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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효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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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그리움의 고향(외 2편)
2014년 08월 25일 14시 27분  조회:1083  추천:2  작성자: 강효삼

누군들 고향과 인연이 없으련만 나는 나서자란 고향과 좀 특이한 인연이 있다. 남들처럼 고향에 붙박혀 산것이 아니라 여러번 고향을 떠나다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면서 고향의 귀중함을 깨우쳤다.

내가 처음으로 고향을 떠난것은 소학교 6학년 전학기였다. 분가하여 이주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따라 아성이란 작은 도시에 이사했다. 갈 때는 전등불이 있는 도시라고 하니 마음이 울렁거렸고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촌놈이여서인지 아니면 고향에 정이 들어서인지 은근히 고향산천이 그리워 고향이 자리잡고있는 동쪽을 바라볼 때면 저도 모르게 그리움에 눈물까지 핑― 돌았다.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였다. 첫주의 토요일이 되니 너무 고향에 남아계시는 아버지네 집으로 가고싶어 선생님께서 휴가를 주지 않자 몰래 도망쳐서 50리 길을 간적이 있다. 그때 현성을 벗어나 멀리서 손짓하듯 누워있는 고향산을 바라보니 마음이 가벼웠고 몇십리 걸음도 힘들지 않았다.

기실 나의 고향은 봉산아래 자리잡은 너무도 소박하고 조용한 마을이다. 뒤로는 마이강이 굽이쳐흐르고 여기저기 크지 않은 들판에 띄염띄염 마을들이 자리잡은것이 보기에 매우 스산하다. 그런데 나는 왜 이 고장이 좋을가? 아마 어릴 때부터 때가 묻은 곳이고 사람도 산천도 익숙하고 친절하기때문일것이다. 그때 고향밖을 많이 나가보지 못한 나는 고향이 제일 좋았다. 산과 물이 제일 좋았고 고항친구가 제일 편했으며 고향의 곡식이 제일 맛있었다. 하여 고향에 오면 특별한 볼거리도 없지만 어릴 때 자주 가던 산에 오르고 물고기를 잡고 이웃을 만나면서 시간이 지루함을 전혀 몰랐으니 그야말로 고향은 그 어떤 특별한 매력과 흡인력이 있는것 같다.

그러나 나는 또 고향을 떠나야 했다. 부모님이 이주하면서 아주 멀고 낯선 곳으로 가게 되였다. 신비한 낯선 곳으로 간다기에 처음에는 고향을 떠나는 서러움을 몰랐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고향이 그리웠다. 나는 다시 고향에 돌아왔고 고향에서 교편을 잡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고향산천과 고향사람들의 삶을 글에 담았다. 그리고 고향의 젊은이들과 함께 겨울이면 마른 과자를 씹으며 문예종목을 만들어 고향사람들앞에서 공연했다. 영화도 공연도 볼수 없고 텔레비죤과 라지오도 없던 문화갈증의 시대에 전기도 없이 등잔불을 켜놓고 보는 마을청년들의 문예공연이지만 고향사람들은 집안이 터질듯이 모여왔다. 나는 그것이 너무 고마와 고향에 있는 동안 거의 해마다 선두에서 문예공연을 조직했다.

부득이한 사정때문에 나는 또 고향을 떠나야 했다. 《문화대혁명》이 터지면서 교원사업조차 할수 없게 되여 타지 학교로 가게 되였다. 하지만 나는 또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고향사람들은 분주하게 왔다갔다 하는 나에게 눈총을 쏜적이 한번도 없었다. 아마 내가 고향을 위해 홍보하고 힘쓴 보람일것이다. 나는 《문화대혁명》때 당한 억울함을 시정받은후 고향마을에서 다시 교편을 잡고 고향의 문화사업을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고향을 노래하는 글을 많이 썼다.

그후 인구대이동이 생기면서 고향사람들이 하나 둘 도시로 진출하자 나도 얼마후 고향을 떠났다…

이제 고향은 그리움뿐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기때문이다.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들은 흙으로 떠나갔고 살아있는 세대들은 고향을 등지고 멀리 연해도시 혹은 가깝지만 농촌이 아닌 도시로 떠나갔다. 어쩜 지금은 고향상실의 시대이고 고향변화의 시대이며 고향을 바꾸는 세월일가. 몇십년 오붓이 이마 맞대고 우리 민족들이 한 고향에 붙박혀 대를 이어 살아가던 삶은 영원히 과거가 되지 않았을가?!

그러나 고향은 의연히 고향이다. 그것은 내가 나서 살아온 곳이기때문에 항상 그립다.

나에게 있어서 고향은 바로 그리움이다.

 

다문화가족이 되면서

 

아들의 결혼식때문에 멀리 미국과 일본 등지에 가서 정착한 딸들이 애들을 데리고 왔다. 우리 가족에 참으로 오랜만에 한상에 모여앉아 밥을 먹으면서 재미 있게 이야기를 나눌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러나 정작 바랐던 감동적이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긱할수 없었다. 나의 자식세대까지는 단일 조선족으로 우리 말 대화가 가능했지만 지금 자식들의 남편들과 애들은 타민족이거나 타국의 사람이여서 소통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이제 우리 가정도 다문화가족으로 되였기때문이다.

일본국적인 큰 사위와 큰 외손녀는 일어를 그리고 작은 사위는 한족이다보니 한어를, 미국에 가 출생한 작은 외손녀는 영어를 했다. 이렇게 한 밥상에 앉아 밥을 먹으면서도 조선어, 한어, 일어, 영어 네가지 언어를 사용하다나니 우리 가족은 작은 《유엔》이 된셈이다. 나는 언어가 통하지 않아 재미 있게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것이 제일 안타까왔다.

누가 이런 세상이 올줄을 꿈엔들 생각했겠는가. 나는 일제 강점기에 태여났지만 그때 불과 세살밖에 되지 않아 일어를 배우지 못했다. 그후 소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면서도 일어나 영어는 적대국의 언어라고 근본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았다…

나는 한때 변화된 세상을 직시하지 못하고 외국어에 대해 편견을 가졌었다. 이제라도 가능하다면 일어나 영어를 배우련다. 설사 나이 많아 잘 배우지 못하더라도 외국어에 대한 거부감만을 깡그리 버리겠다. 그리고 자식들한테는 더 많은 언어를 배우라고 권장하여 언어가 바로 재부라는것을 깊이 깨닫게 하겠다.

물론 자식들은 조선민족으로서 우리 말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아무리 타지방에서 타민족들과 함께 살더라도 우리가 조선민족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어린 손자, 손녀들한테 우리 말과 글을 배우도록 하겠다. 자식들이 떠날 때 나는 유치원에 가서 우리 말 독본을 사주었다. 타국에서 이 독본으로 꼭 아이들한테 우리 말을 가르쳐주길 진심으로 바랐다.

조선민족언어는 세계 어디서나 발달한 언어로 주목을 받고있다. 글로벌화시대에 물질의 풍요를 얻는 대신 자기 민족을 잃어서는 안된다. 누군가 《민족적인것이 바로 세계적인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다문화적인 삶에 적응하면서도 자기 민족을 잊지 않고 사는것이 중국조선족의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가싶다.

 

미운 가난 고운 삶

 

나는 지금도 부유하지 않지만 과거는 그야말로 가난하여 서발막대 거칠것 없는 삶을 살아왔다. 그때는 20세기 70년대였다. 모두다 가난한 세월이라 하지만 나는 왜 더 가난했을가? 그것은 부모가 물려준 재산이 너무 없는데다 경제대우가 낮은 시골의 교원사업을 했기때문이다. 그때는 한근에 30전씩 하는 소고기도 사먹지 못했다.

단돈 1원도 없어 남에게서 꾸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쌀이라도 팔려고 쌀주머니를 숨겨가지고 온 동네를 다니면서 쌀 사라는 말을 입밖에 낼수 없어 그만 집으로 돌아왔다. 결국 그처럼 주인에게 충실한, 집에서 기르던 개를 닭 한마리 값을 받고 판적도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친척들도 가난한 우리와 거래하기를 꺼리는 눈치였다. 지어 어떤 친척은 로골적으로 우리를 무시했다. 한번은 아이들을 데리고 그래도 설인사를 한다고 찾아갔는데 우리가 가지고 간 물건이 너무 적어선지 《주둥이를 끌고 구걸하러 다닌다》고 인격적인 모욕까지 서슴지 않아 지금도 나의 가슴에 못으로 박혀있다. 가난하면 사람대접조차 제대로 못 받는다. 오죽하면 거지에게는 인격도 없다고 했겠는가!

가난때문에 우리는 별의별 기시와 미움을 다 받았다. 나는 가난에서 해탈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분발했다. 밭에서 일하고 돌아오면서 길에 나뒹구는 나무토막 하나라도 주었고 모자라는 식량을 보태기 위해 달 밝은 가을밤이면 혼자 콩이삭과 벼이삭을 줏기도 했다. 지어는 50전이면 편하게 타는 뻐스비마저 남기려고 걸어다녔다. 어쩌다 현성에 갈 때면 타래떡 하나 사먹고싶었지만 꾹 참고 그 돈으로 집에서 쓸 사소한 가장집물 하나라도 사왔다.

후에 향의 간부가 되였을 때도 몇십호가 운집해 사는 향소재지 마을에서 직접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학교에서 내라는 불쏘시개값 3원이 아까와 대신 아이들과 함께 산에 가서 싸리나무를 해 학교에 바친적도 있었다. 이렇게 아글타글 애써 절약하면서 나 혼자의 로임으로 식솔 다섯이 살았다. 더는 남에게 구걸하지 않고 살면서 오히려 힘들게 모은 돈으로 친척들을 도와줄수 있었다. 만일 가난때문에 받는 수모가 괴롭다고 하소연만 하면서 남들이 동정하고 도와줄것만 바라고 남들의 도움을 받는데 만족했더라면 지금도 남의 손만 바라보며 게으름까지 덧붙인 못난 사람으로 살고있을것이다.

가난은 수치가 아니다. 그러나 혹독하게 불편할뿐이다.속담에 3대 부자가 없고 3대 가난뱅이가 없다고 했다. 누군가 가난이 두려운것이 아니고 기개가 없는것이 두려운것이라고 했다. 가난은 매섭지만 《좋은 스승》이여서 가난해도 마음이 죽지 않고 마음이 가난하지 않으면 된다. 그것은 가난하면 변하려 하고 변하려 하면 길이 열리기때문이다.

미운 가난을 고운 삶으로 전변시키는것은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으로서 희망은 가난한자의 빵과 같은것이다.

/강효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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