비봉촌을 떠나 대교동(용정)으로 이동됨으로 말미암아 농사짓기에서 장사꾼, 기와장이, 국수말이로 변질된 세계이다. <어떻게 사느냐>의 처지에서 보면 같은 것이지만 땅과의 투쟁에 비해 국수말이의 삶은 뿌리 뽑힘에 해당되며, 유랑민에의 변동을 의미하게 된다. 「북간도」가 일관성을 가진 <서사적 구조>를 띠지 못하고, 두 토막이 나버림으로써 소설적 실패를 초래했다고 평가될 수 있는 주된 근거도 이곳에서 말미암았다.(185쪽) 비봉촌에서의 <어떻게 사느냐>는 「북간도」 전체에서 제일 빛나는 부분이자 참주제가 잠겨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제1,2,3부는 이 참주제를 둘러싸고 구성되어 있는 만큼 「북간도」는 거듭 지적되었듯 비봉촌에서의 조선 개척이민의 <어떻게 사느냐>의 문학적 형상화로 규정, 평가될 수 있다.(187쪽) 비봉촌의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는 이한복 영감과 최칠성 영감의 대립 갈등으로 시작된다.(187쪽) 정계비를 두 번이나 답사한 이한복의 자존심의 근거는 정계비에 적힌 대로(東爲土們) 간도가 조선 땅이라는 신념에서 말미암았다. 그에게는 국경개념이란 한갓 관습과 실력에 의해 좌우된다는 현실적 측면을 알아차릴 능력이 모자랐다. <어떻게 사느냐>에 있어, 이한복은 끝까지 조선인의 처지를 지킴으로써 비타협적인 쪽에 서고 있다.(187쪽) 장치덕은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청국식 변발도 아니고 그렇다고 조선식 상투도 아니다. 제3의 노선인 것이다. 그 결과는 손자 현도의 현실타협주의로 나타난다....그것의 공간적 배치가 용정이다. 따라서 「북간도」에서 용정은 비봉촌에 엄밀히 대응되고 있다.(188쪽) 비봉촌의 이한복은 상투주의자이다. 그는 변화의 세계에 담을 쌓는다. 이에 맞선 최칠성의 방식은 처음부터 현실주의적이다.(188쪽) 비봉촌이 청인화됨을 계기로 하여 비봉촌에서의 이탈현상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비봉촌은 한편으로는 청인화로 뿌리를 내려 농삿군의 땅으로 뿌리를 내리는 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봉촌을 떠나 유랑하는 뿌리뽑힘의 세계가 열려진다.(190쪽) 뿌리 뽑힘으로서의 비봉촌 이탈의 첫 주자는 창윤이다. 그는 「북간도」 제1부의 주역이다. 비봉촌에 지주 동복산의 비석을 세우던 날 밤 비석에 불을 지르고 비봉촌을 떠나는 행위를 그는 저질렀다. 창윤이 감히 이러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는 직접적 계기가 용정이라는 곳임을 알아차리는 일이 「북간도」의 공간적 구조를 이해하는 지름길이다.(190쪽) 창윤의 의식은 용정 공간과 비봉촌 공간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는데, 이것은 끊임없는 비봉촌 이탈지향성과 귀환지향성을 이루게 된다.(192-193쪽) 「북간도」 제1부에서 가장 선명히 제시된 공간적 구조층은 용정과 비봉촌이다. 그리고 이 두 공간의 성격이 주인공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그 지배 방식의 특이함이 「북간도」 전체의 의미를 규정하게 된다. 유토피아로서의 용정과 현실적인 고통의 공간으로서의 비봉촌이란 도식으로도 그것은 그러하며, 현실적 역사적 공간으로서의 공간과 비현실적 환상적 공간으로서의 공간으로도 그것은 그러하다. 비봉촌 공간이란 조부와 부의 무덤으로 표상되고 있다. 그것은 근대적 과학적 현실적인 지도 속에 표시 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청룡, 백호>로 표상되듯 한갓 풍수지리설의 수준에 놓여 있고, 용정은 역사적 개념으로 저만치(193쪽) 놓여 있다.(194쪽) 제3부의 공간적 구조층은 매우 특징적이다. 용정과 비봉촌이 제1,2부에서는 심리적 균형을 이루고 있었지만, 제3부에 오면 균형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마침내 깨지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다. 비봉촌 이탈현상이 빚어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며, 이로 말미암아 작품 「북간도」 전체의 균형감각이 어떤 모양을 갖는가를 물을 수가 있다.(195쪽) 용정이라는 공간구조층은 단순한 지명 이상의 뜻을 머금는다.(196쪽) 창윤이 대교동(大敎洞)으로 옮기게 된 것은 제3부의 제일 중요한 사건이자. 「북간도」 전체의 구조상의 파탄에 해당되는 곳이기도 하여 자세한 검토가 불가피해진다.(197쪽) 창윤이 비봉촌을 떠난 명분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중요하다. 조부와 부의 무덤이 있는 비봉촌을 떠나는 명분은 아들 정수의 교육문제로 되어 있다. 제3부가 정수의 3세에서 비롯됨을 보아도 알 수 있듯, 공부를 조부도 부도 제대로 못했고, 창윤이마저 제대로 못한 탓에 이제 제4세대인 정수만은 제대로 교육을 시키고 싶었다. 이점은 훌륭한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핑계일 수 있다. 결국은 비봉촌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한 증거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한복, 장손, 창윤의 3대에 걸쳐서까지 비봉촌에 뿌리내리기를 못했다면 이 가족은 <어떻게 사느냐>에 실패한 것이자. 비봉촌에서의 삶의 조건의 혹독함을 새삼 말해 주는 것이다. 비봉촌의 삶의 기반이 농사짓기뿐임은 색삼 말할 것도 없다. 그 농사짓기의 어려움, 즐거움 및 그 나름의 삶의 깊이를 「북간도」에서는 전혀 찾을 수 없다. 작가가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안수길은 교사 집안의 아들이고 자신도 교사였고 또한 신문기자였을 뿐이다. 그대신 「북간도」에는 교사가 곳곳에 등장하여 여러 가지 조연출을 하게 된다.(198쪽) 왜 훈춘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이 물음은 제4부부터는 중요하지 않다. 제4,5부의 중심부는 벌써 창윤이 아니고 정수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윤이 어디 있던 관계가 없고 오직 주인공 정수가 있는 곳이 문제될 따름이다. 그것은 곧 정수가 용정에 학교를 다닌다는 사실로 드러난다. 즉 용정이 공간구조층의 한가운데 노출된 것이다. 이 점을 좀더 분명히 함으로써 제4,5부가 얼마나 제1,2,3부와 공간적 구조층에서 다른가를 잘 드러낼 수가 있다. 제1,2,3부는 비봉촌과 용정(대교동)의 대응관계가 성립되고 그것이 작품 구성의 기본원리로 되어 있지만 제4,5부엔 용정에 대응되는 공간개념이 사실상 없다.(199쪽) 이한복의 정계비 답사를 앞세워 거창한 간도 조선개척이민사의 역사적 배경을 끌고 들어간 「북간도」 제1부의 의도는 매우 선명한 것이다. 그것은 만주국 건국 이전까지에 있어서의 조선 개척이민의 전사(前史)를 그리고자 하는 작가 안수길의 야심이 드러남이기도 하다.(202쪽) 이 무렵의 안수길은, 만죽국 이념을 위해 작품을 썼던 아니든 상관없이 재만 조선인의 대다수의 삶의 방식 즉 <어떻게 사느냐>를 문제 삼았다고 할 수 있다.(203쪽) 안수길은 그의 부친조차 교사였던 만큼 농민체험의 간접성조차도 없는 형편이었다. 안수길이 용정을 「북간도」 전체의 중심점으로 삼은 것은 의도적이기 보다도 불가피한 일로 보인다. 작가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 젊은 시절부터 20여 년간 용정에서 살았다....이러한 체험을 가진 그가 의욕만으로 비봉촌을 그려낼 수 없다. 비봉촌의 묘사가 한갓 <환상적>인 것으로 되어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대신 용정의 묘사는 빈틈없고 또 역사적이면 현실적이다. 「북간도」의 당초의 의도와는 달리, 그 중심점은 비봉촌이 아니고 용정으로 되고 만 것이며, 이 공간적 구조층의 면에서 볼 때 결국 「북간도」는 두 토막으로 갈라진 형국을 빚고만 것이다.(204쪽) 「북간도」를 통틀어 등장하는 인물을 고찰하기 우해서는 다음 세 가지 갈래를 나누어 둘 필요가 있다. 첫째는 남성 중심으로 되어 있음이고, 둘째는 저항적 인물과 타협적 인물의 대립이고, 셋째는 교사라는 직업에 종사하는 인물유형이다.(204쪽) 「북간도」는 부계(父系)의 문학이다. 역사적, 공간적 구조층 자체가 남성적이고, 한국인의 가족구조 자체가 가부장제적이다. 「북간도」에 등장하는 남성들을 문제삼을 때는 제1세대인 이한복, 장치덕, 최칠성을 먼저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이 세 인물은 각각 <어떻게 사느냐>의 세 가지 유형을 대표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북간도」가 소설적으로 성공한 것은 이 세 전형적 인물의 창조에 있다 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는 없다. 작가의 역량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은 여기에서이다. <어떻게 사느냐>는 작가 안수길의 창작방법론의 핵심이자 만주 개척이민의 삶의 방식 자체인 만큼 이 문제를 떠나면 「북간도」는 스스로 허물어지고 만다. 역사적 구조층이나 공간적 구조층은 실상은 이 세 가지 인물 유형을 위한 한갓 보조장치 또는 배경의 구실을 한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211쪽) 백두산 정계비를 두 번씩이나 살펴보고 온 이한복은 그 정계비의 환상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물이다.그에 있어 <어떻게 사느냐>는(211쪽)처음부터 명백하다. 정계비에 표시된 대로, 간도는 조선 땅인 만큼 비봉촌에서 그는 주인으로 행세하고자 한다. 따라서 실질적인 주인인 동복산에 맞서 머리 깎기를 거부할 뿐 아니라 그러한 태도를 비봉촌민에게도 강권한다. 젊은층들은 이한복을 지지한다. 그렇지만 이한복이 내세우는 주체성이란 따지고 보면 그의 성격에서 온 것이다.(212쪽) 할아버지는 18살의 이한복을 데리고 몸소 정계비를 답사하고 그 내력을 설명해준바 있다. 그러니까 정계비는 역사적 수준에서 돌연 심리적 수준으로 탈바꿈을 하게 된다. 이 순간부터 이한복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정계비에 적힌 「東爲土們」의 뜻이 지시하는 역사적 사건이 아니고 할아버지의 성스러운 이미지이다. 그것은 한갓 환상이지 실체가 아니며 따라서 현실적으로도 존재하지 않거나 무효상태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한복의 <어떻게 사느냐>는, 주체성 지키기라기보다는, 다만 심리적인 자기 해방의 일종일 따름이다.(212쪽) 이한복으로 대표되는 이 환상적 관념에 들린 인물 유형이 「북간도」에서 실패한 것은 작가의 인식부족이라고 할 수가 있다. 즉 작가가 이한복이라는 인물을 두고 <어떻게 사느냐>의 한 가지 유형을 보이기에 그치지 않고 조선민족의 주체성과 연결시키고자 한 점은 계산 착오일 터이다. 이러한 환상적 방식의 <어떻게 사느냐>가 비봉촌의 건설에 있어(213쪽) 큰 보탬이 되지 못한 사실에서도 이 점이 확인된다. 다시 말해 작가는 아비 말을 듣지도 않고 농삿군 자식인 주제에 농사도 짓지 않고 돌아다니는 이한복이 어째서 할아버지만을 성자처럼 받들게 되었는가에 대한 심리적 통찰을 했어야 했던 것이다. 이 부분이 빠진 마당에서 이한복이 민족주체성 지키기는 환상적 수준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다.(214쪽) 이한복을 대표되는 <어떻게 사느냐>와 최칠성으로 대표되는 <어떻게 사느냐>에서 전자가 환상적임에 비해 후자는 현실적이라는 점이다. 현실적이란 합리적이라는 뜻이기보다는 생활적이라는 뜻에 가깝다. 생활적이란 또한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땅의 사상을 가리킴이다. 비봉촌은 농사 짓는 마을이며 이 마을의 <어떻게 사느냐>는 <땅의 사상>의 틀 속에서의 논의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214쪽) 작가는 시종일관 최칠성의 사상을 이런 각도에서 보고 있다. 그 때문에 「북간도」의 제1,2,3부의 견고성을 상당히 허무러 뜨리고 있는 셈이다. 작가가 이토록 고의적으로 최칠성을 미워하는 생각 즉 작가의 주관성(편견) 때문에 비봉촌은 결국 황페화되어 중요 등장인물들이 비봉촌을 떠나고 최씨 일가와 그 주변 인물만 남는 것으로 그려지고 마는 것이다. 개척이민의 아픔과 그 고난사로 시작된 제1,2,3부가 작가의 주관성으로 말미암아 리얼리즘의 수준으로 성숙하지 못한 한 가지 사례를 이런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끝내 작가는 최칠성을 매장하거나 무시할 수가 없었다. 최칠성이라는 작중인물은 그 스스로의 힘으로 작품 속에 살아서 우뚝 버틸 수가 있었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명료한 곳에서 왔다. 곧 그는 땅의 사상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봉촌>에서의 <어떻게 사느냐>는 바로 땅의 사상 자체이기 때문이다. 무대가 비봉촌이고 그 주민의 삶의 터전이 땅인 만큼, 땅을 지탱하는 사상은 작가의(215쪽) 주관성과는 관계없이 당연히 존속하는 것이다. 적어도 비봉촌의 주역들이 아직도 비봉촌에 머물러 살고 있는 한, 작가는 최칠성을 결코 무시하거나 비양거릴 수가 없다. 「북간도」에서 작가의 부주의한 주관성에도 불구하고, 리얼리즘의 수준에 육박한 것은 바로 이러한 객관성에서 온다. 리얼리즘은 그것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대상 자체의 법칙성을 파악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인 만큼 비봉촌의 법칙성에 밀착된 최칠성은 당연히 그 권리를 작품상에서 갖는 것이다. 작가도 여기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작가는 최칠성을 땅의 사상으로 파악하지 않고 주체성 상실의 방향으로 이끌어 나갔다.(216쪽) 적어도 농부인 사람들은 최삼봉․노덕심의 모습을 비웃을 수가 없다. <어떻게 사느냐>에서 그러한 얼되놈 모습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얼되놈 모습이란 정확히 말하면 <땅의 사상>의 겉모습이다. 그 모습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리지 못하는 사람은 당연히 비봉촌을 떠나야 한다. 적어도 비봉촌에 뼈를 묻을 수 없다.(217쪽) 당초 제1부에서 비봉촌의 개척사를 다루고자 했으나, 제2,3부롤 올수록 비봉촌의 황폐사를 다루게 되고 만다. 그것은 작가의 주관성 때문이다. <땅의 사상>으로서의 <어떻게 사느냐>에 비중을 두지 않으면 비봉촌은 당연히 황폐화되고 만다. 땅의 사상은 얼되놈의 모습을 승화시키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 점에 관해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왜 사람들은 당초부터 살기 좋은 용정이나 대교동에 정착하지 않고 비봉촌에 닻을 내렸던가. 이 근본적인 점에 관해 작가는 아무런 해명도 해놓지 않았다.(217쪽) 출발점에서부터 작가는 큰 실수를 한 것이다. 그러니까 비봉촌 자체가 한갓 환상이고 관념이다. 그것은 이한복의 세계관과 흡사하다. 만일 땅의 사상 즉 비봉촌 정착의 투쟁사를 「북간도」의 주제로 삼았더라면, 이 작품은 훨씬 거대한 서사시적인 형식을 필요로 했을 것이고 그만큼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서사적 형식이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어떻게 사느냐>에서 직접적으로 오는 것인 만큼 땅의 사상과 분리되지 않는다. 만주 개척이민이란 땅의 개척이 중심 과제인 때문이다. 그것은 땅의 개척을 방해하는 두 가지 적대세력과의 싸움의 형식에서 겨우 달성될 수 있다. 하나는 외부조건과의 투쟁이고 다른 하나는 내부조건과의 싸움이다. 이것은 서사적 형식이 갖추고 있는 고전적 형식이다.(218쪽) 「북간도」의 중심이 비봉촌이기보다는 용정임을 알아차리는 일이 이 작품의 가치를 평가함에 지름길이다.(219쪽) 「북간도」 전체를 통해 제일 현실적이고 확실한 인물 즉, 합리적이며 따라서 근대적 인물은 장치덕의 손자 장현도이다.(219쪽) 장현도의 상업에의 전환은 용정의 역사성을 확보하는 방식이었다. <땅의 사상>과는 대립되는 <장사의 사상>이 바로 용정과 그 역사성이다. 그리고 <장사의 사상>은 근대적 성격을 띤 것이기도 하였다.(220쪽) 이러한 장현도의 삶의 방식을 두고 현실타협주의라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현도의 땅의 사상에 맞선 <장사의 사상>에서 바라 볼 필요가 있다. 장사란 무엇인가. 그것은 근본적으로 도시의 사상이다. 물건의 팔고사기란 합리적인 선에서 움직인다. 인간행동의 기본 동기가 물질적인 이해관계를 으뜸으로 한다는 것은 마르크스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살아가는 최소한도의 지혜이다. 그 다음이 신분적 이해관계이다. 막스 베버가 말하는 종교(생각)가 그것이다. 근대사회란 합리적인 논리 위에 서있는 것인 만큼 그것은 환상적 관념을 용남하지 않는다. 이런 대낮의 논리 앞에 이한복의 환상적 기준이 견딜 수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다.(221쪽) 장사의 사상에 맞설 수 있는 것은 땅의 사상이다. 용정과 비봉촌의 대응관계가 이것이다. 작가는 이 두 사상을 가운데 두고, 다시 말해 용정과 비봉촌을 가운데 두고,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어떻게 사느냐>를 제4세대에까지 추구했더라면 만주국이 무너진 뒤에 남는 문제까지도 포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서사적 형식을 취하는 대신 작가는 이한복으로 대표되는 <환상적 사상>을 제4부, 제5부의 주축으로 삼고자 함으로써 「북간도」 전체를 두 토막으로 갈라지게 하고 만 것이다.(222쪽) 작가는 땅의 사상과 장사의 사상을 동시에 배제하고 환상적 기준에 의거된 주체의 사상을 드러내고자 하여 이한복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환상적 사상으로 변해가고 말았다. 그러니까 땅의 사상도 장사의 사상도 철저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환상적 사상 자체의 취약성에서 말미암았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주체성 사상 자체의 취약점과 관련이 없다. 민족의 주체성을 지키는 사상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하고 또 숭고하다. 적어도 민족 단위의 사고범위 내에서는 이 사상이야말로 절대적인 것이다. 따라서 봉오동 전투나 청산리 전투는 <독립전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독립전쟁을 하는 마당에는 그 나름의 독특한 논리가 있는 만큼 <땅의 사상>이나 <장사의 사상> 따위는 한갓 지엽적인 것이라서 독립전쟁의 사상과는 족히 겨눌 성질이 못 된다. 독립전쟁의 사상은 그 자체가 신성한 만큼 비교 대상이 있을 수 없다.(222쪽) 「북간도」는 이 독립전쟁 사상을 제4부에서 비롯하여 5부에서 본격적으로 펼치고 있다....그러나 독립전쟁의 사상은 한갓 주변부의 울림에 지나지 않았다. 첫째, 주역인 정수가 중학 2년급의 소년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 둘째는 정수가 용정의 영향권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만일 작가가 독립전쟁의 사상을 제5부의 중심부에 두고자 했다면 응당 독립사상의 중심부에서 인물과 배경을 놓아야 했을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라든가, 간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김(222쪽)좌진 휘하에서 그들과 운명을 같이하는 자리에 주역들이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는 달리 대한독립군의 홍범도 휘하의 한갓 소년병으로 주역 이정수를 설정하고 있다.(223쪽) 이렇게 보아올 때 「북간도」에 담겨 있는 인물상들이 매우 투철하지 못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비봉촌으로 대표되는 <땅의 사상>, 용정으로 대표되는 <장사의 사상>도 각각 투철하지 못해 두 사상의 내적인 긴장관계가 없었으며 따라서 용정과 비봉촌은 형식적인 대응관계만 낳고 말았다. 그 두 사상의 가운데에 이한복의 환상적 사상과 이정수의 독립전쟁 사상이 끼어 있긴 하지만, 이 독립전쟁 사상은 그 원줄기에서 너무나 머릴 떨어져 있었던 만큼 <어떻게 사느냐>에서 실패하기에 이르게 된다. 상해 임시정부에 연결되지 않은 독립전쟁 사상은 <자수의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독립전쟁의 사상 쪽에서 보면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223쪽) 우리는 이런한 전망에서 작가의 이정수에 대한 애착을 읽을 수가 있다. 그것은 다른 말로 바꾸면 용정에 대한 애착과 확실성에서 말미암았다. 작가에겐 비봉촌도 환상이며 봉오동 전투나 청산리 전투도 한갓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것은 다만 역사책 속에 있는 것이다. 한국 독립 운동사를 들추면 얼마든지 부딪칠 수 있는 과제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비할 때 현도가 상무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는 용정은 작가에겐 허구가 아니고 구체적인 현실이다. 작가가 이정수를 자추케 한 것은 이정수를 용정으로 이끌어오기 위한 한갓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용정에는 현도네가 있고 임영애가 있고 말송 경시가 있고 일본 총영사관이 있다. 뿐만 아니라 용정에 가야 아버지 창윤이를 만날 수가 있었다. 현도와 창윤이 만나는 곳이 정해 놓은 용정인 때문이다. 「북간도」는 이런 사실로 말미암아 <용정의 사상> 또는 <장사의 사상>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북간도」는 중인계층이 만주땅에서 <어떻게 사느냐>를 다룬 작품이라 규정된다.(224쪽) 그렇다면 작가는 왜 중인계층의 만주에서의 <어떻게 사느냐>에 충실하지 않고 비봉촌과 청산리 전투를 펼쳤는가. 그것은 한갓 허영심이 아니었을까. 이 주관성 또는 허영심이 「북간도」를 위대한 작품으로 만들어 내지 못한 참까닭일 터이다. 작가가 이 사실을 깨들은 것은 「북간도」를 완성한 직후일 것이다. 작가는 직관적으로 그 오류를 알아차렸음에 틀림없다. 「통로」(1968), 「성천강」(1971)이 그 증거이다. 이 두 장편은 처음부터 선명하게도 중인계층의 <어떻게 사느냐>를 내세운 것이다. 여기에서 작가 안수길은 그의 작가적 본령을 발휘하게 된다. 「북간도」는 그러니까 많은 객기를 품고 있는 미완성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진술은 막(224쪽) 바로 「북간도」의 작품수준이나 그 무게를 낮추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런 해석은 다만 작품 이해의 한 가지 방편에 해당될 뿐이다. 작가의 진실과 작품의 진실은 다를 수가 있는 만큼 「북간도」는 작가의 진실에서는 벗어난 작품일 뿐 작품의 진실에서 보면 민족문학의 큰 봉우리에 놓일 수 있다. 북간도에서 4대째 걸쳐 <어떻게 사느냐>로 고민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이 2백만을 웃돌았던 역사적 사실이 그 작품의 진실성을 보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술은 조금 더 나아가면 오늘날 중공의 연변 자치구에 살고 있는 약 2백만 한국교포의 <어떻게 살았느냐>에까지 이어지는 과제이기 때문이다.(225쪽) 「북간도」에는 자의식을 가진 인물은 단 한 살마도 등장하지 않는 만큼 심리적 서술방식이 스며들 틈은 없다. 억지로 자의식을 가진 인물을 골라낸다면 독립군에 가담했다가 자수하는 이정수일 터이다. 등장인물들이 한결같이 자기를 남과 구별함에서 오는 자의식이 없고 무턱대고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등장인물이 한결같이 신식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이 문제는 관련이 있다. 오직 중학을 다닌 인물은 이정수뿐이다. 이정수가 조금이나마 자의식의 흔적을 가질 수 있는 인물이지만 그조차 심리적 측면은 문제 밖이다.(226쪽) 「북간도」를 지배하고 있는 묘사 거부의 설명방식은 역사적 구조층의 드러냄을 위해 제일 알맞은 서술형식이라 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북간도」를 떠받들고 있는 다른 두 기둥, 즉 공간적 구조층과 인물적 구조층을 드러냄에는 어떠한가. 물을 것도 없이 비봉촌과 용정을 거점으로 한 공간적 구조층을 밝힘에도 매우 적절한 것이다. 그러나 인물적 구조층을 드러냄에는 극히 부적절한 서술방법이 아닐 수 없다. 「북간도」의 세가지 구조층 중 인물적 구조층이 제일 허술하고 미약한 이유도 이런 서술방식과 깊은 관련이 있다.(231쪽) 용정이란 「북간도」 전체의 중심점이다. 비봉촌이 한갓 비현실적 환상적인 장소라면 용정은 역사적이자 현실적인 장소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보이지 않는 내면상의 구조에서 그렇다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232쪽) 「통로」란 「북간도」에 이르는 통로이자 또한 「북간도」를 지나온 통로이기도 하다. 그는 「통로」를 통해, 또 하나의 우람한 세계를 만들어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구상은 마음만 앞섰지 실질상으로는 잘 되어지지 않았다. 제목에 관해서조차 그 구체성이 없고 막연했던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이 있다면 장차 쓸 「통로」는 북간도와 별개일 수 없고 그 앞단계이거나 뒷단계라는 점뿐이다. 그것을 그는 자기의 고향에서 출발시키고자 했다. 「만세교」라는 구체성이 바로 그것이다. 다시 말해, 「북간도」는 엄격히 말하면 환상적 기준에 의해 씌어진 것인 만큼 작가의 내면에 자리 잡은 것은 아니었다. 그의 내면에는 만세교가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성인이 되어서 다만 아버지 곁에 머문 수년 동안 살았던 제2고향 용정이란 곳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었을 뿐 아니라 조상대대로 살아온 진짜 고향인 함흠 서호진에 비하면 근본적인 삶의 뿌리가 못 된다. 그것이 「만세교」이다. 그렇다고 제2고향인 북간도 체험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북간도 체험이 제2고향으로서의 체험이며 따라서 그것은 성인으로서의 역사 감각에 관련되는 만큼 문제의식에 충만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 감각은 「북간도」에서 충분히 발휘될 수 있었다. 만주에서의 조선민족 개척이민사의 발자취와 그 <어떻게 사느냐>를 그리는 일은 민족문학의 각도를 세우기에 매우 유리한 것이었다. 「북간도」가 작가에게는 물론 우리 문학사에서 문제적임은 이러한 시각에서 말미암았다. 작가에 있어 「북간도」는 따라서 야심작이라 부를 수 있다. 그렇지만 주관성을 일방적으로 이끌어 들임으로써 진실성에 해를 끼치게 되기 쉽다. 「북간도」에서도 그러한 주관성이 여러 곳에서 드러났던 것이다.(247쪽) 「북간도」에서도 그러했지만 안수길에 있어 여인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여인이란 가족의 한 장식품과 같을 뿐 어떤 기능적 몫을 하지 못한다. 철저히 남성지배의 원칙이 지켜져 가고 있는 곳이 곧 「통로」의 기본 구조이다.(251쪽) 「북간도」의 제1대인 이한복 집안의 가계도를 「통로」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이한복의 가계는 철저한 함경도 <상놈>이었다. 대대로 일족은 농사를 업을 삼아 <미미한 생계>를 이어온 가계에 지나지 않는다.(254쪽) 「북간도」에서 작가는 알게 모르게 실패를 했음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실패의 원인은 이한복․창윤․정수의 가문을 지배하는 사상이 참된 주체성 사상이 못 되고 한갓 환상적인 사상에 지나지 못했음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북간도」는 허영심이 부분적으로 작용한 작품임을 누구보다도 작가는 가슴 한구석에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무엇인가. 「북간도」를 끝내고 나서야 작가는 그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통로」, 「성천강」을 쓰게 된 동기가 여기에 있었다. <어떻게 사느냐>는 환상적 기준으로 해결되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작가가 「통로」, 「성천강」을 쓴 뒤에 「북간도」를 했더라면 그 「북간도」는 훨씬 무게 있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262쪽) 「북간도」는 <땅의 사상>과 <장사꾼의 사상>을 양쪽에 두고 그 가운데 제3의 사상을 세우고자 하였다. 제3의 사상이란 구체적으(270쪽)로 무엇인가. 이한복, 이창윤, 이정수로 대표되는 <어떻게 사느냐>가 바로 그것이다. 이 제3의 사상은 불행하게도 확실한 것이 못 되었다. 그것은 작가의 환상적 사상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간도」 속에 있는 3가지의 <어떻게 사느냐> 주에서 이한복 집안이 택한 <어떻게 사느냐>가 제일 치졸하고 또 실패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작가가 익히 알지도 못하는 사상, 다만 작가의 주관적 사상으로 이한복의 집안의 인물들을 조종한 탓이다.(271쪽) 체질적으로 그는 체험의 작가유형이었다. 작가의 인격과 작품이 나란히 간다는 생각이 그의 창작방법론을 지배해 왔던 만큼 그는 인생파유형에 분류된다. 소설이 허구라고 하고 그것에 무게 중심을 둔 작가 유형을 안수길은 처음부터 멸시하고 있었다. <어떻게 사느냐>를 묻고 그것에 대답하는 형식만이 그에겐 소설인 까닭이다.(273쪽) 그는 혼심의 힘을 기울여 「북간도」를 썼다. 그것은 「북원」이라든가 「북향보」의 세계와는 다른 역사관에 그가 이르렀음을 뜻한다. 「북원」이나 「북향보」가 서있는 세계관은 <만주국 조선계>라는 매우 한정된 세계관 위에 선 것인 만큼 그것이 아무리 대단한 것일지라도 한국민족문학의 범주에 똑바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은 못 된다. 만주국 이념에 속하는 세계에 지나지 못한 탓이다. 그런 한정된 세계관에서 벗어나 북간도의 조선민족 문제를 한국민족운동사의 주류 속에 편입하는 방식은 과연 무엇인가. 이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 안수길에겐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 그것은 안수길 혼자서 대답할 수 있는 것이 못 된다. 그를 에워싼 한국의 50~60년대의 총체적 의미가 그 해답을 만들어내었다. 동족상잔을 거친 6.25를 겪은 뒤에야 그러한 민족사적 세계관이 형성된 것이다.(278쪽) 「효수」는 만주체험 자체에 멈추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시점에서 쓰되, 마주체험 자체를 당시의 상태로 포착하는 일은 작가적 역량이라 할 수 있고 또한 만주체험이 이 작가에게 얼마나 깊이 뿌리박힌 것인가를 웅변으로 말해 주는 일이기도 하다.(282쪽) 만주국을 전제한 바탕 위에 서 있었던 만큼 그에게 있어 만주체험은 만주의 조선인 개척사와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엄격히 말해 이 시기에 있어서도 그는 만주를 관찰하는 자리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만주국의 주인이라든가, 뼈를 만주 땅에 묻어야 하는 자리와는 다른 좌표측에 서 있었다. 「북원」이나 「북향보」의 세계가 아무 저항없이 한국 민족문학 속에 들어오기(290쪽)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291쪽) 해란강을 거닐면서 그는 친구들과 싹트는 대지에 무학의 씨를 뿌리고자 하였다. 동인지 「북향」을 6까지 간행한 일이 그 첫 번째 결실이었다. 이어서 창작집 「북원」과 장편 「북향보」를 썼다. 그는 「만선일보」기자라는 매우 중요한 자리에서 있었고 이 자리가 또한 그의 창작을 이끌어 올리기도 하였고 제한하기도 하였다. 요컨대 그는 1932년에 성립된 일본관동군의 괴뢰국가인 만주국의 조선계작가의 대표적 존재에까지 이를 수가 있었다. 오랑 부부가 경영하는 잡지에 안수길의 「부억녀」가 실린 것은 당시의 안수길의 위치를 제일 잘 말해 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안수길의 이 시대의 작가적 수준은 매우 불완전한 것이었다. 만주국 조선계작가의 대표적 존재라고 할 때 그 만주국이 괴뢰국가임을 염두에 둔다면 그가 「토성」, 「목축기」 등에서 제시한 모랄도 괴뢰적인 성격에 훼손된 까닭이다. 이 사실은 안수길이 8․15해방 몇 달 전에 고향 함흥으로 되돌아온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 만주의 조선개척민단의 생존권을 그린다고 자처한 안수길이, 설사 건강 때문이었다고는 하나, 그것을 버리고 고향으로 온 사실은 그에겐 만주가 아닌 돌아갈 고향이 따로 있었음을 웅변으로 말해 주는 움직일 수 없는 중거이다. 만주에 뼈를 묻고자 하는 종류의 사람들과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 안수길이 만 3년의 공백기를 거쳐 월남하고, 다시 창작을 시작할 때 그의 만주체험은 부끄러움과 자부심의 양면성을 가진 것으로 그의 의식을 송두리째 지배하였다. 부끄러움이란 만주국문학에 예속되었다는 점이고 자부심이란 작가의 체험의 특이성에 관련된다. 이 둘을 동시에 극복하기 위한 길이 곧 「북간도」를 쓰는 일이었다.(300쪽) 「북간도」를 쓰기 위해 안수길은 <어떻게 사느냐>의 창작방법을 재확인하는 오랜 과정이 요청되었다. 만주국 조선계의 시각에서(300쪽) 벗어나 한국민족의 주체성 쪽에 서서 만주체험을 재편성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301쪽) 장편 「북간도」(1959~1967)가 그의 대표작임은 주지된 터이다. 이것이 단순히 작가 안수길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한국문학의 대표작 중의 하나라는 점의 승인과 민족적 리얼리즘이란 용어의 성립이 대응된다는 점의 해명은 우선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 같다. 이 문제는 문학사적 안목(필자의 용어로는 의미강)에서 설명될 성질의 것이다. 한국 근대소설의 사적(史的) 전망에서 볼 때 식민지 상황의 의미가 기본항으로 놓이며, 이 축(軸)은 님의 침묵으로 표상된다. 한국 근대문학사를 정신사적 측면에서 설명, 파악하려는 시도는 이 한도 내에서 일정한 유효성을 갖는다. 흔히 사람들은 도대체 그런 흑백논리로 문학을 처리한다는 것의 오류, 혹은 경직성을 지적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축을 상정한다는 것과 사고의 경직성은 적극적으로 혹은 단호하게 말해서 동일한 것일 수 없다. 기본항의 인정과 논리의 경직성이 동일한 것으로 처리된 경우는 실상 문학의 본질적 측면을 몰각함에서 대부분 연유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작가별 계층 분석과 그 계층별 세계관(작품 및 정신적 산물) 연구가 거의 없다시피 한 상태를 위의 진술이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305쪽) 「북간도」는 소설로서의 약속을 희생하고 사실 자체를 살리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일 이런 독법으로 읽는다면 작가의 강박관념이란 무엇인가. 바로 이 물음 속에 소위 민족적 리얼리즘이라는 용어의 비밀이 있다. 동시에 이 진술 속엔 「북간도」가 완성의 의미 쪽보다 과정으로서의 의미 관련이 내포된다. 고쳐 말해 예술적 리얼리즘의 미달이 민족적 리얼리즘이다. <민족적>이라는 형용어와 <예술적>이라는 형용어가 동질적으로 파악될 때 한국문학은 아마도 진정한 작품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어러운 물음 혹은 움을 작가 안수길은 거의 혼자의 힘으로 감당해 온 것으로 볼 수 있고 바로 여기에 그의 위대성이 있을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북간도」, 통로(1969), 「성천강」이 그 도전이다. 이 세 작품이 그의 소설적 싸움의 3부작이다.(309쪽) 우리는 어째서 「성천강」이냐고 물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답변은 이 작품 전체의 토운〔어조〕에서 얻어낼 수밖에 없다. 작품 속에서 계속 울리고 있는 <관북연락선>에서 그 해답이 주어진다. 한국을 운위할 때, 관서, 관북, 영남, 호남, 경기 등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라면 이 「성천강」은 관북지방의 대명사이다. 당시에 관북은 부산과 화륜선으로 연결되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육진(六鎭)개척 이래 관북은 영남지방의 이민 후손이다. 그리고 관북은 곧 간도와 직결되는 것이다. 이런 전망에 설 때 「북간도」에서 작가가 간도를 일반화한 것이었다면 「성천강」에서는 간도의 특수화를 노린 것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주(311쪽)제상으로는 <간도가 한국의 연장>이라는 명제보다 <간도가 함북의 연장>이란 명제는 공소하지 않은, 보다 압축된 것으로 된다. 이런 설정이 득실이 있겠지만, 만일 다음 사실을 믿는다면 오히려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즉, 작가는 쓰고 싶은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쓸 수 있는 것을 쓸>따름이다. 「북간도」가 전자의 경우라면 「성천강」은 후자의 경우일 것이다. 작가 자신이 「성천강」에 자부심을 가졌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312쪽)
33    삼대연구자료들 댓글:  조회:2629  추천:0  2009-05-16
삼대 연구자료 1. (정현기 <<한국 근대소설의 인물유형>> 인문당 1983) <<삼대>>. <<탁류>>. <<태평천하>>의 소설 세계에 나타난 인물연구 서론 하필 이 두 작가의 세 작품으로 논의의 범위를 한정하는 이유는...세째, 이들 작가들이 실은 당시대의 시대적인 민족의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리얼리즘 정신을 깊이있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가 묘사적 사실주의에 충실하려고 했다면 다른 하나는 풍자적 사실주의로 그들의 정신을 드러냄으로써 둘이 다 당시대의 역사적 당위명제가 무엇인지 또 그것이 어떻게 좌절을 맞게 되는지를 여실하게 증명하고 있다.(9) -여기서 중시되는 점은 <공시적 관점>이라는 근대소설의 기법상의 특질과 함께, 작가의 객관성 비감동 및 몰개성이라는 근대사회화 이후 만연한 상대주의적 양상이다. 대중에 의해 확대.성장하기 시작한 시장경제 체제는 개인들로 하여금 절대적 선택의 기준을 이완시켰고 동시에 이 경향은 취향의 다양화라는 결과를 유도.초래하였다. 그러므로 점차 고식적이고 <<사변적인 교훈>>이란 응당 절대적 가치를 잃게 되었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는 이른바 객관적 묘사라는 성실성을 유지함으로써만이 상대적 기준에 입각한 기호판정을 가능케 한다고 믿게 되었다.(14-15) -개인과 사회라는 관계를 파악함에 있어 한 소설에 참여하는 모든 인물들에게 주체적 자아를 부여하는 일은 정당한 노력일 뿐 아니라 그들이 서로 얽히면서 낳는 인식의 양상이 어떻게 긴장상태를 유지하는가를 지적할 때 소설구조가 지니는 미학적 가치는 다소간 입증되는 것으로 보인다.(15) -봉건잔재를 의식내용으로 갖추고 유교적 전통을 고집하려는 제1세대 조 의관이 이 작품 속에서 지닌 소유내용들...우선 조씨가의 가부장제적인 인물이며 가족사 연대기의 제1주인공...(16) -혼란한 틈에 일단 벼슬을 상징하는 표적을 사두고 남의 족보 속에 자신의 이름을 끼워 놓음으로써 그 자신의 가치영역이 영원히 지속. 확대될 것으로 믿는 사람, 이 이후에 채 만식의 <<태평천하>>에서도 동일한 의식구조는 드러나 보이는데, 이런 인물유형은 전체 인간의 욕망을 표현하는 여러 갈래의 한 전형이다.(20) -상훈이가 대표하는 뿌리 잃은 가치세대에 의해 조 의관의 세대는 정면으로 도전당하면서 갈등을 표면화시킨다. ...부자 사이에 오고가는 애증의 갈등이 표면화되는 이면에는 조 의관의 가치관에 대항한 반발이 그 요인으로 깔리고 있다. 가치의식의 충돌인 것이다. 이 충돌에서 분명히 떠오르는 사항은 조 의관이 소유하고 있는 또 하나의 세계이다. 물질의 소유를 통해서 파생되는 의식내용이 드러난 것이다.(21) -작품 전체구조 속에서 차지하는 상훈이의 역할이란 실상 별로 크지 못하다. 이유는 이 작품의 배경으로 되어 있는 세계가 유교권 인물에 의해서 기초되고 있기 때문일 뿐 아니라 배경으로 설정된 사회배경 자체가 동양이 서양과 마주치는 과도기에 있고 보수지향적인 인물을 조의관으로 보고 서양사상을 표방하는 인물로 상훈이를 보려고 하는 작가의 사회철학적 관점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상훈은 어느 면에서 희생세대쪽으로 볼 수 있는 인물류에 속한다. 미국에 가서 2년간 있었고 교회생활을 통해서 당시에 유행하던 교수사업을 펼치던 상훈이, 그러면서도 그는 생동하는 인물이 못되고 찌그러진 폐인이 되고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이미 3.1운동의 실패라는 커다란 상처의 후유증을 안고 있었던 시기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상을 펼쳐보려던 모든 사회운동 자체가 위축되던 시대를 살면서 가장 구체적인 아버지 조 의관 세력의 실제적인 금전상의 위협을 받은 상훈이의 신념이라든가 신앙이란 실상 의미가 없는 것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21-22) -그러므로 그는 서구적인 합리주의 사고가 거대한 전시대의 잔유세력 앞에서 어떤 방식으로 왜곡. 굴절하게 되는가를 보인다...그들 두 사람이 지닌 갈등 가운데 표면적으로 보이는 중요한 내용의 하나가 미래에 관한 신념이라는 점은 그 마찰의 동기를 부여하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그들 신념의 구조자체가 실상은 자기 표현의 욕망을 지탱하는 방법적인 것에 머물고 있음이 작품 속에 보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22) -네째 마디로 분류될 수 있는 부분이란 소유의 관계들 속에 도사리고 있는 접촉항인 각 개인의 탐욕과 질투. 아부. 술수. 허영심. 증오심. 체념 따위의 이른바 내적중개로 변질된 인간내면의 황폐함이다. 진실에의 추구라든지 진정한 의미의 삶의 추구가 결여된 채 일정한 힘에 이끌린 모습으로 불안과 무기력이 주조를 이루는 작품분위기로 이 조 의관의 소유관계는 이어져 있다. 그가 생산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부재지주로서의 체면으로만 살고 있기 때문에 삶의 활력을 일으킬 성취동기나 그 실행을 위한 박진력은 있을 수 없다. 다른 이야기의 인물유형들 속에도 물론 다시 편입될 수 있는 인물들,...등은 상훈이를 필두로 한 처=덕기모. 첩=김의경. 홍경애의 인물군과 함께 한 가족사를 둘러싼 뿌리잃은 도시권 생활사의 한 단면도이다.(23) -타락한 조 상훈과 그 희생자 홍 경애가 이런 마주침으로 관계가 이루어지기까지의 과정 속에는 다분히 가진 자와 뿌리를 잃은 자간의 심리적인 동참의식이 작용했음을 무시할 수가 없다. 홍 갱애 모친이 조 상훈으로부터 생활상의 금전적 도움을 받으면서 겪는 심리적 고통은 실제로 그들이 넘겨야 할 심각한 하나의 시련이다. 신세를 계속 져 오던 갱애쪽의 처녀다운 의협심(?)은 어느 면에서 자기희생을 무릅쓰겠다는 보상심으로 크게 작용했다고 보여진다.(31)-? -이처럼 비정상적인 혼인관계가 이루어진 사회내에서의 비정상 성습속이 순환을 이루면서 반복됨은 중시해야 할 점이다. 한 개인이 스스로 관습을 깨뜨리면 어느 때든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 경험적 사실이라면, 이 작품의 경우 바로 자신의 자식대에 와서 그가 행한 대가를 되돌림받게 될 수 밖에 없는 이치가 이 항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우둔한 치부자들이 그 사물이나 현상을 변경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스스로 도덕적 관습을 깨뜨릴 때 그 부정적 결과가 가장 가까운 자기 자식에게 미친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지적돼야 할 것이다. 한번 깨어져 내려 온 성관습은 쉽게 다음 대에서도 용납될 수 있게 된다.(32)-? -가정의 생계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조 상훈과 밤중에 밀회한 것을 묵인한 그 어머니는 그 딸의 또 어떠한 불륜도 막을 수 없는 입장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경애는 한껏 자유스런 몸림과 마음놀림을 부여받은 것이다. (32)-? -완전히 중도적인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인물들의 행위를 그려보이고 그 대화까지를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처럼 드러난 염 상섭의 <삼대>속에서도 실상은 무섭도록 냉엄한 작가적 판정이 개입되고 있다는 점은 지적되어야 할 사항이다. 그가 그리는 소설의 분위기 속에 깔린 어두운 색조, 일가의 해체과정, 인물들이 끝까지 감당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끝맺은 질곡뿐인 세계에의 조명 등은 그가 조준하고 있는 가치지향의 척도가 뚜렷함으로서만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치지향의 척도란 그러면 무엇인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자아에 대한 절실한 절망이다.(44) -당시대의 교육사업이라든가 교회를 통한 구원의 방법이 어느 한 면에선 일제를 위한 교육으로 굴절된 모습을 띠었고 신앙문제 또한 교회조직의 허울만이 돋보이고 있었다는 한 예증을 그에게서 보게 된다.(45)-?(조 상훈이 아니라 김병화를 통해 시대성격적으로 표현) -작가는 이 작품 전체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색정적인 배경을 구체화하고 있지 않지만 조 상훈이 성적으로 이미 도착적인 상태에 와 있음은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그는 커다란 두 개의 의지-유교윤리를 기초로 한 재산가 부친과(돈의 힘) 애정윤리를 기초로 한 쾌락의 힘(김 의경. 매당)-에 의해 맥없이 부서져가는 인물의 한 전형을 나타낸다.(47) -그러나 한편 이 인물이 계속해서 김병화로 대표되는 없는 자를 돕기 위해 그 가진 재산을 이용하는 심리적 배경에는 적어도 당시대 재산을 소유했다는 자기조건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녔다는 증거가 된다고 보겠다. 또 한편 이런 개인적인 자기성찰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불합리성이 당시대 사회내부에 심각하게 깔리고 있었다는 점을 용인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가난하고 못사는 것이 오히려 당시대의 삶을 떳떳한 것으로 여길 수 있었다면 사회가 지니고 있는 구조적인 병리현상은 대단히 깊은 것으로 보게 한다.(61) -종교나 교육이란 극히 추상적인 것으로 믿을 수 없는 힘이고 현실적인 힘인 안정된 재산 자체만이 자존하느냐 파멸하느냐 하는 열쇠로 작가는 파악함으로써 상징적인 인물인 조 의관-중인계급 출신-을 주축으로 열쇠를 물려주되 꺼풀만의 종교 신봉자인 조 상훈이를 건너 뛰어 아직은 순수한 덕기에게 물려주게 만든 것으로 인식된다.(66) -일제라는 거대한 힘에 의해 주리를 틀린 백성들이 어떻게 살든, 사는 것 그 자체를 비웃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고 이러한 작가의식은 중요한 인물인 덕기로 하여금 그 옆에 살고 있는 모두에게 비판적인 안목을 갖추되 동정하는 태도를 보이게 하고 있다.(67) -가장 가열한 외적의 수중에서 서로 합치할 수 없는 독자적인 방법론의 주장은 결과적으로 일제가 바라는 바의 근본적 민족분열이라는 상태로의 귀결에 다름 아닐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덕기의 우유부단하고 늘 <<자기행위에 회의를 느끼는 성품>>은 일차적으로 기회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고 또한 <<중도적 안정성의 회귀>>라는 평가를 가능케도 하는 반면 민족의 집결된 힘을 총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이해력의 폭이라는 긍적적인 평가도 가능케 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공동운명체간의 화해와 결속을 바라는 민족염원이 이룩할 수 있는 인물의 전형적인 한 기질로도 파악될 수 있다. 이런 긍정성이 부여될 때 이 인물은 작품배경으로 깔린 당시대의 민족적인 질곡을 견디며 자기가 설 위치에서 보여준 동족간에 행한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68-69)-? -가진 사람을 작가가 옹호하려 한다는 관점에서 좀 더 떨어져서 그 재산이 당시대 한국민족이 지닌 현실적인 힘일 수 있었다고 볼 때 당위론의 관점은 달라져야 할 것이 아닌가? 조 의관이 가지고 있었던 소유내용이 한국 자체내에서 부당한 이익추구의 결과라는 판정은 그것대로 타당하다 하더라도 일본 제국주의라는 민족공통의 적 앞에서 내세울 마땅한 긍정적인 유산으로 평가해도 되지 않을까? 그 재산 자체는 한민족적 한가족의 소유라는 점에서 그 재산이 일본인들이 아닌 한국인들을 위해 쓰여져야 한다는 당시대의 당위 명제가 있을 수 있다면 덕기에 오면서 그것이 실현되고 있음을 이 작품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70)-? -과격하고도 환상적인 공산주의자 장 훈의 파괴적인 자기 희생을 통해서 김 병화의 존재를 확립시키고 이 인물의 존재 위에서 덕기를 접속시키고 있음은 작가의 사회의식이 어떠한 개혁의지도 전통적인 민족단위의 기반 위에서 수립되지 않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으리라는 신념과 맥을 잇고 있음을 인식케 한다.(75) -일본이라는 악의 몸에 붙은 발과 손이 저지르는 악행을 짐짓 보지 못하고 지낸다 하더라도 한민족이라는 일개인은 어쩔 수 없이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시대와 상황이 바로 작가 염 상섭이 살던 지점이었다.(91) -앞에서 분류한 인물유형들을 작가적 절망-삶의 한계인식-이라는 안목에서 보면 중대한 측면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것은 민족의 존재단위로 지닌 치부층의 소유양식이 뿌리가 없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어 불가피하게 그 소유양식은 깨어질 수밖에 없다는 작가인식이다.(95) -<삼대>의 작가가 그의 출생지인 서울이라는 도시적 삶의 양상묘사를 통해 1930년대 초반에 걸친 한국적 절망을 보여주고 있다....(96) 2. (최 혜실 <<한국 근대문학의 몇 가지 주제>> 소명출판 2002) 제 3부 근대문학과 일상성 제 1 장 <<삼대>>에 나타나는 1930년대 자본가 몰락 -그러나 이 다양한 주장들의 관계를 정치하게 살펴보면 한 가지 상충되는 점이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돈을 추구하는 부르조아의 가치관과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가족관은 그 본질상 상당히 모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상충되는 가치관이 드러나며 양자는 어떻게 갈등을 일으키고 어떤 선상에서 타협하는지 혹은 두 가치관이 정말 상반되는 것인지 세밀하게 천착해 들어가는 데서 리얼리즘소설로서 <<삼대>>의 문학사적 의미망이 더 잘 드러날 수 있다고 본다.(126) -대부분 한국의 소설들이 예술 특유의 돈에 대한 순결벽을 드러내는 데 반하여 염상섭의 <<삼대>>에는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큰 동인이 <<돈>>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126) -그러나 지금까지 인물들이 ‘돈’을 욕망 실현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양상과 그 이기심이 가족간의 ‘피의 논리’, 인륜이 작용하는 양상과의 교호관계는 세심하게 연구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즉 기존의 연구는 합리적 논리와 가족간의 인정주의의 관계를 중산층의 보수주의란 개념하에 같이 놓고 산술적으로 결합하는데 그치고 있다. (128) -물론 우리는 1930년대 초, 경성 공간에 공존해 있는 구한말 세대, 3.1운동 세대 앞으로의 세대라는 조.부.손의 현재 모습들에서 과거 역사의 편린들을 엿볼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논의의 초점은 상반된 세 가치관들이 현재의 시공에서 어떤 갈등들을 빚는가에 있는 것이지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 변모의 과정과 필연성을 통찰하는 데 있지는 않은 것이다.(128-129) --결국 <<삼대>>의 가장 큰 주제는 돈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인물의 갈등 양상인 셈이다. 여기에는 혈육의 정이 존재하지 않는다.(1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훈이가 형사를 세워 금고를 탈취하거나 정미소를 상훈이에게 상속시킨다는 가짜 유서를 금고 속에 집어 넣는행동을 했다는 것은 신문소설다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삼대>>가 현실이었다면 그것은 부자간의 소송을 의미한다. (138) -...상훈과 덕기가 대안 없는 비판자라는 점만 강조하기로 한다.(146) -조의관에게 있어 벼슬과 족보 사기는 천박한 속물주의가 아니라 자손들이 가문에 긍지를 가지게 함으로써 그것의 결속을 공고히 하는 좋은 수단이 된다. 반면 상훈이나 덕기에게는 이런 확고한 윤리관이 결여되어 있다. 상훈의 ‘제3제국론’이나 덕기의 동정자 성향은 현실에 대한 방관자적 태도일 뿐 현실을 향한 가치관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결국 덕기가 <<무화과>>에서 아버지 상훈처럼 무위도식하다가 몰락하고 마는 전철은 이미 <<삼대>>에서 배태되고 있는 셈이다.(147-148) 3. (김윤식 편 <<염상섭>> 문학과 지성사 1977) 김윤식 <<염상섭의 소설구조>> -덕기는 그 어느 인물에서도 증오나 애정을 드런지 않는다. 이 중립성이 문체의 중립성을 가능케 한다...(59) -물론 부 상훈의 치졸한 연극, 그리고 순순히 회계하는 장면, 지주사의 배신의 동기, 병화의 새 출발, 필순에의 방황 등등이 형편없는 피상적 관찰이라는 지적을 우리는 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삼대>>의 원전 쪽이 훨씬 설득적이다. 거기에는 단행본에 있는 <<부친의 사건>>(41장), <<백방>>(42)이 없다. 실로 개악인 셈이다.(61) -과연 <<삼대>>의 주제가 중산층 안정감으로서의 재산의 윤리화로 본다면, 작가의 주제 파악의 지극한 보수주의가 옳으냐, 즉 시대의 진보성이냐 퇴보이냐의 문제가 이 작품의 가치를 평가함에 중요한 측면이라는 것은 새삼 물을 것도 없다. 리얼리즘이 단순한 묘사의 정밀성에 그치는 자연주의가 아님은 삼척동자라도 아는 일이다.(61) -서울 중인 계층 출신이자 그 계층 옹호에 철저한 <<삼대>>의 조부 조의관의 이데올로기를 호의로써 바라본 작가의 분신이라 할 덕기(손자 세대)인 것이다. 이에 비하면 신학문과 기독교적 이념에 놓인 아버지 조상훈에 대해서는 놀랄 만한 적의를 작가가 드러내고 있다. 실상 작품 <<삼대>>의 리얼리즘상의 취약점이 바로 이 편견에 있는 것이다.(65) -(중성적 안정감 회복이) 염상섭의 경우는 서울이라는 지역성, 그리고 궁정주변과 연결된 역사성이 확보되어 있으며, 이 점에서 그의 보수주의는 설명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 점은 중인계층의 역사성에 직결시켜 보면 한층 명백해진다.(70) 김현 <<염상섭과 발자크>> -전형으로서의 인물은 한 사회가 추구하는 이념을 자신의 피 속에 육화시키는 인물이다. 그는 오히려 그 이념 자체이다. 그러나 염상섭과 발자크는 그런 의미에서의 전형을 창조하지 않는다. 그 두 작가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전형적인 인간보다는 전형을 만들 수 있는 정열. 수난이, 다시 말하자면 한 시대의 문제가 어떻게 모든 인물들에게 확산해 들어가느냐 하는 점이다.(100) -사회가 변하지 않고 풍속적인 면에서나, 윤리적인 면에서 굳건한 틀을 가지고 있다면, 그 틀을 문학화하는 것이 작가들에게 가장 바람직한 일일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사회가 변천한다면, 그 변천의 과정이 여러 인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탐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전형을 창조하지 않고 <한 뭉텅이의 인물>들을 창조하려 할 때에는 (1) 평행을 이루는 여러 세팅의 복합, (2) 인물의 다양함, (3) 도덕적 의미에서의 절대적인 것의 부정이라는 여러 측면을 종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100) -<<만세전>>에서부터 점점 극복되기 시작한 자기 정열의 과잉표출은 그러나 <<삼대>>에 이르면 완전히 제거되고, 자기 관찰의 한계에 대한 뚜렷한 자각이 행해진다...그는 자기가 속한 사회의 냉정한 관찰이라는 선으로 자신을 낙찬지운다. 물론 그 관찰은 개성의 자각이라는 개인주의적 입장 위에서 이다.(112-113) -그를 통하여 소위 개화기시대의 인텔리. 부호들의 기독교와의 관계가 극명하게 들어난다. 개화기 초의 기독교가 풍속으로 뿌리박지 못하고, 새것 콤플렉스의 한 증세로서 <수입>되었다는 것을 상훈은 보여 준다.(114) -30년대의 세대를 염상섭은 덕기와 병화로 대표시키고 있는데 그 두 인물이 다같이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개화기 시대의 기독교의 악질적 측면을 나타내 주는 동시에 기독교에서 분파된 개인주의와 사회주의의 양극화를 보여 준다.(114) 4. (한국문학연구총서 현대문학편 8<<염상섭 연구>> 새문사 1982) 김종균 <<염상섭의 생애와 문학>> -<<삼대>>에는 조. 부. 자의 세대가 공존하면서 각기 다른 정신체계를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중심세대는 할아버지로 되어 있어서 유교사상 체계의 보수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있다. 따라서 개화. 개량주의자 아들의 세계는 빛을 못 보고 파멸에 이르는 과도기 체계 내지 역사적 공간에 끼어든 희생세대로 설명되어지고 있다. 할아버지에서 손자로 이어지는 정신상태 여기서 이미 비극은 잉태되기 시작한 것이다.(15) 이주형 <<‘민족주의 문학운동’과 ‘삼대’>> -<<삼대>>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 축을 구성의 골격으로 하고 있다. 하나는 종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서, 한 가족 내에서 일어나는 세대간의 대립과 연속문제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축이고, 다른 하나는 횡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서, 같은 세대에 속하는 여러 인문들 간의 대립과 화해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축이다. 이와 같은 플롯은 <<삼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런한 이중구성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 세대의 다양한 생활 양상, 그리고 같은 세대의 여러 가지 가치관을 한 작품 속에서 수용하려는 의지에서 창출된 것이었다고 보겠다.(43-44) -조상훈이 이 작품 속에서 보이고 있는 행위의 대부분은 매우 통속적인 것이라 하겠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이 작품 속에서 작가가 가장 통속적인 인물로 그려 보이려고 하는 것이 바로 조상훈이라는 것이 된다. 통속적 인물이란 대다수 시정의 사람들처럼 평속한 가치관을 가진 채 감각적, 순간 향락적 행위를 반복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45) -결국 종축과 횡축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가치관과 이념을 포용한 덕기의 현실대응 방법론은 1920년대 이후 민족개량주의자들이 말해 온 점진개량론, 준비론 혹은 실력양성론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행방 후에 개고된 부분에서는 대일타협론까지 나타나고 있다. 개고된 부분에서 덕기는 기무라 고등과장에게 뇌물을 주면서 피검자의 석방을 ‘사정’하고 심지어 기무라의 도움에 대해 ‘감사한 안사’마저 하고 있다.(49) -<<삼대>>의 형실대응 방법론은 민족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하층민들의 운명을 통찰하고 거기에 논리적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유산층 주변의 제한된 생활체험에서 나오는 지식인(중등 이상의 교육을 받은 인물이라는 점에서 일단 이렇게 말해둔다)의 관념을 통해서 제시된 것...(51) -또한 작중인물 덕기가 말한 대로 포용과 감화가 적극적 현실대응 방법이 될 수 있으려면 그 뒤에 오는 구체적인 실천방안과 최종적인 목표를 제시하는 논리가 수반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포용과 감화의 다음 단계에 대한 발전적 논리가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삼대>>에는 제시되지 않으며, 이 점이 <<삼대>>의 큰 한계일 수밖에 없다. <<삼대>>이전이나 이후의 작품에서도 염상섭은 그런 발전적 논리를 제시한 적은 없다.(51) 김중하 <<염상섭 문학의 사회적 의미>> -문학이 현실과 맺고 있는 현실반영적 의미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으로서의 문학사회학적 의미인 상대적 가치를 어느 정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한국의 근대문학이 발전해 온 파행적 특수성과 시대상황이란 것을 감안한다면-우리의 근대문학이 일제치하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여건적 특수성-문학의 절대적 평가 기준에서보다 그 상대성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는 어려움에 놓이게 된다. 단제의 민족사관이 극단적인 것이면서도 긍정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때문에 단제의 극언인 일제치하에서의 모든 문화활동은 반민족적 또는 친일적이란 표현이 절대적 변수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 해석된다. 그러나 만일 단제의 논리에 따른다면 우리는 불해하게도 친일근대문학은 가질 수 있어도 민족적인 우리의 근대문학은 처음부터 가질 수 없게 된다는 비극을 만나게 된다.(79) -삼대에 걸친 인물의 연계성이 세대간의 갈등이란 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돗하면서도, 그들의 삶의 태도나 현실 인식의 차원은 소설의 배경적 의미 이상의 민족사적 현실에 대응하는 것이란 점에서 소설 전체의 의미를 확대하도록 강요하게 된다.(84) 김시태 <<횡보의 비평>> -문학은 아무것에도 예속된 것이 아니다. 어떠한 종교나 운동에 예속된 이용물이 되고 계급의 특유물이 되거나 선전기관이 되며 玩弄物이 될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시기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릇된 현상이었다. 소위 예술이니 인생을 위한 예술이니 하지만 그 어느 견지로서든지 예술의 완전한 독립성을 거부할 수 없다. 더구나 경향이라든지 주의라든지 파라는 것이 작자와 작품을 지배하는 疇型에 배겨내이는 것이 아닌 이상에야 작가가 어떠한 주의라든지 일정한 경향에 구속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견지로서는 계급문학의 가부를 논의 할 필요가 처음부터 없지 않을까 한다.(염상섭: <<작가로서는 무의미한 말>>, <<개벽>> 56호, 52면)(36-37) -<<계급문학시비론>>에서 시작된 그의 프로문학 비판은 국민문학 논의와 함께 한층 가열되었으며, 그 후 이데올로기 문학운동이 종식된 30년대 초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37) 5. (김윤식 <<염상섭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7 811.3 염51z김1) -제1장에서 작자는 중산층 출신의 부자집 손주인 덕기와, <맑스 보이>인 김병화를 보여줌으로써 30년대의 풍속도를 먼저 제시하고 있다. (514) -말일 <삼대>가 이광수나 이효석의 작품에서처럼 사랑이라든가 감정을 일층 우위에 두고 얘기를 전개한다면 그것은 한갓 낭만적 멜로드라마에 떨어졌을 것이다. 사랑이나 감정이 소중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근대에는 핏줄이나 재산보다 앞서지 않기 때문이다. 근대적 삶이란 재산에 대한 생각이 핏줄이라든가 사랑보다 훨씬 큰 비중을 가져 인간을 행동케 하는 것이다.(516) -<삼대>에는 핏줄과 재산이 유착되어 있어, 핏줄 쪽은 봉건적인 생각에, 재산 쪽은 근대적인 생각에 속하는 것이어서 뒤엉켜 있는 형국이다. <삼대>는 근대적 소설이자 거기에 미흡한 것, 곧 중산층 보수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이 이로써 잘 드러난다. (516) -인간적 바탕의 깨끗함에 대한 도덕적인 우월성이야말로 작품 <삼대>의 밑바탕에 깔린 힘의 일종이다. 덕기도 병화도 이러한 도덕적 정결성에 의해 서로 깊게 맺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필순 및 필순 집안의 존재는 <삼대>의 세속적인 측면을 재는 눈금과 같은 것이다. 어떤 명작도 그것이 명작이기 위해서는 논리 밖에 놓인 어떤 정결함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삼대>는 그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522) -조성훈이 이 편지를 찾고자 안절부절 못하고 홍경애는 그 편지 쓴 여인의 정체를 몰라 몸이 달아 있는 이 장면을 국외자인 김병화가 지켜보고 있다. 부자집 아들의 오입장이 노릇하는 삶의 풍속도라 할 것이다. 홍경애가 김병화의 정체를 잘 알고 있는 것 역시 20년대 후반의 식민지 속의 서울의 풍속도에 속하는 것이다....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부자집 오입장이와 그 첩에 대한 흥미와 김병화와 피혁 등 사회주의자들의 행동 따위가 꼭같은 평면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곧 두 가지 모두가 한갓 풍속적인 흥미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삼대>에서 작가의 이러한 시각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이 작품의 의미는 똑바로 파악될 수 없다.(523) -풍속을 삶의 깊은 곳에서 그리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 풍속이 의식주를 해결한 자리 위에서 벌어지는 이른바 중산층 이상에 연결된 삶이라면 문화적 감각으로의 오입장이적인 감각이 빠질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부르조아지의 일상적 삶의 감각이기 때문이다. <삼대>가 이 시대 중산층의 삶의 감각을 다룬 유일한 작품이라고 평가되는 근거도 여기에서 말미암는다.(527) -...조씨가문의 분재기를 보여줌에 있어 작가 염상섭은 실로 파격적인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작가 염상섭이 맨얼굴을 드러내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536) -작가가 자기의 목소리를 버리고 돌연 <필자>라는 한갓 기록자의 자리에로 옮아 앉은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삼대> 속에서 바로 이 대목만이 소설보다 중요하다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다. 소설이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현실적 삶에서는 사실자체를 드러내야 한다. <삼대>가 소설임엔 틀림없지만 위의 대목만은 소설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현실적 세계로 옮겨가 버린 것이다. 진실과 사실이 여기서 대비되고 있는 형국이다. 어째서 분재기란 소설로 다루어지지 않는가. 왜 작가는 소설 속에 분재기만은 처리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을까. 이질감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진실과 사실 사이에 소설을 두느냐 진실 쪽으로만 치달을 것인가를 묻는 마당에까지 작가는 모르는 사이에 육박해 온 것이다. 사실 쪽으로만 치달리면 소설은 소멸되고 신문기사라든가 학술논문이라든가 보고문의 수준에 이를 것이다. 진실 쪽으로만 치달리면 그 끝에는 사랑이라든가 미움 또는 그리움과 같은 환상(꿈)의 수준에 이르고 말 것이다. 곧 로만스에 이를 것이다... <삼대>는 이 점을 그대로 방치해 두지 않았다. 사실자체의 힘을 이용하여, 진실이라는 이름 밑에 자행되는 허위성(환상적 열매, 허황한 기준)을 견제하고자 한 것이 바로 분재기의 제시와 그 제시방법이다.(536-537) -그렇지만 <삼대>는 소설인지라, 작가는 금방 자기 목소리에로 되돌아갔다. 사실이란 한 번 얼굴을 내밀면 족한 것이다.(537) -조부의 돈의 사상을 유지하되 사당의 사상(봉건적인 것)을 버리겠다면, 그것은 어는 쪽으로도 불철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불철저함이야말로 바로 <삼대>의 한계라 할 수 있다.(539) -곧 그러한 사상운동의 묘사는 범죄자(깡패)라는 감각이 아니면 결코 소설 속에서 포착될 수 없다. <삼대> 자체가 신문소설인 만큼 총독부 도서과의 검열의 직접적인 대상이었음을 염두에 둔다면 이 사정이 잘 이해될 것이다. 가치중립적인 일상적 삶의 감각 속에 신문이 놓여 있는 만큰 그 신문이 안고 있는 정치감각에 충실하는 일이야말로 근대적 삶의 기준에 제일 알맞는 것이다. 그러한 기준에서 보면 병화. 장훈은 깡패 또는 범죄자의 범주가 아닐 수 없다.(547) -<삼대>가 가족사적인 소설이라 하기도 어렵지만, 조부. 부. 손에 걸치는 삼대의 세대적인 갈등을 그린 것이 아님도 거의 확실하다. 더구나 같은 세대의 동시대적 의식을 그린 것이 아님은 분명한 일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그렸는가. 성격이었다. 성격이되, 운명론적인 성격이다. 발전소설, 또는 교양소설이 아닌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말미암는다. 교양(발전)소설 또는 성장소설에서의 성격이란, 그 자체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변해 가는 것이지만, 운명론적인 성격은 날 때부터 결정된 것이었다. 비중이 결정론적 성격에 있는 만큼, 현실개혁의 의지는 사실상 승인되지 않는다. 현상유지의 보수주의, 인간의 일상적 준거, 가치중립성에 멈추게 되어 있다. 자본주의적 삶의 속성이 이 보수주의와 잘 어울릴 수가 있는 것이다.(554-555) -그렇기도 하고 안 그렇기도 한 것, 그 속에 덕기의 인생이 놓여 있다. 이 불확실한 마음이란 덕기가 놓인 상황과 등가이다. 이 점을 인식할 때 비로소 <삼대>의 참주제가 새삼 선명해진다.(561) -돈의 자율성과 개개인의 성격이라는 두 기둥 속에 놓인 조씨가문의 삼대는 각각 저마다의 <도의적 이념>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가치중립적이고 현상유지의 보수주의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제 4 대인 덕기의 아들도 앞 세대가 보인 성격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가 없음이 원칙이다. 다만 그는 그 나름의 <도의적 이념>만을 가질 따름일 것이다. 돈의 자율성을 돌파하지 않으면 이들 가문의 구원이 있을 수 없음은 이제 분명해진 것이다. 이들 가문은 그들 재산을 신성불가침으로 보호해 주는 통치부가 있는 한 영원할 것이다. 구한말 통치부든 총독부든 미군정이든 자유당 통치부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들에겐 역사가 없는 만큼 삶의 내재적 가치란 논의의 여지가 없다. <삼대>가 안고 있는 한계가 여기에서 말미암는다. 그러니깐 보수주의적인 세계관을 이 작품만큼 본격적으로 다룬 것은 우리 문학사에서 일찍이 없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563)
32    도애경-해방전 간도 체험소설의 공간수용양상 연구 댓글:  조회:2495  추천:0  2009-05-16
도애경, 󰡔�해방 전 간도 체험소설의 공간수용 양상 연구󰡕�, 한림대 박사논문, 2004 간도는 간도 문학 작가의 개인적 체험의(1쪽) 공간이자 민족 이주의 공간이었던 만큼, 일제 강점기라는 민족 수난의 시대를 겪어야 했던 작가가 문학 공간으로 수용할 때, 그것은 작가 의식이나 작가의 현실 대응 방식과 관련을 맺으며 나아가 작품의 서사 구조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 개별적 작가의 공간 인식을 통해서 생산된 간도 문학에서의 공간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일제 강점기 한국 문학의 공간이 확대되었을 때 그것이 어떻게 우리 문학 속에 수용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된다. 바꾸어 말하면 문학 작품을 통해 본 간도는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에게 있어 어떤 의미를 가졌던 공간이었는지를 알아보는 의미가 있다.(2쪽) 작가의 간도 체험, 혹은 만주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간도 문학’을 살펴 봄에 있어서는 먼저 만주에 대한 지리적, 역사적, 민족사적 의미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조선인의 만주 이주에 따른 고난과 정착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간도 문학은 우리 민족의 만주 이주의 역사와 밀착되어 형성된 문학이기 때문이다.(2쪽) 재만조선인 사회의 형성과 확대는 곧 재만조선인 문단이 자생할 수 있는 문화적 토양을 마련하는 계기가 된다. 또 점차 문예활동에 대한 검열이 강화되고 발표지면이 축소되는 등, 민족 말살정책이 시행되어 가던 조선의 상황에 비하면, 표면적으로라도 조선인을 만주국의 5개 민족의 하나로 인정하고 있던 간도는 문인들의 문예 활동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5쪽) 특히 해방전 간도문학은 조선족 문학의 근간을 이룬다는 점에서 한국 문학과 조선족 문학의 문학사적 공유물이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그간 주제와 소재의 특이성으로 한국 문학의 지엽적 성과물로만 여겨졌던 간도 문학의 가치와 비중이 과거 어느 때보다 커졌다.(7쪽) 이들 작가의 출생 연도는 각각 1901년, 1906년,(8쪽) 1911년으로 5년 정도씩 간격이 있고, 간도 체류 기간에 최서해 5년, 강경애 8년, 안수길 13년으로 차츰 길어진다. 따라서 이 세 작가의 체험은 시기적으로 각각 3․운동 직후의 1920년대, 간도 5․30폭동과 만주국 수립의 1930년대 전반, 그리고 중․일 전쟁기인 1930년대 말과 1940년대 초반의 것이며 당연히 그곳의 정세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탈출기」로 대표되는 궁핍의 간도, 「소금」으로 대표되는 반만항일무장투쟁 기지로서의 간도, 「목축기」로 대표되는 전시 생산 기지로서의 간도이다.(이상경, 「간도체험의 정신사」, 󰡔�작가연구󰡕� 제2호, 새미, 1996,p.11-인용자 재인용) 간도의 정세와 이주 조선인의 현실을 작품 속에 그려 놓은 이들 세 작가의 작품에서는 작가별 개성과 아울러 해방 전 간도 문학의 초기․중기․말기의 시대별 특성을 볼 수 있으며, 또 간도 문학, 혹은 재만 문학이 해방 후 중국 조선족 문학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들 세 작가는 간도에 살고 있던 조선인의 고난에 찬 삶을 문학작품 속에 형상화함으로써 한국문학의 문학적 공간을 북방으로까지 넓혀 놓았고, 간도라는 이국의 공간을 익숙하고 친밀한 곳으로 장소화시킴으로써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이들의 문학은 하나의 공통분모를 이룬다. 또 이들은 공히 일정 기간 간도에 살다가 해방전에 다시 한반도로 돌아왔다는 점에서 간도 체험 작가로 묶어 고찰하기에 적당하다. 그것은 해방 이후 계속해서 간도에 남아 ‘중국 조선족 문단」을 이끌었던 다른 재만 작가들과 크게 변별되는 요소이기도 하다.(9쪽) 안수길의 초기 문학에 대한 그간의 평가를 정리해 보면, 대략적으로 ‘빈곤문학’ 이나 ‘농민문학’, 또는 ‘이민문학’으로 보는 긍정적인 관점과 만주국 이념에 충실한 부일 혹은 친일문학의 부정적인 관점으로 나뉘어진다. 전자의 경우는 안수길의(17쪽) 초기 소설이 이주민의 고난을 통해 한민족의 만주 개척사를 증언하는 성격을 가지며 만주국 정책과 부합하는 작품들에 대해서는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비해, 후자는 만주에서 활동하던 안수길이 작품을 통해 민족의 독립이나 적극적 형태의 항일을 모색하기보다는 만주국 정책에 부응함으로써 비민족적인 작품 세계를 갖고 말았다고 비판한다.(18쪽) 한편, 이들 작가의 개별 연구에 비하면 간도 문학의 전반적인 연구는 그다지 많이 이루어진 편이 아니다. 주로 일제 강점기 농민들의 고향 떠남과 이주를 다룬 작품들을 대상으로 ‘이민문학’(오양호, 「이민문학」1, 영남어문학 3집, 1976-인용자 주), ‘실향소설’(이정숙, 󰡔�일제하 실향소설 연구󰡕�, 서울여대 박사논문, 1989-인용자 주), ‘유이민소설’(민현기「한국 유이민소설 연구」, 󰡔�어문학󰡕� 51집, 1990-인용자 주), ‘유민소설’(이정은, 「한국의 유민소설 연구」, 영남대 박사논문, 1995-인용자 주), 혹은 ‘이향소설’(조구호, 󰡔�일제강점기 이향소설 연구󰡕�, 경상대 박사논문, 1999-인용자 주)이라는 명칭 아래에서 일제의 강압적인 식민 통치로 궁핍해진 농촌과 이민의 문제에 대해 포괄적으로 연구가 수해오디었다.(18쪽) 한편 골덴스타인은 공간의 네 가지(다섯가지?-인용자) 기능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첫째, 공간 묘사는 허구의 이야기를 진실임직한 세계에 위치시키는 역할을 한다. 둘째로 다른 많은 장소들 중에서 특별히 선정된 그 소설 특유의 공간은 이야기의 극적 효과 창출에 기여한다. 셋째, 공간은 성격부여의 기능을 갖는다. 환경은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며 인간을 형성한다는 생각에서 사실주의, 자연주의 소설에서는 배경이 바로 그 곳에 사는 인물의 이미지로 묘사된다. 여기서 공간은 상징적 기능을 갖는다. 넷째, 공간에는 행동, 플롯이 전개되도록 하는 기능도 한다. 다섯째, 더 나아가 공간은 사건이 전개되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다섯째, 더 나아가 공간은 사건이 전개되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박혜영, 「문학과 공간: 이론적 접근I」, 󰡔�덕성여대논문집󰡕� 제25집, 1996, pp.129-130-인용자 재인용)(26쪽) 간도 문학에 있어서 공간의 문제는 대단히 독특하고 의미심장한 면모를 갖는다. 고향 떠난 사람들, 즉 이주민을 다룬 작품이 대부분인 만큼, 간도 문학을 여타 문학 작품과 구별하는 가장 큰 요소가 공간적 배경일 것이며, 작가에게나 독자에게 가장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역시 일차적으로는 공간의 문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낯선 환경에 놓인 사람들에게 당면한 문제는 우선 새로운 땅을 알아야 하는 일일 것이고 그 다음 정착하고 적응하고 향상시키는 방식으로 그 땅에 뿌리를 내리는 과정을 거키는 것이 일반적인 이주의 양상이다. 그렇다면 간도 문학에서 낯선 공간 속에서 어떻게 그 공간을 이해하고 의미화 할 것인가의 문제는 작가 의식면에서 다른 어떤 문학적 주제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속한다. 만일 그것이 단지 소재나 배경으로만 머물지 않고 주제를 이끌어 내고 인물들의 행위와 사건들을 주도적으로 발생시킨다면 그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다.(27쪽) 식민지 시대에 있어서 ‘간도’란 외국의 지명이 아니라, 그대로 식민지의 처절한 삶을 보여주는 한 비극적 상징이다.(35쪽) 더 이상 안주할 수 없는 고향을 떠난 조선인들에게 간도는 예전의 고향과 같은 삶의 터전을 그 곳에 새로 일구어 가야 하는 개척의 땅이다. 고향을 떠나 찾아가고자 하는 간도는 희망의 땅이자 이상향으로서 그려진다.(36쪽) 이국의 땅을 떠돌아야 하는 당대 조선인들의 입장은 열려진 공간, 이를 하이데거식 표현을 빌자면 세계 속에 내던져진 존재가 되었다.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장소로서의 고향이 훼손됨으로써 거족적인 고향 상실의 운명이 펼쳐지고 유랑민이 되어 낯선 공간을 방황한다. 그들이 얻은 공간에 대한 자유는 원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식민지의 궁핍한 상황에 의해 강요된 것이었다. 미처 이질적인 공간을 마주할 준비가 없어도 낯선 미지의 세계로 떠날 수밖에 없다.(44쪽) 문학에서의 묘사는 일반적인 것보다 기술적이고 의도적인 것이다. 근대문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종류의 묘사는 배경 묘사일 것이다. 최근에는 배경이 인물의 행위와 직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강하여져서 배경 묘사는 인간 행위에 대한 간접적인 암시 또는 대조 비판이 된다고 보고 있다.(클리언스 브룩스․로버트 펜 워렌, 안동림 역, 󰡔�소설의 분석󰡕�, 현암사, 1996, p69-인용자 재인용)(121쪽) 설화와 꿈은 일반적으로 서사적 허구에 사실적인 개연성을 부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문학적 결함이 될 수도 있는데, 안수길의 경우 그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비유를 위한 소설적 장치로 사용하고 있다. 작품 「새벽」에서 작가는 기억 속에 있던 설화를 통해 등장 인물의 심리 상황을 효과적으로 묘사하고, 다음에 일어날 사건을 예언하는가 하면, 새로운 땅에 깃을 내린 이주민의 심적인 부담과 삶의 괴로움, 비극에 찬 고난의 현실 상황을 비유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또 「벼」에서는 조선인의 간도 이주와 정착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 설정되고 있다.(128쪽) “「벼」에서 󰡔�北間島󰡕�에 이르는 그의 작품의 기조음을 이루는 만주는 최명익, 정비석의 낭만적 도피처도 아니며, 최서해의 󰡔�홍염󰡕�에서처럼 외인 지주와 소작인의 갈등의 장소도 아니다. 그의 만주는 이태준의 󰡔�농군(1939)󰡕�에서 모사도니 것과 같은 땅에 깊은 애착과 결부되어 있는 만주이다. 일제의 악랄한 수탈 정책 때문에 정든 고향을 등지고 떠나와서, 원주민과의 목숨을 건 투쟁 끝에 쟁취하였고, 계속 원주민들의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만주의 땅이 안수길의 정신적 고향“인 것이다.(김윤식․김현, 󰡔�한국문학사󰡕�, 민음사, 1973, p.236-인용자 재인용)(128쪽) 중국이나 일본의 입장에서는 조선인을 만주 황무지의 개척에 이용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주 조선인의 입장에서 보면 만주이주와 정착은 곧 땅에 대한 깊은 애착을 바탕으로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일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벼’는 이주 조선인이 낯선 만주 공간을 친숙한 삶의 공간으로 바꾸어 나아가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고 있다. 이러한 역학 관계는 결국 보는 시각에 따라 긍정적이거나 혹은 정반대로 부정적인 방향에서 작품을 해석하게 만든다. 당대의 조선인의 만주 이주가 일제에 의한 ‘정책 이민’이었다는 성격을 문제 삼는다면 시대 상황과 관련하여 작가 의도를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재만(133쪽) 조선인 사회의 확대는 부정할 수 없는 당대의 현실이었고 안수길의 경우 그 현실에 대한 인정을 전제로 시대적 상황과 결부하여 그들의 나아갈 방향을 모색함으로써 민족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을 알 수 있다.(134쪽) [벼]에서 이주민들이 거친 삶을 감수하며 일구어 놓은 만주 땅은 이제 남의 땅이 아니다. 이주민들이 떠나온 고향은 기억 속에서 과거의 한 시점에 고정된 후 반복적인 일상 속에 거듭 재현되어 왔으므로 현재 속에 녹아 있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그들은 어떤 상황이 온다 해도 고향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다.(136쪽) 안수길의 초기 문학 가운데, 1940년대라는 시대적 정치 상황 변화와 관련하여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재만 조선인의 고민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작가 의식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으로 장편 󰡔�북향보󰡕�를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원각촌」이나 「목축기」도 그와 같은 계열의 작품이라 하겠다. 이 작품들은 만주국의 협화정신을 배경으로 낙관적 전망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서 살펴 본 「새벽」이나 「벼」의 세계와는 확연히 구분된다.(139쪽) 「원각촌」의 주인공 억쇠(이원보)는 작가 안수길이 창조해 낸 개성이 강한 인물이다. 억쇠의 아내 금녀는 간도에서 만주인 지팡살이(농장소작인)하는 아버지의 백 원 빚에 대한 담보였던 것을 억쇠가 대신 갚아 주었으므로 그와 결혼하였다. 만주인의 인신매매 풍습이 소재가 되고있는 점은 「새벽」에서와 같다. 억쇠는 의처증이 있어 아내에 대한 지나친 의심 때문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다. 그는 아내를 둔 것이 아니라 마치 누구나 탐을 내는 ‘백 원’짜리 비싼 물건을 품고 있는 것과 같아서 아내를 빼앗기거나 잃어버릴까 봐 전전긍긍한다. 이 작품은 억쇠가 일거리를 찾아 아내를 데리고 원각사라는 절이 있는 조선 개척민 마을에 들어오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140쪽) 한편 억쇠는 의처증으로만 일관하고, 원각촌에 등장부터 퇴장에 이르기까지 고독한 영웅의 이미지를 갖는다. 마을의 암종인 한익상을 처단하여 원각촌의 해결사 역할을 한다. 이러한 억쇠의 행위는 고향의 어느 마을에나 존재하던 장수설화가 개척마을인 원각촌의 현실 속에서 실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언젠가는 전설 속의 산 너머 아기장수가 나타나 마을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희망을 품는 것처럼, 아기장수는 현실의 고난에 대한 구원이자 변화에 대한 갈망을 의미한다. 이 작품은 그동안 주로 억쇠라는 한 인물을 부각시키는 데 성공한 작품으로만 알려져 있으나 막상 작품을 읽어보면 과연 억쇠를 그려내는 것이 작품의 의도였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억쇠의 행위는 논리적 설명이 필요 없는 단순하고 원초적인 것이(141쪽)며, 그에게 집밖의 외부 세계란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공간이다. 그는 결과적으로 마을에 좋은 일을 한 셈이 되었지만 개인적인 의미에 함몰되어 스스로 수행한 자신의 행동이 갖는 의미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마을을 떠나고 있다. 그렇다면 억쇠는 결국 만주에 조선인 개척 마을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설정된 하나의 장치에 불과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작품의 무게 중심은 억쇠라는 인물이 아니라 원각촌에 있는 것이 되며, 이는 작품의 제목과도 정확하게 들어맞는 것이다. 즉, 이 작품은 인물로서의 억쇠 자체를 조명하려고 했다기보다는 단순하고 평면적인 인물인 억쇠의 행위를 통해서 원각촌이라는 이주민 공간을 희망적인 장소로 장소화함으로써 토포필리아를 구현하는 작가 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142쪽) 한편 안수길의 작품 「원각촌」은 작가의 이전 작품에 비해 사실감(reality)이 많이 떨어진다. 마� 태생의 조선인 한익상 말고는 노동력 착취, 민족 차별, 정세의 불안 등 어떤 문제도 찾아볼 수 없는 곳이다. 「새벽」의 절망적 상황이나 「벼」에서의 치열하게 맞서야만 했던 만주의 현실과는 매우 대조적인 양상이 아닐 수 없다. 「새벽」이나 「벼」에서의 만주가 고난과 비극으로 가득 찬 현실의 공간이었다면 「원각촌」은 낙관적 전망으로 이어지는 이상과 희망의 공간이다.(142쪽) 그러나 일제 말, 벼농사에만 종사하던 재만 조선인들은 정부의 시책이 아니더라도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다양한 방식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벼농사는 초창기부터 이주 조선인의 주 종목으로 황무지를 개척하는데 기여했지만, 만주의 근대화 과정에서 전반적인 산업 구조의 변화를 가져올 필요가 있었다. 특히 간도는 일제시대 이전부터 양돈, 양계, 양봉 등 목축의 중심지(최경호, 󰡔�안수길연구󰡕�, 형설출판사, 1994, p.101 참조-인용자 재인용)였으며, 목축은 논농사보다 생산성이 높은 1차 산업이다. 작가는 「목축기」라는 작품에서 목축과 논농사를 다른 것으로 보지 않는다. 재만 조선인이 논농사를 하든, 밭농사를 하든, 목축을 하든 그것은 그 땅에서 살아가기 위해 선택하는 방편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목축이 일제의 정책이었다고 하면, 사실 조선인을 이용해 만주의 황야를 개척하는 벼농사 역시 일제의 정책이었다. 따라서 논농(143쪽)사인가 목축인가 여부는 ‘친일적’의 기준이 될 수 없다. 또 목축이 조선인에게 불리한 업종이 아닌 한, 그것을 행하거나 권장한 일 자체를 문젝삼는 것은 국가주의적인 편향된 시각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인들이 마주로 간 것은 살기 위한 것이었고 계속해서 그 땅에서 살아가야 할 재만 조선인들이 당대로서는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국가일 수밖에 없는 만주국을 부정하고 그 정책을 거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기의 안수길의 문학은 재만 문학이 독자적인 길을 가도록 길을 열어 주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144쪽)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만주국에 대한 정체성의 문제는 중국, 일본, 조선인, 재만 조선인이라는 각자의 입장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다르게 설명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일단 중국이나 조선에서는 만주국이 일제의 괴뢰정부라는 입장이며, 대륙침략의 야욕을 가졌던 일제는 조선인을 이용해 만주에 영역과 명분을 확보하고 마침내 만주국을 세움으로써 만주 경영의 기틀을 닦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주에 살고 있던 구성원들의 입장에서 보면, 만주국은 어쩔 수 없는 자신들의 국가였고, 주변국의 이해관계를 살피기에 앞서 자신들의 현재와 미래를 꾸려가는 일이 우선되어야 했을 것은 자명하다. 그것은 재만 조선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1940년대로 가면 이주의 역사도 오래고 이주 조선인의 수효도 크게 늘어 이주민 사회가 방대해졌으므로 일제나 조선에 의존적이기보다는 차츰 독자적인 생존의 길을 모색할 필요가 있었다.(150쪽) 소설은 소재로서만 사회와 관련을 맺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작품의 등장인물로서든 현실의 작가의 입장이든 외부 세계에 반응하는 주체적 체험의 양식은 사회적으로 규정될 수 있다. 작품에서 만주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신념가인 정학도를 내세워 농민도를 말하고 북향정신을 설파하는 것은 작가의 재만 조선인의 장래에 대한 깊은 성찰의 결과인 것이다.(150쪽) 만주국의 정책방향과 재만 조선인들의 사정을 문학작품을 통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것은 상호 협조와 호응을 기대하는 작가의 의도된 배려라고 하겠다. 이러한 내용은 문학 작품을 통해 만주국 정책에 협조함으로써 친일적 성향을 보인 것으로 혐의를 받은 부분이다. 그러나 조선이 아닌 만주국에 사는 입장에서 목축이 만주국의 생산성 향상을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재만 조선인의 경제적 향상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라면 조선인의 입장에서 거부하기만 할 일은 아닐 것이다. 결국 만주국과 재만 조선인의 이익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의미하므로, 안수길이 볼 때, 목축은 재만 조선인에게 꼭 필요한 생산업이었던 것이다.(153쪽) 만주를 고향으로 삼자는 안수길의 계몽 의식은 재만 조선인의 삶과 태도 전반에 대한 개선을 촉구하는 데로 나아간다.(154쪽)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조선인을 비하하거나 민족 차별을 조장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만주의 타민족과 화합하여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서 작가는 다른 민족의 눈에 부정적으로 비춰질 수 있는 동족의 결점 부분들을 작품을 통해 객관화하여 제시하고 개선을 촉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155쪽) 작품 󰡔�북향보󰡕�는 후반부로 가면 목장을 보전할 수 있게 되면서 분위기가 반전되는데, 그 댓니 북향정신은 ‘환경 개선 운동’이나 ‘농촌 계몽운동’정도로 비약하고 있다.(155쪽)주인공 찬구와 충청도 출신인 듯한 목장의 익살꾼 강서방의 대화에서 더 자연스럽게 만주에 대한 토포필리아를 느낄 수 있다.(156쪽) 󰡔�북향보󰡕�에는 이주민 2세대가 주역으로 등장하고 있는 만큼 만주를 고향으로 삼자는 주제에 대해 어느 정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앞에서 본 찬구나 명식처럼 만주는 그들 부모의 뼈가 묻혀 있는 곳일 뿐 아니라 자신을 비롯한 그 후손들이 앞으로 일구고 살아가야 할 현실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식민지 시대 조선인 이주민들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만주에 들어가 그곳의 어지러운 정세와 민족 차별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곳곳에 학교를 세우고 2세 교육에 힘쓴 것은 그 땅에 대한 애정을 높이고 그 사회에 기여하는 면도 있겠으나 민족의 정체성을 이어가려는 노력의 하나였을 것이다.(158쪽) 한편 󰡔�북향보󰡕�에는 대부분의 2세들이 ‘북향정신’에 동조하고 만주를 고향으로 삼고 있는 것과 달리 기어이 조선으로 가는 개성적인 인물이 있어 주목된다. 그는 정학도의 딸 ‘애라’인데, 주변의 젊은이들이 북향 목장에 매달리 때, 그는 만주를 떠나 경성으로 간다. 만주를 고향으로 삼자는 이 작품의 주제를 놓고 볼 때(158쪽) 주저없이 만주를 떠난 그는 매우 파격적 인물이다. 그의 정신적 지향은 부모가 고향으로 삼고자 하는 농업국 만주가 아니라, 개인적 재능과 사회적 성취의 가능성 면에서 열린 세계였던 문화의 도시 경성에 있었다. 그는 나중에 음반을 취입하여 ‘조선의 종달새’가 되고 북향목장을 구하는 일에 일조한다. 애라는 북향목장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북향정신의 수호ㅈ바가 되었다고 하겠다.(159쪽) 「새벽」과 「벼」가 ‘어떻게 살아왔느냐’를 보여준다면, 󰡔�북향보󰡕�를 위시한 일련의 작품 「원각촌」이나 「목축기」에서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들 작품에서 작가는 ‘북향정신’을 부각시키고자 하였으므로, 재만 조선인의 현실을 그렸던 작품들에 비해 비현실적인 요소나 이상 추구, 계몽주의적 성격이 많이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었다. 만주에 있는 동포들이 이제는 만주를 고향으로 삼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살아가자는 작가의 의도는 일제 패망을 앞둔 만주에서 국가적 관점을 벗어나 민족의 장래에 대한 상황적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사실 만주를 고향으로 삼게 되는 것은 만주의 특정 장소에 대한 애착심이 전제되어야 한다. 만주 공간에 대한 애착은 특정 장소가 고향에서의 경험과 같이 정서적으로 편안하고 안락한 곳으로 여겨질 때 절로 생겨날 수 있는 것이지, 구호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159쪽) 곧 해방이 되고 중국 조선족으로 편입될 재만 조선인들의 입장에서는 국가개념보다는 땅에 대한 정체성을 확실하게 하고 태도와 의식을 정비하는 것이 절실한 시점이었다. 그런 점에서 안수길의 󰡔�북향보󰡕�는 당대 사회의 증언적 성격보다는 대중을 선도하고 교화하는 기능을 적절하게 수행하였다. 작품의 발표 시점도 그러하지만, 만주에 대한 애착을 강조하고 이주민들에게 만주 땅에 대한 주인의식을 갖자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북향보󰡕�는 간도 문학으로서의 한국 문학과 중국의 조선족 문학으로 나뉘어 지는 갈림길에 서 있는 작품이다.(160쪽) 이 작품은 만주 조선인 선구 개척민들의 피땀 어린 고난의 역사를 통해 만주가 우리 민족의 삶의 공간으로 편입되었고 마침내 고향으로 삼을 만큼의 친근한 고장이 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의미가 있다.(160쪽) 무엇보다 작가 안수길은 ‘만주’를 민족의 일시적인 피난처가 아닌, 이주 조선인이 대를 이어 살아가야 할 땅으로 인식하였다. 그에게 있어 만주는, 수십 년에 걸친 조선인의 개척사를 간직하고 있는 시공간이자 수많은 동포들의 삶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일제의 패망을 목전에 두고 재만 조선인 사회의 중심에서, 문학작품을 통해 스스로도 모호하던 재만 조선인의 국가 정체성을 분명히 함으로써 그들의 가야 할 길을 명확하게 제시하였다. 결국 중국 조선족으로 살아강 하는 재만 조선인을 거시적 관점에서 보았던 작가의 판단과 희구가 자신의 간도 체험을 문학으로 형상화하면서 ‘북향(北鄕)’이라는 이상향의 추구로 드러났던 것이고, 그것은 곧 이주민의 땅에 대한 물리적인 정착 단계를 넘어선 지점에서 ‘정신적인 정착’을 도모했던 작가의 노력에 다름 아닌 것이다.(161쪽) 안수길의 간도 시절에 쓴 초기 작품에서의 간도는 작가의 공간 의식의 변화를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165쪽) 「벼」를 분기점으로 하여 농민의 땅에 대한 토포필리아는 만주 땅에 대한 뿌리내림의 방법이 되지만 다른 한편, 일제나 만주국의 시책으로서의 생산력 향상 수단이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중성을 갖게 된다. 이는 재만 조선인이 조선인이면서 만주에 사는 만주인이고, 중국 땅에 사는 중국인이면서 일제의 식민지인이라는 이중적 성격에 기인한 것이다. 일제와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야 하는 현실에서 재만 조선인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했던 작가는 만주국을 인정하는 방향을 선택한다. 작품 「벼」에서 남의 땅에 사는 민족의 설움을 그렸던 작가가 󰡔�북향보󰡕�에서 만주를 후대에 물려줄 고향으로 삼자고 주장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또 󰡔�북향보󰡕�외에 「목축기」, 「원각촌」 같은 작품이 계몽적이고 이상적인 방향으로 밝게 그려지고 있는 점과, 이들 작품에서 이주 조선인을 괴롭히는 주체가 중국인이 아닌 조선인이라는 점도 이와 관련이 있다.(165쪽) 오족협화의 기치를 내세운 만주 땅에서 이제 이민족이라는 점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작가로서 그의 고민은 재만 조선인이 국가로서의 조선인이 될 수 없고, 그들이 앞으로 계속 살아가야 할 만주 땅이 조선 땅이 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땅에 대한 소속을 분명히 하게 되면 국가에 대한 선택은 결국 만주국이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이 만주국 국민이 된다 해도 조선인이라는 민족 정체성은 바뀌지 않는다. 근대적 개념으로 볼 때, 국가와 민족은 별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 것은 무엇보다 안수길의 초기 문학에서 추구했던 것이 땅에 대한 애착이었기 때문이다. 이국땅에서 민족이 살아남는 길은 낯선 공간을 익숙한 공간으로 장소화하고, 확고한 장소애를 갖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중국 조선족의 존재가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166쪽)
31    채트먼, 이야기와 담론 댓글:  조회:3107  추천:1  2009-05-16
󰡔����이야기와 담론󰡕����(S.채트먼/한용환 옮김) 제1장 서론(요약) 문학 이론-넓은 의미에서 시학-과 관련하여 대두되는 많은 긴급한 요구들 가운데는 서사의 구조와 스토리텔링의 요소들, 그리고 그것들의 결합과 조합 체계를 다루는 합당한 항목이 들어 있다. 그 작업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시작된 바 있으나 그것은 단지 초안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시학󰡕����은 해결해주는 것보다는 더 많은 문제점들을 던져 주고 있다. 서사와 시학 형식주의자들과 구조주의자들은 시학의 주체가 문학 텍스트 그 자체이기보다는 오히려-로만 야콥슨의 어투에 따르면-그것의 ‘문학성(lierariness)’이라고 주장한다. 시학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문학 비평과는 달리) ‘󰡔����멕베드󰡕����를 위대한 문학으로 만든 것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그것을 비극으로 만든 것은 무엇인가’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문학 이론이란 문학의 본질에 관한 연구이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문학 작품 자체에 대한 기술이나 평가와는 관계가 없다. 현대 언어학과 마찬가지로 문학 이론은 통상적인 경험론적 접근보다 합리주의적이고 연역적인 접근을 중시한다. 그것은 정의들이 만들어지는 것이지 발견되는 것이 아니며, 문학적 개념들의 연역적 방식이 그것의 귀납적 방식보다 더 시험성이 높고 그러므로 더 설득적이라고 생각한다...노드롭 프라이는󰡔����비평의 해부󰡕����에서 명백히 연역적인 방식을 시도하고 있다. 우리는 실제의 작품에서 우리가 설정한 범주들의 순수한 예를 찾을 필요는 없다. 개개의 작품들은 그 범주들이 짜는 추상적인 그물 속에 속해 있다. 개개의 어떠한 작품도-그것이 소설이든 희극적 서사시이든, 혹은 그 이외의 다른 무엇이든-한 장르의 완전한 표본이 아니다. 모든 작품들은 다소간 혼합된 장르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달리 말하면 장르들은 여러 특성들의 복합적 구성체이다...우리는 텍스트들이 필연적으로 혼합된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에 당황할 필요는 없다. 그 점에서 텍스트들은 가장 유기적인 물체들과 흡사하다. 텍스트들이 지닌 일반적 경향들은 합리적인 탐구의 주제를 형성하고 있다. 서사 이론은 비평적인 분석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목적은 서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최소한의 특성들을 밝혀냄으로써 가능성의 한 극점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극점 위에서 개개의 텍스트들의 그물을 짜며, 그러한 과정을 통해 그 극점을 조절할 필요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탐색한다. 서사 이론의 요소들 구조주의 이론은 각각의 서사물은 두 개의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야기, 사건들(행위, 돌발사 등)의 내용과 그 연쇄 및 사물적 요소(등장인물이나 배경을 구성하는 것)라고 부를 만한 것이 합쳐진 이야기가 그 하나라면, 표현, 혹은 내용이 전달되는 방식인 담론이 그 다른 하나이다. 단순화시킨다면 이야기란 묘사된 서사물 속의 ‘무엇’이며, 담론이란 ‘어떻게’에 해당하는 것이다.                                   행위             사건적 요소                     돌발사       이야기                                               등장인물 서사시적 텍스트           사물적 요소                   배경                         담론                               이야기의 전이 가능성은 서사란 실제로 어떠한 매체로부터도 독립된 구조라는 주장의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된다. 장 피아제는 수학이나 사회인류학, 철학, 언어학, 물리학과 같은 여러 학문 분야들이 구조의 개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으며, 또한 그 각각의 경우에 전체성, 변형, 자기규정의 세 핵심 개념들이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특수한 성질들이 없다면 사물들의 어떠한 모임도 단순한 집합일 뿐 하나의 구조가 될 수는 없다. (이러한 세 가지 성질에 관련시켜 보면) 분명 서사물은 하나의 전체이다. 왜냐하면 사건적 요소들 및 사물적 요소들 자체와, 그러한 요소들로 구성된 서사물은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사건적 요소나 사물적 요소들은 고립적이며 불연속적인 반면, 서사물은 하나의 연속적인 구성체이다. 더군다나 서사물 속에서 사건들은(우연한 편집과는 달리) 상호 관련적이거나 상호 수반적인 경향이 있다...진정한 서사물에서 사건들은 피아제의 말처럼, ‘이미 정리된 것으로서 무대 위에 올려진다’. 임의적인 사건들의 덩어리와는 달리 그것은 뚜렷한 유기적 조직체로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둘째, 서사물은 변형과 동시에 자기규정(self-regulation)을 수반한다. 자기규정은 구조가 그 자체로 지탱되고 완결되는 것, 피아제의 말에 의하면 ‘하나의 구조 속에 내재된 변형들은 결코 그 체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언제나 그 체계에 속한, 그리고 그것의 법칙을 보존하는 요소들을 발생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하나의 사건이 표현되는 과정은 그것의 ‘변형’을 의미한다...그러나 이러한 변형-예를 들어 작가가 인과적인 연속에 따라 사건들을 기술하거나 혹은 플래쉬 백의 기법으로 그 연속을 뒤바꾸는 것 등-은 단지 어떤 가능성이 발생할 경우에만 일어난다. 서사물은 기호학적 구조인가? 서사물은 하나의 구조이다. 우리는 곧 이어서 그것이 독자적인 의미를 가진 것인가, 즉 그것이 말하는 이야기와 분리되어 그 자체로 저절로 의미를 운반하는 것인가를 물을 수 있다. 기호에 대한 일반적인 학문인 언어학과 기호학은 우리에게 표현과 내용 사이의 단순한 구분만으로는 전달이 일어나는 상황의 모든 요소들을 이해하는 데 불충분하다고 가르친다. 그 구분을 횡으로 잘라내면 거기에서 질료와 형식 사이의 구분이 생겨난다.       . 표   현   내   용 질 료     형 식     표현의 수평 단위들은 의미, 즉 내용의 수평 단위들을 가져온다. 서사물에서 표현의 영역은 무엇인가? 정확히 그것은 서사적 담론이다. 이야기가 서사적 표현의 내용인 반면, 담론은 그 표현의 형식이다. 우리는 담론과 그것의 물리적 발현-말과 그림 및 기타에 의한-사이를 구분해야 한다. 후자는 명백히 서사적 표현의 ‘질료’이며, 그것은 그 발현이 독자적인 기호적 약호로 나타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보통 약호와 약호들은 서로에게 질료로 봉사한다...서사물은 전달의 구체적인 언어적 매체, 혹은 다른 매체들의 표층구조(paroles)를 통해 운반된 심층구조(langues)인 것이다.   . 표   현   내   용 질 료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매체들(어떤 매체는 기호적 체계를 타고난다) ∙작가가 속한 사회적 약호들을 통해 걸러진 것으로서, 서사적 매체를 통해 모방될 수 있는 대상과 행위들의 실제적인, 혹은 상상적인 세계 속에서의 재현. 형 식 ∙어떤 형태의 매체에 의한 것이든 서사를 공유하고 있는 요소들로 이루어진 서사적 담론(서사적 전달 구조) ∙서사적 이야기 구성요소: 사건적 요소들, 사물적 요소들,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관계 서사적 내용도 마찬가지로 질료와 형식을 가진다. 사건적 요소들과 사물적 요소들의 질료는 우주 전체이며, 더 정확히는 가능한 대상들, 사건들, 관념들, 그리고 작가(영화감독 등)에 의해 ‘모방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러나 서사물이 자체적으로 하나의 의미 구조를 타고난다는 말은 곧 ‘주어진 모든 이야기는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것인가?’라는 물음이 아니라, 오히려 ‘서사물 자체(또는 어떤 텍스트를 서사화하는 것)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물음이다. 시니피에(signifies or signifieds)는 정확히 세 가지-사건, 인물, 배경적 요소들-이다. 시니피앙(signifiants or signifiers)은 서사적 진술(그 매체가 어떤 것이든) 속에서 이 세 가지 중의 하나를 대표할 수 있는 요소들로서, 첫째는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행위의 모든 유형을, 둘째는 모든 인물들(혹은 인격화할 수 있는 모든 존재들), 그리고 셋째는 장소를 환기시키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는 우리의 주장이 정당하다고 믿는다. 그 정확한 이유는 서사구조가, 달리는 무의미했을 초기 텍스트(ur-text)에, 통상적인 일 대 일의 표상 관계를 통해 사건과 인물, 배경의 특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고찰한 사실들은 우리의 첫 번째 도표를 다음과 같이 다시 그리도록 한다.                                행위                 사건적 요소                   돌발사           이야기 (내용)                           내용의 형식                   등장인물                 사물적 요소               배경                                 작가의 문화적 약호들에 의해서 수용되기 이전의 사람과 사물들 기타           내용의 질료     서사물                                       서사적 전이의 구조   표현의 형식                                         담론           언어                               영상                 발현 매체     발레     표현의 질료                           판토마임                       기타             발현과 물리적 대상 이야기와 담론, 그리고 발현은 서사의 단순한 물리적 처리-책의 실제적인 인쇄, 배우나 무용가, 꼭두각시 인형의 동작, 종이나 캔버스 위에 그려진 선 등-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는 현상학적인 미학자들,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가 박물관이나 도서관, 극장 등에서 부딪히게 되는 ‘실제적 대상’과 ‘미적 대상’간의 근본적인 차이점에 대해서 밝혀낸 바 있는 로만 앙가르덴에 의해 해결되었다. 실제적 대상이란 바깥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대리적 조각, 그림물감이 굳어있는 캔버스, 규칙적으로 울리는 공기의 진동파, 한 덩어리로 제본된 인쇄된 종이뭉치-이다. 반면 미적 대상이란 관찰자가 그러한 사물들을 미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순간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관찰자의 마음속에 구축(또는 재구축)되는 것이다. 미적 대상은 실제적 대상의 부재 속에 존재하게 된다. 우리는 순수한 상상 속의 대상들에서도 어떤 미적 경험을 가질 수 있다. 매체들-언어, 음악, 돌, 캔버스 등등-은 서사를 실제화하고 그것을 책이나 악보(녹음기나 디스크를 통해 진동하는 소리의 파장), 조각, 그림 등의 실질적인 대상으로 만든다. 그러나 독자는 그 매체의 표면을 뚫고 들어가 사실상의 서사물을 찾아내야만 한다. 서사적 추론, 선별, 일관성 담론이 이야기를 다루는 가능한 모든 매체(일상 언어, 발레, ‘프로그램’, 음악, 마임 등등)에 의해 이루어진 표현의 총체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실제로 발현된 모든 서사물에 공통된 특징들만을 포함하는 추상적인 수준의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의 주요한 특징들은 질서와 선별(selection)이다...(질서는 사건의 인과적인 연속이나 그 뒤바뀜의 변형을 의미할 것이고 선별은-인용자) 사건과 대상들에 관해 실제로 진술할 것과 단지 암시만 할 것을 선택하는 담론의 선택적 수용성을 의미한다. 서사물이 공연을 통해서든 텍스트를 통해서든 경험될 때 수용자들은 반드시 그에 대한 해석을 통해 반응하게 된다. 즉 그들은 그들이 경험한 것을 처리해야 한다. 그들은 여러 이유로 해서 언급되지 않은 채 지나치는 틈새들을 필수적인, 혹은 그에 준하는 사건들과 특징들, 물질들로 메꾸어야 한다...그럴듯한 세부적 사건들을 보충하는 독자의 능력은 기하학자가 두 개의 점 사이에 공간 분할의 무한한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처럼 실제로 무한하다...또 인물에 대해서도 똑같은 사실이 적용된다. 선별과 추론에 이은 또 다른 규제는 일관성이다. 서술에 있어서 사물적 요소는 사건들의 이동 속에서 동일한 존재로 남아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에 따른 설명(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이 있어야만 한다...일정한 일관성의 원칙, 즉 서사물 속에 나타나는 대상들의 정체가 고정되어 있으며 연속적이라는 일정한 감각이 작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서사구조의 개요 담론은 이야기를 ‘진술하기’ 위한 것이며 이러한 진술들에는 누가 무엇을 했는가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따라서, 혹은 단순히 이야기 속에 무엇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구별되는 두 가지 유형-‘경과(process)’와 ‘정체(stasis)’-이 있다. 경과진술은 ‘하다’나 ‘일어나다’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영어나 그 외의 일상어로 된 구체적인 단어들(표현의 질료를 형성하는)로서가 아니라 더 추상적인 표현 범주로 존재한다...정체진술은 ‘있다’나 ‘이다’의 형태로 나타난다. 완전히 정체진술들로 이루어진 텍스트, 즉 단지 사물들의 일련의 존재만을 진술하는 텍스트는 하나의 서사를 다만 함축할 수 있을 뿐이다. 경과진술은 하나의 사건이 명료하게 제시되는가 아닌가의 여부, 즉 화자에 의해 그 자체로 표출되는가의 여부에 따라 사건을 ‘자세히 설명한다’거나 ‘실연(實演)한다’고 말해진다...서사 행위 자체와 실연 사이의 대조는 인물의 말을 전달하는 두 가지 근본적인 형식, 즉 간접화법과 직접화법 속에서 예시된다. 마찬가지로 정체진술은 중개를 거치지 않기도, 즉 ‘드러내기’도 하고, 중개를 거치기도, 즉 ‘제시하기’도 한다. 사건적 요소들은 사물적 요소들을 함축하거나 그에 대한 ‘색인’이 되어줄 수 있다. 역으로 사물적 요소는 사건적 요소를 ‘투사’할 수 있다...결국 하나의 사건적 요소는 다른 사건적 요소를 함축하고, 하나의 사물적 요소는 다른 사물적 요소를 함축한다. 엄격한 의미에서 모든 진술은 ‘중개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누군가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이다. 대화조차도 작가에 의해 창안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서술자나 화자, 즉 지금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과 작가, 즉 이야기를 최초로 고안해낸 동시에 이를테면 화자를 둘 것인가 말 것인가, 만약 둔다면 그의 존재를 얼마만큼 내세울 것인가를 결정하는 사람을 구분해야만 한다는 것은(이론과 비평에서 잘 확립되어 있는 바와 같이)매우 분명한 사실이다. 작가가 소홀이 취급되어도 화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은 기본적인 관습이다...모든 서사물은, 전적으로 ‘보여지는’것이거나 혹은 중개를 거치지 않은 것일지라도, 결국 그것을 고안해낸 사람, 즉 작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화자’란 말이 그러한 의미로 쓰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화자란, 화자의 음성을 최소한도로 억제하려는 경우에도 수용자에게, 혹은 수용자의 청각적 기능에 실질적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사람이든 어떤 존재이든-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다. 그와 같은 존재에 대한 느낌을 부여하지 않는 서사물, 즉 두드러지게 화자의 존재를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서사물은 ‘비서사적인 것’ 또는 ‘서사화 되지 않은 것’으로 불리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제2장 이야기 -사건적 요소들 전통적으로 하나의 이야기 속의 사건적 요소들은 ‘플롯’이라고 불리는 배열을 구성하는 것으로 말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롯(미토스)을 ‘사건들의 배치’라고 정의했다. 구조주의적 서사이론은 그러한 배치가 엄밀하게는 담론에 의해 행해지는 작용이라고 주장한다. 이야기 속에서 사건적 요소들은 그것의 표현 방식인 담론에 의해 플롯으로 전환된다. 담론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발현될 수 있지만 그것의 내부구조는 가능한 어떠한 발현형태와도 질적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즉 담론화된 이야기로서의 플롯은 주어진 영화나 소설 등, 특정한 객관화된 형태보다도 더 일반적인 수준에서 존재한다. 그것의 표현순서는 반드시 이야기의 본래적인 논리적 순서를 따를 필요는 없다. 그것은 특정 이야기-사건적 요소들을 강조하거나 악화시키고, 어떤 사건들을 해석하거나 추론의 대상으로 남겨놓으며, 보여주거나 말하고, 논평을 가하거나 침묵하며, 또한 사건이나 인물의 어떤 상양들에 초점을 맞추는 기능을 한다. 사건적 요소란 ‘행위(행동)’이거나 ‘돌발사들’이다. 양자는 모두 상태의 변화를 의미한다. 행위란 행위 주체에 의해 야기된, 혹은 행위객체에 미친 상태의 변화이다. 만약 그 행위가 플롯화된다면 행위 주체와 행위 객체는 등장인물로 불려 지게 된다. 따라서 등장인물은 서사적 술어에 대한 서사적 주어-반드시 문법적 주어가 아닐지라도-가 된다. 인물, 혹은 다른 사물적 요소들이 수행하는 행동의 주요한 유형들에는 비언어적인 물리적 행위(‘존은 거리를 달려 내려갔다’), 언술 행위(‘존은 말했다, ‘나는 배고파”나 ‘존은 그가 배고프다고 말했다’), 사고 행위(‘존은 생각했다, ‘나는 가야 해”(혹은 ‘존은 그가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와 같은 정신상의 언어적 발음), 그리고 느낌이나 인지, 감각(발음되지 않는-‘존은 불안했다’나 ‘존은 차의 앞부분이 흐릿해지는 것을 보았다’) 등이 있다. 서사 이론에서 이러한 것들은 따로 정의가 필요 없는 기초적인 용어들로 사용되기 쉽다. 돌발사는 등장인물이나, 혹은 초점이 맞추어진 다른 사물적 요소가 서사적 객체가 되는 술어 형태를 수반한다. 되풀이한다면, 서사에 관한 일반 이론에서 중요한 것은 정확한 언어적 발현이 아니라 오히려 이야기의 논리이다. 계기성, 우발성, 인과성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서사물에 있어서의 사건적 요소들은 상호 관련적이고 구속적이며 수반적인 관계에 있다고 논의되어 왔다. 그것들의 계기성은, 전통적인 논의에 따르면 단순히 선조적인 것이 아니라 인과적인 것이다. 인과성은 공개적인, 즉 분명한 것일 수도 있고 숨겨진, 즉 암시적인 것일 수도 있다. 고전적인 서사물에서 사건들은 선조적으로 일어난다. 즉 사건들은 서로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결과들은 최종적인 결과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다른 결과들에 영향을 주게 된다. 두 개의 사건들 사이의 관계가 명백해 보이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후에 발견하게 될 어떤 더 포괄적인 원리를 통해서 그 관계를 추론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 ‘중간’, ‘끝’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는 실제적인 행위 자체보다는 오히려 모방된 것으로서의 이야기-사건들, 즉 서사물에 적용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용어는 담론화된 이야기로서의 플롯을 구획 짓기 위한 것이다. 분명히 현대의 작가들은 엄격한 인과성의 개념을 거부하거나 수정할 것을 주장한다. 장 푸이용은 현대적 텍스트들을 한데 묶는 것으로 ‘우발성’이라는 용어를 제안하고 있다. 이 용어는 ‘불확실성’이나 ‘우연’의 의미가 아닌, 오히려 더 엄격한 철학적인 의미에서 ‘그 존재, 사건, 인물 등에 있어서 아직은 확실치 않은 그 무엇에 의존하는 것’(󰡔����아메리칸 칼리지 사전󰡕����)을 뜻한다. 우발성의 개념은 매우 넓다. 플롯이 없는 서사물이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플롯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플롯이 뒤얽힌 사건적 틀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그 사건들이 ‘아무런 비중도 가지지 않는’ 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일 뿐이다. 전통적인 서사물에서의 사건들의 해결에는 문제가 풀려가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문제들이 완결되어 간다는, 혹은 일종의 추리적이거나 정서적인 목적에 부합하는 감각이 존재한다. 핍진성과 동기 부여 사건들이 하나의 서사물을 형성하기 위해 상호 관련되는 방식-그 원칙을 ‘인과성’이나 ‘우발성’, 혹은 그 외의 어떠한 이름으로 부르건-에 대한 논의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그러한 방식이 관습적인 것이며 그런 관습의 본질에 대한 이해는 어떤 서사물에서든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관습은 사건들의 상대적 비중에서부터 플롯의 거시 구조를 성격화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이 장의 다른 모든 논점들(뿐만 아니라 이 책의 나머지 부분까지)안에 동일하게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핍진성에 의한 ‘채워 넣기’의 관습이 우선적인 논제로 선택된 것은 그것이 바로 서사적 일관성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논의는 뒤에 다루게 될 다른 서사적 관습들에 대한 논의의 한 시사적인 본보기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서사물의 수용자들은 관습들을 ‘자연화함(naturalizing)’에 의해 그것들을 인식하거나 해석한다. 서사적 관습을 자연화한다는 것은 그것을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의 관습적 성격 자체를 ‘망각’하고 그것을 심층적인 독서 과정 속으로 완전히 끌어 들여서, 언어나 무대와 같은 발현 매체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그 관습이 의식되지 않은 채로 수용자의 해석적 그물망 속에 섞여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화’의 개념은 실제적인 것보다는 오히려 그럴듯한 것에 호소하는 오랜 전통, 즉 핍진성의 개념에 매우 가까운 것이다. 구조주의자들은 이러한 개념을 재생시키는 데 열정적이었는데, 왜냐하면 그 개념은 독자가 텍스트 내의 틈새들을 ‘채우고’, 사건적 요소나 사물적 요소들을 일관된 전체로 조화시켜 나가는-일상생활에서는 그와 같은 예측이 의문시될 수 있는 경우에까지도-수법을 설명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서사구조의 이론에서 서사적 사건들이 현실 세계에서의 제 현상들이나 가능성들로 자연화하는 것에 대한 논의를 요구하는 것은 서사물의 잘 짜여짐(즉 서사물을 탁월하거나 조잡하게 만들고, 그것이 다른 어떤 유형의 텍스트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 그와 같은 문제들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비록 서사적 허구가 그 제작자에 의해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어질지라도 ‘사실성’, 혹은 ‘유사성’을 이루는 것은 엄격한 문화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물론 ‘자연스러운 것’은 사회에 따라, 또는 같은 사회 내에서도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인위적으로 가능한 것, 있을 법한 것의 바탕이 되는 것, 즉 핍진성의 개념은 쥬네트에게 있어서 궁극적으로는 플라톤적인 것으로서 우연히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이상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다. 요컨대 ‘현재의 것이 아니라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인 것이다. 구조주의자들에 따르면 핍진성의 기준은 이전의 텍스트들-실제의 담론들뿐만 아니라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적절한 행위 ‘텍스트들’까지 포함하여-에 의해 확립된다. 핍진성은 ‘집체 효과(effect of corpus)이거나’ ‘상호텍스트성(intertexturality)’(그러므로 상호 주관성)이다. 그것은 결과에서 원인까지 가리키는, 그리고 하나의 금언(maxim)으로 환원될 수도 있는 일종의 설명의 형식이다. 더군다나 금언들은 널리 알려진 것이기 때문에, 즉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대개 암시적이거나 배경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고전적인 서사물에서 명백한 설명은, 단지 행위의 널리 알려진(공공연하고 일반적인) 규범들에 비춰볼 때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행위들에 대해서만 취해질 뿐이며, 그런 경우에도 엄격성이 요구된다. 그것은 필자가 ‘일반화’라고 일컫는 서사적 논평의 형태를 취한다. 외관상 기이한 현상을 납득시키기 위해 어떤 ‘일반적인 진실’이 자세히 설명되기도 한다. 위의 말에서 필자가 인용부호를 사용한 것은 이러한 경우들에서 ‘진실’은 매우 다양할 수 있으며, 그것이 ‘입증되는’ 관점에 따라서는 완전히 전도된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반화가 ‘진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설명’을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결국 유일한 요구는 그럴듯함(plausiblity)이다. 개연성 없는 행위들은 어떤 식으로 설명되거나 동기 부여가 된 상태에서만 허용될 수 있다. 고전적인 허구물에서 일반화된 논평은 납득하기 어려운 동기들을 표준적인 이해의 단계로 이동시키기 위해 사용된다. 명백한 설명은 단지 극단적인 경우에만 필요한 것이며 그 기준이 되는 것은 핍진성이다. 대부분의 사건들은 ‘모든 사람’(즉 상당한 수준의 모든 독자들)이 이러저러한 일이나 사물들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고 존재할 수 있는지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에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19세기 이후로 역사가 불가사의했기에 대부분의 사실주의적 소설가들 또한 불가사의해져버렸다. 극히 자의적인 서사물이 19세기 동안 점점 대중화되어 갔다. 핵사건과 주변사건 서사적 사건들은 관계의 논리뿐만 아니라 서열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건들은 다른 것들보다 중요하다. 고전적인 서사물에서 연쇄적 흐름을 이루거나 우발성의 틀을 결정짓는 것은 단지 주요한 사건들뿐이다. 하찮은 사건들은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핵사건은 사건들에 의해 취해진 방향으로 문제들을 발생시키는 서사적 계기들이다. 그것은 한두 가지(혹은 그 이상의) 가능한 길 가운데 어느 한쪽으로 서사적 진전을 이끌어 나가는 분기점, 즉 구조 안의 마디나 관절과도 같은 것이다. 핵사건은 서사적 논리를 파괴하지 않고서는 제거될 수 없다. 고전적 서사 텍스트에서는, 주어진 어느 지점에서의 사건들에 대한 적절한 해석이 뒤에 나타나는 핵사건을 앞의 사건들의 결과로 보면서, 그와 같은 계속적인 선택의 상황들을 뒤따라갈 수 있게 하는 기능을 한다. 주변사건(satellites)은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제거될 경우, 그 서사물을 미학적으로 빈약하게 할지라도 플롯의 논리는 혼란시키지 않는다. 주변사건은 선택을 수반하지 않으며, 다만 핵사건에 의해 만들어진 선택을 완결 지을 뿐이다. 그것은 반드시 핵사건을 내포하지만 그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의 기능성은 핵사건을 보충하고 다듬고 완성시키는 것이다. 즉 그것은 뼈대에 살을 부여한다. 핵사건의 뼈대 내에서는 이론적으로 무한한 세공(細工)이 허용된다. 모든 행위들은 무수한 부분들로, 그리고 그 부분들은 더 작은 부분들로 하위 분할될 수 있다. 주변사건들이 반드시 핵사건들과 직접적으로 인접해 있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담론은 이야기와 등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핵사건들을 앞서거나 뒤따르기도 하고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한다. 그러나 사건적 요소들과 사물적 요소들, 혹은 이야기와 담론은 매체와는 별개로 더 깊은 구조적인 단계에서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어진 텍스트 속에 있는 실제의 말들(혹은 이미지들이나 기타)을 통해 그들 사이의 경계를 관찰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단지 분석자의 초언어(metalanguage), 즉 서사물에 대한 일종의 의역(paraphrase)을 통해서만 논의될 수 있다.                      이야기와 반이야기(Anti-stories) 고전적 서사물에서 핵사건들의 조직망(혹은 ‘연쇄’)이 가능한 길들 가운데 단 하나의 선택만을 허용한다면 현대적 반이야기는 모든 선택들을 똑같이 타당한 것으로 다룸으로써 이러한 관계에 대한 일종의 공격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서스펜스와 서프라이즈 서스펜스와 서프라이즈는 모순되는 용어라기보다는 보완적인 용어이다. 양자는 서사물 안에서 복합적인 방식으로 함께 작용한다. 사건들의 연쇄는 서프라이즈로 시작해서 서스펜스의 유형을 이루다가 일종의 ‘비틀림’, 즉 예측된 결과의 좌절-또 다른 서프라이즈-로 끝난다. 시간과 플롯 독서의 시간(reading-time)과 플롯의 시간(plot-time), 혹은 필자가 더 선호하는 구분법으로는 담론의 시간-담론을 읽는 데 걸리는 시간-과 이야기의 시간-서사물에서 의미화된 사건들의 지속 시간-이 있다. 공개적인 서사물의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두 개의 현재(nows), 이를테면 화자가 위치하고 있는 현재시제의 시간(‘나는 여러분에게 다음 이야기를 들려 줄 것이다’), 즉 담론의 시간과 보통 과거시제를 취하는, 행위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시간, 즉 이야기의 시간이 있다. 화자가 전혀 부재하거나 감춰져 있을 경우, 단지 이야기의 현재만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대화나 내적, 외적 독백의 현재성을 제외하면 이 경우 서술의 시간은 과거이다. 순차, 지속, 빈도 A. 순차 이야기의 순서가 식별 가능한 한 담론은 만족한 상태로까지 이야기의 사건들을 재배열할 수 있다. 쥬네트는 이야기와 담론이 동일한 순차(1234)를 가진 표준적 계기성과 ‘시간 변조적(anachronous)’ 계기성을 구분한다. 시간변조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즉 담론이 이전의 사건들을 회상하기 위해서 이야기의 흐름을 차단하는 플래쉬백(analepse)과 담론이 사건들 도중에 뒤이어 일어나는 사건들로 앞질러 가는 플래쉬 포워드(prolepse)가 그것이다. 과거에 대한 전통적인 요약적 구분들이 ‘플래쉬 백’으로 지적되는 것은 옳지 않다. 플래쉬 백과 플래쉬 포워드는 단지 소급 제시(analepsis)와 사전 제시(prolopsis)의 더 포괄적인 분류와 관련된 특정 매체(영상적 매체)상의 보기들일 뿐이다. 쥬네트는 시간변조의 ‘거리(distance)’와 ‘크기(amplitude)’를 구분한다. ‘거리’는 현재(now)로부터 시간변조가 시작되는 부분까지 앞으로, 혹은 뒤로 걸쳐 있는 기간을 의미한다. 크기는 시간변조 사건 자체의 지속 기간이다. 계속되는 이야기에 시간변조를 결합시키는 데에는 외부적, 내부적, 혼합적인 상이한 방법들이 있다. 외부적인 시간변조는 그 시작과 끝이 현재 이전에 일어나는 것이며 내부적인 시간변조는 현재 이후에 시작되는 것이다. 또한 혼합적 시간변조는 현재 이전에 시작해서 현재 이후에 끝나는 것이다. B. 지속 지속은 서사물을 읽는 데 걸리는 시간과 이야기-사건들 자체가 지속되는 시간 사이의 관계와 관련된다. 다섯 가지의 가능성이 고려될 수 있다. ① 요약: 담론-시간이 이야기-시간보다 짧다. ② 생략: 담론-시간이 0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④와 같다. ③ 장면: 담론-시간과 이야기-시간은 동일하다. ④ 연장: 담론-시간은 이야기-시간보다 길다. ⑤ 휴지(休止): 이야기-시간이 0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④와 같다. ① 요약: 담론은 묘사되는 사건들보다 짧다. 서사적 진술은 일군의 사건들을 요약한다. 언어적 서사물에서 이것은 반복적 형태(‘그 회사는 파업을 종식시키려는 시도를 되풀이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를 포함하는 지속의 동사나 부사를(‘존은 7년 동안을 뉴욕에서 살았다’) 수반하기도 한다. 요약은 담론과 이야기의 정확한 동시간대가 필수적인 대화와 같은 곳에조차 존재한다. 영화는 요약이 없기에, 감독들은 종종 기계장치에 의존한다. ‘몽타주’는 오래 전부터 인기를 끌어왔다.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나 계기의 선택된 국면을 보여주는 장면들을 모아서 보통 계속적인 음악을 통해 연결된다. 거기에는 또 달력이 넘어가는 것, 화면 위에 전설처럼 나타나는 날짜들, 또는 화면 밖의 화자 등과 같이 더 격이 낮은 여러 해결책들이 있다. 흥미롭게도 영화상의 문제해결을 위해 고안된 몽타주기법이 언어적 허구물에서도 발견된다. 따라서 우리는 부득이한 이유로 어떤 서사적 매체의 기법이 개발된 뒤, 그것이 자체적으로 대등한 형태적 기법을 갖지 못한 다른 매체들에 의해 새롭게 흥미로운 가능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게 된다. ② 생략: 이야기의 시간은 계속되더라도 담론은 멈춘다. 이야기의 일부 세부적인 사실들은 기록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생략’과 ‘커트’는 신중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그 차이점은 단계상의 그것이다. 생략은 이야기와 담론 사이의 서사적 불연속성과 관계된다. 반면 ‘커트’는 인쇄된 지면에서의 빈 칸이나 별표 표시와 마찬가지의 의미를 갖는, 특정 매체상의 생략의 명시적 형태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하나의 커트는 생략을 가져 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단순한 공간상의 이동, 즉 연속 촬영 A가 손잡이를 돌려 문을 잡아당기는 남자를 보여주고, 그것이 커트된 후에, 연속 촬영 B가 카메라를 향해 열려 있는 같은 방의 내부를 복도를 통해 들어가면서 그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처럼, 완전한 혹은 사실상의 연속적인 두 행위를 연결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 담론은 이 경우 이야기에 못지않게 연속적이다. ③ 장면: 장면은 서사물에 극적 원리를 결합시킨 것이다. 이야기와 담론은 여기서 상대적으로 동등한 지속성을 가진다. 일반적인 구성요소는 대화와, 비교적 짧은 지속성을 갖는 뚜렷한 물리적 행위들이며, 그 행위는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요소하지는 않는다. ④ 연장: 여기에서 담론-시간은 이야기-시간보다 더 길다. ‘고속 촬영(overcranking)’-즉 카메라를 나중에 영사할 때보다 더 빨리 돌리는 것-에 의해 영화는 잘 알려진 ‘슬로우 모션’을 통한 연장을 나타낼 수 있다. 언어적 표현은 사건들 자체보다 더 오래(적어도 인상주의적인 척도로는) 지속된다. 정신적 사건들의 경우는 특히 흥미롭다. 생각을 말하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리며, 또한 그것을 써내려가는 데에는 훨씬 더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언어적 담론은 등장인물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 특히 갑작스런 인지나 통찰 등을 전달하는 데에서 더 느려지게 마련이다. ⑤ 휴지: 묘사적 문구에서와 같이 담론은 계속될지라도 이야기는 멈춘다. 그러나 서사물은 본질적으로 시간예술이기에 이때는 또 다른 담론 형태로 교체되는 것이다. 현대의 서사물은 극적 양식을 선호해 명백히 드러난 기술적 휴지는 피하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는 기술(記述) 자체가 불가능하며, 이야기-시간은 영상이 스크린 위에 영사되는 한, 또 카메라가 계속해 돌아감을 우리가 느끼고 있는 한, 계속 유지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순수한 기술의 효과는 실제로 영화가 소위 ‘freeze-frame’ 효과(영사기는 계속 돌아가지만 필름은 계속 똑같은 영상만을 보여주는 것)를 지닌 채 ‘멈출’ 경우에만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고전적인 소설들은 장면과 요약간의 비교적 일관된 교체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 비평가들(퍼시 러보크 같은)에 의해 지적되어 왔다. 반대로 현대소설들은, 이론과 실제 모두에서 버지니아 울프가 준수했던 것처럼 요약을 피하고, 독자들이 채워 넣어야 할 생략에 분절된 일련의 장면들을 제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현대 소설은, 필자가 그 변화를 영화의 영향 때문이라고 주장하지 않더라도 보다 영화적인 것이다. C. 빈도 담론-시간과 이야기-시간 사이의 세 번째 가능한 관계는 빈도이다. 쥬네트는 그것을 ① 단일적(singularly), ‘어제 나는 일찍 잤다’와 같은 단일한 이야기적 계기의 단일한 담론적 재현, ② 복수 단일적(multi-singularly), ‘월요일에 나는 일찍 잤다. 화요일에 나는 일찍 잤다. 목요일에 나는 일찍 잤다’와 같은 여러 개의 이야기적 계기들 각각에 대한 여러 개의 담론적 재현, ③ 반복 나열적(repetitive), ‘어제 나는 일찍 잤다. 어제 나는 일찍 잤다. 어제 나는 일찍 잤다’와 같은 동일한 이야기적 계기들에 대한 여러 개의 담론적 재현, ④ 요약 반복적(iterative), ‘일주일 동안 내내 나는 일찍 잤다’와 같은 여러 개의 이야기적 계기들에 대한 단일한 담론적 재현으로 구분하고 있다. 서사적 거시구조와 플롯의 유형학 지금까지 논의한 주제는 서사물의 미시구조, 즉 플롯의 분자화된 단위들의 형태적 특성과 부정적인 가능성들(반이야기들)을 포함하는 그 조직 원리들에 대한 것이었다. 서사물에 관한 일반적인 이론은 또한 분명히 거시구조, 즉 플롯의 일반적인 구도에 관한 논의를 필요로 한다. 거시구조는 다시, ‘플롯들은 구조적인 유사성에 의해 어떻게 묶여질 수 있는가’라는, 플롯의 유형학에 관한 이론을 내포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문학연구는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삶을 토대로 플롯의 거시구조에 대해 분석을 계속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인공의 상황이 향상되는가 쇠퇴하는가에 따라서 행복한 플롯과 운명적인 플롯을 구분했다. 운명적인 플롯의 경우에는, ① 무조건적으로 선한 주인공이 실패한다. 이것은 개연성에 위배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충격적이리만큼 납득될 수 없는 것이다. ② 사악한 주인공이 실패한다. 정의가 승리했다는 생각으로 우리는 그의 몰락에 대해서 뿌듯한 만족감을 느낀다. ③ 고귀한 주인공이 오산으로 실패하며 그것은 우리의 동정심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행복한 플롯의 경우에는, ④ 사악한 주인공이 성공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개연성에 대한 감각과 위배되기 때문에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⑤ 무조건적으로 선한 주인공이 성공하며, 이것은 우리에게 도덕적인 만족감을 준다. ⑥ 고결한 주인공이 일시적으로 오산하지만 결국은 만족할 만한 설욕에 이른다. 노드롭 프라이나 로날드 크레인, 노만 프리드만 등에 의해서 행해진, 거시구조와 유형학을 분석하려는 현대적인 시도에서는 변수의 수가 증가하고, 따라서 가능성의 그물망이 더욱 더 새로운 서사유형들에까지 확대되고 있다. 내용에 근거한 플롯유형의 분류법에서 우선 관찰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문화적 전제들에 의존해 있다는 것이다. ‘선’이나 ‘행위’와 ‘사고’ 사이의 구분에 기초한 이론들은 이런 것들이 사실상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며, 기본용어들로 합의될 수 있을 것이라 가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 의미에서 사실일 수도 있으나, 어떤 부류의 고전적인 텍스트들에 대해서만 사실일 수도 있다. 또한 우리는 독자들이 그와 같이 가정된 배경을 어떻게 인지하며, 상상을 통해 받아들이는지에 관해서도 알지 못한다. 이론이 완벽해지기 위해서는 문화적 전제가 되는 이러한 현상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설명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수용행위의 흥미 있는 복합적 체계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선을 이루는 일련의 특성들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변화한다. 주어진 어떤 특성이나 행위가 선한 것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 자체 외에 전통에 대한 친밀한 상상적인 공감이 필요하다. 서사물들에 내재되어 있는 상대성은 그것을 분류하고 분석하는 데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이해하는 과정에서도 깊이 감지될 수 있는 것이다. 이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면 우리는 마땅히 실제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그와 같은 결정을 내리는지를 문제 삼아야 한다. 구조주의자들의 분류법은 서사물의 내용상의 질료보다는 오히려 그 ‘형식’에 의존한다. 그 점을 제일 먼저 주장한 사람은 블라디미르 프롭이었다. 그는 상호 무관한 생물학적, 물리적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등장인물들-말하자면 늙은 여인, 곰, 숲의 정령, 또는 어느 암말의 머리-이 각각 다른, 그러나 연관된 이야기들에서 ‘동일한’ 행위, 즉 주인공을 시험한다거나 그에게 보답하는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요컨대 단일한 기능을 가진 유사한 ‘기능인’의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인식했다. 그는 이것을 러시아민담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고 예측할 수 있는, 각각의 이야기 자체에 내재된 약호를 발견해내어 증명하는 방식으로 인식한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러한 행위자들에게 부여된 이름이 아니라 하나의 기능을 수행하는 존재들 상호간의 대체 가능성이다. 사실상 옛것이 주는 편안함(기능 그 자체인)이나 새로운 것이 주는 상상의 즐거움(화성인 또한 악당이 될 수 있다)을 알고 있는 독자들에게 그 장르를 생생하게 살아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상호 대체 가능성인 것이다. 프롭(그리고 다른 최근의 서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토도로프는 󰡔����데카메론󰡕����의 이야기에 나타나는 플롯상의 재현을 수학적인 공식으로 보여준다. 우선 그는 하나의 이야기를 의역의 형태로 환원시킨다. 의역된 문장으로부터 그는 세 개의 바탕이 되는 상징들-명사로 된 서사물의 주어(인물을 위한), 서사적 형용사(그들의 특징 혹은 상황), 그리고 서사적 술어(수행된 행위)-을 추출해낸다. 등장인물과 자질들, 상황들, 행위들은 상징으로 대체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분명 상징 그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한 배치로부터 달리는 보이지 않을 유형들이 나타나고, 그 유형들은 다시 연구 자료상의 다른 이야기들에 의해 검증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종류의 분류는 검증되어야 할 더 많은 가설들을 제공해 준다. ‘새로운’ 데카메론식의 이야기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프롭과 토도로프의 방법을 모든 서사물의 거시구조에 적용한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회의적인 것이다. 대부분의 서사물들은 전형화된 어떤 필연적인 반복 형태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현대소설과 영화의 세계는 러시아 민담이나 󰡔����데카메론󰡕����처럼 검은색과 흰색의 양가적인 것이 아니다. 현대문화는 대체로 대부분의 서사물들, 또는 적어도 문학적 자질을 가진 서사물들을 위한 인물이나 행위의 상투형을 제공해 주지도 않는다. 예술로서의 서사물은 어떤 하나의 공식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다. 물론 거시구조적인 분석에 대한 형식주의 및 구조주의 이론들이 무가치한 것이며, 어떤 곳에서도 그것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개개의 서사물이 그곳에서 잠들 수 없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서사물에 있어 핵사건을 지칭하는 기술용어들이나, 일군의 핵이 되는 말들(mots-defs) 또한 모든 이야기들을 환원시킬 수 있는 일련의 범주들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핵사건은 플롯의 실질적인 속성이다. 그것들은 존재하고, 분리될 수도 있으며, 마땅히 명칭이 부여되어야 하는 것이다. 많은 서사물에 있어 핵심적인 것은, 환원이 지니는 강력한 단순성보다는 오히려 실제적 분석의 느슨한 복합성이다. 컬러나 다른 이론가들은 어떤 주어진 사건은 그것의 전후 문맥, 특히 최종적인 사건과 분리되어 분류될 수 없음을 지적했다. 죽이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자비행위나 희생, 애국적인 행동, 우발적 사고, 또는 다른 12가지 중의 하나 혹은 그 이상일 수도 있다. 기존의 어떠한 확정된 범주도 서사물 전체와 무관하게, 그리고 그것을 읽기도 전에 서사물을 성격지울 수는 없다. 문학이론가는 가능한 한 서사적 사건들에 대한 기존의 의미론적 범주화에 그리 큰 흥미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인류학자와는 반대로(그리고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합리적인 관심을 거부하지 않고서도) 그는 어떤 주어진 사건이 ‘복수’나 ‘거부’, ‘이탈’, 혹은 다른 기존의 용어들 가운데 어느 것으로 불리는 것이 가장 적절한가에 대한 강요된 결정을 즐기지 않을 것이다. 결국 플롯을 거시구조와 유형학으로 성격 짓는 것은 문화적 약호에 대한 이해 및 그것과 문학, 예술적 약호나 일상생활의 약호와의 상호작용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핍진성에 크게 의존한다. 우리가 문화적 약호 ‘전부’를 공식화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논의는 프롭이나 토도로프와 같은 사람들의 연구에 비하면 인상주의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플롯의 유형학자들은 그들의 기초적인 단위들이 지니고 있는 관습적인 본성을 인식해야만 한다. 현재에 있어서 모든 서사물들이 소수의 플롯-내용상의 형태들에 따라 성공적으로 묶여질 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회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내용-형식적인 관점에 따라 서사물들을 비교하는 것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므로 그 작업은 장르별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제3장 이야기 -사물적 요소들 이야기-공간과 담론-공간 이야기에 있어서 사건적 요소의 차원이 시간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물적 요소의 차원은 공간이다. 그리고 이야기-시간을 담론-시간과 구별하듯이 이야기-공간을 담론-공간과 구별해야 한다. 그 차이는 시각적 서사물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영화에서는 드러나는 이야기 공간은 분명히 화면 위에 실제로 보여지는 세계의 일부분인 반면, 함축된 이야기 공간은 화면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관객에게는 보이지 않으나, 등장인물에게는 보이거나 들리는 범위 내이며, 또한 등장인물의 행동에 의해 암시되는 모든 것이다. 이야기-시간이 사건적 요소를 포함하듯이 이야기-공간은 사물적 요소를 포함한다. 사건은 공간에서 일어나나 공간적이지만은 않다. 즉 공간이라는 것은 사건들을 수행하거나, 혹은 사건에 의해 영향을 받는 실재물이다. 언어 서사물에 있어서 이야기-공간 언어 서사물에 있어서 이야기-공간은 독자로부터 이중으로 떨어져 있다. 왜냐하면 화면에 나타난 이미지들이 제공해 주는 화상(icon)이나 유사물들은 언어 서사물에는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물적 요소들과 그 공간이 조금이라도 ‘보여진다면’ 그것은 상상 속에서 보여지는 것이며, 언어로부터 정신적으로 투영된 것이다. 거기에는 영화에서처럼 사물적 요소에 대한 표준적 영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 󰡔����폭풍의 언덕󰡕����을 읽는 동안 개개인은 자신의 정신적 이미지를 만든다. 그러나 윌리암 와일러가 영화로 각색한 󰡔����폭풍의 언덕󰡕����은 우리 모두에게 결정적인 이미지를 제공한다. 언어 이야기-공간이 추상적이라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그것은 비존재물은 아니지만 하나의 유추물이라기보다는 정신적 구조물에 가까운 것이다. 일반적인 자질로서 담론-공간은 ‘공간적 관심의 초점(focus of spatial attention)’으로서 정의된다. 그것은 내포독자의 관심이 담론에 의해 정해지는 구조화된 영역이다. 전체적인 이야기 공간 속의 담론 공간은 매체의 요구에 따라 화자나 카메라의 눈을 통해-영화에서는 명시적으로, 언어 서사물에서는 비유적으로-‘드러나거나’ 감추어진다. 우리는 화자나 등장인물, 내포작가가 보는 눈에 의지하여 사물을 보게 된다. 등장인물은 인지 가능한 서사적 술어를 통해서 이야기의 세계 내에 있는 것만을 지각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서술 대상은 등장인물에게 지각된 이야기 공간 내에 나타난다. 그리고 등장인물이 머무는 이야기-공간으로부터 그의 시점이 존재하게 된다. 일단 언어 서사물이 등장인물의 마음속에 하나의 장소를 확정지으면 그것은 명시적인 지각 동사의 도움 없이도 그가 지각하는 공간을 전달할 수 있다. 반면에, 화자는 직접적인 또는 간접적인 묘사를 통하여 이야기-공간의 한계를 임의로 정할 수 있다. 인물이나 장소를 소개하거나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화자는 주의 깊은 관찰을 할지도 모른다. 화자는(전지전능한 힘으로) 어디에든지 동시에 존재할 수가 있다. 전지전능한 힘은 등장인물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유리한 지위에서 이야기할 수 있거나, 한 장소로부터 다른 장소로 비약하거나 동시에 두 장소에 존재할 수 있는 화자의 능력이다. 언어 이야기-공간은 등장인물의 감각을 기초로 하거나 화자의 정보를 기초로 하여 독자가 상상력 속에서(그의 능력이 가능한 정도로) 창조할 수 있도록 고무되는 어떤 것이다. 담론-공간이 서로 유사한 영화 서사물들을 자세히 살펴볼 때의 장점 중의 하나는 장면이 어떻게 바뀌며 등장인물이 한 장소에서 다음 장소로 어떻게 움직이는가 하는 등등을 확실히 알게 해준다는 것이다. 언어 서사물과 영화 서사물들은 공간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전통적인 연극 무대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기민한 유동성을 보여준다. 언어 서사물과 영화 서사물 사이의 유사성은 자주 논의되어 왔다. 실제로 ‘카메라의 눈’은 전통주의자들의 문학비평 속에서 비유로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언어 이야기-공간과 영화 이야기-공간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남아 있다. 언어적 묘사 문장이 마음속에 환기하는 이미지들은 틀에 담겨지지 않는다. 언어 서사물은 완전히 비장면적일 수 있으며, 장소보다는 오히려 ‘특별히 어느 곳이 아닌’ 관념의 영역에서 전개될 수도 있다. 영화는 이러한 유형의 비장소적 영역을 환기하기 어렵다. 결국 영화는 엄밀한 의미에서 ‘묘사’할 수 없다. 이야기-사물적 요소: 인물 인물이 실제로 책 속에, 또는 무대나 화면 위에 등장하는 배우에 의해서 형상화되는 ‘인간’이라는 사실은 무언의 원리인 것이다. 아마도 그 원리는 불가피할 것이다. 그러나 케네드 버크가 얘기하는 것처럼, ‘등장인물’과 보통 사람이 ‘동일하다’면 어느 누구도 그것을 ‘구분’할 필요성에 대해 논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히 서사이론은 적어도 그 관계를 심시숙고 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 심리 법칙을 등장인물에 적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하게 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제 ‘특성’의 개념은 등장인물에 관해 논의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등장인물의 허구적 존재로의 전이가 갖는(필연성이라기보다는) 관례성은 강조되어야만 한다. 문학이론은 서사구조에 관한 더 적합한 요구를 충족시켜 줄 또 다른 가능성을 위하여 개방적 자세를 필요로 한다. 인물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 󰡔����시학󰡕���� 제2장은 ‘예술가는 행위를 수반하는 인간을 모방한다’는 진술로 시작된다. O.B. 하디슨에 의하면, ‘그리스 이론에서 강조되는 것은 행위를 수행하는 인간이 아니라 행위 자체이며... 모방의 대상이 되는 행위가 먼저 나타난다. 행위를 수행하는 행위자(agents)는 그 다음에 온다’. 이처럼 특성의 근원으로서 행위의 우선성을 주장하는 데에는 뚜렷한 이유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행위자와 인물을 구별하는 것이 꼭 필요한가? 플롯과 인물이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과, 인물 특성이 행위자에게 부여되는 방법과 시간을 설명함에 있어 어색함을 극복하는 문제를 논의해 보자. 인물에 관한 형식주의자와 구조주의자의 개념 형식주의자와 (소수의) 구조주의자들의 견해는 주요한 방법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비슷하다. 그들은 인물이란 플롯의 산물이고, 인물의 지위는 ‘기능적’이며, 즉 인격체라기보다는 차라리 참여자(participants) 또는 행위자(actants)로서, 인물을 실제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오류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서사 이론은 심리적 본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즉, 인물의 국면은 단지 ‘기능’일 뿐이다. 그들은 인물이 이야기 속에서 무엇인가라는 문제보다는 무엇을 하는가만을 분석하고자 한다-즉, 심리학적 또는 도덕적 기준 밖의 어떤 것으로 ‘존재한다’. 더구나 그들은 인물들의 ‘행위영역들’이 ‘숫자적으로나 특징적으로나 분류할 수 있을 정도로 비교적 적게’ 움직인다고 주장한다. 프랑스 서사학자들은 ‘인물은 이야기의 목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수단’이라고 하는 형식주의자들의 견해를 대체로 따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형식주의자 그리고 구조주의자들은 인물을 플롯의 하위에 두고, 그것을 플롯의 한 기능으로, 즉 반드시 필요하기는 하지만, 이야기의 시간 논리에서 파생되는 결과로 만들어버렸다. 어떤 사람은,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nothing happens)’, 즉 사건적 요소들 자체가 예컨대 수수께끼 등과 같이 흥미를 유발시키는 독자적인 요소를 가지지 않는 현대적 사서물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물이 가장 주요하고 플롯은 부차적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에게 있어서 ‘우선(priority)’과 ‘우세(dominance)’의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야기는 사건적 요소와 사물적 요소가 함께 존재할 때만 가능하게 된다. 사물적 요소 없이는 사건적 요소가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텍스트가(인물 묘사나 묘사적 수필과 같이) 사건적 요소 없이 사물적 요소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어느 누구도 그것을 사서물이라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인물에 관한 토도로프와 바르트의 견해 󰡔����데카메론󰡕����, 󰡔����아라비안나이트󰡕����, 그리고 또 다른 일화적 서사물들에 관한 연구에서, 토도로프는 인물에 관한 프롭적인 견해를 지지하기도 하나 동시에 두 개의 중요한 범주-구성 중심적인(plot-centered), 즉 비심리적인 서사물과 인물 중심적인(chracter-centered), 즉 심리적 서사물을 구별하고 있다. 심리적 서사물에서 행위들은 인물 특징에 대한 ‘표현’이거나 ‘징후’이며, 따라서 ‘종속’적인 것이다. 반면에 비심리적 서사물에서 행위는 쾌감의 독자적 요소로서 그 자체로 존재하며 따라서 독립적인 것이다. 서사 문법용어에서 전자의 관심은 주어부(subject)에 있게 되고, 후자의 관심은 술어부(the predicate)에 있게 된다. 나아가 토도로프는, 비심리적 서사물에서 인물의 특성이 언급될 때에는 그 결과가 곧 뒤따르게 된다(즉 하짐이 욕심이 많다면, 그는 즉시 돈을 찾기 위해 출발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때의 그 특성은 사실상 결과적 행위와 합치된다. 그 관계는 ‘가능성/실현’의 관계가 아니라, ‘지속적/간헐적’ 관계이거나 ‘요약 반복/보기’의 관계이다. 일화적 서사물의 인물특성은 항상 행위를 유발하며, 동기(motives)나 욕망(yearnings)에 언제나 영향을 주게 된다. 다음으로 심리적 서사물만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물특성을 드러낸다. 만약 ‘X는 Y를 시기한다’라는 서사적 진술이 심리적 서사물에 나타난다면, X는 (a) 은둔자 되거나 (b) 자살하거나 (c) Y를 고소하거나 (d) Y를 해치려고 시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라비안나이트󰡕����와 같은 비심리적 서사물에서 X는 오직 Y를 해치려 할 뿐이다. 그래서 (주어부의 성질이자 가능성으로서) 전 단계에서 암시된 것은 행위에 종속되는 부분으로 모아지게 된다. ‘인물’은 선택의 여지없이 실질적인 의미에서 플롯의 단순한 자동적 기능으로 변하게 된다. 비심리적 서사물에서 인물은 ‘자기 자신의 이야기’, 즉 ‘사실상의 이야기’ 그 자체이다. 롤랑 바르트는 협소한 기능적 관점으로부터 인물의 심리적 관점과 유사한 견해로 옮겨가고 있다. 1970년 무렵에 바르트는 ‘특성’이나 ‘인물성’과 같은 용어의 정당성만을 강조하고 있지 않다. 즉 그는 서사물을 읽는 것은 ‘이름을 붙이기의 과정’에 다름 아니며 이름 붙여진 하나의 요소가 특성이라고 주장한다. 즉 ‘읽는다’고 하는 것은 이름을 붙이고자 하는 싸움이며, 텍스트의 각 문장들에 의미론적 변형을 가하는 것이다. 이 변형은 불규칙하며, 여러 개의 이름들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다. 등장인물은 열려진 구조물인가, 닫혀진 구조물인가? 인물에 대한 또 다른 제한은 담론의 언어적 표현과 이야기 사이의 혼란으로부터 기인한다. 어떤 질문이 무의미하기 때문에, 인물에 대한 모든 의문이 무의미하다고 볼 수는 없다. 요컨대, 우리가 좋아서 인물에 대해서 추측하고 생각하고자 하는 생득적인 권리까지 억제해야 하는가? 그러한 어떠한 억제도 미학적인 경험을 저하시킨다고 생각한다. 암시와 추측은 플롯과 주제와 다른 서사물의 요소들에 속하는 것과 같이, 인물의 해석에도 속한다. 인물을 단지 ‘단순한 어휘들’과 동일시하려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부당하다. 수많은 무언극들, 수많은 자막 없는 무성 영화들, 수많은 발레 연주회들은 그러한 동일시의 어리석음을 보여준다. 빈번히 우리는 허구적 인물들을 살아 있는 것으로 드러내는 텍스트 내의 각각의 어휘들에서 허구적 인물 그 자체를 생생하게 환기한다. 세련된 서사물에서 인물들은, 마치 실제 세계에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가 그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와는 무관하게 신비스러운 부분들을 가지고 있듯이 열려진 구조물로 존재한다. 그 점에서 영화는, 잘 알려진 인물들을 고정된 시각으로 규정지어 버리는 한계가 있다. 배경 인물들은 심층 서사단계 속에 추상화되어 있는 공간에서 존재하거나 움직이는데, 그러한 심층 서사단계는 이차원의 영화 화면, 삼차원의 무대, 그리고 마음의 눈에 투사된 공간과도 같은 어떠한 유형의 물리적 실현보다도 우선하는 것이다. 추상적 서사 공간은 양극단 속에서 인물과 배경을 함축한다. 우리가 초상화에서 남자나 여자가 자리 잡고 있는 배경으로부터 인물을 구별해내듯이, 하나의 이야기에서도 배경으로부터 인물을 구별해낼 수 있다. 배경은 표현의 일방적인 비유적 의미에서 ‘인물을 돋보이게’ 한다. 즉 배경이란 인물의 행위와 열정이 ‘그 안에서’ 적절히 드러나는, 대상들의 장소와 집합이다. 그러나 배경을 이렇게 자세히 분석하는 데에는 어떤 의문들이 야기된다. 배경을 이루는 단순한 성분에 불과한 인간 존재들-‘단역들’-과 부차적 인물을 구별할 수 있는 명백한 기준이 있는가?(이것은 비평적 경계를 형성하며, 어떤 엄격한 범주화의 가능성도 그것의 명료한 구별에 의존해 있는 것 같다.) 최소한 세 가지 가능한 기준을 생각할 수 있는데 그중 어느 것도 그 자체로서는 적절하지가 않다. 그 세 가지란 ① 생물학(biology), ② 신원확인(identity; 즉 이름 붙이기), ③ 비중(importance)이다. ① 생물학적 기준은 명백히 그것 자체로서 만족스럽지 못하다. 단역들이나 엑스트라들을 등장인물로서 취급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서사물의 주인공이 이솝 우화처럼 동물이거나 혹은 심지어 무생물일 경우를 생각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과학 공상이야기에서는 친절하거나 적대적인 로봇도 인물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불, 바람과 폭풍우, 해와 달 같은 원시적인 힘까지도 등장인물이 될 수 있다. 지구가 주인공이 되어 태양계의 역사를 들려주는 서사물을 생각해볼 수 도 있다. 그러므로 인물들이 인격화될(대부분 그렇지만)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은 분명치가 않다. ② 인물이라고 부르기에는 적합지 않게 명명된 인물을 가진 소설의 예는 너무나 많다. 그런 인물이란 단순히 분위기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존재이다. ③ 비중이라는 것은 플롯에서 가장 내실 있는 기준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비중이라는 말을 사물적 요소들이 플롯상의 의미 있는 행위를 수행하거나 혹은 그로부터 영향을 받는(즉 핵사건을 수행하거나 그에 의해 영향을 받는) 정도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반대의 예들은 즉각적으로 드러난다. 어떤 플롯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대상이라 할지라도 명백히 소도구나 심지어는 숨겨진 장치들로 남아 있을 수 있다. 하치코크는 이것들을 ‘맥 쿠핀(Mac Guffins)’이라고 부른다. 맥 쿠핀은 영화 속의 등장인물이 많은 관심을 가지는 어떤 것이다. 예를 들면, 독이 든 커피잔, 우라늄 원석이 든 포도주 병, 성채(보루, 요새)의 설계도면, ‘비행기 엔진 또는 폭탄실의 문 등등’이다. 위의 것들은 인물임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지들로서는 적당하지 않으나 자질로서는 적절한 것처럼 보인다. 즉 분명히 서사물의 요소들은 자질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자질들이 특징적일수록 인물은 더욱 더 완전하게 부각된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인물성이란 정도의 문제인 것이다. 이름이 붙여지고 비중 있게 등장하는 인격적 존재는 이름이 붙여지고 비중 있게 등장하는 어떤 물체, 혹은 이름이 붙여진 채 등장하지만 비중은 없는 인격적 존재 등보다 ‘더욱 더’ 인물(그가 조역일지라도)에 ‘가깝다’. 배경의 정상적인, 그리고 아마도 주요한 기능은 서사물의 분위기에 대한 기여일 것이다. 배경의 요소들은 복합적인 기능을 할 수 있다. 자연적 배경에 관심을 기울였던 로버트 리들은 배경이 플롯과 인물에 관련될 수 있는 방법을 다섯 유형으로 범주화했다. 첫째, 공리적, 혹은 실용적 배경은 단순하고 중요성이 적고 행동에 최소한의 영향을 미치고, 일반적으로 감정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배경이다. 둘째는 상징적 배경인데, 행위와 밀접한 결합을 강조한다. 즉 여기서 배경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행위와 ‘유사’하다. 셋째는 무관계한 배경이다. 즉 풍경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인물들은 특별히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다. 넷째는 ‘마음속의 배경’, 즉 등장인물의 내면풍경이다. 다섯째는 만화경적인 배경인데, 물리적인 외부 세계에서 상상의 세계로 재빨리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다. 제4장 담론 -서술되지 않은 이야기들 모든 서사물은-그래서 이 이론이 전개되는데-‘이야기’라고 불리는 내용의 국면과 ‘담론’이라 불리는 표현의 국면을 가진 하나의 구조이다. 표현 국면은 서사적 진술들의 모임인데, 여기서 ‘진술’이란 어떤 특정한 발현보다 독립적이며 추상적인 표현형식의 기본적인 구성요소, 즉 예술마다 그 형태를 달리하는 표현의 질료이다. 발레에서의 어떤 자세, 일련의 사진화면, 소설에서의 전체 단락이나 각각의 단어들은 어느 것이나 하나의 서사적 진술을 나타낼 수 있다. 필자는 서사적 진술을, 심층 서사술어(표층언어가 아닌)가 존재 양식이냐 행동양식이냐에 따라 두 가지 종류-경과 진술과 정체 진술-로 분류할 수 있다고 제안했었다. 이런 분류법을 가로지르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즉 진술이 직접적으로 독자에게 전달되는가 혹은 화자라고 부르는 누군가에 의해 중재되는가 하는 것이다. 직접전달은 독자에 의한 일종의 엿들음을 전제로 한다. 반면, 중재된 서술은 화자로부터 독자에로의 다소간 명확한 전달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현대적 용어로는 보여주기(showing)와 말하기(telling)이다. 말하기가 있으면 거기엔 반드시 말하는 사람, 즉 이야기를 전달하는 목소리가 있기 마련이다. 화자의 존재는, 어떤 전달에 대한 독자의 논증할 수 있는 지각에서 나온다. 만약 무엇인가가 이야기된다고 독자가 느낀다면 그것은 화자를 전제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란 그 행동을 ‘직접 목격하는’ 일이다. 실제작가, 내포작가, 화자, 실제독자, 내포독자, 수화자 작가와 화자를 혼동하지 않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은 문학이론의 상식이 되었다. 게다가, 웨인 부드에 의해 ‘내포작가’라고 편리하게 불리어진 제3의 분류가 있다. 화자와는 달리 내포작가는 독자에게 아무 이야기도 해줄 수 없다. 그는, 아니 ‘그것’은 목소리가 없고, 직접적인 소통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전체적인 구상과 모든 목소리, 그리고 독자가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선택한 모든 수단에 의해 말없이 독자를 가르친다. 내포작가는 서사물의 규범들을 세운다. 우리가 내포작가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은 미학적인 면에서이지 윤리적인 면에서가 아니다. 하나의 구조적 원칙은, 내포작가와 우리가 도덕적으로, 정치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존경할 수도, 존경하지 않을 수도 있는 어떤 역사적 인물을 혼동하면 우리의 이론적 작업을 심하게 손상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내포작가의 상대 개념은 ‘내포독자’-책을 읽으며 거실에 앉아 있는 실체로서의 나, 혹은 당신이 아니라 서사물 그 자체에 의해 전제되는 수용자-다. 내포작가와 마찬가지로 내포독자는 언제나 존재한다. 반면, 화자와 마찬가지로 수화자(narratee)는 있을 수도 있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는 작품 세계 안에 등장인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수화자로서의 등장인물은 내포작가가 실제독자에게 내포독자의 역할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를 알려주고, 어떠한 세계관을 채택할 것인가를 알려 주는 하나의 장치일 뿐이다. 명시된 수화자가 없는 사서물들에서는 내포독자의 위치가 보편적인 문화적 도덕적인 관계 위에서 추측될 따름이다. 화자, 내포작가, 실제작가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수화자, 내포독자(서사물의 내재적인 부분들), 그리고 실제독자(서사물의 외재적이고 우발적인 부분들) 사이의 구분은 필요하다. 내가 소설의 관계 속에 들어감에 따라, 나는 또 하나의 자아를 추가한다. 나는 내포독자가 된다. 화자가 내포작가와 관계를 맺을 수도 있고, 맺지 않을 수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독자에 의해 제공되는 내포독자도 수화자와 관계를 맺을 수도, 맺지 않을 수도 있다. 수화자의 위치는 화자의 위치와 대등하다. 그의 영역은 완전히 성격화된 개인으로부터 ‘아무도 아닌’ 존재에 걸쳐 있다.                                           서사텍스트       실제작가→ 내포작가→ (화자)→ (수화자)→ 내포독자 → 실제독자    위의 도표는 내포작가와 내포독자만이 서사물에 내재하고 화자와 수화자는 임의적(괄호들)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물론 궁극의 실행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서사적 전달에 필수적이기는 하지만, 실제작가와 실제독자는 서사적 전달의 바깥에 있다. 화자들과 등장인물들의 발화행위 우리는 먼저 언술, 사고, 일반적인 물리적 행위에 대해 설명하는 것의 본질을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언어 서사물에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화자인지 작중인물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수용자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구분에 대한 이론기초가 최근에 존 오스틴에 의해 발전된 ‘화행이론’의 학문에 의해 제공되고 있다. 이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언어학이 아니다. 그것은 한 언어권에서의 문장들의 문법적 구성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오히려 화자에 의한 실제적인 행동과 같은 소통 상황에서의 그들의 역할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문장들이 의도하는 것-오스틴이 그것들의 ‘언표내적(illocutionary)’ 국면이라 부르는 것-은 단순한 문법적인, 혹은 ‘언표적(locutionary)’ 국면과, 그것들이 실제로 전달되는 것, 즉 청자에 미치는 영향 혹은 ‘완전언표적(perlocutionary)’ 국면과 날카롭게 구분된다. 그리하여 한 사람의 화자가 영어로(혹은 다른 자연언어로) 한 문장을 말할 때 그는 적어도 두 가지, 어쩌면 세 가지 일을 하고 있다. (1) 그는 문장을 만들고 있다. 즉 영문법의 규칙에 의하여 문장을 형성하고 있다(‘언표화 하기’). (2) 그는 그러한 언어 행위의 ‘내부에서’, 비언어적 수단에 의해서도 똑같이 수행될 수 있는 완전히 분리된 하나의 행위를 수행하고 있다.(‘언표내화 하기’). 예를 들면, 만일 그가 ‘물속을 뛰어들어’라고 말한다면, 그는 (1) 명령법 구문에 관한 표준 영어 규칙에 의해서 ‘물속으로 뛰어’라고 하는 어법을 수행하고 있다. 동시에 그는 (2) 물웅덩이의 가장자리에서 뛰어드는 시늉을 함으로써 전달될 수 있는 행동인, ‘명령하기’의 언표내화를 수행하고 있다. 만일 그가 자신의 대화 상대자로 하여금 물웅덩이에 뛰어들게 함으로써 언표내화의 의도를 달성한다면 (3) 그는 설득이라는 완전언표화를 성취한 것이다. 하나의 언표내화는 매우 다양한 언표화와 완전언표화를 수반할 수 있다. 예언하기의 언표내적 행동에 대한 실례가 되는 표는 다음과 같다. 언표화 언표내화 가능한 완전언표화 ‘존은 틀림없이 미칠 것이다’ ‘존은 결국 미칠 성싶다’ ‘존의 정신이상은 아마도 자명해질 것이다’ ‘존은 머리가 돌고 있다’ 등     예언하다             가르치다 설득하다 속이다 초조하게 하다 놀라게 하다 즐겁게 하다 등   예언하기와 마찬가지로, 어떤 언표내화도 다른 통상적, 어휘적 요소들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언표화로 다양하게 나태 내어 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앞뒤 문맥에 의존하여 수화자에게 매우 폭넓고 다양한 완전언표화를 초래할 수 있다. 화행이론은, 서사물의 수용자와 마주보는 화자의 언어와 작중 인물의 언어를 구별하는 데 하나의 유용한 수단을 제공해준다. 화행이론은 우리로 하여금 기초 서사단위들-이야기 진술들-이 그것의 표면이든 그 아래의 심층구조이든 문장들과 동등해 질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해준다. 작가에게는 관계상 자신의 서사물에 필요한 모든 실재물들과 행위들을 배치할 권리가 부여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화자의 견해인 진술들은 이러한 근거를 갖지 않는다. 그러한 진술들은 이야기의 내부 세계가 아닌 실제 세계에 대한 화자의 견해를 언급한다. 엄격한 화행적 의미에 있어서 ‘의견을 말하기’는 외관상의 진실을 주장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근거 위에서 화자가 옳은지 그른지를 합당하게 물을 수 있다. 작중인물의 발화행위는 논리상 화자의 그것과는 다르다. 어떤 인물이 중심적인 이야기 안에서 하나의 이야기를 말 할 때도 그의 발화행위들은 항상 전체적인 담론보다는 오히려 그 이야기 속에 머물게 된다. 그의 다른 행위들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은 수화자나 혹은 내포독자가 아니라 다른 작중인물들과 직접적으로 상호 작용한다. 그래서 화자보다는 작중인물들에게 광범위한 언표내적 범주가 개방되는 것이다. ‘서술되지 않은’ 일반적 재현 화자 존재(narrator-presence)의 부정적인 극점-‘순수한’ 보여주기의 극점-은 작중인물들의 행동이 원상 그대로 전사(轉寫)되기를 추구하는 서사물들에 의해 표현된다. 반면에 화자가 고유한 목소리로 말하는 순수한 말하기의 극점에선 대명사 ‘나’와 같은 것을 사용하여 해석을 하거나 일반적 혹은 도덕적인 관찰 등을 한다. 관례상 행위에 대한 중립적인 말들은 화자 개입의 의도적인 회피를 암시하는 경향이 있다. 주제에 대한 명백한 해석 없이, 물리적 행동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화자가 개입하지 않는 것으로 느껴진다. 독자는 순수한 외부 행동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보고로부터 주제를 추론해야 한다. 서술되지 않은 유형들: 문자화된 기록들 화자 개입의 최소치에서 최대치까지, 즉 화자의 목소리가 가장 적게 드러나는 것에서 가장 크게 드러나는 일련의 서사적 형태들 가운데서, 발견된 편지나 일기들에 의해 구성된 것처럼 보이는 서사형태들은 화자를 거의 전제하지 않는다. 편지나 일기 내용이 서술적이 될 수 있고, 또 종종 그렇게 될지라도 그것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문장이 단지 소식을 주고받는 사람들 사이의 그때 그 자리에서의 관계만을 표현하는 서간체 형태로도 이야기는 전달될 수 있다. 그 경우에 그것은 인용부호로 구별된 순수한 대화만큼이나 ‘극적’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순수한 화자와 달리, 서신 교환자나 일기를 쓰는 사람은 일이 결국 어떻게 귀결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어떠한 일이 중요한지의 여부조차 알 수 없다. 그는 이야기의 미래가 아닌 과거만을 헤아릴 수 있을 뿐이다. 그는 단지 이해하거나 예측할 뿐이다. 지속적인 서스펜스는 그의 희망이나 두려움이 실현되어질지의 여부에 관한 우리의 호기심으로부터 온다. 따라서 서간체 서사물은 일종의 연기이며, 화자가 개입되지 않은 서사텍스트다-비록 이차적인 개입이 언제나 가능하고 실제로 그것이 일반화되어 있지만 말이다. 순수한 발화 기록 극적 독백들은 한 인물이 다른, 침묵하는 인물에게 말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것의 본질적인 제한은 발화자의 중심 활등이 서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경우에, 그는 하나의 화자일 수 있고, 그 장면은 단지 제2의 서사를 위한 하나의 틀일뿐이기 때문이다. 독백 서사물에서 독백은, 사실상 그것이 생각이 아닌 말로서, 혹은 단순한 생각이나 말을 넘어서는 양식화된 표현주의적 형식으로 인식되어져야 한다는 소박한 이유 때문에 결코 자유롭지 않은, 인용부호가 붙는다는 조건 하에 가능한 것이다. 독백은 아마도, 사물들을 형식적으로 제시하고 설명하며 논평하는 등장인물들이 유발한 정보의 원천이 되는 비자연주의적인, 혹은 ‘표현주의적인’ 서사물들과 관련된 용어로서 가장 유용할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형식적인 낭독-일상적인 의미에서의 말이나 생각이 아니라 그 둘의 양식화된 혼합-이다. 극적 독백이나 대화에서와 같이 이와 같은 독백은 누군가에 의해 ‘들려지고’ 기록된 텍스트로 변형되는 것이 관례적이다. 사고의 기록: 자유 직접화법=내적 독백 인물의 의식의 재현 역시 매개되지 않을 수 있다(비록 그것이 드러내진다는 사실 자체는 엄격한 발화의 기록보다 더 짙은 매개성을 내포한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서사적 개념으로서의 ‘의식’은 신중함과 제한성을 요구한다. 심리학에 의거하지 않고도 우리는 정신행위의 두 가지 유형을 분리할 수 있다. 즉 ‘언어화’를 수반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거칠게 말해서 인식(cognition)과 지각(perception)사이의 구분이 그것이다. 인식이란 이미 언어적 구성물이기 때문에, 또는 쉽사리 언어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언어적 서사물로의 전환은 간단하고도 직접적인 것이다. 그러나 지각의 전달은 언어로의 변형을 필요로 한다. 영화와 같은 시각적 매체는 붉은 장미를 직접적이고 비언어적으로 모방할 수 있으며, 화면 밖을 바라보고 있는 인물 다음에 장미 자체의 커트 된 화면으로 옮겨가는 것과 같은 간단한 관례를 통해 그 장미가 등장인물의 지각대상임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언어적 매체는 반드시 본질적으로는 언어적이 아닌 것의 언어화를 전제해야 한다. 이제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언어화에서 그 언어적 역할은 화자에게 할당된 몫인가, 아니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것인가의 여부이다. 비언어적 지각 내용들은 ‘지정되지 않은’ 언어적 형태로 변형될 수 있는가? ‘내적 독백’에 의해 그것은 가능하다. 등장인물의 사고 내용을 다루는 가장 명백하고 직접적인 방식은 그것들을 ‘비언표적 언술’로 취급하는 것, 즉 ‘그는 생각했다’와 같은 인용 표현과 더불어 그것들을 인용부호로 묶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올수록 인용표현 또한 생략되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는 ‘직접 자유 사고(direct free thought)이다. 그 기준이 되는 형태들은 다음과 같다. ① 등장인물의 자기 언급은 어떠한 것이든 1인칭이다. ② 현재의 담론-순간은 이야기-순간과 같다. 그러므로 현재의 순간을 언급하는 모든 술어는 현재시제를 취할 것이다. 이것은 과거 시간을 묘사하는 ‘서사시적 현재’가 아니라 오히려 행위의 동시간대를 언급하는 실재적 현재이다. 기억과 과거에 대한 다른 언급들은 과거완료형이 아닌 단순 과거로 나타날 것이다. ③ 언어-관용어, 어투, 단어나 문장의 선택-는 화자가 그 외의 곳에 끼어들든 아니든 등장인물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다. ④ 등장인물의 모든 경험에 관한 암시들은 이를테면 그 자신의 생각 속에서 필요로 하는 것 이상의 설명을 제시하지 않는다. ⑤ 생각하는 사람 자신 이외에는 어떠한 청자도 설정되지 않으며 수화자의 무지, 또는 해석의 필요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의식의 다른 재현 방식들로부터 내적 독백을 구분 짓는 가장 뚜렷한 특징은, 그것이 등장인물이 실제로 생각하거나 지각하고 있는 것을 화자의 진술을 통해 표현하는 것을 금기시한다는 것이다. 사고 내용이 곧 지각 내용일 경우, 말들은 오로지 그, 혹은 그녀의 마음속을 스쳐가는 것들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의식의 흐름=자유 연상 의식의 흐름과 내적 독백 사이의 차이점은, 이전의 논의에서는 단순한 어원적인 것이었다. 두 용어는 처음에는 동의어로 취급되었다가 후에 다양한 구분들이 만들어졌다. 로렌스 보울링은 ‘내적 독백’은 인식, 즉 스스로에게 침묵으로 ‘말하는’ 등장인물의 직접적인 모사, 혹은 그의 마음속에 이미 언어적 형태로 존재하는 사고 내용에 대한 기술에 한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언어로 옮겨지지 않는 마음의 순수한 지각이나 영상들’을 그는 ‘감각인상’(필자의 ‘지각’에 해당하는)이라고 부르기를 더 좋아했다. 보울링에게 있어 ‘의식의 흐름’은 ‘작가가 ‘정신의 직접적인 인용’-단순히 언어의 영역만이 아니라 의식 전체를 포함하는-을 제시하기 위해 시도하는 서사적 방법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관점에서 ‘의식의 흐름’은 언어화된 사고(고유한 의미의 ‘내적 독백’)의 기록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의 마음속에 일어나지만 말로 형성되지는 않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에 의한 내적 분석의 산물은 아닌 ‘감각 인상’의 기록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확실히 ‘직접 인용’과 ‘내적 분석’의 구분은 필요하다. 그러나 지각이나 감각 인상이 등장인물의 직접적인 말을 포함할 수 있는가? ‘인용’은 누군가의 실질적인 말을 옮겨오는 것이다. ‘감각 인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의식의 흐름’을 사용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보울링의 가치 있는 구분법을 역으로 받아들여만 한다. 즉 ‘내적 독백’은 분류 용어로 두고, 다른 두 용어는 ‘개념적’이고 ‘지각적’인 두 개의 하위분류를 지시하게 하는 것이다. ‘개념적인 내적 독백’은 등장인물의 마음속을 스쳐가는 실질적인 말에 대한 기록을 일컫는 것이고, ‘지각적인 내적 독백’은 관례적인 언어적 변형에 의해 등장인물의 발음되지 않은 감각 인상들을 전달하는(화자의 내적 분석 없이) 것을 일컫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의 흐름’은 따로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에서 자유롭다. 즉 그것은 생각과 인상들을 임의로 배열하는 것이다. ‘흐름’이라는 말은 그것을 적절히 암시한다. 이 경우 정신은 ‘어떤 목적을 가진 생각과는 정반대의 극을 이루는 연상의 일상적인 흐름에 몰두하는 것이다. 보통 내적 독백과 의식의 흐름이 텍스트 내에서 동시에 일어날 수 있음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분석을 명료하고 날카롭게 하려면, 그 두 개념을 따로따로 검토할 수 없을 만큼 서로 지나치게 얽어매놓아서는 안 된다. 변별점을 구별하는 능력이 없이는, 새로운 윤곽, 새로운 일련의 특성들을 다룰 수 없는 것이다. 문학(그리고 미학)이론들을 흥미롭고 생기 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새로운 가능성들을 예견하는 능력인 것이다. 의식의 흐름의 관례는 외부적으로 등장인물의 사고에 동기를 주는 조직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물론 화자가 그러한 사고를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 효과는 사고에 대한 끊임없이 목적화된 설명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제5장 담론 -숨은 화자와 드러난 화자 화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정도를 나타내 주는 특징들을 식별하는 것이, 화자들의 유형을 결정짓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 다음 세 가지 문제가 우선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된다. 간접 담론의 본질, 숨겨진 서술 목적을 위한 텍스트의 외면적 조정, 그리고 특정한 인물 또는 인물들에 대한 시점의 제한 등이 그것이다. 숨은 화자들 숨은, 혹은 눈에 띄지 않는 서술은, ‘비서술’과, 명백하게 들을 수 있는 서술간의 중간에 위치한다. 숨은 서술에서 우리는 사건, 인물, 배경을 말하는 목소리를 듣게 되지만 소유자는 담론의 그늘에 숨은 채로 남게 된다. ‘서술되지 않은’ 이야기와는 달리 숨겨진 채 서술된 이야기는 작중인물의 말 또는 생각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표현은 서술되지 않은 서사물에서의 단순한 마음을 읽어내는 속기사와는 질적으로 다른 중개자나 해석적 장치를 포함한다. 어떤 해석자는 인물의 생각들을 간접표현으로 바꾸기 때문에, 우리는 그 자신의 관점이 단어 뒤에 숨어 있는지 아닌지를 말할 수 없게 된다. 화자가 숨어 있는 서술 부분이 어디인지는 알아내기가 힘들고 항상 헛갈리기 쉽다. 등장인물이 내적 독백 속에서 고유한 개성적 목소리를 내는 것에 화자라는 명칭을 부여한 잘못은 등장인물의 생각이 숨은 화자에 의해 표현된 곳에서 확실해진다. 간접 인용구와 자유 형식 등장인물의 발화행위와 화자의 발화행위 사이의 복잡한 관계에 대한 분석에서는 의사소통 발화(외적 목소리), 또는 생각(내적 목소리)의 방법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인용과 보고(report), 혹은 보다 전통적인 용어로 ‘직접’ ‘간접’ 형식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수세기 동안 일반적인 것이었다. 서술 시점에서 가장 흥미 있는 제한은, 단지 직접 형식만이 발화자의 정확한 언어들을 인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간접 형식은 그런 보장을 할 수 없다. 간접 형식은 화자에 의해 미묘한 간섭을 받는데, 왜냐하면 보고절에 사용된 단어들이 발화자에 의해 정확히 말해진 것이라는 점을 확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세기에는 직접 간접 발화와 사고(thought) 사이를 가로질러 또 다른 구별이 ‘인용화법’과 ‘자유화법’이라는 차이를 나타냈다. 자유화법에는 인용부문 표시들이 제거된다.   인용화법 자유화법 직접화법 발화 ‘나는 가야 한다’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가야 한다. 사고 ‘나는 가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가야 한다. 간접화법 발화 그녀는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가야 했다. 사고 그녀는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가야 했다.   자유양식의 발화와 사고는 동일하게 표현되고 있으며, 문맥이 분명하지 않는 한 모호하게 남아있다. 필자는 직접 자유화법들은 내적 독백을 형상화한다고 주장했다. 간접 자유화법들은 그렇지 않은데, 왜냐하면 엄밀히 말해 화자가 3인칭 대명사로 제시되고 앞선 시제에 의해 전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접 자유화법의 의미는 간접 인용구 형식에서 인용구 부분을 뺀 단순한 나머지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간접 인용구 형식보다 높은 정도의 자율성을 지니며, 비록 애매함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인용구 부분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등장인물의 말이나 생각 같은 것들을 더 잘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분명히 등장인물의 언어라 하더라도, 최근에 고안된 이것에 대한 적절한 호칭은 서술된 독백(narrated monologue)이다. ‘서술된’이란 말은 간접화법적 특징-3인칭과 앞선 시제-을 의미하며, 반면에 독백이란 등장인물이 사용한 바로 그 언어들을 듣고 있다는 느낌을 전달해 주는 것이다. 서술된 독백은 서술된 보고(내적 분석)와 분명히 다르다. 서술된 보고에서는 등장인물의 생각 또는 발화가 분명히 화자의 것이라 인식되는 말로 전달된다. 때로 자유간접화법 속의 단어들이 등장인물의 것인지 화자의 것인지 결정하기 곤란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둘 다 고도의 문학적 방식에 의해 말해졌을 때 그러하다. 이것은 성격 묘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두 개의 목소리를 합한 것이 의도된 미적 효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때 ‘누가 이것을 생각하거나 말했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 문장들은 인물과 화자 모두에게 적합한 것이다’하는 것이 문장의 함축된 의미이다. 애매함은 그 둘 사이의 결합을 강하게 해주며, 우리로 하여금 화자의 권위를 훨씬 더 믿게 해준다. 아마도 우리는 애매함에 대해서보다는 ‘중립화’나 ‘단일화’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숨은 화자는 명백하게 드러난 유리한 외적 관점에서 작품을 묘사할 수도 있고, 그 자신의 언어나 등장인물의 언어를 사용하여 등장인물의 생각을 인용하는 데 깊이 빠질 수도 있으며, 혹은 어법의 사용, 불분명한 말하기와 보여주기, 등장인물의 내적 삶을 재현하거나 서술하기 같은 것들 속에서 의도적으로 애매함을 조성할 수도 있다 서사 목적을 위한 문장의 조정: 하나의 예로써의 ‘전제’ 언어란 극히 다양한 도구이며, 따라서 현명한 작가들은 언어의 드러내기와 감추기, 주장과 속임 등을 광범위하게 이용한다. 우리는 문장의 요소가 좀 더 적절한 위치, 혹은 자신의 강조를 위해 이동하는 화제화(topicalization)라는 용어를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있다. 이런 방법들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그리고 다른 표현들의 유용성을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은-이른바 ‘전제’라는 것이다. 숨은 화자는 스스로를 노출하여 드러난 존재가 되지 않도록, 말하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그는 그의 모습이 드러날 수 있는 직접적 언급 같은 것을 피해야 한다. 전제란 이런 회피를 위한 편리한 장치이다. 전제는 하나의 자료로 제공된 문장의 일부이며(다른 부분은 주장이지만), 이미 이해되고, 청자를 포함한 모두에게 동의를 강요하는, 말할 필요도 없는 어떤 것이다. 서사 소통에서의 권위의 제한 화자가 가지는 말할 능력은 그의 ‘권위’로 종종 언급된다. ‘제한’의 개념이 늘 명백하게 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에 대립되는 하나는 ‘전지적’인 것, 즉 모든 것을 아는 것으로서, 여기에서 ‘모든’이란 모든 사건적 요소의 결과와 모든 사물적 요소의 본질을 포함한다. 물론,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이 모든 것을 말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화자는 규칙적으로 정보를 숨긴다. 그것이 담론의 정상적인 선택 기능이다. 그러나 전지적 화자(숨은 화자이더라도)는 소설 속의 일들이 어떻게 판명될 것인지를 알고 있다(위에서 논의했듯이, 편지나 일기의 화자는 예외이다). 대부분의 논의에서, ‘전지성’이라는 것은 등장인물의 의식에 들어갈 능력이라는 면에서, ‘제한’에 대립되는 것이다. 전지성은, 등장인물의 심리 속으로 들어가는 화자의 ‘권위’를 일정한 기능으로 묶어두는 효과와 관련될 때 사용하는 술어이며 이와 다른 능력에는 다른 용어들을 사용한다. 전체를 확인하는 중심이 되는 의식이 없이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건너뛰는 능력은 ‘전지적’이라기보다 오히려 ‘필재적’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때는 논리적으로 양자 사이에 어떤 필연적 관계가 없다. 하나의 서술은 화자에게 전지적인 것이 아니라 편재적인 존재가 되도록 허락할 수 있으며, 그 반대도 가능하다. 화자의 특권의 다른 영역은 시간과 관련된다. 즉 화자는 현재의 이야기 순간에 엄격히 제한될 수도 있고, 혹은 특별한 장면이나 요약을 통해서 오랜 기간 지속된 사건을 단 한 두 문장으로 말해버리거나 그와 반대로 사건이 실제 일어난 것보다도 더 오랫동안 읽혀야 되는 방법으로 사건을 확장시키면서, 과거와 미래를 조정하는 것이 허락될 수도 있다. 제한적 이동과 전지적 심리 접근 화자는 한 인물에서 다른 인물로 그의 심리적 접근을 이동하면서도 여전히 상대적으로 숨은 채로 남아 있을 수 있다. 이런 제한된 이동식 접근은 지속적인 ‘전지’와는 다르지만, 이것은 화자의 침투시간이 더 짧다든가, 보여주기와 말하기 사이의 차이점, 구체적 세부묘사와 요약, 단순한 제시와 설명, 자유 간접담론과 인용 간접담론, 보고와 해석의 차이 때문인 것은 아니다. 이런 것들은 동시 발생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보조적인 특징들이다. 주요 기준은 심리적 움직임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의도’이다. 의식의 흐름처럼, 제한된 이동식 접근은 어떤 의도를 드러내지 않으며 플롯의 목적에 기여하지 않는다. 그것은 개별적 사고의 서로 떨어진 집단을 환기하지, 어떤 일반적인 목적에 기여하는 게 아니다. 즉 그것의 변화는 어떤 방법으로도 사건의 외적 전개를 도와주지 못한다. ‘제한적 이동’이란, 문제의 해결 없이, 또는 인과적 사슬을 푸는 일이 없이 다음 단계의 심리로 움직여가는 전환을 뜻한다. 이런 문장 속에서 화자는 해석학적 문제점의 답을 찾기 위해(벌이 꽃을 찾듯) 여러 심리를 샅샅이 찾아다니지 않는다. 심리적 접근은 우연한 문제로 보여 지고 일상생활의 무작위성을 반영한다. 갑작스런 시점의 이동은, 밀접한 육체적 접근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등장인물의 얇은 피부에도 불구하고, 단 1인치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완전히 다른 정신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와 반대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전지적 화자는, 등장인물의 심리가 각각으로 다를 수 있는 것과는 별개로, 그것들이 전체적인 플롯에 적합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준다. 즉 의식에서 의식에로의 변화를 규정짓는다. 드러난 서술: 복합적 묘사 복합적 묘사는 드러난 화자가 가장 미약하게 나타나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화자는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서술되지 않은 이야기에도 묘사는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묘사는 등장인물의 행동을 통해서만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닉은)화물차의 빛을 받은 채 커브를 그리며 시야에서 사라져가는 철로를 바라보았다’(헤밍웨이의 󰡔����전사󰡕����The Battler)에서 커브를 그리는 철로와 화물차는 문장에서 가장 강조되는 부분이 아니다. 그것들은 중심적인 것이기보다는, 다만 닉이 우연히 본 대상들로서 그 장면에 잠시 끼어든 것일 뿐이다. 그것들은 문장 상 두드러지지 않은 채로 행위의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옴으로써, 그것들이 화자의 독립된 장면환기, 즉 복합적 묘사를 이루는 것을 억제한다. 언어 서사물과 영상 서사물에서의 사물적 요소의 재현에는 흥미로운 차이점이 있다. 필름에 찍혀진 대상들의 모든 속성들-형태, 색깔, 크기 등등-은 ‘즉각적인 복합성’ 속에서 하나의 전체로 파악되기에, 대상들은 일종의 ‘강한 자율성’을 지니게 된다(개별적인 속성들을 분석해내고 그것들을 대상들 각각의 유사성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보통 클로즈업이나 편집을 통한 특정 단계가 취해져야만 한다). 반면에 언어로 묘사된 대상들은 더욱 느린 방식으로 독자의 의식 속을 지나간다. 우리는 그것의 속성들을 한꺼번에 파악할 수 없다. 우리는 그것들을 주의 깊게 읽어야만 한다. 묘사가 더 풍부해질수록 다루어지는 내용도 길어진다. 더 많은 세부들을 채우기 위해서는 더 많은 단어들이 필요해진다. 리카르두는 이와 같은 확장된 ‘구분적 복합성(differentiated)’을 통해, 언어로 묘사된 대상들의 ‘상대적 자율성’을 적출해낸다. 즉 그러한 속성들이 연속적으로 제시되기 때문에 그 분절성이 강조되는 것이다. 드러난 서술: 시간의 요약 언어는 공간보다 시간을 다루는데 더 적절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직접적인 요약, 예컨대 생략에 대한 선택권이 있다. 요약은 그 자체에 주의를 환기시키는데, 그 이유는 세부묘사를 할 필요가 없는 이야기 시간의 어떤 기간을 메우는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인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생략은, 바로 논평 없이도 시간의 구분을 발생시킨다. 요약은 누군가가 ‘전이의 문제’, 혹은 그와 유사한 것을 감지했다는 것을 함축한다. 요약은 보통 시간적인 생략과 관련된다. 2장에서 그것은 이야기-시간이 담론-시간보다 훨씬 더 길게 지속되는 하나의 구조이며, 본질적으로 지속적(또는 요약 반복적)인 의미의 동사들을 갖고 있는 언어 서사물에서 그 효과가 더 쉽게 이루어진다고 정의 내린 바 있다. 요약의 세 번째 유형은 사건적 요소나 사물적 요소의 자질을 발췌하는 것이다. 직접적 성격부여는, 어떠한 유형이든 화자의 목소리에 대한 주의를 불러오지만 등장인물이나 배경을 하나의 단어, 혹은 짤막한 구문으로 포장하는 것은 훨씬 더 큰 힘, 따라서 훨씬 더 큰 가청력을 함유하고 있다. 텍스트를 통틀어 간간이 암시처럼 나타나는 ‘그들이 무엇과 같은가 하면’이라는 말은 화자가 그의 개요에 대한 통어력을 통해 적용하려는 말, 즉 ‘한마디로 그것이 명백히 무엇과 같은가 하면’이 된다. 등장인물이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보고 어떤 화자들에게는 실제로 등장인물이 말하지 ‘않았던’ 것을 보고하는 능력이 부여된다. 가능하면서도 불확실한 사건들에 대한 언급은, 여전히 서사적 과정 자체의 인위성에 보다 더 주목을 하게 된다. 어떤 화자는 일어날 수는 있었지만 일어나지는 않은 많은 일들을 들려주며 심지어 등장인물의 의식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상태까지 알고 보고한다. 에토스와 논평 에토스는 허구적 서사물-진실성이 아닌 핍진성이 그 기준이 되는-에서 믿을만한 기능을 한다. 이러한 믿을만함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은 시대와 양식에 따라 변화한다. 서사물은 내포작가의 직접적인 발화를 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에토스는 다만 화자에게만 적용될 수 있다. 핍진성은 단지 허구와 관련된 그럴듯함일 뿐이다(드러난 화자가 때로 그와 같은 착각을 외부세계에 대한 공인된 진실, 즉 ‘철학적 일반화’로 받치고 있을지라도). 달리 말해 화자의 수사학적 노력은 이야기에 대한 그의 해석이 ‘진실’임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반면 내포작가의 수사학적 노력은, 화자의 활동을 포함하여 이야기와 담론의 전체적인 묶음을 흥미롭고 수용 가능하며 내적 일치를 이룬 예술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화자의 에토스는 그가 주장하는 핍진성의 유형에 의존한다. 자서전적이거나 증언형식의 허구 서사물에서 도덕적 신뢰성은 ‘나는 내 자신의 눈으로 그것을 보았다’라는 원칙에 기대고 있다. 법정에서와 마찬가지로 허구물에서 ‘나는 내 자신의 귀로 그것을 들었다’는 이미 그보다 미약해진 것이다. 논평 서술, 묘사 혹은 신원확인을 넘어서는 화자의 발화행위를 일컫는 최선의 명칭은 논평이다(비록 이런 발언이 언술행위의 모든 영역에 걸쳐 있더라도). 논평은 직접적인 것이기에 명백한 자기 언급이 결핍된 어떠한 특징보다도 더욱 분명하게 화자의 목소리를 드러내준다. 논평은 함축적이거나(즉 아이러닉하거나) 혹은 명백하다. 명백한 논평은 해석, 판단, 일반화, 그리고 ‘자의식적인’ 서술을 포함한다. 이중 앞의 세 개가 이야기의 요점, 적절성, 혹은 비중에 대한 개방된 설명이다. ‘판단’은 도덕적이거나 다른 가치 판단에 관한 의견을 표현한다. ‘일반화’는 보편적 진실이든 역사적 사실이든 간에 허구적 세계의 밖에 있는 실제 세계를 언급하는 것이다. ‘자의식적인’ 서술은 진지하든 익살스럽든 간에, 이야기보다는 담론에 대한 논평을 묘사하기 위해 최근에 만들어진 용어이다. 함축적인 논평: 아이러닉한 화자와 믿을 수 없는 화자 등장인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자와 수화자 사이에 의사 전달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아이러닉한 화자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만약 화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포작가와 내포독자 사이에 의사 전달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그 내포작가는 아이러닉하며 화자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내포작가는 실제로 마지막에 진실이 드러나도록 허용한다. 그래서 그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해질 수 없는 것이다. 이야기에 대한 논평: 해석 ‘해석’은 명백한 논평의 가장 광범위한 영역으로 간주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해석은 다른 영역들을 포함한다. 즉 ‘해석’의 본질이 모든 설명이라면, ‘판단’은 도덕적 가치판단에 기초한 설명이고, ‘일반화’는 이야기 속의 사건적 요소나 사물적 요소를 비허구적인 세계에 있는 실제의 어떤 것과 비교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해석’을 어떤 상대적인 의미-이야기 자체의 관점에서 이야기 밖으로 나가는 일 없이 무엇을 설명해 보려는 자유로운 시도-로 제한하면서 이 세 가지 방식의 구분을 고수할 것이다. 이러한 제한 안에서라 하더라도 수없이 많은 ‘해석’의 문장이 가능하다. 이야기에 대한 논평: 판단 우리는 문장의 세부, 그것들의 법칙, 언표내적 상태에 대한 검증을 통해 판단이 전달되는 체계적인 구조를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에 대한 논평: 일반화 비평가들은, 소설 속에서 행해지는 ‘일반적 진실’에 대한 빈번한 인용, 즉 허구적 작품의 세계를 뛰어넘어 실제 세계와 관련된 철학적 관찰들에 대해 오랫동안 주목해왔다. 과학적 사실은 단지 일반화의 한 종류일 뿐이다. 보다 일반적인 것은 (적어도 19세기의 소설에서는) ‘철학적’ 형태의 관찰들이며, 그것은 보다 불확정적인 방식으로 진실의 조건과 관련을 맺는다. 한 예로 사람들은 텍스트의 어떤 부분에서 ‘사람은 항상 진실을 말해야 한다’를 받아들이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사람들은 그로 인해 곤란을 겪을 사람에게는 절대로 진실을 말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7은 가장 좋은 숫자이다’와 같은 말들은 논박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과학적 세계보다는 오히려 수사학적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현실세계에서의 논쟁과 마찬가지로 서사물에서 그러한 말들의 적용 가능성은, 어떤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진실성이 아니라, 작품의 허구적인 문맥 속에 그것들이 얼마나 적합하게 들어맞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실제적 일반화와 수사적 일반화는 동일한 근본적 기능, 이를테면 장식적이며 특별히 핍진적인 기능을 담당한다. 우리는, 혼란한 역사적 과정에서 약호들이 현실적인 외관을 갖출 만큼 충분히 확정적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반화와 논평들이 행해졌었는지에 주목해 왔다. 그래서 임의로 주조된 표현이나 작가들 특유의 핍진성이 보다 큰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일반화는 매우 자의적인 것이 되었다. 어쩔 수 없는 플롯의 요구에 따라, 서로 대립되는 각각의 진술들이 쉽사리 즐겨 수용될 수 있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실수는 패배가 아닌 승리를, 성취는 성공이 아닌 재앙을 불러들이게 된다. 이러한 일반화의 과도한 사용은 분명히 역사상의 불안정한 과도기를 나타내주고 있다. 이러한 과도한 사용은, 일반화의 기초가 되는 사실성에 대한 적절한 일치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리얼리즘을 필요로 하는 스타일임을 나타낸다. 그것은 행위를 설명하기 위한 자체의 정형화된 표현을 제공한다. 전통적 규범이란 항상 역사에 의해 뒤집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확실하거나 비이성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발자크와 대커리는 일상적인 세계에서는 더 이상 묵인될 수 없는 것을 보충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핍진성을 구축했다. 작가들은, 이미 알려진 규범으로는 자신의 의도가 분명해지지 않기 때문에 일반화를 필요로 한다. 일반화는 능숙한 명인의 손으로 행해지는 모든 논평과 마찬가지로, 표현의 경제적인 효과를 위한 정밀한 도구이며,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경우에는 사용 불가능한 통찰법이다. 현대 영화는 일반적으로 공개적인 논평을 삼가는 편이다. 어떤 종류이든 화면 밖의 서술적 목소리는 매력적이지 못하며, 특히 도덕적으로 설명하거나 해설할 경우는 더욱 그렇다. 담론에 대한 논평 담론에 대한 화자의 논평은 수세기 동안 일반화되어 왔다. 담론에 대한 논평이 허구적 내용의 결을 방해 하는가 아닌가에 따라 근본적인 이분법이 생겨난다. 전자의 것은 ‘자의식적인’ 서술이라 불려 왔다. 자의식적인 서술에 대해서 로버트 알터가 한 것 이상으로 더 나은 정의를 내릴 수 없다. 자의식적 소설은 자체의 인위적 조건을 조직적으로 드러내 보임으로써 사실성과 사실처럼 보이는 인위성 사이에 관련되는 문제를 탐색한다···. 완전히 자의식적인 소설은 문체와 서사적 관점의 취급, 등장인물에게 부과된 이름들과 어휘들, 서술의 유형들, 등장인물의 본성과 그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 허구적 세계가 문학적 전통과 관습의 배경에 맞서서 세워진 작가의 구조물이라는 감각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이것은 ‘일종의 허구물의 존재론적 지위에 대한 규명’이다. 기본적인 서사적 관습들을 희롱하는 것은 ‘낭만적 아이러니’의 의미에서 아이러닉하다. 그러나 어떤 자의식적인 서술은 훨씬 더 나아가, 단순히 그러한 관습들을 희롱하는 것이 아니라 외관상 파괴적인 경향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수화자 ‘드러난/숨은’과 같은 구분이 수화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가? 프랭스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즉 그는 ‘수화자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 서사물’과 ‘반대로 그를 특정한 개인으로 규정하는 서사물’을 대립시킨다. 우리는 또 내적 말하기의(intradiegetic) 수화자와 외적 말하기의(extradiegetic) 수화자, 즉 이야기 틀 안의 수화자와 이야기 밖의 수화자 사이의 더 근본적인 이분법을 받아들일 수 있다.                                         단순한 소통 1.드러난〔작가〕-화자     대상이 되는→ 이야기   1. 드러난 화자〔독자〕- 수화자       2. 숨은 화자       2. 숨은 수화자       3. 비화자       3. 비수화자                                                    대                                          구조 소통 이야기 구조 속의 등장인물로서의 드러난 화자        이야기 구조 속의 등장인물로서의 드러난 수화자    대상이 되는 이야기 →            서사물이 진행되면서, 화자처럼 수화자도 바뀔 수 있다는 것-한 사람의 개인이 발전되어 가는 것이든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는 것이든-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수화자는 성격이 다른 개인으로 변하거나 아니면 또 다른 인물로 대치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고리오 영감󰡕����에서처럼, 화자가 그의 수화자를 놓쳐 버려서, 어느 주어진 상황에서 수화자가 명백히 누구인지를 결정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아마도 가장 흥미로운 것은 화자와 수화자가 동일해지거나 그들의 기능이 서로 교환되는 경우일 것이다. 󰡔����구토󰡕����의 로깡땡은 다른 일기체 소설가들처럼 바로 그 자신이 수화자가 된다. 󰡔����캔터베리 이야기󰡕����나 󰡔����데카메론󰡕����에서는 수화자들이 번갈아 화자가 되는데, 그것은 이들 작품의 이야기 구조가 흥미 있는 이야기를 들을 뿐만 아니라, 또 그런 이야기를 제공해야 한다는 장난기 어린 계약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수화자가 수행하는 서사적 역할은 무엇인가? 우리의 기본적인 이분법에 따라 필자는 내적 말하기 기능을 외적 기능과 구별한다. 내적 말하기의 경우, 이야기 틀 속에서 수화자는 화자를 위한 수용자로서, 즉 서사의 다양한 수사적 기교가 그를 위해 활용되는 수용자의 역할을 한다. 허구적 작품에서 ‘수사적’이라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는 ‘진실’보다는 오히려 핍진성과 관련이 있음을 상기한다면, 수화자의 묵인은 화자가 자신의 설명을 받아들이도록 납득시키려는 노력이 사실상 성공했음을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 이의를 제기할 근거가 없는 가장 단순한 경우에는 수화자의 승인은 화자의 신빙성을 보증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우리가 수화자가 잘 속는다는 점을 의심한다면 우리의 판단은 더욱 더 어려워진다. 화자는 수화자와 작품 세계, 특히 그것의 등장인물들 사이를 매개하기 때문에, 거리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우리가 이 세 사람 사이에 있을 수 있는 ‘가깝고’ ‘먼’ 두 가지 기본적인 거리를 상정한다면, 다섯 가지 종류의 상이한 관계 유형이 인정될 수 있다. ① 화자와 수화자는 서로에게 가깝지만 작중인물과는 먼 경우 ② 화자는 멀리 떨어져 있고 수화자와 등장인물이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경우 ③ 화자와 등장인물은 가까우나 수화자로부터 멀리 있는 경우 ④ 세 사람 모두가 친밀한 경우 ⑤ 세 사람 모두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 화자에 의해 발언된 직접적인 판단이나 해석은 수화자의 묵인(침묵일지라도)에 의해 강화될 수 있다. 화자의 진술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반박하지 못하는 수화자의 목소리는 그것의 신뢰성을 시인하는 것이다. 수화자가 ‘그래요, 이해해요’라고 말한다면, 그 진술은 더욱 더 강화될 것이다. 가치판단과 견해들에 대한 화자와 수화자 사이의 이러한 직접적인 의사소통은 텍스트가 요구하는 태도들을 내포독자에게 전달하는 가장 확실하고 경제적인 방법이다. 수화자가 수행할 수 있는 또 다른 기능은 화자를 좀 더 명료하게 구분해 주는 것이다. 수용자의 다양성은 서사적 구조 자체의 정상적인 목표는 아니다. 그러한 것이 틀림없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필자는 그에 대한 단 하나의 적절한 예도 생각할 수 없다. 이처럼 그러한 예가 드문 것은, 대부분의 서사물들이 실제로 이름 붙여지거나 혹은 암시되어진 화자에게 긴밀하고 특수한 초점을 맞추는 기능상의 요구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30    노스럽 프라이, <<비평의 해부>>, 임철규 옮김,한길사,2006 댓글:  조회:2978  추천:0  2009-05-16
노스럽 프라이, 󰡔��비평의 해부󰡕�� 네 번째 에세이 수사비평-장르의 이론 지속적 형식(산문픽션)(요약)                1. 유(類)로서의 픽션과 종(種)으로서의 소설 문예비평에서 기본적으로 지속적인 형식을 취하는 어떤 문학작품-거의 산문으로 된 문학작품-에 이 픽션이라는 말을 적용하여도 지장은 없을 것이다. 가령 이것이 무리한 주문이라면 단 하나의 진정한 픽션의 형식은 이른바 소설뿐인데, 소설을 픽션과 동일시하는 임시변통적인 습관에 대해서 적어도 어떤 식으로든 간에 항의가 허용될 수는 있다.(574) 픽션과 소설을 동일시하는 문학사가들은 이 세상이 소설 없이도 오랫동안 그럭저럭 지내왔다는 사실에 크게 당황하고 있다. 겨우 디포에 이르러 커다란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그들의 시야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비좁은 것이었다.(575) 산문 픽션에 대한 이와 같은 소설 중심적인 견해는 프톨레마이오스(그리스 수학자, 천문학자.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다-인용자)적 견해로서, 너무 지나치게 복잡해진 나머지 지금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이것에 대신해서 좀 더 상대적인 또한 코페르니쿠스적인 견해가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575) 우리가 소설을 픽션으로서가 아니라 픽션의 한 형식으로서 진지하게 고찰해볼 것 같으면 소설의 특질이 무엇이든 그 전통의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은 디포, 필딩, 오스틴, 그리고 제임스 등이며, 또 그 전통의 중심에서 조금 벗어나고 있는 것은 보로, 피콕, 멜빌, 에밀리 브론테 등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가치평가가 아니다. 우리는 󰡔��백경󰡕��이 󰡔��에고이스트󰡕��보다도 위대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메러디스의 작품 쪽이 전형적인 소설에 한층 더 가까운 것이라고 느낀다.(576) 제인 오스틴의 소설처럼 우리가 전형적인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소설에서 플롯과 회화는 풍습 희극의 여러 관습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폭풍의 언덕󰡕��은 오히려 옛날 이야기와 발라드에 연관되는 관습들을 따르고 있다. 이 관습들은 비극과 한층 유사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격정, 광란 등의 비극적 감정은 제인 오스틴의 균형 있는 어조를 산산이 부수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서는 그런 감정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소설 속에 들어가기 어려운, 초자연적인 것이나 그것의 암시도 이 소설 속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있는 요소라고 말할 수 있다. 플롯의 형태도 다르다. 제인 오스틴이 중심적인 상황의 주위를 교묘하게 움직이면서 돌고 있는 데 반해, 에밀리 브론테는 직선적인 억양을 갖고 이야기하며, 또 화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제인 오스틴의 경우에는 화자가 터무니없이 어울리지 않는 존재일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로 다른 습관을 따르고 있으므로 󰡔��폭풍의 언덕󰡕��을 소설과는 별개의 형식의 산문 픽션이라고 간주하여도 정당하다. 여기서 우리는 그 별개의 형식을 로맨스라고 부르겠다.(576) 2. 픽션의 종(種)으로서의 소설과 로맨스의 차이 소설과 로맨스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는 성격묘사의 구상에 있다. 로맨스 작가는 ‘실재의 인간’을 창조하려는 것보다는 오히려 양식화된 인물, 인간 심리의 원형을 나타내는 데까지 확대되는 인물을 창조하려고 한다....인간 성격 가운데 어떤 요소가 로맨스에 방출되므로, 로맨스는 본래 소설보다도 더 혁명적인 형식으로 되고 있다.(577) 소설가는 인격을 취급한다. 이 경우 등장인물들은 페르소나, 즉 사회적인 가면을 쓰고 있다. 소설가는 안정된 사회의 틀을 필요로 하며, 그러므로 훌륭한 소설가의 대부분은 지나치게 소심하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인습을 존중해왔다. 로맨스 작가는 개성을 취급한다. 이 경우의 등장인물들은 진공 속에 존재하며 몽상에 의해서 이상화된다. 또 로맨스 작가는 아무리 보수적이라 할지라도 그의 글에서는 무언가 허무적인 것 또는 야성적인 것이 계속 나올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산문 로맨스는 독립된 픽션의 한 형식으로서 소설과 구별되(577)지 않으면 안 되며, 또 현재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내는 산더미 같은 잡다한 산문작품에서 독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578) 현대의 로맨스에서 소설로서 해석될 수 없는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또 그 역도 성립된다. 산문 픽션의 여러 형식은 인간으로 말하면 인종적 특징처럼 혼합되어 있는  것이지 성별처럼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일반 사람들이 요구하는 픽션은 늘 혼합된 형식, 즉 로맨스적인 소설이다. 말하자면 독자가 자기의 리비도를 주인공에게, 아니마를 여주인공에게 투영할 수 있을 정도로 로맨스적이고, 이 투영을 일상의 낯익은 세계에 머무르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소설적인 작품인 것이다.(678) (그럼에도 위와 같은 구별을 한다는 것-인용자) 그 이유는 위대한 로맨스 작가를 고찰할 때, 그것은 로맨스 작가 자신이 선택해서 취한 관습에 의거해서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비평가가 단지 로맨스 형식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윌리엄 모리스가 산문 픽션의 한구석에 밀려나 있는 것은 부당하다. 또 로맨스의 혁명적인 성격에 대해서 앞서 말한 것을 생각하면, 그가 이 형식을 선택한 것은 자신의 사회적인 입장으(578)로부터의 ‘도피’라고 여기는 것도 부당하다. 만일 스콧에게 그를 로맨스 작가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소설가로서의 그의 결점만을 따지는 것은 좋은 비평이라 할 수 없다. 󰡔��천로역정󰡕��에는 원형적인 성격묘사, 종교적인 경험에 대한 혁명적인 자세 등 많은 로맨스적인 특징이 있으며, 이 때문에 이 작품은 하나의 문학적 형식의 완성된 일례이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영문학의 정식(定食)에 어떤 종교적인 영양을 가하기 위해서 채택된 책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579) 로맨스는 소설보다 더 오래된 형식이다. 이 사실이 로맨스는 유치한 형식, 말하자면 미숙하고 발전이 없는 형식이라는 역사적 착각을 가져온 것이다.(579) 영웅을 주제로 하는 로맨스는 인간을 다루는 소설과 신들을 다루는 신화의 중간에 있다. 고전 그리스∙로마 신화의 말기에 그 하나의 발전으로서 산문 로맨스가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아이슬란드의 산문 사가(Saga)는 두 개의 신화 에다(Edda)의 뒤를 곧바로 잇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소설은 오히려 그 자체의 세계를 확대해서 픽션의 측면에서 역사에 가까이 하려고 하는 경향을 나타낸다.(580) 3. 자서전-고백형식의 픽션 자서전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일련의 이행을 거쳐서 어느 때고 소설과 한데 합쳐지는 별개의 형식이다. 대부분의 자서전은 창조적인, 따라서 픽션적인 충동에 의해서 고취되고 있으며, 이 충동은 작가의 생활에서의 사건과 경험 중에서 하나의 통합된 패턴을 만들어내는 쓸모 있는 것만을 선택하려 한다. 이 패턴은 작자 자신을 초월하고 있는 더 큰 무엇-이것을 작가는 그의 자아와 동일시해오고 있다-일 수도 있으며, 또 단지 그의 인격과 태도의 일관성일 수도 있다.(581) 이 형식을 발명한 것처럼 보이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또 그 현대형(型)을 확립한 루소를 좇아 우리는 이 매우 중요한 산문 픽션의 형식을 ‘고백’형식이라고 부르겠다.(582) 로맨스의 경우에서와 똑같이 고백을 독립된 산문형식으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갖는 가장 훌륭한 산문작품의 일부는 ‘사상’이라고 해서 전혀 문학으로 인정되지 않고, 또 ‘산문 문체의 모범’이라고 해서 전혀 종교나 철학으로 인정되지 않아 막연한 책들의 한구석에 팽개쳐져 있는데, 그 산문 작품들을 고백형식으로 인정하게 되면 그들은 픽션으로서 명확한 위치를 얻게 된다. 또 소설과 로맨스와 똑같이 고백에도 단편형식이 있다. 수필이 그것이다. 몽테뉴의 󰡔��수상록󰡕��은 여러 개의 수필로 구성되어 있는 고백인데, 여기에서는 다만 장편형식의 지속적인 이야기만 빠져 있다. 몽테뉴의 구성법과 장편고백과의 관계는 조이스의 󰡔��더블린 시민󰡕��이나 보카치오의 󰡔��데카메론󰡕��과 같은 짧은 이야기로 된 작품과 장편소설 또는 로맨스와의 관계와 똑같은 것이다.(582) 루소 이후, 아니 실제로 루소에서도 고백은 소설 속으로 흘러들어(582) 그 혼합에서 허구적 자서전, 예술가 소설(Kűnstler-roman), 기타 이와 유사한 형식이 나오게 된다. 문학적으로 보면 고백이 늘 작가 자신에 대한 것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으며, 적어도 󰡔��몰 플란더스󰡕��이래 극적 고백은 소설에서 사용되어왔다. ‘의식의 흐름’기법에 의해서 이 두 가지 형식은 한층 집중적으로 융합될 수 있는 것처럼 되고 있지만, 이와 같은 경우에서조차도 고백형식 특유의 성질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고백에서는 종교, 정치, 예술 등에 대한 어떤 지적∙이론적인 관심이 거의 늘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고백의 작가가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것이 값어치가 있다고 느끼는 것은 그가 이런 주제들에 대해서 통합적인 견해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583) 4. 네 번째 종의 픽션형식-아나토미 소설은 외향적∙개인적인 경향을 갖고 있으며, 그 주된 관심을 사회(583)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으로서의 인간의 성격에 두고 있다. 로맨스는 내향적∙개인적인 경향을 갖고 있다. 즉 로맨스는 소설과 똑같은 성격을 다루지만, 다루는 방법이 한층 주관적이다.(여기서 주관적이라는 것은 소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취급방법을 가리킨다. 로맨스의 등장인물은 영웅적이며, 따라서 밖으로부터는 헤아릴 수 없는 존재이다. 소설가는 보다 객관적이기 때문에 한층 자유로이 등장인물의 심리에 관여할 수 있다). 고백도 역시 내향적이지만 그 내용은 지적이다. 분명히 다음 단계로서 우리는 외향적∙지적인 네 번째의 픽션 형식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584) 우리는 앞서 대부분의 사람은 󰡔��걸리버 여행기󰡕��를 픽션이라고는 불러도 소설이라고는 부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작품이 어떤 형식을 갖고 있음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것은 별개의 픽션 형식임에는 틀림없다. 루소의 󰡔��에밀󰡕��에서부터 볼테르의 󰡔��캉디드󰡕��에, 버틀러의 󰡔��만인의 길󰡕��에서부터 󰡔��에레혼󰡕�� 연작에, 헉슬리의 󰡔��대위법󰡕��에서부터 󰡔��멋진 신세계󰡕��에 눈을 돌리게 되면 우리는 소설을 떠나서 이 같은 형식-그 형식이 무엇이든 간에-으로 향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584) 이런 작가들이 사용하는 형식은 메니포스(Menippos)적인 풍자, 드물기는 하지만 또한 바로(Varro)적인 풍자라고 일컬어지는 것으로, 그리스의 견유철학자 메니포스가 만들어낸 형식이라고 주장되고 있다....메니포스적인 풍자는 운문으로 된 풍자시에 산문으로 된 삽화를 개입시키는 습관에서부터 발달한 것 같은데,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단지 그 산문형식뿐이다.(585) 메니포스적인 풍자는 인간 그 자체보다도 인간의 여러 가지 정신적인 태도를 다룬다. 메니포스적 풍자는 현학자, 고집쟁이, 괴팍스런 사람, 벼락출세자, 사기꾼, 광신자, 온갖 종류의 탐욕스럽고 무능한 전문가들의 사회적 행동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는 구별되는 각자의 아전인수적인 인생관을 다룬다. 따라서 메니포스적인 풍자는 추상적인 관념과 이론을 다룰 수 있다는 점에서 고백을 닮고 있으며, 그 성격묘사에서는 소설과 다르다. 즉 그것은 자연주의적이라기보다는 양식적인 성격묘사를 행하며, 또 인간을 관념의 대변자로서 보는 것이다.(585) 이 전통의 일정한 주제는 이미 논한 허풍선이 학자를 조소하는 것이다. 소설가는 악과 어리석은 행위를 사회의 병이라고 생각하나, 메니포스적 풍자가는 그것을 지성의 병, 한계를 모르는 일종의 현학적인 버릇이라고 생각한다. 이 버릇은 허풍선이 학자의 모습 속에 상징적으로 나타나며, 동시에 규정되고 있다.(586) 그 가장 집중적인 모습을 취할 경우 메니포스적인 풍자는 단일한 지적 패턴에 의한 세계상을 그려낸다. 줄거리에서부터 지적인 구성이 조립되므로, 이때 이야기의 습관적인 대강의 줄거리는 심하게 뒤죽박죽이 되어버리지만, 이 결과 일견 조잡하게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직 독자의 부주의라든가 소설 중심의 픽션관에 의해서 판단하고자 하는 독자의 경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586) 지금 우리가 논하고 있는 메니포스적인 풍자의 경우에는 형식의 명칭이 역시 태도에도 해당된다. 지금까지 보아온 것처럼, 태도의 명칭으로서의 풍자는 공상과 도덕의 결합이다.(587) 메니포스적인 풍자의 단편 형식은 보통 대화 또는 회담인데, 여기에서는 성격의 갈등보다도 오히려 관념의 갈등에 극적인 흥미가 주어진다....이 경우에도 이 형식은 반드시 늘 풍자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순수하게 공상적 또는 도덕적인 논의로 차츰 변한다.(587) 소설가는 헨리 제임스처럼 인간관계의 철저한 분석에 의해서, 그렇지 않으면 톨스토이처럼 사회현상의 철저한 분석에 의해서, 자신의 충일감을 나타낸다. 지적인 주제와 태도를 취급하는 메니포스적 풍자가는 지적인 방법으로, 말하자면 그의 당면 주제에 관계되는 방대한 박식을 차례로 동원해서 펼쳐 보이기도 하고, 또 현학적인 적들에 대해서는 그들 자신의 전문어를 눈사태처럼 퍼부어서 꼼짝 못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충일감을 보이는 것이다.(588) 스위프트 이전에 영어로 씌어진 최대의 메니포스적인 풍자는 버턴의 󰡔��우울의 해부󰡕��인데, 여기에서도 극도로 해박한 지식을 창조적으로 다루는 것이 구성원리가 되고 있다. 여기서는 우울이라는 개념이 제공하는 지적 패턴에 의해서 인간사회가 고찰되고, 대화 대신에 책의 심포지움이 전개된다. 이 결과 초서(그는 버턴이 애독한 작가의 한 사람이다)이래 영문학에서 버턴의 책만큼 단 한 권의 책에 포괄적인 인간생활의 고찰을 담은 작품은 없는 것이다.(589) 버턴의 표제의 ‘아나토미’(anatomy), 즉 ‘해부’라는 말은 해체 또는 분석이라는 뜻으로, 그의 형식의 지적인 방향을 아주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번거롭고 그리고 현대에서 오히려 오해를 낳고 있는 ‘메니포스적 풍(589)자’라는 이름 대신 부르기 편리한 아나토미라는 말을 채용하는 편이 좋겠다.(590) 아나토미도 물론 결국에는 소설과 합치하기 시작한다. 아나토미에서 생성되는 여러 가지 잡종 속에는 이른바 사상소설(思想小說, roman these)과 1930년대의 프롤레타리아 소설처럼 등장인물이 사회적 또는 기타의 관념의 상징으로 되고 있는 소설이 포함된다.(590) 아나토미의 형식과 전통을 올바르게 이해할 것 같으면 문학사의 대부분의 요소가 정연하게 정리될 것이다.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은 대화 형식, 운문의 삽입, 널리 퍼져 있는 관조적인 아이러니의 기조 등을 가지고 있는 순수한 아나토미이며, 이 사실은 그것이 준 커다란 영향을 이해하는 데에서 꽤 중요하다. 월턴의 󰡔��낚시 전서󰡕��도 아나토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운문과 산문의 혼합, 전원의 연회라는 장면 설정, 대화 형식, 음식물에 대한 백과전서적인 흥미, 그리고 고기 낚시를 경멸은 하지만 이것보다 더 좋은 일을 거의 찾지 못하고 있는 사회를 향해 던지는 온건한 메니포스적인 조롱 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590) 5. 픽션의 네 가지 종(種)의 복합형식 형식이라는 관점에서 픽션을 바라보면 네 개의 주요한 흐름, 즉 소설∙고백∙아나토미, 그리고 로맨스가 서로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여섯 개의 가능한 복합형식 그 모두가 실제로 존재하며, 그 중 소설이 다른 세 개의 형식을 어떻게 서로 결합하고 있는가를 제시한 바 있다. 하나의 형식에만 배타적으로 집중하는 경우는 드물다.(591) 한층 포괄적인 구성을 취하는 픽션에는 적어도 세 개의 형식이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다.󰡔��파멜라󰡕��에서의 소설, 로맨스, 그리고 고백, 󰡔��돈키호테󰡕��에서의 소설, 로맨스, 그리고 아나토미, 프루스트에서의 소설, 고백, 그리고 아나토미, 아풀레이우스에서의 로맨스, 고백, 그리고 아나토미 등등의 요소를 볼 수 있다.(592) 만일 어떤 독자에게 󰡔��율리시스󰡕��에서 가장 인상 깊은 사항을 일람표로 만들라고 요구하면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리라 본다. 첫째로 더블린의 광경∙소리∙냄새 등이 선명하게 살아 있다는 점, 성격 묘사의 화려함, 회화(會話)의 자연스러움 등, 둘째로 영웅적인 원형의 패턴, 특히 󰡔��오디세이아󰡕��가 제공해주는 패턴과 대치됨으로써(592) 생기는 줄거리나 인물의 교묘한 패러디, 셋째로 의식의 흐름의 기법의 예리한 사용방법을 통해서, 성격과 사건이 드러나는 것, 넷째로 기법에서도, 또 주제에서도 항상 백과전서적∙포괄적이 되고자 하는 경향, 그리고 기법과 주제를 지적인 관점에서 취급하는 경향. 이 네 가지 점이 각각 작품에서 소설, 로맨스, 고백, 아나토미에 연관되는 요소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 이제는 꽤 분명해졌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율리시스󰡕��는 이 네 가지 형식 전부를 사용하고 있는 완전한 산문 서사이며, 그 형식은 전부가 실제로 똑같이 중요성을 갖고, 또 서로서로에 필요 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여기저기서 주워 모은 집합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체인 것이다.(593)
29    신동욱 편저, <<한국 현대문학사>>, 집문당, 2004.2 댓글:  조회:2923  추천:0  2009-05-16
신동욱 편저, 󰡔��한국 현대문학사󰡕��, 집문당, 2004.2 머리말 이 책은 20세기 한국문학사를 장르별로 총 정리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시, 소설, 희곡, 비평 등 현대문학의 주요 장르들을 망라하여 문학사를 서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등 해외의 한국문학과 아동문학을 별도의 항목으로 설정하여 체계적으로 제시하였다. 이처럼 문학사를 장르와 주제에 따라 나누어 제시한 것은 이 방법이 작가나 작품들 사이의 연관성을 좀더 정밀하게 파악하여 문학사의 실제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수용자에게도 유익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작품도 결국은 장르의 특질을 실현하여 문예적 가치를 이룬다는 점을 고려할 때 문학사도 개별 장르를 중심으로 기술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이 책을 이용하는 많은 독자들의 요구도(3) 문학 일반의 역사가 아니라 시문학이나 소설문학 같은 개별 장르사에 있다고 판단된다. 아동문학과 해외 한국문학을 별도의 항목으로 설정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아동문학이 현실 사회에서 중요한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문학사 서술에서는 흔히 배제되어 왔으며 해외의 한국문학과 관련된 성과들에 대해서도 좀더 포용적인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종전의 문학사들이 지닌 한계를 벗어나 한국 현대문학을 종합적으로 조명하고자 한 모색의 결과가 이 문학사인 셈이다.(4) 총론 1. 한국 근대문학의 출발과 근대계몽기의 문학 우리 근대문학의 태동은 애국계몽사상의 형성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한말에서 합방까지 이른바 개화기로 부르는 시기가 그 새로운 사상과 문학의 기원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 시기는 개화사상뿐만 아니라 다양한 애국계몽사상이 속출했던 때로서 개화라는 명칭이 그리 합당해 보이지는 않는다. 근래에 개화기 대신 애국계몽기라는 명칭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리고 근대계몽운동이 문학에 집중적으로 반영되는 것은 1900년대이므로, 시기를 축소해 1900-1910년 혹은 1905-1910년으로 한정하기도 한다. 보다 최근에는 이 시기에 근대적인 인식론적 전환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근대계몽기라는 명칭이 주장되기도 한다. 우리는 이 시기에 근대적 사회를 이루려는 정치적, 문학적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한 점을 인정할 수 있다. 근대성과 근대문학을 얻으려는 시도는 여러 가지 차원에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애국계몽기는 그 중에서 근대적 민족국가를 수립하려는 다양한 기획들이 출현했던 시기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의 위협에 놓인 이 시기에 독립된 민족국가의 수립이 절박한 과제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애국계몽사상이란 그같은 위기의 상황에 대응해 독립된 민족과 국가를 확립하려는 근대적 기획이었다고 불 수 있다. 그 점에서 애국계몽사상은 다양한 근대기획들이 국가와 민족이라는 거시적 차원에서 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근대기획으로서의 애국계몽사상은 여러 가지 다양한 사상적 흐름으로 나타난다. 크게 나누면 개화(15)를 우선시하는 쪽과 민족의 독립을 중시하는 쪽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전자는 다시 급진적 개화파와 온건적 개화파로 나눠지며 후자는 위정척사파와 개신유학파로 분류된다. 이중에서 문학적으로는 급진, 온건 개화파와 개신유학파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예컨대 개화사상(급진, 온건)에 상응하는 문학이 신소설이라면 개신유교파의 문학은 역사전기소설이었다. 중요한 것은 온전한 근대문학을 성취하는 데 있어 양자 모두 본질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개화파의 신소설은 근대화된 국민문화의 획득을 시도하지만 빈번히 외세 타협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반면에 개신유교파의 역사전기소설은 주체적인 민족의 독립을 강조하지만 근대적인 문화형식을 얻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다. 이러한 문학적 궁지는 어떤 사상으로도 독립된 민족국가를 수립하기 어려웠던 이 시기의 정치적 궁지에 상응한다. 그런 근본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애국계몽기의 중요한 특징은 전통사상과 서구사상이 다양하게 어우러지는 문화적 장이 마련되었다는 점이다. 그런 문화적 혼성의 양상은 서사문학보다도 개신유학파와 연관된 개화가사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전통과 서구가 서로 이반하는 동시에 혼성되는 그 문화 현상은 1910년대로 넘어가면 퇴색하게 된다.(16) 2. 일제 강점기의 문학 1910년대는 일제강점으로 인해 문학에서 정치적 주제가 위축된 시기였다. 이 시기에도 여전히 신소설이 쓰이지만 개화의 주제보다는 통속성이 우세해진다. 또한 계몽적 지식인들에 의한 근대화의 주장이 계속되는 한편 소설 속에서는 빈번히 현실에서의 좌절이 그려진다. 우선 이 시기의 계몽의 주제는 애국이념보다는 개인의 자아각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예컨대 이광수의 󰡔��무정󰡕��은 근대적 자아각성에 의해 문명화된 조국을 건설하려는 소망을 담고 있다. 이 소설에서도 민족주의는 계속되지만 애국독립보다는 신문명의 건설이 주제로 설정되(16)어 있다. 물론 이는 전 시대의 신소설의 주제의 계승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신소설이 나름대로의 민족적 위기상황에 대한 대응방식이었던 반면 󰡔��무정󰡕��은 그보다는 근대적 자아각성에 의해 새로운 시민공동체를 이루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렇ㄴ 근대적 개인의식은 문장에서도 나타났다. 신소설의 ‘~하더라’ ‘~했더라’ 등은 서술자의 책임이 없고 개인의 의지나 주장을 희석시키게 했다. 이에 비해 이광수는 사고와 행동의 묘사에서 현저히 분절화된 세련된 문장을 쓰기 시작했고, ‘~생각을 한다’ ‘~할 마음도 생긴다’ 등의 서술로 서술자의 견해와 의지, 느낌, 그리고 시제를 명료히 기술하기 시작했다. 이광수의 초기 문장 역시 ‘하더라’ 체를 습용하였으나 점차 객관화, 분절화 된 문장으로 발전했고, 이는 김동인, 현진건, 염상섭 등으로 이어지면서 점차 심리적 진실에 입각한 문체로 성숙해 갔다. 말하자면 근대적 자아확립에 부합되는 문체가 수립되었다. 이광수는 이처럼 근대소설의 개척적인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이후 󰡔��이순신󰡕�� 󰡔��원효대사󰡕�� 등의 역사소설을 통해 보편적 인격체로서의 걸출한 애국자와 사상가를 묘사하여 한국 근대소설의 거봉이 되었다.(17) 한편 전 시대와 구별되는 1910년대 문학의 특징은 현상윤의 「핍박」이나 양건식의 「슬픈 모순」 등에서 보다 분명히 나타난다. 두 사람은 이광수와 비슷한 계몽적 지식인이었지만 소설 속에서는 계몽적 이념의 좌절을 그리고 있다. 현실에 대한 환멸에 근거한 그 같은 부정적 인식은 이 시기에 새로 나타난 것으로 1920년대의 리얼리즘 문학으로 이어지는 요소이다.(17) 이처럼 1910년대 문학은 개인의 자아각성에 근거한 근대문학의 형식을 얻는 한편, 내용적으로는 당대현실에 대한 진정한 인식에 한발 접근하게 된다. 물론 이 시기의 문학은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아직 과도기적 양상을 보이고 있었고 본격적인 근대문학은 1920년대 가서야 이루어진다.(17) 3∙1운동 이후의 1920년대 문학은 동인지를 중심으로 전개된 점이(17) 특징이었다. 이 시기에는 󰡔��창조󰡕�� 󰡔��폐허󰡕�� 󰡔��백조󰡕�� 등의 동인지를 통해 다양한 문학적 실험이 전개되었다. 󰡔��창조󰡕��를 창간한 김동인은 전 시대 작가들과는 달리 계몽주의보다는 예술 그 자체의 가치와 의미를 추구했다. 반면에 󰡔��폐허󰡕��의 동인이었던 염상섭은 「표본실의 청개구리」에서 「만세전」에 이르는 초기소설을 통해 식민지 현실에서 고뇌하는 지식인들의 내면고백체를 실험했다. 또한 백조파 출신 현진건과 나도향 등은 낭만주의적 경향에서 출발해서 리얼리즘으로 변화되어 가는 소설들을 창작했다. 시의 경우에는 이상화, 박종화, 박영희 등 백조파의 낭만주의가 초기 시단의 주류를 이루었다. 시든 소설이든 2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낭만주의적 경향은 점차로 식민지 현실을 올바로 인식하려는 문학으로 변모되어 갔다. 특히 염상섭과 현진건의 리얼리즘 소설의 발전을 주목할 수 있으며, 시에서는 김소월, 한용운 등에 의해 전통적 정서와 사상이 부활되면서 근대시의 완성으로 나아갔다.(18) 그러나 1930년대는 임화, 김남천, 안함광, 백철 등에 의한 리얼리즘의 정점기인 동시에 쇠퇴기이기도 했다. 그것은 사상 중심의 문학에 대한 반발로 순수문학이 나타나기 시작한 점과 일제의 파시즘적 탄압이 거세어진 데 그 원인이 있었다. 시에서는 이미 1930년대 초반부터 변화가 시작되어 김영랑, 정지용, 박용철 등의 시문학파에서 보인 순수 서정성과 민족의식은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의 청록파로 이어졌다. 그리고 서(18)정주, 유치환 등 생명파 시인들도 형상적인 시를 이루어 서정성을 심화시켰다. 소설에서는 그런 변화가 조금 후에 나타나는데 이 전화기의 또 다른 특징은 모더니즘 문학이 나타난 점이었다. 시에서 정지용, 김기림 등의 모더니즘은 감정을 절제하고 이미지를 중시하는 시들을 창작했고, 소설에서는 이상의 「날개」,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처럼 무기력한 지식인의 내면을 병렬적 영상 기법으로 조명하는 문학을 탄생시켰다. 이러한 문학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최재서의 비평에 의해 이루어졌다. 1930년대 후반은 심리적 리얼리즘이 성행했고 비평에서는  사회적 리얼리즘론이 유례없이 왕성하게 전개된 때이기도 했다. 또한 「봄봄」 「동백꽃」 등 김유정의 골계소설과 󰡔��태평천하󰡕��, 「치숙」 등 채만식의 풍자소설을 통해 우회적 전략으로 현실을 반영하는 리얼리즘이 명맥을 이어갔다. 그 점에서 1930년대 후반은 적극적인 문학이 위축된 시기인 동시에 가장 다양하고 창조적인 문학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현실의 암흑 속에서 빛나던 창조적 열정도 1930년대 말엽에 이르면 허무주의에 빠지며, 1940년대로 나아가면서 친일문학의 굴욕적 시기를 경험하게 된다. 물론 이 시기에 우리문학의 순결성이 완전히 훼손된 것은 아니었다. 그 치욕의 시대에 끝내 절개를 굽히지 않았던 이육사, 윤동주 등의 문학은 시대의 어둠 속에서도 더욱 빛을 발하고 있었다.(19) 3. 해방기와 전후의 문학 8∙15 광복은 민족해방의 열망을 성취시켜 주는 듯 했으나 미소 양대 진영의 세력에 의한 군사적 분할로 분단을 초래했다. 1945년에서 6∙25, 그리고 1950년대에 이르는 시기는 해방의 소망과 분단의 좌절이 엇갈린 격동의 시기였다. 문학에 있어서도 민족문학 수립에 대한 열망과 사회적, 정치적 혼란이 함께 반영되어 나타났다.(19) 4. 산업화 시대와 변혁운동기의 문학 1960년대는 4∙19 이후 현실 참여론이 제기된 시대인 동시에 제3공화국 탄생 후 산업화가 시작된 시기였다. 전후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싹튼 현실비판의식은 4∙19 이후 참여문학론으로 부각되어 1960년대 중반 무렵 이른바 순수 참여 논쟁이 본격화된다. 이어령, 김우종, 홍사중 등이 현실참여론을 내세웠으며, 이에 대해 김동리, 조연현, 김상일 등이 순수론을 주장했다.(21) 5. 후기산업 시대의 문학 1990년대는 과거와 같은 독재정권이 무너진 대신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모순이 개인의 일상에 내면화된 시대였다. 그에 따라 사회적 참여보다는 개인의 세계를 다루는 문학이 전면에 부각된다. 또한 1980년대 후반처럼 노동문제에 집중되기보다는 생태환경이나 여성문제 등의 다양한 관점에서 사회적 모순에 대응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와 함께 거대서사에 대한 회의가 일고 미시적 차원에서 삶의 문제를 조망하려는 흐름도 나타났다.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포스트콜로니얼리즘 등 서구의 문화이론들이 넓게 소개된 점도 이와 연관이 있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쟁들이 나타났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엄존하는 사회적 문제를 유희적으로 해소하려는 역사허(25)무주의의 반영으로 보는 관점이 대두되기도 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성의 기획과 대서사를 폐기처분하기보다는 미시적 원리를 통해 반성적으로 재고하려는 문화논리라고 할 수 있다. 그처럼 이해를 할 때에만 포스트모더니즘과 탈근대론은 여전히 존재하는 근대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거를 얻게 된다. 1990년대 문학은 그런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변증법을 문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적 일상성과 다양성을 통해 개인의 내면에 깃든 사회문제를 암시하는 문학이 성행했다.(26) 소설의 경우 1980년대 이후의 서사적 무력감과 그를 극복하려는 시도들이 눈에 띈다. 90년대의 무력감은 단순한 주체의 붕괴라기보다는 사회적 변화에 의해 권력의 존재방식이 달라진 점과 연관된다. 80년대에는 한 곳에 집중된 권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총체화된 대서사가 필요했지만 이제는 일상의 곳곳에 스며든 미시적 권력에 대한 탐구가 더 절실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변화에 대한 대응방법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는데, 80년대의 문제의식을 90년대 현실에서 조망하는 후일담 문학이 성행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와 함께 탈근대론과 연관된 메타픽션형식이 80년대 후반에 이어 뚜렷하게 부각되기도 했다. 아울러 90년대 초반에 성행했던 성적 욕망에 관한 소설들 역시 상업화되고 물신화된 성의 문제가 전시대의 정치적 문제에 못지않게 중요해졌음을 암시한다. 이런 흐름은 소설에서도 포스트모더니즘적 일상성과 다양성의 문제가 중요해졌음을 뜻한다. 권력의 일상화로 인한 일상성의 문제는 개인의 삶 속에서 자아를 지키려는 소설들을 만들어 냈다.(26) 1990년대 문학은 한마디로 일상의 영역에서 탈출을 시도하거나 자아를 지키려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시도는 빈번히 개인의 영역에 폐쇄되는 한계를 드러낸다. 90년대의 다양한 개성의 문학은 전시대의 거대서사나 총체화된 문학에 대한 대안으로 나타난 것이지만 이번에는 그 개성이 건강한 문학에 대한 폐쇄적인 제약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점에서 사회적 전망을 지닌 대서사에 대한 재고는 21세기 문학을 위해 필수적이다.(27) 한국 문학사란 개연성 있는 참된 한국인의 삶의 모습이 각 시대의 역사, 사회, 문화와의 연관 속에서 예술적 형식으로 부조되는 것을 포괄한다고 생각된다. 그런 뜻에서 문학사는 우리 정신사와 사상사의 한 주류를 미(27)적 측면에서 기술하는 의의를 지닌다. 그것은 그처럼 우리 삶을 조망하는 정신의 내용과 미적 형식의 만남이며, 그 점에서 우리 예술사에 흐르는 삶에 대한 전망으로서 우리 자신의 홍익인간의 개국이념에서 비롯한 대동사상과 낙관주의의 면면함을 확인하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28) Ⅰ. 시 Ⅱ. 소설 1. 근대계몽기 소설 1 2. 근대계몽기 소설 2 3. 일제 강점 초기 서설 1 -신지식층의 소설 문학 3) 친일복속적 신지식층의 소설과 허위의식 1920년대부터 친일활동을 했다고 알려져 있는 이광수는 1910년대 중반부터 「신생활론」 「오도답파기」 등을 통해 친일적 제스처를 마음껏 취하기 시작한다. 실력양성, 계몽이라는 이름하에 그는 일본 제국주의의 실력양성론과 거의 차이가 없는 이론을 펼친다. 그의 이론이 개량주의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현상윤과의 논쟁에서도 드러난다. 이광수는 실력양성에 있어 정치는 빼고 문화만 논하자는 입장을 취한바 있고 이에 대해 현상윤은 ‘독립」 등의 정치문제를 뺀 문명개화의 허구성을 지적하여 이광수를 비판한바 있다. 여기서 이광수의 구습∙구사상 개혁론의 본질을 엿볼 수 있다. 이광수의 개혁론에는 반봉건적 성격은 강하게 드러나 있으나 반제적 성격은 거세되어 있는 것이고, 이러한 개혁론은  필연적으로 개량화 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운명을 지닌다.(342) 1910년대 최다 단편소설 작가(총 18편0인 백대진은 1910년대에 자연주의문학을 제창하는 등 비평이론가적 면모도 일찍이 전개한바 있다. 󰡔��반도시론󰡕��과 󰡔��신문계󰡕��의 기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친바 있는 백대진은 식민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가난의 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가난 때문에 발생한 비극과 그 불행의 원인인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폭로하고 있다. 가난 및 빈/부의 차이를 통해 인간관계가 얼마나 왜곡되는지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부정적 측면을 드러내 주고 있다. 백대진의 소설들은 1920년대 신경향파 문학을 가능케 하는 직접적 원인으로 그 자리매김이 가능하다. 이러한 양상을 드러내는 소설로 「오호박명」 「황금」 「나의 일기로부터」 「절교의 서한」 「양인의 기도」 「금강의 몽」 「과모의 루」 「생?」 등이 있다.(345) 그러나 백대진의 소설에서는 아직까지 가난의 문제를 개인적 차원에서 인식하고 있지 사회구조적 측면에서 바라보지 못한 한계를 지닌다. 그리고 이 가난에 일제의 수탈과 약탈이 개재되어 있다는 사실은(346) 애써 간과하고 외면한다. 다만 가난한 자의 입장에서, 즉 빈자의 계급적 시각에서 가난의 문제를 조명하고 있을 뿐 가난을 물리쳐 줄 상대를 일제의 문명개화한 세상으로 파악하고 있어 리얼리즘적 전망을 확보하고 있다고 판단하기 여럽다. 이러한 점은 그의 소설을 자연주의에 머물게 한다. 자연주의 소설은 1920년대에 개화한 것이 아니라 1910년대 백대진의 소설을 그 출발점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문학사적으로 수정되어야 할 사항이다.(347) 김복순(명지대) 4. 일제 강점기 초기 소설 2 -1920년대 자연주의 소설의 형성 1) 예술지상파의 인생 제시 (1) 창조파의 반기 (2) 사실성 실험의 김동인 소설 (3) 시대고 증언의 염상섭 소설 (4) 분노로 추구한 현진건 소설 2) 프로문학파의 계급의식 (1) 신경향파소설의 대두 (2) 사회주의 리얼리즘소설의 형성 장백일(국민대) 5. 일제 강점 후기 소설 1 -진보적 작가를 중심으로 1) 파시즘의 대두와 진보적 문학의 위기 2) 진보적 작가의 변모와 후일담 소설 3) 예술파 작가의 등장과 모더니즘 4) 고전주의와 순수소설 나병철(교원대) 6. 일제 강점 후기 소설 2 -1930년대 후반 문학의 주체 담론과 전통주의 1) 1930년대 후반의 현실과 문학의 이념 2) 주체 문제와 새로운 개인성 1930년대 후반 비평계는 주체 재건의 중요성에 대해 절실하게 논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논의 배경에는, 오랫동안 그 실재성과 당위성을 인정받아 온 ‘집단 주체’의 붕괴라는 현실적이고 이념적인 사건이 놓여있다. 집단적 주체, 즉 집단에의 귀속을 전제로 존재 의미를 획득한 개인이라는 상은 우리 근대 문학 초창기에서부터 출현한다. 특히 집단 주체는 카프를 통과하면서 계급성을 얻게 되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집단적 의미를 확보하고 있는 혹은 근본적으로 집단성을 구현하고 있는 개(388)인 주체는 존재하고 있었다. 근대 초기 모든 문자매체를 지배하던 근대화론으로부터 이광수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집단적 추동력에 의해 생명을 얻은 개인의 상을 뚜렷하게 찾아볼 수 있다. 이광수에 의해 형상화되고 이냄화된 개인은 표면적으로는 개성과 감성을 지닌 근대적 ‘개인’이었지만 당시의 이념적 장 안에서 살펴보면 ‘보편적인 권리와 쾌락적 욕망을 부여받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들의 집합’으로서의 개인이었다. 이광수는 고유한 개성과 유일한 특성을 지닌 개인을 본격적으로 제시했지만 이 개인이란 그가 ‘보편적’이라고 여긴, 그리고 ‘보편화’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근대적 인간’의 욕망, 심리, 의무, 윤리를 체현하고 있는 존재였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개인상이 근대 초기에 강력하게 요구되었던 절대적 가치였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집단적 성격을 갖는다. 그런데 이광수 식의 계몽주의적 개인성은 카프와 리얼리즘 담론을 통해 전복되고 이어 계급성을 표방한 새로운 집단 주체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일련의 진행 과정은 우리 문학의 지배적인 관심이 결과적으로는 집단적 가치의 구현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1930년대 후반 문학에서 실체화되기 시작한 개인 주체는 앞선 시기와는 달리 집단적 성격의 상실과 더불어 등장한다. 상실의 배경과 관련하여 임화는 “적극성과 희망 대산 退와 소극성과 절망의 意識이 탄생하였다. 내셔널리즘도 소셜리즘도 없어졌다”(임화, 「복격소설론」(1938.5), 󰡔��문학의 논리󰡕��(서음출판사, 1989), 225쪽-각주5)고 언급했고 김남천은 다음과 같이 절실하게 토로하였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운명을 집단의 거대한 운명에 종속시키고 자신의 표현을 이 속에서만 발견해 오던 시대에 있어서는 집단과 개인과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문학사상상의 불일치는 표면화될 여유가 없었고 각 개인은 사소한 불일치를 실천과정 속에서 해결하여 그 곳에는 일정한 객관적 방향(389)과 영향 밑에서 일치하여 자기를 이끌어 나가는 통일된 방침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하루아침 역사의 행정(行程)이 이러한 것의 일반적인 퇴조적 현상을 우리의 앞에 강요할 때에 집단성의 밑에 종속되었던 작가와 비평가는 자신의 출신 계급을 따라 일개의 독립된 자기로 귀환하고 말았다. 김남천이나 임화는 주체 문제를 바로 자기 삶의 문제로 육화했던 이론가들이었다. 비평계에서 논의된 차원과는 그 궤를 달리 하지만 소설이라는 가상 영역 역시 집단적 가치에의 귀속이 불가능한 개인, 집합적 성격을 상실한 개인을 본격적으로 형상화하기 시작한다.(389) 사실 김동리가 ‘신세대 작가’들의 의식을 ‘개성과 생명의 구경’으로 규정한 것은 자기 자신의 주장을 이들에게 고스란히 적용시킨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신진으로 분류된 여러 작가들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점들이 존재하고, 특히 김동리가 극찬한 최명익이나 그 밖의 허준, 유항림과 같은 작가의 미의식은 김동리와는 매우 먼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기 세대 논쟁에서 신세대의 입장이라는 것은 사실상 김동리 개인의 논리, 그가 의도한 차별화 전략에 포섭된 면이 강하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세대 논쟁을 이해한다면 이 논의가 시사하는바 당대 작가들의 현실인식과 미의식의 변모 양상에 보다 합당하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최명익과 허준, 유항림을 사로잡은 것은 앞에서 지적했듯이 ‘집단적 전망을 상실한 개인’이라는 문제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근대의 종말, 역사의 쇠퇴, 미래의 부재라는 역사철학적 비관주의가 깊숙이 개입되어있다. 따라서 이들의 작품에서는 근대에 대한 생산적 비판이나 모순에 대한 포착보다는 한 시대의 종말을 감각하는 자들의 절망과 좌절이 훨씬 더 강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진보에의 신념, 역사 진행의 파악 가능성이라는 근대적 인식틀이 여지없이 파괴되면서 이제 의미의 유일한 거점은 이 혼돈 속에 놓여 있는 개인 주체가 되는 것이다. 최명익과 유항림에게서 주체 문제는 일종의 윤리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진다. 그러나 윤리성이라는 잣대로 자기 존재의 근거를 마련하고 삶의 의미를 성찰하는 행위는 이성이나 합리성의 영역이 아니라, 순결성, 진정성이라는 심정적 신념의 영역에 그 뿌리를 둔 것이다. 이런 점에서 1930년대 후반은 이성의 시대라기보다는 신념의 시대였고, 마르쿠제의 논의를 빌리자면 ‘정신’의 시대라기보다는 ‘영혼’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391) 자기 존재의 순결성을 제1의 윤리적 덕목을 삼고 있는 개인이 이 시기 작품에서 종종 발견된다. 이 당시 소설에 나타나는 주체 인식은 이성과 합리성을 향한 끝없는 열망에 근원을 두고 있는 임화나 김남천의 이념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객관 현실의 파악’을 위한 기초작업으로 주체 재건을 역설하는 입장과는 달리 소설을 통해 형상화된 주체는 현실에서 소외된 당위적 가치들을 자기 내적을 보존, 실현하고자 했으며 이 과정에서 모든 문제가 ‘윤리’ 혹은 ‘자기 윤리’의 문제로 환원되고 있는 것이다.(392)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제적, 가치론적으로 소외된 개인이 골몰하게 되는 것은 삶의 진정성 회복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스스로를 운용하는 자기-기술이다. 이처럼 자기-기술과 윤리성의 결합 양상이 1930년대 후반 소설의 개인 주체 테마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392) 3) 근대 부정과 전통주의 1930년대 후반 문학을 논할 때 반드시 검토해야 할 영역은 전통론과 동양담론일 것이다. 당시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이 논의의 밑바닥에는 앞에서 살펴본 주체 담론의 저변에도 역시 깔려 있는, 어떤 공통된 시대 인식/감각이 작동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근대적 역사관, 진보의 시간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불신이다. 이는 주체의 문제에 천착했던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도 이미 절대적인 전제가 되어 있다.(393) 김예림(연세대) 7. 일제 강점 후기 소설 3 1) 파시즘과 친일 문학 만주 사변이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되면서 한국은 일제의 세계 대전을 위한 병참기지로 전락하였다. 일제는 대동아 공영권을 부르짖으면서 내선 일체와 황민화 정책을 통해 본격적으로 조선을 일본에 흡수하는 통합 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일제에 의해 한글 사용이 전면적으로 금지되었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민족 언론까지 폐간되었으며 국민총연맹을 결성하여 징병제와 학병제를 시행함으로써 전 국토를 전시 체재화하였다. 작가들은 황도 문학을 선양하기 위해 일어로 창작하라는 강요를 받게 되었으며 이광수 등 일부 어용문인들은 조선문인협회를 결성하며 친일 어용 작품을 창작하기도 하였다. 일제 말기에 조선어 말살정책이 시행되면서 작가들이 신 체재에 편입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문장지가 폐간되고 친일지인 󰡔��국민문학󰡕��과 󰡔��인문 평론󰡕��이 발간되어 시국문학과 국책 문학을 독려함으로써 조직적으로 진보적 계열의 작품 활동을 억압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는 파시즘의 극열화로 삶의 진정성을 추구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작가들의 문학적 실천이 불가능하였다. 특히 현실의 타락한 가치에 대항할 수 있는 유토피아를 그려낼 수 없었고 서사적 전망을 확보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소설의 창작 자체가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작가 중의 일부는 근대의 부정성에 야합함으로써 현실을 이상화할 수 있었다. 그들은 파시즘의 전시 체제에 동조하거나 근대에 대한 맹목적인 찬(397)양을 통해 파시즘의 지배를 합리화하였다. 일부 작가들은 현실과 유리된 신화적 세계를 동경하거나 남녀의 통속적인 연애담을 그려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희석시킬 수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전시 상황으로부터 상대적으로 거리를 둘 수 있었던 안수길의 간도 문학과 전근대적인 가치 속에서 현재에 대응할 만한 이념을 모색했던 황순원의 작품 세계는 이 시기의 소설문학적 성과로 주목할 수 있다.(398) 2) 안수길: 북향 정신과 생존에의 의지 안수길은 1911년 함흥에서 태어나 1924년 14세의 나이로 간도에 갔다가 다시 서울과 일본을 거쳐 1931년 간도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처럼 안수길에게 간도는 조선 다음의 ‘제2의 고향’으로서 그의 북향 정신의 근거지가 되었다. 그는 북간도를 배경으로 도시적 삶보다는 자연에의 귀의 의지와 노동에 대한 애정을 담은 「벼」 「새벽」 「목축기」 장편소설인 󰡔��북향보󰡕��를 발표하였다.(398) 이 작품은 간도 한인들이 중국인 지주의 지팡 살이로 살아가면서 이민지에 정착해가는 과정의 갈등을 그리고 있으며 작가는 이런 고통 속에서도 만주 땅에 제2의 고향을 건설하려는 조선인의 생존 의지를 그려보았다. 한인 가족의 비극적인 파산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이 작품의 제목을 「새벽」으로 설정하여 일본 통치하의 만주국에서 한인 이주민의 미래를 낙관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작가의 현실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었다.(399) 이 작품(「벼」-인용자 주)은 일제의 식민지 국민이면서도 만주땅에서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 일제의 만주 통치에 순응할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일제에 저항하는 중국인들과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한인 이주자들의 생존 상황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400) (「목축기」-인용자 주)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 찬수가 자연 친화적인 돼지 기르기를 통해 생산의 기쁨을 누린다는 이야기로서 일제 말기 전시 체재하에 벌였던 생산 증려 정책에 부응하는 주제로 볼 수 있다.(400) 󰡔��만선일보󰡕��에 연재되었던 󰡔��북향보󰡕��는 간도를 정착지로 만들려는 북향 정신에 바탕을 두고 오찬구가 정학도의 의지에 따라 성실하게 노동하며 목장을 재건함으로써 마침내 만주국에서 목장 유지에 성공한다는 낙관적 전망을 담은 소설이다. 이 작품은 부동성이 많은 조선 농민이 농업 만주에 정착하여 증산에 매진하는 것을 건국 정신으로 이상화함으로써 일제의 만주 지배를 합리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400) 이처럼 「목축기」와 󰡔��북향보󰡕��는 생산 장면의 묘사에 역점을 두고 창조적 노동을 찬양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제 말기 전시 동원 체재의 요(400)구에 부응하는 것이다.(이상경, 「간도 체험의 정신사」, 󰡔��작가 연구󰡕�� 제2호, 1996년 하반기, 28쪽 참조-각주4) 이것은 만주에서 생존 의지를 불태울 수밖에 없었던 이주민들의 아이러니한 존재론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401) 안수길의 작품에서 다루어지는 간도 문제는 「홍염」이나 「탈출기」에서 최서해의 계급 의식에 기초한 현실 인식이나 강경애의 「소금」에서 보여준 사회적 사실주의적인 관점과는 다르다. 안수길의 작품들은 이민세대의 생존을 위한 서사로서(김윤식, 󰡔��안수길연구󰡕��(정음사, 1986), 13쪽 참조-각주5)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지만 당대의 만주땅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제의 만주 지배 정책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401) 3) 이태준: 근대 예찬과 삶의 진정성의 상실 4) 황순원: 전근대적인 가치의 재인식과 변두리적 인물들의 내면적 순수성 5) 박태원: 사적 생활 세계로의 침잠 6) 역사 소설의 등장 김혜옥(한양대) Ⅲ. 희곡 Ⅳ. 비평 Ⅴ. 아동문학 Ⅵ. 해외문학 1. 중국조선족문학 광복 전 중국 조선인 이민사를 보면 대체로 세 차례 고봉기가 있었는데 하나는 대기근으로 봉금령을 마다하고 두만강을 건너온 개척민이고 다른 하나는 1910년 <<한일합방>>을 계기로 나라의 독립을 위해 넘어온 독립투사들과 기타 이주민이며 또 다른 하나는 1931년 위만주국의 건립에 따라 강제 또는 반강제로 이주해온 이주민들이다. 이른바 중국 조선인문학이란 그들 또는 그들의 후손들에 의해 중국을 배경으로 영위된 문학을 가리킨다.(824) 중국의 조선인문학은 조선북부의 간민들이 이 땅에 와서 개척의 첫 괭이를 박던 그때로부터 시작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초(824)기문학은 여기에서 새롭게 창작되였거나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거개는 조선 전래의 문학이였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의 괴나리보짐에 쌓이거나 쪽박에 실려온 문학이다. 이점은 특히 구비문학인 민담, 민요에서 집중적으로 표현되는데 19세기말, 20세기초에 이곳에서 류행했다고 하는 <<아리랑>> <<도라지>> <<에밀레종>> <<바보온달>.이 그러하며 <<신아리랑>>이나 일부 전설, 설화, 민담은 조선반도와 갈라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면 중국의 조선문학은 조선문학의 연장선상에 서있으며 모태인 반도와 갈라놓고 운운할 수 없는데 이런 상황은 1945년 광복까지 이어진다. 광복후 중국의 조선인문학은 전시기 문학과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광복후 이 땅에서 문학활동을 하던 많은 문인들이 조국으로 돌아갔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립과 함께 중국에 남아있던 조선인들은 중국국적을 가지고 중국공민으로 되었다. 따라서 문학도 전시기와는 달리 중국조선족문학으로서의 특점을 과시하고 있는데 대부분은 이데올로기 위주로 중국의 사회주의혁명과 건설을 노래한 송가식문학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다가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의 재난속에서 중국조선족문학은 <<민족문화혈통론>>이란 모자를 쓰고 전면적인 비판을 받다가 1976년 <<4인무리>.를 뒤엎자 다시 부흥하는 태세를 보여주고 있으며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92년 중한수교를 계기로 한국문학과 어울리면서 새로운 특점을 보여주고 있다. 담장밖에서 피여나는 한 송이 꽃이라고 할까.(825) 상편 1) 재중조선인문학의 산생 일반적으로 문학의 산생에는 이러저러한 여건들이 구비되여야 하는데 중국조선인문학의 경우에는 두 가지가 큰 작용을 했다. 하나는 중국조선인사회의 형성이고 하나는 중국조선인문학의 모태인 조선반도문학이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면 1883년 어윤중의 함경도시찰은 각별한 의의를 가진다. 밤이면 두만강을 건너가 <<도둑>>농사를 짓던 함경도 사람들의 기대만큼 이 한 차례 거동은 이른바 <<월강죄>>를 무색하게 하였고 중국 조선인 사회의 형성에 박차를 가했다. 사람이 있는 곳이면 生活이 있고 생활이 있으면 文化가 있고 문화가(826) 있으면 문학이 있기 마련이다. 인간심리의 가장 깊은 곳에 작용을 하는 문학은 인간의 생활을 떠날 수 없다. 중국조선인문학도 례외일수 없다. 그러나 중국조선인문학의 경우, 특히 그 초창기에 있어서 이 지역의 조선이주민들의 생활보다는 조선반도와 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 시기 중국조선인문학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이 시기 반도의 문학을 살펴보는 것이 마땅한 절차라고 생각한다.(827) 앞에서 잠깐 이야기했지만 조선간민들은 19세게 60년대부터 이 지역으로 밀려들었는데 그 주요한 원인은 물론 그 시기 조선 북부를 휩쓴 자연재해였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재해뿐이 아니였다. 여기에는 <<人災>>도 있었는바 통치자들의 수탈과 일제의 략탈이 그 직접적인 원인이였다. 특히 후자의 경우, 1976년(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이후로 조선에 대한 전면적인 침략정책을 강행해 나가면서 1905년에는 조선정부를 핍박하여 <<을사5조약>>을 체결해 조선의 정치, 외교권을 박탈하였고 1910년에는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하여 독립국가인 조선을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시켰다. 그러나 영웅적인 조선인민은 굴복하지 않았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각일각 가심화되고 있는 상황하에서 그들은 중국에서, 쏘련연해주에서, 미국에서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는 투쟁을 벌렸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면 근대조선의 력사는 제국주의의 침략을 반대하여 싸우는 력사였으며 민족의 독립과 자주를 위해 싸운 력사였다. 조선의 근대문학이 이러한 력사의 산물인것과 같이 중국조선인들의 력사 역시 이러한 력사의 산물이였다. 따라서 중국조선인문학은 초창기, 즉 산생기로부터 강렬한 반일성격을 띠지 않을수 없었으며 계몽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력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고구려의 넋이 분명히 숨쉬고 있는 이(828) 당에서 자기의 력사보다는 반일계몽이라는 문학을 영위해 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이것을. 그러나 그것은 굴할줄 모르는 우리 민족의 저력의 표현이며 강렬한 애국정신의 표현이다. 이러한 민족의 저력과 정신은 이 지역의 초창기문학에서도 표현되고 있다.(829) 연변 지역 학자들의 수집정리에 따르면 당시 여기에서는 수많은 창가, 시조, 자유시, 민요가 류행되고 있었는데 가장 주되는 것이 반일성향을 띤 창가, 시조이다.(829) 이러한 시가들은 철저한 반일사상과 독립자주정신으로 충만되여 있는바 이국땅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는 불같은 의지가 그대로 표현되고 있는데...이러한 작품들은 대부분 정교하고 아름다운 예술적기교나 표현보다는 호방하고 강렬하며 견강한 시적기질과 힘차고 박력적인 것으로 특징적이다.(830) 민족계몽에 모를 박고 있는 시나 창가들도 이러한 특점을 갖고 있다. 반도문학에서 민족계몽이 문학의 다른 하나의 주제로 되고 있듯이 완정한 의미에서의 근대적계몽을 받지 못하고 이 땅에 밀려든 개척민들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에서 말하면 근대계몽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주요 과제였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지역에 밀려든 많은 지식인과 항일(831)투사들은 학교를 세우고 신문잡지를 발행하면서 문화적으로 민중을 깨우쳤을뿐만아니라 민중적이고 전통적이며 통속적인 민요나 창가, 또는 시조, 자유시 등등 여러 가지 형식을 리용하여 대중적인 계몽운동을 진행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역시 창가가 가장 많았다.(831) 이처럼 이 시기 중국조선인문학은 창가를 중심으로 그 형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 여느 나라나 지역의 문학이나 문단처럼 그렇게 우아하지도 요란하지도 않게 수수하게 고고성을 고했다. 그래서 진솔하게 말해서 조선인문단의 형성을 고한 작가나 작품이 이것이요라고 할만한(831) 작가도 없고 작품도 없다. 그러나 반면에 그만큼 진실하고 강렬하며 또 실제적이고 효용성이 강한 특점을 갖고 있다. 작품에 반영된 기치선명한 반일사상경향과 민족계몽사상이 이런 관점을 �받침하여 주고 있다. 특히 강렬한 반일애국사상은 민족의 전통적인 애국사상과 그 궤를 같이 하는것으로서 민족수난의 시대에 외세에 굴하지 않는 민족의 정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서 이 시기 문학은 물론 우리 전반 문학의 가장 귀중한 재부로 되기에 아무런 손색이 없다. 물론 이 시기 문학 전부가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어느 지역의 그 어느 때 문학이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가치있는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있듯이 어떤 창가들은 소극적이거나 숙명적인 사상정서와 감정을 읊조리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것들이라고 생각한다.(832) 2) 1920년대 문학과 <<민성보>> 1920년대 중국조선인문학은 연변의 <<3∙13운동>>과 더불어 시작된다. 주지하다싶이 1919년 3월 지금의 연변지역에서는 룡정을 중심으로 <<3∙13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조선의 <<3∙13운동>>의 영향하에 나타난 거족적인 항쟁으로서 <<3∙13운동>>과 더불어 중국조선인력사의 새로운 한 장을 열고 있다. <<3∙13운동>>은 중국조선인 문학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3∙13운동>>을 계기로 이 땅에는 조선본토문학과 여러 가지 시대적인 문학 사상과 사조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는데 <<조선독립신문>>을 비롯하여 <<우리의 편지>> <<일민보>> <<신국보>> <<구국일보>> 등 신문들이 출간되면서 그것들이 더 널리 더 깊이 있게 전파될 수 있게 되었고 문학발전의 건실한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항일투사들과 진보적인 문인 그리고 량심적인 지식인들은 이러한 신문과 간행물을 통하여 애국계몽활동과 민족계몽운동을 벌렸으며 또 그것을 문학창작의 진지로 삼고 널리 리용하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신문, 간행물에 종종 여러 가(832)지 형식의 문학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미구에 辛酋詩社, 文友社, 藝友社 등 문학단체가 나오면서 문학적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고 <<간도일보>> <<민성보>>가 나오면서 이 지역 문학은 본격적인 발전단계에 들어섰다.(833) <<간도일보>>는 룡정 일본령사관의 기관지로서 친일경향을 띤 신문이였다.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 시기 일부 조선인작가들은 이 신문을 리용하여 여러 가지 형식의 문학작품을 발표하였는데 그것은 객관적으로 이 지역 조선인문학의 발전을 추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 지역의 문단에서 이름을 지울수 없는 박계주가 이 신문을 빌어 문단에 두각을 내밀었다는 사실과(박계주는 1929년에 <<간도일보>>에 <<赤貧>>이란 작품을 발표하는데 이 작품이 신춘문�작으로 입선되였다. 오양호 <<한국문학과 간도>>(문예출판사) 제68페이지 참조-각주11) 중국의 당대 유명한 시인 리욱도 이 신문에 적지 않은 작품을 발표하였다는 사실이 이러한 론점을 뒷받침하여 주고 있다.(리욱은 1924년 17세에 <<간도일보>>에 서정시 <<생명의 례찬>>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학창작을 시작한다.-각주12)(833) 1927년 2월 12일, 룡정에서 <<민성보>>가 발행되였다. <<간도일보>>가 친일경향을 띤 신문이였던것과는 달리 이 신문은 연길, 화룡, 왕청, 훈춘 등 지역의 유지인사들에 의해 꾸려지는 <<民報>>였다. 거기에는 전문적인 문예면도 있었는데 조선문편집은 윤화수, 김와룡이 선후로 력임했다고 한다.(<<민성보>>에 관한 것은 최상철 <<중국조선족 언론사>>(경남대학교출판부 1995년판)65-81쪽 참조-각주13) 그들은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서 본지에 문학작품을 게재했는데 그 때로부터 이 지역의 문학은 본격적인 발전단계에 들어선다. 자료구득난으로 현재로서는 <<민성보>>에 발표되었던 문학작품들과 작가들을 모두 집게할 수는 없지만 제한된 범위내에서 구득해본 <<민성보>>에만 의해도 당시 이 지역의 문학열이 여간만 높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833) 중화민국 17년 6월 30일자 <<민성보>>에는 아래와 같은 통지문이 실려 있는데 이것은 당시 이 지역에서 활발했던 문학활동의 일단을 단적으로 시사해 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1) 문예연구회 제4회 림총(臨總) 문예연구회는 래(來) 7월 1일 오후 8시에 간도학원에서 제4회 림시총회를 개최한다는데 본 회원 내지 일반 문학청년은 다수히 참석하기를 바란다더라.(<<민성보>> 1929 6월 30일자-각주15) 이 통지문 아래에는 이 문학연구회의 강령이 적혀 있다. -) 우리는 민중의 필요한 문예를 연구함 -) 우리는 조선문학운동을 촉진함 -) 우리는 문인의 단결을 공고히 함(동상-각주16) 이 통지문과 강령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하여 주고 있다. 첫째, 이 시기 간도지역에는 민중과 조선문학운동의 촉진을 위한 문학연구회가 있었다. 둘째, 이 문예연구회는 자체의 강령이 있는 비교적 완정한 문예단체였다. 셋째, 제4회 림시총회이니 제1회, 제2회, 제3회 총회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이 연구회의 활동이 상당히 활발했다는 것을(834) 시사해 준다.(835) 이 시기의 시가 창작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쏘련의 사회주의혁명에 따른 이른바 혁명가요들인데 당시 이 지역에서는 <<혁명가>>, <<10월혁명가>> <<의회주권가>> <<불평등가>> 총동원가>> <<결사전가>> <<혁명투쟁가>> <<추도가>> 등등 가요가 퍼그나 류행되였는데 거개가 드높은 혁명투쟁정신을 보여주고 있는데 전시기 항일애국시가와 30년대에 류행되는 항일가요와 어울려 중국에서의 조선인문학의 특색의 하나로 되고 있다.(836) 이외에 또 <<파랑새>> <<경숙의 마지막>> <<학우지정>> 등등 연극들이공연되였고 <<뉘라서 간도가 좋다더냐>> <<새 아리랑>> <<헛농사>>와 같은 시들과 일부 설화들이 창작되였다.(837) 3) 1930년대 항일문학과 룡정문학도들의 동인지-<<북향>> 1931년 일제는 중국을 침략하고 이른바 만주국을 세우고 <<오족협화>>를 부르짖으며 본격적인 식민지책응ㄹ 펴나갔는바 문학환경은 조선본토와 별로 차이가 없이 험악하였다. 그러한 상황하에서도 이 지역의 문인들은 끈질진 창작으로 지역의 문단을 다채롭게 장식해 나갔다. 이 시기 문학은 광복전 이 지역 문학의 가장 아름다운 한 페지를 쓰고 있는데 이 지역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있는 부분의 하나라고 하겠다. 이 시기 문학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는데 하나는 유격구나 태항산 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진 항일문학이고 다른 한 갈래는 룡정을 중심으로 한 지방에서 창작된 문학이다. 항일문학이란 동북항일유격구, 태항산을 중심으로 한 관내의 조선의용군, 또는 기타 중국에서 활약하던 광복군들속에서 창작되였거나 류행되던 가요나 연극 또는 기타 장르의 문학을 두루 일컸는것인데 주요한 것은 가요라고 할수 있는데 그 시기에 항일유격대내에는 문학작품현상모집활동도 있었다고 하니 문학창작활동이 상당히 활발하게 전개되(837)였던 것으로 보여지나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에서 나오다싶이 이런 시가들은 전쟁 가운데서 창작된 것이고 또 인쇄되여 출판된 것이 아니여서 많이 류실된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전해지고 있는것만으로도 그 일단을 넉넉히 짐작해볼수 있는데 거개가 강렬한 애국정신과 반일정신으로 충만되고 있어서 이 시기 조선문학가운데서 가장 비장한 한 장이 아니였던가 한다. 이를테면 <<최후의 결전>> <<의용군 행진곡>> <<민족해방가>> <<선봉대가>> <<9.18사변가>> <<반일가>> <<연길감옥가>> 등등은 일제에 끝없는 증오심과 더불러 그들과 혈전을 끝까지 진행하려는 혁명정신으로 가득 차 있으며 <<망향가>> <<그리운 조선>> <<고향리별가>> <<조국부흥의 길로>> <<어머니를 그리며>> 등등은 망향의 한과 더불러 침략자에 대한 증오 그리고 조국과 민족에 대한 끝없는 사랑으로 넘쳐나고 있다. 당시 완전히 식민지로 전락되 조선반도에서는 민족이나 반일을 부르짖을수 없는 상황이였다. 특히는 <<카프>>가 검거적발된후에는 일제의 문화통치가 강화되여 현실부정적인 글도 쓰기 어려웠을뿐만아니라 <<카프>>의 핵심이였던 박영희는 전향하고 리기영과 같은 작가들의 예봉도 크게 무디여진 상태였다. 그러나 그와 상반대로 중국에서는 항일 유격구를 중심으로 이러한 작품이 많이 창작되여 망국노로서의 한을 크게 달래주고 있다. 만일 이러한 문학마저도 없었다면 이 시기 문학을 어떻게 서술해야 할지 망설이지 아닐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가요들이 세련되지 못한 약점들을 갖고 있지만 우리 문학사에서 마땅한 자리매김이 있어야 한다고 인정한다.(838) 이와 등시에 이 시기에 <<강제징병>> <<태항산에서>> <<혈해지창>>, <<조선의 딸>>과 같은 연극들이 창작공연되였다고 하는데 그 기본적인 의식성향은 반일애국으로서 항일가요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839) 룡정, 중국조선족의 희노애락의 견증인이고 유서깊은 곳이다. 더욱이는 윤해영과 조두남의 <<선구자>>로 인하여 더 널리 알려진 곳으로 광복전 중국조선인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기도 하다. 1930년대 이곳을 중심으로 조선인문학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였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북향>>이다.(839) <<북향>>이란 리주복, 강경애, 모윤숙을 위수로 한 룡정의 문인들과 학생들이 <<제2의 고향>>의 문학을 이룩하기 위해 꾸린 문학단체 <<북향회>>의 기관지인데 이 시기 룡정의 문학성과를 대표하는 문학지이다.(839) <<북향>>은 도합 4기를 냈는데 지금까지 1935년에 발행한 제1호는(840) <<조선문단>>의 광고에서 보는 목차만 전해지고 있고 제2호는 1936년 1월에 총27면으로 발행되였고, 제3호는 3월에 총 32면으로, 제4호는 8월에 총 31면으로 되어 있다.(841) 4) <<5족협화>>와 <<만선일보>>문예란에 발표된 작품 <<5족협화>>, 이것은 위만주국건립이후 일제가 내놓은 이른바 건국리념의 하나이다. <<5족>>이란 일본인, 조선인, 몽고인, 중국인, 滿人을 가르키는것이고 협화란 화목과 협조로서 뜻인즉 만주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민족은 평등하고 화목하며 상호 협조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및좋은 개살구라 할까. 일제가 위만주국에서 진행한 모든 문화활동은 이것을 둘러싸고 전개된다. <<만선일보>>도 례외일수 없다. <<만선일보>>는 1937년 10월에 원래 발행하던 <<만몽일보>>와 <<간도일보>>가 통합되여서 나타난 신문으로서 통합되면서 창간취지가 변한 것은 아니였다.(843) 그러나 그 문예란은 이것과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어서 1940년대 한반도에서 사라(843)져간 조선문학을 보완하는데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844) 련재예고에 따르면 안수길의 <<북향보>>는 렵상섭이 건강관계로 련재하던 <<개동>>을 더 쓰지 못하게 되자 그 대신으로 련재된것인데 취미나 렵기위주의 상투적인 신문련재소설과는 좀달리 이주민들의 생활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작가는 그 어떤 선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여기에서 <<현시국의 요청>> <<만주정착문제>> 등등은 당시의 <<만주국>>의 건국리념으로도 파악되거나 해석될수도 있는것이지만 돋보이는 것은 父祖들의 피와 땀으로 이룩한 이 고장을 새로운 고향으로 삼고 건설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우리 부조들이 개척한 이 땅을 자기의 땅으로 삼고 제2의 고향을 건설하자. 현실적으로야 어쨌든 이것은 실로 거창한 꿈이다. 안수길의 소설은 이러한 꿈으로부터 시작된다.(847) 臥牛山기슭에 리상향을 건설하려는 꿈을 안고 평생을 바쳐온 정학도와 거기에 동조하는 지식인 오찬구의 형상을 그린 이 작품에 일관하고 있는 것이 <<북향정신>>이다. 룡정에서 처음 발족된 문학회의 이름이 <<북향회>>이고 그 회에서 펴낸 잡지명이 또한 <<북향>>이다. 그럼 <<북향>>은 무엇이며 <<북향정신>>은 무엇이기에 그들을 그렇게도 집요하게 끌어당겼는가? 이것을 찬구는 이렇게 해명한다. <<...건국전을 선구시대라 한다면 그때에는 이곳에 살림터를 마련하려고 부조들이 피와 땀을 흘린 시대라고 할수 있을것이고 오늘날은 그 피로 얻은 터전에다가 우리의 뼈를 묻고 그리고 우리의 아들과 손자와 그리고 증손자, 고손자들을 위하여 영원히 아늑하고 아름다운 고향을 이룩하지 않으면 안될 시대라고 생각하시여 그 아늑하고 아름다운 고향을 만드시는 것이 선생님의 뜻인줄 압니다.>> <<영원히 아늑하고 아름다운 고향>>을 건설하자 이것이 곧 <<북향정신>>이다. 작가 안수길이 고향을 잃고 이역 땅에서 신음하는 개척민들에게 펼쳐준 유토피아요 리상향이다. 현실적으로는 어찌될지 모르지만 고달픈 삶을 영위해 나가는 개척민들에게 힘을 주고 리상을 주기에는 족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측면에 말하는바와 같은 아름다움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가? 하늘이 얼마나 높은 줄 모르고 땅이 얼마나 깊은 줄 모르는 일개 풋내기들의 광열증이나 아닌가? 여기에서 안수길이 갈리고 작품의 가치도 갈린다. 앞에서 보았듯이 근대 조선에 있어서 반일구국이야말로 진정한 주제이며 민족독립이야말로 가장 큰 정치이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나아가 식민지치하에서 <<아늑하고 아름다운 고향>>을 운운하는 그 자체가 문제일지도 모른다. 더욱이 <<만주국이 마련해준 현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김호웅 <<재만조선인문학연구>> 165쪽-각주35)일 때 문제는 상당히 심각해진다. 그래서 장덕순은 일(847)제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침략을 시작했는데 <<소위 문단에서 云謂하는 대륙문학이니 개척문학이니 하는 것은 이 일본 군벌의 대륙침략을 합리화하는 정신에서 논의해 보려는 것이지 우리 선민들의 망명과 그 개척을 뜻하는 것은 아니>>(장덕순 <<일제암흑기의 문학사>> <<세대>>1963 11월호 253쪽-각주36)라고 꼬집는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다. 안수길은 여기에서 그 시각 <<제2의 고향>>건설이 가능했던 전제가 일제의 만주국이였고 일제의 대륙침략이였다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 소설에서 박병익이나 <<조선의 종달새>>라는 류행가수의 힘에도 오락가락하는 여린 농장이 일제의 대륙침략이라는 엄청난 <<사업>>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때 그 여린 농장이 아니라 더없이 거창한 사업이라 할지라도 삽시간에 물거품으로 될것이라는 현실을 작가는 외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대전제가 틀리면 결론도 틀린다는 론리를 모를리 없는 작가였지만 하룻강아지 범무서운줄 모른다는 우리 속담과 같이 이 시각 안수길은 많이 들떠 있었다. 따라서 여거서는 현실이 무시되며 론리가 뒤틀린다. 머리가 뜨거워질 때 흔히 있을법한 일이고 랑만에 차있는 작가들에게서 흔히 보게 되는 현상으로서 안수길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민족독립을 문제 삼을 때 이것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력사는 민족의 독립은 그 어떠한 장미꿈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웅변적으로 알려주었다. 여기에 작가의 실책이 있었고 작품의 한계가 있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측면에서 작가는 작품에서 <<시현실>>의 동인처럼 앓치만 않고 <<정신적 고향>>에서 고난속에서 허덕이는 개척민들에게 나름대로의 진로를 제시하며 또 그것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인물을 그리고 있는데 이것은 마땅한 평가를 받아야 할것이라고 인정한다. 이점에 대해 권녕민은 이렇게 쓰고 있다. <<<벼>에서 <북간도>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을 성립시키는 공간의 만주는, 최명익, 정비석에서와 같은 랑만적 도피처도, 최서해의 <홍염>에서 제시되는 외인지주와 소작의 갈등의 장소도 아니다. 그것은 이태준의 <농군>에서와 같이 땅에 대한 깊은 애착과 결부되여 있는 만주(848)이다. 일제의 악랄한 수탈정책 때문에 정든 고향을 등지고 떠나와서, 원주민과의 목숨을 건 투쟁 끝에 쟁취하였고, 계속 원주민들의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만주의 땅이 안수길의 정신적 고향인 것이다.>>(권녕민 편 <<한국근대문인대사전>> 아시아문화사 632쪽-각주37) 5) <<만주시인집>> <<재만조선시인집>> <<싹트는 대지>> <<북원>> 개화기에 꽃피기 시작한 반도의 문학은 1930년대말 1940년대초에 들어서면서 고갈되기 시작한것과는 달리 이 북국의 땅-<<만주>>에서는 문학이 수확의 계절을 맞이하여 <<만주시인집>> <<재만조선시인집>> <<싹트는 대지>> <<북원>> <<만주조선문예선>>(<<만주조선문예선>>은 강덕8년(1941년)11월에 신경의 조선문예사에서 신영철의 편으로 발행한 수필집인데 현재로는 신영철의 서문과 목차만이 전해지고 있어 론의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각주38) 등 작품집들이 속출한다. 그래서 40년대초반을 <<수치에 찬 암흑기>>, <<력사적으로 백지에 돌려야 할 브랑크 시대>>(백철 <<新文學思潮史>>(백양당) 399쪽-각주39), <<친일문학의 시대>>로 규정하고 그 문학을 <<일본조종의 문학>>(임종국 <<친일문학론>>(평화문학사) 18쪽-각주40)이라던 관례는 여기에서 타개되여야 한다고 오양호는 말하며 그것을 <<1930년대 민족문학의 지속>>으로 파악하고 그것들에 <<국문학적 위상을 부여>>함으로써 <<공백기>>이라던 40년대초반의 <<한국문학사를 보완하자>>고 한다.(오양호 <<한국문학과 간도>>(문예출판사) 14-15쪽 참조-각주41) <<만주시인집>>이나 <<재만조선시인집>>은 40년대초의 반도문학과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제기되는 당연한 론리라고 하겠다. 적어도 상식적으로 받아지던 <<친일문학>>과는 좀 다른 차원에서 론의 되어야 할것으로서 그것으로 <<한국문학사를 보완하>>자는 당위성은 인정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 시기 문학에 친일적인 경향이 전무하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만주에서 우리의 문학이 가능했다는 사실자체가 식민치하라(849)는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이며 이른바 <<만주국>>도 일제의 괴뢰정권이였다는 대전제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기의 작품집에 나오는 작품들을 상세히 읽노라면 거기에 우리의 생활이 있으며 우리의 정서, 감정이 있음을 부인할수 없다. 사정이 그러할진대 그것을 일괄 처리할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850) (1) <<만주시인집>>과 <<재만조선시인집>> <<만주신인집>>은 강덕9년(1943년)9월 29일에 길림에서 제1협화구락부문화부 발행으로 된 시집인데 여기에는 류치환, 윤해영, 신상보, 송철리, 조학래, 김조규, 함형수, 장기선, 채정린, 천청송, 박팔양 등 11인의 시가 수록되여 있다....<<재만조선시인집>>은 강덕9년(1943년) 10월 10일에 간도성 연길가 (株)藝文堂 발행으로 되어 있는데 김달진, 김북원, 김조규, 남승경, 리수형, 리학성, 리호남, 손소희, 송철리, 류치환, 조학래, 천청송, 함형수 등 13인의 작품 51편이 수록되여 있다.(850) (2) <<싹트는 대지>>와 <<북원>> <<싹트는 대지>>는 강덕8년(1941년) 11월 15일에 신영철의 편으로, 만주 신경특별시 <<만선일보>>사 출판부에서 펴낸 소설집인데 당시 중국조선인문학의 지도자격이였던 렴상섭의 서문과 편집자인 선영철의 跋文이 있다.(854) 현지주의 원칙에 철저히 립각하여 역은 작품집이기에 작품은 한결같이 이주민들의 각양각색의 생활을 다루고 있어서 주목되지만 적지 않은 작품들은 이러저러한 친일성향을 띠고 있어 자칫하면 론란을 일으킬수도 있어 그만큼 소심스럽게 다룰 것이 요청된다.(855) <<싹트는 대지>>에 수록된 작품들은 이 시기 시에서 흔히 보게 되는 망향이나 실향의 아픔보다는 이 지역의 생활을 문제시하고 있다. 앞에서 거듭 이야기했지만 이 시기 이 지역의 간민들의 생활의 주제는 정착과 개척, 그리고 거기에 따른 수난일것이다. 그런데 <<싹트는 대지>>에 수록된 작품들가운데서 적지 않은 작품은 이것을 외면하고 있다. 이를테면 박영준의 작품 <<밀림의 녀인>>은 어린 시절에 共匪에게 잡혀갔다가 10여년이 지나서 다리에 부상을 입고 일본군에 의해 구출된 김순이라는 녀인을 정신적으로 <<귀화>>시키기 위해 집에 데려왔다가 곡절을 겪는다는 이야기를 적고 있는데 주인공이 조선인이라는것외에 거의 다른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뿐만아니라 일제의 만주침략에 동조까지 되고 있는가 하면 한찬숙의 <<초원>>은 조선청년 임봉익과 저 멀리 하이랄초원에서 양치는 몽골족처녀 마루고의 사랑을 적고 있지만 작품은 애초부터 <<5족협화>>란 <<만주국>>리념에 수긍하고 있어 문제로 되고 있으며 현경준의 <<류맹>>은 아편, 흡연, 흡독을 문제시하고 있지만 그것이 <<왕도락토>>와 직결되고 있다. 이것을 립증하는 글이 있다. <<신흥국가 만주국에서는 그들의 그 과거에 착안하고 단 한 사람이라도 좋다. 한 사람이라도 완전히 소생시켜서 국가의 구성분자로 만들 수가 있다면 이 얼마나 뜻깊은 일이랴? 하고 이를 악물고 달려 들었다. 王道樂土를 건설하려는 만주국이 아니고서는 생각도 할수 없는 일이다.>>(김호웅 <<재만조선인문학연구>>(국학자료원) 127쪽에서 재인용-각주43) 이것은 이 소설이 <<마음의 금서(선?)>>라는 제목으로 1943년에 서울 홍문서(855)관에서 출판될 때 그 단행본의 머리말의 한구절이다. 아부이고 굴종이다. 수모이다. 비굴하여 가련하기까지 하다. 김창걸의 <<절필>>과는 도무지 상종할수도 없는 행위이다. 그 시기 문인들의 일단을 넉넉히 짚어볼수 있는대목으로서 우리 문학으로서는 언제나 수치이다.(856) 이와는 좀 달리 황건의 <<제화>>와 신서야의 <<추석>>은 여전히 이주민들의 생활을 그리고 있으나 상기 작품처럼 기존질서와는 거의 상관이 없다. 전자는 <<나>>라는 들뜬 청년이 만주에 와 <<문학청년회>>를 조직하고 문학운동을 한답시고 들먹이다가 內訌으로 흐지브지해지게 되어 고민한다는 이야기를 적고 있는데 內訌의 원인이나 문학운동이 실패하게 된 원인이 있을 법하나 <<나>>의 심리만을 절망적으로 그려 문제가 있으나 그 고민이나 실망이 <<만주국>>에서 일어났다는데서, 나의 고민이나 절망이 현실과 괴리되고 있다는데서 어느 정도의 가치평가를 가능케 한다. 후자는 추석제물을 장만하기 위해, 더욱이는 생계를 위해 密賣를 해야만 하는 김서방의 딱한 처지와 이른바 교통방해죄로 순사에게 끌려가 혼줄이 나고 돌아오는 길에서 옛노래를 부르다가 설음이 북받쳐 평생에 두 번째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를 통하여 이역 땅에서 아무런 인간적 대접도 받지 못하고 설음속에서 살아가는 이주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형상화하고 있는데 치밀한 구성에 생동한 묘사마저 곁들어 가히 佳作이라고 할만한 작품이다.(856) 안수길의 <<새벽>>은 만주 이주민들의 어떤 극한의 상황에 놓여 있는가를 설득력있게 보여준 작품인데 어린 소년을 서술자로 등장시켜서 이색적일뿐만아니라 이 소설에서 가장 돋보이고 가치가 있는 것은 이주민들의 생활실상을 그대로 보여 주는 한편 넓은 사회화폭으로 그들이 령락되지 않을 수 없는 객관환경을 깊이있게 제시한데 있다. 소설은 소금밀수를 하다가 잡힌 나의 아버지가 박치만의 계책에 넘어가 종당에는 딸마저 �값으로 물어넣어야 하는 기막힌 이야기를 적고 있는데 아버지의 밀수, 박치만의 흉계, 복동예와 삼손의 도주 및 복동예의 자결 등등은 이 시기 이 지역의 생활이 그 어느 작품보다도 깊이 있고도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어서 개척민들의 생활을 리해하는데 있어서 자(856)못 중요한 인식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뿐만아니라 작품에 묘사되고 있는 장작림군벌의 횡포와 략탈도 작품에 가치를 더해 주고 있다. 어떤 학자는 <<간도란 명사는 어느새 <난리, 굶주림, 도독농사, 월강죄>와 같은 민족 수난을 연상시키는 말로 들>>(오양호 <<한국문학과 간도>>(문예출판사) 11쪽-각주44)린다고 말한적이 있다. 그뿐이 아니다 여기에는 流民, 逃走, 아편, 사기, 밀수, 수탈, 도둑, 화적, 토비, 군벌, 강도가 있어 간도 혹은 만주 하면 생각나는 것이 이러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험한 곳이라는 이야기다. 소설은 바로 이러한 사회환경속에서의 이주민들의 삶을 집중적으로 묘사하고 있다.(857) 안수길의 소설집 <<북원>>도 같은 맥락에서 풀이된다. 1943년에 연길 예문당에 간행한 <<북원>>은 이 시기 이 지역에서 간행된 유일한 개인 작품집으로서 의의를 가진다.(857) <<원각촌>>은 안수길의 작품에서 가장 이색적인 작품이다. 작품은 넓디넓은 만주벌판을 집으로 삼고 지팡살이나 목재판에서 막일로 생계를(857) 유지해 가는 억쇠 리원보의 형상을 그리고 있다. 리원보는 경상도 출신이라고 하나 그의 내력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또한 만주의 험악한 자연을 닮아서인지 그는 <<만주의 자연>>처럼 험상궂게 생겼고 건장한 몸집과 무진장한 힘을 갖고 있는데다가 성격마저 원시림이 우거지고 짐승들이 욱실거리는 <<만주>>처럼 거칠다. 현대적인 문명과 거의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거기에 따르는 욕구가 있으며 거기에 따르는 시비판단의 표준이 있다. 이것을 김호웅은 <<자기의 생존욕구>>(김호웅 <<재만조선인문학연구>>(국학자료원) 149쪽-각주45)라고 하였다. 이러한 생존욕구는 그에게 자아본능적인 생존방식을 주었는바 이러한 생존방식에 의해 그는 한생을 살아간다. 안해를 겁탈하는 한익상을 한 도끼로 쳐죽일수 있는 행위도 이것으로 해석된다. 그에게는 요즘 인간들의 시비가 근본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치장스러울지도 모른다. <<류혈의 싸움도 간곳마다였고 생명이 위태한 경우도 한두차례 아니였>>던 아짜아짜한 장면도 이것으로 통한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면 이 작품은 안수길의 다른 작품과는 어느 정도 구별된다. 특히 일제의 시책에 순응한 <<토성>>이나 <<목축기>>와 같은 작품들과 비할 때 이 작품은 그만큼 돋보이는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실로 만주에서 있을 법한 인간이며 성격도 만주에서 있어야 할 성격이다. 따라서 작품은 만주 이주민들의 생활을 다룬 안수길의 작품에서도 가장 만주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 측면에서 만주에서의 그 시기 우리 이주민들의 급선무는 민족정체의 생존과 생활문제이다. 훌륭한 작가라면 이 문제를 다루어야 할것이며 이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도끼 하나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 작가 안수길과 이 작품의 한계가 있다.(858) 6) 김창걸의 경우 김창걸, 필명으로 추소, 황금성, 강철 등이 있다고 한다.(조성일 외 <<중국조선족문학사>>(연변인민출판사) 220쪽-각주46) 1911년 12월에 조선 함북 명천군의 한 농가에서 태여났고 난 여섯 살에 간도에 와서 명동촌에서 농사도 하고 후에는 소학교교원을 비롯하여 점원, 사무원노릇도 하였다. 1948년부터는 동북조선인민대학(연변대학 전신)의 교원으로 초빙되였고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부가 설립되자 학부교수로 초빙되여 줄곧 교편을 잡다가 1991년에 세상을 떴다.(859) 지금까지의 연구를 돌이켜 보면 일부분을 제한외 거개가 1982년에 료녕인민출판사에서 간행한 <<김창걸단편소설집>>(해방편)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데 여기에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이 단편소설집은 수록된 허다한 작품들은 원문과 일정한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점은 <<만선일보>>에서 나온 <<락제>>와 이 소설집에 실린 <<락제>>를 대조해 보면 분명해지는데 상당한 부분이 개작, 가미되고 있다. 원문을 찾을수 없는 상황에서 노트에 메모해두었던 이야기줄거리와 기억을 더듬어 복원한것으로서 일정한 개작이나 가미는 불가피면적이라고 생각되나  김창걸문학연구의 기본 텍스트로 삼는데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859) 김창걸의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인상은 가난이다....김창걸은 가난과 문학은 <<사촌간>>이라고 생각했다. 즉 가난해야 문학을 할수 있고 문학은 가난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창작에서 가난을 그처럼 집요하게 파고 들수 있었다. 그러나 김창걸은 가난의 근저에 대해서는 명확한 인식이 없었다. 따라서 그는 가난을 팔자소관(<<거울>>)이나 숙명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락제>>) 그러나 그는 가난을 피부로 느꼈고 그 누구보다 깊이 있게 체득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가난은 일반 의미에서의 가난, 즉 굶주림이나 추위임과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는 굶주림이고 추위였다. 이런 굶주림, 이런 추위, 즉 가난이 그의 정감을 무르익혔고 그의 행위를 좌우지하였다. 가난이 문학이라는 아이디어, 가난제재의 소설을 꾸미는 착상, 소설을 빈부의 대립으로 짓는 발상법은 모두 여기에서 기인된다.(860) 김창걸소설의 다른 한 특점은 소박한 인간성이다. 김창걸은 이 땅에(860)서 잔뼈를 굳혔고 이 땅에다 뼈를 묻은 순 <<토배기>> 작가이다. 그래서 그러한 그의 작품은 만주 어디에서나 볼수 있는 작은 풀처럼 수수하고 소박하나 자기적인 삶의 태도와 도덕성 그리고 세속에 물들지 않은 인간성이 있다. 이런 인간성은 작품 <<청공>> <<락제>> <<암야>> 등 작품에서 잘 보여진다.(861) 동일한 시기, 동일한 지역의 동일한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 <<류맹>>과 <<청공>>은 너무나도 다르다. 전자는 일제의 시책에 부응하면서 중독자문제를 해결하려는 반면 후자는 어디까지나 자체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뿐만아니라 사회병폐와 인간성과의 갈등과 대결을 통해 인간성과 도덕의 승리를 극명하게 보여주어 고난속에서 허덕이는 인간들에게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861) 하편 7) 광복후 중국조선족문단 1945년 8월, 일제는 무조건 투항하였다. 36년의 식민통치가 결속된 것이다. 일제의 항복에 따라 조선이 해방되였고 오매에도 그리던 민족의 독립이 실현되였다. 이 독립에 따라 중국조선인사회도 크낙한 변화를 보여주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큰 변화는 조선인들의 대규모적인 민족이동에 따른 이 땅의 <<문화부대>>, 즉 문인들의 귀국이였다. 이역땅에서 고향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망국의 한과 설음을 달래던 조선문인들은 나라의 독립과 함께 또 다시 보따리를 챙겨들고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조국으로 돌아갔다. <<조선년감>>에 따르면 광복전 만주에는 216만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1949년 민족사무처의 집게는 1949년 현재 재중조선인의 수자는 112만이라고 하니 광복을 전후하여 조국으로 돌아간 사람이 무려 100만이나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것을 제3차 민족의 대이동이라고 하는데(연변대학 민족연구소 박창욱교수와의 인터뷰-각주52) 확실한 대이동이였던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렇다 하여 이 지역의 민족사회가 해체된 것은 아니였고 문학도 고갈된것이 아니였다. 반면 이 지역의 조선인들은 새로운 지평선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또 한차례의 간고하고도 보람있고도 위대한 창업을 개시하였다. 문학 역시 이 시기 이 지역의 조선인 사회와 밀착되면서 그들의 사(865)상, 감정을 대변하기에 여념이 없었다.(866) 광복후 중국조선인의 문학은 조선족사회와 문화의 재정비를 떠날 수 없었다. 100만을 헤아리는 조선인들이 조국으로 돌아가는 한편, 이땅의 조선인들은 여러 가지 형식으로 항일전쟁의 위대한 승리를 환호하면서 새로운 자세로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일련의 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그들은 연길, 룡정, 목단강, 할빈, 심양, 길림, 통화 등 지역을 거점으로, 여러 가지 군중단체를 설립하(이 시기 이 지역에서는 <<연변로동자농민청년녀성총동맹>> <<민주동맹>> <<민주련맹>> 등 군중단체가 건립되여 광복후 조선인 사회의 재정비사업에 떨쳐나섰다고 한다-각주53)였다. 이러한 단체들은 잇따라 건립되는 중국공산당과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 동북민주련군 길림성 연길군분구의 조직지도하에 전후복구사업을 비롯하여 일제의 잔여세력과 토비숙청, 동북근거지의 건설, 토지개혁 등 사업을 본격적으로 떠밀고 나가 전사회는 긴장속에서 새로운 기상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런 와중에 문화정비와 건설사업도 선을 보여 본격적으로 진척을 보여주었는데 각지에서 많은 학교가 신설되는 가운데 연길, 목단강, 할빈, 통화 등지에서 <<한민일보>> <<연변민보>> <<인민신보>> <<길동일보>> <<인민일보>> <<길림일보>> <<연변일보>> <<민주일보>> <<단결일보>> 등 신문이 간행되였으며(이 시기 신문관계의 상황은 최상철 <<중국조선족언론사>>(경남대학교출판부) 관련부분참조-각주54) 잡지로는 <<불꽃>> <<민주>> <<대중>> <<연변문화>> <<문화>> <<건설>> <<효종>> 등이 간행되여(조성일 외 <<중국조선족문학사>> 255쪽 참조-각주55) 광복직후 중국조선인문단을 다채롭게 장식하였다. 그 가운데서 <<연변일보>>가 가장 대표성적인 신문이였고 그 시기 중국조선인 사회의 건립과 그후 중국조선족의 문화생활에 막강한 영향을 주었는데...(866) 각종 군중단체의 출현 및 학교, 신문 등 출판물의 간행은 이 시기 문학창작활동도 자극하여 동북의 여러 지역에서 <<이쓰크라극단>> <<길동군구문공단>> <<양양극단>> <<166사선전대>> 연변문공단>> <<송강로신예술극단>> <<송강군구 제3지대 선전대>> <<164사선전대>> <<리홍광지대선전대>> 등 업여 또는 전업문예단체들이 나타나 활약적인 활동을 보여주었고 <<간도문예협회>> <<銅羅문인협회>> <<동북신흥예술협회>> <<중쏘한문화협회>> <<로농예술동맹>>가 태여나 문예평론회, 문학감상회를 개최하였을뿐만아니라 <<신춘문예현상모집>>활동도 진행하였고(조성일 외 <<중국조선족문학사>> 255-256쪽-각주57) 적극적인 창작활동을 벌렸다. 중국조선족문단은 그들에 의해 자기 발전의 길에 들어선다.(867) 왜서 이처럼 큰 변화가 생기가 되었는가? 해답은 분명하다. 사실 이때로부터 중국조선인의 문학은 시각을 달리 한다. 그것은 단순한 오십보 백보의 차이가 아니다. 이때로부터 중국의 조선인은 이국민으로서의(869) 조선인, 또는 한인으로서가 아니라 중국인으로, 중국의 소수민족의 일원으로 자리를 굳혀 가기 시작한다.(870) <<동북인민행진곡>>(윤해영 작사-인용자 주)은 4음 4보격과 높고 힘찬 격조외에 이(<<선구자>>-인용자 주)와는 일정한 차이를 보여주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전시기에 이 지역의 시에서 흔히 보게 되는 민족의식이 희석해진 것이다. 이것은 일제가 망하고 식민통치가 결속되였다는데 그 원인이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전 세계적으로 이 시기는 동서가 대립되여 있던 시기로서 민족성보다는 계급성이 강조되고 민족의식보다는 이데올리기가 중요시되였기 때문이다. 국제 정세의 이러한 대립은 중국조선인문학에도 반영되여 얼마전까지 지속되였다. 광복후 50여년래 중국조선인문학이 반도문학보다는 중국문학에, 민족성보다는 계급성을, 민족의식보다는 이데올로기를 강조하게 된 근본원인은 사실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 그것을 이질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력사는 어디까지나 력사 그 자신이 쓴 것이므로 중국조선인의 력사도 중국조선인들이 쓴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중국조선인들의 문학의 력사는 이러한 력사상황에서 중국이라는 이 특정한 지역을 력사배경으로 자기 발전의 길에 들어서기 때문에 반도의 문학과는 좀 다(871)른 길을 걸어 왔다.(872) 8)해방후 17년의 중국조선족문학 개관 중화인민공화국의 건립은 중국이 사회주의 력사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하는바 이 력사단계의 도래와 함께 중국조선인들은 지나온 력사와는 완전히 다른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민족자치제도와 지역의 건립이다.(872) 1957년의 <<반우파>>투쟁의 뒤를 이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여러 가지 정치운동, 이를테면 1958년의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화운동, 그리고 민족정풍운동, 1959(874)년의 <<반우경>>운동, 문예계, 학술계의 <<수정주의>>비판운동과 계급투쟁의 절대화와 확대화에 의해 문단은 살풍경이 되었으며 김학철, 최정연, 리홍규, 채택룡, 김순기, 서헌, 김용식, 조룡남과 같은 훌륭한 작가들이 터무니 없는 루명을 쓰고 오유적인 비판을 받았다. 사실 중국조선족문단에서 이러한 투쟁과 비판은 뿌리깊은것이였다. 일찍 공화국창건 전인 1946년부터 중국에서는 동북문예계를 중심으로 蕭軍(蕭軍(1907-1988) 중국현대작가, 대표작으로 <<8월의 鄕村>> <<第三代>> 등-각주64)을 비판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빌미는 동북독립을 부르짖은것이라고 하나 후에는 오유적인 비판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거기에 덩달아 연변문예계에서 잡은 것이 설인 리성휘의 <<밭둔덕>>이다.(875) 우리 민족의 력사를 다룬 <<해란강아 말하라>>가 <<반동작품>>으로 되고 사랑이나 인정을 써도 문제가 되던 시기라 일단 걸리기만 하면 토론은 물론 변명할 여지도 없는 험악한 문화생태환경이였다. 이러한 문화생태계는 이 시기 조선족작가들에게 심리적위구심을 키워 주었는데 그 결과는 비판보다는 歌頌, 고발보다는 찬미, 부정보다는 긍정이 위주인 단색 <<송가문학>>과 단일한 가치 표준이며 비판, 고발의 문학이라고 하더라도 고작해야 선의적인 권유나 온화한 어조로 가볍게 타이르는 식에 그치거나 머물렀다. 이 시기에 발표된 많은 작품가운데서 이러한 작품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인 것이다.(876) 1960년대에 들어서서도 사정은 한가지이였다. 1957년의 반우파투쟁과 1958년의 대약진 및 그 뒤로 이어진 <<좌>>적 착오를 시정하기 위하여 중공에서는 <<調整, 鞏固, 充實, 提高>>의 방침을 제기하였는데 뜻인즉 잘못된 것은 조절하고 잘된 것은 공고히 하고 충실히 하며 제고한다는 것이였다. 여기에서 가장 의미심장하였던 것은 조절이였다고 할수 있는데 중공 수뇌부에서는 전시기 일부 착오적인 시책에 편차가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아내고 그것을 시정하기 위한 정책조절이였다. 당시 실정에 알맞은 조절이였다. 이번 조절은 국민경제가 위주였으나 그것은 문학령역에도 파급되여 부분적인 시정이 있게 되었다. 중국문단의 조절사업에 따라 연변에서도 1961년 11월 18일부터 11월 20일까지 제3차 회원대표대회를 열고 <<백화만발, 백가쟁명>>의 정확한 방침을 재확인하고 문예사업도 조절하는 한편 공고히 하고 충실히 하며 제고할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문예는 진실을 써야 한다>>는 관점을 수정주의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또 착오적인 비판을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지난 시기의 극좌적인 경향은 비판을 받았지만 철저하지 못하였고 조절도 했다지만 전면적이 되지 못했고 말로만의 조절에 머물렀다. 거기에 전국적으로 인 <<중간인물론>>(극 <<좌>>적인 사상에서 나온 문학리론으로서 문학창작에서 부각된 인물도 혁명에서처럼 혁명자가 아니면 반혁명분자, 좋은 사람이 아니면 나쁜 사람이란 2분하여야 한다는 론리다. 따라서 중간인물, 즉 혁명자도 아니고 반혁명분자도 아니고 좋은 사람도 아니고 나쁜 사람도 아닌 인간을 부각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단순한 계급대립으로 인간과 사회를 분류하던 사상의 문예계에서 반여이라고 할수 있다-각주67)에 대한 비판까지 겹띠여 작가들의 창작의욕이 사라지고 창작적극성이 여지없은 타격을 받았다. 따라서 1960년대에 이르러 창작은 1950년대보다 활발하지 못했고 극소부분의 작품을 제한외 훌류한 작품이 태여나지 못했다. 작가들의 창작(877)능력이나 수준의 문제도 간과할수 없지만 주요하게는 걸핏하면 정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당시 이런 문학풍토가 여기에서 더 중요한 작용을 했다는 것은 여기에서도 확인된다.(878) 9) 해방후 17년의 시가 창작과 리욱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자 중국문단의 기본 정서와 흐름은 송가였다. 장기간 암흑속에서 헤매던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또 일제의 잔혹한 통치에 시달리던 중국인에게 있어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은 커다란 의의를 갖고 있는것이였다. 그들은 자기들을 도탄속에서 구해준 공산당을 진정을 사랑했고 사회주의는 진정으로 환영하였다. 그리하여 새 삶을 준 공산당을 가송하는 시가, 1950년대 중엽에 완성된 생산수단의 사유제에 대한 사회주의적개조에 따른 공농업생산의 전면적인 앙양을 노래하는 시가와 항일전쟁을 비롯한 지난날의 피비린 전쟁에서 표현된 애국애족 정신을 구가한 시가들이 중국문단을 휩쓸었는데 중국조선족문단도 대체로 이러하였다.(878) 이 시기에 중국조선문단에는 많은 시인이 혜성처럼 나타났는데 그 가운데서 이 시기 중국조선족문학의 제반 특성을 가장 집중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 리욱이다.(881) 10) 해방후 17년의 소설창작과 김학철 시가 창작과 마찬가지로 해방후 17년의 소설창작도 중국문단의 영향을 받는 가운데 커다란 성과를 거둠과 동시에 일부 <<문제작>>들이 나(885)타나면서 굴곡적인 발전의 길을 걸어왔다. 이 시기 소설가운데서 량적으로 가장 많은 것은 새 생활, 새 인간, 새 기상을 노래한 <<새생활 만세>>식 소설들인데 이것은 1950년에 발표된 김창걸의 <<새로운 마을>>에서 선을 보인다. 건국후 중국조선족문단의 첫 작품으로 인정되고 있는(조성일 외 <<중국조선족문학사>>(연변인민출판사) 332쪽-각주71) 이 작품은 농민 갑식이의 형상을 통하여 새생활의 주인으로 된 농민들의 기쁨과 자기들의 신근한 로동으로 아름다운 미래를 창조해가려는 농민들의 소박한 념원과 리상을 그리고 있다.(886) 이 시기 중국조선족소설문학의 최고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김학철이다.(888) 김학철의 작품에서 가장 일찍 <<말썽거리>>가 된 것이 곧 <<괴상한 휴가>>이다. 소설은 작가 차순기의 <<괴상한 휴가>>를 적고 있는데 정치풍파나 운동이 일때마다 엇갈리는 이른바 評者와 독자들의 변덕스러운 태도를 통하여 <<좌>>적경향에 의한 작가들의 고뇌를 피력하고 있다.(889) 모두어 말해서 김학철의 초기 창작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을뿐만아니라 자기의 창작으로 작가란 진실을 쓰고 참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893) 11) 문화대혁명 시기의 문학 1966년 건국이래 여러 가지 <<정치병>>으로 시름시름 앓던 巨軀의 중국은 진짜로 몸살을 앓게 된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문화대혁명>>은 지도자가 잘못 발동하고 반혁명집단에 리용되여 당과 국가와 여러 민족 인민들에게 엄중한 재난을 가져다준 내란이다. 중공당이 <<문화대혁명>>에 내린 결론이다. 일장 광란에 력사적인 심판을 내린 것이다.(895) 1966년 7월에 연변문련이 해산되고 <<연변>> <<장백산>>과 같은 문예지가 페간되였으며 김학철과 같은 작가들은 감옥으로, 다른 작가들은 농촌으로 갔다. 그리고 <<운동건장>>들이 나서서 <<민족문화혈통론>>이요, <<민족분렬주의언어방침>>이요, <<반당사회주의대독초>>요 하면서 지난시기의 성과를 마구 부정하였으며 문학령역에서 林彪, 江靑일당이 내놓은 모든 인물가운데서 긍정인물을 돌출히 하고 영웅인물(긍정인물?)가운데서 영웅인물을 돌출히 하고 영웅인물가운데서 주요 영웅인물을 돌출히 한다는 이른바 <<3돌출>>을 내세우고 여지없는 타격을 하였다. 그 결과 중국문단과 마찬가지로 문학창작은 철저히 고갈되였다.(896) 12) 해동과 문학의 회춘 1966년 2월 <<문화대혁명>>의 旗手로 불리우던 江靑은 상해에서 이른바 部隊문화사업좌담회를 소집하였다. 장기간 막후에 있던 江靑이 화려한 등장을 하는 시각이였다. 그번 회의에서 만들어낸 <<林彪동지께서 江靑동지에게 위탁하여 소집한 부대문화사업좌담회 紀要>>는 건국이래의 문예사업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 문예계에는 <<毛主席의 사상과 대립되는 한갈래 반당, 반사회주의의 검은 선이 우리에게 독재를 실시하였다>>(조성일 외 <<중국조선족문학사>>(연변인민출판사) 449쪽 재인용-각주79)(895) 1977년 12월, 4인방이 분쇄되여 두달후, <<인민문학>>편집부의 명의로 문예좌담회가 북경에서 거해되였다. 이 회의에서는 4인방이 문예계에 뒤집어씌운 터무니 없는 죄명을 벗겨버리고 문학예술사업의 본격적인 회복을 위한 결의를 다졌다. 이 기초상에서 1978년 5월, 중국문학예술가련합회에서는 북경에서 제3기 제3차 확대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는 문학예술계에서의 4인방의 유독을 철저히 숙청하는 회의로서 중국 문학예술의 새로운 시기를 알리는 기념비적인 회의였다.(902) 1978년 10월에 연변문학예술가 련합회 제2기 제3차 확대회의가 연길에서 소집되였다. 4인방이 분쇄된 2년후에야 열린 회의이지만 연변문단의 재정비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의의를 가지는 중요한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는 <<문예계의 검은 로선 독재론>>과 <<좌>>적인 사상로선을 숙청하고 4인방이 연변문단에 뒤집어씌운 죄명을 청산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것이 이른바 <<민족문화혈통론>>이다. <<민족문화혈통론>>이란 1969년 7월 29일자 <<연변일보>>에 발표된 연격문(필명)의 글 <<<민족문화혈통론>을 철저히 짓부시자>>는 글에서 나온것인데 그 핵심은 민족지구에서의 민족문화정책을 말살하는것이였다.(903) 여기에서 연격문은 <<같은 민족, 같은 혈통, 같은 선조, 같은 력사, 같은 감정, 같은 문화>>란 론리에 따라 조선족문단으로서의 민족적특성을 지켜야 한다는 정확한 민족문예정책을 매국투항주의로 매도하고 민족성을 운운하는것은 매국주의로, 민족언어의 사용을 주장하는것을 민족분렬주의로 규정하고 民族言語文字無用論을 고취하였다. 이 史上 전례없던 문화파쑈주의시책에 의해 연변문단은 고갈될대로 고갈되였고 민족이나 민족성은 운운할 여지조차 없게 되었다.(904) 1980년대후반으로부터 1990년대로 이어지는 중국조선족문학은 바로 이러한 력사적인 반성과 자아의 회귀속에서 새 시기를 장식해 가고 있다.(906) 1980년대말, 특히는 88서울올림픽과 1992년 중한수교는 중국조선족문학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민족의 동질성확인과 삶과 인생에 대한 전례없이 깊은 인식은 중국조선족문학을 더 높은 단계에 끌어올리고 있는바 로작가들은 물론 중청년작가와 신진작가들이 거기에 가세하여 세기 교체기 중국조선족문단에는 전례없이 우수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906) 1990년대 중국조선족문학에서 가장 특징적인것은 현대의식과 민족의식의 강화, 미학경향성의 다양화와 내면화 등등이다. 현대의식은 80년대로부터 중국에 밀려든 서구모더니즘문학과 련관되기도 하나 더 중요한것은 중국조선족 삶의 현대화과정과 밀접히 련계되여 있다.(906) 이 시기 소설문학의 가장 큰 특점의 하나는 사회비판의식이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 재래의 송가와 만세식소설은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였고 작가들은 과감히 현실과 자기를 직시하고 현실을 예리하게 해부하였는데 이것은 소설문학이 이제 진정으로 자기의 삶에 대해 관심하기 시작했다는 표징으로서 소설문학이 한단계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섰다는 표징의 하나이다. 력사소설의 출현도 이런 맥락에서 풀이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강조되는것은 민족의식으로서 나는 누구며, 어디서 왔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중국조선족문학이 재래의 단일한 참여의식에서 인간본연으로 돌아와 진정으로 자기와 자기의 삶을 직시하기 시작했다는 표징으로서 문학의 엄청난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다.(907) 이 시기 문학에서 또 하나 주목되는것은 서구 모더니즘적 경향의 출현과 선명한 내면화 경향이다.(907) 주지하다싶이 1980년대중엽으로부터 중국문단에는 서구 모더니즘문학이 쏟아져 들어왔다. <<3∙1>>운동을 전후하여 서구의 여러 가지 문학사조가 한국에 한꺼번에 밀려들듯이 개혁개방이후로 중국에도 여러 가지 모더니즘문학이 밀려들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중국의 전통적인 문화풍토와 생태, 그리고 문학령역에서의 전통적인 사실주의와 사회주의사실주의와 어울(907)리면서 몽롱시와 <<뿌리찾기>>문학, 신사실주의 등 중국특색과 개성이 있는 문학이 나타났다. 그 가운데서 중국전통문화의 高揚과 민족정신의 高揚에 있어서 <<뿌리찾기>>와 같은 문학이 상당한 구실을 했다는것은 주지이 사실이다. 중국조선족문단에 나타난 모더니즘문학은 이러한 문화생태환경에서 온것으로서 1980년대 중엽에 정착되는듯하더니 한춘, 김학천, 최룡관 외 기타 시인과 특히는 리임원, 조광명, 김영건 외 소장파 시인들에 의해 모더니스트경향이 짙어가고 내면화되여 감과 동시에 시가 여물어 가고 있다. 소설령역에서는 장지민을 비롯하여 우광훈, 리혜선 등 중견작가들의 창작에서 보여지고 있으며 최홍일이나 류연산은 민족문화의 뿌리를 캐고들면서 민족의식의 高揚과 새 시기의 민족문화 高揚에 신경을 쓰고 있다.(908) 13) 새 시기의 시문학 <<4인방>>을 성토하는 타도문학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상처, 반성이란 문학도 등장한다. 상처문학이란 문화대혁명이후 문화대혁명이 인간에게 준 정신적인 상처를 비롯하여 그것의 비인간성과 비인도성을 고발하는 문학을 말하는데 문화대혁명가운데서 농촌으로 가 청춘을 잃고 下鄕청년들이 그 주요 대표로 되고 있다.(下鄕청년이란 문화대혁명기간에 청년들은 농촌으로 가서 농민들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농촌으로, 변강으로 간 청년들을 말하는데 그들의 사상감정을 대변한 문학을 상처문학이라고 하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은 盧新華의 <<傷痕>>인데 상처문학이란 용어는 여기에서 온 것이다-각주93) 반성문학이란 문자 그대로 깊은 자아반성과 나아가서는 문화반성을 동반한 문학을 가르키는데 특히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후에는 더 깊은 문화근저 즉 전통적인 문화환경과 생태에서 그 원인을 찾고 그 해결책이나 대안(908)을 제시하는 식으로 되고 있다. 그 뒤로 개혁이나 새 생활을 노래한 시들이 성행하다가 1980년대 중반으로부터 서구 모더니즘문학이 이입되는 한편 기타 여러 가지 문화가 문화정보 루트의 소통에 따라 중국조선족시단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이러한 변화는 김철을 비롯한 중년시인들의 시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909)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조선족시단은 내면화되고 있는 가운데 고독, 실망, 아픔, 슬픔, 비애, 우수, 번민, 불안과 좌절감, 소외감, 고달픔 등 정서로 어두워진다. 이것은 광복전 중국조선인문학에서 주되는 정서로 되고 있는 망국의 한이나 향수가 아니다. 이것은 중국조선족사회의 현실과 갈라놓을수 없는 것으로서 심각한 사회적원인을 갖고 있다.(922) 주지하다싶이 지금 중국조선족사회는 전대미문의 거대한 변혁속에 있다. 개혁개방, 특히는 중한수교는 중국 조선족사회를 거세찬 개혁과 변화속에 밀어 넣었다. 이 거대한 변화속에서 전통적인 생산방식과 생활방식이 해체되기 시작하였고 거기에 걸맞는 의식형태, 즉 사상관념의식들이 눈에 띄인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분명 이러한 변화는 력사상에 있어 본적이 없는것으로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야 할것이다. 특히 중한 수교는 중국 조선족들의 정신문화생활과 경제생활에 크나큰 영향을 주어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 부정적인 측면들도 만만치 않는 것이다. 동전의 반면같은것이라고 하겠다. 현대화의 물결은 땅에 박혀 있던 농민들을 도시로 불러들여 농촌의 전통적인 농경문화가 급속히 와해되고 있으며 도시도 크나큰 사회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자아의식과 민주, 자주의식이 자라남에 따라 전통적인 사상의식관념과 가치관념, 륜리도덕이 엄청난 충격에 뒤흔들리고 있다. 이러한 사회상황은 중국 조선족사회의 지식계에도 큰 충격을 주어 일련의 벼화가 일어났는데 이러한 변화속에서 지식인들의 자아의식이 크게 제고되었다. 그들은(923) 점차 자기의 존재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경주하는 한편 덧없이 지나간 세월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끼기 시작하였을뿐만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늘어나는 상대적인 빈곤층, 지나친 기대와 바램과 현실간의 커다란 콘트라스트, 농촌의 황페화, 전통적인 도덕과 륜리의 타락, 인간가치의 급락, 기타 범죄와 사회불안정요소로 인한 분노, 실망, 비애, 좌절감, 소외감 등등은 이러한 어두운 정서를 초래하고 있다. 앞으로도 이러한 사회적문제는 더 심각해질것이며 거기에 따른 작가들의 심리적 갈등도  가일층 심화되면서 이러한 정서는 더욱 짙어질것이며 허무적이나 비관주의와 같은 사상들도 나타나게 될것이다. 또 이와 동시에 시도 더욱 세련되면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현대적감각과 의식을 가진 시들이 속출하게 될것이다.(924) 14) 새 기시의 소설문학 시문학과 마찬가지로 새 시기 소설문학도 문화대혁명의 비리에 대한 고발로부터 시작하여 반성문학, 개혁문학 등으로 이어지는데 그 가운데서 대서특필해야 할것은 의연히 김학철이다.(924) 윤윤진(길림대)
28    김동민, <<한국문학사의 탐색>>, 푸른사상, 2003.7 댓글:  조회:2928  추천:0  2009-05-16
김동민, 󰡔��한국문학사의 탐색󰡕��, 푸른사상, 2003.7 책머리에 우리 근대소설과 현대소설을 아우르고 있는 많은 연구서들이 유독 1940년대 전반기 작품만은 빠뜨리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문학연구자들의 관심 부족 및 자료소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한국소설의 유기적인 체계를 밝히는데 결정적인 맹점이 될 수 있다. 필자는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 관련 자료를 뒤적이던 중 동시대의 침체된 문학사를 새롭게 조명할 기초적인 단서가 될 수 있는 텃밭을 찾았는데 개척소설이 그것이다. 1940년대 전반 재만 조선인 작가들과 다른 몇몇 작가들에 의해 씌어진 이 개척소설은 재만조선인문학을 비롯한 민족문학 전체를 비추어 보는 맑은 거울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소위 개척소설이라고 이름 붙여진 작품들만을 따라 모아 살피려는 어떤 시도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심지어 명칭이나 개념 등 가장 기초적인 것들에 대한 기준마저 제도로 정립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필자는 먼저 개척소설의 개념과 형성 배경을 고찰하고 이어 개척소설의 주제와 서사 특징을 밝혀 개척소설이 한국소설사에서 차지하는 의의와 가치를 도출해 보고자 했다. 그 결과, 개척소설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나라가 가장 힘들었던(1) 시대의 감추어진 실상과 겨레얼이 소롯이 담겨 있는 문학 작품이며, 창작기법이나 문학적 패러다임에서나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작적인 서사 특징을 이루어, 자칫 단절될 위험이 있는 한국문학사 연계화의 고리를 마련하기에 모자람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이러한 개척소설에 대한 연구는 이제 시작이라고 본다. 개척소설이라는 명칭보다 더 적절한 이름은 없는지, 혹 누락된 개척소설은 없는지, 친일소설이 개척소설로 거짓 포장되지는 않았는지, 개척소설의 독특한 양상을 바탕으로 한국문학의 영역을 더 넓힐 방안은 무엇인지, 이 밖에도 문학 연구자들이 계속 다루어야 할 부분은 적지 않다.(2) 한국문학사를 보다 깊고 곧게 세우기 위한 길은 늘 우리 앞에 끝없이 펼쳐져 있다. 그 길에 이르는 과정은 숱하게 있겠지만 텍스트 자체를 통한 탐색보다 나은 방법은 없다는 게 필자의 지론이다. 지금까지 만들어졌고 앞으로 만들어질 수많은 문학 작품을 제대로 분석하고 알리기 위한 노력은 의식 있는 문학 연구자들의 무거운 임무요 빛나는 특권이다.(3) 제1부 한국 개척소설 연구 Ⅰ. 서론 1. 연구 목적 이 글은 1940년대 전반기의 소위 ‘개척소설(開拓小說)<일면 생산소설(生産小說)>’이라 불리는 작품들의 양상을 살펴 한민족 문학사에 어떻게 자리매김을 할 것인가에 목적을 둔다. 한민족 문학사에서 개척소설이 차지하는 자리는 특이하다. 일제 식민지하라는 특수한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생겨난 소설의 유형이라는 점이 그렇고, 1945년 해방이 되자 그 성격상 저절로 사라지게 되어 고작 5년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에 발표된 작품들에 한정된다는 점이 그러하다.(11) “불과 30년에도 미치지 못하는 해방 전 한국의 근대문학의 역사를 1920년대, 1930년대로 구별하는 것을 보면 다소 어지러운 느낌을 갖게 되나, 이러한 시대 구분을 따른다면, 1940년 전후부터 1945년 8월 15일에 이르는 약 5년간은 일반적으로 암흑기라 불리는 시기에 해당한다”(사에구사 도시카쓰(三枝壽勝), 󰡔��한국문학 연구󰡕��, 심원섭 역, 베틀․북, 2000, 530쪽-각주1)는 일본인 학(11)자 사에구사 도시카쓰(三枝壽勝)의 말은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 이것은 우리 문학 논자들이 지나칠 정도로 세세한 시대 구분을 통해 문학작품을 비교 분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1940년 초 일제의 암흑정치 아래서 일체의 현실 비판적인 작품창작이 금지되자 그 탈출구로 등장하게”(국어국문학편찬위원회, 󰡔��국어국문학자료사전 상권󰡕��, 한국사전연구사, 2000, 154쪽-각주2)된 개척소설에 대한 연구는 왜 그렇게 부진한가 하는 의아심을 드러낸 것으로도 생각된다. 이에 필자는 “이 시기의 문학(1940년대 전반기 소설: 필자 주)이 식민지시대 근대문학 전체와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기반 위에 성립된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려고 했다”(사에구사 도시카쓰(三枝壽勝), 앞의 책, 530쪽-각주3)는 이야기를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우리 문학의 공백 상태라는 이 시기를 가장 많이 담아내고 있는 개척소설에 대한 관심과 주의는 단절된 한민족 문학사를 이어준다는 의미에서도 절실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12) 시대사적인 편차(偏差)를 보면서 일제의 계산과 그런 역사가 빚어낸 상황 안에서 우리 혼을 갖고 있는 작가가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눈여겨보고 민족사적인 연구 가치를 찾는 작업은 중요하다. 당시의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고 선행 연구가 부족하다는 것이 더 이상 문학 연구자에게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에도 몇 개 되지 않는 그 자료들마저 방치된 채 소실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12) 󰡔��한국소설사󰡕��(김동욱․이재선 編를, 󰡔��한국소설사󰡕��, 현대문학, 1990-각주4)를 보면 근대소설 편으로 신소설과 1920년대 소설, 1930년대 소설을 논의하고, 현대소설 편으로 1945~1960년대 소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글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1940년대 전반기만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연구자들은 고대와 현대의 한국소설의 유기적인 연계화의 고리를 마련하는 단서가 이 책(12)으로써 가능해졌다고 밝혀 놓고 있다.(13) 그러나 1940년대 전반기 문학 연구를 제외한 상태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 이 시기에도 수많은 문학 작품이 씌어졌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문학을 있는 그대로 조명하고 또 지속과 변혁을 가로막는 요인은 여러 면에서 나타난다.(13) 1940년대 전반기의 한국문학을 다루어 보고자 하는 데는 당시 한민족이 일제의 등쌀을 못 이겨 쫓겨간 만주라는 공간을 빠뜨릴 수 없다. 그런 만큼 작품의 주요 배경이 만주 미개지(未開地)이고 만주 지방의 개척민 생활을 그렸으며 대개 1940년대 초기에 나온 개척소설은 적절한 논의거리가 된다. 물론 만주 지역으로의 이주만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라 하와이나 멕시코, 러시아 등지로 이민을 간 이들도 있고 이들의 생활상을 역사적 사회적 관점에서 고찰한 글도 있지만 가장 많이 이민을 떠난 곳은 역시 만주 쪽이기 때문에 개척소설의 의의는 더 크다고 할 것이다. 특히 일제 식민지정책의 희생물로서 전(全)민족의 8할 이상을 차지하는 힘없고 무지한 우리 농민들이 많이 등장하여 민족의 삶을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더 무엇보다 적절한 텍스트가 개척소설이라고 본다.(13)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작가군(群)들 속에서 재만조선인문학(在滿朝鮮人文學)을 논할 때 누구보다 많은 관심을 받는 안수길과 이기영의 작품들 중에 개척소설의 계열에 들어가는 게 있고, 또한 재만조선인문학을 살핌에(13) 있어 빠뜨릴 수 없는 󰡔��싹트는 대지(大地)󰡕��에 실린 무려 7편의 작품도 개척소설의 유형에 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한국의 개척소설들만을 따로 모아 전반적인 양상을 비추어 보는 작업이 없었다는 것은 한국문학 연구의 맹점(盲點)이다.(14) 1940년대 전반기의 침체된 문학사를 새롭게 조명할 기초적인 단서를 찾을 수 있는 텃밭이 개척소설이라는 인식을 통해, 이 일련(一連)의 소설들이 바르게 앉을 밑자리를 규명(糾明)하는 일은 재만조선인문학을 포함한 민족문학 전체를 되짚어보는 계기도 될 것이다.(14) 2. 연구사 검토 일정한 시기(1940년대 전반기)에 일정한 작가들(재만 조선인 작가들과 몇몇 작가들)에 의해 씌어진 일정한 작품들(한정된 작품들)-실제로 다른 데서 그런 작품을 찾기는 쉽지 않다-을 개척소설이라고 갈래지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지적한 대로 소위 개척소설이라고 이름 붙여진 작품들만을 따로 모아 살피려는 어떤 시도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개척소설에 대한 전체적인 연구의 소홀함은 우리 문학사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의 일면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한국문학사는 문제적이거나 예외적인 작가에 대한 연구에 치중되어 왔으며, 여타의 군소(群小)작가에 대해서는 소홀히 취급해 왔다는 점이 특징”(김용성․우한용 공편, 󰡔��한국근대작가연구󰡕��, 삼지원, 2001, 382쪽-각주9)이라는 이야기는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개척소설에 대한 총체적인 연구는 연구대상이 지극(14)히 한정되어 있는 한국소설사의 폭을 넓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 개척소설이라고 불리는 소설작품들이 문학을 논하는 이들의 관심 밖에 벗어나 있었다는 데에서 그 가장 큰 원인을 찾을 수 있겠다. 이런 현상은 특히 만주의 우리 문학에 대한 연구가 오래 전부터 미흡하였다는 데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는데, 그 당시 만주에 있던 조선인 문단(文壇)은 경성(京城)을 중심으로 한 문단으로부터 소외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런 중에도 개척소설에 가장 접근했다고 생각되는 기존의 연구를 찾아보면, 재만조선인작품집 󰡔��싹트는 대지(大地)󰡕��에 대한 고(考)가 보이고, 개별적 작가론을 다루는 과정에서(물론 개척소설이라는 점은 고려하지 않고) 해당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취급하고 있는 정도이다.(15) 이들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면, 첫째, 문학사적인 측면에서 살펴본 연구가 있다.(15) 조남철은 일제하의 한국 농민문학이 갖는 의의가 크다고 보고 크게 세 시기(時期)로 나누어 고찰한 결과, 이 논문에서 다루는 시기와 가장 일치하는 1939~1945년을 제2기로 보고 체제(體制) 지향적인 생산문학으로서의 농민문학이 주창(主唱)되었다고 본다. 오양호 역시 문학사적인 관점에 입각하여 간도문학(間島文學)을 연구하면서 우리의 1940년대 현대문학사가 안고 있는 문제를 여기서 해결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이명우는 193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한국 농민소설을 사적(史的)으로 연구하여 한국 농민소설이 변화, 발전되어 온 과정과 농민소설이 지닌 특성 및 그 한계를 밝히고 문학서적 의의를 드러내 보고자 했다. 둘째, 전개 양상을 중심으로 접근한 연구가 있다. 조정래는 개척소설의 넓은 범주에 속하는 만주소설이 가지는 특수한 모순적 양상응ㄹ 지적하고 있는 바, 만주에서 문단을 탄생시키려면 협화(協和)이념과 같은 일제의 정책 홍보에 따르면서 그 속에는 조선인 특유의 문학적 영역을 가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개척소설에 대한 사전적(辭典的)이고 일반적인 의미와도 서로 맥이 통하고 있다. 이정숙은 간도 이주(移住) 작품을 중심으로 일본 제국주의 아래에서의 실향소설(失鄕小說)의 전개 양상을 살펴 궁국적 의미를 찾아보았는데 이 논문에서 관심을 두는 만주 개척 이주민에 대하여는 고향과 향수가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정신적 받침대라고 보았다. 신희교는 암흑기 소설을 어용소설(御用小說)의 유형과 순수지향 소설의 유형으로 크게 나누고 어용소설의 양상으로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다룬 소설․징병(徵兵)을 독려(督勵)한 소설․전시하(戰時下)의 생활 양식을 격려(激勵)한 소설․개척민의 삶을 다룬 소설로 나누고 있다. 즉 개척소설 계(16)열에 속하는 소설을 모조리 어용소설에 집어넣고 있는 것인 바 이것은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친 시각이라고 생각된다. 셋째, 민족의 삶을 태대로 한 연구가 있다. 유관지는 해방 이전 만주에서의 민족 수난 체험과 한국 현대문학과의 관계를 살폈다는 점을 살 수 있지만 자기 논문의 결론에서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이 탐색적(exoploratory)인 연구로서 심층적 분석을 하지 못한 문제점을 나타내고 있다. 김종호는 일제가 강제로 점령한 시기의 만주 유이민(流移民)소설을 대상으로 소설 속에 나타난 작가의 현실인식의 내면적 논리와 예술적 형상화의 방식을 밝히고 있다. 만주 유이민 소설은 항일 투쟁 소설의 가능성을 열고 민족의 생존 방식에 대한 문제를 내세워 보였다는 등의 의의를 가진다고 보았는데 개척소설을 가려 정하는 과정에서 이 글과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개척소설의 유형에 대한 재고(再考)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넷째, 개척소설의 개념으로 고찰한 면은 거의 보이지 않고 농민소설(農民小說)의 관점에서 다루어 보려고 한 연구들이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이 글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방향과는 다르다.(17) 3. 연구 범위와 방법 개척소설을 논함에 있어 중요한 것이 식민(植民)의식의 불식(拂拭)이다. 일제가 의도적으로 왜곡시켰던 한국의 정신적 전통을 바로잡는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식민성 사고방식 가운데 하나로 한국인이, 한국이나 한국문화를 스스로 열등시하는 그런 자조 자멸의 사고방식을 들 수가 있다. 이 같은 사고방식은 멀리 삼국시대 이후부터 있어 온 사대주의에 뿌리를 박고 있다 하겠으나, 이러한 의식을 철저히 배제한 다음에 접근해야 할 성질의 것이다. 그리고 개척소설에 대한 연구는 기존의 농민소설 연구나 실향소설(失鄕小說)연구와는 분명히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개척소설에 합당한 제 값을 매길 수 있다. 특히 개척소설 연구의 범위를 정함에 있어서도 농민소설이나 실향소설과 중복되는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확실하게 구분 지어 놓지 않은 상태에서의 접근은 오히려 개척소설의 정체성(正體性)을 흐려 놓는 결과를 낳을 우려가 있다. 즉, 많은 선행 연구들이 개척소설의 양상과 특질을 돌아보지 않은 상태에서 개척소설을 농민소설이나 실향소설 등과 같은 연장선상에 놓고 고찰하고 있거나 아예 처음부터 선입견을 가진 상태(가령, 친일 기관지에 발표된 소설이라든지 대개 무명작가의 소설이라든지 하는)에서 논하는 실정이기 때문에 그릇된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개척소설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개척소설을 살필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개척소설은 전혀 다르게 논의될 수 있다는 것은 기존의 연구들에서 어렵지 않게(19) 알아낼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은 소설작품은 일반적인 개념으로 보아 어떤 다른 문학 장르보다도 시대 현실을 가장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야기한다는 전제(前提) 밑에서 작품을 살펴보기로 하겠으며, 기존의 재만조선인문학을 논의하는 이들이 이쪽 분야의 특성상 많은 비중을 두는 문학 외적인 요소와 내적인 면을 아우르면서 다루어 볼 생각이다.(20) 개척소설은 아주 미묘한 시대 상황 속에서 태동(胎動)한 문학이기 때문에 작품 외적인 요소를 참고하면서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볼 것이 아니라 어떻게 포장되어 전달되어지고 있는가를 잘 알아내는 안목이 절실히 요구된다. 또, 분석이란 통일된 전체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무의미하며, 아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자세히 읽기는 겹친 뜻을 가려내는 일만이 아니라 자세히 공들여 읽을 만한 가치가 있음을 전제하고 그 전제를 공들여 확인하는 작업(이상섭, 「<뜻겹침>의 일곱 유형」, 문학사상, 1988.1, 178쪽-각주15)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것이다. 개척소설이 많이 나온 만주 지역에서의 역사적 상황을 참고하는 일도 중요하다.(20) 개척소설을 연구함에 있어서는 일제의 주도하에 세워진 만주국(滿洲國) 또한 상당히 큰 비중을 두게 된다. 일제의 만주에서의 철도 부설권과 탄광 경영권, 그리고 당시 만주국을 형성하고 있던 다섯 민족에 대한 일제의 오족협화(五族協和) 주창 등은 개척소설의 소재(素材)와 일치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이 이 글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사안(事案)이다. 즉, 자칫하면 모든 개척소설이 일제의 국책(國策)에 영합하는 것처럼 보일 소지가 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지만 실제 작품의 내면을 꼼꼼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 논의에서 밝혀질 것이다.(21) 그리고 앞에서부터 이미 그렇게 써 왔지만 이 글에서는 ‘생산소설(生産小說)’이란 이름으로 적지 않고 ‘開拓小說)’ 한 가지로 통일하여 표기(表記)하고자 한다. 개척소설의 명칭에 대한 논의는 제2장의 앞부분에서 좀더 자세히 다뤄지게 되겠지만 앞으로 개척소설 연구자들이 계속해서 비교 검토하는 과정을 통해 더 적의한 이름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주요 대상 텍스트로는 기존의 논자들이 통상적으로 소위 개척소설의 유형에 넣고 있거나 스스로 개척소설이라고 밝히고 있는 작품들-이기영(李箕永)의 󰡔��신개지(新開地)󰡕��․󰡔��광산촌(鑛山村)󰡕��, 안수길(安壽吉)의 「목축기(牧畜記)」․「원각촌(圓覺村)」, 정인택(鄭人澤)의 「검은 흙과 흰 얼굴」, 윤백남(尹白南)의 「벌통」, 이석징(李石澄)의 「도전(挑戰)」, 신서야(申曙野)의 「피와 흙」, 송산실(松山實)의 「한등(寒燈)」, 그리고 당시 만주에서 창작활동을 하던 작가들의 7인 작품집 󰡔��싹트는 대지(大地)󰡕��에 실려 있는 김창걸(金昌傑)의 「암야(暗夜)」, 박영준(박영준(朴榮濬)의 「밀림(密林)의 여인(女人)」, 안수길의 「새벽」, 신서야의 「추석(秋夕)」, 한찬숙(韓贊淑)의 「초원(草原)」, 현경준(玄卿駿)의 「유맹(流氓」, 황건(黃健)의 「제화(祭火)」 등을 삼고자 한다.(22) Ⅱ. 개척소설의 개념과 형성 배경 1. 개척소설(생산소설) 1) 개척소설 이기영(李箕永)이 「대지(大地)의 아들󰡕��을 연재(<조선일보>(1939. 10. 12~1940. 6. 1)-각주17)할 때 “만주 개척민 소설”이란 제목이 함께 붙어 나왔다. 흔히 만주국(滿洲國)이 세워지기 이전에는 이민(移民), 선구(先驅) 개척민(開拓民)이라고 하고, 세워진 이후에는 개척민이라는 용어를 썼다. 그리고 󰡔��만선일보(滿鮮日報)󰡕��를 보면 여러 지면(紙面)에서 ‘개척’이란 말이 수도 없이 나오고 있다. 또 김오성(金午星)이 <국민문학(國民文學)>에 ‘재만조선인작품집(在滿朝鮮人作品集) 󰡔��싹트는 대지(大地)󰡕��를 평(評)함’이라는 글을 쓸 때 제목을 ‘조선(朝鮮)의 개척문학(開拓文學)’이라고 붙여 놓고 있다. 이 평론 속에는 “만주(滿洲)에는 어느 기성문화(旣成文化)의 지대(地帶)에서 찾어볼 수 없는 생산적(生産的)인 개척정신(開拓精神)이 날뛰고 있으며”(김오성, 앞의 책(󰡔��국민문학󰡕��, 1942. 3-인용자 주), 18쪽-각주18)라는 대목이(23) 나온다. 과연 그러했는가를 따지기 앞서 이런 사고(思考)의 바탕 위에서 살펴본 󰡔��싹트는 대지(大地)󰡕��였기에 ‘개척문학(開拓文學)’이란 용어를 사용했을 것이다.(24) 여기서 우리는 󰡔��싹트는 대지(大地)󰡕��의 「서(序)」에 나오는 염상섭(廉尙燮)의 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염상섭은 󰡔��싹트는 대지(大地)󰡕��에 실린 작품들을 “일망무애(一望無涯)의 황막(荒漠)한 고량(高粱)바테서 진흙덩이를 후벼파고 도다나온 개척민(開拓民)의 문학(文學)”이라고 지극히 칭찬하면서도 바로 다음 글에서 “개척(開拓)의 문학(文學)이라하야 자비(自卑)하거나 모멸(侮蔑)을 느지는 안흘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염상섭 스스로도 개척문학이라는 명칭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염상섭은 또 안수길의 첫 단편집 󰡔��북원(北原)󰡕��에 실은 서문(序文)에서 이런 글을 남기고 있다. “금후(今後) 만주(滿洲)에서 우리의 손으로 개척민문학(開拓民文學) 내지는 농민문학(農民文學)이 생성(生成)한다면”라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여기서 개척소설과 농민소설을 구별지어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주를 지역적 배경으로 삼은 소설들은 토지 개척에 그 주된 주제를 맞추고 있다는 것은 제3장의 작품의 분석을 통해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 또 하나 유념해야 할 부분이 있다. 󰡔��만선일보󰡕��에 실린 개척 가사 현상 모집(開拓歌詞懸賞募集)의 요항(要項)이 그것이다. “가사(歌詞)는 5절 이내(五節以內)로 하되 개척(開拓)의 정신(精神)을 고양 고무(高揚鼓舞)하고 겸(兼)하야 희망(希望)과 안거(安居) 낙업(樂業)의 명랑성(明朗性)이 있음을 요(要)함”(만선일보, 1941. 12. 21-각주23)이라는 대목이 눈에 띈다.(25) 이것은 “위의 글(개척 가사 현상 모집 요항: 필자 주)에서 우리들의 눈을 끄는 바는 ‘개척(開拓)’과 ‘식량 증산(食糧增産)’을 강조하는 자리에서 ‘희망(希望)’과 ‘안거(安居) 낙업(樂業)’ 운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어휘의 나열이야말로 중일전쟁(中日戰爭)에 이은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의 발발로 말미암아 더욱 급박(急迫)해진 국내(國內) 사정(事情)을 호도(糊塗)하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다고 보아 무방(無妨)할 듯싶다”(채훈, 앞의 책(󰡔��일제강점기 재만한국문학연구󰡕��, 깊은샘, 1990-인용자 주), 163쪽-각주24)라는 지적처럼, 개척이니 생산이니 하는 말은 일제가 수탈(收奪)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26) 2) 생산소설 ‘생산소설’이란 말은 임화(林和)의 「생산소설론(生産小說論)」(인문평론, 1940.4)에 처음 나타난다. 임화는 여기서 “소설의 제재(題材)로서의 ‘생산(生産’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인간의 현실세계를 소비와 생산의 이원적(二元的) 구조로 파악하여, 국가, 국책(國策)이라는 전제(前提)아래 생산소설(生産小說)의 기능을 설명한다. 그리하여 그는 생산소설을 통해 평면적 수준의 리얼리즘(realism)을 입체적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주장하고”(조남철, 앞의 논문(「일제하 한국농민소설 연구」, 연세대 박사논문, 1988-인용자 주), 135쪽-각주25) 있다. 또한 임화는 사회적 관계 밑에서, 즉 국책이라든가 전쟁 따위의 정치적 사실 내지 정치적 기구와의 관계 밑에서의 생산을 중요시하며, 이를 위해 생산소설을 주장한다. 즉, 그가 주장하는 ‘생산소설’이란 “전쟁문학(戰爭文學) 또는 총후문학(銃後文學)으로서의 농민문학을 의미”(조남철, 앞의 논문, 136쪽-각주26)한다고 볼 수 있다.(26) 2. 개척소설의 형성 배경 일제 식민지정치의 혹독함은 1940년에 최고조에 이른다. 특히 조선농촌에 대한 수탈은 일본 군대의 전투력을 유지하고 작전을 지원하기 위한 보금∙회수∙교통∙위생∙건설 등의 일체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조선 전체를 기지화(基地化)하려는 계획된 책략(策略)이었다.(28) 역사적으로 볼 때 검열제도는 15세기 중엽에 독일 교회에서 카톨릭 승정(僧正)에 의한 인쇄물 통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후 정치 집권자의 통제 수단으로 내려오다가 폐지된 구시대의 유물이다. 일제는 오래 전 사라진 이 제도를 식민 조선에 다시 악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일제 검열을 그래도 어느 정도 적게 받은 만주를 중심으로 태동한 개척소설은 망명문학(亡命文學)의 성격을 띠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반도에서는 극히 소수의 문인을 빼고는 작품 활동이 금지된 상황 속에서 위에 말한 것처럼 마지막 보루이던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에 이어 <문장>∙<인문평론>까지 폐간되었다. 이런 점을 놓고 볼 때 만주의 망명문단(文壇)에 대한 평가는 지금보다 더 새롭게 이루어져야 마땅하다.(35) 개척소설의 등장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개척소설이 속해 있는 재만 조선인 소설문학의 풍토(風土)에 대한 선행 지식(先行知識)이 필요하다. 우선 당시의 정치 사회 경제적 상황과 대다수 작가들의 의식 세계와의 차이점을 들 수 있다. 재만 조선인들은 그야말로 ‘미개척지(未開拓地)’이고 ‘비생산적(非生産的)’인 척박(瘠薄)한 그 곳 땅에서 악착같이 살아가기 위해 피땀을 쏟았다. 그러한 시대 현실을 어느 계층보다 잘 꿰뚫어 볼 수 있었던 작가들의 고뇌와 사명의식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들 중에는 김창걸처럼 붓을 꺾거나 아니면 친일(親日)로 나아가기도 했지만 그래도 대다수의 작가들은 동포들의 정서(情緖)와 의지를 나타내고 드높이는 길을 걸었으며 특히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는데 있어 개척소설이 한몫을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36) 개척소설을 살피는 데 있어 절 때 빠뜨릴 수 없는 자료가 조석간(朝夕刊) 각 8면씩 발간되었던 󰡔��만선일보(滿鮮日報)󰡕��이다.(36) 필자가 볼 때 󰡔��만선일보󰡕��는 개척과 생산의 사회적 여건을 조성하려는 일제 정책의 틈바구니에서 국내 작품 활동이 금지된 우리 작가들이 겉으로 일제에 얹혀 있는 척하면서 실제 안으로는 우리 것을 살리기 위한 숨통 틔우기의 지면(紙面)이었다는 이중적인 잣대를 댈 수 있겠다.(39) 3. 개척소설과 친일소설 이 글에서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개척소설은 친일소설과의 변별(辨別)을 통해 보다 그 주제와 서사적 특징이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두 계열의 소설은 실제 아주 다르면서도 작품의 소재(素材)라든지 그 작가를 보면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 자칫 혼동을 줄 소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39) 친일문학은 개척소설 태동 시기와 거의 맞물리는 1940년을 전후하여 싹트기 시작했다. 중일전쟁(中日戰爭)을 전후하면서 싹튼 전쟁문학, 다시 그 후의 총후의식(銃後意識)을 강조한 애국문학, 그리고 40년대 전반의 국민문학(國民文學), 그 후의 결전문학(決戰文學) 등 일련의 문학운동 및 문학작품이 정도가 덜하고 심한 차이는 있을지언정 거개가 주체성을 상실한 일본 추종의 문학이었다.(40) 친일문학은 일본에 협력하는 문학이며 굴욕과 수치의 문학이다. 친일 작가는 역사를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을 지니지 못한 채 조선이 영원히 일본의 식민지로 살아갈 것으로 착각한 사람이다. 하지만 친일 작가의 양산(量産) 뒤에는 일제의 치밀하고 혹독한 지배 체제가 있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40) 만주 개척민의 이야 담고 있어 소위 개척소설이라고 불리는 작품 중에서 적어도 이 글의 개척소설에 대한 잣대를 가지고 고찰했을 때 거리가 먼 것이 정인택(鄭人澤)의 「검은 흙과 흰 얼굴」(조광, 1942. 11)이다. 무엇보다 일제의 국책을 수행하는 조선이주협회의 부탁을 받은 주인공이 북만주의 개척민 부락인 H부락을 방문하게 되었다는 설정부터가 벌써 의도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다. 이기영(李箕永)의 「만주와 농민문학」(인문평론, 1939. 11-각주55)이라는 글을 보면 「검은 흙과 흰 얼굴」의 주인공이 만주 개척지를 견학하고 그 감상을 쓰게 된다는 상황설정과 그대로 맞아떨어지고 있다. 즉, 이기영이 만주의 농촌을 둘러보고 그 느낌을 기록한 글이 바로 「만주와 농민문학」이다. 그런데 이 두 글이 다같이 일제의 눈을 의식한 이러한 제약성 때문인지 이기영의 글 또한 상당히 문제가 많다. 말하자면, 「검은 흙과 흰 얼굴」처럼 만주의 개척지에 대한 찬양과 그 곳 조선인의 개척정신을 기리고 있다. 특히 강압에 의해 정든 조국 땅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식민지 농민의 고뇌와 만주라는 척박한 대지에서 그들이 겪어야 하는 아픔과 한을 고발하지 않는다.(41) 특히 「검은 흙과 흰 얼굴」은 작품 속에 나오는 모든 인물과 모든 기관이 하나같이 친일 양상을 띠고 있다. 철수와 혜옥은 물론 조선이주협회와 사무소가 저마다 나름대로 일제의 국책에 순응하는 태도를 취한다. 작품의 배경이 만주 미개지이면서도 철저히 일제에 부합하고 있는 「검은 흙과 흰 얼굴」은 역으로 개척소설의 양상과 유형을 알게 하는 좋은 본보기가 된다. 일제 개척 국책의 위대함과 만주 조선인 농민들의 복된 생활상에 감탄을 금치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일제 신궁(神宮)과 신사(神社)를 그리는 과정에서는 체제 지향적인 경향이 두드러진다. 조선 농촌보다도 훨씬 잘 사는 거기 농촌에 감격스러워하고 조선인 여선생이 헌신적으로 교육에 임하는 모습을 통해 너무나 큰 감명을 받는다. 만주 개척민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노골적으로 끌어 보려는 이 작품은 철저히 일제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 친일 작가 글쓰기의 한 표본으로 생각된다. 현실 비판적인 요소는 전혀 보이지 않고 일제에 의해 자행되는 횡포와 야욕을 오히려 찬양하고 부추겨 조선인의 가치 판단과 의식 자체를 혼란에 빠뜨리는 구실을 한다.(55) 윤백남(尹白南)의 「벌통」(신시대, 1945. 1)은 스스로 ‘개척소설’이라고 밝히고 있는 작품으로 일제의 개척민 정책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이다. 양성진 개척단의 광술이 어머니의 삶을 통해 개척민 생활이 살만 하다는 것을 은근히 드러낸다.(55) 이석징(李石澄)의 「도전(挑戰)」(인문평론, 1940. 10)은 생산소설론을 주창한 임화(林和)의 추천작이다. 이 글 뒤에서 살펴볼 안수길(安壽吉)의 「목축기(牧畜記)」와 마찬가지로 작품 소재가 돼지 사육이다. 그러나 「목축기」의 주인공이 활로(活路)를 찾기 위해 목축업을 하는 것과는 달리 이 소설의 주인공은 취미 반 직업 반의 마음으로 돼지를 키우게 된다.(56) <춘추(春秋)>(1943. 4)는 송산실(松山實)의 「한등(寒燈)」∙신서야(申曙野)의 「피와 흙」∙안수길의 「목축기」의 세 작품으로 ‘만주개척민 창작특집’을 꾸몄다. 이들을 모두 개척소설의 부류에 넣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목축기」를 제외한 나머지 두 작품은 친일소설로 봐야 한다.(56) 송산실의 「한등」은 박영준의 「밀림의 여인」에서 일제와 대립되는 공산비(共産匪)를 나쁜 세력으로 몰아붙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적(匪賊)의 습(56)격을 받아 ‘왕청현’ 부락이 폐허가 될뿐더러 주인공이 부모마저 잃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유언대로 부락재건에 나선다는 상황은 분명히 어용(御用)으로 보인다. 신서야의 「피와 흙」은 만주국이 세워지기 전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도망치던 중국군 패잔병들이 국자가(國子街) 북방의 고려촌(高麗村)을 침범하여 심한 횡포를 부린다는 이야기이다. 일본과 중국의 세(勢)싸움 때문에 조선인이 해를 입는 이 소설은 일제가 주도하는 만주국을 찬양하는 것으로 보아 친일로 기울고 있다. 중국군에 의해 주인공의 아버지를 비롯한 수많은 조선인이 죽고 집은 불타 완전히 폐허가 된 고려촌이 만주국 건설로 인해 예전보다 더 잘 살게 되었다는 소리는 시국적(時局的)인 경향을 띤다.(57) 이상 살펴본 소설들은 한 마디로 개척소설이 아니다. 그러함에도 이 작품들을 개척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이 글에서 논의의 대상으로 삼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이 소설들을 개척소설의 계열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당위성을 제시함과 동시에 앞으로 살펴볼 여러 개척소설들의 정체성을 보다 명쾌하게 밝히기 위함에서다.(57) Ⅲ. 개척소설의 주제와 서사 특징 지금까지 한국 개척소설에 대해서는 사전적(辭典的)인 의미에서 조금씩 언급되었거나 극히 부분적인 접근이 있을 뿐 일련의 개척소설들을 모아 그 주제와 서사 특징을 구체적으로 총체적으로 밝혀 놓은 게 없는 실정이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개척소설에 대한 관심 부족과 그릇된 인식, 그리고 자료들을 구하기가 대단히 어려워 연구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 1940년대 전반기에 만주에서 만들어진 개척소설이기 때문에 그 시대적인 상황이나 지역적인 한계로 인해 우리 문학 논자들이나 독자들에게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명하다. 그 결과 개척소설의 주제나 서사 특징에 대한 연구는 물론 개척소설이라고 하는 명칭이나 그 계열에 속하는 작품들에 대한 지식도 퍽 미천한 형편이다. 이런 까닭에 개척소설에 대한 연구는 처음부터 큰 벽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게 된다.(58) 개척소설에 대한 기존의 설명 중 가장 보편적인 것은 “작품의 배경이 주로 만주 미개지(未開地)나 광산촌∙어촌 등 산업촌(産業村)이어서 개척(58)소설 혹은 생산소설이라 부르게 되었다”(대부분의 국어국문학사전에 실린 개척소설의 풀이는 이렇게 되어 있다-각주74)는 것이다. 즉, 개척소설은 그 배경이 위에 언급한 것처럼 한정되어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개척소설의 주제와 서사 특징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만주 미개지나 산업촌이 아닐 경우에 대개 개척소설로 부를 없는 것이다. 그러나 또 작품 배경만 위와 같다고 하여 개척소설로 넣을 수 없을 것은 당연하다. 이런 배경의 소설은 많기 때문이다. 좀더 살펴보면 농촌을 무대로 하지만 당시 조선인 유이민(流移民)이 많았던 간도(間島) 등 만주 지방의 개척농민 생활을 그린 점에서 농민소설(農民小說)과 차이를 둘 수가 있는 것이 개척소설이다. 말하자면 농민소설과는 엄밀히 구분되는 것이 개척소설인 것이다. 그리고 당시 만주를 자기들 손아귀에 넣을 목적으로 식민지 민족인 조선인들로 하여금 만주 지방의 개척농민이 될 것을 부추긴 세력이 일제(日帝)라는 역사적 사실을 놓고 볼 때 개척소설의 양상은 더욱 뚜렷해질 것이다. 한편 어떤 개척소설은 광산촌을 비롯한 공업지대를 무대로 하고 있으나 프로 문학이나 산업소설과는 달리 노동운동을 다루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순전히 생산 의욕만을 드높이고자 하는 것이다. 일제가 조선의 물자를 수탈(收奪)하기 위해 생산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볼 때 이런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개척소설은 상당히 친일(親日)적인 색채를 나타낼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개척소설은 비록 그 소재(素材) 면에서는 그런 인상을 주고 있지만 그 이면(裏面)에는 체제 모순 폭로와 저항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양상이다. 위에서 개척소설은 순전히 생산 의욕만을 높이고자 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하는 목적은 일제 말기에 전쟁 물자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59) 특히 겉으로는 일제의 이런 국책(國策)에 얹혀 있는 것처럼 하면서 실제적으로는 당시 조선 민중의 식민지적 고뇌를 경제적 측면(이 부분을 강조한 것은 개척소설을 연구하고자 할 때 상당히 눈여겨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무론 조선인이 만주 등지로 이민을 간 배경에는 경제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측면도 있었다는 점 또한 고려해야 할 것이다-각주75)에서 다뤄 그 허위와 위악(僞惡)을 노출시키는 양상을 지닌 것이 개척소설이다.(60) 안으로는 반일의식을 지키면서 겉으로는 식민체제에 영합하는 양면적(兩面的)인 구조는 바로 개척소설이 취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양상이다.(61) 또 개척소설은 대지(大地)라는 대자연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펼쳐 나가고 있지만 자연적인 서정파소설(抒情派小說)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자연을 아름다운 풍경화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개발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척소설은 자연을 대하는 입장에서도 특이한 양상을 띠고 있는 소설이다.(61) 1. 개척(開拓) 현장의 위악성 조선인 작가들의 작품 활동에 대한 일제의 검열과 통제가 심했던 틈바구니에서 당시 만주 개척지의 고난과 궁핍상을 잘 드러낸 일련의 소설들이 있다. 안수길(安壽吉)의 「새벽」∙신서야(申曙野)의 「추석(秋夕)」∙김창걸(金昌傑)의 「암야(暗夜)」 등이 그것이다. 일들 작품들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주로 문학외적인 모순을 문학작품을 통해 고발하고 시정(是正)을 주장하는 고발문학(告發文學)과 그 궤를 같이한다. 문학사적으로 볼 때 1930년대 유럽에서 유행하던 인민전(61)선파(人民戰線派)의 반전(反戰)∙반독재(反獨裁) 사상이 식민지 체제하의 우리나라에 와서는 반제(反帝) 휴머니즘의 문학사상으로 받아들여져 현실도피 문학이 아닌 고발정신의 문학으로까지 발전하였다. 특히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전향(轉向)하는 작가가 늘어나는 추세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식의 모랄을 더 한층 중시했다는 데서 이들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조선인의 만주 이주는 국내에서의 조선 농민의 반봉건적 토지소유 형태와 정당하지 못한 토지 정책 등 일제의 계산된 수탈 정책에서 나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들은 그러한 점을 간과하는 인상을 준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이 작가들이 국내 사정에 눈을 돌리지 않았거나 민족의식이 결여되어 있지 않나 하는 의혹을 살 소지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허점일 수도 있지만 일제의 눈을 피해간다는 개척소설의 특질을 감안하면 이해가 가능하다. 현실이 고난과 궁핍을 차 있을 때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극복, 혹은 저항 의지를 품게 되기 마련이다. 저항의 어의(語義)는 본래 라틴어(pugnacertaman)에서 유래되었는데 그 의미는 저지(沮止)∙대치(對置)∙미움이다. 개척현실의 고난과 궁핍상을 이야기하는 이 일련의 개척소설에 있어 그것은 곧 일제에 대한 적대의식과 맞섬으로 귀결되어진다.(62) 1) 안수길 「새벽」<원명: 호가(胡哥)네 지팡> 간도(間島)의 망명문단(亡命文壇)에서 크게 활약해 온 안수길이 일제 암흑기인 40년대 초엽에 발표한 「벼」∙「새벽」 등과 함께 「목축기」에서도 소극적인 듯하지만 항일 저항의 빛은 역력해지고 있다고 보는 견해(이명재, 앞의 논문(「식민지시대문학의 특성연구」, 경희대 박사논문, 1983-인용자 주), 79쪽-각주78)도 있다. 즉, 「새벽」과 뒤에서 살펴볼 「목축기」는 단순히 현실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반일사상(反日思想)까지 담고 있는 것이다. 안수길의 작품들 중 공통적으로 개척민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는 「벼」∙「북향보」와 비교해보면 「새벽」에 대한 보다 명확한 접근이 가능하다. 우선 「벼」의 양상을 보면 갈등과 모순을 조선인과 일본인의 화합을 통해 해결하고자 한다. 또, 「북향보」는 일제에 의해 세워진 만주국을 찬양하는 면이 보인다. 이에 반해 「새벽」은 개인과 사회의 투쟁 양상을 띤다. 「벼」∙「북향보」는 일제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면 「새벽」은 그것을 극복한다. 바로 여기에서 개척소설로서의 「새벽」과 비개척소설로서의 「벼」∙「북향보」의 서로 다른 주제와 서사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63) 「새벽」은 ‘창복’이라는 한 어린 아이의 눈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된다. 제목 밑에 ‘어떤 청년의 수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말하자면 청년으로(63) 성장한 후에 소년 시절을 회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바 이것은 미래지향적인 극복의지와 신념이 들어 있음을 의미한다.(64) 「새벽」은 살 길을 찾아 들어간 만주 땅의 괴상한 풍습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여전히 안정된 삶을 영위하지 못하는 조선 이주민들의 실태를 ‘인질(人質)’이라는 무도(無道)한 악습을 통해 실감나게 드러내 보인다.(66) 그런데 작품 속에서 그 곳 주민들에게 가장 암적(癌的)인 존재는 일본인이나 만주인이 아니라 같은 조선인이다. 여기서도 개척소설의 한 특질을 알 수 있다. 즉,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한 인물 설정이 그것이다. 만약 조선인의 증오의 대상이 조선족이 아니라 일본족이나 일제가 내세우는 만주국 협화(協和)의 대상인 이민족(移民族)이라면 그 시대 상황을 놓고 볼 때 「새벽」의 발표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67) 오히려 지팡주인 중국인 호가(胡哥)보다도 더 동족(同族)을 괴롭히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는데 사실 이런 인간형(人間型)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런 면으로 보면 박치만은 조선인의 얼굴로 가장(假裝)한 일제이다.(67) 일반적으로 인성(人性)은 개인이 타고난 생물학적 특징과 그 개인과 관련된 제 문화적 요소가 상호 작용하는 사회화의 과정 속에 형성된다고 보(67)는데, 「새벽」에서 가장 반동적(反動的)인 인물로 묘사되는 박치만의 행위는 일제하에서 조선인이 어느 정도까지 비인간적이고 반민족적으로 변할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68) ‘왜 만주로 이주(移住)하게 되었는지 모른다는 등 문제의 심각성을 희석(稀釋)시킨 느낌이 없지 않다’(채훈, 󰡔��일제강점기 재만한국문학연구󰡕��, 깊은샘, 1990-인용자 주)는 것은 ‘일제의 검열(檢閱)을 피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못한 생각이다. 일제의 수탈과 탄압을 못 견뎌 이주한 만주 땅에서 그런 비극이 벌어졌다고 한다면 발표할 기회를 잃었을 것이다.(70) 개척소설은 당시 조선 민중의 식민지적 고뇌를 경제적 측면에서 다뤄 그 모순을 파헤친 일련의 작품을 말한다(73) 또, 한 가족이 겪는 비애와 고통은 그것이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현실과 결부되어 있고, 더 나아가서는 국권을 상실하여 삶을 보장받지 못하는 우리 민족의 현실과 관련되어 있어서(조정래, 앞의 논문(「1940년대 초기 한국농민소설 연구」, 연세대 박사논문, 1987-인용자 주), 91쪽-각주90), 「새벽」은 일제 치하 조선 개척민의 고난과 궁핍상을 표출시킨다는 의미 외에도 적지 않은 겨레얼과 저항 의지를 담아내고 있다.(76) 2) 신서야 「추석」 「추석」은 일제 당시의 거창하고 엄격한 이념의 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사소한 일상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우선 그 가치와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특히 단순한 사건과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풍자기법을 십분 활용하여 그 시대 만주 조선인의 초조와 불안정한 내면을 잘 그려내고 있으며 부조리한 현실을 드러내 비판적인 자세를 취한다는 사실에서 개척소설의 양상을 띠고 있다.(77) 또, 이 소설이 날카롭게 고발하고 있는 것은 한 해의 피땀을 수확하는 추수의 계절 추석 때 김서방이 아내를 잃는 사실이다. 이런 뛰어난 상황 설정에도 불구하고 콩트로 이야기를 처리한 것은 적지 않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물론 이것은 작가의 역량도 문제삼을 수 있겠지만 그보다도 당시의 정치 사회적 압력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생겨난 문학의 한계로 보여 진다.(78) 어디에서도 일제의 국책에 영합한다든가 일본인들을 찬양하는 면을 볼 수가 없다. 정복(正服)한 순사로 대변(代辯)되는 일본인들의 횡포와 위세를 고발하면서 힘없이 무너지며 살아가는 조선인의 처참한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지접 총칼을 들고 설치는 큰 사건이 아니라 시골 장터나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소한 일을 통해 일제로부터 당하는 조선인의 비애를 충분히 상징적으로 그래내는 작품이다.(83) 하지만 「추석」을 통해 주목할 것은 소설 기법의 힘이다. 즉, 단순 구성이며 짧은 분량(200자 원고지 35~40매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풍자 기법을 써서 일제에 항거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소설은 농민을 등장인물로 하고 있지만 농민의 모습이나 농촌의 풍습은 거의 나타나 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도 농민소설과는 엄격히 구분될 수 있다. 그러면서 또 이 글 뒤에서 살펴볼 협화 이념이나 교화 정책 등의 분위기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 대신 비판적 리얼리즘에 입각한 현실감을 맛보게 한다.(85) 이렇게 하여 일본인으로 상징되는 순사와 조선인으로 상징되는 김서방은 추석을 매개로 서로 상반된 양상을 나타낸다. 즉, 조선인에게 있어 풍족과 기쁨의 명절이어야 할 추석이 도리어 상실과 빈곤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것은 또 생산에 대한 조선과 일본의 시각이 다르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작품은 개척지 조선인의 고난과 궁핍상을 그려 일제 생산 정책의 모순과 부조리를 고발하고 있다는 데 큰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86) 3) 김창걸 「암야(暗夜)」 김창걸은 1940년 󰡔��만선일보󰡕��에서 모집한 신춘 현상 공모에 「청공(靑空)」(󰡔��만선일보󰡕��, 1940. 2. 11-각주105)이라는 소설로 뽑힌바 있다. 「청공」은 현경준(玄卿駿)의 「유맹(流氓)」처럼 일제의 국책에 부합되는 아편 문제를 다루는 주제가 좋아 당선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청공」에 비하면 「암야」는 상당히 반일(反日)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청공」이 일제 어용지(御用紙)로 알려진 󰡔��만선일보󰡕��에 의존해야 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암야」를 통해서는 당대 작가들이 가졌던 한계를 뛰어넘고자 한다.(86) 이 소설은 애정 갈등이라는 양상을 통해 당시 궁핍한 만주 개척촌의 한 단면을 고발한다. 지독한 가난은 결국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극한 상황을 몰아온다. 바로 인신매매가 그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안수길의 「새벽」과 마찬가지로 갚지 못하는 빚 대신 딸을 제공한다는 이런 설정은 당시 조선인의 삶이 얼마나 피폐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87) 이 작품은 일제에 의해 주도된 만주 개척 사업으로 인한 조선인의 아픔과 한을 잘 드러내고 있다. 빈곤의 터전으로서의 농촌은 더욱이 일제 수탈 정책의 중심이 되는 표적물로서 당시 농민의 생활상은 어느 계층보다 열악하고 참담할 수밖에 없었다.(87) 작품 속에서 온갖 악역을 맡고 있는 같은 동포인 윤주사는 일본인이 대체(代替)된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다. 드러내 놓고 일제를 비방할 수 없는 그 시대 상황이라는 점은 개척소설을 검토할 때 반드시 참고삼아야 할 사실이다. 살기 위해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찾아간 땅에서 살기 위해(기약도 없는 곳으로) 야반도주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통해 그 당시 일제에 의해 주도된 소위 개척사업의 허황됨과 개척지라는 곳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땅인가를 엿보게 한다.(91)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렇게 강인한 의욕과 태도를 나타내 보이는 것은 개척민 제1세대가 아니라 제2세대라는 사실이다. 즉, 조선인들이 갈수록 당시의 부조리한 시대를 부정하고 강력한 저항 의지를 키워가고 있었음을(실제 그렇지 못했다면 앞으로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음을) 작품을 통해 읽어낼 수 있다.(92) 개척소설 중에서도 이 작품만큼 결말이 산뜻하고 희망적인 것도 드물다.(96) 이런 결말은 앞에서 살펴본 안수길의 「새벽」과는 정반대의 상황이다. 즉 「새벽」에 나오는 복동예와 삼손은 「암야」의 주인공들인 ‘나’와 고분이처럼 도망하여 두 사람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복동예의 자살이라는 비극으로 마감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암야」는 「새벽」보다 훨씬 강한 저항 의지와 희망을 제시하는 것으로 평가된다.(96) 또 「암야」는 만주 유이민 제1세대와 제2세대를 비교 분석해 볼 수 있는 작품이라는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96) 제2세대인 명손과 고분의 저항과 의지 표출은 단순히 제1세대인 부모와 윤주사, 그리고 최영감에 대한 적개심이나 공격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곧 일제에 대한 조선인의 쌓여던 울분 토로와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으로 보아야 마땅하다.(97) 이처럼 「암야」는 일제 수탈이 심한 가난한 농촌으로부터의 탈주(脫走)라는 서사(敍事)를 통해 당시 고난과 궁핍이 낳은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강렬한 고발정신으로 확대되는 작품이다.(97) 이상으로 일제에 의해 주도(主導)되는 개척 현실의 고난과 궁핍상을 그려내고 있는 「새벽」∙「추석」∙「암야」 세 작품을 살펴보았다. 이 소설들은 일제의 감시 밑에서도 당시의 역사적 현실을 잘 그려내고 있기는 하지만 아쉬운 것은 만주국(滿洲國)이라는 테두리 속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자칫 일제가 표방하는 ‘북향건설’의 국책과 맞아떨어지는 듯한 인상을 줄 우려도 낳는다. 그러나 만주에 이주한 조선 농민의 의식과 의지를 뚜렷이 담아내는 등 개척소설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다.(97) 이 중 특출한 작품이 「새벽」이다.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 만주 조선인의 처참한 생활상을 보여주는 등 일제의 검열을 피해 가는 기법을 활용하여 개척소설의 서사 특징을 잘 알게 한다. 만주문학의 대표작으로 보아도 손(97)색이 없다.(98) 주인공 창복 일가가 경험하는 비애와 모순은 단순히 한 가족사의 수난에 머물지 않는다. 염상섭이 󰡔��싹트는 대지(大地)󰡕��의 서(序)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소설은 ‘이민수난기(移民受難記)’의 본보기로서 일제 그늘에 가려진 조선 이주민의 진솔한 삶을 당당하게 그려낸다. “인생의 진실이나 삶의 진리는 삶의 무게가 실리는 자리, 곧 삶의 심층(深層)에 있다. 그것을 캐고 보여주는 것이 문학이고 문학의 몫”(강희근, 󰡔��오늘 우리시의 표정󰡕��, 국학자료원, 2000, 276쪽) 일제 시대 조선인의 고난과 궁핍한 실상을 비판적인 눈으로 풍자하는 「추석」은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수탈로 인해 경제적인 핍박을 받는 조선인의 비애와 무능을 잘 그려낸다. 특히 ‘추석’이라는 조선 고유의 명절을 통해 시대 아픔을 한층 잘 드러내는 점이 돋보인다. 일제 현실의 모순을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과감하게 대처하는 「암야」는 만주 유이민 제1세대와 제2세대를 비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일제의 약탈로 피폐해진 개척 농촌으로부터 탈주하는 인물들을 통해 희망과 행복을 되찾고자 하는 놀라운 설정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이 일련의 개척소설은 일제에 대한 저항을 나타내는 방식이 서로 다르다. 적극적인 저항(암야)을 띠는가 하면 소극적인 저항(새벽)을 띠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소극적인 저항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가치를 낮게 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작품 내면에 함축되고 암시되는 의미가 더 깊고 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소설들은 일제의 만주국 이념에 대한 홍보를 강요하는 정치적 요구를 간접적으로 공격한다는 점에서는 뒤에서 살펴볼 협화(協和) 이(98)념의 모순을 다루는 장(章)과 유사한 성격을 띠기도 한다. 어쨌든 이 세 작품은 모두 일제에 의해 일체의 현실 비판적인 작품 활동이 금지된 상황 속에서도 만주 개척지의 고난과 궁핍상을 잘 드러내 보인 개척소설이라는 값매김을 할 수 있다.(99) 2. 낙토(樂土) 건설의 허구성 낙토 건설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되는 이런 허구성을 고발하는 작품으로 이기영(李箕永)의 󰡔��신개지(新開地)󰡕��∙「광산촌(鑛山村)」, 안수길(安壽吉)의 「원각촌(圓覺村)」 등이 있다. 이 일련의 개척소설들은 개척의 허상을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조선인 잘 살 수 있는 이상촌(理想村)을 희미하게나마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특히 낙토는 외부의 어떤 압력이나 종용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살도록 자유스럽게 내버려두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즉, 조선인의 낙토는 일제가 물러난 땅이라는 뜻을 전하면서 식민 체제하의 무력에 의해 건설되는 집단촌(集團村)이 얼마나 허울 좋은 마을인가를 비판한다.(99) 일제에 의해 주도되는 근대화는 비정상적인 문명의 유입으로 인해 도리어 조선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파괴하고 사회적인 혼란과 경제적인 궁핍만(99)을 초래한다. 금전의 위력이 더욱 커지고 농촌은 무너져 민심은 갈수록 흉흉해진다.(100) 일제의 낙토 건설 국책에 동조하는 부류와 저항하는 부류를 통해 진정한 조선인의 꿈과 희망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이 일련의 개척소설들은 인간의 영원한 낙원에 대한 모형도를 제시한다. 다만 일제의 감시를 의식한 탓에 문학적 형상화가 부족하고 주제의식 또한 완벽하지 못하다는 점이 아쉽다.(100) 1) 이기영 󰡔��신개지(新開地)󰡕�� 󰡔��신개지󰡕��는 1920년대 중반 충청남도 천안 부근의 달내골(月川里)을 배경으로 하여 철도 개통을 통한 일제 식민지적 근대화의 모순을 파헤치는 장편소설로서 <동아일보>에 연재(1938.1.14~9.8)된 작품이다.(100) 이 소설의 앞부분에서는 조선의 전통적인 생활 터전으로 번창했던 달내장터가 철도 개통에 의해 쇠잔해지는 과정을 강윤수와 김순남네 가정을 중심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절망과 함께 희미하게나마 어떤 희망을 제시해 보이려는 작가의 의도가 엿보인다.(101) 즉, 근대화 과정과 그로 인한 병폐들, 애정의 갈등 구조, 농촌의 빈궁, 대가족 제도이 불합리, 조혼의 폐단, 신영성과 구여성의 의식 구조 대비 등 당대 한국인의 일상과 심리를 상층계급의 두 가정과 하층계급의 두 가정의 결혼을 통해 드러내는(이미림, 󰡔��월북작가소설 연구󰡕��, 깊은샘, 1999, 44쪽-각주119) 복합적 서사구조가 장편소설다운 면모를(101) 지닌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강하게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소위 낙토 건설을 내세우는 일제에 의해 자행되는 식민지적 근대화로 피폐해지는 조선농촌 모습이다. 일제의 조선 착취가 어느 곳보다도 심하게 행해지는 농촌 속에서, 토지 조사 사업으로 인한 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지주, 마름과 소작인들과의 대립 관계로 파생되는 농민들의 실상이 철저히 파헤쳐진다.(102) 󰡔��신개지󰡕��와 이기영의 다른 작품 󰡔��고향󰡕��, 󰡔��봄󰡕��을 비교해 보면 개척소설(127)로서의 󰡔��신개지󰡕��의 양상이 훨씬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고향󰡕��은 농촌의 어려움에 대한 이유와 모습이 비교적 상세히 드러나고 있으나 비판의식이 결여되어 있으며 󰡔��봄󰡕��은 남에게서 전해 듣는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에 반해 󰡔��신개지󰡕��는 농촌의 궁핍과 농민의 몰락상을 안에 감추고 있다. 일제 대응방식에서도 차이가 난다. 󰡔��고향󰡕��은 조선의 풍습과 조선인의 모순을 비판하며 일제를 추앙하는 모습을 띤다. 󰡔��봄󰡕�� 또한 조선의 반상(班常)차별 의식을 드러내어 일제에 순응하고 있다. 그러나 󰡔��신개지󰡕��는 식민지 체제를 고발하고 조선 민중의 연대(連帶)를 촉한다. 이렇게 볼 때 󰡔��신개지󰡕��는 개척소설로서의 독특한 몫을 매우 잘 감당하고 있으며 󰡔��고향󰡕��처럼 일제 당시의 농촌과 농민에 대해 그저 깨우치고 가르칠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있는 등 이기영의 다른 작품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특징을 가진다.(128) 2) 안수길 「원각촌(圓覺村)」 뒤에서 살펴볼 한찬숙(韓贊淑)의 「초원(草原)」처럼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이 소설은 대륙적인 웅장한 스케일이 느껴지기도 한다. 주인공의 이름을 억세고 힘찬 기분이 드는 ‘억쇠’라고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129) 소설 속에 나오는 부정적 인물로 조선인을 등장시킨 것은 안수길이 일제 당시의 조선인의 삶의 실상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그 부조리와 모순을 지적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때문으로 풀이하는 논자도 있다.(조남철, 앞의 논문(「일제하 한국농민소설 연구」, 연세대 박사논문, 1988-인용자 주), 151쪽 참조-각주151) 그러면서 비록 이 시기가 일제에 의해 강압적인 문화정책으로 체제문학에의 강요가 아주 심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무릇 작가의 사명감은 아무리 힘든 여건 속에서라도 응당 그 시대 삶의 실체와 부조리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130) 이 작품은 북도(北道) 조선인들뿐만 아니라 남도(南道) 출신인 경상도 농민들도 입식(入植)될 것이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남녀의 삼각관계에 더 비중을 두고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겉으로 일제의 국책에 영합하는 척 하면서 내면으로는 유이민의 고뇌와 실상을 다루려는 개척소설의 서사 특징을 여기서 엿볼 수 있다.(130) 만주 이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비교적 사실적인 필치로 묘사한(조남철, 앞의 논문(「일제하 한국농민소설 연구」, 연세대 박사논문, 1988-인용자 주), 137쪽-각주152) 「원각촌」은 앞서 지적한 것처럼 작가의 의도하에 씌어진 작품답게 개척소설로서의 양상을 볼 수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원각촌」을 어용소설(御用小說)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그보다는 특히 만주에서의 고난과 시련을 이겨 나가고자 하는 의지가 주인공 억쇠의 행동을 통해 단적으로 드러난다.(130) ‘원각촌 사람이면서 원각촌사람이 아’닌 억쇠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이런 그가 그래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억쇠’라는 별호(別號)처럼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기 때문이다. 원각촌 사람들은 억쇠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는 아내 금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주민들과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살아가기 위해 같은 민족과도 등을 돌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당시의 어두운 면을 엿볼 수 있다. 억쇠는 스스로 외부와의 벽을 쌓는 것이다. 소외란 원래 싫어하여 따돌린다든지, 사이를 나쁘게 한다든지, 멀리 한다든지 하는 행위나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적인 영역을 넘어서서 사회적으로 일반화되면, 인간의 사회적 활동에 의한 산물, 곧 노동의 생산물, 사회적 제관계, 금전, 이데올로기 등이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의 활동 자체가 그 인간에게 속하지 않고 외적으로 또 강제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 된다. 억쇠를 소외감에 빠지게 하는 일(132)은 또 있다. 바로 아내 금녀 때문이다.(133) 혜룡선사는 ‘한문으로된 불경을 언문으로 번역하는사업에 착수하’게 되는데 이것은 대단한 일이다. 언문으로 번역한다는 것은 민족 얼을 기르게 하는 의미로 파악된다. 이 부분은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에 대한 저항 의지로도 생각된다. 비(134)록 한문으로 된 불경을 언문으로 뒤쳤다고 하지만 사실은 조선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일본어를 쓰게 한 데 대한 반발과 고발로 보여진다. 또‘절에서 행하든 예식절차를 고쳐 민중이 친할수있는 절차를 꾸미’기도 한다. 이것도 조선 민중을 위한 일이다. 그리고 ‘땅값이 싼 만주 그중에도 반도인이 많이사는 간도에 토지를 사놓고 농호를 �아 농사식히는 일방 포교도 하고 학교도 세’운다는 것은 민족 의식을 일깨우는 것과도 서로 통한다.(135) 원각촌은 그야말로 일제로부터 해방된 곳으로 그려진다. 만주인 지주들의 횡포도 벗어나 있다. 그 당시 조선인이라면 모두가 소원했을 이상촌이다. 같은 동포끼리 어느 누구의 억압이나 통제도 받지 않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곳, 즉 진정한 낙토를 비록 소설 속에서나마 실현시킨 작가의 소망과 의지가 퍽 돋보인다. 또, ‘어른들은 특히 부인들은 법당에 드나들어 부처님 앞에 예배함으로서 지금까지 만주들에서 갈팡질팡 갈바를 몰랐든 마음의 귀이처를 찾은 것을 기뻐하였’으니 진정 조선인의 리상촌이 형성된 것이다. 그리하여 ‘왼동리는 한덩어리가 되어 원각교리상촌건설의 희망에불타고있었다.’ 하지만 같은 민족인 한익상이 문제였다.(137) 주인공이 자살하거나 도피하거나 하는 소극적이고 비겁한 행위가 아니라 악(惡)의 화신(化身)을 가차없이 처단하는 점에서 통쾌하고 발전적이다.(139) 부부요 같은 민족인 금녀에게는 차마 어쩌지 못하는 억쇠는 사랑과 정이 넘치는 조선인의 표상이다.(140) 결국 억쇠는 금녀를 죽이지 못한다. 그리고 금녀를 말에 태우고 또다시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난다. 이들의 모습은 당시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살아야 했던 조선인의 비애와 방황을 대변해 준다. 그러나 이들이 떠나고 있는 ‘원각촌은 평화한 꿈속에 명일의평화를 꿈꾸며 곤히 잠이 들고 있었’으니 억쇠로 하여 조선 주민들은 평화로운 날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것은 핍박받는 조선인이 압제에 대해 보다 강하게 도전하고 현실을 극복할 것을 뜻한다.(140) 「원각촌」에 나오는 인물들이 일제에 대해 취하고 있는 태도는 다양하게 그려진다. 친일로 대표되는 한익상과 반일로 대표되는 혜룡대사가 큰 두 개의 축을 이루고 있으며 주인공 억쇠와 금녀는 그 중간에서 방관자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한편 생활 자세로 보면 친일과 반일의 두 세력은 모두 적극적이다. 이에 반해 억쇠는 방어적인 양상을 띠고 금녀는 피동적으로 행동한다. 그런데 친일로 대표되는 한익상응ㄹ 제거하는 것은 혜룡대사나 그를 신봉하는 원각촌 사람들이 아니다. 그것은 처음에 방관자였고 심지어 한익상과 친해지기까지 했던 억쇠이다. 그리고 억쇠가 한익상을 죽인 것은 한익(140)상이 금녀를 넘보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 또한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한 장치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원각촌」은 방관자적이고 방어적인 자세를 버리고 지금까지보다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 일제에 대항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일제 낙토 건설의 허구성을 고발하는 동시에 조선인의 이상촌을 세우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141) 3) 이기영 「광산촌(鑛山村)」 「매일신보」에 연재(1943.9.23~11.2) 되었던 「광산촌」은 농사꾼이었던 주인공 형규가 광산촌으로 들어와 광부 생활을 하는 이야기이다. 물자를 수탈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생산량을 늘리고 각종 물자를 아껴 쓰자는 일제의 홍보와 일치하는 내용을 다루는 이 소설은 친일문학으로 힐난을 받을 여지가 있지만 개척소설은 그 소재만을 놓고 평가할 성질이 아니다.(141) 그런데 형규가 광산 징용으로 인부를 모집하는 공문이 나오고 구장이 권하는 통에 자원한다는 상황 설정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친일적인 성향을 띤다. 당시 일제의 소위 광산 징용 장려정책에 부응하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되는데 이것은 개척소설의 한계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즉, 일제가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수급하기 위한 선전물로서(141)의 문학만이 검열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142) 한편 형규가 일하고 있는 이 광산에서는 증산주간이라는 것이 있다. 광부들의 경쟁심리를 불러일으켜 생산을 증대시키기 위해 매달 한 차례씩 있게 되는데, 이것은 일제의 노동 착취 수단으로 생산 실적이 좋은 단체에게는 상도 내린다. 이 증산주간에 대해 주인공은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처럼 비치지만 부수적인 역할을 하는 광부들을 통해 그것을 비판하기도 한다. 작가가 누구의 입을 빌려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는가를 주의 깊게 살펴볼 대목이다. 갈수록 창작에 대한 여건이 나빠지고 있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142) 또, 이 작품에서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이동극단이 찾아와 하는 연극 공연이다. 그 공연을 본 을남은 어머니의 사랑과 여성의 정조를 생각하는 등 많은 것을 깨닫게 된다. 특히 그 공연 내용이 일제의 국책이나 선전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전이니 산업 전사니 하는 대화를 되풀이하여 일제가 일으키는 전쟁을 선전하고 충성을 고조시키려는 것과 대비시켜 고찰해야 할 것이다.(142) 이동극단이 돌아가고 난 후 형규는 을남이를 두고 고향 농촌으로 향하고 을남이는 슬픔에 잠기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비록 형규의 탄광작업기간이 끝나 광산촌을 떠난다고는 하지만 왜 마지막 주인공을 다시 농촌으로 되돌아가게 하는지 그 내면의 의미를 잘 파악해야 한다. 작가는 식민 시대의 광산업을 일제의 전재 수행을 위한 물자 수탈로 보고 그 왜곡된 실상에 대한 비판으로 농민에로의 회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143) 형규는 ‘넉넉지못한 농가에 태여나서 겨우 국민학교를 졸업하였을뿐이’지만 ‘일터를 학교와같이 알고 나가서 광일을 하다가 집으로 도라와서는 틈틈이 공부를’ 하는 모범적인 조선 청년이다. 이처럼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유를 배우지 못한 데서 찾고 있는 것은 퍽 밝은 안목이다.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공부하여 그 어려운 시대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물론 형규는 모두 잘 살기 위한 일이라는 구호 아래 자행되는 일제 생산 정책에 잘 동조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개척소설의 서사 특징이다. 농촌 출신인 그가 광산에 근무하면서 어떻게 보고 느끼는가를 잘 읽어내는 것이 이 작품을 이해는 관건이다.(145) ‘마침 작년봄에 면에서 광산증용(鑛山徵用)으로 인부를 모집한다는 풍문이 나오고 구장이 권고하는 바람에 자원’한 형규이다. 일제의 조선 자원을 수탈하기 위한 현장에 투입된 것이다. 작가는 그것을 조선 사람이 권고하고 조선 사람이 지원한 것처럼 이야기한다. 일제의 눈을 의식한 표현이다.(146) 그런데 형규의 생각은 또 다르게 표현되고 있다. ‘자연계를 상대하야 생산에 종하기는’ 농민이나 광부나 마찬가지라고 본다....일제가 국책으로 앞세우는 생산에 대해 긍정적인 마음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얼핏 일제의 정책에 부응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단서가 달려 있다. ‘소소한 일개인의 이해를 떠나서 생각할때는’ 하는 말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경우에 한해 광부는 ‘참으로 신성한 직업이라 할수있다.’고 믿는다. 여기서 국가는 곧 일제를 말하고 개인은 조선인을 뜻한다는 사실을 알(149)게 되면 작가가 작품 속에서 드러내려고 하는 의도가 명백해진다. 이런 점이 개척소설의 주제 표출 방식이며 서사 특징이다.(150) 또한 을남이는 그 후 옥순이의 생활을 궁금하게 여기며 여자의 정조(貞操)에 대해 생각한다. 이것은 작품 속에서 상당한 분량으로 강조된다. 광산촌 이야기를 하면서도 생산에 대한 선동보다 조선인의 이런 가족애와 전통적인 정조 관념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일제에 부합하지 않고 우리 것을 지키려는 개척소설의 한 면모를 읽게 한다.(157) 곧 「광산촌」은 농사지을 땅이 없는 농민이 어쩔 수 없이 농촌을 떠나 광산촌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일제 당시 농토를 잃고 고향을 떠나는 조선인의 참상과 비애를 고발해 보인다. 조선인의 낙토는 농촌이며 낙토 건설 주체는 농민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 농민이 일제에 대해 저항하는 양상으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 「광산촌」의 한계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점이 개척문학과 프로문학의 차이를 규명하는 한 단서가 된다.(157) 원각촌의 경우 실제 조선인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상촌 건설을 제시해 보인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원각촌이라는 작은 마을은 일제 세력이 물러가고 조선인들만 모여 살아갈 수 있는 낙토를 상징한다.(158) 3. 협화(協和) 이념의 모순성 만주라는 특수한 지리적 여건 속에서 작가들이 창작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만주국의 건국 정신을 무시할 수 없는 처지였다. 따라서 만주국의 실제 주도권자인 일제가 주창하는 소위 협화 이념은 작품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다루는 소설은 이데올로기를 비롯한 복잡한 측면들이 서로 인과관계를 맺으면서 그려지게 된다. 정치 이념이 판을 칠 때 그런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이것을 잘 말해주는 작품이 한찬숙(韓贊淑)의 「초원(草原)」∙안수길(安壽吉)의 「목축기(牧畜記)」∙황건(黃健)의 「제화(祭火)」 등이다. 이 일련의 소설들은 다른 개척소설에 비해 주인공이 높은 지식이나 안목을 가졌거나 상당한 사회적 위치에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농림부에 근무하는 기사, 학교 교사, 인텔리 등이다. 이들은 어떤 이념을 소화하고 전파할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다. 즉, 일제의 협화 정책을 수행하는데 적합한 인물 유형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그 이념의 성격에 있다. 바로 일제가 내세우는 협화를 바탕에 깔고 있는 이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협화를 강조하거나 적어도 동조하는 태세를 취하게 된다. 하지만 내면에 담긴 의도는 또 다르다. 이러한 서사 특징을 가진 개척소설들이 위의 세 작품이다.(159) 1) 한찬숙 「초원(草原)」 한찬숙은 실제로 만주국 농림부 관리였는데 그의 「초원」에 등장하는 주인공 임봉익 역시 농림부에 근무하는 기사로 설정되어 있다. 그래서 더욱 실화(實話) 같은 느낌과 작가의 강한 의도가 전해진다.(160)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소설 제목이면서 주요 배경인 초원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을 올려다보며 바위에 돌을 던져 운수를 보는 돌점이나 치고 처녀의 꿈을 삭이게 하는 초원은 서정파소설(抒情派小說)에 나오는 아름다운 자연이 아니다. 어떤 낭만도 느껴지지 않는다. 바로 여기서 개척소설의 유형이 갖는 서사 특징을 알 수 있다. 초원(자연)은 그저 개발 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160) 이 작품의 애정 양상은 일반 애정소설과는 다른 각도에서 조망해야 한다. 즉, 애정담(愛情談)을 통해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적 모습을 전반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 「초원」이며 이것이 개척소설의 서사 특징 중 하나이다.(161) 실제로 이 작품은 목적의식(만주국 협화)에 치우친 나머지 표현에 있어 수준이 낮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문학적 완성도보다 만주라는 거칠고 메마른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미개한 사람들을 구제한다는 쪽을 강조하려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가 된다. 개척소설은 서정파소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는 점이 그런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몽고족들에게는 자연이 삶의 터전이지 낭만의 풍경과는 거리가 멀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축이다. 이것은 안수길의 「목축기」와 같다.(162) 여기서 일본 관동군이 만주국 4000만 이상의 이민족을 지배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서 이른바 ‘민족협화’를 내세우고 그것을 ‘오족협화(五族協和)에 의한 왕도낙토(王道樂土)의 건설로서 주창했다는 사실을 되살려야 한다. 또한 1932년 7월에 만주국협화회(滿洲國協和會)라는 관제조직을 발족시켜 민중 지배의 첨병으로 삼았다는 역사적 배경도 중요하다. 일제는 조선 개척민을 앞장 세워 몽고족을 비롯한 이민족들과의 협화를 이루게 한 후 마지막에 가서 모두를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으려는 음모를 꾸몄다. 조선인 젊은이가 몽고 처녀를 대상으로 계도(啓導)를 하고 있는 「초원」을 읽을 때 이 점에 유의해야 한다.(163) 「초원」은 단순한 이야기로만 볼 것이 아니다. 이 작품 속에는 조선족과 만주족의 관계라는 국제적 문제가 엄연히 드러나고 있다.(164) 조선 사람이 우리들(몽고인들)과 무슨 인연이 있는 것인가 하고 몽고 처녀가 반문하는 것은 일제가 만주국 5개 민족이 잘 지내며 운운 하는 것에 대한 회의(懷疑)이다.(164) 오상순의 경우 주인공 임봉익은 만주국의 정책을 실행하며 특히 조선족과 몽고족, 만주족이 화합하자는 ‘오족협화(五族協和)’를 강조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견해를 보인다.(164) 그런가 하면, 「초원」은 그 작품 경향을 따져 보면 한찬숙의 직업적 한계(그는 앞에서 말했듯 만주국 정부의 농림부 관리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를 느끼게도 하는 작품이다. 소위 개척과 생산의 고취와 홍보를 담당해야(164) 할 한찬숙은 조선인으로서 일제에만 영합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일제의 비리를 파헤칠 수도 없는 묘한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165) 임봉익이 ‘축산학교(畜産學校)를 졸업하자 대륙진출의 큰을품고 단거름에’ 들어왔던 곳이 몽고였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제가 대륙진출의 꿈을 품고 만주국을 제 손아귀에 넣으려고 했던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는 이야기다. 그 당시 일제의 지배를 받던 조선인은 곧 일본인이라고 볼 때 이것은 일본의 몽고 진출을 말한다. 한편 “봉익이가 이번에 마루도아버지를라 파일콜이라는 동리에 출장하야온것도 단순히 몽고들판에 이상한 풍경이나 보고가자는 간단한생각은아니엇다”라든가, “세상을모르고 지나가는 몽고의 미개한 민족을 지도하기위하여 자청하고나온 봉익”이라는 이야기는 개척소설로서의 면모를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 즉, 자연을 아름다운 풍경화로 보는 서정파소설과 다르고 미개한 만주 땅을 계도하고자 하는 의도를 내비치는 것이다. 또, 이국(異國)과 타향, 풍물과 정서를 탐미적(耽美的)으로 묘사하는 태도인 이그조티시즘(Exoticism)과도 구별된다. 시민계급의 적극적인 개척정신을 반영하는 일면도 없지는 않지만 흔히 낭만주의의 현실혐오가 낳은 동경으로 먼 것에의 미화(美化)로 나타나는 이른바 이국취미(異國趣味)는 이 소설에서 찾을 수 없다. 이 모든 점은 이 소설이 협화 이념에 깊이 침체(165)된 듯한 인상을 던져주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166) 임봉익의 임무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행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임봉익의 고뇌는 이해된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그런 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당시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없었던 상황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하다. 즉, “개척 농민의 선구자적 업적을 소개하고 영웅화함으로써 생산 정책을 주도하고 조선인의 농촌 이주를 장려하는 데 일조(一助)하고자 하는 의도를 엿볼 수 있”(조정래, 앞의 논문(「1940년대 초기 한국농민소설 연구」, 연세대 박사논문, 1987-인용자 주), 78쪽-각주198)는 동시에 작가로서의 고뇌를 읽을 수 있는 개척소설의 서사 특징이다.(166) 작가가 계속하여 몽고족의 미개 상태를 이야기하는 의도는 조선족의 우월감을 확인함으로써 일제로부터 받아야 하는 열등의식과 자비심(自卑心)을 덜어보려는 것이다. 일제의 협화 이념에 호응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작가의 수완으로 생각된다.(167) 몽고 처녀인 마루도가 조선 젊은이인 봉익이와 처음 손을 잡았을 때의 감정이 솔직하게 표출된다. ‘이곳 저곳들판으로 도라다니며 여름내 싸버린 쇠이나 말을 줍느라고 념이업’는 마루도와 ‘말타고 차저온 봉익이를’ 통해 역시 조선 민족의 문화가 몽고족의 그것보다 우월함을 은근히 표현하고 있다.(168) 봉익이의 마루도에 대한 계도는 약간 문제이긴 하지만 앞에서 지적한 대로 일제의 협화를 염두에 둔 설정으로 봄이 더 타당할 것이다.(168) 소설 속에 어떤 목적의식이 개입하게 되면 자칫 무미건조해지거나 사상성이 짙은 경향으로 흐르기 쉽다. 이 작품은 어쩔 수 없이 그런 요소를 안고 있다. 그래도 이런 점을 감쇄시키는 것은 마루도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자기 민족의 개화보다도 봉익을 향한 사랑의 감정에 더 사로잡혀 있음으로써 소설로서의 재미를 보태주고 있는 것이다.(169) 자기들의 정신적 지주로 군림하는 ‘활불만 맛나면 벌벌고 말한마디 변변히 건네지도 못하는’ 몽고사람의 하나인 마루도가 보는 봉익은 ‘무어든지 이곳백성들을 위하여 이익이 되고 행복이되는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는 아주 멋있고 훌륭한 인물로 비치고 있다. 그것은 조선의 문화가 몽고에 비해 우월하다는 바탕을 깔고 있는 경배요 애정이다. 그런데 사실 각 사회 문화는 그 문화 고유의 특성과 가치를 가지고 있어서 각 문화가 지니는 의미의 차이는 상대적이므로 문화간의 우열을 비교할 수는 없다. 객관적인 안목에서 볼 때 각 사회의 문화는 그 문화 고유의 특성과 가치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는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의 다양성과 특수성을 고려할 때 한 사회의 문화는 다른 사회의 기준에 의해 평가될 수 없다. 이 작품의 작은 흠은 이런 문화의 속성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170) 아버지와 남동생을 두고 사랑하는 봉익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나는 마루도는 자신이 살고 있는 ‘파일콜서’ ‘삼백리는 넘는곳’인 ‘흑산투지’ 가려고 한다. 게다가 그 ‘흑산투는 소련의 접경이요 동쪽의 큰길로 그냥처저가면 삼하(三河)지방’인 것으로 되어 있다. 몽고의 개화뿐만 아니라 소련까지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이것은 재차 지적한 것처럼 만주국 다섯 나라의 협화를 부르짖는 일본의 구호와도 맥이 통하고 있어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꼼꼼히 읽어보면 작품의 어느 부분에도 일제에 영합(迎合)하려는 면은 띄지 않는다.(171) 마루도가 봉익을 찾아가는 이러한 결말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관(一貫)되게 조선인의 우월감을 밑바탕에 깔고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두 민족간의 협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런 미묘한 점이 개척소설을 읽을 때 가장 조심해야 할 문제이다.(172) 임봉익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는 마루도와 그녀의 아버지는 조선민족과 친밀한 관계를 원한다. 만주국이 일제의 계획에 의해 그들 손에 넘어가게 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인과 몽고인의 관계는 우호적이었다. 물론 작품 속에서 임봉익(조선인)이 마루도를 비롯한 현지인들(몽고인)에 대해 우월감을 갖는다든지 사랑보다 시혜(施惠)를 강조하는 등 소설로서의 재미를 반감시키는 약점은 감수(甘受)해야 할 것이다.(172) 「초원」은 조선족과 만주족의 협화라는 명목을 통한 일제의 만주국 지배야욕을 예리하게 파헤치고 있다는데 그 가치와 의의를 둘 수 있다. 만주 세력을 상징하는 활불(活佛)과 조선 세력을 상징하는 임봉익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몽고 처녀 마루도의 심리와 선택 의지를 통해 이야기는 전개된다. 특히 만주족에게 살아 있는 부처로 추앙받는 활불의 부정적인 모습을 드러내어 조선족의 위상을 높이는 효과를 얻어낸다. 일제의 국책인 만주국 오족협화(五族協和)를 임봉익과 마루도라는 두(172) 젊은이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 이 작품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상당히 친일적인 양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개척소설만이 지니고 있는 서사 특징이다.(173) 2) 안수길 「목축기(牧畜記)」 「목축기」는 그 시간적 배경이 1940년 가을부터 같은 해 겨울까지이며 공간적 배경은 이른바 ‘목축지정현’인 ‘00현’의 와우산(臥牛山)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깐 개척소설이 많이 쓰여지기 시작한 시기가 이 작품 속 시기이며 역시 개척소설의 주요 배경인 만주 개척지를 그리고 있고 일제의 수탈을 위한 목축업이 주된 사업으로 설정되어 있는 셈이다.(173) 찬호가 선생으로서 학생들로부터 ‘존경이나 흠앙을’ 얻지 못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학생들은 ‘묵묵히 괭이와 호미로 땅을 파는’ 일을 좋게 여기지 않는다. 이런 곳에서 찬호의 꿈은 당연히 좌절될 수밖에 없다. 또, ‘만주국의 교육 방침’에 대해서도 모두들 부정적으로 본다. 이 부분은 상당히 역설적이고 반어적이다. 주인공 찬호는 만주국을 찬양하는 입장에 서 있고 소위 교화되어야 할 학생들은 도리어 개척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리고 이런 사실에 대해 주인공은 퍽 마음이 아프다는 식이다. 겉으로는 분명히 일제의 만주국 협화 정책에 영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이 대목은 찬호가 학교를 그만 두고 개척민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과정을 알게 하는 부분이다. 만주국에 대해서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어른도 마찬가지 반응을 나타낸다. 일제는 조선인 가운데 지식인을 특히 활용하고자 했는데 그들이 이용한 교사가 개척지에서 교육자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실패를 하고 말았다는 것은 일제 국책의 허위에 대한 풍자와 비판이다.(177) 오로지 가축 키우는 일에만 열중인 로우숭은 ‘만주국이 건설된 지 8개년이 된 오늘에도 그대로 옛날 세상인 것으로만 여’길 뿐만 아니라 ‘도무지 그런 것을 알려 들지 않’는 사람이다. 일제의 강요나 회유를 무시해 버리는 태도로 생각할 수 있다. 그가 염두에 두지 않는 만주국은 곧 일제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177) 로우숭은 작가가 시대에 대응하여 드러내고 싶어하는 인물로 생각된다. 이것은 작품의 끝에 가서 로우숭이 범을 죽이기 위해 산으로 떠나는 장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178) 기우는 돼지를 산짐승에게 빼앗긴다는 내용의 소설로 안회남이 쓴 「늑대」(조광, 1943년. 8)가 있다. 보현이네 집의 돼지를 늑대가 물어 가는데 그 원인이 허술한 돼지우리로 돼 있다. 말하자면 사람은 부지런해야 한다는 일종의 근로소설(勤勞小說)이다. 「목축기」와 비교해 볼 때 이 소설은 시대적 고민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에 반해 「목축기」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개척소설이다. 돼지를 잃은 조선 개척민들은 두 번 다시는 당하지 않을 결심을 한다. 바로 ‘파수 보기’가 그것이다.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할 수 없다는 당시 조선 사람들의 분노(178)와 의지가 표출되는 대목이다. 더 약탈당하기 전에 우리 것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드러나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하여 불만과 원한은 갈수록 고조될 수밖에 없다.(179) 위에서 천성(天性)은 착하나 무모한 사람으로 묘사되어지는 로우숭은 어렵게 일제에 항거하는 당시 만주 개척민의 표상이다. 일제의 만주 개척국책이 조선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희생과 수난을 요구하는가를 지적한다. 범에게 왼쪽 귀를 할켜 떼어진 후 몹시도 분해 하고 침울해 하다가 결국 범을 죽이기 위해 창을 들고 산 속으로 떠나는 로우숭이야말로 주인공 찬호가 해야 할 역할을 대신 맡아 나선 인물이다. 작가는 피해 가는 수법을 취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목축기」의 표면적인 개척민과 내면적인 개척민은 다르다. 일제가 내세우는 소위 만주 개척민의 허상(虛像)을 깨달을 수 있다. 겉으로는 일제의 국책에 영합하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조선인의 아픈 실상을 그려내는 것이 개척소설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 작품을 이해하기가 수월해진다.(179) 「목축기」는 일제의 협화 정책을 빙자한 조선인 물자 수탈을 우회적으로 비난하고 나아가 조선 개척민의 저항 의지를 표출시키고 있다는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찬호와 로우숭의 역할을 주의 깊게 고찰하는 것이 이 작품을 읽을 때 특히 유념해야 할 점이다.(180) 3)황건 「제화(祭火)」 당시로서는 드물게 나름대로 인간 내면 심리를 깊이 드러내 보일 뿐만 아니라 특히 역사와 사회적인 부분까지 건드리고 있는 「제화」는 1인칭 시점을 취하고 있는 서간체 형식의 소설이다. 주인공 ‘나’는 조선 땅에서 만주로 옮겨와 살고 있는 인텔리 젊은이다. 그리고 1920년대 말 지식인 소설의 주인공을 연상시키는 문화청년회 지도자이다.(180) 이 소설은 관념소설(觀念小說)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이 소설은 묘사(180)에 치중하고 있을 뿐 뚜렷한 형상화의 서사는 거의 없다. 주인공은 오직 혼자만의 내면 의식에 빠져 있고 작품 속에 등장하고 있는 친구들과의 인간관계 등에 관해서도 흐릿하게 처리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한창 나이인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자를 떠나게 하고 스스로는 자살을 하려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도달하고 있지만 그 원인 또한 막연하게 드러나고 있어 좀더 높은 차원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그렇지만 이 소설은 자살을 결심하는 주인공의 입을 빌려 일제 협화 이념의 희생물이 된 만주 실향민의 애절한 심정과 절망감, 그리고 피로감을 잘 드러냄으로써 당시 사회의 그늘을 부각시켜 보이는 효과를 자아낸다. 이런 점에서 일종의 우울문학(憂鬱文學)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제화」는 전체적으로 어둡고 암담하며 우유부단한 성격의 인물 창조 등을 담고 있다. 무기력한 주인공은 시종 현실에 대해 혐오감과 도피 충동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미치광이도 못 되고 훌륭한 지도자도 되지 못한 채 자포자기의 인간이 되어 고뇌와 갈등의 포로가 되고 있을 뿐이다. 방향감각을 상실한 암흑기의 전형적인 인간상을 제시하는 소설이다.(181) 황건의 소설은 당시의 다른 작가들이 인물에 대한 형상화에 있어서 그들의 기질과 생활과는 동떨어진 ‘투사(鬪士) 일반으로 묘사하던 제한성을 깨뜨리고 주체형의 인간 성격을 높은 차원에서 형상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로써 그의 소설적 의미는 계급성을 심리적인 차원에서 다뤄 내고 있(181)다는 점이 될 것이다.(이명재 편, 󰡔��북한문학서전󰡕��, 국학자료원, 1995, 1181쪽-각주219) 특히 「제화」는 일제 사회 제도의 모순과 부조리를 고발, 부정하고 있는데 그것도 지식인의 심리를 통해 그려내고 있어 깊이를 가진다. 다만 「제화」는 작품 속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하고 있는 것(가령, 문학청년회의 내분)에 대해 뚜렷한 제시가 부족하기 때문에 애매한 느낌은 있다. 특히 젊은이들을 많이 등장시킨 작품이란 점에서 일제의 눈을 더욱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면 이런 서사 기법이 한국소설 창작 기법의 영역을 넓히는 데 한몫을 할 수도 있다 .결국 이 작품은 이야기 없는 이야기 기법을 통해 일체의 현실 비판적인 작품 창작이 금지된 1940년대 초기의 탈출구를 모색한 것이 되지만 평가는 엇갈린다.(182) 우선 이국땅에서 살아가는 지식 청년의 고뇌와 갈등이 읽는 이의 마음이 답답할 정도로 짙게 깔려 있다. 특별한 스토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정적(靜的)인 분위기는 오히려 암울한 그 시대를 드러내는 데 훨씬 효과적이다.(185) 무릇 예술이란 궁극에까지 추구해 가는 길이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허무이다. 허무의 선언이다. 이 허무를 인간이 인정 아니할 수 없다. 허무라느 사실을 인정하였을 때 새로운 창조보다 레디메이드를 수긍(首肯)한다.(구연식, 󰡔��한국시의 고현학적 연구󰡕�� 시문학사, 1979, 76쪽-각주235) 허무에 대한 이러한 자각은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189)이 된다.(190) 절망과 허무의식은 이 소설을 이끌어 가는 주된 모티브다. 그런 점 때문에 이 작품 곳곳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암울함과 답답함은 읽는 이로 하여금 그 시대의 아픈 실상을 샅샅이 말해준다. 기주는 협화 이념이 빚어낸 괴로운 현실을 탈주하고 싶다.(190) 끝내 자살로 생(生)을 마감할 수밖에 없는 당시 젊은이의 고뇌는 이해가 되지만 지나치게 감상적(感傷的)으로 흐르고 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물론 이것은 그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던 작가의 입장을 고려하면 이해가 된다. 즉, 일제가 내세우는 협화 이념은 그 스스로 모순을 드러내고 있으며 작품 속 인물들은 그것을 제대로 소화해 내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학고 「제화」는 당시 젊은이들의 시대 대응 자세와 내면의 심리를 상당히 깊이 있게 처리하고 있고 또 다양한 성향이 드러나 있기도 하여 개척소설 중에서는 가장 현대소설과 가깝게 받아들여진다.(196) 협화가 참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려면 협화의 대상이 되는 모두가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그 시대 협화 이념은 오직 일제에 의해 만들어졌고 따라서 일제가 다른 민족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이 이 몇 편의 개척소설을 통해 드러난다.(197) 조선족이 몽고족을 계몽시킨다는 내용의 「초원」은 일제의 만주국 독점야욕을 폭로하며 협화라는 명목 아래 펼쳐지는 일제 만주 개척 사업의 실상을 드러내 보인다. 초원은 오직 일제의 개발 대상일 뿐이다. 「목축기」를 보면 개척민 부락을 세우기 위해서 필수적인 두 가지 조건이 나온다. 감자 사료 등을 얻기 위해 농민을 입식(入植)시키고 현 당국의 협조를 받아야 하는 것이 그것이다. 개척민이 잘 살 수 있는 땅을 만들기 위해서 일제의 이런 통제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일제 협화 선전이 스스로 모순을 보이고 있음을 알게 한다. 김동인(金東仁)이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에 나오는 주인공에 대해 과도기의 이 청년이 받은 불안과 공포의 번민에 몹시 불안감을 느낀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제화」의 주인공을 통해서도 비슷한 감정을 맛보게 된다. 만주 개척지는 조선 젊은이들에게 아무 꿈도 희망도 없는 암흑의 땅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일제의 협화 이념에 휘둘리는 조선인의 괴로움과 성가심으로 형상화되고 있으며 나아가 조선인 스스로도 혼란스러움에 빠지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197) 4. 교화(敎化) 정책의 이중성 일제는 조선인을 교화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일제의 국책에 저해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끈덕진 회유와 압력을 넣었다. 겉으로는 무지한 조선 민중을 깨우쳐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게 하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이 정책은 조선인의 의식을 철저히 바꿔 놓으려는 술수에 지나지 않았다.(198) 이런 사실을 알아챈 작가들은 일제의 이중성을 포로하는 등 교화 정책에 반발하였다. 여기 해당하는 작품은 현경준(玄卿駿)의 「유맹(流氓)」∙박영준(朴榮濬)의 「밀림(密林)의 여인(女人)」 등이 있다. 이 소설들의 주인공은 일제가 교화를 내세워 회유하고 협박하는 시대(198)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당면해 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당시 세계적인 사조(思潮)나 분위기가 이들 소설 속 인물들처럼 인간이 비애와 고뇌에 시달리는 추세에 있었다는 점도 작품 전반적인 경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더욱이 그런 중에도 특히 우리나라는 간악하고 치밀한 일제의 이중적(二重的)인 교화 정책에 시달리는 처지였으니 이 일련의 개척소설들은 그런 현실을 그려내는 몫을 잘 해내고 있다.(199) 1) 현경준 「유맹(流氓)」 「유맹」은 우선 아편 중독자의 갱생(更生)이라는 퍽 특이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과 주의를 끌 만한 중편소설이다. 발표 지면도 다양하여 처음에는 <인문평론(人文評論)>(1940.7~8)에 실리고 그 뒤 󰡔��만선일보󰡕��에 게재되었다가 다시 「마음의 금선(琴線)」이란 제목을 달고 단행본에 수록(1943.12)되었다. 이렇게 소재로나 여러 발표 지면으로나 특이한 이 소설은 보도소(輔導所)가 있는 폐쇄된 수용(收容) 부락을 중심 무대로 그 곳에 강제 수용된 사람들의 애환과 갈등, 그리고 황폐한 인간성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꾸려 나간다.(199) 보도소장의 사명감에 넘치는 압박과 회유에도 마약 중독자, 사기범, 도박꾼 같은 폐인들은 좀체 마음을 돌려 갱생의 길을 찾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일제의 교화라는 것이 허위와 위악에 찬 것임을 상징한다.(199) 특히 「유맹」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신뢰와 애착, 학대와 불신 등을 바탕으로 하여 훌륭한 서사적 세계를 창조해 내고 있는 소설인데 다만 그 형식적인 면에서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통계 자료를 지나칠 정도로 길게 늘어놓고 있다든지 보도소장의 일장 연설을 지루할 만큼 장문(長文)으로 삽입시켜 놓았다든지 주제에 집착한 나머지 문학성이 감소되었다든지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결정적인 약점은 다음에서 볼 수 있듯 보고문(報告文)의 성격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작자의 말-이것은(이하 략-인용자) 「유맹」의 맨 앞머리에 들어 있는 작자의 말이다. 현경준은 이 글을 소설이라기보다 ‘한개의 보고문(報告文)에 불과(不過)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해서 제2, 제3의 보고문을 쓸 것이라고 밝힌다. 그것은 이 부락-보도소(輔導所)의 ‘소생 상황(蘇生狀況)을 보고(報告)’하는 내용이 될 것이라고 한다. 특히 ‘여기에 기록(記錄)된것은 지금(至今)으로부터 3년 전(三年前)의 상황(狀況)이라는것을말하’고 있어 작자의 집필 의도를 엿보게 한다. 즉, 현경준은 「유맹」을 소설이 아닌 보고문(報告文)인 것으로 인식시키고 싶어한(201)다. 그래서 훨씬 더 생동감 나는 효과를 얻으려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이것은 「유맹」이 개척소설이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더 확실해진다.(202) 「유맹」을 제대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만선일보󰡕��(1941. 3. 20)에 나오는 “국책 협력(國策協力)의 목적(目的)으로서 금연소설(禁煙小說)과 금연실화(禁煙實話) 금연체험기(禁煙體驗記)를 모집(募集)하기”로 했다는 기사를 읽어 볼 필요가 있다. 만주국(滿洲國)이 세워진 후 인간 자원을 재활용할 목적으로 만든 보도소(輔導所)에 있는 아편 중독자나 밀수꾼들을 등장시킨 이 소설은 앞서 󰡔��만선일보󰡕��에서 밝힌 모집 요항과 그대로 맞아떨어지고 있다.(202) 인물들이 보이는 말과 행동은 작가의 의도를 잘 담아낸다. 보도소장의 설교를 무시하는 보도소 피보도자(被輔導者)들이 이해하기 힘든 나쁜 짓거리와 패륜은 작가가 감추어 둔 조선 민중의 일제에 대한 역설적 항거와 고뇌로 보인다. 이 작품 역시 개척소설이라는 계열로 놓고 볼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와 닿는 느낌은 대단한 차이로 나타난다. 그만큼 이 작품은 난해하고 논자들의 평가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202) 작품의 앞부분에서부터 탈주 사건을 다루어 보도소 안의 반목과 갈등이 심각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그런데 이 소설은 도대체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처음부터 난해한 양상을 띤다. 이것은 일제의 검열을 피해 가려는 작가의 수완으로 판단된다.(203) 일제의 국책에 의해 세워진 보도소가 어떤 곳인가를 보도소장의 입을 통해 밝혀 보이고 있는데 자못 역설적이고 풍자적이다.(205) 「유맹」 또한 분명히 어떤 질서 체계가 잡히는 게 사실이다. 단지 개척소설이라는 양식을 빌려 말하자니 약간 모호한 기법이 불가피했던 것이다.(208) 기를 쓰고 계도하려는 보도소장에 의해서는 조금도 마음이 변하지 않던 명우가 순녀 때문에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싶고 밤새도록 울고 싶은 인간적인 생각을 한다. 즉, 허울 좋은 일제 교육의 맹점을 비꼬는 것이다.(210) 사회가 비도덕적일 때 그 비도덕적 사회의 구성원이 아무리 도덕적 지향의지를 가지도록 강요받더라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물며 일제를 대변하는 보도소장이 내세우는 그릇된 가치에 동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은 당연하다.(211) 그리고 보도소장과 단장이 그렇게 계도하려는 아편 중독자들은 오히려 대부배급 때문에 더욱 아편에 눈을 돌리게 된다. 일제의 계도니 교화니 하는 게 얼마나 거짓된 것인가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부분이다. 그리하여 피보도자들의 탈주는 끊이지 않는다.(212) 결국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방황하고 갈등하는 조선인의 모습이 보도소라는 특이한 배경과 탈주라는 행위를 통해 잘 표출된다. 세상에 대한 이들의 원망은 갈수록 그 골이 깊어지기만 한다.(213) 일제의 조선인 자원 활용 획책은 여기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다. 규선이 끝까지 아편 중독자로 남음으로써 보도소의 역할과 임무는 실패로 돌아가는 것이다. 일제는 결국 자신들의 몫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타민족인 조선인의 처지와 형편을 도외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신들에게도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되고 말 것임을 이 작품은 경고한다. 즉, 피보다자들이 죽음과 절망을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런 속에도 작가는 일제와 조선의 동반 추락을 암시하는 것이다.(214) 퍽 난해하다는 평을 받고 있는 이 소설은 겉으로 나타난 의미와 속에 감춰진 의미가 서로 다른 개척소설이라는 잣대로 비춰보면 보다 잘 이해될 수 있다. “텍스트는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며 그 불완전한 것을 채워 작품을 완성시키는 것은 독자”(유재천, 「시와 언어」, 󰡔��삶과 문학󰡕��, 우석, 1998, 131쪽-각주 271)의 몫이다. 개척소설이 일제의 검열과 통제 때문에 완전히 표현하지 못한 의미까지를 제대로 밝혀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215) 「유맹」은 열악한 환경 속에 감금당한 채 똑똑한 직업도 없이 살아가는 피보도자들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보도소의 열악한 환경과 보도소장의 거짓된 교화를 폭로하여 당시 일제의 횡포와 억압을 암시적으로 드러내는 데 「유맹」의 감춰진 주제가 있다.(216) 그리고 「유맹」에서는 개척소설이 지니는 독특한 서사 특징을 볼 수 있는데 작품의 표면적 의미와 내면적 의미의 뒤바뀜이 그것이다. 즉, 겉으로 볼 때 보도소장과 단장은 피보도자들을 계도(啓導)하기 위해 온갖 정성과 노력을 다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 반면에 계도의 대상인 피보도자들은 철저히 부정적인 모습들로 부각된다. 그러나 실제는 다르다. 피보도자들의 행동이나 대화는 보도소장과 단장의 위악(僞惡)과 허위를 알게 한다. 일제의 비열한 회유책과 강제성을 느낄 수 있다. 도리어 피보도자들이 계도자이고 보도소장이나 단장은 계도되어야 할 대상으로 변한다. 곧 「유맹」은 보도소라는 아주 이색적(異色的)인 제재를 취하여 일제 당시의 모순과 비리에 대한 항거를 역설적으로 처리해 보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소설이 난해하다는 평을 듣는 것은 이처럼 낯선 배경이나 인물, 그리고 서사의 이중구조 등을 그 이유로 들 수 있다.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암담하기 짝이 없는 시대 현실을 아편 중독자 부락을 중심으로 표출시켜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와 신념이다.(216) 2) 박영준 「밀림(密林)의 여인(女人)」 「밀림의 여인」은 김순이라는 처녀가 공산비(共産匪) 대원으로 10여 년 동안 녹립당 생활을 하던 중 일본군 토벌대에 사로잡혀 산 속에서 나와 ‘나’와 ‘나’의 가족이 베푸는 희생과 교화를 받아 사회로 환원된다는 내용이다.(217) 이 소설은 ‘갱생’을 주제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놓고 보면 앞에서 살펴본 현경준의 「유맹」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 다만 한 가정이라는 좁은 공간 속에서 역시 한 개인의 갱생을 다루는 점이 한 부락을 공간 무대로 하여 여러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유맹」과 차이가 있다.(217) 어쨌든 정상적인 사회인이 되게 한다는 이런 과정을 통해 일제가 획책하는 만주국 이념이 강조되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되지만 김순이의 비현실(217)적 신념과 의지를 바탕으로 그것을 지양함으로써 오히려 당시 조선이 처해 있는 상황을 반성하게 하는 효과를 얻어낸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김순이가 산(山) 처녀로서 좀 더 원시적이고 활달한 면모를 띠었으면 하는 것이지만 교화라는 정치적 목적이 걸림돌이 되고 있음은 어쩔 수 없는 개척소설의 한계이다.(218) 「밀림의 여인」은 반일(反日) 유격대원(遊擊隊員)의 전향(轉向)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서 말한 그의 다른 작품들과는 그 성격이 많이 다를 뿐 아니라 친일적인 색채가 다소 엿보이는 작품이다. 하지만 주인공 ‘나’의 시선보다 유격대원인 ‘김순이’의 시선을 포착하여 살펴보면 그런 느낌은 훨씬 줄어든다. 겉으로는 일제에 순응하는 척 하면서 내면적으로는 조선 민중의 고뇌를 다루고 있는 것이 개척소설이므로 이 작품 또한 행간(行間)을 유의 깊게 읽어야 한다.(218) 이 소설은 ‘나’의 직업이 그저 만주국 관리라고만 되어 있을 뿐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은 상태로 밀림의 여인인 김순이를 계도하고 교화한다는 점에서 일제에 대해 작가가 취하는 태도가 다른 개척소설에 비하면 상당히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다. ‘나’를 사이에 둔 나의 처와 김순이가 가질 수 있는 감정도 작품 속에 흐릿하게 녹아 있을 뿐이다.(218) 자유란 외적 강제(强制) 또는 구속을 받지 않는 자립적(自立的) 상태, 소극적으로 외적 구속에서 독립된 것, 적극적으로 자기의 본성(本性)에 따르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는 필연(必然)과 모순되지 않으며 자연충동적(自然衝動的) 자의(恣意)와는 구별된다. 그러나 일제는 자신들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조선인들의 자유를 빼앗은 상태에서 회유하고 협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결국 순이는 아무래도 이런 사회에서는 살 수가 없어 죽어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 당시 사회가 얼마나 살기 어려웠는가를 고발하는 대목이다.(222) 김순이는 ‘나사람 업는데가 초치안허요!’라면서 흥분한다. 여기 김순이가 말하는 나쁜 사람 없는 데는 곧 일제가 없는 세상이다. 김순이는 ‘아무래도 이세상에선 몰살것’ 같다면서 일제로부터의 자유를(223) 염원한다.(224) 그녀는 비록 공산비에게 잡혀 산으로 가긴 했지만 지금보다 훨씬 그 생활이 행복했다는 것이니 이것은 곧 일제의 지배를 받는 이 세상에 대한 반발과 증오의 완곡한 표현이다.(225) 뒤이어 나오는 ‘나’의 한바탕 연설은 완전히 사상(思想)교육이다. 그들(공산비)의 사상은 ‘인류전체의 행복을 위한 사상은 못될것’이고 ‘게급을 업시’하는 것은 ‘결국 한게급만을 만든다는 것이오 라서 나머지 게급의 행복은 는다는것이’니 좋지 못한 것이라고 설득시키려 든다. 일제와 공산비라는 두 개의 축을 세워 두고 조선 여자를 끌고 당기는(226)식의 작품 처리 방식은 보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유아적 취향처럼 느껴진다. 거의 필사적으로 달려들어 상대를 교화시키려는 주인공을 통해 작가는 일제의 끈질기고 가증스러운 행위를 고발하는 효과를 얻고 있다. 단순한 구성 방식이 더욱 그러하다.(227) 결국 ‘나’는 그녀를 이 사회에 붙들어 두기 위해 결혼 이야기까지 꺼내게 된다. 그런데 결혼을 시키려는 ‘나’의 설득에 대해 순이가  보이는 거부의 태도는 아주 완강하다.(228) 특히 ‘그건 해서 무엇해요?’라는 김순이의 말은 이 사회의 모든 제도나 장치에 대한 거부감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일제가 강요하는 대로 하지 않으(228)면 왜 살지 못하느냐는 반발심을 겉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를 종으로 만든다는 것을 통해 ‘남자=일제, 여자=조선’의 등식을 낳을 수 있다. 말하자면 여기서 결혼은 곧 일제에 의한 조선인의 속박이요 만행(蠻行)으로 해석되어진다. 결혼은 남녀가 서로를 이해하고 공경하겠다는 전제하에서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결혼에 대한 김순이의 생각으로 볼 때 여기서 말하는 결혼은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지배하는 종속 관계로서 그 결말이 불행할 것은 자명하다.(229) 김순이의 반박에 대해 ‘나’는 ‘서루 사랑한다면 종이란 말을 쓰지 않게 된다며 계속 설득의 고삐를 늦추려 들지 않고 있다. 이것은 조선인과 일본인의 화합을 권유하는 말이다.(229) 그리고 김순이의 감정은 극(極)에 이른다. 눈이 번쩍이고 그 눈에는 ‘거운 덩이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런 김순이의 얼굴은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힘든 현실 앞에서 강한 슬픔과 고통을 느끼는 모든 조선인의 표상(表象)이다. 여기서 우리는 전향(轉向)에 따른 인간적 치욕이나 굴욕감이 그의 전 생애에 걸쳐 관련된다고 볼 때, 그러한 선택은 또 다른 이념으로써 충분히 보상할 만한 내적 충실성을 확보한 후라야만 가능한 행위(신동욱, 󰡔��1930년대 한국소설연구󰡕��, 한샘, 1994, 230쪽-각주291)임을 고려해야 한다.(230) ‘나’ㄱ 그렇게도 열심히 교화하고 주입하려 했던 모든 것은 결국 허위요 위악임이 드러나고 따라서 김순이 앞에서 허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일제의 회유책이 자가당착에 빠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230) 답답한 심정응ㄹ 눈물로만 씻어내고 있는 김순이에게 그토록 열성적인 자세를 보이던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결국 ‘나’는 김순이를 ‘바라보는것 외에 아모것도 못해준 방관자에 지내지 못한 사람’임을 깨닫는다. ‘다만 아프로 눈물을 흘리지안코 사려주엇스면 하고 나혼자 속으로 바랄이’다. ‘나’의 김순이에 대한 시혜(施惠)는 사랑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그런데 김순이의 아버지는 그녀가 공산비로 들어가게 된 앞의 대목에서 밝히고 있듯이 첩을 두고 있었던 이른바 부르조아였다. 그런 부모인 탓에 앞으로 김순이의 생활이 어떠할지 짐작할 수 없다. 사실 김순이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기차는 속력을 내며 순이의 새생활을 재촉하는드시 다름질첫다.’는 결말은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한가닥 희망에의 여운을 남기는 소설이다. 이처럼 당시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다른 계열의 작품들이 일제에 순응하거나 좌절하는 양상으로 나타나는 데 반해 이 작품은 끝까지 의지를 반영시키고 있다.(231) 「밀림의 여인」에 나오는 중심인물 세 사람은 각기 다른 이념방식을 취하고 있어 이야기를 흥미롭게 한다. 우선 ‘나’의 처는 일제가 조선인의 인력을 활용할 목적으로 주창하는 조선인 사회 수용 정책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김순이는 아예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더 나아가 반발하는 양상을 띤다. 그녀의 입을 통해 일제의 교화와 책동에 반발하는 말들이 튀어나온다. 그리고 그것을 듣고 있는 사람이 일제의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나’이다. 이처럼 ‘나’는 친일적인 면모를 보이면서 오로지 사회적 인간형을 지향한다. 그 반면에 김순이는 반일의 표상으로 순수한 인간형을 바라고 있다.(231) ‘나’의 처는 같은 여자이면서 김순이와는 다르게 남자에게 순응하는 인간형으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중심인물은 어디까지나 김순이와 ‘나’이고 ‘나’의 아내는 부수적인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사회주의 사상에 무의식적으로 젖어 있으면서 반문화적인 경향을 띠고 있는 밀림의 처녀 김순이, 그리고 지식인 계급으로 문화적인 경향을 띠면서 심지어 만주국 관리 노릇까지 하는 현실에 부응하는 ‘나’, 이렇게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은 친일과 반일의 표상으로 나타난다. 이 작품은 시혜(施惠)와 사랑의 혼동을 통한 시대 풍자와 새로운 인간형을 탐색하는 과정이 일제의 교화 정책이라는 이중성과 맞물려 교묘히 드러나고 있는 소설로 평가된다.(232) 현경준의 「유맹」은 과장된 선전 문구와 세세한 통계 수치를 글 속에 삽입하는 등 문학성이 약간 덜어지기는 하지만 특색 있는 소재(素材)로 교화의 이중성을 드러내 보인다. 일제의 계도(啓導)에 대한 매점을 지적한다. 계도자와 피계도자가 뒤바뀐 듯한 특이한 이야기 구조가 눈을 끄는 문제작이다. 일제의 조선 인력 자원 활용 정책에 대한 비리와 부정을 보도소(輔導所)에 강제 수용된 인물들의 반항적∙도전적∙자조적인 말과 행동을 통해 당시 일제가 혈안이 되어 수탈하려는 조선 인력 자원의 실태를 폭로한다.(232) 박영준의 「밀림의 여인」은 조선인을 활용하기 위해 갖가지 수단을 동원해 사회로 환원시키려는 일제의 간악한 면을 엿볼 수 있는 교화소설이다. 공산비(共産匪)를 매도하고 일본군 토벌대와 일제에 영합하는 사람의 끈덕진 활약상을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은 일제의 이중적인 얼굴을 보여준다.(232) 결국 일제가 주창하는 교화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감화(感化)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회유와 강압으로써 식민 민족을 일제의 희생물로 이용하려는 저의(底意)가 숨겨진 악의(惡意)의 교도(敎導)에 다름 아니다.(233) Ⅳ. 개척소설의 소설사적 의의 세계 어느 나라 문학을 돌아봐도 한국 개척소설과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어느 나라도 한국의 개척소설이 태동(胎動)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같은 길을 걸어온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라는 일찍이 세계 어느 곳에서도 없었던 특수한 시대적 상황이 낳은 소설의 유형이며 그것이 창작된 기간도 불과 5년 정도로 한정되어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대부분의 작품이 1940년대 전반기에 발표되었을 뿐 그 이전에는 없었고 그 이후에는 해방이라는 역사적 상황변화로 인해 단절되어 버렸던 것이다. 개척소설이 한국 문학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 이유는 우리 작가들이 더 이상 눈치를 보아야 할 대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개척소설은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일체의 현실 비판적인 작품 창작이 불가능해지자 그 대안(代案)으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일제가 물러남과 동시에 함께 사라지게 된 것은 극히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몇몇 의식 있는 작가들에 의해 창작되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개척소설을 그냥 일제의 부산물(副産物)(234)정도로 소홀히 대할 일은 아니다. 모든 문필 활동이 금지된 암흑기에 붓을 꺾지 않고 무학을 통해 당대 현실의 모순 요소를 타개했다고 할 수 있다.(235) 개척소설은 다른 어떤 유형의 소설보다 접근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개척소설이 형성된 시대적 공간적 배경이 어느 시대나 어떤 공간보다 복잡하고 다양하게 얽혀 있었고 그런 만큼 작가들의 의식이나 창작 기법이 특별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척소설에 대한 자료 부족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 있다.(240) 개척소설은 일제의 국책 홍보와 조선인 작가의 민족의식이 교묘하게 맞물려서 나온 세계 어느 소설사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독특한 소설 양식이(240)다. 특히 대부분의 개척소설이 일제 어용지로 알려져 있는 󰡔��만선일보󰡕��를 통해 발표되었다는 사실은 개척소설의 정체성을 밝히는 데 대단히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점이 개척소설이라는 전례 없는 특이한 유형을 낳게 한 가장 근본적인 밑바탕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개척소설이 지닌 핵심적 가치와 의미는 일제에 의해 모든 현실 비판적 창작 활동이 금지된 조건 아래에서 현상을 넘어 민족의 삶을 통찰∙음미∙반추하여 작품으로 형상화한 소산물이라는 것이다.(241) 1940년대 전반기에 나온 작품들에 대해(한국문학의 공백기라는 이 시기를 메울 목적과 의욕에서) 지나친 기대와 높은 평가를 내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와 반발을 막을 수 있는 자료로 개척소설을 들 수 있다. 개척소설이 집중적으로 발표되던 시기는 공교롭게도 우리 문화의 암흑기로 인식돼 왔다. 게다가 확실한 검증(檢證)을 거치지 않은 채로 우리의 많은 유산(遺産)들이 친일(親日)이라는 올가미에 씌어져 평가 절하(切下)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 중 한 가지가 개척소설이다. 특히 국내의 이름 있는 작가들도 작품 발표를 하지 못하게 된 그 상황 속에서 비록 크게 문명(文名)을 날리지는 못하던 작가들이지만 조선 이주민(移住民)의 삶이 곳곳에 밴 척박한 만주를 배경으로 하여 우리글로 쓴 것이 개척소설이다. 따라서 혹 그 작품성 면이나 소재(素材) 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세세히 검토해 보아야 마땅하다. 특히 소재만을 놓고 볼 때는 분명히 일제의 국책(國策)에 호응하는 느낌을 가지게 되는데 이것 또한 개척소설이라는 잣대로 비춰보면 이해가 가능하다.(241) 한국 문단(文壇)에서 거의 정설(定說)로 굳어 버린 우리 문학상의 공백 상태라는 1940년대 전반기를 가장 많이 담아내고 있는 개척소설은 단절된 한민족 문학사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시대사적인 편차(偏差)를 보면서 일제의 계산과 그런 역사가 빚어낸 상황 안에서 우리 혼을 가지고 있는 작가들이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눈여겨보고 민족사적인 연구 가치를 찾는데 적절한 텍스트가 개척소설이다. 개척소설의 주인공은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부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은 기존의 소설에서는 보기 힘든 양상이다. 그리고 부정적인 모습의 주인공은 현대소설에 나오는 부정적 인물형과는 그 성격이 크게 다르다. 겉으로는 부정적인 면모를 띠지만 속으로 보면 오히려 긍정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것은 개척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점이다. 그런가 하면, 개척소설에서 작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주체는 주인공이 아니라 부수적인 인물이 되는 경우도 있다. 실제 작품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이미 밝힌 바 있지만 이것은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한 작가의 수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기법은 개척소설이 가지는 특장(特長)으로 평가할 만하다.(242) 1940년 초 일제의 암흑정치 아래서 일체의 현실 비판적인 작품 창작이 금지되자 그 탈출구로 나오게 된 개척소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대부분이 일제의 어용지(御用紙)로 알려져 있는 󰡔��만선일보(滿鮮日報)󰡕��를 통해 발표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중요하다. 그리고 어떻게 그러한 일이 가능할 수 있었는가 하는 의혹은 작품 분석을 통해 밝힐 수 있었다. 즉, 소설 곳곳에는 일제의 국책을 홍보하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하지만 그 이면(裡面)에는 또 이런 일제의 횡포를 고발하고 저항하는 요소가 숨겨져 있다.(242) 개척소설은 친일적인 요소가 많은 작품 소재와 조선 민중의 고뇌를 드러내기 위한 작가정신이 교묘하게 뒤섞인 이중성(二重性)을 가진 소설이다. 이것은 이 유형의 소설이 당시의 아주 묘한 시대 상황의 바탕 위에서 씌어진 작품이란 점에서 나온 당연한 결과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점이 개척소설의 한계이자 미덕이다. 개척소설을 보는 두 가지 입장, 즉 친일이냐 배일(排日)이냐 하는 상반된 주장 중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는가에 따라 개척소설의 의의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이 글은 후자에 높은 비중을 둔다. 일제의 엄격한 통제 밑에서도 그만큼 할 소리를 하고 있는 개척소설은 우리가 단순히 작품을 통해서 받게 디는 느낌보다도 훨씬 많은 것을 내포(內包)한다. 개척소설의 값을 온당하게 매기는 일은 다른 유형의 소설도 마찬가지겠지만 오늘날 시대 여건(與件)으로 볼 것이 아니라 개척소설이 씌어졌던 그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 살펴볼 때라야만 가능하다.(243) 한국문학의 창작기법이 단조롭다는 지적에 대해 개척소설이 지닌 독특한 서술 방식-가령, 겉으로는 일제에 편승(便乘)하면서 속으로는 조선 민중의 식미지적 고뇌를 다루었다는 등의-을 보다 심화 발전시켜 한국문학의 새로운 창작기법 하나를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작가의 작품 활동에 대해서는 약간의 제약(정치 사회적이든 윤리 도덕적이든)이 따르기 마련인데 개척소설의 이 같은 창(243)작기법을 변모 발전시켜 잘 활용한다면 훨씬 다채롭고 자유로운 글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244) 개척소설은 공통 분모(分母)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시 몇 가지로 하위분류가 가능하고 그렇게 갈라진 개별 작품들도 다시 나름대로의 독특한 양상을 이루고 있어 한민족 소설문학의 제재(題材)영역을 넓혔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국내 작가들뿐만 아니라 현재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의 문학에 대한 안목과 관심도 높아질 것이다. 소설 속의 대표적인 인물이 농민이라는 사실에서도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일제 당시 우리 민족의 8할을 차지하고 있던 계층이 농민이었다. 이런 농민을 작중 중심인물로 내세운 개척소설은 일제하에서의 조선인 전체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따라서 창작 활동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그 시기에 개척소설은 그 얼마 되지 않는 작품들만으로도 한민족의 삶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일을 해냈다. 암흑기라고 불리는 1940년대 전반기는 문학적 공백기가 아니다. 개척소설이 그 자리를 매우고 있다. 국내는 아니지만 만주에서 우리 민족의 곤궁한 삶을 그려낸 개척소설은 30년대 문학적 전통을 이어받은 소중한 문학적 자산이다.(244) Ⅴ. 결론 이 글에서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개척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여 따로 갈래지어도 무리는 없는가, 1940년 초 일제의 암흑정치로 말미암아 현실 비판적인 작품 활동이 철저히 금지된 상황 속에서 개척소설이 과연 어떻게 탈출구를 찾고 있는가, 혹시라도 개척소설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긍정적인 면보다도 부정적인 면이 더 많이 담겨져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이런 것에 대한 해명을 분명히 해줌으로써 앞으로 계속해서 개척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가 이어지게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등등이다.(245) 동양을 지배하기 위해 만주국(滿洲國)을 건립하여 오족협화(五族協和)를 주창하는 등 온갖 술수를 서슴지 않던 일제의 국책(國策)과 개척소설의 소(245)재(素材)를 비교해 볼 때 너무나 용의주도한 일제의 계산속을 알 수 있었다.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 수탈을 목적으로 한 개척과 생산에 대한 일제의 획책이 그것이다. 개척소설의 소재는 분명히 일제의 정책에 부응하는 것들이 많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대상 텍스트를 꼼꼼히 분석해 본 결과 개척소설의 유형 속하는 작품을 쓴 작가들의 문학적 역량뿐만 아니라 조선인의 자의식(自意識)을 엿볼 수 있었다. 즉, 대부분의 개척소설은 겉으로는 일제에 영합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지만 작품 내적인 의도는 분명히 다르다. 개척소설에는 개척지의 고난과 궁핍상이 있고 일제가 선동하는 낙토 건설의 허구성 및 협화 정책의 모순이 폭로되며 이중구조를 통한 교화소설의 맹점이 드러난다. 따라서 분명히 친일소설과는 구별된다. 일제의 혹독한 검열과 통제 밑에서도 대개의 개척소설은 작가의 깨어있는 얼이 작품 깊은 안쪽에 숨 쉬고 있다. 이 일련(一連)의 소설들은 30년대 문학적 전통을 계승한 문학적 자산(資産)으로서 한민족 문학사의 암흑기라고 불리는 40년대 전반기의 공백을 너끈히 메울 수 있는 값어치를 가진다. 그런 만큼 앞으로도 계속해서 개척소설의 계열에 드는 작품들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절실하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 누락되었을 수도 있는 작품들을 빠짐없이 발굴하여 정당한 값을 매겨야 하리라 본다. 물론 그러기에 앞서 이미 개척소설로 갈래지어진 작품들에 대한 보다 치밀한 총체적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또, 개척소설들도 그 각각에 대한 평가가 같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전제 조건을 두고 고찰해 보아야 함이 당연하다. 이 글이 텍스트로 삼은 개척소설도 친일 요소와 반일 감정 등을 놓고 저울질해 볼 때 조금씩 그 정도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다 같은 개척소설이지만 천편일률적인(246) 평가를 내릴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가령 󰡔��신개지󰡕��∙「새벽」∙「추석」∙「암야」∙「원각촌」∙제화는 민족의식이 강한 쪽이며, 「광산촌」∙「목축기」∙「밀림의 여인」∙「초원」∙「유맹」은 일제 국책을 어느 정도 묵인하는 편이고, 친일소설로 분류한 「검은 흙과 흰 얼굴」을 비롯한 5편은 철저히 일제에 영합하는 경향을 보였다.(247) 이 글이 다루는 시기에 일제와 우리 문학은 분명히 공생(共生)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이제까지의 논의를 통해 밝혀졌다. 그렇다고 투쟁도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려고 했다는 것이 옳다. 즉, 일제는 홍보용으로서, 우리 작가들은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유일한 길로서, 이 개척소설이라는 전례(前例) 없는 형식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만큼 이 일련의 소설들은 창작 기법이나 소재 면에서나 문학적 패러다임에서나 대단히 특이했고, 한국은 물론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자적인 서사 특징을 이루었다.(247) 그리고 좀 더 적합한 이름을 새로 붙여도 좋겠지만 이미 불리어 왔던 대로 개척소설이라고 해도 별 문제가 없으리라 본다. 일제와 우리 민족이 ‘개척’이나 ‘생산’을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에 피해의식이나 자괴감에서 굳이 일제가 본 측면에서의 의미만을 떠올릴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개척과 생산은 물질적인 것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의미도 부여할 수 있다.(247) 개척소설은 친일적인 요소가 많은 작품 소재와 조선 민중 고뇌를 드러내기 위한 작가정신이 교묘하게 뒤섞여 있는 이중성(二重性)을 가진 소설이다. 즉,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나라가 가장 힘들었던 시대의 감추어진 실상(實狀)과 겨레얼이 소롯이 담겨 있는 문학작품이다. 그 속에서 옥석(玉石)을 가려내는 일은 밝고 냉철한 분석 능력과 미래 지향적인 역사관을 가진 문학 연구자와 독자들의 몫으로 넘겨질 수밖에 없다.(247)
27    윤병로, <<한국 근.현대문학사>>, 명문당, 1991 댓글:  조회:2412  추천:0  2009-05-16
윤병로, 󰡔�한국 근․현대문학사󰡕�, 명문당, 1991. 서설-문학사 기술의 시각 우리의 문학적 유산을 공시적인 측면에서 면밀히 검토하면서 동시에 통시적으로 체계화하여 구명․서술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어려운 일을 감당해 내야 하는 데 문학사 기술의 의의가 있다. 문학사란 문학적 유산의 단순한 연대기적 나열이나 사건․사조들의 현상적 전개가 아니라, 그것들이 일정한 시각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객관적인 측면에서 보편타당한 의미를 부여받는 차원에서 기술된, 하나의 문학적 총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사를 올바로 기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문학에 대한 이해와 역사를 보는 안목의 깊이가 전제되어야 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문학사란 문학과 역사의 복합체로서, 이들 상호간의 긴밀한 연계에 의한 유기적 조직체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문학이 지닌 심미적 질서와 가치체계가 인간 행위의 시간적 누적이며 동시에 그 주체들에 의해 방향성이 희구되는 역사와 접맥되는 데서 성립․전개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접하고 있는 문학유산 가운데 어느 양상이 보다 주된 흐름으로 전개되어 왔으며, 또 어떤 문학적 사상(事象)들이 어떤 측면에서 주목되어야 하는가에 따르는 인식과 방법의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된다. 이 문학유산에 대한 인식과 방법의 문제가 진지하게 검토되고, 그 자체가 과거와 오늘의 삶에 대한 적극적 이해를 동반하게 될 때, 하나의 문학사는 비로소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15) 이 점은 우선 하나의 문학행위와 그 결과로서의 작품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될 수 있다. 우리의 모든 행위가 다 그렇지만 문학은 특히 삶의 문제를 떠나서 이야기될 수 없다. 또 일반적으로 삶과 동떨어진 가치란 존재하기 어렵다. 그런 면에서 간략히 정의한다면 문학은 ‘살아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하나의 문학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는 당대적 시간과 공간을 배경으로 여러 가지 일상적 삶의 모습들이 제시되고, 그 속에서 야기되는 복잡다단한 문제들이 작가의 미적 태도에 의해 보다 의미 있는 것으로 부각됨으로써 문학작품은 당대의 현실적 삶과 가치, 사회구조와 문화적 세부를 수렴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학적 행위의 형태가 당대적 삶의 모습과 문제들을 하나하나 거론하여 그 각각에 대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것은 때로 시대가 요구하는 방향과 어긋난 형태로 존재하기도 하고, 시대를 앞질러서 새로운 삶의 각성을 촉구하는 것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그만큼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양상으로 존재하는 데에 문학의 속성이 내재해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따라서 문학사는 어떤 작가, 어떤 작품이 당대적 삶의 모습을 진지하게 반영하여 예술적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는가를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훌륭한 문학은 시대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 문학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토양은 다름 아닌 당대의 현실임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필연적으로 문학사가에게 있어서 기술 대상의 취사선택 문제로 귀결될 것이다. 다음으로, 문학사를 기술하는 일이 오늘의 작가적 현실과 문학유산을 추구해 나가는 작업과 무관하게 진행될 수 없기 때문에, 그 인식과 방법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 오늘의 문학이 과거의 문학적 유산들과 아무런 연계를 맺지 않고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어서, 보다 풍요롭고 알찬 오늘의 문학을 위해서는 과거 문학유산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병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수집 가능한 자료들을 낱낱이 수집하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기초 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자료와 사실들을 깊이 있게 다루고, 다양한 이해의 시각을 넓혀감으로써, 우리 문학의 전통과 현재적 위상을 점검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과거의 문학적 유산에 대한 구명을 통해 오늘의 문학과 삶에 대한 적극적 이해가 확충됨으로써, 문(16)학사는 하나의 살아 있는 실체로서의 의의를 지닐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사 기술에 있어서 자료의 선택과 체계적 정리는 그 자체가 지극히 어려운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 이 경우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과거의 문학적 실상에 대한 객관적 인식과 기술 태도이다. 그것은 문학사에 편입되어 서술되는 그 자체가 이미 가치판단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의 문학사는 거시적 체계에 있어서 통일성이 유지되어야 하는 한편, 그것의 세부를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문학사가의 태도가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문학 자체의 맥락과 작품 상호간의 유기적 연계관계를 주목해야 하며, 나아가 문학이 존재하는 대사회적 성격과 문화적 의미까지를 아울러 밝혀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문학의 실상에 대한 어느 정도의 객관적 인식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17) 요컨대 문학사는 다양한 시각에서 기술되어야 하리라 생각된다. 여기에는 의당 방법론적 각성이 뒤따라야 하겠지만, 그것이 다채롭게 기술되는 만큼 문학에 대한 이해의 폭과 현실을 재구성하는 깊이의 문제가 다시금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문학사를 기술하는 일은 삶에 대한 자각적인 인식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결국 문학사 기술에 따르는 시각의 문제로 귀결되겠지만, 문학이 지닌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속성은 그 같은 과정을 통해 보다 절실하게 우리를 고양시키게 될 것이다.(18) 제1부 초기의 신문학: 개화기시대의 문학 1. 신문학 태동의 역사적 배경 거시적 차원에서 볼 때 우리 문학은 적어도 두 차례의 분기점을 통해 새롭게 변모된 모습으로 전개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그 하나는 훈민정음의 창제에 의한 자국문자의 소유이고, 다른 하나는 개항 이후 비록 외래적 요인의 힘이 컸지만 새로운 근대사회와 사상의 도래이다.(19) 주지하다시피 훈민정음의 창제는 우리 민족이 자국어에 의한 정서표출과 사상 표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이른바 진정한 의미의 국문학이 태동하게 된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문학은 보다 다양한 형(19)식과 내용, 더욱 확장된 계층적 참여를 통해 문학사를 수놓아 왔다. 그러다가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역사적 대전환의 시기를 맞게 되고, 이는 결국 19세기 말엽에 이르자 그동안 누적되어온 변화의 조짐이 사회․문화적으로 표면화되기에 이른다. 이 시기는 말하자면 우리의 문학사에 있어서 ‘근대’를 준비하는 과정에 놓여 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20) 근대에의 지향 새로운 문화현상은 당대의 사회현실과 밀접히 관련을 맺고 있다. 문학 역시 새로운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많은 사회변화와 가치질서의 변모를 자체 내에 수용하고 있다.(20) 단적으로 말하여 18세기 이후 한국사회는 근대를 향한 움직임이 사회전반에 움트기 시작했고, 문학 역시 그 같은 움직임을 적극 수용하여 작품에 반영하려고 한 모색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색이 곧 근대문학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고 보기는 곤란하다. 말하자면 이 시기는 근대문학으로의 이행기(移行期)에 해당한다 하겠다. 우리의 근대문학은 다음 시기인 19세기 후반에 와서야 좀 더 구체적인 모습으로 문학사의 표면에 등장하기 때문이다.(21) 갑오경장(甲午更張)과 정신사적 흐름 전근대적(前近代的)인 봉건체제의 모순들이 사회 전반에 걸쳐 드러나 갈등을 야기하는 대내적 상황과 함께 쇄국(鎖國)과 개화(開化)의 갈림길에서 대외적 위기를 맞게 된 것이 19세기의 조선사회였다.(21) 결국 강력한 쇄국정책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구미열강과 일본의 압력으로 개국(開國)하게 된 1876년의 개항을 출발점으로, 이 땅에 개화의 물결은 거세게 밀어닥쳤다. 그 결과 조선은 새로운 세계관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신․구 문물의 교체적 상황과 함께 필연적인 갈등이 수반되었다. 문(21)학 역시 이러한 시기적 변화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고, 개화사상의 형성과 함께 커다란 변화의 싹을 배태(胚胎)하게 되었다.(22) 감오경장(甲午更張․1894)은 전통적인 봉건 조선사회로부터 자율적인 개혁의 기점이 되고 있다.(23) 근대문학 기점문제 대체로 ‘근대’라는 개념은 중세적 주종관계가 무너지고 신분제가 철폐된 점, 시민의식의 성장, 자본주의적 경제질서의 확립, 새로운 문물제도에 의한 세계관의 변환이라는 특징적 국면들을 통해 규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다.(24) 요컨대 갑오경장을 전후하여 전통적 세계관과 가치관에 대변혁이 이루어졌으며, 외래사조 및 문물의 이입(移入)으로 인한 근대적 성격변화를 경험하게 된 사실들로 비추어, 갑오경장 이전을 근대로의 이행을 위한 과도기로 보아 그 이후를 근대문학으로 봄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25) 2. 개화기 시가와 사회사적 성격 개화기 시가의 범위를 일단 갑오경장을 전후한 19세기 후반에서 본격적인 근대문학이 전개되는 20세기 초, 3․1운동을 전후한 시기 이전으로 잡아볼 때, 이 시기의 시가형태와 개념적 정의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거듭되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논자에 따라서는 이 시기의 시가를 ‘창가(唱歌)→신체시(新體詩․新詩)’순의 전개를 주장하여 신체시 이전의 모든 시가를 창가라는 개념으로 묶어 이를 개화기 시가를 총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기도 하고(임화, 백철, 조연현, 조윤제, 김동욱, 문덕수 등), 창가 이전에 개화가사를 두어 ‘개화가사→창가→신체시’순의 전개를 주장함으로써 전통가사 형식을 답습한 개화가사와 다소 새로운 가요인 창가를 구분지어 사용하기도 하며(조지훈), 개화가사를 다시 개화시와 개화가사로 구분하여 ‘개화시→개화가사→창가→신체시’순의 전개를 주장하는(송민호) 등 견해를 달리하고 있는 실정이다.(26) 실제로 이 시기의 시가는 󰡔�독닙신문󰡕�의 독립․애국가류를 비롯하여 가사(개화가사)․시조․한시 등 전통적 시가형태와 창가․신체시 등으로 불리어지는 다소 새로운 시가형태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당대 간행되었던 신문․잡지들을 통해 발표되었다.(27) 그런데 여기서 ‘신체시’까지를 개화기 시가의 범주에 넣어 살피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신체시가 흔히 우리 시문학사에서 최초의 근대시적 특징을 지닌 문학형태로 일컬어질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실제에 있어서 단순한 몇 가지의 형태적 변형에서 일뿐, 개화기적 특징을 두루 담고 있다는 역사적 성격과 내용적 사실 이외에도 개성적 차원에서 개인의 정서적 반응을 노래한 근대적 서정시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그 과도기적 혹은 이행기적 특징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파악함이 옳을 듯하다. 따라서 신체시 역시 개화기 시가의 말미에서 새로운 시의 태동을 예비하는 단계에 놓여 있는 문학으로 이해해야 하리라 본다.(27) 독립․애국가류와 개화가사 개화기 시가는 특히 초기에 있어 ‘독립가’ 혹은 ‘애국가’라는 모습을 띠고(27)있었다.(28) 이들 독립 애국가류와 개화가사는 전통적 율조인 4․4조 리듬을 취하고 있다는 데 큰 공통점이 있다. 말하자면 세차게 밀려드는 외래사조와 문물제도들에 대한 반응을 새로운 형식적 장치를 구비하여 새로운 감수성의 차원으로 노래하기 보다는, 우리에게 익숙해야 있는 형식적 율조를 통해 보편적인 정서 반응으로 노래하고 있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28) 창가(唱歌)의 성행 창가란 주로 7․5, 8․5, 6․5 등의 형태적 특징을 보이며 서양식 악곡에 얹혀 불린 개화기 시가를 말한다. 가창의 여부가 필수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단정을 내리기 어려우나, 4․4조의 독립․애국가류 및 개화가사와는 그 형태의 면에서 다소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30) 3. 애국․계몽적 서사문학의 양상 개화기의 시대정신을 구현한 문학형태들 가운데 서사양식을 취한 것으로서 신소설류와는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는 일군의 작품이 있다. 흔히 애국․계몽문학으로 불리어지는 이들 작품은 그리 오랜 기간에 걸쳐 존속되지는 않았지만 이 시기 문학의 한 특징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 주목을 요한다. 정확한 연대를 고정시키기는 어렵겠지만 애국․계몽문학은 대체로 1900년을 전후한 시기로부터 1910년 무렵까지에 걸쳐있다. 말하자면 이 시기에 등장했던 우리의 과거 역사적 사실과 인물을 제재로 한 역사전기문학과, 시사적 성격을 띤 단편 토론체문학, 그리고 외국의 역사서 및 전기의 번역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당대의 사회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애국․계몽이라는 주제지향을 강렬히 표출한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는데, 개화나 혁신의 측면을 도외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통고수와 민족적 주체성의 발견 및 확립을 보다 강조한 측면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거시적으로는 당대에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애국․계몽운동과 맥이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33) 4. 개화문학으로서의 신소설(新小說) 신소설이란 우선 우리의 ‘고대소설’과 대립적 위치에 서있는 명칭이다.(41) 신소설의 특징적 면모는, 우선 그 형식적인 면에서 묘사가 치밀하고, 새로운 가치질서와 시대의식을 주제화하려고 했으며, 구어체를 바탕으로 한 문체의 산문화 및 현실적 소재와 배경을 작품에 도입하는 등의 진보적 측면을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주제 형상화나 인물의 성격창조 등 내용적 사실에 있어서는 미숙한 점들이 많이 드러나고 있어, 그 새로운 문학으로서의 한계가 곧바로 드러나기도 한다. 즉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다양한 주제들을 작품에 도입하되, 그것의 미적 형상화보다는 전달적 측면에서의 목적의식이 선행하여 계몽적 차원에 떨어지고 마는 가장 큰 문제점과 함께 인물의 성격창조에 있어서도 선․악의 대립적 구도에 의해 개화인은 선, 전통적 수구인은 악이라는 전형성을 탈피하지 못한 점 등에서 뚜렷한 한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면모들은 사실 그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되는 것들이다. 비판의식의 결여라든가, 근대적 인간형을 제시하지 못한 점, 그리고 소설 구성상 우리의 고대소설적 패턴을 답습하고 있다는 사실 등은 널리 지적된 바이기도 하다.(43) 요컨대 신소설은 이른바 ‘이야기책’으로 불리어지던 고대소설의 퇴진과 새로운 시대적 전환기에 의한 근대소설의 성립이라는 역사적 측면에서의 과도기적 성격을 지닌 문학형식으로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구성과 주제의식의 이면에는 다소 고대소설적 수법이 남아있기도 하는 복합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소설에 의해 우리의 서사문학이 새로운 문학사적 전환을 맞게 된 사실은, 그 내용에 있어 새로운 역사 전환기의 삶의 양식을 작품으로 형상화하려는 작자의 의도와, 그것이 출판문화의 활발한 진전과 함께 일간신문에 연재됨으로써 이른바 독자를 전제로 한 상업적 성격을 띠었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신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주제와 시대의식은 흔히 상업적 성격을 지닌 통속소설 내지 개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그 계몽적 교화를 의도하는 목적성의 문학으로 일컬어지기도 하지만, 신소설이라는 문학이 존재한 것으로부터 우리의 본격적인 근대문학의 출발 거점이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결코 경시할 수 없는 중요성을 지녔다고 할 것이다.(44) 제2부 근대문학의 태동: 1910년대 문학 1. 근대문학의 성격과 특징 근대문학의 일반적 성격 하나의 문학장르가 문학사 위에 뚜렷이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요건을 구비하여야 한다. 흔히 일컬어지듯 문학담당 층이 형성되어야 할 것이고, 그들의 세계관과 미의식을 일정한 형식을 통해 표출해 낼 수 있는 역사적 실체로서의 장르가 마련되어야 함음 물론, 그들이 지향하는 문학적 경향이나 세계관이 일정한 공유분모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는 점 등이다.(52) 이와 같은 측면에서 볼 때 근대문학의 성격은 크게 작품 외적 사실의 면과 작품 내적 사실의 두 면을 통해 이해 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작품 외적 사실들로는 표현언어의 면에서 중세문학이 지향했던 보편적 문어(文語)가 폐기되고 자국어(自國語)에 의해 문학작품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53) 다음으로 작품 내적인 사실들로서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새로운 형식적 틀을 통해 새로운 면모들을 형상화시켜 나간 점들을 들 수 있는데, 새로운 시형태의 개발과 산문적 성향의 대두에 의한 소설장르의 확립을 그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소설장르의 확립은 중세적 세계관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시대의식과 문학적 지향을 형상화해 낸 것으로 공인되는데, 특히 의식의 측면에 있어서의 자아각성과, 형식적 측면에 있어서의 문장의 산문성․소재의 현실성, 그리고 방법적 측면에 있어서의 심리묘사와 성격창조 등을 지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말하자면 새로운 문학장르와 의식의 동질성이라는 공통분모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것인데, 중세적 운문 위주의 영역에서 크게 탈피하여 근대적 산문 위주의 영역을 지향하는 문학적 경향으로 대변된다 하겠다.(53) 한국문학사에서의 특징 식민지시대는 주지하다시피 일제에 의한 주권의 상실과 정치적 부자유, 경제적 궁핍, 그리고 한말에서부터 물려받은 봉건적 잔재의 상존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시대이다. 이런 상황 내지 당시 사회집단의 정신적 구조에 대응하거나 연관되는 작품들의 세계관은, 대체로 다음 세 시기로 나누어 설명된다. 그 첫째가 일정 초기의 무단정치시대로서, 이 시기의 문학작품에 나타난 세계관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기정사실로 인정하여 그 현실에 순응해야 한다는 견해와, 그 통치에 반항하여 민족의 주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둘째는 중기의 이른바 문화정치시대로서 이 무렵에는 현실에 대한 객관적 비판과 계급의식적 해석, 그리고 비현실적 유미세계에의 지향 등이 그 대표적 세계관들이다. 셋째는 전시체제가 지속되던 일정말기로서 이 시기에는 현실사회로부터 서정세계로 비켜서거나, 신변적인 현실세태를 풍자․냉소하거나, 농촌문제를 고민하고 그 현실을 증(55)언하거나, 한국 민중의 강인한 삶을 역사소설로 비유하거나, 혹은 식민지체제에 협력하고 마는 등의 다양한 세계관이 제시되어 있다.(56) 대체적으로 우리의 근대문학사가 ① 극히 후진적인 것, ② 전통성의 빈곤, ③ 서구 문예사조의 혼류성, ④ 사상성의 결핍, ⑤ 국토분단에 따른 비극성 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공인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57) 요컨대 한국문학사에서의 근대적 성격과 특징 논의는, 일반적 성격의 측면에서 검토됨으로써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고, 다시 개별적 성격의 측면에서 고찰됨으로써 특수성을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말하자면 이러한 보(57)편성의 측면과 특수성의 측면을 병행한 다면적 접근에서 구체적 실상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 서구 문학적 기준이나 내용으로 우리의 문학을 저울질하거나 편협한 국수주의적 태도로 끌어당기는 안이함에서 문학의 실상이 왜곡되는 것이다.(58) 2. 신체시(新體詩)의 등장과 그 특징 3. 1910년대와 이광수(李光洙) 우리의 현대문학사에 있어서 1910년대는 흔히 ‘2인 문단시대’로 불리워져 왔다. 이러한 명명이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재삼 검토를 요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주인공에 해당되는 최남선과 이광수의 활동은 극히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60) 4. 새로운 시양식의 등장-김억(金億)과 주요한(朱耀翰) 근대 자유시의 초기적 특징과 시사적 의의 우리의 시사(詩史)에서 1910년대의 중․후반에 등장한 초기 근대시적 실상들은 무엇보다도 그 전 단계적인 신체시의 계몽적 교시성(敎示性)을 극복하고 개인의 감수성을 노래하는 차원에서 일정한 미의식의 내면적 정조를 형상화하려고 노력하였다는 데서 뚜렷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또 이를 위해서 그 개인의 감수성에 맞는 시형(詩形)과 운율미에 대한 자각적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고, 예술성의 확보를 위해 서양문학의 충격에 이끌려 방황하는 가운데 우리의 민족적 정서와 모국어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이르기도 하는 등 복합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93) 반면, 이러한 긍정적 시각의 이면에는 이 시기의 시들이 문학이 근거하고 있는 당대의 역사적 맥락과 시대현실을 외면하고 개인적 감수성의 세계만을 분방한 낭만적․애상적 정조로써 노래하는데 치우쳤다는 질책도 모면키 어려우리라 생각된다. 물론 식민지적 현실이 이 경우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고도 보이나, 그러한 상황 자체가 이러한 의식부재의 면을 합리화시켜 줄 수는 없을 것이다.(93) 제3부 근대문학의 성장: 20년대 전반기 문학 1. 3․1운동과 근대문학사 모든 문화현상이 다 그렇지만 특히 문학은 삶의 문제를 대상으로 하여 이에 관한 모든 인간행위를 형상적으로 그려낸다는 측면에서 그것이 존재하고 있는 역사․사회적 공간과 분리되어 이해되기 어렵다. 더욱이 그 형상적 기술을 바람직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각 시대현실의 역사․사회적 공간에 위치하고 있는 인간과 인간행위에 대한 일정한 인식을 필요로 한다.(95) 물론 이러한 관점은 자칫 문학의 독자성을 흐리게 하는 듯한 그릇된 이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이 그릇된 이해는 문학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오히려 문학의 독자성을 가능케 하는 대 역사․사회적 관련을 이해함으로써, 이 시기에 있어서 전개되었던 문학현상에 대한 온당한 이해의 과정을 밟는 하나의 척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95) 3․1운동과 문학사적 변모 3․1운동 자체가 근대적 민족주의의 확립이라는 거시적 명제 하에 전개되었던 만큼, 1919년 이후의 근대문학은 민족문화를 새롭게 재편하고 창달해야 하는 기본사명을 문화의 다른 어느 영역에서보다 뚜렷하게 자각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하여 그 구체적 현실에 있어서 상당한 질적 변화를 가져왔고, 그 변화과정 또한 단선적으로 이해해야 할 성격의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100) 이러한 역사적 관점에 서 있을 경우 당대 문학인들에게 절실히 기댈 수 있는 것은  당대의 시대현실을 올바로 인식하고 민족의 진로를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하는 작가적 사명의식의 확립이다. 이 점에 있어서 이 시기의 문학인들이 보여준 것은 어느 정도의 긍정적 평가를 가능케 한다. 당시 일본을 통할 수밖에 없었지만, 유학을 통해 새로운 자아각성과 과학적․합리적 사고를(100) 갖추기에 힘썼고, 귀국하여 언론과 문필활동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면서 종사했기에, 작품 창작의식의 면에 있어서나 인쇄매체를 통한 작품 발표의 면에 있어서 다른 어느 시기보다도 전문성을 견지하려고 한 점이 두드러진다. 또 나름대로의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창작하려는 문학사상적 측면에서의 자각도 엿보이고, 전통부정의 시각에서 말미암은 것이기는 하지만 다양한 사조적 접근을 통해 새로운 문학전통을 수립하고자 한 지향적 면모 역사 간단하게 처리할 수 없는 부분들로 생각된다.(101) 많은 긍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의 문학적 실상이 보여주는 것은 먼저 앞에서도 지적한 바 있는 ‘민족적인 형식’을 새롭게 모색해 놓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실제에 있어 이 문제는 작품을 창작하는 전문인으로서 견지해야 할 창작방법의 적극적 개척과, 당대의 시대이념 및 민족사의 전개과정 속에서 필연적으로 추구되어야 할 민족해방의 과업을 언어예술로써 적절히 형상화해 내는 과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문학인들은 이 점에 있어서 아직 문학적인 미숙성을 보였고, 문학 외적인 상황과 무분별한 외래사조의 수용, 그리고 사상적 혼란에 근거한 가치의식의 불안 등으로 인하여 근대문학의 성격을 매우 복합적이고 파행적인 것으로 이끌어 가기도 했다. 식민지적 현실을 감안할 때 다소 무리한 시각이긴 하겠으나, 당면한 현실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이를 타개하려는 문학적 각성이나 작가정신을 높이 치켜들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학적 진실은 이러한 문학 외적 장애나 갈등을 뛰어넘는 차원에서 더욱 그 존재가치가 드러나는 것임에 비추어, 쉽게 합리화할 수 없는 결격사유로 인정되어야 마땅할 것이다.(101) 이와 같은 문제점들은 거시적인 면에서 특히 문화일반에 대한 이해나 민족문화의 진지한 모색이 결핍되었다는 데 큰 원인이 있다. 거듭 강조하는바 민족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나 적극적 계승의식이 각성되지 않았기에, 청년기의 불안정한 정서가 쉽게 ‘새로움’에 이끌리게 되었고, 그 결과 문학을(101) 삶에 대한 진취적 방향제시의 차원에서 지속하기보다는 때로 자아도취와 현실외면의 한 구실로 삼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102) 2. 동인지 시대의 개막과 문학운동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정책의 양상을 한마디로 이야기한다면 정치적 탄압책동과 경제적 수탈구조 그리고 문화적 왜곡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책적 과정 속에서 우리의 자생적 근대화는 억압되었고, 식민지적 근대화라는 변칙적 의지만이 강요되었다.(102) 일제의 식민지정책이 가장 크게 변모된 계기는 주지하다시피 민족적 거사인 3․1독립운동이었다. 이 운동을 계기로 일제는 이른바 무단통치 방식에서 문화통치로 그 방향을 바꾸게 된다.(102) 어떻든 3․1운동의 결과로 나온 일제의 이른바 문화통치는 그 본질에 있어(102)서 그 이전의 무단통치와 다를 바 없다 하더라도, 한국 지식인의 활동과 그 한 부분으로서의 문학운동에 커다란 전기를 마련한 셈이었다. 곧, 신교육을 받은 무학지망생이 어느 시기보다도 많이 등장하고, 문화통치로 인해 발언영역의 진폭과 발표지면이 넓어지게 되었던 바, 각종 신문․잡지 및 동인지가 격증되면서 이 땅의 근대적 성격의 문학이 개화(開化)를 보게 된 것이다. 이 같은 문학활동의 양적 확대와 내용상의 다양성을 밑받침해 주게 된 구체적 현상의 하나가 ‘동인지 시대의 개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학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1920년대 이후의 문학은 그 토대를 확보하게 되었고, 우리의 근대적 문단 형성의 저변을 마련하였다는 데 중요한 의의가 있는 것이다.(103) 주요 동인지의 양상 이 시기에 등장한 대표적 동인지로는 문학적 성과의 면과 당대적 위상에서 차지한 영향력을 고려하는 측면에서 󰡔�창조󰡕�, 󰡔�개벽󰡕�, 󰡔�폐허󰡕�, 󰡔�장미촌󰡕�, 󰡔�백조󰡕�, 󰡔�금성󰡕�, 󰡔�영대󰡕� 등을 들 수 있다.(103) 󰡔�창조󰡕�는 한국 최초의 순문예지이며 동인지로서 3․1운동이 일어나기 한달 전인 1919년 2월에 창간되었다. 당시 일본에 유학 중이던 김동인․주요한․전영택 등이 주축이 되어 2호까지 동경에서 발간되다가, 3․1운동 후에는 국내에서 속간하여 1921년 5월 통권 9호로 폐간되기까지 이른바 근대문학 초기의 계몽적 교훈주의와 관념적․추상적인 성향을 배격하고 문학의 예술성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였다. 󰡔�창조󰡕�를 통해 우리나라 본격 자유시가 발표되었음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고, 또 소설에 있어서도 자연주의 문학의 새로운 출발을 엿볼 수 있다는 데 이 잡지의 중요한 가치가 있다.(103) 1920년 6월에 창간된 󰡔�개벽󰡕�은 천도교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1926년까지 통권 72호를 발행했고 이후 수년간 정간되었다가 다시 속간되기도 한 월간종합지이다. 문예동인지의 성격을 띤 것은 아니었으나, 일제에 투쟁하고 민족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정신과제의 해결과, 세계사상을 받아들여 이를 바탕으로 평등주의를 내세우고 민족독립을 쟁취하자는 데 의식을 같이하는 한편, 문화(103)주의를 표방하여 민족문학의 수립과 발전에 공헌하자는 기본목표를 세워 주목할 만한 의욕을 보였다. 특히 문예면은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우수한 작품과 문인을 배출함으로써 1920년대의 문학을 주도한 범 문단적 성격의 잡지였다. 1920년대에는 김억․김소월․변영로․박종화 등과 신경향파문학을 대표하던 김기진․박영희 등이 중심이 되어 활약했고, 염상섭․현진건 등도 󰡔�개벽󰡕�을 통해 등장하고 여기서 성장했다. 󰡔�개벽󰡕�은 특히 초기 신경향파문학이 성장하는 데 거점적 역학을 하였다.(104) 다음으로 󰡔�폐허󰡕�는 1920년 7월에 창간된 문예동인지로서 김억․남궁벽․염상섭․오상순․황석우 등이 참가, 2호까지 발간되다 말았으며, 주로 19세기 후반 서구문학의 상징주의와 퇴폐적 경향이 짙은 작품들이 실렸다. 또한 1921년 5월 창간된 󰡔�장미촌󰡕�은 최초의 시전문지로서 주로 낭만주의적 경향을 표방하였으나, 대다수의 동인들이 다시 󰡔�백조󰡕�를 창간하는데 참가, 󰡔�백조󰡕�의 전신으로서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104) 한편 1922년 1월에 창간된 󰡔�백조󰡕�는 애초에 격월간으로 계획된 것이었으나 3호에 그치고 만 순 문예동인지였다. 특히 당대의 시대현실 속에서 ‘자유’를 구가하려는 경향을 보였으나, 식민지적 현실의 암울함에서 오는 감상적 낭만성에 치우친 경향이 짙다가 점차 반성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고, 발표된 작품은 소설보다는 시에 더 비중이 주어진 특징을 보였다. 홍사용․박종화․나도향․이광수․현진건․박영희 등이 중심이 되어 활약했으며, 시 쪽에서는 낭만주의적 성향이 강한 반면 소설 쪽에서는 자연주의와 사실주의적 색채가 강했고, 또한 신경향파문학이 태동하게 된 모체가 되기도 한 복합적 성격을 지녔다.(104) 󰡔�금성󰡕�은 1923년 11월에 창간된 시전문동인지이다. 주로 해외문학의 번역․소개와 창작시 발표를 전문으로 했는데, 양주동이 중심이었고, 김동환이 추천시를 발표하였다. 순문학동인지로서 1924년 8월에 창간된 󰡔�영대󰡕�는 당시로서는 특이하게 평양에서 편집을 한, 이 지역 중심의 문학동인지라 할 수 있다. 그 동인들은 󰡔�창조󰡕�에서 주축이 되었던 이들이 거의 속해 있었으므로 그 성격을 그대로 계승 반영했다.(104) 이상에서 그 윤곽만을 간략히 살펴본 이 시기 주요 동인지의 양상들로부터(104) 다음과 같은 몇가지 공통점을 찾아낼 수 있다. 먼저, 간행 횟수가 대체로 단명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동인지’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 속성인 사상적 경향이나 표방된 노선의 통일이 진지하게 모색될 수 없었다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창간 당시의 의욕과는 달리 모호한 성격을 띠게 되었고, 발표지면을 확보하기 위해 엇비슷한 동인지들을 다시 등장시키게 된 결과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지적될 수 있는 사실은 한 작가가 여러 동인지에 동시에 관여하였다는 점이다. 각 동인지가 표방한 노선이 조금씩은 달랐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문제는 작가의식의 파행성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실제로 이들은 다양한 사조적 경향으로 창작활동을 했으며, 따라서 어느 한 작가의 특징적 성향이나 사조적 공통분모를 추출해 내기 힘들다. 이러한 작가의식의 복합성은 특히 서구문예사조에의 무비판적 경도에서 비롯된 것이 주요 원인이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이 시기의 작가들을 어느 한 사조에 쉽게 한정시켜 바라볼 수 없으며, 또 다양한 장르에 걸쳐 창작활동을 한 점을 감안하면 실험적 성격이 강한 작품이 많았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끝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이 시기의 동인지들을 통해 비슷한 연령층의 젊은 작가들이 대거 등장함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폐쇄적 범주 속에 갇힐 위험을 내포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갑작스런 사태는 문학활동의 양적 확대와 내용상의 다양성이라는 긍정적 측면의 이면에, 문학에 대한 인식의 폭과 작가정신의 깊이를 확충하는 면에 있어서의 심각성을 의심케 해준다. 따라서 이 시기의 작가들에 대한 연구는 이 같은 사실을 충분히 고려한 차원에서 수행되어야 한다는 반성적 관점을 제기하고 있다.(105) 동인지문학의 기본성격 우선 이 시기의 문학인들과 그들 문학의 기본성격은 김억과 주요한의 경우에서 살핀 바와 일치한다. 다시 말해 당대 일본 유학생 출신이 대부분응ㄹ 차지하였고, 그들의 연령적 미숙성이나 가치관의 혼란 및 부재 등으로 인하여 파행적 성격을 띠었다는 점, 또 신학문과 접하면서 서구의 문예사조에 깊이 있는 인식 없이 경도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차원에서 전통부재의 현실을 외치면서도 새로운 방법적 모색을 꾀하지 않고 개인적 감수성의 표출에 치우친 점, 그리하여 결국 당대의 역사적 현실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민족의 진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한 점 등은 비판적 측면의 경우에 해당되며, 반면 긍정적 측면에 있어서는 그 이전의 문학이 보여준 교시적 계몽성을 탈피하여 자유로운 정서를 표출하려는 지향적 면모를 보여준 점이라든가, 근대적 각성에 의한 자아의 발견과 그 정서적 가치구현에 힘쓴 점, 또 구체적 대안은 없었지만 나름대로 전통에 뿌리를 둔 민족적 정서의 필요성을 인식한 점, 그리고 다양한 사조적  혼융을 보여주면서도 우리의 근대문학을 본격적으로 개화(開花)시킨 점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106) 그리고 이러한 복합적 측면은 우리에게 반성적 시각을 열어준다. 곧 어느 한 측면만을 강조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확대하여 당대의 문학적 실상을 왜곡하는 우(愚)를 범하지 않게 하는 근거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또 문학의 속성에 비추어 볼 때 가시적으로 드러난 변화만을 문제 삼을 수 없는 구체적 접근방법의 모색을 환기시키기도 한다.(106) 따라서 이 시기 동인지문학의 기본성격을 통해 우리는 거기에 속해있는 작가들의 개별적 실상을 다시 작품을 통해 진지하게 구명해야 한다.(106) 결론적으로 말하여, 1920년대 초의 동인지를 중심으로 한 문학적 상황을 배경으로 이후의 문학은 보다 발전적인 면모로 쇄신되었으며, 그 방법과 인식의 관점에서 상당한 전환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된다.(107) 3. 20년대의 시적 기류와 민족적 정조의 시 1900년대의 신문학적 탐색기를 통해 새로운 시형과 내용적 사실들을 모색해 온 우리의 근대시는 신체시라는 과도기적 형태를 거쳐 1910년대 중반 이후부터 본격 근대시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앞에서 이미 살핀 바 있듯이, 이러한 본격 근대시로서의 도약에는 김억과 주요한의 선구적 업적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들에 의한 계몽적 교시성의 배제와 개인적 감수성의 확보 및(107) 시의 미학적 자질에 관한 자각적 면모들은 이후 1920년대의 시인들에게 일정한 토양을 마련해 준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국의 근대시는 3․1운동 직후의 신문학 운동의 전개와 함께 1920년대에 이르러 그 구체적인 성과와 문학적 역량을 축적시키며 뚜렷이 정립되기에 이른다.(108) 1920년대의 다양한 시적 성향과 특징들을 갈래지어 보면, 초기 문예동인지를 중심으로 활약했던 시인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낭만적 성향과, 중반 이후 뚜렷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등장하여 후반까지 이어지는 신경향파-카프계열의 투쟁적․ 이념지향적 성향, 그리고 이러한 특정 사조나 운동에 속하지 않으면서 시작활동을 펴나간 시인들에게서 추구된 전통적 정서의 심화와 확대의 성향 및 철학적 사유와 적극적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이를 형상화한 시적 성향 등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으리라 본다.(109) 낭만적 성향의 분출-초기 문예동인지의 시와 시인들 전통적 정서의 심화와 확대-김소월(金素月) 시적 인식과 민족의식-한용운(韓龍雲) 4. 새로운 소설미학의 추구 이 시기 소설의 새로움은 우선 이광수로 대표되는 계몽적 목적성의 탈피에서 찾을 수 있으며, 그 결과로 추구된 예술성의 확보 및 다양한 문예사조에의 관심 등으로 대변된다.(130) 이 시기의 소설들을 통해 이끌어낼 수 있는 사실은, 무엇보다도 작가의식이 나름대로 확보되어 있다는 점일 것이다. 1920년대의 소설과 이후의 많은 작품들에 있어서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인데, 이는 문학이 제시할 수 있는 인간적 삶의 양태와 그 구체적 삶의 공간에서 야기되는 다단한 인간 행위 자체가, 무엇보(130)다도 작가가 경험한 의식세계 내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 시기에 있어서도 이 작가의식의 문제는 중요한 것이겠지만, 이 시기의 삶의 현실과 문학적 풍토에서 제기되는 특징적 사실들은, 새로운 소설미학의 추구라는 보다 확대된 개념 속에서 적절히 이해되어야 할 것이고, 그 세부적 실상이 개별 작품을 통해 검증됨으로써 작가와 작품에 대한 정당한 의미부여가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이러한 작업은 다양한 관점과 객관적 사실 규명의 측면에서 항상 새롭게 이루어져야 하며, 긍정적 면모만을 부각시키는 편향성을 벗어나서 복합적으로 수행되어야 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131) 김동인(金東仁)의 소설적 지향 사실 김동인만큼 다양하고도 이질적인 경향을 보이는 작가도 드물다. 그는 1920년대의 문학적 상황 속에서 본격문학의 기치를 들고 나와 문학의 가치와 효용에 대해 나름대로 고심한 작가이다.(132) 김동인의 소설이 통속화되기 이전의 1920, 1930년대 주요 단편들을 대상으로 그 성격을 구분할 때는, 대체로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에 의거한 「감자」 계열과, 탐미주의적 요소가 짙은 「광염소나타」․「광화사」 계열로 이분(二分)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자연주의적 리얼리즘과 탐미주의는 김동인 문학의 독자성을 구축하고 예술성을 높이는 데 주요한 구실을 하는 2원적 요소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133) 염상섭(廉想涉)의 현실감각 염상섭은 우리의 근대소설사에 있어서 특히 김동인과 비교되는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작가로 정평되고 있다.(136) 이와 같은 염상섭의 작가적 지향은 결국 각성된 자아의 눈을 통해 가려진 현실의 이면을 해부하고 그 내부적 실상을 문학적으로 폭로함으로써 현실감(137)각을 더욱 냉철히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소설작품에는 당대의 식민지적 현실과 맞닥뜨린 지식인의 사고와 행동의 문제라든가, 그 현실을 살아나가는 인물들에게 필수적으로 결부되는 도덕성의 문제, 그리고 새로운 세계관의 도래로부터 특히 의식적인 변모를 가져왔던 성(性)과 윤리의 문제 등에 초점을 맞추어 작품을 이끌어 가는 특징적 변모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138) 나도향(羅稻香)․현진건(玄鎭健)의 개성 1920년대의 소설을 살피는 과정에서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작가로 나도향과 현진건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흔히 󰡔�백조󰡕�파 작가로 지칭되지만, 실상 󰡔�백조󰡕�동인들의 성향이 어떤 공통적 특징보다도 개별성을 띠고 있는 면이 강하고, 또 이들 󰡔�백조󰡕�지를 통해 작품활동을 지속적으로 펴 나간 것도 아니어서 쉽게 규정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다만 󰡔�백조󰡕�지의 동인들이 문학활동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한 무렵, 그들은 이른바 당대의 문학청년들로서 낭만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띠는 초기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은 하나의 공통적 성격으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141) 최서해(崔曙海)의 빈궁소설 최서해는 그 작품성향에 있어 이 시기의 일반적 작가들과는 그 갈래를 달리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겠으나, 우선 이 시기의 소설이 보여준 새로운 소설미학의 추구라는 관점에서도 특징적 일면을 지니고 있기에 주목을 요하는 작가이다.(145) 그의 소설들을 통해 추출할 수 있는 새로움의 면모는 다름 아닌 작품의 ‘소재’이다. 그는 당대 식민지 현실 속에서 그 자신이 직접 머슴살이, 나무장수, 물장수, 도로공사인부, 중, 방랑걸식 등 가장 뼈저린 하층생활을 거의 안 해 본 것 없이 겪었으며, 이러한 체험들을 바탕으로 소설 창작에 임하여 매우 강렬한 작가의식을 내보이고 있다.(145) 이와 같은 작품의 소재와 작가의식의 강렬함은 당대 문단에 있어서는 하나의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와 비슷한 경향을 띤 작가나 작품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작가 자신의 체험을 다른 무엇에 의탁하지 않고 보다 직접적이며 사실적으로 작품화한 경우는 그 유례를 찾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최서해의 문학적 성향을 특히 객관적 사실주의와는 갈래가 다른 ‘비판적 사실주의’라고 일컬을 수 있다.(146) 요컨대 이와 같은 최서해 소설의 특징들은 1920년대 중․후반부터 이 땅을 풍미했던 프로문학과 상통한 경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최서해는 그러한 제재를 선택하거나 주제를 내세우는 것이 결코 의식적인 것에 있지 않고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인데 있었다.(147) 실상 그의 체험문학이 좀 더 빛나는 문학적 가치를 갖기 위해서는 그 생활체험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따르는 기법적 자각이 필수적으로 수반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의 소설은 문학적 형상화의 면모보다는 체험적 사실의 단순한 재생에 그치고 만 결함을 다분히 지니고 있다. 따라서 그가 추구해 나간 작가의식의 세계가 이 시기 소설에 있어 보다 확장된 소재적 차원(147)과 계층의식의 확대라는 면에서는 소설미학의 새로운 면모를 열어주었다 하겠으나, 그것이 다만 일종의 소재문학이라는 한계를 지닌 결함을 내포한 것이었음도 동시에 지적될 수 있는 것이다.(148) 5. 민족적 현실의 소설적 형상화 그런데 이러한 1920년대에 등장한 작가의 작품들 가운데는 이렇듯이 새로운 소설미학의 추구라는 관점과는 다른 측면에서 문학사적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특징적 면모들이 또한 내재해 있다. 그 공분모적 성격을 함축적으로 얘기한다면 곧 ‘민족문화적 성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148) 새삼스러운 얘기겠지만 우리가 식민지시대의 민족문학을 중요하게 문제삼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문학으로 표현된 역사적 삶의 근거를 확보하고, 이를 통해 우리의 문학적 유산을 오늘의 관점에서 수렴, 창조해 가는 데 있을 것이다. 문학이 민족적 자기 동질성을 바탕으로 한 언어와 문화의 공동체임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그 사고와 정서의 특징적 면모는 민족 혹은 민족문학을 떠나서 얘기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문학이 일정의 역사적 시기에 있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존재론적 물음을 제기할 수 있으며, 오늘의 관점에서 이를 당위적 사실로 받아들여 구체화시키는 것이 문학사 기술에 있어 의미 있는 일로 생각된다.(149) 그런 면에서 이 시기의 소설에 나타난 민족문학적 성격은 특히 토착적 삶 속에서 제기되는 정서의 문제를 환기시키는 특징을 보이고 있는 점이 우선 주목되며, 다음으로 식민지 현실이 야기시킨 일상적 현실의 조건과 그 생활상의 문제를 형상화한 점, 그리고 과거의 역사현실을 매개하여 자아각성을 촉구하고 현실인식의 안목을 제시하고자 하는 점 등의 특징들이 주목된다.(149) 토착적 삶과 민족적 정서의 추구 식민지시대의 민족주의란 거시적인 안목에서 볼 때 현실적 여건에 대한 민족 주체성의 확립, 그리고 이에 의한 새로운 민족적 활로의 모색으로 봄이 적절하다. 따라서 일제의 침략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이루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경우 자주독립은 근대화라는 또 다른 민족적 활로와 결부되어 새로운 정신적 지주와 가치기준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 당대의 실상이었다. 그래서 문학작품에서 형상화하려는 문제의식들이 이른바 전통적 삶과 그 시대적 위상에 따른 변모양상, 또 그 과정에서 야기되는 갈등의 문제들을 심각한 양상으로 제기하였다. (150) 특히 이 시기에 발표된 소설들 가운데 우리의 토착적 생활현실을 작품의 공간적 배경으로 하여 그 속에서의 삶의 모습을 그려나간 것들이 많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것은 이 공간적 배경에 의한 문학적 형상화의 작업이 당대 식민지 현실에 대한 작가의 문학적 태도, 즉 문학인으로서의 작가의식을 대변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토착적 생활현실과 등장인물을 통한 삶의 모습을 그리는 것 자체가 당대 현실상황에의 관심과 극복의지를 표현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150) 이 같은 경향의 작품으로 먼저 현진건의 「고향」(1926)을 들 수 있다.(151) 김동인의 「붉은 산」(1932) 역시 토착적 삶과 민족정서의 추구를 지향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151) 일상적 현실의 조건과 생활상 일상적 삶의 조건과 생활상을 작품의 주된 소재로 채택하여 식민지적 현실을 예리하게 파헤친 작품으로 먼저 현진건의 「빈처(貧妻)」(1921)를 들 수 있다.(155) 이와 함께 현진건의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인 「운수좋은 날」(1924)에서는 당시 노동자 계층에 속하는 인물 ‘김첨지’의 단면적 일상을 통해 찌든 현(155)실의 가난과 비애가 핍진하게 그려지고 있다.(156) 그런 면에서 또한 주목을 요하는 작품이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1921)와 「만세전」(1922)이다.(156) 한편, 김동인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의 문학적 지향을 구체화시킨 작품 중의 하나인 「감자」(1925)를 통해 식민지의 일상적 현실 조건과 그 생활상을 핍진하게 그리고 있다.(157) 시기적으로는 조금 뒤에 위치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개인적인 문제가 당대의 시대현실과 사회의 문제로 확장되어 있는 예가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1934)이다.(157) 6. 희곡문학의 초기적 정착 제4부 성숙기 근대문학: 프로문학과 민족주의문학 1. 초기 프로문학운동의 양상 (1) 신경향파 시기의 프로문학의 양상 신경향파문학의 어의 신경향파문학이란 프롤레타리아문학의 전 단계, 즉 목적의식적 계급성이 확고히 드러나지 않은 채로 사회적 모순을 개인적 차원에서 폭로와 고발로 표현하던 시기의 문학을 가리키는 말로 자연발생적 프로문학이라 칭할 수 있다. 임화(林和)는 신경향파문학을 말 그대로 막연한 경향성으로만 존재하는 일종의 혼효상태나 과도기의 문학이라 했으며, 박영희는 부르주아문학의 전통과 전형에서 벗어 나와서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었던 각 작품에 나타난 색채를 종합적으로 대표한 말이라고 하였다.(171) (2) 카프(KAPF)의 결성과 내용․형식논쟁 카프의 결성 내용․형식논쟁 1926년 12월 󰡔�조선지광󰡕�에 발표된 김기진의 「문예시평」은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논쟁인 내용․형식논쟁을 불러일으킨 문제의 글이었다.(176) 김기진은 어떠한 소설이든 일정한 소설적 형상화와 구성 및 표현 등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것은 초기 김기진 비평문에서 보이는 효용의 문학, 생의 본연한 요구의 문학을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그러한 문학도 역시 문학인 이상 최소한 소설적 형상화를 갖춰야 한다는 입장으로 진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 박영희는 그러한 김기진의 논의와는 다소 다른 방식으로 이를 비판해 버렸다. 말하자면 김기진은 프로문단도 이제 본무대로 들어섰다고 인식한 데 비해서 박영희는 여전히 투쟁기라는 인식으로 투쟁성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176) 말하자면 김기진이 문예의 본질적 문제로 내용․형식문제를 논한 데 비해 박영희는 현 단계 프로문예의 임무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면서 문학내적인 방법이 아닌 사회사적 혹은 문화사적 비평이 현재 프로문예 비평가가 취할 태도라고 강조...(177) 그러나 이 논쟁은 이후 창작방법논쟁이 본격화되면서 그 단초를 형성하는 계기로서의 평가를 받으며 일원론, 이원론에 대한 규정문제로서 접근해 들어가기도 한다. 실제로 이 논쟁은 미학상의 가장 기본적인 범주에 속하는 문제이며 창작방법론 혹은 리얼리즘론의 계기들을 내포하고 있다.(178) (3) 목적의식론의 제창과 1차 방향전환 제1차 방향전환론 내용․형식논쟁은 그 출발부터 당연히 요구되는 문학의 본질적 측면에서 다루어져야 할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문예비평가의 태도문제로 제기되고 그 내면에는 의식의 선명성문제가 잠재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특히 박영희에 의해 계속해서 선도된다. 그는 이미 앞서 김기진의 소설건축론에 의해 작품이 창작되면 프로생활묘사가 될 뿐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지적은 기존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의식문제를 집중적으로 논함으로써 의식(178)의 방향전환에 기반을 둔 논의를 활발히 전개하기 시작한다. 특히 박영희는 이미 김기진과 논쟁할 때 일본의 아오노 수에기치(靑野季吉)의 외재비평론(外在批評論)에 의지해 비판했다. 이 아오노 수에기치의 외재비평론은 한마디로 “주어진 예술작품을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보고 주어진 예술가를 하나의 사회적 존재로서 인식하여 그 현상과 존재의 사회적 의의를 결정하는 비평”, ‘문화사적 비평’이라 할 수 있다. 박영희는 바로 이러한 비평방식에 의해 김기진과 당시의 창작경향을 비판했던 것이다. 즉 신경향파의 인생관 내지 사회관은 반항기에 있었던 만큼 허무적, 절망적, 개인적이었다면서 투쟁기에서는 성장적, 집단적, 사회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79) 제3전선파는 당시 동경에서 󰡔�제3전선󰡕�을 발간하던 조중곤(趙重滾), 이북만, 홍효민(洪曉民),한식(韓植) 등을 일컫는 것으로 이들은 낚노 시게하루(中野重治)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 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입장에 선이 닿아 있었다. 그러면 이들의 입장은 정확히 어떠한 것이었는가. 조중곤은 「비 마르크스주의 문예론의 배격」(󰡔�중외일보󰡕� 1927년 6월 18일~22일)에서 프롤레타리아예술은 당의 지령에 의하여 제작해야만 정치투쟁과 보조를 같이하는 것이라 하여 현 단계에서는 “××주의 달성에 대한 공리적 선전적 전투술을 쓰면 그만이며, 좌익적 정견발표문도 예술이며 포스터도 예술”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당시 형성되어 있던 신간회에 종속되어 그 지도정신에 통제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181) 제2기 작품논쟁(김기진과 조중곤의 「낙동강」 논쟁) 작품비평에 치중하고 있던 김기진은 조명희의 「낙동강」을 끌어들여 제2기 작품론을 개진하였다. 말하자면 내용․형식논쟁 이후 침묵하고 있던 김기진이 당시 주요한 쟁점이었던 목적의식 문제를 작품 내적인 문제로 끌어들인 것이다. 즉 김기진은 「낙동강」이 1920년 이후 조선대중의 거짓 없는 인생기록이고, 독자대중의 감정조작에 성공했으며, 또한 각 인물에 상응한 성격과 풍모를 부여한 점에서 재래의 공상적 행방불명의 빈궁소설에서 벗어난 제2기에 선편(先鞭)을 던진 작품이라 하였다.(182) (4) 초기 프로문학 작품의 경향 초기 신경향파소설의 두 경향 전반적으로 이 경향을 처음으로 내보인 작품으로 김기진의 「붉은 쥐」(󰡔�개벽󰡕� 1924년 11월)를 들 수 있다.(184) 그리고 이 작품을 시발로 하여 1925년에 들어서는 새로운 경향을 갖는 작품들이 다수 산출되기 시작하였다. 박영희의 「전투」「사냥개」, 이익상의 「광란」, 주요섭의 「살인」, 이기영의 「가난한 사람들」, 최서해의 「기아와 살육」 등이 그것이다.(184) 그러나 이러한 신경향파문학 내부에는 상이한 두 가지 조류가 들어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찍이 임화가 지적한 박영희적 경향과 최서해적 경향이 그것이다.(186) 박영희적 경향은 소위 작가의 관념적 편향에 의한 인물의 단순화, 사건과 행동의 도식성, 전망의 과장의 문학적 특질로 규정지을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소설은 구체적 현실의 반영이 뚜렷하지 않는 추상적 관념이 우위에 선 주관주의적 혹은 낭만주의적 경(186)향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187) 최서해적 경향의 작품세계는 생존 그 자체가 문제가 될 만큼 절박한 핍박받는 빈곤층의 세계를 여실히 반영하는 데 작품의 주안점이 놓여있다. 특히 최서해는 당대 우리 민족의 비극적 상황이 만들어 놓은 간도 유랑민의 비참한 삶을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여실히 그려내어 신경향파의 대표적 작가로 일컬어진다. 방향전환을 기점으로 탈락됨으로써 당시에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최서해는 그런 점에서 신경향파문학의 특징과 한계를 가장 두드러지게 보여준 작가라 할 수 있다.(187) 이러한 두 경향은 결국 신경향파소설의 주된 특징과 함께 한계도 잘 보여주고 있음을 말해준다. 즉 의식적 관념세계와 현실묘사의 분열이다. 일정한 주제, 제재, 줄거리의 공통성을 가지면서도 이렇게 대별되었다는 것은 이들 작가들의 초지의식의 미진함, 그리고 그와 연관하여 리얼리즘적 창작방법에 대한 불충분한 인식 등의 자연스런 발로라 할 수 있다.(187) 본격적 프로소설의 태동 이러한 신경향파 문학의 근본적 문제들은 조명희의 「낙동강」, 이기영의 「민촌」「농부 정도룡」, 송영의 「석공조합대표」에 와서 당시 프로문학운동이 요구하는 의식성에 걸맞는 리얼리즘의 형태를 어느 정도 갖추게 된다.(188) 초기 신경향파시의 성격 초기 프로시는 통칭 신경향파시라 불려지고 있다. 소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덜 주목을 받았으나 김형원, 박팔양, 유적구, 김창술, 이상화 등에 의해 과거의 센티멘털하고 데카당한 문단 풍조와는 반대로 힘 있는 새로운 시풍이 싹터 나오기 시작했다.(191) 2. 볼셰비키기 프로문학 (1) 무산자파(無産者派)의 등장과 볼셰비키화 대중화 논쟁-볼셰비키화의 서곡 제1차 방향전환론의 주요 쟁점이 예술의 정치투쟁의 무기화였다는 점에서 다른 한편으로 이는 교화사업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194) 이미 제1차 방향전환기에서도 “선동의 유일 최선의 방법은 언어와 구체적 표현-그것도 알기 쉬게 해야 한다-을 빌어서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하여 이미 문예를 어떻게 함으로써 대중에게 가지고 가 선전 선동할 수 있겠는가 하는 대중화론의 단초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대중화론은 오로지 대중의 직접적인 아지테이션(agitation)을 위한 ‘진군나팔’이면 족했기 때문에 간단한 시를 읽는다든지, 알기 쉬운 포스터를 그려 붙인다든지, 간단한 연극을 한다든지 하면 된다는 입장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서 무지한 대중을 위해 가장 손쉬운 방식으로, 즉 대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초보적 표현방식으로 투쟁의식을 전달하면 된다는 것이다.(195) 이 결과 여기서는 특히 문학이 설 자리가 없게 된다. 무지한 대중은 대부분 문맹이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문학작품을 가지고 어떻게 한다는 것은 자기모순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읽고 보는 포스터, 연극, 그리고 시낭송에 집중할 도리밖에 없었다. 결국 창작활동은 여기서 부차적이라기보다는 무시될 공산이 컸다. 그런데 김기진은 바로 이러한 제3전선파의 논리에 반대하면서 작품중심의 문제로 되돌려 놓는다. 말하자면 작품을 중시하는 김기진이 세 번째로 도전한 셈이다. 이미 「감상을 그대로-약간의 문제에 대하여」(󰡔�동아일보󰡕�, 1927년 12월)에서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한(限)의 대중은 어떠한 대중일 것인가”라고 묻고, 그것은 문학과 서적으로부터 선이 먼 절대다수의 농민이 아니라 농민급 노동자 출신의 급진분자 외 청년학생, 실업자군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문예작품을 읽을 수 있는 독자대중을 염두에 두고, 이들을 대상으로 한 작품대중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나아간다.(195) 볼셰비키화와 조직개편 1930년에 들어서면서부터 프로문단에는 임화를 제외한 새로운 이름의 일군의 신진들이 지면에 나타난다. ‘볼셰비키화’란 구호를 다 같이 앞에 내세우고 기존 논자들은 과감하게 비판하며 다시 방향전환할 것을 맹렬히 주장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이른바 동경 「무산자」 그룹이다. 이들 「무산자」 그룹 구성원은 임화를 필두로 한 안막, 권환, 김남천 등이다. 「무산자」란 과거 제1차 방향전환을 주도한 「제3전선파」에 뒤이은 새로운 소장파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은 당시 일본 프로문단의 새로운 움직임에 민감히 반응하면서 새로운 기치를 내걸었던 것이다.(200) 이러한 볼셰비키화의 이해는 사실 1927년의 방향전환을 후꾸모또주의에 의한 관념적 방향전환론이라고 규정했는데, 그것은 노동자 농민의 실제 생활을 묘출하지 않고 관념적이어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실제에서 유리시키며, 작가 자신의 관념적 주관으로 해결지어 버리고 말았다고 비판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전위-노동자 농민의 아지(agitation)프로-조직을 위하여 사회의 생산 발전에 적응시킨 경제적 세계관에서 출발한 현실을 현실대로 묘출하는 객관적 실제주의인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으로 비약해야만 한다는 것이다.(201) (2) 볼셰비키화 제창 이후의 전개양상 조직 및 출판활동 농민문학론을 둘러싼 논의 사실상 프로문학에 있어서 농민의 문제는 대중화 논의에서 명확히 나타나듯이 의식화의 무기로서의 문학의 기능에 따라 필연적인 연관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볼셰비키화 문예창작의 기본방침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를 노동자, 농민, 진보적 지식인 등에게 주입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따라서 농민을 주체로 다룬 문학의 문제는 당연히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실 대중화논의를 본격적으로 들고 나온 김기진에게서 농민문학 문제(「농민문예에 대한 초안」, 󰡔�조선농민󰡕� 1929년 3월)가 프로문학 측에서 최초로 제기되었음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물론 여기서도 김기진은 앞서 보았던 대로 통속적 대중화론의 관점에서 무식한 농민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이해하기 쉬운 글을 쓸 것, 구성의 단순화, 농민의 대중 심리에 영합 등을 창작상 지침으로 내걸고 있다.(206)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의 제창 1차 검거사건을 겪은 카프는 급속히 조직활동이 둔화되면서 1932년에 들어서부터는 극히 위축된 활동상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비평의 초점도 실제 창작과 관련된 부분으로 집중되는 양상을 보인다. 그 중에서도 이른바 창작방법(207)이라 일컬어지는 리얼리즘 논의와 작품비평에 주안점이 두어진다. 이때까지 창작방법론으로 간주되어 왔던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론을 비판하면서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이 그 대안으로 제창되기 시작한다.(208) (3) 창작계의 실상 공장소설(工場小說)의 출현 본격적 노동소설의 출현과 관련하여 우리는 김남천을 빼놓을 수 없다. 김남천은 이 시기에 들어와서 활동을 시작한 신진작가로 이갑기는 김남천의 출현을 ‘혜성적 출현’이라고 할 만큼 주목을 받았다. (210) 이북명 역시 이 시기 들어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전개하는 데 대부분의 작품이 흥남 질소비료공장을 무대로 하고 있다. 이는 작가 자신이 그 공장에서 3년간 노동자로 생활한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창작활동을 했기 때문이다.(211) 농민소설의 활성화 이 시기에 들어와서 농민문학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볼셰비키화 제창시에도 당면 제재 중에 농민문제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또한 당시 운동의 지침이 되었던 12월 테제에서도 부르주아 혁명단계로서 토지혁명이라고 명명될 만큼 농민문제는 중요하게 취급되었으며, 이에 따라 농민문학론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졌음을 이미 살펴본 바 있다. 그리하여 많은 작가들이 농민 문제를 테마로 작품활동을 전개했는데 이 시기 중요한 작품은 1933년 별나라에서 발행한 󰡔�농민소설집󰡕�에 수록되어 있다.(212) 3. 카프 해산기 프로문학 (1) 카프 핵산의 경위 해산 직전의 카프 카프 해산까지의 경위 (2)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둘러싼 창작방법 논쟁 1933년 3월 백철(白鐵)은 󰡔�조선중앙일보󰡕�에 발표한 「문예시평」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소개한다. 백철은 이 글에서 새롭게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현재 소비에트에서 주창되어 논의 중에 있다고 소개하면서 정식으로 결의되고 다시 구체화되는 경우에 복종할 수밖에 없겠지만 현재로서는 즉석으로 태도를 결정지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도 오히려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이 적당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220) (3) 해산기 전후의 창작 성과 앞서 살펴본 바대로 이 시기는 일제의 군국주의 정책이 노골화됨에 따라 위기에 처하면서 카프의 활동도 극도로 위축되었음을 살펴보았다. 이는 창작계에도 반영되어 양적으로 전시대에 비해서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작품의 질에 있어서는 오히려 전시기보다도 진전되어감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세계관 혹은 이데올로기 중시에 대한 자기반성과 함께 리얼리즘에 대한 인식이 높아감에 따라 나타난 현상이라 하겠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이 시기에 들어 본격적인 장편소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기영의 󰡔�고향󰡕�과 강경애의 󰡔�인간문제󰡕�가 그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고 이들 작품은 프로문학 운동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우수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224) 이기영(李箕永)의 󰡔�고향󰡕� 강경애(姜敬愛)의 󰡔�인간문제󰡕� 강경애는 엄밀히 말해서 카프에 직접 속해 있는 작가는 아니었지만 이른바 프로소설을 꾸준히 쓴 작가이다. 특히 간도에서 생활하면서 이농민의 어려움을 형상화한 작품을 많이 썼다.(227) 4. 민족주의 문학운동 사실상 프로문학이 대두하면서 이들 문학론자는 자신의 문학적 존재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이전의 지배적 문학형태였던 이광수, 최남선 들 기성 문단을 적극적으로 공격했다. 말하자면 계급적 시각에서 기존의 문학은 부르주아 내지 소시민계급적 토대의 소산이란 평가와 함께 자신들의 문학은 프롤레타리아에 기반한 문학이란 인식이 그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비판은 그 직접적 대상자에게는 명확한 사상적 입장을 강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결과가 프로문학의 본격적 문단 진출과 함께 이루어진 민족주의 문학파 혹은 국민문학파의 형성이다. 따라서 이러한 계열의 형성은 프로문학의 선전포고에 맞서 소극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대립의 선을 그었을 뿐이지 명확한 의식과 그 기치 하의 조직적 단결의 형태는 결코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대개 20년대 말 무렵부터 카프가 존속했던 30년대 초반까진 문단적 흐름을 프로문학 대 민족주의 문학으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계열을 보다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그 내용적 문학적 입장을 엄밀히 분석해야 한다. 사실상 20년대 중반 이후 이 민족주의 문학 계열에는 민족주의파, 절충파, 해외문학파가 함께 포함되어 있으며 30년대에 들어와서는 보다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이를테면 정인섭은 1930년의 우파 한국문학의 판도를 김동인 등의 순수예술지상주의자, 최독견 등의 통속적 모더니스트, 염상섭 등의 심리 해부적 리얼리스트, 이광수 등의 민족적 인도주의자 등으로 4분하고 있으(228)며, 프로 측의 김기진은 기본적으로 민족주의 문학 대 프로문학으로 구분하면서 이를 보다 복잡하게 세분화시키고 있다.(229) (1) 민족주의 문학론의 주요 이론 국민문학론 그러나 프로문학의 선전포고에 맞서 대부분의 것이 소극적이거나 혹은 문학관의 차이로 접근함에 비해 20년 중엽 이후 일련의 민족주의 문학파(국민(229)문학파)는 이데올로기적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주목을 끈다. 특히 염상섭, 양주동, 조운 이병기 등 소장 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프로문학에 맞서 적극적으로 국민문학론을 제창하였다. 국민문학론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조선으로 돌아오라’ ‘조선심을 현양하라’ ‘시조와 민요를 부흥하라’라는 구호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적인 것의 존중과 시조부흥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원래 이광수와 최남선이 주장하여 왔던 것으로 프로문학론에 밀려 주춤해 있다가 이들 소장 문인들이 프로문학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하여 민족적 이데올로기를 발판삼아 다시 국민문학론이란 이름으로 제창하였던 것이다. 양주동은 ‘조선심’을 “조선이란 땅과 기후 생활 풍습이 모인 가운데서 필연적으로 생긴 전통과 정조 및 동족애 같은 것...... 조선이란 땅과 민족생활 관계에서...... 필연적으로 산출된 의식”이라고 규정하였다.(230) 민족주의 문학계열이 부분적으로 당대 현실에 뿌리를 둘 수 있었던 것은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이 손을 잡아 <신간회>를 결성한 역사적 사건과 연관이 있었다. 그러나 문학에 있어서(230) 민족주의는 말 그대로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주의보다는 전통주의 혹은 복고주의에 가까웠다. 이들의 중요한 성과를 보면 첫째는 1926년에 와서 정음(正音)반포일을 찾아 정한 것이요, 또 하나는 시조 부흥운동이었다. 말하자면 정음반포일을 찾음으로써 한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이것은 자연적으로 과거 민족 전통형식으로서 시조와 연관되었던 것이다.(231) 그러나 프로문학이 마르크스주의라는 사상적 체계를 발판으로 하여 워낙 강력히 이를 비판함에 따라 이들의 이론적 모색은 불과 2, 3년 후인 1928년(231)경부터는 프로문학의 계급주의를 어느 정도 수용한 절충적 계급협조주의를 들고 나온다.(232) 절충주의 문학론 양주동 주재의 󰡔�문예공론󰡕�을 중심으로 전개된 문학이론을 지칭하는데, 당시 󰡔�개벽󰡕�을 중심으로 한 계급주의적 경향과 󰡔�조선문단󰡕�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적 경향을 다 같이 비판하면서 중도적 입장을 내걸었다. 양주동이 대표적 이론가였고 여기에 염상섭, 정노풍 등이 가담한 이 절충주의는 <신간회>가 현실적으로 존재함에 따라 계급주의를 안으로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내건 ‘민족문학이 곧 무산문학’이라는 절충적 이론이다.(232) (2) 민족주의 문학의 창작상의 성과 시조(時調)의 부흥 장편역사소설의 등장 제5부 근대문학의 성숙과 현대문학의 태동: 30년대 후반기 문학 1. 30년대 후반의 문단조감 1930년대 후반의 문단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란 사실상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20년대나 30년대는 현실을 마주보고 작가 자신의 신념대로 분명한 자기의 입장을 취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었다. 전 세계적 흐름이기도 하지만 이 시기 들어와 만주사변(1931)과 중일전쟁(1937)을 거쳐 태평양전쟁(1941)으로 확산된 일제의 군국주의화에 의해 우리 국토와 민족은 노동과 각종 자원을 약탈당하고 병참기지와 상품시장으로 제공되는 가장 가혹한 희생을 강요당했다. 그래서 1930년대는 형식적으로나마 일부 주어졌던 제한된 자유와 활동마저 유린당하고 모든 것이 일본의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을 위한 무자비한 전쟁체제에 동원되어 가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문인들은 대개가 현실로부터 비켜서서 자기 자리들을 잡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당시 그 자신들의 규정처럼 ‘무규정의 시대’ ‘혼란․혼돈의 시대’ ‘무주류의 시대’라는 특징으로 나타나고 만다.(236) 사실 1920년대 초에 󰡔�창조󰡕�, 󰡔�백조󰡕� 등을 중심으로 낭만주의와 자연주의가 풍미했고, 20년대 중반 이후에는 프로문학이 태풍처럼 몰아닥쳐 전 문단을(236) 휩쓸고 그에 대항하여 국민문학이 분명한 형태로 존재한 데 비해 일제의 군국주의 정책이 노골화되면서 또한 카프가 해산되고 난 후에는 문단을 주도하는 어떠한 흐름도 없었다는 것이 특성이라면 특성으로 간주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할 것이다.(237) 그러나 조직적인 측면에서 카프가 해산되고 나서 강력한 조직운동은 종지부를 찍게 되고 대신 29년대 초반처럼 동인지나 동인 형식의 소규모 모임이 활발히 모색되고 있었다. 그에 따라 문예활동에 종사하는 문인들의 숫자가 대단히 많아졌다는 점도 이 시기의 특징이기도 하다. 과거 이광수, 김억 등 신문학 초창기 문인들로부터 시작해서 30년대에 등장한 오장환, 김동리에 이르기까지 백여 명이 넘는 문인들이 활동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단체로는 1933년에 결성된 <구인회>를 들 수 있는데 이 단체의 특징은 어떤 강령을 내걸고 조직적인 활동을 수행한 단체가 아니라 색채와 경향이 그다지 분명치 않는 일종의 친목단체 성격이 강한 데 있다. 그 외에 다수의 동인지들이 속출되는데 이들 대부분이 순문학계열에 속한 것이어서 20년대 초반 예술지상주의적 경향의 동인지 시대를 방불케 한다. 말하자면 민족의식을 내걸고 계몽문학을 적극적으로 실행해나간 이광수 문학 뒤에 예술지상주의문학이 솟구쳐 나왔듯이 적극적 사회참여문학이었던 프로문학이 카프 해산과 함께 일제의 탄압에 따라 위축되자 이에 대항해 전반적으로 새로이 순문학이 만개한 형상이었다.(237) 실제로 이 시기에 이르러 예술의 미적․형식적 측면이 다각도로 모색되고 심화되면서 현대적 양식이 어느 정도 정립되기에 이른다. 특히 소설과 관련해서 몇 가지 주요한 특징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전반적으로 세태소설과 심리소설의 두 경향에 집중되고 있다. 이른바 20년대 자연주의 경향이 강하게 온존되어 있는 이 두 경향은 30년대의 시대적 한계가 고스란히 반연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현대 작가들의 정신적 능력인 자기 무기력의 증명이나 제가 사는 환경에 대한 경멸과 악의의 한계를 넘기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바로 30년대 문학은 이러한 시대적 조건을 솔직히 드러내 놓은 데 그 특징이 있었던 것이다.(238) 그리고 전반적으로 볼 때 이 시기에 들어서 묘사의 기술을 완성한 문학적 단계였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물론 서구의 현대적 문예사조의 활발한 수입과 모색과도 깊은 관련을 갖지만, 현상의 정밀이나 자기 내면심리의 솔직한 표백에 주안점을 두면서 문장과 기교의 숙련을 통한 묘사의 발전으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모더니즘 작가들은 리얼리즘 작가들의 ‘내용의 사회성’을 ‘형태(기술)의 사회성’으로 대체시키면서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을 추구하였으나 그 실제 작품들은 소외, 퇴폐성, 도피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다. 이런 현상은 그들이 집단에서 분리된 채 이성이 아닌 지성과 감각으로써 근대문명에 직면하고자 했던 만큼 어느 정도 예견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로써 새로운 문학형식의 발견과 창작 기술이 확대되고(심경, 세태소설, 알레고리 방법, 의식의 흐름 수법, 이표석의 순수한 설화체의 소설), 문학에 대한 공리 효용 우선의 흐름에서 일탈 경향이 확고히 정초되었으며, 기교를 강조한 도시문학의 형성의 계기가 되었다.(238) 시부문에 있어서 1930년대 후반은 각별한 의미를 가진다. 해방 이후 최근까지 시단의 흐름은 어떤 점에선 바로 1930년대 후반의 시단의 영향권에서(238) 자라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보다 엄밀히 말하면 소위 순수시 경향의 현대적 경향이 바로 이 시대에서 본격화되었다는 점이다. 유달리 많은 시인들이 배출되었고 순수시 영역에 포함되는 제 시적 흐름들이 조직적인 형태로서가 아니라 동인적인 형식을 취하면서 보다 개성적인 모습으로 다양하게 산출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시문학󰡕�파의 박용철․김영랑․신석정 등, 그리고 <구인회>계의 김기림․정지용․이상 등, 또한 󰡔�시인부락󰡕� 출신의 서정주․유치환․오장환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고 개별적인 활동을 통해 신석초․이용악 그리고 과거 카프계열에 속했던 박세영 등이 주목을 받았다. 또한 40년대에 접어들면서 박목월․박두진․조지훈 등 <청록파>도 시단에서 고유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239) 한편 비평과 관련해서는 임화와 김기림의 기교주의 논쟁, 「날개」, 󰡔�천변풍경󰡕�을 둘러 싼 최재서 대 임화의 논쟁을 통해 모더니즘 문학이 내용과 형식, 지성과 감각의 분열, 문학적 실천과 사회적 실천의 분리라는 문제가 제기되어 주목된다.(239) 2. 전형기 비평의 양상 (1) 모더니즘 계열의 비평양상 구인회(九人會) 중심의 모더니즘 김기림은 기술자본주의 시대인데도 시인들은 이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하면서 과학문명의 발달, 그에 따른 인간의 생활 감정의 변화, 신비적 사고의 종언, 기존 문학전통의 붕괴, 현대 문명의 병적 징후 등이 자기 시대의 정신적, 현실적 변화의 실상이라고 규정하면서 이에 대응하는 모더니즘 이론을 적극적으로 표명하면서 <구인회>의 대표적 논자가 되었다.(239) 김기림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정리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언어의 예술, 의식적인 제작, 현대문명의 형상화를 그의 문학관의 요체라 할 수 있으며 “실로 말해질 수 있는 모든 사상과 논의의 의견이 거의 선인들에 의하여 말해졌다.-우리에게 남아있는 가능한 최대의 일은 선인이 말한 내용을 다만 다른 방법으로 논설하는 것”이라는 데서 볼 수 있듯이 표현방법과 기교문제를 중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역사의 변화와 문학형식의 변화를 대응관계에서 파악하면서도 구 카프 측 논자들이 이전까지의 세계관의 혁명에 집중함으로써 양식 문제를 소홀히 한 데 비해, 모더니즘 작가들은 세계관 자체를 도외시하고 양식 문제의 변혁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는 그 배경에 파시즘이 놓여 있고 이에 대응한 자율적 ‘지성’의 문제로 세계관 문제를 격하시키면서 문명비판을 새로운 형식으로 시도해야 하는 것으로 요약된다.(240) 주지주의 문학론의 정착-최재서(崔載瑞) 주지주의 문학론을 확고히 정착시킨 최재서는...30년 후반 모더니즘 계열의 대표적 이론가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모더니즘의 이론적 성과는 최재서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241) 최재서는 무엇보다도 지성을 중시한다. 최재서가 파악하는 지성은 한마디로 예술가가 자기 내부에 가치의식을 가지고 그 가치감을 실현하기 위해 외부의 소재, 즉 언어와 이미지를 한 의도 밑에 조직하고 통제하는 데서 표시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최재서는 바로 이 지성을 핵심에 두고 현재에 요구되는 지성이 무엇이며, 그것이 문학론으로 어떻게 발전하는가를 문제삼기 시작했다. 풍자문학론은 그런 점에서 현재적 지성의 표현인 ‘풍자’라는 문학정신과 그 문학적 수법인 풍자수법을 아울러 결합한 그 나름의 종합적 문학론이라 할 수 있다.(241) 최재서는 이렇게 풍자문학 등을 내세우면서 주지적 경향의 대표적 예로 당시 창작계에서 큰 관심을 끌었던 김기림의 「기상도」와 이상의 「날개」를 들고 있다. 말하자면 이들 작품은 현대인의 비애 그 자체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풍자, 위트, 과장, 패러독스, 자조 등의 지적 수법을 통해 ‘아무 막(膜)도 없는 맑은 눈’을 통해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재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독특하게 리얼리즘론을 펴는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객관적 태도를 가지고 대상에 접근하여 진실되게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방법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즉 외부세계 혹은 내부세계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태도가 관건이란 견지에서 흔히 심리주의 소설이라 칭하는 「날개」와 세태소설이라 칭하는 박태원의 「천변풍경」을 리얼리즘의 심화와 확대로 보게 된다.(242) 김환태(金煥泰)․김문집(金文輯)의 인상주의 비평론 그런데 최재서가 지성이라는 객관적 태도를 중심으로 창작방법과 비평을 통일시켜 이해하려 했다면 이와 정반대로 김환태는 이를 엄격하게 분리하여 작품을 객관적 존재물로 상정해 두고 이 작품이 주는 인상을 비평의 기준으로 내세움으로써 문단에 개인주의적 인상주의 비평론을 내건다. 즉 문예비평이란 정치도, 사상도, 사회도 그 대상이 도리 수 없고 오직 문학 그 자체만이 대상이라는 견지에서 문예작품의 예술적 의의와 심미적 효과를 획득하기 위하여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인간정신의 노력이므로 문예비평가는 작품의 예술적 의의와 딴 성질의 혼동에서 기인하는 모든 편견을 버리고 순수히 작품그것에서 얻은 인상과 감동을 충실히 표출해야 한다는 것이다.(243) 이러한 김환태의 인상주의 비평은 김문집에 와서 보다 완벽한 형태의 이론으로 제시된다. 그 역시 김환태와 마찬가지로 인상주의 비평론자에 포함되지만 그는 거기에 탐미성을 가미시킨다.(243)· 이렇듯 비평 자체를 문학 자체로 놓음으로써 비평의 과학성을 어느 정도 중시하는 최재서와 정면 대립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대립은 1930년대 말기 문단의 최대 쟁점이 되기도 했으며, 오히려 대중적 인기면에서 김문집이 앞서기도 했다. 왜냐하면 당시 정치적 폭압 속에서 대중문예지가 속출하고 신문학예면이 오락 쪽에 쏠리면서 이러한 시류에 김문집의 탐미적 인상주의가 자연스럽게 이입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244) (2) 구(舊) 카프 계열의 비평적 동향 백철(白鐵)의 전향과 인간묘사․퓨머니즘론 김남천(金南天)의 고발문학론과 관찰문학론 장편소설론 3. 순문학의 융성과 리얼리즘 문학의 퇴조 (1) 󰡔�시문학󰡕�파와 순수시 사실상 30년대 후반의 흐름에서 큰 윤곽으로 보아 가장 큰 줄기를 형성했던 순문학의 흐름의 선두는 󰡔�시문학󰡕�을 중심으로 한 박용철, 정지용, 김영랑, 신석정, 이하윤 등의 시문학파이다. 이 파는 그러나 이미 1930년대 초반에 태동되었다. 즉 1930년 3월에 창간된 시전문지 󰡔�시문학󰡕�에서 유래한다. 물론 앞서 거론한 인물 중 소위 시문학파의 특징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시인은 박용철, 김영랑, 신석정이고 정지용이나 이하윤 등은 전체 시세계를 고려해볼 때 오히려 <구인회>나 <해외문학파>에 속하는 작가로 범주화할 수 있다. 이 시문학파의 특징은 한마디로 반이데올로기적 순수서정의 추구이다. 그에 따라 당연히 표현매체인 언어에 대한 관심과 기법에 대한 노력에 집중한다.(249) 시문학파의 작가들은 당시 문단을 좌지우지하고 있던 카프계열의 이데올로기 편향주의에 맞서 성급하게 직설적으로 토해지던 선동시 혹은 이념시를 거부하고 예술적 양식화의 중요성을 부각한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이와 관련해서 카프에 대항한 세력으로 흔히 국민문학파를 들고 있으나 엄밀히 말해서 국민문학파는 의식면에서 민족주의 내지 민족개량주의로 맞선 반면, 시문학파는 문예관에서 예술지상주의로 맞선 편이다.(250) 김영랑(金永郞) 박용철(朴龍喆) 신석정(辛夕汀) (2) 구인회(九人會)와 모더니즘 문학 <구인회>는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모더니즘문학의 대변자로 흔히 일컬어진다. <구인회>는 “순연한 연구적 입장에서 상호의 작품을 비판하며 다독다작(多讀多作)을 목적으로” 1933년 8월 15일 이태준, 조용만, 김기림, 이무영, 정지용, 김유영, 이효석, 이종명, 유치진 등 9명으로 창립되었다. 창립목적에서도 드러나듯이 창작에 주안점을 둔 비슷한 경향을 갖는 문학가들의 친목단체의 성격을 갖고 있다.(254) 그리고 기존회원의 탈퇴와 신입회원의 가입 등 몇 번의 교체 과정에서 이태준, 박태원, 이상이 중심회원이 되면서 모더니즘 문학의 기수 역할을 수행한다. 이런 과정에서 이들 구성원들의 개인적 창작활동이 30년대 후반을 주도해 나갔기 때문에 <구인회>의 가치를 문학사적으로 중시하게 된 것이다.(255) 이들 성원들은 상호간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한마디로 서구적 의미에서의 현대문학의 양식을 가장 잘 소화해낸 도시세대의 집합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들 작가들에게서는 도시풍의 문명화된 언어가 주종을 이구고, 집단에서 분리된 채 개인성을 중시하여 이성이 아닌 지성과 감각을 중시함으로써 주지주의, 지성주의라든가 초현실주의라는 정신적 틀 속에서 각기 자유를 구가하였다. 이러한 점을 주목하여 보면 모더니즘 계열 내에서 영미계쪽에 그 원천을 둔 이미지즘((주지주의)적 경향과 전위예술에 가까운 초현실주의계의 모더니즘으로 대별할 수 있다.(255) 이렇게 볼 때 실제 작품을 통해서 주지주의, 이미지즘, 초현실주의, 심리주의, 신감각파 등 잡다한 경향을 보여주는 모더니즘 문학은 전반적으로 언어의 세련성과 기교를 통한 문학양식의 근대성을 최고도로 높인 데 그 의의를 갖게 된다. 그리고 김기림, 정지용, 이상, 박태원, 이효석 등 구인회 작가들과 함께 그 뒤를 이은 김광균, 오장환, 최명익 그리고 󰡔�삼사문학󰡕� 및 󰡔�단층󰡕�계 작가들도 이 범주에 든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일제 식민지 지배체제의 확립기, 즉 식민지 정착기에 서울을 중심으로 한 도시세대들에 의해 추진된 무학경향으로 문학 양식과 실험정신면에서 문학의 현대성을 모색하고자 했다.(256) 박태원(朴泰遠) 구보 박태원(仇甫 朴泰遠)은 소위 <구인회>의 경향을 가장 대표할만한 소설가이다. 순수 서울 태생인 그는 1930년 소설 「수염」으로 등단하여 󰡔�천변풍경󰡕�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성탄제」 등의 작품을 썼다.(256) 이태준(李泰俊) 상허 이태준(尙虛 李泰俊)은 한마디로 봉건적 풍속 속에서 급격히 식민지 자본주의적 풍토로 변모해가는 사회변화 추세 속에서 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거나 혹은 그것을 극복하려는 아무런 의지도 내보이지 않는 수동적 인물을 즐겨 그린 작가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상허를 두고 딜레탕티즘의 작가라고도 일컫는다. 말하자면 그의 대표작이라 칭해지는 「가마귀」 「불우(不遇)선생」 「복덕방」 「우암노인」 등은 거의 전부 일상적인 사소한 것들에 복수당하는 패배적 인간들이 그려지고 있다. 물론 이태준은 하층민의 고난을 형상화한 작품도 썼는데 「꽃나무는 심어놓고」(1933) 「농군」(1939) 등이 그런 작품이다. 이들 작품을 통해 이태준은 분위기 묘사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이러한 어두운 현실문제를 다루면서도 서정적 색채의 소설을 잘 만들어내었다. 이러한 특징은 그의 모든 소설에 해당되는데 문장이 유려하고 구성이 치밀하면서도 자연스러워 지금까지 우리 소설이 갖지 못한 치밀한 형식미를 구비하고 있는 작가였다.(257) 이상(李箱) 건축기사 출신의 이상은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파격적인 작가라 할 수 있다. 그의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으로, 이상이란 이름은 건축기사 시절 인부들이 그를 가리켜 ‘리상’이라 부른 데서 연유한다고 알려져 있다. 소위 심리주의 경향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그는 1934년부터 작품활동을 시작하여 시, 소설 양 장르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대표작 「날개」(1936)를 비롯해서 「봉별기」(1936)․「종생기」(1937)․「동해(童骸)」(1938) 등 그의 소설 전부는 평면적 구성보다는 입체적 구성을 통하여 인간의 심리적 내부를 분석하고 해부함으로써 심층심리학 혹은 정신분석학을 문학에 적용한 작가였다. 따라서 외부적인 디테일은 거의 무시하고 자의식의 세계만을 철저히 추구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상은 이러한 수법을 사용하여 부정적인 자기폐쇄를 통해 정당하게 사회와의 통로를 차단당한 인간의 파산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작품 내에서 보여지는 것의 역설로서 규정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극단적 자기폐쇄는 그렇게 만들어버린 사회의 비건강성으로 독자에게 다가온다.(258) 한편 시에서도 이상은 독자적인 초현실주의 시를 창작하는데 「오감도」 「꽃나무」 등이 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이상은 우리 근대사에서 처음이라 할(258) 수 있는 자동기술법을 도입하여 이성이나 이지, 기성관념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잠꼬대와 같은 넋두리나 숫자와 기하학적 낱말 등을 도입하여 이른바 난해시를 처음으로 선보였다.(259) 김기림(金起林) 모더니즘 시 이론을 전개하며 모더니즘문학을 이끌어나갔던 김기림은 실제로 전형적인 모더니즘 시를 창출해낸 시인이다. 시집 󰡔�기상도󰡕�는 이 시기 모더니즘 시양식의 표본이 되는 시집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집에서 김기림은 무엇보다도 다양한 기법을 구사하여 시적 형상의 감각적 표현에 주력하였다.(259) 그러나 그의 이론수준에 비해서 시는 저급한 수준에 머물렀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말하자면 몇 편의 시에서는 시적 성공을 거두고 있지만 시 대부분이 방법의 도식화와 기교적인 형태주의에 사로잡혀 비유로 짜여진 설명적인 풍경화에 지나지 않는다.(260) 정지용(鄭芝溶) 정지용은 본래 시문학파에서 활동했으나 이미 그전부터 독자적인 시 영역을 가진 중견시인이었다. 사실 시문학파에서도 그는 시문학파 특성에 맞는 시인이라기보다는 큰 의미에서 순수시를 지지하는 후원자로서의 역할이 컸다. 그러다 <구인회>에 가입하면서 그는 자신의 특성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초기 시는 「고향」 「향수」 등에서 볼 수 있는 짙은 향토색의 서정시들이었고, 제2기에 해당하는 <구인회> 시절에는 「아침」 「유랑자」에서 볼 수 있듯이 도시문명에 소재를 둔 모더니즘풍 시들을 창작하였다.(260) 이처럼 문명과 관련된 언어의 음감을 통해 도시적 감각의 정서를 표출한 정지용은 김기림과 더불어 대표적 모더니즘 시인으로 각광을 받았다. 재래의 관념어 대신 현실의 구상, 이를테면 넥타이, 페스탈로치, 오르간 소리 등과 같이 서구적 감수성에 바탕을 둔 새로운 언어를 발굴하여 시각, 청각, 촉각, 공감각 등이 비유를 통해 형상화하였던 것이다. 특히 다른 시인들에게서 자주 보는 감정의 과잉이 정지용에게서는 철저한 절제 혹은 객관화로 정제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261) 이효석(李孝石) 이효석은 1928년에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고 또한 「마작철학」 등을 발표함으로써 이른바 대표적 동반자작가로 간주되었으나 1930년대에 접어들어 서울 시절을 청산하고 구인회에 가입하고 「돈」 「수탉」 등 일련의 향토를 무대로 한 본격적인 순수문학 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했다. 이후 특이한 성적 모럴을 제시한 「분녀」(1936)를 발표하고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였다.(262) 「메밀꽃 필 무렵」은 한국적인 자연의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자연 속에 포함된 순박한 인간상을 주제로 그들의 순수한 본능적 애정문제를 그린 작품으로 식민지 시대가 낳은 한국단편소설의 백미로 꼽히는 작품이다. 장돌뱅이를 작품의 주인공으로 삼아 자연과 더불어 살ㅇ가는 인간의 원초성을 애정과 핏줄의 해후로 회구시켜 과거로부터 우리 전설이나 민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원형적 모티브를 전통화시킨 작품이다.(262) 오장환(吳章煥) 오장환은 직접 구인회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성벽󰡕�(1937) 󰡔�헌사󰡕�(1939) 등의 시집을 발표함으로써 구인회의 모더니즘 시풍을 가장 올바로 계승한 후기 모더니즘시의 대표적 젊은 시인으로 각광을 받았다.(263) (3) 「시인부락(詩人部落)」 등의 동인지와 신진작가들 󰡔�시인부락󰡕�은 1936년 11월 서정주가 발해 및 편집인이 되어 창간한 소책자의 시전문 동인지로 2호밖에 지속되지 못하였다. 그에 따라 발간 당시 이 동인지는 문단의 주목을 전연 받지 못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후 여기에 속한 서정주, 김동리, 오장환 등이 신진 작가로서 시단의 주요 작가로 등장함으로써 문학사적으로 중시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뚜렷한 문학적 이념과 방향을 표방한 것도 아니었고, 단지 문학 동호인적 집단의 성질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서정주, 김동리 등이 이후 활발한 작품활동을 전개하면서 그 위치가 높아지고 독자적인 경향성을 보이자 이들의 경향이 태생한 시발점에 󰡔�시인부락󰡕�이 있음을 주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264) 무규정 혹은 무입장을 표명하는 것은 사실 30년대 후반기의 전형적 특징이기도 하다. 오히려 이런 점에서 30년대 후반의 상황을 가장 잘 반영한 동인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곧 이들이 그 전시대의 모든 활동을 비판하면서 이 시대의 상황과 결부되어 비로소 등장한 신진 작가들이란 점이며, 아울러 이들에 의해 소위 세대논쟁이 촉발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265) (4) 구 카프 계열의 작가와 작품-김남천(金南天), 채만식(蔡萬植) 등 우리는 앞서 1930년대 후반에 들어 일제의 노골적인 탄압에 의해 당시 현실이 직면한 엄청난 고통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여러 쟁점을 정면으로 다룰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사회적 이유 때문에 과거 가장 첨예하게 이제와 맞섰던 구 카프계열의 작가들도 현실로부터 거리를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대신 그들은 개별 작가 나름의 새로운 출구를 모색하기도 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세태소설, 풍자소설, 가족사․연대기 소설들이다. 이들 가족사 연대기 소설들은 시대변화의 다양한 모습을 주관을 개입하지 않고 묘사하는 것이 기본 원칙으로 여러 인물을 등장시켜 그 관계를 중시하고 있지만 대부분 풍속을 소개하는 방식이어서 당시 일제의 가혹한 검열과 탄압을 피해 적극적인 대결을 상실한 상태에서의 소설화 방식이라 할 수 있다.(266) 그중 김남천은 30년대 후반에 있어 매우 특징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고발 문학론-모럴론-풍속론-로만개조론-관찰문학론으로 이어지는 리얼리즘론의 모색을 창작과 결부시킨 작가였다.(266) 채만식(蔡萬植)은 1934년 「레디메이드 인생」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이른바 대표적인 동반자적 작가로 알려졌다. 「사라지는 그림자」, 「화물자동차」(19310, 「부촌」 등의 작품에서 그는 카프 작가와 마찬가지로 사회 현실에서 노동자들과 무산자들이 겪는 삶과 투쟁을 그렸다. 그러나 「레디메이드 인생」 「인텔리와 빈대떡」 등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풍자성이 강한 사회문학을 창출하면서 한국문단의 가장 대표적인 풍자작가로 자리잡는다.(269) (5) 30년대 후반의 농촌소설과 역사소설 다양한 농촌소설 이미 살펴본 대로 농촌소설은 주로 농민소설이란 개념으로 카프작가들에 의해 많은 작품이 산출되었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각도로 순수문학 계열의 작가에 의해서도 많은 작품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직접적인 목적의식보다는 농촌이란 지역적 삶과 연관된 전원소설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농촌소설이란 이름이 더욱 타당할 것 같다. 이러한 경향의 대표적 작품으로 이광수의 󰡔�흙󰡕�과 심훈의 󰡔�상록수󰡕�, 그리고 김유정과 이무영의 여러 단편을 들 수 있겠다.(272) 제6부 일제말 암흑기의 문학 1. 일제말 암흑기 문단의 동향 30년대가 저물고 40년대가 오면서 시대적 상황은 더욱 악화일로를 치닫기 시작했다. 이미 일제는 문인보국회 등을 만들어 작가들을 침략전쟁의 앞잡이로 만들기에 광분하는 등 문학이 설 자리는 차츰 없어져 갔다. 모든 작품 내용은 국책문학 쪽으로 내몰려갔고 끝내는 일본말로 작품을 쓰게까지 하였다.(277) 암흑기 문단을 지킨 󰡔�문장(文章)󰡕�과 󰡔�인문평론(人文評論)󰡕� 1939년에 창간되었다가 1941년에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일간신문과 함께 일본의 압력에 의해 자진폐간의 형태로 폐간된 󰡔�문장󰡕�과 󰡔�인문평론󰡕�은 비록 2년여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암흑기 문단을 그나마 유지시킨 최후의 보루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잡지는 단순히 일제 말기의 암흑기의 문학활동을 유지시킨 공적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내용에 있어서도 일제하 전 기간 동안 어떤 문학잡지보다 높은 권위를 확보한 대표적 잡지이기도 하였다. 특히 󰡔�문장󰡕�지는 지금까지도 시행되고 있는 신인추천제도를 실시하여 최고권위작가들로 구성된 심사위원의 심사를 통해 역량있는 다수의 신인을 배출함으로써 암흑기 문단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명맥을 잇게 하였다.(278) 세대․순수논쟁 이 논쟁은 보다 엄밀히 말하면 ‘세대론’에서 비롯되어 ‘순수논쟁’으로 그 성격이 이월되어 간 논쟁이다. 먼저 세대논쟁은 임화, 유진오, 이원조 등 30대의 중견비평가들과 김동리, 오장환, 정비석 등 20대 신진작가들 사이에 벌어진 세대간의 대립이었다. 논쟁은 신인다운 신인이 없다고 개탄한 임화의 「신인론」(󰡔�비판󰡕�10권1호, 1939)에서 비롯되었다.(279) 유진오는 ‘순수’란 개념을 모든 비문학적 야심과 정치와 책모를 떠나 오로지 빛나는 문학정신만을 옹호하려는 의연한 태도라고 하여 이를 새로이 정의하였다.(279) 고전론과 신체제론 2. 일제말 암흑기의 문학계 순수문학의 자기심화 전반적으로 이 시기 문학은 사상 표현의 자유가 완전히 박탈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리 문학은 일체의 정치성․사회성을 배제하고 심미적 순수문학의 방향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이러한 경향은 30년대 후반부터 태생되어 발전되어 왔기 때문에 실제로 그 내용을 보면 순수문학의 자기심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문학적 성과에 있어서는 주목할 만한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 점은 특히 30년대 후반과 비교해 보면 그 성격이 보다 확실히 드러난다. 즉 1930낸대 후반의 중심은 해외문학파와 모더니즘 문학운동을 기반으로 한 서구문학의 수용이란 측면이 강했던 반면 이 시기에 들어와서는 우리의 문화적 전통을 자발적으로 계승하려는 측면이 우세해지기 시작했다.(281) 󰡔�문장󰡕�지의 전통․고전주의는 󰡔�문장󰡕�지에 관계한 주요 인물들인 이병기, 정지용, 이태준의 활동과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말하자면 과거 모더니즘의 대표주자였던 정지용과 이태준이 가람 이병기와 손을 잡고 고전에 귀의하여 각각 시조, 시, 소설부문의 선고위원을 맡아 신인을 발굴하고, 또한 잡지원고의 기획 및 집필을 하는 등 중추역할을 하였던 것이다....실제로 이들의 경향은 당시 일제말기 문학계의 가장 큰 줄기를 형성한다. 즉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등장한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등 <청록파>를 필두로 하여 가장 토속적인 작품을 써냈다고 하는 김동리 등이 바로 그들이다.(282) <청록파>는 그들을 추천한 정지용의 영향 아래 자연을 공통된 시적 공간으로 설정하여 우리의 뿌리깊은 시적 흐름인 자연시의 최고수준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민족의식과 그 정서나 감정을 집약 승화시켜 밝고 정제되고 청아한 율조와 청신한 자연의 이미지로 서정시의 푯대를 세웠던 것이다.(282) 암흑기의 별, 이육사(李陸史)와 윤동주(尹東柱) 지금까지 우리는 암흑기의 문학적 특징으로 문화적 전통에 대한 관심과 자연에의 귀의, 그리고 삶에 대한 허무와 절망 등 일련의 현실도피적 은둔적 세계가 주류를 이루어왔음을 보아왔다. 그러나 이러한 소극적이고 다소간 절망적 분위기 속에서도 암흑기에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뚫고 나가려는 두 별을 만나게 된다. 바로 이육사와 윤동주가 그들이다. 물론 이들은 당시 문단에 적을 두고 세칭 문단적인 삶을 살지 않았던 작가이다. 그들의 시는 8․15 이후에 비로소 유고집으로 발간되면서(46년 󰡔�육사시집󰡕�이, 그리고 48년에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알려지기 시작한 시인들이다. 따라서 그들의 시는 그 당시 문단에서는 전혀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식민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민족적 자산으로서 그 의의는 매우 크다 할 것이다.(285) 이육사는 실제로 자기 스스로 운동가적 삶을 살다가 1944년에 옥사한 투사로서 이러한 면모가 그의 시풍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285) 「청포도」 「광야」에서처럼 이육사는 우리 민족의 자긍을 기반으로 하여 애조 띤 애상적 분위기를 걷어치우고 강건성을 시적 분위기로 탁월하게 형상화하면서 미래에의 꿈을 확신시킨다.(286) 반면 윤동주는 옥사한 시인이긴 하지만 보다 종교적이며 개인에 대한 진지한 실존적 성찰에 집중되어 있다. 이것은 윤동주가 이육사처럼 실제 운동가로서 살았던 것이 아니라 무명시인으로서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자신의 진실한 삶을 꿈꾸며 진지하게 자기성찰의 길을 걸어왔던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286) 기타 경향과 주요 작품들 이른바 30년대 후반 소설계의 주요한 흐름 중의 하나가 장편소설서 가족사 세태소설임을 이미 말한 바 있다. 이러한 경향은 이 시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계속된다. 그 대표적 소설로 이기영의 󰡔�봄󰡕�과 한설야의 󰡔�탑󰡕�, 이태준의 󰡔�사상의 월야󰡕� 등을 꼽을 수 있다.(287) 이밖에 소설 쪽에서는 안수길, 김정한, 현덕, 이근영과 여류작가 최정희, 이선희 등이 이 시기에 주목을 받을 만한 신진작가들인데 이들은 당대 사회적 삶의 궁핍상을 진솔하게 그리려는 사실주의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만주 간도에서 살았던 안수길은 그곳을 무대로 「새벽」 「원각촌」 등을 발표하여 간도이민생활상을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주었다. 「새벽」은 만주로 이주한 농민 일가족의 삶을 그린 소설인데, 소년의 눈을 통해 같은 동족을 고발하는 비열한 세태, 빚값에 누나를 빼앗겨야만 하는 궁핍상을 리얼하게 형상화하였다.(288) 3. 일제말 친일문학(親日文學)의 양상 친일문학이 본격적으로 우리 문단에 주목된 것은 잘 알려진 대로 1966년에 임종국이 발표한 󰡔�친일문학론󰡕�(평화출판사)에 의해서였다. 여기서 임종국은 대표적 친일문학가로 이광수, 최남선, 주요한, 김팔봉, 박영희, 유진오, 백철, 최재서, 김동인, 모윤숙, 김동환, 노천명, 장혁주, 유치진 등을 꼽고 있다.(289) 사실상 이렇게 많은 문인들이 친일적 행동을 수행함으로써 일제 말기 친일문학 양상은 어느 한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 문단적 양상이었다는 것이(289)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고하고 이렇게 친일문학으로 전 문단이 끌려가기까지에는 1930년 말부터 이를 노골적으로 주도한 몇몇 대표적 문인들의 민족배반적인 행동에 기인한바 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과거 프로문학 초창기의 대표적 논객으로 활동했던 박영희는 이미 1939년 󰡔�인문평론󰡕� 창간호 「전쟁과 조선문학」이란 글에서 대동아전쟁을 성전(聖戰)이라 칭송하고 일본정신을 세계정신의 종국적인 목표를 구현하는 의의가 있다고까지 하였다. 그 외에 이광수, 최재서, 김기진, 김용제 등이 <문인보국회> 등을 주도하면서 일본에 동화하여 학도병 참전을 권유하고 창씨개명을 선도하는 등 그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290) 이렇게 되면서 일제는 전 문인에게 친일적 행동을 강압하고 그 결과 일제 말기에는 친일문학이 하나의 흐름처럼 되어 대다수 작가들의 작품에 일본말 문학으로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 비평가로는 박영희, 최재서, 김기진, 안함광 등이 친일문학의 대열에 들어섰고, 이광수, 유진오, 이효석, 이석훈, 정인택들이 소설에서, 그리고 김동환, 김종환, 김용제 등이 시에서, 또한 유치진, 송영, 함세덕이 희곡으로 친일문학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290)
26    엄창섭, <<한국현대문학사>>, 새문사, 2002.8 댓글:  조회:2368  추천:0  2009-05-16
엄창섭, 󰡔��한국현대문학사󰡕��, 새문사, 2002, 8 제5장 1930년대의 문학 1. 1930년대 성숙기 문학의 개관 1930년대 성숙기 문학의 개관에 앞서 시대적 배경과 문화적 배경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먼저 시대적 배경은, 1931년 일본 제국은 만주사변을 일으키는 등 군부 독재를 더욱 강화해 갔으며 국제적으로 더욱 군비를 구축하여 세계 제1차 대전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조성된 파시즘 노선을 확립하려는 시기로 제시된다.(232) 문학사적으로 접근하여 볼 때, 30년대 한국문학은 KAPF의 해체에서 비롯된다. 이의 해체는 어디까지나 일본 군국주의의 강압에 의해서 비롯(232) 된 것이지만, 문학이 언제까지나 정치의 예속화와 목적의식에만 종속의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30년대의 우리의 문학이 종래의 투쟁적인 민족주의 문학운동이나 계급주의에서 탈피하여 문학 본래의 기능과 목적에 관심을 새롭게 하는 기틀을 마련해 준 점은 획기적인 사건이다.(233) 우리 현대문학사에 있어 1910년대를 문학과 사회의 계몽시대라고 한다면, 1920년대는 동인문단-개인적인 모색의 시대라고 할 수 있으며, 1930년대는 우리 현대문학의 터전을 굳게 확립한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지적되는 세 가지 문학의 특질을 고찰하면, 하나는 문학활동에 참가한 문인들이 숫자적으로 대단히 많아진 점이며, 둘째는 서구문학의 수용이 보다 직접화되고 그 영향이 보다 증대된 점, 그리고 셋째는 작품창작의 기술적 세련과 문예이론의 전문화라고 할 수 있다.(233) 문학사적으로 1930년대 후기는 1936년~1940년까지로 분류할 수 있다. 30년대 후기의 문인들은 언어가 자기 언어의 선택구조로 되어 시대적인 방언처럼 만은 갈래를 가져 왔다. 젊은 세대에서는 프로문학적인 현실참여의 문학관을 부르짖는 문인군(文人群)의 추세도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30년대 전기의 영향을 받은 인생파 시인의 시정신과 청록파의 자연 귀의적인 시관과 우회적인 절망의식을 표백하는 시인들의 시정신으로 일관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234) 2. 문학사적 배경과 그 특성 1930년대는 문학사적으로 보아 1910년대나 1920년대에 비해 여러 가지 중요성을 지니는 시기이다. 그 중요성이란, 일차적으로 1930년대의 시대적 배경에서 언급하였듯이 KAPF의 해체에서 시대적 중요성이 암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234) “조선 민족의 계급적 해방”을 내세웠던 KAPF의 맹원들이 일제 군국주의의 강제에 의해 1931년 신간회(新幹會) 해체 사건과 더불어 제1차로 검거됨에 따라 1930년대의 문학은 진정한 예술성을 추구하는 문학으로 그나마 자리 매김을 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234) 문학 외적인 요소를 되도록 배제하고 문학의 순수성을 지향하는데 목표를 두게 된 것이 바로 1930년대를 접하면서였다. 여기서 비중 있게 논의할 수 있는 것이 사회적 문단의 형성문제일 것이다. <<소년>>, <<청춘>> 등을 중심으로 발달되기 시작한 동인지 중심의 문학 활동은 1920년대까지는 계속돼 왔으나, 1930년을 전후하면서부터는 양상을 달리하며 문단이 점차 특수한 직업사회로 변형되어가기 시작했다. 최남선․이광수를 비롯한(234) <<창조>>, <<폐허>>, <<백조>>, <<금성>>, <<영대>>, <<개벽>>, <<조선문단>>을 통해 활동한 시인․작가들이 모두 동인지 중심의 문단을 구성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문학활동이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개인의 자각이나 역사의식의 전환에 의해, 마침내 소수의 동호인 그룹으로서 한 국가의 문학 또는 문단을 대표할 수 없다는 인식 아래 사회적인 문단을 형성하기에 이른 것이다.(235) 특히 이와 같은 상황에서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의 분리는 현저하게 나타난 이 시기의 양상이다. 일반적으로 1920년대까지는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을 확연하게 구분짓는 데는 다소의 무리가 따른다. 왜냐하면 1920년대까지는 최남선․이광수의 계몽주의적 문학의 영향이 동인지 문단시대에도 그대로 답습되어 대중문학과 순수문학은 확연하게 구분될 수 없었다. 즉 1920년대까지는 문학의 대중적 요소와 순수문학적인 요소가 분리되어 평가되지 않았으며, 1930년대에 접어들어서 그나마 분리되어 평가되기 시작했다.(236) 아울러 순수문학의 등장과 성격을 파악하는 것은 이 시기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인자로서의 계기가 된다.(237) 이 시기 문학적 특징은 예외 없이 순수문학적 성격을 비교적 반영한 점과 현대문학적 성격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민족주의적 입장에서건 사회주의 입장에서서건 사회 참여가 용납될 수 없던 당시의 객관정세의 변화에 기인한다. 그러나 순수문학의 입장이야말로 당시와 같은 일제 강점기의 혹독한 상황에서 한국문학의 존립을 가능하게 한 유일의 거점이 되었다는 것이다.(237) 이처럼 1930년대에 등장한 순수문학적인 요소는 그 당시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한국현대문학의 가장 중심적인 요소로 점차 그 틀을 형성해 가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사실 순수문학의 등장의 동기는 카프의 제1차 검거와 연계성이 있다. 사회가 점차 폐쇄상태로 죄어들자 여기에 대응하는 문학의 응전력(應戰力)은 순문학, 역사소설, 자기고발 등의 형태를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237) 특히 현대문학적 성격으로의 전환에 있어서는 앞에서 기술한 바 있듯이 1920년대까지의 우리의 현대문학은 근대문학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곧 3․1운동 이후에 전개된 자연주의, 낭만주의, 탐미주의, 민족주의, 상징주의 등 문예사조의 혼류는 모두 근대 문예사조에 속한 것이(237)며, 시에 있어서의 주정적․서정적 창작태도는 서구의 근대문학을 모방한 것으로 인식된다.(238) 또한 소설에 있어서의 외면적․객관적 묘사와 평면적 구성은 모두 그 문학적 성격이 근대문학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근대문학적 성격은 1930년대에 접어들어 현대문학적 성격으로 점차 변모되었고,(238) 3. 순수문학의 형성과 양상 순수성이 무엇인가? 라는 다양한 인식에 따라 여러 가지 뜻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광의적인 해석으로는 소설․희곡․시 등을 다른 인문과학(人文科學)에 견주어 순수문학이라고 하는데, 이 경우엔 창작문학(創作文學)이라는 뜻으로 순수성은 즉 창작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 점에 비해 협의의 의미로는 문학의 계몽성, 목적의식 등을 배격한 예술지상적(藝術至上的)인 문학을 지칭함이며, 이때의 순수성은 예수성과 동일하다. 단, 시대에 따라 순수성의 내용이 양상을 달리함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① 1919년 <<창조>>파의 김동인은 이광수 등의 사회문제 제시나 사회개조를 위한 계몽성을 반대하고 인생문제의 제시를 주장하였는데, 이때의 순수성은 사실성 내지 유미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의 순수문학은 민족적 계몽주의를 배제한 사실주의 문학을 의미한다. ② 1930년의 <<시문학>>파와 1933년 9월에 결성된 ‘구인회(九人會)’ 작가들의 문학을 순수문학이라고 한다. 시문학파의 순수시 운동과 구인회의 기교적․예술지상주의적 경향은 카프의 조직 세력을 등에 업은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정치적 목적의식을 반대하고 일어난 것이다. 이때의 순수성도 예술성 내지 기교성을 의미하나, 프로문학에 대한 반동의 입장에 서는 것이 그 시대적 특성이다. ③1938-39년에 문학의 순수론이 대두되었는데, 유진오의 󰡔��현대 조선문학의 진로(동아일보, 1938.12)󰡕��와 󰡔��순수에의 지향(문장,1939.6)󰡕��이 발표되고 이에 대한 김동리의 󰡔��순수문학의 진의(문장, 1939.8)󰡕��, 김환태의 󰡔��순수시비(문장, 1939.11)󰡕�� 등의 반박문이 발표된 데서 발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④ 1945년, 즉 광복 후 순수논쟁은 다시 본격적으로 논의된다. 조선문학가동맹 측과 청년문학가협회 측의 김동리․조연현 등의 불꽃 튀는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239) 이상과 같이 순수문학은 시대에 따라 그 양상을 달리하지만 그 공통점은 문학의 계몽성, 선전성, 목적의식 등을 배척하고 인간성의 옹호에 입각하여 문학의 자율성, 예술성, 그 독자적 세계를 옹호하는 문학으로(239) 인식할 수 있다.(240) 또 하나 우리가 확인하여야 할 문제는 순수문학 대두의 배경에 대한 점검이다. 1930년대의 순수문학이 대두하게 된 배경은 정치적 배경, 문화적 배경, 문단적 배경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① 정치적 배경: 이 시기 사회적 현상은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팽배해진 국제적 파시즘의 물결과 함께 3․1운동 이후의 문화정책이 만주사변 이후 무단정책으로 환원해 가기 시작했다. 일체의 사상운동이 금지된 이러한 배경 속에서 문학을 통해 독립사상을 고취하거나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거나 자유주의적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곤란했으며 문인들은 현실과 거리가 먼 예술지상의 심미적 문학에 빠져들게 되었다. 결국 일본 군국주의의 암흑 속에서 사회의식이 결여된 도피문학으로 순수문학이 대두하였다고 볼 수 있다. ② 문화적 배경: 문화적 배경으로 순수문학의 대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한글학회가 중심이 된 거대한 문화운동인 한글 운동이다. 조선어학회가 주동이 되어 1933년 󰡔��한글 맞춤법통일안󰡕��을 공포하게 되자 반만년 이래 처음으로 우리 언어가 질서를 찾게 되었다. 이러한 한글 운동이 문단에 끼친 영향은 문학의 직접적인 표현 수단인 언어와 문자에 대한 문학인들의 새로운 관심을 촉구하게 되었다. 특히 이 같은 시대적 현상에 있어 1930년 <<시문학>>파의 언어에 대한 감각적 추구와 모더니즘의 언어의 시각적 배려 등이 이 같은 환경에 기인한 것으로 해석된다. 다음으로는 1920년대 말에서부터 1930년대 초까지 출간된 잡지의 영향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발표지면의 확대는 통속적인 대중문학과 순수문학을 구분 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독자들은 문학의식의 성숙으로 종래의 도식적, 선동적 문학을 타기하고 보다 차원 높고 또 전문화되고 세련된 문학을 요구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작자는 문학의 전문화로 문학을 보다 객관화하여 기술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과학적 자세를 지녀야 함도 지속적으로 일깨우기 시작하였다. ③ 문단적 배경: 김동인을 중심으로 한 예술지상주의자들이 최남선․이광수의 계몽주의 문학을 반대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계몽주의(240)적인 것이 문학사의 가치평가에 있어서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한 것은 1919년, <<창조>> 동인들로부터이다. 시문학파에서는 문학을 다른 사회적 영역과 순수한 예술적 영역으로 독립시켰으며, 서정주․김동리 중심의 <<시인부락(詩人部落)>>에 이르러서는 문학의 예술적 가치를 본질적으로 추구하였다. 이런 점이 곧 순수문학의 대두의 배경인 셈이다. 다음으로는 1930년대에 접어들어 KAPF 등의 목적문학의 한계성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곧 1920년대 한국문학을 지배한 프롤레타리아트 문학과 민족주의 문학이 그 이상 발전할 수 없는 한계성을 드러냈다.(241) 4. 현대시의 다양화와 동인지 1) 시문학파(詩文學派) 30년대 문학에서 크게 주목되는 것은 순수성을 문학의 지표로 삼은 시문학파이다. 시문학파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자기 언어의 미학을 시화한 순수서정을 새로운 전통으로 천명하며, 정치적․사회적 목적의식에(241) 사로잡혔던 종전의 시, 즉 카프의 색채를 지닌 시를 배격하고, 시 본연의 예술성을 추구했던 시인들의 유파를 지칭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시는 곧, 언어의 탐구로서, 시란 언어의 발견이요, 창조이며 언어를 떠난 곳에서 시가 존립할 이유가 없음을 나름대로 인식하고 있었음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이다.(242) 2) 구인회(九人會) 3) 삼사문학(三四文學) 순수문예동인지인 <<삼사문학>>은 1934년 9월 1일 창간된 연희전문 학생(247)들이 주동이 되어 조직한 시동인지이다. 발행 겸 편집은 신백수(申百秀)가 담당하였고, 처음엔 4․6배판에 60페이지 분량의 프린트로 발간했고, 3, 4호부터는 국판 체재의 인쇄물로 발행한 것이 특색이다. 이 동인지는 당시의 문단에 새로운 쉬르리얼리즘의 바람을 불어넣어 시단을 풍성하게 하는 공을 남겼다. 비교적 신주지적인 경향의 시세계를 특징으로 하였으며, 현실을 깊이 관조하고 현실을 심층적으로 파고들어 자기를 현실화하려는 의지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주요 필진으로는 이시우(李時雨), 최영해(崔暎海), 홍이섭(洪以燮), 유치환(柳致環), 장응두(張應斗) 등이 참가하였다.(248) 4) 시인부락(詩人部落) <<시인부락>>은 1936년 11월,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가 주간을 담당하며 창간한 시전문 동인지였다. 비록 이 동인지는 1937년 12월에 5권을 발행하고 종간되었지만, <<시인부락>>의 중심 멤버였던 서정주(徐廷柱), 김동리(金東里), 오장환(吳章煥) 등의 문학적인 활동이 두드러져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몫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시문학>> 동인들이 창작상 기교적인 면을 중시하였다면 <<시인부락>> 동인들은 인간 자체의 인간적 고뇌를 중시한 것으로 대별된다.(249) 5)문예월간(文藝月刊) 1931년에 창간된 <<문예월간>>에는, 일상생활의 시정을 노래한 시인들의 작품이 많이 발표되었다. 고차원적인 자연과 자기와의 조화를 위한 염원의 세계가 뚜렷이 나타난 문예지였다. <<시문학>>의 후속으로 발행된 잡지다. 당시 문단의 조류는 문학적 정신이 충만해 가는 젊은이들이 민족적인 자기위상을 지키는 시인가 작가를 원하고 있는 분위기였다.(250) 6) 문장(文章) 1939년 2월에 창간되어 1941년 4월에 일제의 강압에 의해 폐간될 때까지 국판 200페이지 내외로 통권 36호를 문장사에서 월간으로 간행하였다. 주간은 이태준(李泰俊)으로 일본 강점기말 문학잡지로서는 민족성과 서정성을 그 나름으로 올곧게 고집하며, <<인문평론>>과 함께 마지막 교두보의 역할을 수행한 잡지이다. 1930년대를 장식하는 순문예지인 <<문장>>은, 우리 민족의 문학을 지키고 꽃 피우는 터전 역할을 분담했다. 민족문학의 등불 같은 역을 맡았던 <<문장>>은, 30년대뿐만 아니라 우리 문학사와 시사에 있어서, 황금전적(黃金田的)인 의미를 지닌다.(252) 7) 신동아(新東亞) <<신동아>>를 통하여 활동한 시인들을 보면, 30년의 어느 문학지보다도 많은 시인들이 지면을 활용했다. 여기에는 문학의 유파나 세계의 흐름을 통한 것이 아니고, 동아일보사의 발행으로 우리나라 신문화 운동의 일환으로 시, 소설, 수필, 문학평론 등 많은 문학작품을 실었던 것이다.(262) 8) 학등(學燈) 9)문학(文學) <<문학>>에 발표된 시작품 중에는 우리의 현대시사에 영원히 빛날 작품이 발표되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여 볼 필요가 있다. 1934년 제2호에는 김영랑(金永郞)의 문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과 제5호에는 신석정(辛夕汀)의 <산(山)으로 가는 마음>이 발표되었다.(265) 10) 조선중알일보(朝鮮中央日報) <<조선중앙일보>>에 발표한 이상(李箱)의 <오감도(烏瞰圖)>는 그 당시 시평을 했던 김기림이 이 작품을 보고 ‘한국의 현대가 이로 인하여 50년을 앞섰다’고까지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작품이다. 이 <오감도>에서 느끼는 것은 과연 우리가 무엇을 얻고, 소화할 것인가 라는 것이다.(266) 11) 시원(詩苑) 1935년 2월 10일에 창간된 시전문지로 발행인 겸 편집인은 오희병(吳熙秉)이다. 당시의 한국시가 너무 상징적이고 고답적(高踏的)이라는데 반기를 들고 새로운 시건설을 주도한 잡지이다. 다행스럽게도 당시의 모든 중견시인들은 이 잡지에 참여하고 비교적 폭넓게 활동하였다.(267) 일단, 이 잡지는 짧은 기간을 통하여 5권이 간행되기는 하였지만, <<시문학>>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순수 시전문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268) <<시원>>은 오일도(吳一島)가 사재를 털어 간행한 순수시지이다. 무엇보다 이 문학지의 문학사적 공적이라면, <<시문학>>과 같이 참가한 다수의 시인들이 시어(詩語)를 자기 개발화 하고 자연을 이지화(理智化) 한 점과 또 현대감각의 표현에 알맞은 시어를 선택한 점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268) 5. 詩人들의 역할과 作品의 경향 1) 김영랑의 시와 고아한 서정 2) 오일도(吳一島)의 시세계 3) 김광섭(金珖燮)의 시와 우수(憂愁) 4) 김광균의 시와 공간적 조형 5) 김현승(金顯承)과 기독교적인 세계 6) 유치환(柳致環) 시의 사변성(思辨性) 7) 김용호(金容浩)의 시 세계 8) 서정주(徐廷柱)와 관능의 시학 9) 조지훈(趙芝薰)의 탐미(耽美)와 선미(禪味) 10) 박두진(朴斗鎭)의 초월적인 시 11) 박목월(朴木月) 시의 향토성 6. 1930년대 小說의 추이 1) 30년대의 소설문단 비교적 현대문학의 절정기인 30년대에 접어들어 우리나라의 소설문단은 이인직(李人稙)으로 대표되는 신소설 시대와 최남선(崔南善)․이광수(李光洙)의 2인 문단시대, 그리고 20년대 문예사조의 혼류 시대와는 달리 어느 한두 유파가 주조를 이룬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 접어들면 문학동인(文學同人)이라고 하는 집단적 활동이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작가 개인의 능력에 따라 작품을 창작하고 발표(317)하는 풍토가 점차 조성되어, <<소년>>, <<청춘>> 등의 잡지를 통한 최남선․이광수 시대와 <<창조>>, <<백조>>, <<폐허>> 등 동인 집단에 의한 창작활동이 지양되고 독자적인 작품활동이 증폭되기 시작했다. 문학활동의 집단화가 해체되어 가시 시작한 데에는 KAPF의 해체와 이본 군국주의의 정치적 탄압이 주요 역할을 하였다. 30년대에 접어들어 신문을 비롯한 <<시문학>>, <<시인부락>>, <<삼사문학>>, <<문장>> 등의 잡지가 속속 출간되면서 다행스럽게도 발표지면이 점차 확장된 데에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계급주의 문학이나 민족주의 문학 등 목적의식의 문학이 점차 사라지게 되자 문학의 순수성을 주장하는 경향이 대두되었는데, 이것은 30년대 소설문단의 중요한 특성 중의 하나이다. 이 같은 순수문학의 양상은 프로문학의 방법론을 반대한 김동인․염상섭에 의해 일찍부터 준비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순수문학의 형태는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당연한 현실문제에 등한시한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일제의 탄압에 대한 민족적 울분이나 현실문제에 대하여 등한시한 나머지 이를 기피하는 현상까지 보였다. 결국 순수문학은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지고한 예술성만을 주장한 나머지 문학 독자의 욕구 충족이나 문학의 사회적인 공리성에 대하여 일체 무시하는 자세를 유지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반 독자들과의 이해의 폭 또한 부족하였다. 이러한 대중적인 욕구에 부응하여 나타난 것이 바로 방인근, 윤백남. 김말봉, 김내성(金來成), 김영수(金永壽), 정비선 등의 대중소설의 대중화로 차별화 할 수 있다.(319) 2) 30년대 소설의 주제 (1) 불안의식의 표출 하나의 시대사조라 할 수 있는 불안의식, 특히 지식인의 불안 심리를 주제로 한 소설에는 채만식(蔡萬植)의 <레디메이드 인생>을 비롯하여 기타의 작품들이 지적된다. 이 불안의식을 표출한 소설은 주로 지식인의 불안과 비애, 고난과 빈궁, 갈등을 주제로 하고 있다.(319) (2) 민족의식 고취와 전기문학적 역사소설 1920년대 후반기의 역사소설은 주로 민족의식의 고취를 위한 것이었다. 특히 역사의식 속에서 우리 민족의 전통이나 민족성을 찾으려는 주제성이 소설의 주조를 이룬다.(320) (3) 농촌문학의 등장 (4) 감상적인 소설 당시 감상적인 경향의 소설로는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의 <불원(不遠)의 여상(女像)>(1932), <불우선생(不遇先生)>(1931) 등이 있으나, 허무와 서정의 작품세계 속에서도 시대정신의 호소력을 유지하고 있음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322) (5) 풍자소설의 등장 (6) 토속과 인생의 관조 토속적인 서정과 인생을 음미․관조하는 경향은, 비교적 30년대 소설의 공통된 특징으로 지적된다. 이 계열의 작품 중 가산(可山)의 <메일꽃 필 무렵>은 자연과 인간 본능의 순수성을 시적 경지로 끌어올린 향토성 짙은 작품이다.(323) (7) 자의식 세계의 표출 인간의 심리 내면과 자의식의 세계를 표출한 소설은 서구의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며 이러한 주제의 소설을 대표한 작가는 이상(李箱)이다.(324) (8) 사실적 경향의 소설 이러한 경향의 소설은 주로 작자  자신의 신변이나 시정의 세태를 그린 작품에서 엿볼 수 있다. 대체로 이러한 소설은 외부세계를 순수하게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9) 통속소설의 등장 1930년대에 통속소설이 등장한 것은 이 무렵에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이 분리되는 경향을 보이면서부터였다. 즉 30년대의 순수문학이 지나치게 사회적 공리성을 도외시한 작가 개인 중심인데 비해 독자와 보다 친근할 수 있는 필요에 의해서 통속소설 또는 대중소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325) 3) 1930년대의 작가와 작품 (1) 이효석과 향토 서정 (2) 유진오(兪鎭午)와 동반작가 (3) 이무영(李無影)과 농민문학 (4) 박영준(朴榮濬)과 농민의 삶 (5) 김유정(金裕貞)과 해학 (6) 이상(李箱)과 자아의식 (7) 김동리(金東里)와 신인간주의 7. 평론문학의 성숙과 향방 1930년대에 접어들어 순수문학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게 됨에(339) 따라 평론문학도 1920년대와는 달리 문학의 흐름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어 갔음을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평론은, 이른반 해외문학파에 대한 프로문학파의 비판에 대한 정인섭(鄭寅燮)이 「조선문단(朝鮮文壇)에 고(告)함」(1931)을 발표함으로써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340) 제6장 일제 감점기의 문학 1. 문학의 양상과 동향 이 시기의 문학은, 1937년을 전후하여 1945년 해방 이전까지로 구분 지어진다.(342) 1941년을 전후하여 그들의 패전이 점점 가까워 오자 종전의 전시체제를 보다 강화하여 계엄적 체제로 변경시킴에 따라 사회․문화적 제 현상도 변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따라서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가면 속에서 국어․국문의 사용금지와 창씨개명, 신사 참배 강요 등 야만적 탄압정책이 극에 달한 무렵부터 조국광복 이전까지의 문학을 우리 현대문학사에 있어 일제 말기의 문학으로 구분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본 장에서 설명하려는 일제 말기 문학의 시간대는 편의상 1940년대 초에서 1945년 8․15 이전까지의 문학을 지칭하기로 한다. 그 이유는 1930년대 후반의 문학에 대해서는 앞장에서 설명하였기 때문이다.(342) 문학사적 시각에 있어 1944년까지를 일제치하의 문학으로 하고, 45년부터는 해방후의 문학으로 대별하는 방법은 보편적이다. 한국 현대문학의 사적 흐름을 일단 연대별로 나누어, 그 특성을 10년을 1기로 삼았기 때문에 40년대의 문학사의 실제 서술은 2기로 나누어 기술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비교적 다수의 비평가나 문학사가들은 여기 제1기(40년~45년)를 가리켜 암흑기라고 규정하고 있다. 물론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일제가 한국의 모든 저력을 전쟁도구화하기 위해 가혹한 방법을 다하여 창씨개명을 비롯하여 우리말과 글을 말살하였기 때문에 암흑기라고 칭할 수 있을(343) 것이다. 더욱이 한국 문학이 한국의 언어를 표현수단으로 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 표현수단인 언어가 말살 당한다면 사실상 한국 문학은 존재할 수가 없으므로 암흑기라는 말도 당위성이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우리 언어로 된 창작 양상은 미약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끝까지 존재했다. 많은 시인들이 절필하였거나 친일시로 변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시인들은 끝까지 우리의 문화이며, 역사요, 민족의 혼인 언어를 수호하면서 시작활동을 필연적으로 전개했다. 윤동주(尹東柱), 이육사(李陸史), 심연수(沈連洙) 시인의 ‘저항시 활동’이나 만주에서의 망명시 운동이 이를 입증하여 준다. 따라서 이 시기가 비록 암흑의 시기라고 볼 수 있을지라도 큰 틀에 있어서는 저항의 시기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굳이 암흑기로 인식한다면, 그것은 붓을 꺾고 다음 기회를 기다리는 기회주의자이거나 소극적인 도피주의자들에 대한 시각일 것이며 객관적으로 수긍하기에는 이론(異論)이 제기될 것이다. 이 시기에 주요한 김동환, 김소운, 김용제, 최남선, 임학수, 김안서, 김종한, 노천명, 모윤숙, 김경린, 김철수, 김동림, 주영섭, 정지용, 김기림, 임화, 이하윤, 김상용, 서정주 등 많은 시인들이 변절했거나 아니면 친일문학으로 기울어진 데 비해, 대조적으로 김동명, 김영랑, 신석정,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윤곤강, 김상옥 등이 붓을 꺾고 고향에서 은신한 채 지조를 지켰다. 그러나 이 무렵 만주 간도에서는 유치환, 이학성, 김조규 등 몇몇 시인이 모여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 망명시단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국내에서는 김광섭이 항일운동을 하다가 투옥까지 당했다. 뿐만 아니라, 윤동주, 이육사, 심연수는 끝까지 저항운동을 벌이다가 마침내 해방의 문턱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몇몇 시인들이 붓을 꺾고 낙향 은신을 했고, 또 문예지 <<인문평론>>․<<문장>> 등이 폐간 내지는 전향했다고 해서 국내의 몇몇 학자들처럼 일방적으로 암흑기의 문학을 배제할 수는 없다. 비단 정상적인 창작활동 내지는 문단이 구성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러한 시기에 불과 몇몇이지만 저항시 운동을 벌였고 또 언어학자들이(344) 끝까지 한글 수호를 위해 투쟁한 점을 수긍할 때 이 시기를 저항기라고 인식하는 것은 타당할 것이다.(345) 2. 1940년대 전기 시(詩)의 양상 1) <<문장>>과 현대시 1930년대가 20세기 전반기 한국 현대시의 찬란한 개화기로서 수많은 시사에 빛나는 자취를 남겼다고 한다면 순문예지인 <<문장>>은 30년대를 마무리하면서 40년대의 출발을 약속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시의 말살을 기도하는 일제의 야만적 탄압에 항거하기 위하여 민족적인 시정신을 수호하려는 신념에 의해 출발했다.(346) 2) 시인의 변절과 친일문학 3) 망명시(亡命詩)와 간도시단(間島詩壇) <<문장>>과 <<인문평론>>이 1941년 4월에 폐간되고, 1942년 최재서가 <<국민문학>>이라는 친일문예지를 발간하자 지조 있는 시인들은 저항을 하든가 아니면 낙향하여 절필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기에도 친일시가 아닌 민족시를 줄곧 발표한 곳이, 바로 만주접경지대에 있는 간도이다. 30년대부터 일부 뜻있는 시인들에 의해 신경, 용정(龍井) 등 만주에서 동인지 <<차편(此編)>>을 통한 시작활등이 있었고 다행스럽게도 40년대에 이르러서는 󰡔��재만시인집(在滿詩人集)󰡕��과 󰡔��재만조선인시집(在滿朝鮮人詩集)󰡕�� 등이 발행되어 점차 활성화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특히 간도에 있는 <<만조일보(滿朝日報)>>를 중심으로 문인들이 모이게 되고 마침내는 망명시단이 형성되었다. 여기에는 모윤숙, 유치환, 윤동주, 윤영춘, 박귀송, 이학성, 박팔양, 김조규, 손소희 등이 활약하고 있었다. 모윤숙은 북향회를 조직하여 동인지까지 발행했으며, 이학성은 󰡔��재(349)만시인집(在滿詩人集)󰡕��을, 김조규와 박팔양은 󰡔��재만조선인시집(在滿朝鮮人詩集)󰡕��을 펴냈다. 도 이 무렵 <만선일보(滿鮮日報)>에 심연수(沈連洙)는 <려창의 밤>, <대지의 여름> 등 5편의 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곳 간도 출신의 시인으로는 윤영춘, 윤동주, 박귀송과 강릉 출생의 심연수가 있다. 윤동주는 일찍 이곳을 떠나 국내에서 시작활동을 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박귀송은 일본서 조도전(早稻田)대학을 마치고 <<시인문학>>을 편집하다가 간도에서 주로 시작활동을 했다. 심연수(沈連洙)는 일본대학 예술학원 창작과를 졸업하고 신안진과 용정에서 교편을 잡았다.(350) 이 무렵의 시에서 별다른 저항의식은 찾아 볼 수 없으나 망국 지식인의 심상을 여실히 나타낸 시편으로 박귀송의 <추억>이 있다.(350) 윤영춘(尹永春)은 윤동주가 1945년 2월 일본 복강(福岡)형무소에서 옥사한 뒤, 그 비(碑) 앞에서 <조충혼(弔忠魂)>이란 시를 남긴 시인이다.(351) 4) 암흑기의 별(李陸史․尹東柱․沈連洙) 40년대 전반기에서 저항시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은 그나마 이육사와 윤동주 두 시인으로 논의되었으나, 여기서는 민족시인으로 새롭게 조명된 심연수로 인해 이 시기를 결코 암흑기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라 저항기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353) 3. 小說文壇의 양상과 親日文學의 특성 먼저 당시의 소설문학의 양상이라면, 일제의 야만적 행위가 그 극을 향해 치닫기 시작한 1941년을 전후해서 문학 또한 암흑기의 극을 향해 치닫기 시작한다. 1941년에 이르기까지는 그나마 동아․조선 양대 일간지가 있었고, <<문장>>, <<인문평론>> 등 우리 문학의 발표 지면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도 이들 발표기관이 있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긴 했지만, 1941년에는 이것마저 자진 폐간이란 명목으로 발간을 중지 당하여 우리 문학계는 사실상 전멸해 버리고 만다. 곧 문인들은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민족을 배반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절필할 수밖에 없는 불행한 현상이었다.(362) 1941년을 전후하여 치욕스런 암흑기에 접어들자 우리 문학은 사상․표현의 자유를 상실한 채 해방될 때까지 다소 공백기에 접어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363) 4. 평론문단의 오류와 논쟁 일제 강점기 말기에 국민문학이란 이름으로 평론문학에 있어서도 일본 정신을 수긍하려는 문단의 조짐이 나타났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시초는 <<국민문학>>의 창간호에 게재된 최재서의 평론 「국민문학의 요건」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환경 아래 당시의 여러 문인들이 시대적 조류에 편승하였으나. 그것은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님은 명백하다.(364) 한마디로 일제 말기의 문학은 이육사․윤동주․심연수의 저항시를 제외한다면 완전히 공백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내선일체 의식을 의도적으로 유도하거나 일제에 아부하거나 하는 평론이 모두 치졸할 뿐만 아니라, 비평의 본령이나 비평의식을 상실한 비평작태의 오류가 범람한 탈선의 시대였다.(364)
 「서사물의 전통」 로버트 숄즈, 로버트 켈로그 원문: Robert Scholes & Robert Kellogg, "The Narrative Tradition," in The Nature of Narrative(New York: Oxford Univ. Press, 1971)PP.3-16   -지난 2세기 동안 서사문학의 지배적 형식은 소설이었다.(48) -그러나 소설을 하나의 개량적 발전의 최종 산물로 보려는 의도는 없다.(48) -서사물의 본성과 서구의 서사물의 전통 전체를 개관하기 위하여, 소설을 수많은 서사적 가능성 중의 하나로 봄으로써 소설을 올바른 제 위치에 갖다 놓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다.(48)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는 두 가지 특징으로 유별되는 모든 문학작품을 우리는 서사물이라고 부른다.(49) -그러므로 그 글이 서사물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이야기하는 사람 하나와 이야기 하나이지,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다.(49) -그런데 20세기 중엽의 독자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특수한 문제가 극복되어야만 서사적 전통에 대한 균형 잡힌 견해에 다다를 수 있다. 즉 우리가 소설을 문학의 한 형식으로서 존중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무엇인가가 규명되어야 하는 것이다.(50) -20세기의 서사문학은 모든 살아 있는 문학적 전통의 성격을 형성하는 바로 전 시대의 문학적 전통과 서서히 결렬하기 시작한다. 특히 20세기의 서사문학은 사실주의의 목표와 태도와 기법으로부터 이탈해 나갔다. 이 결렬의 함축적 의미는 유럽과 미국에서 활약하는 여러 사람의 매우 흥미 있는 서사문학 작가들에 의해서 여전히 탐구되고 발전되고 투영되고 있는 중이다.(50) -19세기 사실주의의 표준을 모든 소설에다 적용하려는 경향이, 다른 모든 종류의 서사물을 우리가 이해하는 데에 차질을 가져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51) -서사물의 소설적 접근에 대한 보다 더 폭이 넓은 대안을 마련하자면 우리는 서사물의 논의에 흔히 사용되는 연대기적이고 언어적이고 편협한 장르 분류의 다수를 타파해야만 한다. 우리는 구전이나 문자화된 것, 운문이나 산문, 사실이나 허구를 막론하고, 모든 서사 형식에 공통적인 요소를 고찰해야 한다.(51-52) -그런데 20세기 중반인 현재 우리가 서사문학을 보는 관점은 거의 어떻게 해볼 도리 없이 소설에 중심을 두고 있다. 독자들이 서사문학 작품을 대할 때 갖는 예상은 그들의 소설과의 체험에 기초를 두는 것이다. 서사문학의 당위성에 대한 그들의 가설은 그들의 소설의 이해에서 파생되는 것이다.(54) -소설 중심적 서사문학관은 두 가지 중요한 이유로 해서 불행한 관점이다. 첫째로 그것은 과거의 서사문학 및 과거의 문화와 우리 사이를 단절시킨다. 둘째로는 미래의 문학이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전위문학으로부터도 우리를 단절시킨다. 과거를 회복하고 미래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는 소설을 문자 그대로 올바른 위치에 집어넣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사실적 소설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절연할 필요가 없다.(54-55) -소설은 5천 년을 소급해 올라갈 수 있는 서구 세계의 연면한 서사전통 중에서 겨우 두 세기를 대변한다는 사실을 상기하자.(55) -문학의 진화는 몇 가지 점에서 생물학적 진화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그것은 생물학적 과정과 변증법적 과정 간의 일종의 교차로서, 서로 다른 종이 결합하여 잡종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신구(新舊)의 형식이 결합되기도 하며, 하나의 유형이 반대유형을 낳아 그것이 다시 다른 형식과 결합하거나 그 대형(對型)으로서의 원형과 종합되기도 한다.(57) -서사 형식의 진화에 작용하는 복잡한 과정을 순서를 정해 제시할 수 있는 만족스러운 방법을 찾아낸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여기에서 제시하는 해결책은 혼돈적인 것과 도식적인 것 사이의 절충이다.(57) -우리에게 있어서 문자화된 초기 서사물의 가장 중요한 국면은 전통이라는 사실 자체이다. 서사시의 서술자(story-teller)는 전승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를 움직여 놓은 일차적인 충동은 역사적인 충동도 아니고 창조적인 충동도 아니다. 그것은 <재(再)>창조적 충동이다. 그는 전통적 (전승된)이야기를 다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일차적으로 충실해야 할 것은 사실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고 오락도 아니라, <미토스>(mythos)-즉 서사시의 서술자가 재창조하고 있는 전통 속에 유지되어 있는 이야기-이다.(58) -전통적으로 서사물의 전달에 있어서 전달되어야 할 내용은 필연적으로 사건의 윤곽, 즉 플롯이다. 플롯은 모든 의미에 있어서 이야기의 뼈대의 명료화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신화는 전달될 수 있는 하나의 전통적인 플롯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롯을 (그는 이것을 mythos라고 불렀다.) 하나의 행동의 모방인 문학작품의 핵심으로 보았다.(58) -문자화된 서사물의 역사 속에 틀림없이 나타난 일대 발전적 과정은 전통적 플롯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려는 신화적 충동이 지배적인 서사물로부터 점차 멀어지게 된 것이었다.(59) -서사시적 종합으로부터 발생하는 두 개의 상반된 서사 유형은 <경험적>(empirical)유형과 <허구적>(fictional) 유형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다. 두 가지가 다 서사물에 있어서의 전통적 요소의 전횡(專橫)을 피하려는 방법으로 생각될 수 있다. 경험적 서사물은 mythos에 대한 충실성 대신에 현실에 대한 충실성을 모토로 한다. 경험적 서사물을 지향하는 충동은 다시 또 두 가지로, 즉 <역사적>(historical) 요소와 <모방적>(mimetic) 요소로 나눌 수 있다. 역사적 요소는 전통적인 과거의 해석보다 사실의 진실과 사실상의 과거에 충실하다. 그리고 그 발전을 위해서는 시간 공간의 정확한 계산 수단과 초자연적인 작인(作因)보다는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인과율의 개념을 필요로 한다....모방적인 요소는 사실의 진실성보다 감성과 환경의 진실에 충실하며 과거의 연구보다는 현재의 관찰에 의존한다.(59)...모방적 서사물은 무(無)플롯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신화적 서사물과 반대된다. 그 궁극적인 형식은 “생(生)”의 단편이다. 전기나 자서전은 둘 다 서사물의 경험적 형식이다. 둥 중에서 먼저 발달한 전기에 있어서는 역사적 충동이 우세하고 자서전에서는 모방적 충동이 우세하다.(60) -서사물의 허구적(fictional) 분야는 미토스(mythos)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상적인 것에 충실한다. 이 허구적 서사물을 지향하는 충동을 다시 중요한 두 가지 성분으로 나눌 수 있다. 그것은 <로맨틱>(romantic)한 충동과 <교훈적>(didactic)인 충동이다. 허구의 작가는 경험주의의 기반과 아울러 전통의 속박으로부터도 자유롭다. 그는 시선을 외계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것이나 그들에게 필요하다고 그가 생각하는 것을 줌으로써, 그가 즐겁게 하거나 교화하려고 하는 청중에게 고정시킨다. 경험적 서사물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 진실을 목표로 하지만, 허구적 서사물은 미(美)나 선(善)을 목표로 한다. 로망스의 세계는 이상의 세계이며, 그 안에서는 시적 정의(poetic justice)가 지배적이며, 언어적인 모든 기술이나 장식은 그 서사물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사용된다. 모방적 서사물은 정신적 과정의 심리적 재생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그 로맨틱한 서사물은 수사법적 형식을 통해서 사고내용을 나타낸다. 서사물의 두 가지 큰 분류의 명칭이 뜻하고 있는 바와 같이 (경험적 및 허구적) 이것들은 서사문학의 세계에서는 궁극적 진리에 대한 과학적 접근과 예술적 접근과 같은 대립을 나타낸다.(60) -허구의 교훈적 구분은 우화((fable)라고 할 수 있는데, 로망스가 심미적 충동에 지배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지적 도덕적 충동의 지배를 받는다. 인간의 본성으로 보아 우화는 서사물의 면에서는 간략을 지향하고, 서사물 작자가 지속적인 정신적 비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서사적 명료화를 위해서 로망스에 크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61) -우리는 지금까지 서사시적 종합이 두 개의 상반된 요소로 분해되는 것을 고찰해 왔다. 그러므로 이제는 르네상스 이후의 주요한 발전이라고 볼 수 있는 서사물 속에서의 새로운 종합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아야 하겠다. 이것은 늦어도 보카치오에서부터 시작되는 점진적인 과정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가장 명확하게 눈에 띄게 된 것은 17세기로부터 18세기에 걸쳐서이다. 이 새로운 종합은 세르반테스와 같은 작가에게서 가장 두드러지는데, 그의 위대한 작품은 강력한 경험적 충동과 허구적 충동을 타협시키려는 것을 의도로 하고 있다. 그가 이룩해 놓은 종합으로부터 하나의 문학 형식으로서의 소설이 발생한다. 흔히 주장되는 바와 같이 소설은 로망스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 요소와 허구적 요소가 서사문학에서 재결합을 한 소산이다.(62) -20세기에 들어와서 대규모의 변증법이 시작되려는 징후가 보이고, 고대에 그랬던 것처럼 소설이 새로운 형식에 자리를 내어주어야 할 것 같은 기미도 보인다. 왜냐하면 소설은 항시 그 구성 요소로 분해되려고 하는 불안정한 복합물이기 때문이다.(62) -그 불안정성이라는 것 때문에 소설은 서사물의 일반적 본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즉, 서정시의 직접적인 발언자나 노래 부르는 자와 연극의 직접적인 행동의 제시 사이, 그리고 현실에의 충실과 이상에의 충실 사이에 끼여 있기 때문에 소설은 다른 형식보다도 더 극단에까지 다다를 수가 있다. 그러나 이 능력에 의해서 불완전의 가능성이라는 대가를 치른다. 그것은 또 가장 비형식적인 분야이기 때문에 끊임없는 문학적 타협이나 속임수를 유발한다. 가장 위대한 서사물은 그 안에서 최상의 것이 시도될 수 있는 서사물일 수밖에 없다.(63)
24    강만길, 『일제시대 빈민생활사 연구』, 창작사 1987. 댓글:  조회:2504  추천:0  2009-05-16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강행된 '토지조사사업'은 하나의 원시축적 과정으로서 농민의 토지이탈을 촉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9)'토지조사사업'이 "지난날의 토지의 현실적 보유자(保有者)이며 또한 경작자였던 농민을 희생으로 하고 당시의 수조권자(收租權者)를 곧 토지소유자로 하는 방법에 의해 실시되었기 때문에 그 결과로 소수의 수조권자와 부농이 토지를 취득하고 대다수의 농민이 토지에서 이탈되었다"함은 흔히 지적되는 일이지만, 이 '사업'은 종래 어느 정도의 토지보유권을 가졌던 중세적 전호를 식민지형 소작농으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것은 또 종래의 생산수단 소유자로서의 농민층을 비소유자로 만드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10)1910년대의 식민지 지배정책이 종래 어느 정도 생산수단으로서의 토지를 소유 내지 보유하고 있던 농민에게서 그것을 빼앗아 비소유자로 만드는 계기를 마련했다면, 1920년대는 농민을 비소유자로 만드는 정책이 구체적으로 적용되고 또 그 효과가 나타난 시기였다.(10)'토지조사사업'이 농촌의 중소지주·자작농·자소작농 등에게서 토지를 빼앗아 그들을 소작농민으로 만듦으로써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작농의 비율이 계속 높아지게 했다. 이것은 종래의 소농적(小農的) 농민응ㄹ 생산수단을 전혀 소유하지 못한 식민지형 소작농으로 만드는 일이었으며, 종래의 중세적 지주경영을 식민지적 지주경영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소작조건을 크게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소작농의 증가로 그들의 경작면적은 감소되어갔고 소작료는 고율화했으며 소작권은 극도로 불안했다. 소작농민의 증가, 일본 이민의 증가, 이른바 농장형(農場型) 지주경영의 등장 등으로 일반 소작농민들의 경작면적은 줄어들고, 토지경영을 통해 자본주의적 영리를 추구하는 식민지형 지주경영의 결과로 소작료는 급격히 고율화했으며, 종래의 영구소작제가 계약소작제로 변함으로써 농민들의 소작권은 극도로 불안해졌다.(10)소작면적의 축소, 소작료의 고율화, 소작권의 불안 등은 소작농민의 영농수지(榮農收支)를 극도로 악화시켜 그들을 급격히 빈민화시켰다. 생산수단으로서의 토지에서 완전히 이탈되고 일정한 기간의 계약제에 의해 소작지를 경작하면서 지주의 자본주의적 이윤추구에 의해 고율소작료를 수탈당한 식민지시기의 소작농민들은 일정한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자족적(自足的) 영농에 종사하던 종래의 소농적 농민과는 다른 농업노동자적 개념에 접근하고 있었다.농업노동자적 존재로서의 식민지시기의 소작농민들은 좁은 소작지로 적자영농에 시달리는 반실업자적인, 조선총독부가 말한 세궁민(細窮民)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심한 경우는 소작지를 완전히 잃은 완전실업자가 되어 농촌을 떠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1920년대는 '토지조사사업'을 중시으로 하는 1910년대 식민지 농업정책의 결과로 종래의 소농적 농민을 생산수단을 완전히 잃은 농업노동자적 존재로서 식민지형 소작농민으로 만든 시기였으며, 식민지형 지주경영의 자본축적 과정을 통해 이들 소작농민이 계속 반실업자 내지 완전실업자화한, 다시 말하면 상대적 과잉인구화한 시기였다.(11)1920년대와 30년대를 통해 식민지 지배당국이 춘궁민 혹은 세궁민으로 지목한 농촌빈민은 대체로 전체 농촌인구의 절반 가까이 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 연간 약 15만 명 정도가 농촌을 떠난 것으로 통계되었다. ...1920년대 이후 급격히 증가하는 화전민, 이  시기에 처음으로 생겨나는 도시지역의 토만민(土幕民)과 전국 각 지방 토목공사장의 날품팔이 노동자 등은 모두 이들 노촌빈민 출신의 자기소유가 없는 노동자적 존재들이었다.(11)식민지시기 농촌빈민의 이농(離農)현상은 도시지역에서의 노동시장 형성에 의한 노동력 흡인의 결과가 아니라 농촌 내부에서 생산수단을 잃고 노동자적 처지에 빠진 농민들의 실업, 빈민화, 파산에 의한 이른바 밀어내기식의 이농이었다. 따라서 농촌을 떠난 인구를 도시측에서(11)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조건은 아니었고 이 때문에 그 상당한 부분이 다시 농민으로 주저앉되 이번에는 일반 농토가 아닌 깊은 산속의 산림을 불태워 일정 기간 경작하다가 지력(地力)이 다하면 다시 다른 곳에 불을 질러 경작하는 화전민이 되었다.(12)1920년대와 30년를 통해 순(純)화전민과 겸(兼)화전민을 합쳐 120만 명이 넘은 것으로 통계된 화전민은 대부분 평지의 농민생과는 전혀 비교할 수 없는 '원시적'인 생활을 하면 목숨만을 이어가는 빈민이었다.(12)일반적으로 농촌에서의 자본가적 경영의 발달이 농민분해를 촉진시켜 일정한 부분의 농민을 쫓아내는 한편 도시지역에서의 자본주의적 성장이 이들 농촌에서 분출된 인구를 그 값싼 노동력으로 수용하기 마련이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에서의 식민지배는 이들 농촌에서 분출되는 인구를 수용할 만한 조건에 있지 못했고, 이 때문에 그 가운데 상당한 부분이 산간지대로 들어가 그야말로 '원시적'인 생활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이농인구에 의해 형성되는 근대 초기의 일반적인 도시빈민과 다른, 후진 일본 자본주의가 그 식민지 조선에서 만들어놓은 실업자의 변형으로서의 일종의 특수 빈민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12)일본의 식민지 농업정책이 급격히 증가시켜놓은, 실업한 농업노동자적 존재로서의 농촌빈민의 일부는 한편으로는 도시쪽으로 분출되어 토막민이라는 전에 없던 일종의 도시빈민층을 형성했다. 1920년대 초엽부터 전국의 대도시와 중소도시 주변에 나타난 토막민은 우릴 역사 위에 처음으로 형성된 이른바 근대적 빈민의 일종이었다.(12)화전민이 된 인구와 함께 농촌에서 분출된 인구의 일부인 도시빈민으로서의 토막민도 본래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그 값싼 노동력으로, 공장 노동자로서 수용되어야 할 인구였으나 일본 자본주의의, 특히 그 식민지 자본주의의 미숙성·후진성 때문에 공장노동력으로 흡수도지 못한 부분이었다. 농촌에서의 실업으로 강제로 분출된 이들은 도시지역으로 나와 날품팔이나 공사장 막일꾼이나 행상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그들의 주거가 도시주변의 빈터에 땅을 파거나 거적을 두른 움집이었던 데서 토막민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13)조선에 대한 일본 식민지 농업정책의 가장 근원적인 목적은 조선 농촌을 일본의 항구적인 식량공급지로 만드는데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정책은 조선에서의 중소지주·자작농·자소작농 등 농촌중간층의 성장을 억제하고 농촌사회를 일본인 및 조선인 대지주와 그 소작인으로 양분하여 농촌에서의 민족부르조아적 계층의 성장을 저지함으로써 그 식민지 지배를 영구히 하는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식민지 농업정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최초로 실시한 '토지조사사업'은 농촌중간층을 몰락시켜 소작농으로 만드는 하나의 큰 계기가 되었다.(23)식민지 농업정책으로서의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을 위한 수리조합사업 등이 조선 농촌에서의 토지겸병을 촉진시킴으로써 중소지주층·자작농·자소작농을 급격히 몰락시켜 대부분 소작농민으로 만들었다.(28) 이밖에도 역시 식민정책의 일단으로서의 일본 농업이민의 조선농촌 침투와 그들의 지주화, 그리고 동양척식회사 등의 토지약탈이 또한 소작농민을 급증시켰다.(29)'토지조사사업', 수리조합사업, 일본농민의 조선에의 식민 등이 일본인의 조선에서의 토지소유 및 지주화를 조장하는 정책이었고, 따라서 그것은 조선의 중소지주층·자작농층·자소작농층 등의 농촌중간층을 소작농으로 몰락시키는 정책이었던 것이다.(33)일본의 식민지 농업정책이 조선 농민을 전반적으로  빈민화시킨 첫째 단계가 종래의 중소지주층·자작농층·자소작농층을 소작농화시키는 과정이었다면 그 둘째 단계는 급증한 소작농민 일반의 소작조건을 급격히 악화시켜 소작농민 전체의 생활을 몰락시키는 과정이었다.(34)소작농민의 비율을 계속 높여간 식민지 농업정책은 또한 지주권(地主權)을 강화시키고 소작조건을 급격히 악화시킴으로써 소작농민 일반의 생활을 영세화시켜 갔다. 종래의 지주·전호 관계를 근대적이라는 이름으로 식민지적 지주·소작 관계로 바꿈으로써 강화된 소작조건의 악화현상은 무엇보다도 먼저 소작료의 고율화로 나타났다.(35)토지가 일부 대지주에게 집중되고 자작농의 소작농화가 급격히 진행되는 과정에서의 경작면적의 한정, 소작농의 급증은 필연적으로 소작권의 경쟁과 불안을 가져왔던 것이다.(45)마름의 중간수탈이 소작농민 궁핍화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였다.(46)식민지시대에 와서 농촌빈민이 급격히 증가한 가장 중요한 직접적인 원인의 하나가 만성적인 저곡가정책이 주원인인 농업경영수지의 악화에 있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지만,....(51)식민지의 농업구조 전체가 식민모국에의 값싼 식량을 공급하기에 적합하도록 짜여졌기 때문에 곡가는 풍·흉년을 막론하고 최저가격을 맴돌았고 따라서 조선농민은 자작농·자소작농·소작농을 막론하고 적자영농에 허덕이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결과 그들의 부채액은 계속 늘어나기만 했다. 농민들 특히 소작농민의 경우 그 부채액이 전혀 감당할 수(58) 없는 수준에 이르게 되면 결국 파산해서 이른바 '야간도주'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유랑민이 되거나 화전민이 되며, 도시로 나가서 품팔이꾼이 되거나 심한 경우 걸인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59)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 농업정책이 대토지소유제를 촉진하여 소작농민이 급증하게 하고 그 소작제가 지주의 이익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감으로써 소작조건이 계속 악화되게 했으며, 이 때문에 소작농민의 경영수지는 악화하고 농민부채는 증가하기만 했다. 이와같은 식민지 농(68)업정책은 결국 지주를 제외한 농민 전체를 빈궁 속으로 몰아넣었고, 따라서 전체 식민지시기를 통해 농촌빈민은 계속 양산될 수밖에 없었다.(69)식민지시대를 통해서 농촌에는 전체 농민의 거의 절반에 이르는 만성적인 춘궁민이 있었으며, 이들은 춘궁기가 되면 문자 그대로 초근목피와 심지어는 백토를 식료로 삼았고 특히 재해년에는 그 생활이 더욱 처참했다. 정미 한 되 값이 22전에서 42전을 오르내린 1920년대와 30년대에 걸쳐서 농촌빈민들 1인당 1일 생활비는 4전에 불과했으며 그것은 같은 시기 화전민의 1일 생활비와 맞먹었다.(91)화전농법의 특징은 무시비(無施肥) 휴한농법에 있으며 그 때문에 그들의 생활은 또 대단히 비정착적이었다. 경작지에 시비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앞에서도 여러 가지로 살펴보았지만, 화전경작이 시비가 가능하게 되고 따라서 영구적인 경작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숙전화하여 화전의 범주에서  벗어나게 된다. 식민지 농업정책의 결과로 농촌에서 쫓겨난 농민들이 시비도 할 수 없는 비탈진 산간지대에 불을 질러 밭을 이루고 산화회층(山火灰層)이 비료 역할을 해줄 때까지만 조·감자·콩·옥수수 등을 심어서 겨우 연명하다가 지력이 소모되면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새로운 땅에 불을 질러 농토를 얻는 것이 전형적인 화전민 생활이었던 것이다.(153)화전농업 자체 내의 농민층 분화에 의해 지주·소작 관계가 발달해가고 있었던 사실도 뚜렷하지만, 한편 화전농민이 대량으로 또 급진적으로 소작인화하는 조건은 딴 곳에도 있었다. 즉 화전농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국유림 내의 화전민들이, 종래 '무주공산'을 오랫동안 경작하여 자기의 소유가 되었다고 생각하던 땅이 '토지조사' '임야조사' 등에 의해 하루 아침에 그 소유권이 박탈되는 경우가 허다했던 것이다.(161)일본인들과 결탁한 하급관리들의 횡포난 사유지의 국유화로 화전민들이 경작지를 잃게 되는 경우가 전국의 화전지대 도처에 있었지만 화전민들이 경작지를 잃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은 조선총독부가 '산림조사'를 통해 대부분의 산림을 국유림화하고 이를 닿시 주우회사(住友會社)와 같은 일본의 재벌회사에게 대부하여 이들 회사로 하여금 화전지대에다 식림(植林)하게 하는데 있었다.(163)화전민의 대부분이 평지농촌에서 자작지는 물론 소작지마저 가질 수 없어서 유리하다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마지막 방법으로 화전지대로 찾아든 사람들이었지만 이조시대나 식민지시대의 초기까지도 평지농촌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화전을 가질 수 있었으므로 그들의 생활이 평지농민의 생활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식민지 경제정책의 결과로 이농민이 계속 분출되고 식민지 지배당국의 화전금지책이 점점 강화됨에 따라 화전지대는 깊은 산 속으로 확대되어갔고 따라서 그들의 생활과 평지농민 생활과의 차이도 점점 커져간 것이(169)라 생각된다. 깊은 산 속으로 쫓겨들어간 화전민 생활은 문명생활과는 거의 단절된 그야말로 '원시적'인 생활이 될 수밖에 없었고 거의 완전한 자급자족적인 생활이 될 수밖에 없었으며 잉여생산을 가질 만한 조건이 되지 못한 반면 그들의 농경생활은 자연의 재해에 대단히 약한 것이었으므로 일단 재해를 만나면 그대로 이사하거나 또 유랑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생활이었다.(170)화전지대는 대체로 고지대이며 또 산간지대이므로 작물의 성장기간이 대단히 짧게 마련이다. 4월 중순에 많은 눈이 내리는 경우 화전농업은 자연히 큰 타격을 받게 마련이며 더 나아가서는 폐농하게 마련이었다.(202)전국 각지에서 모여온 농민들이 갑자기 만들어놓은 화전민 부락에는 공동의 부락신(部落神)도 없었고 공동경작의 풍속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농번기에 노동력을 얻기가 어려웠고 이 때문에 데릴사위제(豫婚制)와 같은 풍속이 다시 나타나고 있었던 한편 부녀자의 야외노동이 일반화해가고 있었다.(216)토막민이라 해서 백정(白丁)이나 일본의 후라꾸민(部落民)같이 특수한 사회를 이룬 하나의 사회적 계급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도시와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빈민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토막민은 곧 식민지시기 조선인의 하나의 모습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며 그것은 그들이 바로 식민지시기에 들어와서 비로소 나타난 빈민들이라는 점에서도 명백하다.(239)식민지시대에 들어와서 전국의 도시와 그 주변에 새로 나타난 도시 빈민층으로서 토막민은 대부분 식민지 농업정책의 결과로 농촌에서 쫓겨난 농민 출신이었다. 농촌을 떠난 인구의 대부분이 일단 도시로 나왔지만 그들에게는 도시에서 집을 마련할 만한 재력이 없었고 그렇다고 하여 식민지 지배당국이 그들을 수용할 만한 시설을 마련하지 못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도시  주변 공지에다 토막을 마련해 살게 마련이었던 것이다.(241)결국 일제 식민지시기 조선사회의 3대 빈민층의 하나이던 도시빈민으로서의 토막민은 대체로 '토지사업'이 끝난 1920년대 이후 농촌에서 쫓겨난 인구들이었다. 식민지 산업구조가 이들 이농민을 공장노동자로 수용할 만하지 못했고 또한 식민지 구빈사업(救貧事業)이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줄 만한 조건에 있지 못했기 때문에 굴을 파서 살거나 매(244)우 조잡한 가건물을 지어 사는 토막민이라는, 식민통치가 만들어놓은 하나의 빈민층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245)식민지가 길어짐에 따라 토막민·불량주택민 등 도시지역의 빈민들이 증가해갔고 또한 대도시는 물론 지방의 중소도시 지역까지 확대되어갔던 것이다. 이와 같은 도시지역에서의 토막민과 불량주택민의 증가는 이농민의 도시 유출로 인한 도시인구의 증가와 단순한 주택난의 결과로만 볼 수 없으며, 결국 식민지시기가 길어짐에 따라 지주층이나 일부의 자산계급을 제외한 민중사회 전체가 빈곤화한 결과이며 거기에 식민지 피지배사회의 특징이 있었던 것이다.(254)식민지시기 도시빈민으로서의 토막민은 본래 대부분 식민지 농업정책의 결과로 농촌을 쫓겨난 이농민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도시로 나와 초기자본주의 산업구조의 값싼 노동력이 될 만했지만 식민지 산업구조(254)가 이들을 수용할 만한 조건에 있지 못했고 따라서 이들은 대부분 날품팔이 노동자나 잡역부 등이 될 수밖에 없었다.(255)농촌에서 갓 쫓겨난 이들이 특별한 기술이 없어서 기술노동력이 될 수 없었으며, 대부분 파산한 이농민들이어서 상업을 영위할 만한 자본이 있을 리 없었으므로 결국 날품팔이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256)식민지시기의 도시빈민으로서의 토막민은 바로 식민지지배의 소산물이었고 따라서 도시 주변에 형성된 토막민촌은 곧 식민지지배의 치부이기도 했다. 그러나 식민지 경제구조가 이들을 어떤 형태로건 수용할 만한 조건에 있지 못했고 따라서 그 치부를 감추기 위해 도심지에서 먼 곳으로 옮겨가게 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280)파산하여 이농하는 농촌인구의 대부분이 공장노동자로는 수용될 수 없었던 식민지 조선의 산업구조 아래서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길이란 식민지 지배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는 식민지 산업의 기초적 시설, 즉 철도·항만·도로·수력발전소·수리조합사업 등을 실시하여 농촌에서 분출되는 값싼 노동력을 대량으로 수용함으로써 식민지 기초시설도 확보하고 실업자 문제도 해결하는 길이었다.(291)공장노동자가 일본인을 합해 8만 6천여 명밖에 안 되는 시기에 농촌을 떠나 노동자가 된 인구는 87만 명이나 되었고 그 위에 농촌의 임노동자 16만여 명이 있어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조선 지배를 위한 기초시설을 하기에는 충분하고도 값싼 노동력이 양출되고 있었던 것이다.농토를 잃고 농촌을 떠난, 전혀 기술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결국 토목공사장의 육체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가족을 고향에 둔채 단신 토목공사장을 따라 다니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가가 완전히 파산한 경우 전 가족이 그야말로 유민들이 되어 전국 각지의 토목공사장을 따라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식민지시기의 하나의 특수한 노동시장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292)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는 급격한 농민분해를 가져왔고 그 결과 화전민을 급증시켰으며 전에 없던 도시지역 빈민으로서의 토막민을 만들어내었고 또한 전국의 각 토목공사장을 따라다니며 단순 육체노동으로 호구책을 구하는 토목공사장 막일꾼을 만들어냈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배가 만들어놓은 이들 토목공사장 막일꾼은 사실상 식민지 전체 기간을 통한 노동자층의 대표적인 존재들이었으며, 이들은 또 항상 실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식민지시기 빈민의 일부였다.(294)토막민이 되거나 토목공사장의 노동자가 된 사람들은 언제나 실업문제에 시달려 고통받고 있었으며, 특히 1920년대 말기 이후의 '세계공황'의 영향으로 이들 농촌을 떠난 인구의 실업률은 급격히 높아져갔다.(295)식민지 지배당국이 벌이는 각종 토목공사가 해마다 농촌에서 분출되어 나오는 많은 인구를 값싼 단순 육체노동자로 수용하면서 이루어졌지만, 대부분 도급제로 실시된 이들 공사장의 노임이 너무 저임이어서 노동자들이 반발하거나 파업하면 고사청부업자들은 단신으로 흘러 들어와 부양가족도  없고 생활비가 적게 들어 저임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중국인 노동자로 대체함으로써 조선인 노동자를 궁지로 몰아넣었다.(313)식민지 농업정책의 결과 농촌을 쫓겨난 인구가 도시지역의 변두리에 토막촌(土幕村)을 처음으로 형성하게 된 것이 1920년대 초엽이었고 역시 농촌을 쫓겨난 인구에 의해 화전민의 수가 급격히 증가한 것도 같은 무렵이었다. 농촌을 쫓겨난 인구가 화전민이 되거나 도시지역의 토막민이 되어 날품팔이로 연명할 수 있는 경우 또 특히 도시지역으로 나온 인구가 아직 그 수가 많지 않은 경우 실업자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지는 않았겠지만, 농촌에서 쫓겨나는 인구가 점점 많아지고 일본인의 한반도 이주민(移住民), 즉 식민(植民)이 증가함에 따라 실업자 문제는 점점 심각한 문제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335)
23    현진건 단편소설연구자료들 댓글:  조회:3056  추천:0  2009-05-16
1. 서종택/정덕준, 『한국현대소설연구』, 새문사 1990)   한상무, 「현진건 소설의 역사 의식 형성」   현진건의 작품 경향은, 여러 논자들이 대개 인정하듯이, 초기의 자전적, 신변체험적 성격의 작품에서, 중기인 1920년대 중반 경부터 시대적 현실 인식이 두드러진 작품에로 전환해 간다. 이 무렵 현진건은 흔히 인용되어 온 바와 같이, "오직 조선혼과 현대정신의 파악"만이 "우리 문학의 생명이오 특색"이라 강조한 평문 "朝鮮魂과 現代精神의 把握"을 통해 그의 당시의 문학관을 집약적으로 표명하고 있는데, 그의 이러한 문학관은 근본 입장에서, 당시 '조선정신'의 추구를 주창했던 최남선의 영향도 감지케 하지만, 식민지 조국이 처한 시대적 현실 인식을 최우선적 명제로 강조한 신채호의 문학관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음을 볼 수 있다.(187)<고향>은 분량만으로는 단편소설로서의 불과 3, 40매 정도의 다소 짧은 작품이다. 그러나 당대의 한국 민중의 비참한 삶의 현실에서 취재한 그 제재는 단편보다 오히려 장편 형식에 적합할 만큼 광범하며, 직접성과 암시성의 조화로운 효과를 노려, 세련된 작가적 기법에 의해 고도로 압축·제시된 작품내의 현실 상황은 일제의 한국 강점 이후 극도로 황폐화된 식민지 한국의 현실을 구체적이고도 생생하게 증언해 주고있다.(188)<고향>은 신채호와의 관련성에서 볼 때, 두 가지 사실이 특히 돋보인다. 첫째는 한국의 근대사를 주변 강국 특히 일본에 의한 침략 및 수탈의 역사로 보는 명확한 시대 인식이며, 둘째는 그러한 침략으로 인한 가장 큰, 직접적인 피해 계층은 가난한 한국의 민중이라는 민중 의식이다.(188)<고향>의 서두는 한국이 역사적으로 주변 강국인 중국과 일본에 의해 차례로 침략, 지배  당한 사실을 암시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적 묘사로 시작되고 있다.(188)동양 삼국의 옷을 한 몸에 감은 사내란 인물 묘사와 한 찻간에 함께 탄 삼국인이란 정황 설정은 당시이 시대적 배경에 비추어 볼 때 어느 정도 개연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작가의 작위적 의도를 엿보게 해주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189)현진건의 20년대 창작 활동은 대개 <고향>을 발표한 1926년 이후 뚜렷하게 감퇴된다. 이 시기 이후 그가 쓴 작품은 <新聞紙와 鐵窓>(1929), <貞操와 藥價>(1929), <서투른 盜賊>(1931) 등 3편의 단편이 있을 뿐이다. 그의 이러한 급격한 창작 활동 감퇴의 원인은 그의 기자로서의 활동과도 유관한 듯하나, 근본적으로는 <고향>에 그려져 있는 바와 같은 당대의 한국 민중의 절망적 상황과 가혹한 식민지적 질곡에 대하여 작가로서 그가 겪어야 했던 분노와 좌절이 크게 작용했던 듯하다. 또한 이 무렵 이후 그의 叔兄 鼎健의 受刑과 죽음, 그에 이은 형수의 자살이라는 가정적 비극도 그로 하여금 더 이상 현실을 객관적으로 그릴 여유를 許與하지 않은 듯하다.(196)   2. 김열규/신동욱 편,『현진건연구』, 새문사 1989   김우종, 「<貧妻>의 分析的 연구」   <빈처>에 나타난 주제는 작가가 이 무렵부터 계속 발표해 나간 여러 작품과 함께 전체적으로 하나의 커다란 주제 속에 묶일 수 있을 것이다. 즉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우리 민족이 겪고 있던 암담한 삶의 모습을 증언하며 식민지 수탈정책을 비판하는 민족의식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I-10)<빈처>는 그 같은 현실을 내다보고 있는 한 지식인과 그 아내를 통해서 역시 암담한 현실을 증언하며 이 작품을 기점으로 하여 전체적으로 "朝鮮의 얼굴"을 그려나가는 사실주의 문학의 의도를 반영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I-10)감격적인 장면일수록 작자는 침착하고 냉철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독자들이 작품의 인물들만큼 흥분하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그 인물들만 흥분하고 탄식하고 오열한다면 독자와 작품인물 사이에 거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즉 그것도 함께 공감하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공감을 강요하고 함께 울어지기를 애걸하는 결과가 되며, 그것은 더욱 공감도를 읽고 독자를 난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I-16)新派劇의 예술성 여부가 문제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장면들 때문이며 이 작품은 때때로 이 같은 과장법으로 독자를 당황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I-17)그렇지만 아무리 적극성을 나타낸다 하더라도 천사에까지 비약한다면 설득력을 잃게 된다. 서구의 기독교 신앙을 통해서 받아들여진 천사가 지니는 이미지는 '나'의 아내가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이 작품 속의 한국의 소박한 아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천사는 인간을 신격화한 개념이기 때문에 과장이 너무 극단적이어서 찬사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어 오히려 긴장감을 주어야 할 장면을 희극화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아내를 끌어안고 "뜨거운 두 입술"을 포갠다는 것도 사전 설명이 그처럼 과장성을 지니고 있고, 그만큼 공감력을 잃고 있기 때문에 역시 우스운 장면으로 받아들여질 위험이 큰 것이다.(I-19)우리는 부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이 같은 결함으로 말미암아 당황하는 수는 있지만 작자는 그의 주제를 형성시켜나가는데 있어서 거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 즉 뒷그늘에 숨겨져 있는 전통적인 한국의 여인상, 그 여성들이 이 사회에서 지니고 있는 긍정적 삶의 의미와 행복의 의미를 되새기는데 있어서 작자는 거의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이 같은 여인상을 더듬어나갔다는 것도 이 작품이 근대문학으로서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중요한 의의를 지니게 된다. 왜냐하면 이때까지 우리 문학에서는 거의 아무도 이 같은 여인상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존여비의 그릇된 관념이 현모양처를 칭찬하고 열녀를 찬양하더라도 그들은 어디까지나 종속적인 위치에 두고 관찰한데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I-19)그런데 <빈처>에서는 작자가 오히려 그 같은 조강지처가 사회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선비들의 배후에서 얼마나 고통을 참고 그들을 도웁고 있는지를 밝히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것은 새로운 가치관의 제시오, 인간상의 발견이며, 이 작품은 부분적인 기교적 미숙성에도 불구하고 이 점에 있어서 중요한 문학사적 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I-20)   김영화, 「<술 권하는 사회>와 <타락자>의 세계」   20대 지식인이 갖고 있는 꿈과 이상이 현실사회에서 좌절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의 좌절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식민지사회가 갖는 여러 제약, 그리고 20년대 식민지사회의 지적·정신적 풍토와 깊이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I-23)1920년대 초기 현진건은 왜 이런 지식인들의 좌절을 기록하고 있을까. 3·1운동의 실패, 독립에 대한 열망이 한꺼번에 사라지고 사회가 혼란에 빠지면(I-25)서 당시의 지식인들이 깊은 회의와 방황 속에 빠졌다는 것은 역사의 기록이 그것을 보여준다. 개인적인 문제나 민족 전체의 문제를 가리지 않고 당시의 젊은이들은 꿈과 이상의 상실에 대한 깊은 좌절감이 있었다. 게다가 유교적 전통사회로부터 근대사회로 옮겨오면서 빚어진 갈등을 그들은 제대로 수용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소수의 동경유학생이라는 선민의식, 민족을 지도하겠다는 지도자의식이 남보다 강렬한 대신 그런 의식이 현실의 벽에 부딪혀 깨어지고 있다. 이런 좌절은 현진건 개인의 체험인 동시에 동시대 지식인들의 공통된 체험이기도 하다. 그런 갈등과 아픔을 현진건은 소설을 통하여 표현함으로써 암암리에 자기 시대와 사회의 진상을 드러내고 그것을 비판하려는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I-26)<술 권하는 사회>, <타락자>, <빈처>, <지새는 안개> 등의 주인공들은 소설을 달리하면서도 동일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 만큼 그 의식이나 사회적 처지가 비슷하다. 이들의 '아내' 들도 거의 그 점에서는 같다.우선 '남편'보다 연상이라는 것, 신교육을 전혀 받지 않아 '남편'과의 지적 수준이 크게 격차가 있다는 것, '남편'이 동경 유학 중 봉건적인 가정에 묻혀 남편의 귀국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 착하고 선량하다는 것 등. '남편'은 이러한 아내에 대해 연민의 정을 보내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세계를 이해할만한 능력이 없는 것 때문에 실망하고 있다. 이것은 <술 권하는 사회> 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I-27)이것은 20년대 식민지 사회의 전통적인 결혼 양상이 동시대의 지식인들에게 어떤 갈등을 가져왔는가를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연상의 아내, 남편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는 무식한 아내, 그러나 헤어질 수 없을 만큼 선량하고 착한 아내를 둔 당시의 지식인들을 좌절시킨 하나의 요인일 것이다. 밖에서 겪은 갈등과 좌절을 가정에 돌아와서 해소할 수도 없었던 답답한 지식인들의 처지가 요약되어 드러난다. 20년대 전통적인 것과 외래의 문화가 충돌하는 사회가 갖는 문제점을 드러내 보인 것도 현진건의 당대 사회에 대한 비판 의지가 표현된 것으로 보인다.(I-28)20년대 초 근대소설의 확립과정에 그 수법에 있어서는 현진건이 동시대의 작가들 가운데는 단연 앞서 있음을 보게 된다. 현진건은 무엇보다 소설은 묘사에 의한 표현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던 같다. 그리고 주관적인 요소를 가능한 한 배제하고 객관적인 입장에 서려는 의도가 있었음이 드러난다.(I-31)중요한 것은 한국소설사를 개관해 볼 때 수법이라는 측면에서 근대소설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는 최초의 작가가 현진건이라는 점이다. 이인직 등의 신소설이나 이광수의 소설에는 설명이나 서술은 있어도 객관적 묘사가 아주 부족하다. 김동인이나 나도향의 초기소설도 그 점에서 비슷하다. 염상섭의 경우 주관을 배제한 객관적인 묘사에 주력한 흔적은 있으나, 현진건과 비교할 때 그 세련도에 있어서 뒤떨어진다. 한국소설은 비로소 현진건에 이르러 표현기법에 있어서 근대소설적 성격을 획득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리얼리즘 정신에 부합되는 작가정신과 아울러 큰 의의를 가진 것이다.(I-31)현진건의 소설은 소설 그 자체로서도 동시대의 작품 가운데 뛰어난 작품이 많은 편이고, 전래의 이야기나 설화에서 벗어난 본격적인 소설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리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연암 박지원의 작품에서 보여준 당대 사회와 현실의 진상을 극명하게 드러내어 이를 비판하고 개혁하려는 의지가 한 시대를 건너 뛰어 현진건에 이르러 계승되고, 그것이 다음 단계인 채만식 등에 이어진 것은 한국소설사의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생각한다.(I-32)   윤홍로, 「불」의 상징적 의미」-<불>·<貞操와 藥價>를 중심으로   빙허가 작품을 쓰기 시작할 무렵 우리 문단의 문예사조적 경향은 사실주의 경향으로 발판을 굳히기 시작하였으며 문예쟝르상으로는 단편소설이 우위였음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초창기 한국근대소설을 논의하면서 신중히 검토해야 할 문제는 단편소설과 사실주의와의 관련성 여부다. 근대문학의 초창기부터 사실주의를 옹호하는 소리가 점차로 증대하였으나 단편소설은 서구의 경우 코너(Franko' Conner)의 논리를 빌리면 "그 성질상 사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낭만적이고 개인주의적이고 비타협적인" 문학쟝르에 속하는 속성을 지녔다는 것을 참고하면 장르와 문예사조와의 불화가 이 시대에는 팽창하였음을 가정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제기함에 따라 우리는 단편소설을 다룰 때 작가가 아무리 사실주의 쪽으로 기울어졌다 할지라도, 주관적인 사실의 기법 즉 비유적인 문체상의 특징 등을 연구의 대상으로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단편은 그 장르의 성격상으로 보아서도 그 범위가 한정되어 있고 주관적인 압축성을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장편을 서사시에 비긴다면 단편은 서정시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논리는 "단편이 산문설화"라고 규정한 포오의 관점에서 그 타당성이 인정된다. 따라서 단편소설이 장편소설에 비해 상징, 은유와 같은 상상적인 수사기법-상징적 문체를 많이 사용하게 됨은 당연하다.(I-34)빙허는 동시대의 시대상황을 객관적으로 표현하려고 하면서 한 지식인의 내적 고뇌에 깊이 천착하여 작품의 리얼리티를 형상화하는데 주력하였다. 국권을 박탈당한 후 조선의 현실은  날로 쇠퇴하여 가고 경제적 후진성, 정치적 훈련의 부족, 사상적 빈곤 등으로 무수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작가가 이러한 현실을 시대의 중심과제로 형상화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I-35)이들은 외적으로 식민지 제도의 모순에 대한 현실비판과, 내적으로는 봉건적 인습의 극복이라는 두 가지의 목표를 지향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들은 '朝鮮魂'을 주축으로 하여 근대화 운동을 촉진시키면서 민족의식을 고양시켜야 하는 이중의 사명을 창작을 통해 수행하려 하였다. 빙허를 비롯한 일군의 작가들은 일제의 노예화, 우중화 정책에 대응하면서 일제의 검열망을 피하고자 상징적인 기법을 모색, 개발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수사기법의 발전은 시대조건과도 상관성을 가진다. 이들 소설의 수사법-은유나 상징기법은 개인이나 시대상의 우회적인 반영이면서, 역으로 개인적 이미지나 시대정신을 형성하는데 공헌하였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I-36)초창기의 작품들에서는 환상적이고 감상적인 수식어나 관념적인 유추에서 온 장식적 비유어가 많다. 빙허는 20년대 중반기 이후로는 점차 내면적인 고민을 시대와 상황의 모순으로 돌리면서, 인간의 가면과 본질의 낙차를 아이러니의 기법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I-36)빙허의 장기는 사실의 현장을 박진감 있게 그리다가도 돌연히 어조를 바꾸어 반전의 극적 수법을 사용하여 진실을 발현시키면서 문학성을 고양시키는데 있다. 이와 같은 그의 아이러니 기법은 넓은 의미에서 리얼리즘 기법과도 일치된다. 넓은 의미에서의 리얼리즘이라면 낭만적 미학까지도 내포하는 것을 뜻한다. 빙허는 춘원의 도덕적 계몽주의나 동인의 煽情性, 도향의 感傷性을 극복하면서 단편소설의 본령을 찾기 시작하였다.(I-37)빙허가 단편의 본령을 찾았다함은 단편의 특성을 살렸다는 뜻이고, 그 특성은 단편의 압축성을 살리기 위해 상징적인 유추를 통해 서정성과 상상의 폭을 넓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빙허의 소설미학은 상징과 은유 등의 비유법에 의해 구체적으로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I-37)우리는 빙허의 유추에서 자연의 질서가 인간의 삶과 용접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최주부에 내재한 반동물성과 농부에 내재한 반동물성은 <貞操와 藥價>의 비유적 문체를 분석하면 분명해진다. 그러나 타락한 동물성을 지닌 최주부의 세계와 삶을 지탱하기 위한 순수한 농부와 그의 아내의 자연성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은 물론이다. 우리는 위와 같은 유추에서 최주부의 세계에서는 생경한 본능을 볼 수 있고, 농부의 세계에서는 승화된 원초적 본능을 보게 된다. 다시 말하면 전자가 동물적인 성욕으로 표현되었다면, 후자에서는 살아가기 위한 본능을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상이한 양상을 띠고 있다.(I-45)우리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하층민들이 비천한 삶 속에서 끈질기게 살아가는 모습을 깊이 생각하게 된다. 아내의 성관계는 세속적인 윤리관으로는 풀이할 수 없다. 남편의 생명이 위급할 때 유일한 여성의 밑천을 내놓은 것은 기존 윤리관을 파기한 것이며, 그것은 더 넓은 의미로 해석하면 이 시대 사람들이 동시대의 역사적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라는(I-45)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한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존귀한 것인가? 그것은 모든 생명체의 공통된 과제일 것이다. 농부의 삶의 철학은 그러한 자연생명의 공동원리에 순응된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이 시대가 직면한 시대상황에 따른 새로운 윤리성을 제기한 것이며, 새로운 자연의 광명을 인간 생명체에 대입하여 본능의 불을 이념화시킨 주제를 가진 것이다.(I-46)   천이두, 「음산하고 비참한 조선의 얼굴」-현진건의 <고향>   초기의 작품들이 신변적·자전적 색채가 짙게 나타남과 아울러 대체로 일인칭으로 되어 있는 것이 공통된 특색이라 할 수 있는 반면, 두 번째 계열에(I-49) 이르러서는삼인칭 소설이 주류를 이루게 되며, 설사 일인칭인 경우에도 삼인칭 소설적 객관성이 짙게 나타나는 게 공통된 특색이다. 또한 시대 현실에 대한 객관적 관조자의 모습과 아울러 동정자 내지 비판자로서의 작가적 측면을 반영하고 있다.(I-50)   김인환, 「의 구조 해명」   실제로 작품을 읽어 나아가면서 前理解는 착오와 수정을 거쳐 적절한 "이해"로 변형되지만, 애초의 선입견 또는 직관은 언제나 객관적인 의미파악의 출발점으로서 제 몫을 적극적으로 담당하게 마련이다.(I-92)어떠한 해석이나 다 가능하다는 생각은 천박한 인상주의에 떨어지며, 오직 하나의 분석만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편협한 독단주의에 떨어진다. 분석과 평가라는 행위 자체가 객관적인 토론과 설득을 전제로 하고 있는 영역에 속하고 있으므로, 개인적이고 독특한 인상은 배제되지 않을 수 없다. 전이해는 이해로 가는 출발점이지, 이해 그 자체는 아니다. 동시에 학문의 본질은 개방적인 토론에 있으므로 연구의 세계에는 독단이 허용될 수 있는 자리가 없다.(I-94)언어분석의 단위가 어절·형태소·음운 등으로 세분되듯이 한 편의 소설에도 의미의 단위가 있다. 이러한 최소의 설화단위를 話素라 하는데, 설화의 원소들을 추출하여 그것들 상호간의 관계를 해석(I-94)하는 작업이 작품분석의 첫 단계가 된다.화소 가운데 설화의 골격을 이루기 때문에 도저히 삭제하거나 변형할 수 없는 한정화소가 먼저 검토되어야 한다.한정화소는 소설과 민담이 공유하는 화소이며, 작품의 기저가 되지만 근대소설의 구조는 그 기저에 다채롭게 침투하여, 자유롭게 의미의 확대와 변형을 마련하는 자유화소에 의존한다.(I-95)작품에 명백히 나타나 있는 문장을 무시하고 확대해서 해석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한정화소의 대립구조로만 본다면 밤과 낮의 이미지가 대립되어 있는데, 그것은 각각 본능과 의식을 대표한다. 본능의 시간인 밤과 의식의 시간인 낮의 대립은 둘째 단락을 통하여 미묘한 변형을 제시한다. 화소의 대립구조는 단순히 밤과 낮의 대립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밤과 낮의 통일로부터 밤과 낮의 분열로 진행되는 대립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단계구조 만으로써도 억압적 통일이 바로(I-96)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의식이 본능을 강제로 억압하면, 본능의 반란이 발생할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I-97)정신분석의 입장으로 볼 때 인간의 삶은 본능과 의식의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본능의 성질은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고, 쾌락과 놀이를 따르며, 억압의 부재를 원한다는데 있다. 그러나 삶을 이러한 본능에만 맡겨 놓으면, 삶 자체의 자기 보존이 위태롭게 되기 때문에 삶은 본능을 변형하는 것이다. 의식은 지연된 만족을 추구하여 만족을 유예시킬 줄 알며, 쾌락의 억제와 괴로운 노동을 능히 감당하며 안전을 원한다. 의식이 하는 중요한 일은 본능을 억압하는 것이다. 본능을 억압하여 자기를 안전하게 유지하는 구실이 의식의 임무이다. 이러한 설명을 요약하여, 본능은 쾌락 원칙을 따르고, 의식은 현실 원칙에 의존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은 쾌락 원칙과 현실 원칙의 양면성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I-104)의식은 본능의 억압이므로 인간의 문화는 결국 본능의 억압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의식이 본능을 억압하는 그 정도는 사회와 시대에 따라 서로 다르다. 이러한 억압의 과정 가운데에서 언제 어디서고 부득이하여, 결코 풀어 버릴 수 없는 면을 기본억압이라고 부르고, 특정한 시대와 특정한 사회에 국한되어 필연적이 아닌데도 여러 가지 이유로 첨가된 면을 과잉억압이라고 일컫는다.(I-104)삶이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듯이, 본능 자체에도 양면성이 하축되어 있다 본능은 화합본능(Eros)과 파괴본능(Thanatos)으로 형성되어 있다. 유기체의 원시상태로 퇴행하려는 충동이 화합본능이고 무기체의 상태로 퇴행하려는 충동이 파괴본능이다. 원래 화합본능과 파괴본능이라는 이 본능의 양면은 서로 도우며 작용하여 본능 자체를 강화하고 확대하는 직능을 하는 것이다. 사물과 타인에 대하여 존중하고 염려하고 이해하는(I-105)데에 화합본능의 일이 있고, 그러한 존중과 염려와 이해에 대하여 방해하는 세력을 부정하고 증오하고 깨뜨리는 일이 파괴본능의 임무이다. 삶의 가장 큰 목적은 화합본능과 파괴본능의 어울림에 있다. 그런데 그 어울림은 의식의 억압이 기본적인 선에 그쳐 있을 때에 가능하다. 삶의 모든 측면을 샅샅이 유용한 노동으로 전환시키려고 하는 과잉억압이 본능에 가해지면, 화합본능과 파괴본능 사이에 유지되던 균형이 무너진다. 이러한 위험성은 개인의 문제일 뿐 아니라 문화전체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I-105)과잉억압의 상태 아래서는 화합본능과 파괴본능의 어울림이 무너질 뿐 아니라, 화합본능이 축소되고. 파괴본능이 강화된다. 파괴본능은 원래 화합본능을 도와주는 구실을 하던 것이나, 본능의 그른 실현이 불가능하게 되면 파괴본능 자체가 본능을 대표하게 된다. 왜냐하면 본능이란 의식의 어떠한 억압 아래서도 완전히 마멸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애의 성욕에 비교되는 화합본능은 신체의 전부에 퍼져 있으면서 작용하는 것으로서, 화합본능이 잘 실현되는 전형적 상태는 예술감상에 황홀하게 도취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화합본능이 축소되고 파괴본능이 앞에 나오게 되면, 합리적인 쾌락은 대상을 잃고 사이비 쾌락으로 변질된다. 파괴본능의 실현인 증오와 부정은 어디까지나 화합본능의 존중과 염려와  이해를 돕는 것인데, 이것이 전도되어 증오와 부정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고 쾌락의 대상이 된다. 소위 "성기성욕"의 강화도 화합본능이 축소된 결과이다.(I-105)낭만주의가 없다면 현실주의도 있을 수 없다. 낭만주의와 현실주의의 상호작용에 파탄이 일어날 때, 현실주의는 억압의 원리로만 남아 있게 된다.(I-110)집단적 비판과 신분의 전도는 다름 아닌 "희극적" 장르의 기본속성이다. 희극적 문학작품은 대개 완강한 배금주의자나 초자아의 표상인 엄격주의자에 대한 비판을 중심 내용으로 삼는다. 희극적 장르는 모든 고정관념의 타파에 목적을 두고 있으므로 대체로 현학적인 지식인이나 경영간부층이나 딱딱한 이념론자들로부터 악감을 사게 된다. 희극적 장르에서는 신분의 구별이나 남녀의 차별 같은 것도 전도되어 나타난다. 심지어는 아버지가 겨울의 이미지로서 비판받고, 젊은 아들이 여름의 이미지로서 비판의 주체가 되는 경우도 있다. 쾌락원칙에 의존하여 현실원칙을 약화시키는 데에서 희극정신이 솟아나기 때문에, 그것은 현실의 억압으로부터 무의식을 보호하는 '꿈'처럼 유용한 노동의 세계로부터 즐거운 환상을 보존한다.(I-114)희극적 플롯은 우스꽝스러운 인물을 부정하는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구조와 부정된 인물을 용서 또는 화해로써 다시 감싸안는 구조로 나누어진다. 부정의 플롯을 따르는 작품은 풍자적 희극이 되고 부정의 부정이란 플롯을 따르는 작품은 해학적 희극이 된다. 작품 분석에 응용되기에는 지나치게 모호한 구분이기는 하지만, 조소와 공격의 색채가 비교적 강한 작품이 있고 용서와 동정과 화해의 색채가 비교적 짙은 작품이 있다. 완전한 화해란 우스개가 된 인물이 스스로 자신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삶의 약동"에 끼어 드는 플롯에서만 가능하겠지만, 연민과 동정 또한 풍자적 희극작품이라기보다는 해학적 희극작품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I-115)   李在銑, 「교차 전개의 반어적 구조」-<운수 좋은 날>의 구조   현진건의 단편 <운수 좋은 날>(1924)은 그 구조에 있어서 표제가 암시하는 행운과 서사적 사건 내용과의 상호 불일치 내지는 괴리 현상에서 비롯되는 교차 전개의 반어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는 작품이다. 즉 이를테면 행운의 반복적인 상승화와 불행의 한 절정이 같은 시간 속에서 상호 교차하는 점이 그것으로서, 분명히 반전의 반어적인 구조의 소설인 것이다.(I-116)반어란(Irony)란 흔히 말해서 두 개의 상호 모순되는 표리의 언술이나 태도의 동시적 표현, 또는 서로 다른 상황의 상호 병치에 의해서 결과적으로 표리의 상호 괴리 및 미리 예상했던 상황과는 정반대의 상황을 만들어내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 <운수 좋은 날>의 반어는 바로 이야기의 발단과 결말의 상호 관계가 기대와 현실과의 상호괴리 내지는 상충관계에서 연유된다. 그것은 행운과 불행의 반전 교차로서는 물론이지만 밀어닥칠 운명에 대한 이전의 무지 상태와 이후의 깨달음의 충돌관계의 구조에서 오는 것이다.(I-116)   김중하, 「현진건 문학에의 비판적 접근」   필자는 빙허의 사실주의가 심오한 비판정신에 입각한 것이라기보다는 현실 반영적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어느 정도 수용하는 자세로 문제 제기에만 그친 정도라고 말했고, 또 그의 사회에 대한 인식차원 역시 그리 철저한 바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Ⅱ-41)<빈처>는 <희생화>의 연장선 위에 놓여진 작품으로, 그 소재가 새로울 것도 없으며 더 뛰어난 비판정신이나 투철한 역사의식의 발현도 없다. 다면 그의 사실주의적 기법의 발전이 있을 따름이다. 이것은 사회 변동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긴 하지만 그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문제, 민족적 차원에서 파악해야 할 문제에까지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변동사회에 놓여 있는 현실의 '현상' 자체만을 객관화하거나 인식하는 것에 머물러 있어서 '실재'에까지 가 닿지 못하고 있는 빙허의 사실주의의 깊이를 드러내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달리 말하면 소재주의적 사실주의의 경향과 낭만적 기질이 한데 어울린 작품의 예라 볼 수 있다.(Ⅱ-46)1920년대의 한국 현실이 그(<술 권하는 사회>의 '남편'-인용자)의 독백처럼 조선 사람들에 의해 자유로운 상태로 조직되어 있지도 않았고, 일제의 배후 조종 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사회 부조리의 근원은 눈앞의 '현상'에서가 아니라 숨겨진 '실재'에 있었다. 그런데도 '남편'은 '현상' 자체에 대해 절망하고 있으며 울분을 터뜨린다. 또 '남편'은 그의 "유위유망한 머리"를 활용할 수 없고 그의 뜻을 펼 수 없기 때문에 술을 마신다고 했다. 이것은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없게 된데서 오는 좌절이다. 만일 그에게 충분한 "유위유망한 머리"를 활용할 수 있게 했다면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단 말이 되는데, 이것은 현실의 불합리성, 즉 일제치하의 현실을 긍정해 버리는 결과가 되지 않겠는가.공부를 하면 "유위유망"하다는 의식과 현실 속에서, 그것도 일제치하의 현실 속에서 출세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무너졌을 때의 절망은 다른 차원의 것이 아니라 동질의 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다.(Ⅱ-49)현실 속에서 출세해 보려는 야욕과 그것이 용납되지 않는 사회와의 갈등,(Ⅱ-49) 그것이 정당한 사회 속에서 빚어진 것이라면 이는 높이 살 수도 있는 것이지만 일제치하라는 특이한 상황 속에서, 당시대를 대변하는 인텔리의 의식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고, 또 이를 민족적·애국적 의식이라 할 수 없다. '남편'이나 '나'가 이런 모순스런 절망에 빠진 이유는 공부에 대한 기대감, 공부를 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으리란 지나친 기대감 때문에 '현상'은 보되 '실재'를 볼 수 없게 된데서 온 것이다.(Ⅱ-50)'남편'이나 '나', 'W군'은 뛰어난 민족의식을 가진 사람들도 아니며, 또 '현상'을 넘어 '실재'를 볼 수 있는 아웃사이더(outsider)도 아니다. 때문에 그들의 절망이나 비극을 합리화시킬 민족적 차원은 있지도 않다. 다만 그들의 비극이나 절망이 대사회적이란 점과 그들의 의식이 철저하지 못했다는 사실만은 인정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이들을 민족적 차원의 인물로 보거나 그 절망의 근거가 시대적 상황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작품외적 조건을 과대 적용하고 등장인물들의 의식세계를 구명해 보지 않은 편견에 의한 것이다.(Ⅱ-50)민며느리 제도라는 봉건적 잔재 때문에 당하기만 하는 어린 소녀의 인간적 저항이란 차원에서 다뤄질 것이며, '순이'의 육체적·성적 미숙에서 오는 불행으로 보아야 한다. 1920년대의 모든 사회적 불합리라고 해서 그 근거의 구명도 없이 모두 일제의 강권에 의한 것이요, 거기에 대한 저항도 민족주의적 차원으로 확대한다는 것은 지나친 편견이다.(Ⅱ-51)<운수 좋은 날>의 비극적 상황도 그러하다. '김첨지'의 비극이 가난에 연유한 것이고 그 가난이 일제의 강압에 의한 것이란, '실재'의 파악이 투철하였다면 적어도 작품 속의 작은 장치에라도 그 의식이 반영되어 있어야 옳았을 것이다. 인력거를 타는 사람의 전부가 조선사람이었다는 점은 '실재'에 대한 의식보다 '현상'에 머물러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운수 좋은 날>은 가난한 인력거꾼 '김첨지'의 비극적 하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사실주의의 높은 경지는 인정할 수 있지만, 민족주의적 의식에 투철한 저항성이 돋보인다고는 할 수 없다.(Ⅱ-51)<불>, <운수 좋은 날>에서 보여 준 빙허의 작가 의식은 한 인간에게 기울어진 동정적 시선 또는 민족의 일원에게 던지는 인간애에 불과한 것이다.(Ⅱ-51)   李注衡, 「현진건 문학의 연구사적 비판」   논문의 기본은 독창성과 논거의 명증성이다.(Ⅱ-67)현진건 자신이 "로만티즘도 좋다. 리얼리즘도 좋다. 상징주의도 나쁜 것이 아니요, 표현주의도 버릴 것이 아니다. 오직 조선혼과 현대정신의 파악! 이것이야말로 다른 아무의 것도 아닌 우리 문학의 생명이요 특색일 것이다"(현진건, 「조선혼과 현대정신의 파악」, 『개벽』, 65호, p. 34-인용자 재인용)라고 한 말 속에서 우리는 그가 외국 사조 대입적 규정을 거부하고 자(Ⅱ-73)신의 독자성을 문제삼아 줄 것을 요구하고 있음을 읽게 된다. 여기서 이즘은 수단이요, 목적과 근본이 문제임을 현진건은 말하고 있기도 하다.(Ⅱ-74)"기법이 뛰어난 작가"라는 말이 오랫동안 현진건 문학의 규정을 대표하여 왔고, 또 그 말의 증명과정은 너무나 단순하여, 그것이 차라리 현진건을 손해보게 한다. 앞서 말한 김동인의 글이나 그와 유사한 글을 따를 때 현진건은 더 이상 문제삼을 가치가 없는 작가가 된다. 기법론은 작가의 세계인식의 태도, 작품의 내용 등과 연결되었을 때 깊이를 획득한다. 한 문제의 추구는 정면공략(추구)법으로도 가능하고 우회법으로도 가능하다. 현진건은 정공법을 주로 하여, 채만식이나 김유정은 반어와 풍자를 동원하여 우회하는 방법을 주로하여 식민지시대의 문제들을 들추며 따져 나갔다. 현진건은 항상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아이러니를 쓰면서도 채만식이나 김유정과 현진건은 다르다. 그들의 환경과 세계인식의 태도는 동질성과 이질성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Ⅱ-74)현진건의 작품 내용은 크게 애정문제, 자전적 사실, 사회·역사인식 등을 담고 있다는 것으로 정리되고있지만, 그 중에서도 논란의 중심이 되는 것은 사회·역사인식의 문제이다. 이 문제에서 현진건에 대한 긍정론과 부정론이 대립되고 있다. 두드러진 긍정론자는 김우종, 신동욱, 이재선, 조동일, 임형택 등이고 부정론자로는 김동인, 백철, 정한숙, 김윤식, 김현, 김중하 등이 두드러진다. 정한숙이 제기한 양면의식-애정문제와 관련된 정서적 감각과 사회문제와 관련된 현실감각-의 부조화 여부문제는, 20년대 작가들에서 전반적으로 낭만적 성향과 현실의식의 양면이 나타나고 있는 만큼, 현진건에게만 국한되지 않는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여 깊이 따져져야 할 것 같다.(Ⅱ-75)현진건은 현상을 부정적으로 보려한 작가라고 보아야 할 것이며, 발전적 논의를 위하여 부정의 방법과 대상 등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현진건 소설의 어떤 점이 "현진건은 식민지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표현하지 못했고", "사회를 움직이는 기본 힘을 발견하지 못했다"(김윤식·김현, 『한국문학사』, 민음사 1973, p. 165-인용자 재인용)고 볼 수 있게 하는가 하는 것도 재론될만한 중요한 문제거리가 될 수 있다.(Ⅱ-76) 현진건론에서 세울 수 있는 줄거리의 하나로 작중인물이나 작가 자신의 방황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 초기 작품에서 나타난 지식인의 방황이 작가의 현실인식의 태도와 관련하여 어떻게 전개·변모되고 극복되는가를 따져 보는 것이다.(Ⅱ-77)   최원식, 「현진건 문학의 사회적 가치」   우리 나라에서 한 때 높이 존경받았던 "문학을 위한 문학"이란 바로(Ⅱ-79) 서구 시민문학의 자기해체의 징후에 다름아니라는 점이 오늘날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인정되는 바이다. 현실을 속물적 세계로 일괄 규정하고 예술적 조탁에 각고를 거듭하며 예술의 성직자로 자처했던 이 유파의 예술가들의 태도는, 결국 그들이 그리고자 하는 객관적 세계를 통일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말미암은 것이다. 이 유파를 대표하는 플로베르와 모파상의 소설을 일관하는 병적 차거움과 철저한 절망적인 분위기는 이것과 연관된다.(Ⅱ-80)한때 우리 문학의 황금시기로 과장되었던 1930년대의 순수문학도 서구의 유미주의와 그 처지는 다르지만 현실에 대한 무력감의 표현이란 점에서 일치한다. 1930년 순수문학이 1920년대 문학이 획득한 사회의식을 포기하면서 얻어진 것이라는 어느 비평가의 분석은 이런 뜻에서 타당하다. 우리는 1930년대 문학이 모두 사회의식을 포기했다고 몰아붙여서도 안되고 순수문학이 거둔 예술성을 과소평가할 수도 없지만, 문제는 30년대 문학이 거둔 예술성이 1920년대에 고조되었던 민족적 열정의 퇴색과 1930년대의 식민지적 억압의 강화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Ⅱ-80)이처럼 소설의 예술성은 사회성을 배제할 때 독자들을 감동시키는 진정한 힘을 잃고 기계적인 수법으로 전락하기 쉽다. 그것은 소설이란 장르가 현실 속에서 생동하는 인간적 삶을 문제삼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소설에 있어서 사회성이란 소설가가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근원적인 것이다.(Ⅱ-80)어느 서구 비평가가 주장하듯이 셰익스피어가 자기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문학이 위대해졌다는 것도 우스꽝스럽지만, 사회성의 핵심을 이루는 작가의 세계관이 심오하거나 확고하다고 해서 그의 문학의 탁월성이 그대로 보장된다고 주장하는 것에도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소설가의 치열한 작가정신에 의해 파악된 사회성은 일단 예술적 형상화에 의해 구체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술성은 사회성을 실천하는 작업이며, 이 작업을 통해 사회성은 수정되고 다시 심화되는 것이다. 사회성은 예술성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으며, 그것은 탁월한 예술성에 의해서 온전한 모습을 얻는다는 점을 인식해야 하겠다.(Ⅱ-81)자전적 형식은 사회 속에서의 자기의 위치를 조정하려는 內省의 양식이다. 그런데 <빈처>나 <술 권하는 사회>(1921)와 같은 작품에서 보듯이 작가는 여기에서, 때로는 부정하고 때로는 긍정하면서 어느 곳에도 뿌리 내릴 수 없는 젊은 지식인의 절망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Ⅱ-84)현진건의 자전적 소설을 일관하는 갈등은 결국 개인과 사회라는 추상적 도식이다. 그에게 있어 개인과 사회는 속물적 세계에 의해 파괴되는 개인, 이와 같이 세계사적 모순의 현장인 식민지 사회라는 특수성이 외면되고 사회가 상투형으로 제시될 때 개인은 절망과 도피 이외의 다른 길이 있을 수 없다. 그리하여 그의 초기 자전 소설은 한 자유주의 지식인의 실패의 기록으로 되는 것이다.(Ⅱ-85)현진건은 1926년에 <<朝鮮의 얼굴>>이란 단편집을 간행하였다. 이 단편집의 제목은 자전소설을 벗어난 이후 그의 작업의 향방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제2기의 단편들에서 그는 식민지의 현실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진실하게 형상화한다.(Ⅱ-85)   조연현, 「현진건 문학의 특성과 문학사적 위치」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진건은 그러한 단명에도 불구하고 김동인과 함께 한국의 근대단편소설의 기초를 세운 선구자이며, 염상섭과 함께 한국의 근대사실주의문학의 기초를 확립한 선구자의 일인이라는 점이다. 한국근대 단편소설의 개척자로서의 그의 공적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염상섭의 자연주의적인 출발과는 달리 최초의 습작을 제외한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사실주의로 일관되었다는 점이다. 현진건의 사실주의는 제3자에 대한 제3자적인 관찰이라는 사실주의의 일반적인 자세나 태도에서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응시와 관찰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Ⅱ-95)현진건에게는 자연주의의 전형적인 방법인 실험주의적인 해부적·실증적 요소는 오히려 미약했던 것이며, 현실주의적인 객관적 묘사력만이 그의 세련된 기교력과 함께 뚜렷한 작가였다. 같은 자연주의적인 계열의 작가라고 볼 수도 있었던 김동인이나 염상섭(초기의 경향)과 비교해 보면, 이 두 사람은 현실폭로의 암흑면에 대한 분석적인 추구가 강한데 비하여, 현진건은 그에 대한 냉정한 관조가 강하며, 전자의 두 사람이 의지와 정열로써 작품을 구성해 나갔다면, 후자가 기교로써 이를 요리해 나간 것도, 전자에게는 자연주의적인 방법에 대한 적극성이 강했고, 후자에게는 순수한 리얼리즘 정신이 강했던 까닭에서이다.(Ⅱ-97)   林熺燮, 「현진건 문학의 사회학적 배경」   1920년대의 한국 식민지 사회는 3·1운동 이후 일제가 문화활동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자유를 주는 척하면서 그들의 식민정책을 합법적으로 추진하려고 한 소위 「僞裝文化政策」의 시기에 처해 있었다.(Ⅱ-99)일제말기에 갈수록 지식인들은 서정·풍자·냉소·증언·비유·협력 등의 여러 가지 형태의 반응과 적응 양식을 보여주었는데, 어느 형태든 그것이 식민지 상황의 지식인들의 고뇌를 담고 있지 않은 것은 없었다.(Ⅱ-105)현진건의 소설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들이 식민지상황의 지식인의 고뇌,(Ⅱ-105) 빈곤 그리고 구제도에 의해 희생되는 젊은이들의 청순한 사랑 등으로 요약되어질 수 있는 것도 1920년대의 사회적 배경을 반영하는 것이다.(Ⅱ-106)   (「墮落者」게재를 끝낸 뒤에) 끗을맷고보니 처음생각한바의半도 쓰지못하엿다. 그리고 人生의醜惡 一面을 忌憚업시 暴露식히랴든것의幾分間成功도疑問이다. 그것은 作者의無才無能한탓이리라. 有形으로無形으로 이幼穉한붓끗이나마 맘대로 못놀리게하는周圍의까닭도까닭이리라. 그런데 엇던讀者로부터 이醜惡한方面을그린點에잇서 만흔非難을들은 것은 作者로甘受하는同時에, 또 一種의 자랑을늣기는바이다.(作者)어떤날 開闢社編輯局에 한匿名書狀이 들어왓다....(Ⅲ-73)그 書狀의內容으로써는 다른것이아니라 우리開闢에 連載해온 憑虛生의小說「墮落者」가作者의 誤入한 廣告라는것과 또編輯局責任者의無責任하다는말로 꾸지젓다 그리고 또文藝部責任者나 作者의辨明까지 要求하엿다. ...어떠한 一部讀者中에는 小說을볼 때 곳그小說의內容이 作者自己의自敍傳이나 傳記가티생각하는이가잇스나 그것은 決코그러치아니할뿐아니라 그가티 誤解하여서는 매우잘못된일이다. 우리人間社會에 잇는醜美를勿論하고 現狀그대로 描寫하는 것이 어떠한 主義의文學이라고도 할 수가잇다. 그러면 그잇는그대로描出하여 讀者의鑑賞을바라는 것이 文藝에업는일이아니다. 文藝의作品이修身敎科書가아니고 倫理說明이아닌以上에는 우리社會에 잇는그대로描寫하는것도 과히 妄發이아닌줄안다. 그리고더구나우리開闢은 兒童雜誌나 幼年雜誌가아니고 그래도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高級의 讀者와常識잇는讀者들이니까 이러한小說이반 듯이 社會를 毒한다할수는업는 것이다. 文藝의作品으로써는 어떠한나라를 勿論하고 倫理主義, 人道主義, 自然主義, 惡魔主義......其他枚擧키어려울만치여러가지가 잇는 것이다. 그리고世界的文豪의作品으로보더래도 獨逸의詩聖께테의 『젊은벗들의 설음』이 그當時에自殺者를 助長한다는큰非難을바든것과 露國의 쿠푸링의作인 『魔窟』이 賣淫을描寫하고 作者가 스스로 가로되 이作品을 世人이 破廉恥의作品이라고하겟지만은 나는이것을 만흔女子를둔人士에게 一讀을勸한다는말과 英國의 오스카 와일드의 『사로매』가튼作品이 며 더구나 佛國의 못파아산의作品全部가 이 『墮落』以上의 深曲한描寫라고할수가잇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어떠한 文藝國에 가지고가더래도 非文藝品이라고한소리를듯지못하엿고 어떠한사라이라도 이런 것을 傑作이 아니라는 理由를發見치못하엿다. 나는 다맛憑虛生의이作品이 더욱그 深曲味와 回轉節이未熟한것만 遺憾으로아는 同時에이만한作品이라도 우리文壇에잇는것만반가이녀겨 揭載하기에는조금도 躊躇하지안이하엿다. 우리讀者諸位는 開闢이篇이 文藝篇으로만알고 倫理講演-人造道德篇-이나 說敎篇으로나 알아주지아니하엿으며 그우에더알것이업다. 께테의말이아니나 『遊泳을몰으는者가 물에빠저죽고 물을怨望하는것과갓다』는그者되지말기를 바란다. 나는開闢學藝部責任者로써 이러한質問이있는以上에적어도어떠한 見地下에서 이作品을揭載하엿다는 責任上말로 두어字적는것이다. 만일 우리讀者中 그뜻에거슬리는이가잇거든 만히容恕하여주기바란다.......玄哲......(이상「개벽 22호, 1922. 4월호 소재)(Ⅲ-74)
22    윤홍로, 『한국근대소설연구』, 일조각 1980 댓글:  조회:2700  추천:0  2009-05-16
-20년대 리얼리즘 소설의 형성을 중심으로   일제의 문화정책의 저의가 어디에 있었건, 1920년대의 한국 사회는 3·1운동의 지속적인 영향 아래에 있었던 만큼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의 일반적 성격이 3·1운동 및 이에 따른 사회운동·문화운동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3·1운동 후 국내의 민족개혁운동은 주로 반일제·반봉건 투쟁을 지상과제로 하는 문화운동의 양상을 띠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우리가 굳이 획기적인 연대로 구분하고자 하는 소이도 여기에 있다.(2)1920년대의 소설에 대하여 관심이 집중되고 연구가 다양하게 전개되는 것은, 이들 소설이 현대소설사의 출발이 된다는 것 이외에도 소설의 양상 자체의 빠른 변화와 아울러 이들 소설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여러 측면과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3)문예사조의 수용·영향 연구에서는 각 민족마다의 역사적·사회적 특수성을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그 작품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것(3)이 시대의 소설 전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평가를 위해서는 개별적 작가론·작품론·사조론 등에 대한 방법론적인 세밀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또 하나의 문제는 각 작품과 전체적인 시대정신과의 관련성을 찾는 작업인 것이다. 즉 개별 작품의 의미, 작가 의식의 특질, 사조의 수용 등은 시대정신의 총체적 연계성 속에서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대의 작가들과 개별 작품들이 이러한 총체성과 관련하여 궁극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하는 문제를 논구해야 할 것이다.(3)통합적 해석론에 의하면, 문학연구는 어디까지나 정신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므로 자연과학적 방법론과는 구분되어져야 하며, 그러한 근거 위에서 인간의 내면적 정신의 흐름이나 역사적 지속성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은 한편으로는 종래의 심리적·사회적·형태적인 방법론들 중 어느 한 측면만의 작품 접근 태도를 지양하고 총체성과 문학의 자율성을 동시에 인정하려 한 것이다. 정신사의 맥락에서 예술 작품을 이해하는 데는 외형적인 문화와 내면적인 정신의 복합성과 함께 그 관계양상의 작용·반작용을 유기적으로 연관시켜 고찰해야 하며, 그 지속성을 주시해야 한다. 통합의 해석론은 종래의 제방법론에 대한 절충을 시도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며, 작품과 작품 이해의 방법론을 변증법적 원리로써 파악하여 문학현상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방법이다.(4)그러므로 통합의 해석론의 기조가 되는 것은 역사주의 관점과 정신사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주의자들의 작품해석 태도는 역사의 변증법적 양상을 주시하면서, 시대의 기층구조와 개인과를 상호 유기적으로 관련시켜 작품의 위치와 작가의 지향이 무엇인가를 측정하려고 하는 것이다.(4)통합적 해석론에서는 '적합한 순간' '적합한 대상'에 대한 '적합한 방법론'의 적용이라는 과제가 중시된다. 또한 작품을 이해한다는 것은 현재의 위치에서 역사적 視界로 옮겨 작품세계와 자아의 세계를 동시적으로 인식하는(4)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통합적 해석론에서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한 작품을 이해하는 데 미시적 분석과 거시적 통합을 어떻게 일원화하고 균형·조화를 이루도록 하는가 라는 점이다.(5)통합해석론의 필요성은 사실상 예술작품 자체의 본질성에 의해서 제기된 것이다. 예술작품이 유기적 구조성을 띤다는 것은 다양성에서 동질성을 찾아 중심적인 의미로 융합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는 부분과 전체를 동시적으로 파악하면서, 동일체로 융합시키는 통합기능의 구실을 하는 매체를 중시하게 된다. 이러한 통합적 기능을 수행하는 요소는 그것이 작중 인물이든, 작품자체이든, 장르 혹은 유형이든, 예술사조이든 간에 작가의 주관과 객관 세계, 부분과 전체, 특수와 보편, 당위와 존재 등으로 분화된 양극적인 세계를 균형·조화를 이룩하게 하는데 기여한다. 뿐만 아니라 언어 그 자체도 의식과 객관물 사이에 위치한다는 의미에서 통합기능의 구실을 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언어나 문학의 통합적인 기능을 인정할 수 있다면, 그것을 더 확대하여 문학사·문학비평·문학이론 상호간에 존재하는 발전계기로서의 매체로도 원용할 수 있으며, 또한 장르간(이른바 '토도로프'의 '이론적 장르'와 역사적 장르 등) 혹은 문예사조(가령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혹은 사실주의와 자연주의간 등) 등의 전이를 연속성으로 파악하는 데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5)역사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1920년대 소설이 리얼리즘의 방향으로 발전된 것은 저널리즘의 영향 혹은 근대소설의 양식 자체가 리얼리즘과 밀접되었다는 점 이외에, 우리의 문학전통과의 연계에서도 그 요인을 찾아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실학사상·동학사상에 연원한 당대의 현실과 가치관에 대한 관심은 외래적 리얼리즘을 수용함에 있어서 그 잠재력으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7)문학적 전달은 사실의 교환이라기보다는 체험의 교환이라는 점에서 볼 때 인간적 관점의 동일성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이러한 동일성(10)을 이해하는 선결조건은 나타난 문화현상과 내재적인 정신의 복합성과 함께 그 작용·반작용을 유기적으로 관련시켜 고찰하는 것이며, 문학사적 사실의 시공간적 관계 설정 역시 정신사적 지속 현상을 주시하면서 진행하여야 된다는 것이다.(12)예술작품은 원래 그 구성 부분의 분리란 있을 수 없고, 모든 형식은 상호 연관되어 있으며 작품의 구심점을 향해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문학작품 역시 고정된 양식으로 경직된 일면성만을 강조할 수는 없으며 다양한 소재가 상상력과 정서의 작용으로 통일된 조화가 이루어질 때 성공될 수 있는 것이다. 문학의 내포적 요소와 외연적 요소가 유기적으로 통합되었을 때 작품의 가치는 있게 된다.(16)1920년대 작가는 그 사회적 신분이나 연령상으로 보아 대체로 20대의 신교육을 받은 지식인층에 속한다.(21)이 시대 지식인·작가들의 고민은 직접적인 정치운동이 규제되자 작품을 통해 이 시대의 비극을 증언하려는 데 있었다.(21)이 시대에는 일제의 계획적인 식민경제정책으로 경제적 수탈을 당하여 한국의 자원은 날로 피폐해 가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대의 사회적 분위기는 혼란의 와중에서 이기적·퇴폐적 성향과 자폭적(방화·살인·자살 등) 경향마저 드러내게 되었다.(28)3·1운동 이후 우리 문학사는 소설, 특히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그것은 리얼리즘을 지향해 왔다. 전대소설과 대비한 1920년대 소설의 현저한 특색은 당대의 사회적 진실을 객관적으로 표현하려는 더 있었다. 1920년대의 소설이 리얼리즘을 지향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조건을 들 수 있다.첫째는, 이 시대의 신교육을 받은 작가들이 현실을 직시하면서 식민지 체제하의 구제도와 낡은 관념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민족의 내적 의지를 가지고, 선진 시민사회의 역사 경험과 거기서 고양된 문학예술을 배우기 위해 서구의 근대 시민문학을 적극적으로 섭취하려는 데 있었다.둘째로, 3·1운동을 분계선으로 하여 전환된 문화운동과 아울러 저널리즘(36)의 확대·보급으로 독자층이 증대되었고 전문적 記事作成者가 많이 배출되었다는 점이다.셋째는, 이조 초기부터 지속적으로 계승되어 내려온 현실주의(후에 실학사상, 동학, 천도교사상과 맥락을 가짐)와 그 잠재력 등을 들 수 있다.첫째 경우로 3·1운동 후 신문화운동의 결과 서구사조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편모는 이 시대에 애독된 외국작품들을 보면 窺知하게 된다. 이 시대 지식인 작가들은 대체로 톨스토이·푸시킨·투르게네프·바이런·와일드·화이트맨·포우·위고·모파상·플로베르·졸라·베를레느·보들레르 등을 애독했으며 그 중에서도 혁명전야 러시아 작가들의 것이 많이 읽혀졌다. 그것은 제정러시아의 전제정치 아래서 신음하던 민중들의 참담한 상태가 일제 밑에서 고통을 받던 한국 사람의 불행한 생활과 유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南歐의 華麗純爛한 문학이 이 시대의 문학에 영향을 준 것도 사실이다. 말하자면 당대의 문학은 북구문학에서 그 사상성을, 남구문학에서 세련된 기술과 예술적 미학을 수용하면서 일본의 신세대를 대표하는 명치·대정문단의 일면적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당대에 일본 신세대 문학작품이란 세계사조를 중개하는 창구 구실밖에 못하였다.(박영희, 「현대한국문학사(2)」, 『사상계』, 제58호, 1958, 5.-인용자 재인용)(37)대체로 외국의 문예사조가 자국의 문학으로 수용되는 과정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자국에서 과거로부터 예술작품을 구현시켰던 내재적 가능성을 선행하여 검토하면서 시작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민족의 역사의식은 불가피하게 외래적인 요소를 굴절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우리의 현실적 의미는 언제나 과거의 잠재적 잔상이 현재의 지각과 결부되면서 형성되는 것이다. 또한 현실적 의미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부단히 우리의 潛在像으로 누적되어 가는 것이며,  그것은 새로운 사실과 결부되면서 다른 의미의 현실적 존재로 부상되는 것이다.(37)소설의 시간이란 어떤 의미에서 초월적인 反時間性을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맥에서 리얼리즘 소설의 개념을 요약한다면 개개 인간들의 가치를 중심으로 하나의 전체적 생활양식의 가치를 창조하고 판단하는 종류의 소설이라 하겠다. 따라서 리얼리즘은 민족과 시대마다 새로운 리얼리티를 창조하면서 변용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리얼리즘의 기본개념을 常數로 한다면 민족과 상황에 따른 상이한 리얼리즘을 변수로 놓을 수 있다.(38)반영론과 목적론 사이의 논리적 갈등은 리얼리즘(38)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39)리얼리티는 상상력과 정서와 사상을 가진 작가정신이 시대상과 결부되어 하나의 모형을 창조하는데서 실현된다. 따라서 사실주의를 검증하는데 리얼리티 검증이나 유형해석은 단순히 주위 환경의 복사물의 반영이라는 의미를 거부한다. 우리는 쉽게 그림과 카메라의 비유를 들 수도 있다. 그림이란 카메라의 복사성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라 하겠다.(39)보편적으로 사실주의란 심리적인 면보다는 외부사실에 중점을 더 두고, 이 사실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려는 태도를 견지한다. 짧게 정의하면 사실주의란 철학에서는 이상주의와 대치되는 개념이다. 예술에서는 사실주의란 낭만주의와 대치되는 개념이다. 사실주의자 발자크에 대해 낭만주의자 조르즈 상드가 자기와의 관점의 차이를 다음처럼 규정한 것은 상당히 예리하다. "당신은 당신의 시선에 비치는 그러한 모습을 그리지만, 나는 그 사람을 내가 그렇게 보았으면 하는 그러한 모습의 그를 묘사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40)사실주의 다른 변종 가운데 하나인 자연주의는 모든 인생이나 사실 전반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주로 사실적이고 평범한 현상, 인간을 동물과 같게 하는 그런 면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결과가 되었다. 문학에 있어서의 자연주의는 과학에 있어서의 자연주의와 유사해지려고 한다. 자연과학자와 마찬가지로 자연주의 문학자는 예술과 학문을 동일시하며 문학과 자연과학을 동일시하려고 노력한다. 자연주의의 이론이란 자연과학의 성과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즉 자연주의 이론이란 진화의 법칙에 의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자연주의의 한 측면은 기계적이며 원칙적인 종속의 사상을 낳았다. 자연주의는 주인공의 자유를 박탈하고 주인공은 환경에 노예화된다.자연주의 작가는 사실을 대할 때, 어떠한 감정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자연주의자들은 자신을 실험가로 비유한다. 따라서 연민과 분노를 느끼지 않는 자연주의자들은 선과 악을 똑같이 대한다. 우리는 졸라의 글에서 자연주의가 조야한 물질주의와 냉소주의로 변하기가 쉬우며 그 건강한 사실주의가 퇴화해 간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중요한 것은 자연주의 작가들이 가지고 있는 그 자신들의 세계가 중요한 것이므로 철저한 자연주의 이론 자체만을 강조할 수 없는 것이다. 이들 서구의 작가들 역시 그들 작품이 이론보다 뛰어났으며 무미건조한 설명이나 철저한 실험·관찰의 보고서가 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실증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다. 문학의 문제에 관한 한 정신사로서의 예술성을 인정하는 이상 철저한 자연주의란 불가능한 것이다. 다만 자연주의는 관찰과 실험적 방법론을 원용하여 소설의 리얼리티를 탐구하는데 공헌했다는 점은 인정된다.(41)인간의 二大 욕망이라고 할 수 있는 자기보존욕인 식욕과 자기유지욕인 성욕은 인간을 이해할 수 없는 부단한 공허 속으로 몰아낸다. 그러므로, 자연주의소설이 추적하는 것은 사실에 대한 세부묘사의 증대(세부묘사와 예리한 관찰) 이외에 원초적 힘(본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대체라 문학에서의 자연주의적 미학은 태내에서 무덤까지 더욱 날카로운 성적 본능의 비전을 인간에게 요구하였다.(44)자연주의나 사실주의에서 묘사방법의 숙련과정은 사실적인 현장으로 접근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연주의 문학은 성욕과 식욕 등 본능을 탐구의 대상으로 하였을 때나 그런 요소가 결핍되었을 때의 현장을 특별하고 구체적인 감각과 인식의 넓은 조명 가운데서 묘사하는 것이다. 위에서 밝힌 실험소설이라는 용어는 가끔 오해될 가능성이 있다. 자연주의 작가의 소설은 대체로 아주 직선적이며 우직하고 그 화법이 모두 19세기의 인습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실험성이란 말은 바로 인간을 사물과 同列에 놓고, 인간을 과학 실험관 속에서 조종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실험성은 주관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내용을 강조하면서 형식과 스타일을 무시하게 된다. 자연주의자들은 진실이 목적이었지 예술이 목적(원문은 윗점임)은 아니었다. 따라서 자연주의 소설은 어떤 의미에서 '인생의 단면'만을 제공하기 때문에 구조적인 예술만을 의도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자연주의자들은 소설의 무정형을 택했으며 아주 융통성 있는 문학 장르를 택했다. 이러한 자연주의자들의 관점은 인간존재의 진화과정을 추적하려는 욕망과 환경과 상황의 영향을 통해 형성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45)낭만주의에 의한 인간의 이상화와는 대조적으로 자연주의자들은 인간을 벌거벗기면서 동물 수준으로 평가절하시켰다. '形而上學的 人間'은 '물리적 인간'으로 졸라에 의해 대체되었다. 자연주의자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을 인간이하로 평가절하 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진화의 과정을 명백히(원문은 윗점임) 묘사하는 듯이 보이기도 하였다. 특히 어떤 위기, 가령 스트레스라거나 격렬한 섹스의 역설, 혹은 알콜의 영향 아래 인간을 그 내부에 가진 원시적인 야수성에 눈을 돌리게 하였다.(45)자연주의자들은 원시성의 심리적·신화적 유형(원문은 윗점임)을 발굴해서 새로운 진리를 얻는 동시에 유동적인 시공간성에서 영원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들은 사회 속의 다양한 인물 묘사로부터 한두 사람에 집중하여 그들 내면의 비전에 관심을 기울이는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그런 경우 자연주의는 인간 내면에 숨겨 있는 육욕 등을 추적키 위해 특수한 환경의 장치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46)자연주의는 어떤 의미에서 비극보다 환경사의 제시에 기울어져 있다.(46)자연주의자들은 결국 리얼리즘을 정교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그 근본성향을 강화시킨 셈이다. 자연주의는 리얼리즘이 아직 갈 수 없었던 새로운 지적 지평선을 확대시키면서 원초적 본능을 탐험하였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자연주의는 리얼리즘보다 구체적이긴 하지만, 보다 제한적이다.(47)리얼리즘은 이러한 낭만주의의 뿌리와 자연주의의 가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통합적이고 변증법적인 내적 연관성 위에서 이해해야 한다. 통상적으로 리얼리즘이 스스로의 모순을 드러낸 것은 인생을 묘사하는 반영적인 것이기보다는 지도적 인생, 즉 고착된 사실성에만 집착되었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리얼리스트들은 모든 사실을 주의 깊게 통찰하고 새로운 인간의 윤리의식에 의미를 두어야 함을 깨닫는다.(48)리얼리즘은 어디까지나 작가의 상상력이 추상적인 예술형식들과 같이 무절제한 관념적 유희에 빠져들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자기환상 속으로 비약하는 것을 지양하고, 혹은 현실의 일면적 피상적 묘사에 의해 트리비얼리즘으로 떨어지는 것을 단호히 배격한다. 말하자면 동시대의 사회적 진실을 객관적으로 표현한다는 리얼리즘의 강령은 인생에 대한 총체적 통합정신이라는 맥락을 지니는 것이다..(49)체험과 표현의 정확한 재생력은 이중적 과제가 되어 작가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시련이지만 어느 쪽도 경시할 수 없는 것이다.(49)작가들이 어느 정도 주변 현실을 직시했는가를 검증하는 것은 바로 그 시대 소설의 리얼리티를 검토하는 작업이기도 하다.(50)리얼리즘 소설은 특정한 내용의 특정한 형태이다. 따라서 존재 그 자체의 문제 해명은 인간의 특수한 개성과 분리되어질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은 개인의 고독감과도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사람이 놓여질 수 있는 특수상황이란 인격이나 사람이 사는 환경에 종속되는 것이다. 가령 근대소설의 귀감이 될 수 있는 톨스토이의 고독은 보편적인 인간조건에서가 아니라 특수한 사회적 숙명 앞에서 형성된 것이다. 특수한 사회적 숙명 앞에 놓인 개인의 고독이 근대의 이론과 실천의 특성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하이데거가 서술한 이른바 '던져진 곳의 存在' geworfenheit in dasein 라는 의미로 더욱 생생히 일깨워질 것이다. 인간이 특정한 상황 속에 존재하는 동안 거기에서 환기되는 특수한 양식·긴장·암시 등의 여러 가지 가능성은 물론 개인의 특징이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51) 리얼리즘은 사람의 실제 생활을 潛在力 potentiality으로서 파악하게 되는 셈이다. 따라서 링러리즘 소설은 인식론적 본질과 외적세계의 치밀한 관찰이 통합될 때 그 속성이 드러난다. 리얼리즘 소설은 동시대의 특정사회 속에서 사람의 진실을 발견하려 하는 것이다.(52)우선 1920년대 초반 한국 작가들이 모색한 자연주의는 실험정신에 얼마나 투철했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해야만 한다.(56)어떤 면으로는 리얼리즘의 소설은 그것이 어떠한 인간의 삶을 그렸느냐 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중심을 둔다. 그것은 아무리 시대나 민족마다에 차이성을 인정하더라도, 그 목표와 방법의 면에서 소설에서의 리얼리즘의 공통점을 찾아야 한다.(58)철학에서의 인식론적 문제와 관련하여 보면 근대소설과 리얼리즘은 공통된 측면을 갖고 있다. 이 양자는 근대철학을 배경으로 하여 출발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근대란 고정관념화된 보편적 지식에 대한 거부태도를 가지고 과거의 유산과 결별하면서 자유롭게 진리에 도달하려는 데서 시작된 것이다.(58) 3. 현진건시간과 장소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존재치 못하는 것이다. ......로만티즘도 좋다. 리알리즘도 좋다. 상징주의도 나쁜 것이 아니요, 표현주의도 버릴 것 아니다. 오직 조선혼과 현대정신의 파악! 이것이야말로 다른 아모의 것도 아닌 우리 문학의 생명이요 특색일 것이다.(빙허, 「朝鮮魂과 現代精神의 把握」, 『開闢』, 65호, 1926, 134쪽-인용자 재인용)(125)흔히 빙허의 문학관과 소설양식은 민족주의 차원에 바탕을 둔 리얼리즘 기법의 성숙이라고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구체적인 면에서 보면 빙허는 동시대의 문화적 맥락 속에서 그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춘원·동인·상섭 역시 빙허가 밝힌 위의 진술과 유사했다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빙허의 문학관이 동시대 사회적 진실을 실감 있고 객관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면, 전형적인 리얼리즘 정신과 기법에 접근된 것이다. 더욱 그의 문학적 리얼리티가 시대정신과 연결시킨 것이라면, 소설의 진실을 추적하는 전체적 연대성으로의 통합관과 더욱 가깝다. 빙허가 지·정·의의 종합적 미의 형성을 소설 미학으로 평가한 것은 우리 소설사에서 소설의 수준을 한 계단 올린 것이다.(125)문학의 연구가 거시적 視界를 통하여 총체적으로 파악될 때, 그리고 작품의 다양성과 통일된 조화(원문은 윗점임)성이 검증되었을 때 문학의 본질은 해명된다. 예술적 표현은 곧 새로운 지각과 낡은 체험(殘想)의 결합 과정에서 형성된다. 즉 체험의 잡다한 요소들이 용해되고 재결합되고 조직화되는 창조과정에서 사상은 그 본체의 형체를 잃고 새로운 예술적 형상의 근간으로 되나 문학을 독창적으로 만드는 것은 주로 정서적 기능인 것이다.(126)빙허의 評眼을 이러한 통합적 해석론의 관점으로 소박한 대로 받아들인다면 춘원의 계몽문학경향, 동인의 반춘원적 예술지상주의로의 경향 혹은 경향문학의 목적문학 편향을 그가 어떻게 극복하고 동시대이 진실을 소설에서 발전시켰는가를 고찰해야 할 것이다.(126)빙허가 20년대 '조선역사'를 말하는 증인의 대표자요, 당시의 사실주의 문학을 건설한 대표자요, 당시에 처음으로 단편소설을 완성한 대표자로서 우리 문학사에서 귀중한 존재(김우종, 『작가론』, 동화문화사, 1973, 64쪽-인용자 재인용)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전기적 배경을 밝혀보는 데서도 참고할 수 있다.(126)빙허의 작품목록을 시대순으로 배열하면, 작품동기가 일정하게 암시되어 있고, 점층적으로 강화됨을 볼 수 있다. 말하자면 同工異曲의 主題素가 시대상과 밀착되어 극적 구성기법이나 장면 중심적인 영상수법으로 이동함으로써 더욱 작가의 세계관이나 인생관을 암시한다. 정치적 지배체제에 대한 불만, 다시 말하면 국권을 박탈당한 동시대의 조선 지식인의 자기정체상실과 좌절의식을 우회적으로 표출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시대의 가장 큰 명제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식민지정책에 대한 저항이며, 작가는 필연적으로 소외자의 위치에서 일제의 검열을 피하는 위장문학의 작전술을(128) 최대한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가의 의도가 잠재해 있는 작품의 본 의미를 상징적 암호로 해석해 보아야 한다. 빙허 작품의 목록 작성은 그런 의미에서 필요하며, 그의 작품들은 하나의 중심주제를 구심점으로 하여 전반적으로 관련되어 있다.(129)서구에서의 근대화라 함은 중세봉건사회에서 근대국가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하여 「트뢸치」는 다음의 3요소에서 밝힐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정신적 요소로서는 자연과학·합리주의·인간중심주의, 그리고 정치적 요소로서는 합리적 국가주의·민주주의를 들고, 사회경제적 요소로서는 자본주의·시민계급을 들고 있다. 그러나 동양의 근대화 과정은 이러한 자본주의의 성숙과정을 밟지 못하고 아직 근대적(129)인간 형성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훈련도 없었다. 이와 같이 근대화를 밟지 못한 계급층·사회층이 지배하는 사회에 있어서 민족주의가 고취되어도 그것은 가족·종교·촌락과 같은 제1차적 사회집단에 대한 애착으로 나타난다.(130)근대 이후의 민족주의는 근대적 인간의 고도한 자주성·주체성 위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근대화를 밟지 못한 곳의 민족주의는 개인을 매몰시키는 제1차적 사회집단에 집착하게 되므로 모든 민족활동이 단일한 국가에 집결되지 않고 모래알처럼 이산한다. 민주화 국민화를 매개해야 할 통신과 인쇄의 발달은 도리어 족보의 발간·향토애·지방주의의 발휘를 조장시킨다.(130)경제적 후진성, 정치적 훈련의 부족, 사상적 빈곤 등 모든 방면에 걸친 저해의 요인이 重合되어 있는 동양의 지식인 특히 식민지 통치하의 조선 인텔리겐차의 사회문제는 무수히 많았다. 그런데 자주적으로 근대사회를 형성하지 못한 사회에 있어서는 정신적 발전이 기술적 발전보다 뒤떨어지기 쉽다. 여기에 조선 인텔리켄차의 근대화 현실의 암벽은 더욱 두텁다. 이러한 논리는 빙허의 20년대 작품에 대체로 적용된다. 빙허는 동시대의 시대상에 맞는 과도기적 생활의 현장을 한 상황에 적합하게 표현하고, 점층적으로 하층민의 극한상황을 소설의 장치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문학을 계급적 편견에 의한 투쟁의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아각성과 민족해방의 실현매체로 삼고 있다.(131)일본 유학생이었던 빙허는 민중과 커다란 간극을 인식하고 인텔리켄차로서의 사명감을 실현하기 어렵던 정황을 「빈처」계열의 초기 작품에서부터 고백한다.(131)대체로 주인공들은 극적 무대 위에 놓여져 숙명적으로 미지의 세계에서 방황하지만 이미 작가와 독자는 은밀히 교신하여 멍청한 그들의 무지를 지켜보고 있다. 작가는 사실의 현장을 박진감 있게 그리다가 돌연히 어조를 바꾸어 반전의 극적 수법으로 진실을 언제나 가늠하고 있다. 말하자면 작가는 진실의 본질을 양면적으로 조명하면서 비극적 결말 속에서 깨닫게 하여 긴장미를 갖게 하는 아이러니의 기법을 흔히 쓰고 있다.(131)「빈처」의 작중인물인 미숙한 작가는 자기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희생적이고도 봉사적인 자기 처를 동정하면서도 끝내 극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빈처」는 등장인물들이 여러 목소리가 어울려 독자의 해석이 다양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 있다. 첫째, 주인공의 稚氣와 감상적인 미숙성이다.(132)여기 아내는 '나'의 의존 대상자이며 마치 어린애가 부모에게 의존하는 것과 같은 구실을 하는 모성 콤플렉스적인 대상이 되는 셈이다.(133)아내에게는 우리 사회에서 애용되는 도덕적 언사 가운데 '부덕'·'현처'·'현모양처'·'요조숙녀' 등 어떤 의미에서 사회적으로 불리한 여자들의 지위에 대한 역설적 명칭이 따라 다닌다.(133)그러나 여기에는 다른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도 내포한다. 「빈처」「술 권하는 사회」「타락자」의 부부관계는 도덕적 품성을 바탕으로 한 인간관계의 심층면도 있으나, 동시대의 지적 교신이 단절된 부부간의 비극을 간과할 수 없다. 어쨌든 일본 유학까지 한 지식청년의 사회적 좌절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의 과장된 무지는 독자들에게 극화되고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 확대 해석하면 '아내'는 동시대의 대중의 무지를 상징할 수 있다. 선량한 대중의 무지와 지식인의 무력은 다른 차원에서 격차를 벌리고 조선의 장래가 암담함을 시사한다. 즉 조선사회가 지향해야 할 근대화의 제요소 특히 시민계급의 자주성, 주체성의 자각을 선도해야 할 인텔리켄차의 '옆에서의 혁명'조차 의도할 수 없는 작가는 대중의 무지를 아이러니의 수법으로 엮어보려 한다.(134)빈궁을 소재로 한 「빈처」는 감상적 요소가 산재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134)지하게 자기자신에 대한 냉엄한 관찰과 아내의 미묘한 내면심리를 객관화시키려 한 작품이다. 비록 주인공인 나의 성격이 일관되지 않고 지나치게 단조롭고 갈등 요소가 없다거나 감상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稚氣가 있다 할 지라도 20년대 초창기에 리얼리즘을 지향하는 단편소설의 형성에 커다란 공헌을 한 소설임에 틀림없다.(135)이 소설(「운수 좋은 날」, 『개벽』, 48호, 1924. 6-인용자)의 구조는 단일한 사건과 사물, 배경으로 작가의 의도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명암대조법의 틀을 가지고 있다. 오랜간만에 만난 행운의 날이 사실은 가장 운이 나쁜 날이라는 최종적 판단은 작품 플롯 진행과정에서 주기적으로 암시되고 있다. 한 진실의 현장을 더욱 점층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작자는 반전의 역설적 기법을 사용하면서 같은 의미를 반복한다. 결국 「운수 좋은 날」의 시학적 구성원리는 계층적 소외자인 도시 노동자의 숙명적 비극을 형상화하기 위해 사용된 아이러니 수법이다.(135)"겨울철 음산한 날씨에 눈은 아니 오고 비가 내린다"는 것은 벌써 이 작품이 '프라이'가 밝힌 대로 겨울의 신화쟝르에 속하는 아이러니소설 유형으로서 비극적 풍자소설에 가까움을 암시한다.(135)김첨지의 비극은 단순하지 않다. 여기에는 한 개인의 운명적인 비극, 사회적 모순, 혹은 식민지적 부조리한 사회환경에 저항한다는 복합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136)빙허는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비극 문제나 사회적 모순을 김첨지 한 개인의 가정적 비극으로 축소시켰고, 독자에게는 위장적 수법으로 시대의 비극을 넌지시 암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리얼리즘의 정신에 아이러니를 조화시켰고 그러한 극적 수법으로 문학성을 고양시키고 있다.(137)빙허의 소설관은 생활과 유리된 문학을 거부하고 이 시대의 조선사회의 진실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데 있다. 따라서 「운수 좋은 날」(137)의 궁극적 주제는 생존권을 위협하는 조선사회의 경제적 빈곤 원인을 추적하는데 있다. 결국 작가는 당대의 사회적 병리요소를 한 도시 실업자와 같은 육체노동자에게 집약시키고 있음을 찾게 된다.(138)「운수 좋은 날」이 도시 노동자의 궁핍과 비극을 극대화하여 20년대의 부조리한 경제모순을 극명하게 묘사한 것이라면, 「불」(『개벽』, 55호, 1925. 1-인용자)은 농촌의 빈궁으로 고질화된 인습의 질곡을 민며느리로 간 15세 소녀의 비극에서 찾아보려는 것이다.(139)「불」은 강열한 이미지를 함축한 제명이다. 같은 호에 게재된 基鎭의 「불이야! 불이야!」를 위시해서,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여명」창간호, 1925. 1), 최서해의 「홍염」(「조선문단」, 1927. 1), 김동인의 「광염쏘나타」(「삼천리」, 1930) 등은 원초적 불의 이미지를 작품 속에 투영시켜 의미의 해석을 확대시키고 있다. 이들 작품의 말미에 방화를 한 것은 유사한 유형을 갖게 되어 이 시대의 관습화된 장르의 문학으로 분류할 수도 있게 된다. 물론 여기서도 빙허의 불 이미지와 동인의 불 이미지는 작가의 독특한 기질과 작품미학의 상이로 차이성을 드러내겠지만 대체로 이들 작품들은 시대저건의 울분을 노(139)정한 것이다. 실제로 1925년 「동아일보」「조선일보」에 보도된 화염원인의 거의 30%가 방화였다는 사실은 이 시대의 분위기를 말해 준다. 빙허의 「불」의 경우 민며느리의 방화로 끝을 맺게 된 것은 작품 주제동기에서부터 필연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140)빙허는 「불」의 주인공 '순이'를 등장시켜 해결할 수 없는 가난한 농민의 숙명적인 무지와 인습의 굴레를 근대화 정신의 소산인 봉건적인 인습에 대한 비판적 태도로 조명하여 비판적 리얼리즘의 시선을 굳힌다.(140)'순이'가 특정한 상황 속에 '던져진 존재자'로 주시되면서 어떻게 환경에 순응 혹은 저항하는가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불은 이 시대 농촌의 폐습을 리얼하게 부각시켜 지방풍토색을 짙게 나타내고, 한 연약한 소녀가 그러한 인습 속에서 어떻게 희생되는가를 휴우머니즘적 관점에서 독자들에게 자성시킨다.(141)'순이'가 최종적으로 인습의 질곡에서 불로 인해 해방된 것은 인습의 부당한 모순을 지양하려는데 있었고, 금기 파괴의 기쁨이기도 하다. 불에 탐닉하여 희열하며 미지의 세계로 비상하려는 '순이'의 면모는 이른바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를 나타내는 소녀의 절규다. 금단의 불에 대한 존경과 그 불을 훔쳐서 사용하는 인간의 '영리한 불복종'은 고질화된 인습의 억압이 극한적 상황에 이르렀을 때 폭발되었다.(142)「B사감과 레브레타」(「조선문단」, 1925. 2)는 「운수 좋은 날」이나 「불」의 경우처럼 노동자나 농민의 빈궁상을 소재로 삼은 비극적 아이러니가 아니라 여학교 기숙사 사감의 위선을 폭로하고 동시대 여학교 기숙사의 시대착오적인 인권 유린을 극화시킨 것이라 하겠다. 말하자면 이 시대의 또 하나의 중심사상은 인간해방과 평등정신이었으므로 남녀간의 자유연애사조는 정당하게 표방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의 표현이요, 생활의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평등정신의 근거를 해명하면 여학교 기숙사에서의 부당한 禁足令과 개인의 서신 검열과 같은 것은 부당한 인권 침해요 시대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근대화의 자유사조를 우선 이해하(142)면 「B사감과 레브레타」의 주제 동기와 의미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다.(143)작가는 철저히 위장된 한 인물의 본질을 전형화시키고 있다. 게다가 작가는 이 작품의 전체적 분위기를 희극적 요소로 가미시켜 극화시키고 있다. 결말 부분에서 창 틈으로 엿본 기숙사 여학생들에 의해 B사감의 본성이 폭로되는 것과 같은 극적 장면은 바로 희극적 아이러니의 수법을 의미한다. 즉 작자는 낮과 밤의 양면적인 장면 속에서 한 인간의 철저한 위장을 벗기기 위해 극적 기교로 장면구성을 하였으며, 상반된 인간의 모순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143)철저하게 애정문제를 멸시하여 지나치게 학생들의 '러브레타'를 규제했던 노처녀 B사감선생이 바로 그 빼앗은 '러브레타'를 보고 자정에 흥분하는 커다란 모순은 인간의 감추어진 본성을 찾는 리얼리즘이나 아이러니의 기법이다. 이 작품의 특징은 결말 부분의 급전으로 인하여 놀라움과 긴장감과 극적 아이러니로 감추어진 인간의 본성을 갑자기 드러내는데 있다.(144)「고향」(「朝鮮의 얼굴」, 1926)은 소재가 동시대 농촌의 황폐와 궁핍상을 드러내기 위해 한 실향민의 방랑생활을 묘사한 것이지만 「운수 좋은 날」이나 「불」보다는 훨씬 넓은 시공간 속에서 시대정신과 리얼리티를 드러내고 있다.(145)「고향」의 주인공인 '나'가 만난 작중인물은 이 시대 많은 조선인이 겪는 떠돌이 방랑생활을 하는 전형적 인물이다.(145)주인공의 슬픔은 같은 조선인에게만 상통할 수 있다는 전제조건 속에서 벗겨진다.(145)극한적인 생존의 위협을 받았던 농민의 떠돌이 방랑생활을 하는 것을 작가가 시대의 중심문제로 삼아 소재로 삼는다는 것은 당연하다. 「고향」에 등장되는 주인공의 방랑생활과 그 비극적인 삶의 신세타령은 바로 이 시대 조선의 현실을 조명한 것이다.(147)「고향」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 시대의 사회·역사적 맥락, 문학 관습의 전이 이외에도 주인공의 심층적인 내면심리 등을 검증하면서 작가의 표현미학과 결부시켜야 할 문제가 남아 있다. 이 시대의 처절한 궁핍 상황은 아내나 딸의 정조와 물질과의 교환이 생존수단이 되는 소설적 소재를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148)「고향」의 주인공이 체면의식의 가면을 쓰게 된 것 역시 조선의 지정학적(중국과 일본 등 강대국의 영향권에 든 한반도)인 역사 배경 하에서 자기 생존 보호책이라는 특수성이 한 조건으로 될 수 있다. 그의 고향은 동척의 수탈이 가장 심했던 南鮮地方이라는 숙명적 사회배경 속에 있었으므로, 이로 인해 불가항력으로 떠돌이 생활을 해야만 했던 정체성 상실은 타인에게 附和雷同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조건이다.(148)빙허는 반전을 통한 자각의 기법으로 술을 사용해서 분위기의 자연스러움을 훌륭히 처리한다. 가령 그의 초기작품인 「빈처」「술 권하는 사회」를 비롯해서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 「私立精神病院長」에서 W군 등의 본질적 내면의식은 술에서 찾아진 것이다.(149)「私立精神病院長」은 「개벽」 65호(1926. 1월호, 1925. 12. 9. 탈고)에 게재된 것이다. 同誌에는 빙허의 「朝鮮魂과 現代精神의 把握」이라는 평문도 함께 발표되어 「私立精神病院長」을 해석하는데 도움을 준다. 즉 어떠한 문예사조도 수용할 수 있지만 오직 조선혼과 현대정신의 파악이야말로 우리 문학의 가(149)장 중요한 생명이요 특색이라는 것이다.(150)빙허가 '조선혼과 현대정신'(빙허, 「朝鮮魂과 現代精神의 把握」, 『개벽』, 65호)의 문학관에서 '달뜬 기염에서 고지식한 개념에서 수고로운 모방에서 한 걸음 뛰어나와 차근차근하게 제 주위를 관조하고 고요하게 제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으려'는데 있다고 스스로 해명한 것처럼 작품 속에는 침통한 조선의 時代苦(원문은 윗점임)가 앞선다.(150)미친 P군의 보호자였던 사람 좋은 W군이 또한 미쳐서 살인까지 하게 된 아이러니컬한 대단원은 극한상황 속에서 인간의 반응을 실험한 자연주의적 수(150)법일 것이다. 더 의미를 확대하면 W군의 참극은 W군의 성격의 결함이라기보다는 외부적 영향 속에서-동시대의 시대고가 경제적 무능력작인 지식인 실업자  W군에게 가장 예민한 충격을 주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151)1920년대 초반의 문학사조는 대체로 己未 이후 자연주의·사실주의·예술지상주의·악마주의·상징주의 등 사상적 혼류에서, 1923년 이래 커다란 두 주류는 민족문학과 이른바 경향문학과의 대립에서 찾아진다. 빙허의 위치는 민족주의적 계열에 속하면서도 소시민적 자전체로서의 낭만주의 혹은 기교가로 그 뒤 자연주의 혹은 사실주의 작가로 전환하면서도 「운수 좋은 날」 이후 그 소재면에 있어서는 자연적으로 빈궁문학으로 기울어진다.(151)「貞操와 藥價」(『신소설』, 1929. 12)의 소설 제목이 지나치게 노골화된 命名인데도 불구하고 그 주제는 상당히 구체적인 문체로 구성되고 있다. 특히 이제까지 그의 대부분 작품 결말에서 보인 비운의 주인공과는 달리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하고 있다. 자연발생적인 신경향파작가라고 불리우는 최서해의 「飢餓와 殺戮」(『조선문단』, 1925. 6)이 그 소재면(빈궁한 '경수'가 그의 아내 약값으로 1년 동안 의사집 머슴살이를 함)에서 유사하면서도 서해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결말의 공식적인 저항과 살인극에 비교하면 빙허의 미학은 새로운 인간상응ㄹ 창조하고 있는 점에 그 특색이 있다. 빙허의 문체부터 우선 검토함녀서 그의 문학관을 조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빙허는 후기 작품으로 올수록 참된 리얼리즘의 성숙미를 더해 가고 있다.(152) 빙허의 리얼리즘은 地圖的인 인생 혹은 고착도니 사실을 묘사하거나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낭만주의의 뿌리와 자연주의의 가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통합적이고 변증법적인 내적 연계성 위에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림이란 카메라의 複寫性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라 하겠다.(153)소설의 환경은 극한적 가난이고, 주인공은 상황의 희생자들이다. 그들이 던지워진 숙명적 환경은 굶주림, 질병, 빼앗긴 토지, 약값으로 지불되는 정조가 상징하는 추악한 조건들이지만, 그들은 그러한 질곡에서도 줄기차게 살아가는 삶의 철학을 보이고 있다.(153)이 작품은 분명히 하층민들의 비참한 삶 속에서 끈질기게 생명을 보존하려는 개체보존욕을 시사한 것이다. 농부의 아내 경우 세속적인 윤리관은 맞지 않는다. 즉 남편의 생명이 가장 위급할 때, 기존적 윤리의식의 터부는 파(154)기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더 넓은 의미로 이 시대의 역사적 상황의 탈출구가 무엇인가도 점검하게 되고 줄기찬 생명력의 고귀함을 획득하게도 된다. 「貞操와 藥價」는 그런 의미에서 새 윤리성을 제기한 작품이다.(155)빙허의 소설 역시 전체적 연대성으로 통합관을 지향하고 있다. 그는 상상미학으로서의 소설의 기능은 지적인 동시에 정서적이며, 감각적인 동시에 이성적이라는 것, 즉 眞善美의 통합을 강조하고 있다.(155)빙허의 세계는 차차 내면적인 고민을 시대의 모순으로 돌리면서 인간의 가면과 본질의 낙차를 아이러니의 기법으로 성숙시켰다.(155)
21    潘星完 편역, <<발터 벤야민 문예이론>>, 민음사, 1983 댓글:  조회:2559  추천:0  2009-05-16
1. 자전적 프로필 [글을 잘 쓴다는 것]훌륭한 작가는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은 더 말하지 않는다. 말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사고의 실현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걷는다는 것도 어떤 목적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욕구의 실현인 것이다. 그러나 그 실현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는-그것이 목적에 맞추어 정확하게 이루어지든 아니면 마음내키는 대로 부정확하게 이루어져 소기의 목적에서 벗어나든-길을 가는 사람의 평소 훈련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 그가 자제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또 불필요하게 샛길로 어슬렁거리는 움직임을 피하면 피할수록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충분히 제 구실을 하게 되고 또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목적에 더 부합하게 되는 것이다.나쁜 작가에게는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 법이다. 그는 이러한 많은 아이디어 속에서 마치 훈련을 받지 못한 조악한 주자가 스윙이 큰 암팡지지 않은 육신의 동작 속에서 허우적대듯 자기 자신의 정력을 탕진해 버린다.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그가 생각하는 바를 한번도 냉철하게 얘기할수 없는 것이다. 훌륭한 작가의 재능이란, 그의 사고에 정신적으로 철저하게 훈련된 어떤 육체가 제공하는 연기와 그 연기의 스타일을 부여하는 일이다. 그는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을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글을 쓰는 행위는 그 자신에게가 아니라 다만 그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에만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이다.(26쪽)   [나의 서재 공개]책을 구입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자신이 직접 그 책을 쓰는 일이다.(32쪽)작가들이란, 책을 사지 못할 만큼 가난하기 때문에 책을 쓰는 사람들이 아니라, 살 수는 있어도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책에 대한 불만 때문에 책을 쓰는 사람들이다.(33쪽)   2. 문예비평 [프란츠 카프카]나는 오늘날의 유럽과 인류의 몰락에 대해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 카프카와의 대화를 기억한다. 그는 말했다. {우리는 신의 머리에 떠오른 허무주의적 사고들이자, 자살적 사고들이야.} 이 말은 처음에 나에게 그노시스 Gnosis의 세계상, 즉 신을 사악한 조물주로 또 세계를 그 신의 타락으로 보는 신비적 세계관을 상기시켰다. {아니, 그게 아니라}라고 그가 말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신의 언짢은 기분, 기분이 나쁜 날일 따름이야.}-{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인 이러한 현상계 외부에는 희망이 존재하고 있을까?}-그는 미소를 지었다. {암, 희망은 충분히, 무한히 많이 있지.-다만 우리를 위한 희망이 아닐 뿐이지.}(막스 브로트) 이러한 말들은, 카프카의 작품에 등장하는 가장 특이한 인물들, 즉 유일하게 가정의 품을 벗어났고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그들에게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는 그러한 인물들로 나아갈 수 있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해 준다. 이 이상한 인물들은 동물들이 아니다. 더구나 반은 고양이이고 반은 양인 잡종도 하니고 오드라데크와 같은 架空의 동물도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인물들은 모두 아직도 가정의 영향권 안에서 살고 있는 것들이다. 그레고르 잠자가 바로 양친의 집에서 해충으로 깨어나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상속물이 반은 양이고 반은 고양이인 괴상한 동물이며 또 오드라데크가 家長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는 것도 그나름의 까닭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助手>들은 이러한 서클로부터 떨어져 나온 존재들이다.(68쪽)인도의 전설에 의하면 간다르바 Ghandarve라는 아직도 미완성 상태의 존재인 미숙한 피조물이 있다. 카프카의 조수들도 이와같은 성격을 띤 존재들이다. 그들은 다른 어느 인물군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누구한테도 낯설지 않다. 그들은 이를테면 여러 인물군들 사이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68쪽)는 使者들이다. 카프카가 말하고 있는 대로 그들은 使者인 바나바 Barnabas와 비슷하다. 그들은 아직도 자연의 모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마룻바닥 한쪽 구석에 헌 여인의 스커트 두 벌을 깔고 잠자리를 마련하였다....가능한 한 공간을 적게 차지하고자 하는 것이 그들의 속셈이었다. 이를 위해 그들은 팔다리를 끼기도 하고 서로 쪼그리고 앉는 (물론 언제나 속삭이고 킬킬거리면서)등의 여러 가지 시도를 하였다. 어스름녘에는 그들이 있는 구석엔 단지 커다란 실뭉치 하나만 보였다.>바로 이와같은 사람, 즉 미숙하고 서투른 인간들을 위해 희망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69쪽)이 사자들의 활동에서 별다른 무리없이 살짝 드러나고 있는 것은 이 전체 피조물들의 세계를 답답하고 음울하게 지배하고 있는 법칙이다. 그 어느 것도 확고한 지위나 대치될 수 없는 확고한 윤곽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모두 상승하거나 전락할 찰나에 있다. 또 그들은 모두 그들의 적이나 이웃과 교체될 수가 있다. 나이가 찼으면서도 그들은 모두 성숙하지 못한 채로 있다.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에 처해 있으면서도 이제야 비로소 오랜 존재의 출발점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질서나 위계질서에 관해 논한다는 것은 여기서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것들이 암시해 주고 있는 신화의 세계는 신화에 의해 구원이 이미 약속되고 있는 카프카의 세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젊다.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카프카는 신화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현대판 오딧세이로서의 카프카는 <먼 곳을 응시하는 그의 시선>에 의해 사이렌들의 유혹을 뿌려쳤던 것이다.(69쪽)도어벨 소리치고는 너무 큰 이 종소리가 하늘에가지 울려 퍼지는 것처럼 카프카적인 인물들의 제스쳐는 일상적 주위세계에 대해서는 너무 강력하며 보다 넓은 어떤 세계로 뚫고 나가고 있는 것이다. 카프카의 대가다운 노련한 면모가 드러날수록 그만큼 그는 그러한 동작들을 일상적인 상황에 적응시키거나 아니면 그 동작들을 설명하는 일을 더 자주 피하고 있는 것이다.(73쪽)그의 단편들은 비유가 아니며 또한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의 단편들은 사람들이 그것들을 인용할 수 있고 또 설명을 위해 이야기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카프카의 비유들을 해명해 주고 또 K의 제스쳐나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동물들의 거동을 해명해 주는 어떤 교리를 소유하고 있을까? 그러한 교리란 없다. 기껏해야 우리는 이러저러한 것이 그러한 교리를 암시해 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어쩌면 카프카는 그러한 것들은 저 교리를 전해주는 유물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그러한 것들은 저 교리를 준비하는 선구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인간사회에 있어서 삶과 노동이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카프카는 그 조직이 그에게 불투명하게 보이면 보일수록 한층 더 끈질기게 그것에 몰두하였다.(75쪽)카프카는 평범한 사람들 측에 속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해의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한발한발씩 자신을 밀고 나갔다. 그리고 또한 그는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이해의 한계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때때로 그는 마치 도스토예프시키의 종교 패판장과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77쪽)카프카는 자기자신을 위한 비유를 창작해 내는 보기 드물 정도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비유들은 설명이 가능한 것에 의해서 완전히 해명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와는 반대로 그의 작품해석에 방해가 되는,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예비조치를 강구하였다. 우리는 그의 작품의 내부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또 의심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한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우리는 카프카가 이미 언급한 우화를 해석하면서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은 카프카 특유의 읽는 방식을 유념해야만 한다. 그의 유언은 이러한 점을 말해주는 또 다른 하나의 예이다. 자신의 유고들을 소각시켜 달라고 한 카프카의 지시는 전후사정을 두고 보더라도 그 이유를 설명하기가 힘들 뿐만 아니라 법 앞에 서 있는 문지기의 답변들처럼 조심스럽게 따져보아야만 한다. 매일매일의 삶이 가져다 주는 풀기 어려운 행동방식과 해명하기 힘든 발언 앞에 서 있었던 카프카는 어쩌면 죽음을 통하여 적어도 자신의 동시대인들도 그와 동일한 어려움을 맛보도록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77쪽)카프카의 세계는 세계라는 하나의 극장이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무대 위에 서 있는 존재이다. 이를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은 누구나 오클러호머의 자연극장에로의 입단이 허용된다는 사실이다. 어떤 기준에 의해 채용이 이루어지는가는 풀려질 수 없는 문제이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기준인 연극적 재능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응모자에게 기대되어지는 것은 다름아닌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정이 절박하면 그들이 요구하는 바대로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배제되고 있다. 그들은 마치 피란델로의 드라마에서 6명의 단원들이 작가를 찾아나서는 것과 같이 그들의 역할을 가지고 일자리를 찾고 있는 것이다. 카프카의 인물들이나 피란델로의 인물들의 경우 이러한 장소는 마지막 도피처이다. 또 바로 이러한 사실이 그 장소가 구원의 장소라는 사실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구원이라는 것은 현존재에 덧붙여지는 프레미엄이 아니라 오히려 카프카가 말하고 있듯이 <그 자신의 앞이마의 뼈에 의해 길이 차단되고 있는> 어떤 한 인간의 마지막 출구인 것이다.(78쪽)카프카 역시 우화작가였다. 그러나 어떤 종교의 창시자는 아니었던 것이다.(79쪽)카프카의 단편과 장편소설에 나타나는 여러 모티브들 가운데 하나만이라도 철저히 규명하는 일보다는 그의 유고인 비망록에서 사변적인 결론을 추론해 내는 일이 더 쉽기는 하다. 그러나 작품에 나타나는 모티들만이 카프카의 창작을 지배하였던 前世的 vorweltlich 힘들을 이해하는 관건을 제공한다. 이들 前世的 힘들은 물론 오늘날 우리 시대의 세속적인 힘들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그 힘들이 카프카 자신에게 어떠한 이름을 가지고서 나타났는지를 말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만은 확실하다. 즉 그는 그 힘들의 정체를 몰랐고 또 그러한(82쪽) 힘들 속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몰랐는 점이다. 그는 단지 前世 vorwelt가 죄라는 형태로 그에게 내미는 거울 속에서만 재판의 형태로 나타나는 미래를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최후의 심판일까? 재판관을 피고로 만드는 재판일가? 그 소송 자체가 형벌이 아닐까? 여기에 대해 카프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대답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하였을까? 아니면 오히려 그런 대답을 미루려는 것이 그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그가 우리에게 남겨준 이야기들 속에서 서사성이 그 의미를 다시 획득하는 것은 미래를 연기시킨다는 세헤라자데의 입을 통해서이다.(83쪽)   [프루스트의 이미지]으레 하는 얘기지만, 모든 위대한 문학적 작품들은 하나의 장르를 정립하기도 하고 해체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이들 작품은 특수한 경우인 것이다. 그러나 프루스트의 경우는 가장 파악하기가 힘든 경우 중의 하나이다. 허구적인 얘기와 自傳的 사실, 그리고 해설이 하나가 되어 있는 구조에서 시작해서 끝을 모르는 문장의 구문에 이르기까지(여기에 넘쳐 흐르는 말의 나일강은 점차 넓은 진실의 영역으로 나아가면서 이 지역을 비옥하게 만든다) 모든 것이 규범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선 관찰자의 눈에 들어오는 첫 번째의 중요한 인식은, 문학 분야에서의 이 위대한 특수 경우가 동시에 지난 수십년 동안에 이루어진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는 점이고, 또 이 업적이 이루어진 제반조건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불건강했다는 점이다. 이상스러운 병과 엄청난 부, 그리고 비정상적인 성벽이 바로 이러한 불건강한 조건들이었다. 이러한 삶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이 전형적인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아무튼 징표적인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러한 사실은 이 뛰어난 작가적 업적이 불(102쪽)가능의 중심부에서, 또 모든 위험한 중심부-이러한 위험한 중심부는 동시에 모든 위험에 대한 무관심이기도 하다-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이 <필생의 업적>의 위대한 실현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하나의 마지막 실현으로 남게 될 것이라는 점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프루스트의 이미지는, 시와 삶 사이에 걷잡을 수 없이 커가고 있는 간극이 획득할 수 있었던 最大의 人相學的 표현이다. 그의 이미지를 떠올리고자 하는 시도를 정당화시키는 윤리적 가치는 바로 이러한 점에 있다고 하겠다.(103쪽)잘 알다시피 프루스트는 그의 작품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삶이 아니라 삶을 체험했던 사람이 바로 그 삶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삶을 기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아직도 부정확하고 매우 엉성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여기에서 기억하는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그가 체험한 내용이 아니라 그러한 체험의 기억을 짜는 일, 다시 말해서 회상 Eingedenken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니 이보다 더 적합한 표현은 기억을 WK는 일이 아니라 망각을 짜는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루스트가 무의지적 기억 memoire involontaire이라고 부르는 무의지적 회상은 흔히 기억이라고 불리워지는 것보다는 오히려 망각에 훨씬 가까운 것이 아닐까? 기억이 씨줄이고 망각이 날줄이 되고있는 이러한 무의지적 회상이라는 작업은 회상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회상하는 일의 반대가 아닐까?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밤이 짰던 것을 낮이 풀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나게 되면 우리는 대부분 약하고 느슨한 몇몇의 조각 속에서 망각이 우리들 속에서 짰던 이미 체험한 삶의 양탄자를 갖게 된다. 그러나 낮이 시작되면 우리는 언제나 목적과 결부된 행동을 하게 되고 또 그 위에 목적에 맞게 기억을 하게 됨으로써 망각이 밤새 짰던 직물과 장식은 해체된다. 그렇기 때문에 프루스트는 마지막에 가서는 인공적으로 불을 밝힌 방안에서 그의 모든 시간을 아무런 방해 없이 작품을 쓰는 데 이용하였고, 또 이를 위해 시간이 만드는 정교한 상감조각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낮을 밤으로 바꾸었던 것이다.(103쪽)로마인들이 텍서트 Textum라는 단어를 직물처럼 짜여진 어떤 것으로 이해했다는 점을 두고 보면 마르셀 프루스트의 텍스트만큼 촘촘히 짜여진 텍스트도 없을 것이다. 그의 눈에는 세상의 어떠한 것도 그의 성에 찰 만큼 촘촘하고 지속적으로 짜여져 있지 않았다.(103쪽)교정을 보는 프루스트의 습관은 문선공을 거의 절망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교정지는 언제나 여백 가득히 씌어져서 되돌아왔다. 그러나 오식은 하나도 고쳐지지 않았고, 활용한 수 있는 공간은 온통 새로운 텍스트로 채워졌다. 이렇게 해서 기억의 법칙성은 작품의 전체 범위 내에서까지 그 영향력을 미쳤던 것이다. 그 이유는 체험되어진 어떤 사건은 유한한 데 비해 기억되어지는 사건은 그 사건의 전과 후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풀어 주는 열쇠구실을 함으로써 무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억에 의한 사건의 짜임새에 규칙을 부여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기억이다. 다시 말해 텍스트의 통일성을 형성하는 것은 오로지 기억이라는 순수행위 actus purus 그 자체일 뿐, 작가도 아니며 또 얘기의 줄거리는 더욱 더 아닌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작가의 개입과 얘기줄거리에 의해 생겨나는 중단은 다만 기억이라는 연속성의 또 다른 면, 이를테면 양탄자 뒷면의 무늬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104쪽)프루스트가 그렇게 열광적으로 찾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이러한 그의 끝없는 노력의 저변에 가로놓여 있는 것은 무엇일까? 또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모든 삶과 작품 및 행동이란 다름아닌 현재적 삶 속에서 일어나는 가장 진부하고 가장 덧없으며, 또 가장 감상적이고 가장 약한 시간의 일사불란한 전개에 불과할 따름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인가? 우리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어느 대목에서 프루스트가 그의 이러한 가장 본래적인 시간을 묘사했을 때, 그는 우리들 누구나가 이러한 시간을 자기자신의 현재적 삶 속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도록 묘사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본래적 시간을 하나의 일상적 시간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이러한 시간은 밤과 더불어, 열려진 창문의 난간에서 불어오는 바람결과 새들의 잃어버린 지저귐과 함께 온다.(104쪽)콕토는 프루스트 독자의 최대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다. 즉 그는 프루스트라는 인간 속에서 맹목적이고 무의미한, 편집광적인 행복에 대한 동경을 보았던 것이다. 행복에 대한 이러한 동경은 프루스트의 눈에서 및나고 있었으나, 그 눈은 행복한 눈빛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눈 속에는 도박이나 사랑 속에 빠져 있을 때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행복이 도사리고 있었다. 또 왜 프루스트의 작품을 관류하는, 가슴을 멎게 하고 뒤흔드는 행복의 의지가 그의 독자들 가슴 속에는 좀처럼 파고 들지 못하는가에 대해 답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여러 대목에서 프루스트 자신도 그의 독자들이 이 작품 전체를 체념과 영웅주의 및 금욕주의라는 해묵은 안이한 관점에 의해 바라보도록 하는 데에도 一助하였다. 아무튼 인생의 모범생에게는 위대한 업적이란 다름아닌 노력과 비탄, 그리고 환멸의 결과라는 사실만큼 더 분명한 사실은 없는 법이다.(105쪽)행복을 향한 의지에는 일종의 행복의 변증법이라고 할 수 있는 이중적 면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頌歌적 행복의 모습을 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悲歌적 행복의 모습을 하고 있다. 전자에 속하는 것은 지금까지 한번도 들어 보지도 못하고 또 지금까지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 즉 열락의 절정이고, 후자에 속하는 것은 원천적인 최초의 행복을 영속적으로 복원하려는 영원히 거듭되는 새로운 반복이다. 프루스트의 경우, 현재의 삶을 기억이라는 마술의 숲으로 변형시키는 것이 바로 이러한 비가적 행복의 이념-우리는 이를 엘레아적 eleatisch 행복의 이념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이다.(105쪽)프루스트에게도 일종의 옛 이상주의의 흔적이 엿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흔적이 이 작품의 중요성을 규정하고 있지는 않다. 프루스트가 펼쳐 보이고 있는 영원성은 곧장 나아가는 무한한 시간으로서의 영원성이 아니라 둘둘 말린 나선형적 시간으로서의 영원성이다. 그가 진정으로 관심을 갖는 것은 가장 실제적인 모습을 하고 공간과 결부되어 있는 이러한 나선형적인 시간의 진행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의 진행이 그 본연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곳은 내부에서 일어나는 기억 속과 또 외부에서 일어나는 늙어감 속에서이다. 늙어감과 기억의 상호작용을 추적한다는 것은 프루스트 세계의 핵심부, 즉 둘둘 말려 있는 나선적 시간의 우주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유사성의 상태 속에 있는 세계이고 또 이 세계 속에는 교감 Korrespondenz 의 영역이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상호교감을 최초로 파악한 것은 낭만주의자들이고 이러한 상호교감을 가장 깊이 파악한 사람은 보들레르이긴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삶 속에서 이를 밖으로 드러낼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은 프루스트이다. 그것은 <무의지적 기억>의 작품, 즉 불가피하게 늙어가는 노화의 과정에 대적해서 回生하는 힘의 작품인 것이다. 지나간 과거의 일들이 아침이슬처럼 <일순간 Nu>에 반영되는 곳에서는 回生의 고통스러운 쇼크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다시 한번 지나간 과거의 일들을 끌어모으게 되는 것이다.(113쪽)프루스트의 방법은 성찰 Reflexion이 아니라 과거의 일들을 현재 속에 생생히 떠올리는 방식 Vergegenwartigung이다. 프루스트의 전 작품을 관류하고 있는 것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삶의 진정한 드라마를 실제로 체험해 볼 시간을 우리가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통찰이다. 우리를 늙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이지, 결코 그 밖의 사실이 아닌 것이다. 얼굴에 새겨진 작은 주름, 그것은 위대한 정열이나 악덕내지 우리들을 가끔 찾아 오는 인식의 기록부이긴 하지만 정작 주인인 우리는 주인노릇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114쪽)기억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인내와 끈기를 가져야만 취각에 의해서 보관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면(여기서 기억 속에 있는 냄새를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냄새에 대한 프루스트의 민감성이 우연한 기회에 맡게 된 냄새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들이 찾아 내는 대부분의 기억은 시각적 이미지로서 우리들에 나타나고 있음이 분명하다. 심지어 무의지적 기억의 가장 유동적인 형태까지도 그 대부분은 유리된-그것이 이상스러울 정도로 현재적이긴 해도-시각적 이미지인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프루스트의 작품에 내재하는 가장 내적인 토운에 자신을 내맡기고자 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이러한 무의지적 회상이라는 하나의 심층에 자신을 침잠시키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때 우리들이 침잠하는 무의지적 기억의 심층에서는, 기억의 여러 계기들은 우리들에게 더 이상 개별적 이미지로서가 아니라, 마치 그물의 무게를 보고 고기가 얼마나 잡혔는가를 아는 어부처럼, 무정형적이고 이미지가 없는 상태로 또 확실히 알지 못하면서도 무게의 어림짐작으로 떠오르는 전체적 이미지로서 부각되는 것이다. 취각이란, 잃어버린 시간의 바다에 내던져진 그물의 무게에 대한 감각을 뜻할 따름이다. 그리고 그의 문장은, 사유하는 육체의 전 근육에 의한 활동이고, 또 그것은 잃어버린 시간의 바다에 내던져진 그물을 걷어 올리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엄청난 노력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117쪽)   [보들레르의 몇가지 모티브에 관해서]엄밀한 의미의 경험이 지배하고 있는 곳에서는, 개인적인 과거의 어떤 내용들은 기억 속에서 집단적인 과거의 내용들과 결부되어 있다. 의식절차와 축제들을 동반하는 여러 儀式들은-이러한 의식들은 프루스트에서는 어느 한 곳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이들 두가지 요소, 즉 개인적인 과거와 집단적인 과거의 내용들을 거듭해서 융화시키고 있다. 이들 儀式들은 어떤 특정한 시기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 내어서는 그 기억을 평생동안 갖게 된다. 이렇게 해서 의지적인 기억과 무의지적인 기억은 그 상호적인 배타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124쪽)충격적인 요인이 각각의 인상들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면 클수록, 의식이 자극의 방어를 위해 부단히 긴장하면 할수록, 그래서 이를 통해 의식이 성공을 크게 거두면 거둘수록, 그러한 인상들은 그만큼 더 적게(127쪽) 경험 Erfahrung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오히려 그러한 인상들은 그럴수록 체험 Erlebnis이라는 개념의 내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충격방어라는 특수한 작업은 사건의 내용을 온전하게 보전하는 대신에 그 사건에 대해 의식 속에 하나의 분명한 時點을 지시해 주는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성찰의 최고업적이기도 할 것이고 또 그것은 사건을 하나의 체험으로 만들 것이다. 성찰이란 것이 없다면 원칙적으로 즐거운 공포 내지 혐오스러운 공포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공포는 프로이트에 의하면 충격방어의 실패를 인정하고 있음을 뜻한다.(128쪽)소망이라는 것은 경험의 질서에 속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젊었을 때 소망했던 것을 나이가 들면 지천으로 많이 갖게 된다>고 괴테는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그의 생애에서 소망을 일찍 품으면 품을수록 그만큼 소망이 실현될 가능성이 커지는 법이다. 한 소망이 오래 지속될수록 그만큼 더 그 실현에 대한 기대감도 커지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먼 시간 속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는 것은 그러한 시간을 채우고 또 갈랐던 경험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현된 소망은 경험에 선사된 왕관이다. 민중들이 사용하는 상징에서는 시간상의 먼 거리 대신에 공간상의 먼 거리가 등장한다. 따라서 공간의 무한한 거리 속으로 사라져 가는 유성은 어떤 실현된 소망의 상징이 되고 있는 것이다.(147쪽)보들레르가 의미했던 교감이라는 것은 위기에 아무런 영향을 받음이 없이 스스로의 위치를 굳히려고 하는 어떤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은 오로지 儀式的인 것의 영역 속에서만 가능하다. 만약 그것이 이러한 영역을 넘어서게 되면 그것은 <아름다운 것>으로서 나타난다. 아름다움 속에는 예술의 儀式的인 가치가 드러난다.(150쪽)더 이상 아무런 경험도 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위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화를 내는 일의 실질적 내용을 이루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바로 이러한 경험불능이다. 화를 내고 있는 자는 <아무것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화를 내는 자의 원형인 티몬 Timon은 누구에게나 마구 대고 화를 낸다. 그는 더 이상 친구와 원수를 구별할 수 없는 입장에 있지 않다....화는 우울한 자를 내리누르고 있는 초침의 박자에 맞추어 폭발하듯 일어난다.(153쪽)우울 속에서 시간은 物化된다. 매 순간은 눈송이처럼 사람을 뒤덮는다. 이러한 시간은 무의지적 기억의 시간처럼 역사가 없다. 그렇지만 우울 속에서는 시간에 대한 지각은 초자연적으로 첨예화되어 있다. 매순간은 시간의 충격을 중도에서 가로챌 준비가 된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시간을 계산하면서 우리는 시간의 지속성보다 시간의 일사불란한 균일성을 더 우위에 둔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러한 시간계산 속에 비균질적인 특이한 단편적 순간들이 존재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양적인 시간측정과 함께 질적인 시간을 인정해서 이 둘을 합친 것-바로 이것이 달력이라는 작품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를테면 회상의 자리를 기념축제일이라는 형태로 빈 채로 남겨 둔다. 경험을 할 능력을 상실한 사람은 마치 달력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있는 듯한 기분을 갖게 된다. 대도시인은 일요일이면 이런 기분을 맛보게 된다.(154쪽)죽음이 제거된 지속은 끝이 없는 어떤 두루마리 그림의 조악한 무한성과 같다. 그러한 지속에서는 전통이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지속이란 경험이라는 빌어 입은 의상을 입고서 우쭐거리며 행세하는 어떤 체험의 총괄개념이다. 이에 반해 우울은 체험을 본래의 모습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 우울한 자는 지구가 적나라한 자연상태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을 두려움을 가지고 바라본다. 지구의 주위에는 前史의 숨결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한 일말의 분위기 Aura도 없는 것이다.(155쪽)우리가 문위기 Aura를, 원래 무의지적 기억에 자리잡고 있는 어떤 지각대상의 주위에 모여드는 연상작용이라고 규정한다면, 그 대상에 있는 분위기는 실용적 대상에서 연습으로 남게 되는 경험에 해당한다. 카메라와 그 뒤에 나타난 그와 비슷한 기계적 장치에 근거하고 있는기술들은 의지적 기억의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155쪽)하나의 그림은 그것을 바라볼 때 우리의 눈이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어떤 것을 재현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근원적인 형태의 소망을 충족시켜주는 그 무엇을 그 그림이 투영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러한 소망을 부단히 키워 나가는 그 어떤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로써 사진을 그림과 구별시키는 것이 무엇이며 또 왜 이 두가지를 동시에 포괄하는 창작의 원리가 존재할 수 없는가 하는 것이 명백해졌다. 즉 어떤 그림을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시선에 대해 사진이 갖는 관계는 배고픔에 대해 음식이 갖는 관계나 아니면 갈증에 대해 음료수가 지니는 관계와 같은 것이다.(157쪽)무의지적 기억으로부터 나오는 이미지의 특징이 이들 이미지가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있다면, 사진은 <분위기의(157쪽) 붕괴>라는 현상에 결정적인 몫을 하고 있는 셈이다.(158쪽)아우라의 경험이란 인간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반응형식을, 무생물 내지 자연적 대상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에 옮겨놓는 데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시선을 주고 있는 자나 서선을 받고 있다고 느끼는 자는 우리에게 시선을 되돌려 준다. 우리가 어떤 현상의 아우라를 경험한다는 것은 시선을 되돌려 줄 수 있는 능력을 그 현상에 부여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경험은 무의지적 기억의 자료들과 일치한다. 그런데 이러한 무의지적 기억의 자료들은 일회적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자료들은 그것을 붙잡아 자기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기억으로부터 빠져나간다. 따라서 무의지적 기억의 자료들은 그 자체속에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의 일회적 현상>을 내포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아우라의 개념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것이다. 분위기의 이러한 정의는 현상이 지니는 宗敎儀式的 성격을 명백히 해주는 이점이 있다. 본질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가까이 갈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즉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은 실제로 儀式적인 像의 주된 특성이다. 프루스트가 아우라의 문제에 얼마나 정통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우라를 아우라의 이론을 파악하는 개념들을 통하여 때때로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비밀을 좋아하는 몇몇 사람들은 사물들이 한때 그 사물 위(158쪽)에 머물렀던 어떤 시선을 간직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 자위한다.>(그것은 아마 그러한 시선에 응답하는 능력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그들은 기념물들이나 그림들이, 수세기에 걸친 찬미자들의 사랑과 경의가 그 주위에 짜 왔던 부드러운 베일 밑에서만 그 모습을 드려낸다고 생각한다.> 프루스트는 확실한 견해를 피하면서 <이러한 기괴한 환상은, 만약 그들이 그러한 환상을 개인에게만 존재하는 유일한 현실, 즉 그 자신의 특유한 감정세계와 연관시킨다면 진실이 될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꿈 속에서의 지각과정을 아우라적인 지각과정으로서 규정하고 있는 발레리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앞의 내용과 유사하면서도, 그의 규정이 객관적인 방향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 걸음 더 앞서고 있다. <내가 이러저러한 대상을 보았다고 말할 경우 이로써 나와 그 사물 사이에 어떤 동일성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이에 반해 꿈속에서는 어떤 동일성이 존재한다. 내가 보고 있는 사물들은 내가 그 사물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159쪽)어떤 시선이 극복해야 할 거리가 멀면 멀수록, 그 시선으로부터 나오기 마련인 마력은 더욱더 강하게 될 것이다. 거울처럼 투명하게 우리를 바라보는 눈들 속에서 그 거리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채 그대로 남게 된다. 그러한 눈들이 먼 곳의 거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은 바라 이 때문이다.(160쪽)보들레르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둔감성이라는 것은 종종 아름다움의 한 장식물이다. 만약 두 눈이 검은 늪처럼 슬픔에 잠겨 투명해지거나 아니면 적도의 대양처럼 매끄러운 고요함에 잠기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둔감성 덕분인 것이다.> 그러한 눈들에 생기가 돈다면, 그때의 생기라는 것은 먹이를 찾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몸을 지키는 맹수들의 생기인 것이다. (행인들을 지켜보면서 동시에 경찰의 감시도 살피는 창녀들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보들레르는 기이 Constantin Guys가 그린 창녀들을 주제로 한 여러 그림들 속에서 이러한 생활방식이 만들어 내는 인상학적인 유형을 발견하였다. <그녀의 시선은 맹수들의 시선처럼 먼 지평선에 고정되어 있다. 그 시선은 맹수의 불안함을 띠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시선은 이따금 갑자기 긴장되는 경계심을 가지고 있다.>) 대도시 사람들의 눈이 방어적인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 지나친 부담에 시달리고 있음은 분명하다. 게오르그 짐멜 Georg Simmel은 눈이 담당하고 있는 보다 덜 눈에 띠는 기능에 대해 언급하였다. <들을 수 없고 보기만 하는사람은......볼 수는 없고 듣기만 하는 사람보다 더 불안하다. 여기에 대도시의 특징적인 면이 있다. 대도시 사람들의 제반 상호관계의 특징적인 점은, 시각의 활동이 청각의 활동보다 현저하게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의 주된 원인은 공공 교통수단에서 비롯된다. 대형버스, 지하철 및 전차 등이 19세기에 등장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말 한마디 주고 받음이 없이 서로를 몇분 동안, 심지어 몇시간 동안이고 빤히 쳐다보아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지는 않았었다.>(161쪽)방어적인 시선 속에는 꿈꾸듯 먼 곳에 망연자실한 채 빠져드는 면이 없다. 방어적인 시선은 심지어 그러한 망연자실한 태도를 유린하는 데에서 쾌감같은 것을 느끼기조차 한다.(161쪽)사람들은 어쩌면 <유용한 환상>에 대해서보다는 <비극적인 간결성>에 대해 더 큰 가치를 둘지 모른다. 보들레르는 먼 곳이 지니는 마술적인 면에 집착하였다. 심지어 그는 풍경화를 장터의 판잣가게에 걸려 있는 그림들을 척도로 삼아 그 가치를 측정하기까지 하였다. 마치 어떤 그림앞에 너무 가까이 접근할 때의 관찰자가 으레 체험하는 것처럼 그는 먼 곳의 마력을 꿰뚫어보고자 한 것은 아닐가?(162쪽)보들레르는 자신의 생애를 형성해 온 모든 경험들 가운데서 군중에 의해 떠밀리는 경험을 결정적이고 독특한 것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스스로 움직이고 또 스스로 생명력을 지니며, 거리산보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군중의 광채는 보들레르에게는 이제 사라져 버렸다. 군중의 비열함을 마음에 새기기 위하여 그는, 거기에서는 구제불능의 여인들과 버림받은 자들조차도 어떤 정돈된 생활방식을 변호하고 방탕한 생활을 매도하여 또 돈 이외에는 모든 것을 배격하는 그러한 대낮의 세태를 세밀하게 관찰하였다. 그의 마지막 동지들인 이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게 되자 보들레르는 군중이라는 존재와 맞서 싸우게 된다. 그렇지만 그의 분노는 비바람에 맞서는 사람들처럼 무력하기만 하다. 이것이 바로 그가 거기에 어떤 경험과 같은 비중을 부여했던 체험의 실상이다. 그는 현대의 센세이션이 지불해야 할 대가, 즉 충격체험 속에서 아우라가 붕괴되는 현상을 단적으로 지적하였다. 이러한 아우라의 붕괴현상에 동의하기 위해 그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시의 법칙이다. 그의 시는 프랑스 제2제정의 하늘에 <아무런 분위기도 없는 하나의 별>처럼 빛나고 있다.(164쪽)   [얘기꾼과 소설가]-니콜라이 레쓰코브의 작품에 관한 고찰아직도 말이 끄는 차를 타고 학교에 다녔고, 또 구름 이외어는 변하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시골의 맑은 하늘 아래에 서 있었던 세대들에겐, 파괴적인 분출과 폭발이 지배하는 역사 속의 구름 아래에서는 보잘 것 없고 부서지기 쉬운 인간의 몸뚱아리밖에 남은 것이라곤 없었던 것이다.(166쪽)진정한 얘기는 드러난 형태로든 숨겨진 형태로든간에 유용한 그 어떤 것을 내포하고 있는 법이다. 이러한 유용성은 설교 속에 있을 수도 있고, 실제적 충고에도 있을 수 있으며, 또 속담이나 생활의 좌우명 속에 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얘기꾼이란 얘기를 듣는 사람에게 조언을 해줄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조언을 해주는 일은 바야흐로 케케묵은 것이 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된 근본 이유는 경험과 의사소통의 직접성이 점차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결과적으로 우리들 자신이나 남들에게 아무런 조언도 해줄 수 없게 되었다.(169쪽)얘기의 몰락의 마지막 단계를 나타내는 한 과정의 징후를 예고한 것은 근세가 시작되면서 대두되기 시작한 소설의 발흥이다. 소설은 얘기와, 또 보다 좁은 의미의 서사시적인 것과 구별짓게 하는 것은, 소설이 근본적으로 책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설의 보급은 인쇄술의 발명과 함께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 구전으로 전수될 수 있는 것, 즉 서사시의 자산은 소설을 형하고 있는 내용물과는 그 성질을 달리하고 있다. 소설이 여타의 산문문학, 예컨대 동화, 전설, 심지어 소품소설 Novelle 등과 구별되는 것은, 그것이 구전적 전통으로부터 생겨난 것도 아니고 또 그 속에 몰입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소설이 무엇보다도 다른 산문문학과 구별되는 것은 얘기와의 대비를 통해서이다. 얘기를 쓰는 사람은 그가 얘기하는 내용을 경험-그것이 자기 자신의 경험이든 아니면 남이 보고하는 얘기든간에-으로부터 얻고 있다. 그러고 난 후 그는 또 다시 그 내용을 그의 얘기를 듣는 사람들의 경험이 되도록 만들어 내는 것이다. 소설가는 자신을 남으로부터 고립시켰다. 소설의 산실은 고독한 개인, 즉 자신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를 더 이상 표현할 수 없고 또 자기 자신이 남으로부터 조언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남에게도 아무런 조언을 해줄 수 없는 고독한 존재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다른 것과 전혀 비교도 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을 인간적 삶의 묘사 속에서 극단적으로 끌고 가는 것을 의미한다. 소설은 삶의 풍부함과 또 이러한 풍부한 삶의 묘사를 통해서 살아감의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다단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소설이라는 장르의 최초의 위대한 소설, 동키호테를 보면 우리는 금방, 가장 고귀한 사람 중의 한사람, 즉 동키호테의 정신적 위대성과 용감성 및 남을 도우려는 마음가짐이 일체의 조언을 결하고 있고 또 일말의 지혜도 내포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세기가 지나면서 이따금 소설 속에 지시적 사항을 삽입하려는 시(170쪽)도-아마 이러한 시도가 가장 지속적으로 행해졌던 것은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에서일 것이다-가 있었지만, 이러한 시도는 소설형식 자체의 변화를 가져다줄 가능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교양소설은 소설의 기본구조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있다. 사회의 발전과정을 한 인물의 발전과정 속에 동화시킴으로써 교양소설은, 그 인물의 발전과정을 규정하고 있는 질서에 정당성-그것이 비록 부서지기 쉬운 정당성이긴 하더라도-을 부여하고 있다. 교양소설이 부여하고 있는 정당성은 현실과는 정반대되는 입장에 서 있다. 특히 교양소설에서 구체화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현실과 정당성 사이의 불협화음인 것이다.(171쪽)그리이스의 최초의 얘기꾼은 헤로도투스이다. 그의 {역사 Historien}의 3권 14장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기가 있는데, 우리는 이 얘기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다. 이 얘기는 사메니트우스에 관한 얘기다. 이집트의 왕 사메니트우스가 페르시아 왕 캄비세스에 패해서 붙잡혔을 때, 캄비세스는 이 포로에게 모욕을 주자고 하였다. 그는 페르시아의 개선행렬이 지나가는 거리에 사메니트우스를 세워둘 것을 명령하였다. 또 그는 계속해서, 포로로 하여금 그의 딸이 물동이를 가지고 우물로 가는 하녀의 모습을 하고 그의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도록 하였다. 모든 이집트사람들이 이러한 광경을 보고 울고 슬퍼하였지만 사메니트우스만은 혼자 눈을 땅 위에 떨어뜨리고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그러고 난 후 곧 그의 아들이 처형을 당하기 위해 행렬 속에 함께 끌려가는 것을 보았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나 그후 그의 하인들 중의 한 사람인 늙고 불쌍한 남자가 포로행렬중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바로 그 순간, 그는 손으로 머리를 치면서 가장 깊은 슬픔을 나타내는 온갖 표식을 보내었다.이 얘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얘기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정보는, 그것이 새로웠던 바로 그 순간에 이미 그 가치를 상실한다. 그것은 오로지 그저 한 순간 속에서만 생명력을 가진다. 또 정보는 스스로를 완전히 그 순간에 내맡겨야만 하고 또 한순간의 시간도 잃음이 없이 그 순간에 대해 설명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얘기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그것은 스스로를 완전 소모하지 않는다. 얘기는 자신이 지닌 힘을 집중된 상태에서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뿐더러 또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다시 펼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몽테뉴는 이 이집트왕에 다시 언급하면서 왜 그가 하인을 보자 비로소 슬퍼하였던가를 자신에게 묻고 있다. 이 물음에 대해 몽테뉴는 <그가 이미 너무나 슬픔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그 슬픔이 조금만 더 커지더라도 그것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터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또 <왕의 가족들의 운명이 왕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지 못한 것은 그들의 운명이 바로 자(173쪽)신의 운명이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우리는 삶에서 우리를 감동시키지 못하는 많은 것들이 무대 위에서는 우리를 감동시킨다. 따라서 이 하인은 왕에게는 단지 한 사람의 배우였을 뿐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아니면 <커다란 슬픔은 정체되었다가 이완의 계기가 와야만 비로소 터진다. 이 하인을 보는 순간이 바로 이 이완의 순간이었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헤로도투스는 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설명도 부가하지 않았다. 그의 보고는 건조하기 이를데 없는 보고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대 이집트로부터 유래하는 이 얘기는 수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경탄과 깊은 명상을 불러일으키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수천년 동안 밀폐된 피라미드의 방에 놓여 있으면서도 오늘날까지 그 맹아적 힘을 보존하고 있는 한 알의 씨앗을 방불케 한다.(174쪽)하나의 얘기를 지속적으로 기억하도록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심리적 분석이 배제된 정결하며 간결하게 짜여진 집중적 문체이다. 얘기하는 사람에 의해 미묘한 여러 심리적 진행과정에 대한 묘사가 자연스럽게 포기되면 되어질수록, 그러한 심리적 진행과정이 듣는 사람의 기억에 오래 남게 될 승산은 더욱 더 커진다.(174쪽)베짜는 일의 리듬과 같은 얘기에 한번 빠져드는 사람은 그 얘기를 남에게 다시 전할 수 있는 재능이 저절로 생겨나게끔 그 얘기를 듣게 되는 것이다. 얘기를 하는 재능은 이처럼 베를 짜는 일에 그 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짜여진 얘기의 그물은, 그것이 수천년 전에 가장 오래된 수공업적 형태의 주위에서 한번 짜여지고 난 이후로는 오늘날에 와서는 그 마디가 하나하나씩 헤어지고 있는 것이다.(175쪽)수공업의 주위에서-그것은 처음에는 농촌적 형태이었다가 나중에는 해양적 수공업, 마지막에는 도시적 형태로 발전하였다-오랫동안 번성하였던 얘기 그 자체는 이를테면 의사소통의 수공업적 형태이다. 얘기는 정보나 보고처럼 사물의 순수한 <실체>를 전달하려고 하지 않는다. 얘기는 보고하는 사람의 삶 속에 일단 사물을 침잠시키고 나서는, 나중에 가서 다시 그 사물을 그 사람으로부터 끌어낸다. 그래서 얘기에는 그 얘기를 하는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마치 옹기그릇에 도공의 손흔적이 남아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얘기꾼으로서의 소설가 Erzahler들은 자신이 나중에 체험하게 될 상황을 얘기의 맨 처음에 묘사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175쪽)발레리는 그의 관찰을 <영원성이라는 생각의 소멸과 지속적인 일에 대한 기피는 거의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라는 문장으로 끝맺고 있다. 영원성에 대한 생각은 옛날부터 죽음에서 그 가장 강력한 원천을 찾았다. 이러한 생각이 사라지면 죽음의 모습도 다른 양상을 띠게 될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변화는, 얘기의 기술이 사라지면서 경험의 직접성이 감소하는 정도에 발맞추어 일어나게 될 것이다.(177쪽)죽음은 얘기꾼이 보고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인준을 뜻한다. 그는 죽음으로부터 그의 권위를 빌어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의 얘기가 소급해서 그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인간의 自然史이다.(178쪽)사실상 <삶의 의미>는 소설의 중심을 이룬다. 소설이 전개되는 것도 이 중심을 둘러싸고서이다. 그러나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은, 곧 이러한 형상화된 삶에서 독자들 자신이 처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당혹감 그 자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엔 <삶의 의미>가, 저기엔 <이야기의 모랄>이 있다는 바로 이러한 구호를 가지고 소설과 이야기는 서로 대립되고 있으며, 또 이러한 구호에서 우리는 이들 예술형식들이 지니는 전혀 상이한 역사적 좌표를 읽을 수 있다. 소설의 최초(183쪽)의 완벽한 모범이 동키호테라면 소설의 최후의 완벽한 모범은 아마도 플로베르의 {감정교육 Education sentimentale}일 것이다.(184쪽)사실상 이야기에는 <그리고 나서 어떻게 되었는가?>하는 물음이 그 정당성을 잃게 되는 적은 한번도 없다. 그라나 소설가는 이와는 반대로 마지막 境界, 즉 그가 결말 Finis을 씀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삶의 의미를 어렴풋하게 인식하게 하는 그러한 경계를 한 발짝이라도 더 넘어설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184쪽)독자들의 관심을 흥미진진하게 돋우는 것은 무미건조한 재료이다. 모리츠 하이만은 언젠가 한번 <35살에 죽는(원문은 윗점) 사람은 그의 생의 모든 점에서 35세에 죽는 사람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문장처럼 애매모호한 문장도 없을 것인데, 우선 그것은 여기에서 그가 時制를 잘못 쓰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러하다. 이 문장이 뜻하는 바의 진의는, 35세에 죽었던 사람은 회상 속에서는 언제나 35세의 나이로 죽은 사람으로 보여질 것이라는 말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실제적 삶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못하는 문장이 기억된 삶에서는 이론의 여지없이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소설에 나타나는 인물의 본질을 이보다 더 잘 나타내 주는 문장도 없을 것이다. 이 문장은 소설에 나타나는 인물들의 삶의 <의미>는 오로지 그들의 죽음에 의해서만 비로소 해명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소설의 독자는 실제로, 소설에서 <삶의 의미>를 추출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들을 찾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의 독자는 어떤 식으로이든 간에 미리부터 그가 소설인물의 죽음을 함께 체험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부득이한 경우에는 소설인물들의 상징적 죽음, 즉 소설의 종말이라도 체험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 물론 더 좋은 것은 그들의 죽음을 체험하는 일이지만 말이다. 어떻게 해서 소설인물들은 독자들에게 죽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그것도 일정한 장소에서의 죽음)을 인지시킬 것인가? 소설에서 일어나는 사건에서 가장 열렬하게 독자들의 흥미를 돋우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문인 것이다.((185쪽)소설이 의미를 갖는 것은, 소설이 이를테면 제3자의 운명을 우리들에게 제시해 주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제3자의 운명이, 그 운명을 불태우는 불꽃을 통해서 우리들 스스로의 운명으로부터는 결코 얻을 수 없는 따뜻함을 우리들에게 안겨 주기 때문이다. 독자가 소설에 흥미를 갖게 되는 것은, 한기에 떨고 있는 삶을, 그가 읽고 있는 죽(185쪽)음을 통해 따뜻하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인 것이다.(186쪽)위대한 얘기꾼으로서의 모든 소설가는 마치 사닥다리를 아래 위로 오르내리는 것처럼 그들의 경험을 자유자재로 얘기할 수 있다. 아래로는 지구의 내부에까지 이르고 있고, 또 위로는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하나의 사닥다리는 집단적 경험-이 집단적 경험에서 보면 모든 개인적 경험의 가장 깊은 쇼크, 즉 죽음까지도 아무런 자극이나 장애가 되지 못한다-을 말해 주는 이미지이다.(186쪽)동화는, 신화가 우리들 가슴에 가져다준 악몽을 떨쳐버리기 위해 인류가 마련한 가장 오래된 조치방안을 우리들에게 알려 준다. 동화는 바보의 인물을 통하여 어떻게 인류가 신화에 대해 바보처럼 행동하였는가를 보여 주고, 막내동생의 모습을 통해서는 인류가 신화의 원초적 시간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짐에 따라 어떻게 그들의 가능성이 증대하고 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며, 두려움을 배우기 위해 떠났던 사람의 모습을 통해서는 우리들이 두려움을 갖는 사물들이 투시·파악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현명한 체하는 영리한 사람의 모습을 통해서는 신화가 제기하는 의문이 마치 스핑크스의 물음처럼 단순한 것임을 보여주며, 그리고 동화 속의 어린이를 도우는 동물의 모습을 통해서는 자연은 신화에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들하고도 함께 어울리기를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가장 현명한 조언-이러한 조언을 옛날에는 신화가 인류에게 가르쳐 주었다면 오늘날에는 아이들이 가르쳐 주고 있다-이 있다면, 그것은 신화적 세계의 폭력을 간계와 무모한 용기로 대처하는 것이다. (동화가 용기 Mut를 이를테면 변증법적으로 간계 Untermut와 무모한 意氣 Ubermut로 나누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동화가 소유하고 있는, 사물을 해방시키는 마법은 자연을 신화적 방법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해방된 인간과 공모관계에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성숙한 인간은 이러한 공모관계를 가끔, 다시 말해 그가 행복할 때에만 느낀다. 그러나 아이는 이러한 공모관계를 동화 속에서 처음 만나게 되고, 또 이를 통하여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187쪽)얘기꾼이란, 의로운 자가 얘기의 인물 속에서 자신을 만나게 되는 그런 인물이다.(194쪽)   3. 문예이론 [技術複製時代의 예술작품]예술작품은 원칙적으로 언제나 복제가 가능하였다. 인간들이 한때 만들었던 것은 인간들에 의해 언제나 다시 모방되어질 수가 있었다. 이러한 모방은 예술적 수련을 위해 도제들에 의해 행해졌고, 작품의 보급을 위해 예술의 대가들에 의해 행해졌으며 마지막에는 돈벌이에 혈안이 된 제3자에 의해서 행해졌다. 이에 비해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는 좀 새로운 현상이다. 기술적 복제라는 이 새로운 현상은 역사적으로 긴 간격을 두고, 그러나 점점 더 강도를 더해 가면서 관철되었다. 그리스인은 예술작품을 기술적으로 재생산하는 두 가지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鑄造와 刻印이었다.(199쪽)아무리 완벽한 복제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한가지 요소가 빠져 있다. 그 요소는 시간과 공간에서 예술작품이 갖는 유일무이한 현존성, 다시 말해 예술작품이 위치하고 있는 장소에서 그 예술작품이 지니는 일회적 현존성이다. 예술작품은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 역사에 종속되기 마련인데, 예술작품의 이러한 역사성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위에 말한 예술작품의 일회적 현존성이다. 예술작품의 일회적 현존성에 함께 포함되는 것은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예술작품이 겪게 되는 물리적 구조의(200쪽) 변화와 소유관계의 변화이다. 물리적 변화의 흔적은 오로지 화학적·물리적 분석을 통해서만 밝혀질 수 있는데, 이러한 분석은 복제품에서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소유관계의 변화의 흔적은 어떤 전통에 속하는 문제로서, 이 문제의 추적 또한 모름지기 원작의 상황을 그 출발점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201쪽)원작 Original의 시간적·공간적 현존성은 원작의 진품성이라는 개념의 내용을 이룬다.(201쪽)어떤 사물의 진품성이란, 그 사물의 물질적 지속성과 함께 그 사물의 역사적인 증언적 가치까지를 포함하고 또 그 사물의 원천으로부터 전수되어질 수 있는 사물의 핵심을 뜻한다. 사물의 역사적인 증언적 가치는 사물의 물질적 지속성에 그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복제의 경우 후자가 사라지게 되면 전자, 다시 말해 사물의 역사적인 증언적 가치 또한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물론 이렇게 해서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은 사물의 권위이다.(202쪽)복제에서 빠져 있는 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한 현존성을 우리는 분위기 Aura라는 개념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가능성의 시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작품의 Aura이다.(202쪽)역사의 거대한 여러 시대들 내부에서는 인간집단의 모든 존재방식과 더불어 인간의 지각의 종류와 방식도 변화를 겪기 마련이다. 인간의 지각이 조직화되는 종류와 방법, 지각이 이루어지는 매체는 자연적으로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그 성격이 규정된다.(203쪽)예술작품의 유일무이성은 그것이 전통의 상관관계 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전통 자체는 물론 무엇인가 살아 있는 것을 의미하고 또 무엇인가 변화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의 비너스상을 예로 들어 보더라도 그리이스인들은 전혀 다른 전통의 상관관계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중세의 승려들이 불길한 우상으로 보았던 비너스상을 그리이스인들은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공통적으로 마주 대하였던 것은 그 비너스상의 유일무이성, 달리 말해 그것의 분위기였다. 전통의 상관관계 속에 깊숙이 들어가 그 일부가 되고 있는 예술작품의 본래의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은 宗敎儀式 속에서이다. 주지하다시피 가장 오래된 예술작품은 처음에는 마술적 의식, 다음으로는 종교적 의식에 봉사하기 위해 생겨났다. 그런데 여기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실은, 예술작품의 이러한 분위기적 존재방식이 한번도 儀式的인 기능과 분리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달리 표현하면 <진짜> 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한 가치는, 그것에 제일 먼저 본래적 사용가치가 주어졌던 종교적 의식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에 있다. <진짜>예술작품의 유일무이한 가치는 제아무리 간접적으로 매개가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가장 세속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숭배의 여러 형태에서까지도 세속화된 儀式으로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205쪽)예술적 생산은 종교의식에 사용되는 形像物로부터 시작되었(207쪽)다.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바이지만 이들 형상물에서는 그것들이 보여진다는 사실보다는 그것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더 중요하였다. 석기시대의 인간이 동굴의 벽에 그린 사슴은 일종의 마법적 도구였다. 그 사슴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려지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무엇보다도 신령들을 위해 바쳐졌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종교의식적 가치는 예술작품이 숨겨진 상태에 머물러 있기를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면 어떤 神像들은 밀실에서 승려들에게만 그 접근이 허용되고 있고, 어떤 마돈나상은 거의 일년내내 베일 속에 가려져 있으며 또 중세사원의 어떤 조각들은 지면에서는 보이지 않게 되어 있다. 여러 예술활동이 제각기 종교의식의 모태에서 해방됨에 따라 예술활동의 생산품이 전시되어질 기회는 날이 갈수록 더 많아지고 있다.(208쪽)일찍이 사람들은 사진의 예술성 여부를 두고 이러쿵 저러쿵 많은 실랑이를 벌였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이에 선행되어야 할 물음, 즉 사진의 발명으로 인해 예술의 전체 성격이 바뀐 것이 아닐까 하는 물음은 제기하지 않았다.(210쪽)정신분석학을 통하여 충동의 무의식적 세계를 알게 된 것처럼 우리는 카메라를 통하여 비로소 시각의 무의식적 세계를 알게 된 것이다.(224쪽)모든 예술형식의 역사를 보면 거기에는 위기의 시기가 있기 마련인데, 이러한 위기의 시기에는 이들 예술형식은 변화된 기술수준, 다시 말해 새로운 예술형식을 통해서만 비로소 아무런(224쪽) 무리 없이 생겨날 수가 있는 효과를 앞질러 억지로 획득하려고 한다. 따라서 위기의 시기, 특기 이른바 퇴폐기에 생겨나는 예술의 괴상하고 조야한 형식들은 실제로는 이러한 시기의 가장 풍부한 역사적 에너지의 중심부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근래에 와서 그러한 야만적인 에너지로 충만한 예술운도을 볼 수 잇게 된 것은 다다이즘에서이다. 다다이즘이 지니는 충둥의 전모를 알게 된 것은 최근에 와서이다. 다시 말해 다다이즘은, 오늘날 대중들이 영화에서 찾고 있는 효과를 회화나 문학의 수단을 통하여 만들어 내려고 했던 것이다.(225쪽)다다이스트들은 그들 작품의 상품적 가치보다는 관조적 침잠의 대상으로서의 작품의 무가치성을 보다 더 중시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소재를 근본적으로 격하시킴으로써 이러한 무가치성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그들의 시는 외설스러운 문구나 말의 쓰레기를 합쳐 놓은 <말의 샐러드>이다. 단추나 승차권 등을 몽타주하여 불여 놓은 그림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수단을 통하여 이들 그림이 도달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만들어낸 작품의 분위기를 가차없이 파괴해 버리는 일이었고, 또 생산의 수단을 빌어 그들의 작품에다 복제의 낙인을 찍는 일이었다.(225쪽)예술작품은 다다이스트들에 이르러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시각적 환영이나 사람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청각적 구조이기를 그치고 일종의 폭탄이 되었다. 이 폭탄은 보는 사람의 눈과 귀에 와 닿는다. 그것은 촉각적 성질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로써 그것은 영화에 대한 수요를 촉진시키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영화의 정신분산적·기분전환적 요소는 무엇보다도 우선 촉각적인 것이고, 또 그것은 보는 사람의 눈에 단속적으로 들어오는 영화장면과 관점의 변화에 그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펼쳐지는 영사막과 그림이 놓여있는 캔버스를 한번 비교해 보자. 캔버스는 보는 사람을 관조의 세계로 초대한다. 그는 그 앞에서 자신을 연상의 흐름에 내맡길 수가 있다. 그러나 영사막 앞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영화의 장면은 눈에 들어오자마자 곧 다른 장면으로 바뀌어 버린다. 그것은 고정될 수가 없는 것이다....실제로 이러한 영상을 보는 사람의 연상의 흐름은 끊임없이 영상의 변화로 인하여 곧 중단되어 버린다. 영화의 충격효과는 바로 이러한 데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또 이러한 충격효과는 다른 충격효과가 모두 그러한 것처럼 단단히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는 상태에서만 어느 정도 완화되어질 수가 있는 것이다. 다다이즘이 아직도 정신적 충격 속에 포장해서 감싸고 있는 물리적 충격을 영화는 그의 기술적 구조의 힘을 빌어 그 포장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있는 것이다.(226쪽)예로부터 건축은 오락적·집단적 방식으로 그 수용이 이루어지는 예술작품의 원형이었다. 건축의 수용이 이루어지는 방식과 원리를 보면 우리는 이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을 것이다.(227쪽)건축술의 역사는 그 어떤 다른 예술의 역사보다도 장구하다. 그리고 건축술이 미친 영향을 머리 속에 떠올려 본다는 것은, 예술작품을 대하는 대중의 관계가 어떠한가를 알아 보려는 모든 시도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건축물의 수용은 두가지 측면, 즉 사용과 지각, 더 정확히 말하면 촉각과 시각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러한 수용방식은 이를테면 관광객이 어떤 유명한 건물 앞에서 주의력을 집중하여 그 건물을 수용하는 식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각적인 면이 갖는 관조에 해당하는 것이 촉각적인 면에는 없기 때문이다. 촉각적 수용은 주의력의 집중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익숙함을 통해 이루어진다. 건축의 경우 그러한 촉각적 수용은 상당할 정도로 시각적 수용까지도 경정하게 된다. 또 이러한 촉각적 수용은 본래 한 번의 긴장된 주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연히 어떤 대상을 주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건축물을 통해 형성되는 수용방법은 경우에 따라서는 규범적인 가치를 갖게 되는데, 그 이유는 역사의 전환기에서 인간의 지각구조에 부과된 과제는 단순히 시각, 다시 말해 관조를 통해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고, 또 그러한 과제는 촉각적 수용의 주도하의 익숙함을 통해 점차적으로 해결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228쪽)   [사진의 작은 역사]카메라에 비치는 자연은 눈에 비치는 자연과는 다르기 마련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카메라에는 인간에 의해 의식적으로 만들어진 공간 대신에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 드어선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예컨대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대강 어떻다고 흔히 말을 하지만 <걸어서 나아가는> 순간 순간의 자세가 과연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진은 고속도 촬영기나 확대기와 같은 보조수단을 통하여 이러한 것을 밝혀낼 수 있다. 마치 정신분석학을 통하여 충동적이고 무의식적인 세계를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사진술을 통하여 이와 같은 시각적이고 무의식적인 세계를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기술이난 의학이 밝혀내려고 하는 세포의 구조나 조직과 같은 것들은 모두 아름다운 풍경화나 아니면 영혼이 담겨 있는 초상화보다는 근본적으로 카메라에 더 가까운 것이다.(237쪽)   [수집가와 역사가로서의 푹스]엥겔스의 명제들을 잘 생각해 보면 볼수록 그만큼 더 명확해지는 것은, 역사를 변증법적으로 서술하는 일은 역사주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관조적 성격을 포기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사적 유물론자는 역사의 서사적 요소를 포기하기 않으면 안된다. 역사는 그에게 있어 어떤 구성의 대상이 되는데, 그 구성의 장소를 형성하는 것은 공허한 시간이 아니라 특정한 시대, 특정한 삶 그리고 특정한 작품이다. 그는 그 시대를 사물화된 <역사적 연속성>으로부터 폭파시켜 그 시대로부터 무엇을 이끌어낸다. 그래서 그는 그 시대로부터 삶을, 그리고 그 생애로부터 한 작품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구성을 통하여 얻어지는 성과는 바로 작품 속에 생애가, 생애 속에 그 시대가, 그리고 시대 속에 역사의 진행과정이 보존되어 있고 또 지양되고 있다는 점이다.(275쪽)역사주의가 과거의 영원한 상을 제시하고 있다면 사적 유물론은 일회적인 과거의 경험을 각각 제시해 준다. 구성적 요인을 통하여 서사적 요인을 해방하는 일이 이러한 경험의 조건임이 드러난다. 역사주의의(275쪽) <한때......이 있었다>라는 이야기 속에 묶여 있었던 강력한 힘들이 이러한 경험 속에서 해방된다. 모든 현재에 대해 어떤 근원적인 경험이 되는 그러한 역사와의 경험을 실천에 옮기는 일, 바로 이것이 사적 유물론의 과제이다. 사적 유물론은 역사의 연속성을 폭파하는 현재의 어떤 의식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276쪽)사적 유물론의 입장에서 보면 역사적인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맥박을 현재에 이르기까지 느낄 수 있는 어떤 이해되어진 것을 追체험하는 것을 뜻한다.(276쪽)우리는, 어떤 예술작품의(276쪽) 역사적 내용을, 그것이 예술작품으로서 우리에게 보다 투명하게 보일 정도로 파악하는 일이 단지 개별적인 경우에만 성공하고 있다는 점을 가차없이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의 예술작품을 파악하려는 모든 노력은, 그 작품의 냉철한 역사적인 내용이 변증법적인 인식에 의해 파악되지 않는 한 공허할 수밖에 없다.(277쪽)문화유산의 현존재는 그것을 창조한 위대한 천재들의 노고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는 이름도 없는 동시대의 부역자들의 노고에도 힘입고 있는 것이다. 야만의 흔적이 없는 문화의 기록이란 결코 없다. 지금까지 어떤 문화사도 이러한 사실이 지니는 근본적 의미에 공정치 못했으며 앞으로도 좀처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283쪽)개개인이 속하고 있는 계급이 생산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 생겨나게 되는 무의식적인 계급적 행동방식보다는 개개인의 의식적인 이해관계에 더 주목하는 관찰방식은 결과적으로 이데올로기형성에 있어서 의식적인 요인을 과대평가하게 만든다.(301쪽)경제생활에서 권력을 쥔자와 피착취자 사이에는 사법관료와 행정관료라는 한 장치가 끼어들게 되는데 이 장치의 구성원들은 더 이상 충분히 책임있는 도덕적 주체로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들의 <책임의식>이라는 것은 다름아닌 그러한 양심적 불구의 무의식적 표현인 것이다.(301쪽)   4. 언어철학과 역사철학 [언어의 모방적 성격]언어형성에 있어서의 모방적 행동은 擬聲語라는 이름하에서 인정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언어가 일종의 합의된 상징의 체계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언제나 다시 의성적 해명방식이라는 가장 원시적인 형태를 띠고 등장하는 생각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317쪽)<모든 말 그리고 모든 언어는 의성어적이다>라고 레온하르트는 주장한 바 있다. 이 문장 속에 담겨 있음직한 프로그램의 구체적 내용이 과연 무엇인가를 정확히 가늠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하지만 비감각적 유사성이라는 개념은 몇 가지의 길잡이를 마련해 주고 있다. 이를테면 우리가 동일한 것을 뜻하는 여러 상이한 언어의 단어들을, 이 단어(사물)들의 의미를 중심으로 해서 모아 놓으면, 우리는 이들 단어들이 모두-비록 그것들이 상호 아무런 유사성을 지니고 있지 않을지라도-어떤 방식으로 그 의미에 대해 그 중심부에서 상호 유사성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한번 연구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유사성은 상이한 여러 언어에서 동일한 것을 의미하는 단어들의 상호관련성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다시 말해 우리의 고찰은 입으로 말하는 언어에만 한정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입으로 말하는 언어 못지 않게 씌어지는 언어와도 관계를 맺고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씌어지는 말은-많은 경우 입으로 말해지는 말보다 더 명확하게-그것의 문자가 그것의 의미하는 바에 대해 갖는 관계를 통해 비감각적 유사성의 본질을 밝힐 수가 있다는 점이다. 간단히 말해, 말해진 것과 의미되는 것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씌어진 것과 의미되어진 것, 그리고 말해진 것과 씌어진 것 사이의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은 비감각적 유사성인 것이다.(317쪽)필적 해독법은 필적으로부터 필자의 무의식적 세계에 숨겨져 있는 이미지를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처럼 쓰는 사람의 행위를 통해 표현되는 모방적 과정은, 문자가 생겨나던 매우 오래된 옛날에는, 쓴다는 행위에 대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문자는 언어와 더불어 비감각적 유사성 내지 비감각적 교감(교응)의 기록부가 된 것이다.(317쪽)그러나 언어와 문자의 이러한 면은 언어의 다른 면인 기호학적인 면과 동떨어져서 발전하지 않는다. 언어의 모든 모방적 요소는 오히려 불꽃과 비슷하게 일종의 운반자 Trager에 의해서만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이 운반자가 곧 언어의 기호학적 요소이다. 그러니깐 단어나 문장이 갖는 의미의 상관관계가 바로 운반자인 셈인데, 이것을 통해 유사성은 비로소 일종의 섬광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318쪽)   [번역가의 과제]어떤 예술작품이나 예술형식을 인식하는 데 있어 수용자를 고려하는 일은 결코 생산적이 되지 못한다. 비단 어떤 특정한 수용자층이나 아니면 그들의 대표자를 고려하는 일만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이상적> 수용자라는 개념까지도 모든 예술이론적 논의에서 방해요소가 되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논의들은 단지 인간의 현존재와 본질만을 그 전제로 하고있기 때문이다. 예술 역시 이와 같은 식으로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존재를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실제의 예술작품에서는 인간의 반응은 별로 문제시되고 있지 않은데, 그 이유는 그 어떤 시도 독자들을, 그 어떤 그림도 관람자를, 또 어떤 심포니도 청중을 겨냥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319쪽)궁국적으로 보면 삶의 영역은 자연이 아닌 역사에 의해 정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더욱이나 영혼이나 감각과 같은 막연한 것에 의해 삶의 영역이 정해져서는 안된다. 따라서 철학자의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보다 광범위한 삶의 역사를 통해 모든 자연적 삶을 파악하는 데 있다.(322쪽)한 작가가 살던 시대의 문학적 언어의 경향은 시대가 지나면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며 또 잠재적 경향은 기존 형식으로부터 새로이 그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한때 새롭게 보였던 것도 시간이 지나면 진부한 것이 될 수 있고 또 한때 유행했던 것이 나중에 가서는 옛스러운 것이 될 수도 있다. 언어의 이와 같은 변화와 의미의 끊임없는 변화의 본질을 언어와 작품의 고유한 삶에서 찾지 않고 후세 사람들의 주관성(가장 조야한 심리주의까지 포함해서)에서 찾는다는 것(323쪽)은 원인과 본질을 혼동하는, 더 정확히 말하면 가장 강력하고 생산적인 역사적 과정의 한 단계를 사고의 무능력으로 인해 부인하는 것을 뜻한다.(324쪽)   [역사철학테제]이러한 슬픔(멜랑콜리)의 본질이 무엇인가는 다음과 같은 질문, 즉 역사주의의 신봉자들은(346쪽) 도대체 누구의 마음이 되어 보려고 감정이입을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본다면 한층 더 명확해질 것이다. 대답은 두말할 나위없이 승리자의 마음이 되어 보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런데 그때마다의 새로운 지배자는 그들 이전에 승리했었던 모든 자들의 상속자이다. 따라서 승리자의 마음이 되어 본다는 것은 항상 그때마다의 지배자에게 유리하게 됨을 뜻한다. 이로써도 역사적 유물론자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승리를 거듭해 온 사람은, 땅바닥에 누워 있는 사람들을 짓밟고 넘어가는 오늘날의 지배자의 개선행렬에 함께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전리품이란 지금까지 으레 그러했던 것처럼 이 개선행렬에 함께 따라다닌다. 우리가 문화유산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 전리품을 두고 하는 말인 것이다. 이러한 문화유산을 역사적 유물론자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비판저긍로 관찰하고 보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가 문화유산에서 개관하는 것은 하나같이 그에게는 전율 없이는 생각할 수도 없는 원천에서 비롯하고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문화유산의 현존재는 그것을 창조한 위대한 천재들의 노고뿐만 아니라, 이름도 없는 동시대의 부역자들의 노고에도 힘입고 있는 것이다. 야만의 기록이 없는 문화란 있을 수 없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한번도 없다. 문화의 기록 자체가 야만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이 사람 손에서 저 사람 손으로 넘어가는 傳承의 과정 또한 이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유물론자는 가능한 한도내에서 이러한 전승으로부터 비켜난다. 그는 곁에 거슬러서 역사를 솔질하는 것을 그의 과제로 삼는다.(347쪽)억눌린 자들의 전통이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교훈은, 우리들이 오늘날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비상사태>라는 것이 예외가 아니라 상례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러한 인식에 상응하는 역사의 개념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되면 진정한 비상사태를 도래시키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는 사실이 명약관화해질 것이고, 그리고 이를 통해 파시즘에 대한 투쟁에서 우리가 갖는 입장도 개선될 것이다.(347쪽)역사의 연속성을 폭파시키고자 하는 의식은, 행동을 개시하려는 순간의 혁명적 계급에 고유한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은 새로운 달력을 도입하였다. 이 새로운 달력의 첫날은 역사의 低速度 촬영기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 기억의 날로서 국경일의 모습을 하고 언제나 다시 되돌아오는 그 날은 따지고 보면 항상 동일한 날인 것이다. 따라서 달력은 시계처럼 시간을 계산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백년이래 유럽에서는 그 가장 희미한 흔적조차도 드려내지 않았던 역사의식의 기념비이다.(353쪽)역사적 유물론자는 과도기로서의 현재의 개념이 아니라 시간이 그 속에 머물러 정지상태에 이르고 있는 현재의 개념을 포기할 수 없다. 그 까닭은 이와 같은 현재의 개념에 의해서만 역사를 쓰고 있는 현재가 정의되기 때문이다. 역사주의가 과거의 <영원한> 이미지를 나타낸다면 역사적 유물론자는, 일회적인 과거와의 유일무이한 경험을 보여준다. 역사적 유물론자는, 과거의 영원한 이미지 따위는 역사주의의 유곽에서 <옛날 옛적>이라고 불리우는 창녀에게 정력을 탕진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맡겨 버리고, 대신 그는 자신의 힘을 스스로 제어하면서 역사의 지속성을 폭파시키기에 충분한 힘을 가진 남자로 계속 남아 있는 것이다.(354쪽)<이 지구상의 유기적 생물체의 역사와 비교한다면 호모 사피엔스(인류)의 보잘 것 없는 오천년 역사는 이를테면 하루의 24시간 중의 마지막 2초와 같은 것이고 또 이러한 기준에서 두고 보면 문명화된 인류의 역사는 기껏해야 하루의 마지막 시간의 마지막 초의 1/5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어느 현대의 생물학자는 말한 바 있다. 메시아적 현재시간의 모델로서 전 인류역사를 엄청나게 축소해서 포괄하고 있는 현재시간 Jetztzeit은 우주 속에서 인류의 역사가 만든 바로 그 형상 Figur과 정확하게 일치한다.(355쪽)역사주의는 역사의 여러 상이한 계기 사이의 인과관계를 정립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사실도 그것이 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해서 역사적 사건이 되는 법은 없다. 원인으로서의 사실은, 수천년이라는 시간에 의해 그 사실과는 동떨어져 있을 수도 있는 사건들을 통해서 추후에 역사적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제에서 출발하는 역사가는 사건들의 계기를 마치 염주를 하나하나 세듯 차례차례로 이야기하는 것을 중지하고 그 대신 그가 살고 있는 자신의 시대가 지나간 어느 특정한 시대와 관련을 맺게 되는 상황의 배치로 파악한다. 이렇게 해서 그는 메시아적 시간의 단편들로 점철된 <현재시간>으로서의 현재라는 개념을 정립하게 되는 것이다.(3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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