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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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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국민당주력부대를 섬멸한 3대전역 댓글:  조회:6707  추천:0  2013-12-21
국민당주력부대를 섬멸한 3대전역 (번역)   1948년 9월 12일부터 1949년 1월 31일까지 료심대지에서 화북평원에까지, 황해에서 회하량안까지 드넓은 지역에서 인민해방군은 국민당주력부대와 중국의 운명을 결정한 전략적인 대결전을 치뤘다. 3대전역의 승리는 중국인민해방전쟁사에서 빛나는 리정비로 되였다. 항일전쟁이 승리한뒤 중국은 두가지 운명과 두가지 전도의 갈림길에 서있게 되였다. 중국공산당은 전국 광범한 인민군중의 근본리익을 대표하여 평화적인 방식으로 독립, 민주, 부강의 신민주주의 새중국을 건설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대지주, 대자산계급리익을 대표한 국민당통치집단은 내전의 방식으로 전쟁승리과실을 독차치하며 독재적인 반동통치를 꾀했다. 국민당은 내전준비를 마친뒤 3~5개월내에 공산당이 령도하는 인민군대를 소멸하겠다고 떠벌이며 1946년 6월 26일에 22만명의 군대를 출동하여 중원해방구를 진공했다. 이로써 전면내전이 폭발되였다. 전쟁초기 쌍방의 력량대비는 현저했다. 국민당군의 병력은 430만명으로서 비행기와 땅크로 중무장했다. 해방군병력은 120만명에 불과한데다 장비는 대부분 “좁쌀에 보총”격이였다. 이 시기 모택동은 “일체반동파는 모두 종이범”이다는 저명한 관점을 제출하고 정치상에서 인민군중을 발동하고 군사상에서 우세병력을 집중하여 각개 섬멸하는 정확한 전략방침을 세웠다. 전면내전이 폭발된 첫 8개월에 인민해방군은 71만명의 국민당군대를 섬멸하여 전면진공을 파탄시켰다. 1947년 6월 30일 밤에 류백승과 등소평이 령솔한 12만 해방군이 황하를 강행도하하여 “로서남전역”을 발동하여 인민해방군의 전략진공의 서막을 열었다. 그해 10월 10일에 중국인민해방군 총부는 “장개석을 타도하고 전 중국을 해방하자”는 구호를 공개적으로 제출했다. 방어에서 진공으로 전환한뒤 해방군은 드높은 혁명기백과 탁월한 군사지휘예술로 전략결전의 시기를 정확히 파악하고 1948년 9월 12일부터 1949년 1월 31일까지 료심전역,회해전역, 평진전역 3개 대전역을 거쳐 국민당주력부대 154만명을 섬멸했다. 1949년 4월 21일에 “백만대군 장강도하전역”을 시작하여 4월 23일에는 국민당통치수도였던 남경을 승리적으로 점령함으로써 22년간의 국민당통치를 뒤엎었다.    
19    모택동을 대만에 초청한 장개석 댓글:  조회:8609  추천:0  2013-12-21
모택동을 대만에 초청한 장개석                                                                                                      (번역)         20세기 70년대 상반기는 모택동과 장개석을 놓고 말할 때 모두 그들 인생의 최후의 날들이였다. 력사는 그들의 희망과 유감,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을 생명의 마지막까지 남겨놓았다. 1972년 3월, 재차 제5기 대만대통령으로 당선된 장개석은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이 하루라도 존재하는 한 우리혁명의 임무는 절대 끝나지 않을것이다. 우리는 천백번의 좌절과 타격을 당하더라도 끝까지 혁명의 임무를 완수하고야 말것이다!”하고“비장한” 선언을 발표했다. 하지만 만년에 여러가지 질병에 시달린 장개석은 이 “웅대한 뜻”을 펴기는커녕 최후의 3년동안 공개적 장소에 겨우 세번밖에 나타나지 못했다. 반대로 중국혁명에 불후의 업적을 쌓은 위인 모택동은 장개석과 국민당반동파를 몰아내고 전중국을 해방하면서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여 기쁨도 많았지만 문화대혁명의 폭풍으로 피로한데다가 림표사건의 강렬한 자극으로 하여 만년에 질병과 번민에 시달렸다. 공산당과 국민당이 싸울 때 미신을 믿은 장개석은 여러번 적수인 모택동을 망하라고 모택동의 조상무덤을 파헤쳤다. 하지만 모택동은 자신의 손에 들어온 장개석의 조상무덤을 풀 한포기, 벽돌 한장 다치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문화대혁명시기 주은래가 장개석의 조상무덤을 다치지 못하도록 지시했지만 1968년에 누군가 장개석의 옛저택에 침입하여 무덤을 파헤쳤다. 다행이 유골은 가져가지 못했다. 대만에서 이 소식을 들은 장개석은 아들과 손자들을 다 모여놓고 “너희들은 영원히 이 원쑤를 기억해둬라! 모택동과 공산당을 뒤엎고 중화민국을 회복하는 날 가문의 원쑤와 나라의 치욕을 한꺼번에 씻어야 한다!”하고 훈계했다. 하지만 중앙정부에서는 재빨리 장가무덤을 수건하고 보호하는 조치를 댔다. 1972년에 중국방문을 왔던 닉슨대통령이 모택동을 보고 “장개석은 주석님을 비적이라고 부르던데 주석님은 장개석을 뭐라고 부릅니까?”하고 물어 모택동은 하하 웃었고 주은래가 대신하여“우리도 신문에 장개석을 비적이라 했습니다. 우린 서로 상대방을 비적이라고 불러왔습니다”하고 대답했다. 평화적으로 대만을 해방하기 위해 모택동은 먼저 체육운동기구에서 앞장설것을 지시했다. 그리하여 대만과 대륙의 체육선수들이 서로 래왕하며 경기를 치렀고 점차 친척방문의 길도 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개석은 모택동을 일생에서 용서할수 없는 원쑤로 간주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도“나라”가 있었다. 1974년 양력설에 남부윁남에서 우리나라 령토인 서사를 침입했을 때 장개석은“중공이 출병하지 않으면 내가 출병하겠다”고 말하면서 대만 외교부문에 지시하여 “중국령토는 침범할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중국과 남부월남의 해상전쟁이 폭발한후 서사해군이 증병을 요구했다. 이에 등소평이 모주석께 회보하자 모주석은 동의하면서 군함이 에돌지 말고 대만해협으로 직행할것을 지시했다. 이전에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불필요한 마찰을 피면하기 위해 중국해군은 동해와 남해를 오갈 때마다 모두 대만동남의 공해를 돌아서 래왕했다. 중국군함이 대만령해를 통과한다는 보고를 들은 장개석은 눈을 지긋이 감더니 “서사의 정세가 그렇게 긴박한가?”하고 물은후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곧 무조건 통과시킬것을 지시했다. 만년에 장개석은 고향생각을 몹시 했다. 1975년 양력설에 장개석은 일생의 마지막으로 되는 “복국”선언을 발표했다. 그해 음력설전후에 국민당원로 진립부는 장개석의 비밀사명을 접수하고 비밀경로를 통해 중공중앙에 모택동주석께서 대만을 방문해줄것을 초청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공산당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진립부는 향항신문에 “내가 만약 모택동이라면”하는 글을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글에서 진립부는 “모택동이 대만을 방문하여 장개석과 담판의 길을 여는것을 환영한다. 나라와 인민의 리익을 위하여 모택동이 과거를 따지지 말고 북벌과 항일시기 국공량당이 두번이나 합작했던 전례대로 다시 새로운 합작의 길을 열것을 바란다”고 썼다. 모택동은 당시 명예를 회복하고 제1부총리직무를 맡았던 등소평을 불러 이 일을 토론하면서 “나는 신체가 허락되지 않으니 당신이 나를 대신해 대만을 방문할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장개석은 모택동의 정식대답도 기다리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 1975년 4월 5일 청명절아침에 오랜 병상에 누워있던 장개석은 휠체어에 앉아 오래동안 있어본적이 없었던 환한 미소로 병문안온 아들을 맞았다. 그는 헤여질 때 아들 장경국에게 “휴식을 많이 해라”고 당부했다. 그날밤 혼미상태에 빠졌던 장개석은 자정이 되기 10분전에 심장의 고동을 멈추었다. 향년 89세였다. 장개석의 령구를 옮길 때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진동하더니 소낙비가 억수로 퍼부었다. 장경국은 이것을 보고 “하늘도 력사위인의 죽음이 슬퍼서 운다”고 말했다. 장개석은 하나의 유감을 가지고 세상을 떠나면서 자기가 이루지 못한 꿈을 아들에게 기탁했다. 그것은 모택동과 공산당을 뒤엎는 “복국”의 꿈이였다. 장개석은 해마다 “반공”의 글을 발표했고 “반공”계획을 세웠으며 1000여종의 방안을 설계하면서 하루도 “복국”의 꿈을 중단한 날이 없었다. 사람들은 장개석을 “자신의 힘도 모르고 허황하고 어이없는 꿈에 미친 늙은이”라고 비웃었지만 “복국”은 장개석에게 있어서 하나의 신성불가침의 “신념”이였으며 그가 유일하게 고독한 섬에서 버틸수 있었던 “정신법보”였다. 하지만 그 자신도 그것은 영원히 실현불가능한 꿈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다. 그가 할수 있는 일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끝까지 분투하는것이였으며 유감을 유언에 남기는것뿐이였다. 그의 집착과 오만은 대만이란 이 “아이”가 모체를 떠나 밖에서 애처롭게 떠도는 비극을 조성했다. 1976년 9월 9일에 력사의 거인 모택동도 이 세상을 떠났다. 모택동은 장개석과 국민당반동파를 몰아내고 새중국을 건설했지만 량안의 통일은 이룩하지 못했다. 하지만 모택동은 장개석처럼 그렇게 과도한 정치적 짐은 짊어지지 않았다. 모택동은 “대만문제는 시간이 수요된다. 다음 세대에 가서 기다려야 해결될수도 있다”고 말했다. 모택동이 완성하지 못한 력사적 임무를 등소평이 이어받았으며 지금은 호금도동지를 위수로 하는 당중앙에서 이 력사적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있다. 어머니의 품을 떠난지 오랜 대만이란 이 “아이”는 고독하게 울면서 어머니를 몹시 그리고있다. 이 “아이”가 어머니의 품에 안기려고 하는것을 그 누구도 막을수 없다.  
18    주은래의 첫 사랑 장약명의 비극인생 댓글:  조회:6466  추천:0  2013-12-21
  주은래의 첫 사랑 장약명의 비극인생                                                                                                                                                                                     (번역)   주은래와 장약명의 우정은 천진의 남개학교에서 시작되였다. 1902년에 하북성 청원현에서 출생한 장약명은 가정환경이 좋았고 특별히 총명했으며 성격이 강직했을뿐만아니라 다혈질이고 학생시절에 학습성적이 줄곧 1등이였으며 용모도 아름다왔다. 1919년 “5.4”운동때 장약명은 곽륭진, 등영초 등과 함께 천진녀성애국동지회를 조직했다. 그해 9월에 그녀는 주은래, 곽륭진, 류청양 등과 함께 혁명단체 “각오사”를 창건했다. 1920년초에 일본제품을 배척하는 활동을 벌렸는데 장약명은 주은래, 곽륭진, 우방주와 함께 수천명의 민중을 동원하여 직예성공서에 가서 청원하다가 당장에서 붙잡혔다. 당시 4명이 모두 붙잡혔는데 장약명은 주은래와 함께 감옥살이를 했다. 주은래와 장약명은 서로 상대방의 총명과 재능을 흠모하고 아껴주었다. 재질과 용모가 뛰여난 두 사람은 그야말로 룡과 봉황이였다. 주은래는 이 안개속에 가리운 연분에 대해 조금도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1955년에 주은래는 장약명과 어떤 사이였느냐고 하는 후배들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등영초앞에서 솔직하게 “처음에 우리는 사귀였어”라고 대답했다. 등영초는 당당한 공화국의 총리가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는것을 보고 그저 웃기만 했다. 출옥한후 “각오사” 사원들의 안전을 위해 네 사람은 프랑스류학을 떠나기로 약속했다. 1920년 11월 7일에 네 사람은 상해에서 배를 타고 프랑스로 갔다. 그 이듬해 봄에 주은래는 장신부, 류청양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중국공산당프랑스소조(후에 유럽지부로 반전)”에 참가했다. 1921년에 주은래는 프랑스어를 배웠는데 꽃같이 아름다운 얼굴에 늘 웃음을 담고있는 장약명과 열렬한 사랑에 빠져있었다. 갓 프랑스에 갔을 때 곽륭진과 장약명은 빠리의 한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했다. 곽륭진은 장약명보다 8살 년상이였는데 큰언니처럼 장약명을 돌봐주었다. 1922년에 장약명은 곽륭진과 함께 조세염, 주은래, 리부춘이 조직한 “중국소년공산당”에 가입했다. 장약명은 맑스주의의 프랑스원작을 거침없이 량독하고 번역하였는데 공산주의연구회의에서 늘 그녀가 강의했다. 그녀는 학습심득을 써서 프랑스의 《적광》잡지에 발표하는 동시에 늘 프랑스의 통신을 써서 중국국내의 간행물에 발표했다. 장약명은 프랑스어에 능했고 또 녀자여서 신분을 숨기기 편리했기때문에 조직내에서 특별임무도 담당하여 프랑스공산당과의 비밀련락을 유지했다. 첫사랑은 특별히 아름다운것이다. 1922년은 주은래와 장약명의 사랑이 가장 열렬했던 한해였다. 하지만 주은래한테는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주은래의 선배이며 좋은 친구인 채화삼이였다. 호남사람인 채화삼은 모택동과 함께 장사에서 신민학회를 성립했고 최초로 폭력혁명의 주장을 내세웠는데 사상과 행위가 극히 진보적이고 급진적이였다. 채화삼은 괴재였다. 그는 프랑스에 온후 공장에 들어가지도 않고 학원에 들어가 프랑스어를 배우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는 회의에 참가하는외에는 프랑스자전을 안고 조용한 구석에 찾아가 혼자서 자전을 뒤지는것이 업이였다. 그는 흐트러지고 지저분한 얼굴로 맑스주의를 담론했고 입만 열면 무산계급독재를 웨쳐댔다. 그는 주은래가 련애를 하면서 사업과 학습을 좀 늦추는것을 보기만 하면 화를 내면서 “당신은 미색에 빠져선 안되오. 진정한 혁명자는 눈을 녀자한테 팔지 말고 압박받고 착취받는 로동자들에게 돌려야 하오”라고 경고했다. 가슴에 큰 뜻을 품은 주은래는 채화삼의 말을 듣고 갑자기 꿈에서 깨여난듯 사색에 잠겼다. 그는 세상을 놀래울 사업을 하려는 자신의 목표를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장약명을 일생의 반려로 선택하는것이 합당할가”고 자문하면서 고민했다. 장약명은 적극적이였지만 그녀의 가정출신은 줄곧 다른 사람의 의심을 받았다. 장약명은 사랑스러웠지만 승벽심이 강하고 다혈질이여서 무슨 일에서나 이기려고 했기때문에 가끔씩 주은래의 마음을 상하게 할 때가 있었다. 주은래는 고통스러웠지만 장약명과 헤여지기로 마음먹었다. 1923년에 주은래와 헤여진 장약명은 매우 고통스러운 심정을 안고 곽륭진과 함께 빠리를 떠나 리옹으로 갔다. 1923년에 빠리에서 리옹으로 온 곽륭진은 뜻밖에도 한고향사람인 양곤을 만났다. 곽륭진은 양곤을 자기의 친구 장약명에게 소개해주었다. 당시 양곤은 리과석사학위를 따내기 위해 공부에만 전념하는 서생이였다. 1924년에 장약명은 활동을 조직했다가 프랑스비밀경찰의 조사를 받았는데 하마트면 강제추방을 당할번 했다. 그해 주은래는 더는 소년공산당 서기를 담당하지 않았다. 새로온 소년공산당 서기는 방자하게 제멋대로 하는 사람이여서 성격이 강직한 장약명은 그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 또 새로온 서기는 장약명의 출신을 문제로 삼고 그녀에  대해 조사했다. 게다가 여러번이나 정치활동을 하다가 프랑스경찰에 조사를 받게 되자 장약명은 억울하기도 하고 불만스럽기도 하여 당조직에서 퇴출하고 프랑스에 남아 공부에만 전념하기로 결정했다. 장약명과 헤여진 주은래는 자신과 같은 신앙을 품은 등영초와 사귀기 시작했다. 장약명은 리옹대학과 가까운 곳에 있는 천주교녀자중학교아빠트로 이사했다. 거기에서는 집세가 싸고 식사도 책임져주었다. 그녀는 수녀처럼 그 아빠트에서 한명의 중국사람도 만나지 않고 한마디의 중국말도 하지 않으면서 근 3년동안이나 살았다. 때문에 프랑스비밀경찰의 추적에서도 벗어날수 있었다. 1927년 10월에 장약명은 우수한 성적으로 저명한 중불대학에 들어가 박사공부를 시작했다. 그 시기 그녀는 양곤과 함께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감정이 깊어졌다. 1930년 봄의 어느날 밤에 장약명이 기숙사에서 책을 읽고있는데 갑자기 아래층에서 “약명이, 약명이”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여왔다.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흰양복에 흰색 프랑스모자를 쓴 청년이 서있었다. 그 청년이 색안경을 벗자 장약명은 깜짝 놀랐다. 바로 주은래가 아닌가? 주은래는 낮은 소리로 자신의 행동은 매우 비밀적이라고 말했다. 남들이 모르게 살그머니 중불대학에서 나온 두 사람은 부근의 마을을 지나 한 자그마한 커피점으로 들어갔다. 커피를 마시면서 주은래는 “난 모스크바로 회의하러 가는 길에 당신을 만나보려고 들렸소. 난 1925년에 광주에서 등영초와 결혼했소. 영초는 약명이가 잘 있는가 알아보라고 했소. 이제 헤여지면 우린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겠소. 난 앞으로 혁명을 하다가 희생되여 승리하는것을 보지 못하더라도 원이 없소.” 그 말을 들은 장약명은 자신이 유일하게 탄복하고 사랑하던 옛 련인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25년후 주은래는 질녀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해석했다. “남자와 녀자의 사이에는 애정이 끝나도 우정이란것이 존재한다. 평생의 반려가 되지 못하지만 친구로는 계속 지낼수 있지 않겠니? 장약명을 놓고볼때 우리는 천진에서 반년동안이나 함께 감옥에 있었고 프랑스에서도 함께 활동을 했기때문에 나는 그녀의 인품에 대해 잘 알고있다. 그녀가 혁명에 대한 추구를 포기했지만 적의 편으로 넘어가서 우리를 배반한것은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친구로 될수 있는것이다.” 1930년봄에 양곤은 안해와 리혼하고 장약명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양곤의 진심에 마음이 움직인 장약명은 마침내 그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신혼려행을 마치고 리옹으로 돌아온 장약명은 박사론문을 쓰는데 전념했다. 장약명은 우수한 성적으로 문과박사학위를 따냈다. 당시 프랑스류학을 온 녀학생은 40여명이였지만 박사학위를 따낸 녀학생은 그녀밖에 없었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수여받은 중국의 첫 녀박사였다. 1931년 양력설이 갓 지나자 장약명은 남편 양곤과 함께 북경으로 돌아왔다. 1948년 봄에 장약명과 양곤은 운남대학 교장 웅경래선생의 요청을 받고 운남으로 이주하여 운남대학에서 조건이 가장 좋은 교수아빠트로 들어갔다. 그들 부부는 중문학부 교수를 담임하면서 문예리론과 세계문학사를 가르쳤다. 곤명이 해방된후 장약명은 중국민주동맹에 가입했고 1950년에 다시 중국공산당에 가입할것을 신청했다. 1955년 봄은 장약명부부에게 있어서 특별히 따뜻한 봄이였다. 그들은 30여년전에 함께 프랑스로 류학갔던 전우이며 그 당시의 공화국총리인 주은래와 즐거운 상봉을 했다. 그들은 5시간이나 담화를 나누다가 함께 식사를 했다. 이는 주은래와 장약명의 마지막 만남이였다. 1958년 6월 18일 오전에 학부에서 반우파대회를 열고 장약명더러 죄를 승인하라고 핍박했다. 성격이 강직한 장약명은 없는 죄를 승인하라고 하자 모욕을 느꼈다. 오후에 계속 비판대회를 열고 더욱 압력을 가하겠다는 말을 들은 장약명은 강물에 뛰여들어 자살했다. 당시 북경에서 한 학술토론회의에 참가했던 양곤은 회의중에 운남대학에서 보내온 전보 한통을 받았다. 장약명의 병세가 위중하니 속히 오라는 전보였다. 양곤은 부랴부랴 운남대학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를 맞아준것은 장약명의 골회암이였다. 28년동안 환난속에서 서로 의지하고 도와주던 한쌍의 부부는 이렇게 영원한 리별을 하였다. 나중에 장약명의 억울한 죽음을 알게 된 주은래는 분노했다. 주은래와 등영초가 따져물어서야 중공운남대학당위에서는 장약명에 대한 착오적인 비판에 대해 시정하고 가족에게 사과했다. 1966년에 시작된 10년대동란때 양곤은 비판받고 매맞으면서 하마트면 목숨을 잃을번 했다. 1978년에 호요방총서기가 친히 비준해서야 양곤은 북경중국사회과학원 민족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임명되였다.   
17    모택동과 장개석의 제자 장선운 댓글:  조회:9208  추천:1  2013-12-14
모택동과 장개석의 제자 장선운   (번역)       중국력사거인과의 관계를 놓고 보아도 장선운(蒋先云)은 전기적색채를 띤 인물이다. 장선운은 황포군관학교 교장 장개석이 가장 총애하는 학생이였지만 그의 첫선생은 장개석의 가장 큰 적수 모택동이였다. 어떤 사람은 태여날 때부터 천재인데 “황포3걸(장선운, 진갱-陈赓, 하충한-贺衷寒)”중의 한사람인 장선운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는 하늘의 별처럼 어디가나 빛을 뿌리는 천부적인 지도자였다. 만약 장선운과 엽정이 50년대까지 살아있었다면 공화국의 10대원수명단은 바뀌였을것이라고 어느 력사학자는 말했다. 호남성 신전에서 온 장선운은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해서부터 졸업할 때까지 모든 과목의 시험성적이 줄곧 전교 1등이였다. 황포군관학교의 가장 우수한 인재로 불리운 장선운은 장개석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학생이였다. 평소에 학생들을 매우 엄하게 대했던 장개석이였지만 장선운만은 아주 친절하고 너그럽게 대해주었다. 그런데 장개석이 가장 총애하는 이 학생의 첫선생은 이후 장개석의 가장 큰 적수로 된 모택동이였다. 또 장선운을 황포군관학교에 추천해준이도 모택동이였다. 장선운은 모택동이 1921년에 형양에서 당창건시기 가장 일찍 발전시킨 당원중의 한 사람이다. 당시 20세도 안된 장선운은 수구산광산로동자운동을 지도했으며 로동자구락부주임을 담임했다. 안원대파업 때 그는 모택동, 리립삼의 유력한 조수였다. 황포군관학교에 들어간후 장선운은 신속히 많은 학생들을 흡인하여 중공황포지부를 성립하고 지부서기직무를 맡았으며 좌익의《청년군인련합회》를 발기하고 지도했다. 그후 황포군관학교를 나온 공산당원의 대부분은 장선운이 발전시킨 사람들이다. 장개석은 장선운이 중국공산당의 골간지도자라는것을 알고있었지만 인재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장선운에게 매우 큰 희망을 기탁하고있으면서 “앞으로 혁명이 승리하여 내가 군복을 벗으면 이 황포의 룡과 범들은 오직 장선운만이 지휘할수 있다”고 장선운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장선운은 장개석의 총애를 받아 황포의 동학들중에서 제일 빨리 승급하였지만 장개석과 점점 멀어져갔다. 장개석이 공산당과 반목하여 《중산함사건》을 일으키자 국공량당의 2중당원의 신분을 가지고있던 장선운은 국민당에서 탈퇴한다고 공개적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1927년 4월 12일에 장개석이 공산당을 대대적으로 학살하자 장씨성을 가진 선생과 제자의 인연은 철저히 끊어지고말았다. 1927년4월 17일에 장선운은 무한에서 황포학생장개석성토대회를 발기하고 대회주석을 맡았다. 그는 30만명이 모인 대회에서 격앙된 목소리로 혁명을 배반한 장개석을 성토했다.   북벌기간 북벌군총부 비서, 제5퇀 퇀장으로 된 장선운은 광동, 호남, 강서, 무한으로 진군하면서 군벌을 쳐부셨다. 장선운이 무한에 도착했을 때 남창에 있었던 장개석은 장선운의 재간을 몹시 아끼면서 부하를 파견하여 장선운을 제1사의 사장으로 임명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장선운이 조금도 동요하지 않자 장개석은 신문에 자기와 장선운이 함께 찍은 사진을 실었다. 이 때문에 장선운은 공산당내부에서 충분한 신임을 얻지 못했다. 중국공산당의 책임자의 한 사람이였던 장국도는 장선운을 의심하면서 배척했다. 이때 제26사 77퇀 퇀장 겸 정치위원으로 있던 장선운은 타격을 받고 고민하던중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 제2차 북벌전쟁에 뛰여들었다. 1927년 5월 하순에 북벌군은 하남성 림영에서 아군보다 몇배나 더 많은 봉계군벌과 격전을 벌렸다. 봉계군벌 지휘자 장학량은 군장 한명을 철직하고 려장 1명, 퇀장 3명을 잃으면서 땅크, 비행기, 독가스까지 동원하여 맞서 싸웠지만 결국 장선운에게 대패하고말았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던 천재적인 군사가 장선운은 진장한 장성이 되기도전에 림영성아래에 지고말았다. 때는 1927년 5월 28일이였고 그는 향년 25세였다.     
16    장개석의 신변에 잠복했던 녀공산당원 심안나 댓글:  조회:6516  추천:2  2013-12-14
장개석의 신변에 잠복했던 녀공산당원 심안나     (번역)       1915년에 강소성 태주에서 출생한 심안나는 1935년 1월에 시험에 합격되여 절강성정부비서처 의사과(议事科)의 속기원(速记员)으로 들어갔다. 1938년에 주은래의 파견을 받고 심안나는 국민당정부최고층으로 잠입해들어갔다. 그녀는 속기원의 신분으로 여러번이나 국민당의 당, 정, 군 최고층의 중대한 회의에 참석하여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수집해 연안에 보내주었으나 폭로되지 않았다. 그녀는 장개석의 신변에서 장장 11년이나 잠복해있었다. 심안나는 국민당중앙상무위원회와 중앙전회에서 모두 속기사업을 담당했으며 국방최고위원회, 국민정부위원회, 최고군사회의 속기사업을 담당했다. 심지어 장개석이 중앙훈련탄에 가서 강의할 때에도 속기사업을 담당했다. 그전에 심안나는 이미 절강성정부비서처 의사과의 속기원이였다. 조직에서 암호로 그녀에게 상해로 돌아오라고  했을 때 그녀는 즉시 성정부의 중요한 회의서류와 회의기록을 트렁크의 옷속에 감춰가지고 와서 조직에 바쳤다. 조직에서는 빈틈없이 임무를 완성한 그녀를 칭찬했다. 그후 그녀는 국민당의 계획 및 무기장비, 도로또치카의 분포정황, 설계도 등 중요한 정보를 특수한 약물을 리용하여 편지지의 뒤면에 썼다. 그리고 정면에는 일반적인 문안인사를 적어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으로 조직에 전해주었다. 장개석은 주석대에서 발언하면서 옆에 앉아있는 아름다운 속기원아가씨가 중국공산당의 비밀당원이라는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것이다. 심안나는 1946년말에 중경에서 공산당과 국민당이 담판할 때 당중앙에 전략가치가 있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주은래부주석은 심안나의 정보사업을 “신속하고 정확하다”는 말로 칭찬해주었다. 심안나는 1949년에 중공중앙의 표창을 받았고 1989년에 국가안전부에서 내여준 영예상과 영예증서를 수여받았다. 1947년에 해방전쟁은 대치상태에 있었다. 이 시기에도 심안나는 끊임없이 중요한 정보를 수집하여 남편 화명지의 손을 통해 중공중앙남방국 령도의 손에 들어가게 했다. 국민당고위층에서 얻은 이런 극비정보를 장악한 공산당은 국민당군대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적의 심장에 잠복하여 사업하려면 혁명정신을 견지하는외에 반드시 기술이 받쳐주고 어떠한 정황에서도 당황하지 않는 심리감당능력이 있어야 한다. 심안나는 매분당 200자를 기록할수 있는 놀라운 속기속도를 가지고있었다. 이는 그녀가 적의 심장에 잠복할수 있는 선결조건이였다. 새 중국이 성립된후 심안나와 그녀의 남편 화명지는 모두 국가안전부문에서 사업했다. 1946년 6월에 장개석은 고급군사회의에서 발언하다가 절대적인 비밀에 대해 말하기전에 “아래의 말을 기록하지 마시오”라고 명령했다. 심안나는 필을 놓고 장개석이 하는 말을 머리속에 기억해두었다가 휴식시간에 변소로 가는 기회에 슬그머니 중요한 정보를 기록했다. 군통국의 반간첩기구에서 한동안 결사적으로 비밀공산당원을 붙잡으려고 날뛰는 바람에 심안나는 조직과의 관계를 중단하지 않을수 없었다. 1946년 3월 17일에 대립이 비행기추락사고로 죽은후에야 심안나는 중단됐던 조직관계를 회복했다. 그 시기 그녀는 장악한 모든 정보를 직접 《신화일보》총편집이였던 오극견에게 넘겨주었고 오극견은 직접 전파로 연안에 보내주었다. 주은래는 “대립의 죽음은 공산당의 혁명을 10년 앞당겨 성공할수 있게 했다”고 말했고 장개석은 1950년 3월 17일에 있은 대립사망 4돐기념회의에서 침통한 목소리로 “대우농(우농은 대립의 자임)동지가 죽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오늘 대만으로 후퇴하지 않았을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말은 대립이 살아있었더라면 국민당심장에 잠복해있는 심안나와 같은 공산당원들을 붙잡아냈거나 그런 지하공산당원이 작용을 일으키지 못했을것이라는 뜻으로도 풀이된다. 여러 영화회사에서 심안나를 원형으로 한 영화를 찍으려고 했지만 심안나는 모두 거절했다. 텔레비죤련속극 《특수사명》에 나오는 구양하의 원형은 심안나라고 하는데 “80후”, “90후”의 녀배우들이 어찌 인간의 본성인 칠정육욕을 억제해야 했던 심안나의 고통을 알수 있겠는가? 심안나는 국민당의 심장부위에서 장기간 잠복해있으면서 심리압력이 매우 컸다. 그녀는 다른 지하공산당원들과 달리 활동반경이 매우 작았고 사면에 모두 적이였기때문에 자칫하면 신분이 드러날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뛰여난 지혜로 당이 맡겨군 임무를 출중하게 완성하고 무사하게 당의 품으로 돌아올수 있었다.     
15    주은래가 계획한 “동방제1암살사건” 댓글:  조회:6403  추천:0  2013-12-14
주은래가 계획한 “동방제1암살사건”   (번역)     호남성 상덕출신인 백흠은 1926년 3월에 황포군관학교 4기생으로 입학했다. 그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1927년에 “8.1남창봉기”에 참가했으며 1929년초에 상해에 들어가 중공중앙군위의 비서로 지하활동을 시작했다. 1929년 8월 24일 오후에 백흠의 집에서 군위회의가 열렸다. 회의에는 중공중앙정치국위원, 중앙농민위원회 서기 겸 강서성위 군위서기인 팽배, 중앙정치국후보위원이며 중앙군위위원 겸 강서성위 군위위원인 양은, 중앙군위위원 겸 강서성위 군위위원 안창이, 중앙군위위원이며 사병운동사업을 책임졌던 형사정이 참가했다. 원래 당중앙군위서기 주은래도 참가하게 되여있었지만 림시 다른 중요한 일이 있어서 오지 못했다. 그런데 회의도중에 국민당특무들이 회의장소에 뛰여들어 팽배, 양은, 안창이, 형사정을 붙잡아갔다. 사건이 발생된후 주은래와 중국공산당중앙특별행동과를 책임졌던 진갱은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 당내에 반역자가 생겼다는것을 알아냈다. 그 반역자는 바로 백흠이였다. 대혁명이 실패한후 상해는 매일 피비린 학살이 벌어졌는데 백흠은 적들의 백색공포에 온몸이 떨려났다. 그는 남경이불공장에서 공장장을 맡고있는 형을 통하여 국민당상해당지휘부정보처 처장 범쟁파를 만났다. 그는 공을 세우고 상을 타기 위해 국민당을 도와 오호(주은래의 별명), 팽배 등 공산당고위급간부를 붙잡게 하겠다고 말했다. 범쟁파는 크게 기뻐 백흠과 상의하여 중공중앙군위에서 회를 열 때 그들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웠다. 다행히도 주은래는 림시 다른 일이 있어서 군위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 바람에 변고를 면하게 되였던것이다. 주은래는 진갱에게 국민당내부에 잠복한 동지들을 통해 팽배, 양은 등 동지들이 갇힌 곳을 알아낼것과 그들을 구원할것을 지시했다. 진갱은 적들의 심장에 잠복한 공산당비밀특공요원인 양등영을 통해 팽배 등 동지들이 갇힌 곳을 알아냈고 장개석이 이미 팽배 등 동지에게 사형명령을 내린 시간이 8월 28일 아침이란것을 알아냈다. 하지만 국민당의 경계가 삼엄하여 팽배 등을 구해내지 못했다. 결국 팽배 등은 국만당반동파에게 살해당했다. 그후 팽배 등을 밀고한 반역자가 백흠이란것을 알아낸 주은래는 진갱에게 백흠을 처단하라고 지시했다. 1929년 9월말에 백흠은 갑자기 국민당특무를 데리고 상해달생병원의 가달문의사를 찾아와서 병을 보였다. 원래 백흠은 팽배를 밀고하여 살해되게 한후 중공상해지하당당조직에서 자신을 가만놔두지 않을것이라는것을 알고 온종일 극도의 공포에 처했다보니 머리가 아픈 병이 생겼던것이다. 가달문은 백흠을 진찰하고나서 말했다. “여기 잠시 앉아있으십시오. 몇가지 약이 아래층에 있으니 내가 가져오겠습니다.” 가달문은 총망히 아래층으로 내려온후 이웃집에 가서 진갱한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백흠은 혹시나 가달문이 고발하러 갔을가봐 꼬리빳빳이 줄행랑을 놓았다. 백흠이 도망친것을 본 진갱은 가달문을 보고 “백흠이 병에 걸렸으니 아무때든 또 의사를 찾아올것입니다. 그가 다시 찾아오면 먼저 방법을 대여 안심시키십시오. 우리가 수시로 찾아올것입니다”라고 지시했다. 가달문은 중공지하당원인데 본명이 가린이였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은페하기 위해 상해 위해위로에 달생병원을 꾸려놓았다. 아래층은 진료소이고 웃층은 지하당조직의 회의실이였다. 상해지하당조직에서는 매달 여기에서 회의를 열었는데 주은래도 가끔씩 여기서 외지에서 회보하러 온 지하당원들을 접견했다. 그러나 백흠은 당내에서의 지위가 높지 않고 상해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기때문에 가달문의 진실한 신분을 알지 못했다. 그는 가달문을 의술이 높은 의사로만 알고있었다. 과연 백흠은 며칠후 가달문한테 전화를 걸어왔다. 하지만 교활한 백흠은 달성병원으로 오지 않고 가달문더러 프랑스조계지의 한 호텔로 와서 자신의 병을 봐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어느 호텔인지는 가달문이 프랑스조계지에 오기만 하면 알려주는 사람이 있을것이라고 했다. 가달문은 이 정황을 즉시 진갱에게 회보했다. 진갱은 가달문더러 백흠을 치료해주면서 그의 병세가 차도가 보이되 완쾌됐다는 느낌은 가지지 못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가달문이 약속한 지점으로 가니 거기에는 백흠과 그의 안해가 있는외에 정보처 처장 범쟁파도 있었다. 백흠은 가달문이 들어서자마자 의심스러운 말투로 “그날 당신이 약을 가지러 아래층으로 내려간다고 해놓고는 왜서 밖으로 나갔습니까?”라고 물었다. 가달문은 웃으면서 “제가 아래층으로 내러가보니 한가지 약이 모자라기에 가까운 약방에 약을 사러 갔댔습니다. 그런데 돌아와보니 당신이 이미 갔더군요. 왜서 약도 가지지 않고 갔습니까?”라고 되물었다. 백흠도 그날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갔다고 거짓말을 했다. 며칠후 백흠은 두번이나 가달문을 불렀는데 모두 하비로의 한 골목에 있는 43호의 저택으로 안내했다. 백흠이 이 저택에 거처한다고 짐작한 가달문은 이 정황을 진갱한테 회보했다. 진갱은 비밀특공요원인 양등영에게 반역자를 처단할데 관한 주은래의 지시를 전달하면서 43호가 어떤 곳인가를 알아오라고 지시했다. 본명이 포군보인 양등영은 어릴 때 일본에서 공부한적이 있어서 일본어에 능했다. 그는 국민당특무기관내부에 들어온후 국민당특무조직 중통의 두목인 진립부의 신임을 얻어 국민당중앙조직부 상해주둔 특파원으로 임명되였다. 그는 상해에 파견된지 얼마 안되여 중국공산당력사에서 첫 사람으로 당원이 아닌 신분으로 공당산당의 특공요원이 되였다. 양등영은 많은 중요한 정보를 공산당에 제공해주어 긴요한 관두에 수많은 중공상해지하당 동지들을 구해주었다. 이번에 양등영은 신속하게 “43호가 바로 정보처 처장 범쟁파의 저택이며 국민당특무들이 밤낮으로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있다”는 정보를 진갱한테 전해주었다. 그후 양등영은 리유를 찾아 범쟁파의 저택으로 찾아갔다. 범쟁파는 진립부의 신임을 얻고있는 특파원을 깎듯이 모시면서 백흠을 소개해주었다. 양등영은 불안에 떨고있는 백흠을 자신이 보호해주겠다면서 몹시 관심해주는척 했다. 백흠은 정보처 처장 범쟁파의 저택에 거주하면서 양등영특파원의 “보호”를 받고있지만 팽배 등 렬사들의 피투성이 된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떠오르는가 하면 지하당원들이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정경이 자꾸 눈앞에 나타나면서 발편잠을 잘수 없었다. 그는 날마다 공포에 떨면서 범쟁파에게 남경방면에 보고하여 자신을 빠른 시일내에 외국에 피신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남경이나 광주도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국내에 있는한 지하당원들이 꼭 자신을 찾아내여 팽배의 원쑤를 갚을것이라고 생각되였다. 결국 남경방면에서는 백흠을 이딸리아에 피신시키는데 동의했다. 이는 절대기밀이였지만 범쟁파와 백흠은 “보호자”인 양등영특파원에게 알려주었다. 양등영은 이 소식을 진갱에게 전해주었고 진경은 또 주은래한테 회보하였다. 주은래는 백흠이 도망치는 시간, 부두, 출발차량 등에 대해 정확하게 알아내여 반역자를 처단하라고 지시했다. 백흠과 범쟁파는 양등영과 상의하여 출발시간을 1929년 11월 11일 밤 11시로 정하고 배표도 미리 사놓았다. 범쟁파는 승용차 2대를 저택뒤문어구에 세워두어 백흠부부가 도망칠 때 타고갈수 있도록 했다. 양등영은 만약 백흠이 차에 앉아서 뒤문을 나서게 되면 지하대원들이 그를 처단하기가 매우 힘들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의 배치가 좋기는 하지만 만약 깊은 밤중에 2대의 차량이 문어구에 주차해있으면 사람들의 의심을 자아낼것입니다. 만약 소식이 공산당한테 전해지기라도 하면…” 양등영이 일부러 이렇게 말하자 범쟁파는 “그럴수 없습니다. 이 일은 우리집의 집사도 모르고있는 일입니다”라고 말했다. 양등영은 “팽배가 살해된후 공산당은 몰래 백흠의 종적을 정찰하고있습니다. 그들은 틈만 있으면 파고드는데 만약 그들이 이곳을 의심하고있고 또 문어구에 2대의 차가 세워져있는것을 보면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라고 한술 더 떴다. 결국 범쟁파는 2대의 차량을 43호문어구에 세워두지 않고 뒤문에서 50메터 떨어진 골목에 세워두었다. 양등영은 이 모든 정황을 진갱한테 전해주었다. 진갱은 “참 잘했소”라고 양등영을 칭찬해주었다. 1929년 11월 11일 저녁에 양등영은 작별인사를 한다는 명의로 맛있는 음식을 가지고 범쟁파의 저택으로 찾아가서 백흠한테 주었다. 백흠은 자신의 죽음이 눈앞에 다가온줄도 모르고 양특파원의 “관심”에 너무도 감격하여 눈물까지 흘렸다. 양등영은 백흠이 원 계획에 따라 도주하려는것을 알고 시름을 놓고 돌아갔다. 그날밤에 반역자를 처단하러 온 지하공산당원들은 43호의 뒤문에 매복했다. 밤 11시에 43호의 뒤문이 살그머니 열리더니 한 사람이 나와서 동정을 살피더니 주위가 조용한것을 보고 손을 저어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대문이 활짝 열리면서 안에서 백흠부부, 범쟁파형제와 3명의 경호원이 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몇발자국도 못가서 “땅! 땅!”하는 총소리와 함께 하나, 둘씩 쓰러졌다. 백흠이 죽은것을 확인하자 대원들은 전투를 끝내고 철퇴했다. 이튿날에 백흠, 범쟁파의 동생과 2명의 특무가 죽고 범쟁파와 백흠의 안해가 중상을 입은것이 밝혀졌다. 이 소식은 중외의 여러 신문에 보도되였는데 어떤 신문에서는 “동방제1암살사건”이라고 하면서 경계가 삼엄한 프랑스조계지에서 이토록 주도면밀한 대암살사건이 발생된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라고 했다.     
14    60년만에 장씨성을 찾은 장개석의 쌍둥이손자 댓글:  조회:6675  추천:1  2013-12-08
60년만에 장씨성을 찾은 장개석의 쌍둥이손자   (번역)   장개석의 아들 장경국에게는 아들 다섯이 있었는데 장효엄은 지금까지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장경국의 아들이다. 하지만 장효엄과 그의 쌍둥이동생 장효자는 어릴 때부터 외삼촌의 장(章)씨성을 가지고있다가 장장 60년만에 친아버지 장경국의 장(蔣)씨성을 찾았다. 1938년에 장경국은 아버지 장개석의 파견을 받고 강서성 남창으로 갔는데 거기서 그는 사업관계로 예쁘고 령리한 장아약을 알게 되였고 얼마 안되여 서로 사랑하게 되였다. 당시는 장경국이 이미 장방량과 결혼한지 3년이 되는 때였다. 1942년 1월에 장아약은 장경국의 쌍둥이아들 장효엄과 장효자를 낳았다. 그러나 아이를 낳은지 6개월 이후에 장아약은 갑자기 사망되였다. 불행하게 어머니를 잃은 이 쌍둥이의 안전을 위해 외삼촌 장호약은 효엄과 효자를 자신의 아들로 호적에 올렸다. 그리고 아버지 장경국의 장(蔣)씨성 대신 자신의 장(章)씨성을 따르게 했고 쌍둥이의 출생 일을 1년이나 앞당겨 놓았다. 당시 성씨를 바꿔 호적에 올린데 대하여 장효엄은 이렇게 말했다. “내 생각엔 외삼촌이 이렇게 한것은 그로서의 도리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어머니의 돌연한 사망을 놓고 당시 많은 사람들은 한가지 추측을 했지요. 정치적 고려, 가족의 고려 등등 각 방면의 많은 원인이 있었겠지요. 이 때문에 나와 쌍둥이동생은 장효엄, 장효자라고 불리던 원래 이름을 숨겼고 아버지 장경국의 ‘장’씨성을 감히 쓰지 못하게 되였습니다. 그저 따모(大毛), 쑈모(小毛)라고 불렀지요.” 장아약이 사망된후 장경국은 사람들의 이목을 숨기고 불필요한 시끄러움을 피하기 위해  아이들의 외할머니더러 어린 쌍둥이를 강서성 만안에 데리고가서 키우도록 배치했다. 1942년 겨울에 쌍둥이형제는 외할머니를 따라 외삼촌 장호약이 현장으로 있는 귀주 동인현으로 갔다. 그후 외할머니는 또 쌍둥이형제를 데리고 고향 남창으로 돌아왔다. 그 당시 쌍둥이형제와 관계되는 모든 일은 장경국이 직접 결정했다. 그 때의 일을 장효엄은 이렇게 추억했다. “우리가 태여난후 아버지는 여러번이나 찾아왔는데 번마다 우리를 안아주었습니다. 이는 외할머니와 이모가 나한테 알려준 사실입니다. 그 때는 너무 어려서 기억에 없었지요. 내가 네댓살 때 외숙모가 우리 쌍둥이형제를 남경에 있는 아버지한테로 데리고간 적이 있었지요. 또 중산릉에 간것이 기억되는데 그 땐 어렸고 놀음에 탐하다나니 내가 아버지를 아빠라고 불렀던지 아니면 다르게 뭐라고 불렀던지 그리고 아버지가 우리를 어떻게 불렀던지 생각나지 않습니다.” 1949년에 장경국은 왕승장군더러 장효엄일가를 남창에서 하문으로 그리고 하문에서 대만 신죽으로 데리고가도록 배치했다. 당시 쌍둥이형제는 7살이였다. 대만 신죽에서 쌍둥이형제는 외할머니의 슬하에서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행복한 동년시절을 보냈다. 당시 쌍둥이형제는 자신의 아버지가 장경국이란것을 몰랐다. 그들은 외삼촌과 외숙모를 자신의 부모로 알았다. 장효엄은 그때의 일을 추억하며 이렇게 말했다. “당시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관심은 모두 왕승장군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왕승장군은 아버지의 위탁을 받고 신죽에 와서 우리에게 생활비를 갖다주었습니다. 왕승장군이 올때마다 우리는 육류와 해산물을 먹을수 있었고 새옷을 사서 입을수 있었습니다. 왕승장군은 늘 외할머니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군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활이 우리가 중학교에 다닐 때 돌연히 변했습니다. 왕승장군이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음력설에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초중, 고중시절을 어렵게 보냈고 대학에 다닐 때는 학비마저 낼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고중에 다닐 때의 어느날 밤에 외할머니가 우리에게 출생의 비밀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친아버지가 큰 인물인 그분이란 말을 들은 우리는 매우 놀랐습니다. 그때 사생아로 태여나 친아버지의 사랑도 못받고 자란데 대한 불평과 불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친아버지의 사랑을 갈망했지요.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자신을 설복하려고 힘썼고 이런 객관적 환경에 대해 적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외할머니는 우리에게 남에게 의거하지 말고 자기 절로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외할머니의 교육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자포자기하지 않았으면 반역의 길을 걸었을지도 모릅니다.” 사생아로 태여난 불행한 출생과 가난한 생활은 도리여 이들 쌍둥이의 학습열을 분발시켰다. 1960년에 장효엄은 대만 동오대학 외문학부에 입학했으며 졸업후 우수한 성적으로 대만지구행정부문에 들어가 사업하였다. 그러면서도 장효엄은 종래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갈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한번 만나보는것이 그의 최대의 념원이였다. 과연 그는 아버지 장경국을 만나는 기회가 있었다. 장효엄은 그때의 정경을 이렇게 추억했다. “1973년에 있는 어느 연회에 그분도 참가했습니다. 나는 멀리에서 그분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분의 눈길이 나의 시선과 언뜻 부딪쳤다가 다른 사람한테로 옮겨졌습니다. 이 장소에서는 누구나 그분한테로 가서 인사하고 악수할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한 공무원의 신분으로 아버지인 그분한테로 다가가 악수를 청할수 없었습니다. 내가 당신의 아들이라고 당당히 말할수 있을 때 그분의 손을 잡겠노라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멀찍이 피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눈길이 부딪치는 순간 그분이 이 아들을 알아보았을거라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내 주관적인 추측이긴 하지만 그분은 나의 사진을 본 인상이 있었을것입니다. 왕승장군이 우리가 커가면서 찍은 사진을 모두 그분한테 갖다드렸으니깐요.” 장효엄은 꼭 그날이 있을거라고 믿었다. 장경국을 만나서 아버지라고 한번 부를수 있는 그날이 있을거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장효엄이 정말로 장경국을 만났을 때 아버지는 더는 아들을 바라볼수 없었고 더는 아들의 목소리를 들을수 없었다. 1988년에 장경국이 사망되였을 때 쌍둥이형제 장효엄과 장효자는 영총병원의 얼음침대에 조용이 눈을 감고 누워있는 장경국대통령을 만났다. 이러한 장소, 이러한 정경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만난 쌍둥이형제는 꿇어엎드려 통곡했지만 이미 늦었다. 왜서 좀 더 일찍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단 말인가? 장경국이 사망된후 평시에 장효엄과 관계가 매우 좋던 이복(아버지는 같고 어머니가 다른)동생 장효용은 정치적 관점이 서로 다르다는 원인으로 멀어져갔다. 이 모든것은 쌍둥이형제가 장씨성을 찾는 길이 매우 어렵고 힘들다는것을 예고했다. 하지만 조상을 찾으려는 장효엄의 결심은 더욱 강렬해졌다. 그는 송미령녀사에게 도움을 청할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송미령은 6차나 거절했다. 장효엄은 부득불 증거를 찾는 방법으로 진실을 밝힐수밖에 없었다. 대만당국의 규정에 의하면 정부직무일군은 대륙에 가서 친척방문을 할수 없었다. 2000년에 모든 공직을 사직한 장효엄은 마침내 장씨성을 찾는 꿈을 이룰수 있는 기회가 온것을 알았다. 2000년 8월에 장효엄은 부인을 데리고 조국에 돌아와 58년전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외삼촌을 찾아갔다. 그의 리력서에는 아버지란에 외삼촌의 이름 장호약이 씌여져 있었는데 그가 증명을 서주었다. 그리고 그가 태여난 계림병원에서도 증명을 서주었다. 그리고 그의 리력서의 어머니란에는 외숙모의 이름 기침이 적혀져있었는데 외숙모는 미국에 가있었다. 2003년에 그는 미국을 방문했다. 2003년 9월 3일에 그는 부인과 함께 로스안젤스에 가서 외숙모 기침을 만났다. 외숙모는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의 부인이 외숙모를 보고 말했다. “외숙모, 미안해요. 당신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가서 DNA감정을 하려고 해요. 당신이 저분의 친어머니가 아니라는것을 증명하려고 그래요.” 외숙모는 흔쾌히 동의했다. 그들은 외숙모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가서 DNA감정을 거쳐 장호약과 기침이 쌍둥이의 친부모가 아니라는것을 증명했다. 그 먼저 2002년 12월 12일에 장효엄은 왕승장군의 증명으로 새로운 신분증을 얻었는데 아버지란에는 “장경국”이라 써넣었고 어머니란에는 “장아약”이라고 써넣었다. 2004년 12월 15일에 장경국의 본부인인 장방량이 사망되였고 그 석달후 장효엄은 다시 새 신분증을 얻었는데 이때 정식으로 아버지의 “장”씨 성으로 고쳤다. 2005년 4월 7일에 장효엄은 처음 장씨자제의 신분으로 장씨가족의 조상제사에 참석하였다. 1994년에 쌍둥이동생 장효자가 북경에서 뇌익혈이 돌발했을 때 장효엄은 중병에 걸린 동생을 대만에 데리고가서 치료받게 하기 위해 처음으로 비행기를 도맡아 직항할 생각을 가지게 되였다. 2002년 10월에 장효엄은 정식으로 대만상인이 비행기를 도맡아 직항할 구상을 제출했고 이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애썼다. 2003년 1월 26일에 대만화항회사의 민항려객기가 춘절기간 대북 도원공항에서 리륙하여 상해 포동공항에 착륙했다. 이는 해협량안에서 50여년래의 처음으로 되는 공중통항이였다. 2005년 1월 29일의 춘절기간에 대만상인이 비행기를 도맡아 북경, 대북 등 5개 도시에서 왕복하며 날아다녔는데 이는 1949년이래 조국대륙의 민항비행기가 처음으로 대만에 착륙한것이다. 지금 장효엄은 대만과 대륙에서 비행기가 정기적으로 날아다닐수 있게 하기 위해 힘써 노력하고있다.      
13    세계 미녀간첩들의 비밀 댓글:  조회:9784  추천:0  2013-12-08
세계 미녀간첩들의 비밀   (번역)     사람들은 미녀갑첩에 대해 영화를 통해서 얼마간 알고있지만 그녀들의 진실한 생활은 어떠했으며 그녀들의 운명은 어떠했는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있다.   로씨야 미녀간첩 안나 채프먼     로씨야의 미녀갑첩 안나 채프먼(安娜·查普曼)은 미녀갑첩의 대표적인 형상으로 떠올랐다. 18살에 간첩활동을 시작한 안나 채프먼은 세계적인 남성잡지(성인) 《맥심》2010년 11월호에 속옷차림의 성감적인 모습으로 표지모델을 장식하여 세상사람들에게 무엇이 진정한 성감미인가를 보여주었으며 최근에는 로씨야의 국가영예훈장을 받아 세계언론의 화제인물로 되였다. 1982년 2월 23일에 로씨야의 쓰딸린그라드에서 태여난 그녀는 미국의 국가정책결정에 관여하는 유력자들에게 접근해 정보를 빼내는 임무를 맡았다. 안나 채프먼은 화려한 옷으로 단장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미국에서 상류층이 즐겨찾는 오락장소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하여 유력인사들과 친분을 맺으며 이들로부터 많은 정보를 수집해왔다. 그녀는 미국에서 간첩활동을 하다가 결국 간첩용의자로 체포되였다. 이 무렵에 그녀의 라체사진이 영국과 미국의 대중잡지에 실려서 화제가 되였는데 신문에 게재된 사진들은 그녀의 전 남편인 알렉스 채프먼이 돈을 받고 판것으로 알려졌다. 그후 미국과 로씨야에서는 간첩행위에 대하여 신속히 협상을 하였다. 결과 로씨야에 수감되여있던 미국갑첩 10명과 미국에 체포되여있던 로씨야간첩 4명을 맞교환하기로 하면서 안나도 그속에 포함되여 로씨야로 돌아왔다. 안나는 “사랑과 우정이 주는 매력은 세상 어느곳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남자는 3가지류형으로 나눌수 있는데 가장 원시적인 남자들은 오직 성관계만을 원하고 조금 더 똑똑한 남자들은 사랑받기를 원하고 최고수준의 남자자들은 사랑받기만을 원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이 삶속에서 사랑을 가장 크고 아름다운 감정으로 느끼는것을 원하고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로씨야 국영텔레비죤방송국에서는 2010년 12월 31일에 안나 채프먼을 “2010년 로씨야의 최고녀성”으로 뽑았다. 그녀는 2010년 12월에 통합로씨야당 청년근위대 대의원으로 되였고 로씨야의 한 은행에서 은행장의 투자 및 혁신분야자문직을 맡아 일하고있다. 몇년전에 로씨야대통령 메드베데프는 친히 그녀에게 국가의 최고훈장을 수여하여 그녀가 세운 공헌을 긍정해주었다.   독일미녀갑첩 마타하리   간첨력사에서 가장 유명한 색정녀갑첩이라고 불리우는 마타하리(玛塔哈莉)는 제1차세계대전 당시 7층면사포라는 춤을 춰서 옹근 유럽을 미치게 만들었으며 남자들은 그녀와 하루밤을 즐기기 위해 수천프랑을 쓰는것을 아까와하지 않았다. 그녀의 간첩생활은 그녀의 춤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프랑스를 오가며 간첩활동을 한 마타하리는 1876년 8월 7일에 “마가레타 게크루디아 젤레”라는 이름으로 화란에서 출생했다. 원래 평범한 녀성이였던 그녀는 화란장교와 결혼해 두 아이를 낳았지만 결국 리혼했다. 그후 그녀는 프랑스 빠리의 물랭루즈에서 “마타하리”라는 예명을 쓰면서 무희로 활동하며 유명세를 탔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독일정보국에서 그녀에게 돈을 주고 간첩활동을 하게 했다. 그녀는 프랑스의 국방장관과 외교관, 군장교들을 대상으로 정보를 수집해 독일에 넘겼다. 그러나 중간에 프랑스정보국의 부탁을 받고 프랑스의 간첩이 되기도 했다. 프랑스정보국에서는 마타하리에게 독일군의 첩보장교를 유혹하는 임무를 주었다. 그런데 마타하리를 의심한 독일정보국에서는 그녀의 간첩신분을 고의적으로 흘렸다. 결국 프랑스정보국에서는 독일간첩인 그녀의 신분을 확인하고 그녀를 체포했다. 프랑스군은 그녀때문에 수십만명이 사망되는 손실을 입었다. 마타하리는 1917년10월 15일에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되였다.   영국 미녀간첩 낸시 웨이크   가장 용기있는 녀갑첩이라고 불리우는 낸시 웨이크(南希韦克)는 제2차세계대전 당시 검은명단의 첫 순위에 올랐다. 독일군은 그녀를 잡기 위해 500만프랑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1912년에 뉴질랜드에서 출생한 낸시 웨이크는 프랑스출신의 부유한 사업가와 결혼했다. 제2차대전에서 프랑스가 패한 뒤 영국간첩으로 많은 활약을 했다. 대호 “흰 쥐”로 불리우는 그녀는 1943년에 독일군의 1급목표물이 되여 5백만프랑의 현상금이 걸리기도 했다. 1943년에 간첩망이 배신하자 그녀는 마르세이유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체포되여 독일군에게 고문을 당하다가 처형되였다. 그후 낸시 웨이크는 툴룽에서 체포되였지만 간신히 도망쳐 나와 피레네산맥을 넘어 에스빠냐로 도주한 다음 영국으로 건너가 간첩훈련을 받았다. 1944년 4월밤에 락하산으로 프랑스 오베른에 투하된 그녀는 이곳에서 다시 련락망을 구축하고 노르망디상륙작전에 앞서 간첩활동을 벌리며 몽트루송의 독일군본부의 통신선을 끊는 등의 활약을 했다. 1944년 4월부터 프랑스가 해방되기까지 7000명의 저항세력을 이끌고 2만 2000명의 독일친위군과 전투를 벌려 1400명을 소멸하여 영웅으로 널리 알려졌다. 제2차세계대전이 결속된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나라들에서는 그녀에게 최고영예훈장을 수여했다.   영국 미녀간첩 크리스티나     1915년에 뽈스까(폴란드)의 귀족가문에서 출생한 크리스티나(克里斯蒂娜)는 어릴 때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미모가 뛰여났는데 성인이 된후 뽈스까의 미녀선발에서 최고미녀로 선발되기까지 했다. 1939년 9월에 독일군이 뽈스까를 점령하자 크리스티나는 영국으로 들어가 간첩훈련을 받은후 여려가지 신비한 신분으로 간첩활동을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미혹적인 자색을 리용하여 시시각각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비밀임무를 집행했으며 뛰여난 용기와 지혜로 제2차 세계대전기간에 매우 가치가 있는 수두룩한 정보를 얻어옴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시간의 가장 저명한 녀간첩의 하나로 되였다. 더구나 그녀는 영국수상 처칠이 가장 좋아하는 녀간첩으로 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결속된후 소설가 이안 플레밍(1908년 5월 28일에 영국에서 출생, 1964년 8월 12일에 사망)의 비밀련인으로 되였다. 이안 플레밍(伊恩弗莱明)은 크리스티나를 원형으로 007계렬소설중에 저명한 “제임스 본드의 녀자”를 창조했다.   조선미녀간첩 원정화   1974년 1월 29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태여난 원정화(元正花)는 함경북도 부령군 고무산녀자고등중학교를 다녔는데 4학년때(1988년)에는 학습성적이 우수하여 “이중영예 붉은기휘장”을 받기도 했다. 15세때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에 의해 발탁되여 공작원양성학교인 금성정치군사대학(현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교육을 받다가 1992년에 머리부상으로 소속특수부대에서 의병제대했다. 그녀는 1998년에 국가안전보위부에 소속되여 간첩활동을 시작했다가 2008년 7월 15일에 국가보안법위반으로 한국의 군경합동사법부문에 의해 체포되였다. “조선에서 넘어온 사람(脱北者)”으로 위장한 원정화는 자신의 자색으로 한국 모 부대의 장교들을 유혹하여 성관계를 유지하며 한국의 군사기밀을 빼냈다. 한국 수원지방법원은 원정화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12    풍옥상장군의 사망비밀 댓글:  조회:8732  추천:3  2013-12-01
풍옥상장군의 사망비밀   (번역)     국민혁명군 륙군1급상장(4성상장)이며 장개석의 결의형제인 풍옥상(冯玉祥)장군은 본명이 풍기선(冯基善)이고 자가 환장(焕章)이다. 1882년 11월 6일에 출생한 풍옥상은 본적이 안휘성 소현(巢县—지금의 안휘성 소호시 하각진 죽가촌)이고 기적(寄籍)이 하북성 보정시이다. 1927년 4월에 풍옥상은 국민혁명군 제2집단군 총사령을 맡았고 1935년 4월에 륙군1급상장계급을 수여받았다. 1947년부터 애국민주운동을 지지하면서 “내가 알고있는 장개석”이란 책을 써서 장개석의 전재독재통치를 폭로하였다. 풍옥상은 1905년에 류덕정(刘德贞)과 결혼하여 큰아들 풍홍국(冯洪国), 둘째아들 풍홍지(冯洪志), 큰딸 풍불능(冯弗能), 둘째딸 풍불벌(冯弗伐), 셋째딸 풍불긍(冯弗矜)을 보았다. 아주 소박하고 현모량처였던 류덕정은 1923년에 병으로 북경협화병원에서 사망되였다. 중년에 상처한 풍옥상은 신변에 다섯 미성년자녀를 돌봐줘야 할 녀인이 수요되였다. 그 시기에 적지 않은 처녀들이 모두 천군만마를 거느린 풍옥상장군에게 시집을 오려고 했다. 그중에는 륙군원수 조곤(曹锟)의 딸도 있었는데 풍옥상은 모두 거절하고 가난한 목민가정에서 출생하여 경사녀자협화대학을 졸업하고 어느 중학교에서 교원사업을 하는 리덕전(李德全)녀사와 결혼하였다. 1924년에 풍옥상과 결혼한 리덕전녀사는 첫날밤에 풍옥상을 보고 “왜서 절 좋아했나요?”하고 물었다. 풍옥상은 즉시 “난 당신이 천진하고 솔직한것이 마음에 들었소”하고 대답한후 웃으면서 “당신은 왜서 나한테 시집을 왔소?”하고 물었다. 리덕전도 웃으면서 “하느님께서 당신이 백성을 위해 일하지 않을가봐 감독하라고 저를 당신곁에 파견해보낸거예요”하고 대답했다. 결혼후 리덕전녀사는 풍옥상을 위해 전처의 아이들을 키우면서 선후로 셋째아들 풍홍달(冯洪达), 넷째딸 풍리달(冯理达), 다섯째딸 풍영달(冯颖达), 여섯째딸 풍효달(冯晓达)을 낳았다. 전국이 해방된후 리덕전녀사는 위생부 부장, 전국부녀련합회 부주석, 전국정치협상회 부주석, 국가체육위원회 부주임, 중국적십자회 회장 등 직을 력임했다. 반세기동안 부대를 거느리고 전쟁터를 누비였던 풍옥상장군은 1948년 9월 1일에 선박화재사고로 여섯째딸 풍효달(冯晓达)과 함께 사망되였는데 그의 죽음은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되고있다. 1948년 9월 5일에 구쏘련의 《홍성보》는 눈에 잘 띄우지 않은 곳에 《려객선 “승리”호가 조난당하다》는 제목으로 따스통신사의 속보뉴스를 실었다. 뉴스의 내용 이러했다. “8월초에 ‘승리’호는 뉴욕에서 출발하여 오데사로 가는 도중에 화재가 발생하여 수십명의 승객이 사망되였는데 사망자중에는 풍옥상장군과 그의 딸도 있었다. 현재 이 사건은 조사중에 있다.” 1948년 가을에 풍옥상을 사망되게 한 “승리”호화재사건은 한시기 서방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하지만 구쏘련신문은 이 사건을 감추고 루설하지 않았다. 게다가 풍옥상이 1948년 가을에 구쏘련으로 가게 된것은 절대 우연한 일이 아니였다. 1948년 7월에 중공중앙의 초청을 받은 풍옥상은 귀국하여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기획사업에 참가할 준비를 하고있었다. 만약 귀국도중에 불행한 사고가 발생되지 않았다면 풍옥상은 새 중국정부에서 중요한 직무를 맡았을것이다. 그의 뜻밖의 사망은 지금까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여서 사람들은 여러가지 추측을 하고있다. 1948년 7월 31일에 구쏘련의 려객선 “승리”호는 뉴욕에서 출발하여 오데사로 되돌아오고있었다. 풍옥상과 그의 가족도 구쏘련을 통해 중국으로 오려고 그 배에 올랐다. 배가 바다에서 며칠동안 달렸을 때 선장은 “가는 길에 애급의 알렉산드리아항에 들러서 애급으로부터 귀국하는 2000여명의 아르메니야인을 그루지야의 바투미(巴统)에 실어다주라”는 흑해항운국의 전보를 받았다. 8월말에 “승리”호는 바투미항에 입항했다. 9월 1일 점심에 오데사에 자리잡고있는 흑해항운국에서는 “승리”호가 9월 2일 새벽 2시에 오데사항에 도착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후 “승리”호의 무선전통신이 중단되였지만 누구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9월 2일 아침이 되여서야 흑해항운국에서는 무선전이 중단된 원인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흑해항운국에서는 바다에 나가 있는 선박들과 연도의 항구들에서 “승리”호의 행적에 대해 알아보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누구도 “승리”호와 련계하지 못했고 구조신호도 받지 못했다. 불길한 예감이 든 흑해항운국에서는 급히 흑해함대에 구원을 청했다. 그날 저녁 9시에 한 비행사가 공중에서 “얄따(雅尔塔) 동남 70해리되는 곳에서 이미 불에 탄 ‘승리’호를 발견했는데 선박주위에는 사람을 가득 태운 5척의 작은 삼판선(三板船)이 있다”고 보고했다. “승리”호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구쏘련정부에서 나중에 밝힌데 의하면 9월 1일 13시에 “승리”호의 영화방영원대리이며 무선전기술자인 꼬바렌꼬는 배가 종점에 거의 도착한것을 보고 영화필림을 거두어들이려고 했다. 미리 거두어야 부두에 도착한후 영화필림을 문화기지에 돌려주기 편리했기때문이다. 그리하여 꼬바렌꼬는 한명의 일군을 불러 영화를 다 돌린후 필림을 감는 일을 도와달라고 했다. 손으로 필림을 감는 도중에 기계부속품의 마찰로 불꽃이 일어나 필림에 불이 붙었다. 불꽃은 또 옆에 놓았던 필림에 옮겨붙으면서 화염은 몇초사이에 방안을 활활 태우면서 불길은 사방으로 확산되였다. 이 화재로 배에 탔던 40명의 승객이 사망되였다. 9월 3일에 구조일군들이 배우에 올랐을 때 불은 이미 기본상 꺼져있었다. 9월 5일에 “승리”호가 오데사항에 들어서서 구급된 승객들을 다른 배에 전이시켰다. 인위적인 사고인가? 조사일군들은 화재사고를 조사하면서 방화범이 고의적으로 불을 질렀을 가능성이 있다고 제출했다. 조사일군들은 알렉산드리아항구에서 대량의 승객들이 배에 올랐는데 그속에 일부 파괴분자들이 혼입하여 있다가 방화를 했을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러한 가설을 내놓은데는 이번에 귀국인원들이 배에 오른후 배의 여러곳에서 일종의 광석으로 보이는 덩어리형태의 물체를 발견했기때문이다. 이런 물체는 연소할 때 파란불꽃을 내보내면서 매우 높은 온도에 도달된다.  구쏘련의 국가안전국의 프리아신도 그 배에 탔는데 그는 직업적인 습관으로 그 물체를 들고 상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 자신이 화재로 사망되였기에 조사기관에서는 인위적인 파괴라는 방향으로 계속 조사하지 않았던것이다. 사법부문에서는 반복적인 연구를 거쳐 최종적으로 화재의 주요원인은 영화필림으로 인한것이라고 인정했다. 당시 세계영화업계에서는 보편적으로 니트로셀룰로오스(硝化纤维)필림을 사용했는데 이 필림은 쉽게 연소하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이런 필림을 40도까지 가열하면 화약처럼 맹렬하게 타오르게 된다. 그번 화재로 구쏘련정부는 피동에 처했다. 법정에서는 화재의 직접적인 책임자에게 중한 판결을 내렸다. 무슨 원인때문인지 법원에서는 조사과정에 한가지 사실을 홀시했다. “승리”호가 뉴욕에서 출발하기전에 일련의 기괴한 일이 발생되였다. “승리”호가 곧 항구를 떠나기전에 뉴욕정부에서는 “승리”호를 전부 소독하라는 이상한 결정을 내렸다. 비록 선장이 강렬하게 항의했지만 전부의 선원들이 핍박에 의해 려관에서 이틀동안 주숙했다. 미국인들은 “승리”호에 무리하게 허락없이 올랐는데 그들의 행위를 아무도 감독하지 않았다. 그외 미국을 떠나려고 준비하고있던 한 구쏘련외교관부부가 다투었는데 부인이 귀국하지 않겠다고 고함치면서 집요하게 창밖으로 도망치려고 란리법석을 떨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미국인들이 즉시 부인을 구원하여 엄밀하게 보호했다. 그런데 그 부인의 짐은 이미 배에 실렸는데 이상하게도 그 위치가 바로 화재가 발생한 배의 가운데에 놓여있었던것이다. 그보다 더 이상한것은 “승리”호에서 실제로 화재가 발생되기전에 미국의 라지오방송국에서 사전에 화재소식을 방송한것이다. 쓰딸린은 흑해에서 휴가를 보내고있을 때 풍옥상이 조난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구쏘련 부장회의 부주석 말렌꼬브는 쓰딸린에게 보낸 전보에서 “사실이 확실한바 주석님의 예측이 옳았습니다. 아르메니야난민중에 미국의 정보원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불을 지른것입니다”라고 말했다. 1945년 12월에 구쏘련 최고쏘베트주석단에서는 해외에 나간 아르메니야난민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 해외에서 쏘련으로 돌려보낸 아르메니야인들은 10만명이 넘었다. 그러나 “승리”호화재사건이 발생된후 쏘련부장회의에서 1948년 9월 14일에 출항금지령을 내린후 아르메니야인들의 귀향조류는 철저히 끊기고말았다. 화재사고가 났던 “승리”호는 수리하여 복구된후 해내외의 배길로 계속 달렸다. 그러다가 1977년에 “승리”호라는 이름은 선대(船队)의 명부에서 삭제되였다.       
11    중국에서 원자탄을 개발해야 했던 필요성과 중요성 댓글:  조회:6327  추천:1  2013-12-01
중국에서 원자탄을 개발해야 했던 필요성과 중요성   (번역)       1945년 8월에 미국이 일본에 원자탄을 투하한지 며칠이 지난후 모택동은 연안의 간부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원자탄이 전쟁을 해결할수 있는가? 없다! 원자탄은 일본을 투항하게 할수 없다. 원자탄만 있고 인민의 투쟁이 없다면 원자탄은 빈것에 불과하다.” 1946년 8월 6일에 연안의 대추나무아래에서 미국 녀기자 안나 루이스 스트롱(安娜 路易斯 斯特朗)의 취재를 접수할 때 모택동은 “원자탄은 미국반동파들이 사람을 놀래우기 위해 사용한 한마리의 종이범으로서 보기에는 두려운것 같지만 실상은 두려울것이 없다”고 말했다.   좁쌀에 보총으로 미국의 신식무기로 무장한 장개석비적(蒋匪)을 물리친 모택동은 인민전쟁만 알고 원자탄이 한 나라의 군사력에 얼마나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지에 대해 모르고있었던것이다. 그렇게 원자탄을 얕보던 모택동은 원자탄의 위협에 직면하자 원자탄에 대해 중시하지 않을수 없었다. 1950년 10월에 항미원조에 나간 중국인민지원군은 군사장비가 렬세한 조건에서 영감하게 싸워 승승장구했다. 미국은 전쟁형세를 돌려세우기 위해 여러번이나 중국에 원자탄을 떨어뜨리려고 시도했다.   1950년 11월 30일에 련합통신사는 “해리 S 트루먼(哈里·S·杜鲁门)대통령은 ‘만약 필요하다면 원자탄을 사용해 중국공산당을 대처하려고 한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1952년의 대통령선거에서 제34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德怀特·艾森豪威尔)는 그해 12월에 한국을 방문했고 이듬해초에 핵탄두를 휴대한 미사일을 비밀리에 일본 오끼나와섬에 운반하여 중국에 핵미사일을 발사할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1955년에 중국인민해방군 륙, 해, 공 3군이 련합작전을 하여 일강산도(一江山岛)와 대진도(大陈岛)를 해방했을 때 미국국회는 정식으로 대통령에게 중국에 핵무기를 사용할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이에 따라 미군은 원자탄으로 중국동남연해지구를 공격할 여러가지 방안을 제정했다.   미국이 부단히 핵무기로 중국을 위협하자 모택동은 무엇때문에 미국이 걸핏하면 핵무기로 중국을 위협하는지, 무엇때문에 감히 그렇게 할수 있는지에 대해 완전히 깨닫게 되였다. 그것은 중국에 원자탄이 없었기때문이란것을 알게 된것이다. 모택동은 시간이 흐르면서 국제형세가 변화되고있는 현실에 따라 원자탄을 전략상에서 경시하던데로부터 점차 전술상에서 중시하게 되였다.   1954년 가을에 중국에서 최초로 우라늄광(铀矿)을 발견했다. 1955년 1월 15일에 모택동은 중남해에서 열린 중공중앙서기처 확대회의에서 리사광(李四光), 전삼강(钱三强) 등의 회보를 들었다. 과학자들은 우라늄광석표본과 방사성을 탐측한 가이거뮐러계수기(盖革计数器)를 회의장소에 가지고와서 현장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는 시범을 해보였다. 모택동은 매우 기뻐서 말했다. “우리 나라에서 지금 우라늄광을 알게 되였으니 진일보 탐사한다면 꼭 더욱 많은 우라늄을 찾을수 있을것입니다. 새 중국이 창건된 이래 과학연구에서 일정한 기초가 있고 일정한 조건도 창조하였습니다. 지난 몇해동안 기타의 사정이 많아서 이 일을 틀어쥘 겨를이 없었는데 지금 때가 되였으니 꼭 이 일을 틀어쥐여야 합니다. 참답게 틀어쥐기만 하면 꼭 잘해낼수 있을것입니다.”   모택동은 또 “우리는 사람이 있고 자원이 있으니 어떠한 기적이든지 모두 창조할수 있을것입니다”고 강조했다. 이는 중국핵공업에서 중대한 력사적의의가 있는 희의였다. 이 회의에서 중국이 핵공업을 발전시킬 전략결책을 제정하였는데 이는 핵공업건설이 시작되였음을 표시한것이다. 1956년 4월 25일에 모택동은 중앙정치국확대회의에서 “우리에게는 원자탄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세계에서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으려면 꼭 원자탄이 있어야 합니다”고 말했다.   1958년에 모택동은 “다들 원자탄은 대단한 놈이여서 그놈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고있는데 그럼 좋습니다. 우리도 원자탄을 만듭시다. 나는 10년동안 공력을 들인다면 완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라고 말했다. 중국의 핵공업은 전면적으로 가동되였다. 이때로부터 중국은 원자탄을 정식으로 연구제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술문제에서 난제에 부딪쳤다.   1956년에 모택동은 중국을 방문한 흐루쑈브를 보고 쏘련에서 핵무기를 제조하는 방면에서 중국을 도와달라고 제출했다. 1956년 10월 3일에 중쏘 량국은 정상급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모택동은 흐루쑈브에게 “우리는 원자탄, 핵무기에 대해 호기심을 느끼고있는데 오늘 당신과 상의하려고 합니다. 당신들이 이 방면에서 우리를 도와주기를 바랍니다”고 요구했다.   흐루쑈브는 번마다 “원자탄을 제조하려면 매우 많은 돈을 써야 한다”면서 “중국은 원자탄이 없어도 쏘련이란 핵보호산(核保护伞)이 있으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핵무기는 시간이 오래되면 변질하여 다시 생산해야 되기에 중국에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동의하지 않았다. 1956년에 국제형세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구쏘련을 아버지처럼 의지하고 따르던 뽈스까와 웽그리아가 선후로 반기를 들고 더는 구쏘련의 지휘를 받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흐루쑈브는 중국의 지지가 매우 절박하게 수요되였다. 하여 원래의 태도를 개변하여 기술문제에서 중국을 도와주겠다고 대답했다. 중쏘 량국은 이 문제 대해 여러번이나 담판했다.   1957년 10월에 중국과 구쏘련은 국방신기술협정을 체결했다. 그 협의의 주요내용은 쏘련이 중국을 도와 원자탄을 연구제작한다는것이였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쏘련은 중국의 원자탄연구제조를 도와주는데 동의한다. 쏘련은 중국에 원자탄의 “교수모형과 설계도면기술자료를 제공한다. 쏘련은 중국에 원자탄, 미사일을 포함한 부분적인 첨단무기제조기술을 제공하는데 동의한다. 쏘련은 해당전문가를 중국에 파견하여 원자탄연구제조사업을 도와준다.”   하지만 좋은 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구쏘련에서 중국원자탄연구제작을 원조할데 관한 협의는 1년남짓한 시간밖에 실행되지 못했다. 중쏘량당이 정치분규가 생기면서 량국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였다. 흐루쑈브는 미국에 잘 보이기 위해 미국방문직전(1959년)에 중공중앙에 편지 한통을 보내여 원래의 협의를 개변했다. 그는 편지에서 “쏘련은 지금 미국, 영국과 핵무기실험금지협의에 대한 담판을 하고있다”면서 “담판이 영향을 받는것을 피면하기 위해 쏘련정부는 2년내 중국에 원자탄의 교수모형과 설계도면자료를 제공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썼다.   흐루쑈브는 미국의 캠프데이비드에서 돌아온후 소위 캠프데이비드정신을 선양하면서 1960년 7월 16일에 협의를 완전히 뒤엎었다. 구쏘련정부는 정식으로 중국정부에 각서를 제출하여 중국에 파견했던 전문가를 전부 데려가겠다고 통지했다. 중국정부에서 만류했지만 그때의 흐루쑈브는 태도가 매우 견결했다. 1960년 8월 23일에 중국핵공업계통에서 사업하던 200여명의 구쏘련전문가들은 전부 귀국했으며 중요한 설계도면자료도 전부 가지고갔다. 특히 엄중한것은 쏘련이 원래 중국의 핵공장건설을 도와주던 공사가 절반 건설되였거나 완전히 건설되지 못한 정황에서 쏘련이 중국에 제공하기로한 설비를 중지해버린것이였다.   이처럼 심각한 압력을 받은 모택동은 시국을 자세히 연구하고 발전추세를 정확하게 추측한후 말했다. “우리에게는 오직 한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자체로 손을 쓰는겁니다. 자력갱생하여 원자탄을 만들겠다는 구호를 내걸어야 합니다. 첨단기술을 장악하겠다는 결심을 해야 합니다. 흐루쑈브가 우리한테 첨단기술을 주지 않겠다고 하는데 차라리 잘 됐습니다. 만약 그가 그 기술을 주었더라면 우리는 그 빚을 갚기가 매우 어려웠을겁니다.” 핵공업전선의 광대한 종업원들은 압력을 이겨내고 열심히 분발하여 선후로 수천개의 기술난제를 극복하면서 하나 또 하나의 성과를 취득했다.   쉬임없이 난관을 극복하면서 1963년 3월에 첫 원자탄의 리론설계방안을 완성했고 11월 29일에 우라늄공장에서 첫 합격제품을 생산했으며 12월 24일에 동시집광산생중자실험에 성공했다. 1964년 1월 14일에 중국은 처음으로 합격된 농축우라늄을 생산했고 4월에 원자탄에 사용할 부속품을 가공해냈다. 1964년 6월 6일에 연구기지에서 준원자탄폭발실험에서 리상적인 효과를 거두었다. 1964년 10월 16일에 중국은 첫 원자탄폭발실험에 성공한 휘황한 성과를 거두었다. 중국에 원자탄이 있게 되자 미국은 더는 원자탄으로 중국을 위협하지 못했다.      
10    명령을 받고 비밀리에 상해로 들어간 소진화 (2) 댓글:  조회:5573  추천:2  2013-11-24
  명령을 받고 비밀리에 상해로 들어간 소진화 (2)   (번역)     중앙에서 일거에 “4인방”을 분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장기적으로 “4인방”과 그 잔여세력들의 압제를 받았던 시민들이 10월 14일 오전부터 “4인방”을 성토한다는 대자보를 거리와 골목에 내다붙였다. 10월 15일부터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거리에 나와 붉은기와 표어를 들고 시위하면서 당중앙에서 “4인방”에 대해 과단한 조치를 취한것을 열렬히 옹호했으며 “4인방”과 그 잔여세력의 하늘에 사무치는 죄행을 철저하게 청산할것을 요구했다. 시위물결은 갈수록 높아졌는데 이는 상해의 민심이 어느쪽으로 향하는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형세는 의연히 매우 준엄했다. 비록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시위를 벌려 상해시당위에 강대한 정치압력을 가했지만 문화대혁명시기에 나타난 일부 반란파두목들이 련계를 가지고 재기를 시도하고있었다. 깡패들도 시위대오에 끼여들어 때리고 빼앗으며 혼란을 조성하고있었다. 이런 현상은 “4인방”잔여세력을 적발하는 투쟁방향을 벗어나게 할수 있었다. 더구나 상해의 당정대권을 장악하고있는 마천수, 서경현, 왕수진은 이번 기회를 빌어 중앙에 압력을 가했다. 그들은 10월 15일과 19일에 각각 중앙에 긴급전화를 걸어 강경한 어조로 군중들의 자발적인 시위때문에 시당위기구가 이미 마비상태에 처했다고 하면서 견결한 조치를 취하여 진압하겠다고 표시했다. 그들은 무력으로 시위군중을 진압하여 시민과 시민들의 싸움을 야기시키는것으로 “4인방”잔여세력을 적발하는 투쟁방향을 뒤바꿔놓으려고 시도했다. 중앙에서는 마천수, 서경현, 왕수진이 걸어온 두번의 전화기록을 당시 출발을 기다리고있던 소진화에게 전해주었다. 그 전화기록을 보고난 소진화는 한마디로 정곡을 찌르면서 “이는 중앙에 난제를 제출하여 압력을 가하므써 “합법”적으로 시위대오를 진압하여 시선을 돌리려는 음모입니다”라고 말했다.  소진화, 예지복, 팽충은 상의한후 중앙판공청에 “마, 서, 왕에게 반드시 중앙의 통지회의정신과 중앙의 통일배치에 따라 “4인방”을 적발하는 활동을 조직해야 하고 시민들끼리의 싸움을 일으켜서는 안되며 무력으로 시위군중을 진압해서는 안된다”고 명령할것을 건의했다. 소진화의 건의에 따라 중앙에서 엄중하게 경고했기에 마, 서, 왕이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10월 20일 자정이 되여서야 중앙판공청에서는 정식으로 마천수, 서경현, 왕수진에게 소진화, 예지복, 팽충이 령도하는 중앙사업소조가 이미 상해에 도착했다고 통지했다. 그때에야 마천수는 깨달았다. (상해경비처에서 “날이 어두워질 무렵에 북경에서 전용비행기 한대가 날아왔는데 해군차량부대가 손님들을 영접해갔습니다”라고 보고했는데 원래는 중앙사업소조가 상해에 온거였구나!) 중앙사업소조가 상해에 도착했다는 통지는 마, 서, 왕 세 사람에게 청천병력이였다. 10월 21일 새벽 3시에 소진화는 마천수와 단독으로 담화했다. 마천수는 꿍꿍이를 품고 해군기지로 왔다. 소진화, 예지복, 팽충이 엄숙한 표정으로 회의실에 앉아있는것을 본 그는 일부러 친절한척 하면서 말했다. “당신들이 어찌 이곳에 주숙하고있습니까? 금강호텔이거나 흥국로에 방이 비여있어 주숙할수 있고 조건도 여기보다 더 좋은데 말입니다.” 소진화는 그런 말은 못들은척 하고 중앙의 결정을 선포했다. “당중앙에서는 상해의 정황과 당신들의 요구에 따라 상해의 정세를 안정시키고 ‘4인방’을 적발하고 비판하는 투쟁을 잘하기 위해 중앙사업소조를 상해에 파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중앙사업소조는 우리 세 사람이 령도합니다. 지금 당신이 북경에서 돌아온후 어떻게 중앙정신을 관찰집행했는가 하는 정황에 대해 사실대로 회보하십시오.” 마천수는 미처 손쓸 새가 없어 더듬거리며 말했다. “북경에서 돌아온후 중앙통지회의정신을 상무위원외와 구현국(区县局)간부들에게 전달해습니다. 그리고 문건으로 인쇄하여 기층에 발급했는데 지금 군중들이 일어나서 시당위가 충격을 받아 우리는 국면을 통제할수 없게 되고 사업을 제대로 할수 없게 되였습니다. 오늘 오후에 있은 100만명이 참가한 적발비판대회에 우리도 갔는데 그들이 우리더러 발언을 하지 못하게 하여 매우 난처하게 되였습니다. 이제 중앙사업소조가 왔으니 우리는 마음을 놓게 되였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의 령도에 복종하겠습니다.” 소진화는 정중하게 마천수를 보고 말했다. “우리는 중앙사업소조입니다. 주요하게 정황을 료해하러 왔습니다. 상해시당위의 정상적인 사업은 계속 당신들이 책임지십시오. ‘4인방’의 문제에서 당신들은 깊이 빠졌는데 정신을 바짝 차리고 립공속죄하기를 바랍니다. 상해의 문제는 계속 당신들이 책임지십시오!” 10월 21일 저녁 7시에 같은 회의실에서 소진화, 예지복, 팽충은 또 마, 서, 왕 세 사람과 담화를 나누었다. 그번 담화내용은 상해에서 어떻게 중공중앙의 정신을 관철하여 “4인방”을 분쇄한 위대한 승리를 경축하고 “4인방”의 반당죄행을 성토하겠가 하는것이였다. 소진화는 마, 서, 왕에게 “10월 24일에 북경에서는 100만명이 참가한 대회를 열게 되고 전국각지에서도 모두 이런 대회를 열게 됩니다. “4인방”이 상해에서 위해를 끼쳤는데 이런 대회를 여는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대회를 잘 조직하는것은 당신들에게 립장을 돌릴수 있는 기회와 고험이 될것입니다. 상해시당위가 “4인방”의 문제에서 엄중한 착오를 범한데 대해 적발하고 반성해야 하겠지만 먼저 대회를 잘 열어야 합니다. 동시에 소동작을 하지 말고 그 무슨 ‘합법적투쟁”이란걸 하지 말것을 당신들에게 경고합니다”하고 말했다. 뜻밖의 일을 방지하기 위해 소진화는 남경군구 정위 료한생과 남경군구 부참모장 장정을 상해에 청해놓고 말했다. “‘4인방’잔여세력이 사악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있고 총기를 다 거두어들이지 못했기에 그들이 무장폭동을 일으킬 위험이 의연히 존재합니다. 남경군구에서 계속 경비를 강화하기를 바랍니다. 특히 강소성과 절강성의 부대는 꼭 고도의 경계를 유지하고있기를 바랍니다. 해군은 해상경계를 책임져야 합니다. 경비구와 무장폭동활동과 관련이 있는 사람은 즉시 소환시켜야 합니다. 동시에 남경군구에서 인원을 뽑아 중앙사업소조를 협조해 상해의 안전경비사업을 잘해야 합니다.” 료한생은 장정을 상해에 남겨놓고 일부 인원을 뽑아 상해경비구에 진주하게 했고 상해에 주둔한 부대에 전쟁준비상태에 들어갈것을 명령했다. 소진화는 료한생을 보고 “상해경비구의 몇몇 사람에게 어떠한 비법활동이든 즉시 중시하라고 경고해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이러한 조치를 대였기에 상해의 “4인방”잔여세력은 경거망동하지 못했다. 1976년 10월 26일에 중앙에서는 상해시당위를 개조할 결정을 내렸다. 10월 27일에 소진화, 예지복, 팽충이 상해 구국현간부대회를 소집했다. 이는 그들이 두번째로 상해시의 광대한 지도간부들앞에 모습을 드러낸것이다. 회장의 기분은 열렬하고도 긴장했다. 소진화는 먼저 중앙에서 상해시당위와 시혁명위원회를 개조할데 관한 결정을 전달하고 장춘교, 요문원, 왕홍문의 령도권을  박탈한다고 선포했다. 적을 생포할 때에는 그 두목부터 생포하라는 말이 있다. 소진화는 중앙에서 제정한 “문제를 해결하되 정세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방침을 실시하기 위해 “4인방”이 남긴 우환을 철저하게 제거하려고 결심했다. 소진화, 예지복, 팽충은 반복적으로 연구한 끝에 원 상해시당위 상무위원회에서부터 착수하여 상해에 있는 “4인방”의 잔여세력과 죄행을 철저하게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소진화, 예지복, 팽충은 10월 27일부터 며칠동안 금강호텔에서 상해시당위 상무위원회 회의를 열고 원 상해시당위서기 마천수, 서경현(徐景贤), 왕수진(王秀珍)과 상해시당위 상무위원 장경표, 풍국주는 반드시 회의에 참석하여 무장폭동을 일으키려고 했던 죄행을 털어놓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마천수, 서경현, 왕수진은 무장폭동을 일으키려고 했던 죄가 크다는것을 알고 책임을 서로 떠넘기도 하고 숨길만한것은 숨기려고 하면서 완강하게 저항했다. 소진화는 무장폭동에 참가하려고 했던 민분이 큰 원 상해시당위 상무위원 7명을 상해경비구에 맡겨 감시를 받으면서 격리심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죄행을 털어놓았으나 죄가 큰 진아대(陈阿大) 등 6명을 원 단위에 보내 감시를 받게 하면서 전문심사를 실시했다. 상해에 숨어있는 “4인방”잔당의 핵심세력은 철저하게 무너졌다. 심입되는 조사를 거쳐 중앙사업소조에서는 마천수, 서경현, 왕수진 등이 무장폭동을 일으키려고 했던 죄증을 장악했으며 “4인방”잔여세력이 10월 8일부터 20일까지 꾸며왔던 일련의 죄악적활동을 밝혀냈다.     
9    명령을 받고 비밀리에 상해로 들어간 소진화 (1) 댓글:  조회:6626  추천:1  2013-11-24
  명령을 받고 비밀리에 상해로 들어간 소진화 (1)   (번역)   “4인방”이 체포된후 상해의 “4인방”여당들은 무장폭동을 일으키려고 시도했다. “4인방”의 잔여세력을 제거하고 상해의 “제2무장”을 해제하여 전국을 안정시키는것은 당중앙에서 반드시 착수해야 할 급선무였다. 중앙정치국 후보위원이며 중앙군사위원회 상무위원회의 해군상장인 소진화(苏振华)는 위험한 시기에 명령을 받고 부하들을 거느리고 상해로 갔다. “4인방”을 분쇄한 이튿날인 1976년 10월 7월에 중앙정치국에서는 상해시, 강소성, 산동성, 호북성과 남경군구, 무한군구, 제남군구의 책임자들이 참가한 첫번째 통지회의를 열었다. 상해시에서는 시당위서기(당시에는 제1서기가 없었음)이며 시혁명위원회 부주임인 마천수(马天水)와 시당위서기이며 상해경비구 사령인 주순린  (周纯麟)이 참석했다. 그번 회의에 출석한 중앙령도들로는 화국봉(华国锋), 엽검영(叶剑英), 리선념(李先念), 왕동흥(汪东兴), 진석련(陈锡联), 소진화(苏振华), 예지복(倪志福)이였다. 다른 사람들은 “4인방”을 제거할데 관한 중앙의 과단한 조치를 옹호했지만 마천수만이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진듯 놀라면서 큰소리로 “4인방”을 위해 변호했다. 그리고 상해로 돌아간후 분에 못이겨 중앙에 “돌연습격을 한다”느니 “권력쟁탈을 한다”느니 뭐니 하는 글을 올려 “4인방”을 제거하는데 대해 강렬한 불만을 표시했다.   상해의 반응을 분명하게 파악하기 위해 중앙에서는 10월 8일에 소진화, 예지복을 파견하여 주돈린을 만나보게 했다. 주돈린은 중앙의 결정을 견결히 옹호한다고 태도표시를 하면서 마천수가 상해로 돌아간후의 반상적인 행위에 대해 적발했다. 그후 소진화, 예지복, 주돈린은 마천수를 찾아가서 담화하면서 마천수의 거부태도에 대해 엄숙하게 비판하고 경고했다. 소진화는 주돈린의 건의를 받아들여 상해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긴급조치로 “4인방”잔여세력인 서경현과 왕수진을 북경에 불러들일것을 중앙에 요청했다.  이는 산을 울려 호랑이를 놀라게 하는 방법으로 상해의 “4인방”잔여세력을 당황하게 하므로써 수시로 가능하게 발생될수 있는 반혁명무장폭동을 피면하기 위해서였다. “4인방”이 무장폭동을 일으키려고 한다는것은 일부러 사람을 놀라고 두렵게 하는 말이 아니였다. 1975년 8월에 “4인방”의 핵심성원인 왕홍문은 상해에서 여러번이나 “수정주의가 정권을 잡는것을 경계해야 한다”, “유격전을 할 준비를 해야 한다”, “도시내에서의 지상전투를 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공개적으로 직접 그들의 령도를 받는 “상해시민병지휘부”를 건립했다. 왕홍문은 여버번이나 민병장비를 시찰했을뿐만아니라 민병들을 거느리고 군사훈련을 했다. 왕홍문은 친신인 왕수진(王秀珍), 진아대(陈阿大), 엽창명(叶昌明), 황금해(黄金海) 등을 민병두목으로 임명했다. 이렇게 민병은 명실상부한 해방군이외의 독립된 왕홍문의 “제2무장세력”으로 되였다. 왕홍문은 기고만장해 거리낌없이 “상해민병은 나와 장춘교 두사람이 조직한것이기에 다른 사람의 지휘를 듣지 않는다”고 떠들어댔다. 왕홍문과 장춘교는 지방경비 3000여만원을 함부로 사용하여 사사로이 대량의 무기를 제조했다. 모택동의 병세가 위급하다는 통지가 내려진후의 이튿날에 그들은 즉시 마천수에게 통지하여 창고에 있는 몇십만자루의 총을 기층민병들의 손에 쥐여주어 수시로 명령을 기다리게 했다. 모택동이 사망된후 장춘교는 사람을 상해에 파견하여 마천수, 서경현, 왕수진에게 “상해에 큰 시련이 닥쳐올것이니 큰 싸움을 할 준비를 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상해에서 무장폭동이 일어나는것을 피면하고 상해의 “4인방”잔여세력을 철저하게 분쇄하기 위해 중앙정치국에서는 즉시 중앙사업소조를 파견하여 상해의 중요한 부문을 접수하여 관할하게 하기로 결정했다. 누가 이 중임을 맡을수 있을가? 엽검영은 소진화를 추천했다. “군대와 지방을 능히 제압할수 있는 사람을 보내야 합니다. 내 생각에는 소진화가 가는것이 합당하다고 봅니다. 그는 ‘4인방’에게 처참한 피해를 보았고 ‘4인방’을 분쇄하는 긴급한 시각에 중요한 작용을 하였을뿐만아니라 전쟁년대에 작전을 지휘한 풍부한 경험도 있습니다. 그는 정치사업에도 여러해동안 종사했고 조직사업에도 익숙하며 정책수준도 높습니다. 그는 건국초기에 귀주성 당위서기직을 맡은적이 있고 여러번이나 중앙과 모주석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상해에 해군동해함대기지가 있기에 사업하기도 편리한 조건이 있습니다. 때문에 나는 소진화가 상해에 가는것이 제일 합당하다고 봅니다.” 엽검영의 제의는 기타 정치국위원들의 일치한 찬성을 받았다. 진석련상장은 엽검영의 제명에 찬동하면서 “소진화상장은 군사위원회 상무위원이으로서 군사위원회의 일상사업을 매우 유력하게 처리했습니다. 1974년에 각 군구령도를 조정할 때 그는 매우 협조를 잘하여 중요한 작용을 했습니다. 이런 경력은 모두 그가 남경군구, 해군, 공군의 로동지들의 협조를 받는데 매우 편리할것입니다. 그는 꼭 그들의 지지를 받을것입니다”고 말했다. 리선념도 이어 “엽검영원수의 의견은 심사숙고한것이기에 상해를 안정시키고 전국정세를 안정시키는데 중요한 의의가 있습니다. 소진화동지는 ‘4인방’과의 투쟁에서 매우 견결했습니다. 모주석께서는 해군관리는 소진화에게 의거해야 한다고 말씀한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4인방’잔여세력을 해결하는 문제도 소진화동지가 이끌어야 핵심령도작용을 발휘할수 있습니다”고 말했다. 화국봉도 “‘4인방’은 왕홍문을 ‘로동계급의 령수’라고 했는데 왕홍문이 무슨 ‘령수’란 말입니까? 우리 이번에 진정한 로동계급의 령수를 파견합시다. 내 생각에는 소진화동지외에 예지복동지도 함께 보내는게 좋다고 봅니다. 예지복동지는 상해사람이고 “예지복드릴비트(钻头)를 발명한 저명한 전국로동모범으로서 장기간 공회사업을 한 경험이 있고 로동자들의 정황을 가장 잘 알고있으며 로동자들에게 매우 높은 위망이 있습니다. 때문에 상해로동자들에게 사상사업을 할 때 가장 설득력이 있을것입니다”고 말했다. 화국봉의 제의는 기타 정치국위원들의 찬동을 받았다. 화국봉은 이어 “상해와 강소성의 모순은 줄곧 매우 첨예했습니다. 상해와 강소성은 각 방면에서 가를수 없는 관계가 있기때문에 강소성에서 한명의 동지를 파견하여 보내는것이 좋겠습니다”하고말했다. 리선념은 화국봉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일처리에 온당하면서도 강소성의 정치업적이 돌출한 팽충(彭冲)을 추천했다. 팽충은 당시 강소성당위 서기, 강소성혁명위원회 주임, 남경군구 제2정치위원, 상해경비구 제1정치위원 등 직을 맡고있었기에 그가 가서 상해를 접수관리하면 상해와 강소성의 모순을 해결하고 상해에 경제문제가 나타났을 때 강소성의 지원과 도움을 받는데 가장 편리했다. 이렇게 되여 상해에 가서 당정대권을 접수관리하게 될 소진화, 예지복, 팽충을 령도핵심으로 하는 중앙사업소조가 성립되였다. 10월 20일 오전에 소진화는 인민대회당 북경청에서 중앙사업소조 제1차회의를 소집하고 간단명료하게 중앙의 정신을 전달했다. “‘4인방’이 격리심사를 받은후 상해의 당정대권은 아직도 ‘4인방’잔여세력의 수중에 장악되여있습니다. 때문에 중앙에서는 즉시 우리를 파견하여 상해의 당정대권을 접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특수한 임무입니다. 우리가 상해로 가는 방식, 시간은 모두 절대적인 비밀입니다.  개도 급하면 담장을 뛰여넘는다고 ‘4인방’잔여세력이 무장으로 공항을 포위할지도 모르기때문에 우리가 상해에 도착하기전에 상해시당위에 통지하지 않고 중앙에서 전용비행기를 파견하게 되며 해군동해함대 상해기지에서 책임지고 우리를 맞이하게 됩니다.” 10월 20일 오후에 중앙사업소조는 소진화의 인솔하에 중앙에서 특별히 파견한 전용비행기를 타고 상해로 날아갔다. 비행기가 홍교공항의 제1호리착륙장에 착륙했을 때 홍교공항은 이미 삼엄한 경비상태에 처해있었다. 전용비행기가 도착하기 50분전에 소식을 들은 상해시경비처에서 먼저 공항에 와서 비행기에 대해 무장감시를 실시했다. 소진화는 침착하게 사업소조성원들에게 해군상해기지 사령원 두표(杜彪)와 정위 강장(康庄)이 오기를 조용히 기다리라고 했다. 얼마후 두표와 강장이 부대를 거느리고 공항에 달려와 경례를 올렸을 때에야 소진화는 중앙사업소조를 거느리고 “4인방”잔여세력의 무장감시를 순조롭게 통과하여 상해주둔 해군기지사령부로 들어갔다. 중앙사업소조는 먼저 비밀리에 상해에 파견되여 사업을 고찰한다는 명의로 상해“4인방”잔여세력의 동향을 장악하고있는 동지들과 련계했으며 상해에 주둔하고있는 륙해공 3군의 주요책임자들을 불러들여 마천수, 서경현(徐景贤), 왕수진(王秀珍)의 동향과 그들이 부대를 장악하고있는 정황에 대해 알아보는 동시에 상해시직속단위와 주요기층단위에 심입하여 동향을 장악했다. 그리고 남경군구 정치위원 료한생(廖汉生)에게 전보를 보내여 상해에 오라고 하여 상해의 정세를 안정시킬 병력배치에 대해 상의했다.    
8    소름이 끼치는 마귀의 소굴 76호 댓글:  조회:6721  추천:1  2013-11-17
소름이 끼치는 마귀의 소굴 76호   (번역)     76호는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 나올수 없다는 한간특무조직의 소굴이였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공포의 소굴인 76호는 수많은 항일투사, 공산당원, 진보인사, 신문일군 등 일본과 한간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랍치하고 암살했으며 잔혹하게 고문하고 학살했다. 1939년에 상해주둔 일본령사관의 추천에 의해 이미 일본에 투항한 원 국민당특무와 일본군부의 대표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贤二)가 만나서 “상해특공계획”을 제출했는데 일본대본영의 중시를 받았다. 일본대본영에서는 “정묵촌(丁默邨)일파의 특무사업을 원조할데 관한 훈령”을 내려보냈다. 일본군부는 1939년 5월에 상해에서 괴뢰정권을 세우고 리사군(李士群), 정묵촌특무본부와 왕정위괴뢰본부를 합류시켰다. 왕정위괴뢰 국민당제6차대표대회에서 왕정위괴뢰국민당중앙집행위원회 특무위원회 특공총부를 정식으로 성립하고 특무위원회주임위원을 따로 임명했다. 그리고 정묵촌을 부주임위원으로, 리사군을 비서장으로 임명했다. 또 정묵촌을 특공총부 주임으로, 리사군과 당혜민(唐惠民)을 특공총부 부주임으로 임명했다. 1939년 9월 5일에 왕정위괴뢰정권의 특무조직인 중국국민당중앙집행위원회 특무위원회가 상해에서 성립되였다. 그전에 한간 정묵촌과 리사군은 일본군부의 지시를 받고 특무조직을 세우고 상해 대서로(大西路)의 76호에 특무조직기구를 설립했다. 그후 활동하기 불편하다는 원인때문에 일본특무조직에서 극사비이로(极司菲尔路) 에 위치한 76호를 특무활동장소로 정했다.   76호의 창시자는 리사군이였다. 민국10대한간중의 한 놈인 리사군은 일찍 공산당에 가입했고 구쏘련에 가서 류학했다. 그후 국민당에 체포된 그는 국민당의 중통특무로 되였다. 1938년에 또 일본특무기관에 투항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한간으로 되였다. 상해를 점령한후 상해를 통제하기가 급해난 일본군은 돈과 무기를 내여 리사군에게 될수록 빨리 한간특무조직을 세울것을 명령했다. 자신의 영향력이 부족함을 느낀 리사군은 달갑게 한간으로 되려는 정묵촌을 청했다. 정묵촌은 군통과 중통의 이중간첩이였다. 리사군과 정묵촌은 특무망을 통해 달갑게 일본에 투항하려는 군통과 중통의 특무들을 골간으로 하고 지방깡패들을 졸개로 하는 한간나부랭이들을 끌어모아 상해의 대서로 76호에 특무조직을 세웠다. 그후 활동의 편리를 위해 일본특무기관인 “매기관(梅机关)”의 중좌급특무가 극사비이로의 76호에 자리잡은 원 안휘성주석 진조원의 공관을 정묵촌, 리사군의 특무조직 주둔지로 정했다. 1939년 5월에 나라를 배반하고 일본에 투항한 왕정위가 상해에 와서 괴뢰정권을 세울 준비를 했다. 일본침략군은 왕정위괴뢰정권의 실력을 증강하기 위해 정묵촌, 리사군의 특무조직을 왕정위에게 주어 리용하게 했다. 세력이 약했던 왕정위는 이 특무조직을 자신의 괴뢰통치를 실시하는 지주의 하나로 삼았다. 76호내에는 시부야준위를 통령으로 하는 일본헌병분대가 있었는데 그들의 직책은 76호의 한간특무들을 감시하는것이였다. 76호에서 큰 행동을 할 때마다 사전에 일본특무기관에 통지해야 하며 전반행동은 일본특무기관에서 파견한 특무들의 감독을 받아야 했다. 항일전쟁이 시작된지 이미 1년이 지난 1938년에 곳곳에서 참담하고 어두운 구름이 드리웠지만 유독 상해의 영국조계지와 프랑스조계지만이 외국인의 세력에 의거하여 여전히 전쟁의 화를 입지 않고있었다. 게다가 국민당의 2대특무기구인 군통과 중통이 상해에 대량의 특무를 잠복시켜 한간과 일본인을 암살해 일본인들에게 매우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런 상황이였지만 일본특무기구인 특고과는 상해에서 근본 그 작용을 발휘할수 없었다. 이때문에 골치를 앓고있던 일본특무두목 도이하라 겐지는 군통과 중통과 같은 특무조직인 왕정위괴뢰정권의 76호를 세울 생각을 하게 되였다. 또 한방면으로는 당시 국민당 부총재인 왕정위가 일본에 투항하여 윁남으로 도망가자 군통특무두목 대립은 왕정위를 암살하기 위해 천진특무소의 19명 특무를 윁남에 파견하였다. 결과 왕정위의 비서가 암살당하고 왕정위는 살아남게 되였다. 이 사실로부터 왕정위의 중요성을 알게 된 일본인들은 왕정위의 이름을 빌어 한간특무조직인 76호를 세웠다. 76호가 갓 세워졌을 때 사람이 모자랐기에 리사군은 청방의 최고우두머리 두월생(杜月笙)을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했다. 하지만 두월생의 거절을 받았다. 그후 리사군은 청방의 두목 계운경(季云卿)을 찾아갔다. 계운경이 한간으로 되기를 원했기때문에 그의 제자들이 76호의 개다리로 되였다. 특무위원회의 주불해(周佛海), 정묵촌, 리사군은 왕정위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으면서 특무들을 지휘하여 조금의 인간성도 없는 38가지의 잔혹한 고문방법을 만들어냈다. 그 고문형에는 묶어놓고 때리는것, 호랑이의자(고문용의자의 하나)에 앉게 하는 고문, 고추물을 먹이는 고문, 전기고문, 쇠침으로 찌르는 고문, 반공중에 묶어놓고 강한 해볕을 오래 쪼이게 하는것, 지하감옥, 물감옥 등이 있었다. 76호특무들은 사회상에 공포의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가로등아래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사람머리를 걸어놓기도 하고 위협대상자의 집안에 끊어진 손과 발을 던지기도 하는가 하면 또 위협대상자의 문에 비수를 꽂아넣기도 하고 탄알을 넣은 협박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뒤를 따르다가 인질을 랍치하는것은 보통일이였다. 1939년부터 1943년까지의 기간에 76호특무들이 저지른 암살, 랍치사건은 3000여건에 달했다. 76호는 일본인들을 위해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그들의 두목 리사군은 도리여 일본인들의 손에 죽었다. 태평양전쟁이 폭발된후 일본은 새로운 침화정책(侵华政策)을 추진했다. 태평양전쟁에 수요되는 전략물자를 얻기 위해 일본은 왕정위괴뢰정권을 강화하고 상해대자산계급을 위로해야 했다. 일본은 또 조계지에 진입한후 혼란한 상황이 생기는것을 바라지 않고 국면이 안정되기를 바랐다. 때문에 76호에서 계속 제멋대로 못된 짓을 하는 자는 일본인의 리용가치를 잃게 되였다. 그러나 그 시기에 76호의 세력은 이미 강대하게 되여 일본들이 배척하기 쉽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더는 자신의 뒤심이 되여주지 않는것을 눈치챈 특무두목 리사군은 자신의 퇴로를 남겨두기 시작했다. 그는 국민당군통특무들과 련계하여 군통의 행동에 도움을 주는 한편 공산당의 지하일군들이 상해에서 철수하는데 도움을 주겠다고 표시했다. 중경의 국민당군통특무들은 리사군이 공산당인사를 도와준다는것을 알게 된후 후환을 방지하기 위해 리사군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동시에 일본특무조직에서도 자신들이 기르던 리사군이란 이 개가 꼬리가 너무 커서 주인의 말을 잘 듣지 않는것을 보고 이런 개를 더 기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일본특무조직과 군통특무조직은 합작하여 리사군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1942년에 일본헌병대는 먼저 리사군의 심복이며 76호의 경위대 대장인 오세보(吴世宝)를 독살했다. 1943년 9월에 상해의 일본헌병대 특고과(特高课) 과장 오까무라(冈村)는 집에 술자리를 마련해놓고 리사군을 청했다. “당신이 군통의 웅검동(熊剑东)과 모순이 있는것을 알고있네. 내가 웅검동을 불렀으니 우리 집에 와서 한잔하면서 두 사람이 화해하게나.” 리사군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으나 가지 않을수 없었다. 오까무라는 리사군에게 독약을 넣은 소고기과자를 권했다. 리사군은 사전에 일본인이 권하는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으나 오까무라가 간곡하게 권하는 바람에 하는수없이 한입을 먹었다. 그리고 화장실에 가서 토했지만 일본인이 사용한 독이 너무 강해서 소용이 없었다. 리사군은 집에 돌아와 이틀동안 앓다가 죽고말았다. 리사군이 죽은후 76호내의 크고 작은 두목들은 서로 권력다툼을 하다가 결국 조직이 와해되고말았다. 그후 76호는 개조되고 왕정위괴뢰특공총부는 최소되였다. 그리고 따로 정치보위국이 세워지고 그 밑에 제1국과 제2국을 두었다. 제1국은 의연히 원래의 76호에 자리잡았지만 권세는 이전처럼 강하지 못했다. 1944년 11월에 왕정위는 일본에 가서 병치료를 받다가 죽었다. 그러자 한간특무조직은 약화되였다. 1945년 8월에 일본이 무조건 투항을 하자 76호도 철저하게 멸망되였다. 76호에서 악행을 일삼던 한간특무두목 정묵촌은 1947년에 총살당했다. 나머지 중층두목인 소성덕, 양걸 등도 징벌을 벗어나지 못하고 총살당했다.         
7    로씨야미녀들이 시집오는 마을 댓글:  조회:8420  추천:1  2013-11-17
로씨야미녀들이 시집오는 마을   (번역)     길림성 서란시 소성진 사합촌은 가난했던 탓에 총각들이 장가를 못가서 《로총각촌》으로 불리웠다. 그런데 이 몇년래 이 마을 총각들은 선후로 22명의 로씨야(한국어로는 러시아)미녀들을 안해로 맞아들여 이 마을은 또 《로씨야색시촌》으로 유명해졌다. 사합촌의 총각들은 학력도 높지 않고 지위도 없고 금전도 많지 않은데 어떻게 외국미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가? 1977년 길림성 서란시 소성진 사합촌에서 출생한 리동평은 용모가 영준하고 본성이 소박하고 성실했지만 집이 가난하여 시집 오자는 처녀가 없었다. 2000년초 리동평은 로씨야장사가 돈을 많이 번다는 소문을 듣고 여기저기에서 1만원의 출국비용을 빌려가지고 출국수속을 밟았다. 그해 3월에 로씨야 뿌스꼬브주의 수부 뿌스꼬브시에 도착한 그는 이곳의 기후가 습하여 바퀴벌레가 빨리 번식하지만 바퀴벌레를 퇴치하는 약이 모자라는것을 발견했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그는 바퀴벌레퇴치약을 팔아서 돈을 모았다. 이때 그는 로씨야 사람들과 간단한 대화를 할수 있었지만 이곳에 발을 붙이고 크게 해보려면 로어를 정통해야 한다는것을 깨닫고 시간을 짜내여 로어를 배우려고 마음먹었다. 어느날 뿌스꼬브도서관에 찾아간 리동평은 책을 빌려다 자습하려고 했지만 어느 책을 선택해야 할지 몰랐다. 이때 한 미모의 로씨야처녀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 《제가 도와드릴가요?》하고 열정적으로 물었다. 미녀의 달콤한 말에 그는 일시 어떻게 대답했으면 좋을지 몰랐다. 처녀는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책꽂이에서 로어기초지식에 관한 책을 몇권 뽑아주면서 내용을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예쁜 로씨야처녀의 열정에 그는 각별한 친절감을 느꼈다. 며칠후 책을 바꾸러 도서관으로 간 그는 그 처녀를 다시 만날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날 그 처녀는 출근하지 않았다. 사처에 수소문해보았더니 그 쳐녀는 이름이 유리찌와이고 23세인데 모스크바대학을 갓 졸업했다는것이였다. 리동평은 련며칠 일손을 놓기만 하면 도서관으로 달려갔는데 마침내 유리찌와를 다시 만나게 되였다. 그를 만난 유리찌와는 방그레 웃으면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원래 유리찌와는 그를 처음 만났지만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있었던것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음주, 흡연에 빠져 독서를 하지 않고있는 현실인데 배움에 진취성을 가지고있는 중국총각을 보자 그녀는 호기심을 가지게 되였던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저녁에 만나자는 리동평의 요청을 통쾌하게 수락했던것이다. 그날 저녁 식당에서 만나 함께 식사하면서 리동평은 유리찌와에게 로씨야에서 겪은 자신의 경력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유리찌와는 호김심에 차서 들으면서 이 눈앞에 앉아있는 이국청년의 근면하고 분발하는 정신에 깊이 감복되였다. 그후 두 사람은 자주 만나 리상과 인생에 대해 담론했고 료해가 깊어지면서 서로 사랑하게 되였다. 그런데 유리찌와의 부모가 이 일을 안후 결결히 반대했다. 그때문에 몹시 고민하던 유리찌와는 감기에 걸렸으나 출근을 견지했다. 그 소식을 들은 리동평은 도서관으로 뛰여가서 기침을 몹시 하면서 고열이 나는 유리찌와를 업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녀곁을 한발작도 떠나지 않고 살뜰하게 보살펴주었다. 이에 감동된 유리찌와는 《사랑은 민족도 없고 국계도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훌륭한 남자친구를 잃으면 내가 한평생 후회하게 될것이야》라고 생각했다. 그후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를 더욱 깊이 사랑했다. 유리찌와의 부모도 중국총각이 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있는것을 보고 그들의 결혼에 동의했다. 2003년 크리스마스전날밤 유리찌와의 부모는 로씨야의 풍습대로 딸과 리동평을 뿌스꼬브교회당으로 데리고 가서 결혼식을 올리게 하였다. 결혼후 리동평은 음력설을 쇠기 위하여 색시를 데리고 귀국하여 떠난지 3년이 되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사합촌사람들은 리동평이 금발의 아름다운 로씨야대학생색시를 데리고 온것을 보고 모두들 부러워하면서 탄복했다. 리동평이 로씨야미녀를 색시로 맞아온것을 본 사합촌의 총각 정우는 너무도 부러워 로동평을 찾아와서 자기도 로씨야로 데리고 가달라고 졸라댔다. 2004년봄 리동평부부는 정우를 데리고 로씨야 땅을 밟았다. 리동평은 정우에게 친구를 도와 일하도록 배치해주었다. 2004년 9월 4일 저녁 하루일을 끝마치고 거처로 돌아가던 정우는 갑자기 한 처녀가 다급하게 질러대는 고함소리를 듣게 되였다. 소리 나는 쪽으로 달려가보니 두 강도가 칼을 빼들고 한 처녀를 강탈하고있었다. 순간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번개같이 달려가 강도와 박투했다. 한놈을 넘어뜨렸지만 다른 한놈의 칼에 등을 찔리고말았다. 하지만 그는 결사적으로 몸을 돌려 칼을 든 강도와 맞써 싸웠다. 두 강도는 칼에 상처를 입고서도 용감하게 싸우는 그를 보자 겁에 질려 줄행랑을 놓았다. 강도를 쫓아가려던 정우는 머리가 무거워지면서 그 자리에서 혼절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정신을 차린 정우는 자신이 병원의 침대에 누워있고 곁에는 한 로씨야미녀가 앉아있는것을 발견했다. 로씨야미녀가 서투른 중국말로 《깨여나셨군요. 어제 당신이 절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전…》하고 말해서야 정우는 눈앞의 이 미녀가 지난밤 자신이 구한 녀자라는것을 알았다. 그는 강도들과 박투하느라고 그 녀자가 어떻게 생긴 녀자인지 여겨보지 않았던것이다. 로씨야미녀는 《전 소비야라고 부르는데 중국에서 류학하고 돌아와서 지금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어요》하고 자기 소개를 했다. 정우는 미녀가 떠날념을 하지 않는것을 보고 미안하여 《난 이미 위험에서 벗어났으니 어서 출근하오》하고 독촉했다. 그러자 소비야는 《당신이 목숨을 걸고 날 구해주다가 부상을 입었는데 제가 당신을 돌보지 않아서야 되겠어요? 전 이미 학교에서 일주일휴가를 맡았어요.》하고 말하더니 그를 보살펴주기 시작했다. 로씨야녀인의 매력적인 웃음은 약품보다 더욱 치료효과가 좋았다. 비록 소비야는 불행한 혼인사가 있었지만 정우는 그녀가 너무 좋았다. 소비야는 정우의 몸이 거의 회복된것을 보고 병원을 떠나 부모가 있는 우쑤리스크로 떠났다. 그녀는 정우에게 호감을 가지고있었지만 불행한 혼인경력때문에 사랑을 믿지 않게 되였고 다시 사랑의 감정에 빠지는것을 두려워했던것이다. 소비야가 떠난후 정우는 퇴원하자마자 그녀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학교에도 집에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유리찌와한테서 소비야가 우쑤리스크로 갔다는 말을 들은 정우는 곧 기차를 타고 그녀를 찾아갔다. 소비야는 천리길로 멀다하지 않고 우쑤리스크까지 찾아온 정우를 보자 더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그의 품에 안겨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2005년 정우까지 로씨야미녀를 색시로 맞아 데리고 오자 온종일 술이나 마시고 마작이나 놀면서 세월을 보내던 사합촌총각들은 정신을 번쩍 차리게 되였다. 마을의 마흔살 되는 로총각 등초까지 마음이 움직여 로싸야장사길에 나섰다. 뿌스꼬브에 도착하자 리동평이 그에게 기차역에서 물건 나르는 일을 소개해주었다. 어느 한번 등초는 텔레비죤을 나르다가 발이 미끌면서 델레비죤을 손에서 놓지게 되였다. 그는 황급히 몸으로 땅바닥에 떨어지려는 텔레비죤을 막았다. 비록 몸이 상했지만 물건주인인 로씨야녀자의 신임을 얻었다. 이 로씨야녀자는 쟈나라고 부르는데 사망한 남편이 진 빚을 물기 위해 텔레비죤장사를 하고있었다. 그녀가 혼자서 고생하는것을 본 등초는 반년동안 품팔이를 하여 모은 돈을 그녀에게 주면서 먼저 빚을 물라고 했다. 쟈나는 중국총각의 소행에 몹시 감동되였다. 후에 등초가 로씨야녀자를 안해로 맞으려한다는 말을 들은 그녀는 주동적으로 빚을 다 갚은후 그한테 시집을 가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등초는 기뻐서 함께 빚을 갚은후 결혼하자고 했다. 2006년 가을 등초는 쟈나를 데리고 고향에 돌아와서 결혼식을 올렸다. 등초와 쟈나가 결혼한지 얼마 안되여 사합촌의 총각 손대광, 사지굉, 조영지, 동빈 등도 련이어 로씨야처녀를 데리고 와서 결혼했다. 현재까지 사합촌총각들은 22명의 로씨야미녀들을 안해로 맞아들였다. 로씨야색시들이 모여들면서 사합촌은 정신면모가 일신되였고 경제적으로도 부유한 촌으로 변했다. 사합촌의 22명 총각들이 로씨야미녀를 안해로 맞아들였다는 소식이 동북대지에 퍼지자 외국에 나가 품팔이를 하려는 숱한 로총각들이 비결을 알려고 찾아왔다. 사합촌이 삽시간에 《로씨야색시촌》으로 유명져 인기를 끌고있는데 사합촌총각들이 련애에 성공한 그 비결이 무엇일가? 사합촌총각들은 학력도 높지 않고 지위도 없고 금전도 많지 않은데 그들의 몸에 도대체 무슨 매력이 있어 로씨야처녀들이 다투어 시집오고있는것일가? 하지만 사합촌총각들에게는 별다른 비결이 없었다. 딱히 비결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부지런하고 알뜰한 일본새, 선량하고 충직한 마음 그리고 고상하고 소박한 품성과 용감하게 분발하려는 정신이라고 할수 있다.   
6    구상해탄의 3거두 (3) 댓글:  조회:6086  추천:3  2013-11-10
일본놈의 주구로 된 구상해탄 깡패거두 장소림 (번역)   장소림(张啸林)은 1877년 6월 14일에 절강성 자계현의 한 시골에서 출생했다. 그는 1887년에 사당에서 공부하다가 1890년에 아버지 장전해가 사망되자 형님 장대림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항주로 이주하여 견직물을 짜는 방직실에 들어가 견습공으로 있었다. 1897년에 20살이 된 장소림은 힘이 세고 근육이 발달한 자신의 체질을 믿고 주먹으로 살아가려고 결심했다. 그는 몇몇 깡패들을 긁어모아 상인들을 위협하는 수단으로 돈을 벌었다. 1903년에 장소림은 절강성 무비학당으로 들어가려고 배에 올랐다가 한 청년이 깡패들에게 죽도록 매맞는것을 목격했다. 그는 달려가 깡패들중에서 한놈을 두손으로 머리우까지 들어올렸다가 땅바닥에 내던졌다. 그것을 본 다른 깡패들은 무서워서 뿔뿔이 도망쳤다. 장소림이 구해준 청년은 란계현사람인데 장재양이라 불렀다. 그후 그들은 막역지교로 되였다. 그들은 함께 청왕조를 위해 하급군관들을 양성하는 무비학당으로 들어갔다. 원래 주먹싸움을 좋아했던 장소림은 무술과와 사격과에 흥취를 가졌고 성적도 매우 출중했다. 하지만 기생집출입을 한 규률위반으로 그는 학당에서 처분을 받았다. 화가 난 그는 졸업도 하지 않고 학당을 떠나버렸다. 고향공신교로 돌아온 그는 차집을 차리고 힘깨나 쓰는 사람들에게 술을 사주고 기생을 붙여주면서 그들을 주위에 끌어들였다. 그 시기 그는 12살의 루려금에게 반했다. 그후 그는 루려금에게 접근했는데 생각밖에도 그녀가 못이기는척 하고 그에게 몸을 맡기는것이였다. 그 일이 있은후 장소림은 루려금을 안해로 맞아들였다. 루려금은 아이를 낳지 못했기때문에 그들은 미혼부부가 낳은 남자아이를 양자로 삼았다. 그후 장소림은 아편매매를 하다가 일대에서 자신보다 세력이 더 강한 깡패두목 전표의 패거리에게 아편을 빼앗기게 되였다. 화가 난 장소림은 패거리들을 데리고  전표의 패거리와 무리싸움을 벌렸는데 싸움중에 도망치다가 안해 루려금을 전표에게 빼앗기게 되였다. 전표는 장소림의 안해가 자색이 뛰여난것을 보고 2개월동안이나 데리고 살았다. 전표에게 쫓기워 강물에 뛰여들었던 장소림은 묘지암의 지능이란 녀승에게 구원되였다. 지능은 장소림을 암자에 숨겨놓고 치료해주면서 건장한 체구를 가진 사내에게 반했다. 장소림은 이렇게 미모의 녀승과 남녀의 즐거움을 나누게 되였다. 그후 그는 부하를 통해 전표가 숨겨놓은 안해의 거처를 알게 되였다. 그의 안해는 그가 몰래 보낸 편지를 보고 그날밤에 깊은 잠이 든 전표의 성기를 가위로 베여버렸다. 때를 같이하여 장소림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덮쳐들었다. 전표가 황망히 도망치자 두목이 없게 된 전표의 부하들은 손을 들고 투항했다. 장소림은 앙가품을 하려고 전표의 안해를 찾았으나 벌써 도망치고 없었다. 그대신 전표의 12살 되는 딸을 붙잡았는데 장소림의 안해는 전표의 딸과 자는것으로 앙가품을 하라고 시켰다. 하지만 장소림은 전표의 딸이 못생긴것을 보고 생각이 없어 기생집에 팔아버렸다. 1912년에 상해로 들어간 그는 무비학당을 다닐 때 친했던 장재양 등의 도움으로 세력을 넓히고 재물을 긁어모았다. 무비학당을 함께 다녔던 학원중에 벼슬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군벌군관이 된 사람도 있었다. 그는 1919년에 가족을 데리고와서 상해에 자리잡으면서 “대자(大字)”서렬의 번근승을 스승으로 모셨다. 그후 황금영, 두월생과 함께 “삼흠회사”를 경영하면서 그들과 함께 상해탄의 3거두로 되였다. 1925년에 화격얼로에 위치한 장공간(张公馆)에 이주했는데 그해 북양정부의 재정부참의로 임명되였다. 1927년 4월 12일에 황금영, 두월생과 함께 장개석을 도와 공산당을 살해했다. 장개석은 그의 공로를 치하하여 그를 “군사위원회 소장참의”, “해륙공군 총사령부 고문”, “행정부참의”로 임명했다. 장소림은 본부인 루려금외에 명기로 소문난 장수영을 둘째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그외 셋째부인과 넷째부인이 있었지만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1937년 10월에 일본군이 상해를 맹렬하게 공격해오자 상해를 포기하려고 생각한 장개석은 상해탄의 3거두가 일본군과 괴뢰정부에 리용당하는것을 방지하기 위해 황금영, 두월생, 장소림을 불러 향항으로 피신하라고 권고했다. 3거두의 서렬은 원래 황금영, 장소림, 두월생이였지만 그 당시에는 두월생, 황금영, 장소림으로 변했다. 장소림은 두월생보다 먼저 깡패세계에 발을 들여놓았고 자격도 한급 높았기에 마음속으로 두월생이 최고두목으로 된것을 불복하고있었다. 그는 장개석이 피신하라고 하자 속으로 수판알을 굴렸다. (일본군이 상해를 점령하면 꼭 깡패세력을 끌어들이려고 할것이다. 3거두중에 황금영은 이미 일본군을 위해 일하지 않겠다고 표시했고 두월생은 상해를 떠나겠다고 했으니 이는 내가 혼자서 상해탄을 쥐고흔들수 있는 좋은 기회야.) 과연 장소림의 예산대로 일본군이 상해를 점령하자 일본의 상해파견군 사령관 마쓰이 이와네는 장소림을 찾아와 협의를 맺었다. 그후 장소림은 일본침략군이 점령한 강서성정부의 괴뢰성장을 담임하면서 일본군의 괴뢰가 되여 각 항업의 인사들을 일본군에 순종하도록 핍박했다. 그리고 깡패들을 풀어 항일활동을 진압했고 애국지사들을 잔혹하게 살해했다. 그는 “신아평화촉진회” 회장의 명의로 외지에 깡패들을 파견하여 량식, 면화, 석탄, 약품을 강제로 헐값에 사들이거나 빼앗아가지고 일본군에게 보내주었다. 그는 괴뢰군을 모집해들여 일본군한테 충성하게 했고 대량적으로 깡패들을 모아들여 일본군의 졸개로 만들었다. 장소림의 친일활동은 장개석을 불안하게 했다. 장개석은 군통국 국장 대립한테 장소림을 죽여버리라고 명령했다. 대립은 상해에 잠복한 군통국 상해구 구장 진공주한테 장소림을 제거해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진공주는 장소림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진묵을 대장으로 하는 행동소조를 조직했다. 진묵은 두번이나 장소림을 암살하려고 했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이에 진묵은 장소림의 내부일군을 매수하려고 생각했다. 그는 장소림의 경호원중에서 림회부를 선택했다. 림회부는 장소림의 운전수 아사의 소개로 장소림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초기에 그는 문지기로 일했다. 장소림은 두번이나 암살을 당할번 한후 무예가 사격에 능한 경호원을 모집하려고 했다. 그때 문지기로 있던 림회부는 사격시험에서 합격되여 장소림의 경호원으로 되였다. 진묵은 몰래 림회부를 만나서 대한간 장소림을 제거하는것은 민족의 대의라고 말하면서 5만원을 넘겨주었다. 진회부는 동의하고 돌아가 장소림의 동향을 살피면서 진묵의 지령을 기다렸다. 1940년 8월초에 진공주와 진묵은 림회부를 만나서 “요 며칠사이에 손을 쓰오. 성사후 군통총부에서 방법을 대여 자네를 프랑스조계지의 순포방에 들어가도록 해주겠네”라고 말했다. 1948년 8월 14일에 손님이 장소림을 찾아왔다. 림회부는 장소림이 손님을 바래주러 아래층으로 내려갈 때 손을 쓰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후 손님을 모셔온 집사가 내려와 기생을 불러들이러 나갔다. 기생을 데리고놀면 밤을 지새울것이니 손을 쓸 방법이 없게 된것이다. 림회부는 생각하다가 차를 닦고있는 장소림의 운전수 아사를 찾아가 말했다. “선배님, 집에 일이 있어서 며칠동안 청가를 맡아야 하겠는데…” “그런데 어쨌다는거야?” “선배님이 웃층에 올라가 장선생님한테 말해줄수 없겠소?” 아사는 머리를 가로흔들었다. “장선생은 손님이 왔을 때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게 해. 너도 이런 규칙을 알잖아?” 림회부는 격장법으로 아사를 자극했다. “선배님은 평소에 장선생님이 선배님을 가족처럼 중하게 여긴다고 자랑하더니 이제보니 모두 허풍이였군요. 보아하니 선배님이나 나나 다름이 없군요.” 아사는 화가 나서 “내가 네놈을 장선생한테 소개해주었는데 네깐 놈이 감히 나하고 비기다니?”하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림회부도 지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웃층에 있던 장소림은 “누가 떠는거냐?”하고 소리치더니 창문으로 내다보았다. 장소림은 두 사람이 다투고있는것을 보고 화가 나서 림회부를 가리키면서 고함쳤다. “이 거북손자같은 놈아! 밥을 처먹고 일은 하지 않고 싸우기만 하는거냐? 이 어른이 이제 일본병사들을 더 불러오면 너같은 놈은 필요없어!” 림회부는 약을 올리느라고 맞받아 소리쳤다. “장선생님, 당신 눈에는 내가 일본놈들보다 못하다는겁니까?” 장소림은 화를 참을수 없어서 상반신을 창문밖으로 내밀면서 말했다. “아사야, 그 거북손자놈의 총을 빼앗고 그 놈을 쫓아버려라!” “그럴 필요없어. 나절로 나갈테니깐!” 림회부는 허리춤에 총을 뽑아들었다. 모두들 림회부가 총을 바치려고 그러는줄 알았다. 그런데 림회부는 별안간 총을 장소림한테 겨누더니 잽사게 방아쇠를 당겼다. 장소림은 당장에서 비명을 지르며 숨을 거두었다. 향년 64세였다. 림회부는 장소림의 죽음을 확인하려고 총을 든채 웃층으로 뛰여올라갔다. 그때 장소림을 찾아왔던 손님이 프랑스조계지의 경찰에 전화를 거는것을 보고 림회부는 그 손님을 쏘아죽였다. 그 다음 장소림이 숨을 거둔것을 확인하고 도망치려던 림회부는 장소림의 경호원들에게 붙잡혔다. 그때 현장으로 달려온 프랑스조계지의 순포장에서 림회부를 붙잡아갔다. 림회부는 15년형을 받았다가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석방되였다.  
5    구상해탄의 3거두 (2) 댓글:  조회:6706  추천:2  2013-11-10
조조처럼 간사한 구상해 깡패거두 두월생 (번역)   두월생(杜月笙)은 1888년 8월 22일에 상해 천사(지금의 상해시 포동신구역)의 고교남쪽 두가(杜家)저택에서 출생하였다. 4살전에 부모가 모두 돌아갔기에 그는 선후로 계모와 삼촌의 슬하에서 자랐다. 그는 어릴 때부터 깡패들과 어울렸으며 과일점의 점원질도 했다. 그때 그는 청방의 진세창을 스승으로 모셨다. 진세창은 소동문일대의 깡패두목이였는데 작호가 “투첨자복생”이였고 청방의 중간에 속하는 “통자(通字)”서렬이였다. 두월생은 “오자(悟字)”서렬에 배치되였다. 두월생은 진세창의 관계를 통하여 청방의 최고두목인 황금영의 저택으로 들어갈수 있었다. 두월생은 령리하고 간사하고 눈치가 빨랐기때문에 얼마후에 프랑스조계지의 중국인정탐두목으로 되였다. 황금영은 그를 심복으로 여기면서 아편운반을 책임지게 하고 프랑스조계지 3대도박장의 하나인 “공흥구락부”를 경영하게 했다. 두월생은 부하들을 잘 모아들이고 군벌들과 결탁했기에 몇달사이에 아편운반에서 세력이 가장 강대해졌다.   1925년 7월에 두월생은 프랑스조계지와 군벌의 보호하에 “삼흠회사”를 설립하여 프랑스조계지의 아편운반을 독점했다. 이렇게 되여 그는 황금영, 장소림과 함께 상해깡패3거두의 하나로 되였다. 그해 두월생은 프랑스조계지상회 총련합회 주석 겸 납세중국인감찰로 임명되였다. 상해깡패3거두중에서 “황금영은 재물을 탐내고 장소림은 싸음질을 좋아하고 두월생은 처신을 잘한다”는 말이 나돌았다. 황금영과 장소림에 비해 두월생은 확실히 수법이 더욱 고명했다. 그는 깡패 각 세력간의 관계를 잘 조화시켰고 각 군벌파벌간의 관계를 잘 처리했다. 그는 또 돈을 벌줄도 알고 쓸줄도 알았다. 그는 아편을 밀수하고 도박장을 개설하여 대량의 재물을 긁어모아서는 그 불의지재를 가지고 사회각계 명류, 정치요인, 문인, 화가, 깡패골간 등 인물들을 위해 통이 크게 쓰면서 그들의 환심을 샀다. 그는 또 민심을 사기 위해 몇년동안 련속 전염병방지약품을 고향에 무료로 공급해주고 상해와 부근지구에 재해가 발생되면  리재민들에게 구제물자를 보내주는 등 사화기부활동도 많이 했다. 그리고 직접 나서서 로동자들과 자본가의 분규를 해결해주는 등 로동자들의 리익을 보호해주는척 하는 형상을 보여주기도 했다. 두월생은 전통깡패들이 간편한 옷차림을 하고 손에 반지를 끼고 소매를 걷어올리고 다니던 이왕의 틀거지를 개변하여 사계절 긴 적삼을 입고 점잖은 옷차림을 하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교양있는 형상을 보여주었다. 그는 퇴진한 대통령 려원홍을 잘 대해주었고 대학자 장태염, 저명한 정치가 양도, 명변호사 진련규를 상객으로 모셨다. 그때문에 두월생의 사회상의 지위는 점점 높아졌다. 1927년 4월 11일에 두월생은 황금영, 장소림과 함께 중화홍진회를 조직하여 장개석의 반혁명정변을 도와 상해로동자운동의 령수 왕수화를 살해하고 깡패들을 시켜 로동자규찰대를 진압하기도 했다. 장개석은 그의 공로를 축하하여 남경정부가 성립된후 그에게 륙해공 총사령부 고문, 군사위원회 소장참의와 행정원참의 등 직에 임명했다. 이런 직위들은 실권이 없고 허울뿐이였지만 그의 사회지위를 높여주었다. 1929년에 두월생은 프랑스조계지 공동국의 중국인 리사장으로 되였는데 이는 중국인이 프랑스조계지에서의 최고지위였다. 그해 그는 중휘은행을 설립하여 상해금융업에 진출했다. 그는 금융계의 서신륙, 진광보, 당수민 등 저명한 인사들과 관계를 밀접히 했기때문에 그의 은행업무가 날따라 흥성했다.     항일전쟁시기 두월생은 중국적십자회 부회장을 담임하면서 유익한 자선사업을 했다. 1937년 8월 13일에 일본군이 상해를 공격해오자 두월생은 구급  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는 10개의 구급치료대, 13개의 긴급구호대, 24개의 림시구호병원를 설립하고 구급차 98대를 항일전선에 지원했다. 그가 령도한 의료일군들은 항일전쟁에서 부상당한 군대와 백성 4만 4398명을 구급했다. 두월생은 또 대립과 함께 1만명의 무장유격대를 조직하여 항일정규군을 도와주었다.  이때 그는 자신의 돈으로 구매한 총 5000자루를 전선에 기부했다. 두월생은 대립과 함께 항일조직인 소절행동위원회를 조직했다. 소절행동위원회 별동대에는 5개지대가 있었는데 1, 2, 3지대는 대부분 그의 제자들로 무어졌고 사령은 모두 그의 문하생이였다. 그후 두월생은 또 송강, 곤산, 소주, 무석, 항주, 남경 등지에 중상병원을 설립하여 해마다 수천명의 부상병들을 치료해주었다. 남경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자 그는 직접 비행기를 타고 한구로 날아가서 정부 해당부문과 함께 한구에 림시구급위원회를 설립하고 178개의 의료대를 설치했다. 그가 령도한 적십자회에서는 항일하다 부상당한 군대와 백성 260만명을 치료해주었다. 항일전재시기 두월생은 통신기재, 장갑차 등을 중국공산당의 고급지휘관에게 보내주었다. 그는 또 생해주재 팔로군대표 반한년의 요구에 의해 화란에서 수입해온 1000개의 방독면구를 진북전선에서 싸우는 팔로군부대에 증송했다. 1938년봄에 중국적십자회 총회 리사사무실은 향항으로 이주했다. 두월생은 직접 향항으로 가서 사업을 맡아하면서 항일지원자금을 마련했다. 그는 중국적십자회 부회장, 구제위원회 상무위원과 상해 당정통일사업위원회 주임위원을 담임하면서 정보업, 한간암살계획 등 활동에 종사했다. 그 시기 그는 군통특무를 협조하여 대한간이며 상해시 괴뢰시장인 부소암을 죽여버렸다. 1940년에 그는 인민행동위원회를 조직했는데 이는 국민당의 지지를 받는 중국 각 깡패세력의 련합기구였다. 두월생은 인민행동위원회의 주요책임을 맡았는데 이는 사실상 그가 중국깡패세력의 최고두목으로 된것이다. 1941년 12월에 태평양전쟁이 폭발된후 두월생은 중경으로 이주하여 “항사총사”를 세우고 대후방에서 세력을 발전시켰다. 그는 중화무역신탁회사, 통제회사 등을 조직하여 점령구에서 물자를 교환하여 리익을 챙겼다.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두월생은 1945년 9월에 다시 상해로 돌아와 세력을 넓혀갔다. 그때는 조계지가 이미 없어졌고 국민당세력이 공개적으로 활동을 할수 있게 되여 깡패의 작용이 더는 이전처럼 중요하지 않게 되였다. 1946년 12월에 그는 상해참의회 의장으로 당선되였지만 국민당이 이전처럼 지지하지 않았기에 얼마후 사직했다. 그후 그는 공상, 금융, 교통, 문화, 교육, 매체 등 각 방면에서 세력을 발전시켰다. 그는 각종각약의 리사장, 회장, 상무리사, 학교리사장 등 60~70개의 직위를 담임했다. 두월생이 공개적으로 맞아들인 부인은 다섯이였다. 첫째부인 심월영은 소주사람인데 생육을 못해 다른 사람의 아이를 양자로 삼았다. 그후 첫째부인이 외사촌오빠와 간통하는것을 발견한 두월생은 첫째부인을 10년동안이나 가둬놓았다. 두번째부인 진귁영은 상해사람인데 무용배우였다. 둘째부인은 두유환, 두유한, 두유녕 세 아들을 낳았다. 셋째부인 손패호는 소주사람인데 16살에 두월생한테 시집을 와서 두유병, 두유친 두 아들을 낳았다. 넷째부인 요옥란은 북경사람인데 저명한 경극배우였다. 두월생은 요옥란과 그녀의 녀동생 요옥영이 공연하는 모습을 보고 홀딱 반했다. 그후 그는 두 자매를 하루밤사이에 번갈아가며 자기의 녀자로 만들었다. 일주일후 요옥영은 병으로 죽고 요옥란은 두유선, 두유숭 두 아들과 두미여, 두미하 두 딸을 낳았다. 다섯째부인 맹소동은 북경사람인데 요옥란과 같은 스승을 모신 저명한 경극배우였다. 그녀는 두월생의 부인으로 되기전에 저명한 경극대사(大师) 매란방의 련인이였다. 맹소동은 딸 두미연을 낳았다. 1948년봄에 두월생은 국민정부에서 열린 헌정(宪政)을 실시하기 위한 “국민대회)”에 참석하여 장개석을 받들어 대통령으로 당선되게 하는데 일조했다. 장개석은 엄중한 재정위기를 만회하기 위해 장경국을 상해에 파견하여 시장가격개혁을 실행하게 했다. 장경국은 금원권(金圆券)을 발행하여 민간에 소지하고있는 외화와 금은을 일률로 금원권으로 바꾸도록 요구했다. 두월생의 아들 두유병은 그대로 하지 않았기에 투기거래죄로 장경국에게 체포되여 6개월의 도형에 언도되였다. 이 일을 겪은후 두월생은 상해에서의 자신의 대세가 이미 기울어졌음을 알게 되였다. 1949년 3월하순에 장개석은 두월생을 남경에 청해놓고 “상해를 지키기 어렵게 되였으니 두선생은 대만으로 가는게 좋겠소”라고 말했다. 그 시기 중국공산당측에서 황염배에게 위탁하여 두월생을 상해에 남도록 권고했다. 그 소식을 들은 장개석은 두월생에게 경고하는 말투로 “두선생이 민국 16년에 공산당을 제거하는데 큰공을 세웠고 이때문에 공산당과 깊은 원한을 맺게 되였소. 공산당은 계급투쟁을 중시하기에 두선생을 절대 가만놔두지 않을거요. 요행을 바라지 말고 대만으로 가도록 하오”라고 말했다. 하지만 공산당도 장개석도 믿을수 없게 된 두월생은 자유의 항구 향항을 선택했다. 1949년 5월 1일에 향항으로 도망간 두월생은 1951년 8월 16일에 병으로 사망되였다. 향년 63세였다.       
4    구상해탄의 3거두 (1) 댓글:  조회:7301  추천:5  2013-11-10
구상해탄을 손안에 넣고 흔든 청방거두 황금영 (번역) 황금영(黄金荣)은 구상해에서 명성이 높은 청방(青帮)두목이였으며 두월생(杜月笙), 장소림(张啸林)과 더불어 3대깡패거두였다. 그는 1900년에 프랑스조계지의 순포방에 들어가면서부터 아편밀매를 조정하고 도박장, 오락장을 꾸려 깡패세력을 키웠는데 문하생이 1000여명이나 되였다. 황금영은 “4.12”반혁명정변을 도와 공산당을 살해했지만 항일전쟁시기에는 일본측과 왕정위괴로정부에서 임명한 직위를 일체 거절하기도 했다. 그는 항일전쟁승리후 다시 청방조직의 활동에 나섰지만 이미 권세가 쇠퇴해졌다. 그 당시 그의 지위는 두월생이 대체했다. 1868년에 강소성 소주시에서 출생한 황금영은 1873년에 상해로 이사가서 1876년에 서당에서 공부했다. 1881년에 아버지 황병천이 사망되자 맹강당사당에 들어가 잡일을 했다. 1884년에 자형 황전포가 꾸리는 사가당의 표장포(裱褙铺)에 들어가 학도공으로 일하던 그는 1890년에 관아에 들어가 범인을 잡는 하급관리 포쾌(捕快)일을 맡아하다가 2년후에 프랑스조계지의 순포방에 3등중국인포쾌로 뽑혀들어갔다. 1899년에 사직하고 소주에 가서 로천궁극장을 꾸린 황금영은 이듬해에 림계생과 결혼했다. 그후 다시 상해로 들어간 그는 1901년에 취보루에 향당(香堂)을 세워놓고 제자들을 받아들였다. 1917년에 송호호군사(淞沪护军使)관아의 상좌독찰에 임명되였고 1924년에 순포방의 독찰장으로 승진했다. 1927년에 그는 “4.12”반혁명정변을 도와주었고 1928년에 장개석으로부터 “군사위원회 소장참의”, “륙해공 3군총사령부 고문”, “행정원참의”로 임명되였다. 1931년에 황가(黄家)화원이 락성되였다. 그해 그는 상해대세계오락장을 먹어치우고 “영계(荣计)대세계”로 이름을 고쳤다. 1936년에는 충신사를 세우고1945년에는 영사(荣社)를 성립했다. 황금영은 여러건의 큰 사건을 해명하여 명성이 자자했다. 어느 한번은 프랑스 총령사의 서기관이 동부인하여 태호를 유람하다가 토비를 만나 랍치당했다. 프랑스조계지에서는 그 소식을 들은후 황금영을 파견하여 그 서기관을 구해오라고 했다. 황금영은 부하들을 시켜 태호의 토비두목 “태보아사”와 “저라아미”를 찾게 했다. 그 다음 직접 나서서 손쉽게 프랑스인질을 구해냈다. 또 한번은 복건성 독리(督理) 주음인의 참모장 양지후는 여섯상자의 공동품과 고대서화를 가지고 상해로 왔는데 부두에 도착하자마자 강도들에게 물품을 몽땅 빼앗겼다. 이에 송호호군사 하풍림은 특히 황금영을 청하여 빼앗긴 물건을 찾아달라고 했다. 황금영은 반나절도 되지 않아 그 물건을 찾아주었다. 그외에도 황금영은 수많은 큰 사건을 해명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공로는 프랑스의 천주교신부랍치사건을 해명한것이다. 그 공로로 하여 그는 프랑스의 동정전권대신으로부터 특등 금질보성(金质宝星)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1924년에 프랑스조계지의 순포장에서 유일한 중국인탐정 독찰장으로 승진했다. 황금영은 스승을 모시지 않고 향당을 열어서 청방에서 “빈자리”였지만 세력이 강했기에 자칭 “천자(天字)”서열이라고 하고 청방이 두목으로 되였다. 당시 상해탄(上海滩)청방에서 최고서열은 “대자(大字)”서열이였다. 황금영은 손에 쥔 권력을 리용하여 아편을 밀수하고 도박장을 꾸렸으며 다른 사람과 합작하여 경견장(跑狗场) 등을 꾸려 불과 몇년사이에 상해탄의 거두로 되였다. 황금영은 프랑스조계지의 순포방 중국인 독찰장을 20여년이나 맡아했다. 그는 60돐생일을 쇨 때에야 사직했다. 하지만 프랑스조계지의 순포장 경무처에서는 계속 그를 고문으로 초빙했다. 로란춘은 황금영의 문하생 장생의 양딸이였는데 황공관(黄公馆)에 자주 놀러왔다. 그녀는 평소에 희곡을 듣기를 좋아했다. 그녀는 총명하고 령리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회곡을 흉내내여 부를줄을 알게 되였다. 당시 황금영은 이미 50여살이였지만 14살밖에 안되는 로란춘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는 돈을 아끼지 않고 로란춘을 무대에 오르게 밀어주었다. 그는 직접 나서서 로란춘에게 주역을 맡겨주고 로란춘의 레코드를 출시했다. 상해의 크고 작은 신문에서는 다투어 로란춘의 아름다운 자태를 찍은 사진을 실었다. 로란춘의 명성은 일시에 상해의 이름난 연예인 소금령과 분국화를 릉가했다. 황금영은 로란춘을 첩으로 맞아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부인 림계생은 “나를 이 집에서 내보내기전에는 그 여우년을 들이지 못해요”라고 하면서 반대했다. 화가 난 황금영은 리혼을 제기했다. 그는 림계생에게 거액의 생활비를 줘서 쫓아보내고 로란춘을 안해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그의 혼인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3년도 안되여 젊은 남자와 눈이 맞은 로란춘은 황금영과 리혼하겠다고 성화를 부렸다. 1923년에 황금영과 로란춘은 프랑스변호사 위안소의 사무소에 가서 협의리혼을 했다. 1920년에 경비가 늘 부족했던 장개석은 몇몇 사람과 함께 돈을 벌기 위해 상해에 증권물품교역소인 “항태호”를 세웠다. 교역소의 업무는 초기에는 경기가 좋았지만 1921년에 상해에 오늘의 소규모 금융위기와 비슷한 “신교폭풍(信交风暴)”이 폭발하여 주식가치는 종이장이나 다름없게 되였다. 억지로 지탱하던 “항태호”는 1922년에 부도가 났는데 숱한 주주들이 주식을 가지고 와서 현금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채권자들은 깡패들을 고용하여 장개석을 위협하면서 돈을 갚으라고 강요했다. 깡패들을 피해다니느라고 숨을 죽이고있던 장개석은 상업계에서 비교적 지위가 높은 우흡경을 통해 프랑스조계지에서 명성이 자자한 황금영을 찾아가 보호해줄것을 요구했다. 장개석은 길일을 택해 황금영을 스승으로 모셨다. 그날 황금영은 자택의 2층의자에 름름하게 앉아있었는데 장개석은 붉은색으로 쓴 스승으로 모시는 글을 황금영에게 공손하게 받들어올렸다. 그 다음 장개석은 황금영에게 머리를 조아려 례를 올렸다. 그후 황금영은 채권자들을 술집에 청해놓고 옆에 앉은 장개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지청(그 당시 장개석이 늘 사용했던 이름)은 나의 제자입니다. 여러분들이 지청의 빚을 받겠으면 나를 찾아와 요구하시오!” 그제야 채권자들은 황금영이 홍문연을 차린것이란것을 알았다. 그들은 돈을 요구할수 없게 되였다는것을 알고 이 기회에 황금영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마음먹었다. 이렇게 되여 황금영의 한마디 말로 채권자들을 피하여 다니던 장개석은 숨을 돌리게 되였다. 상해가 해방되기 전야에 사람들이 황금영을 보고 공산당에게 욕을 보지 말고 대만이나 향항으로 도망가라고 권고했지만 황금영은 의연히 상해에 남아있었다. 황금영은 “난 이미 여든이 넘어서 오라지 않아 관속에 들어갈 사람이요. 떠나다가 중도에서 급병이라도 생겨 죽기라도 하면 그런 랑패가 어디 있겠소. 내 일생동안 상해에서 살았는데 외지에서 죽고싶지 않소”라고 말했다. 황금영은 저택에 들어박혀 두문불출하면서 밖의 일을 묻지 않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황금영이 이미 대만이나 향항으로 도망치지 않으면 인민정부에 체포되여 감옥생활을 하고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1951년초에 반혁명진압운동이 시작되자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황금영의 저택문앞에 모여들어 그에게 비판을 받을것을 요구했다. 황금영을 검거하는 편지가 눈송이마냥 상해시정부와 공안기관에 날아들었다. 당중앙에서는 상해를 해방하기 전야에 이미 깡패세력들이 말썽을 일의키지 않고 사회치안을 어지럽히지 않으며 개조를 접수한다면 그들을 다치지 않는다는 방침을 확정했다. 특히 황금영, 두월생과 같은 조직두목들은 한시기 관찰한후 표현에 따라 다시 처벌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이는 상해경제발전에 유리한것이다. 상해시 시장 진의는 이 방침과 정책을 엄격하게 집행했다. 상해시인민정부에서 직접 황금영을 만나 이왕의 정책은 변하지 않았다는것을 설명하면서 그에게 “회개서”를 써서 신문에 공개해줄것을 요구했다. 1951년 5월 20일에 상해의 《뉴스보》와 《문회보》에서 《황금영의 자백서》를 실었다. 황금영은 자백서에 “자수개과”하고 “립공속죄”하며 “정부와 인민에게 용서해줄것”을 요구했다. 상해깡패거두의 “참회”는 당시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사회질서를 안정시키고 깡패잔여세력을 겁먹게 하는데 매우 큰 작용을 일으켰다. 그후 황금영은 정부의 개조호소에 호응하여 거리를 청소하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황금영이 거리청소를 한다”는 소식은 세계각지에 쫙 퍼졌다. 구상해의 다른 한 깡패거두인 두월생은 향항에서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이 상해에 남지 않는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국내외의 반향을 고려하여 황금영의 이런 “개조”조치는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얼마후에는 그만두게 했다. 필경 황금영은 늙고 병든 로인이였던것이다. 2년후인 1953년에 한때 상해탄에서 권세와 명성이 하늘을 찔렀던 풍류인물은 온몸에 열이 나서 며칠동안 혼미상태에 빠져있다가 영영 눈을 감고말았다. 향년 86세였다.     
3    쓰딸린의 밀고로 장개석에게 체포된 양호성 댓글:  조회:9088  추천:1  2013-11-02
쓰딸린의 밀고로 장개석에게 체포된 양호성 (번역)     1893년 11월 26일에 섬서성 포성현에서 출생한 양호성장군은 중국공산당의 항일민족통일전선정책을 찬성하여 내전을 반대하고 항일을 견지하기 위해 1936년 12월 12일에 장학량장군과 함께 중외를 놀래우는 《서안사변(쌍12사변이라고도 함)》을 일으켰다. 《서안사변》후 장개석은 양호성을 핍박하여 출국고찰을 나가도록 명령을 내렸다. 양호성은1937년 6월 29일에 배를 타고 출국했다. 양호성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나라들을 경과하면서 항일주장을 선전했다. 양호성의 손자 양한은 이렇게 말했다. “유럽에 있을 때 양호성은 양명헌과 호희중을 대표로 모스크바에 파견하여 공산국제에 주둔하고있는 중국공산당의 대표를 찾아 쏘련을 통해 귀국하려고 했다. 이는 극비밀에 속하는 일이였다. 그러나 쓰딸린은 비밀경로를 통하여 양호성이 쏘련을 통해 귀국하려고 한다는 이 비밀을 장개석에게 알려주었다. 양개석은 쓰딸린의 통보를 받고 원래 양호성을 귀국하지 못하게 했던 정책을 개변했다.” 1937년 8월 9일에 양호성이 탄 “노르망디(诺曼第)호”륜선은 영국남부의 한 항구에 들어섰다. 양호성은 마침내 유럽에 도착한것이다. 8월말에 양호성은 빠라에서 기차를 타고 독일로 들어갔다. 양호성은 두번이나 사람을 쏘련대사관에 파견하여 사증에 관한 정황을 알아보는 동시에 대표를 모스크바에 파견하여 공산국제에 주둔하고있는 중국공산당대표단을 찾아 “먼저 쏘련에 들어간후 다시 몽고를 경과하여 섬북해방구로 들어가려는 계획”을 털어놓고 양호성이 쏘련에 갈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쏘련대사관에서는 이 일은 모스크바(쓰딸란)에 지시해줄것을 요청해야 한다고 했다. 쓰딸린한테서 양호성이 쏘련을 통해 귀국하여 공산당한테로 가려고 한다는 비밀을 알게 된 장개석은 이 기회에 양호성을 속여서 귀국시킨후 체포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937년 9월말에 장개석은 내막을 모르는 송자문을 통해 양호성에게 “자원적으로 돌아오라”는 전보를 보냈다. 10월 6일에 또 “중쏘관계과 민감하니 양장군이 쏘련을 통해 귀국하는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전보를 보냈다. 양호성은 쏘련을 통해 귀국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장개석의 뜻에 따라 귀국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측근들이 장개석의 음모일지도 모른다고 귀띔했지만 양호성은 “내가 서안사변을 일으킨것은 항일하기 위해서였소. 지금 국내에서 전면적으로 항전하고있는데 내가 해외에서 떠돌고있으니 중국인민을 볼 면목이 없소. 귀국한후 장개석이 나를 어떻게 대하든지 후회하지 않겠소. 나라에 미안하지 않다면 죽어도 원이 없소”라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귀국한 과정에 대해 양한은 《양호성전기》에서 이렇게 썼다. “12월 1일 오후에 양호성은 기차를 타고 무창역에 도착했다. 이튿날에 양호성은 대립의 배동하에 비행기를 타고 무한에서 남창으로 갔다. 공항에서 대립은 비행기가 작아서 세 사람밖에 앉지 못한다는 리유로 양호성의 경호원들을 떼여놓고 양호성 한사람만 비행기에 오르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왕근승이 기어코 비행기에 오르겠다고 요구하는 바람에 대립은 자신의 부하 한사람을 내리게 하고 대신 왕근승을 오르게 했다. 대립이 양보한것은 그곳에서 일을 그르쳐 양호성이 남창으로 가지 않겠다고 하면 비밀리에 양호성을 체포할 계획에 영향을 주게 될가봐 두려웠기때문이다. 대립은 양호성을 체포하는 과정에 매일 장개석에게 전보를 쳐서 지시해줄것을 바랐다. 이 전보문은 모두 대만국사관에 보관되여있다.” 양호성은 비밀리에 체포되여 완전히 자유를 잃은후 먼저 시구역에서 30리 떨어져있는 매령별장에 옮겨졌다. 양호성은 비밀리에 체포된후 12년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장개석은 대만으로 도망치기전에 양호성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양호성장군은 1949년 9월 17일에 국만당특무들에게 살해되였는데 향년 56세였다. 양호성의 아들 양증중, 10살도 안된 막내딸 양증국, 양호성의 비서 송기운부부, 송기운의 아들 송진중, 양호성의 부관 염계명, 경호원 장성민도 동시에 살해되였다. 《북경일보》      
2    루즈벨트를 속여서 죽인 쓰딸린 댓글:  조회:7443  추천:2  2013-11-02
루즈벨트를 속여서 죽인 쓰딸린 (번역)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4월 12일에 책상에서 집무를 보던 미국의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머리가 몹시 아프다며 의자에서 쓰러졌다. 그는 그 자리에 있던 녀초상화가 엘리자베스 쏘마토프에게 “앗, 속았어!”하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도대체 그가 누구에게 속았을가? 전문가들은 루즈벨트가 죽기 약 두달전에 있었던 얄타회담에서 쓰딸린이 루즈벨트에게 손을 썼다고 단언했다.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미국, 영국, 쏘련의 3개국 수뇌인 루즈벨트, 처칠, 쓰딸린이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회담을 열었을 때 쓰딸린은 특공인원들을 시켜 깜쪽같이 천천히 생명을 죽이는 특수약을 음식에 넣었던것이다. 그때 처칠은 독이 든 음식을 적게 먹었던지 그후 다만 건강이 좋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루즈벨트에 뒤이어 루즈벨트 보좌관 해리 홉킨스도 죽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쓰딸린만이 건강하였다. 하지만 누가 알았으랴. 쓰딸린 자신도 1953년 3월 5일에  후르쑈프에 의해 독살될줄을. 쓰딸린은 레닌의 후계자로서 쏘련공산당 서기장, 수상, 대원수를 지냈다. 1879년 12월 21일에 그루지야의 고리에서 구두직공의 아들로 태여난 쓰딸린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손에서 자랐다. 일찍이 비밀결사 메사메 다시에 가담하여 티플리스의 그리스도 정교회신학교에서 추방당하고 1901년에 직업적 혁명가가 되여 카프카스에서 지하활동을 하였다. 그후 10년동안에 7번 체포되고 6번 귀양을 떠났으며 5번 도망치는 고초를 겪었다. 1912년에 쓰딸린은 《맑스주의와 민족문제》라는 론문으로 인정을 받아 당중앙위원이 되였고 쏘련공산당중앙위원회정치국의 책임자로서 처음으로 쓰딸린(강철의 사나이)이란 필명을 사용하였다. 1913년에 체포되여 씨비리야로 류형된 쓰딸린은 1917년에 그곳에서 2월혁명을 맞고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왔다. 그해 4월에 레닌이 망명에서 귀환하자 레닌신정권의 민족인민위원이 되여 제민족공화국의 공수동맹인 쏘련련방의 결성에 진력하였다. 1919~1922년에 국가통제위원이 되였고 이어서 초대 당서기장이 되여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유지하면서 반세기동안 쏘련의 최고지도자로 되였다. 레닌은 유서에서 그의 재능을 평가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성격적 결함(란폭, 불관용)도 지적하여 당서기장직에서 물러날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체카(비밀경찰)와 당기구를 통하여 1만 5000명이상의 직속부하를 전국에 배치하고있었기때문에 1924년 제13차 당대회 때 류임을 인정받았다. 이 사이 1936년 이른바 쓰딸린헌법이 제정되였다. 쓰딸린헌법은 쏘련에서의 사회주의승리를 법적으로 확인한것이였으나 그무렵 국제적 파쑈주의대두로 대쏘전쟁의 위기에 직면하자 3차에 걸친 대숙청을 감행했다. 잇달은 반혁명재판(1936~1938)에서 지노비예프 등 반대파뿐아니라 충실한 당원, 군인, 관료와 무고한 많은 민중이 처형, 투옥, 제명되였다. 쓰딸린은 국방회의 의장, 붉은 군대 최고사령관이 되여 전쟁초기에는 패배하였으나 급속히 국내의 림전체제를 갖추고 주코프 등 소장 장군들을 이끌고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모스크바전선에서 우세한 적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반격의 시간을 마련하였다. 또 테헤란, 얄타, 포츠담 등의 거두회담에 참석해 련합국(미국, 영국)과의 공동전선을 굳혀 독일을 굴복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1945년에 대원수가 된 쓰딸린은 명성이 레닌을 릉가했다. 그는 동유럽에 대해 주도권을 잡고 미국과 대항함으로써 랭전의 중심인물이 되였다. 쓰딸린은 1953년 3월 5일에 뇌일혈로 급사하였다고 당시에 전했지만 후날 력사학자들에 의해 그가 뇌출혈로 병사한게 아니라 독살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후르쑈브의 지시를 받은 유태인녀자가 쓰딸린에게 특별한 주사를 놓아 저 세상으로 보냈던것이다. 《신화넷》        
1    기황후 원나라 황후가 된 고려녀인 댓글:  조회:12265  추천:1  2013-10-29
기황후 원나라 황후가 된 고려녀인 (번역, 퍼온글 종합)     하지원이 기황후역을 맡은 한국 MBC 새 월화드라마 《기황후》 가 지난 28일에 방영되였다. 방송전 “이 드라마는 고려말, 공녀로 끌려가 원나라의 황후가 된 기황후의 이야기를 모티프로 했으며 일부 가상인물과 허구의 사건을 다루었습니다. 실제 력사와 다름을 밝혀드립니다”라는 자막이 먼저 고지됐다. 실제 력사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그렇다면 실제 력사상의 기황후는 어떤 인물이였을가? 아래에 간단히 소개하기로 한다.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이며 북원의 첫번째 황제인 순제(順帝)의 황후인 기황후(奇皇后)는 고려의 녀인이였다. 기황후의 몽골이름은 올제이 후투그(完者忽都)이다. 파죽지세로 일어나 그 누구도 당할자 없었던 몽골제국의 7차례나 되는 침입에도 고려는 30여년간 꿋꿋이 항거하였지만 결국 몽골대제국앞에 무릎을 꿇고말았다. 고려는 장기간에 걸친 항거덕분에 몽골제국(원세조 구비라이가 수도를 대도(현재 북경)로 옮기고 국호를 원으로 한것이 1271년의 일이다. 이시기에는 몽골제국이였다)이 정복한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완전히 복속되지 않고 자체적인 국호와 정권을 인정받는 독립국가로 남을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강국이였던 원나라의 테두리안에 들어간 100여년동안 고려는 원나라의 조정으로부터 수많은 내정간섭에 시달려야만 했다. 고려의 왕자들은 인질로 원나라에 가야만 했다. 원나라조정에서 고려왕도 마음대로 갈아치웠으며 혼인통교를 앞세워 원나라공주가 고려의 왕비가 되여 들어와 고려정치에 간섭하는 일이 생겼다. 조선반도의 북쪽땅은 원나라의 직접 통치구역이 되였고 원나라의 정복전쟁을 돕는다는 명분하에 수많은 물자와 군사가 략탈에 가깝게 동원되여야만 했다. 그중에서도 원나라는 고려에 공녀라는 매우 야만적인 요구를 해왔다. 공녀란 말그대로 녀자를 공물로 바치는것이다. 원나라의 공녀요구는 80년간 정사에 남아있는것만 50여번에 이르고 왕실이나 귀족이 개인적으로 요구한 일도 허다하였다. 원나라의 공녀요구리유는 유목민족출신인 원나라왕실에 녀자가 부족했기때문이였다. 원나라에는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녀자외에도 원의 귀족, 고관이 요구하는 녀자도 공급해주어야 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군인집단 등의 혼인을 위해 많은 수의 녀자를 필요로 하기도 하였다. 공녀는 고려전체에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어린 딸을 공녀로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일찌감치 결혼을 시키는 일이 많아져 조혼의 풍습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공녀는 하층민에서만 차출하는것이 아니라 원나라왕실의 요구에 상응하는 정도의 신분을 가진 녀자도 필요했기때문에 귀족의 딸들도 례외는 아니였다. 고려에서 간 공녀들은 대개 원나라궁궐의 궁녀나 고관귀족의 처첩이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거리의 기생으로 팔려가 이국땅에서 슬픈 생애를 살아야만 하기도 했다. 공녀는 그만큼 고려녀인들의 앞날을 가늠할수 없는 치욕이였기때문에 그중에는 공녀로 뽑히면 가지 않기 위해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기황후도 이런 고려공녀중의 한명이였다. 기황후의 본관은 행주이고 아버지는 기자오(奇子敖)이다. 기자오는 문하시랑평장사를 한 기윤숙(奇允肅)의 증손으로서 음보로 관직을 할 정도였으니 그렇게 지체가 변변하지 못한 집안은 아니였다. 기황후는 이 기자오의 막내딸로 태여났다. 우로 오빠가 다섯에 언니가 둘 있었다. 기황후는 공녀로 뽑혀 1333년에 고려출신의 환관이던 고용보(高龙普)의 주선으로 원왕실의 궁녀로 되였다. 당시 원나라왕실에는 고려출신환관들이 많았다. 원나라는 소수의 몽골족이 다수의 한족을 다스리는 나라였기에 한족들이 중앙정부로 진출해 힘을 얻는것을 극도로 막고있었다. 하지만 지배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식자층이 필요했다. 유목민출신으로 교양을 쌓을 틈이 없던 원나라지배층들은 이런 요구를 고려에서 바친 글을 아는 환관들을 통해서 해결했다. 고용보도 고려에서 원으로 간 환관이였다. 고용보는 조국인 고려에서 온 기황후를 차를 따르는 궁녀자리에 앉히고 황제인 순제의 눈에 띄게 했다. 당시 원나라 황제인 순제는 독특한 리력을 가지고있었다. 어린 시절에 그는 왕실정쟁의 틈바구니에서 고려의 대청도에 1년간 귀양을 간 경험이 있었다. 고려에서 살았던 경험탓이였을가? 순제는 곧 기황후를 총애했다. 당시 원순제의 제1황후이던 타나시리는 기황후를 몹시 질투했다. 타나시리는 기황후에게 수시로 채찍질을 하고 인두로 살을 지지기도 했다고 한다. 기황후가 순제의 총애를 받은지 2년이 되던 1335년에 제1황후 타나시리의 형제들이 순제를 반대하는 모반을 일으켰지만 실패하였다. 이 사건으로 제1황후 타나시리도 반란에 가담하였다는 벌을 받고 죽었다. 순제는 기황후를 황후자리에 올려놓으려고 했지만 실권자이던 메르키트 바얀이 몽골족이 아니면 황후가 될수 없다고 반대하여 결국 이 일은 무산되고말았다. 결국 황후자리는 몽골 옹기라트부족출신의 바얀 후투그(伯颜忽都)에게 돌아갔다. 바얀 후투그는 성격이 매우 어져서 황후가 되였지만 거의 앞에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한번 황후의 꿈이 좌절되였던 기황후는 그후 1338년에 아들 아이유시리다라(爱猷识理答腊)를 낳고 이듬해에 메르키트 바얀이 실각하자 마침내 제2황후로 책봉되였다. 기황후는 황제의 총애를 배경으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제1황후는 허수아비황후와 다름없었다. 기황후는 황후직속기관인 휘정원을 자정원으로 개편하여 고용보를 자정원사(资政院使)에 앉히고 왕실재정을 장악하였다. 막대한 왕실재정을 틀어쥐게 된 기황후는 이를 바탕으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1353년에는 황제를 압박하여 자신의 아들인 아이유시리다라를 황태자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고 같은 고향출신인 환관 박불화(朴不花)를 군사책임자인 동지추밀원사(同知枢密院事)로 삼아 군사권도 장악하였다. 기황후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원나라에서는 고려의 풍속이 크게 류행되기 시작하였다. 이를 고려양(高丽样)이라고 한다. 고려의 복식과 음식들이 원나라의 고위층들을 중심으로 류행되기 시작했고 명문가에 속하려면 고려녀자를 안해로 맞아야 한다는 생각이 퍼졌다. 한편 기황후가 원나라 정치를 쥐락펴락하게 되자 고려에 남은 그녀의 가족들도 덩달아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원나라에서는 그녀의 아버지 기자오를 영안왕(荣安王)으로, 부인을 왕대부인으로 봉하였으며 선조 3대를 왕의 호로 추존하였다. 또한 기황후의 오빠 기철(奇辙)을 원나라의 참지정사, 기원(奇辕)을 한림학사로 삼자 고려에서도 이들을 덕성부원군, 덕양군에 봉할수밖에 없었다. 기씨집안이 고려를 넘어서 원나라로부터 힘을 얻게 되자 고려조정은 기씨집안의 눈치를 보지 않을수가 없는 형편이 되였다. 문제는 이 기씨집안의 아들들이 원나라의 힘을 고려에 유익하게 쓰기보다는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리용했다는데 있었다. 기황후도 가족들을 위해 고려에 대한 내정간섭을 지나치게 했다. 기씨집안의 악행은 결국 고려의 공민왕이 즉위한후 원나라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이들을 비밀리에 제거하는것으로 끝이 났다. 이때도 기황후는 공민왕을 제거하고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세우려고 고려를 침공하였으나 이때 이미 원나라의 국세가 기울고 고려가 원나라의 군대를 잘 막아내서 실패로 그쳤다. 물론 고려녀인인 기황후가 원나라의 황후가 되여서 좋은 점도 있었다. 충렬왕때 시작되여 80년간 지속된 공녀징발이 금해진것도 이 시기였고 고려가 원나라의 테두리안에 들어간후 계속 제기되였던 립성론(立省论) 즉 고려의 자주성을 인정하지 않고 원나라의 한개 성으로 만들자는 론의가 사라진것도 이때였다. 원나라는 순제때 문치주의 정치를 펼치면서 문화적으로는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순제가 즉위하기전에 있었던 왕위다툼의 여파가 여전히 남은 상태에서 기황후가 정권을 잡은후 시작된 황위를 둔 정쟁이 원나라의 힘을 점차 약화시켰다. 기황후는 남편 순제에게 황제자리에서 물러나 장성한 자신의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줄것을 요구했다. 순제는 이를 거부했다. 그런 가운데 황태자의 반대파와 지지파사이에 내전이 일어났다. 황태자반대파의 지도자 볼루드 테무르가 1364년에 수도를 점령했을 때 기황후는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 이 내전은 결국 황태자지지자인 코케 테무르(扩廓帖木儿)가 1365년에 대도를 회복하면서 수습되였다. 1365년에 제1황후이던 바얀 후투그가 죽자 기황후는 제2황후라는 딱지를 떼고 원나라의 제1황후로 올라섰다. 그러나 그녀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원나라의 정치가 문란해지자 홍건봉기가 일어나면서 원나라는 수습할수 없는 혼란으로 치닫게 되였다. 1368년에 마침내 주원장이 이끄는 명나라대군이 원나라 수도 대로를 점령하자 원나라왕실은 피난길에 올랐다. 기황후도 이때 남편 순제와 아들 아이유시리다라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을 떠나면서 기황후는 구원병을 보내주지 않는 고려를 원망했다고 한다. 원나라왕실은 응창부로 수도를 옮겼다가 카라코룸까지 피난했다. 피난도중에 순제는 죽고 그 자리를 기황후의 아들 아이유시리다라가 이어 북원의 두번째 황제로 되였다. 대도를 떠나 응창부까지 가는 동안의 기황후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기황후의 최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는것이 없다. 한때 동아시아와 유럽을 호령했던 대제국 원나라의 황후였던 고려녀인 기황후는 14세기말에 고려와 원나라의 력사에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상당한 역할을 한것만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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