륙도하
http://www.zoglo.net/blog/5857 블로그홈 | 로그인

검색날짜 : 2019/11/30

전체 [ 4 ]

4    겨울 시들 댓글:  조회:1807  추천:0  2019-11-30
겨울 숲     성영희       겨울 산, 수런대는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물고기들의 을씨년스러운 잔등을 만난다. 꼬리는 하류 쪽으로 꿈틀 거린다. 깡마른 나무들이 직립으로 견디는 가잠의 시간들, 고드름이 가시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폭포는 떨어지는 소리들로 얼지 않는다. 튀어나간 물방울들만 빙벽으로 미끄럽다. 뼈를 드러낸 물고기의 잔등처럼 잎 다 떨어진 나무들이 일렬로 서있는 산등성이    나무들의 귀는 일년생이다. 어떤 소리가 저렇게 앙상하게 남아 저희들끼리 입을 만드는가, 수백 년 동안 자란 물고기들이 산꼭대기를 헤엄치고 있다. 능선 지느러미 겨울을 달리고 있다.    물고기들의 조상은 앙상한 나무들이 줄 서 있는 저 산등성이다. 얼음장 밑에 귀를 대보면 넓은 대양의 물이 가는 줄기로 흘러내린다. 봄부터 여름까지 가득 찼던 푸른 정맥을 닫아버리고 앙상한 팔로 바람을 겪는 지느러미들, 아무리 작은 물고기라도 몸속에 가시를 숨기고 있듯 겨울 산, 그 끝없는 능선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가시들이 공중을 향해 자라고 있다.    활시위를 당기듯 겨울 숲을 당기는 팽팽한 바람에 능선하나 걸린다. 꿈틀거리며 물살을 타는 지느러미들, 겨울이 느리게 날아가고 있다.  ―2018 《학산문학》 겨울호                  충남 태안 출생        2017년 대전일보,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시집 『섬, 생을 물질하다』등         농어촌문학상, 동서문학상, 시흥문학상 수상   겨울아침 / 윤제림 역전다방 창가에 붙어 앉아 내려다보는 정거장 마당. 신발가게 주인은 귀마개 위로 장갑 낀 손을 붙이고 섰고, 추운데 저러고 싶을까, 검은 삽사리와 누렁이가 눈 위에서 한바탕 붙어 있다. 지금 막 계단을 내려간 다방처녀는 맨 종아리가 더 안쓰러운데, 연신 코트 깃만 고쳐 세우며 이발소 앞을 걸어가고 있다. 정거장 마당 깨랑 콩이랑 말린 나물이랑 꼭 한 움큼씩 벌여놓은 여자는 무릎 새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 어서 기차 시간이 되어 더러 팔렸으면 좋겠다. 겨울바다에 가서 / 홍해리 세월이 무더기로 지는 겨울바다 아득한 물머리에 서서 쑥대머리 하나 사흘 밤 사흘 낮을 이승의 바다 건너만 보네 가마득하기야 어디 바다뿐일까만 울고 웃는 울음으로 빨갛게 타는 그리운 마음만 부시고 파도는 바다의 속살을 닦으며 백년이고 천년이고 들고 나는데...... 까마아득하기야 어찌 사랑뿐일까 보냐 겨울한라산 / 오석만 바람이 시작되는 곳을 아는가? 구름이 넘나들며 백록이 목을 축이던 한라에 서서 멀리 출렁이는 바다가 바람을 해맑은 하늘에 마구 뿌려대는 비취빛 사랑은 누구의 숨결인가? 하늘과 땅 사이에 온통 피어있는 하얀 눈꽃들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그대와 손을 꼭 잡고 순백의 눈꽃 세상에 푸우욱 빠져 차가운 바람도, 힘에 겨운 무게도 하얀 사랑으로 이겨내는 푸른 나무들처럼 다시 태어나 겨울한라산에 매달려있는 고드름이 되어도 좋고 따스한 햇살에 녹아 떨어지는 한 방울 물방울이어도 좋다 그대 눈 속에서 출렁이는 파도로 하얗게 피어오르는 하얀 나비라도 좋고 끝도 없이 부딪치는 파도에서 시작되어 겨울한라산 백록을 넘나드는 구름이라도 좋다 겨울행 / 이근배   대낮의 풍설은 나를 취하게 한다 나는 정처없다 산이거나 들이거나 나는 비틀걸음으로 떠다닌다   쏟아지는 눈발이 앞을 가린다 눈발 속에서 초가집 한 채가 떠오른다 아궁이 앞에서 생솔을 때시는 어머니   어머니 눈이 많이 내린 이 겨울 나는 고향엘 가고 싶습니다 그 곳에 가서 다시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름날 단신의 적삼에 배이던 땀과 등잔불을 끈 어둠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타고 내리던 그 눈물을 보고 싶습니다   나는 술 취한 듯 눈길을 갑니다 설해목 쓰러진 자리 생솔 가지를 꺽던 눈밭의 당신의 언 발이 짚어가던 발자국이 남은 그 땅을 찾아서 갑니다   헌 누더기 옷으로도 추위를 못 가리시던 어머니 연기 속에 눈 못 뜨고 때시던 생솔의, 타는 불꽃의, 저녁나절의 모습이 자꾸 떠올려지는 눈이 많이 내린 이 겨울 나는 자꾸 취해서 비틀거립니다 겨울 강가에서 / 김경미 눈과 함께 쏟아지는 저 송곳니들의 말을 잘 들어두거라 딸아 언 강 밑을 흐르며 모진 바위 둥글리는 저 물살도 네 가슴 가장 여린 살결에 깊이 옮겨두거라 손발 없는 물고기들이 지느러미 하나로도 어떻게 길을 내는지 딸아 기다림은 이제 행복이 아니니 오지 않는 것은 가서 가져 와야 하고 빼앗긴 것들이 제 발로 돌아오는 법이란 없으니 네가 몸소 가지러 갈 때 이 세상에 닿지 않는 곳이란 없으리 겨울 들판을 거닐며 / 허형만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 바람도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조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울바다에 가려거든 / 최광임   겨울바다에 가려거든 바람 부는 날 가십시다 사랑도 불처럼 뜨거운 것이라야 가슴 데이듯 하얗게 이빨 드러내놓고 미친 소리로 외쳐대며 퍽퍽 까무러치는 모습 보아야 할 거 아니오 바다와 툭 터놓은 이야기 한 판 끝나거든 가슴 헤쳐 놓고 사랑 한 알 미움 한 알 소주잔에 타서 마십시다 생애 굽이굽이 꿈틀거리는 접시 위 낙지의 비애를 떠올려 보기도 하고 고무다라 위 좌판 벌여놓은 석화같이 버짐 핀 아낙의 매운 삶을 엿보거나 그렇게 사랑도 미움도 갈팡진 우리의 내일도 소주 한 잔에 섞어 마시고 오십시다 겨울바다에 가려거든 부디 바다가 요동치는 날 가십시다 겨울의 춤 / 곽재구 첫눈이 오기 전에 추억의 창문을 손질해야겠다 지난 계절 쌓인 허무와 슬픔 먼지처럼 훌훌 털어내고 삐걱이는 창틀 가장자리에 기다림의 새 못을 쳐야겠다 무의미하게 드리워진 낡은 커튼을 걷어내고 영하의 칼바람에도 스러지지 않는 작은 호롱불 하나 밝혀두어야겠다 그리고 춤을 익혀야겠다 바람에 들판의 갈대들이 서걱이듯 새들의 목소리가 숲속에 흩날리듯 낙엽 아래 작은 시냇물이 노래하듯 차갑고도 빛나는 겨울의 춤을 익혀야겠다 바라보면 세상은 아름다운 곳 뜨거운 사랑과 노동과 혁명과 감동이 함께 어울려 새 세상의 진보를 꿈꾸는 곳 끌어안으면 겨울은 오히려 따뜻한 것 한 칸 구들의 온기와 희망으로 식구들의 긴 겨울잠을 덥힐 수 있는 것 그러므로 채찍처럼 달려드는 겨울의 추억은 소중한 것 쓰리고 아프고 멍들고 얼얼한 겨울의 기다림은 아름다운 것 첫눈이 내리기 전에 추억의 창문을 열어젖혀야겠다 죽은 새소리 뒹구는 들판에서 새봄을 기다리는 초록빛 춤을 추어야겠다. 그 겨울의 시 / 박노해 문풍지 우는 겨울밤이면 윗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어는데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어린 나를 품어 안고 몇 번이고 혼잣말로 중얼거리시네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 소금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 죽지 않을랑가 뒷산에 노루 토끼들은 굶어 죽지 않을랑가 아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낭송을 들으며 잠이 들곤 했었네 찬바람아 잠들어라 해야 해야 어서 떠라 한겨울 얇은 이불에도 추운 줄 모르고 왠지 슬픈 노래 속에 눈물을 훔치다가 눈산의 새끼노루처럼 잠이 들곤 했었네 겨울 엽서 / 이희숙 그리워하다 하다 숨길 수 없는 마음 함박눈처럼 펑펑 쏟아지는 날이면 폭설처럼 쌓여있는 사랑을 이야기하자 어디에도 숨을 곳 없는 그리움을 이야기하자 도무지 그칠 줄 모르는 간절함에 대해 이야기하자 하늘의 별들이 숨을 거두는 그 날에도 오늘이 영영 오늘로 살 수 없는 그 날에도 여전히 우리로 살아야 할 부분이 너무도 많은 우리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자 할머니의 겨울 / 서정홍 보일러 기름통에 석유만 가득 차면 배가 부르다는 우리 할머니 시집간 손녀가 기름통에 석유 가득 채워주고 간 날부터 다음해 겨울까지,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 착한 손녀가 기름통 가득 채워주고 갔다고 동네방네 자랑을 참지 못하는 우리 할머니의 겨울은 참 따뜻하다. 일찍 부모 잃은 어린 손자 손녀들 돌보며 내가 자식 잡아먹은 직일년이라고 울면서도 살림살이 어느 한 군데도 흐트러지지 않고 야무지게 사시는 우리 할머니의 겨울은 참 따뜻하다 가득 찬 기름통 하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겨울 / 조병화 침묵이다 침묵으로 침묵으로 이어지는 세월 세월 위로 바람이 분다 바람은 지나가면서 적막한 노래를 부른다 듣는 사람도 없는 세월 위에 노래만 남아 쌓인다 남아 쌓인 노래 위에 눈이 내린다 내린 눈은, 기쁨과 슬픔 인간이 살다 간 자리를 하얗게 덮는다 덮은 눈 속에서 겨울은 기쁨과 슬픔을 가려 내어 인간이 남긴 기쁨과 슬픔으로 봄을 준비한다 묵묵히 겨울 맛 / 강세화 겨울에는 더러 하늘이 흐리기도 해야 맛이다. 아주 흐려질 때까지 눈 아프게 보고 있다가 설레설레 눈 내리는 모양을 보아야 맛이다. 눈이 내리면 그냥 보기는 심심하고 뽀독뽀독 발자국을 만들어야 맛이다. 눈이 쌓이면 온돌방에 돌아와 콩비지 찌개를 훌훌 떠먹어야 맛이다. 찌개가 끓으면 덩달아 웅성대면서 마음에도 김이 자욱히 서려야 맛이다. 겨울 강가에서 / 안도현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 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겨울 사랑 / 박노해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에게 겨울이 없다면 무엇으로 따뜻한 포옹이 가능하겠느냐 무엇으로 우리 서로 깊어질 수 있겠느냐   이 추운 떨림이 없다면 꽃은 무엇으로 피어나고 무슨 기운으로 향기를 낼 수 있겠느냐 나 언 눈 뜨고 그대들  기다릴 수 있겠느냐 눈보라 치는 겨울밤이 없다면 추워 떠는 자의 시린 마음을 무엇으로 헤아리고 내 언 몸을 녹이는 몇 평의 따뜻한 방을 고마워하고 자기를 벗어버린 희망 하나 커 나올 수 있겠느냐 아아 겨울이 온다 추운 겨울이 온다 떨리는 겨울 사랑이 온다. 겨울 고해 / 홍수희 겨울밤엔 하늘도 빙판길입니다 내 마음 외로울 때마다 하나 둘 쏘아 올렸던 작은 기도 점점이 차가운 하늘밭에서 자꾸만 미끄러져 떨어지더니 잠들었던 내 무딘 영혼에 날카로운 파편으로 아프게 박혀옵니다 사랑이 되지 못한 바램 같은 것 실천이 되지 못한 독백 같은 것 더러는 아아, 별이 되지 못한 희망 같은 것 다시 돌아다보면 너를 위한 기도마저도 나를 위한 안위의 기도였다는 그것 온 세상이 꽁꽁 얼어 눈빛이 맑아질 때야 비로소 보이는 그것 겨울은, 나에게도 숨어있던 나를 보게 합니다 겨울나무 / 이재무 이파리 무성할 때는 서로가 잘 뵈지 않더니 하늘조차 스스로 가려 발밑 어둡더니 서리 내려 잎 지고 바람 매맞으며 숭숭 구멍 뚫린 한 세월 줄기와 가지로만 견뎌보자니 보이는 구나, 저만큼 멀어진 친구 이만큼 가까워진 이웃 외로워서 단단한 겨울나무 겨울새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 / 복효근 새들이 겨울 응달에 제 심장만한 난로를 지핀다 두 마리 서너 마리 때로는 떼로 몰리다보니 새의 난로는 사뭇 따숩다 저 새들이 하는 일이란 너무 깊이 잠들어서 꽃눈 잎눈 만드는 것을 잊거나 두레박질을 게을리하는 나무를 흔들어 깨우는 일, 너무 추워서 웅크리다가 눈꽃 얼음꽃이 제 꽃인 줄 알고 제 꽃의 향기와 색깔을 잊는 일 없도록 나무들의 잠 속에 때맞춰 새소리를 섞어주는 일, 얼어붙은 것들의 이마를 한번씩 콕콕 부리로 건드려주는 일, 고드름 맺힌 나무들의 손목을 한번씩 잡아주는 일, 그래서 겨울새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 천지의 나뭇가지가 대들보며 서까래다 그러니 어디에 상량문을 쓰고 어디에 문패를 걸겠는가 순례지에서 만난 수녀들이 부르는 서로의 세례명처럼 새들은 서로의 소리가 제 둥지다 저 소리의 둥지가 따뜻하다 이 아침 감나무에 물까치 떼 왔다갔을 뿐인데 귀 언저리에 난로 지핀 듯 화안하다  겨울나기 / 도종환 아침에 내린 비가 이파리 위에서 신음소리를 내며 어는 저녁에도 푸른 빛을 잃지 않고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하늘과 땅에서 얻은 것들 다 되돌려주려고 고갯마루에서 건넛산을 바라보는 스님의 뒷모습처럼 서서 빈 가지로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이제는 꽃 한 송이 남지 않고 수레바퀴 지나간 자국 아래 부스러진 잎사귀와 끌려간 줄기의 흔적만 희미한데 그래도 뿌리 하나로 겨울을 나는 꽃들이 있다 비바람 뿌리고 눈서리 너무 길어 떨어진 잎 이 세상 거리에 황망히 흩어진 뒤 뿌리까지 얼고 만 밤 씨앗 하나 살아서 겨울을 나는 것들도 있다 이 겨울 우리 몇몇만 언 손을 마주 잡고 떨고 있는 듯해도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견디고 있다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이기고 있다 겨울 기도 / 마종기   하느님, 추워하며 살게 하소서. 이불이 얇은 자의 시린 마음을 잊지 않게 하시고 돌아갈 수 있는 몇 평의 방을 고마워하게 하소서.   겨울에 살게 하소서. 여름의 열기 후에 낙엽으로 날리는 한정 없는 미련을 잠재우시고 쌓인 눈 속에 편히 잠들 수 있는 당신의 긴 뜻을 알게 하소서. 겨울 숲을 아시나요 / 홍수희 잎 지고 새 떠나간 겨울 숲에는 외로움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 남아 윙윙 부는 바람만 사는 것이 아니에요 인기척에 놀라 툭, 소리도 없이 떨어지는 삭정이만 사는 것도 아니지요 아무도 모르게 꼭꼭 숨어 꽃씨가 산답니다 파릇파릇 새순이 산답니다 부끄럽게 웃고 있는 꽃무리도 숨어 살아요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도 숨어살지요 당장 보이지 않는다고 초조해하지는 말아요 희망한다는 것은 어둠 속에 감추어진 그 너머를 바라보는 일이니까요 겨울 숲에는 두근두근 설레는 봄날이 숨어 살아요   겨울 들녘에 서서 / 오세영 사랑으로 괴로운 사람은 한 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빈 공간의 충만. 아낌없이 주는 자의 기쁨이 거기 있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 떨어진 낟알 몇 개. 이별을 슬퍼하는 사람은 한 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지상의 만남을 하늘에서 영원케 하는 자의 안식이 거기 있다. 먼 별을 우러르는 둠벙의 눈빛. 그리움으로 아픈 사람은 한 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너를 지킨다는 것은 곧 나를 지킨다는 것, 홀로 있음으로 오히려 더불어 있게 된 자의 성찰이 거기 있다. 빈 들을 쓸쓸히 지키는 논둑의 저 허수아비. 초겨울 - 도종환   올해도 참나무잎 산비알에 우수수 떨어지고 올해도 꽃진 들에 억새풀 가을 겨울 흔들리고 올해도 살얼음 어는 강가 새들은 가고 없는데 구름 사이로 별이 뜨듯 나는 쓸쓸히 살아 있구나. 겨울 저녁의 시 - 박정만 새파랗게 얼어붙은 하늘에도 흰 재채기나 조금씩 토해 내면서 이제 우리 모두 돌아갈 시간이다. 안티플라민 시린 코를 감싸쥐고서 눈물 어린 눈을 끔벅이면서. 겨울산 - 황지우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들에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겨울 편지 - 안도현   흰 눈 뒤집어쓴 매화나무 마른 가지가 부르르 몸을 흔듭니다 눈물겹습니다 머지않아 꽃을 피우겠다는 뜻이겠지요 사랑은 이렇게 더디게 오는 것이겠지요   겨울 사랑 - 문정희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 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겨울, 저무는 황혼의 아름다움 - 이정하 보여주겠다 분지의 벌판 끝에 서 있는 눈사람 같은 자세를 보여주겠다. 귀 기울여 줄 것. 누가 와서 이 쓸쓸함을 지적해다오. 저무는 황혼으로 내 사랑을 죄다 보여주겠다. 겨울날 - 정호승 물 속에 불을 피운다 강가에 나가 나뭇가지를 주워 물 속에 불을 피운다 물 속이 추운 물고기들이 몰려와 불을 쬔다 멀리서 추운 겨울을 보내는 솔씨 하나 날아와 불을 쬔다 길가에 돌부처가 혼자 웃는다       겨울산 - 황지우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들에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3    신용목 시 묶음 댓글:  조회:1813  추천:0  2019-11-30
 중고가전 수거 차량처럼  신용목    비온 뒤 지구는 커다란 비눗방울 속에 갇힌 것 같다. 울고 난 뒤 너는 너만큼의 비눗방울 속에 갇힌 것 같다.   차 마실래?   아니,   아무도 저어주지 않아서   물고기는 어항 속을 저 혼자 빙빙 돈다.    물고기는 녹지 않는다.   아픈 사람의 입술에 물려주는 젖은 헝겊처럼 빨래가 널려 있다. 빨래는 어항 같다. 아무도 마시지 않는다.   소리가 들린다. 차들이 왔던 길을 가는 소리.   물속처럼,   너는 오후를 조용히 보낸다.   후후, 불며 졸음이 졸음을 마시는 동안에도 옷은 조금씩 빨랫감이 되어간다.   책을 펼치고 어떤 문장도 읽지 않는다.   그래도    책 속에는 사랑이 있다. 이야기는 사막이거나 바다.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기 위해 폭풍우를 건너는 낙타가 있고, 죽어버릴 거야. 문을 쾅, 닫고 나가서는 어느 모퉁이 식당에서 국수를 삼키는 순간이 있고    책 속에도,   책처럼 조용한 사람이 있다.   끝.   창문을 닫으려고 창가로 간다.   너머엔 학교가 있다. 여름이 운동장에 물길을 만들고 사라진 뒤 아이들은 다시 빗방울처럼 돌아올 것이다. 팔, 구, 사, 오, 전화번호를 크게 알리며 중고가전 수거 차량이 지나간다.   어항은 식었다.   ​ 나도 가끔 유리에 손자국을 남긴다           신용목 우럭이 관 속에 누워 있다 몇 마리 우럭들, 우럭의 영혼으로 헤엄친다 산 것들이 죽은 것의 영혼인 물속 연기의 문장으로 맴을 돈다 한생이 무덤 속이었던 우럭 물속에서 타 죽은 우럭 나도 가끔 창밖을 본다 철 지난 부음처럼 낙엽은 날아와 부딪치고 흘러내리는 손자국, 한 칸씩 허공은 투명하게 질러놓은 관짝들이다 가을은 눈부시게 출렁이는 공동묘지 물살이 씻고 가는 비문처럼 나도 가끔 방 안을 맴돈다 문 없는 집을 세워놓고 무섭게 달려 나가는 추억들이 몸 여기저기를 찢어놓을 때 문이 없어 그 자리 뒤집히고 마는 마지막, 죽음은 육신만을 거두어가므로 나는 아무도 읽지 못할 문장 당신의 영혼으로 눕는다 활활 타는 장작의 머리카락, 어떤 죽음은 쏟아져야 한다 몸에서 풀려나는 연기처럼 삶이 딛지 못한 곳으로 인근 재개발 문 없는 노장에서 나는 벽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절반만 말해진 거짓 /  신용목       이제 놀라지 않는다   새가 실수로 하늘의 푸른 살을 찢고 들어간다 해도       그것은 나무들의 짓이라고   오래전 내가 청춘의 주인인 슬픔에게 빌린 손으로 연못에 돌을 던졌던 것처럼   공원 새들을 모조리 내던지는   나무들,   서서 잠든 물의 무덤들       저녁의 시체들   가을이 새의 울음을 짜내 신의 예언을 죄다 붉게 칠했으므로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그날, 마지막으로 던졌던 반지의 금빛 테를 가진 달빛조차도   손목을 그은 청춘의 얼굴로 늙어가니   집으로 돌아가   최대한 따뜻한 밥을 하고 뭇국을 끓여 상을 차리고   마음을 지우고 나면,   남는 자신을 앉히고       눈에서부터   긴 눈물의 심을 빼내기라도 한다면 구겨진 옷가지처럼 풀썩 쓰러질 자신을 향해   밥그릇 속에서 달그락거리는 수저 소리로,   걸어가거나       형광등 빛을 펴 감싸주며       아니면, 집으로 돌아가   온몸 뜨거운 물에 흠씬 적신 뒤 뿌옇게 김 서린 거울을 훔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네 몸이 아프다   네가 내 몸을 앓듯이   그러니까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위로가 있어서       물끄러미 나라고 이름 붙인 장소에서 가여운 새들을 울음 속으로 날려보내며   중얼거린다   절반만 거짓을 믿으면   절반은 진실이 된다고,   어쩌면 신은 우연을 즐기는 내기꾼 같아서 하나의 운명에 보색을 섞어 빙빙 돌린다   그러나    여름을 윙윙거리던 공원의 벌들도 열매가 꽃의 절반을 산다고 믿지 않는다   꽃이 열매의 절반을 가졌다고도   믿지 않지   다만 우리가 별들의 회오리 속에서 청춘을 복채로 들었던,   모든 예언은 절반만 말해졌다는       그리고 그 나머지를 실현하기 위하여 삶이 아프다는 것   이제 놀라지 않는다   모든 나무가 지구라는 둥근 과녁을 향해 날아든 신의 화살이었다 해도   우리가 과녁의 뚫린 구멍이라 해도,   뽑힌 나무라 해도       나무는 자신의 절반을 땅속에   묻고 있으므로,   내가 거울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자신의 목을 조르는 밤을 견디는 것처럼 중에서   공동체 신용목 내가 죽은 자의 이름을 써도 되겠습니까? 그가 죽었으니 내가 그의 이름을 가져도 되겠습니까? 오늘 또 하나의 이름을 얻었으니 나의 이름은 갈수록 늘어나서, 머잖아 죽음의 장부를 다 가지고 나는 천국과 지옥으로 불릴 수도 있겠습니까? 저기 공원에서 비를 맞는 여자의 입술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지면, 기도도 길을 잃고 바닥에서 씻기는 꽃잎처럼 그러나 당신의 구두에 붙어 몇 발짝을 옮겨가고…… 나는 떨어지는 모든 꽃잎에게 대답하겠습니다. 마침내 죽음의 수집가, 슬픔이 젖은 마을을 다 돌고도 주인을 찾지 못해 누추한 나에게 와서 잠을 청하면, 찬 물이 담긴 주전자와 마른 수건 하나, 나는 삐걱거리는 몸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목소리로 물을 수 있습니다. 더 필요한 게 있습니까? 그러나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달라고 할까 봐. 꽃 핀 정원에 울려퍼지다 그대로 멈춰버린 합창처럼, 현관의 검은 우산에서 어깨 위에서…… 빗물처럼 뚝뚝, 오토바이와 회색 지붕과 나무와 풀 위에서 망각의 맥을 짚으며 또, 보고 싶다고…… 보고 싶다고…… 울까 봐. 그러면 나는 멀리 불 꺼진 시간을 가리켜 그의 이름을 등불처럼 건네주고, 텅 빈 장부 속에 혼자 남을까 봐. 주인 몰래 내어준 빈 방에 물 내리는 소리처럼 떠 있는 구름이라는 물의 영혼, 내 몸속에서 자라는 천둥과 번개를 사실로 만들며 네 이름을 훔치기 위해 아무래도 죽음은 나에게 눈을 심었나 보다, 네 이름을 가져간 돌이 비를 맞는다. 귀를 달았나 보다, 돌 위에서 네 이름을 읽는 비처럼, 내가 천국과 지옥을 섞으며 젖어도 되겠습니까? 저기 공원을 떠나는 여자의 붉은 입술처럼, 죽음을 두드리는 모든 꽃잎이 나에게 기도를 전하는…… 여기서도 인생이 가능하다면, 오직 부르는 순간에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뜨는 것처럼 사랑이 가능하다면, 죽은 자에게 나의 이름을 주어도 되겠습니까? 그가 죽었으니 그를 내 이름으로 불러도 되겠습니까? 1974년 경남 거창 출생 서남대학교 국문과 졸업 2000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아무 날의 도시』등 ㅡ시 노트ㅡ 공동체의 전문을 대하면 우리가 실존하며 살아가는 이 시대의 지구는 우리가 상상할 수없는  슬픔들이 떠다닌다 만약 우리가 수십억 지구인의 비애를 피부로 다 느낀다면 우리는 잠시라도 웃음을 짓지는 못할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슬픔의 숙주로 기생하는가  한생이란 잠시 일었다가 꺼져버리는 미풍처럼 덧 없고 허망한 것이리라 단지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살아  있으므로 몇십년이란 시간의 뒤를 체험적으로 인식하지 못할 뿐 우리는 시시각각 슬픔이란 매개물 속으로 침몰하고 있으며 종국엔 이생의 모든 슬픔의 단어들 수집하고 떠날 것이다 내가 죽은 자의 이름을 써도 되겠습니까? 그가 죽었으니 내가 그의 이름을 가져도 되겠습니까? 오늘 또 하나의 이름을 얻었으니 나의 이름은 갈수록 늘어나서, 머잖아 죽음의 장부를 다 가지고 나는 천국과 지옥으로 불릴 수도 있겠습니까?              ㅡ 공동체 전문부분ㅡ 어쩌면 우리의 이름은 이미 오래전 죽은 자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이름은 단지 사자의 석자 이름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것이다 사실 인간은 하루에도 몇 번 슬픔으로 죽는다 시인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 현상에  담담하게  질문하고 있다 /내가 죽은 자의 이름을 써도 되겠습니까? 그가 죽었으니 내가 그의 이름을 가져도 되겠습니까?/ 이미 수많은 사람이 사용했고 앞으로도 사용하게 될 수 밖에 없는 현상을 이름이란 단어 속에 모두 집어 넣고 그 이름을 가져도 되겠느냐는 역설적 방법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며 상상하게 사유하게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한다 또한 시인은 그 질문을 통하여 인간이 가진 숙명적 이름을 환기시키고 소환하며 우리의 생각을 묶어 두고 있는 것이다 저기 공원에서 비를 맞는 여자의 입술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지면, 기도도 길을 잃고 바닥에서 씻기는 꽃잎처럼 그러나 당신의 구두에 붙어 몇 발짝을 옮겨가고…… 나는 떨어지는 모든 꽃잎에게 대답하겠습니다. 마침내 죽음의 수집가, 슬픔이 젖은 마을을 다 돌고도 주인을 찾지 못해 누추한 나에게 와서 잠을 청하면, 찬 물이 담긴 주전자와 마른 수건 하나, 나는 삐걱거리는 몸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목소리로 물을 수 있습니다. 더 필요한 게 있습니까? 그러나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달라고 할까 봐. 꽃 핀 정원에 울려퍼지다 그대로 멈춰버린 합창처럼, 현관의 검은 우산에서 어깨 위에서…… 빗물처럼 뚝뚝, 오토바이와 회색 지붕과 나무와 풀 위에서 망각의 맥을 짚으며 또, 보고 싶다고…… 보고 싶다고…… 울까 봐. 그러면 나는 멀리 불 꺼진 시간을 가리켜 그의 이름을 등불처럼 건네주고, 텅 빈 장부 속에            ㅡ 공동체 전문부분ㅡ 위  전문의 모든 것을 대변 하듯이 시인은 묻고 있다 /나는 천국과 지옥으로 불릴 수도 있겠습니까?/  그리고 시인은 /그러나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위 구절로 부정의 대비를 통해 긍정적 추론을 대입하며 또한 달관적 체념을 바탕에 깔고 반어적인 해답을 제시하며 우리가 가진 정서에 시인의 시적 자아의 태도를 반영시키며 공감을 끌어가는 것이 이 시의 특징으로 보인다 또한 시인은 삶과 질곡 속에서 파생된  슬픔이란 모든 이름을 맥박을 소멸과 진통 그리고 필연적 결과물로 인식하고 한 편의 깊은 서사를 시인의 독특한 구도를 빌려 나와 너 우리 모두를 공동체란 틀 속에 유입시키면서 시적 긴장감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한장면 한장면의 영사 속으로 몰아가 인생이란 광범위한 문제에 대해 우리 자신들에게 그 명암의 앞면과 뒷면을 뒤돌아 보게 하고 있다 인생이 가능하다면, 오직 부르는 순간에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뜨는 것처럼 사랑이 가능하다면, 죽은 자에게 나의 이름을 주어도 되겠습니까? 그가 죽었으니 그를 내 이름으로 불러도 되겠습니까?                  ㅡ 공동체 전문부분 ㅡ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이 생의 우리의 모습을 한없는 연민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온통 슬픔 밖에 없는 세상에 노출된 모든 이름에게 /사랑이 가능하다면, 죽은 자에게 나의 이름을 주어도 되겠습니까?/  라고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는 이 시대의 자화상들에게 치유와 사랑의 태도를 제시하고 있다 하겠다 오늘 신용목의 공동체 시  한 편을 읽으면서 삶이란 참 슬픈 노래가락이다 그것도 한소절의 짧은 노래 인간은 그 누구도 원초적으로 슬픈 짐승일 수 밖에 없으며 한없이 사랑하며 살아가기도 부족한 유한의 시간을 가진 존재가 아닌가 그러므로 다 같이 슬픈 짐승들끼리 부둥켜 안고 얼싸안고 미워하지 말고 신이 인간을 용서 했듯이 우리도 늘 용서하며 살자 미워하고 사는 일이란 우리를 더 슬픈 짐승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나는 누구를 미워 한 적은 없나 싶어서 이 밤 저 반짝이는 별빛들에게 구원처럼 용서를 구한다[문정완] 0시의 자오선 신용목   어제는 병실에서 자정을 맞고 오늘은   가로수 스치는 차창 안에서   자정을 지난다   그때, 휘익 내 몸을 긋고 간 것   어제와 오늘 사이   1초와 1초 사이, 나를 갈라놓는 것 ─ 별자리를 긋고 간 것   바람이 수북이 털을 깎는다 태양의 성기에서 쏟아지는 등고선 휜 능선 하나가 취한 망나니   단칼로 떨어지는 0시의 자오선,   이별은 그렇게 온다 죽음은   그렇게 0시   나와 나 사이의   별과 별 사이의   발자국마다 그 주인의 키로 서서 바람은 물끄러미 스러지는 순간들을 바라본다, 추억의 처형장인 몸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고   우주의 낱장이여, 안녕   시간의 단면이여 문을 닫는다 침대는 도마처럼 반듯하다 문짝과 문틈으로 누워   가만히 어둠 속에서 입을 벌린다   물속에서 물풍선을 터뜨리듯 ─ 내 속의 어둠을 풀어놓는다   아무래도 나는 부활할 것 같다 시집 《아무 날의 도시 중에서》 ㅡ시 노트ㅡ 시를 올려놓고 시간관계상 이 시는 시노트를 작성해야지 하면서 작성하지 못했다 조금 시간의 틈을 내서 늦게 시노트를 매단다 신용목시인은 거창출신의 시인이다 전형적인 농경사회에서 산과 들을 뛰어 다니며 어린시절을 보냈고 좋은 산과계곡 그리고 당시의 농경사회의 가난한 환경을 바라보며 체험하며 자라났다고 보인다 그러한 환경적 요소들이 이시대에 좋은 시인을 만드는데  좋은 토양으로 역활을 하며 기여하지 않았나 싶다 0시의 자오선은 한 행성을 발자국을 추적하며 시인 특유의 작법과 감각적 언어로 시를 짜고 있다 신용목시인의 시집에서 시어를 잘 살펴보면 옛날에는 많이 사용했는데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언어들로 시를 바느질 한다  한편의 시에 보통 한 서너개쯤의 시어들이 정말 시의 몰입도 를 높이고 독자를 시 속으로 흡수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다  필자를 자처하는 나도 신용목의 그러한 점에서 매료되기 시작했고 그에게 대책없이빠져드는 계기가 되었다 아직 젊은 시인인데 어떻게 그러한 시어들을 알고 적절하게 시의 영역으로 그 시어들을 데려와 조합을 하는지 그만의 언어로 시를 조탁하는 솜씨는 그가 정말 진짜 시인이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발자국마다 그 주인의 키로 서서 바람은 물끄러미 스러지는 순간들을 바라본다, 추억의 처형장인 몸                         ㅡ0시의 자오선 전문 중ㅡ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오선을 가진 행성이다 그리고 인간은 추억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다 0시의 자오선은 한 행성의 궤도를 추적하며 명암을 그려놓고 있다 행성은 그 행성의 고도와 궤적에 따라 그 빛의 명암은 극명할 수 있다 한국문단에 걸출한 젊은 시인들이 요즘 많다 문학도로서 좋은 시인들이 많다는 것은 한국문학의 발전을 위해서도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또한 문학도로서 좋은 경쟁자가 있다 좋은 스승이 있다는 것은 진정 행복한 일이다 생각한다 또한 내가 넘어야할 벽이 있다는 것은 좌절이 아니고 온전한 기쁨이다 아직 이름없는 늦깍이 문청에 지나지 않으나 벽이 있어서 나는 늘 행복하다 아무래도 나는 부활할 것 같다[문정완] 산책자 보고서 신용목   어쩌면 허기진 쪽으로 기울어져 가는 지붕의 망치질 소리로 비가 온다 지붕을 뚫지 못해 빗방울은 대신하여 빗소리를 집 안으로 내려보낸다   이제는 그만 굴러 떨어지고픈 그림자를 간신히 붙들고 있는 비탈의 오래된 집   끓는다는 말 속에는 불꽃의 느낌이 숨어 있다 비 오는 날 지붕이 끓는 것처럼 냄비 바닥의 불꽃 속에 숨어 있는 빗소리의 느낌을 라면 가닥으로 삼킨다는 말 속에는 또 비처럼 흘러내는 몸의 느낌이 있다   나의 몸은 비를 대신하여 집 안에 고여 있다   나는 비의 느낌으로 숨어 있다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한사코 지붕에 부딪치는 빗방울을 지운다 바닥에 누운 나는 한사코 바닥에 차는 빗소리를 지운다 빗방울의 시간은 빗소리의 시간보다 더 멀리 있어서 빗소리의 시간은 나의 시간보다 더 멀리 있어서 나는 온통 허기일 뿐 하루는 그 간격을 오가는 시간으로 더 먼 곳의 시간들을 지우고 있다   산책은 자전의 느낌이다 하루를 대신하여 라면을 먹고 나는 나를 지웠다 시간의 반대편으로 뻗는 그림자로부터 간신히 몰락을 지우는 망치질까지   나는 모든 말의 느낌으로 살아 있다 1974년 경남 거창 출생 서남대학교 국문과 졸업 2000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아무 날의 도시』등 ㅡ 시 노트 ㅡ 신용목시인은 한국문학계에 주목 빋고 있는 대표적인 젊은 시인 중에 한사람이다 대체적으로  이미지와 이미지를 조합하여 시를 직조하는  방식이 촘촘하면서도 맥놀이가 긴 울림통을 가지고 있다 신용목 시인의 시  편들은 쉬운 듯 하면서도 어렵고 다양한 시적 이미지를 연결고리로 사용하여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설계 방식으로 시의 구조물을 설계한다 독자에게 시인의 시는 강력한 문학적 마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지구의 소유자가 아니고 잠시 산책을 나온 한시적 인 관람객에 지나지 않는다 하는 지점에서 이 시는 발아를 시작한다 유한적 존재론의 모퉁이에서 산책자라는자아를 통해 그 자아의 정서와 충돌하는  현실세계와 부딪치면서 발생하는 삶에 대한 노래를 빗소리와 비 망치질 지붕 기울어져가는 집 등등의 상징적  언어들로 재구성 재편성하여 신용목만의 시세계를 펼치고 있다 산책자 보고서는  인간의 유한적 존재론에서 파생하는 유물론적인 변증법을 기반으로 절제된 언어 그리고 심층적이고도  감성을 흔드는  시어들과  비유를 통하여 삶의 그늘을 들추고 내면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나는 오늘 모든 말의 느낌으로 살아있다 / 결구의 마감질은 역설적으로 고난의 실체를 통해서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현실세계의 체감 온도를 대변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지구별의 산책자다  산책자 보고서 시 한편을 통해서 내안에서 범람하고 있는 부호들과 자주 조우한다 [문정완]    
2    한국시 (7)(황광주 시) 댓글:  조회:1597  추천:0  2019-11-30
불랙커피 한잔이면 충분해 한기봉 ​ 어느 여행지 카페의 넓은 테라스 낡은 턴테이블의 음악에 몰입된 시간 너머 첫사랑 순정의 꽃잎이 잊힌 계절의 보푸라기처럼 나뒹군다. ​ 퇴색한 잎의 주름위로 아직 다 피지 못한 국화꽃 한 무더기 실눈 뜨는 모습 애상에 눈을 뜬 연인들의 어깨너머로 반쯤 기운 가을의 어림이 애젓하다. ​ 불에 탄 종이처럼 날리다 재가 되는 나뭇잎 따스했던 온기는 식어가고 울고 웃던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갈 때 ​ 하얀 바람의 빗질에 떨어지는 마지막 잎새의 처연한 이별쯤이야 낯선 여자의 향기와 블랙커피 한잔이면 충분하겠지 ​ 아, 가을보다 예쁜 애인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주량 봉윤숙 아버지에게 뺨을 맞고 처음 술을 마셨다 엄격한 손바닥 하나가 붉게 손상되자 자꾸 헛소리가 나왔다 아버지는 내 속에 들어와 비틀거리며 자꾸 울려고 한다 부계를 살피면 정승도 부자도 없지만 허름한 탁자와 술잔은 없다 술을 마시면 늘 친구를 잃어버리는 아버지는 엄마의 잔소리를 어느 곳에 감춰놓고 밤새 마을을 돌아다녔다 심지어 술 취한 자신을 친구라 굳게 믿었다 어쩌다 비틀거리는 비밀을 세상천지에 풀어놨을까 집안에서는 절대 권력을 가졌지만 소주 하나에 안주 하나만 시켜놓으면 다 들통날 서글프고 빈약한 비밀들을 왜 함부로 들이켰을까 아버지에게 맡겨놓았던 미성년 찾아오던 날 아버지는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 나는 아버지를 못 견디고 결국 집 앞에 당도해 아버지를 토하고 말았다 누구나 어느 시절의 행동들을 온전히 이해하려 하듯 비틀거리는 중심에서 걸어 나오는 아버지의 누추하고 쓸쓸한 주량 알 것 같다 아버지, 기분 좋았던 일생이 이렇게 허름한 가격이었다는 것 소주에 김치 쪼가리 하나밖에 안 되는 빈약한 가격이라는 것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주량이 있다 봉윤숙 시집 『꽃 앞의 계절』, 《한국문연》   애첩愛妾을 바꾸다 이인처럼 1 이제사 솔직히 고백하노니, 제법 아랫도리가 튼실해갈 무렵부터 곁에 애첩 하나 끼고 지금까지 살아왔다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늘 붙어 다니던 수족이나 다름없는 년이었지만 일갑자 나이를 넘기고서부터 노화가 안방마님처럼 퍼질러 앉아 벼라별 주접을 떨기 시작하더군 이목구비가 날로 쇠잔해진다 싶더니 오장육부도 따라 나서기 시작했고 팔 다리에 힘이 빠지니 윗도리 아랫도리 가릴 것 없이 신통찮아 년과 둘만 있는 시간이 거북해지고 성가신 생각마저 들게 했다네 더욱이 소일거리 삼아 새로 얻은 스마트한 색시에 빠지고나서 부터는 년은 내 안중을 차지하지 못한 것은 물론 가급적 기피하려는 중이기도 했지 차라리 가까운 일을 보는 것은 년이 없는 게 오히려 수월하고 맘이 더 편하더군   2 내 눈에 쏙 들어온 애첩을 새로 바꿔야했다 그녀의 허리가 졸지에 두동강나는 바람에 나에겐 수족이나 다를 바 없는 그녀도 난데없이 부러진게 아니라 주인인 나의 꼬락서니를 닮아 노화가 암암리에 진행되었을 게 틀림없다 그녀의 허리를 고쳐주려고 입원시켰다 완치하는데 한 보름 소요된다고 전문의(?)는 진단을 내렸고 나를 수발하느라 고생께나 한 그녀를 차마 헌신짝처럼 내동댕이 칠 수 없어 주저없이 수속을 끝냈다 아마도 그녀는 완치가 된다해도 약해빠진 그 허리로는 다른 년에게 쓸모가 밀려 본래의 제 기능이나 역할을 못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녀는 이제 권번에서 쫓겨난 퇴기처럼 유사시에만 내 눈을 시중들게 될 것이다 안경이라 불리는 그녀도 갈수록 신체기능이 떨어져 노화를 실감하는 나처럼 불현듯이 가버린 세월이 서러울까 생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밀려난다는 것은 아무에게나 서글픈 일이다   감자 송편 / 김 승 썩어야지 푹푹 썩어 무른 살은 악취와 함께 날아가고 곱게 부서진 뼈만 모여야지 꿈을 꿔야지 푹푹 썩고 난 뒤에 오는 세상을 그 아름다운 뼈들의 반란을 검은 뼛가루끼리 뭉쳐서 단단하게 뭉쳐서 넓은 세상을 만들고 살아서 허기진 배를 곱게 빻은 깨와 콩과 달콤한 설탕으로 가득 채워 봐야지 원 없이 먹어 봐야지 든든히 먹고 찜질방 같은 가마솥에 누워 다시 쓰는 역사를 꿈꿔야지    중고가전 수거 차량처럼  신용목    비온 뒤 지구는 커다란 비눗방울 속에 갇힌 것 같다. 울고 난 뒤 너는 너만큼의 비눗방울 속에 갇힌 것 같다.   차 마실래?   아니,   아무도 저어주지 않아서   물고기는 어항 속을 저 혼자 빙빙 돈다.    물고기는 녹지 않는다.   아픈 사람의 입술에 물려주는 젖은 헝겊처럼 빨래가 널려 있다. 빨래는 어항 같다. 아무도 마시지 않는다.   소리가 들린다. 차들이 왔던 길을 가는 소리.   물속처럼,   너는 오후를 조용히 보낸다.   후후, 불며 졸음이 졸음을 마시는 동안에도 옷은 조금씩 빨랫감이 되어간다.   책을 펼치고 어떤 문장도 읽지 않는다.   그래도    책 속에는 사랑이 있다. 이야기는 사막이거나 바다.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기 위해 폭풍우를 건너는 낙타가 있고, 죽어버릴 거야. 문을 쾅, 닫고 나가서는 어느 모퉁이 식당에서 국수를 삼키는 순간이 있고    책 속에도,   책처럼 조용한 사람이 있다.   끝.   창문을 닫으려고 창가로 간다.   너머엔 학교가 있다. 여름이 운동장에 물길을 만들고 사라진 뒤 아이들은 다시 빗방울처럼 돌아올 것이다. 팔, 구, 사, 오, 전화번호를 크게 알리며 중고가전 수거 차량이 지나간다.   어항은 식었다.   사랑의 이율배반  이정하 그대여 손을 흔들지 마라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떠나는 사람은 아무 때나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겠지만 남아 있는 사람은 무언가 무작정 기다려야만 하는가 기약도 없이 떠나려면 손을 흔들지 마라   세상 사는게 다 그런거는 아닌데 / 황광주 모든 일들이 마음먹기 나름인데 마음한번 시원하게 갖으면 될 일인데 그게 그렇지 않은게 문제야. 모든게 나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상대방의 마음은 내가 이해할 수 있을 때 그때가 되서야 조금 놓아주는 그게 그럴 수 밖에 없는게 문제야. 요동쳤던 가슴들이 진정해야 할 그런 시간도 필요하고, 쓰리고 아프지만 덤덤한척 태연히 흘려보내야 할 시간도 필요해. 누구도 알아주지 않은 무심함에 나 혼자서 감내해야 할 짐을 나 혼자서 밖에 풀지 못한다는거 그게 혼자여서, 혼자여서라는게 문제야. 세상 사는게 다 그런거는 아닌데.   낙엽 엄마 아버지는 늘 타이른다 머리를 숙이고 살거라 하늘로 날아 갈 낼개가 있어도 바닥으로 떨어지는 까닥은 땅이 하늘보다 가까워서가 아니다 유전자는 기계적 공식으로 대를 잇는다 가까운 것을 더 가깝게 번식시키는 하나의 죽은 방정식이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몰랐다 어느 순간에 생기는 반골은 하늘이 가깝다고 고집해서 일까 고집이란 살아가는 유희이다 땅과 하늘의 거리에 기어코 고개숙이는 외로움도 햇빛과 아귀다툼한 것은 아니다 그냥 떨어지는 자유낙하에 풀어 버린 손맥에는 법이 따로 없다 김삿갓이 걸어가는 뒷모습이다 ㅡ ㅡ 생각없이 적어 봅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 황광주 봄비 오는 아침에 길가 벚꽃나무는 벌써 꽃잎 젖어 떨어지더이다. 봄 기다리는 지친마음들이 어디 나 뿐이겠소만 봄이 왔어도 봄이 온 거 같지 않네.   나의 기도   / 황광주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심은, 아직도 젊은 마음으로 내일을 향해 걷고 있는 여린마음에 희망이 있다는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삶을 재 인식하고 제게 주신 가치를 잊지않게 하심으로 앞으로의 삶 또한 더욱 더 소중히 하라는 깊은 뜻으로 믿습니다. 오늘을 함께 하고 있는 제 주변의 모든이에게 진정 감사하는 그런 하루가 되게 하소서.   추억이 내게 남은 방법 / 황광주 가 걸었던 그 길가에 나무들이 바람속에 흔들리며 손짓하네. 아련해진 기억들이 나뭇잎소리에 하나 둘씩 다시 찾아 오는데 초점없이 다가오는 낯익은 풍경은 나 어릴적 고향으로 변해가네. 내가 걸었던 그 길가의 추억들이 한자락꿈 기약없던 약속인데 이제와서 풋내나는 거친 숨소리로 하나 둘씩 다시 돌아오네. 선명해진 기억들에 하나 더 있어 나 어릴적 동무의 반김이었네. 지금은 그 모두가 함께 하지 못하고 서로가 새롭게 만들었던 세상속에서 추억은 빛나는 별 하나로 남아있으리.   ​하룻밤에 만리장성 쌓는다고?    중국의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을 때였다. 요조숙녀 새색시는 신혼생활 한 달여 만에 남편이 징용을 당했다. 한번 끌려가면 공사가 끝나기 전에는 나올 수가 없었다. 만리장성을 쌓는 일이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었다.   새색시는 시집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일을 당했다. 아이가 없어 외딴집에 혼자 사는 데, 선비차림의 나그네가 찾아들었다.   "갈 길은 멀고 날은 저문데 인가라고는 이 집밖에 없으니 헛간이라도 무방합니다. 하룻밤만 묵어가게 해 주십시오"   정중하게 부탁을 하는 데도 여인은 아녀자 혼자 살기 때문에 과객을 받을 수가 없다고 거절하였다.   여인이 저녁식사를 마치고 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언제 들어왔는지 선비는 다시 말을 걸었다. “보아하니 외딴집에 혼자 사는 모양인데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이 분명하외다. 여인은 숨길 것도 없고 해서 남편이 부역가게 된 사정을 말했다. 선비는 가지 않고 노골적으로 수작을 걸었다.   “이렇게 살다가 죽는다면 너무 허무하지 않소?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린들 무슨 소용이요. 우리는 아직 젊지 않습니까? 내가 책임을 질 테니 멀리 도망가서 함께 삽시다.”   사내는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깊은 밤 인적도 없는 외딴집에서 여인 혼자서 뿌리치는 것은 무리였다. 그전에 한 가지 부탁을 들어달라고 하며 조건을 걸었다. 그러자 사내는 어떤 부탁이라도 다 들어줄 테니 말해보라고 했다. 여인은 일단 사내의 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부부간에도 거역할 수 없는 정리가 있습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고 해서 그냥 당신을 따라 나설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남편의 속옷을 싸 드릴 테니, 갈아입도록 전해주시오. 그리고 증표로 잘 받았다는 글 한 장만 받아 오십시오.   어차피 살아서 만나지 못할 남편에게 수의를 마련해주는 뜻으로, 내복이라도 한 벌 지어 입히고, 당신을 따라 나서면 마음이 홀가분할 것 같습니다. 만일 돌아오시면 평생을 당신에게 의지하고 살 것입니다.“   사내는 내심 반가웠다. 듣고 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어서. 그렇게 하시지요. 이들은 마침내 합방을 하였다.   흔드는 기척에 사내는 늦게야 잠에서 깨었다. 젊은 여자의 고운 얼굴이 아침 햇살을 받아 선녀처럼 예뻐 보였다. 잠결에 보아도 양귀비가 따로 없다.   이런 미인과 평생을 같이 살수 있다면, 하는 기대와 함께, 황홀감에 간밤의 피로도 잊고 벌떡 일어났다. 여인은 장롱 속에서 속옷을 꺼내 보자기에 싸서 사내 봇짐에 넣어주었다.   사내는 부지런히 걸어 부역장에 도착했다. 감독하는 관리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다.   감독관이 말하기를, 옷을 갈아입히려면 그자를 공사장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데 ‘한 사람이 나오면 그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옷을 갈아입을 동안 잠시 교대를 해줘야 한다고 했다.   사내는 관리가 시키는 대로 옷 보따리를 여인의 서방에게 건네주면서, 옷부터 갈아입으세요! 그리고 부인의 요청대로 편지 한 장 써서 주시고. 빨리 돌아와야 합니다. 말을 마친 사내는 별 생각 없이 터벅터벅 난생 처음 보는 공사장으로 들어갔다.   남편이 보자기를 펼치자 옷 속에서 꼭꼭 접은 편지가 나왔다.   “아내 언년입니다. 당신을 공사장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이 옷을 전한 남자와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이런 연유로, 외간 남자를 받아들인 저를 평생 허물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서시면 옷을 갈아입은 즉시 집으로 돌아오시오. 혹시라도 그럴 마음이 없어 저의 허물을 탓하시려거든 그 남자와 교대해서 공사장으로 도로 들어가십시오.”   새 옷으로 갈아입은 남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길로 아내에게 달려갔다. 다음 이야기는 말 안 해도 다 안다.   만리장성 공사현장에는 언젠가부터 실성한 사람 하나가 돌아다니는데. 혼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어보니. “하룻밤 밖에 못 잤는데, 하룻밤 밖에 못 잤는데...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   우표 한 장 붙여서 천양희 꽃 필 때 널 보내고도 나는 살아남아 창 모서리에 든 봄볕을 따다가 우표 한 장 붙였다 길을 가다가 우체통이 보이면 마음을 부치고 돌아서려고 내가 나인 것이 너무 무거워서 어제는 몇 정거장을 지나쳤다 내 침묵이 움직이지 않는 네 슬픔 같아 떨어진 후박잎을 우산처럼 쓰고 빗속을 지나간다 저 빗소리로 세상은 여위어가고 미움도 늙어 허리가 굽었다 꽃 질 때 널 잃고도 나는 살아남아 은사시나무 잎사귀처럼 가늘게 떨면서 쓸쓸함이 다른 쓸쓸함을 알아볼 때까지 헐한 내 저녁이 백년처럼 길었다 오늘은 누가 내 속에서 찌륵찌륵 울고 있다 마음이 궁벽해서 새벽을 불렀으나 새벽이 새, 벽이 될 때도 없지 않았다. 그럴 때 사랑은 만인의 눈을 뜨게 한 한 사람의 눈먼 자를 생각한다 누가 다른 사람 나만큼 사랑한 적 있나 누가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나 말해봐라 우표 한 장 붙여서 부친 적 있나 ●  '피아노' 외 3편 / 최하연 눌러도 소리가 나지 않는 건반을 책상 위에 그려놓고, 가만 귀 기울이고 있어요, 당신의 소원은 검은건반에서 뛰어내리는 것, 그리하여 일생일대의 화음으로 나를 부활시키는 것, 당신의 경전마다 엉터리 활자를 찍어놓고, 페이지를 봉인하고 있어요, 나는 나의 다음 페이지가 무조건 될 수 없다는 것, 우주를 한 바퀴 돌아 신발을 벗으며 '그것 참,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당신이 떨어지고 있는 바로 그 순간, 나도 당신이 있던 그곳을 향해 뛰어오를 수 있다면, 당신의 멈칫함이 나를 일깨우는 바로 그 주문이길, 두들겨라, 두들겨라, (나의 건반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요) 나의, 나를 위한 마침표는, 언제나 나의 시작 전에 찍히고 있어요, 도돌이표 마디마다 당신은 돌아오고 있겠지요, 가로지르는 모든 것들로 하여금, 당신을 향한 나의 좌표를 잃게 만들고 싶어요, 당신은, 또다시 그 높은 절벽, 검은건반에 올라서서 눈을 감고 있네요, ●  '물구나무의 태몽' 오사카에서 베를린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기다리다 심심해서 낚시를 했다, 강물은 묽은 색이었다, 낚시를 하던 나는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된다, 그러니까 오사카는 베를린에서의 추도식에 참가하기 위해 경유해야 할 곳, 오사카의 공원엔 오사카의 벚꽃이 피고 난 천삼백 원짜리 와플을 받아들고 비행기를 놓친다, 내 낚싯대엔 바늘이 없다 전화기를 열었다, 아무개 선생님 전화입니다, 지금 선생님은 베를린에 계신데 말씀을 남겨주시면, 성가대는 한 옥타브나 낮은 예배송을 불렀다, 추도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합동 장례식이 추도식과 한 날 한 시에 열렸다, 낚시 동호회 사람들은 검은 장화를 신고 있었다 마침내 줄을 물고 올라온 물고기, 급하게 잡아 탄 택시엔 기사도 없고 안전벨트도 없고 이번에도 또 출발하지 못했다, 공항은 바다 건너 있고 램프 없는 대교 위에선 아무도 바깥으로 나가지 못했는데, 잡힌 물고기는 오래된 위생 랩을 친친 감고 있었다 랩을 푸는 동안 비행기가 왔다 가고, 할 일 없어진 나는 정성껏 랩을 풀어 물고기를 바다에 던진다, 용광로의 슬래그처럼, 물고기가 가라앉는다, 그런데 이 전화기의 주인은 누구지? 생각하는 동안 네모난 집에서 나와 동그란 집으로 이사를 한다, 이글루는 덥고 움막은 춥고 망루는 높아 스스로 동그란 집에서 쫓아낸다, 오사카엔 꽃이 피고 베를린에선 전화기의 주인이 아직도 참회 중이다   ●  '물구나무 빌라' 어둠도 아래층에 있다 망치를 쥐고 무엇을 때려야 할까 복층으로 된 어둠 속에 버스를 풀어놓는다 어둠이 기워놓은 어둠을 입고 버스에 올라탄다 이 버스는 어디로 가는 걸까 어둠을 세 논 주인을 만나야겠다 임시고정용 스프레이 풀과 색종이를 싸들고 소풍을 가야겠다 아래층 고양이 고양이는 밤눈이 어둡다 띄어쓸 수 없는 어둠도 있다 그 안엔 쉽게 잘라 쓸 수 없는 허방이 있다 허방 속엔 말라가며 비명 질는 치자꽃이 있다 가위를 들고 무엇을 잘라야 할까 복층으로 된 어둠 속에 수초들을 풀어놓는다 수초 속에는 눈먼 물고기들이 있다 내일은 수초의 망막을 제거해야겠다 갈아입을 옷 하나 없는 어둠과 아무것도 차리지 않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다 내가 삼키고 있는 어둠이 내 다리를 뜯는 어둠의 손을 꼭 잡고 있다 너무 먼 거리를 돌아와 쥐가 난 종아리가 그들의 위장 속에 있다 어둠 한 숟갈 덜어내고 남은 자리에 누워 어둠과 oo하고 싶다 ● '포도밭' / 최하연 밤새 신발이 작아졌어 발이 자랐나봐 사원증을 단 여자 사람이 사원증을 단 여자 사람에게 말한다 신발이 작아진 것이 신발 탓이 아닌 세계로 신세계 식품관 봉투를 든 여자 사람이 들어온다 밤의 저수지엔 다리 저는 붉은 홍학이 살았고 저수지가 벗어놓은 신발 한 짝엔 깊고 비린 어둠이 자라고 있었지 신발장 안에 저수지가 살아요? 그래서 목마른 짐승들이 신발장으로 모여드는군요 알에서 알이 깬다 와인에서 포도 싹이 난다 병아리들이 봉투에서 기어나와 옆자리의 드라마 속으로 들어간다 돌도끼를 든 사내들이 그 옆자리에서 튀어나와 포도밭으로 들이닥친다 까마귀가 사내들을 실어나른다 저수지 수면에 기록된 새떼의 표류기를 강독하는 우리 아빠가 마법사라구요? 객차와 승강장 사이가 멀어서 밤새 발이 자랐는데도 건널 수가 없다 새벽엔 몸이 무거워 관절은 관절마다 꺾이겠죠 문이 열리고 문이 닫히고 사원증을 달지 않은 여자 사람이 사원증을 달지 않은 여자 사람에게 말한다 밤새 신발이 작아졌어 미친 거 아님? ⊙최하연/ 1971년 서울 출생. 2003년 제3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당선. 시집 『피아노』(2007. 11 문학과지성사) ------------------------- 최하연은 언어에 대한 특별한 자의식을 바탕으로 시적 언어의 극한이 어디로 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인이다. 이는 언어의 세계와 사물의 세계 사이를 연결해주는 통로로서 시가 얼마나 제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회의하는 일에서부터 비롯되거니와, 이러한 자의식으로 인해 시는 세계를 우리의 인식장 앞으로까지 내밀하게 당겨오는 언어이면서 동시에, 세계를 우리의 혀 바깥으로 밀어내는 언어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끝없이 언어의 그물 바깥으로 도망치는 세계와 이를 포획하려는 언어 사이의 물고 물리는 추격전 도중에 최하연의 시는 돌연 어떤 특이한 영역으로 공간 이동을 감행한다. 그렇게 시가 도착한 곳은, 가장 가깝게 있다고 여겨진 대상이 실은 가장 먼 곳에 위치하고, 반대로 가장 멀리 존재한다고 느껴진 타자가 실상 내 안의 가장 깊숙한 갈비뼈 같은 곳에서 칼을 품고 있는(“너는, 다시, 내 늑골 깊숙이, 칼을 숨기고”), 치명적인 시공간이다. 이러한 괴이한 관계는 ‘언어’와 ‘세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연인과의 사랑이 이와 닮지 않았는가. ‘피아노’는 이러한 언어의 문제를 사랑의 문제로까지 확장시킨 매력적인 시이다. 이 시에서 당신과 나는 각각 반음을 사이로 두고 피아노의 건반 위에 서 있다. 건반이라는 다분히 규정적인 세계 안에서 당신과 나는 가장 가까운 위치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이나, 실상 음과 반음 사이에는 또 다른 음의 분할선들이 무한하게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랑하는 당신과 나 사이는 때로 “우주를 한 바퀴 돌아”야 할 거리로 느껴질 수도 있다. 가깝기에 도리어 그토록 아득한 너와 나 사이의 간격으로 인해, “그것 참”이라는 허탈한 고백을 내뱉을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생일대의 화음”으로 나와 당신을 연주하고 싶다는 욕망만은 지칠 줄 모르는 것이기에, 우리의 사랑은 “도돌이표”라는 법칙에 따라 오늘도 검은건반 위에 올라 기꺼이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여, 이 영원할 것 같은 찰나의 낙차를 감당하려는 세상의 모든 연인들이여, 두들기자, 두들기자.  (강동호 문학평론가)   한계 천양희 한밤중에 혼자 깨어 있으면 세상의 온도가 내려간다. 간간이 늑골 사이로 추위가 몰려온다. 등산도 하지 않고 땀 한번 안 흘리고 내 속에서 마주치는 한계령 바람소리 다 불어 버려 갈 곳이 없다. 머물지도 떠나지도 못한다. 언 몸 그대로 눈보라 속에 놓인다.  소화    천양희     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서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너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 천양희, 「밥」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다 천양희 마음 끝이 벼랑이거나 새로울 것 없는 하루가 지루할 때마다 바람이라도 한바탕 쏟아지기를 바랄 때가 있다 자기만의 지붕을 갖고 싶어서 우산을 만들었다는 사람을 떠올릴 때마다 후박잎을 우산처럼 쓰고 비바람 속을 걸어가던 네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별명이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 랭보를 생각할 때마다 바람은 그리워하는 마음들이 서로 부르며 손짓하는 것이라던 절절한 구절을 옮겨 적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라고 다른 얼굴을 할 때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던 죽은 시인의 시를 중얼거릴 때가 있다 여러 번 내가 나를 얻지 못해 바람을 맞을 때마다 바람 속에 얼굴을 묻고 오래 일어나지 못할 때가 있다 이 세상 어디에 꽃처럼 피우는 바람이 있다면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고 누가 말했더라 아무리 가벼운 바람이라도 그 속에는 뼈가 있다고 말한 이는 또 누구더라 바람소리든 울음소리든 소리는 존재의 울림이니까 쌓아도 쌓아도 소리는 탑이 될 수 없으니까 바람이여 우리가 함께 가벼워도 되겠습니까 오늘 밤에도 산위로 바람 부니 비 오겠습니다   참 좋은 말  천양희 내 몸에서 가장 강한 것은 혀 한잎의 혀로 참, 좋은 말을 쓴다   미소를 한 육백개나 가지고 싶다는 말 네가 웃는 것으로 세상끝났으면 좋겠다는 말 오늘 죽을 사람처럼 사랑하라는 말   내 마음에서 가장 강한 것은 슬픔 한줄기의 슬픔으로 참, 좋은 말의 힘이 된다   바닥이 없다면 하늘도 없다는 말 물방울 작지만 큰 그릇 채운다는 말 짧은 노래는 후렴이 없다는 말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말 한송이의 말로 참, 좋은 말을 꽃피운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같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란 말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는 말 옛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꾸 온다는 말   새가 있던 자리 / 천양희 잎인 줄 알았는데 새네 저런 곳에도 앉을 수 있다니 새는 가벼우니까 바람 속에 쉴 수 있으니까 오늘은 눈 뜨고 있어도 하루가 어두워 새가 있는 쪽에 또 눈이 간다 프리다 칼로*의 『부서진 기둥』* 을 보고 있을 때 내 뼈가 자꾸 부서진다 새들은 몇 번이나 바닥을 쳐야 하늘에다 발을 옮기는 것일까 비상은 언제나 바닥에서 태어난다 나도 그런 적 있다 작은 것 탐하다 큰 것을 잃었다 한 수 앞이 아니라 한치 앞을 못 보았다 얼마를 더 많이 걸어야 인간이 되나 아직 덜 되어서 언젠가는 더 되려는 것 미완이나 미로 같은 것 노력하는 동안 우리모두 방황한다 나는 다시 배운다 미로 없는 길 없고 미완 없는 완성도 없다 없으므로 오늘을 눈 뜨고 있어도 하루가 어두워 새가 있는 쪽에 또 눈이 간다 어디에나 나를 지켜보는 새의 눈이 있다   *프리다 칼로: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여성 화가. 교통사고로 수차례 수술을 받은 후 느낀 삶의 아픔을 미술 작품으로 드러냄. *『부서진 기둥』: 프리다 칼로가 자신의 처절한 고통을 형상화한 작품. ㅤ   우리 같은 사람들 / 천양희 내가 사는 아파트 경비원이 시집 한 권 달래서 드렸더니 우리 같은 사람들 얘기가 없다고 한다 우리 같은 사람들? 나는 놀라서 우리 같은 사람들 말고 울 같은 울타리 같은 사람들이라고 고쳐 써 본다 어떤 울림이 울을 넘어 넘실거린다 몇 줄의 문장이 한 사람의 구구절절을 옮겨적는다 시 쓰는 동안 나는 아직 사람을 모른 것이다 인파 속에 사람이 부대끼는 줄 모르고 물결 속에 물방울이 흩어지는 줄 몰랐다 세상에는 좋은 일 나쁜 일이 있는게 아니라 이런 일 저런 일 있다는 걸 몰랐다 모르면서 모를 때마다 텅빈 몸이 텅텅거린다 문득 이게 나라는 생각 우리 같은 사람들이란 생각 『시로 여는 세상』 2018년봄호 ㅤ글자를 놓친 하루 / 천양희 어느 시인의 시집을 받고 정진하기를 바란다는 문자를 보낸다는 것이 'ㄴ' 자를 빼먹고 정지하기를 바란다고 보내고 말았다 글자 한 자 놓친 것 때문에 의미가 정반대로 달라졌다 'ㄴ'자 한 자가 모자라 신(神)이 되지 못한 시처럼 정진과 정지 사이에서 내가 우두커니 서 있다   ㅤ하루 ​ 천양희 ​ 오늘 하루가 너무 길어서 나는 잠시 나를 내려놓았다. 어디서 너마저도 너를 내려놓았느냐. 그렇게 했느냐. 귀뚜라미처럼 찌르륵대는 밤 아무도 그립지 않다고 거짓말하면서 그 거짓말로 나는 나를 지킨다. ​     너에게 쓴다 - 천양희 꽃이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꽃이 졌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길이 되었다 길 위에서 신발하나 먼저 다 닳았다 꽃 진자리 잎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잎 진자리 새가 앉는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내 일생 되었다 마침내는 내 생 풍화되었다   추억 / 천양희 포도는 익으면 향기를 낸다. 향기 속에 포도밭의 추억이 있다.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 벼 잎 속에 들판의 추억이 있다. ​ 꽃은 만발하면 꽃잎을 떨어뜨린다. 꽃잎 속에 꽃밭의 추억이 있다. ​ 사람은 나이 들면 주름이 진다. 주름 속에 사람의 추억이 있다.   - 시인 백석과 자야의 사랑이야기 일제시대 시인 백석은 천재적인 재능과 훤칠한 외모로 당시 모든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설에 의하면 그가 길을 지나가면 여인들이 자지러졌을 정도라 했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인, 기생 김영한 과의 러브 스토리는 '로미오와 줄리엣' 만큼이나 가슴이 애린다. 백석은 함흥 영생여고에서 영어교사로 재직 하던 1936년, 회식 자리에 나갔다가 기생 김영한을 보고 첫 눈에 반하게 된다. 이 잘 생긴 로맨티스트 시인은 그녀를 옆자리에 앉히고는 손을 잡고, "오늘부터 당신은 영원한 내여자야.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기 전까지 우리에게 이별은 없어."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백석은 이백의 싯귀에 나오는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김영한에게 지어줬다고 한다. 그렇게 둘은 첫눈에 사랑에 빠져 연인이 된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도 장애물이 등장한다. 유학파에, 당대최고의 직장인 함흥영생여고 영어선생 이었던 백석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탐탁치 않게 여겼고, 강제로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켜 둘의 사랑을 갈라 놓으려 한다. 백석은 결혼 첫날밤에 그의 연인 자야에게로 다시 돌아간다. 그리고 자야에게 만주로 도망을 가자고 제안한다. 그렇지만 자야는 보잘것 없는 자신이 혹시 백석의 장래에 해가 되진 않을까 하는 염려로 이를 거절한다. 백석은 자야가 자신을 찾아 바로 만주로 올 것을 확신하며 먼저 만주로 떠난다. 만주에서 홀로된 백석은 자야를 그리워하며 그유명한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짓는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즈녁히 와서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그러나 잠시동안 이라고 믿었던 이별은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만다. 해방이되고  백석은 자야를 찾아 만주에서 함흥으로 갔지만 자야는 이미 서울로 떠나버렸다. 그 후 3.8선이 그어지고 6.25가 터지면서 둘은 각각 남과 북으로 갈라져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된다. 이후 백석은 평생을 자야를 그리워하며 북에서 1996년 사망한다. 남한에 혼자 남겨진 자야는 대한민국의  3대 요정 중 하나인 대원각을 세워 엄청난 재력가로 성장한다. 훗날 자야는 당시 시가 1,000 억원 상당의 대원각을 조건없이 법정 스님에게 시주한다. 그 대원각이 바로 서울 성북동에 위치한 사찰 '길상사'이다. 평생 백석을 그리워했던 자야는 폐암 으로 1999년 세상을 떠난다. 그녀가 떠나기 전 1000억원 상당의 재산을 기부했는데 아깝지 않냐란 기자의 질문에 자야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1000억 재산이 그 사람 시 한줄만도 못해."  "내가 죽으면 화장해 길상사에 눈 많이 내리는 날 뿌려달라." 고 하니 백석의 시처럼 눈이 푹푹내리는 날 백석에게 돌아가고 싶었나 보다. 그리움이 가을잎을 발갛게 물들이는 날이 무수히 지나도, 부지런히 싸리빚으로 쓸어논 깨끗한 비탈길위에, 첫눈이 양탄자처럼 쌓이는 새벽이오면....응앙응앙 가픈숨 몰아쉬는 흰나귀 타고 찾아올 자야를 기다리던 백석의 사랑에 가슴이 아리다. 사랑하지만 떠나야 하고 때론 그리워해도 만날수없는  많은 사람들중에... 우린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이있다는 큰 기쁨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더큰 욕심을 부리며 사는건 아닌지 반성해 봅니다. 오늘도 곁에 있어 행복한 사람들~^^*   고향 ㅡ ㅡ 백석 나는 북관에 혼자 앓어 누워서 어늬 아츰 의원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같은 상을 하고 관공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녯적 어늬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드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 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 씰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이라며 수염을 쓴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어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ㅤ 사랑의 이율배반  이정하 그대여 손을 흔들지 마라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떠나는 사람은 아무 때나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겠지만 남아 있는 사람은 무언가 무작정 기다려야만 하는가 기약도 없이 떠나려면 손을 흔들지 마라   편지  이성복   1 ​ 그 여자에게 편지를 쓴다 매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내 동생이 보고 구겨버린다 이웃 사람이 모르고 밟아 버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길 가다 보면 남의 집 담벼락에 붙어 있다 버드나무 가지 사이에 끼여 있다 아이들이 비행기를 접어 날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가져갈 때도 있다 한잔 먹다가 꺼내서 낭독한다 그리운 당신…… 빌어먹을, 오늘 나는 결정적으로 편지를 쓴다     2 ​ 안녕 오늘 안으로 나는 기억(記憶)을 버릴 거요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왜 그런지 알아요?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요 나는 선생이 될 거요 될 거라고 믿어요 사실, 나는 아무것도 가르칠 게 없소 내가 가르치면 세상이 속아요 창피하오 그리고 건강하지 못하오 결혼할 수 없소 결혼할 거라고 믿어요   안녕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편지 전해 줄 방법이 없소   잘 있지 말아요 그리운……   돌에 대하여  이성복 돌은 제 얼굴을 만질 수 없다 아, 얼마나 답답할까 돌은 제 그림자를 숨길 수 없다 아, 얼마나 난처할까 돌은 제 눈물을 삼킬 수 없다 아, 얼마나 서러울까 전에는, 전에는 ......돌은 더듬거린다 여기는, 여기는 ......돌은 두리번거린다 돌은 부딪쳐도 부서진 줄을 모르고, 돌은 으스러져도 제 피를 볼 수 없다.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 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그날 이성복 그 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 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치는 노인과 변통의 다정함을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 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꽃피는 시절   이성복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귀먹고 눈먼 당신은 추운 땅속을 헤매다 누군가의 입가에서 잔잔한 웃음이 되려 하셨지요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이 올 때면 먼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벗고 싶어 몸부림하지만 내게서 당신이 떠나갈 때면 내 목은 갈라지고 실핏줄 터지고 내 눈, 내 귀, 거덜난 몸뚱이 갈가리 찢어지고   나는 울고 싶고, 웃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켜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낼  테지만 부서지고 무너지며 당신을 보낼 일 아득합니다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 막막합니다 불탄 살가죽 뚫고 다시 태어날 일 꿈 같습니다   지금 당신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당신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막만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    시는 -캄캄한 인도하늘을 날으며  / 조병화 시는 공기처럼 우주 어디에나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걸 볼 수 있는 시인에게만 그걸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보고 감지할 수 있는 감성이 있고 그걸 처리할 수 있는 지성이 있고 그걸 말로 잡을 수 있는 재능이 있고 언어로 단단히 묶어 둘 지혜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언어로 단단히 묶어 둔 그 시를 아름답게 닦고, 다듬어서 고독한 영혼들에게 뿌려 주는 것이다 사막의 이슬처럼. 별처럼.   꿈 / 조병화 내 손길이 네게 닿으면 넌 움직이는 산맥이 된다 내 입술이 네게 닿으면 넌 가득찬 호수가 된다 호수에 노를 저으며 호심으로 물가로 수초 사이로 구름처럼 내가 가라앉아 돌면 넌 눈을 감은 하늘이 된다. 어디선지 노고지리 가물가물 먼 아지랑이 네 눈물이 내게 닿으면 난 무너지는 우주가 된다.   《2016 경향 신춘문예시 부문 당선작》 의자가 있는 골목- 李箱에게 변희수 아오? 의자에게는 자세가 있소 자세가 있다는 건 기억해둘 만한 일이오 의자는 오늘도 무엇인가 줄기차게 기다리오 기다리면서도 기다리는 티를 내지 않소 오직 자세를 보여줄 뿐이오 어떤 기다림에도 무릎 꿇지 않소 의자는 책상처럼 편견이 없어서 참 좋소 의자와는 좀 통할 것 같소 기다리는 자세로 떠나보내는 자세로 대화는 자세만으로도 충분하오 의자 곁을 빙빙 돌기만 하는 사람과는 대화하기 힘드오 그런 사람들은 조금 불행하오 자세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이오 의자는 필요한 것이오, 그런 질문들은 참 난해하오 의자를 옮겨 앉는다 해도 해결되진 않소 책상 위에는 여전히 기다리는 백지가 있소 기다리지 않는 질문들이 있소 다행히 의자에게는 의지가 있소 대화할 자세로 기다리고 있는 저 의자들은 참 의젓하오 의자는 이해할 줄 아오 한 줄씩 삐걱거리는 대화를 구겨진 백지를 기다리지 않는 기다림을 이해하오 이해하지 못할 의지들을 이해하오 의자는 의자지만 참 의지가 되오 의자는 그냥 의자가 아닌 듯 싶소 의자는 그냥 기다릴 뿐이오 그것으로 족하다 하오 밤이오 의자에게 또 빚지고 있소 의자 깊숙이 엉덩이를 밀어 넣소 따뜻하게 남아 있는 의자의 체온 의자가 없는 풍경은 삭막하오 못 견딜 것 같소 의자는 기다리고 있소 아직도 기다리오 계속 기다리오 기다리기만 하오 여기 한 의자가 있소 의자에 앉아서 보이지 않는 골목을 보고 있소 두렵진 않소 ​ 의자는 시를 낳는 성소…궁합 잘 맞는 난 행운아 이 세상에는 의자가 참 많다. 카페에도 도서관에도 지하철에도 의자는 넘쳐난다. 아니다. 의자보다는 엉덩이가 훨씬 더 많다. 내게도 늘 의자를 그리워하는 엉덩이가 있다. 가끔 시를 쓰는 대신 차라리 나무를 심었다면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결국 나는 그 나무로 또 의자를 만들었겠지만 이제 의자와 나무가 같은 혈족이라는 걸 안다. 오늘은 잠시 의자와 떨어져 있었고 황송하게도 누워서 당선소식을 받았다. 몽중일까. 눈을 뜨고 있어도 꾸는 꿈처럼 더듬더듬 의자를 끌어당겨 앉아본다. 여전히 내 머리맡을 지키는 의자, 이 기회에 의자에게 한마디 안 할 수가 없다. 의자여! 정말 미안하다, 아니 참 미안했다, 그리고 다시 더 미안하겠다. 당선소감을 쓰는 지금도 나는 의자를 믿고 까분다. 나는 행운아다. 의자와 궁합이 잘 맞는 엉덩이를 갖고 있으니. 시를 빌미로 의자와 엉덩이 사이에서 벌어지는 오해가 즐겁다. 언젠가 삐거덕거리던 시들이 끄덕끄덕 고개를 흔들어주는 날들이 올까. 대화는 계속될 것이고 의자는 나의 모든 시들이 마지막으로 태어나는 성소다. 어떤 자세로 의자에 앉아야 할까 늘 함께 고민하는 ‘구밀’과 ‘13시’ 나의 시동지들과 행운을 나눈다. 의자에 항상 따뜻한 방석을 놓아주는 나의 가족 연, 동 그리고 남편 너무 고맙다. 심사를 해주신 이시영, 황인숙 선생님 그리고 손택수, 김행숙 선생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아울러 경향신문사에도 깊은 마음을 전하고 싶다. 영광은, 의자에게 바친다. ♧변희수(본명 변정숙) 1963년 경남 밀양 출생. 대구 거주 | 영남대 국문과 졸업 기존 틀 차용했지만 사유를 끌고가는 의식 우뚝 14건의 응모작이 예심에서 올라왔다. 그중 우선 고른 작품이 ‘의자가 있는 골목’ ‘벽과 대화하는 법’ ‘투명한 발목’이었다. 이 과정이 수월했다는 건 좀 서글픈 일이다. 새로운 종의 시를 포획하기를 기대하며 무엇이든지 빨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 심사자들의 눈에서 그토록 쉽사리 빠져나가는 시들이라니. 재량껏 성심을 다한 시들을 보내주신 분들께 이런 말씀을 드려 죄송하다. 아, 하지만 왜 그리 겉도는 거지? 붕붕 떠 있지? 한 걸음 더 성심을 담으시라. 진정을 담으시라. 하긴 열네 분의 시가 근사하면 얼마나 머리가 터졌을까. 고마운 일이다만. ‘벽과 대화하는 법’은 감각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이이가 갖춘 표현력에 세상-사물을 읽는 힘, 인식의 힘이 더해지기를 바라며, ‘투명한 발목’과 ‘의자가 있는 골목’을 최종심으로 놓았다. ‘투명한 발목’은 섬세하고 예민하고 차분한 묘사와 어조로 독자를 시의 정황 속으로 천천히, 깊게 이끄는 시다. 그런데 이 매력적인 시에도, 흠을 잡자고 눈에 불을 켜니, 성근 부분이 있어 아쉽다. ‘의자가 있는 골목’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 저렇게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 것이오”로 시작되는, 이상의 가장 널리 알려진 시 ‘거울’의 말투를 베껴서 쓴, 즉 이상 풍으로 쓴 시다. 새로운 시인을 가려 뽑는 자리에 기존 시인이나 시를 패러디함으로써 오마주를 보이는 시를 뽑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이 틀 속에 자기 생각, 자기만의 세계가 담겨 있는 점을 높이 샀다. 사유를 길게 끌고 나가는 힘 있는 진술 속에 시인 의식이 우뚝하다. 그의 다른 응모작들도 두루 소재를 다루는 솜씨가 예사가 아니어서 믿음이 간다. 건필을 빌며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1    공광규 시 묶음 댓글:  조회:1777  추천:0  2019-11-30
아름다운 책 / 공광규 어느 해 나는 아름다운 책 한 권을 읽었다 도서관이 아니라 거리에서 책상이 아니라 식당에서 등산로에서 영화관에서 노래방에서 찻집에서 잡지 같은 사람을 소설 같은 사람을 시집 같은 사람을 한 장 한 장 맛있게 넘겼다 아름다운 표지와 내용을 가진 책이었다 체온이 묻어나는 책장을 눈으로 읽고   서울역 / 공광규 서울역 4번 플랫홈에서 부산행 고속열차를 기다리다가 발견한 화강암에 새긴 서울발 이정표 조각물 서울역에서 출발하면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음각되어 있다 내가 오늘 가려는 부산까지 441 킬로미터 목포까지 414 킬로미터 강릉까지 374 킬로미터 그런데 평양까지는 겨우 260 킬로미터로 표시되어 있다 인천까지는 38킬로미터인데 내가 살고 있는 일산에서 개성까지는 더 가까울 것이다 부산보다 조금 더 먼 신의주가 496 킬로미터 나진은 부산 가는 거리보다 두 배 더 먼 943 킬로미터이다 그렇더라도 고속열차로 간다면 6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이다 내가 못 가본 저곳들은 얼른 가보고 싶은 곳들이다 대동강 건너 신의주에서 국경을 넘어 이베리아반도까지 나진을 거쳐 광활한 시베리아를 지나 북해의 어디쯤에 닿고 싶다 어느 날 배낭을 꾸려서 떠났다가 몇날 며칠을 묵으며 깨끗한 술 한 잔 하고 돌아오고 싶은 곳이다 혀로 넘기고 두 발로 밑줄을 그었다 책은 서점이나 도서관에만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최고의 독서는 경전이나 명작이 아닐 것이다 사람, 참 아름다운 책 한 권   아름다운 사이 공광규   이쪽 나무와 저쪽 나무가 가지를 뻗어 손을 잡았어요 서로 그늘이 되지 않는 거리에서 잎과 꽃과 열매를 맺는 사이군요 서로 아름다운 거리여서 손톱을 세워 할퀴는 일도 없겠어요 손목을 비틀어 가지를 부러뜨리거나 서로 가두는 감옥이나 무덤이 되는 일도 이쪽에서 바람 불면 저쪽 나무가 버텨주는 거리 저쪽 나무가 쓰러질 때 이쪽 나무가 받쳐주는 사이 말이에요 되돌아보는 저녁/공광규 자동차에서 내려 걷는 시골길 그동안 너무 빨리 오느라 극락을 지나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어디서 읽었던가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가다가 영혼이 뒤따라오지 못할까봐 잠시 쉰다고 발등을 스치는 메뚜기와 개구리들 흔들리는 풀잎과 여린 꽃들 햇볕에 그을린 시골동창생의 사투리 푸짐한 당숙모의 시골밥상 어머니가 나물 뜯던 언덕에 누이가 좋아하던 나리꽃 군락 나비가 되어    공광규 어젯밤에는 내가 나를 아주 깊이 안아주며 잤어 이렇게 팔을 엇갈려 네가 나를 안아주듯 내가 나를 안아주었어 그리운 너의 체온 감자알처럼 고구마 뿌리처럼 만져지는 내가 나를 만지는 슬픔 그러다 손목을 엇갈려 가슴에 얹고 뻗어가는 슬픔 꾹꾹 누르다 잠들었어 나비가 되어 펄럭펄럭 너에게 다녀오려고 ―월간 《시인동네》 2019년 6월호 완행버스를 탔다 / 공광규 오랜만에 광화문에서 일산 가는 완행버스를 탔다 넓고 빠른 길로 몇 군데 정거장을 거쳐 대도시에서 신도시로 직행하는 버스를 보내고 완행버스를 탔다 이 길 저 길 좁은 길을 거쳐 사람이 자주 타고 내리는 버스를 타고 가며 남원추어탕 집도 지나고 파주옥 앞도 지나고 전주비빔밥 집도 지나고 스캔들양주 간판과 희망맥주 앞을 지났다 고등학교 앞에서는 탱글탱글한 학생들이 기분 좋게 담뿍 타는 걸 보고 잠깐 졸았다 어느새 버스는 뉴욕제과를 지나서 파리양장점 앞에서 천국부동산을 향해 가고 있었다 천국을 빼고는 이미 내가 다 여행 삼아 다녀본 곳인데 완행버스를 타고 가며 남원, 파주, 전주, 파리, 뉴욕을 다시 한 번 다녀온 것만 같다 고등학교도 다시 다녀오고 스캔들도 다시 일으켜보고 희망을 시원한 맥주처럼 마시고 온 것 같다 직행버스를 타고 갈 수 없는 곳을 느릿느릿한 완행버스로 다녀왔다 나쁜 짓들의 목록 / 공광규 길을 가다 개미를 밟은 일 나비가 되려고 나무를 향해 기어가던 애벌레를 밟아 몸을 터지게 한 일 풀잎을 꺾은 일 꽃을 딴 일 돌멩이를 함부로 옮긴 일 도랑을 막아 물길을 틀어버린 일 나뭇가지가 악수를 청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피해서 다닌 일 날아가는 새의 깃털을 세지 못한 일 그늘을 공짜로 사용한 일 곤충들의 행동을 무시한 일 풀잎 문장을 읽지 못한 일 꽃의 마음을 모른 일 돌과 같이 뒹굴며 놀지 못한 일 나뭇가지에 앉은 눈이 겨울꽃인 줄도 모르고 함부로 털어버린 일 물의 속도와 새의 방향과 그늘의 평수를 계산하지 못한 일 그중에 가장 나쁜 것은 저들의 이름을 시에 함부로 도용한 일 사람의 일에 사용한 일   욕심 / 공광규 뒤꼍 대추나무 약한 바람에 허리가 뚝 꺾였다 사람들이 지나며 아깝다고 혀를 찼다 가지에 벌레 먹은 자국이 있었나? 과거에 남 모를 깊은 상처가 있었나? 아니면 바람이 너무 드셌나? 그러나 나무 허리에선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다만 너무 많은 열매를 나무는 달고 있었다.   서울역 / 공광규 서울역 4번 플랫홈에서 부산행 고속열차를 기다리다가 발견한 화강암에 새긴 서울발 이정표 조각물 서울역에서 출발하면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음각되어 있다 내가 오늘 가려는 부산까지 441 킬로미터 목포까지 414 킬로미터 강릉까지 374 킬로미터 그런데 평양까지는 겨우 260 킬로미터로 표시되어 있다 인천까지는 38킬로미터인데 내가 살고 있는 일산에서 개성까지는 더 가까울 것이다 부산보다 조금 더 먼 신의주가 496 킬로미터 나진은 부산 가는 거리보다 두 배 더 먼 943 킬로미터이다 그렇더라도 고속열차로 간다면 6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이다 내가 못 가본 저곳들은 얼른 가보고 싶은 곳들이다 대동강 건너 신의주에서 국경을 넘어 이베리아반도까지 나진을 거쳐 광활한 시베리아를 지나 북해의 어디쯤에 닿고 싶다 어느 날 배낭을 꾸려서 떠났다가 몇날 며칠을 묵으며 깨끗한 술 한 잔 하고 돌아오고 싶은 곳이다   헛간을 짓다가 / 공광규 장마에 무너진 시골 헛간을 헐고 다시 짓는데 동네사람들이 지나가며 한 마디씩 한다. - 어라, 광규 이 사람, 주춧돌을 놓을 줄 모르는구먼. - 어허, 그 나이 먹도록 기둥 한 번 안 세워봤구먼. - 어이구, 지금 짓는 게 개집이여 뭐여. 동네사람들 말을 듣고 이렇게 저렇게 해보다가 한나절이면 될 것을 하루 종일 기둥도 못 세웠다. 저녁을 먹고 마루에 나와 별을 보는데 내가 지금껏 이렇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남의 말만 듣고 살아서 평생 헛간 같은 집 한 채도 못 짓고 있는 것이다.   얼굴 반찬 공광규(1960~)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 반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반찬이 가득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 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얼굴 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동사목 김광규(1941~) 유달리 추웠던 지난겨울 영하17도의 혹한을 비껴갈 수 없이 뒷동산 언덕배기에 뿌리박은 채 꼿꼿이 서서 얼어 죽은 나무들 전기톱으로 잘라내는 소리 비명처럼 들린다 산 아래 첫 집 담 너머 우리 마당에도 누렇게 얼어 죽은 낙엽송과 단풍나무 한여름 녹음 속에 처연하게 숨 멎은 동사목 두 그루 살아 있는 나무들만 바람에 수런거리고 마른 잎을 떨어버릴 수 있다는 수목의 유언에 귀 기울이며 말 없는 미라를 보듯 두고두고 바라보기만 할 뿐   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어두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담장을 허물다    공광규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때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사는 백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 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그늘 수십평과 까치집 세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 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해서 듣던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엔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내려와 방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 꽃이 하얗게 덮인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 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다니는 하루 수백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청태산까지 나의 소유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 영주가 되었다  - 공광규 시집 『담장을 허물다』 (창비, 2016) ​ 1960년 충남 청양 출생 동국대 국문과와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1986년 ≪동서문학≫ 등단 1987년 《실천문학》에 현장시들을 발표 2009년 제4회 윤동주상 문학부문 대상 2010년 제1회 김만중문학상 시부문 금상 2011년 제16회 현대불교문학상 시부문  시집 『대학 일기』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지독한 불륜』 『소주병』『말똥 한덩이』『담장을 허물다』 『신경림 시의 창작방법 연구』『시 쓰기와 읽기의 방법』『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등   손가락 염주 공광규 (1960~) 밥상을 차리고 빨래를 주무르고 막힌 변기를 뚫고 아이들과 어머니의 똥오줌을 받아내던 관절염 걸린 손가락 마디 이제는 굵을 대로 굵어져 신혼의 금반지도 다이아몬드 반지도 맞지가 않네 아니, 이건 손가락 마디가 아니고 염주알이네 염주 뭉치 손이네하하허허 하하하호" 내가 모르는 사이에 아내는 손가락에 염주알을 키우고 있었네   소주병 공광규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 주면서 속을 비워 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러져 않은 빈소주병이었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