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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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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탈□ 김희수
2020년 11월 20일 08시 39분  조회:1042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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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택시기사에게 택시비를 주고 사철맛집 앞에서 내린 철우는 불룩한 가방부터 만져보았다. 그 안에 묵직한 것이 들어있다는 것을 다시한번 확인하고 나서야 마음이 든든해진 철우는 사철맛집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단간방을 찾아 자리잡은 그는 복무원 아가씨에게 잠간 기다리라고 하고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좀 전에 걸었던 전화번호에 다시 전화를 걸었다.

“준수, 어디까지 왔어? 거의 온다구? 난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어. 빨리 와.”

휴대폰을 내려놓은 철우는 조심스레 가방을 열고 100원짜리 묶음을 세여보았다. 세번이나 다시 세여보면서 열묶음이 맞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였다.

생각하면 너무나 힘든 세월이였다. 남들처럼 잘 먹고 잘살지는 못해도 아이들을 공부시키면서 먹고 입고 자는 근심이 없이 낮에는 출근하고 밤에는 마누라 궁둥이 만지며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았는데 느닷없이 찾아온 안해의 뇨독증 때문에 불행이 시작되였다. 철우는 병 때문에 고생하면서도 아이들과 남편 앞에서 억지웃음을 짓는 안해가 안스럽고 불쌍하여 그런 안해를 살리겠다고 집 팔고 빚을 지며 치료비를 마련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여서 찾아간 것이 준수였고 그에게 두말없이 선뜻 10만원이란 거금을 내준 것도 준수였다.

“고맙다! 준수. 이 돈을 꼭 갚을게.”

“고맙긴 뭐, 니 처가 이제 30대 초반인데 사람부터 살려야지. 돈이 더 수요되면 주저하지 말고 얘기해라.”

“나도 그 사람 나이가 아까워 더 살리고 싶다. 아이들도 너무 어려 엄마가 수요되고……”

철우는 눈물을 훔치면서 차용증을 쓰자고 권했다. 싸인하고 손도장을 찍겠다고 했지만 준수는 친구 사이에 차용증을 써선 뭘 하겠느냐며 아무때나 돈이 생기면 본전만 갚아주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 사정이 어려우면 갚지 않아도 된다고 한마디 덧붙였다. 철우가 그럼 증인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다른 사람을 부르자고 했지만 그것도 거절당했다. 그렇게 철우는 차용증도 증인도 없이 10만원을 받아가지고 나오면서 고맙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그것이 1989년이였으니 10만원은 그때 도심의 아빠트 한채를 살 수 있는 거금이였다.

그런 거금을 차용증도 없이 선뜻 내준 준수가 고마워서 철우는 안해를 살리겠다고 치료비로 모두 쏟아부으며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안해를 살리지 못했다. 친구 준수의 눈물나도록 고마운 지원의 손길과 철우의 정성 어린 간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해는 치료효과를 보지 못하고 결국 1년 후에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빚만 남기고 떠나간 안해, 그래도 살았으면 고마웠을 텐데 치료비만 쓰고 간 안해가 야속했다. 어떻게 10살, 12살밖에 안되는 아들딸을 두고 35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단 말인가?

“여보, 그렇게 가면 나혼자 어쩌라구? 이 많은 빚을 어떻게 다 갚으라구?”

철우는 오열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밤낮으로 일했고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돈을 모았다. 준수의 빚을 갚겠다고 퇴근해서는 다른 일거리를 찾아하기도 했지만 돈은 별로 모아지지 않았다. 마누라 없이 살아도 이것 없이 못 산다고 했던 담배도 끊고 이걸 발명한 사람에게 노벨상을 주어야 한다던 술도 끊었다. 그렇게 3년 동안 억척스레 일하며 악착같이 아득바득 애썼지만 생각처럼 돈이 모아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가야 벌 수 있다고 한국행을 권유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직장을 때려치우고 여기저기서 돈을 꿔다가 출국수속을 밟았다…

7년 동안 한국에서 별의별 고생을 다하며 모은 목돈을 손에 쥔 철우는 드디여 귀국했다. 귀국해서 처음 한 일이 준수한테 전화해 만나자고 한 일이였다. 이제 이 돈을 준수한테 넘겨주면 10년 동안 어깨를 지지누르는 것 같던 무거운 짐을 벗고 어깨를 쭉 펴고 다닐 것 같았다. 철우는 은행에서 준수를 만나 직접 빌린 돈을 주려고도 생각했지만 한잔 나누면서 고맙다는 말을 곁들이는 것이 나을듯 싶었다.

철우는 메뉴를 훑어보면서 준수가 좋아하는 료리 두가지를 먼저 주문했다. 그런데 거의 도착한다던 준수는 이제나 저제나 나타나지 않았다. 절대로 약속시간을 어길 준수가 아닌데 30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혹시 무슨 급한 일이 있어 늦는다거나 못 오게 된다면 전화라도 하겠는데 지금까지 오지 못하는 걸 보면 사고라도 생긴 게 아닐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철우는 휴대폰을 꺼내 준수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응답이 없었다. 잠시후 다시 걸자 뜻밖에도 귀에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휴대폰 주인을 아십니까?”

“네. 그분과 만나기로 한 친군데요…”

“저… 이 휴대폰 주인은 교통사고가 나서…”

“뭐라구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거기 어딥니까?”

철우는 준수가 어떻게 됐는지 물을 경황도 없이 위치부터 확인하고 서둘러 가방을 챙겨 부랴부랴 달려갔다. 살아야 하는데, 살아있어야 하는데, 이 생각만 하면서 주먹을 쥐고 달렸다.

현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보니 교통경찰들이 현장조사를 끝내고 시신을 옮기고 있었다. 시신은 피투성이가 되였지만 낯익었다. 다가가 확인하는 순간 철우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터져나왔다.

“준수야! 준수!”

준수가 가다니? 얼마 전까지도 씩씩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전화하던 사람이 죽다니? 사람이 이렇게 쉽게 죽을 수 있다니? 인생이 너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금이 들어있는 가방을 잡고 있는 손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2

준수를 보내는 날, 하늘도 슬퍼서인지 비가 내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유가족의 눈물과 함께 땅을 적셨다. 평생 남을 도우며 살아온 고인의 장례식에 수많은 사람들이 비를 무릅쓰고 찾아와 애도를 표했다. 남편을 잃은 미망인과 아버지를 잃은 자식들의 애처로운 통곡소리가 철우의 가슴을 찢었다. 준수의 죽음이 자신 때문인 것 같아 철우는 한켠에 죄인처럼 우두커니 서있었다. 내가 맛집으로 부르지 않고 직접 돈을 돌려주었더라면 준수가 죽지 않았을텐데…

인간적이고 소탈한 준수의 모습이 영화필림처럼 스쳐지났다. 언젠가 둘이 함께 술을 마시며 한담을 할 때 준수가 웃으며 이런 말 한 적이 있었다.

“철우야, 우리 둘중에서 누가 먼저 죽을가?”

“그걸 누가 알아. 내 생각엔 내가 먼저 죽을 것 같다. 넌 나보다 건강하지 않니?”

“그건 모르는 일이야. 건강해보이는 사람이 먼저 죽을 수도 있고. 여하튼 70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가도 괜찮을 것 같다. 너무 오래 살면 벽에 똥칠을 할가 봐 두려워.”

철우는 죽는다는 말이 싫어 화제를 바꾸려고 준수를 흘겨보았다.

“넌 오늘 왜 재수 없게 죽는다는 말을 자꾸 하니? 우린 아직 죽을 날이 멀었어!”

“허허허”

준수는 소탈하게 웃었다.

“죽음도 학문이야. 우리가 사는 것이 날마다 죽음을 향해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 아니겠니? 죽은 후에도 사람들이 오래오래 기억해준다면 그의 삶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지.”

그렇게 죽음에 대해 고담준론을 펼치며 70까지는 살겠다던 준수가 50도 안된 나이에 이렇게 빨리 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철우는 인생이 무상하게 느끼면서 허탈감에 빠졌다. 그리고 친구의 죽음이 자신과 관계가 있다는 괴로움에 눈물을 훔쳤다. 장례식 내내 그런 자책감에 모대기다가 철우는 고인의 가족들을 대할 용기가 없어 부조돈을 다른 사람한테 맡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철우는 그 후에도 준수에게 빚을 졌다는 자책감 때문에 예전과 같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자신이 가장 어려울 때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준 준수에게는 평생 갚지 못할 은혜의 빚을 졌고 준수 가족에게는 남편과 아버지를 잃게 한 빚을 졌다는 죄책감이 밤낮으로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사람이 빚을 지고는 못 사는 거야. 사람은 량심이 있어야 해. 은혜를 모르면 사람도 아니지.”

준수가 가고 한달이 지난 후 철우는 거금이 든 가방을 들고 준수의 안해를 찾아갔다. 미망인은 남편을 잃은 슬픔에서 벗어난듯 안존하고 차분한 모습으로 철우를 맞아주었다. 철우는 미망인이 타온 커피를 받아들고 죄책감을 감추느라 고개를 숙였다. 미망인이 커피가 싫으면 차를 따라오겠다고 일어서려고 할 때 철우는 고개를 들고 커피향이 좋다고 했다. 그는 죄책감을 털어버리려고 긴긴 세월 끈끈하게 쌓아온 고인과의 우정을 내세우며 고인의 인품을 칭찬하는 이야기를 하다가 고인의 가족상황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특히 고인을 잃고 힘들겠는데 도움을 받을 일이 있으면 솔직하게 얘기해달라고 부탁했다. 미망인은 가끔씩 남편이 그리울 때가 있어 그렇지 아이들을 데리고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다고 했다. 철우는 그 때에야 비로소 고인의 집을 방문한 목적이 생각나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저, 준수가 생전에 돈을……”

성격이 급한 미망인은 철우의 말을 채 듣지 않고 가로챘다.

“잘 아시겠지만 준수씨는 주머니사정이 넉넉해서 여태껏 누구한테 돈을 꾼 적이 없어요.”

한국에 가서 5년 동안 생활한 적이 있는 미망인은 언제나 남편에게 준수씨라는 호칭을 썼다. 철우는 미망인의 오해를 정정하려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저, 그런 게 아니라 준수가 누구한테 돈을 꾼 게 아니라 꿔준 일이……”

이번에도 미망인은 철우의 말허리를 잘랐다.

“준수씨가 누구한테 돈을 꿔줬다고 한 말을 못 들었어요. 그의 유품에 차용증 같은 것도 없었구요.”

“저, 그게 아니라 저……”

철우는 거금이 들어있는 묵직한 가방을 들고 돌려 주려고 일어섰다. 바로 그 때 갑자기 미망인의 핸드폰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핸드폰을 꺼내들고 상대방과 통화를 하던 미망인은 “미안하지만 급한 일이 있어서……” 하는 말만 남기고 부랴부랴 밖으로 뛰여나갔다. 멍해있던 철우가 거금이 든 가방을 든 채 뒤따라 나갔을 때는 미망인이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3

빚을 갚으러 갔다가 갚지도 못하고 그대로 돌아온 철우는 다시 찾아가서 갚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빚을 꼭 갚아야 하는데 하고 마음속으로는 생각하면서도 행동에는 옮기지 못했다. 빚이 항상 무겁게 몸을 누르면서 괴롭혔지만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자신이 싫어졌다.

공교롭게도 그때 식품상점을 경영하던 이웃이 사정 때문에 가게를 내놓는다고 했다. 당장 밥그릇이 필요했던 철우는 구미가 당겼지만 자금 때문에 고민했다.

“준수의 빚은 나중에 갚고 먼저 이 돈을 당겨 쓴다?”

하고 생각하다가도 또

“안돼. 사람이 량심이 있어야지. 아무리 그래도 빚을 갚는 게 먼저야.” 하고 왼고개를 치기도 하며 갈등을 겪느라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철우는 준수가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아 부끄러웠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먹고살아야겠다는 의욕이 부끄러움을 덮었다. 온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을 못 이루며 량심의 목소리와 싸우던 철우는 아침에 일어났을 때 결단을 내렸다.

아이들을 시집 장가 보내고 밥은 먹고살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는 준수의 빚을 갚기로 했던 돈으로 가게를 차려놓고 아들과 함께 식료품을 팔았다. 딸 슬기는 취직이 어려워 한국으로 나갔다.

철우는 매일 가게문을 닫고 돈을 셀 때마다 준수의 빚을 갚아야 한다는 량심의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어 “돈을 모아 꼭 빚을 갚아야지.” 하고 중얼거렸다. 그는 아껴먹고 아껴쓰면서 아들에게 주는 용돈마저 줄였다. 아들은 입이 한자나 나와서 불만을 터뜨렸다.

“이렇게 쥐뿔 만큼씩 모아서 어느 세월에 그 많은 빚을 다 갚겠습니까?”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모으고 또 모으면 목돈이 되겠지.”

“아버지나 그렇게 사세요. 난 이 일을 더는 못하겠습니다. 창피해죽겠단 말입니다!”

“창피하긴 뭐가 창피하단 말이냐?”

“아이들이 나를 식장이라고 놀려준단 말입니다.”

“식장?”

“식료품장수란 말입니다.”

아들은 젊은 나이에 식료품이나 파는 게 체면이 깎인다고 투덜대더니 자기도 누나 따라 한국으로 가겠다고 떼를 썼다.

“넌 어려서 안된다. 스무살밖에 안된 녀석이 어떻게 남의 나라에 가서 일하겠다는 거냐?”

“누나도 갔잖아요? 나절로 벌어서 장가 갈 돈을 모아야지 않겠어요?”

“장가갈 돈은 이 애비가 모아줄게.”

“빚까지 진 신세에 어느 천년에 돈을 모으겠어요?”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아들이 몇달 후에는 위장질환을 앓다가 수술까지 하게 되였다. 수술비로 적지 않은 돈이 나갔다. 그 후에도 철우는 식료품장사를 견지하면서 계속 돈을 모았지만 아들의 말처럼 그렇게 모아서는 20년 후에도 빚을 다 갚을 것 같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빚을 갚겠다는 철우의 의욕도 퇴색했다. 세월은 량심도 죄책감도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몇해가 지난 후에는 차용증도 없고 증인도 없고 가족도 모르는 사실인데 그냥 묻어둬도 괜찮지 않을가 하는 그런 마음이 생겨났다.

 

4

세월이 흘러 딸도 시집을 가고 아들도 장가를 갔다. 그동안 철우는 준수에게 빚진 일을 잠시 잊고 살았다. 그런데 인생이란 게 참 묘하다고 해야 할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인간에게는 살다가 갑자기 잊고 살았던 기억을 되살리는 어떤 계기가 나타나게 되는 법이다.

그날 철우는 대련에 사는 딸집에 가려고 공항으로 나갔다. 이른 시간이여서 공항 대합실에서 비행기 시간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눈앞에 유령이 나타났다. 먼발치에서 철우를 바라보던 유령은 곧장 철우를 향해 다가왔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 유령을 본 철우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 유령은 준수였다. 순간 철우는 오래동안 잊고 살았던 빚이 떠오르며 준수가 유령이 되여 빚받으러 온 것 같아 전신이 옥죄여오는 공포를 느꼈다. 그러던 철우는 가까스로 진정하며 귀신의 존재를 부정했다.

“내가 헛것을 본 거야!”

철우는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그를 향해 다가오는 사람은 허깨비가 아니라 분명 준수였다. 내가 정말 귀신을 본 걸가? 귀신이 아니라면 죽은 사람이 어찌 살아서 내 눈앞에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온몸에 전률이 이는데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그 귀신이 깍듯이 인사했다.

“슬기 아빠, 안녕하세요?”

그제야 철우는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귀신이 아니라 준수의 아들 건이였다. 건이는 철우의 딸 슬기와 동갑이며 소학교부터 고중까지 줄곧 한반에서 공부한 동창생이였다. 준수는 생전에 두 아이를 놓고 철우와 사돈을 맺자고 롱담을 한 적도 있었다. 철우는 눈앞에 나타난 준수의 아들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이제 30대 중반에 들어선 준수의 아들은 제 아빠를 닮아도 너무 닮았다.

“응, 너 건이 아니냐? 정말 오래간만이구나.”

철우는 건이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것을 발견했다.

“너 얼굴색이 좋지 않구나.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저, 엄마가 많이 아파요.”

“무슨 병인데?”

“연변병원에서 검사했는데 진단이 안 나와서 지금 북경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고 있는중이예요. 치료비가 모자라 여기저기서 돈을 꿔가지고 다시 북경으로 가는 참입니다.”

“어쩌다 그렇게…”

순간 철우는 오래도록 까맣게 잊었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 잠자고 있던 죄책감이 꿈틀 고개를 드는 걸 느꼈다. 내가 진작 빚을 갚았더라면 준수 가족이 치료비 걱정은 덜었을 텐데 하는 량심의 가책에 건이의 얼굴을 마주볼 용기가 없었다.

철우는 준수가 사망한 후 준수의 가족이 어떻게 살아가는 지조차 외면하고 살아온 자신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준수가 생전에 그토록 큰 도움을 주었는데 친구의 자식이 엄마의 치료비를 마련하려고 사처로 뛰여다니는 상황이 된 것도 모르고 있다니? 도움을 받을 때는 그 은혜를 꼭 갚겠다고 다짐했지만 결국 자신은 은혜를 저버린 천벌 받을 인간으로 된 것이다.

“너 잠간만 기다려.”

철우는 현금인출기에서 은행카드에 있던 2만원을 찾아 수중에 있던 5000원의 현금과 함께 건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건이는 그 돈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내 너의 아버지한테 빚진 것이 있어 그런다. 받아라, 어서.”

“고맙습니다. 나중에 꼭 갚겠습니다.”

건이는 빚진 것이 있다는 말을 철우가 아빠에게 신세를 좀 진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철우는 건이가 고맙다고 한 말과 나중에 꼭 갚겠다고 한 말에 너무 미안하고 죄스러워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날 철우는 딸집에 가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준수의 빚을 갚기 위해 또 한국으로 나갔다.

 

5

20년 만에 다시 찾은 서울은 낯익으면서도 낯설었다. 철우는 모든 것이 많이 변해있는 모습에 놀랐고 더구나 가리봉동, 대림동과 같은 조선족집거지까지 생겨난 것을 보고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가하게 감상에 젖어있는 것도 잠간, 이곳에 온 목적 대로 하루빨리 돈벌이에 나서야 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무엇보다 먼저 준수의 빚을 갚아야 했다. 빚이 어깨를 지지눌러 기를 펼 수 없었다. 빚을 다 갚아야 마음이 홀가분할 것 같았다. 사실 관광객이 아니라면 이곳에서 풍경 따위에나 취해 감상에 젖어있을 조선족은 매우 드물다. 분초를 다투어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20년 전에 왔을 때처럼 한국인에게 사기당하는 일은 적어졌지만 한국인의 눈치를 보면서 일해야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한국인 앞에서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처음부터 주눅이 들면 한국인들의 업신여김을 받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20년 전에 철우는 이곳에서 한국인들에게 수없이 무시당하고 업신여김을 받았지만 참을 인자 셋을 품고 견지했다. 그런데 지금은 당당한 위엄이 무시라는 바이러스의 침입을 막아주는 효과적인 방어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였기에 이방인이 아니라 단군의 후손이란 자신감을 가지고 허리를 쭉쭉 펴고 일했다.

철우는 장기간 서울에 눌러 있던 친척에게 일자리를 부탁했다. 60세를 넘긴 몸으로 한국에 와서 일하자니 생각보다 힘들었다. 봉급이 높은 일자리는 이뤄질 수 없는 꿈이고 저임금의 일자리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도 하는 수 없이 젊은이들보다 낮은 임금을 받으며 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적으로 덜 힘든 일이였지만 장기간 육체로동을 하노라니 일을 끝내고 자리에 누우면 전신이 뻐근하고 팔다리가 쑤시군 했다.

사랑 찾아 인생을 찾아 하루종일 숨이 차게 뛰여다닌다

서울하늘 하늘아래서 내 꿈도 가까이 온다

지쳐 누워있다가도 이런 노래를 들으면 다시 힘이 생겼다. 아파도 참고 힘들어도 감내하면서 철우는 5년 동안 견지했다. 그렇게 고생한 보람으로 손에 목돈을 쥐기는 했지만 몸이 지치고 마음도 지쳐서 깊은 병이 들었다.

온몸이 아파서 귀국했을 때는 몰골이 말이 아니였다. 피골이 상접하고 눈확이 푹 꺼져들어간 데다가 얼굴까지 창백하여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특히 아들딸은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고 서럽게 엉엉 울어댔다.

3개월 후에 철우는 급기야 입원했지만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했다. 이제 죽는다고 생각하니 먼저 간 안해가 떠오르고 또 준수가 떠올랐다. 준수와 함께 죽음에 대해 담론하던 일도 떠올랐다. 자신은 이제 2~3년은 더 살아야 70세를 채우지만 벽에 똥칠은 하지 않고 간다 생각하니 그래도 다소 위안이 되였다. 비록 오래 살지는 못해도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고 간다는 생각, 자식들도 이제 다 어른이 되여 각자의 가정을 이루었으니 부모 없이도 잘살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생기면서 눈을 감아도 안심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한가지 일이 딱 마음에 걸렸다. 죽기 전에 해결하지 못하면 눈을 감지 못할 것 같았다. 장장 30년을 자책감에 시달리게 하며 못견디게 괴롭히던 일이였다. 림종을 앞둔 철우는 아들딸을 불러놓고 말했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아빠가 친구에게 10만원을 빚진 것이 있는데 아직도 갚지 못했다. 그게 30년 전의 일이니까 지금 돈으로 100만원은 더 될 거다. 100만원은 아니여도 너희들이 힘자라는 만큼 꼭 갚아야 한다. 슬기야, 너 아빠 친구 준수를 잘 알지? 건이의 아빠 말이다. 너의 엄마가 앓을 때 치료비로 쓰라고 선뜻 거금을 내준 고마운 분이다. 그런데 아빠는 그런 친구의 은혜를 잊고 지금까지도 그 빚을 갚지 못했다. 빚을 지고는 못산다고 아빠는 그동안 자책감으로 인한 괴로움에 시달리며 살았다. 한동안은 빚진 일을 잊기도 했지만 기억에 영영 지워버릴 수는 없는 일이였지. 너희들에게 빚을 지우고 가는 것 같아서 미안하구나. 그러나 아빠가 이 지경이 되였으니 내가 지금까지 모은 돈에 너희들이 보탤 수 있으면 보태서 준수의 아들 건이에게 보내주어라. 이것이 아빠의 마지막 부탁이다.”

“아빠, 그 돈을 꼭 갚아야 해요? 차용증도 쓰지 않았고 증인도 없다고 했잖아요? 우리가 갚지 않아도 건이네는 모를 거예요.”

철우는 그런 아들의 손을 꼭 잡고 마지막 힘을 모아 말했다.

“차용증을 쓰지 않았다고 꾼 돈이 꾸지 않은 것으로 되겠니? 아빠의 친구가 우리 가족이 제일 어려울 때 도와주었는데 우리가 그 은혜를 잊어서야 되겠니? 지금 건이네도 엄마의 치료비에 거금을 쓰고 생활형편이 몹시 어려울 거다. 이제 아빠는 준수를 만나러 가겠는데 그를 만나서 뭐라고 말을 하겠니? 빚을 갚지 못하고 무슨 낯으로 그를 보겠니? 그러니 너희들이 아빠의 빚을 꼭 갚아다오. 제발 부탁이다. 아빠의 유언이라고 생각하고 꼭 갚아다오.”

철우의 딸 슬기는 지체하지 않고 자기의 저금을 찾아 돈 액수를 맞춘 후 건이에게 전화를 걸어 구좌번호를 알아냈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 철우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상하게도 철우는 숨은 거두었지만 눈은 뜨고 있었다.

“왜 눈을 감지 못하는 것일가?”

“아빠는 아마 빚 때문에 눈을 감지 못한 것 같아.”

슬기는 돈을 건이의 구좌에 넣어주고 나서 아빠한테 빚을 다 갚았다고 속삭였다. 그제야 철우는 눈을 감았다.

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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