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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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무오독립선언서”의 탄생 댓글:  조회:3616  추천:6  2016-05-03
              “무오독립선언서”의 탄생        어느날 서일은 김헌과 단둘이 있는데서 자기의 속심을 털어놓았다.     《총독부에서 통제령이 내린 후부터 탄압이 점점 우심해가고있는 상황이니 부득이한 상황에 대교는 잠을 자는 것 처럼 가만히 있는것이 현책인가봅니다. 그 대신에 이제는 중광단이 정면으로 나서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먼저 그런다면 미온상태에 있는 여러 독립단체와 지사들은 따라서 용기를 얻어 분발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오, 거 참 좋은 생각이구만! 한데 어떻게?...》   《중광단에서 를 작성하여 만방에 공포합시다.》   《가만있자, 인자 방금 뭐라했소? 우리가 를?...》    김헌은 저으기 흥분했다. 그도 품어 온 생각이였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저는 곰곰히 생각해봤습니다. 도사교께서 직접 그 선언문을 쓰시는 것이 어떨가요.》   《나더러 그 거창한 일을 해내라는건가?!...》   《도사교께서는 대교의 전 운명을 량어깨에 메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도사교께서 쓰신다면 그것은 이라는 한계를 벗어난 우리 모두의 거사로서 력사에 기록될것입니다. 필경는 우리 대교의 영광이 될게아닙니까.》   《허, 이거... >>    김교헌은 묵묵히 생각하고나서 하다면 빈약한 필력이오만 한번 재간을 부려보리다 대답했다. 서일의 건의를 기꺼히 받아준거다..그는 당장 그날 밤으로의 초고를 써서 이틑날 아침에 들고와 서일앞에 내놓았다.      서일은 그것을 받자 저으기 흥분된 목청으로 내리읽었다.     
73    지구의 가장 놀라운 30 곳 댓글:  조회:4435  추천:1  2016-03-16
지구는 매력과 놀라움으로 가득한 곳입니다,다른 사람이 상식의 위반으로 볼 수 있지만, 심지어 너무 놀라운 그들이 존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가장 놀라운  지구 풍경 (30)의 다음 컬렉션,그것을 보고 나면 당신은 어떤 감정일가!?....   플라이 간헐천 - 네바다, 미국 천자산  ㅡ 중국  Pamu 갈리 ㅡ 터키   Dallol 화산 - 에티오피아  Danxia 지형 ㅡ 중국   반딧불 동굴 -ㅡ 뉴질랜드       자이언트 코즈웨이 - 북 아일랜드 컬러 언덕 - 미국 Lassen 화산 국립 공원    아브라함 호수의 얼음 거품 - 캐나다 한 노래 동 - 베트남   그랜드 프리즘 스프링스 - 와이오밍   나미 브 사막 - 나미비아   영양 캐년 - 미국  네카 내 크리스탈 동굴 - 멕시코  에메랄드 호수 바이칼의 얼음 - 러시아    살 라르 데 우유 니 - 볼리비아 레드 비치 - 중국 판진   얼음 동굴 - 아이슬란드 마운트 로라 이마 ㅡ 베네수엘라   로즈 호수 ㅡ 세네갈 발광 비치 ㅡ 몰디브  해안 동굴을 가르 베 ㅡ 포르투갈 천연 탄산 소다 ㅡ 탄자니아  어디 Vatnajokull 빙하 동굴 ㅡ 아이슬란드  지옥의 문 ㅡ 투르크 메니스탄   발견 호수 - 캐나다   얼음 동굴 근처 무트 노브 스키 산 화산 ㅡ 러시아                                                                                                얼음 동굴 - 오레곤   호수 힐러 ㅡ 호주 分享到:
72    中国贪官必要看的照片 댓글:  조회:5776  추천:2  2016-03-15
  我的图片 帐号设置 退出帐号   jinsz 출처 : 신문망                                                                                                                                             女贪官包养小白脸夺财产害丈夫 在线观看 - 酷                                   中国贪官必要看的照片                                                                            女贪官包养小白脸夺财产害丈夫 在线观看 - 酷                                              中国女贪官第一“美女“   在辽宁鞍山市,流传着一个众所周知的天下奇闻:鞍山市国税局长刘光明花50万元到香港把自己的屁股全部美容一遍,成为全鞍山市最漂亮的屁股!     刘光明何许人也?岂敢如此花费国家税收和人民血汗,大张旗鼓地把美容美到自己的屁股上?这在全世界也是奇迹吧?完全可以上吉尼斯世界大全了。毫无疑问,刘光明这样做,目的肯定是为了取悦那些保她当官的人。        在眼下的中国,特别流行什么“美女经济”,而在目前的中国官场,也大规模流行起“美女当官”了。什么意思?就是长得很美的女人,通过给各路控制官职的领导睡觉,很快就能当上单位的一把手,特别是当上肥缺单位的一把手。        刘光明身高一米七多,年龄已经五十多岁了,可是第一眼看她,你会觉得她只有二十八、九岁,人也长得蛮漂亮。她从一个小小的副科长,在不到两年的时间里,突然窜升为正处级的鞍山国税局长。整个鞍山的税务系统都惊呆了!        刘光明靠什么爬得这么快?就象演员的路是睡出来的一样,刘光明的这个肥缺官职也是睡出来的。从国家税务总局的一些头头,到辽宁省国税局的一些头头,凡是能影响鞍山国税局局长这个宝座的领导,刘光明都一路睡过去。为什么这些领导对刘光明的身体感兴趣?        因为刘光明花了500多万元把自己全身上下都美容了一遍,她到美国、欧洲各地遍寻美容大师,把自己的眼睛、鼻子、脸蛋、头发、手臂、胸脯、肚子、大小腿、背部、腰部、脚指、手指,全身都美容了一遍!成了中国官场女贪官中第一美女!这么一说,相信有无数的刘光明的上级贪官都可能想和刘光明“沟通”一番了。                                                                                       
71    30만 캄보디아 화교를 누가 살해했는가? 댓글:  조회:3907  추천:2  2016-03-02
         30万柬埔寨华侨被谁杀害了?           (30만 캄보디아 화교를 누가 살해했는가?)                         출처-网易新闻论坛   . 红色高棉统治柬埔寨期间,华侨遭受了空前的劫难,三年多时间里,约30万华人惨死于波尔布特集团之手,约占在柬华人华侨一半。   在柬埔寨,有一个曾经令人闻声变色的人物,他就是红色高棉的领导人波尔布特。波尔布特其人,乃是毛氏思想的的绝对崇拜者,是毛泽东的得意门生。波尔布特在执政的短短3年8个月时间里,造成了柬埔寨非正常死亡200万人之多(也有说300万人、400万人),人口骤减1/3,这在历史上是没有先例的。 红色高棉在夺取政权之后,迅速达到完全丧失理性的恐怖巅狂。在速度上,超过斯大林的肃反;在广泛性上,超过中国的文革;在残暴程度上,超过希特勒纳粹和日本;在毁国毁民的程度上,超过非洲的卢旺达;在死亡人数和国民人口相对值上,创造了世界纪录。 波尔布特在柬埔寨步毛泽东的后尘,甚至全面超越了毛泽东,毛泽东想到而未能做到的事,他在柬埔寨都敢付诸实践,取消工资,取消货币、取消商品、消灭城市、消灭家庭。波尔布特从1965年开始,曾经4次来中国取经,当面聆听毛泽东的教诲。他对毛泽东讲:“我从年轻时就学习了很多毛主席的著作,特别是关於人民战争的着作,毛主席的著作指引了我们全党。”事实也确实如此,早在1965年11月,波尔布特就曾到中国访问3个月。这时正是毛泽东酝酿和发动文化大革命时期,在此期间,陈伯达、张春桥等人给他讲述了“中国的革命理论和实践”,特别是“枪杆子里面出政权”、阶级斗争、无产阶级专政等理论和经验。对於波尔布特而言,毛泽东的理论、中国的斗争经验,在那时已成为他心中的夺权、建国、治国依据。波尔布特在中国的3个月朝圣令其大受启发,回国后将原来的劳动党改名为柬埔寨共产党,并效法农村包围城市的理论,建立革命根据地。 波尔布特在夺取政权后的所作所为同样紧跟毛泽东。1975年4月波尔布特攻下柬埔寨首都,2个月后,就到北京拜见“伟大领袖”,听取指示。毛泽东对他说:“我们赞成你们啊!你们很多经验比我们好。”毛泽东对波尔布特讲:“你们现在是民主革命到社会主义道路有两种可能,一个是社会主义,一个是资本主义。我们现在正是列宁所说的没有资本家的资产阶级国家,这个国家是为了保护资产阶级法权,工资不相等,在平等口号的掩护下,实行不平等的制度。”对毛泽东的指示,波尔布特身体力行。按照毛泽东和波尔布特的观点,要消灭私有制,消灭“剥削阶级”,而城市是剥削阶级聚集的地方,因而他们对大城市抱着敌意。毛泽东说“城市太大了不好”,波尔布特则更干脆,来个彻底消灭城市。柬埔寨首都金边有200多万人口,波尔布特一声令下,3天之内全部赶到农村。 华侨是柬埔寨人口中的一个重要部份。早在中国南宋时期,就有从事海上贸易的华商在柬埔寨居留,称“唐人”。到1920、1930年代和二战后,先后出现了3次中国人移居柬埔寨的高潮,特别是在二战后的1946年到1949年期间,柬埔寨的华人由30万猛增到42万,占全柬574万人口的7.4%。1975年红色高棉政权建立前夕,柬埔寨的华侨已达60万之众。在柬埔寨的华人不仅数量可观,而且大多在经济上都比较富裕。 1975年4月7日,以占领金边市为标志,波尔布特领导的红色高棉夺取了柬埔寨国家政权,此后的3年零8个月中,柬埔寨人经历了一场惨绝人寰的空前劫难,华人社会更是首当其冲。当时拥有商人身份的华人被都划入“资产阶级”阵营,红色高棉甚至宣布“华侨都是资产阶级,有史以来都是吸柬埔寨人的血”。红色高棉对柬埔寨华人、华侨进行“红色恐怖”,很多人被处以死刑或苦刑。如1974年4月28日发生的著名“橘井事件”,大批从前线回来的红色高棉军人开进橘井市中心,把轻重机枪摆在街上,对准华人的住宅,限令全市华人立即到农村种田,拘捕煽动华人回中国的嫌疑分子,严刑拷打,折磨至死。 经历了1975年到1979年红色高棉的短暂统治后,柬埔寨华人数量迅速下降到30万左右。在财产蒙受重大损失、生命受到威胁时,柬埔寨华人曾基于自己的中国侨民身份,寻求过祖国政府的解救。然而,他们未能看到来自中国方面的任何公开的正面的反应。当时,华人所能接触到的祖国亲人仅仅是中国大陆援柬专家,但当他们向这些祖国亲人投诉的时候,得到的回答则不能不使他们失望,因为回答均不外乎两种,即要求华侨“顾全大局”、要“忍”下去,或认为华侨过去是剥削阶级,多数是资本家,现应好好接受所在国政府劳动教育,把自己改造成自食其力的劳动者。处于孤立无援境地的在柬华人因此感叹:“我们枉有一个强大的‘社会主义祖国’——华侨的寄托、精神支柱,却无能为力照顾得了海外华侨”;“热爱祖国却被祖国遗弃,在侨胞有难时祖国不伸以援手,这种心情是怎样的难受和失望”。 大陆民间思想家刘文忠先生曾在一篇文章中记述了他访柬时认识的一位华侨导游蔡先生的控诉。蔡先生回忆说,1975年4月17日是柬埔寨人刻骨铭心的日子。这一天,红色高棉荷枪实弹的军人们,勒令金边老百姓三天之内必须离开该市,他们说,“你们用不着带城市的东西!三天之内就回家,谁也不准留下!美国人要轰炸金边!美国人马上要轰炸城市了!”敌不过士兵的逼迫,4天之内200万人口都被强制离开,包括老弱病残。有“东方小巴黎”之称的金边顷刻间成了一座有路无人走、有车无人开、有房无人住的“鬼城”。许多华侨几代人都在金边开店铺做生意,几昼夜间成为彻头彻尾的无产者,许多人死于颠沛流离的途中,幸存者便开始了原始的刀耕火种的日子。没过多久,粮食的配给越来越少,饭也由干变稀。人们开始以野菜、草根、树皮果腹;很快,连这些“美食”也找不到了,每天都有人饿死,而活着的人连挖坑掩埋死人的力气都没有。最后,因饥不择食,有人开始吃蚯蚓、甚至吃死人肉,全国饿殍遍野。活着的人除了白天种地修渠,晚上还要开会学习。精神脆弱的人看不到痛苦的尽头,还没等到饿死就自行了断,蔡先生一对年幼体弱的弟弟妹妹就是这样死去的。 蔡先生的父母一再叮嘱兄弟俩咬牙挺着,说:“我们是华侨,祖国会出面来救我们的。”当时有几十万华侨都咬紧牙关,盼星星、盼月亮地盼望毛泽东主席来救他们,因为当时红高棉政权的报纸都刊登了中国派出不少专家团来柬援助的消息。有一次,蔡先生的父亲和一群人在山上劳动,看到了中国标志的飞机,许多人拚命挥手、放烟火发求救信号,结果竟被红色高棉枪毙了好几个。还有一次,村里一个红色高棉的翻译告诉华侨,离他们不远处有中国派出的建设专家小组驻扎地,村里几个胆大的华侨年轻人冒险去报信求救,结果反而被这些中国人出卖,给红色高棉抓起来。公判大会上,一个自称中国派来的干部带头喊口号:“中国政府坚决支持红色高棉政权的革命斗争!支持打击阶级敌人、打击特务反动派!”那几个去求救报信的青年华侨都被枪毙了。就这样,柬埔寨的华侨成了被祖国抛弃的孤儿。 这些被抛弃的孤儿哪里知道,他们一度寄予厚望的祖国当时正在轰轰烈烈地开展“文化大革命”,这场革命与置他们于死地的高棉革命一样,矛头也是指向“党内外阶级敌人”的,即便他们身在祖国,也一样会成为革命的敌人,难逃同样的厄运。正当柬埔寨华侨叫天天不应叫地地不灵时,毛泽东却在会见波尔布特时紧握着他的手说:“你们做了我们想做而没有做的事情!” “亚细亚的孤儿在风中哭泣,黄色的脸孔有红色的污泥,黑色的眼珠有白色的恐惧……”。这首歌,非常形象地描述了当时柬埔寨华侨华人的悲惨命运。
70    침묵속에 묻힌 거룩한 넋 댓글:  조회:2183  추천:0  2016-02-18
                   침묵속에 묻힌 거룩한 넋                            ㅡ 독립투사 김좌진장군의 묘소를 찾아보고서      광음여류라, 걷잡을 수 없는 것이 세월이다. 희비애환이 반죽된 인세에 천태만상의 인간들이 살고 죽었을것이니 풍류가인이 얼마고 절세의 인걸은 또 얼마였으랴! 올초에 나는 목단강에 갓다가 우연히 세파의 와중에 부대끼면서도 여지껏 살아온 긴좌진의 딸 김강석녀인을 알게 되었고 그 연분으로 약속이 있어서 지난 7월초 다시 만나서는 함께 장군의 구광(舊壙)을 참배하기까지 했다.    해림현 경내의 어느 소나무숲 우거진 자그마한 산, 그 산 바로 앞기슭에 김장군의 묘자리가 있는 것이다. 거금 60년전, 여기에 묘소가 생겨난 그때로부터 고향 홍성으로 이장됐고 지금은 이 자리에 구광만 남아있다.  하건만 그것이 장군의 딸에게는 더없이 귀중하기만 했다.    독립군에서 풍수를 아는 권화산과 오지영 두 로인이 수고스레 찾아내서 쓴 이 묘소는 과연 린근에서는 더 찾아볼수 없는 명소였음이 분명했다. 량켠에 산이 둘러있어서 아늑한 느낌인데 저 개활한 앞으로는 평야가 탁 틔여 시원함이 그지없다. 마치도 그것은 고인된 장군의 활달한 흉금이런듯.    15세때 벌써 30여명의 가노를 전부 해방하고 2000여석을 추수하던 토지를 소작인에게 분배해 조선의 근대화에 앞장나섯던 개혁의 선구자, 을사조약 체결후 독립운동자금을 모집코저 조선팔도를 누비다가 체포되여 옥고를 치럿던 우국우민의 애국자, 3.1운동때는 만주로 들어와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장령이 되었던 백야 김좌진장군은 조선이 낳은 희유의 장사였고 걸출한 독립운동가였다!    1924년 3월 10일, 김좌진 장군은 분산된 각지의 반일무장을 한데 뭇고 신민부(新民府)를 세웠다. 실력양성을 위한 둔병전(屯兵田)이였던것이다. 그때의 병력은 무려 1,260여명.    신민부가 한창 활약하고있었던 1930년, 그해의 1월 29일 아침은 과연 신수 흉했다. 장군은 아침진지를 들다 수저가 부러졌다. 괴이쩍게 생각한 장군은 식사를 마치고 저택앞 정미소마당으로 나갔다가 그만 괴한의 총에 저격되였던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는 42세.     파란만장의 생애에 비해 그의 죽음은 너무나도 맹랑했다!    그때의 구광은 아직까지 메워지지 않고 거의 그대로 있었다. 뒤켠에 독립군이 심었다는 사시나무 두그루, 앞에는 잔디풀, 김녀사가 정성스레 심어놓은 봉선화가 한창 곱게 피고 있었다.        김강석녀인의 부름에 나는 숙였던 머리를 다시들고 따라서 구광에 들어갔다. 이제는 너무나도 오랜 세월이 흘러갔다. 했어도 주인없는 고총같이 고적하지 않은 묘소, 세상 어디서 또 이런 효녀를 찾아보랴. 아직 마음편해본적 없었건만 딸의 손목을 이끌면서, 그리고 후에는 아니면 혼자서라도 남의 눈을 피하면서 아버지의 묘소를 고스란히 지켜왔다니 그 효성이 너무도 기특하고 구슬프기도 했다!    우리는 비석 하나를 더 찾아냈다.    구광의 앞쪽에 비석 하나가 더 감춰져있었던 것이다. 판자로 된 것이였다. 거기 비문에는 김좌진장군이 수난당한 년 월 일과 시간까지 똑똑히 밝혀져 있었다.    김강석녀인의 말에 의하면 이 비석 둘은 후에 살아남은 독립군들이 만든건데 사처로 흩어진 그네들은 자기가 숨져서 타계의 사람이 되기전까지는 잊지 않고 해마다 찾아와 참배를 하군 했다고 한다. 그러기를 1958도까지.    실로 기특한 일이요 눈물겨운 추억이였다.    김강석녀인은 장군의 유해를 이장하던 날의 정경을 이야기 했다.    그것은 1934년 4월 9일(음력) 새벽. 일제의 감시를 넘기느라 이장을 자못 은밀히 했었는데 독립군들은 유해를 다리곁 철길옆에 놓았다가 유개화차에 실어서 보내놓고는 모두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장군이 수난당했을 때는 비분에 몸이 떨려 울음조차 나가지 않았던 그네들이 유해와 리별하고서는 그렇게!          하늘을 집을 삼고 떠도는 신세          동서남북 찬바람에 갈 곳이 없어          어머님의 옛사랑이 다시 그립다          비오고 바람부는 들창밑에서          팔베개로 꿈을 꾸는 정든 전우야          어느날 어느 곳에서 무슨 꿈을 꾸느냐          귀뚜람이야 울지 말라 희망이 온다       이 노래는 김좌진장군이 생전에 부르군 했던 노래라면서 딸이 불렀다. 마지막 구절은 본래 “운다고 궂은비가 아니 올소냐”였는데 장군이 그렇게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래선지 노래를 듣노라니 불안과 위구에 가슴 떨고 혹은 전도에 절망해 탄식하는 독립군을, 고난과 고뇌속에서 방황하는 전우들을 다시금 분발하라 고무를 하는 김장군의 그 심정을 내가 보고있는 듯. 또한 내 눈앞에는 어느덧 독립군이 운명의 갈림길에 들어섯을 때 과감한 결책으로 부대를 이끌어 광활한 만주벌판을 행진했을 장군의 강개한 모습이 우렷이 떠오르기도 했다.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는 거족적인 성스러운 싸움에서 동포의 단합, 민족의 단결은 자못 중요하고 필요한것이였건만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되지 못하고있은것이 그때의 가슴 아픈 실태였다. 무엇보다 자기만을 진정한 혁명자로 생각하여 넓은 포용성이 없이 파쟁을 일삼아온 종파당쟁의 파괴가 무서웠던 것이다. 그때 결패있고 장군다운 위엄이 있었던 김좌진은 간요한 인간들의 분렬책동을 단호히 배격하면서 그 위해성을 준절히 갈파했던것이다.    서로 의합이 맞지 않은 3부(신민부, 정의부, 참의부)의 통합을 실현하려고 불철주야 끈질긴 노력을 경주했던 장군의 근엄한 모습을 눈앞에 재다시 그려본 나는 그당시 훌륭한 념원이 어의해 뜻을 이루기가 그리도 힘들었던가고 한숨쉬였다. 용감하고도 치졸했던 독립운동가들이여, 무원의 경지에서 고립됨은 스스로의 멸망을 초래함을 그대들은 그래 몰랐단 말인가?    신민부의 거두었던 김좌진이 쓰러지고 보니 기둥이 부러진 격이여서 온 만주의 독립군이 그만 사기 저락되는 혼란속에서 와해의 일로로 줄달음치고말았다.    이것이 그래 원통한 일이 아니였던가?     조선사람의 그 빌어먹다 오그라질 놈의  당파심!                                                              1991년 9월 21일                                                 
69    高官落马:检方从季建业眼神中找到突破时机 댓글:  조회:3009  추천:0  2016-02-17
            高官落马:检方从季建业眼神中找到突破时机                                  출처: 时政新闻政知圈赵婧姝 2016-02-16 19:52 我要分享                                         撰文 | 赵婧姝 编辑 | 桂田田   十八大以来最让老百姓拍手称快的是什么?   打虎。   如果要让政知圈(微信ID:wepolitics)列个打虎榜,这单子得老长老长。三年来,打下来的许多老虎也相继有了“交代”——自去年开始,大批省部级高官的贪腐案件进入司法程序,去年有40名原省部级以上高官被立案侦查,他们均以“受贿罪”被立案。   据政知圈(微信ID:wepolitics)统计,去年走上法庭的省部级以上高官有18名。到目前为止,2014年6月以前落马的官员,还没有被提起公诉的仅剩金道铭一人。   侦查   季建业的辩解和“眼神”   转播到腾讯微博 季建业受审   大多数落马高官的判决书上,都有“认罪悔罪”、“坦白情节”、“积极退缴全部赃款赃物”等表述。不过有人一开始对于直面案情是“拒绝”的,南京市原市长季建业就是这样一位。   “虽然中央纪委双规期间,他(季建业)能供述一些问题,但是辩解的成分太多。用我们的话说,他的态度还不是太老实。”季建业案专案组成员、来自烟台市检察院的刘文清回忆第一次在秦城监狱见到季建业的情形时说,作为法学博士的季建业有问有答,甚至对一些问题侃侃而谈,回答的内容滴水不漏。   春节后,刘文清再次坐到季建业对面,决定对案情只字不提,他们聊反腐形势、聊家庭、聊生活,“因为在聊的过程当中,我们俩也是互动的,每一天我们也让他谈谈对这个事情的认识。也是从这些角度,我们来观察他。”   一开始,刘文清感到季建业表面上似乎在听,但没有真正听到心里去。“但是到了后期,他的眼睛一直盯着你,基本上是不离你的视线,确确实实感觉到他在认真听。”刘文清说,从季建业的眼神变化中找到了突破的时机。最终,虽然季建业偶有反复和辩解,但还是如实交代了涉案情节,并主动写下了万言悔过书。   “中央纪委一开始调查的时候,他当时还不理解,觉得这是不是有人陷害他。”刘文清说,后来季建业意识到“如果自身没有问题,谁告你也没有用”。   当年8月,季建业案件进入审查起诉阶段。从8月19日到28日,公诉团队兵分两路,奔赴北京、烟台、苏州三地,送达文书、提审季建业、复核了主要证据。公诉人张蕾后来回忆,每晚他们都要开会分析白天的问答,将所得事实归类分析,还要分析季建业的性格特点、顾及身体状况,避免讯问中刺激对方。   另一位公诉人傅延威则透露,为了准备庭审,公诉组的五个人全部都多次把五十多本案卷翻了好几遍,同时研究季建业的辩护律师——某高校法学院副院长的著作。“感觉这个辩护律师还是一个比较犀利的法学家。所以,我们当时也做了一定的应对,就是从法学理论这方面,就把相关的这种理论、司法解释、一些前沿的法律观点,我们都整理在一起,防止他当庭提出一些理论的观点……”   请律师   口碑较好官员 有望酌情考虑量刑   在检察机关进行侦查的同时,当事人已经可以请律师,要求与律师会见,获得法律咨询和法律帮助。   像季建业的辩护律师一样,不少高官的辩护律师都是学界专家、业界大拿。比如周永康的辩护人之一是中国政法大学刑诉法学研究院副院长顾永忠,另一位则是顾永忠的学生郝春莉,她曾为黄光裕、丁书苗辩护。曾为王素毅(内蒙古自治区党委原常委)、沈培平(云南省原副省长)辩护的律师许兰亭则有着为十余位省部级高官辩护的经验。   转播到腾讯微博 顾永忠(左上)、郝春莉(右上)、许兰亭   在许兰亭接触过的当事人当中,有些是官员的家人委托他进行辩护,有的则是由法律援助中心指派律师辩护,“这两种情况大概一半一半”。当然,高官并非请不起律师,而是有一部分人认为自己认同指控,请律师意义不大,还有人对律师的作用表示怀疑,也有人存在认识误区,认为请律师就是态度不好,与组织对抗。   许兰亭说,在量刑可能比较重,比如可能判死刑、无期,或者有重大影响的案件,在无律师的情况下,法律援助中心应该会指定律师。比如,许兰亭律师在为王素毅辩护时,就是以提供法律援助的形式进行的,刘志军当时的辩护律师也是由法律援助中心指定的。据了解,法律援助的价格较低,大约为2000元。   许兰亭告诉政知圈(微信ID:wepolitics),与落马官员至少接触三到五次,“主要是谈起诉书,对起诉书有什么意见,里面提到的事儿有没有,比如有没有送钱,对性质有什么异议。”对于起诉书的内容,一部分人没有什么意见,也有人对某一笔或者几笔财物往来认为不构成犯罪。   许兰亭说,较少有人完全否认指控,所以一般情况下会对落马高官进行罪轻辩护,比如从是否有自首、立功、主动积极退赃、悔罪认罪,没有索贿情节,没有给国家和人民造成严重损失和恶劣影响,都对量刑是有利的。还有一些人,在当地口碑良好、为当地发展做出贡献,也可酌情考虑量刑。   政知圈(微信ID:wepolitics)注意到,在对沈培平的辩护中,许兰亭与另一位辩护人韩德晶对沈培平收受茶叶、玉石的价格提出了异议,并且认为其收受茶叶的理由主要是为了进行研究推广。另外,辩护人指出,对于收受他人财物,沈培平也是为帮他人获取合法利益,而非谋取非法利益。沈培平任职期间,也为地方发展做出了一定贡献。   庭上   童名谦的自辩与陈柏槐的翻供   政知圈(微信ID:wepolitics)注意到,在目前披露的公开信息中,仅有一位落马官员——童名谦(湖南省政协原副主席)没有请律师,而是“自辩”。   转播到腾讯微博 2014年7月24日,童名谦案件开庭时,他认可检方指控罪名,没有为自己聘请辩护律师,法院提出为其指定辩护律师,童名谦也表示不需要。据媒体报道,童名谦的好口才给旁听者留下了深刻印象,他在脱稿的情况下逐条讲明了自己认为应该获得轻判的理由,条理非常清楚。作为一名“非贪”官员,童名谦以犯玩忽职守罪被判处其有期徒刑5年,他也成为自十八大后首个因“玩忽职守”获刑的省部级高官。   在目前已经获刑的十八大后落马官员中,几乎全部人都认同检方指控,唯有陈柏槐(湖北省政协原副主席)一人当庭翻供。陈柏槐认为,起诉书指控其滥用职权没有证据证实,其审批都是依照程序进行,也未给国家造成重大经济损失;其在侦查阶段关于受贿的有罪供述系特定情况下作出的虚假供述,从未利用职务上的便利为他人谋取过利益,认定其受贿没有事实与法律依据。陈柏槐在去年4月一审被判17年,至于其是否上诉,目前无消息披露。   转播到腾讯微博 陈柏槐受审   秦城   等郭永祥出狱 他已是86岁高龄   按照惯例,秦城监狱将会是落马高官的去处。谁会在这里待得更长久?   政知圈(微信ID:wepolitics)注意到,在去年获刑的14名官员中,9人的刑期在10~15年,4人刑期在16年~20年,除贪污罪外,廖少华和李春城犯有滥用职权罪,蒋洁敏和郭永祥则还犯有巨额财产来源不明罪,蒋洁敏还同时犯有国有公司人员滥用职权。周永康则因受贿、滥用职权、故意泄露国家秘密被判处无期徒刑。   除周永康外,郭永祥获刑时间最长,为20年。郭永祥出生于1949年,如果没有减刑,待出狱之时已是86岁高龄。
68    스탈린은 맑스주의자로 위장된 살인악마 댓글:  조회:4126  추천:2  2015-12-21
                      스탈린은 맑스주의자로 위장된 살인악마                                                           김 송 죽   현실의 내막과 역사의 진실을 알면 인식이 명확해져 비교와 판단을 하고 평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맑스가 태여났던 19세기초는 경제의 자본주의적 축적단계였기에 그가 자본주의의 변화와 발전을 예측 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의 초기의 계급투쟁, 폭력혁명, 무산계급전정리론은 성숙되지 않은 리론이였다. 그러니 맑스의 저작에 대해서도 역시 하나를 둘로 나누어 보면서 그 본질을 받아들이고 찌꺼기는 버려야 한다.   1895년6월, 엥겔스는 라는 글에 있는  맑스주의 이론의 전체 시스템을 최종적으로 수정했다. 그는 1848년의에 있는 폭력혁명과 공상적인 공산주의를 완전히 포기한 것이다. 이로부터 볼수있는바 그가 번스타인(1850—1932)인 것이 아니라 그는 맑스주의의 폭력적혁명리론을 “수정”하여 평화적인 과도기리론으로 내놓았다는 것을 알수있는 것이다. 번스타인은 그저 엥겔스와 맑스가 함께 창건한 민주사회주의리론을 계승하고 그것을 발전시켰을 뿐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로년기에 이르어서는 사회민주주의자로 되였다. 맑스가 젊었을 때의 폭력혁명, 무산계급전정, 계급투쟁, 공상적인 공산주의리론은 1894년에 출판된 제3권에서 이미 다 뒤집혀진 것이다. 제3권은 맑스와 엘겔스가 몇10년간 가난속에서 지내면서 마침내 연구하여 낸 정수(精髓)인 것이다. 어느것을 믿을것인가?   20세기 초, 국제공산주의운동중에서 무산계급정당이 정권을 탈취하는데 대해서, 집정후에는 어느길로 나아가야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강렬한 쟁론과 분기가 생겼던바 나중에는 레닌을 위수로 한 폭력적 혁명, 계급투쟁, 무산계급전정하의 제3국제의 정당인 볼세비크정당과 번스타인, 카우츠키를 위수로 한 제2의회를 통하여 합법적인 투쟁으로 집정지위를 얻자는 사회민주당 이렇게 두파로 갈라진 것이다. 번스타인, 카우츠키를 위수로 한 사회민주당은 사유재산을 보호하고 자본가를 인정하거니와 지식분자가 선진생산력과 선진문화를 대표하며 평화적인 수단으로 3대차별을 소멸하는 제2인터내셔널을 주장한 것이다. 실천이 증명하다십히, 제2인터내셔널의 사회민주당의 길이 옳았고 레닌이 지도한 제3국제의 길은 틀린것이다.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국가들에서 공산당집정이 붕괴되고 만 그것이 바로 가장 유력한 증거로 되고있다.   민주사회주의 이념은 북유럽의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그리고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등 무려 13개에 이르는 국가들에서 실현되고 있다. 그들이 사회민주당의 집권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 국가에서는 노동자와 농민, 도시와 시골, 체력로동과 뇌력로동의 차이를 졻히였고 정부관원과 사회민주당 당원의 특권을 없애버렸거니와 수입이 많을수록 국가에 바치는 세금도 많게끔 만들었다. 의료비용과 교육비용은 아주 낮거니와 지어는 무료인데도 있는 것이다. 그 나라들에서는 높은 임금에다 높은 복리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례를 하나만 들어도 알수 있다. 스웨덴의 일반 근로자의 로임이 루마니아 시장의 월로임보다도 더 높은 것이다. 하기에 우리 중국의 한 국가 지도자 왕진(王震)은 스웨덴을 방문하면서 감개하여 “이게 바로 우리가 늘 바라고있는 사회주의가 아닌가!”고 그 즉석에서 감격을 토로한 것이다. 그는 스웨덴을 국사방문하고 돌아와서 동유럽의 사회주의국가들을 보면 그같이 큰 변경과 전환속에서도 집정당의 지위는 전혀 손실되지 않았다고 감개하여 말했다고 한다. 하여 모택동이 사망하자 등소평은 서둘러 개혁개방 정책을 인차내놓은 것이다.   맑수주의학설은 인류가 다 같이 아름다운 사회를 추구하고 그를 구현하자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고 볼 때 민주사회주의가 바로 맑스주의의 정수(精髓)로 되는 것이다. 맑스의 리상은 소련이나 중국에서가 아니라 스웨덴, 노르웨이, 네덜란드 등 그 13개 국가들에서 먼저 이루어지고있는 것이다.   에 보면 “계급과 계급대립이 존재하는 자산계급사회에서, 즉 그러한 컨소시엄(一个联合体)에서는 사람마다 자유적인 발전과 조건이 주어진다.”고 했다. 엥겔스의 그 말인즉 바로 의 기본사상으로 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대체 한 후에는 원유의 민주와 자유를 유지 할 뿐만 아니라 “사람마다 자유발전”할 수 있는 공간이 자본주의사회보다도 더 많아진다는 것이다. 이같은 조건에서 “모든 사람이 점차적으로 발전”하여 클래스(阶级)는 최종적으로 폐지 될 것이며 전인류는 해방되고 따라서 세계대동(世界大同)은 이루어 질 것이다.       그런데 관건은 국가와 국민을 다스리는 자의 행위가 어떠한가에 있는 것이다.  스탈린은 1917년에 무장혁명에 의하여 권력을 장악함으로 하여 사회주의로 자본주의를 대체한 것이다. 그런데 스탈린시대의 소련을 보면 모든 사람의 “자유적인 발전공간”이 있기는 고사하고 실상은 아예 거의 없어지나 다름이 없었다. “자유적인 발전공간”이 있었다면 그것은 스탈린 그 혼자였을 것이다. 그를 내놓고는 백성은 물론 지어는 대부분의 고위층 지도자들 마저도 자유란 운운 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목숨마저도 그 한 사람의 손에 쥐여있었으니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소련은 형상 그대로 큰 캠프(대집중영)였다. 1917년 10월혁명 후, 소련은 레닌이 새로운 경제 정책을 구현함으로 하여 사회주의의기본단계에 들어섯다. 그러다가 1924년에 레닌이 사망하니 지도권을 찬탈한 스탈린은 레닌이 내놓은 새로운 경제정책을 폐지했거니와 계급투쟁이라는 명의로 당내에서 피비린 대숙청을 벌리였던 것이다. 공산당사람이 제 공산당사람을 죽이게 한 것이다. 그는 선후하여 레닌시기의 정치국상임위원이였던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톰 샤란스키, 푸처럼, 부하린 등을 살해하였다. 피에 굶주린 그 독재자폭군은 정치국 상임위원회 카메네프의 가족에게 까지 살인마수를 뻗히였는데 지어는 카메네프의 17살 난 아들과 보모까지도 살려두지 않은 것이다.   이미 공개된 사료에 보면, “10월혁명”때의 중앙위원 중 14명이 스탈린의 손에 살해되었다. 그리고도 군사장령 60명 중 54 명이나 살해 된 것이다. 그뿐이 아니였다. 제1계 인민위원회에 위원이 모두 15명이였는데 스탈린은 그들 중 9명이나 혁명이라는 명의로 처형 한 것이다. 1934년 소련공산당 “17대회의” 중앙위원회의 선거 때 270명의 대표가 스탈린에게 투표하지 않았다. 투표결과를 보면 레닌그라드의 서기 키로프에게 투표 한 것이 스탈린보다 훨씬 더 많았던 것이다. 그렇게 되자 키로프는 얼마못가서 암살되였거니와 그를 죽인 흉수역시 피살되고 만 것이다. 희한스레 조작된 비극이였다. 이때로부터 스탈린은 저항세력에 대한 대규모적인 숙청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1,108명을 체포했는데 그들 대부분이 감옥에서 죽고말았다. 그때 중앙위원으로 선거된 것이 139명이였는데 98명이나 스탈린의 손에 총살 된 것이다.    옛 소련 정치국 성원이였던 미코얀의 회억에 보면 1935년1월부터 1941년6월에 이르는 기간에 2,000만이 박해를 받았는데 그 중 700만이 총살되였다고 했다. 그러고도 입을 막느라고 자기가 부려먹었던 2만명이 넘는 특공인원(特工人员)들 마저 전부 죽여버렸다고 했다. 스탈린과 한고향이거니와 가까운 친구였던 오르조니키는 그보고 사람을 너무 죽이지 말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스탈린은 그의 타이름을 받아주지 않았다. 부하린의 부인과 몹시 가까운 치구간이였던 스탈린의 처는 살인악마로 변해버린 제 남편이 사람을 너무죽이니 그만 정신병에 걸려 나돌다가 자살아고 말았다.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거기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12통을 썼는데 그는 제 아버지를 “사람인게 아니라 지독한 살인악마”라고 폭로했다.   스탈린은 정권을 잡자 ,레닌때의 경제정책을 폐지하였거니와 도시의 자산계급을 없애고 농업집단화를 한다면서 부농은 남기지 않고 육체를 소멸했거니와 그들의 자녀에 대해서까지 추방정책을 쓴 것이다. 그리하여 수십만에 달하는 이들이 적절한 조치도 없는 시베리아에 쫓겨가 그곳에서 굶어죽거나 얼어죽고 만 것이다. 농업집단화는 생산력을 파괴하였다. 그럼으로 하여 전국성적인 대기황을 몰아와 수백만이 굶어죽고 얼어죽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스탈리은 집정기간에 고발자를 적극적으로 격려했다. 례를 들면 12살먹은 퍼프 무바라크란 애아 제 아버지 카스트피모를 계급의 적이라 고발하게 하여 진압한  대의멸친(大義滅親)사건같은 것인데 그 사건은 전형으로까지 되었던 것이다. 카스트피모는 스탈린을 숭배하는 자들의 손에 피살되였거니와 그의 형 말리크 역시 그같이 살해 된 것이다. 그리고도 그에 련루되여 친척 여럿이나 아무런 죄도 없이 당국에 의해 처형되였다. 정치선전수요에 의하여 소련정부는 제 아버지를 고발한 소년 퍼프 무바라크를 소년영웅으로 부각시키켰다. 그리하여 도처에다 그의 동상을 해 세웠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였다. 가도, 학교, 집체농장 지어는 하늘에 나는 비행기와 강물에 떠있는 륜선에마저 그 애의 이름을 달았거니와 그 애를 찬미하는 노래를 지었고 그림과 책이 나왔으며 영화로 각색되였거니와 지어는 우표와 성냥갑에마저도 그 애의 얼굴을 그려넣을 지경이였던 것이다.   스탈린은 그같이 밀고바람을 일으키면서 전국적인 숙반운동을 확대했는데 기관, 학교, 군대, 정부의 각 부문들에서 고백을 협박하고 비밀처형하고 죄없이 무차별 살해함으로 하여 억울한 가짜안건들이 기수부지로 나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2000년도 10월혁명절 저녘에 야코블레프가 기자를 회견했을 때 토로한 것을 보면 스탈린시기 그의 진압에 의해 피해입은 자가 2,000만이 넘으리라는  것이다. 야코블레프는 그러면서 자기는 러시아 대통령에게 각 부문들에다 희생자조사위원회를 내올것을 제의했노라고 말했다. 미국의 전임총통 국가안보 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이라는 책에서 피해자가 2,000만이라는 설법을 인정했다. 그는 그러면서 계속해 쓰기를 “스탈린의 손에 살해된 정확한 수자는 영원히 알아 낼 재간이 없다. 2,000만 내지 2,500만이라 해도 과장되는 수자가 아니이다. 스탈린시대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참혹하게 살해 된 것이다. 그한테 박해받은 사람이 하도 많아 그 수가 2,000만이 아니라 4,000만이 될수도 있을 것이다.” 라고 했다. 다른 한 자료에 보면 “스탈린시대에 총살된 사람이 짜리통치 30년간의 1.600배가 된다”고 했다.                                                        (《斯大林密闻》,《莫洛托夫回忆录》,《苏联亡国的原因》)                                                                            스탈린의 극좌로선은 소련공산당과 소련인민에게 너무나도 큰 고통과 재난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니 그 시대를 살아본 사람들의 머릿속에 뚜렷이 남은것은 오로지 고통과 증오뿐이였다.  스탈린은 진정한 맑스주의자가 아니다. 스탈린은 맑스주의자로 위장된 잔인한 살인악마였다!                                                                                                  
67    고칠수 없는 숫자 댓글:  조회:3625  추천:2  2015-12-07
                                        고칠수 없는 숫자                                 【中华史林】杀了多少人?镇反与肃反的历史回眸   法国外交官杰奎斯?圭拉麦将军估计,从一九五一年二月至一九五二年五月间,至少有三百万人被杀害。 据一九六九年四月七日莫斯科电台广播,一九四九年至一九五二年有二百八十万人被毛处死;一九五三年至一九五七年有三百五十万人被杀。 在一个月内处死的最高数字则是北京中央人民广播电台透露的:皖浙苏鲁四省一个月之内死了一百一十七万六千人;在华中和华南,一个月内则死了一百五十万人。内务部长薄一波在镇反报告中提及:“为了永久的和平,为了人民民主,在过去三年半(一九四九──一九五二),我们清算了二百多万土匪”。 불란서 외교관 자크 규 라멕장군은 1951년2월부터 1952년 5월사이에 적어도 대략 300만은 살해되였을 것이라 했다. 1969년 4월 7일, 모쓰크바 방송은 1949년부터 1952년 사이에 280만이 모택동의 손에 살해되였고 1953년부터 1957년에는 350만명이 살해되였다고 보도했다. 한달사이에 처형한 최고수자는 북경 중앙방송국에서 토로한것인데 안휘, 절강, 강소, 산동 4성은 한달사이에  117만6천명, 중화남쪽은 한달사이 150만명이 처형되였다. 내무부장 박일파(博一波)는 “진반”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구한 평화를 위하여, 인민의 민주를 위하여, 지난 3년반 (1949ㅡ1952)사이에 우리는 토비 2백만을 넘어 숙청했다.” 。。。。。。 전국적으로 자수한 반혁명분자와 기타의 범죄분자가 37만명이 넘는다. 이미 밝혀진 조기의 정치운동당안을 보면 숙반운동으로부터 운동이 끝난 1956년말까지 체포한것이 21만 4천4백7십명이 되는데 그 중 사형한것이  21,715명이고 비정상적으로 사망한것이 53,230명(이른바 “비정상사망”이란것은 핍박에 못이겨 자살한것, 투쟁대회나 심문때에 탄백을 핍박하면서 때려죽인 것, 혹은 감옥과 로개중 시달려 죽은 것 등을 가리킨다.) 란 글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들은 1957년 7월 18일자 사론 가 제공한 수자로부터 쉽게 계산해 낼 수 있을것이다. 그번의 숙반 운동에 무려 140만명이나 되는 국가간부와 지식분자들이 타격받았는데 결국 보면 94%가 잘못처리 된 안건이였던것이다.”                                                                  본문 :  음지에 묻힌 비밀(2)                                                              본문을 상세하게 읽어보기 바람.      
66    “백명 목자르기시합” 살인마들의 끝장 댓글:  조회:4532  추천:2  2015-12-04
                         “백명 목자르기 시합” 살인마들의 끝장                                   항전전이 승리한 후에 맨먼저 해야 할 일은 전쟁범들을 재판하는 것이였다. 그리하여 국제헌병팀이 무어졋는데 그 국제헌병팀의 한 소조 5명이 일본에 간 이틑날이였다. 그들은 도쿄의 아카사카 거리에 있는 한 생선가게에 들어가 정심을 먹게 되였다. 그들이 음식상에 방금 둘러앉자 저켠의 다른 한 상에서 방금 생선을 먹고난 식객이 돈을 낼 념을 하지 않고 그냥 가버리자고 하여 그만 가게주인과 말다툼이 생겼던 것이다. 주인이 그보고 어디 그런 법이 있는가 음식을 먹었으면 응당 값은 내야 할게 아닌가 하니 그 자는 팔을 걷어붙이더니 씽 달려들어 주인의 뺨을 갈기면서 미친 듯이 을러메는 것이였다. “자식이, 돼해먹지 못하게 누구하구 함부로 그따위소리를 해? 이 어른이 이래뵈여도 지나전쟁 때 중국사람의 목을 백개 넘어 잘랏다, 잘랐어! 너 어째 살고싶지 않아 나하고 감히 돈을 내라고 해?”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국제헌병팀 5명중에 마침 일본말을 아는 사람이 있었던지라 그 소리를 잡아 듣자 “저놈을 붇잡으라!” 했다. 그자가 바로 그들이 찾고있는 살인마귀 다나카였던 것이다.    그자는 이렇게 잡히였다. 그는 솔직하게 탄백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자백하는데 의하면 남경이 함락되자 동료 셋은 자기가 갖고있는 군도로 누가 먼저 백명의 목을 자르나 보자는 비기기 시합을 했다는 것이다. 과연 국제헌병팀에서 장악하고있는 자료와 같았다. 다나카는 반년전에 고향인 가고시마현의 초등학교에서 청하기에 자기는 중국에서 싸운 얘기를 한바탕 했거니와 거기를 떠날 때 우연스레 죽지 않고 살아있는 동료 노다를 만난 일까지 토로했던 것이다.      국제헌병은 노다를 붙잡자고 즉시 가고시마에 가서 려관을 잡고는 거리를 빗질 하듯이 훑었다. 그런데 며칠을 애써도 그자를 볼 수 없었다. 나중에 그들은 시멘트포장도로가  끝나는데에 있는 한 가계에서 들렸더니 일용품을 파는자의 용모가 그들이  갖고있는 사진의 인물과 같기에 붙잡으니 바로 그자였던 것이다. 살인마 노다는 그렇게 잡히였다.    둘을 붇잡았으니 이제는 하나 남았다. 그 국제헌병팀은 그자가 알려준대로 서둘러 야마구치 산에 갓고 그곳에 가서는 나무꾼이 알려줘서 한 오두막에서 과연 코대가 퍼렇고 낯이 부은것 같은 토시아키 무카이를 찾아 낸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자칫하면 그자를 노칠번했다. 토시아키 무카이는 중무장을 한 국제헌병들을 보자 창문을 내지르고 밖으로 내뛰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자는 몇발짝 달아나지 못하고 바깥을 지키고있었던 헌병손에 잡히우고 만 것이다.                                                                               1947년12월18일,남경군사법정은 정식으로 법원 세션을 열어 남경 대학살 때 “아즈미(百人斩)”시합을 했던 극악한 살인자들을 심판했다. 살인마귀 다나카는 철같은 증거앞에서 죄를 승인하면서 머리를 숙이였다. 그러나 다른  둘은 자기들이 무고한 남경백서성의 목을 자른 일을 승인하지 않고 떼를 썻다. 그 둘은 국제헌병대에서 이미 증거들을 충족히 장악하고 있으리라고 까지는 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헛짓이였다. 남경대도살이 있은지 10년후에 비로소 끝내 붙잡히여 재판에 오른 그 살인백정들ㅡ  토시아키 무카이, 노다, 다나카 그자들 셋은 반달 후에 처결되였다.  모두가 40살전이였다.                                                                                                                                   세                                        웃사진은 세 살인악마가 처형되는 장면                                                                                                三个人形禽兽遗尸法场。                                      그 외 갑급전쟁범으로 처결된 자들로는 아래 몇이다.   와이드 코키ㅡ 일본의 외무 장관과 총리를 역임,재임기간에 선후하여 화북사변(华北事变), 로구교사변(卢沟桥事变), 남경대학살(南京大屠杀)을 일으켰던 것이다. 극동국제군사재판은 그자를 갑급전범을 인정하여 교수형에 처하였다.   마쓰이 이와네ㅡ 본래는 1937년8월에 상해 파견군사령관이였는데 후에는 일본군 화중방면군 사령관으로 지명되어 그해의 12월에 일본군의 남경점령을 주도하면서 남경대학살을 지휘 한 것이다. 극동군사재판은 그역시 A급전범으로 인정하고 교수형에 처했다. 무토ㅡ 중화파견군 부참모장. 남경대학살에 역시 피할 수 없는 책임자였기에  극동국제군사재판은 그를 A급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하였다.   그 외에도 야나가와 헤이스케와  제10군참모장이였던 고로 하시모토는 감금종신형을 서고받았고 일본의 중화파견군으로서 “짐승군단”이라 소문났던 제6사단장 히사오 역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제10군 사령관 야나가와는 1944년에 병으로 죽었고  재판을 받아야 할 제18사단장 사다오와 제114사단장이였던 시게하루는 행방불명이였다.                                                                                                                                                                                                                                                             자료출처 : 
65    거짓과 탄압에 저항하라 댓글:  조회:2304  추천:0  2015-12-02
                       거짓과 탄압에 저항하라                                       ㅡ 알베르 카뮈, 노벨문학상 수상연설문                                               (1957년10월17일, 스웨덴에서)   노벨상 위원으로부터 이같은 영광스런 상을 수상하게 된 것은 저에게는 무한한 기쁨이며, 감사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특히 이같은 상이 제 개인적인 능력의 범위를 초과하여 주어지는 것이라 여겨져서 더욱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들, 그리고 보다 뛰여난 지성을 소유한 사람들 즉, 모든 예술가들은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물론 저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제 진정한 모습과 저의 이면에 대한 비교없이는, 저는 결코 이같은 결정에 대해 수긍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주 젊은 어떤 사람, 불확실한 부를 소유한 그리고 여전히 그의 일이 진행중이며, 그의 일의 고독함 속에 익숙해져 있고, 모든이들의 호의로부터 떠나있는 그런 한 사람이 있습니다. 홀로 그리고 스스로 조신하기를 바라고 있는 사람에게, 빛의 영광된 광채로 이끄는 포고, 갑자기 날아든 이같은 소식, 그런 소식을 들은 그는 어떻게 어떠한 종류의 공포스런 감정을 갖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더군다나 유럽안의 다른 작가들, 그들 중 가장 위대한 작가들이 침묵하기를 강요당하고, 심지어 동시에 그들의 조국이 끝없는 불행을 겪고있을 때 그는 어떠한 마음으로 이런 영광을 안아야 합니까? 저는 충격과 내부의 혼란을 느낍니다. 제가 가졌던 평화를 되찾기 위해서, 간단히 말씀드리면, 너무나도 풍족한 행운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그리고 제 자신의 성취안에서 단지 안주하며 살 수 있었던 이후로, 제 전생애를 걸쳐 저를 지원해주고 있는 것, 그것은 심지어 가장 불합리한 상황외에는 사실 지금까지 누구도 저를 지원해주진 못했었습니다. 제가 예술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 작가로서의 임무라고 여겨왔던 그 생각, 저는 오늘 그것만을 말씀 드리고자하며, 영광스런 마음과 호의의 감정을 갖고, 할 수 있는한 최대한 간단히 이같은 저의 생각을 피력하고자 합니다.   제 자신의 경우, 저는 예술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예술을 모든 것의 위에 놓은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만약, 반대로, 그것이 필요한 경우란, 예술이 제 동료로부터 분리 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것을 통해 저와같은 사람이, 그들과 같은 위치에 서서 살아갈 수 있음을 예술이 허락하기 때문일 겁니다. 일상의 기쁨과 고통의 특징지워진 심상을 제공함으로써,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고무시틸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그 예술가는 자신을 사회로부터 분리시킬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예술가를 가장 누추하고, 그리고 가장 절실한 진실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번번히 예술가의 운명을 선택한 사람은, 만약 그가 다른사람이 느끼는 것처럼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의 예술도 그리고 그의 차별적인 시선까지도 감수하면서, 곧 그 자신이 다르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술가는 그 자신을 그것없이는 만들 수 없는 미와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그 사회의 중간선상에 자신을 세웁니다. 그와같은 이유로, 진실한 예술가들은 아무것도 꾸짖지 않습니다. 그들은 판결하기보다는 이해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세상을 선택해야 한다면, 그들은 아마도 니체의 위대한 말처럼, 그와같은 사회안에서, 그들이 노동자이건, 지식인이건 간에 마침내는 심판관이 아닌 창조자가 지배하는 사회를 선택할 것입니다.   게다가 작가의 임무는 어려운 의무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명확하게 그는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헌신안에 자신을 놓을 수사 없습니다. 그는 그런 이유로 인해 고통받고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혼자가 되거나 자신의 예술을 빼앗기게 되고 맙니다. 수백만의 병사로 이루어진 독재자의 군대도, 그를 그의 고립으로부터 해방시키지 못할 것이고, 심지어 특별히, 그가 그들에게 동조를 한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한명의 이름없는 죄수의 침묵은ㅡ 세상끝의 이면에서 굴종하기를 거부한ㅡ 작가 자신의 오랜 망명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해내기에 충분하며, 적어도 언제든지, 자유란 특권의 이름으로, 그 침묵을 잊지 않으려 하고, 그리고 그의 예술을 통해서 그것을 알리고 또 울려터지게 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우리중 누구도 그런 일을 해내기에 충분치 못합니다. 그러나 삶의 모든 환경속에서 모호하고, 혹은 일시적인 명성안에서 군주의 무력안에 포위되어서, 혹은 그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자유로운 시간을 얻기 위하여, 그 작가는 그를 정당화하게 해줄 사회공동체의 이념을 획득하기에 이르며, 그와 같은 하나의 상황에서, 그의 작업의 위대함을 구성하는 두가지 일에 대한 그의 능력의 한계를 그는 절실히 깨닫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실에 대한 헌신과 자유에 대한 봉사를 말합니다. 그의 일이란 수많은 사람들의 엄청난 가능성을 하나로 묶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예술은 거짓된 것과 그리고 어디서든지 그들을 지배하려고, 고독을 만들어내는 노예적 태도와는 절대로 타협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나약함이 무엇이건 간에 우리의 지혜의 고귀함이라는 것은, 항상 그대로 지켜내기가 어려운 두가지 책무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명확히 알고 있는 것에 대한 거짓에의 거부와 탄압에대한 저항, 바로 그것입니다.   20년이상 계속된 이 광기의 역사안에서, 희망없는 모든 사람처럼 이 격동의 시대의 나의 세대는 무수히 많은것을 잃어버렸고, 저는 오직 한가지에 의지하여 살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노늘의 시대를 쓴다는 것이 하나의 명예가 되었던 숨겨진 감정일 겁니다. 왜냐하면 그같은 행동이 저 자신에 대한 하나의 약속에 다름아니었기 때문입니다. ㅡ 그리고 그 약속은 오직 쓴다는 행위, 그것만이 아닙니다. 특히, 저의 능력과 저의 상황을 고려하여, 그것은 같은 역사를 헤쳐온 모든 사람들과 함께, 우리가 나누었던 불행과 희망을 생각하며, 동시대의 현실을 참아내기 위한 약속이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태어나서, 히틀러가 힘을 얻을 때 20살에 이르고, 첫 혁명의 시도가 시작되는 것을 목격하며, 스페인내전과 함께 그들의 교육이 완결될즈음, 세계 모든 곳이 전쟁터에 다름아니었던 2차 세계대전을 맞이하고, 고통받는 유럽과 그리고 죄수들ㅡ 그들은 오늘날 핵무기의 파괴력이 위협하는 세상에서 그들의 자식을 양육하며, 그들의 작품을 창조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누구도 저는 그들에게 낙천주의자가 될것을 강요하지 못할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극도의 절망으로 인한 치욕에 대한 복수심과 그 시대에 허무주의로 빠져드는 사람들의 오류까지도ㅡ 어떠한 논쟁없이 ㅡ 우리들이 이해해야 할 거라고 심지어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그리고 나의 조국과 유럽의 모든 나라 사람들은 허무주의를 거부하여 왔고, 정의에 대한 욕구가 아직도 우리곁에 남아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를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의 역사안의 그 일들이 죽음의 본능에 대항하여, 솔직히 싸웠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격동의 시대를 경험한 예술을 그들 자신을 위해서 창조해야만 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각 세대는 의심할바없이 그들의 세계를 개혁하고자 하는 욕구를 느낍니다. 제가 아는바 세계는 개혁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같은 생각자체가 아마도 저는 더 위대한 것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세계를 스스로의 파괴로부터 막아내는 힘에 다름아니기 때문입니다. 부패한 역사를 상속한다는 것, ㅡ 실패한 혁명의 혼란과, 과학기술을 맹신, 신의 죽음, 낡은이념, 중도적인 힘이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확신해야 될지 알지 못하는 곳, 지성이 그것자체로 변질되어, 증오와 외압의 종이 되어 버릴 곳ㅡ 이 세대는 그같은 것 자체의 부정으로부터 시작해서, 삶과 죽음의 존엄성을 이루는 그 조그마한 것 그것안에서 아니면 그것없이라도, 우리는 이 시대를 재건해야 하는 것입니다. 파멸에 의해 위협받고있는 이 세계에서, 우리의 엄중한 재판관들은 영원한 죽음의 왕국을 건립하는데, 위험을 감수하며ㅡ 그래야 된다는 것을 알고서ㅡ 시간을 다투는 이 정신나간 경주안에서, 노예적이지 않는 국가간의 평화를 부활시키고, 다시 노동과 문화를 조화시키며, 그리고 모든 인간들과 함게 인류의 언약의 궤를 다시 짜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세대가 이같이 거대한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러나 벌써, 세계 모든 곳에서 진실과 자유를 향한 두가지의 도전이 일어나고있으며, 만약 필요하다면, 거리낌없이 그것을 위해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도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와같은 일들이 어디에서 일어나건 우리는 그런 움직임들에 환영할만한 가치를 느끼며, 특별히 그것 자체가 희생되고있는 곳을 우리는 눈여겨 보고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여하튼, 노벨상 위원회가 저에게 주신 어떤 종류의 상을 저는 이 세대에 대한 경의로 돌려야 할 것입니다. 동시에, 작가의 작업에 대한 고귀함이 인정된 이후에는, 그는 자신이 있어야 할 적당한 곳에 그를 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함게 싸웠던 동료들과 그의 기쁨을 나누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바램도 없습니다. 비난받을지언정 완강하게, 부조리하지만 정의에 대한 열정으로, 모든 이들의 시선 안에서 수치심이나 자만심없이 그의 일에 열중하며, 슬픔과 아름다움을 분리시키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그리고 마침내는 그 두가지 실존을부터 창조물을 이끌어내기 위한 노력으로, 그는 완강히 이 파괴적인 역사의, 알길없으며 항상 정복당하기 쉽상입니다. 자유는 위태로우며, 우리의 힘든 삶과 함께 할 수 없음을만큼, 흐름안에서, 그것들을 바로세우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이 모든일이 있은 후, 누가 절대의 이념과 지고한 도덕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가? 진실은 신비에 쌓이고 그것은 의기양양합니다. 우리는 이 지난한 길위에서 우리의 실패에 앞서, 고통스럽지만, 단호하게 두가지 목표를 향해 진군해야 합니다. 어떤작가가 지금부터 명석한 의식으로 감히 미덕의 전도자로서 그 자신을 세울 수 있을까요? 제 자신은, 한번 더 말씀드리자면 그러한 종류의 사람이 아닐겁니다. 저는 결코 정의와 인간의 희망, 제가 키워왔던 자유에 대한 의지를 포기한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이같은 동경이 나의 잘못과 나의 결점을 설명해주고는 있지만, 그것은 분명히 나의 작업을 보다 잘 이해시키는 방향으로 저를 도왔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세계속에서 자유로운 행복과 그것의 짧은 복원에 대한 기억만으로 그 자신의 삶을 이어오고 있는 절대다수의 침묵하는 사람들은 의심할바없이 여전히 저 자신을 지금도 돕고있는 것입니다.   그런까닭에 진정한 제 자신을 뒤돌아보고, 저의 한계를 바로 알고, 그리고 제가 가지고있는 채무뿐만 아니라 제 자신의 지켜나가기 어려운 신조 속에서 저는 더욱더 자유로움을 느끼며, 그것안에서, 그 이상 지니고 있는 무게와 저에게 내려진 큰 영광에 대한 보답으로, 같이 투쟁하는 사람들과 이 영광을 공유할 것임을 말씀드리며, 그리고 어떠한 특권으로서 이 상을 받지 않고, 오히려 불행과 박해의 편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을 위한 영예를 위해 이 상을 받을 것임을 분명히 밝혀 둡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모든 진실한 예술가들은 매일매일의 침묵속에서 그 자신을 채찍질 하여 왔으며, 이 성실하며 유구한 약속에 대해 이 상을 수상하기에 앞서, 그들에게 오늘 저는 제 개인적인 감사의 마음을 무한히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알베르 카뮈(1913,11,7~1960,1,4)
64    수도홍위병의 휘황한 략탈성과 댓글:  조회:4361  추천:0  2015-11-30
                    수도홍위병의 휘황한 략탈성과                                                 인민페 4백억원. 황금 백만량.                                                      출처:   【기밀 바다의 역사, 역사의 기밀】“문혁”기간 북경홍위병들의 이른바 레이드(집털이 승리)는 그야말로 매우 놀라운 것이였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6월부터 10초의 기간에 그들이 개인집에 달려들어 략탈한 돈과 공채가 428억원이고 황금이 118.8여만량이였으며 골동품이 1000만개도 더 되였다. 이른바 “계급의 적”이라 하여 끌어 낸 것이 1.66만명이고  “반혁명”안건이 1,700여건. 거기에다 전국적으로 도시에서 쫓아낸 요물잡귀를 합치면 그 수가 3,900만명에 이르는 것이다.   문혁 때 홍위병들의 집털이   다가 알다싶히 “문혁”이 일어나서 얼마안되여 전국적으로 네가지를 타파하는 즉 “퍼쓰쥬” 바람이 불어치기 시작하여 그것이 전국에 퍼졌는바 처음에는 시내에 있는, 사람다니는  가도의 이름을 고치는 것부터 시작하더니 그것이 머리형과 복장을 고치는 것으로, 그 다음에는 “요물잡귀”를 잡아내면서 가택털이를 함으로 하여 막대한 재난을 가져왓던 것이다.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이 잘 모르고있는 것은 그 당시 림표의 지시에 따라서 수도 북경에서는 “홍위병 집털이 승리전시회”를 열었던 그 희한한 행사일 것이다.   인상적인 결과   1966년도 “퍼쓰쥬”가 시작되어 한달사이에 북경시에서 털리운 집이 11.4만호 넘고 쫓겨난 사람이 85,198명이였다. 그 외 다른 도시들인 상해에서는 8월23일부터 9월8일기간에 홍위병들 손에 털리운 집이 84,222호. 천진에서는 9월하순에 1,2만호가 털리웠다. 홍위병들이 략탈한 그 “전과”라는 것이 그야말로 놀라운 것이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그해의 6월부터 10월초까지 홍위병들이 빼앗아 낸 개인의 현금과 공채가 428억원에 달하고 황금이 118,8만량에 달하며 골동품이 1,000여만건에 이르었던 것이다. 이른바 “계급의 적”이라 하여 잡아낸 것이 1,66만명에 “반혁명안건”이 1,700 여 종. “요물잡귀”로 몰려 쫓겨난 사람이 3,900만이 넘는 것이다. 북경시를 보면 1958년에 건국 후 처음으로 되는 문물조사 때 보존된 문물이 6,843곳이였는데 문화혁명기간에 “퍼쓰쥬”바람에 4,922곳이나 파괴되고말았다.      “퍼쓰쥬”운동이 마감에 이르었을 때 림표는 운동성과를 특별이 자랑시키느라 “림반(林办)”의 이름으로 “홍위병 집털이 성과 전람회”를 열어 전국에다 본보기를 보여줬던 것이다. 그때 북경에는 전시회에 대비하여 집털이 물건들을 너은 창고가 여럿되었는데 그 창고안에는 풍우란(冯友兰), 전백찬(翦伯赞), 상월(尚钺) 등 명인들이 수집한 서적(수자를 헤아릴 수 없는 고대의 책과 골동품)들도 빼앗아다 한데 처넣었거니와 지어는 저명한 사학가 상월(尚钺)이 몇십년간을  손에서 놓지 않고 푸채질을 했던 낡은 부채마저 고물품이라 하여 빼앗아 갓다.  문화예술가 이를테면 전한(田汉), 로사(老舍), 소군(萧军), 락빈기(骆宾基), 마련량(马连良), 순혜생(荀慧生)의 집에서 걷어간 개인의 자화(字画)와 예술품들도 한데다 처넣었던 것이다. 림표는 그것들로 1967년2월에 북경에서 를 열었던 것이다.      그들은 전람관을 4개 설치하여 대중에게 전람시켯다. 첫관은 관이고 둘째관은 는 관이며 셋째관은 전람관이고 넷째관은 이라는 전람관이였다. 그 중에서 첫째관과 둘째관은 홍위병운동의 발생, 발전과 이른바 “퍼쓰쥬”운동의 “휘황한 성적”을 전시한 것이였는데 거기에는 현저한 위치에다 섭원재(聂元梓) 등이 쓴 대자보와 모주석의 “나의 첫 번째대자보”가 걸려있었고 비판대상으로 되었던 등척(邓拓), 오함(吴晗), 료말사(廖沫沙)의 “삼가촌”과 “해서의 파직”등 작품과 자료들이 전시되었다. 가장 눈에 띄이는 것이 “홍위병 집털이성과”라는 세 번째 전람관이였는데 거기에는 진귀한 물건들이 많이 전시되고 있었다. 례를 들면 진주보석놀이개, 고물, 옥 에메랄드(玉石翡翠), 다양한 다이아몬드, 보석장식품과 기타 진귀한 보물들이였다. 한 고물전문가는 “홍위병 집털이 성과 전람회”를 세 번이나 와보고서는  감개하여 “과연 값진 보물들이로구나! 내가 이렇게 좋은것들을 처음으로 구경한다!”면서 눈이 번쩍 뜨인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 재간에는 이 전람관에 있는 보물들의 값을 계산하기조차 어렵다고 했다고 한다.      북경의 이 박물관은 1958년에 성립된 원 “사립지인박물관(私立志仁博物馆)”으로서 전시 된 물건중 많은것이 그전의 것이였다. 그 물건들의 소유자가 토로한 것을 보면 도자기유물을 비롯한 300개 이상의 조각과 다양한 종류의 컬렉션을 가지고있었는데 그 중 1급 국보급 수준의 문화 유물 30여개와 2급 국보급 조각문물이 50여개 뿐이였다고 한다. 그 외것은 다가 북경홍위병들이 날강도식의 집털이를 해서 전시회에 나온 것인데 그 중 “아이를 씻어준다”를 비롯한 4세트에 이르는 도자기들은 다가 직경이 30cm였다. 그때 그 하나 값만도 홍콩 시장에서 인민폐로 100만원이였니 그 돈이면 당시 “해방패"트럭을 88대 구입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북경시 선무구(宣武区)의 “총리골목”에는 본래 옛날 총리급인물  6호가 있었는데 홍위병들은 그 집들을 습격하여 털어 낸 명나라 와 청나라 때의 물건만도 17트럭이나 되었다. 그중 3트럭은 도서였다. 그런 집들은 다가 명,청 때의 왕조의 후예였던 것이다. 다른 한 집은 러시아대사를 지낸 고위급 관리여서  해방후 정부의 초청을 받아 국경절에 천안문 성루에 오르기까지 했다. 홍위병들은 그의 집에서 들춰낸 Dingdai꽃 링세(三眼顶戴花翎)는 청나라 정부가 이른바 중국과 인도지간에 국경으로 확정한  “맥크마홍선”의  복제품이였다. 그런것을 깨버렸다. 당년의 중앙 아카이브 기록에 보면 원본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니 그 복제품이 있은것이 얼마나 다행인비 모를 일이다. 유명한 문화 유산 전문가 사수청(史树青)은 그 일을 두고 매우 맹랑하다면서 자기는 그 집을 알고있다는 것이였다. 그는 그 가족이 흩어지지 않고 600년이나 연속 내려왔다는 그 자체가 매우 기적이라면서 가치있는 귀중한 역사적 유물을 가지고있어 좋았는데 불행하게도 “문화혁명”에 그 가족의 역사적 유물시스템이 파괴되었으니 우리는 많은 중요한 역사적 가치있는 유물을 더는 찾을 수 없게됐다고 말했다.   그번의 전시회《수도홍위병의 요물잡귀 집털이 성과 표》에는 아래와 같이 밝혀져 있다. 황금 103131량, 백은 345212량, 현금 55459919원, 문물, 옥기 61361개. 전람이 끝난 후 총기는 경찰에서 가져가고 골드 보석은 금융 부문에서 가져갔으며  전송 골동품들은 박물관을 보냈다. 그때의 포스터(대자보)와 붉은기들은 지금까지도 창고에 처박은대로 무져있다. 아래 왼쪽사진, 문화혁명은 잘못발동된 것이라 지적했다가 혀가 잘리우고 참혹하게 살해된 대바른 장지신.         그누가 바른말을 하면 그누가 잘못되던 저주러운 암흑의 세월.         运动特征 编辑  简介 红卫兵运动是在特定历史条件下产生、发展起来的,它主要是由一群单纯、热血沸腾和政治挂帅的大、中学生组织起来的,随着红卫兵“北上、南下、东征、西进”的大串联如火如荼地展开,红卫兵运动逐渐远离了它的初衷,从而严重地困扰了我国国民经济的发展和正常次序的维护。它的特征具体表现为:  崇拜性 红卫兵对偶像的崇拜,对毛泽东的个人迷信是维系千百万红卫兵的精神纽带,一切传统和现实的社会思想、准则以及一班的社会习俗,都以毛泽东教导为价值判断的标准。因此,无论红卫兵中什么派别、组织都是以对毛泽东的无限忠诚为旗帜的,对毛泽东的个人崇拜不是红卫兵组织的目的,而是红卫兵组织的手段。  破坏性 红卫兵运动最流行的语言是:不破坏一个旧世界,就不能建立一个新世界。红卫兵运动对于物质和精神的破坏是繁杂的、无目的和无序的,他们的破坏涵盖着政治上的冲动、青春期反叛心理的表现和缺乏理性的情绪宣泄。同时,他们对于传统文化的否定,以“破四旧,立四新”去创造一个水晶般纯洁的社会,在对“走资派”、“牛鬼蛇神”进行肉体打击和精神折磨时,他们给未来编造了一幅空幻的蓝图。   空幻性 红卫兵运动具体表现在缺乏理性精神,他们的思想和行为过于情绪化、观念化和绝对化,阶级感情、思想道德被看成是第一位的。红卫兵的幻想一般来说其出发点是好的、是善意的,可惜的是,他们的观念不是以事实为依据,而是被畸形的政治宣传所困惑。他们的绝对化体现为,没有民主的论争与科学的分析,只有绝对的专制和服从。                 文          文革北京红卫兵暴行:40多天竟打死1700余人_   新闻频道_中华                                                                                                                                                                                                                                                                            선택: 컴파일 부터《역사크림(文史精华)》  
63    강생이 꾸며낸 현대문자옥 댓글:  조회:3485  추천:2  2015-11-26
                     강생이 꾸며낸 현대문자옥                               연루자 만여명.  습증훈은 일자리마저 떼우고 검토                                  출처: 중공 뉴스네트워크  작자:무문소(武文笑)      장편소설 을 탈고하기는 20세기60년대초였는데 그 소설은 섬북(陕北)、섬감(陕甘)혁명근거지와 중국공농홍군 제26군의 창건자의 한 사람인 류지단(刘志丹)의 혁명적 생애를 쓴 것이다. 그러나 소설이 출판되기도 전에 강생(康生)은 소설 을 리용하여 중국현대사상 놀랍고도 터무니없는 끔찍스런 문자옥(文字狱)을 꾸며낸 것이다.                용맹한 전사 예기치 않은 전투에서 희생   1932년12월,섬북의 용맹한 전사 류지단(刘志丹)은 홍16군을 정식 설립하고는 1934년에는 또 홍27군을 설립하였는바 선후하여 조금(照金)을 중심으로 한 근거지와 신부(神府)근거지、섬북근거지를 건립했던 것이다. 장기적인 군사투쟁과 실천중에서 영험(靈驗)이 생긴 류지단(刘志丹)의 유격전술은 발휘되고 발전하여 소문이 났다. 그럼으로 하여 류지단은 섬감홍군의 최고지도자로 홍군의 영혼으로 인정 되기에 이르었고 국민당은 두려움을 갖고 지어는 1만원(大洋)의 상금을 내걸고 그를 붙잡자고 한 것이다. 그 당시 이러한 소식을 들은 모택동은 조금도 이상해 하지 않고 가척부(贾拓夫)와 다음과 같이 감탄을 토로한 것이다. “섬북에서 옛날에는 리자성(李自成)이 나더니 오늘은 류지단이 나왔구나! 섬북은 과연 인재가 나는 고장이구나!” @贾拓夫(1912~1967) 8계중공중앙위원. 원 국가계획위원회 부주임, 당조부서기엿다. 1934년~1935년간에 류지단이 이끄는 홍군은 급속히 장대해졌다. 1935년,류지단의 총지휘하에 홍26군과 홍27군은 국민당군 5,6만명의 포위토벌을 분쇄하고 6개 현을 해방했거니와 섬감, 섬북 근거지에다 섬감소비에트 정권을 세우고는 주변에 있는 22개현을 관활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장개석은 부득불 장학량의 대군을 끌어다 그를 대처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것이다.   1935년9월,중앙홍군은 설산을 넘고 초지를 지나면서 천신만고 끝에 간신이  섬북에 이르었다. 그런데 이때 류지단의 운명은 험악했다. 그는 운수사납게 붙잡혀 적의 감방에 갇혓던 것이다. 모택동은 그 형편을 알자 가척부, 왕수도 등을 급속히 와요보(瓦窑堡)에 보내여 그 고장 백성들 속에서 “록림식 수령”으로 높이 칭송되고 있었던 류지단을 속히 구원하게끔 했다. 류지단은 과연 구원되었다. 그가 풀려나오자 모택동은 그에게 자기가 방금 새로 일떠세운 홍28군의 지휘를 맡겼던 것이다.     1936년2월,류지단은 명령대로 부대를 거느리고 황하를 건너 산서에 가서  하북과 열하전선에서 일본군과 맡붙어 싸울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의 부대는 분하(汾河)류역에서 장개석과 염석산의 습격에 들어 그만 불행스레 희생되고 만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가 32세였다. 류지단은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그번 싸움에서도 지휘를 잘했길래 홍군은 그 여세로 두달내에 18개의 현이나 점령 할 수 있은 것이다.   류지단이 희생 된 후 모택동은 “군중의 령수, 민족의 영웅”이라는 제사를 썻고 주은래는 “상하 오천년에 영웅이 수천만이건만 인민의 영웅은 류지단이다”라고 제사를 썻다. 미국기자 스노는 자기가 쓴 에 그를 “현대의 협객” 이라면서 “악과 악의 세력에 채찍을 안긴 중국의 로빈한”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류지단의 유체는 섬북의 와요보에 묻혓고 중국의 홍색소비에트는 그곳을 지단현으로 명명하여 길이 길이 전해지면서 기념하고 있다. 공산당과 인민은 민족영웅인 그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1956년에 공인출판사에서는 류지단의 일생전기로 되는 장편소설 을 펴내기로 계획하고는 류지단의 동생 류경범(刘景范)의 처 리건동(李建彤)에게 그것의 집필을 맡겼던 것이다. 리건동은 처음에는 주저하면서 손을 감히 대지 못하다가 출판사에서 협조해 주리라 고무하니 그제야 신심이 생겨 그것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리건동(李建彤)은 일찍이 연안에 있을 때부터 비록 짧기는 하지만 류지단의 휘황한 영웅생에 대한 얘기를 들어 얼마간 알았기에 결국은 마음먹고 출판사의 요구에 응하여 나선 것이다. 영웅의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 그는 우선 그 당시의 사람들을 기회만 있으면 많이 방문하여 자료들을 충족히 모았다. 그러고나서는 옹근 6년간 붙박혀 소설을 썻던 것이다. 그 기간 그는 여섯 번이나 수개를 거쳐 마침내 장편소설 을 탈고했다.   그런데 1962년 봄, 그녀가 작품이 다 완성되었으니 그것을 이제는 세상에다 홍보 하려고 준비를 할 때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일이 생길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그녀가 쓴 장편 은 “반당소설”이라는 것이였다. 그야말로 날벼락이였다. 그 일은 한 인물과 많이 관계되였으니 그 인물인즉은  염홍언(阎红彦)이라는 사람이였다. 그역시 용감히 싸워 공훈메달을 탄 이름난 장군으로서 류지단과 함께 서북홍군과 서북근거지를 창건했었기에 1955년에 상장군함(上将军衔)을 받은 것이다. 그 당시 그는 운남성위 제1서기에다 곤명부대 제1정위와 중공서남국 서기처 서기로 있었다. 염홍언(阎红彦)은 그 소설이 원칙성문제가 있거니와 역사와 맞지 않는다는 것이였다. 사실 을 쓰면서 류경범(刘景范)과 리건동은 여러 방면의 의견을 청취했거니와 염홍언(阎红彦)이 서북에서 간부를 오래지낸 경력이 있으니까 원고를 한번 봐달라고 그한테 청을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염홍언(阎红彦)은 원고를 대충보고서는 리건동에게 편지로 “사실을 가지고 류지단과 기타 동지들을 회억하게끔 하니 교육적 가치가 있는 좋은 일이다. 그런데 네가 쓴 을 몇 편 읽어봤는데 실상은 이것이 소설형식을 빌어서 서북의 혁명투쟁력사를 쓴것이다. 그러나 허다한 것이 원칙문제와 관련이 되는 것이다. 어떤것은 중앙이 결론을 내려야만 될 일이다. 그래서 사정과 부합되지 않으니 너의 이 글은 발표 할 수 없다.”라고 했다.   염홍언(阎红彦)이 편지에서 말한 “허다한 원칙성 문제”란 바로 이른바 당사에서 의논이 되고있은 “서북역사문제”였던 것이다. 중앙홍군이 장정하여 섬북에 이르기 전에 류지단을 대표로 한 그곳의 공산당 사람들은 서북지구에서 그야말로 장쾌한 서사시다운 투쟁으로 섬감근거지를 건립했던 것이다. 한데 그것을 놓고 당사를 연구하고 만드는 사람들끼리 다년간 의견이 같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 즉. 1962년도 여름과 가을지간에 염홍언(阎红彦)은 북대하에서 열린 회의기간에 뜻밖에도 장편소설 을 이미 에서 련재하고있다는 소식을 알게되었던 것이다. 그는 그 소식을 듣자 즉시 전국총공회와 공청단중앙 책임자들에게 소설련재를 당장 중지 할 것을 제기했다.   그리하여 8월5일에《공인일보》는 련재를 중지했다. 8월17일,염홍언은 양상곤(杨尚昆)에게 편지했다. 그리고는 9월3일에는 서기처에다도 한통썻는데 그는 편제에 쓰기를 “내가 보기에는 소설 은 내용이 류지단을 선전한다는 명의를 빌어 고강(高岗)이 변구의 고급간부회의와 7대전후의 서북역사좌담회에서 서북혁명수령은 자기였다고 조작했던 역사를 옳은것으로 긍정하고 있다” 고 고발했다. 그러면서 염홍언은 또 편지에다 소설에 등장하는 역사인물들의 대조표를 만들어 넣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자료들을 렬거하면서 소설에 나오는 인물 중 허종(许钟)인즉 바로 습증훈(习仲勋)이고 라염(罗炎)은 고강(高岗)이라 했다.   한편 강생은 그 소설을 보지도 않고 모택동에게 쪽지를 써서 넘기였다.  염홍언이 왜서 이 일을 강생에게 일러바쳤는지 그것은 모를 일이다.      염홍언이 쓴 편지를 받은 강생은 소설을 읽어보지도 않고 마치 흥분제 주사라도 맞은 것 같이 들떠갖고 결론을 내렷다. “이것은 단순히 문예로만 볼것이 아니라 정치경향이 있는 것이다. 바로 모택동사상을 표절한 것이다.” 라는 죄명을 만들어 모택동에게 올리 받쳤다.   사실 보면 섬북근거지는 중공중앙과 련계가 끊어진 상황에서 류지단이 실천중에서 무장투쟁으로 홍군과 농촌근거지를 건립함으로서 한갈래의 정강산과 같은 길을 걸은것이다. 하건만 그랬다고 그것은 류지단이 모택동의 사상을 “표절”했다는 “죄”를 만들어 씌운것이였다. “소설에서 섬감소비에트를 좋게 그린것은 즉 다시말해 중앙소비에트와 맛선것이다.”느니 “소설에 등장한 어떤 젊은 간부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습중훈이다.”느니 “그가 당권을 찬탈하게 하느라 정치자본을 만든 것이다.”느니 하면서 강생은 그 소설은 완전히 “고강을 위해 번안한것”이라고 트집잡았다. 그리고는 중선부(中宣部)와 각종 간물에 이 소설을 련재하는 것을 정지하라고  명령하면서 공인출판사에서는 중앙회의에서 심사하게끔 5차 수개고를 책으로 600부 찍고 4차수개고는 300부 찍어 올려보내라고 지시를 했던 것이다.   국제정세가 험악한데다 건국 후 일부 지도자들 간에 모순이 있음으로 하여 “계급투쟁”코드가 이루어 지면서 분위기는 사뭇 긴장해졌다. 하기에 모택동은 중공 제8계10중전회를 열고는 계급모순과 계급투쟁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한 것이다. 강생은 쪽지에다 “소설을 리용하여 반당활동을 하는것은 한갓 큰 발명이다.”라고 써서 모택동에게 주었고 그것이 결국은 모택동의 어록으로까지 된 것이다. 후에 모택동은 “소설을 리용하여 반당활동을 한다”는 어록은 강생이 발명한 것이라 공개했다. 모택동은 회의에서 그 쪽지에 씌여진 글을 읽고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권을 뒤짚자면 우선먼저 여론을 일으켜야 한다. 의식을 돌려야 하니까말이다. 혁명적 계급이 그렇게 하거니와 반혁명적 계급도 역시 그렇게 하고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이어진 것은 무자비한 탄압이었다. 모택동의 지지를 받은 강생은 힘을 냈다. 그의 작간에 의하여 습중훈(习仲勋), 가척부(贾拓夫), 류경범(刘景范) 등은 소설 의 막후 선동자라 질책을 받았다. 허무하기 짝이 없는 일이였다.  중앙에서는 20명으로 조성된, 강생이 지휘하는, “습중훈 등 반당활동 심의위원회”를 내오고서는 잇따라서 “습(仲勋), 가(拓夫), 류(景范) 반당집단”이라는 것을 조작해 냈던 것이다. 1962년부터 1966년에 이르는 사이 서북5개성의 간부들이 련류되여 심사를 받았거니와 지어는 억울하게도 반당집단성원으로 몰리기 까지 한 것이다.    습중훈은 마석오(马锡五)를 찾아 역사를 핵실했고 리건동(李建彤)을 찾아서는 형세가 좋지 않으니 주의하라 일깨워줫다.      일찌기 1959년도에 리건동은 소설 제3차 수개고를 습중훈에게 보내여 그를 심열하게끔 요청한바있은 것이다. 마침 로산회의가 시작된지 얼마안되거니와 반우경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기에 정치기분은 아주 긴장한 상태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소설원고를 읽어 본 습중훈은 리건동보고 자기 생각에는 소설을 장편으로 폭이 크게 쓰느라 말고 단편으로 쓰는게 더 낳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장편으로 써내기로 작심하고 거의 다 써낸 리건동이였으니 그의 제의를 선선히 받아드릴리 만무였다.        1961년 봄이 지나 여름철에 접어 들 때 습중훈은 제4차수개고를 받았다. 수개고를 받아 본 습중훈은 선후 두차례 리건동, 마석오와 공인출판사 편집 둘을 모여놓고 좌담회를 열었다. 습중훈이 마석오로인을 참여시킨것은 소설에서 구사되고있는 이야기중 사실과 맞지 않은 부분이 있으면 작자 리건동에게 알려주겠끔 하자는 데서였다. 그때 승증훈은 명백히 자신의 주견을 말했다. “이 소설을 쓰는 목적이 주요하게 젊은이들을 교육하자는 것이다.” “모택동사상” “류지단이 생애가 모택동사상의 전형이 될 것이다” 그리했건만 강생은 1962년8월24일에 양상공(杨尚昆)에게 서기처에서 이 문제를 처리하라고 지령적인 편지를 했던 것이다.  리건동은 그제야 자기가 쓴 소설이 큰 말썽거리가 되었음을 알게되였다. 그는 9월6일에 자기가 쓴 소설에 등장한 몇몇 인물의 출처에 대해서 해석했다. “소설에 나오는 몇이 실명이고 그 외는 다가 가명이다. 소설자료는 각방면으로 조사하고 모은 것으로서 이야기는 소설기법에 따라 허구하여 낸 것이다. 례를 들것 같으면 허종(许钟)은 본명 그대로인 그를 쓴 것으로서 지방에서 사업한 그를 대표적인 소비에트주석으로 부각한 것이다. 소재들은 기본상 조사해서 실증 된 것인바 습중훈동지에 관한 어떤 부분은 위남기의(渭南起义) 때의 중앙 군사위원회 사무총장을 지낸 이와 함께 쓴 것이다. 자기가 쓰는 것이 순수한 인물전기를 만들자는게 아니고 그 소재를 가지고 소설을 만들자는 것인지라 리건동은 창작기법상 허구를 하기가 마련이였다. 지협적인 보통인물 하나만을 원명으로 하고는 그 외는 다가 가명인 것이다.  그런데도 소설 이같이 무고한 사람들이 말아먹을줄이야 어찌알았으랴! 조사해 보니 으로 인한 문자옥에 말려든 사람이 근 1만여명에 이른 것이다! 1966년5월, 강생은 “소설에서 찍어 말하지는 않았어도 이 소설은 너무나 크게 외곡되였다”면서 그당시 서북근거지의 지위와 작용이 “모택동사상을 류지단사상으로 고쳐버렸다”고 덤터기를 씌운 것이다. 그러면서 강생은 소설 을 쓴것은 습중훈반당집단이 여론을 조성하느라 언영부터 계책을 꾸민 것이라면서 습중훈이 의 첫 번째 인물이고 류경범이 둘째인물인데 필자는 류건동이라고 했다.    소설 의 첫째 죄는 “역사를 위조”하여 섬감을 중국혁명의 “중심”으로 하고 “정통”으로 만들자 한 것이고 둘째 죄는 “모택동사상을 류지단사상으로 고쳐 전당을 지휘하는 사상으로 하자고 꾀한 것”이고 셋째 죄는 “류지단을 모택동보다 더 영명한 예언자”로 만든 것이고 넷째 죄는 소설중의 인물인 라염과 허종은 고강과 습중훈이니 고강을 번안하고 습중훈이 당권을 잡게끔 올리추고 불어댄 것이라 했다.    문화대혁명이 터지자 안건은 승급했다. 충격을 맨먼저 받은 사람은 습중훈이였다. 그는 하루밤새에 부총리에서 나떨어져 직무를 잃었거니와 외지에 하방하여 어느 한 공장에서 막일을 했거니와 16년이나 심사를 끊임없이 받고 8년간이나 감옥에 갇혀 괴롭게 지낸 것이다. 원 국가경제위원회 주임이였던 가척부는 언영 철직되여 북경교구에 있는 한 감옥에 갇혔다가 문화혁명이 오니 1967년5월7일 박해를 받아 거기서 죽고말았다. 1967년12월, 리건동은 안범(案犯)이라 하여 잡히여서는 1970년4월에 습중훈반당집단이 소설로 반당활동을 하게끔 리용된 골간분자라는 모자를 썻다. 그러고도 내내지하실에 갇혔다가 1970년에 당적을 긁히우고 로동개조를 했다.   1968년5월, 류경범은 자백을 강요하니 되려 강생의 믿그루를 뒤졌다가 반혁명으로 몰려 붙잡혀 10년을 옥살이했다. 1974년12월21일, 모택동이 친히 이 안건은 조사한지 오라니 이제는 더 할 필요가 없겠다고 하여 탄압을 더 하지 않고 그만둿다. 그러나 류경범은 감옥에서 나와갖고도 의연히 추궁대상이 되었다. 그는 “사인방”이 분쇄된 후에도 “고강을 번안했다”는 죄를 의연히 뒤집어썼다.     원 공인출판사 사장 고려생(高丽生)은 혹독한 고문에 질려 그만 죽고말았다. 그리고 소설의 책임편집 하가동(何家栋)은 농촌에 쫒겨갔는데 그의 어머니와 두 아들은 빈곤과 질병에 사망하고말았다.    문화혁명기간에 섬북의 지단현에는 대자보가 나붙었는데 류지단과 류경범은 다가 “반역자”라 모욕했거니와 국민당이 마사버렷던 것을 수리한 보안(지단)기념당이 홍위병들 손에 다시한번  습격받아 거덜이 낫거니와 모택동, 주은래, 주덕 등의 기념패마저도 부서지고 말았다.  그리고 류지단의 가족들은 제 고장에서 살지 못하고 다른 농촌으로 쫓겨났던 것이다. 소설안건이 “팽(팽덕회), 고(고강), 습(습중훈)반당집단”이던것이 나중에는 더 승급하여 그것이“서북반단집단”으로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서북의 대부분 국장이상 간부 수백명이 말려들었다. 그들뿐이 아니였다. 장정을 했던 사람도, 지어는 1962년에 그 안건을 심사했던 간부마저도 불행을 면치 못했다. 섬감녕 로구(老区)의 기층간부와 군중마저 수만명이 팽, 고, 습반당집단의 사람으로 몰렸거니와 지어 류동화에게 길을 안내해 줬던 사람중 왕열현(王悦贤)과 류경화(刘景华)같은 사람은 매를 맞아 죽었다. 그같이 리건동이 소설자료를 수집하느라 나다닐 때 길을 서준 사람마저도 걸려들었으니 그 수자를 다 합치면 만명도 넘은 것이다.                                                   부총리였던 습중훈이 일자리를 띄우고  돌림투쟁을 받던 날.     그로부터 17년후 소설 은 마침내 루명을 벗고 출판되었다. “4인방”이 분쇄되자 대량의 조사연구를 한 기초에서 1979년6월에 중앙조직부에서는 을 평판할 보고서를 올렷던 것이다. 보고서는 “이 안건을 보면 이른바 소설을 리용하여 반당할동을 했다는데 그것은 강생이 만들어 낸 틀리고 잘못된 안건인 것이다. ‘문화대혁명’을 하면서 강생과 그 한무리였던 ‘사인방’은 수없이 많은 사람이 연루되는 문자옥(文字狱)을 만든 것이다. 으로 인하여 박해받은 이들의 루명을 벗겨 억울함을 풀어줘야 마땅하거니와 명예를 회복시켜줘야 한다.”라고 했다. 이 보고서를 접수한 중앙은 한달후에 시행명령을 내렸다. 그야말로 모진 우여곡적을 겪은 소설 이 1979년에 공인출판사에 의하여 햇볕을 보게 되었으니 류지단이 희생되여 63년만이다.                                                      현대문자옥을 조작한 모택동의 졸개 강생                                                                                                    康生(1898年-1975年12月16日),原名张宗可,字少卿,曾用名赵溶、张溶,乳名张旺,笔名鲁赤水,中国山东胶南县(今属山东青岛市黄岛区)人,胶南名门之后,曹汶张氏后人。曾经担任中共中央政治局常委、中共中央副主席、全国人大常委会副委员长、全国政协副主席等职务。发动"文化大革命"的主要成员之一,林彪、江青反革命集团主犯。 康生1925年加入中国共产党。在革命战争年代,他长期领导秘密战线工作;1966年后,与林彪、江青等相互勾结,是发动文革的主要成员之一;1975年12月16日在北京病逝。1980年,中共中央开除其党籍,撤销悼词;其骨灰被迁出八宝山革命公墓,后被划为林彪、江青反革命集团的主要成员之一。 康生出生于书香世家,由于受到家族薰陶,幼年时代便开始接触文艺作品,因此擅长中国传统书法、中国画及收藏,其艺术造诣曾被指为是众多中共领导中最为优秀者之一。                                                                                원문출처《복건당사월간》                 관련글 : 전체보기에서 (218), 에세이 지천이 공노할 대원안(호풍집단안건)                                                        김송죽 번역     
62    짐바브웨 "못생긴 사람" 비기기 미운 대회 댓글:  조회:2591  추천:1  2015-11-23
                               짐바브웨 "못생긴 사람" 비기기 미운 대회     출처: 신화웹버전 2015년11월22일   베이징 신화소식. 어제(11월22일),한해에 한번씩 열리군 하는 짐바브웨 “못생긴 사람”을 비기는 “미운 대회”가 하룻밤 결승전을 했는데 42세 나는 무직업자 메이슨 세레이이가 “썩은 이빨”을 드러내 우승했다. 시합은 짐바브웨 수도 하라레의 한 클럽에서 개최했다. 결과 치아가 몇 대 석어빠진데다 조끼마저 초라한 것을 입은 메이슨 세레이가 다른 참가자 다섯을 물리치고 500달러의 상금을 탄 것이다. 그런데 전에 세 차례나 우승을 했던 윌리엄·마스웨누와 그의 지지자들이 저항해 나서면서 지어 는 작은 규모의 난투까지 벌어짐으로 하여 이번시합은 예상외로 분위기가 흐려졌던 것이다.   우승자 메이슨 세레이는 경기 후 현장에서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내가 이전의 게임에서는 단지 4등을 했으나 이번에는 1등을 했으니 이 타이틀을 얻을 수 있게끔 기회를 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겠습니다. 물론, 나를 승리하게끔 해준 심사위원에도 감사드구요!”   여러차나 왕관을 썻던 윌리엄·마스웨누가 이번에는 2등을 하여 상금 100달러를 탓다. 그러나 그는 게임 결과에 대해서 오히려 불만하여 “나는 지지 않을것인데 졋으니 심사가 불공정하다. 응당 심판을 다시해야한다.”고 항의를 했던 것이다.   신화 국제 클라이언트 료해에 따르면 짐바브웨 못생긴 대회 스폰서(赞助)는 당지의 기업가인 데이비드 마우와가 하고있는데 그는 세계에 미인시합이 있을라니 추물시합이 없어서야 어디 되겠느냐면서 2012년부터 이 시합을 조직하고있는데 유별난 재미와 웃음으로 인기를 모으고있는 것으로 알려지고있다고 한다. 조직자 데이비드 마우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런 이벤트로 단지 추악한것만이 아닌 인간의 아름다운 본성도 함께  보여주자는 것이 목적이다. 약간의 마찰이 있긴했어도 이번 시합은 성공적이였다. 장차 이 프로그램을 세계적 행사로 차려 볼 생각이다.”                                                                                       올해 우승을 따낸 메이슨 세레의 추악한한 몰골과 자태                                    추악한 몰골비기기 미운 대회에 세 차례 나 수상한 윌리엄(오른쪽)이 배우함께。                           (사진 쑤린꾸이, 편집 양애화. 신화통신 국제 클라이언트 보도)                                      
61    모친을 살해한 자를 절대용서말라 댓글:  조회:3664  추천:0  2015-11-22
                                           한 홍위병의 참회                           모친을 살해한 자를 절대용서말라                                                                                      베이징 변호사 장홍병(张红兵)                                          장홍병(张紅兵), 원명 장철부(张铁夫). 올해 나이 61세. 1970년도였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이름을 빨간색으로 고치니 마뜩잖아서 너 왜 그러느냐 하면서 집에서 모택동이 류소기와 같이 혁명을 하고서도 이제와서 그를 타도하는건 옳지 않은 일이라고 그가 문화대혁명을 발동한데 대해서 불만스러운 말을 했던 것이다. 그런다고 장홍병은 “엄마는 반혁명”이라 하면서 고발하여 장홍병의 어머니 팡충모는 두달갇혔다가 총살당하고 말았다.  장홍병은 점차 자라나면서 몇 년동안 마음상 고통스럽기 그지없었다. 내가 왜 그같이 철없는 짓을 했던가? 후회가 막심한 그는 잔혹했던 지난세월의 역사를 돌이켜 회상하고 참회하는 심정에서 지난일을 세상에다 이같이 공개는 것이다.   올해 나이 61세인 장홍병은 8월2일,고향 안휘방부오하현에서 열린 청문회에서 자신의 “역사적상처”를 다음과 같이 공개했다. “45년전이니 문화혁명이 한창이던 때였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자 철부(铁夫)를 제멋대로 홍병(红兵)이라 고쳐지은 그해 내 나이는 16살이였는데 어머니를 비난하는 편지 한통을 써서 그것을 홍위병배지(红卫兵胸章)와 함께 당지의 군사대표가 든 기숙사 문쯤에다 끼워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나를 낳아 길러준 어머니를 반동이라 고발 한 것이였다. 나는 그 고발신에다 어머니 방충모(方忠谋)는 집에서 자기는 류소기를 지지한다면서 모택동이 문화혁명을 일으킨것은 틀린다고 했다. 어머니가 그러는 것을 아버지도 들었다. 나의 아버지는 성명이 장월생(张月生)인데 나와같이 어머니를 반동이라 했다. 그날 밤이였다. 내가 동생, 아버지와 같이 집에 있었는데 외삼촌(올해 66세)이 왔다가 이 일을 알고는 너가 왜 그렇게 철없이 덤비느냐고 나무랏다. 그러자 나는 두고봐요, 이제 아예 누나마저 고발할테야 했다. 누나도  문화대혁명에 대한 태도가 어머니와 같았던 것이다. 외삼촌은 그렇게 말없이 화목하던 한 가정이 이제 화를 당하겟으니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느냐 하면서  안달아했다. 나의 어머니 방충모는 그날로 붙잡혀가서 두달갇혔다가 “현행반혁명”이라 판결되여 총살당하고 말았다.”    장홍병의 외삼촌이며 금년에 66세인 방매개는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억했다. “분쟁이 있은 그날 밤이였다. 장홍병은 제 아버지와 같이 한편이 되어 제 어머니와 견해가 같고 립장이 같은 제 누나마저 고발하여 검찰이 와서 당장 잡아가게 하리라 했다. 매우 불안했다. 나는 그들이 스스로 재화를 입을 그따위 머저리짓은 제발 하지 말라고 설득하다가 안되겠길래 거기를 뛸쳐나와 도와줄 사람을 찾느라 헤맸다.... 방충모는 두달갇혔다가 끝내 ‘현행반혁명’이라 판결이 내려 총살되고 만 것이다.”   10년후인 1980년7월23일에 안휘숙현지구 중원지구 법원은 원래의 판결이 잘못되였으니 고친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이미 죽은 사람을 되살려내지도 못하는 것이니 그야말로 원통하기 그지없는 일이였다. 제 어머니를 그같이 죽게 만든 장홍빈은 후회막급했거니와 어떻게 하면 속죄가 될지 내내 후회와 반성과 고통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다 그는 2011년9월에 안휘의 구전현당국을 찾아가 제 모친의 모를 “피해자유물”로 정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유관부문에서는 그렇게 하기는 어려운 일이라 했다. 답복인즉은 그의 제의가 유물에 관한 국가규제와 요건에 부합되지 않기때문이라는 것이였다.    다른 별 방법없은 장홍문은 지난해 8월에 청문회에 나서서 다시한번 자아 참회를 했다. 그래서라도 담은 얼마간 속죄를 하자는 심정이였다. 그가 말했다. “나는 제 어머니를 죽인 불효자입니다. 나를 반면교재로 삼아주시오. 그같은 역사비극이 이 땅에서 다시생기지 말아야 합니다. 영원히 다시생기지 말아야 합니다.”  이에 기자가 그한테 물엇다. “당신은 어떻게 되어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아마 2009년도일겁니다. 나는 온라인을 보았는데 어떤 사람은 ‘문화대혁명은 좋았다’면서 또 했으면 좋겠고 하길래 ‘정신나간 놈’이라 욕했습니다. 그같은 혁명은 죄악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자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 “당신은 그당시 아버지와 같이 어머니를 고발하자했다며?”  장홍병은 다음과 간이 말했다. “우리 집도 다른 여늬 집과 마찬가지로 본래는 아주 따뜻하고 화목했습니다. 저의 아버지가 투쟁맞던 날 어머니가 나서서 ‘요원도우, 뿌요 우도우!’하고 고함치며서 자기 몸으로 주먹질을 막아 아버지를 보호했던 겁니다. 그날 투쟁대회가 끊나자 어머님은 아버지를 부축하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나의 부모님들이 그같이 정깊은줄을 전에는 미처몰랐던 겁니다.”  그의 부친 장월승(张月升)은 그당시 고진현위생과 과장(固镇县卫生科科长)이여서 “문혁”초기에 끌려나와 투쟁받은 것이다.      “부부간 그같이 정이 깊었건만 아버지가 어머니를 반동이라며 일러바치겠다고 했단말이지?” “그렇습니다. 시대가 그러했으니까요. 그때는 사람들의 의식과 사회동향이 그러했던 겁니다.”  “사회동향이 암만그렇다해도 제 어머니를 목숨잃게 할 정도까지야?” “그렇습니다. 나는 ‘모친살인죄’를 졋으니 용서못받을 불효자입니다. 지금도 똑똑히 기억됩니다. 때는 1970년2월13일이였습니다. 우리 집 식솔들은 ‘문혁’을 놓고 가정변론을 했던 겁니다. 그날 어머님은 국가령도자가 자기에 대한 개인숭배를 하게끔 하는것은 맞지 않는다면서 ‘류소기는 참 좋은 사람이다, 나는 류소기를 위해 번안하겠다’라고 했던겁니다. 나는 그의 그런 말에  정말 크게 충격받았습니다. 그 순간부터 나의 심목중의 어머니 형상은 완전히 변해버리고 만 겁니다. 나의 어머니인 것이 아니라 계급의 적으로 보여졌던 겁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비판투쟁해야겠다고 맘을 먹은 겁니다. 아버지도 이제부터 너하고는 견결히 계선을 갈라야겠다면서 그보고 네가 방금 내뿜은 그 독설들을 네절로 전부 쓰라고 했던 겁니다. 어머니는 하라는대로 한 장 썻습니다. 아버지는 그것을 들고 문을 나가서면서 이제 당장 고발하리라 했습니다.”  “아버지가 이미 고발하러 갔는데 당신은 왜 갓는가?” 기자의 이 물음에 장홍빈은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나는 아버지가 다른 궁리를 할가봐 걱정한 겁니다. 말할것 같으면 어머니와는 감정이 깊거니와 또한 가정을 돌봐야 할 사람도 있어야 하니까 어머니를 용서해줄것 같아서 말입니다. 나는 나 자신은 그래도 혁명립장이 견정하다는 것을 보여주느라고 검거신(检举信)을 쓴겁니다. 그래서는 그것을 홍위병배지(红卫兵胸章)와 함께 군대표가 들어있는 숙사의 문쯤에다 끼워넣고 돌아왔던 겁니다. 그 후 내가 집에 돌아와서입니다. 군대표와 민병패장이 들어오더니 어머니를 발로 차놓으면서 땅에 무릎을 꿇라했습니다. 그리고는 번들만두처럼 포승줄로 그를 묶는 것이였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데 어머니가 묶이울 때 어깨 목에서 듣기끔찍스런 소리까지 났습니다.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날벼락’이였습니다.”  “제 어머니를 고발하면서 후과가 어떠하리라는건 그래 생각지 않았단 말인가?” “생각은 했습니다. 아버지가 고자질하고 돌아와서 어머니와 너같은 년을 총살해서야 아까울게 없는줄을 알겠지?”합디다. 그리고는 이어서 어머니를 향해 이렇게 말했던 겁니다. “내가 적발신 끝에다 썻다. ‘방충모를 총살하라!’ 라고 말이다.” 기자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 “당신은 그래 어머니가 잡혀가는 것을 보면서 후회되지도 않던가?” 이에 장홍병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정작 그때를 당하니까 머리가 복잡해졌습니다. 그러나 후회되지는 않았습니다. 가정에서 한바탕 계급투쟁을 했다는 생각에다 나와 아버지는 립장이 견정했다고 여긴 것 뿐 다른 생각은 더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과연 한심했지. 그때는 강제된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형식’에 얽매이다보니 인간의 선한 양심이란 그같이 다 잃어가며 사는 세월이였던 겁니다.” “당신이 제 어머니를 고자질하니 주위의 사람들은 어떻게 보던가?” “그당시 나의 부모님과 가까이 지낸 아저씨가 한분 있었는데 나보고 ‘너의 어머니가 집에서 한 말을 나가서는 하지 않았겠지, 너나 너의 아버니나 그렇게는 처사하지야 말아야 한다. 아무럼 어찌?....’ 하고 핑잔하는 것이였습니다. 주위의 사람 다들 의아해 하면서도 그 문제를 놓고 공개적으로 변론은 하지 않은것 같습디다.”     “제 립장을 지키느라 어머니와 계선을 갈랐다 그거겠지?”  “그때는 그랬습니다. 표면상 내 거동이 사리 없고 순 고상한 행위같아보였겠지만 기실은 립장이 견정한 혁명자로 표현함으로써 제 자신을 보호하자는 것이였습니다. 정치적인 연기를 한거지요. 그렇게 하면 앞길이 잘 풀릴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도 생각대로 되지 않은겁니다. 내나 내 동생이나 다 고중을 못갓거니와 군대에도 나가지 못하고 어느 공장에도 못들어가고 결국은 ‘하향지식청년’이 되어 촌에 가서 농사일이나 해야하는 신세가 되고말았던 겁니다. 후ㅡ 어쩌면 어머니는 꿈에마저 한번도 나타나지 않지. 나타나면 한마디 속죄라도 하련만 그때는....” “당신생각에는 그 일이 자기 생활에 어떤 영향이 미쳤다고 여기는가?” “사인방이 분쇄되니 나는 그네들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었건만 어쩐지 불안하면서 극도의 공포를 느꼈던 겁니다. 그래서 한동안 나는 우울증이 심했던 겁니다. 세상 모든 것이 귀찮아졌습니다. 다른 사람과 접촉하기 싫어지면서 자신을 완전히 폐쇄상태에 빠지게 했던겁니다. 그것은 공포스러운 것이였습니다.” “어떤 종류에 드는 공포였는가?” “나는 토지개혁때를 생각했습니다. 반혁명진압이였는데 외할아버지가 반혁명으로 몰려 총살되였던 겁니다. 나는 어머니가 그의 피를 이어받았길래 반혁명이 된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역시 어머님의 영향으로 반혁명이 될가봐 무서워났던 겁니다. 내 머릿속에 어느때 어머니와 같은 정치견해가 생길까봐 말입니다. 다시말해 유전되면 어쩌나 하구말입니다.” “당신은 어머니에 대한 꿈을 꿔받는가?” “꿧습니다. 후에는 여러번이나 꿧습니다. 어머니는 사형전 젊었을 때의 모습그대로였습니다. 나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어머니는 두손으로 나를 부추켜 세우고는 홀연히 사라지는 것이였습니다. 나는 ‘어머니 이 불효자는 어머님께 빕니다!’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래도 어머님은 못들은 척 아무응대없이 사라집디다. 번번히 그같이 말입니다. 나는 그것이 어머님이 나에 대한 징벌이라는 것을 알고있습니다.”     “그래 눈물이 안나던가?” “왜 안나겠습니까. 눈물을 숱해흘렷습니다. 어떤 때는 목놓아 울기도했습니다. 제발 용서해달라구 빌면서 말입니다. 어떤 때는 밤에, 어떤 때는 낮에.....그러기를 얼만지..... 작은 이모와 외삼촌을 볼때마다 죄책감에 가슴이 미여지는 것 같아 고개도 바로들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어머님을 다시금 평판해달라고 신소자료를 쓰면서도 그저 자신을 죽도록 원망했습니다. 너는 제 어머니를 죽게 했으니 짐승보다 못한 놈이라고 자신을 저주하면서.” “그래 이제는 어쩔 예산인가?” “나는 응당 남들이 침을 뱉는 반면교재로 돼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은 어느때부터 생긴건가?” “어머님이 정작 돌아가시니 내 가슴은 무너졌습니다. 나는 그만 고통속에 빠지고 말았던 겁니다. 이 몇십년간 어느 하루도 자신을 원망하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세상에 나같은 불효자식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1979년도에 형식상 공개반성을 했습니다. 관방에서 장지신(张志新)의 죽음에 대해서 반성한 것을 내가 신문에서 봤던겁니다. 그때 나와 아버지는 우리도 정말 잘못했다는 것을 통절히 느꼈던 겁니다.”  “당신이 이제와서 공개반성하면 남들이 어떻게 보겠는가? 그걸 생각했는가?” “내집사람과 친척, 친구들도 이해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보고 반성을 그렇게 한들 이제 무슨소용이 있는가구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나를 욕하고 저주하는 이메일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고도 낮짝 들고 다니느냐, 살아서는 뭘하는가고 하면서 차라리 어머니 무덤에 가 엎어져 자살하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어머님의 무덤을 유물로 하고푼 생각은 어떻게 생겼는지?” “지난세기 80년대 작가 파금(巴金)선생께서 문혁박물관(文革博物馆)을 세우자는 제안을 내놓은바있습니다. 이 땅에서 문화혁명과 같은 우매한 재난이 이제 다시 생겨서는 절대 안된다면서 자라나는 후대들에 대한 교육을 위해서도 그것은 마땅하고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도 그분의 제안이 옳고 정당하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그의 제안이 빈말이 되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문혁박물관(文革博物馆)은 아무 때던 세워야 합니다. 나는 나 자신을 세상사람다가 침을 뱉고 타매하는 반면교재로 삼아주기를 바랍니다. 정말입니다.                                                         (据《新京报》)   장홍병 어린시절 가족사진. 오른쪽 둘째 장홍빈. 오른쪽 세 번째 아버지 장월승,왼쪽 둘째, 어머니 팡충모.                                                                                     출처 : 허난 비즈니스 데일리 (정주)    文革期间,国家各职能部门都处于不同程度的混乱状态,真实的死亡数据难于统计。 有国外科学家依据国内出版的县志等资料,计算出1966-1971年间中国农村地区 有50万到200万人被迫害致死。 这个数据很小。R.J.Rummel教授在其专著《一百年血淋淋的中国》中则认为, 文革丧生者约为773万人。 1980年邓小平对意大利女记者法拉奇说:“永远也统计不了,因为死的原因各种各样, 中国又是那样广大,总之,人死了很多”。 中共中央党史研究室合编的《建国以来历史政治运动事实》给出的文革数据则是: “420余万人被关押审查;172万8000余人死亡;13万5000人被以反革命罪处决; 武斗死亡23万7000人;703万人伤残;7万1200余家庭整个被毁”。 1978年12月13日,叶剑英在中共中央工作会议闭幕式上说:文革期间, 全国整了1亿人,死了2000万人,浪费了8000亿人民币。 经多方报道分析与研判,较接近实际的文革中非正常死亡人数约在4、5百万。    
60    없애치워야 할 '공산국가'        댓글:  조회:7358  추천:7  2015-11-18
                                                              없애치워야 할 "공산국가"          1975년4월17일, 크메르루즈는 론놀정부를 축출하고는 그날을 소위 "첫 해"시작라 선포했다. 하지만 그것이 캄보디아백성들에게는 뼈속에 잊어질수 없는 저주의 날이기도 했다. 크메르루즈의 지도자 폴포트가 실행한 것은 “대중은 인식 할 수 없다”는 우민정책이였다. 그가 내놓은 1호명령이였던 그 전쟁에 대처한다는 구실로 도시주민들을 속이고 농촌에다 내 몬 것부터 그러했다. 크메르루즈의 도시를 비우는 그 결정은 2개월 전부터 꾸며진 것이였는데 고위간부들 다가 기밀을 엄격히 지키다보니 쥐도 새도 몰랐던 것이다.   그들은 미국군이 프놈펜을 폭격하리라 거짓말을 한 것이다. 3일지나면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니 그 누구나 짐을 가지지 말고 떠나야 한다고 했다. 군인들의 강제적인 위협이였다. 하여 푸놈펜 시민들은 다가 재산을 그대로 놔두고 세세대대로 살아오던 도시를 시급히 떠나야만했다. 폴포트가 그네들을 철저한 무산자로 만드는 술법이 그러했다. 하여 “동방의 파리”라 불리였던 푸놈펜은 순식간에 죽은 유령의 도시로 변하고 만 것이다. 그날부터였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어리석고 암매하기 그지없는 심연의 나락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그들이 공산주의로 간다는 길이 그러했다.   중무장을 한 크메르루즈 병사들이 출동하여 도시주민들을 강제로 농촌에 쫓아버림으로서 이른바 농업부터 공산주의를 실현한다고 했다. 그해의 9월, 전국의 모든 도시주민들이 그모양으로 도시를 떠나 논촌에 갓으니 그야말로 세상을 웃기는 폴포트가 창조한 크메르루즈 공산당의 어리석고 야만스런 유토피아계획이였던 것이다. 어떤데서는 한달가량의 먼길을 걸어야 했다. 그러다보니 로약자는 목적지에 이르지도 못하고 중도에서 지쳐죽는 현상이 빈발했다. 게다가 목적지에 도착 하면 다른데로는 가려니 궁리도말고 그곳에다 발을 붙이고 붙밖혀 영원히 원시적인 부대농사를 지어야 했다. 그러다보니 순식간에 사유제가 금지된 캄보디아는 공업이 없어지고 상품거래가 허락되지 않고 화페류통이 없어지고 심지어 원시적 인 물물 교환 거래마저도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폴포트의 계획에 의한 2백만의 이주ㅡ 그 위대하다는 마이그레이션(大迁移)은 사전에 물질적인 아무런 준비도 없었기에 결과는 수십만명에 이르는 백성이 목숨을 잃는 사망비극을 초래한 것이다.                                                        판결받은 어린 죄인 들                 폴포트은 정권을 잡아서부터 근 4년간의 피비린 통치를 하면서 10년아니면 15년내에 국가가 현대화를 실현하리라 했다. 그러자면 먼저 도시사람들을 농민으로 개조시켜야 한다는 리론이였다. 크메르루즈의 백성들을 “구인(旧人)”과 “신인(新人)”으로 나누어 사상개조를 시키고 지식분자, 승려, 기술자, 상인, 도시사람은 다가 사상을 개조를 하여 새사람으로 다시태여나야 한다고 하면서 각 부분들에서는 재등록을 하게했다. 그러면서 본인의 역사를 밝히게 했다. 그래놓고서는 무릇 랑놀집정 때 복무한 사람이면 몰잡아 새정권에 불만을 품은 자, 지주, 부농, 나쁜자라느니 프놈펜을 떠나기 실어했던 자였다느니 죄명을 씌워 모조리 죽이였다. 그 뒤를 이은것은 계급대오정리였다. 아이템(有产者), 소유자, 부르주아 지식인, 선생, 의사와 기타 다른 전문가는 다가 무산계급이 아니라면서 정리해야 한다고 했다. 지어는 안경을 건 사람마저도 가만두지 않은 것이다. 그 다음에 이어진 것은 종족과 종교에 대한 박해였는데 지어는 그 누구건 외국어를 알아도 그것을 죽을 죄로 취급됐다. 모든 종교신앙을 금지시켰고 모든 교회와 사원을 문을 닫게 하거나 파괴했다. 그러면서 불교를 믿는 사람은 세속 생활로 돌아가라고 강박했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였다. 또한 반체제 인사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보통사람마저도 약간만 의심스러우면 베트남이나 소련 스파이로 의심하거나 몰거나 아니면 미국특무라 의심하면서  발광적으로 도살했는데 지어는 보복이 무서워 피해자의 가족 대부분을 전멸한 것이다.   크메르 루즈는 지식을 죄악으로 취급했다. 그리하여 학교를 없애고 도서인쇄를 금지시켰다. 노래를 불러도 혁명노래만 불러야 하고 혁명춤을 춰야했다. 전통무용 드라마가 금지되였고 서방문화가 전파되는 것을 엄금했다. 국민의 이동자유마저도 없었다. 전국적으로 우전국이 없어지고 병원마저도 없애버렸다. 그런것은 자산계급사회의 흔적이라했다. 전체 국민을 “구인(旧人)”과 “신인(新人)”으로 갈라서 감독하고 관제를 했거니와 배불리 먹이지도 않고 강도 높은 일을 시켰던 것이다. 개조대상에 대해서는 농사일을 배우라 강요하면서 배수로를 파게 했고 노동 할당량을 정해주어 매일 열몇시간을 고역에 시달리게 했거니와 밤이 되어도 쉬지 못하게 회의를 하거나 아니면 학습을 시켰던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 애써 지은 알곡마저도 몽땅 바치게 했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그기간에 1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일에 지치고 굶어서 병에 걸려 죽은 것이다.   크메르루즈가 집정한 3년 8개월 20일기간의 공포는 그 정도가 세상에 전례없는 것이였다. 1976년 여름, 줄곧 막후에서 조정하던 폴포트가 정부총리로 되었다. 그는 크메르루즈 공산당이 병에 걸렸길래 고쳐야겠다면서 친월분자, 가께보간첩, 미국중앙정보국특무, 당내에 기어든 이기분자를 잡아야 한다는 이름을 내걸고 내부 청산을 했는데 1975년10월에 선포한 민족전선의 지도자 13명중에서  내무부장과 두명의 상무부장, 신문선전부장, 국가주석단제1부주임 등 다섯이나 처결되였던 것이다. 주요 지역들에서 군사와 정치지도자들이 처결된 것이 더 많았다. 제일 집중된 한차례는 1978년 친월파라 여겨진다면서 감행한 동부대군구의 간부와 군인에 대한 숙청과 따목이 책임진  서남군구에 대한 대숙청이였는데 그 한번에 근 10만명에 이르는 무고한 사람을 도살한 것이다.  이미 언급한 바지만 S—21킬링필드(杀戮场)를 보면, 주로 심문과 고문이였는데 혹독하기가 세상 그 어도 비길수 없이 잔악했다. 그 한곳에서 처결된 것만도 2만명. 지난세기 80년대초에 S—21근처에서 9천여구의 시체를 파냈다. 그 외 다른 곳에도 아직 시체를 발굴할 구덩이들이 많은 것이다. 죽은이들을 보면 크메르루즈가 탄알을 절약하느라 거의가 몽둥이나 도끼아니면 철뭉치로 머리를 쳐 죽었기에 대골마다에 그 흔적이 그대로 있는 것이다. 1976년1월에 캄보디아는 새헌법을 내오면서 국명을 민주캄보디아로 고친다고 선포했다. 그해의 4월에 시아누크는 핍박에 의해 퇴직하고는 가택연금을 당했다. 그의 자녀 친척 12명은 “신인”으로 취급되어 지방에 내려가 노동개조를 했는데 지금은 다가  행방불명이다.                                                          자기의 경전을 가르키는 모택동. 사진에서 중간인물이 모택동의 학생 살인악마   폴보트.                                                   (燕妮摘自))   》                           下面这几张是钻取脑浆的照片!                                                     波尔布特的大屠杀告诉了我们什么                                           毛泽东与波尔布特 2008年4月,北京出版的《炎黄春秋》与广州出版的《同舟共进》的第四期分别发表了有关波尔布特的文章,前者的题目为《波尔布特:并不遥远的教训》,后者的题目是《又见〈红色高棉〉》。 这两篇文章在同一个月发表,是巧合,还是特殊内涵,值得深思!波尔布特在柬埔寨当政的年代(1975春到1978年底,历时三年另八个月),犯下了罄竹难书的滔天罪行。波尔布特早已臭名昭著,遭世人唾骂,被钉在历史耻辱柱上。在我国的杂志上历数他的罪行,没有任何实际意义。但为什么还要联系中国实际来做文章,这就是两位作者的良苦用心之所在。 两文都比较长,这里只摘编其中有关值得反思的内容。为了醒目一些,小标题是笔者写的,但其主要内容则引自两文。   《波尔布特罪行馆》与“文革博物馆” 在今天柬埔寨首都金边建立了一座《波尔布特罪行馆》,后一篇文章的作者在陈述参观“罪行馆”之后,提出如下的沉重反思: “曾经遭受‘文革’浩劫的中国已经以改革开放的态势高歌猛进,但至今没有建立可以公开开放的‘文革博物馆’。首倡其议的巴金老人已经作古,他那颗燃烧着痛苦的心,未能安息下来吧。而这,并不仅仅是巴金老人的梦与痛!” 不言而喻,作者的观点是极其显明的。写本文的意图在于促进中国人民期盼已久的“文革博物馆”能尽快建立起来!可是到目前为止,还停留在“忌谈文革”的状态,似乎让我们子孙后代永远忘记这一在神州大地曾经付出了极其惨痛的、血淋淋的局面,无疑这是十分可悲的! 为什么在柬埔寨能够建立“波尔布特罪行馆”,而在中国就不敢建立“文革博物馆”?何况又不是什么“毛泽东罪行馆”,究竟怕什么?我作为一个有良知的老共产党员(解放前在地下入党的党员)怎么也无法理解! 描述:“红色高棉杀人场”(Choeung Ek)是柬埔寨最著名的旅游景点之一,也承载了无数民众的痛苦记忆。杀人场地处柬埔寨首府金边以南约15公里,又被称作“钟屋”,是所有柬埔寨“屠宰场” 中最著名的一个。在红色高棉政权统治时期,有大约17,000人在这里被处死。如今,“钟屋”被建成一座纪念馆,以一座佛塔为标志。这座佛塔用树脂玻璃构造,里面陈放着大约5,000个左右的头骨,佛塔底部几层向参观者开放毛泽东盛赞波尔布特 在前一篇文章中,作者提供两个有关重要情节。一是: “在中国无产阶级文化大革命的时刻,他(指波氏)又来到中国,这一次毛泽东接见了他,亲授‘无产阶级专政下继续革命’的理论,并向他推荐姚文元写于1974年的两篇受他激赏的文章——《论对资产阶级的全面专政》和《论林彪反党集团的社会基础》。…… 另一是: “1975年6月—8月,在中国已经病重的周恩来在医院三次会见波尔布特,苦口婆心地劝告他们不能这样做,共产主义不是一朝一夕就能成就的,而毛泽东却盛赞:‘你们做到了我们想做而没有做到的事情。’ 波尔布特因此而骄傲地宣称: “全世界的革命者都可以从柬埔寨学到很多经验。” “你们做到了我们想做而没有做到的事情”,毛泽东这一句话倒是一句大实话,波尔布特在柬埔寨所作所为,正是他灵魂深处想追求的目标,可惜没有能够做到,对毛泽东来说,是留下了遗憾。从这一角度看,中国人民也算是万幸的。 应该说:毛泽东与波尔布特属于同类。这才是事物的本来面貌。   中共与柬共达成的一份充满血腥的协议 在前一篇文章中,作者透露了至今极为绝密的出卖侨胞的罪行史料,读后令人痛心、愤慨,这是我党奇耻大辱!现摘录原文如下: “在波尔布特大屠杀的年代中,柬埔寨的华侨和越侨遭受了比柬埔寨人民更大的苦难。……柬埔寨的华人在1975年红色高棉上台之初大约有60万,而在1979年暴政结束时只剩下了30万。朗诺政变之初,中国大使馆曾通知华侨干部去‘解放区’参加柬埔寨革命,组织关系留待中柬两党日后协商解决。一千多侨干和男女青年慷慨激昂奔向‘解放区’,加入柬人民抗美斗争。实际上,柬共并不欢迎这些华侨干部,因此北京方面决定并宣布:中国共产党和柬埔寨共产党已经取得协议,决定将柬埔寨华运组织的全体成员移交给柬共。也就是说,柬埔寨的华侨、华人今后将由柬共掌控。所以红色高棉干部经常对华侨、华人说:‘中共已经把你们全交给我们了!’而红色高棉掌握政权后立即开始宣传,‘华侨都是资产阶级,有史以来都是吸柬埔寨人血的。’……在1975年4月金边大疏散的200多万人中有大约40万华侨。那时他们根本不可能向祖国的大使馆求救。澳大利亚国立大学柬埔寨问题专家爱德华兹说:‘波尔布特梦想建立的是以柬埔寨农民为主导的社会主义,华人在种族和意识上都不符合这一模式而成为整肃的对象。到了1976年,柬共内的华侨干部被屠杀殆尽。” 从上述摘录的史料中,我们可以清晰地看到:究竟是谁让波尔布特胆敢如此肆无忌惮地残害我们的侨胞?是中共最高决策者毛泽东! 中共与柬共签订的出卖华人的协议,如果没有毛泽东授权是根本不可能的。在国内毛泽东自认为“做不到的事情”,现在由波尔布特在柬埔寨代劳了。 在上述文章中,还提到一个在国际外交史上的可怜又可笑的闹剧。现摘录供欣赏如下: “在越军入侵过程中还出现了一件在古今中外的外交史上都算得上是匪夷所思的事情。中国大使馆在大使迅刚的带领下居然追随波尔布特残部退入柬埔寨西部原始森林,在越军的追击下连续多日行军,并在雨中睡觉。后来在森林里搭起三间草屋作为临时‘大使馆’,靠吃象肉和野生动物为生,坚守外交岗位47天,七个人差点饿死和病死(摘自 2005年1月15日《扬子晚报》)” 毛泽东与波尔布特称得上是一对难兄难弟,但这一外交史上的奇特现象,是发生在1979年的初春,也就是说发生在毛泽东去世后的二年半的时间里,虽然已经步入改革开放的年代,怎么还会出现这一不可思议的蠢事、怪事!这是不是说明毛泽东的幽灵不散! 迟到的正义。2009年2月17日,由联合国和柬埔寨共同组建的红色高棉特别法庭在金边开庭。 人类史上只有不得已的战争而没有不得已的大屠杀,即使如此,柬埔寨的大屠杀也超出了人类正常思维的底线,其性质使所有史学家至今难下定义。就连英文词汇Genocide(有计划的灭种和屠杀)也不准确,因为它既不是种族间的,也不是地域间的,既不是利益间的,也不是宗教间的,甚至都算不上意识形态间的。因为除了波尔布特临终前的谵妄——“我没有屠杀,我只是在战斗”,至今也没有什么理论或者著作来说明或解释它。 人们只能说这是一个疯子在向全人类挑战,向人性的底线挑战。这是一场向着毁灭人类也毁灭自己的黑暗高歌猛进的种族自杀。这样反人类、反人道、反文明、反理性的类似癌细胞一样的政治产物居然出现在离我们并不遥远,甚至可以说非常接近的20世纪70年代,这令所有研究人类野蛮行为、人类大屠杀事件和柬埔寨问题的专家至今都迷惑不解。 迟到的正义。2009年2月17日,由联合国和柬埔寨共同组建的红色高棉特别法庭在金边开庭。                                结束语 在波尔布特执政的短短3年8个月时间里柬埔寨人口骤减了三分之一(《国际统计年鉴》1995年版),这在历史上是没有先例的,红色高棉在夺取政权之后迅速达到完全丧失理性的颠峰。 在速度上,它超过斯大林的肃反; 在广泛性上超过中国的文化大革命; 在残暴和野蛮的程度上超过希特勒纳粹, 在毁国毁民的程度上超过非洲的卢旺达; 在死亡人数和国民人口相对值上它创造了世界纪录。 相关阅读 关键词:西哈努克 波尔 布特 毛泽东 中国  与西哈努克相伴的恶魔波尔布特(之一 牛虻) 消灭全国1/4人口的波尔布特自称"良心是清白的" 佛国血魔--波尔布特其人其事(转载) 佛国血魔---波尔布特 从媒体对波尔布特的"审判"看主流意识 波尔布特:救世梦幻的破灭 波尔布特15岁前曾被柬埔寨王室宫女淫乱(图)(转载 。
59    삼십년 늦어진 판결 댓글:  조회:6245  추천:1  2015-11-10
삼십년 늦어진 판결        웃사진 왼쪽부터 첫두목  폴포트,  세째두목  잉싸리,  둘째두목  눙세.  아래 머리흰 사람은    전 크메르루즈 국가주석 쵸센판                                                一场迟到了30多年的正义审判   波尔布特在柬埔寨推行了一条比中国的“文化大革命”更为左倾的路线。这场被柬共领导人称为“前无古人”的“高棉革命”,给柬埔寨带来了灾难性的后果。【发表评论】 他们正与时间赛跑 2007年11月,由联合国和柬埔寨组建的红色高棉特别法庭开庭,此前已有五位前红色高棉领导人被收押候审,并被以反人类罪起诉。尽管首次开审的只是柬版盖世太保、S-21监狱负责人康克由的保释申请,尽管法庭在技术和政治问题上还存在很多争议,但对柬埔寨人而言,这场迟到了三十多年的正义审判实在不能再耽搁了,他们必须与时间赛跑,才赶得上耄耋之年的被审判者们奔往坟墓的速度。 柬埔寨撕开历史伤口 柬埔寨政府此前一直反对设立这个得到联合国支持的“种族灭绝罪行国际法庭”,但在国际社会的一再坚持下,特别法庭在经过近10年的谈判和拖延后终于进入了工作状态。泰国曼谷的一名华人学者说:“对于所有留意这个东南亚苦难小国的人来说,法庭呈现给他们的将是一段苦痛的历史,一串令人悲伤的故事。” “至今没有一个人为当时的暴行受到惩罚” “然而,至今没有一个人为当时的暴行受到惩罚。”曼谷的一名华人学者说,“柬埔寨只搞过两个做样子的审判,在红色高棉原领导人波尔布特和外长英萨利缺席的情况下,宣判了他们的死刑。”波尔布特于1998年死亡后,投诚的英萨利和乔森潘等红色高棉领导人至今仍然不受惩罚地生活在柬埔寨。除他们外,还有一些当年红色恐怖的制造者自由地生活着,因为他们获得了大赦。今天,他们中的大多数已经垂垂老矣,有些已经自然入土。 艰难的审判 一个众所周知的情况是:尽管后来都已经放弃,但是红色高棉当时受过美国和中国的支持,而后两者先后都有过与越南为敌的经历。红色高棉的兴起和“民主柬埔寨”政权的建立,正值中国史无前例的“文化大革命”时期;而在1980年代,流亡在密林间的红色高棉竟然作为合法的柬埔寨政府得到了美国的承认,并且可以保持在联合国的席位。 那些恐怖的回忆和往事总是令人心潮难平 人们似乎都在急于忘记过去,但那些恐怖的回忆和往事总是令人心潮难平。曼谷的一名华人学者说:“在外界看来,罪恶明显的这场历史大审判迟迟才能开幕,自然要引来许多思考,甚至非议。”                                                                                      四十年兴亡路 农村包围城市的又一成功实践 1962 年柬共总书记杜斯木神秘失踪,波尔布特继任。从此,“留法派”成为柬埔寨革命的领导核心。六十年代初的柬埔寨,还算是歌舞升平,国泰民安,但绝不允许共产党组织存在。1963 年5 月,波尔布特、宋成、英萨利等被迫逃入磅湛丛林,在农村进行革命宣传。 要“一举建成共产主义”带来的灾难 红色高棉宣布要在十到十五年内使国家实现现代化。把柬变成一个农业社会后,它着手推广原在解放区实行的合作社制度。取消货币和市场,实行按需分配和全民供给制。男女老少集体劳动,大修水利,平整土地。所有人在公共食堂集体就餐,过时不候。柬埔寨原是个鱼米之乡,但因粮食产量逐年下降,人们只能勉强喝上稀粥。 在14年抗越战争中重整旗鼓 四下逃散的红色高棉官兵渐渐聚集起来。他们整编军队,在西北和西南山区建立根据地,进行有组织的武装抵抗斗争。丛林游击战是艰苦的,但他们对此比建设国家更有经验。1981 年后民柬国民军逐渐恢复了元气,摆脱被动防御。越军旱季进攻,国民军雨季出击。越军在边境围剿,国民军则分散进入内地打游击,开辟新的根据地。民柬是抗越战争的主力。 战略失策和内部分裂导致衰亡 在政府的军事压力和政治攻势下,红色高棉内部思想混乱,官兵厌战思乡,开始逃离。对此,强硬派领导人始终没有制定切合实际的对策。波尔布特对外迷恋军事斗争的魔力——的确,民柬军队能征惯战,政府军的围剿常常是损兵折将,无功而返;对内他坚持抗美时期的做法,反对自由经济和私有财产,强化他的绝对领导,清除不同意见者,结果激起内变。                                                                                                      大屠杀:以革命的名义 资料图:柬埔寨特别战争罪法庭判处两名前红色高棉领导人终身监禁。    农谢   他曾经是红色高棉的中央委员会副书记,民主柬埔寨全国人民代表大会委员长,是红色高棉“二号人物”。 农谢1925年生于柬埔寨马德望省一个富有家庭,年轻时在曼谷修读法律。他是柬红色高棉的创始人之一。1975年到1979年波尔布特当政时期,农谢出任柬埔寨全国人民代表大会委员长,农谢一直是波尔布特的亲密战友,人称“二哥”。1998年,他向柬埔寨政府投降后获特赦。但是,特别法庭拒绝遵守这一决定。                                             乔森潘   1985年,乔森潘在名义上取代波尔布特,成为红色高棉最高领导人。1991年,柬埔寨内战各方签订《巴黎和平协议》。其后,乔森潘与农谢、塔莫克等人共同组成了九人委员会,夺取了波尔布特的军权,并在1997年对其进行了公审。次年,乔森潘和农谢宣布向柬埔寨政府投降,正式结束了红色高棉的武装斗争。  40—300万人死亡 一般认为,100万是一个可以接受的估计。然而对於一个当时人口在700万到800万之间的小国来说,即使100万也是一个难以想像的数字,它远远超出了许多国家在新政权建立后的政治清算和镇压的规模,因此法国学者拉古特(JeanLacouture)把柬埔寨的这段历史称为“自我灭绝的屠杀”(auto genocide)。 构成大屠杀的因素 柬埔寨在1975-79这四年中之所以会出现如此规模的杀戮,是由以下几个因素形成的:大规模的强制性人口迁移;政治清算和镇压;高强度的体力劳动;内部清洗。 超过列宁和毛泽东:红色高棉的目标 当1975年9月份一些在国外学习的柬埔寨知识份子回国时,看到的口号是“组织胜过了列宁,超过了毛泽东”。负责接待他们的高级干部对他们介绍说,柬革命的特殊性就是撤空城市和废除货币。他说:毛泽东说文化大革命还要进行多次,但是后来停下来了,而我们每天在搞。 以大屠杀为代价的社会重构 除了把“反革命份子”从总人口中清除出去,红色高棉独一无二的政策是公开把柬埔寨人口划分成享有不同权利部分。在掌握政权后,它把原来生活在红色高棉控制下的乡村农民称为“旧人”或“根据地人”,意为他们已经参加了革命,那些由城里遣散下乡的称为“新人”或“4月17日人”,意为在红色高棉进城后被接收的人。 红色高棉:20世纪革命史上的地位 红色高棉无疑属於二十世纪共产主义革命这条线索,但却是这个革命的极端时期——俄国革命到1930年代末为止,中国革命到1970年代末为止,和古巴革命到1960年代末为止——的继承。本来这三次革命的社会重构就有一个加速度的趋势,一个比一个早,一个比一个快,一个比一个激进。而红色高棉则是它们的缩微版和强化版。                   크메르루즈 시대의 지도자들 西哈努克:我愿意出庭受审 1998年4月16日波尔布特因心脏病发作在柬埔寨北部柬泰边境地区去世。当年在中国影响下与柬共合作抗美,并且支持过波氏政权的柬埔寨国王西哈努克说:波氏的去世是使人民感到宽慰的事情。他说,波尔布特之死结束了柬现代史上最恐怖的一章。翌年他又宣布:如果国际法庭审判红色高棉领袖,他愿意放弃自己在宪法上,以及皇家身份所享有的豁免权,出庭受审。 毛泽东:“柬埔寨万岁!” 在天安门城楼上,林彪宣读了毛泽东的《五·二○声明》,西哈努克发表了讲话。会上,西哈努克情绪高昂,先后用华语喊了十几次“毛主席万岁!”毛泽东也说:“柬埔寨万岁!西哈努克亲王万岁!” 1974年4月2日:毛泽东会见乔森潘、英萨利 当英萨利解释说“在中国和越南援助下进行的柬埔寨革命,具有自己的特点。我们的革命包括所有的社会阶层,即不排斥任何阶层。我们有一切理由把大家团结起来,而没有理由排斥一个阶层”时,毛指出:“要排斥朗诺集团,要团结两位亲王。我赞成你们的方针。”并要乔森潘与英萨利直说自己是代表共产党的,不要吞吞吐吐的。 陈伯达、张春桥给波尔布特讲述“中国的革命理论与实践” 早在1965年11月波尔布特就曾到中国进行访问,并一直逗留到次年的2月。这时正是毛酝酿和发动“文革”时期。在此期间,波尔布特会见了邓小平和彭真等一些政治局委员,虽然没有见到毛,但是陈伯达、张春桥等人给他讲述了“中国的革命理论和实践”,特别是“枪杆子里面出政权”、阶级斗争、无产阶级专政、无产阶级国际主义等理论和经验。 1975年6月21日:毛泽东会见波尔布特 毛同波尔布特热烈握手,波尔布特激动地表示:我们今天能在这里会见伟大领袖毛主席,感到非常愉快!毛谈道:你们的作战、战争、政治、军事、经济、外交、统一战线,我不谈了。并指着邓小平说,我赞成他的,他说你们是正确的。 一条比中国“文革”更左的道路 事实上,波尔布特在毛泽东等中国领导人的赞许与鼓励下,推行了一条比中国的“文化大革命”更为左倾的路线。这场被柬共领导人称为“前无古人”的“高棉革命”,给柬埔寨带来了灾难性的后果。    西哈努克、波尔布特以及中国                                                            红色高棉的恐怖执政 2008年05月02日 08:39:31  来源:今晚报 【字号 大 中 小】 【留言】 【打印】 【关闭】   【Email推荐: 】    1975년4월17일, 크메르 루즈는 론놀 정부를 축출하고는 소위 "첫해"개시라 했다. 하지만 이날이 캄보디아 사람들에게는 잊을 수없는 고통스러운 날이기도 했다. 크메르루즈의 령도자 폴포트가 실시한 것이란 “대중은 인식 할 수 없는 반 계몽주의” 즉 우민정책(愚民政策)이였던 것이다.   그 당 역시 공산주의를 신앙했으나 캄보디아의 집정당으로 있은 1975년부터 1979년초에 이르는 허무하기 짝이 없는 극좌의 정책을 실시함으로 하여 백성들에게 이루형언키 어려운 재난을 덮씨워 천추에 용납못할 무서운 죄를 진 악당인 것이다. 그 자들은 캄보디야에 민주정권을 건립한다고 부르짖었는데 3년8개월간 국가를 지배하는 기간에 기근과 과로, 질병과 박해로 인해서 40만 300명 이상이 사망되였는바 20세기 최대규모의 인공재해로 인정되였다. 그런 재해말고도 크메르 루즈의 통치기간 대도살에 목숨을 잃은자가 300만이상이니 전체인구의 약 1/5을 차지하는 것이다. 하여 근대의 인류역사상에 악명기록을 낸 것이다.   크메르루즈의 공산당은 거짓말을 너무나도 험하게 잘한 전형이다. 폴포트가 도시의 주민들을 농촌에 내 몬 제1호명령부터 그러했다.  그리고 모든 클래스(계급)의 차별이 없는 국가로 만들것이라 장담하고 내린 정책을 보라.       1). 통화(货币), 종교를 페지한다. 2). 사유 재산은 몰수한다. 3). 도시생활을 없애고 가족을 분리시킨다. 4). 은행을 청산하고 학교, 병원, 공장, 사원을 없애버린다. 5). 도서 인쇄와 출판을 금지한다. 6). 오직 혁명 노래만을 불러야 하고 혁명춤을 추며 혁명복장을 입어야지        서양문화를 전파해서는 안된다.  7). 상인, 교사, 률사, 의사, 승려는 모두 없애버린다.  8). 도시생활은 자본주의식이기에 시민들을 모두 집단농장에 보내여 농사일      을 해야 한다. 등등.   그야말로 우매하고 야만스럽기 그지없는 공산주의였다.  1975年4月17日,红色高棉扳倒了朗诺政府,开始了所谓的“元年”。而这一天,却是柬埔寨人刻骨铭心难以忘却的日子。红色高棉的领导人波尔布特,实行“民可使由之,不可使知之”的愚民政策。他发出一号命令,以战备为借口把城市居民遣散出城。这项决定是在红色高棉进城前两个月作出的,但他们对相当高级的干部都严加保密,并   且欺骗老百姓说美国人要轰炸金边,谁也不准留下,不准携带行李,用不着带出城市的东西,三天之内就可以回家。在士兵的强行驱赶威吓之下,四天之内,所有金边人被迫离开了世世代代居住的家园,放弃所有财产,成为彻头彻尾的无产者。素有“东方巴黎”之称、并有两百万人口的金边,数日之内就成了死寂的空城。正是从这一天开始,柬埔寨的百姓开始陷入水深火热且极其荒谬的处境之中。     红色高棉的军人荷枪实弹,强迫城市居民迁往乡下改造,实践所谓的农业乌托邦计划。同年9月,全国所有城镇的人口被全部迁出。而大部分的金边人没有料到,此次的离开,竟是一条不归之路。体弱的人还没到达目的地,就病死在去乡村的长达一个月的徒步跋涉中。有幸到达目的地的,一落脚便开始了刀耕火种的日子。眨眼间,柬埔寨禁止私有制,没有工业,不准商品买卖,不准货币流通,连以物易物的原始交易方式也不允许,而波尔布特策划的这次两百万人的大迁移,事先毫无物质准备,直接导致几十万人的死亡。     波尔布特掌权之后,开始了长达四年的血腥统治,并宣布要在十到十五年内使国家实现现代化。首先要把每一个城里人改造成农民。红色高棉把人分为“旧人”和“新人”。“旧人”是攻克金边前已在解放区的人口,主要是农民。“新人”则是旧政权的军政人员、知识分子、僧侣、技术工人、商人、城市居民,“新人”必须通过改造才能新生。每位新人必须重新登记,交代以前的历史。凡在朗诺政权服务过的人、对新政权不满者、地富反坏、不愿自动离开金边者,一律格杀勿论。接着是清理阶级队伍,有产者、业主、资产阶级知识分子、教师、医生及其他专业人士都不是无产阶级,属于清理之列,连戴眼镜的人也不放过。然后是种族和宗教迫害,会说外语也是死罪。禁止所有的宗教信仰,关闭或摧毁所有的教堂和庙宇,佛教徒被迫还俗。除了整肃党内异己,普通百姓以越南或苏联间谍、美国特务等罪名遭疯狂屠杀,大多数遇难者全家都被斩尽杀绝。     红色高棉视知识为罪恶,不设正规学校,禁用书籍和印刷品。只准唱革命歌、跳革命舞,取缔传统歌舞戏剧,严禁西方文化传播。人们不能自由流动。全国没有邮政电信,也没有医院。“新人”在“旧人”的监督和管制下,食不果腹地从事超强度的体力劳动,他们被迫学习农活,种地修渠,为了完成规定的劳动限额,白天必须在田里干十几个小时活,晚上还要开会学习。辛辛苦苦打下的粮食,必须全数交公。据不完全统计,在此期间,至少有一百多万人因为劳累、饥饿、营养不良和疾病而死去。     在红色高棉执政的三年八个月二十天时间里,其恐怖程度空前绝后。1976年夏,一直处在幕后的波尔布特出任政府总理。年底他忧心忡忡地指出“党的躯体已经生病了”,此后就以肃清亲越分子、克格勃间谍、美国中央情报局特务和新混入党内的异己分子为借口开始了内部清洗。在1975年10月宣布的民族阵线的十三个领导人中,就有五个在1977年的清洗中被处决,其中包括内政部长、两任商务部长、新闻和宣传部长、国家主席团第一副主席等。各大区的党政军领导人被处决的更多。最集中的一次是1978年对被认为是亲越派的东部大区干部和军人的清洗,由西南大区的领导人塔莫负责,一次屠杀了近十万名自己人。S—21杀戮场,主要用来审讯、拷打和处决党内敌人。据估计,仅在这个中心一处,就处决了两万人。上个世纪80年代初,在S—21发掘出近九千具尸体。还有许多死人坑尚待挖掘。这些人死得极其恐怖,红色高棉为节省子弹,杀人多用棍棒重击或以斧头砍杀。许多陈列的头盖骨上,留有被斧头砍出的裂痕。1976年1月柬共颁布新宪法,改国名为民主柬埔寨。4月西哈努克被迫退休,随后遭到软禁。他的子女亲属十几人照样作为“新人”下放劳动,最后下落不明。 (燕妮 摘自《书屋》)                             폴포트 기념관을  그곳에서는 모택동죄행관이라 한다.  
58    악마의 '공산국가'ㅡ(2) 댓글:  조회:4018  추천:2  2015-11-03
                              악마의 '공산국가'ㅡ크메르 루즈(2)                                               ㅡ크메르 루즈(红色高棉)                                                      김송죽 자료번역                                    출처: 캄보디아   NetEase> 뉴스 > 대형 관보 > 크메르 루즈 편집항목                          통털어 보안감옥이라 부르는 sㅡ21호는 1975년부터 1979년사이 사람을 잡아 가둔것이 대략 1만4천~1만5천(2만명이 넘는 다는 설도있고)되는데 그들 다가 전국 각지에서 끌어 온 것이다. 론놀 정권기간에 같인 정부관원들이 있는가 하면 군인도 있고 학자, 교원, 의사, 변호사, 승려도 있었다. 후기의 죄수는 주요하게 크메르 루즈(红色高棉)정권당시 사람이였다. 당원과 병사가 있는 가 하면 고급 장교도 있었다. 례를 들면 외무부 차관 Waw(沃维)、신문부장 등인데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건 다해서 겨우 7명뿐이였다. sㅡ21호는 공산국가 크메르 루즈(红色高棉)의 사망공장이였다.                              S-21에 같힌 그들 거의가 사실은 죄없는 무고한 사람들이였다. 공산국가라는 크메르 루즈의 대집중영 S-21의 작동 모드를 보면 저들의 눈에 “배신자”라 여기는 사람이면 우선 하나건 둘이건 얼마건 잡아넣기부터 했는데 온갖의 지독한 고형으로 핍박하여 승인하게 만들어서는 지장을 찍게 했다. 그래서는 이름을 공개하고는 살해했던 것이다. 어린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동당(同黨)이 누군지 대라해서 온 식구를 멸종시키도 했는데 그럴때면 공시를 내렸던 것이다. 무죄살인은 허용되지 않기에 근거를 만들어 뵈여주는 지악하고도 야만적인 수단이였다. 저들 내부에서까지도 그러했다. 지어는 충성하는 당원마저도 저건 미국 중앙 정보국 (CIA)스파이가 아닌지 혹은 베트남의 주구는 아닌지 하고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었던 것이다. 살인귀들의 작법은 그야막로 극에 이르었음을 말한다. 그러다보니 옹근 크메르 루즈가 극심한 의심병에 걸려서 세상에 더없는 변태적인 국가로 변해버리고 만 것이다.                                                                                  1977년9월,폴 포트는 처음으로 국립 라디오 마이크로폰 앞에 나타나 장장 5시간 동안이나 프레젠테이션을 했는데 테마는 국내외의 모든 반동 세력에 대항하여 고위급 공무원을 포함한 크메르의 국민 모두다가 혁명을 끝까지 하자는 것이였다. 온 크메르국민이 폴 포트라는 이름을 가진 통치자가 있다는것은 알았어도 목소리는 이때에야 처음들어보는 것이였다.                              쇄망 그런데 1978년5월에 이르러서는 크메르 루즈의 대숙청이 도리여 폴 포트를 반대하는 기의를 격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번의 기의는 아쉽게도 진압되였고 실패한 이들은 베트남으로 건너가 그곳에다 베트남 캄보디아 망명국가연합인 NRF를 설립한 것이다. 령도자는  크메르 루즈 사령관의 전 사장(师长)이자 성위서기를 지낸바있는 최고 지도자 한Samrin  장관이였다.   1978년11월3일,소련과 베트남은 《소월우호합작조약》을 체결하고서는 베트남이 인도지나반도에서의 확장을 승인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동년 12월25일,베트남의 인민군은 캄보디아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1979년1월7일에 베트남의 인민군은 프놈펜을 점령했다. 이 군사 작전의 시리즈를 "캄보디아 전쟁"이라 한다.   많은 캄보디아 사람들이 베트남의 지배를 우려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그쪽 베트남군에 항복하는 사람이 많았기에 크메르 루즈의 정권은 얼마못가서 붕괴되고 만 것이다.   베트남군대는 캄보디아를 점령하자 캄푸 치아(크메르의 원 어음) 인민 공화국을 설립했다.  그러자 중국은 베트남의 행위에 대해서 실제로 매우 불만족해 하였다. 이렇게 되자 유엔의 투표에 의해 크메르 루즈정권 역시 캄보디아의 합법적인 정권으로 인정받게 되었거니와 그럼으로 하여 그것은 또한 훗날 중월전쟁(中越战争)이 일어나게 된 잠재적인 동기로도 되었던 것이다.   한편 가택연금을 당하고 있었던 시하누크친왕은 프놈펜이 점령당하기 며칠전에 유엔총회에 베트남의 침공을 호소하기위해서 미국에 보내졌다. 그는 호텔에 있으면서 회의에 참가했고 그 후에는 기회가 좋아 미국경찰의 도움으로 캄보디아를 탈출했다.     1979년2월17일,중국과 베트남 사이에는 끝내 중월전쟁(中越战争)이 일어났다. 베트남군은 북부로부터 정식으로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크메르 루즈군은 서쪽으로 퇴각했다. 그럼으로서 그들은 10년간 태국ㅡ캄보디아 국경 근처 지역을 제어한 것이다.   베트남에서 모든 증거들을 공개함으로 하여 공산국가라는  크메르 루즈가 지난날 자기나라 백성들에 대해 감행했던 잔악한 행위들이 세상에 다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충격적이였다.    그로부터 크메르 루즈는 중국을 포함한 세계 모든 국가의 지원을 잃고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 사회의 압력을 완화하기 위해서 1981년12월8일,크메르공산당은 “자동해산”을 선포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1985년,폴 포트, 농세 역시 자기들의 퇴직을 선포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은퇴”한 그들이 정권욕은 죽지 않았았기에 실제상 여전히 크메르 루즈를 움직였던 것이다.   1989년9월,캄보디아를 점령했던 베트남군이 철수했다. 그리고 1992년에 유엔의 중재 하에 크메르는 저들과 충돌했던 당사자들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유엔은, 평화 협정을 구현하고 캄보디아를 돕기 위해서 22,000명에 이르는 방대한 지원대를 보냈거니와 거의 28억($)달러에 달하는 금액을 썼다. 그러했음에도 불구하고 크메르 루즈는 계약서명 중 하나를 제외하고 유엔과 협력하기를 거부함으로 하여 전체의 분리를 조작하여 량심없이 선거 보이콧을 발표했던 것이다. 하였기에 1994년7월7일,크메르왕국 국회는 크메르 루즈는 불법조직이라고 선언했다.   캄보디아 정부의 군사적 압력과 정치적 공세하에서 크메르 루즈 병사들은 향수를 버리고 도망하기 시작했다. 1996년 8월는 크메르 루즈의 두 번째인물이였던 이엥사리는 4천명의 병사를 이끌고 정부군에 항복했다 그리하여 크메르 루즈는 중요한 군사력과 경제 기반을 잃은 것이다. 이때부터 크메르 루즈는 붕괴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1997년 5월에, 크메르 루즈는 전투 병력의 거의 80%을 잃었다. 6월,민주캄보디아 국민군총사령 송선(宋先)마저 자수했다. 폴포트는 그 소식을 듣자 사람을 보내여 송선(宋先)의 부부와 그의 자녀 8명을 살해하게 했다. 임무를 집행한 자는 시체들을 트럭에 실어 폴 포트에게 보이였다. 폴포트는 이제는 됏다면서 속이 시원하다고 했다.  그러나 폴 포트 그 자신도 얼마안가서 제 부하손에 체포되어 공개심판대에 올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998년 4월 15일에 심장 마비로 감옥에서 죽고말았다. 그해의 12월25일,키우 삼판과 NUON체아는 파일린에서 프놈펜정부에 투항하고말았다. 그리고 같은 해의 12월, 파일 린 프놈펜 정부는 키우 삼판과 NUON체아가 항복했다고 발표했다. 한편 1999년 3월 6일은 따목은 캄보디아의 군사에 의해 태국ㅡ캄보디아 국경 근처에서 붙잡혔다. 이로서 크메르루즈 정권은 완전히 괴멸되였음을 선고 한 것이다. 。。。                                                                                           9138개 구덩이에서 150만개의 해골을 찾아낸 캄보디아.
57    광란의 년대 댓글:  조회:4744  추천:1  2015-10-20
                                        광란의 년대 ㅡ 문화대혁명 문화대혁명의 전체이름은  "무산계급문화대혁명"으로서 간약하여 "문화대혁명" 혹은 "문화혁명", "문혁"이라고도 하며 "십년동란", "십년재해", "문화재앙", 혹은 "문화집단학살"이라고도 한다. 1966년 5월 16일부터 시작하여 1976년 10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끝났는데 모택동의 실수로 하여 발동한 것이 림표와 강청 두 반혁명집단에 리용됨으로 하여 1949년 건국이래 10년간이나 지속된 가장 사납고도 치명적인, 국가와 백성에게 이루다 형용 할 수 없는  막심한 재난을 가져다 준 "반인류적인 혁명"이였다.                                                                    老 照片 古今中外,凡是出现了“伟大领袖”的国家,无一例外,都是人间地狱。 老照片: 文革杀人照片多是无辜百姓。以下图片曝光而已,所占总数连十万分之一都不到。   标签:到
56    위대한 분의 걸작 (4) 댓글:  조회:2795  추천:0  2015-10-20
                                                          가장  가장  위대하고 영명하다는   모택동의 녀편네가   노는   꼴                                                                            위대한 분의 걸작 (4)                           
55    위대한 분의 걸작 (2) 댓글:  조회:3093  추천:1  2015-10-20
                                                                     위대한 분의 걸작 (2)                                                                                                                                                                  [本帖转自:照片中国(国内最大老照片.社区)] http://www.picturechina.com.cn/bbs/viewthread.php/ [本帖转自:照片中国(国内最大老照片.社区)] http://www.picturechina.com.cn/bbs/viewthread.php/                                                                                  [本帖转自:照片中国(国内最大老照片.社区)] http://www.picturechina.com.cn/bbs/viewthread.php/                                                                                                                                                                                                                                                                                                                                                                                                                                                                                                                                           중국의 혁명은 모택동이 혼자한게 아니다.  수없이 많고많은 혁명간부들을 잡아 먹은 불악귀는 누구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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