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신선생이 친일행적이라고?
이즘 필자의 마음은 편하지 못하다. 김문학씨가 2013년 6월 17일 조글로 관련코너에 “로신과 리광수”란 한편의 글을 버젓히 올리였기 때문이다. 글의 시작부터가 중국의 위대한 문호 로신선생과 친일작가 춘원 리광수를 비교하면서 “노신 또한 자진해서 반식민지 구역인 상해 일본인조계에 진입하여 문필활동을 한 것에도 이광수와 유사한 ‘친일적’ 형적(행적)을 남기고 있는 사실을 안고 있다. 그 점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고 로골적으로 횡설수설하면서 리광수를 극력 변호하는 대신 로신선생은 그 희생양으로 끌어들이며 어벌이 크게도 친일로 몰아붙인다.
사실로 말해 필자는 한가한 틈이 없는 사람이다. 술상을 즐기는 동료들이 술상에 앉는 시간도 아까와 가도 되고 안가도 되는 장소에는 절대 나서지 않는다. 하물며 한번의 시시비비에 나서면 깊이 빠져들며 많은 정력과 시간을 소모해야 하니 말이다. 몇번이고 마음이 욱하다가도 눌러버리군 했는데 마음이 그토록 편하지 못할 줄은 몰랐다. 로신선생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묵과한다는것이 도저히 지성인의 마음이 아니다. 그래서 필자는 “로신과 리광수”, “친일파의 무덤에도 봄은 오는가?” 이 두편의 글만은 반론아닌 반격하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딱 두편의 글만이다. 그외는 누가 뭐라해도 나서지 않을것이다. 그럴 시간과 겨를이 없음을 분명히 밝히여 둔다.
김문학씨, 당신도 인간이면 가슴에 손을 얹고 필자의 글을 정면으로 주시해 보시라, 당신이 로신선생이 자진하여 상해에서 생활하면서 이른바 리광수씨처럼 자진하여 친일을 하는 행위를 보았는가, 아니면 그런 연구자료와 결과라도 보았단 말인가? 그런 자료라도 있다면 먼저 필자를 간략이나마 소개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필자는 오늘까지 우리 겨레력사에 깊숙히 몸담그며 겨레력사와 씨름하는 사람이다. 중국 강남땅에 잠시 삶의 무대를 옮긴 근 10년 간에도 “로신선생과 조선사람(한국사람)”, “로신선생과 조선문학(한국문학)”을 주선으로 연구하면서 중국내 로신선생이 생활한적이 있는 절강 소흥, 남경, 항주, 북경, 하문, 광주, 상해 등지를 모두 현지답사하면서 로신선생의 발자취를 전면 추적하여 보았다. 남들이 잘 모르는 깊은 연구와 돌파로 연구저서를 준비하며 이면의 연구에서는 한국을 망라하여 중국내에서도 으뜸 계열에 속한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필자는 로신선생의 상해생활이 친일과 직결된다는 그어떤 행위도 보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이다.
김문학씨의 글을 보면 로선선생을 아주 익숙히 알고있는 모양새인데 사실은 당신은 로신선생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고있다. 아니면 알면서도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다. 먼저 로신선생 생평부터 들어가 보면 로신선생 인생발자취는 소흥 (1881년 9월~1898년 5월), 남경 (1898년 5월~1902년 3월), 일본 (1902년 4월~1909년 8월), 항주-소흥-남경 (1909년 8월~1912년 5월), 북경 (1912년 5월~1926년 8월), 하문 (1926년 9월~1927년 1월), 광주 (1927년 1월~1927년 9월), 상해 (1927년 10월~1936년 10월) 로 이어진다. 인생의 마지막 시절은 1927.10-1936.10 상해시절이 아니던가.
길게 말할 필요가 없는것 같다. 로신선생이 상해로 오기전 정착지는 이 나라 남녘땅--광주이고, 광주 중산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것도 몇달 아니고 사직이다. 광주 먼저 하문대학 시절도 로신선생은 대학이란 직장이 자기의 바램이 아니라더니 중산대학에서도 결연히 사직하고 만다. 그러나 광주도 리상적인 삶의 자리는 아니였다. 로신선생이 보는 그 시절 광주는 “생활비가 너무 비싸고”, “볼만한 간행물이 없으며”, 글을 쓸만한 곳도 아니였다. 글을 써도 팔아먹을 수가 없으니 생활비를 벌어들일 수가 없다. 그런 환경에서 보아낸 것이 상해는 이미 중국의 경제중심이고 문화중심도 북경으로부터 상해로 옮겨져 서점만 해도 40여 집이니 상해에서 글로 살기는 문제 없을것 같았다. 이런 연유로 로신선생은 허광평과 함께 짐을 꾸려 가지고 1927년 9월 27일 배편으로 광주를 떠났고, 10월 3일에 상해에 이르게 되였다.
상해의 발전사를 보면, 상해는 워낙 장강삼각주에 위치한 하나의 모래불(滩头)에 지나지 않았다. 상해탄(上海滩)이라는 말은 그렇게 생겨난것 같은데 1843년 11월 상해 황포강에 부두를 앉히며 개방하며 그젯날의 자그마한 어촌은 점차 변모해 간다.그럴만치 황포강에 부두를 앉혀 반세기 남짓한 변천속에 20세기 20년대 초에 이르더니 동방의 국제성 대도시로 탈바꿈한다.
보다 적절히 말하면 20세기 20년대의 상해는 이미 중국의 경제, 정치의 중심이였다. 또, 20년대 후반부터 전국 각지로부터 많고많은 지식인들이 상해로 몰리더니 30년대에 이르러서는 명실공히 중국의 문화중심으로 자리를 굳히였다. 그런 시대적 물결에 휩싸여 로신선생은 허광평과 함께 상해에 들어섰고, 상해에 집결한 엽공초(叶公超), 문일다(闻一多), 호적(胡适), 곽말약(郭沫若), 심안빙(沈雁冰), 장광자(蒋光慈), 성방오(成仿吾), 소군(萧军), 소홍 (萧红)등 허다한 일대 문인들과 어울린다. 중국의 제1류 수준의 문화정예들이 거의 다 상해에 모이니 그들은 “어사”(语丝), “현대평론” 등 전국성 영향력을 가진 간행물을 꾸리며 그들 생평중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을 써내였다. 1932년 3월 2일에는 중국좌익작가련맹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그들속의 로신선생은 중국 제1류 문화정예의 한 사람이였다.
다시 로신선생의 상해이주 시절로 돌아오면 로신선생은 상해에 이른후 여러개 대학의 강연과 명류들과의 접촉속에서 상해는 진정 중국의 경제중심이고 문화중심임을 피부를 느끼게 되였다. 광주에서 심한 문화고독감, 문화침묵감에 시달리던 로신선생으로 말하면 삶의 질적 변화였다. 상해란 이 동방대도시는 번역으로 삶을 살아가려는 로신선생에게 더없이 리상적인 생존환경이였다.
상해에 삶의 뿌리를 내린 로신선생에게 둘도 없는 일본 벗이 생기였다. 상해에서 생활한 로신이 친일행적을 갖고있다면 일본 벗이 생겼으니 더구나 친일이 아닐까? 먼저 결론을 내리지 말자. 사실은 웅변보다 낫다고 하지 않는가.
로신선생은 상해에 가서 사흘째 되던 날, 부근 북사천로(北四川路)의 우찌야마 서점(内山书店) 으로 책사러 갔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일본문 서적을 주로 경영하는 특색있는 서점이였다. 이에 끌린 로신선생은 1927년 10월 한달 사이만도 선후 9차나 우찌야마 서점에 가서 50여원어치 25권의 책을 사들이였다.
로신선생의 두번째 서점 출현은 서점주인--우찌야마의 주의를 끌었다. 책을 고른 후 로신선생은 쏘파에 앉아 주인의 안해가 권하는 차물을 마이면서 숙련된 일본말로 이 책을 아무아무곳에 보내달라고 청들었다.
“존함은요?”
“주수인이라고 부릅니다.”
“아, 당신이 로신선생이예요?”
우찌야마는 반겨마지 않았다.
그때로부터 로신선생과 서점주인은 세월의 흐름속에서 깊은 우정을 맺으며 로신선생의 상해 10년 생활에로 이어졌다. 서점의 위치와 주인의 댁이 로신선생의 선후 몇곳 주숙처와 가까이여서 서점은 로신선생이 사회활동과 문화활동의 중요한 장소로 되였다. 로신선생한테 오는 편지들도 흔히 서점을 통하여 로신선생에게로 전해지고,이 서점에서 국내외 벗들과 생면부지 혹은 특수신분의 손님들을 맞이하였다.
우찌야마와 로신선생과의 우정은 서점주인의 중국과 중국사람에 대한 정감을 크게 개변시키면서 그의 생활에도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와 로신과의 10년 우정은 그로 말하면 “일생의 행복”이였다. 그후 일본으로 귀국한 우찌야마는 새중국이 세워진후 수차 중국을 방문하면서 일중친선활동에 전력하였다. 그러다가 1959년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10돌 경축활동에 참석했다가 병으로 북경에서 서거하였다. 그의 유체는 로신선생이 처음 안치되였던 상해 만국공묘에 모셔졌다. 친일행위가 아닌 실로 흔치않은 두 사람의 심후한 우정이라 하겠다.
그러면 상해 실생활속의 로신선생은 어떠했을까, 역시 력사사실 한두가지로 개략적으로 말하기로 하자.
1931년, 일본제국주의는 심양에서 “9.18사변”을 일으키고 장개석의 부저항정책으로 아주 빨리 동북 전경을 점령하였다. “9.18사변”이 일어나 3일만에 로신선생은 “문예신문사의 물음에 대답”이란 글을 써서 일본제국주의가 중국을 침략한 죄행을 적발하였다. 로신선생의 글은 욱달부 등의 짧은 글과 함께 “문예신문”이 개설한 전문란에 게재되였다.
1931년 이해 12월에는 전국 각지의 학생들이 장개석의 부저항정책을 반대하면서 남경청원에 나섰다가 국민당 당국의 체포와 학살을 당하였다. 12월 20일에 로신선생은 저명한 “우방경타”(友邦惊詫)를 써서 25일 좌익작가련맹의 간행물 “십자가에서”(十字街头)에 발표하면서 국민당 당국의 부저항 매국정책과 애국학생운동 진압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1932년 1월, 일본군대가 상해에서 “1.28”전쟁을 발동하면서 로신선생의 저택 맞은켠이 일본해군륙전대 사령부로 되였다. 이튿날 날이 밝지도 않았는데 일본군의 수색이 시작되였다. 우찌야마는 일본점원을 급히 보내여 로신일가가 서점 2층에 급히 피하여 옹근 한주일을 지내도록 조건을 지어주었다. 서점 일대가 일본군의 전구(战区)인데서 우찌야마는 또 로신일가와 동생 주건인일가를 상해 삼마로(三马路) 영국조계지의 우찌야마서점으로 옮기여 절대적 안전을 담보하여 나섰다.
이것이 상해시절의 로신선생이고 우찌야마서점의 주인 우찌야마선생이다. 로신선생은 상해 10년 세월 내내 글로 일본침략자와 맞서 싸우고, 일본에 부저항하며 선량한 항일군민을 탄압하는 국민당반동파와 싸웠다.
김문학씨, 오늘은 일제에 의한 "7.7"사변 76돌이 되는 날이다. 이날이 어떤 날인가를 잊지 마시고 상해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 10년을 생활한 로신선생의 친일행위를 어디 말하여 보시라. 그토록 정정당당하다면 중문으로 써서 중문 신문과 잡지, 인터넷에 올리여 보시라. 당신이 며칠이나 견딜수 있을까.이 글을 더 이상 전개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어찌 자진하여 친일에 나선 친일작가 리광수를 중국의 로신선생에 비하며, 로신선생이 일본군의 통치구에서 생활하였다하여 어찌 친일행적으로 몰아가리오? 당신의 론리대로면 일본의 식민지, 반식민지 중국땅에서 생활했던 사람들, 일본의 조선총독부 철제아래 삼천리 금수강산에서 망국노로 생활했던 사람들이 다 친일행적을 가지고 있을까. 당신은 견해문제가 아니라 머리가 돌았도다. 이 머리를 돌리지 않으면 한 하늘아래서 의좋게 살아갈 인간이 아니도다.
2013년 7월 7일