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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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개의 고원》학습필기-3
2019년 10월 07일 12시 34분  조회:1805  추천:0  작성자: 박문희

《천개의 고원》을 읽어내려 가노라면 리해하지 못할 부분이 많다. 지어 잠꼬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고 헷갈리는 부분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런 잠꼬대 같아 보이는 그런 부분까지 첫 시작부터 철저히 리해하느라 알골을 썩일 필요는 전혀 없다. 내 생각에는 그런 곳은 잠시 지나쳐버려도 된다.

그러면 우리는 알기 쉽고 생동하고 력동적인 부분과 바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재미나는 부분도 아주 많다. 이 책에는.....

들뢰즈 가타리가 주장하는 바가 뭔지 결론부터 알고 기타 개념이나 문제를 차차 풀어나가는 학습방법도 혹시 방법이라면 방법이 아닐가?

들뢰즈/가타리 주장의 매력은 뭘가?

우선 《천개의 고원》이 지극히 매혹적인 것은 그것이 이른 바의 중심도 줄기도 토대도 갖지 않은 ‘리좀’이 보여주는 놀라운 상상력 때문이 아니겠는가고 생각한다. 실상 우리가 들뢰즈와 가타리에게서 배울 것은 무슨 지식이나 심오한 사상에 대한 리해가 아니다. 령감과 상상, 사유의 방법론, 존재의 쇄신/생성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모든 것이 중심에 종속되여 있는 위계(位阶)질서 등 기존의 규범적 질서체계에 대하여 “진절머리가 난다”는 말로 타매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나무(树木적 体系)라면 진절머리가 난다. 우리는 더 이상 나무들, 뿌리들, 곁뿌리들을 믿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진절머리가 난다”는 말로 타매할 정도로 나무의 체계를 불신하는 것은, 리좀체계와의 관계에서 고찰할 때 나무체계는 지극히 보수적이고 비생산적인 체계인 반면에 리좀은 지극히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체계인 까닭이다.

다시 말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서론 부분(리좀)에서 현대사회와 같은 위계질서의 세계를 수목의 개념으로 정의하고 이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리좀(뿌리줄기)을 내세웠다. 나무라는 체계는 모든 것이 중심에 종속되여 있고 철저히 등급질서의 사유를 따르는 그런 기존의 규범적 질서체계다.

그러나 리좀은 그와 반대로 탈중심화와 非 위계질서를 본질로 하는 다양체(多元体)로서 중심도 계층도 서렬도 계보도 없고 초월적인 통일도 또 이항 대립이나 대칭성의 규칙도 없으며, 항상 그런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생성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서렬과 위계질서와 규범으로 충만된 세계다. 그러나 발전을 거듭해온 현대사회의 리면에는 단순히 수목의 개념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다. 현대사회에는 문명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친자연적이면서도 비체계적인 질서가 무수히 존재한다. 특히 현대와 같이 인터넷이 발달한 오늘 지나치게 위계질서적이고 인간중심주의적인 수목의 개념은 처처에서 인류사회와 자연의 조화발전의 걸림돌이 될 소지가 많으며 이에 반해 리좀의 개념이 훨씬 현시대에 잘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수목의 개념이 중심화를 지향한다면 리좀은 탈중심화를 지향한다. 나무체계가 자기가 몸담고 있는 령토를 지층화하고 그 안에서 탑이나 피라미트를 쌓으며 일직선의 수직형 체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면 리좀은 그것과는 달리 어떤 지점에서든 다른 무엇과 련결하고 접속한다.

나무는 혈통관계로서 한핏줄일 때만 서로 통하고 상위이웃과 하위이웃들과만 련계를 가지지만 리좀은 결연관계로서 모든 것과 만나며 만나야만 한다. 기성의 령토를 떠나 다른 것과 만나고 접속하는 것이 바로 탈령토화며 탈령토화하는 과정이 바로 새로운 것을 창조(창신-創新)하는 과정이다.

사유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발명하고 발견하지 않는다면 그 사유는 즉각 페기해야 한다. 왜? 그것은 죽은 사유니까. 죽은 사유는 내부에서 작용하는 속도들과 변용태들을 끌어내 새로운 순환의 선으로 나아가는 동력이 되지 못한다. 새로운 순환의 선을 타려면 작동하는 옛 힘들의 순환을 정지시키고 해체해야만 한다. 옛 순환이 정지되지 않고서는 새 순환은 작동하지 않는다.

지층은 기성의 위계체계이며 이미 형성된 중심이며 령토이다. 되기를 위한 령감생성(灵感生成)으로 나가지 못한다면 당신은 력사의 재귀(再歸), 노예의 도덕에 매인 하수인, 식민지에 지나지 않는다.

도주선, 탈영토화 운동, 지각 변동(=탈지층화) 운동 등을 통해 지층에서 벗어나야 창조로 나갈 수 있다.

들뢰즈의 철학적 작업은 예술에서의 아방가르드(先锋派)와 상당히 닮아 있다. 그는 정지되여 경직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들뢰즈의 욕망리론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도 다르다.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동원해 억압된 욕망의 양상을 가족 내부 차원에서 분석했다면, 들뢰즈는 욕망의 창조력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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