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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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에 묻힌 비밀(1) 김송죽
2011년 03월 16일 15시 11분  조회:6324  추천:17  작성자: 김송죽
                                음지에 묻힌 비밀(1)

 

권두언 


나는 몇해간 지난력사를 연구하느라 수집해둔 자료중 먼저 152개만 골라 번역했다. 그것을 체계적으로 배렬해 한데묶어놓으니 한권의 두툼한 책이 되었다. Camon프린트지 B5로는 682페지에 글자수는 88만5천여자, 첨가된 부록 2개. 내심한 독자는 마감까지 뒤지노라면 세월의 갈피에 묻히여 세인이 잘 모르는 어떤일의 실태를 료해함에 도움이 될것같아 내놓으니 일독을 바란다.  

                               쏘련의 력사사건
                               대숙청의 정치국세 

1 .끼로브사건과 숙청
2.,전면적인 대숙청시작
3. 세차례 요안의 공개심판
4. 피비린내나는 잔혹한 “대숙청”  
5. 당내인사의 대숙청 
6. 전군이 복멸된들 이렇게는 되지 않으리라
 

20세기 30년대초, 쓰딸린은 반대파를 물리친 후에 이미 제
손에 대권을 쥐였지만 주저하게 되는게 적지 않았다. 당총서기인 그는 당기구의 작용을 우선 강화해야 했다. 브라실로브가 지휘하고있는 홍군으로부터, 그리고 얄타안전기구로부터, 선전기구로부터 모든 공적을 바로 자기 쓰딸린과 련계시켜놓야했다. 하여 볼세비크당내와 쏘련국내에서는 마치 신을 믿듯이 쓰딸린을 숭배하는 열풍이 일게 된 것이다. 인민들의 심목중에 쓰딸린은 엄연한 신명(神明)으로 떠올랐다. 그러다보니 모든 공로가 쓰딸린 한사람의 것 처럼 되고말았다, 하여 그는 당과 국가의 상징으로 되었던것이다.
 

1929년 12월에 쏘련에서는 쓰딸린의 탄생 50주년을 성대히 경축 했다. 신문에는 "위대"하다느니 "천재"라느니 "도사"라느니 하면서 그를 축하하는 글이 나왔다. 본래는 부하린을 비롯한 반대파의 수령들도 청하여 그들이 스스로 자기의 잘못을 반성케 하면서 자기의 공덕을 노래 하는 대합창을 함께 부르면서 "세계인민의 위대한 수령"인 이 쓰딸린동지는 어떻게 어떻게 정확하다고 말하게 하려 했는데 그것이 그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다른 일종의 랭기가 돌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형명과 건국에 공로가 많은 원로들은 쓰딸린이 자기만을 옹호하고 숭배하게 하면서 충성하는 젊은이들을 대량으로 등용하는 술책에 불만을 품고 반발하는 그것이였다. 하여 전부터 그런 사람을 멸시해왔던 쓰딸린이 이제는 그들을 증오하기에 이른것이다. 그는 자기와 뜻이 어긋나는 그런 사람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력사무대에서 내리떨구려고 맘먹었다. 그가 내거는 리유는 간단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설계하고있는 위대한 사회주의사업을 방해하거니 와 지어는 해까지 끼친다는것이였다.
 
1934년 1월에 열린 쏘공17차대표대회에서 쓰딸린의 친밀한 전우인 끼로브는 자기의 발언에서 22차나 쓰딸린을 처올리였다. 례를들것같으면 "위대한 사회주의건설의 키잡이", "로동인민이 해방을 쟁취하는 위대한 전략가" 등등. 그는 지어 "쓰딸린동지의 총결보고중의 모든 론점과 결론은 당의 법률로 삼아 관철집행해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끼로브의 이러한 발언은 번마다 박수소리에 중단되군했다. 겉으로 보건대는 마치도 전당이 쓰딸린을 핵심으로 한 당중앙주위에 똘똘 뭉친것만같았다. 그러나쓰딸린은 기편적인 겯모양에 넘어가려하지 않았다. 
는 우렁찬 박수소리와 찬양뒤에 전에는 없었던 무시무시한 랭기 즉 자기를 맛서는 일장의 암류가 흐르고있음을 심심히 느꼈다. 그는 17차대회의 음모냄새를 맡아냈던것이다. 규정대로 하면 당총서기 즉 자기 쓰딸린이 주석대에 나서면 10분간 박수를 치고 기타의 정치국위원은 2분간치기로 돼있는건데  끼로브가 나섯을 때는 우뢰와도 같은 박수소리가 엄청나게 길어서 쓰딸린이 받은것보다 2분이나 더 초과했던것이다. 17차대회는 이같이 쓰딸린으로하여금 준엄한 정치국세에 직면했음을 깨우쳐준것이다. 

한편 그는 대응책을 찾느라 공상당중앙서기로 구성된 비밀련맹을 결성했다. 어떤 당일군들은 예측컨대 그번 대회가 금방 시작되여서 아니면 대회직전에 명망이 높아 쓰딸린과 어깨를 겨루는 끼로브가 쓰딸린을 내리떨굴 일을 상의했다는거다. 아니나다를가, 쓰딸린은 밀탐을 내놓아 그렇다는 것을 조사해낸것이다. 하길래 그를 놓고 보면 1934년은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한해였다. 몇해전에는 그들이 그의 켠에 서서 그를 도와 반대파를 물리치긴했지만도 지금와서는 그들이 도리여 그를 위협하고있는것이다. 하여 쓰딸린은 그런 사람들을 모조리 숙청하려고 맘먹게 된 것이다. 정치경험으로부터 그는 사람은 일생에 기회가 한번뿐이라는것을 깨닫고 있었다. 만약 대방을 이기지 못한다면 그는 자기가 꺾꾸러지고 말 것이라는것을  심심히 깨달은 것이다.
   

                      "끼로브사건"과 대숙청

1934년 12월 1일, 쏘련공산당(볼) 중앙정치국위원이며선 레닌그라드주위서기인 끼로브는 사업을 마지막으로  하는 날이였거니와 그가 생명을 종결짓는 날이기도했다. 따라서 이날은 또한 전국을 석권한 광열적인 진압이 서막을  여는 날이기도했다. 이날저녁에 끼로브는 레닌그라드주위기관 소재지인 스몰리니궁전에 들어가 주위제2서기의 판공실로 향했다. 그런데 그가 발길을 멈추고 문을 열었을 때 어디선가 흉탄이 날아와 그의 목을 뚫어놓았던것이다. 그는 휘청거리다 쓰러졌다. 상처에서 붉은피가 콸콸 쏟아졌다. 흉수 니꼴라예브는 내무부의 사업일군이였다. 증건이 알려주다싶이 그는 벌써 여러차나 그를 암살하려고 시도했던것이다.      
안건발생으로부터 수사전반을 걸쳐 보면 이것은 완전히 계획적인 암살이였거니와 사건을 조작한 자의 뒤에는 어떤 큰 인물이 있음이 분명했다. 모살을 쓰딸린이 획책했건 하지 않았건간에 아무튼 그는 이 사건을 빌어서 자기의 적대를 대량 소멸하는 숙청서막을 올린것이다. 

끼로브는 자기의 능력으로  영향력을 부단히 키웠는바 이미 전국에서 쓰딸린버금으로 가는 인물로 자리를 굳히였다. 그는 성망이 높았거니와 쓰딸린의 틀리는것과는 맞추지 않았다. 하기에 어떤때는 다수의 지지자를 갖기도했던것이다. 
이는 당연히 쓰딸린의 의심과 질투를 자아내게되였던것이다. 공산당내의 어떤 지도자들은 날따라 엄중해지는 개인숭배와 그에따라서 나타나는 경제건설중의 문제로 하여 불안을 느끼면서 1934년초 제17차당대회에서는 쓰딸린이 맡고있는 당총서기직책을 끼로브가 맡는것이 좋겠다고 온양하기에 이르었다. 

당내에서의 쓰딸린에 대한 불만은 그 17차당회의 련공(볼)중앙의 표결에서 반영되고있었다. 투표를 보면 쓰딸린이 중앙위원회 명단에서 마지막자리를 차지했는데 득표수가 가장낮아 결표가 270장이나됐지만 끼로브는 결표가 3장밖에안되였던것이다. 
투표는 주관하고있던 자가 쓰딸린을 반대한 대부분의 표들을 불에 태워버렸다. 그리하여 사람을 놀라게 만들 투표결과가 밖으로 새나가지 않은것이다. 몹시 놀랜 쓰딸린은 자기가 매우 불쾌한 처지에 놓여있다는것을 심심히 깨달았다. 하기에 그는 끼로브암살을 당내에서의 자기의 권위를 수립하고 독재통치를 실시하는 중요한 보취로 삼은것이다. 

그는 여론을 조작하고 손에 잡은 칼을 휘둘러 자기를 반대했다고 여겨지는 당내의 수많은 우수한 간부와 심지어는 무고한 사람까지 의심하여 련루시키고는 적으로 몰았다. 그리고는 자기의 말을 곰상히 듣는 잔인한 살인수들에게 명령하여 무자비하게 살해하고 진압하여 원한이 하늘에 사무치게 만든것이다. 
쓰딸린의 잔인 음험한 죄악이야말로 세상에 보기힘든것이였다.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쓰딸린이 그런 모살을 직접획책하고 지시했다는  근거는 똑똑하지 않은것이다 하지만 여하튼 그가 끼로브암살을 계기로 30년대 숙반운동서막을 올린것만은 사실인것이다. 

                    전면적인 대숙청을 시작 
    
심판은 이러한 "특별절차"에 따라서 진행했다. 12월 1일, 각 법워는 끼로브암살과 아무관련이 없는 반혁명죄행의 안건마저도 최고법원의 군사위원회에 넘겨 심리하게 하여 소유의 피고를 사형에 처하게했다. 
   
당시 스딸린의 친신이며 쏘련총검찰장이였던 유스끼는 검찰관들은 시름을 놓으라, 그 어ㄸ거한 고려도 갖지 말고 시름을 놓으라고 부르짖엇다. 그는 1837년 3월 어느 한차례 검찰공작회의에서 말하기를 " 당신들은 응당 쓰딸린의 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회의 일원인 당신들 자신의 생활중에는 종종 이러한 때를 당할 수 있는데 한마디로 때지난 범률은 한켠에 버려진다는걸 잊지 말아야한다는 말이다." 
그는 또 학술상에서 한가지 전제를 론증했는데 그것인즉은 "기성된 죄행에서는 피고의 공술이 가장 중요하거니와 결정적인 증거로 되는것이다. 바로 그러하기때문에 내무인민위원부는 일체수단을 다해 공술을 받아내는것이다." 라는것이였다. 
   
1937년 12월 27일, 쏘련정부에서는 끼로브를 암살한것은  "레닌그라드총부"의 공포조직 즉 다시말해서 니꼴라이예브가 있는 그 조직의 소행으로서 끼로브의 암살은 그조직에서 쓰딸린과 당의 기타 지도자들을 모해하기 위한 장기적인 계획의 일부라고 공포했다. 

두해전이였던 1935년 1월 15일, "총부"의 주요성원들을 심판했는데  끌려나온 두 사람은 자기들은 절대 그런일이 없었다고 부인했거니와 사실 증거도 없었다. 하지만 법원은 그들에게 각각 유기형 10년, 5년을 선고했던것이다. 무단적으로 3일만인 1월 18일에 쏘련공산당(볼)중앙은 전국당조직에 비밀편지를 발송했다. 각지에서는 동원하여 깊이 숨어있는 적을 파내야한다는 지시였다.

그때로부터 온 국가적으로 마구체포하는 돌풍이 일었으니 그것은 다가 이루말할수 없는 원안을 만들어 낸것이다. 숙청명단이 바로 사람을 체포하는 중요한 의거였다. 보안기구는 책임지고 "의심자"명단을  제출했는데 일정한 표준에 근거하여 그들을 분류했다. 쏘공제20차대표대회에서 공포한 자료에 의하면 그때의 그 명단에 오른 사삼대부분을 쓰딸린이 직접 보거나 아니면 그의 친밀한 동사자들인 강노위치, 몰로또브, 말렌꼬브 혹은 블라시노브가 책임지고 맡아서 보고는 생사여부를 결정지었던것이다.  

1935년부터 1936년초까지 진압과 체포를 하였는데 국내와 당내에 반항하는 현상이 크게 보이지 않았다. 진압이 일부 당원들을 불안에 빠뜨렸건만 어떠한 조직적인 반항도 발생하지 않았던것이다. 이런사정은 쓰딸린으로하여금 숙청계획을 대담하게 밀고나가게했다. 
공포적인 숙청을 심하게할수록 진압전정기관의 내무인민위원부는 하나의 중요한 정치부로 변하여갔다. 쓰딸린은 자기의 권력공구를 변화시킨것이다. 그는 계급투쟁이 매일격화되고있다면서 당내에 일보, 독일과 뜨로쯔끼파의 첩자와 음모집단이 숨어있다고했다. 그러면서 그는 또 파괴분자의 "대리인", "변절자"외에 함의가 똑똑치못한 "량면파"가 있다고했다. 
이는 대규모적인 진압과 공포가 재빨리 쏘련인민의 머리우에 떨어지고있음을 표시한것이다. 

                   세차례요안의 공개심판      

 "대숙청"이 "합법"이라는 껍질을 쓰기 위하여 1936년 8월 19일부터 24일사이 쏘련최고법원군사법정은 한차례 공개심판을 했는데 이른바 피고란것이 "뜨로쯔끼ㅡ지노위예브련합총부”의 성원인 지노위예브, 까미예브, 쓰밀로브 등 16명이였다. 심문과정에 법정은 아무런 증거도 쥐지 못했건만 이것은 바로 피고가 “교대”한것이라느니 “승인”한 것이라느니 꾸며갖고는 죄상이라 렬거하여 고발했다. 그러면서 저들이 만들어 낸 피고의 “공술”을 죄가성립되는 근거로삼은것이다.

    법정은 최후로 선포했다. 지노위예브 등은 국외로 축출한 뜨로쯔끼와 결탁하여 끼로예브를 모살한 죄명이 성립되는것만큼 16명피고를 사형에 처하며 곧 집행한다, 그러면서 재산은 전부몰수한다고 했다. 판결한지 24시간도 안되여 신문은 아래와같이 보도했다. 
 “사형은 이미 집행되였다. 이 심판은 ‘뜨로쯔끼ㅡ끼로예브공포분자의 공포중심안건으로서 피고중 저명한 인물로는 G。E 지노위예브, L。B 까미예브다. 이 심판대에 오른 모든 피고들은 다 극형을 받음으로 하여 이후 대규모의 진압을 몰아올것같다.” “련합총부”의 심판이 새로운 한 차례 체포고조를 일으켰는바 심문 중 피고의“공술”에 따라 이른바 “뜨로쯔끼 평행총부”를 뽑아냈는데 성원들의 죄명은 공포활동(그중 하나는 끼로 브암살과 관련됨), 간첩활동을 했다는것이였다. 

937년 1월 23일ㅡ30일, 쏘련최고법원군사법정은 “평행총부”숙반운동 중 제2차의 공개심판을 했다. 피고는 다가 저명한 혁명가들이였다. 이들은 지난날 볼쉐비크와 쏘베트국가의 출중한 혁명가들로서 시월혁명과 쏘련국내전쟁에 적극참가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다가 20년대중기에 확실히 뜨로쯔끼를 적극옹호했던 사람들이였다. 그래서 당에서 제명되였던 것이다. 30년대초, 그들은 실제상 뜨로쯔끼와는 관계를 끊었거니와 따라서 당적을 회복하여 각기 인민위원부 출판기구거나 아니면 기타 단위에서 책임을 지고있었는데 “뜨로쯔끼의 지시를 접수”하고 “조국을 배반하였으며 정찰과 군사파괴를 하면서 공포와 암해를 했다”는 터무니 없는 죄를 뒤집어씌워 판결했던것이다. 17명피고중 13명이 사형당했고 4명은 10년 혹은 8년감금형 판결을 받았다. 

1937년 2월말, 부하린과 리꼬브가 중앙전회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 였다. 3월초 련공(볼)에서 개최한 중앙전회에서 쓰딸린은 “당의 사업결점과 뜨로쯔끼량면파 그리고 기타량면파를 소멸하는 방법을 론함”이라는 보고를 하였는데 그는 보고에서 뜨로쯔기주의는“이미 해독자, 파괴분자, 간첩과 살인흉수, 무원칙적인 비도로 되였다. 그자들은 국제간첩기관의 임무를 맡고 활동한다.”고 했다. 2월 23일, 련공(볼)중앙은 부하린과 리꼬브의 당적을 취소하고 그를 쫓아낸다고 선포했다. 이듬해의 3월 2일ㅡ13일, 쏘련최고법원군사법정은 이른바 숙반운동중“우파 뜨로쯔끼련맹”에 대한 제3차 공개심판이라는것을 하였다. 부하린 등 21명을“해독죄”와 “조국 배반죄”를 씌워 기소하였는데 부하린과 리꼬브를 포함한 19명을 사형에 처하였던것이다. 

이를 선전물에 다음과같이 썼다“당이 전취한 사회주의승리는 인민의 적들로 하여금 미쳐날뛰게 하였다. 1937년에 자본주의국가들의 밀정에 봉사한 부하린ㅡ뜨로쯔끼적 탐정강도, 해독자, 살인자들의 폭행에 대한 새 재료들이 발각되였다. 재판의 행정은 이 인류의 쓰레기들이 레닌을 체포하려고 시도하였고 또 그와 당 쏘베트국가에 반대하는 음모를 벌써 10월혁명초기부터 시작하였다는것을 보이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제국주의적 상전들의 의지를 실행하면서 당과 쏘베트국가의 파괴, 국가의 오손, 외국무장간섭을 용이하게 하며 붉은군대 패북준비, 쏘련의 분할, 쏘련을 제국주의적식민지로 변화 하려는 것, 쏘련에 자본주의적 노예제를 회복시키려는것을 저들의 목적으로 세웠다.”그야말로 후안무치한 공공연한 날조였다.

부하린은 자기가 체포되기 며칠전에 당의 몇몇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나는 인간세상을 떠나갈 것이다, 나는 무산게급도끼에 찍혀 죽고싶지 않다, 무산계급도끼는 마땅히 무정해야한다, 그러나 순결 해야하는 것이다. 나는 만악의 기구앞에서 무능하다, 이 기구는 중세기적 방법을 쓰면서 비할수없는 강대한 힘으로 대량으로 조직적인 날조와 비방을 하고있다. 이같은 만능의 기구는 얼마든지 어떠한 중앙위원이든 당원이든 변절자, 공포분자, 해독자, 간첩으로 몰아 분신쇄골이 되게 갈아치우는 것이다. 쓰딸린이 누구를 의심하기만하면 그 기구는 얼마든지 증거를 제꺽 만들어내는것이다.”   
부하린은 자기를 심문하는 자를 위협해서 자기 처와 갖 출생한 아들을 죽이게 한 후에야 “죄”를 승인했다. 1937년 말에 이르러 반대파인원들은 모두 체포되였는데 체포될 때 무슨 관점이였던간에 불문이였던것이다. 

세차례의 공개심판은 모두가 숙반운동에서의 국내외의 여론을 막기위 해 세밀하고 열심스레 조작한 기편적인 안건들이였는바 이는 억울하게 진압당한 수없이 무고한 사람을 대표하는 극 소수의 인물에 불과한것 이다. 실제상에서 숙반운동에 의하여 꾸며진 가짜원안은 판결에 의해 공포된것보다는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자경 많고많은것이다. 숙청대상은 중앙으로부터 기층에 이르기까지 도시에서 농촌에 이르기까지 사회전역 각계층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대숙청”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 원안(冤案)을 만들어냈고 무고한 사람을 얼마나 살해하였는가는 아직까지도 확실한 구체적인 숫자가 없다. 그러나 분명하다는 것음 일장의 정치성진압으로서의 그 규모로 보아 파급면이 넓어서 그 위해성은 력사에 보기드물다는 그것이다. 이는 쓰딸 린이 령도했던 그 시기 쏘련의 가장 암흑한 한 페지인것이다. 쓰딸린이 죽은 후에야 이 안건을 다시금 심사하게 된 것이다.

1956년 2월, 후르쇼브는 제20차당대표대회에서 쓰딸린을 공격하는 보고를 하면서 두해사이에 7,678명이 명예가 회복되였다고 했다. 그들중 대부분이 이미죽었다. 사람을 놀라게 하는것은 1934년 “승리자대표대회”라 이름지은 회의에서 선출된 134명 당중앙위원중 98명, 즉 전체위원 의 70.9%가 1937ㅡ 1938년간에 총살당했다는 그것이다! 


                피비린내나는 잔혹한 대숙청 


1936ㅡ1938년간, 쏘련은 4개의 큰 안건을 심판한 외에 숙반운동전반에 당,정,군 각 부문에서 대규모의 숙청을 한것이다. 그 중에는 억울하게 죽이고 잘못죽인 사람이 많고도많았으니 그것은 다가 숙반확대화의 착오로 조성된 것이였다.

22ㅡ1928년, 쏘련공안과 안정기관에서 총살한 각종류형의 범죄자만해도 11,271명이였다.
1
930년 한해에 20,201명에 달했다.
1937년에는 353,074명으로 급증했다 
1938
년의 숫자는 326,818명이였다.
1939년에 4,201로 내려갔다. 
1940년에는 더 내려가 1,939명.

 쏘련 각 로동개조영에서 사망한 인원수는 아래와 같다.
1934 1월ㅡ1947 12 31일까지 기간 96.21만명.  
1937
2.5만명.
1938 9.5만명. 
1939 5.5만명. 
1940 4.67만명. 
1942년 24.89만명으로 급증。

1953년 쓰딸린이 금방죽자 쏘공중앙주석단(쏘공정치국)은 안전부문에서는 즉시 가두어놓은 “반혁명범죄분자”에관한 상세한 자료를 올려올 것을 지시했다. 1954년 2월 쏘련총검찰장, 공안부장, 사법부장은 중앙주석단에 상관한 보고서를 올렸는데 거기에는 이같이 되어있었다. 

1921년부터 1954년2월1일까지“반혁명죄”로 판결된 그중 처형된 사람 642,980.  
판결받아
로개영에 같힌 사람 2369,220.
판결받고 쫓기우거나 강제이주한 사람 765,100. 

정치국보안공작조에서 판결한것이 대략 290만이였는데 그것은 “2인심판조”와 “특별전안조” 등 비정규적인 사법기관에서 한것이였다. 그외 나머지90만명이 일반법원, 군사법정과 고등법원에서 한 것이였다.
1992년, 당시의 로씨야련방국가안전부의 등기처처장이 여론계에 쏘련시기의 “정치범”자료를 전부알려주었다. 그 자료들을 보면 1917년부터 1990년까지 총 3853,900명이 사형을 받았으며 극소수의 사람만이 사형을 받지 않고 고쳐서 다른죄로 판결 받았다.
그외 어떤 형사범죄자의 처벌역시 정치범취급을 받은것이 있는데 그 주요원인은 국내전쟁과 제2차세계대전기간에 남의 집에 불난 틈을 타 도적질하듯 나쁜짓을 한건데 그런자들도 얼마 가량은 정치범에 넣었던 것이다.


                      당내인사에 대한 숙청 

쓰딸린개인숭배가 있음으로하여 령수의 의지가 법제를 릉가하였기에 그번의 숙반운동에 수없이 무고한 사람들이 박해를 받은 것이다. 짐작컨대 인민의 적과 공모했다느니 파괴적인 간첩활동을 했다느니 공포행동을 꾸몃다느니 하는 등등 형형색색의 죄명으로 련루돼 숙청된 사람만도 500만이였는데 그중 처결된 사람이 30ㅡ40만 이였다.19361939, 일반당원이 체포된것이 120만명.
17 당대회때의 1966명 대표중 1108( 반수이상) 체포되였는데 그번 대회에서 선출된139 중앙위원과 후보위원중 98명이 체포되거나 총살당했다.11차당대회에서 선출되였던 중앙위원회의 26명 중앙위원중 17명이 처결 혹은 류배됐다.
쏘베트와 정부기구역시 “대숙청”운동으로말미암아 심중한 타격을 받았는바 1937ㅡ1938년간에 체포되여 처결된 부인민위원이 17명인데 거기다 그들의 조수와 부하까지 합치면 몇배되는 것이다. 1919년부터 1935년까지 사이 정치국위원 31명중 20명이 참혹하게 죽었다. 중앙위원기구와 성1급의 당위서기 그리고 기층당조직의 서기중에는 이런 정황이 더엄중했던것이다. 체포된 대다수 당원이 공개적인 심판도 걸치지 않고 처형되거나 류배를 했다. 


         전군이 복멸된들 이렇게는 되지 않으리라 

1937년 6월 11일, <<진리보>>는 뚜하체브쓰끼원수 등 8명은 국가를 배반한 죄로 체포했다하고는 12일자 신문에다는 뚜하체브쓰끼 등 8명은 총살당했다고 보도했다.

뚜하체브쓰끼원수는 모든 사람이 공인하는 천재적인 장령으로서 홍군의 진정한 령혼이였다. 그와 여러 장령들이 내놓은 종심작전리론과 대규모기계화작전리론은 서방의 다른 동배들보다 훨씬 앞선것이다. 한데 쓰딸린은 이런 사람을 전부처결한 것이다. 

뚜하체브쓰끼원수의 "나라배반안건"은 그 진상이 일찌기 밝혀졌다. 1936년 독일안전국지도자였던 해인리시가 조작했다는 그 뚜하체브쓰끼 음모재료가 독일사람의 주동적인 ‘반간계"인지 아니면 쓰딸린이 그네들이 "반간계"를 쓰도록 기회를 주느라 고의적으로 토로한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똑똑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뚜하체브쓰끼와 관점이 달랐던 사람이 심판에 참가했으니 그것은 대숙청기간에 늘 볼수있는 일이였다.
대숙청은 쏘련홍군의 군관계층을 거의 소멸해버렸는바 홍군지휘인원과 정공인원 4만여명이 숙청된 것이다. 그중 1.5만명은 처결되였다. 대원수 5명중 3명이 총살당했고, 일급집단군사령 4명중 3명이 총살당했으며, 이급집단군사령 12명은 전부 총살당했다. 67명군장중 60명이 총살당했고, 199명사장중 136명이 총살당했으며, 397명 려장중 221명이 총살당한것이다.

쏘련군장령 골리바렌꼬는 이렇게 평론했다.

"세계의 그 어떤 부대도 그 어떤  전쟁이였다해도 고급지휘간부가 (제2차세계대전을 포함해서) 이렇게 큰 손실을 본적은 없었던것이다. 지어 전군이 복멸되였다한들 결과가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을것이였다. 무기를 놓고 투항한 파시스독일군이나 제국주의일본도 고급지휘간부는 이보다는 썩 적게 잃어진 것이다."

인류력사상 가장 보기드믄 이 사건은 쓰딸린이 판단한 전쟁이 일어날 림박에 발생한것이다.
대숙청으로 인하여 엄중하게 기운을 잃은 쏘련군은 1939년에 핀란드와의 전쟁에서 인차 낯이 깎이고말았다. 90만쏘련군이 4개월이나 필사적으로 싸워서야 나라인구가 300만밖에 안되는 핀란드와 정전을 했는데 홍군은 50만이나 상망을 내였던것이다. 그런꼴이 파시스독일을 자극해서 군사모험을 하게 부추긴것이다. 뒷이어 겪어야했던 위국전쟁에서 쏘련은 피를 엄청많이도 흘렸다. 전쟁개시전 쏘기수자만봐도 독일의 5배, 땅크는4배였던 것이다. 하건만도 개전 1년만에 쏘련은 1,100만을 손실봤으니 전체인구의 1/7을 잃은셈이다. 유태인이 전멸된 파란의 비례에 달하니 생명대가를 따진다면 중국을 제외한 모든 참전국이 손실을 본  인구의 총합보다도 더 많은것이다.
광활한 국토를 가지지 않았다면, 4,000만의 예비군을 갖추지 않았다면, 맹국의 거대한 물질적인 원조가 없었다면, 쏘련이 독일을 이겨내리라고는 생각도말아야했다.

당연한 일이다. 승리한 주요인소가 쏘베트체재본신에 있는것이다. 오로지 이러한 체재만이 한개 국가가 최대한의 일체자원을 전쟁에 밀어넣을 수 있는것이고 받아내기어려운 상망을 내면서도 상상키 어려운 고통을 받아내는 것이다. 이런 제도하에서 사람이란 오로지 싸구려물건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레닌이 창건한 당이 소멸되였다 

세차례의 모쓰크바 대심판에  오른 사람이 16, 17, 21명이였는데 그중 3명만 유기도형을 받은 외 전부 총살당했다. 레닌의 저명한 유서에 이름이 찍힌 쏘공령도자 6명가운데 쓰딸린 하나를 내놓고 전부 총살당하거나 암살되였다. 뜨로쯔끼, 지노위예브, 까미예브, 부하린, 피다꼬브(뜨로쯔기는 해외에 류배 하였기에 심판석에 나서지 않았지만 후에 피살됨).

그외에 10월혁명을 령도한 6기중앙위원성원중 2/3가 총살되였고 11차대회 중앙위원회의 27명중 20명이 총살되였으며 15기 정치국위원 7명중 쓰딸린 한사람을 내놓고 6명이 총살당했다. 제1기 쏘베트정부의 15명성원중 5명은 이미 사망 하고 쓰딸린을 제외한 9명 모두 총살당했다.
1936ㅡ1938년간, 쏘공당원의 반수에 이르는 약 120만명이 체포되였던것이다. 어느 사람이 총결해보았는데 레닌이 창건한 당을 바로 쓰딸린이 소멸한것이다. 쓰딸린은 레닌이 살았을적의 로볼세비크들을 대거숙청한것인데 기실은 이때뿐이 아니였다. 1929ㅡ1931년에 벌써 25만명이나 되는 사람의 당적을 지워버렸던 것이다.

대숙청은 쏘공에다 일종의 공포문화를 산생시켰는바 당간부들은 여럿이 감히 한차를 타지 못했다. 원인은 음모집회를 한다고 의심할까봐였으니 그들은 개인적으로 사사로이 우정조차  나눌 수 었었던것이다. 쓰딸린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든 친구를 자기 집에 청해 밥을 먹을 수도 없었다. 쓰딸린이 청해서 음식을 같이 먹는다해도 속이 얼어드는 판이니 모두가 갈망하는 자리에 올라앉고싶지만도 볼가닌이 말한바와 같이 "너는 영원히 모를것이다, 그 자리를 떠난후에는 어떻게 될지? 집으로 돌아가 겠는지 감옥으로 가겠는지.

"
대숙청은 쏘공의 피를 바꿔버렸다. 레닌시대의 쏘공당원들, 상당히 많았던 리상주의자들, 비록 국가를 관리하는 경험이 없었지만 그들은 사회주의리상이 충만했고 볼세비크의 소박한 정의감으로 당에 충성했던 것이다. 1939년에 이르러 쏘공간부중 80%가 레닌이 죽은 후에 쏘공에 가입했는데 그들은 쓰딸린이 수개한 력사와 각종선전물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일대여서 그들의 심목중에는 레닌과 쓰딸린을 제외한 조기의 혁명령수들은 거의다가 반역자로 보였던것이다.
피를 바꾸기전의 쏘공은 "당의 일체가 다 옳다"고 믿었지만 피를 바꾼 후의 쏘공은 "당수령의 일체가 옳다"고 믿었다. 쏘공이 피를 바꾼 후 가장 무서운 질적변화는 당의 새 성원들이 이미 밀고와 적발문화에 습관이 된바 령도의 안색에 따라 행사하는데 버릇되고 령혼을 팔아먹는 방법으로 물질적인 부와 권력을 향수하는 그것이였다.         
 
쓰딸린은 대숙청으로 자기의 절대적인 력사지위를 수립하려했다. 1938년, 쓰딸린이 흠정한(황제의 명령으로 정한) <<련공(볼)당사간명교정>>의 출판되였는데 그 력사책에 대숙청중에 꾸며진 거짓말들이 많이 들어가 수십개의 국가에서 여러대나 력사교재로 리용하였기에 끼친 영향이 대단히 나쁜것이다. 


                          공포로 생긴 이야기 

 
마음꺼릴 일을 하지 않았거든 밤에 귀신이 문뚜드릴가봐 검나하 랴" 세상사람이 잘 알고있는 속담이다. 그것이 당연한 리치건만 정상적이 이아니였던 그 세월에는 그렇지 않았다. 아무런  꺼릴짓도 한것이 없었건만 사람들은 누가 문을 뚜드리기만 하면 가슴을 떨었고 지어는 죽음이에 이르기까지 한것이다.

1
956년부터 쓰딸린과 쓰딸린시대의 진실한 정황들을 부단히 폭로하기 시작했다. 최근에 공개된 대량의 쏘련당안의 비밀로부터 사람들은 한걸음 더 그런일이 생기게 되였던 그 시기를 좀 더 깊이 료해하고 세심히 연구하게 되는것이다. 로씨야작가 라진쓰끼가 쓴 <<쓰딸린>>(1996년 출판)이란 책은 그때의 당안들ㅡ쓰딸린개인당안을 비롯하여 10월혁명당안, 쏘공중앙당무당안에 근거하여 쓴것인데 어떤장면은 그야말로 모골이 송연하다. 

하루저녁은 몰로또브와 까가노위치가 쓰딸린의 별장화원에서 한담을 하다가 하늘의 별이름을 놓고 쟁론을 벌렸다. 몰로또브는 그것이 오리온(猎户)자리라 했고 까가노위치는 그것이 안드로메다(仙女座)자리라 우겼다. 두 사람의 쟁론은 멎을줄을 몰랐다. 옆에서 듣고있던 쓰딸린이 아 다툴건 뭔가 그거야 천문관에다 전화를 쳐서 물어보면야 제꺽알게될게 아닌가 했다. 그래서 비서가 쓰딸린의 분부대로 천문관에 전화를 했던것이다. 그런데 어찌 알았으랴, 원천문관장은 다른 한 저명한 천문학가와 같이 이미 숙청되여서 지금은 그 자리에 원내무부위원이고 군관이던 사람이 대신 올라앉은것을. 그는 천문학에 깜깜이다보니 물어보는것을 대답할 수 없었다. 그렇다하여 쓰딸급히 승용차를 잡아타고 아직 숙청되지 않은 천문학가를 찾아가게되였다. 그 천문학가는 허다한 동업자들이 숙청에 걸린것을 보고는 자기도 걸리면 어쩔가고 속을 조이고있던 참인데 밤중네 웬 자동차가 와 멋더니 벨을 급촉히 누르는지라 말일이 닥쳐온 줄로 알고 문을 열어주다가 심장병이 돌발하여 그만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말았다. 차는 급히 되돌아 다른 한 천문학가의 집을 찾아갔다. 그 천문학가역시 숙청된 천문학가들과 사이가 가까왔던터로 안절부절 몸둘바를 몰라하면서 잠도 제대로 못이루고있는데 새벽2시에 벨을 울리기에 창밖을 내다보니 아래에 승용차가 서있는지라 인제는 말일이 온줄로 알고 붙잡혀 릉용당하기보다 스스로 목숨끊는것이 났겠다 생각하여 층집에서 떨어져 스스로 목숨을 끊고말았다.

 천문장은 5시가 되여서야 별이름을 겨우알아갔고 쓰딸린 별장에다 전화를 쳤다.
 "
몰로또브와 까가노위동지께 전해주기바랍니다 " 전해줄 수 없소, 그들이 자고있 으니!"
수직원의 말이였다.  



                  대숙청은 일종의 체재문제 
 

 숙청은 쏘베트국가로하여금 전에 있어본적이 없는 자해(自害)를 감행함으로써 자멸을 자초하는 길을 걷게끔 만들어 놓은 것이다. 잔혹한 대숙청은 도의상 쏘공정권의 합법성을 동요시켰는바 그 한단락의 력사를 정시하고 비극원인을 총결짓자면 도의적인 비범한 용기가 없이는 안되는것이다. 이 방면에서 후르쑈브는 시험을 해본것이다. 쓰딸린에 대한 그의 비밀보고는 온세계를 진감했다.

숙청으로 인하여 해를 입은 사람의 명예를 다시회복시키자면 아직은 적어도 30년은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1987년, 대숙청에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둘 다 잃은 고르바쵸브는 "잊어진 이름과 공백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하여 대숙청에 대한 조사가 다시금 시작되였던것이다.


 1988년, 모스크바대심판에서 살해된 사람들은 50년후에야 드디여 잘 못된 안건으로 시정되여 명예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해, 쏘련의 모든 중 소학생의 력사기말심험을 취소하면서 정부는 다음과 같이 리유를 밝히 였다.
"다시는 거짓말로 학생들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 
   "그같이 거짓말로 사람의 사상과 령혼에 해독을 주면서 한세대 한세대를 기편한 자들의 죄상은 너무도 많아서 다 적을 수 없다."  


대숙청과 쓰딸린사이는 등호관계가 된다. 그리고 대숙청에서 해를 입은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권력투쟁으로 하여, 사람과 사람 지간 서로 불신임했던 결과로 하여, 사람의 생병을 초개같이 여기는 관료계통과 밀고문화가 합침으로 하여 생겨난 무고한 희생품인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체재였다. 모든 사람을 믿지 못해  적으로 보고 의심하면서 서로 밀고하고 적발하는 추악한 인성을 드러내는 체재였다. 그야말로 보기드믄 일종의 국가공포체제였다. 이 체제의 창시자는 쓰딸린인것이다. 쏘련은 바로 이 체재로 운전하였기에 결국은 망하고 만 것이다. 

이 세상에는 자기의 권리를 영구하게 만들기 위해서, 자기만을  떠받들기를 바라고 숭배하기를 바라면서, 쓰딸린을 흡모하고 그의 지독한 작법을 련습하는 인간불출의 사이비한 위인령수가 얼마든지 나지는 것이다. 경계해야 한다. 


                            력사평가와 반성 
 

쏘련의 숙반운동에 대해 안나 루이스 스트랑은 이렇게 평하고 기술했다.
내 생각에는 어떤 곳의 사람들은 다가1936ㅡ1039년간에 쏘련에서 발생했던 그 너무나지나쳤던 행동의 전모를 모르고있는것 같은데 그것은 그에 대한 적절한 평가와 책임을 비판하고 판단함이 부족한데 있다고 본다. 정확한 수자는 알 수 없지만 수많은 사람이, 그것도 아무런 통지도 없이 붙잡혀 심판도 걸치지 않고 저 북부와  원동의 죄범집중영에 끌려 갔다. 수천수만이 처형되였건만 그네들의 조우를 지어는 친구에게 마저도 알리지 않았던것이다." 

쏘련을 반대했던 신문들이 마침내 결론을 찾았는데 그것인즉은  사회주의본성이 본래 ‘집권과 잔폭’이라는것이다. 하지만 근래 쏘련인민의 창조성과 그네들이 자칭하는 "자유"를 열애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런 견해 를 받아들이지 않고있다. 흐루쇼브와 다른 일부의 사람들은 거의 같은 본새로 쓰딸린과 개인숭배에 책임이 있다고 간단하게 해석하고있다. 쓰딸린이 꼭 책임져야한다는건 자연스러운데 그의 착오를 선포하는 것이 최후의 답안인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쓰딸린이 조직을 통해 일을 처리했기 때문이다. 중앙위원회의 1차전체회의는 1937년 2월에 시작된 행동을 지지했던 것이다. 하나의 온정한 권력기구가 련루되는것이다. 게다가 후르쇼브가 제 입으로 말한것도 있다. 쓰딸린이 취한 그 행동에는 ‘로동 인민의 리익을 위해서, 혁명과실을 보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것이 필요했다.’는것이다. 내 생각에는  쏘련이 이런 안건과 력사를 회고하고 총결짓자면 이제 아무때건 발생했던 일에 대해서는 평가를 제대로 내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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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 ]

1   작성자 : 岳岩
날자:2018-11-18 16:53:21
안녕하세요?
선생님의 번역시사논평 "음지에 묻힌 비밀"을 잘 읽었습니다.
특히 선생님의 해박한 지식과 박식한 번역을 일독하면서
다함없는 존경심을 금할 수 없어 이렇게 댓글로 제 심정을 표시합니다.
혹시 선생님의 번역작 "음지에 묻힌 비밀"을 제 블로그에 모셔가도 되는지 조심히 허락을 받아봅니다. 너무 좋은 글이라 한국에 소개하고 싶은 제 심정을 읽어주셨으면 고맙고 감사하겠습니다.
선생님의 옥체건강과 무궁한 발전을 진심으로 기원하면서 답변을 손꼽아 기다려 보겠습니다.
다시 한 번 좋은 글에 감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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