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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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진언수상록 (75) 천당이 어드메냐? 댓글:  조회:2479  추천:0  2017-12-23
                                                 천당이 어드메냐?                                                             진 언         오늘 또 이웃의 장례식에 참녜하였다. 낯익은 얼굴들이 하나둘 세월의 비바람에 지는 인생이 슬펐던가, 못하는 술몇잔을 걸치고 알딸딸한 걸음으로 강둑길을 굼닐다 가 혼탁해진 개천이라도 바다로 간다고 류수의 원리를 체현하는 연집강을 굽어보니 상념이 뚱딴지같이 흐른다. 미친놈 미치지 않았다고 가슴을 탕탕 치듯이, 억수로 취하고도 멀쩡하다고 하듯이 생각은 맑지만 비애는 비틀거린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떠나간 이들을 생각하면 자연좇아 사후세계에 엉뚱함을 달려보게 되는것은 이맘 때 로옹들의 공통한 심성이라 할것이로되 저저 죽음을 맞는 자세는 다를것이다. 공자의 제자가 사후세계에 대해 묻자 공자가 가라사대“현세도 잘 모르겠는데 사후세계는 개나 줘버려라.”라고 했다던가? (고증할길은 없음).     무슨 일이나 겪어보아야 실상을 알수 있다는 뜻으로 쓰이는 “죽어봐야 저승 알지”라는 말과는 별개로 정말 사후세계는 죽어봐야 알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죽어봐서 알게 된것을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전달한 사람은 인류사에 한번도 기록된적이 없다. 그런데 종교인들은 곧잘 사후세계를 론하고있다. 어째서 이 세상에 태여나게 되였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살지도 모르는데 허구헌날 사후세계를 설교하는것은 눈감고 “야옹ㅡ”하는식의 자기기만이 아닌가?     천당이요 지옥이요 하는 사후세계는 영원히 살고자하는 자아의 환상이다. 자아가 가장 좋아하는것이고 또 누구나 좋아하는것으로 인간이 가질수 있는 욕심중에 가장 큰 욕망이다. 그래서 이것을 종교에서 실현시켜준다고 유혹한다. 기독교의 천국은 말 할 필요도 없고 불교도 환생으로 영원한 삶을 설교하고있다.     하지만 자아는 환생하는 주체가 아니라 이 세상에 이 몸이 장기적인 기억이 가능해지면서부터 기억의 덩어리로부터 나타난“나”라는 일종의 기억의 집합체일뿐이다. 이것이 우리가“나”라고 느끼는것이지만 몸이 죽고나면 동시에 사라진다. 이것을 불가에서는 “무아”라고 한다. 자아가 나타날수 있는 근원이 되게 하는 의식, 그것은 순수한 자각을 느끼는 의식이다. 우리가 감각하며 사는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게 하는 그 의식은 죽음을 맞이한 최후시각에도 단말마적으로 반짝일것이다.     불가에서는“아뢰야식(阿賴耶識)” ,“제8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이라는 현묘한 말로 설교하는데 모든 법의 종자를 갈무리하고 지각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심층의식이라고 해석하고있다. 그리고 불가에서 일컬어 심의식(心意識)에는 안식(眼識) ? 이식(耳識) ? 비식(鼻識) ? 설식(舌識) ? 신식(身識) ? 의식(意識)이라는 6식설법도 있다. 하지만 그 의식이 곧 “나”일가?     그 의식은 “나”가 전혀 아니다. 자연계에서 죽음이 끝없어도 새로운 생명이 태여나는것을 환생이라 하는것은 들리지 않는, 상상속 천국의 소리로서 본래 불가에는 없던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지금도 없는) “교리”로 사람들을 매료시키고있다. 우리는 자아를 너무 사랑하기때문에 그것을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다. 죽어도 다시 새로 환생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죽음을 피할수 없다. 하지만 새로운 생명이 부단히 태여난다. 그것이 생명의 대순환으로서 이 욕심을 버릴 때 각 종교에서 열심히 설교하는 영생설에 혹하지 않을것이다.     천국과 지옥은 과연 존재하는가, 있다면 류류상종이라 악한놈들은 악한 놈들이 있는데로 (지옥)로, 선한사람은 선한사람들만 모인 천국으로 간다는데“이승”에서 “저승”을 론한다는 자체가 그럴듯한 속임수라고, 현실세계의 악인들은 업보때문에 지옥에 떨어진다는것이 악에 대한 유일한 대책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설교"는 순전히 얄팍한 기만술이다. 내가 유물론자로 자처하는것은 아니지만,     몸은 생명을 다해도 의식은 남을가? 늙은 생명은 련속부절 사라지고 새 생명은 계속 태여나고 그 생명에 생겨나는 수많은 의식들이 끊임없이 생성되기때문에 가치가 없는 의식은 필요없다고 누가 선언할수 있는가? 그것을 무엇으로 판단하느냐? 누구도 정답을 못할것이 뻔하다. 그래서 종교야말로 정신을 마비시키는 독약이라 하는게 아 닌가? 자가당착이지만 사후에 무엇이 있다면 “무”자체밖에 더 있겠는가?     아직도 천당,지옥이 어디 있는지 몰라 궁금증을 달리는가? “천당지옥은 한생각, 마음의 일로서 제 한마음 바로 다스리며 살면 천당이요 제 한마음 그릇되게 가지면 그 자리가 곧 지옥이라 마음밖에서 천당지옥을 구하면 미신, 맹신, 광신의 첩경이라 마음은 모든 법의 근본이요(心爲法本), 마음은 모든 법의 가장 으뜸되는것이며 (心尊 心使 ), 그리고 마음에 의해서 모든것은 이루어지나니(中心念善) 만일 깨끗한 마음 으로 말하고 행동하면(卽言卽行) 그 사람에게는 반드시 행복과 즐거움이 뒤따른다 (福樂自追) 마치 그림자가 물체를 따르듯이(如影隨形)”라고 하니 순리로 살다 갈 일이 아니랴,        불법은 마음법이라 한다. 그래서 다른 종교보다 실제적이라 볼수도 있다. 불교는 제 한마음 바로 다스려 바로 쓰는 법을 가르치되 마음밖에서 구하지 말라 이른다. 한국의 법정스님의 시가 의미롭게 새겨진다.     “여보게 부처를 찾는가?…여보게 친구/산에 오르면 절이 있고/절에 가면 부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절에 가면 인간이 만든 불상만/자네를 내려다보고 있지 않던가 //부처는 절에 없다네…부처는 세상에 내려가야만 천지에 널려있다네/내 주위 가난한 이웃이 부처고/ 병들어 누워있는 자가 부처라네//그많은 부처를 보지도 못하고 어찌 사람이 만든 불상에만 허리 가 아프도록 절만하는가//     천당과 지옥은 죽어서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는가/ 천당은 살아있는 지금이/천당이고 지옥이라네/내 마음이 천당이고 지옥이라네/내가 살면서 즐겁고 행복하면/ 여기가 천당이고/살면서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하면/ 거기가 지옥이라네//자네 마음이 부처고/자네가 관세음보살이라네// 여보시게 친구/ 죽어서 천당가려 하지말고/ 사는동안 천당에서 같이 살지 않으려나// 자네가 부처라는걸 잊지마시게/ 그리고 부처답게 살길 바라네/ 부처답게……”     각설하고, 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죽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등바등 살아간다. 누군가는 죽기 위해 살고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은근히 장생불로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인명재천인것을 어찌하랴, 석가모니도 생로병사에 고뇌하다 결국은 사신을 물리치지 못하였다. 그런데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하고 예수님은 교시하고있다. 아멘!     세상에 변하지 않는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주만물의 흥망성쇠, 인간의 생로병사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마음 편하게 마지막 잔광을 한껏 선물하는 석양을 바라보아야 하련만 그게 안되기에 인생은 죽음을 향해 가면서 남는것은 오직 영원한 삶이이라는 밀주같이 달착지근한 소리를 듣고 그것을 믿으며 시려오는 가슴을 어루만진다.     우리가 오래동안 살기를 바라는것은 미쁜 욕망이라 할세 당면의 문제는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이다. 죽음은 가장 두렵지만 전전긍긍 하며 산다는것은 자학(自虐)이다. 설사 환생한들 뭣하리오. 귀공자로 태여난들 뭣하리오. 천사로 환생해서 악마와 싸우던들 뭣하리오. 보고싶지 않으나 자꾸 보이는것을 안볼수도 없듯이 궁극을 알면서도 가는데까지 가보쟈!                                                                     2015년 4월 1일
1    (진언수상록 73) 비극영웅을 기리다 댓글:  조회:2405  추천:0  2017-12-23
                                                            비극영웅을 기리다                                                                            진 언       사마천의《홍문연》을 읽으면 감수가 각이할것이다. 관념상 항우는 폄훼하고 류방을 치켜세웠다. 항우는 용맹하나 무모하여 아낙네들같은 인정을 가지고 있어 류방을 놓아주었기에 종당에 사면초가에 빠지여 패주하다가 오강에서 자결하는 비극을 빚었다는것이 정설로 되여졌다. 승자가 력사를 쓰니까 그렇게 돌아가는가?     패왕답지 않게 황제보좌에 오르지 못했거니와 목숨마저 잃었으니 대업을 이루지 못한건 둘째치고라도 천추의 비웃음거리로 된 “대머저리”라는것이다. 반면에 류방은 머리가 잘돌고 계략이 뛰여나며 인심을 얻었기에 시운이 틀어져도 동산재기할 웅심이 있고 기회를 잘 틀어쥐였기에 황제위에 오를수밖에 없었다는것이다.     시비는 하기 나름인가? 력발산 영웅이 머저리로 락인찍히고 항간에 류망소인배가 영웅으로 추대되였다. 사실이 과연 그러한가?《홍문연》을 다시 읽노라면 생각도 다르게 된다. 아름다운것과 추악한것이 뒤바뀌고 선악이 전도되고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지 못했으니 력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하리랴,    진실된 력사는 아무나 치장해 내놓을수 있는 소녀가 아니다. 력사를 참고하면 현실을 인식하고 미래를 열어가는데 유조하다. “홍문연”을 수업각도에서 개괄한다면 학생들로 하여금 진,선, 미를 흔상하게 할수 있다. 환언하면 문장의 사상예술성을 음 미하고 인격의 진,선,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하고 인성의 진,선,미도 새겨보게 하면서 비극의 진,선,미도 반추해보고 력사의 진,선,미도 터득하게 할수 있다.     1. 인격의 진, 선, 미     “인격은 금이요 인격의 광휘는 어떠한 사악, 어떠한 세력도 마멸할수 없다.”는 말이 있다. 항우가 비록 실패했지만 인격매력은 천추에 빛나고 있는바 과시 “살아서 는 영웅이요 죽어서도 영웅귀신”이 아니런가? 항우가 영웅이란것은 옛날부터 정평이 나있었다. 항우는 뭇영웅만이 아니라 영웅중에 호걸이다. 유명한 거록대전 (巨鹿 之战)에서도 그렇고 해하에서의 일당백의 싸움도 그렇고 오강가에서 웃으며 사신을 맞으며 자결한 장렬한 거동도 그렇고 홍문연에서 항우의 영웅다운 아량도 그렇고…     용맹무쌍하고 호방하고 종용하며 진솔하고 광명정대하며 도량이 넓고 인의가 있는 사나이, 이것이 바로 력사상의 항우의 본연이다. 항우야말로 위대한 인격을 한몸에 집대성한 인걸이라해도 손색이 없다. 위대한 인격은 일월과 같아 하늘을 가르 며 빛발 눈부시여 후세사람들이 기리게 한다. 간능한 류방에게 패하여 비극의 주인공 으로 남았지만 실은 영웅호걸의 인격을 갖추었을 뿐만아니라 제왕의 기질도 갖춘 영웅이다. 사마천이 제왕도 아닌 항우를 “본기(本纪)”에 써넣었을뿐만아니라《사기》 에서 가장 돌출한 인물로 부각시킨데는 다 생각이 있었기때문이 아닐가?     류방은 어떠한가? 한마디로 속다르고 겉다른 소인배이다. 범증의 예견처럼 그는 관중에 왕이 될 욕심은 굴뚝같았지만 입관후 재물을 취하지 않고 미색에 탐하지 않는 자태로 분장하였는데 군사력량이 잠시 항우의 상대가 아님을 알았기때문이다. 이역시 지모라하면 지모이겠지만 항우와는 인격차원에서 뒤틀린다. 하긴 꿩잡는게 매라고 승자는 왕이요 패자는 역적이라 실패한 영웅 항우를 위해서는 변명거리도 없으리라. 그 러나 제왕이 된 류방의 “교토사량구팽(狡兎死良狗烹)”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2. 인성의 진,선,미      지난세기 한때 소위 자산계급인성론은 대역부도한것이였지만 인성의 존재는 부정 하지 못했는바 “다만 구체적인 인성은 있지만 추상적인성이 없다”고 했을뿐이다. 그런 구체적인성을 항우의 몸에서 읽을수 있다. 항우의 인성미는 인성의 본질 질박함이 다. 항우는 대인격자이면서도 의연히 범부속자로서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지 상정이 없을수 없다. 해하가에서 패하고 오강까지 밀리였을 때 사면초가로 갈길이 더 없었지만 “강동의 부로들을 볼 면목이 없다.”고 말하며 강을 건너 도피하기를 거절한것은 항우의 진정한 마음의 메아리였던것이 아니랴!     그의 말 한마디에서 우리는 그의 심리바탕에서 가장 진실한 일면을 엿볼수 있으 며 종리매를 배를 타게 한 환난지우지정에서 그의 남아의 풍모가 여실히 드러난다. 한목숨 건지여 강동으로 돌아가기를 거절한것은 기실 그의 지엄한 자존에서 나온것으 로서 그의 마음바탕이 선량하다는 반증이다. 사면초가에서 “패왕별희(霸王别姬)”의 장면은 얼마나 비장한가!그는 감히 사랑하고 감히 미워할줄 아는 심지가 명랑한 사 내대장부였다. 물론 여기서 그의 소인격의 치명적약점도 드러난다고 왈가왈부하지만 역시 인성미를 갖춘 영웅임에는 틀림없다.     반대로 사마천이 류방의 인성의 허위와 추악한 일면을 림리하게 기술하고있다.  그처럼 무뢰한의 무치함은 류방의 간판이요 잔인성과 추악성은 그의 본성이였다. 딸 의 혼인을 교역으로 삼거나 항백의 감정을 롱락한것 등 사실과 혈전만리를 헤쳐온 건국 영웅 한신을 의심하여 잡아죽인것이나 제애비마저 모른체 한 사실에서 그의 추악한 인성이 여실히 드러나지 않는가? 선량함도 정치투쟁의 도구로 될 때 인성중에 진,선, 미로 이화될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원초적인 비애인지 모르겠다.      3. 비극속에 진,선,미      “비극은 인생에서 가치있는것의 훼멸을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 인생에서 가치있는것이란 바로 인격의 진,선,미이며 인성의 진,선,미는 인간의 생명력이며 사회학각도에 말한다면 생산력이 되기도 한다. 항우로 말하면 원래 천지를 진감할 위업을 이룰 영웅으로서 력사의 한페지를 빛나게 장식할 인물이다. 그의 최후의 개탄처럼 하늘이 알아봐주지 못한 탓인가? 그의 우수한 품질은 그의 대업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당신은 용속한자가 왕이 된다는것을 믿지 않는가?”라고 한 서양격언을 떠올리면 항우의 실패가 더 애석해지는것이다.     원래 고상한자가 비루하고 간능한 소인배에게 당하지 말아야 하지만 운명의 신은 못된 장난질을 잘한다. 시인 북도의 말처럼 고상함은 고상한자의 묘지명이고 비루함 은 비루한자의 통행증이 되는 현실사회에서 영웅에게도 막무가내함이 있는것이다. 전통적으로 항우의 비극을 성격의 비극으로 단정지어왔다. 꿩잡는게 매요 쥐를 잘 잡 는게 좋은 고양이라는 실용주의 철학으로 말하면 항우는 유구무언이라 하겠다. 더구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한편 이런 평판은 력발산, 개세의 영웅에 대한 전면적인 평가일수 없으며 그만큼 일종 모독이라 할것이다.     항우의 실패는 기실 그의 개인의 착오만이 아니다. 그의 성격에 인간적인 결함이 없을수 없으나 그 시대가 항우같은 영웅을 리해하지 못하고 용납하지 못했던것이라 말하면 어페일가? 혹시 그의 출생이 시대착오일지 모른다. 어쨋거나 성패로만 영웅을 론할수 없다. 승리한자는 왕이 되고 패자는 역적이 된다는 론제는 통치자들이 혹세무 민하는 랑설이며 용속한자들의 바람따라 돛을 달아야 한다는 편견일수도 있겠다.     항우는 비록 실패했지만 명실공히 천하영웅임에 손색이 없고 류방이 비록 득세하여 황위에 올랐지만 뛸데없는 소인배이다. 이 시점에서 볼진대 항우의 개인적비극을 확장한다면 당시 사회의 대비극이였다. 어찌보면 항우의 조우와 운명적비극에 대한 서술에서 사마천의 인생조우와 비극적운명의 관조가 엿보이기도 한다. 아무튼 사마천 의 명문장인 “홍문연”에서 력사의 진,선,미와 사상예술적인 진,선,미도 충분히 읽을수 있으나 일개 무명 훈장으로서 이만 말을 사리기로 한다.                                                                                    2015년 3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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