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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로신선생이 친일행적이라고? 댓글:  조회:2385  추천:5  2013-07-07
                  로신선생이 친일행적이라고?  이즘 필자의 마음은 편하지 못하다. 김문학씨가 2013년 6월 17일 조글로 관련코너에 “로신과 리광수”란 한편의  글을 버젓히 올리였기 때문이다. 글의 시작부터가 중국의 위대한 문호 로신선생과 친일작가 춘원 리광수를 비교하면서 “노신 또한 자진해서 반식민지 구역인 상해 일본인조계에 진입하여 문필활동을 한 것에도 이광수와 유사한 ‘친일적’ 형적(행적)을 남기고 있는 사실을 안고 있다. 그 점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고 로골적으로 횡설수설하면서 리광수를 극력 변호하는 대신 로신선생은 그 희생양으로 끌어들이며 어벌이 크게도 친일로 몰아붙인다. 사실로 말해 필자는 한가한 틈이 없는 사람이다. 술상을 즐기는 동료들이 술상에 앉는 시간도 아까와 가도 되고 안가도 되는 장소에는 절대 나서지 않는다. 하물며 한번의 시시비비에 나서면 깊이 빠져들며 많은 정력과 시간을 소모해야 하니 말이다. 몇번이고 마음이 욱하다가도 눌러버리군 했는데 마음이 그토록 편하지 못할 줄은 몰랐다. 로신선생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묵과한다는것이 도저히 지성인의 마음이 아니다. 그래서 필자는 “로신과 리광수”, “친일파의 무덤에도 봄은 오는가?” 이 두편의 글만은 반론아닌 반격하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딱  두편의 글만이다. 그외는 누가 뭐라해도 나서지 않을것이다. 그럴 시간과 겨를이 없음을 분명히 밝히여 둔다.  김문학씨, 당신도 인간이면 가슴에 손을 얹고 필자의 글을 정면으로 주시해 보시라, 당신이 로신선생이 자진하여 상해에서 생활하면서 이른바 리광수씨처럼 자진하여 친일을 하는 행위를 보았는가, 아니면 그런 연구자료와 결과라도 보았단 말인가? 그런 자료라도 있다면 먼저 필자를 간략이나마 소개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필자는 오늘까지 우리 겨레력사에 깊숙히 몸담그며 겨레력사와 씨름하는 사람이다. 중국 강남땅에 잠시 삶의 무대를 옮긴 근 10년 간에도 “로신선생과 조선사람(한국사람)”, “로신선생과 조선문학(한국문학)”을 주선으로 연구하면서 중국내 로신선생이 생활한적이 있는 절강 소흥, 남경, 항주, 북경, 하문, 광주, 상해 등지를 모두 현지답사하면서 로신선생의 발자취를 전면 추적하여 보았다. 남들이 잘 모르는 깊은 연구와 돌파로 연구저서를 준비하며 이면의 연구에서는 한국을 망라하여 중국내에서도 으뜸 계열에 속한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필자는 로신선생의 상해생활이 친일과 직결된다는 그어떤 행위도 보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이다.  김문학씨의 글을 보면 로선선생을 아주 익숙히 알고있는 모양새인데 사실은 당신은 로신선생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고있다. 아니면 알면서도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다. 먼저 로신선생 생평부터 들어가 보면 로신선생 인생발자취는 소흥 (1881년 9월~1898년 5월), 남경 (1898년 5월~1902년 3월), 일본 (1902년 4월~1909년 8월), 항주-소흥-남경 (1909년 8월~1912년 5월), 북경 (1912년 5월~1926년 8월), 하문 (1926년 9월~1927년 1월), 광주 (1927년 1월~1927년 9월), 상해 (1927년 10월~1936년 10월) 로 이어진다. 인생의 마지막 시절은 1927.10-1936.10 상해시절이 아니던가.  길게 말할 필요가 없는것 같다. 로신선생이 상해로 오기전 정착지는 이 나라 남녘땅--광주이고, 광주 중산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것도 몇달 아니고 사직이다. 광주 먼저 하문대학 시절도 로신선생은 대학이란 직장이 자기의 바램이 아니라더니 중산대학에서도 결연히 사직하고 만다. 그러나 광주도 리상적인 삶의 자리는 아니였다. 로신선생이 보는 그 시절 광주는 “생활비가 너무 비싸고”, “볼만한 간행물이 없으며”, 글을 쓸만한 곳도 아니였다. 글을 써도 팔아먹을 수가 없으니 생활비를 벌어들일 수가 없다. 그런 환경에서 보아낸 것이 상해는 이미 중국의 경제중심이고 문화중심도 북경으로부터 상해로 옮겨져 서점만 해도 40여 집이니 상해에서 글로 살기는 문제 없을것 같았다. 이런 연유로 로신선생은 허광평과 함께 짐을 꾸려 가지고 1927년 9월 27일 배편으로 광주를 떠났고, 10월 3일에 상해에 이르게 되였다.  상해의 발전사를 보면, 상해는 워낙 장강삼각주에 위치한 하나의 모래불(滩头)에 지나지 않았다. 상해탄(上海滩)이라는 말은 그렇게 생겨난것 같은데 1843년 11월 상해 황포강에 부두를 앉히며 개방하며 그젯날의 자그마한 어촌은 점차 변모해 간다.그럴만치 황포강에 부두를 앉혀 반세기 남짓한 변천속에 20세기 20년대 초에 이르더니 동방의 국제성 대도시로 탈바꿈한다.  보다 적절히 말하면 20세기 20년대의 상해는 이미 중국의 경제, 정치의 중심이였다. 또, 20년대 후반부터 전국 각지로부터 많고많은 지식인들이 상해로 몰리더니 30년대에 이르러서는 명실공히 중국의 문화중심으로 자리를 굳히였다. 그런 시대적 물결에 휩싸여 로신선생은 허광평과 함께 상해에 들어섰고, 상해에 집결한 엽공초(叶公超), 문일다(闻一多), 호적(胡适), 곽말약(郭沫若), 심안빙(沈雁冰), 장광자(蒋光慈), 성방오(成仿吾), 소군(萧军), 소홍 (萧红)등 허다한 일대 문인들과 어울린다. 중국의 제1류 수준의 문화정예들이 거의 다 상해에 모이니 그들은 “어사”(语丝), “현대평론” 등 전국성 영향력을 가진 간행물을  꾸리며 그들 생평중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을 써내였다. 1932년 3월 2일에는 중국좌익작가련맹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그들속의 로신선생은 중국 제1류 문화정예의 한 사람이였다.  다시 로신선생의 상해이주 시절로 돌아오면 로신선생은 상해에 이른후 여러개 대학의  강연과 명류들과의 접촉속에서 상해는 진정 중국의 경제중심이고 문화중심임을 피부를 느끼게 되였다. 광주에서 심한 문화고독감, 문화침묵감에 시달리던 로신선생으로 말하면 삶의 질적 변화였다.  상해란 이 동방대도시는 번역으로 삶을 살아가려는 로신선생에게 더없이 리상적인 생존환경이였다.  상해에 삶의 뿌리를 내린 로신선생에게 둘도 없는 일본 벗이 생기였다. 상해에서 생활한 로신이 친일행적을 갖고있다면 일본 벗이 생겼으니 더구나 친일이 아닐까? 먼저 결론을 내리지 말자. 사실은 웅변보다 낫다고 하지 않는가.  로신선생은 상해에 가서 사흘째 되던 날, 부근 북사천로(北四川路)의 우찌야마 서점(内山书店) 으로 책사러 갔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일본문 서적을 주로 경영하는 특색있는 서점이였다. 이에 끌린 로신선생은 1927년 10월 한달 사이만도 선후 9차나 우찌야마 서점에 가서 50여원어치 25권의 책을 사들이였다.  로신선생의 두번째  서점 출현은 서점주인--우찌야마의 주의를 끌었다. 책을 고른 후 로신선생은 쏘파에 앉아 주인의 안해가 권하는 차물을 마이면서 숙련된 일본말로 이 책을 아무아무곳에 보내달라고 청들었다.  “존함은요?” “주수인이라고 부릅니다.” “아, 당신이 로신선생이예요?” 우찌야마는 반겨마지 않았다.  그때로부터 로신선생과 서점주인은 세월의 흐름속에서 깊은 우정을 맺으며 로신선생의 상해 10년 생활에로 이어졌다. 서점의 위치와 주인의 댁이 로신선생의 선후 몇곳 주숙처와 가까이여서 서점은 로신선생이 사회활동과 문화활동의 중요한 장소로 되였다. 로신선생한테 오는  편지들도 흔히 서점을 통하여 로신선생에게로 전해지고,이 서점에서 국내외 벗들과 생면부지 혹은 특수신분의 손님들을 맞이하였다.  우찌야마와 로신선생과의 우정은 서점주인의 중국과  중국사람에 대한 정감을 크게 개변시키면서 그의 생활에도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와 로신과의 10년 우정은 그로 말하면 “일생의 행복”이였다. 그후 일본으로 귀국한 우찌야마는 새중국이 세워진후 수차 중국을 방문하면서 일중친선활동에 전력하였다. 그러다가 1959년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10돌 경축활동에 참석했다가 병으로 북경에서 서거하였다. 그의 유체는 로신선생이 처음 안치되였던 상해 만국공묘에 모셔졌다. 친일행위가 아닌 실로 흔치않은 두 사람의 심후한 우정이라 하겠다.  그러면  상해 실생활속의 로신선생은 어떠했을까, 역시 력사사실  한두가지로 개략적으로 말하기로 하자.  1931년, 일본제국주의는 심양에서 “9.18사변”을 일으키고 장개석의 부저항정책으로 아주 빨리 동북 전경을 점령하였다. “9.18사변”이 일어나 3일만에 로신선생은 “문예신문사의 물음에 대답”이란 글을 써서 일본제국주의가 중국을 침략한 죄행을 적발하였다. 로신선생의 글은 욱달부 등의 짧은 글과 함께 “문예신문”이 개설한 전문란에 게재되였다.  1931년 이해 12월에는 전국 각지의 학생들이 장개석의 부저항정책을 반대하면서 남경청원에 나섰다가 국민당 당국의 체포와 학살을 당하였다. 12월 20일에 로신선생은 저명한 “우방경타”(友邦惊詫)를 써서 25일 좌익작가련맹의 간행물 “십자가에서”(十字街头)에 발표하면서 국민당 당국의 부저항 매국정책과 애국학생운동 진압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1932년 1월, 일본군대가 상해에서 “1.28”전쟁을 발동하면서 로신선생의 저택 맞은켠이 일본해군륙전대 사령부로 되였다. 이튿날 날이 밝지도 않았는데 일본군의 수색이 시작되였다. 우찌야마는 일본점원을 급히  보내여 로신일가가 서점 2층에  급히 피하여 옹근 한주일을 지내도록 조건을 지어주었다. 서점 일대가 일본군의 전구(战区)인데서 우찌야마는 또 로신일가와 동생 주건인일가를 상해 삼마로(三马路) 영국조계지의 우찌야마서점으로 옮기여 절대적 안전을 담보하여 나섰다.  이것이 상해시절의 로신선생이고 우찌야마서점의 주인 우찌야마선생이다. 로신선생은 상해 10년 세월 내내 글로 일본침략자와  맞서 싸우고, 일본에 부저항하며 선량한 항일군민을 탄압하는 국민당반동파와 싸웠다.  김문학씨,  오늘은 일제에 의한 "7.7"사변 76돌이 되는 날이다. 이날이 어떤 날인가를 잊지 마시고 상해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 10년을 생활한 로신선생의 친일행위를 어디 말하여 보시라. 그토록 정정당당하다면 중문으로 써서 중문 신문과 잡지, 인터넷에 올리여 보시라. 당신이 며칠이나 견딜수 있을까.이 글을 더 이상 전개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어찌 자진하여 친일에 나선 친일작가 리광수를 중국의 로신선생에 비하며,  로신선생이 일본군의 통치구에서 생활하였다하여  어찌 친일행적으로 몰아가리오?  당신의 론리대로면 일본의 식민지, 반식민지 중국땅에서 생활했던 사람들, 일본의 조선총독부 철제아래 삼천리 금수강산에서  망국노로 생활했던 사람들이 다  친일행적을 가지고 있을까. 당신은 견해문제가 아니라 머리가 돌았도다. 이 머리를 돌리지 않으면 한 하늘아래서 의좋게 살아갈 인간이 아니도다.                                                                                                 2013년 7월 7일   
7     “무정평전” 등 국가중점작품지원프로젝트로 선정 댓글:  조회:1717  추천:5  2013-07-06
    “무정평전” 등 국가중점작품지원프로젝트로 선정 오늘은 나 생애에서 또 의미가 있는 날인것 같다. 아침 8시 직전에 연변작가협회의 손문혁주임으로부터 문자메시지를 받았는데, 나의 작품이 재차 중국작가협회 중점작품지지프로젝트에 선정되였다고 한다. 중국작가협회 넷을 열어보니 과연 얼마전 연변작가협회에 보낸 “무정평전”보고가 중국작가협회에 추천되여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문학중점작품지지프로젝트 90항 가운데 하나로 선정되여 있었다. 오늘 새로 0시에 올린 중국작가협회 2013년 제3호공보였다.  이 모든것은 전적으로 연변작가협회에서 지지하고 받들어주고 추천해준 결과로서 항상 감사한 마음이다. 아래 연변작가협회에 드리는 감사편지를 중문 그대로 올리여 본다. 2013.07.05                                 致延边作家协会的感谢信 你们好,我是延边作家协会浙江地区创作委员会李光仁。今天早晨7点多荣幸收到来自延边作家协会孙文赫主任的短信,打开中国作家协会公报(2013年第3号)一看, 我的“武亭评传”已被选定为中国作家协会2013年度少数民族文学重点作品扶持项目90项之一。 谢谢!这都是延边作家协会尽力支持和推荐的结果。2011年度“杨林评传”被评为中国作家协会重点作品扶持项目,也是你们的大力支持和推荐分不开的。 谢谢!我一定不辜负大家的支持,以更加做好浙江地区创作委员会的工作,努力创作更多更好的人物评传以及纪实文学的实际行动来报答你们。 谢谢! 2013.07.05                         中国作家协会2013年度少数民族                   文学重点作品扶持项目 (朝鲜族)        高丽砬子人系列          李洪奎(朝鲜族)         朝鲜语    龙井别曲             崔红一(朝鲜族)         朝鲜语    中国媳妇             许莲顺(朝鲜族)         朝鲜语    火焰               金    革(朝鲜族)            朝鲜语    武亭评传             李光仁(朝鲜族)、林善玉(朝鲜族)   朝鲜语          秋千               金昌国(朝鲜族) 
6    우리 님들 로신의 고향에 모이였소 댓글:  조회:1776  추천:3  2013-07-02
【스케치】                                  우리 님들 로신의 고향에 모이였소 지난 6월 2일은 잊을 수 없는 하루인가부다. 이 나라 강남땅에 빠알간 석류화 흐드러지게 피여나고 아름다운 련꽃 앞다투어 피여나는데 절강월수외국어대 보고청은 절강월수외국어대  한국문화연구소와 연변작가협회 절강창작위원회에서 주최하고 민족출판사 조선문편집부에서 협찬한 “홍군장령 양림”평전  출판기념회로 들끓는다. 이날 양림평전 출판기념회에 참가한 이들은 국내 여러 대학교 한국어과들과 한국 관련 대학교, 월수대  한국어과 사생 100여명, 그중에서도 보다 감동적인 이들은 우리 연변작가협회 절강창작위원회와 남방아리랑 주요 맴버들이 아닌가 싶다. 그네들은 일상의 분주함도 마다하고 가까이 항주로부터 멀리 상해, 남경, 무석 등지로부터 무작정 절강월수대로 달려왔다. 우리 님들 또 한번 로신의 고향에 모인 추억을 심어간다. 돌이켜보면 우리 연변작가협회 절강창작위원회 설립은 2009년 6월 13일, 뒤미처 절강창작위원회 산하 자발적 모임체 남방아리랑이 고고성을 터치니 이곳 소흥, 항주, 상해, 남경, 무석 등지 또래 지성인들이 하나로 되여 돌아간다. 이번에도 양림평전 출간식을 가진다니 모두들 신변을 털어내고 무조건 호응하여 준다. 이 감동적인 모습들을 단마디라도 그려내지  않음은 마음이 내려갈것 같지 못하다.  우리 남방아리랑 맴버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대학 학력들이 아니면 대학교수출신들이다. 6월의 시작은 한학기를 마감하는 달로서 웬간한 관계가 아니면 곁을 주기가 어려운 줄로 안다. 그러면서도 항주의 남연님, 현충혁님은 양림평전 출간을 첫자리에 놓았다. 절강공상대학의 류일법학박사 권승문교수는 아무리 일이 바쁘기로서니 선배님의 일에 안갈수 있느냐며 절친한 친구이고 절강공업대학의 류일법학박사인 리정일교수와 동행했다. 항주사범대학의 한국어과 학과장 김재국박사는 심양 관련 학술세미나에 참석하고 북경을 거쳐 곧바로 달려 왔다.  연변인민출판사 상해지사 지사장  김창석님은 서둘러 상해서 사업체를 운영하는 전은종님과 심양에서 모처럼 상해에 오신 심양조선족문학회 부회장 리문호시인을 안내하여 하루먼저 소흥에 달려왔고, 중국력사상 대서예가 왕희지를 모신 소흥 란정을 유람하는 여유를 보여주며 의미론 추억을 만들어냈다. 이들 상해 님들의 과업 아닌 과업은 양림평전의 출판기념 사진과 뉴스를 전담당하는 일이 아니던가.  무석과학기술직업학원 한국어과 학과장 황춘옥님은 소흥으로 달려올 계기가 아니였다. 산하 교수분들이 많지 않고 관련수업이 많은데서 학과장 자기가 더해야 한다며 수업시간을 늘이다보니 6월 2일 이튿날은 여러 수업시간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래도 남방아리랑 일에 빠질수 없다는 춘옥님은 련락전화를 받자 두말이 없다. 남경사범대학 한국어과 학과장 유성운박사교수도 두말이 없다. 유성운님은 북경의 관련 학술세미나에 갔다가 그길로 일손을 드티우며 내처 소흥으로 내달았다.  이들 모두가 연변작가협회 절강창작위원회와 남방아리랑 주요 맴버들-남경, 무석, 상해, 항주서 달려온 이들이 있어 절강월수대 보고청에 자리한 “홍군장령 양림”평전 출판기념식은 보다 의미를 가지며 둥글어갔다. 겨레의 위인이고 홍군장령인 양림이 평전으로 재탄생한데 대하여 그토록 기뻐들하며 출간식을 전후하여 기념사진을 남긴다, 이야기꽃을 피운다, 앞날의 구상을 수놓는다 하며 뱅뱅 동그라지는 모습들 너무도 인상적이다.  누가 이들을 남방아리랑 대가족의 한집안식구가 아니랴 하랴, 이들이 있어 절강창작위원회(사실은 장강이남 강남지구를 어우르는 남방창작위원회) 는 희망으로 벅차고, 이들이 있어 남방아리랑은 활기로 넘치거니 어제는 무석에 모이였소, 오늘은 소흥에 모이였소, 래일은 항주에-상해에-남경에 모이오 하며 하나 또 하나의  옛말과 추억을 만들어 간다. 그네들 속에서 남방의 우리 겨레사회의 한 모습은 이렇게 내내 밝아만 간다.                                                                                2013년 7월 2일, 강남땅 두앵원에서
5    력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리문호) 댓글:  조회:1512  추천:3  2013-06-30
력사의 발자취를 더듬어      심양시조선족문학회 부회장 리문호시인                           아득히 머언 시간의 뒷안길에 두터운 천층의 력사가 퇴적한 그 적막한 어둠속에서  홀로 호롱불을 켜들고 미치게 미치게 얼이 남긴 겨레발자취 찾아 더듬어 가시는 그대는 누구십니까 한 피줄에 흐르던 혼령들이  종적을 감춘 강남 광야에 심혈을 안타깝게 안타깝게 태우며 부르며 부르며 헤매가시는 그대는 누구십니까 먼지와 곰팽이가 침묵하는 고서적 행간에서도 혈안의 길을 내고 낯설고 물설은 험난한 산천을 집념을 그어 어렵게  답사하시며 옛 사람들이 걸어간 길위에 다시 피어린 발자국을 내시는 그대는 누구십니까 강한 의지의 학자시여 천고의 무덤을 넘나드시는 광인이시여 그대의 별빛같은 눈동자로 잃어 버린 과거의 행적을 따라 문을 찾으시고 아침을 열듯 여십시오 그리고 웨치며 부르짓으며 그 깊은 잠들을 흔들어 깨우시오 우리가 찾아 왔노라고 일어나 우리에게로 오시라고 –   2013.5.28  
4    "장개석 어른님"과 악수 나누다 댓글:  조회:1875  추천:37  2010-05-08
              "장개석 어른님"과 악수 나누다    절강 녕파시 봉화시 계구진은 장개석 어른의 고향으로 이름높은 국가급 4A풍경구, 매일 관광오는 유람객들이 얼마인지 모릅니다. 나도 수차 다녀 왔지만 근 1000년전 고려명승 의천 대각국사님이 귀국 도중 항주와 천대산을 거쳐 머물렀던 설두산 설두사가 장개석 어른의 고향에 있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습니다.   2009년 11월 13일 나와 항주 현장님은 현장님의 자가용으로 장개석 어른의 고향--계구진으로 갔습니다.  어른 고향에서 천길 천장암과 묘고대. 삼은담, 고려 의천 대각국사님이 다녀간 설두산 설두사 유람하고 분장 장개석 어른과 어른의 분장 녀비서와 기념사진을 남기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날의 사진 여러장을 올리여 봅니다. 우리 "장개석"어른과 그의 "녀비서"와 악수를 나누며 한바탕 웃음판을 터뜨렸습니다.
3    겨울꽃 피여나는 남하 산책길 댓글:  조회:1468  추천:26  2010-02-01
             겨울꽃 피여나는 남하 산책길   북방 찬 기운의 남하로 1월 31일 온 하루 우중충 비내리는 날씨더니 2월을 잡은 오늘 2월 1일도 내내 흐리터분한 날씨가 이어집니다.    비내린뒤 강남 바깥 세상은 어떠할까?    어쩌다 시간을 내여 겨울꽃 피여나는 호젓한 회계산풍경구 남하가를 산책하여 보았습니다. 비방울 반짝이는 겨울꽃 남하산책길 모습을 디카에 담아 보았습니다.    ( 사진축소 처리를 월수대 김은복선생이 해주었습니다!!!)
2    강남 소흥에도 눈이 내린다 댓글:  조회:1753  추천:38  2009-12-27
                강남 소흥에도 눈이 내린다    련일 강남날씨가 하강선을 긋더니 오늘 아침 최저기온이 령하 2도로 떨어진다. 령하면 물이 언다는 뜻이기도 하니 령하선에서 오전부터 내리던 비는 눈개비로 변하고 눈개비가 다시 겨울눈으로 되여 떨어진다.    오전 11시 그때  6층아빠트에서 밖을 보니 밖에서는 벌써 비가 눈개비로 되여 내린다. 그러다가 진짜 눈으로 변하여 펑펑 쏟아진다. 그렇게 오전 11시쯤부터 내린 눈이 비록 무더기눈은 아닐지라도 오후 4시쯤까지 장장 5시간이나 내리였다.    한두시간도 아닌 장장 5시간 말이다. 오후 4시쯤에 눈이 멎으니 우리 아빠트 동남쪽 회계산이 희뿌연 속에서도 눈으로 덮히여 있음이 육안으로도 잘 알린다. 강남에 온 몇년래 처음 보는 정도의 강남눈이여서 나는 디카를 가지고 밖으로 내달았다. 오후 5시쯤이면 어스름이 깃들기 시작하니 시간을 허비하지 말아야 했다.    회계산 대우릉에 이르니 동남쪽 주변산들이 온통 하얀 눈세계다. 련속 디카 셔터를 누르고 또 눌러도 계속 누르기만 싶다. 어둠이 각일각 몰리는 때가 아니면 산으로 치달았을테지만 그럴 겨를이 못된다. 강남날씨여서 녹으면서 내리는 눈이지만 무려 5시간이나 내린 눈은 산야를 덮고도 남음이 있다. 산의 눈은 엄청이다.     이렇게 생각에도 없던 눈사진들을 여기에 올리여 본다. 우리 북방에서는 너무나 례사로운 일이지만 눈을 보기 어려운 여기 남방, 강남에서는 너무나도 희한한 일이기만 하다. 사진속 캠퍼스내 눈사람 만들기가 그러하지 않은가. 어쩌다 내린 눈으로 눈사람까지 만들어보는 대학생 그네들 얼마나 신나기만 했을까!   2009년 12월 27일, 소흥에서  
1    한국인 윤철수선생 별세 댓글:  조회:1608  추천:45  2009-12-27
                 한국인 윤철수선생 별세     중국 절강월수외국어대에 와서 중국어청강중이던 한국인 윤철수선생이 병으로 12월 26일 새벽 3시 직전 중국 소흥에서 별세하였습니다. 윤철수선생은 올해 56살, 절강월수대와 인연을 맺은 분. 올해 4월 19일 절강대학 중국어청강중 한국인 이대로교수의 련계로 항주서 소흥으로 와서 4월 20일 성대한 대우참배활동에 참석하면서부터 월수대를 알게 되고, 한국어과 선생들과 더불어 회계산서 같이 단오명절을 쇠면서 월수대와 한국어과에 대해 이해를 깊이 하였습니다. 지난 12월 1일, 한국서 다시 절강월수대로 와서 먼저 류학생신분으로 중국어공부를 시작했다가 숙환으로 12월 16일  아침에 급진입원, 10일간 정성어린 치료를 받았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한국인 윤철수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상세한 추모글은 이제 일련의 사진들과 같이 따로 올리게 됩니다)   2009년 1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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