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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시학 – 홍문표
2022년 02월 22일 21시 48분  조회:734  추천:0  작성자: 강려
 출처 -홍문표 문학관

은유시학 홍문표
 
은유의 시학1-비유란 무엇인가
https://youtu.be/_5O9vl6Bn6c

1. 비유의 어의
비유(比喩-견줄비, 깨우칠유, 譬喩-비유할비)
견주고 비교해서 깨달음,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직접 설명하지 아니하고 다른 비슷한 현상이나 사물에 빗대어서 설명하는 어법 .

2. 비유의 전략
1) 비교(compare)
A와 B를 비교하다, 견주다, 둘 또는 그 이상의 사물이나 현상을 견주어 서로 간의 유사점과 공통점, 차이점 따위를 밝히는 일. 특히 비교법은 앞뒤의 사실을 비교하는 방법으로 쓰이며 성질이 비슷한 두 가지의 사물이나 내용을 서로 비교하면서 그 차이로 어느 한쪽을 강조하는 수사법, 그래서 강조법이라고도 함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은 정열은
사랑보다 강하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변영로 <논개>에서

거룩한 분노-종교와 비교, 불붙은 정열-사랑과 비교, 푸른 그 물결-강낭콩 꽃과 비교, 그 마음-양귀비꽃과 비교, “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에서는 ‘너의 넋’을 ‘수녀’에 견주어 더 외롭다, “하늘이 높은들 땅이 높은들 끝없는 이 행복에 어찌 비기랴.”에서는 ‘하늘’, ‘땅’, ‘행복’ 사이의 우열을 비교하고 있다.

2) 유추(類推, analogy), 유사성(類似性, similarity)
비유하여 추리한다, 유비추리의 준말, 우리가 평소에 알고 있는 지식으로 어려운 대상을 쉽게 설명하는 방식, 생소한 개념이나 매우 어렵고 복잡한 어떤 주제를 설명하고자 할 경우, 그 개념이나 주제와 유사성을 지닌 보다 친숙하고 단순한 어떤 개념이나 주제를 유추해 나가는 전개 방법이다. 따라서 비유에서는 표현할 대상과 이를 견주어 보는 대상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하는 유추 즉 아날로지가 중요한 기능이 된다.
앞서 시 <논개>에서 분노를 종교와 비교, 정열을 사랑과 비교, 물결을 강낭콩 꽃과 비교, 마음을 양귀비꽃과 비교하였는데 이러한 비교는 두 사물 간에 어떤 면에서는 서로 유사성이 있음을 유추해서 가능한 것이다.

“개구리가 몸을 낮추는 이유는 멀리뛰기 위함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 사는 것도 마찬가지 다.” 따라서 비유는 a를 b에 빗대서 '표현'하는 것이고, 유추는 a가 이러이러하니 b도 이러이러할 것이라고 논리적으로 '추측'하는 것인데 유추는 이처럼 비유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 된다. 성서에 보면 “부자가 천국에 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는 구절이 있다. 부자는 천국에 가기 어렵다는 주제를 낙타와 바늘구멍으로 대비시켜, 말하고자 하는 사상을 구체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예다.

3) 전이(轉移 transfer) 또는 메타포(metaphor)
전이란 자리나 위치 따위를 다른 곳으로 옮김. 심리학에서는 어떤 대상에 향하였던 감정이 다른 대상으로 옮아감, 시각적인 것을 촉각적인 것으로, 촉각적인 것을 시각적인 것으로 나타냄, 병원체나 종양 세포가 혈류나 림프류를 타고 다른 장소로 이행(移行), 물질이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달라짐, 그런데 메타포(metaphor)란 말도 은유로 번역되어 비유의 한 방법으로 알고 있지만 그 어원을 보면 meta는 초월, 벗어남(over, beyond)의 뜻이고 phor는 이동한다(carrying)는 뜻이다. 따라서 메타포도 전이란 말과 같이 어떤 사물이나 의미나 감정이 다른 사물이나 의미나 감정으로 옮겨져 전자의 사물이 후자의 사물로 완전히 전환하는 것인데 이는 비유의 본질이기도 하다.

따라서 ‘A는 B와 같다’는 식의 소극적인 비유가 아니라 ‘A는 B다’ ‘인생은 여행이다’처럼 A를 B로, 인생을 여행으로 완전히 바꿈, 그 본래의 의미와는 별도로, 전이, 전화(轉化)된 의미로 사용, 의미를 확장 전환 창조, 이러한 표현은 이질적인 것의 동일화가 느닷없이 이루어지는 까닭에 매우 강렬한 비유 효과를 지닌다. 이러한 은유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우선 비교되는 두 대상이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해 있지 않으면 안 되고, 그 비교에 어느 정도 연상적인 타당성과 설득력, 그리고 의외성의 긴장감이 있어야 한다.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번 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 흘림.
- 박두진 「꽃」에서


이 시에서 시인은 꽃에 대한 객관적 진술을 하지 않고, 꽃을 속삭임, 울음, 피 흘림이라는 의미로 전이되어 꽃의 본래의 의미나 성격이 변용․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진정 시의 창조성이 있다.

4) 원관념(原觀念)과 보조관념(補助觀念)
비유란 나타내려고 하는 생각이나 사물을 다른 사물에 빗대어 표현하는 어법인데, 여기서 원래 나타내려고 하는 생각이나 사물을 원관념, 빗대는 다른 사물을 보조관념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원관념은 비유되는 대상, 즉 표현하고자 하는 사물을 뜻하고 보조 관념은 비유하는 대상, 즉 원관념이 잘 드러나도록 돕는 관념을 말한다.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라고 했을 때, 원관념은 '꽃'이 되고 보조관념은 '내 누님'이 된다.
리처즈는 여기서 ‘꽃’과 같은 원관념을 주지(主旨tenor)라 하였고, ‘내 누님’ 같이 주지와 동일한 간격으로 사용된 보조적 용어들을 매개어, 매체(vehicle)라고 하였다.

앞서 변영로의 시 <논개>에서
원관념, 주지-분노 정열 물결 마음
보조관념 매체-종교 사랑 강낭콩 꽃 양귀비꽃
박두진의 시 <꽃>에서 ‘꽃’은 원관념, 주지가 되고 ‘속삭임’, ‘울음’, ‘피흘림’은 보조관념, 매개어 매체가 된다.

이처럼 비유는 원관념이 보조관념을 통해 비교되고 유추되고 전이되는 어법이고 문학, 그 중에서도 시는 이러한 어법이 중심을 이룬다.

그런데 리처즈에 의하면 주지와 매체, 즉 원관념과 보조관념(꽃과 누님) 사이의 상이성이 크면 클수록 좋은 비유가 된다. 그는 상이성을 '거리'라는 말로 설명한다. 주지와 매체의 거리가 너무 가까울 경우에 두 힘 사이의 탄력은 상실되어 긴장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리가 지나치게 멀어 상호 작용할 수 없을 때에도 긴장은 생기지 않는다. 긴장은 주지와 매체 사이의 관계가 적절하면서도 두 힘이 팽팽하게 대립될 때에만 생겨난다. 다시 말하면 비유가 몹시 폭력적이거나 충격적이기 때문에 강렬한 것이 아니라, 서로 거리가 멀면서도 적절하기 때문에 강렬한 것이다. 긴장의 밀도가 짙을수록 비유의 효과는 극대화되며, 그 극대화를 통해 감동과 새로운 인식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은유의 시학2- 비유의 탄생

https://youtu.be/41oG2s-I5cQ

1) 언어의 탄생
인간은 누구나 세상만물에 대한 인식에의 욕망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사물을 자기화하려는 본능에서 비롯되고 있다. 마치 신이 모든 사물을 인식하고, 소유하고, 창조하면서 무소부지한 존재가 되듯이 인간들도, 모든 사물을 이해하고 소유하는 만물의 주체가 되고 싶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끼리도 의사소통을 원한다. 그래서 사물에는 각각의 이름을 붙이고 서로 간의 소통을 위한 소통신호(code)를 만드는데 이것이 바로 언어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언어를 통해서만 사물을 인식하고 소통할 수밖에 없는 언어적 존재들이 되었다.

2) 언어의 한계
그런데 우리가 사물에 접근하고 서로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 믿고 있는 언어란 사물을 대신하는 추상적인 개념이거나 기호이거나 이름일 뿐이지 사물 그 자체는 아니다. 말은 사물이 아니다. 지도는 실제 땅이 아니다. 언어는 사물에 붙인 단어나 사물의 개념을 사용할 뿐이지 사물 자체 또는 그 내면이나 본질까지를 인식하고 소유하지는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여기에 언어의 근원적인 한계가 있다.

그동안 우리는 언어만 있으면 무엇이고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언어만 있으면 나도 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물은 한없이 많고 끝없이 생성되는 반면 언어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 모든 사물들을 기존의 언어를 가지고는 언제나 부족한 실정이다. 더구나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인간의 미묘한 감정도 기존의 언어로는 그 섬세한 뉘앙스를 정확하게 표현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실정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사물을 보다 정확하게, 보다 깊고 넓게, 보다 감동적으로,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하고자, 그리고 기존 언어의 불완전성을 극복하고자, 또한 새로운 사실, 새로운 개념을 발견했거나, 새로운 감정을 느꼈을 때 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계속 기존의 불완전한 언어를 보완할 수 있는 언술방법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비유라는 어법의 탄생이다.

3) 기지의 언어로 미지의 세계를
‘병모가지’란 말이 있다. 병의 윗부분은 통이 좁고 잘록하다. 이 부분을 명명하고자 할 경우 이미 동물의 머리와 몸통 사이의 잘록한 부분을 ‘모가지’라고 한다. 따라서 병의 잘록한 부분을 동물의 모가지와 유사한 것으로 유추하여 병과 모가지를 결합한 병모가지라는 용어를 만들게 된다. 이는 모가지란 기존의 언어가 없었다면 ‘병모가지’란 지시어가 쉽게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강의 입'(河口)이나 '지구의 허파'(아마존 원시림), '바늘귀' '열광의 파도', '흥분의 물결', '빗발치는 욕설' "우리는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을 매일 기다린다" 등도 기존의 언어로 미지의 새로운 현상을 명명한 것이다. 이때 미지의 언어는 원관념 기지의 언어인 입 허파 귀 파도 물결 빗발 콩나물시루 등은 보조관념이 된다.

4) 숨은 존재와 계시(啓示)
한편 진리나 도, 또는 본질이란 형이상학의 세계, 불가시의 세계를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우리들의 의식 밖에 존재하는 영원하고 절대적인 신의 세계 초월적인 세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리들이 경험하고 의식할 수 있는 사물의 세계라 할지라도 그것의 올바른 내면까지 그 숨어 있는 세계를 확인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불가시의 세계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먼저 그런 세계와의 의사소통이나 감정소통이 가능해야 한다. 그리고 소통을 위해서는 소통의 통로가 있어야 한다. 이 소통의 대표적인 기호가 언어다. 그러나 초월적인 세계나 내면의 세계와는 사전에 정해진 약호가 없다. 그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소통의 중간 다리. 즉 중개 물이 필요하다. 미국인과 한국인 사이에 통역이 필요하듯이,
그래서 신들이 인간과 소통하는 데는 신이 직접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계시(啓示)나 음성이나 꿈이나 표적이나 예언자 등의 간접적인 방법으로, 즉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중개 물을 통한다. 민간 종교에서는 무당이 이를 대신한다. 이때 계시나 음성이나 꿈이나 예언자 무당 등의 중개자 역할이 바로 비유에서 보조관념이기도 하다. 여기에 비유의 위력이 있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한용운<알 수 없어요>에서

누구의 발자취(원관념)-오동잎(보조관념 계시물)
누구의 얼굴(원관념)-하늘(보조관념 계시물)

4. 죽은 비유, 사유(死喩 dead metaphor)
비유는 언어의 불완전성을 보완하는 최대의 무기다. 따라서 비유는 일상어에도 있고 문학어나 시에도 있다. 그리고 인간이 불완전한 언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계속 비유어를 개발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문학 특히 시의 경우 비유를 사용할 때는 이미 사용된 비유어를 사용할 경우 시의 개성이나 창조성을 상실하게 된다. 시가 일상어나 산문과 다른 점은 리듬도 있어야 하지만 비유의 참신성에서 감히 예술이니 창작이니 말하게 된다.
따라서 이미 굳어버린 비유, 이미 일상어가 되어버린 상투적인 비유를 시에서는 죽은 비유, 사유(死喩 dead metaphor)로 취급하게 된다.

‘앵두 같은 입술’ ‘달덩이 같은 얼굴’ 뜨거운 감자‘ “그는 청산유수다” 등이 그것이다. 특히 한자어 고사성어 등은 금물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시인이 이미 사용한 비유어를 그대로 쓴다면 이는 표절이 된다. 반대로 일상어에서는 굳어버린 비유어를 쓰는 것이 효율적일 수 있다. 그렇다면 참신한 비유가 시의 생명이 된다.
은유의 시학3-수사법의 3원칙
https://youtu.be/_NkQu8UT0N4


(1) 수사학과 과거 언어표현법(음성언어중심시대)
수사학이란 (rhetoric 修辭學)이란 사람을 설득하고 그에게 영향을 끼치는 언어기법을 연구하는 학문. 고대에는 언어의 효과적 사용방법을 수사학으로 규정. 그런데 어의에서 보듯이 수사(修-닦을수 辭-말씀사)란 언사(言辭)의 수식(修飾)이란 뜻으로 말과 글을 아름답게 꾸미는 데 그 의의가 있었다. 심지어 극단의 궤변, 이러한 수사학은 오랫동안 문장을 장식하는 수단으로만 생각되었으나, 현대 사회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정확한 전달과 설득을 위한 모든 수단을 고찰하는 기능으로 주장되기도 한다.

(2)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설득의 3요소 로고스(Logos), 파토스(Pathos), 에토스(Ethos)
로고스는 듣는 사람을 논리적으로 설복시키는 어법, 따라서 논리적 설득은 가장 합리적인 설득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가 기승전결을 갖추고 체계적으로 전개되고, 삼단논법 등을 사용해서 결론 도출에 타당한 근거가 제시된다면, 청중은 변론가의 주장에 대해 신뢰감을 갖게 된다. 학술, 변론 등의 언술
파토스는 듣는 사람의 마음에 호소하는 것, 듣는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는 근거를 통해 주장을 펼치는 것이 파토스다. 즉, 파토스는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일정한 정서적인 틀을 부여하여, 말하는 사람의 말에 동화시키는 어법. 연설 설교 문학적인 문장

에토스는 말하는 사람의 인품이나 지식, 전문성이나 경험 등을 설득의 근거로 제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화자의 품성이라고도 함. 말하는 사람의 품성이 듣는 사람에게 믿음을 줄 때, 그가 말하는 내용을 쉽게 믿는 경향이 있다. 또한 의사소통이 일어나고 있는 사회 구성원들이 공통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관습·가치관·습속 등의 도덕성을 동시에 의미하기도 함. 도덕성 윤리성
 
은유의 시학4- 현대 문장 표현법의 3원칙 (문자중심언어시대)
https://youtu.be/PggRfe3cEOI


(1) 효과적 표현의 3 원리
일반적으로 문장이라면 기본 문법에 맞는 의미 전달, 즉 달의(達意)의 문장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보다 효과적인 소통을 위하여 비유의 원리, 변화의 원리, 강조의 원리를 개발하게 되었다.

비유의 원리란 추상적인 것, 막연해서 포착하기 어려운 사물에 어떤 형태를 주어 보임으로써, 한결 명확한 인상을 주는 원리이다. 따라서 본래 나타내고자 하는 어떤 사상(事象)을, 그와 비슷한 다른 사상에다 빗대어 표현하는 기교다. 가령, ‘반갑다’를 ‘죽은 아들이 되살아난 것처럼 반갑다.’고 하면, 그 ‘반갑다’는 내용과 정도가 한층 더 실감을 자아내게 한다.

변화의 원리는 인간은 누구나 단조롭거나 평범한 것을 싫어한다. 문장의 경우도 문법에 맞는 고지식한 문장, 평범한 문장은 이내 식상하게 된다. 그래서 문장의 순서를 바꾼다든지, 문장을 생략하거나 의문형으로 만들어 독자나 청자의 관심을 새롭게 한다. 가끔은 외식이 필요하다. 매번 같은 음식, 매번 같은 어조의 설교가 얼마나 지겨운 일인가.

강조의 원리는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사상, 감정이 정확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전달되기를 원한다. 특히 작자의 사상이나 감정 표현의 문장 중 특히 어느 부분을 보다 더 명확하게 전달하여, 독자에게 강한 인상을 주려고 하는 원리이다. 말하기에서도 중요한 내용을 전달할 때는, 소리를 높이거나 제스처를 사용하거나 같은 내용을 반복하여, 청자에게 강한 인상을 주려고 한다.

(2) 비유법-비유의 원리
문장의 효과적인 표현 기술을 전통적으로는 수사법이라고 하였다. 수사(修辭)란 문장을 멋있게 꾸민다는 뜻이다. 그래서 비유니, 직유니, 은유니 하는 말만 나오면 문장을 꾸미는 방법으로 오해하고, 진실성이 결여된 장식의 글이라는 오해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효과적인 표현은 바로 생각이나 감정을 보다 정확하게 전달하고 보다 감동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문장법이다. 그 대표적인 표현법이 비유법인데 비유법은 기존 사물을 보다 명확하게, 미지의 세계, 아직 알려지지 않은 세계를 이미 알려진 그와 공통점을 가졌거나 유사성이 있는 어떤 사물을 예를 들어 밝히는 것이다.

직유법(直喩法)
직유란 어떤 사물을 그와 유사성을 가진 다른 사물을 직접 들어 ~처럼, ~같이, ~듯이, ~인양 등의 어미를 붙여 말하는 방식이다.

항라적삼 안섶 안에
연적 같은 저 젖 보소
담배씨만큼 보고 가소
많이 보면 병납니다.

“봄 햇살이 어머님의 손길처럼 따스하다.”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0:16),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마 13:24),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마 23:37)

은유법(隱喩法)
은유법은 은유(隱喩)라는 한자어 때문에 숨어서 간접적으로 암시적으로 비유하는 방법이라고 오해하고 있는데 영어의 metaphore라는 말이 meta(넘다)와 phore(운반하다)라는 어원에서 보듯이 기존의 개념이나 사실을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 본래의 의미를 넘어서 새롭게 명명하는 창조적인 비유법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은유
그대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그림자를 안고-은유
옥같이-직유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은유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 18:2).

의인법(擬人法)과 활유법(活喩法)
의인법이란 비인간을 인간화하여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느끼고 행동하게 하는 비유의 방식인데 “산들이 말을 건다.”와 같은 경우 이를 활유법이라고도 한다. 활유법은 무생물을 생물화하는 비유법이다. “산들이 뛰어 다닌다.” 이들은 자연과 인간, 무생물과 생물의 동일시라는 상상력의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의성법(擬聲法)과 의태법(擬態法)
어떤 사물의 소리를 그대로 흉내 내는 것을 의성법이라 하고 모양이나 행동을 흉내 내는 것을 의태법이라 한다. 모두가 생생함을 드러내는 표현법이다.

영만이는 괜히 따르릉 따르릉 소리를 울리며 힘차게 발판을 밟아댔다. (의성법)
마침 저쪽에 먹음직스러운 포도송이가 주렁주렁 높이 달려 있었다. 잘 됐다 싶은 여우는 포도를 따먹으려고 펄쩍펄쩍 뛰어올랐다. (의태법)

대유법(代喩法)
대유란 부분적인 사물이나 특성으로 전체를 대표하게 하는 표현 방법이다. 예컨대 “펜은 칼보다 강하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라는 문장의 경우 ‘펜’은 문장, ‘칼’은 무기, ‘빵’은 음식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된다.

(3) 변화법-변화의 원리
변화법은 문장의 기본적인 순서나 내용에 변화를 주어 관심을 새롭게 하고 전달의 효과를 꾀하는 효과적인 문장 표현의 기술이다.

1)도치법(倒置法)
도치법은 우리 문장의 기본 순이 주어+목적어+서술어인데 서술어나 목적어를 앞에 내세우는 방식이다. “나는 밥을 먹었다.”를 “밥을 먹었다 나는.” 또는 “먹었다 나는 밥을.” 등으로 바꾸는 경우다.

2) 인용법(引用法)
자기의 의견이나 주장을 한층 권위 있게 하고, 뒷받침하기 위해서, 유명 인사의 말이나, 명구, 금언, 학설 등을 빌려다 쓰는 표현 방법이다.

그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3) 대구법(對句法)
대구법은 비슷한 짜임을 가진 구절을 나란히 늘어놓아 변화 있게 표현하는 방법이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와 같은 방법이다. 그런데 상반된 구절을 늘어놓을 경우는 대조법이 된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가 그것이다. 과거에는 대구법과 대조법을 많이 사용하였다.

4) 문답법(問答法)과 설의법(設疑法)
문답법은 말하는 화자가 스스로 묻고 청자를 대신하여 스스로 대답하여 청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표현법이다. 한편 설의법은 번연히 알 수 있는 것을 의문 형식으로 하여 청자가 스스로 알게 하는 방법이다.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장희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5) 반어법(反語法), 역설법(逆說法), 풍자법(諷刺法)
반어법은 문장 표면에 나타난 뜻과 그 이면의 속뜻이 정 반대인 표현법이고, 역설법은 겉으로 보기엔 불합리한 듯 나 그 속에 어떤 진실이 내포된 것을 말한다. 그밖에도 성경에서는 특별히 풍자법을 사용하고 있다. 풍자란 조롱과 책망을 통해 인간의 악함과 어리석음을 폭로하는 기법이다.

잘 먹고 잘 살아라. (반어)
나는 기다릴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역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풍자)

(4) 강조법-강조의 원리

1) 과장법(誇張法)
생각이나 느낌을 더욱 힘주어 말하는 강조법 중 대표적인 것이 과장법이다. 이는 사실을 보다 확대하거나 축소하는 방식이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2) 반복법(反復法)과 열거법(列擧法)
같거나 비슷한 낱말, 어구, 문장 등을 되풀이하여 흥을 돋우고 뜻을 강조하는 것으로 시적 형식의 대표적 표현법이다. 열거법은 각기 다른 사물을 나열하는 것으로 산문적인 표현법이다. 이들은 모두 청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언술의 방법들이다.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이글 앳된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 박두진 <해>에서

3) 대조법(對照法)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와 같이 서로 다른 두 가지를 맞댐으로써 뜻을 강조하는 기술이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창파에 조히 시슨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5) 영탄법(詠嘆法)
우리의 감정이 고조되거나 애달플 때는, 그 표현도 파도와 같이 동적인 표현을 요구한다. 이처럼 감정이 격렬하거나 애달플 때 지르는 소리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 영탄법이다. 그러므로 이 영탄법은 ‘아아!’, ‘오오!’, ‘어머나!’, ‘아이구!’, ‘아유!’, ‘이크!’, ‘으흥!’ 등의 감탄사를 많이 쓴다. 그리고 때로는 ‘얼마나 사나운 비바람인가?’ 처럼 의문형 감탄으로 쓰기도 한다. 그러나 지나친 영탄법은 문장의 품위를 손상시킬 수 있다. 격정적인 맥락에 적절히 써야 한다.

(3) 시와 수사학과 비유법과 은유
1) 고대부터 수사학이란 말을 써 왔기 때문에 지금도 수사학 수사법이라고 말하는데
앞서 지적했듯이 수사학이니 수사법이니 하는 용어는 음성언어 중심 시대 연설 변증 즉흥시 등의 문화에서 상대나 청중을 효과적으로 설득하려는 언어 기술이란 개념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수식이나 장식의 성격이 강했다.
2) 그러나 현대는 음성언어보다 문자언어 시대여서 문장 중심이고 그러기에 효과적인 문장 표현법이라는 말이 적절하다.
3) 그런데도 아직 수사법이니 표현기교니 하는 용어들과 혼용하고 있어 시의 경우 비유를 단지 문장 꾸밈으로 오해하고 있다.
4) 그러나 시에 있어서 비유 특히 은유는 꾸밈이나 기교가 아니라 창작원리, 아니 시의 원리라 개념으로 확대 심화되었다는 데서 은유의 시학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필요하다.
은유의 시학5- 은유인가
https://youtu.be/6AuVG9VN-Yc

(1) 보다 정확한 소통을 위해서
모든 언어의 목적은 정확한 의사전달에 있다. 그리고 일상적 또는 사전적 언어는 정확한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인생은 허무한 존재다.” 이성적으로는 타당한 말이다. 그러나 ‘인생’ ‘존재’ ‘허무’ 라는 말을 우리는 얼마나 정확히 알고 있는가. 그리고 그 뜻을 온몸으로 감성적으로도 실감할 수 있는가. 그런데 “인생은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시103:15)” 이렇게 비유로 표현하면 무학자라도 그 뜻이 무엇인지를 잘 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추상적인 언어는 우리의 미묘한 감정이나 사물의 내면적인 세계까지 드러내기엔 너무나 막연하고 애매하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과 유사성을 가진 이미 잘 알려진 어떤 사물들을 예로 들어 이를 보충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편18;2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절대자다. 신실하신 분이다. 등 매우 신학적이고 논리적이고 사전적이고 지적이지만 너무 추상적이고 포괄적이어서 나와는 어떤 관계인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인용한 다윗의 시를 보면 하나님이 나에게 얼마나 실질적으로 중요한 존재인지 내가 왜 그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지를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의사전달, 즉 소통이라면 지식이나 정보만 전달하면 되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의사전달이나 소통에는 지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감정도 있다. 이 모두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소통하고자 한다면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전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은유가 있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가 은유를 사용하는 이유도 그렇다. 시가 미묘한 나의 감정을 또는 내면적인 세계까지를 드러내고자 한다면 더욱 은유적 표현이 아니고는 소통이 불가능한 것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오오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김동명의 「내 마음은」에서

“나는 당신을 아주 사랑합니다” 이런 상투적인 고백이 나는 호수가 되어 그대의 다가오는 물결을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는 파도가 되어 헌신하겠다는 다짐에 비할 수가 있는가. 내 마음은 촛불이 되어 그대를 위해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버리겠다는 고백에 비할 수가 있겠는가. 은유의 힘, 시의 놀라운 호소력이 여기에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2) 보다 감동적인 삶을 위하여
시나 예술은 사상이나 개념을 추상적인 언어형식으로 이성에 호소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들까지도 감동적인 형식으로 만들어 감성에 호소하려는 세계다. 그런데 여기서 감동, 감성, 정서, 느낌 등의 용어는 모두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感動)을 뜻하는 것으로 이는 어떤 외부적 자극이 신체의 감각기관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심리적 현상이다. 따라서 감동적인 형식은 감각기관인 오관을 자극하는 바로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 미각적 후각적인 이미지나 언어들을 요구하게 된다.

인간은 어떠한 자극을 받는가에 따라 신체의 각 기관이 다양하게 반응하고 이에 따라 슬픔, 기쁨, 웃음, 노여움, 두려움, 놀라움, 그리움, 사랑스러움 등의 정서적 감정을 느끼게 된다. 예컨대 시끄러운 소리는 불쾌감을 줄 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는 소화기 장애를 일으킬 수 있고 짜증스러운 기분을 유발하게 된다. 그러나 경쾌한 리듬은 소화 기능을 돕고, 즐겁고 유쾌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색채도 검정색 회색보다는 파란색 노란색 하늘색 등이 밝고 생기가 넘치며 붉은색은 덥고 열정적이다.
따라서 지식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움직이는 감동적인 언어나 예술이 되고자 한다면 감각성이 없는 추상적인 언어들을 감각적인 언어로 바꾸어야 한다. 은유를 메타포(metaphor)라 하는데 시는 이성적이고 추상적인 언어들을 감각적 언어, 즉 감동적 언어인 은유로 메타포하여 정서적 감동적 언어로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소통을 통하여 인간은 메마른 이성적 삶에서 풍요로운 감성적 삶을 함께 누리게 된다. 여기에 은유의 존재 이유가 있다.

이 창가에서
들어요
둘이서만 만난 오붓한 자리
빵에는 쨈을 바르지요
오 아니예요
우리가 둘이서 빵에서 바르는
이 쨈은 쨈이 아니라 과수원이예요
우리는 과수원 하나씩을
빵에 얹어서 먹어요
전봉건 「과수원과 꿈과 바다 이야기」에서

이 시는 우리가 아침마다 대하는 식탁의 일상에서 빵에 바르는 쨈을 소재로 하여 쨈의 원료인 과일을 연상하고 과일에서 다시 과수원을 연상하면서 마침내는 빵에다 쨈을 바르는 것이 아니라 과수원 하나씩을 얹어 먹는다는 식사법을 상상하기에 이른 것이다. 쨈과 과일과 과수원의 관계는 가장 밀접하게 인과성을 지닌 사물이며 우리의 경험 속에서 쉽게 재생 시킬 수 있는 친근한 이미지다. 이러한 이미지의 재생은 원 관념이 되는 쨈의 의미나 과수원의 의미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다만 쨈의 존재를 그와 관계가 깊은 과수원으로 은유화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력이 얼마나 삶을 풍요롭게 하는지를 이 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상적인 쨈에서 과수원을 연상하고 빵에 과수원을 얹어먹는 상상의 은유가 우리를 더욱 행복하게 한다.


(3) 존재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하여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인간도 하나님처럼 지혜로워질 것이라는 환상 때문이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런 명제를 확신하면서 역시 인간은 진리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이제 사람이 먼저라는 인본주의 깃발을 휘두르고 있지만, 그러나 인생이란 무엇인가. 만물들의 참 모습은 무엇인가. 이런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답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지금까지 알고 있고 알려져 있는 모든 것들은 얼마나 진실한 것인가 나와는 어떤 관계인가. 인간은 여전히 이런 질문을 하고 그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초월적인 세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리들이 경험하고 의식할 수 있는 사물의 세계조차도 시간과 공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해가고 거기다가 인식의 주체인 나마저 흔들리는 주관과 객관 이성과 감성이란 상반된 잣대가 있을 뿐이니 존재의 참 모습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모든 존재들의 참 모습은 무수한 시간과 공간의 이질성들로 겹겹이 가리어져 있거나 숨어 있거나 왜곡되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모든 존재들은 늘 자신들의 참모습이 드러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리는 존재들의 참 모습을 드러내야 할 책임이 있다.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히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의 「꽃」

모든 존재는 이렇게 제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가리어진 숨어있는 존재들의 참 모습을 회복시키고자 한다.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가. 이에 대하여 하이데거는 존재의 참모습은 언제나 은폐되어 있으며 오직 존재자 즉 계시자를 통해서만 드러난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존재성이 우주자연이란 피조물들, 즉 그의 계시물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듯이, 모든 존재의 참모습은 직접 드러내지 못하고 간접적인 계시자 매개자를 이용해야 하는데 이 매개자가 바로 메타포, 즉 은유라는 것이다.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믐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 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박두진의 「꽃」에서

시인은 기존의 꽃에 대한 일반적 의미를 되풀이하지 않는다. 기존의 꽃에 대한 의미를 해체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꽃은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아픈 피 흘림, 엇갈림의 핏방울 등의 은유를 통하여 기존에 알고 있던 꽃의 의미를 새롭게
창조하고 있다.

(4) 하늘과 땅을 창조하기 위하여
인간이란 지상이라는 세계에 던져지면서 이미 하나님이 창조해 놓은 무궁무진한 자연 공간 즉 물리적 공간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 거기엔 무한한 우주와 하늘과 바람과 별과 강물이 있고, 너와 내가 있고, 높고 낮음이 있고, 멀고 가까움, 크고 작음, 무겁고 가벼움이 있고 낯선 존재와 생명들이 있다. 그러기에 인간들은 우선 이들 낯선 것들을 알아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들을 알아가기 위해서는 이들에게 이름을 붙여야 한다. 그래서 최초의 인간 아담은 이들에게 이름 붙이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최초 아담은 사물들의 이름을 어떻게 붙였을까. 바로 감각적 경험과 유사성 또는 비유사성의 관계를 고려해서 작명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은유적 방법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이러한 자연공간을 통하여 축적된 경험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공간을 머릿속에 그려 보기도 하고 새로운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이나 욕망은 무한한 것이어서 현실 공간의 한계를 느끼기 때문이다. 현실은 불완전하고 생로병사가 있는 유한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좀 더 나은 공간을 머릿속에 그려 보기도 하고 새로운 공간을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이때 새로운 공간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을 상상(imagination)이라 하고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것을 발명이니 창조니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작업 역시 모두 은유가 된다. 왜냐하면 은유란 기존의 개념이나 사물을 메타포(metaphore=over, carrying), 변경하고 대치하고 옮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유적 상상이야말로 조물주가 창조한 물리적 공간과 달리 인간이 창조한 인위적 공간을 창조하는 열쇠가 된다. 인간은 은유라는 도구를 통하여 신이 창조한 세계를 다시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은유를 통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적 능력이야말로 인간의 위대함이고 최고의 축복이다.

골짝물이 이렇게
조잘대며 흐르는데
바위들에게도
귀가 있을거야
산나리가 이렇게
예쁘게 웃어주는데
나무들에게도 정말은
눈이 있을거야

어느 어린이의 동시다. 이 시에 등장하는 소재는 골짝물, 바위, 산나리, 나무 등이다. 따라서 어느 산골짝의 모습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이들 소재를 현실적으로 말한다면 산을 구성하고 있는 광물이거나 식물 등의 종류를 열거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조잘대는 골짝물, 귀가 달린 바위, 웃는 산나리, 눈이 달린 나무 등으로 전이, 메타포하면 광물이나 식물이 귀와 눈이 달린 동물이거나 웃고 조잘대는 생명이 있고 감정이 있는 생명체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시는 광물에서 동물로, 동물에서 인간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무에서 유로, 침묵에서 행동으로 창조되고 변화되는 조화무궁한 세계다. 이처럼 이성적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을 초월한 무한한 꿈의 세계, 이러한 새 하늘과 새 땅을 가능케 하는 것이 상상이고 은유다.

너의 눈은 번개와 눈물의 조국
말하는 고요
바람 없는 폭풍, 파도 없는 바다
갇힌 새들, 졸음에 겨운 황금 맹수
진실처럼 무정한 수정
숲 속의 환한 빈 터에 찾아온 가을, 거기
나무의 어깨 위에선 빛이 노래하고
모든 잎사귀는 새가 되는 곳
아침이면 샛별같이 눈에 뒤덮인 해변
불을 따 담은 과일 바구니
맛있는 거짓
이승의 거울, 저승의 문
한낱 바다의 조용한 맥박
깜박거리는 절대
사막
옥따비오 빠스 「너의 눈동자」

인용한 시는 멕시코 시인 옥따비오 빠스의 「너의 눈동자」 전문이다. 시란 존재의 리얼리티를 발견하는 작업이며 기존의 통념을 해체하고 새롭게 사물을 명명하여 새롭게 의미를 창조하는 노력이라고 하였다. 이 시가 의도하는 시적 진실은 너의 눈동자에 대한 새로운 명명이며 눈동자가 지니는 시적 인식의 새로운 창조다. 시적 화자는 처음에 ‘너의 눈은’이란 주어를 제시할 뿐 나머지의 모든 진술은 눈에 대한 시인의 직관적 명명이며 시인을 통해 진술되는 ‘번개와 눈물의 조국’에서부터 마지막 행의 ‘사막’에 이르는 열 일곱 번의 눈물에 대한 정의는 결코 일상적인 어법으로는 이해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신선한 이미지에 의한 창조적 생명이다.
은유의 시학6-은유의 전통적 논의

https://youtu.be/9ipZGPOmFx8


1, 전이 또는 대치로서의 은유

과거 비유어에 대한 대표적인 언급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는 문학의 말씨를 다루는 항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유를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인데 이는 남에게서 배울 수 없는 천재의 표적이라고 하였다. 또한 좋은 비유란 서로 다른 사물 사이에 같은 것, 즉 유사한 점을 직관적으로 유추하여 전이 대치 자리바꿈하는 기술이라고 하였다.

전이의 방법 그는 은유를 어떤 사물에다 다른 것에 속하는 이름을 갖다 붙이는 것이라고 하였고, 이러한 대치 작업, 즉 옮겨 넣는 일은 유추를 근거로 하여 보편에서 특수, 특수에서 보편, 또는 특수에서 특수, 즉 유(類)에서 종(種), 종(種)에서 유(類), 종(種)에서 종(種) 그리고 유추 등의 관계로 전이되는 양식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유개념과 종개념이란 분류학에서 상위개념과 하위개념으로 동물-상위개념, 소 말 돼지-하위개념) 그는 전이의 네 방법을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에서 () “여기에 내 배가 정지하고 있다(Here lies my ship)”는 말에서 ‘정지하고 있다’는 유개념이고 “여기에 내 배가 정박하고 있다"라고 하면 ‘정박하고 있다’는 종개념이다. 따라서 이는 정박하다(lying at anchor)라는 종개념을 정지하다(lies)라는 유개념으로 바꾼 것이다.

()에서 () “오디세이는 실로 가지 선행을 행하였다”라는 말에서 ‘만 가지 선행’은 대단히 많은, 즉 ‘다수’라는 유개념을 특수한 종개념으로 사용한 것이다.

()에서 () ‘구리쇠로 생명의 물을 푸면서’와 ‘구리쇠로 베면서’라는 문장을 보면 전자는 ‘청동의 칼로 목을 베어 피를 흘리게 하면서’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푸면서’와 ‘베면서’는 모두 ‘제거한다’라는 유개념에 대한 종개념이며 이들이 서로 뒤바뀌어 사용된 것이다.

유추에 의한 전이의 예로 한 날(A)의 저녁때(B) 인생(C)의 노년(D)의 경우는 모두 유와 종의 관계다. 그렇다면 저녁때(B)를 한날의 노년(A+D)라고 하든지 노년(D)을 인생의 저녁때(C+B)라는 말로 유추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수사학적 은유

원래 직접 민주주의를 하던 그리스에서는 웅변의 여신에게 제사를 지낼 만큼 웅변술이 왕성했다. 설득의 화술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초 「시학」에서 은유를 강조했음에도 그의 「수사학」에서는 비유를, 말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꾸미는 방법이라고도 하였다. 이처럼 비유를 수사학으로 다루었다는 것은 비유가 천재의 소산이 아니라 누구나 배우면 터득할 수 있는 표현 기술로 인정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문학이란 사상이나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도록 꾸민 글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경우 궁극에 있어서는 문학을 수사법의 한 소산으로 보게 되었으며 이러한 사상이 유럽의 문학 이론을 오래 지배해온 까닭에 결국 비유라면 수사학적 방법으로 간주되어 왔던 것이다.

그 후 키케로 등 많은 문법학자들에게 오면서 서술이나 해설의 기능으로만 비유의 개념을 제한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전이의 원리에 반하여 언어를 용법과 관습에 맞게 사용하는 정합성, 분명하게 말하는 명확성, 말하는 상황이나 맥락에 어긋나지 않는 적절성, 그리고는 장식성을 추가하여 수사적 장치를 추가하였다. 또한 비유를 언어에 전아(典雅)한 효과를 주는 하나의 방편이라 하였고, 롱기누스는 장엄함, 즉 숭엄미에 기여해야 한다고 하였고 퀸틸리안은 비유를 최고 장식이라 하였다. 그는 비유의 용법을 선명함을 위하여, 간단함을 위하여, 모함을 꾀하기 위하여, 과정을 위하여, 축소를 위하여, 수식을 위하여 라고 하면서 비유를 사상에 입히는 옷이라고 하였다. 비유를 극단의 꾸밈으로 왜곡시킨 것이 소피스트(sophist), 궤변이다.
이 곡해의 개념은 결국 시에서도 일상어와 시어를 구분하였고 심지어는 시에만 사용되는 언어(poetic diction ) 즉 시적인 은유가 따로 있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그 대표적인 기법이 돈호법 고문체 완곡어법 형용어법 등이다.

말하여다오, 아버지 테임즈강이여,
그대는 푸른 물가에서 물장난 치며
싱싱한 무리들이 쾌락의 길을
질주하는 것을 보았으려니,
지금은 누가 유리같은 파도를
유연한 팔로 가르기를 즐기는가?
사람들을 매혹하는 포로된 홍방울 새인가?
어떤 게으른 자손들이
굴러가는 원의 속도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날아가는 공에 힘을 줄 것인가?

그레이의 「이튼대학의 원경에 부치는 오드」의 일절인데 완곡어법이다. 여기서 그는 수영이란 말을 ‘파도를 유연한 팔로 가르기를’이라 하였고 새장을 ‘포로된’, 소년들을 ‘게으른 자손들’, 굴렁쇠는 ‘굴러가는 원’이라 하여 가능한 직접적인 어휘를 피하고 부드럽고 우아한 말로써 표현하려고 하였다.

즐거움을 가지라, 그리고 정숙한 가슴의 만족을 가지라
그대들의 사랑의 결합으로,
사랑의 여왕인 아름다운 비너스가 그대들에게
심장을 꿰뚫은 아들과 함께 미소를 보내게 하라.

스펜서의 「에피달라미온」 일절인데 형용어법의 예다. ‘정숙한 가슴의 만족’이나, ‘사랑의 여왕인 아름다운 비너스’ 등의 표현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수법도 역시 인물이나 사물의 특징을 말하는 형용어구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고전시가에도 이러한 불필요한 형용어들을 볼 수 있다.

이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얏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

성삼문이 지은 잘 알려진 시조다. 여기서 낙락장송이나 독야청청 등의 용어는 분명 한시에서 인용한 상투적인 고문체라고 할 수 있다.

3. 낭만주의적 은유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와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주의적인 생각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경향이었다. 그들은 은유를 '장식'이 아니라 상상의 중심 원리로 생각하고 은유의 강렬한 작용력에 주목하기에 이른다. 이는 수사학으로부터 은유를 구원하고 역사적으로 은폐되었던 은유의 본질적 가치를 복원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고전주의적 장식적 은유의 시학에서 낭만주의적 은유, 또는 낭만주의 시어를 제기한 대표적인 시인은 워즈워드다. 그는 「서정민요집」Lyrical Ballads의 서문에서 이전의 고전적 완곡어법 형용어법 등으로 정교하게 다듬던 일체의 수사적인 언어를 배격하고 진정한 시어법은 자연적인 것이고 거짓된 시어법은 인위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시는 소수의 오락물이 아니라 만인의 것이어야 하며 형식이나 제도에 얽매인 문법체가 아니라 개성적이고 일상적인 구어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훌륭한 시는 강한 정서가 자연발생적으로 넘쳐흐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를 계승한 낭만주의에서 특히 셸리는 이성은 사물의 차이를 존중하며 상상력은 유사성을 존중한다고 하면서 은유는 상상력을 자극하고 유발하는 기능을 갖는다고 하였다. 이 점은 헤르더나 비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원시적인 언어, 유년기의 언어, 시인의 언어를 동일하게 본다. 어린이의 언어는 성인들의 합리적이고 추상적인 언어에 비하여 근본적으로 강하고 힘차고 구체적이다. 원시적인 전설과 신화는 세상에 대한 시적이고 은유적인 방식이며 유아적이다. 따라서 은유는 사실들에 대한 공상적인 장식이 아니라 사실을 체험하는 방식이며 사실의 상상적인 투영이라고 본 것이다.
중략
그는 한 늙은 水夫
셋 중에 하나를 세운다.
“긴 수염과 빛나는 눈을 가진 분이
어째서 나를 세우는가?”

“신랑집의 대문은 활짝 열려있고
나는 바로 가까운 친척,
손님들은 모이고 잔치는 다 되어
즐거운 소리만 들려오누나”

그는 여윈 손으로 그를 잡고
“거기에 배 한척이 있었지”라고 했다.
“손을 놓으세요, 영감님”
늙은 수부는 바로 손을 내렸다.

이 시는 코울리지의 「늙은 수부의 노래」의 일부로 어떤 늙은 수부가 혼인잔치에 가는 손님을 붙들고 자기 경험담을 얘기하려는 장면이다. 초자연적이고 환상적인 낭만주의 시로 알려졌는데, 특히 시적 진실성이 있고 이미지가 뚜렷하다. 서두부터 친밀감을 주는 대화체의 형식을 취하며 과거의 수사적인 형식을 탈피하였고 일상적인 언어들을 정감 있게 구사하여 시어의 자연스러움의 미적 기쁨을 자아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후반부에는 ‘채색된 바다 위에/채색된 배처럼 꼼짝 않고’라든지 ‘달빛은 뜨거운 바다를 비웃는다/ 마치 4월의 흰서리처럼 퍼져’라는 구절들을 볼 수 있어 그가 주장하는 상상력과 자연과 인간의 전체성을 조화하는 유기체적인 낭만주의 세계관을 잘 드러내는 대목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적 방법론과 합리성을 강조하던 근대 합리주의 철학자, 경험주의 철자들은 이런 수사학을 반대했다. 베이컨은 사람들이 진지한 주제와 건전한 논의보다는 오히려 미사여구에 현혹된다고 개탄했고, 로크는 수사학을 기만이나 사기 행위로 간주했다. 몽테뉴 역시 사물을 담아내는 그릇인 언어보다는 그 그릇 안에 담겨 있는 사물 자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밀턴을 비롯한 청교도에서도 교회의 색유리창이 빛을 차단하는 것처럼, 현란한 수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린다고 주장했다.
은유의 시학7-은유의 현대적 개념(1)

https://youtu.be/QPCA4YAFaRw

1.상호작용으로서의 은유

시에 있어서 비유의 문제는 현대에 와서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논의하게 되었다. 비유에 대한 전통적인 논의는 비유가 유추에 의한 유사성의 발견으로 말의 전이 단어의 대치를 통한 효과적인 표현임을 알고는 있었으나 주로 수사학적인 입장에서 설득과 과장과 외적인 장식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바로 옮겨서 멋있게 꾸민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은유란 자리바꿈의 전이나 대치나 비교나 꾸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단어나 문맥들이 상호작용 또는 충돌하여 새로운 제3의 의미나 정서를 드러내는 창조적 작업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유사성에 의한 전이를 은유의 기본으로 생각해온 입장에서 비유사성에 의한 폭력적인 전이, 또는 대치도 가능하다는 관점의 전환과 확대가 된다.

2. 리처즈의 주지와 매체의 상호충돌

이러한 상호작용의 논리는 리처즈(L.A.Richads)가 은유를 주지(tenor)와 매체(vehicle)의 관계로 설명하면서 이 둘의 상호충돌을 강조하는데서 시작하고 있다. 그는 은유의 진정한 의미는 “내 마음은 호수요”(김동명의 ‘내 마음은’)라고 했을 때 마음과 유사성을 가진 호수로 전이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당신은 놋쇠항아리다”(김춘수의 ‘나의 하나님’)에서 보듯이 하나님과 놋쇠항아리는 유사성의 관계가 아니라 비유사성의 관계로 상호충돌하면서 오히려 새로운 의미와 정서를 자아내게 된다.
그래서 그는 같은 은유라 할지라도 좋은 시와 나쁜 시를 구별하는 기준으로 경험의 포괄과 배제를 내세운다. 그는 시가 이질적인 매체의 은유를 배제하고 동질적인 것만을 포용하는 은유의 시는 나쁜 시이며 이질적인 경험의 이미지를 모두 포괄하는 시를 좋은 시라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시에 나타나는 경험은 상반되는 충돌들의 균형과 조화, 즉 포괄을 이룰 때 좋은 시가 되기 때문에 이질적인 경험을 배제하고 동질의 경험만으로 되어 있는 시는 나쁜 시라고 하였다. 그 예로 셸리의 「사랑의 철학」, 테니슨의 「부서져라, 부서져라, 부서져라」 등은 잡다한 경험이 종합되지 못하고 단일하고 유사한 경험만으로 배열되었기 때문에 좋은 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그런 시는 포괄이 아닌 배제의 시다. 그러나 키이츠의 「나이팅게일을 위한 오드」, 마아벌의 「사랑의 정의」 등은 이질적인 충돌의 특이한 잡다성을 보이는 점에서 포괄의 시라는 것이다.

부서져라, 부서져라, 부서져라
차디찬 잿빛 바위 위에, 오 바다여!
솟아오르는 나의 생각을
나의 혀로 토로해 주었으면
― 테니슨의 「부서져라, 부서져라, 부서져라」에서

너는 죽으려고 태어나지 않았다. 불사조여
어떠한 굶주린 세대도 너를 짓밟아 죽이지는 못하였다
이 깊어가는 밤에 내가 듣는 저 소리는
옛날 제왕과 촌부의 귀에도 들렸을 것이다
― 키이츠의 「나이팅게일을 위한 오드」에서

앞의 시는 주로 바다를 소재로 하여 떠나간 사람에 대한 애상을 적고 있는데 그 소재는 차디찬 잿빛 바위 바다, 파도, 등 주로 일상적인 경험들, 말하자면 동질적인 경험의 사물들, 유사한 사물들만을 동원하여 단조로운 정서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뒤의 경우는 비록 같은 낭만파 시인의 시지만 나이팅게일의 울음소리에 대한 상상을 “어떤 굶주린 세대도 너를 짓밟아 죽이지 못하였다” “옛날 제왕과 촌부의 귀에도 들렸을 것이다” 등은 나이팅게일과는 매우 이질적인 매체의 사물들을 은유로 포괄하여 생소한 충돌이 보다 시적인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

나의 본적은 늦가을 햇볕 쪼이는 마른 잎이다.
밟으면 깨어지는 소리가 난다
나의 본적은 거대한 계곡이다
나무 잎새다.
― 김종삼의 「나의 본적」에서

이 시의 주지 즉 원관념은 ‘나의 본적’이다. 그러나 그가 상상하는 본적의 의미는 호적상의 어떤 장소가 아니고 ‘햇볕 쪼이는 마른 잎’ ‘거대한 계곡’ ‘나무 잎새’라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본적의 의미는 일상적인 의미를 넘어서 마른 잎과 계곡과 나무 잎새라는 비교적 비유사성의 은유로 충돌되어 인간 존재의 근원은 결국 자연이라는 의미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3. 긴장관계의 은유

테이트는 좋은 시라는 것은 내포와 외연의 가장 먼 양극에서 모든 의미를 통일한 것이라고 하면서 좋은 시는 텐션tension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텐션은 단순한 긴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외연extension과 내포intension의 접두사인 ex와 in을 제외한 조어로서 시의 의미란 시의 텐션, 즉 시 속에서 발견되는 모든 외연과 내포를 유기적으로 조직한 총체라는 것이다. 시의 외연은 시가 지닌 표시적 의미이고 내포는 함축적 의미인데, 이와 같이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은 두 요소가 가장 알맞게 조화를 이룰 때 좋은 시가 된다는 것이다. 테이트는 이 텐션이 성공한 시로서 형이상학파 시인인 존던의 「애도를 금하는 고별의 노래」 를 들고 있다.

우리 두 마음은 하나이므로
나는 가야 하지만, 또한 한 몸이어서
두 쪽으로 쪼개는 것이 아니라 늘이어 놓네
마치 금이 공기처럼 얄팍하게 늘어나듯이

이 시는 ‘마치 금이 공기처럼 얄팍하게 늘어나듯이’란 시구가 텐션이 있는 이미지라는 것이다. 이 시구의 은유에 보조관념으로 도입된 금은 물질로서 테이트가 말하는 외연이며 물질이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유한한 것이다. 그런데 내포적 의미는 ‘연인들의 영적관계’을 의미하며 그것은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기 때문에 무한한 것이다.

이렇게 상반된 먼 자리에 있는 두 관념, 즉 외연과 내포를 연결하는 것을 기상(奇想)conceit이라고도 한다. 기상이란 원래 기발한 착상이란 뜻으로 겉보기와는 전혀 다른 두 물건이나 상황을 결합하여 정교한 비유의 관계를 형성하는 시어법이다. 존슨은 기상을 한마디로 조화로운 부조화, 상이한 이미지들의 결합, 가장 이질적인 관념들의 폭력적인 결합이라고 하였다. 형이상학파의 기상으로 지나치게 과장되면서도 미묘성이 잘 표현된 작품으로는 크래쇼의 「성 막달라 마리아」를 들기도 한다.

두 개의 충실한 분수
두 개의 걸어가는 목욕탕, 두 개의 우는 동작
휴대용으로 압축된 대양(大洋)들

예수 앞에서 참회하는 막달라 마리아의 눈물이 글썽이는 두 눈물을 표현한 것으로 과장된 감이 있기는 하나 기발한 발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4. 투쟁의 원리와 은유

휠라이트는 투쟁적 삶의 원리와 긴장언어의 상호관계를 말한다. 모든 생명의 유기체들은 상반되는 두 힘의 지속적이며 다양한 싸움을 겪고 있고, 그러한 싸움 없이는 유기체와 생명은 죽어 없어진다. 인간이 유기체로서 가지는 기본적 갈등은 여러 가지 상반된 투쟁성으로 나타나며 이것은 아주 무의식적이거나 부분적으로만 의식될 수 있다. 인간의 삶은 두 가지 상반된 끌림 사이에서 배회하는 것이다. 디오니소스적 상황에서 아폴로적 비전을 추구하며 때로는 그 반대일 경우도 있다.
이처럼 휠라이트는 삶의 원리를 투쟁의 원리로 보고 시도 은유도 투쟁을 통한 긴장의 언어가 된다고 하였다. 여기서 긴장 언어는 바로 의미론적 긴장을 지향하며 그것은 사물의 리얼리티를 표출하는 인간의 근본적 활동이다. 이러한 긴장 언어의 기본단위가 이미지, 은유, 상징의 형식으로 시어의 독자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허름한 처마 아래서 밤
열두시에 나는 죽어
나는 가을
비에 젖어 펄럭이는 질환이 되고
한없이 깊은 층계를
굴러 떨어지는 곤충의 눈에 비친 암흑이 된다.
두려운 칼 자욱이 된다.
― 이승훈의 「사진」에서

이 작품의 화자인 나는 사진에 대한 인상을 죽어서 ‘가을비에 펄럭이는 질환’ ‘곤충의 눈에 비친 암흑’ ‘두려운 칼 자욱’이 된다는 것이다. 사진의 일상적인 해석과는 무관한 질환과 칼 자욱이 등장하는가 하면, 비에 젖어 펄럭이는 질환이라는 극히 비현실적인 어휘를 구사함으로써 독자를 당황하게 한다. 이들 어휘나 시행은 동일성의 화해나 인습적인 질서가 아니라 대립과 모순으로 인한 투쟁과 긴장을 강하게 고조시키고 있다.

은유의 상호작용설은 리처즈의 상호충돌 테이트의 텐션tension, 휠라이트의 투쟁, 그밖에 부룩스의 파라독스paradox와 아이러니irony 등으로 확대되었으며 러시아 형식주의에서는 낯설게 만들기 전경화 등의 용어를 쓰기도 하였다. 이러한 충돌과 긴장과 역설과 반어와 일탈의 개념들은 시에 대한 은유의 새로운 관심과 분석적 이론들을 영미 계통의 이미지즘이나 신비평 new criticism으로 정리되기도 하였다.
은유의 시학8-은유의 현대적 개념(2)

https://youtu.be/XzsUc9jo34A


1. 문맥적 은유

한편 맥스 블랙은 시에 있어서 은유의 상호작용론에 대하여 보다 확장된 해석을 하였다. 그는 먼저 비유의 방식을 세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하였다. 첫째 문자 그대로의 표현literal expression을 다른 낱말로 대신하는 대치론substitution, 예를 들어 키다리를 ‘전봇대’, 그녀의 얼굴을 ‘보름달’로 바꾸는 경우다. 둘째는 비교론인데 ‘그는 부처와 같다’ 또는 ‘그는 부처다’와 같이 두 사물을 비교하여 의미를 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치나 비교의 관점이 단어와 단어 간의 축어적인 번역 이상의 것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를 비판하고, 은유는 한 작품 전체에서 주 주제, 즉 초점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보조 주제들, 즉 틀의 상호작용에 의해 의미를 생성해내는 것이라 했다. 이와 같은 블랙의 상호작용론은 은유 작용의 범위를 단어에서 문장의 차원으로 넓힌 것이다.

“나는 그에게서 떨어져서 혼자 서보려 했지만 터널을 지나는 기차처럼 맹렬한 기세로 통증이 돌아왔다.” (그레이엄 그린의 <조용한 미국인>에서) 다리가 부러진 병사가 적에게 도움을 받을 때의 통증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2, 이야기 은유

한편 리꾀르(Paul Ricoeur)는 이를 해석학적 견지에서 언술, 혹은 담화(discourse)의 차원으로 더욱 확대한다. 그는 은유를 사용하는 문학은 일차적 의미보다 숨겨진 의미를 발견하려는 의미론의 차원에서 취급되어야 한다고 했다. 의미 혁신은 은유의 경우 낱말에서 발생하는 아니라, 문장 혹은 술부에서 발생한다. 은유가 술부에서 발생하는 것은 현실을 새롭게 그리는 상상력의 동원을 말한다. 수사학에서 특정 어휘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지만. 은유의 차원에서는 문장 전체가 새로운 뜻을 지닌다. 그래서 그는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은 은유를 푸는 것과 비슷한 해석 행위다. 꾸민 이야기는 거대한 은유다.”라고 했다.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이 문장은 성경에 나오는 천국에 대한 이야기 비유다. 그런데 이 비유의 진가는 ‘천국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라는 것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보다는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라는 술부의 은유를 함께 이해할 때 온전한 이해가 된다. 따라서 은유는 문장 전체로 파악되어야 한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저녁에〉전문

이 시는 저녁이나 별 등 은유적인 언어 한 둘로 이해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들과 함께 구성된 문장 전체를 읽어야 화자의 의미를 만날 수 있다. 저녁이면 무수한 별들이 보인다. 그런데 그중 나에게만 특별히 관심 가는 별이 있다. 그렇다면 나에게만 특별히 관심 가는 별이 무엇일까. 연인, 꿈, 진리, 화자가 특별하게 의미를 두는 어떤 것일 수 있다. 그런 별은 밤이 깊을수록 점점 더 선명해진다. 내가 있는 곳이 점점 더 어두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와 나의 만남은 천재일우 바로 운명적인 만남, 마침내 완성된 영원한 만남이기를.

3, 담론적 은유

한편 후루쇼프스키도 은유를 단어에 차원으로 고정시키는 기존의 은유 개념에서 벗어나 '담화'로서의 은유를 강조한다. 은유는 언어학적 단위에 의한 고정된 단위가 아니라 텍스트의 연속체 안에서 변화하는 역동적 의미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은유의 작용을 단어의 차원에 한정하는 것은 물론, 막스 블랙의 초점(focus)과 틀(frame)의 개념처럼 은유를 문장의 차원에 한정하고 있는 것조차 은유를 좁은 범주에 국한시키는 것이라 지적하고, 은유의 의미를 독자의 지식수준, 텍스트의 시점과 발화 양상, 그리고 독서와 해석이 현실적 문맥과 어떤 관련을 맺는가 하는 작가 텍스트 독자 간의 관계에서 해석하는 통합적 의미론(Integrational Semantics)에 이르고 있다. 이는 은유의 문제가 텍스트만을 절대적 대상으로 삼았던 기존 태도와는 달리 독자의 상상력을 대폭 허용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막 이삭 패기 시작한 수숫대가
낮달을
마당 바깥쪽으로 쓸어내고 있었다
아래쪽이 다 닳아진 달을 주워다 어디다 쓰나
생각한 다음날
조금 더 여물어진 달을
이번엔 洞口 개울물 한쪽에 잇대어
깁고 있었다
그러다가 맑디맑은一生이 된
빈 수숫대를 본다
단 두 개의 서까래를 올린

속으로 달이
들락날락한다
-장석남, 달과 수숫대 -"貧"

달과 수숫대, 제목부터가 이질적인 결합이다. 달이나 수숫대가 태양과 결합했다면 낯익은 감은 있으나 긴장감이 약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이런 이질적인 두 사물의 상호작용 이야기가 전 문장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결실이 가까운 수숫대가 빈약한 낮달을 처음엔 소홀히 했었다. 그러다가 좀 여물어진 달을 개울물로 보완하여 채우기로 했다. 비운 것을 가득 채워주는 수숫대의 맑은 일생, 결국 달은 두 개의 서까래 같은 수숫대 사이를 들락날락하는 존재가 된다. 초승달과 보름달, 이삭 패기 시작한 수숫대와 빈 수숫대, 수숫대는 달을 쓸며 존재한다는 고즈넉한 이야기 은유다. 따라서 이 시는 달과 수숫대의 은유적 상호작용이 텍스트 텍스트를 넘어 인생과 자연으로 확장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껍데기는 가라” 했지만 우리의 역사나 우리의 정신사는, 그리고 우리의 문학사는 한 번도 알맹이가 토실하게 영근 일이 없었다. 객주집의 나그네처럼 알맹이는 늘 비어 있거나 늘상 손님이 바뀌었다. 문학성의 껍데기는 그래도 정직하게 제 모습을 유지하였지만 알맹이는 바람난 난봉꾼처럼 실망을 주었을 뿐이다. 알맹이는 한 번도 집주인 노릇을 해본 일이 없다. 나그네였다. 정말 지조 없이 스쳐가는 나그네였다. 그런데도 역사는 이 지조 없는 나그네에게 순정을 바쳐왔다. 시대마다 지식인들은 이 변절의 이데올로기에 추파를 던졌고, 열병처럼 달아오르다가 마침내는 함께 객사해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홍문표의 <한국문학과 이데올로기>에서

우리는 이데올로기를 역사의 중심이념 사상 주제, 문학에서는 이를 내용이라 하여 중시하였고 형식을 경시하였다. 민족적인 것을 주체로 외래적인 것을 객체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형식적인 것 외래적인 것을 가변적인 객체나 껍데기로 은유화한다. 그렇다면 이념 사상 주체 등은 불변의 알맹이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실은 불변의 알맹이로 생각하는 이데올로기 이념 사상 등도 객주집의 나그네처럼, 바람난 난봉꾼처럼, 정말 지조 없이 스쳐가는 나그네였다. 가변적이고 선동적이고 유행적이었다.
은유의 시학9-은유와 의미 옮기기

https://youtu.be/uYbnYj8yDKU


1. 의미란 무엇인가
의미(意味)란 말이나 글의 뜻이며 이는 사물 행위 현상이 지닌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인간의 모든 언어는 의미를 지닌 그릇이고 의미를 대신하는 기호다. 따라서 대화란 의미를 주고받는 행위다. 의미는 가치 관념 사상 생각 감정 현상 진리 도 등으로 도 언급된다. 이렇게 중요한 것이 의미지만 의미는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다. 의미설의 대표적인 것을 보자.
지시설-이는 언어표현의 의미를 그 표현이 실제로 지시하는 대상물이라고 보는 것이다. 예컨대, ‘개’라는 어휘의 의미는 그것이 실제로 지시하는 대상물로서의 ‘개’라는 것이다. 그러나 개도 천차만별이다.
개념설 또는 심적영상설(心的映像說)-이는 어떤 표현에 접하였을 때 마음속에서 떠올리는 영상이며, 이것이 곧 그 표현의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나 심적 영상은 사람마다 다르다.
용법설 또는 맥락설-이는 문장의 맥락(context) 안에서 사용되는 현상이거나 그 사용에 의해서 결정되는 국면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하나하나의 용법에 따라 의미가 다르게 된다.
우리는 언어와 의미가 확실한 소통 도구인줄 알지만 이렇게 언어는 완전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처럼 불완전한 언어로 어떻게 확실한 의미를 담보할 수 있으며 진리나 도를 만날 수 있을까. 여기에 은유의 진실이 있다. 은유는 의미의 확실성 의미의 창조성을 담보하기 위해 비교 대치 등의 언어행위이기 때문이다.

2. 의미의 전이 전치 대치 옮기기
언어의 확실성을 담보하기 위하여 예부터 비유 즉 은유를 사용했다. 은유의 어원은 metaphora-metaphor다, 이는 meta, 즉 넘다 초월(over)이라는 의미이고 phora는 이전한다(carrying), 운반한다 옮긴다는 의미이다. 이는 의미를 확실하게 새롭게 창조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물의 양상이 다른 사물로 넘겨지거나 옮겨져서 후자의 사물이 전자의 사물처럼 서술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은유의 기본 성격은 언어의 전이(轉移, transfer), 전치(轉置) 대치(代置) 이동 옮기기 자리 바꾸기다. 그렇다면 신이 인간에게 은유를 활용하여 의미의 변화와 창조를 도모할 수 있도록 허용한 최고의 선물이 아닐 수 없다.

내 마음은 호수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마음이란 기존 언어를 호수로 전이시켰다. 일반적으로 언어란 어떤 사물을 지정하는 고정적인 것으로 안다. 마음은 인간의 심리상태다. 이를 사전적 개념 문자적 개념이라 하고 과학에서는 이런 고정적 어법을 사용한다. 그러나 마음의 고요함 흔들림 감수성 등은 호수와 같다. 그래서 시인은 “내 마음은 호수요” 라고 하여 원래의 개념을 이동시켰다. 객관적으로는 맞지 않지만 개인적 감성적으로는 공감이 가는 비유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도 그렇다. 절대신 여호와와 양치기 인간 목자는 이질적이지만 그 역할의 일면에서는 인도자란 공통점이 있어 여호와의 칭호를 목자의 칭호로 바꾸었다. 이렇게 시인은 객관적 과학적으로는 이질적이지만 주관적으로 상상적으로는 유사성이 있는 것으로 유추하고 기존의 명칭과 개념을 다른 명칭과 개념으로 전이 변형시킨다.

3. 관념어와 사물어의 전이 방법
은유의 기본적인 원리는 독자적인 두 사물 간에 비유를 통해 결합되거나 충돌하는 데서 나타나는 새로운 의미나 정서를 유발하는 미학이다. 그런데 두 사물의 관계를 결합시키거나 충돌시키는 데는 반드시 문장의 형태적 질서가 필요하다. 의미나 정서의 이동, 즉 전이에는 구체적인 서술방식이 요구된다는 말이다. 고전적 시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를 어떤 사물에게 다른 것에 속하는 이름을 갖다 붙이는 것이라고 하였고, 이러한 옮겨 넣는 일은 유추를 근거로 하여 보편에서 특수, 특수에서 보편, 또는 특수에서 특수, 즉 유(類)에서 종(種), 종(種)에서 유(類), 종(種)에서 종(種) 그리고 유추 등의 관계로 전이되는 양식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전이의 방법을 의미론적 차원에서 볼 때는 추상어와 구체어 또는 관념어 사물어 간의 전이로 설명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①구상적 이미지가 다른 구상적 이미지로 전이되는 경우 ②추상적 관념이 구상적 이미지로 전이되는 경우 ③구상적 이미지가 추상적 관념으로 전이되는 경우 ④추상적 관념이 다른 추상적 관념으로 전이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1) 사물어에서 사물어로

낙엽은 나비가 되고
나비는 가난한 불꽃
새벽이슬
비탈진 언덕의 개나리
빙하기의 공룡 발자국
여자의 아린 눈물
가시 돋힌 흑장미
에덴의 처음남자
자작시 「낙엽은 나비가 되고」에서


(1)의 시는 철저히 구상적 사물이 다른 구상적 사물로 전이되는 형식이다. 낙엽은 나비로, 나비는 불꽃, 이슬, 개나리, 발자국, 눈물, 흑장미, 남자로 전환하면서 의미의 전환을 모색한다.

(2) 관념에서 사물어로

의식은
한 마리 작은 산새
톱니 같은 부리와
羽毛의 날개를 단
무색투명한 어둠 속의 새
무성한 여름날엔
나무가지 잎새 속에 숨어 살면서
까칫까칫 잎새마다 구멍을 뚫다가
목말라,
목말라,
구멍을 뚫다가
홍윤숙 「한 마리 작은 새」에서

(2)의 시는 첫 행과 둘째 행에서 분명히 밝히듯이 추상적 관념이 구체적인 사물 이미지로 전이된 경우다. 의식이란 추상어가 한 마리 작은 산새’라는 구체적 사물어로 새롭게 명명되고 있다. 대부분의 시들은 (1)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애매하고 막연하고 불가시한 의미를 가시적이고 감각적인 사물 이미지로 바꾸어서 애매한 의미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은유의 일반적인 기법이다.

(3) 사물어에서 관념어로

비는 하나씩 불안을 벗어 던졌어
비는 하나씩 인습을 벗어 던졌어
비는 하나씩 속력을 벗어 던졌어
비는
그날
떨어지던 모체 이후
마음을 비비는 순간
보다 생활을 얹는 시간으로
꿈을 꿰는 감동
보다 시계를 보는 형안으로
헤엄치는 머리속 질주
보다 만지는 손가락의 정착으로
놓여나는 신경의
分子.
김지향 「비는」에서

그러나 때로는 (3)이나 (4)의 시에서처럼 구체적인 사물어를 관념으로 바꾸거나 아예 관념을 관념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있다. (3)의 경우 ‘비’라는 사물 이미지를 불안 인습 속도와 관련 짓고 꿈을 꿰는 감동’, ‘머리 속 질주’, ‘신경의 분자’ 등 관념적 비유어로 전이시키고 있는데 이는 구체적 사물의 의미를 추상적 의미로 확산하고 있는 경우다.

(4) 관념어에서 관념어로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늙은 비애(悲哀)다.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시인(詩人) 릴케가 만난슬라브 여자(女子)의 마음속에 갈앉은놋쇠 항아리다.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순결(純潔)이다.삼월(三月)에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연둣빛 바람이다.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

(4)의 경우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悲哀)다” “어리디어린 순결이다”에서 하나님이란 관념어가 늙은 비애라는 관념어로 어리디어린 순결로 고 즉 하나님-비애, 순결의 형식으로 관념에서 다른 관념으로 전이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이렇게 관념적 언어로 전이될 경우 그것은 의미의 확장이란 장점은 있지만 의미의 확실성이란 측면에서는 문제가 될 수 있다. 현대시에서 특히 일부 모더니즘시의 난해성이 여기에 있다. 이는 이 시에서 하나님을 놋쇠 항아리나 연둣빛 바람으로 은유화한 것과 비교해보면 더욱 난해성의 정도가 분명해진다. 이상의 예를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전이의 형식 전이의 실례
사물→사물
관념→사물
사물→관념
관념→관념
(1) 낙엽→나비
(2) 의식→산새
(3) 비 →분자
(4) 하나님→비애, 순결
은유의 시학10-은유와 의미 만들기
https://youtu.be/kSIqRcIot5w


1. 문학의 창작 또는 창조와 은유

재창조(recreate)란 고치거나 새로운 방식을 써서 다시 만들어 내거나 이미 있던 것을 고치거나 새로운 방식을 써서 새롭게 다시 만들어 낸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문학에서 창작이란 무엇인가. 보통 창조(create)가 신에 의해 무에서 유의 세계를 만들어낸 의미로 쓰이는데 문학은 기존의 언어나 이야기로 언어와 이야기를 새롭게 만드는 것이기에 엄격히는 재창조라 해야 할 것이고 이를 창작(works)이라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예술적 창작의 세계도 독창적인 방식에 의해 새로 고쳐진 의미에서의 창조란 말을 쓴다. 이는 언어의 경우도 그렇다. 그런데 언어 의미의 창조든 문학의 창작이든 이 모두가 의미의 확대나 축소나 이동을 꾀하는 은유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2. 의미의 축소와 확대

축소 은유는 두 기호의 공통된 특성만을 부각시키고 다른 부분은 숨기는 약점이 있다. “내 마음은 호수요”라고 하면, 마음이라는 넓은 의미의 세계가 호수라는 의미로만 한정된다. 따라서 은유에 의한 이해와 지식은 전체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기는 하지만 의미가 축소되고 한정적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본래 ‘형체’를 뜻했던 단어 ‘얼굴’이 지금은 ‘안면(顔面)’의 뜻만 가지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의미의 축소 변형의 대표적인 경전이 바고 성경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도 그렇다. 원래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지하신 하나님인데 목자 하나님이라고 하면 구체적이기는 하나 의미가 너무 축소되었다. 목자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등의 은유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절대자를 목자나 아버지로 축소하여 하나님과 쉽게 소통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도 자신을 인자, 생수, 생명의 떡, 세상의 빛, 양의 문, 선한 목자, 부활과 생명, 길과 진리와 생명, 포도나무 등의 은유로 의미를 축소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다양하게 드러냈다.

확대 그러나 세계는 이러한 은유적 치환을 통하여 그 의미와 가치가 새롭게 발굴되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지식이란 같은 대상일지라도 낡은 은유적 인식에서 새로운 은유적 인식으로 바뀐다는 뜻이며 그러한 은유의 망상조직이 바로 무한히 확대되는 지식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신체의 일부분을 가리키는 용어인 ‘손’이 ‘손이 필요하다(노동력)’ ‘손을 봐줘야겠다(위해)‘ ’손이 크다(씀씀이)‘ ’손을 내밀다(도움)‘와 같이 확대된다.

이동 의미의 이동은 단어의 의미 영역이 넓어지거나 좁아지는 일 없이 단어의 의미가 변하는 현상이다. 이는 역사 사회 심리 등의 변화에 따른 것인데 역사적으로 중세 국어의 ‘어엿브다’는 ‘불쌍하다’의 뜻이었으나, 근대에 이르러서 ‘아름답다’의 의미로 바뀌었다. 사회적으로 팔찌는 장식품인데 수갑의 뜻도 된다. 심리적으로는 죽다가 돌아 가다로, 내외가 부부로, 배우(재주꾼)가 스타로, 수작(술잔을 주고받음)이 말을 주고받음으로 이동한다.

⓵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悲哀)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詩人)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女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에서
⓶낙엽은 나비가 되고
나비는 가난한 불꽃
새벽이슬
비탈진 언덕의 개나리
빙하기의 공룡 발자국
여자의 아린 눈물
홍문표 「낙엽은 나비가 되고」에서

인용한 ⓵의 시에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늙은 비애(悲哀)다 놋쇠 항아리다 라고 은유적 전이를 시도한 것은 의미의 차원에서 보면 본래의 의미를 특수한 관념이나 이미지로 축소한 것이다. ⓶의 시에서 낙엽을 나비로 은유적 전이를 시도한 것은 의미의 이동이라고 하겠지만 나비를 불꽃 새벽이슬 개나리 공룡발자국 눈물 등의 은유 이미지로 한 것은 나비의 의미를 무한히 확장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은유는 의미나 사물이나 현실을 축소 확대 이동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은유를 통하여 사고하고 나아가 행동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은유에 의해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문화적 체험을 실제적인 현실로 축조하며 축조된 현실 안에서 추리하고, 목표를 세우고 계획을 수행한다. 그리하여 은유는 본래의 개념을 변형 축소 확대를 통해 보다 선명하게 보다 구체적으로 사물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새롭게 세계를 창조한다.

오르테가는 "은유는 아마도 인간의 가장 다산적인 잠재력일 것이다. 그것의 효력은 마술에 접해있고, 그것은 신이 인간을 만들었을 때 그의 피조물의 몸 속에다 깜박 잊어버리고 놓아둔 창조의 도구처럼 보인다."고 했다. 은유는 인간이 지닌 조물주의 능력, 즉 창조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신은 인간에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면 인간은 은유를 통해 말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3. 의미의 투사와 동화와 동일시

프로이트의 동화와 투사 인간은 누구나 마음에 평화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고 자신의 욕망은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끊임없는 외부의 도전과 자신의 지나친 욕망은 늘 심리적 불안과 불만과 스트레스를 겪게 된다. 그리고 이를 적절히 해결하지 못하면 병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아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속이거나 상황을 다르게 해석하여, 감정적 상처로 불안하거나 붕괴위기에 처한 자아를 보호하기 위한 심리의식이나 행위인 심리적 자기방어기제(self-defense mechanism)를 발동하게 되는데 그중에 투사( projection)와 동화(同化, assimilation)가 있다. 투사는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이나 욕망 등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나 외부 환경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동화는 투사와 반대로 자신의 불안이나 부족감을 피하기 위해 타인의 바람직한 점을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유명한 사람의 옷차림 행동 등을 따라한다. 따라서 이는 극히 자기중심적인 행동이다.

시인의 동화와 투사 그러나 시인은 의식적으로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추구함에 있어 동화는 시인이 세계를 자신의 내부로 끌어들여서 그것을 내적 인격화하는 이른바 세계의 자아화다. 실제로는 자아와 갈등의 관계에 있는 세계를 자아의 욕망, 가치관, 감정에 적합한 것으로 만들어 동일성을 이룬다. 반면 투사는 자신을 상상적으로 세계에 투사하는 것, 곧 감정이입에 의해서 자아를 세계에 내던져 세계와 일체감을 이루도록 한다. 이처럼 동화에 의하든 투사에 의하든 자아는 세계와의 관계에서 소외되거나 세계와 괴리되거나 초월하지 않고 공존한다. 이것이 시의 진정한 가치다. 그리고 이러한 동일시 작업 역시 은유를 통해 이루어진다.

① 노래도 바람도 아닌
괴이한 소리 따라
산을 넘어가고 있노라면

뒤에서 부르는 소리 있어
돌아다 보면 아무도 없는데
내가 이고 가던 하늘이
저 나뭇가지에 걸려 신음하고 있다
― 최선령의 「다리를 건널 때」에서

② 내가 당신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슬한 봉우리
휘날리는 깃발
가을 하늘에 덩그렇게 빛나는 결실
바로 추수군의 얼굴입니다
― 홍문표의 「내가 당신의 자녀가 되는 것은」에서
인용한 시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주체와 객체, 나와 사물의 동일성에 대한 시어의 확인이다. ①의 시에서 “내가 이고 가던 하늘이/저 나뭇가지에 걸려 신음하고 있다”는 시행을 보면 하늘이 신음한다는 것이 그 골자다. 하늘이란 우주적 사물이 신음이란 심리적 현상으로 동화된 것이다. ②의 시에서는 ‘나’ 또는 ‘당신의 자녀’라는 인격적 자아가 봉우리, 깃발, 열매, 얼굴이라는 사물로 투사되고 있다.
이처럼 의미니 개념이니 하는 것들이 객관적으로 사전적으로 고정된 것들로 알고 있지만 의미란 은유적인 확대와 축소와 이동을 통해서 또는 투사와 동화라는 동일시를 통해서 기존의 의미를 해체하거나 보완하면서 무한한 창조의 하늘로 비상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르테가는 "은유는 아마도 인간의 가장 다산적인 잠재력일 것이다. 그것의 효력은 마술에 접해있고, 그것은 신이 인간을 만들었을 때 그의 피조물의 몸 속에다 깜박 잊어버리고 놓아둔 창조의 도구처럼 보인다."고 했다. 은유는 인간이 지닌 조물주의 능력, 즉 창조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신은 인간에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면 인간은 은유를 통해 말을 즐길 수 있고 재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세상은 역사나 문명만 변화와 개혁을 도모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언어의 세계 의미의 세계도 끊임없이 변화와 개혁을 모색한다.
은유의 시학11-서술형 은유의 문법
https://youtu.be/K7Kj97H18vE

(1)우리 문장의 기본 문법
은유는 문학의 기술이고 문법은 일반어의 규칙으로 생각하여 문법은 언어학자의 영역이고 은유는 문학자의 영역으로 안다. 은유가 비유를 통해 의미를 전이한다든지 상상과 창작이라고 하니까 일반문장과는 단어들의 배열 규칙이 다른 어떤 신비로운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문학문장이나 일반문장이나 모두 소통을 위한 것이라면 소통의 공통규칙인 단어와 문장 배열의 문법적 규칙은 동일해야한다. 따라서 본 강의에서는 일반문법과 은유의 문법을 함께 살펴봄으로 은유의 속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5언 9품사 7성분-문장이란 몇 개의 단어들이 모여서 기본적인 단문을 만들고 단문들이 모여서 문단을 만들고 문단들이 모여서 하나니 글을 이룬다. 그런데 아무리 긴 작품이라 해도 문장은 주어+술어라는 기본적인 단문들이 모인 것이다. 그래서 문법은 바로 이 단문문장들의 구성과 기능을 이루는 단어의 의미나 기능에 따라 명사, 대명사, 수사, 동사, 형용사, 관형사, 부사, 조사, 감탄사의 9품사로 나누고, 그리고 이들 품사는 문장에서의 역할에 따라 체언, 용언, 수식언, 관계언(조사), 독립언(감탄사) 등 5언으로 구분하며, 이들을 문장성분의 입장에서는 주어 서술어 목적어 보어 관형어 부사어 독립어 등 7성분으로 나눈다.

체언(體言)은 명사, 대명사, 수사로 앞에는 관형어 뒤에는 다양한 조사가 붙어 주어 서술어 목적어 보어 관형어 부사어 독립어 등 문장의 뼈대구실을 한다.

우리가 이겼다. ('우리' + 주격 조사 '가' → 주어)
우리는 이제 중학생이다. ('중학생' + 서술격 조사 '이다' → 서술어)
그가 나를 이겼다. ('나' + 목적격 조사 '를' → 목적어)
아, 그는 꼴찌가 아니다. (‘아‘ 독립어, '꼴찌' + 보격 조사 '가' → 보어)
어머니의 희망은 너뿐이다. ('어머니' + 관형격 조사 '의' → 관형어)
그들은 교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교실' + 부사격 조사 '에서' → 부사어)

용언(用言)은 동사, 형용사, 보조용언(보조동사, 보조형용사)으로 다양한 어미변화를 통해 동작이나 작용, 성질이나 상태 등을 서술한다.

그는(주어) 밥을(목적어) 든든히(부사어) 먹었다(용언=서술어=동사)
그는(주어) 밥을(목적어) 든든히(부사어) 먹어 두었다(서술어=동사+보조동사)
그는(주어) 금강산에(부사어) 가다(용언=서술어=동사)
그는(주어) 금강산에(부사어) 가고 싶다(서술어=동사+보조형용사)

수식언(修飾言)은 체언을 수식하는 관형사와 용언을 수식하는 부사로 체언이나 용언 앞에 놓여 그 뜻을 꾸미거나 한정한다.

철수의(관형어) 동생이(주어) 밥을(목적어) 많이(부사어) 먹는다.(서술어)

(2) 우리말 문법과 은유의 문법

은유는 사물을 대신한 이미지이기에 대부분 명사다. 그렇다면 문장에서 명사는 체언이기에 역시 주어 서술어 목적어 보어 관형어 등의 성분 역할을 하게 된다.

1) 나비는(주어) 곤충이디(술어)-일반문장(나비+곤충=인접관계)
2) 나비는(주어) 꽃이다(술어)-은유문장(원관념=나비, 보조관념=꽃, 이질관계)

3) 내 마음은(주어) 호수요(술어)-은유문장(원관념=마음, 보조관념=호수)
4) 내 마음은(주어) 호수가(보어) 아니오(술어)-은유문장
5) 나는(주어) 호수인(관형어) 그의 마음을(목적어) 좋아한다.(술어)-은유문장
6) 호수의(관형어) 마음이(주어) 그녀의(관형어) 마음이다(관형어)-은유문장
7) 나는(주어) 호수인(관형어) 그의 마음에(부사어) 눈을 돌렸다.(술어)-은유문장

인용한 문장들은 1)을 제외하고는 모두 은유가 포함된 문장이다.
그런데 은유도 문장 성분상 모두 주어 술어 목적어 보어 관형어 부사어 구실을 한다. 이는 은유도 일반 문법의 규칙을 지키고 있다는 말이다.
1)의 경우 나비와 곤충은 종과 유의 인접관계지만 2)은 나비와 꽃은 아무관계가 없는데 나비(원관념)=꽃(보조관념)이라는 작위적 단정을 했다. 이때 나비는 이질적인 꽃으로 전이된 것인데 이것이 바로 은유, 메타포(metaphor=meta 넘다 phor 옮기다)가 작동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은유는 술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4)는 보어,5)6)7)은 관형어가 되어 마음이 투명하고 수동적임을 호수라는 이미지(보조관념)로 드러내고 있다.

(3)브링크만의 명사은유와 품사

브링크만(F. Brinkmann)도 명사은유는 모든 품사들과 결합하여 다양하게 은유를 드러낸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경우를 들고 있다.

‘이다’란 서술격 조사를 품은 은유- 그녀는 한 마리 나비이다.(서술어)
사역동사의 형태로 된 조사를 품은 은유- 그는 이리가(보어) 되었다.
동격 혹은 관계절을 품은 은유- 장미꽃(관형어)인 그 소녀
돈호법 또는 호격조사를 품은 은유- 오오, 나의 등대여!(주어)
소유격조사를 품은 은유- 질투의(관형어) 불꽃, 슬픔의(관형어) 강
다른 구문 속의 소유격으로서의 은유-악마의 무리인, 형태 없는 저 불꽃의(관형어) 말들
동사를 품은 은유- 나르는(관형어) 꽃(나비)
형용사를 품은 은유- 슬픈(관형어) 달
부사를 품은 은유- 헐떡거리며 부는(관형어) 바람

물론 이러한 문법적 분석은 은유도 일반문법을 따른다는 객관적 입장이어서 이를 이해하는 것은 창작의 기초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시를 읽고 감상한다는 것은 문법적인 구조가 아니라 시의 예술적 가치와 나아가서는 삶의 동질성을 찾는데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보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거리, 그 긴장관계나 성립구조를 찾는 일이 더욱 중요한 일일 것이다. 대표적인 은유의 문법을 살펴보자

(2) 서술형 은유, “A는 B다”형 은유

문장의 가장 기본형식은 첫째는 “무엇은 무엇이다”와 둘째는 “무엇이 어떠하다“의 두 형식이다. 전자는 사물의 의미나 개념을 정하는 것이고 후자는 사물의 상태 성질 동작 등을 말하는 형식이다. 따라서 명사가 다른 명사로 전이되는 은유문장의 경우도 그 대표적인 문법은 “A는 B다”라는 주어(원관념명사)+서술어(보조관념명사) 형식이다.
이는 A라는 원관념 명사에 주격조사 는, 가 등을 붙이고, B라는 보조관념명사에 서술격 조사 다, 이다 등을 붙인 것으로 예컨대 “내 마음은 호수요”라든지 “나비는 꽃이다.”라는 은유적 표현은 결국 “무엇은 무엇이다”라는 주어+서술어의 문장인데 이는 주어가 원관념명사+주격조사, 술어는 보조관념명사(이미지)+서술격조사가 결합된 형태다.

이상은
아름다운 꽃다발을
가득 실은
쌍두마차였습니다

현실은
갈갈이 찢어진
두 날개의
葬送의 만가였습니다

아하!
내 청춘은
이 두 바위틈에 난
고민의 싹이었습니다
- 김용호 「싹」

인용한 시는 전형적인 “A는 B다”형이다. 이상은 쌍두마차다, 현실은 장송의 만가다, 청춘은 고민의 싹이다 라는 은유의 문법이다.

그런데 문법적 구조로 보아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김동명 <내 마음>) 같이 “A는 B다”의 단순한 문장의 은유라면 이를 단순은유라 하겠지만 “A는 B다, C다, D다”로 확장될 때는 이를 확장은유라고 하게 된다.-

아아 나는 이제 숯이요 물이요 불이요 그 모든 것
나는 이제 술이요 물이요 불이요 예언자요
심판자요 피도 눈물도 오줌이요 똥이요
송미자요 강철주요 김성성이요 박경님이요......
그 모든 것이다. -<박남철 ,조용한 목소리>-

한편 “A는 B다”형에서 ‘B다’의 경우 서술격 조사 다 이다를 생략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 흘림
박두진의 <꽃>에서

이 시의 주어는 ‘이는’이고, 서술어는 속삭임, 울음, 피흘림 등의 명사형인데 모두 ‘이다’라는 서술형 조사를 생략한 것이다.

“A는 B다”형 은유의 경우 위에서는 B가 명사였다. 명사 B에 서술격조사를 붙인 것이다. 그런데 서술어(보조관념)는 동사나 형용사도 될 수 있다.

1) 달빛이(주어) 밝다(술어, 형용사)-일반문장
2) 달빛이(주어-원관념) 운다(술어,동사,보조관념), 슬프다(형), 흐느적거린다(동), 중얼거린다(동), 눈을 흘긴다(동), 허리를 굽힌다(동)-은유문장

1)은 달빛과 밝다 라는 형용사가 인접성으로 결합된 일반문장이다. 그러나 2)의 여러 경우는 달빛이란 무생물의 주어가 운다 슬프다 흐느적거린다 등 달빛과 무관한 생물의 동사나 형용사를 결합한 일반 상식을 뛰어넘은 은유적 표현이다. 이렇게 은유는 기존의 개념을 뛰어넘어 계속 새로운 의미를 창조한다.
은유의 시학12-수식형 은유의 문법
https://youtu.be/4vyrH4QvUME

(3) 수식형 은유 - 관형어 은유, 부사어 은유

세상의 모든 문장은 “무엇은 무엇이다”와 둘째는 “무엇이 어떠하다“의 두 형식이 있다고 했다. 이를 기본 도식으로 보이면 주어 +술어다. 그런데 이를 좀 확대하면 주어+목적어+보어+서술어도 된다. ”철수는(주어) 꽃을(목적어) 순이에게(보어) 주었다(서술어)“ 그리고 이들 각 성분들을 수식하는 말을 각 성분 앞에 놓을 수 있다. 이를 수식언이라 하는데 수식언에는 체언을 수식하는 관형어와 용언을 수식하는 부사어가 있다. 따라서 수식형 은유에는 관형어 은유, 부사어 은유가 있다.

가, 관형어 은유
1) A의 B형
관형어는 ① 관형사, ② 체언 또는 체언 구실을 하는 말에 관형격 조사를 붙여서, ③ 용언을 관형형으로 만들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체언(명사, 대명사, 수사)에 관형격조사 ‘의’를 붙여 뒤에 있는 체언을 꾸미는 A의 B형이 있다. 관형격을 속격 또는 소유격이라고 부르는데, 이 명칭은 관형격조사 ‘의’가 그 다음의 명사가 그 앞의 명사의 소유물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1) 이것은(주어) 어머니의(관형어) 사진(이다, 서술격조사 생략)
2) 이것은(주어) 어머니의(관형어) 깃발(이다, 서술격조사 생략한 은유)

1)에서 ‘어머니의 사진’은 사진이 어머니의 소유라는 일상적인 어법이다. 그러나 2)에서 ‘어머니의 깃발’은 문법상 어머니가 깃발을 꾸민 관형어로 어머니의 꿈이나 소망을 ‘어머니의 깃발’이라는 이미지로 은유화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경우 원관념은 ‘이것은’이란 어머니의 소망이고 보조관념은 ‘어머니의 깃발’이라는 복합적 의미의 은유 이미지 가 된다.

사과의 바다 : 김구용의 「頌」
바람의 사람 : 전봉건의 「처음으로 열리는」
허무의 겸손 : 석성일의 「애가」
추억의 한 접시 불 : 김춘수의 「꽃을 위한 서시」
문자의 하늘 : 신석초의 「만해유고를 읽는다」
어두움의 이불자락 : 김광협의 「눈물」
흰 꽃의 눈물 : 김선영의 「별」
천년의 가을 : 조남익의 「충청도①」
세월의 누더기 : 신동집의 「이사」
시간의 화살소리 : 홍신선의 「아침 노을」
귀환의 창 : 권용태의 「解土를 기다리며」
몇 줄의 현기증 : 이우석의 「여름밤」
복수의 얼음 꽃 : 유안진의 「유배길」
유랑의 벽 : 추은희의 「여름날 하루」
안식의 바다 : 허형만의 「목포역」
침묵의 노래 : 이유경의 「겨울산행」
志鬼의 낱말 : 이관묵의 「변형의 바람·84」
젖가슴의 오디송이 : 유경환의 「속니웃음」
불구의 조각달 : 김태준의 「귀향」
위선의 옷깃 : 이탄의 「나와 나」
사색의 주검 : 김창근의 「겨울에 세우는 묘비」
숲의 문신 : 정승렬의 「의자 만들기 9」
영혼의 성 : 황금찬의 「파도를 타는 새」
幼年의 숲 : 이명수의 「새를 위한 콘체르트」
잠속의 나무 : 박제천의 「꿈을 꾸며」
시의 가슴 : 이기반의 「산 너머 저 노을」
시간의 난파 : 이근배의 「浮沈」
말씀의 은유 : 한광구의 「심지 하나로 녹이면서」
사랑의 비밀구좌 : 허소라의 「10월의 노래」
순수의 아침 : 함홍근의 「겨울파도」
여자의 창 : 허영자의 「문득 바람이」

한편 A의 B형에서 관형격조사 ‘의‘를 생략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의) 학교, 어머니(의) 가방, 고향(의) 마을-일반문장
바람(의) 허리, 하늘(의) 치마 - 은유문장
2) A+ㄴ,+ㄹ,+던, +는 B형
관형어 은유의 두 번째 경우는 용언(동사, 형용사)에 관형사형 어미를 붙여 A-ㄴ,-ㄹ,-던, -는 B형의 관형어를 만들 수 있다.

착한(관형어, 형용사)) 아이
내가 읽던(관형어, 동사) 책

1) 천년을
불붙는
바다
- 이성교 「노을」에서

2) 질기고 긴 세월
구석구석 저리는 관절염의
아픈 밤비로 만난다면
오,
우리가 매일 무엇으로 다시 만난다면
- 강계순 「연가」에서

1)의 ‘불붙는 바다’에서 ‘불붙는’은 ‘불붙다’ 동사가 불붙(어간)+는(관형사형어미)로 된 관형어 은유다. 2)에서 ‘질기고 긴 세월’에서 ‘질기고 긴(기+ㄴ)’은 관형어구, 구석구석 저리는(저리+는) 관절염에서 ‘구석구석 저리는’. 역시 관형어구다. 구란 둘 이상의 어절이 결합된 것, 그리고 이들도 모두 은유로 표현되었기에 관형어 은유라고 할 수 있다.

나, 부사어 은유
부사는 원래 형용사나 동사 등 꾸미는 품사다. 그런데 형용사나 동사가 용언으로 서술어 역할을 하므로 이들 용언이나 서술아를 꾸미는 것들은 부사어가 되고 부사어 은유유가 된다.

보름달이 정말(부사어) 아름답다(형용사)
보름달이 점점(부사어) 다가온다(동사)
이 초상화는 실물과(부사어) 다르다(형용사)
그는 친구의 아들을 사위로(부사어) 삼았다(동사)

서울 사는 재미는
상한 공기를 마시고
빛바랜 푸루죽죽한 하늘을 이고 사는 재미다.

소리에 부대끼다가,
빛깔에 부대끼다가,
그리고 나면 적막에 부대끼다가,
어디 털석 주저앉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재미다.
- 허유 「서울 사는 재미」에서

이 시는 1연에서 “서울 사는(관형어) 재미는-재미다”(주어+서술어)에 ‘상한 공기를 마시고’, 빛바랜 푸루죽죽한 하늘을 이고 사는‘은 모두 ’재미다‘를 수식하는 관형사어 은유다. 그런데 ’소리에 부대끼다가‘ ’빛깔에 부대끼다가‘ ’적막에 부대끼다가’는 모두 ‘부대끼다가’라는 동사를 수식하는 부사어 은유다. 그리고 ‘어디 털석 주저앉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은 역시 ‘재미다‘를 수식하는 관형어구 은유다.

다, 혼합형 은유

은유가 있는 문장들을 우리 문법과 비교해보면 은유문장도 일반 문장의 구성성분과 같이 주어 서술어 목적어 보어 관형어 부사어의 배열규칙을 같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문장의 성분은 꽃은(주어) 나비다(서술어)나, 내 마음은(주어) 호수요(서술어)처럼 단문으로 되어있는 것도 있지만 “꽃이 마음의 불꽃이 되어 밤새 고독의 능선을 태우고 있다”라고 한다면 골격은 “꽃이 능선을 태우고 있다”라는 것이지만 그 속에는 ‘마음의 불꽃이 되어 밤새 고독’이라는 관형어 부사어의 구와 절들이 또 은유가 되어 보충하고 있음을 본다. 이렇게 주어 서술어 목적어 보어 관형어 부사어들 앞에 관형어 부사어의 구와 절들이 배치되어 은유가 혼합된 모습을 보게 된다.


(1) 시간의 둔탁한 大門을
소란스럽게 열고 들어선
밤이
으스럼과 부딪쳐
기둥을 끌어안고
누우런 밀밭을 밟고 온
그 밤의 신발 밑에서
향긋한 보리 냄새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내밀고 있다.
- 오규원 「분명한 사건」에서

(2)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서정주 「동천」에서

(1)의 주어는 3행의 ‘밤이‘고 목적어는 ’고개를’ 최종서술어는 ‘내밀고 있다‘ 이다. 그렇다면 ‘시간의 둔탁한 大門을 소란스럽게 열고 들어선’은 주어인 원관념 밤을 수식하는 보조관념 관형어구 은유다. 그리고 4행 ‘으스럼과 부딪쳐’에서 9행 셋째 행의 ‘어리둥절한 얼굴로’까지는 목적어 ‘고개를‘을 수식하는 혼합적인 은유의 구절들이다.
(2)의 경우 문장골격은 첫 문장은 주어는 숨겨두고 ‘눈썹을(목적어)+심어놨더니’(서술어)의 문장과 ‘새가(주어)+그걸(목적어) 알고(부사어) 비끼어가네’(서술어)의 두 문장이 복문으로 되어 있고, 첫 문장의 목적어 눈썹 앞에는 ‘내+마음+속+우리+님의’ 중복된 관형어구가 ‘눈썹’을 수식하고 있고, 서술어 ‘씻어서’ 앞에는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라는 부사어들이 중복구를 형성하여 서술어 ‘씻어서’를 꾸미고 있으며, 두 번째 문장에서는 주어 ‘새’ 앞엔 관형구 ‘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이 서술어 ‘비끼어가네’ 앞에는 부사어 ‘시늉하며‘가 배치되어 있다.

이처럼 아무리 복잡한 은유문장이라도 문장 성분으로 분석해 보면 시문장도 주어+목적어+보어+서술어 라는 골격에 각각 관형어나 부사어라는 수식어를 앞에 살붙이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시가 복잡한 은유의 혼합문장일 경우 독자가 바로 느끼기 어려운 난해시라는 오해를 받게 된다. 그러나 난해시라도 문법적으로 분석해보면 쉽게 그 문장의 구조와 의미를 이해할 수 있고 창작방법에도 도움이 된다. 그리고 시가 은유를 통해 보다 예술적으로 창조적으로 창작한 것이라면 문법적 논리보다 감성적 상상적 은유의 분석할 필요가 있는데 이렇게 보면 이 시는 초승달을 원관념으로 하고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보조관념으로 하여 화자가 추구하는 절대적 대상에 대한 간절함을 ‘즈믄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라는 은유로 표현하였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절대자에 대한 외경심을 ‘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라는 고도의 상징적 은유로 표현한 시라고 할 수 있다.

내 아내는 갖고 있다. 호랑이 이빨 사이의 수문의 몸통을
내 아내는 갖고 있다. 장미꽃 무늬 리본 매듭과 최후의 웅대한 별의
화환의 입술을
흰 땅 위의 흰 생쥐의 흔적 같은 이를
문지른 호박과 유리의 혀를
내 아내는 갖고 있다. 칼에 찔린 祭餠같은 혀를
눈을 감았다 떴다 하는 인형의 혀 같은 혀를
믿기 어려운 보석의 혀를
내 아내는 갖고 있다. 어린이의 첫 습자 글씨 같은 눈썹을
제비둥지의 가장자리 같은 눈썹을
-앙드레 브르똥 「자유로운 결합」에서

이 시의 문법은 ‘내 아내는(주어) 갖고 있다(서술어).’ 라는 단문에 구체적으로 갖고 있는 것들(목적어)을 1행에서는 몸통을, 2행에서는 입술을, 3행에서는 이를, 4행에서는 혀를, 이렇게 계속 나열하고 그 목적어들 앞에 은유적인 관형어들을 배치한 혼합은유의 시다. 따라서 이 시는 일반적인 문법적 규칙을 지키면서도 결국 사물의 기존 의미를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것은 시가 기존의 의미나 개념들을 해체하고 새롭게 창조하는 것으로 그 특성을 지닌다는 사실이기도 하다.
은유의 시학13-치환은유(바꿔놓기 은유)
https://youtu.be/CkVegGs5BAI

(1) 의미와 감정 표현의 두 방법

물질의 세계나 과학의 세계에서는 모든 사물의 개념이 정확성에 근거한다. ‘물’이란 무엇인가, 과학적 표현으로는 H2O, 수소 2분자에 산소 1분자가 결합된 물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물질적 존재이면서도 정신적 존재요 감성적 존재다. 따라서 사물의 개념이나 의미를 그렇게 정확한 기호로 표시할 수 없다. 사물의 개념은 물질적으로는 단일하지만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는 양파껍질처럼 벗겨도 벗겨도 또 속살이 드러나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다.

그런데도 우리는 일상적 언어 사전적 언어를 가지고 사물의 의미가 다 밝혀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양파껍질 몇 겹에 불과할 뿐 사물들의 존재 가치나 의미는 아직도 무진장으로 내장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보다 가치 있는 삶, 보다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는 기존의 개념 속에 숨어 있는, 미 발굴된 의미를 계속 드러내는 의미의 발견 의미의 창조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때 의미의 발견 의미의 창조 작업 행위가 바로 은유(metaphor)다.
그렇다면 은유가 문장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의미를 발견하고 창조하는가, 그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기존의 의미를 바꾸는 전이 즉 옮겨놓기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은유의 커다란 줄기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은유를 전이, 대치로 보았듯이 동일성 또는 유사성의 아날로지를 통한 낱말들의 이름 옮기기가 주류를 이루어 왔다. 그러나 현대의 은유에 대한 개념은 유사성의 유추에 의한 이름 바꾸기 보다는 비동일성 비유사성의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관계로 낱말들을 옮기거나 심지어는 구절이나 문장 간에도 이질적인 은유를 대립적으로 배치하여 친숙함보다는 충돌감 긴장감을 조성하는 방향으로 의미의 발견 의미의 창조 작업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은유의 이러한 두 방향을 휠라이트는 「은유와 실재」에서 치환은유(diaphor)와 병치은유(epiphor)로 나누어 전자를 ‘전이’에 의한 것이라 하고 후자를 ‘상호작용’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를 어원적으로 보면 당초 은유인 메타포(metaphor)가 meta=over, phor=movement, carrying. ‘넘다’와 ‘옮기다’ 라는 뜻인 것을 치환은유(置換隱喩)는 epi(over on to)+phor(movement), 병치은유(竝置隱喩)는 dia(through)+phor(movement)로 구분한 것이다. 필자는 이들 용어를 「현대시학」 「시어론」 에서 구분하기 쉽도록 치환은유를 옮겨놓기 은유, 병치은유를 마주 놓기 은유라 했는데 옮겨놓기를 바꿔놓기로 하는 것이 더 명확할 것 같아 여기서는 치환은유를 바꿔놓기 은유라는 말과 함께 사용할 것이다.

(2) 치환은유 -바꿔놓기 은유

치환은유(置換隱喩)에서 치환이란 바꿔놓다 란 뜻이다. 그동안 은유의 개념을 전이(轉移)란 말로 사용해 왔고 over on to란 ‘-로 넘다, 옮기다’라는 뜻이어서 옮겨놓기 은유라 했는데 은유가 원관념, 즉 원래의 의미를 보조관념으로 의미를 바꾼다는 뜻에서는 바꿔놓기 은유라고 하는 것이 더 선명할 것 같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비유를 의미의 전이로 설명하였고 이러한 의미의 이동을 A에서 B로 옮긴다는 뜻으로 치환은유라 하고 대치론으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치환은유란 두 사물 간의 비교가 아니라 A라는 사물의 의미가 B라는 사물로 자리바꿈하여 의미를 확실하게 보다 새롭게 하는 것을 뜻한다.

비유의 본질은 어떤 사물을 드러내기 위하여 그와 유사한 다른 사물을 예를 들어 보여주는 어법이다. 비교를 위해서는 원물 즉 원관념이 있어야 하고 그것과 빗대어 볼 수 있는 보조 대상 즉 보조관념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를 문장 도식으로 하면 치환은유의 기본적인 문장은 “A(원관념)는 B(보조관념)다” 라는 형식이 된다. 예컨대 “여호와는(원관념) 나의 목자시니(보조관념)”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의 원관념에 보조관념도 하나로 바꾼 것을 단순은유라 한다. 그런데 막상 시를 쓰다보면 A라는 원관념에 대한 보조관념이 하나뿐 아니라 여러 개로 확장될 수 있다. A(원관념)는 B(보조관념)다, C(보조관념)다, D(보조관념)다 등으로, 이런 경우 이를 확장은유라고 한다. 또한 “A(원관념)는 B(보조관념)다” 라는 단문의 A나 B에 관형어은유나 부사어은유가 수식어로 첨부되어 은유 속에 또 은유가 있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를 액자식 은유, 혼합형은유라고 한다.

1) 단순은유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은 촛불이오
그대 저 문을 닫어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김동명의 「내 마음은」에서

봄바람은 안기기 잘하는 나비
여름은 할퀴기 잘하는 곰
가을바람은 울기 잘하는 송아지
겨울바람은 뛰어 달리는 성난 말
―황석우의 「사계의 바람」

2) 확장은유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다윗의 시 「시편18;2」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줄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순결이다.
삼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

3) 액자식 은유 또는 혼합형은유

개나리
진달래
흐드러진 꽃밭이다
가나안의 혼인잔치다
맹진사댁 청사초롱이다
사월의 산언덕
포동한 등성이마다
너울 쓴 신부처럼
파닥이는 가슴이다

두려움의 껍질들이
허물을 벗고
차마 부끄러워
마지막 정절에 혼절하는
잔인한 환성이다
-홍문표의 「꽃밭에서」에서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서

1)에서 김동명의 「내 마음은」 첫 행 “내 마음은 호수요”는 마음(원관념)+호수(보조관념)의 형식으로 단순은유다. 마음이라는 원관념이 호수라는 보조관념으로 옮겨진 원관념 하나에 보조관념 하나로 치환된 은유다.
그런데 2연에서는 마음이 촛불이라는 보조관념으로 치환되었다. 그렇다면 1,2연 전체로 보면 마음이란 원관념이 호수와 촛불이라는 보조관념으로 확장된 확장은유가 된다. 황석우의 「사계의 바람」은 1행에서 봄바람은 나비, 2행에서 여름은 곰, 3행에서 가을바람은 송아지, 4행에서 겨울바람은 말로 치환된 역시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모두 1;1로 옮겨진 것들이어서 단순은유의 형식이다.

그런데 2)의 다윗의 시 「시편18:2」를 보면 ‘여호와’라는 원관념에 보조관념은 반석, 요새, 건지시는 이, 하나님, 바위, 방패, 뿔, 산성 등 무려 8개로 옮겨지고 있는 전형적인 확산은유의 본보기다. 이처럼 하나의 원관념이 여러 개의 보조관념으로 확산된다는 것은 기존의 개념이 은유를 통하여 무한히 창조될 수 있음을 잘 말해준다. 한편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도 분석해 보면 ‘하나님’이라는 하나의 원관념이 2행에서 늙은 비애, 3행에서 살점, 5행에서 놋쇠 항아리, 10행에서 순결, 13행에서 연둣빛 바람으로 보조관념들이 나열되어 있어 역시 확장은유의 작품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다윗의 「시편18:2」시와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 시에서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확장 과정을 보면 시인의 유추 방식에 차이가 있음을 보게 된다. 다윗의 시에서 원관념 ‘여호와’는 반석, 요새, 방패, 바위, 뿔, 산성 등 모두가 강하고 견고한 방어와 보호라는 유사성을 가진 이미지들이다. 따라서 이는 전통적으로 은유란 유사성에 의한 유추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김춘수의 시에서 ‘하나님’이란 원관념이 늙은 비애, 살점, 놋쇠항아리 등의 보조관념으로 유추되는 경우는 이미지들 간에 비유사성, 이질감이 작용하고 있다. 이는 현대적 은유의 개념이 유사성에 의한 치환보다는 비유사성, 즉 상호충돌에 의한 의미와 감성의 창조라는 측면을 드러내고 있다.

한편 3)에서 홍문표의 「꽃밭에서」를 보면 1연을 보면 원관념 ‘꽃밭’이 보조관념 혼인잔치, 청사초롱, 파닥이는 가슴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2연에서는 잔인한 환성 앞에 “두려움의 껍질들이 허물을 벗고”라는 은유의 구절이 있고, ‘마지막 정절에 혼절하는’이란 관형구의 은유가 또 있다. 따라서 2연의 구성을 보면 ‘꽃밭’이란 원관념과 ‘잔인한 환성’이란 보조관념 사이에 두 개의 은유가 삽입되어 있는 액자식 은유가 된다. 그렇다면 홍문표의 「꽃밭에서」는 확장은유와 액자식 은유가 혼합된 혼합형은유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의 일절을 보면 이 시의 원관념은 ‘맹서는’이고 보조관념은 ‘날아갔습니다’이다 그런데 ‘맹서는’이란 원관념 앞에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이란 은유가 있고, ‘날아갔습니다’ 앞에는 ‘차디찬 티끌’과 ‘한숨의 미풍’이란 은유가 있어 전체 은유 속에 부분 은유가 액자처럼 구성되었다.

이상에서 보면 의미를 옮기고 바꾸는 치환은유의 경우, 크게는 A라는 원관념을 B라는 보조관념으로 전환하는 것이지만 세부적으로는 단순은유, 확장은유, 액자식 은유로 구별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방법은 모두 기존의 의미를 바꾸고 옮기어 의미를 확장하고 창조하자는데 있는 것이다.
은유의 시학14-병치은유-마주놓기 은유
https://youtu.be/3GpbDBB5spI

(3). 병치은유-마주놓기 은유

3) 병치은유와 상호작용
그러나 휠라이트는 시에서 은유의 방식은 바꿔놓기만이 아니라 병치(竝置), 즉 마주 놓기의 방법을 통하여 은유의 또 다른 역할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병치은유를 diaphor로 표기하면서 접두사인 dia는 통과함, 마주봄(through)이라고 할 때 치환은 동일성이든 비동일성이든 A가 B로 자리를 바꿔놓는 것이고 병치는 A라는 은유와 B라는 은유가 서로 마주봄의 충돌을 통해 의미가 전환되거나 새롭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병치은유는 치환은유처럼 어느 한쪽으로의 합침이 아니라 서로가 각각 대결상태를 유지하면서 제3의 효과나 의미나 정서를 자아내게 하는 방법이다. 은유가 그동안은 전이 전치 치환을 원칙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처럼 병치은유를 제기하게 된 것은 미학이나 언어학의 인식 변화와도 관계가 있다. 우리는 그동안 의미나 가치를 절대적이고 고유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언어는 어떤 사물의 의미를 정확하게 지시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치환은유를 사용했다. 그런데 미술에는 색상대비란 것이 있다. 색상이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색을 대비시켰을 때 원래의 색보다 차이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노랑색은 검정색과 대비했을 때 훨씬 선명하다. 음악에는 대위법이나 화성학이 있다. 독창이나 독주도 좋지만 중창이나 오케스트라의 웅장함은 또 다른 감동을 준다. 언어학자 소쉬르는 모든 낱말의 의미는 서로 다른 낱말과의 음성적 변별성에서 탄생한다고 하였다. 의미나 감동은 독자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 이웃과의 충돌과 대립에서 탄생한다는 말이다. 부분의 합은 전체가 아니라는 게쉬탈트 심리학의 명제가 있다. 서로 다른 이미지가 합쳐지면 각각의 이미지의 특성은 사라지고 전혀 다른 이미지가 탄생한다는 말이다. 이를 달리는 시너지synergy) 효과 또는 상승작용이라고 할 수도 있다.

2) 고전시가의 병치은유
그러나 이러한 상호작용의 원리는 현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음양의 법칙이나 이원론의 변증법적 과정은 예부터 있었던 것이다. 시가를 보면 과거에 대조법이니 대구법이니 하는 상호작용의 문장법이 있었다.

江碧鳥逾白(강벽조유백) 강이 푸르니 새 더욱 희고
山靑花欲然(산청화욕연) 산이 푸르니 꽃이 붉게타고 있네
今春看又過(금춘간우과) 올봄도 보기만 하면서 또 보내니
何日是歸年(하일시귀년) 어느 날이 곧 돌아갈 해인가
-두보의 절구(絶句)

당나라 두보의 이 시는 1행에서 파란 강과 하얀 갈매기 2행에서는 푸른 산과 붉은 꽃이 색상대비를 이루고, 1행과 2행은 강과 산이 공간적인 병치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3,4행을 보면 인간과 자연, 평화로운 자연과 불행한 인간, 불변과 안정의 자연에 비해 고향조차 못 가는 유랑하는 화자의 불안과 고뇌가 병치되어 더욱 처절하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에 흐르니 옛 물이 있을손가
인걸도 물과 같도다, 가고 아니 오노매라
-황진이, 시조

조선조 황진이의 이 시는 1행에서 산과 물이라는 자연 공간이 대비될 뿐만 아니라 옛 산과 옛 물이 아님이란 말로 불변의 영원한 시간과 불가역의 무상한 시간이 대조적으로 병치되었으며 2행에서는 흐르는 물의 그 불가역적 시간성을 재확인하고 3행에서는 인간과 동일시하여 산의 영원함과 인생의 무상함을 더욱 절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3) 현대시의 병치은유
은유에 대한 현대시의 인식은 전통적인 의미의 전이, 언어의 확실성을 전제한 의미의 확장이란 은유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의미란 고유한 사물의 기호가 아니라 다른 사물과의 차이라든지 이질적인 사물과의 상호작용으로 탄생하는 것이라면 ‘A(원관념)는 B(보조관념)다’라는 단선적 치환은유에서 ‘A는 B다’라는 은유와 다른 ‘a는 b다’라는 은유가 마주보며 각각의 의미를 드러내 서로 충돌하여 또 다른 의미와 정서를 드러내거나 또는 존재성을 드러내자는 것이 병치은유의 의도다.

군중 속에 끼어있는 유령의 얼굴들
검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비에 젖은 꽃잎들
- 파운드 「지하철 정거장에서」

아뜨리에서 흘러나오던
루드비히의
주창곡(奏唱曲)
소묘(素描)의 보석길

한가하였던 창가(娼街)의 한낮
옹기장수의 불던
단조(單調)
- 김종삼 「아뜨리에 환상」

낡은 아코오뎡은 대화를 관뒀습니다.
-여보세요!
(뽄뽄다리아)
(마주르카)
(디젤엔진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 밭에서
수화기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아란 기폭들,
나비는 기중기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층계를 헤아린다
-조향의 「바다의 층계」에서

파운드의 「지하철 정거장에서」는 1행과 2행이 서로 무관한 내용들이 나란히 마주보고 있다. 1행은 지하철 정거장의 많은 인파와 고개를 쳐든 유령의 얼굴들을 상상한다. 2행은 나뭇가지에 걸린 젖은 꽃잎들이다. 지하철의 인파와 나뭇가지, 얼굴들과 꽃잎들이 병치된 구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1행과 2행의 병치적 충돌은 도시인들의 치열함과 피로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선명한 이미지 시를 내세웠던 파운드는 한시의 대구법을 알고 있었다.

김종삼 「아뜨리에 환상」은 1연에서 아뜨리에서 흘러나오는 루드비히의 주창곡, 즉 소나타와 소묘의 보석길이 병치되고, 둘째 연에서는 한가하였던 사창가의 한낮과 옹기장수의 단조가 서로 병치되어 있다. 하나는 서양음악 하나는 동양음악, 하나는 유명한 루드비히, 하나는 무명의 옹기장수, 보석 길과 사창가 이렇게 대조되는 각각의 모순된 세계가 한 작품에 병치되어 새로운 시적 공간을 형성한다. 이는 부조리한 전후 현실의 단면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향의 「바다의 층계 」는 원관념 바다에 아코오뎡, 뽄뽄따라아, 마주르카(춤), 디젤엔진의 들국화, 전화소리 모래밭, 수화기, 허벅지, 그림자 등 서로 무관한 이미지들이 병치되어 있고, 2연의 '나비'와 '기중기의 허리'도 병치다. 이들 이질적인 이미지의 병치는 디젤엔진과 들국화. 수화기와 여인의 허벅지, 나비와 기중기의 대립과 충돌은 기술문명과 자연 또는 연약한 생명들이 각각 사물처럼 오브제로 제시된 것으로 초현실주의의 자유연상으로 설명하기도 하였고, 뒤에는 무의미 시 하이퍼시로 이어졌다. 그래서 치환은유가 '의미의 시'라면, 병치은유는 '존재의 시'를 지향한다고도 한다. 이처럼 병치은유는 한 사물이 다른 사물로의 자리바꿈이 아니라 두 사물을 그냥 대조적으로 배치해 놓을 뿐이다. 서로의 유사성이나 전이성을 배제하고 각각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비동일성, 비 친숙화의 폭력적 배열이다. 은유는 이와 같이 사물과 사물 간의 동질성을 회복하려는 방법과 오히려 상호 간의 이질성으로 인한 충돌을 시적인 미학으로 인정하려는 입장이 있다.

(4) 치환은유와 병치은유의 조화
치환이냐 병치냐 어떤 은유의 방식이 유리한가는 그것은 전적으로 시인의 창조적 결단에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기법을 선호하는 시인들은 치환은유를, 새로움을 추구하는 모더니즘 시인들은 병치은유를 많이 실험한다. 그런데 전통적인 치환은유의 경우 참신한 상상이 결여될 경우 진부할 수 있고 병치은유가 지나치게 이질적인 이미지로 채워질 경우 난해한 언어희롱으로 독자와 멀어질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바람직한 것은 어느 한쪽을 지나치게 고집하기보다 두 방법을 잘 조화해서 궁극적으로는 시가 추구하는 감동의 언어 작용에 충실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앞에 예시된 파운드의 작품에서 첫 행의 ‘얼굴들’과 둘째 행의 ‘꽃잎들’이라는 이미지는 분명히 병치적이다. 그러나 대조적인 병치적 시행임에도 불구하고 ‘얼굴들’이란 원관념이 ‘꽃잎들’이란 보조관념으로 치환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래서 휠라이트도 훌륭한 시는 치환적 요소와 병치적 요소가 확연히 구분될 수 없으며 이들은 다만 상보적으로 융합되어 작용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상에서 은유의 두 방향을 검토하였거니와 현대의 특징을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혼돈이라고 할 때, 그동안 은유가 추구해온 동일성의 방향에서 비동일성을 추구하려는 노력도 함께 이해하게 된다. 기존의 유사성이나 동일성에서 발견하던 치환은유의 의미나 감성이 오히려 이질적인 것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의미와 존재를 발견할 수 있다는 병치은유의 모험을 보면서 역시 은유란 변화와 창조의 길임을 알게 된다.
은유의 시학15-은유의 일탈과 낯설음의 정도(1)

https://youtu.be/Ma0TcSDt13k

1. 은유의 상호작용과 긴장관계

은유에 대한 전통적인 논의는 주로 수사학적인 입장이었으며 그것은 표현의 선명성,문장의 꾸밈, 유추에 의한 유사성의 발견, 새로운 말의 창조, 지적 호기심의 유발이라는 명분에서 말의 전이, 단어의 대치, 옮겨서 꾸미는데 에 역점을 두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은유란 자리바꿈의 전이나 대치나 비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원관념과 보조관념, 은유와 은유의 문맥들이 상호작용 또는 충돌하여 새로운 제 3의 의미나 정서를 드러내는 창조적 작업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상호작용이란 지금까지 은유의 원리가 주로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유사성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면 현대적 은유의 대세는 오히려 비 유사성을 통한 생소함 긴장감을 조성하여 시의 감동성을 극대화 하는 작업이 된다.

리처즈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상호충돌을 말하면서 이질적인 보조관념의 은유를 배제하고(배제의 시) 동질적인 매체만을 포용하는 은유의 시는 나쁜 시이며 이질적인 매체의 이미지를 모두 포괄하는 은유의 시가(포괄의 시) 좋은 시라고 하였다.
테이트는 좋은 시라는 것은 내포와 외연의 가장 먼 양극에서 모든 의미를 통일한 것이라고 하면서 좋은 시는 텐션tension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텐션은 단순한 간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외연extension과 내포intension의 접두사인 ex와 in을 제외한 조어로서 시의 의미란 시의 텐션, 즉 시 속에서 발견되는 모든 외연과 내포를 유기적으로 조직한 총체라는 것이다.

휠라이트는 삶의 원리를 투쟁의 원리로 보고 시도 은유도 투쟁을 통한 긴장의 언어가 된다고 하였다. 여기서 긴장 언어는 바로 의미론적 긴장을 지향하며 그것은 사물의 리얼리티를 표출하는 인간의 근본적 활동이다. 이러한 긴장 언어의 기본단위가 이미지, 은유, 상징의 형식으로 시어의 독자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술의 형식으로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을 발견하는데 있다고 하였다. 엘리어트는 「전통과 개인의 재능」에서 시는 감정의 해방이 아니고 감정으로부터의 도피다. 그것은 개성의 표현이 아니고 개성으로부터의 도피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하였다.

자 그러면 갑시다, 그대와 나는
수술대 위에 마취된 환자처럼
저녁놀이 하늘에 퍼뜨려지거든
-엘리어트의 「J. A. 프로푸록의 연가」에서

엘리엇이 객관적 상관물을 설명하면서 예로 든 이 시에서 ‘수술대 위 마취된 환자’는 바로 객관적 상관물이다. 하늘에 퍼뜨려지는 저녁놀의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즉 희미하고 몽롱한 상태를 독자에게 보다 선명히 전달하기 위하여 수술대 위에 있는 에테르로 마취된 환자의 몽롱한 상태를 객관적 상관물(보조관념)으로 동원하고 있다. 여기서 객관적 상관물이란 특정한 정서(particular emotion)가 될 수 있는 일단의 대상, 상황, 사건들의 이미지다.

랜섬은 관념시가 너무 관념적이고, 물질시가 너무 사실적이기 때문에 그는 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야말로 인간 경험의 완전한 지식을 전달 할 수 있는 시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형이상시는 은유와 기타 비유를 적절히 사용하여 독자에게 충격을 주며 그 시의 제재를 새롭고도 생생한 눈으로 인식하게 하는 시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은유형식을 형이상학적 기상(metaphysical conceit)이라고 하였다.

나보다 더 깊이 사랑의 광산을 팠던 사람들이여
말해보라 사랑의 행복의 핵심이 어디 있는지를
나도 사랑하고 소유하고 알아보았다
그러나 늙을 때까지 내가 사랑하고 소유하고 알아볼지라도
나는 그 숨은 신비를 발견하지 못하리라
-존던의 「사랑의 연금술」 (Love Alchemy)에서

존던은 ‘광산을 파는 일’ 을 ‘여자를 사랑하는 일’ 로 비유하고 남녀의 사랑의 양극화 성격을 폭력적으로 결합하는 기발한 기상(conceit)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 김현승의 시에서 불꽃이나 눈송이도 객관적 상관물이며 동시에 기발한 기상의 은유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의 불꽃 속으로
나의 눈송이가
뛰어듭니다

당신의 불꽃은
나의 눈송이를
자취도 없이 품어 줍니다
-김현승 「절대 신앙」

러시아의 쉬클로프스키는 시의 문학성은 시어의 낯설음, 또는 일탈성의 구조에 있다고 하였다. 이는 친숙한 의미의 은유가 아니라 생소한 충격을 주는 은유, 뭔가 새롭게 생각하고 느끼도록 활력을 주는 은유의 창조가 바로 낯설음이며 산문과 구별되는 시어의 정수가 된다고 하였다. 시어나 은유의 친숙화는 동일한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반복되어 습관화되었을 때 조성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각은 자동화되고 감각은 마비되어 낯익은 사람 사이에는 언어를 생략하고 손짓이나 눈짓으로 의사를 교환하는 탈 언어화 상태가 된다.

한편 프라그의 무카로브스키는 언어의 인식적 기능과 표현적 기능을 구별하면서 언어의 표현면이 우세할 때, 다시 말하면 표현행위 자체를 전면에 내세우는 수법에 의하여 언어가 보통의 사용법에서 최대로 일탈될 때, 그 언어는 시적으로 혹은 미적으로 사용되어진다고 하였는데 이를 전경화(前景化 foregrounding)로 설명하기도 한다. 전경화란 일상적이고 문법적인 언어들을 배경화(backgrounding)하고 낯설은 시어들을 뚜렷하게 전면으로 제시하는 수법이다. 그리고 낯설게 하기나 전경화는 어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음운, 리듬, 어휘 등 시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 속에서 실천되는 현대시의 수법이기도 하다.

인간과 사물, 인간과 인간 사이에 기호만 존재하게 될 때 그것은 시의 세계가 아니라 수학이고 과학이고 산문이다. 추상적인 개념과 습관적이고 기계적인 생활만 존재하는 삶이란 이미 창조적 인간이 아니고 기계나 동물이나 다를 바 없는 비인간화의 무의미한 개념의 세계일뿐이다.

(1)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 달
어디어디 떴나
남산위에 떴지

(2)활자 사이를
코끼리가 한 마리 가고 있다.
잠시 길을 잃을 뻔 하다가
봄날의 먼 앵두 밭을 지나
코끼리는 활자 사이를 여전히
가고 있다.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는
코끼리,
코끼리는 발바닥도 반짝이는
은회색이다.
― 김춘수의 「은종이」에서

인용한 (1)의 동요에서 ‘쟁반같이 둥근 달’이란 말은 수사학적으로 보면 직유법의 구절이라고 하겠지만 쟁반이나 둥근 달이란 말은 너무나 익숙한 말이며 아예 복합어로 인정될 만큼 굳어버린 일상적인 말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장은 어린이들에게 교육적 가치는 있겠지만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과 감동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활자 사이를 코끼리가 가고 있다”라는 시행에서 활자와 코끼리라는 시어의 배열은 아무리 상상해도 그 유사성이나 기존의 시학에서 말하는 사고의 경제성을 찾을 수가 없다. 그들 사이에는 친숙함도 없고 관습적인 자동화의 지각도 없다. 전혀 예상 밖의 언어가 대치되어 일상의 어법을 일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낯설은 언어가 주는 당혹감은 오히려 지각의 새로운 충격으로 유도된다.
은유의 시학16-은유의 일탈과 낯설음의 정도(2)
https://youtu.be/RXIirXjm4ZU
2. 은유의 일탈과 낯설음의 정도
1) 의미의 전이자질과 의미자질
그렇다면 기존 은유의 낯익은 의미나 낯익은 용법에서 낯설음의 은유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인식이 현대시에서 은유를 해명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원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언어가 가지는 기본의미의 원관념이 시의 은유에서는 낯설음의 의미로 전이되는데 즉 보조관념으로 바뀜, 벗어남 일탈이 일어나는데 그 원관념과의 벗어남의 정도, 일탈의 정도가 모두 일정할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그 벗어남의 정도가 바로 시의 창조성, 개성, 예술성 등의 미학적 시적 비평적 해명이 논의 될 수 있다.
그리고 시의 은유에서 의미의 벗어남, 일탈 낯설게 만들기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언어학에서 말하고 있는 전이자질(transfer feature)과 의미자질(meaning feature)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낱말이 갖는 여러 가지 자질들의 변별성에서 가능한 것이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 환락(pill)과 부리(bill)이라는 말을 보면 두 단어의 첫 글자 /p/와 /b/를 제외하고는 모두 동일하다. 말하자면 /p/와 /b/의 변별성 때문에 ‘환락’과 ‘부리’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구별하게 된다. 그런데 /p/와 /b/를 좀 더 구체적으로 음운론적 자질을 보면 /p/는 양순음+파열음+무성음이다. 또한 /b/는 양순음+파열음+유성음이다. 따라서 두 음가는 양순음과 파열음이란 공통적 자질을 가졌고 다만 무성음과 유성음이란 변별성, 즉 음성의 시차적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음운론적 변별성이 다른 의미를 탄생시킨다. 우리말의 ‘밥’과 ‘밤’의 의미는 ‘바‘에 ㅂ이냐 ㅁ이냐로 구별된다. 이처럼 의미는 고유하게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음운적 전이자질의 차이에서 탄생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와인라이츠(Weinreich)는 언어의 의미 자질에 관한 이론들을 통해 의미의 변별성을 설명하고 있다. 예컨대 남자(man)는 +남성 (male), +성인(adult), +인간(human) 등의 의미자질로 구분된다. 그렇다면 남자와 대비한 여자(woman)는 비남성(-male), +성인, +인간 등으로 구분되어 남자와 여자란 다 같이 성인이며 인간인 점에서는 동일하나 성에 있어서만 구별되는 변별적 자질을 지닌 것이다.

남자(man); +남성 (male), +성인(adult), +인간(human)
여자(woman); 비남성(-male) +성인(adult), +인간(human)
사람; 생물 인간 명사
짐승; 생물 비인간 명사
자동차; 비생물, 비인간, 명사

그렇다면 사람과 짐승, 자동차의 경우 의미자질을 비교해 보면 사람과 짐승은 같은 생물에 같은 명사인데 사람과 자동차는 비생물(-animate), 비인간(-human), +명사 등으로 분석되어 다 같이 명사라는 데는 일치하나 자동차는 생물도 인간도 아니기에 사람과 짐승의의 관계에 비하여 훨씬 동질성이 희박한, 말하자면 동일성을 벗어난 일탈성, 이질성, 낯설음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2) 은유의 일탈과 차이
시의 언어는 은유를 통하여 표현되는 예술이다. 이때 은유란 어떤 대상에 대한 유사성이나 이질성을 유추하여 표현하는 어법이다. 그렇다면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유사성과 비유사성의 거리, 일상성과 비일상성의 미학적 심도, 일탈의 정도, 낯설음의 강도가 어떻게 강화되는지를 ‘노래하다’라는 원관념의 동사가 전이 되는 단계를 보자.

① 어린이가 노래한다.
② 새가 노래한다.
③ 꽃이 노래한다.
④ 강이 노래한다.
⑤ 바위가 노래한다.
⑥ 고독이 노래한다.

인용된 ①은 노래하는 동작의 주체가 인간이므로 어법상으로나 의미상으로 보아 가장 정상적인 일반진술이다. ②는 관용적이기는 하나 ‘노래한다’는 말은 ‘지저귀다’가 전이된 은유로 ①보다 벗어난 것이다. 그러나 어린이나 새는 같은 동물이라는 점에서 친근성을 느낀다. ③의 경우는 꽃잎이 흩날림의 은유로 식물이기 때문에 ②보다는 더욱 벗어난 형식이다. ④와 ⑤는 같은 무생물인 사물이어서 ③보다 벗어났지만 강은 산에 비하여 물이 흐르는 성질을 감안한다면 ⑤가 더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⑥은 관념적인 추상어다. 따라서 ⑤보다 더욱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①에서 ⑥까지의 동사은유를 보면 그 벗어남의 정도가 인간<동물<식물<무생물<구체<추상의 순으로 도식화할 수도 있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김동명의 「내 마음은」에서

참 고운 물살
머리카락 풀어 적셨네
출렁거리는 산들의
부신 허벅지 좀 봐
아무 때나 만나서
한몸되어 흐르는
눈물나는 저들 연분홍 사랑 좀 봐.
곽재구 「참 맑은 물살」에서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에서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서정주 「동천」

낡은 아코오뎡은 대화를 관뒀습니다.
-여보세요!
(뽄뽄다리아)
(마주르카)
(디젤엔진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 밭에서수화기여인의 허벅지낙지 까아만 그림자
-조향의 「바다의 층계」에서

김동명의 「내 마음은」에서 원관념은 마음이고 보조관념은 호수다. 이들의 일탈정도는 마음; 인간, 수동적 심리, 호수; 자연, 수동적 사물로 의미자질을 분석해보면 수동성이란 공통성이 있는 거리감이 작은 친밀감이 있는 은유다.

곽재구의 「참 맑은 물살」에서 물살은 머리카락, 산 그림자는 허벅지로 은유화 했는데 모두 신체 이미지지만 머릿결과 물살의 유사성에 비해 산과 허벅지는 일탈이 심해 충격이 크다.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의 원관념 하나님과 보조관념은 늙은 비애, 살점, 놋쇠 항아리의 일탈 정도는 늙은 비애는 영원히 외로운 존재라는 점에서, 살점은 십자가 형벌이라는 데서 공통점이 유추되지만 놋쇠 항아리와는 일탈의 정도가 큰 은유다. 그러나 일탈이 크다고 더 시적이란 말은 아니다.

서정주의 「동천」에서 눈썹은 초승달의 은유다. 그러나 이 시에서 보조관념인 눈썹은 단순 은유가 아니라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이란 수식형 은유가 있고 눈썹 다음에는 하늘에 심었다는 설명까지 있어 절대적 신비감을 주고, 새는 진실을 찾는 인간의 은유로 눈썹의 외경에 겸손해지는 새의 구도적 한계를 보여주는 일탈의 시다. 조향의 「바다의 층계」는 원관념은 없고 이질적인 보조관념들만 나열된 의미의 일탈성이 극단화된, 무의미 시 탈관념 시 낯설게 만들기의 충격을 주는 시다.

메타포란 근본적으로 기존의 의미를 뛰어넘는 것이 생명이기에 고인물이 아니라 늘 신선한 충격을 주는 생수가 되어야 하지만 원관념과 은유인 보조관념 사이에 어느 정도 일탈이 좋은 시인가는 시대마다 개인마다 다르다고 할 수 있지만 시에서 이상적인 은유는 언제나 누구나 읽어도 신선한 충격을 주고 감동을 주는 것이리라.
은유의 시학17- 은유와 이미지(1)
https://youtu.be/ilZHY3fuVPw

1. 이미지의 기본 이해
1) 이미지란 무엇인가
지금 세상은 온통 이미지의 왕국 시대다. 우리는 그동안 문학예술에서나 이미지가 소용되는 것으로 알았는데 요즘은 산업에서도 브랜드 이미지 상품 이미지, 정치에서는 인물 이미지 정책 이미지, 심지어 결혼이나 취직이나 사랑에도 외모 이미지 때문에 성형외과가 문전성시를 이루고 명품 이미지에 열광한다. 도대체 이미지가 무엇이기에 모두가 이렇게 이미지 메이킹에 목숨을 거는 것인가. 그러데 현대는 은유의 시대라고도 하고 또 상상력의 시대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은유와 이미지 은유와 상상, 그리하여 은유 상상 이미지의 관계는 무엇이며 그들 용어의 배경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하겠다.

원래 이미지(image)의 사전적 개념은 심상(心象), 영상(映像), 표상(表象) 인상(印象) 등인데 여기서 공통된 글자는 상(象, 像)이다. 이는 그림자, 모양, 그림, 본뜬 형상, 닮음의 뜻을 갖고 있다. 이미지의 어원은 라틴어로는 이마고(imago)이며, 동사형인 라틴어 이미타리(imitari)는 모방하다(imitate)는 뜻이다. 이미지는 보통 단일한 심상을 의미하지만 복수일 경우에는 ‘이미저리(imagery)라는 용어를 쓴다. 한편 희랍어로는 미메시스(mimesis)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이미지를 심상이라면 외부의 사물이 우리의 마음이라는 인식의 거울에 비춰진 그림자란 뜻이겠고 영상이라면 어떤 사물의 모습이 자막에 나타나는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마음에 나타나는 그림자는 반드시 외부의 사물이 직접 투영되는 경우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과거에 경험했던 어떤 사물의 인상들이 의식 속에 축적되었다가 재생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이 표상이다.
따라서 이미지는 인간의 마음속에 그려지는 사물의 감각적 형상이라는 데서 기본적으로 시각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물을 시각으로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의 모든 감각기관을 통해 느끼는 것이므로 이미지는 이들 오관을 통한 감각적 이미지라 할 수 있다.
또한 마음에 새겨진 그림자 즉 이미지는 그 사물의 전부가 마음에 새겨질 수도 있지만 특별히 관심 있는 부분만 마음에 새겨질 수도 있다. 이것이 인상이 된다. 예컨대 사람일 경우 눈이 큰 얼굴, 키가 큰 체구, 여성스런 말씨 등 가장 인상적인 부분만 기억 속에 상으로 남겨진다. 그래서 그를 회상할 때는 그 인상 깊었던 부분만 재현된다.

2) 이미지의 종류
공통된 것들끼리 나누는 것을 분류학이라 하는데 이는 원래 생물학에서 활발했다. 나누는 것은 가치판단의 중요한 방법이기에 어느 분야에서도 활용된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사물들을 나누려면 그 기준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부터 복잡해진다. 그 기준이란 만들기에 따라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이미지의 경우 첫째는 가장 기초적인 이미지로 마음에 투영된 감각적 경험을 기준으로 할 때 감각적 이미지(mental image)가 된다. 둘째는 어떤 관념이나 사물을 대치하여 비유하는 비유적 이미지(figurative image), 셋째는 어떤 복잡하고 고차적인 관념을 암시하는 경우 상징적 이미지(symbolic image)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물을 대치하는 비유를 넓게 은유란 말로 쓸 수 있고 상징도 어떤 의미를 대신하여 나타내는 만큼 비유 또는 은유라고 할 수 있으며 아예 언어니 기호니 하는 말도 따지고 보면 어떤 의미를 대신하는 만큼 이미지, 은유, 상징이란 말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브랜드 이미지 광고 이미지 정치적 이미지 인물 이미지 심지어는 모든 이데올로기도 이미지요 은유요 상징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는 언어의 시대가 아니라 이미지의 시대요 은유의 시대라고 해야 하겠다.

개나리
진달래
흐드러진 꽃밭이다
가나안의 혼인잔치다
맹진사댁 청사초롱이다
사월의 산언덕
포동한 등성이마다
너울 쓴 신부처럼
파닥이는 가슴이다
홍문표 「꽃밭에서」에서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 「광야」에서

시 「꽃밭에서」는 꽃밭이라는 원관념이 개나리 진달래라는 실제적인 사물어가 있는가하면 가나안의 혼인잔치라는 기적 같은 봄꽃 동산의 시각적인 이미지가 맹진사댁 청사초롱이라는 한국적 정서의 푸르고 붉은 시각적 이미지, 거기에다 신부처럼 설레는 신체 감각 이미지 파닥이는 가슴을 보조관념으로 한 감각적 비유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

시 「광야」에 사용된 언어들은 일상적인 의미나 사전적인 의미로 해석되지 않는다. 객관적 서술도 아니다. 여기에 사용된 언어는 보다 깊은 뜻이 있다. 뿐만 아니라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먼저 ‘눈’은 겨울의 눈, 추위, 괴로운 세상, 시인 자신의 고독감일 수 있다. 매화 향기, 가난한 노래, 백마, 초인, 광야 등도 그것이 일상적이고 객관적인 의미를 초월하여 보다 깊고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초인’이란 말은 사전을 통해 보면 인간적인 것을 극복한 천재나 영웅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의 초인은 애국자, 민족, 시인, 해방, 미래, 영광, 권위 등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에 동원된 시어들은 모두 상징적 이미지가 된다.

2. 이미지의 역사적 이해
1) 이미지의 고전주의적 이해
이미지에 대한 비평적 논의는 과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플라톤은 모든 예술적 창조는 인간이 자신의 생활 안에서 지각하는 이상적인 형태 즉 이데아(idea)가 어렴풋이 재현된 미메시스 즉 모방 복사 또는 재현이라 했다. 따라서 플라톤에게 있어 예술은 모방이며, 이러한 모방성 때문에 예술은 실재와는 거리가 멀고, 한낱 이미지, 모상, 복제, 그림자에 불과하다 했다. 모방 혹은 복제라는 개념은 대상의 세 가지 단계로 설명되는데 첫 번째는 완전히 실재하며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 즉 이데아(idea), 두 번째는 이데아로부터 복제된 지각 가능한 대상, 그리고 세 번째는 두 번째의 지각 가능한 대상을 복제한 시나 예술 작품 등이다. 따라서 시나 예술 작품은 모방의 모방이며, 진리에서 두 단계나 멀리 떨어져 있는, 그래서 이미지를 드러내는 시인은 그의 관념주의 철인 공화국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념주의 이성중심주의 이데올로기를 계승한 이분법적 서열주의 계급주의 역사는 이미지로 표현되는 모든 행위를 모조품 가짜 거짓 악으로 매도하면서 분열과 탄압과 피의 역사를 조장하는 화근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와 예술이 현상, 자연의 모방이기는 하지만 실재니 본질이니 이데아니 진리니 하는 것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나 현상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 안에 있는 것이므로 이를 모방한 이미지에도 본질이나 진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입장에서 그는 시와 예술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보게 되었고 과거 서양의 문학당의설(文學糖衣說)이나 동양의 재도지기설(載道之器說)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를 포함한 모방론, 이미지론과 같은 맥락을 같이하면서 플라톤주의들의 관념주의 횡포에 맞서 그동안 시와 예술의 명맥을 유지해 왔다.

2). 이미지의 현대적 이해
수공업시대 손으로 직접 자연을 보고 그린 미술은 자연과 동일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사물을 모방거나 그린 이미지는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는 말에 수긍이 갔다. 그러나 오늘의 전자문명시대는 영상미디어의 영화나 사진 인쇄 등 무한 기술복제시대를 맞아 무한 복제 이미지 시대가 되었다. 벤야민은 복사물의 존재는 원작을 단지 베끼는 데에 그치지 않고 원작의 존재와 권위 즉 아우라를 파괴한다고 염려했지만 최근 3D프린팅을 비롯한 기술의 발달로 더욱 완벽에 가까운 복제가 가능해졌기 때문에 복제된 예술품에도 원본과 다름없는 아우라가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될 정도로 이미지지 산업은 더욱 막강해졌다. 사실 오늘의 문명은 원본과 복제 실제와 이미지의 구별이 없다. 모든 상품은 원물과 동일하다. 요즘 복제약이란 말이 있다. 그렇다고 원 약과 성분이나 약효가 구별되는 것도 아나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미지가 원본과 동일하다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인공물, 즉 모방하거나 복사하거나 흉내 내지 않은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처럼, 때로는 존재하는 것보다 더 실재처럼 인식되는 가장의 이미지를 만들어 살고 있는 것이다. 이를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simulacre)라 했다. 그는 시뮬라크르는 흉내 낼 대상이 없는 이미지이며, 원본 없는 이미지가 그 자체로서 현실을 대체하고, 현실은 이 이미지에 의해서 지배받게 되므로 오히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이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실제라고 생각하였던 것들이 바로 이 비현실이라고 하였던 시뮬라크르로부터 나오게 된다. 흉내 내거나 모방할 때는 이미지라는 실제 대상을 복사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실제 대상이 가장된 이미지를 따라야 하는 주객이 전도된 이미지 세상에서 살게 된 것이다.
홍문표교수은유의시학강좌18
은유의 시학18- 은유와 이미지(2)

3, 이미지의 특성
1) 이미지는 감동의 수단이다
그렇다면 이런 이미지가 시의 근본 구조를 이루는 은유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가. 이를 명백히 인식하는 것이 시 창작의 열쇠가 된다. 가장 기본적인 문제이지만 시란 언어 예술이다. 여기서 예술이란 과학이 추구하는 논리적, 이성적, 객관적 세계가 아니라 정서적, 환기적, 감동적 세계다. 시는 언어의 정서적, 환기적 작용을 통하여 감동하게 하고 삶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모두 관념적 추상적 객관적 언어로만 가득 차 있다. 따라서 이 삭막한 관념의 언어 세계를 벗어나는 길은 이성이나 관념의 언어가 아니라 감성적 언어의 상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때문에 예술은 근본적으로 감각적 기능에 호소할 수 있는 표현 수단, 즉 이미지가 있는 표현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음악이 음성을 통해서 청각에 호소하고 그림이 색채를 통하여 시각에 호소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이치다. 따라서 시의 경우도 그것이 예술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관념적 의미의 세계를 청각이나 시각이나 촉각 등 감각적인 언어로 치환하는 은유적 작업이 필요한데 이때 사용하는 매개물이 바로 이미지어 들이다. 이처럼 이미지는 정서적 반응을 극대화하는 매개적 수단이기 때문에 언어 예술이고자 하는 시의 경우 필수적인 요소가 되고 있다.

구름 한 점 없는
먼 하늘에 둥근 사발물이 꽁꽁
얼어붙어 있다.
하얗게
조병화 「겨울달」
겨울의 차갑고 맑은 하늘과 밝은 달을 ‘둥근 사발물’로 표현한 것이라든지 ‘얼어붙어 있다’라는 표현은 달의 시각적 구체성은 물론 차가운 촉각을 실감하게 한다. 거기다가 ‘하얗게’라는 말을 첨가하여 더욱 겨울달의 감각적 효과를 강화시키고 있다. 이처럼 이미지는 첫째로 단순히 언어의 그림을 나타내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보다 감동적인 표현을 위한 필수적인 방식이다. 더욱 시각적 감각적 효과를 자아내게 한다.

2) 이미지는 의미의 감각화, 구체화 수단이다
이미지는 시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성서에는 부자가 천국에 가기란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구절이 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의미 내용을 약대와 바늘구멍이란 감각적 이미지로 은유화함으로써 보다 구체적이고 실감 있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시편 23편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에서도 여호와란 불가시의 추상적 관념을 목자라는 은유적 전이의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써 여호와의 존재와 역할을 실감할 수 있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더 먼저 일어난다
김수영 「풀」에서
이 시는 표면적으로는 풀의 생태를 감각적 이미지로 형상화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시는 단지 풀만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내면에 숨기고 풀이라는 이미지로 대치, 은유의 보조관념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 의미를 민초(民草)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모든 생명체들이 역경과 고난을 극복해 가는 강인한 생명력일 수 있다. 이 시의 훌륭한 점은 그러한 생각이나 사상이 ‘풀’이라는 은유적 이미지를 통하여 보다 감각적으로 구체화되고 정서화 되어서 예술성을 드러내고 있다는데 있다.

4. 은유와 이미지
1) 이미지는 인간 최초의 은유적 언어다
인간이 최초로 사물과 접촉하여 나타난 심리적 현상은 나의 눈에 나의 마음에 비춰진 이미지다. 그래서 니체는 “우리가 한 사물을 지각할 때, 우리는 먼저 어떠한 신경자극을 느끼게 된다. 그 신경자극은 곧바로 우리로 하여금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데 이것이 첫 번째 은유다. 그 이미지는 바로 음성으로 표현되고 다시 그 음성은 문자로 표기된다. 이것이 두 번째 은유다.” 라고 했다. 그러니까 인간 최초의 언어는 사실은 이미지였고 그 이미지는 그 사물이 자신의 심리적 인식장치를 거쳐 여과된 이미지라는 데서 이는 이미 원 사물을 이미지화 것인 만큼 은유, 메타포(metaphore), 즉 전이의 산물이 된다. 따라서 모든 사물의 이미지는 바로 은유라는 말이 설득력을 갖는다. 두 살 박이 우리 손녀는 생선을 먹을 때면 뻐금이를 먹는다고 한다. 생선의 이미지를 뻐금이로 은유화한 것이다. 이 뻐금이가 다음엔 물고기로 은유화 되고 다음엔 생선이니 피쉬(fish)니 하는 실제와는 무관한 추상적 기호인 언어로 은유화 된다. 그리하여 세상은 그 최초의 사물 이미지와 무관한 기표들을 가지고 소통놀이를 한다. 여기에 비극이 있다.

2) 은유의 보조관념이 이미지다
은유란 비유법, 또는 수사학의 용어로 행동 개념 물체 등을 그와 유사한 다른 말로 대체하는 비유법을 말한다. 은유(隱喩)를 한자어만 보고 원래의 뜻을 숨기고 비유하는 보조관념만 나타내는 비유법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원래 은유 즉 메타포(metaphor)에서 meta는 초월, 벗어남(over, beyond)의 뜻이고 phor는 이동한다(carring)는 뜻이다. 따라서 은유란 어떤 사물이나 의미나 감정이 다른 사물이나 의미로 옮겨져 전자의 사물이 후자의 사물로 그 뜻이 전이(轉移)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은유의 문장은 여호와라는 원관념이 목자라는 보조관념으로 대체된 것이고, 옮겨진 것이고, 전이된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가 목자로 전이될 수 있는 근거는 여호와 하나님이 목자와 유사하다는 유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목자와 유사하다는 유추를 이미지의 개념과 연관시켜 본다면 이는 여화와라는 외부의 사물이 시적 화자의 마음이라는 인식의 거울에는 목자라는 사물과 동일한 것으로 비춰진 심상(心象) 즉 이미지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여호와를 목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화자의 마음에 하나님을 생각하니 목자와 유사하다는 생각이 함께 떠올랐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문장에서 목자는 바로 하나님의 이미지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은유에서 원관념이 전이된 모든 보조관념은 모두 원관념의 이미지라 해도 무방하다는 결말이다. 그렇다면 은유가 원관념을 보조관념으로 바꾼다는 말은 원관념을 이미지로 바꾼다는 말이 되고 은유가 의미를 창조한다는 말은 이미지를 창조한다는 말이 된다.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번 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 흘림.
박두진 「꽃」에서

이 시는 꽃이라는 원관념을 다양한 보조관념으로 바꾼 은유의 시다. 여기서 시인은 꽃에 대한 객관적 진술을 하지 않았다. 만일 꽃에 대한 객관적 진술을 했다면 꽃의 이름, 종류, 냄새, 상태 등에 관한 내용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꽃의 그런 일반적인 정보 대신에 꽃을 ‘속삭임’, ‘울음’, ‘피흘림’이란 전혀 주관적인 의미로 바꾸었다. 이는 꽃의 일반적 개념을 무시하고 꽃이라는 존재가 속삭임이나 울음이나 피 흘림이라는 존재로 자리바꿈을 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바로 꽃에 대한 시인의 내면에 ‘속삭임’, ‘울음’, ‘피흘림’이란 이미지가 투영된 것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은유는 수사학적으로는 보조관념으로 비유한 것이지만 이미지론으로 보면 이들은 꽃에 대한 내면적 심상을 드러낸 것이 된다.
홍문표교수은유의시학강좌19
은유의 시학19- 은유 상상 (1)

1. 상상의 기본의미
상상의 의미를 사전에서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나 존재하지 않은 대상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무한히 발전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실현해 가는 본성적 심리 작용이라고 말하고 싶다. 상상을 한자로는 想像이라 하고 영어로는 Imagination으로 표기하였는데 두 어휘 속에 상상의 기본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想像이란 한자의 想자는 ‘생각할 상’자인데 구성을 보면 마음(心) 위에 어떤 모양(相)을 올려놓은 글자다. 그러니까 마음속에 어떤 형상을 품은 생각이란 말이다. 영어의 Imagination도 그 어원은 Image와 함께 이마고(Imago), 즉 모방, 형상, 그림자에서 파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한자의 想像이란 글자나 영어의 Imagination이나 그 공통점은 생각에 어떤 형상, 즉 이미지 (Image)를 머릿속이나 마음속에 그리면서 생각하는 의식행위가 된다.

골짝물이 이렇게
조잘대며 흐르는데
바위들에게도
귀가 있을거야
산나리가 이렇게
예쁘게 웃어주는데
나무들에게도 정말은
눈이 있을거야

어느 어린이의 동시다. 이 시에 등장하는 소재는 골짝물, 바위, 산나리, 나무 등이다. 따라서 이는 어느 산골짝의 실상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시는 이러한 실상을 직접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나 존재하지 않은 대상을 머릿속에 그리며 생각하는 상상적인 구절을 만들었다. 바로 “바위들에게도 귀가 있을 거야”와 “나무들에게도 정말은 눈이 있을 거야”가 그것이다. 현실적으로 이성적으로는 광물인 바위에 귀가 있거나 식물인 나무에 눈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시적 화자는 바위에 귀가 나무엔 눈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상이다.
이성적 사고로는 매우 비현실적이고 비과학적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자연현상에 이런 상상력의 혼을 불어 넣자 광물이나 식물이 귀와 눈이 달린 동물이거나 웃고 조잘대는 생명이 있고 감정이 있는 생명체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사물에 상상력을 부여하면 광물에서 동물로, 동물에서 인간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무에서 유로, 침묵에서 행동으로 창조되고 변화되는 조화무궁한 세계가 된다. 이렇게 이성적으로 판단되는 현실의 세계에 안주하지 않고 보다 발전되고 변화된 세계, 현실을 초월한 무한한 가능성의 새로운 세계를 마음에 그리며 생각하는 것을 우리는 상상(imagination)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상상은 한정된 세상을 보다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 뿐만 아니라 유한하고 부조리한 현실을 미래로, 변화로, 가능성으로 이끌어 주는 영원한 창조의 깃발이 된다. 따라서 우리에게 상상이 없다면 미래도 없고, 초월도 없고, 자유도 없고, 삶의 확장도 구원도 없다

2) 심상 사고와 무심상사고
세상의 언어에는 이미지, 즉 어떤 형상을 품고 있는 사물어가 있다. 예컨대 사과, 강, 하늘, 참새 등의 말을 하면 동시에 이런 명칭에 맞는 사물 이미지가 구체적으로 감각적으로 마음에 떠오르게 되고 그래서 우리는 그런 언어는 쉽게 이해가 되고 마음도 쉽게 움직이는 감동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미지가 없는 관념적인 언어, 예컨대 민주주의, 사랑, 학문 등의 언어는 지적으로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추상적으로만 이해될 뿐이다. 그러기에 시인은 물질적인 세계는 물론 비물질적인 관념의 세계까지도 감각적인 이미지 언어로 바꾸어 표현하고 존재를 증명하고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사고방식에는 이미지를 가진 언어를 통해 사물을 인식하고 세계를 드러내려는 심상사고(image thinking)가 있고, 과학자처럼 이성적인 언어로만 사물을 드러내려는 무심상사고(imageless thinking)가 있음을 본다. 국화에 대한 다음 두 문장을 보자.

(1) 국화: 명. 식물. 엉거시과에 속하는 식물. 줄기는 나무질화 하며 잎은 대개가 깊이 찢어지고 품종이 다양함. 꽃의 빛깔이나 모양도 여러 가지여서 대국, 중국, 소국으로 나눠지며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하국, 추국, 동국으로 나누기도 함.
- 현문사 「한국어 대사전」에서
(2)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 서정주 「국화 옆에서」에서


인용한 문장을 보면 다 같이 국화에 대한 서술이지만 (1)의 문장은 국화에 대한 사실을 객관적으로 서술한 무심상사고의 학술적인 글이며 (2)의 문장은 국화의 개화에 대한 생각을 소쩍새 울음, 천둥과 먹구름, 누님 등의 이미지와 연결하여 생각한 심상사고의 문장이다. (2)의 문장에서 국화꽃과 소쩍새 울음은 과학적 사고로 볼 때 전혀 무관한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들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인식하려고 한다. 또한 국화꽃을 누님같이 생긴 꽃이라 했는데 과학자의 입장으로 보면 매우 황당한 발상이다. 인용한 국화에 대한 사전적인 설명은 한 번 읽고 그것을 이해하면 그것으로 인식작용은 끝난다. 그러나 거기엔 기쁨도 즐거움도 풍요로움도 없는 침묵의 기호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서정주의 주관적인 국화에 대한 표현은 신비로움이 있고, 놀라움이 있고, 감동이 있다. 뿐만 아니라 읽을 때마다 우리의 인식을 일깨우는 살아 있는 언어가 된다.
홍문표교수은유의시학강좌20
은유의시학 20- 은유와 상상 (2)

2. 상상의 입장
1) 창조적 상상
상상의 사전적인 의미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나 존재하지 않은 대상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는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이는 창조적 상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심리학자들은 우리들의 기억이이나 지식은 모두가 경험한 것들의 재생이라 하고 사상은 그러한 경험들을 연결하여 재구성하는 것이라 하여 연상적 상상을 말한다. 그런가 하면 상상이란 사물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이라는 견해가 있어 이를 해석적 상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입장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상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현실에서 만날 수 없는 세계, 즉 지각에도 없고 기억에도 없는 새로운 세계, 즉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나 존재하지 않은 세계를 새롭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보는 창조적 상상(creative imagination)에 대한 입장이다. 상상을 창조적 작업으로 강력히 제기한 크로세(Croce)는 예술을 직관(intuition)이라 하였는데 이는 영감(inspiration)이라는 말과도 상통한다고 하였다. 심리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전에는 남들이 드러낼 수 없는 놀라운 상상력을 음악의 신인 뮤즈(muse)의 특별한 은총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시인이나 무당이나 사제들은 시를 쓰거나 제사를 지낼 때 반드시 뮤즈의 이름을 불러 영감을 청하는 초령(evocation)의 행사를 벌리기도 하였다. 그러기에 이성 중심의 철인들은 상상력을 불온한 신비주의로 보았고 과학주의 자들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경멸했다.
그러나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는 예술창작에 있어 그동안 지배해온 이성주의 관념주의를 부정하고 오로지 상상만이 본질적 실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예술이 현실의 단순한 모방보다는 새로운 표상을 제시하는 영혼의 감성을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상상력이 갖는 새로운 창조의 힘에 보다 큰 의미를 둔 것이다. 여기서 영감이란 범인의 생각을 초월한 신령한 예감이나 느낌을 말하고 직관이란 이성에 의한 사유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 사물의 진실을 깨닫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적 상상의 시인은 가히 천재적이며 신적인 비범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현대에는 과거에 경험한 이미지들을 유사성의 유추 작용으로 재구성하는 ‘경험의 재구성’으로 보는데 창조적 상상은 이러한 연상적 재구성의 과정을 뛰어넘거나 전혀 유사하지 않은 것들을 서로 연결하는 비상한 상상력의 단계라 할 수 있다,

내가
돌이 되면
돌은
연꽃이 되고
연꽃은
호수가 되고
서정주 「내가 돌이 되면」


인용한 시의 상상은 나와 돌과 연꽃과 호수가 융합되는 비상한 관계다. 나와 돌의 유사성을 굳이 말한다면 서로가 침묵하는 조건이라든지 비정한 의지를 대신한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돌과 연꽃에서 유사성을 찾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연꽃이 호수가 된다는 말도 이질적이고 낯선 것이다. 따라서 이 시는 유사성에 의한 연상이나 과거 경험을 그대로 재생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생산한 것이며 이는 직관적이고 은유의 관점에서 보면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폭력적으로 연결시킨 구조다.

2) 연상적 상상
그러나 현대 심리학이 발달하면서 상상은 두 번째로 우리들 인간 사고 중에서도 특히 과거에 경험한 체험들이 기억 속에 저장되었다가 재구성되어 나타나는 심적 능력으로 보게 되었다. 미국의 심리학자 제임스는 상상을 정의하여 상상은 과거에 보고 듣고 느꼈던 원물(原物)의 모상(模像, image)을 기억에 저장했다가 재생하는 능력이라고 하였다. 사물이 우리의 감각에 일단 체험되면 기억 속에 그 이미지가 축적된다. 그리고 원물이 되는 외부의 자극이 사라진 뒤에도 이미지는 기억 속에 남아 있다가 어떤 계기에 다시 기억으로 나타난다. 이때 경험했던 이미지나 관념이 그대로 재생되면 이를 기억(remember)이라 하고 이들이 재구성되어 나타날 때 이를 상상이라고 하는데 제임스는 외부로부터 직접 자극을 받지 않으면 어떤 종류의 감각에도 심적 이미지는 일어날 수 없다고 하였다.

낭만주의 시대에는 시인의 상상은 무에서 유를 창조는 신의 능력을 연상시킨다고 해서 창조적 상상력,이라고 불리어 왔지만 그것은 비유적인 말에 지나지 않는다. 기억은 단 하나의 단순 개념도 스스로 구성할 수 없다고 로크(Locke)가 말했듯이 시인의 상상은 과거의 삶에서 체험했던 어떤 소재의 이미지를 결합해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낸다는 의미에서 창조적이지 결코 무에서 유를 탄생시킨다는 말은 아니다.

이 창가에서
들어요
둘이서만 만난 오붓한 자리
빵에는 쨈을 바르지요
오 아니예요
우리가 둘이서 빵에서 바르는
이 쨈은 쨈이 아니라 과수원이예요
우리는 과수원 하나씩을
빵에 얹어서 먹어요
전봉건 「과수원과 꿈과 바다 이야기」에서

이 시는 우리가 아침마다 대하는 식탁의 일상에서 빵에 바르는 쨈을 소재로 하여 쨈의 원료인 과일을 연상하고 과일에서 다시 그 생산지인 과수원을 연상하면서 마침내는 빵에다 쨈을 바르는 것이 아니라 과수원 하나씩을 얹어 먹는다는 식사법을 연상하기에 이른 것이다. 쨈과 과일과 과수원의 관계는 가장 밀접하게 유사성을 지닌 사물 이미지들이며 우리의 경험 속에서 쉽게 재생 시킬 수 있는 친근한 이미지다. 그리고 이러한 상상력이 얼마나 삶을 풍요롭게 하는지를 이 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상적인 쨈에서 과수원을 연상하고 빵에 과수원을 얹어먹는 상상은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바로 시적 상상력의 즐거움이다. 이렇게 시인의 상상은 과거에 체험한 이미지들을 재생하거나 유사한 이미지들을 연상하여 결합한 것이라고 하겠다.

3) 해석적 상상
그러나 인간의 정신활동이란 이성적인 사상이나 감성적인 정서가 상상력과 더불어 유기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며 그러기에 비록 시인이 상상적인 시를 쓰는 경우라 할지라도 정서와 사상의 도움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물의 이미지를 마음속에 그릴 때에 이미 그 이미지는 시인의 정서와 사상이 함께 반영된다. 또한 이미지들을 결합하여 어떤 통일체를 구성할 때에도 시인의 정서와 사상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상상적인 문장에서 마음을 호수와 동일시한 것은 단지 기계적으로 마음을 호수로 바꾼 것이 아니라 마음의 투명하고 수용적인 심리 상태를 호수의 투명하면서도 수용적인 성질과 일치시켜 보겠다는 해석적 판단이 작용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사물에 직면하게 될 때 먼저 감각적으로 그것을 인식하게 되고 연상 작용을 통하여 인식을 확대할 뿐만 아니라 나와 인생과 세계와 어떤 관계,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함께 생각하게 된다.
이처럼 상상의 과정에서 인생에 대한 보다 깊은 가치 인식이나 사상을 조화시켜 보는 경우, 이러한 상상을 윈체스터(C. T Winchester)는 해석적 상상(interpretative imagination)이라고 하였다.

당신의 불꽃 속으로
나의 눈송이가
뛰어듭니다
당신의 불꽃은
나의 눈송이를
자취도 없이 품어 줍니다
김현승 「절대 신앙」에서

인용한 시는 우선 ‘당신의 불꽃’과 ‘나의 눈송이’로 대비된다. 당신과 나, 불꽃과 눈송이는 단순한 사물 이미지가 아니다. 당신은 신이나 절대적 존재, 나는 인간을 대신하는 이미지일 수가 있다. 불꽃은 신의 은총, 절대적 힘이고 눈송이는 보잘 것 없는 찰나적 존재다. 그 찰나적 존재인 눈송이가 감히 불꽃에 뛰어드는 도전을 한다. 그러나 당신은 그 도전조차 자취도 없이 품어주는 절대적 사랑을 행사한다. 따라서 이 시에는 불꽃과 눈송이라는 상상이 있는가 하면 신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라는 이성적 해석이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홍문표교수은유의시학강좌21
은유의 시학 21- 은유와 상상 (3)

3. 상상력의 역사적 이해
1) 고전주의 시대, 이성주의와 상상력의 억압
사실 인간의 모든 사고행위는 상상력으로부터 비롯된다. 상상력이라면 예술이나 시의 전유물로 생각하지만 실은 원시인의 돌도끼에서 오늘의 눈부신 과학 기술문명조차도 그들의 경험이나 시행착오들을 재구성한 상상력의 산물이다. 그러나 고전주의 시대는 관념적 합리주의와 이성적 사고의 우월성을 앞세워 상상력을 억압했다. 세상의 이치와 사물의 본성, 즉 진리와 도는 이성적인 사유만이 도달할 수 있다는 철인 도사들의 독선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서구사회를 지배해온 플라톤의 관념적인 이데아론을 진리의 길이라고 맹신해왔다. 현실이나 현상은 이데아의 그림자, 즉 이미지라는 데 늘 자괴감을 느끼며 절대 진리 절대 정의를 내세우는 저들의 궤변에 박수를 보냈고 지금도 현실 너머의 정의니 평화니 하는 이데올로기로 혹세무민하는 관념주의 이념주의자들의 술수에 혼란을 겪고 있다. 저들은 현실 저편의 진리나 정의를 생각하는 행위를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가치 있고 고상한 철학이고 휴머니즘이라고 보았다. 그러니 현상을 모방하는 시나 예술의 상상적 행위는 찬밥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플라톤이나 이념주의자들의 이성적 논리엔 근본적인 모순이 있다. 도대체 현실 너머 눈에 보이지 않는 이데아의 세계에 진리가 있고 본질이 있다는 생각, 그런 사고가 과연 이성적 사고인가. 앞서 상상의 사전적인 의미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나 존재하지 않은 대상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현실에 부재한 이데아를 추구하는 이데아주의(idealism)야말로 이성적 사고가 아니라 상상적 사고가 아닌가. 그런데도 이들 철인주의자들은 이데아를 추구하는 철학을 합리적인 이성적 사고라 하고 문학예술이 새로운 세계를 추구 행위는 저급한 모방의 상상적 사고라고 하면서 경멸했던 것이다.

플라톤의 상상력의 억압에 대한 모순은 그의 이데아로 꾸며진 철인들의 나라 「국가론」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플라톤이 제시한 이상 국가는 인간의 불평등을 전제로 한 최악의 계급사회였다. 인간들은 나면서부터 철학자, 전사, 농부와 수공업자 세 계급으로 고정된다. 사유재산은 사회악의 근원이다. 국가의 목표는 양질의 종족 증식이기에 양질의 남자와 여자가 동침해야 하고 여자들은 남자들의 공동 소유물이고 아이들도 공동소유다. 예술은 오직 획일적 주제만 드러내야 하고 개인적 오락도 없다. 이는 이성적인 유토피아가 아니라 획일주의의 비인간적인 디스토피아다. 오늘의 무신론, 국가주의, 사회주의의 원형을 보는 것 같다. 이런 곳에서는 자유로운 상상력이 발휘될 수 없는 일이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진리나 이데아는 현실 저편이 아니라 현실 세계, 바로 자연에 있다고 보고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보았다. 그 이유는 자연은 완전한 것으로 그 안에는 질서와 조화 절도가 이미 내재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때의 자연은 이성과 진리와 동의어가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기 때문에 문학도 처음 중간 끝이 있어야 하고 기승전결, 특정한 어투, 등장인물들 간의 갈등, 시간 · 장소 · 사건의 통일 등 여러 가지 틀을 만들어 규칙에 따라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동양에서도 한시나 우리의 고대 시가의 경우 정형시라는 일정한 틀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창작하도록 하여 상상력을 제한한 것과 같다.

내 벗이 몇이냐 하나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윤선도 <오우가>

이 시는 조선조의 윤선도가 선비나 군자가 지녀야 할 덕목을 물 바위 소나무 대나무 달 이미지로 은유화 한 시조다. 한자 문화시대 이만한 한글 시의 역사적 가치는 인정된다. 그러나 시조라는 형식의 정형적 획일성, 그리고 수석송죽월이란 당대 유교사상의 지배 이념의 획일적인 이미지라는 데서 상상의 자유로움은 제한되고 있다.

2) 낭만주의 시대, 이성에서 상상으로
이성의 손아귀에 놓여 있던 상상력이 비로소 완전히 해방된 것은 낭만주의 시대이다. 낭만주의는 현실을 떠나 또 다른 세계로 진입하며 멀리 있는 것, 낯선 것, 무한한 것을 동경하면서 상상의 날개를 폈다. 낭만주의는 이성의 지배를 강요한 고전주의를 거부하고 문학의 개인성, 주관성을 강조하고 감성의 지배를 확고히 하였다. 낭만주의는 상상력을 이성에 대치되는 능력, 또는 이성을 초월하여 실재를 드러낼 수 있는 능력으로 보고 이성을 통해 이루지 못했던 실재의 발견을 상상을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세계의 사물들은 이데아의 그림자나 의미 없는 것들이 아니라 직관을 통해 세계의 본질을 통찰할 수 있는 초월적인 세계의 상징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력에 대한 인식은 르네상스 이후부터인데 영국의 P. 시드니는 신(神)이 무(無)의 상태에서 세상을 창조했다면 시인은 세상에 없는 형상들을 상상력을 통해 만들어내는 제2의 창조자라고 했다. 경험주의 철학자 F. 베이컨은 철학이 이성적인 지식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라면, 문학은 상상력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낭만주의에 이르러서는 상상과 이성의 대등한 관계나 상호 보조적 관계에 만족하지 않고 인간의 참다운 생활에서도 또는 적어도 예술에서는 이성을 아주 제외 하던가 극히 부차적인 역할만을 맡기고자 하였다. 시인 블레이크(Blake)는 상상만이 본질적 실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래서 뛰어난 상상력을 천재성으로 인정하기도 했다. 따라서 절대적 실재의 발견은 이성의 힘보다도 직관과 영감을 통한 상상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보았다.

골짜기와 언덕 위를 하늘높이 떠도는 구름처럼 외로이 헤매다가 나는 문득 보았네. 수 없이 피어난 황금빛 수선화가 한데 어울려 호숫가 나무 아래서 산들바람에 한들한들 춤추는 모습들을. 은하에서 반짝이며 빛나는 별들처럼 수선화는 끝도 없이 지천에 피어있네 -워즈워드의 <수선화>에서

3) 디지털 시대의 상상력
고전주의가 상상보다 이성에 우위를 두었다면 근대 낭만주의는 상상에 우위를 두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주지주의 계열의 시인 TS. 엘리엇은 낭만주의가 지나치게 개성과 감성 즉 상상을 강조함에 대하여 시는 감성의 표현이 아니고 감성의 도피다. 시는 지성과 감성의 등가(等價)라고 하여 이성과 상상의 융합을 예고했다.

사실 인류 문명사는 감성을 앞세운 상상력과 이성을 앞세운 지식과 테크놀로지의 두 바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현대까지 달려왔다. 처음에야 결핍에 대한 욕망의 감정이 꿈이라는 상상으로 시작했지만 그 상상을 실현하기 위해 도구를 발명하고 자연을 정복하면서 호모 파베르(Homo Faber), 즉 도구적 인간이 되어 지식과 기술이 주도하면서 당초의 상상력을 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21세기 컴퓨터를 기반으로 하는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보이지 않는 것을 표상하는 능력으로서의 고전적인 상상력보다는 아주 이질적인 것들을 꿰어 맞추는 능력으로서의 상상력이 강조되고 있다. 지식의 무한한 생산과 유통이 진행되는 지식 정보 사회에서는 지식 그 자체보다 지식과 지식들이 융합하여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상상력이 더 중시되고 있다. 지식 데이터들이 상상력을 통해서 서로 충돌하고 결합되고 융합될 때 새로운 생각, 새로운 기술 새로운 문화가 창조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상상력은 곧 융합하는 기술이다. 아니 상상력은 네트워크 능력이다. 아니 상상력은 모든 것을 개방 공유하는 플랫폼(platform)을 확장해가는 능력이다. 때문에 상상력이 곧 테크놀로지인 새로운 문명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바야흐로 호모 이마기난스(Homo Imaginans), 즉 상상력의 인간 시대가 온 것이다.


이성과 지식을 바탕으로 한다는 기술 문명에서조차 상상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이미 저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상상력(Imagination is more important than knowledge)”이라고 했다. 이성중심시대 대표적인 화두는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I think, therefore I am)"였다. 그러나 디지털시대의 최대 화두는 "나는 상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I imagine, therefore I am)"라는 명제가 현실화되었다. 지식이 기술을 낳고 이념이 정의를 낳는 것이 아니라 상상이 지식을 낳고 기술을 낳고 이념을 낳고 정의를 낳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떠들고 있는 이념이나 사상이라는 것도 상상의 한 방식일 뿐인데 이를 고전주의 시대 플라톤주의가 그랬듯이 이념이란 이데아를 보편적인 진리로 위장하여 혹세무민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 땅에는 아직도 좌익이니 우익이니 진보니 보수니 하는 허황된 이념 플레임을 만들어 이념투쟁을 한다. 시대착오적인 플라톤적인 진리를 앞세운 사기극에 놀아나는 꼴이다. 이념 플레임은 자유로운 상상 속에 무한한 발전과 창조적 전진을 가로막는 역사악이다.
홍문표교수은유의시학강좌22
은유의 시학 22- 은유와 상상 (4)

4. 은유와 상상
앞서 왜 은유인가를 말하면서 은유야말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가는 발전과 창조의 영원한 깃발이라고 했다. 인간이란 지상이라는 세계에 던져지면서 이미 하나님이 창조해 놓은 무궁무진한 자연 공간 즉 물리적 공간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데 인간들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이러한 자연 공간을 통하여 축적된 경험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공간을 머릿속에 그려 보기도 하고 새로운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이나 욕망은 무한한 것이어서 현실 공간의 한계를 느끼기 때문이다. 현실은 불완전하고 생로병사가 있는 유한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좀 더 나은 공간을 머릿속에 그려 보기도 하고 새로운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이때 새로운 공간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것을 상상(想像, imagination)이라 하는데, 이는 想像이란 한자어나 영어의 Imagination이나 그 공통점은 생각에 어떤 형상, 즉 이미지 (Image)를 머릿속이나 마음속에 그리면서 생각하는 의식행위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는 돌이 되고 돌은 연꽃이 되고”라는 시구의 경우 이는 나는 돌, 돌은 연꽃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내가
돌이 되면
돌은
연꽃이 되고
연꽃은
호수가 되고
서정주 「내가 돌이 되면」

따라서 이 시는 나라는 대상에서 돌을 상상하고 돌에서는 연꽃을 상상하고 연꽃에서는 호수를 상상한 것이다.
그런데 은유의 개념은 무엇인가. 은유 즉 메타포(metaphor)에서 meta는 초월, 벗어남(over, beyond)의 뜻이고 phor는 이동한다(carring)는 뜻이다. 따라서 은유란 어떤 사물이나 의미나 감정이 다른 사물이나 의미로 옮겨져 전자의 사물이 후자의 사물로 그 뜻이 전이(轉移)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인용한 시에서 나라는 대상에서 돌을 상상한 것은 은유적으로 보면 나라는 원관념을 돌이라는 보조관념으로 돌이라는 원관념을 연꽃이라는 보조관념으로 연꽃을 호수라는 보조관념으로 바꾼 것이며 이는 어떤 사물이나 의미나 감정이 다른 사물이나 의미로 옮겨져 전자의 사물이 후자의 사물로 그 뜻이 전이(轉移) 되는 것이라고 하는 은유의 방식에도 부합한 것이 된다.

은유의 대표적 시구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의 문장을 분석해보면 여호와란 원관념이 목자라는 보조관념으로 전이시킨 것인데 이를 상상론으로 보면 하나님이란 대상에서 목자라는 이미지를 유추한 상상이 된다.
따라서 상상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나 존재하지 않은 대상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나, 은유란 어떤 사물이나 의미나 감정이 다른 사물이나 의미로 옮겨져 전자의 사물이 후자의 사물로 그 뜻이 전이(轉移) 되는 것이라고 하는 말은 내용상 다 같이 변화와 창조를 위해 새로운 이미지를 모색하는 행위라는 데서 대동소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은유와 상상이란 용어가 함께 사용되고 있는 것은 그 관점과 역사적 배경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기본적으로 은유(metaphor)란 용어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그의 수사학에 연원을 두고 있다. 당시 문학이나 문법의 핵심은 수사학이었다. 그는 시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유를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인데 이는 남에게서 배울 수 없는 천재의 표적이라고 하였다. 또한 좋은 비유란 서로 다른 사물 사이에 같은 것, 즉 유사한 점을 직관적으로 유추하여 전이 대치 자리바꿈하는 기술이라고 하였다. 한편 「수사학」에서는 비유를, 말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꾸미는 방법이라고도 하여 그 뒤로 은유는 말을 꾸미는 수사의 한 방식으로 후퇴하였다. 따라서 은유는 비유법이나 수사학의 관점에서 사용된 것이다.

한편 상상은 고전주의란 철학적 이성적 사유의 중심에서 상상은 진리에서 먼 현상을 모방하는 것으로 경시하거나 불온한 것으로 간주되어 언급을 피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다가 상상이 제대로 부활한 것은 근대 낭만주의에 이르러서이고 최근 심리학이 발달하면서 상상이란 인간의 본성적인 심리 작용으로 이는 체험의 재구성이란 단계에 이르렀다. 은유 또한 현대에 와서야 수사학이 아니라 의미 창조의 작업이란 인식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현대에는 은유나 상상 모두가 문학예술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모든 분야에서 이미지메이킹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시행하는 마법의 수단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홍문표교수은유의시학강좌23
은유의 시학23-은유와 상징 (1)

1, 상징의 기초적 의미
(1) 어원적 의미
상징 symbol은 조립한다, 짜 맞춘다의 뜻을 가진 그리스어의 동사 심발레인 symballein과 명사인 심볼론 symbolon으로 부호 mark, 증표 token, 기호 sign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런 어원적 의미로 보면 상징은 어떤 것을 대신하는 다양한 표시 행위가 된다.

(2) 한자어의 의미
상징(象徵)이란 한자어의 풀이를 주역에서는 하늘에서는 상을 이루고(在天成象) 땅에서는 형을 이룬다(在地成形)고 하였고 징이란 징험할 징, 들어 올린다, 밝게 보여 준다는 뜻이니 상징이란 하늘의 징조, 하늘이라는 형이상학적 세계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징조를 뜻하고 있다. 동양의 전통적인 사유 구조는 음양(陰陽) 오행(水金地火土)이나 팔괘인 하늘(天) 연못(澤) 불(火) 번개(雷) 바람(風) 물(水) 산(山) 땅(地)이 그 대표적인 상징으로 되어 왔다.

(3) 문학적 의미
문학적 상징은 관념이나 내적 상태의 외적 기호다. 다시 말하면 보이지 않는 불가시적(不可視的) 관념을 대신 들어내는 가시적(可視的)인 이미지다. 그렇다면 크게는 비유와 다를 바 없다. 다만 직유나 은유에서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함께 드러내는데 상징은 비유에서 원관념을 숨기고 보조관념만을 드러낸다.


내 마음은 호수요 -은유(원관념=마음, 보조관념=호수, 1:1의 관계)
님은 갔습니다-상징(원관념=숨김, 보조관념=님, 1:多의 관계)
산 나무 두리기둥은
신비로운 소리로
때로 주절주절 말씀한다.
사람은 상징의 숲을 비껴가고
숲은 낯익은 눈초리로 그를 살핀다.
- 보들레르의 “만상의 조응”에서

(4) 상징의 사회문화적 의미
상징은 원래 상징하는 것과 상징되는 것 사이에 어떤 유사성에 의한 대응 관계를 포함하는 동시에 집단적, 사회적으로 승인된 일정한 약속으로서의 사회적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 이때 상징은 반드시 유사성에 의한 대응 관계를 포함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수학 물리 화학 기호도 상징이다. 현대는 언어학이나 정신분석, 심리학, 인류학이나 사회학, 미학, 예술학이나 종교학 등의 분야에서도 상징이라는 용어가 쓰인다. 그래서 레비스트로스가 “사회는 본성으로서 그 관습, 그 제도 중에 자신을 상징적으로 표출한다.”라고 했고 모스는 “모든 문화는 각종 상징체계로 이루어진 일개의 통합체이며, 그 최전열에 언어활동, 혼인 규칙, 경제관계, 예술, 과학, 종교가 위치한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상징 작용의 탐구는 최근 구조주의나 기호학적 이론의 심화와 함께 유행이나 광고, 도시화 현상이나 정치언어 등에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5) 상징의 기능
상징은 첫째로 사물을 이해하는 작용을 한다. 적색신호는 정지를 의미한다. 둘째로 상징은 생각이 나 감정을 표현한다. 시와 예술품의 이미지들은 작가의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한다. 셋째로 상징은 행동을 지시하는 수단이다. 감독은 선수들에게 특정한 행동을 하도록 수신호를 보낸다.
그러나 상징은 단순한 신호나 일의적인 기호의 기능을 넘어 현실이나 경험을 다른 영역과 결부시키는 동시에, 그들 영역을 상호보완의 관계에 둠으로써 각각 깊이와 풍요를 더해간다. 상징은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심층의 숨겨진 세계를 드러낸다. 종교나 철학에서 상징을 중요시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상징의 네 번째 기능은 정신을 하나의 과제에 직면시키고, 탐구적인 사유로 향하게 하고, 나아가서 사고를 일의적인 기호의 닫쳐진 세계에서 해방하는 동시에 자연과 통합하고 정신을 어느 전체적인 것으로 향하게 하는 작용을 가진다.
홍문표교수은유의시학강좌24
은유의 시학24-은유와 상징 (2)

2. 상징과 기호의 관계
(1) 인간과 동물
동물도 언어가 있다. 그러나 동물의 언어는 문자로 상징화하지 못한다. 상징화하지 못하기에 언어의 발전이나 재구성이나 재창조가 불가능하고 지능도 발전하지 못한다. 인간만이 상징화 능력으로 언어, 문학과 예술을 창조하고 사회 문화 과학을 개발한다. 이는 은유의 경우도 그렇다. 따라서 상징을 넓은 의미로 보면 무엇을 대신하는 모든 기호나 언어, 이미지나 은유도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는 약간의 변별성을 지적할 수 있다.

(2) 상징과 기호
상징과 기호(sign)의 구조는 어떠한 사물의 개념이나 의미를 대신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만 두 가지 사항의 결합단계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기호인 경우 연결되는 두 항목 사이에는 틈이 있고 자의적이다. 그러나 일단 약속이 성립되어 나타나면 그 관계는 명백해진다. 파란 교통신호는 ‘서라’ 뜻이다. 원래 파란색과 서다는 아무 관련이 없는 단지 약속일뿐이다. 과학에서는 물을 H2O라는 기호(sign)로 사용하고 독약이 있는 약품의 표지에는 해골을 그려 놓는다. 그러나 상징의 경우에는 그 관계가 더욱 긴밀하지만 나타내는 내용은 기호의 경우처럼 확정적인 것은 아니다. 비둘기는 평화, 십자가는 구원 희생 고통 등으로 상징적 의미를 말하지만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
그래서 카시러는 기호는 물리적인 존재 세계의 부호요 상징은 의미 세계의 부호라고 하였다. 가로의 빨간 교통안내 표지판은 비록 의미의 세계이기는 하지만 상징이라 하지 않고 이런 기호를 신호(signal)라고도 한다.

우리 생활은 대체로 보이는 세계, 경험이 가능한 경우가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세계, 현실적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세계를 그리고 꿈꾸며 믿기도 한다. 우리는 일찍부터 천국과 지옥을 상상해봤고, 또 그 존재를 믿어 왔다. 이렇게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상상의 세계를 드러내는 이미지를 상징이라 한다. 상징이란 이와 같이 초경험적 세계까지도 드러낸다는 점에서 단순한 기호와 구별된다.



오 장미꽃이여, 너는 병들었구나
폭풍우 몰아치던 밤
어둠 속을 날아가는
보이지 않는 벌레가
-블레이크의 「병든 장미」에서

이 시를 축어적으로 보면 일반적인 장미가 벌레 때문에 시들어 버렸다는 내용이다. 이때 장미는 하나의 기호에 불과하다. 그러나 ‘폭풍우 몰아치던 밤’이라든지 ‘어둠 속을 날아가는 보이지 않는 벌레’라는 말은 단순한 현실을 넘어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있고 이러한 어조는 장미가 하나의 꽃이라는 기호를 넘어서 아름다움이나 순결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는 추리를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장미는 여인일 수 있으며 벌레는 그의 순결을 짓밟는 어떤 남성을 상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 기호학에서는 상징도 기호의 한 방식으로 보고 있다. 퍼스(D. Peirce)는 기호를 도상icon, 지표index, 상징symbol의 세 유형으로 나눈다. 여기서 도상이란 대상체와 유사한 기호를 말한다. 도상(圖像)은 그것이 대표하는 대상체와 비슷하게 보이거나 비슷한 소리를 내거나 비슷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사진은 실물의 도상이다. 의성어도 도상이다. 지도는 땅의 도상이다. 설계도는 건축물의 도상이며 상형문자도 도상이다. 따라서 도상의 중요한 점은 기의가 기표처럼 행세한다는 사실이다. 즉 기표와 기의가 동일하다는 말이다.

지표(指標)란 대상체의 실존적 연결을 이루고 있는 기호다. 지표와 대상체 사이에는 어떤 인과적인 관계가 존재하기도 한다. 연기는 불의 지표다. 지문은 도둑의 지표다. 재채기는 감기의 지표다. 모든 대명사들도 기표다. 이것, 저것, 그것, 여기, 저기, 거기 등 지시대명사는 물론, 어제, 내일 등도 시간의 지표다. 옷은 부의 지표요, 표정은 마음의 지표다.
이에 반해 상징(象徵)이란 임의로 만들어진 기호다. 따라서 기호와 대상체 사이에는 도상처럼 유사성도 없고 지표처럼 인과성도 없다, 오직 언중들의 약속, 사회적 계약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용하는 음성언어는 모두 상징이다. ‘사과’라는 글자는 실제 과일을 대신하는 한국인들만의 기호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apple이라는 기호를 가지고 사과라는 과일을 표시하고 있다. 이렇게 인간들은 어떤 사물이나 어떤 생각들을 상징적 기호로 표시한다. 따라서 지식이나 관념, 이데올로기도 모두 상징이다. 우리들은 상징을 통하여 사물을 이해하고, 상징을 통하여 사물의 의미를 발견한다. 따라서 기호학의 관점에서는 기표와 기의를 가진 모든 것들이 다 기호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퍼스의 비교 관점에 따른 분류이고 상징주의자들은 도상이나 지표도 상징이고 은유론자들은 도상 지표 상징 기호가 모두 어떤 것을 대신하는 이미지인 만큼 이를 모두 은유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상징을 넓은 개념으로 볼 경우엔 기호는 그 하위로 보게 되지만 기호를 기호학적 관점에서 보면 상징은 그 하위 개념이 된다. 이는 은유와 상징과 기호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3. 은유와 상징
비유나 상징은 어떤 사물을 설명하거나 묘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내재된 의미와 본질을 대신하는 이미지로 표출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상대적으로 다음 몇 가지 점에서 구별할 수 있다.
첫째로 상징은 관념만을 사물 이미지로 표현하지만 은유는 사물을 다른 사물 이미지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뿐만 아니라 상징의 경우는 본의는 생략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비유는 본의와 유의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밀턴은 비유와 상징을 구분하여 비유는 회화적 비교이지만 상징은 관례적 비교라고 한 말을 상기할 수 있다. 여기서 관례적 비교란 당초엔 은유였던 것이 계속 반복 사용되면서 상징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는 「실낙원」에서 구약의 「아가」중에 있는 다음 구절들을 인용하고 있다.

① 그의 머리는 최상의 순금이며
그의 머리는 텁수룩하고 까마귀처럼 검구나
② 그들이 나를 포도원 지기로 삼았으나
나는 내 포도원을 지키지 못하였구나.⁸⁾

①의 인용에서는 ‘머리는 순금’이라든지 ‘머리는 까마귀처럼’이란 문장으로 은유와 직유의 방식을 사용하고 있으나 ②의 문장에 나타난 ‘포도원’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드러내지 않았다. 즉 포도원은 보조관념일 뿐 원관념이 없다. 그러나 ‘포도원’은 관례적으로 처녀성을 뜻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다의성을 갖는 상징이 된다.

둘째로 은유에 유사성이나 비교와 대조의 관계로 대각선이 그어지는 것이지만 상징은 그러한 연결선이 없거나 회피한다. 다라서 은유보다 더욱 상상력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구분이 명확하게 상징과 비유의 한계를 정한 것은 아니지만 우선 상징이 암시적이고 비유가 연상적인 사실을 중요시하고 있다.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 흘림
-박두진의 “꽃”에서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김수영의 “풀”에서

박두진의 “꽃”은 ‘이는’ 이란 대명사를 통해 원관념인 꽃을 문면에 드러내고 속삭임 울음 피흘림 등의 보조관념인 이미지를 드러내는 은유적 표현인데 김수영의 “풀”은 민초들의 끈질긴 생명력이란 본래의 의미 즉 원관념은 숨기고 이를 대신하는 보조관념 이미지인 ‘풀‘을 내세운 상징적 표현이다.

휠러에 의하면 은유와 상징은 문학 작품에서 비슷한 양식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은유는 끝내 언어적 기교임에 비하여 상징은 단순한 언어적 연결이 아니다. 둘 다 일종의 이중성doubleness을 핵으로 한다. 그러나 은유의 경우 모두 낱말인데 상징의 경우는 사물과 관념을 표시한다. 요약하면 은유는 오직 언어에 의해서 존재하지만 상징은 언어에 의해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물과 더불어 사고하는 방법이요 은유보다 더욱 분별적이고 근본적이다.

이렇게 보면 상징이 은유보다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은유, 메타포(metaphor)가 넘다와 옮기다의 어원을 가진 것이라면 상징이나 기호도 모두 은유의 방식임을 알아야한다. 따라서 은유 상징 기호는 무엇을 대신하는 기호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고 있고 다만 언술자가 은유, 상징 중 어느 방법에 더 치중하는가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홍문표교수은유의시학강좌25
은유의 시학25-은유와 상징 (3)

3. 상징의 종류
원래 분류니 종류니 하는 말들은 동질성이나 이질성에 의한 끼리끼리 나눔의 방식으로 학문적 비평적 가치를 갖고 있다. 그러나 동질성이니 이질성이니 하는 기준은 관점에 따라 다양하기에 단순하게 확정지을 수 없다. 사실 앞서 퍼스 같은 경우는 의미를 가진 모든 사물을 기호로 보고 기호엔 도상, 지표, 상징을 나눈바 있고 니체는 사물에 대한 감각적 체험을 은유로 본 만큼 상징도 은유이고 이미지일 뿐이다. 다만 상징을 사물의 대표적 표상로 본 휠러는 언어적 상징과 문학적 상징, 휠라이트는 약속상징과 긴장상징, 랭거는 추리적 상징과 비 추리적 상징, 프롬은 인습적 상징, 우연적 상징, 보편적 상징, 그리고 프라이는 원형상징을 들고 있다.
그러나 크게 보면 상징의 종류는 기존의 언어를 확장한 개인적 상징과 역사적 사회적으로 굳어진 제도적 상징으로 나눌 수 있으며 필자는 제도적 상징 중에 특별히 원형적 상징을 구별하고자 하는데 이는 인간 정신의 잠재적 근원이라는 점에서 또한 은유의 확장적 이이해라는 측면에서 이는 별도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1) 개인적 상징 또는 창조적 상징

하략-
홍문표교수은유의시학강좌26
은유의 시학26-은유와 상징 (4)

(3) 원형적 상징
한편 상징적 이미지 중에는 인류나 민족의 무의식 속에 내재되어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는 보편적인 것들이 있어 이를 원형적 상징이라 한다. 원형(原型, archetype)이란 원래 근본적인 틀이라든지 어떤 제품의 기본 구조라고 말한다. 신발을 만들 때는 신발의 기본 틀에 맞추고 버선을 만들 때는 버선의 본에 맞춰 천을 재단하듯이 이러한 상징은 시대를 초월하여 반복성과 동일성을 지니고, 모든 인간에게 유사한 의미를 환기시킨다는 특징을 지닌다. 그런데 이러한 상징에는 신적인 이야기 즉 신화 형식의 상징도 있고 세계 인식의 기본적인 개념으로 굳어진 원형적 형식의 상징도 있다. 그러나 신적인 이야기든 세계 인식의 기본적이 되는 원형적 상징이든 이들은 모두가 시대를 넘어서 계속 반복되는 인간 사고방식의 틀이 되고 문학이나 예술의 주제가 되기에 원형적 상징이란 말로 통용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인습적 상징이나 제도적 상징의 개념과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비둘기가 평화를 상징한다든지 무궁화가 한국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비둘기와 평화, 무궁화와 한국이라는 사고의 도식은 지역적 역사적 사회적 조건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결정된 제한된 약속에 속하는 것이지만 원형 상징은 그러한 특수한 상황에서의 약속이 아니라 우주자연 속에 존재하면서 그들과 오랜 세월 교섭하면서 무의식 적으로 체득된 사고 유형을 말한다. 예를 들어 인간과 물의 관계를 보면 물은 모든 생물들의 필수적 요소다. 세척의 기능도 있고, 성장의 기능도 있고, 재생의 기능도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물이라는 이미지에서 본능적으로 창조의 힘이나 정화의 기능, 풍요와 성장의 의미를 연상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인식은 어느 일부의 인간만의 사고가 아니라 인간이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보편적인 것이다. 이처럼 자연과의 오랜 교섭 속에 무의식적으로 체득된 보편적 의미를 원형적 상징, 또는 보편적 상징, 또는 그런 이야기를 신화적 상징이라고 한다.

인류학자 프레이저는 세계 각 민족의 신화와 종교제식을 비교 연구한 결과 신화 및 의식의 근본적인 양식이 공통된 것을 발견하였다. 심리학자 융은 우리 조상들이 수만 년 동안 살아오면서 반복하여 겪은 원천적인 경험들이 인간 정신의 구조적 요소로 고착되어 집단적 또는 민족적 무의식을 통하여 유전된다고 하였으며 그것이 신화, 종교, 꿈, 환상, 상징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따라서 시인들이 시를 쓰면서 이미지를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게 되는데 이를 분석해 보면 결국 원형적 의미로 환원될 수 있다는 이론이기도 하다. 원형 상징에 대한 휠라이트, 궤린, 프로이드, 융, 프라이 등의 해석을 요약해 본다.

1) 휠라이트와 궤린의 원형상징
휠라이트와 궤린은 공간적인 상하, 우리와 밀접한 피, 빛, 물, 말, 원, 바다, 강물, 태양 등의 원형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상- 성위, 탁월함, 왕권, 지배, 소망, 선, 하늘, 아버지
하- 하강, 심연, 지옥, 무질서, 공허, 대지, 어머니
피- 선과 악, 긍정, 불길, 힘, 금기, 죽음, 처녀성, 탄생, 형벌, 맹세,
전쟁, 재생
빛- 정신, 영혼, 지적, 공간, 불, 공포, 상승, 원, 하늘
물- 정화, 생명, 순수, 속죄, 창조, 신비, 탄생, 죽음, 부활
말- 충동, 이성, 윤리, 정상성
원- 태양, 완전, 진리, 운명의 장난, 윤회, 남녀 결합
바다- 생의 어머니, 죽음과 재생, 영원성, 무의식
강물- 죽음과 재생, 세례, 시간의 영원, 생의 순환, 신의 화신
태양- 힘, 자연의 이치, 의식, 부성의 원리, 시간과 생의 추의
아침해- 탄생, 창조, 각성
저녁해- 죽음, 소멸
검정- 혼돈, 신비, 미지, 죽음, 무의식, 사악, 우울
빨강- 피, 희생, 격렬, 무질서
초록- 성장, 감동, 희망
땅의 어머니- 탄생, 포근함, 보호, 비옥함, 성장, 풍요
공포의 어머니- 무녀, 여자, 마법사, 마녀, 두려움, 죽음
정원- 낙원, 천진무구, 순결미, 풍요
사막- 황폐, 죽음, 니힐리즘, 절망



무서운 것이 내게는 없다
누구에게 감시 받을 생각도 없이
나는 나에게 황홀을 느낄 뿐이다

나는 하늘을 찌를 때까지
자랄려고 한다
무성한 가지와 그늘을 펼려고 한다
김윤성 「나무」에서
이 시는 나무의 성장하는 속성을 통하여 인간의 상승 지향적 욕망을 보여주고 있다. 나무는 늘 수직으로 상승한다. 이는 무한히 상승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원형적 상징으로 충분한 이미지가 될 수 있다. 성장이나 발전을 소망하는 인간의 꿈은 하늘로 뻗어가는 나무들을 통하여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2) 프로이트의 성적 상징
프로이트는 그의 정신분석학을 통하여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성적 욕망이라고 보고 특히 남성과 여성의 욕망이 다음과 같은 이미지로 표현된다고 하였다.

남성- 지팡이, 양산, 막대기, 나무, 모자, 칼, 총, 수도꼭지, 연필,
넥타이, 뱀, 열쇠, 산, 하늘 등
여성- 구멍, 웅덩이, 동굴, 항아리, 병, 트렁크, 상자, 방, 호주머니, 배, 종이, 책, 테이블, 달팽이, 조개, 교회, 사원, 숲, 사과, 복 숭아, 구두, 마당, 셔츠, 물, 바다 등

3) 융의 집단적 원형 상징
융에 의하면 인류의 조상들이 계속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체득된 반복되는 의식의 유형을 원형이라 하였고, 이러한 원형은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 즉 민족의 전통에 계승되어 문학, 신화, 종교 등에 반영된다고 하였다.

그림자(shadow)- 검은 형제, 자아의 어두운 측면, 악마, 부정, 갈등,
이중성
아니마(anima)- 남성의 여성적 측면, 영원한 여성상, 처녀, 여신, 천사,
마녀, 악마, 거지, 창부, 친구, 악녀,
아니무스(animus)- 여성의 남성적 소망, 명배우, 권투선수, 정치가, 지도 자, 이상적 남성, 독수리, 황소, 사자, 창, 탑, 현실, 퍼소나(persona)- 배우의 탈, 사회적 인격, 화자, 톤, 가면, 역할

먹구름 뚫고
파아란 하늘만을 우러러
폐원의 石塔처럼
겨우내 앙다문 裸木
오늘도 不動이다.
사나운 눈보라에 시달린 胴體
사지는 바람에 찢기우고
여름을 여윈 가슴은
밤마다 무서운 객혈이어도
선채로 억년을 지켜
동결된 계절의 이랑 끝에
저리도 오만하게 버틴
겨울초병이여!
자작시 「裸木」
이 시를 프라이드의 성적 상징으로 보면 강한 남성적 이미지를 보이고 있고, 융의 무의식적 원형의 논리로 보면 아니무스적이며, 프라이의 이미저리로 보면 상승적 구조를 지닌 것이라 할 수 있다. 우선 ‘먹구름 뚫고’는 검정빛의 극복이다. 파아란은 성장, 감동, 희망이며 하늘은 남성적 상승 이미지다. 거기다가 석탑, 나목 등은 남성을 상징하는 성적 이미지일 수 있다. 이러한 아니무스적 상징이 눈보라, 바람, 여름, 밤, 그리고 계절의 이랑이라는 대지의 아니마적 상징과의 갈등에서 결국은 겨울 초병이라는 남성적 원형으로 매듭을 짓고 있다. 따라서 이 시는 상과 하, 아니무스와 아니마, 하늘과 땅의 갈등에서 끝내 하늘이거나 아니무스이기를 강하게 표현하고 있는 남성적 시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은유의 시학27-은유와 환유(1)
1. 은유와 환유의 수사학적 개념
중략-

1)에서 빵은 음식물이나 식량 전체를 대신하는 비유로 제유의 방식이다. 2)의 감투는 과거 벼슬아치들이 썼던 의관이다. 따라서 이는 벼슬 직위 등 전체를 모자라는 일부로 대신한 제유가 된다.

한편 환유법(換喩法)에서 환(換)자는 바꾼다는 뜻으로 이는 전체 중 일부가 전체를 대신하는 제유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이미지로 전체를 대신하여 바꾸는 비유법이다. 예를 들어 철수가 항상 야구 모자를 쓰고 다닌다고 할 때, "야, 저기 야구 모자 온다."라고 할 수 있다, 사실은 철수가 온다는 것인데 야구 모자로 철수 전체를 대신한 것이다. 이런 것을 환유법이라고 한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에서 펜은 글을 대신하고 칼은 무력을 대신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면 요람은 출생이고 무덤은 죽음을 대신한 말이다. 그렇다면 제유와 환유의 차이는 무엇인가. 제유는 전체 사물과 동질의 일개 사물이고 환유는 그 전체 사물과 관계는 있지만 동질의 사물은 아니다. 글을 펜으로 대신할 경우 펜은 글 쓰는 도구로서 글과 관계는 있지만 시 산문 편지 일기 희곡 등 글 전부는 아니다.

TIME誌는 모르리
몸 둘 바 슬픔의 중중모리를
아예 모르리
아으, 하고 넘어가는 아홉 고비를
낭군찾아 거북고개 넘어
가고 가는 그대를 모르리
-윤후명의 ‘外誌’에서

이 시에서 TIME誌는 미국의 저명 잡지명인데 이는 외국잡지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인을 대신하는 환유다. 이 시는 한국인들의 고유한 정서와 전통을 외국인 특히 미국인들은 알 수 없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타임지가 미국인들의 잡지이기에 미국과 관계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인의 일부는 아니다. 바로 여기에 제유와 환유의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같은 비유법으로 환유나 제유가 직유나 은유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은유법은 실제 대상인 원관념과 이를 대신하는 비유어인 보조관념이 같은 문장에 표시된다. 예컨대 “내 마음은 호수요”에서 실제 대상인 마음과 비유어인 호수가 유사성이란 공통성을 가지고 함께 제시된다. 그런데 대유법인 제유나 환유에는 실제 대상인 원관념은 숨기고 대신하는 비유어만 표시된다. 그렇다면 상징법과 같은 문장 형태가 된다. 그렇다면 상징법과의 차이는 또 무엇인가, 그것은 제유나 환유는 그 보조관념이 대상 전체의 일부이거나 밀접한 관련을 가진 것이어서 원관념이 단순 명확하다. 그러나 상징에서 원관념을 숨기고 보조관념만을 드러내되 은유처럼 어떤 유사성에 근거하지만 보조관념의 의미는 환유나 제유처럼 원관념이 명확하지 않고 암시적이며 다의적이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의 바위가 상징하는 것은 단단함 비정함 침묵 등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어원적으로 보면 환유(metonymy)는 그리스어의 metōnymia에서 유래한 것으로 ‘넘다’라는 ‘metá’와 이름이라는 ‘ónyma’ 의 합성어여서 메타포(metaphor)라는 은유와 비교할 때 두 비유법 모두 어떤 사물을 다른 것으로 대체한다는 meta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다만 ónyma(이름)와 phora(옮기다)의 차이가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은유가 유사성에 근거를 두면서도 하나의 지시 대상을 다른 것으로 완전히 그 속성을 바꾸어 버리는 것과는 달리, 환유는 그 지시 대상이 가지고 있는 속성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이다.
 
은유의 시학28-은유와 환유(2)
2. 은유와 환유의 현대적 개념

중략-

(1) 소쉬르의 계열체와 은유, 통합체와 환유
사실 문학은 그동안 이성과 논리를 정도로 생각한 철학이나 과학에서는 비논리 비과학이라는 이유로 늘 주류에서 벗어난 존재였다. 고전주의에서는 철학이 그랬고 근대과학에서는 언어학이 그랬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문학에서 말하는 은유니 상상이니 상징이니 감성이니 하는 것들은 애당초 합리적 논리적 실증적 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는 세상을 편 가르고, 인간을 편 가르고, 문명을 편 가르고 서열화하는 악순환의 역사를 만들었다. 감성보다 이성을, 상상보다 현실을, 문학이나 예술보다 과학이나 철학을, 주관보다 객관을 중시하는 이분법적 서열주의를 당연시한 것이다.

그런데 1916년 스위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일반어어학강의」라는 저술을 만나면서 세상이 온통 변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성과 감성이니 정신과 물질이니 서열주의니 하는 그동안의 이분법적 사고나 가치관을 송두리째 뒤엎는 도화선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개 언어학자였지만 언어야말로 인간의 의식과 사고를 그대로 드러내는 기호이기 때문에 언어의 구조원리가 바로 인간의 사고방식이며 사회 문화 활동의 원리가 된다는 획기적인 사실을 규명하게 된 것이다. 그가 언어의 구조를 연구하면서 발견한 원리는 크게 다음 세 가지다.


첫째로 언어는 기표와 기의가 결합된 기호(sign)
일반적으로 기호는 무엇을 대신한다는 의미이고, 전통적으로 기호는 지시물을 대신한다. 그런데 언어 기호가 결합시키는 것은 명칭과 사물이 아니라 기표(signifiant)와 기의(signifié) 즉, 청각 영상과 개념으로 결합된 것이다. ‘사과’라는 언어기호는 sagwa라는 문자(기표)와 과일이라는 실물(기의)가 함께 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언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바르트는 음식 의복 운동경기에도 기표와 기의가 있고 퍼스는 먹구름 천둥 사진 지도 상징도 기호라 했다. 그렇다면 세상에 어떤 의미를 가진 모든 것들은 기표와 기의를 가진 기호이며 시나 소설이나 철학이나 과학이나 문자로 표기된 것들은 모두 기호다. 그중에도 그대의 얼굴은 탁월한 기호다.

둘째로 언어(language)는 랑그(langue)와 빠롤(parole)의 구조.
영어로는 language와 speech이다. 이 세상에는 무수한 말들이 존재하지만, 이 말들이 말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심층에 문법을 소유한다. 심층의 문법을 랑그라 하고 현장에서 개별적으로 드러내는 말을 빠롤이라 한다. 이는 마치 농구와 농구 게임에 비유할 수 있다. 우리가 농구라고 하면 기본적인 규칙과 제도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 선수들이 코트에서 뛸 때는 그 규칙의 범위에서 자유로운 놀이가 이루어진다. 이런 논리는 우리의 사회생활이나 전통이나 문화도 그렇다. 민주주의라는 말에도 원칙이 있고 그 실천이 있다. 결혼식에도 원칙과 구체적인 행위가 있다. 문학도 모두 장르적 규칙이 있고 각자마다 개성 있는 작품이 있다. 그렇다면 우주나 살아가는 모든 것들의 현상 이면엔 랑그라는 질서가 있다는 말이다.

셋째로 언어는 계열체와 통합체, 단어의 선택과 결합
우리는 문장을 쓰거나 말을 할 때 무의식적으로 술술 나오는 것 갖지만 사실은 첫마디는 어떤 말로 할까, 다음 말은 어떤 말로 이을까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다만 유사한 상황을 반복하며 살기에 습관적으로 기계적으로 나올 뿐이다. 따라서 말하기나 장기 두기나 같은 이치다. 장기 놀이의 경우 각각의 말을 가로와 세로와 대각선으로 이동할 때마다 상황, 즉 가로 세로의 관계를 살펴야 한다. 언어의 세계도 말을 계속 선조적으로 발화해 나아갈 때 수많은 단어들 속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그 단어와 어울리는 단어를 결합하며 이어간다. 이는 가로와 세로의 무늬로 짜는 직물과 같다. 이렇게 세계는 시간이라는 통시적인 것과 같은 시간에서 전개되는 동시적 공간적 현상이 펼치는 날줄과 씨줄의 비단길이다. 이를 통시성과 공시성이라고 한다. 인생도 역사도 화살처럼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선상에서 전후좌우의 공간을 살피며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나 글에서 단어를 선택하고 결합하는 과정에는 수직적인 계열체에서 선택하고 수평적인 통합체로 결합하는 구조원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단어 선택의 원리
우리는 그동안 언어활동, 즉 글을 쓰든지 말을 할 경우 그 기본 원리가 문법이었다. 그 문법에 따르면 문(文)이란 기본적으로 “나는 간다.” “예쁜 영이가 밥을 먹는다.”등의 문장이 있을 경우 이는 ‘주어+서술어’ 또는 ‘관형어+주어+목적어+서술어’와 같은 구문 형식이라고 하였다. 문이란 먼저 여러 가지 요소들 중에서 문에 사용될 단어들을 선택하고 다음엔 단어가 의미론적・문법적으로 보아 정확한 연쇄를 형성하도록 선조적으로 결합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단지 문법적인 설명일 뿐이고 보다 말과 글의 본질은 결국 흩어진 언어의 벽돌들을 아무렇게나 선택하여 이를 결합하여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선택 기준과 결합이 있어야 한다.

“학생이 공부한다.”라는 문장을 과거에는 주어와 서술어라 하여 문장의 성분과 기능으로 설명했지 ‘학생이’와 ‘공부한다’라는 언어의 벽돌들이 어떻게 선택되고 결합하는가의 근본적인 원리를 몰랐다. 그런데 소쉬르는 언어에 통시성과 공시성이 있듯이 문장에도 계열의 축과 통합의 축이 있음을 간파했다. 인용문에서 ‘학생이’와 ‘공부한다’라는 단어가 선택되는 과정을 보면, ‘학생’이라는 선택어는 ‘학도’, ‘생도’, ‘연구원’, ‘청년’, ‘대학생’, ‘중학생’ 등의 유사한 등가성을 가진 단어들 중에서 선택된 것이고 ‘공부한다’도 ‘연구한다’, ‘탐구한다’, ‘탐색한다’, ‘실험한다’ 등의 등가성을 가진 단어들 중에서 선택된 것이다.

학생이 연구한다
학도가 공부한다
생도가 학습한다
연구원이 〮탐구한다
……… ………

이처럼 문장을 만들기 위하여 낱말들을 선택하고 결합하는 경우 먼저 하나의 낱말을 선택할 때, 선택의 수직적 영역에서 선택된 요소들의 바깥에는 선택되지 않는 요소들의 집단이 잠재적(潛在的)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말이나 글에서 낱말의 선택은 수직적으로 널려 있는 같은 계열체에서 자신이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단어를 번개같이 선택한다. 이들 계열체의 단어들을 보면 모두 동질의 유사성이 있는 등가 관계이고 그렇다면 이는 은유적 관계가 된다.

단어 결합의 원리
한편 ‘학생이’란 말과 ‘공부한다’라는 말이 결합하는 원리는 무엇인가. 학생과 공부는 동등한 의미는 아니다 학생 학도 학습자 등은 동등한 등가의 관계지만 학생과 공부 사이에는 긴밀한 인접성의 관계는 있지만 동등한 등가의 관계는 아니다. “참새가 노래한다”라는 문을 보면 ‘참새’, ‘제비’, ‘꾀꼬리’ 등 같은 수직적 계열축에서 선택한 ‘참새’와 ‘노래한다’, ‘지저귄다’, ‘운다’라는 등의 등가적인 수직적 계열축의 단어들 중에서 ‘노래한다’를 선택하여 결합한 것인데, 이때 ‘참새’와 ‘노래한다’ 사이는 인접성의 관계가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단어가 결합하여 문장을 이루는 원리는 계열축에서 선택된 단어들이 인접성에 의해 결합하여 통합축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학생이 공부한다.”에서 공부한다는 단어는 학생의 많은 인접활동 중에서 선택하여 결합한 것이고 “참새가 노래한다”에 노래한다는 참새의 많은 인접의 동작 중에서 선택하여 결합한 것인 만큼 이는 환유적 관계가 된다. 그렇다면 모든 문장과 말은 등가적인 계열축에서 선택되고 인접성의 통합축으로 결합되는 것이며 이는 수사학적 논리로 보면 은유적 관계에서 단어가 선택되고 환유적 관계에서 결합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따라서 모든 문장은 수직의 은유와 수평의 환유로 짜여 진 날줄과 씨줄의 비단 폭이다.

그리고 이런 은유와 환유의 원리는 모든 생명체들의 삶의 방식이나 인간의 정신작용으로 이루지는 문화 현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전쟁에서 직선적 전진은 지피지기와 전후좌우의 조건이란 상황을 함께 고려한다. 모든 게임의 전진과 후퇴도 그렇다. 시도 그렇고 소설도 그렇다. 심지어는 의상도 그렇다. 의상 착용의 경우 군모, 중절모, 갓이 있는 경우 중절모를 선택한 경우 전체 의상은 중절모-양복-와이셔츠-넥타이-구두로 구성된다. 갓을 선택한 경우는 두루마기 바지저고리 버선 짚신이다. 이때 군모, 중절모, 갓은 모두 모자라는 유사성의 계열축의 은유적 관계가 되고, 중절모-양복-와이셔츠-넥타이-구두로 결합되는 관계는 인접성의 통합축으로 환유의 관계가 된다. 이처럼 세상의 질서는 은유적인 계열축에서 선택되고 환유적인 통합축으로 결합되는 것이다. 말 잘하고 글 잘 쓰고 세상을 성공적으로 사는 삶도 바로 이런 이치다. 따라서 실어증 환자나 실패한 삶은 바로 이런 은유적 선택과 인접성의 결합 기능을 잘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된다. 실어증의 경우 인접성의 요소들을 하나의 연쇄체로 결합하는 능력이 결핍된 경우를 연속성 혼란(continuity disorder)이라고 하고, 한 요소를 다른 요소와 대체하는 능력이 결핍된 경우를 유사성 혼란(similarity disorder)이라고 한다.
은유의 시학29-은유와 환유(3)
(2) 야콥슨의 시와 산문, 은유와 환유

앞서 소쉬르는 언어나 문장에서 단어가 선택되고 결합되는 원리는 각 단어들의 등가적인 계열축에서 선택되고 선택된 단어들은 인접성의 통합축으로 결합되어 나아가는 것이라 했다. 이는 은유적인 수직축에서 단어가 선택되고 환유적인 수평축으로 결합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단어들의 선택과 결합의 원리는 러시아의 언어학자 야콥슨에 의하여 시와 산문의 근본적인 차이를 밝히는 획기적인 견해를 도출하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시와 산문을 구별할 때, 시는 운문(verse), 산문(prose)은 토의의 문장이라 하여 시는 어떤 사실을 보다 감성적으로 운율적으로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양식이고, 산문은 어떤 사실을 보다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자유롭게 진술하는 문장이라는 것이었다.

한편 시는 감성적이고 상상적이고 비논리적인 것이어서 문법적으로 논리적으로 연구할 대상이 아니라 했다. 플라톤 이래 시는 감성적이고 상상적이고 모방적인 것이어서 이성과 본질을 추구하는 철학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이분법적 차별주의에서 시는 푸대접을 받아왔다.
그런데 소쉬르와 야콥슨은 입장은 전혀 다른 관점이었다. 이들은 시와 산문이니 이성과 감성이니 현실과 상상이니 주관과 객관이니 하는 이분법적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배제하고 시나 산문이나 철학이나 의미를 드러내는 모든 것은 기표와 기의로 구성된 기호일 뿐이며 모든 언어 문장은 시든 산문이든 은유적인 계열체에서 단어를 선택하고 선택된 단어들은 인접성에 의해 통합체로 결합될 뿐이라고 했다.

“새가 날다”

이 문장의 구성원리를 보면 먼저 ‘새가’는 조류, 날짐승, 제비, 참새 등 동종의 유사성을 가진 은유적 관계에 있는 계열축의 단어들 중에 ‘새‘가 선택된 것이고 그 다음 수평축, 즉 결합의 축으로 ’날다‘를 붙였는데, 물론 ’날다‘도 비상하다, 날개짓하다, 비행하다 등 계열축에서 선택된 것이지만 문제는 새와 날다 사이에 무슨 관계이기에 ’새가‘에 ’날다‘를 결합시킨 것일까.

새와 날다는 의미상 서로 유사성이나 등가성이 없다. 은유관계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날다는 새의 행동 중에 하나다. 따라서 인접성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와 날다 사이에는 환유의 관계가 성립된다. 이렇게 모든 문장은 앞 단어와 뒤 단어가 인접성의 관계 즉 환유의 관계로 결합되면서 계속 확장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고 산문이고 세상의 모든 문장들은 은유적으로 선택되고 환유적으로 결합된 것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현실적으로 시와 산문이 구별되고 모두가 구분하는 그 근본적인 변별성은 무엇인가 그 점에 대하여 야콥슨은 소쉬르의 이론에서 한발 나아가 시와 산문이 구별되는 결정적인 원리, 바로 기존의 상식들을 완전히 뛰어넘는 신의 한 수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1) 내 마음은 호수요 -김동명의 시 <내마음>에서
2) 내가
돌이 되면
돌은 연꽃이 되고 -서정주의 시 <내가 돌이 되면>에서

1)의 시 문장도 ‘내 마음은’ 내 심정은, 내 가슴은, 내 정신은, 내 영혼은 등의 은유적 계열체에서 선택된 말이고 ‘호수요’는 연못이오 우물이오 개울이오 바다요 등 은유적 계열체에서 선택된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 마음은’과 ‘호수요’가 어떤 관계로 결합되었는가. 앞서 모든 문장은 인접성의 환유관계라 했다. 앞서 “새가 날다”에서 ‘새가’와 ‘날다’의 결합은 인접성의 환유관계다. 그런데 ‘내 마음은’과 ‘호수요’ 의 결합은 환유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등가관계의 결합이다. 환유란 전체와 부분의 인접관계다. “새가 날다”에서 날다는 새의 행동중 하나다. 그러나 마음은 심리적 계열체이고 호수는 물리적 계열체여서 전체와 부분의 인접관계가 아니다. 그런데도 시인은 임의적으로 내 마음과 호수가 동일한 동등한 것임을 인정하고 통합축으로 결합시켰다.
2)의 시도 그렇다. 나와 돌과 연꽃은 모두 이질적인 것들이어서 전체와 부분의 환유관계가 아니다. 그런데도 이들을 동질적인 등가관계로 만들어 결합시켰다. 따라서 이는 환유적 결합이 아니라 은유적 결합이다.

여기서 야콥슨은 시인들이 시어를 선택하여 산문과 다른 낯설음의 감동적인 문장을 만드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에 대하여 “시의 언어는 등가성의 규칙에 따라 선택의 축에서 결합의 축으로 시어를 투사하기 때문”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밝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야콥슨의 결론은 산문의 문장은 낱말과 낱말이 인접성에 의하여 환유적으로 결합하는 구조이고 시의 문장은 낱말들이 등가성에 의하여 은유적으로 결합하는 구조라는 말이 된다. 시는 등가성의 원리에 따라 계열축의 언어를 선택의 통합축으로 결합해 가는 언술이고, 산문은 전체와 부분이라는 환유적 접촉으로 결합해 가는 언술이다.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a¹)
비밀한 울음(a²)

한 번만의 어느 날의
아픈 피 흘림.(a³)
먼 볕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a⁴)
꺼질 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정적(靜寂).(a)

펼치면 일렁이는
사랑의
湖心아.(a)
박두진 「꽃」에서

이시는 시는 박두진이 꽃에 대한 감정을 서술한 문장이다. 꽃에 대한 일반 문장이라면 꽃은 식물이다. 그 꽃은 국화꽃이다. 그 꽃은 노란색이다. 등 꽃과 인접성을 가진 단어들과 결합하는 환유적인 것들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시 문장은 외견상은 7연 18행으로 되어있지만 의미상 구조를 보면 다음과 같이 6개의 은유로 결합된 문장이다

꽃은 해와 달이 속삭임(a¹)
꽃은 비밀한 울음(a²)
꽃은 아픈 피흘림(a³)
꽃은 엇갈림의 핏방울(a⁴)
꽃은 아름다운 정적(a⁵)
꽃은 사랑의 호심(a⁶)

이 시는 꽃이라는 a가 (a¹) (a²) (a³) (a⁴) (a⁵) (a⁶)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것임을 은유적으로 천명한 문장이다. 이는 기존의 한정된 꽃의 개념을 뛰어넘어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창조해낸 메타포(metaphor), 시인의 상상력으로 짜여진 환유적으로 결합된 일상의 문장과는 전혀 다른 형식으로 결합된 은유적 문장이다.
여기서 시란 근본적으로 너와 내가 이질적으로 분열된 세상의 사물들을 등가적으로 동일시하여 통합하려는 시정신을 보게 되며, 이러한 은유의 계속된 반복 즉 리듬을 통하여 더욱 감동을 자아내게 되는데 여기서도 일찍이 발레리가 시는 춤추기 (dancing), 산문은 걸어가기(walking)라는 말이나 무카로브스키의 진동이란 말을 재확인하게 된다.
은유의 시학30-은유와 환유(4)
(3) 은유와 환유와 서사시, 산문시
그동안의 역사를 보면 시는 감성 산문은 이성이란 이분법적 굴레를 씌워 시를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으로 매도하였고 그래서 이성을 중시하는 철학이나 시도 엄연히 언어인데 언어과학, 즉 언어학에서는 시나 문학을 학문적인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지금도 대학의 문과를 보면 어학과 문학이 엄연히 분리되어 있다.

그런데 시와 산문 아니 문학과 어학, 감성과 이성 상상과 현실이라는 이 완고한 이분법적 이데올로기가 바로 언어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언어학자 소쉬르와 야콥슨을 만나면서 허물어지게 되었다는 것은 정말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은 시고 산문이고 철학이고 과학이고 가랑잎이고 모두 기표와 기의를 가진 기호일 뿐이라는 것이고, 말이고 글이고 언어로 조직된 문장이라면 모든 문장은 은유적인 계열체의 축에서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단어들을 선택하고 이를 인접성의 통합축으로 결합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시의 문장을 보면 특별하게도 인접성의 통합축으로 결합하는 과정을 등가성의 은유로 결합해 투사해 나아간다는데 시와 산문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했다.
이는 그동안 문학이나 시는 비논리적이기 때문에 해석도 비논리일 수밖에 없다는 통설을 깨고 문학이나 시도 언어학자에 의해 논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말하자면 시도 언어과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획기적인 발상 전환의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그런데 모든 시가 정말 시어의 결합 과정에서 인접성이 아닌 등가성으로, 환유가 아닌 은유로만 결합하는 것인가. 절대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시도 산문처럼 인접성에 의한 환유적 결합의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이런 시는 은유적인 결합의 시가 아니라 환유적인 결합의 시라고 하겠는데 역사적으로 보면 서사시 산문시가 있고, 최근에는 아예 환유적인 시를 은유적인 시와 대등한 것으로 내세우기까지 한다.

1) 서사시
전통적으로 시의 주류는 서정시(抒情詩)다. 그러나 서사시 극시도 있어 이를 시의 3대 장르라 했다. 서정시란 자신의 마음, 감정을 드러내는 시다. 그리고 감정을 보다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짧게 반복적으로 리듬과 은유를 통해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시라면 압축 리듬 은유를 기본 조건으로 하는 문학 장르로 여겨왔다.
그런데 시는 개인 감정만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건도 강렬한 감정으로 드러내고 싶은 경우가 있다. 그래서 과거에는 어떤 영웅적인 이야기를 시의 기본 요소인 리듬을 살려 길게 쓴 경우가 많았다. 이를 서사시(敍事詩)라 한다. 가장 오래된 문학작품으로 슈메르의 길가메쉬, 호머의 일리아드 오디세이 중세의 베오울프 단테의 신곡 한국엔 이규보의 동명왕편 김동환의 국경의 밤이 등이 있다. 따라서 서사시에는 영웅적인 이야기(story,敍事)가 있고 행갈이를 통한 리듬이 있다.



32
산 자여 들으라
봄이 와서 들에 산에 찔레꽃이 피거들랑
꽃향기가 그대들 가슴속으로 스며들어 가거들랑
부드러운 바람이 살랑살랑 그대들 얼굴을 어루만지거들랑
우리를 떠올려다오
천 개의 목숨을 가진 사람들처럼 싸웠던
마지막 남은 한 호흡까지 칼을 놓지 않았던
동료를 위해 목숨을 버리고
오로지 하나의 영혼으로
수십만의 동료들과 하나가 되었던

35
이 왕궁은 백성들의 땀이요
이 음식은 백성들의 피요
이 옷은 백성들의 혼이요
어느 것 하나 내 것이 없느리라
잠시 백성들에게 빌려 쓰고 있는 것일 뿐
그들을 위해 무릎을 꿇으리라
그들을 위해 고개를 숙이리라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리라
-강수의 「서사시 대백제」에서

이 시는 강수의 「서사시 대 백제」 근초고왕편으로 32는 백제의 번영을 위해 싸우다 죽은 군인들이 산자에게 말하는 구절이고 35는 백제의 왕인 근초고왕이 전사한 군인들에게 보내는 답가다. 강렬한 호소가 있고 행갈이를 통한 리듬이 있고 이야기가 있다. 여기서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각각의 시어는 어느 문장이나 은유적인 계열체에서 선택하지만 시어들의 결합은 인접성에 의한 환유적인 결합으로 산문성을 지닌다는 말이다.

2) 산문시
한편 과거에 문학의 2대 장르, 또는 문장의 2대 종류라면 운문(韻文)과 산문(散文)으로 나누었다. 여기서 운문이라면 시를 말하는데 韻文의 운자는 운율(韻律), 즉 규칙적인 음성적 리듬을 말했다. 규칙적인 리듬이라면 일정한 음성률 자수율 행갈이가 있기 마련인데 그래서 고대시는 정형시 형태가 많았다. 그러나 모든 장르는 고정불변일 수 없고 변형이 있기 마련인데 근대에 이르러 운율의 정형성을 타파하고 자유롭고 개성적인 리듬 즉 내재율을 추구하는 시를 선호하게 되어 이를 자유시라 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행갈이의 전통마저 허물고 짧은 산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시들도 있는데 이를 산문시로 지칭한다.
따라서 산문시는 행을 나누지 않은 산문 형식의 시. 리듬의 단위를 행이나 연에 두지 않고 한 문장이나, 한 문단에 둔다. 시는 기본적으로 감성을 강하게 들어내기 위해 반복적인 리듬과 행갈이를 한다. 그런데 산문시는 급박한 감정 표출보다는 산문형식으로 표현하여 느슨한 리듬 느슨한 은유를 사용하여 표현한 서정시다.

보들레르는 산문시 <파리의 우울> 서문에서 산문시의 특질에 관하여 "율동과 압운이 없지만 음악적이며 영혼의 서정적 억양과 환상의 파도와 의식의 도약에 적합한 유연성과 융통성을 겸비한 시적 산문의 기적"이라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산문시와 일반 서정시의 결정적인 차이는 역시 선택된 시어들이 은유적으로 결합하는가, 환유적으로 결합하는 가에서 산문시는 야콥슨의 지적처럼 산문의 특징인 환유적 결합에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일반 산문처럼 사건의 전개가 있다는 말이다.

꽃밭은 그 향기만으로 볼진대 한강수나 낙동강 하류와도 같은 융륭(隆隆)한 흐름이다. 그러나 그 낱낱의 얼골들로 볼진대 우리 조카딸년들이나 그 조카딸년들의 친구들의 웃음판과도 같은 굉장히 즐거운 웃음판이다. 세상에 이렇게도 타고난 기쁨을 찬란히 터뜨리는 몸뚱아리들이 또 어디 있는가. 더구나 서양에서 건너온 배나무의 어떤 것들은 머리나 가슴패기뿐만이 아니라 배와 허리와 다리 발꿈치에까지도 이쁜 꽃송이들을 달았다. 멧새, 참새, 때까치, 꾀꼬리 새끼들이 조석으로 이 많은 기쁨을 대신 읊조리고, 수십만 마리의 꿀벌들이 왼 종일 북치고 장구치고 맞이굿 울리는 소리를 하고 그래도 모자라는 놈은 더러 그 속에 묻혀 자기도 하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이다.
-서정주의 <상리과원>에서

한여름 내내 천 개의 애벌구이에 한여름 내내를 쓴 적이 있다 붓이 잘 나가질 않았다 들끓는 나를 청화(靑華)로 달랜 적이 있 다 자주 어지럽던 슬픔의 운필(運筆)을 구워낸 적이 있다 슬픔에 사흘 밤 사흘 낮 불을 지피자 항아리가 빚어졌다 슬픔이 항아 리를 빚어냈다 터질 듯 달 항아리로 떴다 속을 비워 냈다 터질 듯 비워 냈다 그때부터 그런 아궁이 하날 지니게 되었다 너는 떠나 고 어제는 진종일 혼자서 장작을 팼다 이번 한여름에도 사흘 밤 사흘 낮 불을 때야 할 모양이다 슬픔의 운필(運筆)이 또다시 시 작 되었다 벌써 호되다- 정진규의 ​<달 항아리>

이들 시는 지금까지 시가 가장 중요시한 행을 해체한 시다. 시의 행이란 이미지, 리듬, 의미, 정서의 단위로 시를 시답게 하는 외형적 요인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능을 극도로 제한하고 산문처럼 행을 연결하여 서술한 것이다. 이러한 시는 형태상으로 볼 때는 산문이고 내용으로 볼 때는 상당히 상상적이고 정서적이어서 행갈이를 제외하고는 내재적인 리듬이나 은유적인 표현 등 시적인 요소를 담고 있어 이러한 시를 산문시(散文詩)라고 한다.

서정주의 시는 꽃밭은 융륭한 흐름, 조카딸년, 웃음판 등의 은유도 있지만 전체는 과수원 꽃밭 이야기의 환유적인 산문이다. 정진규의 달 항아리는 항아리 굽는 고통스러운 과정의 이야기다. 그러나 슬픔의 항아리, 슬픔의 운필 등의 은유가 반복적인 리듬감을 더하는 환유적인 산문시다.
시를 형태상으로 구분할 때, 정형시, 자유시, 산문시라는 말을 하였다. 이는 시의 행과 연을 일정한 규칙에 구속시킬 것인가 시인의 자유로운 개성에 맡길 것인가, 아니면 행과 연마저 포기할 것인가의 문제다. 시의 생명을 리듬과 메타포라고 할 때 서정시만은 못하지만 이들 기능을 포함하면서도 산문적인 서술을 하는 것이 산문시의 기본 조건이다.
은유의 시학31-은유와 환유(5)
3) 은유와 환유와 환유적인 시

언어학자 소쉬르와 야콥슨의 공로는 세상의 모든 문장은 그것이 시든 소설이든 논설이든 철학이든 과학이든 등가의 은유적인 계열축에서 단어가 선택(selection)되고 선택된 단어들은 인접성의 환유적인 통합축으로 결합(combination)되어 나아가는 것이라 했다. 그런데 시의 경우는 등가의 은유적인 계열축에서 단어가 선택(selection)된 것들이 결합의 과정에서 일반 문장처럼 인접성의 관계로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등가적인 은유적 관계로 결합해간다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모든 문장은 은유적인 수직축에서 단어를 선택하고 환유적인 수평축으로 결합해 가지만 시의 경우는 등가적인 은유적 관계로 결합해간다는 말인데 이는 시와 산문의 근본적인 변별적 속성을 밝혀낸 획기적인 발견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시는 물론 현재의 시들도 보면 시의 구성은 모두 은유적 결합으로만 된 것이 아니라 사실은 환유적으로 되어 있는 것이 많다. 특히 과거 정형시가 우세하던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1)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황진이 시조

(2)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이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1)은 시조의 정형성을 살린 고시조의 대표적 작품으로 모두가 애호하는 시다. 그런데 시어의 결합 형태를 보면 앞의 시어와 뒤의 시어가 야콥슨의 말처럼 등가적인 은유적 시어들로 결합된 것이 아니라 산문적 결합원리인 환유적 시어의 결합이다. ‘청산리 +벽계수야 + 수이 감’ 의 결합관계는 은유가 아니라 전체와 부분의 환유다. ‘일도창해하면’ 도 청산에서 바다로 가는 흘러감의 환유다. ‘명월이 +만공산하니 + 쉬어 간들’도 역시 환유적인 결합이다.

(2)의 시도 시문장의 결합과정을 보면 환유적이다. 1연의 서술을 보면 은유처럼 원관념과 보조 관념이 A-B다의 형식이 아니라 간다면 보내겠다는 환유적 진술이다. 2연은 가는 길에 진달래꽃을 뿌리겠다는 산문적 진술이며, 3연은 진달래꽃을 밟고 가라는 말이고, 4연은 떠날 경우 눈물 흘리지 않겠다는 역설이 있을 뿐 문면상 시어들의 구성은 철저히 환유적 결합이다. 이처럼 서정시들도 행갈이나 자수율을 통해 시적 정서나 감동을 드러내며 환유적인 시를 많이 썼다.

그런데 최근 일부에서는 시의 은유적인 등가성의 결합이라는 근본적인 속성을 아예 거부하고 시는 환유적이어야 한다는 주장까지하고 있다. 이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부상과 함께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환유 논리가 언어의 수사법이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 탈 근대적 사유 체계로 중요하게 재조명되고 있는 것이다. 세계는 추상적 관념이 아니며 굳어 있는 것이 아닌데도 그동안 우리는 특정한 코드의 은유 체계로 사물의 존재를 왜곡하여 규정해 왔다는 것이다. 은유의 체계는 세계를 선택하거나 배제하며 그것들을 차별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접성에 의한 결합과 통합으로 이루어진 것 중에 대표적인 사진의 경우는 주체와 타자로 위계를 구분하지 않고 세계 전체를 평등한 것으로 인식하게 한다.

이처럼 은유의 수직축을 버리고 타자 중심적 수사 체계인 환유의 수평축으로 중심축을 옮겨야 한다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유이기도 한데 그러기에 시도 이제는 은유중심의 결합 구조에서 환유중심의 결합구조로 옮기는 것이 보다 현대적이고 진보적이라는 논리까지 제기하고 있다

강변에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집배원이
소변을 보고 있다
물줄기가 들찔레를 흔들면서 떨어진다
근처에 있던 뱀이 슬그머니
몸을 감춘다
강은 물이 많이 불었다
-오규원의 「여름」

오규원의 시는 「여름」이라는 제목 하에 여러 사실들이 산문으로 스케치 되고 있다. 행갈이를 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시의 형태는 갖추고 있는데 시의 문장은 모두 산문이다. 1,2행은 집배원이 소변을 보는 사건의 산문이고, 3행은 오줌줄기가 들찔레를 흔들면서 떨어진다는 사건의 산문이며, 4,5행은 뱀이 도망간다는 사건의 산문이고, 마지막 행은 강물이 불었다는 사건의 산문이다. 따라서 1,2행의 집배원과 소변, 3행의 물줄기와 들찔레, 4,5행의 뱀의 도망, 마지막행의 강과 물은 모두 환유적인 결합이다. 그리고 각 사건들은 서로 인과성은 있으나 그렇다고 집배원이 이 시의 중심도 아니다. 모두가 독자적인 사물로 배치되어 있을 뿐이다. 이 시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이나 사물이나 동등한 탈 주체적 관계에 있다. 주체와 타자의 차별을 해체하는 평등의 시가 된 것이다. 이처럼 은유가 배제된 경향의 시를 환유의 시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시의 본질은 무엇이며 시 어떻게 쓸 것인가. 은유의 시를 택할 것인가. 환유의 시를 택할 것인가. 야콥슨은 시와 산문의 근본적 차이를 시는 은유적인 선택의 축에서 시어를 선택하고 은유적으로 투사하며 결합의 축으로 나아가는 것이라 했는데 시의 현장을 보면 오히려 환유적으로 결합하는 시문장이 많으니 이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은유와 환유의 보다 근원적인 속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3. 은유와 환유, 시와 산문의 상대적 인식
은유와 환유는 언어가 지닌 두 축의 특성과 직결되어 있다. 은유는 선택 기능과 유사성의 원리를 축으로 하여 작동되고, 환유는 결합 기능과 인접성의 원리, 즉 인접한 단어들이 규칙에 맞게 배열되어야 한다는 선조적 축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유사성을 동력으로 하는 은유적인 힘은 의미의 중심을 향해 나아간다. 여기에서는 어떤 단어가 의미의 핵심을 포착해내는지가 문제가 된다. 환유는 인접성의 원리에 따라 끝없는 연쇄를 만들며 이어진다.
그런데 이는 세상의 모든 작업과도 일치한다. 옷감은 날줄과 씨줄로 짜여지고 세상의 모든 공간은 수직과 수평으로 채워진다. 그런데 우리들의 생각도 수직적인 생각과 수평적인 생각이 있다. 모든 힘은 중심을 향하는 구심력이 있고 중심을 벗어나려는 원심력이 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표면적인 현상이 아니라 내면적인 구성과 세계가 있고 외적인 관계가 유기적으로 얽혀있어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외적인 요소도 있다. 인간이란 존재도 내적인 조건이 있고 외적인 조건이 있다. 그래서 개인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를 구별하여 설명하게 된다. 기존의 것에 집중하기도 하지만 발전과 변화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이러한 세상의 존재원리는 나와 세상을 드러내려는 언어 즉 문장의 경우도 같은 이치에서 작용한다. 시든 산문이든 모든 문장, 즉 언어행위는 의사소통과 의사표현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사한 등가의 수직축에서 단어들을 선택해서 굴비 엮듯이 수평축으로 연결하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 이때 단어의 선택은 은유적인 등가의 계열축에서 선택하지만 단어들의 결합은 주어+술어의 형식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인접성, 즉 환유적인 관계로 결합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사소통의 문장이라면 당연히 이 원칙을 따른다.

그런데 같은 문장이라도 시의 경우는 보다 감동적인 표현을 하고자하는 문장이기에 과거에는 운문이라하여 음성의 반복적 규칙인 리듬을 사용했다. 이때 운문의 리듬은 운율 자수율 행갈이 등을 주로 하였다. 따라서 운문중심의 과거 시에서는 은유 중심이 아니고 환유 중심의 문장이어도 운율만 있으면 시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지금도 그렇다. 행갈이만 해도 시의 기초는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는 감동적인 표현만이 아니라 보다 새로운 세계의 발견과 창조라고 할 때 은유의 전이적 기능이 필요하게 되며 리듬의 경우 과거에는 음성적 반복만을 생각했는데 사실은 의미의 반복 이미지의 반복도 리듬이라는 인식에서 시의 문장은 언어의 결합과정에서도 은유적인 투사가 동심원을 그리는 진동의 문장을 만들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같은 시라해도 사물의 핵심, 중심, 내면, 존재성을 지향하거나 기존의 것을 넘어 초월하고 창조하고자 하는 감성적 서정시에서는 은유적 표현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시적인 요소는 최소한의 리듬인 행갈이를 통해 감동보다는 현실과 사실들을 디테일하게 전달하고자 할 때는 시어들의 결합에서 환유라는 산문성을 강하게 들어내기 마련이다. 사실주의 시나 목적성의 시들이 더욱 그렇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시인들 개개인의 시학적 관심에서도 나타날 수 있지만 시대사상이나 사조에서도 초월이냐 현실이냐 상상이냐 현상이냐 하는 세계관에 따라서도 나타난다. 예컨대 낭만주의와 상징주의에서는 은유가 압도적이고, 사실주의에서는 환유가 주도적이다. 초현실주의 미술은 은유적 태도가 우세하고, 피카소의 입체파는 명백한 환유 지향성을 지니고 있다. 모더니즘은 중심 지향이기에 은유적이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중심해체이기에 환유적이다. 그러니까 은유와 환유는 세계관에 따라 그 비중이 달라진다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과학적인 학술적인 문장은 환유적인 결합이 원칙이다. 그러난 감동을 동반한 문학의 문장은 모두 은유적 결합과 환유적 결합을 포함하고 잇다. 산문인 소설에도 은유가 있고 시에도 환유가 있다는 말이다. 다만 빈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시에 있어서도 산문시니 환유의 시니 하는 것은 은유의 빈도가 높은 순수 서정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산문적 요소인 환유의 비중을 많이 가미한 것으로 이는 시의 본질적 속성의 하나인 은유적 리듬 보다 음성적 리듬에 환유적 속성을 가미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최근 환유적인 시가 보다 진보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시류적인 것이다. 해체주의나 탈구조주의를 통해 이념적 양극성이 사라지면서 등장한 사유의 한 방식이다. 산문이 아닌 시를 왜 쓰는가, 감동과 초월과 창조를 위해서인가. 보여지는 현상의 리얼리티를 드러내기 위해서인가. 그렇다면 시를 어떻게 써야할 것인가. 그것은 시를 쓰는 시인에게 물어야할 영원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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