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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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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속의 <와룡사람>
2015년 02월 14일 23시 49분  조회:2046  추천:0  작성자: 리태근
상해속의 <와룡사람>

리태근

 
지난 10월휴가에 나는 <두만강>병원의 의사들을 모시고 상해로 유람가게되였다. 조국의 수많은 남해바다 해안풍경과 수려한 금수강산을 마다하고  목적지를 상해로 정하게된것은 결코 우연이아니다. 40년전에 화룡시 와룡산골로 하향했던 상해지식 청년들을 만날수있기때문이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40년이면 강산이 네번 바뀌였다. 도대체 어떻게변했는지 막연했다.  범이 새끼치고 승냥이 울어대던 와룡산 골에 무슨재교육을 받을게있다고 상해한끝에서 지식청년들을 내려보냈을가?  하여간 산골사람들이 앉은자리에서 상해청년들을 만날수 있었다는것만 해도 행운이였다. 그때부터 두메산골에 히한한 구경거리가 생겼다.
 
벼가 나무에 달리는줄로 알았고  호박이 참나무에 열리는줄 알았단다.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을 편지봉투에 넎어서 상해로 부치겠다고 야단이다. 밥을 먹고는 집안에서 똥을 싸겠다고 (马桶변기통 ) 을 갖춰달란다. 기막혀서 말이나가지 않는다. 농민들은 두말없이 도끼를 들고 산으로 오른다. 땔나무를 팡팡패서 온돌을 뜨끈드끈하 게 덮혀주었다. 그때로부터  아침이면 집체호문이 열리지않아도 달려갔고 겨울이면 집체호굴뚝에서 연기가 나지않아도 달려갔다. 춘하추동 추울세라 더울세라 어미닭이 햇병아리를 품은듯 알뜰살뜰 보살폈다. 이른봄 반찬투정을 할때면 집집마다 간장 김치 언감자 시래기를 거두어서 입맛을 돋구느라 애간장을 태웠다. 재교육이란 이런것인가 아무리 잘해주어도 집생각이나서  울고불며 말썽만 읽으켰다. 지금 생각해보면 입에서 젖내나는 어린것들을 한구둘에 앉혀놓고 함께 살아가라고 생억지를 부린게 얼마나 억울했던가  빈히중 농의재교육을 달갑게 받기는 고사하고 애만 먹이지말았으면 얼마나 좋으랴  집체호는 날마다 골치아푼일만 터지였다. 여북했으면 사람들은 집체호를 <말새단지 련애단지 애물단지>라고 원망했을가 오늘 내 자식을 키워보고서야 그들이 왜서  울고불며 야단쳤는지 알것같다.
 
"괜히 젖먹이들을 고생만 시키지말고 날래 올래갑소" 이것이 사원들의 한결같은 목소리였다. 그런데 환경이 사람을 죽인다고 재교육을 받아야 살길이 나진다고 교육한 덕분에 굴레벗은 망아지들이 점차 제곬수에 들어서는것같다. 사원들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말갈데 소갈데를 가리지않고 일하면서 점차 인간이 되였는가 고분고분 제곬수에 듣기 시작했다. 눈보라 몰아치는 겨울날  삼태기를 들고 돼지똥을 줏을때면  얼마나 가슴아팠던가 한여름 쨍쨍 내리쯰는 해볕에 새하얗던 얼굴이 굽은감자처럼 퉁퉁갈라지는 모습을 보면 속이 찡해났다. 범이 울어대는 두메산골에서 억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저의들의 부모가 얼마나 기슴아파할가 때가 묻히자 점차 사원들도 친자삭처럼 사랑했다. 없는믿천에 집집마다 색다른음식이 나지면 집체호를 날라갔다. 추울세라 더울세라 내자식처럼 아껴주던 사원들의 이름을 오늘도 기억하고 있을가?...
 
영원토록 농촌에 뿌리깊이 밖겠다던 비둘기들이 <招工指标 로동자지표>가 나오면 내 먼저 올라가겠노라고 울며불며 달아다니였다.  재교육이란 결국 빚좋은 개살구였다. 하긴 세세게게로 세계의 유명한 도시에서 태를 묻고 살아온 그들을 소똥떼 나 딍구는 두메산골에 안착하라는게 말이나 되는가  지금 생각해보아도 낮이면 뱀이 욱실거리고 밤이면 모기떼 날아드는 찌긋찌긋한 <와룡산골>을 얼마나 저주했을가?  어찌보면 그들의 청춘을 매몰시켰던 와룡골에서 찾아오는 나를  반겨줄지?  망연한 생각을 굴리며 비행기에 올랐다. 구름이 타래치는 망망한 창공은 울긋불긋 꽃망울 터치는 진 달래꽃이런가  소리없이 피고지는 나리꽃인양 집체호청년들의 얼굴을 방불히 떠올린다. 노울비긴 창공에 뭉게뭉게 타래치는  구름들이 바람에 스치가면서 천태만 상으로 변한다.  때로는 새하얀 양떼같고 때로는  비둘기같다. 노울비낀 들판에서 풀 을뜯는 소무리처럼 변하더니 갑자기 소잔등에 앉아서 피리불던 <눈찌그레>가 떠오른다..
 
<눈찌그레>는 원이름이 <원홍강>( 元洪刚 )이였다. 원홍강이란 이름은 아마도 문화 대혁명이 낳은사물인가 작으만한 키에 다부지게 생긴 원씨는 걷보기에도 특별한 인 물이였다. 날마다 일하기는 싫고 련애질에 이골이텄다. 밤이면  새둥지를 들춘다는 미명하에 닭도독질해서 동네개들이 미친듯이 짖어댄다. 뉘집에서 닭 오리가 잃어졌다 하면 모두들 원씨를 의심하고 집체호 문밖에서 닭털을 찾았다. 원홍강은 하루도 안착하지않았다. 생김새도 이상하게 한쪽눈까풀이 축 쳐진게 똑마치 젖을 모자라서 눈을 채못뜬 애완견같았다. 알고보니 어릴때 눈까풀이 쳐진것을 부모가 돈이없어서 제 때에 수술해주지 않아서 평생  <애완동물>로 되였던것이다.  그 세월에 집체호청년 들은 국가일급보호동물이였다. 집체물건은 물론 사원들의 남새밭을 내것처럼 들추 어도 참아야한다. 그런데 바늘도독이 소도독이 된다고 목숨처럼 키우던 닭과 개까지 닥치는대로 잡아먹자 온마을이 발끈 뒤집어졌다. 사원들은 닭 개 오리  게사니가 잃어져도 영낙없이 집체호를 찾아갔지만 뾰족한 해결책은 없었다.
 
대장은 굴레벗은 말처럼 뛰노는 원홍강을 어쩌는수 없자 청년단지부서기인 나에게 맏기였다. 소방목을 책임진 나는 날마다 늦잠꾸레기를 억지로 깨워가지고 큰북골방목지로 데리고 갔다. 일하기 싫어하는 노랑뱅아리들은 소방목은 김매기보다 낳은 사또일이라고 여겼다. 원홍강은 나무그늘밑에서 소설책을 읽고 피리를 불면서 푸른하늘을 바라보며 허튼생각만 하였다. 배고푸면 채여물지않은 콩꼬투리를 뜯어서 삶아먹으면서 콩밭을 절단냈다. 뭐라고말할가 불쌍한것 말하면 내혼자서 모든것을 감당하련만 소방목은 혼자하는 일이 아니였다. 말못하는 짐승들이 도깨비풀을 뜯어먹고 죽는건 괜찬아도  눈먼 올무(옥노)에 걸려서 죽으면 책임은 누구도 감당하지못한다. 말못하는 짐승이나 조선말못하는 홍강이를 소를 몰면서 재교육을 시키라는게  소보다 더 우둔했다.
 
집체호는 날마다 구경거리만 생겼다. 뭐가부족한지 눈만 뜨면 싸우기 시작한다. 사원들이 알아들을가바 상해말로 울고불며 여단치는 그들이 우리눈에는 경극단연원 처럼 보이였다. 얼마나 부럽던지 날마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 구경하였다. 산골 청년들의 눈에 비낀 상해지식청년들은 저저마다 백마왕자였다. 철따라 옷을 다려입고 상해사탕을 질근질근 씹는 그들의 배경은 얼마나 황홀했던가 그들이 입만 벌리면 상해를 자랑하는데  귀가 솔깃해났다. 인구만해도 몇천만명을 넘는데 밥먹고 똥싸는것도 집에서 처리해서 살기가 얼마나 편안한지 모른단다.  향긋한 향수냄새 꿀맛같은 상해사탕은 그들의 몸값을 상상하기조타 무서웠다. 세상은 정말 불공평하다 누구는 상해에서 태여나고 누구는 소똥떼가 발에 채우는 시골에서 태여나게 하였을가  그들이  시대의부름에 호응해서 할수없이 내려왔지만 다시 올라가면 전도가 양양한 인재로 배양될게 불보듯 뻔했다. 사원들은 그들이  때가되면 몽땅 날아 갈  <비둘기패>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비둘기>들의 앞길은 저마다 창창한것만 아니였다. 원홍강은 남달리 애로를 많이겪었단다.  생김새와 똑같이 애를 무지무지하게 먹여서 제일 마지막에야 겨우 올라오게되였다. 40년이면 강산이 네번 바뀐다는데 어떻게 변했을가 상상하는 그 자체가 즐거웠다. 인간은 60을 넘기면 후회하며 살아간다. 한참 배움의 활무대에서 나래칠 나이에 청춘을 두메산골에 바쳤다는게 얼마나 억울햇을가. 그들의 말로는 내가 하향했던 산골을 제2고향이라지만 그건 잘된사람들이 하는 말이였다. 농촌에 가서 잘못된청년들은 걷으로는 재교육을 참답게 받았다고 승인하지만  속으로는 추천해주지않은 사원들을 얼마나 원망했을가 그래서 제2고향이라고 즐겁게 찾는 청년들도 많지만 어떤청년들은 한번도 찾지않고 오히려 입에서 신물나게 원망한 다.  력사를 무조건 부정해도 안된다. 지식청년들이 농촌에 내려오면서 치벽하던 두메산골이 문명해진만 사실이다. 왜서 소는 올리몰고 사람은 내리 몰라고했을 가  덕분에 농촌청년들도 추천을 받아서 골안을 벗어나지 않았는가 흘러간 력사의 옳고그름은 결국 먼 력사가 증명할수밖에 없다.
 
인편에 알아보니 그때 <와룡산골>로 하향했던 청년들중에 집체호 호장 (钟史江)종사강밖에 잘된게 없단다. 그 세월에 간고한 환경속에서 끝까지 뻗쳐내면서 입당한 청년이 흔치않았다. 종사강은 신체는 허약했지만 벌써 사람됨이 특별했다. 사원들의 곧난을 해아리고 앞장서 해결하며 걸싸게 일했다. 그가 하도 끈질기게 노력했길래 농촌에서 입당하고 추천받아 돌아간후 열심히 공부해서 상해복단대학을 졸업하고 <상해황포중학교>중학교장으로 승진해서 잘 나간단다. 다른 지식청년 들은 사는게 모두가 심통치않단다. 인정많은 종사강은 해마다 집체호모임을 조직 하면서 한때는 한가마밥을 먹었던 식구들을 진심으로 위로하며 아직도 <호장책임>을 열심히 하고있었다. 참 뭐라고 말할가  인생이란 활무대에서 우리 모두가 연원이였다. 행복은 날때부터 타고난게 아니요 가난은 죽을때까지 갖고가는게 아닌데 왜서 현실을 개변하지못하는걸가? 나는 수많은 의문부호를 않고 찾아갔다.
 
종사강이 약속을 어기지않고 상해국제비행장에 나타났다. 의리의리한 국제공항 풀레홈에서 내이름을 우렁차게 부르는 사람이 있다는것만해도 얼마나 반갑던지 마구 얼싸않고 만세를 불렀다. 연변에서 상해까지 두시간반이면 도착하는데 우리둘은 장장 40년을 걸려서야 많날수 있었다 비록 혈육은 아니지만 위대한 시대의 격변기에 맺은 인연이여서 친혈륙보다 더 반가웠다. 그런데 눈물을 훔치며 다시 쳐다보니 그 옛날에 호리호리하던 청년이 어느새 머리가 히슥히슥한  뚱보할아버지로 변한게 얼마나 서러웁던지 말이 나가지않는다. 언젠가는 꼭 만나리라 약속하면서도 선뜻히 다가서지못한게 이런모습이 나타날가 두려웠던것이다. 하지만 한사람이 인생에 40년이 몇번나 있는가 청춘이 한참 꽃피던시절에 이나라 지도에는 이름도 없던 두메산골에서 만난 막연한 인연이여서 더욱 그리웠다. 지식청년들이 농촌으로 내려가는 운동이 없었다면 영원히 만날수없는 막연한 인연이다.
 
작으만한 모텔에서 그리운 얼굴들을 만나는 순간 심장이 당장 튀여나올것만 같았다. 그런데 장작 만나고나니 가슴이 철렁 내앉는다. 해당화처럼 곱게피던 얼굴들이 어느새 서리맞은 함박꽃이 되여버렸다. 남자들의 주름덮힌 얼굴에는 수심이 잔뜩 끼였다. 모두들 늙었다고 한탄하는데 언제보나 뜨개소처럼 우수개를 좋아하던 원홍강은 다행이도 별로 변한게 없었다. 변했다면 키가 좀 작아진게 서운했다. <눈찌그레>는 나를 만나자 내가슴을 팡팡두두린다. 할말이 태산같단다. 천리봉기슭 큰북골에서 소를 방목하던 이야기며 밤이면 새둥지를 들추다가 뱀에게 손을 물리운던 일니며 논밭에서 기음매라면 가라지만 세워놓고 벼를 몽땅 뽑아버리던 일이며 소를 잃어버리고 안개발 타고 헤매다가 너무배고파서 오줌을 싸놓은 콩쌀개를 줏어먹던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친혈육처럼 사랑해주던 김대장 한대장과 톱질쟁이 우리아버지 그리고 술장군 만금이와 소매재 오케이 와룡공사간부와 생산대의 대무위원들까지 일일이 기억하고 있는게 반갑기 그지없었다.
 
나는 그들이 찌긋찌긋하던 두메산골을 끝없이 언망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밖에 제2고향이라고 인정하고 산과 물을 일일이 기억하고 있다는게 가슴이 뭉클해진다. 필경 재교육은 원홍강과 집체호청년들의 가슴에 잊을수없는 추억을 만들어놓았고 씼을수없는 력사를 새겨놓았다. 그런데 현실을 떠올리면 웬일인지 눈길을 피하는게 이상했다. 꼬치꼬치 물어보니 사는게 말이 아니였다. 부모가 다니던 공장이 파산되여서 전세집신세를 벗지못한게 유전되여서 지금도 딸집에 얹혀서 살고있단다. 거기다 마누라까지 농촌호구여서 최저생활보조를 받으면서 근근득실로 살아간단다. 세계십대도시 상해사람이라면 높은로임을 받고 높은 층집에서 잘살리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였다. 원홍강은 언녕 파산된 연길 모건축회사의 튀직로임을 그대로 물려받다보니 생활형편이 말이아니였다. 그래도 생존수요라 지금은 할수없이 공장에서 경비를 서면서 로임을 보태서 억지로 살아간단다. 
 
나는 그만 억이막혀서 말이 나가지않았다. 다섯식구가 번화한 도시에서 3천원도 안되는 로임에 매달려서 산다는게 상상도 못할일이다. 50평도 안되는 사위집에 얹혀산다는게 심리고통은 어디에다 하소연할가 하긴 상해에서 웬간한 주택을 마련하자면 적어도 몇백만원 천만원이 있어야한다는건 알고있다. 하지만 륙십평생 내집한채 마련하지 못했다는게 눈에 흙이들어가도 눈을 감을수없단다. 괜히 두메산골에 내려와서 재교육을 받은게 오히려 소처럼 머리가 우둔해진게 아닐가? 하다못해 남새장사를 하던지 아니면 출국하던지 방법을 대야지 어쩐지 다른나라에 온 기분이다. 원씨는  연변사람들이 한국바람에 잘산다는 소문을 듣었다고 하면서  차라리 올라오지 않고  연변호적으로 한국에 나갔으면 언녕 새집을 마련했을지도 모른단다. 그날밤 나는 새하얗게 밤을 세웠다. 어떻게하면 원홍강을 도와줄 수 있을가? 이것저것 견주며 장밤 궁리해도 륙십이라 성쌓고 남은돌이 된게 안탑깝다.
 
"여보게 리사장 차라리 내가 소를몰던 큰북골에다 소를 댓마리 사놓고 방목하면 어떨가? 아무리궁리해도 죽기전에 자식에게 집 한채라도  남겨주어야 눈을 감을게 아닌가 "
 
"뭐야? 와룡산골에 가서 소를 방목한다고?"
 
아! 그만 뜨거운 그무었이 욱하고 솟구치는것을 억지로 참았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자나깨나 도망치지못해서 발버둥치던 두메산골로 되돌아가려고 할가 세계의 유명한도시 상해속에 <와룡사람>이 있을줄 꿈에도 생각지못했다.  
 
"자네 정말 살기바뿌면 찾아오게 내가 소를 열마리 사놓고 부자가 되게 힘껏 밀어주겠네" 
 
나는 주저없이 대답했다. 비록 고향은 사라지고 선배님들이 한분도 없지만 지식청년들을 잘살게하는건 빈하중농들이  저승에 가서도 책임져할 위대한 사명이 아닌가  그런데 말이쉽지 정말 돌아올가? 그옛날 집체호를 내려올때는 시대의 절박한 수요이지만 지금은 생활의 절박한 수요라 옛날처럼 정부에서 힘차게 받들어주리라 굳게믿는다.  만약 재교육을 하던 고향선배님들이 살았으면  피를 팔아서라도 힘껏 도와주련만 가석하게도 사라진고향에는  나 하나밖에 남지않았다. 선배님들을 대표 해서 내가 원홍강을 도와주는건  미를수없는 엄숙한 력사적인 임무이다. 
 
원홍강이 정말 돌아올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정말 결심하고 돌아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돌아오기만 하면 어떻게하던지 상해속의 <와룡사람>을 천방백계를 다해 서  <해방>시키리라. ...
 
2012년 10월 1ㅡ10월 7일 상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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