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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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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2022년 03월 20일 15시 03분  조회:655  추천:0  작성자: 강려
1 내용과 표현
#리좀 (Rhizome)전통적 사유와 글쓰기에는 하나의 중심이나 주체가 자신의 관념들을 표현한다. 이런 사유와 글쓰기의 스타일은 판명한 질서와 방향을 생산하기 때문에 壽木(수목)적인 것이다. 대조적으로, 리좀학은 임의적이고 탈중심화되며 증식하는 접속들을 만들어낸다. 리좀적 방법은 근거와 결론, 원인과 결과, 주체와 표현 사이의 구별이나 위계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즉 어떤 지점도 뭔가 다른 것을 위한 시작 내지는 접속점을 구성할 수 있다. 이항 대립과 같이 보이는 것은 - 리좀과 나무 사이의 구별과 같이 - 대립이 아니라 하나의 다원주의를 창조하는 방식이란 점을 강조한다.
#배치모든 삶은 접속과 상호작용 과정이다. 어떤 신체나 사물도 접속 과정의 결과인 것이다. 인간의 신체는 유전적 물질, 관념들, 행동의 힘들, 다른 신체들과 맺은 관계의 배치다. 또한 한 부족은 신체들의 배치다. 들뢰즈 와 가타리는 통일체들이 접속들에 선재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기체나 기계장치 보다는기계적’ 배치에 대해 언급한다. 배치를 전체적으로 지배하는 궁극성[합목적성]이나 목적 또는 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어떠한 배치의 법도 접속자들로부터 창조된다.(정치적 국가는 사회질서나 개인의 정체성을 창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국가가 신체들의 배치를 통해 산출된 효과다. 또한 인간 신체들의 발생적 생산을 지배하는, 인간에 대한 진화론적 관념이나 목표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일련의 배치들, 즉 발생적·사회적·역사적 배치들의 효과다.)
#여성-되기 … ‘동물-되기’, ‘강도 높게-되기’, ‘지각 불가능하게-되기’와 결부된 말이다. 서양 사유의 문제는 존재에서 출발하는 데 있다. 서양의 사유는 존재가 먼저 있어서 생성 혹은 운동을 겪는 것으로 보고, 더욱이 인간을 정초자(定礎者)로 특권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때 정초자는 변화와 생성의 세계를 바라보는 안정적인 인식자 혹은 주체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모든 생명은 생성면이라는 것, 그리고 고정된 존재들-인간과 같은-의 지각작용은 생성의 효과라는 점을 강조한다. 실재적으로 생명을 사유하고 조우하기 위해서 우리는 더 이상 생명을 고정된 부동의 항들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는 사유함 자체가 이동적이어야 하고, 사유함 그 자체를 주체인 인간의 고정된 정초들로부터 해방시켜야 함을 의미한다. 인간 이외의 것이 된다는 것은 여성-되기나 동물-되기를 요한다. 그리고 만일 지각작용이 세계를 고정되고 연장된 대상의 측면에서 보는 경향이 있다면, 우리는 또한 지각 불가능하게 되거나 강도 높게 될 (더 이상 세계 내에 고정되고 정박되지 않으며 생명의 강도에로 열릴) 필요가 있다.
욕망과 욕망하는 기계 생명을 말 그대로 하나의 기계로 보는 관념은 우리가 어떤 생산된 질서, 의도, 전체, 목적을 상상하기 전에 기능과 접속에서 출발하도록 해준다. 그러므로 욕망하는 기계는 접속들이 계열화된 결과이다. 예컨대 가슴과 접속한 입, 양란과 접속한 말벌, 한 떼의 새들을 지각하는 눈, 장난감 기차와 접속한 아이의 신체 등이 그러하다. 이런 방식으로 욕망을 사유하면 근본적인 결여로서의 욕망을 극복하게 된다. 욕망은 상실이나 분리가 아니라 접속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결여하거나 욕구해서가 아니라, 삶이 투쟁과 자기-강화의 과정이기 때문에 욕망하는 것이다. 욕망은 증대하는 연장, 접속, 창조이다. 욕망은 닫힌 유기체나 자아에서 기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욕망이 유기체와 자아를 생산하는 생산적인 생명의 과정이기 때문에 ‘기계적’이다.
카프카의 작품 속에 어떻게 들어갈 것인가? 그것은 리좀이고, 굴이다. 어느 쪽으로 해서든 사람들은 굴에 들어가겠지만, 어떤 쪽도 다른 쪽보다 특별히 낫지 않으며, 어떤 입구도 아무런 특권을 가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이 들어간 곳과 접속되는 다른 어떤 지점을 찾고자 할 뿐이고, 두 지점이 만나기 위해서는 어떤 통로와 교차점을 지나야 하는지, 리좀의 지도는 대체 어떻게 그려지는지, 그 지도는 다른 지점으로 들어갈 경우 직접적으로 어떻게 수정될 것인지를 찾고자 할 뿐이다. 복스의 입구의 원칙은 적들의 침입이나 ‘기표(Signifiant)’를 막는 것이고, 사실은 실험적으로만 제시될 뿐인 작품에 대해 해석하려는 시도를 봉쇄하는 것이다.
성』의 여관 홀에 있는 소박한 입구를 선택해 본다. 여기에서 K는 턱이 가슴에 파묻힐 정도로 고개를 숙인 수위의 초상화 발견한다. 초상화든 사진이든 낙심하여 수그린 고개라는 이 두가지 요소는 작품에 따라 독자성의 정도는 다르지만 카프카의 작품에서 항상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가 선택한 입구가 사람들이 예상하는 것처럼, 곧 마주치게 될 다른 것과 접속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가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두 가지 형식이 접속됨으로써 구성되는 것이다. ‘숙인 고개’라는 내용의 형식과 ‘사진-초상화’라는 표현의 형식이 그것인데, 이 양자는 『성』의 시작 부분에서 결합되고 있다.


우리는 해석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양자이 결합이 기능적인 블록화, 실험적 욕망의 중립화를 작동시킨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손댈 수 없고 입맞출수 없으며 액자화되어 있는 금지된 사진은 자기 자신의 눈으로만 즐길 수 있을 뿐이다. 지붕이나 천장에 의해 구부러진 욕망, 복종적인 욕망이 자기 자신의 복종만을 즐길 수 있을 뿐인 것처럼 말이다.

반면, 쳐든 고개, 지붕이나 천장을 뚫고 올라가는 고개가 숙인 고개에 대응하는 듯이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카프카의 경우 소리가 꺼어드는 것이 고개를 세우거나 쳐드는 운동과 빈번히 접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숙인 고개 / 초상화- 사진
= 고정된, 복종적인 혹은 복종하는 욕망, 중립화된 욕망, 접속이 최소화된 욕망,
어린 시절의 추억, 영토성 내지 재영토화
쳐든 고개 / 음악적- 소리
= 치켜든 욕망, 혹은 슬며시 빠져 나가 새로운 접속으로 열리는 욕망, 유아기의
블록, 혹은 동물적 블록, 탈영토화
그러나 이것으로는 아직 충분치 않다. 카프카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것은 유기화된 음악, 음악적 형식이 아니다. 카프카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붕괴와 관련된 강렬하고 순수한 음향적 질료로서, 탈영토화된 음악적 소리고, 의미화·구성·노래·발화를 비켜 가는 비명 소리며, 여전히 지나치게 기표적인 연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단절된 그런 소리다. 소리에는 오직 강렬도만이 중요한데, 그것은 대개 단조롭지만 언제나 비의미적이다.
우리는 해석코자 하지 않으며, 이것이 의미하는 건 저것이라는 식으로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더구나 우리는 형식적 대립이나 전적인 기표들로 이루어진 어떤 구조를 찾고자 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믿는 것은 오직 카프카의 정치학일 뿐이다. 우리가 믿는 것은 오직 카프카의 어떤 기계 혹은 기계들일 뿐이다. 그것은 구조도 아니고 환상도 아니다. 카프카의 기계는 다양한 정도로 형식화된 내용과 표현으로 구성되고, 그런만큼 그 형식화된 것에서 빠져 나와 모든 상태를 통과하며 그 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비형식화된 질료에 의해 구성된다. 기계 안에 들어가고 거기서 나가는것, 기계 안에 있는 것, 기계를 따라 가는 것, 기계에 접근하는 것, 기계의 일부가 되는 것, 이 모든 것이 어떠한 해석으로부터도 독적인 욕망의 상태들이다. 문제는 전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 출구 또는 입구를, 혹은 측면이나복도 쪽문등을 찾는 것이다.
2. 너무 거대한 오이디푸스-이중의 초과: 사회적 삼각형들, #동물-되기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초상화, 사진의 표현양식이다. ‘고개 숙인 아버지’는 자신이 아버지이고, 아들로 하여금 죄인이 되게 하고, 끊임없이 심판한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아버지 탓으로 돌리는 그 편지는 때늦은 것이다. 그가 결혼을 할 수 없고, 글을 쓰고, 황량하고 강렬한 세계에 매료된 것은 긍정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파생된 반발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편지에는 옆으로 빗나가는 어떤 미끄러짐이 있다. 카프카는 고전적 #오이디푸스 로부터 결백한 아버지의 가설, 아버지와 아들에 공통된 ‘고뇌’라는 가설에서 움직이는 도착적인 오이디푸스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과도한 사진은 세계에 대한 지리적, 역사적, 정치적 지도 위에 투사되어, 그것으로 광대한 지역을 뒤덮게 된다. 곧 우주의 오이디푸스화. 아버지의 사진을 세계 지도위에 투사함으로써 그 사진에 포함된 막다른 골목을 벗어났다고, 출구를 고안했다고, 막다른 골목을 모든 지하의 굴들 및 그 굴들의 모든 출구를 접속시켰다. 문제는 어떻게 그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거기서 아버지가 찾지 못했던 길을 찾아 낼 것인가다. 아버지와 아들에 공통된 무죄 .
,공통된 고뇌의 가설이야말로 최악의 것이다. 아버지는 출구가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자기 자신이 지배적 질서에 복종하고 있다는 이유로 아들에게 복종을 강요한다. 복종적일 뿐 아니라 자신의 복종을 소통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오이디푸스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확대와 확장, 과장, 도착적 내지 편집증적 사용은 이미 복종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고개를 드는 것이다. 이것은 막다른 골목을 통과하고 그 봉쇄를 넘어서는 것, 세상 속으로 오이디푸스를 탈영토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위해 아버지에 대한 카프카의 반항은 비극이 아니라 희극이다.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는 오이디푸스를 웃음거리로 만들기 위해 그것을 과장하여 확장한 것이다. 본질적인 것은 외부와 내부를 넘어선 분자적인 동요와 춤, 어이없이 확장된 오이디푸스의 마스크를 쓰게 될 바깥과의 모든 극한적 한계에 있다. 한편으로는 가족 삼각형 뒤에서 좀 더 능동적인 다른 무수한 삼각형들을 발견할 수 있다. 가족 삼각형의 항들은 전체를 탈가족화시키기에 충분한 다른 상들로 대체되어 있다.
형태와 인물을 바꾸어 법적. 경제적. 관료적, 혹은 정치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또는 카프카의 아버지 뒤에서 윤곽을 드러내는 독일인-체코인-유대인의 지정학적 삼각형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여기에서 아버지의 무죄에 대한 가설, 아버지의 고뇌에 대한 가설은 나쁜 비난일 술 있는 것이다. 체코 농촌의 유대인이라는 기원을 배신함으로써 다만 고개를 숙이게 할 뿐이고, 자신의 것이 아닌 권력에 복종하도록 할 뿐이며,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을 뿐인 아버지라는 점에서. 가족 삼각형은 다른 본성을 갖는 리비도의 투여를 위한 안내자일 뿐, 판사와 관리,관료 등은 아버지의 대체물이 아니다.

아버지야말로 스스로 복종하며 아들에게 복종을 권유하는 모든 세력들의 응집체인것이다. 카프카 안에서 고통스러워 하거나 즐거워하는 것은 이미 미국적인 기술 지배적 기계고, 러시아적인 관료제적 기계, 혹은 파시즘적인 기계다. 이 세력들을 위해서 가족 삼각형은 와해되어 버림에 따라 다른 삼각형들은 흐릿하고 모호한 끊임없이 변환되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 뒤에는 도시의 독일인들 집단에 들어가기 위해 체코의 농촌이라는 환경을 떠났던 유대인들의 모든 모호함이 있다.
오이디푸스의 희극적인 확대는 그 삼각형들로부터 벗어나는 출구, 탈주선의 가능성이 동시에 나타난다. ‘악마적 세력들’의 비인간성에 대해 동물-되기의 하위-인간성이 응수한다. 고개를 숙이고 관료나 감시인, 판사나 피고로 남기보다는 차라리 곤충이 되고 개가되고 원숭이가 되는 것. 이 탈주선은 동물-되기와 관련된 것으로서 동물은 아버지의 대체물과는 아무 관련이 없으며 원형과도 관련이 없다.
동물-되기는 최소한 원칙적으로 절대적 탈영토화로서, 카프카가 애써 만들어 놓은 황량한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동물되기는 운동을 만드는 것이고, 모든 긍정성 속에서 탈주선을 그리는 것이며, 문턱을 넘는 것이고, 그 자체를 위해서만 타당한 강렬도의 연속체에 이르는 것이며, 순수한 강렬도의 세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여기서 내용이 모든 형식에서 해방되고 표현이 자신을 형식화하는 기표들로부터 자유로운 강렬도의 지대와 상응한다. 그레고어는 곤충은 되지만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가 찾을 수 없었던 출구를 찾아내기 위한 것이고, 지배인. 상업. 관료들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고, 어떤 소리도 내지 않는 그런 영역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오이디푸스의 희극적인 전개 내지 확대의 두 가지 결과는 하나는 가족 삼각형 밑에서, 혹은 그것 안에서 튀어나온 다른 삼각형들의 대립 추론적 발견이고, 다른 하나는 동물-되기의 탈주선의 더욱 강화된 궤적이다.

<변신>에서 관료적 삼각형이 점진적으로 구성된다. 위협하고 강요하는 지배인,

© miteneva, 출처 Unsplash
제복을 입고 스스로 복종하는, 여전히 외부의 권력을 증언하는 아버지, 가족을 대신해서 세 사람의 하숙인 관료들의 침입이 있다. 그레고어의 동물-되기는 관료적 및 상업적 삼각형과 관련하여 탈주선을 그린다. 오이디푸스의 과장되고 도착적인 이용은 모든 종류의 폐쇄를 퇴치하기에는 충분치 못하고, 동물적인 선과 같은 다른 삼각형들을 덮치는 가족 삼각형이 재구성되는 것을 퇴치하기에는 충분치 못하다. 이런 의미에서 <변신>은 재오이디푸스화의 표본적인 이야기다. 동물-되기 안에서 진행되는 그레고어의 탈영토화 과정은 어떤 시기에 차단된다. 그레고어는 모피 입은 부인의 초상화에 달라 붙고, 누이는 초상화에 대해 질투하면서 그레고어를 미워하게 되고, 그를 비난하게 된다. 거기에서 동물-되기를 통한 그레고어의 탈영토화는 좌초된다. 그는 아버지가 던진 사돠에 의해 재오이디푸스화 되고, 등에 박힌 사과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다. 가족의 탈영토화는 더 나아갈 곳을 잃어버린다. 아버지는 세 사람의 하숙인 관료를 쫓아내고, 오이디푸스적 삼각형의 가족주의적 원칙으로 되돌아가며, 가족은 그 자체로 평온하게 다시 폐쇄된다

3 #소수적인문학 이란 무엇인가?
소수적인 문학은 어떠한 문학 형태가 아니며 문학의 종적 분류이거나 속성의 탐구가 아니다. 생성으로 파악되는 문학의 양상이다. 들뢰즈는 언어는 그 자체가 이질적인 변수들의 집합이므로 자신 속에 내재적인 언어를 가지지 않는 언어는 없다고 본다. 한 사회의 다수 언어 속에서 소수언어들이 들어있다고 할 때, 문제는 소수언어들이 특이한 방언이나 은어로 재영토화 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 언어를 탈영토화 하는 것이다. 다수 언어를 정복하여 미지의 소수언어를 묘사하는 것, 연속적인 변이의 상태에 놓는 것이다.
#다수언어 #소수언어
다수는 언어를 평가하는 언어를 동질화시키고 통일시키는 것은 다수언어다. 이것은 동질적이고 중심화 되어 있고 표준화된 언어인데, 권력의 언어, 지배적인 다수어가 된다. 예컨대 문법성이라는 권력을 휘두르는 언어는 다수언어다. 그러나 방언과 피지배 언어가 소수언어라고 단정지울 수 없다. 흑인영어와 같은 방언은 표준영어와 동일한 문법성을 추구하며, 아프리카어는 영어에 대항하여 투쟁하면서 동질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수언어는 지역적인 소수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범주로 정의한다하면 소수를 특정한 영역, 특정한 대상으로서 정의하는 방식이고, 그것을 운동으로서 정의한다고 하는 것은 특정한 질로서, 힘으로서 정의하는 방식인데, 두 가지를 구분해야한다,
#탈영토화
가족, 민족, 국가는 장소에 기반한다. 가족은 집, 민족, 국가는 영토로 연결되어 있다. 존재의 장소부착적인 삶으로부터의 일탈, 어떤 고정된 것으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는 움직임을 말한다.
탈영토적인 경향이 합스부르크 제국의 위기 시에 나타나게 되는데 그 몇 가지 경향들을 보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뉴튼적인 물리학의 탈영토화를 표현하고, 오스트리아의 12음계주의자들은 고전적인 것으로부터 탈영토화 움직임이고, 들뢰즈의『시네마』에서 분석하고 있는 표현주의 영화는 이미지의 탈영토화를 가져왔다고 본다.
카프카의 소수문학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해체와 몰락기에 나타난 소리, 이미지, 과학이 전반적 탈영토화 운동의 일부로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들뢰즈의 생각이다. 탈영토화 과정에서 핵심적으로 고찰되어야 할 문제로 들뢰즈는 언어문제라 본다.
#소수적문학
소수 언어는 다수 언어를 소수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소수 언어는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수 언어와 공존하며, 다수 언어를 소수적으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소수 언어이다. 따라서 다수 언어를 소수적으로 만드는 작가를 들뢰즈는 위대한 소수 작가라고 부른다.

소수 작가들은 그들 자신의 언어에서 이방인들이다”. 독일어로 글을 쓴 체코인인 카프카와 프랑스어로 글을 쓴 아일랜드인인 베케트는 자신들의 표현 수단인 다수 언어에 대한 소수적 사용을 창출한다. 그들은 언어를 달아나게 하고, 끊임없이 불균형의 상태로 두며, 용어들이 갈라지고 변하게 하며, 쉬지 않는 진동을 따른다. 언어를 소수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모국어로 작품을 쓰는 작가도 마찬가지다. 프루스트는 “훌륭한 책들은 일종의 이방어로 씌어져있다”고 말했다. 소수 작가는 자신의 언어 안에서 미리 존재하지 않는 이방어를 새겨내며, 언어 자체를 비명지르고, 더듬고, 버벅거리고, 웅얼거리게 만든다. 파르네와의 대담에서 들뢰즈는 그것을 문체라고 부르면서, 개별적인 말에서 더듬는 것은 쉽지만, 언어 그 자체를 더듬는 것은 어렵다고 말한다.

소수 언어와 소수 작가가 굳이 소수 민족의 언어와 작가일 당위성이 없는 것처럼, 소수 문학이 소수 민족의 언어로 씌어진 문학이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들뢰즈는 소수 문학을 본격적으로 다룰 때, 카프카의 소수 민족적 위치를 충분히 살린다.
이를 통해 소수 문학의 특징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든다.
첫째, 소수 문학에서 언어는 탈영토화 계수가 높다. 카프카가 사용하는 체코 독일어는 탈영토화된 언어로서 익숙지 않은 소수적인 사용에 적합하다.
둘째, 소수 문학은 모든 것이 정치적이며 개인적인 관심사도 정치적이다. 다수 문학은 (부르주아 문학에서 보듯) 개인적인 관심사의 나열만이 있으며, 사회 환경은 단지 배경의 역할만 한다. 그리고 가족이나 결혼과 같은 개인적인 관심사는 오이디푸스라는 가족 삼각형 속에 가둬진다. 소수 문학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조차 기타 상업적, 경제적, 관료적, 사법적 삼각형과 연결되면서 개인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만든다.
셋째, 소수 문학은 모든 것이 집합적 가치를 지닌다. 소수 문학에는 재능 있는 작가가 많지 않기 때문에 대가들이 포진한 다수 문학에서처럼 개별화된 발화행위가 강하지 않다. 그러나 소수 문학이 집합적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문학이 집단적 발화행위의 배치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혁명적 역할을 떠맡고 있다. 회의주의에도 불구하고 적극적 연대를 생산하고, 취약한 공동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런 상황이 다른 잠재적 공동체를 표현케 하며, 다른 의식과 감수성의 수단을 벼리게 한다.
카프카는 처음에 발화행위의 주체와 발화의 주체를 구분하는 전통적인 구분에 따

작가와 주인공을, 화자와 인물을 구분한다. 그러나 곧 그는 서술자 원칙을 포기한다. 생쥐 요제페네는 개인적으로 노래부르기를 포기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민중이라는 주인공”의 집합적 언표행위 안에 자리잡는다. 개별적인 동물에서 집합적 다양체로 넘어가는 것이다. <어느 개의 연구>에서 개라는 종의 집합적 언표행위의 배치를 향해 나아간다. 주체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만이 존재한다. K는 화자나 인물을 가리킬 뿐 아니라 기계 같은 배치, 보다 집합적으로 변한 행위자를 가리킨다. 문학은 이러한 배치를 표현한다. 이 배치는 외부로 주어진 조건이 아닌, 도래할 혁명적 힘들로 존재하는 한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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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기계
이처럼 언어의 탈영토화, 개인과 정치의 즉각적 연결, 발화행위의 집합적 배치를 소수 문학의 세 가지 특징으로 꼽으면서, 들뢰즈는 소수 문학을 “특정한 문학이 아니라, 이른바 위대한 문학의 안에서 모든 문학을 위한 혁명적 조건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오직 다수적인 언어 자체의 소수적인 이용을 내부에 수립해야 한다. 소수 문학은 모든 문학의 가능성이 된다.
들뢰즈는 배치와 관련하여 내용형식을 기계적인 배치(machinic assemblage)로, 표현형식을 발화행위의 집단적 배치로 다시 쓴다. 배치를 가장 쉽게 이해하는 방법은 ‘-와’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발화가 집단적임은 배치의 개념에서 더욱 분명해지는데, 들뢰즈는 “최소한의 실재적인 단위는 단어도, 관념도, 개념도, 기표도 아닌 배치이다. 발화를 만드는 것은 항상 배치이다. 발화는 발화 주체로서 주체에 관련되지 않는 것처럼, 발화행위 주체로서의 주체를 원인으로 삼지 않는다.
발화는 우리의 안과 밖에서 사람들, 다양체들, 영토들, 생성들, 감응들, 사건들과 함께 놀게 하는 언제나 집단적인 배치의 산물이다”(Dialogues 51)라고 말한다. 문학이 소수 문학이 되는 것, 그것은 모든 존재 동사를 와- 와- 와-의 배치로 바꾸는 것이다. 더 이상 접속사가 존재동사의 주위를 맴돌지 않고 더 멀리까지 나아가서 존재를 침식하고 동요하게 만든다.
AND . . AND . . AND . . 문학을 연속적인 변이 속에 두는 것, 재영토화하지 않고 탈주시킴으로써 절대적 탈영토화하에 이르는 것이 문학의 소수적 사용이다.
들뢰즈는 카프카가 절대적 탈영토화에 이르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체코 독일어가 어느 정도 탈영토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더 강렬한 정도로, 그러나 새로운 절제, 새롭고 예측치 못한 변경, 가차 없는 교정, 머리를 바로 드는 방향으로 더 멀리 가지고 간다. 정신분열적 예의바름, 물에 취한 방향으로. 그는 독일어가 탈주하게 한다. 그는 금욕하고, 체코 독일어를 찢어 숨기고자 했던 미발달의 자질들을 끄집어내고, 체코 독일어가 엄청나게 절제되고 엄격한 울음을 울게 한다. 그는 그것을 짖는 개에게서, 기침하는 원숭이에게서, 부산떠는 벌레에게서 끌어낸다. 그는 이 말라버린 독일어의 엄격한 통사법을 포용할 수 있게 통사법을 울음으로 변모시킨다. 그는 그것을 더 이상 문화나 신화에 의해 보존될 수 없도록 탈영토화를 향해 밀고 나가서, 그것이 느리고, 끈끈하고 응고되어도 절대적 탈영토화에 이른다. 언어를 천천히점진적으로 사막에 데려간다. 통사법을 울기 위해서 사용하고, 통사법을 울음에 맡긴다.’
프라하의 유대 독일어가 갖는 특징
프라하의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독일어는 외국어이기에 습득하기 힘들다. 그래서 표현되는 어구들은 문장을 구성한다기보다 어휘들로 분절되어 있다. 들뢰즈는 이를 간결성이라 하는데, 긴 문장을 쓸 수 없기 때문에 의사소통을 위해서 꼭 필요한 기능만을 독일어에서 축출해서 쓰게 된다. 이런 간결성이 유대계 독일어의, 프라하 독일어의 특징으로 본다. 두번째로 표현성, 이것은, 일종의 외마디 비명과 같은 것이다. 서술적으로 뭔가를 전개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 감성적으로 다가가서 듣는 이에게 충격을 가해서 이해하게 만드는 식이다. 음악에서 샤우팅과 같은 것이다.

외침과 같은 방식으로 프라하 독일어가 존재했는데, 상승하는 부르주아들은 만족할 없었다. 그들은 문화적 인텔리로 행세하기 위해 유대의 전통문화와 독일어를 결합시켜, 프라하 독일어를 고급언어로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상징적 표현이나 은유적 표현을 마치 히브리어와 같은 비의적인, 숨어있는 말들이, 뜻이 전파되게 하는 표현들을 통해 독일어를 발전시키려는 경향이 있었다.
카프카의 #언어전략 (카프카의 언어적 특징-체코어, 독일어, 이디시어, 히브리어)

유태인이면서 체코인인 그의 문학적 언어는 독일어다. 카프카의 언어 전략은 독일어를 선택하되, 현행의 유대 독일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유대 독일어를 발전시킨 고급화된 언어를 거부한다. 카프카는 모든 지시는 물론 모든 은유, 상징주의, 의미화를 필사적으로 제거한다. 변신이란 은유와 반대되는 것이다. 거기엔 본래적 의미도 형상적 의미도 없으며, 단어들 상태들의 분포가 있을 뿐이다. 사물들이 탈주선에 의해 탈영토화 된 강렬도만 있을 뿐이다. 이 동물-되기는 동물 행동과 사람행동의 유사성에 관한 것이 아니며, 거기에는 동물도 사람도 없다. 왜냐면 흐름의 통접속에서 역전 가능한 강렬도의 연속체 속에서 각자가 다른 탈영토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반대로 차이의 최대값을 강렬도의 차이로 포착하는 되기(생성)에 관한 것이다.

(인간-되기를 하는) 동물은 사람‘처럼’ 말하는 게 아니라 의미를 결한 채 어조로 언어를 추출해 낼 뿐이다. 언어의 비의미적이고 강렬도적인 사용이 그것이다.
<변신>에서 언표주체도 사람으로 남아있긴 하지만발화자인 벌레는 더 이상 언표행위의 주체가 아니다. 필연적으로 집합적 배치 안에서 상호적인 되기를 형성하는 상태들의 회로가 있을 뿐이다. 이런 소수적인 문학의 언어는 특히 이러한 텐서,
강세도(접속사, 감탄사, 부사: 고통을 포함하는 용어)를 발전시킨다. 유대 독일어의 빈약성이 새로운 간결성, 새로운 표현성, 유연성, 강렬성을 위해서 창조적인 용법을 취하고 있다. 언어는 이제 표상적인 것을 그치고 극한 내지 극단을 향해 나아간다.
카프카의 말을 들뢰즈가 해석한 문장, ‘어떻게 자신의 언어로 소수적 문학을 이룰 것이며 언어활동을 천착해서 간결한 혁명적 선을 따라 나아가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자신의 언어 안에서’ 라고 했다.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 안에서 유목민이 되고, 이민자가 되고, 집시가 될 것인가. 이것이 카프카의 소수문학을 위한 언어전 들뢰즈의 책읽는 두가지 방법- 전략이다.
1. 책을 마치 안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상자로 간주하는 태도이다. 그런 독자는 거기에서 기호내용을 뒤져 찾는다. 더 심한 독자는 거기에서 기호표현을 뒤져 찾는다. 그래서 거기에 주석을 달고, 해석을 가하고, 설명을 붙여 책에 대한 책을 쓴다.
2. 책을 무의미의 작은 기계(machine a signifiante)로 간주하는 독서이다. “그 기계가 작동하는가?” 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당신 위해 작동하는가이다. 만약 작동하지 않는다면, 만약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다른 책을 집어 드는 것이다. 후자는 전자와 대립된다. 왜나면 강밀한 독서방법인 두 번째 방법은 책을 바깥-표면-과 연결시켜주는 독서방법이디 때문이다. 설명할 아무것도, 이해할 아무것도, 해석할 아무것도 없다. 중요한 것은 비인간으로의 변신, 범우주적 동물 변신이다. 들뢰즈는 우리에게 짐승되기를 권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적인 껍질을 벗고, 육체의 강밀한 영역을 통과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에게 속한 영역을 회복하는 것이다.
4 . 표현의 구성요소
카프카에게 문학이란 리좀이고 굴이며, 그것은 # 탈주선 이다. 이것은 모든 종류의 도피처와 무관하다. 삶과 글쓰기를 대립시키며 그가 삶 앞에서의 결여, 허약함, 무능력으로 인해 문학으로 도피했다고 하는 것은 어이없는 평가이다. 그는 문학을 창조적 탈주선으로 모든 정치, 경제, 관료제 및 사법 장치와 연결하며 그 모든 것을 흡혈귀처럼 빨아들여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하지만 가까운 미래에 닥쳐올 그런 소리- 파시즘과 스탈린주의, 아메리카주의 등, 문을 두드리는 악마적 세력들의 소리-를 울리게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카프카는 정치적인 작가고, 다가올 세계의 예언자였다. 그는 두 개의 극을 가지고 그것을 전적으로 새로운 배치 안에서 결합시켰다. 하나는 거대한 미래의 관료적인 흐름으로 이제 막 형성되고 있는 현실적인 배치와 잇닿아 있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가장 현재적인 방식으로 탈주하는 유목민의 흐름으로 사회주의, 아나키즘, 사회 운동과 잇닿아 있는 것이었다. 카프카에게 글쓰기란 문학이 아니라 언표행위였다. 욕망과 함께 하는, 법과 국가, 체제를 넘어서는 언표행위다. 언표행위는 언제나 그 자체가 역사적이고 정치적이며 사회적이다. 다른 모든 심급을 문제삼는 미시정치학이요, 욕망의 정치학이다.
카프카의 문학에서 내용의 형식과 표현의 형식 간에 어떤 구조적 상응성을 발견할 수 없으며 자신의 형식을 해체하여 순수한 내용을 해방시켜 동일하게 강렬한 질료 안에서 표현과 조우할 수 있는 하는 ‘표현기계’를 발견 할 수 있다. 이 세 요소는 1)편지와 악마적 계약, 2)단편 소설과 동물되기,

3)장편소설과 기계적 배치이다.
첫째, 편지들
카프카의 편지들은 그의 문학적 기계의 필수적인 톱니바퀴이자 동력 장치의 일부이다. 이 기계는 부부간의 근접성 계약을 악마적인 원거리 계약을 대체하는 것이다. 편지는 그에게 피를 주고 피는 그에게 창조적인 힘을 준다. 그의 모든 편지의 지평에는 언제나 여성이 있지만 그가 찾는 것은 여성적인 어떤 영감도 아니고 모성적인 보호도 아닌 글을 쓰기 위한 물리적인 힘이다. 그는 펠리체에게 편지의 저주를 이야기하며 그것은 ‘자기에게 키스를 허용한 사람의 피를 어느 새 빨아 버리는 유령과 필연적으로 관련’되어 있으며 영혼의 어긋남을 말한다.

편지는 언표행위의 주체(글을 쓰는 주체)와 언표 주체(내용의 주체)의 이중성을 보존하고 있다.(가령 내가 “그는 언제나처럼 당신을 꿈꾸고 있다오”라고 썼다면, 여기서 편지를 TM고 있는 ‘나’는 언표행위의 주체고, 편지에서 언급되는 ‘그’는 언표주체다) 연인과의 편지에 있어서 언급되는 죄의식과 허약함은 언표 주체로서 카프카의 외견상 운동일 뿐이다.
반대로 언표행위의 주체로서 편지와 편지의 내용은 다른 문제를 드러낸다. 그것은 죄의식이 아니라 함정이고, 리좀 안에서 막다른 골목이며, 모든 출구를 봉쇄당하는 것이고, 모든 곳이 막힌 굴이다. 악마 자신이 함정에 빠진다. 근접성을 몰아내기 위해 카프카는 공간적인 거리를, 연인으로부터 먼 거리를 확보하고자 하며, 그는 자신이 수인(囚人)-자기신체의 수인, 자기 방에 갇힌 수인, 자기 가족의 수인, 자기 작품의 수인-이며, 연인을 보거나 만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증식시켰다. 편지는 카프카의 필수 불가결한 부품이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충분히 글을 쓰게 만드는 긍정적 선동자였지만, 이제 카프카는 글을 쓰고 싶다는 소망이 자신에게 없으며, 자신의 사지는 거의 막혀 버린 함정에 빠져 절단나 있음을 스스로 발견한다.
둘째, 단편 소설
카프카의 단편소설은 본질적으로 동물적이다. 편지가 모든 기계를 가동시키는 발동기라고 한다면, 단편소설은 편지와 다른 무엇을 쓰는 것으로 창작, 작품으로서 출구며, 탈주선이다. 단편소설의 본질적 대상인 ‘동물-되기’는 인간이 자신을 바뀌거나 여행하면서 수행하는 상대적 탈영토화 대립되는 인간의 절대적 탈영토화를 구성한다. 이것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 않으며 하는 여행이고 오직 강렬도 안에서만 체험되고 이해되는 그런 여행이다. (<어느 개의 연구>에서 화자는 개는 인간처럼 말하고 인간처럼 행동한다는 점에서 ‘동물의 인간-되기’지만, 동시에 그것을 통해 카프카가 동물이 되고, 그것을 읽는 우리 역시 동물이 된다는 점에서 ‘인간의 동물-되기’다.)
동물되기는 은유나 알레고리, 상징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이 어떤 결함이나 저주,죄의식의 결과는 더더욱 아니며,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파노라마’다. 그것은 인간이 출구를 찾는 한에서 인간과 동물이 접목된, 서로간에 구별되는 모든 상태들의 집합이다. 그것은 창조적 탈주선으로 그 자체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할 뿐이다.
셋째, 장편 소설
장편 소설은 기계적 배치에 상응한다. 동물-되기를 포기하고 복잡한 배치로 나아간다. 그는 장편 소설을 통해 관료적, 경찰적, 법적, 경제적, 혹은 정치적 ‘에로스’의 폭력성을 풍부하고 신랄하게 포착한다. 카프카의 장편소설은 끝날 수 없으며 완결되지 않은 단편소설이며 이 둘 사이에는 절단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편소설이 어떻게 장편소설의 단초가 되는가. 동물-되기를 다루는 텍스트는 그것이 동물을 넘어서 장편소설적인 배아를 이루는 기계적 지표들을 충분히 포함하고 있을 경우, 기계적 지표들이 그 자체로 일관된 진정한 배치를 구성하는 경우, 명시적인 기계를 포함하는 텍스의 경우에도, 그것이 구체적인 사회적-정치적 배치 같은 것으로 뻗어나가는 한에서만 장편소설로 발전된다.
세가지 표현의 구성요소들 간에는 항상 소통이 존재한다. 소통은 세가지 구성요소에 속하면서 중단되지만, 각각은 그 나름의 방식으로 하나의 구성요소에서 다른 구성요소로 넘어간다. 편지가 중단되는 것은 반송이 그것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단편소설이 중단되는 것은 장편 소설로 발전하지 못하고, 출구가 막혀있는 두 가지 방향으로 갈라지기 때문이다. 장편소설은 카프카 자신이 중단시키는데, 이는 장편 소설이 끝날 수 없으며 무한하고 무제한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유산되지만 모든 것이 소통하는 이런 운동을 그처럼 완벽한 작품으로 만든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매번 글쓰기는 하나의 문턱을 넘는다. 이 경우 우월한 문턱도, 열등한 문턱도 없다. 그것은 사람들이 거쳐 가는 그런 의미를 추구하는 것보다 더 높지도 않고 더 낮지도 않은 강렬도의 문턱이다.”
5. 내재성과 욕망
5-1. 카프카에 대한 해석 : 부정신학, 법의 초월성, 죄의식의 선험성
카프카에게 중요한 것은 법에 대한 초월적이고 불가해한 이미지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본성을 지니는 법적 기계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분해하는 것이다.
- <소송>에서는 내용도 대상도 알 수 없는 순수한 텅빈 형식으로 법을 제시. 법은 선고를 통해서만 언표될 수 있고, 선고는 처벌을 통해서만 알 수 있을 뿐 누구도 법의 내부를 알지 못함. K의 처형에 관한 마지막 장이 과연 마지막 장이었을까. 카프카가 말한 바에 따르면 소송이 최고 심급에 이르는데 결코 성공할 수 없는 것처럼 이 소설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완결될 수 없는 것처럼 보임. ‘성당에서’는 법앞에서 이야기를 해주는 사제가 법적 장치의 일부임을, 교도소의 부속 사제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변호사,공장주,화가’의 장 앞에 두어도 됨.

<소송>에서는 법의 초월성, 죄의식의 내면성, 언표행위의 주체성을 분해하고 해체함. 법이 불가해한 것은 법이 초월성 속으로 숨어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법이 어떠한 내면성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 법은 언제나 바로 옆의 사무실에 혹은 문 뒤에 무한히 존재. 법이 초월성의 요구 덕분에 언표되는 것이 아니라 언표하는 것에 내재하는 권력의 이름으로 언표가, 언표행위가 법을 만드는 것.

- <유형지에서>는 판결받은 사람의 신체에 고통을 가하면서 그에 대한 선고문을 새길 뿐 법이 무엇인지 모름.
- 카프카 작품의 표면적인 운동(분자적인 운동과 기계적 배치를 보여주기 위한 분해의 지점)을 진행시키기 위해 법과 죄의식, 내면성이 필요. 이 세가지 주제가 어디에도 없으며 전혀 기능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편지-단편소설-장편소설을 고찰. 편지에서는 죄의식이 아닌 공포, 단편소설에서는 탈주, 장편소설에서는 분해.
5-2. 카프카에 대한 해석 : 현실주의적 사회적 해석
-해석에 무한히 가깝기 때문에 지지함. 소수적인 문학의 문제에 대해, 프라하의 유대인에 대해, 아메리카에 대해, 관료제에 대해, 그리고 거대한 소송에 대한 말함.
- <아메리카>, <중국의 만리장성>, <소송>에서 주인공들은 비판보다 훨씬 더 효과 적으로 사회적 표상을 탈주케하며, 세상의 탈영토화를 작동시킴.
- 기계적 지표들, 추상적 기계들, 기계의 배치들 구분
기계적 지표들 : 기계적 배치가 전체로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그것을 통해 어떤 기계적 배치를 짐작하고 예상할 수 있게 해주는 따라서 기계적 배치의 징표적 기능을 하는 요소 (원소,부품)들을 뜻함. 예) 변신
추상적 기계들 : 아무런 지표도 없이 전적으로 조립된 채 등장하지만 제대로 기능하지 않거나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하는 기계. 일반적인 법의 형식 자체가 자기 파괴적인 구체적으로 전개될 수 없는 추상적 기계임. 예) 유형지에서의 오드라데크
기계적 배치들 : 추상적 기계는 사회적-정치적인 구체적인 배치 밖에서는 존재하지 않음. 배치는 그것이 작동시키는 기계와 표상의 분해를 통해서만 유효하며, 현재적으로 작동하는 경우에도 그것의 분해를 통해서만, 그리고 분해 안에서만 기능함. 배치는 이러한 분해로 부터 탄생. 배치는 여전히 코드화되고 영토적인 사회 비판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소설적인 가속화내에서 탈코드화와 탈영토화를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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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욕망
배치가 현실안에서 현실적으로 기능한다고 할 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며 어떠한 기능을 떠맡고 있는가?
- <소송>의 마지막장의 객관적 불확실성, ‘성당에서’가 브로트에 의해 크든 작든 잘못 배열되었다는 확실성을 고려하다면 <소송>의 진행 전체를 여러 가지 층위에서 따라가야 함. 첫인상에 따르면 <소송>의 모든 것이 잘못되어 있음.(예-엉터리 변호사, 엉터리 판사) 두 번째 인상은 법이 있다고 믿었던 곳에 실제로 있는 것은 욕망이고 오직 욕망일 뿐이라는 것. 사법은 욕망이지 법이 아니다.
- 화가 티토렐리는 사법을 눈먼 운명처럼 날개단 욕망처럼 우의적으로 그림. 불안정한 욕망. 사제 “사법은 당신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그것은 당신이 오면 붙잡고 당신이 가면 놓아 주지요”로 설명. <소송>전체를 욕망의 다의성이 주파하고 있으며, 그것이 그 작품에 에로틱한 힘을 부여하고 있음.

- 사법의 권위는 탈법 행위를 찾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탈법 행위로 인해 유혹되고 작동하는데 있다. 사법이 자신을 표상케 하지 않는다면 이는 그것이 욕망이기 때문. K는 중요한 것은 법정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복도나 무대 뒤편에서 혹은 뒷문이나 옆방에서 벌어지는 분자적인 동요라고 생각. 모든 사람이 사법에 속한다면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것의 부속물이라면 그것은 법의 초월성 때문이 아니라 욕망의 내재성 때문임.
- <소송>에서 K는 표현기계를 장악하여 직접 청원서를 작성하게 되고, 무한히 쓰게 되며 거의 끝날 수 없는 작업에 전적으로 몰두하기 위해 휴가를 신청하게 된다.
<소송>은 그자체가 끝날 수 없는 소설이라는 것은 이런 의미이고 무한한 초월성의 장이 아니라 무제한한 내재성의 장이 됨. 사법이란 욕망의 내재적인 과정일 뿐. 과정 그 자체가 인접성으로 만들어진 연속체. 화가 티토렐리가 무제한 연기라는 이름으로 분석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과정, 연속체, 내재성의 장임. K의 모든 이야기는 외관상의 무죄 방면의 공식과 절연하여 무제한한 연기로 점차 들어가게 되는 방법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사법의 기계적 배치 속으로 다시 말해 탈코드화된 법과 탈영토화된 욕망의 상호적인 내재성 속으로 들어감.
- K가 결백한가 죄를 지었는가 하는 것은 카프카의 문제가 아님. 연기가 유한하지만 무제한적이고 연속적이라고 말하고 있음. 이것은 하나의 선분에 다른 선분을 끊임없이 부가하여 기계의 분해와 함께 배치의 구성이 함께 이루어짐을 보여줌.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데리다&들뢰즈)... 박영욱.김영사.2013.’
1. 개념 VS 무개념 / 표상 VS 비표상
- 사물의 개념을 그린다면 매순간 현실에서 마주치는 진짜 사물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말 것. 표상이란 우리가 사물을 분류할 때 쓰는 머릿속의 기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표상의 체계는 믿을 만한 것이고 세계의 진정한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일까? 표상에 빠지게 될 때 가장 큰 문제점은 현실의 풍부함과 다양성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 말하자면 제각기 다른 고유한 특이성 혹은 차이들이 소멸함. 들뢰즈는 표상적 사유에 대한 반발과 그러한 사유에 의해 억압되는 차이들을 자유롭게 해방시키고자 함.

- 근대철학의 특징은 인간의 지식이 세계의 진실한 모습과 일치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세계가 인간이 가진 지식과 같은 모습이라고 가정함. 데카르트의 경우 인간의 가장 완벽한 지식 체계를 기하학이라고 봄. 기하학적인 완벽한 지식 체계가 현실의 원래 모습과 일치한다고 가정함으써 자신이 주장했던 지식 체계는 완전 무결하고 절대적인 것임을 증명하고 싶어함. 근대 사상가들은 자신들의 머릿속에 체계를 먼저 정해놓고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고자 함. 이러한 태도를 들뢰즈는 표상주의 혹은 재현주의라 부름.

- 표상주의는 현실의 모든 존재에 잠재해 있는 저마다의 독특하고 개성적인 목소리를 억압함. 들뢰즈는 표상주의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표상주의에 억압된 존재들의 다양하고 차별적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철학의 방법론을 제시하고자 함.
2. 들뢰즈가 차이에 주목한 이유
2-1. 칸트의 도식 : 어떤 것을 안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떠올리거나 그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머릿속에 그릴 수 있는 이미지를 도식이라고 말함.
2-2. 창조적 상상력을 위한 새로운 도식 : 이미지인 도식은 사고작용의 산물이 아니라 감성의 산물로 칸트는 이러한 감성의 능력을 상상력이라 부름.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감성적 도식의 능력이 대중문화에 의해 획일화되어 왜곡되고 조작되었다고 비판한데 비해 들뢰즈는 영화가 새로운 도식을 창출할 수 있다고 봄. 개념의 구속을 받지 않은 예술적 상상력과 같은 창조적인 상상력이 거꾸로 기존의 인식 활동이나 개념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도식을 만들 수 있다고 봄.
새로운 개념이 나오기 위해서는 기존의 개념이 파괴되어야 함. 기존의 개념을 파괴하고 새로움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은 개념이나 인식활동이 아니라 개념의 밑바닥에 있는 도식임. 사물에 대한 새로운 도식이 제기되면 이와 더불어 기존의 개념에
문제가 제기될 수 밖에 없고, 이것이 바로 들뢰즈가 기대하는 바였음.
2-3. 동일성의 틀을 깨고 차이 자체로 : 들뢰즈가 새로운 것에 집착에 이유는 진부함에 대한 거부감 때문. 진부함은 개념 혹은 어떤 표상과 관련되어 있다고 믿음. 현실에서 어떤 것에 대한 개념이나 표상은 곧 그에 대한 엄격한 절차와 관련이 있음. 들뢰즈가 보기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동일한 것은 없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차이 자체를 지니고 있으며 그 차이는 틀에 박힌 개념이나 표상의 틀에서 깨어날 때 뜨러남. 그때야 비로소 세상은 개념이 만들어낸 진부한, 너무나도 진부한 동일성의 틀로부터 깨어날 수 있다는 것이 들뢰즈의 생각임.
3. 존재에 대한 진부한 시각을 거둬라.
3-1. 존재 속에 감춰진 무한한 잠재성 :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은 무한한 잠재성이 있기 마련. 그러한 잠재성은 그 존재 자체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음. 모든 음에는 배음이 있음. 이를 테면 도 음은 다름 음과 어떻게 배치되느냐에 따라 다른 음이 될 수 있음. 이렇게 배치에 따라 도음이 다른 소리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도 음 자체가 하나의 단일한 소리가 아닌 무한한 소리를 지니고 있는 다양체이기 때문임. 다양체한 도 음처럼 그 자체가 무수히 많은 소리를 잠재적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함. 들뢰즈는 세상의 모든 존재를 이렇게 다른 것과 절대적으로 차이 혹은 차이 자체를 지니면서 무한한 잠재성을 가지고 있는 다양체로 봄. 관습이나 개념의 틀로부터 벗어나 존재를 있는 그대로 파악할 때 나타남.
3-2. 개념이 아닌 이념 : 개념은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분류하고 체계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으로 어떠한 개념도 그 개념이 지시하는 현실의 사물과 일치하지 않음. 칸트는 개념적인 인식이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것일 뿐 세계 자체의 모습과 같다고 생각하지 않음. 사물의 본래 모습은 물자체로 개념으로 영원히 규정할 수 없는 것이라 함. 칸트는 사물 본래의 모습을 이념으로 표현. 우리의 지각능력이나 사고 능력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음. 이념이란 실재하지 않는 주관적인 어떤 것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실재하지만 그것에 도달할 수 없는 불가능성의 표현인 것임. 들뢰즈는 잠재성과 현실성을 대비. 잠재성은 우리 귀에 들리지 않은 무수한 음을 포함한 도 음 자체로 분명히 실재함. 그렇게 때문에 잠재성은 실재적인 것임.
3-3. 지각작용은 뺄셈의 과정이다 : 베르그송은 물질이라는 개념을 무수한 이미지들의 총체라고 부름. 지각작용으로 얻어지는 표상은 사물의 무수한 이미지들 중 지각하는 사람의 관심에 들지 않는 것들을 도려냄으로써 얻어짐. 이러한 표상들은 이제 충만한 현실을 보는 필터의 작용을 하며 현실 자체를 지각하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함.
3-4. 진부한 시선에 던져진 충격 : 들뢰즈는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인간의 지각을 구속으로부터 점차 해방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함. 인간의 눈이 아닌 카메라라는 기계의 눈에 담긴 지각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표상과 관습, 진부한 도식에 의해 지배된 우리의 사고에 새로운 충격을 던져질 수 있다고 믿음.
4. 통합과 일탈이 공존하근 기계적 존재
4-1. 기계적인 것과 기계론적인 : 기계론적인 것이 미리 설계된 대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형성된 체계라면, 기계적인 것은 그러한 엄밀한 체계를 벗어남. 기계적이라는 표현은 서로 이질적인 것들이 섞여 있어 언제나 변형될 수 있는 잠정적이고 우연적인 배치의 상태와 관련. 들뢰즈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궁극적으로 기계로 간주한 이유는 어떠한 존재이든 나름대로의 체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 이 체계성은 무수히 많은 층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단일한 기계로서 정의될 수 없음.
4-2. 기계란 절단과 연결의 체계 : 들뢰즈에게 기계란 단절과 연결을 동시에 수행하는 하나의 기제를 의미. 라캉은 무의식과 의식의 어긋난 층위를 절단으로 보고 이러한 어긋남이 강박적으로 반복 행동을 하게 한다고 봄. 정신분석학에서 드러나지 않는 무의식의 욕망이 반복적인 체계를 생산하듯이, 들뢰즈에게 모든 기관이나 기계는 눈에 드러나지 않는 어떤 체계를 전제함.
4-3. 기계는 우연적인 배치물일 뿐이다 : 들뢰즈의 기계라는 개념이 무의식적 욕망, 더 정확하게는 무의식적 충동에 기대고 있긴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반복적인 체계성을 지닌다고 해서 확고부동한 체계로 이해해서는 안됨. 다양체로서의 존재는 어떤 다른 것과 관계를 맺지 않으면 체계성을 지닐 수 없음. 기계는 항상 다른 기계와 결합이 될 경우에만 기계가 됨. 기계는 통접과 동시에 이접을 전제한 것으로 한 연접적인 관계에 의해 이루어진 체계.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인간의 무의식은 의식을 통해 억압되지만 완전히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심층적인 잉여의 부분으로서 보관되어 있음. 이것은 들뢰즈의 기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됨. 통접을 통해 배제된 것들이 완전히 배제되지 않고 잉여의 부분으로 내재되어 있어 언제든 기계의 통접적인 체계를 위협함.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기계라고 한다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기계로서 통합과 일탈을 동시에 지닌 다양체. 들뢰즈는 기계론적이고 개념적인 체계를 수목적인 것이라고 부르고, 기계적이고 이념적인 체계를 리좀적인 것이라고 부름.
4-4. 수목적인 것과 리좀적인 : 수목은 수직적이며 위계적인 구조를 상징하며 통일성과 동질성을 특성으로 한 반면, 리좀은 수평적이고 탈중심적이며, 무한한 생산성과 다양성, 개방성이 특징임. 수목적인 체계를 이루는 절단의 선은 일탈을 허용하지 않는 엄격한 선인 반면, 리좀적인 체계를 이루는 절단의 선은 일탈(탈주)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잠재적이고 유연한 연접의 체계임. 분자는 물질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최소 단위, 몰은 이러한 분자들이 모여 집적되고 구조화된 것. 몰은 동질의 입자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체계적이고 질서화된 상태라면, 분자는 이러한 결합 구조에서 벗어나 있는 개별적이고 파편화된 상태. 여기서 몰은 수목적인 것으로 분자는 리좀적인 것으로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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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55 [카프카-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2022-03-20 0 655
54 들뢰즈 [Gilles Deleuze, 1925 ~ 1995] 2019-12-16 0 990
53 제14강 절대적 탈영토화로서의 철학 2019-03-17 0 1344
52 제13강 기억을 넘어선 되기들 Ⅱ 2019-03-17 0 1299
51 제12강 기억을 넘어선 되기들 I 2019-03-17 0 1162
50 제11강 동물-되기 2019-03-17 0 1137
49 제10강 ‘behaviour’의 행동학에서 배치들의 행동학으로 Ⅱ 2019-03-17 0 1162
48 제9강 ‘behaviour’의 행동학에서 배치들의 행동학으로 I 2019-03-17 0 1183
47 제8강 자기조직화와 기계적 이질생성 2019-03-17 0 1226
46 제7강 공재면, 창조적 첩화 Ⅱ 2019-03-17 0 1207
45 제6강 공재면, 창조적 첩화 I 2019-03-17 0 1108
44 제5강 복수성: 베르그송과 다윈 Ⅱ 2019-03-17 0 1205
43 제4강 복수성: 베르그송과 다윈 I 2019-03-17 0 1226
42 제3강 탈기관체와 유기체 2019-03-17 0 1294
41 제2강 복잡성과 유기체 2019-03-17 0 1226
40 제1강 들뢰즈/가타리 사유 개관 2019-03-17 0 1425
39 제12강 리좀을 구성하는 원리들 Ⅲ 2019-03-12 0 1112
38 제11강 리좀을 구성하는 원리들 Ⅱ 2019-03-12 0 1102
37 제10강 리좀을 구성하는 원리들 I 2019-03-12 0 1250
36 제9강 책의 두 가지 유형 2019-03-12 0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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