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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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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친정에 오신 고모님 댓글:  조회:1485  추천:1  2013-06-21
               친정에 오신 고모님                                          나의 작은 고모님 김 금례씨는 금년 춘추 여든 둘이시다. 고모님께선 64년 전인 광복 전해에 고향 절라도로 시집 가셨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친정이라 찾아오셨다. 80할매가 친정 나들이 하시는걸 누가 봤을까? 그것도 머나먼 이국땅에로, 그의 아버님, 어머님, 오라버님도 저세상에 가신지가 오래고 안계시는 친정에로. 혹시 여름철이나 됐더라면 장백산 관광에라도 이름 ·걸텐데 그도 아니다. 고모님께선 우리 뵈러 오신 것이다. 3월 2일에 오셨다가 3월 13일에 돌아가셨으니 연길에서 11일간 체류 하셨다. 조금만 더 계시다 가시라 그렇게도 만류 했건만 좀처럼 말을 듣지 않으셨다. 조카들이 어머님 모시고 좋은 고장에서 잘 살고 있는걸 봤으니 시름을 싹 놓으셨다는 것이고 경첩이 지났는데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 새해 농사차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팔십고령 파파 할매가 농사를 짓다니! 륙십인 나로서도 농사일이란 엄두도 못 낼 짓이다. 고모님께선 절라남도 강진군 군동면 중산리라는 시골에서 홀로 사신다. 큰 딸님 덕례씨는 병환으로 세상을 뜨셨고 큰 아들 재홍씨는 교통사고로 아쉽게도 숨지었다. 고모부께선 여섯해나 누워 앓으시다가 지난해 말 저세상으로 가셨다. 작은 아들 재원인 인천에서 살고 있고 작은 딸 덕희는 부천에서 살고 있다. 고모님께선 일찍이 친정에 한번 오시고 싶었으나 집에 환자가 계시고 이일 저일로 시간을 잡을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넉넉치 못한 자식들에게 부담 주기가 미안하여 그 소원을 감히 입밖에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모님께선 얼마 안 되는 논밭은 남편이 앓아 누우시자 페경 해버리고 지금은 약 800평 가량의 남새밭을 홀로 가꾸고 계신다. 무우나 감자 강냉이 따위를 심어 자식들 먹으라고 보내주고 가을이면 큰 며느리 큰 사위(큰 아들과 큰 딸은 없지만…) 작은 딸 작은 아들 앞으로 고추가루를 댓키로그람씩 골고루 보내준다. 고모님께선 매일과 같이 동이 트기 바쁘게 자리에서 일어나셔 기음 매고 해가 뜨면 각가지 남새들을 캐여 이고 지고 읍내로 가신다. 중산리에서 강진읍까지는 이십 여리 길, 경운기(手扶机)나 만나 얻어 타는 날이면 운수가 좋은 날이라고 한신다. 마을 뻐스를 타려면 돈을 내야하지 않겠는가? 뻐스놀이로 호광하면 남는 돈이 없다. 운수가 사나워 경운기차를 못 잡으면 하는 수 없이 뻐스를 탄다. 점심 식사는 집에서 품고 간 삶은 강냉이나 고구마 감자따위 뿐이다. 갖고 간 남새를 다 팔고 난 후 허리를 펴며 이마에 손그늘을 지우고 해를 본다. 해가 아직도 소장바쯤 남아 있으니 뭐든 더 팔아 타고 온 뻐스값 반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광주리를 안고 다니며 남새를 많이 갖고 와 다 팔지 못하는 사람들의 것과 떠넘겨주고 일찍 집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의 것을 한바구니 반바구니 사들인다. 고것을 넘겨 팔아 몇푼이나 더 하겠소만은 고모님의 생각은 달랐다. 장사란 게으름을 피워선 아니 되고 일거에 큰 돈을 바라서도 아니 된다. 티끝 모아서 태산이라 하였다. 3년전 친지 방문으로 부모님의 고향에 갔다 왔었다. 작은 고모님께 인사 드리러 간다고 전화를 치고 안해와 나는 큰 누님을 따라 중산리 작은 고모님 집으로 갔다. 고모부님께서 홀로 병상에 누워계시고 작은 고모님께선 그날도 읍내 장으로 남새 팔러 가고 안 계셨다. 우리들은 절로 밥을 짓고 반찬을 버무려 점심을 먹었다. 고모부님께 소고기 육회에 소주 한잔을 권했더니 취하셔서 “살자니 고생이요, 죽자니 청춘이라”만 련이어 곱씹었다. 작은 고모님께선 오후 네시가 되여서야 빈 광주리를 옆구리에 끼고 돌아오셨다. 큰절을 올리고 이야기를 조금 나눈 후 우리는 또 다른 친척들께 인사 드리러 떠나야 했다. 고모님께선 한화 5만원을 기어이 나의 호주머니에 넣어 주려고 애를 쓰셨다. 살림 형편을 펀히 보고서야 누군들 감히 그돈을 받는단 말인가?  고모님께선 언제나 제일 늦게 어두워져서야 장터를 떠나군 하셨다. 굶주리고 지친 몸으로 이십여리 밤길을 걸어야만 했다. 옆구리에 낀 광주리엔 남편에게 대접 할 소주 한병, 애들에게 나눠 줄 알사탕 한봉다리가 담겨져 있다. 고달픈 몸이라지만 마음만은 뿌듯하고 힘이 솟았다. 비록 힘들고 하찮은 장사이지만 그 장사로 가정을 키웠다. 하기에 그는 평생 후회를 모르고 희망만을 안고 살으셨다. 자식들을 모두 출세시켜 시가지로 보냈고 령감님은 몸 져 누우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빈 광주리엔 약봉다리 하나뿐 소주도 알사탕도 없어졌다. 무정한 세원 허무한 인생이라 한탄도 하셨다. 고모님께선 그래도 여전히 새벽엔 기음을 매고 해가 뜨면 읍내 장터로 나가셨다. 변함 없이 희망에 들뜬 삶을 찾아 재출발을 하군 하셨다. 큰 손자 대학 갈 때 학비에 보탬 하라고 천만원(인민페로 약 팔만여원)을 주었고 둘째 손자가 고중에 들어가니 또 오백만원을 주었다. 또 다음 손자를 위하여 돈을 모아야 한다는 할머니ㅡ 그이가 바로 불쌍하고 존경스런 나의 작은 고모님이시다. 고모님께서 륙십여년간 한시도 잊지 못하고 한번만이라도 다녀가고 싶어 하시던 친정집은 시골마을을 떠나 칠남매 모두가 중국 조선족 자치주의 수부인 연길에 들어와 취직하고 가정을 이루었으며 자식들을 키웠다. 신사년 사월 사일 사시에 절라남도 강진군 칠량면 동백리에서 태여난 나의 큰 누님 김 서례씨는 어려서부터 령리하고 이쁘게 생겨 어데로 가나 뭇사람들의 총애를 흠뻑 받았다. 사람들은 애가 사주팔자를 너무도 잘 쥐고 태여났기에 장래에 엄청 큰 인물로 될거라 예측하던 일을 고모님은 우리들 앞에서 몇번이나 자랑하며 곱씹었는지 모른다. “중국 현대명인 사전”에까지 김아무깨라 그이름이 수록 되고 소개 된바이니 옛날 고향 어른신들의 예언이 참으로 맞아떨어진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닌거고 “산 좋고 물 맑은 동백마을을 뜨지 않았더면 큰 누님은 한국 총통은 몰라도 총리쯤은 됐을 겁니다.”라고 한 나의 롱담에 고모님은 연신 “그럼, 그렇구 말구!”를 부르셨다. 큰 누님께선 정년퇴직 하신 후 서울에서 박사공부 하는 큰 애 연이와 사업을 벌린 작은 애 영이를 돕고자 한국에로 자주 가셨었다. 인젠 필요 없게 되였다. 작은 애는 북경으로 돌아와 사업을 벌렸고 큰 애 역시 박사공부를 끝낸 후 높은 봉금도 마다하고 북경에 와 취직 할 것이다. 법학 박사에다 몇개국의 변호사 자격증을 가졌고 또 중국말, 한국말, 외에 일어, 영어, 로어까지 능숙한 그애는 능력상 제엄마를 몇곱절 초월 하였다. “명인 사전”엔 언제 오를지 모르지만 말이다. “청 출여 남, 승여 남(青出于蓝,胜于蓝)”이라 했거늘 큰 누님께서 자식들에게 부은 노력은 헛되지 않으셨다. 큰 누님께선 인젠 한국으로 더 가실 필요가 없게 된 것이라 마지막으로 한국으로 간 것이고 고모님께선 마치 그런 정황을 알기나 한듯이 큰 누님 앞에 “친정 나들이” 의향을 내비치셨다. “중국 갔다 올라믄 돈 얼마나 든다냐? 나 댕겨올란디.” 고모님께서 몇십년을 가슴속에 품고 살아오신 버리질 못 할 념원이였다. “고모님, 참으로 하늘의 안배인가 봅니다. 이번 일 다 마무리 하면 고모님 모시고서 중국에 갈라구 한겝니다. 이제 돌아가면 내 언제 또 나오겠어요.” “오냐 오냐, 그랬냐? 오사게(매우ㅡ절라도말) 반갑고 고맙다 잉…” 고모님께선 너무 기뻐 어쩔바를 몰랐고 즉석에서 자식들에게 전화로 자랑 하였다. “느그 큰 누나 중국 갈 때 날 덱고 갈란다닝껭 느그 그리들 알거라 잉.” 그 자식들도 기뻐마지 않았다. “느그들 외갓집 북간도 쓰렁바우에 있으닝껭 이제 꼭 가보고 어른들한티다 인사 올려사 쓴다 잉.” 참으로 자장가처럼 타령처럼 들어 온 어머님의 부탁이였다. 그러시던 어머님께서 외갓집엘 가신단데 어느 자식인들 기뻐하지 않겠느냐 말이다. 출국 수속을 밟고 항공권을 끊고 이곳 친척 인수에 맞추어 례물을 사는 등 만단의 준비를 인츰 다 끝냈다. 헌데 두달이 넘도록 누님께서 결론을 봐야 할 사무가 풀리질 않는 것이였다. 우수가 지나고 경첩이 다가온다. 농사일은 절기를 절대 어길 수 없는 법이라고 고모님께선 중국 친정 나들이를 포기 하려 하셨다. “니가 안 가믄 나도 안 갈란다.” “아니요, 래달 초에 가기로 했으니 시름 푹 놔도 됩니다.” 3월 2일날 큰 누님의 친구 정란씨가 볼일을 끝내고 연길로 돌아오게 되였는데 큰 누님께선 하는 수 없이 그 친구분한테 고모님의 행차를 돌봐달라고 부탁 했던 것이다. 1일 저녁 인천에 사는 작은 아들 재원이네 집에 모여 고모님의 일로평안(一路平安)을 기원하는 만찬회를 열었다. 식사 후 큰 누님의 큰 애가 고모할머님께 한화 70만원을 로비로 내놓았다. 물론 절대로 받으려 하지 않으셨다. 이미 왕복 항공권을 다 끊었고 려비도 푼푼히 갖춘터라지만 큰 누님께선 기어이 떠밀어드렸다. 고모님께선 1990년 봄 나의 어머님과 큰 누님의 방한(访韩) 초청서와 비행기표를 보내왔었다. 그때는 초청서뿐만 아니라 왕복 항공권이 있어야 비자를 내리는 시기였다. 바구니 남새 되거리로 한푼 두푼 힘들게 모은 돈 60만원을 털어내고 다른 친척들과 나의 외가친척들까지 찾아다니며 20만원을 더 얻어 비행기표를 샀던 것이다. 그돈 그정을 갚지 못하여 큰 누님과 우리형제들은 늘 불안 하고 미안 하기만 하였었다. 이 기회에 큰 누님께선 18년을 품고 온 마음속의 빚을 갚은 것이였다. 이튿날 인천공항에 와서야 배동인이 큰 조카 본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아셨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려 고모님께선 비행기에 오르시는 수밖에 없었다. 고모님께선 오전 11시 10분에 연길 공항에 내려 검사를 마친 후 12시가 넘어서야 외국인 출구에 모습을 나타냈다. 나의 작은 고모님은 호칭 그대로 작달막한 분이시다. 한메터반의 키에 얼굴은 해볓에 타 검고 무지 못 생기셨는데 40여년 전에 세상뜨신 나의 할아버지를 닮으셨다. 키나 얼굴 뿐만 아니라 말이나 행동, 성격까지도 그러셨다. 반백인 머리칼에 가마잡잡한 얼굴, 작으나 탄탄하고 꿋꿋하신 체구ㅡ완전 무결한 시골 할머니였다. 삼년 전 내가 고모님을 찾아가 뵐 때 보다 퍼그나 로문하셔 보였다. 마침 일요일이라 우리 형제자매들은 어머님을 모시고 있는 막내동생네 집에 모였다. 차례로 큰절을 올린 후 환영 오찬이 시작 되였다. “왔다와메이ㅡ 뭣을 이초롬 많이도 챙겼을꼬 잉?” 고모님께선 끊임 없는 찬탄뿐 포도주 한잔 받지 않으셨고 반찬도 몇저가락 집질 않으셨다. 나의 절라도 어머님께선 감탄사를 “웠다워메이ㅡ”로 하시는데 고모님께선 “왔다와메이ㅡ”로 하셨다. “고모님께선 비행기에서 맛나는 점심식사 솔찬히(많이ㅡ절라도 말) 하셨나봅니다?” 너무 잡숫지 않으시기에 비행기에서 공짜로 공급하는 음식이니 시골로인의 본색을 피력 하셨으리라고 나는 속으로 긍정 하고 말 한 것이다. “아니여, 하나도 안 묵었땅껭…” 고모님의 말씀에 나는 리해가 가지 않았다. “곽밥 주고, 빵 주고, 커피에다 쥬스, 머시기 머더라… 많고 많은디, 볼랑껭 오천원 육천원 받아 처백이겠더랑껭. 너무 비싼거 아니겠어야?” “거그서 드리는건 뭐나 다 서비스로 비행기 표값에 속한 것이라는데요.” 고모님께선 숨 넘어 갈 정도로 오래 웃고나서 나의 말에 대꾸 하셨다. “금메이, 어디 나 말 잔 듣거라잉, 날 덱고 온 아줌마가 비행기서 내림수로 점심 다 묵어뿌렸냐기에 ‘배때기 하낫도 안 고픈디 왜랏다고 헛돈 팔아야?’ 했드니 그거 다 공짜라드랑껭. 그글씨, 느그들 나 말 잔 들어보거라잉. 우리 사는디서 서울까지 올라믄 고속뻐스 타고 댓시간 와야이. 옴수로(오면서) 서너반디다(곳에다) 차 세우고 한 십분씩 쉬게츠롬 했는디 슈퍼도 있고 구멍가게도 있고 한디 오사게도(대단히도) 비싸야, 우리 사는 시골서는 원 당초에 생각도 못 해, 생각도… 그랑껭, 길바닥에서 그초롬 비싼디 그 정신빠진 놈들이 공중서야 오죽 할거냐? 하늘에 별 따기랑게 이렁게 아닝고 싶었어야. 길 떠나믄 길빠닥에 돈 폄수로 댕겨야 한단디 하늘에까지 뿌림수로 댕겨얀단 소리는 이때끔 못 들어봤땅껭. 그래 묵고 잡하도(먹고 싶어도) 안 묵었드니 왔따원 당초에 그거 몽땅 공짠걸 갖고, 참말로 지랄옌벵 하겠어야, 옌벵 하겠어!” 고모님께선 비행기 음식을 돈 아까워 안 잡수신 것을 너무도 후회 하는 말투였다. “후제는 사양 마요. 하하하… 근데 이 챙긴 음식은 어쩔랍니까? 고모님 위해 챙긴 음식인데 남기면 랑빈데요. 입맛 틀려도 천천히 좀 잡수세요, 녜?” “오냐, 알았으닝껭 걱정 말어, 근디 보기만해도 배가 불러, 배가.” 고모님께선 원래 김치나 토장국 외 기름에 볶은 반찬이 구미에 습관 되지 않으시고 중국식 료리의 오향면(五香面) 냄새가 맞질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였다. 그후로 깨와 깨기름 그리고 각종 남새들을 사다가 한국식 무침 반찬과 소고기 미역국을 주로 해드고 개탕도 대접 하였다. 고모님께선 조카들 집을 모두 돌면서 식사도 하고 밤도 보내셨다. “왔다와메이ㅡ느그들 어떠크롬 벌었으믄 이초롬 크고 좋은 집들을 샀는가 몰라잉, 느그들 다 잘 챙겨놓고 잘 사는 꼴 봤응껭 시름 싹 놨다… 우리애들 보담 싹 다 더 잘 산다, 더 잘 살어. 느그들도 꾸준 했을거지만 수선은 나라가 좋아졌다는 말이지라?” “그럼요, 고모님은 우리나라가 그냥 제정때인줄로 아세요?” 고모님께선 어느집엘 가나 방안을 둘러보면서 경탄을 금치 못 하셨다. 아마도 중국 조카들이 거지생활을 하고 있는 줄로 여기셨던 모양이다. 한국 실정에서 개인 소유의 아파트 한채를 산다는건 보통 서민으로서는 너무나도 힘 든 일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해방 후, 특히는 개혁 개방 이후 중국의 발전이 일사 천리라는 것을 그이가 어찌 알고? 시골 팔순 안로인님이 이국의 개혁개방 정치를 알리 없고 광복전 쓰렁바우의 초막집만 머리속에 그려보며 오셨을터이니 어찌 경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60년도 더 흐른 오늘인데야! 90년도, 큰 누님과 어머님께서 고향에 다녀오실 때 고모님께서는 이곳 조카들에게 고운 밥상보 하나씩 보내주었다. 보잘것 없는 작은 선물이였지만 바구니 들고 다니며 남새 되거리 장사로 한잎 두잎 모은 돈으로 비행기표를 사보냈다는 사연을 들었을 때 우리들은 감격 하였고 하찮은 밥상보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알았다. 고모님께선 친정에 오신 후 하냥 만족 해 하셨다. 우리는 해 드린 것도 전혀 없는데 말이다. 신발과 옷 한벌을 사드리면서 입고 비행기에 오르시라 하였더니 신만 신고 새 옷은 차곡 차곡 개여서 가방에 담으셨다. 입으면 구겨지고 어지러워진다는것, 새것으로 마을 회관에 입고나가 로인들 앞에 자랑하며 뽐낼 것이란다. 얼마나 이쁜 것이냐고, 마다고 마다고 해도 조카들이 꺽꺽 사준 것이라고… 고모님께 옷 한견지라도 더 골라드리고 즐겨 잡수시는 보신탕 한끼니라도 더 대접 하고 조그마한 기쁨이라도 한번 더 안겨드리고 싶었었는데 고모님께선 고집스레 가 버리셨다. 또 새벽에 일어나 호미 쥐고 나가고 저녁 늦게 광주리 이고 돌아오며 한푼 두푼 돈을 모아 자식들한테 바치고… 그러실라고 가신 것이다. 고모님께선 자식들과 친척 친구들한테 선물 하시려고 깨, 고사리, 검정귀버섯 등 이곳 장백산 토산물과 우황청심완, 웅담분, 인삼 등 약품 약재들을 조금씩 샀다. 인천 공항에서 인삼 백뿌리를 몰수당한 누님의 전례가 있기에 고모님께선 한웅큼밖에 안 되는 웅담분 캡술은 속바지 주머니에 넣었으나 백여뿌리 되는 인삼은 감출 곳이 없어 머리를 죄짜며 한참을 들볶았다. 결국 헤뜨려 검문 받기가 제일 쉬운 핸드빽에 담아 들었다. 순전히 순진한 시골 할머니의 친정 나들일뿐 밀수도 마약 반입도 아닌데 뭐가 근심이고 뭐가 무서우냐 그것이다. 남들이야 믿든가 말든가. 고모님께서 인천 공항에서 나가시자 재원이는 어머님께선 무사히 도착 했노라고 감사 하다고 전화를 쳐왔다. 전화를 바꾸어 고모님께서도 감사의 뜻을 표하셨다. “감사 하시다니 웬 말씀이세요? 잘 대접 해 드리지 못하여 죄송하기 그지 없습니다. 부디 옥체 건강 하시구요, 오래오래 앉으세요!” “오냐 오냐, 알았으닝껭, 느그도 그냥 어머이 잘 모시고 잘들 살그라 잉…” 한주일 아니, 딱 사흘밤 만이라도 더 쉬고 일요일 비행기로 가시라고 그토록 만류 하였건만 그이는 고집스레 목요일날 떠나셨다. 일년에 한번이나 올라 오실까 마실까 하는 서울과 인천인데 주말이라야 자식들이 집에 있으므로 자리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였다. 항상 언제 어데서나 자식들만을 위하여 억척스레 살아계시는 팔순의 왜소한 할머니ㅡ 그이와 같은 여성들을 두고 사람들은 “여자는 약한 것이지만 어머니는 강한 것이다!” “모성애는 위대한 것이다!”라고 말 한다. 3월 9일 열두시 십분, 아시아나 항공기가 친정나들이를 마친 고모님을 싣고 연길 공항 활주로를 씽ㅡ하니 벗어났다. 영원히 건강하시고 90세에 100세에 또 한번 연길 친정에 오시길 한점으로 멀어져 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두손 모아 기도 하였다. 나의 고모님처럼 사람이란 무엇을 하든 응당 끈질긴 정신이 있어야 한다. 60여년을 그렇게 하여오셨고 80세를 넘기신 오늘에도 여전히 그렇게 하고 계시며 90세 100세인 래일에도 영원히 그렇게 하실 나의 작은 고모님처럼 말이다. 나의 고모님처럼 80세에도 친정나들이 처가집 나들이를 활개치며 다닐 수 있도록이 우리 모두가 신체 건강히 정신 유쾌히 꾸준히 살아가야 할 것이다. 나의 고향 이도구 서산비탈 아래엔 “쑈미츄린”이라 부르는 자그마한 과수원이 있다. 그과수원 입구엔 집채만큼 큰 청바위를 쩍 가르고 하늘 높이에 우뚝 치솟은 느릅나무 한그루가 거연히 서있다. 대지를 짓뭉갤듯한 먹장구름은 그의 머리 위에서 감돌고 지상 만물을 쓸어버릴 듯한 광풍은 그의 허리를 분지를 듯 치고 박으며 용을 쓴다. 모든 고난과 위험을 한몸으로 안고 하늘과 땅 사이에 꿎꿎하게 뻗히고 서있다. 옛적 어느날 가냘픈 씨앗 하나가 바람 타고 날아와 그 바위 틈에 떨어졌을 것이다. 나무 년령을 갸늠하면 혹 고모님께서 고향에 시집 가시던 그날 그때가 아닐까 느껴본다. 그것이 싹 트고 뿌리를 내리고 바위를 가르고 무성하게 자라나 하늘을 이고 서있다. 이미 작고하신 과원 주인ㅡ성인대회 대표시던 김 일선로인은 푸른 바위에 흰색으로 “自然(자연)은 이와 같은持久力(지구력)으로!!”라고 힘 있는 필치를 커다랗게 남겨놓았다. 나의 고모님을 생각하니 바로 그 힘 있는 느릅나무, 수십성상 온갖 풍상고초 다 겪으며 굴 할 줄 모르는 그 고향나무가 머리속에 떠오르며 자리를 잡는다. 아아ㅡ 우리도 그처럼 살 수는 없을까?!… 나이 륙십에 이런 생각도 가져본다.                                                   ㅡㅡ 008년 5월 20일. 연길.
63    아름다운 꿈을 품고… 댓글:  조회:1605  추천:0  2013-06-20
소설 “여울치는 복밀하”의 창작에 관하여     사람이란 누구라 할것 없이 아름다운 꿈을 품고 산다. 꿈이 있기에 리상과 포부가 있고 노력과 분투가 있으며 힘이 있게된다. “꿈(梦想)을 굳게 가지라, 일단 그꿈이 소실된다면 생명은 날개 부러진 새가 되여 다시는 날아옐 수 없으리라.” 이는 미국 시인 슈스(休斯)가 쓴 시의 한구절이다. 그렇다, 꿈이 없다면 사유가 없는 동물과 같고 움직이는 송장과 다를바 없을 것이다. 비록 이세상에 꿈을 이룩하는 사람은 적다지만 결과 보다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있다. 어떻게 하면 몽상을 현실로 되게 할 것인가? 기회를 잡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나는 인생의 막바지에 닿은 오늘에야 심절히 느끼게 되였다. 기회가 왔음에도 잡지 않고 놓친다면 꿈은 환상으로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회란 머리만 있고 꼬리는 없다. 하기에 그머리가 보이면 무조건 안고 뒹굴어야지 꼬리를 잡으려 기다린다면 놓치고 만다.”는 명언을 한 TV드라마에서 들었다. 참으로 지당한 말이다. 사람들은 머뭇거리다가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리기가 일수이다.  나는 소시적부터 꿈도 많았었다. 어릴 때엔 큰 누님(김 선녀; 연변텔레비죤 방송국에서 사업했음) 의 영향을 받아 작가의 꿈을 꾸며 밤 새워 책을 읽고 글을 썼으며 “문화혁명” 때 공부의 기회를 빼았긴 후 사회 환경의 지배로 정치가의 야심을 품고 “9차 당대회”의 대표로 되리라는 꿈까지 꾸며 , , 등 많은 저작들을 읽고 또 읽었다. 부대에선 “학습활용 적극분자”라는 칭호를 줄 달고 있었고 화평년대에 보기드문 3등공을 부대 양돈장에서 세웠다. 복원 한 후 점차 정치란 나같이 어진 놈이 해먹을 것이 못됨을 알게 되였고 공장에서 일하는 때인지라 기계공정학을 전공하리라 마음먹었다. 하여 기계 교과서를 읽었고 참고서와 잡지들을 많이 읽었으며 조작공으로부터 기술간부로 되였다. 각항 공작과 기술혁신에 성적을 쌓아 장려, 상장도 많이 탔으며 “선진 공작자”, “우수 공산당원”과 같은 이름이 떠날줄 몰랐다. 허지만 품은 꿈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가 국가 기술간부직을 버리고 자유인이 되려 할 때 마침 주정부에서 일하던 동생이 전국 특허 신산품 전시 회의에서 항목 하나를 사가지고 정부문을 나와 나를 불렀다. 그때로부터 20년간 우리 형제는 대련에서 식품공장, 연길에서 가스레인즈 공장등 여러차례 작은 공장을 꾸리고 새산품을 개척하며 신고를 몰부었다.   도리켜보면 억울한 일도 많았다. 우리들이 개발한 해산물 신산품 기술을 일본에서 훔쳐다가 전자동 기계를 만들어 중국에 팔아 먹으니 설비가 락후한 우리공장은 문을 닫아야 했고 우리가 연구하여 특허권까지 얻은 가스레인즈 기술도 북경의 큰 공장이 훔쳐다 우리시장을 빼앗아버리니 우리는 미찌고 나앉아야만했다. 새로운 항목을 연구 성공하여서는 남의 좋은 노릇만 하다보니 꿈은 부서지고 나이만 60을 넘겼다. 돈을 벌어 가문의 신세도 고치고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도우며 사회에 공헌도 해보고 싶었었는데, 연변대학 정문앞에 공중 인행도를 만들어 교정과 학생 아파트를 직접 련결하여 학생들의 안전과 편리를 도모하리라 계획 하였었는데, 대련 어디엔가엔 연대 휴양소도 하나 세우고 고향 사람들을 위하리라 생각 했었는데 꿈은 이루어 지질 않았다. 대련에서 공장을 운영 할 때 십여만원이란 적은 투자로 일년 사이에 몇천만원이란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도 만났었건만 우리는 투자금이 없어 그것을 놓쳐버렸다. 우리두형제는 공정기술 능력은 갖추어졌다지만 기업경영 능력이 너무나도 차하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고 한생에 한번밖에 없는 그기회를 놓지지 말아야 했다는것도 인제야 깨달았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가끔 “아버지 어머님의 꿈은 무엇이셨을까?”하는 생각도 가져보군 한다. 아버지는 아름다운 꿈을 품으시고 18세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가셨다.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보려고 타향길에 오르신 것일것이다. “제진아, 내 등거리 자상히 보거라…” 1985년도, 한달에 한번씩 나는 병환에 계시는 부친님을 모시고 내가 근무하는 공장 모욕탕에 가 등거리를 밀어드렸다. 마음씨 착한 모욕탕 아줌마와 공장 경비원 아저씨 부부는 시끄러워 할 대신 언제나 웃는 얼굴로 “세상 효자요!”를 부르며 칭찬 해주고 편리를 마련 해주곤 하였다. 한번은 내가 아버지의 등을 천천히 밀고 있는데 “자상히 보라”고 하시지 않겠는가? “뭘 보라고 그럽니까? 아버지.” “칠성별이 보이지 않느냐? 등거리에 검은 짐 말이여.” 나는 이리저리 자세히 찾아보았다. 오른쪽 어깨뒤로 검은기미 몇개 박혀있었다. 분명히 그 모양도 수자도 칠성별은 아니였다. 허지만 부친님은 친눈으로 등거리를 보실 수 없으니 그렇게 한생을 속힘 속에서 살아오셨다. “예, 이제 보니 칠성별이네요! 정말 희귀합니다. 아버진 보실 수도 없으신데 어떻게 칠성별이 있는지 아셨습니까?” 뇌혈전으로 어린애 지력으로 변해버린 아버지를 실망케 하고 싶지가 않았다. 나는 그의 등거리 빈자리에 손가락을 찍어가며 일곱개를 헤여드리고 눈물을 훔쳤다. “그누구하구도 말 말거라 잉? 큰 일 난다, 큰 일 나…” 일본 동경, 어느하루 벨트 배달 후 물품 값을 받아가지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한 백발로인이 아버지 앞에서 걸음을 뚝 멈추었다. “젊은이 날 따라오게.”하니 아버지는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 큰 거리를 지나고 작은 골목을 에돌아 한참을 가 작은 찻집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미닫이를 닫고 로인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었고 로인이 시키는대로 윗통을 벗고 돌아앉았다. “바로 너로구나! 로승은 바다 건너 먼디서 너를 구하러 왔느니라. 넌 등거리에 칠성별을 지고 났으니 하늘이 내려보낸 사자(使者)이다. 하늘의 뜻을 절대 루설하지 말라(天机不可泄漏), 루설 하면 천벌을 받는다. 부모 처자한테도 알려선 안된다. 나라가 알면 즉각 목을 칠것이여, 감추고 시기(时机)를 꼭 기다려야 하느니라…” 아버지께서는 늙은 도사한테 사례금을 많이 냈을 것만은 사실이다. 일생을 망쳐준 협잡군 원쑤임을 모르고 구명은인으로 여겼을테니깐. 한평생 볼 수도 없고 누구하고 물어볼 수도 없는 “칠성별”이라는 무거운 보짐을 짊어지고 사시려니 내심적 고통이 막심하셨을 것이고 언제 올지도 모르는 “시기”를 기다리시려니 희망도 크셨을테지. 헌데 처자한테도 말 말라는 “천기”를 왜 나한테 말씀 하셨을까? 병마에 시달리시다 못해 희망을 잃으시고 “칠성별”의 진가라도 알고싶으셔서? 아니면 그제라도 그 멍에 벗어버리고 싶으셔서였는지도 모른다. “칠성별” 등에지고 살아오신 아버지의 한많은 타향살이…생각하면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다. 2007년 여름, 나는 전렬선 비대증이라는 병으로 다리가 찜빵처럼 부나고 소변이 말을 듣지 않아 어려운 기업을 동생 혼자에게 맏겨두고 집에 들어앉게 되였다. 나는 마작판이나 낚시터 같은 곳에서 조금 남은 여생을 허송하고 싶지가 않았다. 하여 활동하지 않으면 몸에 해롭다는 안해의 꾸지람을 귀등으로 하고 밤낮 없이 컴퓨터에 마주앉아 있었다, 어릴 때의 취미와 욕망을 되살려 글 짓기를 다시 해보는 것이였다. 나는 글 짓기에 푹 빠져버렸다. 혼자 웃고 혼자 울면서 글을 썼다. 여섯달간의  품을 들여 “장편소설” 60여만자를 써냈다.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스스로 소설이라 부르지만 남들 보기엔 너무나도 형편 없는 글이라는것을 나는 잘 안다. 졸작일지라도 부모가 자기의 못난 자식을 사랑하듯 누구나 자기의 작품을 아끼는 법이다. 졸작에도 작자의 사랑과 원한이 찍혔고 희망과 분투를 그렸으며 희노애락을 담았다. 하기에 작자는 졸작일지라도 부끄러움을 참으며 기대만을 품는다. 나의 소설 “여울치는 복밀하”는 ( 원 제목은 촌부의 사랑 )한 산골녀성 방 화의 사랑을 묘사하였다. 그녀는 개혁개방의 동풍을 타고 남하하여 천륙백만원을 벌고 북방 고향에 돌아가 기업가로 되여 산골 마을을 건설하며 고향 농민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였다. 남방에 와 돈 버는 사이, 그리고 고향에 돌아가 사업을 벌리는 과정에 그녀가 자기를 잃고 인간사회에 사랑을 몰붓는 이야기를 썼다. 그녀가 번 돈이 작자가 벌고싶었던 돈이고 그녀가 벌린 사업들과 몰부은 사랑들이 작자가 하고싶었던 일들이다. 양돈장, 양로원, 휴가촌, 호텔, 골프장등과 같은 항목들… 작자는 자기가 이룩하지 못한 꿈들을 소설속의 주인공에게 맡겨 진행시키고 이룩시킨다. 뿐만 아니라 소설이 성공되여 출판되고 독자에게까지 전달 된다면 그것은 미지의 힘이 되고 방향판이 될 수 있어 더욱 많은 주인공—“작자의 대리인”을 낳고 사회에 무한한 사랑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친애하는 독자들이시여, 꿈을품고 기회를 잡으시라, 성공은 당신에게 속한다! 온 가보총리는 제16기 인대회 정부 공작보고에서 “북방의 한가한 로동력이 남방의 일부 성시에 와 일종 무체력로동에 종사하여 상당한 원시자금을 벌어가지고 고향에 돌아가 점으로 면을 이끌며 당지의 경제를 발전 시켜야한다.” 고 말하였다. 소설중의 주인공이 걸은 길은 생각밖으로 온 가보총리의 지시에 완전히 부합되였다. 허지만 “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대학도 못다닌 산골의 한개 보통 녀성이 어떻게 그런 큰 일들을 할 수 있겠는가”고 의문을 제기하고 “3~4 년이란 짧은 시간에 천 륙백만원을 벌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전통적 관념으로 사물을 보고 분석하며 결론 짓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작자본신이 반전통적 새관념이 수립되여 그러한 주인공을 설치한것은 아니다. 작자본신이 가고싶던 대학에 가지 못했기에 반전통적인 주인공을 내세웠다. 인류사회에 사랑을 바침에는 학벌이나 직위나 빈부나 성별 구분이 없다는 것을 작자는 독자들께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천 륙백만원이라는 원시자금을 수입함에 있어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학벌이나 직위가 필요한것이 아니라 기회를 만나야하고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기회란 예고 없이 불쑥 나타났다가는 가뭇 없이 사라지는 법이다. 하기에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미처 고려 할 사이도 없이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리고는 돌아서서 지나간 기회를 바라보며 후회한다.  해질 무렵 비가 멎고 구름 사이로 해살이 비친다. 해빛이 검은 구름을 뭉게뭉게  불 태우니 하늘 전체가 불바다이다. 해가 산 뒤에 지기전에 저 붉은 파도 속에 뛰여들어 자맥질이라도 치고 싶다. 하면 차겁게 찢어졌던 령혼은 화염속에 녹았다 굳어지고 영생불멸 하리라. 몸과 마음이 다 찌그러진 나에게도 궂은 날은 가고 해가 비칠줄을, 심금을 잡아치는 저녁노을의 아름다움이 찾아올줄은 정녕 몰랐으니 흥분된 가슴을 달랠길이 없다. “아리랑주간” 편집부에 뜨거운 감사를 드리는바이다. 나는 보다 많은 “방 화”가 이세상에 태여나고 곳곳에서 참된 사랑이 꽃피는 그날을 그려본다.   2012년 2월.
62    <부기>어머님께서 떠나시던 날 댓글:  조회:1964  추천:0  2013-06-19
    어머님께서 떠나시던 날      인생살이 고닲을 때나 행복 할 때나 마음이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그언제나 잊지 못하는 가장 따사롭고 자애로운 이름, 고요한 밤 깊은 잠속에서도 다정히 불러보고 간절히 웨쳐도보는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런 이름, 이세상에 울음보를 터뜨린 후로 제일 먼저 불러보는 이름, 저세상으로 가는 그 순간까지도 듣기만 하고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뭉클 하고 정열에 불타게 하는 그 이름ㅡ 어-머-니! 어머님께선 떠나가셨다… 공륙년 9월 22일(丙戌年八月初一) 오후 두시경. “창자이, 어머니 아프셔 퇴근 할 때 들리라구 큰 누님 전화 왔씀다.” “知道啦(알겠소)!” 나는 공장 회계원의 전화통지에 반마디 대꾸하고는 아무일도 없는 듯 하던 일을 계속하였다. 퇴근시 들리라고 하니 아무렇지도 않으신줄로 알았는데 바로 그시각부터 어머님께선 먼길을 떠나고저 서두르며 자식들의 배웅을 애타게 기다리고 계셨음을 내가 어찌 상상이나 하였겠는가? 여든 여덟(1919년 6월) 고령이시니 종종 불편하심은 물론이라 한 시가지에 모여 살고있는 여러 자식들은 자주로 어머님 뵈러 드나들었다.  약 한주일 전, 그날에도 나는 어머님께서 식사를 잘 못하신다는 큰 누님의 전화를 받고 퇴근길에 들리였었다. 병원에 모시고 가 전면 검진도 받아보고 약도 좀 쓰고 했으면 좋으련만 누님네 말은 좀처럼 따르려 하지 않으시니 아들이 좀 권유 해보라는 큰 누님과 자형님의 지시였다. “어머니, 안녕하셨습니까?” 나는 어머님 방에 들어서면서 인사드렸다.    “제지니 왔냐? 내 새끼, 어서 와 앉거라.” 어머님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나에게 자리를 권하셨다. “예, 어머니.” 나는 어머님이 도닥이는 침대가에 궁둥이를 붙히며 두손으로 어머님의 한손을 꼭 잡았다. 마른 고목 가지마냥 앙상하나 너무나도 부드럽고 따스한 손길이였다. 어머님은 다른 한손으로 나의 손등을 쓰다듬고 얼굴을 어루만지며 “내새끼”만 되뇌이신다. “어머니, 왜 밥 안 잡수십니까?” “왜 안 먹어야, 굶고 산다냐? 근디 기계 잔(좀) 팔린다냐?” “예, 팔리잖구요… 어머니 밥 영 쬐꼼씩 잡순다면서요?” “늙은이가 그만하면 솔찬한거지(많은거지) 어떻게 더 먹는다냐?” “‘늙으막에 쌀이 막대’라구 꺽꺽 많씩 잡숴얍니다. 밥 한공기가 보약 열첩보담 낫다고 사람들 많이 말하잖아요.” 도리켜보면 어처구니 없는 소리지, 보약 열첩 당하는 밥 한공기가 어디에 있느냐 말이다. 돈이 없거나 보약 사다 대접 하기가 아까워서 한 소리가 절대 아니고 약이라면 질색하시는 어머님이시라 진지라도 많씩 드시라는 말씀인데 지금 도리켜 보니 말이 아니다. 지난 구정 때 영이 남자친구와 함께 보약이고 로인 보건식품을 엄청 많이 북경에서 사 들고 할머니 뵈러 왔었는데 헛돈 파는거라면서 한알도 안 건드리고 두었다가 건강이 그닥잖은 큰 며느리한테 쓸어 주어버렸다. “어머니, 봅시다. 제가 손톱 짱커드릴께요.” 어머님은 워낙 깨끗한 분이라서 자식들이 목욕 시켜드리고 손 발톱 깎아드리는 것을 매우 반가워 하셨다. 나는 그리 길지 않은 어머님의 손톱을 천천히 다듬었다. “어머님, 어데 아프십니까?” “아니, 안 아퍼. 아펐으믄 어서 죽어버리고 느그들 덜 고생시키잖겄냐?” “웬 말씀을요, 우리가 뭘 고생 한다고? 외할머니 93세까지 앉으셨으니 어머닌 꼭 백세를 넘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따라서 오래 살게 아닙니까?” “느그 큰 매부 누님 고생이다. 매부 날마다 내방 청소 다하고 내빨래 다 빤다. 매부 같은 사람 시상(세상) 없다. 나중에 나 죽더라도 꼭 잘 해드려야 한다.” “예, 명심 하겠습니다. 매부네 근심 덜라믄 말씀 잘 들어야 하잼니까?” “잘 듣는다.” “근데 어째 병원 가시잔데 마다하십니까?” “안 아픈디 왜랐다고 병원 가야? 온, 꺽하믄 배랑(벼락) 맞을 놈이 병원 소리야, 병원소리는…” “병원이랑게 아파서만 가는게 아니구 사람마다 정기적 검사도 받고 예방도 하고 그러는 곳입니다…” “안 가, 안 가, 헛돈 안 팔아!” “어머니, 고집 좀 부리지 마시고 자석들 소원 좀 꺼주시요, 예?” “죽어도 안 간다니깐 그러냐?” “넬은 출근하고 모레 아침 다시 올랍니다. 병원 가실 준비하고 계셔요.” 나는 주말에 억지로라도 어머님을 모시고 아무 문진이든 가리라 마음 잡았다. 이튿날 아침, 나는 출근하지 않고 어머님 한테로 다시갔다. 하루라도 미루고 싶지 않았다. 누님네 살고계시는 의학원 “교수아빠트”는 나의 집에서 도보로 5분거리도 안되므로 래왕이 편리하였다. “아침 진지 드셨습니까?” “오냐, 어째 또 왔냐? 공장 안 가냐?” “어머니, 병원에 가십시다.” “나 잔 편히 살게 놔 두거라, 참말로 왜 그라냐? 그 배랑 맞을 병원 소리 송신 나고 몸살 난다.” 우리는 어머님을 이길 수가 없었다. 큰 매부께서 의학원 위생소에 가셔 영양제 주사약을 사고 간호원도 데리고 왔다. 간호원이 점적주사를 꽂아놓고 돌아가자 어머님은 나더러 빨리 주사침을 뽑아버리라고 야단이셨다. 살만큼 다 살았으니 약을 써가며 살 필요는 없으시다는 말씀이였다. 촌에 계시는 나의 장모님은 금년에 춘추가 여든이시다. 그이는 당신 홀로 집 앞 진 병원에 가셔 약도 사고 영양제 주사도 맞군 하신다. 밥 맛 없고 기운이 떨어진다며 약 좀 써야겠다고 한해에 몇번씩 우리한테로 전화가 온다. 그러면 나의 안해는 그자리로 병원에 전화를 걸어 약을 주문하는데 기정된 병원에 기정된 의사, 그리고 처방도 기정된 것이고 수량 또한 기정된 스무첩이다. 이튿날 안해는 병원에가 값을 치르고 이미 다려서 봉해놓은 초약을 찾아메고 친정으로 간다. 어머님을 위하여 무엇이든 조금이나마 해드리는 것이 자식된 최소의 도리이고 최대의 기쁨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자식으로서의 의무이고 천직이며 특권이다. 9월 22일 오후 다섯시 사십분경, “혈액소” 공공뻐스 정류소다. 뻐스에서 내리자 “오빠!” 하는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일곱째 향란이, 그애도 퇴근하는 길로 어머님 뵈러 오는터였다. “해서이네 집에 가 저녁 먹구 건너와 어머니 침대서 같이 자겠습니다.” “응, 그래라. 나는 먼저 피끗 들러 뵙구 집에 가겠다.” 해선이란 여섯째 수란이네 무남 독녀 딸님인데 그들도 우리와 한구역 아빠트에서 살고 있었다. 순란이는 한국에 가서 삼년 있다가 돌아온지 댓달밖에 안된다. 향란이 실랑은 지금도 한국에서 일하고 있고 딸애는 일본에 류학 간터라 향란이는 집에서 혼자 산다. 막냉이인데다가 어머님과 함께 농촌에 오래 있으면서 고생을 많이 했다고 어머님은 그애를 제일 많이 외우시는 터이다. 우리는 어머님께서 편하시라고 다년간 경로원에 모시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자식마다 앞다투어 어머님을 모시고자 하지만 저마끔 출근해야 했고 일부 퇴직휴양은 했더라도 빈번한 사회활동 때문에 집에 멈춰있을 시간이 적었다. 감옥살이마냥 빈 층집에서 어머님은 홀로 종일을 보내야 하고 점심은 물론 종종은 저녁상까지도 챙겨드릴 수가 없어 어머님께선 그러저럭 에때우기가 일수였다. 반대로 경로원에서는 하루 세끼 더운밥과 반찬을 대접하고 방안 청소는 물론이고 빨래까지 다 해드린다. 말 동무도 많고 재미나는 오락활동도 많다. 작은 병은 그자리에서 치료하고 큰 병 나면 큰 병원으로 모셔다드린다. 로인들은 자식들을 항상 보고싶어 하시니깐 주말만 되면 우리들은 서로 엇바꾸어 륜번으로 어머님 뵈러 가군 하였다. 경로원에 내는 돈이 아깝다고 어머님은 언제나 경로원에서 나오려하시고 한번 나오시면 다시 들어가려 하지 않으셨다. 집에 나오면 인츰 얼굴이 홀쪽해지고 경로원에 들어가면 다시 얼굴에 살기가 오르고 피색이 도신다. 춘절을 함께 쇠려고 년말에 어머님을 경로원에서 모셔왔었다. 헌데 설 후 어머님은 경로원으로 절대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막내가 집에 혼자 있으니 족족하지 않게 함께 있어준다는 것이였다. 그애네 집은 아빠트 1층이라 로인님 계시기엔 4-5층인 다른 집들보담 편리한 편이였다. 그렇지만 향란이도 출근하는 외에 동료나 친구들 활동에 종종 삐쳐야 하니 마음뿐이지 어머님은 경상 홀로 계셔야했다. 그렇다고 점심밥만 챙겨드리는 보모를 쓸 수도 없고하여 3월 말에 큰 누님 집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큰 누님네는 두분 다 정년퇴직 하셨으니 집에 계시는 시간이 동생들보담 많다고 할 수 있다. 향란네 집에서 큰 누님과 함께 어머님의 모든 물건ㅡ 상시옷까지 찾아내여 택시차에 실었다. 인젠 하늘나라로 가실 때까지 큰 누님네 집에서 계시게 할 참이였다. 정말로 뜻밖에 세상 뜨신다면 어린 막내가 혼자서 놀라지나 않을까 하는 큰 누님의 우려다. 상시옷은 둬해전 딸님들이 베천과 붉은 광목을 끊어다가 어머님과 함께 지어 둔 것이다. 상시옷을 미루 지어두면 장수하신다는 민간에 도는 말이 있었으니깐 따르지 않을리 없는 딸들이다. 큰 누님 집으로 옮겨가신지 대개 열흘쯤 된 주말이였다. 어머님은 바람도 좀 쏘일겸 향란이네 집으로 놀러 갈란다고 나섰다. 큰 누님께서는 하시던 일들을 젖혀놓고 배동하여 나섰다. “인젠 암디도 안가, 그냥 여그서 살다 죽을란다. 너는 집에 가그라.” 막내 딸집에 이르러 쏘파에 앉자 어머님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예? 뭐랍니까? 엄마 어째 그럽니까?” 어머님한테 깜쪽같이 기편당한 큰 딸은 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아무리 얼리고 닥치고 빌어도 어머님은 끄떡치 않았다. 막내는 막내대로 어머님께서 불편 하시더라도 계시고 싶은 곳에 계시도록 하자고 큰 언니를 위안했다. “그래우! 엄마 맘대루…” 큰 누님께선 성이 머리끝까지 났다. “이제는 엄마 상새 난대두 모르오, 볼라두 안 올거니깐 큰 딸년은 죽었거니 하오! 막내가 아무리 곱구 허물 없다해두 그렇지, 갸 생각은 어째서 쪼끔두 안 해주는가 말이요! 양? 답답하재이요? 글쎄…” 큰 딸은 가버렸다. “좋아 하십데? 그런데 어째 벌써 왔는가? 점심두 안 줍데?” 큰 자형님은 생각보담 일찍 돌아온 안해를 반기며 의아쩍은 표정을 지었다. “깜쪽같이 속았습니다, 속상해서 월래…” “속다이? 누긴데?” “바람 쐴라 간다든게 거기서 영 산다우, 우리가 그렇게 싫은 모이지?” “동무 딸들하구 하든 버릇대루 쩍하믄 어머이하구 떽떽거리는게 무슨 좋겠는가?” “아이, 내 언제 떽떽거립디까? 원래 목소리 높아 그렇지 누기 제에미 미워 그러겠는가? 육십년 넘었어두 딸 성질 모른단 말이? 오망 써두 분수 있지…” “그만한 년세에 치매두 안 오구 그렇게 깨끗한 노인이 어디 있소? 제 늙어보오 어찌는가. 사실 말이지 노망은 지금두 당신이 더 쓴다구.” “뭐랍니까? 내가 어쨌다구… 아이구 算啦,算啦!(됐소, 됐어!) 당신 모실라 간다메? 모셔다 놓구 잘하는 싸우재 다 하우, 이 오망쓰개 노치는 모르갰소…” 큰 누님은 나에게 자초지종을 전화 해주었다. 아침에 나설 때 어머님은 향란이네 집에서 하루 쉬고 이튿날 사위가 가서 다시 모셔오기로 약속 되였던 것이다. 나는 그길로 어머님을 찾아갔다. “어머니, 누님하구 다퉜습니까?” “아니, 다툴일 뭐 있다냐?” “그럼 누님이나 매부한테 무슨 노여운 일이라도 있는겝니까?” “아니, 뭐가 놉다냐? 느그 매부 너무 잘 해 줘서 미안해 그런다. 제새끼도 가뜩한디 왜 매부 고생시키겄냐? 눈치 봄수로…” “어머님두 참, 사위두 자식인데 무슨 체면이 그리도 많습니까? 눈치 볼 것두 미안 할 것두 없씀다. 어머니는 뭐나 다 좋은데 그냥 쌩애 부리시는게 통 문제란 말입니다.(부모님께서 쓰시던 ‘쌩애’란 ‘체면’이라는 절라도 말로 안다.)”  88세 고령이신데 어머님은 체면을 너무 차려서 자식들로 하여금 골머리 앓게 한다. 어머님께선 오래전부터 “기관지 천식”이라는 고질로 불편을 겪고계셨다. 많은 약을 잡수셨고 입원치료도 받아 보았으나 차도가 없었다. 층계를 오르거나 길을 조금만 걸으시면 숨이 차 하기에 나는 쭈크려 앉으며 등을 들이대곤 하였으나 단 한번도 성사하지 못 하였다. 억지로 업으려들면 옛날 산으로 달래 캐러 갔다가 넘어져 다쳤던 가슴이 눌리여 숨 넘어가게 아프시다는 것이였다. “어머닌 누구게나 시름 안 끼칠라구 그러는데 그럴수록 오히려 시름만 더 끼치는겁니다. 지금 누님네 내외간네 큰 야단 났습니다. 서로 네탈 내탈하며 어머니 땜에 쌈하는데 그러믄 좋습니까?” “죽어버려야 느그들 편할텐데 죽어지질 않으니…” “죽어지질 않으니 서로 생각 해주메 삽시다, 어서 누님 집에 도로 갑시다.” “넬 매부 오믄 갈란다. 오늘은 여그서 자고.” 어머님은 하는 수 없이 수그러드셨다. 이튿날 자형님께서 어머님을 다시 모셔 갔다. 어머님께서는 간혹 객실 쏘파에 앉아 텔레비를 보시다가도 사위가 밖에서 들어오는것 같으면 인츰 방으로 들어가버리군 하셨다. 사위는 전혀 불편이라든가 부담을 느끼지 않는데 장모님은 미안스러워 안절 부절 못하시는 판국이였다. 22일, 퇴근하여 뻐스에서 내린 향란이는 해선이네 집으로 가고 나는 먼저 복권 투입소에 들렸다. 나는 해선아비의 영향을 받아 복권놀이를 시작한 지난 봄부터 한번도 빠짐 없이 매기마다 열 다섯주 30원어치씩 샀다. 일년반 사이 6천원 넘게 날려보냈다. 복권 중독증에 걸린 것이다. 헛돈을 쓴다고, 바보라고 이따금 안해의 바가지 긁는 소리도 들리지만 나같은 바보가 없다면 “늙은이를 부축하고 장애인을 도우며 고아들을 구하고 곤난을 구제하는(扶老 助残 救孤 济贫)” 나라 복권사업이 기로에 빠지고 말게 될것이 아니겠는가? 복권을 안 산다고해서 돈이 남는 것이 아니다. 복권을 사기전에는 경상적으로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다녔었다.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그러니 술과 놀이, 아가씨들한테 버리던 돈을 복권에 넣는 것이다. 나도 남들처럼 자가용도 갖고싶고 멀리 유람도 다니고 싶다. 자가용에 어머님 모시고 안해와 함께 우리가 살던 “남도마을”도 가보고 어머님께서 가보지 못하신 북경 상해에도 가보고 어머님께서 가보고 싶으시다는 곳이라면 그 어디 하늘끝에라도… 8월 15일, 광복의 날을 현재 이곳 사람들은 “로인절”이라 정해놓고 년마다 크게 경축 한다. 이곳에는 한해에 구정을 빼고 “6.1아동절”과 “8.15로인절” 큰 명절이 딱 두번밖에 없다. 예로부터 “로인을 존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는 (尊老爱幼)”것은 우리 민족의 미풍량속이다. 지난 로인절날 우리부부는 새벽시장에 들리여 찰떡과 방금 볶은 료리 몇가지 사들고 어머님 계시는 큰 누님 집으로 명절 쇠러 갔다. 동생들이 몰려오리라 짐작한 누님네는 개 한마리 사다 솥에 안쳐놓았었다. 아침상에서 어머님은 우리가 부어올리는 술 한잔을 마시고 밥 둬숫가락 뜨신 후 수절을 놓으시는 것이였다. “어머니, 맛 없으셔도 조금만 더 드시요, 우리 다같이 공원 구경 갑시다. 속이 든든하셔야지요.” 나는 숫가락을 도루 그의 손에 잡어드리며 말하였다. “공원 갈거냐?” 나의 한마디 말에 어머니는 어린애마냥 희색이 만면하셨다. “예, 바람도 쐬시고 구경도 하시고 그럽시다.” 어머니는 내가 집어드리는 반찬을 받으며 밥 한그릇을 다 잡수셨다. 그리곤 좀 누워 쉬시련다면서 방으로 들어가셨다. 아침상을 끝낸 후 들어가 보니 어머님은 술에 취하셨는지 밥에 취하셨는지 곤히 쉬고계셨다. 사실 나는 공원으로 모실 생각은 없이 어머님께서 밥 좀 더 드시도록 어린애 달래듯이 한 말이였는데 어머님께선 참으로 믿으신 것이였다. 어머님께선 따스한 명절날 곱게 차려입으시고 맛나는 음식들을 챙겨들고 자식들 무리에 휩싸여 공원놀이하며 로인들이 둘러앉은 마당에 나가 노래장끼도 부려보고 북장단에 맞추어 두둥실 춤도 추어보고 하는 것을 제일로 즐겨하셨다. 헌데 몇해째 어머님께서는 기력상 공원으로 놀러가실 수 없는 형편이시다. 공원 문앞까지는 택시로 모신다고해도 공원안에 들어가서 다니는 것이 문제이다. 나는 일찍부터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휄차를 하나 사고 싶었다. 길에 나서면 어머님을 앉혀 밀고다니고 층계에 오를 때는 앞뒤에서 들어 모시고 집에 들어서면 접어서 세워두고, 어머님께서 다 쓰신 후 큰 누님께서 쓰시고 그다음은 그다음 누님… 나의 안해도 아주 좋은 생각이라며 찬성 하였었다. 휄차만 하나 있어도 어머님과 함께 그 어데든 다 다닐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머님께서 그처럼 가고퍼 하시는 공원놀이도 모시고 못가는 불효한 자신을 한탄하며 어머님 방에서 소리 없이 나왔다. 어머님은 어느때쯤 잠을 깨셨는지 하루 내내 공원 이야기는 다시 더 없었고 우리들은 마작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머님을 위해 가족들을 위해 자가용도 휄차도 다 있어야 한다. 헌데 빈 털털이이니 복권에나 당첨되기를 바라는 그길밖에 무능한 나로서야 무슨 수가 더 있더란 말인가? 만날 아글타글 뻐덕이여봤자 공장이란게 그꼬라지이고 나이 드니 외국 나가기도 싫고… 22일 오후 다섯시 사십 오분경, 큰 누님집 층층계 문앞에 닿았을 때 내 허리에서 핸드폰이 진동하였다. 어데까지 왔느냐는 자형님의 독촉 전화였다. 온 오후 누님께서 어머님을 안고 계신다는 말에 나는 한걸음으로 4층까지 뛰여 올라갔다. 상황이 위태로움을 그제야 느낀 것이다. 그런 줄만 알았더면 복권은 무슨놈의 복권이고 전화 받은길로 뛰여 왔어야 했을걸… 큰 누님께선 침대에 앉아 뒤로 어머님을 품안은채 울고계셨다. “어머니, 제가, 제진이가 왔습니다.”나는 어머님의 앙상한 손을 잡아 흔들며 조용히 불렀다. “엄마,재지 왔소, 눈 좀 떠보오, 엄마! 엄마!”누님도 어머님의 얼굴을 만지며 불렀다. 어머님은 가쁜 숨을 몰아 쉴 뿐 눈을 뜨지 않으셨다. 어제까지만 하여도 약도 마다하고 주사도 꽂으면 뽑아버리라고 야단이시더니 오늘 아침엔 주사를 놓아달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엄마, 오래 살고싶으죠?”하고 큰 누님이 롱담 하니 그렇다고 머리를 끄덕이시더라는 것이다. 얼마나 맥이 없고 힘 드셨으면 주사를 다 자청하셨을까? 인츰 피로 회복제인 아미노산(氨基酸) 점적주사를 꽂아드렸다.“수고 참 많았수!”라고 주사침을 꽂고 돌아가는 호사에게 인사하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오전에 순란이가 건너와 어머님을 배동하다가 별 탈 없으시니 점심에 집으로 갔다한다. 오후부터 불시로 힘들어 하시니 나한테 전화를 걸고 내내 안고 앉었다는 것이다. “누님 허리 아프시겠습니다, 내 좀 안어드립시다.” “응 그래, 한국에서 볼라니깐 부모들이 운명하자 할 때문 모두 자식들이 와서 이렇게 안고 있더라, 그래야 편하구 복하게 가신다구 말이다.” “참 누님두, 어머니 뭐 운명 하실라구…” 말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듯 하였으나 누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참말로 운명 하시면 어쩌랴 싶어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눈물이 왈칵 솟구쳐 올랐다. 큰 누님은 한국서 입원한 로인을 돌보는 간병인일을 오래 하셨고 세상 뜨는 로인을 많이 보았다. 하기에 그는 만일에 대처해 몇시간이나 울면서 안고 계셨다. 허지만 그도 믿지 않았기에 나만 알리고 다른 동생들에겐 전화도 하지 않았다. 내 나이 먹고 머리털이 다 희도록 여직껏 어머님께 해드린것 하나 없고 큰 근심 작은 근심 하냥 근심만 끼쳐드린 불효자식이였다. 이제라도 뭐든 조금씩 해드려야지 절대 이대로 보낼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낮은 소리로 어머니를 련속 불렀다. “오냐, 제진이 왔냐? 공장 기계 잔 팔리냐?”하고 매번 볼 때마다 묻듯이 또 물어봐주기를 얼마나 바랬던가! 어머님의 작은 등이 나의 가슴에 맥없이 안기여 가늘게 숨 쉬고 있다. 이 작은 등으로 일곱살 넘은 아들을 업고 몇십리 엄동설한 눈보라를 헤쳐다니며 썩어가는 발을 구해주었고 이 작은 등으로 일곱 남매를 업어 키우셨다. 그 고난의 년대에 우리들을 남만 못지 않게 키우려고 어머님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셨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바로 이러하기에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사람들은 말하는 것이리라. 헌데 “상팔자”와 “효도”는 왜서 반비례 되는지? 무자식이라 아무런 근심걱정 없는 나라지만 “대를 끊음이 최대의 불효(绝后不孝为大)”라 했거늘 손주 하나 키워드리지 못한 나는 부모님과 조상님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마음을 앓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님께선 나하고 마주 앉으면 늘 “너 자식 하나 없어 늙어지면 어떡 하겄냐?”하고 근심을 표하신다. 운신 못 할 때 돌봐주고 저세상 갈 때 보내주는 자식이 있어야 한다는 이것이 인간사회의 전통이니깐. 내가 누님 대신 어머님을 안은지 2-3분 되였을 때 어머님은 드디여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듯 입을 여셨다. 헌데 숨만 둬번 올리 톱으시더니 아무런 말씀도 없이 조용히 숨을 거두시였다. 자형님께서 눈까풀을 번져보고 가슴에 청진기도 대여보았다. 심장 박동이 멈춰버리고 만것이다. 어머님께서 이렇게 운명 하셨다는 것이, 말씀 한마디 없이 영영 떠나셨다는 것이 믿기질 않았다. 큰 누님의 대성통곡이 터졌다. 그는 어머님의 어깨를 잡아 흔들기도 하고 어머님의 빰을 때려보기도 하며 넉두리쳤다. “아이고ㅡ이렇게 가믄 어떻게 하오?ㅡ 엄마, 엄마ㅡ 눈 좀 떠보오ㅡ 금년까지만이래두 좀, 소영이 잔치 할 때까지 이제 한달만이래두 좀 참으란데 이렇게 가믄 어떻게 하는가 말이오! 아이고ㅡ 그잘란 새끼두 아들이라구 바꿔 안자마자 숨을 거두고 마오?ㅡ 그럴줄 알았드믄 내 그냥 안고 있을거… 아이고ㅡ 우리 엄마, 불쌍한 우리 엄마ㅡ 숨 거둘 때까지두 그저 새끼들을 생각해서 이렇게 깨끗하게, 소변 한점 안 흘리구 냄새 하나 없이 가오? 아이고 우리 엄마ㅡ 딴집 노친들처럼 쏘고 뭉개고 욕도 하고 정이래두 좀 떼고 갈게지, 아이고…” 큰 누님께서 넉두리 하는 사이 자형님의 전화를 받고 셋째 누님네와 동생들 모두가 달려왔다. 네딸이 통곡치며 더운물로 목욕 시켜드리고 새옷을 갈아 입혀 드렸다. 따스하고 부드럽던 어머님의 몸은 나의 품속에서 천천히 식어가고 천천히 굳어지고 있었다. 아아! 나의 어머님!ㅡ정녕 이렇게 떠나신단 말씀이옵니까?! 우리는 두만강을 민족의 강, 백두산을 겨례의 산이라 부르고 또한 어머니의 강, 아버지의 산이라 부른다. 멀잖은 어젯날 어머님은 나의 큰 누님을 등에 업고 아버지를 따라 눈물 뿌리며 두만강을 건너왔고 피땀 흘리며 백두산 기슭에 뙉밭을 일구었다. 우리들은 두만강의 맑은 물을 마시며 몸과 마음을 키웠고 백두산의 싱싱한 풀을 먹으며 힘과 지혜를 키웠다. 두만강처럼 맑고 도도한 어머님의 사랑, 백두산같이 싱싱하고 숙엄한 아버지의 사랑, 그사랑은 영원 할 것이다! 어머님! 고이고이 잠드소서! 이자식은 래생에 다시 당신의 아들로 태여나 이생에 못한 효도 다 하리다!                                                                 (2006년 10월)
61    [한국 나들이]23. 어머님의 슬하에로 댓글:  조회:1845  추천:0  2013-06-18
23.  어머님의 슬하에로     고대하던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집으로, 어머님의 슬하로 돌아간다! 큰 누님께서 한국에 나오시기만 하면 우리는 떠날 수 있도록 준비가 다 되였다.   어머님께선 복수(腹水)가 와 배가 엄청 커지고 숨이 차고 음식을 드실 수가 없는 형편이였다. 두주일이나 큰 병원에 입원해 검진을 받았으나 진단도 내리지 못하고 많은 돈만 팔았다. 의사들은 어머님의 페를 조금 뜯어내여 검사하자고 제기하였다. 큰 누님을 비롯하여 모든 자식들이 동의하지 않았다. “아무런 일도 없는 페를 왜 뜯어낸단 말인가? 그랬다간 어머님의 건강하시던 페까지 상할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였다. 진단도 내리지 못하는 병원에 그냥 누워 헛 돈만 팔 수는 없는 일이라 자식들은 어머님을 출원시켰다. 우리가 한국에서 돌아왔을 때는 어머님께서 병환에 계신지 이미 달포가 지난 후였다. 향란이네 집에 누워계시는 어머님은 전신에 살이 싹 빠지시고 배만 둥둥 불러계셨다. 병원에 가서 주사기로 두번이나 물을 뽑기도 하였다는데 그때 뿐이지 하루만 지나면 또 그대로 커진다는 것이였다. 연길엔 큰 종합병원도 많고 전문병원도 많고 교수문진이요 전문가 문진이라는 것도 많고 개체 진료소는 더욱 많다. 그많은 병원, 그많은 의사와 전문가들이 나의 어머님의 병환을 진단 못 하고 치료 못한단 말인가? 큰 병원에서 진단 못 했으니 어데 가도 안될거라고 착각 한다. 연변에서 안되면 북경 상해라도 모시고 가야 한다. 2002년 12월 초, 한국에서 돌아온 며칠 후 나는 택시차로 연길시내를 한바퀴 돌기로 작심하고 나섰다. 먼저 “무역청사” 뒷거리에 있는 교수문진부로 갔다. 차를 세우고 간판에 라렬된 글들을 읽어보니 소아과요 부산과요 치과요하는 것들만 적혀있는 것이 어머님의 병환과는 하나도 맞는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차머리를 돌려 “우전호텔” 동쪽거리에 자리한 전문가병원으로 갔다. 현관대청 계시판에서 내과 문진실을 찾았고 책임의사에 대한 소개도 상세히 읽어보았다. 리씨이신 60대 중반의 녀의사였다. 나는 흉부투시 사진한장을 그의 앞에 내밀며 인사하였다. “수고 많으십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여기에 앉으시죠.” “선생님, 제가 아픈게 아니구요, 왕진 좀 가주실 수 없겠습니까?” “죄송한데요, 보시다 싶이 자리를 비울 수 없잖습니까? 어떤 환자십니까?” 나의 소개를 듣고난 리의사는 반드시 어머님을 모시고 와 검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였다. 맥이나 짚어보고 결론 내릴 증상이 아니니깐.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다. 큰 병원에서 많은 교수들이 보름동안 해도 진단 내리지 못한 병을 왕진으로 해결 받으려니 철딱서니가 없는 일이다. 나는 즉시 어머님을 모시고 다시 찾아갔다. 리선생님은 어머님을 침대에 눕히고 배도 만져보고 등거리에 청진기도 대보고 하더니 혈액 화험단 한장을 떼주었다. 화험실에서 혈액 채취를 받은 후 어머님을 집으로 모셔갔다. 몇분 안 걸려 진찰이 끝난 것이다. 신심이 가지 않았으나 당일 오후 화험단이 나올무렵 나는 세번째로 리의사를 찾아갔다. “어머님의 병은 결핵성 흉막염입니다. 큰 병원에서 이런걸 진단 못했다고 하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니기다 불편하시니 주사약은 쓰지 않고 드시는 약만 뗍니다. 이것은 우리병원에서 사면 되고 이쪽 처방약은 결핵병 방치소에 가야 합니다. 그곳에밖에 없는 약입니다. 설명서들을 잘 보시고 그대로 대접하시요.” 리선생님은 약처방 두장을 써주며 설명했다. 나는 연신 감사 드리며 허리 굽히고 뒷걸음질로 내과 진찰실에서 나왔다. 나는 기뻤다. “큰 병원에서 이런걸 진단 못했다고…”하는 리선생님의 한마디에 나는 신심을 가진 것이다. 큰 병원이라는 간판에 속히워 병을 키우고 돈을 잃고 죽어지고 하는 억울한 환자들이다. 우리어머님도 하마트면 당하고 말번하였다. 어머님의 병환은 기적처럼 사라졌다. 리선생님께서 떼여준 알약 서너가지를 드셔 일주일 전인데 어머님의 불렀던 배는 줄기 시작하였고 열흘도 안되여 통군 300원도 들이지 않고 언제 그랬더냐는 듯이 말끔히 나아지셨다. 내가 한국에서 오기전 큰 병원에서 어머님의 페를 오벼내여 검사하려 할 때 동의하지 않은 큰 누님과 형제들이 잘 한 것이였다. 세상 뜨실줄로만 알았던 어머님께서 다시 건강을 찾으시니 온 집안이 기쁨에 넘쳐 난리였다.  두해 후인 04년 12월 중순께였다. 룡연 “천애양로원”에 계시던 어머님은 허리를 움직일 수 없게 되였다. 조금만 움직여도, 기침을 조금 깃어도 숨넘어갈 지경으로 통증이 난다는 것이였다. 골질증식이나 허리 척추뼈 돌출일 것이라는걸 누구나 다 안다. 절대 다수의 로인들이 겪어야 하는 질환이니깐. 많은 자식들을 낳아 키우시고 그 자식들을 위해 평생 허리 굽히고 농사 지어온 그이들 허리에 이상이 오지 않으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어머님은 또 향란네 집에 누워계시게 되였다. 얼마간 견디면 절로 나아진다며 절대 병원에는 가시지 않는다는 것이였다. 그처럼 모질게 아프시면서도 간신히 몸을 굴려 화장실로 기여 가 볼 일을 보시군 하셨다. 어머님께선 원래 여간만 불편하셔선 내색을 내지 않는 분이시다. 지통제를 잡수며 반달간 누워계셨으나 나아지질 않았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라디오 방송광고를 통해 “골영양소”가 중로년의 허리 척추병을 잘 치료 한다는 것을 알게되였다. 많은 사람들이 “광고약”이란 값만 비싸고 효과 저질이라고 여기듯 나도 례외가 아니였다. 허지만 어머님께서 아프신데 비싸면 어떻고 효과가 없다면 어떤가? 자식으로서 그렇게 고통스러워 하시는 모습을 그저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는가? 05년 1월 1일 아침, 나는 “신약 대약방” 앞에 서서 문 열기를 기다려 첫 손님으로 들어갔다. 한개 료정에 두곽, 값은 2원 없는 300원이다. 효과가 나기를 바라는 마음은 태산 같은데 신심은 5%이다. 무슨 약이나 광고사대로만 된다면 세상에 앓는 사람이라고는 없을 것이고 병원은 죄다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또 기적이 나타났다. 어머님께서 일주일간 약을 복용하시더니 일어서실 수 있게 되였고 두주일(반개료정)이 지나니 아픈데 없이 말끔히 나아졌다. 광고약이 이같은 기적을 낳아 사람을 놀라게 할 줄은 상상도 못 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드시 새해의 첫 날 첫 사람으로 약을 사다가 어머님께서 완쾌 하시기만을 기원하며 드렸더니 감천하였는지 모를 일이다. “내아들 효자요, 두번이나 죽을걸 살렸어…” 어머님은 감탄, 치하, 자랑을 아끼지 않으셨다. 내가 무얼 해드린 것이 있다고? 편찮으신 어머님께 약 조금 사다드리는건 너무나도 지당하고 작은 일인데. 어머님께서 평생 자식들을 위해 쏟은 사랑과 고생에는 비길 수도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큰 누님께서 드디여 한국에 나오셨다. 우리가 돼지농장에서 일년간 벌어 모아둔 돈 천 칠백만원을 찾아내여 인민페와 바꾸었다. 둘이 일년반 꾸준히 일해 번돈이 인민페로 십만원이다. 한국에 나온 많은 친구들은 한사람이 백만원을 목표로 한다고 들었다. 우리부부는 5만원씩 벌고서도 만족하였다. 친척들을 다 만나보았고 곳 구경도 실컷 하였고 생활체험도 마음대로 하였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돈보다 더욱 소중하고 얻기가 힘든 것이다. 삶에 있어서 돈이 없어서는 안되지만 전부는 아니다. 어머님께서 오늘일까 래일일까 하신다는데 돈을 더 벌겠다고 눌러 앉아 있는다면 사람도 아닌 삶이다. 큰 누님께선 “엄마는 인젠 년세가 많아 그러시니 방법이 없다.”고 하셨다. 이미 실망 한 것이였다. “아닙니다, 외할머님 93세에 돌아가셨으니 어머니는 아직 적어도 10년은 더 앉으셔야합니다. 백세까지 사시면 더욱 좋구요.” 이는 모든 자식들이 그러하듯 나의 욕심과 소망에 지나지 않는 것이였다. 뭐든 욕심과 소망대로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으련만 세상만사는 그렇지가 않다. 그러니 큰 누님의 실망도 지당한 것이라 나는 더욱 한시급히 어머님 슬하로 돌아가야 했다. 어머님의 병치료를 하더래도 내가 해야하고 후사를 치러도 내가 있어야한다. 한국에 나오시자마자 큰 누님께서는 허리가 아파 들어눕게 되였다. 이역시 년세 탓이다. 나이 들고 탈 없는 사람이 드물다. 마침 전해 봄에 남산타워 오르는 길에서 만났던 김원장님께서 다시 나와계시기에 전화를 쳤더니 찾아 와 침도 놔주고 약도 주어 누님께선 인츰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큰 고모님께선 여전히 건강하셨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날 저녁 우리는 큰 누님을따라 윤현형님 집으로 작별 인사드리려 갔었다. 한국에 와서 돈 좀 벌었노라고 고모님께 용돈 10만원 드리면서 큰 절 하고 나왔더니 형님께서 따라나와 우리에게 기어이 10만원을 도루 넣어주는 것이였다. 그것이 그것이지만 “느그한티서 용돈 다 받어본다 잉, 고맙게 잘 쓰것다.”하며 기뻐하시는 고모님을 보면서 우리들의 마음도 더없이 기뻣다. 이렇게 헤여지면 언제 다시 뵐지? 고모님 생전엔 다시 뵐 수 없을 것은 사실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저그나마 서로에게 기쁜 마음을 남길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였다. 고향에도 한바퀴 다시 돌면서 절 올렸으면 좋으련만 어머니에 대한 근심으로 한시가 급한지라 전화를 걸어 인사를 남기고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2002년 11월 29일 오후 세시반, 우리는 고국에 대한 련민의 정을 한가슴 가득 품고 하늘 높이로 날아 올랐다. 안녕히, 대한민국이여! 가슴으로 웨치며 구름위에서 날았다.   2007년 07월(끝)
60    [한국 나들이]22. 막 일 군 댓글:  조회:1632  추천:0  2013-06-17
22.   막  일  군     어머님께서 몹시 앓고계신다는 순란이의 전화를 받은 후 우리는 즉시 돌아가려고 마음 먹었었다. 헌데 큰 누님 계좌에 적금해둔 돈을 찾아내올 수가 없었다. 비밀번호가 맞지 않았다. 중국에 큰 누님과 여러번 전화 통하고 안해와 영이가 매일같이 은행에 가 비밀번호를 쳐봤지만 열리지가 않았다. 돈푼이라도 쥐고 가야 어머님 모시고 병원에 갈 수 있지 않겠는가?  병환에 계시는 어머님께선 얼마나 이자식을 근심하며 기다리고 계시는지 모른다. 나의 마음은 한시가 급했다. 그런데 그 비밀번호가 사람을 말려 죽인다. 누님 본인이 신분증을 지니고 가야 해결 할 수 있다는데 한달 썩 넘게 지나야 한국으로 나올거라 하신다. 별 수 없이 그때까지 일을 해야 했다. 돈을 싹 긁어모아 이틀간 뛰여다니며 연길공장 가스레인즈 생산에 수요되는 내화 밀봉재료 이백만원어치를 사 부쳤다. 안해가 “감자옹심이”에 들어간 이튿날 나는 고양시 일산구 “공사인력개발 센터”로 찾아갔다. 진짜로 막벌이판에 들어선 것이다. 누님께서 한국에 오시기 전까지 한달만 견지하려는 것이다.“벼룩시장”의 광고를 보나 길가의 간판들을 보면 인력시장이거나 직업소개소같은 것이 기수부지이다. 그러니 뭐든 하려고만 든다면 일거리 찾기는 쉬운편이라 하겠다. 광고에서 제시 해준대로 영등포역 앞거리에서 87번 좌석뻐스를 타고 시간반쯤 달려 일산 암센터역에 내려 전화를 치니 사장님이 차를 몰고 실으러 왔다. 원래는 한역 더 가 정발 고등학교역에서 내렸더면 이분만 걸어 그 인력 센터에 들어 갈 수 있었을 것을 잘못 내린 것이였다. 일산 국립 암센터는 자리도 컸고 건물도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건물 색갈이 해말쑥한걸 보아 세운지가 그리 오래된것 같지는 않았다. 암 고치는 병원과 전문가는 물론이고 연구원도 있고 료양원도 있고 암에 관한 것이라면 총 집합한 곳이라 한다. 아무리 아름답고 크고 구전하다고 해도 사람이 살면서 그런 곳에는 들어갈 일이 절대로 없어야 하는 것인데… 하고 나는 생각 하였다. 국립암센터나 공사인력개발센터나 다가 센터인데 자그마한 건물의 지하에 자리한 인력센터는 너무나도 초라 하였다. 60-70평방메터되는 작은 지하실에 합판을 세워 세칸으로 나누어 한칸은 사무실로 쓰고 한칸은 나같은 외래 일군들의 숙소로 쓰고 나머지 한칸은 주방겸 샤워실로 쓰고 있었다. 지하실 층계를 내려와 문을 열고 들어서면 사무실인데 왼손켠에 서 정필소장님 책상이 벽에 대여있다. 채상위엔 전화기 한대가 놓여있고 책상 곁엔 찬물과 끓인 물이 나오는 정수기가 세워져있다. 책상 맞은켠, 그러니 출입문 정면에 24인치짜리 작은 채색 텔레비죤이 벽을 등지고 높이 얹혀져 있고 그아래 차탁을 마주하고 길다란 인조가죽 낡은 쏘파 두개가 놓여있다. 텔레비죤이 얹혀진 벽 왼켠에 잇다인 합판으로 세워진 벽에 역시 합판으로 만들어진 출입문 두개가 달려있다. 첫문에 들어서면 둬뼘되는 각목을 세우고 위에 널판자를 펴서 만든 7-8명씩 누울 수 있는 통침대가 량켠으로 설치되여있다. 이미 투숙한 일군이 열명 정도라 내가 누워 잘 자리는 넉넉하게 있는셈이였다. 서소장은 지저분한 이부자리들을 이리저리 밀쳐버리고 왼켠 중간에 내 자리라고 여기저기서 낡은 담요도 뽑아오고 어지러운 이불과 베개도 주어다 주었다. 내가 배치된 왼켠 통침대가 붙어있는 합판벽 건너쪽이 주방겸 샤워실이다. 침실 출입문 켠의 침대머리에 작은 통로를 내고 주방으로 들어 갈 수 있는 작은문을 달아 놓았기에 침실에서 직접 주방으로 드나들 수도 있고 사무실에서 두번째(왼켠) 문으로 드나들어도 된다. 사무실에서 주방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손켠엔 침실로 통하는 작은 문이 달려있고 왼손켠엔 크고 작은 각종 건설장 공구들이 구멍나고 어지러워진 안전모 안전화나 작업복 따위들과 함께 마구 장져져있다. 왼켠 벽 가운데쯤 자그마한 랭장고가 서있고 다음 콩크리트로 만든 취사탁대(炊事桌台)위엔 전기밥가마, 가스레인즈 그리고 사발광주리와 칼도마가 놓여있다. 탁대와 잇닿인 곳엔 간이 샤워실이라고 한메터 높이로 벽돌을 쌓아 남자물건만 가리워지게 해놓았다. 끝머리 벽에 가스 온수 샤워기를 높이 달아놓은 것이였다. 매일 아침 날 밝기 전이면 막일군 20명 좌우가 사무실에 모인다. 숙소에서 자는 사람 여나문과 본지방 사람들 그리고 먼거리에서 자가용을 몰고 오는 사람과 옆집 지하실에 주숙하는 연길 김씨 아저씨도 있었다. 서소장은 우리들을 용인 단위의 부름대로 두셋씩 조를 지어 여러 일터로 보낸다. 어떤 일군에겐 전화를 쳐주어 센터에 들리지 않고 직접 집부근의 일터로 가게하고 일군이 모자랄 때면 단른 센터에 전화를 걸어 아무아무 곳으로 몇명 보내달라고 지원을 요청 하기도 한다. 간혹 인부가 남아돌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센터에서 주숙하는 우리들이 우선이고 그다음은 외지에서 다니는 사람들, 마지막으로 본지방 일군이다. 우리는 주숙비를 바치는거고 외지에서 다니는 사람들은 교통비가 들어간 것이다. 그러니 합리한 안배라 하겠다. 일터는 먼곳도 있고 가까운 곳도 있는데 공공뻐스를 타고 도착하자마자 아침밥을 주는데도 있지만 거개가 일을 한쉼씩 한 후 아침밥을 준다. 간혹 한사람만 부르는 일터도 있고 7-8명 요구하는 일터도 있었다. 한곳에서 하루나 이삼일 하는 일이 대부분인데 한주일 두주일씩 오래 쓰는 일터도 있었다. 일터란 모두가 건설장인데 별이별 일이 다 차려진다. 건물 안팎을 청소 한다든가 널려 있는 건축용구들을 주어 모으는건 기본이고 벽돌이나 모래를 높이 지어올리는 무거운 일도 했고 하루종일 현장을 돌며 담배꽁초만 줏는 가벼운 일도 했다. 받침대 철관을 주어모두는 일, 폼(콩크리트 막이판)을 날라다 규격별로 쌓는 일, 지하실의 무너져내린 콩크리트 쓰레기를 쳐내는 일,전기 안장 전선을 끄당겨주는 심부름 일, 외벽장식 대리석 운반공 일, 건물기초 흙벽 방타(防塌) 목공 일… 헤아려 보니 길지않은 한달사이에 일 여덟 건설장으로 다니면서 스무여가지 일을 해본것 같은데 지금에 와 적으려니 명칭을 몰라 구구이 쓸 수가 없다.  아침 여섯시쯤에 일을 시작하고 오후 다섯시쯤이면 일반적으로 퇴근한다. 간혹 여섯시에 퇴근 하는 일도 있고 한번은 사우나실의 바닥 장식 일을 했었는데 저녁도 못 먹은채 아홉시에 퇴근 한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돈을 올려주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하는 일은 기술일도 아니고 힘든일도 아니기에 일당 5만원이 고정이다. 날마다 5만원을 벌어가지고 와서는 인력센터 소장님한테 5천원 바친다. 입주시 선금으로 낸 주숙비는 하루에 2천원씩이다. 4만 3천원에서 뻐스비와 저녁 밥값이 들어야하고  나는 담배값과 소주값이 더 들어야한다. 그외 액화가스 값이라고 몇천원이였던지 한번 낸적이 있다. 그러고나면 하루에 4만원 아래로 남을 것이다. 모래를 7층에서 10층으로 지어올리는 무거운 일을 하루하여 7만원을 받아봤다. 5만원 이상을 벌었을 때엔 센터 소장한테 만원을 바쳐야 할뿐만 아니라 체력 단련이 안된 나로서는 이튿날 사지가 쑤셔나 누워 있어야 했으니 좀 적게 받고 매일 출근하기만 못한 일이였다. 건설장마다 목공반이거나 철근공반, 용접공반에는 중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많이 끼여 일하고 있었고 몽땅 중국 사람들로만 조직된 구르빠도 적지가 않았다. 그런 집단에 참가하라고, 그러면 힘 적게 들이고 많이 벌 수 있다고 추천하는 사람이나 요청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허지만 나는 한달도 못하고 귀국해야 하는 몸이니 이일 저일 단기적인 림시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일산병원 부근에 자리한“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건설장에서 며칠간 잡일을 하게 되였다. 보잘것 없는 잡일이라하지만 하기 나름이다. 서른살을 좀 넘긴 본지방 키다리애 하나는 각목 메여나르는 일을 한다는 것이 자기 팔뚝보담도 가늘고 자기 키보담도 짧은 나무대기만을 골라메고 느릿느릿 다닌다. 곁사람  보기에도 거북한데 부끄러운줄도 전혀 모른다. 현장감독원같은 사람들한테 되게 꾸지람도 받군 하였지만 변함이 없다. 한번은 현장 총감독인 나보다 둬살 년상으로 보이는 나그네가 혼자서 건설장 밖의 길을 쓸고 있는 나를 불렀다. “아저씨, 쉬염쉬염 하세요.” “괜찮은데요 뭐.” 하루종일 시키는 일만 고분고분하고 말 두마디 넘기지 않는 성미인 나는 한마디 대꾸하고는 하던일을 계속 하였다. “아저씨, 잠깐 멈춰보세요.” 나는 “예?”하며 돌아섰다. 내가 뭘 틀리게 했는지 아니면 다른 일을 급히 시키려는 것인지… 그가 나와 뭔가를 말하려하고 있음을 나는 느꼈다. “막일 다니지 말고 우리 회사로 들어오세요,”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섰는데 그가 말을 계속 하였다. “지금 우리 현장에 공구 관리원이 한사람 수요 되는데 해주면 안될까요? 숙식을 안배해드리고 매월 백 오십만원씩 드리겠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인데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어머님께서 병환이 중하셔 이달내로 중국으로 돌아가려고 하거든요, 죄송합니다.” “교폽니까? 한국분인줄 알았는데. 간다니 방법 없죠. 같이 일 다니는 분들과 이야기 해 의향 있으믄 나를 찾으라구 하세요, 골라서 채용 하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러죠.” “그럼 수고하세요, 날도 덥고 급한 일도 아니고한데 쉬여가며 하세요.” “예에, 감사합니다!” 나는 인츰 동료들에게 말하긴 했으나 그후로 “음주문화”건설장에 일하러 가지 못했기에 누가 그를 찾아 갔었는지, 또 누가 채용 되였는지 나는 모른다. 집으로 돌아올 계획이 아니였더면 내가 그일을 맡아 했을텐데 아쉽게 된것이다. “음주문화연구센터”는 쌍둥이 고층건물로 세울 예정인듯 몇메터 사이두고 14메터 깊이의 커다란 기초구덩이 두개를 팠는데 하나는 이미 3층 지하실로 콩크리트를 다 때렸고 하나는 밑바닥 청리와 철근기둥 세우는 일을 하고 있었다. 쌍둥이 건물이 아니고 두 구덩이 위에 길다란 건물을 세울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은 준공한지가 오랠텐데 어떤 모습으로 일떠섰을지 궁금하다.  고양시는 서울 북쪽에 위치해 있다. “일산신도시”라 이름달고 철근 콩크리트 건물들을 많이 세우고 있었다. 북한의 진공을 막고 서울을 보위하는 방어선이라는 말같잖은 소리들을 들었다. 인력센터 숙소에는 흑룡강성에서 온 사람 넷, 러시아에서 온 애들 둘, 본국인 넷, 나까지하면 도합 11명이고 사무실 귀퉁이에 합판으로 두면을 막고 독방살이 하는 내 나이와 비슷한 나그네 한사람이 있다. 사람들은 그를 리실장님이라고 부르는데 그센터에서 실장인지 아니면 원래 모 회사의 실장이였었다고 그렇게 부르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자가용에 연장들을 싣고 다니면서 자기절로 값 높은 일만 찾아하는 사람이다. 침실 첫머리에 자리잡은 60여세 돼보이는 늙은이도 센터 소장의 안배 없이 절로 일을 찾아서 하러 다니는 고급 미장이이다. 그러니 그들 둘은 주숙비만 내고 일 소개비를 내지 않는 것일게다. 내가 인력센터를 떠나던 날, 나는 하루 일을 끝내고 와 짐을 꿍져가지고 나오면서 작별인사나 남기려고 리실장의 방문을 처음 열었다. 헌데 이불로 무릎을 덮고 비스틈히 누워 작은 TV를 보고있던 리실장은 와뜰 놀라며 이불을 뒤집어 쓰고는 “어,어…” 소리까지 내며 부들부들 떠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형상에 나까지 깜짝 놀라 한동안 어안이 벙벙해 서있었다. “리실장님, 저 인제 돌아갑니다. 안녕히 계십쇼!” 먼저 정신이 든 내가 인사말을 끝낼 때에야 리실장은 “허유ㅡ”하며 천천히 이불을 내리우고 머리를 내밀었다. 도대체 왜서 그처럼 놀라고 무엇을 그렇게 무서워 하는 것인지 나는 전혀 알 수가 없다. 나는 미리 준비 하였던 돈 5만원을 꺼내여 그의 이불 위에 놓으며 말을 이었다. “따님이 결혼 한다 했죠? 축하 드립니다! 적지만 성의이니 받아주시요.” “아니, 뭐 이렇게…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건강하시구요…” “예, 예…”하며 나는 급급히 나와 뻐스역으로 향했다. 며칠전 흑룡강성의 두 늙은이와 내가 일거리가 없어 안배를 받지 못하고 센터에 있었는데 마침 리실장도 일하러 가지 않고 있었다. 그날 리실장이 우리에게 점심밥을 사주었고 점심을 먹으면서 이야기 나누는 중 그의 딸이 곧 결혼하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되였다. 비록 몇푼 안되는 밥이지만 그 마음이 고마워 꼭 갚고 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 했던 것이다.“有来无往非礼也(오기만 하고 가지 않으면 례의가 아니다)”라는 중국말이 있고 “되로 꾸고 말로 갚는다(滴水之恩 用泉相报)”는 우리민족 속담도 있다.    숙소에는 미장이 로인 한사람 외에 30대의 한국 젊은이 셋이 있었다. 셋 다 일도 잘 하고 인물 체격도 좋고 마음씨도 고운 애들이였다. 두 러시아 애들과 저녁마다 씨름하며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키가 좀 작은 애는 전문 벽돌 지여올리는 힘든 일만 맡아하였고 키 큰 애는 나같이 그곳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데리고 여기저기로 막일을 다녔다. 그들중 나이가 제일 어려보이는 애는 나보다 센터에 반달가량 늦게 들어왔는데 우리와 함께 일다니는 날보다 외출하는 날이 더 많았다. 그들은 왜 고정 직업을 찾지 않고 막일을 하는 것인지? 장가나 들었는지? 나는 지금도 그러한 의문들을 풀지 못해 답답하다. 그들은 PC방에서 게임으로 밤을 새우는 때가 많았다. 그러던 어느날, 저마끔 저녁을 먹은 후 시간반쯤 지났을까한데 “신분 확인 하겠습니다, 모두들 신분증 꺼내요!”하는 소리에 문쪽으로 머리를 돌려보니 경찰 셋이 침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모두들 말 없이 려권을 꺼내 보였다. 가슴이 철렁 하였다. 나는 려권을 분실 할까봐 부천에 두고 가져오지 않았었다. 경찰아저씨가 내 앞에 다가와 섰다. 뚫어지게 쏘아본다. “빨리 내놓지 않고 뭘 꾸물거려?!”하는 눈길이다. 나는 려행가방을 뒤적이며 급급히 변명했다. “려권을 조카집에 두고 안 가져왔습니다.” 순경은 지나치려는듯 둬발자국 가더니 홱 돌아서면서 입을 열었다. “그걸 어떻게 증명합니까? 두고 왔다면서 뭘 찾는척 합니까?” “글쎄요…” 나는 할 말을 못 찾고 얼버무렸다. 그 경찰은 나를 측면에서 뜯어보고 있었고 다른 둘도 사냥물이나 발견한듯 나의 정면에 와 섰다. “증명 할 수 없다면 우리 같이 가야하겠습니다.” “글쎄요… 그런데 이걸루는 안 될까요?” 바퀴 달린 려행가방 안의 옷속을 뒤집다가 손끝에 문득 닿은 것이 공정사 직함 “자격증서”였다. 일자리를 찾는데 쓸모 있을런지하여 언젠가 넣어두었던 것이 뜻밖에 나타난 것이였다. 그들은 한동안이나 실물과 사진을 대조해 보더니 외출시엔 려권을 반드시 휴대해야 한다고 주의를 주고는 나가버렸다. 하마트면 파출소에 가 꼬박 밤을 새며 시끄러움을 겪을번 하였다. 한국에 건너가 한달만에 경찰의 질문을 받았었고 한국을 떠나기 한달 전에 또 경찰의 질문을 받았다. 이상한건 불시로 들이닥친 경찰들인데 그들이 나타나기 전에 한국애들 셋이 가뭇 없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 어떻게 사라졌고 왜서 사라졌는가 하는 그것이다. 나보다 후에 들어왔다던 그애는 경찰이 왔다 간 후로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침과 점심은 일터에서 먹여주니 근심이 없었는데 저녁을 자취 하려니 조금 시끄러웠다. 첫 한주일 저녁마다 “신라면”두개에 “참이슬” 한병씩 했다. 라면 한개반은 정수기의 끓는 물에 담궈 주식으로, 마른 라면 반개는 술안주로 했다. 두주일간은 흑룡강성에서 온 세사람과 함께 밥을 해 먹었는데 두부 두모에 돼지고기 반근, 장 덩어리를 뚝 떼여넣고 부글부글 끓여 매운 고추가루 듬뿍 놓고 후ㅡ후ㅡ 불며 반지술에 먹을라치면 천하 별미였다. 거기에 안해가 해준 데친 부추무침이라든가 말린 무우장아찌라든가 겯들어 먹으면 막일군 호불아비 신세 서러운줄 모른다. 밑반찬은 떨어지기 바쁘게 안해한테 미루 전화하여 준비 시켜놓고 가져다 같이 먹군 하였다. 흑룡강에서 온 사람 넷 중 하나만 나보다 열살 아래이고 셋은 다 나보다 열살 넘게 이상이였다. 치치하르에서 왔다는 행동이 느릿느릿한 신씨 아저씨는 63세였는데 우리와 함께 해먹지 않고 작은 전기밥가마와 납양재기를 하나씩 갖추어놓고 저녁마다 부지런히 홀로 해먹는 것이였다. 일산에 온 이튿날부터 전신이 가려워 고생하였다. 중국에서도 가려운 증상을 겪은바 있는지라 물탈이라 여겼다. 부천이나 한국 그어디에 가나 그런 증상이 전혀 없기에 수토가 나한테 맞아 천만 다행이라 생각 했었는데 일산에 오니 아니였다. 매일 저녁을 먹은 후 나는 샤워기를 켜놓고 뜨거운 물로 전신을 지져 마비 시키곤 하였다. 뜨거운 물을 끊으면 더욱 가려워나 미칠 지경이였지만 뜨거운 물을 들쓰는 시각만은 가려움을 잊을 수 있었기에 그렇게하는 것이였다. 수토과민증이라면 물을 피해야 하는것일지 모르겠으나 물을 마시지 않고 쓰지 않으면 살 수 없다. 마지막 한주일간 나는 다시 라면생활을 하였다. 주방의 하수도 구멍에 밥알이 들어가 막힌다고 서소장님이 하는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였고 나를 따라 하는 수 없이 술을 마시는것 같아 함께 밥먹는 이들에게 미안해서였다. 내가 따로 하니 그들은 참으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 사장님의 잔소리는 나 하나를 두고 하는 것이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귀에 거슬리면 성미가 고약한 나는 참기가 힘들다. 나는 계획한대로 한달간의 막일군 “생활체험”을 마치고 부천으로 돌아왔다. 안해도 이튿날로 “감자 옹심이”에서 나와버렸다. 큰 누님께서 한국에 오실 시간은 그래도 일주일이나 있어야했다. 일주일이면 둘이서 적어도 오십만원은 벌 수 있을텐데 우리는 지겨웠다. 집으로 곧 갈 것이라 생각하니 일이라곤 전혀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우리는 남대문 시장에도 가고 동대문 시장에도 가고 큰 상점들도 돌았다. 안해는 원래 쑈핑을 좋아한다. 례물을 갖추고 항공권도 사고 배표도 물리였다.
59    [한국 나들이]21. 깍쟁이네 집 머슴 댓글:  조회:2339  추천:0  2013-06-14
21.  깍쟁이네 집 머슴     서울 강남이라하면 부자동네로 소문난 마을이다. 사모님을 따라 안해가 간 곳은 침실 세개에 거실 하나, 서재 하나, 주방 하나, 화장실 둘로 된 160m2쯤 되는 집이였다. 안해가 자는 방은 서재였는데 한사람 누울만큼한 공간이 있었다. 사모님은 안해에게 가정부로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상세히 알려 주었다.  아침 여섯시 정각, 안해가 아침 준비에 나서는데 주인집 할머니는 벌써 아침단련을 끝내고 들어오는 것이였다. 안해는 할머니가 정정하시니 가무일을 가르쳐 줄 수 있어 다행이라 여기고 할머니한테서 반찬같은 것들을 차근차근 배우리라 마음 가졌다. “편히 주무셨어요? 할머니, 제가 한국 음식에 대해 잘 모르니 하나하나 잘 가르쳐 주십시요. 그리고 집집마다 식습관이 다르니 잘 부탁드립니다!” “아줌마, 말버릇부터 고치게, 할머니라 부르지 말고 어르신님이라 부르게!” 첫마디 말투부터 곱지가 않았다. 까다로운 할망구임이 틀림이 없었다. 잘해 보리라 들떳던 안해의 기분이 삽시에 가라앉았다.  반찬은 대개로 콩나물을 데쳐 메우고 고구마 줄거리 겁질을 훑어버린 후 데쳐서 무치고 생선을 굽고 두부를 굽고 국물이나 찌개를 하는 것이다.  밥쌀은 안해까지 여섯사람인데 한근좌우 씻어 안치고 생선은 두토막 굽고 두부도 반모는 남겨두고 반모를 두토막 내서 굽게했다. 눈에도 차지 않았지만 안해는 로인이 시키는대로 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외 밑반찬으로 소고기졸임, 멸치볶음, 김치 두 세가지 등이였다. 밥상을 차리는데 할머니 앞으로 따로, 사장님 앞으로 따로, 아이들 앞으로 따로, 제마끔씩 차려놔야 했으니 반찬은 몇가지 아니였어도 각가지 그릇들로 밥상에 빈틈이 없었다. 밥도 사장님 그릇에 다소곳이 담고는 그외 그릇에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담아야 했다. 안해의 앞에는 밥 한공기에 김치 한두토막이 차려졌다. 배가 차지 않았지만 안해는 숟가락을 놓을 수 밖에 없었다. 아침밥을 먹고나니 정심밥이 작았다. 다음날 아침 안해가 쌀을 더 떠서 씻으려 하니 할머니가 사설하였다. “무슨놈 쌀을 그리 많이 해? 내가 떠주는 대로 씻어! 중국사람들은 돼지혼을 탔는지 멍청히도 밥만 많이 먹는다니깐!” 그말에 안해는 정신이 윙ㅡ할 정도로 발칵 성이 났지만 방금 왔는지라 대꾸도 못하고 쌀을 덜어내였다. 아침식사가 끝나면 안해는 애들을 통학뻐스 역전까지 데려다주고 바삐 달려와서는 설걷이며 집 청소며 빨래를 하는데 무더운8월이라 안해는 땀벌창이 되여 돌아쳤다. 배속에서 “꼬룩,꼬르룩ㅡ” 항의를 제출하자 시계를 올려다 보니 정오가 넘었다. 한공기도 되나마나한 밥을 물에 말아 게는감추듯 먹어 버리고 허리펼 사이도 없이 다림질을 한다. 오후 두시면 학교에서 오는 작은애 마중을 가는데 그시간이 안해의 유일한 자유 시간이였다. 안해는 아이를 통학뻐스에서 맞은 후 곧게 집으로 가지 않고 책가방과 아이 손을 잡고 먹거리 시장으로 가서 “떡볶이” 한접시 사서 애와 함께 먹고는 아이 놀이테에 가서 좁다란 걸상에 드러누어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였다. 그날도 아이의 손을 잡고 먹거리 시장으로 가는데 아이가ㅡ “이모, 이모는 어째 날마다 떡볶이만 사 먹어요?”라고 의아해 했다. “야,임마! 너네 집에서 밥 쪼끔 줘 배 고파 그런다, 맛 있어 먹는줄 아니?” “응? 그래요?”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똥말똥 쳐다보더니ㅡ “내일부터 내밥까지 이모가 다 드세요. 나는  밥 먹기 싫어 죽겠어요!” “그건 안돼. 니 밥 이모 주면 너 엄마한테 혼난다. 알겠니?” 다음날 아침. 아이는 밥을 보니 전날 먹거리 시장에서 한말이 생각났던지 밥 둬술 뜨네 하다가 “이모” 앞으로 밀어놓으며ㅡ “이모, 이밥도 다 드세요.” 했다. 안해는 가슴이 뜨끔 했다. “얘가 왜 이래 안돼…” 사모님이 밥그릇을 도루 가져다 아이 앞에 놓고는 “우리 아들 참 착하지, 밥 잘 먹어야 이쁘지…”하며 달래는 것이였다. 안해는 아이가 “떡볶이 비밀”이나 루설하면 어쩌랴 싶었는데 다행이도 말 없이 넘어갔다. 안해는 그러는 애가 고마웠고 귀여웠다. 할머니는 하루종일 객방 한가운데에 앉아 신문을 뒤적이며 “어르신님”의 틀을 차렸고 안해가 하는 일을 감시하고 잔소리를 했다. 커피를 끓여오라, 과일 깎아오라, 영양시 풀어오라 몸종 부리듯 잔심부름을 한없이 시키면서 손이 놀새 없게 만들었다.  한번은 과일을 가져 오라기에 오랜지 하나 까고 사과 하나를 깎아서 쪼개 올리고 속괭이를 버리려는데ㅡ  “아줌마, 사과 잘 못 쪼갰어. 그 속괭이 던지지말고 먹어치워.” “이걸요? 먹을것 없는데요?”하면서 안해는 쓰러기 통에 홱 던져 버렸다. 치밀어 오르는 분을 가까스로 삭이면서ㅡ “우리 중국선 사과도 배도 빡쓰드리로 사두고 먹습니다. 생생한 것도 먹기 싫어 하는데 한국사람들은 속괭이도 다 먹습니까?!” 안해는 반발심에 한마디 했다. 잘사는 집이라서 랭장고에는 과일따위의 먹을 것이 차고넘쳤다. 그러나 깍쟁이 할망구가 먹는 것을 하도 아끼기에 안해는 역겨워서 전혀 먹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먹고싶은 것이 있으면 아예 슈퍼에 나가 사서 먹었다. “흠흠, 없는 놈이 더 우쭐 하는 법이야, 그렇게 잘 먹고 잘 사는디 왜 한국 와서 남의 집살이 하는거여?” “우리가 못 입고 못 먹고 살아서 한국에 와서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권비가 중국보다 높으니 여기에서 좀 벌어 가지고 중국 가서 더 잘 살자고 그러는 것입니다. 북한은 못먹고 못 살지만 중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북한사람 대하듯 중국사람을 대하지 마십시요!”.안해는 애국심이 불끈 솟아 올랐고 속으로 중국에서 사는것이 편안하고 행복함을 심심히 느끼였다. “건너집 아줌마는 때마다 묵은밥이나 사발 까신 밥알 밭어 먹고 일 한다던데 아줌마는 주인을 잘 만날줄로 아시오!” “녜? 그런 집도 다 있답디까? 그집 주소와 주인 이름을 알려 주십시요. 신문과 텔레비에 낼 일입니다! 한심하고 기가 막힙니다.” 할머니는 안해가 얼굴이 지지벌개 나면서 흥분하자 더 말을 하지 못하고 방으로 들어 가 버리는 것이였다. 어이 없는 일이였다. 중국사람을 짐승 대하듯 하는 사람들도 다 있다니! 발전한 한국에, 문명한 한국의 한 구석에서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이 안해로서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깍쟁이 할머니는 안해가 세탁기로 빨래 하는것도 못 마땅해 했다. “남의집 돈을 버는게 어디 그리 헐한줄 아는가? 세탁기는 전기도 많이 들고 물도 많이 드는데 힘 아낄라 말고 손빨래 하게!” “어르신님, 사모님이 사장님 흰샤쯔만 손빨래 하고 다른건 모두다 세탁기로 하라고 했는데 그러십니까?”  “그래도 그렇지! 손빨래 하라면 손빨래 해!” “정 그러시다면 할 수는 있는데요, 시간이 안됩니다.” 이집에서는 나들이 옷이나 고급 옷은 죄다 세탁소에 맡긴다. 집에서 세탁기에 돌리는 것은 아이들 옷과 어른들 속벌 뿐이였다. 손빨래를 하려고 해도 시간이 안되였다. 세탁기에 빨래를 넣고 돌려놓은 후 할망구의 심부름을 들어주며 방안 청소 하노라면 오전시간이 다 간다. 오후엔 아이를 데려오고 다림질을 하고 아이들에게 간식을 먹이고 저녁밥을 한다. 저녁 설거지를 끝낸 후에는 아이들을 목욕 시키고 숙제 공부를 지도 해야한다. “서울 깍쟁이”란 말을 들어보긴 했어도 이정도로 아끼는 한국인은 리해가 안간다. 중국에서는 무엇이나 랑비해서가 문제이고 한국에서는 너무 아껴서가 문제이다. 자기가 먹고 쓰는 것도 아까운데 남이 자기걸 점한다고 생각하면 안 아까울리 어데 있겠는가? 두주일이 지난 후 안해는 할망구의 스트레스를 끝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사모님한테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하였다. 애들을 돌보거나 가무일 같은건 아무 문제가 아닌데 할머니의 잔소리를 받아내기 힘들다고 사실대로 말하였다. “이모, 우리어머님 성격은 저도 알고 있는데 이모가 좀 참아줘요. 처음이라 그렇지 시간 지나 적응되면 괜찮아질겁니다. 그리고 애들도 이모를 퍼그나 좋아 하는데 좀만 참으세요, 고생 하는만큼 제가 다 알아봐드릴께요. 부탁해요.” 사모님이 하도 만류하니 안해는 다시 눌러앉았다. 그러나 할머니는 여전했다. 할머니는 중국사람을 거지 발싸개보다도 못하게 여겼다. 더우기 먹는 것을 가지고 제한이 심했다. 아침 식사 때 젊은이들이 새 반찬을 안해의 앞으로 밀어 놓으면 할머니가 다시 밀어가고 저녘이면 묵은반찬만 먹으라고 안해의 앞에 밀어 놓는다. 안해가 먹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고 사설하면서 이틀사흘 던지지도 못 하게 한다. 안해는 만성장염이 있기에 여름철엔 각별히 음식을 주의해 먹어야 한다. 맨 김치에 밥을 먹을 지언정 묵은 반찬들은 할머니 눈을 피해 가면서 쓰레기통에 넣어 버리군 하였다. 일이 바쁜것보담 스트레스가 심하여 안해는 얼굴이 새까매지고 몸이 부어나면서 좋지 못하였다. 더 뻗치다간 병이라도 도질 것만 같았다. 겨우 한달을 지탱했다. 한달 월급을 받자 일을 그만두고말았다.  돌아오는 날 안해는 깍쟁이 할망구가 평시 제일 반가워하던 떡을 사들고 들어가 마음속에 쌓이고 쌓였던 말들을 털어놓았다. “어르신님, 이 한달 동안 어르신님의 많은 미움을 받고 질책을 받았습니다. 미운정도 정이라고 어르신님이 싫어서 떠나게 되지만 마음은 서운합니다. 앞으로 이집에 다른 중국 아줌마가 들어오면 잘 해주십시요. 고국이라 찾아와 피땀으로 돈 좀 벌고 가려는 동포인데 왜 그리 기시합니까? 우리 중국 사람들이 빌어 먹을 정도로 가난해서 여기에 와 일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지금 중국이 얼마나 발전이 빠른지 어르신은 매일 신문을 보시면서 왜 모르십니까? 중국 샹하이랑은 서울만 못지지 않습니다. 우리 조선족이 모여 사는 연길도 한국과 전혀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도 연길에서 이만 못하지 않는 집을 갖고 입을 근심 먹을 근심 없이 잘 살고 있습니다. 전에 말씀 드렸지만 저도 그곳에서 높은 공무원 직에 있었구요. 어르신님은 옛날에 악패지주가 머슴을 대하듯이 나를 대했는데 그러지 마십시요. 앞으로 일은 모릅니다. 당신 손자 손녀가 우리집에 와서, 우리중국에 와서 머슴살이 할지도! 중국은 이만하고 한국은 요맨하거든요…” 안해는 두 팔을 크게 벌려 중국의 땅덩어리를 묘사했고 새끼손까락 끝을 내들어 한국땅을 묘사 했다. 그 늙은이가 알아들었는지는 몰라도 하고싶던 말을 다 뱉어버린 안해의 마음은 한결 개운했다. 정이 든 애들은 전철역까지 따라나와 안해를 바래며 손을 저어주었다. 아홉살 여자애에겐 도금 목걸이를 사주었고 남자애에겐 커풀반지를 사주고 차에 올랐다. 일학년에 금방 다니는 일곱살짜리 놈이 여자친구가 있다면서 커풀반지를 사달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중국에서 20세기 60년대 어린시절에 배고픈 고생을 엄청 했었는데 21세기에, 그도 엄청 발전했다는 한국에 와 엄청 잘 산다는 부자집에서 나는 배고픈 고생을 했어요! 재미진 소설 소재가 아닌가요? 누가 들으면 거짓말이라 할겁니다. 두번 다시 이같은 생활체험 할까봐 겁납니다.” 얼마나 배가 고팠더랬으면 한달만에 만난 남편 앞에서 한다는 첫 연설이 굶주림 타령이겠는가? 한국에는 물가가 비싸기에 배를 곯게되고 짐승고기 얻어먹기가 힘들다고 들어왔다. 헌데 그런것도 아니였다. 여러 일잘리를 돌아 다니며 본바에는 배불리 먹을 수 있었고 소고기는 없지만 돼지고기나 닭고기 같은건 가끔씩 차려지군 했다. 배불리 먹고 고기도 먹고 하는데도 한국에 다녀온 90% 이상 사람들은 다이어트가 절로 된다. 나와 안해도 일년반 사이 살이 딱 10kg씩 빠졌더랬다. 이는 식생활 문제가 아니라 정신생활ㅡ스트레스 속에서 살다보니 그렇게 되는 것이다. 중국에 돌아와 별로 갖추어 먹은 것도 없는데 두달이 지나니 딱 10kg씩 올라 원상태인 130근과 140근으로 되여버렸다. 나들이 껍대기를 가춘답시고 고급 양복 두벌을 큰 맘먹고 서울 큰 상가에서 큰 돈 들여 사갖고 왔는데 배가 커져 맞지않으니 버리게 되였다. 그냥 크는 어린애도 아니고 옷을 살 때 몸에 맞게 골라 사기가 마련인데 배가 그렇게도 재빨리 내밀줄이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강남에서 돌아온 며칠 후 오정동 집 근처, 집에서 도보로 3분 거리밖에 안되는 “감자옹심이”식당 유리문에 “주방보조 모집”이란 글자가 나붙자 안해는 남한테 자리를 빼앗길세라 즉각 쳐들어갔다. 또 “생활 체험”에 “인생 수업”이라 하면서 “삶의 현장”으로 나간 것이다. 오정동 “감자옹심이”는 분점이였는데 주요 메뉴로는 감자옹심이, 칼국수와 수제비였다. 감자옹심이는 감자를 갈아 참새알만큼한 알맹이를 만들어 이미 끓여놓은 멸치육수에 삶는 것이고 칼국수는 서울 본점에서 반죽 해 온 밀가루를 자그마한 기계에 넣어 저가락만큼 굵기의 오리를 뽑은 후 여전히 이미 끓여놓은 멸치육수에 삶는 것이다. 수제비란 우리 말하는 밀가루 뜨덕국인데 끊는 멸치물에 서울에서 가져온 밀가루반죽을 손으로 뜯어 넣으면 끝난다. 멸치육수는 백근 좌우의 물에 멸치 다섯근 무우 열개 양파 스무개에 다시마 한봉다리(두근) 쏟아넣고 세시간 정도로 푹 고는다. 손님의 주문에따라 즉석에서 한그릇씩 삶아서 내보내는데 감자옹심이는 한그릇에 4천원이고 칼국수와 수제비는 3천원이다. 식당에는 주방장 하나, 홀에 하나, 거기에 안해가 보조로 들어갔으니 도합 셋이다. 홀에서 음식도 나르고 상도 거두고 돈도 받고하는 50대 여인은 살짝 곰보인데 서울 본점 사장의 이모라던지 고모라던지 이 분점의 사장이시다. 안해의 월급은 손님이 적으니 90만원이라고 했다. 다른 식당에 도우미들은 적어서 120만원씩 받는 때였지만 안해는 월급이 적어도 일만 너무 힘들지 않고 무맥한 신체에 맞으면 된다면서 “감자옹심이”와 인연을 맺게되였다. 안해는 아침 9시에 출근하여 밤 12시에 들어온다. 손님은 점심 한 때 많고는 말 그대로 적었다. 보조로 들어간 안해는 손님이 많으나 적으나 일이 끝이 없었다. 아침에 출근하면 하루간 팔 음식을 준비하는데 채소를 다듬고 김치 걷절이를 하고 기계로 칼국수를 뽑고 밥쌀을 앉히고나면 점심 먹을 손님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주문에따라 옹심이, 칼국수, 수제비를 삶는데 주문이 많을 때면 일 솜씨가 서투른 안해는 주방장의 핀잔을 면치 못했다. “아줌마! 아줌마 땜에 내가 미치겠어!” 한국에서는 미치겠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산다. 주방장이 미칠법도 했다. 미처 씻지 못한 크고 작은 그릇들이 쟁방 위에 산더미처럼 쌓이고 옹심이나 칼국수를 삶는다는 것이 쿨쿨 넘쳐버리고… 식당일이라고는 처음인 안해는 퍼붓는 욕을 한귀로 듣고 한귀로 내보내는 수 밖에 없었다. 듣다 못해 성이 나면 수돗물을 콱 열어놓고 “미쳐라, 미쳐! 미칠라면 콱 미쳐!”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일했다. 안해는 차츰 일의 질서를 알게되였고 일이 손에 조금씩 잡히게 되였다. 따라서 그들의 욕설도 뜸해 졌다. 그러나 쉴틈은 여전히 주지 않았다. 오후 세시에 점심을 먹은 후 조금 앉아있게 하고는 이일 저일 끝이없이 시켰다. 저녁 후 손님이 없다 싶으면 자기들은 앉아 텔레비를 보면서도 안해더러는 쟁반을 반짝반짝 광택나게 닦으라고 했다. 수술중 신경이 손상 받아 오른팔에 힘이 부족한 안해는 힘든 일은 주로 왼팔로 하다가 때론 오른팔이 나서기도 하는데 절반 힘도 못 쓴다. “아줌마, 팔뚝이 말뚝 같구만 왜 맥 안 쓰는거야!”하고 홀에서 일하는 곰보 녀편네가 잔소리를 한다. 안해는 땀을 뚝뚝 떨구며 닦고 또 닦는다. 며칠 후 안해는 일이 얼마간 익숙해지고 자기 앞의 일을 감당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였다. “주방장, 오늘 저녁에 내가 한턱 쏘겠습니다.”라고 안해가 말했다. 술을 좋아하는 주방장은 기뻐서 입이 대뜸 귀에 가 걸렸다. “들어온지 얼마 됐다고 무슨 돈으로 낸다는 거여?”홀에 곰보사장의 말이다. “저 돈 많아요, 무얼로 할까요?” 안해는 시장에 나가 광어 생선회를 주문해 왔다. 시장에서 사면 식당에 가서 먹는것보담 싸고도 생신하다. 광어 한마리에 3만원 좌우니 식당의 절반값이다. 술상에 마주앉은 두 여인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안해가 볶은 중식 “마라두부”와 시장에서 가져온 광어 생회는 보기만 해도 입맛을 당겼다. “아줌마야, 이 비싼 생회를 사다니, 간단히 한잔 하면 될걸가지구.” “아저씨한테 들키면 야단 맞겠네요, 벌기도 전에 돈만 쓴다구.” “우리 실랑 내가 먹는다고 절대 아까워하는 법이 없답니다.” 안해는 남편 자랑을 슬쩍 하고는 득이 양양한체 했다. “부부 금슬 좋은가부다!” 두 여인은 감탄이나 하는듯 아무렇지도 않은 일에 혀를 끌끌찼다. 여자들이란 원래 이런 법이다.  술잔이 몇순배 돌아가자 안해는 중국에서의 신분을 밝히면서 한바탕 제자랑 연설을 퍼부었는데 당신네같은 일반 여인들의 무시를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알려주었다. 한턱쏘는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생회가 효과를 냈는지 술이 효과를 냈는지 연설이 효과를 냈는지 이튿날부터 그녀들의 태도는 달라졌다. 일도 적게 시키고 잔소리도 적게 했으며 텔레비도 같이 보자고 불렀다. “아줌마, 이거 시원하게 한잔 들구 해요.” 주방장은 감추어 두었던 막걸리를 한그릇 부어 안해에게 넘겨주며 홀쪽을 향해 턱질하고 눈을 끔벅인다. 홀아줌마 보기전에 데꺽 마셔버리라는 뜻이다. 주방장이 늘 사장 눈을 피해가며 막걸리를 훔쳐 마시는 것을 안해는 보아왔었다. “감사합니다, 근데 난 막걸리만 입에 대면 속탈 나서 못 마셔요.” “그래요? 아쉽네, 죽이게 시원한데. 속 차가운 체질인갑네요.” “예, 그래서 맥주도 못 마신답니다.” 주방장은 안해에게 주려던 막걸리를 꿀꺽꿀꺽 단모금에 마셔버리고는 “그럼 약을 써야지, ‘록태고’랑 먹으믄 좋다던데…”한다. 나의 안해가 막걸리 못 마시는 체질이라서 사양한 것이 아니다. 먹고싶으면 돈 내고 정정당당하게 먹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 해서였다. 음식점에서는 오후 세시에 점심을 먹고 밤 아홉시에 저녁을 먹는데 언제나 밑반찬 둬가지에 수제비 한그릇이다. 소주, 맥주, 쥬스, 막걸리같은 랭장고 안의 물건은 공짜로 먹을 수 없는 것이였다.
58    [한국 나들이]20. 캄캄한 모텔에서 댓글:  조회:2240  추천:0  2013-06-13
20. 캄캄한 모텔에서   “돼지 인공수정 센터”에서 돌아온 후 나보다 안해의 일거리가 마땅치 않아 애를 먹다가 “벼룩시장”의 광고를 읽고 한 모텔의 청소부로 들어가게 되였다. 모텔이라면 호텔보담은 작고 려인숙보담은 크고, 그러한 규모의 잠자는 장소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국어 사전을 번져보니 영문으로 “motel”이라 적어놓은 것을 보아 영어 발음을 따온 단어이고 “자동차 여행자용 여관”이라고 설명을 달아놓은 것을 보아 본의는 자동차를 몰고 일보러 다니는 운전수나 수행자들이 쉬여가는 장소로서 옛날 자동차가 귀할 때의 “마차려관”같은 작용을 하는 장소렸다. 헌데 지금 모텔은 실제로 자가용 몰고 놀러 다니는 남녀가 함께 들리여 침대위에서 즐기는 장소로 전용되고 있다. 중국에선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명사인지라 안해도 그저 려관으로만 알고 방 20개에 청소부가 둘이라니 식당보조보다는 일이 쉬우리라 생각했다. 일하러 떠나는 날 아침, 나는 짐을 챙기는 안해를 보고 말 하였다. “짐을 많이 갖고 가지마오. 갈아입을 속옷이나 한견지 넣고 치솔이나 하나 넣고 가서 며칠 해 보고 할만하면 다시 와서 짐을 챙겨가는 것이 좋겠소.” 안해도 동감이였다. 허지만 “고까짓것!”하는 자신 만만한 자태였다. 가방 하나 달랑 메고 꽃 놀이 가듯 흥얼거리며 안해는 떠나갔다. 분당 지하철역에서 내려 전화 가르킴대로 오른손편 길을따라 얼마를 안 가니 모텔이 나타났다. 올려다보니 이상하게도 다른 층집과는 판 달리 창문이 작았다. 사실 이상 할 것이 없다. 려관이라 잠자는 곳이니 해빛이 필요치 않고 공기통만 뚫리면 끝이다. 전화를 받은 모텔마담이 문어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확인 인사를 나눈 후 안해는 마담을 따라 층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에 들어 선 안해는 어리둥절 해졌다. 밖은 대낮인데 집안의 카운터로부터 뻗은 길다란 복도는 깊은 동굴속의 야밤과도 같았다. 모텔이란 “지하 공작자”들이 드나드는 비밀지로 남들과는 될 수록 얼굴이 맞띄지 말아야 좋다는 도리를 안해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모텔 정차장에 줄지어선 고급 승용차들의 길쪽으로 향한 번호판마다엔 걸레를 걸어 덮어놓았다. 다가 비밀공작의 수요인 것이다. 선배 청소부가 앞에 나타나서야 정신이 든 안해는 보이지 않는대로 인사를 나누고 그녀를 따라 일 할 방으로 들어갔다. 흑룡강성 농촌에서 왔다고하는 선배 녀인은 나이 60에 가까웠고 흑인처럼 검으틱틱한 얼굴에 작달막한 키와 딱 벌어진 어깨가 농사일에 굳어진 몸매였다. 한국에 오자마자 들어온 모텔인데 6개월이 지났어도 이 건물밖을 한번도 나가보지 못했다고 했다. 중국에서도 시골 마을 한번 떠나보지 못했던 순박한 여자라 이런 곳에서 먹고 자고 돈 벌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같은 중국에서 온 조선인이라는 의미에서 그녀는 더없이 반가워하며 안해를 좋아 하였다. 일이 시작되였다. 흑룡강 언니가 안해에게 일을 가르쳤다. 그녀들의 주되는 작업은 침대보를 곱게 펴는 것과 화장실 청소였다. 손님이 걸쳐 간 뒤의 침대와 침실은 어지럽다고만 해선 전혀 말이 아니였다. 금방 펴논 새하얀 침대보엔 “코물”지도며 피자국까지 더럽게 발려져 있었고 오물투성이인 화장지가 사방에 널려져 있는가하면 먹다만 음식물까지 마구 뿌려져 있는 것이 통 말이 아니다. 양복차림에 목바를 정연히 매고 아녀자와 팔을 끼고 모텔에 들어와서는 그짓을 해도 왜서 그렇게 더럽게 하는지? 것치례는 반반한데 실속은 더럽기가 그지 없다. “비단보에 개똥”이 그것이다. 안해는 구역질을 참으며 일에 손을 댔다. 고무장갑을 끼였지만도 화장지를 하나하나 쓸어모을 때마다 전신이 오싹 해 나면서 손이 움추러들었다. 화장실은 길고 짧은 머리카락 천지라 물로 한참씩 씻어내고 닦아내고 해야했다. 침대보를 갈아 펴는 일은 힘들다고만 해선 말이 아니였다. 침대보를 몇개 갈고나니 힘든 일이라곤 해보지 못한 안해는 팔맥이 다 풀렸고 열손가락 손톱눈 주위가 벗겨지기 시작하였다. 전신은 땀에 푹 젖었다. 오전에 간 침대보만하여도 50개가 넘는다. 한칸 일이 끝나기 바쁘게 카운터에서 따르릉하고 전화가 오면 또 다른 칸으로 뛰여 가야 했다. 반날일에 안해는 벌써 지쳐버렸다. 점심을 대충 먹고 숨 돌릴사이도 없이 일은 계속되였는데 안해는 벗겨진 손가락으로 침대보를 팽팽히 잡아끌어 펴고 깃을 쑤셔넣을 때마다 숨 넘어가듯 아파났다. 강 설금이 받은 혹형도 이보다 더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되였다. 땀벌창이 되고 신음소리까지 지르며 안깐힘을 다 쓰는 안해를 보기가 구차했던지 흑룡강 아줌마는 비닐빗 하나를 주어다 주면서 빗을 꺼꾸로 쥐고 빗 손잡이로 침대보 깃을 밀어넣도록 가르쳐주었다. “저녁 후 동생은 주로 화장실 청소만 하오, 침대보는 내가 펼게. 그리 힘들어 하고서야 쯧쯧쯧…”라고 혀를 찼다. “언니, 저녁엔 대체 몇시에나 일이 끝나요?” 한시 급히 아무곳에나 벌렁 들어누워 버리고 싶은 나의 불쌍한 안해였다. “24시간 영업인데 12시부터 아침 6시까지 우리한테 휴식시간을 주는거요.” “예? 그러면 몇시간 로동이죠? 18시간 로동! 너무 합니다! 그렇게 긴시간 일 시키고도 월급은 고작 100만원, 식당일보다 더없이 고됩니다.” 안해는 속으로 무조건 투항을 선고 했다. 안해는 모텔에 오기전 고향친구 희숙씨의 소개로 안양의 한 한바(건설장 식당)에서 도우미 일을 했었다. 일도 전혀 힘들지 않았고 일하는 시간도 짧고 먹고 자기도 편리하고 모텔일에 비기면 꽃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해의 신체로서는 감당하기가 힘들어 겨우 열흘을 하고 집에 와서 추석을 쇤 후 안 가버린 신세다. 관절염인 두 다리는 퉁퉁 부어나고 두 발은 고무장화 속에서 괴여 터지고 밤이면 뼈마디마다 쑤셔나는데 모기떼까지 살판치며 괴롭혔다. 하여 물과 멀리하는 일거리를 찾는다고 나선 것이 승냥이 굴에서 호랑이 굴로 굴러 떨어진 격이다. 나의 안해를 두고 “공주님의 몸에 시녀의 명으로 태여난 애”라고 나의 장모님께선 일찍 말씀 하셨다. 일을 전혀 할 수 없는 존귀하고 연약한 몸으로 태여나 고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가련한 운명을 가졌다는 비유일 것이다. 그는 20대 초반에 큰 수술을 했었고 30대 초반에 또 큰 수술을 하였으며 40대 말에는 암 수술을 세번이나 하였다. 그런 몸으로 한국에 나온 것만도 기적이 아닐 수 없는데 일해서 돈까지 벌려니 그 고초야말로 뭐라고 더 형용키 어렵다. 돈 잘 버는 남자나 만나 살것이지… 허지만 나같이 돈 못 버는 멍청이와 한생을 살도록 태여난 불우한 운명인걸 무슨 수가 있단 말인가? 그 누구든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행복을 안겨 줄것이 소원일 것이다. 나로서는 안해에게 미안한 마음에 휩싸이고 자신의 무능함을 통탄 할뿐이다… 하루에 방 열개만 깨끗이 청소하면 끝나는 청소공인줄로 알고 모텔일에 덤벼든 안해는 크게 오산 한 것이다. 저녘 10시가 되자 주인은 밤참을 먹으라고 전화가 왔다. 밤참이라야 고작 밀갈루 부침개 몇개였다. 배가 고픈지라 그것도 별미였다. 다시 청소 할 방에 왔는데 어데선가 전화벨이 울렸다. 둘러보니 손님이 두고 간 핸드폰이라 안해는 데꺽 주어열고 “여보세요”를 불렀다. “누군데요?”하고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나요? 중국에서 온 아줌만데요.” “근데 왜 아줌마가 그 핸드폰을 받아요?” “예, 그런 당신은 이 핸드폰 주인과 어떻게 되신데요?” “나 그사람 마누라야!” 겨우 참던 분노가 폭팔하였다. “예-- 마님 어쩌죠? 당신 남편 예쁜 아가씨 끼고 이 모텔에 와 시원히 한판 하고 이 핸드폰만 남겨두고 방금 콧노래 부르며 나가던걸요. 나같은 불쌍하구 죄 없는 청소부 아줌마하구 전화로 야자나 부르며 큰 소리 치는 여자는 남편의 배신 받기엔 딱이네요!” 안해는 깔깔 웃으며 말하였다. “거기가 어디야?!” 당금이라도 뛰여와 머리칼이라도 잡아끗을 듯한 기세다. “여기요? 하하! 나 몰라, 남편하구 물으면 알려줄건데, 잘 물어보고 와요.” 안해는 깔깔거리다가 핸드폰을 꺼버렸다. “동생, 남의 집에 불을 질러놔서 어쩌나?” 흑룡강 아줌마가 벌벌 떤다. “콱 싸우라지요! 그리고 언니, 이 핸드폰은 언니가 갖고있다가 후제 번호를 바꾸어 쓰던지 아니면 팔아버리던지 하세요.” “그래도 돼?” “그럼요, 다시 안 와요. 와도 모른다면 다구요, 나한테 밀어도 되구요.” “안그래도 화장품이구 시계구 두고 가는 것이 많아 쓸만한건 내가 감추어 두었소… 이보오 동생, 우리마을에서 한국에 시집 온 애가 둘이나 있소, 그래서 나두 작은아는 한국에다 시집보낼까 했댔는데 와보니 한국 남자들이 다 개요 개, 메슥거워 한국 남자한테는 정말 안보내겠소.” 둘이 찍고 박고 신나려는참에“따르릉ㅡ” 일 독촉 전화별 소리가 그들의 대화를 끊어놓았다. 그들 둘은 한바탕 통쾌하게 웃었다. 그웃음에 하루의 피로가 조금이라도 가셔지는듯 했다. 모텔에 오는 손님은 대부분 한시간내지 두시간정도 머물고 간다. 그러니 모텔마담은 돈벼락을 맞는 것이다. 하루 24시간 영업이니 방 20개라 한방에 적어도 손님이 열번 이상으로 오니깐 매번 5만원이라쳐도 하루에 수입이 천만원이다. 그 절반으로쳐도 한달 수입이 억 오천만원이다. 그러니 거리마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것이 모텔이란 간판이다. 그만큼 모텔 사용자가 많다는 것을 말한다. “살펴볼라니 한국남자 90%가 바람둥임다.” 이는 나의 안해가 “삶의 현장”에서 얻은 결론이다. 사람들은 연길을 작은 서울이라 말한다. 서울처럼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내재적 원인ㅡ서울에서 뭘 하면 앵무새처럼 연길에서 뭘 따라 한다는 그소리이다. 특히 불량한 것이라면 더욱 잘 옮겨지는 법이라지만 “모텔문화”만은 전염이 되지를 말았으면… 복도 제일 끝머리에 합판으로 막아놓은 작은 칸이 있었다. 손바닥만큼한 창문을 열어놨지만 바람이라곤 통하지 않는 어둑 침침한 방에 피로에 푹 절은 두 여인은 나무단 넘어지듯 폴싹 쓰러졌다. 눈은 감았어도 사방에서 들려오는 숨 넘어가는듯한 생매(生埋)소리에 그들은 잠 들 수가 없었다. “언니, 난 이일을 못하겠습니다. 넬 아침 돌아가겠습니다.” “동생, 내가 일을 더 맡아 할테니 가지 마오.” “아니, 일하는 시간도 너무 길고 일도 너무 힘들고 게다가 구역질까지 나서 못 하겠습니다. 집에가서 쉬면서 다른 일을 찾아볼 예산입니다.” “동생하구 같이하면 참 좋겠는데…넬 가믄 오늘 일한 돈도 안 줄건데…”  “안 준대도 할 수 없지. 언니도 이런 일 하지말고 다른 일 찾아요. 할 일은 영 많씀다. 언니는 농촌에서 단련된 몸이라서 아무일이라도 다 잘 할껨다.” “아직 전철도 호분자 못 타봤는데 어떻게?… 잠시는 그냥 해야 될것 같으오. 불법이라 잡히믄 쫓겨 간다던데…” 그녀는 한숨을 휴ㅡ 내 쉬였다. 밖에 나가 돌다간 경찰한테 잡혀 쫓겨가고 만다는 마담의 말만 들어왔고 비자 연기 수속도 모르는지라 하지 못한 처지였다. 날이 밝자 안해는 마담하고 일을 그만두겠노라고 말하였다. 하루 삯전은 주어도 좋고 돈 나올 때 언니한테 보태주어도 좋다고 했다. 안해의 태도가 하도 단호하니 주인은 돈 3만원을 주면서 “그렇게 고추장 맛보기 할라믄 오지나 말든가, 세상 쉬운일이 어데 있을라고…”하며 두덜거렸다. 어둑 침침한 모텔문을 나서니 몇년만에 구치소에서 풀려나오는 심정이라할까, 눈앞이 환해지고 흐리멍텅하던 머리가 개운해지며 갑갑하던 가슴이 확 트이는듯 긴 숨이 “후ㅡ”하고 절로 나왔다. 안해는 지친몸을 이끌고 힘들게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또 “벼룩시장” 한웅큼 안고 들어왔다. 며칠간의 연구끝에 가정부 생활을 “체험”해보기로 결정되였다. 서울강남에 일흔이 잘 된 할머니를 모시고 아들 딸 오누이를 둔 40대 초반의 현씨 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큼직한 일식점을 경영하고 있었고 일때문에 밖에서 많이 돌다보니 아들 딸 교육과 관리가 제일 큰 문제라고 했다. 딸애가 아홉살이고 아들애가 일곱살인데 초등학교 삼학년과 일학년이였다. 안해는 원래 사범학원을 나온 로교원이다보니 자신있게 대답을 주었다. 사모님은 긍정적인 사유을 가졌고 성격도 시원해 마음 든다면서 안해를 기꺼이 받아주었다. 그러면서 려권과 보호자의 각서를 가져오라고 하였다. 일부 품질이 나쁜 아줌마들이 가정도우미로 들어갔다가는 귀중품을 훔쳐가지고 도망쳐버리는 일들이 있었기에 주인집에서 려권을 받아두는 것이 공통법칙으로 되여 있었다. 나는 일식점의 떨어진 곳에서 잔비를 맞으며 한시간을 서성거리다가 안해가 면접에 합격되였다는 신호를 보내자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돌아섰다. 집으로 향한 발걸음은 무거웁고 가슴은 쓰리였다. 캄캄한 모텔이라서 하루밖에 견디지 못하고 돌아선 그가 부잣집 머슴으로는 얼마나 뻗힐 수 있을런지? 다른것 보다는 스트레스를 참고 이겨내야 할 것이니 꼭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려야 한다고 몇십번을 말해주었고 그도 그러리라 결심하고 떠났으나 말이 쉽지 그 심리적 고통을 어떻게 감당 할 수 있겠는가?
57    [한국 나들이]19. 번대머리 파트너 댓글:  조회:1738  추천:0  2013-06-09
19.  번대머리 파트너     아침 먹을 사이도 없이 나는 사우나에서 나서는 길로 춘석이가 전날밤에 전화로 알려주던 길을 따라 반시간 남짓이 걸어 예정된 시간에 예정된 지점에 이르렀다. 여덟시 직전이면 내가 가야 할 회사의 통근차가 그곳을 지나므로 손을 들어 차를 세우고 올라 타라는 것이였다. 나는 십자거리 네길목을 순회로 응시하면서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춘석이 말로는 여덟시 직전이면 틀림 없이 꼭 온다며 시간을 절대 어기지 말라던 통근차가 여덟시 넘었는데도 나타나지를 않았다. 생각 할 수록 뭔가가 잘 못 되여 헛물 켜고 있는듯 싶었다. 나는 춘석이한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춘석이는 인츰 정황을 자기보담 더 잘 알고 있는 박동무한테 전화를 넘겼다. 그도 연길 사람이고 춘석이의 친구였다. 그는 먼저 전화로 내가 기다리고 있는 위치부터 확인 하였다. 위치는 틀리지 않았다. 자주빛 중형 뻐스이고 ㅁㅁ74번인데 내가 섰는 건너편 거리로부터 나를 향해 마주 오다가 네거리에서 90도로 굽어들어 마침 나의 앞을 지난다는 것이였다. 간혹 길이 막혀 조금씩 늦어 올 때도 있으니 조급해 할 것은 없고 차를 못 만나면 다시 전화를 쳐 달라는 것이였다. 자기가 회사에 전화를 걸어 래일 갈거라고 설명 할 것이라 했다. 시름이 놓였다. 또한 차의 형태와 색갈, 오는 방향까지 알고나니 감시하기가 무척이나 쉬웠다. 인츰 목표물이 나타났다. 통근차는 도중에 둬사람 더 주어싣고 쏜살같이 달리더니 여덟시반 정각에 한 회사 대문안에 들어섰다. 내가 차에 오리기전 로상에서 좀 지체 된 모양이였다. 정규적인 회사라서 엘지 건설장에서 본것처럼 조회를 거르지 않았다. 조회 형식은 회사마다 제마끔이였다. 마당에 커다란 원을 짓고 사 오십명 되는 사람들이 빙 둘러섰다. 키가 자그마한 50세 쯤 돼 보이는 남자가 몇가지 지시를 내리고 40세쯤 돼 보이는 키큰 남자가 보충 지시를 했다. 후에 알고보니 키가 자그마한 중년자가 그 회사의 박사장이고 보충 지시를 내리던 젊은이는 생산부 박부장이였다. 두사람 지시가 끝난 후 뒷사람이 두 손으로 앞 사람의 두 어깨를 눌러짚고 유아원 애들이 기차놀이 하듯이 박부장의 “하낫, 둘, 셋, 넷…”하는 구령 소리에 발 맞추어 한동안 돌았다. 박부장이 “얏샤!”를 부르니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두손을 하늘로 뻗으며 “야샤!”를 세번 소리 높이 웨치고는 헤여져 공장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도 나를 보는척 하지 않았다. 나는 공장안으로 들어서는 박부장을 따라섰다. 그때엔 부장인줄 몰랐지만 무슨 책임자임이 분명했고 먼저 발언하던 중년자는 건물 밖에 각철과 철판으로 달아놓은 층계를 밟으며 2층으로 급히 올라가고 있었다. “여봐요!”하고 나는 박부장을 불러 세웠다. “이곳에서 용접공을 쓴다고 알려주어서 찾아왔습니다.” “그래요?” 그는 나를 깐깐히 훑어보는 것이였다. “용접은 해보셨겠죠?” “예, 조금요.” 나는 사실대로 대답 했다. “이리 와 봐요.”하며 그는 나를 용접 작업장으로 데리고 갔다. 손바닥 만큼한 철편 두 쪼박을 주어 작업대 위에 던지더니 “세워서 부쳐보세요.”하는 것이였다.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이 떨렸다. 채용되지 못하면 저녁에 다시 사우나에 가면 되는 것인데 못나게 땜질하여 망신 당할까봐 겁났다. 박씨는 내속을 아는듯 “긴장하지 마시고 맘 편하게 하세요.”하며 고무까지 해 준다. 무슨 원숭이 광대 구경이라도 생긴듯 작업전 사람들이 하나 둘 다가오더니 나를 둘러쌌다. 사실 난 용접공이 아니다. 경력은 40년이라 할 수 있지만 자격증도 없고 용접공으로 불리워 본 일도 없다. 그래서 떨리는 것이였다. 63년도 구정 전이였으니깐 근 40년전, 중학교에 붙은 해의 일이다. 그때의 아이들은 화약총을 만들어 참새 잡이하는 장난을 많이 하였었다. 송아지 친구 두찬이와 나는 그깟 참새는 싫고 산속에 들어가 멧돼지나 곰을 잡아야 한다고 총대가 한메터 되는 장총 제작에 착수 하였다. 바위에 난포 구멍을 뚫을 때 쓰는 속에 작은 물 구멍이 난 강철지레대를 주어왔고 부근 공장에 가 드릴과 용접봉 몇대를 훔쳐왔다. 드릴에 한메터 되는 쇠꼬챙이를 때부쳐야 지레대의 타원형 작은 구멍을 수동 보르반으로 둥글게 다시 뚫을 수 있었다. 나는 전선의 음극과 양극을 접촉시키면 불이 일고 용접봉이 녹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여 전선 하나는 쇠꼬챙이에 감고 다른 하나는 용접봉에 감아 집게로 꽉 집어들고 드릴과 쇠꼬챙이의 용접 부위에 가져다 대였다. 대였다 뗀 시간이 몇십분의 일초나 될런지 한데 순식간 온 집안에 연기가 꽉 찼고 천정 밑에 늘여진 두갈래의 검은 전선에선 흰연기가 물물 피여오르고 있었다. 하마트면 집에 불을 지르고 밖에 나앉아 설을 쇨번 하였다. 빠짝 놀란 나는 이건 아니다 싶어 마을 탈곡장으로 나갔다. 눈 덮인 탈곡장엔 세갈래의 굵다란 전선줄이 전주를 타고 내려와 눈속에 박혀 있을뿐 아무것도 없으니 화재 위험도 없었다. 결국 첫 용접에 성공 하였고 용접 불빛에 눈을 상하여 한주일간 죽을 고생을 겪어야 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용접모자와 용접집게를 잡았다. 사람들은 불빛을 피하려고 돌아서는데 박부장은 용접모자로 얼굴을 가리우고 주시한다. 나는 먼저 불을 일궈 본 후 용접기의 전류를 조절 하였다. 전류가 너무 낮으면 용접봉을 녹일 수 없고 너무 높으면 엷은 철편까지 녹여버리고 마는 것이다. 나는 단숨에 반뼘가량 때여나갔다. 용접일에서 제일 쉬운것이 두 물체의 내각을 때는 것이다. 용해된 용접봉 철물이 식으면 수축 하기에 각도가 줄어든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나는 실기측험에 합격된 셈이다. 박부장은 나에게 파트너를 소개해 주었다. 그는 서른 댓살 돼 보이는 반 번대머리 젊은이였다. 기술측험에 쉽게 통과된 나는 인간 관계 측험에 걸리고 말았다. 그날 휴식 시간이였다. 번대머리 젊은이는 나를 데리고 휴식실(식당)로 갔다. 자판기에서 커피 두컵을 뽑아 나에게 하나 주었다. 우리는 빈 밥상에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부쳤다. “어저씨, 아저씨 보기엔 제가 몇살이나 돼 보여요?” “음ㅡ한 사십세?” 그의 물음에 한동안 고려하다가 높이 부쳐 대답 했다. “예?!…” 그는 놀란 나머지 입을 크게 벌린채 아랫말을 찾지 못하였다. “미안합니다, 나는 원래 사람 나이를 제대로 볼 줄 몰라서…” “아저씨 큰 실수 한겁니다. 어쩌면 그렇게 엄청나게 볼 수가 있어요?” 참으로 실수 한 것이였다. 그의 머리가 반쯤 벗겨진 탓에 나이보담 늙어 보이는건 사실이지만 40까지는 안 돼 보인다. 그의 실제 나이 스물 아홉밖에 안 되였는데 사람들마다 서른 대 여섯으로 보니 기분이 상한다는 것이다. 내가 만일 그의 나이를 낮추어 스물 대 여섯으로 말했더라면 그는 너무 좋아 기장밥은 몰라도 소주 한잔 사주었을지 모른다. 그자식의 그따위 심리나 신세를 전혀 알리 없는 나는 그래도 그의 나이를 적게 말하면 자기를 깔보는 것이라 할까봐 서른 다섯에 다섯을 더해 마흔으로 말했더니 개판이 돼버린 것이다. 만난지도 얼마 안되는 나하고 제일 처음 한다는 소리가 자기 나이를 알아 맞추라는 것으로 보아도 걷늙어 보이는 자기 주제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골머리를 앓고 있는 놈인지를 알 수 있다. 그 심리적 행실이 병태적이 아닌가 의심을 쌀 정도였다. 아마 누가 그를 나이 많은 것으로 보면 그 어떤 모욕감 아니면 좌절감 같은 것을 느끼는 모양이다. 특히는 이성들 앞에서. “씹 할, 젊어 보이면 뭘 해? 장가도 못 간 주제에. 내 이마 벗겨 진게 뭐 저하구 밥 달래 술 달래? 제동생하구 아들까지 팍팍 낳고  잘 살고만 있구만…” 가만히 들어볼라니 자기 이상 처남을 욕해대는 소리였다. 내가 제나이를 높이 짚었다고 “아저씨 어찌해도 앞으로 나하구 친해 지긴 천만번 글렀어요.”라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어처구니 없는 놈이다. 지금 아무리 생각 해봐도 그회사 이름이 뭣이던지 알 수 없다. 기억력이 말이 아니다. 60명 좌우의 일군을 가진 작은 회사였는데 철판으로 당안궤와 책꽂이를 만드는 것이 주업이였다. 그러니 그회사를 “책꼬지”회사라 부를 수 밖에 없다. 일미리메터 두께의 랭간압연강판(冷轧钢板)을 집채만큼 큰 기대 앞에 끌러 놓아두면 자동으로 한장씩 기대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뒤로 돌아가 보면 철궤의 본체나 문짝이 흘러나와 차곡차곡 쌓인다. 그처럼 거대하고 령민한 자동 기대는 처음 보았고 상상도 못했었다. 그기대에서 흘러나온 형체물을 한켠에서 두 검은 피부 젊은이가 전기 점접기로 용접하고 문짝에는 아줌마 둘이 마주앉아 잠글쇠와 손잡이를 단다. 다음 두 젊은이가 본체에 문짝을 두개씩 접시로 련결 해 놓으면 당안궤는 끝난다. 이것들을 큰 트럭에 실어 전문으로 뼁끼칠 하여 구워내는 공장(烤漆厂)에 가져간다. 색칠이 다 되면 다시 실어다 포장하여 팔아먹는데 국내의 곳곳은 물론 세계 곳곳에까지 수출한다. 지붕만 높이 받쳐놓은 넓다란 바깥에 이산화탄소 용접을 하는 사람이 하나 있고 전기 용접공은 번대머리 젊은이와 나 둘뿐이다. 우리가 하는 것은 철제 책꽂이에 들어가는 여러가지 부속품들을 용접 하는 외에 주로는 책꽂이의 샤시 (底架)를 때붙히는 일이다. 삼미리 두께인 열간압연강판(热轧钢板)을 규격에 맞춰 재단하고 형단조프레스(冲床)로 각종 모양를 눌러오면 우리는 그것들을 표준틀에 올려놓고 용접 한다. 그들의 “표준틀”은 여러개의 고압공기 피스톤을 리용하여 용접 하고저하는 물체를 눌러주고 밀어주고 조여주게끔 만들어진, 나로서는 역시 처음 보는 묘하고 멋들어진 설비였다. 장기간 공장 일을 하면서 한개 기술공정 일군으로서 나 역시 많은 표준틀을 설계 하고 제조 하여 생산에 사용 하도록 하였었건만 그들은 모두 용수철이거나 라사를 틀게끔 한 락후한 설계들이였다. 일후에 만약 또 표준틀을 만든다면 꼭 압축공기 피스톤을 써가며 멋들어지게 만들 것이라고 속구구 하였다. 용접이 끝난 샤시는 40-50쎈치메터 가량의 넓이에 4-5메터가량의 길이인데 40-50공근 정도의 무거운 것이라 혼자 다루긴 불편한 것이였다. 그것을 열개 높이로 스무개씩 철편 포장끈으로 묶어놓으면 지게차가 트럭에 실어준다. 검은 색칠을 하여다가 거기에 궤도 위에서 굴러다닐 수 있도록 홈이 진 바퀴도 달고 자전거 사슬바퀴도 달고 변속기와 전동기도 달고 포장한다. 책꼬지의 두메터 높이도 넘는 웃틀은 조립하지 않은 각철대로 따로 포장 하였다가 회사원이 현장에 가 안장 해주고 궤도도 늘여주고 시험조작도 해준다. 궤도란 직경이 30미리메터인 랭발원강(冷拔圆钢)을 한끝엔 구멍을 뚫고 한끝은 구멍에 들어 갈 수 있도록 깎아버리고 콩크리트나 나무마루 바닥에 고정 할 수 있도록 구멍난 철편을 두개씩 용접한 3메터 길이의 철근이다. 건물의 작은 공간에 보다 많은 책들을 넣기 위하여 궤도 위의 책시렁들은 틈 없이 촘촘히 서있다가 컴퓨터에 찾으려는 책의 제목을 쳐 넣으면 틈이 벌러져 책을 꺼낼 수 있도록 한다. 아주 현대적인 책꽂이를 생산하고 있었다. 나는 번대머리 파트너와 표준틀 량켠에 서서 철물들을 주어올리고 자기 앞부분을 용접 하는데 햇내기라서 숙련된 그의 속도를 따를 수가 없었다. 일에 숙달하지 못하니 일로임을 잠시 5만원으로 정한다고 박부장이 알려주었다. 나는 그것으로도 만족하였다. 하루 건너로 곱대거리를 하였는데 저녁 아홉시 까지이다. 그러면 반날 로임을 부가해 준다. 곱대거리는 몇 개인이나 반조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전 회사 직원이 한사람도 빠짐 없이 다같이 하는 것이였다. 곱대거리 때엔 용접일 외에 철판 재단도 하고 형재 압연도 하고 밑판 조립도 하고 어느곳이 일이 처지면 어느곳에 가서 하였다. 반달 후 로임 발급이 되여 90만원을 탔다. 새벽에 부천 집 근처에서 마을뻐스에 올라 역곡역에 가 전철을 타고 부평역에서 내려 길가로 나가 잠깐만 기다리면 책꼬지회사의 통근차가 지나간다. 퇴근 할 때도 통근차로 부평역까지 오고 전철을 갈아타고 역곡동에 오고 다시 뻐스를 바꿔 타고 부천 오정동까지 온다. 곱 대거리를 한 날이면 밤 열한시가 넘어야 귀가 하는데 아침 다섯시 전이면 다시 출발 해야 한다. 비록 피로하긴 하지만 능히 견뎌낼 수가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결막염인지 뭔지하는 홍안병에 걸렸다. 나는 처음엔 불찰로 용접 불빛에 상했거나 피곤해서 그렇거니 했었는데 보니 그것이 아니였다. 그시기 그곳에 그병이 한창 많이 돌고 있었던 것이다. 결막염은 서로 마주보기만 해도 옮는다고들 하는데 참말인지는 모른다. 박사장이 일하는 나를 찾아 와 돌아가 치료하고 눈병이 나으면 다시 출근 하라고 말하였다. 틀림 없이 번들이마가 올라가 나를 일 못하게 방간질 했을 것이다. 전날 그자식의 막걸리 심부름을 거절 했더니 보복한 것이다. 돈 이천원을 주면서 회사 대문밖에 나가서 막걸리 한병만 사다달라고 자기 아비벌같은 사람한테 술 심부름을 시키는 것이였다. “아저씨는 대문밖에 맘대로 나들어도 말 할 놈 없어요”라는 리론이였다. 나도 그들과 한가지로 출퇴근시 접수실 카드에 이름을 적어넣고 거기에따라 돈을 탄다. 보아하니 그놈은 작업시간에 막걸리 마시러 다녀 욕깨나 얻어먹어 온 터다. 그런대로 처음 한번은 참고 들어주었다. 그런데 전날엔 문지기 눈이 어려워 못 나가겠노라 말했더니 더 시키지는 못 하고 망치며 용접모 같은 공구들을 탕탕 내동댕이치며 성난 기색을 보였다. 내 일 솜씨가 굼뜨다고 두덜거리는 때도 많았다. 처음 하는 내가 어떻게 10년을 그것만 해먹은 놈과 비길 수 있단말인가? 어떤곳은 빠뜨리고 용접하지 않아 조립공들이 보충용접을 하라고 부르는 때도 많았는데 언제나 보면 그자가 용접한 켠임이 분명한데 그자는 사람들 앞에서 내탈을 하군한다. 그렇다고 그와 옳거니 글커니 시비 할 수도 없는 신세다. 내가 네깐놈의 스트레스를 꼭 받으며 살아야 하는거냐고 뿌리치고 말고픈 생각이 굴뚝처럼 치솟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으나 나는 참아왔다. 나란 작자는 원래 못나게도 성미가 어질고 나약하고 비겁하다. 어지간한 일이면 손해를 보면서도 덮어버리고 참고 삼킨다. 그러니 무지막지한 놈들은 내 머리위에 올라앉아 똥 싸려한다. 남한테 약하게 보여서는 안된다. 자기자랑 같은것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나는 그렇지가 못하다. 그러니 늘상 손해만 보고 큰 일을 못 한다. 인생의 막바지에 와서야 깨달은듯 후회하고 있으니 어처구니 없는 일이고 눈물 나게 기가 막힌 인생이다. 부천에 돌아와 약방에 들리였다. 눈약이나 한통 사다가 잠자리에 들 때 떨궈 넣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연필 꽁다리만큼한 눈약 하나 사려는데 의사의 진단이 있어야 판다고 한다. 그들이 가르켜주는대로 길 건너 맞은편 자그마한 진료소로 찾아갔다. 의사의 처방을 들고 다시 약상점에 가서 약을 사고 또 다시 진료소에 가서 주사를 맞고… 헛돈 4만원을 썼다. 얼마전 부천 한 미장원에 들어갔다가 4만원을 판 일도 있다. 먼저 젊은 리발쟁이가 대수간 짤라주고는 안마실에 들어가라는 것이였다. 나는 안마는 필요 없고 머리만 짜르면 된다고 하였다. 리발쟁이가 나가더니 요염하게 분장하고 어깨와 허벅지를 드러낸 30쯤 돼보이는 여인이 들어왔다. 나의 어깨와 머리를 몇번 주무른 후 “아저씨 참으로 멋지시네요!”하고는 나가버렸다. 그러고는 4만원을 내란다. 멋지다는 소리에 누가 넘어 갈까봐. 돼지농장에서 일 할 때 북면이나 병천에 가면 머리를 곱게 짜르고 감고 하는데 7-8천원밖에 안 썼는데 이거야말로 산 눈 빼 처백일놈의 세상이 아닌가? 작은 조카애 영이는 “삼촌, 또 당했구만!”하고 나를 놀려주었다.
56    [한국 나들이]18. 품 값 댓글:  조회:1698  추천:0  2013-06-08
18.  품  값                     부천에 돌아와 이삼일간 푹 쉬였다. 안해와 함께 시장돌이 하면서 금점에 가 반지를 바꾸었다. 우리들이 옛날에 만들어 낀 반지는 24k 순금이라서 색갈도 곱지 않고 디자이너도 그닥잖은데다가 경도(硬度)가 차하여 찌그러들기도 하였다. 우리는 보석이 박힌 18k 반지로 바꾸어 하나씩 끼였다. 18k는 24k와 달리 무르지 않아 변형이 가지 않고 색갈도 어두워 지지않는다. 인생도 사랑도 18k 처럼, 자그마한 보석 처럼 영원히 변치말고 빛나기를 바라는 마음이였다. “벼룩시장”을 한동안 뒤번지다가 “때밀이 강습반 학원모집”광고에 눈길이 멈췄다. 이튿날 명동 “제일 모욕관리원”에 가 40만원을 내고 때밀이 강습반에 들어갔다. 자그마한 지하실에 합판을 세워 세칸으로 나누고 첫 칸은 책상 하나 놓고 사무실로 쓰고 두번째 칸은 갱의실, 세번째 칸이 강습실인데 작은 나무 침대 두개에 큰 물통 하나가 놓여 있었다. 시설이 나쁘면 뭐라나, 재간만 배우면 되는거지. 돈벌이 보담 재간 배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나였다. 재간이면 영원한 재산이 아니겠는가? 우리 나이와 비슷한 김혜환 이정옥부부가 꾸리는 강습반인데 오전엔 남자들이 한시간반 배우고 오후엔 녀 학원들이 배운다. 이렇게 한달을 배운 후 일자리를 찾아 준다고 한다. 나의 안해는 함께 배우고 싶어 하면서도 그일이 힘 겨울거라 감히 덤벼들지 못하였다. 세주일간을 때밀이와 안마를 배우면서 련습한 후 한주일은 실습이라고 두곳엔 두날씩 다니고 한곳은 하루 갔었다. 때 미는 일은 얼마 못 하고 주로 목욕탕 청결일을 하였는데 일당 품값 3만원씩 받았다. 마지막 날 억수로 쏟아지는 폭우를 무릅쓰고 인천 연안부두“명진해수탕”에 갔었는데 어쩌다 4만원을 받았다. 헌데 퇴근하려 할 때 난데 없이 한 놈 나타나 그것이 자기가 소개한 일자리라며 소개비 3만원을 내놓으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고 생각 하면서도 나는 그런 놈팽이와 싱갱이질 하는 것이 질색이고 또한 시시비비 해봤자 이길 수 없을거라 달라는대로 줘버렸다. 그러고는 그곳으로 일 하러 다시 가지 않았고 성이 방가인 그놈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마도 강습반쪽을 통해 나의 핸드폰 번호를 알았던 모양이다. 사흘 후 강습반 김선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왜 인천 사우나에 하루만 가고 마느냐 하는 것이였다. 통근 길이 멀어 힘드니 부천이나 그 부근에 일자리를 알선 해달라고 부탁 했다. 이틀 후 다시 전화로 부평에 있는 “전방 사우나”를 소개 받았다. 인천에 안 간 것은 사실 거리문제는 아니지만 부천에서 부평까지는 인천 가기보담 절반 거리도 아니되니 괜찮은 편이다. 보증금 50만원을 내고 밤 일군으로 채용 되였다. 저녁 다섯시에 출근해 여덟시까지 청소를 해야한다. 엄청 큰 사우나라서 좀만 굼뜨면 청소일은 아홉시를 넘긴다. 먼저 이동식 양수기를 작은 수영장만큼한 랭수 욕탕에 가져다 넣어 낮에 쓴 낡은 물 뽑기를 시작 해놓고 초약 욕탕, 홍송 욕탕, 더운물 욕탕, 뜨거운물 욕탕의 낡은 물들이 절로 빠지게 바닥의 하수도 구멍 마개들을 하나하나 뽑아놓는다. 한편 고무 장갑을 끼고 세척제 물로 20개의 샤워분두(淋浴 喷头)가 달린 사기벽과 바닥 그리고 작은 비닐걸상을 깔고 앉아 때 벗기는 넓다란 구역의 바닥과 탁, 거울들을 걸레질 하고 맑은 물을 뿜어 씻어내린다. 찜질실과 고온 안개실 역시 맑은 물을 쏘고 쓸어낸다. 물 빠진 욕탕들은 닦아내고 요구하는 온도에 맞게 물을 다시 댄 후 초약탕에는 이미 배합 해놓은 약주머니를 던져 넣는다. 이때면 랭수 욕탕의 물이 발등 높이에까지 줄어드는데 걸레로 바닥과 벽을 밀고 하수도 뚜껑을 열어 오수를 완전히 뺀 후 맑은 찬물을 댄다. 낮 일군들은 나한테 맡기고 여섯시면 퇴근한다. 그때면 저녁 먹는 시간이라서 그런지 고객 몇이 없다. 청소를 끝내고나면 때밀이 받을 고객 한두명이 기다리고 있는데 젊은 아버지와 어린 아들, 부자간일 때가 많다. 때밀이 복무비는 어른은 만원이고 어린애는 오천원 받는다. 한사람을 미는데 걸리는 시간은 20-25분이다. 새벽엔 로인들이 많이 들어오는데 등 밀어 달라는 로인은 하나도 없다. 초약 물이나 제일 뜨거운 물에 몸을 한시간씩 담구고 나서는 뿔뿔이 아침 식사하러 간다. 안마비는 일인당 4만원인데 나는 초보라고 3만원씩밖에 받지 않았다. 더 받는건 모르겠지만 남들만 적게 받는건 내 맘대루였다. 그나마 한달 사이 안마를 받으려는 손님 둘밖에 만나지 못하였다. 고객이 나갈 때 카운터에 돈을 내고 아침에 퇴근 할 때 카운터에서 나에게 내가 수입한 돈의 80%를 준다. 그들의 장소에서 돈벌이 하는 값으로 수입의 20%를 바치고 청소일을 감당하는 것이니 비교적 합리한 셈이라 하겠다. 헌데 내가 청소일을 한 품값만큼 장소를 쓸 수 있도록 때투성이들이 몰려 와야는데 그렇잖으니 품값도 못 받고 날마다 죽도록 청소일만 해주는 신세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한달 사이 어쩌다 딱 한번 하루밤에 열사람을 밀어주어 8만원을 벌어보았다. 이튿날 부근에서 뭐 신체 검사를 한다나? 평일엔 겨우 2-3만원씩밖에 벌지 못 한다. 그런데다 집에서 세시에 떠나기에 부평에 도착 한 후 먼저 저녁을 먹어야 하고 오가는 교통비가 들어야 한다. 첨엔 안해가 도시락을 싸 줬었는데 그것도 헐찮은 일이고 안해 또한 아무 일이나 찾아 밥값이라도 해야지 도시락 하나 보고 집에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라 부득불 음식점에서 먹기로 한 것이다. 아침 여섯시에 출근 하여 저녁 여섯시에 퇴근하는 낮대거리는 한사람이 열 서넛씩 밀고 주말엔 30명 좌우씩 민다. 나보다 평균 열배씩 버는 판이다. 그들은 둘 다 김씨이고 부평구의 토박이인데 하나는 대개 마흔살쯤 돼 보이고 한놈은 그보담 댓살 정도 위였다. 나이 더 먹은 김 산수(이름도 페롭다, 산수가 뭐여?) 란이가 사우나 남탕 때밀이와 안마일을 도거리 맡은 오아지이다. 오아지란 한국에 와서 새로 듣게된 말인데 십장이나 두목을 일컸는 말로 나는 안다. 그위에 또 사우나 남탕을 임대 맡은 성이 장씨인 경리가 있고 경리위에 사우나를 만든 사장이 있고 사장위엔 건물을 지은 건설회사의 동사장인지 회장인지가 있다. 건물주는 사장들한테서 집세를 받아 벌고 사장은 집을 세맡아 여러가지 영업터로 꾸며 다시 여러 경리들한테 나누어 임대준다. 사우나같은 경우는 사장이 경리들이 바치는 임대료만 버는 것이 아니라 사우나 입장비도 벌고 있었다. 지하 2층에 내려서면 본 카운터에서 사우나 입장권을 사야하는데 낮에는 사장의 며느리가 앉아 있고 밤엔 아들이 앉아 있다. 표를 사고 오른켠 문을 열고 들어서면 녀탕이고 왼켠이 남탕이다. 남탕에 들어서면 먼저 잠글쇠가 달린 신 보관함이 벽에 설치돼 있고 한켠에 구두닦는 아저씨가 앉아 있다. 그앞을 지나 오른켠으로 사이문을 열고 들어서면 문안 오른켠에 작은 카운터가 하나 있다. 거기에다 입장권과 신 보관함의 열쇠를 바치면 신 보관함과 같은 번호의 옷 보관궤의 열쇠를 준다. 낮에는 남탕을 임대 맡은 장경리가 카운터를 지키고 밤에는 장경리의 조카애가 앉아 있다. 작은 카운터에선 표를 받고 열쇠를 바꿔 주는 외에 목욕탕에서 쓸 수 있는 잡동사니들을 파는 것이 주업이였고 거기에서 돈이 벌어졌다. 수건, 팬티, 양말, 머리 감는 물비누, 일회용 면도와 코털가위, 치솔, 과자, 사탕, 삶은 계란 등등 수십가지였다. 철통맥주와 음료들은 카운터 밖에 놓은 유리문 랭장고에 가격별로 줄 세워 넣어두어 마시고픈 사람은 절로 꺼내고 카운터에 가 돈을 낸다. 랭장고 제일 윗층엔 한봉다리에 몇만원씩 하는 인삼액과 같은 보건약물도 놓여있다. 거기에서 파는 음료나 물건들은 슈퍼보다 몇갑절 비싸지만도 잘 팔리는 편이였다. 계란만 놓고 보더라도 가격차이가 다섯배나 된다. 슈퍼에선 생계란 한알에 100원(한틀에 30개씩 담아 3000원)인데 사우나에선 삶은 계란 하나에 500원이다. 특정된 환경에서 하는 장사라 나무랄 것이 없는 일이고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사 먹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새벽 두 세시쯤 되면 근본 때밀이 받으려는 사람이 없다. 수십명 사람들이 수면실에 꼬부라 지거나 휴식실에서 음식을 먹으면서 텔레비를 본다. 이럴 때면 나는 장경리의 조카애를 대신하여 카운터에 앉아 책을 보며 돈도 받고 열쇠도 바꿔준다. 스무살이 되나마나한 어린애가 얼마나 졸리랴 싶어 새벽 손님들이 몰려들기 전에 눈을 부치게 하는 것이다. 그 조카애의 집도 부천에 있었다. 카운터 곁방은 리발관이다. 리발사 셋은 모두 낮에만 출근 한다. 신닦는 젊은 아저씨와 휴식실 청소공 아저씨도 낮에만 나온다. 밤에는 머리 깎을 사람도 구두 닦을 사람도 없으니깐. 그러니 때밀이 받을 사람이라고 따로 있을리 만무하다. 밤에는 잠자러 오는 사람들 뿐이다. 사천원 내고 목욕 실컷하고 영업 정지만 아니라면 백년을 들어박혀 자도 쫓는 사람이 없다. 수면실엔 2층으로 된 침대를 수십개 놓았고 까딱하면 콩크리트 대들보에 이마가 쫏기는 다락방 같은 윗층 널마루 바닥에는 목침과 타월식 이불이 무더기로 쌓여 있다. 막일 다니며 품값 받아 홀로 사는 나그네들 휴식처로는 꽤나 괜찮은 곳이다. 헌데 꼭 배불리 먹고 들어와야 한다는 것만은 잊지 말아야 한다. 녀탕에서 꾸리는 간이 음식점에 전화만 누르면 국밥이나 라면같은 것들을 가져오지만 어느만큼이나 비싸리라는 것은 계란 값에 대해 이미 비교 해 본바이니 다시 말 할 필요가 없다. 나에게는 휴식일이 없었다. 내가 결근하면 욕탕의 물을 바꾸고 청소일을 해 줄 사람이 없으니 쉴 수가 없었다. 마침 9월 21일이 추석이라서 19일 저녁부터 21일 저녁까지 영업을 정지 하였기에 두날 밤을 쉴 수가 있었다. “19일 저녁 9시부터 21일 저녁 6시까지 영업을 정지하고 설비 보양을 하오니 광범한 고객님들의 양해를 구합니다!”라고 흰종이에 크게 써서 부쳐놓은 것이였다. 21일 오전, 안산시에서 일하는 륙촌처남 춘석이가 추석이라고 술병을 들고 놀러 왔다. 그는 농촌 신용사의 회계라는 괜찮은 공무원 직을 버리고 연길에서 몇해간 택시업을 하더니 삼년전에 한국으로 왔다. 안해는 외사촌동생 미옥이한테 전화를 쳤다. 미옥이 남편도 추석이라 마침 집에 있었다. 사촌이고 륙촌이고 어릴 때엔 모두 산골 마을에서 네집 내집 따로 없이 함께 뛰놀며 자란 형제 자매다. 두 녀자가 부지런히 안주를 볶아대고 세나그네는 부지런히 잔을 비웠다. “형부, 제 한잔 붓자요.” 미옥이가 차례로 술을 따른다. “언니, 한국에 와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앉을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소.” 잔을 추켜들고 미옥이를 따라 이구동성으로 “위하여!”를 높이 웨쳤다. 웨친것만은 사실인데 뭘 위하자 했던지 지금 생각히질 않는다. 술이 거나하게 되자 그들 넷은 노래방으로 놀러 가고 나는 출근 하였다. 품값도 벌지 못하면서 만 한달째 다니고 있었다. 술 마시면서 한국에 나온지가 오래된 처남과 동서는 나에게 알맞는 일자리를 찾아 주리라고 약속하였다. 춘석이는 안산에서 괜찮은 회사에 취직 했고 미옥이 실랑은 목공 20명을 거느리고 건설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추석이 지난 이틀 후 과연 춘석이한테서 소식이 왔다. 밤 열시, 내가 휴식실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춘석이와 즉시 통화 하라고 안해한테서 전화가 왔다. 인천 공업단지 한 회사에서 용접공을 수요하고 있는데 이튿날로 출근해야 한다는 것이였다. 이튿날 아침, 오아지가 출근하자 나는 당일 저녁부터 안 나오겠다고 말 하고 보증금인지 뭔지 내가 낸 돈 50만원을 돌려 달라고 하였다. 그는 무지 성난 어투로 장경리와 말 하라는 것이였다. 불시로 청소 해 줄 사람이 없어지는데 누구든 좋아 할 리는 만무한 것이지만 그는 원래 도툴 없이 제정시대 십장놈 모양이였다. 얼마전 그와 낮일을 함께 하던 김씨를 억지로 내보내고 연길에서 온 한 젊은이를 받았는데 중학교 교원질을 하다가 한국에 왔다는 그는 이틀을 삐쳐보고는 치질병이 도져 못 하겠노라고 구실을 대고 나가버렸다. 나가면서 왜서 이런 곳에 박혀 헛 고생만 하느냐고 나한테 의혹을 표하였다. 그는 자기 안해가 3년 먼저 한국에 와 벌어놓은 돈이 있으니 그 돈으로 때밀이 일을 도급 맡은 후 함께 해보자는 것이였다. 그 젊은이가 나간 후 역시 중국 흑룡강성에서 온 청년이 들어왔다. 사우나 일을 하고저 하는 조선족이 많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때밀이 강습반에 등록 할 때 일년 사이 배우고 나간 조선족만 하여도 50여명이고 몽땅 일자리를 알선해 주었노라고 김 혜환선생님은 등록부를 펼쳐 보이며 자랑 했었다. 내 나이와 비슷한 장경리는 오아지보담 목소리도 낮고 말수도 적고 싹싹한 편이였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 아침 자기 조카애와 나를 자가용으로 집에까지 실어다 준 일도 있다. 그러한 장경리와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하기가 민망스럽긴 했으나 말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장경리는 돈이 갖추어지면 전화 해 줄터이니 그때에 와서 가져가라는 것이였다. 그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였다. 며칠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기에 내가 휴식하는 날 안해와 함께 놀음삼아 그 사우나로 찾아갔다. 일이 안 될라니 그날 마침 장경리는 몸이 안좋아 출근하지 않았고 카운터에는 오아지 김 산수가 앉아 있었는데 “돈이 갖추어지면 전화 한다고 장경리가 말 했다면서요?”하니 더 말 할 나위도 없었다. 돌아져 나오는데 신닦는 젊은 아저씨가 “아저씨, 돈 찾았어요?”하고 말을 건넸다. 내가 돈 찾으러 온 줄 그가 어떻게 아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장경리 안 계셔 못 찾았습니다.” “꼭 찾으세요.” “예, 그럼요. 그럼 수고 하세요!” “또 오세요!” “안녕 하세요?” “고맙습니다!” “또 오세요!”는 그의 직업적 용어이지만 한달간 아침 저녁으로 만났던 사람이라고 아는척을 하고 고무 해 주니 고마웠다. 그는 오른발 앞부분 절반이 잘리워 없어진 장애인이였는데 이미 잘리워 나간 때밀이 김씨와 가까운 사이였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함께 자랐고 십여년간 여러개의 사우나로 함께 일하러 다녔었다. 그런 그들을 갈라 놓았으니 불만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후 나는 다시 찾아가지 않고 나의 작은 조카애가 여러번 전화를 걸어 겨우 30만원을 찾아왔다. 강습비 40만원에 떼운 보증금 20만원을 버리니 센터에서 돌아 온 후 두달 사이 고생만 하고 품값을 벌대신 30만원가량 꺼꾸로 처넣고 말았다. 남들은 한국에 나오면 돈을 잘들만 번다고 하는데 이놈이라구야… 그러니 속히 자리를 옮겨야 한다. 춘석이가 추천하는 일자리가 어떨런지 모르나 용접일이라니 할만한 것이고 또 듣자니 용접일은 일반적으로 품값도 높다던데…
55    [한국 나들이]17. 종돈장과 리 별 댓글:  조회:1742  추천:0  2013-06-07
17.  종돈장과  리 별        우리가 센터에서 일한지 만 일년이 되였다. 일년 사이 애들은 얼마나 많이 바뀌였는지 모른다. 호성이도 안 할란다고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둬달 하다가 또 나가버렸다. 리대리 동국이도 나가고 리부장도 나갔다. 우리가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있는 애는 박 재성이와 김 해룡이 둘 뿐이다. 영식이가 아마 제일 늦게 나갔을 것이다. 그애들은 저마끔 쎈터를 떠나면서도 나와 하는 인사말은 꼭 같이 “아저씨, 건강하시고 돈 많이 벌어갖고 가세요!” 한다. 리부장은 호성이보담 두살 아래인 로총각이다. 그는 센터를 떠나 한 양돈장을 임대맡아 새로 사업을 벌리고 있는데 아저씨 아줌마가 가서 일 봐달라고 청구하러 찾아왔었다. 우리는 고사장을 떠나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량해를 구했다. 한번은 회식 후 센터에 돌아 와 두부찌개에 소주를 마시며 호성이랑 같이 밤 새울 때 리부장이 리씨말을 하니 나는 반대표를 던졌다고 “잡담”에서 엿쭈었다. “리씨가 위대한지 망나니인지는 모르겠으나 리 성계와 리 승만은 아니요. 리 승만이 위대했다면 ‘3.8선’은 없었을 것이고 통일된 부강한 한반도일 것이요…” 나는 리부장의 말이 채끝나기도 전에 말씀거리나 잡았다고 술 한잔을 혼자 쭉 찌우고는 손을 내 저으며 소리를 높였다. “아는가? 고려 말기에 중국 원나라 밑에서 비록 부패하고 무능 했다고는 하지만은 명나라가 고려땅을 침입 할 때 임금 왕 신(王辛)과 재상 최 영(崔莹)은 당시에 도통사(都统使)였던 리 성계더러 명나라 군을 막으라고 명령 했던거요. 리 성계는 앞록강 변까지 갔다가 물이 불어 건널 수 없다며 군사를 이끌고 돌아와 정변을 일으켰어, 고것이 륙칠백년 전이요. 그때 리 성계가 위대했다면 료녕성 동부부터 길림성 남부, 흑룡강성 서남부까지 모두 지금도 고려나 조선의 땅일거란 말이요! 령토만 지켰더면 그가 정변이고 뭐고 다 ok! 나라 땅 잃고 백성 버리고 정권만 잡으면 단가? 리 성계는 민족의 죄인이고 력사의 죄인이란 말이요!” 나의 열변에 두아이는 할 말을 잃었다. 리부장은 “난 역사 몰라요…”하며 잔을 냈다. 나도 력사라고는 모른다. 20여년전 “고려산 이야기”라는 글을 써보면서 “세계통사”의 한 대목 읽어 두었던 것을 력사학자나 되는 듯 외웠을 뿐이다.   02년도 5월, 나라에서는 불법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 들에게 체류 기일을 일년 연장 해 주었다. 만약 정한 기한내에 수속을 밟지 않고 있다가 잡히면 벌금하고 쫓겨나고 어느 회사에서 채용하다 잡히면 회사측에서도 크게 벌금 할지어라고 통고가 내렸다. 그러기에 고사장도 우리더러 수속을 밟으라고 독촉 하였다. 5월 13일 저녁, 우리부부는 차를 몰고 퇴근하는 성희차에 앉아 기차 타러 천안으로 갔다. 성희란 충남 축목대학을 졸업하고 몇달전에 센터에 온 처녀애인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무실에 앉아 돼지 정액 주문을 받고 주문 받은 즉시로 주문하는 용호 부근에서 뛰고 있는 배달 하는 애 한테 전화 쳐 몇분내로 용호에 가 닿게 한다. 점심 식사는 날마다 우리 둘과 성희까지 셋이다. 그애는 체격도 크고 성격도 일반 남자애 못지 않게 호방하다. 다만 생김새가 다른 처녀애들보담 굵직굵직 하다보니 여자애치고는 깜찍한 멋이 못하다고 하겠다. “아저씨, 저의 희망이 뭔지 아세요?” 성희가 핸들을 돌리며 곁좌석에 앉은 나와 묻는데 내가 어찌 알고? 돈 많이 버는것? 얼굴 이뻐지는것? 좋은 남자 친구 만나는것? 아니면 축목학 박사나 축목 기업가가 되는것? “글쎄 무얼까?…” “모르시겠죠?”그애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호호호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저는요, 개인의 목장 하나만 가지는거라요, 자그마한 목장 말이얘요.” “그래? 문제 없지뭐, 성희는 자산이 많으니까!” 하는 나의 말에 성희는 “녜?”하며 의아쩍은 표정으로 나를 힐끗 곁눈질 했다. “돈 없어요, 돈 있으믄 뭐 희망이고 소망이고 하겠어요? 사면 될걸.” “성희는 돈만 자산이라고 봐? 돈은 작은 재산이고 쓰면 줄어들고 없어 지지만 성희에겐 쓰면 쓸 수록 늘어나는 무궁무진한 자산이 있는거야, 지식과 열정, 젊음과 패기 그리고 아름다운 그 꿈! 이거면 자그마한 목장 하나가 무슨 문제여? 더욱 큰 것도 이룩 할 수 있을거야!” “아저씨 말씀 딱이얘요, 마구 힘이 솟는 감각입니다. 그런 무형의 재산으로 희망을 실현 할거얘요! 그때 아저씨 아줌마 내 목장에 놀러 와요, 제가 귀빈으로 모시겠습니다.” “오케이! 목장주님의 휘황찬란한 내일을 미리 축원합니다!” “감사합니다! 호호호…” 얼마 후, 성희는 일이 자기의 취향과 맞지 않는다며 동창생이자 친구인 정애를 소개하여 자기가 하던 일자리에 앉혀놓고는 센터를 떠나버렸다. 자기의 꿈을 실현하러 갔을 것이다. 정애라 부르는 처녀애는 성희와 모든 것이 너무도 달랐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사회물을 몇해 먹었다는 그애는 인물체격이나 말투나 행실이나 그 뭣이든 비할바 없이 매혹적이였다. 성희와 사귀려는 애는 하나도 없더니만 정애가 오니 불찬놈은 한결같이 그애 주위에서만 맴도는데 일까지 젖혀놓고 맴돌다가 사장의 된욕을 먹는 애도 있었고 해고 당하는 애까지도 있었다. 성희는 천안 기차역 광장에 우리를 내려주며 “두분께서 잘 다녀 오세요!” 하고는 차머리를 돌렸다. 성희 나이 우리딸 금화와 정 동갑이다. 금화도 저애처럼 꿈을 품고 그것을 실현 하고저 분투 할 것이다. 우리는 딸애가 99년도 일본으로 류학 간 후로 만나보지 못했다. 센터의 애들은 방학에라도 딸님을 놀러 오도록 하라고 야단들이다. 비용은 자기들이 처리 할거라면서. 부천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 일찍이 우리는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으로 연기 수속하러 갔다. 학교 마당이라 볼라니 주위에 학교같은 건물이 보이지 않고 체육장이라 여길라니 관람석도 없고 한 별란 곳에 인산인해를 이루어 파도치고 있었다. 그마당이 축구장 두개올치는 될 듯한데 그 둘레에 너덧 겹으로 싸리나무 울바자마냥 빼곡히 사람들이 줄 섰다. 행렬의 첫 머리를 찾아 큰길을 따라 한참 가다가 작은 굽인돌이 길목에서 줄을 서지 않은 탓에 경찰한테 쫓기우고 말았다. 큰 길가에는 먹거리 장사군들과 려행사 장사군들로 붐비고 있었다. 사람 많은 곳엔 장사군들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 복잡한 인파 속에서도 면목 있는 연길 사람들을 몇몇 만날 수가 있었다. 어떤 치들은 밤 새워 줄을 선 것이라 피로해 죽기 직전이라 했다. 일년 후의 배표를 먼저 귾어야 수속을 해 준다는 것도 알게 되였다. 행렬의 흐름으로 보아서는 뒷꼬리에 서서 따른다면 밤을 새워도 작은 굽인돌이 길목에 닿을 수가 없을 것임이 뻔연하였다. 아뭏든 배표는 먼저 끊어야 했다. 비행기로 가려는데 왜 배표를 끊어야 하는지 전혀 리해 할 수는 없으나 하라는대로 해야만 했다. 배표 장사는 각 려행사들에서 도거리 맡고 있었다. 어떤 장사군들은 자기한테서 표를 사면 줄을 서지 않고 수속을 밟을 수 있도록 해준다고 우리의 옷깃을 끄당긴다. 길목 지키는 경찰의 형님이나 되는지 모를 일이다. 속히울까 두려워 따라가지 못하고 길가에 탁상를 놓고 앉아 파는 장사군한테서 배표를 샀다. 배에 올라야 할 날자는 03년 3월 17일로 찍혀져 있었다. 우리는 02년 말에 비행기로 돌아 오면서 려행사에 가 배표를 물렸는데 50%밖에 환불 받지 못하였다. 세상엔 별이별 장사아치들이 다 있는 법이다. 배표를 끊은 후 안해는 고사장한테 전화를 쳤다. 아마도 온 밤 줄을 서야 하겠으므로 계획대로 사흩날ㅡ15일 오전에 센터로 돌아 갈 수 있으지 모를 일이라고 보고 하였다. 고사장은 우리더러 크게 근심 할 것 없이 수속이나 잘 해 가지고 돌아오라 하였다. 우리는 점심 먹으러 미옥이 한테로 갔다. 남을 대신하여 불고기점을 경영하고 있는 외사촌 처제 미옥이는 우리를 반갑게 맞고 대접 해주었다. 그들 부부는 한국으로 일하러 온지 다섯해를 넘기고 있었다. 점심 다 먹었을 때 고사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우리더러 경기도 안산시로 가라는 것이다. 우리는 미옥이와 갈라져 뻐스에 올랐다. 안산 뻐스역에서 시작해 둬번 물으며 가니 고사장이 가르켜 준 “이마튼”지 무슨 마트던지 쉽게 찾을 수가 있었다. 일층은 쑈핑광장 같은 곳이고 이층에 올라가 보니 커다란 빈 방에 책상과 컴퓨터들을 갖추어놓고 외국인 출입국 관리 업무를 림시로 보고 있는듯 하였다. 수속 하러 온 외국인보다 컴퓨터에 마주앉아 놀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았고 저마다 우유를 마시고 빵을 먹으며 한담 하고 있었다. 세시가 되였으니 아마도 참을 먹고 있는 모양이였다. 우리의 려권과 배표를 번지작거리더니 컴퓨터에 몇글자 쳐넣고는 려권에 커다란 사각형 남색 도장 하나와 배표에 손톱눈굽만큼 작은 붉은색 삼각 도장 하나를 찍어주더니 “됐어요.”한다. “여보세요, 내가 대전 외국인 출입국 관리 사무소에 잡혀가서 싸인해주었던 각서는 잃어버렸어요? 돈벌이 안 할거구 불법 체류 안 할거라던 그것 말입니다. 아무런 문이도 없으니 멋 없는데요.”하고 나는 말하고 싶을 지경이였다. 려권에 찍어준 도장에는 “출국 준비기간 부여”라 쓰고 출국일은 배표와 같이 “2003. 3. 17.”이라고 썼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출국 기한까지 출국하지 않는 경우 5년 동안 입국금지”라고 한글과 영문으로 뚝 찍어놓았다. 뚝 찍던 떡 찍던 내보기엔 형식이고 배표 값이나 뜯어 먹자는 것이 진실인듯 싶다. 한달 후인 6월 16일, 이틀간 말미를 맡고 강남구 분당에 있는 처조카 전 홍네 집으로 놀러갔었다. 그애의 부모님께서 연길에서 놀러오셨고 월드컵 관람권을 사놓았던 것이다. 우리는 수원 월드컵 경기장에 가서 스페인대 아일랜드의 16강전을 보았다. 우리는 원래부터 축구 구경을 퍼그나 즐긴다. 텔레비에서 축구경기를 중계 할 때면 드라마프로를 뒤로 하고 축구를 본다. 우리 연변대가 대방에 선꼴을 넣으면 우리는 “이겼다!”고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치는데 축구를 모르시는 어머님께선 “이겼을 때 그만 차라 하그라, 그냥 차다 또 질란디…”라고 한다.  월드컵 경기장에 들어선 우리는 축구도 축구이지만 그보담도 경기장 구경이 더욱 좋았다. 그같이 웅장하고 아름다운 경기장에 앉아 본다는 것은 우리 일생에서 처음이고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센터에 돌아와 자랑 했더니 “아저씨는 제주도 관광도 하고 세계 일류의 경기장에서 일류의 뽈 차기도 구경하고 참으로 세상에 태여난 보람이 있게 사네요, 우리는 제 나라래도 고작 텔레비죤 화면밖에 보지 못했는데…” 하며 애들은 부러워 하였다. “출국 준비기간 부여”를 받은 후 우리는 쎈터에서 두달 더 있다가 떠났다. 전해 7월 10일에 오고 이듬해 7월 13일에 떠났으니 만 일년하고 이틀이 더 된 것이다. 12일 저녁에 여전히 로임을 타고 회식을 하였고 나로서는 마지막 회식이라고 애들이 부어주는 술을 다 받아 마셨다. 13일 마지막으로 하루 일 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박 종필 동서의 차에 앉아 북면까지 오고 북면에서 뻐스를 타고 천안까지 왔다. 고사장은 언녕부터“아줌마 보내드리고 다시 와요.”하더니 마지막에 짐을 다 들고 센터문을 나서는 나를 보고 “다시 오시란데 안 오실 참이군요.”하며 서운한 표정을 짓는 것이였다. “글쎄 보구요, 나는 오고 싶지만 일이 어떻게 될런지 가 봐야 알겠습니다.”라고 나는 얼버무려넘겼다. 대개 반달 전 나의 안해와 고사장이 또 하찮은 일로 서로 얼굴을 붉힌 일이 있었다. 그때에 아무런 내색도 내지말고 이달만 시간을 채우고 떠나자고 둘은 약속이 섰던 것이다. 그래서 한주일 전에는 안해의 몸이 불편하여 중국으로 돌아가야 하니 일군을 새로 찾으라고 고사장과 말 했었다. 고사장은 아줌마의 신체 정황을 잘 알고 있는터고 또 자기와 다툰 것이 속에 내려가지 않아 떠나려 하는 것임도 눈치 챘을 것이다. 허지만 그도 아무런 내색을 내지 않고 사흘 전엔 내 일을 대신 할 30대 초반의 젊은이를 데려다 나한테 붙혀주었다. 나는 사료 주는 일부터 모든 설비를 작동하는 방법, 돼지 정액 채취술까지 하나하나 시범 해 보이며 가르켜주었다. 그는 인츰 익숙하고 감당 할 수 있을것 같았다. 헌데 우리가 떠날 때까지도 주방일을 하고 거둠일을 할 사람은 오지 않았다. 일년이란 우주의 광음 속에서나 인류 력사에서는 한 순간에 지나지 않지만 한 인생에 있어서는 짧지 않는 보귀한 시간이라 여겨진다. 이제 나의 앞날에 몇개의 일년이 더 있을런지? 열? 스물?…“光阴似箭(광음은 화살과도 같다)”이라 우리는 분초를 아껴야 한다. 화살처럼 빠르고 다시 돌아 올 줄 모르는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 한다. 나는 지난 일년을 괜찮게 열심히 살았노라 자아 평가 하게된다. 물론 위대한 발명을 했거나 천재적 학설을 펴낸 것도 아니고 남들처럼 돈을 많이 벌었거나 남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한 것도 아니지만 일개 보통 인간으로서 할 만큼은 거의 다 한 것이 아니겠는가고 자기를 위안하게 된다. 눈 깜박하면 꺼져버릴 한생을 후회 없이 열심히 살아야 한다. 열심히 살고 보면 뭘 남긴 것은 없더라도 후회는 남지 않을 것이다.   나는 미련을 품고 안해와 함께 센터를 떠났다. 혹시 문밖까지만이라도 배웅 나오지 않을까하여 나는 몇번 뒤돌아 보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이룩 할 수도 없고 이룩 해서도 아니 될 가슴속의 련정이니 이룩 못 한 채 떠나지만 쉽사리 지워 지지는 않을 것이고 몽롱한 추억으로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54    [한국 나들이]16. 无 题 (무제ㅡ잡담) 댓글:  조회:1585  추천:0  2013-06-06
16.  无  题 (무제ㅡ잡담)    한국으로 떠날 때 작은 노트 하나를 가지고 렬차에 올라서부터 잡글을 썼다. 친지방문을 하고 관광 다니고 일자리를 찾아 “인생수업”을 하면서 글 쓰기는 게으름이 없었다.   “01년 11월 11일. 1자가 꽤나 많다고 하여 별다른 의미가 있는 날인건 아니고 ‘잡담’쓰기를 놓았다가 넉달반만에 무슨놈의 똥궁리가 났는지 필을 다시 들게 된 날이다.  원래는 중단하지 않고 아무거나 쓰고 싶은걸 써 내려가려고 했었는데 죄 없이 잡혀 하루 갇혔다가 놓여나온 후 고국에 대한 여미감(如美感)이 깨여지고 글맛 조차 잃고 말았다. 권력이 아니였더면 나는 영락 없이 한달도 못 돼 강제 축출을 당했을 것이다.  인간이 흔히 갖게되는 심리중에 반발심이라는 것이 있다. 역심리라 하는 그것, 석달비자로 한국에 들어설 때의 생각은 와서 첫 반달과 돌아가기전 마지막 반달은 친척 방문과 관광을 하고 두달간은 막벌이를 해서 려비에나 조금 보태고 제시간에 돌아가 하던 일이나 하고 래년에 또 시간을 내여 다시 왔다가고 후년에 또… 신사답게 놀려고 했었는데 개판이 아니겠는가? 누가 날 신사로 봐준다고? 한국에 와 일만 하면 다 빌어먹는 거지로 취급 하는 판인데야. 불법체류도 아닌 나더러 무슨놈의 ‘불법체류 안 하겠다’고 각서를 쓰라지 않나하면 령수증도 없는 벌금을 안기지, 죄인 대접 받으러 온 것은 아니였는데! 반백년동안 ‘법이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칭찬만 받아먹던 내가 불법체류를 작심했고 다시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 속 다짐 하였다. 횡설수설 혼자 잡담을 늘이고 있는데 설거지를 끝내고 들어온 안해는 내가 쓰고 있는 책장을 마구 뒤번지며‘새책에 쓰라고 지지 말했는데 왜 또 여게 씁니까?’하며 소학생 굴듯 한다.‘남이 열심히 공부 하는데 왜 방해야?’‘하참, 무참하다…’ 말본전도 못 찾고 세수하러 나갔다 다시 들어온 안해는 화투장을 넉줄로 엎는다. ‘어디에 돈 많은 령감이 있을란가 화투패 떼오?’‘아니, 돈 없어도 좋고 못나도 좋고 무참만 안 주는 령감이면 좋겠습니다.’‘체, 돈 많고 멋지고 무참도 안 주는 령감이면 더 좋지?’ 네번만에 패가 떨어졌다. 명년 3월이면 마음에 드는 령감을 만날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나는 돈만 많은 로친 얻고 싶은데 대신하여 패를 떼여달라고 했다. 세번만에 나의 운수패가 떨어졌는데 래년 1월달에 만나 질 것으로 예정이 되였다. 내가 ‘잡담’쓰기를 그만둔지가 오랜줄 번연히 알면서도 안해는 새노트를 사다 주었다. 자기의 것은 작은 것으로 사고 나에게는 크고 멋진 것으로 샀다. 다시 쓸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겨울에 잡아들면서 밤시간이 길어지다보니 여유시간이 많아진 것이다. 연길에서 같으면 퇴근길에 친구들과 소주나 한잔하고 노래방에나 들리고 주말이면 동생들과 마작이나 치고 그래도 그럭저럭 시간 보내기가 괜찮겠는데 여기에선 오로지 홀로 잡담하며 시간 보내는 수 밖에 따로이 방도가 없다. 그래서 안해가 선물한 노트가 유용하게 되였다. 비록 잡담이긴해도 두었다가 언젠가 펼쳐보면 절로 웃음이 나올 일도 있을 수 있고 그러면 그때에 가서 시간 보내기에도 도움이 될거고. 늙어지면 시간이 썩 더 많을텐데 말이다. 7월 10일에 온 후 하루도 쉬지 않고 일만 하다가 이번에 청가 맡고 넉달만에 부천에 갔다왔다. 7일날 일을 끝내고 여섯시가 넘어 떠나 부천에 이르니 아홉시 반이였다. 8일날 하루 푹 쉬고 9일엔 큰 누님 뵈러 인천병원에 갔다오고 10일 오후차로 돌아왔다. 11일은 일요일이라 내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날이다. 사실 글이란 쓰기 습관 하면 재미 나는 일이다. 남들은 어떨런지 몰라도 나는 그렇다 그것이다. 특히 격식도 없이 주제도 없이 제목도 없이 서두 결말도 없이 쓰는 목적도 없이 그저 쓰는 재미만 갖고 쓰노라면 참말로 별 재미지!! 한 때 글이랍시고 많이 썼었는데, 출근하며 시간 짜내여 써서는 가져가면 툇자만 맞고 하였어도 무지무지 재밌었던걸, 진짜로 침식을 잃으면서 썼었거든. 그땐 시간이 부족한데다가 출판도 안해주지 하니깐 싹 걷어장져버렸지만 지금 하는 ‘잡담’은 발표 하려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남아도니 벌린 것이니 어디 좀 좋으냐? 제발 누구든 나의 ‘잡담’을 엿듣지 말기를 바란다. 엿듣는 날이면 뛸데 없이 ‘저놈 한국 가더니 어쩌다가 글 싸구쟁이에 정신 이상까지 걸린게 틀림 없구나!’하고 웃을 것이니깐 싫다. 그누군들 남의 웃음거리로 되길 좋아 하겠는가? 있으면 나서봐! 하하하… 이런 도리까지 다 꿰뚫는걸 보니 나 아직 정신 이상은 아니겠지? 에라, 웃을라면 콱 웃으라고 하지, 웃다가 배꼽 빠지던 턱 빠지던 난 약값 모른다. ‘정신 빠진놈 소리ㅡ 잡담’은 왜 하냐고 해도 내 멋이다. 상관이 뭐드냐? 그래서 안해한테서 선물 받은 새 노트 첫장에 제목을 ‘잡담’이라 크게 쓰고 한줄 아래에 ‘나의 삶ㅡ 나의 멋’이라고 자그마하게 부제를 달아 놓은 것이다. (제목만 써놓고 결국은 생뚱같은 ‘양돈 봉침술’에 대해 기록하다가 버리였다.) 사람이란 누구나 다 자기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인간이고 그러기에 인간 관계라는 것이 복잡한 것이다. 그 무엇을 감추기 위해 팬티를 입듯이 보이지 않는 부끄러운 것을 감추고저 거짓 떠는것, 나는 그것이 싫다. 그렇다고 내가 남들 앞에서 팬티를 벗으려는 것은 아니다. 나 홀로만이, 그누구도 엿보지 말기를 바라면서 ‘잡담’이라는 나의 령지(领地)에서 나의 삶의 어제와 오늘, 래일이 홀딱벗은 그대로 나 뒹굴 것이다. 문뜩 대중 목욕탕이 련상된다. 벌거숭이들이 오고간다. 거짓 없는 ‘원시전 사회’가 그려진다. 지금은 형상과 상상뿐, 있을 수 없는 사회다. 가면, 거짓, 협잡, 강탈, 기시, 증오, 압박, 착취, 보복, 쟁탈, 테러, 전쟁… 또 뭐가 있나? 아무튼 드센 놈이 약한 놈을 먹어버리는 이것이 사회이고 정치이다. 물론 이와 반면에 광명한 면도 많다. 가난한 사람, 의지가지 없는 로인, 자립이 힘든 장애인등 나약한 군체들에게 사회는 사랑의 손길을 뻗히고 있으며 만일 어느 한곳에서 자연 재해를 받았다면 사면팔방에서 구원의 손길을 보내주곤 한다. 하지 말아야 할 싸움을 벌리고 있는 곳도 있지만 평화를 위해 각자 회담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는 곳도 있다. 참, 오늘따라 정치가 술술 되는판이라 정치를 안 할라고해도 절로 잘 될 땐 두통이 난다. 밤 열시가 넘었다. 내가 ‘잡담’하고 있는데 안해가 들어와서 누가 선 보러 갔었는데 어쩌고 저쩌고 열변하는데 대고 나는 ‘나도 들었소.’하고 말문을 꾹 막아버렸다. 이건 아니다 싶어 다시 입을 열었다. ‘또 무참했지?’ ‘아니.’ ‘습관 됐소?’ ‘예.’ ‘나는 원래 글 쓸 때 누가 지장 주면 좋아하지 않소. 어제도 보오, 남이 한창 쓰는데 책장을 마구 번져놓으면서…’ ‘아직도 동무를 잘 모른다는 걸 말합니다.’ 돌아누워 잘 듯 하더니 인츰 일어나 밖같방으로 텔레비 본다고 나갔다. 총각애들의 잠자리이니 인츰 쫓겨 들어 올 것이지만 내가 필을 놓고 불러 들여야 한다. 그는 남달리 잘 삐여지는 어린애이고 나는 남의 흥을 맞추어 줄 줄 모르는 멍청이이다.                                    ㅡㅡ02년 11월 12일.”                                                                                “어제 12일은 이곳 开资날(로임 발급 날)이다. 달마다 이날이면 고사장이 한턱 쏜다. 회식을 조직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엊저녁에는 고사장이 영식이를 데리고 선 보러 간다고 하루 미루어 오늘 저녁에 쐈다. 영식이가 엊저녁에 선 봤다는 처녀애도 함께 참가했다. 영식이 나이는 30을 갓 넘었고 그 처녀애는 서른살 밑이였다. 영식이 몸은 너무 마르고 그처녀애는 너무 뚱뚱한 편이였다. 영식이는 성격이 너무 내성적이고 어진데 그처녀애는 지나치게 활발한 편이였다. 涮牛肉(소고기 뎃침)에 소주를 먹고 노래방을 걸친 후 안해와 나는 곤하다고 택시에 앉아 먼저 돌아왔다. 와 보니 열시 반 밖에 안 되였다. 술을 마시면서 불량 정액 돼지와 후보돈 대체문제에 관하여 고사장한테 합리화 건의를 제기 했더니 자기는 그런 정황을 모르고 있었다면서 훗날 상세히 토론하자고 하였다. 고사장은 영식한테 80만원을 맡기면서 애들끼리 실컷 놀라고는 자기도 집으로 갔다. ‘아저씨, 아저씨하구 아줌마 우리집에서 하루밤 쉬고 내일 천안 시장이나 돌구 하루 휴식 하시게 하고픈데 내가 취해가지고 초대 할 수가 없어요, 량해 하시죠?’고사장의 인사말이였다. 걷발린 말이라도 그처럼 살갑게 해주니 마음이 훈훈하다. 엊저녁에 로임봉투를 들고 우리방에 들어와서 지금은 로임을 올려드릴 수 없다는 ‘곤난사정’을 말하고 6개월이 되면, 명년 일월부터 아저씨의 로임을 십만원 올려 주리라는 것이였다. 이것도 다른 농장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아줌마는 일년 후에 올려 줄것이라 한다. 크낙한 배려라 그 배려에 목이 메여 나는 더 힘을 뺄 것이다. 전날 안해가 나의 운수패를 일월이면 돈 많은 노친 생길거라 뗀 것이 딱 맞아 떨어진셈이라 하겠다.    ㅡㅡ13일 밤 11시에 씀.”   “또 하루가 흘러갔다. 아침에 사료를 먹이고 들어와 해장술을 한잔 했더니 입맛 없어 밥도 못 먹고 한잠을 잤다. 깨여보니 열두시다. 술을 마시면 자제력을 잃는건 왜서일까? 회식을 끝내고 먼저 와 잘라고 하는데 얼마 후 애들이 뒤따라 돌아왔다. 랭장고 여닫는 소리가 나고 뭔가 끓이는 소리가 나기에 한잔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 큰 방으로 나갔다. 호성이가 라면을 끓여 먹으려고 물을 끓이고 있었다. ‘두부는?’하고 내가 호성이와 물었다. 회식에 견결히 안 갈거라고 말했더니 안해가 슈퍼에 전화를 걸어 대두병 소주와 두부 몇모를 가져오게 하고 맛 좋게 볶아까지 놓았던 것이다. 어쩌다 한번쯤 회식에 빠지려고 하니 애들이 고사장한테 전화 하고 고사장은 ‘아저씨 못 모시고 올라면 너도 오지말어!’ 하고 호성이를 볶아대고 하니 하는 수 없이 갔다 오긴 했는데 늘 3-4차 하던 것이 일차만 하고 왔더니 술이 모자란듯 했다. 그래서 ‘13일 밤 11시에 씀.’해놓고는  나갔었는데 ‘소주하구 두부 리부장 가져갔슈.’하고 호성이가 알려준다. 나는 술잔과 저가락을 찾아 들고 리부장 방으로 갔다. 호성이도 라면을 끓여들고 들어왔다. 셋이서 큰 병 소주 하나를 거의 굽내며 헛소리 장단에 밤을 새웠다. 리부장은 자기네 리씨가 위대하노라고 리 성계요 리 순신이요 리 승만까지 렬거 하면서 얼끈한 소리를 쳐댔다. 나는 그것이 아니라고 일장연설을 퍼부었고 호성이가 전엔 깡패였노라고 큰 소리 치니 나도 뒤질세라 열여덟에 권총 차고 수백명 애들을 거느리고 싸댔노라 허풍을 쳤다. 오늘 도리켜 보면 절로 우수워 죽어버리겠다. 술을 먹으면 더 먹고싶고 나중엔 자제력을 잃는다. ‘사람이 술을 청하고 술이 술을 청하고 술이 사람을 청한다’는 말대로 내가 번번히 그모양이다. 원칙적인 일은 아니라고해도 거듭 되면 멍청한 성품이 보여지고 인격이 떨어진다.                                   ㅡ                                              ㅡㅡ  11월 14일 21시.”   “내가 금방 엎드려 필을 들었는데 안해는 설거지를 끝내고 들어오며서 말을 걸다가 멈추고는 ‘또 지장 준다고 욕 먹겠네.’하고 내가 뭐라 할 사이도 없이 막아버린다. 내 버릇이 얼마나 나빴으면 나와 말 하기까지 무서워 하겠는가? 이 못난것도 남정이라고 말을 나누고 싶어 그러는 거겠는데. ‘뭐 큰거나 쓰는것 처럼…’하며 안해는 또 텔레비 보러 나간다. 둘이서 잡담 하기보담 혼자 잡담 하는 것이 나로선 더 편하니깐 방법이 없다. ‘그러믄 쓰지 말까?’하고 내가 물으니 ‘아니요, 쓰더래두 나를 너무 납작하고 비참하게 만들지 마시오.’라고 알아듣기가 힘든 지시를 내리며 문을 닫는다. 나의 태도를 이르는 말인지 잡담 내용을 이르는 말인지 구분이 안된다. 글 쓰기라는게 사람에게 유익한 점이 많다고 보아진다. 낚시군이 낚시질이 사람에게 좋은점이 많다고 하듯이. 나는 돌아갈 때 낚시대를 잘 갖추어 갖고 갈 예정이다. 낚시질 하고 글 쓰고, 참으로 신선 같은 세상 따로 없겠다. 거기에 주색까지 겹치면 죽어지고 말리라.ㅡ수양버들 그늘 아래 김태공 삿갓 쓰고 대나무 아챙이 휘두를제 유유히 흐르는 두만강물에 천서만문 펼쳐진다. 내여인 따라주는 진로주 향기에 취해 꿈을 꾸는디 보글보글 생선국 향기가 넋을 깨운다… ‘一杯酒,三首诗, 酒一斗,诗百首’라고 시성(诗圣) 리 백이 그랬듯이 술술 넘어가는 것은 술이요… 조금 멋들어진 말구를 골라보려 생각을 더듬고 있는데 ‘떨꺽!’ 안해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통에 연필을 놓고 말았다. 시계를 보니 일곱시반 정각이다.‘왜 벌써 들어왔수? 텔레비나 좀금 더 볼거지.’‘지내 재미 없어요.’‘글쎄, 멋들어지게 한구절 쓸라했는데 뚝꺽 끊겼잖아…’ 하면서 나는 위에 쓴 한 구절을 읽어주었다. 제딴엔 괜찮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주색이란 말은 빼시오.’‘뭐? 술 없고 여자 없이 무슨 멋에 살게?’‘그래도 주색이 뭡니까? 나쁜 단어잼니까?’                     ㅡㅡ11월 15일 초저녁.”                                              “문을 잠그고 불을 껐다. 바깥방에선 호성이가 홀로 텔레비를 보고 있었다. 한달에 한번일까 말까 하는 부부 허리운동을 시작 하였다. 나의 입에서 풍기는 술, 마늘, 담배등 혼합제 악취에 까무라친다면서 운동을 빨리 끝내자는 건의에 나는 머리를 외로 돌리고 속도를 가했다. 50대 초반이면 한달에 두번은 쉽게 또한 응당 허리운동을 해야 한다고 보아진다. 헌데 우리는 년령보다 몸이 먼저 늙어졌는지 잘 되지가 않는다. 잘 안 된다고하여 맥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부부간아라면 방법을 대서라도 허리운동을 견지해야 한다. 그래야만 몸이나 정신이나 빨리 늙지를 않고 장수 할 수 있을뿐더러 부부간의 정도 새로워 지고 깊어 지고 젊어 지는 것이다. 잠에서 깨고보니 아침 다섯시, 그러니 아홉시간이나 꼬박 잔게다. 원래 안하던 허리운동을 하고나면 잠이 잘 오기 마련이다. 화장실에 가 변기에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거기에 애들이 가져다 놓은 소설책을 펼쳐 한조목 읽고 나와 불을 켜고 자리에 엎드려 ‘잡담’하는데 안해가 눈을 뜨고 시계를 보더니 ‘다섯시 반 밖에 안 됐구만’하고 아직 이르다는 뜻으로 중얼거리곤 돌아누워 인츰 드렁드렁 코를 골며 다시 자버린다. 화장실에 애들이‘장미와 포수’라든가 ‘보도방’이라든가 그러루한 책들을 어디에서 얻어다 놓으면 언제나 나지자마자 다 읽어버린 것이지만 한 밤중에라도 잠을 깨면 담배 한가치 물고 볼일도 없이 들어가서 반시간씩 읽고 나오군한다. 변기에 앉아 두다리가 저려나서 더 오래는 못 읽고. 침실에서 담배 피우는걸 안해가 질색 할 뿐만 아니라 나역시 싫으니깐 그러는 것이다.‘화장실에 가면 뭐가 그리 오램니까?’ 하고 묻는 말에 ‘남이 하는걸 책에서 한장면 다보고 나온게요.’하면 ‘에구 주책이야!’라고 대화는 끝나고 각자는 인츰 다시 잠들어버린다. 여섯시 반에 일어나 사료를 주고 돈분을 긁어 내리면 여덟시가 된다. 애들은 그때면 모두 배달 나가고 안해와 둘이 마주앉아 텔레비를 보면서 아침을 먹는다. 오늘은 나더러 혼자서 돼지 예방주사를 놓으라고 하니 다른 일은 젖혀 놔야겠다.                                                             ㅡ                                                     ㅡㅡ16일 새벽.”   “16일 저녁. 텔레비를 조금 보다가 들어와 한동안 안해와 잡담 하였다. ‘전번달 화식비가 5만원 초과 됐는데 사모님이 보태주겠다는 것을 싫다고 밀어버렸습니다.’나의 안해는 미자씨를 앞에서나 뒤에서나 사모님이라 불렀다. 그녀가 사장님이라 불러야 좋아한다는걸 눈치 챈지 오래면서도 한번 입에 오른 호칭이 잘 고쳐지지 않는 모양이다.‘우리의 주체사상은 돈을 벌어야 하거니와 남들에게 도움과 기쁨을 주어야 하는거죠?’ 안해의 말씀이다. ‘그런데 말이요, 예비돈 하우스 돈사를 개조 하겠다기에 내가 재료 구입 명세표를 해 줬는데 아침에 이부장이 나한테 하구 정심에 고사장은 하더라구. 나는 주지도 않았고 모른다고 이부장과 말했고 고사장의 물음엔 미처 해득하지 못 해 대답도 못 했소.’하는 내 말에 ‘앗!’하고 놀라는 안해, ‘그걸 내 보관 했습니다.’라고 한다. 코 막고 답답한 노릇이지, 내가 고사장한테 바친 것인데 그건 왜 가져다 감추느냐 말이다. 잃어 질까봐, 당신이 애 써 만든 자료인데 마구 뒹구니(고사장이 본 후 책상위에 놓아둔것) 청소 하면서 가져 왔다는것, 그러니 그들은 내가 그서류를 배사장한테 넘긴줄로 알고… 안해는 즉각 남 모르게 고사장의 책상위에 도루 가져다 놓았다. ‘저녁에 포도주 한잔 드시더니만 발가우리한게 우리 부인 고와졌네요!’하는 내 롱담에 안해는 웃음꽃이 활짝 핀다.‘어쩐지 한국에 와 술이 잘 안 됩니다.’ ‘음, 그래서 내가 약 먹게 설거지하고 들어 올 때 물 좀 갖고 오랬다고 심부름군인가고 큰 소리 치고 活洛丹환약 둬알 달라고 했더니 개한테 돌 던지듯 했군그래.’ ‘그렇잖구.’ ‘예전에 쥐 한마리가 술항아리에 빠졌댔소, 겨우 기여나온 그 쥐는 휘청거리면서 배를 잔뜩 내밀고 하고 웨쳤다오, 하하하…’ ‘나두 들었씀다.’ 쥐가 웨치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옛말을 이미 들었다는것. ‘나한테서 들었지?’ ‘예?...’ 그는 기억 못하고 있었다. ‘내가 이런 수수께끼를 낸 적이 있지? 이렇게, 옳지?’ ‘맞네요, 어데선가 듣던 소리다 했더니, 호호…’                           ㅡㅡ2001년 11월 16일”             
53    [한국 나들이]15. 서해 대교 댓글:  조회:1976  추천:1  2013-06-05
15.  서해  대교     한시간 푼히 달리던 차는 드디여 멈춰섰다. “사모님, 수고하셨어요!” 나는 차에서 내리며 인사치례를 하였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인사를 받았다. “그냥 하는 일인데요 뭐.” 아름다운 집 한채가 눈앞에 확 안겨왔다. 집뒤로 멀리에는 평택시인지 뭔지 층집들이 어렴풋이 보이고 그 집 한채뿐 보이는 것이라고는 없었다. 그래서 더욱 아름다워 보이고 돋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럴 수도 있거니와 확실히 아름답게 꾸민 장원다운 집이였다. 작은 아스팔트 길은 전문 그집으로만 다니기 위해 낸 것인것 같았다. 정차장으로 넓혀놓은 마당에 차가 들어서기 바쁘게 매력이 넘치는 30대 중반의 한 녀성이 달려나와 차문을 열어주며 허리를 굽힌다. “어서 오세요, 박사장님!” “잘들 지내시쥬? 이사장.” “덕분에요!”하며 리사장은 박사장과 악수를 나눈 후 나에게도 웃는 얼굴로 “어서 오세요!” 하며 허리를 굽힌다. 충남과 경기도가 맞붙은 서해안 지역에서 박 종필사장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간첩일 것이다. 이는 내 생각이고 다른 한가지는 앞으로 남의 차에 앉을 때 운전기사 뒷좌석엔 앉지 말아야 함을 느꼈다. 차가 멈추니 영접자가 제일 먼저 열어주는 것이 운전석 뒷문이였다. 만약 내가 박 종필씨가 앉았던 그자리에 앉았더면 얼마나 난처하였겠는가 말이다. “李朝农园”이라 누른 원목 커다란 나무판에 검은색으로 깊숙히 새겨넣고 반들반들 기름칠을 한 간판이 입구 위에 걸려있었다. 집안 장식 또한 아담하고 아늑하면서도 포근하고 정겨웠다. 우리는 삼면이 유리벽인 작은 방에 들어가 통나무 한토막을 반으로 쪼개여 번져놓은 듯한 상을 사이하고 마주 앉았다. 밑반찬 여섯 접시가 오른 뒤를따라 차거운 차돌 위에 편 생 홍어편과 뜨거운 철판위에 편 구운 소고기편이 올랐다. 생선회나 소고기 구이는 한국치고 꽤나 값이 가는 안주이다. 박사장은 나보다 주량이 컸고 사모님은 운전을 해야하므로 쥬스만 받아놓고 있었다. 셋이서 소주 한병을 금방 다 마셨을 때 고사장이 당도 했다. “어서 오세요!”하며 일어서려는데 나의 어깨를 꾹 누르며 오른켠에 앉았다. 내가 먼저 새 병을 따서 고사장 잔에 술을 따랐다. 그녀도 우리들 잔이 비여 있는 것을 보더니 술을 붓고 잔을 들었다.“불러줘 감사해요! 자, 다 함께 듭시다.”하며 잔을 비웠다. “친구가 출국하는데 짐이 많아 실어다 달라기에 공항 갔었어요.” 고사장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박사장님의 지시를 받자 초고속으로 달려 왔거든요, 몰카에 찍히지 않았는가 모르겠어요, 마침 길이 열려 거침 없었어요. 참, 오늘 술이 댕기네요, 한잔 더 줄래요?”하며 술잔을 나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내가 “왜 한잔뿐이겠어유?” 하는데 나의 왼켠에 앉은 안해가 술병을 앗아갔다. “나도 한잔 권합시다. 많이 돌봐 주세요.”하며 안해는 먼저 고사장의 잔에 붓고 그다음 박사장의 잔과 나의 잔에 부었다. 고사장 오기전에 박사장하고는 인사술을 나눴기에 제일 년하지만 고사장한테 술잔이 먼저 가게되는 것이였다. 권커니 작커니 술이 거나하게 되였다. 나의 안해와 사모님은 서로 자기가 술값을 치르려고 생갱이질 하다가 결국은 사모님의 승리로 끝났다. 우리는 모두 사모님이 운전하는 차에 않았다. 안해는 나의 왼켠에 점잔하게 떨어져 앉았는데 고사장은 오른켠에 딱 붙어 앉았다. 얼굴이 뜨거워났지만 그렇다고 밀리여 안해쪽으로 엉덩이를 옮겨놓을 수도 없는 일이였다. “급히 마셨더니만 취하네요”하며 나의 팔을 껴안고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 그의 부드러운 가슴이 엷은 옷을 사이두고 나의 큰 팔에 대여 전률을 느끼게 한다. 남들 보기가 좀 민망스러웠지만 결코 그녀를 물리칠 수는 없었다. 나는 몸을 뒤로한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무것도 모를는척 하는 것이 나로선 최선의 방토였다. 겉으로는 모르고 자는척 했지만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곁사람보기가 부끄럽거나 무서워서가 아니임을 누구나 다 알것이다. 두 남녀가 술에 취한척 눈을 감고 붙어 앉아 황홀한 상상을 피르고 있음을 누가 모를라고? 눈이래도 감아야지 부끄러워 어쩔바를 모르겠다. 이것이 바로 “귀 막고 방울 훔치기”나 “눈감고 따웅하기”와 같은 짓이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간 그렇게 앉었고 환상의 나래를 펼치고 싶었는데 차는 인츰 서해 대교위로 달리고 있었다. 다리의 넓이는 30여메터, 길이는 7300여메터, 다리 북쪽은 경기도 평택이고 건너가면 충청 남도라고, 어느 때 착공하고 어느 때 준공했는데 서해 고속도로 남북을 이어놓은 중요한 다리라고 이것 저것 박사장은 열심히 설명을 해주었다. 우리는 다리 남쪽머리에서 사진 몇장을 찍고 다시 북쪽으로 건너와 다리목 아래로 내려갔다. 거기가 훌륭히 꾸며놓은 놀이터이고 유람지였다. 대교를 아래에서 사선으로 쳐다보니 참말 멋지였다. 장강대교나 황포대교같은 큰 다리들을 차타고 지났을 뿐 이같이 가까이에서 전문 관상한 일은 없었다. 옛날 우리 “남도마을” 조무래기들은 고동하에 놓인 이도로부터 팔가자로 통하는 “이팔교” 다리 밑에서 낚시질도 하고 미역도 감으며 많이 놀았었다. 그때엔 그다리가 세상에서 제일 큰 줄로 알았었는데 서해대교처럼 크고 아름다운 다리가 있다니! 이다리를 건너 얼마 안가면 내가 땀 흘리던 서해안 고속도로 웅천 구간에는 묻어 둔 추억이 있다. 언제 다시 가서 그 추억을 파 볼 수나 있을런지… “빨리 와요!”하는 안해의 부름소리에 잡생각에서 깨여나 머리를 돌려보니 많은 사람들이 찌그러진 철근 바자틈 사이를 지나 바다가의 새하얀 모래톱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내가 철근 바자 앞에 다가섰을 때 놀이터 일군이 틈새 출입을 차단하고 넘어진 철근 울타리를 바로 세워 철사로 동이였다. 해수욕장과 같은 울타리 안은 수금 놀이터이고 해가 넘어가야만 개방하는 밤 놀이터라는 그것이다. 헌데 누군가가 일군들이 보지 않는 사이 허술한 거리망을 무너뜨리고 길을 개척해 놓은 것이였고 나의 안해도 약빠르게 건너가 마치도 장하게 “3.8선”이나 뛰여 넘은 듯이 “빨리”를 웨치고 손을 저으며 야단이다. 나혼자 “이북”에 남았으면 어쩌랴싶어 발돋움하며 흰 모래밭 멀리만을 바라보며 안해외의 그누굴 찾으려 애썼다. 멀리라고해도 백메터 안팍, 그다음은 작은 산굽이가 시야를 막아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그들은 벌써 산굽이 뒤에 숨겨진 것이 아닌가… 이때 누군가가 나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아저씨, 뭘 그렇게 봐요?” 고사장이였다. 반가웠다. 와락 끌어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았다. 멀잖은 곳에서 안해가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깐. “속 상해 말아요, 곧 통일 되고 이산가족 상봉 할 날이 올거니깐요!” “나는 고사장님네 어데 있나 찾고 있었습니다.” 내 말이 사실임을 그녀는 알면서도 짐짓 딴전을 부렸다. “거짓말, 아줌마 잃어버릴까봐서…” “다 큰 사람 뭐 잃어질라구요? 고사장님 잃어버릴까봐 찾았는데요 뭐.” “나는 아긴가요? 잃어지게.” “글쎄요… 근데 박사장님네는 어델 갔습니까?” “취했다고 저쪽에 앉아 쉬고계셔요.” 해지기 전엔 들어 갈 수도 나올 수도 없는터라 안해는 하는 수 없이 홀로 모래펄을 거닐어야 했다. 안해의 뒤 모습이 산굽이 뒤로 사라지자 나는 천천히 그러나 힘 있게 고사장의 작은 어깨를 한팔로 껴안으며 “박사장네 계신데로 갑시다.”라고 말하였다. 그녀는 “박사장네 보는데요.”하며 몸을 돌려 나의 품에서 어깨를 빼버렸다. 차에 앉아선 취한척 나의 팔에 매달려 있더니만 금시에 술을 깼다는 것인지 부끄러움을 탔다. 나는 돌아서서 천천히 그녀를 따랐다. 박사장네 부부는 멀지않은 곳 기념탑 층계에 나란히 앉아 “쌕쌕이”를 마시고 있었다. 우리에게도 한통씩 넘겨주었다. “사진 찍어요!”하며 사모님은 음료수 통을 내려놓고 층계 앞으로 몇발자국 나가 돌아서며 사진기를 내들었다. 박사장이 앉은 뒤층계에 내가 고사장의 어깨를 끼고 앉았다. “까치ㅡ하고 불러요! 자, 하나, 둘, 셋! 까치ㅡ” 사모님은 혼자 “까치”를 부르며 샤타를 눌렀다. 나는 속으로 까치를 부르며 웃노라 신경을 썼는데 훗날 사진을 받아 볼라니 운건지 웃은건지 분간이 안된다. 술 취해갖고는 사진 잘 되는 법이 없다. 우리는 몸을 휘청거리며 음식점에도 들어가 보고 큰 슈퍼에도 들어가 보았다. 먹을것도 살것도 없지만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시간을 보내야 했다. 박사장네나 고사장은 서해대교에 한 두번만 와 본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를 접대하노라 시간을 팔며 놀아주는 것이 더없이 고마웠다.  석양에 붉게 물든 바닷물, 작은 산봉과 건물들, 그리고 웅위한 대교, 그야말로 가관이였다. 산뒤로 숨는 해와는 달리 바닷물 속에 가라앉는 해는 재빨리 대지에 먹물을 뿌려놓았다. 전등이 켜졌다. 건물의 변두리 마다에, 대교의 선과 각마다에, 산봉의 바위와 소나무 가지에, 바닷가의 유보도에도 고속도로 량켠과 중심선에도 채색 네온등이 줄을 섰다. 그러고도 설차지 않았던지 건조물과 산봉에는 여러면으로 조명을 비추었고 하늘 밑에 닿은 분수는 불기둥이 솟는듯 옥기둥이 몸부림 치다가 와그르르 무너지는듯 황홀하다. 자연이 던져주는 찬연한 해빛 아래에서나 불타는 저녘 노을 속에서도, 조물주인 인간이 창조한 등불에 잠겨서도 서해대교는 아름다웠다! 비바람 속의 그 모습과 하늘을 가르는 번개빛 속의 그 모습, 그리고 흰 눈으로 덮씌인 그 모습과 눈보라 속의 그 모습은 또한 어떠할까? 직접 볼 수는 없지만 나는 완전히 상상 할 수가 있었다. 오늘 본 서해대교의 아름다운 정경을 녀성다운 차분함과 매력이라고 한다면 상상속의 그 모습들은 사나이 같은 기백이고 웅위로움이고 영준함이리라! 대교의 야경까지 구경 한 후 우리는 사모님이 모는 차에 다시 앉아 그리 멀지 않는 원 바닷가로 갔다. 바닷물 위에 감도는 비린내가 시원한 서쪽 바람에 실려 한가슴 안겨온다. 정신이 맑아지고 기분이 상쾌 해진다. 바닷물 속에 몸을 던져 열기를 빼고 피로를 풀고픈 마음이다. 바닷가 둔덕 위엔 해물 먹거리 포장마차가 줄 지어 섰다. 우리는 다짜고짜 첫집으로 들어갔다. 조개구이 전문점이였다. 목탄불 화로에 적쇠를 올려놓고 산조개를 굴리며 구웠다. 조개란 맛 좋은 해산물임을 나는 썩 잘 안다. 가스 구이로 생산을 했었으니 적쇠구이 또한 내항이다. 우리 형제는 1989년부터 4년간 대련 바닷가에 공장을 세우고 조개만 가공 하였었다. 우리 자체로 연구 개발한 식품으로서 전국에 소문이 났다. 국내의 일곱개 큰 매체에서 소비자들의 투표를 받아 평의한 결과 금상을 따냈다. 우리는 그런 평의 활동이 있는줄도 몰랐는데 증서와 상컵이 날아왔다. 두해 후, 일본에서 현대적인 설비를 만들어 중국에 팔았다. 우리가 장춘 의료 설비 공장에가 만든 토박이 기계는 인민페로 이천원밖에 들지 않았는데 한대에 인민페로 20만원이나 하는 일본기계를 그당시 돈내고 사기는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이 없었다. 하기에 물물무역 형식으로 일본기계와 갓 잡은 산조개를 교환 하는 것이였다. 가공용 기계를 들여오고 가공해야 할 원자재를 내보내니 그 기계는 어데다 쓴단 말인가? 일년 사이에 전국적으로는 잘 모르겠으나 대련지구에만 그런 기계가 일곱대나 들어왔다. 일년 사이에 백 사십만원어치의 산조개가 일본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그 조개 또한 아무 조개나 다 되는 것이 아니였다. 품종이나 크기는 딱 우리가 개발한 그 표준이였다. 맛과 영양가치가 으뜸인 “화합(花蛤)”이라 부르는 그품종 조개는 그지역에 제일 많았고 제일 쌌었는데 제일 비싸졌고 인츰 멸종 되여버렸다. 물론 일본에서 들여온 기계들도 인츰 페철로 되여버렸다. 실제상 그런 기계가 전국적으로 두석대만 있으면 족한 것이였다. 토박이 기계로 당금 멸종 돼가는 “화합”만 바라고 있다간 망하는 길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감촉한 우리형제는 새로운 개발을 구상하였다. 바닷가에 공장과 연변대학 교수 휴양소를 짓기위해 산지를 사기로 유관 부문들과 협의 하고 건물설계도 초본을 그린 후 대련에 있는 “중국설계원 동북분원” 전문가들을 찾아가고 불러오고 현장에 함께가 답사도 하였다. 바다를 향한 산비탈의 땅 한평방메터에 10원씩, 만 오천평방메터를 사기로 했으니 십오만원이 수요된다. 이돈을 마련 할 방도가 없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우둔하게도 당시 현대그룹 총재인 정 주영 회장님 앞으로 서한을 보냈다. 우리의 구상을 알려드리고 도움을 청구했다. 가망이 없는 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물에 빠진놈이 지프라기라도 잡는다는 격으로 천만분의 일의 요행이라도 바라며 글을 썼다. 일생 성공 할만한 기회는 누구나 세번밖에 없는 법이라고, 그것을 잡아야 한다고 누가 연구 했는지 말 한다. 우리는 기회를 놓쳐버렸다. 우리가 사려던 땅은 이듬해에 대련시 경제 개발구에 귀납되여 값이 20여배로 뛰여 올랐다. 대련에서 실패하고 우리는 연길로 돌아와 인츰 액화가스용 불고기 구이로 생산 회사를 세웠다. 우리가 자체로 연구 설계하고 국가 특허권을 받은 환보식 구이로였다. 그것 역시 두해도 못 가 모조품이 나오고 우리의 발전을 제압 하였다. 우리가 만든 구이로는 연기가 나지 않는다. 연기에 그을린 고기에는 연기에 그을리지 않은 고기보담 암 유발 물질인 “carcinogen”이 36배나 더 많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으름 냄새에 먹는거라고 곰같은 소리를 한다.  밤 열시, “이조농원”에 다시 왔을 때 대리기사 두사람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고사장을 집에까지 바래고 센터에 이르니 밤 열두시가 지났다. 달포가 지났을 때 나는 또 박사장네 집으로 봉침술(蜂针术) 배우러 가게 되였다. 봉침술이란 벌을 핀센트로 집어 돼지의 혈위나 환위에 가져다 대면 벌은 궁둥이의 침을 돼지의 피부에 박고 독을 쏜 후 죽어버린다. 이 방법으로 돼지의 많은 질환을 치료 할 수 있는 것이였다. 종돈은 체중이 큰데다가 물청소로 인해 습해진 콩크리트 바닥에 하루종일 엎드려 있다보니 관절염에 걸리는 페단이 많았는데 관절염에 걸리면 바로 서기도 바쁘므로 페돈으로 되고 마는 것이였다. 이런 돼지가 종종 생겨나 천안에 있는 통졸임 공장이나 소시지 공장에서 기중기와 트럭을 몰고 와 실어가군 하였다. 한창 정액을 많이 생산 할 돼지인데 서지를 못하니 아까운대로 버려야하는 것이다. 며칠 련속 끗어내고 하루에 두마리씩 끗어낼 때 고사장은 급해났다. 리부장 동국이 영식이등 몇이 급사한 돼지를 고사장 몰래 웅덩이를 파고 묻어버린 일도 있었다. 고사장이 알게되면 그애들이 괜히 욕을 먹어야하니깐 그러는 것이였다. 고사장은 천안에서 유명하다는 보살,풍수쟁이, 점쟁이들을 데려 오군 하였다. 센터 네귀퉁이에 향불을 피우고 둬뼘되는 쇠꼬챙이를 땅에 박아놓고 가버리는 이가 있는가하면 수맥을 끊는다며 방 귀퉁이 장판 밑마다에 붉은 차돌같은 것을 깔아놓고 가버리는 이도 있었고 밤 열두시에 센터 주위에 막걸리를 뿌려 굶주린 귀신을 막으라 하고 가는 점쟁이도 있었다. 밤중에 막걸리를 뿌려 굶주린 귀신을 고시는 일은 매번 나에게 맡겨졌는데 고양이한테 생선 맡기는격, 애들이 다섯병 사오면 내가 몰래 한병 마셔버리고 남은 네병만 뿌려주군 하였다. 다섯 귀신한테 네병만 주어서 그런지 잡혀갈 놈은 여전히 잡혀가고 효험이 없었다. 고씨는 미신도 믿어보고 과학도 믿어보는 그런 사람이였다. 관절염에 봉침이 최고라는 조언을 얻어듣고 참고서적을 얻어다 나한테 주더니 인츰 꿀벌을 한통 사다놓고 얼굴을 가리우는 망사모자와 고무 장갑, 벌 채집통과 핀센트도 사왔다. 나는 인츰 돼지한테 차례로 관절부위와 회음혈(会阴穴)에 벌침을 놓기시작 하였다. 회음혈에 벌침을 놓으면 정액 수량과 질량을 높인다고 책에 씌여있다.  “아저씨, 박사장한테로 봉침 배우러 가십시다. 옷을 바꿔 입고 나오세요.” 고사장은 깨끗한 돈사를 둘러보며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천정의 먼지를 털고 고압 분무기로 물청소 하고 돼지마다 샤워시키고 소독수까지 분무했으니 깨끗하지 않을 수 없다. 고사장은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차의 앞문을 열었다. 그와 나 둘뿐이니 그의 곁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되였다고 생각한 것이다. “박사장이 아줌마를 꼭 뎃고 오라네요, 불러와야겠어요.” 퍼그나 달갑잖은 표정이였지만 어쩔 수 없는 그였다. 나는 안해를 불러오고 뒷자리에 함께 올랐다. 안해는 안해대로 박사장한테 간다고하니 흥이나서 야단이다. 박사장 또한 나보담 왕누님을 더 반길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깐 할 일도 없이 꼭 데리고 오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그래도 봉침인지 벌침인지 구실 달고 있는데 말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마치 나의 안해와 박사장이 무슨 특수한 관계라도 있다고 암시 하는 듯 보인다. 글이란건 원래 남자 여자 서로 좋아 하는 것을 써야 재미진 법인데 박사장이나 안해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 안지가 나보다 몇년 앞이니 서로가 구속이 없고 안해 또한 작은 산골짜기 센터에서 일로 시간을 보내려니 밖으로 놀러 나간다고만 하면 박사장이 아니라 누구라도 좋다고 날뛰는 성미다.  박사장은 설사하는 갓난 새끼돼지 회음혈에 봉침 놓는 것을 간단히 보여주네 마네 하고는 또 사모님과 함께 우리들을 평택시에서 제일로 크다는 음식점으로 싣고 갔다. 센터에 있는 사이 박사장네부부와 여러번 함께 술을 마셨다. 중국에 돌아온 후 박사장과 연길에서 한번밖에 만나지 못했다. “다섯금화”의 배동하에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도 갔었다. 배사장과도 한번 만났다. 고사장도 백두산 관광으로 재성이 해룡이를 데리고 연길에 왔었다는데 섭섭하게도 련락이 없었다. 술 한잔이라도 사고 싶었는데… 
52    [한국 나들이]14. 박사장과 사모님 댓글:  조회:1662  추천:1  2013-06-04
14.  박사장과  사모님                                                                 우리부부는 센터에 온지 달포 되였을 때 휴식일을 빌어 박사장네 집으로 인사도 할겸 놀러 갔었다. 그의 소개로 센터에 오게된 우리가 아닌가? 호성이네가 바로 박사장 뒷집 건너에서 사는터라 우리는 고사장이 안배대로 호성의 차에 앉아 평택시 교구로 갔다. 박사장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배사장보담 두살 위인 그역시 드물게 잘 생기고 건장하고 호방한 사나이였다. 주정부 공무원이였던 나의 안해는 연길에서 그와 함께 술 마신적도 둬번 있은터라 초면이 아니였다. 사람마다가 고향을 멀리하고 시가지로 들어가는 그세월에 박 종필씨는 축목업 대학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집마당에 작은 우리를 짓고 돼지를 키우기 시작하여 20년이 흘러갔다. 오늘 그는 전국 양돈왕으로 되였고 그의 사업은 국외로 뻗히고 있다. 그의 집엔 김대통령이 수여한 “감사패”도 걸려 있었다. 나라 양돈사업에 한 공적과 불운한 이웃을 돕고 고향민들을 부추켜 잘 살게 한 공덕을 칭송하였다. 전화벨 소리가 울리더니 팩스기가 돌아갔다. 연변 돈화시 왕사장한테서 보내온 팩스라 중문으로 찍혀 있었는데 마침 우리가 곁에 있었기에 번역해 줄 수 있었다. 왕 강은 돈화시에서 규모가 제일 큰 자동차 부품 판매회사를 갖고 있었는데 박사장이 연변에 다니면서 사귄 30대의 젊은 친구였다. 이번에 주정부에서 조직한 민간 상무 고찰단에 들어 한국으로 오게되는데 보내온 팩스 내용은 열 다섯명의 고찰단 성원 구성과 한국에 온 후 열흘간의 일정 안배였다. 일정에는 고찰단이 종필네 한길농장을 참관 고찰 한다는 조목도 들어있었다. 연길 의란진 춘양촌에 세운 농장만 한길농장인줄 알았었는데 사실은 원유의 이름을 그대로 그곳에 옮겨간 것이였다. 왕 강의 상무 고찰 목적은 한국 자동차 부품들을 제 3자의 손을 걸치지 않고 직접 자기가 수입해다 판매 할 수 있는 통로를 찾으려는 것이였다. 성사 하였는지는 몰라도 그들이 쌍용 자동차 회사의 유관 인원과 상담 할 때 안해와 나는 통역으로 한번씩 불리워 갔었다. 박사장의 안내하에 우리는 그의 돈사를 돌아보았다. 몇백마리의 엄지돼지는 박사장 부인님께서 직접 마을 사람들을 거느리고 사양하면서 달마다 천여마리의 새끼 돼지를 받아내고 있었다. 부인은 교포일군들의 끼니도 직접 책임지고 한집 식구처럼 함께 먹으며 지냈다. 그많은 돈을 벌고서도 부부가 손잡고 부지런히 돌아치는 그들을 보면서 하고 나는 못내 탄복 하였다. 박사장의 두 아들은 고교에 다니고 있었다. 큰 놈이 금년에 필업하면 유럽으로 류학 보내 양돈업을 전공하게 할판이라고 한다. 종필네 양돈장엔 만 여마리 고기돼지가 크고 있었는데 5-6개월씩 먹이면 출하 하니깐 달마다 한번씩, 한번에 근 천마리씩 서울에서 내려와 실어간다고 한다. 만여마리라는 많은 돼지를 돈 벌러 건너간 연길 나그네 넷이서 관리하고 있었는데 돈사의 모든 것은 기계화로 되여 있기에 책임감만 가진다면 쉽게 할 수가 있었다. 사료회사에서 포장도 하지 않은 건사료를 트럭으로 실어다가 직접 네개의 사료 공급 시스탬ㅡ철탑식 저장고에 넣어준다. 아침 저녁으로 하루에 두번씩 스위치 하나만 꾹 누르면 시스탬이 작동하여 저장고 속의 마른 사료가 자동으로 오륙백칸의 돼지 우리, 수천개의 철 구유마다에 정량으로 수송된다. 건사료를 먹은 돼지들은 물을 많이 먹기가 마련이니 수돗물은 24시간 끊이질 않고 공급하는데 철구유 윗쪽마다 자동 물주리(물면 물이 나오고 입을 떼면 막히는)가 줄줄히 달려 있다. 돼지 분변 처리도 당연히 자동화이다. 설비의 수리와 보양은 설비를 공급한 회사에서 완전히 책임진다. 그러니 사양원의 일은 전기 스위치를 누르는것, 사료 시스탬과 급수 계통에 이상이 없는가를 감시 하는것, 덜 새여 내려간 분변을 긁어 내려뜨리는것, 그리고 돈사를 정기적으로 소독 하는 것이다. 돈사는 엄청 큰 봉페식 2층 벽돌집 두채에 층마다 사료 시스탬과 분변 처리 시스탬이 각기 하나씩 설치되여 있었다. 중국에서도 큰 양돈장들은 아마 봉페식이고 모든 것이 자동화로 되여 있을 것이다. 비록 내가 보아온 것들은 죄다 로천식 우리에 철바가지로 물사료를 퍼주는 그런 작은 사양장들 뿐이지만… 30년전, 군대 종합 농장에서 일년 남짓이 돼지를 먹였었다. 그 때의 겨울은 어쩌면 그리도 추웠던지? 헌데 봉페식 돈사가 아니라 토피(土坯)를 쌓아 북쪽만 막고 남쪽은 통나무로 울타리를 삥 둘러놓은 원시적인 우리였다. 서른마리도 안되는 돼지를 우리 쫄도병 넷이서 힘들게 먹였다. 여름에는 풀밭으로 몰고 다니며 풀을 뜯기였고 겨울에는 벼겨를 사다가 물을 뿌려 비닐 하우스 땅 밑에 묻어놓은 큰 오지독에 담아 발효시킨 후 시래기를 섞어 부글부글 삶아 먹였다. 펄펄 끓여 주면 뭘하게? 구유에 붓기가 바쁘게 얼음 덩어리로 되여버리는데야. 천지가 얼음장인 세월에 왜 따스한 봉페식 돈사를 생각하지 못했던 것인지 알고도 모를 일이다. 한 밤중, 설한풍이 창문을 두드릴 때면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몇리밖의 련대 탈곡장으로 뛰여가 벼짚북데기를 한짐 꿍져지고 사나운 눈보라와 씨름하며 돼지우리에로 기여와 새끼돼지들을 덮어주었고 낡은 솜군복을 뜯어 체질이 약한 놈들에게 “외투”를 해 입혔다… 그해 나는 전퇀에서 하나밖에 없는 남들이 우러러 보는 삼등 공신으로 당선 되였다. 도리켜 보면 참으로 우숩고도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다. 박사장의 돈사를 돌아 보면서 내가 만약 다시 돼지를 기르게 된다면 절대로 옛길로 가지 않을 것이라 속다짐 하였다. 박사장은 우리부부를 차에 앉히고 이미 준공되고 바야흐로 사용에 교부될 한길농장 새 돈사 건설 현지로 갔다. 년간 10만마리 고기돼지를 생산 할 수 있는 양돈장을 세운 것이다. 그는 국내 돼지고기 수요가 만족 되였으므로 국외에로 진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연길에 와 농장을 세웠고 자지방에 막대한 “돼지굴”을 지은 것이다. 국도로부터 지방도로를 거쳐 농장에 이르기까지 길목마다 “한길”을 가르킨 도로 표시판이 세워져 있었다. 나라 양돈협회 주석인데다 한길농장 또한 전국의 으뜸인지라 참관이나 자문, 상담 하고저 찾아오는 사람들로 줄을 섯는데 길을 몰라 고생이고 전화기로 가르켜 줄라니 시간 랑비가 대단하였다는 것이다. 박사장네 새농장에서 멀지않은 곳에 고사장이 새로 세우고 있는 경기도 돼지 인공 수정 센터가 있었다. 현재 경영하고 있는 충남의 센터보다 곱절 더 크고 모든 것이 자동으로 돌아가게끔 할 판이였다. 사료도 비닐 바가지로 퍼주지 않고 자동으로 수송되고 분변도 철편 갈퀴로 긁지 않고 절로 떨어져 내리는 그런 돈사다. 새로운 센터가 운영 되면 고사장은 우리 몇몇만 데리고 이사오고 충남의 것은 배사장한테 다시 넘겨 줄 것이라고 한다. 고사장의 새로운 돼지정액센터가 가동 되여야만 박사장의 몇 십만마리를 사육하는 양돈장이 돌아 갈 수 있고 박사장의 새 양돈장이 가동 돼야 고사장의 새 센터가 살아 갈 수 있는 그런 사이, 병존하며 서로 도와야만이 잘 될 수 있는“상보상성(相辅相成)”의 관계였다. “고사장은 인제 가만히 앉어 돈 벌게 됐어요.” 참관을 끝내고 돌아오면서 하는 박사장의 말이다. 고사장 센터의 돼지정액을 박사장네 농장에서 전부 받아 써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센터의 달 평균 수입이 천만원을 넘기므로 이제 새 센터의 달 평균 순 수입은 이천만원 쉬히 넘길 것이라 그이야기다. “원래 물 장사 마른 돈 버는 법이 아닙니까? 허허허…”박사장은 유모감도 뛰여났다. 고사장이 이천만원씩 번다면 박사장은 얼마씩 벌것인가?ㅡ나는 박사장의 말을 들으며 홀로 주먹구구 치다가 엄청난 천문수자라서 결과도 못 보고 그만두었다. 박사장네 집에 돌아와 보니 사모님은 멋진 스타일로 변장하고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금전 돈사에서 작업복 차림에 새끼돼지를 안고 돌아치는 모습을 보았을 때 건강하고 일 잘 하는 텁텁한 농촌녀성으로 보였고 박사장에 비해 너무나도 짝진다고 생각 하였었다. 헌데 웬걸, 입호단장이라고 좋은 옷 입고 얼굴에 분가루를 조금 뿌려 놓으니 몰라보게 변하였다. 호리호리하고 아름답고 젊고, 서울의 어느 귀부인도 따를 수 없을 형편이고 박사장쪽이 되려 많이 찌불어 보이는 판이였다. 아마 이럴 때엔 “사모님, 미인이십니다!”하고 찬사를 올려야 할 것인데 나이 먹은 놈이 주책 없는 짓이다 싶어 목구멍에까지 올라온 말을 삼켜버렸다. 고 미자씨보다 한살 위라는 사모님은 되려 그보다 더 많이 젊어 보였고 아직도 청춘의 활기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고사장도 조금만 치장하고 꾸미고 가꾸면 박사장 사모님보다 썩 나으련만 그녀는 그저 입술을 약간 칠하는 정도밖엔 아무것도 없었다. 박사장의 봉고차는 사모님이 핸들을 돌리는대로 어데론가 향해 달리고 있었다. 박사장은 나의 옆 운전석 뒤자리에 앉아 누구에겐가 전화를 치고자 부지런히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아마 잘 안 통하는 모양이였다. 까아만 봉고차는 마을의 작은 길을 벗어나 큰 도로를 타고 한참을 달리다가 다시 작은 길로 접어들었다. 큰 도로던 작은 길이던 다가 아스팔트라서 하나 거침이 없었고 시속은 시종 백키로를 넘기고 있었다. “운전 기술 참 대단하시네요!” 조수석에서 안해는 찬탄을 금치 못하였다. “뭘요, 그저 수수한데요.” 종필씨 안해의 겸손한 대답이다. “거 다 이 스승님의 덕분이쥬.” 종필씨가 허허 웃으며 끼여 들었다. “제요, 저양반 기사노릇 이십년 했어요. 처멘 태워줘 좋더니 날 갈쳐 놓곤 부리기만 하는거 있죠?”“스승님 덕분”에“불만”을 토하는 사모님이였다. “참 수고 많으셨군요, 뽀너쓰 많이 받으세요.” 나도 한마디 끼였다. “뽀너쓰유? 줄라니 싫다는디유, 뽀뽀도 주고 키쓰도 주고 밤낮으로…” 종필씨의 롱담끼가 막 터지려는데“전화 왔어요! 전화 받으세요…”하고 그의 핸드폰 신호가 울리였다. “예예, 고사장님, 왜 통화 안 됐었지유?...오, 그래유?  우리 지금 이조농원에 가는 길이우… 맞쥬… 맞어유, 그리로 와유… 기다릴테니 꼭이유…‘뽀너쓰’ 토론 중이라 전화 끊습니다…아따 참말로 와 보면 알거구만유. 끊습니다.” 그는 핸드폰을 접으면서 “인천공항 갔대유.”라고 한다. “인천공항에서 오시믄 당신 뽀너쓰 줄거죠?” 이번엔 사모님이 말을 뗐다. 그녀의 말은 롱담 반 진담 반으로 들렸다. 웃으며 떠드노라 차속도 떨어졌다. 박사장은 술 한모금만 마셔도 안해한테 차 핸들을 몰수 당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렇게 해야한다! 가정에서부터 음주운전 단속과 방지에 전력 해야지 경찰아저씨들의 힘만으로는 천만 가당찮은 일이다. 그처럼 애쓰는데도 얼마나 많은 아까운 생명들이 음주운전 사고로 불행을 당하고 있는지 헤아릴 수가 없다. 술 마신후 요행을 바라며 핸들을 잡는 일이 절대로 없어야 할 것이고 박사장님네 부부처럼 자각적으로 교통 규칙을 지키고 자기의 생명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아끼고 지켜야 할 것이다! 사모님은 남편의 음주운전 단속만이 아니라 가정생활로부터 사회활동, 양돈 사업에 이르기까지 내조작용을 출중히 하는 훌륭한 동반자였다. “성공한 남성의 뒤엔 위대한 녀성이 서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나의 뽀너쓰야 당신거 아니유? 남 줘두 되것수?” 박사장은 하하하 크게 웃으며 안해의 롱담을 받았다. 그 안해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보관원 맘대로 하는거 아닌가요? 남 줬다고 뭐 자리나 나는가, 자각적으로 영수증 떼여다 바칠리도 없고한데. 주인한테 들키는 날이면 큰 일 날 것이란걸 잊지 마시고 들키지만 말아요.” “알것습니다, 주인님! 헌데 그 고사장 성질 사납고 팩해 뽀너쓰 못 받아요. 누가 줄라겠어유? 이봐요, 왕누님! 이 형님 뽀너쓰 많이 드리쥬?” 한일 남편을 위해 차를 몰았다는 사모님더러 남편한테서 장려금이나 많이 타라고 그녀의 방식대로 롱담 절반 진담 절반 한다는 것이 장려금을 한국식대로 뽀너쓰라 했고 보너스를 발음법에 맞추어 된소리 조금 낸 것이 뽀뽀요 키쓰요하며 롱담거리로 돌다가 다시 돌아 온 것이다. “왕누님”은 성이 왕씨라서가 아니라 나의 안해를 두고 이르는 박사장만의 특별한 존칭이다. 나의 안해는 전(全)씨라 단위에 나가면 “전서기”라 불리우고 집에 오면 “여보” 아니면 “어이”로 불리운다. 함께 일하고 함께 노는 친한 녀동료들 중 나이가 제일 많다보니 모두들 “全姐(전언니,전누님)”라 불렀고 친언니 보담도 더 믿어주고 따라주고 존경해 주었다. 박사장과 연길에서 만나 함께 술 마시고 놀 때 “칠선녀”들이나 “다섯금화”들은 입만 열면“쵄제”이니 박사장은 하도 궁금하여 곁에 앉은 복자씨와 그것이 뭔 소리냐고 몰래 묻게 되였다. “쵄제란건 순수한 중국말인데요…” 남의 뒷공론 하는것 같아 계면적은 생각에 낮은 소리로 물었더니 복자씨는 아무런 구애 없이 기다렸다는 듯이 높은 소리로 대꾸했다. “쵄은 성씨 올 전, 모땅다라는 뜻이구요, 제는 언니 누님이란 뜻입니다. 쵄제는 우리들을 골고루 사랑하고 우리들은 쵄제를 존경합니다. 쵄제는 제일 큰 언니 누님, 제일 높은 언니 누님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챈제는 왕누님이구먼…” 연신 머리를 끄덕이며 설명을 듣던 박사장은 쵄자를 챈자로 번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왕누님! 박 종필이란 사람도 챈제를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박수소리 속에서 그가 잔을 추켜들자 좌석 전체도 일어섰다. “자, 여러분! 왕누님의 이쁨과 기쁨을ㅡ 위하여!ㅡ”하니 다 같이 “위하여!”를 웨치고는 잔을 굽내고 다시 열렬한 박수를 쳤다. 이렇게 “왕누님”이란 특이한 이름이 몇해전 연길에서 탄생한 것이다. “왕누님 이젠 년세가 많으셔 뽀너쓰에는 뒤전이랍니다. 아마 저축이 퍼그나 많은가 보죠 뭐.” 박사장의 묻는 말에 내가 안해 먼저 입을 열었다.  “형님한테 남겨두면 안 좋을텐데…” 박사장의 말이다. “남겨 둘 새가 어디 있다구요? 달라는 사람도 많을게고 주고싶은 사람도 많을게고 모자랄거야요.” 나의 안해도 뒤질세라 공격 태세로 끼여들었다. “남자들은 뽀너쓰를 자꾸자꾸 써야써유. 마님 모르게…” “그럼요, 유통 기한이 지나면 끝이랍니다…” “얼마나 유통 했는지 바른대로 대시요.”하는 쵄제의 말을 이어 사모님은ㅡ  “바른대로 댈리 있겠어요? 그러니 전 운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따라 다니면서 우리집 재물 관리를 철저히 하는거얘요, 방임하면 언제 어떻게 어데로 새여 나갈지 모르잖아요.”라고 한다.  “실증 났어도 남 줘서는 안되고, 여자들은 그래요.” 나의 말에 앞 좌석에서 “남자들 그런거얘요!”하고 이구동성으로 달려든다. “집에 꽃은 남이 꺾을까 눈 부릅뜨고 밖에 꽃에만 눈독 들이고, 남자들은 다 이런거라구요.” 하는 쵄제의 말에 사모님도 “그래요!”하고 동을 단다.  “롱담은 롱담이고, 고사장 앞에선 이런 롱담도 못해유.”남녀간의 대결이 한동안 흐르다가 결국엔 종필씨가 결말을 지었다. “누구라 없이 가정을 지켜야지 가정을 잃으면 인생을 잃는겁니다.”하는 종필씨의 말에 우리 셋은 이구동성으로 “그럼요”를 부쳤다.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말은 가장 평범하고 가장 심오한 말이다. 종필씨는 말을 이었다. “고사장이나 배사장이나 다가 우리와 친구구 동업자지유. 그들에게는 웃음이란게 없어유, 실수로 인한 불행입니다.” 종필씨는 휴ㅡ 한숨을 내쉬였다. “배사장이나 고사장이나 둘 다 기막히게 좋은 분들이시고 사이도 너무나 끔찍 했었는데…” 남편의 론술에 사모님이 설명을 가했다. 박사장네 부부는 우리 센터로 자주 왔었다. 센터에서 개를 잡고 회식 할 때도 사모님은 삼계탕을 손수 끓여들고 남편과 함께 왔었고 사모님의 동생 남편을 일군으로 들여보내놓고 자주 보러 다녔으며 사모님은 가을에 센터의 김장일을 도우러 동네 친구들까지 여럿 끌고 왔었다. 박사장네와 배사장네는 확실히 가까운 사이였다. 우리를 태운 검은색 봉고차는 작은 아스팔트 길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51    [한국 나들이]13. 고사장 그녀 댓글:  조회:1587  추천:0  2013-06-03
13.  고사장 그녀   고사장은 쩍 하면 집 모퉁이로 돌아가 핸드폰 통화를 하곤 하였는데 그 모퉁이란 바로 우리부부가 들어있는 방의 서북쪽 창문 밖이라서 그녀가 전화로 큰 소리 치며 성내군 한다는 것을 똑똑히 알 수 있었고 또한 그 상대가 배사장이라는 것도 점차 알게 되였으나 영문만은 알 수 없었다. “배사장하구 고사장 잘 안 맞는거요?”하고 호성이와 넌짓이 물으니 리혼 한지가 몇년 잘 된 것이라하니 나의 궁금증은 더 커졌다. “이혼? 왜서요?” “몰라유, 배사장이 바람 피웠다나유… 그래서 집이구 애들이구 쎈터구 싹 다 고사장이 가졌잖아유? 배사장한테 백 오십만원씩 생활비만 준대유. 이 쎈터 배사장 세운건데, 돈은 사모님 부모가 냈다나유…배사장 점잖구 마음 고와유…” 호성이는 언제나 알고있는 것이면 다 말 해주었다. 이 수수께끼를 난 오늘까지 풀지 못하고 있다. 참으로 “이세상에 닭이 먼저 있었나, 닭알이 먼저 있었나?”하는것과 같은 문제이다. 배사장은 중국에서 건너오면 집으로 가지 못하고 센터에서 먹고 자고 한다. 애들과 밤이면 고스톱도 치고 치킨을 배달시켜 소주도 함께 마시고 틀거지 없이 보낸다. 어떤 날엔 친구들과 함께 낚시터에서 밤을 새우고 날이 밝아서야 돌아오는 때도 있다. 배사장이 지난밤에 센터에서 자더냐고, 아니면 몇시쯤에 돌아왔더냐고 고사장이 나하고 몰래 살랭이 묻는 때도 여러번 있었다. 고사장이 출근하여 센터로 온 후이면 배사장은 집으로 가 옷도 갈아입고 낚시대도 내오고 할 일을 한다. 주말이면 고사장은 초등학교 2학년과 5학년 다니는 두 아들을 데리고 와 아버지와 만나 놀게한다. 마흔 네살 고사장이 큰 애가 열둬살 밖에 안되니 조금 늦은 셈이다. “한국에 바람 안 쓰는 남자 어데 있게? 어떤 남자면 고사장을 맞출까?”라고 하는 안해의 두루뭉실한 해답이 맞는것 같기도하다. 고사장은 하루 건너로 검으락 푸르락 애들과 성격을 부린다. 물론 애들이 잘못한 일도 있을 수 있고 자기 기분 상한 일도 있을 수 있는데 그럴 때마다 성격을 부려서야 될 말인가? 그래서 젊은 애들은 배겨내지 못하고 인츰 가 버리군 한다. 일년 있는 사이 나의 안해도 그한테 그런 무모한 변을 둬번 당했고 세번째 우리는 끝내 센터에서 나오고 말았다. 처음 한번은 쌀이 떨어졌다고 입을 열었다가(쌀은 직접 고사장이 사들이기로 결정되여 있었다.) 날벼락을 맞았다. 고사장한테 무슨 좋잖은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의 안해는 무고한지라 억울하였다. 그렇다고 말 대꾸 하며 그녀와 같은 모양을 할 수는 없는 안해라 홀로 울분을 삭이느라 하루종일 끙끙 속알이를 하였다. “뭐, 속 탄 일이 있어 그러는거겠지. 량해하고 맘 넓게 먹소, 별도 없지뭐…”하며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척 하였지만 스트레스를 받는 안해를 보며 속이 쓰렸다. 그 보고는 맘 넓게 먹으라 했지만 내 마음은 좀처럼 넓어지질 않았다. “재성이 차 당금 찾아다가 팔아버려라.” 저녁상이 거의 끝날무렵 고사장이 말했다.“재성이 차”란 배사장의 봉고차인데 자가용이 없는 재성이가 몰고 배달 다니다가 한주일 전 조심하지 않아 구렁창에 굴리여 수리소로 갔다. 그것을 당금 찾아다가 팔아버리라는 소리이다. “그거 배사장 차인데 배사장 허락도 없이 맘대루 팔아버려 씁니까?” 나는 기회를 놓칠세라 말꼬리를 단단히 잡고 안해의 “원쑤”를 갚을 태세를 취하였다. 사실 얼토당토한 말참견임을 누구나 다 안다. 고사장은 나를 뚫어지게 쏘아보고 애들도 밥술을 입가에서 멈춘채로 퀭하니 의아쩍고 놀라운 눈길로 바라본다. 옛날옛적 철부지 시절에 이놈이 그래도 “하늘도 땅도 무서워 하지 않는 반란자” 멍청이 두목이였음을 그들로선 알리 없다. 멍해진 그들을 한번 둘러 본 후 나는 밥을 그냥 먹었다. 반년 남아 나와 큰 소리 싫은 소리 한번 안 했었지만 내가 공공연히 배사장 편을 들고 나서는 이런 때에 입을 다물고 있을 고 미자가 아니임을 나는 잘 안다. 얼마전 리부장이란 애가 중국에 있는 배사장과 몰래 전화 통화를 했다가 고사장한테 된 욕을 먹는 것을 나는 직접 보았었다. 부산에서 온 고사장의 친척이라는 김부장이 둬달 있다가 고사장과 이가 틀려 돌아가고 배사장이 있을 때부터 실장 직을 가졌던 리씨가 부장으로 진급을 한 것이다. 배사장을 알고있는 애들은 모두 고사장보담 배사장을 더 좋아 하였고 그러는 줄을 번연히 알고있는 고사장 또한 그것을 제일 싫어하였다. 그러니 “원쑤”를 갚자면 배사장편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아저씨, 아저씨가 지금 날 가르치자는 거시유?” 고사장은 저가락을 밥상위에 살랭이 내려 놓으며 낮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왈칵 터지려는 분노를 가까스로 억누름이 확연 하였다. 나같이 말 없이 일만 하던 놈이 사장님을 감히 가르치려고 들다니 그 누구든 상상도 못 할 일이였다. “예? 가르치자는건 아니고…” 사실은 분풀이를 하자는 것이였다. 나는 꾸밈 하나 없이 단도 직입적으로 하려던 말들을 냅다쏟았다. “듣자니 오늘 아침에 아줌마를 욕 했다면서요? 뭘 잘 못했다는 겁니까? 평생을 싫은 소리 한마디 들어 못 본 사람을, 잘못 하나 없는 사람을 그렇게 마구 꾸짓어도 된다고 생각합니까? 아줌마뿐만 아니라 센터 사람들 사장님의 욕을 밥 먹듯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모두 얼마 견뎌내지 못하고 길을 익히고 일을 익히고는 가버리지 않습니까? 남을 존경 할 줄 알아야 남의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거 알겠죠? 사람은 덕으로 다스리고 도리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도 알겠죠?” 절반쯤 낮춘 목청이였으나 물음표 몇개를 련속 내뱉고 나니 오뉴월 무더위 갈증에 얼음물 한컵을 쭈ㅡ욱 들이 켠 듯 온 몸과 마음이 상쾌하였다. 애들은 감정 표현을 감히 못하고 멍해졌는데 식사를 먼저 끝내고 곁방으로 건너갔던 리부장이라는 애가 사이문으로 머리를 내밀고 고사장 뒤에서 나를 향해 엄지를 세워 보인다. 웬일인지 그녀는 까딱 말이 없었다. 말이 있더라도 된욕일지라도 나는 입을 딱 다물고 여기에서 끝내려 생각 했던 것이다. 적당히 하고 그치는것(适可而止)이 누구에게나 리로울 것임을 나도 잘 알고 있다. “배사장에 비기면 거리가 먼거 아닌가?”“그까짓 밸땍이니 배사장하고도 못 사는거 아닌가?”하는 따위의 헛소리는 내가 용케 삼켜버리고 내뱃질 않았다. 내가 “미안합니다.”하며 수저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고사장이 드디여 입을 열었다. “잠깐 앉어보세요…” 나는 반쯤 일어서다 말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는 한동안 뭔가를 생각 하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성질이 나쁜건 누구나 다 아는거구요, 나도 잘 알아요. 노력해서 고칠겁니다. 아침에 아줌마하구 큰 소리 친것두 미안해요. 좀 그렇다고 이 많은 애들 앞에서 내 위신 깎아야 속 시원 하시겠어요? 그리고 배사장 자동차문제 같은건 아저씨와 전혀 상관 없는 일이잖아요?…” “참으로 죄송하게 되였습니다.” 물론 상관 없는 일이고 말고. 나는 빌고 들어야 하고 간단히 대화를 빨리 끝내버려야 함을 안다. 그래서 그의 말을 잘라버린 것이다. “나도 성질이 무지 나쁜 놈이랍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러한 일이 없을 것이니 이번만 봐주십시오. 죄송합니다!” “됐어요, 그만 합시다. 들어가 쉬세요.” “예, 사장님두 조심해 가십시여.” 나는 내 방으로 들어왔고 고사장도 그자리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갔다. “싸움 끝에 정이 든다”고 하였던가? 그렇게 다투고 난 후 나는 그녀가 미울 대신 저도 몰래 정이 가고 동정하게 되는 것이였다. 그녀도 그런가봐, 아니, 그녀가 그런 태도이니 내 마음이 더욱 들뜨는 것이 아닐까? 매일 아침 내가 “대문” 밑에서 돼지사료 가공일을 할 때면 고사장이 출근 한다. 그는 언제나 승용차에서 내리면서 곱게 웃는 얼굴로 “안녕하셨어요?” 부터 부른다. 그러면 나는 머리를 끄덕이며 “오셨어요?”라고 답례 한다. 그는 내곁을 지나며 이것 저것 묻기도 하고 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승용차에 싣고 온 무거운 물건들을 사무실에 들어다 달라기도 한다. “싸움”한 바로 그 이튿날 아침이였다. 종전보담 조금 늦게 새하얀 승용차가 “대문”밖에 멈춰서고 차문이 열렸다. 전날 저녁 있은 불쾌한 일로 그녀를 대면키가 좀 송구스럽긴 했지만 그렇다고 피해 숨을 수 있는 것도 아니였다. 헌데 이날 아침엔 “안녕하셨어요”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웃는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대로 못 본 듯이 지나쳐 버릴 수도 없는 일, 처음으로 내가 먼저 인사를 건늬였다. 머리를 끄덕이며“오셨어요? 사장님!” 하니 “녜, 안녕하셨어요? 아저씨!”하며 그제야 그녀는 환히 웃는 얼굴을 보인다. 오늘은 이아저씨가 어쩌나 볼라고 일부러 여느때와 달리 함이 분명했다. 언제나 인사를 나누며 스쳐 지나가버리는 것이였는데 이날만은 내 앞에 와 다가섰다. 가슴과 가슴이 마주 닿였다. 돌발적인 순간이고 숨 막히는 순간이였다. 이러한 순간을 우리 서로가 저도 몰래 바라오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허지만 나로선 어찌 할 방도가 없었다. 슬그머니 껴안으면서“엊저녁 일 미안 합니다!”라고 했어야 할 건데 나의 사유가 정지되고 팔다리가 말을 듣질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두손을 들더니 나의 얼굴을 스쳐 내가 쓴 모자채양에가 닿았다. 나의 모자채양(帽舌)이 중국희극가 조 본산의 것처럼 아래로 쳐진건 아니였지만 평평한 모양이 그녀의 마음에 썩 들지가 않았던가부다. 모자채양을 위로 반달처럼 휘여주고 바로잡아 주었다. “이렇게 쓰면 곱잖아요?” 하면서. 그음성이 청각을 통해 나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녀의 싱긋한 체취와 코숨까지 나의 후각을 파고들며 신경을 긁는다. 한손을 천천히 들어 그녀의 고운 얼굴을 만지며 “고마워요!”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렇게 하여선 절대로 안되는 것이였다. 나의 머리 속은 백지장 같았고 두손은 가늘 게 떨고 있었으며 눈길은 그의 머리 위를 지나 가까운 산중턱 숲속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나는 불타는 감정을 짓뭉개며 그대로 굳어져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실망을 주었을지 믿음을 주었을지 아니면 기쁨을 주었을지 슬픔을 주었을지 사랑을 주었을지 원한을 주었을지 나는 알 수 없다. 제발 그 사랑스런 마음이 나로 인해 상처 받는 일이 없기를 기도 하면서 나는 가만히 서서만 있었다. 누나가 동생을, 동생이 오빠를 아니, 먼나먼 길을 떠나는 자가 님의 쓰다듬음을 받는 듯한 그런 자세로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는 드디여 손을 내리고 “아저씨, 수고해요!”하며 머리를 돌렸다. 나는 몽중에서 벌떡 깬 듯한 느낌이였다. “예,예, 사장님 수고하세요!” 나는 당황한 듯 떨리는 음성으로 화답 하였다. 맥 없이 사무실로 발길을 옮기는 그녀의 뒷 모습을 바라보며 “미안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속으로 웨치는 나의 마음 속에선 눈물이 흘렀다. 아무리 가여워도 아무리 고와도 그녀는 나의 사장님일 뿐이고 나는 그녀의 일군일 뿐이다. 그 도를 지키는 것이 사람 된 도리이리라… 센터에선 매달 두번씩 꼭꼭 회식을 했다. 회식 하는 날 저녁이면 일찍이 돼지사료를 주고 샤워 하고 좋은 옷으로 갈아 입고 센터를 완전히 비워둔채 애들 차에 앉아 천안으로 간다. 회식이라고 해산물 구이집에 둬번 가보고 전부 돼지고기 삼겹살을 숫불에 구워 상추와 깨잎에 보쌈 싸 먹으며 소주를 마시는 그런 곳으로 갔다. 고사장은 회식날이면 돈을 아끼지 않고 애들이 하자는대로 2차 3차 열두시가 넘게 먹고 놀았다. 삼겹살로 술을 얼끈하게 먹은 후 노래방이나 나이트클럽으로 가서 마시고 놀고 그다음으론 레스토랑이나 서양 술집(酒吧)으로 가 양주를 마신다. 그때 쯤이면 대부분 애들이 취하고 피곤해 돌아가고 두 셋만 남는데 내가 술고래인 면도 있겠지만 번마다 그녀가 나를 붇잡고 보내지를 않았다. 늘 재성이나 호성이가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가 나를 싣고 센터로 돌아오군 했는데 그애들도 주량이 크고 그녀가 고와하는 애들이다. 고사장도 주량이 컸다. 우리가 매번 가는 서양식 술집은 그녀가 사는 아빠트에서 백여메터밖에 안되는 매일이다싶이 들리여 딱 한잔씩만 마신다는 그녀의 거점이였다. 추운날 술을 마시고 자리를 옮길 때면 그녀는 나의 외투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내손을 꽉 잡고 옆에 딱 붙어 몇발자국 걷다가는 데꺽 떨어져버린다. 뒷따르는 애들 보기 민망하고 아줌마의 눈이 무서워서였을 것이다. 이날도 회식 날이였다. 우리는 삼겹살을 먹고 나이트클럽으로 갔다. 애들은 독방을 차지하고 맥주와 안주를 불렀다. 독방은 문만 닫으면 노래방처럼 되여 마시고 먹고 춤 추고 노래하며 놀 수가 있는 곳이다. 나도 애들과 함께 대청으로 나가 무대위의 연예인들의 노래 춤에 맞추어 몸을 흔들어댔다. 춤짝(舞伴)이 되여주고 돈을 버는 러시야 아가씨가 다가와 나와 코를 맞대고 가슴에 가슴을 부비며 몸을 꼰다. 그 향기와 아름다움에 난 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사장이 비좁은 우리 둘 사이에 끼여들며 러시야 아가씨를 슬적 따돌리고 나를 감싸고 돈다. 춤노래에 문외한인 나였지만 무대위의 노래와 춤 그리고 악대반주가 어찌도 흥을 돋궈 주는지 정신을 잃고 몸을 떨며 그녀와 함께 뛰였다. 우린 땀 흘리며 뛰다가는 들어가 맥주를 마셨고 맥주를 마신 후 다시 나가 뛰였다. 애들은 저마끔 춤짝을 끌고 들어와 맥주를 함께 들이 켜고는 다시 대청으로 나간다. 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구석진 곳이라도 있었으면 그녀를 홱 끌고 가 너도 나도 숨 넘어가도록 굳게 포옹이라도 하고싶은 충동에 몸부림쳤다. 허지만 그런 장소는 없었고 그럴 수도 없는 것이였다.  “동국아, 인젠 그만하고 헤여지자 잉.” 고사장이 리대리한테 하는 말이다. “안 돼요, 인제 몇신데요? 봐요, 열시도 안 됐잖아요…” “그럼 아저씨 모시고 나가 한잔씩만 더 해라. 난 곤하니깐 아줌마 모시고 집에 가 쉬겠다. 끝나 갈 때 들리여 모시고 가그라. 백만원 넘겨 쓰면 안 된다 잉?”하며 고사장은 동국이한테 은행카드 하나를 넘겨 주는데 동국이는 차렷 자세로 군례를 부치며 “충성!”을 웨친다. “짜식, 돈만 쓰라믄 그저 좋다고 날리야.” 고사장은 활짝 웃고나서 나의 안해와 함께 자기집 아빠트로 갔고 난 애들을 따라 나이트클럽 문앞에 차려진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동국이는 먼저 참이슬표 소주 여섯병을 청하였다. 나까지 합쳐 술마시러 삼차에 따라나선 애들은 모두 여섯이였던 것이다. “오늘 코 삐뚤어지게 마시는 거야! ㅡ그렇죠? 아저씨. 한병씩 임무 완성 못 하는 놈이 결재 하기다, 싫은 놈은 썩 꺼지고 넬부터는 앉어 오줌 쏴라, 씹 할!” 동국이는 쎈터 애들 중 말투가 제일 어지러운 놈이였다. 순대도 오르고 소밸 버무림도 오르고 삶은 돼지혀빠닥도 올랐다. 모두가 안주는 몇점 집지를 않고 술만 꿀꺽꿀꺽 들이켰다. 사실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술이 사람을 먹고 있는 판이였다. 결국 누구나 반병씩 남겼고 동국이도 많이 남겼다. 카드를 긁으니 9만원이란 령수증이 나왔다. 아주 싼 것이다. 작은 포장마차에서도 카드를 쓸 수 있다는 것은 나라의 금용 관리가 선진적이고 그 선진적인 것이 국민경제 발전의 든든한 바침돌이임을 알려준다.  “아저씨, 4차 가요. 오늘 백만원 다 쓰자구요. 이거 다 우리가 사모님 벌어 준 돈이잖아요?” 동국이가 나의 팔을 끼고 끌며 포장마차를 나섰다. 휘청거리며 애들을 따라 간 곳은 네온등으로 “미인 마을”이라 새겨서 첫머리에 높이 걸고 길 좌우로 기생집이 쭉 늘어선 유흥거리였다. 넓지 않은 길 량켠 단층집 문앞마다 여자들이 남자들을 끌어 들이느라 분주하였다. 울긋불긋 채색 네온등을 켠 유리벽 안에는 키 크고 고운 아가씨 둴씩 서서 허리를 꼬며 웃으며 손짓 하고 있다. 피끗 보기만 해도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군침 흘리게 하는 산 표본들이다. 길목에서 두집 지나 나는 애들이 떠밀어 주는대로 문안에 들어섰고 한 녀자애한테 끌리여 현관 한켠에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2인용 침대 하나 놓고 조금 여남이 있는 비좁고 어둑시그레한 방이였다. 나를 끌고 들어갔던 녀자애가 커다란 붉은색 비닐 대야에 김이 몰몰 나는 더운 물을 듬뿍 담아 들고 들어왔다. 윗동을 먼저 벗어버린 녀자애는 “벗어요 아저씨, 먼저 몸 닦아 드릴께요.”하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죄송한데 담배 한대만 피우고 나갈라유. 애들이 마구 떠밀어 들어오긴 했는데 술에 너무 취해 뭐가 뭔지 전혀 모르겠슈.” 나는 될수로이면 당지의 어투를 번지느라 애썼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빠른 속도로 담배를 피웠다. 말로만 들어 오던 기생집이란 어떤 것이고 기생이란 어떤 것인지 많이 궁금 했었는데 정작 봉착하고나니 고개도 못 추켜드는 나다. 곁눈질로 가만히 훔쳐보니 유리벽 안의 “표본”보다 썩 못났고 나이도 더 먹어 보였다. 술에 절어 축 쳐진 신세에 곱던 밉던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인데 그래도 좀 고왔으면 하는 마음인것 같으다. 4-5분 걸렸을까? “술 깨고 가셔요.” 하는 소리에 대꾸도 없이 나는 담배 한대를 다 피우자 밖으로 나왔다. 동국이네는 나만 떠밀어 들여보내고 “미인마을” 밖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하나 마나 고사장이 그렇게 하라고 애들한테 시키고 아줌마를 따돌려 뎃고 간 것이다. 아줌마 또한 고사장네 집으로 따라가지 않고 무서움을 참으며 혼자 택시를 잡아타고 센터로 돌아와버렸다. 천안 시내를 벗어나는 길목에서 재성이가 음주 운전에 걸려 곤욕을 치러야 했다. 워낙 술을 많이 마셨으니 변명 할 여지조차 없는 것이라 면허증을 압수 당하고 벌금딱지를 떼여받고 대리기사를 불러 많은 돈을 팔며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나의 호주머니에서 고운 명함장 하나가 뚝 떨어졌다. “자리를 정하시고 전화 주세요! 아무 때건 달려가 최고의 서비스로 최대의 만족을 드릴게요!” 하는 글이 씌여져있었다. “아저씨, 먼저 몸 닦아 드릴게요.”하던 아가씨가 어느새 자기 핸드폰 번호가 찍힌 명함장을 나의 호주머니에 넣었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급급히 찢어 화장실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무언가 그녀와 이야기 나누며 건늬여 받아 나절로 호주머니에 넣은 것일 수도 있는데 너무 취하다보니 잊혀 졌는지도 모른다. 나는 유흥거리 구경 갔었다는 말을 입밖에 내지도 못하고 포장마차에서 술을 먹다가 온거라고 안해한테 거짓말을 하였다. 그에게 발각 되는날엔 큰 일 일어 날것이다. 내가 혼살 나는 것은 둘째로 치고 고사장까지 큰 미움을 받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50    [한국 나들이]12. 추석날의 추억 댓글:  조회:1519  추천:0  2013-05-31
12.  추석날의  추억     배사장의 이름은 배 상종이다. 배사장은 고 미자씨의 남편이였고 센터의 창시자이고 창업자였다. 그는 인물 체격이 출중 할 뿐만 아니라 듬직하고 마음씨 고운 남자이다. 우리부부가 센터로 오기 조금 전에 배사장은 중국 연길로 갔었다. 박사장의 대동하에 너덧 사장님들이 힘을 모아 연길 산골농촌에 한국 독자기업 “한길 농장”을 꾸리고 배사장이 대표로 일을 보고 있었다. 연길 의란진 춘양촌 한 산골짜기에 8000m2되는 돈사를 짓고 규모가 상당한 현대적인 양돈장을 세웠다. 지금(06년말)에 와서는 당지 농민공 서른 넷을 쓰고 있고 存栏数(기르고 있는 수)는 7000마리, 고기돼지 매년 出栏数(내보내는 수)는 만 오천마리이다. 한길농장은 이미 연변의 선두 외자 기업으로 꿎꿎하게 일떠섰다. 모든 자금과 기술 및 시설들을 한국에서 가져갔고 웅돈의 정액도 고사장한테 와서 가져간다. 이렇게하여 당지의 기후, 자연 조건에 잘 적응하면서도 빨리 크는 육질 좋은 고기돼지를 길러낸다. 이번에도 배 상종사장은 웅돈정액을 가지러 연길에서 몇달만에 건너 온것이다. 20년전 한 보통 농가에서 20대 중반인 배 상종은 웅돈 두마리를 사놓고 혼자의 힘으로 정액 장사를 시작 하였다. 비바람 눈보라 속에서 건장하고 씩씩한 한 청년이 오토바이를 타고 흙사람 눈사람이 되여 산촌의 오솔길을 누비며 가가 호호 양돈호에 돼지정액을 배달하고 인공수정까지 시켜주는 모습을 지금도 펀히 보는 것만 같으다. “인공수정센터”가 오늘만큼 되기에는 배 상종씨의 얼마나 많은 피타는 노력이 슴배여 있으며 얼마나 많은 뼈 아픈 사연들이 담겨져 있는지를 우리는 상상도 하기가 힘들다.   “어머님도 달밤이면 이 아들 그릴테지! 아, 잠 못 드는 타향의 달밤이여…” 추석 전날 밤이다. 허리가 움직일 수 없게 아파보기는 난생 처음이라서 나는 저녁 반지술을 다른 때 보담 조금 더 하고 센터 밖으로 나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 홀로 앉아 산정에 걸린 둥근달을 바라보며 눈물을 쏟았다. 할 줄도 모르는 노래로 기분을 잡아가며 둬시간 실컷 눈물 빼고는 돌아와 코를 골고있는 안해 곁에 아무일 없은듯 누워 흑흑 흐느끼다가 잠들었다. 어머님도 다시 못 뵙고 죽을 것만 같이 아팠던 것이다. 당장 어머님 뵈러 가려해도 통증으로 비행기에 오를 수 있을것 같지 못해 눈물이 났다. 아무리 모질게 아프더래도 돼지는 먹여야 했다. 목단강 리아저씨는 산에 떨어진 밤 한주머니를 주어가지고 추석 며칠전 서울에 사는 딸집으로 가버렸다. 일년 반 전, 그의 애지중지 하는 막내 딸은 서울에로, 나이가 좀 많고 소아마비증으로 다리를 좀 젏는다는 실랑한테로 시집을 왔고 반년 전엔 딸애를 낳고 아버지를 초청해 한국으로 모셔왔다. 스무한살인 그딸애는 실랑이 만들어 준 은행카드를 람용하여 이천만원을 빚 지었고 중국에서 온 아비는 그 빚을 물어 주겠노라고 피땀 흘리는데 중국에서 놀고만 있다는 스무네살 건달 아들은 돈 부쳐 달라고 전화가 끊이질 아니 한다. 계집애만 셋 낳고 겨우 얻은 아들이라 곱다고만 쓰다듬어 그 꼬라지임이 불보듯 뻔하다. 리아저씨는 서울에서 두달간 페물 장사군의 밀차를 밀어 주었는데 각전 한 푼 못 받고 이 센터로 온 것이라 했다. 그가 처음 왔을 때 고사장은 두달 후부터는 월 로임을 팔십만원으로 올려 주겠노라 강사기를 올려 놓았었는데 넉달째에도 그냥 칠십만원이니 기분 상해 가버린 것이다. 대머리에 왜소한 체구인 리아저씨는 나보다 다섯살 위일 뿐인데 60을 썩 넘긴듯이 겉늙어 보이는 불쌍한 농민이다. “저 아저씨 샤워 좀 하라구 그러세유, 애들이 냄새 난다잖아유.” 호성이가 직접 그하고는 말 못하고 나보고 하는 말이다. 돈사의 일을 하다보니 옷이나 몸에 슴배인 그 냄새가 말이 아니라 날마다 샤워 해도 부족한데 그는 그런줄을 몰랐다. 그가 떠나는날 고개넘어에까지 배웅하고 돌아 서며 생각하니 본의 아니게 내가 그의 일자리를 빼앗은 것이라 기분이 퍼그나 서글프고 언짢았다. 날 밝기전에 일어나 사료를 주고 청소를 끝내면 애들이 배달 나간 후이다. “아저씨, 왜 허리가 불편하시요?” 내가 허리를 붇잡고 힘들게 움직이는 모양을 배사장이 본 것이다. “예, 조금 지나면 괜찮아 질겁니다.” “다치셨어요?” “아니요, 모르겠는데요.” “이리와 엎드려 보세요.” 나는 그가 시키는대로 방바닥에 얼굴을 대고 큰 대(大)자로 엎드렸다. 배사장은 무릎 하나로 나의 척추를 지그시 누르고 두손으로 나의 오른 손목과 왼 발목을 잡아 들었다. 여나무번 들었다 늦추었다 하더니 왼 손목과 오른 발목으로 바꾸어 그짓을 한참 하였다. “그만!”하고 나가려는 소리를 겨우 삼키며 나는 이를 악물고 극도의 아픔을 참고 뻗히였다. 전신에 땀이 흥건하고 정신이 멍해졌다. 나는 하고 속으로 자위안 하며 내맏겨버렸다. 들어올릴 때마다 처음엔 “으음!” 하는 된소리가 저도모르게 터져 나오군 하던 것이 그 소리가 차츰차츰 가늘어지고 사라졌다. 그와 반면에 등뒤 숨소리가 갈수록 거칠어 지더니 나의 손 발목을 놓아버리고 손바닥에 힘을 주어 척추뼈를 아래 위로 꿍꿍 몇번 눌러주는 것이였다. “됐어요, 천천히 일어나세요.”하니 나는 “수고 하셨습니다.”하며 일어나 앉았다. 헌데 이것 참 나 원, 전혀 아프지가 않았다. 일어서서 허리를 좌우로 뒤틀어 보기도 했다. 언제 아팠더냐 싶게 멀쩡 해졌다. “어머니ㅡ”를 목놓아 부르며 홀로 울던 전날 밤이 못내 우수웠다. “좀 괜찮으세요?” 배사장이 화장실에 들어가 땀을 씻고 나오면서 묻는다. “예, 아무렇지도 않게 되였네요. 참으로 귀신이 곡 할 노릇입니다!” “다행이네요, 일 할 때 허리 조심해얍니다. 나이 드시면 다 튀여난대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실로 자기의 허리를 아낄줄 몰랐다. 일을 해도 멍청스레 하는 편이다. 얼마전 분변 처리 진공뽐프를 다루면서 허리를 풀떡 놀래운 일이 있었다. 뽐프의 무게만은 4-50kg쯤 될 것이나 그것을 뜯으려면 모터와 고정틀까지 대개 150kg쯤 되는 물건을 다 움직여 끌어내야 했다. 그렇다고 누구의 방조를 청 할 줄도 모르고 혼자 하는 멍청이다. 어리다면, 또 사람들 앞에서라면 혹시 힘 자랑이나 하고 잘 하는척 하는 짓이라고나 하겠지만 이것도 저것도 아니니 답답하다. 옛날 갑산에서 감자 캘 때 사람들은 나를 “한초대”라 불렀다. 초대(草袋)란 벼짚으로 짠 가마니를 이르는 이고장 말이다. 7-80도 가파로운 양지쪽 뙉밭의 감자를 캐서는 가마니에 담아 메고 산마루에까지 기여 올라가 달구지에 싣는다. 그래야만 산북에 난 뉘연한 길을 에돌아 끌고 내려 올 수 있는 것이였다. 나보다 썩 더 우둑진 청년들도 죄다 반가마니씩 져 올리는데 나는 시종 한가마니씩 지여 날라 그런 별명을 가졌다. 그때 “한 하지”라는 별명도 가진 일이 있다. 집체화 그때엔 어쩌면 일 축이 그리도 안 났던지? 논두렁이에 무져놓은 벼단들이 눈속에 묻히게 될라치면 등짐으로 몇 백메터 져서 길가에로 내온다. 그래야 늦어져도 아무때건 달구지로 실어서 탈곡장에까지 운반 할 수 있는 것이였으니깐. 그런데 다른 애들은 모두 열단 아니면 반하지씩 지고 다니는데 나는 무조건 한하지인 32단씩 지고 다녔다. 그때로부터 허리병을 가진 것일지도 모른다. 배사장이 권유하듯이 지금부터라도 자기의 허리를 아껴야 할 것이다. 나는 뭐나 이렇게 “행차뒤에 나발(马后炮)”이다.  추석이면 우리 민족으로선 큰 명절이라 애들은 다른 날보다 일찍이 배달 나가고 점심전으로 각기 모두 부모님 계시는 자기집에 들어가기로 했다. 이튿날 새벽에 그들이 출근하기 전까지는 우리 둘 뿐이다. 우리는 족족하고 섭섭한대로 센터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부천에 계시는 큰 누님한테나 가서 조카들이랑 카드나 고스톱을 치다 오든가 아니면 서울에 계시는 윤현형 집에라도 찾아가 고모님 뵙고 술 한잔 나누고 돌아 오든가 하고 싶었는데 더 생각 할 여유도 없이 고사장이 선수를 써 “아저씨 아줌마, 부탁 할께요.”하는데 어찌 “아니요”를 부른단 말인가? “안심하쇼, 사장님!”라고 하는 수밖에. 안해는 북면 슈퍼에 전화를 걸어 술이랑 고기랑 두부랑 가져오고 논두렁이에 난 미나리도 캐다 무치고 처음으로 둘이서만 쇠는 타향의 추석이라 서운함이 없도록 아름답고 재미나는 추억을 만들려고 분주히 돌아쳤다. 연길에서는 형제 자매들이 어머님을 모시고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 추고 카드나 마작을 치며 흥 나게 놀 것이다. 추석 쇠고 며칠 안 가면 중국의 국경절이고 장모님의 진일이시다. 우리는 아무곳에도 갈 수 없다. 나는 원래 형제자매들과 모여앉아 술 마시고 놀음 놀기를 너무나도 좋아했었는데…  나는 한달에 두날씩 휴식일을 가지게 되여 있었다. 헌데 센터에서 쉬여선 뭘 하게? 하여 달 평균 하루씩 노는데 그날이면 나는 안해와 함께 데이트 하러 배달 나가는 애들 차에 앉아 밖같 세상으로 간다. 린근의 목천에도 가고 진천에도 가고 사천에도 가고 병천에도 갔었다. 그곳 지명은 왜서인지 천(川)자를 부친 것이 많았다. 뭐 그다지 큰 강이 있는 것도 같지 않는데 말이다. 지도를 펼쳐 놓고 볼라치면 부천, 용천, 이천, 선천, 서천, 순천, 과천, 옥천, 제천, 포천, 연천, 영천, 웅천, 합천, 화천, 홍천, 김천, 웅두천 등등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다. 혹시 샘물 천(泉)자나 하늘 천(天)자를 썼는지도 나는 알 수 없다. 중국에는 주(州)자를 부친 지명이나 성시명이 많다. 귀주, 광주, 온주, 항주, 정주, 소주, 양주, 덕주, 란주, 창주등등 기수부지이다. 옛날엔 중국 약명을 주(州)라 하였다고 하니 주자를 단 지명이 많은 것인지 모른다. 미국은ㅡ미, 한국은ㅡ한, 중국은ㅡ중이라 하는데 지금도 가끔 신주라 쓸 때가 있다. 우리는 먼저 리발소에 들리여 칠천원이나 팔천원을 내고 나의 머리를 곱게 짜른다. 리발소에서 나와서는 슈퍼에 들리여 생활 용품도 사고 옷도 사고 센터 일에 쓸 공구도 사고, 장날이면 장 구경도 하고 엿가락도 사 먹는다. 그다음은 안해의 가장 중요한 과제인 저금소에 들리는 일이다. 우리는 달마다 두사람의 많지 않은 로임을 큰 누님의 계좌에 적금 하였던 것이다. 나중에 나의 중요한 과제만 완성하면 센터로 돌아온다. 우리는 문이 제일 크고 간판도 제일 큰 음식점으로 들어간다. 물론 우리가 간 곳은 어느 곳이나 천안시에 소속된 작은 면마을이라서 음식점들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큰 것으로 찾아 들어가는 것이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이였다. 작은 음식점에 들어간다하여 적게 먹거나 큰 음식점에 들어간다고하여 많이 먹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해물찜이나 갈비찜 하나에 밥 두그릇 그리고 소주 한병이면 끝이다. 뭘 더 청하고자 해도 청할 것도 없고 필요도 없다. 꽃계찜 하면 자그마한 계 둬마리 쪼개 넣고 콩나물 듬뿍 넣고 야채 듬뿍 넣고 부글부글 끓이면서 먹는건데 죽어 나가 자빠진다고 해도 둘이서는 다 먹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다 순두부 찌개라던가 칼치구이 같은걸 더 청해서는 뭘 하겠는가? 김치라든가 미역무침같은 밑반찬은 모자라면 더 요구 할 수 있게 되여있다. 거기에서는 거개가 전문점이다 보니 연길에서 흔히 보는 메뉴판 같은건 없고 흰종이에 크게 써서 문이나 기둥이나 벽에 몇조목씩 부쳐놨을 뿐이다. 나가 놀던중 병천면이 조금 컸다. 면이라면 여기 향이나 같은건데 병천에는 대학교도 둬개 있고 아주 소문난 순대도 있었다. 병천 순대가 전국에 소문 난 것이라면서 한번은 호성이가 우리네한테 일부러 사들고 들어왔었다. 나의 구미엔 맞지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 맛 없는 먹거리라하면 나는 주저없이 그것을 꼽을 것이라 생각 된다. 안해도 못 먹을 것이라고 야단이다. 순대 속이라는 것이 당면과 시래기 뿐이고 조미료도 우리가 중국에서 맛들인 것과 완전히 다르니 그럴 수 밖에는… 자료에 보면 “순대 속에는 들깨, 배추, 찹쌀, 마늘, 파, 고추, 당면 등 15-20가지 양념이 들어간다.”고 썼고 그래서 “천안시 병천면 아우내 장터에 위치한 순대촌을 찾아가면 훈훈한 충청도 인심과 함께 단백하고 고소한…” 맛을 선사 할 것이라고 씌여 있다. 뭐든 글이나 화면을 보면 군침 나지만 먹어보면 그것이 그것이다. 몰라, 호성이가 잘못 골라 사온 것이였던지 아니면 식어버려서 그런 맛이였는지도. 아우내 장터는 옛날 독립운동 때 유 관순렬사가 조선 독립 만세를 부르고 체포된 혁명 유적지라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이 아닐지, 그래서 수수한 순대 또한 높이 뜨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우리 민족의 맛, 민족의 자랑이라 하는 김치와 된장이 멀어지기 시작한다. 옛날엔 김치와 된장으로 살았다. 지금 애들은 옷에 냄새가 옮는다고 꺼려한다. 옛날엔 그 냄새 속에서 살았는데 말이다. 된장을 담구자면 큰 가마에 콩을 삶아야하고 김치를 담구자면 김치움이 있어야 한다. 헌데 사회가 발달하면서 그런것들이 없어지고 있다. 공장에서 생산하는 김치거나 된장도 나오고 김치 랭장고도 따라 나오고 있지만 그맛은 재래식으로 어머님께서 손수 해주던 것과 비기면 왜서인지 천양지별(天埌之别)이라 어른들도 맛을 잃고 있다. 그맛이 아니라서 전국의 으뜸이라는 “병천순대”가 우리 입에 맞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서울이나 제주도에서까지도 그 순대 소문에 귀가 벌쭉하여 군침 흘리며 찾아 온다고들 하는데 우린 장거리에서 “병천순대”라든가 “순대국집”이라고 제목을 달아놓은 집만 보면 멀리로 에돌아 가 “곱창전골”간판을 건 집을 선호로 하였다. 비록 곱창은 적게 넣고 지저분한 소위와 콩나물을 듬뿍 넣고 끓였지만도 얼큰하고 뜨끈하고 구수한 맛이 순대보담은 퍼그나 좋았다. 물론 갑배처가 우리집에 왔을 때 끓여 준 것 보담은 말도 안되지만은. 정심을 먹은 후 뻐스를 타고 북면까지와 북면에서 센터까지 걸어 건너 올 때도 있지만 거개는 미리 약속 해둔 아이가 배달일을 끝내고 우리를 실으러 온다. 일이 일찍 끝나 정심전에 우리한테로 왔을 때엔 그아이가 돈을 내기도 하고 우리가 돈을 내기도 하고 간단한 것으로 함께 먹고 돌아온다. 애들과 우리는 언제나 식구처럼 스스럼 없이 보냈기에 추석이라고 우리 둘만 있으려니 더욱 적막하고 고독스러운 것이다. 우리가 한창 점심상을 갖추고 있을 때 뜻밖에 반가운 손님들이 몰켜왔다. 윤현형님께서 차를 몰고 형수님과 제수씨(윤현형님부인과 흥현동생부인) 그리고 나의 큰 누님까지 모시고 우리 뵈러 오셨던 것이다. 큰 누님께선 여러가지 과일도 사오고 “참이슬”표 흰술도 한박스나 사오셨다. “이 한박스만 다 마시고 뚝 끊어라, 끊어.” 동생이 산골 농장에서 일을 한다 하니 그토록 좋아하는 술도 못 얻어 마시는것 같아 불쌍히 여기면서도 술에 너무 집착함을 아는지라 상할까 걱정 하시는 나의 누님이시다. 우리들은 정심을 먹은 후 나의 안해만 집에 남겨두고 밤 주으러 산으로 올라갔다. 60세가 다 되신 윤현형은 날파람이 살아 있었다. 매끄러운 밤나무에 날래게 기여올라 통채로 흔들어대면 밤이 우박 쏟아지듯 우수수 떨어진다. 리씨 아저씨와 함께 여러번 밤 주으러 다녔지만 우리는 한번도 나무에 올라가 볼 념을 못하고 땅에 저절로 떨어진 것만 줏군 하였다. 군대에 갔었다는 것이 농사 짓고 돼지 먹이다 총도 몇방 못 쏴 보고 돌아온 놈이니 베트남 전장에서 날뛰던 특종병 형님과는 상대도 안 될게 뻔연하다. 밤 줏는 재미가 별 재미라 누구도 모르는 사이 해가 서산머리에 다았고 돼지밥 줘야 할 시간이 되였다. 큰것들만 골라 모아둔 밤 한주머니를 형님 차에 실었다. 먼지에 묻혀 산굽이를 돌아서는 차를 바라보며 마음은 다시 허전해졌다. 이튿날, 누님네 몇분이 오셨다가 뵙지 못하고 문안만 남기고 가셨노라 고사장과 말했더니 자기에게 왜 전화라도 하지 않았느냐고 퍼그나 서운해 하였다. 고사장 그녀는 그렇게 다정다감하고 곧은 성격이였다.  
49    [한국 나들이]11. 충청남도 종돈장(种腞场) 댓글:  조회:1789  추천:0  2013-05-30
11.  충청남도 종돈장(种腞场)     작은 비는 끊을줄 모르고 내린다. 기차역 광장 한 모퉁이에서 우리는 쉽게 사장님을 만날 수가 있었다. 우리가 그의 앞에 나타났을 때 그녀는 한창 누군가에게 핸드폰으로 전화를 치고 있었다. 하기에 인사말도 건뉠 수 없었고 손따윈 더욱 잡아볼 엄두도 못내였다. 고 미자라고 부르는 사장님은 나이 마흔 넷이고 한메터반 조금 넘는 키에 진짜로 귀염상스런 얼굴을 가졌다. 얼굴 화장은 전혀 하지 않았고 노랑 염색을 조금 한 느슨한 파마머리를 뒤에 한줌 모두어 손수건 같은 것으로 대수간 매여 놓았는데 자연스럽고 보기가 좋았다. 두 무릎이 펑 뚫린 색 바래진 청바지 위에 새하얀 와이셔츠를 입었는데 팔소매를 반쯤 걷어올렸고 한뼘 반쯤 되는 허리끈 끝으머리가 그녀의 오른쪽 큰다리 앞에서 좌우로 그네 뛰고 있었다. 나와 그녀는 서로 머리를 약간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끝내고 나는 그녀가 차문을 열어주는 대로 말없이 뒤좌석에 올라 려행가방을 사이에 놓고 안해와 나란히 앉았다. 그녀는 운전석에 올라 핸드폰을 끄고 시동을 걸었다. 한참을 에돌더니 천안 시내를 간신히 벗어나 국도에 들어섰다. 후시경 속에서 그녀와 눈길이 마주쳤다. 그녀를 내내 훔쳐 보다가 들통 난듯이 나의 눈길은 허둥지둥 차창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얼굴이 달고 가슴이 높뛰였다. “아저씨, 이 먼 곳까지 오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어요!” 허둥대는 나의 눈길를 안정시켜주는 그녀의 목소리는 챙챙하고 야무졌다. “수고야 뭐… 바쁘실텐데 이렇게 마중해주어 감사합니다!” 그녀는 후시경 속에서 나를 한동안 뜯어보고는 시선을 전방에 던지며 자기의 얼굴을 나의 시선에 맡겨버렸다. 40대 중반이 아니라 30대 중반 밖에 되여보이질 않는다. 양돈장 사장으로선 나의 상상과 많이 어긋나는 인물 체격이고 나이이다. 고사장의 승용차가 23호 국도(강진ㅡ천안/396.3km)를 따라 남으로 달린다. 마을이 없는 곳에 뭣 하는 것인지 멋진 건축물 하나가 외롭게 서 있었다. “저것이요,‘독립 기념관’이라요.” 고사장은 눈치도 빠르게 후시경속의 나의 눈길에서 내 머리속의 의문을 읽었던 모양이다. 1919년 3월 1일, 그러니 중국 북경에서 일어난 ‘5.4 청년운동” 두달 전, 애국 지사들은 일제의 침략과 통치를 반대하여 조직하여 일떠났고 “조선 독립 만세!”를 높이 불렀다. 일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제국주의 렬강들은 1919년 1월 파리에서 소위 “화평회의”를 열어 조선 인민과 중국 인민의 반대도 불구하고 일제의 조선에 대한 통치를 확보하며 일제가 중국 산동에 대한 독일의 특권을 넘겨 받기로 결정지었다. 저희들끼리 주고 받고 확보하고 지랄이였다. 조선의 “3.1운동”과 중국의 “5.4운동”은 쌍둥이 형제임을 보아낼 수 있지만 나라가 다르고 정치가 다르다보니 모르쇠를 하는 것이 아닌가고 이 문외한은 생각 해본다. 독립 기념관에서 조금 더 달려 연출리라는 작은 동네를 지나니 그리 크지 않는 다리 건너에 연출리보담 썩 더 큰 마을이 보이는데 그곳이 북면이라고 고사장이 소개 해준다. 북면이라면 린근에는 남면도 있을 것이고 동면과 서면도 있을것이다. 이렇게 하나를 가르쳐주면 적어도 두 셋을 더 아는 무지하게 똑똑한 놈이라고 사람들은 뒷 공론 할런지 모르겠지만 그건 모르고 하는 소리다. 내가 나서자란 “남도마을”은 바로 서성(西城)진에 예속되여 있고 서성에서 동으로 20여키로메터 내려가면 동성(东城)진이라는 큰 마을이 있는데 그사이에 남고성(南古城)과 북고성(北古城)이 남북으로 갈라져 있다. 그러니 북면이 있으면 동 서 남면도 있을 것이 당연한 리치가 아니겠는가? 북고성에는 가슴 아프게 바야흐로 지워지는 력사 유적지 하나가 있다. 옛날 성터, 70년대 중기였던지 말기였던지 “중화인민 공화국 국무원 력사 유물 보호국”에서 세운 계시판엔 “발해국 옛성터(勃海国古城址)ㅡ국가급 보호 력사 유물”이라 썼었다. 헌데 그 계시판은 어느 때인가 왜서인가 말없이 없어지고 토성의 흔적도 오늘일까 래일일까 사라지기를 재촉한다. 발해국이라 하면 내가 알기로는 고구려나 고려처럼 우리 민족의 고대국인데 왜서 그 유적을 국무원에서는 보호 했다 말았다 하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여나문살 소시적 나의 키를 썩 넘어 쳐다 보아야했던 웅장한 토성이 반세기도 안되는 사이에 발목 아래로 꺼져버렸다. 발해성터라면 아마 천년은 되였을텐데 그처럼 거룩하던 모습이 어쩌면 눈 깜짝 하는 사이 급격히 사라지느냐 그말이다. 발해국 력사를 두나라 서로가 자국의 력사라 하고 있다는 소리도 들은듯 하다. 정치를 모르는 서민이 몇글자 쓰면서 될수록이면 정치에 관한 단어는 회피 하려 애써보지만 자꾸만 말려들게 된다. 그래서 글이란 것이 쓰기가 힘이 든다.  서성에서 남으로 오리쯤 나가면 구옥촌(九屋村)이라 부르는 마을이 있었고 일리반쯤 더 나가면 림업국 팔가자(八家子)진이 있다. 구옥촌과 팔가자 두 마을 사이에는 언제인가 먼 옛날 부모가 늙어지면 지어다 버렸다는 넓다란 “고려장터 (高丽葬址)”가 있었다. 두께는 반메터 정도고 사방 한메터 반씩도 넘을 넙쭉한 바위를 아름반씩 되는 둥근 바위 몇개로 궤여 놓았다. 그런 것이 천개는 몰라도 수백개 정도로 널려 있었다. 아이들은 바위 밑을 헤집고 놋 숫가락 놋 그릇을 주어다 팔아서는 놀이감을 샀었고 늙은이들은 바위 사이 흙이 보이는 곳을 파고 콩이나 감자를 심어 빈궁한 가정 생계에 보탰었다. 거기에도 북고성 성터처럼 “국가급 보호 력사 유물”이라는 계시판을 세워 놓았었는데 없어진지가 오래고 그자리엔 팔가자진 아빠트가 줄쳐서서 “구옥촌”이란 지명마저 사라졌다. 옛날 언젠가는 팔가자 보담 한집 더 많다고 구옥촌이라 불렀을텐데 오늘에 와선 이름마저 먹혔다. 후세인들은 고려장터란 어떤 것인지를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후세가 아니라 오늘 사람들도 모르고 있고 믿지 않고 있다. “고려장터”란 이야기는 있을 수 없는ㅡ우리 민족의 과거를 모욕하는 날조라고 근간 KBS 한 어린이 방송프로에서 들은바가 있는 듯 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소시적에 본 구옥촌 돌 무덤은 무엇일까? 선사시대의 유물이라고 하는 “고창 고인돌군”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그런것들이 퍽 알고 싶다. 알지도 못한채 북고성의 토담과 구옥촌의 바위들이 깜쪽같이 사라진 것이 가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북면에 닿으니 북고성이 머리에 떠오르면서 분수 없이 사색도 길어진다. 북면 북쪽 큰 다리를 건너기 전, 승용차는 오른손편의 강뚝 길로 접어들어 십분가량 달리고나서 큰 산 등성이 하나를 넘었다. 산등성이에서 내려다 보니 머잖은 건너편 산비탈에 서면마을이 논밭을 마주하고 옹기종기 앉아있었는데 고사장의 차는 오른켠 산굽이를 돌더니 드디여 목적지인 작은 벌의 북쪽 막바지에 이르렀다. “충남 돼지인공수정센터”라 내려 쓴 나무 간판 앞에서 고사장은 차를 멈춰 세우고 시동을 껐다. 우리고장 같으면 “센터”간판 곁에 이간판 저간판, 그것도 중국글과 조선글로 여러개 걸려 있을텐데 여기엔 간판이 간편하게 하나만 달랑 걸려 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고사장 뒤를 따라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대문이 아니라 기실은 창고벽에 달아 지은 앞 뒤벽이 없는 사료 저장실이다. 들어서며 오른손켠 첫 머리엔 높다란 사료 혼합기계가 안치되여 있었고 그뒤를 이어 누른 종이 주머니에 담아 포장한 돼지 건사료들이 벽에 기대여 높고 길다랗게 장져져 있었다. 마당 첫머리는 정차장이였는데 비닐로 된 둬톤 되는 디젤유 탕크가 철제 등발 위에 높이 얹혀져 있었다. 정차장 다음은 깨끗한 잔디밭이고 그 왼쪽 켠에 사무실, 제작실, 주방, 숙소등이 들어있는 길다란 집 한채가 잔디밭을 마주해 있었다. 집은 벽돌이나 콩크리트로 지은게 아니라 포말과 세멘트를 섞어 규격에 맞게 미루 만들어진 회백색 벽자재를 사다가 조립하고 철판을 눌러 포말에 부친 푸른색 기와를 얹어놓은 것이다. “얘들아! 모두 건너와라!” 고사장의 집합 명령이였다. 젊은이 대 여섯이 텔레비 놓인 큰 방으로 모여왔다. “인제 한집식구 되는건데 인사나 해야지” 하면서 고사장은 이대리 이부장 김실장하며 그애들을 우리에게 일일이 소개하고 나서 김씨 아저씨와 전씨 아줌마도 그애들 한테 소개하였다. 전국 동항업에서 세번째로 크다고하는 이“센터”에는 백 사십 여마리의 종자 숫돼지가 있는데 자가용을 몰고 다니며 돼지 정액을 배달하는 총각 직원 여덟과 집에 앉아 정액 주문을 받는 처녀 직원 하낫, 그외에 고사장과 사육원 아저씨 그리고 새로 온 우리 둘, 도합 열 셋이다. 밥 짓기하던 아줌마는 한달 전에 가버리고 없었다. 그러니 고사장이 급히 수요로 하는 인원은 돼지 사육원이 아니라 밥하는 아줌마였다. 아이들이 아침을 거른대로 차 몰고 나가기가 일수고 두시쯤 배달일을 끝내고 하나 둘씩 돌아와 저절로 라면을 끓여 먹고 또 이튿날 배달해야 할 돼지정액을 채취해야 한다. 저녁 밥은 이애 저애 바꿔가며 대강 해 먹기도 하고 짜장면을 불러다 먹기도 하는데 이러다 보니 애들 건강에도 좋지가 않고 일에도 지장이 많았다. 나의 안해는 손등만큼 두터운 기름때로 장식된 주방을 청결 하느라 큰 고생을 하였다. 애들은 복스럽게 생기고 늘 상냥한 아줌마를 좋아 하였다. 아침에는 시원한 콩나물국에 뜨끈뜨끈한 새밥을 먹고 일 나갈 수 있게 되였고 돌아오는 차엔징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아줌마는 계란을 깨 넣고 라면을 끓여준다. 저녁이면 야채 무침이나 고등어 찜도 있고 계란 튀김도이나 중국식 “마라 두부”도 있는가하면 이따금 양돈호들에서 보내주는 삼겹살 구이나 삼겹살을 넣은 물만두도 먹을 수 있게 되였다. 한달 채소값 50만원이란 적은 돈으로 될수록이면 애들의 구미에 맞도록 하려고 새 아줌마는 무진 애를 썼다. 남새라던가 기름, 간장, 라면, 닭알, 두부, 고기등 무엇이든 북면 슈퍼에 전화를 치면 오토바이를 타고 즉각 가져다 준다. 아줌마는 밥 짓는 일을 하는 외에 날마다 주숙방부터 사무실까지 칸칸이 구석구석 깨끗이 청소하고 애들의 이불과 작업복으로 부터 속내의까지 세탁기로 빨래하고 해볓에 말리여 차곡차곡 개이여 주군 하였다. 양말은 애들 모두가 네것 내것 없이 성하고 깨끗한 것으로 주어 신는터였다. 하루만 신고 화장실에 벗어버리면 아줌마가 세탁기에 굴려서 말리운 후 제 짝 씩 맞추어 이불장 서랍에 넣어둔다. 그러면 애들은 아무 때이건 제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라 신고 나간다. 그녀는 아줌마 노릇을 썩 잘 하고 있었다. 애들은 새 아줌마 앞에서 먼저 아줌마는 청소도 안 하고 빨래는 해본적도 없었다고 흉 보곤 하였다. 나는 이튿날부터 리아저씨와 함께 돼지 먹이는 일을 하였다. 저마끔 외바퀴 밀차로 사료 혼합기에서 배합된 사료를 받아가지고는 돈사로 밀고 들어간다. 돈사는 사무실 뒤에 둬메터 간격 두고 너비 열메터 길이 5-60m되게 지은 푸른색 양철기와를 얹은 조립식 집이다. 돈사와 사무실 사이 좌우에 벽을 세우고 여전히 푸른색 양철기와를 얹었다. 거기가 정액 채취실이고 집 원채 뒤벽에 작은 미닫이를 두겹으로 달아 놓았는데 그안이면 곧 정액 제작실이다. 제작이란 현미경으로 정액을 검사하고 비례맞게 희석제를 섞어서 진공밀봉하면 된다. 종돈들은 륙푼 바이프를 용접하여 만든 칸막이에 한마리씩 두줄로 벽을 향해 갇히여 있다. 두줄 칸막이 사이에는 현관처럼 둬메터 간격이 나 있는데 철판을 깔았고 철판 밑 함도엔 전동식 분변 송출기가 장치되여 있었다. 벽쪽에 난 철제 구유통이 달린 앞문을 열기만 하면 이미 훈련을 거쳐 습관이 돼 있는 종돈은 정액 채취실로 쏜살같이 뛰여가 가짜 암컷한테 업히워 용을 쓴다. 이때 채취원이 그놈의 페니스를 잡고 자극을 주면 유리컵에 대고 정액을 쏜다. 맥 빠진 놈은 자각적으로 채취실을 나와 이미 열어둔 뒤문을 거쳐 자기 칸으로 천천히 들어가 누워버린다. 백 이십마리가 륜번으로 돌다보니 4-5일에 한번씩 정액을 뽑게 되는 것이다. 슈퍼돈과 뭐라고 했던지 명칭이 기억나지 않는데 그 두가지 종돈뿐이다. 미국이나 카나다 그리고 유럽에서 한마리에 한화 백만원도 넘게 주고 수입해온 것들도 얼마간 있었는데 자국에서 개량한 십만원짜리가 다수다. 20여마리 미숙 예비 종돈은 커다란 남새 하우스같은 집에서 따로 키우고 있었다. 철관을 휘여서 박고 그 위에 비닐박막을 씌우고 그 밖에 또 방수포를 덮어 해볓을 가리웠다. 바닥은 콩크리트도 하지 않은 흙땅이다. 사료는 아침 저녁, 하루에 두끼니씩만 주는데 마른사료를 밀차로 밀고가면서 칸막이 철문에 달린 철통에 비닐바가지로 하나씩 퍼담아주면 끝이다. 돼지가 사료를 먹을 때 우리는 철편 갈퀴로 칸칸이 바닥의 돼지 분변을 “현관” 철판 밑으로 긁어내린다. 날마다 애들이 배달하러 나간 후 우리는 며칠간 예비돈 우리를 쳐 내는 일을 하였는데 충남 농업대학 필업 전인 대학생 아르바이트 애 둘도 우리와 함께 하였다. 그중 박 재성이라 부르는 애는 한달 후 축목학부를 졸업하고 우리 센터에 와 취직 하였다. 그애는 아버지가 규모 상당한 돼지 농장을 운영하고 있는터라 장래에 그걸 물려받을 것이라 한다. 센터의 애들 거개가 대학을 나왔다는 것은 후에 안 일이지만 이로부터 한국 국민 문화 교육이 많이 벌전 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예비돈우리 바닥을 깨끗이 쳐낸 후 하루 두끼 사료를 주고 분변을 긁어내고 나면 할 일이 별반 없었다. 창고에 들어가 둘러보니 마침 용접기와 용접봉 몇가치가 있는지라 할 일을 찾게되였다. 큰돈사엔 커다란 에어콘 두대를 량켠에 세워놓고 사용하는데 출입문 철제 문턱 안으로 지나간 실팍한 에어콘 전선과 동관이 로출 되여 드나드는 많은 사람들의 발에 밟히우고 사료밀차 바퀴에 마구 깔리우면서 위험을 보이고 있었다. 문턱이란 것이 밀차 넘나들기를 고려하여 한 것이다보니 평지와 별반 차이가 없고 반면에 에어콘은 엄청나게 큰 것이라서 그 전선과 동관 또한 가늘지가 아니하다. 나는 페철 무더기를 뒤져 “ㄷ”자형 규격철을 찾아내다가 전선과 동관을 덮고 문턱과 함께 용접 해 버렸다. 그날 오후 고사장 눈에 그것이 뜨인 것이다. 아마도 오래간 근심 해 오면서도 누구하나 해결책을 찾지 못한 문제였던 모양이다. “이걸 아저씨 고쳤어요?” 하고 뻔한 의문을 던지며 흡족한 웃음을 짓는 그녀의 모습은 매혹적이였다. “사장님, 용접봉 한보루만 사다 주시요, 고쳐야 할게 많구만요.” “그러세요. 그리구 앞으로는 다른것들두 뭐든지 수요되시믄 애들을 시켜 직접 사오라고 그러세요.” 그날 저녁 저녁상 앞에서 고사장은 분부하였다. “너희들 잘 듣거라, 앞으로 아저씨가 뭣이 수요된다고 하시면 누구든 뭐든 총알같이 사다 드려야한다. 알았어?” “옛! 알았습니다!”는 애들의 이구동성이다. 누구나 없이 군생활을 겪은터라 그맛이 났고 사회 습성이 그러하듯 사장님은 직원들 앞에서 절대적 권위이다. “그리구 방 호성, 넬 들어 올 때 잊지 말고 용접봉 한보루만 사와라.” “예, 알았어유.” 방 호성은 센터 애들 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은 서른 아홉살 로총각이다. 애는 마음도 곱고 일도 잘 하는데 술을 너무 하는 것이 흠이였다. “술 좋아하는 사람 마음 나쁜게 없다”고들 말은 하지만 술 많이 마시는 남자를 좋아하는 녀자 어데 있을까? 그래서 로총각으로 되고 로총각으로 되니 술과 동무하고… 호성이는 술 먹은 날 밤이면 먹을 알도 없는 랭장고 문을 열번도 더 여닫는다. 그리곤 아침을 굶은채 차를 몰고 나간다. 처음엔 홀로 살고있는 나의 처제와 짝 지어 주려고 하다가 그자식 술을 너무 하는 탓에 아쉬운대로 단념 했다. 원 남편도 술이 문제여서 헤여지고 만 것이니 술이 과한 남자라면 처제는 당초에 도리질이다. 이튿날 호성이는 용접봉 한통을 사왔다. 나는 돈사의 떨어져 거덜거리는 칸칸의 앞뒤 철문들을 모두 다시 용접하여 새것처럼 만들어 놓았고 마당 서쪽 모퉁이에 세워진 개우리도 새로 고쳐 놓았다. 센터에서는 “진도깨”등 명종견을 다섯마리나 가두어 기르고 있었는데 길다란 견사는 몽땅 새끼손가락만큼한 철근을 용접하여 만들어 놓은 쇠살창이였다. 헌데 그것을 그대로 땅바닥에 방치하였기에 보기가 싫거니와 엄중한 위생불결이였다. 나는 애들 차에 쓰는 쟈끄(千斤顶) 두개를 가져다 개우리 귀퉁이를 파고 넣었다. 벽돌을 주어다 받치면서 조금씩 떠 올리고는 한쪽켠에 먼저 한메터씩 되는 두 다리를 용접 한 후 또 다른 한쪽을 떠 올려 용접 하였다. “허, 진도깨도 인젠 빌딩에서 살게 되였네요!”하며 애들은 나의 앞에 엄지를 내밀군 하였다. 땅바닥에 딱 붙어 있던 철살창 개우리가 파아란 양철기와 밑에 반키 가량 허공에 뜨니 보기 좋고 깨끗한 것이 마치 한개의 멋진 경물과도 같았다. 나는 리아저씨와 함께 쎈터 주위의 잡초들을 깨끗이 베여버리고 휘발유 모터로 돌리는 팔랑개비식 낫으로 마당의 잔디밭도 가쯘하게 다듬어 놓았다. 앞산에 올라가 진달래 꽃나무도 두그루 파다가 안해와 함께 마당 앞 변, 주방 창문으로 환히 볼 수 있는 자리에 한그루씩 옮겼다. 누가 심은 꽃나무가 더 잘 피나 내기 하자며… 센터로 들어오는 차길과 산 사이로 물도랑이 났는데 큰 비가 올라치면 골물이 터져 내리면서 굽인돌이 길을 조금씩 핥아가군 하였다. 나는 비닐오리 주머니 서른여개를 주어모아 리아저씨와 함께 산비탈의 흙을 파담아서는 돌아 서서 굽인돌이 길목에 쌓아 놓았다. 인젠 아무리 큰 비가 쏟아져도 길목이 끊길 근심은 없게 되였다. 하루에 몇번씩 철편 갈퀴로 긁어내리고 고압물로 쏘아내린 돼지 분변은 반달에 한번씩 전기기계로 “현관” 철판 밑에서 돈사 밖의 커다란 콩크리트 구덩이에로 밀어낸다. 거기에서 분변과 오줌물이 자연 분리되여 물은 오수 정화 시스탬으로 흘러 들어가고 걸죽한 분변만 다시 외바퀴 밀차에 담아 분변 발효장에 가져간다. 콩크리트 구덩이와 분변 발효장의 직선 거리는 5메터밖에 안되지만 밀차를 밀고 에돌다 보니 30메터가량 된다. 원래는 전기 고압진공 뽐프로 흡입해서 발효장에 뿜어버리면 되는 일이였는데 그것이 고장 난지가 썩 오래 되였다고 애들이 알려주었다. 뜯어보니 여러 종류의 전기 뽐프를 수리 했었던 기계 전문가인 내 능력으로도 고칠 수 있는 것이 못 되였다. 오수 정화처리 시스탬의 고장 난 양수기도 고쳤었고 돈사 바닥을 물로 불고 돼지를 샤워시키는데 사용하는 고압 분사뽐프와 센터의 지하수를 빨아올리는 흡입뽐프도 손질 했으며 옛날엔 연길 공장에서 150메터도 넘는 깊은 땅밑의 물을 끌어올리는 큰 양수기(深井泵)도 사람들과 함께 수리 했었다. 헌데 분변 수송 진공뽐프는 깨여진 부속품을 바꿔야하고 그걸 바꾸려면 반드시 전문용 공구가 있어야 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물로 깨끗이 씻은 후 배사장의 차에 싣겨 보내여 천안 시내의 전문점에 가서 수리 해 오게 하였다.
48    [한국 나들이]10. 둘만의 생일 파티 댓글:  조회:1681  추천:1  2013-05-29
10.  둘만의  생일  파티   칠월이라서인지 날씨도 을씨년 스럽다. 차창 밖에선 잔비가 한없이 내린다.  현대적인 엘지 건설장에서 열흘 일하고 나왔다. 하루에 5만원씩 50만원을 월말 봉금이 나올 때 형 광철씨가 받아서 넘겨 오기로 하였다. 그냥 붙어 한다면 월급은 백 이 삼십만원 될 것 같았고 일도 한주일 후부터는 미립이 트이여 그닥 힘 들지가 않았다. 친구도 익혀졌고 아침 다섯시에 일어나 뻐스타고 갔다가 저녁 일곱시면 오는 시간 생활도 완전히 습관이 되였다. 문래동의 작업이 곧 끝나는데 인천엔가 새로운 공사장으로 옮겨 간다고 하니 일거리 끊길 근심도 없다. 꽤나 괜찮은 일자리라 생각돼 그만두기는 아쉬웠지만 그만두지 않으면 안되였다. 나는 안해가 더욱 좋은 일자리를 찾았다기에 그를 따라 충남 천안으로 가는길이다. 영등포 역에서 점심 때 쯤 “무궁화” 남행 렬차에 올랐다. 한국 렬차를 처음 타보는 것이다. 뻐스와 지하철을 많이 탔고 제주도 왕복 비행기도 탔었다. 렬차는 여덟 바고니 초과하지 않았고 한바고니 정원도 여든을 초과하지 않았다. 려객표는 일절 컴퓨터로 공제되여 있기에 역마다에서 차위에 빈자리가 나져야만 표를 사고 오를 수 있었다. 차위엔 표 검사를 한답시고 왁짝거리며 서넛씩 무리쳐 다니는 승무원이나 승경도 없고 승무원 옷을 주어입고 쪽바리 차를 비집고 밀고다니며 시끄럽게 “매바, 매바!ㅡ (买吧-사세요)”를 부를는 장사군도 없다. 차바곤이 사이문은 자동문이라서 사람이 문앞에 다가서면 조용히 열리고 또 사람이 지나간 후면 소리없이 닫힌다. 바닥엔 붉은 주단을 깔았고 천정엔 공기 조절기를 달아놓았기에 창문은 열지 못하도록 고정해버려 바깥 먼지바람이나 소음과 완전히 격리 되여 있는 것이다. 차내는 조용하고 깨끗하고 편안하였다. 장거리라야 고작해서 중국의 한개 성내의 거리도 안되는 것이라서 침대차나 식당차가 따로 없다. 한국 렬차 안은 대형 뻐스 모양으로 가운데에 통로가 있고 좌우켠에 두사람씩 앉는다. 걸상은 모두 렬차가 전진하는 방향으로 놓여졌는데 등받이를 반쯤 젖히고 누운 자세로 휴식을 취 할 수도 있고 걸상을 백 팔십도로 돌려놓고 넷이 마주 앉아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고 맥주도 마실 수 있다. 실로 아늑한 공간이라 하겠다. 중국에서 기차 타는 것을 한차례의 고역이라 한다면 한국에서 기차 타는 것은 일종의 향수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려행가방을 선반위에 올려놓고 그아래에 나란히 앉아 차창 밖의 경물들을 구경하며 향수를 누린다. 철로 연선의 나무들과 철탑식 전선주들은 휙-휙- 차창을 스치며 우리가 오던 방향을 향해 달리는데 꽤나 먼곳의 고층 건물들은 우리와 경주나 하려는 듯 한참씩 함께 앞으로 달리다가는 기진맥진한 듯 천천히 뒤로 물러선다. 기차가 한역전에 당도 할 때마다 스피카에서는 네가지 나라 말로 지명과 내릴 문의 방향을 알려주고는 “감사 합니다!”“빠이 빠이!”“쎼쎼!”“사요나라!” 하는 아가씨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유연하게 울려 나온다. “자자,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점심이나 먹기요.” 역전 슈퍼에서 장만한 물건이란 맥주와 포도물 두통씩 그리고 자그마한 빵과 짤막한 소시지 두개씩 뿐이다. 너무나도 적은 것이지만 그것이 정이고 쾌락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일자리를 찾아 간다기보담 신혼 부부가 려행길에 오른듯한 들뜬 기분이다. 한국에 나온지 달포가 다 되는데 안해는 아무 일도 못하고 하루 종일 옥살이 하듯 조카네 빈집만 지키자니 여간만 힘겨운 사무가 아니였다. 얼마전 그녀는 주정부 인대에서 일보는 딱친구 복자씨한테 안부를 전했었다. 그 친구로부터 한국에서 제일 큰 양돈장을 경영하는 박사장의 련락처를 알았고 그 즉시로 박사장한테 전화를 걸었다. 복자씨도 박사장에게 도움을 부탁하는 전화를 쳤다. 이렇게 되여 전날 안해는 박사장의 련계로 천안의 한 돼지농장에 가서 사장님을 만나 뵙고 일자리를 결정 지었던 것이다. 월 로임은 80만원과 70만원으로 남자는 백 사십마리의 종돈을 기르고 녀자는 열명 좌우의 사람들 밥을 하기로 하였다. 두사람의 로임을 합쳐야 문래동에서 내가 혼자 벌던것 만큼 되지만 우리는 돈이 첫째가 아니라 기분 좋게 사는 것이 첫째다. 우리 뿐만 아니라 누구든 다가 그럴 것이다. 돈도 기분 좋게 살자고 버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누구든 살기위해 버는 것이지 벌기위해 사는 것은 절대 아니다. 안해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그가 할 일이 한결 가볍기만을 은근히 기대해본다. “자, 나의 옥의 건강을 위하여ㅡ!” 포도물을 그에게 따 주고 나는 맥주를 따 들었다. 그리고는 앞뒤 좌석의 려객들이 듣기나 할까 두려워 도적놈처럼 속살 걸렸다. 그녀도 나의 귀에다 속살거리며 맥주통에 포도물통을 가져다 대였다. “자, 나의 진의 건강을 위하여ㅡ!” “우리부부의 건강과 행복과 사랑을 위하여ㅡ”우리는 함께 속삭이며 한모금씩 마시고 마주 보며 웃었다. 참으로 꿀 같이 달콤한 분위기였다. 모든 피로와 번뇌와 증오와 고통까지도 말끔히 잊혀지고 사라지는 순간이였다. 나의 안해의 이름은 옥이고 성은 전씨다. 올 전(全)자에 구슬 옥(玉)이라 이름 하나만은 완미하고 찬란하다. 내가 고쳐준 이름이라서 나의 구미에 딱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본명은 순옥이라 우리 민족 여자들중 제일 평범하고 썩어빠지게 흔한 이름이였다. 중학시절 소위 문화혁명이란 놀음을 함께 하였기에 아래 학급인 그녀와 알게되였고 사회에 나간 후 남 몰래 꽃편지까지 쓰게 되였다. 물론 그녀가 제일 처음 받아본 꽃편지였고 나역시 세상에 나서 처음으로 써바친 사랑의 고백이였다. 그많은 편지의 첫줄마다에 “사랑하는 나의 옥!”하고 썼으니 그 이름이 고쳐지지 않는다면 별일인 것이 아니고 뭐겠는가? 내가 군대질 할 때 그는 병마에 찢기운 몸과 순옥이란 이름을 그대로 가지고 그와 한마을에서 함께 자란 춘식이한테로 시집 갔다. 불행이도 그녀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그처럼 그를 사랑해주고 아껴주던 춘식이마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춘식이는 나와 동창이였고 먼저 군대에 갔다왔었다. 운명의 조화라고나 할까, 하늘의 안배라고나 할까? 나는 전 처 장씨와 자그마한 말다툼 끝에 리혼까지 하게되였고 리혼한지 3일만에 옥을 다시 만나게 되였다. 만나고보니 남편을 잃고는 이름을 고쳤고 연길에 전근 해 와 살고 있었다. 홀로 있는 팔년 사이 돈 많은 남자, 급 높은 남자, 잘 생긴 남자, 우수한 남자들의 청혼도 많았지만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기다리기나 했다는 듯 무능하고 못난 나를 만나 주었다. 첫사랑이란 원래 잊혀지지 않는 법이라고들 말한다. 그녀가 철부지던 나로하여금 사랑이란 뭔지를 알게 하였고 내가 그녀의 애된 가슴속에 사랑이란 불씨를 던져 타번지게 하였다. 25년이란 기나긴 세월의 폭풍취우와 엄동설한을 겪은 후 그 재무덤을 살랭이 뒤적이고 헤쳐 보니 그속에 여직껏 그렇게 뜨겁고 아름다운것ㅡ사랑이란 불티가 고집스레 살아남아 반짝이고 있지를 않겠는가?! 93년 2월 9일 오후 3시경, 나는 리혼증을 타가지고 그길로 큰 누님을 찾아 갔었다. 큰 누님께선 한단위에서 근무하는 옥의 친구를 통해 3일만에 옥을 찾아 누님집으로 데려왔고 저녁에 나를 불렀다. 그때 나는 어머니와 함께 동생 순란이네 집에서 살았었는데(리혼시 집을 녀자쪽에 주었으니깐) 옥을 찾았다는 소리에 매제 봉진이가 벌떡 자리를 차고 먼저 일어서는 것이였다. “오빠를 오라는건데 동무 뭐라구 먼저 나섭니꺄?” 순란이의 질문이다. “나두 보믄 안 되는가?” 봉진이의 불가사이라는 뜻이다. “둘이 만나 련애 할건데 동무 무슨 대반 서겠습니꺄?” “그런가? 하하하…” “그렇채이쿠, 호호호…야ㅡ웃긴다야! …오빠, 잘 만나보구 오시요!” 문밖에 나서는 내 등뒤에서 순란이네 부부의 상쾌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동생들이나 누님들은 옛날부터 나와 옥의 관계를 너무 잘 알고 있는터였다. “만나게 되여 반갑소!” 나는 처음으로 옥의 손을 잡았다. 60년대 말과 70년대 초 5년간 편지만 서로 오고 갔을 뿐 손을 잡기는 커녕 이렇게 가까이에서 만나본 일 조차 없었다. 아마도 어리고 어진 탓이였을 것이다. “전 옛날 옥이 아님다…” 하는 말은 잇지 않았다. “나두…” 나도 옛날 내가 아니란 말이고 하는 뜻이다. 그의 풍상고초를 모르는 내가 아니다. 그마음의 상처를 인젠 내가 쓰다듬어 주어야 한다. 생각은 이렇게 하면서도 본성이 의사 표달을 잘 못 하는 나고 처음 만나는 자리인지라 말을 아꼈다. 우리는 이튿날 아침 여덟시에 예술극장 앞에서 남몰래 만나기로 약속하고 인츰 갈라졌다. 이튿날 13일은 음력으로 1월 22일이라 마침 그녀의 생일이였다. 우리는 쌍 침대 하나보담 조금 더 큰 그의 세집방 침대위에서 말린 세치네(물고기)를 기름에 튀겨놓고 빠이갈(흰술)을 마시면서 하루내내 둘만의 생일파티를 가졌다. 그리고는 저녁에 순란이네 집에 함께 가 어머님과 형제들의 허락을 받았다. 차창밖에선 작은 비가 그냥 내리고 있었다. “무궁화”는 우리를 싣고 평택을 지나 천안으로 달린다. 안해는 음료통을 나의 앞으로 내들었다.  “이번엔 내가 찡쥬(敬酒-술을 권함)할 차롐다. 랑군님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옥체 건강하시고 하려는 일들이 뜻대로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부인님의 건강과 쾌락을 위하여 이잔을 듭시다!” 나는 나의 옥과 존대말을 잘 쓰지 않는 버릇이 있다. 중학 시절부터 어린애로 보아왔고 선배노라 틀거지 내며 “야,자,”하는 말투가 습관 돼 버렸다. 헌데 생각지도 않은 생일을 축하 한다고 하니 정식이 돼버려 존대어가 불쑥 튕겨져 나온다. 오늘이 바로 양력 7월 10일이니 음력으로 5월20일이라 나의 쉰 한돐 생일이였던 것이다. “섭섭케 생각지 마십시오, 앞으로 다 보상 해 드릴께요.” “아니, 섭섭한게 아니라 너무 즐겁기만 한데뭐, 고국의 아름다운‘무궁화’ 속에서 사랑하는 님과 나, 우리 둘만의 생일파티! 얼마나 랑만적인 현실이요? 남들은 이런 생일을 쇠고퍼 죽는다고 해도 쇨 수 없거니와 상상도 못 할 건데뭐, 영원히 영원히 이렇게 둘이서 생일을 쇨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소? 이같은‘생일 려행’은‘신혼 려행’ 못지 않게 뜻 깊은 한페지가 아니겠소?…” “뭐나 좋게 생각하니 좋습니다. 고생을 락으로 생각하며 ‘뛰고 뛰는 몸이라 괴로움 많지만 쨍ㅡ 하고 해 뜰 날 돌아 온단다…’” “생일날이면 제일 먼저 생각 나는 사람은 누구갬?” 내가 불쑥 물었다. “어,머,니!”하고 안해는 또박또박 대답한 후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정답입니다! 백점을 드리겠습니다. 자, 철혁씨의 노래가 나갑니다…” 나는 사회자나 된듯한 어투였고 “어머니”를 낮은 소리로 함께 불렀다. “천리를 가도 만리를 가도 못 잊을 어머님 사랑, 무엇으로 그 사랑에 보답 해야 합니까…” 우리는 어머님에 대한 추억으로 묵상에 잠겼다. “천구백 칠십년, 애들과 함께 갑산골에 가 일년간 감자 농사를 지었댔소…” 나는 31년전 스므돐 생일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남도마을”로 내려갔던 동필이가 달구지에 보습날이며 괭이따위 농기구들과 생활 용품들을 싣고 돌아왔다. 마을로부터 갑산골까지 칠 팔십리 거리라 소수레를 몰고 올라면 하루 종일이 걸린다. “자, 이거 저네 엄마 줍데.”하며 동필이는 돈 2원을 내앞에 내밀었다. “이건 어째?”  파아란 돈 2원을 받아쥐며 짓는 나의 의아적은 표정이다. “넬 제 생진이라구 술 사 먹으랍데.” 동필이의 전달이다. “응?” 나는 목이 꺽 메였다. 원경지에 가 일하는 아들의 생일을 잊지 않으시고 챙겨주신 어머니! 그 이원은 온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어머님의 사랑이다! 째지게 구차한 그세월에 무슨 수로 그 2원을 얻어 보내셨는지 알 수 없다. 한근에 2전씩 하는 소금을 산다면 2원으로 백근을 살 것이고 백근이면 몇년을 먹을지 모른다. 그렇게 눅은 소금도 적잖은 농가들에선 마음대로 사 먹을 수 없는 세월이였다. 먹을 쌀이 긴장한 때라서 그랬던지 그때도 다른 물건에 비해 술값만은 비쌋다. 2원이면 흰술 너근밖에 살 수 없었으니깐. 우리네 넷이니 너근 값을 구해 보내신 것이 뻔하다. 너남 없이 젊은이들은 누구나 다 60% 흰술을 한근씩 마시고도 부족해 하는 때였으니깐. 이튿날 그들 셋은 감자밭 기음 매러 가고 나를 남겨 밥을 짓게 하였다. 애들이 나의 생일이라 봐준 것이고 또 그래야만 저녁에 생일술이 쉽게 생길 것이 아니겠는가? 애들을 점심 먹여 일밭에 다시 올려 보낸 후 할 일이 없으니 나무 그늘 아래서 소설책을 읽고 있는데 뜻밖의 춘식이가 찾아왔다. 군대에서 휴가를 맡아 나온 그애는 멋들어진 군복 차림이였다. 68년 3월에 참군하여 학교에서 갈라진 후로 오래간만에 만나는 동창이고 친구이다. 갑산마을에 친척이 있어 피끗 뵈러 왔다가 내가 그곳에 와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들린 것이였다. 기차를 타야 한다면서 말 몇마디 못하고 역전으로 발길을 옮기는지라 나도 따라 나섰다. 기차란 림업국 통나무를 운반하는 소형 철길 위로 뛰는 작은 객차인데 고동하골과 갑산골로 하루 건너 엇바꾸어 뛰는지라 한번만 놓지면 두밤을 묵어야 하였다. 함께 학교 다니다가 춘식이와 같이 참군한 애들이 많았다. 명식이, 룡운이, 운봉이, 준봉이, 승남이, 승호… 나는 그애들의 소식을 퍼그나 알고 싶었다. 나는 일원을 내고 “목단표”담배 두갑을 사 춘식이의 호주머니에 넣어주었다. 그때 그곳에선 그것이 제일 비싼 담배였다. 더 사주고파도 아니된다. 저녁에 생일 술을 적게라도 사야되니깐. “이것이 바로 돈을 쪼개 쓴다는 것일게요…” 나의 옛말은 아쉬운대로 여기에서 멈춰져야 했다. 우리들을 실은 “무궁화” 렬차가 서서히 천안역에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사장님께서 직접 승용차를 몰고 우리들을 영접하러 오기로 했노라고 안해가 알려 주었다. 나는 어서 빨리 뛰여내려 사장님을 뵙고 싶었고 가슴까지 쿵당쿵당 뛰였다. 무슨 말부터 해야는건지? 악수는 해야는지 말아야 쓰는지? 사장님이란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하니깐 분수 없이 들뜬 것이다. “원래 점잔은척 하는 놈이 뒤로 호박씨 깐다”고들 말한다. 고운 녀자 싫다는 남자란 없을 것이다. 특히나 나같이 멋진 남자가, 식물인이면 몰라도 말이야. 물론 고운 녀자라고 뭐 다 나하고 친하는건 아니지만, 아니, 나를 보는것 처럼도 하지 않을 것이지만 홀로 생각만 하고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데야! 이래서 “남자들은 다 발람둥이”라고 무리하게 제멋대로 욕하는건지 모를 일이다. 바람둥이라기 보담은 세상이란 원래 이렇게 타극이나 이성은 서로 흡입 하면서 음양 자웅이 서로 조화되여 온 사회가 발전 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고 생각된다.
47    [한국 나들이]9. 현대화 아파트 댓글:  조회:1688  추천:0  2013-05-28
9.  현대화  아파트               절라도 광주에 계시는 93세 당숙모님께서 별세 하셨다. 정정하신 모습 뵌지 한달도 않되는데 참으로 사람의 래일은 알 수가 없다. 나는 형님께 전화를 걸어 조문드리고 전날 구치소에서 구해준데 관해서도 뜨거운 감사를 표하였다.“형제 사이 감사랄거 뭐 있어? 무사히 잘 지우다가 가소 잉.” 형님의 부탁이였다. 부평 “평화 회사”에 가서 5일 로임 15만원을 받아왔다. 이튿날 일찍 우리는 비를 촐촐 맞으며 서울에서 퍼그나 멀리 떨어져 있는 한 부화장으로 찾아갔다. 하루종일 계란을 옮겨놓는 일이였다. 보기엔 쉬운일 같으나 안해의 체력에는 받아 견딜 수가 있을 것 같질 않아 돌아와버렸다. 다음날 우리는 전화 련계를 가진 후 김 희숙이라 부르는 친구를 만나려 뻐스를 타고 안양으로 갔다. 희숙씨는 어릴 때 나의 안해와 한부락에서 자랐고 중학교 때엔 나와 한반급에 다녔었다. 그들 부부는 한국에 나온지 5년이나 되였는데 마침 잔비 내리는 날이라 그의 남편 김 광철씨와 동생 김 형도씨까지 모두 집에 있었다. 집이란 희숙씨의 건설현장 밥을 하는 일터의 주숙처이다. 희숙의 남편 김 광철씨는 나보다 한살 위인데 알고보니 나와 동본인 청주(清洲) 김씨였다. 중국에 있을 때엔 청주 김씨 하나라도 만나보고 죽으려 해도 없더니 한국땅에서 의외로 형님 한분을 찾게 된 것이다. 이튿날 이른 아침 문래동 현장에서 만나기로 하고 부천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나는 문래동의 건설장으로 일하러 다니게 되였다. 다시 잡힐까봐 두려워 세끼 밥만 현장에서 먹고 부천에서 통근 하였다. 뻐스비는 600원인데 25분이면 문래동까지 가고 35분이면 집에까지 온다. 경적소리가 들리거나 경복이 보이면 괜히 가슴이 뛴다. 엘지건설회사에서 문래동 한구역의 옛집을 모조리 밀어버리고 28층짜리 새집을 네모나게 둘러 열몇채 삼 사천 가구 지어놓았었다. 벽채라든가 창문같은 외부 장식이 끝나고 한창 실내 장식과 마당 정리를 다그치는 중이였다.   아침 일곱시 전에 대문 밖 널판자집에서 작업복을 바꾸어 입고 현장에 들어가야 한다. 일곱시만 되면 경호원이 문을 닫아 꽁꽁 잠궈버리니 퇴근 할 때까지는 들어 올 수도 나갈 수도 없게되는 것이다. 몇키로메터 현장 둘레에 철관기둥을 세우고 높다란 철판으로 거리벽을 만들어놨기에 쥐새끼도 꿰 지날 수 없는 형편이다. 안전모나 안전화를 착용하지 않았을 경우엔 절대 입장을 제지시킨다. 위로부터 경호원들의 책임을 추궁하는지라 그들은 이를 엄격히 집행하는 판이다. 일곱시 십분부터 이십분간 조회 시간이다. 철판벽 안 제일 넓고 반반한 길바닥을 운동장 삼아 반조별로 지휘대를 마주해 줄을 선다. 수돗물 안장대, 전기 안장대, 난방관 안장대, 까스관 안장대, 장판가구 안장대, 조경대까지 300여명쯤 될 듯 싶다. 먼저 확성기를 틀어놓고 국민 건강체조라는 것을 한다. 나는 처음이라 뭐가 뭔지 모르기에 제일 뒤쪽에 서서 앞사람이나 지휘대에 선 사람의 동작을 보며 따라 한다는 것이 남이 다리를 벌리면 가두고 남이 팔을 내리면 추켜들면서 혼자 웃는다. 체조가 끝나면 현장 채임자 같은 사람이 훈시를 내린다. 전날 5번지 15층 전기 안장한 사람들이 퇴근 할 때 스위치를 내리지 않았기에 장밤 등불이 켜져 있었는데 다시는 이런일이 없도록… 천기예보에 따르면 최고 기온이 34도…  실외 작업하는 사람들은 물을 많이 마시고 음수처 마다에 염분알을 놓아뒀으니… 12번지 수도와 까스가 끝을 봤으니 가구가 따라설것… 등 말이 많은 것이 보편화이다. 어떤 날엔 들어도 모를 국가 공문을 읽어 줄 때도 있고 자기 반조끼리 둘러서서 작은 책임자의 훈시를 받을 때도 있었다. 훈시가 끝나면 지휘대에 선 사람의 “쉬였! 차렸! 뒤로 돌앗!”하는 구령 소리가 울리고 뒤따라 “준비ㅡ시ㅡ작!”하는 고함 소리가 들린다. 첫날이라 남의 행동을 훔쳐보려고 제일 뒤에 섰던 내가 “뒤로 돌앗” 소리와 함께 제일 앞 사람으로 되여 버렸다. 뭘 준비 하고 또 뭘 시작 하는건지 내가 알리 없다. 나의 앞엔 지휘도 줄선 사람도 없이 갓 지어놓은 아빠트만 하늘을 찌르고 서있다. 그렇다고 나혼자 사람들을 마주하고 원 방향대로 돌아 서서 그들이 무슨 수작을 하는거냐고 볼 수 있는 것도 아닌 판이라 죄진놈처럼 머리를 숙이고 섰다. 헌데 웬걸“아! 아! 아!ㅡ”하는 뜻밖의 함성에 놀라 하마트면 뒤로 자빠질번 하였다. 훗날 알고보니 뒤로 돌아 새아빠트를 마주하고 선 후 두손을 허리에 짚고 머리를 버쩍 치켜들고 목을 곧게 편다. 이것이 준비 동작이다. 헌데 나는 두 팔을 드리우고 머리를 푹 숙이고 섰었으니 실로 가관이 아닐 수가 없다. “시작” 명령이 떨어지면 층집 꼭대기를 쳐다 보며 목구멍이 터지도록 “아”를 세번 길게 웨친다. 물론 마지막 “아”소리는 더 길게, 기침이 나고 눈물이 나고 숨이 끊길 때 까지 웨치는 것이다. 이렇게 웨치기를 하고나면 스트레스가 풀리고 몸과 마음이 거뜬해 지기에 신체에도 좋고 작업상 효률도 한결 더 높아진다고 한다. 웨치기를 마감으로 조회는 끝나는 것이라 삼삼 오오 작업터로 향해 자리를 뜬다. 나는 김 광철씨와 함께 조경(造景)대에서 일하게 되였다. 다른 작업대들은 사람이 많고 일이 많아 4-5명이 한개반, 여러개 반조로 나뉘여 일을 하고 있었다. 우리 조경대는 대개 20명쯤 될까한데 두개반이라 보여진다. 우리반은 도합 열 두 사람으로 청 일색 연변에서 돈벌러 간 사람들로 모여졌고 반장은 왕청에서 간 마흔살 좌우의 최씨 젊은이였다. 다른 한반은 몽땅 60세 좌우의 한국 늙은이들로 구성되였다. 조경대의 총 지휘는 쉰살 좌우의 우둑진 중년 사나이였는데 그가 제일 분주히 돌고 있는 상 싶었다. 그외에 대부분의 시간을 사무실에 앉아서 보내는 무슨 실장이라는지 대리라는지 하는 젊은이도 한명 있었다. 우리 반장은 설계 도면을 겨드랑이에 끼고 다니다가 간혹 의문점이나 모를 것이 있으면 사무실로 가거나 총지휘를 찾아가 물어본다. 그럴 때면 난 “참, 나하고 물어봐도 될걸.”하고 생각 해 볼 뿐 한번도 아는척 한적은 없다. 사람이란 교오하면 못 쓰지만 일정하게 자기를 홍보 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봐주고 써주고 멸시도 면하게 된다. 자기가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감추기만 한다면 그속에 뭣이 들었는지 누가 알더란 말인가? “벙어리 속은 난 에미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지금까지 이런 손해를 얼마나 봤는지 모른다. 우리 “젊은반”에서 경계석을 곧게 세우고 나면 저쪽 “늙은반”에서는 경계석 안 길바닥에 콩크리트를 편다. 어떤 때엔 니반 내반 구분 없이 함께 경계석을 세우고 함께 콩크리트를 펴고 함께 굴착기 꽁무니를 따라 다니며 나무를 심기도 한다. 마당 중심에 커다란 분수터를 만들 때 집채만한 쇠통이 빙글빙글 도는 트럭이 물적물적한 콩크리트를 련달아 실어다 들붓는통에 두반 사람들 모두가 혼줄이 났다. 하루는 최반장이 인사를 남기고 떠나버렸다. 다른 곳에 좋은 일자리가 있으면 우리 둘만(김 광철씨와 나) 데려 갈 것이니 기다리라고 하였다. 나는 그 문서를 알 수 없었는데 희숙 남편의 말에 의하면 한국반 늙은 반장하고 의견이 맞지 않아 가는 것이라 한다. 얼마전 조금 다퉜다나 어쨌다나. 제일 밑, 발바닥 관리도 벼슬이라 생각 하는갑다. 자기 주장을 세우려 하고 남을 굴복시키려 하고… 외국인 젊은이로서 발바닥 벼슬이래도 소중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고 조경일에 고수인 늙은이로서 자기를 아니라고 하는 중국 사람을 좋다고 할 리가 없는 일이고. 좋은 일자리를 찾지 못한채 최반장은 사흘만에 다시 돌아왔다. 나는 처음으로 “참”이라고 먹어보았다. “아저씨, 와 참 드시구 하세요!” 희숙의 남동생 형도가 량손에 비닐 봉다리를 들고 오면서 웨쳤다. 한국에선 부르기가 좋고 부리기가 좋은 것이 아저씨와 아줌마이다. 우리 젊은 반에서 광철씨를 제외하고 내가 년장자로 51주세다. 그외엔 모두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이니 우리를 아저씨라 부름은 지당한 일이다. 어떤 때엔“로찐(老金)”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한국에서 중국식 호칭을 들어보는 것도 꽤나 상쾌한 일로 된다.   가타부타간에 “참 드시구”라는 “참”자는 태여나서 처음 듣는 소리라 어안이 벙벙한대로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다가섰다. 형님 광철씨가 빵 하나와 포도즙 하나를 자기 처남한테서 받은대로 나에게 넘겨주었다. 이 새 동생을 챙기느라고 퍼그나 신경을 썼다. 아침을 많이 먹었기에 배가 불룩하다면서 자기가 먹을 빵까지 나에게 밀어준다. 매일 오전 아홉시 사십 오분부터 열시까지 오후 세시부터 세시 십오분까지 참을 먹는 시간이다. 아침 정심 저녁 하루에 세끼씩 먹는 법으로만 알았었는데 다시 알고보니 법이 따로 없이 습관이 법으로 된 것이였다. 그러니 하루에 다섯 끼니씩 먹는 법을 따라야 할 것이다. 빵을 참이라 부른단 말인가? 빵을 “헬레바리”라 부르는 소리를 들은적이 있고 근간엔 빵을 두층으로 쪼갠 후 그 사이에 상추와 소시지 쪼각을 주어넣고는 “햄버거”라 부르는 것을 많이 보았다. 그러니 “참”이란 음식물이 아니라 시간을 말하는 것일게다. 아침과 점심 사이, 점심과 저녁 사이, 그러니 응당 “짬”이라 불러야 옳을 듯 하다. 나는 하루종일 참이냐 짬이냐 헛궁리 하며 일하다가 집에 들어서기 바쁘게 “국어 사전”을 펼쳐 참자를 찾았다. “일을 하다가 쉬는 시간에 먹는 식사” ㅡ이것이 “참”의 참뜻이였다. 점심 식사는 우리가 일하는 마당의 땅밑에 내려가 하였다. 고층 건물마다 3-4층의 지하실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네면이 두겹씩 고층 건물로 둘러싼 넓다란 공지의 지하 역시 두 세층으로 된 주차장인 것도 례사로운 일이다. 바로 그 주차장의 한귀퉁이 보이지 않는 곳에 림시로 커다란 식당을 차려놓고 점심에는 삼백여명을 먹이고 아침과 저녁엔 사 오십명 먹게한다. 식당 아줌마 7-8명 전부가 중국 흑룡강성에서 건너온 조선족이라는 소리에 나는 놀랐다. 어떻게하면 그렇게 일색으로 모일 수 있었는가 말이다. 조금 젊고 조금 반반하게 생긴 아줌마들은 쌩글쌩글 웃기도 잘한다. 그녀들은 멍청한 홀아비들을 마음대로 유혹 할 수 있었다. 눈만 맞으면 세집을 맡고 즉시 살림을 꾸린다. 돈벌러 갔다는 남편이 돈을 부쳐오지 않을 때엔 십상 팔구는 그러한 “새 살림”을 꾸린 것임을 꼭 알아차려야 한다. 식욕과 성욕은 모든 동물들의 본능이라 하지만 고급 동물이라 자처하는 인간으로선 조금이라도 참을 줄을 알아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자기의 욕구를 다 만족 시키려 함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라 하겠다. 우리 젊은반 열 둘 중 셋이나 그런 “새 살림”부부 생활을 공개적으로 하고 있었다. 중국에 있는 녀편네만 모르면 그만이다. 최반장은 친척집에서 다녔고 광철씨하고 나는 안해한테서 다니고 김 형도등 여섯은 작은 려관에 두칸 세맡고 다닌다. 그들 여섯은 퇴근하면 함께 술도 마시고 유흥거리도 다니며 비오는 날이면 마작놀이도 한다고 하였다.  두번째로 한국에 나온, 이미 삼년이 되였다는 한 젊은이는 버는 족족 경마권을 사다보니 지금 집으로 가고파도 로비가 없다는 것이다. 투전에 망하여 집에 돈을 부치지 못하는 사례도 십상 한 둘은 되는것 같으다. 점심을 먹은 후 사십분가량의 여유시간이 있었다. 나는 그들을 따라 한창 장식 중인 한 주택가에 들어갔다. 나무장판을 편 바닥에는 가구들을 포장했던 박스종이와 비닐포말들이 가득 널려 있었다. 그들은 박스를 찢어 깔고 안전모를 머리에 받치고 누웠다. 한잠 자려는 것이다. 나는 이칸 저칸 둘러보았다. 침실마다에 옷장, 이불장은 물론이고 서재에는 책상, 책장, 객실에는 커다란 채색 텔레비죤까지 놓여 있었다. 객실에는 쏘파와 차탁이 놓여 있지 않고 침실에는 침대가 없는 것이 중국 가정과는 다른 점이다. 중국에서 “한국식 온돌방”이라고 한국의 난방 기술을 가져다 쓰고 있지만 객실 쏘파와 침실 침대는 여전히 필수품으로 여긴다. 한국에서도 대다수 가정이 그것을 수요로 하지만 갖추어 놓지 않은걸 보아선 아마도 입주자 자체의 선호와 수요대로 하라는 것일게다. 화장실엔 세탁기 한대만 들여다 놓았다. 흰 대리석을 편 주방은 넓직하고 훤했다. 중국식을 볼라치면 주방은 대체로 작고 어둡고 구석쪽으로 배치되여 있는 것이 상습이니 반드시 개정해야 한다. 한 가정에서 객실보다 주방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아직 중국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는것 같다. 주부라면 더욱더 주방을 챙겨야 할 것이다. 그들이 주방을 사용하는 시간은 객실을 사용하는 시간보다 곱절은 된다. 집을 많이 지어 잘 팔아먹으려면 수선먼저 주부들의 마음을 사로 잡아야 한다. 주방엔 연기배출기, 가스 레인즈, 전기 밥가마, 미그로파 전기로, 커다란 랭장고와 라디오 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책상 걸상과 같은 가구로부터 텔레비나 랭장고와 같은 가전제품까지 모두가 엘지표 딱지가 붙어있는 자기들 산품이였다. 집도 팔고 가구도 팔고 집 사는 고객의 환심도 사고 일거 다득이다. 주방일 하면서 텔레비는 볼 수 없지만 라디오는 맘껏 들을 수 있고 또 라디오 멜로디에 맞추어 뭣인가를 한다면 그것은 보다 향기롭고 아름다운 것으로 탄생 할 것이 아니겠는가? 이같이 큰 집 짓는 사람은 작은 밥 짓는 사람의 편리부터 생각 해야 한다. 밥 짓는 사람이 없다면 집 짓는 사람도 없을 것이니깐. 둬발(약3m) 너비 되는 주방 정면 벽에는 약 80공푼 높이에 50공푼 넓이 웃면에 푸른색 파도 무늬의 흰 대리석판을 올려놓은 취사용 탁대(桌台)가 있고 탁대위 사람 키보담 조금 높은 곳으로 부터 천정까지 이어놓은 사발장(碗柜)이 있다. 왼켠 베란다와 린접한 벽쪽에 흡연기가 달려 있고 그아래 탁대에는 가스로가 놓여있다. 가스로 곁엔 사발 부시고 남새 싯는 불수강 물함지 두개가 가설되여 있다. 그다음 한메터 남짓이 탁대의 중간 자리가 비여 있고 그 오른 쪽에는 전기 밥가마와 미그로파 전기로가 놓여 있다. 탁대의 빈자리 아래에는 미그로파 사발 소독기가 안치되여 있고 벽에 달린 사발장 밑판 모서리엔 까아만 누름단추와 돌림단추 몇개가 신비롭게 달려 있었다. 나는 고 눌러보았다. 헌데 노래가 와당탕하고 울리질 않겠는가? “오ㅡ 록음기로구나!” 하고 경탄을 금치 못했다. 까아만 돌림단추(旋钮)를 조심스레 움직였다. 노래가 꺼지고 연설이 나왔다. 록음기만 숨겨 놓은 것이 아니라 라디오도 숨겨져 있었다. 헌데 그록음기라디오의 총두께는 두공푼밖에 안돼 사발장 밑판에 모든 부속품을 안장하고 주파수 계시판과 록음테프 입구만 단추들 좌우켠에 달아 놓았다.  연길의 형편을 놓고보면 라디오나 록음기는 커녕 벽돌을 쌓고 벽을 바른 후 창문과 출입문을 달아주면 끝이다. 수도꼭지나 스위치를 달기도 하는데 부동산 업주들이 그집을 팔아먹기 전까지 물이나 전기가 마구 흐르지 않도록 싸구려로 림시 달아 놓은 것이니깐 쓸 수 없는 것이다. 입주자는 싹내여 실내 장식부터 해야 한다. 벽에 칠을 하고 장판을 펴고 칸칸이 문이나 미닫이를 달고 옷장이나 이불장같은 벽가구를 만들고 화장실이나 주방의 바닥과 벽엔 사기판을 붙히고… 나는 베란다에 나갔다. 가스 류량 측정기와 개페기가 벽에 안치되여 있었다. 베란다 밖의 벽을 따라 실팍한 흰색 가스 비닐관이 지하로부터 28층 옥상에까지 곧게 올라 갔다. 연길에서 보면 가스 철관은 실내층계 벽에 붙어 있다. 가스관의 실내 안장과 실외 안장은 기온 문제일까? 안전성 문제일까? 알지도 못하면서 늘 이렇게 헛궁리로 세월을 허송한다. 객식쪽의 베란다엔 공기 조절기가 놓여 있었다. 역시 엘지표 딱지가 딱 붙어 있는 상품이였다.   
46    [한국 나들이] 8. 권력과 돈 그리고 법 댓글:  조회:1844  추천:0  2013-05-27
 8. 권력과 돈 그리고 법     “권력은 곧 법이다.” “돈만 있으면 처녀 불알도 산다.”는 철리는 중국이나  한국이나 동방국이나 서방국이나 가릴것 없이 다 들어맞는다. “법률 앞에선 사람마다 평등하다.”고 누구라 없이 다 외울 줄을 안다. 사실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누구나 다 잘 알면서도 헛소리를 죄치는 것이다. 어느누가 어느때 어디에서 어떻게되여 규정 지었는지 어느 나라에 가보나 법원청사라면 이마에 황금빛의 커다란 천평(天平) 모형물을 번듯하게 걸어놓았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드나드는 사람들도 거개가 두리모자 혹은 어깨나 가슴에 작은 천평 같은 것을 달고 다니며 멋을 부린다. 그들이 걸어놓거나 달고 다니는 것을 천평으로 보면 틀린다. 천평 모형인 장식품이지 천평이 아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저울질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진짜로 천평을 짊어지고 다녀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천평은 사람들 마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헌데 그 천평이 같은 품질로 만들어진 것이 하나도 없거니와 저질품이 너무나도 많다. 그런 저질 천평으로 모든 것을 저울질 하다보니 공정이란 운운 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우기 천평 지침이 한쪽으로 기울러 지며 전도된 수치가 나올 때엔 어느 한쪽에 꼭 돈 뭉치나 권력이 얹혀져 누르고 있음을 제꺽 알아차려야 한다. 한국 책엔 “칼자루 쥔 놈이 이긴다.”는 말이 있고 중국 책엔 “팔로 큰 다리를 비틀 수 없다(胳膊拧不过大腿).”는 말도 있다. 그러니 권력이 없고 돈이 없는 평민 백성은 많이 조심하고 기 죽이고  살아야 하는 것이 법칙이다. 사실 법관들마다 이른바 법대로 하려고 애 쓰지만 일마다 법대로 되여지질 않는 것이 현실이다. 법을 지배하는 것이 권력이고 돈이니깐. 권력이나 돈이 있으면 이 사회에서 큰 소리 땅땅 치며 살 수 있다. 권력과 돈 그리고 법은 한집 식구이다. 권력은 남편 같은 것이고 돈은 안해 같은 것이며 법은 자식 같은 존재이다. 권력과 돈이 결혼하여 법을 낳았다. 권력이 있으면 돈을 얻을 수 있고 돈이 있으면 권력이 생긴다. 그러니 그들은 천상 배필이다. 자식은 부모 앞에서 효도해야 한다. 그러니 법은 권력과 돈 앞에서 찍 소리도 못 한다. 법으로 국가를 다스리고 조화로운 사회를 건설 하려고 나라들마다 애써보지만 범죄분자만 날로 늘고 대중성적인 집회나 로조 행렬이 끊이질 않고 자살 테러 폭팔 사건이 날마다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간다. “권력과 돈 그리고 법”, 이 법칙은 한 가정이나 한 나라에만 적용 되는 것이 아니라 국제 사회에도 적용이 된다. 미국은 돈이 가장 많은 나라이다. 돈이 많다고 패권을 쥐려고 한다. “법률 앞에서 누구나 평등”하다고 하듯이 국제 사회에서 큰 나라나 작은 나라나 진보국이든 락후국이든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 미국의 관점은 그렇지가 않다. 최고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국제 사회에서 최고의 권력으로 알고 있는 미국은 국제법도 자기의 구미에 맞아야 한다고 여기며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반 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우리민족의 자랑이라고 말들을한다.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 최고상”을 수여 받고도 남음이 있다. 허지만 한민족 한나라가 두쪽으로 갈라져 사는 신세에 유엔사무총장이면 뭘 하며 자랑스런 한국인이면 뭘 한단 말인가?  자기 민족 자기 나라 일도 제대로 못하는 신세에 세계일을 하면 어느만큼이나 할거냐 하는 나의 둔한 생각이다. 그의 임기 사이 세계 어느 나라에 “분단선”이나 더 늘지 않을런지? 최고의 “자랑스런 한국인”이란 이름 답게 한반도의 “분단선”이나 지워버려 준다면 전 민족은 감지덕지 할 것이다.   20일 아침 9시에 나는 열 이틀 로임 36만원을 타가지고 “종점 갈비점”을 떠나 저녁 9시에 광수를 만났다. 충남 보령 웅천읍 서해 고속도로 건설장이다. 김씨성인 사장님은 나와 간단한 대화를 한 후 인천시 부평구 본부로 돌아갔다. 그들은 부평에 “평화 회사”라 이름 달아놓고 사람 너덧이서 이것 저것 끊고 때고 하며 철 대문도 만들고 알뉴미늄 창문도 만들고 하다가 간혹 야외 공정도 도거리 맡군 하였다. 서해 고속도로 웅천지구 몇십키로메터 구간에는 산굴도 몇개 있었고 산을 썩뚝 깎아버리고 길을 닦은 것도 몇곳 있었다. 우리가 하는 일은 그런 깎아놓은 산벽 락석(落石) 방지 공정이다. 산벽 밑 한메터 높이의 콩크리트 담 뒤에 최 대형 “공자 형강(工字型钢)”을 너덧메터 간격으로 용접하여 세운다. 그다음 그뒤에 쇠그물를 세워 펴고 량켠에서 당겨주고 기둥에 고정하고나면 끝난다. 우리는 먼저 기둥 세우는 일부터 시작 하였다. 우리란 김 광수와 나 그리고 평화 회사의 리대리와 아르바이트 대학생 애들 셋, 도합 여섯이다. 콩크리트 길과 벽을 때릴 때 미루 고정 해놓은  쇠판이 드러날 때까지 그들이 흙이나 돌멩이를 깨끗히 치워버리고 철기둥을 세워 잡아주면 내가 용접 한다. 날씨는 무더웠으나 일은 막힘 없이 잘 진척되여 나갔다. 리대리와 광수 나 우리 셋은 웅천서 제일 큰 려관에 방 하나를 잡고 투숙했고 근처의 작은 음식점 하나를 고정해놓고 하루 세끼씩 먹으러 다녔다. 알바 애들은 방학하여 돌아온 읍내 애들이라 점심만 우리와 같이 먹고는 집으로 다녔다. 그애들은 방학간 돈을 벌어 호주로 배낭연수 갈 참이라한다. 가만히 보면 방학에 놀고있는 대학생이 하나 없이 모두가 일에 뛴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우리와 함께 일하는 애 하나는 우리가 먹으러 다니는 음식점 녀사장의 아들인데 음식점은 작아도 고속도로 일군들이 얼마나 많은지 돈을 갈퀴로 긁는 판이였다. 걔들이 방학에 일하는 것은 돈 버는 재미와 번 돈을 유용하게 쓰는 재미를 감수 하려는 것이고 사회와 접촉 하면서 사회를 알고 장래 자기가 살아 나갈 길을 미루 구상하며 찾게 되는 것이다. 중국 애들은 아직도 이런 자립성이 부족하다. 모든 것은 부모한테 의거하려 하고 부모 또한 허리를 졸라 매며 돈을 모아 끝까지 자식의 뒷바라질을 한다. 그러하기에 자식 키우기가 힘 들고 힘이 드니 낳으려 하지 않고 낳지를 않으니 조선족의 인구는 급격히 줄어든다. 대학을 마친 적잖은 조선족 처녀애들은 한족 동창생이나 외국인과 결혼 하는가 하면 연변의 가임(可妊)여성 적잖은 수, 처녀애들은 물론이고 지어 기혼 (已婚)녀들까지도 남편을 버리고 한국으로 시집 가는가하면 중국 관내 발달한 연해 도시로 가 일 한다. 연변에 조선족 홀아비나 로총각들이 늘고 너무 많아 문제거리이다. 중국 보담 못 사는 조선에서 건너온 녀성을 몰래 뎃고 살다 들통나 잡혀가는 일도 있고 아무도 모르게 어데론가 도망가 버리는 일도 있다. 고속도란 나라의 동맥과도 같은 것이다. 고국의 대동맥 속에 나의 자그마한 힘이나마 부여하고 나의 한방울 피라도 흐르게 할 수 있게되여 크낙한 긍지와 희열로 나의 가슴은 벅차올랐다. 안해도 20일 나와 함께 와 려관에서 이틀밤 자고 부천으로 돌아갔다. 웅천에서 식당 도우미 일이라도 찾으면 함께 있으려고 했었는데 자리가 없었다. 22일 저녁에 돌아간 그를 25일 아침에 다시 불렀다. 24일, 오전부터 적은비가 내려 일을 할 수 없으니 광수와 나는 리대리를 따라 바다가로 놀러 갔다. 넓은 갯벌에서 우리는 반지락도 줏고 식지만큼씩 길다란 맛도 많이 잡았다. 그것들을 삶아 점심 먹을 때 소주 한잔씩 하였다. 려관으로 돌아온 후 리대리와 둘이서 소주 두병에 맥주 다섯병을 더 마셨다. 머리가 알딸딸해나고 세상이 콩알만큼 해졌다. 본틀이 들어날 차례이다. 술이 모자라다고 리대리를 데리고 우리가 들어있는 려관의 지하실로 내려갔다. 거기엔 커피숍도 있고 노래방도 있었다. 나는 노래방에 자리를 정하고 아가씨도 한명 청했다. 노래방은 한시간에 이만원이고 술과 안주 값은 따로 낸다. 아가씨한테도 시간당 2만원씩 줘야한다. 거기에서 노래 부르며 세시간쯤 마시고는 리대리와 아가씨를 달고 또 려관 앞길 건너에 있는 포장마차로 갔다. 저녁을 먹는다는 것이 술만 둬시간 더 마셨다. 호주머니에 있던 24만원을 다 털고도 4만원이나 모자라 아가씨에게 훗날 갚어 주기로 약속 했다. 리대리의 호주머니에도 몇만원쯤은 있음직 한데 한푼도 낼 념을 하지 않았다. 핸드폰도 자기 것을 절대로 쓰지않고 언제나 광수보고 달라해서는 전화를 치는 그런 구두쇠였다. 노래방 아가씨의 돈 4만원을 갚고저 안해를 부른 것이다. “바람은 나그네가 피우고 돈은 녀편네가 문다.”더니 이놈이 그쪼 났다. 돈도 돈이겠지만 술이 끝난 후 리대리가 볼일 있다며 파출소에 갔었는데 얼빤한 정신에 따라다니다가 넘어져 안경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잃어버린 이백 오십도짜리 돋보기가 없으면 잘 보이질 않아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형편이다. 6월 26일 아침 여섯시 40분경 출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형사들이 들이 닥쳤다. 광수와 나 그리고 나의 안해까지 셋은 보짐을 대강 꿍져가지고 경찰차로 안개 자욱한 칠갑산 고개를 넘어 보령시 경찰서에 모시워 갔다. 보령 경찰서에서 형사들과 함께 곽밥을 불러다 아침을 먹으면서 물었다. “경찰 아저씨, 우리를 왜 붇잡는거죠?” “당연 위법 했으니깐 붇잡는게 아닐까유?” “우리는 위법 한 일 없는데요.” “우리는 신고를 받았으니 공무 집행 할 뿐이쥬.” “누가 신고 했습니까?” “그건 말 할 수 없구요, 아저씨 한국말 잘 하신데 몇번째 한국에 왔쥬?” “처음이구요, 딱 한달 됐거든요. 우리를 어떻게 처리하는 겁니까?” “처리는 우리가 하는거 아니구, 가보면 알겁니다.” 우리는 다시 경찰차에 앉아 대전 “외국인 출입국 관할서”에 옮겨졌다. 핸드폰, 손목시계, 만년필, 라이타등 소지품과 혁띠와 신끈까지 보관 당하고 구치소에 갇혔다. 광수는 불법 체류죄, 나는 놀러와서 일한죄, 안해는 무죄라 석방이였다. 석달 비자로 친지 방문을 온 그녀를 잡을 리유는 추호도 없었다. 사실은 셋 다 불법 체류자로 알고 잡은 것일게다. 잡고 보니 아닌지라 하나는 석방 시키고 하나는 “일 한 죄”를 만들어 씌운 것이다.   구치소엔 우리 먼저 여섯이 갇혀 있었다. 조금 후 검은 살색을 가진 동남아 어느 나라에서 왔다는 30대의 젊은이가 교통 사고를 쳐 잡혀들어왔다. 전날 밤엔 그 작은 방에 서른 둘이나 앉았었다가 아침에 비행장으로 싣겨 갔다고 한다. 흑인 하나외에 여덟이 중국에서 건너간 조선족이다. 흑룡강 어데서 왔다는 20대 중반쯤 된 한 애는 분을 참지 못하고 집에 간 후 한국인에게 복수하리라고 중국 말로 허튼 소리만 죄친다. 점심이라고 들여온 곽밥도 차 버리면서. 금요일, 29일 비행기로 몽땅 강제 추방 시킨다는 것이다. 잡혀 들어온 후로 외계와 아무런 련계도 가질 수 없게 되였다. 안달아 난 것은 나의 안해였다. 함께 잡아 넣어달라고 해도 안된다, 남편을 놔달라고 해도 안된다, 면접도 안된다, 친척집으로 그냥 돌아가라는 한마디 뿐이였다. 안해는 보령에서 우리를 압송해온 한 키다리 형사한테서 핸드폰을 빌렸다. 법학 박사 공부를 하고있는 조카 연이에게 전화를 쳐 사연을 알렸다. 연이는 광주 형님께 전화로 구원을 요청 했다. 그형님은 청와대 동생한테 다시 전화 하였다. 청와대 형님은 즉시 나를 구속한 대전“관할서”에 전화를 쳤다. 그들은 내 소지품과 혁띠를 돌려주고 책상머리에 세웠다. 연이도 이미 와 있었다. 나는 그네들이 힘들여 타자 해 준 “돈 벌이 안함, 불법 체류 안함, 한국의 모든 법을 어기지 아니함.”등의 세가지 내용을 쓴 각서에 싸인하고 해방 받았다. 령수증 없는 벌금  50만원을 하였는데 그들이 저녁 먹을 돈이 없으니 구걸하는 것이리라 생각 하며 자선 사업을 한번 하였다. 나오다가 호출령을 받고 온 “평화 회사”의 김사장을 마당에서 만났다. 광수를 구해달라고 말은 해봤지만 그라고 무슨 힘이 있겠는가? 부천에 돌아와 여러 곳에 전화를 치고보니 광수의 딱친구네 친척이 법무부에 있는데 그이가 날이 밝으면 광수 구하러 간다고 하기에 큰 기대를 걸며 비로서 안도의 숨을 쉬게되였다. 친구광수는 결국 구원되지 못하고 중국으로 쫓겨왔다. 우리와 함께 일 하던 아르바이트 애들 부모가 신고한 것이라고 광수는 추측하고 있었다. 원자재가 오지 않아 반날 쉬고 비가 내리는통에 하루 쉬고 한건데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리유이고 그러니 그애들도 제대로 돈 벌이를 할 수 없으니 불만이였을 것이라 한다. 진상은 지금까지도 누구나 알 수 없으니 추측일 뿐이다. 광수는 점잔하면서도 강의한 친구이다. 그는 중국에 돌아오자 성시 생활을 버리고 룡수마을 농촌으로 내려가 명태 말리기 부업을 시작 하였다. 몇년 사이 20만원이란 빚을 다 물었고 아빠트 한채 살만한 돈까지 갖추었다고 한다. 돈을 번다는게 한국에 가야만 하는 것이 아니임을 광수는 우리들에게 알려주었다. 권력이 있어야 산다. 내가 내돈 내고 내입으로 술을 마신 것이 불법인가? 일 한 것이 불법이라 한다. 내딴엔 그래도 고국 건설에 땀 흘리는 것이라고 즐겁게 생각 했었는데, 언젠가 어데선가 서해 고속도로라 말이 나온다면 그곳 한 모퉁이에 나의 피와 땀도 슴배여 있노라고 우줄렁 해보려고 생각까지 했더랬는데 불법이라 하니 크게, 뜨겁게 부풀어 올랐던 가슴도 금시 식어버리고 만다. 불법이든 뭐든 청와대에 형님이 안 계셨더면 나는 별 수 없이 안해와 갈라져 한달만에 쫓기우고 말번 한 것이다. 그러니 권력이 있어야 산다 그것이다. “아줌마, 왜 총통한테는 전화 하지 않으시유?”하며 한 뚱뚱이 형사가 나의 안해한테 롱담삼아 비꼬아 말하였다. 그들은 이 아줌마가 직접 청와대에 전화 한줄로 알고 있는 것이다. 하기에 그후론 누구도 그녀를 쉽게 대하지 못 하였다. “무죄한 남편을 놔주지 않으믄 총통한테 전화 할라고합니다.”안해는 주저 없이 말하였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청와대에서 전화가 내려온 것을 전혀 몰랐고 연이한테 전화를 걸어놓고 속만 빠질빠질 태우며 그애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판이였다. 법을 배우는 애이니 형사들을 설들하여 삼촌을 구원 할 수 있으리라 안해는 믿고 있었다. 형사들은 자기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지 법을 집행 하고 있는 것이 아니임을 그녀는 모르기에 법학자인 조카애를 태산같이 믿고 있었다. 믿은 것은 옳바른 처사였다. 연이는 법이란 어떤 것인가를 잘 알기에 즉각 권력의 도움을 청한 것이다. “그눔 자식들 싹 다 총살 해버려라… 씹할, 어느 때는 잡아라 잡아라 해놓고는 또 내놔라고 지랄들이야…” 한 형사는 두덜두덜 청와대를 욕한다. 듣지도 못하는 욕이나 해대며 속풀이 하는 신세, 한급만이라도 위인 상사 앞에선 찍 소리도 못내는 그들의 신세가 가소롭지가 않을 수 없다. 99년 9월 말,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회관 대 회의실에서 한 “재외 동포 지위 향상 추진 협의회” 창립 회의에 참가하러 간 연변 작가협회 83세 고령인 고 김 학철선생님은 문화일보가 조직한 좌담회의에서 다음 같이 말씀하셨다. “조선족이 딱히 한국에서 기업을 하고 투자를 하고 부동산을 사겠다는 것도 아니고 단지 일해서 벌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대개 제 3 산업도 마다 않고 노동을 하고자합니다. 부지런한 이사람들이 들어오면 한국에 유리한것 아닙니까? 한국 정부가 조선족이 알거지라고 해서 동포로서의 대우조차 안 하는데 대해서는 슬픔을 느낌니다.” “…최소한도로 왕래의 자유를 보장 하는 것부터, 한국내 불법 체류자 문제들을 해결하는 문제 등을 차근히 풀어가자는 것이지요… 최근 한국내에서 대통령의 발언과 상관 없이 길거리에서 불심 검문에 의한 체포와 추방은 조금도 변함이 없이 진행되고 있다고합니다. 한국 국민 대다수는 조선족을 동포로 껴안고 있으나 소수의 악덕인이 있게 마련입니다. 임금 체불을 항의하면 기업주가 불법 체류자로 신고하고 경찰에 붇잡히면 돈을 줘야 풀려난다는게 현실이라고 들었습니다. 천만원 정도 빚지고 한국땅에 들어와 빚을 갚고 돈을 벌어 돌아가기 위해 4-5년 동안 불법 체류자로 도망 다니며 불안에 떠는게 현실이 아닙니까? 이런것부터 고쳐가자는  것입니다.” 동년 동월 중순, 남서울대학 보건행정학과 이 윤현교수님은 연변에 다녀간 후 썼다. “…지금 이시간에도 우리 편이대로 뒷전으로 돌린 동포들이 한국의 뉴스와 드라마를 즐겨보고 같은 유행가를 부르며 살아가고 있다. 먼 이국에서 반세기 넘게 지켜온 동질성을 단순히 짧은 경제론리로 모르는척 해선 안 될 것이다…” 어제 전남 여수시 외국인 관리소에 불이 났다. 불법 체류자로 같혀 있던 50여명 외국 로동자들 중 아홉이 숨지고 열 몇이 큰 화상을 입었다고 보도 되였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갸냘픈 목숨들이 이렇게 로동의 권리마저 삐앗기고 죽는 세상이다. 그 누군들 부모 처자 멀리한 낯설은 타향에서 불법 체류자로 숨어 다니며 고생하고 싶고 잡히우고 싶고 갇히우고 싶고 객사하고 싶겠는가? 모든건 권력이 없고 돈이 없는 죄다!   
45    [한국 나들이]7. 인생 수업 댓글:  조회:1357  추천:0  2013-05-24
 7.  인생  수업              세상에 살면서 누구라 없이 이런 저런 고비를 넘고 시련을 겪기가 마련이다.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인생수업”이라 듣기좋게 이름 지어 부르기도 한다. 일거리는 실로 많았다. 그렇다고 일군이 부족한 것도 아니였다. 모두들 자기에게 불합당한 것이라고 하려하지 않으니 외국인 로동자를 불러들이고는 또 불법 체류자라 붙잡아 보내고 야단인 것이다. 한국인은 열심히들 산다고 많이 들어왔다. 무슨 사물이든 절대적이 아니다. 부도나는 기업의 엄청 많으니 실업자 무직업자도 훨씬 많고 로숙자 범죄자도 썩 많은 것이다. 할 일도 많고 노는 사람도 많고 빈집도 많고 노숙자도 많고 경찰도 많고 범죄자도 많고… 사회적 질환은 일시에 근치 할 수 없는 것이고 또한 영원히 근치 못한채 사회가 끝날지도 모르는 것이라 내가 “훈장앞에 문서질 (班门弄斧)”이라 “왈가왈부,왈시왈비 (曰可曰否,曰是曰非)” 할 짓이 아니다. 자기 주제에 맞게 말을 해야한다. 조카집에 얹혀사니 로숙은 안해도 될거라지만 언제까지 신세만 질거냐 말이다. 6월 7일 오전 명동의 한 직업 소개소에 가 직업 소개비 18만원을 냈다. 아저씨는 로임을 더 탈 것이라며 십만원을 받고 안해 쪽으로 팔만원을 받는다.  집에서 점심을 먹은 후 뻐스를 타고 세시간 가량을 달려 경기도 구리시 토평동 “종점 갈비점”으로 왔다. 이곳이 우리들의 첫 일터이다. 잠자리 주고 먹여 주고 한달에 90만원씩 보증 해 준다고 한다. 봉금은 낮으나 둘이 함께 있으니 서로간 도울 수 있는 것이 좋았다. 뿐더러 연길에서 동생이 불고기 가스레인즈를 생산하고 있고 불고기점도 경영하고 있으니 한국의 기계도 보고 경영도 배우면 귀국 하여서도 유용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잖아도 요즘 놀러다니며 목격한 고기 구이로 두가지를 이미 그림 그려 동생한테 부쳐 보냈다. 물론 우리 가스로에 비기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혹시 어떤 부분이라든가 원리가 참고로 될런지 해서였다. “종점 갈비점”은 불가마를 놓은 상이 60개도 넘는 큰 가게였다. 한창 재 장식 중이라 손님을 받지 않고 16일에 오픈(개업) 한다고 일손을 다그치고 있었다. 날마다 자가용을 몰고 갈비 먹으러 왔다가 돌아서는 사람들이 푸술하였다. 40대 중반의 사나이가 사장이였는데 키도 크고 인물도 잘났다. 그는 우리 둘을 앉혀 놓고 대개 상황을 소개 해 준 후 인츰 일에 부쳤다. 처음이라서 두서가 잘 잡히지 않았다. “눈치 있게 일 찾아하라”고 사장님이 제시를 주었으니 부지런히 돌면 될 것이다. 나는 그런대로 밀어부칠 수 있을텐데 안해가 어떨런지 근심이다.  사장님을 비롯하여 여나문 식구들이 모두 마음이 곱고 상냥해 보인다. 우리 말로 할것 같으면 까다로울 것은 같지가 않았다. 모여 앉아 저녁을 먹는데 우리가 올 때 뻐스 정류소까지 데리러 왔던 채구원 같아 보이는 친구가 이불과 베개를 사왔다. 사장님은 “첫날 이불”이라며 롱을 하더니 요자리가 없다면서 캄캄한 밤임에도 불구하고 그길로 다시 가 당장 사오라고 시킨다. 일군이란 어디에 가나 사장님을 잘 만나야 살고 나는 법이다. 첫날 밤을 잘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났다. 안해는 볼라니깐 온 밤을 뒤척이며 제대로 자는것 같지가 않았다. 원래부터 어린애들처럼 잠자리를 바꾸면 잘 자지 못하는 모병이 있다. 그러니 점차 괜찮아 질것이다. 책상머리에만 앉아있던 그로 말하면 언제 이런 곳에 와서 돈벌이 한답시고 먹고 자고 일 할 줄을 생각이나 해 봤겠는가? 돈이란 뭐길래 인생길을 이렇게 엇바꾸어 놓는지 모를 일이다. “인생 수업”이라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말한다. 그 결과는 어떨런지? 나이 반 백을 넘어 먹고서야 인생 수업을 하다니… 아버지는 18세에 고향을 떠나셨었다.“나무는 옮기면 죽어도 사람은 옮기면 산다.”는 속담도 있다. 잘 살아보려고 사람들은 이리저리 옮겨가고 옮겨온다. “제진아, 내등거리 자상히 보거라…” 1985년도, 한달에 한번씩 나는 병환에 계시는 부친님을 모시고 내가 근무하는 공장 목욕탕에 가 등거리를 밀어 드렸다. 마음씨 착한 모욕탕 아줌마와 공장 경비원 아저씨부부는 시끄러워 할 대신 언제나 웃는 얼굴로 “세상에 효자요!”를 부르며 칭찬 해주군 하였다. 한번은 내가 아버지의 등거리를 천천히 밀고 있는데 “자상히 보라”고 하시지 않겠는가?   “뭘 보라고 그럽니까? 아버지.” “칠성별이 보이지 않느냐? 등거리에 검은 짐 말이여.” 나는 이리저리 자세히 찾아 보았다. 오른어깨쪽으로 검은 기미 몇개가 박혀 있었다. 분명히 그 모양도 수자도 칠성별은 아니였다. 허지만 부친님은 친눈으로 등거리를 보실 수 없었으니 그렇게 한생을 속힘 속에서 살아오셨다. “예, 이제보니 칠성별이네요! 정말 희귀합니다. 아버진 보실 수도 없으신데 어떻게 칠성별이 있는지는 아셨습니까?” 중풍에 걸려 어린애 지력으로 변해버린 아버지를 실망케 하고 싶지가 않았다. 이런걸 아마 “선의적인 거짓말”이라 하리라. 나는 그의 등거리 빈자리에 손가락을 찍어가며 일곱개를 세여 드리고 눈물을 훔쳤다. “누구하고도 말 말거라잉? 큰 일 난다, 큰 일 나…” 일본 동경에 계실 때, 스무나문살 혈기의 아버지께서는 꿈도 많으셨을테지… 어느 하루 벨트를 배달 한 후 물품값을 받아가지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한 백발로인이 아버지 앞에서 걸음을 뚝 멈추었다. 아버지도 자연히 걸음을 멈추고 마주 쳐다 보았다. “젊은이 날 따라와 보게.”하고 한마디 위엄 있게 남긴 로인은 아버지를 스쳐지나 앞서 걸었다. 큰 거리를 지나고 작은 골목을 에돌아 한참 가더니 한 자그마한 찻집으로 들어 갔다. 아버지는 미닫이를 닫고 로인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로인은 흰수염을 슬슬 내리 쓸며 아버지를 뜯어보았다. 아버지는 로인이 시키는대로 돌아 앉아 윗통을 벗었다. “바로 너로구나! 로승은 바다 건너 먼디서 너를 구하러 왔니라. 넌 등에 칠성별을 지고 났으니 하늘이 이세상에 내려보낸 사자(使者)다. 하늘의 뜻을 절대 루설하지 말라(天机不可泄漏), 루설하면 천벌을 받는다. 부모 처자한테 알려서도 아니된다. 나라가 알면 즉각 목을 칠 것이여, 감추고 시기(时机)를 꼭 기다려야 한다…” 아버지께서 늙은 중한테 사례금을 많이 냈을 것만은 사실이다. 일생을 망쳐 놓은 협잡군이고 원쑤임을 모르고 구명 은인으로 여겼을테니깐. 한평생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고 누구하고 물어볼 수도 없는 “칠성별”이라는 무거운 보짐을 짊어지고 사시려니 그 심리적 고통이 막심 하셨을 것이고 올지 말지 모르는 “시기”를 기다리시려니 희망도 크셨을테지. 헌데 처자한테도 말해선 안된다는 “천기(天机)”를 왜 나에게 말씀 하셨을까? 병마에 시달리다 못해 희망을 잃으시고 “칠성별”의 진가(真假)라도 알고 싶으셔서? 아니면 그제라도 그 멍에 벗어버리고 싶으셔서였는지도 모른다. “칠성별” 내막은 그 바다건너 먼디서 왔다는 로승과 나밖엔 누구도 모른다. “칠성별”을 등에 지고 지나오신 타향살이, 갖은 고생 다 겪으며 칠남매 키워놓고 복 누릴 날 다가오니 병마가 덮쳐들어 그처럼 그리워 하시던 고향땅도 다시 한번 밟아 보지 못하신채 인생 수업 끝마치시니 불쌍하고 가여울 뿐이다. 참으로 칠성별을 등에 지고 태여나셨더면 그인생 어떻했을까? 물론 그럴 수는 없을 줄을 알면서도 얼림속에서 보내신 아버지의 한생이 너무나도 가슴 아파 그렇게 생각 해 보는 것이다. 아버지는 “칠성별”을 등에 지었다고 언제 한번 교만하거나 라태하는 일이란 없었다. 낮이면 생산대 밭일을 하시고 밤이면 가마니를 짜거나 족닥기를 만드셨다. 날마다 새벽 두 세시에 쉬시고 날 밝기전에 일어나군 하셨다. 저녁을 먹은 후 우리는 늘 아버지의 좌우에 나란히 앉아 벼짚으로 가마니줄새끼 꼬는 일을 하군했다. 그때면 아버지의 옛 이야기가 자연히 흘러 나온다. 주제들은 모두 효도와 충성, 선량함에 관한 옛말들이다. 우리들이 아버지의 옛말을 들으며 새끼를 꼬기 시작하면 어머님은 언제나 가마뚜껑을 번져놓고 그위에 가마니를 두겹으로 접어 높이 쌓는다. 가마니 짜는 일은 기계소리가 시끄러우니 량변을 꿰여매는 일을 하실 참이다. 재미진 옛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으며 우리는 시간 가는줄 모르고 벼짚을 부벼댄다. 아버지께서는 인생 수업 리치에 대해서도 늘 말씀 하셨다. “아침에 잠 자리에서 일어나면 오늘 뭘 해야하나 한번만 생각 해봐, 저녁에 눕기전에는 다 했는가 생각 해보고 빠진것이 있으면 해버리고 누워야 한다.” “하나를 베풀면 열이 돌아온다고 한다. 돌아 오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구차한 사람에게 베풀어야 한다.” “뭐든 하자꾸나 맘 먹으면 된다, 결심하구 노력 있으면 못 할 일 없다.” 아버지께선 말로만이 이니라 행동으로도 우리들에게 그렇게 본보기를 보이셨다. 족닥기도 구차한 집엔 무료로 만들어 주었고 수일령감네 외동 아들이 서방 간다고 돈 이백원을 꾸어갔는데 돌려받을 형편도 못 되였고 받을 념도 하지 안으셨다. 그때 돈 이백원이면 모르긴해도 지금 돈 이삼만원은 쉬히 될 것이다.   나는 반세기가 지난 오늘까지도 “뭐든 하면 된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인생 수업”의 좌우명으로 삼고 자기를 채찍질 하군한다. 안해는 “종점갈비점”에서 이틀간 겨우 일 하고는 손을 바짝들고 남 보기가 부끄럽다고 새벽차로 가버렸다. 직업 소개비만 팔만원을 버린 것이다. 나만 남겨두고 돌아서려니 뭐 영별이나 하는듯한 표정이다. “인생 수업”이라며 큰 맘 먹고 달려들더니만 이틀 낮 사흘 밤 지나니 끝났다. “호불아비로 되는건 시간적 문제구먼, 허허허…” 아침상에 앉아 실장님이 롱담을 한다. 두시간 전에 나의 안해가 가고 그자리에 없었던 것이다. “호불아비유? 이산 가족이지, 호호호…” “아저씨 홀아비믄 참 좋은 아줌마 있는디…” 내가 아무런 응대도 않으니 롱담은 여기에서 끝나버리고 몸이 불편하여 하는 수 없이 돌아간 것이라고 나는 묻는 말에 대답했다. 아침 식사는 보통 열시 반에, 점심은 세시 반에, 저녁은 일이 끝난 후, 아침 출근은 열시에 한다. 출근전 나는 세칸(변소) 청소를 하고 분무기로 집 주위에 파리약을 쳐야 한다. 그러니 여덟시 좌우에 깨여나면 될걸 습관 되지 않아 그냥 다섯시나 여섯시면 자리에서 일어난다. 정식 영업 할 때면 밤 열 두시를 넘겨야 한다니깐 그때엔 늦잠을 자야 할 것이다. 날이 새더라도 손님만 많았으면 한다. 요즘은 늘 아홉시 좌우에 저녁을 먹고 헤여진다. 랭수욕을 하고 열 두시까지 텔레비 보고 잠자리에 든다. 안해한테서 전화가 왔다. 연변으로 돌아가는 오빠를 따라 집에 가라고 했더니 오빠는 15일날 간다면서 너무 이르니 자기는 좀 더 있어보고 갈지 말지 결정 지을 것이라 한다. 앓지만 않는다면 아무 때까지든 놀아도 별일 없지만 그 몸이 어떨런지 근심이 태산이다. 그런 주제에 나더러 밥도 잘 먹고 약도 잘 먹고 몸 조심 하라고 부탁도 많다. 부부니깐 그러는 것이겠지. 11일부터 시험 영업을 하고 16일에 정식 개업을 하였다. 개업식 날은 참으로 굉장 하였다. 아침에 해가 뜨니 삶은 돼지머리를 상에 놓고 제를 지내는데 나도 그들의 식대로 돈 2만원을 감아 돼지귀에 꽂아넣고 절을 세번 하였다. 다른 일군들은 모두 멀리에서 구경만 한다. 가족들이 하는 제사에 나같은 불청객이 절을 하여도 되는 일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일군도 가족이라 생각하였고 마음이 내키는대로만 행동 했을 뿐이다. 저녁에 주방장이 돈 2만원을 나에게 돌려주었다.   오전 열시쯤 되니 축구장 반 만큼 큰 주차장에 하객들의 자가용이 꽉 차고 가게 앞 길옆에도 몇십메터 늘어섰다. 사람의 키를 썩 넘는 생화 꾸러미도 몇십개나 들어왔는데 사장님의 친구들은 물론이고 구리시 시장으로부터 세무국 국장, 경찰서 서장, 공상회 회장등 하나 빠짐 없이 축하의 꽃무더기를 보내왔다. 울긋불긋 생화로 장식한 입구 앞에선 어깨와 등거리 배꼽까지 드러내고 제일 짧은 치마를 입은 애들이 스피커의 음악에 맞추어 하루 내내 쉬지 않고 춤 추며 꽃을 흔들어댄다. 아마 구리시에서는 제일로 이쁘고 춤 잘 춘다는 애들일 것이다. 새로 개업한 16일부터 사흘간은 손님이 어찌도 많은지 목탄불을 피우고 적쇠 부시는 일만 하는 내가 너무바빠 당금 숨 넘어갈 지경이였다. 손님들이란 대개가 가족별이다. 친구나 동료끼리 짝지어 오는 것도 조금씩 있긴 한데 많지가 않았다. 한가족이라면 보통 부부간에 아이 둘 셋이다. 그러면 갈비 4-5인분에 삼겹살 2-3인분, 그다음 맥주와 음료 몇개다.그외엔 소주 뿐 메뉴도 없다. “종점 갈비”란 수입제 랭동 소갈비를 길이 8cm 정도 되게 기계톱으로 끊은 후 고기를 한뼘 정도 길이 되게 엷게 바른다. 그걸 도루 감아 차곡차곡 용기에 담고 양념간장을 부어 래장고에서 스물 네시간 숙성 시키면 곧 손님상에 오른다. 비밀은 그 양념간장에 있다. 생강, 마늘, 고추, 감초, 양파, 계피등등 수십종의 물건들을 넣고 잔잔한 불에 늘늘이 고아 뽑아낸 즙인데 뭐가 뭔지 아는 사람은 실장님(주방장)과 사장님 뿐이다. 그렇게 만든 갈비 한토막이 바로 일인분인데 이만원이고 삼겹살 일인분은 둬냥가량인데 삼천원이다. 돼지 뱃살을 엷게 썰어서 아무런 양념 처리 없이 숫불에 구워 깻잎에 싸 먹는다. 이런 삼겹살은 어데 가나 다 있는 메뉴인데 “종점 갈비”는 이집에서만 하는 특종이다. 너무 아끼니 먹어보지는 못했지만 그리 대단한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그들의 홍보문에는 “맛 없으면 내살을 저며 구우시우!”하곤 사장님의 환히 웃는 사진과 이름, 주소, 전화 번호를 적어 놓았다. 17일 밤, 영업이 결속 된 후 나는 사장님을 찾았다. “김씨아저씨, 무슨 일 있으시유?” 사장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기보담 몇살 위라고 그는 언제나 “김씨아저씨”라 부르며 존경어를 썼다. “사장님, 만난진 얼마 안 되지만 많은걸 배우고 관심도 많이 받았습니다. 헌데 죄송하게도 더 못하고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니 일군을 찾으시오.” “바쁜목 인제 다 지났는데 왜 고생만 하시다 갈실라구 합니까? 뭐 좋잖은 일이라도 있으시믄 말씀 하세요, 손잡구 잘 해 보자구요.” “뭐 좋잖은 일이 있겠습니까? 와이프가 아파서 할 수 없이 중국으로 돌아 가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사장님께 미안하게 되였습니다.” “사연이 정 그러시다면 정말 섭섭하게 됐군요, 돌아가 잘 치료하시구 후제 다시 한국에 오신다면 여기에 놀러라도 오세유, 잘 모시겠습니다.” 암병으로 이미 수술을 세번이나 받았었다는 말에 사장님은 더 만류 할 말을 찾지 못 했고 왔다가 사흘도 채 안돼 가버린 것도 아는 사실이다. 안해가 아퍼 중국으로 돌아 가련다는 것은 순 거짓말이였다. 룡정에서 안해와 함께 있던 친구 광수한테 좋은 일자리가 있다더라고 안해한테서 전화소식이 온 것은 일찍 16일 밤이였다. 김 광수는 나와 동갑인데 나의 안해와 동창이고 안해는 연길로 전근해 오기전에 몇해간 룡정 한회사에서 그와 동료로 있었다. 광수에겐 자녀가 없었다. 그도 남 못지 않게 파란곡절의 “인생 수업”을 받았다. 룡정에 있던 그 큰 회사가 부도나자 사장님의 승용차를 몰던 광수는 정기 실업자로 사회에 나오게 되였고 처음엔 실업비로 차 한대를 사서 택시업을 하여 돈 좀 벌었다. 한생을 차만 몰려 하니 지겨웠던지 그는 작은 음식점을 꾸렸었는데 얼마 안가 택시업을 해서 모은 돈과 택시차를 판 돈까지 다 비벼먹고 나앉았다. 그는 거금을 꾸어 넣고 “로무수출”로 싱가포르에 갔다. 헌데 그들을 데리고 간 놈팽이가 돈만 떼여 먹고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불법 출국이였다. 려권도 돈도 없는 그들은 중국 대사관의 도움을 받아 겨우 목숨을 붙혀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빚을 물고자 또 빚을 내여 한국으로 왔다. 자기와 모양새와 나이가 비슷한 다른 사람의 려권과 비자를 팔만원이란 비싼 값으로 사 갖고 온 것이다. 단속에 걸려 쫓기울까봐 두려워 인적이 드문 깊은 산속 양마장에서 일 하다가 반년이 지나니 담이 좀 커진 것도 있으려니와 로임이 너무도 적어 근 20만원이나 되는 빚을 갚자면 4-5년 남짓이 걸려야 하겠기에 산에서 내려온 것이다. 말먹이군의 한달 봉금이 고작 60만원이니 그당시 환률로는 중국돈 4천원도 안된다. 둬 해에 빚을 다 털어버리고 2-3년을 더 벌면 중국에 돌아가 뭐든지 다시 해 볼만한 자금이 모아진다. 광수는 연길에 가면 자동차 몇대를 사고 자동 고층 승강기를 만들고 몇사람 모여 “이사짐 회사”를 함께 꾸리자고 하였었다. 그 많은 억울한 빚을 걸머지고서도 추호의 실망이나 비관이 없이 꾸준히 억세게 싸우며 살아가고 있었다. 실망하고 맥을 버리면 자멸의 길밖에 없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술 담배도 하지 않고 말수도 적고 마음이 어진 친구이다. 허지만 그는 모질은 “인생 수업”의 무서운 역경 속에서 추호도 굴할 줄 모르는 꿋꿋한 사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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