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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의 건물들은 기억하고 있다...
2019년 01월 20일 01시 26분  조회:3590  추천:0  작성자: 죽림
 

 

 

언더우드관.

스팀스관

아펜젤러관.

언더우드 동상.

 

스팀스관 / 사적 제275호 / 일제강점기 1920년.

스팀스관은 1920년에 준공된 옛 연희전문학교(현재 연세대학교)의 건물로 사적 제275호이다.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거주하던 찰스 스팀슨의 기부금으로 캠퍼스에 세워진 최초의 석조건물이다.

아펜젤러관 / 사적 제277호

배재학당 설립자인 아펜젤러를 기념하기 위해 미국 매사추세스 피츠필드시의 기부를 받아 1921년에 착공해

1924년에 완공했다. 석조 3층의 단아한 고딕풍 건물로 언더우드관과 함께 연세대에 두 번째로 세워졌다.

언더우드관을 중심으로 스팀슨관과 아펜젤라관이 앞으로 들어서 "ㄷ"자 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당시 이 건물은 이학관으로 자연과학계의 강의동으로 쓰였으나 지금은 사회복지대학원에서 사용하고 있다.

언더우드관 / 사적 제276호 / 완공년도 1924년.

이 건물은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서 1924년 완공된 연면적 2,700m2의 근대식 4층 건물이다.

연희전문학교 설립자인 고 원두우(元杜尤, H. G. Underwood)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언더우드

관이라 하였다.

설립자의 장남 원한경 교수가 초석을 놓았고, 공사 감독은 스팀슨관과 아펜젤러관을 감독한 화학교수

밀러가 맡았다. 당시 문학관이라 불리었으며 본래는 강의동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대학본부로 쓰이고 있다. 

이 건물은 중앙 현관문이 튜더(Tudor)풍의 아치로 되어 있는 준고딕양식의 웅장한 석조 건물이며,

스팀스관과 아펜젤러관이 건물 양쪽으로 인접하여 건물군이 "ㄷ"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건물의 중앙부에는 1개 층의 탑옥(塔屋)이 솟아 있다. 

 

 

 

언더우드관.

 

최현배 선생 동상.

 

 

 

윤동주 기념관(핀슨 홀).

 

핀슨 홀과 윤동주.

연희전문학교 창립 초기에 공이 큰 미국 남감리교 총무 핀슨박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핀슨홀로 명명된

건물은 1922년에 학생기숙사로 준공되었다. 1936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 윤동주(1917~1945)는

이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사색하고 고뇌하며 시 쓰기에 전념하였다.

 

기념관 입구, 기념관은 2층에 있다.

윤동주 생가 기와.

윤동주 시인의 생가 지붕 수막새 기와에는 특이한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집안의 깊은 신앙심과 애국심을 나타내는 태극문양과 무궁화 그리고 십자가.

이런 문양을 보며 조국에 대한 사랑을 키워왔던 시인은 연희전문에 입학하여 또 다른 고향집을 보게 된다.

연희전문학교에는 건물마다  정면 꼭대기와 출입문 그리고 돌계단에 조차 태극이 새겨져 있고, 정원 곳곳에 무궁화가 만발하였으며, <언더우드관> 뒷면 벽 꼭대기에 새겨있는 열두송이 무궁화를 본 윤동주 시인은 고향을 발견한 듯 남다른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연희는 민족적 정서를 살리기에 가장 알맞은 배움터로, 만주에서 볼 수 없는 무궁화가 캠퍼스에 만발하여

있고, 도처에 우리 국기 태극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일본말을 쓰지 않아도 되고,

우리 말로 가르치는 조선문학도 있다(고향에 돌아간 윤동주의 연희전문 소개말 중, 장덕순의 증언)

명동촌 막새기와

윤동주 시인이 태어난 명동촌의 사람들은 모두 집의 지붕 막새기와에 무궁화, 십자가, 태극문양 등을 새겨

넣을 만큼 애국심과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100여년이 지나 우여곡절 끝에 우리 앞에 그 편린을 드러낸 그들의 용광로같은 조국애가 우리 가슴에

뜨거운 북을 울린다.  -김재흥선생(김약연 목사의 증손) 기증-

 

참회록 / 육필 원고와 해석.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滿)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래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 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1941년 말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일본에 유학하여 대학과정을 밟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때 일본에 유학하고자 하려면 필수적인 것이 창씨개명이었다.

창씨개명 압박에 못이겨 숭실학교를 자퇴까지 했던 윤동주이지만,

결국 일본유학 수속을 위하여 성씨를 <히라누마, 平沼>라 바꾸게 된다.

윤동주는 1942년 1월 졸업증명서 등 도일 수속을 위하여 연희전문에 창씨계를 제출하는데,

창씨계를 제출하기 5일 전인

1월 24일의 시작품<참회록>은 고국에서 쓴 마지막 작품이 된다.

참회록은 일제가 강요하는 창씨개명에 굴복한 자신에 대한 참회로,

시에서 나오는

만 24년 1개월은 1917년 12월생으로  1942년 1월에 만 24년 1개월이 된 자신을 지칭하는 것이다.

당시에 유학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창씨개명이었지만 그로 인해 상당한 괴로움을  표현했다.

그의 괴로움과 번민은 시 본문 뿐 아니라 원고 여백에 쓰여진 낙서들에서도 잘 드러난다.

 

 

 

 

공상(空想)

내 마음의 탑(塔)

나는 말없이 이 탑을 쌓고 있다.

명예(名譽)와 허영(虛榮)의 천공(天空)에다,

무너질 줄도 모르고,

한 층 두 층 높이 쌓는다.

 

무한(無限)한 나의 공상.

그것은 내 마음의 바다,

나는 두 팔을 펼처서,

나의 바다에서

자유로이 헤엄친다.

황금(黃金), 지욕(知慾)의 수평선(水平線)을 향하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 1955년 증보판 / 표지그림, 김환기.

윤동주가 세상을 떠난 지 3년째 되던 해인 1948년. 그의 유고 31편을 모아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으로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출간하였다.(정음사)

1955년에는 윤동주의 서거 10주년을 기념하여 유고를 보충한 증보판이 출간되었다.

아우의 인상화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애띤 손을 잡으며

'늬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 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1948-

 

용재 백낙준 박사상

여기 모신 이 어른은 1957년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 의과대학을 통합하여 연세대학교로 다시 세운

초대총장 백낙준 박사이시다.

교육과 학문 민족봉사와 자유정신의 구현에 뜻을 두시고 일생동안 연세와 민족을붙들고 키운 연세의 정신적

지주시며 민족교육의 스승이시며 겨레의 지도자시고 하나님의 종이시다.

일찌기 연세를 국학연구의 발상지로 민족교육의 터전으로 진리 자유의 전당으로 힘써 이끄시며

연세는 연세인의 연세요 한민족의 연세요 세계의 연세임을 밝히시고 연세에 맡기어진 하늘의 사명을 일깨워

주시다

그러기에 용재 선생에게 있어서 연세는 사랑이요 생명이시니 여기 연세인과 함께 영원히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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