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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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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원짜리 송금 표
2014년 10월 29일 13시 47분  조회:2031  추천:3  작성자: 리태근

이 글을 삼가 대학생들에게 드립니다.
 

5원짜리 송금 표

 

리태근

 

나는 가끔 차간이나 거리에서 앞가슴이 번쩍이는 대학휘장을 달고 다니는 대학생들을 볼때마다 깊은 감회에 잠기군 한다. 나에게도 잊지 못할 대학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나의 대학시절은 희망과 행복으로 충만된 보람찬 대학시절이 아니라 고민과 한숨으로 뒤섞인 고난의 시절이었다. 내가 농촌에서 재교육을 받다가 요행 추천받다가 간 곳이 길림시였다. 운명의 기회를 받아들인 행운이라 눈물나게 고마웠다. 세세대대 땅만 뚜지고 살아오던 우리 전주리씨네 가문에 대운이 튼것은 말할것도 없고 어쩌다 가물에 씨 나듯 중학생이 나타나도 희한해하던 와룡산골에서는 나를 두고 개천에서 용이 났다고 전대미문의 희사로 경축하였다. 비록 째지게 가난한 세월을 만나서 큰 돈은 내밀수 없었던 사원들이 옷고름에 꼬깃꼬깃 감춰두었던 엽전을 모아서 만년필이며 목책, 치솔 치약을 사주던 일, 송아지친구들이 이집저집에 보관했던 널잎들을 모아서 책궤짝을 짜주고 처녀들은 칠색무지개를 수놓은 작은 꽃쌈자를 선물하던 일....

온 동네가 명절의 기분으로 들먹이였다. 옥수수가 무르익는 칠월 들국화를 한아름 않고서 환송하던 처녀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던가 뻐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래주던 사원들의 얼굴들이 지금도 내 가슴을 파고든다.고향의 뜨거운 축복을 받은 나의 가슴속에는 꼭 성공하겠다는 굳은 결심이 뿌리 내리었다. 그헌데 대학이라고 정작 찾아가 보니 생각과는 판판달랐다. 좀처럼 학업에 마음을 붙일수가 없었다. 4인무리가 한창 교육대권을 틀어쥐고 주락펴락하는 때라 하루건너 실습이요 사회조사요 하며 농촌으로 내쫓았다. 날마다 배우는 것은 대비판문장이였다.

먹는것은 더구나 말이 아니었다.한달에 19원20전밖에 안되는 생활배용에 매달려서 근근득실로 살아갔다. 끼니마다 소가죽 같은 전병에 푸대죽 같은 멀건 옥수수죽을 먹으면서 죽어날게 짠지였다. 그것도 배불리 먹을수 없었다. 빈부의 차이는 이세상 어딜가나 마찬가지였다. 우리 반급에는 거의다 림업계통이 자제와 도회지에서 온 학생들이였다. 그들에게 비하면 나는 "알거지"신세였다.학습에 별로 흥취없던 그들은 매일 집에서 보내오는 송금통지서만 눈이 빠지게 기다린다. 일요일 아침이면 집에서 보낸 송금통지서를 받아 쥐고 빛이 번쩍번쩍 나게 구두를 닦아신고 환성을 울리며 송화강유보도로 쓸어나간다. 그런 날이면 나는 슬그머니 학교도서실로 피해가서 매마른 옥수수떡을 찬 수돗물로 목을 적시며 온하루 책에 파묻혀 있어야했다......

그럭저럭 한 학기가  다가오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도 5원짜리 송금표가 날아왔다. 와 내가 환성을 올리는데 친구들이 이상한 눈길로 처다보는 것이었다. 50원이면 몰라도 5원짜리 송금표를 들고서 춤추는 내가 어처구니 없었던 모양이다. 남들이 뭐라고 하던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것도 끝내 나에게도 친인이 있다는 기념장같은 존재였다. 오리발 그리듯 한자로 삐뚤삐뚤하게 쓴 주소아래 "최영숙" 이라는 어머님의 이름석자가 또박또박 박혀있었다. 틀림없이 여동생의 대필이였다. 특별히 어머니의 이름을 박아 넣은것이 유표하게 안겨왔다.

한평생 사진 한장 찍어못본 어머니가 "최영숙"라는 이름 석자를 세상에 공개한 것이 일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였다. (아니 어디서 돈을 나져서 부쳤을가?) 한공수에 마이나서 8전도 못가는 <우표생산대>라 소문놓던 생산대에서 5원짜리 돈이 나질곳이 없었다. 해마다 뼈빠지게 일해봤댓자 년말분배돈은 한푼도 없다는것을 뻔히 알고있는 나는 갈마드는 궁금증을 풀이할 방도가 없었다. 천금보다 더 귀중한 이 돈을 꼭 유용하게 쓰리라 며칠두고 뜬 눈으로 지새우노라니 학교로 떠날 때 밤을 패며 낡은 솜이불이며 옷가지들을 차고차곡 포개놓던 어머니가 얼른거린다. 푸름푸름 새날이 밝아오는데 깨끗히 씼은 색바랜 운동화를 매만지며 어설프게 눈물짓던 모습이 환하게 떠올랐다.

나는 평생두고 잊지못할 금전을 가장 요긴한데 쓰려고 결심하였다. 눅거리 구두라도 한 컬레 장만하려고 백화점을 훋기 시작했다.그런데 아니보다 배꼽이 더 컸다. 오원짜리 구두는 보고 죽자해도 없었다.궁리하던 끝에 친구들에게서 몇원 더 꿔가지고 지질탐사대원들이 신는 반모구두를 마련했다. 어머니의 뜨거운 손길이 슴배인 구두를 신으니 마치도 어머니가 만들어준 줴기밥을 먹은듯 마음이 한결 든든해 났다. 나는 맑은날만 골라서 시내 행차때만 구두를 골라 신었다. 저녁이면 머리말에 신문을 펴놓고 구두를 올려놓고 자면서 애지중지하는 간직하였다.

하찮은 구두를 보배처럼 여기는 모습에 은근히 측은해 났던지. 한족친구가 돈 몇푼 안들이고 새 구두를 만드는 묘리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5전짜리 면도칼을 사왔다. 친구는 면도칼로 보송보송한 털을 말끔히 밀어버리고 구두기름을 발르고 구두솔로 열심히 닦더니 눈깜짝할 사이에 신사구두가 탄생했다. 와! 나는 저도 모르게 환성을 질렀다. 오매불망 바라던 깜장구두를 볼에대고 비비면서 입김으로 닦았다. 날마다 구두기름을 바르고 팔소매로 닦고 또 닦았다. 가마반지르한 윤기도는 새 구두는 나를 새사람으로 단장시켰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자작구두 때문에 평생 잊지못할 창피를 당할 줄이야......

그날도 시교농촌으로 실습을 나갔다. 한 소조에 있는 여학생이 빨래를 해주겠다고 하기에 한벌밖에 없는 띠치량바지를 바지를 벗어주었다. 띠치량바지는 상해지식청년이 돌아가면서 선사한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바지를 씻다말고 숱한 여학생들 앞에서 띠치량바지를 나무가지에 추켜들고 깔깔 웃어대며 창피를 주는 게 아닌가?......알고 보니 햇빛에 구두기름이 녹아내리면서 바짓가랑이를 소가죽으로 만들었던것이다. 옷지도 울지도 못할 일이었다. 한순간에 총각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졌다. 나는 치솟는 모멸감으로 나는 그만 얼굴이 수수떡이 됐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신물이 난다.그래서인지 옷을 환하게 입고 나선 처녀들과 마주치면 저도 몰래 슬그머니 신발부터 훔쳐보는게 습관이 되였다. 손꼽아 기다리던 방학이 돌아왔다. 나는 그동안 친했던 연변동창들을 시골집으로 청했다. 어머니는 꿈에도 생각지못했던 대학생들이 한구들 넘쳐나게 찾아들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귀한 손님들에게 특별히 대접할 것이 없어 쩔쩔매던 어머니는 순두부를 앗기로 하였다. 어머니은 초급사 때부터 특별히 순두부를 잘해서 와룡산골에서 <두부집 아매>라고 소문났다 그런데 여느 때 같으면 그까짓 두부 한판대기는 누구의 도움 없이 제꺽 앗아놓던 어머니가 우리에게 손맷돌을 밀어놓으며 갈아달라는 것이었다.

잠깐사이 하들하들한 새하냔 두부와 세치네탕으로 풍성한 주안상이 마련되였다. 누군가 첫 술잔을 철철 넘치게 부어서 어머니에게 올렸다. 이 기쁜날에 선뜻 술잔을 받으셨을 어머니가 웬일인지 자꾸만 사양하셨다. 그럴수로 한사코 권하는 친구들의 성화에 못이겨 술잔을 받으신 어머니가 웬일인지 갑자기 술잔을 떨어뜨렸다. 아차 ! 불길한 예감에 어머니의 팔목을 걷어 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언제 그랬는지 버드나무로 부목하고 각반으로 얼기설기 처맨 어머니 팔목은 퉁퉁 부어있었다. "아니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나와 동학들은 약속한듯 녀동생을 쳐다보았다.

부엌에서 가냘픈 어께를 들먹거리던 여동생은 울면서 자초지종을 이실직고 하였다. 나에게 신발 하나 변변하게 갖춰못준게 내내 마음에 걸렸던가 어머니는 살을 에이는 동지섣달 찬바람은 안고서 봉밀하 강반으로 날마다 갈부업하러 나섰단다. 룡두산기슭 따라 칠팔리나 오르내리면서 큼직한 갈단을 두단이나 베였다. 해는 저물고 배는 고픈데 갈길이 막연했다.어머니는 버드나무가지우에 갈단을 올려놓고 각반으로 목에걸고 소처럼 강판으로 올리끌었다. 어둠이 밀려오면서 낮에 녹기시작한 건물이 얼어들면서 갈짐이 강복판에 굳어지고 말았다. 하는수 없이 갈단을 억지로 지고 일어서던 어머니가 그만 엎어지면서 오른팔이 절골되었다. 이튿날 공사병원에 가서 진찰했는데 왕복 오십리도 넘는 팔가자병원에 가서 x광 사진을 찍으란다.

갈판 돈이래야 고작해서 5원밖에 안되는데 x광선 사진값이 5원이란다. 어머니는 입을 악물고 장떼를 팔목에 바르고 버들가지로 부목을 대고 각반으로 쳐맸다. 오, 나는 그만 목이 꽉 메여서 말이 나가지 않는다. 과연 이 시각 무슨말이 필요하랴. 그 이튿날 한시급히 집으로 가려던 동학들은 말없이 도끼와 톱을 얻어가지고 뒷산으로 올라갔다. 어머니에게 땔나무근심을 덜어드리려는 것이었다. 나는 개학이 되기전에 학교에 달려갔다. 또다시 옥수수떡에 떫은짠지를 먹고 수돗물을 마시며 공부에 이악스레 달라붙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오늘 어엿한 공무원이 되여서 활개치며 사업해 나가는것도 내가 문학에서 성공하게 된것도 머어님의 뜨거운 사랑, 절절한 기대를 옳게 받아들인 결실이 아니겠는가. 어머님의 피와 땀이 슴배인 5원짜리 송금표, 그것은 정녕 내 인생의 항로를 환하게 밝혀준 희망의 등대불이었다.

아, 우리 민족력사에 우리 어머니와 같은 은헤롭고 자애로운 어머님들이 그 얼마였던가 ...이런어머님들이 있었기에 쓰러져가는 초가삼간에서도 밤새도록 글소리 울렸고 이런어머니들이 있었기에 수많은 자식들이 혈혈단신 타향멀리 유학의 길에 오르지 않았던가. 자신은 굶어죽어도 지식만은 공부를 시켜려는 우리 민족의 새하얀 얼이 우주를 빛추는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발치고있다.

잊을수 없는 5원짜리 송금표, 그것은 정녕, 하늘나라에서 뜨거운 정성을 듬뿍 적어보내는 어머님의 절절한 사랑의 편지였다. 세월이 천만년 흘러도 내 가슴에 사랑의 멧새지로 영원히 빛발칠이다.

2014면 5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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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2 ]

2   작성자 : 두만강
날자:2014-11-02 15:51:00
intaigen님 고맙습니다. 남을 감동시킨다는 게 얼마나 힘듭니까 글이란 진심을 써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지요 감사합니다.
1   작성자 : jintaigen
날자:2014-10-31 11:01:13
이태근님의 글을 감동으로 잘 읽었습니다. 어머님의 하해같은 사랑을 눈물나게 잘 쓴 좋은 글이었습니다. 우리 자식들이 부모님의 은혜를 알게 될 때면 보상할 데도 없이 하늘나라에 간 때이니 억울하기 그지 없군요. 님처럼 훌륭한 인간으로 노력하는 자세가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위안 받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마음으로 쓰는 좋은 글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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