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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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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친정에 오신 고모님 댓글:  조회:1485  추천:1  2013-06-21
               친정에 오신 고모님                                          나의 작은 고모님 김 금례씨는 금년 춘추 여든 둘이시다. 고모님께선 64년 전인 광복 전해에 고향 절라도로 시집 가셨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친정이라 찾아오셨다. 80할매가 친정 나들이 하시는걸 누가 봤을까? 그것도 머나먼 이국땅에로, 그의 아버님, 어머님, 오라버님도 저세상에 가신지가 오래고 안계시는 친정에로. 혹시 여름철이나 됐더라면 장백산 관광에라도 이름 ·걸텐데 그도 아니다. 고모님께선 우리 뵈러 오신 것이다. 3월 2일에 오셨다가 3월 13일에 돌아가셨으니 연길에서 11일간 체류 하셨다. 조금만 더 계시다 가시라 그렇게도 만류 했건만 좀처럼 말을 듣지 않으셨다. 조카들이 어머님 모시고 좋은 고장에서 잘 살고 있는걸 봤으니 시름을 싹 놓으셨다는 것이고 경첩이 지났는데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 새해 농사차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팔십고령 파파 할매가 농사를 짓다니! 륙십인 나로서도 농사일이란 엄두도 못 낼 짓이다. 고모님께선 절라남도 강진군 군동면 중산리라는 시골에서 홀로 사신다. 큰 딸님 덕례씨는 병환으로 세상을 뜨셨고 큰 아들 재홍씨는 교통사고로 아쉽게도 숨지었다. 고모부께선 여섯해나 누워 앓으시다가 지난해 말 저세상으로 가셨다. 작은 아들 재원인 인천에서 살고 있고 작은 딸 덕희는 부천에서 살고 있다. 고모님께선 일찍이 친정에 한번 오시고 싶었으나 집에 환자가 계시고 이일 저일로 시간을 잡을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넉넉치 못한 자식들에게 부담 주기가 미안하여 그 소원을 감히 입밖에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모님께선 얼마 안 되는 논밭은 남편이 앓아 누우시자 페경 해버리고 지금은 약 800평 가량의 남새밭을 홀로 가꾸고 계신다. 무우나 감자 강냉이 따위를 심어 자식들 먹으라고 보내주고 가을이면 큰 며느리 큰 사위(큰 아들과 큰 딸은 없지만…) 작은 딸 작은 아들 앞으로 고추가루를 댓키로그람씩 골고루 보내준다. 고모님께선 매일과 같이 동이 트기 바쁘게 자리에서 일어나셔 기음 매고 해가 뜨면 각가지 남새들을 캐여 이고 지고 읍내로 가신다. 중산리에서 강진읍까지는 이십 여리 길, 경운기(手扶机)나 만나 얻어 타는 날이면 운수가 좋은 날이라고 한신다. 마을 뻐스를 타려면 돈을 내야하지 않겠는가? 뻐스놀이로 호광하면 남는 돈이 없다. 운수가 사나워 경운기차를 못 잡으면 하는 수 없이 뻐스를 탄다. 점심 식사는 집에서 품고 간 삶은 강냉이나 고구마 감자따위 뿐이다. 갖고 간 남새를 다 팔고 난 후 허리를 펴며 이마에 손그늘을 지우고 해를 본다. 해가 아직도 소장바쯤 남아 있으니 뭐든 더 팔아 타고 온 뻐스값 반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광주리를 안고 다니며 남새를 많이 갖고 와 다 팔지 못하는 사람들의 것과 떠넘겨주고 일찍 집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의 것을 한바구니 반바구니 사들인다. 고것을 넘겨 팔아 몇푼이나 더 하겠소만은 고모님의 생각은 달랐다. 장사란 게으름을 피워선 아니 되고 일거에 큰 돈을 바라서도 아니 된다. 티끝 모아서 태산이라 하였다. 3년전 친지 방문으로 부모님의 고향에 갔다 왔었다. 작은 고모님께 인사 드리러 간다고 전화를 치고 안해와 나는 큰 누님을 따라 중산리 작은 고모님 집으로 갔다. 고모부님께서 홀로 병상에 누워계시고 작은 고모님께선 그날도 읍내 장으로 남새 팔러 가고 안 계셨다. 우리들은 절로 밥을 짓고 반찬을 버무려 점심을 먹었다. 고모부님께 소고기 육회에 소주 한잔을 권했더니 취하셔서 “살자니 고생이요, 죽자니 청춘이라”만 련이어 곱씹었다. 작은 고모님께선 오후 네시가 되여서야 빈 광주리를 옆구리에 끼고 돌아오셨다. 큰절을 올리고 이야기를 조금 나눈 후 우리는 또 다른 친척들께 인사 드리러 떠나야 했다. 고모님께선 한화 5만원을 기어이 나의 호주머니에 넣어 주려고 애를 쓰셨다. 살림 형편을 펀히 보고서야 누군들 감히 그돈을 받는단 말인가?  고모님께선 언제나 제일 늦게 어두워져서야 장터를 떠나군 하셨다. 굶주리고 지친 몸으로 이십여리 밤길을 걸어야만 했다. 옆구리에 낀 광주리엔 남편에게 대접 할 소주 한병, 애들에게 나눠 줄 알사탕 한봉다리가 담겨져 있다. 고달픈 몸이라지만 마음만은 뿌듯하고 힘이 솟았다. 비록 힘들고 하찮은 장사이지만 그 장사로 가정을 키웠다. 하기에 그는 평생 후회를 모르고 희망만을 안고 살으셨다. 자식들을 모두 출세시켜 시가지로 보냈고 령감님은 몸 져 누우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빈 광주리엔 약봉다리 하나뿐 소주도 알사탕도 없어졌다. 무정한 세원 허무한 인생이라 한탄도 하셨다. 고모님께선 그래도 여전히 새벽엔 기음을 매고 해가 뜨면 읍내 장터로 나가셨다. 변함 없이 희망에 들뜬 삶을 찾아 재출발을 하군 하셨다. 큰 손자 대학 갈 때 학비에 보탬 하라고 천만원(인민페로 약 팔만여원)을 주었고 둘째 손자가 고중에 들어가니 또 오백만원을 주었다. 또 다음 손자를 위하여 돈을 모아야 한다는 할머니ㅡ 그이가 바로 불쌍하고 존경스런 나의 작은 고모님이시다. 고모님께서 륙십여년간 한시도 잊지 못하고 한번만이라도 다녀가고 싶어 하시던 친정집은 시골마을을 떠나 칠남매 모두가 중국 조선족 자치주의 수부인 연길에 들어와 취직하고 가정을 이루었으며 자식들을 키웠다. 신사년 사월 사일 사시에 절라남도 강진군 칠량면 동백리에서 태여난 나의 큰 누님 김 서례씨는 어려서부터 령리하고 이쁘게 생겨 어데로 가나 뭇사람들의 총애를 흠뻑 받았다. 사람들은 애가 사주팔자를 너무도 잘 쥐고 태여났기에 장래에 엄청 큰 인물로 될거라 예측하던 일을 고모님은 우리들 앞에서 몇번이나 자랑하며 곱씹었는지 모른다. “중국 현대명인 사전”에까지 김아무깨라 그이름이 수록 되고 소개 된바이니 옛날 고향 어른신들의 예언이 참으로 맞아떨어진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닌거고 “산 좋고 물 맑은 동백마을을 뜨지 않았더면 큰 누님은 한국 총통은 몰라도 총리쯤은 됐을 겁니다.”라고 한 나의 롱담에 고모님은 연신 “그럼, 그렇구 말구!”를 부르셨다. 큰 누님께선 정년퇴직 하신 후 서울에서 박사공부 하는 큰 애 연이와 사업을 벌린 작은 애 영이를 돕고자 한국에로 자주 가셨었다. 인젠 필요 없게 되였다. 작은 애는 북경으로 돌아와 사업을 벌렸고 큰 애 역시 박사공부를 끝낸 후 높은 봉금도 마다하고 북경에 와 취직 할 것이다. 법학 박사에다 몇개국의 변호사 자격증을 가졌고 또 중국말, 한국말, 외에 일어, 영어, 로어까지 능숙한 그애는 능력상 제엄마를 몇곱절 초월 하였다. “명인 사전”엔 언제 오를지 모르지만 말이다. “청 출여 남, 승여 남(青出于蓝,胜于蓝)”이라 했거늘 큰 누님께서 자식들에게 부은 노력은 헛되지 않으셨다. 큰 누님께선 인젠 한국으로 더 가실 필요가 없게 된 것이라 마지막으로 한국으로 간 것이고 고모님께선 마치 그런 정황을 알기나 한듯이 큰 누님 앞에 “친정 나들이” 의향을 내비치셨다. “중국 갔다 올라믄 돈 얼마나 든다냐? 나 댕겨올란디.” 고모님께서 몇십년을 가슴속에 품고 살아오신 버리질 못 할 념원이였다. “고모님, 참으로 하늘의 안배인가 봅니다. 이번 일 다 마무리 하면 고모님 모시고서 중국에 갈라구 한겝니다. 이제 돌아가면 내 언제 또 나오겠어요.” “오냐 오냐, 그랬냐? 오사게(매우ㅡ절라도말) 반갑고 고맙다 잉…” 고모님께선 너무 기뻐 어쩔바를 몰랐고 즉석에서 자식들에게 전화로 자랑 하였다. “느그 큰 누나 중국 갈 때 날 덱고 갈란다닝껭 느그 그리들 알거라 잉.” 그 자식들도 기뻐마지 않았다. “느그들 외갓집 북간도 쓰렁바우에 있으닝껭 이제 꼭 가보고 어른들한티다 인사 올려사 쓴다 잉.” 참으로 자장가처럼 타령처럼 들어 온 어머님의 부탁이였다. 그러시던 어머님께서 외갓집엘 가신단데 어느 자식인들 기뻐하지 않겠느냐 말이다. 출국 수속을 밟고 항공권을 끊고 이곳 친척 인수에 맞추어 례물을 사는 등 만단의 준비를 인츰 다 끝냈다. 헌데 두달이 넘도록 누님께서 결론을 봐야 할 사무가 풀리질 않는 것이였다. 우수가 지나고 경첩이 다가온다. 농사일은 절기를 절대 어길 수 없는 법이라고 고모님께선 중국 친정 나들이를 포기 하려 하셨다. “니가 안 가믄 나도 안 갈란다.” “아니요, 래달 초에 가기로 했으니 시름 푹 놔도 됩니다.” 3월 2일날 큰 누님의 친구 정란씨가 볼일을 끝내고 연길로 돌아오게 되였는데 큰 누님께선 하는 수 없이 그 친구분한테 고모님의 행차를 돌봐달라고 부탁 했던 것이다. 1일 저녁 인천에 사는 작은 아들 재원이네 집에 모여 고모님의 일로평안(一路平安)을 기원하는 만찬회를 열었다. 식사 후 큰 누님의 큰 애가 고모할머님께 한화 70만원을 로비로 내놓았다. 물론 절대로 받으려 하지 않으셨다. 이미 왕복 항공권을 다 끊었고 려비도 푼푼히 갖춘터라지만 큰 누님께선 기어이 떠밀어드렸다. 고모님께선 1990년 봄 나의 어머님과 큰 누님의 방한(访韩) 초청서와 비행기표를 보내왔었다. 그때는 초청서뿐만 아니라 왕복 항공권이 있어야 비자를 내리는 시기였다. 바구니 남새 되거리로 한푼 두푼 힘들게 모은 돈 60만원을 털어내고 다른 친척들과 나의 외가친척들까지 찾아다니며 20만원을 더 얻어 비행기표를 샀던 것이다. 그돈 그정을 갚지 못하여 큰 누님과 우리형제들은 늘 불안 하고 미안 하기만 하였었다. 이 기회에 큰 누님께선 18년을 품고 온 마음속의 빚을 갚은 것이였다. 이튿날 인천공항에 와서야 배동인이 큰 조카 본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아셨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려 고모님께선 비행기에 오르시는 수밖에 없었다. 고모님께선 오전 11시 10분에 연길 공항에 내려 검사를 마친 후 12시가 넘어서야 외국인 출구에 모습을 나타냈다. 나의 작은 고모님은 호칭 그대로 작달막한 분이시다. 한메터반의 키에 얼굴은 해볓에 타 검고 무지 못 생기셨는데 40여년 전에 세상뜨신 나의 할아버지를 닮으셨다. 키나 얼굴 뿐만 아니라 말이나 행동, 성격까지도 그러셨다. 반백인 머리칼에 가마잡잡한 얼굴, 작으나 탄탄하고 꿋꿋하신 체구ㅡ완전 무결한 시골 할머니였다. 삼년 전 내가 고모님을 찾아가 뵐 때 보다 퍼그나 로문하셔 보였다. 마침 일요일이라 우리 형제자매들은 어머님을 모시고 있는 막내동생네 집에 모였다. 차례로 큰절을 올린 후 환영 오찬이 시작 되였다. “왔다와메이ㅡ 뭣을 이초롬 많이도 챙겼을꼬 잉?” 고모님께선 끊임 없는 찬탄뿐 포도주 한잔 받지 않으셨고 반찬도 몇저가락 집질 않으셨다. 나의 절라도 어머님께선 감탄사를 “웠다워메이ㅡ”로 하시는데 고모님께선 “왔다와메이ㅡ”로 하셨다. “고모님께선 비행기에서 맛나는 점심식사 솔찬히(많이ㅡ절라도 말) 하셨나봅니다?” 너무 잡숫지 않으시기에 비행기에서 공짜로 공급하는 음식이니 시골로인의 본색을 피력 하셨으리라고 나는 속으로 긍정 하고 말 한 것이다. “아니여, 하나도 안 묵었땅껭…” 고모님의 말씀에 나는 리해가 가지 않았다. “곽밥 주고, 빵 주고, 커피에다 쥬스, 머시기 머더라… 많고 많은디, 볼랑껭 오천원 육천원 받아 처백이겠더랑껭. 너무 비싼거 아니겠어야?” “거그서 드리는건 뭐나 다 서비스로 비행기 표값에 속한 것이라는데요.” 고모님께선 숨 넘어 갈 정도로 오래 웃고나서 나의 말에 대꾸 하셨다. “금메이, 어디 나 말 잔 듣거라잉, 날 덱고 온 아줌마가 비행기서 내림수로 점심 다 묵어뿌렸냐기에 ‘배때기 하낫도 안 고픈디 왜랏다고 헛돈 팔아야?’ 했드니 그거 다 공짜라드랑껭. 그글씨, 느그들 나 말 잔 들어보거라잉. 우리 사는디서 서울까지 올라믄 고속뻐스 타고 댓시간 와야이. 옴수로(오면서) 서너반디다(곳에다) 차 세우고 한 십분씩 쉬게츠롬 했는디 슈퍼도 있고 구멍가게도 있고 한디 오사게도(대단히도) 비싸야, 우리 사는 시골서는 원 당초에 생각도 못 해, 생각도… 그랑껭, 길바닥에서 그초롬 비싼디 그 정신빠진 놈들이 공중서야 오죽 할거냐? 하늘에 별 따기랑게 이렁게 아닝고 싶었어야. 길 떠나믄 길빠닥에 돈 폄수로 댕겨야 한단디 하늘에까지 뿌림수로 댕겨얀단 소리는 이때끔 못 들어봤땅껭. 그래 묵고 잡하도(먹고 싶어도) 안 묵었드니 왔따원 당초에 그거 몽땅 공짠걸 갖고, 참말로 지랄옌벵 하겠어야, 옌벵 하겠어!” 고모님께선 비행기 음식을 돈 아까워 안 잡수신 것을 너무도 후회 하는 말투였다. “후제는 사양 마요. 하하하… 근데 이 챙긴 음식은 어쩔랍니까? 고모님 위해 챙긴 음식인데 남기면 랑빈데요. 입맛 틀려도 천천히 좀 잡수세요, 녜?” “오냐, 알았으닝껭 걱정 말어, 근디 보기만해도 배가 불러, 배가.” 고모님께선 원래 김치나 토장국 외 기름에 볶은 반찬이 구미에 습관 되지 않으시고 중국식 료리의 오향면(五香面) 냄새가 맞질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였다. 그후로 깨와 깨기름 그리고 각종 남새들을 사다가 한국식 무침 반찬과 소고기 미역국을 주로 해드고 개탕도 대접 하였다. 고모님께선 조카들 집을 모두 돌면서 식사도 하고 밤도 보내셨다. “왔다와메이ㅡ느그들 어떠크롬 벌었으믄 이초롬 크고 좋은 집들을 샀는가 몰라잉, 느그들 다 잘 챙겨놓고 잘 사는 꼴 봤응껭 시름 싹 놨다… 우리애들 보담 싹 다 더 잘 산다, 더 잘 살어. 느그들도 꾸준 했을거지만 수선은 나라가 좋아졌다는 말이지라?” “그럼요, 고모님은 우리나라가 그냥 제정때인줄로 아세요?” 고모님께선 어느집엘 가나 방안을 둘러보면서 경탄을 금치 못 하셨다. 아마도 중국 조카들이 거지생활을 하고 있는 줄로 여기셨던 모양이다. 한국 실정에서 개인 소유의 아파트 한채를 산다는건 보통 서민으로서는 너무나도 힘 든 일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해방 후, 특히는 개혁 개방 이후 중국의 발전이 일사 천리라는 것을 그이가 어찌 알고? 시골 팔순 안로인님이 이국의 개혁개방 정치를 알리 없고 광복전 쓰렁바우의 초막집만 머리속에 그려보며 오셨을터이니 어찌 경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60년도 더 흐른 오늘인데야! 90년도, 큰 누님과 어머님께서 고향에 다녀오실 때 고모님께서는 이곳 조카들에게 고운 밥상보 하나씩 보내주었다. 보잘것 없는 작은 선물이였지만 바구니 들고 다니며 남새 되거리 장사로 한잎 두잎 모은 돈으로 비행기표를 사보냈다는 사연을 들었을 때 우리들은 감격 하였고 하찮은 밥상보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알았다. 고모님께선 친정에 오신 후 하냥 만족 해 하셨다. 우리는 해 드린 것도 전혀 없는데 말이다. 신발과 옷 한벌을 사드리면서 입고 비행기에 오르시라 하였더니 신만 신고 새 옷은 차곡 차곡 개여서 가방에 담으셨다. 입으면 구겨지고 어지러워진다는것, 새것으로 마을 회관에 입고나가 로인들 앞에 자랑하며 뽐낼 것이란다. 얼마나 이쁜 것이냐고, 마다고 마다고 해도 조카들이 꺽꺽 사준 것이라고… 고모님께 옷 한견지라도 더 골라드리고 즐겨 잡수시는 보신탕 한끼니라도 더 대접 하고 조그마한 기쁨이라도 한번 더 안겨드리고 싶었었는데 고모님께선 고집스레 가 버리셨다. 또 새벽에 일어나 호미 쥐고 나가고 저녁 늦게 광주리 이고 돌아오며 한푼 두푼 돈을 모아 자식들한테 바치고… 그러실라고 가신 것이다. 고모님께선 자식들과 친척 친구들한테 선물 하시려고 깨, 고사리, 검정귀버섯 등 이곳 장백산 토산물과 우황청심완, 웅담분, 인삼 등 약품 약재들을 조금씩 샀다. 인천 공항에서 인삼 백뿌리를 몰수당한 누님의 전례가 있기에 고모님께선 한웅큼밖에 안 되는 웅담분 캡술은 속바지 주머니에 넣었으나 백여뿌리 되는 인삼은 감출 곳이 없어 머리를 죄짜며 한참을 들볶았다. 결국 헤뜨려 검문 받기가 제일 쉬운 핸드빽에 담아 들었다. 순전히 순진한 시골 할머니의 친정 나들일뿐 밀수도 마약 반입도 아닌데 뭐가 근심이고 뭐가 무서우냐 그것이다. 남들이야 믿든가 말든가. 고모님께서 인천 공항에서 나가시자 재원이는 어머님께선 무사히 도착 했노라고 감사 하다고 전화를 쳐왔다. 전화를 바꾸어 고모님께서도 감사의 뜻을 표하셨다. “감사 하시다니 웬 말씀이세요? 잘 대접 해 드리지 못하여 죄송하기 그지 없습니다. 부디 옥체 건강 하시구요, 오래오래 앉으세요!” “오냐 오냐, 알았으닝껭, 느그도 그냥 어머이 잘 모시고 잘들 살그라 잉…” 한주일 아니, 딱 사흘밤 만이라도 더 쉬고 일요일 비행기로 가시라고 그토록 만류 하였건만 그이는 고집스레 목요일날 떠나셨다. 일년에 한번이나 올라 오실까 마실까 하는 서울과 인천인데 주말이라야 자식들이 집에 있으므로 자리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였다. 항상 언제 어데서나 자식들만을 위하여 억척스레 살아계시는 팔순의 왜소한 할머니ㅡ 그이와 같은 여성들을 두고 사람들은 “여자는 약한 것이지만 어머니는 강한 것이다!” “모성애는 위대한 것이다!”라고 말 한다. 3월 9일 열두시 십분, 아시아나 항공기가 친정나들이를 마친 고모님을 싣고 연길 공항 활주로를 씽ㅡ하니 벗어났다. 영원히 건강하시고 90세에 100세에 또 한번 연길 친정에 오시길 한점으로 멀어져 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두손 모아 기도 하였다. 나의 고모님처럼 사람이란 무엇을 하든 응당 끈질긴 정신이 있어야 한다. 60여년을 그렇게 하여오셨고 80세를 넘기신 오늘에도 여전히 그렇게 하고 계시며 90세 100세인 래일에도 영원히 그렇게 하실 나의 작은 고모님처럼 말이다. 나의 고모님처럼 80세에도 친정나들이 처가집 나들이를 활개치며 다닐 수 있도록이 우리 모두가 신체 건강히 정신 유쾌히 꾸준히 살아가야 할 것이다. 나의 고향 이도구 서산비탈 아래엔 “쑈미츄린”이라 부르는 자그마한 과수원이 있다. 그과수원 입구엔 집채만큼 큰 청바위를 쩍 가르고 하늘 높이에 우뚝 치솟은 느릅나무 한그루가 거연히 서있다. 대지를 짓뭉갤듯한 먹장구름은 그의 머리 위에서 감돌고 지상 만물을 쓸어버릴 듯한 광풍은 그의 허리를 분지를 듯 치고 박으며 용을 쓴다. 모든 고난과 위험을 한몸으로 안고 하늘과 땅 사이에 꿎꿎하게 뻗히고 서있다. 옛적 어느날 가냘픈 씨앗 하나가 바람 타고 날아와 그 바위 틈에 떨어졌을 것이다. 나무 년령을 갸늠하면 혹 고모님께서 고향에 시집 가시던 그날 그때가 아닐까 느껴본다. 그것이 싹 트고 뿌리를 내리고 바위를 가르고 무성하게 자라나 하늘을 이고 서있다. 이미 작고하신 과원 주인ㅡ성인대회 대표시던 김 일선로인은 푸른 바위에 흰색으로 “自然(자연)은 이와 같은持久力(지구력)으로!!”라고 힘 있는 필치를 커다랗게 남겨놓았다. 나의 고모님을 생각하니 바로 그 힘 있는 느릅나무, 수십성상 온갖 풍상고초 다 겪으며 굴 할 줄 모르는 그 고향나무가 머리속에 떠오르며 자리를 잡는다. 아아ㅡ 우리도 그처럼 살 수는 없을까?!… 나이 륙십에 이런 생각도 가져본다.                                                   ㅡㅡ 008년 5월 20일. 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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