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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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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중국공산당 최대 반역자 장국도 댓글:  조회:7137  추천:2  2014-06-15
중국공산당 최대 반역자 장국도   (번역)     장국도(张国焘)는 자가 개음(恺荫)이고 특립(特立)이라는 이름도 가지고있다. 1897년 11월 14일에 강서성 평향시 상률현 금산향 산명촌에서 출생한 장국도는 1916년에 북경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여러가지 새로운 사조의 영향을 받았다. 힘없고 가난하며 내우외환에 시달리고있는 당시의 시국에 대해 불만을 품고있던 장국도는 반일애국의 청원시위활동에 참가하였으며 학생구국회에서 성립한 《민국》잡지사에서 적극적으로 애국활동에 종사했다. 1919년 5월 4일에 폭발된 5.4운동에서 장국도는 등중하, 황일규, 고군우 등과 함께 핵심적인 지도작용을 일으켰다. 모든 애국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장국도는 지대한 열정으로 이 운동에 뛰여들었다. 1920년 4월에 장국도는 리대소의 건의로 맑스주의저작과 사회주의를 소개한 서적을 계통적으로 학습했다. 7월초에 북경의 국세가 긴장해지자 리대소는 장국도에게 상해로 가서 진독수와 함께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보라고 했다. 진독수를 만나보고 북경에 돌아온 장국도는 리대소에게 진독수가 상해에서 공산당창건준비에 착수하고있는 정황을 회보했다. 리대소는 당창건조건이 초보적으로 구비되였다고 인정하면서 찬동을 표시했다. 일련의 준비를 거쳐 10월에 리대소, 장국도, 장신부 세 사람은 북경대학 도서관 주임실에서 회의를 열고 정식으로 북경공산당조직을 성립하고 후에 여러 사람을 가입시켰다. 11월말에 북경공산당조직에서는 회의를 열고 중국공산당북경지부를 명명하기로 결정하고 리대소를 서기로 추천했다. 그리고 장국도에게 조직사업을 책임지게 하고 라장룡이 선전사업을 책임지도록 결정했다. 리대소의 지도하에 장국도, 등중하, 라장룡, 류인정 등은 사회주의청년단을 조직했다. 북경공산당조직이 성립되여서부터 중국공산당 1차대표대회가 열리기까지 장국도는 맑스주의리론학습에서나 로동자들을 조직하는 사업에서나 모두 매우 큰 성과를 이루었다. 이는 장국도의 정치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한페지로 되였다. 1921년 7월에 중국공산당 제1차대표대회가 상해에서 열렸다. 장국도는 북경공산당조직의 대표신분으로 회의에 참석했는데 추천에 의해 회의를 주관했다. 그번 회의에서 장국도는 중앙국(中央局) 성원으로 선거되였으며 조직사업을 책임졌다. 회의후 중국로동조합서기부 주임 겸 《로동주간》 주필로 임명된 장국도는 로동운동을 지도했다. 중국공산당 제3차대표대회에서 장국도는 국공합작을 반대했기에 중앙위원으로 당선되지 못했다. 의기소침하여 북경으로 돌아온 장국도는 양자렬과 결혼했다. 북경에서 반역자의 고발로 장국도와 양자렬은 함께 체포되였다. 적들의 고문에 견디지 못한 장국도는 죽음이 두려워 리대소, 진독수, 담평산, 장곤제 및 북경의 공산당원들을 고발하여 공산당을 배반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력사는 당시에 누구도 몰랐기에 장국도는 조직을 속이고 적과 투쟁한 영웅으로 되였다. 중국공산당 제4차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거된 장국도는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사업했다. 국민당우파가 공산당을 배척하고 타격하며 국공합작을 파괴하는 음모활동에 대해 장국도는 타협하고 양보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국민당 제2차대표대회, 중산함사건, 당무사건정리 이 3대사건에 대해 장국도는 모두 국민당에 양보했다. 1926년말에 장국도는 중공호북구당위 서기직을 담임했다. 대혁명이 실패한후 장국도는 림시중앙상무위원회 위원직을 맡았는데 남창으로 가서 남창봉기를 제지하려고 했다. 그의 의견이 부결된후 그는 봉기에 동의했을뿐만아니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봉기의 전과정에 참가했다. 1928년에 장국도는 구쏘련으로 건너가 중국공산당 6차대표대회에 참가했으며 제6기 1중전회에서 중앙정치국위원으로 당선되였다. 회의후 그는 중국공산당 공산국제대표로 모스크바에 남았다. 1931년 4월에 중공중앙에서 장국도, 진창호, 심택민을 악예환쏘베트구역에 파견했다. 장국도는 악예환쏘베트구역 중앙국 서기 겸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임명되였다. 장국도는 권력을 장악한지 얼마 안되여 악예환특위와 홍군에 대해 전면적으로 개조했다. 그는 “볼세비크의 개조”, “숙반강화” 등의 명의를 내걸고 악예환쏘베트구역의 반대파숙청을 확대하여 수많은 혁명동지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1935년에 홍군 제1방면군과 제4방면군이 합류하자 8만여명의 군대를 장악한 장국도는 1만여명의 군대밖에 장악하지 못한 모택동과 맞서 따로 중앙을 세우고 당과 홍군을 분렬하려고 시도했다. 섬북에 도달한후 1937년 3월에 연안에서 열린 정치국확대회의에서 당중앙에서 장국도의 착오를 비판하고 “장국도동지의 착오에 대한 결정”을 통과했다. “결정”은 장국도가 많은 중대한 정치문제에서 원칙적인 착오를 범했다고 지적했다. 소수가 다수에 복종하는 조직원칙에 따라 장국도는 “나의 착오”라는 서면반성문을 썼다. 그제야 장국도는 섬감녕변구정부 대리주석으로 임명되였다. 1938년 4월 4일은 국공쌍방에서 공동으로 황제릉에 제사를 지내는 날이였다. 섬감녕변구정부 대리주석의 신분으로 이 활동에 참가한 장국도는 황제릉앞에서 국민당 서안안무공서주임 장정문을 만났다. 제사가 끝난후 장국도는 호송하는 사람들에게 “내 서안에 볼일이 있으니 먼저 가시오”하고 경호원 한사람만 데리고 국민당방면의 차에 앉아 거들먹거리며 사라졌다. 무한에 돌아온후 주은래 등이 여러번이나 권고했으나 장국도는 이미 장개석에게 투항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장국도는 1938년 9월에 중경에 도착했다. 대립은 장국도에게 국민당특종정치문제연구실을 책임지게 했다. 군통특무조직에 가입한 장국도는 전문 공산당을 대처하는 특공일군들을 훈련시켰다. 공을 세우기 위해 장국도는 대립에게 “팔로군129사를 투항시키겠다”고 제기했다. 그는 승산이 있다는듯 “129사는 주요하게 홍군4방면군을 개편한 부대인데 홍군4방면군은 내가 거느리던 대오입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장국도의 오산이였다. 장국도가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대립은 화가 나서 부하들에게 당장 장국도를 불러오라고 명령했다. 얼마후 부하들이 장국도를 데려오자 대립은 장국도를 손가락질하며 한바탕 욕설을 퍼부은후 즉시 장국도의 일체직무를 철소하고 전용차를 포함한 일체 생활대우를 취소한다고 선포했다. 리용가치를 잃은 장국도는 이렇게 국민당에게 버림받았다. 1946년에 관계를 통해 사후구제총서 강서분서 서장으로 된 장국도는 “금의환향”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는듯한 느낌이 들어 기뻐했다. 그러나 장국도가 일을 맡은후 그와 원쑤를 맺었던 왕릉기가 곳곳에서 그와 맞섰다. 울분을 억누르며 2개월동안 참고있던 장국도는 더는 해먹을수 없다고 생각되여 사직하고 강서성을 떠나 상해로 피해갔다. 1949년에 장가왕조의 대세가 기울어지자 장국도는 황망히 가족을 데리고 대만으로 도망쳤다. 대북에 세를 맡은 그는 계속 국민당을 위해 일하려고 생각했지만 국민당은 그에게 “사업”을 배치하지 않았을뿐만아니라 그의 생활형편에 대해서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국민당제6기 중앙위원”이란것을 언제나 마음속에 잊지 않고있었으나 국민당은 그를 잊고있었다. 얼마후 그가 거주하고있는 주택은 행정원의 비준을 맡아 동남행정장관공서에 강제로 징수되였다. 그는 노기충천하여 행정원을 찾아가서 도리를 따졌지만 아무런 결과도 보지 못했다. 집을 빼앗긴 장국도는 다시 가족을 데리고 당시 영국식민지였던 향항으로 이주했다. 1956년에 중국공산당 제8차 대표대회가 열린후 국내형세가 많이 느슨해진것을 본 장국도는 귀국하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 중공중앙에 자신의 요구를 전달했다. 얼마후 중공중앙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장국도한테 보냈다. 그 사람은 장국도한테 “귀국하는건 문제없다. 하지만 전제조건은 착오를 승인하는것이다”라는 중공중앙의 뜻을 전달했다. 장국도는 이런 조건을 예상했지만 정작 듣고나니 망설이였다. 그는 재삼 생각해보다가 결국 귀국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1961년에 장국도는 미국 캔자스주대학의 청탁을 받고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캔자스주대학에서 매달 2000원(향항돈)씩 주는 돈으로 생활비를 해결했다. 그후 10여년동안 장국도는 판권을 팔아 생활을 유지했다. 1966년에 향항을 떠나 카나다로 간 장국도는 카나다에서 류학중인 큰 아들 장해위한테 몸을 의탁했다. 1977년 12월에 갓 80돐 생일을 쇤 장국도는 갑자기 중풍에 걸려 관청에서 꾸린 로인무료병원에 입원했다. 1979년 12월 3일의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밤이였다. 카나다의 토론토에 있는 한 로인병원의 병상에 누워있던 장국도는 엄한의 침습에 시달리다가 비참하게 이국타향에서 객사했다. 그의 옆에는 간호원도 없었고 친인도 없었다.    
59    중국 최대 한간 왕정위 댓글:  조회:7389  추천:0  2014-06-09
중국 최대 한간 왕정위   (번역)   왕정위(汪精卫)의 본명은 왕조명(汪兆铭)이고 자는 계신(季新), 호는 정위이다. 1883년 5월 4일에 광동성 삼수현서(三水县署—지금의 광동성 불산시 삼수구 하구진)에서 출생한 왕정위는 1904년 9월에 동경정법대학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서방의 민주사상을 접촉했다. 그때로부터 그의 가슴에는 봉건전제제도를 뒤엎고 서방식민주공화국을 건립하겠다는 신념이 있게 되였다. 1905년 7월에 손중산을 만나서 동맹회에 가입했고 동맹회장정을 작성하는데 참여했으며 한달후 동맹회 평의부 평의장으로 임명되였다. 그후 “정위”라는 필명으로 《민보》에 《민족의 국민》, 《혁명의 추세를 론함》 등 일련의 문장을 발표하여 3민주의 사상을 선전했으며 강유위, 량계초 등 개량파의 황제보호론을 호되게 꾸짖어 손중산의 호평을 받았다. 1907초에 손중산을 따라 남양으로 들어간 왕정위는 동맹회분회를 세우고 남양혁명당보인 《중흥일보》의 주필을 맡아 보황당의 《남양총회보》와 론전을 벌렸다. 1908년에 먄마에 동맹회 앙광분회를 세웠는데 그해 3월에 왕정위는 말레이시아의 삐낭시(槟城)에서 화교거부 진경기의 딸 진벽군을 알게 되였다. 그후 싱가포르에서 동맹회 남양지부를 세우는 등 사업을 하면서 혁명경비를 마련했다. 1909년 10월에 남양에서 일본으로 들어가 《민보》의 주필을 담당하면서 비밀리에 《민보》 제25기와 제26기를 발행했다. 1910년 1월에 황복생 등과 함께 북경에 돌아와 수진사진관을 꾸리고  암암리에 섭정왕 재풍암살을 계획했다가 일이 탄로난후 경찰에 체포되여 종신감금형에 언도되였다. 처음에 그는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려고 결심했으나 숙친왕 선기의 구슬림에 넘어가 뜻을 굽히고말았다. 왕정위는 1912년초에 상해에서 진벽군과 결혼식을 올렸다. 왕정위와 진벽군은 6남매를 보았는데 다섯째가 요절한외에 나머지는 모두 장수했다. 1925년 3월에 손중산이 사망되고 그해 6월 26일에 왕정위의 주최하에 국민당중앙정치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는 국민당총리의 칭호를 영원히 손중산에게 남겨주고 이후 국민당은 집체령도의 위원제를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회의에서는 또 손중산생전의 대원수부행정기구를 철소하고 국민당의 최고행정기관을 국민정부로 고치기로 결정했다. 7월 1일에 국민정부가 정식으로 성립되였는데 왕정위가 국민정부 상무위원회 주석 겸 군사위원회 주석, 선전부 부장 등 직에 임명되였다. 그는 또 1926년 1월에 국민당 2차 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되였다. 그러나 “중산함사건(‘3.20사건’이라고도 하는데 1926년 3월에 장개석이 국공합작을 파괴하고 혁명의 령도권을 쟁취하려고 의도적으로 중국공산당을 배척하고 타격한 정치사건)”이 발생된후 핍박에 의해 사직하고 프랑스로 갔다. 1927년 2월에 프랑스를 떠나 구쏘련을 통해 귀국했다. 구쏘련에 들렸을 때 쓰딸린이 이 국민당좌파령수를 접견했다. 귀국후 무한국민정부 주석직을 맡은 그는 혁명을 배반한 장개석과 권력싸움을 벌렸다. 1927년 4월 5일에 왕정위와 진독수는 련명으로 “국공량당령수 왕조명, 진독수의 련합선언”을 발표했다. 4월 18일에 남경의 장개석국민정부가 성립되였다. 장개석은 국민당중의 원로 반공분자 호한민을 청하여 국민정부 주석을 맡게 하고 자신은 중앙군위주석과 국민혁명군 총사령을 맡았다. 이렇게 국민당은 공개적으로 왕정위의 “무한정부”와 장개석의 “남경정부”로 분렬되였다. 왕정위는 7월 15일에 무한에서 공산당을 등지고 장개석과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후에도 줄곧 장개석과 암투를 벌렸다. 왕정위는 12월 16일에 정계에서 은퇴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진벽군과 함께 프랑스로 갔다. 그는 1929년에 귀국한후 “중국국민당 제2기 중앙집행감독위원련석회의”의 명의로 명령을 발부하여 각지의 “호당구국군(护党救国军)”에 위임장과 부대번호를 내주었다. 1928년 11월에 진공박(陈公博) 등이 상해에서 개조파를 성립했는데 왕정위가 수령으로 선거되였다. 1930년에 왕정위는 풍옥상(冯玉祥), 염석산(阎锡山), 리종인(李宗仁)과 련합하여 장개석을 반대하려다가 실패한후 향항으로 도망쳤다. 1931년에 왕정위는 장개석을 반대하는 각파의 세력을 모아가지고 광동에서 따로 국민정부를 세웠다. 9.18사변후 전국인민들이 각 당파가 단합하여 일치하게 항일할것을 요구하자 왕정위는 다시 장개석과 합작했다. 1935년 11월 1일에 국민당은 제5기전국대표대회를 열었는데 4기6중전회가 개막되였다. 개막식이 결속된후 중앙위원들이 대문앞에 모여서 사진을 찍을 준비를 했다. 왕정위는 득의만면하여 배를 쑥 내밀고 맨 앞줄의 걸상에 앉았다. 그의 옆의 장개석자리는 비여있었다. 중앙위원회 주석인 장개석은 무슨 영문인지 그때까지 회의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사진사가 사진을 찍을 준비를 하고있는데 갑자기 사진기를 둘러싸고있던 사람들속에서 한명의 기자가 불쑥 달려나오면서 총을 꺼내들고 왕정위를 향해 련속 세방을 쏘아댔다. 총소리와 함께 왕정위가 쓰러지자 대경실색한 사람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왕정위의 경호원 양개평은 자객을 향해 련발사격을 해댔다. 그때에야 도착한 장개석은 왕정위암살을 지시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중상을 입은 왕정위는 요행 목숨을 건졌다. 1936년에 서안사변이 발생된후 왕정위는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장개석을 대신해 정권을 장악할 준비를 했다. 장개석이 남경으로 돌아온후 왕정위는 국민당정치위원회 주석을 담임했다. 1937년 7월에 항일전쟁이 폭발되자 왕정위는 국방최고회의 부주석, 국민당 부총재, 국민당참정회의장으로 선발되였는데 당, 정 권력이 모두 장개석의 아래였다. 1938년 12월에 웥남의 하노이로 도망쳤다가 귀국하여 남경으로 돌아온 왕정위는 “염전(艳电—왕정위가 1938년 12월 29일에 림백생을 시켜 장개석에게 보낸 전보식성명으로서 일본에 대한 타협정책을 지지한다고 표시한 친일성명)”성명을 발표했다. 1938년까지 일본에 투항한 괴로군은 7만 8000명이였지만 왕정위가 일본에 투항한후 괴로군수는 14만 5000명으로 증가되였다. 그후 일본의 주구로 된 괴로군수는 놀라울 정도로 늘어나 100만명을 넘었다. 후에 왕정위는 일본측대표와 비밀리에 “중광당협의(重光堂协议)”를 체결하고 공개적으로 일본과 합작했다. 왕정위는 1940년 3월 20일에 남경에서 괴뢰민국정부를 성립했다. 그해 11월 30일에 남경에서 “화일기본조약(华日基本条约)”체결의식을 거행했는데 왕정위는 행정원장의 신분으로 출석하여 조약에 서명하고 자체로 주석직을 맡았다. 일본에 충성한 매국역적 왕정위는 1944년 11월 10일에 일본의 나고야시에서 병으로 악명높은 일생을 마감했다. 왕정위의 안해 진벽군도 중국의 최대 녀한간이였다. 진벽군은 1891년 11월 5일에 말레이시아의 삐낭시(槟城)에서 태여났는데 아버지 진경기는 남양거부였다. 일본이 투항하자 그녀는 국민당감옥에 갇혔다. 1949년 4월에 소주가 해방된후 진벽군은 사자구감옥에서 공안국 간수소로 이송되였다. 7월 1일에 상해가 해방된후 진벽군은 또 소주감옥에서 상해제람교감옥으로 압송되였다. 처음에 진벽군은 중국공산당과 인민정부에 매우 깊은 저촉정서를 가지고있어 자신이 한간이란것을 승인하지 않았다. 진벽군은 국민당감옥에 있을 때에는 조건이 악렬하여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공산당감옥에서 인도주의정신으로 대우를 잘해주자 너무 뜻밖이여서 “내가 반평생 공산당을 반대했는데 공산당이 이렇게 날 잘 대해주다니? 하하하. 이건 다 내 신분이 특수하기때문이지”하고 득의양양하여 어깨를 으쓱했다. 새중국이 성립된후 국가 부주석인 송경령과 중앙인민정부 위원인 하향응이 련명으로 감옥에 갇혀있는 진벽군한테 편지를 써보냈다. 송경령과 하향응은 일찍 진벽군과 사업을 함께 해온 동료였고 손중산의 령도아래서 함께 혁명사업을 해온 동지였으며 사적으로도 감정이 깊었다. 송경령과 하향응은 함께 모택동과 주은래를 만나 “진벽군문제는 왕정위와 다름니다. 나라를 팔아먹고 적에게 투항하는데 지지하고 참여했지만 결책자는 아닙니다. 적당한 시기에 진벽군의 태도를 보아 석방해주기 바랍니다”라고 제기했다. 모택동과 주은래는 송경령과 하향응의 의견을 존중하여 “진벽군이 죄를 승인하는 간단한 성명만 발표하면 중앙인민정부는 명령을 내려 진벽군을 석방해주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진벽군은 송경령과 하향응의 호의를 거절하면서 말했다. “내가 일본과 화친한것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였는데 무슨 죄가 있겠는가? 나는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후회하지도 않는다. 나는 달갑게 감옥에서 일생을 마치겠다.” 진벽군은 또 어이없게도 “나는 장개석을 반대했고 당신들 공산당도 장개석을 반대했으니 우린 동지라고 말할수 있어. 그러니 날 장개석역적처럼 대해선 안돼”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1959년 6월 17일에 진벽군은 상해제람교감옥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향년 68세였다.     
58    강청이 태여나서 자살하기까지 (5) 댓글:  조회:10022  추천:1  2014-06-01
강청이 태여나서 자살하기까지   그녀는 바로 녀황제를 꿈꾸고있었던것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분노케 했다. 1976년 4월 4일의 청명절을 기하여 천안문광장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주은래추모행사를 벌리면서 그동안 쌓였던 강청에 대한 반감과 분노를 토해냈으니 그것이 바로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천안문사태였다. 그날 저녁에 중공중앙정치국에서는 회의를 소집하여 천안문사태를 “반혁명사건”으로 규정하고 다음날 병력을 투입하여 천안문광장의 시위군중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4월 7일 오전에 모원신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모택동은 등소평의 모든 직위를 해제하고(등소평이 천안문사태의 주동자로 알려졌음) 화국봉을 국무원총리에 임명했다. 그날 오후에 모택동은 다시 화국봉을 중공중앙 제1부주석에 임명함으로써 등소평은 다시 타도되고 화국봉이 정식으로 후계자로 선정되였다. 화국봉은 모택동의 후계자로서 정국을 수습하면서 강청을 견제하였지만 강청은 그러한 화국봉을 안중에 두지 않고 모택동이 사망된후의 정권장악을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1976년 9월 9일 새벽 0시 10분에 모택동이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모택동이 세상을 떠나자 중국의 정국은 엄청난 회오리에 휘말렸다. 4인방인 왕홍문과 장춘교가 높은 지위에 들어갔기때문에 강청은 “모택동의 부인”이라는 자격으로 당당하게 화국봉을 제압할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녀는 야심을 드러내고 화국봉과의 마지막 일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녀의 그러한 계획은 엽검영 등 로간부들에 의해 하루아침에 수포로 돌아가고말았다. 1976년 10월 6일에 화국봉과 엽검영은 4인방을 일거에 짓부셔버렸다. 1977년 7월에 중국공산당 10기 3중전회에서 강청의 당적을 영원히 박탈하고 당내외의 모든 직무를 해임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981년 1월 25일에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은 강청에게 반혁명집단의 주범으로 사형을 선고하고 2년후에 형을 집행하도록 하였다. 1983년 1월에 최고인민법원 형사법정은 판결문에서 그녀의 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 모든 정치적권리를 종신토록 박탈한다고 선고하였다. 1991년 3월 15일에 강청은 몹시 앓아서 공안병원에 입원했다. 병석에서 강청은 모택동을 몹시 그리워했다. 그녀는 모택동의 친필서한이며 자기와 모택동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서 모택동을 그리워했다. 그녀가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딸 리눌이 늘 면회를 왔다. 1991년 5월 14일에 허약하고 절망에 빠진 강청은 새벽 3시 30분에 자살을 하였다. 향년 77세였다. 이 소식을 들은 리눌이 와서 사망통지서에 서명했고 그 어떤 장례식도 치르지 않는데 동의했다. 사흘후인 5월 18일에 강청의 유체를 화장했는데 그 자리엔 리눌도 없었고 모택동이나 강청의 친적이 한 사람도 없었다. 리눌의 요구에 의해 골회함은 리눌에게 보내주었다. 그때 전국, 전세계에선 강청의 사망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있었다. 1991년 6월 4일에 중국정부에서 《시대》주간에 이 소식을 정식 전세계에 보도했다. “주석님, 전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의 학생이며 전사인 강청이 당신을 보러 갑니다!” 이것이 강청이 자살하기전에 남긴 유일한 유서였다.      
57    강청이 태여나서 자살하기까지 (4) 댓글:  조회:7183  추천:0  2014-06-01
강청이 태여나서 자살하기까지 (4)     그해 8월에 중앙문화대혁명소조 조장 진백달이 병으로 휴직하는 동안 강청은 제1부조장 겸 대리조장을 맡아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후 중앙문화대혁명소조는 조직과 권한이 강대해져 중공중앙서기처와 중공중앙정치국을 압도하였다. 이로써 강청의 권한은 더욱 막강해져 “중앙수뇌”로서 사실상 모택동, 림표, 주은래, 주덕의 다음 가는 권력을 휘두르게 되였다. 1966년 11월 28일에 강청은 인민대회당에서 개최된 수도 문화계의 무산계급문화대혁명대회에서 “문예혁명의 기수”로 등극함과 동시에 중국인민해방군 문화사업고문을 맡았다. 1969년 4월 28일에 거행된 중국공산당 9기 1중전회에서 강청은 중공중앙정치국 위원으로 들어가 공식적으로 상무위원 다음의 자리에 오르게 되였다. 1971년 9월 13일에 모택동의 후계자로 지목되였던 부주석 림표가 반란사건으로 사망되고 1972년 1월에 강생이 병으로 물러난후 강청은 지위가 3~4위로 올랐다. 강청의 권력이 급부상됨에 따라 장춘교와 요문원의 위치도 강청의 다음에 오르게 되였다. 림표사건이후 건강상태가 점점 악화된 모택동은 79세의 나이를 이기지 못하고 1972년 1월에 심장병으로 드러누웠고 4월에는 또 주은래가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는 모택동과 주은래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고하는것이기도 하였다. 모택동은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문제에 부딪히게 되였다. 원래 후계자로 지목되였던 림표가 타도된후 그의 뒤를 이을 마땅한 인물이 없었기때문이였다. 강청은 내심 자기가 후계자자리에 오를수 있다는 기대를 하였지만 모택동은 그녀를 안중에 두지도 않았었다. 1973년 3월에 강청은 서렬에서 한참 뒤로 밀려나고 모택동의 총애를 등에 업은 왕홍문이 강력한 후계자로 부상되였다. 강청은 그러한 왕홍문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장춘교, 요문원과 함께 일종의 정치사조직인 “4인방”을 결성하여 정치적주도권을 잡아나갔다. 1974년 1월에 강청 등은 모택동의 승인을 받고 제2차 문화대혁명이라 할수 있는 “비림비공(림표와 공구를 비판하는)”운동을 일으켰다. 강청 등은 이 운동을 통하여 공자의 극기복례는 노예제도를 복귀시키려는것이고 림표의 “반혁명수정주의 로선”역시 극기복례를 통하여 자본주의를 복귀시키려는것이라고 공격하였다. 표면적으로는 림표와 공자를 비판하였지만 그 리면에는 강청의 최대 정치적 걸림돌인 주은래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가 숨어있었던것이다. 1974년 6월에 암진단을 받았던 주은래의 병세가 위중해져 병원에 입원하였다. 모택동과 주은래의 운명이 눈앞에 다가와있다는것을 감지한 강청은 그들의 사후에 정권을 장악할 새 내각을 구상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길 준비를 하였다. 주석에 강청, 국무원총리에 장춘교, 인민대표대회 위원장에 요문원… 그러나 모택동이 이미 그러한 사실을 간파하고있었던데다가 1973년에 국무원 부총리로 복권된 등소평이 주은래의 권력을 도맡아 행사함으로써 강청의 구상은 큰 난관에 부딪히게 되였다. 1974년 7월에 모택동은 중앙정치국회의를 소집한 자리에서 강청과 4인방을 “상해파”, “4인소종파”라고 지칭하면서 그들의 정치적행동에 대하여 엄중히 경고하였다. 이로써 강청의 정치적무대는 많이 좁아지게 되였다. 1974년 10월에 거행된 중앙정치국회의에서 강청은 자신의 지위를 만회하기 위하여 주은래와 등소평을 공격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1974년 12월에 모택동은 왕홍문을 불러 “4인방으로 활동하지 말라! 네사람이 함께 종파를 무어 일하는것은 좋지 않다”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1975년 1월에 발표한 인사문제에서 주은래와 등소평체제를 강화하고 왕홍문을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명단에서 제외했다. 이로써 왕홍문을 전면에 내세우고 공작을 준비하려했던 강청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말았다. 1975년 4월에 강청은 북경대학과 청화대학에서 강연하면서 “현재 당의 최대 위험은 교조주의가 아니라 경험주의다”고 비판하였다. 그녀가 말한 “경험주의”는 바로 경험이 풍부한 주은래와 주덕, 등소평 등의 로간부들을 지칭한것이다. 그리고 장춘교와 요문원을 책동하여 《인민일보》,《광명일보》,《문회보》 등에 경험주의를 비판하는 문장을 게재하게 했다. 이에 모택동은 “경험주의와 교조주의에 대한 반대를 포함하여 수정주의를 반대한다고 주장했어야 한다. 량자는 모두 맑스-레닌주의를 수정한것으로서 다른 한쪽은 놔두고 한쪽만 주장해서는 안된다. 각지의 상황이 다른것은 모두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수준이 낮아서 그런것이다. 어쨌든 교육을 시켜야 한다. 다년간 맑스-레닌주의를 제고시키는것이 좋다”라는 지시를 내리고 강청 등을 겨냥하여 “우리 당에서 맑스-레닌주의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고 사실은 잘 모르면서 걸핏하면 남을 훈계하려 한다”라고 비판하였다. 그리고는 정치국에서 이 문제를 론의하라고 지시하였다.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중공중앙정치국에서는 4월 27일에 회의를 소집하여 강청의 문제에 대한 론의를 하였으며 그 론의에서 어쩔수없이 강청은 자아비판을 해야만 했다. 이로써 강청은 문혁이후 최대의 정치적위기를 만나게 되였다. 1975년 9월에 모택동의 병세가 더욱 위중해져 말을 잘 못할 정도였으며 주은래도 4차수술을 받았다. 그 시기 모택동은 조카 모원신을 곁에 두고 자기와 중앙정치국사이의 특수련락원으로 삼았다. 모택동의 지시가 모두 모원신을 통해서 전달되게 된것이였다. 그러나 모원신은 강청을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로 그녀와 아주 각별한 사이였다. 이 기회를 리용하여 강청은 모원신과 결탁하고 잠간동안 “최고지시”를 반포하는 대권을 장악하였다. 모원신은 모택동에게 등소평이 문화대혁명의 성과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지 않고 류소기의 수정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을 하지 않는다고 건의하였다. 그후 정국은 등소평 등을 우경주의로 몰아갔다. 이로써 등소평의 지위는 다시 위축되였다. 1976년 1월 8일에 중국공산당 중앙 부주석, 국무원총리, 전국정협 주석 주은래가 암으로 사망되였고 이어 주덕도 세상을 떠났다. 주은래와 주덕의 죽음은 강청에게 무엇보다도 기쁜 소식이였다. 최대의 정적이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기때문이였다.  주은래가 세상을 떠난후 국무원총리의 자리는 비여있게 되였다. 리치대로 한다면 당연히 제1부주석인 등소평이 총리직을 맡아해야 했지만 1976년 2월 2일에 하달된 “중공중앙통지”에서는 뜻밖에도 화국봉을 총리로 임명하였다. 이는 등소평에 대한 모택동의 신뢰가 떨어지고 대신 화국봉에게 후임을 맡긴것을 의미한다. 1976년 2월 25일에 중공중앙은 각 성, 시, 자치구와 각 군부책임자회의를 개최하여 등소평에 대한 비판을 공개화 했다. 그 시기 강청 등 4인방은 모든 언론을 총동원하여 등소평과 수정주의비판에 열을 올렸다. 이로부터 화국봉이 중공중앙의 일상업무를 주관하게 되였으며 이 기회를 리용하여 강청은 다시 전면에 나설수 있었다. 1976년 3월 2일에 강청은 12개 성, 구 회의를 소집하여 등소평을 신랄하게 비판한 다음 마치 녀황제가 된듯한 어조로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무측천이라고 류언비어를 퍼뜨립니다. 나는 계급문제에 있어서는 그녀를 릉가하지만 능력면에서는 그녀에 미치지 못합니다. 림표에게 편지를 써서 나를 무측천이라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영광스러움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무측천은 녀자로서 봉건사회의 황제였습니다. 동지 여러분! 평범하지 않습니다. 정말 평범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남편도 병이 아주 심하였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도와 국사를 처리했으며 그러면서 재능을 키워나갔던것입니다. 무측천은 비범한 녀걸인데 그들은 비렬한 방법으로 무측천을 비방하고 나를 비방하였습니다…”  
56    강청이 태여나서 자살하기까지 (3) 댓글:  조회:7538  추천:1  2014-06-01
강청이 태여나서 자살하기까지 (3)     중공중앙정치국에서는 모택동의 뜻에 따라 강청과의 결혼을 비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강청에 대해서는 “첫째, 모택동과 하자진의 부부관계가 공식적으로 정리되지 않고 그대로 존재하는 한 강청은 모택동의 부인으로 행세할수 없다. 둘째, 강청은 모택동의 일상생활과 건강을 책임지고 돌보아야 하며 차후 그 누구도 당중앙에 이와 류사한 요구를 제기할 권리가 없다. 셋째, 강청은 모택동의 사적인 업무와 생활에만 간여해야 하며 20년동안 당내의 어떠한 직무도 맡는것을 금한다. 당내의 인사문제와 정치활동에도 절대 참여할수 없다”는 규정을 두기로 했다. 이것이 바로 후에 “약법삼장(约法三章)”이라고도 일컬어진 규정이다. 그후 강청은 이 규정에 묶여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기전까지는 어떠한 정치활동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1938년 11월에 강청은 24세의 나이로 자기보다 21살이나 많은 모택동(당시 45세)과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후에도 강청은 명분상으로는 여전히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였지만 실제로는 집에서 모택동의 생활을 돌보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그 시기 강청은 행동을 극히 조심하면서 항상 미소를 잃지 않되 말을 삼가했다. 그리고 모택동을 위해서 세타를 짜고 맛있는 료리를 만들며 노래도 불러주었다. 집에 사람들이 찾아오면 모택동이 부를 때를 제외하곤 좀처럼 얼굴을 나타내지도 않았다. 그래서 모택동의 집을 방문하였던 어떤 외국기자는 그러한 강청의 인상에 대하여 “그녀는 솔직하면서도 겸손하고 사리에 밝은 현모량처 같았다”라고 기술하기도 하였다. 뛰여난 배우 출신답게 자기의 속마음을 철저히 숨긴채 얼마나 완벽하게 현모량처역을 잘 연기해내였는지 알수 있는 대목이다. 강청은 모택동과 결혼하기전에 이미 네번의 결혼경험이 있었으며 황경과 동거할 때에는 임신도 하였으나 상해에서 수술로 락태시켰다. 그때 그녀는 배우활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있었기때문에 아이를 원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모택동과 결혼한후에 그녀는 빨리 아이를 갖고싶어 했다. 아이가 있으면 무료한 시간을 달랠수도 있고 “모택동의 정식부인”자격을 확실히 다질수 있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1940년 8월에 그녀는 마침내 딸 리눌(李讷)을 낳아 모택동의 사랑을 받으면서 정식부인의 지위를 더 굳게 다질수 있었다. 그후 그녀는 재차 임신을 하였으나 더이상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락태수술을 한후 다시 임신중절수술을 하였다. 1949년부터 강청은 모택동을 따라 다닐수 있게 되였으며 료양차 쏘련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는 강청에 대한 규제가 많이 완화되였음을 의미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그녀는 일을 하고싶다면서 공식적인 직책을 요구했다. 당에서는 신중한 상의를 거쳐 그녀에게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 영화처부처장이라는 직함을 주었다. 이 직책은 매일 출근할 필요도 없을 정도의 한가한 직이였지만 어쨌든 그녀는 이때부터 당내의 공식적인 직함을 가지게 되였으며 또 이를 기점으로 정치에 대한 야망을 키워갈수 있었다. 그후 그녀는 또 전국영화지도위원회 위원(후에 문화부영화국고문으로 변경)을 겸임하면서 영화 《무훈전》과 유평백(俞平伯)의 《홍루몽간론》등 사상적으로 문제가 된다고 생각되는 문예들에 대한 비판운동에 앞장섰다. 1956년에 강청은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모택동의 생활비서로 임명받았다. 말이 생활비서이지 그것은 실제로 부부장급의 간부직이였기때문에 당내에서 그녀의 위상은 한층 높아졌다. 1963년 12월 12일과 1964년 6월 27일, 두차례에 걸쳐 문예문제에 관한 모택동의 지시가 나왔다. 모택동은 이 지시에서 건국이후 문예계의 사회주의적 개조의 성과가 보잘것 없으며 문련산하의 각 협회는 최근 몇년사이에 수정주의의 변두리로 굴러떨어졌다고 단언하였다. 이 지시는 정치적 운신의 폭을 넓히려고 계획하고있던 강청에게 절호의 기회로 다가왔다. 1964년 6월 5일~7월 31일 경극현대경연이 북경에서 거행되였는데 이 기간에 강청은 전면에서 나서서 경극혁명의 기수로 행세하면서 “경극혁명을 론한다”라는 제목으로 공개연설을 하였다. 1938년 8월 하순에 연안에 들어간 이후 27년만에 처음으로 공개석상에서 가진 그녀의 연설은 그후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위한 신호탄이 되였다. 그때부터 강청은 경극혁명이란 이름하에 문예계의 정풍운동을 주도하면서 극좌적사조를 선동하였다. 중간인물론, 사실주의심화론, 시대정신회합론 등을 비판하고 연구적가치가 있는 문예론들까지도 “자산계급적 문학주장”, “반혁명수정주의적 문학주장”으로 몰아 무자비한 비판을 가하였다. 그녀는 또 전국을 다니면서 로동자, 농민, 군인 등에 대해 묘사한 연극작품을 골라내 현대경극으로 개편하도록 지시하고 《홍등기》, 《사가방》, 《위호산을 지혜롭게 탈취》, 《백호퇀을 기습》,《룡강송》, 《해항》, 《홍색랑자군》, 《백모녀》 등을 우수한 경극현대화의 본보기로 선정하였다. 마침내 그녀는 “무산계급문예혁명의 기수”라는 칭호를 듣게 되였다. 경극의 현대화에 앞장서서 많은 성과를 올린 결과 그녀의 이름은 제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산동성대표명단에 올라갔다. 1964년 12월 20일~1965년 1월 4일에 제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회의가 북경에서 거행되였을 때 그녀는 인민대표자격으로 인민대회당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그녀는 정식으로 중국의 정치무대에 등장하였던것이다. “경극혁명을 론한다”는 연설발표이후 전국인대 대표에 당선될 때까지 그녀는 정치상에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 모든것은 그녀가 공개적으로 진행한것이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북경과 상해를 빈번하게 왕래하여 장춘교, 요문원 등과 접촉하면서 극히 비밀스런 정치활동을 준비하고있었다. 강청은 1962년 7월 6일에 오함의 신편 력사경극 《해서의 파직》을 보고 “이 극에는 심각한 정치적오류가 내재되여있으니 이 극의 공연이 금지되기를 주장한다”라고 말한바 있었지만 당시에는 그러한 그녀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후 반사회주의적인 작품에 대하여 “반드시 비판하고 철저히 비판해야 한다”는 비판의 열기가 한창 고조에 올랐을 때인 1965년 11월 10일에 상해 《문회보》에 《해서파직을 평함》이라는 글이 실렸다. 이 글은 강청이 8~9개월간에 걸쳐 준비한것으로 요문원의 이름으로 발표되였지만 실제로는 강청과 장춘교, 요문원 세 사람의 합작품이였다. 요문원은 이 글에서 《해서파직》을 일러 반당 반사회주의의 독초라고 비판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당시 북경시 부시장이면서 저명한 력사학자인 《해서의 파직》의 작자 오함을 직접적으로 겨냥한것이였다. 그 글이 발표된이후 11월 12일부터 26일까지 상해의 《해방일보》, 절강의 《절강일보》, 산동의 《대중일보》, 강소의 《신화일보》, 복건의 《복건일보》, 안휘의 《안휘일보》, 강서의 《강서일보》에도 차례로 실렸다. 그것은 화동의 6개지역이 모두 요문원의 문장을 지지하였음을 의미한다. 북경시 부시장이 걸려있는 문제라 망설이면서 대세를 관망하고있던 북경지역도 여론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11월 29일에 《해방군보》를 시작으로 《북경일보》, 《인민일보》, 《광명일보》에서 요문원의 글을 게재하였다. 상해에서 붙인 비판의 불씨가  마침내 북경지역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되였던것이다. 그후 이것은 단순히 학술계의 범위를 뛰여넘어 사회적인 대중정치운동으로 발전하여 문화대혁명의 시발점이 되였다. 1966년 3월에 강청은 문예정풍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위하여 장춘교, 진백달, 유지견, 진아정 등과 함께 론의하여 “부대문예공작좌담회기요”를 작성하였다. 당시에 모택동도 그 글을 읽어보고 만족해하면서 “우리는 반드시 당중앙의 지시에 따라 문화전선상의 사회주의대혁명을 꿋꿋이 전개하여 반동로선을 철저하게 짓밟아야 한다”라는 구절 뒤에 “이 반동로선을 짓밟은후에도 새로운 반동로선이 생길지 모르니 계속 투쟁을 견지해야 한다”라는 구절을 덧붙이는 등 세군데나 직접 수정을 가하기도 하였다. 1966년 4월 10일의 “기요”는 중국공산당중앙의 중요문건으로 채택, 발간되여 전국각지에 배포되였다. 문화방면에 있어서 대혁명이 없으면 안된다는것을 골자로 하고있는 이 “기요”는 바로 문예사업에 대한 강청의 의견을 철저하게 집행하도록 전국각지에 하달한것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이 문건에서는 “모택동동지가 친히 세차례나 수정하였다”, “림표동지가 위탁한것이다”라는 등의 문구가 삽입되여있어 그녀의 배후세력이 누구인지 잘 나타나 있었다. 이 “기요”는 강청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였다. 이로써 강청은 중국공산당내에서 위상이 강화되고 새로운 정치실세로 전면에 부각되기 시작하였던것이다. 1966년 5월 28일에 중공중앙에 “중앙문화대혁명소조”가 신설되여 강청은 부조장직을 력임하였다.      
55    강청이 태여나서 자살하기까지 (2) 댓글:  조회:6574  추천:0  2014-06-01
강청이 태여나서 자살하기까지 (2)     1934년 5~6월경에 리운학은 이름을 리학으로 바꾼후 다시 상해로 돌아와서 기독교상해청년회 로동부의 소개로 녀공야학교에서 가창과 연기 등을 가르쳤다. 그후 다시 서명청이 있던 포동의 야학교로 옮겨 장숙정(张淑贞)이란 이름으로 교사생활을 계속하였다. 1934년 10월말에 리운학은 상해조풍공원(지금의 중산공원)에서 옛친구 아락을 만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때 공청단중앙 련락원이였던 아락은 국민당특무들의 추적을 받고있던 상태였다. 그들이 만날 무렵에 아락은 이상한 낌새를 채고 급히 도망쳤는데 아락을 놓친 특무들은 그 대신 리운학을 체포해갔다. 리운학은 상해시 공안국에 약 1개월간 갇혀있다가 기독교상해녀청년회의 도움을 받아 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때 마침 황경이 상해로 돌아왔다. 마땅히 갈곳이 없던 리운학은 황경의 큰어머니네 집에서 황경과 함께 동거생활을 했다. 1935년 봄에 그녀는 상해업여극인협회에 들어가 유명한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의 녀자주인공 노라역을 맡게 되였다. 이것은 그녀의 인생을 또 다시 바꾸는 중대한 전환점이 되였다. “1935년 봄…난 영원히 그날을 잊을수 없다. 그날은 내 마음처럼 음산한 날이였다. 나는 한없이 따뜻한 고향을 떠나 일생에 있어 가장 소중하면서도 다시는 얻지 못할것을 버리고 상해로 가서 《인형의 집》을 공연하였다. “노라”의 공연은 내가 본격적으로 희극계에 발을 들여놓는 계기가 되였다…”(강청의 자술 중에서) 여기에서 강청이 “일생에 있어 가장 소중하면서도 다시는 얻지 못할것을 버리고”라고 술회한것은 바로 그녀와 황경사이의 아이를 가리키는것이다. 당시에 강청은 이미 임신을 하고있던중이였는데 무대에 서기 위해 락태수술을 했던것이다. 이 공연에서 그녀는 그간의 불행을 말끔히 씻고 세상에 이름을 떨칠수 있기를 열망했다. 1935년 3월에 그녀는 예명을 람평(蓝苹)이라 하였다. 《인형의 집》은 당시에 공연되기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던 작품으로서 1935년 6월 27일에 상해의 금성대극원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인형의 집》은 첫 공연부터 련일 초만원을 기록하면서 대단한 호응을 받았다. 상해의 각 언론에는 노라역을 맡았던 람평에 관한 기사가 쏟아져나왔다. 《인형의 집》의 대성공으로 강청은 불과 21세의 어린 나이에 다소 유명세를 타기는 했으나 대스타가 되기에는 아직도 험난한 길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녀는 관객이 적은 연극무대에서는 대스타가 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관객이 훨씬 더 많은 영화계로 시선을 돌렸다. 1935년초에 전통영업공사가 상해에서 영화 《풍운아녀》를 촬영하고있었다. 이 영화의 주제가 《의용군진행곡》이 바로 현재의 국가이다. 《풍운아녀》의 제작이 끝날 무렵에 강청은 전통영업공사에 들어갔다. 그후 강청은 전통영업공사의 세번째 작품 《자유신》의 여월영(余月英)역을 맡았다. 그러나 극중의 여월영은 그다지 비중이 높지 않은 배역이여서 자못 실망이 컸었다. 1935년 9월에 그녀는 당시 상해영화계에서 영향력이 있던 영화평론가 당납과 열애에 빠져 동거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강청이 당납의 이름을 빌어 유명세를 타려한다는 소문이 무성하기도 했다. 1936년 4월 21일에 강청은 당납과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는데 그때 심균유의 주례하에 강청과 당납, 조단과 엽로천, 고이기와 두소견이 동시에 집체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에는 정군리, 리청 그리고 촬영사 마영화가 참석했다. 그후 강청은 영화 《도시풍광》과 연극 《흠차대신》 등에 출연하였으나 그다지 비중이 있는 배역을 맡지 못하고있었다. 연화영편공사의 《랑산첩혈기》에서 주인공 유삼의 안해역을 맡았으나 그 역도 허명뿐이였다. 1936년 6월에 강청은 어머니가 앓는다는 거짓말로 상해를 떠나 천진에 가서 황경을 찾아 동거했다. 그후 1936년 9월에 강청은 장민과 서로 사랑의 감정이 생겼다. 1937년 5월에 강청은 당납과 헤여지고 상해연극계에서 매우 명망이 높던 연출가 장민과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당납의 명성을 리용하여 영화계에서 스타가 되여 보려고 하였으나 영화계의 높은 벽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시 연극계로 돌아와 장민의 명성을 리용하기로 했던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그녀의 계획은 또 다시 수포로 돌아가고말았다. 이 일로 인하여 유부남이였던 장민은 안해와 리혼하게 되였다. 사랑하는 강청을 잃고 절망한 당납은 거듭 자살소동을 벌리게 되여 여론이 강청을 부도덕한 녀인으로 몰아갔다. 상해에서 더이상 발붙일 곳이 없게 된 강청은 스타의 꿈을 접고 1937년 7월에 도망치듯 상해를 떠났다. 이때 그녀는 황경이 연안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연안으로 갈 결심을 했다. 그녀는 서안으로 가있던 서명청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였다. 서명청은 엽검영의 부인 위공과 친분이 두터웠던지라 그녀의 소개로 팔로군사무소로 가서 주은래의 부인 등영초를 만날수 있었다. 등영초는 강청이 상해의 진보적인 좌익극단에서 활동하던 배우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녀를 연안으로 갈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다. 당시 연안에서는 진보적인 문화계인사들을 적극 환영하고있었던 터였다. 1937년 8월말에 강청은 연안에 도착하여 제3초대소(서북려사라고도 함)에 투숙하였다. 여기에서 그녀는 숙박부에 이름을 적으면서 람평 대신 강청(江青)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강청이라는 이름은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지은것으로 두가지 의미를 내포하고있다. 첫째, “청 (青) 색은 쪽에서 나오지만 쪽보다 더 푸르다”는 “청출어람”의 의미이다. 여기에서 “쪽” 즉 “람”은 바로 람평을 가리키는것이다. 다시 말하면 “청(青—강청)은 비록 람평(蓝)에서 나왔지만 람평때보다 더욱 뛰여난 능력을 발휘하겠다”는 의미이다. 둘째, 강청(江青)이란 말은 당나라시인 전기의 시 “성시상령고슬곡이 끝나도 상수의 녀신은 보이지 않고 강가의 산봉우리만 푸르구나”에서 나왔다. 강청은 연안에 도착한후 곧장 심사를 받았다. 2개월간의 심사를 거친후 강청은 황경의 도움으로 다시 당적을 회복하고 1937년 11월에 중국공산당 중앙당교에 입학하여 6개월간 교육을 받았다. 1938년 7월 7일에 “7.7” 첫돐 기념행사가 연안에서 열렸다. 그날 오전에는 모택동의 보고가 있었고 오후에는 문화행사가 있었는데 이 문화행사에서 강청은 경극 《타어살가》의 주연을 맡아 관중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공연을 끝까지 관람한 모택동은 배우들을 격려하기 위해 분장실로 들어가서 강청과 악수를 하고 담소를 나누었다. 이로써 강청과 모택동의 력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진것이다. 강청이 연안에 들어갔을 때 모택동의 세번째 부인 하자진(贺子珍)은 서안에 있었다. 해외의 많은 사람들은 강청이 모택동의 집에 발을 들여놓고 하자진과 크게 다투었기때문에 하자진이 서안으로 떠났다고 주장하고있지만 하자진이 서안으로 떠난 일은 강청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강청은 평생동안 하자진을 한번도 만난적이 없었기때문이다. 당시에 강청은 다른 사람에 비해 용모가 출중한 편이였으며 연기도 뛰여났다. 지금은 그녀를 삼류배우라 평가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 당시 상황에서 그녀는 분명 연안과 섬북지역의 인기배우였다. 그녀는 연기뿐만아니라 노래도 잘하였다. 모택동은 그녀가 공연한 《타어살가》를 좋아하였다. 그녀는 글씨와 문장에도 뛰여났고 특히 해서를 잘 썼다. 말타기와 트럼프를 좋아하고 뜨개질과 화장을 잘 하였으나 사격은 좋아하지 않았다. 1938년 4월 10일에 로신예술대학이 연안에 창설된후 강청은 그 대학의 연극과 지도원을 맡았다. 1938년 8월에 강청은 군위원회 사무실 비서로 발령받아 모택동과 함께 일할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였다. 그때부터 모택동과의 관계가 례사롭지 않은 사이로 발전하였다. 강청은 모택동을 숭배하고 사랑했다. 사업이 바빴지만 정력이 충만했던 모택동은 청춘의 활력이 넘치는 아름다운 강청의 격정에 빠져버리고말았다. 모택동과 강청의 련애설이 퍼져나가자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중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사람은 장문천(张闻天)이였다. 그는 하자진이 우수한 공산당원으로 빛나는 투쟁의 력사를 가지고있고 험난한 장정을 겪으면서 여러차례 부상을 입었기때문에 당연히 그녀를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모택동의 결혼이 개인의 사생활에 관한 문제이므로 누구도 간섭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에서는 모택동의 결혼문제를 토론에 붙였는데 다수가 반대하였다. 그러자 모택동은 강청과의 혼인을 동의하지 않으면 주석직에서 사직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54    강청이 태여나서 자살하기까지 (1) 댓글:  조회:6054  추천:0  2014-06-01
강청이 태여나서 자살하기까지      강청은 본명이 리운학(李云鹤)이고 산동성 제성현에서 출생했다. 강청의 할아버지 리순해(李纯海)는 원래 2만여평방메터의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으나 아버지 리덕문(李德文) 대에 이르러 파산하였다. 강청은 1972년의 자술에서 “나는 매우 가난한 수공업집안에서 태여났다”고 하였는데 사실 그녀의 아버지는 목공소주인이였다. 리덕문은 처음에 목공소견습공으로 들어가 뒤에는 목공소주인이 되였으며 그뒤 다시 제성현의 성문부근에 려관을 차렸다. 리덕문의 본처는 원래 지주집안의 딸이였으나 늙고 못생겼다는 리유로 리덕문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리덕문은 50세에 다시 결혼하여 20여세의 젊고 예쁜 리란씨(李栾氏)를 첩으로 삼았다. 1914년 3월에 란씨는 딸애를 하나 낳았다. 그러나 리덕문과 란씨는 아이를 임신했을 때 아들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름까지 리진남으로 지어놓았던 터이라 실망이 컸다. 그들은 할수 없이 이름을 다시 리진해(李進孩)로 고쳐지었으니 그녀가 바로 몇십년후 중국대륙을 떠들썩하게 흔들었던 강청이다. 강청이 태여났을 때 그녀의 아버지 리덕문은 이미 60세였으며 우로 이복오빠 리건훈(일명 리간경이라고도 함)과 언니 리운하가 있었다. 리진해(강청)는 6세 되던 해에 다른 녀자애들처럼 전족을 해야만 했다. 당시 산동지역에는 여전히 전족이라는 악습이 성행하고있었기때문이다. 어린 리진해는 전족한 발이 너무도 아파서 밖에서 놀 때에는 몰래 전족을 풀어버리고 집에 올 때 다시 전족을 하곤 했다. 이러한 일은 당시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수 없는 대담한 행동이였다. 리진해는 어릴 때 담이 크고 남에게 지면 죽고 못사는 맹랑한 성격의 소녀였다. 그녀의 이러한 성격을 잘 대변해 주는 어린시절의 한 에피소드가 있어서 여기에 소개한다. 리진해의 동네에 단운전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리진해는 그녀와 함께 잘 놀다가도 자주 싸우군 했다. 하루는 단운전이 리진해를 보고 “넌 첩의 자식이야! 누가 모를줄 아냐, 네 아빠는 이리, 네 엄마는 호랑이, 넌 새끼 호랑이야! 네 집에는 전부 나쁜 사람들뿐이구나!”라고 놀렸다.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리진해는 당장 단운전에게 달려들었지만 도저히 그녀를 당해낼수 없었다. 얼마후 리진해는 길에서 놀고있다가 마침 이복오빠인 리건훈을 만났다. 당시 리건훈은 제성현 경찰국소속 경관으로서 한창 거드름을 피우고있을 때였다. 리진해는 리건훈에게 달려가서 단운전과 있었던 일을 낱낱이 일러바치고 원한을 갚아달라고 부탁하면서 분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리건훈은 그녀에게 반드시 보복해 줄테니 안심하라고 약속했다. 다음날에 리건훈은 순경들을 데리고 단운전의 집으로 찾아가서 “우리 집을 이리집안이라 욕한 놈이 누구야! 어서 나와!”라고 웨쳤다. 단운전은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 담장모퉁이에 꼭 숨어있었다. 단운전의 아버지가 나와서 애들끼리 싸우다 그런것이니 참으라고 하면서 대신 사과를 하였다. 하지만 리건훈은 오히려 자식교육을 잘못 시킨 부모의 책임이 더 크다고 하면서 데리고간 순경들과 함께 구타를 가했다. 이에 단운전의 아버지는 만신창이가 되도록 맞았으며 그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강력하게 항의하던 단운전의 삼촌도 리건훈과 순경들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았다. 이 일로 단운전의 삼촌은 억울하게 죽고말았으며 단운전의 숙모는 생계를 잇기 위해 두살밖에 안된 자기애를 버려두고 남의 집 유모로 들어가야만 했다. 얼마후 두살짜리 애도 엄마젖을 먹지 못해 굶어죽었다. 이때 리진해의 나이는 불과 일곱살이였다. 처음에 그녀는 단운전에게만 보복할 생각이였지만 그 결과는 너무도 엄청난것이였다. 리건훈이 단운전의 집에서 행패를 부리고있을 때 리진해는 열심히 단운전을 찾고있었다. 그녀는 겁에 질려 숨어있던 단운전을 발견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제 겁나냐? 모두 너때문에 생긴 일이야. 또 한번 욕해 봐!” 이 일이 있은 뒤로 동네아이들은 모두 그녀를 피해다녔으며 아무도 그녀와 함께 놀지 않았다고 한다. 리진해는 강청이 어릴 때 집에서 부르던 이름이고 그녀의 공식적인 이름은 리운학이다. 그녀는 소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도 정식이름이 없었다. 그때 그녀가 다니던 학교의 리사장 설환등이 그녀의 다리가 가늘고 길다고 해서 운학(云鹤)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그녀가 자술에서 “군계일학”을 운운하면서 이름을 지은 경위를 설명한것은 유명해진 뒤에 꾸며낸 이야기로 보여진다.) 리덕문은 성미가 급하고 거칠어 걸핏하면 자기 안해에게 손찌검을 하군 했다. 어느 원소절대보름에 리운학의 어머니 란씨는 실수로 넘어져 그릇을 깨뜨렸다. 이에 화가 난 리덕문이 삽으로 마구 때리는 바람에 그녀는 손가락이 부러졌고 놀라서 울던 리운학은 따귀를 얻어맞아 이가 부러졌다. 더이상 고통과 멸시를 당할수 없다고 판단한 란씨는 리운학을 데리고 그 집에서 나와서 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가진게 없었던 란씨는 생계를 잇기 위하여 남의 집 종살이라도 해야 했다. 그녀는 리운학을 친척집에 맡겼다. 그로부터 리운학에게는 가난하고 힘든 생활이 계속 되였다. 1926년에 12세의 리운학은 소학교 5년과정을 졸업하고 그해 아버지가 사망되자 어머니와 함께 천진에 있는 동부이모(同父异母)인 언니네 집에 가서 살았다. 중학교진학을 하지 못한 그녀는 언니네 집에서 별로 하는 일이 없이 몇년을 지냈다. 1929년 봄에 그녀의 형부 왕극명(당시 봉계군벌의 군관)이 제남으로 전근되여 그녀도 언니네 식구를 따라 제남으로 갔다. 그해 여름에 거기에서 15세의 리운학은 산동실험극원에 들어가 조태모와 왕박생 등으로부터 연극과 고전음악을 배웠다. 그때 강청은 학력이 낮고(다른 사람들은 최소 중학교졸업이상이였음.) 가난하여 동기생들로부터 갖은 멸시를 받았지만 개성과 승부욕이 아주 강했기때문에 수업시간에 뒤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했다고 한다. 실험극원입학은 그녀의 인생을 바꾸는 첫번째 전환점이 되였다. 연극배우 리운학이 없었다면 후날의 영화배우 람평이 있을수 없었기때문이다. 1930년에 실험극원은 정국의 변화로 문을 닫게 되였다. 리운학과 학생들은 왕박생을 따라서 북경으로 가서 “해명극사”를 조직하여 순회공연을 하였다. 그때 그녀는 경극단에 들어가 제남, 청도, 연태 등지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곳의 사정도 리운학이 적응하기에게는 여러모로 어려운 점이 많았다. 연기경력이 짧은데다 사투리가 심해서 북경인들에게 그다지 호응을 받지 못하였고 공연도 정기적으로 있지 않았기때문이였다. 1931년 봄에 리운학은 다시 청도에 있던 조태모(당시 청도대학 총장)를 찾아갔다. 조태모의 배려로 그녀는 청도대학 도서관의 직원으로 근무할수 있었다. 여기에서 그녀는 도서관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중문과수업을 청강하고 유명한 현대문학가 문일다와 심종문을 알게 됨으로써 어느 정도 문학적소양을 쌓을수 있었다. 당시에 그녀는 조태모의 처남 유계위(일명 황경이라고도 하는데 청도대학 리과생, 후에 천진시장 겸 중국공산당 천진시위원회 서기 력임)와 사랑에 빠져 동거생활을 하였으며 조태모의 안해이자 황경의 누나인 유산을 따라서 전한이 창설한 극단 남국사에 들어갔다. 당시 유산은 중국연극계의 인기배우로 남국사의 일원이였다. 1931년 9월 18일에 일본관동군이 동북삼성을 점령하여 각지에서 반일운동과 반장개석운동이 일어났을 때 리운학은 황경과 함께 진보적인 학생운동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1933년 2월에 19세의 리운학은 황경의 소개로 정식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당시 황경은 중국공산당 청도대학 지하지부 서기를 거쳐 중국공산당 청도시위원회 선전부장을 맡고있었다. 그런데 이해 7월에 반역자의 밀고로 황경이 국민당에 체포되는 사태가 발생되여 강청은 조태모의 소개로 황급히 상해로 도망갔다. 그리하여 그녀는 당조직과 련계를 잃고말았다. 상해에서 그녀는 전한과 그의 동생 전원의 도움으로 서명청이 책임자로 있던 “신경공학단”의 교사로 들어갔다. 1933년 겨울에 체포되였던 황경이 아버지의 도움으로 석방되여 상해로 돌아왔다. 그러나 황경의 부모가 반대하는 바람에 그들은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따로 집을 구하여 다시 동거를 시작하였다. 1934년 1월 28일에 상해에서 “1. 28”항전 2돐을 기념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신경공학단의 단원들은 대부분 이 시위에 참가하였으며 이 일로 리운학은 체포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리운학은 황경과 함께 북경으로 도망갔다. 북경에서도 그들은 동거를 계속하였으나 황경의 부모가  그들의 동거를 반대하여 생계비를 보내주지 않아 생계를 잇기가 곤난한 지경이였다. 결국 리운학은 황경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53    대립은 왜서 국민당에 가입하지 않았는가? 댓글:  조회:5968  추천:3  2014-05-24
대립은 왜서 국민당에 가입하지 않았는가?   (번역)   누구도 국민당정보조직의 특무대부로 명성이 높은 중국국민당 민국정부 군통(군사위원회조사통계국) 국장 대립(戴笠)이 국민당 당원이 아니라고 하면 믿으려 하지 않을것이다. 국민당이 대립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은것도 아니였고 대립이 국민당을 반대한것도 아니였지만 대립은 죽을 때까지 줄곧 국민당에 가입하는것을 거절했다. 그는 비록 국민당원이 아니였지만 국민당의 군통국 국장이란 중요한 직무를 담임했으며 권세가 하늘을 찌를듯 했는데 이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정치해프닝이 아닐수 없다. 당시의 기형정치가 낳은 배경에서만이 대립식의 정치투기분자가 나타날수 있었다. 1897년에 절강성 강산현 보안향에서 출생한 대립은 본명이 춘풍(春风)이며 자는 우농(雨农)이다. 그는 “장개석의 검”, “중국의 게슈타포(盖世太保)”, “중국의 가장 신비한 인물”로 불리웠는데 잔인하고 무정한것으로 소문났다. 6살에 아버지를 여읜 그는 1917년에 참군했고 1921년에 상해에서 두월생(杜月笙)을 알게 되여 결의형제를 맺었다. 그는 1927년에 광주에 들어가 이름을 대립이라고 고쳤으며 그해 9월에 시험을 쳐서 황포군관학교 제6기생으로 되였다. 북벌시기 국민혁명군 제1군 기병영 1련에 편입되였다. “4.12정변” 때 동학들중에 끼여있은 20여명의 공산당원을 적발한 공로로 장개석, 호종남(胡宗南) 등 국민당거물들의 높은 평가를 받아 기병영국민당당부 집행위원으로 선거된 그는 정보사업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1928년에 국민혁명군 총사령부 상위(上尉)련락참모로 임명된 그는 정보사업을 주관했다. 1931년말에 장개석이 핍박에 의해 “한발작 물러났다가 다시 전진하려는 계책”으로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자 대립은 “련락조”를 조직하여 계속 장개석에게 충성했다. 1932년 1월에 장개석이 다시 남경으로 들어가 “중화복흥사(中华复兴社)”란 특무조직을 세우고 대립을 특무처장으로 임명했다. 대립은 장개석에게 “목숨을 다 바쳐 정의를 위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일하겠습니다”라고 표시했다. 대립은 선후로 저명한 진보인사 양전, 사량재와 애국명장 길홍창을 살해했다. 대립은 1935년에 남창항영조사과 과장으로 임명되였다. 후에 남창항영조사과가 군사위원회조사통계국과 합병되자 대립은 2처의 처장으로 되였다. 1936년 12월에 서안사변이 발생된후 대립은 송미령을 따라 장개석을 구하러 서안으로 들어갔다. 그때로부터 장개석의 심복으로 되여 장개석의 중용을 받았다. 1937년에 “소절행동위원회” 별동대 5개지대를 조직하고 자기저로 서기장 겸 총지휘를 맡았는데 후에 “충의구국군”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이듬해 대립은 군통국 부국장으로 임명되였다. 1939년초에 대립은 하영년(何永年)이라는 가명으로 향항으로 해서 하노이로 들어가 왕정위(汪精卫)암살을 지휘했다. 1942년에 대립은 미국 해군중장을 회견하고 정보사업을 상담했다. 다음해에 “중미특종기술합작소”를 세우고 미국 해군중장과 대립은 각각 정, 부 주임을 맡았다. 그들은 전국각지에서 특무활동에 종사하여 민주운동과 공산당조직을 파괴하고 수많은 진보인사들과 공산당원들을 살해했다. 대립은 출세한후 여러번이나 고향 강산현에 돌아간적이 있었다. 1937년말에 고향에 돌아갔을 때 강산현 현장 정종은 대립에게 자위대에 무기와 탄약을 배치해달라고 요구했다. 다음해 1월에 대립은 부하를 파견하여 50자루의 총과 1만발의 탄알을 가져다주었다. 1943년에 대립은 강산현에 중학교를 세우고 경비를 군통국에서 대주었으며 자신이 학교 리사장을 맡았다. 항일전쟁승리후 장개석은 대립에게 한간문제를 처리할 권력을 주었다. 1946년에 대립은 중국교통총국을 조직하여 원 군통무장조직인 “충의구국군”을 18개 교통총대로 확장했다. 그해 3월 17일에 대립은 청도에서 전용비행기를 타고 상해를 경과하여 남경으로 돌아오다가 비행기가 추락되여 남경부근의 판교진 대산에서 죽었다. 국민정부는 1946년 6월 11일에 명령을 발부하여 대립에게 륙군중장계급을 추증했다. 대립은 장개석이 가장 신임하는 유력한 장수였고 국민당군에서 생살대권을 틀어쥐고있었다. 그는 한번 말한 말은 다시 거두어들이는 법이 없었다. 그는 국민당군통국 국장을 맡은 8년동안 비밀명령을 내려 수많은 혁명동지들을 살해했다. 또 얼마나 많은 진보인사를 잔인하게 살해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대립은 죽을 때까지 국민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그가 국민당에 가입하지 않은것은 장개석의 심리를 틀어쥐고 자신의 충성심을 보여줌으로서 자신의 지위를 더욱 굳건히 하려는데 있었다. 대립은 16살 때 학교에서 위생을 강조하고 진보를 제창하며 아편과 전족을 반대하는 “청년회”의 주석으로 되였다. 대립은 1914년에 결혼했는데 신부 모수총의 아버지 모응승은 현소재지에서 2~3킬로메터 떨어진 풍림진에 살고있는 지주였다. 1916년에 대립은 도적질하다가 붙잡혔는데 학교측에서는 그를 제명했다. 그 이듬해 대립의 아들 대장의가 출생했다. 그후 대립은 도박판에서 여러번이나 속임수를 쓰다가 붙잡혔다. 목숨을 살리기 위해 대립은 항주로 도망쳐 참군했는데 반국강이 지휘하는 절강륙군1사(총부는 녕파에 있었음)에 들어갔다. 대립은 참군한 후에도 계속 도박을 놀면서 지방의 깡패들과 친했다. 지방깡패들은 그를 청방에 소개해주었다. 상급이 도박에 빠져 깡패들과 섭쓸리는 그를 징벌하려고 하자 그는 도주병으로 되였다. 1921년에 대립은 청방과의 관계를 리용하여 상해로 들어갔다. 항주에서 친했던 청방의 “스승”이 그를 당시 상해탄에서 가장 권세가 있는 청방의 거두 황금영을 소개해주었다. 대립은 이런 관계를 통해 류지륙, 장소림, 왕효뢰, 향해잠, 장자렴, 전득승, 풍석죽, 당소무, 석효선, 범소증이 세력을 휘두르던 시대에 상해깡패들과 친구로 되였다. 1923년에 대립은 늘 상해 소동문의 16포일대를 돌아다녔는데 그곳의 깡패들속에서 꽤 이름이 있었다. 대립은 31살 때 호종남부대의 정보사업을 주관했다. 대립은 자신의 미래 성과가 상해지하사회와 동맹관계를 건립하는데 달려있다고 인정했다. 그래서 대립은 당시의 상해경비구 사령 양호를 찾아갔다. 양호는 대립이 찾아온 뜻을 알고 “자네가 상해에서 정보사업을 하려면 한 사람과 관계를 잘 맺어야 하네”라고 알려주었다. 그 사람이 바로 두월생이였다. 명성이 높은 청방 거두 두월생은 젊은 대립이 “인재”라는것을 보아냈다. 후에 두월생, 양호, 대립은 결의형제를 맺었다. 대립의 일생에서 가장 좋은 친구는 호종남이였다. 대립은 호종남이 항주에 왔을 때 행운스럽게 만난후부터 중요한 동맹관계로 되였다. 대립이 출세하게 된 또 한번의 중요한 기회는 상해에서 장개석을 만난것이였다. 그들이 만난 구체적인 시간은 똑똑하지 않지만 가능하게 1921년이였을것이다. 당시 장개석은 대계도(戴季陶), 진과부 등 친구들과 함께 상해에서 주식무역시장을 경영하여 손중산을 위해 자금을 모으고있었다. 대립은 처음에 자신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이런 혁명파들을 건달나부랭이로 알았다. 대계도는 자신과 같은 성을 가진 대립이 보통인물이 아님을 간파하고 그에 대한 태도를 고쳤다. 총명한 대립은 그들이 손중산이 파견한 광주의 특공일군들이란것을 추측하고 천방백계로 그들앞에서 자기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장개석은 대계도가 대립을 좋게 대하는것을 보고 대립에 대해 다른 눈으로 보게 되였다. 대립이 이미 대계도를 “아저씨”라고 부르는것을 보고 그에게 더욱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1938년 3월에 중경에서 국민당중앙위원회 림시전체대회가 열렸을 때 장개석은 대립을 중앙위원으로 확정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대립은 급히 달려가 장개석에게 “저는 국민당 당원도 아닌데 어떻게 중앙위원으로 될수 있겠습니까?”하고 보고했다. 장개석은 듣고 나서 매우 놀라면서 물었다. “자네는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이고 복흥사의 사원이며 또 나의 신변에서 여러해동안 일을 했는데 왜서 아직도 당원이 아닌가?” 대립은 차렷자세를 취하면서 대답했다. “학생은 한마음 한뜻으로 교장님을 따르면서 먹고 입을게 모자란다든가 전도가 없다던가 입당을 한다든가 하는건 개의치 않습니다. 높은 직위와 많은 월급은 학생이 추구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 말을 들은 장개석은 매우 기뻐하면서 즉석에서 쪽지를 써주었다. 대립이 받아서 보니 쪽지에는 “장중정(장개석은 이름이 중정이고 자가 개석임)이 대립을 중국국민당당원으로 소개한다”는 몇글자가 씌여있었다. 대립은 급히 사양하면서 중앙위원으로 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장개석의 “무명학생”으로 살겠다고 맹세했다. 이어 그는 우렁찬 목소리로 “교장께서 신임만 해시주면 학생은 더없는 영광으로 생각하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1945년에 중경에서 국민당 6차대표대회를 열었을 때 장개석은 또 대립을 중앙위원의 자리에 올려놓으려고 했다. 그러나 대립은 사절하면서 “교장께서 신임만 해주시면 당(党), 관(官) 두글자는 개의치 않습니다”라고 표시했다. 이에 장개석은 대립을 더욱 중시하고 극진히 관심했지만 한편으로 그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는것을 경계했다.       
52    주은래의 두 양딸 댓글:  조회:9844  추천:0  2014-05-17
주은래의 두 양딸   (번역)     주은래와 등영초는 비록 자신의 후대는 없었지만 많은 렬사의 자녀들을 입양했다. 이런 양자녀들중에서 줄곧 평범하지 않은 련계를 유지하고있은것은 두 사람뿐이였는데 그들로는 손병문(孙炳文)렬사의 딸 손유세(孙维世)와 리소석(李少石)렬사의 딸 리미(李湄)였다. 손유세와 리미는 주은래가 직접 인정한 양딸이였는데 그녀들은 줄곧 주은래와 등영초를 아빠, 엄마라고 불렀다. 손유세의 아버지 손병문은 주은래의 전우였는데 1927년에 혁명을 하다가 희생되였다. 당시 손병문에게는 4자녀가 있었는 손유세는 5살밖에 안되였다. 항일전쟁이 폭발된 그해 손유세는 무한의 팔로군판사처에 찾아가 연안으로 가겠다고 신청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를 아는 사람이 없어 비준되지 않았다. 그 당시 16살밖에 안된 손유세는 혼자서 문어구에 서서 상심하여 울기만 했다. 그때 주은래가 그녀를 발견하고 양딸로 삼았다. 그후 주은래는 그녀를 연안으로 데리고갔다. 1939년에 주은래가 팔을 상하여 쏘련으로 치료하러 떠나게 되였는데 손유세도 모택동의 비준을 받고 함께 갔다. 그후 손유세는 쏘련에 남아 7년동안 희곡을 배우다가 새중국이 성립된후 귀국했다.   귀국후 손유세는 주은래와 등영초를 몹시 따랐으며 주은래와 등영초도 양딸을 몹시 사랑해주었다. 1950년에 손유세는 혼자서 서화청에 양부모의 은혼기념연회를 차례놓았다. 이에 주은래와 등영초는 몹시 감동되였다. 그후 손유세는 김산(金山)한테 시집을 갔다. 주은래와 등영초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반대하지 못했다. 주은래는 양딸의 결혼식때 등영초에게 부탁하여 《중화인민공화국혼인법》이란 책을 결혼선물로 주었다.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주은래가 손유세의 신랑에게 긴고주(紧箍咒)를 씌워준것이란것을 알았다. 그후 10여년간 세 사람은 줄곧 친부모자식처럼 친밀하게 지냈다. 비록 주은래와 등영초는 손유세를 친딸처럼 사랑해주었지만 문화대혁명시기에 이 렬사의 딸을 보호해주지 못했다. 강청이 결사적으로 손유세를 죽음으로 몰았기때문이다. 1967년 12월에 공안일군들이 손유세의 집에 뛰여들어 “특무혐의”가 있다는 죄명으로 손유세의 남편 김산을 체포했다. 그후 손유세도 감옥에 들어가게 되였다. 손유세는 감옥에서 족쇄와 수갑을 찼으며 지독한 고문을 당했다. 1968년 10월 4일에 손유세는 매를 맞아 감옥에서 사망되였다. 숨을 거두었을 때까지 그녀는 족쇄와 수갑을 차고있었다. 손유세가 사망되였다는 소식을 들은 주은래와 등영초는 비통을 참을수 없었지만 비상시국이여서 마음속으로 묵묵히 양딸을 애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양딸 손유세를 잃은후 주은래와 등영초는 다른 양딸 리미에게 더욱 많은 사랑을 주었다. 주은래는 1942년 8월에 리미를 양딸로 삼았다. 그해 주은래는 료중개(廖仲恺)의 딸 료몽성(廖梦醒)을 파견하여 송경령을 도와 중국동맹을 보위하는 사업을 회복하게 했다. 료몽성은 딸 리미를 데리고갔다. 그때 엽정(叶挺)의 부인 리수문(李秀文)과 엽정의 딸 양미(杨眉)도 그녀와 동행했다. 두 어머니와 두 딸은 오문으로부터 중경으로 갔다. 료몽성네가 도착하자 주은래는 증가암 50호에 한상 차려놓고 그녀들을 청했다. 리미와 양미는 주은래를 보자 친절하게 “주백부(周伯伯)”라고 불렀다. 주은래는 기뻐서 두 녀자애를 한팔에 하나씩 안으면서 말했다. “양아빠라고 불러라!” 이렇게 되여 리미와 양미는 주은래의 양딸이 되였다. 비록 그 당시 등영초는 중경에 없었지만 그후 두 아이를 만났을 때 양어머니로 되여주었다. 1945년 10월 8일에 주은래의 비서를 담임한적이 있던 리소석이 중경에서 살해되였다. 그 소식을 들은 주은래는 렬사의 안해 료몽성과 딸 리미를 홍암촌의 팔로군판사처로 데려왔다. 주은래와 등영초는 아버지를 잃은 렬사의 딸 리미를 친딸처럼 사랑해주었다. 료몽성은 딸 리미와 함께 한시기 홍암촌에 거주하다가 향항으로 가서 어머니 하향응(何香凝)을 만났다. 1949년 4월에 하향응은 딸 료몽성과 함께 외손녀 리미, 손자 료겸, 료휘를 데리고 해방된 북평으로 왔다. 이렇게 되여 리미는 다시 양부모 주은래와 등영초를 만나게 되였다.  
51    농민부총리 진영귀의 6가지 “제일” 댓글:  조회:5561  추천:3  2014-05-10
농민부총리 진영귀의 6가지 “제일”   (번역)     1. 제일 가난한 국무원부총리   1973년에 진영귀(陈永贵)가 중앙정치국위원과 국무원부총리로 당선된후 주은래는 진영귀에게 호적을 북경으로 옮겨와 로임을 타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진영귀는 자기부터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면서 호적을 옮기지 않고 의연히 대채에서 로임을 탔다. 대채대대에서는 이 국무원부총리에게 만점을 기록하고 만출근으로 하여 매일의 로동로임을 1원 50전씩 결산해주었다. 산서성에서 진영귀가 성의 직무를 겸임한것에 근거하여 매달 100원을 보조해주었고 국무원에서 매달 생활비로 36원을 보조해주었다. 136원에다 로동로임을 첨가한것이 곧 이 부총리의 전부 수입이였다. 그런데 그에게는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서 식사대접을 하다보니 늘 돈이 모자라서 절약해 쓰군 했다. 어느날에 기등규(纪登奎)와 진석련(陈锡联)이 진영귀네 집에 찾아와서 산서라면을 먹었는데 취사원이 닭 한마리를 사왔다. 진영귀가 취사원을 보고 물었다. “닭은 왜 사왔소? 나는 이 닭을 안먹겠소. 손님들이 라면을 먹으로 왔는데 우리 밀가루음식을 하기오.” 진영귀는 늘 좁쌀죽 한사발이거나 칼국수 한그릇에 짠지 몇저가락을 놓고 쪽걸상에 앉아 후룩후룩 먹는것으로 한끼를 때우군 했다.   2. 제일 술을 많이 마신 연회   1975년 12월 26일의 저녁에 정치국회의를 마친후 강청이 모두 모여앉아 모택동의 생일연회를 열자고 제의했다. 사업일군이 모태주를 들고오자 장춘교와 요문원이 진영귀에게 건배하라고 억지로 술을 권했다. 그러자 진영귀가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들이 자꾸 권하면 좋소. 모주석께서 년세가 얼마면 난 그만큼 건배하겠소.” 그날은 모택동의 82돐 생일이였다. 사업일군들이82개의 밑굽손잡이가 긴 술잔(高脚杯)에 모태주를 넘치게 부어놓자 진영귀는 82잔을 한모금에 한잔씩 련거퍼 다 마셔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운전수를 보고 “오늘 많이 마신것 같군. 제밀할, 날 취하게 하려구? 어림도 없어”라고 말했다.   3. 정치리론학습을 가장 두려워 한 진영귀 진영귀는 한동안 매일 오후마다 왕홍문의 거처에 가서 맑스, 엥겔스, 레닌, 쓰딸린의 저작을 학습했다. 그는 무슨 《고타강령비판》이란 맑스의 저작을 학습하라거나 외우기도 어려운 포이어바흐(费尔巴哈)라고 하는 독일철학자의 이름을 기억하라고 할 때에는 골치가 아파 죽을 지경이였다. 그는 매번 학습하고 돌아올 때면 큰 병을 앓은 사람처럼 기진맥진했다. 그는 학습하기 싫었지만 학습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다가 그는 꾀를 생각하고 학습하러 가지 않았다. 왕홍문이 학습하러 오라고 전화를 걸어오면 그는 전화를 받는 경호원을 보고 말했다. “내가 집에 없다고 하오!”   4. 제일 골치아픈 일은 문건비준   진영귀는 40살에야 겨우 문맹을 벗어났는데 문화수준이 매우 낮았다. 그는 부총리로 된후 늘 문건을 보고 비준해야 했는데 모를 글자가 많았다. 그는 다른 사람과 물어보기 창피하여  방안에서 멍하니 “이 글자를 어디서 봤더라?”하고 머리를 쥐여짜며 생각했다. 어느 한번은 문건을 비준할 때 “待后处理”란 “대(待)”자가 반나절이나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중앙판공청에서 문건을 바치라고 독촉해서야 그는 창피를 무릎쓰고 비서와 “대”자를 어떻게 쓰는가고 물었다. 비서는 “‘초대소’, ‘접대소’라고 할 때 모두 그 ‘대’자를 쓰지 않습니까?”하고 대답했다. 그제야 진영귀는 손바닥으로 머리를 탁치며 말했다. “아, 그러길래 눈에 익지. 과연 어디서 보던 글자군!”   5. 제일 참을수 없는 일은 놀면서 량식을 랑비하는것 진영귀는 갓 중앙에 와서 사업할 때 처음에는 그와 그의 비서, 경호원이 모두 경서호텔에 가주했다. 중앙지도자들은 오후와 밤에 사무를 보는데 습관되여 오전에는 아무일도 하지 않았다. 진영귀는 그들이 아무일도 하지 않고 량식만 소모하는것을 보고 참을수 없어서 뒤짐을 지고 쉴새없이 화원을 돌아다니면서 할일없이 놀기만 하는 흉내를 냈다.   6. 제일 리해할수 없는 일은 여러사람이 그를 받들어모시는것   1974년 8월에 중앙에서는 진영귀에게 조어대로 이사오라고 통지했다. 진영귀는 3호아빠트에 들었다. 아빠트에는 복무원 3명, 료리사 1명, 운전수 1명, 경호원 1명, 비서 1명이 모두 그를 받들어 모셨다. 그는 리해할수 없어서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한사람을 왜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받들어모시는걸가? 나더러 이불도 개이지 못하게 하고 마당도 쓸지 못하게 하다니? ” 진영귀는 아무일도 못하게 하자 심리부담이 증가되였다. 그는 이 사람들을 모두 대채로 데리고가서 농사를 짓게 하고싶었다.    
50    모택동이 후계자를 선정한 이야기 댓글:  조회:7779  추천:0  2014-05-01
모택동이 후계자를 선정한 이야기 —모택동은 왜서 주은래를 후계자로 선정하지 않았는가    (번역)   주은래(周恩来)가 서거하자 국무원총리자리가 비였다. 원래는 응당 등소평(邓小平)이 총리의 후계자로 되여야 했다. 등소평은 제1부총리였기때문이다. 그러나 등소평은 비판을 받고있는 처지여서 총리자리를 이어받을수 없었다. 장춘교(张春桥)와 왕홍문(王洪文)은 등소평을 타도하면 자신들이 당연히 후계자로 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1976년 2월 2일에 하달된 《중공중앙통지》에는 뜻밖에도 위대한 령수 모주석의 제의에 따라 화국봉(华国锋)을 국무원대리총리로 임명한다고 했다. 그리고 엽검영(叶剑英)이 병으로 앓고있는 기간에 진석련(陈锡联)이 중앙군사위원회의 사업을 책임진다고 했다. 이는 모택동(毛泽东)이 새로운 후계자로 화국봉을 선정했다는것을 보여주었다. 화국봉은 류소기(刘少奇), 림표(林彪), 왕홍문, 등소평후 모택동이 또 친히 선정한 후계자였다. 1970년 7월부터 모택동의 기요비서겸 생활비서를 담임했던 장옥봉(张玉凤)은 모택동이 후계자를 선정하던 정경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후계자문제에 대해 모주석은 여러번이나 저에게 ‘이 문제는 골머리를 썩여야 할  일이요. 림표도 내가 선정했고 왕홍문도 내가 선정했지만 모두 자격이 안되오’라고 말했습니다. 1970년초에 저는 한번 모주석께 ‘주총리는 그렇게 훌륭한데 왜서 그를 후계자로 선정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은적이 있는데 그때 모주석은 손바닥을 펴고 칼로 자르는 동작을 하면서 ‘총리는 비록 훌륭하지만 이것이 모자라오’라고 대답했습니다.” 주은래가 사망되였을 때 모택동의 조카 모원신(毛远新)이 병석에 있는 모택동을 보고 누구를 총리로 임명하겠는가고 물었다. 모택동은 “왕홍문과 장춘교에게 양보하라고 알려라”라고 말한후 “그래도 화국봉이 좋을것 같구나”라고 말했다. 이렇게 되여 화국봉은 대리총리로 되여 정치국사업을 주관하게 되였다. 1976년 4월 30일 오후에 모택동은 화국봉과 담화했는데 당시 모택동의 발음은 똑똑하지 않았다. 모택동은 장옥봉의 부축을 받으며 종이에 “천천히, 급해하지 마시오”, “과거의 방침대로 하시오”, “동무가 사업을 맡아하니 나는 마음이 놓이요(你办事,我放心)!”라고 써서 화국봉에게 주었다. 그후 “과거의 방침대로 하시오”라는 말은 모택동의 림종부탁이고 “당신이 사업을 맡아하니 나는 마음이 놓이요”라는 말은 후계자를 지정한것이란 설이 나돌았는데 이는 사실과 맞지 않는다. 사실 모택동은 그와 비슷한 말을 주은래, 등소평 등의 앞에서도 서너번 말한적이 있었다. 례하면 등소평이 만리(万里)를 사천성당위 제1서기, 철도부 부장으로 천거했을 때 모택동은 등소평을 보고 “좋소. 동무가 사업을 맡아하니 나는 마음이 놓이요”라고 말한적이 있었다. 1976년 1월 21일과 28일에 모택동은 화국봉을 국무원 대리총리로 임명할것을 제의한후 또 화국봉이 중앙의 일상사업을 주관하게 제의했다. 화국봉을 국무원 대리총리로 임명한것은 모택동이 장춘교가 총리로 당선될 가능성을 부정했다는것을 말해준다. 화국봉을 중앙의 일상사업을 주관하도록 한것은 모택동이 의연히 왕홍문을 랭대했다는것을 말해준다. 장춘교보다 키가 머리 하나는 더 크고 나이가 4살 년하인 화국봉은 정치수단이나 문장, 말재주가 모두 장춘교보다 못했다. 산서사투리를 하는 이 대한이 갑자기 나타나서 장춘교의 총리꿈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놓았던것이다. 본명이 소주(苏铸)이고 자가 성구(成九)인 화국봉은 1921년에 선서성 교성현의 한 제혁로동자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28살의 모택동이 상해에서 중국공산당 제1차회의에 출석할 때 화국봉은 고고성을 울리며 태여났던것이다. 1938년에 17살인 화국봉은 집에서 떠나 산에 올라 항일유격대에 참가하여 1940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46년에 화국봉은 중국공산당 교성현당위서기를 담임한지 얼마안되여 중국공산당 양곡현당위 서기 겸 현 무장대대 정치위원을 담임하여 “화정위”라고 불리우게 되였다. 1949년 8월에 동정호의 남안에 위치한 상양현성에 붉은기가 꽂혔다. 부대를 따라 남하한 화국봉은 상향현 제1임 현당위서기 겸 현무장대대 정위로 임명되였다. 그때로부터 화국봉은 호남성에서 20여년을 사업했다. 1952년에 화국봉은 상담현에 전근되여 현당위서기를 담임했고 몇달후 중국공산당상담지구 당위원회 부서기 겸 상담지구전원(专员)으로 승진했다. 1954년에 화국봉은 중국공산당 상담지구당위원회 서기를 담임했다. 당시 화국봉 자신도 상담현당위 서기, 상담지구당위원회 서기라는 직무가 특수하게 중요하다는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모택동이 바로 상담현사람이였다! 1955년 7월에 모택동이 《농업합작화의 문제에 관하여》란 보고를 한후 34살의 화국봉은 《우경사상을 극복하고 농업합작화운동고조의 도래를 적극적으로 영접하자》, 《농촌 각 계층의 동태를 충분하게 연구하자》, 《합작화운동중에서 반드시 견결히 빈농에게 의거하자》라는 세편의 문장을 썼다. 모택동은 이 고향의 흙냄새가 나는 문장을 읽고 친절감을 느꼈다. 동시에 처음 화국봉이란 이름에 주의를 돌리게 되였다. 모택동은 호남성을 지날 때 상고머리를 한 화국봉을 접견했다. 1955년 10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제7기 6중전회 확대회의에서 모택동은 화국봉을 렬석대표로 특별요청하여 상담지구의 합작화운동경험을 소개하게 했다. 일개 지구당위원회 서기가 중국공산당 중앙전회에서 강화를 한다는것은 아주 대단한 일이였다. 회의후 화국봉은 호남성으로 돌아간지 얼마 안되여 중국공산당 호남성당위 통전부 부장으로 승진했다. 1959년 여름에 중공중앙에서는 강서성 려산에서 제8기 8중전회(바로 제1차로산회의)를 열기로 결정했다. 그해 6월 하순에 북경을 떠난 모택동은 장사를 지나게 되였다. 당시 강청은 항주에서 휴양하고있었다. 모택동은 장사에서 화국봉을 만나 담화하면서 고향을 돌아보겠다고 했다. 화국봉은 즉시 모택동의 상담행을 배치했다. 1959년 6월 25일 저녁에 모택동은 떠난지 32년이 되는 고향 상담의 소산충(韶山冲)에 도착했다. 옛집(故居)의 벽에 걸려있는 양개혜(杨开慧)의 사진을 바라보던 모택동은 전처 하자진(贺子珍)에 대한 그리움에 잠을 이룰수 없었다. 모택동은 려산에 오른후 전용차를 보내 남창에 거주하고있는 하자진을 데려오게 했다. 모택동은 20여년이나 헤여졌던 하자진을 려산에서 만났다. 그런데 누가 고발했는지 항주에서 휴양하고있던 강청이 이 소식을 알게 되였다. 화가 난 강청은 장도전화로 “내 지금 당장 려산으로 찾아가겠어요”라고 말했다. 그 바람에 하자진은 려산에서 하루밤밖에 자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려산회의에서 모택동은 팽덕회(彭德怀)를 맹렬하게 규탄했다. 중국공산당 호남성당위 제1서기 주소주(周小舟)도 련루되였다. 주소주는 모택동과 한고향사람이고 모택동의 비서를 담임한적이 있었다. 모택동은 려산에서 내려간후 친히 화국봉을 중국공산당 호남성당위 서기처 서기로 임명하라고 지시했다. 그후 모택동이 호남성에 가기만 하면 화국봉이 곁에서 모시군 했다. 모택동은 늘 “화국봉동지는 정직한 사람이요”라고 말했다. 1968년 4월 8일에 호남성혁명위원회가 성립되였을 때 화국봉은 부주임을 담임했다. 1969년에 화국봉이란 이름은 중국공산당 제9차대표대회의 주석단명단과 제9기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의 명단에 나타났다. 화국봉은 중국공산당 호남성당위 제1서기를 담임했다. 1970년 12월 18일에 모택동은 저명한 저서 《서행만기(西行漫记)》를 쓴 미국 기자이며 작가인 에드가 스노(埃德加·斯诺)와 담화할 때 화국봉에 대해 언급했다. 스노의 글이 미국의 《생활》잡지에 발표된후 화국봉은 처음으로 국외의 주의를 일으켰다. “친밀한 전우” 림표가 국외로 도망가다가 사망된후 모택동은 부득불 다른 후계자를 선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모택동은 상해의 왕홍문과 장사의 화국봉을 북경으로 전근시켰다. 그 시기 화국봉은 북경에 있었지만 의연히 호남성당위 제1서기, 광주부대정위, 호남군구제1정위직을 겸임했다. 공안부 부장 사부치가 1972년에 사망된후 화국봉은 모택동의 제의에 따라 공안부 부장직을 담임했다. 공안부 부장의 지위가 중요하다는것은 모두가 알고있는것이다. 때문에 화국봉은 북경에 든든하게 발을 붙인것으로 된다. 1973년 5월에 모택동은 정식으로 왕홍문을 후계자로 선정한다고 표시했다. 왕홍문을 중앙정치국회의에 렬석시킬 때 모택동은 화국봉을 예비후계자로 여기고 왕홍문과 동시에 중앙정치국회의에 렬석시켰다. 1973년 8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10차대표대회에서 왕홍문은 부주석으로 당선되여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화국봉은 중앙정치국위원으로 되여 그렇게 사람들의 눈에 띠이지 않았다. 화국봉은 말수가 적고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북경에서 그가 유일하게 의거할 사람은 모택동뿐이였다. 그는 “4인방”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주은래, 등소평, 엽검영 등과도 아무런 교분이 없었다. 중앙정치국의 날카로운 투쟁중에서 그는 언제나 중립을 지켰으며 유일하게 모택동의 명령에만 복종하였다. “4인방”은 전력을 다해 등소평을 넘어뜨렸지만 모택동은 대권을 화국봉에게 넘겨주었다. 
49    군벌거두 손전방을 암살한 녀호걸 댓글:  조회:6604  추천:2  2014-04-26
군벌거두 손전방을 암살한 녀호걸   (번역)   시검교(施剑翘)는 본명이 시곡란(施谷兰)이다. 그녀는 1905년에 안휘성 동성에서 태여났고 생부는 혁명렬사 시종운(施从云)이다. 생부가 사망된후 시검교는 아버지 시종운의 동생 시종빈(施从滨)의 양녀로 들어가 삼촌 시종빈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시종빈은 1925년에 산동성군무조리 겸 봉계제2군 군장을 담임했다. 시종빈은 그해 11월의 직봉대전에서 패배하여 손전방(孙传芳)에게 포로되였다. 당시 5성련군통수(五省联军统帅)였던 손전방은 포로된 시종빈을 즉시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손전방은 시종빈의 시신을 동강낸후 머리를 안휘성 방부기차역꼭대기에 7일동안 걸어놓았다. 아버지가 비참하게 살해된 소식을 들은 시검교는 비분강개하여 주먹을 불끈 틀어쥐고 꼭 손전방을 죽여 아버지의 원쑤를 갚겠다고 하늘에 맹세했다. 그러나 당시 연약한 녀자가 손전방같은 군벌거두를 암살한다는것은 불가능한 일이였다. 그리하여 시검교는 복수의 희망을 사촌오빠 시중성에게 걸었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읜 시중성은  시검교의 아버지 시종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시종빈이 살해되였을 때 시중성은 연태경비사령부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있었다. 시검교는 이런 사촌오빠의 힘을 빌면 손전방을 암살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찾아갔을 때 유망한 전도와 부귀영화에 미련을 둔 시중성은 단마디에 시검교의 부탁을 거절했다. 몹시 실망한 시검교는 집에 돌아간후 장편편지를 써서 시중성과의 남매관계를 단절했다. 몇년후 시검교는 산서성 태원에 갔다가 산서군벌 염석산의 부대에서 첩보계장을 담임하고있는 시정공을 알게 되였다. 그때까지 시검교는 한시도 원쑤를 갚을 일을 잊은적이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비참하게 살해된 사실을 시정공에게 털어놓으면서 복수를 도와달라고 했다. 시검교의 미모에 반한 시정공은 비분강개하는척 하면서 “만약 기회가 있다면 내 이 몸이 분신쇄골이 되더라도  검교를 대신하여 원쑤를 갚아주겠소”하고 호언장담했다. 그 말을 믿은 시검교는 시정공에게 몸까지 바쳤다. 하지만 결혼후 시정공은 안락한 생활에 빠져 결혼전에 맹세했던 말을 말끔히 잊어버렸다. 시검교가 기다리다못해 여러번이나 원쑤를 갚아달라고 말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시검교는 더는 참을수 없어 1935년 6월에 아이를 데리고 태원을 떠나 천진의 친정으로 돌아왔다. 그후 그녀는 다른 사람이 나서서 자신을 대신해 아버지의 복수를 해줄 생각을 버리고 직접 손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시검교는 손전방과 관계되는 정보라면 모두 수집하면서 손전방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1935년 추석날에 시검교는 프랑스조계지의 대광명영화관문앞에 세워놓은 검은색승용차를 발견했다. 차번호가 1093호인 그 차는 틀림없는 손전방의 승용차였다. 영화가 끝난후 시검교는 처음 가까운 거리에서 검은색안경을 낀 기세등등한 손전방을 만났다. 그러나 떼를 지어나오는 관중들이 많아서 손을 쓸수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살해한 원쑤가 승용차에 올라 사라지는것을 눈을 펀히 뜨고 보고있는수밖에 없었다. 그후 시검교는 여러번이나 영국조계지에 있는 손전방의 호화저택주위를 돌아보았으나 경계가 삼엄하여 손을 쓸수 없었다. 시검교는 손전방을 미행하여 그의 행동규률을 알아냈다. 그때 손전방은 갑자기 불교신도로 탈바꿈하여 천진거사림(居士林)의 부림장으로 되였다. 1935년 10월에 시검교는 “동혜”라는 이름으로 불교절당인 거사림에 들어가 거사(거사림의 불교신도)로 되였다. 그후 그녀는 손전방을 암살할 기회가 오기만 기다렸다. 1935년 11월 13일은 불경을 강의하는 날이였다. 시검교는 그날에 근운붕과 손전방이 모두 경문을 들으러 거사림에 온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날은 비가 내리고 찬바람이 불어서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매우 적었다. 근운붕은 비때문에 오지 않았지만 손전방은 비를 무릅쓰고 제 시간에 거사림에 도착했다. 거사림에서 부처에게 절하고 불교강의를 들을 때 남녀거사들은 두줄로 갈라서 앉았다. 마침 남거사들의 줄앞에는 근운붕이 앉고 녀거사들의 줄앞에는 손전방이 앉는것이 규칙으로 되였다. 그날도 손전방은 녀거사들의 줄앞에 앉았다. 그전에 시검교는 세번이나 불교강의를 들었지만 강의를 들어러 온 거사들이 많아서 손을 쓰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은 비때문에 강의를 들으로 온 거사들이 적었다. 시검교는 손을 쓰기가 좋다고 여겼지만 맨 뒤에 앉아서 손전방과의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뒤의 난로가 뜨겁다는 리유로 앞으로 옮겨 앉았다. 거사들이 부명법사를 따라 경문을 읽을 때 손전방도 거사들과 함께 눈을 감고 경문을 읽었다.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시검교는 남몰래 가방에서 브라우닝권총(勃朗宁手枪)을 꺼내들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전방의 머리를 겨낭한후 방아쇠를 당겼다. 불교절당에 울려퍼진 “땅!땅!땅!”하는 세방의 총소리와 함께 손전방은 당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혼비백산한 거사들은 그 자리에 굳어져 한 사람도 일어나 도망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시검교는 사람들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모두들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나는 아버지의 원쑤를 갚았을뿐 무고한 사람을 해칠 마음이 없습니다. 손전방은 내가 죽였으니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절대 여러분들에게 련루되게 하지 않을것입니다.” 말을 마친 시검교는 가방에서 삐라와 《국민들에게 알리는 글》이란 책자를 꺼내 사방에 뿌렸다. 그리고 그녀는 집에 전화를 걸어 거사에 성공했다고 말한후 동해스님한테 가서 자신이 자수하겠으니 경찰국에 통지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손전방의 부하가 달려들어왔다. 그는 시검교가 총을 들고있는것을 보고 서뿔리 다가서지 못하고있다가 경찰이 온후 시검교를 붙잡아갔다. 그날 오후 6시에 《신천진보》는 호외를 발행하여 “시종빈의 딸이 쏜 복수의 총에 손전방이 비명에 쓰려지다”는 특대뉴스를 보도했다. 다음날에 천진, 북평, 상해 등지에서도 이 소식을 보도하여 전국이 들썽했다. 다음날에 사건은 천진지방법원검찰처에 이송되였다. 시검교는 자신이 손전방을 살인한 경과와 원인에 대해 숨김없이 진술했다. 시검교의 진술을 들은 사람들은 그녀의 용기에 감탄하면서 그녀를 “녀호걸”이라고 불렀다. 연약한 녀자가 혼자서 손전방같은 거물을 암살할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처음에 그녀의 배후에 누가 있지 않을가고 의심했다. 이런 의문에 대해 시검교는 아래와 같이 진술했다.  “저는 아버지의 원쑤를 갚으려고 오래동안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배후는 없습니다. 저의 아버지가 만약 싸움터에서 돌아갔더라면 저는 손전방을 원쑤로 여기지 않았을것입니다. 하지만 손전방이 잔인하게 포로된 아버지를 살해하고 수급을 매달아 가족들이 일주일이나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지 못하게 하였기에 저는 그를 불공대천의 원쑤로 여긴것입니다. 저의 시집형제들과 남편은 모두 총이 있고 세력이 있지만 은혜를 저버리고 우리 아버지의 원쑤를 갚아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족도 믿을수 없는데 어찌 남을 믿을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다시는 다른 사람을 찾지 않고 어머니도 모르게 행동했습니다. 권총은 태원에 있는 저의 남편한테서 가져온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총을 가지고놀았기에 사격에 대해 잘 알고있었습니다.” 손전방의 가족대표와 시검교의 가족대표가 법정에서 수개월동안 변론했지만 결과를 보지 못했다. 얼마후 천진지방법원에서 시검교를 유기형 10년에 처한다고 1심판결을 내렸다. 그후 변호사의 신고로 천진고급법원에서 다시 심리하고 징역을 유기형 7년으로 정했다. 당시 사회각계에서는 시검교가 죄악이 하늘에 사무친 대군벌 손전방을 암살한것은 나라와 인민을 위해 유익한 일을 한것이라고 일치하게 평가했다. 당시의 《대중생활》잡지는 손전방이 이미 불문에 귀의했기에 그의 과거를 추궁하지 말아야 한다는 일부 사람들의 설법에 대해 “중국의 수많은 군벌과 관료들은 무고한 인명을 도살한후 늘 념불을 외우면서 불교에 몸을 담고있는데 이는 불교의 허울로 자신의 몸에 묻은 피흔적을 씻고 비렬하게 나라를 팔아서 긁어모은 돈을 세탁하려는 음모이다. 손전방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는 글을 실어 반박했다. 당시의 전국부녀회인 료녕, 양주, 강도부녀회와 려경안휘학회, 안휘성 립휘주사범 등 단체에서 시검교를 동정하여 나서서 최고법원에서 시검교를 석방해줄것을 요구했다. 또 이 사건은 풍옥상장군까지 놀라게 했다. 풍옥상은 시검교를 알지 못했지만 신해혁명시기에 시검교의 친아버지 시종운과 함께 용감히 적을 물리친적이 있었다. 풍옥상은 소식을 알게 된후 즉시 중화민국 개국공신 리렬균, 장계 등과 함께 련합으로 남경정부에 압력을 가해 아버지의 원쑤를 갚은 효녀이며 인민을 위해 해를 제거한 녀호걸인 시검교를 석방해줄것을 요구했다. 일부 신문에서는 풍옥상장군이 단독으로 장개석에게 전화를 걸어 시검교를 석방해줄것을 요구한 사실을 보도했다. 결과 시검교가 감옥에 들어간지 1년이 채 되지 않는 1936년 10월 14일에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 림삼은 전국에 공고를 발표하여 시검교를 사면한다고 선포했다. 그후 중화민국 최고법원에서 특사령을 내려 시검교를 석방했다. 시검교가 사면된지 얼마안되여 항일전쟁이 폭발하였다. 즉시 남방으로 달려간 시검교는 선후로 장사, 중경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항일전사들을 위해 위문품을 모으고 학교를 꾸리는 등 나라와 인민을 위해 유익한 사업을 했다. 새중국이 건립된후 시검교는 1952년에 북경으로 이사왔는데 줄곧 거사의 신분으로 벽운사에서 수행했다. 그녀는 1957년에 북경시의 정협특별초청위원으로 되였다. 시검교는 1973년에 병으로 사망되였는데 그때까지 줄곧 북경시의 정협특별초청위원으로 있었다.      
48    국산전쟁드라마로부터 본 군사상식 댓글:  조회:5952  추천:4  2014-04-19
국산전쟁드라마로부터 본 군사상식 (번역)     《량검(亮剑)》은 관중들의 환영을 받는 군사제재드라마인데 최근에 새로 다시 찍기까지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량검》의 신판이나 구판을 포함해서 시청률이 높다고 소문난 국산군사제재드라마는 오래동안 군사상식이 잘 못된 장면들이 련속 나와서 비난을 받을대로 받아왔다. 또 국산군사제재드라마는 관중들에게 국방지식과 군사상식을 보급하는 방면에서 현저하게 오도한 착오를 범했다. 이 방면에서 미국과 일본에서 제작한 전쟁드라마는 본보기를 보여주고있다. 이를테면 현재까지 방송되고있는 일로전쟁을 반영한 《언덕우의 구름(坂上之云)》, 미국HBO에서 투자하여 제작한 2차대전드라마  《형제련》, 최근에 방송된 태평양전쟁을 반영한《태평양에서의 혈전》은 제작수준 및 도구와 력사고증 등 전업방면에서 매우 뛰여나다. 국내전쟁드라마는 미국과 일본에 비해 현저한 차이가 있다. 관중들은 앞으로 국내에서 제작한 군사제재작품에서 도구를 진실하게 사용하고 력사사실을 정확하게 반영할것을 바라고있다. 《새 량검(新亮剑)》중의 군사상식착오를 살펴보면 웃음거리가 많다. 신판 《량검》제3집중에는 초운비와 리운룡이 각각 체스꼬식 경기관총을 받쳐들고 공중에 대고 사격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이다. 두 사람의 손은 모두 접은 두개의 받침대(两脚架)를 쥐고있고 손가락은 도기관(导气管)부위에 접근하고있다. 사격후 도기관은 몹시 뜨겁게 달아서 그런 자세라면 손이 데여 화상을 입게 된다. 영웅기개를 보여주는 이런 문제의 장면은 기타 많은 국산전쟁제재력사극에서도 동일하게 존재한다. 손으로 경기관총을 받쳐들고 련발사격하면 명중률이 매우 낮다. 사실 손으로 경기관총을 받쳐들고 련발사격하면 총을 쏘는 사람의 두손이 화상을 입을뿐만아니라 적이 근거리에 있지 않을 경우에는 안정성이 결핍하여 명중률이 매우 낮다. 또 이런 사격방식은 탄알이 특별히 크고 넓게 흩어지면서 사격하는 사람의 앞에 공교롭게도 전우들이 있다면 적은 명중하지 못하고 도리여 전우들의 목숨만 빼앗게 된다. 사실 일반적인 정황에서 경기관총조는 앞에서 돌격하는 일이 매우 드물다. 경기관총은 반급이나 패급의 화력지원에 사용되는데 사용시에 총의 두 받침대를 안정된 위치에 흔들리지 않게 고정시켜놓고 사격한다. 그래야만 사격의 정확성과 련속성을 보장할수 있다. 경기관총수가 정말로 총을 받쳐들고 사격할 경우에는 총의 두 받침대를 벌려놓고 두다리로 총의 두 받침대를 안정시키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경기관총수의 손이 화상을 입지 않을수 있다. 또는 한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다른 한손으로 사격하는것이 바른 자세이다. 그리고 공중에 대고 사격할 경우에는 두손으로 총신과 총의 개머리판(枪托)을 단단히 잡고 사격해야 한다. 인물의 용감하고 두려움없는 기개를 보여주기 위해 신판 《량검》중에 관병(官兵)이 밀집하여 돌격하는 상투적인 장면이 나온다. 이 역시 국산전쟁력사극에서 늘 보게 되는 착오적인 장면이다. 그러나 진짜전쟁에서 이렇게 하면 적의 화포, 수류탄, 경기관총의 마지막 리상적인 과녁이 될수 있다. 진짜전쟁에서는 돌격할 경우에 보병은 모두 흩어져 달린다. 사실 팔로군, 신사군 및 나중의 해방군과 조선전쟁때의 지원군은 모두 전쟁중에서 사람바다가 되여 돌격한적이 한번도 없었다. 조선전쟁시기 미군 제2보병사에서는 1950년 11월의 전역을 총결할 때 이렇게 서술했다. “지원군은 미군의 한개 보병련진지를 진공할 때 처음에는 공격중점을 주요진지측후방의 유리한 지형을 선택했고 공격병력을 1개패(약 30명)의 진지에 집중했다. 지원군의 첫 공격은 길게 많은 병력이 밀집하여 공격한것이 아니라 가장 많아 60~70명이 흩어져 달렸고 일반적으로 30~40명이 흩어져 달렸다.” 이는 아군이 적진으로 진공할 때 “인해돌격(人海冲锋)”을 발동하지 않았다는것을 설명한다. 스텐돌격총(斯登冲锋枪)은 중국전쟁력사극에서 가장 잘못 사용된 도구이다. 신판《량검》에서 이 돌격총은 먼저 초운비의 손에서 나타나는데 이 돌격총은 사실 해방전쟁시기에야 국민당군대에 제공된것이다. 그전에는 기본상 영국과 유럽의 일부나라에서 사용했다. 이렇게 《량검》에서 스텐돌격총은 력사사실보다 앞서 나타나 웃음거리로 되였다. 그후 이 련속극에서 스텐돌격총은 또 일본군특수부대의 손에서 나타났다. 먼저번보다 다른것은 독일제MP18독일총의 외형으로 개장한것이다. 구판 《량검》에서도 일본군특수부대에서 미국제M3식돌격총을 사용하고있는데 2차세계대전시기에 일본군은 미국제경무기로 장비한적이 없다. 신판 《량검》에서 일본군은 독일제MP18돌격총을 사용하는데 이 돌격총은 국민당군에서도 적지 않게 사용하고있다. 이는 당시의 력사사실에 부합된다. 이렇게 력사사실에 부합되게 하기 위해 신판《량검》에서 스텐돌격총의 외형을 독일제MP18돌격총의 모양으로 개장했지만 자세히 보면 의연히 스텐돌격총이란것을 식별할수 있다. 스텐돌격총은 영국에서 제2차세계대전시기에 대량 제조한  구경 9밀리메터돌격총이다. 영국군은 이 돌격총을 줄곧 1960년대까지 사용했는데 모두 400여만자루 제조했다. 이 돌격총은 구조가 간단하고 외형이 못생겼지만 위력이 매우 강하고 원가가 낮으며 신속하게 대량적으로 생산할수 있는 장점이 있다. 1918년에 독일의 저명한 군사무기설계사 슈마이저(施迈瑟)는 이름난 MP18돌격총을 설계해냈다. 베르그만(伯格曼)무기공장에서 생산한 베르그만MP18돌격총은 세계에서 처음 나온 돌격총이다. 제1차세계대전이 결속된후 독일에서 남은 모젤권총(毛瑟手枪)과 MP18돌격총이 중국에 류입되였다. 1925년에 한양병기공장에서 처음으로 MP18돌격총을 모방하여 제조하였는데 구경을 7.63밀리메터로 고쳤다. 1926년에 상해병기공장과 금릉제도국에서도 이 총을 모방하여 제조하기 시작했는데 2년사이에 6000자루를 생산했다. 광동, 공현병기공장과 대고조선소에서도 선후로 이 총을 약간 개조하여 제조했는데 구경이 9밀리메터, 7.65밀리메터, 7.63밀리메터였다. 이런 모방형돌격총은 모두 개머리판이 나무로 되였고 탄창(弹匣)이 좌측에 가로놓였으며 총신의 보호덮개(护套)에 동그란 구멍을 가득 냈기에 이름을 “화기관(花机关)”이라고 통칭했다. 극중에서 일본군이 사용한 저격보총도 38식보총을 개장한것이다. 묘준경은 현대제품인것이 현저하게 드러난다. 그 시기 현실에서 일본군이 사용한 97식과 99식 저격보총은 외관이 일반보총의 특징에 비해 현저하게 다르다. 그 시기 일본군이 사용한 97식저격보총은 38식보총의 표준적인 변형총이다. 99식저격보총은 99식짧은보총의 기초에서 총신을 두껍게 하고 묘준경을 첨가한 변형총이다. 진짜일본군의 97식과 99식저격총에 가설한 묘준경은 가설위치가 현저하게 뒤쪽에 치우쳐져 사격수가 관찰하기 편리하게 했다. 그러나 극중의 저격보총에 가설한 묘준경은 현대제품일뿐만아니라 가설위치가 앞으로 치우쳐져 사격수가 묘준할 때 머리가 총신에 붙게 되였다. 이런 가설방식은 실제전투에서 매우 불편한것이다. 극중에서 또 하나의 웃음거리는 일본군이 현역해방군의 07식군화를 신은것이다. 현재까지 3년동안 지속적으로 방영되고있는 일본대하력사드라마 《언덕우의 구름》은 중국 동북에서 진행된 일로전쟁을 반영한 작품이다. 이 력사드라마는 인물의 형상을 진실하게 반영하였을뿐만아니라 도구와 쌍방의 군복, 쌍방의 함정은 당시의 력사를 진실대로 반영하였다. 신판 《량검》은 다른 국산력사극에 비해 군사상식착오가 적은 셈이다. 이것도 국산력사드라마수준의 진보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국산력사드라마의 수준은 국외의 력사드라마에 비해 차이가 매우 크다. 하지만 국산력사드라마는 전쟁제재의 경전이라고 할수 있는 《형제련》이나 《태평양에서의 혈전》과는 감히 비교할수조차 없다. 국내전쟁제재영화나 드라마는 장기간 많은 군사상식착오를 범하였는데 그 위해는 제작수준문제에만 있는것이 아니다. 국내전쟁제재영화나 드라마는 관중들에게 국방지식과 군사지식방면에서 헤아릴수 없을 정도로 착오적인 인식을 심어주었는데 이는 반드시 중시를 일으켜야 할바이다.      
47    장개석의 사망비밀 댓글:  조회:8051  추천:5  2014-04-11
장개석의 사망비밀   (번역)   장개석은 1972년 7월부터 병상에 누워있었다. 그때부터 그의 몸에는 산소호흡기를 비롯한 여러가지 의료기기가 가득 꽂혀있었다. 물리치료를 받을 때 장개석은 이런 의료기기들을 뽑아내고 침대에서 내려 30분정도 활동했다. 장개석은 군인출신이였기에 놀라운 의력으로 정원의 화초를 감상하며 단거리산책을 할수 있었다. 그렇게 되자 송미령은 장개석의 건강을 빨리 회복시키기 위해 매일 오후 차에 앉아 교외로 드라이브(兜风)를 해야 한다는 규칙을 세웠다. 그런데 장개석이 차에 앉아 교외로 드라이브를 갈 경우 병실의 여러가지 의료기기의 감시범위를 벗어나야 하기에 위험했다. 하지만 송미령이 자신의 의견을 고집했기때문에 의료소조에서는 《3군총병원》의 최신구급차를 동원하여 장개석의 전용차를 뒤따르게 했다. 처음 드라이브를 하는 날, 오래간만에 외출하는 장개석은 몹시 흥분되였다. 송미령도 오래가만에 장개석과 함께 산책하는지라 기분이 좋아서 경호원에게 좀 멀리 달려도 된다고 분부했다. 장개석이 거의 1시간만에 사림관저로 돌아왔기때문에 의료소조의 “어의”들은 손에 땀을 쥐였다. 송미령은 장개석이 하루 빨리 건강이 회복되여 “대통령부”에 나가 “국가”사무를 보기를 바랐다. 장개석은 오래동안 공개장소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기에 외부에서는 장개석의 사망설까지 나돌았다. 송미령은 세인들에게 장개석이 “건재”함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장개석이 공개장소에 나오도록 배치하고 텔레비죤방송을 통해 그 장면을 내보냈다. 1972년 9월부터 1974년 12월 1일까지의 기간에 장개석의 병세는 의연히 의료소조에서 통제할수 있는 범위내에 있었다. 그러나 공식판 《장개석치료보고》에서 1973년 12월 22일부터 1974년 12월 1일까지의 치료정황에 대해 언급할 때 “의료소조에서는 장개석의 만성전위선염이 나았다 도졌다 하여 장개석의 건강이 악화되고 장개석의 혈관경화와 심장비대증이 수시로 합병증을 일으킬가봐 세계의 유명한 비뇨기과, 심장 등 방면의 전문가들을 청하였다. 결과 영양을 증가하고 체력을 증진하면서 약물사용, 염증발생통제 등 보수적인 치료방법을 취해야 하며 과격한 치료방법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결정했다”고 썼다. 대만의 섬내(岛内)사무는 모두 장개석의 비준이 있어야 실행될수 있었다. 관저사무에 대해서 장개석은 송미령에게 도맡겼다. 정부사무에 대해서 장개석은 송미령이 참견하는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대미(对美)외교사무만은 송미령의 의견을 존중했다. 장개석이 병상에 눕게 된후 의료사무에 대해서 송미령이 독단으로 처리했다. “행정원장”으로 당선된 장경국은 대부분 정부사무를 장악했지만 사림관저내의 사무에 대해서는 송미령의 결정에 대해 감히 반대의견을 내놓지 못했다. 송미령은 외조카딸인 공령위를 친딸처럼 총애하고 신임했다. 재벌가 공상희와 송애령의 딸인 공령위는 천문지리에 밝았는데 자신의 소총명을 믿고 모르는것도 아는듯이 행동했다. 그때문에 실수할 때도 있었는데 송미령은 책임을 추궁하지 않았을뿐만아니라 그녀를 믿어의심하지 않으면서 더욱 총애했다. 1974년 11월말에 사림관저의 “의료총고문”으로 불리우는 공령위는 송미령을 보고 미국에 “서양화타”로 불리우는 세계명의가 있는데 장개석의 병을 능히 치료할수 있다고 장담했다. 송미령은 귀가 솔깃하여 즉시 그 미국의사를 청해오라고 지시했다. 공령위는 오빠 공령간과 함께 미국에 가서 “서양화타”를 청해왔다. 송미령은 미국의사를 상빈으로 모시고 장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국의사는 장개석의 긴 병력서를 보고난후 한바탕 리론을 늘여놓으면서 장개석의 병세가 안정되였기에 즉시 등부위천자(背部穿刺)수술을 해야 회복될 희망이 있다고 장담했다. 장개석의 병세가 회복될 희망이 있다는 말을 들은 송미령은 몹시 기뻤다. 천자란 몸의 일부에 속이 빈 가는 침을 혈관이나 몸의 일부에 찔러넣어 몸속의 체액, 조직 등을 뽑아내거나 약물을 주입하는것을 말한다. 그러나 장개석의 의료소조성원들은 미국의사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런 수술은 “과격치료방법”이라고 인정하면서 환자에게 예측할수 없는 위급한 후과를 가져올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미국의사는 등부위천자수술이 장개석의 병세를 회복시킬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고집했다. 미국의사의 말을 믿은 송미령은 의료소조의 경고를 무시했다. 의료소조에서는 장경국을 찾아가 “미국의사는 장대통령의 병세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중국인의 체질과 체형이 백인과 다르다는것을 고려하지 않고있습니다. 만약 미국의사가 장대통령의 서면병력서자료만 보고 등부위천자수술을 한다면 매우 위험합니다. 송부인은 공령위의 비전업적인 말만 듣고 미국의사를 너무 믿고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의료소조의 회보를 들은 장경국은 깜짝 놀랐다. (공령위가 또 무슨 짓을 하고있는거야? 그녀가 일으킨 화근이 적었단 말인가? 만일 의료소조의 말처럼 등부위천자수술이 위험하다면 그 책임을 누가 질수 있겠는가?) 장경국은 송미령에게 권고하려고 사림관저를 찾아갔는데 입을 열기전에 송미령이 먼저 의료소조에서 장개석의 건강을 회복시키지 못하고있는 상황에서 미국의사에게 한번 맡겨보는것이 좋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장경국은 의료소조의 의견도 들어보는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송미령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장개석이 등부위천자수술을 받은것은 1974년 12월초의 일이였다. 그후 장개석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였다. 원래 서양의사를 의술이 고명하다고 춰올렸던 송미령과 사림관저(士林官邸)의 “의료총고문”이라고 불리우던 공령위는 모두 김 빠진 풍선마냥 풀이 죽어서 안절부절못했다. 의료소조의 “어의”들은 일찍 송미령과 장경국에게 등부위천자수술을 하면 매우 위험하다고 경고한바 있었다. 유감스러운것은 송미령이 시종 들은척도 하지 않은것이였다. “어의”들은 처음부터 등부위천자수술은 장개석의 병세가 악화된 주요원인이라고 인정했다. 의료일군과 시위들은 모두 마음속으로 알고있었다. 송미령이 페천자수술로 페부의 농혈된 액체를 뽑아내자고 결정한것은 확실히 선의로부터 출발한것이였는데 그것이 장개석의 생명을 빨리 결속짓게 한  최명부(催命符)로 되였다는것을… 송미령과 공령위가 마음속으로 가책을 느꼈는지는 누구도 알수 없는 일이였다. 송미령은 자신과 공령위가 큰 화를 저질렀다는것을 깨달았지만 체면때문에 잘못을 승인하지 않았다. “의료총고문”인 공령위는 의료소조에서 등부위천자수술을 반대하는 리유를 알고 다시는 “미국의사”라는 말을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후회해도 늦었다. 공씨가문은 장개석을 위해 적지 않은 일을 해주었다. 1960년대초기에 장개석은 대륙을 공격하려고 생각했지만 신식무기를 사들일 자금이 모자라서 공씨가문에 손을 내밀었다. 그시기는 공상희가 살아있을 때였는데 공상희는 장개석의 전화를 받자마자 수억의 자금을 기부하여 미국제M-24형전차를 탑재(搭载)할수 있는 등륙함을 사들이는데 일조했다. 악화된 병세는 다시 회복되기 어려웠다. 장개석은 점점 죽음을 향해 가깝게 다가가고있었다. 장경국은 내막을 알고있어도 공씨남매의 책임을 추궁할수 없었다. 1975년 1월 1일에 장개석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자 장경국은 일기를 쓰는것으로 아버지의 병세에 대해 근심하는수밖에 없었다. 그 시기는 바로 합의사가 장개석에게 페천자를 시행한지 한달후였다. 장경국은 그날의 일기에 “양력설에 아버지께 세배를 드렸다. 아버지는 수면상태에 있는데 병세가 매우 엄중하여 내 가슴이 칼로 찢기는듯 아프다”고 썼다. 수술후유증으로 장개석은 계속 고열혼미상태에 있었다. 페부감염이 엄중하고 심장기능이 쇠퇴하고 혈액순환이 잘되지 않아 장개석의 체내기관에 다시 액체가 쌓이기 시작했다. 여러가지 병이 서로 불화를 이끌면서 장개석의 병세는 악성순환을 반복했다. 1975년 4월 5일 밤 11시 50분에 의료소조의 “어의”들은 실망한 표정으로 심장구급설비를 내려놓고 정식으로 장개석이 숨을 거두었다고 선고했다. 향년 89세였다.  1969년의 교통사고가 장개석의 심장부위에 엄중한 내상을 입혀 장개석의 건강은 악화되였다. 만약 그번의 교통사고가 없었더라면 장개석은 병석에 눕지 않았을것이다. 또 만약 송미령이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물리치지 않고 독단으로 미국의사의 의견에 찬동하지 않았더라면…그래서 페부에서 액체를 뽑아내는 수술을 하지 않았더라면…원래 안정되였던 장개석의 병세가 돌변하여 수습하지 못할 지경으로 되지는 않았을것이다. 이 모든것은 구경 천명이였을가? 장개석의 운이 다 기운것이였을가?     
46    력사상의 10대 저명한 독신자 댓글:  조회:9318  추천:0  2014-04-11
력사상의 10대 저명한 독신자   (번역)     2011년은 외톨이(光棍) 즉 독신의 해이며 2011년 11월 11일은 독신의 날이다. 이 독신의 날을 맞으면서 본지는 력사상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10대 명인들을 소개한다.   (1) 그리스의 저명한 철학자 플라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며 객관적 관념론의 창시자인 플라톤은 기원전 427년에 그리스 아테네에서 출생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파이돈》, 《향연》, 《국가론》 등 저서를 남긴 플라톤은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기원전 347년에 81세의 나이에 일생을 마감했다.     (2) 이딸리아 천재적 미술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딸리아 문예부흥시기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년 4월 15일에 이딸리아 피렌체근교의 빈치라는 마을에서 사생아로 태여났다. 다 빈치는 문예부흥시대의 이딸리아를 대표하는 천재적 미술가, 과학자, 기술자, 사상가이다. 15세기 문예부흥시대의 미술은 그에 의해 완벽한 완성에 이르렀다. 조각, 건축, 토목, 수학, 과학, 철학,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면에 재능을 보인 그는 문예부흥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위대한 예술가일뿐만아니라 지구상에 생존했던 가장 경이로운 천재중 하나이다. 다 빈치는 1519년5월 2일에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그는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기때문에 자식을 남기지 않았지만 미술사에 길이 남을 걸작 《최후의 만찬》, 《모나리자》 등 작품을 남겼다.     (3) 영국 녀왕 엘리자베스 1세     1533년 9월 7일에 헨리 8세와 두번째 왕비인 앤 불린 사이에서 태여난 엘리자베스 1세는 국교의 확립을 이루려고 힘썼고 종교적 통일을 추진하였으며 화페제도를 통일하고 중상주의정책을 펼쳤다. 또 빈민구제법에 의하여 토지를 잃은 농민의 무산화를 방지하였고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독일, 프랑스, 이딸리아 등의 외국어를 공부하여 력사, 음악, 신학에 능통하였다. 25세때에 에메리 1세가 죽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며 에스빠냐왕 펠리프의 구혼을 받았으나 당시 최강을 자랑하던 에스빠냐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거절하였다. 그녀의 오랜 치세는 영국의 절대주의 전성기를 이루었으므로 국민으로부터 “훌륭한 냐왕”라고 불리우며 경애의 대상이 되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 처녀로 살다가 1603년 3월 24일에 생을 마감했다.     (4) 영국의 천재적 과학가 뉴톤     1642년의 성탄절에 영국 링컨셔의 울즈소프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여난 아이작 뉴턴은 물리학자, 천문학자, 수학자, 근대리론과학의 선구자였다. 수학에서는 미적분법을 창시하였고 물리학에서는 뉴톤역학의 체계를 확립했다. 또한 이것에 표시한 수학적방법 등은 자연과학의 모범이 되였으며 사상면에서도 역학적자연관은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령감이 떠올라 만유인력의 법칙을 확립한 근대과학성립의 최고의 공로자이다. 그가 주장한 “자연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라고 하는 력학적 자연관은 18세기 계몽사상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뉴톤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1727년 3월 20일에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5) 독일의 천재적인 음악가 베토벤     베토벤은 1770년 12월 17일에 독일의 본에서 가난한 음악가의 아들로 태여났다. 그는 30대전에 청력을 잃었지만 시련을 이겨내고 《영웅교향곡》을 작곡했다. 음악가에게 청력이란 목숨과도 같았지만 베토벤은 청력을 잃은후에도 인류의 빛과 령혼이 되는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창작하였다. 베토벤이 평생에 걸쳐 작곡한 피아노쏘나타 32곡은 피아노음악의 금자탑으로 손꼽히고있다. 그러나 베토벤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열번째 교향곡을 준비하면서 완숙미를 자랑하는 다양한 현악4중주곡을 작곡했다. 사랑하는 녀인들이 모두 청혼을 거절했기에 베토벤은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1827년 3월 26일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6) 스웨리예의 위대한 과학가 노벨     1833년 10월 21일에 스톡홀름에서 발명가의 아들로 태여난 알프레드 베른하르드 노벨은 고체폭탄인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1867년에 특허를 얻었고 1875년에 무산화약발리스타이트를 발명하였다. 이러한 발명 및 특허에 의해 그의 가문은 유럽최대의 부호로 되였다. 노벨은 숨을 거두기 1년전에 자기재산에서 생기는 리자로 해마다 물리학, 화학, 생리학과 의학, 문학, 평화의 5개부문에 걸쳐 공헌이 있는 사람에게 상을 주라는 유언장을 남겼다. 세계의 평화와 과학의 발달을 념원해 오던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산은 스웨리예의 과학아카데미에 기부되였다. 그 기부금으로 1901년부터 노벨상제도가 설정되였다. 이 상은 물리학, 화학, 생리학과 의학, 문학, 경제학, 평화의 6개부문으로 나누어 국적 및 성별에 관계없이 그 부문에서 뚜렷한 공로를 세운 사람에게 해마다 수여되고있다. 노벨은 19살 때 외국류학을 나갔다가 프랑스에서 한 처녀를 사모하게 되였다. 그후 이 처녀는 죽고말았다. 그 처녀의 죽음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은 노벨은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다가 1896년 12월 10일에 이딸리아 산레모의 별장에서 일생을 마쳤다.     (7) 화란의 위대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     1853년 3월 30일에 화란의 그루트 준데르트라는 작은 마을에서 출생한 반 고흐는 선명한 색채와 정서적인 감화로 20세기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화가이다. 그의 수많은 자화상을 비롯하여 풍경화, 초상화 그리고 해바라기 등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으로 되여 각종 기록을 갱신하고있다. 반 고흐는 8살 된 아들까지 있는 과부인 외사촌누나 키 보스 스트릭커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그후 반 고흐는 5살 된 딸을 가진 임신한 창녀 시엔과 동거했다. 시엔과는 약 1년 넘게 같이 생활했지만 1883년 가을에 헤여졌다. 1884년 가을에 반 고흐보다 10살이나 많은 마고 베게만이라는 이웃집 녀인이  반 고흐를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반 고흐는 그녀에게 보답하기 위해 결혼하기로 결심했지만 두 집안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했다. 그후 정신적인 병으로 고통을 겪던 반 고흐는 우울증이 점점 심해졌다. 1890년 7월 27일에 권총으로 자살함으로써 37세의 나이에 일생을 마쳤다.     (8) 영국의 저명한 녀류소설가 제인 오스틴     1775년 12월 16일에 영국 햄프셔주의 스티븐턴에서 출생한 제인 오스틴은 《오만과 편견》 등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담담한 필치로 인생을 포착하고 은근한 유머를 담은 그녀의 작품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높이 평가되였고 세계문학의 대표적 작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였다. 제인 오스틴은 자신보다 6살 년하인 젊은이에게서 청혼을 받은적이 있었지만 거절하고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다가 몸이 쇠약해져 1817년 7월 18일에 42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감했다.     (9) 프랑스의 저명한 작가 볼테르     본명이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인 볼테르는 1694년 11월 21일에 프랑스의 빠리에서 태여났다. 저명한 작가이며 계몽사상가의 신으로 불리우는 볼테르는 《자디그》, 《캉디드》 등의 철학소설과《관용론》, 《철학사전》, 《샤를르 12세사》, 《루이 14세의 시대》, 《각 국민의 풍습·정신론》 등 99권의 거작을 남겼다. 유부녀인 에밀리와 20년동안 동거했지만 자식이 없이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1778년 5월 30일에 84세의 나이에 다사다난했던 생을 마감했다.     (10) 중국의 저명한 철학가 김악림     중국의 저명한 철학가이며 론리학자인 김악림은 1895년에 호남성 장사시에서 출생했다. 저명한 저서 《지식론》을 남긴 김악림은 일생동안 량사성의 안해 림휘인을 사모했다. 그는 림휘인을 사랑한다는것을 숨기지 않았을뿐만아니라 량사성의 앞에서까지 “너의 안해를 사모한다”고 말했다. 림휘인은 중국의 첫 녀성건축가이며 문학가인데 그녀는 남편 량사성외에 시인 서지마, 철학가 김악림의 사랑을 받았다. 김악림은 림휘인이 사마된후에도 해마다 몇번씩 그녀의 산소를 찾아가서 성묘하는것으로 그녀를 그리면서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다가 1984년 10월 19일에 90세의 나이로 북경에서 사망되였다.                                                                  (생활안내)      
45    악마같은 아버지를 죽이고 처형당한 녀자 댓글:  조회:7324  추천:0  2014-04-04
악마같은 아버지를 죽이고 처형당한 녀자     명문귀족 첸치집안의 미소녀     첸치가문은 원로원 의원과 추기경 등 명사를 낳은 로마 굴지의 명문귀족이였다. 프란체스코 첸치와 그의 안해 에르시아의 사이에는 일곱명의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둘째딸 베아트리체 첸치는 보기 드문 미소녀였다. 검고 부드러운 머리카락, 사랑스런 얼굴 생김새, 생기 넘치는 검은 눈동자, 날씬한 몸매… 1584년에 7세의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베아트리체는 그때로부터 8년을 장미꽃으로 둘러싸인 기숙학교에서 지냈다. 하지만 거기에서의 즐거운 소녀시절도 15세 때에 나폴리 국경에 가까운 페트렛트라성에 사는 아버지에게 이끌려 가게 됨으로써 일변했다. 베아트리체의 아버지는 녀자들을 번갈아 가며 침실로 끌어들였을뿐만아니라 성안에 다 들릴 정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몽둥이를 들고 그녀를 쫓아다니군 했다. 베아트리체는 방에 들어박혀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일이 많아졌다.   친딸을 범하는 야만스런 아버지의 욕정     베아트리체와 계모 루크레치아에게 있어서 밤에 잠자기전의 몇시간은 지옥과 같았다. 프란체스코는 난로 앞에 앉아 두 사람이 보고있는 앞에서 트림을 하기도 하고 더러운 말로 웨치기도 하고 그러다가는 구멍이 뚫린 의자에 앉아서 대변을 보고는 두 사람에게 억지로 엉덩이까지 닦게 하는것이였다. 1593년 3월의 어느날 저녁에 베아트리체가 침대에 누워있는데 갑자기 그녀의 아버지가 나타났다. 그녀는 깜짝 놀라서 모포를 뒤집어썼지만 아버지는 상관하지 않고 들어와서 침대끝에 앉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베아트리체의 모포를 벗기고 예쁜 딸을 덮치려 했다. 깜짝 놀란 베아트리체는 고함치며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아버지는 겁이 나서 뒤걸음질치는 딸을 벽까지 바싹 몰고 갔다. 그리고 애원하듯 목이 터지게 소리를 지르는 베아트리체를 덮쳐 란폭하게 속옷을 벗기고 딸의 순결을 마음껏 짓밟았다… 집사 올림피오는 당당한 체구와 거무스름한 피부의 45세 된 미남이였다. 그는 가련한 베아트리체가 아버지에게 학대받고있는것을 보고 동정하게 되였다. 그 동정이 차츰 애정으로 변한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올림피오의 애무를 받으면서도 베아트리체는 전혀 다른것을 생각하고있었다. 그 무렵부터 그녀의 마음속에는 아버지를 살해하겠다는 무서운 생각이 꿈틀거리고있었던것이다. (그녀는 지옥과 같은 생활에서 도망가고싶다. 녀자로서의 행복을 누리고싶다.) 베아트리체는 아버지를 살해하기 위해 올림피오를 끌어들였던것이다.   서로 다른 목적으로 시작된 프란체스코 살해     어느날에 베아트리체는 예전에 아버지의 마부였던 마르치오를 통해서 로마에 있는 오빠 쟈코모에게 지금의 고통스러운 생활에서 구출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것이 어쩌다가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 버렸다. 화가 난 프란체스코는 베아트리체가 오빠에게 보냈던 편지를 그녀의 눈앞에 내밀고는 채찍으로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옷이 찢기고 부드러운 피부에 피가 맺히자 이번에는 베아트리체를 헛간에 가두어 버렸다. 전신이 쑤시는 고통속에서 베아트리체는 헛간의 축축한 바닥에 누워있었다. 이제 더이상 견딜수 없었다. 이 지옥에서 도망칠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설령 그것이 자신에게 위험이 닥치는 일이라도… 그후에도 또다시 지옥과 같은 나날이 계속 되였지만 베아트리체는 어떤 릉욕이나 폭력도 잠자코 참았다. 오로지 아버지를 살해하려고 하는 결심만이 그녀를 지탱해 주었다. 오빠 자코모도 함께 아버지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게 된것은 그 무렵이였다. 베아트리체는 아버지의 폭력과 학대에 견딜수 없어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고 올림피오는 그녀를 구하려고 서슬이 시퍼래서 기다렸으며  자코모는 아버지의 유산으로 빚을 갚으려고 아버지를 죽이려고 별렀다. 1598년 9월 8일 밤에 베아트리체는 포도주에 아편을 섞어서 아버지에게 마시게 했다. 이튿날 새벽에 집사 올림피오와 마부 마르치오는 마치와 방망이를 들고 성안으로 잠입했다. 올림피오는 프란체스코를 덮쳐서 멱살을 누르고 오른손에 든 쇠망치로 머리를 마구 내리쳤다. 올림피오와 마르치오는 계획대로 마루바닥을 뜯어내고 프란체스코의 시체를 밀어 떨어뜨렸다. 그렇게 하는 동안 베아트리체는 피묻은 깔개를 잘게 잘라서 변소에 던져버렸다.   의혹을 깊게 하는 올림피오의 실종     성으로 돌아온 올림피오는 시치미를 떼고 장례식을 도맡아 했지만 사람들의 의혹을 두려워해서 한시라도 빨리 사체를 매장하도록 신부를 재촉했다. 이런 그의 행동은 오히려 세상의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첸치 일족이 파멸하게 된 원인이였다. 프란체스코의 죽음은 사람들의 의혹을 자아냈다. 결국 1598년 11월 14일에 쟈코모와 베아트리체는 심문을 받게 되였다. 오누이는 아버지가 베란다에서 떨어져 죽였다고 주장했지만 의심은 풀리지 않았다. 사건이 발생된후 올림피오는 첸치집을 제집 드나들듯 했다. 버릇없이 첸치집안사람들과 같은 밥상에서 식사를 하고 밤에는 베아트리체의 침실에 들어박혀서 그녀의 아름다운 육체를 제 마음대로 주물렀다. 참다 못한 오빠 쟈코모는 어느날에 베아트리체를 불러놓고 말했다, “이대로 그자를 두면 우리 집안 명예가 더러워진다. 즉시 이 집에서 내쫓아 버려!” 몸에 위험이 닥쳤다는것을 느낀 올림피오는 부리나케 성을 떠났으나 그후 쟈모코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했다. 올림피오의 실종은 더욱 의혹을 자아냈다. 경찰은 집요한 수사끝에 프란체스코의 무덤을 파헤치고 검사했다. 의사들은 유체의 상처가 도끼로 맞은 상처라고 증언했다. 베아트리체, 루크레치아, 쟈코모, 마르치오, 그리고 동생 베르나르드까지 붙잡히게 되였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가족의 고문     마르치오, 쟈코모,  루크레치아는 선후로 발가벗겨져서 손이 뒤로 묶여 매달리게 되는 순간 고통을 견디지 못해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모든 죄를 베아트리체에게 전가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억울함을 주장했다. 이렇게 되자 재판장은 베아트리체가 지켜보는 앞에서 오빠와 계모를 고문했다. 베아트리체는 그들의 자백은 모두 고문때문에 강요당한것이라고 주장했다. “거짓말입니다. 아무도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첸치가문을 근절하는 법왕의 책략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자 경찰들은 베아트리체를 고문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이 뒤로 묶이고 오빠와 동생처럼 높이 매달렸다. 팔의 뼈가 관절부분에서 불거져나온 그녀는 가슴을 괴로운듯이 헐떡이였다. 바줄이 늦추어지고 축 늘어지면서도 베아트리체는 의연히 굴복하지 않았다. 자코모, 루크레치아, 베아트리체에게는 사형판결이 내려졌지만 로마의 명문가문인 첸치일족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편지가 눈송이마냥 로마법왕에게 날아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왕이 은사를 베풀지 않았던것은 첸치일족을 멸문시키고 그 막대한 자산을 몰수하려는 속셈이 있었기때문이라고 전해오고있다. 처형이 집행되기 조금전에 베아트리체는 “한 불행한 남자아이”를 위해 500스쿠드라는 돈을 샌티스부인에게 위탁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 돈의 리자로 남자아이를 양육할것, 부인이 아이보다 먼저 죽는 경우에는 다른 누군가에게 같은 조건으로 그 돈을 위탁할 것.” 력사가들은 그 남자아이가 베아트리체와 올림피오의 사이에서 태여난 아이라고 추정하고있다. 1599년 9월 11일에 로마의 다리광장에서 처형이 집행될 때 베아트리체는 22세이지만 아직 십대로밖에 보이지 않는 천진란만한 미소녀였다. 먼저 계모 루크레치아의 목이 잘려졌고 다음으로 오빠 쟈코모가 달구어진 불에 근육과 다리가 태워지고 머리는 내려친 마치에 박살나고 몸은 갈가리 찢겨져 처형대에 매달렸다. 동생 베르나르드는 간신히 죽음은 면했지만 그 대신 처형장에서 형과 누나가 처형당하는것을 몇번이나 실신하면서 지켜보아야만 했다.  폭력, 강간, 유괴 등 온갖 나쁜 짓에 물든 악마같은 아버지를 죽인 베아트리체는 빠른 걸음으로 단두대로 달려나가 스스로 용감하게 목을 작두밑에 내밀었다고 한다. 작두가 내리쳐졌고 절단된 그녀의 목을 사형집행관은 높이 쳐들어 사람들에게 보게 하였다.  아버지의 학대로부터 자유를 구하려고 했으나 결국 얻지 못한 가련한 미소녀 베아트리체! 온 로마의 사람들이 이 절세미소녀의 죽음을 깊이 탄식하고 슬퍼했다.     
44    공화국창건후 첫 고위급간부 암살사건 댓글:  조회:6044  추천:0  2014-03-30
공화국창건후 첫 고위급간부 암살사건   (번역)     1951년 2월에 중앙인민정부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반혁명징벌조례》를 반포하였는데 그때로부터 전국적으로 기세드높은 반혁명진압운동이 시작되였다. 그러나 일부 반혁명분자들은 멸망을 달가와하지 않고 의연히 새로 태여난 인민정권을 뒤엎으려고 취후발악을 하면서 한번 또 한번 새 정부의 고위급간부들을 암살했다. 1951년 3월에 모택동의 원 비서이며 산동성인민정부위원이며 산동성군구 정치부 부주임인 황조염(黄祖炎)은 인민해방군내부에 숨어든 반혁명분자에게 암살되였다. 이는 새 중국이 성립된후 처음으로 발생된 고위급간부암살사건이기에 중앙지도자들까지도 경악했다. 1951년 3월, 제남의 밤은 아직도 쌀쌀하여 거리에는 행인이 드물었다. 3월 13일 밤 8시 30분에 경이로에 위치한 제남시정부의 강당에서 북소리와 거문고소리가 울려퍼졌다. 산동성군구문화사업좌담회의가 방금 끝나고 문예야회의 공연이 시작된것이였다. 좌담회에 참석한 대표는 200여명이였는데 대부분이 산동성군구계통 사정(司政)기관의 문화, 선전교육을 책임진 과급이상의 간부들이였다. 황조염은 앞줄의 오른쪽 첫좌석에 앉아있었는데 그는 그날밤 좌담회에 참석한 간부들중에서 직무가 가장 높은 수장이였다. 공연이 시작되기전에 그는 주석대에 올라 대표들을 향해 강화를 한후 자기의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그때 누구도 회의에 참석한 일군중에 한 사람이 황조염의 일거일동을 주시하고있다는것을 알지 못했다. 그날밤에 황조염은 원래 열이 몹시 나서 강화를 마친후 집에 돌아가 쉬려고 했는데 다른 사람들의 흥을 깨뜨릴가봐 계속 남아서 문예공연을 관람했다. 공연이 한창 고조에 오르고있을 때 황조염의 좌측 뒤쪽에 앉은 한 사내가 흉악한 눈길로 황조염을 쏘아보고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주의하지 않았다. 그 사내는 사람들이 관람에만 몰두하느라고 자신에게는 주의를 돌리지 않는것을 보고 살그머니 황조염의 뒤로 다가가 총을 꺼내들었다. 그는 1초동안 황조염의 머리를 겨눈후 방아쇠를 당겼다. “땅!”하는 총소리와 함께 황조염은 당장에서 쓰려졌다. 흉수는 이어 오른쪽 처장의 좌석에 대고 한방 쏘았다. 너무 갑작스럽에 발생된 일이라 모두들 어리둥절해졌다. 한참후 누군가 큰소리로 “저 놈을 붙잡아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그때는 흉수가 이미 자진한 뒤였다. 산동성군구 보휘부의 장일평 등은 급히 화조염을 성립병원으로 호송했다. 의사들이 모든 방법을 다해 구급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하고 황조염은 불행하게 사망되였다. 향년 43세였다. 황조염을 암살한 흉수는 공개된 반혁명분자가 아니라 당내에 숨은 반혁명분자 왕취민이였다. 왕취민은 혜민군분구 선전교육과 부과장이였다. 산동성 문등현 서횡요촌의 한 지주의 가정에서 출생한 왕취민은 항일전쟁초기에 소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1940년에 팔로군에 혼입해들어왔고 이듬해에 공산당내부에 혼입해들어왔다. 1944년에 농민의 소작료, 토지세, 대출리자 등을 낮추는 정책을 실시하자 자신의 가정리익에 손해를 입는것을 보고 소극적으로 저항하면서 병을 핑게로 장기적으로 집에서 휴식했다. 토지개혁운동때 그는 부모가 투쟁을 당하게 되자 군중들을 욕하면서 요언을 퍼뜨려 토지개혁을 반해했다. 하지만 그는 처분을 받지 않았다. 1950년 11월에 왕취민은 혜민군분구에 전근되여 선전교육과 부과장직을 맡았다. 그후 그는 직권을 리용하여 조직에서 나서서 자신의 아버지가 악패지주가 아니라는것을 증명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그 요구가 거절을 당하게 되자 당과 당의 토지개혁정책에 더욱 큰 불만을 품게 되였다. 1951년 2월에 전국적으로 반혁명진압운동이 시작되였다. 3월 6일에 혜민군분구에서는 왕취민의 고향사람들이 부쳐보낸 련명신을 받았다. “악패지주인 왕취민의 아버지는 두 농민을 핍박하여 죽게 한 죄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왕취민은 1938년에 적에게 두명의 지하당원을 밀고한적이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이번 반혁명진압운동에서 그들을 처리해주기를 바랍니다.” 혜민군분구 정치부의 지도부에서는 왕취민의 정서에 영향을 끼칠가봐 엄숙하게 처리하지 않고 산동성군구에도 보고하지 않았다. 왕취민은 고향사람들이 자신을 적발했다는것을 알게 된후 놀라서 함께 죽더라도 한번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총을 닦고 칼을 갈면서 기회만 기다렸다. 하지만 혜민군분구지도부에서는 왕취민의 반상적인 행동에주의를 돌리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를1951년 3월 13일에 제남에서 열린 산동성군구 문화사업좌담회에 참석하게 하여 황조염을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되게 하였다. 해방초기에 농촌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할 때 당내에는 왕취민과 같은 가정에서 출새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공산당의 토지개혁정책을 옹호하고 지지하면서 혁명사업에 충성했다. 황조염이 암살당한 그날밤에 중공산동분국과 산동성군구에서는 즉시 이 소식을 중앙에 보고했다. 모택동 등 중앙지도동지들은 황조염이 암살당한 소식을 듣고 몹시 놀랐다. 모택동은 중공중앙을 대표하여 각 중앙국, 대군구, 지원군 당위 및 해당단위에 통보를 내려보냈다. “산동성군구 정치부 부주임 황조염동지는 3월 13일에 좌담회에 참석했다가 반혁명분자 왕취민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이는 우리 당의 고위급간부가 당내에 숨어든 반혁명분자에게 암살당한 사건으로서 과거에는 보기 드물었습니다. 이에 전당에서는 경각성을 높여야 합니다. 이에 다음과 같이 통보합니다. 첫째, 반혁명분자들의 보복을 엄하게 방지해야 합니다. 반혁명분자들의 보복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것을 인정하고 반드시 사전에 방지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경비를 강화하는 외에 적극적인 방법을 강구하여 반혁명조직을 파내고 반혁명소굴을 짓부셔버려야 합니다. 반혁명분자들이 미처 보복할 사이가 없이 견결하고 신속히 그들을 소멸해야 합니다.” 둘째, 절대 무사태평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반드시 당내, 정부내, 군대내에 소수의 반혁명분자들이 혼입해들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시작하여 이 문제에 주의를 돌려 의심스러운 분자들을 조사하여 재료를 수집해야 합니다. 지구당위 및 행정공서 1급이상의 기관, 군분구 및 사(师) 1급이상의 기관, 도시에서는 시구량급기관내에서 특별히 의심스러운 분자들을 주의하여 조사해야 합니다. 확실한 조사하여 재료가 확실하다면 반드시 합당하게 처벌하여 당, 정, 군 각급지도기관의 순결과 안전을 보장해야 합니다. 절대 우유부단하거나 관용을 베풀어 나쁜 일을 하도록 조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건이 발생된후 산동성군구에서는 욍취민소재의 혜민군구의 지도부와 해당간부에 대해 엄숙하게 처리하고 이번 사건의 교훈을 참답게 총결했다. 반혁명진압운동이 방금 시작되여 군대내부에서는 반혁명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결과 각급 조직에서는 마비사상이 존재했고 경각성이 부족했다. 보위부문에서는 안전사업이 소홀하여 회장에 대한 경호배치가 따라가지 못했다. 이런 사건이 다시 발생되지 않도록 방지하기 위해 군구에서는 구체적인 조치를 제정했다. 산동성군구 사령원 허세우는 명령을 내려 이후 기관간부들이 토비토벌 등 임무를 집했할 때를 제외하고는 일률로 총을 휴대하지 못한다고 규정했다. 1952년 10월 26일에 모택동은 처음 제남땅을 밟았다. 모택동이 이번에 산동에 온것은 사업회보를 듣고 산동각지를 시찰하는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일정이 있었는데 그것은 황조염렬사를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그날 오후에 산동분국의 시찰활동계획배치에 대해 알아본후 모택동은 산동성군구 사령원 허세우한테 물어서 황조염의 묘지가 남쪽교외의 사리산에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모택동은 허세우를 보고 말했다. “내가 묘지에 가보아야겠소. 난 1938년초에 연안에서 그와 리별했댔소. 그때 그는 신4군을 편성하러 산에서 내려온 진의를 맞이하러 갔댔는데 벌써 14년이 되였소. 그런데 그것이 영원한 리별이 될줄은 생각도 못했소.” 1952년 10월 27일에 모택동은 허세우와 함께 승용차에 앉아서 화조염렬사의 묘지로 찾아갔다. 묘지로 가는 도중에 모택동은 허세우를 보고 말했다. “조염동지는 얻기 힘든 인재요. 문무에 능하고 사람됨됨이가 너그럽소. 그는 조직관념과 사업심이 강하고 자신에 대한 요구가 엄격하며 동지들과의 우애도 깊었소. 난 그가 몹시 그립소.” 황조염의 묘지는 렬사릉원의 제일 높은 곳에 있었다. 모택동은 황조염의 묘지앞에서 허리를 굽혀 묵묵히 묵도를 하고나서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염동지, 내가 당신을 보러 왔소!” 모택동이 눈물을 흘리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통곡했다. 
43    동북전역에서 국민당 거목 진성을 물리친 림표 댓글:  조회:7356  추천:0  2014-03-22
동북전역에서 국민당 거목 진성을 물리친 림표   (번역)   동북민주련군의 가을철공세가 결속된후 1947년 10월 15일에 모택동은 동북민주련군 총사령 겸 정위인 림표에게 전보를 보내여 더욱 큰 규모의 겨울철작전을 앞당겨 개시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림표는 현재 그의 부대가 관을 넘어 작전한다는것은 현실적이 못된다는것을 의식하고 모택동에게 회답하는 전보에서 기동출격작전을 1948년초로 늦출것을 건의했다. “금주에서부터 심양일대까지의 하류가 모두 얼어야 아군의 대부대가 행동하기 편리하고 금주와 심양사이의 작전에 최대의 병력을 투입할수 있습니다. 대거점공격, 대증원작적의 수요에 적응하기 위해 우리는 래년 4~5월에 다시 100개의 새 병퇀을 확대하기로  했습니다. 기동과 평수로작전에 관해 림표, 라영환, 류아루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현재 대군이 움직인다면 보충공급이 곤난합니다. 그렇다고 규모가 크지 않은 부대가 나간다면 병력이 분산되여 작은 전투는 찾기 어렵고 큰 전투를 하려고 해도 병력이 모자라게 됩니다. 때문에 우리는 잠시 움직이지 않고 명년에 강물이 언후 다시 형세를 보아서 움직이기려고 합니다.” 동북전역에서 국민당군이 병력을 집중하여 대도시를 고수하고있는 상황에서 림표는 4~5개 종대를 집중하여 도시공격작전을 발동하거나 6~7개의 종대를 집중하여 대규모의 운동전을 하는수밖에 없었다. 공격할수 있는 작은 거점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기때문이다. 그 시기 재정비와 확충을 거쳐 림표의 병력은 가을철작전시기보다 근 22만명이 더 증가되여 총병력은 이미 74만명이 되였다.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군대는 동북지구에서 처음 병력이 국민당군을 초과했다. 12월초에 동북지구의 기온은 마침내 령하 20도로 내려갔다. 강울이 얼어 무거운 군수물자를 실은 차도 통과할수 있게 되였다. 동북민주련군은 두꺼운 솜옷을 입고 신선한 우랍초를 받친 신을 신고 한자 깊이 쌓인 눈길로 전진했다. 12월 15일에 2종대와 10종대는 심양이북의 법고를 포위했고 7종대는 법고이서의 창무를 포위했으며 8종대는 창무이남의 신립툰을 포위했다. 1종대, 3종대, 6종대는 법고, 신민, 심양사이에 도착했고 4종대는 심양에 접근했으며 9종대는 심양서북방향의 신민부근에 이르렀다. 동북민주련군이 전면적으로 출동하자 긴장해난 군민당군의 국방부참모총장이며 동북군영주임 진성은 즉시 철령을 고수하던 신6군 신22사에 법고를 증원하라고 명령했다. 신22사의 출동은 림표에게 전투하기 적합한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림표는 아래와 같이 명령했다. (1) 10종대 29사는 법고를 물샐틈없이 포위하여 적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할것. (2) 2종대와 7종대의 주력은 신속하게 법고동남을 돌아서 측면으로 진공할것. (3) 3종대는 철령으로 우회하여 적군 22사의 퇴로를 막아 신3군 14사와의 련계를 끊어놓을것. 12월 16일에 신22사(적군)는 철령과 법고사이의 진서보루와 랑랑묘의 일선에 도착하여 법고이동의 2종대(아군)의 진지를 공격했다. 2종대는 즉시 반격하면서 5사를 적의 측면과 후면으로 우회하게 했다. 신22사는 자신이 공격대상으로 되였다는것을 발견한후 급히 철령으로 후퇴했다. 신22사가 얻어맞자 12월 20일에 진성은 급히 장춘을 고수하던 신1군 54사와 림시편제로 된 53사, 사평을 고수하던 제71군 87사와 91사, 개원을 고수하던 제53군 103사와 림시편제로 된 30사, 료남을 지키던 제52군 제2사에 심양과 철령지구를 증원하여 심양을 포위한 림표군의 군사위협을 해제하라고 명령했다. 국민당군의 대규모의 이동은 림표가 줄곧 기다리고있던 바였다. 림표는 동쪽을 치는척 하고 서쪽을 치는 전술로 사면이 산으로 둘러쌓여 견고한 법고를 포기하고 2종대와 7종대에 서쪽의 창무를 공격하여 이동한 적군과 분산된 적군을 소멸하라고 명령했다. 창무는 심양이북철로선의 중요한 거점의 하나로서 국민당군 제49군 79사의 3개퇀이 지키고있었는데 병력이 1만명나 되였다. 12월 28일에 총공격이 시작되였다. 5시간후 창무성을 지키던 1만여명의 적군은 소멸되였고 군민당군 제49군 79사 소장 부사장 리불태와 7000여명의 적군이 포로되였다. 이는 림표군이 첫번째로 대낮에 발동한 도시공격전이였다. 그후로 동북민주련군은 대부분 대낮에 도시를 공격했다. 창무전투가 결속되자마자 림표는 1종대, 8종대, 9종대에 계속 남녕로로 전진하여 금주부터 심양사이의 교통련락을 철저하게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림표군이 사상자가 많아서 다시 전투하기 어렵다고 여긴 진성은 법고이남지구에서 림표군과 주력작전을 벌릴 계획을 포치했다. 국민당군의 5개군이 동쪽에서 철령으로, 서쪽에서 신민으로 료하량안의 100킬로메터를 따라 부채형으로 전면 출격했다. 진성의 대군이 출격한 날은 바로 1948년 양력설이였다. 진성은 그날부터 적수의 칭호가 변한것을 몰랐다. 1947년 12월 30일 17시에 동북민주련군총부에서는 “1948년 1월 1일부터 동북민주련군총사령부를 중국인민해방군동북군구사령부로 개칭하고 원래의 동북민주련군총사령부의 간칭인 ‘동총(东总)’을 중국인민해방군동북군구사령부의 간칭인 ‘동사(东司)’로 개칭한다”고 통지했다. 바로 그날에 림표는 진성의 3로대군(三路大军)중의 좌로 신5군이 진격이 빨라서 이미 돌출하게 앞으로 나와있고 력량이 상대적으로 박약하다는것을 발견했다. 림표는 각 종대를 동원하여 국민당군 신5군을 섬멸하는 전술을 펴나갔다. 림표군에게 포위된 신5군은 공주툰과 그 서남지구에 갇히게 되였다. 진성은 신오군 군장 진림달에게 공주툰을 고수하면서 증원을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진성은 림표가 자신의 한개 군을 섬멸하리하고는 생각도 못했기때문이다. 림표는 적군의 4개군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병력을 보전하기 위해 증원을 오지 않을것이라는것을 알고  대담하게 공격을 들이댔다. 공주툰을 계속 지킬것인가, 후퇴할것인가? 그때까지도 진성은 의연히 망설이고있었다. 각지의 증원부대에서 모두 그에게 “빠른 속도로 전진하고있다”고 보고했기때문이다. 림표는 2종대에 명령하여 새벽에 총공격을 발동하게 했다. 6일밤에 진성은 마침내 신5군에 심양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7일 아침에 림표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였다. 호되게 얻어맞은 국민당군은 결국 투항했고 진림달, 195사 사장 사대증, 43사 사장 류광천 등 1만 3000여명 관병들이 포로되였다. 거기에 7000여명의 사상자까지 합치면 신5군 2만여명이 전부 섬멸된것이다. 진성은 급히 료양을 지키던 제52군의 주력과 사평을 지키던 제71군의 주력을 심양으로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그후 그는 위병으로 드러누웠다. 1월 10일에 장개석은 심양으로 찾아왔다. 장개석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진성을 만났다. 진성은 신5군이 전멸된 원인을 하급들이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기때문이라고 하면서 신6군 군장 료요상을 처벌해줄것을 요구했다. 군민당동북군영에서 사장이상의 장령들이 참석한 군사회의가 열렸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장개석은 화가 나서 상을 내리치며 료용상장군, 리도장군 등이 무능하여 신5군이 섬멸되였다고 10여분동안 “냥씨피(娘希匹)”를 반복하며 줄욕을 퍼부었다. 장개석은 남경으로 돌아가자마자 나쁜 소식을 듣게 되였다. “신립툰이 림표군에게 근 한달동안 포위되여 제49군 26사의 9000여명 군사가 탄알과 군량이 떨이지고 많은 군사가 동상을 입어 사기가 저락되여있던중에 갑자기 림표군의 명렬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진성은 동북군영 부사령장관 정동국과 함께 남경으로 가서 장개석을 만났다. 진성은 장개석앞에서 다시 군민당군이 동북에서 패배한 원인은 하급들이 부패하고 타락되여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기때문이라고 변명했다. 그의 말을 듣고난 장개석은 “진장군은 다른 일은 상관하지 말고 마음놓고 료양이나 잘하게”하고  말했다. 그제야 진성은 자신의 군사생애가 결속되였다는것을 깨달았다. “심양과 함께 생사를 같이 하겠다”, “심양을 지키지 못하면 총으로 자살하겠다”고 맹세했던 진성은 병을 핑계대고 장개석에게 사직을 제출했다. 1948년 2월 5일에 패전한 진성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심양을 떠났다. 때는 그가 동북군을 거느린지 6개월도 안되였다. 림표가 거느린 동북인민해방군의 겨울철공세 제1단계작전이 결속되였다. 이 전투에서 림표군은 국민당군 5만 8000여명을 섬멸하고 북녕철도를 차단했으며 국민당군이 동북을 고수하는 요지인 심양의 관문을 열어놓았다. 동북야전군은 령하 40도의 날씨에 야외에서 작전하다보니 8000여명이 동상을 입었고 신5군을 섬멸하는 전투에서만도 사상자수가 1만여명에 달했다. 
42    력사의 음지에 사라진 4인방 댓글:  조회:9262  추천:2  2014-03-18
력사의 음지에 사라진 4인방   문화대혁명시기에 중국을 암흑천지로 만들었던 강청, 왕홍문, 장춘교, 요문원을 일컬어 “4인방”이라고 부른다.   강청의 앞잡이 왕홍문     왕홍문(王洪文)은 본명이 왕홍원이며 1935년에 장춘에서 출생하여 일찍이 1950년에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하였으며 그후 조선전쟁복구에 나가기도 하였다. 1951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군에서 제대한 후에는 상해 면방직 제17공장에서 로동자로 근무하다가 면방직 제17공장 보위과 간사를 지냈다. 1966년에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상해로동자혁명반란총사령부"를 조직하여 사령관을 맡았다. 같은 해 11월에는 철로에 가로누워 렬차의 운행을 막은 상해 "안정사건"을 주동하여 중국공산당 상해시위원회를 협박하였다. 1967년초에 장춘교, 요문원과 손잡고 상해 "1월폭풍"을 만들어 권력탈취의 바람을 일으켰다. 그후 상해시 혁명위원회를 결성하여 부주임을 력임하고 상해 면방직 제17공장 혁명위원회주임을 력임하였다. 1968년에 중국공산당 상해시위원회가 다시 신설되자 제3서기를 력임하였으며 그후 상해시 로동자대표대회 주임, 상해시 로동조합 총련합회 주임, 상해 경비구 정치위원을 력임하였다. 1969년 4월 중국공산당 9기대회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되였다. 1973년 8월 중국공산당 10기대회에서 중앙위원, 중앙정치국 위원, 상무위원회 위원, 중앙 부주석에 선출되였으며 이와 동시에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상무위원을 겸임하였다. 1956년 2월에 쏘련공산당 제20차대회에서 쓰딸린을 비판하고 쏘공량당의 관계가 악화되자 모택동은 수정주의를 방지하고 수정주의를 반대하는것을 초점으로 삼았고 계급투쟁을 틀어쥐고 날마다 말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으며 또 미제국주의가 사회주의중국을 자본주의로 변화시키려는 희망을 제3대, 제4대에 두고있는 형세하에서 후계자문제를 급선무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림표를 후계자로 두었다가 실패하자 다시 젊고 전도가 있다고 여긴 왕홍문을 후계자로 정하였다. 왕홍문은 후계자로 지목된 기간에 강청의 당권 및 국가 최고권력 찬탈행위에 적극 가담하여 강청반혁명집단의 핵심인물이 되였다. 1974년부터 1975년까지 강청, 장춘교, 요문원과 더불어 4인방을 결성해 “림표를 비판하고 공자를 비판(批林批孔)”하는 운동을 일으켜 주은래를 중심으로 한 원로무산계급 혁명가들을 대대적으로 공격하고 당중앙을 총괄하고있던 등소평의 일상적인 업무를 반대하여 당권과 국가 최고권력을 탈취하려고 모의하였다. 그리고 계속하여 북경 제1차 천안문사건의 류혈진압에 적극 개입하였다. 그후 직접 상해로 내려가서 그의 직속하에 있는 무장조직을 결성하여 상해 민병폭동을 획책하려 하였다. 1976년 10월 7일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결정에 의해 구속 수감되였다. 1977년 7월, 중국공산당 10기 3중전회에서는 그의 당적을 영원히 취소하고 당내외에서의 모든 직무를 해임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1980년 11월 20일부터 1981년 1월 25일 사이에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에서 공개재판을 받았다. 1981년 1월 25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종신토록 정치권리를 박탈당했다. 1992년 8월 3일에 간염으로 옥중에서 병사하였다.     야망으로 가득찬 음모가 장춘교   장춘교는 1917년 2월에 산둥성 거야에서 출생하여 1932~1937년 제남과 상해에서 문예활동에 종사하였다. 1938년 연안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진찰기일보", "신석문일보"에서 총편으로 있었고 1954년 상해 "해방일보" 사장이 되였다. 1963년 중국공산당 상해시위 상무위원회, 서기처 후보서기 겸 선전부장, 1966년 당 중앙문화혁명소조 부조장, 1967년 상해시위 혁명위원회 주임 겸 남경군구 제1정치위원 및 상해경비구 제1정치위원, 해방군총정치부 주임을 지녔고 1969년 당 제9기 중앙위원․중앙정치국 위원, 1973년 당 제10기 중앙위원․중앙정치국 위원․중앙정치국 상임위원, 1975년 제4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부총리에 선임되였다. 1966년부터 76년까지 10년동안 이어진 중국 문화대혁명의 광기를 주도한 4인방중의 한 사람인 장춘교는 기타 세 사람과 함께 극좌적인 문화대혁명을 통해 중국 전통문화와 가치관을 말살시킴과 동시에 수백만명의 무고한 사람을 박해받아 사망에 이르게 했으며 수천년에 걸쳐 내려온 중국 전통문화재가 대부분 소실되게 했다. 장춘교는 강청이 녀황제를 꿈꾸고 왕홍문이 모택동의 자리를 꿈꾸고 유문원이 주덕의 위원장 자리를 꿈꿀 때 총리의 자리를 찬탈하려는 야심을 품고 강청 등과 결탁하여 주은래를 타도하는데 앞장섰다. 홍콩과학기술대학 중국사회 전문가 데이비드 교수는  권력에 대한 야망으로 가득 찼던 장춘교의 사상은 현대 경제개혁의 수요와 어긋났다고 평가했다. 1976년에 4인방의 일원으로 체포된 장춘교는 1981년에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형집행이 2년간 유예되였고 1983년에 무기형으로 감형되였다. 장춘교는 재판을 받는 동안 처음부터 마감까지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1998년 신병 치료를 위해 교도소를 나와 병원에서 지내다가 2005년 4월 21일 암으로 사망되였다.     붓으로 사람을 죽인 요문원     문화대혁명 시기에 림표, 강청 반혁명집단의 핵심 인물이였던 요문원(姚文元)은 1932년 절강성 제기에서 출생하여 대학을 졸업한 후에 문화홍보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다가 1948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일찍이 중국작가협회, 상해 로만구로동운동위원회, 구위원회 선전부, 상해 "해방일보", 중국공산당 상해시위원회정책연구실에서 선후로 업무를 맡았다. 1965년 11월, 강청과 장춘교의 사주를 받고 "신편역사극 〈해서파직〉을 평함"이란 글을 발표하였으며 이로부터 강청반혁명집단의 핵심인물이 되였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중국공산당 중앙문화대혁명 소조구성원을 력임하였다. 1967년초 장춘교, 왕홍문과 함께 상해 "1월폭풍"을 만들어 정권찬탈 바람을 전국적으로 일으켰다. 그후 중국공산당 상해시위원회 제2서기, 상해시 혁명위원회 제1부주임 등을 력임하였으며 중국공산당 제9, 제10기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였다. 1974년부터 1975년까지 그는 "림표와 공자를 비판하는(批林批孔) 운동"을 리용하여 인민민주전정을 타도할 목적으로 많은 문장을 발표하여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을 모함하고 박해하였다. 강청, 장춘교, 왕홍문과 더불어 4인방을 결성하여 당과 국가의 최고권력 찬탈을 기도하였다. 요문원은 1976년 10월 6일 회인당에서 회의에 참석하라는 통지를 받고 갔다가 체포, 7일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의 결정에 의해 구속 수감되였다. 1977년 7월, 중국공산당 10기 3중전회에서는 그의 당적을 영원히 취소하고 당내외의 모든 직무를 해임한다는 결정을 하였다. 그는 1980년 11월 20일부터 1981년 1월 25일 사이에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에서 공개재판을 받고 징역 20년에 5년간 정치권리 박탈을 선고받았다. 감옥에서 그는 강청처럼 야단치지도 않고 장춘교처럼 묵묵히 침묵을 지키지도 않았으며 열심히 개조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매일 신문과 책을 읽으며 반성문을 써바치면서 림표, 강청반혁명집단과 계선을 가르겠다고 보고했다. 그는 개조표현이 적극적이였으며 신문을 보고 자기의 제기하기도 했다. 가소로운것은 그가 신문에서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입쌀고 밀가루가 남아돈다는 보도들 읽고 감옥당국에 "이렇게 흥청망청 먹고 랑비하면 몇년 못가서 량식이 거덜날것이니 다시 량표를 발행하여 계획적으로 제한해야 합니다. 당신들이 저의 의견을 중앙정치국에 전하여 간고분투하는 정신을 견지하지 않고 마구 먹어버리면 나라의 창고가 텅 비게 된다고 귀띔해주십시오."하고 제기한것이다. 1996년 1월 출옥할 때 요문원은 10여년동안 갇혀있던 감방을 둘러보며 길게 한숨을 지었다. 그런후 천천히 죄수복을 벗고 가족들이 가져온 중산복을 갈아입었다. 그는 바깥의 찬란한 태양을 바라보며 감옥문을 나서서 이미 기다리고있는 가족들한테로 다가갔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북경기차역으로 가서 상해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지난날 문밖을 한발작만 나서도 수많은 경호원들과 수행인원들이 전후에 따라서는 으리으리한 큰 인물이였던 그는 누가 자신을 알아볼가봐 모자를 꾹 눌러썼다. 그러나 상해역에 도착하여 마중을 나온 안해 김영을 보았을 때 그는 눈물이 글썽하여 "후-정말로 꿈같은 10년이구려!"하고 탄식했다. 요문원은 2005년 12월 23일에 당뇨병으로 사망되였다. 
41    모택동의 아들 모모를 찾던 곡절적인 이야기 댓글:  조회:6338  추천:1  2014-03-08
모택동의 아들 모모를 찾던 곡절적인 이야기   (번역)   1909년 9월 28일에 강서성 영신현 향신에서 하환문의 맏딸로 출생한 하자진(贺子珍)은 원명이 계원, 자진(自珍)이다. 1926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그녀는 영신현공청단위서기, 중공길안현당위 부녀운동위원회 서기직을 담임하다가 1928년에 정강산에서 모택동과 결혼했다. 하자진은 모택동과 결혼하여 3남3녀를 낳았는데 그중에서 리민이 현재 유일하게 생존해있는 자녀이다. 하자진은 1929년 3월에 맏딸 양월화(원명 모금화)를 낳았는데 후에 전투에서 후퇴하면서 황망히 한 백성의 집에 맡겼다가 1973년에 찾았다. 하자진은 1930년에 남자아이를 낳았지만 요절되였다. 그후 1932년 11월에 모안홍(모모)을 낳았는데 장정을 하기전에 한 백성의 집에 맡겼는데 모택담이 사망된후 행방불명이 되였다. 하자진은 1935년 2월에 딸 왕수진을 낳았는데 장정도중에 행방불명이 되였다. 그 이듬해 하자진은 딸 모교교(리민)을 낳았다. 그후 1937년에 모택동과 리혼하고 이듬해 10월에 모스크바에 가서 아들 료와(로씨야이름)를 낳았는데 얼마 안되여 요절되였다. 하자진은 만년에 병으로 상해에서 치료를 받고있다가 1984년 4월 19일 17시 17분에 사망되였다. 1953년 3월에 강서성 성장 소식평은 중공중앙조직부 부부장 안자문이 북경에서 보낸 긴급전보를 받았다. 전보는 1934년 10월에 서금의 백성에게 맡겨놓았던 모택동의 아들 모모를 찾아줄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였다. 전보문을 읽은 소성장은 얼마전에 상해에 거주하고있는 하자진도 자신에게 편지를 써서 서금에 두고온 아들을 찾아달라고 부탁하던 일이 떠올랐다. 당시 하자진은 아이의 아명을 모모라고 지었다. 장정을 시작하기전에 하자진은 모택동의 동생 모택담에게 부탁하여 모모를 당지의 백성에게 맡기게 했다. 모택담과 하자진의 녀동생 하이는 부부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모택담은 조카를 한 백성의 집에 맡겨놓은후 전투에서 사망되였다. 모택담이 사망되였기에 모모가 어느 지방의 어느 백성의 집에 맡겨놓았는지 하이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하이는 언니의 아들을 찾으려는 결심을 굽히지 않았다. 하이는 모모를 찾으려가다가 도중에 교통사고로 사망되였다. 소식평은 즉시 서금적의 로홍군인 강서성 민정청 청장 주개전을 불러 모모를 찾는 임무를 맡겼다. 주개전은 또 우대무휼처의 청년간부 왕가진을 불러 모모를 찾는 임무를 맡겼다. 서금에 도착한 왕가진은 먼저 서금현의 현장과 부현장 그리고 홍군 녀전사 황장교를 찾았다. 사흘후 서금현 현장 류휘산은 로홍군좌담회를 열었다. 좌담회에는 17명의 로홍군이 참석했는데 그들은 저마다 당시의 정황을 회상해보았다. 그들은 홍군이 장정을 하기전에 어떤 홍군간부가 어느 백성의 집에 아이를 맡겼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모모가 어느 곳에 남았는지는 아무도 모르고있었다. 왕가진은 촌마다 돌아다니면서 조사하기 시작했다. 한달반이나 되는 동안 70~80개의 촌을 돌아다녔지만 모모의 향방을 찾지 못했다. 그후 왕가진은 서금현당안관에서 력사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는 1934년의 《서금현지》에  “공산당의 괴수 모적(毛贼) 택동이 아들을 서금의 마을에 맡겼다”는 기록을 보고 모모가 확실히 서금에 남았다는것을 확신했다. 어느날 엽평향정부에 거주하던 왕가진은 두 농민과 한담하다가 주방촌의 주성태농민이 당년에 홍군의 아이를 부양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였다. 왕가진은 이튿날에 주성태의 집으로 찾아갔다. 주성태와 그의 안해 황월영은 1934년 9월말에 자신들이 홍군의 아이를 맡아서 키웠다고 대답했다. 국민당이 쳐들어오자 주성태는 아이의 안전을 위해 아이의 이름을 길에서 주어왔다는 뜻으로 “도래(道来)”라고 지었다. 그들은 19년동안 주도래를 자신들의 다섯 친자녀보다 더 애지중지 키우면서 중학교까지 공부시켰다. 그런데 두달전에 그들부부가 상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남경에서 왔다는 주월천이라고 하는 중년녀인이 남경군구공군사령부의 소개신을 가지고 와서 모모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데려갔던것이다. 주월천의 남편은 중앙쏘베트구역 순시원이였던 곽보청인데 1933년 2월에 복건성 녕화에서 사망되였다. 주월천도 아이를 서금에 맡겨놓았는데 이번에 서금현 민정부문의 일군과 함께 주성태네 집에 찾아와서 다짜고짜로 주도래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남경으로 데려갔다. 왕가진은 세심한 사람이였다. 그는 주성태부부에게 주도래의 사진이 있는가고 물어보았다. 황월영은 주도래가 방금 남경에게 부쳐보낸 사진이 있다면서 왕가진에게 보여주었다. 그 사진을 본 왕가진은 깜짝 놀랐다. 사진의 주도래는 모택동의 젊은 시절의 모습과 너무 흡사했기때문이다. 황월영은 주도래의 편지도 보여주었다. 주도래는 편지에 부모와 형제자매들이 너무 그립다고 하면서 “나는 아버지, 어머니의 집으로 가서 이전처럼 당신들과 함께 살고싶어요. 남경의 어머니는 절 좋아하지 않아요. 그는 녀동생만 고와해요. 녀동생도 나를 촌티가 난다면서 싫어해요”라고 썼다. 왕가진은 의심스러웠다. 그 남경의 어머니는 오래동안 헤여졌던 친아들을 찾았는데 왜서 랭대하는걸가? 도래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는것을 발견하고 그런 반상적인 행위를 저지르는것은 아닐가? 주도래는 분명 모택동을 닮았는데… 세심한 왕가진은 또 주월천이 도래를 데려갈 때 도래가 아기때 입던 옷을 가지고갔는가고 물어보았다. 황월영은 남경에서 온 녀인은 이전에 도래를 맡길 때의 물건을 하나도 요구하지 않았다고 했다. 도리대로 말하면 그렇게 귀중한 력사물증을 어머니가 가져가지 않을수 없는 일이였다. 왕가진은 의심스러운 점을 성민정청의 주청장에게 회보했다. 주개천청장은 이 일을 소식평성장에게 회보하고 소식평성장은 또 전보로 중앙조직부에 회보했다. 중앙조직부에서는 왕가진과 황월영에게 남경으로 가서 주도래를 데리고 하자진이 있는 상해로 가라는 임무를 맡겼다. 하자진이 직접 주도래를 보고 확인할수 있게 하려는것이였다. 왕가진은 서금에 가서 황월영을 데리고 함께 남경으로 가서 주도래를 찾았다. 1953년 6월중순의 어느날, 왕가진과 황월영이 주도래를 데리고 상해경비구에서 방공사령원직을 맡고있는 하자진의 오빠 하민학의 안내를 받으며 상해에 있는 하자진의 거처로 갔을 때 하자진은 첫눈에 모모를 알아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모모예요! 나의 모모예요”하고 말했다. 하자진은 1932년 11월에 복건성 장정복음병원에서 모모를 낳을 때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있었다. 산후 14일후 아들을 보러온 모택동은 “아이의 이름을 모안홍이라고 하고 아명을 모모라고 합시다”고 말했다. 황월영이 모모를 맡았을 때 모모가 입었던 아기옷을 보여주자 하자진은 자신이 직접 한뜸한뜸 바느질하여 지은 옷이 맞다고 확인했다. 하민학이 모모를 데리고 부대의 큰 병원에 가서 검사해본 결과 혈형도 하자진과 똑같았다. 모모의 신분이 특수했기때문에 모모는 10여일후 북경에 있는 중앙조직부의 초대소로 호송되였다. 초대소에서 모택동과 하자진의 딸 리민은 아버지의 모습을 그래도 빼여닮은 모모를 보자마자 친절하게 “오빠”라고 불렀다. 주은래, 주덕, 사각재, 동필무 등 중앙쏘베트구역에서 전투했던 로혁명가들과 등영초, 강극청, 사맹기(帅孟奇) 등 녀성혁명가들이 선후로 모모를 찾아보고는 모두 모택동의 젊었을 때의 모습과 똑 같다면서 기뻐했다. 그런데 이 일을 알게 된 남경의 주월천이 중앙조직부의 초대소로 찾아와서 “주도래는 내 아들이야! 내 아들을 다른 사람이 데려가면 난 여기서 목을 메여 죽을테야”하고 울고불며 떠들어댔다. 그 바람에 이 일을 더 “확인”해야 했기때문에 주도래는 모택동이나 하자진에게로 가지 못하고 사맹기의 저택에 들어갔다. 주도래는 그해 9월에 청화대학부속중학교에 들어가 공부했고 1957년에 시험에 합격되여 청화대학에 입학했다. 졸업후 그는 국방과학연구단위에 배치되여 과학연구에 종사했다. 그러다가 불행하게도 1966년 하반년에 문화대혁의 폭력투쟁이 시작되였을 때 주도래는 남경에서 폭력배들에게 맞아 사망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황월영은 눈물을 흘리면서 “이럴줄 알았더라면 그 아이를 북경에 보내지 말았을걸 그랬어. 우리 집에 남아서 농사나 지었더라면 목숨만은 살아있었겠는데”하고 한탄했다. 주도래가 누구에게 맞아죽었는가 하는것은 아직까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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