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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애치워야 할 '공산국가'       
2015년 11월 18일 23시 16분  조회:7359  추천:7  작성자: 김송죽
               

                                              없애치워야 할 "공산국가"     

 

 

1975년4월17일, 크메르루즈는 론놀정부를 축출하고는 그날을 소위 "첫 해"시작라 선포했다. 하지만 그것이 캄보디아백성들에게는 뼈속에 잊어질수 없는 저주의 날이기도 했다. 크메르루즈의 지도자 폴포트가 실행한 것은 “대중은 인식 할 수 없다”는 우민정책이였다. 그가 내놓은 1호명령이였던 그 전쟁에 대처한다는 구실로 도시주민들을 속이고 농촌에다 내 몬 것부터 그러했다. 크메르루즈의 도시를 비우는 그 결정은 2개월 전부터 꾸며진 것이였는데 고위간부들 다가 기밀을 엄격히 지키다보니 쥐도 새도 몰랐던 것이다.  
그들은 미국군이 프놈펜을 폭격하리라 거짓말을 한 것이다. 3일지나면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니 그 누구나 짐을 가지지 말고 떠나야 한다고 했다. 군인들의 강제적인 위협이였다. 하여 푸놈펜 시민들은 다가 재산을 그대로 놔두고 세세대대로 살아오던 도시를 시급히 떠나야만했다. 폴포트가 그네들을 철저한 무산자로 만드는 술법이 그러했다.
하여 “동방의 파리”라 불리였던 푸놈펜은 순식간에 죽은 유령의 도시로 변하고 만 것이다. 그날부터였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어리석고 암매하기 그지없는 심연의 나락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그들이 공산주의로 간다는 길이 그러했다.

 

중무장을 한 크메르루즈 병사들이 출동하여 도시주민들을 강제로 농촌에 쫓아버림으로서 이른바 농업부터 공산주의를 실현한다고 했다. 그해의 9월, 전국의 모든 도시주민들이 그모양으로 도시를 떠나 논촌에 갓으니 그야말로 세상을 웃기는 폴포트가 창조한 크메르루즈 공산당의 어리석고 야만스런 유토피아계획이였던 것이다. 어떤데서는 한달가량의 먼길을 걸어야 했다. 그러다보니 로약자는 목적지에 이르지도 못하고 중도에서 지쳐죽는 현상이 빈발했다. 게다가 목적지에 도착 하면 다른데로는 가려니 궁리도말고 그곳에다 발을 붙이고 붙밖혀 영원히 원시적인 부대농사를 지어야 했다. 그러다보니 순식간에 사유제가 금지된 캄보디아는 공업이 없어지고 상품거래가 허락되지 않고 화페류통이 없어지고 심지어 원시적 인 물물 교환 거래마저도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폴포트의 계획에 의한 2백만의 이주ㅡ 그 위대하다는 마이그레이션(大迁移)은 사전에 물질적인 아무런 준비도 없었기에 결과는 수십만명에 이르는 백성이 목숨을 잃는 사망비극을 초래한 것이다. 

                                                      판결받은 어린 죄인 들
               

폴포트은 정권을 잡아서부터 근 4년간의 피비린 통치를 하면서 10년아니면 15년내에 국가가 현대화를 실현하리라 했다. 그러자면 먼저 도시사람들을 농민으로 개조시켜야 한다는 리론이였다. 크메르루즈의 백성들을 “구인(旧人)”과 “신인(新人)”으로 나누어 사상개조를 시키고 지식분자, 승려, 기술자, 상인, 도시사람은 다가 사상을 개조를 하여 새사람으로 다시태여나야 한다고 하면서 각 부분들에서는 재등록을 하게했다. 그러면서 본인의 역사를 밝히게 했다. 그래놓고서는 무릇 랑놀집정 때 복무한 사람이면 몰잡아 새정권에 불만을 품은 자, 지주, 부농, 나쁜자라느니 프놈펜을 떠나기 실어했던 자였다느니 죄명을 씌워 모조리 죽이였다.
그 뒤를 이은것은 계급대오정리였다. 아이템(有产者), 소유자, 부르주아 지식인, 선생, 의사와 기타 다른 전문가는 다가 무산계급이 아니라면서 정리해야 한다고 했다. 지어는 안경을 건 사람마저도 가만두지 않은 것이다. 그 다음에 이어진 것은 종족과 종교에 대한 박해였는데 지어는 그 누구건 외국어를 알아도 그것을 죽을 죄로 취급됐다. 모든 종교신앙을 금지시켰고 모든 교회와 사원을 문을 닫게 하거나 파괴했다. 그러면서 불교를 믿는 사람은 세속 생활로 돌아가라고 강박했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였다. 또한 반체제 인사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보통사람마저도 약간만 의심스러우면 베트남이나 소련 스파이로 의심하거나 몰거나 아니면 미국특무라 의심하면서  발광적으로 도살했는데 지어는 보복이 무서워 피해자의 가족 대부분을 전멸한 것이다.

 

크메르 루즈는 지식을 죄악으로 취급했다. 그리하여 학교를 없애고 도서인쇄를 금지시켰다. 노래를 불러도 혁명노래만 불러야 하고 혁명춤을 춰야했다. 전통무용 드라마가 금지되였고 서방문화가 전파되는 것을 엄금했다. 국민의 이동자유마저도 없었다. 전국적으로 우전국이 없어지고 병원마저도 없애버렸다. 그런것은 자산계급사회의 흔적이라했다. 전체 국민을 “구인(旧人)”과 “신인(新人)”으로 갈라서 감독하고 관제를 했거니와 배불리 먹이지도 않고 강도 높은 일을 시켰던 것이다. 개조대상에 대해서는 농사일을 배우라 강요하면서 배수로를 파게 했고 노동 할당량을 정해주어 매일 열몇시간을 고역에 시달리게 했거니와 밤이 되어도 쉬지 못하게 회의를 하거나 아니면 학습을 시켰던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 애써 지은 알곡마저도 몽땅 바치게 했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그기간에 1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일에 지치고 굶어서 병에 걸려 죽은 것이다.  

크메르루즈가 집정한 3년 8개월 20일기간의 공포는 그 정도가 세상에 전례없는 것이였다. 1976년 여름, 줄곧 막후에서 조정하던 폴포트가 정부총리로 되었다. 그는 크메르루즈 공산당이 병에 걸렸길래 고쳐야겠다면서 친월분자, 가께보간첩, 미국중앙정보국특무, 당내에 기어든 이기분자를 잡아야 한다는 이름을 내걸고 내부 청산을 했는데 1975년10월에 선포한 민족전선의 지도자 13명중에서  내무부장과 두명의 상무부장, 신문선전부장, 국가주석단제1부주임 등 다섯이나 처결되였던 것이다. 주요 지역들에서 군사와 정치지도자들이 처결된 것이 더 많았다. 제일 집중된 한차례는 1978년 친월파라 여겨진다면서 감행한 동부대군구의 간부와 군인에 대한 숙청과 따목이 책임진  서남군구에 대한 대숙청이였는데 그 한번에 근 10만명에 이르는 무고한 사람을 도살한 것이다. 


이미 언급한 바지만 S—21킬링필드(杀戮场)를 보면, 주로 심문과 고문이였는데 혹독하기가 세상 그 어도 비길수 없이 잔악했다. 그 한곳에서 처결된 것만도 2만명.
지난세기 80년대초에 S—21근처에서 9천여구의 시체를 파냈다. 그 외 다른 곳에도 아직 시체를 발굴할 구덩이들이 많은 것이다. 죽은이들을 보면 크메르루즈가 탄알을 절약하느라 거의가 몽둥이나 도끼아니면 철뭉치로 머리를 쳐 죽었기에 대골마다에 그 흔적이 그대로 있는 것이다.
1976년1월에 캄보디아는 새헌법을 내오면서 국명을 민주캄보디아로 고친다고 선포했다. 그해의 4월에 시아누크는 핍박에 의해 퇴직하고는 가택연금을 당했다. 그의 자녀 친척 12명은 “신인”으로 취급되어 지방에 내려가 노동개조를 했는데 지금은 다가  행방불명이다.

                                                  毛泽东和波尔布特(原柬埔寨共产党(红色高棉)总书记)执政期间的发动“红色高棉大屠杀”,造成柬埔寨170多万人死于非命
       자기의 경전을 가르키는 모택동. 사진에서 중간인물이 모택동의 학생 살인악마   폴보트.
                                                  (燕妮摘自<<书屋>>)   》 

 

  

                    下面这几张是钻取脑浆的照片!

                    

                               波尔布特的大屠杀告诉了我们什么

                                          毛泽东与波尔布特

2008年4月,北京出版的《炎黄春秋》与广州出版的《同舟共进》的第四期分别发表了有关波尔布特的文章,前者的题目为《波尔布特:并不遥远的教训》,后者的题目是《又见〈红色高棉〉》。
这两篇文章在同一个月发表,是巧合,还是特殊内涵,值得深思!波尔布特在柬埔寨当政的年代(1975春到1978年底,历时三年另八个月),犯下了罄竹难书的滔天罪行。波尔布特早已臭名昭著,遭世人唾骂,被钉在历史耻辱柱上。在我国的杂志上历数他的罪行,没有任何实际意义。但为什么还要联系中国实际来做文章,这就是两位作者的良苦用心之所在。
两文都比较长,这里只摘编其中有关值得反思的内容。为了醒目一些,小标题是笔者写的,但其主要内容则引自两文。
 
《波尔布特罪行馆》与“文革博物馆”
在今天柬埔寨首都金边建立了一座《波尔布特罪行馆》,后一篇文章的作者在陈述参观“罪行馆”之后,提出如下的沉重反思:
“曾经遭受‘文革’浩劫的中国已经以改革开放的态势高歌猛进,但至今没有建立可以公开开放的‘文革博物馆’。首倡其议的巴金老人已经作古,他那颗燃烧着痛苦的心,未能安息下来吧。而这,并不仅仅是巴金老人的梦与痛!”
不言而喻,作者的观点是极其显明的。写本文的意图在于促进中国人民期盼已久的“文革博物馆”能尽快建立起来!可是到目前为止,还停留在“忌谈文革”的状态,似乎让我们子孙后代永远忘记这一在神州大地曾经付出了极其惨痛的、血淋淋的局面,无疑这是十分可悲的!
为什么在柬埔寨能够建立“波尔布特罪行馆”,而在中国就不敢建立“文革博物馆”?何况又不是什么“毛泽东罪行馆”,究竟怕什么?我作为一个有良知的老共产党员(解放前在地下入党的党员)怎么也无法理解!
描述:“红色高棉杀人场”(Choeung Ek)是柬埔寨最著名的旅游景点之一,也承载了无数民众的痛苦记忆。杀人场地处柬埔寨首府金边以南约15公里,又被称作“钟屋”,是所有柬埔寨“屠宰场” 中最著名的一个。在红色高棉政权统治时期,有大约17,000人在这里被处死。如今,“钟屋”被建成一座纪念馆,以一座佛塔为标志。这座佛塔用树脂玻璃构造,里面陈放着大约5,000个左右的头骨,佛塔底部几层向参观者开放毛泽东盛赞波尔布特
在前一篇文章中,作者提供两个有关重要情节。一是:
“在中国无产阶级文化大革命的时刻,他(指波氏)又来到中国,这一次毛泽东接见了他,亲授‘无产阶级专政下继续革命’的理论,并向他推荐姚文元写于1974年的两篇受他激赏的文章——《论对资产阶级的全面专政》和《论林彪反党集团的社会基础》。……
另一是:
“1975年6月—8月,在中国已经病重的周恩来在医院三次会见波尔布特,苦口婆心地劝告他们不能这样做,共产主义不是一朝一夕就能成就的,而毛泽东却盛赞:‘你们做到了我们想做而没有做到的事情。’
波尔布特因此而骄傲地宣称:
“全世界的革命者都可以从柬埔寨学到很多经验。”
“你们做到了我们想做而没有做到的事情”,毛泽东这一句话倒是一句大实话,波尔布特在柬埔寨所作所为,正是他灵魂深处想追求的目标,可惜没有能够做到,对毛泽东来说,是留下了遗憾。从这一角度看,中国人民也算是万幸的。
应该说:毛泽东与波尔布特属于同类。这才是事物的本来面貌。
 
中共与柬共达成的一份充满血腥的协议
在前一篇文章中,作者透露了至今极为绝密的出卖侨胞的罪行史料,读后令人痛心、愤慨,这是我党奇耻大辱!现摘录原文如下:
“在波尔布特大屠杀的年代中,柬埔寨的华侨和越侨遭受了比柬埔寨人民更大的苦难。……柬埔寨的华人在1975年红色高棉上台之初大约有60万,而在1979年暴政结束时只剩下了30万。朗诺政变之初,中国大使馆曾通知华侨干部去‘解放区’参加柬埔寨革命,组织关系留待中柬两党日后协商解决。一千多侨干和男女青年慷慨激昂奔向‘解放区’,加入柬人民抗美斗争。实际上,柬共并不欢迎这些华侨干部,因此北京方面决定并宣布:中国共产党和柬埔寨共产党已经取得协议,决定将柬埔寨华运组织的全体成员移交给柬共。也就是说,柬埔寨的华侨、华人今后将由柬共掌控。所以红色高棉干部经常对华侨、华人说:‘中共已经把你们全交给我们了!’而红色高棉掌握政权后立即开始宣传,‘华侨都是资产阶级,有史以来都是吸柬埔寨人血的。’……在1975年4月金边大疏散的200多万人中有大约40万华侨。那时他们根本不可能向祖国的大使馆求救。澳大利亚国立大学柬埔寨问题专家爱德华兹说:‘波尔布特梦想建立的是以柬埔寨农民为主导的社会主义,华人在种族和意识上都不符合这一模式而成为整肃的对象。到了1976年,柬共内的华侨干部被屠杀殆尽。”
从上述摘录的史料中,我们可以清晰地看到:究竟是谁让波尔布特胆敢如此肆无忌惮地残害我们的侨胞?是中共最高决策者毛泽东!
中共与柬共签订的出卖华人的协议,如果没有毛泽东授权是根本不可能的。在国内毛泽东自认为“做不到的事情”,现在由波尔布特在柬埔寨代劳了。
在上述文章中,还提到一个在国际外交史上的可怜又可笑的闹剧。现摘录供欣赏如下:
“在越军入侵过程中还出现了一件在古今中外的外交史上都算得上是匪夷所思的事情。中国大使馆在大使迅刚的带领下居然追随波尔布特残部退入柬埔寨西部原始森林,在越军的追击下连续多日行军,并在雨中睡觉。后来在森林里搭起三间草屋作为临时‘大使馆’,靠吃象肉和野生动物为生,坚守外交岗位47天,七个人差点饿死和病死(摘自 2005年1月15日《扬子晚报》)”
毛泽东与波尔布特称得上是一对难兄难弟,但这一外交史上的奇特现象,是发生在1979年的初春,也就是说发生在毛泽东去世后的二年半的时间里,虽然已经步入改革开放的年代,怎么还会出现这一不可思议的蠢事、怪事!这是不是说明毛泽东的幽灵不散!

迟到的正义。2009年2月17日,由联合国和柬埔寨共同组建的红色高棉特别法庭在金边开庭。


人类史上只有不得已的战争而没有不得已的大屠杀,即使如此,柬埔寨的大屠杀也超出了人类正常思维的底线,其性质使所有史学家至今难下定义。就连英文词汇Genocide(有计划的灭种和屠杀)也不准确,因为它既不是种族间的,也不是地域间的,既不是利益间的,也不是宗教间的,甚至都算不上意识形态间的。因为除了波尔布特临终前的谵妄——“我没有屠杀,我只是在战斗”,至今也没有什么理论或者著作来说明或解释它。

人们只能说这是一个疯子在向全人类挑战,向人性的底线挑战。这是一场向着毁灭人类也毁灭自己的黑暗高歌猛进的种族自杀。这样反人类、反人道、反文明、反理性的类似癌细胞一样的政治产物居然出现在离我们并不遥远,甚至可以说非常接近的20世纪70年代,这令所有研究人类野蛮行为、人类大屠杀事件和柬埔寨问题的专家至今都迷惑不解。

迟到的正义。2009年2月17日,由联合国和柬埔寨共同组建的红色高棉特别法庭在金边开庭。

                               结束语

在波尔布特执政的短短3年8个月时间里柬埔寨人口骤减了三分之一(《国际统计年鉴》1995年版),这在历史上是没有先例的,红色高棉在夺取政权之后迅速达到完全丧失理性的颠峰。

在速度上,它超过斯大林的肃反;

在广泛性上超过中国的文化大革命;

在残暴和野蛮的程度上超过希特勒纳粹,

在毁国毁民的程度上超过非洲的卢旺达;

在死亡人数和国民人口相对值上它创造了世界纪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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