륙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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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59 ]

59    정호승의 시 댓글:  조회:484  추천:0  2020-02-02
58    목필균의 시 댓글:  조회:432  추천:0  2020-01-24
얼굴     목필균   아들과 똑 닮은 여섯 살 손녀가 허리 잘록한 백설공주를 그린다   아버지를 닮은 나와 나를 닮은 아들 아들을 닮은 손녀의 이음줄   쳐진 눈썹, 하얀 피부 외유내강의 성품까지 유전자의 놀라운 대물림이다   아버지가 떠난 길 따라 나도 떠나고 나도 꼭 닮은 부녀가 걸어갈 길은 굽이굽이 넘어갈 세상살이   내가 그리기를 좋아하듯 공주를 그리는 아이를 위해 행복의 타율을 높이는 기도 ​ 매일매일 절절하다   6월의 달력    목필균                  한 해 허리가 접힌다 계절의 반도 접힌다 중년의 반도 접힌다 마음도 굵게 접힌다 동행 길에도 접히는 마음이 있는 걸 헤어짐의 골목마다 피어나던 하얀 꽃 따가운 햇살이 등에 꽂힌다. 잘 지내고 있어요    목필균 그리움은 문득문득 잘 지내고 있어요? 안부를 묻게 한다 물음표를 붙이며 안부를 묻는 말 메아리 없는 그리움이다 사랑은 어둠 속에서 잘 지내고 있어요 안부를 전하게 한다 온점을 찍으며 안부를 전하는 말 주소 없는 사랑이다 안부가 궁금한 것인지 안부를 전하고 싶은지 문득문득 잘 지내고 있어요? 묻고 싶다가 잘 지내고 있어요 전하고 싶다 사랑을 정리하며                       - 편지함  목필균 이제쯤  엇갈리기만 하는 너를 정리해야겠다고  편지함을 연다  받은 편지함을 휘저어 보며  과장된 말들을 골라내고  보낸 편지함을 뒤져보며  이별의 예감들을 솎아낸다  이미 한 번 지워진 사연들이  줄줄이 잡혀와서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있는 지운 편지함  "선택된 메시지를 영구적으로 삭제시키겠습니까?"  예(Y), 아니오(N)  잠시 머뭇거리다  예(Y)를 누른다  다시 한번 가위질 당하는  나만의 이야기들  이제 영원히 놓쳐버린 것을    잡초 목필균   일주일 만에 만난 텃밭은 잡초가 주인이었다 상추사이로 부추사이로 고추사이로 뽑히면 더 안간힘으로 자라는 잡초들 뜯기고 뽑히고 밟혀도 무성히 일어서는 삶의 뿌리들 이순고개넘어서서 호미들고 돌아보니 좋은 날보다 더 기억되는 어려웠던 시간들 캐 낼수가 없어 굽이굽이 고단한 세월 견뎌온 잡초같던 내가 보인다 빈 눈으로 서성거려 보지만  가슴엔 미련이 선명하게 찍힌다 
57    복효근의 시 댓글:  조회:437  추천:0  2020-01-24
무심풍경 복효근   겨울 감나무 가지가지에 참새가 떼로 몰려와 한 마리 한 마리가 잎이 되었네요 참, 새, 잎이네요 잎도 없이 서 있는 감나무가 안쓰러워 새들은 이 가지 저 가지 옮겨 앉으며 작은 발의 온기를 건네주기도 하면서 어느 먼 데 소식을 들려주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나무야 참새가 그러든지 말든지 하는 것 같아도 안 자고 다 듣고 있다는 듯 가끔씩 잔가지를 끄덕여주기도 합니다 나무가 그러든지 말든지 참새는 참 열심히도 떠들어 댑니다 모른 체 하고 그 아래 고양이도 그냥 지나갑니다 나무는 나무대로 참새는 참새대로 모두 다 무심한 한 통속입니다 최선을 다하여 제 길 갑니다 연말인데 벌써 몇 개월 전화 한 통 없는 친구에게 한 바탕 욕이나 해줄까 했다가 잊어버리고 저것들의 수작을 지켜보며 이 한나절에 낙관 꾹 눌러 표구나 해뒀으면 싶었습니다   ㆍ 이녁  /  복효근 그믐 가까운 밤하늘 별들이 좋아 별 보러 가자 했더니 따라 나선 사람   등 뒤로 유성 하나 길게 흘러 "앗 별똥별이다" 하니 "에이, 난 못 봤는데……. 근데 당신이 보았으니 됐어" 한다   내가 먹은 것으로 이녁 배가 부르고 내가 본 꽃으로 제 가슴에 천국을 그리는 사람   나를 스친 풀잎으로 제 살갗에 피멍울이 맺혀 내가 앓기도 전에 먼저 우는 사람아   별똥별 떨어진 자리 또 한세상 같이 건너야 할 무지개다리 하나 걸려 있겠다 다 스쳐보낸 뒤에야 사랑은     복효근   세상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산길에선 정말 믿을 사람 하나 없다 정상이 어디냐 물으면 열이면 열 조금만 가면 된단다 안녕하세요 수인사하지만 이 험한 산길에서 나는 안녕하지 못하다 반갑다 말하면서 이내 스쳐가버리는 산길에선 믿을 사람 없다 징검다리 징검징검 건너뛰어 냇물 건너듯이 이 사람도 아니다 저 사람도 아니다 못 믿겠다 이 사람 저 사람 건중건중 한 나절 건너뛰다보니 산마루 다 왔다 그렇구나, 징검다리 없이 어찌 냇물을 건널 수 있었을까 아, 돌아가 껴안아주고 싶은, 다 멀어져버린 다음에야 그리움으로 남는 다 스쳐보낸 뒤에야 사랑으로 남는 그 사람 또 그 사람 그들이 내가 도달할 정상이었구나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이 산길에 나 하나를 못 믿겠구나 낙엽 ​ 복효근(1962~) 떨어지는 순간은 길어야 십여초 그 다음은 스스로의 일조차 아닌 것을 무엇이 두려워 매달린 채 밤낮 떨었을까 애착을 놓으면서부터 물드는 노을빛 아름다움 마침내 그 아름다움의 절정에서 죽음에 눈을 맞추는 저 찬란한 투 신. ​
56    한국시 (임영도시 다수) 댓글:  조회:433  추천:0  2020-01-05
강물에 띄운 편지   이학성     흐르는 물 위에 편지를 쓴다.  달무리가 곱게 피어났다고 첫줄을 쓴다.  어디선가 요정들의 아름다운 군무가 그치지 않으리니  이런 밤은 많은 것들을 떠오르게 한다고 쓴다.  저 물의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처럼 도무지 당신의 마음도 알 수 없다고 쓴다.  이곳에 나와 앉은 지 백 년,  저 강물은 백 년 전의 그것이 아니라고 쓴다.  마음을 벨 듯하던 격렬한 상처는  어느 때인가는 모두 다 아물어 잊히리라 쓴다.  그럼에도 어떤 일은 잊히지 않으니  몇날며칠 같은 꿈을 꾸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쓴다.  알 수 없는 게 그것뿐이 아니지만  어떤 하나의 물음이  꼭 하나의 답만 있는 게 아니기에  저물어 어두워가는 물 위에 편지를 쓴다.  그러나 강물에 띄운 편지는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깊은 곳으로 흘러간다.  ...........................    강물은 멀리 흘러간다. 흘러가서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길고 큰 강을 시간에 빗대기도 한다.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도 장강(長江)과 유사하다. 휘돌아가는 물굽이가 있다. 앞뒤 사정이 많다. 그 시간의 강물 위에 시인은 편지를 써서 띄운다. 달의 언저리에 월훈(月暈)이 곱다고 쓰며 누군가를 생각한다. 오랜 기다림과 그리움에 대해 생각한다. 바뀌고 달라지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난해해서 도무지 풀이할 수 없는 삶의 질문들을 생각한다. 그 질문들에 꼭 정해진 답은 없다. 누구도 하나의 마음이 아니기에. 시인은 반성과 살핌의 긴 편지를 써서 강물에 띄운다. 그러나 이 편지는 꼭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라며 보내는 편지가 아니라 자신에게, 수심(水深)이 깊은 자신의 마음에게 띄우는 서신이기도 하다. 내가 써서 내가 받아보는 편지도 의미가 크다. 따뜻한 말로 자신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일도 필요하다.  문태준 (시인)   2020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풀씨창고 쉭쉭 이주송   멧돼지 한 마리 그 커칠한 털 속에는 웬만한 풀밭이나 산기슭이 들어 있다 노루발, 뻐국새, 지칭개, 복수초, 현호색, 강아지풀, 질경이, 벌개미취, 금낭화, 산자고, 쇠별꽃 멀리 가고 싶은 풀씨들은 멧돼지 등에 올라타면 된다 제 몸에 눈 녹은 묵은 봄이 가려워 멧돼지는 부르르 온몸을 털어낼 터 씨앗들은 직파방식으로 파종될 것이다 북극의 스피츠베르겐섬에는 국제종자보관창고가 있다 먼 훗날의 구호(救護)를 위해 멧돼지 한 마리 그 쉭쉭거리는 씨앗창고를 기르고 싶다 이 산과 저 산 이쪽 풀밭과 저쪽 풀밭이라는 말 다 멧돼지의 등짝에서 떨어진 말일 것이다 그러니 너나들이로 섞이는 산 번지는 초록들은 멧돼지의 숨결 국경도 혈연도 지연도 없다 멧돼지 꼬리에서 반딧불이 날아오르고 꺼칠한 오해 속에서도 극지에서도 풀씨들이 움튼다   [당선소감] “쉬지 않고 묵묵히 시의 길 걸을 것” 치유 위해 내디딘 걸음이 행운 전해줘 이끌어준 분들께 고맙다 말하고파 한해를 돌아보는 천변의 산책길에서 당선 소식을 받았습니다. 온몸의 통증으로 병원 순례를 하다가 무조건 시집을 읽었던 날들이 지나갔습니다. 시에 대한 첫걸음은 살기 위한 길이었고 고통의 유일한 탈출구였습니다. 치유로 시작한 글쓰기가 이렇게 큰 영광으로 이어지다니 아직도 얼떨떨합니다. 아버지가 개간한 산비탈 밭의 농작물은 늘 멧돼지들의 몫이었습니다. 형편없는 수확물 앞에 엄마의 하소연과 저들도 한식구라던 아버지의 뚝심이 엉기는 날이면 할머니 무릎에서 잠이 들곤 했습니다. 그런 날엔 멧돼지 등에 올라탄 채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농작물을 지키는 꿈을 꾸곤 했습니다. 멧돼지 발자국마다 애기똥풀이 피었고 개똥벌레들이 잡식동물들의 접근을 막아줬습니다. 잡초와 멧돼지랑 함께 먹고 살았던 유년의 밭은 이제 아버지와 함께 숲으로 돌아갔습니다. 도심 곳곳에 멧돼지가 출현하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그 산비탈 밭에서 한참을 서성이곤 합니다. 부족한 제 시를 뽑아주신 농민신문사와 심사위원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쉬지 않고 묵묵히 걷겠습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이끌어주신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교수님들 감사합니다. 응원해주신 공광규·이종섶 선생님, 시클 고맙습니다. 지켜봐준 가족들 사랑합니다. 오늘도 요양병원에서 자식들만 기다리고 있을 엄마, 당신의 기도대로 생의 가장 큰 선물을 안고 달려갑니다. 이주송 -1961년 전북 임실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심사평] 밀고 가는 역량 섬세하며 힘차 … 야생동물과의 상생까지 다뤄 예심을 통과한 21명의 작품은 일정수준 이상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선자들의 손에 마지막까지 들려 있던 작품은 ‘그랴’와 ‘신기루’ 그리고 ‘풀씨창고 쉭쉭’이었다. ‘그랴’는 ‘그랴’라는 말을 통해 아버지와의 기억을 환하고 따뜻하게 더듬고 있는데, 시를 끌고 가는 힘이 남달랐다. 하지만 시적 긴장감이 아쉬웠고 다른 투고작에서 언어가 조금은 넘친다 싶었다. ‘신기루’는 독특한 비유와 이야기 방식으로 선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는데 모호한 지점이 없지 않았고 동봉한 작품에서 편차가 느껴졌다. ‘풀씨창고 쉭쉭’은 강인한 생명력과 역동적인 힘이 느껴지는 시였다. 그저 바람에 흔들리다 떨어지는 풀씨가 아닌 멧돼지의 등에 힘차게 올라타 대지를 거침없이 달려나가는 씨앗의 모습은 당찼고, 시를 밀고 가는 역량은 섬세하면서도 힘찼다. 선자들은 몇번이고 행간의 여백까지 반복해 읽어나가며 이 시에 결정적인 흠결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았으나, 마지막 행까지 다 읽고 난 후에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멧돼지의 “그 꺼칠한 털 속에는 웬만한 풀밭이나/산기슭이 들어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소 덜 다듬어지거나 서툰 지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노루발, 뻐꾹채, 지칭개, 복수초, 현호색, 강아지풀/ 질경이, 별개미취, 금낭화, 산자고, 쇠별꽃”의 이름을 불러내는 것만으로도 묘한 서정성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이 “쉭쉭거리는 씨앗창고”의 풀씨는 “국경도 혈연도 지연도” 없이 극지에까지 초록의 생명력을 퍼트리고 있는데, 이 응모자는 말의 호흡을 나름의 방식으로 터득하고 있는 듯했다. 야생동물과 사람의 상생에 대한 고민과 질문까지 넌지시 덧붙여 던지고 있기도 한 이 시와 더불어 동봉한 다른 네편의 시에서도 신뢰를 주기에 충분한 역량을 보여주고 있어, 선자들은 논의의 끄트머리에 닿아 당선작으로 흔쾌히 동의했다. 이 작품들 외에도 ‘피싱’ ‘씨앗 열개’ ‘사후(死後)’ 등의 작품이 논의선상에 있었다는 것을 밝히면서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끝까지 최선을 다한 분들에게는 격려를 보낸다. 심사위원 : 곽재구 시인 박성우 시인 매미소리/ 임영조   감나무 가지 매미가 악쓰면 벚나무 그늘 매미도 악쓴다. 그 무슨 열 받을 일이 많은지 낮에도 울고 밤에도 운다. 조용히들 내 소리나 들어라 매음매음… 씨이이… 십팔십팔 저 데뷔작 한 편이 대표작일까 경으로 읽자니 날라리로 읽히고 노래로 음역하면 상스럽게 들린다.   - 시집『그대에게 가는 길』 12월 / 임영조 올 데까지 왔구나 막다른 골목 피곤한 사나이가 홀로 서 있다 훤칠한 키에 창백한 얼굴 이따금 무엇엔가 쫓기듯 시계를 자주 보는 사나이 외투깃을 세우며 서성거린다 꽁꽁 얼어붙은 천지엔 하얀 자막처럼 눈이 내리고 허둥지둥 막을 내린 드라마 올해도 나는 단역이었지 뼈빠지게 일하고 세금 잘 내는 뒤돌아보지 말자 더러는 잊고 더러는 여기까지 함께 온 사랑이며 증오는 이쯤에서 매듭을 짓자 새로운 출발을 위해 입김을 불며 얼룩을 닦듯 온갖 애증을 지우고 가자 이 춥고 긴 여백 위에 이만 총총 마침표 찍고. 자서전 / 임영조 1943년 10월 19일 밤 하나의 물음표(?)로 시작된 나의 인생은 몇 개의 느낌표(!)와 몇 개의 말줄임표(……)와 몇 개의 묶음표(< >)와 찍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만둔 몇 개의 쉼표(,)와 아직도 제자리를 못 찾아 보류된 하나의 종지부(.)로 요약된다 빨래 / 임영조 옥상에 널린 빨래가 다냥한 햇볕 받아 눈이 부시다 오랜만에 사람을 벗어버리고 찌든 때를 씻어내고 냄새도 털고 날아갈 듯 가볍게 펄럭거린다 이제는 각자 옷 그만 두고 새나 되어 훨훨 날아가겠다는 듯 온 하루 빨랫줄을 잡고 흔든다 바람이 부추기면 신바람이 나는지 쩔쩔매는 바지랑대 혼자 바쁘다 주인의 흉허물을 싸고돌던 한통속 백주에 속속들이 드러나면 저렇게 서로 다른 색깔로 아우성칠까 자중지란 난파된 갑판에 서서 수기를 흔드는 보트 피플들 같다 다시 보면 가을 운동회 날 하늘에 나부끼던 만국기 같은 저 옥상에 넌 빨래를 보면 아직 덜 마른 내 마음이 무겁다 사람도 때를 씻고 무게를 덜면 저렇듯 깨끗하고 가벼울 수 있다면 제멋대로 부시게 펄럭일 수 있다면 젖은 빨래처럼 몸 무거운 날 나도 눅눅한 마음 꼭 짜 널고 싶다 한 점 얼룩 없는 백기로 펄럭 내 멋대로 세상에 나부끼고 싶다 삼월 / 임영조 밖에는 지금 누가 오고 있느냐 흙먼지 자욱한 꽃샘바람 먼 산이 꿈틀거린다 나른한 햇볕 아래 선잠 깬 나무들이 기지개켜듯 하늘을 힘껏 밀어올리자 조르르 구르는 푸른 물소리 문득 귀가 맑게 트인다 누가 또 내 말 하는지 떠도는 소문처럼 바람이 불고 턱없이 가슴 뛰는 기대로 입술이 트듯 꽃망울이 부푼다 오늘은 무슨 기별 없을까 온종일 궁금한 삼월 그 미완의 화폭 위에 그리운 이름들을 써놓고 찬연한 부활을 기다려본다.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날                                      곽효환 그날, 텔레비전 앞에서 늦은 저녁을 먹다가 울컥 울음이 터졌다 멈출 수 없어 그냥 두었다 오랫동안 오늘 이전과 이후만 있을 것 같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밤, 다시 견디는 힘을 배우기로 했다'\   2020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 고래 해체사 ​ 박위훈 ​ 만년의 잠영을 끝낸 밍크고래가 구룡포 부둣가에 누워있다 ​ 바위판화 속 바래어가는 이름이나 호기심으로 부두를 들었다 놓던 칼잡이의 춤사위이거나 잊혀지는 일만큼 쓸쓸한 것은 없다 허연 배를 드러낸 저 바다 한 채, 숨구멍이 표적이 되었거나 날짜변경선의 시차를 오독했을지도 모를 일 고래좌에 오르지 못한 고래의 눈이 칼잡이의 퀭한 눈을 닮았다 피 맛 대신 녹으로 연명하던 칼이 주검의 피비린내를 잘게 토막 낼 때면 동해를 통째로 발라놓을 것 같았다 조문은 한 점 고깃덩이나 원할 뿐 고래의 실직이나 사인(死因)은 외면했다 주검을 주검으로만 해석했기에 버텨온 날들이 상처의 내성처럼 가뭇없다 바다가 고래의 난 자리를 소금기로 채울 동안 고래좌는 내내 환상통을 앓는다 테트라포드의 느린 시간을 낚는다 주검의 공범인 폐그물도 인연이라고 수장된 꿈과 비명 몇 숨 그물에서 떼어내자 반짝, 고래좌에 별 하나 돋는다 ​ 바다의 정수리 늙은 고래의 흐린 동공에 맺힌 달, 조등이다 ​ [당선소감] 절망의 시간 잊게 해 준 ‘詩밭 경작’ ​ 졸작 몇 편 신춘문예 원고로 보내놓고 십여 일, 조바심에 안달이 난 걸음이 문수산을 향했다. 영하의 기온과 가쁜 숨이 산 중턱을 오를 즈음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턱 밑까지 차오른 숨을 일시에 가라앉히는 당선소식이 발보다 먼저 정상을 밟았다. ​ 모두가 직립의 삶을 꿈꿀 때 가끔 횡보의 날들을 꿈꾼 적 있다. 혼탁한 정치판만큼이나 시답잖던 내 짧은 사유의 공간에라도 무한 갇히고 싶었던 날들, 그 날들이 시와의 동거였지 싶다. ​ 부지불식간 찾아온 뇌경색, 후유증이 남긴 편마비 그 숭한 짐승과의 양보 없는 드잡이에 지쳐갈 무렵 마치 구원의 손길인 양 두려움과 절망의 시간을 잊게 해준 또 다른 짐승이 詩였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형체도 없고 끝이라는 말 자체도 모르는 짐승과의 싸움 그것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강을 건너는 것이기도 했고 무저갱에 갇힌 순한 짐승의 두려운 울음 같은 거였다. 시의 문외한인 내게 문을 활짝 열어준 ‘김포문예대학’ 그 너른 품에서 수삼년 시구와 부대끼던 날들이 언제인지 싶다. 햇병아리들 몇 모여 시의 숲을 해찰대던 ‘달시’의 김부회 시인과 동인들, 무녀리를 자처 시의 끈을 놓지 말자며 서로 경계하며 이끌어주던 ‘반딧불이’ 동아리 샘들, 당근과 채찍으로 詩라는 과육을 맛깔나고 단단하게 단근질시켜준 문성해 시인께 이 영광을 돌립니다. ​ 詩밭으로 한 발 더 들어서는 것이 끝없는 미로를 걷는 것이며 기약 없는 약속임을 알기에 기쁨보단 두려움이 앞섭니다. 평생 詩밭을 경작할 것이지만 시를 놓는 것이 여반장(如反掌) 같다는 것도 잘 알기에 나를 더 경계할 것입니다. 이 영광은 끝이 아닌 시작입니다. 겸허함을 마음 네 모서리에 친친 두르고 자만이라는 짐승을 가두어 두겠습니다. 사람답게 사람 같은 꼭, 그런 사람으로 살 것입니다. 시와 사랑을 품고… ​ 박위훈 : -1964년 출생 -김포문예대학 13-15기 수료 -반딧불이 동인 ​ [심사평] ​ 심사를 하면서 기본적인 맞춤법을 지키지 않거나 주술관계가 어긋나는 경우에는 논의의 대상에 올려두기가 어려웠다. 또한 한 편의 시를 잘 빚어낸다고 해도 거듭해서 흡사한 사유를 풀어놓거나 작품마다 반복되는 이미지와 어휘로 진행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 우선 다섯 분의 작품을 가려낸 후 다시 숙고했다. ‘블랙의 도시’는 신선한 실험정신이 돋보였으나 그 외 두 편의 작품과의 미학적 편차가 컸다. ‘벽’ 등의 시는 삶의 협곡을 더듬으며 긴장감 있게 시를 전개하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그러나 투고작들이 전체적으로 고른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세 분의 작품을 두고 고민했다. 문나원의 ‘괜찮은 날’ 외 2편은 개인을 둘러싼 삶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진솔하면서도 과도한 감정으로 치우치지 않는 점이 신선했다. 작품을 끌고 가는 방향성, 언어배열이 고르고 안정적이었으나 삶의 깊숙한 곳에 시선을 밀어 넣어 숨겨진 비의나 은폐된 문제들을 끄집어내려는 힘이 부족했다. “유리창들은 늘 쏟아지기 위해 거기 있다” “순간은 그러나 얼마나 성공적인 실패를 부르는가” 등의 문장들은 개성적인 아포리즘과 구별된다. 어떤 사유의 지점에서 단정 지으며 머무르기보다는 남달리 치열하게 밀고나가기를 기대한다. ​ 황세아의 ‘징그러운 사과’ 외 4편은 일상화된 생각을 뒤집는 사고의 전복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시적 화자의 직설적 발설에 비해 비유를 통한 서사의 진행이 자의적인 구성에 갇혀 있었다. 시인의 상상력과 잠재력이 탁월하게 드러나는 것은 정제되지 못한 생경한 이미지의 구조가 아니라 핍진하며 익숙한 현실에서 그것을 다르게 인식해 마지막 문장까지 책임지는 태도라 할 것이다. 시의 표면적 새로움에 휘둘리지 말고 천착해나갈 때 좋은 결과가 있으리라 믿는다. ​ 숙고 끝에 당선작으로 선정한 작품은 박위훈의 ‘고래 해체사’ 외 2편이다. 사고의 전개와 대상을 응시하는 태도가 자연스러웠고 타자와의 접촉에 있어 대범한 기질이 돋보였다. 한 고래의 주검을 통해 “동해를 통째로 발라놓을 것 같았다”는 감정은 귀하다. 버틀러는 ‘애도’는 슬픔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슬픔에 잠겨 슬픔이 내가 되게 하는 거라고 했다. 이 세계에서 떠밀려지는 존재들과 접촉하며 상처받고 통제할 수 없이 슬퍼하는 자가 시인이 아닐까? 당선작이 기성의 시들처럼 다소 숙련화된 이미지를 보여주는 점이 아쉬웠으나 패배감으로 끝내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높이 보았다. 심사위원 : 배한봉 · 김이듬   무료 / 양광모 따뜻한 햇볕 무료 시원한 바람 무료 이침 일출 무료 저녁 노을 무료 붉은 장미 무료 흰 눈 무료 어머니 사랑 무료 아이들 웃음 무료 무얼 더 바래 욕심 없는 삶 무료   나무 한 그루 / 이정록 내 棺으로 쓰일 나무가 어딘가에서 크고 있다 한 그루 한 그루 뿌리를 지키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산을 이루는가 하늘의 품은 하도 넓어서 나뭇잎 간혹 새처럼 치솟는다 밑가지를 버리고 순을 틔우는 나무 껍질에 딱딱한 벌레를 감싸며 그늘을 내려놓는 나무는 내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경험한다 목숨을 걸어야 내 할 수 있는 일 나는 누구의 따뜻한 棺이 될 수 있을까 나를 집으로 삼을 벌레들아 여기 나이테만 촘촘한 괴목이 있다 내 棺으로 쓰일 나무 한 그루 어딘가에서 하늘을 보고 있다  
55    공광규 시 묶음 댓글:  조회:425  추천:0  2020-01-05
별국                                             공광규 가난한 어머니는 항상 멀덕국을 끓이셨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손님처럼 마루에 앉히시고 흰 사기그릇들이 앉아 있는 밥상을 조심조심 받들고 부엌에서 나오셨다 국물 속에 떠 있던 별들 어떤 때는 숟가락에 달이 건져 올라와 배가 불렀다 숟가락과 별이 부딪치는 맑은 국그릇 소리가 가슴을 울렸는지 어머니는 눈에서 별빛 사리가 쏟아졌다: 흰눈/ 공광규  겨울에 다 내리지 못한 눈은  매화나무 가지에 앉고  그래도 남은 눈은 벚나무 가지에 않는다  거기에 다 못 앉으면 조팝나무 가지에 앉고  그래도 남은 눈은 이팝나무 가지에 앉는다  거기에 또 못 앉으면  쥐똥나무 울타리나  산딸나무 가지에 앉고  거기에 다 못 앉으면 아까시나무 가지에 앉다가  그래도 남은 눈은  찔레나무 가지에 앉는다  앉다가 앉다가  더 앉을 곳이 없는 눈은  할머니가 꽃나무 가지인 줄 알고  성긴 머리 위에 가만가만 앉는다  별 닦는 나무 공광규 은행나무를 별 닦는 나무라고 부르면 안되나 비와 바람과 햇빛을 쥐고 열심히 별을 닦던 나무 가을이 되면 별가루가 묻어 순금빛 나무 나도 별 닦는 나무가 되고 싶은데 당신이라는 별을 열심히 닦다가 당신에게 순금 물이 들어 아름답게 지고 싶은데 이런 나를 별 닦는 나무라고 불러주면 안되나 당신이라는 별에 아름답게 지고 싶은 나를 월간『현대시학』2010년 1월호 : 본적 공광규 청양군수가 2014년 개별공시지가 결정통지문을 내가 사는 일산 주소로 보내왔다. 본적인 남양면 대봉리 653번지 지목이 옛날 초가집 두 채 자리여서 대지인 줄 알았는데 밭으로 되어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나와 여동생들이 고추와 맥문동을 심을 때 사금파리와 기왓장과 모가 부드럽게 닳은 곱돌이 식구들처럼 다정하게 어울리던 밭이다. 혼자된 어머니가 좋아하던 홍화꽃과 도라지꽃이 출렁이고 겨울을 춥게 보낸 언 고구마와 썩은 무를 버렸던 밭이다. 어린 동생이 마당가에 눈 똥을 삽으로 떠다가 묻고 그걸 알고 강아지와 고양이도 가서 똥을 묻고 오던 밭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한참 비어있자 민들레씨앗이 날아와 해마다 식구를 늘리고 무좀에 찧어 붙였던 쇠비름이 뿌리로 자기 영역을 넓히고 명아주가 거미에게 공짜로 잎과 대궁을 빌려주어 거미줄을 치고 반짝이는 아침 이슬을 매다는 밭이다. 지붕이 없어서 별이 가득 내리고 지붕이 없어서 내리는 비를 다 받고 지붕이 없어서 내리는 눈을 다 덮고 벽이 없어서 바람이 무시로 다녀가는 밭이다. 개미와 땅강아지와 귀뚜라미와 지렁이가 모여 살고 산비둘기가 오고 참새가 와서 발자국을 찍고 가는 밭이 내 본적이다.   잃어버린 문장 / 공광규 푸장나무* 향기가 풋풋한 마당 쑥대를 태우며 말대방석에서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별과 별을 이어가며 썼던 문장이 뭐였더라? 한 점 한 점 보석으로 박아주던 문장 어머니의 콧노래를 받아 적던 별의 문장 푸장나무도 없고 쑥대도 없어 밀대방석을 만들던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 무릎마저 없어 하늘공책을 펼칠 수도 읽을 수도 없는 문장 별과 별을 이어가던 문장이 뭐였더라? 한점 한 점 보석으로 박아주덕 그 문장이.   -시집『말똥 한 덩이』(실천문학사,2008) *푸장나무: 떡갈나무의 다른 이름 새벽에 잠이 깨어         공광규 전날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새벽에 잠이 깨서 다시 잠이 오지 않는다 학교 근처로 방을 얻어 나가 사는  아들과 딸 생각이 자꾸 난다 자식들도 내가 젊었을 때처럼 잡히지 않는 미래와  불안을 덮고 잘 것이다 밖에는 고양이가 새벽을 울고 간다 직장에서 쫓겨나 밤이슬을 맞으며 불 꺼진 자취방을 찾아가던 내가 생각나서 안쓰럽다 갑자기 기침이 난다 평생 기침이 심해서 무를 달여 먹고 배를 삭혀 먹던 서늘한 아버지 기침 소리를 닮아서 놀란다 아버지도 이렇게  집을 나가 사는 나와 동생들을 생각하면서 새벽잠을 뒤척였을 것이다.  어떤 시위  공광규   종이를 주는 대로 받아먹던 전송기기가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전원을 껐다가 켜도 도대체 종이를 받아먹지 않는다 사무기기 수리소에 전화를 해 놓고 덮개를 열어보니 관상용 사철나무 잎 한 장이 롤러 사이에 끼어 있다 청소 아줌마가 나무를 옮기면서 잎 하나를 떨어뜨리고 갔나 보다 아니다 석유 냄새나는 문장만 보내지 말고 푸른 잎도 한 장쯤 보내보라는 전송기기의 침묵시위일지도 모른다 ㆍ 대전역 가락국수 / 공광규   행신역에서 고속전철을 타고 내려와 새로 지은 깨끗한 역사 위에서 철로를 내려다보면서 가락국수를 먹고 있다   열여섯 살 때 처음 청양에서 버스를 타고 칠갑산 대치와 공주 한티고개를 투덜투덜 넘어와 부산행 완행열차를 기다리던 승강장에서 김이 풀풀 나는 가락국수를 먹던 생각이 난다 지금은 쉬운 여섯이니 벌써 사십년이나 지났다   그동안 선로도 많아지고 건물도 높아지고 오고가는 사람도 많아졌다 국수 그릇도 양은에서 합성수지로 바뀌었다 내가 처음으로 옛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날이다   그러나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국물냄새와 노란 단무지 색깔과 빨간 고춧가루와 얼큰한 맛은 똑같다 첫사랑처럼 가락국수도 늙지 않았다 이런 옛날이 대전역이 좋다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도 국수발을 닮아서 좋다 : 얼굴 반찬  공광규(1960~)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 반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반찬이 가득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 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얼굴 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어릴때 대가족 속에서 자랐습니다 잘 차린 반찬도 좋지만 사랑하는 사람들과 밥먹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행복했던 시간인지 돌아보면 이제 기억마져 희미한 내 인생의 한 장면 입니다. 이 시를 접하면서 울 할머니 할아버지도 많이 생각나게 하는 시였네요 지금 네 식구 살아도 함께 모여 한달에 밥 한끼 먹는게 힘이드네요   서울역       공광규 서울역 4번 플랫홈에서 부산행 고속열차를 기다리다가 발견한 화강암에 새긴 서울발 이정표 조각물 서울역에서 출발하면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음각되어 있다 내가 오늘 가려는 부산까지 441 킬로미터 목포까지 414 킬로미터 강릉까지 374 킬로미터 그런데 평양까지는 겨우 260 킬로미터로 표시되어 있다 인천까지는 38킬로미터인데 내가 살고 있는 일산에서 개성까지는 더 가까울 것이다 부산보다 조금 더 먼 신의주가 496 킬로미터 나진은 부산 가는 거리보다 두 배 더 먼 943 킬로미터이다 그렇더라도 고속열차로 간다면 6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이다 내가 못 가본 저곳들은 얼른 가보고 싶은 곳들이다 대동강 건너 신의주에서 국경을 넘어 시베리아반도까지 나진을 거쳐 광활한 시베리아를 지나 북해의 어디쯤에 닿고 싶다 어느 날 배낭을 꾸려서 떠났다가 몇날 며칠을 묵으며 깨끗한 술 한잔 하고 돌아오고 싶은 곳이다  
54    한국의 좋은 시11 댓글:  조회:339  추천:0  2020-01-05
  내 남자 양말을 개다가 / 에해야 남편, 남의 편이라 남편이라고 하루에도 열두 번 미웠다 애잔했다 남편 좋아하는 음식 파는 곳을 지나며 지갑부터 꺼내드는 내가 웃기다 남편 좋아하는 색깔 스웨터 보며 발길부터 멈추는 내가 참 그렇다 놀이터에서 애들과 놀아주는 동네 젊은 아빠들 보다 애들 어릴 때  테니스에 미쳐 아빠 테니스 치는 테니스장 철망담 코를 대고 들여다보게 하던 생각에 울화통 확 치밀다가도 이국의 칸나빛으로 노을 스러지고 햇볕 냄새 가득 든 마른 옷 걷어 들여 뒤꿈치 말갛게 닳은 남편 양말 차붓이 개다 보면 문득 남편이 그립다 그.러.다.가. 퇴근하고 들어올 때 굽은 등을 보면 괜히 화가 나는 것이다 그 애잔하고 서글픈 내 남자의 세월 그대로 읽혀져 화가 나는 것이다 등좀 펴고 다녀! 퉁명스러워도 마누라 인사가 반가운 내 남자는 속없이 헤벌쭉 웃는다   삼계탕 / 이정록 시신의 입에 불린 쌀을 넣듯 깨끗한 헝겊에 찹쌀을 싸서 담는다 버드나무 숟가락 대신 굵은 손으로 청주 한잔에 황기 인삼까지 모신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이다 이제 목이 달아났으니 소름으로 느껴 볼 수밖에 없다 뱃속에 넣은 반합이라니? 새벽을 열어젖히던 목청과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생각 많던 머리도 버리고 가부좌 틀고 누웠다 에고나 뜨거워라 벌떡 일어나 앉으면 사리 그득한 부처의 환생이구나 싶겠지만 스스로 다리 포갠 것 아니라 대추 밤 마늘 쏟아지지 마라 지퍼 채운 전대 끈이었구나 화탕지옥 와불 같다만 발목의 피멍을 보니 야단법석 힘깨나 썼겠다 등짝엔 도리깨로 찍은 용 문신도 있겠다 가스레인지가 불두화 피워올리며 독경을 해도 열반은 육탈이라, 웅크리고 있는 것 다 풀어놓거라 허벅지며 앙가슴에 쇠젓가락을 찌른다 없는 발가락 당겨 사라진 미주알 가리려 애쓰는 동안 허공이 품은 넓고도 아름다워 안개도 풀어놓는다 선학표 쟁반 송학 위에 삼계*의 매듭을 풀어놓는다 *삼계: 불교의 세계관에서 중생이 생사유전한다는 욕계, 색계, 무색계의 미망 세계.   의자 /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은방울꽃 / 이정록 아버지는 안마당 한가운데 우뚝 서서 식구들을 하나하나 불렀다. 노모에게 미안하단 말 올리고선 빗줄기 속에 서계셨다. 우리는 마루 끝에 나란히 서서 차렷경례를 올렸다. 아버지 이제 오세요? 어머니가 나오시지 않으면 나오실 때까지, 어머니가 서열을 잘못 찾으면 막내 옆 끝자리에 설 때까지 야간 점호는 계속 되었다. 왜 내가 끝자리래요? 어머니께서 댓 발 입술을 내밀면 빗물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당신이 막내보다 귀엽잖아. 찡긋 눈짓을 날렸다. 우리는 그제야 골방으로 기어들었고 어머니의 입술은 은방울꽃 가장 작은 봉오리가 되어 취한 아버지를 마른 수건으로 닦아드리는 거였다. 그런 날 꿈결엔 막내를 임신한 늙은 어미가 하얀 이를 내보이며 웃는 것이었다.   흙장난 / 이정록 흙장난한다고 혼내지 마세요. 저 무 좀 보세요. 흙 속에서 미끈덩, 저리도 잘 컸잖아요.   엄니의 남자 / 이정록 엄니와 밤늦게 뽕짝을 듣는다 얼마나 감돌았는지 끊일 듯 에일 듯 신파연명조다 마른 젖 보채듯 엄니 일으켜 블루스라는 걸 춘다 허리께에 닿는 삼베 뭉치 머리칼, 선산에 짜다 만 수의라도 있는가 엄니의 궁등이와 산도가 선산 쪽으로 쏠린다 이태 전만 해도 젖가슴이 착 붙어서 이게 모자(母子)다 싶었는데 가오리연만한 허공이 생긴다 어색할 땐 호통이 제일이라, 아버지한테 배운 대로 헛기침 놓는다 "엄니, 저한티 남자를 느껴유? 워째 자꾸 엉치를 뺀대유?" "미친놈, 남정네는 무슨? 허리가 꼬부라져서 그런 겨" 자개농 쪽으로 팔베개 당겼다 놓았다 썰물 키질소리 "가상키는 허다만, 큰애 니가 암만 힘써도 아버지 자리는 어림도 읎어야" 신파연명조로 온통 풀벌레 운다   굴뚝연기 / 이정록 굴뚝연기가 아름다운 이유는 누군가의 차가운 등짝을 덥히고 왔기 때문이지   나도 이제 기와불사를 하기로 했다 / 이정록   금강산 관광기념으로 깨진 기왓장 쪼가리를 숨겨오다   북측 출입국사무소 컴퓨터 화면에 딱 걸렸다 부동자세로 심사를 기다린다 한국평화포럼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지고 와서 이게 뭔 꼬락서닌가 콩당콩당 분단 반세기보다도 길다   "시인이십네까?"   "네."   "뉘기보다도 조국산천을 사랑해야 할 시인 동무께서 이래도 되는 겁네까?"   "잘못했습니다" "어찌 북측을 남측으로 옮겨가려 하십네까?"   "생각이 짧았습니다"   "어데서 주웠습네까?"   "신계사 앞입니다"   "요거이 조국통일의 과업을 수행하다가 산화한 귀한 거이 아닙네까?"   "몰라봤습니다"   "있던 자리에 고대로 갖다놓아야 되지 않겠습네까?"   "제가 말입니까?"   "그럼 누가 합네까?"   "일행과 같이 출국해야 하는데요"     "그럼 그쪽 사정을 백천번 살펴서 우리 측에서 갖다놓겠습네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닙네다 통일되면 시인 동무께서 갖다 놓을 수도 있겠디만, 고사이 잃어버릴 수도 있지 않겠습네까? 그럼 잘 가시라요"   한국전쟁 때 불탔다는 신계사, 그 기왓장 쪼가리가 아니었다면 어찌 북측 동무의 높고 귀한 말씀을 들을 수 있었으리요 나도 이제 기와불사를 해야겠다, 쓰다듬고 쓰다듬는 가슴 속 작은 지붕 조국산천에 오체투지하고 있던 불사 한 채                          시집 [정말] 창비 2010   남의 나이 / 이정록 환갑이 넘으면 남의 나이를 먹는다고 한다. 허망하게 죽은 젊은이와 한 몸이 되어 황혼 길을 걷는다. 다시 맞은 봄으로 사랑을 불태우기도 한다. 팔순이 지나면 남의 나이를 모신다고 한다. 기저귀 차고 떠난 젖먹이와 둥개둥개 한 몸이 된다. 때도 없이 어리광 부리고 떼쓰기와 삐치기와 사탕을 좋아한다. 아예 똥오줌도 못 가리는 갓난아기로 돌아간다. 그래서 영혼은 모두 다 동갑내기 벗이 된다.   나무도 가슴이 시리다 / 이정록 남쪽으로 가지를 몰아놓은 저 졸참나무 북쪽 그늘진 둥치에만 이끼가 무성하다 아가야 아가야 미끄러지지 마라 포대기 끈을 동여매듯 댕댕이 덩굴이 푸른 이끼를 휘감고 있다 저 포대기 끈을 풀어보면 안다, 나무의 남쪽이 더 깊게 파여 있다   햇살만 그득했지 이끼도 없던 허허벌판의 앞가슴 제가 더 힘들었던 것이다 덩굴이 지나간 자리가 갈비뼈를 도려낸 듯 오목하다 시집「의자」2006 문학과지성사 작가의 말 : 나 스스로를 위로할 때, 읽는 시입니다. '내 가슴도 포대기 끈이 묶여있던 자리가 있어서 다행이야' 쓰다듬어 줍시다. 돌주먹 쥐고, 자신을 쾅쾅 부수지 맙시다.   일생 / 이정록 알로 한 번 알에서 애벌레로 또 한 번 다시 번데기로 한 번 또다시 배추흰나비로 한 번 난 생일이 네 번이야 너처럼 음력 양력 다 따지면 여덟 번이나 되지 난 나를 낳고 나를 떠나보내지   마지막은 아예 상복을 입고 태어나지  [문학의오늘] 2016 겨울호   [202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골목의 번식 김은숙 발밑을 믿지 마세요 골목의 뒤통수는 백 년이 가도 썩지 않아요 미처 이름을 갖지 못한 태아도 봉지에 버려진 조약돌, 툭툭 발길에 채여요 어둠이 눈감아줬다면 당신은 그것을 바람 빠진 축구공쯤으로 여겼을 거예요 공중화장실에서 태어나자마자 봉지 속으로 꼬깃꼬깃 숨겨진 첫울음, 도심에는 한 방향만 암기한 검은 사각형들이 살아요 정육면체 어둠이 검은 시냇물이 되어 흘러요 밤이면 먹물 같은 골목, 징검다리는 없어요 그 안에 더 이상 비밀을 숨기지 못할 때 종착지는 캄캄한 땅속이거나 고래 뱃속이었어요 뭔가를 산란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 지난밤 그 골목은 비좁았어요 집안 어디쯤에서 폐품이 되기 좋은 질긴 산책로를 발견했나요? 창문 밖 골목 저 끝말이에요 봐! 저기! 저것 좀 봐! 소리친 게 당신이었나요? 노을을 뚫는 검은 새떼의 비행은 사실상 누군가 목을 비틀어서 유기遺棄한 비닐봉투였죠 은밀함을 목 졸라 죽일 때는 낯선 저녁 역광 뒤쪽이 최고예요 역광을 믿지 않았던 고래는, 죽은 봉투를 해파리로 읽었어요 그것들은 간혹 뱃속에서 심장을 갉아 먹다 고래의 사인死因이 되기도 하죠 검정을 죽이고 돌아와, 비닐봉투가 피살되었다는 뉴스특보를 보더라도 웃음 짓는 것이 중요해요 한잔의 블랙커피를 삽으로 파고서 떨리는 증거들을 감쪽같이 묻어버리세요 지난밤에는 어둠을 자백하라고 길고양이들이 나를 포위했어요 묻어버린 시간과 폐기한 말들을 뱉어내라고 난리에요 그렇지만 최후의 단서를 들키지는 않았어요 귀소본능이 없는 것은 발명가가 깨트린 새 소리예요 길게 누운 골목, 졸음의 이마 위로 갓 태어난 개똥을 조심하세요 골목 왼쪽, 삐쩍 마른 나뭇가지 꼭대기에 흙을 잔뜩 묻히고 입을 헤- 벌린 깃발처럼 펄럭이는 검은 농담들, 맞아요 어느 아르바이트생이 20원짜리 비닐봉투 도둑으로 몰린 사건 아시죠? 두께도 없고 입구도 없는 혐의는 아메바보다 지루해요 괜찮아요 밀봉된 태아의 캄캄한 몸과 비명도 따지고 보면 고무장갑과 같은 족속 붉어서 아무도 구별 못 해요 매일 밤 태어난 어둠은 막다른 모퉁이에 검은 무덤을 만들고, 아침이면 기지개 켜는 코스모스가 그것들을 화려하게 변호하죠   [2020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심사평] 다양한 목격서사 통해 우리 시대 골목론 새롭게 써 예심을 거쳐 본심에서 논의된 작품은 10명의 응모작 37편이었다. 심사위원들은 이들 작품을 숙독한 후 5명의 작품을 놓고 거듭 읽었다. 전체적으로 잘 다듬어진 작품들이 많았다. 그러나 공들인 흔적이 역설적으로 기성품을 보는 것처럼 익숙했고 개성이 없었다. 기존의 시 미학에 갇혀 안정적인 포즈를 취하는 것으로는 결코 신인이 될 수 없다. 내용적으로는 올 한 해 국내외에 주목할 만한 사회현상들이 있었음에도 그러한 곳에 눈길을 보낸 작품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내적 충동과 사유에 충실한 작품도 고르기 어려웠다. 이상하다싶을 정도로 개인 서사에 집중하는 시들이 많았는데, 미시적인 시·공간 속에서 사소하다 싶은 세목들을 짚어내는 데 치중하고 있었다. 이런 시들을 읽으며 우선 논의한 내용은 시의 소통 가능성이었다. 요설에 가까운 언어 비틀기나 이미지 왜곡 등이 지적되었고, 익숙한 것을 익숙한 방식으로 나열하는 무딘 언어 감각도 건강하게 소통되기 어렵다는 의견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논의된 작품은 ‘피어라, 숲’ 외 3편, ‘배고픈 이름’ 외 3편, ‘보성 댁 출항기’ 외 2편, ‘간이’ 외 5편, ‘그늘의 곳간’ 외 2편이었다. ‘그늘의 곳간’은 잘 쓴 시였지만, 그 ‘잘’의 의미가 기성의 시 문법에 고루하리만큼 충실하다는 쪽으로 해석되었다. ‘간이’는 외부 세계를 섬세하게 관찰하고 있으나 시적 대상과의 거리 조절에 실패함으로써 산문화되고 말았다. ‘보성 댁 출항기’는 입담이 좋았다. 그러나 입담에 산문성이 더해지면서 아쉬움을 남겼다. ‘배고픈 이름’은 잘 짜였고 드러내고자 하는 메시지도 좋았다. 그러나 아귀가 딱딱 맞아가는 시상 전개가 역설적으로 시를 단순하게 만들고 말았다. 심사위원들은 ‘피어라, 숲’ 외 3편 가운데 ‘골목의 번식’을 당선작으로 뽑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앞서 언급된 시에 비하면 불안정한 면들이 있지만, 자기 목소리에 충실하다는 점이 계속해서 시를 써나갈 거라는 믿음을 주었다. 특히 ‘골목’에 ‘유기’된 생명체와 그것을 둘러싼 다양한 목격서사를 통해 이 시는 우리 시대의 골목론을 새롭게 써나가고 있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자로서 자부심을 갖고 시를 써나가기를 당부한다. 허영자 시인·문신 시인   [2020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소감-김은숙] "아직 발굴되지 않은 세계를 찾아 천천히, 그러나 불꽃처럼 갈 것“ 누구는 있다 했고, 누구는 없다 했다. 내게 시 쓰기란, 그들이 말하는 있거나 없거나 한 전설을 발굴하는 일이었다. 메마른 종이에 수없이 뭔가를 심고 물을 주었다. 아주 가끔 다른 생각을 했다. 때론 밤을 새웠고, 새벽에도 걸었다. 간혹 뭔가가 보였고 이내 사라졌다.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시가 무엇인지…. 그러나 길었던 육신의 삶보다 시 안에서 보낸 짧았던 시간이 더 아팠고 반짝였다. 이것은 낯선 영토에서 발굴하는 일종의 고고학 게임이었다. 내 키가 채송화만 했을 때 교실 뒤쪽에 내 시가 붙여졌다. 첫 경험이었다. 그 후, 세상 저쪽에서 긴 세월이 흘렀고 나는 날것의 생을 건너며 성인이 되어 있었다. 시는 환자와의 대화 속에서, 골방에서, 저녁 산책길에서, 출퇴근길에 수시로 고개 들었다. 몇 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는 밤마다 한 줄의 문장으로 내게 오셨다. 기적이었다. 원고를 보내놓고, 습관처럼 책꽂이 속에서 하늘을 꺼냈다. 잔인하게 푸른 형광색 오후에 자주 밑줄을 그었다. 그날 성탄찬양 연습 중에 수화기 저쪽 음성 하나가 나를 잡아당겼다. (학교 안 가겠다던 아이처럼) 난공불락 같았던 시 앞에서 돌아서려 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그때마다 내 손을 잡고 그 벽과 친해질 수 있다고, 시의 눈을 마주 보라고 응원해주신 김명희 선생님. 내가 언어의 껍질을 깨고 노란 부리를 내밀 수 있도록 기다려 주신 그 믿음에 깊이 감사드린다. 뜨겁고 따뜻한 은행나무 도반들과 나를 사랑하는 모든 문우들에게 감사와 사랑을 전하며, 매일 새벽 기도로 응원해 준 남편(당신의 침묵은 행복한 천둥이었어.)과 가족들, 나의 영원한 고향인 엄마에게도 사랑의 마음을 전한다. 큰 용기가 필요했던 외출에 흔쾌히 문 열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앞으로 치명적인 무게의 적막과 동거하겠지만 그때마다 잘 견디겠다는 다짐을 새기며 허브향 촛불을 켠다. 천천히, 그러나 불꽃처럼 가야겠다. * 김은숙 작가는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상담심리를 공부하고 심리상담사로 일하고 있다. 서울 송파문인협회 이사, 은행나무문학회, 송파수필작가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석: 2020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풀씨창고 쉭쉭 이주송   멧돼지 한 마리 그 커칠한 털 속에는 웬만한 풀밭이나 산기슭이 들어 있다 노루발, 뻐국새, 지칭개, 복수초, 현호색, 강아지풀, 질경이, 벌개미취, 금낭화, 산자고, 쇠별꽃 멀리 가고 싶은 풀씨들은 멧돼지 등에 올라타면 된다 제 몸에 눈 녹은 묵은 봄이 가려워 멧돼지는 부르르 온몸을 털어낼 터 씨앗들은 직파방식으로 파종될 것이다 북극의 스피츠베르겐섬에는 국제종자보관창고가 있다 먼 훗날의 구호(救護)를 위해 멧돼지 한 마리 그 쉭쉭거리는 씨앗창고를 기르고 싶다 이 산과 저 산 이쪽 풀밭과 저쪽 풀밭이라는 말 다 멧돼지의 등짝에서 떨어진 말일 것이다 그러니 너나들이로 섞이는 산 번지는 초록들은 멧돼지의 숨결 국경도 혈연도 지연도 없다 멧돼지 꼬리에서 반딧불이 날아오르고 꺼칠한 오해 속에서도 극지에서도 풀씨들이 움튼다   [당선소감] “쉬지 않고 묵묵히 시의 길 걸을 것” 치유 위해 내디딘 걸음이 행운 전해줘 이끌어준 분들께 고맙다 말하고파 한해를 돌아보는 천변의 산책길에서 당선 소식을 받았습니다. 온몸의 통증으로 병원 순례를 하다가 무조건 시집을 읽었던 날들이 지나갔습니다. 시에 대한 첫걸음은 살기 위한 길이었고 고통의 유일한 탈출구였습니다. 치유로 시작한 글쓰기가 이렇게 큰 영광으로 이어지다니 아직도 얼떨떨합니다. 아버지가 개간한 산비탈 밭의 농작물은 늘 멧돼지들의 몫이었습니다. 형편없는 수확물 앞에 엄마의 하소연과 저들도 한식구라던 아버지의 뚝심이 엉기는 날이면 할머니 무릎에서 잠이 들곤 했습니다. 그런 날엔 멧돼지 등에 올라탄 채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농작물을 지키는 꿈을 꾸곤 했습니다. 멧돼지 발자국마다 애기똥풀이 피었고 개똥벌레들이 잡식동물들의 접근을 막아줬습니다. 잡초와 멧돼지랑 함께 먹고 살았던 유년의 밭은 이제 아버지와 함께 숲으로 돌아갔습니다. 도심 곳곳에 멧돼지가 출현하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그 산비탈 밭에서 한참을 서성이곤 합니다. 부족한 제 시를 뽑아주신 농민신문사와 심사위원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쉬지 않고 묵묵히 걷겠습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이끌어주신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교수님들 감사합니다. 응원해주신 공광규·이종섶 선생님, 시클 고맙습니다. 지켜봐준 가족들 사랑합니다. 오늘도 요양병원에서 자식들만 기다리고 있을 엄마, 당신의 기도대로 생의 가장 큰 선물을 안고 달려갑니다. 이주송 -1961년 전북 임실 출생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심사평] 밀고 가는 역량 섬세하며 힘차 … 야생동물과의 상생까지 다뤄 예심을 통과한 21명의 작품은 일정수준 이상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선자들의 손에 마지막까지 들려 있던 작품은 ‘그랴’와 ‘신기루’ 그리고 ‘풀씨창고 쉭쉭’이었다. ‘그랴’는 ‘그랴’라는 말을 통해 아버지와의 기억을 환하고 따뜻하게 더듬고 있는데, 시를 끌고 가는 힘이 남달랐다. 하지만 시적 긴장감이 아쉬웠고 다른 투고작에서 언어가 조금은 넘친다 싶었다. ‘신기루’는 독특한 비유와 이야기 방식으로 선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는데 모호한 지점이 없지 않았고 동봉한 작품에서 편차가 느껴졌다. ‘풀씨창고 쉭쉭’은 강인한 생명력과 역동적인 힘이 느껴지는 시였다. 그저 바람에 흔들리다 떨어지는 풀씨가 아닌 멧돼지의 등에 힘차게 올라타 대지를 거침없이 달려나가는 씨앗의 모습은 당찼고, 시를 밀고 가는 역량은 섬세하면서도 힘찼다. 선자들은 몇번이고 행간의 여백까지 반복해 읽어나가며 이 시에 결정적인 흠결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았으나, 마지막 행까지 다 읽고 난 후에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멧돼지의 “그 꺼칠한 털 속에는 웬만한 풀밭이나/산기슭이 들어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소 덜 다듬어지거나 서툰 지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노루발, 뻐꾹채, 지칭개, 복수초, 현호색, 강아지풀/ 질경이, 별개미취, 금낭화, 산자고, 쇠별꽃”의 이름을 불러내는 것만으로도 묘한 서정성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이 “쉭쉭거리는 씨앗창고”의 풀씨는 “국경도 혈연도 지연도” 없이 극지에까지 초록의 생명력을 퍼트리고 있는데, 이 응모자는 말의 호흡을 나름의 방식으로 터득하고 있는 듯했다. 야생동물과 사람의 상생에 대한 고민과 질문까지 넌지시 덧붙여 던지고 있기도 한 이 시와 더불어 동봉한 다른 네편의 시에서도 신뢰를 주기에 충분한 역량을 보여주고 있어, 선자들은 논의의 끄트머리에 닿아 당선작으로 흔쾌히 동의했다. 이 작품들 외에도 ‘피싱’ ‘씨앗 열개’ ‘사후(死後)’ 등의 작품이 논의선상에 있었다는 것을 밝히면서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끝까지 최선을 다한 분들에게는 격려를 보낸다. 심사위원 : 곽재구 시인 박성우 시인 물  임영조​(1943~2003) 무조건 섞이고 싶다 섞여서 흘러가고 싶다 가다가 거대한 산이라도 만나면 감쪽같이 통정하듯 스미고 싶다 더 깊게 더 낮게 흐르고 흘러 그대 잠든 마을을 지나 간혹 맹물 같은 여자라도 만나면 아무런 부담 없이 맨살로 섞여 짜디짠 바다에 닿고 싶다 온갖 잡념을 풀고 맛도 색깔도 냄새도 풀고 참 밍밍하게 살아온 생을 지우고 찝찔한 양수 속에 씨를 키우듯 외로운 섬 하나 키우고 싶다 ​그 후 햇빛 좋은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증발했다가 문득 그대 잠깬 마을에 비가 되어 만날까 눈이 되어 만날까 돌아온 탕자의 뒤늦은 속죄 그 쓰라린 참회의 눈물이 될까
53    '사실주의적 기법의 시상' 댓글:  조회:381  추천:0  2020-01-03
'사실주의적 기법의 시상' 시를 대할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마음가짐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다. 어떤 형식의 것이든지, 머리이든 마음이든, 때론 가슴이든 시를 대하고 접하는 신체의 부위가 다르다. 위의 시를 조탁한 시인의 마음이 어떤 상태였는지 다소의 궁금증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물론 시인의 객관적이고 사실적 관찰이 극도로 예민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몹시 곤궁한 노후의 한 인물을 통해서 얘기하려고 했던 의지가 없지는 않았겠으나 그게 아주 차가운 체온으로 느껴졌다. 시인의 너무나 사실적인 관찰 탓이 아니었을까 짐작하고 있다. 시인의 관찰 대상이 된 노구를 일상의 주변에서 발견하는 일은, 사실 아주 사소하리 만큼 쉬운 일이다. 그 노구들의 모습은 사시사철 조석과 주야를 가리지 않는다. 그들을 목도하는 일은 결코 마음 가벼운 일이 아니며 여럿의, 몹시 무거운 상량을 불러 일으키는 일임에 틀림없다. 이런 옛말이 지금도 공감을 받을지 알 수 없다. '곤궁은 나랏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 말을 아주  오래 전부터 들어왔다. 어릴 적 부터이다.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알쏭달쏭한 말이다. 서양의 학문에서는, 특히 경제학에서는  숱한 논란과 처방이 거듭 제시되어 왔다. 실패의 경험이 반복됐다는 의미이다. 거울이라는 역사가 비교적 정확한 답을 보여주고 있다. 실패와 성공의 사례를 말이다. 물론 굉장히 어려운 문제이다. 세상의 역사를 반추해 보면,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정치라는 이름으로 백성, 또는 국민, 시민 특히 인민들을 속이고 수탈하고 지배한 사기꾼들이 적지 않았다. 정치인이라고 불리는 정상배들과 이들에 빌붙어 곡학아세를 목숨처럼 여기는 책상물림들이 그들이다. 현재도 바뀐 것은 없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구부러진 골목'처럼 노구의 '각'을 지게한 게 어찌 세월, 그 뿐이겠는가. '야윈 뼈 마디'를 삐걱대게 만든 게 어디 세월과 비탈진 골목 뿐이었을까. 저녁, 노구를 차갑게 사실적 수법으로으로 조탁하여 그려낸 화폭 같은 시를 읽는 속내가 솔직히 편치 않다. 시인의 따듯한, 살가운 온기를 느끼고 싶은 까닭이다. 펌 글 ㅡ
52    한국시 10 댓글:  조회:411  추천:0  2019-12-21
늦게 온 소포  /. 고두현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 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 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 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 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함 두터운 마분지에 싸고 또 싸서 속엣것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 보낸 소포 끈 찬찬히 풀다 보면 낯선 서울살이 찌든 생활의 겉꺼풀들도 하나씩 벗겨지고 오래된 장갑 버선 한 짝 해진 내의까지 감기고 얽힌 무명실 줄 따라 펼쳐지더니 드디어 한지더미 속에서 놀란 듯 얼굴 내미는 남해산 유자 아홉 개. 「큰 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몃 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울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리라」 헤쳐놓았던 몇 겹의 종이 다시 접었다 펼쳤다 밤새 남향의 문 닫지 못하고 무연히 콧등 시큰거려 내다본 밖으로 새벽 눈발이 하얗게 손 흔들며 글썽글썽 녹고 있다.   가슴에 묻은 김치국물/손택수                                    점심으로 라면을 먹다  모처럼만에 입은  흰 와이셔츠  가슴팍에  김치국물이 묻었다  난처하게 그걸 잠시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평소에 소원하던 사람이  꾸벅 인사를 하고 간다  김치국물을 보느라  숙인 고개를  인사로 알았던 모양  살다보면 김치국물이 다  가슴을 들여다보게 하는구나  오만하게 곧추선 머리를  푹 숙이게 하는구나  사람이 좀 허술해 보이면 어떠냐  가끔은 민망한 김치 국물 한 두 방울쯤  가슴에 슬쩍 묻혀나 볼 일이다 밤의 독서 이장욱     나는 깊은 밤에 여러 번 깨어났다. 내가 무엇을 읽은 것 같아서. 나는 저 빈 의자를 읽은 것이 틀림없다. 밤하늘을 읽은 것이 틀림없다. 어긋나는 눈송이들을, 캄캄한 텔레비전을, 먼 데서 잠든 네 꿈을 다 읽어버린 것이   의자의 모양대로 앉아 생각에 잠겼다. 눈발의 격렬한 방향을 끝까지 읽어갔다. 난해하고 아름다운, 텔레비전을 틀자 개그맨들이 와와 웃으며 빙글빙글 돌았다. 나는 잠깐 웃었는데,   무엇이 먼저 나를 슬퍼한 것이 틀림없다. 저 과묵한 의자가, 정지한 눈송이들이,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물끄러미 내 쪽을 바라보는 개그맨들이   틀림없다. 나를 다 읽은 뒤에 탁, 덮어버린 것이. 오늘 하루에는 유령처럼 접힌 부분이 있다. 끝까지 읽히지 않은 문장들의 세계에서   나는 여러 번 깨어났다. 한 권의 책도 없는 텅 빈 도서관이 되어서. 별자리가 사라진 밤하늘의 영혼으로. 그러니까 당신이 지금 읽은 것은 무엇인가?   밤의 접힌 부분을 펴자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문장들이 튀어나왔다 . 낯선 여자      이향아           거울 속에는 언제부턴가   낯선 여자가 있다.   나보다 한 발짝 빠르게 떠났다가도   나보다 한 발짝 앞질러 돌아오는   날이 갈수록 낯선 여자가 있다.   손님처럼 멀거니 바라보다 지치면   수십 겹 물살 아래 잠적해 버리는   그렇다   내 모든 시름과 눈물   내 모든 번잡과 분망은   바로 이 낯섦이다   공연한 망설임으로 얼굴을 붉히고   손장단 어깨춤에도 신명을 멈춘 것은   그림자처럼 날 추적하는   거울 속 바로 저 여자의   낯선 얼굴 때문이다      이별하는 일이야 너무나 쉽지   검은 휘장 내리고 돌아앉아서   나 몰라, 나 몰라   쫓아내는 일   그거야 쉽지 어렵지 않지   낯선 여자를   오래오래 낯설게   내 눈 속에 품을 듯   녹여버릴 듯   낯설게 낯설게 뚫어야겠다 -시집『종이등 켜진 문간』(문학세계사,1997) ㅤ군산 벚꽃       이향아        너무 늦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와 볼 걸  전주에서 군산 가는 백리 길가에  벚꽃이 미칠 듯이 만발했단 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꽃이니까 꽃이겠지 봐야만 알까  기껏하면 구름이겠지  아니면 목이 타는 아우성이겠지  그것도 아니라면 넘치는 눈물  그렸다 허물었다 못들은 척했다  이제야 멋을 내고 군산 벚꽃 보러 왔다  그러나 늦었다  살기가 고달파도 진작 와 볼 걸  헌 신발 끌고서 다니던 길로  억지로라도 그냥 와 볼 걸  그대로 이럴 줄은 차마 몰랐다 ㅤ 진도 냉이             이향아        진도에 다시 한 번 가고 싶다  어느 땅이나 똑 같은 봄 나물이 아니여  진도의 밭 두렁에 쭈구리고 앉아  진도의 냉이를 캐고 싶다  미풍에도 흐느끼는 신들린 냉이  신들린 진도의 코딱지 나물을 캐고 싶다  겨울이 추웠기에 오히려 색이 맑은  진도산 봄나물의 희디 흰 뿌리를  내 오른 손금 위에 얹어 보고 싶다  손금으로 파고드는  진도의  봄 시냇물  풀리는 소리를 듣고 싶다 군산 벚꽃       이향아        너무 늦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와 볼 걸  전주에서 군산 가는 백리 길가에  벚꽃이 미칠 듯이 만발했단 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꽃이니까 꽃이겠지 봐야만 알까  기껏하면 구름이겠지  아니면 목이 타는 아우성이겠지  그것도 아니라면 넘치는 눈물  그렸다 허물었다 못들은 척했다  이제야 멋을 내고 군산 벚꽃 보러 왔다  그러나 늦었다  살기가 고달파도 진작 와 볼 걸  헌 신발 끌고서 다니던 길로  억지로라도 그냥 와 볼 걸  그대로 이럴 줄은 차마 몰랐다 ㅤ   선창가 젓비린내 질퍽거리고  - 목포에서 -    이향아        내가 처음 목포에 갔을 때  앞바다 물새알은 탁구알처럼 영글었다  나는 그 시절  목포 출신 탁구선구 위쌍숙을 사랑했고  그녀는 푸른 바다 물새알처럼 솟았었다  나는 어정쩡하게 커서 목포에 다시 갔다  동백꽃 입맞추며 사진을 찍고  선창가 정처없이 흐느적거리면서  이난영 노래도 흥얼거렸다  공연히 다리 뻗고 울고 싶었다  바닷물보다 짭짤한 눈물 몇 방울  그 바다 과녁에 섞어두고서  흔적없이 흔적없이 뒤돌아서 왔다  오늘 다시 목포에 왔다  목포시인 김송희도 뉴욕으로 가고  소문난 집 전복죽을 혼자서 먹으면서  '네 고향 목포는 아무 탈 없고  동백꽃만 몸살하며 지고 있더라'  줄코 줄여 스물 몇자 전보를 치고  유달산 조각공원 석양을 향해  제목없는 묵념을 길게 하였다  선창가 젓비린내 질퍽거리고  뱃고동 악을 쓰고 울었으면 싶었다  위쌍숙을 아시지요? 안부를 물어도  모른다고 절레절레 고개들을 저었다  지금 내가 아무리 출세를 했어도  옛날의 위쌍숙만 어림도 없다   쉬/ 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이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이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하실까 봐 "아버지, 쉬, 쉬이, 아이쿠 아이쿠, 시원하시겄다아"농하듯 어리광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누였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가 그렇게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땅에 붙들어 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ㅡㅡ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 ㅡ위 시는 워낙 유명한 시라서 대중에 잘 알려져 있다 인터넷 공간을 털면 이 시 / 쉬 / 에 대한 감상문 혹은 시노트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나보다 훨 시평을 잘한 분의 시노트를 가져와 시의 재미와 감상을 도운다ㅡ 이 시는 많이 알려진 대로 정진규 시인의 부친 상가에 갔던 문인수 시인이 정 시인에게 들은 부친과의 회고담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그 회고담은 '환갑이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이다. 이를 듣는 순간 성능 좋은 촉수가 번득였고 이거 잘 하면 괜찮은 시가 한 편 되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 곧장 대구로 내려와 단숨에 초고를 다듬었다. '생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떠나버린 노구를 꼭 안고서 옛날 옛적 아버지가 자신에게 그랬듯이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겄다아"며 농하듯 어리광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누이는 행위가 시인에겐 '몸 갚음'으로 포착되었던 것이다. 일화는 정진규 시인의 것이지만 비로소 시는 문인수 시인에게로 온 것이다.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길고 긴 뜨신 끈' 시에서 '뜨신 끈'으로의 비유는 문인수 시인 특유의 감각을 멋지게 살려낸 대목으로 이후 그의 모든 시에서 전매특허처럼 사용되고 있다. 지금껏 각자가 눈 오줌발의 길이를 끈으로 환산해 잇는다면 한라에서 백두까지 세 번은 왕복하고도 남으리라. 그 '길고 긴 뜨신 끈'은 생명의 존재를 증거 하는 한편 인간의 모든 욕망을 함의한 존재의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늙은 아들은 그 끄나풀을 안타까이 땅에 붙들어 매려하고 그 아버지의 끈은 이제 '툭, 툭, 끊기'면서 힘겹게 마저 풀리고 있다. 그때 아들은 '쉬!' 추임새를 넣는다. 한번은 길게 또 한번은 짧게. 어릴 적 많이 들어본 이 단음절의 언어를 아들의 가슴에 안겨 다시 듣는다. 쉬이 누어보시라는 추임의 뜻 말고도 우주적 고요를 이끌어내는 말이기도 하고 또 이 밀교의 행위를 빤히 지켜보는 삼라만상을 향해 비밀유지를 당부하는 주술적 언어이기도 한 것이다. 아버지를 향해, 우주를 향해 그리고 신을 향한 절절한 울력의 소리였던 것이다. (권순진) ㅡ 출처 네이버ㅡ ㅡ별도 시 노트 ㅡ 위 감상의 시노트는 다른 분의 시노트로 대신했다 굳이 시노트가 없다고 해도 어느 정도의 시를 접한 분이나 또는 교육수준의 정도면 충분히 그 속뜻을 읽어 내고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공부중인 문청인 나는 여기에서 우리가 시쓰기에서 배워야할 몇가지를 논해보고자 한다 시인은 여기서 오줌을/ 뜨신 끈/ 으로 읽고 있다 대단한 감각이라고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끈과 관련된 시들이 몇 편 떠올려지기는 하지만 그건 실존하는 끈 혹은 인연의 끈 탯줄의 개념, 상징 등으로 표현되고 시적으로 확대 사용되었지만 오줌을 /뜨신 끈/으로 읽은 시인의 감각과 시력은 혀를 내둘 정도다 아마 이것은 시인이 천부적 자질이기보다 늘 대상과 사물과 대화하며 어루만진 반복된 학습과 훈련을 통해 어떤 함의에서 도출된 결과물이 시인의 직관으로 연결, 발화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또 위 시의 전문에서 우리가 배워야할 점은 묘사다 탁월한 묘사력를 보여주고 있다 그냥 텍스트란 언어의 영역이 아니라 그장면을 실제 보고 있는 듯 선명하게 영상을 전달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묘사 역시 많은 훈련에서 얻어진 학습에 의한 상관물일것이다 그리고 또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가 그렇게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어떤 동작 행위를 자세를 설명하는 부분인데 / 몸 갚아드리듯 / 정말 깊다 그 행위와 동작의 자세를 시인은 아무나나 상상할 수없는 깊숙한 곳에서 뭉클한 무엇을 끄집어 내었다 / 몸 / 어떻게 이 평이한 한 단어로 행위와 동작 자세 모두를 대변하며 단숨에 절정으로 몰고 가는가 우리가 이 시인에게서 배워야할 또 한가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니까 평이한 한 단어도 적재적소에 어떻게 제 쓰임새를 다 하는가에 따라서 명암이 갈라진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쉬ㅡㅡ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마직 결구의 /쉬/ 어휘적 중의성 다의성이 빛나는 부분인데 이건 재치와 직관 그리고 통찰력의 삼위일체다 이러한 부분을 우리는 또 부단한 노력과 훈련으로 배워야 하는 부분이 아닌가 고민해 본다 또한 항상 수첩과 메모지를 가지고 다니며 메모하고 기록하고 매사 생활에서 조차 시를 놓지 않는 시인의 시는  치열한 시정신에서 창조된 시인만의 시세계다 싶다  위 시는 바로 치열한 시인정신의 결과에서 발행된 보증수표인 것이다[문정완] 잃어버려지지 않는 찾아지지 않는                                           김행숙   폐허에서 극장을 찾고 있습니다. 누구나 과거를 가지고 있어요. 과거 위에 내려앉은 이미지는 날개를 떼어버린 새의 발자국처럼 멀어지기 어려워요. 어디로든 조금씩 걷고, 천천히 걷고, 부리를 땅에 박으면 먹을 게 있다는 뜻일까요?   과거 위에 내려앉은 이미지는 몸통을 잃어버린 날개처럼 꿈속에서만 날아다닙니다. 나는 폐허에서 약초를 찾고 있었습니다. "자, 이 중에 하나는 약초고, 다른 하나는 독초다."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윽박지르는 노인을 만났어요. 꿈결은 뒤척거리면서 이런 미치광이 노인들이 시간을 시험하기 좋은 무대를 꾸미죠. 그때마다 약초를 원했는데 독초를 고르고, 독초를 원했는데 약초를 고르고, 약초를 원했는데 약초를 고르고, 독초를 원했는데...... 어느덧 나는 한 그루 덤불을 껴안고 활활 타오르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폐허에서 잃어버린 기타를 찾고 있습니다. 기타줄 위에서 손모양이 살짝살짝 변했을 뿐인데, 놀랍게도 영혼의 옥타브가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호기심은 새싹같이 움텄고 애벌레같이 꼼지락거렸어요. 살짝 열린 문틈으로 엿보았을 뿐인데, 하나뿐인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눈알을 뽑아 들개에게 던져주고 싶었습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뒤돌아서서 검은 장막을 쳤어야 했던 이유를 오랫동안 용서하지 않았어요.   - 시집        마른번개들     김행숙   타협하지 않고 절제하지 않고   발작을 시작한다   숨, 숨을 안 쉬고   숨, 숨을 쉬고   나는 나를 넘나드는 잔인한 불길,   나는 나를 찢고 나와서 또 찢을 테다!   사랑의 화수분처럼   내일 아침을 염려하지 않고 쓰고 쓰고 또 써버릴 테다!   사랑의 쓰레기처럼   완전히 허비하고 교환하지 않을 테다!   나는 시시각각 다른 웃음소리를 낸다   그것이 싸우는 소리라면   협상하지 않고 위장하지 않고 방어하지 않고   반성하지 않고   나는 나를 아끼지 않을 테다!   이윽고 검은 동공이 사라지는 순간에, - 시집   저녁   엄원태(1955~) 비 그치자 저녁이다 내 가고자 하는 곳 있는데, 못 가는 게 아닌데, 안 가는 것도 아닌데, 벌써 저녁이다 저녁엔 종일 일어서던 마음을 어떻게든 앉혀야 할 게다 뜨물에 쌀을 안치듯 빗물로라도 마음을 가라앉혀야 하리라, 하고 앉아서 생각하는 사이에 어느새 저녁이다 종일 빗속을 생각의 나비들, 잠자리들이 날아다녔다 젖어가는 날개 가진 것들의 젖어가는 마음을 이제 조금은 알겠다, 저녁 되어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 늙어가는 어떤 마음과 다름없는 것을..... 뽀얗게 우러나는 마음의 뜨물 같은 것을......비가 그 무슨 말씀인가를 전해주었나 보다 육체의 세 가지 전략     서안나      최호일,「나의 과학」    우대식,「이순(耳順)」    이화은,「팬티를 삶으며 창밖을 오래 바라보았다」      재주 있는 사람 치고 바쁘지 않은 이가 있던가? 다행히도 재주 없어 나만 홀로 한가롭다. 有才豈有不忙客(유재기유불망객) 惟喜無才我獨閒(유희무재아독한) -홍신유(洪愼猷·1724~?),「閒中(한중)」부분        이제 곧 봄이다. 매서운 겨울의 혹한과 추위를 열고 나무는 꽃을 피울 것이다. 홍신유의 “모두 재주가 있어 바쁜데 나는 재주가 없어 홀로 한가하다”라는 한시 구절이 가슴에 와 닿는 계절이다. 무장한 겨울은 사람을 여유롭게 하여 시 읽기에 좋은 시간을 선사해주기도 한다. 카프카 역시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쓴 편지에서 독서란 “우리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어 부수는 도끼 같은 책. 이것이 나의 믿음이야.”라고 쓰지 않았던가.    시를 읽는 맛이란 시인이 보여주는 낯선 이미지와 상상력과 맞대면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시를 읽는 것은 시인이 만난 세계를 동행 하는 것이며, 시인의 쓴 안경을 빌려 쓰고 시인과 함께 여행자가 되는 것이다.    이번 계절의 시 읽기는 최호일, 우대식, 이화은 시인의 시 세계를 여행해본다. 최호일 시인이 몸을 통해 문명을 비판하고 속도의 시대를 저격한다면, 우대식의 시는 신체 일부인 “귀”를 통해 외부에서 내면으로 이동하는 시선의 역동적 상상력을 맛볼 수 있으며, 이화은의 시에서는 해학과 풍자를 통해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가부장적 시스템에 비수를 던지는 칼칼함을 만날 수 있다.       저 허공은 사물이 없는 곳에 두 번 나타난다 소년과 소녀들은 발레를 하고   나는 발레를 피한다     나의 과학은 어처구니가 없다     스포츠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오렌지를 반대하고   치통을 앓는다     아직도 역사의 선반 위에서 불타는 사과      저녁이 유리 형제들처럼 투명한 과녁을 모두 빛낼 때   빗나간 바람은 달그락거린다     누군가는 러닝머신 위를 달리고   두 발은 항상 위험한 폭탄으로 떠 있다   곧 날아오를 것이다     불행은 가끔 장밋빛이며 영리하고   주변을 깨끗이 정리할 줄 모른다     열한 마리의 고양이와   열한 명의 축구선수들   공이 없는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     벽의 세계에서는 벽을 들고 가   벽지에 붙인다     나의 과학은 소리가 나지 않고 겸손하지만   불을 끄고 그 벽에 몸을 기대면   슬퍼진다               -최호일, 「나의 과학」, 월간 《현대시》 2018년 10월호         최호일 시인은 시집 『바나나의 웃음』을 상재한 이후 시적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감각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시 세계를 견지하고 있다. 최호일의 시는 독자들을 미지의 감각으로 이끄는 매력이 있다.   「나의 과학」은 주체와 객체의 전도를 통해 물질문명의 폐해와 현대인의 불안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시의 제목이 “나의 과학”이지만 시에서 과학에 관한 설명이나 진술을 하고 있지는 않다. 이질적인 사건의 배열과 돌연한 상황을 병치하고 있다. 그럼에도 최호일 시는 쫄깃한 식감을 지닌다. 신선함과 긴장감을 통해 낯선 세계를 우리 앞에 선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최호일 시는 읽을 때는 신선하고 재미있지만, 막상 시를 분석하는 일은 만만치 않다. 그 이유는 시의 행과 행 그리고 연과 연의 비약과 확장과 변주가 있기 때문이다.    시에서 드러나는 시적 정황을 따라가 보면, “허공-발레-오렌지-치통-역사-사과-유리창-바람-러닝머신-불행-고양이와 축구선수-벽과 벽지-과학-슬픔”으로 다양한 사건과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이는 하나의 행, 행과 행, 행과 연, 연과 연 사이가 비유기적이며 폭력적인 이미지의 결합 그리고 돌연한 이미지들의 병렬식으로 배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총 10연으로 이루어진 「나의 과학」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연은 1연과 3연, 6연과 8연이다. 4개의 연에 나타나는 정황을 통해 유추해 볼 때, 1연의 발레와 3연의 스포츠, 8연의 러닝머신에서 시적 화자는 문화센터나 스포츠 센터를 중심으로 시적 사건을 구성하고 있다고 보인다.     특히 시의 1연이 유독 눈길을 끈다. “사물이 없는 곳에서 두 번 나타나는 허공” 그리고 발레로 이어지는 내용은 돌연하고 폭력적이다. 아마도 “나”가 문화센터 유리창을 통해 발레 하는 한 무리의 소년과 소녀를 목격한 것일 수도 있다. “사물이 없는 곳에서 두 번 나타나는 허공”은 발레의 동작 중 손을 머리 위로 둥글게 뻗어 허공을 만들어내는 동작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발레 교실을 지나치는 과정을 “나는 발레를 피한다”라는 감각적인 진술로 구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최호일의 시는 하나의 행에도 여백의 미학을 구현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행과 행, 연과 연 사이에도 간극이 넓다. 독자들은 시인의 상상력 증폭을 따라가며 그 이질적인 결합에 신선함을 느낀다.       시의 후반에서야 유추할 수 있듯이, “나의 과학”은 “벽지를 들고 벽을 붙이는” 전도된 세계를 기여하는 원인이 된다. 그래서 “나의 과학은 어처구니없는 것이며, 불을 끄고 몸을 기대면 슬퍼진다”. 이때 “불”을 끈다는 행위 역시 시의 주제를 응축하고 있다. 러닝머신 위에서 달리는 사람들의 다리는 폭탄처럼 터질 듯 위험하고, 고양이와 축구선수 모두 무언가를 향해 끊임없이 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사람과 축구선수 등의 신체는 벽지 위에 벽을 붙이는 전도된 세계 속에 결박된 육체이다. 과학과 문명으로 건설된 현대사회의 욕망의 구조의 생산성을 유지하는 것은 속도이다. 시적 화자는 속도 속으로 흡입되어 선택지를 상실한 현대인의 불안과 현실의 모순된 시스템을 “나의 과학”을 통해 날카롭게 저격하고 있다.     최호일 시는 카프카의 「어느 투쟁의 기록」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골목길을 따라 뛰듯이 달렸다/ 달려가는 취객처럼/ 발로 공중을 구르면서”     이제 묵념 따위가 매우 잘된다   어떤 형식도 괜찮다   벌써 귀가 순해지는지 부끄럽기도 하지만   하나님이나 부처님 이런 분들도 크게 나무랄 것 같지는 않다   내친 김에 봄날 꽃나무와도 한번 크게 겨루어보고 싶다   몇 합 겨루지 못하고   낙화의 황홀에 굴복할지라도   내 안에 뻗은 칼로 된 나뭇가지와 꽃잎도   쨍그렁 쨍그렁   낙화의 종년(終年)을 맞고 싶다   봄비에 붉은 녹물을 뚝뚝 흘리며 울고 있는   내 안의 꽃들이여   순백의 어느 한 날을   우리도 그리워하지 않았겠는가   귀가 순해진다   내 귀를 잘라내고 싶다        -우대식, 「이순(耳順)」. 월간 《시인동네》 2018년 10월호       우대식의 시 “이순(耳順)”은 신체의 일부인 “귀”와 “이순(耳順)”이 시의 중심 모티프를 이루고 있다. 신체어가 지니는 다양한 표현 중 연령을 은유하는 “이순(耳順)”은 “어떤 말을 들어도 귀에 거슬림이 없다는 나이”를 이른다. 귀가 순해져 나의 말을 많이 하기보다,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겸손해지는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이순에 가까워진 나는 “봄날 꽃나무와도 한번 크게 겨루어보고 싶다”라고 의지를 드러내지만, 이내 “몇 합 겨루지 못하고/낙화의 황홀에 굴복”하고 만다. 이순이 되어 내가 자연이 주는 낙화의 아름다움에 매혹당하고 굴복한다면, 이제껏 내가 세상을 향한 시선이 부드럽지 않고 대적하는 날카로움에 가까웠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순에 들어서서 그간 세상을 향해 휘둘러온 “내 안에 뻗은 칼로 된 나뭇가지와 꽃잎”이 녹이 슬었으며, 이제는 순하게 다루고 싶어 한다. 이제껏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칼끝을 내 안으로 거두어 “낙화의 종년(終年)을 맞고 싶”어한다. “낙화의 종년(終年)”을 바라는 이유는 세상을 향해 겨누던 칼끝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자발적 내전 상황이다. 내 안에 칼로 된 나뭇가지와 꽃잎들이 무성하여, 시적 화자는 “봄비에 붉은 녹물을 뚝뚝 흘리며 울고 있”는 내면의 상흔과 맞대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면의 상흔은 신체 기관 중 귀의 외형과 연관된다. 귀는 눈이나 코와 입과 달리 칼처럼 뾰족하고 외부로 향해 있다. 곧 나의 귀는 타자를 향해 날이 서 있던 내면의 칼로 된 나뭇가지와 꽃의 구체적 형상이라 할 수 있다. 나의 귀가 순해진다는 의미는 밖으로 향하던 칼날이 내 안으로 과녁을 새롭게 조준하는 내면의 고투이다. 내면으로 향하는 과녁의 변경은  “이순(耳順)”이 전제조건이며, 이를 통해 경청의 힘이 타자를 내면에 들이는 동기로 작용하고 있다.     칼끝을 나에게 겨누는 것은 곧 세계와의 대결에서 지거나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격전장을 나의 내면으로 옮겨 타자와의 관계 설정을 재배치하고, 자폐화 한 내면 공간의 확장으로 나아가고 있다. 내면 공간의 확장과 과녁의 변경은 곧 나를 둘러싼 세계와 나를 분리하는 이분법적 인식에서 벗어나 타자를 내면으로 들이는 공존의식의 재발견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시의 후반부에서 “귀가 순해진다/ 내 귀를 잘라내고 싶다”라는 진술은 독특하다. 시적 화자는 타자와의 공존의 자각에서 획득한 유순함과 현명함을 자폐적인 공간에 설정하고, 뒤이어 귀를 자르고 싶다고 욕망하고 있다. 이러한 외부와의 통로 차단은 “순백의 어느 한 날을”과 같은 순수함의 원형을 회복하고 유지하려는 의지이다. 시의 첫 행인 “이제 묵념 따위가 매우 잘 된다”에서 “형식”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관계회복의 결연함은 곧 원형적 순수함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백 톤의 질문          서안나 뒤돌아보면 가을이었다 소주가 달았다 내가 버린 구름들 생강나무 꽃처럼 눈이 매웠다   고백이란 나와 부딪치는 것 심장 근처에 불이 켜질 때 그렇게 인간의 저녁이 온다   불탄 씨앗 같은 나를 흙 속에 파묻던 밤 죄 많은 손을 씻으면 거품 속으로 사라지는 두 손은 슬프다 어떤 생生은 어떤 눈빛으로 커튼을 닫고 밥을 먹고 슬픔을 물리치나   깨진 중국 인형의 눈동자 속에서 울고 싶은 자들이 운다 죽은 꽃이 죽은 꽃을 밀고 나오는 부딪치는 밤이었다 돌아누우면 물결이던 애월   ―《유심》 2015년 1월호   틈 김기택          튼튼한 것 속에서 틈은 태어난다 서로 힘차게 껴안고 굳은 철근과 시멘트 속에도 숨쉬고 돌아다닐 길은 있었던 것이다 길고 가는 한 줄 선 속에 빛을 우겨넣고 버팅겨 허리를 펴는 틈 미세하게 벌어진 그 선의 폭을 수십 년의 시간, 분, 초로 나누어본다 아아, 얼마나 느리게 그 틈은 벌어져온 것인가 그 느리고 질긴 힘은  핏줄처럼 건물의 속속들이 뻗어 있다 서울, 거대한 빌딩의 정글 속에서 다리 없이 벽과 벽을 타고 다니며 우글거리고 있다 지금은 화려한 타일과 벽지로 덮여 있지만  새 타일과 벽지가 필요하거든 뜯어보라 두 눈으로 확인해보라 순식간에 구석구석으로 달아나 숨을  그러나 어느 구석에서든 천연덕스러운 꼬리가 보일 틈! 틈, 틈, 틈, 틈틈틈틈틈…… 어떤 철벽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사는 이 틈의 정체는 사실은 한 줄기 가냘픈 허공이다 하릴없이 구름이 풀잎의 등을 밀어주던  나약한 힘이다 이 힘이 어디에든 스미듯 들어가면 튼튼한 것들은 모두 금이 간다 갈라진다 무너진다 튼튼한 것들은 결국 없어지고 가냘프고 나약한 허공만 끝끝내 남는다       마른번개들             김행숙   타협하지 않고 절제하지 않고   발작을 시작한다   숨, 숨을 안 쉬고   숨, 숨을 쉬고   나는 나를 넘나드는 잔인한 불길,   나는 나를 찢고 나와서 또 찢을 테다!   사랑의 화수분처럼   내일 아침을 염려하지 않고 쓰고 쓰고 또 써버릴 테다!   사랑의 쓰레기처럼   완전히 허비하고 교환하지 않을 테다!   나는 시시각각 다른 웃음소리를 낸다   그것이 싸우는 소리라면   협상하지 않고 위장하지 않고 방어하지 않고   반성하지 않고   나는 나를 아끼지 않을 테다!   이윽고 검은 동공이 사라지는 순간에, - 시집 달과 목련과 거미의 가계/김미나 달 거미 한 마리 지붕을 밟고 목련나무로 걸어와요 거미의 집을 허무는 게 아니에요. 물웅덩이를 만드는 게  아니에요. 솜 트는 기계 멈춰있는 집 앞의 목련나무 꽃송이 안으로부터 달이 솜털을 짜기 시작했나봐요 자동차 바퀴에 찍힌 고양이 울음소리도 되살아나요 솜이불을 짜는 소리 할머니의 귓바퀴에 감겨요 나는 벼락처럼 자라난 목련나무의 꽃과 달의 이빨들이 하나의 틀을 이루는 소리를 생각했어요 먹구름을 집어 삼킨 듯 검게 물드는 것들은 솜틀집 앞 배수구에 걸려있나봐요 그늘 쪽에 얼어있는 지난  봄눈 덩어리들이 아지랑이를 피워 올려요 아직 꽃샘추위는 발끝을 야금야금 베어 물고 있었죠 그러니까 목련들도 밤의 이불을 덮고 싶어 나뭇가지 침대에 꼭 맞는 그믐이 올 때가지 할머니의 꽃상여를 짜듯 깊은 어둠을 지우려고 달의 이불을 짜고 있나봐요 봄눈 녹자 귀신도 볼 수 있다는 물웅덩이엔 달과 목련과 거미가 한 가계(家系)에서 태어났다는 소문이 고여 있어요 이불 한 채에 그려진 목련나무, 노란 나비들이 먼저 날아와서 날개를 풀고 있었어요   겨울 맛 / 강세화 겨울에는 더러 하늘이 흐리기도 해야 맛이다. 아주 흐려질 때까지 눈 아프게 보고 있다가 설레설레 눈 내리는 모양을 보아야 맛이다. 눈이 내리면 그냥 보기는 심심하고 뽀독뽀독 발자국을 만들어야 맛이다. 눈이 쌓이면 온돌방에 돌아와 콩비지 찌개를 훌훌 떠먹어야 맛이다. 찌개가 끓으면 덩달아 웅성대면서 마음에도 김이 자욱히 서려야 맛이다.  겨울날 - 정호승 물 속에 불을 피운다 강가에 나가 나뭇가지를 주워 물 속에 불을 피운다 물 속이 추운 물고기들이 몰려와 불을 쬔다 멀리서 추운 겨울을 보내는 솔씨 하나 날아와 불을 쬔다 길가에 돌부처가 혼자 웃는다  무심풍경 복효근   겨울 감나무 가지가지에 참새가 떼로 몰려와 한 마리 한 마리가 잎이 되었네요 참, 새, 잎이네요 잎도 없이 서 있는 감나무가 안쓰러워 새들은 이 가지 저 가지 옮겨 앉으며 작은 발의 온기를 건네주기도 하면서 어느 먼 데 소식을 들려주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나무야 참새가 그러든지 말든지 하는 것 같아도 안 자고 다 듣고 있다는 듯 가끔씩 잔가지를 끄덕여주기도 합니다 나무가 그러든지 말든지 참새는 참 열심히도 떠들어 댑니다 모른 체 하고 그 아래 고양이도 그냥 지나갑니다 나무는 나무대로 참새는 참새대로 모두 다 무심한 한 통속입니다 최선을 다하여 제 길 갑니다 연말인데 벌써 몇 개월 전화 한 통 없는 친구에게 한 바탕 욕이나 해줄까 했다가 잊어버리고 저것들의 수작을 지켜보며 이 한나절에 낙관 꾹 눌러 표구나 해뒀으면 싶었습니다   엉겅퀴의  노래   복효근  들꽃이거든  엉겅퀴  이리라 꽃핀  내 가슴  들여다  보리라 수없이  아프고  베인  자리  마다 돋은  가시를  보리라 하나의  꽃이 사랑이기까지 하나의  사랑이  꽃이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안고  또 떠나야  하는지 이제는 들꽃이거든  가시돋힌   엉겅퀴 이리라 사랑이거든  가시  돋힌  들꽃이리라 척박한  땅  깊이  뿌리  뻗으며 함부러  꺽으려드는   손길에 선연한  핏  멍울을  보여  주리라 그렇지  않고  어찌  사랑  한다  할  수  있으리 그리고 보랏빛  꽃을  보여  주리라 사랑을  보여  주리라   마침내는 꽃도  잎도  져버린  겨울날 누군가  또  잃고  떠나 앓는  가슴  있거든 그의  끓는  약탕관에  스몄다가 그  가슴 속  보랏빛  꽃으로  맺히리라   #홀로감상하기 의중      성영희 철못은 안을 채우면서 박히고 나사못은 틈을 파내면서 들어간다 박히는 소리로 넘치는 못과 파냈으므로 넘칠 것 없이 꽉 조이는 못, 삐걱거리는 못은 딱딱한 성질 때문이 아니라 의중을 묻지 못했기 때문이고 소리 없이 그 틈을 채우는 못은 물렁해서가 아니라 의향을 가늠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땅에 힘껏 찔러 넣어 자국도 없이 박혔다면 그 속에서는 뿌리가 다시 파랗고 우거진 틈을 내 펼치고 있는 것이겠다 무심코 던진 돌멩이도 물보라를 덜어 낸 다음에 그 깊이로 가라앉는다 벽에 걸린 외투의 의중이 나른한 창밖을 내다보는 봄날 오후 위층에서 간헐적으로 못 박는 소리가 난다 삐걱거리는 속내도 아랑곳없이 시계 초침은 쉬지 않고 톡톡 휴일 오후를 박고 있다 무엇이든 잘 들어가지 않을 때는 그 의중을 물어 살살 돌려 줄 것   틈 김기택          튼튼한 것 속에서 틈은 태어난다 서로 힘차게 껴안고 굳은 철근과 시멘트 속에도 숨쉬고 돌아다닐 길은 있었던 것이다 길고 가는 한 줄 선 속에 빛을 우겨넣고 버팅겨 허리를 펴는 틈 미세하게 벌어진 그 선의 폭을 수십 년의 시간, 분, 초로 나누어본다 아아, 얼마나 느리게 그 틈은 벌어져온 것인가 그 느리고 질긴 힘은  핏줄처럼 건물의 속속들이 뻗어 있다 서울, 거대한 빌딩의 정글 속에서 다리 없이 벽과 벽을 타고 다니며 우글거리고 있다 지금은 화려한 타일과 벽지로 덮여 있지만  새 타일과 벽지가 필요하거든 뜯어보라 두 눈으로 확인해보라 순식간에 구석구석으로 달아나 숨을  그러나 어느 구석에서든 천연덕스러운 꼬리가 보일 틈! 틈, 틈, 틈, 틈틈틈틈틈…… 어떤 철벽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사는 이 틈의 정체는 사실은 한 줄기 가냘픈 허공이다 하릴없이 구름이 풀잎의 등을 밀어주던  나약한 힘이다 이 힘이 어디에든 스미듯 들어가면 튼튼한 것들은 모두 금이 간다 갈라진다 무너진다 튼튼한 것들은 결국 없어지고 가냘프고 나약한 허공만 끝끝내 남는다   첫눈 오는 날/곽재구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하늘의 별을 몇 섬이고 따올 수 있지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새들이 꾸는 겨울꿈 같은 건 신비하지도 않아 첫눈 오는 날 당산 전철역 계단 위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슴속에 촛불 하나씩 켜들고 허공 속으로 지친 발걸음 옮기는 사람들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다닥다닥 뒤엉킨 이웃들의 슬픔 새로 순금빛 강물 하나 흐른다네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이 세상 모든 고통의 알몸들이 사과꽃 향기를 날린다네 첫눈 오는 날/곽재구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하늘의 별을 몇 섬이고 따올 수 있지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새들이 꾸는 겨울꿈 같은 건 신비하지도 않아 첫눈 오는 날 당산 전철역 계단 위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슴속에 촛불 하나씩 켜들고 허공 속으로 지친 발걸음 옮기는 사람들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다닥다닥 뒤엉킨 이웃들의 슬픔 새로 순금빛 강물 하나 흐른다네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이 세상 모든 고통의 알몸들이 사과꽃 향기를 날린다네 바람이 좋은 저녁/곽재구 내가 책을 읽는 동안 새들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바람은 내 어깨 위에 자그만 그물침대 하나를 매답니다. 마침 내 곁을 지나가는 시간들이라면 누구든지 그 침대에서 푹 쉬어갈 수 있지요 그 중에 어린 시간 하나는 나와 함께 책을 읽다가 성급한 마음에 나보다도 먼저 책장을 넘기기도 하지요 그럴 때 나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다 바람이 좋은 저녁이군 하고 말합니다. 어떤 어린 시간 하나가 내 어깨 위에서 낄낄대고 웃다가 눈물 한 방울 툭 떨구는 줄도 모르고 ㅤ그리움에게/곽재구 그대에게 긴 사랑의 편지를 쓴다 전라선, 지나치는 시골역마다 겨울은 은빛 꿈으로 펄럭이고 성에가 낀 차창에 볼을 부비며 나는 오늘 아침 용접공인 동생 녀석이 마련해준 때묻은 만원권 지폐 한 장을 생각했다 가슴의 뜨거움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오래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건축공사장 막일을 하면서 기술학교 야간을 우등으로 졸업한 이등기사인 그놈의 자랑스런 작업복에 대해서 절망보다 강하게 그놈이 쏘아대던 카바이트 불꽃에 대해서 월말이면 그놈이 들고 오는 십만원의 월급봉투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팔년이나 몸부림친 대학을 졸업하는 마지막 겨울 그대에게 길고 긴 사랑의 편지를 쓰고 싶었다 얼굴 한번 거리에서 마주친 적도 어깨 나란히 걸음 한번 옮긴 적 없어도 나는 절망보다 먼저 그대를 만났고 슬픔보다 먼저 화해인 그대를 만났고 길고 근적한 우리들 삶의 미로를 돌아 어머님이 사들고 오는 봉지쌀 속의 가난보다 오래 그대와 겨울 저녁의 평화를 이야기했고 밤늦게 계속되던 어머님의 찬송가 몇 구절과 재봉틀 소리 속에 그대의 따뜻한 숨소리를 들었다 그대에게 길고 긴 사랑의 편지를 쓴다 가슴으로 기쁨으로 눈송이의 꽃으로 쓴다 지나간 겨울은 추웠고 마음으로 맞는 겨울은 따뜻했다 전라선, 밤열차는 덜컹대며 눈발 속으로 떠나고 문득 피곤한 그대의 모습이 내 옆자리에 앉아 웃고 있는 것을 본다 그대의 사랑이 어느결에 내 자리에 앉아 가슴의 뜨거움으로 창 밖 어둠을 바라보게 한다 멀리 반짝이는 포구의 불빛이 보이고 그대의 불빛이 흰 수국송이로 피어나는 것을 나는 눈물로 지켜보았다 그대에게 뜨거운 편지를 쓰고 싶었다 팔년이나 몸부림친 대학을 졸업하는 마지막 겨울 외지에서 사랑으로 희망으로 식구들의 희망으로 쓰고 싶었다 . 구두 한 켤레의 시/곽재구 차례를 지내고 돌아온 구두 밑바닥에 고향의 저문 강물 소리가 묻어 있다. 겨울보리 파랗게 꽂힌 강둑에서 살얼음만 몇 발자국 밟고 왔는데 쑥골 상엿집 흰 눈 속을 넘을 때도 골목 앞 보세점 흐린 불빛 아래서도 찰랑찰랑 강물소리가 들린다 내 귀는 얼어 한 소절도 듣지 못한 강물소리를 구두 혼자 어떻게 듣고 왔을까 구두는 지금 황혼 뒤축의 꿈이 몇 번 수습되고 지난 가을터진 가슴의 어둠 새로 누군가의 살아있는오늘의 부끄러운 촉수가 싸리 유채 꽃잎처럼 꿈틀댄다 고향 텃밭의 허름한 꽃과 어둠과 구두는 초면 나는 구면 건성으로 겨울을 보내고 돌아온 내게 고향은 꽃잎 하나 바람 한 점 꾸려 주지않고 영하 속을 흔들리며 떠나는 내 낡은 구두가 저문 고향의 강물 소리를 들려준다. 출렁출렁 아니 덜그럭덜그럭.   육체의 세 가지 전략     서안나      최호일,「나의 과학」    우대식,「이순(耳順)」    이화은,「팬티를 삶으며 창밖을 오래 바라보았다」      재주 있는 사람 치고 바쁘지 않은 이가 있던가? 다행히도 재주 없어 나만 홀로 한가롭다. 有才豈有不忙客(유재기유불망객) 惟喜無才我獨閒(유희무재아독한) -홍신유(洪愼猷·1724~?),「閒中(한중)」부분        이제 곧 봄이다. 매서운 겨울의 혹한과 추위를 열고 나무는 꽃을 피울 것이다. 홍신유의 “모두 재주가 있어 바쁜데 나는 재주가 없어 홀로 한가하다”라는 한시 구절이 가슴에 와 닿는 계절이다. 무장한 겨울은 사람을 여유롭게 하여 시 읽기에 좋은 시간을 선사해주기도 한다. 카프카 역시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쓴 편지에서 독서란 “우리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어 부수는 도끼 같은 책. 이것이 나의 믿음이야.”라고 쓰지 않았던가.    시를 읽는 맛이란 시인이 보여주는 낯선 이미지와 상상력과 맞대면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시를 읽는 것은 시인이 만난 세계를 동행 하는 것이며, 시인의 쓴 안경을 빌려 쓰고 시인과 함께 여행자가 되는 것이다.    이번 계절의 시 읽기는 최호일, 우대식, 이화은 시인의 시 세계를 여행해본다. 최호일 시인이 몸을 통해 문명을 비판하고 속도의 시대를 저격한다면, 우대식의 시는 신체 일부인 “귀”를 통해 외부에서 내면으로 이동하는 시선의 역동적 상상력을 맛볼 수 있으며, 이화은의 시에서는 해학과 풍자를 통해 여성의 몸에 가해지는 가부장적 시스템에 비수를 던지는 칼칼함을 만날 수 있다.       저 허공은 사물이 없는 곳에 두 번 나타난다 소년과 소녀들은 발레를 하고   나는 발레를 피한다     나의 과학은 어처구니가 없다     스포츠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오렌지를 반대하고   치통을 앓는다     아직도 역사의 선반 위에서 불타는 사과      저녁이 유리 형제들처럼 투명한 과녁을 모두 빛낼 때   빗나간 바람은 달그락거린다     누군가는 러닝머신 위를 달리고   두 발은 항상 위험한 폭탄으로 떠 있다   곧 날아오를 것이다     불행은 가끔 장밋빛이며 영리하고   주변을 깨끗이 정리할 줄 모른다     열한 마리의 고양이와   열한 명의 축구선수들   공이 없는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     벽의 세계에서는 벽을 들고 가   벽지에 붙인다     나의 과학은 소리가 나지 않고 겸손하지만   불을 끄고 그 벽에 몸을 기대면   슬퍼진다               -최호일, 「나의 과학」, 월간 《현대시》 2018년 10월호         최호일 시인은 시집 『바나나의 웃음』을 상재한 이후 시적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감각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시 세계를 견지하고 있다. 최호일의 시는 독자들을 미지의 감각으로 이끄는 매력이 있다.   「나의 과학」은 주체와 객체의 전도를 통해 물질문명의 폐해와 현대인의 불안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시의 제목이 “나의 과학”이지만 시에서 과학에 관한 설명이나 진술을 하고 있지는 않다. 이질적인 사건의 배열과 돌연한 상황을 병치하고 있다. 그럼에도 최호일 시는 쫄깃한 식감을 지닌다. 신선함과 긴장감을 통해 낯선 세계를 우리 앞에 선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최호일 시는 읽을 때는 신선하고 재미있지만, 막상 시를 분석하는 일은 만만치 않다. 그 이유는 시의 행과 행 그리고 연과 연의 비약과 확장과 변주가 있기 때문이다.    시에서 드러나는 시적 정황을 따라가 보면, “허공-발레-오렌지-치통-역사-사과-유리창-바람-러닝머신-불행-고양이와 축구선수-벽과 벽지-과학-슬픔”으로 다양한 사건과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이는 하나의 행, 행과 행, 행과 연, 연과 연 사이가 비유기적이며 폭력적인 이미지의 결합 그리고 돌연한 이미지들의 병렬식으로 배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총 10연으로 이루어진 「나의 과학」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연은 1연과 3연, 6연과 8연이다. 4개의 연에 나타나는 정황을 통해 유추해 볼 때, 1연의 발레와 3연의 스포츠, 8연의 러닝머신에서 시적 화자는 문화센터나 스포츠 센터를 중심으로 시적 사건을 구성하고 있다고 보인다.     특히 시의 1연이 유독 눈길을 끈다. “사물이 없는 곳에서 두 번 나타나는 허공” 그리고 발레로 이어지는 내용은 돌연하고 폭력적이다. 아마도 “나”가 문화센터 유리창을 통해 발레 하는 한 무리의 소년과 소녀를 목격한 것일 수도 있다. “사물이 없는 곳에서 두 번 나타나는 허공”은 발레의 동작 중 손을 머리 위로 둥글게 뻗어 허공을 만들어내는 동작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발레 교실을 지나치는 과정을 “나는 발레를 피한다”라는 감각적인 진술로 구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최호일의 시는 하나의 행에도 여백의 미학을 구현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행과 행, 연과 연 사이에도 간극이 넓다. 독자들은 시인의 상상력 증폭을 따라가며 그 이질적인 결합에 신선함을 느낀다.       시의 후반에서야 유추할 수 있듯이, “나의 과학”은 “벽지를 들고 벽을 붙이는” 전도된 세계를 기여하는 원인이 된다. 그래서 “나의 과학은 어처구니없는 것이며, 불을 끄고 몸을 기대면 슬퍼진다”. 이때 “불”을 끈다는 행위 역시 시의 주제를 응축하고 있다. 러닝머신 위에서 달리는 사람들의 다리는 폭탄처럼 터질 듯 위험하고, 고양이와 축구선수 모두 무언가를 향해 끊임없이 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사람과 축구선수 등의 신체는 벽지 위에 벽을 붙이는 전도된 세계 속에 결박된 육체이다. 과학과 문명으로 건설된 현대사회의 욕망의 구조의 생산성을 유지하는 것은 속도이다. 시적 화자는 속도 속으로 흡입되어 선택지를 상실한 현대인의 불안과 현실의 모순된 시스템을 “나의 과학”을 통해 날카롭게 저격하고 있다.     최호일 시는 카프카의 「어느 투쟁의 기록」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골목길을 따라 뛰듯이 달렸다/ 달려가는 취객처럼/ 발로 공중을 구르면서”     이제 묵념 따위가 매우 잘된다   어떤 형식도 괜찮다   벌써 귀가 순해지는지 부끄럽기도 하지만   하나님이나 부처님 이런 분들도 크게 나무랄 것 같지는 않다   내친 김에 봄날 꽃나무와도 한번 크게 겨루어보고 싶다   몇 합 겨루지 못하고   낙화의 황홀에 굴복할지라도   내 안에 뻗은 칼로 된 나뭇가지와 꽃잎도   쨍그렁 쨍그렁   낙화의 종년(終年)을 맞고 싶다   봄비에 붉은 녹물을 뚝뚝 흘리며 울고 있는   내 안의 꽃들이여   순백의 어느 한 날을   우리도 그리워하지 않았겠는가   귀가 순해진다   내 귀를 잘라내고 싶다        -우대식, 「이순(耳順)」. 월간 《시인동네》 2018년 10월호       우대식의 시 “이순(耳順)”은 신체의 일부인 “귀”와 “이순(耳順)”이 시의 중심 모티프를 이루고 있다. 신체어가 지니는 다양한 표현 중 연령을 은유하는 “이순(耳順)”은 “어떤 말을 들어도 귀에 거슬림이 없다는 나이”를 이른다. 귀가 순해져 나의 말을 많이 하기보다,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겸손해지는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이순에 가까워진 나는 “봄날 꽃나무와도 한번 크게 겨루어보고 싶다”라고 의지를 드러내지만, 이내 “몇 합 겨루지 못하고/낙화의 황홀에 굴복”하고 만다. 이순이 되어 내가 자연이 주는 낙화의 아름다움에 매혹당하고 굴복한다면, 이제껏 내가 세상을 향한 시선이 부드럽지 않고 대적하는 날카로움에 가까웠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순에 들어서서 그간 세상을 향해 휘둘러온 “내 안에 뻗은 칼로 된 나뭇가지와 꽃잎”이 녹이 슬었으며, 이제는 순하게 다루고 싶어 한다. 이제껏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칼끝을 내 안으로 거두어 “낙화의 종년(終年)을 맞고 싶”어한다. “낙화의 종년(終年)”을 바라는 이유는 세상을 향해 겨누던 칼끝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자발적 내전 상황이다. 내 안에 칼로 된 나뭇가지와 꽃잎들이 무성하여, 시적 화자는 “봄비에 붉은 녹물을 뚝뚝 흘리며 울고 있”는 내면의 상흔과 맞대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면의 상흔은 신체 기관 중 귀의 외형과 연관된다. 귀는 눈이나 코와 입과 달리 칼처럼 뾰족하고 외부로 향해 있다. 곧 나의 귀는 타자를 향해 날이 서 있던 내면의 칼로 된 나뭇가지와 꽃의 구체적 형상이라 할 수 있다. 나의 귀가 순해진다는 의미는 밖으로 향하던 칼날이 내 안으로 과녁을 새롭게 조준하는 내면의 고투이다. 내면으로 향하는 과녁의 변경은  “이순(耳順)”이 전제조건이며, 이를 통해 경청의 힘이 타자를 내면에 들이는 동기로 작용하고 있다.     칼끝을 나에게 겨누는 것은 곧 세계와의 대결에서 지거나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격전장을 나의 내면으로 옮겨 타자와의 관계 설정을 재배치하고, 자폐화 한 내면 공간의 확장으로 나아가고 있다. 내면 공간의 확장과 과녁의 변경은 곧 나를 둘러싼 세계와 나를 분리하는 이분법적 인식에서 벗어나 타자를 내면으로 들이는 공존의식의 재발견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시의 후반부에서 “귀가 순해진다/ 내 귀를 잘라내고 싶다”라는 진술은 독특하다. 시적 화자는 타자와의 공존의 자각에서 획득한 유순함과 현명함을 자폐적인 공간에 설정하고, 뒤이어 귀를 자르고 싶다고 욕망하고 있다. 이러한 외부와의 통로 차단은 “순백의 어느 한 날을”과 같은 순수함의 원형을 회복하고 유지하려는 의지이다. 시의 첫 행인 “이제 묵념 따위가 매우 잘 된다”에서 “형식”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관계회복의 결연함은 곧 원형적 순수함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백 톤의 질문   서안나 뒤돌아보면 가을이었다 소주가 달았다 내가 버린 구름들 생강나무 꽃처럼 눈이 매웠다   고백이란 나와 부딪치는 것 심장 근처에 불이 켜질 때 그렇게 인간의 저녁이 온다   불탄 씨앗 같은 나를 흙 속에 파묻던 밤 죄 많은 손을 씻으면 거품 속으로 사라지는 두 손은 슬프다 어떤 생生은 어떤 눈빛으로 커튼을 닫고 밥을 먹고 슬픔을 물리치나   깨진 중국 인형의 눈동자 속에서 울고 싶은 자들이 운다 죽은 꽃이 죽은 꽃을 밀고 나오는 부딪치는 밤이었다 돌아누우면 물결이던 애월   ―《유심》 2015년 1월호    눈의 방황                                                     조홍래   눈이 여름에 내리면 지구에 이상이 생겼다는 야단법석에 미리 겁 먹고 움츠렸다 겨울에 내린다 혹시라도 겨울이 아니면 어쩌나 조심조심 내린다 제 때에 내리는 건지 알기 위해 바람을 데리고 밤새 슬며시 온다 서로 부둥켜 안고 쌓일만한 곳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눈의 위치      김행숙   공업용 다이아몬드 같은...... 네 눈알을 굴리면 니 눈꺼풀이 먼저 까지겠고, 쓰라리겠다.   언제나 제자리에서만 구르는 건 공이 아니지. 하늘의 별이 아니지.   저쪽으로 굴러가기 때문에, 공중으로 떠오르기 때문에, 땅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심심하면 공을 가지고 노는 거야. 그것은 우리 지구인들의 유희.   최선을 다해 눈알을 던져봐. 최고 속도는 불이 되고 재가 되는 속도일까. 야구공은 야구공인 채로 던져지네. 축구공은 축구공인 채로 골대를 비껴가네. 휙, 지나가버려서, "아름다운 곡선이다" 감탄할 새도 없었네.   어떤 룰 속에서 우리는 승리하고, 패배하고, 어떤 빗속에서 오늘의 경기를 쉬게 되는 걸까. 거친 숨을 고르며   너를 보지만, 햇빛 때문에 우리는 우주를 볼 수 없다. 깜깜한 밤에 햇빛이 감추는 우주적인 구체(球體)들의 퍼레이드를 올려다보자. 렌즈를 바꿔도 상자 모양의 별은 없다.   그러니까 우주에 거대한 콘크리트 박스를 별처럼 설치하면, 호기심 많은 외계인이 찾아올 겁니다. 똑똑한 외계인은 말하겠죠. 우주를 견딜 수 있는 직선이라니!   옆에서 듣고 있던 동료 천문학자가 중얼거렸지. "기발한 아이디어이긴 한데, 우리가 정말 외계인을 만나도 괜찮을까요?"   우리끼리 사는 것도 죽도록 힘든데...... 혼자 잠을 자고 혼자서 꿈을 꾸는 것도 이렇게 괴로운데...... 너를 볼 용기가 안 생겨서 혼자 눈알을 굴리고 있는 것도 이렇게 쓰라리고 아픈데......   내 눈빛을 이해하시겠어요?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먼 곳에서 왔는지도 모르는데...... - 시집       모르는 목소리     김행숙 ​​ ​   모르는 목소리가 아는 사람처럼 내 이름을 부르며 걸어오고 있다   얼굴은 안개에 감겨 얼굴이 없는 것 같고   같은 안개를 뚫고 모르는 목소리가 내게 달라붙고 있다   어떤 앎이 이처럼 끈적이는가. 모든 앎이 이처럼 끈적이는가   나는 침묵의 계명을 따랐던 교분들을 희뿌연 빛에 비추어 상기하고 있다, 오래전    그 중에...... 그는 법정 서기였다   그는 완벽했다 ​   이제 말을 해도 되는 거냐고 내가 놀라며 물었더니   메아리처럼 돌아오는 그의 목소리는 주인을 바꾼 듯이 변해 있었다   또 다른, 모르는 목소리가 아는 사람처럼 내 이름을 부르며 더 가깝게 걸어오고 있다   나의 이름이 나를 비껴가고 있다 - 시집   눈의 방황                                                     조홍래   눈이 여름에 내리면 지구에 이상이 생겼다는 야단법석에 미리 겁 먹고 움츠렸다 겨울에 내린다 혹시라도 겨울이 아니면 어쩌나 조심조심 내린다 제 때에 내리는 건지 알기 위해 바람을 데리고 밤새 슬며시 온다 서로 부둥켜 안고 쌓일만한 곳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깜빡했다                                                       조홍래 비누거품이 날리고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온세상이 은빛으로 화안했다 달까지도 반짝이는 소금꽃밭 길을 조신하게 걸었고 하얗게 꽃을 피운 나무들이 거들먹거렸다 역시 하늘님은 위대했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 마술사다 거기까지였다 가뭄에 원망 좀 했다고 예라이 목욕물을 퍼부었다 하늘님의 각질을 햇살과 땅이 나눠먹기 시작할 때쯤 온 천지가 땟국물로 질척거렸다 그렇다 하늘님이 목욕하는 날 땟가루 뒤집어쓰는 줄도 모르고 좋아한 나약한 인간이란 걸 깜빡했다 뒤끝있는 심술쟁이란 걸 깜빡했다   따뜻한 얼음                                            박남준  옷을 껴입듯 한겹 또 한겹  추위가 더할수록 얼음의 두께가 깊어지는 것은  버들치며 송사리 품 안에 숨 쉬는 것들을  따뜻하게 키우고 싶기 때문이다  철모르는 돌팔매로부터  겁 많은 물고기들을 두 눈 동그란 것들을  놀라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얼음이 맑고 반짝이는 것은  그 아래 작고 여린 것들이 푸른빛을 잃지 않고  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겨울 모진 것 그래도 견딜 만한 것은  제 몸의 온기란 온기 세상에 다 전하고  스스로 차디찬 알몸의 몸이 되어버린 얼음이 있기 때문이다  쫓기고 내몰린 것들을 껴안고 눈물지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햇살 아래 녹아내린 얼음의 투명한 눈물자위를  아 몸을 다 바쳐서 피워내는 사랑이라니  그 빛나는 것이라니    시집 (창비,2005)   떠도는 무렵 / 박남준 저 길 끝에 있을까 설레이며 헤매었지 마음속의 길을 버린 지 나 오랜 일이었으나 달려갔었지 별이 내리는 먼 산너머 길에 나서면 길은 언제나 나를 먼저 가로질러 갔고 나 내가 걸어온 길에 갇혀 길 밖에 버려지고는 했다 삶이 내게 드리운 그늘로 무너져가던 무렵이었다   -시집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문학동네, 2000)   첫눈 소식 / 박남준     설악의 대청봉에 내렸다는 첫눈 소식  지난 여름 왼손 두 손가락에 물들였던  붉은 봉숭아 꽃물 아직 남아 있는지  살몃 내려가는 눈길  여태 기다려야 할 사랑 떠도는 것일까  손톱 끝에 남아 있는 붉은 꽃물자위 보며  허허로운 웃음이  바람처럼 가슴을 쓸어 내렸다 ㅤ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구두 한 켤레의 시/곽재구 차례를 지내고 돌아온 구두 밑바닥에 고향의 저문 강물 소리가 묻어 있다. 겨울보리 파랗게 꽂힌 강둑에서 살얼음만 몇 발자국 밟고 왔는데 쑥골 상엿집 흰 눈 속을 넘을 때도 골목 앞 보세점 흐린 불빛 아래서도 찰랑찰랑 강물소리가 들린다 내 귀는 얼어 한 소절도 듣지 못한 강물소리를 구두 혼자 어떻게 듣고 왔을까 구두는 지금 황혼 뒤축의 꿈이 몇 번 수습되고 지난 가을터진 가슴의 어둠 새로 누군가의 살아있는오늘의 부끄러운 촉수가 싸리 유채 꽃잎처럼 꿈틀댄다 고향 텃밭의 허름한 꽃과 어둠과 구두는 초면 나는 구면 건성으로 겨울을 보내고 돌아온 내게 고향은 꽃잎 하나 바람 한 점 꾸려 주지않고 영하 속을 흔들리며 떠나는 내 낡은 구두가 저문 고향의 강물 소리를 들려준다. 출렁출렁 아니 덜그럭덜그럭.   가슴에 묻은 김치국물/손택수                                    점심으로 라면을 먹다  모처럼만에 입은  흰 와이셔츠  가슴팍에  김치국물이 묻었다  난처하게 그걸 잠시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평소에 소원하던 사람이  꾸벅 인사를 하고 간다  김치국물을 보느라  숙인 고개를  인사로 알았던 모양  살다보면 김치국물이 다  가슴을 들여다보게 하는구나  오만하게 곧추선 머리를  푹 숙이게 하는구나  사람이 좀 허술해 보이면 어떠냐  가끔은 민망한 김치 국물 한 두 방울쯤  가슴에 슬쩍 묻혀나 볼 일이다 낯선 여자      이향아           거울 속에는 언제부턴가   낯선 여자가 있다.   나보다 한 발짝 빠르게 떠났다가도   나보다 한 발짝 앞질러 돌아오는   날이 갈수록 낯선 여자가 있다.   손님처럼 멀거니 바라보다 지치면   수십 겹 물살 아래 잠적해 버리는   그렇다   내 모든 시름과 눈물   내 모든 번잡과 분망은   바로 이 낯섦이다   공연한 망설임으로 얼굴을 붉히고   손장단 어깨춤에도 신명을 멈춘 것은   그림자처럼 날 추적하는   거울 속 바로 저 여자의   낯선 얼굴 때문이다      이별하는 일이야 너무나 쉽지   검은 휘장 내리고 돌아앉아서   나 몰라, 나 몰라   쫓아내는 일   그거야 쉽지 어렵지 않지   낯선 여자를   오래오래 낯설게   내 눈 속에 품을 듯   녹여버릴 듯   낯설게 낯설게 뚫어야겠다 군산 벚꽃       이향아        너무 늦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와 볼 걸  전주에서 군산 가는 백리 길가에  벚꽃이 미칠 듯이 만발했단 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꽃이니까 꽃이겠지 봐야만 알까  기껏하면 구름이겠지  아니면 목이 타는 아우성이겠지  그것도 아니라면 넘치는 눈물  그렸다 허물었다 못들은 척했다  이제야 멋을 내고 군산 벚꽃 보러 왔다  그러나 늦었다  살기가 고달파도 진작 와 볼 걸  헌 신발 끌고서 다니던 길로  억지로라도 그냥 와 볼 걸  그대로 이럴 줄은 차마 몰랐다     잃어버려지지 않는 찾아지지 않는                                           김행숙   폐허에서 극장을 찾고 있습니다. 누구나 과거를 가지고 있어요. 과거 위에 내려앉은 이미지는 날개를 떼어버린 새의 발자국처럼 멀어지기 어려워요. 어디로든 조금씩 걷고, 천천히 걷고, 부리를 땅에 박으면 먹을 게 있다는 뜻일까요?   과거 위에 내려앉은 이미지는 몸통을 잃어버린 날개처럼 꿈속에서만 날아다닙니다. 나는 폐허에서 약초를 찾고 있었습니다. "자, 이 중에 하나는 약초고, 다른 하나는 독초다."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윽박지르는 노인을 만났어요. 꿈결은 뒤척거리면서 이런 미치광이 노인들이 시간을 시험하기 좋은 무대를 꾸미죠. 그때마다 약초를 원했는데 독초를 고르고, 독초를 원했는데 약초를 고르고, 약초를 원했는데 약초를 고르고, 독초를 원했는데...... 어느덧 나는 한 그루 덤불을 껴안고 활활 타오르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폐허에서 잃어버린 기타를 찾고 있습니다. 기타줄 위에서 손모양이 살짝살짝 변했을 뿐인데, 놀랍게도 영혼의 옥타브가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호기심은 새싹같이 움텄고 애벌레같이 꼼지락거렸어요. 살짝 열린 문틈으로 엿보았을 뿐인데, 하나뿐인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눈알을 뽑아 들개에게 던져주고 싶었습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 뒤돌아서서 검은 장막을 쳤어야 했던 이유를 오랫동안 용서하지 않았어요.   - 시집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ㅤ 시집『종이등 켜진 문간』(문학세계사,1997)   헌신 복효근 내 마음이 그대 발에 꼭 맞는 신발 같은 거였으면 좋겠다 거친 길 험한 길 딛고 가는 그대 발을 고이 받쳐 길 끝에 안착할 수 있다면 나를 신고 찍은 그대의 족적이 그대 삶이고 내 삶이니 네가 누구냐 물으면 그대 발치수와 발가락 모양을 말해주리 끝이 없는 사랑이 어디 있으리 다만 그 끝의 자세가 사랑을 규정해주리니 그대 다시 나를 돌아보거나 말거나 먼 길 함께 했다는 흔적이라면 이 발냄새마저도 따스히 보듬고 내가 먼저 낡아서 헌신, 부디 헌신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 박남준   툇마루에 앉아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바라본다 마당 한쪽 햇살이 뒤척이는 곳 저것 내가 무심히 버린 놋숟가락 목이 부러진...... 화순 산골 홀로 밭을 매다 다음날 기척도 없이 세상을 떠난 어느 할머니, 마루 위엔 고추며 채소 산나물을 팔아 마련한 돈 백만원이 든 통장과 도장이 검정 고무줄에 묶여 매달려 있었다지  마을 사람들이 그 돈으로 관을 마련하고 뒷일을 다 마쳤을때 그만 넣어왔다 피붙이도 없던 그 놋숟가락 언젠가 이가 부러져 솥바닥을 긁다가 목이 부러져 내 눈밖에 뒹굴던 것  버려진 것이 흔들리며 옛일을 되돌린다 머지않은 내일을 밀어올린다  가만히 내 저금통장을 떠올린다 저녁이다 문을 닫고 눕는다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ㅤ 따뜻한 얼음                                            박남준  옷을 껴입듯 한겹 또 한겹  추위가 더할수록 얼음의 두께가 깊어지는 것은  버들치며 송사리 품 안에 숨 쉬는 것들을  따뜻하게 키우고 싶기 때문이다  철모르는 돌팔매로부터  겁 많은 물고기들을 두 눈 동그란 것들을  놀라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얼음이 맑고 반짝이는 것은  그 아래 작고 여린 것들이 푸른빛을 잃지 않고  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겨울 모진 것 그래도 견딜 만한 것은  제 몸의 온기란 온기 세상에 다 전하고  스스로 차디찬 알몸의 몸이 되어버린 얼음이 있기 때문이다  쫓기고 내몰린 것들을 껴안고 눈물지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햇살 아래 녹아내린 얼음의 투명한 눈물자위를  아 몸을 다 바쳐서 피워내는 사랑이라니  그 빛나는 것이라니    시집 (창비,2005)   ㅤ
51    서정주 시 묶음 댓글:  조회:485  추천:0  2019-12-10
  국화 옆에서  서정주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곶감   서정주 맨드래미 물드리신 무명 핫저고리에, 핫보선에, 꽃다님에, 나막신 신고 감나무집 할머니께 세배를 갔네. 곶감이 먹고 싶어 세배를 갔네. 그 할머니 눈창은 고추장 빛이신데 그래도 절을 하면 곶감 한개는 주었네. "그 할머니 눈창이 왜 그리 붉어?" 집에 와서 내 할머니한테 물어보니까 "도깨비 서방을 얻어 살어서 그래"라고 내 할머니는 내게 말해 주셨네. "도깨비 서방얻어 호강하는게 찔려서 쑥국새 솟작새같이 울고만 지낸다더니 두 눈창자가 그만 그렇게 고추장빛이 다아 되어버렸지   자화상 (自畵像)                                                 서 정 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신록  ㅡ ㅡ 서정주 어이할꺼나 아, 나는 사랑을 가졌어라 남몰래 혼자서 사랑을 가졌어라 천지엔 이미 꽃잎이 지고 새로운 녹음이 다시 돋아나 또 한 번 날 에워싸는데 못견디게 서러운 몸짓을 하며 붉은 꽃잎은 떨어져 내려 펄펄펄 펄펄펄 떨어져 내려 신라 가시내의 숨결과 같은 신라 가시내의 머리털 같은 풀밭에 바람 속에 떨어져 내려 올해도 내 앞에 흩날리는데 부르르 떨며 흩날리는데 아, 나는 사랑을 가졌어라 꾀꼬리처럼 울지도 못할 기찬 사랑을 혼자서 가졌어라    
50    문정희 시 묶음 댓글:  조회:449  추천:0  2019-12-10
나의 아내                             문정희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봄날 환한 웃음으로 피어난 꽃 같은 아내 꼭 껴안고 자고 나면 나의 씨를 제 몸 속에 키워 자식을 낳아주는 아내 내가 돈을 벌어다 주면 밥을 지어주고 밖에서 일할 때나 술을 마실 때 내 방을 치워놓고 기다리는 아내 또 시를 쓸 때나 소파에서 신문을 보고 있을 때면 살며시 차 한잔을 끓여다주는 아내 나 바람나지 말라고 매일 나의 거울을 닦아주고 늘 서방님을 동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내 소유의 식민지 명분은 우리 집안의 해 나를 아버지로 할아버지로 만들어주고 내 성씨와 족보를 이어주는 아내 오래 전 밀림 속에 살았다는 한 동물처럼 이제 멸종되어간다는 소식도 들리지만 아직 절대 유용한 19세기의 발명품 같은 오오,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사람에게    문정희 사람을 피해 여기까지 와서 사람을 그리워한다 사람, 너는 누구냐 밤하늘 가득 기어 나온 별들의 체온에 추운 몸을 기댄다 한 이름을 부른다 일찍이 광기와 불운을 사랑한 죄로 나 시인이 되었지만 내가 당도해야 할 허공은 어디인가 허공을 뚫어 문 하나를 내고 싶다 어느 곳도 완벽한 곳은 없었지만 문이 없는 곳 또한 없었다 사람, 너는 누구냐 나의 사랑, 나의 사막이여 온몸의 혈맥을 짜서 너를 쓴다 사람을 피해 여기까지 와서 사람을 그리워한다 별처럼 내밀한 촉감으로 숨 쉬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 너는 얼마나 짧기에 이토록 아름다우냐   겨울 사랑 - 문정희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 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계속 ㅡ  
49    한국시 9 댓글:  조회:386  추천:0  2019-12-10
거대한 식탁    반연희   저것은 회전판이 있는 식탁이다 바퀴 달린 접시들이 돌고 있는 휘어진 도로 닭을 가득 실은 트럭이 달려간다 아이들을 실은 버스가 달려간다 접시 위의 닭들이 질주한다 아이들의 혀 위에서 닭을 실은 트럭이 질주한다 트럭이 달려간다 버스가 입을 벌리며 뒤를 쫓는다 트럭이 꼬리부터 먹힌다 버스가 익지 않은 트럭을 뱉어낸다 반쯤 씹혀진 회전판이 멈춰지고 깨진 접시들이 옮겨지고 있다 거대한 식탁의 먹어치워진 오늘이 내일로 대체되고 있다 ―계간 《시와 정신》 2006년 봄호   안개의 나라 / 김광규 언제나 안개가 짙은 안개의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안개 속에 사노라면 안개에 익숙해져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귀는 자꾸 커진다 하얀 안개의 귀를 가진 토끼 같은 사람들이 안개의 나라에 산다   생각의 사이 / 김광규 시인은 오로지 시만을 생각하고 정치가는 오로지 정치만을 생각하고 경제인은 오로지 경제만을 생각하고 근로자는 오로지 노동만을 생각하고 법관은 오로지 법만을 생각하고 군인은 오로지 전쟁만을 생각하고 기사는 오로지 공장만을 생각하고 농민은 오로지 농사만을 생각하고 관리는 오로지 관청만을 생각하고 학자는 오로지 학문만을 생각한다면 이 세상이 낙원이 될 것 같지만 시와 정치의 사이 정치와 경제의 사이 경제와 노동의 사이 노동과 법의 사이 법과 전쟁의 사이 전쟁과 공장의 사이 공장과 농사의 사이 농사와 관청의 사이 관청과 학문의 사이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으면 다만 휴지와 권력과 돈과 착취와 형무소와 폐허와 공해와 농약과 억압과 통계가 남을 뿐이다.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도종환 산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 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고,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 시에서 한 시 사이는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머지않아 겨울이 올 것이다 그때는 지구 북쪽 끝의 얼음이 녹아 가까운 바닷가 마을까지 얼음조각을 흘려보내는 날이 오리라 한다 그때도 숲은 내 저문 육신과 그림자를 내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지난 봄과 여름 내가 굴참나무와 다람쥐와 아이들과 제비꽃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보낸 시간이 얼마나 험했는지 꽃과 나무들이 알고 있으므로 대지가 고요한 손을 들어 증거해 줄 것이다 아직도 내게는 몇 시간이 남아 있다 지금은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시집 「세시에서 다섯 시 사이」」(창비, 2011)   별이 좋은 것은                           이돈권 별이 좋은 것은 멀리 있기 때문이다 멀리 있어 달려갈 수 없기 때문이다 상처 총총 다 여미고 빛나는 모습만 보여 주기 때문이다 어둠이 누를수록 더욱 찬란해지기 때문이다 수억만 리에서 달려와 벅찬 꿈꾸게 하는 영롱함 때문이다 별이 안타깝도록 좋은 것은 가까이 갈 순 없어도 바라만 봐도 좋은 너를 닮았기 때문이다 -시집『희망을 사다』(천넌의시작,2019) ㅤ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1912~1996)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 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여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ㅡ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1912~1996)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 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여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ㅡ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묵상 고정희(1948~1991) 잔설이 분분한 겨울 아침에 출근버스에 기대앉아 그대 계신 쪽이거니 시선을 보내면 언제나 거기 적막한 산천이 놓여 있습니다 고향처럼 머나먼 곳을 향하여 차는 달리고 또 달립니다 나와 엇갈리는 수십 개의 길들이 무심하라 무심하라 고함치기도 하고 차와 엇갈리는 수만 가닥 바람이 떠나라 떠나거라 떠나거라.... 차창에 하얀 성애를 피웁니다 나는 가까스로 성애를 긁어내고 다시 당신 오늘 쪽이거니 가슴을 열면 언제나 거기 끝 모를 쓸쓸함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운무에 가린 나지막한 야산들이 희미한 햇빛에 습기 말리는 아침 무망한 슬픔으로 비어있는 저 들판이 내게 오는 당신 마음 같아서 나는 왠지 눈물이 납니다.   배꼽  노향림 꽃에도 배꼽이 있는가 흔적없이 죽음을 수납하는 꽃들에게는 배꼽이 자란다 열매 꼭대기에 오똑하니 올라 앉아서 방금 떨어진 제 배꼽이 향기로운 전생이었다는 것을 태를 태워 묻은 아득히 먼 고향이었다는 것을 터질 듯한 온 몸으로 보여준다 상처 아문 자리에 봄이 돋고 은빛 금빛 장신구에 보랏빛 티셔츠를 입는 제비꽃들이 일제히 만개한 배꼽들을 열고 깔깔거리는 동안 지상엔 웃음소리들이 수북이 쌓인다 봄이 쌓인다 봉성장날 권달웅 닷새마다 찾아오는 봉성장날은 북적거리는 장꾼들만큼 왁자한 소고기국밥 냄새가 는개처럼 자욱했다. 마지막 수업시간이 끝나자마자 침 묻혀 쓰던 몽당연필 달각거리는 책 보퉁이를 둘러메고 까불대는 비비새처럼 날아갔다. 농기구 좌판 거쳐 건어물 전 거쳐 엿장수 가이 소리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어머니는 나에게 엿 한 가락을 내밀었다. 콩 서 말을 팔아서 산 간고등어 한 손은 내가 들고 호미 세 자루 미역 한 오리 양미리 네 두릅은 어머니가 이고 남은 돈이 맞는지 다시 셈해 보면서 돌아오는 길에는 떼 찔레꽃이 어머니 환한 웃음소리처럼 하얗게 피어나고 있었다.   가물가물 불빛 최정례(1955~) ​ 당신과 이젠 끝이다 생각하고 갔어 가물가물 땅속으로 꺼져갔어 왕릉의 문 닫히고 석실 선반 위에 그 불빛 얼마 동안 펄럭였을까 왕이 죽고 왕비가 죽고 나란히 누운 그들 칼을 차고 금신발을 신고 저승 벌판을 헤맬 동안 그 불꽃 혼자 어떻게 떨었을까 당신 나 끝이야 이젠 우리 죽은 거야 가물가물 마지막 불빛 사윈 다음 또 몇 세기를 캄캄히 떠내려갈까 금관도 옥대도 비스듬히 쓰러졌지 다 무너지고 무너져서 왕비 어금니 하나 반짝 눈떴지 얼마를 헤매게 될까 당신이 있는 세상 거기 그래도 봄이면 새풀 돋겠지 삐죽삐죽 솟고 무성해지다 냇물은 소리치며 돌아 내려가겠지 당신 나 잊고 나도 당신 잊고 ​  산그늘  박규리(1960~) 먼산바라기만 하던 스님도 바람난 강아지며 늙은 산고양이도 달포째 돌아오지 않는다 자기 누울 묏자리밖에 모르는 늙은 보살 따라 죄 없는 돌소나무밭 돌멩이를 일궜다 문득, 호미 끝에 찍히는 얼굴들 절집 생활 몇 년이면 나도 그만 이 산그늘에 마음 부릴 만도 하건만, 속세 떠난 절 있기나 한가 미움도 고이면 맛난 정이 든다더니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사람들이 하필 그리워져서 눈물 찔끔 떨구는 참 맑은 겨울날   산그늘  박규리(1960~) 먼산바라기만 하던 스님도 바람난 강아지며 늙은 산고양이도 달포째 돌아오지 않는다 자기 누울 묏자리밖에 모르는 늙은 보살 따라 죄 없는 돌소나무밭 돌멩이를 일궜다 문득, 호미 끝에 찍히는 얼굴들 절집 생활 몇 년이면 나도 그만 이 산그늘에 마음 부릴 만도 하건만, 속세 떠난 절 있기나 한가 미움도 고이면 맛난 정이 든다더니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사람들이 하필 그리워져서 눈물 찔끔 떨구는 참 맑은 겨울날 이사     김나영     이 남자다 싶어서 나 이 남자 안에 깃들어 살 방 한 칸만 있으면 됐지 싶어서 당신 안에 아내 되어 살았는데 이십 년 전 나는 당신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나 당신 밖에 있네 옛 맹세는 헌 런닝구처럼 바래어져 가고 사랑도 맹세도 뱀허물처럼 쏙 빠져나간 자리 25평도 아니야 32평도 아니야 사네 못 사네 내 마음의 공허가 하루에도 수십 번 이삿짐을 쌌다 풀었다 하네   절정(絶頂)  이육사 매운 계절(季節)의 채쭉에 갈겨 마츰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리빨 칼날진 그우에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와인의 체위를 아세요   이향란     햇빛 아래 싱글싱글 맺히는 과일의 본명은 포도이고요 촛불 앞에서 머뭇머뭇, 그러나  군침 도는 고백의 가명은 와인이에요.   드디어 완성됐나요? 그럼 깨지지 않게 조심해서 어둡고 서늘한 침대에 뉘여 주세요. 껍질 속 바람과 햇빛이 마음껏 뒤척일 수 있도록  약간 기울여서요.   왼쪽으로 석 달 오른쪽으로 석 달 탱글탱글 꿈의 석 달 정신없이 와 닿을 입술의 석 달   빨간 오토바이를 타고 먼지 날리며 달리던 소년의  부릉부릉 심장 박동 소리에 비록 짓이겨지고 으깨졌지만  또르르 동그란 의지와 눈물은 더욱 투명해졌답니다.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바라보되 향이 새어나오면 윙크해주세요.   해 저물녘   빙글 돌리고,  빙글 바라보고,  빙글 마시고,  빙글빙글 추는,  물방울들의 춤   너무 크게 움직이지는 않으려고요.  여태 녹지 않은 햇빛을 천천히 녹이는 중이거든요.  새하얀 귀를 붉게 붉게 물들이는 중이거든요.   무덥고 긴 그해 여름을 쪼르르 잔에 따르면 재즈와 치즈의 얼룩이 묻어나는, ​ 스위트하거나 드라이한 와인의 이 오묘한 체위를  혹시 아세요?   월간 《시인동네》 2018년 10월호    저녁의 감정      김행숙   가장 낮은 몸을 만드는 것이다   으르렁거리는 개 앞에 엎드려 착하지, 착하지, 하고 울먹이는 것이다   가장 낮은 계급을 만드는 것이다, 이제 일어서려는데 피가 부족해서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현기증이 감정처럼 울렁여서 흐느낌이 되는 것이다, 파도는 어떻게 돌아오는가   사람은 사라지고 검은 튜브만 돌아온 모래사장에…… 점점 흘려 쓰는 필기체처럼   몸을 눕히면, 서서히 등이 축축해지는 것이다   눈을 감지 않으면, 공중에서 굉음을 내는 것이 오늘의 첫번째 별인 듯이 짐작되는 것이다   눈을 감으면, 이제 눈을 감았다고 다독이는 것이다   그리고 2절과 같이 되돌아오는 것이다   - 시집   P118~P119 ■ 김행숙 시인  - 1970년 서울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강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 1999년 등단  - 시집 외 다수'      사람살이와 시 쓰기 ㅡ 이어산    필자는 몇 년 전 새해 첫 강의를 하면서 ‘당.신.멋.져 운동’을 하자고 주창한바 있다. ‘당: 당차게 시를 쓰고, 신: 신나게 시를 쓰고, 멋: 멋있게 시를 쓰되, 져: 져주는 겸손함으로 시를 쓰자는 첫 글자인데 한 동안 시 모임에서 즐겨쓰는 건배사로 인용하기도 했다.    시를 쓰는 일은 우리 삶의 집에 창문을 내는 일이고 그 창문에 품위 있는 커튼을 다는 작업 같다고 강조해 왔다. 시를 쓰더니 그 사람의 언어와 삶이 품격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소리를 듣도록 하자는 말이다. 정제되지 않은 말, 자신의 넋두리나 연민, 비탄조는 그런 시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맡겨두고 우리는 좀 더 진취적이고 젊고 밝은 내용의 시를 쓰되 겸손을 잃지 말자고 주장해 왔다.    모든 시인이 좋은 시를 쓰고 유명하게 된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그걸 부러워 할 필요도 없다. 좋은 시라고 신춘문예나 유명 시 전문지에서 내어놓는 많은 시 들은 그것의 해석부터가 쉽지 않은 난해함 때문에 오히려 시가 골치 아픈 것이 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시는 전문가들의 전유물이 되고 일반 독자들에게선 멀어지는 부작용이 생기게 된다. 시적 감동이란 이해를 전재로 한 독자를 위한 것인데 소통의 가능성을 차단한 난해함이란 오히려 빈곤과 성취도를 감추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고 그것은 시가 추구하는 근원적 방향과도 맞지 않는 일이다. 물론 난해하거나 실험적, 전위적인 시에도 좋은 시가 많다. 그러나 그것이 주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시는 마음속의 불꽃이고 강력한 감정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 즉 정(情)을 뿌리로 하고, 언어를 싹으로 하며, 운율(韻律)을 꽃으로 하고, 의미를 열매로 하는 것이다. 또한 시는 영혼의 화가가 그리는 그림이라고도 하는데 자기만의 색깔을 드러낼 수 있을 때 좋은 시가 되는 것이다. 다만 시가 되기 위해선 최소한의 구성 요소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 즉 중복된 문장이나 주제와는 간접적이거나 의미로 연결되지 않는 말을 늘어놓은 횡설수설한 형태 등이다.    다음의 시 한 편을 보자. ​    갯 모래 머금은    혓바닥 하나 몸을 삼으니    석화된 입이 무기다    발바닥 생을 숨긴 집이다    만입이 다 열려 있어도 적막한    묵언수행    어느 전생의 세치 혀가 저지른 죄업인지    딱딱한 입술 두 쪽에    혓바닥 하나 숨겨 생애를 건너가는 중이다    물속에서 내다뵈는 것은    먼 깜박임    저건 시리우스 저건 좀생이 별    저기에도 생을 기댈 짭쪼름한 물이 있을까    바람 칠수록 명멸하는 찬란을 본다    머나먼 거기    뉘 손짓이 저리 반짝이는지    조개는 날개를 펴듯 움찔 움찔    패갑을 열었다 닫곤 한다       - 김추인, 전문    첫 연의 묘사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조개는 입이 열려 있어도 묵언수행 하고 있는, ‘발바닥 생을 숨긴 집’이란다. 그리곤 물 밖으로 보이는 별 중에서 가장 밝게 보이는 시리우스별과 자잘한 좀생이별을 보고 있다. 그러면서 사람살이와 이미지로 연결하고 있는데 ‘생을 기댈 짭쪼롬한 물이 있을까’라는 다의적 표현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바람 칠수록 명멸하는 찬란을 본다’면서 사람은 희망을 보고 사는 존재임을 다의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마지막 연에서는 ‘몸이 무거워서 날지 못하는 새가 인간’이라는 신달자 시인의 강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위 시를 쓴 김추인 시인은 한국예술상, 질마재문학상 등 많은 상을 받고 일곱 권의 시집을 낸 중견시인이자 나이에 비해서 시를 아주 잘 쓰는 시인이다. 그의 시들은 위의 예시처럼 시적 대상과의 자리바꿈을 제대로 하고 있다. 벌말이 없다. 읽을수록 맛이 나는 시가 많다. 한번 읽고 나면 뜻이 모두 이해되어서 다시 읽기 싫어지는 내용이 훤히 드러나는 시는 시의 생명이 일회성으로 끝날 위험이 크다.    시가 예사말이라면 시를 쓰기위해 씨름할 이유가 없을 텐데 시는 특별한 말이다. 비틀어서 말할 때 시(詩)다와지고 줄여서 말하고 시치미를 떼고 돌려서 말했을 때 더 뚜렷해지는 특성을 지닌다. 표피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 다의적이면서도 사람살이에 긍정적으로 이바지 하는 시를 좋은 시의 기준으로 꼽는 이유도 그래서다. ​ 수평선 / 배한봉 저 빨랫줄 참 길게 눈부시다 태양을 널었다가 구름을 널었다가 오징어 떼를 널었다가 달밤이면 은빛으로 날아다니는 갈치 떼를 널었다가   옛날에는 귀신고래도 너끈하게 널었다는 그래도 아직 단 한 번 터진 적 없는 저 빨랫줄 한라산과 백두산이 가운데 쯤 독도를 널어놓고 이쪽, 저쪽에서 팽팽하게 당겨주는 참 길게 눈부신 저, 한국의 쪽빛 빨랫줄  인생             유자효 늦가을 청량리 할머니 둘 버스를 기다리다 속삭인다 "꼭 신설동에서 청량리 온 것만 하지?"   이제는 누군가의 한줄기 햇살이 되고 싶다 허인 얼굴 한번 본적이 없는 사람이 문득 보고싶다 들추면 훤히 상처가 드러 나 서로 어색한 웃음 웃지 않아도 되는 난 누군가에게 매일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어느 별에선가 우등불옆에 오구구 모여들어 함께 목 놓아 불렀던 옛노래 은하의 풀밭에 금 망아지떼 풀어 놓고 죽 어서야 다시 불러 볼수 있는 익숙했던 사람들의 이름 하나 하나를 살아서 한번쯤 다시 불러보고 싶다 모조리 벗고 알몸뚱이 그대로 그라스며 와인잔에 들어 앉아서야 비로소연분홍 유혹이 되는 묵은 포도주처럼 내 남은 인생도 누군가의 달콤한 추억이 되면 얼마나 좋으랴 죽으러 온 세상 참 열심히 살아 미안하다 이제는 누군가의 맑은 눈동자에 눈물이 찰랑거리는 한줄기 밝은 햇살이 되고 싶다...   그림   이생진 아무 것이나 아무렇게나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림에서 소리가 나야 하고 그림에서 냄새가 나야 하고 그림에서 무지개가 떠야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세워야 하고 가버린 사람을 돌아오게 해야 하고 모두 말없는 고독에서 나온 그림이다   어머니의 지붕 / 이준관 어머니는 지붕에 호박과 무를 썰어 말렸다 고추와 콩꼬투리를 널어 말렸다 지붕은 태양과 떠도는 바람이 배불리 먹고 가는 밥상이었다 저녁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초승달과 서쪽에 뜨는 첫 별이 먹고 나면 어머니는 그것들을 거두어들였다 날씨가 맑은 사나흘 태양과 떠도는 바람 초승달과 첫 별을 다 먹이고 나서 성자의 마른 영혼처럼 알맞게 마르면 어머니는 그것들을 반찬으로 만들었다 우리들 생의 반찬으로! . 낡은 의자 김기택 묵묵히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늦은 저녁, 의자는 내게 늙은 잔등을 내민다. 나는 곤한 다리와 무거운 엉덩이를 털썩, 그 위에 주저앉힌다. 의자의 관절마다 나직한 비명이 삐걱거리며 새어나온다. 가는 다리에 근육과 심줄이 돋고 의자는 간신히 평온해진다. 여러 번 넘어졌지만 한 번도 누워본 적이 없는 의자여, 어쩌다 넘어지면, 뒤집어진 거북이처럼 허공에 다리를 쳐들고 어쩔 줄 몰라 가만히 있는 의자여, 걸을 줄도 모르면서 너는 고집스럽게 네 발로 서고 싶어하는구나. 달릴 줄도 모르면서 너는 주인을 태우고 싶어하는구나. 그러나 오늘은 네 위에 앉는 것이 불안하다. 내 엉덩이 밑에서 떨고 있는 너의 등뼈가 몹시 힘겹게 느껴진다. 1957년 경기도 안양 출생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수문학상, 미당문학상 수상 시집 , , , 등 김기택 시인의 시의 특징은 어떤 대상을 끝까지 추적하며 구체적 섬세한 필법으로 인식한 대상과 대화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낡은 의자를 의인화시킨 시인의 본문의 시세계는 어쩌면 낡은 시대의 시적 장치를 사용한 한물간 서정의 구시대의 작법이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시는 날카로운 시인의 직관과 통찰을 바탕으로 관찰적 자세에서 시의 본연의 기능에 충실하고 있음을 공감할 수 있다 시가 창조라는 예술의 장르이기 이전에 시는 인간에게 성찰적 기능을 부여하는 거울이라고 가정할 때 시인의 시는 투명하고 맑은 거울로 시대를 비추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김기택 시인은 큰 나무 같은 시인인 것이다 시 속에 등장하는 낡은 의자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 표면적으로 바라보면 의자와 시인의 이야기가 시인의 연민에서 시가 축조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평자의 관점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서로간에 종속된 존재론에서 시인이 의자라는 무생물에 생명성을 불어 넣어 연민과 동정만을 표출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시대는 빈익빈 부익부가 가면 갈수록 심화되어 가고 우리 사회는 부자와 가난한자 노동자와 사주 그리고 계층과 계층간의 갈등  또한 지역과 지역간의 대립이 표면화 되어 이 사회는 분열되고 그 분열된 사회성 속에서 개인의 이기주의는 묻지마의 범죄 유형 으로 날마다 뉴스에서 아픈 우리의 비명들이 쏟아진다 우리사회가 낡은 의자와 주인의 관계 처럼 서로에게 그렇게 따뜻하게 바라보고 스민다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정말 한번 쯤 신명나게 살아 볼 세상일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서로의 의자가 되어 준다면 그 의자에 앉은 우리의 엉덩 이는 이태리 명품 가죽쇼파보다 더, 더, 더 안락할 것이다 오늘 그대 바깥에 나가거든 누구의 엉덩이를 튼실하게 태워주는 의자가 한번 되어보자 [문정완 ]   국수행 전철에서     김기택     한낮에 국수 가는 전철은 한산하다.   노인은 왜소한 몸으로 7인석 좌석을 다 차지하고 앉아   신문을 쌓아놓고 보고 있다.   한쪽 다리를 좌석 위에 턱 얹어놓고   등을 옆으로 기대고 한껏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편할수록 더 결리는 허리.   최선을 다해 자세를 고쳐 앉아보지만   삶은 여전히 바뀌지 않는다.   허리와 어깨는 10초 동안 편안한 척하다가 다시 못 마땅해진다.   하루 종일 타도 공짜지만 다 탈 수 없는 전동차들.   텅텅 비어 남아돌아도 다 앉을 수 없는 좌석들.   아무리 많이 버려져 있어도 다 읽을 수 없는 신문들.   에어컨이 질 좋은 찬바람을 공짜로 퍼주어도   짜증만 나는 쾌적함.   물결치는 숲과 강이 보는 눈도 없이 차창 가득 지나가도   지긋지긋하기만 한 아름다움.   보던 신문을 확 던져버리고 의욕적으로 새 신문을 펼쳐든다.   먼저 본 신문에서 다 본 기사들.   그놈에 그 사건에 그 인생...... 사이에   반라의 모델 사진이 있다!   끊어질 것 같은 수영복 안에서 무엇인가 계속 터지고 있다.   그의 허리가 민첩하게 진지해지고 성실해진다.   너무 정성껏 여자를 쓰다듬어 눈알이 지문이 생길 지경이다.   다시 허리가 아파오자 그것도 금방 시들해진다.   거의 드러눕듯이 앉아본다.   여기저기 쏘아보는 눈알들.   한때는 눈치 보는 것도 스릴이 있었지만   꽉 찬 지하철에서 여자들 틈에 끼어   간이 오그라들도록 엉큼하고 도전적인 짓도 해봤지만   그런 재미조차 싫증난 지 오래다.   처치할 곳이 없어 전철에다 잔뜩 부려놓은 시간.   전동차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느려터지기만 한 시간.   아까 팔당역이었는데 어째서 아직도 팔당역이란 말인가.   전철이 달리면 잠깐 흐르는 듯하다가 멈추면 함께 정지하는 시간.   죽어라 밀쳐도 안 가는 시간.   고집스럽게 한자리에만 앉아 늙기만 하고 죽지는 않는 시간.     김기택 시집 『갈라진다 갈라진다』(문지)에서.   감상;    김기택 시인의 지하철 묘사다, 이렇게 끝낸다면 이 시는 평범하다. 김기택 시인이 정치적으로 지하철을 타고 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다시 읽게 된다. 물론 사회적이고, 참여적이고, 의식적인 언어들이 일상의 관찰인 양,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그곳에 시인이 내려놓은 그림자 문자는 사실 다른 말을 하는 듯하다. 그는 지하철을 타고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지만, 그의 눈은, 그의 감각은, 그의 정서는 못을 박듯 한곳에 머물러 있다. 그곳에서 그는 사회를 보고, 세상을 읽고, 타성화되고 고령화된 의식과 동작을 읽는다. 타자들과 섞여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침몰해 있는 인간 군상을, 자기중심적으로 발달한 인간 유형을 관찰한다. 그것이 우리가 몰아가는 전동차 같은 사회다. 젊은 세대에게 미래에게 염치도 체면도 필요 없고, 과거를 존중하는 의례적 칸으로 모셔진 지정석에 앉아, 일견 자유롭지만, 불편하다. 어쩌면 그가 달려온 생이 마치 한 곳에 갇혀 있는 듯한 인상이다.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그의 행동 양상은 사회에서 고립된 섬에서 다 부서진 몸으로, 다 망가진 의식으로 앉아 있는 우리의 사회를 반영하고 있다. 도시에서 도시로 궤도를 놓은, 그곳을 왕래하는 사람의 고립을 묘사하고 있다.    김기택 시인은 사물에 대한 개입과 감정을 내색하는 편이 아니지만, 사실 문자만 그렇지 그의 시는 강력한 주제를 내비치는 것이 특장이다. 그는 그림만 그리는 듯하지만, 독자는 증폭된 내재한 에너지를 읽어야 하는 부담이 있다. 아주 친근한 평서문인데도, 그는 탑재한 감정과 의식들을 읽어낼 것을 독자의 몫으로 둔다. 누구의 손을 들어주며 옹호하지도, 찬양하지도 않지만, 그는 이미 현실에 대한 냉철한 비판자이고, 그가 담겨 있는 사회에서 무의식적으로 무의지적으로 소모되는 인간을 반대한다. 그는 아름다운 언어보다는 적확한 언어로 시를 쓰고, 시를 쓰는 목적이 분명하다. 시는 고통을 읽는 일이고 고통을 이완하는 일이다. 그의 시를 여러 번 읽으면 내가 왜 이 사회에 덩그러니 떨어져 수많은 기계의 조립된 동작에 얹혀 무심히 흘러가는 인간인가를 반성하게 된다. 국수행 전철은 작은 공간을 통해, 사회를, 국가를, 세계를, 그리고 우리가 잃어버린 인간 군체가 꾸려갈 미래를 진단하고 암전된 예시로 보여주고 있는 시이다. 그는 승객이나, 큰 함선을 몰아가는 함장으로도 보인다. 시의 힘일 것이다.                                              비의 목록 김희업 손바닥에 닿으면 부러지는 연약한 비 비가 거리의 목록에서 노점을 지웠다 오늘은 가난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우산을 펴자 비가 우산 위로 사납게 달려들었다 우산은 우산 크기만큼만 비를 가려주었다 온다는 소리 없이 집집마다 비가 다녀갔다 섭섭하지만 비를 뒤쫓아갈 필요가 없었다 훗날을 기약하며 보내주기로 했다 비를 모금함 속에 모아두는 엉뚱한 사람은 없을 테니까 사람을 불러 모으는 재주를 가진 노점이 사라진 사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비에 스며들었는지 한산한 거리가 비로 시끌벅적했다 비에 쫓겨난 봄꽃은 어디서 보상받을는지 생계가 막막해진 봄꽃이 뿔뿔이 자취를 감추었다 손바닥에 닿으면 부러지는 연약한 비에도 바퀴의 노동은 멈추지 않고, 내일도 모르고 앞만 향해 자꾸 달려간다 이런 날, 바퀴도 없이 미끄러지는 사람이 꼭 있더라 저만치 자신을 내팽개치는 사람을 보고 있으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비가 거리의 목록에서 이제 웃음조차 지우려 한다 오늘은 비의 목록에 따뜻한 위로가 추가되어야 할 것 같다 프로필 김희업 : 건국대 국문과, 서울예대 문창과, 현대문학 등단, 시집[비의 목록]외 다수 시 감상 겨울답지 않게 비가 많이 내렸다. 계절마다 내리는 비는 계절의 색을 짙게 하거나 혹은 계절을 탈색시키거나, 당신은 어느 계절의 비를 좋아하는지? 쏟아붓는 여름 비, 우산 속 울음을 감추지 못하게 만드는 가을비, 따뜻한 봄 비? 아니면 왠지 남의 옷을 걸친 듯 겨울 속 봄 비? 비의 목록을 만들어 보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비에 스며들었고 얼마나 많은 것들을 비에 씻겨 보냈는지? 보낸 것들의 목록을 만들어 보자. 잠시 비가 되어보자. [글/김부회 시인, 평론가]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 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고독의 깊이 / 기형도(1960~1989) 한 차례 장마가 지났다 푹푹 파인 가슴을 내리쓸며 구름 자욱한 강을 걷는다 바람은 내 외로움만큼의 중량으로 폐부 깊숙한 끝을 부딪는다 상처가 푸르게 부었을 때 바라보는 강은 더욱 깊어지는 법 그 깊은 강을 따라 내 식사를 가만히 띄운다 그 아픔은 잠길 듯 잠길 듯 한 장 파도로 흘러가고 아아, 운무 가득한 가슴이여 내 고통의 비는 어느 날 그칠 것인가 #시소문 2020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김은숙의 당선작을 취소합니다. 당선작 발표 이후 이 작품은 2019년 10월 4일 네이버 카페 에 습작품으로 게재된 김난의 와 상당 부분에서 동일성이 있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습니다. 이에 심사위원단은 두 작품을 면밀히 비교 검토한 결과 타인의 창작물을 이용한 점이 상당 부분 인정되어 당선 취소가 바람직하다는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김은숙 씨는 “카페 게시판에 올라왔던 김난의 작품을 보지 않았고 게시물을 읽을 수 있는 권한도 없다”고 입장을 밝혔으나 응모작품은 미발표 창작품이어야 한다는 규정에 따라 당선 취소를 결정했습니다. . . . 1월 / 오세영 1월이 색깔이라면 아마도 흰색일 게다. 아직 채색되지 않은 신(神)의 캔버스, 산도 희고 강물도 희고 꿈꾸는 짐승 같은 내 영혼의 이마도 희고, 1월이 음악이라면 속삭이는 저음일 게다. 아직 트이지 않은 신(神)의 발성법(發聲法). 가지 끝에서 풀잎 끝에서 내 영혼의 현(絃) 끝에서 바람은 설레고, 1월이 말씀이라면 어머니의 부드러운 육성일 게다. 유년의 꿈길에서 문득 들려오는 그녀의 질책, 아가, 일어나거라, 벌써 해가 떴단다. 아, 1월은 침묵으로 맞이하는 눈부신 함성. . .골목의 번식 - 김은숙 발밑을 믿지 마세요 골목의 뒤통수는 백 년이 가도 썩지 않아요 미처 이름을 갖지 못한 태아도 봉지에 버려진 조약돌, 툭툭 발길에 채여요 어둠이 눈감아줬다면 당신은 그것을 바람 빠진 축구공쯤으로 여겼을 거예요 공중화장실에서 태어나자마자 봉지 속으로 꼬깃꼬깃 숨겨진 첫울음, 도심에는 한 방향만 암기한 검은 사각형들이 살아요 정육면체 어둠이 검은 시냇물이 되어 흘러요 밤이면 먹물 같은 골목, 징검다리는 없어요 그 안에 더 이상 비밀을 숨기지 못할 때 종착지는 캄캄한 땅속이거나 고래 뱃속이었어요 뭔가를 산란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 지난밤 그 골목은 비좁았어요 집안 어디쯤에서 폐품이 되기 좋은 질긴 산책로를 발견했나요? 창문 밖 골목 저 끝말이에요 봐! 저기! 저것 좀 봐! 소리친 게 당신이었나요? 노을을 뚫는 검은 새떼의 비행은 사실상 누군가 목을 비틀어서 유기遺棄한 비닐봉투였죠 은밀함을 목 졸라 죽일 때는 낯선 저녁 역광 뒤쪽이 최고예요 역광을 믿지 않았던 고래는, 죽은 봉투를 해파리로 읽었어요 그것들은 간혹 뱃속에서 심장을 갉아 먹다 고래의 사인死因이 되기도 하죠 검정을 죽이고 돌아와, 비닐봉투가 피살되었다는 뉴스특보를 보더라도 웃음 짓는 것이 중요해요 한잔의 블랙커피를 삽으로 파고서 떨리는 증거들을 감쪽같이 묻어버리세요​ 지난밤에는 어둠을 자백하라고 길고양이들이 나를 포위했어요 묻어버린 시간과 폐기한 말들을 뱉어내라고 난리에요 그렇지만 최후의 단서를 들키지는 않았어요 귀소본능이 없는 것은 발명가가 깨트린 새 소리예요 길게 누운 골목, 졸음의 이마 위로 갓 태어난 개똥을 조심하세요 골목 왼쪽, 삐쩍 마른 나뭇가지 꼭대기에 흙을 잔뜩 묻히고 입을 헤- 벌린 깃발처럼 펄럭이는 검은 농담들, 맞아요 어느 아르바이트생이 20원짜리 비닐봉투 도둑으로 몰린 사건 아시죠? 두께도 없고 입구도 없는 혐의는 아메바보다 지루해요 괜찮아요 밀봉된 태아의 캄캄한 몸과 비명도 따지고 보면 고무장갑과 같은 족속 붉어서 아무도 구별 못 해요 매일 밤 태어난 어둠은 막다른 모퉁이에 검은 무덤을 만들고, 아침이면 기지개 켜는 코스모스가 그것들을 화려하게 변호하죠     비닐봉지의 원죄 - 김난 시커먼 어둠 저쪽, 번뜩거리는 누들이 분주하다 착지하는 소리마저 종적을 감춘 낡은 새벽 배고픈 눈동자를 어슬렁거리며 굶주린 입들이 검은 선물을 노린다 어떤 것은 벌서 발 바른 무리에게 뜯긴 채 알록달록한 내장을 쏟아 놓았다 며칠 치의 몸이 뱉은 배설인지 물컹한 냄새가 부랑자처럼 떠돌았다 항상 간단한 일상을 담고서 손에서 달랑거리며 존재를 알렸지만 그러나 늘 일회용이라는 불명예를 떨치지 못했다 어떤 날은 검은 동굴처럼 어두운 입구 저쪽에서 미세하게 갸르릉거리는 소리가 구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세상의 출구에서 가느다란 숨을 내뿜으며 미처 이름을 갖지 못한 태아가 발견된 날은 이미 오래전이었다 무언가를 품었다가 빈속인 채 연애편지처럼 꼬깃꼬깃 접어지기를 몇 차례 더 이상 뭘 담지 못할 때의 종착지는 늘 땅속이거나 고래의 뱃속이었다 가볍고 미끈거려 초라한 대신 영생을 보장 받기라도 한 듯 아무도 그것의 질긴 목숨을 끊을 수 없었다 노을을 뚫는 검은 새떼의 비행은 실상 비닐봉지였고 심심할 때면 고래의 뱃속에서 심장을 갉아먹고 사인(死因)의 선봉이 되기도 했다 제 몫을 끝내고 서로가 서로를 보듬어 안은 채 폐기된 소멸은 소멸이 아니었다 그가 죽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없다 귀소본능이 없는 것은 발명가가 실수를 한 원죄였다 마당 한 켠, 삐쩍 마른 나뭇가지 꼭대기에 흙을 잔뜩 묻히고 입을 벌린 채 어느 알바생이 20원 짜리 도둑으로 몰린 사건은 혐의 없는 일회용으로 종결되었다고 웅웅거린다   허수아비  .ㅡ. 신달자 혼자 서 있는 허수아비에게 외로우냐고 묻지마라 어떤 풍경도 사랑이 되지 못하는 빈들판 낡고 해진 추억만으로 한세월 견뎌왔느니 혼자 서 있는 허수아비에게 누구를 기다리느냐고도 묻지 마라 일체의 위로도 건네지 마라 세상에 태어나 한 사람을 마음속에 섬기는 일은 어차피 고독한 수행이거니   허수아비는 혼자라서 외로운게 아니고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외롭다 사랑하는 그만큼 외롭다   국물 신달자 메루치와 다시마와 무와 양파를 달인 국물로 국수를 만듭니다 바다의 쓰라린 소식과 들판의 뼈저린 대결이 서로 몸 섞으며 사람의 혀를 간질이는 맛을 내고 있습니다 바다는 흐르기만 해서 다리가 없고 들판은 뿌리로 버티다가 허리를 다치기도 하지만 피가 졸고 졸고 애가 잦아지고 서로 뒤틀거나 배배 꼬여 증오의 끝을 다 삭인 뒤에야 고요의 맛에 다가옵니다 내 남편이란 인간도 이 국수를 좋아하다가 죽었지요 바다가 되었다가 들판이 되었다가 들판이다가 바다이다가 다 속은 넓었지만 서로 포개지 못하고 포개지 못하는 절망으로 홀로 입술이 짓물러 눈감았지요 상징적으로 메루치와 양파를 섞어 우려낸 국물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바다만큼 들판만큼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몸을 우리고 마음을 끓여서 겨우 섞어진 국물을 마주보고 마시는 그는 내 생의 국물이고 나는 그의 국물이었습니다   책에 담을 수 없는 여자 / 김관민 미안해요, 당신을 윤리책에 담으려 했어요 당신의 신발을 신발장에만 가두려 했으니 당신은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미안해요, 당신을 수학책에 담으려 했어요 당신의 모든 걸 계산하려고 했으니 당신은 얼마나 지루했을까요 미안해요, 당신을 국어책에 담으려 했어요 당신을 그렇고 그런 이야기 속에 살게 했으니 당신은 얼마나 심심했을까요 미안해요, 당신을 음악책에 담으려 했어요 당신의 눈에 들리지 않는 음표들만 늘어놓았으니 당신은 얼마나 짜증났을까요 정말 미안해요, 당신은 책에 담을 수 없는 여자인데 당신은 책이 아닌 이렇게 내 앞에 서 있는데 나는 그 동안 뭘 하고 있었던 거죠 오, 정말 미안해요 또 다시 당신에게서 답을 구하려 했네요
48    한국시 * 댓글:  조회:519  추천:0  2019-12-06
종이비행기    이선명 종이를 접어 날리는 습관이 생겼다  보낼 수 없는 편지를 종이 접어  그대도 바라보고 있을 저 하늘에  그대를 꿈꾸며 나를 보낸다 그대의 마음 가에 닿지 못하고  금새 내 그리움 속으로 곤두박질치는  기운 사랑만을 쫓아 바닥으로 떨어진 종이 눈물  저 나약한 비행기가 그녀에게 갈 수 없음을 나는 안다 하지만 사랑이란 포기할 수 없는 절망  오늘도 나는 부치지 못할 편지를 종이 접어 그대에게 날린다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은 오직 이것 뿐  깊어가는 마음만 하늘을 날아간다   다시  이선명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잊어버렸다 더 크게 부를수록 고요해지는 거짓이 되어버린 말들과 그리움이 되어버린 시간들 불현듯 너는 떠났고 허락도 없이 그리움은 남았다 앉거나 걷거나 혹은 서 있을 때도 내 안에 투명한 방울들이 맺히고 있었다 산다는 것은 죽어가는 것이 되었고 기억하는 것은 떠난 것이 되어 있었다 내 삶에 낙서 되어버린 한 사람의 이름 어디로 가야 다시 도착할 수 있는 걸까 나는 물들기 쉬운 어리석은 사람 한 번의 입맞춤을 위해 힘없이 떠나보낸 시간들을 기억해 본다 쓸쓸히 왔던 길을 돌아서듯 너를 생각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혹 당신이 아니라는 착각 하지만 그래도 후회할 수 없다 뼈가 부서지도록 아픈 이름을 안고 너라는 끝없는 절망을 사랑했다   마른 꽃     이선영    시들고야 말았다  식었다     그대에게서 오래 전 받은 따뜻한 꽃 한송이     벽에 거꾸로 매달린 채 하세월     사랑은 말라붙은 꽃만 남기고  기어이 그대를 벽에 꽂아놓진 못했어도     내 마음 깊은 어디쯤에  딱딱하게 걸려 넘어가지 않는 마른 꽃     속이 다 비고도  바스라지지 않는   세수 / 이선영  어제의 나를 깨끗이 씻어낸다  오늘의 얼굴에 묻은 어제의 눈곱  어제의 잠  어젯밤 어둠 어젯밤 이부자리 속의  어지러웠던 꿈 어제가 혈기를 거둬간  얼굴의 창백함을  힘있지는 않지만 느리지는 않은  내 손길로 문질러버린다  늘 같아 보이지만 늘 새 것인 물이  얼굴에 흠뻑!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오늘엔 오늘 아침 갓 씻어낸 물방울 숭숭 맺힌 나의 얼굴이 있고  그러나 왠지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하지 않은가  어제는 잔주름만 남겨놓았고  오늘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   짧고도 길어야 할       이선영  그대와 내가 늘 처음처럼 사랑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사랑한다는 말을 지루하도록 되풀이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은  마침내 낯익어서 낯설어져 버린 서로의 얼굴이 마주치는 순간을 맞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그대와 내가 거문고의 여러 개 줄 가운데 딱 두 줄처럼  끝끝내 묵음으로 울려 왔음을 들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흙 속에 바람 속에 뼛가루로 재로 영영 묻혀 버리면 그만이라는 것은  이쯤에서 추억이 되었으면 하고 바랄 때  사랑의 박제를 만들어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그대 앞에서 내가, 내 앞에서 그대가 늙어가서는 안되겠기에  사랑과 시는 늙어서는 안되겠기에  사랑과 시를 위해서는 짧았으면 싶지만  생활과 핏줄을 위해서는 질기게도 길어야 할,  당길 수도 늘릴 수도 없는 이  인생이라는 것      花樣年華(화양연화) / 이선영     가장 불행한 얼굴로 지금이 가장 행복한 때이노라고 리첸 부인은 말했다   "정말 많이 보고 싶지만, 먼 후일을 기약하기로 해요" 편지를 써야만 했던 날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더 많고   게임은 거의 끝나가는데 남은 판은 더욱 절박한   사십세   행복은 불행이라는 돌틈에 숨은 작은 샘구멍 불행은 행복의 부서지기 쉬운 살을 감싼 갑각   알겠구나, 평생이 이 뗄 수 없는 연인들과의 부질없는 삼각관계임을!   불행의 적요한 한낮을 화(花)-아-양(樣)-연(年)-ㄴ-화(華) 라디오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올 때   불행은 자기가 빠져나갈 틈을 알고 있다   사람이 선물입니다    김민소 하늘이 빛나는 것은 은하수 때문이고 들판이 빛나는 것은 원시림 때문이고 세상이 빛나는 것은 사람 때문입니다. 아픔이 소중한 것은 기쁨과 함께 하기 때문이고 실패가 소중한 것은 성장과 함께 하기 때문이고 세상이 소중한 것은 사람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받아들이는 아름다움을 배우게 하고 세상은 나누는 아름다움을 배우게 하고 사람은 존재의 아름다움을 배우게 해줍니다. 살면서 가장 행복한 시간은 가슴 따뜻한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사람이 선물입니다   다음 생에 할 일들    안주철   아내가 운다. 나는 아내보다 더 처량해져서 우는 아내를 본다. 다음 생엔 돈 많이 벌어올게. 아내가 빠르게 눈물을 닦는다. 나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음 생에는 집을 한 채 살 수 있을 거야. 아내는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본다. 다음 생에는 힘이 부칠 때 아프리카에 들러 모래를 한줌 만져보자. 아내는 피식 웃는다. 이번 생에 니가 죽을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재빨리 아이가 되어 말한다. 배고파. 아내는 밥을 차리고 아이는 내가 되어 대신 반찬 투정을 한다. 순간 나는 아내가 되어 아이를 혼내려 하는데 변신이 잘 안 된다. 아이가 벌써 아내가 되어 나를 혼낸다. 억울할 건 하나도 없다. 조금 늦었을 뿐이다.   그래도 나는 아내에게 말한다. 다음 생엔 이번 생을 까맣게 잊게 해줄게. 아내는 눈물을 문지른 손등같이 웃으며 말한다. 오늘 급식은 여기까지   책 읽는 남자                                     강기원   실직은 질식이다 목을 죄던 것들이 어느 날 툭 끊어졌는데 이번엔 보이지 않는 손이 온종일 그의 목을 조른다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는 손보다 더 집요하다 아침마다 단정히 넥타이를 매고 서류가방을 들고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그는 집을 나선다 아침 아홉 시 입실 밤 아홉 시 퇴실 매일 밤 늦는 그의 귀가를 기다리며 아내는 야근수당을 기대하리라 도서관 그 자리엔 언제나 그가 있다 책 보다는 창밖에 멍한 시선 자주 보내는 말쑥하고 창백한 높은 도수 너머의 그가 자주 목덜미를 문지르는 그가   아내가 옳다 이동재     아내가 옳다! 젊어선 세상의 정의가 공자나 맹자 예수나 부처의 말씀에 있는 줄 알았다 조금 더 젊었을 땐 마르크스나 프로이트에게 있는 줄 알았고 한창 땐 레닌이나 모택동 체 게바라 루카치 마르쿠제 아드르노 벤야민 라깡이나 지젝 자유주의이니 자본주의, 사회주의니 공산주의 구조주의나 후기구조주의 리얼리즘 혹은 모더니즘 하다못해 신자유주의가 옳은 줄 알았다 독수공방, 아내가 외롭게 지새우는 긴 밤 그래도 세상의 정의는 바깥에 있는 줄 알았다 거리에서 술집에서 책상 앞에서 헤매던 시절 세상의 옳고 그름이 그 어디쯤에 있는 줄 알았다 마지못해 내는 학회지나 창비나 문지 같은 잡지에 숭고한 뭔가가 있다거나 요사스런 사설(私設邪說)로 가득찬 신문지 쪼가리 속에 찾아야 할 진실이 있다고 진정으로 믿은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세상의 진리가 그 어디쯤에 서성이고 있을 줄 알았다 허나 찍히고 짤리고 미끄러지고 터지고 뭉개져 돌아와 식탁 앞에 앉은 어느 저녁 아내는 옳았다 아내가 옳다, 아내가 옳다 아내가 항상 옳다 라고 수없이 되뇌어 보는 중년의 어떤 나, 아내가 역시 옳다, 아내는 여전히 옳다, 무조건 옳다! .   아내의 젖을 보다 이승하      나이 쉰이 되어 볼품없이 된  아내의 두 젖가슴이  아버지 어머니 나란히 모신 무덤 같다  유방암이란다  두 아이 모유로 키웠고  내가 아기인 양 빨기도 했던  아내의 젖가슴을 이제  메스로 도려내야 한다  나이 쉰이 다 되어 그대  관계를 도려내고  기억을 도려내고  그 숱한 인연을 도려내듯이  암이 찾아왔으니 암담하다  젖가슴 없이 살아야 할 세월의 길이를  생명자가 있어 잴 수가 있나  거듭되는 항암 치료로 입덧할 때처럼  토하고 또 토하는 아내여  그대 몇 십 년 동안 내 앞에서  무덤 보이며 살아왔구나  두 자식에게 무덤 물리며 살아왔구나  항암 치료로 대머리가 되니  저 머리야말로 둥그런 무덤 같다  벌초할 필요가 없다  조부 무덤 앞 비석이  발기된 내 성기 닮았다  - 계간《서정시학》2008년 봄호   나의 아내                             문정희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봄날 환한 웃음으로 피어난 꽃 같은 아내 꼭 껴안고 자고 나면 나의 씨를 제 몸 속에 키워 자식을 낳아주는 아내 내가 돈을 벌어다 주면 밥을 지어주고 밖에서 일할 때나 술을 마실 때 내 방을 치워놓고 기다리는 아내 또 시를 쓸 때나 소파에서 신문을 보고 있을 때면 살며시 차 한잔을 끓여다주는 아내 나 바람나지 말라고 매일 나의 거울을 닦아주고 늘 서방님을 동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내 소유의 식민지 명분은 우리 집안의 해 나를 아버지로 할아버지로 만들어주고 내 성씨와 족보를 이어주는 아내 오래 전 밀림 속에 살았다는 한 동물처럼 이제 멸종되어간다는 소식도 들리지만 아직 절대 유용한 19세기의 발명품 같은 오오,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내의 빈자리      정연복 아내가 오랜만에 친정 나들이를 갔습니다 한 며칠 엄마랑 함께 지낼 작정이랍니다. 첫날은 아내가 없으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했습니다 둘째 날도 큰 불편 없이 그럭저럭 견딜 만했습니다 셋째 날부터 아내 생각이 나며   홀로 자는 밤이 쓸쓸했습니다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듯 아내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집니다 하루 세끼 밥도 먹는 둥 마는 둥입니다. 아무래도 나는 아내가 곁에 있어야겠습니다.   아내와 나 사이        이생진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네비게이션   홍종빈     자동차를 몰고 나서면 어느새 아내가 네비게이션 안에서 말하기 시작한다. 또박또박 하느님처럼 말한다. 전방에 과속방지턱이 있습니다. 안전운전 하십시오. 그녀가 시키는 대로 브레이크를 밟는다. 보이지 않는 아내가 다시 말한다. 전방에 과속단속구간입니다. 과속에 주의하십시오. 나는 언제나 길들여진 의식으로 브레이크를 밟는다. 어디로 갈까 묻지 말고 그림자처럼 오롯이 따라만 오세요. 당신이 한평생 건너온 그 질퍽하고 굴곡진 삶도 거역할 수 없는 내 힘에 이끌려 왔듯이.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현관문을 열면 그녀가 다시 말하기 시작한다. 너무 늦게 들어오지 마세요. 내가 심심합니다. 제발 담배 피우지 마세요. 내 건강에 해롭습니다. 당신은 영원한 내 포로입니다.   하동 ㅡ ㅡ 이시영    하동쯤이면 딱 좋을 것 같아. 화개장터 넘어 악양면 평사리나 아, 거기 우리 착한 남준이가 살지. 어쩌다 전화 걸면 주인은 없고 흘러나오던 목소리. “살구꽃이 환한 봄날입니다. 물결에 한 잎 두 잎…”. 어릴 적 돌아보았던 악양 들이 참 포근했어. 어머니가 살아 계시다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배틀재 토지 동방천 화개… 빨리 빨리 타이소!” 하며 엉덩이로 마구 승객들을 들이밀던 차장 아가씨도 생각나네. 아니면 인호 자네가 사는 금성면도 괜찮아. 화력발전소가 있지만 설마 터지겠어? 이웃에 살며 서로 오갈 수만 있다면! 아니 읍내리도 좋고 할리 데이비슨 중고품 몰고 달리는 원규네 좀 높은 산중턱 중기마을이면 또 어떠리. 구례에는 가고 싶지 않아. 마음만 거기 살게 하고 내 몸은 따로 제금을 내고 싶어. 지아는 지가 태어난 간전면으로 가고, 두규도 거기 어디에 아담한 벽돌집을 지었다더군. 설익은 풍수 송기원이 허리를 턱하니 젖혀 지세를 살피더니 ”니가 살 데가 아니다“라고 했다며?    하여간 그쯤이면 되겠네. 섬진강이 흐르다가 바다를 만나기 전 숨을 고르는 곳. 수량이 많은 철에는 재첩도 많이 잡혔지만 가녘에 반짝이던 은빛 모래 사구들. 김용택이 사는 장산리를 스쳐온 거지. 용택이는 그 마을 앞 도랑을 강이라고 우겼지만 섬진강은 평사리에서 바라볼 때가 제일 좋더라. 그래, 코앞의 바다 앞에서 솔바람 소리도 듣고 복사꽃 매화꽃도 싣고 이젠 죽으러 가는 일만 남은 물의 고요 숙연한 흐름. 하동으로 갈 거야. 죽은 어머니 손목을 꼬옥 붙잡고 천천히, 되도록 천천히. 대숲에서 후다닥 날아오른 참새들이 두 눈 글썽이며 내려앉는 작은 마당으로. ​ ㅡ이시영 시집 『하동』(창비, 2017)   * 분수(喷水)               이경희 난 첼리스트 다칠세라 당신을 금이 갈세라 가만히 포응하면 매지근한 체온에 튀는 스타키토 내 어께에 당신의 머릿카락은 바닷물결 차츰 잠기우는 몸을 안고 흔드는 파도의 요람 내 기인 손가락은 당신의 허리에서 내려오는 엉뚱한 애무처럼 몸저리는 연소에 타는 쏘나기, 쏘나기 소린 내 그이의 분수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손 미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밤을 두드린다. 나무문이 삐걱댔다. 문을 열면 아무도 없다. 가축을 깨무는 이빨을 자판처럼 박으며 나는 쓰고 있었다. 먹고사는 것에 대해 이 장례가 끝나면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뼛가루를 빗자루로 쓸고 있는데 내가 거기서 나왔는데 식도에 호스를 꽂지 않아 사람이 죽었는데 너와 마주 앉아 밥을 먹어도 될까. 사람은 껍질이 되었다. 헝겊이 되었다. 연기가 되었다. 비명이 되었다 다시 사람이 되는 비극. 다시 사람이 되는 것. 다시 사람이어도 될까.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생각하지 않아도 될까. 케이크에 초를 꽂아도 될까. 너를 사랑해도 될까. 외로워서 못 살겠다 말하던 그 사람이 죽었는데 안 울어도 될까. 상복을 입고 너의 침대에 엎드려 있을 때 밤을 두드리는 건 내 손톱을 먹고 자란 짐승. 사람이 죽었는데 변기에 앉고 방을 닦으면서 다시 사람이 될까 무서워. 그런 고백을 해도 될까. 사람이 죽었는데 계속 사람이어도 될까.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라고 묻는 사람이어도 될까.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나무문을 두드리는 울음을 모른 척해도 될까.   ―손 미 시집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민음사, 2019)에서     모르는 목소리    김행숙 ​​ ​   모르는 목소리가 아는 사람처럼 내 이름을 부르며 걸어오고 있다   얼굴은 안개에 감겨 얼굴이 없는 것 같고   같은 안개를 뚫고 모르는 목소리가 내게 달라붙고 있다   어떤 앎이 이처럼 끈적이는가. 모든 앎이 이처럼 끈적이는가   나는 침묵의 계명을 따랐던 교분들을 희뿌연 빛에 비추어 상기하고 있다, 오래전    그 중에...... 그는 법정 서기였다   그는 완벽했다 ​   이제 말을 해도 되는 거냐고 내가 놀라며 물었더니   메아리처럼 돌아오는 그의 목소리는 주인을 바꾼 듯이 변해 있었다   또 다른, 모르는 목소리가 아는 사람처럼 내 이름을 부르며 더 가깝게 걸어오고 있다   나의 이름이 나를 비껴가고 있다 - 시집   용접 / 이석현 온몸으로 젖어 본 사람은 알 수 있지 보안경 너머로 삼천도 불꽃물의 길을 터주면 두툼한 방열복 속으로 후끈 스며들던 고열의 마음들 서로 녹아 넘치도록 혼절해야만 한 몸 되는 힘겨운 접목 뼈와 살을 녹여내는 아픔을 나눈 후 태어난 신생 기억을 가로지르는 고압선에서 나온 수많은 불티들을 온 가슴으로 막아내다가 지나온 길을 더듬어 균열을 살핀다. 마음과 마음을 묶는 일이 얼마나 뜨거운 일인지 시뻘걸게 달아 온 몸으로 젖어 본 사람은 알 수가 있지. -시집 『둥근 소리의 힘』 (문학만, 2010)   갱년기   안현미   국숫집에 와보니 알겠다 호르몬이 울고 호르몬이 그리워하고 호르몬이 미워하고 다 호르몬이 시키는 일이라는 걸   매일매일 죽지도 않고 찾아와 죽고 싶다고 말하는 나는 누구인가?   국수 가락처럼 긴 사생과 결단의 끝   당신, 내가 살자고 하면 죽어버릴 것 같은 내가 죽자고 하면 살아버릴 것 같은   국숫집에 와보니 알겠다 크게 잘못 살고 있었다는 걸 크게 춥게 살고 있었다는 걸 그래서 따뜻한 국수가 고팠다는 걸     모르는 목소리    김행숙 ​​ ​   모르는 목소리가 아는 사람처럼 내 이름을 부르며 걸어오고 있다   얼굴은 안개에 감겨 얼굴이 없는 것 같고   같은 안개를 뚫고 모르는 목소리가 내게 달라붙고 있다   어떤 앎이 이처럼 끈적이는가. 모든 앎이 이처럼 끈적이는가   나는 침묵의 계명을 따랐던 교분들을 희뿌연 빛에 비추어 상기하고 있다, 오래전    그 중에...... 그는 법정 서기였다   그는 완벽했다 ​   이제 말을 해도 되는 거냐고 내가 놀라며 물었더니   메아리처럼 돌아오는 그의 목소리는 주인을 바꾼 듯이 변해 있었다   또 다른, 모르는 목소리가 아는 사람처럼 내 이름을 부르며 더 가깝게 걸어오고 있다   나의 이름이 나를 비껴가고 있다 - 시집  
47    겨울 시들 댓글:  조회:383  추천:0  2019-11-30
겨울 숲     성영희       겨울 산, 수런대는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물고기들의 을씨년스러운 잔등을 만난다. 꼬리는 하류 쪽으로 꿈틀 거린다. 깡마른 나무들이 직립으로 견디는 가잠의 시간들, 고드름이 가시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폭포는 떨어지는 소리들로 얼지 않는다. 튀어나간 물방울들만 빙벽으로 미끄럽다. 뼈를 드러낸 물고기의 잔등처럼 잎 다 떨어진 나무들이 일렬로 서있는 산등성이    나무들의 귀는 일년생이다. 어떤 소리가 저렇게 앙상하게 남아 저희들끼리 입을 만드는가, 수백 년 동안 자란 물고기들이 산꼭대기를 헤엄치고 있다. 능선 지느러미 겨울을 달리고 있다.    물고기들의 조상은 앙상한 나무들이 줄 서 있는 저 산등성이다. 얼음장 밑에 귀를 대보면 넓은 대양의 물이 가는 줄기로 흘러내린다. 봄부터 여름까지 가득 찼던 푸른 정맥을 닫아버리고 앙상한 팔로 바람을 겪는 지느러미들, 아무리 작은 물고기라도 몸속에 가시를 숨기고 있듯 겨울 산, 그 끝없는 능선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가시들이 공중을 향해 자라고 있다.    활시위를 당기듯 겨울 숲을 당기는 팽팽한 바람에 능선하나 걸린다. 꿈틀거리며 물살을 타는 지느러미들, 겨울이 느리게 날아가고 있다.  ―2018 《학산문학》 겨울호                  충남 태안 출생        2017년 대전일보,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시집 『섬, 생을 물질하다』등         농어촌문학상, 동서문학상, 시흥문학상 수상   겨울아침 / 윤제림 역전다방 창가에 붙어 앉아 내려다보는 정거장 마당. 신발가게 주인은 귀마개 위로 장갑 낀 손을 붙이고 섰고, 추운데 저러고 싶을까, 검은 삽사리와 누렁이가 눈 위에서 한바탕 붙어 있다. 지금 막 계단을 내려간 다방처녀는 맨 종아리가 더 안쓰러운데, 연신 코트 깃만 고쳐 세우며 이발소 앞을 걸어가고 있다. 정거장 마당 깨랑 콩이랑 말린 나물이랑 꼭 한 움큼씩 벌여놓은 여자는 무릎 새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 어서 기차 시간이 되어 더러 팔렸으면 좋겠다. 겨울바다에 가서 / 홍해리 세월이 무더기로 지는 겨울바다 아득한 물머리에 서서 쑥대머리 하나 사흘 밤 사흘 낮을 이승의 바다 건너만 보네 가마득하기야 어디 바다뿐일까만 울고 웃는 울음으로 빨갛게 타는 그리운 마음만 부시고 파도는 바다의 속살을 닦으며 백년이고 천년이고 들고 나는데...... 까마아득하기야 어찌 사랑뿐일까 보냐 겨울한라산 / 오석만 바람이 시작되는 곳을 아는가? 구름이 넘나들며 백록이 목을 축이던 한라에 서서 멀리 출렁이는 바다가 바람을 해맑은 하늘에 마구 뿌려대는 비취빛 사랑은 누구의 숨결인가? 하늘과 땅 사이에 온통 피어있는 하얀 눈꽃들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그대와 손을 꼭 잡고 순백의 눈꽃 세상에 푸우욱 빠져 차가운 바람도, 힘에 겨운 무게도 하얀 사랑으로 이겨내는 푸른 나무들처럼 다시 태어나 겨울한라산에 매달려있는 고드름이 되어도 좋고 따스한 햇살에 녹아 떨어지는 한 방울 물방울이어도 좋다 그대 눈 속에서 출렁이는 파도로 하얗게 피어오르는 하얀 나비라도 좋고 끝도 없이 부딪치는 파도에서 시작되어 겨울한라산 백록을 넘나드는 구름이라도 좋다 겨울행 / 이근배   대낮의 풍설은 나를 취하게 한다 나는 정처없다 산이거나 들이거나 나는 비틀걸음으로 떠다닌다   쏟아지는 눈발이 앞을 가린다 눈발 속에서 초가집 한 채가 떠오른다 아궁이 앞에서 생솔을 때시는 어머니   어머니 눈이 많이 내린 이 겨울 나는 고향엘 가고 싶습니다 그 곳에 가서 다시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름날 단신의 적삼에 배이던 땀과 등잔불을 끈 어둠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타고 내리던 그 눈물을 보고 싶습니다   나는 술 취한 듯 눈길을 갑니다 설해목 쓰러진 자리 생솔 가지를 꺽던 눈밭의 당신의 언 발이 짚어가던 발자국이 남은 그 땅을 찾아서 갑니다   헌 누더기 옷으로도 추위를 못 가리시던 어머니 연기 속에 눈 못 뜨고 때시던 생솔의, 타는 불꽃의, 저녁나절의 모습이 자꾸 떠올려지는 눈이 많이 내린 이 겨울 나는 자꾸 취해서 비틀거립니다 겨울 강가에서 / 김경미 눈과 함께 쏟아지는 저 송곳니들의 말을 잘 들어두거라 딸아 언 강 밑을 흐르며 모진 바위 둥글리는 저 물살도 네 가슴 가장 여린 살결에 깊이 옮겨두거라 손발 없는 물고기들이 지느러미 하나로도 어떻게 길을 내는지 딸아 기다림은 이제 행복이 아니니 오지 않는 것은 가서 가져 와야 하고 빼앗긴 것들이 제 발로 돌아오는 법이란 없으니 네가 몸소 가지러 갈 때 이 세상에 닿지 않는 곳이란 없으리 겨울 들판을 거닐며 / 허형만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 바람도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조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울바다에 가려거든 / 최광임   겨울바다에 가려거든 바람 부는 날 가십시다 사랑도 불처럼 뜨거운 것이라야 가슴 데이듯 하얗게 이빨 드러내놓고 미친 소리로 외쳐대며 퍽퍽 까무러치는 모습 보아야 할 거 아니오 바다와 툭 터놓은 이야기 한 판 끝나거든 가슴 헤쳐 놓고 사랑 한 알 미움 한 알 소주잔에 타서 마십시다 생애 굽이굽이 꿈틀거리는 접시 위 낙지의 비애를 떠올려 보기도 하고 고무다라 위 좌판 벌여놓은 석화같이 버짐 핀 아낙의 매운 삶을 엿보거나 그렇게 사랑도 미움도 갈팡진 우리의 내일도 소주 한 잔에 섞어 마시고 오십시다 겨울바다에 가려거든 부디 바다가 요동치는 날 가십시다 겨울의 춤 / 곽재구 첫눈이 오기 전에 추억의 창문을 손질해야겠다 지난 계절 쌓인 허무와 슬픔 먼지처럼 훌훌 털어내고 삐걱이는 창틀 가장자리에 기다림의 새 못을 쳐야겠다 무의미하게 드리워진 낡은 커튼을 걷어내고 영하의 칼바람에도 스러지지 않는 작은 호롱불 하나 밝혀두어야겠다 그리고 춤을 익혀야겠다 바람에 들판의 갈대들이 서걱이듯 새들의 목소리가 숲속에 흩날리듯 낙엽 아래 작은 시냇물이 노래하듯 차갑고도 빛나는 겨울의 춤을 익혀야겠다 바라보면 세상은 아름다운 곳 뜨거운 사랑과 노동과 혁명과 감동이 함께 어울려 새 세상의 진보를 꿈꾸는 곳 끌어안으면 겨울은 오히려 따뜻한 것 한 칸 구들의 온기와 희망으로 식구들의 긴 겨울잠을 덥힐 수 있는 것 그러므로 채찍처럼 달려드는 겨울의 추억은 소중한 것 쓰리고 아프고 멍들고 얼얼한 겨울의 기다림은 아름다운 것 첫눈이 내리기 전에 추억의 창문을 열어젖혀야겠다 죽은 새소리 뒹구는 들판에서 새봄을 기다리는 초록빛 춤을 추어야겠다. 그 겨울의 시 / 박노해 문풍지 우는 겨울밤이면 윗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어는데 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어린 나를 품어 안고 몇 번이고 혼잣말로 중얼거리시네 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 소금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 죽지 않을랑가 뒷산에 노루 토끼들은 굶어 죽지 않을랑가 아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낭송을 들으며 잠이 들곤 했었네 찬바람아 잠들어라 해야 해야 어서 떠라 한겨울 얇은 이불에도 추운 줄 모르고 왠지 슬픈 노래 속에 눈물을 훔치다가 눈산의 새끼노루처럼 잠이 들곤 했었네 겨울 엽서 / 이희숙 그리워하다 하다 숨길 수 없는 마음 함박눈처럼 펑펑 쏟아지는 날이면 폭설처럼 쌓여있는 사랑을 이야기하자 어디에도 숨을 곳 없는 그리움을 이야기하자 도무지 그칠 줄 모르는 간절함에 대해 이야기하자 하늘의 별들이 숨을 거두는 그 날에도 오늘이 영영 오늘로 살 수 없는 그 날에도 여전히 우리로 살아야 할 부분이 너무도 많은 우리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자 할머니의 겨울 / 서정홍 보일러 기름통에 석유만 가득 차면 배가 부르다는 우리 할머니 시집간 손녀가 기름통에 석유 가득 채워주고 간 날부터 다음해 겨울까지,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 착한 손녀가 기름통 가득 채워주고 갔다고 동네방네 자랑을 참지 못하는 우리 할머니의 겨울은 참 따뜻하다. 일찍 부모 잃은 어린 손자 손녀들 돌보며 내가 자식 잡아먹은 직일년이라고 울면서도 살림살이 어느 한 군데도 흐트러지지 않고 야무지게 사시는 우리 할머니의 겨울은 참 따뜻하다 가득 찬 기름통 하나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겨울 / 조병화 침묵이다 침묵으로 침묵으로 이어지는 세월 세월 위로 바람이 분다 바람은 지나가면서 적막한 노래를 부른다 듣는 사람도 없는 세월 위에 노래만 남아 쌓인다 남아 쌓인 노래 위에 눈이 내린다 내린 눈은, 기쁨과 슬픔 인간이 살다 간 자리를 하얗게 덮는다 덮은 눈 속에서 겨울은 기쁨과 슬픔을 가려 내어 인간이 남긴 기쁨과 슬픔으로 봄을 준비한다 묵묵히 겨울 맛 / 강세화 겨울에는 더러 하늘이 흐리기도 해야 맛이다. 아주 흐려질 때까지 눈 아프게 보고 있다가 설레설레 눈 내리는 모양을 보아야 맛이다. 눈이 내리면 그냥 보기는 심심하고 뽀독뽀독 발자국을 만들어야 맛이다. 눈이 쌓이면 온돌방에 돌아와 콩비지 찌개를 훌훌 떠먹어야 맛이다. 찌개가 끓으면 덩달아 웅성대면서 마음에도 김이 자욱히 서려야 맛이다. 겨울 강가에서 / 안도현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강은,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래서 눈발이 물 위에 닿기 전에 몸을 바꿔 흐르려고 이리저리 자꾸 뒤척였는데 그때마다 세찬 강물 소리가 났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계속 철없이 철없이 눈은 내려, 강은, 어젯밤부터 눈을 제 몸으로 받으려고 강의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을 깔기 시작한 것이었다 겨울 사랑 / 박노해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에게 겨울이 없다면 무엇으로 따뜻한 포옹이 가능하겠느냐 무엇으로 우리 서로 깊어질 수 있겠느냐   이 추운 떨림이 없다면 꽃은 무엇으로 피어나고 무슨 기운으로 향기를 낼 수 있겠느냐 나 언 눈 뜨고 그대들  기다릴 수 있겠느냐 눈보라 치는 겨울밤이 없다면 추워 떠는 자의 시린 마음을 무엇으로 헤아리고 내 언 몸을 녹이는 몇 평의 따뜻한 방을 고마워하고 자기를 벗어버린 희망 하나 커 나올 수 있겠느냐 아아 겨울이 온다 추운 겨울이 온다 떨리는 겨울 사랑이 온다. 겨울 고해 / 홍수희 겨울밤엔 하늘도 빙판길입니다 내 마음 외로울 때마다 하나 둘 쏘아 올렸던 작은 기도 점점이 차가운 하늘밭에서 자꾸만 미끄러져 떨어지더니 잠들었던 내 무딘 영혼에 날카로운 파편으로 아프게 박혀옵니다 사랑이 되지 못한 바램 같은 것 실천이 되지 못한 독백 같은 것 더러는 아아, 별이 되지 못한 희망 같은 것 다시 돌아다보면 너를 위한 기도마저도 나를 위한 안위의 기도였다는 그것 온 세상이 꽁꽁 얼어 눈빛이 맑아질 때야 비로소 보이는 그것 겨울은, 나에게도 숨어있던 나를 보게 합니다 겨울나무 / 이재무 이파리 무성할 때는 서로가 잘 뵈지 않더니 하늘조차 스스로 가려 발밑 어둡더니 서리 내려 잎 지고 바람 매맞으며 숭숭 구멍 뚫린 한 세월 줄기와 가지로만 견뎌보자니 보이는 구나, 저만큼 멀어진 친구 이만큼 가까워진 이웃 외로워서 단단한 겨울나무 겨울새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 / 복효근 새들이 겨울 응달에 제 심장만한 난로를 지핀다 두 마리 서너 마리 때로는 떼로 몰리다보니 새의 난로는 사뭇 따숩다 저 새들이 하는 일이란 너무 깊이 잠들어서 꽃눈 잎눈 만드는 것을 잊거나 두레박질을 게을리하는 나무를 흔들어 깨우는 일, 너무 추워서 웅크리다가 눈꽃 얼음꽃이 제 꽃인 줄 알고 제 꽃의 향기와 색깔을 잊는 일 없도록 나무들의 잠 속에 때맞춰 새소리를 섞어주는 일, 얼어붙은 것들의 이마를 한번씩 콕콕 부리로 건드려주는 일, 고드름 맺힌 나무들의 손목을 한번씩 잡아주는 일, 그래서 겨울새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 천지의 나뭇가지가 대들보며 서까래다 그러니 어디에 상량문을 쓰고 어디에 문패를 걸겠는가 순례지에서 만난 수녀들이 부르는 서로의 세례명처럼 새들은 서로의 소리가 제 둥지다 저 소리의 둥지가 따뜻하다 이 아침 감나무에 물까치 떼 왔다갔을 뿐인데 귀 언저리에 난로 지핀 듯 화안하다  겨울나기 / 도종환 아침에 내린 비가 이파리 위에서 신음소리를 내며 어는 저녁에도 푸른 빛을 잃지 않고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하늘과 땅에서 얻은 것들 다 되돌려주려고 고갯마루에서 건넛산을 바라보는 스님의 뒷모습처럼 서서 빈 가지로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이제는 꽃 한 송이 남지 않고 수레바퀴 지나간 자국 아래 부스러진 잎사귀와 끌려간 줄기의 흔적만 희미한데 그래도 뿌리 하나로 겨울을 나는 꽃들이 있다 비바람 뿌리고 눈서리 너무 길어 떨어진 잎 이 세상 거리에 황망히 흩어진 뒤 뿌리까지 얼고 만 밤 씨앗 하나 살아서 겨울을 나는 것들도 있다 이 겨울 우리 몇몇만 언 손을 마주 잡고 떨고 있는 듯해도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견디고 있다 모두들 어떻게든 살아 이기고 있다 겨울 기도 / 마종기   하느님, 추워하며 살게 하소서. 이불이 얇은 자의 시린 마음을 잊지 않게 하시고 돌아갈 수 있는 몇 평의 방을 고마워하게 하소서.   겨울에 살게 하소서. 여름의 열기 후에 낙엽으로 날리는 한정 없는 미련을 잠재우시고 쌓인 눈 속에 편히 잠들 수 있는 당신의 긴 뜻을 알게 하소서. 겨울 숲을 아시나요 / 홍수희 잎 지고 새 떠나간 겨울 숲에는 외로움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 남아 윙윙 부는 바람만 사는 것이 아니에요 인기척에 놀라 툭, 소리도 없이 떨어지는 삭정이만 사는 것도 아니지요 아무도 모르게 꼭꼭 숨어 꽃씨가 산답니다 파릇파릇 새순이 산답니다 부끄럽게 웃고 있는 꽃무리도 숨어 살아요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도 숨어살지요 당장 보이지 않는다고 초조해하지는 말아요 희망한다는 것은 어둠 속에 감추어진 그 너머를 바라보는 일이니까요 겨울 숲에는 두근두근 설레는 봄날이 숨어 살아요   겨울 들녘에 서서 / 오세영 사랑으로 괴로운 사람은 한 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빈 공간의 충만. 아낌없이 주는 자의 기쁨이 거기 있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 떨어진 낟알 몇 개. 이별을 슬퍼하는 사람은 한 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지상의 만남을 하늘에서 영원케 하는 자의 안식이 거기 있다. 먼 별을 우러르는 둠벙의 눈빛. 그리움으로 아픈 사람은 한 번쯤 겨울 들녘에 가 볼 일이다. 너를 지킨다는 것은 곧 나를 지킨다는 것, 홀로 있음으로 오히려 더불어 있게 된 자의 성찰이 거기 있다. 빈 들을 쓸쓸히 지키는 논둑의 저 허수아비. 초겨울 - 도종환   올해도 참나무잎 산비알에 우수수 떨어지고 올해도 꽃진 들에 억새풀 가을 겨울 흔들리고 올해도 살얼음 어는 강가 새들은 가고 없는데 구름 사이로 별이 뜨듯 나는 쓸쓸히 살아 있구나. 겨울 저녁의 시 - 박정만 새파랗게 얼어붙은 하늘에도 흰 재채기나 조금씩 토해 내면서 이제 우리 모두 돌아갈 시간이다. 안티플라민 시린 코를 감싸쥐고서 눈물 어린 눈을 끔벅이면서. 겨울산 - 황지우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들에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겨울 편지 - 안도현   흰 눈 뒤집어쓴 매화나무 마른 가지가 부르르 몸을 흔듭니다 눈물겹습니다 머지않아 꽃을 피우겠다는 뜻이겠지요 사랑은 이렇게 더디게 오는 것이겠지요   겨울 사랑 - 문정희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 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겨울, 저무는 황혼의 아름다움 - 이정하 보여주겠다 분지의 벌판 끝에 서 있는 눈사람 같은 자세를 보여주겠다. 귀 기울여 줄 것. 누가 와서 이 쓸쓸함을 지적해다오. 저무는 황혼으로 내 사랑을 죄다 보여주겠다. 겨울날 - 정호승 물 속에 불을 피운다 강가에 나가 나뭇가지를 주워 물 속에 불을 피운다 물 속이 추운 물고기들이 몰려와 불을 쬔다 멀리서 추운 겨울을 보내는 솔씨 하나 날아와 불을 쬔다 길가에 돌부처가 혼자 웃는다       겨울산 - 황지우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들에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46    신용목 시 묶음 댓글:  조회:368  추천:0  2019-11-30
 중고가전 수거 차량처럼  신용목    비온 뒤 지구는 커다란 비눗방울 속에 갇힌 것 같다. 울고 난 뒤 너는 너만큼의 비눗방울 속에 갇힌 것 같다.   차 마실래?   아니,   아무도 저어주지 않아서   물고기는 어항 속을 저 혼자 빙빙 돈다.    물고기는 녹지 않는다.   아픈 사람의 입술에 물려주는 젖은 헝겊처럼 빨래가 널려 있다. 빨래는 어항 같다. 아무도 마시지 않는다.   소리가 들린다. 차들이 왔던 길을 가는 소리.   물속처럼,   너는 오후를 조용히 보낸다.   후후, 불며 졸음이 졸음을 마시는 동안에도 옷은 조금씩 빨랫감이 되어간다.   책을 펼치고 어떤 문장도 읽지 않는다.   그래도    책 속에는 사랑이 있다. 이야기는 사막이거나 바다.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기 위해 폭풍우를 건너는 낙타가 있고, 죽어버릴 거야. 문을 쾅, 닫고 나가서는 어느 모퉁이 식당에서 국수를 삼키는 순간이 있고    책 속에도,   책처럼 조용한 사람이 있다.   끝.   창문을 닫으려고 창가로 간다.   너머엔 학교가 있다. 여름이 운동장에 물길을 만들고 사라진 뒤 아이들은 다시 빗방울처럼 돌아올 것이다. 팔, 구, 사, 오, 전화번호를 크게 알리며 중고가전 수거 차량이 지나간다.   어항은 식었다.   ​ 나도 가끔 유리에 손자국을 남긴다           신용목 우럭이 관 속에 누워 있다 몇 마리 우럭들, 우럭의 영혼으로 헤엄친다 산 것들이 죽은 것의 영혼인 물속 연기의 문장으로 맴을 돈다 한생이 무덤 속이었던 우럭 물속에서 타 죽은 우럭 나도 가끔 창밖을 본다 철 지난 부음처럼 낙엽은 날아와 부딪치고 흘러내리는 손자국, 한 칸씩 허공은 투명하게 질러놓은 관짝들이다 가을은 눈부시게 출렁이는 공동묘지 물살이 씻고 가는 비문처럼 나도 가끔 방 안을 맴돈다 문 없는 집을 세워놓고 무섭게 달려 나가는 추억들이 몸 여기저기를 찢어놓을 때 문이 없어 그 자리 뒤집히고 마는 마지막, 죽음은 육신만을 거두어가므로 나는 아무도 읽지 못할 문장 당신의 영혼으로 눕는다 활활 타는 장작의 머리카락, 어떤 죽음은 쏟아져야 한다 몸에서 풀려나는 연기처럼 삶이 딛지 못한 곳으로 인근 재개발 문 없는 노장에서 나는 벽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절반만 말해진 거짓 /  신용목       이제 놀라지 않는다   새가 실수로 하늘의 푸른 살을 찢고 들어간다 해도       그것은 나무들의 짓이라고   오래전 내가 청춘의 주인인 슬픔에게 빌린 손으로 연못에 돌을 던졌던 것처럼   공원 새들을 모조리 내던지는   나무들,   서서 잠든 물의 무덤들       저녁의 시체들   가을이 새의 울음을 짜내 신의 예언을 죄다 붉게 칠했으므로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그날, 마지막으로 던졌던 반지의 금빛 테를 가진 달빛조차도   손목을 그은 청춘의 얼굴로 늙어가니   집으로 돌아가   최대한 따뜻한 밥을 하고 뭇국을 끓여 상을 차리고   마음을 지우고 나면,   남는 자신을 앉히고       눈에서부터   긴 눈물의 심을 빼내기라도 한다면 구겨진 옷가지처럼 풀썩 쓰러질 자신을 향해   밥그릇 속에서 달그락거리는 수저 소리로,   걸어가거나       형광등 빛을 펴 감싸주며       아니면, 집으로 돌아가   온몸 뜨거운 물에 흠씬 적신 뒤 뿌옇게 김 서린 거울을 훔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네 몸이 아프다   네가 내 몸을 앓듯이   그러니까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위로가 있어서       물끄러미 나라고 이름 붙인 장소에서 가여운 새들을 울음 속으로 날려보내며   중얼거린다   절반만 거짓을 믿으면   절반은 진실이 된다고,   어쩌면 신은 우연을 즐기는 내기꾼 같아서 하나의 운명에 보색을 섞어 빙빙 돌린다   그러나    여름을 윙윙거리던 공원의 벌들도 열매가 꽃의 절반을 산다고 믿지 않는다   꽃이 열매의 절반을 가졌다고도   믿지 않지   다만 우리가 별들의 회오리 속에서 청춘을 복채로 들었던,   모든 예언은 절반만 말해졌다는       그리고 그 나머지를 실현하기 위하여 삶이 아프다는 것   이제 놀라지 않는다   모든 나무가 지구라는 둥근 과녁을 향해 날아든 신의 화살이었다 해도   우리가 과녁의 뚫린 구멍이라 해도,   뽑힌 나무라 해도       나무는 자신의 절반을 땅속에   묻고 있으므로,   내가 거울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자신의 목을 조르는 밤을 견디는 것처럼 중에서   공동체 신용목 내가 죽은 자의 이름을 써도 되겠습니까? 그가 죽었으니 내가 그의 이름을 가져도 되겠습니까? 오늘 또 하나의 이름을 얻었으니 나의 이름은 갈수록 늘어나서, 머잖아 죽음의 장부를 다 가지고 나는 천국과 지옥으로 불릴 수도 있겠습니까? 저기 공원에서 비를 맞는 여자의 입술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지면, 기도도 길을 잃고 바닥에서 씻기는 꽃잎처럼 그러나 당신의 구두에 붙어 몇 발짝을 옮겨가고…… 나는 떨어지는 모든 꽃잎에게 대답하겠습니다. 마침내 죽음의 수집가, 슬픔이 젖은 마을을 다 돌고도 주인을 찾지 못해 누추한 나에게 와서 잠을 청하면, 찬 물이 담긴 주전자와 마른 수건 하나, 나는 삐걱거리는 몸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목소리로 물을 수 있습니다. 더 필요한 게 있습니까? 그러나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달라고 할까 봐. 꽃 핀 정원에 울려퍼지다 그대로 멈춰버린 합창처럼, 현관의 검은 우산에서 어깨 위에서…… 빗물처럼 뚝뚝, 오토바이와 회색 지붕과 나무와 풀 위에서 망각의 맥을 짚으며 또, 보고 싶다고…… 보고 싶다고…… 울까 봐. 그러면 나는 멀리 불 꺼진 시간을 가리켜 그의 이름을 등불처럼 건네주고, 텅 빈 장부 속에 혼자 남을까 봐. 주인 몰래 내어준 빈 방에 물 내리는 소리처럼 떠 있는 구름이라는 물의 영혼, 내 몸속에서 자라는 천둥과 번개를 사실로 만들며 네 이름을 훔치기 위해 아무래도 죽음은 나에게 눈을 심었나 보다, 네 이름을 가져간 돌이 비를 맞는다. 귀를 달았나 보다, 돌 위에서 네 이름을 읽는 비처럼, 내가 천국과 지옥을 섞으며 젖어도 되겠습니까? 저기 공원을 떠나는 여자의 붉은 입술처럼, 죽음을 두드리는 모든 꽃잎이 나에게 기도를 전하는…… 여기서도 인생이 가능하다면, 오직 부르는 순간에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뜨는 것처럼 사랑이 가능하다면, 죽은 자에게 나의 이름을 주어도 되겠습니까? 그가 죽었으니 그를 내 이름으로 불러도 되겠습니까? 1974년 경남 거창 출생 서남대학교 국문과 졸업 2000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아무 날의 도시』등 ㅡ시 노트ㅡ 공동체의 전문을 대하면 우리가 실존하며 살아가는 이 시대의 지구는 우리가 상상할 수없는  슬픔들이 떠다닌다 만약 우리가 수십억 지구인의 비애를 피부로 다 느낀다면 우리는 잠시라도 웃음을 짓지는 못할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슬픔의 숙주로 기생하는가  한생이란 잠시 일었다가 꺼져버리는 미풍처럼 덧 없고 허망한 것이리라 단지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살아  있으므로 몇십년이란 시간의 뒤를 체험적으로 인식하지 못할 뿐 우리는 시시각각 슬픔이란 매개물 속으로 침몰하고 있으며 종국엔 이생의 모든 슬픔의 단어들 수집하고 떠날 것이다 내가 죽은 자의 이름을 써도 되겠습니까? 그가 죽었으니 내가 그의 이름을 가져도 되겠습니까? 오늘 또 하나의 이름을 얻었으니 나의 이름은 갈수록 늘어나서, 머잖아 죽음의 장부를 다 가지고 나는 천국과 지옥으로 불릴 수도 있겠습니까?              ㅡ 공동체 전문부분ㅡ 어쩌면 우리의 이름은 이미 오래전 죽은 자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이름은 단지 사자의 석자 이름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것이다 사실 인간은 하루에도 몇 번 슬픔으로 죽는다 시인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 현상에  담담하게  질문하고 있다 /내가 죽은 자의 이름을 써도 되겠습니까? 그가 죽었으니 내가 그의 이름을 가져도 되겠습니까?/ 이미 수많은 사람이 사용했고 앞으로도 사용하게 될 수 밖에 없는 현상을 이름이란 단어 속에 모두 집어 넣고 그 이름을 가져도 되겠느냐는 역설적 방법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며 상상하게 사유하게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한다 또한 시인은 그 질문을 통하여 인간이 가진 숙명적 이름을 환기시키고 소환하며 우리의 생각을 묶어 두고 있는 것이다 저기 공원에서 비를 맞는 여자의 입술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지면, 기도도 길을 잃고 바닥에서 씻기는 꽃잎처럼 그러나 당신의 구두에 붙어 몇 발짝을 옮겨가고…… 나는 떨어지는 모든 꽃잎에게 대답하겠습니다. 마침내 죽음의 수집가, 슬픔이 젖은 마을을 다 돌고도 주인을 찾지 못해 누추한 나에게 와서 잠을 청하면, 찬 물이 담긴 주전자와 마른 수건 하나, 나는 삐걱거리는 몸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목소리로 물을 수 있습니다. 더 필요한 게 있습니까? 그러나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달라고 할까 봐. 꽃 핀 정원에 울려퍼지다 그대로 멈춰버린 합창처럼, 현관의 검은 우산에서 어깨 위에서…… 빗물처럼 뚝뚝, 오토바이와 회색 지붕과 나무와 풀 위에서 망각의 맥을 짚으며 또, 보고 싶다고…… 보고 싶다고…… 울까 봐. 그러면 나는 멀리 불 꺼진 시간을 가리켜 그의 이름을 등불처럼 건네주고, 텅 빈 장부 속에            ㅡ 공동체 전문부분ㅡ 위  전문의 모든 것을 대변 하듯이 시인은 묻고 있다 /나는 천국과 지옥으로 불릴 수도 있겠습니까?/  그리고 시인은 /그러나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위 구절로 부정의 대비를 통해 긍정적 추론을 대입하며 또한 달관적 체념을 바탕에 깔고 반어적인 해답을 제시하며 우리가 가진 정서에 시인의 시적 자아의 태도를 반영시키며 공감을 끌어가는 것이 이 시의 특징으로 보인다 또한 시인은 삶과 질곡 속에서 파생된  슬픔이란 모든 이름을 맥박을 소멸과 진통 그리고 필연적 결과물로 인식하고 한 편의 깊은 서사를 시인의 독특한 구도를 빌려 나와 너 우리 모두를 공동체란 틀 속에 유입시키면서 시적 긴장감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한장면 한장면의 영사 속으로 몰아가 인생이란 광범위한 문제에 대해 우리 자신들에게 그 명암의 앞면과 뒷면을 뒤돌아 보게 하고 있다 인생이 가능하다면, 오직 부르는 순간에 비가 그치고 무지개가 뜨는 것처럼 사랑이 가능하다면, 죽은 자에게 나의 이름을 주어도 되겠습니까? 그가 죽었으니 그를 내 이름으로 불러도 되겠습니까?                  ㅡ 공동체 전문부분 ㅡ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이 생의 우리의 모습을 한없는 연민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온통 슬픔 밖에 없는 세상에 노출된 모든 이름에게 /사랑이 가능하다면, 죽은 자에게 나의 이름을 주어도 되겠습니까?/  라고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는 이 시대의 자화상들에게 치유와 사랑의 태도를 제시하고 있다 하겠다 오늘 신용목의 공동체 시  한 편을 읽으면서 삶이란 참 슬픈 노래가락이다 그것도 한소절의 짧은 노래 인간은 그 누구도 원초적으로 슬픈 짐승일 수 밖에 없으며 한없이 사랑하며 살아가기도 부족한 유한의 시간을 가진 존재가 아닌가 그러므로 다 같이 슬픈 짐승들끼리 부둥켜 안고 얼싸안고 미워하지 말고 신이 인간을 용서 했듯이 우리도 늘 용서하며 살자 미워하고 사는 일이란 우리를 더 슬픈 짐승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나는 누구를 미워 한 적은 없나 싶어서 이 밤 저 반짝이는 별빛들에게 구원처럼 용서를 구한다[문정완] 0시의 자오선 신용목   어제는 병실에서 자정을 맞고 오늘은   가로수 스치는 차창 안에서   자정을 지난다   그때, 휘익 내 몸을 긋고 간 것   어제와 오늘 사이   1초와 1초 사이, 나를 갈라놓는 것 ─ 별자리를 긋고 간 것   바람이 수북이 털을 깎는다 태양의 성기에서 쏟아지는 등고선 휜 능선 하나가 취한 망나니   단칼로 떨어지는 0시의 자오선,   이별은 그렇게 온다 죽음은   그렇게 0시   나와 나 사이의   별과 별 사이의   발자국마다 그 주인의 키로 서서 바람은 물끄러미 스러지는 순간들을 바라본다, 추억의 처형장인 몸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고   우주의 낱장이여, 안녕   시간의 단면이여 문을 닫는다 침대는 도마처럼 반듯하다 문짝과 문틈으로 누워   가만히 어둠 속에서 입을 벌린다   물속에서 물풍선을 터뜨리듯 ─ 내 속의 어둠을 풀어놓는다   아무래도 나는 부활할 것 같다 시집 《아무 날의 도시 중에서》 ㅡ시 노트ㅡ 시를 올려놓고 시간관계상 이 시는 시노트를 작성해야지 하면서 작성하지 못했다 조금 시간의 틈을 내서 늦게 시노트를 매단다 신용목시인은 거창출신의 시인이다 전형적인 농경사회에서 산과 들을 뛰어 다니며 어린시절을 보냈고 좋은 산과계곡 그리고 당시의 농경사회의 가난한 환경을 바라보며 체험하며 자라났다고 보인다 그러한 환경적 요소들이 이시대에 좋은 시인을 만드는데  좋은 토양으로 역활을 하며 기여하지 않았나 싶다 0시의 자오선은 한 행성을 발자국을 추적하며 시인 특유의 작법과 감각적 언어로 시를 짜고 있다 신용목시인의 시집에서 시어를 잘 살펴보면 옛날에는 많이 사용했는데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언어들로 시를 바느질 한다  한편의 시에 보통 한 서너개쯤의 시어들이 정말 시의 몰입도 를 높이고 독자를 시 속으로 흡수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다  필자를 자처하는 나도 신용목의 그러한 점에서 매료되기 시작했고 그에게 대책없이빠져드는 계기가 되었다 아직 젊은 시인인데 어떻게 그러한 시어들을 알고 적절하게 시의 영역으로 그 시어들을 데려와 조합을 하는지 그만의 언어로 시를 조탁하는 솜씨는 그가 정말 진짜 시인이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발자국마다 그 주인의 키로 서서 바람은 물끄러미 스러지는 순간들을 바라본다, 추억의 처형장인 몸                         ㅡ0시의 자오선 전문 중ㅡ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오선을 가진 행성이다 그리고 인간은 추억을 저장하는 창고가 있다 0시의 자오선은 한 행성의 궤도를 추적하며 명암을 그려놓고 있다 행성은 그 행성의 고도와 궤적에 따라 그 빛의 명암은 극명할 수 있다 한국문단에 걸출한 젊은 시인들이 요즘 많다 문학도로서 좋은 시인들이 많다는 것은 한국문학의 발전을 위해서도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또한 문학도로서 좋은 경쟁자가 있다 좋은 스승이 있다는 것은 진정 행복한 일이다 생각한다 또한 내가 넘어야할 벽이 있다는 것은 좌절이 아니고 온전한 기쁨이다 아직 이름없는 늦깍이 문청에 지나지 않으나 벽이 있어서 나는 늘 행복하다 아무래도 나는 부활할 것 같다[문정완] 산책자 보고서 신용목   어쩌면 허기진 쪽으로 기울어져 가는 지붕의 망치질 소리로 비가 온다 지붕을 뚫지 못해 빗방울은 대신하여 빗소리를 집 안으로 내려보낸다   이제는 그만 굴러 떨어지고픈 그림자를 간신히 붙들고 있는 비탈의 오래된 집   끓는다는 말 속에는 불꽃의 느낌이 숨어 있다 비 오는 날 지붕이 끓는 것처럼 냄비 바닥의 불꽃 속에 숨어 있는 빗소리의 느낌을 라면 가닥으로 삼킨다는 말 속에는 또 비처럼 흘러내는 몸의 느낌이 있다   나의 몸은 비를 대신하여 집 안에 고여 있다   나는 비의 느낌으로 숨어 있다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한사코 지붕에 부딪치는 빗방울을 지운다 바닥에 누운 나는 한사코 바닥에 차는 빗소리를 지운다 빗방울의 시간은 빗소리의 시간보다 더 멀리 있어서 빗소리의 시간은 나의 시간보다 더 멀리 있어서 나는 온통 허기일 뿐 하루는 그 간격을 오가는 시간으로 더 먼 곳의 시간들을 지우고 있다   산책은 자전의 느낌이다 하루를 대신하여 라면을 먹고 나는 나를 지웠다 시간의 반대편으로 뻗는 그림자로부터 간신히 몰락을 지우는 망치질까지   나는 모든 말의 느낌으로 살아 있다 1974년 경남 거창 출생 서남대학교 국문과 졸업 2000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 『아무 날의 도시』등 ㅡ 시 노트 ㅡ 신용목시인은 한국문학계에 주목 빋고 있는 대표적인 젊은 시인 중에 한사람이다 대체적으로  이미지와 이미지를 조합하여 시를 직조하는  방식이 촘촘하면서도 맥놀이가 긴 울림통을 가지고 있다 신용목 시인의 시  편들은 쉬운 듯 하면서도 어렵고 다양한 시적 이미지를 연결고리로 사용하여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설계 방식으로 시의 구조물을 설계한다 독자에게 시인의 시는 강력한 문학적 마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지구의 소유자가 아니고 잠시 산책을 나온 한시적 인 관람객에 지나지 않는다 하는 지점에서 이 시는 발아를 시작한다 유한적 존재론의 모퉁이에서 산책자라는자아를 통해 그 자아의 정서와 충돌하는  현실세계와 부딪치면서 발생하는 삶에 대한 노래를 빗소리와 비 망치질 지붕 기울어져가는 집 등등의 상징적  언어들로 재구성 재편성하여 신용목만의 시세계를 펼치고 있다 산책자 보고서는  인간의 유한적 존재론에서 파생하는 유물론적인 변증법을 기반으로 절제된 언어 그리고 심층적이고도  감성을 흔드는  시어들과  비유를 통하여 삶의 그늘을 들추고 내면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나는 오늘 모든 말의 느낌으로 살아있다 / 결구의 마감질은 역설적으로 고난의 실체를 통해서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현실세계의 체감 온도를 대변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지구별의 산책자다  산책자 보고서 시 한편을 통해서 내안에서 범람하고 있는 부호들과 자주 조우한다 [문정완]    
45    한국시 (7)(황광주 시) 댓글:  조회:363  추천:0  2019-11-30
불랙커피 한잔이면 충분해 한기봉 ​ 어느 여행지 카페의 넓은 테라스 낡은 턴테이블의 음악에 몰입된 시간 너머 첫사랑 순정의 꽃잎이 잊힌 계절의 보푸라기처럼 나뒹군다. ​ 퇴색한 잎의 주름위로 아직 다 피지 못한 국화꽃 한 무더기 실눈 뜨는 모습 애상에 눈을 뜬 연인들의 어깨너머로 반쯤 기운 가을의 어림이 애젓하다. ​ 불에 탄 종이처럼 날리다 재가 되는 나뭇잎 따스했던 온기는 식어가고 울고 웃던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갈 때 ​ 하얀 바람의 빗질에 떨어지는 마지막 잎새의 처연한 이별쯤이야 낯선 여자의 향기와 블랙커피 한잔이면 충분하겠지 ​ 아, 가을보다 예쁜 애인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주량 봉윤숙 아버지에게 뺨을 맞고 처음 술을 마셨다 엄격한 손바닥 하나가 붉게 손상되자 자꾸 헛소리가 나왔다 아버지는 내 속에 들어와 비틀거리며 자꾸 울려고 한다 부계를 살피면 정승도 부자도 없지만 허름한 탁자와 술잔은 없다 술을 마시면 늘 친구를 잃어버리는 아버지는 엄마의 잔소리를 어느 곳에 감춰놓고 밤새 마을을 돌아다녔다 심지어 술 취한 자신을 친구라 굳게 믿었다 어쩌다 비틀거리는 비밀을 세상천지에 풀어놨을까 집안에서는 절대 권력을 가졌지만 소주 하나에 안주 하나만 시켜놓으면 다 들통날 서글프고 빈약한 비밀들을 왜 함부로 들이켰을까 아버지에게 맡겨놓았던 미성년 찾아오던 날 아버지는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 나는 아버지를 못 견디고 결국 집 앞에 당도해 아버지를 토하고 말았다 누구나 어느 시절의 행동들을 온전히 이해하려 하듯 비틀거리는 중심에서 걸어 나오는 아버지의 누추하고 쓸쓸한 주량 알 것 같다 아버지, 기분 좋았던 일생이 이렇게 허름한 가격이었다는 것 소주에 김치 쪼가리 하나밖에 안 되는 빈약한 가격이라는 것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주량이 있다 봉윤숙 시집 『꽃 앞의 계절』, 《한국문연》   애첩愛妾을 바꾸다 이인처럼 1 이제사 솔직히 고백하노니, 제법 아랫도리가 튼실해갈 무렵부터 곁에 애첩 하나 끼고 지금까지 살아왔다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늘 붙어 다니던 수족이나 다름없는 년이었지만 일갑자 나이를 넘기고서부터 노화가 안방마님처럼 퍼질러 앉아 벼라별 주접을 떨기 시작하더군 이목구비가 날로 쇠잔해진다 싶더니 오장육부도 따라 나서기 시작했고 팔 다리에 힘이 빠지니 윗도리 아랫도리 가릴 것 없이 신통찮아 년과 둘만 있는 시간이 거북해지고 성가신 생각마저 들게 했다네 더욱이 소일거리 삼아 새로 얻은 스마트한 색시에 빠지고나서 부터는 년은 내 안중을 차지하지 못한 것은 물론 가급적 기피하려는 중이기도 했지 차라리 가까운 일을 보는 것은 년이 없는 게 오히려 수월하고 맘이 더 편하더군   2 내 눈에 쏙 들어온 애첩을 새로 바꿔야했다 그녀의 허리가 졸지에 두동강나는 바람에 나에겐 수족이나 다를 바 없는 그녀도 난데없이 부러진게 아니라 주인인 나의 꼬락서니를 닮아 노화가 암암리에 진행되었을 게 틀림없다 그녀의 허리를 고쳐주려고 입원시켰다 완치하는데 한 보름 소요된다고 전문의(?)는 진단을 내렸고 나를 수발하느라 고생께나 한 그녀를 차마 헌신짝처럼 내동댕이 칠 수 없어 주저없이 수속을 끝냈다 아마도 그녀는 완치가 된다해도 약해빠진 그 허리로는 다른 년에게 쓸모가 밀려 본래의 제 기능이나 역할을 못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녀는 이제 권번에서 쫓겨난 퇴기처럼 유사시에만 내 눈을 시중들게 될 것이다 안경이라 불리는 그녀도 갈수록 신체기능이 떨어져 노화를 실감하는 나처럼 불현듯이 가버린 세월이 서러울까 생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밀려난다는 것은 아무에게나 서글픈 일이다   감자 송편 / 김 승 썩어야지 푹푹 썩어 무른 살은 악취와 함께 날아가고 곱게 부서진 뼈만 모여야지 꿈을 꿔야지 푹푹 썩고 난 뒤에 오는 세상을 그 아름다운 뼈들의 반란을 검은 뼛가루끼리 뭉쳐서 단단하게 뭉쳐서 넓은 세상을 만들고 살아서 허기진 배를 곱게 빻은 깨와 콩과 달콤한 설탕으로 가득 채워 봐야지 원 없이 먹어 봐야지 든든히 먹고 찜질방 같은 가마솥에 누워 다시 쓰는 역사를 꿈꿔야지    중고가전 수거 차량처럼  신용목    비온 뒤 지구는 커다란 비눗방울 속에 갇힌 것 같다. 울고 난 뒤 너는 너만큼의 비눗방울 속에 갇힌 것 같다.   차 마실래?   아니,   아무도 저어주지 않아서   물고기는 어항 속을 저 혼자 빙빙 돈다.    물고기는 녹지 않는다.   아픈 사람의 입술에 물려주는 젖은 헝겊처럼 빨래가 널려 있다. 빨래는 어항 같다. 아무도 마시지 않는다.   소리가 들린다. 차들이 왔던 길을 가는 소리.   물속처럼,   너는 오후를 조용히 보낸다.   후후, 불며 졸음이 졸음을 마시는 동안에도 옷은 조금씩 빨랫감이 되어간다.   책을 펼치고 어떤 문장도 읽지 않는다.   그래도    책 속에는 사랑이 있다. 이야기는 사막이거나 바다.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기 위해 폭풍우를 건너는 낙타가 있고, 죽어버릴 거야. 문을 쾅, 닫고 나가서는 어느 모퉁이 식당에서 국수를 삼키는 순간이 있고    책 속에도,   책처럼 조용한 사람이 있다.   끝.   창문을 닫으려고 창가로 간다.   너머엔 학교가 있다. 여름이 운동장에 물길을 만들고 사라진 뒤 아이들은 다시 빗방울처럼 돌아올 것이다. 팔, 구, 사, 오, 전화번호를 크게 알리며 중고가전 수거 차량이 지나간다.   어항은 식었다.   사랑의 이율배반  이정하 그대여 손을 흔들지 마라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떠나는 사람은 아무 때나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겠지만 남아 있는 사람은 무언가 무작정 기다려야만 하는가 기약도 없이 떠나려면 손을 흔들지 마라   세상 사는게 다 그런거는 아닌데 / 황광주 모든 일들이 마음먹기 나름인데 마음한번 시원하게 갖으면 될 일인데 그게 그렇지 않은게 문제야. 모든게 나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상대방의 마음은 내가 이해할 수 있을 때 그때가 되서야 조금 놓아주는 그게 그럴 수 밖에 없는게 문제야. 요동쳤던 가슴들이 진정해야 할 그런 시간도 필요하고, 쓰리고 아프지만 덤덤한척 태연히 흘려보내야 할 시간도 필요해. 누구도 알아주지 않은 무심함에 나 혼자서 감내해야 할 짐을 나 혼자서 밖에 풀지 못한다는거 그게 혼자여서, 혼자여서라는게 문제야. 세상 사는게 다 그런거는 아닌데.   낙엽 엄마 아버지는 늘 타이른다 머리를 숙이고 살거라 하늘로 날아 갈 낼개가 있어도 바닥으로 떨어지는 까닥은 땅이 하늘보다 가까워서가 아니다 유전자는 기계적 공식으로 대를 잇는다 가까운 것을 더 가깝게 번식시키는 하나의 죽은 방정식이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몰랐다 어느 순간에 생기는 반골은 하늘이 가깝다고 고집해서 일까 고집이란 살아가는 유희이다 땅과 하늘의 거리에 기어코 고개숙이는 외로움도 햇빛과 아귀다툼한 것은 아니다 그냥 떨어지는 자유낙하에 풀어 버린 손맥에는 법이 따로 없다 김삿갓이 걸어가는 뒷모습이다 ㅡ ㅡ 생각없이 적어 봅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 황광주 봄비 오는 아침에 길가 벚꽃나무는 벌써 꽃잎 젖어 떨어지더이다. 봄 기다리는 지친마음들이 어디 나 뿐이겠소만 봄이 왔어도 봄이 온 거 같지 않네.   나의 기도   / 황광주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심은, 아직도 젊은 마음으로 내일을 향해 걷고 있는 여린마음에 희망이 있다는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삶을 재 인식하고 제게 주신 가치를 잊지않게 하심으로 앞으로의 삶 또한 더욱 더 소중히 하라는 깊은 뜻으로 믿습니다. 오늘을 함께 하고 있는 제 주변의 모든이에게 진정 감사하는 그런 하루가 되게 하소서.   추억이 내게 남은 방법 / 황광주 가 걸었던 그 길가에 나무들이 바람속에 흔들리며 손짓하네. 아련해진 기억들이 나뭇잎소리에 하나 둘씩 다시 찾아 오는데 초점없이 다가오는 낯익은 풍경은 나 어릴적 고향으로 변해가네. 내가 걸었던 그 길가의 추억들이 한자락꿈 기약없던 약속인데 이제와서 풋내나는 거친 숨소리로 하나 둘씩 다시 돌아오네. 선명해진 기억들에 하나 더 있어 나 어릴적 동무의 반김이었네. 지금은 그 모두가 함께 하지 못하고 서로가 새롭게 만들었던 세상속에서 추억은 빛나는 별 하나로 남아있으리.   ​하룻밤에 만리장성 쌓는다고?    중국의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을 때였다. 요조숙녀 새색시는 신혼생활 한 달여 만에 남편이 징용을 당했다. 한번 끌려가면 공사가 끝나기 전에는 나올 수가 없었다. 만리장성을 쌓는 일이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었다.   새색시는 시집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일을 당했다. 아이가 없어 외딴집에 혼자 사는 데, 선비차림의 나그네가 찾아들었다.   "갈 길은 멀고 날은 저문데 인가라고는 이 집밖에 없으니 헛간이라도 무방합니다. 하룻밤만 묵어가게 해 주십시오"   정중하게 부탁을 하는 데도 여인은 아녀자 혼자 살기 때문에 과객을 받을 수가 없다고 거절하였다.   여인이 저녁식사를 마치고 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언제 들어왔는지 선비는 다시 말을 걸었다. “보아하니 외딴집에 혼자 사는 모양인데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이 분명하외다. 여인은 숨길 것도 없고 해서 남편이 부역가게 된 사정을 말했다. 선비는 가지 않고 노골적으로 수작을 걸었다.   “이렇게 살다가 죽는다면 너무 허무하지 않소?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린들 무슨 소용이요. 우리는 아직 젊지 않습니까? 내가 책임을 질 테니 멀리 도망가서 함께 삽시다.”   사내는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깊은 밤 인적도 없는 외딴집에서 여인 혼자서 뿌리치는 것은 무리였다. 그전에 한 가지 부탁을 들어달라고 하며 조건을 걸었다. 그러자 사내는 어떤 부탁이라도 다 들어줄 테니 말해보라고 했다. 여인은 일단 사내의 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부부간에도 거역할 수 없는 정리가 있습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고 해서 그냥 당신을 따라 나설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남편의 속옷을 싸 드릴 테니, 갈아입도록 전해주시오. 그리고 증표로 잘 받았다는 글 한 장만 받아 오십시오.   어차피 살아서 만나지 못할 남편에게 수의를 마련해주는 뜻으로, 내복이라도 한 벌 지어 입히고, 당신을 따라 나서면 마음이 홀가분할 것 같습니다. 만일 돌아오시면 평생을 당신에게 의지하고 살 것입니다.“   사내는 내심 반가웠다. 듣고 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어서. 그렇게 하시지요. 이들은 마침내 합방을 하였다.   흔드는 기척에 사내는 늦게야 잠에서 깨었다. 젊은 여자의 고운 얼굴이 아침 햇살을 받아 선녀처럼 예뻐 보였다. 잠결에 보아도 양귀비가 따로 없다.   이런 미인과 평생을 같이 살수 있다면, 하는 기대와 함께, 황홀감에 간밤의 피로도 잊고 벌떡 일어났다. 여인은 장롱 속에서 속옷을 꺼내 보자기에 싸서 사내 봇짐에 넣어주었다.   사내는 부지런히 걸어 부역장에 도착했다. 감독하는 관리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다.   감독관이 말하기를, 옷을 갈아입히려면 그자를 공사장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데 ‘한 사람이 나오면 그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옷을 갈아입을 동안 잠시 교대를 해줘야 한다고 했다.   사내는 관리가 시키는 대로 옷 보따리를 여인의 서방에게 건네주면서, 옷부터 갈아입으세요! 그리고 부인의 요청대로 편지 한 장 써서 주시고. 빨리 돌아와야 합니다. 말을 마친 사내는 별 생각 없이 터벅터벅 난생 처음 보는 공사장으로 들어갔다.   남편이 보자기를 펼치자 옷 속에서 꼭꼭 접은 편지가 나왔다.   “아내 언년입니다. 당신을 공사장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이 옷을 전한 남자와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이런 연유로, 외간 남자를 받아들인 저를 평생 허물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서시면 옷을 갈아입은 즉시 집으로 돌아오시오. 혹시라도 그럴 마음이 없어 저의 허물을 탓하시려거든 그 남자와 교대해서 공사장으로 도로 들어가십시오.”   새 옷으로 갈아입은 남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길로 아내에게 달려갔다. 다음 이야기는 말 안 해도 다 안다.   만리장성 공사현장에는 언젠가부터 실성한 사람 하나가 돌아다니는데. 혼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어보니. “하룻밤 밖에 못 잤는데, 하룻밤 밖에 못 잤는데...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   우표 한 장 붙여서 천양희 꽃 필 때 널 보내고도 나는 살아남아 창 모서리에 든 봄볕을 따다가 우표 한 장 붙였다 길을 가다가 우체통이 보이면 마음을 부치고 돌아서려고 내가 나인 것이 너무 무거워서 어제는 몇 정거장을 지나쳤다 내 침묵이 움직이지 않는 네 슬픔 같아 떨어진 후박잎을 우산처럼 쓰고 빗속을 지나간다 저 빗소리로 세상은 여위어가고 미움도 늙어 허리가 굽었다 꽃 질 때 널 잃고도 나는 살아남아 은사시나무 잎사귀처럼 가늘게 떨면서 쓸쓸함이 다른 쓸쓸함을 알아볼 때까지 헐한 내 저녁이 백년처럼 길었다 오늘은 누가 내 속에서 찌륵찌륵 울고 있다 마음이 궁벽해서 새벽을 불렀으나 새벽이 새, 벽이 될 때도 없지 않았다. 그럴 때 사랑은 만인의 눈을 뜨게 한 한 사람의 눈먼 자를 생각한다 누가 다른 사람 나만큼 사랑한 적 있나 누가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나 말해봐라 우표 한 장 붙여서 부친 적 있나 ●  '피아노' 외 3편 / 최하연 눌러도 소리가 나지 않는 건반을 책상 위에 그려놓고, 가만 귀 기울이고 있어요, 당신의 소원은 검은건반에서 뛰어내리는 것, 그리하여 일생일대의 화음으로 나를 부활시키는 것, 당신의 경전마다 엉터리 활자를 찍어놓고, 페이지를 봉인하고 있어요, 나는 나의 다음 페이지가 무조건 될 수 없다는 것, 우주를 한 바퀴 돌아 신발을 벗으며 '그것 참,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당신이 떨어지고 있는 바로 그 순간, 나도 당신이 있던 그곳을 향해 뛰어오를 수 있다면, 당신의 멈칫함이 나를 일깨우는 바로 그 주문이길, 두들겨라, 두들겨라, (나의 건반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요) 나의, 나를 위한 마침표는, 언제나 나의 시작 전에 찍히고 있어요, 도돌이표 마디마다 당신은 돌아오고 있겠지요, 가로지르는 모든 것들로 하여금, 당신을 향한 나의 좌표를 잃게 만들고 싶어요, 당신은, 또다시 그 높은 절벽, 검은건반에 올라서서 눈을 감고 있네요, ●  '물구나무의 태몽' 오사카에서 베를린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기다리다 심심해서 낚시를 했다, 강물은 묽은 색이었다, 낚시를 하던 나는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된다, 그러니까 오사카는 베를린에서의 추도식에 참가하기 위해 경유해야 할 곳, 오사카의 공원엔 오사카의 벚꽃이 피고 난 천삼백 원짜리 와플을 받아들고 비행기를 놓친다, 내 낚싯대엔 바늘이 없다 전화기를 열었다, 아무개 선생님 전화입니다, 지금 선생님은 베를린에 계신데 말씀을 남겨주시면, 성가대는 한 옥타브나 낮은 예배송을 불렀다, 추도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합동 장례식이 추도식과 한 날 한 시에 열렸다, 낚시 동호회 사람들은 검은 장화를 신고 있었다 마침내 줄을 물고 올라온 물고기, 급하게 잡아 탄 택시엔 기사도 없고 안전벨트도 없고 이번에도 또 출발하지 못했다, 공항은 바다 건너 있고 램프 없는 대교 위에선 아무도 바깥으로 나가지 못했는데, 잡힌 물고기는 오래된 위생 랩을 친친 감고 있었다 랩을 푸는 동안 비행기가 왔다 가고, 할 일 없어진 나는 정성껏 랩을 풀어 물고기를 바다에 던진다, 용광로의 슬래그처럼, 물고기가 가라앉는다, 그런데 이 전화기의 주인은 누구지? 생각하는 동안 네모난 집에서 나와 동그란 집으로 이사를 한다, 이글루는 덥고 움막은 춥고 망루는 높아 스스로 동그란 집에서 쫓아낸다, 오사카엔 꽃이 피고 베를린에선 전화기의 주인이 아직도 참회 중이다   ●  '물구나무 빌라' 어둠도 아래층에 있다 망치를 쥐고 무엇을 때려야 할까 복층으로 된 어둠 속에 버스를 풀어놓는다 어둠이 기워놓은 어둠을 입고 버스에 올라탄다 이 버스는 어디로 가는 걸까 어둠을 세 논 주인을 만나야겠다 임시고정용 스프레이 풀과 색종이를 싸들고 소풍을 가야겠다 아래층 고양이 고양이는 밤눈이 어둡다 띄어쓸 수 없는 어둠도 있다 그 안엔 쉽게 잘라 쓸 수 없는 허방이 있다 허방 속엔 말라가며 비명 질는 치자꽃이 있다 가위를 들고 무엇을 잘라야 할까 복층으로 된 어둠 속에 수초들을 풀어놓는다 수초 속에는 눈먼 물고기들이 있다 내일은 수초의 망막을 제거해야겠다 갈아입을 옷 하나 없는 어둠과 아무것도 차리지 않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다 내가 삼키고 있는 어둠이 내 다리를 뜯는 어둠의 손을 꼭 잡고 있다 너무 먼 거리를 돌아와 쥐가 난 종아리가 그들의 위장 속에 있다 어둠 한 숟갈 덜어내고 남은 자리에 누워 어둠과 oo하고 싶다 ● '포도밭' / 최하연 밤새 신발이 작아졌어 발이 자랐나봐 사원증을 단 여자 사람이 사원증을 단 여자 사람에게 말한다 신발이 작아진 것이 신발 탓이 아닌 세계로 신세계 식품관 봉투를 든 여자 사람이 들어온다 밤의 저수지엔 다리 저는 붉은 홍학이 살았고 저수지가 벗어놓은 신발 한 짝엔 깊고 비린 어둠이 자라고 있었지 신발장 안에 저수지가 살아요? 그래서 목마른 짐승들이 신발장으로 모여드는군요 알에서 알이 깬다 와인에서 포도 싹이 난다 병아리들이 봉투에서 기어나와 옆자리의 드라마 속으로 들어간다 돌도끼를 든 사내들이 그 옆자리에서 튀어나와 포도밭으로 들이닥친다 까마귀가 사내들을 실어나른다 저수지 수면에 기록된 새떼의 표류기를 강독하는 우리 아빠가 마법사라구요? 객차와 승강장 사이가 멀어서 밤새 발이 자랐는데도 건널 수가 없다 새벽엔 몸이 무거워 관절은 관절마다 꺾이겠죠 문이 열리고 문이 닫히고 사원증을 달지 않은 여자 사람이 사원증을 달지 않은 여자 사람에게 말한다 밤새 신발이 작아졌어 미친 거 아님? ⊙최하연/ 1971년 서울 출생. 2003년 제3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당선. 시집 『피아노』(2007. 11 문학과지성사) ------------------------- 최하연은 언어에 대한 특별한 자의식을 바탕으로 시적 언어의 극한이 어디로 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인이다. 이는 언어의 세계와 사물의 세계 사이를 연결해주는 통로로서 시가 얼마나 제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회의하는 일에서부터 비롯되거니와, 이러한 자의식으로 인해 시는 세계를 우리의 인식장 앞으로까지 내밀하게 당겨오는 언어이면서 동시에, 세계를 우리의 혀 바깥으로 밀어내는 언어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끝없이 언어의 그물 바깥으로 도망치는 세계와 이를 포획하려는 언어 사이의 물고 물리는 추격전 도중에 최하연의 시는 돌연 어떤 특이한 영역으로 공간 이동을 감행한다. 그렇게 시가 도착한 곳은, 가장 가깝게 있다고 여겨진 대상이 실은 가장 먼 곳에 위치하고, 반대로 가장 멀리 존재한다고 느껴진 타자가 실상 내 안의 가장 깊숙한 갈비뼈 같은 곳에서 칼을 품고 있는(“너는, 다시, 내 늑골 깊숙이, 칼을 숨기고”), 치명적인 시공간이다. 이러한 괴이한 관계는 ‘언어’와 ‘세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연인과의 사랑이 이와 닮지 않았는가. ‘피아노’는 이러한 언어의 문제를 사랑의 문제로까지 확장시킨 매력적인 시이다. 이 시에서 당신과 나는 각각 반음을 사이로 두고 피아노의 건반 위에 서 있다. 건반이라는 다분히 규정적인 세계 안에서 당신과 나는 가장 가까운 위치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이나, 실상 음과 반음 사이에는 또 다른 음의 분할선들이 무한하게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랑하는 당신과 나 사이는 때로 “우주를 한 바퀴 돌아”야 할 거리로 느껴질 수도 있다. 가깝기에 도리어 그토록 아득한 너와 나 사이의 간격으로 인해, “그것 참”이라는 허탈한 고백을 내뱉을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생일대의 화음”으로 나와 당신을 연주하고 싶다는 욕망만은 지칠 줄 모르는 것이기에, 우리의 사랑은 “도돌이표”라는 법칙에 따라 오늘도 검은건반 위에 올라 기꺼이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여, 이 영원할 것 같은 찰나의 낙차를 감당하려는 세상의 모든 연인들이여, 두들기자, 두들기자.  (강동호 문학평론가)   한계 천양희 한밤중에 혼자 깨어 있으면 세상의 온도가 내려간다. 간간이 늑골 사이로 추위가 몰려온다. 등산도 하지 않고 땀 한번 안 흘리고 내 속에서 마주치는 한계령 바람소리 다 불어 버려 갈 곳이 없다. 머물지도 떠나지도 못한다. 언 몸 그대로 눈보라 속에 놓인다.  소화    천양희     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서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너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 천양희, 「밥」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다 천양희 마음 끝이 벼랑이거나 새로울 것 없는 하루가 지루할 때마다 바람이라도 한바탕 쏟아지기를 바랄 때가 있다 자기만의 지붕을 갖고 싶어서 우산을 만들었다는 사람을 떠올릴 때마다 후박잎을 우산처럼 쓰고 비바람 속을 걸어가던 네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별명이 '바람구두를 신은 사나이' 랭보를 생각할 때마다 바람은 그리워하는 마음들이 서로 부르며 손짓하는 것이라던 절절한 구절을 옮겨 적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울지 않는 바람이라고 다른 얼굴을 할 때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던 죽은 시인의 시를 중얼거릴 때가 있다 여러 번 내가 나를 얻지 못해 바람을 맞을 때마다 바람 속에 얼굴을 묻고 오래 일어나지 못할 때가 있다 이 세상 어디에 꽃처럼 피우는 바람이 있다면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고 누가 말했더라 아무리 가벼운 바람이라도 그 속에는 뼈가 있다고 말한 이는 또 누구더라 바람소리든 울음소리든 소리는 존재의 울림이니까 쌓아도 쌓아도 소리는 탑이 될 수 없으니까 바람이여 우리가 함께 가벼워도 되겠습니까 오늘 밤에도 산위로 바람 부니 비 오겠습니다   참 좋은 말  천양희 내 몸에서 가장 강한 것은 혀 한잎의 혀로 참, 좋은 말을 쓴다   미소를 한 육백개나 가지고 싶다는 말 네가 웃는 것으로 세상끝났으면 좋겠다는 말 오늘 죽을 사람처럼 사랑하라는 말   내 마음에서 가장 강한 것은 슬픔 한줄기의 슬픔으로 참, 좋은 말의 힘이 된다   바닥이 없다면 하늘도 없다는 말 물방울 작지만 큰 그릇 채운다는 말 짧은 노래는 후렴이 없다는 말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말 한송이의 말로 참, 좋은 말을 꽃피운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같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란 말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는 말 옛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꾸 온다는 말   새가 있던 자리 / 천양희 잎인 줄 알았는데 새네 저런 곳에도 앉을 수 있다니 새는 가벼우니까 바람 속에 쉴 수 있으니까 오늘은 눈 뜨고 있어도 하루가 어두워 새가 있는 쪽에 또 눈이 간다 프리다 칼로*의 『부서진 기둥』* 을 보고 있을 때 내 뼈가 자꾸 부서진다 새들은 몇 번이나 바닥을 쳐야 하늘에다 발을 옮기는 것일까 비상은 언제나 바닥에서 태어난다 나도 그런 적 있다 작은 것 탐하다 큰 것을 잃었다 한 수 앞이 아니라 한치 앞을 못 보았다 얼마를 더 많이 걸어야 인간이 되나 아직 덜 되어서 언젠가는 더 되려는 것 미완이나 미로 같은 것 노력하는 동안 우리모두 방황한다 나는 다시 배운다 미로 없는 길 없고 미완 없는 완성도 없다 없으므로 오늘을 눈 뜨고 있어도 하루가 어두워 새가 있는 쪽에 또 눈이 간다 어디에나 나를 지켜보는 새의 눈이 있다   *프리다 칼로: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여성 화가. 교통사고로 수차례 수술을 받은 후 느낀 삶의 아픔을 미술 작품으로 드러냄. *『부서진 기둥』: 프리다 칼로가 자신의 처절한 고통을 형상화한 작품. ㅤ   우리 같은 사람들 / 천양희 내가 사는 아파트 경비원이 시집 한 권 달래서 드렸더니 우리 같은 사람들 얘기가 없다고 한다 우리 같은 사람들? 나는 놀라서 우리 같은 사람들 말고 울 같은 울타리 같은 사람들이라고 고쳐 써 본다 어떤 울림이 울을 넘어 넘실거린다 몇 줄의 문장이 한 사람의 구구절절을 옮겨적는다 시 쓰는 동안 나는 아직 사람을 모른 것이다 인파 속에 사람이 부대끼는 줄 모르고 물결 속에 물방울이 흩어지는 줄 몰랐다 세상에는 좋은 일 나쁜 일이 있는게 아니라 이런 일 저런 일 있다는 걸 몰랐다 모르면서 모를 때마다 텅빈 몸이 텅텅거린다 문득 이게 나라는 생각 우리 같은 사람들이란 생각 『시로 여는 세상』 2018년봄호 ㅤ글자를 놓친 하루 / 천양희 어느 시인의 시집을 받고 정진하기를 바란다는 문자를 보낸다는 것이 'ㄴ' 자를 빼먹고 정지하기를 바란다고 보내고 말았다 글자 한 자 놓친 것 때문에 의미가 정반대로 달라졌다 'ㄴ'자 한 자가 모자라 신(神)이 되지 못한 시처럼 정진과 정지 사이에서 내가 우두커니 서 있다   ㅤ하루 ​ 천양희 ​ 오늘 하루가 너무 길어서 나는 잠시 나를 내려놓았다. 어디서 너마저도 너를 내려놓았느냐. 그렇게 했느냐. 귀뚜라미처럼 찌르륵대는 밤 아무도 그립지 않다고 거짓말하면서 그 거짓말로 나는 나를 지킨다. ​     너에게 쓴다 - 천양희 꽃이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꽃이 졌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길이 되었다 길 위에서 신발하나 먼저 다 닳았다 꽃 진자리 잎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잎 진자리 새가 앉는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내 일생 되었다 마침내는 내 생 풍화되었다   추억 / 천양희 포도는 익으면 향기를 낸다. 향기 속에 포도밭의 추억이 있다. 벼는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 벼 잎 속에 들판의 추억이 있다. ​ 꽃은 만발하면 꽃잎을 떨어뜨린다. 꽃잎 속에 꽃밭의 추억이 있다. ​ 사람은 나이 들면 주름이 진다. 주름 속에 사람의 추억이 있다.   - 시인 백석과 자야의 사랑이야기 일제시대 시인 백석은 천재적인 재능과 훤칠한 외모로 당시 모든 여성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설에 의하면 그가 길을 지나가면 여인들이 자지러졌을 정도라 했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인, 기생 김영한 과의 러브 스토리는 '로미오와 줄리엣' 만큼이나 가슴이 애린다. 백석은 함흥 영생여고에서 영어교사로 재직 하던 1936년, 회식 자리에 나갔다가 기생 김영한을 보고 첫 눈에 반하게 된다. 이 잘 생긴 로맨티스트 시인은 그녀를 옆자리에 앉히고는 손을 잡고, "오늘부터 당신은 영원한 내여자야.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기 전까지 우리에게 이별은 없어."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백석은 이백의 싯귀에 나오는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김영한에게 지어줬다고 한다. 그렇게 둘은 첫눈에 사랑에 빠져 연인이 된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도 장애물이 등장한다. 유학파에, 당대최고의 직장인 함흥영생여고 영어선생 이었던 백석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탐탁치 않게 여겼고, 강제로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켜 둘의 사랑을 갈라 놓으려 한다. 백석은 결혼 첫날밤에 그의 연인 자야에게로 다시 돌아간다. 그리고 자야에게 만주로 도망을 가자고 제안한다. 그렇지만 자야는 보잘것 없는 자신이 혹시 백석의 장래에 해가 되진 않을까 하는 염려로 이를 거절한다. 백석은 자야가 자신을 찾아 바로 만주로 올 것을 확신하며 먼저 만주로 떠난다. 만주에서 홀로된 백석은 자야를 그리워하며 그유명한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짓는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내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즈녁히 와서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내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그러나 잠시동안 이라고 믿었던 이별은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만다. 해방이되고  백석은 자야를 찾아 만주에서 함흥으로 갔지만 자야는 이미 서울로 떠나버렸다. 그 후 3.8선이 그어지고 6.25가 터지면서 둘은 각각 남과 북으로 갈라져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된다. 이후 백석은 평생을 자야를 그리워하며 북에서 1996년 사망한다. 남한에 혼자 남겨진 자야는 대한민국의  3대 요정 중 하나인 대원각을 세워 엄청난 재력가로 성장한다. 훗날 자야는 당시 시가 1,000 억원 상당의 대원각을 조건없이 법정 스님에게 시주한다. 그 대원각이 바로 서울 성북동에 위치한 사찰 '길상사'이다. 평생 백석을 그리워했던 자야는 폐암 으로 1999년 세상을 떠난다. 그녀가 떠나기 전 1000억원 상당의 재산을 기부했는데 아깝지 않냐란 기자의 질문에 자야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1000억 재산이 그 사람 시 한줄만도 못해."  "내가 죽으면 화장해 길상사에 눈 많이 내리는 날 뿌려달라." 고 하니 백석의 시처럼 눈이 푹푹내리는 날 백석에게 돌아가고 싶었나 보다. 그리움이 가을잎을 발갛게 물들이는 날이 무수히 지나도, 부지런히 싸리빚으로 쓸어논 깨끗한 비탈길위에, 첫눈이 양탄자처럼 쌓이는 새벽이오면....응앙응앙 가픈숨 몰아쉬는 흰나귀 타고 찾아올 자야를 기다리던 백석의 사랑에 가슴이 아리다. 사랑하지만 떠나야 하고 때론 그리워해도 만날수없는  많은 사람들중에... 우린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이있다는 큰 기쁨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더큰 욕심을 부리며 사는건 아닌지 반성해 봅니다. 오늘도 곁에 있어 행복한 사람들~^^*   고향 ㅡ ㅡ 백석 나는 북관에 혼자 앓어 누워서 어늬 아츰 의원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같은 상을 하고 관공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녯적 어늬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드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 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 씰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막역지간이라며 수염을 쓴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어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ㅤ 사랑의 이율배반  이정하 그대여 손을 흔들지 마라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떠나는 사람은 아무 때나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겠지만 남아 있는 사람은 무언가 무작정 기다려야만 하는가 기약도 없이 떠나려면 손을 흔들지 마라   편지  이성복   1 ​ 그 여자에게 편지를 쓴다 매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내 동생이 보고 구겨버린다 이웃 사람이 모르고 밟아 버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길 가다 보면 남의 집 담벼락에 붙어 있다 버드나무 가지 사이에 끼여 있다 아이들이 비행기를 접어 날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가져갈 때도 있다 한잔 먹다가 꺼내서 낭독한다 그리운 당신…… 빌어먹을, 오늘 나는 결정적으로 편지를 쓴다     2 ​ 안녕 오늘 안으로 나는 기억(記憶)을 버릴 거요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왜 그런지 알아요?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요 나는 선생이 될 거요 될 거라고 믿어요 사실, 나는 아무것도 가르칠 게 없소 내가 가르치면 세상이 속아요 창피하오 그리고 건강하지 못하오 결혼할 수 없소 결혼할 거라고 믿어요   안녕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편지 전해 줄 방법이 없소   잘 있지 말아요 그리운……   돌에 대하여  이성복 돌은 제 얼굴을 만질 수 없다 아, 얼마나 답답할까 돌은 제 그림자를 숨길 수 없다 아, 얼마나 난처할까 돌은 제 눈물을 삼킬 수 없다 아, 얼마나 서러울까 전에는, 전에는 ......돌은 더듬거린다 여기는, 여기는 ......돌은 두리번거린다 돌은 부딪쳐도 부서진 줄을 모르고, 돌은 으스러져도 제 피를 볼 수 없다.   그  여름의 끝  -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 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그날 이성복 그 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 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 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 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치는 노인과 변통의 다정함을 그 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 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 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꽃피는 시절   이성복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귀먹고 눈먼 당신은 추운 땅속을 헤매다 누군가의 입가에서 잔잔한 웃음이 되려 하셨지요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이 올 때면 먼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벗고 싶어 몸부림하지만 내게서 당신이 떠나갈 때면 내 목은 갈라지고 실핏줄 터지고 내 눈, 내 귀, 거덜난 몸뚱이 갈가리 찢어지고   나는 울고 싶고, 웃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켜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낼  테지만 부서지고 무너지며 당신을 보낼 일 아득합니다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 막막합니다 불탄 살가죽 뚫고 다시 태어날 일 꿈 같습니다   지금 당신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당신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막만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    시는 -캄캄한 인도하늘을 날으며  / 조병화 시는 공기처럼 우주 어디에나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걸 볼 수 있는 시인에게만 그걸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보고 감지할 수 있는 감성이 있고 그걸 처리할 수 있는 지성이 있고 그걸 말로 잡을 수 있는 재능이 있고 언어로 단단히 묶어 둘 지혜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언어로 단단히 묶어 둔 그 시를 아름답게 닦고, 다듬어서 고독한 영혼들에게 뿌려 주는 것이다 사막의 이슬처럼. 별처럼.   꿈 / 조병화 내 손길이 네게 닿으면 넌 움직이는 산맥이 된다 내 입술이 네게 닿으면 넌 가득찬 호수가 된다 호수에 노를 저으며 호심으로 물가로 수초 사이로 구름처럼 내가 가라앉아 돌면 넌 눈을 감은 하늘이 된다. 어디선지 노고지리 가물가물 먼 아지랑이 네 눈물이 내게 닿으면 난 무너지는 우주가 된다.   《2016 경향 신춘문예시 부문 당선작》 의자가 있는 골목- 李箱에게 변희수 아오? 의자에게는 자세가 있소 자세가 있다는 건 기억해둘 만한 일이오 의자는 오늘도 무엇인가 줄기차게 기다리오 기다리면서도 기다리는 티를 내지 않소 오직 자세를 보여줄 뿐이오 어떤 기다림에도 무릎 꿇지 않소 의자는 책상처럼 편견이 없어서 참 좋소 의자와는 좀 통할 것 같소 기다리는 자세로 떠나보내는 자세로 대화는 자세만으로도 충분하오 의자 곁을 빙빙 돌기만 하는 사람과는 대화하기 힘드오 그런 사람들은 조금 불행하오 자세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이오 의자는 필요한 것이오, 그런 질문들은 참 난해하오 의자를 옮겨 앉는다 해도 해결되진 않소 책상 위에는 여전히 기다리는 백지가 있소 기다리지 않는 질문들이 있소 다행히 의자에게는 의지가 있소 대화할 자세로 기다리고 있는 저 의자들은 참 의젓하오 의자는 이해할 줄 아오 한 줄씩 삐걱거리는 대화를 구겨진 백지를 기다리지 않는 기다림을 이해하오 이해하지 못할 의지들을 이해하오 의자는 의자지만 참 의지가 되오 의자는 그냥 의자가 아닌 듯 싶소 의자는 그냥 기다릴 뿐이오 그것으로 족하다 하오 밤이오 의자에게 또 빚지고 있소 의자 깊숙이 엉덩이를 밀어 넣소 따뜻하게 남아 있는 의자의 체온 의자가 없는 풍경은 삭막하오 못 견딜 것 같소 의자는 기다리고 있소 아직도 기다리오 계속 기다리오 기다리기만 하오 여기 한 의자가 있소 의자에 앉아서 보이지 않는 골목을 보고 있소 두렵진 않소 ​ 의자는 시를 낳는 성소…궁합 잘 맞는 난 행운아 이 세상에는 의자가 참 많다. 카페에도 도서관에도 지하철에도 의자는 넘쳐난다. 아니다. 의자보다는 엉덩이가 훨씬 더 많다. 내게도 늘 의자를 그리워하는 엉덩이가 있다. 가끔 시를 쓰는 대신 차라리 나무를 심었다면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결국 나는 그 나무로 또 의자를 만들었겠지만 이제 의자와 나무가 같은 혈족이라는 걸 안다. 오늘은 잠시 의자와 떨어져 있었고 황송하게도 누워서 당선소식을 받았다. 몽중일까. 눈을 뜨고 있어도 꾸는 꿈처럼 더듬더듬 의자를 끌어당겨 앉아본다. 여전히 내 머리맡을 지키는 의자, 이 기회에 의자에게 한마디 안 할 수가 없다. 의자여! 정말 미안하다, 아니 참 미안했다, 그리고 다시 더 미안하겠다. 당선소감을 쓰는 지금도 나는 의자를 믿고 까분다. 나는 행운아다. 의자와 궁합이 잘 맞는 엉덩이를 갖고 있으니. 시를 빌미로 의자와 엉덩이 사이에서 벌어지는 오해가 즐겁다. 언젠가 삐거덕거리던 시들이 끄덕끄덕 고개를 흔들어주는 날들이 올까. 대화는 계속될 것이고 의자는 나의 모든 시들이 마지막으로 태어나는 성소다. 어떤 자세로 의자에 앉아야 할까 늘 함께 고민하는 ‘구밀’과 ‘13시’ 나의 시동지들과 행운을 나눈다. 의자에 항상 따뜻한 방석을 놓아주는 나의 가족 연, 동 그리고 남편 너무 고맙다. 심사를 해주신 이시영, 황인숙 선생님 그리고 손택수, 김행숙 선생님께도 감사를 드린다. 아울러 경향신문사에도 깊은 마음을 전하고 싶다. 영광은, 의자에게 바친다. ♧변희수(본명 변정숙) 1963년 경남 밀양 출생. 대구 거주 | 영남대 국문과 졸업 기존 틀 차용했지만 사유를 끌고가는 의식 우뚝 14건의 응모작이 예심에서 올라왔다. 그중 우선 고른 작품이 ‘의자가 있는 골목’ ‘벽과 대화하는 법’ ‘투명한 발목’이었다. 이 과정이 수월했다는 건 좀 서글픈 일이다. 새로운 종의 시를 포획하기를 기대하며 무엇이든지 빨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 심사자들의 눈에서 그토록 쉽사리 빠져나가는 시들이라니. 재량껏 성심을 다한 시들을 보내주신 분들께 이런 말씀을 드려 죄송하다. 아, 하지만 왜 그리 겉도는 거지? 붕붕 떠 있지? 한 걸음 더 성심을 담으시라. 진정을 담으시라. 하긴 열네 분의 시가 근사하면 얼마나 머리가 터졌을까. 고마운 일이다만. ‘벽과 대화하는 법’은 감각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이이가 갖춘 표현력에 세상-사물을 읽는 힘, 인식의 힘이 더해지기를 바라며, ‘투명한 발목’과 ‘의자가 있는 골목’을 최종심으로 놓았다. ‘투명한 발목’은 섬세하고 예민하고 차분한 묘사와 어조로 독자를 시의 정황 속으로 천천히, 깊게 이끄는 시다. 그런데 이 매력적인 시에도, 흠을 잡자고 눈에 불을 켜니, 성근 부분이 있어 아쉽다. ‘의자가 있는 골목’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 저렇게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 것이오”로 시작되는, 이상의 가장 널리 알려진 시 ‘거울’의 말투를 베껴서 쓴, 즉 이상 풍으로 쓴 시다. 새로운 시인을 가려 뽑는 자리에 기존 시인이나 시를 패러디함으로써 오마주를 보이는 시를 뽑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이 틀 속에 자기 생각, 자기만의 세계가 담겨 있는 점을 높이 샀다. 사유를 길게 끌고 나가는 힘 있는 진술 속에 시인 의식이 우뚝하다. 그의 다른 응모작들도 두루 소재를 다루는 솜씨가 예사가 아니어서 믿음이 간다. 건필을 빌며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44    공광규 시 묶음 댓글:  조회:346  추천:0  2019-11-30
아름다운 책 / 공광규 어느 해 나는 아름다운 책 한 권을 읽었다 도서관이 아니라 거리에서 책상이 아니라 식당에서 등산로에서 영화관에서 노래방에서 찻집에서 잡지 같은 사람을 소설 같은 사람을 시집 같은 사람을 한 장 한 장 맛있게 넘겼다 아름다운 표지와 내용을 가진 책이었다 체온이 묻어나는 책장을 눈으로 읽고   서울역 / 공광규 서울역 4번 플랫홈에서 부산행 고속열차를 기다리다가 발견한 화강암에 새긴 서울발 이정표 조각물 서울역에서 출발하면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음각되어 있다 내가 오늘 가려는 부산까지 441 킬로미터 목포까지 414 킬로미터 강릉까지 374 킬로미터 그런데 평양까지는 겨우 260 킬로미터로 표시되어 있다 인천까지는 38킬로미터인데 내가 살고 있는 일산에서 개성까지는 더 가까울 것이다 부산보다 조금 더 먼 신의주가 496 킬로미터 나진은 부산 가는 거리보다 두 배 더 먼 943 킬로미터이다 그렇더라도 고속열차로 간다면 6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이다 내가 못 가본 저곳들은 얼른 가보고 싶은 곳들이다 대동강 건너 신의주에서 국경을 넘어 이베리아반도까지 나진을 거쳐 광활한 시베리아를 지나 북해의 어디쯤에 닿고 싶다 어느 날 배낭을 꾸려서 떠났다가 몇날 며칠을 묵으며 깨끗한 술 한 잔 하고 돌아오고 싶은 곳이다 혀로 넘기고 두 발로 밑줄을 그었다 책은 서점이나 도서관에만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최고의 독서는 경전이나 명작이 아닐 것이다 사람, 참 아름다운 책 한 권   아름다운 사이 공광규   이쪽 나무와 저쪽 나무가 가지를 뻗어 손을 잡았어요 서로 그늘이 되지 않는 거리에서 잎과 꽃과 열매를 맺는 사이군요 서로 아름다운 거리여서 손톱을 세워 할퀴는 일도 없겠어요 손목을 비틀어 가지를 부러뜨리거나 서로 가두는 감옥이나 무덤이 되는 일도 이쪽에서 바람 불면 저쪽 나무가 버텨주는 거리 저쪽 나무가 쓰러질 때 이쪽 나무가 받쳐주는 사이 말이에요 되돌아보는 저녁/공광규 자동차에서 내려 걷는 시골길 그동안 너무 빨리 오느라 극락을 지나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어디서 읽었던가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가다가 영혼이 뒤따라오지 못할까봐 잠시 쉰다고 발등을 스치는 메뚜기와 개구리들 흔들리는 풀잎과 여린 꽃들 햇볕에 그을린 시골동창생의 사투리 푸짐한 당숙모의 시골밥상 어머니가 나물 뜯던 언덕에 누이가 좋아하던 나리꽃 군락 나비가 되어    공광규 어젯밤에는 내가 나를 아주 깊이 안아주며 잤어 이렇게 팔을 엇갈려 네가 나를 안아주듯 내가 나를 안아주었어 그리운 너의 체온 감자알처럼 고구마 뿌리처럼 만져지는 내가 나를 만지는 슬픔 그러다 손목을 엇갈려 가슴에 얹고 뻗어가는 슬픔 꾹꾹 누르다 잠들었어 나비가 되어 펄럭펄럭 너에게 다녀오려고 ―월간 《시인동네》 2019년 6월호 완행버스를 탔다 / 공광규 오랜만에 광화문에서 일산 가는 완행버스를 탔다 넓고 빠른 길로 몇 군데 정거장을 거쳐 대도시에서 신도시로 직행하는 버스를 보내고 완행버스를 탔다 이 길 저 길 좁은 길을 거쳐 사람이 자주 타고 내리는 버스를 타고 가며 남원추어탕 집도 지나고 파주옥 앞도 지나고 전주비빔밥 집도 지나고 스캔들양주 간판과 희망맥주 앞을 지났다 고등학교 앞에서는 탱글탱글한 학생들이 기분 좋게 담뿍 타는 걸 보고 잠깐 졸았다 어느새 버스는 뉴욕제과를 지나서 파리양장점 앞에서 천국부동산을 향해 가고 있었다 천국을 빼고는 이미 내가 다 여행 삼아 다녀본 곳인데 완행버스를 타고 가며 남원, 파주, 전주, 파리, 뉴욕을 다시 한 번 다녀온 것만 같다 고등학교도 다시 다녀오고 스캔들도 다시 일으켜보고 희망을 시원한 맥주처럼 마시고 온 것 같다 직행버스를 타고 갈 수 없는 곳을 느릿느릿한 완행버스로 다녀왔다 나쁜 짓들의 목록 / 공광규 길을 가다 개미를 밟은 일 나비가 되려고 나무를 향해 기어가던 애벌레를 밟아 몸을 터지게 한 일 풀잎을 꺾은 일 꽃을 딴 일 돌멩이를 함부로 옮긴 일 도랑을 막아 물길을 틀어버린 일 나뭇가지가 악수를 청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피해서 다닌 일 날아가는 새의 깃털을 세지 못한 일 그늘을 공짜로 사용한 일 곤충들의 행동을 무시한 일 풀잎 문장을 읽지 못한 일 꽃의 마음을 모른 일 돌과 같이 뒹굴며 놀지 못한 일 나뭇가지에 앉은 눈이 겨울꽃인 줄도 모르고 함부로 털어버린 일 물의 속도와 새의 방향과 그늘의 평수를 계산하지 못한 일 그중에 가장 나쁜 것은 저들의 이름을 시에 함부로 도용한 일 사람의 일에 사용한 일   욕심 / 공광규 뒤꼍 대추나무 약한 바람에 허리가 뚝 꺾였다 사람들이 지나며 아깝다고 혀를 찼다 가지에 벌레 먹은 자국이 있었나? 과거에 남 모를 깊은 상처가 있었나? 아니면 바람이 너무 드셌나? 그러나 나무 허리에선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다만 너무 많은 열매를 나무는 달고 있었다.   서울역 / 공광규 서울역 4번 플랫홈에서 부산행 고속열차를 기다리다가 발견한 화강암에 새긴 서울발 이정표 조각물 서울역에서 출발하면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음각되어 있다 내가 오늘 가려는 부산까지 441 킬로미터 목포까지 414 킬로미터 강릉까지 374 킬로미터 그런데 평양까지는 겨우 260 킬로미터로 표시되어 있다 인천까지는 38킬로미터인데 내가 살고 있는 일산에서 개성까지는 더 가까울 것이다 부산보다 조금 더 먼 신의주가 496 킬로미터 나진은 부산 가는 거리보다 두 배 더 먼 943 킬로미터이다 그렇더라도 고속열차로 간다면 6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이다 내가 못 가본 저곳들은 얼른 가보고 싶은 곳들이다 대동강 건너 신의주에서 국경을 넘어 이베리아반도까지 나진을 거쳐 광활한 시베리아를 지나 북해의 어디쯤에 닿고 싶다 어느 날 배낭을 꾸려서 떠났다가 몇날 며칠을 묵으며 깨끗한 술 한 잔 하고 돌아오고 싶은 곳이다   헛간을 짓다가 / 공광규 장마에 무너진 시골 헛간을 헐고 다시 짓는데 동네사람들이 지나가며 한 마디씩 한다. - 어라, 광규 이 사람, 주춧돌을 놓을 줄 모르는구먼. - 어허, 그 나이 먹도록 기둥 한 번 안 세워봤구먼. - 어이구, 지금 짓는 게 개집이여 뭐여. 동네사람들 말을 듣고 이렇게 저렇게 해보다가 한나절이면 될 것을 하루 종일 기둥도 못 세웠다. 저녁을 먹고 마루에 나와 별을 보는데 내가 지금껏 이렇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남의 말만 듣고 살아서 평생 헛간 같은 집 한 채도 못 짓고 있는 것이다.   얼굴 반찬 공광규(1960~)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 반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반찬이 가득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 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얼굴 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동사목 김광규(1941~) 유달리 추웠던 지난겨울 영하17도의 혹한을 비껴갈 수 없이 뒷동산 언덕배기에 뿌리박은 채 꼿꼿이 서서 얼어 죽은 나무들 전기톱으로 잘라내는 소리 비명처럼 들린다 산 아래 첫 집 담 너머 우리 마당에도 누렇게 얼어 죽은 낙엽송과 단풍나무 한여름 녹음 속에 처연하게 숨 멎은 동사목 두 그루 살아 있는 나무들만 바람에 수런거리고 마른 잎을 떨어버릴 수 있다는 수목의 유언에 귀 기울이며 말 없는 미라를 보듯 두고두고 바라보기만 할 뿐   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어두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담장을 허물다    공광규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때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사는 백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 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그늘 수십평과 까치집 세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 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해서 듣던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엔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내려와 방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 꽃이 하얗게 덮인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 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다니는 하루 수백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청태산까지 나의 소유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 영주가 되었다  - 공광규 시집 『담장을 허물다』 (창비, 2016) ​ 1960년 충남 청양 출생 동국대 국문과와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1986년 ≪동서문학≫ 등단 1987년 《실천문학》에 현장시들을 발표 2009년 제4회 윤동주상 문학부문 대상 2010년 제1회 김만중문학상 시부문 금상 2011년 제16회 현대불교문학상 시부문  시집 『대학 일기』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지독한 불륜』 『소주병』『말똥 한덩이』『담장을 허물다』 『신경림 시의 창작방법 연구』『시 쓰기와 읽기의 방법』『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등   손가락 염주 공광규 (1960~) 밥상을 차리고 빨래를 주무르고 막힌 변기를 뚫고 아이들과 어머니의 똥오줌을 받아내던 관절염 걸린 손가락 마디 이제는 굵을 대로 굵어져 신혼의 금반지도 다이아몬드 반지도 맞지가 않네 아니, 이건 손가락 마디가 아니고 염주알이네 염주 뭉치 손이네하하허허 하하하호" 내가 모르는 사이에 아내는 손가락에 염주알을 키우고 있었네   소주병 공광규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 주면서 속을 비워 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러져 않은 빈소주병이었다  
43    한국시(6) 댓글:  조회:335  추천:0  2019-11-27
        폭설                                        윤제림   싸락눈으로 속삭여봐야 알아듣지도 못하니까 진눈깨비로 질척여봐야 고샅길도 못 막으니까 저렇게 주먹을 부르쥐고 온몸을 떨며 오는 거다. 국밥에 덤벼봐야 표도 안 나니까 하우스를 덮고, 양조장 트럭을 덮는 거다. 낯모르는 얼굴이나 간지럽혀봐야 대꾸도 없으니까 저렇게 머리채를 흔들며 집집을 때리는 거다. 점, 점......으론 어림도 없으니까 삽시에, 일순에! 떼로 몰려와 그리운 이름 소리쳐 부르는 거다. 어른 아이 모다 눈길에 굴리고 자빠뜨리며 그리운 이의 발목을 잡는 거다. 전화를 끊고 우체국을 파묻는 거다 철길을 끊고 정거장을 파묻는 거다. 다른 세상으론, 비행기 한 대 못 뜨게 하는 거다.   치열한 시 쓰기 / 문정영      '좋은 시란 운문으로서의 운율적 요소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이미지와 새로운 인식 내용을 보여주는 작품 일 것이다' 1. 말하지 않고 말하는 방법      시인은 시 속에서 벌써 다 말하고 있지만 겉으로는 이런 사실을  하나도 표현하지 않는다. 좋은 시 속에는 감춰진 그림이 많다. 그래서 읽는 이에게 생각하는 힘을 살찌워 준다. 보통 때 같으면 그냥 지나치던 사물을 찬찬히 살피게 해 준다. 2.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시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직접 하지 않는다. 사물을 데려와 사물이 대신 말하게 한다. 즉 시인은 이미지(형상)를 통해서 말한다. 한편의 시를 읽는 것은 바로 이미지 속에 담긴 의미를 찾는 일과 같다. 3. 진짜시와 가짜시      시인은 눈앞에 보이는 사물을 노래한다. 그런데 그 속에 시인의 마음이 담기지 않으면 아무리 표현이 아름다워도 읽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다. 겉꾸밈이 아니라 참된 마음이 깃든 시를 써야한다. 4. 다 보여 주지 않는다     시에서 하나하나 모두 설명하거나 직접 말해 버린다면 그것은 시라고 할 수 없다. 좋은 시는 직접 말하는 대신 읽는 사람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5. 사물에서 찾는 여러 가지 의미      하나의 사물도 보는 방향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사물 속에는 다양한 의미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좋은 시는 어떤 사물 위에 나만의 의미를 부여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시이다. 6. 사물이 가르쳐 주는 것      사물 위에 마음 얹는 법을 배워야 한다. 시는 우리에게 사물을 바라보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시인은 사물을 관찰하며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7. 새롭게 바라보기      좋은 시는 남들이 생각한 대로 생각하지 않았기에 쓰인다. 시인은 사물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사람이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든다. 그래서 사물을 한 번 더 살펴보게 해 준다. 어느 날 그것들을 주의 깊게 살펴 대화를 할 수 있게되면, 사물들은 마음 속에 담아 둔 이야기들을 시인에게 건네 오기 시작한다. 시는 사물이 시인에게 속삭여 주는 이야기를 글로 적은 것이다.     8. 미치지 않으면 안된다      위대한 예술은 자기를 잊는 이런 아름다운 몰두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훌륭한 시인은 독자가 뭐라 하든 자신이 몰두할 때까지 고치고 또 고친다. 우리가 쉽게 읽고 잊어버리는 작품들 뒤에는 이런 보이지 않는 고통과 노력이 담겨 있다. [출처] 치열한 시쓰기 / 문정영 |작성자 마경덕   일곱 번, 나는 내 영혼을 경멸하였습니다. 칼릴지브란   제일 처음 나의 영혼이 저 높은 곳에 도달하기 위해 비굴해지는 것을 알았을 때입니다. 두 번째는 나의 영혼이 육신의 다리를 저는 사람들 앞에서 절룩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입니다. 세 번째는 나의 영혼이 쉬운 것과 어려운 것 사이에서 쉬운 것을 선택하는 것을 보았을 때입니다. 네 번째는 나의 영혼이 잘못을 행하고서도 타인들도 잘못을 행하노라고 스스로 합리화 하였을 때입니다. 다섯 번째는 유약함으로 몸을 사려 놓고는 그것이 용기에서 나온 인내인 양 짐짓 꾸밀 때입니다. 여섯 번째는 어떤 사람의 얼굴이 추하다고 마음속으로 경멸했을 때입니다. 바로 그 얼굴이 내 마음속의 가면들 중 하나라는 것을 모르는 체.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의 영혼이 아부의 노래를 부르고 그것을 덕이라 여길 때입니다.   가족의 재구성                                         김연종   세상의 모든 호칭은 이모와 언니 오빠로 재편집 되었다 여보당신은 이미 삭제되었고 한 때 유행하던 자기야도 자취를 감추었다 할아버지 할머닌 고려장 모텔에 장기투숙 중 아빠는 아직까지 귀가하지 않고 엄마는 막장 드라마에 칩거 중이다   오랜만에 가족나들이를 간다 이모가 앞장서고 언니 오빠가 뒤따른다 매표소에도 마트에도 이모 투성이다 식당에 들러 맨 먼저 이모를 부른다 아줌마는 자취를 감춘지 오래고 너무 젊은 이모는 슬쩍 언니로 대체된다 뒤처리와 계산은 모두 오빠 몫이다   가로등에 가물거리는 식구들을 들여다본다 할아버지 할머닌 유령처럼 토닥거리고 엄마 아빠는 서로의 손톱자국 사이로 슬며시 빠져나간다 언니 오빠는 각기 다른 채널로 재빨리 발길을 돌린다 달빛에 취한 이모마저 슬쩍 酒房으로 사라지고 나면 룰루랄라 모텔의 네온 간판은 나른하거나 불안하다   - 웹진『시인광장』 2012년 9월호   발 유병록   지나간 고통은 얼마나 순한가   인간 하나쯤 아무렇지 않게 태우고 다니는 네 발 짐승 같다 말귀를 알아듣는 가축 같다   소리 없이 나를 태우고 밥집에도 가고 상점에도 들른다 달리거나 한곳에 오랫동안 서 있기도 한다   한참을 잊고 지내다 네 등을 올라타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길들여진 고통은 얼마나 순종적인가 사나운 짐승의 시간은 이미 오래전의 일 네 발이 내 것 같다   말을 듣지 않고 날뛰는 시간도 있다 그러나 너를 껴안으면 떨어지지 않을 만큼만 위험한 길   참을 만한 시간이 참기 어려운 밤   발을 어루만진다 발가락을 하나씩 세어본다 내 발이 네 것 같다   너는 나를 태우고 또 어디론가 가려 한다   네 등은 따뜻하고 나는 그 커다랗고 우멍한 눈동자와 마주치는 일이 드물다    향수/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어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빈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게를 돋아 고이시는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힘초롬 휘적시던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던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줍던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던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우리나라 짧은시   1. 가을 / 함민복 당신 생각을 켜 놓은채 잠이 들었습니다   2. 그 꽃 / 고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3. 섬 / 정현종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4. 너에게 묻는다 /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적이 있었느냐   5. 낙엽 / 유치환 너의 추억을 나는 이렇게 쓸고 있다   6. 호수 / 정지용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픈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수밖에 7. 짤막한 노래 / 박경원 정직하고 부드러운 빵 아름다운 푸른곰팡이를 피어내는군 자신이 썩었음을 알려주는군   8. ‘木星’ / 박용하 확실히, 영혼도 중력을 느낀다. 쏟아지는 중력의 대양에서 삶과 죽음을 희롱하는 시를 그대는 썼는가. 삶이 시에 빚지는 그런 시를 말이다   9. 지평선 / 쟈콥 그 소녀의 하얀 팔이 내 지평선의 모두였다   10. 後記 / 천양희 시는 내 自作나무 네가 내 全集이다. 그러니 시여, 제발 날 좀 덮어다오   11. 마른 나뭇잎 / 정현종 마른 나뭇잎을 본다. 살아서, 사람이 어떻게 마른 나뭇잎처럼 깨끗할 수 있으랴   12. 그리고 삶 / 이상희 입술을 깨물어도 참을 수 없이 터져나오는 재채기 삼창   13. 시멘트 / 윤용주 부드러운 것이 강하다 자신이 가루가 될 때까지 철저하게 부셔져본 사람만이 안다.   14. 서시 / 나희덕 단 한 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도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이여 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   15. 사이 / 박덕규 사람들 사이에 사이가 있었다 그 사이에 있고 싶다   양편에서 돌이 날아왔다 정신은 한번 깨지면 붙이기 어렵다   16. 후회 / 황인숙 깊고 깊어라 행동 뒤 나의생각 내 혀는 마음보다 정직 했느니   17. 별 / 곽재구 여기 어이할 수 없는 황홀! 아아 끝끝내 아침이슬 한방울로 돌아가야 할 내 욕망이여   18. 빵 / 장석주 누군가 이 육체의 삶, 더 이상 뜯어먹을 것이 없을 때 까지 아귀아귀 뜯어먹고 있다 이스트로 한없이 부풀어 오른 내몸을 뜯어먹고 있다!   19. 꿈 / 황인숙 가끔 네 꿈을 꾼다 전에는 꿈이라도 꿈인줄 모르겠더니 이제는 너를 보면 아, 꿈이로구나, 알아챈다   20.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 / 황지우 긴 외다리로 서있는 물새가 졸리운 옆눈으로 맹하게 바라보네,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를   21. 방(榜) / 함성호 천불 천탑 세우기 내 詩쓰기는 그런 것이다.   22. 첫사랑 / 이윤학 그대가 꺽어 준 꽃 시들 때 까지 들여다 보았네 그대가 남기고 간 시든 꽃 다시 필 때 까지   23. 일기 / 김형영 잘 익은 똥을 누고 난 다음 너, 가련한 육체여 살 것 같으니 술생각 나냐?   24. 사랑 / 정호승 무너지는 폭포 속에 탑 하나 서 있네 그 여자 치마를 걷어 올리고 폭포 속으로 걸어 들어가 탑이 되어 무너지네   25. 사랑 / 김명수 바다는 섬을 낳아 제 곁에 두고 파도와 바람에 맡겨 키우네   26. 눈물 / 정희성 초식동물 같이 착한 눈을 가진 아침 풀섶 이슬 같은 그녀 눈가에 언뜻 비친   27. 不倫 / 윤금초 가을날 몰래 핀 두어 송이 장미 그래도 꽃들은 감옥에 가지 않는다 위험한 이데올로기 저 반역의 開花   28. 행복 / 박세현 오늘 뉴스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 뉴스는 없습니다   우리나라 국영방송의 초창기 일화다   나는 그 시대에 감히 행복이라는 말을 적어 넣는다   29. 자화상 / 신현림 울음 끝에서 슬픔은 무너지고 길이 보인다 울음은 사람이 만드는 아주작은 창문일 것 창문 밖에서 한 여자가 삶의 극락을 꿈꾸며 잊을 수 없는 저녁 바다를 낚는다.   30. 전집 / 최승호 놀라워라, 조개는 오직 조개껍질만을 남긴다.   31. 내 청춘의 영원한 / 최승자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 앵글   32. 세상에서 멀리 가려던 / 최하림 세상에서 멀리 가려던 寒山 같은 시인도 길위에서 비오면걸음을 멈추고 오던 길을 돌아본다지난시간 들이 축축이 젖은 채로 길바닥에 깔려있다   33. 꽃 / 조은 오래 울어본 사람은 체념할 때 터저나오는 저 슬픔과도 닿을 수 있다   34. 간 봄 / 천상병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들어 살고 있음으로 고통을 말하면 월세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35. 하늘 냄새 / 박희준 사람이 하늘처럼 맑아 보일 때가 있다 그 때 나는 그 사람에게서 하늘 냄새를 맡는다   36. 도토리 모자 / 문삼석 도토리모자는 벗기면 안돼 까까머리 까까머리 놀릴테니까   37. 풀꽃 /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이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38. 낙엽 한 장 / 오광수 나릿물 떠내려 온 잎 하나 눈에 띄어 살가운 마음으로 살며시 건졌더니 멀리 본 늦가을 산이 손안에서 고와라 39. 서시 / 이정록 마을이 가까울수록  나무는 흠집이 많다. 내 몸이 너무 성하다. 40. 외투 / 하재일 누구나 살면서 가슴에 대못 하나쯤 박고 살게 마련이다. 그걸 숨기기 위해 사람들은 녹이 슨 못 위에 자신의 화려한 외투 한 벌을 걸어둔다.   아내의 남자   이석현     연애시절 아내의 지갑을 몰래 훔쳐보았을 땐 은발의 리처드 기어가 있었고 결혼 전후 용모 단정했던 내 모습이 한참을 자리하나 싶었는데 이내 아들 돌 사진으로 바뀌었더군 허둥대며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한참을 잊고 살다 어쩌다 열어보니 군대 간 작은 아들이 빡빡머리 군기 바짝 든 모습이 자리했다가 얼마 전부터 파마머리 개구쟁이 외손주 녀석을 넣고 다니며 다이아반지 생긴 듯 아내는 은근슬쩍 여기저기 자랑하더군 몇 년 주기로 바뀌는 아내의 지갑 속 남자들 누굴까 그 다음은 돌에 대하여   이기철 ​ 구르는 것이 일생인 삶도 있다  구르다가 마침내 가루가 되는 삶도 있다  가루가 되지 않고는 온몸으로 사랑했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뜨겁게 살 수 있는 길이야 알몸밖에 더 있느냐  알몸으로 굴러가서 기어코 핏빛 사랑 한 번 할 수 있는 것이야  맨살밖에 더 있느냐  맨살로 굴러가도 아프지 않은 게  돌멩이밖에 더 있느냐  이 세상 모든 것, 기다리다 지친다 했는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지치지 않는 게 돌밖에 더 있느냐 빛나는 생이란 높은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치열한 삶은 가장 낮은 데 있다고  깨어져서야 비로소 삶을 완성하는  돌은 말한다  구르면서 더욱 단단해지는 삶이,  작아질수록 더욱 견고해지는 삶이 뿌리 가까이 있다고  깨어지면서 더욱 뭉쳐지는 돌은 말한다   울음이 타는 강 박재삼 마음도 한자리 못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가는 소리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출전 (1959. 2)   석류를 보며 / 박재삼 한여름 내내 속으로 속으로만 익어 왔던 석류가 이 가을 하늘이 높고 햇빛이 눈부시고 바람까지 서늘한 때를 택하여 그 가슴을 빠개 놓고 다 익은 속열매를 보여 아름답기만 하구나 그러나 임이여 내 가슴은 보일 것이 없어 더 없이 쓸쓸하구나     아득하면 되리라      박재삼 해와 달, 별까지의  거리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이것들이 다시 냉수 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오는 그 이상을 나는 볼 수 없어라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시방 갈증 때문에 마실 밖에는 다른 작정은 없어라   천년의 바람 - 박재삼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적막 안도현 풀숲에 호박이 눌러앉아  살다 간 자리같이 그 자리에 둥그렇게 모여든 물기같이 거기에다 제 얼굴을 가만히 대보는 낮달과도 같이 그리움 - 박재삼 나뭇잎은 햇빛에 싱싱하게 윤이 나고 그와 비슷한 촌수로 물결은 더욱 빛나는 무늬를 끊임없이 빚고 또한 바람은 연방 그리운 것 외에 불 줄밖에 모르는 이것들, 천날 만날 한결같은 오, 이것들을 보아라. 물방울처럼 스러졌다가 이어져 마음은 움직이는 것을 통하여 사랑의 연습만을 부지런히 하고 그것을 영원토록 지치지 않고 하겠다는 그것 말고 나는 볼 수가 없구나. 참으로 환장할 일은 이것이로다    희망을 사다 / 이돈권   88세 어르신이 오피스텔을 사셨다 두 달여 동안 사시겠다 안 사시겠다를 반복하시더니 최종 마나님 결재가 났다고 하신다 그동안 안방에만 계시던 할머니가 부축을 받으시며 사무실에 나오셨다 어르신이 80대 중반의 부인 이름으로 사주시는 계약 현장을 보시려고 안방마님이 직접 나오셨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 입가에 연신 웃음이 맺힌다 마님의 미소가 창가에 비치는 유월 햇살을 타고 푸른 매실처럼 퍼져나간다 입속에 맴도는 '그 연세에 오피스텔은 사셔서 뭐 하시려고 하십니까?' 라는 말은 결국 하지 못했다 나는 꿈을 팔고 할머니는 희망을 사셨다 -시집『희망을 사다』(천년의시작,2019) 독작獨酌 ​ 문신 ​ 두 홉짜리 소주병을 땄다 병과 잔 사이는 한 치가 못 되었다 그 사이에 삼라만상의 근심이 깊었다 주섬거리지 않고 탁, 털어 넣었다 안주는 오래 물색하였다 달이 떴고 밤새 소리도 펼쳐 있었다 강물의 물비늘 두어 장을 쭉 찢었다 질겅거렸다 두 홉짜리 소주병이 비었다 강물의 수위가 한 치쯤 낮아져 있었다 노을에서 시작하였으나 어느덧 여명이었다 내내 독작이었다 ​ ​ 문신 시집 『물가죽 북』, 《애지》 ㅤ 
42    시론 댓글:  조회:300  추천:0  2019-11-27
시 쓰기, 시 앓기  김기택   1    꼬집어 어디가 아프다고 할만한 곳도 없는데, 누워있는 것이 힘들고 답답하다. 자세가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진단해 본다. 여러 번 자세를 고쳐 눕는다. 예민한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아주 조심스럽게 몸을 뒤척거린다. 가까스로 쌓아온 잠이 작은 뒤척거림으로 금방 무너진다.  오줌이 마려운 걸 참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해 본다. 그렇게 생각하니 금방이라도 쌀 것 같다. 오줌은 뜨거운데 변기에 떨어지는 양은 많지 않다. 다시 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다. 낯은 익은데 누구인지 기억이 안 나는 얼굴들, 끊임없이 숫자를 대입해도 정답이 굳게 닫혀져 있는 수학공식들이 계속 꿈자리를 어지럽힌다.    감기에 걸린 것인가 생각해 본다. 저혈압이라는데, 혹시 피가 모자라 어지러운 건 아닌가도 생각해 본다. 병! 내가 아는 이름이 나오자 우선 마음이 편해진다. 초등학교 시절, 아파서 학교에 가지 못했을 때의 이상한 쾌감, 조금은 불안한 안락함, 아무도 없는데 어디선가 급우들이 떠들고 있는 듯한 다소 혼란스러운 고요함, 이런 추억들이 내 열과 불안을 자석처럼 빨아들인다.    나는 내 몸에 들어온 병이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 본다. 이 놈이 내 몸에 들어와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어디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숨죽이고 지켜본다. 잔 물비늘 같은 떨림이 온몸을 흔들며 지나간다. 내 몸에 돋은 닭살들이 갈대처럼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 즈음에서 나는 약한 잠에 빠져든다.    2    필사적으로 바람을 견디다가 찢어진 비닐 조각처럼, 떨어져 덜컹거리는 문짝처럼, 망가지고 허술해진, 바람을 더 견디기엔 불안한 몸뚱어리를 그는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눕힌다. 조금이라도 호흡이 거칠어지거나 불규칙하면 몸속에서 쉬고 있는 폭풍이 꿈틀거린다. 숨이 바늘구멍을 무사하게 통과하느라 그는 아슬아슬 호오호오 숨을 고른다. 불손했고 반항적이었던 생각들과 거침없었던 감정들로 폭풍에 맞서온 몸은 폭풍을 막기에는 이젠 너무 가볍고 가냘프다.      ―졸시 「바늘구멍 속의 폭풍」 중에서    3    매일 불행하고 슬픈 일들이 일어난다. 그 슬픔과 불행이 왜 일어나는지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느 누구의 탓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두가 자기가 생긴 대로 열심히 살다가 생긴 일일뿐이다. 그렇게 생긴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탈이 나서 배가 아프다고 대장균을 탓하겠는가? 그 미생물들이 할 일은 저들이 타고난 생김새와 성질 그대로 열심히 사는 것이다. 생김새와 성질이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아무의 잘못이 없는데도 언제나 적과 죄인은 있고, 계속 생겨나고 있다. 적과 죄인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 만든 것이다. 분노와 적개심을 받아줄 대상이 필요한 자들의 마음이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매일 무언가 잘못한 사람들이 생겨난다. 그들이 그렇게 생긴 것이 바로 그들의 잘못이어야만 하는 일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것을 정교한 체계를 갖추어 시비를 가려내기 위한 법이 생겨난다. 불행과 슬픔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생겨난다. 그 필요성은 점점 커지고 비례하여 불행과 슬픔도 늘어나고 있다. 법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해지고 충실해졌지만, 불행과 슬픔이 늘어난 양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불완전하고 빈약하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적인가? 나는 얼마나 많은 죄를 짓는 사람인가?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나는 누군가에게 또는 무엇인가에게 폭력이 되고 있다. 나는 적이 필요한 사람과 내 행동이 단죄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불행과 슬픔이 생겨나도록 하기 위해, 매일 누구에겐가 적이 되고 무엇인가 잘못을 저지른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퇴근이 한참이나 지난 내 몸이 미세하게 떨고 있다. 그날의 일용할 폭력을 견뎌내느라 몸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들부들 떨고 있다. 오랫동안 그치지 않는다. 그 폭력을 견뎌내기 위하여 내 몸은 상처와 병을 필요로 한다. 상처는 폭력이 몸에 들어와 몸이 된 것을 말한다. 폭력이 몸이 되는 동안 몸은 뜨거워진다. 폭력이 몸이 되려고 뜨거워지는 것, 떨리는 것, 그것이 병이다. 병은 폭력을 껴안는다. 몸 안에서 폭력과 병은 서로 하나가 된다. 서로 싸우다가 다정해진다. 어느 순간, 폭력과 병은 폭력도 아니고 병도 아닌, 내 몸이 된다.    4    비에 젖은 구두    뻑뻑하다 발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신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구두는 더 힘껏 가죽을 움츠린다    구두가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린 적은 없었다    나는 구두주걱으로 구두의 아가리를 억지로 벌려    끝내 구두 안에 발을 넣고야 만다    내 발이 주둥이를 틀어막자    구두는 벌어진 구두주걱 자국을 조용히 오므린다    제 안에 무엇이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소가죽은 축축하고 무거운 발을 힘주어 감싼다        ―졸시 「소가죽 구두」    5    몸살! 몸은 뜨거운데, 나는 춥다. 지금은 내 병이 내 몸 속의 폭력을 치료하는 중이다. 대부분의 경우, 앓는 동안 나는 내가 앓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병은 내밀하게 진행된다. 나는 둔하지만, 몸은 예민하다. 나는 단지 말이 없어지거나, 갑자기 화를 내거나, 술이 먹고 싶어지거나, 아무 생각 없이 중얼거리거나, 갑자기 어떤 대상이 떠올라 적개심이 일어나거나, 몹시 피곤해지거나 하기는 하지만, 병이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감기약을 사 먹어야 할 만큼 병이 두드러지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나에게 전에 없던 습관이 생겼다든가 갑자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다는 것은 폭력의 긴 육체화 과정이 잠시 멈추고 병이 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6    그동안 나는 여러 번 넘어졌는지 모른다    지금은 쓰러져 있는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제 자리만 맴돌고 있거나    인력에 끌려 어느 주위를 공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졸시 「우주인」중에서    7    매일, 매순간, 앓는다. 병은 내 눈이고 코이고 입이다.    서정이 살아있는 시 쓰기    "시는 영혼의 피를 흘려야 하는 고통스런 것"이라든지 "천형의 고난을 감내할 용기로 써야 한다"는 시인의 경험담을 가끔 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쓴 시의 진정성에는 박수를 보내주어야 한다. 그렇게 치열하게 시를 쓰는 사람들 중에는 훌륭한 시인이 많다. 그러나 필자는 우리의 사람살이에 시가 긍정적으로 이바지 하도록 써보자는 것이고 시를 쓰거나 읽을 때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하자는 시 쓰기를 지지하는 입장이다. 이 말은 시에서 고통이나 눈물을 멀리 하라는 말이 아니다. 시의 궁극적 목표인 삶의 카타르시스, 담담하되 감동이 배어나오는 시의 열쇠를 찾자는 것이다. 이것은 '서정으로 돌아가자'라는 시 운동과도 연관된다.    그렇다, 오늘이 그날이다    우리가 태어나고 죽고 슬퍼하고    눈물짓는 그날이다    사랑하고 기도하고 축복 받는 그날이다    오늘이 어저께의 어깨를 뛰어넘고    내일의 문앞에 당도했을 때    우리는 꿈만 꾸었었다    오늘이 그날임을 알지 못했다 ​    나를 거둬가는 그날인 줄은    내 낟알을 털어 골라두는 그날인 줄을    나를 넣고 물을 부어 밥솥에 끓이는 그날인 줄을    나를 숟가락으로 떠먹으며 씹는    그날인 줄을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어떤 이는 소리내어 울고    어떤 이는 술을 마시며 욕질하고    어떤 이는 무릎꿇고 연도하는 그날인 줄을 ​    언제 우리가 오늘 이외의 다른 날을 살았더냐    어째서 없는 내일을 보려고 하였더냐    어제는 오늘의 껍질이요 내일은 오늘의 오늘이다    모든 것이 오늘 함께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오늘이 그날이다​     -김종철, 전문        1998년 지리산 시인학교에서 였다. 문학수첩을 운영하던 김종철 시인이 필자의 [지리산시인학교]의 특강 강사로 초청되어 왔었는데 미소를 머금은 초롱하던 큰 눈망울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라는 시집으로 '못의 시인'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던 때였는데 그는 "시에서 감동이 없는 시는 죽은 시다"고 말했다. 서정적인 시 쓰기에 열변을 토했던 그는 한국시인협회장 시절에 갑자기 유명을 달리 하셨지만 필자는 서글서글하고 선이 굵은 그의 시들을 지금도 즐겨 읽고 있다.    위의 시도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는 서정시다. 설명이 필요없는 내용이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시를 배운다는 것은 자신에게 덕지덕지 붙어있던 타성, 익숙한 것들을 하나하나 떼어내는 작업이다. 시인은 직,간접으로 경험했던 것에 지각과 감수성을 동원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사물을 해석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시인이 경험했거나 삶의 진정성만으로 시를 쓰겠다는 태도는 곧 시의 소재가 바닥나거나 시 쓰기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시는 경험의 진실성을 따지는 장르가 아니기 때문이다.    좋은 시를 쓰려면 체험을 많이 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체험에는 직접 체험과 간접 체험, 상상적 체험이 있다. 그러나 시가 직,간접의 체험만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시는 직,간접의 체험 이상의 것이다. 오히려 상상적 체험을 묘사하고 진술하는 장르라 해도 무리가 아니다. 그래서 시인은 선험적(先驗的)으로 세상에 먼저 발을 디디는 사람이다. 자기가 직접 체험했던 것만 시를 쓰면 시의 한계에 스스로 갇히게 된다는 사실이다. 화자가 처한 입장에서 생각하고 화자의 정서를 솔직 담백하되 신선하고 내밀하게 표현해야 한다. 또한 시에는 화자(話者)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他者)나 사물이 등장한다. 이때 시에 등장하는 대상들과의 관계를 철저한 의미망(意味網)으로 화자와 연결해야 한다. 즉 타자나 사물이 등장하지 않으면 안 될 화자와의 관계를 돌려서 말하는 방법을 연마해야 더욱 깊은 맛이 나는 시를 탄생시킬 수 있다.      - 이어산   쉬운 시 쓰기와 시적 대상 찾기    시를 쓰다보면 절벽이 가로막은 것처럼 도무지 더 이상 진척이 되지 않거나 싱크홀 같은데 빠진 것 같이 허우적 거리다가 시 쓰기를 그만 둘까 고민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시인치고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리스의 3대 비극시인 에우리피데스(Euripides, B.C 480~406)는 "약간의 노력으로 좋은 시의 열매를 맛보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2천5백 년 전에 이미 설파 했는데 그 말은 오늘도 유효하다. 시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 끊임없는 노력으로 시 쓰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말로 들린다.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는 사람살이의 지점을 읽어내는 일이 곧 시 쓰기요, 불확실하고 변화무쌍한 삶의 질곡을 새롭게 진단하여 세상에 보고하는 일이 시 쓰기인데 신이 아닌 이상 노력 없이 되겠는가? 그리고 엄밀하게 따지자면 시 쓰기의 성공이란 사실 없다. 다만 좋은 시 쓰기가 있을 뿐이다. 중국의 대 사상가 루쉰(魯迅)의 말처럼, “길이 없던 곳도 자꾸 걸어가면 길이 된다”는 것이고, “파도를 겁내지 않고 바다에 나가는 사람이 고기를 잡는다”는 말과도 같다.       '붉은 여왕 효과(Red queen effect)'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변화하는 세상을 읽지 못하고 그 자리에 안주하면 성공하기 힘들게 되고, 세상의 속도만큼 나도 같이 뛰면 현상유지는 되는 것이며, 세상의 속도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뛰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인데 시도 그렇다. 다른 사람들의 시에는 관심이 없고 현대시의 흐름을 모르면서 자기 고집에 사로잡혀 시를 쓴다면 시가 진부한 넋두리인지, 지향하는 지점이 어디인지조차 모르고 넘어가는 우(愚)를 범하게 된다. 그러므로 현재 주목받는 시인들의 시를 많이 읽어보란 이야기다. 주의할 것은 초보 시인일 때는 남의 시를 모방하여 쓰는 연습도 필요하지만 계속 기성 시인의 흉내나 내는데 머물면 시인으로 인정받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좀 서툴고 거칠어도 반드시 자기만의 색이 드러나도록 써야 새로운 시인의 탄생으로 인정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새로운 시인과 시인 비슷한 사람이 있다는 말도 생겨났나보다.    그리고 시 쓰기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 좋다. 나는 난삽하고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시를 쓰지 말자는 입장이다. 좋은 시와 어려운 시는 다르다. 두 가지 이상의 이미지가 결합된 말의 덩어리를 이미저리(Imagery)라고 하는데 이것이 잘 결합된 시는 어려운 시가 아니라 뜻이 깊고 읽을수록 맛이 나는 좋은 시다. 그렇지만 몇 번을 읽어도 뜻이 잡히지 않는 시는 쓰레기통에 집어넣어도 된다. 세 번 정도 정독을 해도 시인도 이해하지 못할 시라면 일반 독자들은 머리가 아파서 시를 읽지 않을 것이다. 그런 시를 좋은 시라고 꼽는 사람들은 그들끼리 즐기든말든 나는 서정이 살아있는 시의 깃발 아래로 나가려고 한다. 나의 이 강의가 어려운 시론을 짜집기하여 유식한척 폼이나 잡는 것으로 읽힌다면 이 글 읽기를 중단하라. 유식한 시론으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가슴으로 느껴져야 시를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될 수만 있다면 회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하려고 한다. 깊이가 없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강좌가 학위를 따기위해 마련된 것도 아니요 다만 시를 쓰는데 약간의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것임을 유념해 주시기 바란다.    오늘은 시적 대상에 대한 것을 생각하면서 세 편의 시를 보자.    물론 시적 대상에는 제한이 있을 수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이 시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이 선택한 소재는 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좋다. 여러 시인들이 이미 발표한 흔한 소재로 시를 쓴다면 여간해서는 주목받기 힘들다. 어차피 시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독자의 공감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쌍방향의 문학인데 여기저기에서 봤던 내용을 다시 본다면 독자는 흥미를 잃을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처음 시를 쓸 때, 시의 소재로 가장 많이 택하는 것은 '자연'이다. 그런데 이 소재는 수대에 걸쳐서 동서양의 시인들이 너무나 많이 다뤘고 훌륭한 시도 수없이 많다. 그러므로 여간 잘 쓴 것이 아니라면 자연에 관한 소재로 시를 써서 좋은 시로 주목 받기 어렵다. 자연을 매개로 시를 쓸 작정이라면 누구나 느꼈을법한 내용은 멀리하고 새롭게 형상화 된 내용, 즉 자기만의 특질화 된 시각의 시를 쓰기 바란다.    와우리 성애원 옆, 금곡폐차장엔    벌써 10년 넘게    쇠와 싸우는 풀들이 있습니다.    보통리 그 넓은 벌판 다 빼앗기고    변두리로 밀리고 밀리다    폐차장 무쇠더미 속까지 떠밀려와 살고 있습니다.    쇠와 살대고 살면서도    쇠와 섞이지 않는 강아지풀 하나    지난 봄에 살해당한    풀의 아이를 배고    죽은 엔진 뼈대에 기대어 잠이 들어 있습니다.       - 최문자, 1연    위 시는 자연을 소재로 한 시인데 시인은 생명 현상의 본질을 간파하고 파괴된 풍광을 비판, 고발하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진술이 무엇인지를 공부하려면 우리나라 최고의 '진술시인'으로 불리는 최문자 시인(계간 시와편견 편집고문)의 시를 눈여겨 보기를 권한다.    대지를 물들이는 저 쑥과 냉이, 씀바귀에 대해    과수원 언저리를 온통 노랑물살 지게 하는 저 유채꽃에 대해    (중략)    뻐꾹새에게 물어봐라    벌, 나비에게 물어봐라    (중략)    별과 달이 밤새도록 읽다가 펼쳐둔    과수원 시집    나는 거름 져다 나르며 읽고    앞산 뻐꾹새는 진달래 먹은 듯 붉게 읽는다       - 배한봉, 중에서    그 뻔한 풍광도 시집이 되고, 그 시집은 새도 읽고 나비도 읽고 거름을 져다 나르는 시인도 읽는데 결국 온 산을 붉게 물들이는 봄을 "뻐꾹새는 진달래 먹은 듯 붉게 읽는다"로까지 진행되어서 서술+묘사+진술+이미지화에 성공하고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모든 것이 수미상관(首尾相關)으로 제각각의 역할이 확실하게 주어졌다. 눈여겨보라. 배한봉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것들은 역할이 명징하기로 유명하다. 시 쓰기에서 반드시 가져야 할 자세다.    대흥사 입구의 마늘밭    마늘잎들이 누렇게 때깔을 쓰고 있다    마늘이야 마른 생각들 버석거려도 머리통 가득    매운맛을 가두겠지만    수확이 가까울수록 잎들의 혈행(血行)을 끊어    머리 뿌리 온통 깨달음으로 채워넣으려는    저 독한 마음을 읽고 있는 한    나는 아직도 한참이나 갈증을 견뎌야 하는    메마른 5월이다. 누가 내 몸을 캐서    불알 두 쪽 갈라본들    거기 통속의 향기 드러나겠는가         - 김명인, 부분    위 시는 '마늘'이라는 대상을 선택하여 마늘의 수확이 가까워질수록 거추장스러운 잎들의 혈행(血行)을 끊고 마늘의 특성인 매운맛을 가득 머금고 여물어져 가고 있는 것과 통속의 향기(通俗의 香氣)인 마늘의 특질을 시인에게로 치환(置換)시켜서 오롯이 제 맛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를 자문하고 있다. 이처럼 담백 하지만 사물의 특질과 연결된 자신만의 사람살이의 해석이 시를 쓰는 본질에 가까이 가는 일인 것이다. 김명인 시인의 시는 서정시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제대로 읽어 볼 일이다.    - 이어산 그리고…… 그 병의 부산물로 시가 얻어진다.    시와 이미지 심재휘 (시인, 대진대 문창과 교수) 1. 심상(心象)으로 풀이되는 이미지(Image)는 리듬과 함께 시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이다. 시를 읽거나 혹은 쓸 때, 이 문학적 용어가 담당하는 역할이 얼마나 절대적인가는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안다. 그러나 또 이미지라는 말의 뜻을 막상 설명하려고 하면 그것 역시 쉽지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미지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논리적이라기보다는 다소 직관적이라는 데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일상에서도 우리는 이미지라는 말을 흔히 사용한다. 가령 예상치 못한 상황을 보고 그것을 ‘충격적인 이미지’라고 말한다거나, 처음 만난 사람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받았다’고 하기도 한다. 또한 ‘그 사람의 이미지는 따뜻하다’라는 말처럼, 중첩된 느낌을 표현할 때에도 이 용어를 쓴다. 일상어의 일부가 된 이 말은 따지고 보면 결국 ‘인상(印象)’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어떤 대상이 경험자의 마음에 특정한 감각으로 각인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일상에서 사용하는 이미지란 말은 감각경험의 상태에 대한 표현일 터이다. 그렇다면 문학용어로서는 어떤가. 헤겔이 ‘절대정신의 감각적 드러냄’으로 예술 미학을 설명할 때, 우리는 ‘정신(Geist)’이라는 헤겔적인 개념의 철학성보다는 ‘감각적 드러냄’이라는 말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는 당연히 예술적 표현의 어떤 특성을 고려한 말이다. 그러니까 예술은 이성에 호소하는 양식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에 가 닿고 또 의도한 감흥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하는 행위일 것이며 그 노력의 정체는 바로 ‘감각적 드러냄’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사전적인 의미로 감각(感覺)이란 눈․귀․코․혀․살갗 등 신체의 기관을 통해 받아들이는 느낌을 뜻한다. 결국, ‘감각적 드러냄’이란 감각기관을 통해 자극을 받는 것과 유사한 미적 경험을 제공하는 것 또는 그 의도를 포괄하는 말이 된다. 마치 보고 듣는 것처럼 혹은 냄새가 나는 듯, 촉감이 느껴지는 듯 생생하게 느낌을 구현하는 것이 창조적 예술의 공통된 과제가 되는 셈이다. 시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2. 시의 경우 ‘감각적 드러냄’은 이미지라는 용어로 집약된다. 이미지는 그만큼 감각적 인식의 산물이며 시의 장르적 속성을 가장 잘 대변하는 말이다. 문학이론서의 고전인 에는 이미지가 ‘감각의 잔류를 표상하는 것’으로 정의되어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말로 만들어진 그림'(C.Day.lewis), ‘감각체험의 재현으로서 감각의 어떤 것에 호소하는 것’(C.Brooks & R.P.Warren) 등, 여타의 언급들도 이미지의 핵심적인 성질로서 감각적 자질을 거론한다. 이는 다분히 시의 비유적인 속성을 전제로 한다. 다음의 시를 보자. 군중 속에 있는 얼굴들의 환영 축축한 검은 가지 위의 꽃잎들 - 에즈라 파운드 「지하철 역에서」, 전문 위의 시는 에즈라 파운드의 그 유명한 「지하철 역에서」라는 시이다. 그는 ‘축축한 검은 가지 위의 꽃잎들’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로 현대사회의 황폐와 삭막을 표현하였다. ‘축축한’, ‘검은’ 등의 감각적인 느낌이 ‘가지’와 만나면서 선명한 배경을 만들고 거기에 ‘꽃잎들’이 연결되면서 지하철 역의 군중들의 모습이 특정한 의미를 지닌 하나의 이미지로 재생된다. 수사법 상으로 보자면 위의 시에서 이미지는 비유에 의해 발생한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병치시킨 은유가 그것이다. 비유어가 곧 이미지가 된 셈인데 그렇다면 비유어와 이미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가 의문스러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미지와 비유어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비유어는 수사법 상의 언어 기능을 지칭하는 것인데 반해, 이미지는 그 비유어가 환기하는 느낌에 해당하는 말이다. 즉 비유어는 언어적인 것이고 이미지는 감각적인 것이므로 개념의 차이가 있다. 비유어와 이미지가 간혹 동일시되기도 하지만 실상 비유어보다 이미지의 개념은 더 광범위하다. 문학용어 사전에 의하면 이미지는 몇가지 층위로 나누어 정의된다. 좁은 뜻으로 이미지는 시각적 대상이나 장면의 ‘묘사(描寫)’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은유나 직유처럼 일종의 매개어(媒介語)에 의한 비유언어(Figurative Language)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미지의 의미가 포괄적으로 사용될 때에는 대단히 애매한 용어가 되기도 한다. 시의 독자에 의해 경험되는 心象(mental picture)의 뜻에서부터 한 편의 시를 형성하는 요소들의 총체를 담당하는 용어에 이르도록 그것이 관장하는 의미의 영역은 상당히 넓다. 감각적 지각의 모든 대상이나 특질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모호함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미지를 문학적인 자질로서만 인정한 것인가 아니면 심리적인 측면을 고려할 것인가와 관련이 있다. 그런데, 에서는 이미지의 의미를 단순히 감각 경험의 표출로만 한정하지 않는다. ‘과거의 감각상의 혹은 지각상의 체험을 지적으로 재생하는 것, 즉 기억(memory)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미지의 개념을 설정한다. 이 언급은 시를 읽는 과정 혹은 창작하는 현장을 상정할 때,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이미지를 기억의 일종이라고 하는 논리는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겪게 되는 감각경험이 단순히 생리적인 반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알 것이다. 감각경험은 경험자의 기억으로 저장된다. 그런데 감각경험이 기억으로 저장되는 과정에는 알게 모르게 추가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경험에 대한 경험자의 해석이다. 우리는 흔히 ‘인상적이었어’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印象的’이라는 말은 단순히 외부 자극의 강도를 드러내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또한 경험자가 경험에서 얻은 인상적인 느낌에 특징적인 코드를 부여한다는 뜻과도 같다. 기억에는 그래서 수많은 코드가 저장되어 있게 마련인데 그 기억이 시적 상상력을 표현하게 될 때 코드화된 이미지로 재생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저녁 무렵, 일과를 마치고 접어드는 동네 어귀의 익숙하지만 특징적인 풍경, 혹은 독특한 냄새는 사람에게 어떤 인상적인 느낌을 주게 된다. 가령 그것이 편안함이라는 느낌으로 기억 속에 저장되었다고 하자. 시를 읽을 때 동일한 표현이나 상황을 접한다면 독자에게 그 이미지는 편안함을 상기시켜주는 코드로 작용할 것이다. 이는 역으로도 가능하다. 시를 창작할 때 편안함, 혹은 귀가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형상화하자면 인상적인 느낌의 코드로 입력된 특정한 이미지가 그 추상성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귀가의 편안함은 동네 어귀의 느티나무가 있는 풍경이나, 담장을 타고 흘러나오는 된장국 냄새로 형상화 될 것이고 그것은 곧 하나의 이미지가 될 것이다. 이미지가 기억의 일종이라는 말은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다음의 시를 보자. 잎이 나기 전에 꽃을 내뱉는 살구나무, 중얼거리며 좁은 뜰을 빠져 나가고 노곤한 담벼락을 슬픔이 윽박지르면 꿈도 방향도 없이 서까래가 넘어지고 보이지 않는 칼에 네 종아리가 잘려 나가고 가까이 입을 다문 채 컹컹 짖는 中年 남자들 네 발목, 손목에 가래가 고인다, 벌써 어두워! - 이성복 「봄 밤」, 부분 이 시는 봄밤에 느끼는 어떤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봄밤에 대해 생각하는 관습적인 느낌과는 많이 다르다. 봄날 밤의 정취는 시인에게 그리 부드럽거나 포근한 무엇이 아니라 황당하고 황망하며 절망적이고 치욕스럽게 인식된다. 그것은 시인이 어떠한 연유에 의해 얻게된 절실한 고민의 발로이다. 그러니까 시인에게 봄밤의 감회는 비극적인 느낌으로 다가온 것이고 그 느낌은 다시,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 , , 넘어진 , , , 등으로 구체화된다. 동원된 소재들은 시각적인 이미지를 구현하면서 특정한 느낌, 나아가 주제적인 정황을 형성해나간다. 그런데 이미지들이 환기하는 어떤 분위기는 그 소재들에 대한 시인의 기억에서 발원한다. 다시 말하자면 에서 에 이르는 시인의 감각경험이 하나의 이미지 코드로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에 대한 이미지가, 달빛이 내리는 봄밤의 과 에 대한 이미지가 하나의 느낌을 이루며 이렇게 개성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제시되지는 못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미지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는 자연스럽게 확인된다. 이미지의 기능은 단연 관념을 구체화하는 일이다. 시의 주제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감각으로 현상해내는 일을 이미지가 담당한다. 시는 의미를 내장하고 있는, 혹은 의미를 환기하고 있는 이미지의 덩어리로 독자에게 제시된다. 그러므로 시 속에서 이미지가 제대로 기능할 때, 그 시는 높은 감응력을 발휘한다. 김준오는 이미지의 기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의 이미지는 시에서 여러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이미지의 정의에 이미 암시되어 있듯이 이미지는 무엇보다도 해석에 도움되는 중요한 장치다. 시인은 전달하고 싶은 관념이나 실제 경험 또는 상상적 체험들을 미학적으로 그리고 호소력 있는 형태로 형상화시킬 수단을 찾는다. 이 수단이 이미지다. 다시 말하면 이미지는 의미를 전달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독자든 시인이든 시를 잘 읽거나 잘 쓰기 위해서는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기억을 얼마나 풍부하게 저장하고 있는가를 늘 점검해야 한다. 이는 평소에 주변의 사물과 상황에 대해 세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과 같다. 또한 사물과 상황이 특정한 느낌을 지닌 하나의 이미지로 받아들여진다면 시를 읽거나 창작할 때 많은 도움이 되겠다. 절실한 고민과 구체적인 느낌은 이미지라는 훌륭한 도구를 통해 효과적으로 다가오거나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부한 감성의 시들을 구별하게 해주고 학습된 느낌과 상투적인 이미지가 마치 내 것인 양 남발하는 시 쓰기의 오류로부터 우리를 구제해 줄 것이다. 3.    이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현대시로 올수록 ‘감각적 드러냄’, 즉 ‘이미지’의 위상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규보가 「백운 소설」에서 ’무릇 시에서는 뜻이 주가 된다. 뜻을 세우는 일이 가장 어렵고 표현하는 일은 다음이다‘(夫詩以意爲主 設意最難 綴辭次之)라고 말한 것에 비하면 현대시에서 ’감각적 드러냄‘이 차지하는 비중은 가히 ‘뜻을 세우는 일’을 능가한다고 하겠다. 물론, 현대시에서도 감각적인 특질과 사유적인 특질은 시에 따라 달리 나타나기도 한다. 이제는 과거의 시작법처럼 보이기도 하는, ( 유치환, 「바위」)와 같이 감각을 대동하지 않는 도저한 관념의 표출이 있는 반면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이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羊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 김종삼 「북치는 소년」, 전문    과 같이 오직 감각적인 이미지만 남아있는 시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에서 감각과 사유는 가장 효과적인 균형을 이루려고 노력한다. 문제는 현대시가 사유의 무거움보다 개성적이고 다채로운 감각적 이미지의 추구로 기울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시에서 리듬감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는 현상에서도 그 사실은 입증된다. 현대시는 집단이 공유하는 노래로서가 아니라 내밀하고 사사로운 느낌을 구현하는 장으로서 그 장르적 속성이 변해가고 있다. 이제 시의 언어는 감각적 느낌을 제공하는 단서로서 그것에서 파생되는 시적 환기력에 의해 그 성패가 가늠된다.     현대시가 리듬감보다는 조형적인 이미지에 의한 구성이 더욱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현대사회가 더욱 복잡해지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집단 무의식의 발로로서 시가 지녔던 주술성, 혹은 그것에 대한 믿음이 현대시의 언어에서 사라진 지는 오래 되었다. 근대적인 시의 개념은 리듬과 비유와 상징으로 대표되는데 동시대로 오면 올수록 리듬감은 현저히 퇴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갈수록 다양하고 개별화되는 현대인들의 삶을 드러내고 그것을 문학적으로 향유하기에는 집단적 성격의 음악적 자질보다는 미세하게 분화된 감각적 이미지가 더욱 적합해진 것이다. 개성적인 비유, 혹은 새로운 이미지로의 경도는 어쩌면 현대적 삶의 양상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날이 흐리고 가랑비 내리자 북쪽으로 가려던 새들이 날기를 멈추고 서 있다 오리나무숲 새로 저녁은 죽음보다 조금 길게 내리고 산 밑으로는 사람들이 두엇 두런두런 얘기하며 가고 있다 어떤 충격이 없이도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다 바람도 그들의 머리칼을 날리며 그들 식으로 말을 건넨다 바람의 친화력은 놀랍다 나는 바람의 말을 들으려고 귀를 모으지만 소리들은 예까지 오지 않고 중도에서 사라져버린다 나는 그것으로 됐다 나는 너무 멀리 있다 나는 유리창 너머로 마른 나무들이 일어서고 반향하며 골짜기를 이루어 흘러가는 것을 보고 있다 나는 모두를 알 수 없다 나는 너무 멀리 있다 새들이 다시 날기를 멈추고 시간들이 어로인지 달려가고 그림자들이 길 위에서 사라지는 것을 나는 보고 있다 이제 유리창 밖에는 새도 나무도 보이지 않는다 유리창 밖에는 유령처럼 내가 떠오르고 있다.    - 최하림 「나는 너무 멀리 있다」, 전문        일상적인 풍경으로 드러나는 이 시는 사실 대단히 무거운, 관념적인 주제를 안고 있다. 시인은 삶과 죽음의 대비를 통해 생의 소중함을 말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말하지 않고 드러내는 방식을 택한다. 이런 주제는 대체로 고통스러운 포즈의 진술에 의해 표현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는 표현 외에는 어디에도 무거운 진술은 없다. 특별히 두드러지는 비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나무와 새와 바람의 모습을 동원하여 일정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 이미지들은 모두 죽음을 향해 흘러가는 시간의 의미, 혹은 화자로부터 멀어져 가는 생의 의미를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가벼운 일상의 풍경 속에 생의 가장 비극적인 무거움이 깃들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주제적 사유도 사유지만 사물에 대한 애정과 관찰이 없이는 불가능하며 그것은 곧 감각적 이미지로 환원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시에서 주제의 무거움이 가벼운 이미지의 놀라운 운용에 의해 어떻게 환기되는지를 즐긴다. 이와 같이, 형상화가 주제에 대한 고려보다 더 우세한 자리를 점하고 있는 현상은 요즘의 시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시에는 당연히 주제적인 전략과 형상화 전략이 공존한다. 이규보의 시대에 비해 본다면, 주제적 전략과 형상화 전략은 훨씬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아직까지 기존의 대다수 시들은 세상을 통찰하는 생각의 힘을 궁극적으로 우위에 둔다. 그러나 새롭게 부각하는 시의 창작경향, 그리고 앞으로 전개될 시창작의 유형은 더욱 다른 모습을 띄게 될 것이다. 사물을 통해 세상의 의미를 해석해내려는 기존의 시작법보다 제시의 기능이 강한, 즉 형상화의 측면을 즐기는 시작법이 우세해질 것이다. 더구나 시에 있어서 비유와 묘사에 국한되던 기존의 이미지의 개념에는 점차 ‘관념의 조성’이라는 세련된 기능이 추가되고 있다. 과거에는 상승․하강, 폐쇄․개방, 어둠․밝음 등과 같은 관념적 이미지들이 주제를 형성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였다면 이제는 특정 관념을 육화해내는 이미지의 공정, 그 자체를 즐기기 위해 이미지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시가 곧 이미지다라는 고전적 정의의 패러다임은 질적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아니 변하고 있고 변했다.      4.    80년대 서정의 대표적 얼굴이었던 이성복의 시들은 이미지의 운용에서 80년대적이었다. 이미지 활용의 기존 관습을 극복한 그의 시들은 이미지가 전체성보다 파편성에 지배받도록 한다. 그의 시 쓰기는 비유적 이미지의 작법이 치환의 시대에서 병치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비유의 방법으로서 치환이 동일성에 대한 단순한 욕구에 근거한다면 병치는 이질성으로 인해 유발되는 자유로움에 더 큰 무게를 둔다. 물론 치환방식과 병치방식은 근본적으로 자아의 동일성을 지향하기는 하지만 맥락을 약화시키고 이질적인 것들의 중첩을 통한 직관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병치는 좀더 현대적이다. 이성복의 시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은 이미지군과 군 사이의 고리가 대체로 느슨하다. 그러므로 이미지들은 자족적인 성격을 지닌 채 다른 이미지들과 소원하다. 이전의 시들이 시의 구성 요소들을 유기적으로 조직하였던 것에 비해 이성복의 시는 다소 무책임한 태도를 보인다고 하겠다. 이 무책임함은 최근 시 쓰기에 이르러 하나의 강력한 목표가 된 듯한데 이점에서 이성복은 선구자였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봄은 오지 않았다 복숭아 나무는  채 꽃이 피기 전에 아주 작은 열매를 맺고  불임의 살구나무는 시들어 갔다  소년들의 성기에는 까닭없이 고름이 흐르고  의사들은 아프리카까지 이민을 떠났다 우리는  유학가는 친구들에게 술 한 잔 얻어먹거나  이차대전 때 남양으로 징용간 삼촌에게서  뜻밖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놀라움도 우리를 무기력과 불감증으로부터  불러내지 못했고 다만, 그 전해에 비해 약간 더 화려하게 절망적인 우리의 습관을  수식했을 뿐 아무것도 추억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살아 있고 여동생은 발랄하지만  그들의 기쁨은 소리 없이 내 구둣발에 짓이겨  지거나 이미 파리채 밑에 으깨어져 있었고  춘화를 볼 때마다 부패한 채 떠올라왔다  그해 겨울이 지니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우리는 봄이 아닌 윤리와 사이비 학설과  싸우고 있었다 오지 않는 봄이어야 했기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감옥으로 자진해 갔다   - 이성복 「1959」, 전문       「1959 년」은 으로 변명되는 절망을 매우 감각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시이다. 시인은 절망의 현장이 지니는 불모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몇 개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아주 작은 열매만을 맺는 복숭아나무’, ‘시들어가는 불임의 살구나무’, ‘까닭없이 고름이 흐르는 소년들의 성기’ 등이 그런 것들이다. 예시한 존재들은 생산성이 떨어지거나 생산이 불가능한 것들의 구체적인 이미지들이다. 하지만 이들 소재들은 의미의 어떠한 맥락도 없이, 즉 인과관계 없이 전후로 연결되어 있다. 연계성이 없으므로 연결되어 있다기보다 놓여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병치되어 있는 이미지들은 모두가 유사한 느낌을 환기한다. 이질적이고 파편적인 소재들이지만 일정한 이미지를 공유함으로써 ‘따로 또같이’의 효과를 발휘한다.   게다가 ‘아프리카로 이민을 떠난 의사’, ‘유학을 가는 친구들’에서 파생된 이미지는 치유 능력의 부재를 적극적으로 환기하는데 그것의 중첩은 더욱 깊은 절망을 조성하는 데 기여한다. 도 그 절망의 현장에 방치된 존재들을 구원할 수 없다는 우울한 선언은 이미지들의 힘을 바탕으로 높은 가청도를 확보한다. 그런데 시의 앞 부분에서 제시된 불모의 이미지들과 마찬가지로 ‘의사’와 ‘친구’ 사이에는 어떠한 논리적 연계가 없다는 점에서 이미지들은 자유롭고 무책임하다. 기존의 독법에 의존하면 이미지 사이의 맥락은 상식적이지 않다. 독자는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 의 주위에 모여드는 새로우면서도 강렬한 느낌을 전달받는다. 아닌 것 같으면서도 결국은 동일한 느낌의 이미지들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다면성과 동일성이 동시에 구현된다. ‘오지 않는 봄’의 세상과 ‘보이지 않는 감옥’의 현실을 이성복 식으로 형상화하는 방식으로서 이미지의 활달한 활용은 80년대 시의 실험이자 성과였다.   이러한 이미지 활용은 다음 세대인 기형도의 시에 고스란히 이어진다. 다만 이성복의 시적 상상력이 여전히 정치적인 국면에 토대를 두고 있었던 것에 비해 기형도의 것은 정치적 국면에서 벗어나고 있거나 이미 벗어나 있다. 그런 면에서 기형도 시의 이미지는 90년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인 상처를 기점으로 전개되는 우울하고 어두운 그림들은 그의 시 세계를 특징짓는 아이콘이 되었다. 가령 그가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정거장에서의 충고」, 부분)라고 노래했을 때, 이 시에 사용된 어둠과 황량함과 처량함은 더 이상 사회 공동체의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하지만 나열된 이미지들,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는 마른 나무’, ‘천천히 노트를 덮는 나’, ‘검은 구름이 멎어있는 저녁의 정거장’, ‘군데군데 쓰러져 처량한 눈을 껌벅이는 개’ 등은 이성복 시의 방식처럼 인과관계보다 독립성에 의존한다. 이미지들 사이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약화시키는 태도는 더욱 발전한다. 이미지들은 일정한 의미를 지향하기보다는 독자들의 정서 안에서 자유롭게 진동한다. 하 지만 지배문화에 대한 저항으로서 일탈의 의미는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질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일군의 시인들에 의해 시도되는, 때로는 발랄하고 때로는 엽기적인 상상력들이 대동하는 이미지들은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곤혹스럽다. 이러한 현상은 조짐이 아니라 이제 하나의 흐름이 된 듯하다.      객관적인 아침  나와 무관하게 당신이 깨어나고  나와 무관하게 당신은 거리의 어떤 침묵을 떠올리고  침묵과 무관하게 한일병원 창에 기댄 한 사내의 손에서  이제 막 종이 비행기 떠나가고 종이 비행기,  비행기와 무관하게 도덕적으로 완벽한 하늘은  난감한 표정으로 몇 편의 구름, 띄운다.  지금 내 시선 끝의 허공에 걸려  구름을 통과하는 종이 비행기와  종이 비행기를 고요히 통과하는 구름.  이곳에서 모든 것은  단 하나의 소실점으로 완강하게 사라진다.  지금 그대와 나의 시선 바깥, 멸종 위기의 식물이 끝내  허공에 띄운 포자 하나의 무게와  그 무게를 바라보는 태양과의 거리에 대해서라면,  객관적인 아침. 전봇대 꼭대기에  겨우 제 집을 완성한 까치의 눈빛으로 보면  나와 당신은 비행기와 구름 사이에 피고 지는  희미한 풍경 같아서.   - 이장욱 「객관적인 아침」, 전문   시 읽는 즐거움  ㅡ 펌 글             「새로운 시는 전방위(全方位)의 '소외'를 야기해 '드높은 곳의 고향'으로 인도한다. 그 '공작(工作)'의 본질은 수학적 의미에서의 분석가가 기지의 것으로부터 미지의 것을 이끌어내는데 있다. 시 창작은 테마상으로 우연에 의존하며, 방법상으로는 '과도한 명료성'이라는 병을 앓고 있는 일상 세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동화(童話)의 추상화 작용과 일맥상통하는 대수학적 추상성에 의존한다.   정감이 아니라 중성적인 내면성, 현실이 아닌 상상력, 세계의 통일성이 아닌 세계의 파편, 이질적인 것들의 혼합, 혼돈, 모호함과 언어 마술에 의한 매혹,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드는 수학에 비견할 만한 냉철한 공작, 이러한 것들이 보들레르의 시론, 랭보, 말라르메와 현대인들의 시의 토대를 이루는 바로 그 구조다.」 ─『현대시의 구조』(후고 프리드리히)에서. 1. 시는 왜 불편을 말하는가  최근 시의 수사학은 다양한 변이를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몽타주의 구성-인과율에 따른 진행(A-B-C-D)에서 최근 시에는 각각의 장면을 잇는 인과적인 사슬이 없는 경우도 있다. 치환 가능한 상태로 주체의 의도나 심리를 기술하기도 한다(a-a-a-a). 또한 확장된 현실법(現實法)-과거시제로 적힐 부분에 현재시제를 적용함으로써 생생한 묘출(描出)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 쓰이기도 한다. 또한 의사(擬似) '인유'와 '명명법'-통상적으로 인유(引喩)와 명명(命名)이 대상과의 일치를 의도하면 인용과 정체성 호명(呼名)으로 전화하고, 대상과의 불일치를 의도하면 패러디와 정체성의 분열로 진화한다. 그리고 알레고리의 무대 또한 그 의도가 언중(言衆)의 통념을 배반하기에 시의 표면만 따라 읽으면 작위적인 상황이 펼쳐진다. 또한 육체 언어로서의 '위악어법'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기인, 김이듬, 김민정 등의 시에서 이런 점을 볼 수 있다. 또한 최치언이나 김행숙 등에게서는 블랙유머도 읽을 수 있다. 이장욱의 경우는 '좀비 산책'에서 반 잠언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재연의 '오 분간'도 그렇다. 김경주의 경우, 비문을 통해 어감을 바꾸고, 의미를 더하고, 시에 육체성을 부여하기도 했다. 신영배나 장승리의 일부 시는 시선의 변화, 감정의 사물화를 통한 비례의 왜곡을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급락법(急落法)-숭고에서 경박으로, 고양에서 해학으로 급반전되는 어조의 변화, 연쇄법(連鎖法)-한 장면에서 다른 장면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전환들, 또한 육하원칙의 의도적인 배제를 통해 진공의 시공간 속에서 진술하기, 등 이것들은 전대 미학의 부정이 아니라 그것들의 승계이며, 미학의 영토를 넓히고자 하는 개성적인 노력들이다. 그렇다면, 이 변화를 항목으로 정리하는 것은 학자의 몫일 것이나, 시의 표현 양상이나 진술의 진행 방향은 자꾸만 변화하고 발전한다. 독자로서는 텍스트를 읽으면 그만이지만, 내적인 의도는 다양한 시도와 실험이 동반된 전술적인 방향으로의 진행이 시의 전략이 아닐까 싶다. 그러므로, 이런 시의 양상들이 불편하다. 또한 이 세계나 우주가 완벽한 질서로 이루어져 있다면, 미학은 설 자리가 없다. 불편함이 없다면, 찬송이나 찬양 밖에는, 늘 즐겁고 행복한 소리밖에는 없을 것이다. 시의 태도는 긍정과 부정에 묶이지 않고, 시인의 시각으로 이 세계를, 또는 무질서를 재편해서, 새로운 질서를 찾고자 한다. 그러니 시는 선미든 추미든 궁극적으로는 미에 닿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그 욕망의 결과로 우리는 재편된 질서를 느끼고 미적 즐거움을 얻는다. 불편과 불행은 좋은 시를 위한 씨앗이 된다. 비극을 통해 카타르시스나 오르가슴이나, 어떤 지적인 쾌락에 도달하는 경우도 있다. 시라는 두레박은 아무래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올려, 독자에게 시원한 찬물을 건네는 방식으로 존재할 때 더 서늘하다. 나는 불편에서 발생한 시의 힘이 더 끈질기고 끈끈하며 더 나은 경계로의 확장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가 인지하는 세계의 질서를 옹호하고 찬양하는 것 또한 좋은 일일 것이나, 시의 비수가 우리가 감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베고, 또 그 속살을 보여줄 때 더 풍부한 독서의 즐거움을 가질지 모른다. 모든 미학을 좇는 자들은 두더지가 땅굴을 파서 숨통을 열어놓듯이, 밑바닥으로 숨길을 여는 존재들은 아닌가 싶다. 쉬운 위로보다, 처절한 위로가 불편하지만 오히려 득이 될 때가 많다. 그래서 더러 시를 읽는 것도 시가 보여주는 세계도 불편할 때가 있다. 2. 시는 왜 해방을 말하는가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시간과의 가역반응 속에 산다. 시간은 우리에게 삶이라는 공간을 제공하고 역반응으로 그 삶의 목줄을 당긴다. 우리는 제한된 시간을 사는 유한자이므로, 자유롭기를 원한다. 그러나 삶의 톱니바퀴에서 마냥 자유로울 수 없다. 자본, 자식, 성공, 연애, 생존, 등등 추상적인 구호들을 다 젖힌다 하더라도 존재가 앓는 다양한 결핍과 후유증과 통증과 그  증상을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런 쪽에 문학과 예술은 있다. 삶의 기표나 기율들이 우리를 제한하고자 할 때, 그늘을 찾든지, 도식화된 질서를 벗어나든지. 늘 일상이 여행 같은 것일 테지만, 그 여행은 대부분 단막극이다. 쓸쓸한 생활로의 귀환을 강요한다. 시는 진실을 말하는 방식이 다르다. 어느 밤의 통성 기도로 얻는 방언과도 다르다. 그저 외쳐서 얻는 것이 아니라, 삶이 가진 속성 안에서 모순과 결핍과 부작위와 틀과 관습과 관념 등과의 길항을 원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딱 맞는 기성복인지, 꼭 그것을 착의하고 살아야 하는지 질문한다. 그래서 시인은 설교자나 양치기나 깊은 숲에 은거하는 도사가 아니다. 생활 속에 뒹굴며 살아가는 낮은 자이다. 가장 낮게 보고 서럽게 짖어대는 짐승인지도 모른다. 그런 절규가 시인을 인간과 신의 중간자로 둔다. 그것은 허공의 메아리를 담는 것이 아니라 바닥을 기며, 신음을 드러내 우리를 정면으로 보고자 하는 노력이며 의지이며 시는 그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절대 고상한 존재가 아니라, 똥간을, 퇴비를, 더러운 흙을 갈엎어 숨 쉬는 땅으로 만드는 지렁이와 같은 존재에 가깝다.  시인은 마천루 꼭대기에 올라 설교하는 자가 아니라, 빌딩과 빌딩 사이에 줄을 걸고 맨몸으로 건너는 자와 같이 위험하고, 도전적이며, 또 외로운 자들이다. 예전의 미학은 시인 스스로가 감정을 드러내는 쪽으로, 눈물샘을 자극하고, 글자를 가지고 울고짜고, 감성 풍부, 울먹울먹 감상주의(感傷主義)가 우리를 위로한 때도 있었다. 그 공과는 과거의 것이지만, 일부는 여전히 우리를 즐겁게 한다. 상한 감정도 위로가 될 때가 많으니까 그렇다. 점차 우리는 과거 시가 가진 울음과 시인 스스로, 진지를 잃은 언표들의 장난에 심드렁해지기 시작했다. 언어와 시인의 분리는 당연하지만, 글자로써 우리를 감격이나 감탄이나, 감성의 자극은 한 줄 카피보다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부정과 개척을 통해 깨달았다. 과거를 전복해서 얻은 언어의 견고한 자태가 있다는 새로운 경험이 자꾸만 등장한다. 그래서 언어는 사막의 모래알을 삼키며 건조해지고, 독자는 그 사막의 기후를 마시며 더 풍요롭게 쓸쓸해지고, 깊어지고, 또 언어의 맛, 시가 드러내는 묘미 또다른 오아시스를 경험하기도 한다. 언어가, 감정을 억제하고, 감각으로 간 이유와 성과이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아주 진실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진실이라는 문제에 관심이 없다. 어떤 사람이 내적으로 충실한 사람이라면 내부에서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 없다. 다 채워져 있다면, 기체 고체 액체로의 상태 변화는 불필요한 것이 되고 만다. 시인은 세상을 완벽한 유토피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지옥에서 보내는 한철',로 본다. 그런 인지와 인식이 타자를 위로의 대상, 해방의 대상, 자유를 말하는 대상으로 놓아주기 때문이다. 예전에 어떤 관념은 살인적인 것이었다. 이를테면, 정조 관념이 그 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온갖 잡질을 다 하면서도, 열녀비를 세우고, 여성의 정조만을 강요했다. 그것을 잃으면, 당산나무에 목을 거는 것으로, 그들의 교만하고 야만적인 잔치는 그칠 줄 몰랐다. 그들이 가진 천박한, 속성이다. 춘화의 태도가 그렇듯, 아름다운 유교에 라는 것에는 이런 비인간적인 불균형이 많다. 이것은 인간이 인간을 프로테스크 침대에 눕히고 자기 식으로 몸을 절단한 방식과 그 야만성이 동일하다. 아름다운 종교란, 삶을 진실로 위로하는 것이지, 말씀을 팔아 아름다운 건축물을 지어대는 것이 아니라 믿는다. 흔히 회당에서는 수천년 말씀을 아름답게 전하고 모두, 일제히 한 마디 아멘을 강요하면서, 돈주머니를 내민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낮은 사람 소외된 사람을 위한 것일 테지만, 일부는 자본주의 성장 궤도와 같이 양치기와 그 그룹을 살찌우는 것으로, 그 혁혁한 공과는 사실 세계사에서도 드문 일이다. 우리 앞의 종교가, 자본주의 속성을 그대로 닮아, 미쳐가는 것을 자주 보기도 한다. 이것은 일반화의 오류겠지만, 맹목적인 신앙이 갖는 이상한 결과물은 곳곳에 존재한다. 신은 이런 믿음을 축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종교도 예술도, 그 기만의 속성을 모르면, 맹목적인 노래나 불어야 즐겁겠지만, 그것은 절대적으로 위선이다. 언어가, 포장을 위한 포장일 때, 겉으로 위로하는 척하며 야만을 떨 때, 마치 세상은 요들송처럼 그렇다 말할 때, 싸구려 위로로 진실을 가공할 때, 우리는 슬프다. 그 거짓말의 상자 안에는 조화보다도 못한 얄팍한 속임수가 들었기 때문이다. 예술은, 질서나 규율이나, 본능이나, 이성이나, 생이나, 시나, 비시나, 질문과 파괴 혹은 생성의 대상이 된다. 사탕발림을 아름답다, 하는 얄팍한 눈으로는 시가 말하는 그 속내를 알아채기 어렵다. 그것은 문자를 놓고 자위를 하는 것처럼 허랑하고 쓸쓸한 짓이다. 그렇다면 요지는 무엇인가. 요지는, 시를 쓴다면, 자신에게 본질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라 믿는다. 무엇을 위해 쓰고, 무엇을 위로하고자 하는지, 갇힌 새를 놓아주고, 억압된 마음과 우리에서 풀어주고, 기만적인, 교조나 신념에서 벗어나게 하는지를. 우리에게 우상이란, 아름다운 척하는 가짜다. 함부로 진실을 말하는 자를 믿을 수 없듯이, 우리는 조심스럽게, 왜 인간이고,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반문하며, 어둠을 소모하며, 몇 글자를 적는다. 사탕과 풍선이 아니라, 그 안에 든 헬륨 가스가 아니라, 자유로운 새가 되어, 이 기계적인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한 줄이라도 읽고 유쾌해지기를 원한다. 기표에 속아, 기의의 발랄함을 잃으면 시를 읽을 이유가 없다. 그것보다는 음담패설이나 싸구려 농담이 더 유쾌하다. 그런 것 또한 시가 품고 있는 표현법이겠지만, 아무것도, 시를 쓰는 마음을 꺾을 수는 없다. 시는 가장 가난한 노동이고, 값어치 있는 행위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그렇다. 시를 쓰며 우상이 되려 하는 모순은 시의 편이 아닐 것이므로, 시는 자본이나 성공이나 화려함이나, 멋진 거짓말 등의 바깥을 배회하는 부랑아라고 믿는다. 시를 읽는 것은 내 인식과 감각의 몽리면적을 확장하는 즐거움이다.           「문학은 경제생활의 안정에 전념하는 사회와 대립했고, 과학적인 세계 해명과 공공 사회의 범속성를 비탄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전통과의 예리한 단절이 생겨났고, 문학은 치유가 아니라 섬세한 말을 추구하며 자신의 내부에서 선회하는 고통의 언어를 자처했다. 그리고 이제 시가 문학의 가장 순수하고 고귀한 현상으로 규정되었다. 요컨대 시는 여타 문학과 반대 입장을 취하면서 준엄한 상상력, 무의식으로 확대된 내면성 그리고 공허한 초월성과의 유희가 부여해 주었던 모든 것을 무제한적으로 가차 없이 말하는 자유를 자기 것으로 했다.」 ─『현대시의 구조』(후고 프리드리히)에서.   이장욱의 시에서 선행 이미지는 의미상으로 전혀 뒤이은 이미지로 징검다리 건너듯 건너간다. 끝말 잇기 놀이의 방식을 시에 차용하는데 어휘 대신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끝말 잇기에서 앞 말과 뒷말이 소리 이외의 어떤 연관도 없는 것처럼 이미지들도 기억이나 시선에 의해 매개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나와 당신’, ‘당신과 어떤 거리의 침묵’, ‘침묵과 한일병원의 어떤 사내’, ‘사내와 종이비행기’, ‘종이비행기와 하늘’, ‘하늘과 구름’ 등 이미지들의 연쇄는 오히려 무관한 것들의 무의미한 연쇄에 불과하다. 그것은 이 시의 가장 큰 형식적 전략이다. 그 전략에 의하면 을 포함한 모든 존재들은 고립된 객체들이자 지극히 우연하게 한 공간에 놓여진 일 뿐이다. 그것은 무관하게 연계된 이미지들의 관계를 통해 더욱 감각적으로 입증된다. 결국 이 시에 등장하는 많은 이미지들은 전체성이나 동일성을 파괴하기 위해 의도된 아귀 맞지 않는 퍼즐조각들이다.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객관적인 존재들일 수밖에 없다는 일단의 사유는 무관한 이미지의 배치를 통해 완성된다. 이 시를 이끌어가는 대표적인 힘은 사유가 아니라 이미지들의 관계방식에 있다.   이처럼 단 하나의 결정적인 의미가 되기를 원하는 않는 기표들, 의미가 아니라 오로지 이미지로만 남기를 원하는 시들을 만나게 되는 일은 전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되었다. 이제 현대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무의식에 근거한 듯한 자동기술들은 급진적으로 교란된 이미지들을 양산한다.      호주머니를 잃어서 오늘 밤은 모두 슬프다  광장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모두 서른두 개  나는 나의 아름다운 두 귀를 어디에 두었나  유리병 속에 갇힌 말벌의 리듬으로 입 맞추던 시간들을.  오른손이 왼쪽 겨드랑이를 긁는다 애정도 없이  계단 속에 갇힌 시체는 모두 서른두 구  나는 나의 뾰족한 두 눈을 어디에 두었나  호수를 들어올리던 뿔의 날들이여.  새엄마가 죽어서 오늘 밤은 모두 슬프다  밤의 늙은 여왕은 부드러움을 잃고  호위하던 별들의 목이 떨어진다  검은 바지의 밤이다  폭언이 광장의 나무들을 흔들고  퉤퉤퉤 분수가 검붉은 피를 뱉어내는데  나는 나의 질긴 자궁을 어디에 두었나  광장의 시체들을 깨우며  새엄마를 낳던 시끄러운 밤이여.  꼭 맞는 호주머니를 잃어서  오늘 밤은 모두 슬프다   - 황병승 「검은 바지의 밤」, 전문      주어와 술어, 그리고 목적어가 제 위치에 있다고만 해서 통사구문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위의 시는 너무나 리얼하게 보여준다. ‘아버지는 바쁘고 어머니는 예쁘다’라는 문장은 통사구조상 정상적인 것 같지만 의미의 불균형으로 말미암아 누가 보더라도 이상한 문장이 된다. 사람들은 문장의 반을 듣고 상식적인 수준에서 다음에 무엇이, 최소한 어떤 맥락의 표현이 등장할 것인지를 안다. 그러한 상식은 그러나 황병승의 시에서는 무참하게 파괴당한다.(이 시는 그의 시집에서 다소 온순한 편에 속한다) 필연성이나 합리성을 의도적으로 조롱하듯 수식어와 피수식어의 관계, 구문과 구문의 조합, 문장과 문장의 연결은 예측할 수 없는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아니 질서와 규범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 같다.   「검은 바지의 밤」에서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의미의 코드는 부재, 분열, 해체이다. 이 시의 슬픔은 이기 때문이다. 는 죽었고 , 들도 목을 잃었다. 생명을 잃기는 들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와 , 역시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호명하는 것들은 모두 없는 것들이다.   한편, ‘부재하는 것들의 세상’에서 중심을 이루는 또 하나의 이미지는 분열된 신체에 관한 것이다. 의문과 회한의 어조를 동시에 겨냥한 라는 표현은 적절한 위치에서 후렴구처럼 등장한다. 그것은 듣고 보고 생산하는 신체의 기관들이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의 주체가 파편으로 분열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부재와 균열, 분열과 단절, 그 이상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어쩌면 그것을 알려고 하는 욕망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바람직할지 모른다. 해체의 노력은 읽는 이에 따라 다양한 경험으로 수납될 것이다.   정상적인 이해의 파괴를 대동한 이 난해한 이미지들은 처음부터 해석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각각의 이미지들은 전혀 연계되지가 않고 열심히 배타적이다. 이성복과 기형도 시의 자족적인 이미지들도 궁극적으로 일정한 정서를 지향하였던 것에 비해 보면 환상과 모호함으로 무장한 일군의 시들은 궁극적인 지향, 즉 동일성이나 전체성 자체를 거부한다. 그것은 곧 의미와 형식의 해체이고 질서와 규범의 파괴이다. 이미지들은 해체와 파괴, 이탈과 모호함을 위해 창조된다. 지배질서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저항정신과 실험의지는 급속하게 진화하고 있다. 전통은 늘 닫혀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급진적인 저항은 완전하게 열려 있는 텍스트를 끊임없이 추구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이러한 형상화 전략들이 전략을 위한 전략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시의 근간은 정직이다. 정직은 절실함으로 이어지고 오래 절실하다보면 단 하나밖에 없는 바로 그 언어와 형식을 얻게 될 것인데 전략에 치우치다 보면 스스로를 기만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면 진짜인 척 하기가 훨씬 수월하다. 그 함정을 어떻게 피해갈 것인가? 사실 그것은 모든 시의 숙제이다.    심재휘  1963년 강릉. 고려대학교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 1997년 신인상으로 등단. 현재 대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시 쓰기의 실패자들    시를 쓰다보면 절벽이 가로막은 것처럼 도무지 더 이상 진척이 되지 않거나 '시'의 싱크홀 같은데 빠져서 허우적 거리다가 그만 자포자기하여 시 쓰기를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시인치고 이런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스의 3대 비극시인 에우리피데스(Euripides, B.C480~406)는 "약간의 노력으로 좋은 결과를 얻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2천5백 년 전부터 오늘도 유효하게 세상의 시인들을 향해 일갈하고 있는바, 시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 끊임없는 노력으로 시 쓰기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성공을 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새기게 된다. 실패를 하지 않고 시 쓰기를 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실패한 시인일 것이다. 왜냐하면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는 사람살이의 지점을 읽어내는 일이 곧 시 쓰기요, 불확실하고 변화무쌍한 삶의 질곡을 진단하여 희망의 손수건을 세상을 향해 흔드는 일이 시인의 일인데  실패를 경험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희망이란, 루쉰(魯迅, 중국의 사상가)의 진단처럼, 길이 없던 곳도 자꾸 걸어가면 길이 된다는 것이고, 파도를 겁내지 않고 바다에 나가는 사람이 고기를 잡는다는 것이다. 시를 쓰다가 막히거나 실패를 거듭해도 또다시 도전하는 사람이 시의 길을 만드는 사람이기에 시인으로 인정받는 반열에 오를 수 있거나 최소한 시를 제대로 읽어내는 독자라도 되는 것이다.    "붉은 여왕 효과(Red queen effect)"는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나의 고집대로 그 자리에 안주하면 성공하기 힘들게 되고, 세상의 속도만큼 나도 같이 뛰면 현상유지는 되는 것이며, 세상의 속도보다 조금이라도 빨리 뛰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인데 시도 그렇다. 다른 사람들의 시에는 관심이 없거나 현대시의 흐름을 모르는 채로 내 고집에 사로잡혀 시를 쓰면 내 시가 진부한 넋두리인지, 지향하는 지점이 어디인지조차 모르게 되어서 시가 성공하기 어렵게 된다. 또한 시류에 편승하여 기성 시인의 흉내나 낸다면 그런 시는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인, 있으나 마나 한 시가 된다. 그러나 자기와의 치열한 싸움을 통해 실패를 하더라도 계속 도전하는 사람이 결국 좋은 시를 쓰게 될 확율이 가장 높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난삽하고 이해하기 힘든 어려운 시를 쓰지 말라는 것이다. 좋은 시와 어려운 시는 다르다. 두 가지 이상의 이미지가 결합된 말의 덩어리를 이미저리(Imagery)라고 하는데 이런 시는 어려운 시가 아니라 뜻이 깊고 읽을수록 맛이 나는 좋은 시일 가능성이 많다. 그렇지만 몇 번을 읽어도 뜻이 잡히지 않는 시는 쓰레기통에 집어던져도 된다. 시를 좋아하는 보통의 독자가 몇 번을 읽어봐도 이해하지 못하는 시는 그런 시를 좋은 시라고 꼽는 사람들끼리 보고 놀면 된다. 나의 이 강의도 어줍잖은 지식을 뽐내려 한다거나 여기저기에서 끌어모은 어려운 시론을 짜집기하여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면 읽을 필요도 없다. 될 수 있으면 회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시를 사랑하는 보통의 사람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여 노력하지만 사실 쉽게 설명 한다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매번 느낀다. 200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폴 크루그먼(Paul Krugman)도 이런 말을 했다.   "나 역시 아무나 읽지 못하는 어려운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은 충분하지만 대중이 알아 먹도록 써야한다"    오늘은 시적 대상에 대한 것을 생각하면서 세 편의 시를 보자.    물론 시적 대상에는 제한이 있을 수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이 시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이 선택한 소재는 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좋다. 여러 시인들이 이미 발표한 흔한 소재로 시를 쓴다면 여간해서는 주목받기 힘들다. 어차피 시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독자의 공감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쌍방향의 문학인데 여기저기에서 들었던 내용을 다시 듣는다는 생각이 들면 독자는 흥미를 잃을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처음 시를 쓸 때, 시의 소재로 가장 많이 택하는 것은 '자연'이다. 그런데 이 자연이라는 소재는 수대에 걸쳐서 동서양의 시인들이 너무나 많이 써왔고 훌륭한 시도 수 없이 많다. 그러므로 여간 잘 쓴 것이 아니라면 자연에 관한 소재로 시를 써서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 자연을 매개로 시를 쓸 작정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은 느꼈을법한 내용은 멀리하고 새롭게 형상화 된 내용, 즉 자기만의 특질화 된 시각의 시를 쓰기 바란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을 소재로 했을 땐 조금만 방심해도 진부하거나 재미없는 시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범위한 자연은 아직도 나만의 시각으로 해석할 공간을 수도 없이 제공하고 있기에 소재가 빈곤하다고 탓 할 일은 더욱 아니다.    와우리 성애원 옆, 금곡폐차장엔    벌써 10년 넘게    쇠와 싸우는 풀들이 있습니다.    보통리 그 넓은 벌판 다 빼앗기고    변두리로 밀리고 밀리다    폐차장 무쇠더미 속까지 떠밀려와 살고 있습니다.    쇠와 살대고 살면서도    쇠와 섞이지 않는 강아지풀 하나    지난 봄에 살해당한    풀의 아이를 배고    죽은 엔진 뼈대에 기대어 잠이 들어 있습니다.             - 최문자, 1연    이 시는 자연을 소재로 한 시인데 시인은 생명 현상의 본질을 간파하고 파괴된 풍광을 비판, 고발하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진술이 무엇인지를 공부하려면 우리나라 최고의 '진술시인'으로 불리는 최문자 시인의 시를 눈여겨 보기를 권한다.    대지를 물들이는 저 쑥과 냉이, 씀바귀에 대해    과수원 언저리를 온통 노랑물살 지게 하는 저 유채꽃에 대해    (중략)    뻐꾹새에게 물어봐라    벌, 나비에게 물어봐라    (중략)    별과 달이 밤새도록 읽다가 펼쳐둔    과수원 시집    나는  거름 져다 나르며 읽고    앞산 뻐꾹새는 진달래 먹은 듯 붉게 읽는다           - 배한봉, 중에서    그 뻔한 풍광도 시집이 되고, 그 시집은 새도 읽고 나비도 읽고 거름을 져다 나르는 시인도 읽는데 결국 온 산을 붉게  물들이는 봄을 "뻐꾹새는 진달래 먹은 듯 붉게 읽는다"로까지 진행되어서 서술+진술+이미지화에 성공하고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모든 것이 수미상관(首尾相關)으로 단단하고 제각각의 역할이 확실하게 주어졌다. 눈여겨 보라. 배한봉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것들은 역할이 명징하기로 유명하다. 시 쓰기에서 반드시 가져야 할 자세다.    그 여자 이름을 잊었다    용정에서 혜란강 가는 길    선구자 한 소절 부르고  싶어 철없이    일송정 찾아가는 길    조선족이야요 천 원에 다섯 개야요    따가운 땡볕 오가며 젖먹이를 업은 채    삶은 옥수수를 팔던 여자    황토먼지 푸석이는 버스 창가에    다투어 맨발로 뛰어오던 머룻빛 눈매가 서늘했던 여자    기념사진을 찍어주며 윤동주를 안다고 하던    그래서 은빛 맑은 물가에 손을 함께 씻었던    가물가물한 그 이름을 까맣게 잊었다    한국돈 이천 원 받아쥐고 돌아서며    설핏 눈시울이 붉어졌던 조선족 여자    그 뒷모습은 잊지 않았다    덜컹거리는 버스 차창 너머    연변 맑은 강바람 속으로 멀어져가던           - 나종영, 전문    위 시는 인물을 소재로 한 것이지만 슬픈 우리의 근현대 역사와 오버랩 되면서 가슴이 찡하기도 한 시다. '인물 시'는 그 인물의 특징적 면모가 실감 있게 드러나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주인공의 역할이 확실하지 않은 시는 영 재미 없는, 방향 잃은 시가 되므로 꼭 시의 주인공을 잘 챙겨야 한다.    이 외에도 특정물을 대상으로 얼마든지 시를 쓸 수 있는데 한 편만 더 소개 한다.    대흥사 입구의 마늘밭    마늘잎들이 누렇게 때깔을 쓰고 있다    마늘이야 마른 생각들 버석거려도 머리통 가득    매운맛을 가두겠지만    수확이 가까울수록 잎들의 혈행(血行)을  끊어    머리 뿌리 온통 깨달음으로 채워넣으려는    저 독한 마음을 읽고 있는 한    나는 아직도 한참이나 갈증을 견뎌야 하는    메마른 5월이다. 누가 내 몸을 캐서    불알 두 쪽 갈라본들    거기 통속의 향기 드러나겠는가           - 김명인, 부분    위 시는 '마늘'이라는 대상을 선택하여 마늘의 수확이 가까워질수록 거추장스러운 잎들의 혈행(血行)을 끊고 마늘의 특성인 매운맛을 가득 머금고 여물어져 가고 있는 것과 통속의 향기(通俗의 香氣)인 마늘의 특질을 시인에게로 치환(置換)시켜서 오롯이 제 맛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를 자문하고 있다. 이처럼 담백 하지만 사물의 특질과 연결된 자신만의 사람살이의 해석이 시를 쓰는 본질에 가까이 가는 일인 것이다.    오는 10월에 시상식을 갖게 될 수상자로 김명인 시인이 선정 되었다. 와 "식당 의자"가 그의 시다. 그는 지금 우리나라 현대 서정시의 계보를 잇는 대표적 시인으로 평가 받고 있다. 김명인 시인의 시를 서정시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제대로 읽어 볼 일이다.     - 이어산                             현대시를 이루는 중요 요소 가운데 하나가 "시의 의미성"이다. 한 편의 시 속에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깊은 속뜻이 내포되어 있는 시가 시다운 것이다. 너무 드러나 버리면 산문이 된다. 시 전체에 담겨있는 정서와 사상을 직접적이거나 추상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배후에 숨어있는 이미지가 암시적이거나 간접적으로 떠오르도록 하는 표현 방법이 오랜 세월 가장 시다운 것으로 합일 되었기에 이 부분을 관과해서는 안된다.      또 하나 시를 이루는 요소 가운데서 기초중의 기초가 "수사법"이다. 이것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 집을 짓는 목수가 기둥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거나 지붕을 덮을 능력이 안되어서 바람에 넘어지거나 비가 줄줄 새어서 사람이 살 수 없는 집을 지은 것과 같다. 그래서 어설픈 수사법을 사용하는 것 보다는 초보일 때는 차라리 담백하고 정직한 문장을 구사하는 것이 좋다.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수사법에 대해서 물어보면 중,고등학교에서 배웠기에 너무 잘 아는 것처럼 말하지만 구체적으로 시에 반영시키는 방법이 서툰 경우를 많이 본다. 알고 있는 것이라도 제대로 반영시킬 수만 있다면 좋은 시를 쓸 수 있는데 오히려 그 중요성에 둔감할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수사법 중 맨 앞자리에 놓이는 것이 직유법(直喩法/simple)이다. 비유법 중 가장 간단하고 명쾌한 형식으로 두 개의 사물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 '~같다' '~인양' '~같은' '~처럼' '~듯이'등의 표현 형식이다.       밤새 자애로운 봄비의 다스림에    태초의 첫날처럼 반짝 깨어난 아침    발돋움하고 빨래 너는 안해의 모습도 어여쁘고    마을 위 고목 가지에 깍깍이는 까치소리도 기름져       흠뻑 물오른 검은 가지, 엄지 같은 움    하늘엔 자양한 햇발이 우유처럼 자욱하다         - 유치환, 전문    위 시에서처럼 A와 B, 두 사물간의 유사성을 발견하여 직접 연결하는 기법인데 우리에게 좀더 확실히 알려진 것과 덜 알려진 것의 비교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질성이나 사물과 연관되는 정신(사상 또는 관념)이 너무 둥떨어지면 이 비유법을 쓰지 않은 것보다 못할 수가 있으므로 적절하고 적확(的確)하게 사용하기 바란다.    직유법과 대조되는 수사법으론 은유법(隱喩法/metaphor)이 있다. 은유는 표현하고자 하는 원관념(tenor)과 보조관념(vehicle)을 동일시 다루는 것인데 암유(暗喩)라고도 한다. 말 그대로 감춰진 이미지다. 즉 '내마음은 호수요' '소리없는 아우성'  '책상다리'  '바늘 귀'  '저울 눈'등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표현 방법이다. 현대시를 말할 때 "시란 은유다"라고 말해도 틀린말이 아닐 정도로 시에서는 매우 중요한 수사법이다. 은유법에는 치환은유(置換隱喩)와 병치은유(竝置隱喩), 대유(代喩)등의 갈래로 나눠지기도 하는데 구체적인 것은 다음에 다시 소개하도록 하고 오늘은 널리 알려진 치환은유의 활용이 돋보이는 유치환 님의 시 한 편을 더 보자.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유치환, 전문     시를 쓸 때 은유만 잘 활용해도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다. '깃발'이라는 말이 한 번도 본문 중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은'이라는 말로 대치 하였고 2행 부터는 '이것은'이라는 말도 생략해 버렸다. 다만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 '순정' '이념의 푯대' 등의 보조관념만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의 모두는 깃발의 일부분인 것이다.    이처럼 원관념이 다른 이름으로 나타나 있거나 생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를 이해하는데 별 무리가 없는 것은 두 사물간의 동일성이나 보편적 상상력이 전혀 어색하지 않기 때문이고 유추과정이 복잡하지 않은 치환은유의 특징을 잘 살리고 있음에 기인하고 있다.    오늘은 간단하게 시 작법의 중요 요소를 살펴봤는데 소개한 것 외에도 수사법의 갈래는 마흔 가지 쯤 된다. 다 익히면 더욱 좋겠지만 시를 쓰는데 이용하거나 참고 하여 더 좋은 시적 표현을 하라는 것일 뿐 그 법칙의 테두리에 갇혀서 부자연스러운 모습이 되어서도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말하거니와 시는 우리의 삶을 노래하는 것이며 그 노래에 부표를 찍고 음과 리듬을 살리는 것이다. 또한 시쓰기란 사물을 사랑하는 사랑싸움에 도전하는 일이기에 시적 대상을 내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사랑의 싸움을 잘하여 승리하기 바란다. 그런 적극성을 가진 사람이 시의 영토를 차지할 수 있고 시인의 깃발을 올릴 수 있다.    - 이어산   ■ '누가 글을 쓰는가' / 김이듬 파브르는 평전에 이렇게 쓴다. “나는 꿈에 잠길 때마다 단 몇 분만이라도 우리 집 개의 뇌로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랐다. 모기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기도 했다. 세상의 사물이 얼마나 다르게 보일 것인가?” 사람의 굳어진 사고가 아니라 다른 존재의 시선으로 최초의 하루를 살아가는 삶은 어떨까? 문득 겹눈이 생겨난다든가 겨드랑이가 가려워진다면, 작가 이상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다시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알다시피 파브르는 곤충작자였고 이상은 건축학도였다. 인문계를 나왔다거나 유명한 문예창작학과를 다닌 바도 없다. 며칠 전에 나는 이런 사연이 든 메일을 받았다. “저는 이제 막 취업하게 된 27세 사회초년생입니다. 저는 문과출신인데, 어쩌다보니 ‘공대 비율 90%’에 육박하는 회사에 들어왔네요. 사실 ‘될까?’싶었는데, 덜컥 합격하는 바람에 매일매일 제 빈틈을 들킬까 두려워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상사 분들은 저에게 ‘문과적인 논리와 상상력’을 기대하며 저를 뽑았다고 하세요. 하지만 저에겐 그런 게 없는 것 같고, 동기들이 당연히 아는 기본 개념을 모를 때도 많고요. 부여받는 업무는 제가 소화할 수 있는 단계를 늘 넘어서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기 힘들고 늘 경직되어 있어요. 이런 저, 실수하지 않고 잘 해나갈 수 있을까요?” 나는 그 젊은 여성에게 책을 읽고 짬짬이 글을 써보시라고 했다. 하다못해 단상 메모나 짧은 일기라도 적어보기를 권했다. 연필로 간신히 쓰는 미음, 이응 하나가 어쩌면 자신과 타인을 침착하게 응시하는 가장 큰 창문이 될 수 있다는 조심스러운 조언을 하며 몇 권의 책을 추천하기도 했다. “나는 내 우울을 쓰다듬고 손 위에 두기를 원해. 그게 찍어 맛볼 수 있고 단단히 만져지는 것이었으면 좋겠어.”  이 문장은 김초엽의 첫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나오는 대화이다. 정상과 비정상, 성공과 실패,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를 허물어가는 작가의 질문들이 무척 신선했기 때문에 나는 이 소설책을 그녀(사회초년생)에게 권했다. 김초엽은 공대 출신의 20대 여성 작가인데 묘하게도 과학과 문학이 결합된 멋진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을 쓰고 있었다. 자신이 몸담은 세계가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져 적응하기 어려운 이나 또 다른 도전을 시도하려는 이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문과이기 때문에, 혈액형 때문에, 여자이기 때문에 등 뭉뚱그리는 잣대가 얼마나 많은가? 나는 그녀가 회사 구석에서 와락 울음을 터트려야 하는 터무니없는 상황이 그려졌다. 새롭고 낯선 직장에서 실수를 할까봐 두려움에 떨며 업무에 자신이 없다면, 식물학자 호프 자런의 에세이 ‘랩 걸’을 읽어보는 것도 좋다고 했다. 호프는 “과학자라서 똑똑하다는 말을 들었고, 단순하다는 말도 들었다”고 한다. 객관성과 합리성으로 무장한 과학의 세계에서 솔직하게 고백적인 에세이를 쓰는 실험실의 여자, 호프는 과학논문이 아니라 그 책을 쓰면서 스스로 치유되었다고 한다. 여성 과학자로서 엄마로서 겪은 편견과 차별에 관해서도 쉬운 문장으로 털어놓으며 타인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었다. ‘문과적인 논리와 상상력을 기대하는’ 상사가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해서 조바심과 불안에 떨기보다는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면 된다. 세상 모든 이에게는 논리와 상상력이 내재되어 있다. 발현하는 방법 중에는 읽고 쓰기가 있다. 지금부터 그것을 키워볼까? 모든 씨앗은 대담하니까. 미국의 영화감독 짐 자무시의 영화 ‘패터슨’을 보면 버스 운전 기사인 패터슨은 어두운 불빛 아래 책을 읽고 틈날 때마다 시를 쓴다. 그는 반복적이며 지루한 일상 속에서도 빗방울이 만드는 파문의 둥근 차이를 발견하는 사람이다. 연일 비바람 불어닥쳐도 그칠 날이 있다는 걸 인식하는 버스기사이자 시인이다. 노점상에게도 일용직 노동자에게도 독서할 여유가 주어지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우리들을 과속과 추월, 사고로 몰아가는 세상이 아니기를 바란다. 버스 운전하다가 신호에 걸렸을 때 떠오르는 시 구절 하나 메모하는 패터슨이 나오려면 일한만큼 최소한의 휴식과 임금은 보장되어야 한다. (국제신문/ 시인·책방이듬 대표)   어떻게 써야 할까 시는 운문으로 노래이기도 하지만, 정제된 언어로 그린 그림이며, 사물과 관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코 사랑타령이나 넋두리, 푸념이 시가 되지는 않는다. 구체어와 추상어 구체어는 감각에 의해 인식되는 특정한 대상을 가리킨다. 특히 시각적으로 관찰되며, 공간 속에 존재하는 대상을 가리키는 단어들은 모두 구체어이다. 따라서 ‘산, 강, 바위’와 같은 자연물과 ‘의자, 라디오, 집’과 같은 인공물들은 구체어이다. 추상어는 어떤 대상의 ‘특성’을 가리킨다. ‘사과’라는 대상은 ‘빨갛다, 달다, 둥글다’와 같은 여러 특징을 가진다. 이러한 특성은 종류가 같거나 종류가 다른 대상과도 공통성이 있는 성질들이다. 이러한 특성들은 물리적으로 어떤 대상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나, 인간의 사고에 의해 인식되고 구별된다. 이 외에 인간의 정서 상태를 가리키는 ‘슬픔, 기쁨’과 같은 단어, 상태를 나타내는 ‘잔잔하다, 평화롭다’와 같은 단어도 추상어이다. 흔히 추상어가 의미하는 것을 ‘관념’이라고 한다. 관념의 사전적 의미는 「①생각, 견해 ②관찰하고 생각함. 마음을 가다듬어 생각에 잠김 ③사고(思考)의 대상으로 되는 의식의 내용. 심적 형상(形象)을 통틀어서 이르는 말.」등으로 나와 있다. 이 세 가지 풀이에는 모두 ‘생각’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 관념은 곧 생각이라 할 수 있다.   갈등 갈망 갈증 감사 감정 개성 격정 결실 고독 고백 고별 고통 고해 공간 공허 관념 관망 광명 광휘 군림 굴욕 귀가 귀향 긍정 기도 기억 기원 긴장 낭만 내공 내면 도취 독백 독선 동심 명멸 모욕 문명 미명 반역 반추 배반 번뇌 본연 부재 부정 부활 분노 불면 비분 비원 삭막 산화 상실 상징 생명 소유 순정 시간 신뢰 심판 아집 아첨 암담 암흑 애련 애수 애정 애증 양식 여운 역류 연소 열애 열정 영겁 영광 영원 영혼 예감 예지 오만 오욕 오한 오해 욕망 용서 운명 원망 원시 위선 위안 위협 의식 의지 이국 이념 이별 이역 인생 인식 인연 일상 임종 잉태 자비 자유 자학 잔영 저주 전설 절망 절정 정신 정의 존재 존중 종교 증오 진실 질서 질식 질투 차별 참혹 처절 청춘 추억 축복 침묵 쾌락 탄생 태만 태초 퇴화 패망 편견 폐허 평화 품격 풍자 피폐 필연 해석 행복 향수 허락 허세 허위 현실 혼령 혼령 화려 화해 환송 황폐 회상 회억 회의 회한 후회 휴식 희망   * 시를 쓸 때, 관념어 사용은 피하는 게 좋다. 평소 관념어를 이미지를 활용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꾸준히 연습하면 극복이 가능하다. 예문) 임종 : 낮잠을 즐기시려는 게지 / 악몽을 꾸고 계신 건지도 몰라 / 봉숭아 붉은 꽃잎이 해불쭉한 오후 / 나비 한 마리 해거름을 쫓아 날아간다. 무엇보다 관념적인 한자어를 써야만 그럴 듯한 시가 된다는 착각이 문제다. 정진규는 시에서 관념이 ‘화자의 우월적 포즈’()라고 꼭 집어 말한 바 있다. 당신은 관념적인 한자어가 시에 우아한 품위를 부여한다고 착각하지 마라. 품위는커녕 한자어 어휘 하나가 한 편의 시를 누르는 중압감은 개미의 허리에 돌멩이를 얹는 일과 같다. 신중하고 특별한 어떤 의도 없이 아래의 시어가 시에 들어가 박혀 있으면 그 시는 읽어 보나마나 낙제 수준이다. - 안도현 중에서          
41    한국시(5) 댓글:  조회:343  추천:0  2019-11-27
네가 오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감상노트   개인적으로 연시는 취향이 아니지만 감정의 배설이 절제된 시를 만나면  어느 시절의 언덕으로 양떼 구름을 몰고 사랑,  그 사그락 거리는 사랑의 추억으로 발을 더듬는 내가 보인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은 어쩌면 가장 눈부시게 설레이는 기다림일지 모른다 그시간만큼은 시선이 머무는 어느 곳에도 꽃이 만발하게 핀다 그 사랑이란 이름 앞에 설레이지 않은 사람 은 없을 것이다 사랑은 지독한 묘약이 두가지 있는데 눈을 멀게 하는 것과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다는 것이다 류시화 시인의 시집 타이틀처럼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 는 것이리라 별이 내려 오는 어느 저녁의 벤치에서 연인의 입술을 뜨겁게 훔쳐본 사람은 안다 그 설레임이 스미게 번지는 감전 같은 전율을ᆢᆢᆢ 사랑은 서로에게 천천히 스미는 의식이겠는데 사랑은 오래오래 서로에게  꽃을 피워대는 일이 겠는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시를 읽는 동안 사랑 그 몽의 틈에서 간신히 덜커덩거리며 빠져나온다 너는 여기서 우리가 또 간절히 바라는 이름일지도 [문정완] 동사목(凍死木)    [2020 부산일보 신춘문예-시조] 진 헤어살롱/장남숙 스팸메일 지우듯 싹둑싹둑 잘라내도 낮 불 밝은 살롱은 루머(rumor)가 크는 온실 엉터리 가짜뉴스가 물들이며 치장이다 오랜 날 기다린 듯 끈 풀린 수다들이 해가 긴 오후만큼 끝없이 늘어지고 미용사 장갑 낀 손만 귀 닫고 한창이다 친친 감는 머리카락 뜬 소문 리플레이 들통 난 통화내용 진짜라도 어쩔 건지 까맣게 염색한 세상 알고 보면 새치다   아름다운 책 / 공광규 어느 해 나는 아름다운 책 한 권을 읽었다 도서관이 아니라 거리에서 책상이 아니라 식당에서 등산로에서 영화관에서 노래방에서 찻집에서 잡지 같은 사람을 소설 같은 사람을 시집 같은 사람을 한 장 한 장 맛있게 넘겼다 아름다운 표지와 내용을 가진 책이었다 체온이 묻어나는 책장을 눈으로 읽고   서울역 / 공광규 서울역 4번 플랫홈에서 부산행 고속열차를 기다리다가 발견한 화강암에 새긴 서울발 이정표 조각물 서울역에서 출발하면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음각되어 있다 내가 오늘 가려는 부산까지 441 킬로미터 목포까지 414 킬로미터 강릉까지 374 킬로미터 그런데 평양까지는 겨우 260 킬로미터로 표시되어 있다 인천까지는 38킬로미터인데 내가 살고 있는 일산에서 개성까지는 더 가까울 것이다 부산보다 조금 더 먼 신의주가 496 킬로미터 나진은 부산 가는 거리보다 두 배 더 먼 943 킬로미터이다 그렇더라도 고속열차로 간다면 6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이다 내가 못 가본 저곳들은 얼른 가보고 싶은 곳들이다 대동강 건너 신의주에서 국경을 넘어 이베리아반도까지 나진을 거쳐 광활한 시베리아를 지나 북해의 어디쯤에 닿고 싶다 어느 날 배낭을 꾸려서 떠났다가 몇날 며칠을 묵으며 깨끗한 술 한 잔 하고 돌아오고 싶은 곳이다 혀로 넘기고 두 발로 밑줄을 그었다 책은 서점이나 도서관에만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최고의 독서는 경전이나 명작이 아닐 것이다 사람, 참 아름다운 책 한 권   아름다운 사이 공광규   이쪽 나무와 저쪽 나무가 가지를 뻗어 손을 잡았어요 서로 그늘이 되지 않는 거리에서 잎과 꽃과 열매를 맺는 사이군요 서로 아름다운 거리여서 손톱을 세워 할퀴는 일도 없겠어요 손목을 비틀어 가지를 부러뜨리거나 서로 가두는 감옥이나 무덤이 되는 일도 이쪽에서 바람 불면 저쪽 나무가 버텨주는 거리 저쪽 나무가 쓰러질 때 이쪽 나무가 받쳐주는 사이 말이에요 되돌아보는 저녁/공광규 자동차에서 내려 걷는 시골길 그동안 너무 빨리 오느라 극락을 지나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어디서 읽었던가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가다가 영혼이 뒤따라오지 못할까봐 잠시 쉰다고 발등을 스치는 메뚜기와 개구리들 흔들리는 풀잎과 여린 꽃들 햇볕에 그을린 시골동창생의 사투리 푸짐한 당숙모의 시골밥상 어머니가 나물 뜯던 언덕에 누이가 좋아하던 나리꽃 군락 나비가 되어    공광규 어젯밤에는 내가 나를 아주 깊이 안아주며 잤어 이렇게 팔을 엇갈려 네가 나를 안아주듯 내가 나를 안아주었어 그리운 너의 체온 감자알처럼 고구마 뿌리처럼 만져지는 내가 나를 만지는 슬픔 그러다 손목을 엇갈려 가슴에 얹고 뻗어가는 슬픔 꾹꾹 누르다 잠들었어 나비가 되어 펄럭펄럭 너에게 다녀오려고 ―월간 《시인동네》 2019년 6월호 완행버스를 탔다 / 공광규 오랜만에 광화문에서 일산 가는 완행버스를 탔다 넓고 빠른 길로 몇 군데 정거장을 거쳐 대도시에서 신도시로 직행하는 버스를 보내고 완행버스를 탔다 이 길 저 길 좁은 길을 거쳐 사람이 자주 타고 내리는 버스를 타고 가며 남원추어탕 집도 지나고 파주옥 앞도 지나고 전주비빔밥 집도 지나고 스캔들양주 간판과 희망맥주 앞을 지났다 고등학교 앞에서는 탱글탱글한 학생들이 기분 좋게 담뿍 타는 걸 보고 잠깐 졸았다 어느새 버스는 뉴욕제과를 지나서 파리양장점 앞에서 천국부동산을 향해 가고 있었다 천국을 빼고는 이미 내가 다 여행 삼아 다녀본 곳인데 완행버스를 타고 가며 남원, 파주, 전주, 파리, 뉴욕을 다시 한 번 다녀온 것만 같다 고등학교도 다시 다녀오고 스캔들도 다시 일으켜보고 희망을 시원한 맥주처럼 마시고 온 것 같다 직행버스를 타고 갈 수 없는 곳을 느릿느릿한 완행버스로 다녀왔다 나쁜 짓들의 목록 / 공광규 길을 가다 개미를 밟은 일 나비가 되려고 나무를 향해 기어가던 애벌레를 밟아 몸을 터지게 한 일 풀잎을 꺾은 일 꽃을 딴 일 돌멩이를 함부로 옮긴 일 도랑을 막아 물길을 틀어버린 일 나뭇가지가 악수를 청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피해서 다닌 일 날아가는 새의 깃털을 세지 못한 일 그늘을 공짜로 사용한 일 곤충들의 행동을 무시한 일 풀잎 문장을 읽지 못한 일 꽃의 마음을 모른 일 돌과 같이 뒹굴며 놀지 못한 일 나뭇가지에 앉은 눈이 겨울꽃인 줄도 모르고 함부로 털어버린 일 물의 속도와 새의 방향과 그늘의 평수를 계산하지 못한 일 그중에 가장 나쁜 것은 저들의 이름을 시에 함부로 도용한 일 사람의 일에 사용한 일   욕심 / 공광규 뒤꼍 대추나무 약한 바람에 허리가 뚝 꺾였다 사람들이 지나며 아깝다고 혀를 찼다 가지에 벌레 먹은 자국이 있었나? 과거에 남 모를 깊은 상처가 있었나? 아니면 바람이 너무 드셌나? 그러나 나무 허리에선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다만 너무 많은 열매를 나무는 달고 있었다.   서울역 / 공광규 서울역 4번 플랫홈에서 부산행 고속열차를 기다리다가 발견한 화강암에 새긴 서울발 이정표 조각물 서울역에서 출발하면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음각되어 있다 내가 오늘 가려는 부산까지 441 킬로미터 목포까지 414 킬로미터 강릉까지 374 킬로미터 그런데 평양까지는 겨우 260 킬로미터로 표시되어 있다 인천까지는 38킬로미터인데 내가 살고 있는 일산에서 개성까지는 더 가까울 것이다 부산보다 조금 더 먼 신의주가 496 킬로미터 나진은 부산 가는 거리보다 두 배 더 먼 943 킬로미터이다 그렇더라도 고속열차로 간다면 6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이다 내가 못 가본 저곳들은 얼른 가보고 싶은 곳들이다 대동강 건너 신의주에서 국경을 넘어 이베리아반도까지 나진을 거쳐 광활한 시베리아를 지나 북해의 어디쯤에 닿고 싶다 어느 날 배낭을 꾸려서 떠났다가 몇날 며칠을 묵으며 깨끗한 술 한 잔 하고 돌아오고 싶은 곳이다   헛간을 짓다가 / 공광규 장마에 무너진 시골 헛간을 헐고 다시 짓는데 동네사람들이 지나가며 한 마디씩 한다. - 어라, 광규 이 사람, 주춧돌을 놓을 줄 모르는구먼. - 어허, 그 나이 먹도록 기둥 한 번 안 세워봤구먼. - 어이구, 지금 짓는 게 개집이여 뭐여. 동네사람들 말을 듣고 이렇게 저렇게 해보다가 한나절이면 될 것을 하루 종일 기둥도 못 세웠다. 저녁을 먹고 마루에 나와 별을 보는데 내가 지금껏 이렇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남의 말만 듣고 살아서 평생 헛간 같은 집 한 채도 못 짓고 있는 것이다.   얼굴 반찬 공광규(1960~) 옛날 밥상머리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얼굴이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과 형과 동생과 누나의 얼굴이 맛있게 놓여있었습니다 가끔 이웃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먼 친척들이 와서 밥상머리에 간식처럼 앉아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외지에 나가 사는 고모와 삼촌이 외식처럼 앉아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얼굴들이 풀잎 반찬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새벽 밥상머리에는 고기반찬이 가득한 늦은 저녁 밥상머리에는 아들도 딸도 아내도 없습니다 모두 밥을 사료처럼 퍼 넣고 직장으로 학교로 동창회로 나간 것입니다 밥상머리에 얼굴 반찬이 없으니 인생에 재미라는 영양가가 없습니다 동사목 김광규(1941~) 유달리 추웠던 지난겨울 영하17도의 혹한을 비껴갈 수 없이 뒷동산 언덕배기에 뿌리박은 채 꼿꼿이 서서 얼어 죽은 나무들 전기톱으로 잘라내는 소리 비명처럼 들린다 산 아래 첫 집 담 너머 우리 마당에도 누렇게 얼어 죽은 낙엽송과 단풍나무 한여름 녹음 속에 처연하게 숨 멎은 동사목 두 그루 살아 있는 나무들만 바람에 수런거리고 마른 잎을 떨어버릴 수 있다는 수목의 유언에 귀 기울이며 말 없는 미라를 보듯 두고두고 바라보기만 할 뿐   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어두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담장을 허물다    공광규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때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해졌다 우선 텃밭 육백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사는 백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 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그늘 수십평과 까치집 세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 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해서 듣던 마른 귀지 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엔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내려와 방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 꽃이 하얗게 덮인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 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다니는 하루 수백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청태산까지 나의 소유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가격 구백만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 영주가 되었다  - 공광규 시집 『담장을 허물다』 (창비, 2016) ​ 1960년 충남 청양 출생 동국대 국문과와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1986년 ≪동서문학≫ 등단 1987년 《실천문학》에 현장시들을 발표 2009년 제4회 윤동주상 문학부문 대상 2010년 제1회 김만중문학상 시부문 금상 2011년 제16회 현대불교문학상 시부문  시집 『대학 일기』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지독한 불륜』 『소주병』『말똥 한덩이』『담장을 허물다』 『신경림 시의 창작방법 연구』『시 쓰기와 읽기의 방법』『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등   손가락 염주 공광규 (1960~) 밥상을 차리고 빨래를 주무르고 막힌 변기를 뚫고 아이들과 어머니의 똥오줌을 받아내던 관절염 걸린 손가락 마디 이제는 굵을 대로 굵어져 신혼의 금반지도 다이아몬드 반지도 맞지가 않네 아니, 이건 손가락 마디가 아니고 염주알이네 염주 뭉치 손이네하하허허 하하하호" 내가 모르는 사이에 아내는 손가락에 염주알을 키우고 있었네   소주병 공광규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 주면서 속을 비워 간다 빈 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밤 나는 문 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러져 않은 빈소주병이었다 가재미                                                문태준-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 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 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 준다.     오해(誤解) 박만엽 내가  그대 가슴에  돌을 던졌나요. 가슴으로 나눈  대화이기에 증거를 댈 수 없을 뿐 난 그저 그대 가슴에 사랑이 담긴 꽃가루를 뿌렸을 뿐이라오. 11월  - 고은   낙옆을 연민하지 말아라 한자락 바람에 훨훨 날아가지 않느냐 그걸로 모자라거든 저쪽에서 새들도 날아가지 않느냐 보아라 그대 마음 저토록 눈부신 것을... 20년 박관서 ​ ​ 기차가 내 안으로 들어온다 기차는 진입 전에 장내신호를 출발 전에는 출발신호를, 통과 후에는 개통취급을 제대로 해줘야 하는데 ​ 요즘엔 기차가, 아무런 신호도 받지 않고 아무런 취급도 해주지 않아도 내 안으로 진입해 들어와 출입문을 열어, 사람들을 내리고 짐보따리를 내리고 비척비척 눈 비비는 강아지까지 풀어놓곤 한다 ​ 더불어 노란 봄 햇살도 함께 따라와 개찰구 아래 손바닥만 한​ 뙈기 화단에 새아기 눈곱처럼 돋아 있는 채송화 개불알꽃 얼레지까지 함박웃음 짓게 하나니 ​ 아 아득한 무엇 하나 부럽지 않고 밉지 않고 무엇 하나 못나 보이지 않는 햇살 내리는 봄날의 간이역 생전 처음 보는 아늑한 풍경을 선물로 주고 가나니 ​ 내 안으로 들어온 기차가, 땀이었고 눈물이었고 한숨이었고 오기였고 버팀이었던 그 기차가, 이제야 ​ -박관서 시집, 『기차 아래 사랑법』, 푸른사상(2014)   구두 송찬호 나는 새장을 하나 샀다 그것은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날뛰는 내 발을 집어넣기 위해 만든 작은 감옥이었던 것 처음 그것은 발에 너무 컸다 한동안 덜그럭거리는 감옥을 끌고 다녀야 했으니 감옥은 작아져야 한다 새가 날 때 구두를 감추듯 새장에 모자나 구름을 집어넣어 본다 그러나 그들은 언덕을 잊고 보리 이랑을 세지 않으며 날지 않는다 새장에는 조그만 먹이통과 구멍이 있다 그것이 새장을 아름답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새 구두를 샀다 그것은 구름 위에 올려져 있다 내 구두는 아직 물에 젖지 않은 한 척의 배 한때는 속박이었고 또 한때는 제멋대로였던 사람의 한켠에서 나는 가끔씩 늙고 고집 센 내 발을 위로하는 것이다 오래 쓰다 버린 낡은 목욕통 같은 구두를 벗고 새의 육체 속에 발을 집어넣어 보는 것이다 송찬호 시인, '10년 동안의 빈 의자' (문학과지성사, 1994)   놋쇠황소    박지웅 놋그릇에 뼈다귀 하나 건져내 나 구석구석 빠는 놈, 나는 허둥지둥 빠는 놈, 나는 침을 묻히는 놈 밥뚜껑에 쌓이는 뼈들 한때 소의 한 축이었으나 그림자도 없다 세상에 무덤덤한 일이 어디 있나 이 놋그릇이 소에게는 생지옥이다 옛 팔라리스왕은 나를 놋쇠황소에 집어넣고 배 밑에 장작을 때어 내 몸에 있는 춤을 모두 꺼내었다 훗날 왕도 형틀에 들어가 춤을 추었다 국물을 들이키며, 뼈도 못 추린 이야기 국물도 없는 가난한 생을 떠올리다 문득 저세상의 바닥까지 깨끗이 비우는 게 산목숨이라니 그럴 줄 알았다 여기가 지옥이다 벽에 붙은 도가니탕 얼마 꼬리곰탕 얼마 수육 얼마 망자의 가격이 매겨진 비문을 훑으며 입을 벌린다, 아아 나는 나의 뱃속을 돌고 돌았구나 밥자리에 다소곳이 따라붙는 놋쇠 그림자   불타는 글자들    박지웅 도서관에는 쓸데없이 많은 정숙이 근무하고 있다 이곳을 이용하는 시민은 그들을 선량한 직원으로 여기지만 사실 그들은 국가에서 심어놓은 비밀요원이다 바닥에 매설된 요원 사이를 통과하지 못한 자들 힘차게 걷던 한 시민의 발목은 화단에서 발견되었다 보라, 우리가 국가를 불렀을 때 국가는 우리에게 와 꽃이 되어 주었다 캄캄한 꽃, 침통한 꽃이 피어 있는 국가 국가의 지하에서 자란 꽃들이 낭자하게 피어 있는 사월 깨어진 글자들이 유리조각처럼 깔려 있는 사월 우리는 격실에 갇혀 서로에게 안부를 묻고 호출하였으나 정숙에 적의를 드러내지 않은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사월에 국가는 묵음이었으니 사월에 국가는 침대에 누워 꽃이나 피웠으니 이제 누가 창을 깨고 들어가 침몰한 사월을 인양할 텐가 소곤거리는 사이에 정숙은 어김없이 나타나 엄숙하게 경고하고 바닥에 매복한다 경솔하게 움직이지 마라 제자리를 지키고 지시에 따르라 아, 살아 있는 것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불타는 글자를 종이컵에 담고 우리는 행진한다 적막이 낭자한 이 사월에 —《시사사》 2015년 5-6월호   고향  조말선  벗어놓은 외투가 고향처럼 떨어져 있다 내가 빠져나간 이후에 그것은 고향이 되었다 오늘 껴입은 외투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면 한 번 이상 내가 포근하게 안긴 적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벗어놓은 외투를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다 내가 빠져나가자 그것은 공간이 되었다 후줄근한 중고품 더 이상 그 속에 있지 않은 사람의 언어   애인들  김찬옥   누가 내 몸에 수없이 구멍을 뚫어 놓았다  몸이 사막으로 변하면서 애인이 바뀌었다  술친구도 적당히 멀리하고 지천명에 몸 붙이려는 순간  숨 가쁘게 나를 호출하는 것들이 있다   내 전부를 탐하려는 듯  화곡역에서 집까지 늘어서 있는 애인들  걸핏하면 내 속을 들여다보는 이종현 내과  눈을 까뒤집고 말라버린 눈물 줄기를 찾아내는 백상춘 안과  엇나간 지층의 뼈대를 살살 구슬리는 선 정형외과  선인장 가시로 사정없이 모래언덕을 찔러대는 김대근 한의원  골짜기에서 시들어 버린 붉은 꽃송이를 똑똑 따 내는 황세영 산부인과   이들은 전생에 또 어떤 인연이었길래  내 몸 속 오랜 지천명의 시간을 달려와  서로 내 애인이 되겠다고 시샘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들이 한통속이 되어 머리 맞대고 궁리하는 일이라곤  내 몸속에 숨어있는 바람과 모래를 거래하는 일이다   난 요즘 김대근 한의원과 눈이 맞았다  대낮부터 하얀 시트 위에서  바지를 벗어 내리고 맨살로 누워있다  그는 긴 손가락으로 맥을 꼭꼭 눌러가며 샘을 찾는다  초음파, 고주파, 이 기구들은 단번에 내 성감대를 알아 버렸고  막힌 수맥이 터졌는지 허리와 어깨가 짜릿짜릿하다 어제는 부항이 굶주린 짐승처럼 목 뒷덜미를 물어뜯어  옷 밖으로 빨간 입술자국이 기어 나왔다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이런 날이면 내 몸을 뜨겁게 열어주던  소주 한 잔, 그 달던 밤은 사라지고  낯선 침대위에 사막 한 채 시린 구멍을 웅크리고 있다 매미가 울면 나무는 절판된다 / 박지웅 붙어서 우는 것이 아니다 단단히 나무의 멱살을 잡고 우는 것이다 숨어서 우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들키려고 우는 것이다 배짱 한 번 두둑하다 아예 울음으로 동네 하나 통째 걸어 잠근다 저 생명을 능가할 것은 이 여름에 없다 도무지 없다 붙어서 읽는 것이 아니다 단단히 나무의 멱살을 잡고 읽는 것이다 칠 년 만에 받은 목숨 매미는 그 목을 걸고 읽는 것이다 누가 이보다 더 뜨겁게 읽을 수 있으랴 매미가 울면 그 나무는 절판된다 말리지 마라 불씨 하나 나무에 떨어졌다 먼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김재진(1955~ )     감잎 물들이는 가을볕이나 노란 망울 터드리는 생강꽃의 봄날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수숫대 분질러놓는 바람소리나   황사 / 송찬호 요즘 이곳 시골에서 혼례를 올리기 위해서는 바다 건너 사막 너머 먼 데서 신부를 데려와야 한다 예식은 읍내 식장까지 갈 필요가 없다 창밖 지붕 너머 들판과 냇가 건너 멀리 앞산까지 온통 뿌연 예식장 드디어 신부가 온다 누우런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산 넘어 신부가 날아온다 신부의 가는 허리에서 방울 소리 울리고 속눈썹은 회초리처럼 길고 양털 가죽신을 신은 걸 보아 신부는 유목의 바람 세찬 곳에서 오나 보다 혼례는 하루 종일 계속된다 이 잔치를 거들고 즐기느라 목련과 산수유도 종일 눈이 따갑고 목이 아프다 그런데 혼수용으로 신부를 따라온 염소구름은 어떻게 한다지? 이 뿌우연 봄날, 고삐를 매지 않으면 금방 사라져 버릴 터인데 , 문학과지성사, 2009 쌀 안치듯 찰싹대는 강물의 저녁인사를 몇 번이나 더 들을 수 있을까.   미워하던 사람도 용서하고 싶은, 그립던 것들마저 덤덤해지는, 산사의 풍경처럼 먼산 바라보며 몇 번이나 노을에 물들 수 있을까.   산빛 물들어 그림자 지면 더 버릴 것 없어 가벼워진 초로의 들길 따라 쥐었던 것 다 놓아두고 눕고 싶어라.   내다보지 않아도 글썽거리는 먼산 같은 사람에게 기대고 싶어라.   천돌이라는 곳    정끝별 목울대 밑 우묵한 곳에 손을 대면 그곳이 천돌 쇄골과 쇄골 사이 뼈의 지적도에도 없이 물집에 싸인 심장이 벌떡대는 곳 묶였던 목줄이 기억하는 고백의 낭떠러지 와요, 와서 긴 손가락으로 읽어주세요 아무나가 누구인지 무엇이 모든 것인지 묻어둔 술통이 따뜻해질 즈음이면 잉크빛 목소리들이 저녁 안개처럼 스며들고 혼잣말을 하며 헤매는 발자국이 하나둘 늘어나요 어떤 이름은 파고 또 파고 어떤 이름은 묻고 또 묻고 애초에 없었던 어떤 이름은 바람에 밟히기도 해요 심었다 쓰러지는 함몰된 희망에 호미 자루가 먼저 달아나기도 하는데요 그럴 때면 눈물의 밀사가 관장하는 물시계 홈통에 물 듣는 소리가 들려요 와요, 어서 와서 중지의 지문을 대주세요 지도에도 없는 천 개의 돌을 열어주세요 발소리도 없이 들었다 잠시의 별을 피워냈던 서리 입김 유리컵처럼 내던져진 너라는 텍스트의 파편과 인도코끼리만큼이나 무거운 오해의 구름들, 그리고 지리멸렬에 두 발이 묶인 지지리한 기다림이 기억의 물통에 채워질 때마다 망각의 타종 소리가 맥박처럼 요동치는 곳 뜻밖의 지금을 살게 한 천돌이라는 그곳 어떤 이름을 부르려 달싹이는 입술처럼 천 개의 숨이 가쁜 내 고통의 숨통    —《현대문학》 2017년 9월호   섶섬이 보이는 방 나희덕(1966~) 서귀포 언덕 위 초가 한 채 귀퉁이 고방을 얻어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묻혀온 모래알이 버석거려도 밤이면 식구들의 살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조개껍데기처럼 입을 다물던 방, 게를 삶아 먹은 게 미안해 게를 그리는 아고리와 소라껍데기를 그릇 삼아 상을 차리던 발가락군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던 석회질의 방, 방이 너무 좁아서 그들은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이 가질 수 있었다 꿈 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복숭아는 마치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다 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섶섬이 보이는 이 마당에 서서 서러운 햇빛에 눈부셔 한 날 많았더라도 은박지 속의 바다와 하늘, 게와 물고기는 아이들과 해질 때까지 놀았다 게가 아이의 잠지를 물고 아이는 물고기의 꼬리를 잡고 물고기는 아고리의 손에서 파닥거리던 바닷가, 그 행복조차 길지 못하리란 걸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알지 못한 채 살았다 빈 조개껍데기에 세 든 소라게처럼   사투리   박목월 우리 고장에서는 오빠를 오라베라 했다. 그 무뚝뚝하고 왁살스러운 악센트로 오오라베 부르면 나는 앞이 칵 막히도록 좋았다. 나는 머루처럼 투명한 밤하늘을 사랑했다. 그리고 오디가 새까만 뽕나무를 사랑했다. 혹은 울타리 섞에 피는 이슬마꽃 같은 것을...... 그런 것은 나무나 하늘이나 꽃이라기보다 내 고장의 그 사투리라 싶었다 참말로 경상도 사투리에는 약간 풀냄새가 난다. 약간 이슬냄새가 난다. 그리고 입안에 마르는 황토(黃土)흙 타는 냄새가 난다. *************   물음표(?)에 대하여  복효근 오늘 아침 찌갯감 일본산 생명태 아가리 속에는 낚시바늘 하나 박혀있다 살기 위해 삼켰으나 결국은 거기에 매달려 죽었으리라 그래서 낚시바늘은 물음표를 닮았다 옷장 밖에선  먹이를 찾아  낚시바늘을 삼키고 있는 몸을 상징하듯 관을 닮은 옷장을 열면 몸이 빠져나간 옷들은 물음표 하나씩 달고 있다 살게 한 것도 물음표였으나 죽게 한 것도 물음표라는 듯  물음표는 낚시바늘을 닮았다   능소화 / 전선경 가슴으로 피어올라 아픈 사랑이 되었구나 내가 죽고 네가 살 수 있다면 너의 자존을 지키기 위해 한 줌의 흙이 되어 필 수만 있다면 네 곁에서 향기 발할 수만 있다면 너의 웃음소리 들을 수만 있다면 내 모든 것 주어도 아깝지 않기에 너의 소리 없는 눈물을 받아먹고 이리 애닯게 피었구나 널 향한 그리움 담장을 훌쩍 넘었구나 네 소리가 되고자 흐드러진 여러 귀가 되어 열렸구나 네 서러움 담아내고자 이리도 곱게 피었구나 너에게만은 참 미소 보여 주고자 저리 붉게 피었구나 너의 심장 가까이에서 끊임없이 속삭여 주는구나 널 사랑한다고   풀의 정신 김형로 ​ 한갓 발길이 두려워서야 풀이 아니리 밟혀도 풀, 커봤다 풀 헝거리 정신으로 바람결에 쉐도우 복싱을 하고 있는 풀들 ​ 이름 모를 풀을 보면 당신은 잡초라고 퉁, 치지만 그것은 당신의 자유 그들에게도 철학이 있다 ​ 바랭이는 당신을 위해 방석을 깔고 어디 한 번 밟아보라며 펑퍼짐한 엉덩이를 내민다 밟을수록 좋다고 댓거리한다 ​ 질경이는 함부로 당신 발에 밟히는 순간 긴 혀를 내두르며 말한다 오, 내가 지구를 짊어졌구나 ​ 당신은 풀 한둘 뽑을 수 있지만 저 무성한 풀의 정신은 죽일 수 없다 배짱 없이 풀일 수는 없다고 풀풀한 풀의 함수를 사람은 풀 수가 없다 ​ 겨울이면 사그라들 것들의 힘이란 어디서 오는 건지 밟혀도 풀, 커봤다 풀인 것들이 나무도 못 되는 것들이 거대한 생각의 씨를 심고 있다 ​ 풀의 가문엔 약골이 없다    섬걱선         이성부   가까이에 있는 산은 항상 아내 같다 바라보기만 해도 내 것이다 오르면 오를수록 재미있는 산 더 많이 변화를 감추고 있는 산 가까이에서 더 모르는 산 그래서 아내 같다 거기 언제 그대로 있으므로 마음이 놓인다 어떤 날에는 성깔이 보이고 어떤 날에는 너그러워 눈물 난다 칼바위 등걸이나 벽이거나 매달린 나를 떠밀다가도 마침내 마침내 포근히 받아들이는 산 서울 거리 어디에서도 바라보기만 하면 가슴이 뛰는 산 내 것이면서 내가 잘 모르는 산 이성부. ㅡ ㅡ 삼각산 -시집『자연 속에서 읽는 한 편의 시 05』(국립공원, 2007)   감기/박후기 숙주를 파고드는 병과 함께 누워 약을 먹는 밤은 쓰다 목에 걸린 알약처럼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육신아 물 한 모금 겨우 눈물 한 모금 겨우 삼키며 너를 안고 너를 앓는다 누가 내 안에 들어와 기어이 사흘 밤낮을 울고 간다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박후기 싱크대 옆 선반 위 물이 담긴 유리그릇 속에서 감자 한 알이 소 눈곱 같은 싹을 틔운다 똑똑한 아기 낳는 법, 이라고 씌어진 두툼한 책장을 넘기다 말고 고추장 김치 돼지고기가 들끓는 찌개 곁에서 아내가 입덧을 한다 햇볕이 잠시 문 밖에서 서성이다 돌아가는 지하 단칸방 식탁 위 선인장이 우울하다 아내는 이곳을 판도라의 상자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냥 상자라고 부른다 내 몸은 지상의 모든 발 아래 놓여 있어 늦은 밤 사람들의 발소리가 뚜벅뚜벅 내 깊은 잠 속까지 걸어 들어온다 내가 살고 있는 상자는 산 아래 큰 강가의 60층 빌딩보다 높은 곳이지만 주인집 은행나무 뿌리보다 낮은 곳이어서 외벽에 기댄 은행나무 뿌리가 내벽에 금을 만든다 땅 속 어디선가 은행나무의 발가락들이 꼼지락거리며 벽을 긁고 있는 것이다 아내의 배 위로 불거진 핏줄이 한 가닥 금을 긋는다 아내의 뱃속에는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열 개 발가락이 열 개 그리고 바위의 안부를 묻는 빗방울처럼 쉬지 않고 내세는 두드리는 희망이라는 유전자가 하나 1968년 경기도 평택 출생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3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격렬비열도』『엄마라는 공장 아내라는 감옥』등   낙엽   이생진 한 장의 지폐보다 한 장의 낙엽이 아까울 때가 있다 그때가 좋은 때다 그때가 때묻지 않은 때다 낙엽은 울고 싶어 하는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낙엽은 편지에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낙엽을 간직하는 사람은 사랑을 간직하는 사람 새로운 낙엽을 집을 줄 아는 사람은 기억을 새롭게 갖고 싶은 사람이다   손님 백무산   내가 사는 산에 기댄 집, 눈 내린 아침 뒷마당엔 주먹만 한 발자국들 여기저기 어지럽게 찍혀 있다 발자국은 산에서 내려왔다, 간혹 한밤중 산을 찢는 노루의 비명을 삼킨 짐승일까  내가 잠든 방 봉창 아래에서 오래 서성이었다 밤새 내 숨소리 듣고 있었는가 내 꿈을 다 읽고 있었는가 어쩐지 그가 보고 싶어 나는 가슴이 뜨거워진다 몸을 숨겨 찾아온 벗들의 피묻은 발자국인 양 국경을 넘어온 화약을 안은 사람들인 양 곧 교전이라도 벌어질 듯이 눈 덮인 산은 무섭도록 고요하다  거세된 내 야성에 피를 끓이러 왔는가 세상의 저 비루먹은 대열에 끼지 못해 안달하다 더 이상 목숨의 경계에서 피 흘리지 않는 문드러진 발톱을 마저 으깨버리려고 왔는가 누가 날 데리러 저 머나먼 광야에서 왔는가 눈 덮인 산은 칼날처럼 고요하고날이 선 두 눈에 시퍼런 불꽃을뚝뚝 떨구며 그는 어디로 갔을까 커피를 내리며  허영숙 커피를 내리는 일처럼 사는 일도 거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둥글지 못해 모난 귀퉁이로 다른 이의 가슴을 찌르고도 아직 상처를 처매주지 못했거나 우물 안의 잣대 품어 하늘의 높이를 재려한 얄팍한 깊이로 서로에게 우를 범한 일들 새벽 산책길 이제 막 눈을 뜬 들풀을 무심히 밟아댄 사소함까지도 질 좋은 여과지에 거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는 일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것처럼 마음과 마음의 온도 차이로 성에를 만들고 닦아내지 않으면 등을 보여야 하는 슬픈 배경 가끔은 아주 가끔은 가슴 밖 경계선을 넘어와서 눈물나게 하는 기억들 이 세상 어디선가 내게 등을 보이고 살아가는 사연들이 있다면 걸러내서 좋은 향기로 마주하고 싶다 커피 여과지 위에 잊고 산 시간들이 따뜻하게 걸러지고 있다   할미꽃   허영숙 그늘 드는 마음 눌러보자고 나갔다가 너를 보았다 봉긋하게 내린 그림자를 환하게 바라보는 햇솜 같은 얼굴 누가 이 꽃을 그늘진 마음으로 보겠는가 누가 함부로 이마를 치켜들고 이 꽃을 보겠는가   투명 / 하린 인공눈물을 화분 속에 떨어뜨리고 싹트길 기다려 볼까요 개밥바라기별을 처음 사랑한 사람이 나였으면 하고 서쪽 하늘이 무표정을 버릴 때까지 우는 시늉을 해볼까요 혼자 밥을 먹는데 익숙해지는 허무를 위해 D-day를 표시하며 하루에 세 번 웃어볼까요 바짝 마른 그리움을 풀어 국을 끓이고 숨이 적당히 죽은 외로움을 나물로 무쳐내고 꼬들꼬들한 고독을 적당히 볶아 식탁을 구성해 볼까요 빈 의자와 겸상해볼까요 자, 이제 주말연속극이 시작됩니다 고지식한 시어머니나 파렴치한 악처를 옹호해볼까요 두 사람이 짧은 식사를 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긴 식사를 하는 것이 더 낭만적이라고 다짐해볼까요 입맛을 다시거나 잃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독백을 방백처럼 늘어놓으며 접시를 지속적으로 더럽혀 볼까요 다리를 떨면서 신문을 봐도 먹기를 멈춘 채 눈물을 흘려도 잔소리할 사람 없습니다 시계를 보며 과장되게 늦은 척을 해 볼까요 예감이나 확신을 믿지 않게 해준 당신 공백은 있어도 여백을 찾을 수 없게 만든 당신 오늘 차려놓은 투명한 기척, 눈물 나게 웃으며 먹어볼까요   토란 잎 우산 / 이지엽 가을비 그제부터 시슴사슴 내리더니 오늘은 작정한 듯 나절가웃 내리신다 누에들 뽕잎 쓸듯이 속삭이듯 내리신다. 당숙모 어딜 가시나 토란 잎 우산 쓰고 또로롱 또르르 구르는 빗방울 봐라야 천연 방수다 더 좋은 거 너 봤냐 막내가 손바닥 들고 뛰어간 방둑길 건너 초록하늘 펼쳐들고 단풍물빛 차려입고 비 맞는 어깨와 큰 등짝 뒷모습 내내 애릿하다   나그네 / 이지엽 사람 사이의 길 끊어질 때 사람은 나그네 됩니다 돈 미움 시기 질투 마침내 길 끊어져 외로워집니다. 그가 걸어가는 길 늘 허공입니다 절벽입니다 많은 이 가운데 혼자이고 웃고 있지만 울고 있습니다 밥 먹을 때도 혼자이고 말을 할 때도 혼자입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어 자기에게 혼자 말해 본 적 있으십니까 하루 온종일 말을 안해 본적 있으십니까 나그네 미워마세요. 사람 사이 길 끊길 때 우리 모두 나그네 입니다 -시집  4집   하문(下問)  / 문성해 이 길고 멀고 오래된 것은 어디서 오나 이 차고 습습하고 묵은내 나는 내 철들자 맞기 시작한 어떤 상담교사보다도 더 귀에 쏙 맞는 말씀을 담아주는 이것은 내 어미가 싱싱한 허벅지를 걷고 한바탕 헌칫솔로 시멘트 마당을 벗기고 나면 꼭 들이닥치던 이것은 내 아비가 장롱 손잡이에 혁대를 걸고 면도칼을 갈며 바라보던 이것은 내 이마를 지나 코끝을 지나 장미 꽃잎을 지나 땅에서 난민처럼 버글거리는 이것은 먼산도 넓은 벌도 앞 도랑도 막 매달리기 시작한 포도도 착하게 맞고 있는 이것은 마침내 자두맛 참외맛 수작맛도 다 업어가는 이것은​      자기 시를 검토하는 열 가지 기준(10-10) 윤석산 마지막 열 번째로 내 작품이 문학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검토해 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물론 '나는 커다란 야심이 없이 쓰는 것이 즐거워 그냥 쓰여지는 대로 쓸 뿐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고 이 질문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작품을 쓰고, 발표하는 행위는 이다. 그러므로, 작품을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두고 혼자 읽거나 같은 수준의 사람들끼리 동인회를 조직해서 돌려 읽을 게 아니라면 통시적(通時的)으로 그리고 공시적(共時的)으로 자기 작품이 어떤 변별성을 지녔는가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국 시인들 전체는 세계 문학 가운데 우리 시가 어떤 독자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위치가 어디쯤인가를 따져봐야 할 것이다. 아마, 이 열 가지 문제를 검토해본 시인들은, 그렇다면 시란 시론을 공부한 사람만 쓰란 말이냐고 이의를 제기하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네 시 수준은 어느 정도인데, 그렇게 건방을 떠느냐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죄송하게도 첫 번째 이의에 대한 필자의 대답은 '그렇다'이다. 그리고, 두 번째 질책에 대해서는 '죄송스럽습니다' 이다. 그렇다고 새삼스레 대학을 가고, 대학원을 가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선대와 동시대의 작품들을 꼼꼼히 읽어 보고, 그 작품이 좋다면 왜 좋은가를 생각해 보고, 받아들일 것이 있으면 받아들이고, 못마땅한 것이 있으면 자기 작품에는 그런 것이 없나를 살펴보면서, 자기의 감수성과 문학관을 경신하라는 권유일 뿐이다. 문학 작품은 이론대로는 쓰여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론은 자기 작품 가운데에 어떤 요소가 모자라고 과잉되었는가를 분석하고 가다듬도록 안내하는 길잡이가 된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일정 기간 시를 쓴 사람들은 자기 작품을 재검토하고 또 새로운 시학의 수립에 전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못마땅하신 분들이 있다면 용서를 빈다.()   술보다 독한 눈물 박인환 눈물처럼 뚝뚝 낙엽지는 밤이면 당신의 그림자를 밟고 넘어진 외로운 내 마음을 잡아 보려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그렇게 이별을 견뎠습니다. 맺지 못할 이 이별 또한 운명이라며 다시는 울지 말자 다짐했지만 맨 정신으론 잊지 못해 술을 배웠습니다. 사랑을 버린 당신이 뭘 알아 밤마다 내가 마시는건 술이 아니라 술보다 더 독한 눈물이였다는 것과 결국 내가 취해 쓰러진건 죽음보다 더 깊은 그리움이였다는 것을   몸 관악기 ㅡ ㅡ 공광규 "당신, 창의력이 너무 늙었어!" 사장의 반말을 뒤로하고 뒷굽이 닳은 구두가 퇴근한다 살 부러진 우산에서 쏟아지는 빗물이 굴욕의 나이를 참아야 한다고 처진 어깨를 적시며 다독거린다 낡은 넥타이를 끌어당기는 비바람이 술집에서 술집으로 걸레처럼 끌고 다니는 밤 빗물이 들이치는 포장마차 안에서 술에 젖은 몸이 악보도 연주자도 없이 운다.   서시 -나희덕 단 한 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이여 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   의 자   /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폭설 류근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온밤 내 욕설처럼 눈이 내린다 온 길도 간 길도 없이 깊은 눈발 속으로 지워진 사람 떠돌다 온 발자국마다 하얗게 피가 맺혀서 이제는 기억조차 먼 빛으로 발이 묶인다 내게로 오는 모든 길이 문을 닫는다 귀를 막으면 종소리 같은 결별의 예감 한 잎 살아서 바라보지 못한 푸른 눈시울 살아서 지은 무덤 위에 내 이름 위에 아니 아니, 아프게 눈이 내린다 참았던 뉘우침처럼 눈이 내린다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사나흘 눈 감고 젖은 눈이 내린다   섶섬이 보이는 방 나희덕(1966~) 서귀포 언덕 위 초가 한 채 귀퉁이 고방을 얻어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묻혀온 모래알이 버석거려도 밤이면 식구들의 살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조개껍데기처럼 입을 다물던 방, 게를 삶아 먹은 게 미안해 게를 그리는 아고리와 소라껍데기를 그릇 삼아 상을 차리던 발가락군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던 석회질의 방, 방이 너무 좁아서 그들은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이 가질 수 있었다 꿈 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복숭아는 마치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다 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섶섬이 보이는 이 마당에 서서 서러운 햇빛에 눈부셔 한 날 많았더라도 은박지 속의 바다와 하늘, 게와 물고기는 아이들과 해질 때까지 놀았다 게가 아이의 잠지를 물고 아이는 물고기의 꼬리를 잡고 물고기는 아고리의 손에서 파닥거리던 바닷가, 그 행복조차 길지 못하리란 걸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알지 못한 채 살았다 빈 조개껍데기에 세 든 소라게처럼   사랑 정끝별 나오는 문은 있어도 들어가는 문은 없는 뜨겁게 웅크린 네 늑골 저 천길 맘속에 들어앉은 수천 년의 석순 끝 물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너를 향해 한없이 녹아내리는 몸의 꽃이 만든 몸의 가시가 만든 한번 열려 닫힐 줄 모르는 다 삭은 움막처럼 바람속에서 발효하는 들어가는 문은 있어도 나오는 문이 없는 그 앞에서 언제나 오줌이 마려운 그림 일기 ​   진은영 ​ 그런 날이면 창백한 물고기에게 황금빛 수의를 땅이 내준 길만 따라 흐르는 작은 강물에게 거미의 다 리를 무엇에 차이기 전에는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 돌멩이 에게 이쁜 날개를 한 번도 땅의 가슴을 만져본 적 없는 하늘에게 부드러 운 손가락을 높은 곳에서 떨어져본 마음을 더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마음 받아주는 두 팔을 높은 곳에 올라가기 전에 네 곁으로 가는 다리를 그러나 높은 곳에서 떨어져 이미 삐뚤어진 입술을 그 입술의 미세한 떨림을 그 떨림이 전하지 못하는 신음을 크게 그려줘 내 몸에 곱게 새겨줘 그런 날이면 망친 그림을 잘못 그려진 나를 구기지 말아줘 버리지 말아줘 잘못 그려진 나에게 두껍게 밤을 칠해줘 칼자국도 무섭지 않아 대못도, 동전 모서리도, 그런 날이면 새로 생긴 흉터에서 밑그림 반짝이는 그런 날    양파 공동체 / 손미   그러니 이제 열쇠를 다오. 조금만 견디면 그곳에 도착한다. 마중 나오는 싹을 얇게 저며 얼굴에 쌓고, 그 아래 열쇠를 숨겨 두길 바란다.   부화하는 열쇠에게 비밀을 말하는 건 올바른가?    이제 들여보내 다오. 나는 쪼개지고 부서지고 얇아지는 양파를 쥐고 기도했다. 도착하면 뒷문을 열어야지. 뒷문을 열면 비탈진 숲, 숲을 지나면 시냇물. 굴러떨어진 양파는 첨벙첨벙 건너갈 것이다. 그러면 나는 사라질 수 있겠다.    나는 때때로 양파에 입을 그린 뒤 얼싸안고 울고 싶다. 흰 방들이 꽉꽉 차 있는 양파를.   문 열면 무수한 미로들.   오랫동안 문 앞에 앉아 양파가 익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때때로 쪼개고 열어 흰 방에 내리는 조용한 비를 지켜보았다. 내 비밀을 이 속에 감추는 건 올바른가. 꽉꽉 찬 보따리를 양손에 쥐고     조금만 참으면 도착할 수 있다.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는 내 집.    작아지는 양파를 발로 차며 속으로, 속으로만 가는 것은 올바른가. 입을 다문 채 이 자리에서 투명하게 변해 가는 것은 올바른가. 서늘함 / 신달자 주소 하나 다는 데 큰 벽이 필요 없다 지팡이 하나 세우는 데 큰 뜰이 필요 없다 마음 하나 세우는 데야 큰 방이 왜 필요한가 언 밥 한 그릇 녹이는 사이 쌀 한 톨 만한 하루가 지나간다 -시집 「북촌』, 민음사, 2016   국물          신달자   메루치와 다시마와 무와 양파를 달인 국물로 국수를 만듭니다 바다의 쓰라린 소식과 들판의 뼈저린 대결이 서로 몸 섞으며 사람의 혀를 간질이는 맛을 내고 있습니다 바다는 흐르기만 해서 다리가 없고 들판은 뿌리로 버티다가 허리를 다치기도 하지만 피가 졸고 졸고 애가 잦아지고 서로 뒤틀거나 배배 꼬여 증오의 끝을 다 삭인 뒤에야 고요의 맛에 다가옵니다 내 남편이란 인간도 이 국수를 좋아하다가 죽었지요 바다가 되었다가 들판이 되었다가 들판이다가 바다이다가 다 속은 넓었지만 서로 포개지 못하고 포개지 못하는 절망으로 홀로 입술이 짓물러 눈감았지요 상징적으로 메루치와 양파를 섞어 우려낸 국물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바다만큼 들판만큼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몸을 우리고 마음을 끓여서 겨우 섞어진 국물을 마주보고 마시는 그는 내 생의 국물이고 나는 그의 국물이었습니다   식당풍경/ 신달자 용산 기차역 식당에서 내 앞에 마주 앉아 국수를 먹고 있는 한 쌍의 남녀, 마흔이 갓 넘어 보이는 남자와 여자는 조금은 누추하고 겉늙어 보인다 일터에서 잠시 몸을 빼 기차 타는 여자를 보러 나온 남자는 여자의 입에 자꾸만 국수 가락을 넣어 주고 있다 답례인지 여자도 국수 한 가락을 남자의 입안에 아 하고 넣어주는데 킥킥 웃음도 함께 넣어 주는데 이마가 닿을 듯 말 듯 그사이 그들의 고된 생이 환하게 국물처럼 흘러내린다 여자의 국수 가락 끝으로 깊은 강 하나가 쑥 뽑혀 올라오다 김 속으로 사라진다 든든하다 포도나무 처럼 무릎을 서로 꿇은 채 사과처럼 익어 가는 저 풍경 무릎이 닳아 사막이 될 때 만난 사이인가 기운 인연이 다 터지고 엎지러진 물을 담듯 서로 만난 인연인가 눈을 마주하고 얼굴을 마주하고 이마를 마주하고 운명을 마주하고 절대로 누가 먼저 돌아서지 않을 것 같은 저들 가난한 인연들에게 국수 한 가락 건져 올려 그들 목에 리본이라도 매어 주고 싶다   배추꽃 / 박성우 시골집 다녀오는 길에 텃밭에서 겨울을 난 배추를 캐왔다 겉절이를 하거나 쌈을 싸는 저녁은 생각만으로도 달았지만 노모가 챙겨준 반찬만 꺼내도 저녁 식탁은 어지간히 푸짐했다 비닐봉지에 들어있던 봄동, 배추는 그새 꽃대를 내밀고는 겉절이도 쌈도 거부하고 지 맘대로 꽃으로 돌아갔다 꽃대 당당히 밀어올리고는 고추장이나 된장 따위 말고 화병과 물을 내놓으라 했다 꽃병이 어디 있더라, 하루 걸러 물 갈아주지 않으면 유리병 뿌옇게 까탈을 부렸다 배추를 캐온 게 아니라 까탈스러운 꽃을 모셔왔구나, 물이 탁해진다 싶으면 얼른 병 씻고 물 바꿔줘야 했다 배추꽃은 배추꽃답게 꽃대 겨드랑이 사이로 새 꽃대 내밀어댔다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걷어주면 순식간에 몰려온 햇살이 앵앵 왱왱, 샛노란 배추꽃에 달라붙었다 햇살의 분별력 / 안도현 감나무 잎에 내리는 햇살은 감나무 잎사귀만 하고요 조릿대 잎에 내리는 햇살은 조릿대 잎사귀만 하고요 장닭 볏을 만지는 햇살은 장닭 볏만큼 붉고요 염소 수염을 만지는 햇살은 염소 수염 만큼 희고요 여치 날개에 닿으면 햇살은 자르륵 소리를 내고요 잉어 꼬리에 닿으면 햇살은 첨버덩 소리를 내고요 거름 더미에 뒹구는 햇살은 거름 냄새가 나고요 오줌통에 빠진 햇살은 오줌 냄새가 나고요 겨울에 햇살은 건들건들 놀다 가고요 여름에 햇살은 쌔빠지게 일하다 가고요   우리가 눈발이라면 / 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살이 되자.   처음 시를 쓰던 날'/ 손홍규 “외로웠다. 돌아보건대, 생은 늘 외로웠다”로 시작하는 한 편의 글을 읽었다. 외롭다는 말에 무심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첫 문장부터 돌부리에 걸린 듯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생을 돌아보아야 할 만큼 나이를 먹은 건 아니라고 여기지만 생을 돌아보기에 좋은 나이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닐 테니 이런 문장 앞에서는 잠시 숨을 고르며 머물러도 괜찮을 듯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내가 쓴 최초의 시도 외로움에 대한 것이었다. 그 시를 쓴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담임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 부임한 지 몇 해 안되었지만 인기가 많은 분이어서 다른 반 동급생들의 부러움을 샀다. 첫인상은 좀 무시무시했다. 키가 크고 비쩍 마른 분이어서 까다로운 성격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되었으니까. 6학년이 되기 전부터 동네 형들과 누나들에게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던 터라 잔뜩 긴장한 탓도 있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반 친구들은 다들 그런 듯했다. 그렇지만 며칠 안되어 왜 인기가 많은 선생님인지를 알게 되었다. 당신은 어린 학생들이라고 해서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집이 가난하다고 해서 공부를 못한다고 해서 차별하지도 않았다. 그런 차별이 흔하다 못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는데 말이다. 선생님은 수업 운영 방식에서도 남달랐다. 일주일에 세 시간인 작문 시간을 다른 반 선생님들은 보통 자습 시간 삼아 적당한 요일로 한 시간씩 떨어뜨려 놓았지만 우리 반은 달랐다. 오전 수업만 있던 토요일은 오롯이 작문 시간으로 채워졌다. 우리 반 친구들은 매주 토요일 홀가분한 마음으로 학교에 갔고 책을 읽거나 시를 쓰거나 좋은 시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선생님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며 일 년을 보냈다. 날이 갈수록 그 시간을 즐기게 됐고 돌아보니 아마도 그때 나는 외로웠던 것 같다. 초등학교 6학년도 외로울 수 있는 법이다. 세 해 전에는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바로 전해에는 아버지가 탈곡기에 손가락 하나를 잃었다. 나는 형제자매가 많은 친구들이 부러웠다. 집에 돌아가면 아무도 없었다. 적막과 고요만이 나의 형제였다. 그 시간을 늦추기 위해 학교에 오래 머무는 날이 많아졌다. 내가 홀로 찾아들어 시간을 보내던 곳은 도서관이었다. 거기에 도서관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을 만큼 쓸쓸한 곳이었다. 그 사실이 퍽 마음에 들었다. 서가 사이 마룻바닥에 앉아 책장을 넘기면 창으로 스며든 햇살이 재단한 허공에서 속삭임처럼 책 먼지가 들끓었다. 외로움은 그처럼 숨죽인 채 내 곁에 머물렀다. 그러던 내가 처음으로 시를 쓰게 된 거였다. 도서관에서만 위안을 찾을 수 있던 한 아이가 꾸미지 않아도 괜찮다고 어른의 말투를 흉내 내지 않아도 좋다고 무엇을 느끼든 내가 느낀 걸 쓰면 그게 바로 시라는 선생님의 격려를 받으며 시를 끄적이게 된 거였다. 그렇게 한 해를 보낸 우리는 각자 두 편의 시를 제출했고 선생님은 그 시들로 문집을 엮어 졸업하던 날에 한 권씩 나눠주었다. 나는 지금도 고향집에 가면 ‘미리내’라는 제목의 이 문집을 가끔 들여다본다. 그 시절에 내가 느껴야 했던 외로움을, 사실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몰라 한 번도 발설하지 못했던 감정이 서투르지만 결백한 언어들로 행을 이루어 잠에서 깨어나는 걸 본다. 문집에 실린 다른 친구들의 시에서도 내가 느꼈던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감정들을 본다. 어쩌면 그 아이들의 가슴속에서 난생처음 이끌려 나와 부신 눈을 깜박이고 있을 그것들을. 그로부터 삼십여년이 지난 지금 그해 일 년 동안 우리에게 시를 가르쳐주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문학을 알게 해준 당신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외로워하던 사람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외로웠다. 돌아보건대, 생은 늘 외로웠다”(최명표)로 시작하는 당신의 글을 읽었다. “그날 처음으로 눈곱이 산 자가 저승으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몌별하느라 밤새 빚어낸 사리인 줄 깨달았다”라는 문장처럼 당신 역시 외롭고 높고 쓸쓸했음을 알았다. (경향신문/ 손홍규 소설가) 꽃의 권력 / 고재종      제15회 영랑시문학상 수상작   꽃을 꽃이라고 가만 불러보면 눈앞에 이는 홍색 자색 연분홍 물결 꽃이 꽃이라서 가만 코에 대보면 물큰, 향기는 알 수도 없이 해독된다 꽃 속에 번개가 있고 번개는 영영 찰나의 황홀을 각인하는데 꽃핀 처녀들의 얼굴에서 오만 가지의 꽃들을 읽는 나의 난봉은 벌 나비가 먼저 알고 담 너머 대붕(大鵬)도 다 아는 일이어서 나는 이미 난 길들의 지도를 버리고 하릴없는 꽃길에서는 꽃의 권력을 따른다   -시집『꽃의 권력』 (문학수첩, 2017)   개의 정치적 입장 / 배한봉 개들이 짖는 소리를 개소리라 한다. 그것은 개들의 대화이기도 하고 개들이 달을 보고 하는 뻘짓이기도 하다. 사람끼리 가끔 개소리한다고 할 때가 있다. 사람 안에 개가 들었다는 말이다. 개들도 그럴 때가 있을까. 개 안에 사람이 들어 울부짖으면 사람소리 한다고 개들끼리 수군거릴까. 그러면 그것은, 욕설일까, 정치일까, 철학의 한 유파를 형성할 수 있을까. 벽에는 커다랗게 얼굴 사진을 새긴 포스터가 일렬횡대로 붙어 웃고 있다. 벽보 앞을 지나가다 나는 개 짖는 소리를 듣는다. 이것은 정치적 혐오일까, 무관심일까, 참여일까. 골목 앞, 신들린 무당집 개가 아무나 지나갈 때마다 컹컹컹, 컹컹 자꾸 묻는다. ㅡ《시사사》(2018년 9-10월호) ~~~~~~~~~ 배한봉 경남 함안 출생, 1998년 '현대시' 등단 시집 『흑조 』『우포늪의 왁새 』『악기점 』 『잠을 두드리는 물의 노래 』『주남지의 새들』   [감상] 실존 철학에 기반을 둔 모더니즘 문학은 자신과의 싸움을 기저로하는 자기투쟁의 문학이고 이 자기투쟁은 사회 부조리를 있는그대로 받아들이되 좀더 나은 인간 본연의 세계로 창조하는 것이라 한다. 여기에 바탕을 두고 태동한 문학이 앙가지망 문학이다. 앙가지망 문학을 한마디로 정의 한다면 참여 문학으로 정의한다. 여기서 참여란 사회부조리를 바라보는 눈이 좀더 나은 사회로 개선시키위해 역설적으로 반항하는 저항의식을 담아 일반인에게 각성을 촉구한다. 이 시 개의 '정치적 입장'도 앙가지망의 성격을 지닌 시로 오늘날의 한국 정치사회를 일타하고 있다. 머지않아 총선이 다가 오고 벌써 부터 정치 입지자들의 사전 선거 운동이 전개되고 언론에서는 여기에 촛점을 맞춰 연일 뉴스의 대다수를 할애하고 있다. 역설로 개의 정치적 입장이 개판 정치의  입장으로 발상전환이 되어 개짖는 소리의 다양한 의미 전달을 통해 깊은 사유로 상상을 확장시키고 있다. ㅡ ㅡ 펌   사랑 / 홍관희 우리가 사랑이란 이름 하나로 굳게 만나 말 못하는 내가 그대의 다리가 되어 주고 걷지 못하는 그대가 나의 입이 되어 준다면 지평선 너머까지라도 가고픈 길을 우리는 하고픈 말을 하면서 갈 수 있겠네 우리가 사랑이란 이름 하나로 만나 팔 못 쓰는 내가 그대의 길이 되어 주고 앞 못 보는 그대가 나의 팔이 되어 준다면 빛이 들끓는 그 곳까지 가고픈 길을 우리는 보고픈 것들을 보면서 갈 수 있겠네 그대의 어려움이 나의 사랑으로 풀리고 나의 어려움이 그대의 사랑으로 풀리며 우리가 굽힘없이 한 길 되어 꿋꿋이 나아간다면 척박한 이 세상도 꿈을 꾸며 살아갈 수 있겠네.   담쟁이 /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류근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온밤 내 욕설처럼 눈이 내린다 온 길도 간 길도 없이 깊은 눈발 속으로 지워진 사람 떠돌다 온 발자국마다 하얗게 피가 맺혀서 이제는 기억조차 먼 빛으로 발이 묶인다 내게로 오는 모든 길이 문을 닫는다 귀를 막으면 종소리 같은 결별의 예감 한 잎 살아서 바라보지 못한 푸른 눈시울 살아서 지은 무덤 위에 내 이름 위에 아니 아니, 아프게 눈이 내린다 참았던 뉘우침처럼 눈이 내린다 그대 떠난 길 지워지라고 눈이 내린다 그대 돌아올 길 아주 지워져버리라고 사나흘 눈 감고 젖은 눈이 내린다 사랑 정끝별 나오는 문은 있어도 들어가는 문은 없는 뜨겁게 웅크린 네 늑골 저 천길 맘속에 들어앉은 수천 년의 석순 끝 물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너를 향해 한없이 녹아내리는 몸의 꽃이 만든 몸의 가시가 만든 한번 열려 닫힐 줄 모르는 다 삭은 움막처럼 바람속에서 발효하는 들어가는 문은 있어도 나오는 문이 없는 그 앞에서 언제나 오줌이 마려운 그림 일기 ​   진은영 ​ 그런 날이면 창백한 물고기에게 황금빛 수의를 땅이 내준 길만 따라 흐르는 작은 강물에게 거미의 다 리를 무엇에 차이기 전에는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 돌멩이 에게 이쁜 날개를 한 번도 땅의 가슴을 만져본 적 없는 하늘에게 부드러 운 손가락을 높은 곳에서 떨어져본 마음을 더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마음 받아주는 두 팔을 높은 곳에 올라가기 전에 네 곁으로 가는 다리를 그러나 높은 곳에서 떨어져 이미 삐뚤어진 입술을 그 입술의 미세한 떨림을 그 떨림이 전하지 못하는 신음을 크게 그려줘 내 몸에 곱게 새겨줘 그런 날이면 망친 그림을 잘못 그려진 나를 구기지 말아줘 버리지 말아줘 잘못 그려진 나에게 두껍게 밤을 칠해줘 칼자국도 무섭지 않아 대못도, 동전 모서리도, 그런 날이면 새로 생긴 흉터에서 밑그림 반짝이는 그런 날   
40    좋은시 묶음3 댓글:  조회:463  추천:0  2019-08-19
카드 키드     박성우     카드가 사준 정장을 입고 카드가 사준 구두를 신은 출근길은 벅차다 어쩌다 카드가 사주는 저녁은 근사하고 카드가 큰맘 먹고 들여준 침대는 푹신하다 카드가 현금서비스 해준 축의금을 들고 다녀오는 직장 동료의 결혼식은 처연하게 찬란하다 입사 삼년차 카드 키드, 야근에 지쳐 귀가하는 밤은 카드가 카드론으로 얻어준 원룸이 있어 아늑하다 카드 키드가 되기 위한 지난날은 아름다웠다 스펙에 내준 대학생활은 교양 없이 품위 있었고 자기소개서 속으로 들어간 스펙은 뻔뻔하게 자랑스러웠다 서류전형에서 번번이 떨어지던 입사시험, 처음으로 면접 통보를 받던 날은 팬파이프 같은 빛이 눈앞으로 쏟아져내리는 것 같았다 카드가 사주는 패스트푸드는 먹을 만하고 카드가 지켜주는 직장생활은 아직 견딜 만하다 정기적금을 해약해 카드에게 이체하고 남은 돈, 지방에 사는 양친께 부쳐드리던 손은 대견하다 월급날 받은 급여는 어김없이 카드에게 옮겨간다 '언제 취직할 거니'를 지나 '언제 결혼할 거니'까지 기적적으로 와 있는 카드 키드, 카드는 희망 복근을 키워보는 건 어떠냐며 헬스클럽을 권유한다   시인은 시적으로 지상에 산다 / 천양희 원고료를 주지 않는 잡지사에 시를 주면서 정신이 밥 먹여 주는 세상을 꿈꾸면서 아직도 빛나는 건 별과 시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제 숟가락으로 제 생을 파먹으면서 발 빠른 세상에서 게으름과 느림을 찬양하면서 냉정한 시에게 순정을 바치면서 운명을 걸면서 아무나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면서 새소리를 듣다가도 ‘오늘 아침 나는 책을 읽었다’*고 책상을 치면서 시인은 시적으로 지상에 산다 시적인 삶에 대해 쓰고 있는 동안 어느 시인처럼 나도 무지하게 땀이 났다 * 연암 박지원의 글 에서 최영미 시 ㅡ 너에게로 가는 길 누구도 모른다 ​ 그리하여 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창자를 뒤집어 보여줘야 하나, 나도 너처럼 썩었다고 적당히 시커멓고 적당히 순결하다고 버티어온 세월의 굽이만큼 마디마디 꼬여 있다고 그러나 심장 한귀퉁이는 제법 시퍼렇게 뛰고 있다고 동맥에서 흐르는 피만큼은 세상모르게 깨끗하다고 은근히 힘을 줘서 이야기해야 하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나도 충분히 부끄러워 할 줄 안다고 그때마다 믿어달라고, 네 손을 내 가슴에 얹어줘야 하나 내게 일어난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두 팔과 두 다리는 악마처럼 튼튼하다고 그처럼 여러번 곱씹은 치욕과, 치욕 뒤의 입가심 같은 위로와 자위끝의 허망한 한 모금 니코틴의 깊은 맛을 어떻게 너에게 말해야 하나 양치질할 때마다 곰삭은 가래를 뱉어낸다고 상처가 치통처럼, 코딱지처럼 몸에 붙어 있다고 아예 벗어붙이고 보여줘야 하나 아아 그리하여 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아직도 새로 시작할 힘이 있는데 성한 두팔로 가끔은 널 안을 수 있는데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 -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창비, 1994)   2017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빅풋/석민재   군함처럼 큰 발을 끌고 아버지가 낭떠러지까지 오두막집을 밀고 갔다가 밀고 왔다가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스텝을 맞추며 말기 암, 엄마를 재우고 있다 죽음을 데리고 놀고 있다 죽을까 말까 죽어줄까 말까 엄마는 아빠를 놀리고 있다 아기처럼 엄마처럼 절벽 끝에서 놀고 있다 ​   < 2017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 점등 / 오경 가슴에서 플러그를 뺐다 젖이 멈췄다 벽등의 스위치를 켰다 나는 밤이 들킨 것 처럼 호들갑을 떤다 떨다가 아슬아슬하게 걸친 검은 브래지어를 떨어뜨린다 어둠이 활처럼 휘어진다 순간 배고프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허기를 달래려고 더 진한 화장을 하고 더 긴 속눈썹을 붙이고 스타킹을 벗는다 갑작스런 빛이 사방을 삐거덕거리게 한다 아기 유령들이 셔플 댄스를 추다가 천장에서 추락했을지도 모른다 길 잃은 시조새 한 마리 비상하다가 태양의 모서리에 부딪쳐 날개가 부러졌을지도 모른다 나는 문을 나서고 싶지 않았다 아니 불을 켜고 싶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것의 아주 작은 세포를 만지며 느껴 보고 싶었을 뿐 식탁 위엔 주인 없는 고통이 가열하지 않은 채 날것으로 있다 함성에 금이 간 어둠이여 다시는 변명에 목을 걸지 말 것 목숨 걸어야 할 곳이 어디 한 두 곳인가 식탁 아래 한때 눈부셨던 대낮의 그림자가 꽁무니를 빼느라 허둥지둥이다 지금은 어둠을 수습하기 위해 차단이 필요한 순간이다 찰나를 포착한 순발력 매년 일간지 신춘문예로 등단하는 시인이 30명 이상이다. 이 중에서 과연 몇 명이나 살아남아 계속 활동할까. 이러한 질문은 열정적이고 패기 넘치는 응모작들을 접하는 동안 우려보다는 새로운 기대로 바뀌었다.  올해 한라일보 신춘문예의 시 부문 예심을 거친 응모자는 10명이었다. 이를 다시 검토한 결과 김려원의 '애월의 얼룩', 김미경의 '먹돌쌔기', 이도훈의 '중절모', 오경의 '점등' 등 4편이 최종까지 남았다.  이 네 사람의 작품은 비슷한 수준이지만 서로 다른 작품 경향을 보여주었다. 김려원은 언어를 구사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을뿐더러 어떤 소재도 시적 대상으로 수용해내는 역량이 돋보였다. 그러나 호흡이 다소 산만하고 불안하였다. 김미경의 시는 긴 호흡의 내용도 거침없이 소화해 내는 능력을 높이 살만했지만, 익숙한 자신의 틀에 갇혀 개성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 아쉬웠다. 이도훈의 시는 서툰 듯 낯선 표현이 되레 참신하게 느껴졌다. 특히 전봇대에 지은 새집을 중절모로 비유한 표현은 눈길을 오래 붙잡았다. 그렇지만 응모작 간 격차가 드러난다는 사실이 선택을 망설이게 했다. 반면 오경의 시는 식상하거나 미흡한 표현들이 더러 눈에 띄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들 수준이 대체적으로 고르며 응모자 자신의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데 심사위원들의 견해가 일치했다. 미숙한 점이 노정된다는 것은 그것을 극복해나가야 하는 숙제가 주어진다는 의미이다. 심사위원들은 그 긍정적인 가능성을 인식하고, 논의 끝에 '점등'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당선작 '점등'은 주방의 벽등을 켜는 순간을 개성적으로 묘사하면서 사색한다. 빛이 들어와 어둠이 사라지는 찰나는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지만, 이때 존재하는 소재와 상상들을 순발력 있게 포착해 역동적으로 제시하는 대목에서 당선자의 기량을 엿볼 수 있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또한 상세히 언급하진 못했지만 예심을 거친 모든 분께도 응원을 보낸다. 그들 모두 똑같은 출발점에 다시 서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스며드는 것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에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바깥에 갇히다 정용화 우리 집 현관문에는 번호키가 달려있다 세 번, 비밀번호를 잘못 누르면 가차 없이 문이 나를 거부한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다가 지갑도 휴대폰도 없이 제대로 바깥에 갇히고 말았다 안과 밖이 전도되는 순간 열리지 않는 문은 그대로 벽이 된다 계단에 앉아있는 30분 동안 겨울이 왔다 바람은 골목을 넓히려는 듯 세차게 불고 추위를 모르는 비둘기는 연신 모이를 쪼아댄다 내 것이면서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이 어디 문뿐이겠는가 낡을 대로 낡아버린 현수막이 바깥에 갇힌 나를 반성도 없이 흔든다 걸터앉은 계단이 제멋대로 흩어지는 길 위의 낙엽이 새들이 자유롭게 풀어놓은 허공이 나를 구속하고 있는 바깥이라니!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나는 지금 바깥이다 프로필 정용화 : 충북 ,동대 대학원 문창과,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바깥에 갇히다]외 다수 시 감상 어느 때 외출했다가 당혹할 때가 있다. 손에 아무것도 쥔 것이 없다. 현금도, 카드도, 전화기도, 차 열쇠도, 밀려드는 공포. 나는 여기에 이렇게 있는데, 세상의 밖에 나 홀로 있는 듯한 느낌. 어쩌면 나는 현금, 카드, 전화기, 열쇠로만 존재했던 것은 아닌지? 아니면 애초부터 나는 없었고 다만, 한 여름 땡볕에 울렁거리는 저 그림자가 진짜 ‘나’인지? 분명한 것은 바깥은 안의 반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지금 바깥이라는 것이다. [글/김부회 시인, 평론가]   물소의 뒷굽은 거룩하다 라고 / 정태중 시의 설계는 간혹 시어들이 떠나버리기도 해서 부도난 공사장 같기도 하였는데 공사장으로 신의 선물이랄까 하는 물음들이 녹슨 창으로 푸르게는 올라오기도 하였다 하얀 배꽃들이 지난 시간을 입었던 듯 옷들이 누렇게 먼저 바래고는 있는 듯 신문 기자의 탁본이 바래고는 있는 듯 배들이 어떤 문장들로 하여서 배가 불러오기도 한 점심시간이 지나자 부리나케 삐뽀삐뽀로 기선 잡는 불자동차와 헛배에 힘 잔뜩 부린 부도난 공사장 방귀와 상관도 없이 해는 쨍쨍 내리다가 굵은 빗방울 쏟아져 공사장을 내려치는데 부도난 말들이 튕겨 오르는 것이 풀들을 잡고 있는 눈물 같기만 하였는데 불화 가득 늙은 수소 큰 눈이 어리둥절 휘청이다가 눈물을 흘려주다가 음~매 라고 몇 번을 풀을 토악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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