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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남방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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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중국 항주와 가흥의 임정 유적지 답사기 댓글:  조회:1096  추천:51  2009-04-27
대한민국 임정 90돌, 백범의 꿈을 되새기다 [이대로의 우리말글사랑] 중국 항주와 가흥의 임정 유적지를 둘러보다   이대로 ▲ 지난 4월 11일 임정 90돌을 맞이해 백범기념관을 찾아 임정과 백범 정신을 되새겼다     © 이대로올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립 90돌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겠다고 독립 운동가들이 90년 전에 중국에 세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지금 이 나라의 뿌리다. 우리 헌법 전문에도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쓰여 있고, 이명박 대통령께서도 90돌 기념식에서 “임시정부는 실로 우리 대한민국의 뿌리요 정신적 토대”라고 말했다.나는 지난 4월 11일 임시정부 90돌을 맞이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 연구회” 회원들과 함께 임시정부 요인들이 묻힌 효창원을 참배하고 4월 18일부터 5일 동안 중국 항주와 가흥에 있는 임정 유적지를 살펴보았다. 나라가 몹시 어려운 때를 맞이해서 우리의 뿌리요 정신의 바탕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백범 정신을 되새기며 지금 내가 무엇을 어찌해야 할 지 바른 길을 찾고 다짐하려는 뜻있는 발길이었다.4월 19일 아침 비가 나리는 날에 1932년 11월부터 1934년 11월까지 임시정부 청사로 썼던 중국 항주 호변천 청사를 찾았다. 본래 연립주택 촌이라 초라했는데 중국 정부는 2년 전에 새로 지어서 깨끗하게 관리하고 있었다.호변천 청사를 살펴보고 상해에서 처음 와서 자리 잡은 군영여관 터를 찾아 나섰으나 지금도 여관으로 쓰고 있어서 찾기 힘들었다. 비를 맞으며 물어물어 간신히 찾았으나 유적지로 지정되지 않아 표지석도 없고 임시정부 자리였다는 아무 흔적이 없어 실망스러웠다.  ▲ 2007년 새로 지은 임정 항주 청사 터. 2009년4월 19일 이대로 찍음    © 이대로  ▲ 새로 단장하기 전 모습,  長生路 湖邊忖 연립주택 입구. 이 건물 내 23號를 임시정부가 1932. 11. - 1934. 11. 청사로 썼다. 1999년 3월 이봉원 찍음     © 이봉원다음은 백범이 일본의 감시를 피해 숨어살았던 가흥 피란처로 갔다.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본군 사령관을 살해한 뒤 일본의 감시를 피해 숨어 지냈던 곳이다. 일본은 백범에게 엄청난 현삼금을 걸고 잡으려 해서 상해 임시정부를 버리고 긴급하게 항주로 피했다가 다시 가흥으로 가서 숨어살게 되었다. 그때 중국 절강성 주석을 지낸 추푸청이 위험을 무릅쓰고 백범과 임정요원을 자신의 집에 숨겨 주었다.   ▲ 지금도 여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군영여관. 2009년 4월 19일 이대로 찍음     © 이대로  ▲ 淸泰第2旅社 (仁和路 22호 群英飯店) : 항주 임정의 첫 임시판공처 (1932. 5. - 10.) * 1994. 4. 24. 이봉원 첫 발견 촬영     © 이봉원추푸청은 백범이 혼자 움직이다가 경찰에 잡힌 일이 있은 뒤 주애보란 뱃사공 여인과 부부처럼 살면서 호수에서 고기를 잡으며 숨어 살게 했고, 일본 첩자의 감시가 더 심해지면서 며느리 주자루이에게 지시해 위험을 무릅쓰고 친정집 별장인 해염현 재청별장으로 피신시켰다. 백범은 낮에는 배를 타고 호수로 나가서 어부처럼 행세하다가 저녁엔 숙소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숙소에 아무 일이 없으면 흰옷을 내걸고, 위험하면 붉은 옷을 내 걸어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 때 백범은 무슨 생각을 하였고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상상하면서 오늘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할까 곰곰이 생각하면서 가흥의 백범 피난처와 임정 요원 숙소를 보고 남북호 피난 별장으로 향했다.  ▲ 嘉興 梅灣街 76-4 : 김구 피난처 * 1999. 3. 13. 호수 쪽에서 이봉원 촬영. 호수가 지저분하다.     ©이봉원  ▲ 새로 지은 피난처에서 창문으로 바라본 호수, 지금은 아주 깨끗하다. 2009.4.21 이대로 찍음.     ©이대로  ▲ 새로 지은 가흥 피난처 이층집에 있는 탈출구 문을 열어 보이는 강연수 사장. 뒤 쪽에 있는 사다리를 놓고 내려가서 배를 타고 도망갔다. 2009.4.21 이대로 찍음     © 이대로일찍이 백범은 나의 소원은 “우리가 자주독립국가가 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또 백범은 우리가 무력이나 경제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가 되는 것보다 우리 자주문화로 잘 사는 나라를 만들고 인류 전체가 의좋고 즐겁게 살도록 하자는 일이라고 했다. 만약 문화로 세계를 밝힌 나라가 없다고 할 지 모르나 우린 그걸 해낼 수 있다는 것이며, 하늘은 우리보고 하라고 그 일을 남겨놓았다고 말했다. ▲ 해염현 명인문화구 안에 있는 김구 피난처 별장 옆 전시관 앞에서 왼쪽 종진표, 이대로, 강연수,강남. 별장에서 내려다 보이는 남북호 호수도 평화로워서 좋았다. 이대로 찍음.     © 이대로  ▲ 하이얜현(海鹽縣) 남북호(南北湖) 호숫가에 있는 별장 재청별서. (1999. 3. 14. 이봉원 촬영)     ©이봉원또 백범은 수십억 인류가 자유롭고 평안하게 살아갈 터전을 만드는 건 오직 문화라고 했고 우리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높은 자주문화를 꽃피워서 세계문화의 근원이 되고 모범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래서 세계평화가 우리나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했다. 나는 지금 그 꿈을 이루려고 영어에 미친 한국교육을 고치려고 애쓰고 있고, 세종대왕이 태어난 곳을 성지로 만들고 광화문에 한글역사문화관을 건립해 자주문화국가의 기초를 다지자고 외치고, 중국에 우리말과 문화를 알려서 “한, 중 우호협력 시대부터 열자.”고 움직이고 있다.   ▲ 중,한우호원에서 중국 절강월수외대 두 제자와 한중우호협력 시대를 함께 만들어 두 나라가 사이좋게 살자고 다짐했다. 왼쪽부터 종진표, 이대로, 강남.     © 이대로이번 가흥 유적지 답사를 함께 한 교포 사업가 강연수 사장은 “중국에 관광을 오는 한국인이 많은데 이런 우리 역사 유적지는 돌아보는 사람이 없어 안타깝습니다. 이곳 가흥과 남북호는 항주 서호보다 조용하고 아름답습니다. 이런 곳에서 한국 젊은이들이 하루 묵으면서 백범 정신과 한중우호를 되새기는 여행을 하면 매우 뜻있는 여행이 될 겁니다.”라고 말했다. 이제 구경만 하는 관광시대는 지났다. 가흥 임정 유적지는 내가 가본 상해나 항주 중경 유적지에 비해 주위 환경이 아주 깨끗하게 정비되어있고 평화로워서 홍익인간 정신과 세계평화를 논하고 다짐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백범은 문화국가 건설을 외치면서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우리 국조(國祖)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 또 우리 민족의 재주와 정신과 과거의 단련이 이 사명을 달하기에 넉넉하고, 국토의 위치와 기타의 지리적 조건이 그러하며, 또 1차 2차 세계대전을 치른 인류의 요구가 그러하며, 이러한 시대에 새로 나라를 고쳐 세우는 우리의 서 있는 시기가 그러하다고 믿는다. 우리 민족이 주연배우로 세계의 무대에 등장할 날이 눈앞에 보이지 아니하는가.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 양식의 건립과 국민교육의 완비다. 내가 위에서 자유의 나라를 강조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만일 우리의 오늘날 형편이 초라한 것을 보고 자굴지심(自屈之心)을 발하여, 우리가 세우는 나라가 그처럼 위대한 일을 할 것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모욕하는 일이다. 우리 민족의 지나간 역사가 빛나지 아니함이 아니나 그것은 아직 서곡이었다. 우리가 주연배우로 세계 역사의 무대에 나서는 것은 오늘 이후다. ”라고 백범일지에 썼다. 중국이 자신들을 위해서 유적지를 정비했지만 우리가 많이 찾고 잘 이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 답사를 한 항주, 가흥 임시정부 유적지는 피신한 곳이지만 임시정부가 사라질 번 한 위기를 넘기게 한 중요한 자리다. 상해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보고 일본은 우리 독립운동의 씨를 말리려고 했지만 중국이 우리 임시정부를 적극 도와 협력할 계기를 준 곳이다. 이곳에서 어떻게 해야 진짜 독립된 자주통일국가가 될까 고민해봤고 중국 한족인 두 제자에게 백범과 내 꿈을 가르치고 나와 함께 두 민족이 다정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자고  약속했다.   ▲ 절강성 해염현에 있는 명인문화구 표지석. 이곳에 김구피난처 별장과 전시관이 있다.     © 이대로 <대자보> 고문 대학생때부터 농촌운동과 국어운동에 앞장서 왔으며 지금은 우리말글 살리기 운동에 힘쓰고 있다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공동대표 한글문화단체 모두모임 사무총장중국 절강성 월수외대 한국어과 교수   2009/04/27 [11:14] ⓒ 대자보
7    신선을 찾아 神仙谷으로 댓글:  조회:1118  추천:36  2009-04-09
 보봉사에 온지도 벌써 한달이 되여간다. 그동안 절안에만 박혀 공부만 열심이 했다. 한달이 되니 워낙 주일마다 등산에 습관이 배긴 내가 손발이 근질근질하여 참을수가 없다. 4월 10일부터는 또 한동안 집중수행에 들어가니 어디를 더 갈래야 갈수없으니 차라리 이 시간을 마추어 신성동으로 가보자....  신선곡으로 가는 길에서  신선곡대문정경  반룡호끝머리에 앉은 신선곡  앞에 보이는 저 산골짜기를 따라 40여분 걸으면 곧 단아대협곡어구에 도착한다.  다리를 건너...  신선곡의 삼단계폭포  비단폭같은 폭포들?  산을 오르는 계단.  성수폭포-- 주원장이 난을 당했다가 관세음보살이 달로 화현하여 구원해주었다하여 성수폭포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산골짜기 바위틈새로 떨어지는 성수폭포  협곡전경  관음바위  계단이 오래되여 나무가 썩어가고 있었다. 여기는 사람도 많이 오지 않는 곳인가 본다. 온 산에 지금 나 혼자밖에 없으니...  폭포위를 따라 올라가니 골짜기 넘어로 또 하나의 폭포가 보엿다.  신선곡의 소석림  성수폭포웃쪽에서 바라본 풍경  활짝핀 영산홍  내려올때 지나온 참대숲  당조때 대매화상이 수행을 했다는 곳에서 부처를 발견. 신선을 찾아 신선곡에 왔다가 신선은 찾지못하고 부처의 흔적만 찾았네....
6    한글기계화의 선구자 공병우 박사를 아시나요? 댓글:  조회:1491  추천:34  2009-03-16
한글 기계화 선구자요 개척자인 공병우 박사 “세벌식 자판과 조합형 코드가 한글을 빛낸다”   이대로 논설위원 오늘날 우리 한국인들은 누구나 셈틀(컴퓨터)로 글을 자유롭게 쓰고 누리통신(인터넷통신)을 마음대로 즐기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나라는 정보통신 선진국이고 강국이라고 한다. 우리가 정보통신 강국이 된 건 한글 덕이다.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님과 한글기계화 선구자이신 공병우 박사께 고마워해야 한다. 그런데 한글과 한글을 만들고 빛낸 분들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는 한국인이 많다. 마치 공기와 물이 고마운데 그 고마움을 잊고 살 듯이 말이다.공병우 박사는 1995년 3월 7일 아흔 살에 이 세상을 떠나셨다. 공 박사의 삶과 정신을 본받고 따르면 오늘날 국가 경제 위기도 오지 않고, 오더라도 거뜬하게 이겨 낼 수 있다고 보기에 그분이 더욱 우러러 보이고 그립다. 오늘 그분의 제삿날을 맞이해서 공 박사님을 기리는 마음으로 그분의 말씀과 그분에 얽힌 이야기를 하련다.  ▲ 공병우 박사가 돌아가신 2009년 3월 7일, 공병우 박사님을 기리는 송현 한글문화원장, 공 박사를 존경하는 제자들은 해마다 제삿날에 모여 그분의 거룩한 삶과 정신을 기린다.    ©이대로 논설위원 공 박사님은 누리꾼 1세대다. 돌아가시기 2년 전인 88살이었던 1993년 한글날을 맞이해서 하이텔과 천리안에 “우리의 명절 한글날을 국경일로!”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에 “우리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한 가장 근본 대책은 과학, 문화의 뿌리 구실을 하는 '한글'을 살리는 일입니다. 한글날을 우리 겨레의 가장 큰 경축일로 발전시키며, 한글 전용과 한글을 3벌식으로 과학화하는 일을 하루빨리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국민, 모두가 한글의 위대함을 깨달아서, 일상생활에서 한자로 인한 까막눈을 없애고, 교통수단보다 더욱 중요한 한글 기계화를 선진국처럼 완벽하고 빠른 속도로 할 수 있도록 과학화해야만 우리 민족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과학, 문명국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글을 써 올렸다. 그때에 수염이 하얀 할아버지가 날마다 누리통신에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나씩 썼다. 아마 타자기는 말할 거 없고, 셈틀로 글을 쓴 분 가운데 가장 어른이셨고, 누리통신을 한 사람 가운데서도 가장 노인이셨을 것이다. 그때 누리통신으로 올린 그분의 말씀은 모두 우리 겨레와 나라를 살릴 가르침이고 옳은 말씀이었다. 그때는 고속도로를 만들 때인 데 "고속도로보다 글자생산속도가 더 중요하다."라는 제목의 글 중에 "모든 교통기계와 수단은 선진국에서 나날이 발전하고 있으므로 우리나라는 그것을 따라가기만 해도 발전할 것이다. 그러나 한글의 기계화는 선진국에 맡길 수 없는 우리의 국가 지상 과업이다."라면서 한글 문서 편집기를 개발하는 젊은 과학자들과 한글운동가들을 도와주셨다.또 "글자생산 속도는 과학과 문화발전에 뿌리 구실을 하기 때문에 교통 속도보다도 나라 발전에 몇 배나 더 중요하다. 민족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자동차, 기차, 비행기보다도 한글 타자기나 한글 컴퓨터가 몇 배 중요한 문명의 이기 구실을 한다. "라면서 셈틀을 이용한 정보통신 연구와 발전이 우리나라와 겨레의 운명을 좌우한다며 90살 돌아가시기 전까지 날마다 누리통신에 정보기계통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사무실 목침대에서 자면서 그 연구에 힘쓰셨다.모두 백번 옳은 말씀이고 삶으로서 우리 모두 가슴에 담고 실천해야 할 가르침이다. 대통령과 장관과 학자와 교수들은 말할 거 없고 젊은이들도 셈틀이 무엇이고, 누리통신을 어떻게 하는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20년 전 89살 공병우 할아버지는 날마다 누리통신을 통해서 그 중요성을 알려주고 누리통신 선진국으로 만들려고 발버둥치셨다. 6~70년 대 타자기시대부터 초성,중성,종성을 조합해서 무한한 글자를 만드는 한글 창제 윈리와 과학성을 살리는 세벌식 자판으로 글을 쓸 때 과학과 자주문화가 발달하여 잘살고 힘센 나라가 된다고 굳게 믿으셨다. 그런데 과학기술처는 엉터리인 네벌식 자판을 국가 표준으로 정했다. 그 잘못을 알려주고 반대운동을 하니 공 박사를 반정부 인사로 지목하고 지하실로 끌고가 고통을 주면서 다시 두벌식을 국가 표준으로 정하고 세벌식을 못 쓰게 했다. 글자를 기계로 쓰는 게 얼마나 편리하고 중요한지도 모르고 기계로 글씨를 쓸 줄도 모르는 자들이 장관이고 과학자로서 나라 돈과 권력을 마음대로 쓰면서 당신의 재산을 다 바치고 한글 기계 글쓰기 연구와 운동을 하는 분을 잡아다 겁준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재산까지 그 군사정권 세력에 빼앗겼다.그 아픔을 겪고 절망한 마음을 달래시려고 사진작가가 되어 전국을 떠돌다가 전두환 군사독재시절 미국으로 망명하여 민주화운동을 하시며 셈틀 자판과 문서편집 연구를 하신 1988년 민주화바람이 분 뒤에 귀국해서 한글문화원을 차리고 이찬진, 정래권 들 젊은 과학자들에 게 공짜로 연구실을 주면서 ‘글’을 개발하고 ‘한글과컴퓨터’ 회사를 차리게 밀어주어서 오늘날 셈틀 시대를 열어주셨다. 그때 한글전용운동을 하는 나와 한글기계화연구가 송현 선생, 우리말 사랑운동을 하는 이오덕 선생도 불러 공짜로 사무실을 주시고 연구와 운동을 이끌어 주셨다. 노인도 글씨를 기계로 글을 쓸 수 있고, 그 세상이 되면 정보통신 강국이 될 수 있다고 외치면서 그 실천을 하신 선각자요 선구자였다. 요즘 노인들이 셈틀과 누리통신을 배워서 잘 이용하는 모습을 보면서 새삼 공 박사님이 생각난다.  ▲ 동대문구청 정보화교육장에서 셈틀과 누리통신 이용 교육을 받는 노인들, 그런데 세벌식 자판 글쓰기는 가르치지도 않고 그런 게 있는지도, 선배 누리꾼 공 박사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이대로 논설위원 오늘날 세계 모든 나라가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사 문서편집기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오직 한국만 우리 문서 편집기 ‘글’을 사용하고 있다. 세계가 미국의 문서편집기 지배를 받는데 유일하게 우리만 독립한 문서편집기 자주국가다. 우리 글자인 한글 덕이고 공 박사가 밀어주고 이끌어준 젊은이들이 ‘글’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셈틀 글쓰기 시대에도 정부는 두벌식 자판과 완성형 코드를 국가 표준으로 정했다. 미국이 두벌식 완성형이니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 완성형 코드는 자주 쓰는 2000여 자만 쓸 수 있게 만들어서 조합형으로 만들 수 있는 12000여 글자를 쓸 수 없게 했다. 조합형으로는 현재 쓰고 있는 “, 똠” 같은 글자는 말할 거 없고, 지금 잘 쓰지 않지만 앞으로 필요하면 쓸 수 있는 “뀎, 밹,푮”들을 쓸 수 없게 한 것이다.그래서 완성형은 사람이 두 팔과 다리를 다 써야 하고 쓸 수 있는 것을 한 팔과 한 다리만 쓸 수 있게 해 논 격이라서 불편하고 큰 잘못이라고 하니 이제는 12000여 글자를 쓸 수 있게 만들었으나 마찬가지 한글 자모 28자를 가지고 더 많은 글자를 조합할 수 없게 되어있다. 엄청난 글자와 소리를 적을 수 있는 한글을 12000여 글자로 묶어 놓았다. 그런데 아직도 정보통신 과학자요 장관이란 자들이 두벌식 완성형 글쓰기가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고 세벌식 조합형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다. 그러니 국민은 아무것도 모르고 한글 발전을 가로막는 두벌식 완성형이 옳고, 그것만 있는 줄 알고 쓰면서 한글발전을 가로막는 공범이 되고 있다.네모꼴 글꼴만 고집하지 말고 세벌식 자판도 국가 표준으로 정하고 누구나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하자공 박사는 글꼴을 네모꼴만 고집하지 말고 여러 글꼴을 개발해야 한글이 빛난다고 주장했다. 한글은 한자와 달리 여러 가지 글꼴로 바꾸어 쓸 수 있으나 책이나 신문은 말할 거 없고 모든 글이 □(네모꼴)안에 들어가게 되어 있어서 답답하다. 한글은 궁체, 고딕체, 공한체 들들 수십 개 글꼴로 쓸 수 있게 되어있다. 그런데 타자기 시대에 공병우식 세벌식 타자기의 글꼴이 네모꼴이 아니라 예쁘지 않다고 표준이 될 수 없다고 했다. 두 손과 두 발의 10개 손가락과 발가락을 사용할 수 있는 데, 한 손가락만 쓰도록 한 거와 같다. 공대를 나온 장관과 전자공학 학자들이 일반인인 80대 할아버지보다도 무식했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남북 셈틀 학자들이 두벌식 완성형이 한글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임을 깨닫고 그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다. 세벌식 조합형이 휴대전화 자판이나 남북과 세계가 서로 소통하는 데 편리하고, 지금 쓰지 않는 훈민정음 4글자를 사용해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 데도 좋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하늘나라에 계신 공 박사도 기뻐할 일이다. 이제 정부는 지난날 잘못을 깨닫고 하루빨리 세벌식 자판도 국가 표준으로 정해서 일반인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해서 한글 자주문화가 활짝 꽃필 수 있게 해주길 바란다. 공 박사는 미국에 가서 영어나 배워서 영어 공용어나 외치는 얼빠진 학자와 공무원과는 다르게 우리에게 꼭 필요하고 시급한 셈틀 연구를 하고 와서 정보통신 강국이 될 기초를 닦으셨다. 이런 거룩한 태도와 정신을 본받으면 경제 위기도 오지 않고 이 위기를 거뜬하게 이겨낼 수 있다. 학생과 국민에게 이분의 가르침과 삶을 알리고 본받게 하자. 공 박사는 1991년 4월 21일 ‘과학의 날’에 “한글의 과학성은 초성, 중성, 종성의 3가지 자소를 모아서 한 음절을 나타내는 글자이기 때문에 세계에서 독창적인 글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서, 한글 구성 원리를 배우는 동시에 타자치는 기술도 익히는 길이 장차 과학자로서 소중한 지식을 가지게 하는 교육일 것이다. 3벌식 한글 타자기 이외에도 교과서나 시청각 교육을 통하여, 한글의 구성원리를 가르치는 기술도 익히는 길이 우리나라 과학을 발전시키는 뿌리라고 믿는다. 자기 나라 글자의 과학적인 원리도 모르는 과학자가 과학 교육을 한다는 모순 자체가, 오늘날 과학이 뒤떨어지고 문화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과학자들이 한글이 왜 으뜸가는 과학적인 글자인가를 분명히 깨닫게 하는 것이, 한글 전용과 한글 기계화나 전산화를 과학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이며, 나아가서 우리나라 과학을 눈부시게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한글은 과학의 뿌리이니 한글을 사랑하고 빛낼 때 우리 과학이 빨리 발전하고 잘사는 나라가 된다.”라고 외치셨다.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이제라도 학교에서도 구청 정보화 교실에서도 한글이 훌륭함과 세벌식 자판을 가르치고 즐겨 쓰게 하자.  ▲ 세벌식 최종 자판 모양. 나는 타자기시대부터 세벌식으로 글을 쓰고 있다. 두벌식 자판에서도 세벌식을 외우기만 하면 세벌식으로 글을 쓸 수 있다. 이 글꼴은 공병우식 글꼴이다.     ©이대로 논설위원  * 이대로 <참말로> 논설위원은 대학생때부터 농촌운동과 국어운동에 앞장서 왔으며, 우리말글 살리기 운동과 한글과 우리문화의 세계화에 힘쓰고 있다.1967년 동국대 국어운동학생회 창립 초대 회장 1990년 한말글사랑겨레모임 공동대표 1994년 민족문제연구소 후원회 조직위윈장 1997년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공동대표  2004년 한글날국경일 제정 범국민추진위원회 사무총장2005년 한글문화단체 모두모임 사무총장    기사입력: 2009/03/09 [08:37]  최종편집: ⓒ 참말로
5    오늘은 세종대왕께서 태어나신 날 댓글:  조회:1631  추천:91  2008-05-15
   1319. 오늘은 세종임금 탄신, 어디서 태어났는지 아시나요?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2008. 05. 15.     오늘은 세종임금 탄신입니다.그런데 탄생지가 아닌 세종영릉곧 세종의 묘소에 있는 곳에서 기념행사를 합니다.세종임금 탄생지가 성역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안타깝습니다.            한국 사람치고 한글이 누가 만든 것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가장 위대한 인물 세종임금이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잘 모릅니다.       새 정부는 국어·국사까지도 영어로 수업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여주 세종영릉의       세종대왕 동상 비문엔 “우리나라의 말소리가 중국과 달라”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훈민정음 서문과 달리 “나라에 독특한 글자가 없음을 한탄하시어…”라고 쓰여       한글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말해주는 듯합니다.         세종임금은 1397년 5월 15일 경복궁 옆 준수방 곧 태종(당시 왕자 이방원)의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세계 어디든 웬만한 위인이면 생가를 복원한다고       아우성이지만 세종임금은 작은 비석 하나만 길가에 뎅그러니 서 있습니다. 그       비석엔 커피가 남은 종이컵과 쓰레기봉투들이 둘러싸여 있던 것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지난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가운데서 골라 본 글)                       1040. 노비들에게까지 출산휴가를 준 개혁군주 세종 2007/05/24                  백성을 끔찍이 사랑했던 세종임금은 출산 뒤 7일 동안 아이를 돌보도록 한 노비의       휴가기간을 100일까지 늘리도록 했습니다. 또 출산 1달 전부터 산모를 쉬도록       해주었습니다. 게다가 세종은 “그 남편에게는 휴가를 주지 않고, 일을 시켜 산모를       돌볼 수 없게 하고 있으니, 이는 부부로 하여금 서로 보살피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이 때문에 간혹 목숨을 잃는 일까지 있었다.”라며 노비의 남편에게도       출산휴가를 주었습니다.         세종은 금주령을 내릴 때도 힘이 없는 백성 편을 듭니다. “술을 못 마시게 할 때마다       청주를 마신 사람이 벌을 받은 적이 없고, 막걸리를 마시거나 혹은 술을 판 사람만       법에 걸리니 사정이 딱하다.”라며 금주기간이라도 집안행사를 위해서나, 늙고 병든       사람이 약으로 마시는 경우는 처벌하지 말라고 합니다. 세종임금의 백성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                                                                                                                               서울시 동대문구 용두동 102-133. 3층.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소장 김영조☎ : 02-9292-771,  누리편지 : sol119@empal.com,  누리집 : www.solsol21.org
4    월수대 가까이 남하 산책 댓글:  조회:1747  추천:90  2007-12-21
            월수대 가까이 남하 산책
3    동지달에도 교정 국화가 만발해 댓글:  조회:1976  추천:107  2007-12-21
       동지달에도 교정 국화가 만발해       여러 날 갈끔갈끔 내리던 비, 오스스 날씨가 가뭇 사라졌다. 해빛찬란한 12월의 날씨가 그리도 좋을수 없다. 마침 오후 시간도 없고하여 안해 그리고 아들애와 같이 절강 월수외국어대 교정과 교정 가까이를 흐르는 남하를 산책하며 오후 한때를 즐기였다.        교정에는 아직도 가을국화가 만발하고 있었다. 동북의 한 겨울 12월에 만발한 남방의 국화를 감상해 봄도 좋을듯 싶어 꽃생을 마감하는 최후시기-- 국화의 그 모습을 사진에 담아 보았다.
2    【산행기】순왕묘를 보고 탐석을 하고(3) 댓글:  조회:2023  추천:75  2007-12-09
【산행기】   순왕묘를 보고 탐석을 하고(3)   5   순왕묘밖은 강물을 가로 막은 대순호(大舜湖)라더니 과연 그러한가부다. 강을 가로타며 1987년 12월에 준공되고 120메터에 달하는 대교우에 올라서니 다리 동쪽은 호수를 이룬 강물이 저 멀리까지 뻗어있고 대교서쪽은 흘러내리는 강 자연모습이다. “아니, 온통 돌밭이네!” 널다랗게 펼쳐진 강바닥 돌밭을 보고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아까 오면서 보이던 강이 여기 순왕묘를 에돌아 동으로 흐르면서 많고 많은 돌밭을 이루는 모양인데 저 돌밭도 그속의 하나렸다. 언녕 수석에 매료된 수석인인 나로서는 가까이에 돌밭을 두고 지나칠수 없었다. 이색적인 탐석이 뒤를 물었다. 첫시작에 나는 벌써 커다란 호수형 움푹패인 질좋은 수석 한점을 주어들고 싱글벙글, 안해는 강가에서 수석의 물때를 벗기기에 여념이 없다. 강에서 고기잡이하는 한 남자를 만나 강이름을 물으니 소순강(小舜江)이라고 한다. 순왕묘에 소순강, 소순강이 하사한 호수수석—나는 복받은 인간이 틀림없었지. 소순강은 소흥일대의 물의 고향 제1원천으로 알려진다. 또 우순의 거룩한 발자취가 스며있는 소순강이여서 그 탐석 례사롭지만은 않다. 어쩌면 4000여년후 머나먼 동북 연변에서 찾아온 길손이 고맙다고 우순님이 하사한 것일지도 모르지.   (그래서 저쪽 순왕묘가 남방의 갈대속에 우렷히 비껴여드는걸가, 그래서 저기 순황산아래 남방 단풍나무가 봄날같은 오늘 해빛아래 붉게 붉게 불타고 있는걸가, 그래서 거북이 산우에 장수한다는 거북이를 타고 일어선 순왕묘가 우순의 이름을 수천년 력사속 오늘에 전하여 주는걸가……) (2007년 12월 9일, 오전)  
1    【산행기】순왕묘를 보고 탐석을 하고(2) 댓글:  조회:1744  추천:87  2007-12-09
【산행기】         순왕묘를 보고 탐석을 하고(2)                      3   순왕묘의 입구길은 강을 따라 동으로 나아가다가 갑자기 서로 꺽어들었다. 전체로 보면 순왕묘의 입구길은 동으로 열리여있어 재다시 고개를 가로 탈 일이 나섰다. 얼마후 순왕묘 관련자료를 펼치였어야 나는 지리적위치와 풍수학의 원리에서였음을 알았다. 순왕묘의 정문입구—정남쪽은 지세가 가파로운데 비해 동쪽켠은 지세가 완만하여 오르기 편리하였고, 풍수학의 원리--팔쾌의 진쾌로 봐도 그 위치는 동쪽이란다. 입구길에서 우리의 흥미를 끈것은 한 그루의 울울창창한 고목이였다. 안해는 대단히 오랜나무라고 혀를 차는데 수령은 고작 500년으로 알려진다. 중문으로 장목(樟樹)이라고 불리니 우리 말로 장목 또는 녹나무라 불러야 했다. “소흥 관광안내서에 문밖에 한그루의 녹나무가 있다더니 이 나무를 가리키는구나!” 나는 거대한 숲을 이루는 500년 고목—녹나무를 이모저모로 살피며 련속 디지털사진기 셔터를 눌러댔다. 나무 한그루가 펴내는 장엄한 모습에 경건한 마음까지 생겨서일가,  장수나무에 서면 덩달아 장수한다고 느껴서일가 ~ 안해는 빨리 사진을 찍으라고 성화다. 하면서도 내가 서고있는 올리막 돌계단길이 “백보금계(百步金階)로 불리우는 118개 돌계단길이라는것을 알지 못하였다. 이번에는 순왕묘의 진짜 산문(山門)이다. 산문의 중앙부에 걸려진, 내리쓴 대순묘 금빛 세글자 편액이 인상적이라면 다섯개 문으로 되여있는 산문의 출입구 또한 흥미를 끌기에 족했다. 소흥 관광안내소책자를 보면 순왕묘는 산문, 극무대(戏台), 대전(大殿),후전(后殿), 동서사랑채(东西厢房)로 이루어져 있다. 산문안에 들어서면 선참 밭길을 잡히는것이 극무대라고 할까, 극무대는 대전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남방에서 보면 옛스러운 관광명소들에서 흔히 볼수 있는것이 이런 극무대인데 이는 높은 극무대에서 월극 등을 공연하는 절강의 전통문화와 관련된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순왕묘내 중심부는 대전과 후전으로 이루어졌다.. 후전에는 우순과 우순의 두 녀인을 모신 불상—우순상, 아왕상, 녀영상이 정중하게 자리하여 여기가 화하족의 시조 한분인 우순을 모신 사당임을 알리고 있었다. 안해는 우왕의 두 녀인을 알고 중화 5천년속의 우순의 래력을 알았다고 헛오지는 않았다고 한다.                   4   순은 중국 고대부락련맹의 수령이고 전설속 삼황오제(三黃五帝)중의 5제중 한분으로서 성은 요씨요, 이름은 중화로 불리운다. 사서들에서는 순을 우순이라고 칭하면서 우순은 국호(國號 ,기실은 씨족명)라고 소개한다. 이런 순의 출생지를 두고 학계에서는 산서라는 주장, 산동이라는 주장, 절강 상우라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는데 절강의 여러 전문연구저서와 관광안내서들에서는 절강 상우라고 밝히면서 순이 30살에 요에 의해 등용되고, 50살에 천자대리로 되고, 58살때 요가 승천하자 61살에 제위(帝位)하여 39년동안이나 집정했다고들 한다. 그러던 순이 제위를 자식아닌 우에게 넘겨준다. 순의 휘황한 력사적 공로가 후임으로 우를 선택한것, 이런 우가 중국력사상 첫 노예제국가—하조의 기틀을 닦으며 아들을 올려놓아 노예제세습의 선례를 이룬다. 그만큼 오늘의 절강 회계산 일대에는 우순과 대우에 대한 전설들이 대단히 많이 전해진다고 한다. 회계산은 소흥, 상우, 승주, 제기 등 현과 시에 걸쳐 있는 수천년 력사속 성스러운 산으로서 일찍 4 000여년의 대우가 회계산에 이르러 홍수를 다스리는 법도를 얻고 안해를 얻어 후에 하나라 시조로 된 아들 계(启를 낳았다면 진시황이 순례길에 이른 곳이기도 하다. 그만치 순의 출생지 절강 상우설은 도리가 없지 않다. 항주대학 력사학부 출신의 소흥현 왕단진 사람 유일하의 연구저서—“소흥우순문화연구”(4년여 시간에 4개 현 8개 향 56개 촌 현지답사조사)에 따르면 회계산구의 왕단진 일대에만도 여러가지 류형의 순왕묘가 여섯이고 그중 보존이 좋은것이 셋이라고 한다. 또, 소흥, 상우, 승주, 제기 4개 현에 순왕묘회조직이 86개 촌에 121개 회를 갖고있는 현실이다. 그에 걸맞게 소흥현에서는 해마다 음력 9월 25~27일이면 순왕묘에 모여 성대한 순월(舜越)문화절을 가진다. 산행답사를 마치고 입구로 돌아오니 큰길 광고대에 가로걸린 붉은 프랑카드가 유난히 안겨든다. “2007소흥순월문화관광절 및 회계산 순제왕묘개회 성대히 거행” 이 문화절 기분을 알리고도 남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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