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초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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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블루베리농장
2019년 07월 14일 09시 13분  조회:291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블루베리농장

박초란

 

처음엔 블루베리가 아니였다. 왕건을 유혹했던 건 맑고 깨끗하고 상쾌한 공기, 공기였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중요하다고 믿는 것 몇가지가 있기 마련인데 그에게 있어서는 공기가 그랬다. 그것이 삶의 질을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의 하나가 되였다. 매일이다 싶이 미세먼지에 오염된 공기를 들이마시면서 살다 보면 그런 념원이, 소원이 생기지 않고는 어쩔 수가 없다고 왕건은 생각했는데 그렇다고 누구나 다 그처럼 철새마냥 좋은 공기를 찾아서 날아다니지는 않는다는 것 쯤은 자명한 일이였다.

그것이 왕건의 생의 목표가 되여버렸다. “무슨 목표가 이래” 싶게 몇년 전만 해도 그는 상상을 못할 일이였다. 그 때마다 그는 고려를 세운 왕건을 떠올렸다.

그는 공기가 좋은 곳들을 찾아다니다가 블루베리를 알게 되였다. 블루베리야 전에도 먹긴 했지만 블루베리나무를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였다. 당연한 순서마냥 그는 블루베리에 빠져들었다. 마트에서 블루베리를 가끔 사다 먹으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일생의 목표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블루베리가 그의 입이 아니라 생 안으로 들어오게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가?

왕건은 그 겨울이 끝나갈 무렵 블루베리농장을 하기로 했다. 선결조건은 당연히 ‘깨끗한 공기’가 되였다.

 

왕건은 오래 전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아이 때문이였다. 태여난 지 얼마 되지 않는 딸아이를 봐줄 누군가가 필요했지만 그들 부부에게는 봐줄 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신경증으로 앓고 있는 장모님에게 봐달다고 부탁할 수는 없는 일이였다. 보모를 쓰기엔 왕건의 절반 월급과 거의 맞먹는 정도라서 엄두도 낼 수가 없었다. 그보다는 아직 피덩이 같은 아이를 누군가 잘 모르는 사람 손에 하루종일 맡겨야 하는 일도 썩 내키지가 않았다. 결국은 안해보다 수입이 적은 남편이 아이를 돌보기로 했다. 서른넷이였고 왕건은 그렇게 ‘주부’가 되였다. 벌써 4년 전의 일이였고 그동안 아이는 그가 차려주는 예쁜 음식들을 비우면서 몸무게를 늘여갔고 머리가 여물어져갔다.

 

월요일이다. 차들이 시동을 거는 소리가 련달아 들린다. 출근하는 사람들의 바쁜 움직임, 왕건의 안해인 해도도 이른아침부터 서둘러 나서야 했다. 출근길이 막혀버리면 큰일이라 해도는 좀더 일찍 나서는 게 편하다고 했다. 해도가 커피 한잔에 빵 한조각을 먹고 나간 뒤 왕건은 커피잔을 들고 베란다 탁자 앞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지운은 저녁 늦게까지 보채더니 아직도 꿈나라를 헤맨다. 

월요일은 그에게 어제나 그제나 별반 다름이 없는 날이다. 급히 길에 나서야 할 필요성도 없는 터라 이 점은 출근하지 않고 집에 있는 좋은 점 중의 하나다. 활력은 스스로가 만들어야 한다. 아침의 시원한 공기를 창문 활짝 열어 반겨 맞아들여야 하듯이.

노트북을 켠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인터넷이 기다려달라고 한다. 기다리는 새 왕건의 시선은 다시 창밖으로 향한다.

해가 둥그렇게 빛사위를 만들면서 세상으로 얼굴을 내민다。 처음인 것처럼, 수집어하면서,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건지 새벽을 터치우는 폭죽소리에 놀라는 것처럼, 얼굴을 붉힌 채, 전률하듯 소용돌이치며.

질기고 두서없는 꿈들에 시달리다 눈을 뜨고 보니 그랬다. 책 한권을 찾아 괴기한 서점 안을 기웃거리다가 올라탄 뻐스 안에서 카드를 찍었던지 말았더니 흐릿한 기억을 더듬던 그 순간에도 해살은 스쳐지나간 꿈속 풍경 안에 있었던 것 같았다. 빛살에서 따끈한 커피향이 배여나왔다. 꿈속에서 왕건은 혼자였다.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가고 있던 건 맞는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는 혼자였다. 뻐스에서 처음 보는 곳에 내렸고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 어느 근처라고 말해야 하는데, 기억해야 하는데, 찾아야 하는데 그 주소마저 잊어버렸다.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집을 찾아헤맨 건가 싶게도 어둠이 미꾸라지같이 꾸물거렸다. 미꾸라지의 배때기같이 희멀끔하고 누런 석양이 낮과 밤 사이에 걸려있었으며 급할 것도 없다는듯 조금씩 조금씩 침식되여가는 와중에도 그는 잃어버린 길 한복판에 서서 길을 찾고 있었다. 어둠의 속살을 찾는 것보다 불가능해졌다는 걸 왕건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어떤 행복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때의 왕건은 이미 꿈에서 깨여나 김이 모락모락 솟는 커피 한잔을 마주한 채 거실 베란다에 앉아 커다랗게 떠오르는, 이미 떠오른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도의 숨을 쉬였다거나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행위 자체는 물론 일어나지 않았다. 꿈은 꿈이니까. 꿈을 그냥 꿈이라고 믿고 있으니까.

 그렇게 수많은 아침을 맞았다. 금요일과 월요일의 별다른 점을 그다지 느끼지 못하면서.

 

사내자식들은 주방문턱을 들락하는 게 아니라면서 어린 왕건의 등을 떠밀던 할머니의 손길이 아직도 주방문을 열 때마다 느껴진다. 주방에 들어선다. 어느새 정들어진 곳이다. 시금치를 다듬어 나물을 무치고 감자를 깎아 된장국을 끓이고 고기를 굽고 아이가 좋아하는 계란찜을 만들고 빵을 굽기도 하는, 하루 중 왕건이 네댓시간씩 머무르기도 하는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커피잔을 개수대에서 씻어 엎어놓은 뒤 아이가 일어나서 먹을 빵을 굽기 시작한다. 계란후라이를 하고 브로콜리도 조금 데쳐놓고 제철 딸기도 씻어 예쁘게 잘라놓는다. 그리고 블루베리잼도 꺼내놓는다. 이제 딸아이를 깨울 시간이다. 

 

가습기가 뽀얗게 수증기를 내뿜고 있는 방, 물통에 그득 담겼던 생수가 어느새 밑바닥을 내보이고 있다. 물이 수증기가 되여 빠져나오고… 공기 속에 품고 있는 적당한 물방울들, 그것들이 아이의 몸을, 호흡기를 어느 정도 편안하게 만들어주긴 했다. 창문 쪽에서 공기청정기가 사르르 수없이 정화된 공기를 토해내고 있다. 그 공기 안에 아이를 편안하게 해주는 보이지 않는 습기와 산소가 있다는 게 신기하다.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가 않는 그것들이 왕건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느껴지는 고마움, 자잘한 감동이 빛살처럼 마음 안에서 퍼져나가는 순간들, 왕건은 그런 자신을 보고 있는 것도 신기해졌다. 그럼에도 아이의 방문을 열 때마다 짠해지는 그 무엇, 왕건은 공기 중에 깊은 한숨 하나를 보탠다. 지운은 이미 깨여있었다. 지운이 꿈속처럼 공기 중에 말을 던졌다.

“아빠, 블루베리 먹을래.”

지운은 유난히도 블루베리를 좋아했다. 슈퍼에서 구입한 블루베리로 잼을 만들어놓아야 할 정도였다. 빵 먹기 싫다고 칭얼대다가도 블루베리잼을 얹어주면 잘도 먹었다. 지운은 달콤하고 새콤한 맛을 좋아했다. 그렇다고 모든 달콤하고 새콤한 맛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였다. 적당히 달콤하면서 은은한 새콤함이 배여있는 자신의 입맛에 따른 맛만을 찾았다.

“블루베리도 있어?”

지운이 식탁 앞에 다가오면서 또 블루베리를 찾았다.

“응. 맛있는 블루베리잼도 있지!”

지운은 아직도 잠에서 덜 깬 건지 두손으로 눈을 비빈다.

“더 자고 싶어?”

왕건이 물었다.

지운이 식탁 앞에 마주앉아 접시를 끄당긴다.

“유치원 갈 거야.”

지운은 짝꿍친구가 생기고 난 뒤부터는 유치원에 잘 간다. 

“아빤 외로워서 어쩌지?”

왕건이 짐짓 울상을 지어보인다.

딸애가 힐끗 왕건을 쳐다보더니 말을 던졌다.

“아빠도 아빠유치원 다녀. 그럼 친구도 많아!”

“그렇지? 지운이처럼 아빠도 유치원 다녀야겠네!”

왕건은 아이가 긁어서 이미 피딱지가 앉은 귀밑을 들여다보면서 대답했다.

 

딸아이가 유치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서 몸을 돌렸다. 그 순간이였다. 왕건은 그 어떤 행복의 실체와 맞닥뜨렸다. 피하기엔 이미 충분히 늦어버렸다는 걸,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그 긴 꿈을 꾸었었다는 걸 그는 알았다. 왕건은 인행도 우에 서서 벌겋게 달아오른 해를 쳐다보았다. 어제의 해가 아니였다. 눈안으로 자꾸만 뽀얀 먼지들이 아물거렸다. 늘 자신의 마음을 묵직하게 짓누르던 그 무엇의 실체를 이미 피할 새도 없이 보아버렸다.

“가야겠어. 여길 떠나…”

왕건은 갑자기 울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이가 생기고 나서부터였다. 도시가 더더욱 삭막해졌다. 아이가 자라기엔 적합한 환경이 아니라는 것이 이미 골수에 파고 들었다.

“여기 오는 게 좋을 걸세. 한번 와보기나 하게.”

다형의 말이 번개처럼 왕건의 뇌리로 다시 한번 번쩍였다.

 

아미산에서 만났던 다형과 꾸준히 련락을 가져온 것은 고마움 때문이였다. 다형이 아니였으면 큰일 날 번했었다. 아미산의 원숭이가 그렇게 대단할 줄은 생각도 못하고 묵고 있던 호텔주인이 지팽이를 꼭 갖고 나가야 한다면서 지팽이를 집어주는 것도 괜찮다고 사양했다. 그래도 짐승인데 싶었는데 그곳의 원숭이들은 사람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시 녀자친구였던 지금의 안해인 해도에게로 달려드는 원숭이를 쫓다가 팔에 상처까지 입었지만 덩치가 커다란 또 한놈의 원숭이가 왕건의 앞을 막자 해도는 다시 곤경에 빠지게 되였다. 해도는 뒤에서 배낭을 당겨대는 놈의 괴력에 이미 땅에 넘어져있었다. 그 때였다. 마침 그 자리를 지나게 된 다형이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의 앞에 나타나 손에 들고 있던 지팽이로 원숭이를 쫓았다. 원숭이가 이발을 드러내고 씩씩거렸다. 왕건이 급히 해도를 원숭이로부터 잡아당겨 일으켰고 다형이 해도의 등뒤에 있던 놈을 다시 지팽이로 쫓았다. 그렇게 맺어진 인연이였다. 다형은 자신은 위해에서 왔다고 소개했다. 다형은 아미산 정상에서 내려가고 있었고 그들은 정상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정상에서 내려가는 대로 다형과 다시 련락하기로 약속하고 그들은 거기서 헤여졌다.

그랬던 다형이 재작년부터 산골동네서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갓 뾰족뾰족 나온 배추며 상추며 쑥갓들을 혹은 노란 병아리와 오리새끼들을 찍어 왕건에게로 보내기도 했다. 다형은 한번 와보면 여기 눌러살고 싶어질 거라고 했다. 

왕건은 꽤 많은 곳들을 돌아보았다. 아토피를 앓는 딸아이 때문이였다. 그는 한때 교외의 산속 쪽으로 이사할가고 꽤 심각하게 고민했던 적도 있었는데 그 쪽도 시내 안보다는 심각하진 않겠지만 결국은 별로 크게 상황이 나아지지가 않겠다는 데 실망하고 말았다. 아토피가 심해진 지운을 데리고 장성 근처의 지인의 별장에서 보름 동안 머물고 나서였다. 지운은 건조한 공기 때문에 계속 기침을 했고 여기저기를 긁어댔다. 말유를 온몸에 발라주어도 별 소용이 없었다. 가습기를 종일 틀어놓아도 습도가 별로 올라가지 않았다. 해도는 드라마를 만드는 일에 잔뜩 신나있어서 문화의 중심지인 이 도시를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 도시에서 살려면 부부 중 한사람은 돈을 벌어야 했다. 돈 버는 일도 아이를 키우는 일도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해도는 밤늦게까지 드라마극본을 썼다가 고치고 또 고쳤다. 젊은 시절 해도의 꿈은 소설가였다. 이제 해도와 상의할 일만 남았다.

  그 날 밤이였다. 왕건이 샤워를 마치고 나온 해도에게 다형을 보러 같이 가자고 했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이래. 공기도 좋고.”

  왕건이 해도를 쳐다보았다.

  “시간 내기 좀 바쁠 것 같은데…”

해도가 말끝을 흐리더니 곧바로 대답했다.

“나를 기다리지 말고 이번 주말에 당신이 애 데리고 갔다와. 다음에, 다음에 갈 때 내가 시간을 내볼게.”

잠이 모자라서 해도의 눈에는 피발이 져있었다.

“그래. 그럼 이번엔 지운이랑 둘이서만 갔다오는 걸로. ”

왕건은 쉬면서 해야지 하는 뒤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가족의 생계를 어깨에 짊어지고 사는 안해에게 그 말을 건네는 것이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살아가는 데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필요했다.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가. 점점 분명해지는 건 그것이 집이나 차가 아니라는 점이였다. 집안에서 빨래하고 청소를 하다 보면 뚝뚝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와중에도 뿌듯한 충만감이 가슴에 차오르군 했다. 뭔가 커다란 것을, 전에는 상상조차도 못했던 그 하나를 내려놓았다는 걸 알았다. 왕건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농사군이였다. 왕건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로동자였다. 농민과 로동자의 차이를 보면서 왕건은 자란 셈이였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콩밭을 매다가 시퍼렇게 자라는 콩들을 뒤돌아보면서 흐뭇하게 웃음 짓던 할아버지의 의미심장한 그 미소를 왕건은 조금은 알 것만 같았다. 일에 쫓기워 살고 있는 안해도 자신의 콩밭을 되돌아보면서 그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을가 궁금해진다. 왕건은 해도에게서 한번도 그런 미소를 본 적이 없다.

 

소년 시절 왕건은 일찍 깨쳤다. 그 지루한 시골을 떠나려면 대학에 가야 한다는 걸. 그리고 왕건은 코피를 쏟으면서 공부를 했다. 큰도시로 가고 싶었다. 왕건은 원하던 대학에 붙었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니던 가죽공장과 방직공장이 차례로 부도가 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실업자가 되였다. 왕건은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모든 저축을 학비로 냈다. 그 돈을 건네줄 때 아버지의 떨리던 굵은 손가락마디가 떠올려진다. 오랜 세월 가죽을 이겨온 손이였다. 왕건의 대학 뒤바라지를 위해서 부모님은 집을 팔았다. 얼마 되지 않았지만 유일한 재산이였다. 아버지는 곧바로 한국으로 나가서 일을 했고 어머니는 한국에 나갈 때까지 연길에서 남의 매대를 봐주는 일을 했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왕건은 한번도 집에 다녀간 적이 없었다. 왕복기차표가 아까와서였다. 침대칸도 아닌 좌석표였음에도 아까왔다. 그것도 대학생은 절반 가격이였음에도.

왕건이 대학을 졸업할 즘에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가 세상떴어도 왕건은 집에 다녀오지 못했다. 아버지도 들어오지 못했다. 혼자 남겨진 할머니는 며칠 사이에 폭삭 늙어서 운신도 못할 정도여서 어머니가 시골에 내려가있어야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는 거기 남아있어야 했다. 할머니는 경로원에 가겠다고 했지만 아버지가 반대를 했다. 할머니까지 그렇게 보내고 나면 자신을 평생 용서하지 못할 것 같다고 어머니와의 통화에서 우셨다고 후날 들었다. 왕건이 연구생을 마친 그 다음해 아버지는 출근하던 길에서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왕건이 한국으로 갔고 아버지의 유골을 동해바다에 뿌렸다. 할머니가 그에게 던진 마디마디가 아직도 귀가에 묻어있다.

“태워서 그냥 날려. 데려올 필요가 없어. 난 내 아들이 계속 한국에 나가서 돈 벌고 있거니 생각할 테니껴.”

왕건이 취직을 해서 겨우 북경에서 안정될 만할 때 할머니도 세상을 떴다. 어머니를 북경에 모셔오려고 했지만 싫다고 했다.

“아직 움직일 만한테 왜 벌써부터 자식 애를 먹여. 싫다. 난 한국 나가서 돈 좀 벌란다.”

그렇게 나간 어머니는 벌써 7년째 한국생활을 하고 있었다. 왕건이 결혼을 하면서 집을 살 때도 어머니의 도움이 컸다. 그런 어머니에게 왕건은 차마 와서 아이를 봐달라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지운은 기차를 타기 전부터 신나했다. 

“아빠, 우리 어데 가는 거야?”

지운이 한어로 물었다. 유치원에 다니면서부터 지운은 조선어보다 한어를 더 편안해했다.

“엄마가 집에서는 조선말 하라구 했지?”

왕건이 핀잔을 주었다.

“아빠 여긴 집이 아니잖아! 응, 엄마한텐 비밀.”

지운이 까르르 웃었다. 그러더니 머리를 숙여 왕건의 볼에 뽀뽀를 했다. 목마를 태우고 있던 왕건은 그 서슬에 약간 비틀했다. 아이가 컸구나, 그런 감회가 새로와진다.

“지운아, 다형아저씨 기억나?”

아기 때라 아이의 기억엔 남아있을 리 없겠지만 왕건이 물었다.

“기억나.”

지운이 조선어로 대답했다.

“그래?”

왕건이 놀란듯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다형아저씨 원숭이를 쫓아줬다는 옛말 다 기억나.”

지운이 노래하듯 떠들었다.

“옛말?”

“응, 옛말!”

아이한테는 그들의 지난 일들이 옛말이구나하고 생각하니 약간 씁쓸해졌다. 아이한테가 아니라 삶 자체에 대해서. 어린 아이였을 적 자신도 할아버지한테 옛말을 해달라고 끊임없이 졸라댔던 게 떠올려졌다. 

기차에 오른다. 사람이 그다지 많지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아이 때문이였다. 사람들이 많은 공간에서 지운은 힘들어했다. 끊임없이 기침을 했다. 오늘은 편하게 목적지까지 갈 수가 있겠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놓인다.

 

다형의 농장은 기차역에서 차로 한참을 가야 했다. 바다와 시골동네가 이어지고 이 땅의 끝자락마냥 산이 막힌 곳, 화기융융한 기운이 느껴졌다. 시원하고 습윤한 공기가 가슴안으로 흘러든다. 도착하자 참으로 다형이 농장을 구경시켜준다면서 왕건을 밖으로 안내했다. 다형은 왕건이 생각했던 것처럼 일하던 작업복차림에 장화를 신고 그들을 마중하지도 않았고 딱히 주변에는 마구간 같은 것도 없어보였다. 다형은 놀랍게도 정장차림이였다.

“어데 나가시는 중 아니죠?”

왕건이 미심쩍은 얼굴로 묻자 다형이 클클클 웃었다.

“귀한 손님들이 오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하고는 지운이를 번쩍 들어올렸다.

“네가 지운이구나!”

“큰아버지!”

지운은 기차에서 일러준 대로 큰아버지라고 불렀다. 

“지운이 블루베리 좋아해?”

다형이 묻자 지운이는 방긋 웃으며 작은 머리통을 힘차게 끄덕였다.

“네!”

“우리 집에 블루베리가 엄청 많거든.”

동화 속 산타할아버지가 냄직한 목소리 톤으로 다형이 말했다.

지운이 눈길이 여기저기 갸웃거렸다. 

왕건이 웃었다.

“여기선 블루베리 타령 안하겠네.”

“블루베리나무도 엄청 많아.”

다형의 신비한 목소리에 지운이 뿐 아니라 왕건도 그 속으로 끌려들어가는듯했다.

 

 다형의 농장은 웅기중기 들어선 산밑에 있었는데 아득하니 넓었다. 낮다란 블루베리나무들이 줄지어서있었다.

“가서 맘껏 따먹으렴.”

다형이 나무 밑에 지운을 내려놓았다. 산자락 아래로 멀리 잔잔한 바다가 바라보였다. 구수하게 몸안 깊숙이 파고드는 흙냄새, 모든 게 싱그러웠다. 지운은 벌써 몇개째 블루베리를 따먹었는지 손바닥까지 보라빛이다.

한가롭게 그냥 나무그늘 밑에서 누워자고만 싶은 오월의 끝자락이였다. 다형과 나란히 블루베리나무 밑에 앉았다. 블루베리밭 아래로 비닐하우스가 일여덟개 이어져있었고 거기엔 겨울채소와 딸기를 심는다고 했다. 

“정리하고 여기 내려와서 살어. 애도 여기가 좋을 거야.”

다형이 그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저야 좋긴 한데…”

왕건이 말끝을 흐렸다. 안해의 표정을 상상해보았지만 아직 또렷하지가 않았다.

“그래,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지. 한번 잘 생각해봐. 언제든지 대환영이니까.”

다형이 빙그레 웃었다.

왕건은 끝없이 펼쳐진 하늘 아래 넘실거리는 블루베리나무 사이로 뛰여다니는 지운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아이가 뛰여노는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흐뭇하게 웃어본 지가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집 주변에 있던 공원에서 뛰여노는 아이를 보고 있을 때 말 못할 짠한 감정에 절어있던 때와는 사뭇 다른 편안함이였다.

왕건은 오랜만의 편안함을 느꼈다. 너무 오래되여서 더듬더듬 기억을 찾아서 확인해보아야 할 정도로.

왕건은 찾고 싶었던 곳을 이제 찾아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해도를 설득할 일만 남았다.

 

농장은 다형네 부부 뿐 아니라 왕건네와 비슷한 나이대의 화가부부가 함께 경영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이 필요하다네. 일이야 동네 일군들을 삯내면 되지만 좀더 장기적으로 함께 일을 만들어갈 사람들이 필요하지. 아이들도 많아질 거고 그러면 학교도 필요하고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우리만의 건강한 구역을 만들어가고 싶네.”

지운은 이미 왕건으로서는 아직 구분이 잘 안되는 화가부부의 쌍둥이들과 친해져서 밖에서 뛰놀았다. 본래는 학교 운동장이였다고 했다. 그러니까 다형네 집은 옛 학교를 개조해서 만든 주택이였는데 비여있는 방만도 아홉칸이 되였다. 화가부부 중 남편은 유화를, 안해는 수묵화를 그린다고 했다. 거실에 걸린 그림 중 한폭이 마주앉아있는 장의 안해인 린이 그린 그림이라고 다형이 주방에서 나오며 설명했다. 탐스런 호박을 매단 호박넝쿨이 하늘을 향해 물음표를 긋고 있는 수묵화였다. 장은 린과 결혼하기 전 사년 가까이 사찰에서 그림을 그려주면서 머무르다가 린을 만났다고 했다. 린을 만나지 않았다면 출가했을 겁니다 그러면서 장이 왕건을 마주봤다. 왕건은 그다지 종교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탓으로 그냥 그랬나 보다고 그 말을 넘겼다. 장이 뭔 말인가 할듯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초창기라서 수입은 적지만 이제 다음해부터는 블루베리도 대량으로 판매하게 되면 수입도 꽤 될 걸세. 자신이 하고 싶은 생활을 하면서 돈 걱정 없이 살 수가 있다는 게 참 행복이지 않겠나?”

다형이 거실 쏘파로 와서 앉으면서 다시 농장얘기를 꺼냈다.

“그럼요! 저희한테도 그런 행운이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왕건의 말끝에 한숨이 묻어있었다.

“여기로 오게. 언제든지 환영일세! 빈방도 가득하고. 아무 방이나 고르게나!”

다형은 열정에 불타있었다. 하고 싶은 일을 원해서 하고 있는 사람에게서만 볼 수가 있는 그런 에너지였다. 

밤이 깊어갔고 다형의 열정 또한 더욱 깊어져갔다. 

 

곧이어 숯불에 올려진 동으로 된 샤브샤브 가마가 나왔고 식탁에는 싱싱한 야채들과 버섯들이 가득 늘어졌다. 양고기도 올라왔다. 지운은 놀기도 잘 놀고 먹기도 잘 먹었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행복이 느껴졌다. 행복이란 단어가 그대로 가슴 안에서 껑충껑충 노루처럼 들뛰면서 노닐었다.

“지운이 많이 먹어. 양고기도 많이 먹고. 양도 직접 키운 거라서 고기맛이 다르지…”

린이 쌍둥이아들보다는 지운을 더 챙겨주었다. 

왕건은 돌아가면 대출이 아직 남은 집을 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생각만으로 홀가분해졌다. 몸안에서 오랜 시간 동안 묵직한 짐에 짓눌리워있던 당나귀 한마리가 어쩌다 히히힝 몸을 흔들어대며 소리내여 웃고 있는듯 온몸이 한바탕 춤이라도 추고난듯 기분 좋게 유연해졌다.

왕건은 세상에서 자신의 가족에게 가장 어울리는 곳을 찾은 거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다.

 

왕건은 농장으로 이사오던 날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친인처럼 반겨맞아주던 다형과 화가부부, 해살이 맑은 날이였고 해도의 얼굴 가득 퍼져있던 오랜만에 보는 웃음.

해도는 왕건이 말을 꺼내기 바쁘게 그 말을 기다려왔던 사람처럼 그러자고 했다.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었고 오히려 당황한 쪽은 왕건이였다. 믿겨지지가 않아서 왕건은 몇번이고 다시 해도에게 확인해야 했다.

“놀러 가는 게 아니라 이사 가자고.”

“응.”

“북경이 아니라 먼 위해, 그것도 산골동네라고.”

“응.”

“집도 팔아야 한다고.”

“응.”

“직장 그만둬도…”

해도가 빽 소리를 질렀다.

“된다고! 직장 다 때려치우고 당신이랑 지운이랑 채소 심고 닭도 키우면서 살 거라고.”

왕건은 입을 벌리고 있다가 해도를 품에 그러안았다. 해도에 대해서 정말이지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미안하기도 했다. 안해도 나름 이 삶이 무거웠구나 싶었다.

해도가 그의 품안에서 말했다.

“나도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면서 살고 싶다고… 그리고 지운이랑도 놀아주고 싶다고…”

해도의 목소리가 축축히 젖어있었다.

 

그들은 일단 위해에 정착해 살 집을 사기로 했다. 시내 변두리의 자그마한 아빠트를 사고 이사짐 대부분은 거기에 풀었다. 그리고 나서 수중에 90만 정도가 남았다. 아주 간추린 살림으로 그들은 농장에 입주를 했다. 다형은 화가부부가 입주할 때 70만원을 농장에 투자했다고 얘기했다. 당연히 농장주인이 되려면 투자는 해야 할 게 아니냐고 왕건이 말했다.

“생각 좀더 해보시지 그러셨어요…”

입주 환영만찬이 끝나고 왕건이 산보 삼아 혼자서 마당에서 걷고 있는데 손에 닭알이 그득 담겨있는 광주리를 들고 옆을 지나던 린이 가다 말고 조용히 말을 던져왔다.

“네?”

왕건이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린을 올려다보았다. 광주리를 든 린의 모습은 틀림없는 시골아낙의 행색이였다.

“농장에서 산다고 홀가분한 것만도 아니예요. 어데든 마음자세가 중요하겠지만 정작 살다 보면 우리가 생각했던 거랑은 천지차이예요. 적어도 저희한테는요.”

린이 자기를 쳐다보고 있는 왕건을 건너다 보지도 않고 말을 던지고는 몸을 돌려 총총걸음으로 저만치 멀어져갔다. 왕건은 좀 무거워보이는 광주리를 들어다줄걸 그랬나 머뭇거리다가 다시 느적느적 마당을 돌기 시작했다. 어둑어둑 짙은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왕건은 손에 붓만 들던 화가들이 농사일을 하려니 당연히 힘들겠지 하고 린의 말을 속으로 풀이를 했다. 헌데 다형은 일군들을 쓴다고 했지 않는가? 

쥐여짜면 레몬즙이 흘러내릴 것만 같은 달이 떠올랐다. 왕건은 린의 표정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왕건을 쳐다보지도 않고 고집스럽게 발끝만 내려보면서 말을 던져올 때 린의 표정은 이상하리 만치 슬퍼보였다. 무가내로 삶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듯 버거워보였다.

그러고 보니 저녁식사 자리에서도 첫 만남과는 달리 린도 그렇지만 린의 남편인 장도 말을 참 아끼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긴 했었다.

“달이 참 밝아. 달 바라보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

해도가 다가와서 그의 곁에 섰다.

“응, 달이 밝지? 우리 여기서 잘살자.”

왕건이 안해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해도가 머리를 기대여왔고 왕건의 알 수 없던 불안감은 순식간에 어데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잠시 려행을 나갔다고 했던 다형의 부인은 왕건네가 농장에 정착한 지 한달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 날은 무척이나 궁금했던 모양으로 해도가 다형에게 물었다.

“아주머니는 꽤 긴 려행을 하네요? 어데 가신 거예요?”

마침 터밭의 풀을 뽑고 있었고 곁에서 부지런히 일손을 놀리던 린이 해도에게 눈짓하며 머리를 저었다.

해도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왕건과 장과 함께 수로를 빼고 있던 다형이 삽질을 멈추고 그들을 둘러보았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서 얘길 안했는데… 우리 부부 별거 중이예요.”

잠시 침묵이 스쳤고 다형이 두손바닥으로 툭툭 호주머니가 달린 앞섶을 털더니 “좀 쉬다가 합시다.” 하고는 먼저 집 쪽으로 향한다.

해도가 한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는 것을 왕건은 물끄러미 건너다 보고 있었다. 게면쩍어질 때면 저도 몰래 나오는 해도의 습관이였다.

 

그 날 밤 자기 전 해도는 린에게서 들은 얘기라면서 왕건에게 말했다.

“다형이네 부부 말이야. 별거한 지 꽤 오래됐대. 이 농장을 할 때부터 아주머니가 반대를 하셨나봐. 다형이 시내에 있던 집도 팔고 있던 돈을 모두 이 농장에 넣는 바람에 리혼얘기까지 나왔대. 다형이 돈을 줘야 하는데 그 돈을 못 주게 되니까 리혼을 지금까지 미뤄왔나봐… 다형 참 안됐지? 부부가 같은 취향을 갖고 같이 살 수가 있다는 게 참 행운인 것 같애. 당신은 여기서 살길 원하는데 내가 싫다고 계속 시내에 있어봐…”

왕건은 대답 대신 해도의 손을 꼭 잡았다. 

 

과묵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던 장이 다형에게 화를 내는 것을 보게 된 것은 며칠 뒤였다. 왕건은 한두달 쯤 있어본 뒤 최종 합류결정을 내릴 생각이였는데 다형은 은근히 빨리 투자금을 다 줬으면 하는 눈치였다. 왕건은 어차피 농장에 자리잡기로 한 걸 빨리 돈을 준대도 괜찮겠지 생각했다. 처음부터 다형을 믿고 시작한 일이니까.

왕건이 다형의 거실 앞에 다가갔을 때 안으로부터 장의 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렇게 계속 언제까지 끌 거요? 벌써 반년째 돌려달라고 했지 않소? 왕건이네한테는 그 돈을 우리에게 달라고 말할 작정이니 그리 아시오!”

“자네도 알다 싶이… 돈도 돈이지만 사람도 필요하지 않은가. 이 농장은 돌아가야 되지 않겠나? 좀만, 좀만 기다려주면 안되겠나?”

다형이 장을 달래고 있었다.

“다른 건 둘째 치고 2년 동안 우리가 일한 만큼 보수는 줘야 할 게 아니요? 그동안 돈 십원을 줬소? 아니잖소! 애들도 커서 학교도 다녀야 할 거고. 그동안 보수는 그만두더라도 투자한 원금은 돌려주시오. 그래야 우리도 살 게 아니요…”

장의 목소리에서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다.

“우리 농장사정을 누구보다 자네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좀만, 좀만 더 기다려주게…”

“기다리고 말고 할 게 없소. 더는 못 기다리겠으니 그리 아시오. 아니라 싶으면 왕건에게 내가 다 말하리다.”

장이 나오는 발자취소리가 났다. 왕건은 황급히 뒤마당 쪽으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왜 몸을 피해야 했는지 왕건 스스로도 허구퍼서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니 장은 발을 탕탕 구르면서 자신의 집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왕건은 사위스런 생각이 드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분명히 돈얘기였다. 왕건은 주머니에 넣은 은행카드를 손바닥으로 툭툭 쳐보다가 자리를 떴다. 

 

정적.

정적이 흐른다. 태초에 침묵이 있었다면 그 태초의 침묵도 이 밤의 정적마냥 흘렀으리라.

오후 내내 장작을 팼더니 몸이 노곤했다. 왕건은 침대에 누워 어둠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는다.

아무래도 장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래일 날 밝는 대로 장을 만나 얘기를 나눠봐야 하겠다고 왕건은 생각했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와글거리고 정적 속을 헤맨다.

여길 온 게 잘된 일 맞겠지?

왕건은 그 순간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산 너머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새가 낡은 풍금을 가까스레 당기듯 괴상한 소리를 질러댔다. 해도가 몸을 움츠렸다.

왕건은 다시 베개에 머리를 붙였다. 갑자기 어둠 속이 여간 북적북적한 게 아니였다. 잎이 무성해진 살구나무 그림자가 카텐을 드리운 창가로 무섭게 드리워져있다. 왕건은 어둠 안에서 두려움에 떨던 어린 아이로 되돌아간듯 온몸이 경직됨을 느꼈다. 크게 한숨을 내쉬다 말고 왕건은 손으로 밀면 밀릴 수가 있는 물건처럼 오른팔을 내밀어 휘휘 어둠을 쫓았다. 그러다가 그런 자신이 어이가 없어 피식 웃고 만다. 

이제 잠이나 자야지 싶어 눈을 붙이는데 저쪽 방으로부터 지운이 잠꼬대하는 소리가 났다.

“민수오빠 같이 가.”

왕건은 섭섭해지려고 한다. 잘 익은 살구가 몇개 바람에 투둑 하고 땅에 떨어졌다.

 

다음날 아침.

왕건은 세수를 하러 짐짓 장의 집 쪽을 에돌아 뒤쪽 편 샘터로 나갔다.

장이 퐁퐁 솟아 흘러내리는 샘터에서 대나무바구니에 그득 담긴 오이며 가지, 호박, 상추를 씻고 있었다.

이번 주는 린의 식사당번이다. 한주씩 왕건네와 장네가 돌아가면서 식사준비를 하기로 했지만 거의다 린이 도맡아했다. 그동안 린이 이 큰 살림을 맡아해온 터라 린을 좀 쉬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제의한 당번제도였는데 일주일도 안돼 별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나서는 포기한 셈이였지만 해도는 그래도 열심히 자신 앞의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했다. 주방일에 더 익숙한 왕건이 하려고 하면 해도는 자신의 일거리를 뺏지 말라면서 왕건을 주방 밖으로 내쫓았다. 해도도 나름대로 자신의 위치를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밥물도 제대로 못 맞추고 국수를 삶다가도 넘치는 바람에 놀라 소리지르며 달아나는 해도가 린의 마음에 들었을 리는 없었겠지만 린은 가타부타 소리없이 해도의 손에서 밥통을 받아 물을 맞추고 끓어넘친 가마에 찬물을 부어넣고 행주로 가스렌지를 닦았다.

어제 아침에는 린이 채소 따는 걸 도와준다고 나갔던 해도가 시무룩해서 집에 돌아왔었다.

“왜 벌써 왔어?”

살랑살랑 아이의 코를 간지럽히며 지운이를 깨우고 있던 왕건이 물었다

해도는 왕건을 보자 얼굴이 새빨개져서 화를 냈다.

“린에게 쫓기웠어. 너무한 거 아니야? 린이 말이야. 오이면 오이지 가지면 가지지… 어느 건 따도 되고 어느 건 따면 안된다고…”

“왜 린이 그랬을가? 나도 리해가 안되네.”

왕건이 해도를 끄당겨 곁에 앉혔다. 어느새 잠에서 깬 지운이가 뒤로 가만히 다가와 제 엄마의 겨드랑이에 작은 두손을 쏙 집어넣었다.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는 해도가 숨이 넘어갈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만해. 제발 그만해. 하하… 나 죽네.”

 

“싱싱하네요.”

왕건이 말을 건넸다.

장이 깜짝 놀라 몸을 크게 떤다. 그 서슬에 왕건도 놀라서 어 소리를 냈다.

 “아,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왕건이 급히 사과를 했다.

“아니예요. 제가 너무 몰입을 해서… 제가 뭔 일을 하면 푹 빠져버리는 버릇이 좀 있어서…”

장이 미안한듯 웃었다.

“그림을 그리려면 고도로 몰입을 해야겠죠.”

왕건이 머리를 끄덕였다. 왕건은 세수하는 것도 잊은 채 멀거니 장이 상추잎을 하나씩 떼여 씻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제 아침에, 린이 큰소리를 냈다고 엄청 후회를 하더라구요.”

한참 상추잎을 씻고 있던 장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네?”

왕건이 조금 뒤늦게 장의 의도를 알아채고 급히 아니라고 했다.

“아니예요. 해도가 여러 모로 살림을 안해봐서 주방일도 밭일도 몰라요. 한번도 오이 같은 걸 따본 적도 없을 걸요. 도시에서만 커서 그런 일이 워낙 서툴러요. 헌데 본인도 엄청 일을 배우고 싶어해서…”

“지운이 엄마 뭐든지 열심히 하려고 하더라구요. 린이 약간 채마전에 대해선 까탈스럽거든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저도 리해가 안되긴 마찬가지예요. 오이나 가지나 호박이나 도마도가 딱 그 자리에 달려있어야만 예쁘다고. 두고 보려고 키우는 거죠. 언젠가 민석이 녀석이 처음 익은 도마도를 따서 먹어치웠는데 린이 얼마나 화를 내던지… 그 때문에 저희 다투기까지 했지만 지금은 별 수 없이 그러려니 해요. 지운이 엄마가 리해를 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왕건은 뭔 말인지 잘 리해가 안됐지만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네.”

“다시 말하자면 채마전은 그냥 채소를 심어먹는 땅이 아니라 린의 예술작품 창조 같은 것이라고 할가요? 실제로 린의 많은 작품들이 거기로부터 나오기도 했죠. 다형의 거실에 걸린 그림 있죠? 호박덩쿨과 호박 그림도 그렇게 그린 거예요.”

왕건이 머리를 다시 끄덕였다.

“그렇게 두고 보겠다고 키우는 채소들도 있군요. 하여튼 대단하네요.”

장이 채소가 그득 담긴 대나무바구니를 들고 일어섰다.

“그럼 먼저 가볼 게요. 식사준비를 해야 해서. 돌고 천천히 들어오세요.”

왕건은 멀어져가는 장의 뒤모습을 바라보다가 엉거주춤 선 채 차거운 샘물로 푸푸 세수를 했다. 그러다가 장에게 묻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엄마, 민수오빠한테 나 시집갈 거야!”

지운은 쌍둥이들과 잘 어울려 다녔다. 민수는 쌍둥이 형제 중 형이였다. 동생은 민석이였다.

“왜 민수오빠야?”

해도가 목욕수건으로 아이의 몸을 닦아주다가 물었다.

“민수오빠 멋있어.”

“그래? 민수랑 민석이랑 똑같이 생겼잖아. 그럼 민석오빠도 멋있지.”

“아냐, 민수오빠가 더 멋있어.”

“뭐가?”

“음… 민수오빠가 수제비 날리는 거 더 멋있어요.”

“수제비?”

“오빠가 말하지 말랬는데…”

지운이는 해도가 들고 있는 목욕수건 안으로 파고 들었다.

“바다 갔었어?”

해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운이는 모래 속에 머리를 파묻은 타조 모양으로 해도의 품안으로 파고든다. 저도 잘못한 줄 아나 보았다.

“누구랑? 쌍둥이오빠들이랑?”

지운이 목욕수건을 뒤집어쓴 채 머리를 끄덕였다.

“바다는 위험하다고 했지? 꼭 엄마랑 아빠랑 같이 가야 한다고 했지?”

지운이 숨소리마저 죽인 채 머리를 끄덕였다.

“민수도 혼나야겠네.”

해도가 목욕수건을 잡아챘다. 아이가 손끝으로 두세번 수건끝을 잡아당기다가 포기하고 손을 놓았다. 

“민수오빠가 그런게 아냐… 민석오빠가 먼저 가자고 했어.”

민수를 혼내야겠다는 해도의 말에 지운이 울먹거렸다. 해도는 다섯살짜리의 사랑 앞에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다신 혼자서 바다에 가면 안돼 알았지? 오빠들이랑도 안돼!”

해도가 오금을 박았다. 린에게도 단단히 아이들에게 이르라고 말할 참이였다.

“엄마, 민수오빠 혼내지 마… 지운이, 지운이 다음부터는 말 잘 들을게.”

지운은 엄마한테 혼나는 것보다도 민수 걱정 때문에 더욱 안달이 나했다.

 

이런 것이 행복이지 않을가?

왕건은 해도가 어린 딸애를 어르는 모습에 감동한다. 날이 더워지기 시작했다. 노랗게 익은 살구를 따먹는 재미에 지운은 푹 빠져있었다. 아이를 씻긴 목욕물로 빨래를 하던 해도가 치마에 살구물이 들었다고 아무리 비벼도 벗겨지지 않는다고 아이한테 타박했다.

“치마에 또 살구를 주어담았지?”

“살구가 너무 많아서 호주머니가 넘쳐났어.”

지운이는 푸짐하게 줏던 살구 생각이 나는지 생글거렸다. 해도가 서둘러 아이의 웃옷을 뒤져보더니 이거 뭐야! 구박한다.

“살구 너무 많이 먹으면 탈난다고 했다…”

해도가 계속 아이의 치마자락을 불걱불걱 비비면서 핀잔을 늘여놓을 때는 지운이가 별이 내다보이는 창가 쪽 흔들이의자 우에 누워 책을 읽고 있는 왕건의 몸 우로 막 기여오르기 시작할 무렵이였다. 지운이는 씩 웃어넘긴 채 아빠에게 감겨든다.

“아빠, 책 읽어줘.”

왕건이 아이를 몸 우에 얹은 채 흔들흔들하면서 “옛날옛적에 호랑이 담배 피울 때 말이야.” 옛말을 하기 시작했다.

“호랑이 담배 피워?”

지운이의 눈이 올롱해졌다.

“응, 호랑이 담배 피우던 옛날옛적에 말이야. 커다란 살구나무 한그루가 있는 집에 한 아이가 살고 있었단다. 그 아이가 엄마 말을 안 듣고 밥도 잘 안 먹고 살구만 따먹었지. 아, 그 애 이름은…”

왕건이 잔뜩 턱을 내리깔고 슬며시 아이를 엿보았다.

“아빠, 잘못했어. 그 아이 이름 나도 알아. 지운이지?”

지운이 시무룩해졌다.

“가서 엄마한테 잘못했다고 말하고 올 거지? 그럼 계속 재미있는 옛말 해줄 건데…”

왕건이 넌지시 말을 던졌다.

아이가 재빠르게 엄마한테 달려가더니 손빨래를 하고 있는 해도의 볼에 쪽 소리나게 뽀뽀를 했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달아와 왕건의 몸 우로 기여올랐다. 그런 그들 부녀를 바라보는 해도의 얼굴에도 행복이 찰랑거렸다.

평온한 밤이였다.

 

블루베리는 잘 팔렸다. 매일 오전 늦게까지 블루베리밭에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해도와 린이 같이 일하는 시간도 늘어났다. 린은 해도보다 두살 어렸다. 그럼에도 바다바람에 시달렸는지 아니면 두 쌍둥이아들을 키우느라 힘겨웠던 건지 린은 오히려 해도보다 겉늙어보였다. 두살이나 적다는 걸 알고 나서 해도가 놀랐을 때 린은 체념한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던졌다.

“이제 아줌마가 다됐는 걸. 언제 거울을 들여다봤던지도 아득해요.”

해도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린이 아까보다는 다소 거칠어진 손으로 블루베리를 따는 것을 지켜보았다. 통통하니 보라빛으로 익은 블루베리가 린의 손안에서 물러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블루베리가 어느새 가득찬다. 새벽 같이 일어나서 블루베리를 따서 택배로 보내는 일이 하루 중 중요한 일과가 되였다.

“헌데 다형은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

해도의 말소리가 빳빳해진 분위기를 느슨하게 만들었다.

“장의 친한 친구랑 잘 아는 사이였어요. 그 친구가 농장얘기를 꺼내면서 인연이 됐죠.”

린이 가볍게 웃었다. 해도도 한달 전 농장으로 들어오던 때의 부풀었던 그 순간순간들이 떠올려졌다. 꼭 두달 전만 해도 이렇게 산과 바다로 둘러쌓인 농장에서 블루베리를 따고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을가.

“우리가 이렇게 같이 살게 된 것도 인연이겠죠…”

초심을 잃지 말아야지, 해도는 그 순간 다짐했다. 정말이지 다짐 같은 건 왕건과 련애를 할 때조차도 해본 적이 없던 것이였다.

“전원생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번에는 린이 물었다.

“음… 여유작작하고 게으름을 실컷 피우고 맨발로 바다가 산책을 하고 책도 읽고 또…”

해도가 뭐가 더 할 말이 필요하냐는듯 거기서 말을 멈추고 린을 뒤돌아보았다. 해도는 다른 일은 잘 못해도 블루베리 따는 일은 잘했다.

린이 흐드득 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던 적 있죠…”

그러더니 해도의 두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좀더 지내보세요!” 했다.

“그래야겠죠?”

해도도 린의 두눈을 피할 념 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두 사람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시선을 딴 데로 돌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조금 뒤 해도가 다시 말을 꺼냈다.

 “블루베리가 이렇게 잘 팔릴 줄 생각 못했어요.”

“따서 바로바로 택배로 보내서 꽤 신선하거든요. 찾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늘었는데 물량은 아직도 못 따라가고 있죠. 블루베리꿀은 거의 아는 몇분만 나누고 있구요.”

린이 잠간 서서 멀리 넘실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해도를 마주해 섰다.

“그러면 뭘해요. 이렇게 힘들게 일해도 돈 한푼 받지 못하는데…”

“네?”

해도는 미처 린의 말뜻을 몰라 혀아래소리로 물었다.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저희 부부 2년 동안 일했는데 아직 돈 한푼 못 받았어요.”

린이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첫해는 얼마 팔지 못했으니 그러나 보다 하고 넘어갔거든요. 헌데 지난해도 없는 거예요. 다형이 리혼을 한다고 했잖아요. 그 돈 모두가 다형의 부인한테로 넘어간 거죠. 아직도 다 주려면 아마 몇해 걸릴 거예요. 다형이 말 안했죠?”

해도가 아무 말도 못하고 머리만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며칠째 다형의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저희도 농장에 투자를 했거든요. 그러면 어느 정도 투자액 만큼 수익분배는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아마도 우리가 투자한 그 돈도 다형의 부인한테로 들어갔을 거예요. 이런 얘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름 대로 고민을 하긴 했는데…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말을 마친 린이 다시 손을 내밀어 블루베리를 따기 시작했다.

해도의 손안에서 블루베리알들이 후드득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장과 다투고 난 다음날 일 보러 시내에 다녀온다고 나갔던 다형이 돌아왔다. 막 아침식사를 마친 뒤였다. 나흘이 흘렀을 뿐인데 수염을 깎지 않아서 그런지 다형은 폴싹 늙어져 홀쪽해진 쌀자루 모양으로 거실 쏘파 한쪽켠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런 다형을 보면서 왕건은 기분이 착잡했다. 그제날의 열정은 고사하고, 한점의 불꽃마저도 사그라져버린듯한 다형이 낯설었다. 그럼에도 한편 얼마나 힘들면 이 모양일가? 다형이 안스러웠다.

“아침은?”

장이 묻자 다형은 힘겹게 머리를 저었다. 린이 부엌으로 들어가는 뒤모습을 따라 해도도 부엌으로 따라들어간다. 그러더니 잠시 뒤 꿀물 한컵을 타들고 거실로 나왔다. 아이들이 밖에서 숨박곡질을 하느라 떠들썩했다. 폭우가 퍼부을 것처럼 해가 구름장 뒤에서 얼굴을 내밀 념을 안했다.

다형이 해도가 건네는 꿀물을 단숨에 비웠다.

“아, 이제 살 것 같군.”

다형이 컵을 내려놓고 그제야 좌우를 살펴보더니 별일 없었지? 물었다.

“별일이야 뭐.”

장이 툭 말을 던졌다. 장은 아예 다형과 눈도 맞추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툭 트인 거실이 오늘따라 숨막힐듯 갑갑했다. 해도가 재빨리 부엌으로 몸을 도사린다.

“내가 나간 지 나흘인가? 닷샌가?”

“나흘입니다. 오늘까지.”

이번엔 왕건이 대답했다. 장은 계속 내려오지도 않은 앞머리를 올리쓸었다. 허리께까지 길게 묶은 장의 생머리가 신기한지 지운은 몇번이고 장에게 물었다.

“아저씨, 아저씨는 녀자예요? 남자예요?”

뾰족한 턱 때문인지 작은 얼굴 때문인지 아니면 머리채 때문인지 장은 녀성적인 느낌이 강해보이긴 했다.

“나 지금 삼박사일을 지하에 갇혔다가 풀려난 길이라네.”

다형의 말소리가 거실 안에 공허하게 퍼졌다.

“어쩌다가…”

왕건이 깜짝 놀라 물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모질 줄은 생각 못했네. 당장 돈 삼백만을 내놓으라는데 천천히 주면 안되냐고 했더니 상 한번 찡그리지 않고 지하실에 가둬놓고…”

다형이 힘겨운듯 두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 사람 남자형제가 셋이라네. 내가 세 장정을 당해낼 수가 있겠나? 지하에 가둬놓고 차용증을 쓰라고 협박을 하대… 지금 별 수 없이 그 차용증을 쓰고 풀려나온 길이네.”

“그렇다면 파출소부터 갔어야죠?”

장이 약간 빈정거리는 투로 물었다.

다형이 장을 건네다 보더니 손을 내저었다. 

“그렇다고 감옥에 보내야겠나? 식구끼리?”

다형이 끄응 소리를 내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단 목욕부터 하고 밥이나 먹어야겠네. 있다가 얘기하세.”

동시에 밖에서 후둑후둑 비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이들이 와, 소리지르며 그들이 있는 거실 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창밖으로 보였다.

 

“미쳤어? 그걸 다 얘기하면 어쩌자고!”

장이 린에게 고함을 지르는 걸 왕건은 들었다. 지운을 찾으러 나갔다가 마당 어디에도 없길래 쌍둥이네 집에서 노나 보다고 그 집 쪽으로 향하던 중이였다. 린은 그들 집과 거의 붙어있다 싶이 한 채마전에서 쪼크리고 앉아 풀을 뽑고 있었다. 비가 온 뒤라 풀들이 기세등등해서 올라왔다. 

“애들 못 봤어요?”

왕건이 소리쳤다.

장이 놀라면서 그런 왕건을 돌아보았다.

“아니, 저 뒤쪽에서 놀고 있었는데…”

린이 일어나면서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장을 보는 체도 않고 집 뒤편으로 걸어갔다. 린네 집은 ㄱ자형으로 앉은 집들 중 동쪽에 있었고 다형네는 남향으로 앉은 중간집에, 왕건네는 서쪽 끝머리에 살고 있었다. 집 뒤쪽에서 산으로 올라가는 가장자리로 가는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는데 아이들은 거기서 놀기 좋아했다. 

왕건도 장의 곁을 지나 린의 뒤를 따라 실개천까지 나왔다. 거기에도 아이들은 없었다.

“어데 갔지?”

린이 이미 어둠이 옅게 깔리기 시작한 동녘을 바라보다가 후다닥 달리기 시작했다.

왕건도 린의 뒤를 따라 달렸다.

바다였다. 집 근처에 없다면 아이들이 갈 곳은 바다 밖에 없었다.

린은 이미 정신 나간 사람처럼 앞에서 달렸다. 걸어서 반시간도 되나마나한 거리가 오늘따라 멀기도 멀다.

하얀 날개의 갈매기 한마리가 어둠 속으로 날아들어간다. 

그 때였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바다가 쪽에서 들려왔다. 왕건이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바다바람이 얼굴을 아프게 때렸다.

“지운아!”

눈물투성이 된 지운의 모습이 먼저 보였고 그 다음 보인 건 쌍둥이 중 하나였다.

“민수야! 민석아!”

뒤에서 린의 부름소리가 따라왔다.

“민석아! 형은? 너 형은!”

린이 달려와 민석을 흔든다. 아이는 이미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엄마…”

아이가 입귀를 피식거리더니 울음을 터뜨린다.

“아니야.”

린이 외마디소리를 지르면서 바다로 뛰여들었다. 민석의 울음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뒤이어 달려온 장과 다형도 바다에 들어갔다. 곧바로 해도가 달려왔고 지운은 해도의 품에 안겨 온몸을 바들바들 떤다. 그런 모녀간을 뒤에 두고 왕건도 바다로 뛰여들었다. 

뛰여드는 순간, 왕건은 그 날 새벽 집 뒤 샘터에서 장에게 미처 건네지 못한 말이, 하지 못했던 그 말 한마디가 밀려오는 파도처럼 평생 가슴을 쳐오리라는 걸 알았다.

“실은 말이야, 위해에 집 장만하고 나서 먼저 다형에게 50만원을 이체했다네.”

어둠이 무겁게 바다가에 내렸다. 파도소리가 철석거리는 가운데 린의 갈린 목소리가 계속해서 울려퍼졌다.

“민수야, 어데 있어…”

출처:<장백산>2018 제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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